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마나회로 재건
#108화.
적막한 침묵을 깬 이는 백면서생이었다.
"인형사가 원하는 자가 대체 누구이기에?"
그는 호리호리한 체격이나 인상과는 다르게 수시로 폐관에 드는 수련광이자 호승심이 충만한 전투광.
백면서생은 천하의 인형사가 로키를 벗어나 직접 움직인다는 얘기를 듣고는 크게 흥미가 동한 것이다.
꺄핫-
백면선생의 질문에 로라 마르티네즈는 가볍게 웃었다.
네임드 개체 '가륵' 의 혈액이 연방 내부에 퍼져있다는 충격적 사실보다, 뷔에탕이 관심을 보인다는 녀석을 더 궁금해하다니.
'이거 아무래도 우선순위가 좀 잘못된 것 아니야?'
하지만 다른 십이제들도 그걸 더 궁금해하는 눈치.
로라 마르티네즈는 원하는 전개까지 잘 끌어냈음에도, 어떻게 이리도 상식적인 인물이 없을까···하는 의문을 가지며 입을 열었다.
"수복전 마무리 연설에서 연방군을 씹었던 녀석이야."
"연방군을 왜?"
수복전이 진행되던 시점, 백면서생은 폐관에 든 상태였다.
그런데다가 그는 강자와 관련된 소식이 아니라면 전혀 관심을 두지 않거나 금방 잊어먹기 일쑤라, 이해한다는 듯한 얼굴의 장한이 대신 대답했다.
"마탑 소속의 젊은 마법사다. 라그나로크에서 9레벨급 네임드 '바만차' 를 잡았다고 세간에 소문이 자자했다. 수복전이 끝나고는 연방군을 지칭해 좆같은 땅깨라고 했지."
"9레벨급 네임드까지 잡았다? 전의 일이야 어찌 되었든 그 무서운 여인을 '아줌마' 라 부르고, 연방군을 싸잡아 욕까지 뱉었으며, 9레벨급 네임드를 토벌한 강자라는 소리 아닌가!"
백면서생의 안면에 들끓는 듯한 열기가 감돌더니, 곧 기분 좋은 감탄이 터져나왔다.
"세상을 오시할 강자가 탄생한 건가!"
동시에 하얗기만 했던 낯빛에 생기가 돈다.
백면서생은 강자와의 전투를 통해 희열을 느끼는 인물. 강하기만 하다면 언데드나 사람도 가리지 않는다. 저런 싸움 중독자는 어디가서 찾기도 힘들다.
자칫하면 뷔에탕보다도 일찍 녀석을 찾아가 전투를 신청할 분위기라, 로라 마르티네즈가 즉시 나서 찬물을 끼얹었다.
"그 정도는 아니고, 아직은 7레벨인데."
그러자 백면서생이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7레벨이 9레벨을 죽였다? 말 같지도 않다. 아무리 조력을 받았다 해도 그만한 격차라면 감히 숨조차 쉬지 못할 것인데?"
"응, 이해해. 그런데 사실인걸 어떡해."
로라 마르티네즈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마탑주의 조력을 듬뿍 받긴 했지만, 녀석은 분명 9레벨 네임드 바만차를 상대로 버텨내고 극한까지 몰아붙였다.
오색빛의 찬란한 검강이 세상에 뿌려졌다.
녹량백량의 에센스를 전부 태워가며 수준 이상의 잠력을 끌어냈다지만, 7레벨 주제에 그만한 잠력을 꺼내어 쓸 수 있다는 것부터가 비상식적인 영역.
'게다가 단전뿐 아니라 마나 회로까지 있고, 그걸 깨뜨려가며 싸웠다는 걸 알았을 때의 그 충격이란······.'
바만차는 당가 출신 변절자였던 녹량백량과 달리 인간 시절의 정보가 없는 개체였다.
짐작하기로, 대전쟁 이전 초창기에 감염되어 지금까지 살아온 개체일 것이다. 특별한 고유의 기술이 없더라도 긴 세월 쌓아온 방대한 양의 요기로 상대를 짓누르는 타입.
달리 말하면, 그 방대한 요기마저 버텨냈다는 뜻.
계속 말하면 끝도 없고, 아무튼 정말 미친놈이다.
동일한 조건이라면,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7레벨에 바만차급 괴물을 때려잡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다.
···그 믿기 힘든 장면을 눈앞에서 보았으니, 제자를 시켜주겠다는 말로 이례적인 호의를 표했던 것이고.
그러나.
"그래서, 7레벨인데 어쩌자는 거냐. 재능이 출중한 7레벨이니 인형사와 대신 싸워 구해주자는 뜻인가?"
"······."
저 시종일관 삐딱하게 굴어대는 남자처럼.
여기있는 이들은 호락호락한 자원봉사자가 아니다.
레반. 그 녀석을 직접 보았다면 자신처럼 생각이 달라지겠지만, 남궁세가의 일이 끝난뒤 수르트에 남은 거로 봐서 딱히 오딘 시티로 올 마음도 없어 보이고······참 걱정이네.
그렇게, 로라 마르티네즈가 속으로 한숨을 삼키던 도중.
"나는 인형사가 무슨 짓을 하든 신경쓰지 않겠다."
"······엥? 갑자기?"
조용히 고심하던 장한이 불현듯 말문을 열었다. 그 느닷없는 타이밍에 로라 마르티네즈가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고.
"왜?"
"잠재력이 대단하다고 쳐도, 그 잠재력이 만개할 때까지 세상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
허를 찌르는 장한의 한 마디가 돌아왔다.
여기있는 십이제 중 모르는 사람은 없다.
연방의 수명은 이미 한참 전부터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그리고 벼랑 끝까지 몰린 인류는 이번 라그나로크 시티를 시작으로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으니, 일곱 도시 안에서만 아웅다웅대던 이전과는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바뀌어갈 것이란 사실도.
그러니까, 즉시 전력감이 필요한 시기란 거다.
"라그나로크를 수복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네임드가 피를 뿌려댄다는 얘기가 들리는데, 바로잡을 기회가 있다면 조기에 바로잡는 게 낫다."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즉시 뷔에탕의 제안을 수락하고 대가로 가륵의 위치를 특정해 사냥하자는 장한의 말에 로라 마르티네즈가 곧장 날카롭게 물었다.
"그 이상한 년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어쩌려고?"
"안건에 올릴 정도의 약속을 어기면, 아무리 인형사라도 반드시 큰 손해를 본다는 걸 알고 있을 테지. 오랜 기간 십이제였으니."
등 뒤의 커다란 박도를 만지작대며 단언하는 장한.
외견으로 보자면 이곳에서 가장 앞뒤없이 달려들 것만 같으나, 그는 이성적인 판단에 근거해 신중히 움직이는 편이었다.
장한은 곧, 낮게 깔린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의 연방에는 미래의 유망주인 7레벨의 마법사보다 인형사의 힘이 더 필요하다."
인형사는 세뇌 혹은 저주 마법으로 인형을 만들어 강력한 전투원을 양산하는 강자.
그쪽 분야의 마법사는 연방에서도 지극히 귀할 뿐더러, 비록 악행으로 퇴출당했다 해도 '십이제' 라는 지위가 주는 무게감이 있다.
물론 7레벨도 낮은 경지는 아니나, 초월의 반열에 서있는 이들의 눈에는 연방군 병사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수준.
무엇보다.
현재에도 마피아 조직과 인형사가 자체적으로 사냥하는 시체와 에센스 수급량은 연방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마피아 조직은 연방과 기업들의 공적 취급을 받는다지만 점점 필요악이 되어가는 모양새.
"······으흠."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을 기점으로 이제 웅크려있던 연방이 기지개를 킨 상황에, 잠재력 있는 7레벨 하나 살려보자고 십이제들이 발벗고 나서 마피아의 보스를 죽이거나 내친다는 건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장한은 로라 마르티네즈의 반응이 좋지 못하자, 자신도 그다지 내키지 않는듯 말했다.
"어차피 인형사는 변절하지 않을 거다."
로라 마르티네즈가 볼멘 얼굴로 물었다.
"흐음, 그건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변절할 생각을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었다면, 마피아 토벌전때 변절하고도 남았을 여인이니까."
카스트라 뷔에탕.
그녀가 십이제에서 퇴출되고 벌써 20년이 넘게 지났다.
만약 오늘 일처럼 감정적이기만 한 인물이었으면 몇 차례에 걸친 대규모 마피아 토벌에 반항해 진작에 변절했을 거란 얘기다.
"또한, 욕정을 주체하지 못해 남자를 심히 밝힌다. 그런데 시체의 몸이 되면 그렇고 그런 일들을 할 수 없지 않은가."
"그건 그러네."
인형사, 카스트라 뷔에탕은 남자를 밝힌다.
이것은 뷔에탕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모두가 인정하는 얘기다. 초월적인 힘을 가지고 있어도 남자 없이는 하루도 살지 못하는 여인.
어마무시한 욕정만큼 성적인 부분에 크게 집착한다.
그런데 그 7레벨의 마탑 소속 마법사는, 여인의 여성성을 난도질하는 단어의 최고봉인 '아줌마' 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것은 여인을 여인으로 보는 게 아닌, 지형지물 수준으로 바꿔버리는 마법의 단어.
특히나 여성성에 집착하는 뷔에탕에게는 허투루 넘어갈 농담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자승자박이다. 애써 도와줄 이유가 없다."
그렇게 장한이 판단을 내린 다음 순간.
"7레벨과 가륵을 맞바꿀 수 있다면 남는 장사겠군."
"나는 그놈이 죽든 말든 상관없다. 마지막 안건까지 끝났나?"
백면서생과 남자도 장한과 비슷한 대답을 내놓았다.
인형사와 대적하면서까지 녀석을 보호해줘야 할 이유나 동기가 부족하고, 가륵의 위치를 특정해 처리하는 게 더 중요하단 판단을 내린것.
로라 마르티네즈는 그들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래서, 다들 좋은 의견은 없다 이거지~?"
"라그나로크에서 무얼 보았길래 자취를 감춘 신예에게 관심을 기울이는지는 확실히 궁금하군. 회의에 안건 상정까지 해가며."
"뭐, 말했던 대로 잠재력과 재능이 역대급이야. 지금 수르트 시티에 있긴 한데, 에이 아니다. 이제 말해봐야 뭐 해."
"······."
장한의 혼잣말에 로라 마르티네즈가 지나가는 말로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안건의 결론은 슬슬 정해진 것 같으니, 더이상 공들여 설득할 필요가 없기에.
다만 아쉬운 점이 남았다.
'흠, 남궁에서 바로 오딘으로 왔으면 설득할 수 있었을 텐데······분명 바만차의 에센스 절반을 그대로 주고 왔잖아. 시간도 많이 지났고. 그걸로 마나회로 구축을 해봤다면 분명히 놀라 자빠지고도 남았을 텐데? 아주 이상하단 말이지."
물론······
로라 마르티네즈조차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무려 9레벨급 네임드의 에센스는 당연하게도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사용해야 했겠지만—
시기상조라며 에센스를 아껴두다가 무력하게 당할 뻔한 사실에 화가 치민 레반은, 화끈하게 바만차의 에센스를 단전에 다 때려부어 초절정과 맞먹는 공력을 얻은 참이었으니.
집행관에게 차마 그런 정신나간 짓을 한 부분까지 세세하게 듣지는 못했으니, 그녀라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아무튼 좋아, 회의는 이쯤 하고 마무리하자."
십이제 여섯이 참여한 안건 회의가 진전없이 마무리된 뒤.
로라 마르티네즈와 연신 대립각을 세우던 남자가 자리에서 기상하며 냉소적인 말을 던졌다.
"재능이라, 이 자리에 재능 없는 사람도 있었나?"
"······하아, 좋게 마무리 하려 했더니."
남자의 뒤늦은 비아냥에 로라 마르티네즈 역시 냉담해졌다.
순간 오싹할 정도로 오만해진 로라 마르티네즈의 얼굴에서 형용할 수 없는 한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야, 뒷북 좀 치지 마. 너는 10년 내로 걔한테 따인다."
"그리 대단한 재능을 지녔다면 네가 인형사를 죽여 일을 막아라. 나는 시체를 사냥할 시간도 부족하니."
"참 나, 누가 보면 1억 마리는 죽인 줄 알겠네."
"인형사를 죽이는 건 힘들지. 연방군과 메가콥이 손잡고 몇 번이나 토벌에 나섰는데, 죽여봐야 인형이었다."
"?"
로라 마르티네즈가 남자와의 대화중에 갑자기 끼어든 백면선생을 바라봤다. 그래. 안건 회의에 참여한 이들 중, 그나마 설득해볼 여지가 있는 자다.
"어! 그러고 보니, 아까 진공 영감과 싸워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인형사도 강하니까 좋은 기회 아냐?"
하지만, 크게 관심을 보이던 전투광 백면서생마저도 그 말을 듣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귀찮은 일을 모두 떠맡길 셈이라면 사절하겠다."
"내가 떠맡은 변절자 색출도 충분히 귀찮고 좆같은 일이거든? 폐관하다가 이제야 기어나왔으면서."
로라 마르티네즈, 그녀는 수복전 이후부터 진공진인과 함께 연방 내의 변절자 색출을 맡았다. 워낙에 흘러 들어오는 정보량이 많아 일일이 확인하고 처리하려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카스트라 뷔에탕이라는 로키의 악녀가 검은손까지 드리우려한다. 내가 특별히 제자로 점찍어 놓은 놈인데! 내가 나설 시간도 없는데!
"하여간 도움이 못 되어 아쉽구만. 나중에 보자고 마녀."
머리를 휘휘 저은 백면서생이 싱긋 웃으며 떠났다.
이미 사라진 장한에 이어 백면서생까지 미련이 없다는 듯 떠나자, 빳빳한 의복을 정돈한 남자 역시 의뭉스러운 말만 남기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놈이 네 제자인지 아니면······정신을 옮겨갈 몸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신경이 쓰이면 자기 일은 스스로 하는게 어떤가."
"입좀 닥······아, 벌써 갔네."
남자가 사라지기 전에 욕을 완성하려 했으나 실패.
열 받은 얼굴의 로라 마르티네즈가 꺄하하- 광소한 뒤, 남자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걸걸한 욕설을 마구 뱉었다.
"야! 이 망할 새끼야! 너 오늘 몇 마리나 죽였는데 그렇게 잘난 척이야? 3천 마리? 5천 마리? 씨발, 못해도 200억 마리가 넘는데 1년에 백만 마리쯤 잡아봐야 그게 티나 나겠냐? 네가 앞으로 1년에 백만 마리씩 백 년을 더 죽여야 1억 마리야. 그거 잡아서 뭐할래! 199억 마리는 조상님이 잡아주냐! 숫자 계산 못해? 응? 그리고 내가 너보다 바쁘다고 씨발! 거 쓸데없는 짓이나 해대면서 존나 잘난 척하네 쓸모없는 새끼!"
* * *
"저리 관심받는 7레벨은 흔하지 않은데."
동상이몽.
십이제의 안건 회의에 참여했던 이들은 단호하게 거절했던 것과는 달리 마녀, 로라 마르티네즈가 말한 마법사에 대해 각자 다른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백면서생이 기지개를 켜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수르트 시티에 있다고 했나? 당장 얼굴부터 보러 가야겠군. 7레벨때 9레벨급을 잡았다라···과연 내게 무의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인재인가 한 번 확인해 주겠다.'
뒤이어, 가장 먼저 나갔던 장한이었다.
'인형사와는 엮이지 않는다. 다만 로라 마르티네즈가 저리 칭찬할 정도의 잠재력을 가진 이라면, 이른 시일 내에 봐두는 것도 좋겠군.'
이윽고, 장한의 다음은···
피가 덕지덕지 붙은 의복을 입은 남자였다. 그는 시체라면 눈이 돌아가는 사내로, 오늘만 해도 수천 마리의 시체를 죽이고 십이제의 안건 회의에 참여한 참이었다.
[ 쓸데없는 짓이나 해대면서 거 존나 잘난척하네 쓸모없는 새끼! ]
'······.'
그런데 쓸데없는 짓?
남자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었다.
세상에 자기만큼 시체 사냥에 혼을 쏟아붓는 이는 없으니.
그는 생각이 짧기로 유명한 마녀의 말을 한심하다는 듯 흘려 넘겼으나, 과연 누가 쓸데없는 짓을 하는지 똑똑히 보여줄 생각이었다.
'놈이 인형사에게 넘어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곧바로 가륵을 친다.'
누가 쓸모없는지는 그때 알게 되리라 생각하며.
······그리고 다시 오딘의 어느 테이블로 돌아와.
안건 회의 내내 입을 열지 않던 나머지 둘중 한 명.
십이제의 최상위권의 무력을 지닌 마법사.
카시오페아 파냐탈루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여기."
스아아—
파냐탈루의 손에서 피어난 마력이 저 멀리 떠나고 있는 백면서생과 장한, 남자의 모습을 그대로 재생해낸다. 그들의 위치는 달라도 현재 약속이나 한듯 오딘 스테이션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걸 확인한 로라 마르티네즈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미친년처럼 크게 웃었다.
"꺄하하하핫! 저거봐! 저거봐! 아닌 척하면서 움직일 놈들만 딱 불렀는데, 역시 생각대로 해주잖아? 아주 좋네~"
사실, 다른 십이제는 회의에 부르지도 않았다.
이 소식을 들으면 분명히 움직여줄 셋을 불러낸 거다.
수련이랑 싸움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놈, 신중하고 이성적인 만큼 제 눈으로 꼭 확인해야 믿는 놈, 조금만 자극하면 홀라당 넘어가서 불타는 놈.
뭐, 마지막 한 놈이 조금 문제긴 한데.
"······쟤는 지 혼자 헛짓거리나 좀 하다 말겠지. 암튼 좋아 좋아."
* * *
화산파.
그러니까 화산 그룹에는 무력을 담당하는 문파가 있고, 화산 그룹의 사업을 총괄하는 기업쪽이 있다.
양쪽 다 속해있는 경우도 있지만, 수련에 주력하고 싶다면 문파쪽으로. 무재가 부족하거나 기업의 일에 재능이 있다면 그룹쪽 일을 맡는 편이다.
이 천풍곡이 있는 기암괴석의 지대는 옛납루터 문파쪽의 문도들이 수련하고 기거하는 장소였다. 그룹일을 맡은 쪽은 따로 떨어져 수르트의 남경 신도심에 자리하고 있다.
— 수복전의 영웅이라고 들었네. 환영하네.
대 화산의 장문인 선천자(琁泉子).
그는 예상외로 나를 크게 반겨주어, 잠시 적응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선천자는 나를 보자마자 좋은 차를 내어주고는, 라그나로크 수복전에 참여했던 선운자 장로와 팔이 잘린 천무연의 얘기를 늘어놓았다.
대부분은 같이 싸워주어 고맙다는 식의 얘기였다.
'맞다. 12조장 천무연도 있었군······.'
하여튼, 화산의 장문인은 청풍이가 대체 무슨 얘기로 구워삶아 놓았는지 정말로 나를 귀중한 객 대하듯 했다. 생각해보면 객따위가 무슨 장문의 얼굴을 보겠는가. 특별 대우가 확실했다.
— 여기 형장은 남경의 무학관에서도 견식한 적 없는 오성을 지니고 있고, 제가 본 모든 검수중 가장 뛰어나다고 과히 자신할 수 있습니다.
— 허허, 그렇더냐.
청풍이 화산이 밀어주는 후기지수라는 말은 사실이다. 거리낌 없는 청풍의 말솜씨에도 장문은 그저 부둥부둥해주는 모양새였으니.
하기야 문파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다해도, 약관의 나이에 초절정을 찍은 천재중의 천재인데 무엇이 아까우랴.
그리고, 저게 벌써 나흘 전 일이다.
화산에서의 생활은 당연히도 편했다.
"흐음."
헌데, 화산에 온 지 나흘만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하나 생겼다.
나는 그동안 한쪽 팔이 날아간 천무연도 보고, 대련을 청하는 청풍이와 가끔 비무도 해주었다.
무공으로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이상 3위계의 마법은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았으나, 그래도 비무는 항상 아슬아슬하게 나의 승이었다.
그런데 천하의 기재이자 무림계 제일의 후기지수 청풍은, 성취와 배움이 극도로 빠르기에 나와의 비무에 며칠새 적응해버렸다. 해서 점점 무공으로만 꺾어내기가 버거워지고 있었다.
계속 이대로 가다간, 언젠가 밀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의 특 장기중 하나인 마법을 살려보기 위해 마나 회로 제작의 필요성을 조금씩 느끼고 있는 중이다.
무공으로 이룬 전생의 경지는 어느 정도 따라잡았고, 바만차의 에센스로 내공까지 든든하게 채워두었다. 단전에 이 정도쯤 기운이 들어차면 허접한 에센스를 먹어봐야 더이상 공력을 채울 수는 없다. 오히려 그런 허접한 기운은 방해만 되겠지.
"그러니 무공이나 내공 쪽은 이제 나중에 생각하고."
나는 화산에 편히 머무는 동안, 아직 성장의 여지가 크게 남아있는 마법쪽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마침, 나흘 전에 남궁세가의 재경각에서 얻어온 크레딧만 무려 1천만이 넘었다. 두당 떨어지는 거마비였는데 아힘사는 돈이 필요 없고, 루돌프놈 돈은 원래 내 것이니까.
