# 16
"금발에 금안. 모나크가 확실하네요."
"요즘은 직계 혈족 중에서도 금안은 희귀하다고 하지 않았나?"
"희귀한 게 아니라 저 아이 하나라고 들었습니다."
RTA 전술학을 맡은 선생 넷은 생도 한 명을 주목했다.
풍성하게 빛나는 금빛 머리카락, 그리고 어두운 가운데서도 홀로 빛나고 있는 것만 같은 금색 눈동자.
이 두가지 모두를 갖춘 레오나르드 모나크는, 그 옛날 에일리언의 등장으로 사라진 금안[金眼]왕 이랑 칭호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신기하구만. 분명 내가 열람한 자료에선 방계 혈족으로 분류되어 있었는데."
"저희로썬 나쁠 것 없는 이야기 아닙니까? 찔러 볼 여지도 있을 테고."
"그건 그렇지."
그들 중 가장 높은 계급으로 전역한 중년의 남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역일 때 지휘관으로 명성을 날렸던 그는 넷 중에서도 특히, 레오나르드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저렇게 어린 아이가 이토록 높은 수준의 전술 보고서를 짜다니. …놀랍네요."
"우연으론 나올 수 없는 결과였지? '그들'과 관련된 건 아니고?"
"이미 수차례 검토를 마쳤습니다. '미미르' 또한 레오나르드 모나크에 대한 인적 자원 평가에서 별다른 문제점을 찾아내지 못했고요."
남성이 놀란 반응을 보였다.
미미르까지 이용할 정도로 중요한 이슈였던가.
'아니, 놀랄 일이 아니지.'
인류연합에 있어 아카데미 생도가 가지는 중요성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특히, 이번과 같은 이슈가 벌어졌을 경우엔 더욱더.
남성은 클라이막스를 향해 가는 영상을 다시 한 번 바라봤다.
"후.... 이 괴물놈들은 대체 어디까지 진화할 속셈이지?"
화력에 의해 뻥 뚫린 대지의 까마득한 밑바닥에서 엄청나게 거대한 무언가가 기어 올라온다.
초대형의 에일리언이다.
게다가 저건 이번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개체.
"저거 명명[命名]은 완료되었나?"
"예."
"뭐지?"
"육지 전차, 랜드 크라울러(Land crawler)라고 합니다."
"어울리는 이름이군."
영상엔 랜드 크라울러가 미리 준비하고 있던 군이 쏟아내는 화력에 밀려 상처 입는 모습이 나타났다.
완성체가 되기 전에 억지로 끄집어냈음에도 만만치가 않다.
혹시나 상황을 가볍게 보고 전력을 덜 모았었더라면 생각하기도 싫은 결과를 마주할 뻔했다.
"아직 인류에겐 희망이 남아있는 건가...."
"인류는 승리할 것입니다. 저들이 그렇게 만들겠죠."
"…그래. 오늘 저녁엔 축배를 들어야겠는걸."
"함께하겠습니다."
끝나가는 영상 위로 랜드 크라울러가 마지막 비명을 지르며 무너지는 광경이 담겨 있었다.
*
강의실의 생도들 모두가 영상에 빠져들었다.
여태껏 발견되지 않았던 개체.
그것도 딱 보기에도 엄청난 비쥬얼을 자랑하는 에일리언의 모습은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어.... 저게 왜 저기에?'
나는 좀 다른 의미로 놀랐다.
랜드 크라울러.
에일리언의 육지 형 모함이라고도 불리는 이 육중한 개체는 인류 연합에게 새로운 충격을 선사한 위험 7급의 에일리언이다.
원작에는 대충 이쯤에 처음 등장했다고 써놓긴 했을 텐데, 이렇게 갑자기 튀어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래서 합동 수업을 한다고 이렇게 모였나?'
위험 7급이 의미하는 바는 생각보다 크다.
특히 랜드 크라울러는 단일 개체만으로 어지간한 부화장 군락 전체를 합한 것보다 대단한 생산력을 보여줄 수 있다.
여기에 가지고 있는 방어능력 또한 동급 최고에 가까운 끔찍한 놈이다.
'더 끔찍한 건 저기서 진화하면 그땐 우주를 날아다닌다는 거지.'
거기까진 상상하기도 싫다.
그랬다간 하늘에서 비처럼 떨어져 내리는 에일리언 떼를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어쨌든, 조기 발견 덕에 후른샤이아 행성이 큰 위기를 넘겼다.
원작에선 꽤 충격적인 등장으로 큰 피해를 입고 인류연합의 대 에일리언 방위 라인이 재조정되는 사태로까지 번졌다고 했으니 못해도 수천만 명은 살리지 않았을까.
"와. 저게 뭐야? 싸워보고 싶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5km는 되겠는데? 우리 로제같이 작은 아이는 인식도 못하지 않을까?"
"아냐, 메르디. 내가 때리면 아파서 바닥을 뒹굴 걸?"
바로 옆의 두 명은 랜드 크라울러의 거체에도 충격을 받지 않은 것인지 재잘재잘 잘만 떠들었다.
나로선 저딴 걸 보고 싸우려는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이가 없을 뿐이다.
이럴 수 있어서 초인인 건가.
"내가 보기엔 아직 완전체가 아닌 것 같은데. 네가 보기엔 어떤가, 레몬?"
"…음, 아마도?"
나는 사힘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이 돼서 대충 얼버무렸다.
아는 척을 해야 할까.
랜드 크라울러는 지금 처음 공개되었다.
저게 하루 전에 치러진 작전을 기록한 영상임을 생각한다면, 지금쯤 사체를 막 조사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래도 예상 정도는 말하지 못할 것도 없다.
"저보다 더 성장한다면 아마 10km까지도 가능하지 않을까?"
"10km? 와. 전함 10척을 붙여놔도 그것보단 작겠다."
"그보다 더 가공스러운 건 저 에일리언이 이동형 생산기지처럼 보인다는 점이야. 생산 능력이 얼마나 될지는 몰라도 분명 끔찍하겠지."
"저걸 미리 알아차린 작전 입안자가 정말 대단하군."
사힘이 내 얘기를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게 나 때문에 벌어진 작전이란 걸 내 입으로 말할 수도 없고.
계속 모른 척 해야 하나.
다행히 내 고민은 길지 않았다.
랜드 크라울러가 완전히 침묵하는 것을 끝으로 영상을 종료한 선생들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던 것이다.
"생도 분들은 후른샤이아 행성이 어색하지 않으실 겁니다. 이건 바로 그 후른샤이아 행성에서 어제 있었던 일은 기록한 영상입니다.
선생은 말을 하면서 일련의 정보를 각자의 전술 테이블에 전송했다.
그러자 그동안 멈춰 있었던 후른샤이아 행성 관련 업데이트가 다시 이루어졌다.
전체 전황은 위의 작전으로 인해 전선이 조금 밀려나 있는 상태.
하지만 전선이 조금 밀린 정도는, 상황을 생각했을 때 손실이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개체명은 랜드 크라울러.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중소규모 부화장 군락지와 비슷한 정도의 생산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여태까지 밝혀낸 정보도 내 기억과 별다를 바 없었다.
완전체가 되기 전에 해치웠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직은 내가 랜드 크라울러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왜 합동 수업까지 계획하면서 이 영상을 보여드렸나 하는 점입니다."
강의실 내부가 약간 소란스러워졌다.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다.
어떻게든 관련되어 있으니 일어난 일이겠지.
바튼 또한 그 점을 깨닫고 내게 물어왔다.
"레몬. 네가 저 지역에 관한 정보를 파고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하하, 그랬지?"
"뭔가 알고 있나?"
"음.... 지금 선생이 말해주지 않을까?"
내 대답에 바튼이 싱긋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알아챘구나.
굳이 세세하게 파고들지 않는 점은 고맙다.
가만, 방금 전에 바튼이 분명 웃지 않았나?
내가 놀라서 바튼을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도 선생의 말은 계속되었다.
며칠 전 한참을 공들여 작성한 전술 입안 보고서가 먼저 공개되었고, 곧이어 내 이름도 나왔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레오나르드 모나크 생도에게 박수 한 번 부탁드리겠습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은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이때만큼은 순수하게 놀란 생도들이 박수를 친다.
이런 일은 COH 아카데미가 창설된 이후 처음이 아닐까.
몇몇 삐딱선을 타는 놈들이 껴있긴 했지만, 지금 순간을 기점으로 내 위상이 확연하게 달라질 것임을 모를 수 없었다.
이건 1학기 종합 성적 순위 23등 따위완 비교도 되지 않는 실질적인 전공이니까.
"정확한 건 아닙니다만, 이번 사태를 예견하지 못했었을 경우 발생했을 인명 손실이 300만 명을 초과했을 것이라는 계산 결과가 있습니다. 물론 군 또한 큰 타격을 입었겠죠. 여러모로 가슴이 철렁한 일입니다."
로제가 반짝이는 눈길로 날 봤다.
여기가 사람들이 잔뜩 모인 강의실만 아니었어도 날 붙잡고 방방 뛰었을 행동이 예상되었다.
"레몬, 저거 진짜야?"
"어."
"우와, 대단해!"
"…어, 고마운데 지금은...."
"진짜 짱이다!"
물론, 굳이 방방 뛰지 않아도 얼굴은 팔릴 수 있지.
난 간신히 로제를 진정시켰다.
그런데 아직 놀랄 일이 남아있었다.
"가까운 시일 내로 레오나르드 모나크 생도에게는 훈장이 수여될 예정이며, 이 훈장 수여식에는 2군단의 사령관님과 중앙 초인단의 단장이신 다르모사님의 참석이 확정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생도들이 소란스러워졌다.
현재 인류연합 최고 전력으로 평가되는 초인 중 하나인 '다르모사.'
에일리언의 등장 초기부터 100년이 넘은 시간 동안, 수많은 전공을 세우며 입지를 다져온 다르모사는 일반인이나 군인 초인 가릴 것 없이 우상으로 생각하는 남자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초인에겐 의미가 남다르다.
"우리도 볼 수 있을까?"
"학기 중 생도의 외출이 금지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훈장 수여식은 아카데미 내에서 진행될 것이다."
"맞아. COH아카데미의 설립자인 다르모사님이 스스로 룰을 어길 리 없지."
확실히 대단한 일이긴 하지만, 이게 다르모사까지 움직일 일이었을까.
다르모사의 성격을 알고 있는 난 조금 의아했다.
'다른 사정이라도 있나? 뭐, 큰일은 아니겠지.'
다르모사의 사정이야 어쨌든, 이렇게 이른 시기에 그와 대면할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한 판 붙어볼 수 있을까?"
"일단 한 대 치고 봐. 그럼 싸워줄지도?"
"오, 메르디. 기발한데?"
하지 마 이것들아.
바튼과 함께 두 사고뭉치를 말리고 있자니 선생들 중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방금 마이크를 잡았던 중년 남성이다.
내가 알기로 현역 시절 꽤 날린 장교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제대하고 한참이 지난 지금도 눈빛이 형형하다.
"레오나르드 생도.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겠습니까?"
"아, 예. 얼마든지요. 어디로 움직일까요?"
"아뇨, 별것 아닙니다. 이 자리에서 하죠."
뭘 물어보려고 하는 걸까.
이번 상황과 관련되어 내가 아는 건 제출된 전술 보고서에 모두 쓰여 있다.
"전 RTA 전술한의 선생 중 하나인 제롤드라고 합니다. 생도가 제출한 전술 보고서를 검토한 당사자이기도 하죠."
"…아!"
"어젠 많이 놀랐습니다. 생도의 보고서를 반려했었을 경우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만 해도 식은땀이 흐르더군요.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제롤드 선생의 말대로 반려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작성자가 겨우 교육 7개월 차인 생도 아닌가.
그럼에도 가볍게 넘기지 않고 작전이 실제로 실시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제롤드에게 절을 해도 모자라다.
"전장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관점도 꽤 신선하더군요. 이 나이가 돼서 새로운 것을 알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뭘 몰라서 그런 건데요."
"물론, 엉성했다는 것 자체는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생도가 가진 에일리언 지식의 깊이와 그것을 전술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은, 분명 누구도 따라하지 못할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굳이 그렇게까지는...."
"정말입니다."
날아와 꽂히는 열렬한 시선이 아프다.
아직 이런 식의 관심에는 내성이 전혀 없는데.
그런데 하고 싶은 말은 공치사가 다인가.
"생도의 활약으로 RTA 전술학 과목에 대한 군 사령부의 관심도 크게 높아졌습니다.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시스템이 바뀔 가능성이 있겠죠."
"저희들이 입안한 전술이 실제 반영되기라도 합니까?"
사힘이 대번에 물었다.
제롤드가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걸 벌써?'
이 변화는 내 기억으로 원작이 시작되고 난 후, 주인공이 입학한 후 부터 적용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점을 감안하면 너무 빠르다.
"물론, 100% 반영되질 않을 겁니다. 먼저 적정한지에 대한 검토 과정을 거치겠죠. 작전 지역과 정보가 제공되는 간의 시차까지 생각하면 더욱 어려워질 테고요."
"그것만 해도 대단하네요. 실제 지휘관이나 다름없어지는 거잖아요."
"그렇습니다."
선생이 다시 내게 뜨거운 눈빛을 보내온다.
"이걸 먼저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선생이 일어나려다 멈칫하며 말 한 마디를 더 남겼다.
"교장님이 언제든 시간 편할 때 들러달라고 하셨습니다. 할 이야기가 많은 모양이더군요."
한 번 쯤 볼 때도 됐지.
아카데미에 입학할 때 공식석상에서 본 게 마지막이다.
기적의 세대를 포함한 몇몇을 빼곤 관심도 없는 인물이라, 이 정도 사건이 아니었으면 졸업할 때까지 얼굴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변태 할배가? 조심해야 해 레몬."
로제가 살짝 눈을 찌푸리며 걱정스레 말했다.
"걱정 마."
"레몬이라면 잘 할 거다."
"교장은 얕볼 수 없는 인물이다. 말려들지 마라 레몬."
어느 순간부터 내 애칭이 공공제가 되어버린 기분이다.
나는 한동안 일행들로부터 주의를 당부 받아야 했다.
# 17
"같이 가줄까?"
로제가 걱정이 가시지 않은 듯 말했다.
저도 만나기 싫은 사람일 텐데 마음씀씀이는 고맙다.
"정말 괜찮아."
합동 RTA 전술학 수업은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끝났다.
몇몇은 내게 말을 걸려는 듯 다가왔다가 돌아선다.
아마도 화려한 일행들 때문인 모양이다.
하지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다.
"레오나르드 모나크? 난 류청이라고 해. 잠깐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물론이죠. 선배님."
RTA 전술학은 1년차 생도만 듣는 과목이 아니다.
자연스레 이번 합동 수업에는 2년차 생도 또한 함께하고 있었다.
그리고 류청이라면 나도 이름을 기억하는 인물이다.
'자신의 고향 행성을 지키다 산화했었지.'
현재 류청과 함께하는 이들도 꽤 믿을 만 한 인물들이다.
앞으로의 활동을 생각하면 알아둘수록 좋은 부류의 사람들.
류청은 자신의 일행을 하나하나 소개시켜 주었다.
"평소라면 이쪽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을 텐데. 오늘만큼은 너에게 말을 붙여보지 않곤 못 참을 것 같아서."
"제 친구들이 많이 대단하긴 하죠."
"친~구?"
메르디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한다.
그러고 보니 친구란 표현을 쓴 적이 처음인가.
어쩐지 다른 3명도 약간 놀란 표정이다.
"그렇지. 아, 어쨌든 별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고. 너 대단하다고. 존경한다."
"하하...."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이다.
나는 이럴 때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게 내 탓이기도 한데.
"혹시 도와줄 게 있다면 언제든 말해. 이래봬도 인맥은 좀 알아주는 편이라서 말이야."
"저야 고맙죠."
"그런 난 이만 가볼게. 뒤에 순번이 많이 밀린 거 같아서."
류청이 뒤로 살짝 고갯짓을 했다.
류청이 먼저 포문을 열었기 때문인지 사람들이 꽤 몰려있었다.
"음, 나도 먼저 가볼게 레몬. 디저트가 날 기다리고 있어."
"휴게실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고생하든지."
"수업 때 보지. 이번 합동 수업 때문에 수련시간이 줄었다. 지금이라도 보충해 두어야겠군."
배신자들.
친구란 건 이런 것인가.
순식간에 내 옆에는 한 명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나는 앞에서 밀려오는 생도들을 보며 억지 미소를 뗬다.
내 생애 가장 인기 있는 순간을 부담스럽게 맞이해야 했다.
*
갑작스런 팬 모임은 생각보다 괜찮은 시간이었다.
얼굴을 대면하고 이름을 들으면서 원작에 대한 것을 다시 한 번 떠올릴 수 있었다.
류청을 비롯한 몇몇은 개인용 메신저 주소를 교환하기도 했고.
'이쪽인가?'
교장실.
COH 아카데미의 교장은, 아카데미의 관리자 중 유일하게 원작에서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여자와 돈 같은 세속적인 것을 대놓고 밝히는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주인공의 정신적 지주 중 하나로 활약할 만큼 비중이 높기도 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비서의 안내를 받아 방안으로 들어섰다.
꽤 넓은 공간이 탁 트여 있어서 훤해 보인다.
외벽은 투명한 자재를 써서 테라 행성이 전면에 보였는데, 꽤 멋졌다.
"레오나르드 모나크군?"
"예, 교장님.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잘 정돈된 수염이 인상적인 백발의 신사가 날 반겼다.
젊었을 적 여자들이 아주 좋아했을 것 같은 외모.
'나이를 잘 먹었다'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저 얼굴에 150살 이라니.'
기대 수명이 200살인 시대.
그럼에도 현대와 비교하면 약 70살이 넘는 노인이다.
에일리언이나 각종 갈등과 사고 때문에 기대 수명을 다 채우는 이가 적어졌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그 자체로 존경받기에 부족함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로제 양은 같이 안 왔나요? 메르디 양은?"
"혼잡니다."
"잘 붙어 다닌다고 해서 같이 올 줄 알았는데. 에잉…."
물론, 저런 모습만 보여주지 않으면 말이다.
신사처럼 보였던 얼굴이 순식간에 불량배처럼 바뀌었다.
로제의 '변태 할아범'이란 표현이 딱 알맞은 얼굴이다.
사람이 갑자기 저렇게 느끼하고 재수 없어 보일 수도 있는 건가.
"사내놈이랑 둘이서 이야기 하고 싶지는 않는데."
"저 돌아갈까요?"
"아니, 아니. 레오나르드 군에게 한 말이 아니에요. 일단 거기 좀 앉아요. 앉으란 말을 안 하면 언제까지고 멀대처럼 가만히 서있을 거예요? 차도 좀 알아서 한 잔 따라 마시고."
"…"
괜히 한 대 때리고 싶어진다.
그걸 꾹 참으면서 억지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래, 참자 참아.
"음? 난 사내한테 관심 없어요. 미리 말해두는 거지만 명심해요."
참아야 하나?
일단 한 대 치고 시작하면 안 되는 걸까.
이러다간 로제처럼 행동하게 될 것 같다.
나는 바튼이 당부한 대로 말리지 않기 위해 일단 대화부터 진행하기로 했다.
"절 보자고 한 이유는 뭐죠?"
