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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4% REGRINFINT / Chapter 1: 1
REGRINFINT REGRINFINT original

REGRINFINT

作者: Kakao_Cuenta_3951

© WebNovel

章 1: 1

* * *

'여기는….'

기침 소리.

다 늙어 가는 늙은이가, 비참하게 '지구'를 중얼거리며 손으로 하늘을 잡으려 하고 있었다.

그 노인의 감정이 절절하게 전해져 왔다.

나는 황급히 그 노인을 기령으로 복제하였다.

노인이 있는 방 안으로 작은 여자아이가 들어왔다.

나는 여자아이를 알고 있었다.

'주 씨네 딸….'

츠츠츳!

다시금 장면은 뒤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적 떼에게 살려 달라고 비는 젊은 시절의 노인.

약초를 캐며 비루하게 먹고 사는 노인.

열심히 공부하며 뭐라도 해 보려는 노인.

비누를 만들어 팔며 어떻게든 삶을 타파해 보려는 노인.

그리고, 젊은 시절.

막 이곳에 떨어졌을 시절의… 서은현.

나는 등선향에 최초로 떨어졌을 때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그리고, 나는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며, 더더욱 이전의 기억을 되짚었다.

'더 이전….'

내가 이 세계에 오기 이전….

기억은 시간을 넘어서며, 내가 이 세계에 막 떨어지는 직후로 향하였다우리는거기서누군가를만났었다그자가우리를이곳으로데려왔었다분명히이기억은.

* * *

내가 이 세계에 오기 이전….

나는 기억의 물결을 거슬러 오르며, 드디어 내 고향에 대한 기억에 도달할 수 있었다.

츠츠츳!

기령 중 하나가 기이하게 부스러지며, 사라졌고, 그 자리를 SUV에 타고 있던 시절의 기령들이 채웠다.

산사태가 일어난다.

그 이후는 기절한 것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를 괴롭혔던 전명훈에 대한 기억….

회사에서 있었던 동료들과의 여러 추억….

군대에 있었을 당시 선임의 군복을 대신 정리해 주다가 각이 덜 잡혔다면서 갑자기 정색하는 선임에게 얻어맞았던 기억….

지원한 대학은 다 떨어지고, 재수해서 지방대에 갔던 기억….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

그 모든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며.

나는 종래에.

정말로 '최초'에 있었던 기억에 도달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이곳까지 온 적은 없었다.

여기까지 오기도 전에, 늘 기령을 만들겠답시고 한 기억을 오래 붙잡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공법이 극성에 달한 지금.

나는 인식하는 것만으로 기령을 만들 수 있었기에, 드디어 이곳까지 도달하였다.

그것은, 막 태어난 나였다.

나는 어머니의 팔 안에 안겨서 울고 있었다.

아기.

'아아….'

어째서 지금껏, 원영(元靈)은 아기의 형태인지 몰랐다.

하지만 나는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운명 아래에서 울부짖으며.

처음으로 타인과 교류를 나누는, 가장 순수한 시절.

최초로 인연이라는 것을 맺은 그 시절.

가장 순수한 본원.

결단으로 끌어모은 순수한 기운의 결정이, 인간의 가장 순수한 시절과 맞닿아 그러한 형태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저 아기를 향해.

내 최초의 순간을 향해 손을 뻗으면, 나는 원영기 수사가 될 수 있었다.

절대 다수의 원영기 수사가 그렇게 했으리라.

자신의 인생을 한 번 돌이켜 보고 나서 바로 자신의 순수했던 시절에게 손을 뻗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바로 손을 뻗지 않았다.

대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과, 그 옆으로 달려와서 어쩔 줄 모르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아버지….'

아니….

나는 조금 더, 조금 더 근원적으로 내 가슴속에 담겨 있는, 조금 더 친근한 단어로 그들을 불렀다.

'엄마… 아빠….'

두 사람은 웃고 있었다.

원영(元靈)의 경지에서는 어째서 음양신(陰陽神)을 수련하는가.

그것은, 어쩌면 가장 순수한 순간이란 음과 양, 두 존재에 의해 태어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부모.

'그렇군….'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지구의 기억.

현대인의 윤리관, 도덕 관념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조금 더 본질적인 것.

'사랑받았던 기억….'

내가 타인을 사랑했던 기억은, 사랑을 했던 기억이지 사랑을 받았던 기억이 아니다.

이성적으로 주고받는 사랑은 어찌되었든 서로 주고받고, 갈구함이 있다.

첫사랑인 북향화도, 천 년 동안 사랑을 잊지 않았던 연이도 마찬가지.

이성의 사랑은 어찌 되었든 갈구.

그러나, 세상에는 절대적인 무상의 사랑이 하나 있다.

"아아…."

나는 원영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문턱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내 울음소리와, 눈 앞에서 막 생명을 탄생한 아이의 울음소리가 겹쳤다.

동시에, 나는 내 마음 속에 있던 심마가 올올이 풀려 나가는 것을 느꼈다.

옳거나 그르거나, 이것이 맞거나 틀리거나.

그런 분별심으로 뭔가를 판단할 필요가 없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무한한 축복과 무한한 은혜를.

무한한 누군가의 마음을 그대로 받았다.

그 마음을 받고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

사람은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고자 한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을 가진 모든 존재의 본성이다.

선이니 악이니, 내가 옳았니 네가 옳았니, 정의가 다 무슨 말이란 말인가!

눈앞에 마땅히 축복받아야 할 존재가 있다면, 그들이 비참하게 하지는 않게 하는 것이.

그냥, 최소한의 도리가 아닌가!

나는, 눈물을 닦으며 내 최초의 인연을.

그들의 모습을 기령으로 담아 간직하였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삼령공과 군마용갱권을 합쳐 만든 무명 공법의 이름은 이것으로 정하였다.

"만상인연도(萬狀因緣圖)…."

파아아아앗!

금단(金丹)의 정중앙으로, 내 삶의 최초의 테.

아기의 모습이 응결되었다.

츠츠츠츳!

천기가 바뀌며, 수명이 다시 쓰인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 먹장구름이 일기 시작하였다.