게다가 상급 에센스도 꽤 가져왔다.
내가 남쪽 어머니의 에센스나 우르드, 바만차의 에센스같이 말도 안되는 귀물들만 자주 본 탓에 눈이 높아져 그렇지, 상급 에센스면 매우 귀한 축에 속하는 에센스.
···무림계의 한 축인 화산에서 마법에 집중하게 되어 조금 상황이 우습긴 하군.
꿀꺽-
나는 박살났던 네 번째 마나회로를 재건하고 그 다음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남궁에서 가져온 에센스를 들이키기 시작했다.
#109화. 흉흉한 소문
#109화.
나의 전생(前生).
검과 마법의 세계, 라아기스 대륙.
레반으로 생을 사는 지금과 가장 가까웠던 삶.
나는 그 세계에서 거대한 대륙을 지배하는 '제국' 그 바로 다음가는 성세를 구가했던 몰타왕국 마탑 소속이었으며.
꽤 늦은 나이에 마법사의 길에 입문했음에도, 성인이 되기 전에 상위의 경지로 분류되는 5위계를 일찌감치 달성했고.
몰타 왕국의 대마탑주가 백 년 가까이 수련해 6위계에서 7위계 사이인데 반해, 나는 스물에 벌써 6위계를 바라보는, 왕국의 촉망을 받아 장래가 유망했던 마법사······
아. 정확히 말하자면, 마검사나 마권사에 가까웠다.
[ 크, 크학! 마법사가 아니라 정체를 숨긴 기사였나······! 이제야 그 괴상하리만치 퍼졌던 명성이 이해되는구나! ]
[ 안 숨겼어 새끼야. ]
달려들던 기사의 판금 갑옷을 단순히 주먹으로 때려 구멍 뚫어버릴 정도였으니, 순수한 마법사라고 하기에는 양심이 없긴 했다.
나는 몰타 왕국 마탑에서의 교육 과정을 몇 년 만에 속성으로 끝내버리고, 곧바로 제국과의 전선으로 뛰어들어 마법과 전투 실력을 갈고닦았다.
그러다 제국 8위계 대마법사의 손에 죽었다.
마지막 전투에서 모든 무공과 마법을 쏟아내 대응을 해 봤으나, 그 노괴 대마법사는 용(龍) 바로 밑줄에 위치하던 전설적인 존재.
전투를 막 끝내 지친 몸을 이끌고, 만반의 준비를 마친뒤 찾아온 대마법사를 이겨먹는 건 불가능했다.
그 노괴가 나를 점찍어 찾아온 이유는, 전선에서 너무 과하게 이름을 날렸기 때문이라 했다. 단단한 제국의 아성을 위협할 만한 괴물의 새끼라 여겼기 때문에.
나는 그 기억 덕분에, 이번 생에서는 명성부터 날리는 것을 상당히 경계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마 전생보다는 시선을 덜 끌지 않았을까.
[ 좆이나 까시고, 앞으로는 나잇값을 하세요 아줌마. ]
[ 좆같은 연방군 땅깨 새끼들아. ]
"······."
아닐 수도 있다.
사실은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군.
워낙에 휘말들어간 사건이 많아서.
아무튼, 그것이 라아기스 대륙에서의 나였다.
6위계로 가는 길목에 걸쳐져 있던 왕국 마법사.
"음, 이제야 4위계 복귀인가."
둥둥—
그간 몇 번이나 걸어본 길인 만큼, 나는 에센스의 기운을 다스려가며 어렵잖게 네 번째 고리를 엮는데 성공했다.
수복전 전투에서 박살난 네 번째 회로를 완전히 재건해 4위계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그런데 회로를 제작해 4위계로 오르자마자.
"?"
나는 몸이 어딘가 달라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사실, 눈치챘다고 하기에는 무언가 오묘했다.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상황은, 웬 허접한 마법사를 데려다 놓아도 알 수 있을 만큼의 큰 변화라서.
스아아아아—
주변의 마나가 내 회로에 미친듯 흡수되고 있다.
마나회로가 잘 자리 잡았나 확인해 보려 주변의 마나를 빨아들였는데, 마나가 정도 이상으로 세차게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다.
"······."
그리 집중한 것도 아닌데, 전신으로 마나가 폭포수처럼 흘러 들어온다. 당장 마력으로 변환해 자신을 마법의 포탄으로 바꿔 달라는 듯.
화산파의 도문이 드높은 기암괴석 위에 세워져 있기에 저 도시 밑바닥보단 마나가 풍부하다지만, 이건 조금 과하다.
더 과한 것은, 회로가 과열되려는 기미조차 없지 않은가. 마치 마나가 회로와 한 몸이라도 된 듯이 말이다.
나는 혹시 몰라 마나회로의 가동을 멈추었다.
4위계 정도면 어디가서 어깨좀 쭉 펴고다니는 수준이라 해도, 이렇게나 큰 변화가 생기진 않는다. 중간에 특별한 일이라도 겪지 않는 이상에는.
그리고 내 생각에, 바만차와 전투를 벌이기 이전과 달라진 것은 하나뿐이었다.
"심장을 뜯어 고쳤군. 이래서 그 여자가 자꾸 생색을 냈던 건가."
십이제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마법사.
뿔테안경의 마녀, 로라 마르티네즈.
필시 그녀가 한 일이다.
[ ······아니, 네 몸을 '새로' 만들어줬다니까. 이 로라 마르티네즈님께서 직접? 그게 뭘 뜻하는지 몰라? ]
[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
[ 흥, 부족한지 아닌지는 나중에 보면 알 일이고. ]
무리에 무리를 거듭해 아주 작살이 나버린 내 육체에, 바만차의 에센스를 졸졸 부어가며 새롭게 구축해 주었다며 크게 생색을 냈었지.
그녀가 자신만만하게 장담했던 이유가 있다.
동화(同化).
몸이 주변의 마나와 동화되는 듯한 이 느낌.
로라 마르티네즈는 육체 재구축을 통해 마법사들이 바라 마지않는, 마나를 받아들이고 구현하기에 최적화된 체질을 내게 선물해 주었다.
마치 무림계의 절대고수가 환골탈태 뒤에 무공을 사용하기에 적합한 몸을 얻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 4위계의 경지에 올랐을 뿐인데, 벌써 육체가 주변의 마나와 자연스레 동화된다. 왜 그리 잘난 척을 하나 했더니, 어지간한 고위 마법사도 엄두조차 못낼 짓을 내게 시도했군.'
사람이 어릴 때에는 혈도와 근골이 성장을 위해 흐물흐물한 상태라 외부의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나이가 스물쯤 되면 성인의 육체가 완성되어 단단히 굳는다.
말인 즉, 성장이 어느정도 끝난 성인의 몸을 외부에서 재구축하려면 어린 아이의 몸과 비교해 적어도 몇 배 이상의 노력이 든다는 뜻.
그러니 명성높은 대 무림방파의 후기지수들도, 극히 어린 나이에 대단한 문의 고수로부터 벌모세수를 받는 것이고.
헌데, 이건 아무리 못해도 벌모세수(伐毛洗髓) 그 이상의 중노동이 들어가야만 했을 텐데.
문득, 그 대목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굳이 왜 이렇게까지 했지? 자기 몸도 아닌데."
알 수 없으나,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로라 마르티네즈는 내 육체를 인위적으로 재구성하는데 실로 지대한 공을 들였다. 적어도 슬레모킨이 뜨개질로 손수 짜놓은 담요보다 공을 많이 들인······
······어쨌든 심상찮은 공을 들여가며 나의 육체를 작은 단위부터 새로 구축했다.
이제 마나와 동화를 이루어, 새로운 마나회로를 보다 더 빠르게 쌓을 수 있음은 물론이고, 회로를 돌리는 과정에서 낭비되는 마나가 줄어든 만큼 마법의 효율 역시 좋아질 것은 당연지사.
"6위계가 되면 바로 착수하려고 했던 일인데."
체질을 바꾸는 것은, 초고난도의 작업이다.
설마 제자 어쩌고 하던 말이 전부 따뜻한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는가?
고강한 마법사라도 몇 시간으로 뚝딱 해치울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나조차도 뒤로 미뤄두고 있었는데······그걸 로라 마르티네즈가 해결해 주었다.
다만, 이것은 멀쩡한 상태의 나였다면 절대로 맡기지 않았을 위험한 작업. 해주겠다는 여자가 무려 십이제의 지위를 받은 고위 마법사라 해도 매한가지다.
'단전과 마나 회로가 공존하는 것은 당연히 눈치챘겠고, 마나 회로가 하나 깨진 것까지 속속 들여다봤겠군. 그래도 다행히 공력을 끝까지 뽑아 써버린 터라, 내가 뚫어놓은 큰 혈도나 기맥들을 제외하고는···특히 상단전은 보지 못했겠지.'
위험한 일이다.
만약 육체를 주무르는 도중에 삿된 마음을 먹었으면 나를 원하는대로 조종하거나, 병신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을 터.
생전 처음보는 남의 육신을 뚝딱 재구축하면서도 이 정도의 수행 능력까지 만들어낼 정도면, 아마 처음 해본 일도 아닐 것이다.
허나, 결과적으로는 정신을 잃은 게 득이 되었군.
단전과 영약만 있다면 즉시 공력을 쌓아 활약할 수 있는 무인의 길과는 달리, 마나 회로는 영약을 먹더라도 차근차근 쌓아가야 하며 고리를 엮는 인내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해 무공에 비해 성장이 더뎌졌는데······.
이대로 가면 5위계는 물론이고, 6위계까지도 큰 어려움이나 문제 없이 진입할 수 있겠군.
"아힘사."
일단 나는 곧장 아힘사를 불렀다.
종후표와 루돌프놈은 사이좋게 화산의 경내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아힘사는 홀로 화산에 남아있다.
"네. 부르셨나요?"
대마법사용 전쟁병기인 아힘사는 마법에 관해 논하기에 매우 좋은 상대다. 마법계 마법사와의 실전 경험이 수없이 많고, 마나를 흩어내는 역장까지 보유하고 있으니.
"아힘사, 방해역장 최대한으로 작동시켜봐."
"이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우웅—
나는 아힘사의 마나 방해역장이 작동되자마자, 온몸에 힘이 탁 풀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4위계임에도 역장이 이렇게나 효율적이면 아무런 대응없이 무작정 마력만 믿고 뻗댄 마법사들은 뒈지기 딱 좋겠군.
그래도···
마나와 동화되는 체질까지 선물받은 이상, 집중력만 잘 유지하면 버틸만은 할 듯했다.
"계속 유지할 수 있겠어?"
"네. 가능합니다."
그렇게.
내가 아힘사의 역장을 어떻게든 견뎌내며 주변의 마력을 빨아들여 처소의 있는 물건들을 띄웠다가, 반으로 쪼갰다가, 다시 붙였다가, 지랄 발광을 하고 있던 때.
하하하—
청풍이가 오늘도 호탕하게 웃으며 들어왔다.
"형장,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시오?"
"여기가 화산인데 괜찮지 그럼. 밥도 맛있고, 편하고, 화산 구경도 하고, 지친 심신에 한줄기 빛 화산. 화산 최고."
"그거 다행이오. 화산을 좋게 봐주어서."
청풍이는 만면에 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며칠사이 밥도 잘 먹었는지 얼굴 때깔이 더 좋다.
자신감이 잔뜩 올라온 녀석은, 곧장 본론을 꺼내놓았다.
"형장, 내 감히 말하건대···오늘은 비무에서 형장을 뛰어넘을 수 있을것 같소."
"그러냐."
"지금 한 번 확인해 봐도 좋소."
"알았다. 가자."
나는 일단 자리를 정리하고는 청풍을 따라나섰다.
청풍은 최근, 평소보다도 피나는 노력을 거듭하고 있었다.
다른 무인들의 입장에서 볼때, 청풍은 실로 비합리적인 오성을 지니고 태어나 그간 패해본 적이 없었을 터. 그런데 비슷한 연배를 상대해 어떻게 한 번을 이겨보지 못했으니.
그래도 나는 화산에 온 뒤로, 청풍이 향상심을 불태울 수 있는 재료가 되어주고 있었다.
덕분에 초절정에 오른 뒤에도 무서운 속도로 성장한 청풍은, 빠르게 발전을 해가는 중이다. 어느순간 나를 죽였던 화산 노괴의 움직임이 청풍이의 검끝에서 희미하게 보일 정도이니.
그러나 나 역시 청풍과의 비무에 적응이 되는 건 매한가지라······.
카강!
"!"
이십사수매화검법, 매화난만(梅花爛漫).
흐드러진 매화처럼 사방을 점하고 쏘아진 청풍의 날카로운 검에, 비무중 그만 공력을 실어둔 칼을 놓쳐버렸다.
그러자 청풍은 이때라는 듯,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곧장 짓쳐 들어왔다.
섬전과도 같은 쇄도.
내 첫 패배가 비무장 바닥에 새겨지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스윽.
"······."
청풍은 목덜미에 얹혀있는 검날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분명히 자신이 확실하게 날려버렸던 내 검이 어느새 그리로 가있는 것이었다.
내 목을 찌르기 전에, 자기 목이 먼저 날아갈 판.
오늘도 나의 승리로군.
스르릉—
얼굴이 굳은 청풍이는 돌연 납검을 하더니, 주변을 슬쩍 둘러보며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형장, 방금 그거 뭐였소?"
"허공의 마나로 검을 잡아 행로를 비튼 거다."
"그게 바로 이기어검(以氣馭劍)의 경지 아니오?"
"이기어검보단, 어기동검에 가깝지. 이기어검은 이런 눈장난 따위와 차원이 다른 경지니."
"방금, 검기(劍氣)가 실린 검이 허공에서 움직이지 않았소."
"나도 봤다. 근데 그건 이기어검 아니야."
"형장, 초식을 나누는 중에 검기가 들어찬 칼을 비틀어 경신을 밟은 내 목에 가져다 대는······그것이 당최 가능키나 한 소리요? 화산 주변의 기(氣)가 모두 형장의 것도 아닐진대."
"오늘은 내 운이 좋았구나."
"······이리도 불합리할 수가."
청풍은 결국 낙담하여 시무룩하게 등을 돌렸다.
나는 불쌍하게 떠나가는 청풍을 보며, 방금의 비무를 복기했다.
복잡한 초식을 나누면서도, 자연스레 주변의 마나를 끌어와 검을 조작했다. 본래라면 머리가 터져버렸을 기예가 숨 쉬듯 쉬웠다.
주변의 마나와 동화되는 체질을 얻었다고 해서 무공에 문제가 가거나 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나는 무선대지신공을 익혀 무공과 마법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사람. 그걸 격렬한 전선에서 구르며 항상 갈고 닦았던 사내이기에.
이거, 꽤 괜찮군.
* * *
수르트 시티, 남경의 한 대규모 객잔.
수많은 인파와 테이블 사이에 섞여 음식과 술을 홀짝이는 일행이 있었다.
그들은 주변 손님들의 시선이 몇 초 이상 머무르지 않을 정도로, 객잔에서 언제나 보이는 유형의 평범한 일행이었다.
그때.
"아······."
일행중 한 여인이 요염한 한숨을 내쉬었다.
퍼석-
그리고는 쥐고있던 술잔을 그대로 잡아 우그러뜨렸다. 그 소리가 꽤나 컸으나 객잔의 내부가 심히 소란스러워 조용히 묻혔다.
이윽고.
소름끼치는 음성이 여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짜증나네?"
객잔 구석에서 조용히 앉아있던 여인.
그 여인은 절대 이곳에 나타나서는 안 될 인물.
수십년 전 퇴출된 십이제이자, 로키 시티 신동경을 장악한 마피아 조직의 우두머리인 카스트라 뷔에탕이었다.
뷔에탕은 '어떤 일' 로 인해 그간 절대로 벗어나지 않던 로키를 빠져나와 수르트까지 행차했으며, 현재 자신의 인형들을 조작하며 근방의 모든 광경을 주시하고 있었다.
헌데.
저 멀리 화산 본문의 기암괴석이 늘어선 정경 밑으로 보이는, 아까부터 뷔에탕의 예민한 신경을 박박 긁어대는 존재들이 있었다.
뷔에탕은 분노를 삭히며 억지로 웃어보였다.
왜냐하면—
"······경고를 했는데도, 감히 화산까지 기어와?"
그녀의 인형들이 보내오는 다양한 정보 속.
새하얗게 질린 낯빛에 호리호리한 체격과 얼굴.
전신에서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한 백면서생이 화산의 기암괴석 근처를 어슬렁대고 있다.
또한.
어슬렁대는 백면서생과 멀찍이 떨어져있는 포목점.
지나가는 행인들 사이에서 기운을 숨기고 있는 큰 덩치의 장한도, 뷔에탕의 인형이 진작부터 포착해 놓았다.
일단, 기운을 한계까지 숨긴 의문의 절대강자 둘.
심지어.
지금 자신과 같은 객잔에 들어와서 호시탐탐 기회를 보고있는, 혈향이 짙게 나는 남자까지.
수많은 인형들을 풀어 화산 주변의 모든 기물과 행인을 하나하나 파악하고 있던 뷔에탕이 손을 파들파들 떨었다.
'마녀, 그 빌어먹을 년이 끝까지······.'
장한과 객잔에 숨어든 저 남자는 몰라도···
저 백면서생 놈은 말이 통하는 상대도 아니다.
어, 어떻게 놈의 자취를 잡아 화산까지 쫓아온 건데?
죽여버릴 거야. 반드시 죽여버리겠어. 아주 사지를 찢어······.
"이봐, 아줌마? 언제까지 앉아있을 거야."
"······."
"밖에 웨이팅 있으니까 그만 먹고 나가지?"
평범한 여인으로 위장한 채 객잔에서 자신의 인형들과 술을 들이키던 뷔에탕의 귀로, 피식거리는 비아냥이 들려왔다.
뷔에탕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커다란 덩치의 사이보그가 흉악한 얼굴로 서있었다.
객잔의 다른 손님들은, 그 커다란 덩치가 주는 압박감에 기겁하며 고개를 돌렸고—
그날 수르트 시티 남경, 녹림이 운영하는 객잔에서 자그마치 절정 경지의 녹림도들이 오체분시 당해 관이 출동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았다.
#110화. 사백 구십 구번 남았다
#110화.
"화산은 오랜만이군."
십이제 절반이 모인 안건 회동 이후.
백면서생은 곧장 수르트 시티로 날아왔다.
서로 상이한 이유이긴 해도 '마녀' 와 '인형사' 가 지극한 관심을 표하는 7레벨의 마법사. 한참 낮은 수준으로도 강력한 9레벨급 시체를 잡아먹었다는 그런 인물이 어찌 궁금하지 않을 수 있겠나?
번쩍···
지금 화산의 기암괴석들을 올려다보는 백면서생의 뽀얀 낯빛과 눈빛에는, 적당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그가 9레벨, 화경(化境)에 오른 뒤 까마득한 세월이 흘렀다.
오랜 시간 각고의 노력으로 뼈를 깎아 화경의 초입을 지났고, 수많은 폐관으로 정신을 다듬어 완숙한 지경까지 이르렀으며, 이제는 완숙함을 넘어 어느덧 화경의 끝자락까지 당도해 경지의 극을 보았다.
같은 9레벨, 화경의 절대고수라도 초입에 머무르는 자와 화경의 끝자락까지 당도한 자는, 해수면과 심해의 그것처럼 격차가 극심하기 마련.
백면서생은 상대가 어지간한 9레벨의 고수라도 단 몇 합내로 거꾸러뜨릴 무위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는 9레벨의 한계에서 오래 정체되었다.
수련에 전념하여 배움을 얻어도 어두운 심연으로 끌려 내려가는 듯, 끝없는 벽이 새로이 나타나 그의 앞을 가로막았으며.
쉬지않고 그 다음의 경지를 밟기 위해 칼을 갈았으나, 아무리 노력해도 10레벨의 심오한 벽을 돌파하기에는 요원하기만 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자타공인 수련광의 면모를 가지고 있는 백면서생은 최근 수시로 폐관에 들어 그간의 심득을 수없이 복기하고 정리했음에도, 특별한 진척없이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것이다.
세상을 오시할 천재 중에서도 큰 천운을 타고난 이들에게나 허락된다는 초월적 경지 10레벨.
가진 무재(武材)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했다.
그리고 이만한 경지에 오르면 누군가의 뒤꽁무니를 보고 배워 쫓아갈 수도 없기에, 오로지 자신만의 힘으로 돌파구를 찾아내야 한다.
해서 그는 마녀가 말했던 대단한 잠재력의 그자가 다음 경지로 가는 연결고리를 이어줄 수 있지 않을까, 혹은 막혀있는 깨달음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여 수르트로 온 것이다.
"배울 점이 티끌만큼이라도 있다면 좋다."
그자의 경지가 낮아도 상관없다.
가끔은 타산지석으로 삼을 거친 돌도 필요한 법.
수련광이라 불리는 것은 무공에 대한 욕심이 많다는 뜻이기도 해서, 백면서생은 거대하고 높은 10레벨의 벽을 깨부수기 위해 여기까지 걸음한 시간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게다가 마침, 벗이 있는 화산에 그자가 있다는 소식을 구해 즉각 달려온 참.