"아, 그거? 내가 보고 싶어서는 아니고. 교장씩이나 되어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그래서 겸사겸사 치하도 할 겸 불렀어요."
"제 아카데미의 지원 권한 조정도 할 겸 말이겠죠."
사람을 부러 긁어서 속을 파악하는 것은 교장이 가진 습관이다.
괜히 말려들 바엔 이쪽이 대화를 주도하는 편이 훨씬 낫다.
"잘 알고 있네요. 뭘 원하죠?"
"예. 지난번에 제 이능과 관련해서 에일리언 관련한 요청을 했다가 사고가 일어나 금지된 일은 알고 있을 겁니다. 그걸 풀어주세요."
"그건 워낙 민감한 주제라 내가 혼자 할 수가 없어요. 전방의 군에게 일일이 요청도 해야 하고. 여러모로 복잡하죠."
"하하, COH 아카데미 교장님에게 그 정도 요청은 별 문제 안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다.
교장의 권한은 막강하다.
그의 일은 단순히 교장실 의자에 앉아 농담 따먹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아카데미의 훈련 계획은 그의 손에서 돌아간다.
이곳으로 들어오는 보급이나 채용계획, 생도의 입학도 모두 그의 소관이다.
또한, 가장 중요한 3년차부터 생도들이 임관할 부대를 정하는 일에 큰 지분이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이 과정에서 구축한 군 장성들과의 커넥션은 때문에 그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때문에 교장은 인류연합의 인사들 중 영향력이 가장 높은 층에 들어간다.
'살아있는 에일리언을 공수해 오는 정도야 뭐.'
교장이 하기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바라는 건 그게 끝?"
교장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빠른 표정 변화다.
"일단은 그렇습니다."
"좋아요. 대신 에일리언을 구해다 주는 것은 2주에 한 번. 위험 2급까지의 개체에 한합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사고가 있었으니 예방 차원에서 숙소는 공동 구역과 조금 떨어져 있는 곳으로 옮기도록 하죠."
그렇게까지 해주면 더 바랄 게 없다.
이능을 제대로 써먹지 못해서 썩히는 일은 이제 끝.
로제에게 신세질 일이 늘어날 것 같지만, 그건 내가 견디면 될 일이다.
"흠…. 바라는 게 더 많을 줄 알았는데요."
"여기부터는 개인적인 용건입니다."
"개인적 용건?"
교장이 되물었다.
조금 뜬금없을 것이다.
하긴, 교장에게 개인적 용건을 들이미는 생도가 흔할 리 없다.
"교장님은 CSPA(에일리언에 대항한 어린아이 보호소 프로젝트. Children Shelter Project from Alian)연합의 설립자이자 최대 후원자이시죠?"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중요한 건 어떻게 알았는지가 아닙니다. 요즘 CSPA관련해서 조금 힘드시죠? 제가 도움을 좀 드리고 싶은데요."
교장이 날 떠보는 것처럼 이리저리 살폈다.
그가 CSPA와 관련되어 있다는 건 그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알려면 알 수는 있는 정보.
하지만 설립자인 동시에 최대 후원자라는 건 극소수의 지인만 알고 있으며, 그 때문에 교장이 짠돌이 성질이 있다는 건 더욱 아는 사람이 적었다.
"어떻게? 금전적 지원? 모하임 왕가에게 대규모 투자를 받아서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레오나르드 군은 빈털터리일 텐데요."
"잘 알고 계시네요."
"그럼요. 내가 이 자리를 포커로 딴 게 아니에요. 레이나르드 군 같이 장래가 창창한 젊은이의 경우엔 특히 관심이 많지요."
잘도 그러기야 하겠다.
내가 이슈가 되니까 미리 찾아봤겠지.
"어쨌든 금전적 지원은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돈을 받아야죠."
"...이건 좀 새로운 종류의 관심종자인데?"
"다 들립니다."
"하하, 들렸나요? 거 참 귀도 밝네."
교장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한다.
난 개의치 않고 설명을 계속했다.
하고 보니 보험 들라고 하는 거랑 별 다를 바 없기는 한데, 내 입장에서는 반드시 터질 걸 알고 있으니 조금 답답하긴 하다.
그래도 다행히 교장의 흥미를 끄는 요인이 있긴 했다.
"...잠깐만. 그 폰타나 운테가 참가했다고 말했나요?"
"예. 3분 만에 꼬셨죠."
3분이 뭐야.
생각해 보니 30초도 안 걸렸던 것 같다.
만나기까지가 힘들었을 뿐이지.
"흐음…. 이 연구소도 레오나르드 군의 그 '이능'관련이 있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제게 줄 수 있는 지분율은 얼마까지죠?"
"3%"
"3%? …좀 적은 것 같긴 한데. 일단 가격부터 들어보도록 하죠."
살몬 연구소에서 나오는 모든 결과물에 대한 지분 3%.
일견 적어 보이지만, 나중엔 절대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지분율일 것이다.
교장은 액수를 듣고는 기함했다.
"너무 비싸. 나에 대해 알고 있으면 내가 가난하다는 것도 알고 있을 텐데요."
"당장 사지 않아도 좋습니다. 스톡옵션 형식으로 드리죠. 스톡옵션 제공에 대한 근거는 연구소의 운영에 기여하는 것으로 해결해주시면 됩니다."
"으음.... 연구 과정에 필요한 에일리언을 제공…하는 것 따위를 말하는 건가요?"
"그러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만, 교장님의 권한을 남용하는 일이 될 수 있으니 다른 방식으로라도 괜찮습니다."
방법은 많다.
살몬 연구소에서 나올 결과물은 대부분 에일리언과 관련되어 있다.
그 중 군사 무기 기술과 관련해 시험 적용해 볼 수도 있을 것이고, 새로 개발한 장비를 군에 공급하는데 힘써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십니까?"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다.
말이 스톡옵션이지 이미 교장에게 제시한 금액의 몇 배를 부르며 접근중인 사람이 많다.
이미 사기만 하면 몇 배는 이득.
말 그대로 돈을 쥐여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해야 하긴 해야 하는데...."
오랜 시간 빈곤하다 보니 돈 냄새를 특히 잘 맡는 교장이 이걸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고민한다.
왜?
내가 이런 호구같은 제안을 자신에게 하는 이유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정말 바라는 게 뭐죠?"
"별거 없습니다."
"난 별거 없다는 말이 가장 무섭더라."
"정말입니다. CSPA 활동에 관심이 있어서죠. 외출 때라도 가능하면 실상을 직접 쉘터의 상황을 직접 보고 느끼고 싶습니다.
"…정말인가요?"
조금 뜬금없는 조건이었을까.
교장이 눈을 끔뻑인다.
"예. 저도 아이들에게 무척 관심이 많거든요."
난 신뢰가 넘치는 미소를 얼굴 가득 지어보였다.
물론, 교장에겐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내적으로 심히 갈등하고 있다는 것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수작부릴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물론이죠."
넘어왔다.
교장답지 않게 심각했던 얼굴도 방금 말을 마지막으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런데 설마 애들을 좋아하는 그…런 건 아니죠?"
"네?"
"그 있잖아요. 그거."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에이 알면서."
"아직 계약서 안 썼는데, 제안을 취소해도 될까요?"
"제가 뭐라고 했나요? 레오나르드 군. 허허."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 친해졌다.
우리는 한 손에 칼을 든 것처럼 잠시 하하호호 말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로제 양은 뭘 하는 중인지 압니까?"
"디저트 시간이라고 하더군요."
"만나면 지구에서 공수해 온 아주 귀한 유과자 세트를 내가 가지고 있다고 전해주겠어요?"
"그러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이 영감은 로제에게 정말 관심이 많다.
"레오나르드 군과의 만남은 제 생각보다 훨씬 유익했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일찍 만나볼 걸 그랬네요."
"저야말로."
"하지만 레오나르드 군."
교장의 얼굴이 다시 한 번 진중해졌다.
장난스럽던 분위기가 언제였냐는 듯 확 바뀐다.
"조심하세요. 당신의 이능. 그건…잘못하면 당신 자신이 집어 삼켜질지도 모릅니다."
"알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다.
내 이능이 양날의 검이라는 사실은.
많은 걸주는 만큼, 그 이상의 위험을 강요한다.
# 18
"쉽게 대답할 일이 아닙니다. 내 충고를 좀 더 가슴속에 새기세요."
"…예."
"저는 이곳의 교장으로 지내는 동안 많은 재능 있는 친구들을 봐왔습니다. 개중에는 미래가 촉망되는 생도도 있고 이미 생도라 할 수 없는 수준의 굉장한 능력을 가진 이도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찬란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재능이 빛날수록 많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찬란한 재능 중 일부는 항상 자멸하고 말았죠."
교장은 인류 연합에서 가장 많은 초인을 보아온 인물이다.
그들의 과거와 성장, 그리고 현재까지.
초인에 대해 교장보다 박식한 사람은 인류 연합 전체를 뒤져봐도 없다.
"그런 이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사람 중 레오나르드 군이나, 그 일행과 같은 재능을 갖춘 사람은 여태 본 적이 없군요."
"하하."
날 그들과 같은 선상에 세우다니.
이것만큼 놀라울 일이 없을 거다.
"당신들은 무척 특별합니다. 그래서 더 걱정됩니다."
교장의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자신의 재능에 잡아먹히지 마세요. 당신들은 인류에게 다시는 없을 보배일 지도 모릅니다."
과찬이 지나치다.
어쩐지 교장의 눈을 마주하고 있는 내 고개가 무거운 느낌이었다.
"변태 늙은이가 너무 말이 많았죠? 제 말은 이게 다입니다."
"아니요. 그런 이야기는 교장님에게 처음 들어보네요. 너무 과한 기대가 아닐지…."
"절대 과한 기대가 아닙니다. 제 눈을 믿으세요. 아, 마지막으로 이번 후른샤이아 행성의 상황과 관련해선, 부족하지만 제가 인류연합을 대표로 감사드리겠습니다. 레오나르드 군의 활약이 앞으로도 이어지길 바라죠."
말을 마친 교장이 다시 싱긋 웃었다.
"그럼 얼른 나가세요. 나가기 전에 거기 문 옆에 있는 냄새 제거제 좀 뿌려주고."
"아니, 이 할배가 진짜 끝까지...."
"로제 양에게는 꼭 안부전해주세요. 제가 과자와 함께 기다리고 있다고. 허허."
끝까지 일관적이다.
저러니까 이 나이가 될 때까지 결혼도 못했지.
어쨌든, 교장과의 만남으로 선은 이었다.
원작의 시작.
CSPA 연합이 만든 보호 쉘터에 자연스럽게 접근할 연관성을 말이다.
'주인공은 아직도 꼬꼬마겠지.'
주인공의 현 상황을 생각하자 머리가 아파온다.
주인공이 해줘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아직 몸도 다 크지 못한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차라리 지금 접촉할까 싶다가도, 꽂아야 할 플레그가 다 어긋날까봐 쉽사리 접근도 못했다.
'일단 기다리는 수밖에.'
결국, 내 최대의 보험은 현 시대를 대표하는 기적의 세대 5인방이다.
나는 교장실의 빠져나와 휴게실로 걸음을 옮겼다.
일단 로제와의 지도 대련이 있기 전에 당을 채워야겠다.
*
지난번의 사건을 계기로 RTA 전술학에 대한 생도들의 관심도가 크게 향상되었다.
전장의 참상을 너무 세세히 보여주는 것에 대해 적응을 못하던 생도들 또한 이게 단순한 수업이 아니라 그들의 목숨을 좌우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고 익숙해지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에 따라 토론회도 정기적으로 개최되었다.
같은 구간의 사례를 가진 생도들이 모여, 어떤 전술이 효율적인지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막히는 게 있을 경우, 지휘관 레벨이 높은 생도에게 조언을 청하기도 할 정도.
그래서인지 아카데미는 학기 시작 이례로 가장 활기찬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레오나르드씨. 오늘 저녁에 저희 모임 '장군'에서 RTA 전술학에 대한 토론회를 개최할 예정인데 참석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기요. 제가 먼저 얘기하고 있는 것 안 보이나요?"
"어머. 키가 작아서 제가 미처 못 봤네요."
두 여자가 내 앞에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RTA 전술학에서 1, 2년차 생도를 통틀어 지휘관 레벨 랭킹 1위인 나를 섭외하려는 거다.
처음엔 잠깐 즐겼다.
그 꼿꼿하던 사람들이 비위를 맞춰주는 것처럼 행동하는데 기분이 나쁠 리 없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정말 잠깐이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시간이 나질 않네요. 다음번에 기회가 되면 꼭 참석하겠습니다."
"정말요? 아쉽네요."
인기에는 귀찮음이 따른다.
게다가 나는 부족한 재능으로 천재들을 따라가려다 보니 갈수록 시간이 부족했다.
그들의 청 대부분을 거절할 수밖에 없다.
'계속 거절하다 보면 좀 식겠지.'
물론, 지금은 당장 어쩔 수가 없다.
한창 관심이 높아져 있는 시기이기도 하고, 그 사건 이후로도 벌써 2주 동안이나 RTA 전술학에서 높은 성적을 기록하고 있는 중이라 우연일 거라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생도들도 마음을 바꿔먹는 중이었다.
"레몬!"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로제가 보인다.
몇 번의 고민 끝에 오늘은 그녀와 함께 행동하기로 했다.
"지금 바로 가?"
"어. 바로 가면 돼."
요청해 두었던 에일리언이 도착했다.
마치 기다리고 기다렸던 택배를 받은 기분이다.
"그런데 정말 나랑 같이 가도 되는 거야?"
"별로 특별한 것도 아니니까."
"다행이다. 엄청 궁금했거든!"
내 이능은 겉으로 봐선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내가 본 적은 없지만, 기껏해야 멍 때리고 있는 모습이 전부 아닐까.
뭐가 됐든 별로 도움 되는 광경은 아닐 것이다.
나는 로제와 한께 제한구역에 도착했다.
내 요청 때문에 새롭게 생긴 시설이다.
관리인은 나와 로제의 신원을 확인하고 안쪽으로 우리를 데려다 주었다.
"아예 풀어두셨네요."
"예.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공간이 충분하니까요. 시설도 그때완 차원이 다릅니다. 그리고 원하신다면 이놈들을 장시간 살려둘 수도 있으니 마음대로 다뤄보세요."
"그건 희소식이네요. 감사합니다."
"전 그저 관리인일 뿐입니다. 감사는 교장님에게 하시는 편이 나을 것 같네요."
투명한 재질로 이루어진 격리 공간에 에일리언이 들어있었다.
비슷한 격리 공간이 여럿 있었는데, 각각의 격리 공간에는 서로 다른 종류의 에일리언이 자리하고 있다.
내 의견대로 갈퀴와 숨 지렁이를 제외한 위험 1급의 에일리언들이다.
"시설 이용 방법은 숙지하셨죠?"
"예."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혹시나 비상상황이 발생하면 패널을 이용해서 연락 주세요."
관리인도 나갔다.
내부에 남은 것은 나와 로제 둘, 그리고 다수의 에일리언 뿐.
로제는 이렇게 여유롭게 에일리언을 관찰할 수 있는 경험이 처음인지, 격리 공간의 투명한 벽에 붙어서 내부를 열심히 구경하는 중이었다.
"대단하다…."
"에일리언을 이렇게 볼 기회가 없긴 하지?"
"아니, 쟤들 생긴 것 좀 봐. 저 머리랑 목이랑. 엄청 세보여."
그 이야기였나.
"에일리언은 목적에 따라 아주 충실한 육체구조를 이루고 있어. 인간이 보기에는 무척 극단적이라고 여겨질 정도지."
옆으로 다가가 말을 붙였다.
로제가 시선을 떼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에일리언이 무서운 이유다.
이들에게 생존은 제 1목적이 아니다.
인류에 대한 증오심으로 점철된, 한껏 비틀린 생명체.
오로지 전투와 파괴만을 위해서 '설계'된다.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어."
로제가 말했다.
내 육체를 살폈던 것처럼 처음 보는 이 외계인들 또한 만져보고 싶은 것이다.
"좋아. 이것부터 볼까?"
위험 1급 투구 멧돼지.
1급 중에서는 가장 커다란 몸집을 자랑하는 녀석으로 덩치가 크고 얼굴뼈가 바깥으로 드러난 것이 특징인 개체다.
이름은 외견과 함께 멧돼지가 가지고 있는 저돌성을 생각나게 해서 붙여졌다.
쿠어엉!
격리 공간 안으로 들어섰다.
이놈은 격리 공간 안에 갇혀있을 뿐, 움직임이 자유로웠던 녀석이 당장에 덤벼들었다.
"어딜."
로제가 정면에서 투구 멧돼지의 돌격을 막아냈다.
제자리에서 찔러오는 뿔을 잡아 채 손을 빙글 돌리자, 그 커다랗던 놈의 몸이 허공엣 몇 차례 뱅글 돌아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고선 일어나지도 못한다.
뱅글 도는 과정에 중요 관절이 모두 부서진 것이다.
"가만히 있어."
로제가 먼저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그러다가 문득, 얼굴을 찌푸렸다.
"이게 정말 살아있는 거야?"
조금 충격 받은 얼굴이다.
나는 왜 그런 반응인지 깨달았다.
투구 멧돼지는 내장기관이 없다.
음식을 먹지 않고, 먹지를 않으니 소화시킬 위장 및 소장이나 대장 같은 것도 없는 것이다.
있는 거라곤 호흡기 하나.
"에일리언 중에서 이런 종류는 흔해."
이유는 투구 멧돼지가 1회용이기 때문이다.
흔히, 고기방패라고 하는 별칭 그대로의 생물.
이놈들의 목적은 단단한 머리를 앞세워서 열심히 달려 인간의 전열을 흐트러뜨리는 데 있다.
그 후엔?
무조건 죽는다.
성공했든지 실패했든지 상관없이 그 자리에 죽어 새로운 오염원으로 변한다.
"네 말대로 너무 극단적이야. 마치 죽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 같아."
"그런 만큼 단기결전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대단하지."
이놈은 소대 단위의 화력을 가지곤 저지할 수 없는 개체다.
막기 위해선 미리 지뢰를 설치하고 그 위로 유인하던지, 화력지원을 요청해야 한다.
병사들 입장에선 아주 욕 나오는 개체인 것이다.
"그럼 잠깐 기다려줘. 내가 좀 들여다볼게."
오랜만에 이능을 다시 발휘했다.
그동안 바쁜 와중에도 조금씩 연습한 성과가 있는지 분석에 걸리는 시간이 더 빨라졌다.
투구 멧돼지[890]
같은 급인 갈퀴와 비교하면 정보량이 상당히 차이난다.
1급 중에서도 최상위에 랭크된 개체답다.
나는 일단 정보를 분석해 적용 가능한 특성을 먼저 분류했다.
돌출된 두개골
-두개골의 밀도가 상승하고 두꺼워진다. 부작용으로 머리가 커지고 무거워진다.
극 반응성 신경.
-작은 뇌를 대신하여 신경이 극도로 발달해 있다. 반응 속도를 극도로 끌어올린다.
깊은 허파.
-허파가 길어진다. 공기의 저장성이 크게 증가하고 처리 능률도 향상된다.
생각해볼 만한 특성은 이정도.
몸집에 비해서 구조가 너무 간소하다.