본래 원영을 얻은 자는 금색(金色)의 천뢰를 맞으며, 온 천지에 원영을 얻었노라고 선포한다.

그러나, 내 천뢰는 두 가지 색이었다.

일반적인 원영기들이 맞는 금색에 더불어, 익숙한 청색의 천뢰.

쿠구구구구!

"와라."

나는 평온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하늘에서 빛의 기둥이 떨어져 내렸다.

피이이이잇!

원영을 얻었다.

이것으로.

'뚫을 수 있다!'

"답천!!!"

내 몸은 검(劍)이 되어 나를 향해 내리꽂히는 천벌을 향해 쇄도하였다.

번개가 갈라지고, 천둥이 쪼개졌다.

내 몸은 그러고도 멈추지 않고, 하늘을 뒤덮은 총연맹의 결계를 그대로 뚫고, 천벌을 떨어뜨리는 먹장구름에 도달해 하늘의 구름을 두 쪽으로 쪼개 버렸다.

푸확!

'드디어, 도달했다.'

나는 구름 위에서, 마계의 총천연색의 하늘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제, 원영기(元靈期)다."

휘이이이이이―

나는 마계의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지상으로 다시 내려갔다.

아직도 감찰관은 오지 않았다.

무형검도 원영의 영향을 받아 한층 진화하였으니, 이젠 결계에 구멍을 내어 남은 이들을 탈출시키기만 하면 될 터.

그렇게 생각했을 터였다.

"…어?"

나는, 어느새 눈앞으로 다가온 섬뜩한 인상을 가진 한 적포 남성을 보며 몸이 얼어붙었다.

남성의 왼손에는 한 개의 머리통이 잡혀 있었고, 머리통은 이마에 작은 띠를 두르고 있었는데, 그 띠에는 [감찰]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머리통의 표정을 보니, 죽을 때 상당히 고통스레 죽은 것 같았다.

감찰관의 머리통을 뽑아 온, 끔찍한 의념을 흩뿌리는 적포의 남자를 보며, 나는 잠시 말을 정리한 후 인사했다.

"오랜만이다. 전명훈."

잃어버린 것 (4)

까딱….

전명훈이 나를 쳐다본다.

어쩐지, 그의 눈은 산 사람의 것 같지 않았다.

저 눈은 흡사… 죽은 자의 그것과 같아 보였다.

그리고, 그 시꺼멓게 죽은 동태눈 뒤로는 무언가 뜨거운 감정이 잠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전체적으로 죽어 있고, 우울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머리카락은 길게 산발이 되어 있었다.

피부는 이전과 달리 훨씬 하얘졌고, 눈 밑으로는 시커먼 눈 그늘이 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아 보이는, 시체 같아 보이는 인상.

하지만, 나는 그 시체 같아 보이는 인상에서, 마치 폭발하기 직전의 활화산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지금의 녀석은, 터지기 직전의 폭탄 같은 상태였다.

"전명훈, 괜찮은 거ㄴ…."

부웅!

그리고.

다음 순간, 내 턱을 향해 시뻘건 번개가 쏘아졌다.

"…!"

나는 전신에 두른 무형검으로 번개를 갈라 버리고는 녀석에게서 물러나 간격을 확보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쿠르르릉!

천둥이 울리는 것 같더니, 녀석이 삽시간에 앞으로 나타나 손바닥을 펼쳐 얼굴로 가져왔다.

말 그대로, 한순간 번개 그 자체가 된 듯한 형상!

파지직, 콰르르릉!

녀석의 주변으로 적뢰(赤雷)로 이뤄진 일곱 개의 창이 나타나 나를 노렸다.

상, 하, 전, 후, 좌, 우!

육합(六合)의 방위에서 붉은 창이 나를 노렸고, 마지막 한 자루의 창은 전명훈이 직접 손으로 쥔 채 나를 향해 날렸다.

부우웅!

마지막 창이, 계위를 넘어서 나에게 날아온다!

하나하나가 번개에 준하는 속도!

'하나, 진짜 번개는 아니다.'

나는 육합의 방위를 인식하며 손을 뻗었다.

붕, 붕, 붕, 붕!

파아앗!

단 한 번!

한 번의 손짓으로 여섯 자루의 뇌창이 베여 나갔고, 마지막 한 자루의 뇌창은 몸을 움직여 피했다.

츠츳!

나는 일순간 전명훈의 앞으로 쇄도하며 주먹을 뻗었다.

녀석이 방어하려는 듯 양팔을 교차하며 막아 냈으나, 내 주먹이 녀석의 방어에 닿은 순간.

전명훈의 상반신은 그대로 반으로 쪼개져 버렸다.

츄칵!

"…음, 오랜만에 만나고 안부 인사가 이런 꼴이라 조금 미안하군."

츠츳, 츳!

파지지직!

그러나, 전명훈의 쪼개진 몸체에서는 번개가 튀기더니 얼마 후 녀석의 몸은 다시 붙어 버렸다.

"꽤… 하는군."

그리고, 전명훈은 시체 같은 눈알을 뒤룩이며 입을 열었다.

"…?"

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며 그에게 물었다.

"이봐… 너,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거냐?"

확실히, 녀석의 정신 상태는 조금 이상했다.

상당히 불안정하다.

내 질문에, 전명훈은 시체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8차 점령지… 임시 총독이 아닌가? 감찰관의 혼(魂)을 고문해서 알고 있다."

"…난 서은현이다. 정말 기억이 안 나는 거냐?"

"서은현…?"

"너와 같은 곳 출신! 네가 어디서 왔는지를 기억해라!"

"같은… 곳…."

그 말에, 전명훈은 갑자기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 아아… 으아아아아아! 흐아아아아아!"

파직, 파치지지직!

그리고, 녀석의 전신에서 형형색색의 뇌전 줄기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끄흐아아아아아!"

쿠르릉, 쿠릉!

녀석의 등 뒤로, 총 여섯 개의 깃발이 희미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섯 개의 깃발은, 전명훈의 등에 마치 날개처럼 꽂혀 있었다.

'저건… 녀석이 익힌 공법인가?'