"초인종도 벨도, 감시 폐쇄회로조차 없어 뵈는군. 문파의 본산만큼은 전통을 지키는 것도 좋지."
그는 체격도 호리호리한데다 눈빛이 순하고 서글해 아무런 경계나 제지도 받지 않고 쉽게 화산의 산문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스르륵 스쳐 지나가는 백면서생을 보고도 없는 사람처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
그러다 화산의 초입인 산문에 이르자, 절정 경지에 이른 무인 하나가 걸어나와 백면서생을 마주했다.
화산의 산문을 지키던 문지기는 아무런 기운조차 느껴지지 않는 이 샌님이 어찌 이곳까지 올라왔는지 의구심을 가졌으나, 이곳은 가끔 거물들이 들락날락하는 화산의 본문.
정체가 확실치 않다고해서 무작정 박대했다간 후에 크게 경을 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산문을 지키던 무인은 무언가 심상찮다고 생각하여 정중하게 물었다.
"무슨 일로 화산을 찾으셨습니까?"
"벗을 보러 왔다."
"허면, 누구에게 무어라 전하면 되겠습니까."
"배분이 높은 자 아무나 붙잡고, 다섯문이 걸음했다 일러봐라."
"······예."
배분이 높은 자를 아무나 붙잡고 물어? 다섯문?
광오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말이었으나, 화산의 무인은 잠시 기다려달라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홱!
"고인(高人)께 정중히 인사 올립니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빛살처럼 튀어나와서는 허리를 푹 숙였다. 눈앞의 호리호리한 샌님은 그가 올려다볼 수조차 없는 대단한 고인이 맞았던 것이다.
"이쪽입니다."
산문을 지키던 이는 대화산의 자존심마저 접어두고, 조금 질린 얼굴로 백면서생을 직접 안내했다.
백면서생의 뒤를 따라왔던 한 방문객의 '나를 두고 어디가냐' 는 식의 외침이 들려왔으나 별수 없이 못 들은 체했다. 등에 세 자루의 거대한 검을 멘 사내였는데, 그냥 나중에 내려와 안내하면 될 것이었다.
아무튼 매화로 대표되는 화산답게 경내는 매화꽃으로 장식한 전통적인 조명들이 많았고, 백면서생은 눈이 즐거운 와중에도 머릿속에는 그자의 생각뿐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찾아내고 싶었으나, 오랜 벗이 있는 화산의 경내에서 경거망동할 수는 없는 일.
"이제 되었다."
"!"
후웅—
능공허도. 우화등선하는 선인처럼 표표히 날아 기암괴석의 지대를 통과한 백면서생은 드높은 천풍곡에 이르러서야 땅을 딛고 내려섰다.
화산의 장문인 선천자를 만나 적당히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눈 뒤, 변소가 급한 사람처럼 참지 못하고 장문인 처소를 뛰쳐나와 마녀가 말한 그 마법사 녀석을 찾아간다.
그것이 백면서생의 계획이었다.
"화산(華山)의 경내에 들인 객이 원치 않는다면, 삼존칠좌가 와도 대면을 허락할 수야 없는 일."
"······."
그러나 화산 그룹의 회장이자, 화산의 장문인 선천자는 뜨거운 차를 단숨에 비워내고 급히 나가려는 백면서생을 그 말로 붙잡았다.
선천자의 말에, 백면서생은 오히려 흥미가 더욱 솟구침을 느꼈다.
단순한 빈객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화산도 그 젊은이를 잘 알고 있어 뵈는군."
"본문의 보배가 좋은 인연을 물어 온 게지."
"폐관에 들었던 동안 신기한 놈이 나왔구만. 이만 가보겠네."
이윽고.
사아아······
백면서생이 한 줌의 연기처럼 사라진다.
"······."
하나, 선천자는 넌지시 말렸던 것과는 달리 조용히 차를 마시며 틀어진 의복을 정돈할 뿐 움직일 생각조차 없었다. 십이제의 고명한 싸움광을 맞이해, 이만했으면 장문의 역할은 할 만치 해준 것이다.
그리고 군자의 모습만을 보여야 할 장문이, 경내에서 체통도 없이 술래잡기나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곧.
선천자는 차를 마시며 방(幇)의 직인이 찍힌 문서를 꺼내들었다.
그는 화산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요들을 개방을 통해 수시로 보고 받고 있었다. 오늘은 근방의 녹림(綠林)이 운영하는 유흥객잔에서 절정 경지의 녹림도들이 오체분시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 있었다.
"허어······."
선천자는 세상이 실로 흉흉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 * *
어느 기암괴석의 높은 꼭대기.
쉭!
기척을 죽인채 밑을 내려보던 백면서생이, 순간 어깨를 설핏 움직였다.
아주 미세하디 미세한, 지금 움직인 게 맞나? 싶은 그 행위에 반응한 자는 주위의 넓은 경내에서 딱 둘이었다.
비무장 위에서 합을 나누고 있던 사내 둘.
화산의 후기지수로 보이는 헌앙하고 젊은 사내와, 역시 비슷하게 헌앙하나 화산의 검수는 아닌듯 보이는 사내 하나.
백면서생은 흥미로운 눈으로 그들을 지켜봤다.
— 형장. 무언가 이상한 느낌 없었소?
백면서생 탓에 진행되던 둘의 비무가 멈추었다.
헌앙한 화산의 검수는 본능적인 위험을 느끼고 곧장 검집에 손을 올려놓아 언제든 방어할 태세를 갖추었고, 다른 사내는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 청풍아. 갑자기 뭐가 이상하다 그러냐.
— 방금······어디서 옅은 살기가 느껴진 듯한데.
— 신경쓰지마라. 저 밑에서 루돌프놈이 종후표 대가리라도 뜯고 있나보지. 요기일 거다.
— 어서 내려가 말려야 하는 거 아니오?
— 사내들은 치고받고 싸우면서 친해지는 거지.
— 하하! 틀린 말은 아니군. 우리도 한번 더 합시다.
— 좋다. 다만 전과 같은 상황에서 검을 낼 때는, 팔꿈치 각도를 좀 더 좁혀봐라. 팔이 몸통에서 벌어질수록 힘을 받기가 힘들다.
— 새겨듣겠소.
그렇게, 아무 일 없단 듯 비무를 속개하는 둘.
'연기를 잘 하는군.'
허나 백면서생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신속하게 방어 태세를 갖춘 화산의 검수도 훌륭했으나······반대쪽의 사내가 분명 한 치 앞서 반응했다. 맹금류보다도 날카로운 백면서생의 눈동자는 저자의 가슴께가 아까부터 부풀지 않고 있던 것을 집어냈다.
비무 도중에 이유없이 호흡을 멈추었을 리 없다. 필시 어떠한 낌새를 진즉 느끼고는 기감을 펼치는 과정에서 숨을 멈춘 것이었다.
백면서생은 이룩한 경지가 너무도 깊은 나머지 도리어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는 반박귀진(返撲歸眞)의 지경에 이르렀는데, 저자가 어찌 미리 눈치챘다는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것도 격렬한 비무 도중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곧, 다시 시작된 둘의 비무를 견식한 백면서생이 허허로이 웃었다.
'확실히 마녀가 제대로 보긴 했구나. 7레벨도 아니고.'
왜인지 점점 마음에 드는 것이, 잘 찾아온 듯했다.
원래 가지고 있던 그의 생각도 순식간에 뒤집어졌다.
저거, 시체 하나 잡자고 내어주기에는 아까운 놈이 아니던가?
게다가 마법사라더니, 칼솜씨가 심상치 않다. 화경의 극에 이른 백면서생이 놀랄 정도의 초식 교환이 저 둘의 비무에서 번번이 일어나는 것이다.
심지어.
"!"
검을 일부러 손에서 떨어뜨린 뒤 마법으로 허공의 검을 통제하는 대단한 기예를 목도한 뒤로, 백면서생은 저 사내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무공과 마법을 동시에 쓰는 괴이를 대체 얼마만에 보는지!
그런데.
도통 둘의 비무가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수준높은 후배들의 비무에 눈이 즐거워지긴 했으나, 결국은 한 쪽이 슬슬 물러서며 가르침을 내려주는 형식이라 백면서생이 얻어갈 것은 없었다.
'흠!'
그는 빨리 저 기이한 놈과 독대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간절했다. 그래서 돌연 허공을 권격으로 때렸는데, 수백 미터 밖의 기암괴석 기둥이 무너질 듯 흔들렸다.
우르르릉—
굉음을 내며 진동하는 천지.
그러자 경내에 기거하던 화산의 검수들이 황급히 나와 무슨 일인가 살펴보았고, 큰 소란이 일어나니 둘의 비무도 당연히 멈추었다.
백면서생은 자신의 식견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워졌으므로, 평소라면 하지 않을 짓을 했다.
타닥.
허공을 나비처럼 날아 비무대 위에 오른 백면서생이, 레반을 똑똑히 바라보고 서서 입을 열었다.
"너는 화산 밖으로 나가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 * *
청년과 중년 사이. 평범한 문사같은 외형.
아까부터 숨어 감시하더니, 다짜고짜 와서 나가면 뒈진단다.
다만 지금까지 해온 행태로 보아, 그는 굉장한 고수가 확실해서 아주 헛소리는 아닐 것이다.
레반은 이런 부류의 사내들을 꽤나 많이 겪어보았다.
눈빛의 정광은 맑아 악인은 아니나, 심대한 광기와 욕망이 뒤섞여 들끓고 있는 것을 보면 무언가 바라는 게 있을 터.
이런 이들은 가끔 제멋대로 행동할 때도 있으나, 대부분 기분파이기도 해서 비위를 맞추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다.
"그렇군요. 바깥에 무서운 귀신이라도 있나 봅니다."
"고작해야 귀신이나 악귀 수준이면 다행일 것이다."
이미 그 대답쯤에서 레반은 일단 예측을 끝냈다.
자신을 확실하고도 반드시 죽여버릴 수 있는 존재.
카스트라 뷔에탕, 그 미친년이 혼내주겠다며 예고했던 대로 마침내 여기까지 쫓아온 게 틀림없다.
설마 화산의 바깥에 진이라도 치고 있는가?
얼굴이 약간 구겨진 레반이 대뜸 물었다.
"그럼, 무슨 수를 써야 살아나갈 수 있겠습니까?"
"나와 일만 번의 비무를 하자. 내 너를 통해 작은 단초나마 얻어낼 수 있다면, 흉신악살이라도 기꺼이 쫓아내 주도록 하마."
"······."
수련이나 무공에 미쳐있는 자였군.
그렇다면 원하는 것은 깨달음의 실마리인가?
레반은 다짜고짜 찾아와 단초를 얻어가겠다는 백면서생의 언행에도 일절 당황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일만 번의 비무가 지나도 고인께서 단초를 얻지 못하면, 제가 죽음을 비껴갈 수 있겠습니까?"
그 질문에 백면서생이 잠시 입을 닫더니 생각에 잠겨 주변을 천천히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에 형용할 수 없는 힘이 담겨있었다.
분명 깡마른 체격이라 위압감은 느껴지지 않아야 하거늘, 아까 보여준 무위가 기겁할 정도라 그 누구도 차마 그리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
"글쎄. 그것은 나도 모른다."
쐐액!
그리 말한 백면서생이 불시에 쏘아낸 지풍. 그 지풍은 빛살처럼 쏘아져 어느 기암괴석을 때렸다.
폭탄같은 거력에 기암괴석의 중간이 몇 미터나 움푹 파였는데, 놀라운 것은 그 안에 숨어있던 무언가 풀썩 쓰러지며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 크헥!
그것은 지형지물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인형' 이었다. 이곳은 신성한 화산의 경내다. 대체 어떤 방법으로 저것을 들였는지는 모를 일.
···어째 아까부터 저쪽에 검을 던져보고 싶더라니.
레반의 그런 상념을 깨고, 백면서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일만 번의 비무간에 무얼 얻게 해주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
부서진 인형쪽을 잠시 바라본 레반이 입을 열었다.
"평범한 비무입니까?"
"네게는 생사결같은 비무가 될 것이다."
"좋습니다. 밥은 챙겨 먹으면서 합니까?"
"화산의 음식이 잘 나온다 들었다."
"맞습니다."
레반은 전혀 잃을 것이 없는 좋은 제안이라 여겼다.
눈앞에 있는 이는 적어도 화경 이상의 경지에 이른 고수.
덧붙이자면, 화산의 경내를 마음껏 휘젓고 다닐 정도의 거물.
그런 자와 생사결같은 비무를 겪는다면 부족했던 마법 부분도 실전처럼 갈고 닦을 수 있고, 정기신의 조화에도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정말 비무 일만 번을 합니까?"
"그래. 헌데 생각을 해보니 네가 세 합 이상 견뎌내지 못할 것이라 일만 번으로 부족할 듯하다. 오만 번을 하자."
레반이 딱히 부족하다고 한 적도 없는데, 당연히 부족하겠다고 생각하는 점으로 보아 눈앞의 백면서생은 미친 사내였다.
오만번의 비무라면 아무리 삼초지적이라 해도 몇 달은 훌쩍 지나갈 것인데, 그런 사실은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레반도 그에 못지않게 미친 사내라서 상관없었다.
"그게 아니고 오만 번의 백분지일인 오백 번이면 족합니다. 제가 세상을 구해볼 생각이라, 비무 따위에 몇 달이나 낭비할 마음이 없습—"
쾅!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면서생이 레반을 후려쳐 날려버렸다.
잠시 뒤.
기암괴석 저 밑바닥으로 떨어졌다가 기어 올라온 레반은, 입에 고인 피를 퉤 뱉으며 비무장 위에 섰다.
백면서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뒷짐을 졌다.
"좋다. 사백 구십 구번 남았다."
#111화. 백 번 남았다.
#111화.
퉷!
나는 백면서생이 누군지 묻지 않았다.
저 양반도 자기 입으로 말하진 않았으나···
수복전의 전선에서 세력을 지휘하고, 네임드를 때려잡았던 진공진인이나 로라 마르티네즈와 같은 반열에 있는 절대고수가 틀림없다.
적어도 완벽한 반박귀진의 지경을 이루었으니···십이제(十二帝)중 한 명인가.
그런 거물이 갑작스레 화산에 나타나 이러는 것을 보면, 내게 호의를 보인 로라 마르티네즈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가장 크겠고. 어쩌면 남궁이나 화산 장문인 선천자가 흘렸을 수도 있겠지.
아무튼, 저 백면서생의 정체가 무엇이든 한참 후배에게 비무를 청하더라도 다음 경지를 절실히 밟고 싶어하는 무인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을 터.
"잠시 내상을 다스리겠습니다."
"얼마든지."
가만히 선 채 기운을 전신으로 돌리며 숨을 고른다.
나는 연방의 희망찬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장 내가 화산 밖으로 빠져나가 안전히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이 백면서생이 단초를 얻도록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뭐, 뷔에탕의 인형이 화산의 경내까지 숨어든 이상 청풍이가 발벗고 나서 도와주기야 하겠지만, 20년간 연방과 메가콥의 추격도 피했던 뷔에탕이 그걸 멍청하게 당해줄 리가 없다. 잠시 로키로 물러났다가 내가 혼자있을 때 다시 돌아와 쳐죽이면 그만이지 않은가?
그러나 백면서생급의 강자라면, 말이라도 듣겠지.
나는 백면서생이 뷔에탕을 죽여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 아줌마는 그냥 대가리좀 몇 대 때려서 보내주기만 하면, 내가 나중에 어련히 해결할 자신이 있었다.
'지금 나의 수준으로 어찌 단초를 주느냐가 문제군.'
무공의 성취에 대한 욕심이 있고, 수련광의 모습도 있다면 그간 사람의 몸으로 해볼 수 있는건 다 해봤을 터.
애초에 재능이 없으면 7레벨 이상으로 올라오는 것도 힘들어서, 일단 비무중에 미세한 영감이라도 얻으면 자기가 알아서 꽉 붙들 것이다.
다만 백면서생의 경지가 지극히 높다는 게 큰 걱정인데.
정크타운.
사무라이 륭이 6레벨에서 절정의 벽에 막혀있을 때, 내가 무아의 검로를 유도해가며 깨달음을 주었고 결국 경지 상승을 유도할 수 있었다.
일류에서 절정. 그것은 대단한 진일보다.
허나 백면서생은 최소 화경 이상.
화경에서 그 이상의 경지로 가는 벽은 겪어본 적도 없고, 그야말로 신선의 길을 걷는 수준이라 나조차도 정확한 방법을 알지 못한다.
상단전을 열어젖혀 화경 수준의 심득까지는 무난히 깨달았는데, 그 이상은 나도 다섯 번의 삶 동안 도달해보지 못한 경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다면 올랐을 것이나, 계속 젊은 시절에 죽어버린 바람에.
물론, 그것은 앞에 있는 백면서생도 마찬가지일 터. 오백 번의 기회가 있으니, 한 번 머리를 감싸쥐고 여러가지 다 해보는 식으로 가자.
나는 내상을 적당히 다스리고는 슬슬 입을 열었다.
"시작하시죠."
"그러마."
백면서생의 첫 초식은 탄지신공(彈指神功).
조금 전에 인형을 부숴버렸던 지풍이었다.
쾅! 쾅! 쾅! 쾅!
그리고 나는 총 다섯 번째 비무가 진행될 때까지, 백면서생의 그 첫 초식을 버티지 못했다.
고작해야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는 거다.
눈으로 다 보고 있는데도, 손가락에서 쏘아진 지풍따위를 흩어내거나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다.
실로 어마어마한 힘의 격차. 백면서생의 생사결같은 비무라는 말이 들어맞았다. 거력이 담긴 지풍을 못 막으면 죽을 것이라, 일단 힘겹게 막고 멀리 날아간 뒤에 절벽을 꽤나 기어 올라와야 했다.
퉷!
여섯 번째 비무부터는 지풍을 방어하고 멀리 튕겨나가진 않았으나,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쾅! 퍼걱!
그리고 나는 열한 번째 비무에서 드디어 첫 초식 지풍을 성공적으로 흘려내고 다음 초식까지 볼 수 있었다.
백면서생의 두 번째 초식은 권풍(拳風).
"후우—"
나는 태산같은 권풍에 직격당해 피범벅이 된 몸으로, 기운을 세맥으로 돌려 내상을 다스렸다.
단단한 기암괴석도 박살 내버리는 지풍보다 수 배는 더 강력한 권풍이 연속으로 날아오니, 아주 큰 부담이었다.
"······호오."
그래도 백면서생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삼 초식을 못 버틸 것이라 무려 오만 번의 비무를 하자고 한 양반인데, 고작 열댓 번 만에 일 초식을 넘겼으니 놀라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후의 과정이야 어쨌건 버틴 건 버틴 거라.
퉷!
"다시 시작하시죠."
"좋다."
그렇게 나는 스물일곱 번째 비무에서 권풍까지 버텨내고 다음 세 번째 초식을 보았다.
콰과과광!
앞선 두 합은 원거리 지풍과 권풍이었으나, 세 합부터는 공력이 실린 진짜 주먹에 맞아 화산의 산문까지 튕겨져 날아갔고, 충격이 심해 전신의 뼈가 으스러지고 뒤틀렸다.
'아프군.'
부서진 뼈가 장기를 찌르는 것은 막았어도 내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산문을 지키던 화산파 무인의 도움을 받아 다시 비무대 위로 기어 올라왔다.
백면서생은 진행되는 비무마다 초식을 달리하지 않았다. 그저 막아볼 테면 막아보라는 듯, 피할 거면 피해보라는 듯 동일한 초식을 사용했다.
그것이 내게 하나의 숙제가 되었다.
일 초, 지풍.
이 초, 권풍.
삼 초. 단순히 주먹을 강하게 내뻗는 권격.
나는 적응이 빠른 사내다.
그러나 저 간단한 권격을 못 막는다.
마법은 어림도 없고, 광선의 검기도 무용하다.
그야말로 삼초지적(三招之敵).
고작 세 합도 버티지 못하고 있군.
쿨럭-
나는 주먹에 맞아 낙지처럼 흐물거리는 몸을 이끌고 기암괴석 위로 기어올라온 뒤, 조용히 가부좌를 틀었다.
"화산 속가의 명의들을 본산으로 즉시 불렀소."
"어, 고맙다."
다행히도 청풍이 이 비무를 눈이 빠져라 보고 있었기에 외부에서 훌륭한 의원들을 불러와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거기다 든든한 6세대 나노로봇이 있으니, 이런 식의 비무 방식에는 참 잘 어울렸다. 나는 운공으로 체력을 회복하고, 주변의 마나까지 빨아들여 몸을 치료했다.
"형장. 자칫 틀어지면 정말로 죽을 듯한데, 괜찮으시겠소?"
"괜찮다. 지켜보는 게 도움이 좀 되나?"
"······아직은 잘 모르겠으나, 솔직히 말하면 더 지켜보고 싶긴하오."
"알았다. 내가 고생하마."
나는 부상의 정도가 심했던 것 치고는 아주 빠르게 완치되었고, 반나절도 되지 않아 다시 비무에 돌입할 수 있었다.
몇 번의 비무가 더 지났다.