또한 대부분의 특성은 인간의 육체에 적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끝났어?"
"어."
눈을 뜨자 바로 앞에서 날 바라보고 있는 로제가 있었다.
뭔가 신기한 걸 보는 눈빛이다.
"…왜? 뭐 이상했어?"
"아니, 그냥."
로제가 설픈 웃음을 흘리며 말을 얼버무렸다.
나는 그런 로제를 잠시 바라보다가 설명을 시작했다.
투구 멧돼지의 특성과 육체 구조, 그리고 적용 가능한 특성이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내 몸과 이능에 대해 가장 잘 알고, 믿을 수 있는 로제라 가능한 일이다.
나는 그녀의 도움을 통해서 내 이능을 좀 더 효율적으로 써먹어 볼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모두 제각각 단점이 하나씩 있다는 거네?"
"음. 맞아."
"이번 건 전부 넘길까?"
"아니, 머리를 뺀 나머지 둘은 괜찮을 것 같아. 일단 해보고 아니다싶으면 버릴 수 있다고 했잖아?"
성능만 보면 두개골을 강화하는 것도 괜찮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특성은 단지 뼈를 강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두개골이 피부를 뚫고 표면으로 드러나게 된다.
난 뼈 괴물은 물론이고 대머리가 되고 말 것이다.
"신경계는 육체에서 가장 민감한 부위 중 하나야."
무투사에게 있어서 육체를 자신의 제어 안에 놓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투구 멧돼지의 신경을 얻을 경우, 제어가 제멋대로 튈 가능성이 크다.
외부의 자극에 따라 마음대로 움직이는 몸이라니.
얼마나 웃길까.
"개조 시술이나 훈련으로도 발달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무조건 얻는 게 가장 좋아."
"…괜찮을까?"
"그것도 '적응'과정이랑 똑같다고 보면 돼. 적응되면 큰 힘이 되어줄 거야."
고생은 미뤄두고 일단 그녀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럼, 허파는?"
"그것도 내가 직접 조정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조정?"
내장기관을 어떻게 조정한다는 말일까.
"…어. 해 봐야 알 것 같은데. 일단 해보고 다시 말하면 안 될까?"
로제로서도 확실치는 않은 모양이다.
물론 시도는 나쁠 게 없으니 동의했다.
그렇다면 투구 멧돼지에게서 얻을 특성은 두 개.
-극 반응성 신경
-깊은 허파.
정보의 크기는 둘이 합쳐 [19].
현재 가장 큰 정보량을 가진'강인한 손목'의 2/3 수준이다.
'이 정도면 하루?'
육체의 적응력 또한 하루가 지날수록 상승하는 중이다.
예전엔 이틀 걸렸을 일이 하루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마저도 강인한 속목을 채울 때 배운, 나눠서 적응하기를 이용하면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여파를 최소화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은 여기서 다 처리해 볼 속셈이다.
"시작할게. 준비 됐어?"
"응."
에일리언의 인자가 내 몸에 섞이기 시작했다.
온몸에서 거부 반응이 일며 신체 온도가 서서히 올라갔다.
특히, 이번엔 전신의 신경을 건드리기 때문인지 저번보다 힘든 기분이다.
# 19
"정신을 집중해. 그리고 네 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정확히 관조해야 해."
로제가 말을 걸어왔다.
그러면서 열이 일어나는 부위를 툭툭 건드리는데, 그럴 때마다 감각이 민감해졌다.
"네 육체는 지금 비상식적인 변화를 겪는 중이야. 하지만 어떤 종류건 네 몸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면 네가 직접 제어 할 수 있어."
지난 번, 그녀는 내게 직접 자기개변을 보여주었다.
자기개변은 무투술 상, 육체 제어 기법 중에서도 최고봉.
로제의 말은 나도 그걸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레몬은 운이 좋아. 본래 레몬 같은 흰 띠는 할 수도 없고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거든."
"…할 수 있게 되면 노란 띠를 받을 수 있을까?"
"응."
좋아.
로제류 입문한지 반년.
드디어 승급할 기회가 생겼다.
입문자를 뜻하는 흰 띠를 벗어날 때가 된 것이다.
"한 번에 모든 걸 할 수는 없어. 말단에서부터 조금씩 시작해봐."
땀이 비 오듯 흐른다.
전신에서 오른 열 때문에 마치 뜨거운 열탕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이런 상황에서 육체를 제어해야 한다?
'말이 쉽지!'
이걸 할 수 있으면 내가 괜히 흰 띠였겠는가.
사력을 다해서 육체의 변화에 개입해 보려 했지만, 그럴수록 내 몸이 낯설게 느껴졌다.
조금 잡았다 싶으면 손안을 빠져나가버린다.
곧, 열이 머리까지 올라왔다.
어지러움과 수마가 덮쳐온다.
이대로 잠깐 정신을 잃으면 편해지지 않을까.
그런 내 귓가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잘 하고 있어, 레몬. 넌 잘 하고 있어."
마음을 다독여주는 소리.
로제가 끊임없이 내게 말하고 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열에 차 있는 머리가, 조금씩 식어가는 기분이다.
그러다 깨달았다.
언젠가부터 툭툭 건드리던 것을 멈추고, 어떤 한 점을 계속 누르고 있다는 것을.
그 순간 정신이 그 지점으로 몰입되었다.
'움직여.'
육체 전체를 한 번에 관조하는 것은 아직 무리다.
가능한 것은 겨우 세포 한 조각.
'움직여.'
그 세포 한 조각에 내 모든 의지를 모은다.
'움직여.'
분명 가능하다.
로제에게 이미 몇 번이나 설명을 받았고, 그 증거를 보여주기까지 했다.
더구나 원작의 작가인 나 또한 가능하다는 것을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다.
'움직여.'
세포 하나.
완전한 자기개변은 꿈도 꾸지 않는다.
다만, 이미 변화 중에 있는 세포 한 조각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다.
'움직여.'
내가 원하는 그림을 그린다.
투구 멧돼지의 특성 '깊은 허파'.
에일리언의 인자가 결합한 허파는 인간의 육신에 담기엔 너무 비정상적으로 크다.
이대로 적용을 끝마치면 신체의 밸런스가 크게 어긋날 것이다.
'움직여'
그러니까 억제한다.
늘어난 효능을 그대로 수용하고 신체 구조에 걸 맞는 수준까지만 성장을 허락한다.
'움직였다?'
몸이 내 의지를 받아들였다.
비록, 한 조각에 불과한 크기지만 과다 성장하려던 세포가 활동을 중지했다.
'더....'
하지만 너무 많은 정신력을 쏟아부어서일까.
이미 극단에 이르렀던 의식은 검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잡았다."
목소리에 눈이 뜨였다.
땀에 흠뻑 젖은 로제가 웃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목표를 포착한 암사자 같이 보인다.
"잘했어, 레몬. 이제 내게 맡겨."
로제가 나와 시선을 마주치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것을 끝으로 의식이 완전히 닫혔다.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여전히 시설 안이었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시간부터 확인했다.
하루 조금 못 미치는 시간이 지나 있었다.
'로제는 돌아갔나?'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바로 옆에 누군가가 있었다.
"우응."
기다란 선홍빛 머리카락을 침구처럼 몸에 감고 있는 여성.
로제다.
나는 지금 이곳이 어디라는 것도 잊고 그녀를 넋 놓고 쳐다보았다.
세상모르고 자는 모습이 평소의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과 다르게, 천사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으응? 레몬?"
시선을 느꼈는지, 로제가 잠시 뒤척이다 깨어났다.
나는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부자연스런 움직임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척하다 대답했다.
"어, 일어났어?"
"좋은 아침."
좋은 아침은 무슨.
곧 있으면 저녁 먹을 시간이다.
어제 오후 수업 마치고 이곳에 왔으니, 대략 시간이 맞아떨어진다.
나는 그 점을 로제에게 알려주었다.
"아, 정말?!"
로제가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밥 먹으러 가자. 어제부터 굶어서 엄청 배고프단 말이야."
"어. 그런데 왜 혼자 안 가고 여기 있었어?"
"응? 같이 왔는데 친구를 두고 혼자 갈 수 없잖아?"
당연한 듯 말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몸 상태는 체크해 봤어? 정말 고생했다고."
"내 몸?"
그러고 보니 새로운 특성을 적용한 직후임에도 이질감이 그리 강하지 않다.
특히 원래대로라면, 다른 내장기관을 압박할 정도로 커졌을 허파가 적당한 수준까지만 커져있었다.
로제가 해낸 것이다.
"잘 됐지?"
"와 이건…. 정말 대단한데."
"그치? 그치?"
"어.... 정말 고맙다. 매번 이 말 밖에는 할 게 없네."
"뭘. 덕분에 나도 덕 좀 봤는걸. 이번엔 처음부터 자세하게 본 덕분에 나도 써먹을 수 있었어."
"...뭐?"
지금 얘가 뭘 말한 거야.
나 잠든 사이에 벌써 베껴냈다는 소리인가.
갑자기 소름이 전신을 뒤덮는다.
"물론 레몬만큼은 아니지만. 레몬 건 단순한 인간의 육체 이상이라니까? 부럽다."
"...."
"그래도 잘만 보완하면 내 식[式]으로 업그레이드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완성하면 우리 나중에 누구 폐활량이 더 좋은지 대결해 볼까? 재밌을 것 같이 않아?"
"어...응."
말잇못이란 단어가 이렇게 와 닿을 줄이야.
매번 놀라면서도 적응이 되질 않는다.
내 앞에 있는 인간이 말 나랑 같은 생물이 맞는 걸까.
"신경 쪽은 몸을 쓰다 보면 알아서 적응이 될 거야. 한동안은 페이스를 올려야겠네."
"하하."
그저 웃었다.
어제와 비교해서 오늘의 나는 분명 확실히 발전했다.
그럼에도 그녀와의 격차는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니지. 굳이 비교할 필요 없어.'
벌써 숨 쉬는 게 달라졌다.
더 빠르고 풍부한 산소를 공급받은 근육은 활기가 넘쳤다.
한계를 알기 위해서는 따로 시간을 내 봐야겠지만, 그것도 이전보다 훨씬 나을 게 분명하다.
"아! 노랑 띠는 수여식도 해야지. 우리 무문은 첫 수여식이잖아. 어떤 식으로 치르는 게 좋을까? 역시 사람들을 모아서 축하연을 할까? 아니면 관문을 만들어서 시험 치르는 건 어때? 레몬은 좋은 생각 있어?"
"음, 그거...."
잔뜩 신이 난 로제.
이대로 가만히 놔두면 혼자 폭주해서 과한 계획을 꾸밀지도 모른다.
"일단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밥 먹고 저녁에 있을 훈장 수여식에 참가해야지."
"…아! 그게 오늘이었지."
그제야 생각난 듯 로제가 날 앞질러 걷기 시작했다.
중앙 초인단 단장이자 초인들의 살아있는 우상인 '다르모사'가 오늘 저녁 아카데미에 도착한다.
수여식은 그가 도착하자마자 시작될 예정.
바쁜 스케쥴로 겨우 시간을 냈다고 했으니, 오늘이 지나면 얼굴 볼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흥분한 로제는 이례적으로 식사를 빠르게 끝내버렸다.
하루를 굶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로제. 지금 가봤자 한참 기다려야 한다."
"일단 씻고 나서 옷을 고쳐 입고 다시 만나기로 하자."
식당에서 만난 바튼과 함께 그녀를 진정시켰다.
아까 격리 시설에서 소독을 하며 씻긴 했지만, 말 그대로 소독만을 위한 공간이라 그리 깔끔한 모습은 아니다.
"…그럴까?"
"맞아. 참석자들은 예복을 입도록 했으니까 복장도 챙겨야 해."
"아, 예복입어야 하지! 나 입는 법도 모르는데…."
로제가 자신의 복장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그녀에겐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다행히 신경 써 줄 사람이 있었다.
"나랑 같이 씻으면 되겠네. 가자, 로제."
"메르디는 알아?"
"입학식 때 입어 봤어."
"정말? 엄청 복잡하잖아. 그걸 다 기억해?"
"그때도 혼자 입었거든. 난 누가 내 몸에 손대는 걸 싫어해서."
메르디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한쪽 머리를 쓸어 넘기며 대답했다.
하긴, 메르디가 패션 센스 하나는 좋다.
화려하게 잘 입는다고 할까.
자칫하면 천박해 보일 수도 있는 복장을 굉장히 잘 소화한다.
그런 그녀에게 예복 정도는 어려운 문제가 아닐 것이다.
"다행이다. 그럼 난 메르디랑 갈게. 좀 있다 봐!"
"어."
두 명이 금방 사라졌다.
남은 것은 바튼과 나.
내가 바튼을 살짝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난 같이 해줄 필요 없다."
"...…뭐?"
"농담이다."
바튼이 농담도 할 줄 알았던가.
그는 얼빠진 내 반응에 만족한 것인지 아닌지, 평소와 같은 무표정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아!"
나도 이럴 때가 아니지.
이번 훈장 수여식의 주인공은 나다.
고로 나는 무조건 참석이 강제되어 있는 상황.
그런데 현재 내 꼴은 엄밀히 말해서 로제보다 더 심했다.
나는 얼른 숙소로 돌아가 씻고 예복을 갖춰 입었다.
예복은 화려한 만큼 입기 어려웠다.
복잡했으며, 순서를 지켜야 비로써 맵시가 살아났다.
나도 몇 번을 다시 고쳐 입은 후에야 제대로 복장을 갖출 수 있었다.
'흠, 이 정도면.'
거울에 얼굴이 비친다.
원래의 내 얼굴과는 전혀 다른 레오나르드 모나크의 얼굴.
반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면상이다.
그래서 처음엔 거울을 잘 쳐다보지 않았다.
기초적으로 관리할 것이 있을 때를 빼놓고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색해.'
그래서인지 아직도 어색하다.
내 얼굴이라는 느낌이 확 다가오지 않았다.
그냥 잘생긴 금발의 서양인이 내 앞에서 날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
'얼굴 하나는 잘생겼네.'
모나크 가문은 우주 시대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성장한 여타의 가문과 같다.
그게 무슨 말이냐면, 신체 개조나 유전자 변형 같은 것을 주도적으로 행해서 크게 성공했다는 소리다.
그래서 모나크 가문의 인물은 못난 사람 없이 전부 잘났다.
피를 이어받은 혈족은 누구나 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의 내 몸 또한 같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일반적인 모나크의 혈족들 보다 낫다고 할까.
'금안.'
한때 모나크를 상징했던 금안.
지금 모나크의 성을 가진 혈족 중 금안은 내 몸인 레오나르드만 가지고 있다.
'그래봤자 특별한 능력도 없지만. 아마도?'
모나크 가문은 내가 원작을 쓸 때, 설정만 해놓고 쓸 일이 없어서 구석에 미뤄 둔 떡밥에 불과했다.
그 중 금안은 일단 있어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 만들어 놓은 설정.
정말 특별한 뭔가가 있는지는 몰라도, 지금 알 수 있는 거라곤 밤눈이 밝은 정도가 다다.
하지만 그 정도야 온갖 시야 보조 도구가 넘쳐나는 미래에 명함도 내밀 수 없다.
괜한 분란의 도구나 되지.
숙소를 나섰다.
훈장 수여식이 열리는 곳은 교장실과 가까이 붙어있는 대강당이었다.
시간은 아직 늦지 않았지만, 미리 와달라는 연락을 받은 상태.
"아, 오셨군요. 이쪽으로 오세요. 미용을 해야 하거든요."
"미용이요?"
"예. 오늘 훈장 수여식은 인류 연합 전체에 탑 뉴스로 방송될 예정이어서요. 이례적으로 기자들도 많이 왔거든요."
기자까지.
이번 이슈를 선전을 위해서 써먹을 예정인 모양이다.
결국, 나는 미용사들에게 잡혀 들어갔다.
"이제 오셨어요? 시간이 모자랄 것 같은데."
"얼굴이 잘 생겼잖아. 대충만 꾸며도 그림이 될 것 같은데."
"그렇긴 해요. 일단 엉망인 머리카락부터 정리할까요? 아, 머리카락에 손을 대도 괜찮을까요?"
"…예. 마음껏 해주세요."
나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미용사 분들이 아주 열정적이시다.
"와, 이거 피부 봐. 어쩜 이렇게 탱탱하고 부드러울까?"
"머릿결도 굉장해요. 평소에 어떻게 관리해요?"
관리 도중 미용사들이 꺼내는 이야기는 신기할 정도로 현대의 미용실에서 들을 수 있는 것과 비슷했다.
"…아뇨. 딱히."
"그럼 안 돼요. 망가지는 건 순식간이라니까. 조금씩만 관리해 줘도 상태가 훨씬 오래 유지될 거예요. 제가 좋은 제품 좀 추천해 드릴까요?"
두 분 모두 실력이 좋은 미용사였다.
다만, 말이 좀 많아서 그렇지.
"어때요?"
미용이 끝나고 미용사 분이 비춰준 거울에는 아까 본 것과 또 다른 모습의 레몬이 있었다.
"음...."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됐다고 할까.
왠지 모를 자심감이 솟구치는 기분이다.
"잘 됐네요. 고맙습니다."
"아뇨. 저희도 재밌었어요. 호호."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도 수여식까지는 조금 시간이 남아있다.
화장실이라도 다녀올까 하는 생각에 일어나 주변을 둘러봤다.
관계자들을 위해 만들어 둔 공간이라 그런지 조금 복잡하다.
결국 안내봇의 도움을 받아 가장 안쪽에 있는 화장실을 찾았다.
'어?'
선객이 있다.
그것도 무언가 익숙한 얼굴이다.
# 20
다르모사
'다르모사잖아.'
한 눈에 딱 알아볼 만큼 특이하게 생긴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길을 지나다 보면 꼭 있는 흔한 얼굴이랄까.
초인단의 단장복만 아니었으면 나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보고만 있지 말고 들어와. 네가 레오나르드지?"
"아, 네."
놀랍게도 그는 날 알아봤다.
다르모사는 손을 씻고 머리를 정리한 다음 말을 이었다.
"나는 다르모사. 뭐, 여기 생도면 내 이름을 모르지는 않을 테고."
"알고 있습니다. 단장님."
"일단 볼일부터 봐. 얘기는 그 뒤에 하자. 내 대기실에 맛이 죽이는 과자가 있거든?"
씩 웃으며 말하는 그가 무척 친근해 보인다.
나는 얼른 볼일을 마치고 그를 따라갔다.
가는 도중 이것저것 얘길 하는데, 정말 말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 행성 남바 원 쉐프도 안 봤단 말이야?"
"볼 시간이 없어요."
"요즘 생도는 참 불쌍하네. 최소한의 문화생활은 영위해야 하는데 말이야."
요즘 잘 나가는 TV프로그램.
인기 있는 뮤지션의 음악.
인류 연합의 의원들이 또 어떤 뻘짓을 했는지까지.
대화 주제도 다양했다.
'그래. 딱 내가 그렸던 그대로네.'
다르모사에 대해 표현해 보자면, 일종의 원치 않는 계기로 유명해진 일반인이다.
처음엔 흘러가는대로 살았는데, 너무 유능하고 유능해져서 일에 치이게 된 사람.
100살이 넘도록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다보니 은퇴가 지상목표가 되었다.
아마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니트 생활을 즐길 인물.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왜냐.