무언가 금제 같은 것인가 했지만, 영기의 흐름이 썩 자연스러운 것이 그냥 본인의 공법 특징인 것 같았다.

얼마간 사방으로 번개를 뿜으며 울부짖던 녀석은, 이내 잠잠해졌다.

그리고, 시체 같은 눈알이 다시금 나를 쳐다보았다.

"…서… 은현. 그래, 기억난다."

녀석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군. [그걸] 직시한 후로는 정신이 온전치 않아 추태를 부렸다. 적당히 이해해라."

"[그거]?"

"닥쳐! 닥치란 말이다! 죽여 버릴 거야! 반드시! 죽인다! 잘근잘근 포를 떠서 씹어먹을 것이란 말이다!!!"

쿠구구구구!

전명훈의 눈이 뒤집혀, 갑자기 폭주를 하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벼락이 떨어졌고, 나는 벼락들을 피하며 잠시 녀석을 쳐다보았다.

다행히도 전명훈은 얼마 후 안정되었고.

다시금 나를 쳐다보며 음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뭐, 이런저런 얘기할 거 없고, 어쨌든 너를 찾아왔다. 8차 점령지 임시 총독 서은현."

"무슨 일이지?"

"8차 점령지에, 혹여 '연진'이라는 금신천뢰문의 제자가 들르지 않았나? 녀석은 지금 어디로 갔지?"

"연진? 연진이라면… 너를 찾으러 광한계 본토로 간다고 하던데…."

"본토…? 하, 하하하, 흐하하하하하!"

그리고, 그 말에 갑자기 전명훈이 미친 듯이 발광하며 웃기 시작했다.

"흐흐하하하하! 본토! 광한계로 갔다고! 엇갈렸단 말이냐!?"

녀석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왜! 도대체 왜! 왜 이러는 거야! 왜 이러는 거냔 말이다!!!"

쿠르르르릉!

전명훈의 몸에서, 시뻘건 번개가 뿜어져 나왔다.

"이봐, 전명훈. 진정하고…."

"다!!!"

그리고, 내가 무어라 할 새도 없이.

전명훈은 고함을 지르며 사방으로 번개를 뿜었다.

"다 죽어 버려라! 전부! 모조리!!!"

콰지지지지직!

쿠릉, 쿠르르릉!

천지사방에 벼락이 떨어진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 전부 다, 아무런 가치도 없어! 전부, 전부, 전부 죽어 버리란 말이야!!!"

콰치지지직!

'뭣…!'

붉다.

전명훈의 번개의 색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녀석의 의식이, 피처럼 시뻘건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분노!

녀석은, 용암처럼 뜨겁게 분노를 토해 내고 있는 중이었다.

"자, 잠깐…!"

그와 동시에, 녀석이 흩뿌리는 번개들은 나뉘어 떨어지며 결계를 그대로 투과해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인족은 그대로 들여보낸다는 게, 인족이 행하는 법술들도 다 들여보낸다는 의미였나!'

피잇!

나는 빠르게 비둔술로 이동하여, 결계 안쪽에서 전명훈이 흩뿌리는 낙뢰들을 무형검으로 전부 쳐 냈다.

저 아래쪽에서 아직 탈출하지 못한 마족들이 두런거리는 것이 보였다.

'저 번개들 중 하나라도 마족들이 있는 곳에 떨어지면….'

모두 전멸이다!

쿠릉, 쿠르릉!

전명훈에게서, 어마어마한 벼락이 뿜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저 정도면 틈을 봐서 제압할 수 있을….'

다음 순간.

쉬이이….

전명훈이 들고 있던 감찰관의 머리통이, 그대로 불타 재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녀석의 등에 박혀 있던 여섯 개의 깃발 중.

자색(紫色)의 깃발이 뽑혀 나가며, 녀석의 번개에 녹아들었다.

한 개의 깃발이 뽑혀 나가자, 녀석의 몸에서 뿜어지는 번개의 양과 질이 급격히 증가한다!

'이, 이건…!'

하나하나가 원영기 후기 수도자의 일격 급!

푸콱!

그리고, 녀석의 등에서 다시금 하나의 깃발이 뽑혔다.

남색(南色)의 깃발이 뽑혀 나가며 녀석의 번개에 녹아든다.

쿠르르르릉!

"…!"

나는 이를 악물었다.

번개가 더더욱 강해진다.

'생각해 보면, 감찰관은 사축기 수도자일 텐데 그를 죽였다는 것은….'

저 깃발이 전부 뽑히면, 놈은 사축기 수도자 급이 된다.

'소모성 힘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폭발력이 말도 안 되게 커! 장기전은 시도도 못 하고 단기전에 끝날 확률이 높다!'

침착하자.

나는 마음을 다스리며, 우선 이번에 얻은 원영을 관조하였다.

우우웅!

계위(界位)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군….'

원영기 수도자는, 모두 원영기에 오르게 되면 한 가지 진실을 깨닫게 되며, 이는 원영기 수도자의 깨달음과도.

동시에 세계의 섭리와도 맞닿아 있는 사실이다.

'기(氣)는 곧 의(意).'

이 세상에는 높은 계위와 낮은 계위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계위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세상의 물질과 생명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기(氣)의 계위.

기의 계위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만물의 방향을 인도하는 혼(魂)의 계위.

그보다도 아득히 높은 위치에서 세계의 진리를 인도하는 명(命)의 계위.

세상은 이 세 가지의 계위로 이뤄져 있었으며,

차원의 높낮이에 따라 존재가 기(氣)로 표출되냐, 영혼(魂)으로 표출되냐.

혹은 운명(命)으로 표출되냐가 다를 뿐.

한 마디로 기와 혼, 그리고 운명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었다.

'월도입천의 깨달음과도 일맥상통한다….'

모든 강환은 하나.

즉, 천지인(天地人)은 하나라는 이치로 도달했던 월도입천.

그와 같이, 결국 모든 본질은 하나인 것이었다.

단지 차원의 높낮이에 따라 표출되는 바가 달랐을 뿐.

'그래, 어째서 광한계에 있는 종족을 세 개로 분류했는지 이제야 알겠군.'