가끔 누가봐도 심각한 부상이 생기면, 백면서생도 직접 나서 진기를 주입하는 등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어차피 비무의 결과는 내내 삼초지적.
그럼에도 백면서생은 전혀 지루해하지 않고 기꺼운 얼굴로 비무를 받아주었다. 와중에 나는 현재까지도 가벼운 백면서생의 주먹을 보았다. 아무런 무기도 없는 맨주먹. 아직 백면서생은 전력을 다 꺼내지도 않았다.
쾅!
그날은 정확히 삼십 번의 비무를 겪고, 그만 정신을 잃어 다음 날로 넘어갔다.
다음날 비무장.
"오호, 이럴수가······!"
나는 백면서생과의 오십 번째 비무에서 자그마치 다섯 합을 버텼고, 예순일곱 번째 비무에서 여섯 합, 구십 번째 비무에서 일곱 합을 버티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면서 몇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백면서생의 경지는 최소 화경의 끝자락 즈음이다. 하기야 그쯤 갔으니 깨달음을 줄 단초를 눈에 불켜고 찾아다니고 있겠지. 9레벨중 거의 최상위권이지 않을까 싶다.
"놀랍구나."
다만 그는 이따끔 놀라기만 할 뿐, 구십 번째 비무동안 딱히 깨달은 것은 없어보였다. 당연했다. 나는 근근이 버티고만 있는 중이라. 사실 내가 아니라 9레벨을 여기 데려다 놓아도 저 거물을 상대로,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거다.
콰과광!
백면서생과의 비무는, 일곱 합에서 턱 막혀 진척이 멈추었다.
퉷!
나는 다음 수십 번의 비무간 백면서생의 강력한 칠 초식을 파훼하지 못하고 있다. 남의 눈에 보이기 싫어 최대한 자제하고 있던 오형검의 수를 꺼냈음에도 마찬가지다. 사실 못한다기보단 할 수 없다는 게 맞았다. 파훼할 길은 보이는데 육신이 따라가질 못하니.
도무지 진전이 없다. 절대 못 막는다 칠 초식은.
실은 억지로 막으라면 막겠는데, 그러면 비무는커녕 남은 한 평생을 죽만 먹고 살아야 할 거다.
그래서 안 되겠다고 말했다.
"안 되겠습니다."
"포기인가?"
백면서생이 물었고, 고개를 저었다.
포기라니.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8위계 대마법사의 로브자락도 찢어버린 무시무시한 사내다. 그때가 마법의 경지로 6위계에 가까운 5위계에 무공으로는 초절정 수준이었다.
그러니까 그때처럼, 마법 수준이 5위계는 되어야 뭐라도 해볼 성 싶었다.
5위계 마법사에 초절정 무인.
이 세계의 기준으로 각각 7레벨과 8레벨이면, 백면서생의 칠 초식도 막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칠 초를 깨려면, 마나 회로 하나를 더 쌓고 와야겠습니다."
"그게 말처럼 쉬이 가능한 일이 아니다."
"많이도 필요 없으니, 칠 주야의 여력만 주십시오."
"······칠 주야? 그렇다면 알겠다."
백면서생은 일주일의 시간을 허락했다.
나는 그즉시 청풍에게 부탁해 보유한 크레딧을 모두 에센스로 바꾸고, 특별대우로 천풍곡 구석의 작은 전각을 얻어 다섯 번째 고리를 엮기 위한 폐관에 들어갔다.
천풍곡 구석 전각 앞에는 집채보다 거대한 암석이 있었는데, 나는 일주일간 폐관에 들기 전에 4위계 공격 마법으로 암석을 한 번 밀어보았다.
콰과광! 구르릉—
허나 정말로 꿈쩍조차 하지 않는 단단한 암석.
나는 머리를 끄덕이며 폐관에 돌입했다.
"아힘사."
"네. 역장을 가능한 최대로 작동. 맞습니까?"
"아니. 진정한 열반의 길을 찾는 건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어찌, 내 옆에 머무는게 도움이 되고 있나 궁금해서."
"······작동하겠습니다."
우우우우웅—
나는 눈빛이 가라앉은 아힘사의 방해역장을 최대로 견디며 회로를 굴렸다. 심장 부근이 조여 그대로 터져버릴 것만 같았으나, 백면서생의 주먹질보다는 덜 고통스러웠다는 게 한 줄기 위안이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나는 또 다른 비무를 겪고 있다.
"레반, 땀을 많이 흘리는데 괜찮으십니까?"
"아직은 괜찮다."
회로 네 개인 4위계와 다섯 개인 5위계.
그것은 무림계에서 초일류와 절정의 깊은 간극처럼, 아예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는 거대한 기준선.
5위계부터 제대로 된 상위 마법사 취급을 받는다.
왜냐하면, 회로가 많을수록 다수의 마법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고 마법의 위력도 껑충 뛰기 때문이다.
루벤카가 마탑의 설산에서 근방 수십 미터를 홍염으로 불살라버린 것도, 5위계의 경지에 이르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전생에서 왕국 마탑 벽면에 새겨진 한 비사를 보았는데.
— 4위계까지는 한 명의 마법사가 되어가는 과정이고.
— 5위계부터는 완성된 마법사로서, 신화적인 경지인 9위계를 향해 달려가는 과정이다.
······라고 배웠다.
9위계.
라아기스 대륙의 최강종, 용(龍)과 동일한 경지.
제국의 '위대한 세 별' 이라고 불리는 노괴 대마법사도 8위계였는데, 그보다도 한 단계 진보한 신화 속의 얘기.
라아기스 대륙의 모든 마법사는 그 경지를 꿈꾸었다. 9위계라면 이곳의 기준으로는 11레벨쯤이 되겠군.
그리되려면, 완성된 마법사의 기준선부터 넘어야겠지.
나는 첫 토대가 되는 두 개의 마나회로를 아주 잘 다져 놓았고, 마음껏 힘을 쓸 수 있는 비무 동안 성장한 것도 없지 않았다. 무엇보다 로라 마르티네즈의 육신 재구축이 일주일이란 시간을 알차게 쓰는 데 도움이 크게 되었다.
주변의 마나가 회로와 동화되어 과열도 잘 되지 않는 회로를 미친듯이 혹사했다. 그것도 아힘사의 방해역장을 받으며, 심장이 터져라 굴려댔다.
값비싼 에센스를 아낌없이 마시는 것은 물론이고, 분에 넘치는 마법도 마구 사용해가며 서둘러 네 번째 회로의 단조 단계에 들어간 것이다.
자그마치 칠 주야.
나는 칠일밤낮을 쉬지 않고 마법을 사용했다.
심지어 알 헤임달의 다르간트가 직접 손봐가며 업그레이드한 아힘사의 배터리가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나는 네 번째 회로를 쉬지 않고 두들겼다. 나중에는 말할 힘도 없어 아힘사와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어야했다.
그래서, 내 오주야의 기억 속에는 아힘사의 자홍빛 눈동자만이 남아있다.
그리 뜨겁게만 흘러가던 어느 날이었다.
늦은 새벽이라 화산의 매화꽃 조명들이 밝고 환하게 피어난 날, 나는 폐관하던 전각에서 나와 집채만한 암석을 바라보고 섰다. 4위계 공격 마법으로도 꼼짝조차 하지 않던 놈이다.
한참을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거대하고 단단한 암석.
"······."
나는 그 암석 앞에서 입을 천천히 열었다. 화산의 전각 근처를 농밀한 마나가 휘감고 있었는데, 그 마나들이 허공의 극점으로 일순간 응축되었다.
"떨어져라."
쾅!
이윽고, 극점에 응축되었던 마나의 빛줄기가 공중에서 낙하해 암석의 중간을 꿰뚫었다. 작은 암석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강력한 위력이었다.
그러나 나는 거기서 음성영창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 떨어져라. 더 줄기차게 떨어져라."
그러자 극점의 마나가 격렬하게 반응했다.
극점에 모인 그것은 상공에서 순간 폭발하듯 드넓게 펼쳐지더니, 두터운 마나로 이루어진 먹구름이 되었고 어느 순간 응축된 마나의 덩어리를 빗물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쾅! 쾅! 쾅! 쾅! 광!
상단부에서부터 천천히 깨져나가는 암석.
"···됐군."
5위계 광역 마법, 「 가랑비 」
거대 암석은 쏟아지는 빗물에 몸을 숨길 곳이 없어 작은 돌가루로 해체 되어가기 시작했다. 화산의 붉은 매화꽃 조명을 배경으로 푸른 마나의 빗물이 떨어지니, 나는 그것이 상당히 조화로운 듯하여 넋을 잃고 구경했다.
* * *
칠 주야가 흘렀다.
"······."
백면서생은 설마설마했으나, 정말 매우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분명 백오십 번째 비무까지 칠 초식에서 진전이 없었는데, 고작 칠 주야 폐관의 성과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보란듯이 두 합을 더 버텨낸 것이다.
레반은, 첫 비무부터 무려 아홉 합을 버텼다.
그리고 레반은, 백 칠십 번째 비무에서 마침내 열 합을 버텼다.
산산조각으로 찢겨나가는 몸을 악으로 깡으로 버텨낸 레반보다, 도리어 백면서생이 더 크게 감명받은 얼굴로 말했다.
"좋다. 좋구나."
비록 비무하는 시간보다 절벽에서 기어 올라오는 시간과 회복을 기다리는 시간이 훨씬 더 오래 걸렸으나, 백면서생은 한 번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너는 나와의 싸움에서 열 초식을 버텼다."
백면서생은 수십 년이 넘는 세월을 벽에 막혀 있었다. 긴 세월간 해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에서야 이해해 보지 못할 일을 마주했으니, 이제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고 싶은 심정이 더욱 강해졌다.
"좋다. 이럴 마음까지는 없었으나, 기왕 이리된 거 제대로 하자."
그때, 백면서생이 드디어 무기를 꺼내들 기미를 보였다. 여태껏 맨손으로만 비무를 펼쳤기에 레반도 백면서생의 무기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러시죠."
쫘악—
백면서생은 품이 넉넉한 의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단숨에 찢어버리더니, 팔과 주먹에 붕대처럼 둘둘 둘렀다.
그러고는 자기 어깻죽지에 손가락을 그어 피를 냈다. 아래로 흘러내리는 피가 붕대처럼 감은 옷가지를 적시자 옷이 축축해져 주먹에 달라붙었는데, 피에 젖은 옷가지 위로 권강(拳罡)이 형성되었다.
우우우우웅—
그런데, 권강의 규모가 너무도 비대했다. 농담 조금 보태서 레반이 저번에 부수었던 암석 정도. 안력을 돋구어 확인한 레반은 그 이유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백면서생의 찢어진 옷자락. 그러니까 실보다 가는 의복의 섬유 한 가닥 한 가닥마다 백면서생의 강기(罡氣)가 스며들어 있던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주먹 이상으로 크게 부풀어 보이겠지.
스치기만 해도 죽는 강기의 실이 거대하게 나풀거린다.
'대단한 권사로군.'
게다가 넉넉한 의복에 가려져 있던 상반신이 드러나자, 그에게는 이제 더이상 백면서생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았다. 풍기는 기세마저 달라졌다. 호리호리하던 백면서생은 어느새 수라(修羅)의 기백을 지닌 사내가 되어있었다.
레반이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비무라고 하지만, 상대의 의지를 이렇게 꺾어도 되나? 물론 백면서생은 그따위 하찮은 부분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죽을까 두려우면 여기서 포기해라."
"······."
바만차, 남궁천과 같은 9레벨급이라도 존재의 격이 다르다.
육신에서 뿜어지는 저 거대한 중압감과 박력만 보아도, 남쪽의 어머니를 손으로 북북 찢어버렸던 묘왕(卯王)을 연상케 한다.
이것이 생사결같은 비무가 아니라 진짜 생사결이었다면? 아마 싸워볼 각오보다는 다음 생으로 넘어가도 열심히 살아볼 각오를 다지고 있었으리라.
"좋습니다."
"포기하겠나?"
"기분이 좋습니다. 훌륭한 기회를 얻어서."
"그건 나도 그렇다. 내게도 좋은 기회가 꽤 남아있구나."
중원무림도 아니고, 이 세계에 와서 총칼이 아닌 주먹과 맞선적이 있던가.
한 번 물리면 좀비꼴이 되는 터라 자연스레 거리를 벌릴 수 있는 병기들이 유리한 세상. 이곳에서 권법은 사장된 무술이나 다름 없어 더욱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레반은 즉시 백면서생과의 비무를 재개했고.
쾅!
이전에는 열 합까지 버텨냈는데, 그가 주먹에 옷자락의 강기를 두르자마자 곧장 두 합으로 다시 떨어졌다. 숙제같던 초식도 조금 바뀌어 초기화되었다. 그래도 다행히 적응을 빨리 해 세 합까지는 돌아왔다.
그때가 총 이백 번째 비무였다.
첫 초식. 왼쪽 주먹에서 쏘아낸 권강더미.
이 초식. 오른쪽 팔꿈치.
삼 초식. 알 수 없음.
퉷!
레반은 다시 삼초지적이 되었다.
이제 삼백 번의 비무 기회가 남아있다.
레반과 백면서생은 특별히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백면서생이 묻지 않으면 레반도 입을 열지 않았다. 별달리 나눌 말이 없었다고 보는게 맞으리라.
레반은 보이지도 않는 백면서생의 삼 초식을 파훼하기 위해 꽤 갖가지 무공을 섞어 사용했다.
그러나 놀라는 기색 하나 없는 백면서생의 강력한 삼 초식은 일말의 자비가 없었다. 5위계에 올라 마나 수발이 더욱 쉬워진 덕에, 백면서생을 상대로도 주변의 마나를 장악하는 지경에 이른 레반도 도저히 파훼가 힘들어 혀를 내둘렀다.
시간이 빠르게 지나고.
그들의 이백여든 한 번째 비무가 찾아왔다.
"가겠습니다."
"알았다."
백면서생은 유유한 고래 같아서 레반이 어디를 찌르고 공격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선공을 내주고 후발제인(後發制人)으로 8레벨 따위는 쉽게 제압할 자신이 있었으리라.
그러나 레반은 이백 번을 훌쩍 넘긴 그와의 비무에, 이제는 백면서생의 다음 움직임이 어디로 갈지 모두 익혀버린 상태였다. 죽어있던 안광에 공력과 마력이 함께 빛났다.
레반은 전생에서 무림십대고수인 광마의 샌드백이자, 비무 상대이자, 화풀이 상대이자, 믿음직한 제자였기에 마음을 굳게 먹은 이상 과히 꺾이지 않고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쾅!
"!"
그렇게 이백여든 한 번째 비무에서 각성한 레반이 돌연 세 합을 뚫고 무려 네 합까지 버텨버리자, 백면서생이 계획하지 못한 초식이 본능적으로 뿌려졌다.
백면서생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듯한 얼굴로 레반을 주시했다.
주먹에서 흐르는 피가 그의 마음을 대변했다.
"오른팔이 떨어졌군."
"이거 붙이면 됩니다."
"어서 고쳐라."
"예."
아프다.
그러나 기분 좋은 고통이다.
깨지 못할 바위에 몸을 부딪친다.
지금까지 레반의 인생이 그러했을진대 무에 아프다 하겠는가. 무작정 대가리부터 박고 살아온 삶이다. 백면서생은 이제 레반과 비무가 아닌 싸움을 하고 있으나, 서로에게 득이 되는 싸움이라 생각해 힘을 빼지 않았다.
······삼백 번째 비무 다섯 합.
······삼백 열번째 비무 여섯 합.
······삼백 스무번째 비무 다섯 합
······삼백 서른 세번째 비무 일곱 합.
레반이 말했다.
"이제 또 칠 합까지 버텼습니다."
"그전의 비무에서 힘을 아껴놓은 것은 아닌가?"
"나아가야 할 길을 미리 보고, 추진력을 얻은 것이지요."
이후.
그들의 시간은 쏜살처럼 흘러갔고.
어느덧, 사백 번째 비무를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백 번 남았다. 너는 반드시 버텨주어야 할 것이야."
그리고 백면서생의 정광이 더없이 진중하게 변하고, 저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간 것도 분명 그쯤이었다.
#112화. 신선
#112화.
— 퉷!
높은 기암괴석을 끝끝내 기어올라 또 전투적으로 피가래를 뱉는 레반을 보며, 갈무리되지 못한 의문과 잡념들이 백면서생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백 번을 부수었다. 포기할 기회도 주었다.
헌데 팔이 잘려도, 피를 토해도, 내상이 심해도.
— 다리가 잘렸군요. 하하. 붉은 다리 레반.
대체 왜 미친 사람처럼 기분 좋게 웃는가.
부서진 몸으로 어째서 계속 기어 올라오는가.
어째서 계속 기어 올라와 파도처럼 부딪쳐 오는가.
한낱 각오 따위로 될 것이 아니다.
과거, 강자와의 싸움에서 이런 의문을 느꼈던 적이 있었나.
이것은 수많은 폐관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신선한 감각.
기암괴석을 기어 올라와 비무대에 선 저자는, 격차가 지대하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도 강대한 초식을 하나 둘 파훼해가며 끝없이 등반을 하고 있다. 칠 주야의 여력을 주었더니, 놀랍게도 큰 성취를 이루어 다시 부딪쳐 오기까지 했다.
백면서생은 폐관에 들었을 때보다 많은 의문을 얻었다.
어째서 주먹을 쥐었나.
어째서 주먹을 뻗었나.
자신이 저리 처절히 기어 올라가본 적은 언제였나.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일이다.
'!'
그런데 초반에는 백면서생의 일 초식조차 버티지 못한 저자가, 놀랍게도 순식간에 열 합을 넘어 다시금 열 합을 버텨내고 호탕하게 웃었을 때. 화산의 산문을 지날적만 해도 기대하지 않았던 감정이 불현듯 들었다.
'즐겁다.'
바로 즐거움이었다.
약자와의 싸움이 어째서 즐거운가.
그것을 타산지석 삼아, 수행에 도움이 될까 하여?
아니다.
돌이켜 보자면, 강자와의 싸움에서만 희열을 느껴왔다.
그래서 반열에 이른 자들은 백면서생을 싸움광, 전투광으로 평했다.
그런데 지금에서야 새삼 알고보니, 강자와의 싸움에서만 희열을 느낄 수 있던 것이 아니라 싸움을 통해 다음 경지로 갈 수 있다는 무의 욕심에 희열을 느낀 것이었다.
백면서생은, 단순히 저자와 어울리는 지금이 즐거웠다.
그리고 그때가, 삼백 구십 구번째 비무였던가.
백면서생은 레반이 이전에 했던 말을 곱씹었다.
[ 기분이 좋습니다. 훌륭한 기회를 얻어서. ]
하면 저자는 진심으로 비무가 즐거웠는가.
그래서 몸뚱이가 깨져도 부딪쳐 왔는가.
"······좋다."
그런 생각이 들자, 백면서생은 레반과의 비무 자체가 진정으로 즐거워져 깨달음의 단초를 얻어야 한다는 생각마저 잊어버렸다.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했던 심정도 같이 버렸다.
"······기분이 좋구나."
마침내 오랜 잡념들을 단념해버고, 즐겁게 주먹을 뻗기로 한 것이다.
* * *
나는 백면서생의 일초지적, 삼초지적, 칠초지적, 십초지적이 된 뒤 무기를 든 후 다시 일초, 삼초, 칠초지적에 이르렀고, 드디어 두 번째 십초지적을 달성했다.
쾅!
권강의 실타래가 너풀대는 곳에 몸을 던져 열 합을 어울리자, 백면서생은 사백 번째 비무에 앞서 다리를 땅에 박았다.
"앞으로 백 번이다. 너는 반드시 버텨주어야 할 것이야."
주변의 공기가 달라졌다.
백면서생의 정광은 깊어지고 더없이 진중했으나, 어째서인지 즐거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 백면서생도 나처럼 웃어보였다.
아파도 왜인지 기분 좋은 고통에 웃던 나처럼.
나는 그 때문에 검병을 더욱 강하게 쥐어야 했다. 어찌나 강하게 잡았던지 광선이 부르르 진동했다.
생사결같은 비무에서 비무를 빙자한 사내 간의 싸움이 되었다가 다시 생사결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백면서생과의 비무는, 앞선 스물일곱 번째 비무에서 눈좋은 청풍이 자칫하면 죽는다 할 강도였다. 그때도 충분히 생사결같은 비무였고, 초식이 새로이 바뀐 이백 번째 비무에서는 백면서생이 직접 죽을까 두려우면 포기하라고 일렀다. 여태까지도 한 번 삐끗했다간 돌이킬 수 없는 전투였다.
그런데 이제야 제대로 깨달았다.
앞선 맨주먹 비무가 그의 일 초식이고.
그 뒤의 옷자락 비무가 이 초식이었으며.
지금 저 백면서생이 삼 초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 그렇다면 나는 아직도 백면서생의 삼초지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구나.
인정하니 마음이 더욱 편해지고 가벼워졌다.
이제 백면서생도 바뀌고 나도 바뀌었다.
비무장 위의 공기가 선명히 바뀐 기점.
그렇게 사내 둘의 사백 번째 비무가 시작되었다.