그는 유능한 만큼 똑똑하다.
그래서 안이나 밖이나 다르모사라는 중심이 없으면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인류 연합의 안타까운 현 사정을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은퇴를 한다?
뒤에 닥쳐올 일이 너무나 생생해서 그러질 못한다.
'하지만 그것도 머지않아 한계에 도달하겠지.'
원작의 스토리에서, 인류 연합의 붕괴를 가속화시키게 될 사건이 기억난다.
그 사건을 방비하기 위해서는 다르모사를 먼저 챙겨야한다.
"저도 시간이 났으면 좋겠네요.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살게."
"그렇지? 참 안타깝다니까."
다르모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해온다.
여담이지만,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자신의 여가시간을 뺏기는 것이다.
그런 그가 훈장 수여식에 참석하기 위해 먼 길을 왔다.
그럼에도 내게 나쁜 감정을 보이지 않는 것은, 후른샤이아 행성에서 일이 일어났을 경우 그가 직접 나서야 했을 정도로 전선 상황이 빠듯해서일 것이다.
"그럼 넌 취미생활 같은 건 안 해? 조금이라도 쉴 때가 있을 것 아냐."
"아, 그럴 때요?"
나도 인간이다.
아무리 바빠도 머리를 쉬게 해줄 필요가 있다.
그러다보니 레몬이 되고 나서 생긴 취미가 하나 있었다.
"오? 이건 엄청 오래된 건데. 우주 시대 이전에 나온 것들 아니야?"
"네. 지구 시절 거예요. 2,000년대 초반 작품이죠."
사람은 익숙한 걸 찾게 되어 있다.
나도 자연스럽게 내가 살던 시대의 것들을 찾아보게 됐다.
보다가 말았던 시리즈 영화나 만화 그리고 소설들.
영원히 완결이 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것들이 찾아보니 완결이 돼있었다.
얼마나 재미있던지.
다만, 자료를 찾기가 쉽지는 않았다.
지금은 노하우가 붙어서 이것저것 발굴해내고 있지만, 자료가 삭제되어 개인소장품으로만 남은 작품들도 존재했다.
"야, 이거 재밌다. 이런 건 어디서 구해?"
"직접 찾기 힘들 거예요. 제 걸 공유해 가세요."
"…정말? 너 굉장히 착한 놈이었구나."
겨우 그걸로 인내 게이지를 떨어뜨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줄 수 있다.
나는 웃는 얼굴로 내 소장 파일을 모조리 넘겨주었다.
솔직히 미래인 감성에 맞는 이야기일지는 모르겠지만, 명작의 작품성을 믿어보기로 했다.
"다음에 더 구하면 나한테 좀 넘겨줄래? 어, 그러니까 다른 사람 모르게 비밀로…알지?"
"물론이죠. 아! 물론 직접 드려야겠죠?"
"어. 보니까 너랑은 또 만날 것 같아서 말이야. 메모리 스틱으로 부탁해. 다른 쪽은 검열이 심해서."
다행히 대중문화의 옹호자께서는 딱히 가리는 게 없었다.
나는 그와 다음을 기약할 정도로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그렇게 떠들며 대화하다보니 나도 깜짝 놀랄 정도로 시간이 금방 흘렀다.
그와는 확실히 코드가 맞는 느낌이라서 대화하기가 편했다.
사실, 이게 레몬이 되고 나서 가장 일반적인 대화였다고 생각한다.
"원래 이 말을 하고 싶어서 불렀던 건데."
"어떤 말이요?"
"어...네 덕분에 뺑이치지 않게 돼서 고맙다고."
"아…."
"너무 직설적이었나? 원래 온갖 격식 다 차려서 말하려고 했는데, 역시 못 하겠다. 그런 건 남들 보여 줄 때나 하면 되지. 난 원래 이런 사람이니까 이해해."
"아뇨. 저도 이편이 좋아요. 고마우면 다음에 밥이나 한 번 사세요."
"…뭐?"
다르모사가 눈을 끔뻑였다.
그러더니 이내 우하핫 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파핫! 맹랑한 놈 보게."
"제 콜렉션도 싹 가져가셨다는 걸 생각하면 이쪽이 확실히 손해인데요."
"맞아. 그렇지. 아아, 이것 참."
그는 뭐가 좋은지 실실 웃음을 흘렸다.
"언제든 인류 연합군 사령부로 찾아와. 세계 최고의 셰프가 만든 음식을 먹여주지."
"그 정도면 손해는 안 보겠네요."
"프흐흐! 나가자. 주인공이 늦으면 안 되지."
다르모사와 어께를 나란히 하고 수여식장으로 향했다.
이미 수여식이 열리는 대강당에는 참석 인원을 대상으로 한 교장의 연설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와중이었다.
단상 한쪽에는 외부인들을 위한 좌석도 준비되어 있었다.
'역시 올란드 모나크도 왔네.'
외부인 중에는 모나크 가의 인물들도 자리해 있었다.
미리 연락받은 사실이라 놀라진 않았다.
다만, 올란드 외에도 예상치 못한 본가의 인물이 하나 더 있었을 뿐이다.
'저쪽은 기자들이고.'
기자들의 수가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많아 봐야 10명쯤 될까 싶었는데, 그 3배는 족히 넘어 보인다.
아무래도 이번 기회에 뽕을 뽑으려는 모양.
"친구. 우리차례인가 본데?"
다르모사가 툭 건드리며 고갯짓을 했다.
단상 위의 교장이 레슬링 경기의 진행자처럼 내 이름을 길게 늘여 부르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살짝 경직되어 있던 몸을 풀고, 미소와 함께 앞으로 나섰다.
"모두 박수로 맞이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공훈자인 레오나르드 모나크 생도에게는 인류 연합에서 증명하는 3급 공훈 훈장과 함께...."
수상식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다르모사는 방금 전 둘이 있었을 때완 다르게 엄숙한 표정으로 나와 훈장을 직접 매주었고, 대강당은 박수소리로 물들었다.
기자들의 촬영기기도 주변을 요란스럽게 날아다녔다.
"...이것으로 훈장 수여식을 마치겠습니다. 참석해주신 귀빈과 생도 여러분들을 위해 식사가 준비되어 있으니, 이용을 원하시는 분들은...."
다행히 내가 주인공인 순간은 여기까지였다.
이어서 생도들의 관심을 독차지한 것은 다르모사.
뷔페식으로 되어있는 식당에 다르모사가 식사를 위해 나타나자 그의 주변으로 생도들이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했다.
"…지금 가볼까?"
"저 많은 사람들을 뚫을 자신 있어?"
"응."
"폭력은 쓰지 않고."
"...아니?"
아까 덜 채웠던 배를 열심히 채우던 로제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서도 다르모사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것을 보니, 정말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나중엔 그렇게 싫어하는데....'
이건 내가 '모르는' 모습이다.
하긴, 그런 일을 겪지 않았을 지금 시절엔 딱히 미워할 이유야 없기도 하다.
어쨌든, 이렇게나 만남을 고대하는 로제를 보고 있자니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말이야. 대기하는 중에 저 아저씨랑 꽤 친해졌거든."
"…아저씨? 그렇게 불러도 돼?"
"아아, 단장님이랑."
나도 모르게 내가 그리는 이미지대로 부르고 말았다.
말을 재빨리 바꿨지만 미심쩍어하는 기색이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너랑 만나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말?"
"어. 잠깐만 기다려. 이리로 데려올게."
로제가 먹는 걸 멈출 만큼 놀랐다.
다르모사를 부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내가 그의 주위로 다가가자, 모인 생도들을 억지미소로 상대하던 그가 대뜸 아는 체를 하면서 붙어온 것이다.
"이래도 돼요?"
"아, 뭐. 난 네 친구들한테도 무척 관심이 있거든. 저녁을 굶었기도 하고. 그런데 그건 네가 먹을 거니? 나도 같은 걸로 한 접시 퍼다 줄래?"
"단장님을 위해 퍼둔 겁니다. 마음껏 드세요."
"내가 좋아하는 걸 어쩜 이렇게 잘 아냐? 정말 간신이 따로 없네."
뭐, 그거 맞추는 게 그렇게 어렵겠나.
그냥 나랑 똑같이 조금 어린애 입맛에 고기를 좋아할 뿐인데.
내가 먹고 싶은 걸 그대로 퍼다 주면 된다.
"여긴 제 친구들이에요. 이쪽부터 로제, 바튼, 사힘 그리고 메르디."
"역시 잘난 놈은 잘난 놈들끼리 어울린다더니. 반가워."
다르모사가 씩 웃으며 착석했다.
예상대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기분이 좋은 이유는 뭐 당연하다.
자신의 일을 줄여줄, 미래가 아주 유망한 동량들을 만났는데 싫어할 수 있을 리가.
게다가 이쪽도 다르모사에 대한 관심이 많을 시기.
로제를 필두로 그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그런데 일단 밥부터 먹으면 안 될까? 특히 빨간 머리 아가씨. 그러다 내 얼굴 뚫리겠어."
"아아, 죄송해요. 밥 먹을 땐 방해하는 거 아닌데."
"예의 바르네. 그러면 그 투기도 조금만 숨겨줄래?"
"하하, 이건 제 맘대로 안 되네요."
로제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미 싸워보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인 듯하다.
다르모사는 곤란하다는 얼굴로 내게 눈짓을 보냈지만, 나도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상태의 로제는 누가 와도 제어 불가다.
"이렇게 먹다간 체하겠는걸."
"그럼 먼저 한 판 붙고 드실래요? 땀 빼고 먹으면 밥이 더 맛있어요!"
"그건 좀 그렇고. 대신 요걸 해보자."
다르모사가 무언가를 품안에서 꺼냈다.
조금 세련되게 생긴 버스 손잡이로 보이는 물건이다.
"이건 내 직속 기술관련 팀에서 만든 물건이야.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압력[壓力]기랄까."
"압력기요?"
"그래. 정해진 시간 내에 주어진 에너지를 측정해내는 거지. 방법은 단순히 힘을 주는 것과 이능을 끌어올려 주입하는 것 두 가지가 있어."
나도 처음 본 물건이다.
일종의 전투력 측정기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저런 소형으로 초인들의 힘을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점은 의문이다.
그리고 이건 로제도 나와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부서질 것 같은데."
"이거 이래봬도 꽤 비싼 물건이야. 만드는데 뭐가 들어갔는지 알면 깜짝 놀랄 걸. 전 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물건이란 말씀. 자, 일단 시범을 보여줄게."
다르모사가 압력기를 건드려 타이머를 조작했다.
입력한 시간은 3초.
손잡이를 쥔 그가 힘을 주었다.
동시에 그의 이능이 일어나며 초록색의 운무가 주변을 살짝 덮었다.
그렇게 3초 동안 기록한 수치는 [11,120 K]
"나도. 나도 해 볼래요."
"자."
로제가 얼른 건네받았다.
그리곤 타이머를 조작하기 전 일단 손잡이를 잡아보곤 의자에서 일어나 자세를 잡았다.
왼 쪽 다리를 한 걸음 내딛고 허리를 약간 굽혔다.
여기에 왼 팔뚝을 내딛은 왼 허벅지에 지탱한 채, 손바닥을 벌려 손잡이를 쥔 오른 주먹을 받쳤다.
'정말 제대로 해 볼 생각인가 본데.'
로제는 그 상태로 잠깐을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들어 다르모사에게 말을 걸었다.
"이거 부서져도 괜찮아요?"
"안 부서진다니깐. 내가 전력을 다 해 봤을 때도 멀쩡했어."
다르모사가 호언장담했다.
로제가 씩 웃었다.
그리곤 숨을 한 차례 길게 들이마시다가 짧게 기합을 내지르며 힘을 줬다.
"합!"
순간 그녀를 중심으로 먼지바람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장소가 식당이라 당황해하는 음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하지만 거기에 시선을 돌릴 틈이 없었다.
압력기에 쓰인 수치.
타이머가 시작된 순간 가파르게 치솟기 시작한 수치는 1초가 지나기 전 다르모사의 기록을 돌파했다.
그리고도 모자라 2초가 되기 전에 앞자리 숫자가 다시 바뀌었고, 갈수록 수치가 오르는 속도가 빨라졌다.
결국, 측정이 끝나고 적힌 수치는 [38200K]
다르모사의 기록을 3배 이상으로 따돌리고야 말았다.
"아.... 실패했다."
그럼에도 로제는 무척 아쉬운 얼굴이었다.
진심으로 부셔버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로제를 보고 있던 다르모사는 놀라서 입이 슬쩍 벌어진 상태였다.
"삼만…삼만이 넘었어?"
"이거 정말 단단해요. 뭐로 만들었어요?"
"삼만.... 내가 그 쌩 난리를 치고 나서야 10만을 겨우 찍었는데."
어지간히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 21
다르모사가 중얼거리는 동안 로제는 아쉬운 표정으로 압력기를 만지작거렸다.
"다시 하면 더 나올 것 같은데…. 한 번 더 해봐도 돼요?"
"…어? 아니. 여기선 조금 민폐인 것 같은데."
"아, 그렇구나."
로제가 주변을 둘러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먼지를 맞은 생도들이 울상을 짓고 있었다.
우리 테이블도 사힘이 대응하지 않았다면 엉망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재밌겠다. 나도 해볼래."
그런데 갑자기 메르디가 눈을 빛냈다.
눈에 장난기가 가득한 것이 일내려는 표정이다.
순진하게 압력기를 넘겨주려는 로제를 바튼과 내가 결사적으로 막아 선 끝에야 사전진압을 해낼 수 있었다.
"흐응-."
덕분에 남은 식사 시간은 조금 괴로웠다.
불만스럽게 쳐다보며 손으로 전기를 위협적으로 튕겨대는 메르디부터, 충격에 빠져 말이 사라진 중앙 초인단의 단장님까지.
다행이 다르모사가 얼마 후에 정신을 차렸다.
"너희들 보고받은 것보다 더 대단하네. 거기 빨강머리. 로제라고 했던가?"
"네!"
"너희들 전부 쟤랑 다 비슷한 수준인거지?"
움찔.
내 몸이 순간 떨렸다.
방금 다르모사의 발언은 지뢰를 밟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들이 친분을 유지하는 것은 그의 말대로 비슷한 수준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심엔 자신이 최고일 거라는, 혹은 최고가 될 거라는 생각을 기저에 깔려 있었다.
"다음 기[旗]의 중앙 초인단 단장직은 걱정 없겠다. 너희들 중 한 명이 하면 될 테니까."
중앙 초인단 단장께서는 밝은 미래에 정신이 팔려 분위기를 읽어내지 못했다.
'이거 어쩔 거야.'
나를 뺀 네 명 간에 알 수 없는 기류가 감돌았다.
기분이 나빠 보이는 메르디는 물론이고 스멀스멀 투기를 흘려대는 로제.
그리고 수련 모드에 들어간 사힘과 평소보다 한층 냉정해 보이는 바튼까지.
노리고 한 짓이라면 인정한다.
다르모사는 말 한 마디로 이들 사이의 경쟁심을 점화시켰다.
"그럼 식사도 다 했으니 이만 일어날까?"
"저랑 대련은요?"
"이미 시간이 늦었는데. 일과는 끝났어. 지금부터는 내 휴식시간이야."
"...으으."
로제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표정을 보였다.
예전에 메르디가 했던, 한 대 치고 보라던 말을 떠올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로제에게 다르모사가 씨알도 박히지 않을 얼굴로 다시 말했다.
"내일을 노리라고 아가씨. 안 그래도 아카데미까지 온 김에 특별수업을 진행하기로 했으니까."
"그럼 내일은 싸워주나요?"
"…뭐, 좋아. 잠깐 시간 내지."
"헤헷."
자리를 파했다.
다음날 있을 대련에 기분이 업 된 로제는 불만이 한계까지 찬 메르디에게 끌려 대련실로 사라졌다.
바튼도 오랜만에 사힘의 대련 제의를 수락하곤 움직였다.
남은 건 나와 다르모사.
"넌 할 거 없어?"
"훈장까지 수여받은 날인데 하루는 쉬어야죠."
"그럼 나랑 프로그램이나 볼래? 이제 곧 시간이야."
"좋죠."
우리는 하루 어울려 놀기로 했다.
다르모사는 음식이 마음에 들었는지 접시 둘을 꽉 채워 들었다.
나도 약간의 먹거리와 함께 술을 한 병 골랐다.
'이 정도는....'
이름 모를 브랜드의 맥주.
그러고 보면 이 세계에 오고 난 이후 담배나 술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인류의 꿈과 희망을 지킨 공로로 훈장까지 받은 날인데, 소소한 상 정도는 허락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뭐해? 얼른 와."
"가요."
"어? 그거 술? 너 술도 할 줄 알아?"
"조금씩 즐겨요. 뭐, 예전 일이긴 하지만...."
내 대답에 다르모사가 뭔가 생각하는가 싶더니 다른 술을 집어 들었다.
"그거 말고. 이걸로 가져가자. 네가 고른 건 맛이 별로 없어. 초인한텐 맹물이나 다름없고."
"그래요?"
그런 설정이 있긴 했지.
초인은 웬만큼 높은 도수의 술을 마셔도 좀처럼 취하질 않는다.
그만큼 해독 능력이 뛰어나다.
'그래, 이왕 마실 거라면....'
다르모사가 골라준 걸로 2병을 더 챙겼다.
오늘은 오랜만에 제대로 쉬는 날이다.
*
"끙...."
잠에서 깼다.
레몬의 몸을 얻은 후 처음으로 숙취를 느꼈다.
다르모사가 골라준 술은 맛있는 만큼이나 강했다.
'대체 뭘 넣어서 만든 거야?'
단순히 도수가 높다고 초인이 뻗을 리는 없으니까, 특별한 재료가 들어갔을 것이다.
나는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봤다.
꽤 마시고 떠들었음에도 그리 어질러져있지는 않다.
막판에 꺼냈던 게임기와 술병이 나뒹구는 정도?
오히려 답답한 예복을 거칠게 풀어헤친 채 한 쪽 다리를 소파 등받이에 걸치고 자는 다르모사가 풍경을 헤치는 제 1의 원인이었다.
'가야겠다....'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다.
좀처럼 깨려고 하지 않는 다르모사에게 인사하고 방을 나섰다.
하루 놀면서 그와 형, 동생으로 부르는 사이가 된 것이 수확이라면 수확일 것이다.
'나이 차이가 얼마야?'
거의 100살.
조상님이라고 불러도 시원찮을 나이의 형님이다.
세계가 판타지나 마찬가지인데 뭔 상관이겠냐 만은.
일단 숙소로 향해서 예복을 갈아입고 오전 일과를 치렀다.
그리고 식사를 한 다음 특별히 편성된 다르모사의 이능학 합동 수업에 참가하기 위해서, 아카데미에 있는 가장 큰 대련실로 향했다.
'여긴 처음 와 보는데.'
말 그대로 초대형 대련실이다.
가끔 신무기 시연회를 열거나, 만약의 사태에 아카데미 생도를 위한 보호구역을 겸하는 시설로, 오늘 같은 날이 아니면 사용허가가 떨어지지 않기로 유명했다.
내부엔 이미 생도들이 많았다.
한쪽 구석에서 이미 한 판 하는 중인 생도들도 있었다.
그리고 단상 위쪽에는 어제 참석했던 외부인들도 존재했다.