어째서 심족은 천족과 지족에 한참 미치지도 못하면서 '삼 대 종족'에 끼어 있는가.

단순히 '시야'가 아니었다.

'지족은 기의 계위에서 영기를 극한으로 끌어모아 수행을 쌓아 가고, 천족은 명의 계위를 향해 제사를 지내 가며 명의 계위를 향해 끌어올려진다. 그리고 심족은 혼의 계위를 자유자재로 노니는 수행을 하는 것이다.'

나는 계위를 인지하게 된 이후에야 드디어 어떻게 인간이 수련을 하여 진선이 되는 것인지 이해하였다.

'기의 계위에서부터 명의 계위까지 존재를 끌어올려, 기(氣)에서 태어난 필멸자가 운명(命)의 영역에 이르면 그 존재를 진선이라 하는 것이군.'

나는 원영의 생성 원리를 이해하였다.

'기의 계위에서 끌어모은 순수한 기력을, 혼의 계위로 끌어올려 영혼과 기(氣)를 합일한 것. 아니, 아니지.'

영기와 영혼은 본래 하나.

단순히 차원의 높낮이에 따라 다르게 나뉘었던 것뿐이니.

영기를 끌어올려, 차원의 높낮이를 너머 '본질'에 접속한 것!

그것이 원영이었다.

그렇기에 기는 곧 의!

어째서 법력을 쌓고 신통을 수련하는데, 정신을 단련하는 구결을 익혀야 하는가.

어째서 '기운'을 끌어모아 경지를 높이면 수도자의 '의식'도 같이 커지는가.

기는 곧 혼이자 의.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이었기에 그런 현상이 벌어졌던 것이었다.

'아하하,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

절정경에 이르던 시절.

강시에게서도 붉은 선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절정 고수에 이르고 나서는 막상 생명체가 아닌 강시에게서는 붉은 선이 이론상 없는 게 맞다는 것을 느꼈다.

왜 의식이 없는 강시에게서도 붉은 의념의 선을 봤을까.

그것은 곧 기운은 의식이기에, 강시 역시 혼이 없을지언정 기를 가지고 있다면 미약한 의(意)는 가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전보다, 더더욱 명확히 보인다.'

'기운'의 계위와, '영혼'의 계위가 또렷하게 나뉜다.

그리고 거기에 영기의 흐름을 보는 요족의 시야.

심상의 색과 본질을 보는 월도입천의 시야가 합쳐지니, 나는 이전보다도 더더욱 세계의 본질을 파고들 수 있었다.

'합쳐진다….'

기와 의가 같은 것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나니.

그동안 나뉘어 있던 요족의 시야와 답천의 시야가, 서서히 녹아들며 하나가 되었다.

의념의 색상이, 영기의 음양과 합쳐지며 이루 말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풍광을 자아낸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까지, 천족의 시야인 천기를 읽는 시야는 이 시야에 녹아들지 않았다.

'진선이 되어, 운명 그 자체가 되면 저 시야도 이 시야에 녹아드는 것인가.'

생명의 근원인 영기를.

마음의 근원인 심상을.

운명의 근원인 천기를.

그 모든 것을 하나로 합친 시야에는, 과연 어떤 것이 보이는 걸까.

나는 그것을 잠시 상상해 본 후, 시야를 다잡으며 전명훈을 노려보았다.

놈의 힘이 더더욱 강해지고 있다.

하지만….

'보인다.'

차분히 깨달음을 정리하며 시야를 바로잡자, 보이기 시작했다!

천지의 결과 결이.

그 천지의 결이 인간의 의식과 뒤섞이며, 신통이라는 이름으로 탄생하는 모든 과정이.

그 과정 안에서 보이는, 무수한 상대의 허점이!

오로지, 요족과 답천의 시야를 둘 다 얻은 나만이 볼 수 있는 시야!

부웅!

나는 전명훈이 내뿜는 번개의 결과 결.

그 정확한 틈을 향해 무형검을 뻗었다.

츄왁!

벼락이 그대로 갈라진다.

동시에 전명훈이 내뿜을 뇌전들이, 거의 예지에 가깝게 어디로 향할지가 눈에 훤했다.

그리고 그 예지 속에서도 나는 녀석의 공격.

그 공격의 틈새를 찾을 수 있었다.

'춤을 춰 볼까.'

나는 무형의 검을 잡고, 허공에서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검무(劍舞)에 맞춰 무형검이 흩뿌려진다.

계위를 넘나든다는 것이, 얼마나 무지막지한 권능인가.

원영기에 들기 이전에는 몰랐으나, 지금에서야 알 수 있었다.

기의 계위와 혼의 계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넘나들며, 원영을 아무 제약 없이 베어 버릴 수 있는 끔찍한 흉물!

그것이 무형검!

그리고, 나는 이제야 이 흉물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눈'을 얻어 냈다!

축기기 때에 얻은 정순지력이, 월도입천에 무한한 기력을 보급해 주었다면.

원영기에서 얻은 이 '눈'은 월도답천이 어디로 향해야 할지를 정확하게 알려 주었다.

서로가 서로를 보완한다.

거기에, 연체술로 얻은 육신의 힘이 더해지며, 무형검은 기의 계위에서 육신의 힘을 받아 압도적인 패력(覇力)을 지니고 상위 계위로 날아올라 본질적인 차원에서 벼락을 베어 냈다.

슈캉!

전명훈의 등에서 청색(靑色)의 깃발이 뽑혀 나갔다.

이제는 번개 하나하나가 천인기의 일격 급!

그러나, 육신의 힘.

원영기의 눈.

무형검의 공능이 더해지며, 내 무형검은 전명훈이 흩뿌리는 벼락의 약한 점에 정확히 꽂히며 녀석의 번개를 그대로 베어 냈다.

슈캉!

'어디까지 통하나 볼까?'

붕, 붕, 붕, 붕!

보보를 디디며 검으로 내 주변에 원(圓)을 그렸다.

녀석의 번개는 점차 강해졌다.

조금씩 번개를 베는 데에 힘이 들어간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이전까지는 천인기 급 번개를 베어 내는 데에 아무런 힘도 안 들었다는 소리!