사백 번째 비무에 들어서면서 백면서생은, 반드시 버텨달라 말했다. 그런데 나는 어차피 특별한 소득이 없으면 뷔에탕의 손에 죽을 것이라 버텨볼 생각이었고, 다섯 번이나 전생한 놈이 삼초지적으로 끝나면 더럽게 쪽팔려서라도 더 버텨줄 생각이었다.
쾅!
비무가 되풀이된다.
그 시점으로부터도 날이 꽤 지났다.
금일은 '사백여섯 번째' 비무다.
6일간 이루어진 여섯 번의 비무. 백면서생과 여섯 번의 충돌로 인해 비무장이 크게 파손되었는데, 화산이 그룹의 기술자들을 불러 이리저리 둘러보다 결국 수리를 포기했다.
하하.
얼마나 강하게 맞았기에 비무장이 박살났겠나.
사백 번째 비무부터는 한 번의 비무를 펼칠 때마다 입은 내상이 너무도 깊어, 회복과 정양에 꼬박 하루의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다들 당황한 것이 눈으로도 보였는데 이제는 몸이 걸레짝이 되어 기암괴석 어딘가에 빨래처럼 걸리면 누군가 나를 주워다 '부활' 시키는 식이었다. 주우러 오는 것은 대부분 아힘사였다.
지지지직—
"심정지 상태라, 전기로 충격을 주었습니다."
내가 앙굴리마라의 이름을 버리고 아힘사로 새로운 생을 살아가게 하듯, 이제는 반대로 아힘사가 나의 육신을 살려내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육신은 하루마다 새로 갈아치워졌다.
쾅. 쾅. 쾅.
살아난 나는 죽을 각오로 돌에 대가리를 박는다.
정말로, 죽음을 염두에 둔 채 백면서생에 달려들고 있다.
예전부터 대가리박는 거 하나는 잘하니 머리가 깨져도 기분은 괜찮았다. 매일 달라지는 천장에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이러다 대가리를 잘 박으면 정신병도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거듭 정신을 차렸다. 익숙한 하늘이다.
지금이, 사백아홉 번째 비무를 할 차례였던가.
내상을 회복하는 데 워낙 오래 걸리다 보니, 앞선 사백 번의 비무보다 뒤의 여덟 번의 비무가 이루어지는 시간이 더 길었다.
"······."
누워있는 상태에서 비척대며 고개를 들자, 땅 위에 굳건히 발을 박고 서있는 백면서생이 보였다. 백면서생은 망부석처럼 제자리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백면서생이 괜히 백면서생이 아닌가보다.
얼굴이 허얗고 뽀얘서 백면서생이 아니라, 비무하는 동안 저 얼굴을 백 번이나 봐야 해서 백면서생이다.
아무튼, 이번에는 기절한 뒤 어디에 실려가지는 않은 모양. 나는 무너져내린 비무장 위에 그대로 쓰러져 하늘을 다시 구경했다. 오늘도 하늘은 거뭇했다. 거뭇한 하늘만 보면 우울해질 것 같아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여덟 번에 걸친 비무의 여파. 비무장의 단단한 돌바닥이 무너져내려 딱 백면서생의 발밑만 멀쩡했다. 높은 기암괴석 위로, 기암괴석이 또 솟아난 것이다. 그래서 백면서생을 공격하려면 나는 몸을 가볍게 유지해 허공을 날아야 했으므로 밥도 먹지 않았다.
지금의 비무가 만들어낸 기암괴석 위의 백면서생은 무적자(無敵者)였다. 그는 며칠 전부터 한 가지 초식만 반복하고 있었고, 나는 오직 한 가지 초식을 뚫어내고 있었다.
그는 다리를 두 땅에 박아넣고, 정권을 내지른다. 현란하고 강대했던 백면서생의 초식은 다 사라지고, 기본적인 일직선의 권격으로 형태를 바꾼 것이다.
그러나 그 일직선의 단순한 권격은 비무장 전체를 쓸어버리는 상식 밖의 권격. 피할 곳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낼 수 있는 답은 막고 날아가거나 백면서생을 썰어버리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가 그 주먹을 썰어버릴 힘은 없으니, 백면서생은 반드시 버텨달라 한 것이다.
남궁천을 상대로 일각도 버텼는데, 백면서생과는 단 일 초에 비무가 갈렸다. 단 일 초만에 튕겨져 날아가고 하루를 꼬박 회복했다.
허나 나는 튕겨져 날아가도 계속 기암괴석 위로 기어오르므로, 비무의 자격을 얻었다. 백면서생은 하루가 지나서 올라와도 언제나 비무장 위 그자리에 있었다. 저 망부석은 거대 암석처럼 깨부술 수 있는 재질이 아니라 나는 운공을 하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래서 몸의 회복을 마치면 백면서생의 앞에서 사색을 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어떻게 하면 즐거이 웃는 백면서생의 일권(一拳)을 파훼한다는 말인가? 보여도 막지 못하고, 너무 빨라 피하지 못한다. 여래신장과도 같은 권격이 비무장 전체를 찰나간 휩쓸어버리니.
매일매일, 나의 고민이 길게 이어졌다.
나는 생사의 기로에서 정기신(精氣神)의 균형이 급격하게 진전을 이루는 것도 모르고. 오직 그것을 고민하고 사색하며 다음 비무를 준비했다. 화경 끝자락 절대고수의 작정한 일 초식을 어떻게 뚫을까. 저 주먹을 어떻게 부술까. 그러다 보니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가겠습니다."
······사백 열한 번째.
······사백 열네 번째.
······사백 스물두 번째.
······사백 쉰 일곱 번째.
동일한 날이 얼마나 지났을까.
498패가 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나는 498패를 하고는 굉장히 크게 웃었다.
태어나서 이렇듯 수없이 패해본 적은 스승 광마말고는 없었는데, 정말 많이도 날아가고 쓰러졌다.
그리고 나는, 결국 사백 구십 구번째 비무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사백 구십 구번째 비무에서는 자신이 있었다. 기암괴석에 오르자마자 백면서생을 이길 자신이.
1승 498패.
백면서생과의 사백 구십 구번째 비무.
그 비무의 향방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승리였다. 왜냐하면 백면서생은 이번 비무에서 주먹을 휘두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먹을 휘두를 마음조차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색검광을 뿌리는 광선으로 고래 같은 백면서생을 베었다.
서걱-
다음 순간, 백면서생의 미소가 보였다.
* * *
깎아지른 듯한 화산의 기암괴석.
그 위에 생겨난 또 하나의 기암괴석.
상처를 입은 백면서생은 그 자리에 고목이 된 듯 멈춰있다.
그때, 피 묻은 광선이 부르르 떨렸다.
일을 마쳤으니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듯.
"잘했다."
백면서생을 멋지게 베어버린 광선이 주인공이 되기를 거부했으므로, 나는 광선을 몇 번 쓰다듬어 준 뒤 칼집에 넣어 쉬게 해주었다. 백면서생과 사백구십 구번의 비무를 거친 광선은 끄떡없었다. 내 몸만 병신이었다. 역시 전설의 드워프 다르간트라 생각하며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바라보았다.
푸화악!
광선이 낸 백면서생의 상처에서는 걷잡을 수 없이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그런데 그 선혈은 금세 황금빛으로 물들더니, 금색의 꽃으로 변했다. 곧 화산의 매화꽃 배경에 백면서생의 전신에서 사리처럼 뿜어져나오는 금화(金花)가 섞여 들었다.
금화의 폭포수.
곧이어 청,적,흑,백,황의 빛이 하단전에서부터 흘러나와 백면서생을 휘둘렀다. 백면서생이 쌓아온 내공으로 빚어진 오색광은 금색의 꽃에 섞여들었다.
그것은 삼화취정(三花聚頂)이자 오기조원(五氣朝元).
······처음에 빠져나온 금화들은 삼원을 이루었으나 다음에는 허공에 뭉쳐져 오색의 고리를 만들어냈다. 백면서생의 몸에서 금빛과 오색광이 같이 비쳐흘렀다. 그 오색광은 나의 애병, 광선이 보인 오색검강마저도 잠시 덮어 퇴색되게 할 정도로 밝게 빛났다. 광선을 미리 집어넣기를 잘했다.
그렇게 화산파 자색빛의 매화꽃 조명 위로 오색금광의 꽃들이 깔리니, 내가 5위계에 오른 뒤 암석을 가랑비로 부술 때만큼 신묘하고 장엄한 광경이 펼쳐졌다.
화산파의 문도들은 어느새 사실을 알고 나왔는지, 수십 개의 기암괴석 위를 개미처럼 빽빽하게 메우고 있었다. 절벽의 산등성이에서 훌쩍 날아온 화산의 장문인, 선천자가 입을 열었다.
"생의 경지를 곱씹고 있구나."
곧, 오색금화들은 거대한 한 송이 꽃으로 뭉쳐져서는 오색영롱한 금화송이가 되어 어두운 허공을 밝혔다. 그러고는 또다시 나뉘어 수많은 오색금화가 되기를 반복했다.
옥예금화(玉蘂金花)에 천화난추(天花亂墜).
"······."
내 옆, 청풍의 눈동자에도 금화의 황금빛이 비추었다.
그러나 청풍이는 화산의 사람이라, 매화의 분분한 자색 빛을 더 좋아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청풍이는 허공 금화에 박힌 눈을 억지로 떼고는 내게 물어왔다.
"형장, 언젠가 저 금화보다 나의 매화가 더 찬란히 빛날 수 있겠소?"
저걸 보고도 더 환히 빛날 생각이라니, 녀석의 향상심은 실로 끝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든 생각에 나는 청풍이를 둔재라고 부르기로 했다.
"가끔 천재보다 둔재가 나을 때도 있다."
"둔재라니, 나는 저리될 수 없다는 소리를 돌려 하시는 거요?"
청풍이는 정신이 없는지, 오랜만에 내게 따지고 들었다.
언제나 서글서글한 면이 있어 의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첫 대면을 떠올려보면 말이 많은 놈이고, 아직 약관밖에 안 된 젊은 놈이다. 나는 이놈이 너무 천재라 갓 청년의 나이라는 것을 가끔 망각하고는 했다.
어느 때는 무에 달관한 놈 같으면서도, 어느 때는 치기어린 아이 같다.
나는 청풍이가 갑자기 부러워져 입을 열었다. 역시 젊은 게 좋다.
"보라는 말이다."
"?"
"눈을 돌리지 말고 봐라. 재능을 타고난 너의 향상심이 너도 모르는새 치기로 바뀌기 전에. 머리를 비우고 눈에 담아둘 때도 있어야 한다. 둘도 없는 천재에게도 과유불급이라는 말은 통용되어, 성급하면 둔재보다도 느려진다. 욕속즉부달이라고, 빨리 가려다간 미끄러지더라. 내가 예쁜 매화를 따서 빨리 가려다가 죽었다. 마음에 둔 여인에 눈이 멀었지."
앞은 나의 스승인 광마가 해주었던 말이고, 뒤는 내가 덧붙여 하는 말이다.
"······."
"너는 어리니 벌써부터 눈이 멀 필요 없다. 사실 내가 보기에 별로 밝지도 않다."
그 말에 청풍이가 잠시 멈춰있더니, 만간에 대강 알아들었는지 멋쩍게 웃고는 말했다. 녀석은 머리에 두른 매화건을 풀러 다시 묶었다.
"······하하! 이거 들렸다간 경 치는 거 아니요?"
"몰라. 좋은 날인데 한 번은 봐주겠지."
우리가 그리 담화를 나누는 사이.
지나온 경지들을 하나하나 곱씹은 백면서생의 육신이 내공과 섞여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광선이 낸 상처로부터 시작된 변화는 이제 극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꼭 허물을 벗는 매미처럼 보였다.
금선탈각(金蟬脫殼).
이윽고, 허물어지던 육신이 갈무리되어 사람의 형상이 생겨났다.
나는 눈을 떼지 않았다.
탈각마저 끝나자, 이전과는 아예 다른 사람이 기암괴석 위에 서있었다. 청년과 중년 사이의 호리호리한 문사는 어디가고 청풍과 비슷한 연배의 청년이 눈을 감고 기암괴석 위에 둥둥 떠있었다.
그의 발은 땅이 아닌 허공을 밟고 있었으며, 반박귀진을 넘어섰는지 사람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등봉조극(登峰造極)이다.
과히 신선의 경지라는 현경(玄境).
백면서생은 어떠한 깨달음을 얻어, 오늘 화산에서 신선이 되었다.
세상에 또 한 명의 10레벨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제야 백면서생에게 물어볼 수 있었다. 저 밑에 있을 루돌프놈과 종후표처럼. 사내들은 보통 치고받은 뒤에 친해지므로, 우리는 사백구십 구번이나 치고받고 뒤늦게 통성명을 하는 것이었다.
"고인께서는 누구십니까?"
눈을 감고 있던 백면서생이 답했다.
"나는 백만의 교인을 거느린 숭무교(崇武敎)의 교주이고, 이백만의 아랫것들을 거느린 하오문(下五門)의 주인이자, 때때로 십이제의 권제(拳帝)가 되는, 독고세가(獨孤世家) 최후의 생존자 독고웅백이다. 너는 누구냐."
독고세가.
먼 과거 변절한 연방의 전설이 수천만 명의 주민을 학살하고 인간의 피로 수영장을 만들었던···그 도시를 지배하던 가문이었던가.
게다가 하오문주.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
대단한 경지를 이루었음에도 자신보다 못한 사람에게 묻는 것을 한점 부끄러워하지 않더니, 그는 실제로 가장 낮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하오문의 문주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런 사실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사내끼리 몇백 번을 치고받았으니 이름을 주고받을 차례 아니던가. 그런데 나는 세상에 제대로 나온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십이제 독고웅백처럼 떠벌리며 자랑할 거리가 없었다. 그러므로 자랑은 접어두고 포권만 했다.
"레반입니다."
"레반."
"예."
백면서생은 갓 태어난 아이처럼 눈을 감은채 말했다.
"나는 거대한 벽을 부수어 법칙도, 순리도 초월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런데 내가 독고세가 최후의 생존자라 후계가 없다. 그래서 단초를 제공한 네게 넘기마."
딸칵.
아주 작은 소리가 왜 그리 크게 들리는지.
숭무교주이자 하오문주, 십이제중 권제 독고웅백.
그의 태양혈. 관자놀이 부근의 살갗이 천천히 일어났다. 곧이어 독고웅백의 관자놀이 바깥으로 하나의 칩이 쩔걱대며 빠져나왔다. 저만한 경지를 이룬 사내의 머리에서 칩이 빠져나오는 광경은, 평생에 한 번도 못볼 진귀한 것이었다.
백면서생, 독고웅백이 말했다.
"나의 깨달음이자, 심마에 대한 해법이다. 법칙에 얽매이지 않고, 무의 이치를 잊는 바. 나는 강을 건넜으니 배를 버린다. 내 배의 다음 사공은 네가 해라."
울림이 있는 말이었다.
허나 나는 시체 사냥꾼, 륭의 인격 메모리칩을 오랜만에 꺼내었다. 그것은 줄에 매어져 있었는데 그간 한 시도 몸에서 떼어버린 적이 없었다.
"이미 노를 젓고 있어, 다른 배는 불필요합니다."
완곡한 사절.
저걸 받으면 독고웅백이라는 사람이 내게 섞일 것이다.
나는 온갖 심마와 정신병력이 충만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과 생각까지 들일 여유가 없었다. 그랬다간 머리가 터져버리고 말 것이라.
그러자 독고웅백이 서운해하지도 않고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허면 둔재, 이제부터 네가 저어라."
"!!!"
독고웅백이 청풍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칩을 던졌다.
청풍이놈은 얼떨결에 그걸 귀하게 받아 들고는 눈이 동그래졌다. 그럼에도 얼굴은 계속 헌앙해서 좀 부러웠다. 역시 사람은 외형이 중요한지, 괜히 죽 쒀서 개 준 기분은 들지 않았다.
아까 청풍이와의 대화는 다 듣고 있었나보군.
아무튼 청풍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린 백면서생, 독고웅백이 말했다.
"너는 이제 한 치 뒤처지던 둔재에서 천재가 될 수 있다, 좋은 머리로 좋은 것만 익혀 저놈을 눌러주도록 해라."
"······."
그 말에, 청풍이 망부석처럼 굳었다.
매화꽃 조명이 켜진 화산의 새벽은 조용했다.
독고웅백은 나의 스승이 아니었으나, 나는 독고웅백의 큰 가르침을 받고 목숨도 구했으므로 구배지례를 올릴 생각을 했다. 정기신의 균형이 크게 진일보하고, 화경에 이른 정신을 더 완숙한 경지까지 한 발짝 더 밀어놓은 사내의 아집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독고웅백은 무공에 미쳐있는 사내라 나의 구배지례를 신경도 쓰지 않고 받지도 않을 것이므로, 포권지례로 대신하는 게 나을 듯했다.
독고웅백은 내가 정중히 포권하자, 천천히 감은 눈을 뜨고는 입을 열었다.
"오백 번중, 한 번의 비무가 남았다. 어쩔 테냐."
나는 독고웅백의 질문에 고개를 더 숙였다.
"오래 가지 않아 찾아뵙겠습니다."
#113화. 진주언가
#113화.
— 마지막 비무를 기대하고 있겠다.
현경의 경지에 오른 독고웅백은, 마지막 비무를 기대하고 있겠다는 말과 함께 유유히 사라졌다.
그리고 하루 뒤.
화산의 장문인을 통해 전해 듣기로, 화산 근처에 진을 치고 있던 카스트라 뷔에탕은 백 기가 넘는 인형을 일방적으로 잃고 도망쳐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독고웅백은 나와의 약조를 즉시 지킨 것이다.
뷔에탕은 많은 수의 인형을 잃었으니, 당분간은 근거지인 로키로 돌아가 잠잠히 숨을 죽이고 있을 터. 하오문주인 독고웅백은 후에 하오문의 전령까지 보내어 그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개방만큼 정보력이 훌륭한 하오문. 그들은 거지처럼 도처에 깔려있다. 아무리 뷔에탕이라도 10레벨이 된 독고웅백의 경고까지 무시하고 움직일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한낱 인형 따위에 당할 수준도 아니라, 뷔에탕의 본신이 몸을 숨긴 이상 당분간은 안전해졌다.
데구르르-
헌데.
그날 저녁에 화산의 산문으로 죽은 녹림도의 머리가 송달되었다. 흘러나오는 마력을 보니, 종적을 감추었다던 카스트라 뷔에탕의 짓이었다. 심히 부패한 녹림도의 이마에는 날카로운 손톱으로 파낸 듯한 글씨로 이렇게 쓰여있었다.
[ 로키 시티, 신동경에서 기다릴게 ]
끈질긴 년.
누가 보면 연애편지인 줄 알겠군.
화르륵!
나는 성불하라는 의미로 불쌍한 녹림도의 머리에 불을 질러 화장해 버렸다. 그런데 앞쪽 얼굴이 녹아내리자, 뒤통수에 남아있던 마력이 들불처럼 치고 일어나 또박또박 글자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한 자 한 자에 절절한 살심이 녹아내려 있는 글자들이었다.
[ 오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단다. 언제까지 숨어지낼 수 있을 것 같아? 네 부모를 찾아 사지육신을 비틀어야······. ]
과연!
쑥스러웠는지 연애편지 뒷장에 본심을 숨겼는가.
나는 일을 저질러 놓고도 후회를 하는 편이 아닌데, 이번만큼은 내 생각이 틀렸다고 기꺼이 인정했다. 이거 아무래도 보통 거머리같은 년이 아니군.
다행히도 나는 이 세계에서 천애고아로 태어난 덕에, 애꿎은 부모의 사지육신이 비틀릴 일은 없을 듯했다.
그때.
[ 반드시 인형으로 나와 여생을 함께할······거야———!!! ]
연신 허공에 욕과 저주를 써 내려가던 글자들이 갑자기 내게 달려들었다. 정크타운 근처에서 잘생긴 시체 공장장을 죽였을 때처럼. 기이한 마력이 끈적한 살기를 풍겨내며 들러붙었다.
하지만.
"더럽고, 시끄럽다."
화아악—
노선을 틀어 정신을 파고들려는 뷔에탕의 기이한 마력은 내 손짓 한번에 그대로 박살이 났다.
전 십이제가 살심을 담아 남겨둔 마력의 편린과 조각들은, 달려들던 투기가 무색하게도 쉽게 흩어진 것이다. 그동안 나도 괄목상대한 성취를 이루었기에, 앞으로는 저런 사후 저주에 똑같이 당할 일은 없을 듯했다.
더해서, 저 아줌마와 여생을 함께할 일도 없을 테지.
* * *
'지나간 아줌마는 잊자.'
무너져내린 기암괴석 위.
뷔에탕의 저주를 떨쳐낸 레반은, 지나간 비무를 다시 한번 복기하고 있었다.
499번의 비무가 있었다.
백면서생, 독고웅백과의 400번째 비무부터 레반은 1초식 만에 병신이 되어 화산의 경내를 뒹굴었다. 하루 종일 찢어진 몸을 초인적인 재생력과 정신력으로 기워냈고, 다시 덤벼 1초식만에 병신이 되었다. 그러니 백번의 비무간 막상 초식을 나눈 시간은 몇 분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400번째 비무를 시작할 때와는 달리 시간이 꽤나 지나있었다. 적어도 백일은 훌쩍 넘겼고, 한 4개월 정도가 지났다. 세월은 실로 쏜살같아서 무언가에 깊이 빠져들면 이리도 빠르게 지나가곤 한다.