내가 들어온 것을 보았는지 올란드 모나크가 아는채를 해온다.
'저놈....'
올란드 모나크와 함께 있는 인물.
누군지 확실히 기억난다.
나파엘 모나크.
이 몸의 주인인 레몬과 같은 어머니를 둔 형제이자 배 다른 쌍둥이 동생 중 첫째다.
레몬의 기억 중 딱히 좋은 건 없었다.
인성 파탄자에 자존감이 하늘을 찌를 정도로 강하고 가문에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다고 기억된다.
여기에 다음 대의 가주 자리가 무조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까지 알면 충분.
'그런데 날 만나는 자리에 동참했다고?'
나파엘 모나크는 레오나르드 모나크를 없는 사람 취급한다.
사이가 나쁘다 좋다 이야기하기 이전에 접점 자체가 없는 놈이란 소리다.
그런 인물을 모나크 가문에서 왜 보냈을까.
한창 관계를 좋게 가져가야 할 이 시기에 말이다.
어쨌든, 왔으니 얼굴이라도 봐야겠다.
나는 그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레오나르드?"
그런데 그때.
갑작스런 공격이 뒤에서 날아왔다.
창을 이용한 공격이다.
피하지 않았으면 배를 관통했을 공격을 빠른 움직임으로 비껴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자 몇 번 마주쳤던 얼굴이 보인다.
"잘 피하네?"
"…무슨 짓이야?"
킥킥 웃는 녀석의 이름은 류 룬쉰[流 润迅]
우주 시대가 펼쳐진 지금도 중화사상을 중시해, 다른 인종을 모조리 배척하는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는 멍청이다.
아카데미 내부에서도 사고를 가장 많이 일으키는 문제아 중 하나로 다수의 경고가 누적된 상태.
내가 유명해진 이후부터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어오는 놈이기도 했다.
"그냥. 눈에 거슬리는 게 있길래. 파리인 줄 알고."
그래도 만만치 않은 놈이다.
류 가문의 가전 창법과 무투술은 꽤 유명했고, 그런 집안에서도 가장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인물이 바로 룬쉰이다.
실제 지금 놈이 들고 있는 창도, 가전 창법에 최적화된 일종의 기계창[機械槍].
"눈이 삐었나 보네. 아니면 자기 무기도 못 다룰 정도로 미숙하거나."
"이야, 몰락한 집안의 핏줄이 입은 살아있네. 혹시 네 친구들을 믿고 그러는 거냐? 어쩌지. 여긴 지금 아무도 없는데."
이놈, 작정하고 온 거다.
마침 수업을 위해서라지만 대련실 내부이니 둘러댈 말도 있을 테고.
그나마 패거리를 끌고 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할까.
'어떻게 할까?'
룬쉰이 창을 까딱였다.
노골적인 도발이다.
하지만 내 수준은 확실히 룬쉰에게 못 미쳤다.
게다가 저 기계창까지 들고 있는 상황이라면, 언제 몸에 구멍이 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과감히 결정을 내렸다.
'튀자.'
결정은 빠르고 움직임은 신속하게.
땅을 박찼다.
몸이 튕기듯 뒤로 날아간다.
하지만 룬쉰의 반응도 그에 못지않았다.
"어딜!"
룬쉰이 제자리에서 창을 찔렀다.
그 힘에 정교하게 맞물려 있던 기계창의 톱날이 풀려, 창대가 회전하며 쭈욱 늘어났다.
차라랑!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찔러온 창을 몸을 뒤집어 가까스로 피해냈다.
'빨라.'
로제가 말했다.
무기 중에서도 창은 아주 위험하다고.
특히, 찌르기를 제대로 할 줄 아는 달인과 만나면 피하는 게 답이라고 했다.
불행히도 룬쉰의 창이 그랬다.
"쥐새끼 같은 녀석!"
전진하며 내뻗는 동작에 군더더기가 없다.
한 번 한 번의 찌르기가 들어올 때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다.
경로가 보이질 않는다.
멀리 있는 점이 순식간에 확장해 몸을 꿰뚫는 느낌이었다.
갈퀴의 특성을 받아 감각이 민감해지지 않았다면 이미 당하지 않았을까.
"어디서 맞고 와서는 나한테 행패야! 난 분명히 대련을 거부했어. 경고받기 싫으면 자중하라고."
"우리 류 가문은 한 번 시작한 행사를 도중에 접는 법이 없다!"
룬쉰은 오히려 기계창의 출력을 올렸다.
장착된 에너지 코어가 영롱한 빛을 뿜으며 창의 움직임에 강한 추력[推力]을 더하기 시작했다.
"큭!"
빠르다.
창의 움직임이 한층 더 빨라졌다.
눈 깜빡할 사이에 십여 번의 창질이 급소를 노리고 찔러왔다.
숨을 쉴 새도 없이 몸을 움직여 겨우 피해낸다.
'...이거?'
피해내는 게 고작이지만, 의외로 할만하다.
몇 번 찔려준 다음에나 상황을 넘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스친 상처 몇 개가 다였다.
이유는?
'깊은 허파'
장시간 무호흡 운동을 가능케 하는 투구 멧돼지의 특성이 육체의 활동을 도왔다.
공방이 길어졌다.
무아지경으로 창의 공격을 피하고 또 피했다.
어느새 주변에는 싸움을 구경하려는 생도와 외부인들이 빙 둘러서 벽을 만들고 있었다.
"후욱! 이놈…!"
룬쉰의 얼굴이 굳었다.
얕보던 표정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지 오래다.
더구나 기계창을 사용했음에도 성과가 없으니, 속이 터질 것이다.
'이 이상 가면 위험한데.'
하지만 나도 속이 편한 것만은 아니다.
선전하긴 했지만, 내 한계는 여기까지다.
룬쉰의 상태가 더 거칠어진 지금, 자칫 잘못하면 아주 크게 다칠 우려가 있었다.
'지금!'
그래서 숨이 모자라 공세가 멈춘 틈을 타,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주변에 구경한다고 모여 있는 생도들 뒤로 몸을 숨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룬쉰의 인성은 겉으로 보기보다 더 엉망이었던 모양이다.
이대론 놓칠 것 같았던지 에너지 코어의 출력을 최대로 개방해 기계창을 나에게 투척했다.
"...!"
뭐라 말을 할 틈도 없었다.
기계창이 날라 온다는 것을 느끼자마자 몸을 돌려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양 팔꿈치 오른쪽 무릎을 모아 지척까지 다다른 창촉을 강하게 타격했다.
"큭!"
힘이 부족했다.
창의 돌진력을 일부 상쇄했으나, 에너지 코어에서 뿜어지는 추력이 기계창을 다시금 쏘아지게 만들었다.
문제는 내가 아니다.
방향이 휘어진 창이 뒤쪽에 있는 외부인들에게 날아갔다는 것.
외부인 참석자들 중 대부분이 일반인임을 감안하면 참사가 일어날 순간이다.
"여기까지 하지."
다행히 이 앞뒤 없는 폭주를 멈춰준 구원자가 나타났다.
가장 앞에 선 외부인이 눈을 질끈 감으려는 찰나 초록색 아우라가 확 퍼지며 기계창의 움직임을 붙든 것이다.
다르모사다.
그의 바로 옆에는 같이 왔는지 올란드 모나크도 있었다.
"위험한 짓을 하는데. 어린 친구."
"...어."
약동하던 기계창의 에너지 코어는 다르모사의 손 안에서 작동을 완전히 멈춘 상태였다.
다르모사는 창대를 쥐고 룬쉰에게 다가갔다.
"자기 무기도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해서야 어디 류 가문의 이름을 이을 수 있겠어?"
내가 아까 한 말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룬쉰은 이번엔 뭐라 반박하지는 못했다.
그저 다르모사가 건넨 기계창을 받아들고 입을 앙다물었을 뿐.
"이번 일은 불문에 붙일 테니 여기서 수습하는 게 어떨까? 아니면 내가 직접 불편하게 만들어줘야 하나?"
"...아닙니다."
룬쉰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리곤 내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본인의 행사가 과했음을 사과한다."
내심이 어떻든 간에 말투는 확실히 정중했다.
하지만 뒤이어 작은 목소리로 한 말까지 정중하진 않았다.
# 22
"그러나 그대의 주변에 언제까지고 옹호자가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원시천존 [元始天尊]이 항상 그대를 주시하시지는 않을 테니 말이야."
작게 말했다고 다르모사가 이 말을 못 들었을 리가 없다.
룬쉰이 제 무덤 파는 멍청이로 보인다.
"하! 이 새끼 보게."
그런데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진 건 뜻밖의 인물이었다.
옆을 보니 나파엘 모나크가 있었다.
"언제부터 류[流] 가문이 우리 모나크 앞에서 머리를 바짝 들게 되었지?"
"넌...?"
"모나크 가의 적자, 나파엘 모나크님이시다."
"모나크가 언제 적 모나크라고."
비슷한 인성의 소유자 둘이 맞붙었다.
미친개 두 마리가 서로를 향해 짓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내게 올란드 모나크가 말을 걸어왔다.
"몸은 괜찮니?"
"아, 예."
"멀쩡해 보이지 않는구나. 옷이 피로 물들었단다."
투창을 막기 위해 부딪혔던 양 팔꿈치와 오른쪽 무릎의 피부가 완전히 뒤집어졌다.
하지만 속은 안 다쳤으니, 기계창을 막은 것 치고는 대가가 싼 편이다.
"…치료를 해야겠구나."
"정말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나중에 의료 처지 한 번만 받아도 나아요. 지금은 수업에 참가해야죠."
"…정말 괜찮겠니?"
"예."
올란드 모나크가 출혈 부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는 얼버무렸다.
어쩐지 레몬의 생모인 올란드 모나크와는 대화를 할 때마다 알 수 없는 거북함이 느껴졌다.
"왜? 이쪽은 불편하게 못해줄 것 같은가 보지? 웃기네. 너희 류 가문이 얼마나 버티다가 와서 싹싹 비는지 한 번 볼까?"
"그쪽이나 웃기는 소리하지 말고 꺼져라. 위대한 중화인은 그런 허접한 협박 따위는 취급해주지도 않는다."
"넌 지금이 어느 땐데 아직도 중화 타령이냐? 아주 시대착오적인 놈이네."
"뭣? 중화사상을 깔보는 거냐? 우주 전역에 살고 있는 100억 중화인을 뭐로 보는 것이냐."
"100억은 무슨. 너희 류 가문을 포함한 소수의 멍청이들이나 하는 망상이겠지."
말싸움이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
남들이 보면 둘 다 도긴개긴일 것이다.
그래도 난 나파엘에게 점수를 주고 싶다.
룬쉰을 같은 수준에서 말로 거침없이 까댈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번 일은 잊지 않겠다."
"안 잊기는. 내가 뼛속까지 박히게 만들어 줄게."
결국, 룬쉰이 먼저 퇴장했다.
"저거 괜찮겠어요?"
"설마 걱정하는 거야? 류 가문 따위는 신경 쓰지 말라고, 형."
"...형?"
나는 움찔했다.
나파엘의 형이란 호칭은 매우 낯설고 뜬금없다.
"류 가문은 어차피 과거를 팔아 먹고사는 치들이야. 우리 모나크 가문의 상대는 아니지."
"갑자기 왜 친한 척이냐?"
"친한 척?"
나파엘은 정말 몰랐다는 듯이 눈을 끔뻑였다.
그리곤 피식 웃으며 말을 잇는다.
"친한 척이라…. 나는 그저 저 얼간이가 내 '모나크'에 흠집 내는 게 짜증났을 뿐이야. …형이라고 부른 건 뭐, 그럴 자격을 보여줘서랄까."
"웃기네."
자격은 무슨.
아무튼 이놈이나 저놈이나 자기들 기준으로 생각한다.
내가 예전의 그 레몬은 아니지만, 이런 집안을 상대로 미친 것도 이상하지 않아 보인다.
"그냥 예전대로 하자."
"예전대로? 음 서로 모르는 척 하고 그러다가 주고받을 게 있으면 친한 척 하는 그런…비즈니스 관계를 말하는 거야?"
"그래."
"그건 좀 곤란해. 나는 정말로 형하고 친해져 볼 생각이거든."
나파엘이 날 보며 씩 웃었다.
'이 녀석 진심인가?'
그동안 천길 같이 느껴졌던 거리감도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들러붙는다.
이런 친화성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이건 비밀인데. 사실, 난 예전부터 형을 그리 싫어한 적이 없었어."
"그쯤 해두거라. 나파엘."
"알았어, 어머니. 오랜만에 봐서 나도 모르게 기분을 냈나 봐."
주변도 정리가 됐다.
다르모사가 놀란 외부인들을 진정시킨 후 다가왔다.
"아, 고마워요. 형님."
"됐어. 인사는 뭘. 네 어머니가 불러서 제때 도착할 수 있었어. 웬 머저리 때문에 정말 사고가 날 뻔했네."
"뭐야. 단장님이랑 말까지 트는 사이였어?"
"나파엘."
"알았다니까. 어머니."
수업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나는 일단 의료처치를 받기 위해 움직였다.
올란드, 나파엘은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겠다고 한 덕분에 잠시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2시간 정도 후에 다시 대련실을 찾았다.
'응...?'
근데 대련실에선 이미 싸움판이 펼쳐져 있었다.
내부 구역을 나누는 식으로 한쪽 공간을 할양해 놓은 곳에서 익숙한 두 사람이 공방 중이었다.
주인공은 로제와 다르모사.
초록색 운무를 두른 다르모사가 로제의 공세를 틀어막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나는 그걸 보면서 사람들을 헤치며 일행들에게 다가갔다.
사힘이 인기척을 느끼곤 고개를 돌려 아는 척을 해온다.
"치료는 잘 받았나?"
"어. 그런데 저건 얼마나 된 거야?"
"이제 막 시작했다."
일진일퇴의 공방.
둘이 부딪힐 때마다 귀가 멍멍할 정도의 소음이 터져 나온다.
맨몸으로 그런 파괴력을 내는 로제도 대단했지만, 그걸 모조리 받아내는 다르모사의 모습도 입이 다물리지 않을 정도로 대단했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다 문득 입을 열었다.
"코어 웨폰은 안 쓰네."
"당연한 거다. 중앙 초인단 단장이 생도를 상대로 코어 웨폰까지 쓰면 반칙이나 마찬가지지."
바튼이 말대로다.
코어 웨폰.
초인을 상징하는 무기이자 갑옷이자 인류 연합이 쌓아올린 기술의 총화.
내가 이전에 보았던 기계창 또한 엄밀히 말하자면 코어 웨폰의 초기 형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최신의 코어 웨폰은 병사들이 쓰는 육전형 아머와 같이 입는 형태를 기본으로 한며, 다양한 환경에서 사용자의 활동을 가능케 하며 움직임을 보조하고 위협적인 공격을 방어한다.
특히, 베리어 기능의 경우 전함의 주포조차 1발 까지는 정면으로 막아낼 정도로 대단한 출력을 자랑한다.
'대신 그만큼 비싸지.'
코어 웨폰은 아주 복잡한 제작 방법만큼이나 비용도 무지막지하게 들어간다.
정확히 밝혀진 적은 없지만, 코어 웨폰 제작에 들어가는 돈이면 화력 대대를 한 부대 만들고 운영할 수 있을 정도라니 말 다했다.
"한 방에 치고 들어갈 생각인가?"
"좋은 생각이지. 다르모사님의 이능이라면 유지력 싸움으론 안 될 테니까."
로제가 자세를 잡았다.
잘 보면 압력기의 기록을 측정할 때와 비슷한 자세다.
정직하게 오른손에 모든 힘을 모아서 때릴 생각인 모양인데, 저렇게 대놓고 보여주는데도 통할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상대가 다르모사라면 저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땅을 딛고 있는 다르모사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내가 원작에서 다르모사의 능력에 대해 묘사한 문장이다.
그의 힘은 땅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땅과 밀접하게 닿아있는 동안, 지금의 단순한 공방으로는 그의 이능을 조금도 소모시키지 못할 정도로 회복력이 강해진다.
특히 그가 두르고 있는 초록색 운무는 땅을 밟고 있을 경우 한 층 더 강력해지는 특성까지 있어, 장기전에선 누구보다 강하다.
"갑니다."
"와라."
곧 로제가 움직였다.
내 동체시력으로도 사라졌다고 느꼈을 만큼 빠르게 날아간 로제가 짙어진 초록색 운무를 가격했다.
마치 안개가 흩어지는 것 같다.
충격을 견디지 못한 이능이 날아가고 그 틈을 비집고 로제가 더 전진했다.
"어딜!"
초록색 운무가 뭉친 상태로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가한다.
로제는 그조차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환상적인 움직임으로 피해내며 돌파했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양쪽 모두 극도로 절제된 힘의 운용을 보여주고 있었다.
"조금만 더...."
생도들은 저도 모르게 로제를 응원중이다.
상대적으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다르모사를 상대로 거침없이 나아가는 로제의 모습이 감성을 건드린 모양이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로제가 다르모사에게 닿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그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단지 뒤로 물러나는 것만으로도 로제가 전진해오는 만큼의 거리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좀 더 지나자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뭐야?"
다르모사가 황당해하며 중얼거렸다.
초록색 운무가 흩어지는 속도가 빨라진다.
밀도가 올라간 만큼 저지력이 상승했을 텐데도 로제의 주먹 한 방에 여지없이 꿰뚫렸다.
처음과 비교해서 그녀의 피부가 눈에 뜨일 정도로 빨갛게 달아오른 상태.
"빨강머리 너 정말 생도 맞는 거냐?"
폭주?
아니다.
저건 육체제어능력을 이용해 신체를 한계까지 사용하는 것뿐이다.
몸에 저장된 에너지를 몽땅 끌어와 심장의 박동을 가속시키고 근육을 가혹하게 짜내는 것.
'대단해.'
하지만 저걸 로제가 아니고서야 누가 하겠나.
단순한 육체제어도 아니고 세포 하나하나를 마음대로 움직이는 자기개변 수준에서 행하는 짓인데.
저것이야 말로 언제나 강조하는 육체 제어의 전부이자 극한이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나는 로제의 전력을 몇 번 본적이 있다.
다름 아닌 메르디와 대련을 할 때.
그때도 로제는 신체를 가속시키는 것은 그때도 잘 써 먹었다.
하지만 다르모사와 싸우고 있는 것처럼 지속적으로 장시간에 걸쳐 써먹는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짧게 끊어서 쓴다고 해야 하나.
약간의 오버기어 같은 느낌이었다.
'호흡…때문이구나.'
그 이유가 뭔지는 금방 깨달았다.
신체를 가속했을 때 가장 위험한 것은 열이다.
한계 이상까지 올라간 온도는 몸을 갉아먹을 뿐만 아니라 뇌에도 이상을 불러올 수 있다.
또한, 폭발적인 움직임에 비해 산소 공급량이 부족해지며 몸이 제어를 벗어나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 폐활량이 크게 늘어났다.
바로 그제 내 변화를 참고삼아 자신의 호흡 기관을 개선시켰다.
문제 중 일부가 해결된 것이다.
"저러다 뚫겠는데?"
"잘한다!"
다르모사가 바빠졌다.
초록색 운무의 움직임이 이전보다 더 다채롭고 빨라졌다.