쿠웅, 쿠웅, 쿠웅!

전명훈의 등에서 녹색(綠色), 황색(黃色)의 깃발이 동시에 뽑히고, 녀석의 번개 줄기 하나하나가 천인기 대원만의 공격으로 변한다.

꾸웅!

그쯤 되자 검이 무거워진다.

아무리 약점을 찾아, 모든 것을 베는 검으로, 강력한 육신의 힘을 실어 벤다지만 그것도 힘의 격차가 너무 커지면 한계가 찾아오는 법이었다.

하지만 나는 미소를 지으며 원영기에 이른 내 한계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점차 내 무형검에 힘이 붙기 시작했다.

검무가 점차 빨라진다.

이것은, 우공이산!

우그그그극!

전명훈의 번개를 내 무형검에 담아 그 힘을 계속해서 되친다.

점차 전신에 가해지는 부하가 극심해지지만, 원영의 경지에 더불어 연체술로 단련한 육신과 답천의 경지는 본래라면 터져 나가야 할 육신을 단단히 붙잡아 주었다.

콰앙, 콰아앙!

드드드드!

위령선이 펼친 결계가, 나와 전명훈의 격돌에 흔들리고 있었다.

점차, 무색의 검이 적색의 번개를 밀어내기 시작한다.

푸콱!

결국, 전명훈의 등에서 마지막으로 주황색의 깃발이 뽑혀 번개로 녹아들었다.

쿠르르릉!

안 그래도 붉었던 번개가, 더더욱 시뻘건 빛으로 빛나며 나를 향해 쏘아져 왔다.

번개의 일격에 공간이 그대로 잘려 나간다!

'이건 조금 무리일 것 같다만… 그래도….'

나는 씨익 웃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 볼까!'

크그그극!

전신에 별빛이 맴돌았다.

창령성광오채대법!

나는 별빛과 푸른빛의 기운을 극도로 미세하게 운용하며, 두 기운을 내 무형검에 깃들였다.

우우우웅!

무형검이, 별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츠츠츠츠츳!

나의 무형검은 한 자락의 은하수가 되었다.

내 손에 들린 것은 더는 허공이 아니었다.

은하(銀河).

자그마한 은하수가 내 손에 잡혀 있었다.

창령성광오채대법의 오의.

창익천쇄의 절기를, 극한으로 미세하게 조절하여 갈아 낸 후 무형검에 불어넣은 것.

전신의 힘을, 일격에 짜낸다!

'아아….'

지금이라면.

베지 못할 것이 없을 것 같다.

피융!

우공이산으로 인하여 극한으로 치솟은 무형검의 공격력에, 창익천쇄의 힘마저 더해져 무형검에 담겨 하늘을 걷어 낸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푸화아아악!

하늘을 뒤덮던 붉은 벼락의 세례가 이 일 수에 걷혀 나갔다.

나는 씨익 웃으며, 피를 한 줌 토해 냈다.

우공이산을 쓰면 죽는다.

예전에는 그랬다.

"저주, 역전!"

파아아앗!

전신에 깃든 우공이산의 부하가, 전부 원유에게로 돌아갔다.

푸쾅!

저 아래쪽에서 내 명에 의해, 마족들이 혹여라도 휩쓸리지 않게 보호하고 있던 원유가 저주인형이 되어 터져 나갔다.

결단기 대원만에 이른 녀석의 몸이, 내 몸에 걸린 부하를 전부 떠받았다.

우우웅!

그리고, 원유는 빠르게 이곳으로 올라와, 모든 번개를 다 쏟아내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전명훈을 향해 해골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촤르르륵!

전명훈의 기혈이 원유에게 빨려 들어왔다.

점차 원유는 전명훈의 기운을 빨아먹으며 터져 나간 몸을 재생시켰다.

원유에게 기력을 빨린 전명훈은 이내 비틀거리며 결계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휘이이이이!

나는 원유를 시켜 전명훈을 받아 내게 했고, 녀석을 데리고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이봐, 전명훈."

나는 광기와 함께 힘을 한차례 전부 쏟아 낸 전명훈을 보며 물었다.

"괜찮은 거냐?"

그리고, 녀석이 나를 보며 말했다.

"…닥쳐라."

"뭐?"

"이해하는 척하지 마라…."

녀석이 이를 악물었다.

"나를 죽여라…. 나는 기력을 회복하면, 이 일대의 모든 생명체를 남김없이 죽여 버릴 거다."

놈의 눈 안에서, 분노가 이글거렸다.

"아무리 쏟아부어도 이 고통과 분노가 잦아들지 않아… 가슴이, 타는 것 같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걸 죽여 버리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그러니, 나를 막고 싶으면 나를 지금 죽여라, 서은현!"

"…진정해라, 분노는 남을 죽이는 것으로 풀리는 것이 아니야."

"네가!"

그리고 녀석이 버럭 소리 지르며 내게 달려들어 내 멱살을 잡았다.

"네가 뭘 안다는 거냐! 눈앞에서 연인을 잃어 봤나? 항거할 수 없는 존재에게 스승과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과, 모든 지인들이 일거에 벌레처럼 쓸려 나가는 것을 겪어 보았나? 소중한 사람이 다 죽을 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벌레 같은 비참함을 안다는 거냐!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는 거야! 닥쳐! 닥치란 말이다!!! 나는!!!"

전명훈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나왔다.

"다 잃어버렸단 말이다!!!"

콰르르르릉!

녀석의 몸에서 붉은 벼락이 다시 한 차례 뿜어지며, 주변을 휩쓸었다.

잃어버린 것 (5)

아, 그렇구나.

나는 저 눈을 본 적이 있었다.

나는 저 시체 썩은 것 같은 눈 안쪽에서, 먼 예전의 동질감을 찾아내었다.

나도, 한때 저 눈을 하고 있던 적이 있었었다.

그리고 그 동질감을 깨닫자마자, 나는 전명훈이 연진을 찾아다니는 이유가 어쩐지 짐작이 갔다.

나는 짐작을 확인하기 위해 녀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상황을 설명해라. 어떻게 된 거냐."