말인즉, 독고웅백과 무려 네 달 가까이 한 초식만을 가지고 비무를 나눈 것이고. 그 긴 시간동안 9레벨 끝자락 절대고수의 초식을 파훼하려 깊이 사색하고 노력을 기울였다는 말이 된다.
레반은 그 기간동안 얻은 성취가 꽤 마음에 들었다.
"이랬던 적이, 스승 말고 또 있었던가."
무(武)의 이치에 관해 이리 오래, 깊이 사색한 것은 정신이 화경에 오르고 난 뒤로 처음이었다. 게다가 비무가 잘못되었을 때의 대가는 여지없이 목숨이었기에 백 일이 넘는 시간동안 수많은 고찰과 궁리를 해야만 했다.
현경의 경지에 오른 독고웅백이 레반과의 비무에서 어떤 깨달음을 구했는지, 지금의 그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독고웅백의 모든 공부가 담긴 일 초식을 파훼하려는 무수한 노력 끝에, 확연한 단초를 얻어 경지가 깊어진 참이라 그것에만 신경을 쏟았다. 정신적으로 화경의 초입께 어딘가에서 머물던 레반의 무학은 눈부시게 발전하여, 전보다 한 발짝 더 높은 반열에 둥지를 틀었다.
무려 화경이라는 초월적인 반열에서, 무학의 근원과 뿌리가 더 깊어졌다는 말이다. 틀어진 정기신의 균형 역시 성과를 이루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남궁세가에서 허접한 제왕검형을 쓰다가 죽었던 8레벨 끝자락의 검수 남궁진. 이제 그놈이 극성에 이른 창천무애검법만 쓴다고 해도 베어넘길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부족하나, 9레벨도 머지않았군.'
불현듯, 검을 뽑아 기운을 밀어 넣었다.
우우웅—
내공이 단전에 가득 차지 않았는데도, 초절정 극에 이른 무인만큼 검강을 더 자유로이 뽑아낼 수 있었다. 다르간트가 제작한 광선에는 내공의 낭비를 아껴주는 좋은 효과가 있으니, 실 전투에서도 크나큰 도움이 될 듯했다.
"내공도 당장 크게 부족하지는 않겠어."
현재 레반의 단전에는 일 갑자 하고도 반갑자를 더한 내공이 잠들어 있었다. 60년간 쉼 없이 내가공부를 해야 겨우 쌓는 양이 1갑자인데, 속옷 바람으로 세상에 뛰쳐나온지 2년 정도 만에 거의 백 년치의 내공을 얻은 것.
그것도 어지간한 심공으로 마구 들여놓은 탁한 내공이 아니라, 절세심법인 무선대지신공으로 정순한 기운만 걸러 쌓은 내공 백 년치다.
그런데. 그렇다고 하여 마구 거들먹댈 수도 없는 것이, 이 세상은 천고의 영약인 에센스를 무한정 추출하는 미친 세상이라 영약이 귀했던 중원무림처럼 토납한 내공의 양이 엄청나게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당장 베테랑 시체 사냥꾼인 사무라이 륭도, 절정 경지에 오르고도 한참 남아 흘러넘칠 양의 내공을 가지고 있었지 않은가.
출신 좋고, 부모가 돈 많으면 내공 정도는 돈으로도 얻을 수 있는 세상. 그걸 얼마나 훌륭한 무공과 깨달음으로 갈무리하느냐가 문제지.
무공에서의 성과뿐만 아니라 이제 마법마저도 5위계의 반열에 넉넉히 올라 왔다. 그렇기에 휴식기를 가지며 경지를 가다듬을 만도 하건만, 당장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또 레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종후표 그 놈이 제일 문제로군. 쓸만한 놈이라 버릴 수도 없고. 계륵이다. 계륵이야."
그것은 바로 대가리만 덜렁 남은 종후표.
신선 지망생과 백 번의 비무를 끝낸 탓에 병신같은 몸이 되었는데, 휴식은커녕 앞으로 해야 할 일처리부터 생각해야 한다니. 참으로 병신같은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지금 화산은 바쁘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화산의 역대 최고 기재이자, 무림계 후기지수 중 제일이라 평가받는 화령검절 청풍이 10레벨 경지에 오른 권제 독고웅백의 진전을 이어받았다.
독고웅백은 권(拳)을 쓰고 청풍이는 검(劍)을 쓰나, 녀석은 규격 외의 대단한 천재라 필시 자신에게 필요한 심득만 취할 수 있을 것이다. 독고웅백이 지닌 고유의 성정이나 기억이 같이 섞여들 수도 있는데, 구더기 무섭다고 장 못담그는 것은 아니니까.
······독고웅백같은 초월자의 편린을 구더기라고 표현하는 것도 좀 그렇군.
뿐만 아니라, 레반이 독고웅백과 경내의 기암괴석 위에서 비무를 벌이고 무학의 성취를 얻는 동안 라그나로크 수복전의 공적 분배가 마무리 되었다. 화산도 거기에 한 숟가락 얹었으니, 정신이 없을 것이다.
라그나로크를 수복한 연방은, 이제 8개 거대 도시의 연합이 되었다.
시체의 잔당 소탕마저 끝난 라그나로크 시티로 대형 인프라 관련 기업과 각종 기술자, 건설 기계, 노동으로 한탕 벌고 흥청망청 쓸 생각에 신난 생체기계들이 대거 몰려갔다던가?
인류는 뻗어나갈 땅이 없었을 뿐, 기술력은 좋으니 라그나로크의 땅을 몇 달 만에 갈아엎고 사람이 살아갈 만한 신도시를 만들어냈다.
대형 건설사를 보유한 기업들은 이미 입지 좋은 목을 받아놓고, 신도시 아파트 광고를 백만방도 포털에 때리는 지경이다.
[ 돌아온 신세계! 라그나로크 시티의 첫 프리미엄 주거 단지 『라그나로크 시범 혁신도시 에코월드 센트럴 퍼스트 스카이 메트로 더 프라임 로얄 포레온 1차 시티』 절찬리 분양중! ]
첫 삽도 안 떴는데 일단 분양부터 때려버리는 건설사들의 악독함에 혀를 내둘렀다. 저기도 사람 여럿 죽어 나갈 것이다.
아무튼 도급순위 높은 초대형 건설사들이 벌써 선분양을 시도할 정도로, 사람이 아주 못살 곳은 아니긴 한가보다.
인류의 터전이 하나 더 늘어난 것이라 주민들의 분위기도 나쁘지 않다. 도시가 초고밀집에 포화 상태라 다 같이 쪄죽기 전이었는데, 라그나로크로의 이주가 시작되고 있으니 숨을 좀 돌릴 수 있을 거다.
그런데 의외의 점이 있었다.
[ 잘 지내? 각 편제끼리 전공에 대해 협의 다 끝났어. ]
로라 마르티네즈가 보낸 전령에게 듣기로, 레반에게 라그나로크 시티의 한 필지를 뚝 떼어 주기로 했단다. 심지어 중심부에 세워질 관청과 고급 주택가로 낙점된 핵심지 옆에 붙어있는 노른자 땅이란다.
비무에 빠졌던 동안, 정말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괜찮긴 한데."
뭐 당장 팔아서 현금화를 해도 내공 증진에 도움이 될만한 에센스는 살 수 없을 것이라 묻어두기로 했다. 후에 레나에게 권리를 양도해서 알아서 굴리게 내버려 두는 것도 괜찮겠지. 일단은 신경 쓰지 말자.
부스럭-
"대강 정리는 끝났나? 장문인께서 마음이 깨끗이 정리되면 천풍곡으로 올라오라 하셨다."
슬슬 상념이 끝나가자 누군가 다가왔다. 그는 한쪽 팔이 없는 사내. 수복전의 12조 조장이자 지금은 외팔이 검수인 천무연이었다.
레반은 이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이제야 물었다.
"어째서 사이버웨어 팔을 새로 달지 않았지? 8레벨의 검수라면 문파의 중역인데, 화산에 크레딧이 없는 것은 아닐 테고."
"그간 팔을 잃어볼 기회가 없었으니, 외팔인 게 수련에 도움이 될까 해서 달지 않았었지."
"12조장께서는 라그나로크에서의 일로 싸움이 두려워졌던 모양이야."
"······."
천무연이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것도 맞다. 매화검수도 결국은 사람이니,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을 보고는 나의 무력함을 절실히 느꼈다."
천무연은 머리칼이 짧고 선이 굵어 사내다운 인상인데, 겁을 집어먹었노라 순순히 인정해 버리니 그 모습이 특이했다. 레반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라그나로크에서 13조장 슬레모킨을 구하러 갈 때, 12조장인 천무연이 레반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슬레모킨은 죽은 목숨이었을 테지.
해서 레반은 호의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그룹 쪽 사업일을 맡을 건가? 무인으로 대가리가 굳어서 회계나 영업같은 건 힘들지 않나."
"아니다."
그러자 천무연은 호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본문에 있는 화산의 모두가 하오문주께 산산이 깨지고도 계속 달려들던 네 모습을 똑똑히 보았는데, 팔 하나 잘렸다고 나 혼자 도망치기에는 새삼 부끄럽지 않겠나."
그 대답에 레반도 호쾌하게 웃었다.
"그런가? 잘된 일이로군."
"어서 천풍곡으로 올라가 봐. 우리는 기회가 있다면 나중에 또 보겠지."
"가장 값비싼 사이버웨어를 달아라. 돈 부족하면 연락하고."
"······."
레반이 일어나 유령과도 같은 신법으로 허공을 주파해 사라지자, 기암괴석 위에 홀로 남은 천무연이 짐짓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보면, 내가 조원이 되어 있겠군. 한쪽 팔이 없어 포권을 나누지 못함이 아쉬울 뿐이구나."
그렇게, 레반이 화산을 떠날 시점이 다가왔다.
청풍 하나만 보고 화산에 들렀는데, 이제는 녀석이 독고웅백의 심득을 소화시키기 위해 기약 없는 폐관에 들어갔으니 더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
천무연이 말한 대로, 독고웅백과의 비무로 부담스러운 화산 문도들의 시선들이 따라붙어서 더욱 부담스러웠다. 때마침 독고웅백이 근처에 도사리고 있던 뷔에탕을 해결해주어 나가려면 지금 나가야 했다.
천풍곡의 처소, 화산의 장문인이 말했다.
"오래 잡아둘 생각은 없었네만, 더 쉬다 가지 않아도 괜찮겠는가?"
"화산의 은혜에 그저 감사드립니다."
"···음."
레반이 떠날 마음을 단단히 먹은듯 하자, 장문인 선천자는 붙잡는 대신 아쉬운 기색을 비쳤다.
그래도 선천자는 레반덕에 화산의 보물인 청풍에게 거대한 득이 떨어졌으니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고 싶어했다. 결국 그는 품속에서 작은 패 하나를 꺼내놓았다.
"가져가라."
"이게 무엇입니까?"
"대화산의 장문이 보증하는 보은패다. 이 도시에는 정신나간 고수들이 많다. 허나 감히 화산을 상대로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자는 없을 것이야."
"예, 요긴히 잘 쓰겠습니다."
보은패를 챙긴 레반은 장문 앞에 포권지례를 올렸다.
전생에서는 자신을 죽였던 화산이, 이번의 생에서는 살리고 싶어하는가.
실로 요상한 인연이라,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 * *
루돌프놈, 아힘사, 종후표.
나는 셋과 함께 화산을 떠나왔다.
"형님, 가기 전에 장벽 바깥에서 식사를 좀······."
"시간 없어."
"하······시간이 어떻게 맨날 없지?"
이제 나의 목적지는 수도자들의 가문인 북경의 진주언가(辰州言家)였다. 청풍이 폐관에 들기 전 장문인에게 부탁했고, 장문인은 청풍의 청을 들어주었다. 덕분에 북경에서도 알려져있지 않은 진주언가까지 가는 길과, 화산 장문의 보은패를 비롯한 화산 장로들의 보증서까지 넉넉히 받아올 수 있었다.
"죽을 것 같구나. 배가···나도 배가 고프다! 계속 이런 취급이라면 차라리 죽. 죽이라도 줘라!"
백리뇌부 종후표의 대가리는 아직도 잘 있었다. 가만히 요기를 모아 재생할 때마다 배가 너무도 고픈 루돌프놈이 반쯤 잡아먹기를 반복했으므로, 적당히 힘없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진주언가는 수르트 장벽의 진법을 담당했을 정도로 그 실력이 우수한 수도자 가문. 언가의 수도자하면 진법과 생강시를 비롯한 주술에 통달한 기인들로 여겨진다. 신묘한 힘인 법력을 사용하며 생강시도 제작해온 자들이니, 시체인 종후표의 거취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보통 속세와 단절되어있는 삶을 산다. 바깥으로 나와 돌아다니는 언 선생같은 경우가 특이했던 것이지. 조금 걱정은 되었으나 어차피 가기로 마음먹은 것,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어느덧.
"여기가 남북의 경계인가."
우리는 남경과 북경을 나누는 지역에 도착했다.
폭이 수십 미터는 될 법한 대로 중간에, 하나의 기다란 줄이 가로로 그어져 있고, 그 양 옆으로 거대하고 화려한 전각들이 수백 개나 늘어서 있다.
눈을 사로잡는 건물들은 대로 건너편과 경쟁이라도 하는 양 서로의 불빛을 뽐내기에 바빴다. 앞에서 호객꾼으로 보이는 이들이 대로의 경계까지 나와서 상대편 호객꾼에게 걸걸한 욕설과 침을 뱉고 있었다.
홍등 안에 넣어둔 종후표의 대가리가 말했다.
"이곳은 남경과 북경의 경계가 되는 도시로군. 저 빛나는 중간선을 밟지 마라. 왈패들이 남경과 북경 어느쪽 편이냐고 반드시 시비를 걸어올 테니."
"등신같은 건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군."
"무림은 원래 이해할 수 없다."
"그건 맞지."
무림계는 분열과 뒤통수 치기가 취미라, 마법계뿐 아니라 저들끼리도 남쪽과 북쪽 두 덩이로 나뉘어 자존심 싸움을 한다. 뭐 아군의 청백전 같은 것이라 그다지 심각한 사안은 아니지만, 고향이 어디냐며 남북경 출신을 따져 박대하는 이들도 없지 않다 들었다.
화산과 남궁은 남경에 있었기에, 수르트 시티 북경은 또 생전 처음이었다. 오늘은 시간이 많이 늦었으므로 언가까지 주파할 여력이 없기에, 우리는 남경쪽의 커다란 객잔에서 하룻밤을 묵고 가기로 했다.
그리고.
"!'
그 커다란 객잔 로비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귀인을 만났다. 객잔의 로비에 들어가자마자 웬 소형 진법이 걸려있어 그만 본능적으로 흩어버린 것인데, 그 안에서 누군가와 바둑에 열중하고 있는 한 사내가 보였다.
한 손에는 커다란 부리또를 들고서는 말이다.
두루마기 통을 둘둘 말아 지고 다니는 사내.
저자를 내가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과정이야 어쨌건—
[ 에라, 내가 이딴 촌구석에 천년만년 있을줄 알아? 귀찮게 들러붙지 말고 나가라 이 돌연변이놈아. ]
'언 선생?'
그는 내 목숨을 두 번이나 살려주었던 언 선생이 확실했다.
발두르같은 촌구석에 천년만년 처박혀있을 생각이 없다던 언 선생. 내게 상계 법부적을 내어주고 쫓아버린 그 젊은 수도자를, 실로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마주친 것이다.
"멈춰라 괴이한 놈들. 여길 어떻게 기어들어 왔느냐."
"?"
헌데 언 선생은 나를 알아보는 기색이 아니었다. 바둑판에 눈을 고정하고 있으면서도 법력을 일으켜 이쪽을 경계했다. 발두르에 있을 때와는 나의 외형과 기운이 아예 달라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게다가 시체인 종후표의 대가리까지 들고 있었으니, 언 선생은 이리 가까운 거리에서 그걸 몰라볼 사람이 아니었다.
댕—
그는 품에서 작은 종을 하나 꺼내 들고는 즉시 법력을 일으켰다. 종소리를 따라 흩어냈던 진법이 다시 강력히 세워지고, 강대한 법력이 순식간에 공간을 장악했다. 나도 예전과는 보는 눈이 달라졌기에 알 수 있었다. 언 선생은 수도자 중에서도 법력이 심후한 편일 것이다.
"터져죽기 싫다면 그 길로 다시 나가라."
더해서, 언 선생과 바둑을 두고 있던 자도 아는 얼굴이었다. 딱 봐도 냄새가 고약한 놈이 좋은 건틀릿을 끼고 있었는데, 저놈은 나를 죽일 뻔했던 거지가 확실했다.
이 세계에서 나를 첫 심마에 들게 했던 놈.
"개방의 초삼이도 같이 있었구나."
"······어?"
"잠시만. 네놈 혹시······."
그쯤 되어 언 선생도 무언가 이상했는지 나를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얼마간 그러더니, 내가 몇 년전 개방 팔 결개인 풍령개의 겁박에 못이겨 부적을 쥐어주었던 그놈이라는 것을 알고는 결국 화들짝 놀랐다.
"네가 정말 그놈이라고?"
"예."
"내 피같은 상계법부적을 강탈해간 무뢰배 놈이 맞구나! 허어! 불과 2년쯤 된 일인데, 그간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꽤 많은 일들이 있었지요. 그때 찾아가기로 했었는데, 여기서라도 보았으니 인사부터 올리겠습니다."
"됐으니까 앉아라. 담소나 나누자."
그리고 우리는 객잔로비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종후표의 일 관련으로 진주언가로 가는 중이라 하니, 언 선생이 한다는 말은 이랬다.
"나도 본가인 진주언가로 향하는 중이다."
"마침 잘 되었군요. 같이 갑시다."
나는 진주언가 출신인 언 선생을 다시 만나 크게 운이 좋다고 여겼다. 악연이든 인연이든 연은 있으니, 화산이 보여준 호의와 합쳐 조금이라도 일을 더 잘 풀어나갈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묘한 표정의 언 선생이 고개를 휘휘 젓고는 말했다.
"북경의 언가 본산은 현재 봉문(封門)했을 것이야."
#114화. 진주언가 2
#114화.
"북경의 언가 본산은 현재 봉문(封門)했을 것이다."
봉문(封門).
세가의 대문을 단단히 걸어 잠구었다는 거다.
그런데 진주언가는 원래가 속세와 교류하지 않고 세상과 동떨어진, 일상이 봉문 상태인 곳 아니던가.
평범한 봉문이 아닌가보군.
언 선생은 그런 나의 의문을 눈치채곤 말했다.
"진주언가는 수도계의 종주로써 오롯이 존재한다. 무림계가 워낙 거대해 그들과 함께 통틀어 묶일 뿐이지, 수도계는 수도계만의 방식이 있다. 헌데 몇몇 고강한 수도자가 큰 말썽을 일으키는 바람에 봉문했다."
나는 수도자들의 세계를 깊고 세세히 알지는 못하므로 언 선생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속세와 관련을 두지 않지만 수르트 시티의 커다란 장벽 전체에 광역진법을 칠 정도로 무림계의 중요한 한 축이라, 무시해도 될 정도가 아니다.
"고강한 수도자가 무슨 말썽을 일으켰습니까?"
"수도계의 경지는 본래 연기경(炼气境), 축기경(築基境), 결단경(结丹境), 원영경(元婴境)으로 나뉜다. 연방의 레벨로 치환하자면 연기경은 3레벨, 축기경은 6레벨, 결단경은 8레벨까지. 원영경은 9~10레벨, 그리고 화신경이란 경지도 있는데, 비현실적인 수준이라 알 필요 없고 아무튼······."
와작.
언 선생은 부리또를 씹어먹으며 별 대단한 얘기는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몇 결단경과 원영경에 오른 수도자들이 '시체가 되는 것' 을 현세에 존채지도 않는 화신경으로 가는 통로이자, 중경계로 가는 하나의 도(道)로 낙점했다. 변절하면 인간의 수명을 뛰어넘을 수 있으니, 생과 수련이 무한할 것 아니냐면서."
나는 그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들었다.
무림계와 마법계의 상황과 큰 틀에서 다르지 않다.
결국에는 더 높은 경지를 보기 위해 변절을 하겠다는 의견들이 수도계 언가 내에서 오고고 있다는 것. 높은 경지의 수도자들이 목표로 잡은 천계의 신선이 되기 위해 인간성을 버리고 변절하자며 다른 수도자들을 선동하고 있다는 말이다.
"시체가 되면 수련 역시도 무한히 할 수 있다 말하겠군요."
"바로 그거다. 언가를 포함한 수도계는 애초부터 속세에 별 관심이 없는 꼴통이자 촌놈들이라 인간의 수명에 만족을 못하는 놈들이 슬슬 기어나오고 있다는 말야. 솔직히 변절하면 수명이 인간과는 비교도 안 되잖아."
"그래서 봉문한 진주언가 내부도 시끄럽다는 겁니까?"