올가미를 짜서 로제를 묶으려는가 하면, 전신을 뒤덮는 그물이 되어 덮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전진일변도인 로제를 막지 못했다.
결국, 모든 운무를 다 뚫고 들어간 로제가 다르모사에게 주먹을 날렸다.
다르모사가 그 주먹을 막으며 일시적으로 교착 상태가 만들어졌다.
"이겼다."
"이기긴 누가 이겨, 요 맹랑한 놈 보게."
잠시 방심하던 로제에게 다르모사의 발차기가 날아간다.
"어어?"
"잘 왔다. 이제 돌아 가."
발차기는 흘렸지만, 뒤를 잇는 공격과 함께 날아오는 초록색 운무는 피해낼 수 없었다.
결국, 거리를 좁힌 것도 무색하게 로제는 아까의 그 간격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힝."
"더 할 테냐?"
로제가 울상을 지었다.
다르모사는 이능만큼이나 무투술에 있어서도 로제에게 뒤처지지 않는 강자.
방심의 여파는 뼈아프다.
"아뇨. 배고파요."
약간은 허무한 마무리.
그래도 바로 전까지 보여주었던 모습이 너무 멋졌던 터라 온 사방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선전했다.'
이번 대련으로 확실히 알았다.
로제의 발전 속도는 원작보다 확실히 빠르다.
이대로 몇 년 만 흘러도 다르모사를 뛰어넘을 것이며 진정한 새로운 시대가 펼쳐질 것이다.
'로제뿐만이 아니지.'
로제의 성장은 그녀 혼자만의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로제와의 대련이 벅차다는 것을 느낀 메르디는 자신의 힘을 제멋대로 분출하는 것만이 아닌, 제어를 위해 노력 중에 있으며 나머지 둘도 자극을 받은 상태다.
"아까웠네."
"한 대도 못 때려 봤어."
"다음에 붙으면 충분히 가능하겠는데?"
"…그렇지?"
나는 로제를 위해 준비한 간식을 주머니에서 꺼내 주며 칭찬했다.
우울해하던 로제가 간식을 보며 반색했다.
한입에 넣는 것을 보곤 하나 더 까주었다.
"...너, 그런 것도 가지고 다녔나?"
"어…요즘 들어? 요긴하게 쓰이더라고."
바튼을 비롯한 일행들이 날 요상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 23
정말 요긴하긴 하다.
가끔 로제가 우울해 할 때나 배고파서 포악해지는 상황에서는 특히 더 말이다.
게다가 뭘 줘도 잘 먹는 모습을 보면 보람이 느껴진다.
다음엔 한국 음식이라도 준비해서 줘볼까 생각중이다.
"나머지는 식당에 가서 먹자. 그런데 수업은 이게 끝?"
"음. 원래 로제 다음에도 몇 사람과 실전 대련을 이어서 한다고 했는데…이 분위기를 보면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사힘의 말대로다.
로제와 다르모사가 너무 대단한 모습을 보여준 나머지 분위기는 소강상태가 되었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실력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자신의 모습과 비교되어 차마 나서지 못하는 것이다.
다르모사도 이걸 알고는 눈치 빠르게 수업을 끝내버렸다.
"할 말이 있다고요?"
해산하는 사람들 사이로 올란드와 나파엘이 다시 다가왔다.
"자리를 준비해 뒀단다. 따라 오거라."
외부인의 체류 허가는 오늘까지.
올란드 모나크를 따라 가까운 곳에 마련된 미팅룸으로 향했다.
따라온 수행원들은 방 밖에서 대기토록 하고, 내부에는 나와 올란드, 나파엘만이 들어갔다.
"용건을 말씀하세요."
"너무 재촉하지 마. 형. 우리는 어차피 내일이면 없으니까."
"내가 모나크 가와 사담을 나눌 사이도 아니잖아? 할 말만 하고 끝내는 편이 낫지."
미친개가 자꾸만 들러붙으려한다.
아무리 쳐내도 웃으며 다가오는 게 떨어질 생각이 없어보였다.
'지금까지가 딱 좋았는데.'
비즈니스 관계.
모나크와는 혈연으로 얽혀있으니 남들보다는 조금 쉽게 다다갈 수 있는 정도의 거리감이 있었다.
나는 여태껏 이게 편했다.
하지만 피는 확실히 물보다 진한 모양이다.
내가 몸의 원래 주인이 아님에도 다가오는 가족을 쉽사리 떨쳐낼 수가 없었다.
'이 놈의 머리에 남은 기억 때문일지도....'
레몬의 머리에 생생히 남아있는 기억.
이 기억은 내가 원작 세계에 적응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볼수록 몰입된다.
단순한 감정 이입을 떠나서 '나'라고 혼동하게 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났다.
"뭐, 형이 어떻게 생각하든 좋아. 일단 그러면 일 얘기부터 해볼까?"
나파엘이 자신의 패널에서 작은 원형의 무언가를 분리해 테이블 위에 두었다.
일종의 휴대용 영사기다.
그걸 툭툭 치자 미리 준비되었던 영상 자료가 허공에 조사[照射]되었다.
"이건 현재 우리 가문에서 준비 중인 에일리언 관련 군사 무기들이야. 앞에건 납품이 예정되어 있는 것들이고, 지금부터 나오는 건 아직 개발 단계에 있는 물건들."
모나크 가의 사업은 다방면에 걸쳐있다.
가장 주력으로 하던 사업은 우주 개척 사업이었는데, 이건 에일리언 때문에 망했다.
그래도 첨단 우주선 제작 기술과 항행 노하우 그리고 기반 시설은 아직도 탑 수준이다.
한 번 망한 뒤로는 체질개선을 시도해서 하이앤드 급 행성간 이동용 셔틀이나 수송선 등으로 사업을 심화시켰는데 꽤 잘 나가는 중이다.
'여기에 군사 기술도 나쁘진 않지.'
모나크 가문이 가지고 있는 첨단 제조업 기술은 단지 민간 용도에 그치지 않는다.
인류 군 편재 상 가장 작은 단위의 전함인 버드 급부터 머독 급까지의 전함과 각종 특수목적함을 건조, 납품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좀 분야가 다른데?'
나파엘이 보여 준 영상 자료에 나타난 것은 모나크 가문이 주력하고 있는 사업 부문과는 아이템이 조금 다르다.
이를 테면 개인 화기와 같은 소형의 군사 무기.
덩치가 있는 것만 건드렸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상당히 모험적인 선택이 아닐까 싶었다.
"이런 것도 만들어?"
"적자야. 쏟아 부은 돈에 비해서 결과물이 시원찮거든."
나파엘이 앓는 소리를 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다가 슬쩍 찔렀다.
"이런 기밀정보까지 외부인에게 보여주는 걸 보면 네가 책임지게 된 거고?"
"외부인이라니. 모나크 가문의 간판스타가 될 분께서."
"헛소리. 난 꿈에도 생각 없다."
"하하. 그거야 두고 봐야 할 일이고. 형."
나는 나파엘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둘을 살폈다.
올란드는 군사 무기 분야에 손대지 않는다고 알고 있으니, 이 안건은 온전히 나파엘이 맡고 있는 분야일 것이다.
여기에 나파엘의 나이를 생각하면 가문에서 나파엘을 얼마나 밀어주고 있는 알 수 있다.
'그건 그렇고....'
그동안 열심히 공부한 결과일까.
이 영상 자료에서 보여주고 있는 기술들이 얼마나 괜찮은 수준인지 대략적으로나마 파악이 가능하다.
자세한 건 세부 자료를 살펴봐야겠지만, 본래 주력하던 분야가 아님에도 수준이 굉장히 높다.
'정말 공을 많이 들인 모양인데.'
솔직히 탐난다.
이 정도 수준의 기술과 그동안 축적되었을 연구 지식이면 내 살몬 연구소에도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설마, 이 녀석 그걸 노린 걸까.
"살몬 연구소에 욕심이 나는 모양이지?"
"와. 벌써 알아차렸어?"
"연구소는 모나크랑 전혀 상관없다."
"정말? 우리 기술을 몽땅 넘긴다고 해도?"
"...뭐?"
제정신인가.
이 정도 수준까지 기술개발을 진행했으면, 몰라도 가문의 사활을 건 사업일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걸 통째로 넘긴다니.
살몬 연구소에 투입되는 자금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하지만, 모나크에서 여태껏 기술개발에 쏟아 부은 돈에 비하면 한참 모자를 것이다.
나는 결국 이 대사를 내뱉고 말았다.
"원하는 게 뭐야?"
"살몬 연구소의 지분 15%."
"…겨우?"
"겨우라니. 내가 보기에 형이 연구하고 있는 건 대박이야. 아마 이쪽이 이득일 걸."
"정보가 어디가 샌 거야."
"에이, 뭐 우리가 스파이라도 꽂아 놨을까봐? 감이야 감. 차기 모나크의 가주가 될 이 몸의 감."
"거짓말도 잘하네."
"들켰어? 역시 내 형이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믿어주지.
모나크 같은 큰 가문은 의사 결정의 과정은 허투루 이뤄지지 않는다.
아무리 나파엘이 촉망 받는 후계자라 할지라도 제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더구나 저만큼이나 큰 사안을 전격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 리가.
'가능해. 하지만 그만큼 확실한 근거가 필요하겠지.'
100%까지는 아니더라도, 7, 80%정도는 확신을 줄 정보가 있어야 한다.
더구나 살몬 연구소는 외부에 공개된 것도 없으니 어디선가 정보가 샜다는 건 쉽게 유추 가능하다.
"어때? 관심 있어?"
"정보가 어디서 샌 건지부터 말해."
"아, 그거."
히죽 웃은 나파엘이 허리를 폈며 올란드를 한 번 쳐다봤다.
그러자 올란드가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형이 지금 쓰고 있는 자금은 거의 대부분 내 가문에서 나왔지."
"...그 걸로는 부족할 텐데."
"자금의 흐름만 알면 나머지는 크게 어렵지 않아. 잘 봐."
나파엘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속으로 납득되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확실히 원작 세계의 금융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긴 하다.
나는 공부해야 할 분야가 늘었다는 것을 기억해 두며 나파엘의 말을 새겨들었다.
"...그렇게 해서 대략적으로 연구소가 주력으로 하는 내용을 알아냈지. 그 다음엔 조금 더 쉬웠어. 외부활동과 추가적으로 구입하는 연구 자재 등을 종합해서 고려하면 꽤 실체에 접근할 수 있지."
"그 과정을 어머니가 관여하신 거고?"
고개를 끄덕이는 나파엘이 갑자기 이상한 표정으로 나와 올란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 맞는데. 언제부터 어머님에게 어머니라고 불렀어?"
"뭐가 이상해?"
"아니 그건 아닌데."
나파엘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원래 레몬은 그의 생모인 올란드 모나크를 '올란드님'이란 호칭으로 불렀다.
그렇게 교육받은 것은 아니다.
단지 자신을 신경 써주지 않던 생모에 대한, 사소한 반항의 표현이었을 뿐.
하지만 그렇게 부른 시간이 오래되면서 서로 익숙해졌다.
그런 상태에서 내가 올바른 명칭을 사용하자, 할 때마다 놀란다.
그때, 올란드가 이야기가 겉돈다고 생각했는지 혹은 다른 이유에서인지 입을 열었다.
"나파엘.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거라."
"…알았어. 어머님."
초인이 아니라면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살짝 쳐진 목소리다.
"어쨌든 그랬다는 거지."
"아무리 그렇다 치더라도 겨우 지분 15% 때문에 이걸 전부 준다는 걸 믿으라고?"
"15%는 초기 제안이고. 우리 선임 연구원들도 전부 넘겨줄게. 대신 모하임 왕가랑 같이 20% 어때."
"생각 없다."
"아깝네."
이젠 대놓고 스파이를 집어넣겠다고?
어림도 없다.
물론, 15%만 해도 주권행사를 통해 충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만큼 정보가 어떤 식으로든 빠져나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대놓고 빼가는 거랑 아닌 거랑은 확실히 차이가 있다.
"물론 우리도 그것만으로 올인 할 생각은 없었지. 그런데 최근 움직임을 보면 벌써 상용화에 가까운 것도 있던데. 그게 분명, 폰타나 운테의가 만든 자동 전투기계였던가."
"거기까지 알아냈다고?"
"뭐...."
숨기는 게 없다는 것처럼 손바닥을 펼쳐 보인다.
그런데 뭐 이정도 수준이면 거의 다 아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도 더 이상 숨기는 게 별 의미가 없고.
"맞아. 현재 실전 테스트를 앞두고 있지. 3가지 모델을 시험할 거고, 높은 확률로 모델 셋이 모두 도입될 거라 예상중이야."
"역시!"
가장 중요한 실전 테스트다.
연구소 내부적으로는 자체 시험 결과를 따라 낙관중인 상황.
예상보다 실재 결과물이 이렇게 빨리 나온 데에는 역시 폰타나 운테의 힘이 컸다.
게다가 현재 주력으로 디자인 된 3가지 전투기계의 모델은 전투력, 인공지능 적합성, 생산성, 자재 수급 용이성 등 군납을 위한 모든 부분을 고려한 최적의 작품이다.
즉, 도입만 결정되면 다음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20%하자. 내가 엉뚱한데 쏟아 버리고 있는 돈도 전부 형 줄게."
"돈 주고 싶어서 안달 난 놈들은 줄 섰어."
"그래도 명색이 모나크의 성씨를 달고 있는 형이 주인인데. 모나크 가문도 모하임 왕가랑 같은 수준은 맞춰야지. 이건 어때?"
나파엘이 새로운 걸 꺼냈다.
메모리 스틱 형식으로 제작된 주식이다.
받아서 살펴봤는데 놀랍게도 '모나크루 도크 스테이션'의 것이었다.
"5%야. 직책도 몇 자리 줄게. 감사팀과 인사팀이면 되려나?"
"이걸 준비했다고? 어떻게?"
"내 개인적으로 했다고 알면 돼. 대신 교환 지분은 내 개인의 것으로. 알겠지?"
넘기겠다던 기술 건도 대단하긴 했다.
하지만 이번에 내민 카드는 급이 다르다.
모나크루 도크 스테이션[Monarcrew Dock Station]
모나크 가문의 모체인 기업이다.
우주 항공 부문에서 산업 전반에 끼치는 영향력은 물론 거느리고 있는 종업원 또한 어마어마하다.
또한, 가장 중요시하는 우주선 제작 도크에 관여할 수 있다.
이 기업의 지분은 전량 모나크 본가의 혈족과 인류연합 관련 부서에서만 소유하며 다른 곳에서 거래되지 않는다.
즉, 내가 이것을 받으면 본가의 혈족으로 인정된다는 것.
'나한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만.'
나파엘은 모나크루 도크 스테이션의 주식 5%를 살몬 연구소의 지분과 동등한 수준에서 교환 조건을 제시했다.
아무리 살몬 연구소가 높은 가능성을 보유했다고 해도, 믿을 수 없을 만큼 파격적인 제의다.
다른 사람들이 알면 미쳤다고 하지 않을까.
옆의 올란드 또한 나파엘을 보며 이례적으로 눈꺼풀을 꿈틀거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모르는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미친놈. 진심이냐?"
"아니, 난 정상인데?"
미친놈이 자기 미쳤다고 하는 거 봤나.
"콜."
"역시 내 형이야. 계약서부터 작성할까?"
"놓고 가라. 검토해서 보내주마."
"좋아. 공적인 일은 이제 끝. 아카데미 얘기 좀 들려주지 않을래? 사실 나도 여기에 들어오고 싶었거든."
"행여나 그러겠다."
"왜? 초인 좋잖아?"
초인은 분명 인류 연합에 있어서 부정할 수 없는 영웅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봐야 한다.
초인이란 직업은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히는 신세와 같다.
평생 전역도 못하고 전쟁터에 끌려 다녀야 하는데 나파엘 같은 놈에게 메리트가 있을까.
'그래서 부러 능력을 감추는 이들도 많지. 그놈처럼.'
현재 아카데미에는 없는 기적의 세대 마지막 1인이 떠오른다.
그놈도 언젠가는 만나게 될 것이다.
"나파엘."
"드디어 내 이름을 불러주는 거야?"
"흰소리 말고. 넌 가주가 될 거라고 했지?"
"당연하지. 그건 내 자리니까."
"기왕 될 거며 서둘러라."
"응? 어째서?"
내 말이 조금 뜬금없었는지 나파엘이 살짝 놀란 눈으로 반문했다.
# 24
전조.
"시킬 일이 있어서."
"그게 뭔데. 지금 말해주면 안 돼?"
"나중에 말해줄게. 모나크 가문에게도 그리 해가 될 내용은 아니야. 오히려 잘 이용하면 크게 도움이 되겠지."
"뭔가 있구나."
재정적으론 피해를 볼지는 몰라도 말이야.
나는 나파엘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입을 다물었다.
"좋아. 뭐가 됐든 손해만 볼 것 같지는 않네."
나파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씩 웃었다.
'가주가 될 정도면…도움이 되겠지.'
어쨌든 나파엘은 지금 내 편에 섰다.
뭘 생각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상관없다.
비즈니스 관계라고는 하지만 이 정도 배팅을 보여주는데 손잡지 않을 이유가 없다.
'지금 상황만 보면 내가 로또 맞은 거지. …아니. 슈퍼볼이라고 해야 하나?'
차후엔 관계를 역전시킬 자신이 있지만, 지금 당장은 그렇다.
지분을 넘기는 것에 대한 세부 합의는 실무진과 했다.
모나크 가문이 가지고 있는 군사 무기 기술 같은 경우에는 나와의 개인적인 거래가 아니기 때문에 15%만큼 증자를 해서 주는 방식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난 후, 내 지분 5%를 모나크루 도크 스테이션의 지분과 1:1로 맞바꾸었다.
그렇게 하자 나, 모나크 가문, 모하임 왕가, 교장, 그 외 순으로 지분율이 정리되었다.
'내 지분률이 60%가 조금 넘네.'
아직도 과반을 넘는다.
솔직히 내 지분은 여기서 반 이상 더 줄어들어도 상관없다.
내 목적은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살몬 연구소의 가치는 내 지식으로부터 비롯된다.
막말로 내가 살몬 연구소와 결별하면 어떻게 될까.
지금 당장은 잘나갈지 몰라도 새로운 기술 개발에 있어선 큰 난항에 빠지고 말 것이다.
결국, 지분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도 내 몫을 좀 더 챙겨야겠지.'
연구소는 연구소.
내 지식과 연구소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내 지식을 근거로 개발되는 기술에 대한 로열티를 받아내야겠다.
나는 이 문제를 사힘과 거론하기로 하고 올란드와 나파엘을 배웅했다.
"잘 있어, 형. 또 대활약해서 난리 나면 놀러올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몸조심 하거라."
"네. 어머니."
두 사람이 떠났다.
시간이 또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
학기가 시작된 게 어제 같은데 벌써 반이 더 흘렀다.
이대로 두 달만 있으면 기말고사를 치르고 2년차 생도가 된다.
갈수록 시간의 흐름이 빠르게 느껴지는 것은 내가 원작 세계의 삶에 익숙해져서가 아닐까.
나는 그럴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 조급함이 솟구치려는 것을 억눌렀다.
'지금이 최선이다.'
나 자신을 다독인다.
하루 2시간의 수면 외에는 무언가를 익히고 배우는데 주력한다.