"다 잃어버렸다! 네가…!"

"진정해라!"

쿠르르릉!

나는 답천의 경지를 통해, 전명훈에게 심어를 강력하게 때려 넣어 놈의 발작을 일단 저지시켰다.

"제대로, 상황을 설명해라. 너는 '왜' 연진을 찾는 거지? 내가 도와주겠다!"

"…!"

연진의 몸 안에 숨어 있던 연위는, 금신천뢰문이 멸문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수명이 20년 안쪽으로 줄었다고 했다.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했다.

아마 진선이 금신천뢰문을 멸망시키고, 금신천뢰문과 관련된 이들의 수명을 어떻게 조정한 것이리라.

내 고함에, 전명훈은 몸을 떨더니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 존재]가, 천겁을 내렸다."

녀석의 얼굴이 음울하게 물들었다.

"천뢰번은 [그것]이 눈을 뜨자마자 [그것]에게 뺏겼다. [그것]은 천뢰번을 매개로, [위]에서 뇌령도 전체에 천겁을 내렸고…."

그리고, 절망의 의념이 전명훈의 의식을 잠식하는 것이 보였다.

"당시 금신천뢰문에서 임무 때문에 문파 안에 없었던 이들이나, 혹시 모를 생존자들. 금신천뢰문에 적(籍)을 둔 모든 이들. 금신천뢰문에서 사승의 인연을 맺었던 삼천세계 모든 이들에게, 천겁의 운명을 고정시켰어…."

뿌드득….

그는 이를 갈았다.

"길어도 20년… 그 안에, 금신천뢰문의 시조 양수진의 가르침을 이었던 삼천세계의 모든 존재가 천겁에 멸할 운명을 강제로 부여받았다…!"

"그렇군…."

나는 녀석이 연진을 찾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너는, 금신천뢰문의 생존자들을 구하려 하는 건가…?"

"…그래."

녀석이 썩은 눈으로 내 옷자락을 붙잡으며, 절규하듯 목소리를 내뱉었다.

"연진을 찾게… 도와준다고 했지…? 도와다오, 제발 도와다오…. 다… 죽었다. 먼 곳에 파견 나간 제자 다섯을 제외하고, 인근에 파견 나갔던 제자들도… 금신천뢰문에 가까이 있던 순서대로 다 죽어 버렸어…! 마계로 파견 나간 제자인 연진, 명귀계로 탐사를 나간 나머지 넷을 제외하면, 이제 이 세상에서 살아 있는 금신천뢰문의 제자는 아무도 없단 말이다…!"

"…알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진은, 내가 준 천인기 괴뢰들을 가지고 너를 찾으러 광한계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괴뢰들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괴뢰들에게 연락할 수 있지."

그 말에, 전명훈의 썩은 눈동자 안에서 조금씩 생기가 돋아났다.

"정말이냐… 서은현…!? 그게 정말이냐!!"

"그래, 연락이 닿는 것 자체에 시간이 며칠 걸리긴 하겠지만… 그래도 나흘 안에 연진 쪽에 연락을 넣을 수 있을 거다."

콰악!

그리고, 전명훈은 내 어깨를 쥐며, 혼이 나간 얼굴로 몸을 떨었다.

"고맙다…! 고맙다, 서은현…!"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전명훈은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

'이건….'

탈진(脫塵)이었다.

나와 싸우기 이전에 사축기 감찰관을 죽이고, 이곳에 와서 폭주할 때 쓴 몸에서 깃발을 뽑아내는 공법 역시, 상당히 몸에 무리가 가는 공법이었으니.

충분히 탈진할 만도 했다.

나는 기절해 버린 전명훈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전부.

이 세계에 떨어진 모두가 전부, 너 나 할 것 없이 변했다.

'모든 기억을 되찾았다.'

나는 눈을 감고서 원영을 관조하였다.

좋았던 기억, 싫었던 기억….

저 무의식의 암흑 속에 침잠했던 모든 기억을 찾고, 기령 속에 기록해 두었다.

더 이상 잊고 싶어도 잊을 리 없는 기억.

그 기억 속에서, 전명훈은 솔직히 내게 별로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하나, 그럴지라도.

좋았던 일도 싫었던 일도 있었던 내 인생이었고.

전명훈은 내 인생에서 짜증 났던 축에 속했던 녀석이었지만, 그래도 녀석은 나와 함께했던 인연이었다.

부스스스….

만상인연도에, 이번에 찾아온 전명훈이 모습이 기록된다.

'솔직히 나는 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짜증 날지언정 이 녀석은 내 적은 아니었다.

악연이 아닌 그저 인연.

그렇기에, 나는 전명훈을 돕기로 하였다.

'다 잃어버렸다, 라….'

거기에 이 녀석에게선 동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압도적인 힘에 의해, 소중한 이들을 잃어버리면서 무력감을 느껴야 했던 그 심정을 모르지 않았으니 말이었다.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오히려 더 돕고 싶은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기절한 전명훈을, 괴뢰를 시켜 총독 관저에 데려다 놓게 한 후.

아직까지도 결계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 마족들을 찾아갔다.

* * *

"견 도우, 이들을 통솔해서 잘 가실 수 있으시겠소?"

[뭐, 조금 분쟁이 생기긴 했습니다만, 그렇게 큰일은 아닙니다. 저 광한옥으로 된 결계가 문제긴 합니다만… 멀리서 총독 대인이 하는 것을 지켜보자니, 대인께서는 결계를 해체하실 수 있으신가 보군요.]

"맞소."

[흐음….]

촉수를 꿈틀거리며 나와 눈높이를 맞추던 견신이 말하였다.

[총독 대인께서, 어쩐지 전과 달라 보이시는군요. 그 전부터 보았던 불안정한 의식 파동 대신, 확고한 의식의 파동이 느껴지십니다.]

나는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았소. 이제 더는 흔들리지 않겠소. 마족이든 인족이든…."

나는 견신의 뒤쪽에서 불안하게 두런대는 마족들.

그리고 그사이에 섞여 있는, 두 젊은 남녀를 슬쩍 바라보았다.

"내 앞에서 소중한 이들이 죽게 두지 않겠소."