언 선생이 그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진저리가 쳐진다는 듯 머리를 도리도리 저었다. 어찌나 빨리 젓던지 마치 헬기의 프로펠러를 연상케했다.
"내가 본산에서 출가할 때만 해도 정신이 똑바로 박혀있는 노인들이 있어서 괜찮은 수준이었다. 작은 소요쯤은 그들의 힘으로 충분히 막았어. 몰래 변절을 준비하다 쥐도새도 모르게 죽은 결단경 수도자도 있었지."
"하면, 그 노인들이 죽은 뒤로 난리가 났겠군요."
언 선생이 긍정했다.
"맥락은 잘 짚는구나. 대단한 수도자도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이 정해진 수명은 있다. 탈태환골이나 반로환동을 해도 몇십 년 정도를 늘릴 뿐 정해진 하늘의 뜻은 크게 역행하지 못해. 그런데 얼마 전에 원영경에 이른 노인 두 명이 한날한시에 세상을 떠났다. 살만큼 산 수도계의 거물들이었지. 그들이 타계한 이후, 문제가 커졌다."
언 선생은 부리또를 와작와작 씹으며 말세다 말세야를 반복했다. 그런데 내가 잠시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부리또를 어느새 다 해치운 언 선생이 바둑판에 백돌을 딱 소리 나게 착수했다.
"자, 이 판은 끝났구나."
"어!"
흑돌은 집은 왕초삼의 대마가 죄다 잡히는 형국이었다.
그때, 언 선생이 죽어버린 왕초삼의 대마를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짓나 싶더니 대뜸 바둑판을 엎어버렸다. 동그란 흑백의 바둑알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아이고! 왜 이러십니까 선생님."
"난 판이 끝나 기분이 좋은데, 화나면 네 사부한테 가서 이르던지. 으하하!"
와장창!
그래, 저 좆같은 부리또.
분명 그때도, 빌어먹을 부리또만 먹으면 사람의 성격이 종잡을 수 없고 희한하게 바뀌었다. 예측할 수 없는 다른 자아가 언 선생의 속내에서 기어나오는 걸지도 몰랐다. 나는 갑자기 언 선생이 지랄할 때를 대비하여 공력을 슬쩍 끌어올렸다.
가벼웠던 언 선생의 태도가 돌변했다.
"판의 축인 대마가 잡히면 바둑판을 엎어버리지 않는 이상, 도리가 없는 법 아니겠냐."
"······."
그렇게 건틀릿을 낀 왕초삼이 힘겹게 바둑알을 하나하나 줍는 사이, 나는 언 선생과 눈이 제대로 마주쳤다. 즉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눈동자. 강바닥처럼 극히 혼탁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심유한 면이 있다.
저만한 인물이 어찌 정신이 나가있다는 말인가.
나는 잡념을 지우고는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언 선생께서는 어쩌실 생각입니까. 속세로 나왔는데도 다시 봉문중인 본가로 향하는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걱정하지 마라! 수도계 놈들이 아니더라도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거다! 나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시끄럽다."
"······."
진주언가로 가서 방법을 구하지 못하면 마침내 대갈통이 박살날까 기겁한 종후표가 느닷없이 끼어들기에, 입을 닫으라고 일갈했다. 종후표는 싸해진 분위기를 단박에 느끼고는 입을 딱 닫고 끼어들지 않았다.
"언 선생,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왜 봉문한 본가로 향하십니까."
나는 어찌 데려갈 방법이 없어진 백리뇌부 종후표를 그냥 죽여버리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서 언 선생의 대답을 기다렸다.
언 선생은 의자에 털썩 기대더니 입을 열었다. 부리또를 먹었는데도 생각보다는 멀쩡했다. 다행이었다.
"에휴, 뭐 말한다고 해도 네놈이 알겠느냐."
"어쩌면 운이 좋아 알 수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
꽤 강력한 공력을 일으킨 내가 조금 진중하게 질문하니, 언 선생도 여기까지 말한 김에 입을 닫아버리기에는 아쉬웠는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나는 결단경 십이성을 이룬 수도자다."
법력이 심후한 이유가 있었군.
"9레벨 이상인 원영으로 가는 길목에 있으시군요."
"내가 원영경에 오르면, 변절을 통해 화신경이니 중경계니 헛소리 지껄이는 수도계 노친네들을 싹 다 죽여버릴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지닌 오성에는 한계가 있는 탓에 제정신을 허무에 바쳐 공법의 수준을 높여왔다. 아마 원영경에 오르면 지금보다도 더 정신이 오락가락할 거라 고민 중이다."
"······."
싹 다 죽인다느니 하는 소리가 나오기에 조금 경계심을 높였다.
언 선생은 과거에 나를 살려준 은인이면서도, 제정신이 아닐 때가 있어 마음만 먹으면 혈겁을 펼칠 수 있는 수준의 강자. 진법이나 법부적, 법기에 별다른 지식이 없다면 죽을 때까지 나오지도 못하고 굶어 죽는다.
듣자하니 익혔다는 공법도 정상적인 공법이 아닐 것이다. 무공으로 따지자면 제정신을 잃어가는 대신 성취와 성장이 극히 빠른 마공이라고 할까.
여튼 나는 마침 떠오른 것이 있어, 살기등등해지는 대화의 방향을 돌리려 물었다.
"그러고 보니, 언 선생께서는 연방에서 일했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연방에 투신해 변해가는 언가를 한 번 구해보려했다. 변절을 반대하는 노친네들이 죽고 나면, 수도계에서는 자정작용이 힘들 거라 예상했거든."
"실패했습니까."
언 선생은 콧잔등을 긁으며 한숨을 쉬었다.
"남궁의 전대가주도 변절하네 마네 지랄하다 콱 뒤져버린 세상에, 진법에 틀어박힌 수도계에 신경이나 쓰겠나? 심지어 당장 변절을 한 것도 아니고 얘기나 나오는 수준으로 알 텐데 말이지."
"남궁의 전대가주가 죽은 건 어찌 아셨습니까?"
"어찌 알긴 뭘 어떻게 알아? 네 눈에는 저 거지놈이 무슨 꿔다놓은 맹꽁이로 보이는 모양이로구나."
언 선생은 왕초삼을 가리키며 어이없어했다. 왕초삼은 두꺼운 강철 건틀릿을 낀 손으로 바둑돌이나 줍는 등신이라 신경조차 쓰지 않았는데, 신기하게 개방에서도 나름 제 입지가 있는 놈이었지.
이번에는 언 선생이 화제를 돌려 물었다.
"저 시체놈은 출신이 어디냐."
"연방의 정치인 출신인데, 아는 것이 워낙 많고 지식이 방대해 데리고다닐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연방의 정치인? 이름이 뭔데?"
"종후표요."
"종후표? 연방 의원 백리뇌부 종후표?"
"언 선생도 아십니까?"
"그야 알다마다."
"?"
"비켜봐라. 내가 그자와 긴히 할 얘기가 있다."
촤르륵—
"?"
언 선생은 느닷없이 다가오더니, 등 안에서 종후표의 대가리를 불쑥 꺼냈다. 잠시 뒤, 그는 종후표의 주둥이를 벌려 바둑알을 한가득 집어넣고는 다시 입을 닫게했다.
그리고는 놀랍게도······.
"크악!"
연신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수도자가 저리 폭력을 쓰는 건 처음 보아서 꽤 재미있게 구경했다. 종후표는 지친 와중에도 혀를 내밀어 대항하려 했으나, 물지 못하게 넣어둔 입 안의 바둑돌과 언 선생이 법부적까지 손에 꽉 쥐고있는 탓에 혀를 내밀지 못했다.
언 선생은 아주 철저한 사내였다.
결국, 종후표의 얼굴은 몰라보게 피떡이 되었다.
나는 건수를 제대로 잡았으니, 언 선생이 연성한 상계 법부적을 뜯어보려는 목적으로 짐짓 과장되게 화를 냈다.
"아니, 언 선생이라도 이 무슨 괴상망측한 짓입니까. 시체 기분 나쁘게 머리를 왜 때려요."
"그건 저자가 나보다도 더 잘 알 것이야."
"짧게 해명해라."
내가 고개를 돌려 묻자, 코피를 철철 흘리던 종후표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솔직했다.
"수도계에 좋지 못한 법안을 발의했다. 힘도 있는 사람들이 속세를 떠나 진법 속에만 박혀 있으니까, 세상 밖으로 나와보라는 뜻에서 강제적으로 주기적인 시체 사냥이나 장벽 보수등의 할당을 내렸다. 다만, 나 혼자 그리한 게 아니고 동조하는 의원들도 많았다."
줄여 말해 수도계를 탄압하는데 앞장섰다는 얘기.
곧장 광선의 검집에 손이 갔다. 나는 진주언가의 일도 이렇게 되었겠다, 계륵인 종후표를 그냥 죽이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언 선생은 또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같이 흐름을 끊었다.
"아니다. 저놈은 쓸모가 있으니 죽이지마라. 이래저래 아는 게 많은 놈은 맞다. 네게 얘기한 내용은 아마 알고있는 십분의 일도 안 될 것이야."
"그런데요."
우리가 그러고 있는 도중에, 조용히 있던 루돌프놈이 갑작스레 입을 열었다. 마치 자기가 새로운 방법을 발견해 냈다는 듯 의기양양한 목소리였다.
"누가 변절한다고 하면, 칠좌가 나서서 처리하면 되는거 아닙니까?"
"······."
루돌프의 실로 뜬금없는 개소리에 여러 곳에서 한심한 시선들이 꽂혀들었다.
"왜, 왜요. 왜 그렇게 봐요."
"칠좌가 그런걸 뭐하러 힘써가며 도와주는데?"
"당연히 인류가 살아남는데 도움이 되죠. 존나 강하니까 안전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잖아요."
그러자 나 대신 종후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까짓 게 뭔데."
"···?"
"네놈도 당장 발벗고 나서서 자원봉사도 하고, 길거리에 있는 쓰레기도 줍고 흑도도 잡아 죽이고 기부도 하면 주민들이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될텐데. 안전하고 말이야. 하는 김에 강력 범죄자도 좀 잡아넣지 그래. 왜 안하고 여기에 있냐."
"아니, 그거랑 그거는 다르지 않나······."
내가 말했다.
"칠좌가 네 일처리 해주는 자원봉사자냐? 쪼르르 달려가서 해 달라면 옳타구나 해주게."
"······."
"돌프야. 너는 저기 옆객잔에 있는 호객꾼 양아치들이 우르르 기어와서, 너더러 막춤 한번 춰달라고 하면 좋다고 춰줄거니."
"술 좀 마시고 존나게 신나있는 상태면요?"
"지랄. 몰래 쫓아가서 퍽치기나 하겠지."
"······."
내가 주먹을 슬쩍 들어올리자 루돌프놈이 자동반사로 입을 닫았다. 드디어 개소리가 멈추니 귓구멍이 편해졌다.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칠좌가 무슨 해달란 대로 다 해주는 자원봉사자도 아니고, 세상 편하게 양아치짓만 하면서 살아온 놈이라 현실감각이 저리도 없다.
나는 갑작스레 짜증이 도져서 버럭 화를 냈다. 사실 진주언가가 봉문한 탓에 일이 어그러져 짜증이 난 걸 수도 있지만, 그냥 짜증을 냈다.
"칠좌한테 말한다고 다 들어줄 거면 새끼야, 내가 지금 진주언가를 왜 찾아가는 거니? 그 인간이 산타 할아버지야?"
"······산타 할아버지요?"
"그냥 종후표 이놈 잡아서 칠좌한테 고문해달라 해가지고 그냥 다 불게 만들고 쓸모없어지면 쳐죽여버리면 되지. 그래 안 그래."
내 답답한 물음에, 루돌프와 종후표가 동시에 기겁했다.
"왜, 왜 그러세요. 알았어요. 진정하세요 형님."
"진정해라. 지금 너무 흥분했다. 마음을 가라앉혀. 저 새끼는 원래 등신이다."
"돌프야, 연방 집행관은 왜 필요하니. 응? 말 안들으면 칠좌한테 일러바쳐서 처리 해달라 부탁하면 되는데. 라그나로크 수복전에서는 뭐하러 십이제가 지휘했어. 씨팔 거 삼존칠좌 열 명 불러다가 도시좀 깨끗이 치우라고 시키지."
"······아, 아니 그냥 해본 말인데 그러시네."
루돌프놈이 한심한 표정으로 입을 삐쭉 내밀더니 '모르면 좀 알려주면 되지 괜히 화를 낸다' 는 말과 함께 뒤로 물러섰다.
그 뚱한 표정이 굉장히 거슬리는 바람에 나는 황망한 눈을 떼지 못했다. 보면 볼수록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신경질이 솟구쳤다.
사람이 어찌 저렇게 꼴보기 싫을 수 있는가.
아. 그것은 내가 차차 풀어갈 숙제겠구나.
"이제는 사람이 싫구나."
"다, 다가오지 마시고 거기서 얘기하세요."
나는 가슴이 턱 막히는 게 갑자기 정신병이 도질 뻔해서 다급히 폭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올라오는 분노를 잠재웠다. 루돌프놈은 두들겨 맞을수록 외공의 성취가 늘어가니, 폭력 행사보다는 수련을 돕는다는 표현이 맞겠다.
그걸 지켜보던 종후표의 대가리는 한숨을 돌렸다.
"···후우, 대가리가 꽃밭인 놈때문에 화가 옮을 뻔했군."
* * *
"바둑돌 다 주웠습니다. 선생."
시간이 조금 지났다.
소란했던 상황이 대강 진정되자, 언 선생은 왕초삼을 무시하고는 다시 입을 열 준비를 했다. 그의 눈빛은 아까보다도 더 심유해졌다. 나는 조용히 언 선생의 말을 경청할 자세를 갖추었다.
이윽고, 언 선생이 말문을 열었다.
"나는 천재다."
"···오성이 부족해 정신을 바쳐 공법을 익히셨다 했으면서 어떻게 천재가 됩니까? 재능이 대단한 수도자들은 자신의 공법을 창시한다던데요."
바둑돌을 다 주운 왕초삼이 질렸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놈은 더러운 산발에다 냄새나는 모양새로 정크타운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달라진 거라곤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한 담담한 눈빛 뿐이었다.
와작.
아무튼 언 선생은 또 어디서 났는지, 부리또를 씹어먹으며 입을 열었다. 조금 오락가락해 보이는 상태였으나, 서로 말이 안통할 정도는 아니었다.
"초삼아, 남이 닦아놓은 길을 빠르게 걷는 사람은 천재가 아니냐?"
"그거야······."
"자신의 길을 새로이 개척해야만 천재인가? 그렇다면 평생을 바쳐 절세공법을 만들고 죽은 연기경의 수도자가 천재야, 아니면 그 절세공법을 받아 갈고닦아서 화신경을 이룬 수도자가 천재야. 초삼이 네 눈에는 둘 중 누가 더 천재로 보이더냐? 십이제의 수좌인 무당의 진공진인이 천재냐. 아니면 무당의 무공을 창안한 시조가 천재냐. 과연 둘 중 우위를 가릴 수 있겠느냐. 무당의 시조는 진공진인보다 필시 무위가 약했을 것인데?"
"······."
"나는 고리타분해서 본래의 것이나 지키고 익히는 천재고, 전대의 수도자들이 닦아놓은 길을 빠르게 걷는 천재다. 그래서 신세계니 중경계니 헛소리하며 변절하자는 수도자 놈들을 이참에 싹 치우고, 본래의 수도계로 회귀시킬 생각이다. 본래회귀하고 숨어있는 수도자들을 세상에 끄집어 내놓을 거다. 그래야 세상이 돌아간다. 나는 수도자들의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내 정신까지 공허에 버렸다."
그래서 진주언가를 치러 가는가.
본심, 저게 언 선생의 본심이로군.
언 선생은 부리또를 먹으면 오락가락 횡설수설하는 사람이지만, 가끔 머리가 탁 트이게 하는 말재주가 있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언 선생이 한 말을 되감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내게 오늘 하늘의 운이 따르나 보겠다."
언 선생은 불현듯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고개를 돌려 언 선생의 두루마기 통을 보았다. 아주 빵빵한 것이 당장이라도 터지기 직전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언 선생이 쳐둔 진법이 씻은듯 사라졌고 조용했던 객잔의 로비가 언 선생의 음성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출가를 파하고 언가로 회귀한 나는, 진주언가의 봉문진을 부수고 들어가 변절을 주장하는 원영경의 수도자 둘을 죽일 것이다. 한 명은 나의 아비이고, 또다른 한 명은 나의 어미가 될 것이야. 그게 오늘이구나! 이제 그만 먹고 일어나라."
심후한 법력이 실린 언 선생의 목소리가 울리자.
옆에서 그를 보좌하던 왕초삼 놈도 기다렸다는 듯 따라 일어났다. 언 선생은 이후 유유히 걸어 객잔의 로비 밖으로 나갔는데, 수백 채가 길게 늘어진 남경쪽의 객잔에서 웬 거지들이 배를 두드리며 우르르—몰려나왔다. 게다가 거지들 중에는 기척을 죽이고 있던 걸개도 보였다.
그 기백이 대단한 젊은 행색의 사내.
왕초삼의 스승이자 개방원로 풍령개(風鈴丐).
개방의 장인 용두방주와도 맞먹는 거물이자, 발두르에서 언 선생과 바둑을 나누며 투닥대던 벗까지 있는 걸 보니, 보통 큰 행사가 아니었다.
호객꾼들은 남경 북경간의 무슨 세력전이라도 펼쳐지는 줄 알았는지, 다급히 줄행랑을 쳤다.
하오문주인 독고웅백과의 비무 뒤에 경쟁사인 개방도를 이리도 많이 보다니. 세상은 참 신기하게 돌아간다. 게다가 변절을 주장한다는 원영경의 수도자가 언 선생의 부모였다는 말인가.
"······."
진주언가의 출가자인 언 선생은, 오늘 개방까지 끌어들여 진주언가의 봉문을 뜯어버리고 문에서 변절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혈겁을 펼치려 마음을 먹은 것이다. 알았다면 수도계에서 난리가 날 것인데, 개방과 한 편을 먹었으니 정보 통제까지 하고 있을 터.
눈앞에서 물 흐르듯 돌아가는 상황을 유심히 주시하고 있던 나는 문득, 그 시절의 언 선생이 발두르같은 촌구석에 숨어 사부작사부작 무얼 하고 있었는지 지금와서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나는 전각 밖으로 나온 언 선생에게 물었다.
"허면 발두르 촌구석에서 풍령개 선배에게 법기를 전달받은 것도, 나이 지긋한 개방도들이 자꾸 찾아와 바둑을 둔 것도. 선생의 본가인 언가의 도모를 준비하기 위함이었습니까?"
언 선생이 웃으며 답했다.
"너 기억하는구나. 기이한 놈아! 나처럼 속에 다른 놈이 들어가있는 것 같은데, 다른 놈은 아니란 말이지. 이상하고 기이한 놈. 으하하!"
"하하하!"
그는 뜻모를 말과 함께 박장대소했고, 나도 가만히 있기는 그래서 같이 박장대소했다. 하하하 웃는 소리가 전각의 처마 밑을 맴돌았다.
한참 웃던 내가 언 선생에게 물었다. 나는 이전 발두르에서 법부적을 구걸하던 사내도 아니었고, 왕초삼을 미끼삼아 목숨을 구하려던 사내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와 다른 사내로서 넌지시 물었다.
"선생께서는 무엇하러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언 선생은 어떤 부적을 휘갈겨 쓰며 답했다.
"나는 제정신을 버렸지만, 다른 수도자들은 제정신을 차렸으면 좋겠어서 그렇다. 그러면 좋겠다. 내가 좋으니 한다. 때문에 혈겁에 패륜까지 저지르려 한다."
"그렇습니까. 실로 그랬군요."
"기이한 놈아. 너는 도리(道理)가 무엇인 줄 아냐. 도리는 마땅히 앞뒤가 들어맞는 것이다. 허면 나는 태어나기를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앞뒤가 들어맞으려면 사람으로 살다 사람으로 죽어야지. 그게 나 언가가 말하는 도리이자 이치다."
그것은 언 선생이라는 한 수도자의 신념이었다.
나는 딱히 신념이랄 게 없는 편이라, 신념있는 사람이 부럽고 달가웠다. 신념이 곧게 선 사람은 주위를 감화시킨다. 발두르에서의 나약한 도망자였던 나라면, 감화될 여력도 없이 살아남기에 급급했겠지.
그런데 나는 그때보다는 일신상의 여력이 생겼으므로, 언 선생의 신념에 작은 숟가락을 얹고 싶어졌다.
헌데, 나보다 아힘사가 먼저 물었다.
"사람을 죽이는 병기로 탄생했으면, 마땅히 병기로 살다 죽어야합니까?"
언 선생의 신념과 도리는 아힘사의 존재와 상충한다. 아힘사는 전쟁병기로 태어났으나 전쟁병기로 살다 죽지 않을 것이다. 내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허나, 언 선생은 별스럽지 않게 답을 내려주었다.
"나의 부모는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요기를 가진 괴물이 되려 함에 나의 도리에 따라 사람으로 죽게 해주려 한다. 병기로 탄생한 이는 지금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느냐? 아직도 사람 죽이는 병기냐?"