피곤에 곯아떨어지지 않는 날이 없었고 맘껏 쉬어 본 기억도 없었다.
그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
그랬음에도.
[속보! 아틀란스 4차 방위 라인이 무너지다.]
심장이 덜컥 멈춰버리는 것 같은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뭐야. 거짓말이지?"
"3개 함대가 전멸했다고?"
"아틀란스 행성이...."
시작됐다.
지난 번, 4차 방위라인의 일각을 이루는 후른샤이아 행성에서 새로운 개체인 랜드 크라울러를 조기에 퇴치하며 미뤄졌던 일이 다시 진행되고야 말았다.
혹시나 하긴 했다.
후른샤이아 행성을 지켰으니 4차 방위라인이 뚫리지 않거나 더 미뤄지진 않았을까 하고.
하지만 내가 지켜낸 것은 고작 한 달 남짓의 평화에 불과했다.
"레몬, 레몬? 레몬 괜찮아?"
"...어, 응."
너무 정신이 팔려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우리가 식사 중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이미 지원 함대가 이동 중이었어. 구멍 하나쯤은 어떻게든 막아내겠지."
"그래. 일단 밥부터 먹어. 오늘 점심은 네가 좋아하는 카레라이스잖아?"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식사를 다시 시작했다.
4차 방위 라인이 뚫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긴 해도, 이전부터 가능성이 무수히 재기되던 중에 있었다.
지원 함대의 구성도 이를 막기 위함이었고.
일행들의 말처럼 4차 방위 라인은 원작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시 형성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것은 속사정에 있었다.
방위 라인은 일종의 벽.
한 군데가 뚫렸더라도 일단 들어온 오염원은 벽 내부의 어느 곳이든 돌아다닐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해서 퍼진 오염원은 미래에 있을 재앙의 씨앗이 될 것이고.
문제는 지금 당장 내가 어떻게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아직 생도인 내 신분으로는 어떠한 군사적 조치도 이끌어내기 어려웠다.
'애초에 준비한다고 다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언제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1년 내내 대 우주 방어망을 가동하고 있으라고 하면 누가 따라줄까.
그래서 포기다.
일단, 난리가 나는 행성 중 내가 이름을 기억하는 행성 위주로 준비 해볼 셈이었다.
"어? 레몬 더 안 먹어?"
"미안. 오늘은 먼저 들어가 볼게. 사힘도 저녁에 보자."
"그러지."
걱정스러워 하는 얼굴들을 뒤로하고 식당을 빠져나갔다.
내 생각 같아서는 당장 아카데미를 떠나 움직이고 싶었으나, 그건 불가능하다.
'어디보자. 내가 쓸 수 있는 금액이....'
아직 여유가 부족하다.
며칠 전, 폰타나 운테에게서 도입 허가가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려왔다.
이미 성공을 확신한 터라 생산 시설을 확충 중에 있었지만, 아직은 돈이 계속 들어가는 단계.
'부족한대로 쓸 수밖에.'
숙소에 도착해 책장을 장식하고 있는 산티나우의 심장을 살폈다.
갑자기 사정이 넉넉해지며 팔 이유가 없어진 상태라 놔두었지만, 이것도 조만간 팔아치워야 할 듯하다.
한동안 바쁘게 연락을 돌렸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조치를 한 후, 침상에 걸터앉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척을 하긴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이게 전부.
이제는 앉아서 조급함을 가라앉히는 게 일이다.
그리고 이럴 때 내가 하는 일은 항상 비슷하다.
'어디 한 번 볼까.'
이능을 발휘해 스스로에게 접속했다.
속도가 빨라져서 과정은 단 몇 분 만에 완료되었다.
이 행위 자체가 무투가로서 나 자신을 이해하고 육체를 제어하는 데 큰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열심히 한 덕도 크다.
-역반응성 외피[7/192]
-끈끈한 다리 힘줄[4/23]
-두터운 뒤꿈치[2/14]
-강인한 손목
-깊은 허파
-극 반응성 신경
-바람 안테나
-급격한 세포분열
여태까지 에일리언에게서 얻은 특성의 목록이다.
마지막에 얻었던 투구 멧돼지 이후로 새로운 개체를 만나 볼 수가 없어서, 새로운 특성의 획득은 미뤄지고 있었다.
직원의 말대로라면 교장이 힘을 써서 다음 주쯤 위험 2급의 종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데 그때가 돼 봐야 확실해질 것이다.
그렇다고 얻은 게 아예 없느냐?
그건 아니다.
경험이 축적되어가면서 알 수 있었다.
같은 개체라고 항상 같은 정보를 함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활동하고 있는 지형과 환경에 맞춰 개체마다 갖고 있는 특성이 다르며, 오래 활동한 개체의 경우 자체 진화를 통해서 우수한 특질을 갖춘 경우도 있었다.
이걸 통해 이미 적용한 특성을 개선하고 일부는 성능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잘 하면 괜찮은 특성을 얻을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안타깝게도 완성된 정보를 뽑아낼 수 없었기에 새로운 특성을 뽑아내진 못했다.
가능성을 봤을 뿐이다.
특성 확인을 끝내곤 몸 상태를 조율했다.
로제를 통해서 배운 육체 제어와, 특성 적용을 할 때의 느낌을 살렸다.
이걸 이용하니 단순히 관리를 뛰어넘어 몸을 단련 할 수 있었다.
'아직은 효율이 낮지만....'
직접 몸을 움직이는 것에 비해서 별로 나을 게 없다.
조금 더 능숙해져야 쓸 만해질 것이다.
대신 일반적으로 단련 가능한 근육이나 신체 부위를 넘어, 내장기관을 비롯해 잘 쓰지 않는 근육까지 골고루 단련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메리트였다.
이걸 시작한 것도 벌써 한 달.
로제에게 육체의 벨런스가 전보다 많이 향상됐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이걸 마음속에 그리는대로 몸을 가꾼다는 뜻으로 심상단련[心象鍛鍊]이라 부르고 있다.
심상단련을 마지막으로 자가몰입 상태에서 깨어났다.
한 차례 땀을 뺐더니 마음이 가라앉는다.
아까 봤던 속보의 내용도 담담하게 다가왔다.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하면 돼.'
급하게 한다고 더 잘할 수 있는 건 없다.
천천히 가는 지금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렇게 마음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계획했던 일과를 시작할 시간이다.
그때, 벨이 울렸다.
"...누구?"
"나야, 나! 레몬."
"로제? …바튼이랑 메르디도 있네?"
문을 열었다.
무언가를 잔뜩 들고 있는 로제가 들어오라고 말하기도 전에 먼저 입장했고 뒤를 이어 바튼과 메르디도 뭔가를 하나씩 들고 왔다.
보니까 다 먹거리다.
나는 메르디가 억지로 넘겨주는 음료를 받으며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과자 파티하자. 과자 파티!"
로제가 신나하는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갑자기?"
"가끔 이래도 좋잖아?"
"로제의 말이 맞다. 레몬.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그렇게 하다가는 언젠가 쓰러질 거다. 쉬는 것도 중요해."
"얼음땡이가 맞는 말 하네."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난 괜찮은데."
"아, 맞아. 여기 재료도 사왔어. 레몬이 저번에 해준 그…그게 뭐였지? 검은 걸로 말아서 한 거."
"김밥?"
"그래 그거! 나 김밥 만들어 주면 안 될까?"
재료를 잔뜩 사들고 와서 물어보면 어떻게 거절하겠니.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알았어. 거기 앉아서 편히 있어. 금방 해줄게. 메르디는 오뎅 많이 들어간 걸 좋아했지?"
"...무슨 소리야."
"난 뭐든 잘 먹는다. 그리고 나중에 사힘과 류청도 오기로 했다. 몇 명 더 데려올지도 모른다더군."
"그럼 하는 김에 많이 만들어 놔야겠네."
"내가 먹을 거 더 사오라고 연락할게!"
졸지에 숙소에서 파티가 열리게 생겼다.
나는 불만이 그득한 눈빛을 쏴대며 변개를 튕겨대는 메르디를 의식적으로 무시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갑작스럽긴 하지만, 이렇게 시끄러운 분위기도 나쁘지 않다.
"술 마실 사람!"
이 날은 다르모사가 아카데미에 다녀간 이후, 처음으로 쉬는 날이었다.
*
하루를 쉬고 난 후, 새로운 아침은 난장판 위에서 시작됐다.
밤새 먹고 떠들던 방은 이미 초토화 된 상황.
COH 아카데미의 생도인 만큼 다들 힘이 넘쳐서 그런지 남아나는 게 없다.
술도 그렇게 많이 마셨으면서 모두 멀쩡한 걸음으로 숙소를 찾아갔지.
난 냉장고를 열었다가 싹 비워진 걸 확인하곤 가만히 문을 닫았다.
'먹을 건 물 뿐인가....'
어차피 하도 먹어서 아침은 별 생각이 없었다.
대신 하우스 클리닝 서비스를 신청한 후 씻고 숙소를 나섰다.
웃고 떠들면서 생각났다.
아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아 조금은 더 힘써 볼 생각이다.
'조금 동떨어진 이야기긴 하지만, 일단 시도는 해봐야지.'
나는 RTA 전술학 프로그램을 찾아 전술 테이블을 펼쳤다.
어느 사이엔가 위관[尉官] 급에 다다른 지휘관 레벨이 눈에 띈다.
그것도 경험치가 한계에 가깝게 찬 소위다.
일단 전술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번에 쓸 전술 보고서는 내가 그동안 써왔던 것과는 다르게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떻게 보면 소설.
하지만 이렇게밖에 쓸 수 없다.
4차 방위 라인이 잠깐 뚫린 걸 가지고 앞으로 일어날 어마 무시한 사건을 엄중히 경고하는 전술 보고서를 쓰다니.
내가 이 세계의 원작자이고 미래를 알고 있다고 할 수도 없다.
여태까지 보고되지 않은, 에일리언이 보여줄 전혀 새로운 형태의 위협에 대해 쓰는 것이니 근거도 없다.
말 그대로 소설이다.
'그래도 내 말이 가장 먹힐 라인은 이것밖에 없지.'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난 상당히 주목받는 중이다.
초인으로서 지휘관의 역량까지 출중한 인재는 흔하지 않다.
게다가 내가 제출하는 전술 보고서는 상당히 많은 군 관계가자 관심을 갖고 검토할 정도이며 후른샤이아의 일 이후에도 몇 번이나 내 전술이 채택, 시행되었다.
'딱 한 명만 믿어도 돼. 되도록 높은 계급이면 더 좋고.'
통하면 좋고, 안 통하면 어쩔 수 없다.
나중에 이걸 어떻게 예측했냐고 물어보면 좀 난감해지긴 하겠지만, 있는 그대로 적은 것도 아니다.
최대한 이런 식의 위험이 있지 않겠냐는 것처럼 '있어 보이게' 의견을 개제한 것일 뿐이니까.
'여기까지 했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나는 전술 보고서를 제출하고 프로그램을 종료했다.
그리고 오전 수업 시간에 늦었다는 것을 알고 서둘러 움직였다.
'다음 수업이…무중력 상태 적응 훈련이었나.'
아카데미의 수업 중, 아카데미에서 가장 많이 벗어나서 이루어지는 수업이다.
대형 셔틀을 이용해 우주 공간으로 이동해야 해서 일반 수업보다 일찍 시작한다.
# 25
"지각이네."
"죄송합니다."
"상관없어. 늦어도 버리고 가면 그만이거든."
선생이 쿨하게 대답하며 셔틀의 문을 닫았다.
셔틀 안에는 100명에 가까운 생도가 이미 훈련용 아머를 착용하고 수업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나도 내 자리를 찾아 준비된 아머를 착용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잘 만들었네.'
훈련용 아머 슈트라고 허접하지 않다.
오히려 어지간한 군용보다 뛰어나다.
디자인 또한 대충 만들지 않고 날렵하고 맵시 있게 생겼다.
입은 상태를 보면 꼭, 슈X맨에 나오는 크X톤 행성의 외계인들이 착용하는 모습과 비슷해 보인다.
'불편해.'
입자마자 감각이 무뎌졌다.
답답함마저 느낄 지경.
내 감각의 반 이상은 갈퀴의 특성인 '바람 안테나'에서 온다.
일전 바튼이 해준 말이 이런 아머류를 입을 때마다 다시 떠오른다.
'그래도 입어야지.'
여긴 우주 공간이다.
이 잔혹한 진공의 공간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으면 아머 슈트는 필수일 수밖에 없다.
차후, 3년차 생도가 되면 지급받게 될 코어 웨폰이 너무나 기다려진다.
"다 왔다. 모두 자기 물건을 가지고 내려라."
목적지에는 금방 도달했다.
테라 행성의 인력이 있기에 완전한 무중력은 아니지만, 그 정도는 수업을 진행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우주 공간으로 쏟아져 내린 생도들이 추진기를 이용해 금방 자세를 잡았다.
이미 6번째 수업.
처음 경험했을 때의 어리버리한 모습은 이미 누구에게서도 보이지 않았다.
-자기 물건 하나 못 챙기는 멍청이는 더 이상 없길 바란다.
선생의 음성이 헤드 부분에 달린 통신기를 통해서 들려왔다.
매질이 없는 우주에서는 소리가 공기를 타고 전파되지 않기 때문에 음성 전달 방법을 전환한 것이다.
-오늘은 입체기동을 자율적으로 연습한 후, 간단한 짧은 실전 게임을 하나 할 것이다. 각자 자유롭게 시간 보낸 뒤 2시간 후에 이곳으로 집합할 수 있도록.
자율 연습이라.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번 수업을 같이 듣는 일행은 바튼 하나다.
나는 그와 개별 통신 채널을 연결했다.
"어떻게 할래?"
-일단 몸 좀 푸는 것이 어때?
"좋은 생각이야. 좌표는 내가 찍어줄게."
훈련용 아머 슈트는 적응하기 꽤 까다로운 편이다.
약속된 인체의 움직임을 토대로 추력의 방향이나 세기 등이 결정되는데, 이것을 미세 조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점도 있다.
적정 이상의 숙련도만 쌓는다면 우주 공간을 마치 자신의 집처럼 누빌 수 있게 된다.
"시작한다."
-준비됐다.
그리고 이걸 숙련시키는데 가장 좋은 훈련은 '대쉬'다.
대쉬는 가상 좌표를 출력해서 목적지까지 향하는 모든 체크 포인트를 최대한 빠른 속도로 찍고 골인하는 훈련이다.
숙련될수록 중간의 체크 포인트의 수가 많아지고, 일반적인 숙련도로는 할 수 없는 고급 기동을 요구하기도 한다.
-3, 2, 1 GO!
시작과 동시에 고글 위로 체크 포인트가 빼곡히 표시되었다.
레벨 10.
고급자 레벨이다.
고급자 레벨이 되니 체크 포인트가 정신없을 정도로 많이 찍혀있다.
첫 체크포인트의 방향은 바로 아래쪽.
나는 파악한 즉시 몸을 뒤집어 기동을 시작했다.
-Win +1Point!
스타팅은 내가 빨랐다.
하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다.
바튼의 아머 슈트 기동은 나와 거의 차이나지 않는다.
-Lose –1Point!
얼마 못 가 점수를 잃었다.
찍은 체크 포인트의 개수는 내가 앞서고 있었지만, 바튼은 보너스 기동까지 성공시키며 점수를 가져갔다.
이건 무시할 수 없다.
이렇게 하나씩 차이가 나기 시작하면 어지간히 앞서지 않는 한, 내가 골 포인트를 먼저 획득한다고 해도 질 것이다.
'그럴 순 없지.'
벌써 밀릴 순 없다.
나도 조금 무리하기로 했다.
새로운 체크포인트를 찍자마자 주어진 경로를 약간 벗어났다.
급격한 방향전환을 요구하는 이번 기동에 연속해서 성공하면 단번에 다량의 점수를 획득할 수 있다.
-Win +3Point!
-Lose –1Point!
성공이다.
아슬아슬한 차이로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이대로 위너의 자리를 계속 차지했으면 좋으련만.
-Lose -1Point!
-Lose -1Point!
트랙을 반 쯤 돈 상황에서 불행히도 바튼이 반칙을 시작했다.
"또 그러기야?!"
-주어진 능력은 쓰라고 있는 거다.
바튼은 이 공허한 우주공간에 있을 리 없는 디딤대를 만들어냈다.
그의 이능으로 만든 냉기 수정이다.
그는 이 냉기 수정을 널찍한 판 모양으로 조형한 후, 움직여서 아머 슈트만으로는 불가능한 기동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물기 하나 없는 우주공간임에도 말이다.
어지간한 물리법칙은 가볍게 무시해 주는 이능의 사기성은, 그런 제약 따윈 가볍게 무시해줬다.
-Lose -1Point!
-Win +1Point!
어차피 저걸 쓸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비록, 육체적 능력조차 나에 비해 뒤지지 않는 바튼이지만, 엄연한 주 능력은 이능이다.
더구나 바튼은 냉철한 승부사.
이길 수 있는 수단은 망설이지 않고 쓰며, 주어진 승리를 놓칠 사람이 아니다.
-Lose –3Point!
-Winner Racer Change!
결국 점수가 뒤집어졌다.
보너스 체크 포인트를 연속으로 잡은 바튼에게 밀린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남은 것은 목표 지점에 먼저 골인하는 것뿐이다.
나는 한층 속도를 끌어올렸다.
전체 체크 포인트를 눈에 담고 최단 거리를 머릿속에 그렸다.
-Win +1Point!
-Lose –3Point!
-Win +1Point!
보너스 체크 포인트에 대한 생각을 모조리 비우자 돌파 속도가 조금 늘어났다.
훈련용 아머 슈트의 출력이 최대치에서 줄어들 시간이 없는 기동이다.
그렇게 먼저 목표 지점 앞에 펼쳐진 난이도 상승 구간에 접어들었다.
'앞으로 조금!'
난이도 상승 구간에서는 새로운 시스템이 추가된다.
적의 공격을 가정한 위협 공간을 표시하는 레드 존인데, 이곳에 닿으면 무조건 게임 오버다.
게다가 무작위로 나타나기 때문에 피하기 위해선 지금부터 속도를 줄여야 한다.
이때 잘못해버리면 최적의 경로에서 크게 벗어나버리는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뒤가 없을 정도의 기동은 시도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대로 돌파한다.'
나는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렇게라도 안 하면 이기지 못한다.
실전에서는 결코 하지 않을 결정을 훈련이라는 이유 아래 마음껏 시도했다.
-Win +1Point!
-Lose –1Point!
골인 지점이 가까워진다.
이능을 발휘한 바튼은 나 이상의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위험 수준까지 점수 차이가 벌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후발 주자와의 거리 차이로 인한 골 포인트로 승리를 점칠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상황은 마음먹은 대로 따라주지 않는다.
"으앗!"
골 포인트 바로 앞에서 갑자기 레드 존이 전면을 덮고 밀려왔다.
가까스로 레드 존에 맞닿지는 않았으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설상가상으로 다가오는 레드 존을 피해서 뒤로 후퇴해 멀리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Lose –1Point!
-Lose –1Point!
-First Goal! +13Point!
-Winner Racer Change!
골 득점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점수가 앞섰지만, 좋아할 게 못 된다.
예상대로 뒤따라 골 포인트를 찍은 바튼에 의해 승자가 다시 뒤바뀌었다.