[축하드립니다. 번뇌를 덜어 내셨군요.]

"기준을 되찾았을 뿐이오."

꿈틀, 꿈틀….

견신은 갑자기 촉수 두 개를 교차하여 가위 표시를 만들어 냈다.

[저희 유촉족은, 스스로를 굉장히 교양 있고 지적인 종족이라 자부합니다. 저희는 종족의 특성이 남에게 기생하는 것이다 보니, 늘 외관보다는 본질적인 것으로 스스로를 정의하기를 좋아하는 종족이지요.]

그의 의념에는, 나에 대한 어떠한 존중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 표시는, 유촉족에서 자기 스스로를 명확히 정의 내릴 수 있는 현숙한 족원에게 경의를 담는 인사입니다. 부디 받아 주시지요.]

우우웅!

견신의 가위 표시 촉수의 정중앙으로 희미한 영기의 빛이 서렸다.

아무래도 단순한 인사가 아닌, 어떤 특정한 신통인 듯했다.

그의 의념에서는 진솔함이 느껴졌기에 나는 감사를 표하며 견신이 쏘아 내는 영기의 빛을 받아냈다.

우우웅!

그와 동시에, 나는 내 원영에 기묘한 감각이 자리 잡는 것을 느꼈다.

'이건….'

내 원영(元靈)에 특수한 감각이 맴돌았다.

나는 이전보다도 내 원영을 더욱더 명확하고 또렷이 관조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래도 견신은 아예 특수한 신통을 내게 부여한 것 같았다.

[저희 종족은 상대의 정신을 제압해서 기생하는 것을 주로 하여 살아가는 종족입니다. 대인께 드린 신통술은, 대인의 혼백의 일부를 저희 종족과 비슷하게 변화시켜 대인의 혼(魂)을 떼어 내어 상대의 원영에 기생시킨 후, 차후에 상대의 원영을 지배하여 제2 원영을 응결시킬 수 있는 기괴고(奇怪蠱)의 비술이지요.]

"이 비술은…."

나는 견신이 준 비술에서 무언가 익숙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익숙함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알 수 있었다.

'원립의 혈영(血靈)….'

자신의 원영을 쪼개, 혈영이라는 것으로 만들어 각 성의 용맥에 잠복시켜 둔 그 마도 신통과 비슷한 군데가 있었다.

'과연 진마계는 마공의 본고장이라는 건가.'

원립의 혈영 역시, 유촉족 혹은 그 비슷한 종족에서 기인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고맙소. 다만 이 비술을 사용하려면 결국 타인의 영혼에 내 혼을 심어서 기생시켜야 한다는 건데, 나는 그런 류의 마공을 사용할 것 같지는 않군."

[뭐, 사용하시는 건 대인의 자유입니다만. 그리고 애초에 그 기괴고의 본질은 타인의 혼을 무자비하게 착취하는 게 아닙니다.]

견신의 말이 이어졌다.

[먼 옛적, 진마계가 온전한 하나였을 때. 그 당시 마계는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요마(妖魔)와 천마(天魔). 그중에서 천마들은 그 특유의 기괴한 마공을 통해 요마족을 자원으로 갈아먹고는 했지요. 특히나 요마족의 정신을 침식시켜, 타락시킨 후 천마족의 영원한 노예로 부리는 비술들 역시 당시 천마들 사이에서 유행했었더랍니다.

저희 유촉족 역시 한때 천마족의 노예였으나, 유촉족의 시조 중 한 분께서 천마족의 정신 침식에 대항하여, 명확한 자신의 주관으로, 자신을 침식시키는 천마의 정신에 역으로 기생하여 서로의 정신력을 겨루는 비술을 만들어 낸 것이 기괴고의 시초이지요.]

"한 마디로, 천마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 이 신통이란 소리군?"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지금은 천마들이 거하는 혈음계와, 우리 요마들이 거하는 진마계로 두 세계가 나뉘었고, 광한계 분들은 천마를 볼 일도 없습니다만… 옛적부터 천마들이 광한계에 기이할 정도로 집착을 보였던 것은 진마계에서 유명한 사실입니다. 진마계에 오신 이상, 대인께서 혹시 천마를 만날 일도 있을지 모르니 비술을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제가 해 드려야 할 말이지요. 저희 마족들을 잘 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웃었다.

"…일단, 당장 내보내 드리고 싶지만 천기를 볼 때, 당장 며칠 후 흉(凶)이 이 인근을 뒤덮을 거요."

나는 견신을 보며 말했다.

원영기에 이른 후, 천기를 보는 눈이 더더욱 성장했다.

그리고 그 눈으로 볼 때, 며칠 이내에 이곳 점령지는 흉을 품은 이들로 휩싸일 예정이었고, 견신이 이곳의 마족들을 통솔해서 점령지 인근을 빠져나가게 되면 그 흉을 품은 이들에게 붙잡힐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흉의 상태로 보아, 아마 높은 확률로 인족이다.'

견신과 같은 마족이었다면 나도 망설임 없이 그들을 내보내 주었을 터였지만.

아무래도 인족 총연맹 측에서 사람을 보내려는 것 같았다.

"아직은 보내 드릴 수 없으니, 조금만 더 참아 주시구려."

[알겠습니다. 기다리지요.]

"그래도 내가 어찌할 수 있을 정도의 흉이니, 그들을 처리한 후에 보내 드리도록 하겠소."

나는 견신에게 말을 전한 후, 점령지에서 영기가 진한 곳으로 가 며칠간 원영의 경지를 안정시켰다.

'인족 총연맹에서, 나를 잡으러 오는 것일까.'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높으리라.

아마 이미 나는 인족의 배신자로 등록이 되어, 수배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 마음의 준비를 하자.'

천기를 읽을 수 있다고는 하나, 그것으로 자신의 운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천기를 읽을 수 있기에 애매하게 자신의 앞날을 알게 되고, 그 앞날을 대비하는 과정에서 변화하는 경우의 수를 전부 읽지는 못하기에, 천기를 아무리 읽어도 스스로의 운명은 알 수 없다.

내 앞날은 어찌 될지 몰랐지만.