"진정한 열반을 구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괴물로 세상에 나왔으나, 진정한 열반인지를 구하기 위해 병기의 길을 버렸구나. 그렇다면 이제 너 알아서 잘 살다 죽으면 될 일이지. 그걸 누구한테 물어야만 하나?"
"······."
그에게 물었던 아힘사가 조용해졌다.
언 선생은 상대방이 말을 곱씹게 하는 재주가 있다. 나는 아힘사의 뒤를 이어 개방도들을 이끌고 진주언가를 치러가려는 예비 패륜아, 언 선생에게 물었다.
"언 선생, 그런데 왜 하필 오늘입니까?"
내가 언 선생의 행사에 대해, 가장 궁금한 것이었다.
아무리 천운에 때가 맞아도 하필 이리 맞을 수가 있는가.
"오늘은 운수가 대통해서 두렵지 않은 날이라."
"설마 나와 연관이 있습니까?"
"응. 공교롭게도 끊겼던 인연을 다시 만났으니, 오래되어 묵은 인연은 끊기 좋은 날이지. 너는 그리 생각하지 않으냐?"
"나를 오늘 보지 않았다면 어찌했을 겁니까."
"결심이 설 때까지 여기서 거지들 밥이나 먹이며 일 년이고 이 년이고 이 객잔 근처에 죽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오늘 인연을 보았으니, 머리가 뜨끔하여 바로 진주언가로 향해 부모를 죽일 생각이라 진주언가로 향하는 중이라 했다. 바둑판도 그래서 엎었다."
나는 언 선생의 대답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 선생의 말은 여러번 곱씹고 되감아야해서 머리가 아팠다. 고개를 계속 끄덕이다보니, 두통이 조금 사라지는 듯해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그거 기억 나십니까? 전에 선생께서 나를 두 번 살려주었는데, 그럼 나는 몇 번을 살려주어야 선생이 말하는 도리에 맞겠습니까?"
나는, 지금 언 선생과 진주언가까지 동행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푸하하하!"
그러자 언 선생은 갑자기 앙천대소하더니 곧장 다시 내게 물어왔다.
"그때 쥐여준 상계 법부적이 그리 쓸만했냐?"
"쥐고 있어서 나쁠 건 없었습니다."
"으하하핫!"
언 선생의 호방한 웃음 뒤로······
경계선을 따라 늘어서 있는 남경의 전각들 앞.
수백의 배부른 거지들이 도열해 있는 것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언 선생과 풍령개를 필두로 한 거지들은 북경으로 가는 경계선을 밟아 넘었다. 그리고 나 역시도 그들을 따라 경계선을 넘었다.
언 선생은 자신을 왜 따라오냐 묻지 않았다.
#115화. 진주언가 3
#115화.
언 선생은 아까 적었던 회백색 법부적을 꺼내 쥐었다.
화르륵!
그 회백색 법부적에 불이 붙자, 잿가루가 무수히 일어나더니 그때부터 수백이나 되는 거지 무리의 모습이 건물의 유리창에 비쳐보이지 않았다. 잿가루가 이 많은 이들의 기척조차 숨겨주는지 행인들은 우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언 선생이 뒤따라오는 개방도들을 향해 말했다.
"진주언가는 생강시도 다루니, 죽어도 사람으로 죽지 못할 것이다. 이마빡에 부적 붙은 강시로 태어날 것이야. 풍령개는 내게 빚이 있어 도와주는 것 뿐이다. 의협심을 보일 생각이걸랑 지금이라도 떠나라."
반응은 잠잠했다.
배가 잔뜩 부른 개방도들은 귀나 코를 후비는 등 더 바라는게 없어보였다. 불쌍한 거지라는 관념을 꼭 지켜야하는지 평소 많이는 처먹을 수가 없는 탓에, 얼굴은 수척한데 배만 볼록한 놈들이 많았다. 음식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경계선의 전각에서 많이도 집어먹은 듯했는데, 언 선생의 주머니가 꽤 가벼워졌을 것이다.
"언 선생과 풍령개 선배를 도와 언가 도모에 성공하면 수도계가 봉문을 풀고, 속세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습니까?"
거지들이 잠잠하니 나는 언 선생에게 가감없이 물었고, 언 선생은 걸으며 즉답했다.
"그렇다. 아마도 그리되겠지. 이제는 그리 되어야겠지."
대답이 퍽 마음에 들었다.
이제 우리는, 북경의 어떤 길을 지나고 있다. 주변의 경관이 평범한 도시와는 조금 달라 눈에 금세 들어왔다.
도로경계를 따라 양옆으로 솟구친 높은 고층빌딩 옥상에는 조경용으로 푸릇한 대나무를 키우고 있었다. 각자 다른 회사인데 누가 대나무를 더 곧게 키우는지 경쟁이라도 하는 모양새다. 해가 없고 공기가 혼탁해 저런 걸 키우기 힘든 세상인데, 칼 대신 대나무에 크레딧을 처바르고 있군. 여러모로 대단한 놈들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는 그곳을 지나 반나절이 조금 안되게 더 걸었고, 북경의 어느 골목 담벼락에 이르러 묵묵히 걷기만 하던 언 선생이 걸음을 멈추었다.
딱히 부유한 동네도 아니고 평범한 이들이 모여사는 구역 같았다. 눈이 아릴 정도의 조명이 휘황찬란히 펼쳐진 도시가 아닌, 네온 가로등이나 겨우 켜져있는 주택가 담벼락.
그리고.
"?"
그곳에, 작은 목문과 대나무 숲이 있었다.
헌데 그 대나무종은 높고 커다란 왕대였다.
조명과 생육환경이 충분한 고층빌딩의 옥상정원도 아니고, 그저 길거리에 있는 담벼락 옆에 커다란 대나무들이 쑥쑥 커서 조그마한 숲을 이루고 있다. 누가봐도 참 수상한데, 가끔 지나다니는 행인 누구도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인식 자체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대나무들과 저 작은 목문은, 수도계의 종주 가문인 진주언가의 손길이 닿아 있는 곳이다.
언 선생이 작은 목문을 가리켰다.
"작지?"
"예. 작습니다."
"진주언가의 문은 작아도, 포부는 클 것이다."
"그래 보입니다. 제 포부도 생각보다 큽니다."
진주언가의 출입구인 목문은 실로 작았다.
대부분의 잘난 놈들은 산문을 더 거대하고 웅장하게 만들지 못해서 안달인데, 언가는 사람 한 명이 겨우 몸을 구겨 들어가야할 만큼 작았다. 그리고 목문 옆으로 난 대숲 사이에는, 생기가 전혀 없는 이가 떡하니 서있었다.
사지에 부적이 붙은 피풍의 차림의 사람. 전신이 사람 피처럼 붉은게, 어찌보면 불길한 외형이었다.
'생강시.'
나는 생강시라는 생소한 존재를 여기서 처음 보았다.
이마와 사지에 붙어있는 부적에 그려진 그림은 어딘가 모르게 고매했으며, 신묘한 법력을 줄기차게 흘리고 있었다. 나는 법력의 특수함을 잘 모르지만, 간단하게 뷔에탕의 인형과 비슷한 개념일 것이라 생각했다.
툭.
무거운 두루마기통을 바닥에 끌러놓고 뻐근하다는 듯 뒷짐을 진 언 선생은, 빙글 돌아서더니 언뜻 조소하며 말했다.
"봉문한 언가의 입구를 지키는 혈시다. 어지간한 초절정 고수를 상대로도 감히 동수를 이루는 괴물. 저걸 무력으로 건드리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다. 자,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죽음은 면할 것이다."
개방도 수백은 이번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기세좋은 거지들은 오히려 용맹하게 앞으로 나섰다.
동시에 젊은 모습의 기인, 풍령개도 걸어나와 언 선생 옆을 차지했다. 언가의 정문을 지키는 혈시는 수준이 당연히도 높을 것이나 기세등등한 거지들의 앞에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또, 저 나무문만이 입구이며 출구이다. 안쪽에는 기문진(奇門陣)중에서도 강력한 대라금몽진(大羅金夢陳)이 팔방으로 쳐져있는데, 저 문이 아니라면 본문의 누구도 진법이 작동하는 한은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들어가면 나오고 싶어도 못 나올 수도 있다는 말이다. 만약 안에서 내가 죽는다면 그것을 풀 사람이 없어 너희들도 같이 죽는다."
아무도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거지들한테 밥을 잘 먹여 줬나보다.
또한, 계속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돌아가라 몇 번이나 이르는 걸 보면 언 선생은 필시 본성이 여린 사람이었다. 그래서 오락가락할 수도 있지.
아무튼, 나도 거지들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언 선생은 거지들을 보다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닥에 둔 두루마기 원통을 집어들었고, 원통 겉을 감싸고있던 천 두루마기를 둘둘 풀러나가기 시작했다.
"언가놈아, 이 세상이 대라금몽진이고 천라지망이다. 이미 도시의 장벽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데 그깟 골목 기문진을 두려워하랴!"
동시에 개방 원로 풍령개가 기다렸다는 듯, 기다란 타구봉(打狗棒)을 들고 달려들었다. 동상처럼 굳어있던 생강시는 전의를 느끼자마자 벼락처럼 움직여 풍령개와 박투를 벌였다.
쾅! 쾅!
언가의 목문을 지키는 생강시는 실로 강력했다.
나는 생강시와 풍령개가 담벼락 앞에서 펼치는 육박전을 눈에 담아두었다. 생강시는 몸이 수인처럼 단단하며 피해를 입어도 고통이 없어보였다. 게다가 진주언가의 진법에서 법력을 계속 받는지, 몸을 완전히 부수는 게 아니면 쉽게 처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지지직—
'화경급의 고수로군. 젊어 보였던 것은 반로환동을 마쳤기 때문인가. 아니면 실제로 젊은 것인가.'
풍령개는 개방 내에서 무위로는 방주를 제하고 따라올 자가 없는 고수였다. 적어도 삼십 합은 넘기지 않았을 때, 마침내 걸개의 타구봉 앞에서 생강시의 부적이 다 녹아 떨어져 힘을 잃었다.
투기를 흩어낸 풍령개가 돌아서 말했다.
"언가 이 파렴치한 놈. 내 위험한 혈시를 때려잡아 주었으니 이만 네 법기(法器)를 꺼내라. 아끼지 말고 가장 좋은 것으로 꺼내라."
"알았다. 그러고 있는 참이니 재촉하지 말아라."
그러자 언 선생은 원통에서 괴상하게 생긴 나팔모양 법기를 꺼내어 목문 앞으로 가더니, 자신의 법력을 불어넣어 구동했다. 생강시 말고도 목문에 복잡한 무언가가 또 걸려있는 모양이라 억지로 열 듯했다.
걱정은 들지 않았다.
언 선생은 결단경 끝자락. 어지간한 진법 따위는 눈 감고도 해제하는 수준인데다, 원영경에 이른 수도자들이 부모라면 언 선생도 수도계에서 지위가 높아 각종 진법에 해박할 것이라. 게다가 언 선생은 오랜 기간에 거쳐 본문을 뒤집어엎을 준비를 단단히 해왔기에 진전이 빨랐다.
덜컥—
나팔 법기에서 빛이 나더니 목문이 금방 덜커덕거렸다.
나는 생강시에 신묘한 진법들까지 구경하니, 눈이 호강해 생각이 많아졌다. 지금 내가 수도자들의 법력을 배워봐야 세상이 망하기 전까지 높은 수준에 이를 수 없을 터. 언 선생이 하려는 일은 연방의 멸절을 늦춰보려는 내게도 긍정적인 일이로구나.
화아악—
이윽고, 작은 목문이 활짝 열렸다.
나는 그 목문 안으로 순식간에 빨려들어가 냉랭한 한기가 뿜어져 나오는 길목에 섰다. 저 멀리 언가가 보이는데 이상하게 멀어지다 가까워지다를 반복했다. 언가로 가는 길목은 백 개쯤 됐다. 뭐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술을 거나하게 마셔 어지럽게 만취한 듯, 세상이 빙빙 돌았고 복잡한 길을 통해 가야하는 진주언가의 본문은 계속 멀어졌다. 마치 닿고 싶어도 닿지 못하는 신기루처럼.
어이구 정신없어라.
나는 정신이 나간 놈인데 정신이 없을 리는 없으니, 이건 고수조차 몽롱하게 만드는 진법이구나. 아주 개같은 진법이야.
나는 이것이 침입자로부터 언가를 방어하는 진법임을 느끼고는, 공력을 북돋아가며 기다렸다.
"갈!"
그 순간, 뒤에서 법부적 수십 장이 하늘을 날았다.
언 선생의 것이었다.
심후한 법력의 줄기들이 우르르 일어나 법부적에 힘을 더하니, 길목으로만 가득했던 온사방이 꽃가루로 물들었다. 그 꽃가루들은 빙글빙글 도는 주변을 덮으며 진실을 가려내고 거짓된 길을 막았다.
이어서 상계 법부적보다도 고묘한 법력이 담겨있는 법부적 수십장이 허공으로 날아올라 진법에 강제로 틈을 냈다.
"들어가자!"
그 틈으로 풍령개와 개방 거지들이 우르르 몰려들어갔다.
나와 언 선생도 그리로 따라 들어가자.
"!"
커다란 대나무 숲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펼쳐졌다. 매우 넓고 크지는 않아도 몇백 명 정도는 넉넉히 살아갈 수 있을 법한 세상이었다. 푸른 하늘과 구름이 있고 샘과 천도 있었으며 적당한 암자와 전각도 있었다.
높고 곧은 대나무 위에 아름다운 전각들이 지어져 있기도 했다. 저런 곳에 살면 수도자라고 부를 만도 하지.
다만, 진법으로 만들어낸 허상일 것이다.
촤륵-
언 선생은 숨돌릴 새도 없이 품속에서 법부적을 꺼내어 입구를 틀어막았다. 오묘한 법력이 먹물처럼 흘러나와 언가의 입구가 다시 봉해졌다.
바로 그때.
'얼씨구. 근두운?'
누군가 하늘 위로부터 구름을 타고 아래로 훌쩍 날아왔다.
높은 대나무를 밟고 내려선 그 중장년의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언 선생은 그 중장년의 사내를 이미 아는 눈치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대나무 꼭대기에 내려선 그 중년의 사내가 말했다. 법력의 수준이 꽤나 깊어보여 언 선생과 비슷한 결단경의 수도자로 보였다.
"놈! 왜 진법을 건드렸느냐!"
"숙부."
진주언가는 하나의 가문이고 같은 언가라 피로 엮여있다. 허면 저 중년의 사내가 언 선생의 숙부인 모양이다. 아직까지는 내가 나설 상황이 아니라 그저 가만히 있었다.
"봉문 중에 어쩌자고 외부의 이들을 우르르 끌고와 해괴한 짓을 벌이느냐! 어리광도 정도껏이지! 당장 돌아가라!"
"숙부, 잘 안 들리니 이리 내려와서 말씀하시오."
언 선생은 중년의 사내를 숙부라 불렀으나 오고가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언 선생의 숙부는 내려오기는 싫다는 듯, 계속 대나무 꼭대기 위에 서서 되물었다.
"무어라? 너 다시 말해봐라."
"아니면 나의 부모를 이리로 불러주시오."
"이런 버릇없는 놈을 보았나! 오래전 출가했다 하여도 부모는 여전한 하늘인 것을 모르느냐!"
"하늘! 숙부는 지금 하늘이라 그러셨소!"
숙부의 말에 언 선생의 목소리에 점점 살기가 어려 흘러나오더니, 무시무시한 음성으로 숙부라는 작자를 크게 다그치기 시작했다.
"부모는 자식의 하늘이 맞으나, 나는 부모를 죽이기로 결단했으니 하늘을 버린 것과 다름없다! 그리했더니 이제야 진짜 세상의 하늘이 보이더구나. 하늘은 어둡다. 세상이 어두워. 그리도 칠흑같은데 수도자들은 이 작은 세상에 처박혀 다들 무얼 하는가!!!"
언 선생이 쩌렁쩌렁하게 호통을 치자, 진주언가 진법 내의 공간이 우르릉거리며 무너질 듯 울렸다.
심후한 법력이 담긴 호통에 더는 가만히 앉아 견딜 수 없었는지, 하늘과 대나무 숲, 여기저기서 수도자들로 보이는 이들이 튀어나왔다. 거기에는 언 선생을 알아보는 수도자도, 알아보지 못하는 수도자도 더러 있었다. 언 선생이 출가한 기간이 상당히 길었다는 뜻이다.
그들을 휘휘 둘러보던 언 선생은 소리를 더욱 높였다.
— 어머니! 불효막심한 아들이 왔습니다!
— 아버지! 집 나간 자식이 돌아왔습니다!
다음 순간.
공중을 밝히던 푸른 하늘이 양 옆으로 드르륵 열리더니, 바깥으로 작은 발이 빠져나왔다.
언 선생의 부모.
원영경의 수도자 둘은 마치 잉꼬부부처럼 사이좋게 걸어나왔다. 그들은 다행히도 아직 사람이었다. 평범한 의복을 걸치고 있는 것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노인들이었다. 법기를 타고 허공에 둥둥 떠있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언 선생이 기다리던 늙은 부모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좋아보이는 노인들의 인상과는 다르게, 언 선생을 바라보는 시선만큼은 승냥이처럼 날카로웠다.
뚝···.
뚝···.
그런데 부모 나오라며 호통을 친 언 선생은 막상 부모가 나오자마자 돌변하여 눈물을 줄줄 흘렸다. 턱밑으로 그의 눈물이 연신 흘러내렸다. 나는 본래도 오락가락하는 그가 늙은 부모를 보고는, 갑자기 후회막심하여 행로를 틀까 본능적으로 검을 쥐었다.
텁.
헌데 그때, 언 선생이 공손히 두 손을 합장했다.
마지막 예를 갖춘다는 듯, 눈물을 그렇게 줄줄 흘리는데도 두 눈을 부릅뜨고 부모를 응시하며 눈에 담아두었다. 언 선생은 내가 걱정할 필요도 없이 마음을 단단히 먹은 듯했다.
아까 하나밖에 없는 언가의 문마저 단단히 틀어막았으니, 오늘 누가 죽어도 죽을 것이다. 집안싸움에는 끼는 게 아니라지만, 은인인 언 선생을 살리러 왔다. 나는 오로지 그 사실만 떠올리면 될 일이었다.
털썩!
곧, 언 선생이 그들의 앞에 납작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자신을 고깝게 보는 부모 앞에서도 언 선생은 진심으로 절을 올리고 있었다. 언 선생이 허리를 끝까지 굽혔을 때, 하늘을 가르고 나온 노인중 하나가 말했다.
그는 언 선생의 부친으로 보였다.
"우리는 너를 자식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 결단경으로 우리를 어찌 해볼 수 있으리라 여기고 왔더냐."
스르륵—
언 선생 부친의 말과 함께.
아까 목문에서 보았던 생강시 수십이 나타났다.
부모가 뻗은 칼날은 엎어져있던 자식에게 향했다. 그것은 대나무를 깎아만든 죽창처럼, 가슴을 꿰뚫는 비수가 되어 떨어질 것이었다.
허나 절을 마친 언 선생은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이 언가가 천운과 새로운 인연을 이끌고 왔으니, 오래된 연은 잘라내겠습니다. 나를 한 번 봐주십시오!"
"······."
"— — ———지 — —— 어라."
절을 마친 언 선생은 즉시 꿇어앉아 두루마기 원통을 소중히 붙잡고는, 뜻모를 괴상한 문장을 줄줄 읊었다.
탓!
찰나간, 나는 밝아진 얼굴로 괴언을 읊는 언 선생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방금의 행동은 내 뜻으로 행한 게 아니라, 육신과 정신이 본능적으로 그와 떨어지기를 바란 것이었다.
"······."
감히 짐작도 할 수 없는 악의가 그의 혀와 입을 타고 설설 넘쳐흐른다. 그것을 읊는 인간이 언 선생이 아니었다면 내가 나서 죽였을 정도였다.
언 선생의 부친과 모친은 진즉 무언가를 느낀 듯 가만히 있었으나 숙부 되는 사람은 나보다 그걸 늦게 느꼈는지, 그에 질세라 어떤 법기를 꺼내 들고는 입을 달싹이려했다.
그리고.
펑!
대나무 꼭대기에 한 마리 학처럼 서있던, 언 선생 숙부의 머리가 예고도 없이 펑 터져나간 것이 그때였다. 숙부의 머리가 터져나가자, 머리통만 남은 종후표는 괜히 움찔했고.
잠시 괴언을 읊는것을 멈춘 언 선생은, 저 하늘을 가르고 나온 부모와 눈을 마주치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거대하고 살의 짙으며 깊고도 깊은 법력이 언 선생의 전신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언 선생의 눈물은 아직도 멈출줄을 몰랐다.
"자랑스러운 나의 부모여! 비록 나와는 도리가 맞지 않아 이리되었으나, 당신들은 나를 세상에 들임으로 수도자의 도리를 행하게 해준 선각자들입니다. 그러니 오늘 벌어질 일로 불효막심한 자식을 비정타 책망하지 마시고, 다음 생에서는 우리 행복하게 삽시다. 먼저가셔서 부디 이 언가를 기다리고 계십시오!"
#116화. 진주언가 4
#11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