"아, 결국 졌네. 그거 너무 치사한 거 아냐?"
-최소한으로 썼다.
"그래, 너 잘났다."
내가 바라보자 바튼이 얼굴을 슬쩍 돌린다.
저놈의 이능 때문에 내가 이긴 적이 몇 번 안 된다.
그것도 아머 슈트 기동을 배운 초기에만 몇 번, 최근에는 없었다.
나는 스스로가 무투파임을 탓하며 억울함을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한 판 더해. 이번엔 이능 없이."
-생각해 보겠다.
"레벨 13으로 올려서 이번엔 고 난이도 기동전으로 하자."
-13레벨? 난이도를 크게 올리는 것에는 찬성한다. 하지만 그전에 연습 모드로 한 번 익숙지 않은 기동을 체크해 보는 편이 나을 것 같군.
"좋아."
13레벨은 너무 크게 지른 감이 있다.
바튼의 제안에 따라 일단 새로운 기동부터 연습에 들어갔다.
변형으로 쓰이는 '베럴 롤'과 '코브라 기동'을 시작으로 갖가지 기동을 연습해 볼 수 있었다.
대쉬에선 매번 내가 졌지만, 그래도 재밌기는 했다.
그렇게 2시간을 보내고 나자 집합 시간이 다가왔다.
-진행할 게임은 대항전이다.
선생이 생도들을 모아두고 룰을 설명했다.
생도를 모두 10팀으로 나눠 제공된 공간에서 싸우는 형식이다.
이능의 사용도 가능하며, 개인 화기로는 에너지 건과 단방향 충격 폭탄 지급된다.
여기에 팀마다 5개의 베리어 발생기가 추가로 지급되었다.
"그래도 무투파가 불리한데."
-같은 팀을 하도록 하자.
"그럼 나야 좋지. 그런데 팀 편성은 무작위로 이뤄질 것 같아?"
내 예상이 맞았다.
팀은 이능 능력자를 비율에 맞춰 나눈 후, 무작위로 짜였다.
나는 탈락자 보호를 위한 장비인 비상 베리어 발생 장치를 장착했다.
팀마다 주어진 일반 베리어 발생 장치와는 다른 것이다.
이건 주로 훈련용 아머 슈트가 위험 수준 이상으로 파괴되었을 때 자동 발동되도록 설계되며 작동 시 빨간색으로 빛나 탈락자를 표시한다.
또한 일반용에 비해 출력이 10배 이상 강한데, 그 이유는 훈련 간 사망 사고를 막기 위해서다.
그렇다.
사망 사고다.
'그래도 사고사는 계속 일어나지만....'
최대한 실전적으로 수업을 진행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생기는 피해다.
굉장히 고 성능을 자랑하는 비상 베리어를 씀에도 불구하고, 생도들의 능력이 출중해서 모든 피해를 막을 수는 없었다.
메르디의 경우, 이미 사망자는 물론 중상자를 '다수' 만들어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런 훈련에는 참가 자체가 제한되어 있었다.
'그 성질에 실전적인 훈련은 말이 안 되지.'
이런 보호 장비 강화에 공을 들인 교장의 노력에 의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사망사고는 크게 줄어드는 실정.
하지만 아무리 고 성능이라고 해도 소형 장치로 메르디의 이능을 막아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에 반해서 바튼의 이능 제어는 누구도 따라갈 수 없지.'
메르디와 바튼은 정 반대의 타입이다.
메르디가 무지막지한 이능을 쏟아 붓는 다면, 바튼은 섬세한 제어로 자신의 이능을 컨트롤해 적재적소에 써먹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튼의 이능이 메르디에 비해서 그리 달리는 편도 아니다.
그도 역시 무지막지하다는 표현이 들어맞을 정도의 이능 소유자.
자신이 제어할 수 있을 정도만 보여주어서 그렇지 마음껏 쏟아낼 경우, 메르디와 같은 수준의 재앙을 만들어낼 수 있는 괴물이다.
-결국 다른 편이군.
"살살 부탁해."
-생각해 보겠다.
결국 바튼과는 떨어져 다른 생도 8명과 한 팀을 이뤘다.
2학기도 반 이상 지나간 지금, 웬만큼 아는 얼굴들.
-지휘관은 레오나르드가 맡는 편이 좋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무도 불만이 없을 거라고 봐.
모두가 날 좋아하진 않는다.
솔직히 친화력이 좋은 일부를 제외하곤 맨둥맨둥한 사이에 불과하다.
그래도 내 RTA 전술학 성적에 대한 것은 너무 잘 알려진 사실이기에 팀 지휘관으로 선출되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잠깐이지만 잘 부탁해."
-우리도 잘 부탁해요, 대장.
바로 옆까지 다가온 생도가 수줍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꽤 익숙한 얼굴.
'윤 지혜'다.
생긴 것도 딱 한국적이며, 검은 단발에 고른 이목구비를 가진 얼굴.
볼 살이 통통하고 생도치고는 키가 약간 작은 편이라 귀여움이 돋보이는 여성이기도 했다.
특히, 흔치 않은 한국식 이름을 가진 생도이며 원작에도 등장해서 중요시 여기는 인물 중 하나다.
"일단 세트장으로 이동하자."
대항전을 위해서 마련된 세트장으로 향했다.
세트장은 파괴된 전함의 잔해가 어지러이 떠다니는 공간이었는데, 듣기론 실제 폐기되려는 전함을 가져다 꾸몄다고 들었다.
# 26
'돈도 많아.'
아무리 폐기되려던 전함이라지만 스케일이 크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전함에 들어가는 자재는 모두 비싸다.
분해해서 나오는 자재 값만 해도 같은 크기의 일반 우주선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여기가 우리 본진인 모양이야."
-어떻게 할까?
"잠깐. 생각 좀 해볼게."
대항전은 한 팀만 남거나 1시간 후 수업이 종료되는 시간이 될 경우에만 끝난다.
유일한 룰은 비상 베리어 발생 장치가 작동된 생도에게는 절대 공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이걸 어기면 경고 조치도 없이 아주 심한 패널티를 받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일단 수성부터 하자. 이쪽은 장애물이 많아서 방어에 꽤 유리한 곳이네. 스타팅이 좋아."
내가 노리는 건 생존이다.
애초에 바튼은 혼자서 팀을 먹어도 모든 생도를 씹어 먹을 수 있는 반칙 캐릭터.
그런 사기캐와 다른 팀이 된 이상 서든데스로 가서는 가망이 없었다.
바튼도 위험상황이 닥치지 않는 이상 자신의 이능을 최대한 절재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생존을 목표로 한다면 가망성이 있다.
-수성? 1시간 짜리 대항전에서 수성을 해? 그렇게 해서 어떻게 포인트를 딸 거야?
팀원 중 하나가 불만을 터뜨렸다.
불만의 주인공은 꽤 성질이 급해 보이는 타입이었다.
임시로 주어진 직위라도 팀장은 팀장.
직위로 때려 누를 수도 있지만, 그건 하책이다.
어차피 대항전에서 주어진 직위는 일시적인 뿐.
괜히 적개심을 살 필요는 없다.
난 그의 이름과 성격 그리고 특징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네 이름이 로버트였지? 로버트 마르셀로."
-맞다.
"수성은 수성이지만, 단순한 수성은 아닐 거야. 그리고 다른 어떤 팀 못지않게 많은 포인트를 따게 해줄게. 어때?"
-어떻게?
"잠깐만 시간을 줘. 못하겠다 싶으면 언제든 팀장의 자리에서 물러날 테니까"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로버트가 고개를 끄덕이곤 물러났다.
"내 목표는 1등이야. 팀원을 최대한 많이 살려서 끝까지 살아남아보자고."
-좋아요. 대장.
-편히 지시해줘. 훈장까지 받은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한 번 맛보고 싶네.
단합력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주변을 살폈다.
시간관계상 대항전은 이미 시작된 상태다.
시야를 생각하면 막아야 할 공간은 크게 다섯 군데.
좀 많아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부담을 확 줄일 수 있기도 했다.
"로버트. 네 쪽에 있는 검은색 철판을 가져와서 저 부분에 붙여줘."
-이런 철판 쪼가리 정도야...어어?
"생각보다 무겁지? 그래도 네 이능이라면 문제없을 거야."
내가 가리킨 철판은 겉보기보다 아주 무겁다.
전함의 외벽 안쪽을 감싸는 자재로, 가공된 상태에서는 문제가 덜하지만, 일정 이상의 충격을 받으면 갑자기 부풀어 오른다.
이유는 전함에 균열이나 구멍이 뚫렸을 경우 이를 막기 위해서다.
더구나 지금은 부풀어 오르기 전의 상태이니, 밀도가 일반 강철에 비해서 6배가량 무겁다.
"잘했어. 이제 그걸 이쪽에 붙이고 있는 힘껏 때려."
여럿이 도와서 공사를 하고 나자, 마치 윗부분만 깨진 달걀과 같은 타원형의 쉘터가 만들어졌다.
-와.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했어?
-괜찮은데?
다행히 제작 중에는 다른 팀이 적극적으로 덤벼오지 않았다.
나는 다시 로버트를 불렀다.
"네가 해야 할 역할이 커."
-내가?"
"그래. 네가 바로 이 배의 조타수를 맡아줘야 해."
로버트의 이능인 염력은 아주 쓸모가 많다.
특히, 우주 공간과 같이 발을 받쳐줄 디딤판이 없는 공간에서는 더.
이유는 간단하다.
염력의 경우 그 반발력을 생각하지 않고 운동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다.
즉, 일종의 추진기 역할이 가능하다는 뜻인데, 이능의 수준이 받쳐주기만 하면 우리가 만든 이 달걀 모양의 잔해를 우주선처럼 쓸 수 있다.
로버트도 내 설명을 금방 알아들었다.
-이 정돈 문제없지. 방향만 알려주면 내가 잘 이끌어주겠다.
"좋았어. 다들 들었지? 우리는 지금부터 포인트를 노릴 거야. "
제작 중에 이미 주변 상황은 모두 눈에 담아두었다.
어느 곳이 만만한지는 모두 파악됐다는 소리다.
나는 아머 슈트의 매핑[Mapping] 기능을 이용해 적극적으로 지시를 내렸다.
첫 목표는 소수의 인원으로 우리는 견제하던 3팀.
견제를 위해서인지 3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좋아. 쏴!"
상대는 우리가 잔해를 둘둘 두르고 전진해 올지는 몰랐던지 허둥댔다.
그러다 집중 사격에 둘을 잃고는 남은 한 명이 혼자서 도망가기 시작했다.
"속도를 늦춰. 좀 더 천천히 따라가."
-왜?
"꼬리를 타고 올라가야지."
-아아.
이걸 만드느라 시간을 꽤 잡아먹었다.
겨우 2명은 도저히 성에 차질 않는다.
내 예상대로 혼자 남은 3팀의 생도는 우리를 자신의 본대에게 인도했다.
-한창 교전중인데?
-어떻게 할 거야?
"둘 다 잡아먹어야지."
도착한 지역엔 적군이 꽤 많았다.
곳곳에서 산발적인 교전이 벌어지며 혼잡한 양상을 이루는 상황.
'차려진 밥상을 무시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나는 로버트에게 잔해를 외곽 쪽으로 움직이게 했다.
다른 팀원들도 모두 잔해 뒤쪽에 숨도록 지시했다.
미리 보지 못한 사람의 경우 그냥 잔해 더미가 충격에 떠다니는 중이라고 여길 것이다.
작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성공했다.
"지금!"
반대 방향을 경계하며 뭉쳐있던 3팀이 사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이능이 꽤 강력한 걸로 기억하던 생도가 가장 먼저 집중 포화에 비상 베리어가 발동되며 탈락했고, 나머지도 아머 슈트가 엉망이 되었다.
"쫓아가!"
숨어도 소용이 없다.
우리는 잔해 체로 상대가 숨어 있는 작은 은신처를 들이박았다.
숨어 있다가 달려 나와 우리를 공격했지만, 이쪽은 너무 멀쩡한 상태인 데다 숫자도 많았다.
결국, 근접전까지 벌인 끝에 3팀을 전멸시킬 수 있었다.
"좀 더 외곽으로 돌자."
-이쪽이면 될까?
로버트가 좀 더 적극성을 내비쳤다.
전투를 하는 것이 아님에도 큰 기여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고무된 상태다.
다른 팀원도 그 점은 비슷했다.
탈락자 없이 빠른 속도로 포인트를 쌓아나가자 집중력이 높아졌다.
-문제는 에너지 건이네요. 충전량이 거의 다 떨어져가요.
"그건 걱정할 필요 없지 않을까? 저길 봐."
윤지혜가 내가 가리킨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탈락자들이 버린 에너지 건과 보급품이 넘쳐나고 있었다.
-아아. 다른 사람 물건을 써도 되는 거였죠!
"맞아. 그리고 지향성 폭탄도 가능한 한 전부 모아줄래."
-알았어요!
챙길 수 있는 건 모두 챙겼다.
그리고 계속해서 잔해를 움직여 다른 팀을 공략했다.
단순한 패턴임에도 딱히 적수가 있지는 않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전략이 탄로 나고 여러 팀들에게 집중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이쯤에서 뒤로 물러나자."
-뭐? 더 안 싸우고?
"너무 견제가 심해. 이대로는 집중 공격의 대상이 될 뿐이야."
너무 날뛰었다.
대항전이 끝나기까지는 이제 겨우 10분.
그동안 획득한 점수를 생각하면 1등은 따 놓은 당상이다.
우리는 잔해더미를 끌고 잠시 시선을 피해 외곽으로 이동해 갔다.
그런데 그때.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와아, 저게....
우주 공간에 눈꽃이 피어났다.
족히 수백 미터 떨어진 이곳에서도 거대해 보일 만큼 크고 아름다울 정도로.
"바튼이네."
아름다운 눈꽃은 실체까지 아름답진 않았다.
곳곳에서 보이는 비상 베리어의 빨간 불빛이 탈락자의 존재를 알려오고 있었다.
'저건....'
눈꽃은 시작이었다.
힘을 숨기고 있던 생도들이 자신의 이능을 마음껏 발휘했다.
눈꽃의 한 줄기를 단숨에 녹일 만큼 강력한 열을 방출하는 생도부터, 전차에서 쏴대는 것 같은 강력한 빔 공격을 하는 생도까지.
저곳은 진짜 상위권들의 각축장이다.
윤지혜가 그걸 보고는 다행이라는 듯 말했다.
-미리 빠지길 잘했네요.
"너도 저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저, 저요? 아니에요. 전 저런 사람들이랑은 못 싸워요….
얘도 지금까지 기회가 없어서 보여주지 못했을 뿐이지 1년차 생도 중 최상위권에 있는 이능 사용자다.
일종의 충격파를 생성하는 이능.
무척 위협적이며 살상력이 높다.
게다가 나중엔 이능 발현을 통해 대규모 지진까지 일으키는 능력자로 발전한다.
'접근전에서 특히 강하지.'
능력의 특성 상, 이능사용자임에도 근접전에도 강한 면모를 보여준다.
발생하는 충격파를 제대로 해소하지 못하면 몸이 붕괴해버리기 때문에 쉽사리 다가가지도 못한다.
싸우는 모습도 보면 생긴 것과 다르게 무척 파괴적이다.
"내 생각에 우리들 중 가장 큰 전력은 너야. 혹시나 하는 일이 생기면 잘 부탁할게."
-그렇게 말하셔도....
당장은 내성적으로 보여도 닥치면 잘 할 것이다.
우리는 앞의 싸움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지금 가서 껴 봤자 뒷북을 칠 뿐.
이대로 시간이 죽이며 기다려도 최소 2등은 따 놓은 당상이다.
'결착이 났나.'
예상대로 승자는 바튼의 팀이었다.
그는 주변을 빠르게 정리하고 마지막 생존자인 우리 팀을 향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팀원들을 바삐 움직여 대비를 끝마쳤다.
남은 시간은 겨우 5분 남짓.
"아아. 들리나?"
-레몬? 마지막 생존자가 너희 팀이었나 보군.
"맞아. 우승이 욕심나면 들어와 봐."
-지금 가지.
공용 채널로 바튼을 도말했다.
바튼 팀에서 살아남은 인원은 6명.
바튼을 필두로 해서 몰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로버트. 부탁해."
-내가 다 쓸어버릴 테니까 두고 보기나 하라고.
잔해를 이끌고 로버트가 앞서나갔다.
그를 제외한 우리 팀의 모든 인원은 흩어져서 주변의 잔해에 숨어있는 상황.
여태 우리들의 안전을 책임지던 잔해 더미를 희생양으로 내밀었다.
-덤벼라. 새끼들아!
로버트가 광역도발을 시전했다.
자신의 에너지 건만이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노획한 에너지 건을 모아, 염력을 이용해 한 번에 격발시켰다.
바튼이 냉기 수정을 변형시켜 투명한 방패로 만들어 밀고 들어왔다.
빔이 초당 수십 발 씩 꼽힘에도 방패에는 금하나 가질 않는다.
결국 접근한 바튼과 팀원들에 의해 잔해가 박살나고 말았다.
로버트는 그런 와중에도 항전했다.
우리 것까지 몽땅 털어서 준 베리어 발생기를 모두 소모할 때까지 분전하는 모습이 멋지다.
로버트는 아머 슈트가 반파될 때까지 염력을 발휘해 상대를 붙들었다.
그리고 그런 로버트를 잡기 위해 상대 팀이 정신이 팔렸을 때, 내 입이 열렸다.
"격발."
미리 심어 두었던 단방향 충격 폭탄이 일제히 폭발했다.
충격 방향은 지금 바튼의 팀이 모인 곳.
30개 이상의 폭탄이 집중된 폭발력은 정말 대단했다.
-해냈어!
로버트는 거의 거지꼴이 된 채로 우주 공간을 떠다녔다.
안타깝게도 훈련용 아머 슈트가 긴급 복구 모드가 된 터라 탈락자로 판명된 상황.
그래도 제역할은 다 했다.
이번 대항전에서 우리 팀이 1등을 하게 된다면 제일의 공훈자가 될 것이다.
그런데 옅은 연기가 겉이며 드러난 광경은 예상 외였다.
-이야, 질기네.
-저건 뭐야. 수정인가?
바튼의 팀원 5명은 모두 비상 베리어 발생기가 작동해서 자동으로 탈락처리가 되었다.
하지만 바튼은 청색 빛을 띠는 수정에 둘러싸인 채 살아남아 있었다.
"바튼. 살아 있어?"
내가 부르자 수정이 걷혔다.
아기처럼 양 팔로 다리를 감싸고 있던 바튼이 그 안에서 나왔다.
그런 다음 몸을 쭉 펴고 고개를 꺾으며 스트레칭을 했다.
-꽤 놀랐다. 답례를 해주지.
바튼이 손을 벌렸다.
냉기 수정이 손바닥 위에서 자라난다 싶더니 순식간에 거대해졌다.
그리고 거대해진 수정이 깨지면 수 천 개의 알갱이로 나뉘더니 하나하나가 모두 화살 모양으로 변해 우릴 겨냥했다.
"어...그걸 우리한테 쏠 생각은 아니지?"
-쏠 생각이다.
"정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그런데 못 할걸? 시간 오버다."
-…뭐?
바튼이 반문한 바로 다음 순간 대항전이 끝났다.
#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