'어쩌면… 인류를 배신해야 할 수도 있을 터!'

미래를 각오하고, 당당히 맞서자!

나는 결의를 다지며 며칠을 기다렸다.

* * *

나흘 후.

전명훈이 깨어났다.

나는 천기를 보며, 앞으로 이틀 후면 인족의 사람들이 도착한다는 것을 읽어 냈다.

'어쩌면 전명훈의 도움을 받아야 할 수도 있겠어.'

원영에 오르며,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시야'를 얻게 되었다.

이제는 계위 그 자체를 넘나드는 월수궁무록을 펼칠 수 있었기에, 합체기 태수가 직접 오지 않는 한 내가 생존하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마족들을 보호하는 것.

'그 정도는 전명훈에게 맡겨도 되겠지…?'

이제 연진에게 연락이 닿았으니, 아마 답변이 올 터였다.

'연진의 소식을 전해 준 후, 전명훈에게 도움을 청하자.'

사축기 수사를 죽여 버린 전명훈의 전력이라면, 상당히 도움이 될 터였다.

우우우웅!

나는 내 품에서 옥패가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벌써 답신이 돌아왔다고…?'

연진과 함께 간 천인기 괴뢰로부터의 답신이었다.

'잘 됐군, 이곳으로 오겠다는 것이겠지?'

우우웅!

내가 옥패에 영력을 불어넣자, 옥패는 몸을 떨며 허공으로 한 개의 영상을 투사했다.

파아아앗!

"…어?"

―쿠르르릉, 쿠릉!

―번쩍!

천뢰(天雷).

그것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천뢰였다.

천뢰 속에서, 반백반흑의 머리칼을 지닌 연진과, 그의 몸에 들러붙어 있던 연위가 동시에 부스러진다.

그리고 천뢰에서 뿜어진 한 줄기의 벼락이 괴뢰를 향해 쇄도한다.

피시식….

그것이 영상의 마지막이었다.

"…이, 이게 무슨…."

나는 황당함을 느끼며 헛숨을 들이켰다.

'그, 그사이에 죽었다고…?'

분명히 연위는 20년 안에 죽는다고 했었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아무리 빨라도 10년 안에 죽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20년 안쪽이면 언제든지 상관이 없었던 듯.

그들은 그대로 죽어 버렸다.

나는 이를 악물며 주먹을 쥐었다.

'…미안하다, 연진.'

어쩌면 나 때문이다.

전명훈을 찾아가라고 괴뢰를 쥐어서 보내지 않고 여기에 붙잡아 놓았다면 오히려 전명훈을 만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는데.

'전명훈에게는… 뭐라고 말해야 하지.'

이제 도움을 받는다거나 그런 것을 생각하기보다는, 녀석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가 더 걱정되었다.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거짓말을 해야 하는가.'

나는 전명훈을 찾아가기에 앞서,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고민했다.

'뭘 말해 줘야 한단 말이냐!'

"…."

한참을 고민한 나는, 전명훈을 찾아갔다.

녀석은 이제야 기운을 회복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멍하니 총독부 밖을 보는 중이었다.

"…전명훈, 일어났나?"

"기절하고 얼마나 지났지?"

"…나흘."

"그렇군. 나흘이면 연진에게 소식이 닿을 거라 하지 않았나? 답변이 오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하지?"

"…한 가지 묻겠다, 전명훈."

나는 녀석을 쳐다보며 물었다.

"연진을 만나면 어떻게 할 거지? 진선… 이란 존재가 연진의 운명에 천겁을 고정시켰다고 들었다만…."

"내가 대신 막아 줄 것이다."

그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스스로 경지를 올리며 부른 천겁이 아닌, 남이 인위적으로 부여한 천겁이다. 대신 막아 주어도 될 거야. 금신천뢰문의 내리친 천겁은 진선이 직접 내리친 벼락이었다. 하지만 그 녀석이 운명을 고정시켜 내리는 천겁은 진선이 직접 힘을 쓰는 게 아닌, 간접적으로 내리는 천겁이니, 분명 내가 막을 수 있을 것이야!"

"…그런가."

"궁금한 걸 들었으면 답을 내놔라, 서은현. 연진에게 연락은 닿았나!?"

나는 전명훈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의념과 심상을 바라보았다.

시체.

시체의 밭이 펼쳐진 시산혈해!

그것이 지금 전명훈의 심상이었다.

녀석의 정신은 그 시산혈해 속에서 매우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여기서 내가 연진이 죽었다는 말을 하면, 어쩌면 녀석은 완전히 미쳐 버릴지도 몰랐다.

"…연진에게선, 아직 답변이 없다."

나는 이를 악물고 거짓말을 했다.

"답변이 돌아오려면, 돌아오는 데에도 시간이 조금 걸린다."

8차 점령지에서 연진에게 들려 보낸 괴뢰에게 연결되는 데 시간이 걸린 것은, '연결'되는 데에 시간이 걸릴 뿐.

연결이 되고 나면 시간은 걸리지 않았지만, 나는 거짓을 말했다.

녀석에게는 희망이 필요해 보였으니까.

한 줄기 희망이라도 주지 않는다면, 그대로 무너져 미쳐 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렇군. 알겠다."

"연진에게서 답변이 돌아오면, 다시 말해 주마."

나는 비겁하게도 거짓말을 했기에, 녀석에게 나를 도와 마족들을 지켜 달라고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다. 어차피 이번에 보인 흉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흉이었으니, 최대한 내 힘으로 해결할 수밖에.'

나는 총독부 바깥으로 나와 다시금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이틀이 지났다.

"…왔다."

원영을 관조하던 나는 눈을 뜨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웅, 웅, 웅….

결계 너머에는, 수 명의 원영기 수사와 천인기 수사들이 즐비하였다.

지난번 전명훈과 싸워서 구멍이 났던 결계는 어느새 자가 수복이 되어 다시금 닫혀 있었다.

쿠릉, 쿠르릉….

하늘이 음기로 충천하며, 먹장구름이 덮였다.

그리고, 하늘 아래로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음(陰) 계열의 공법이군.'

나는 그들의 대표로 보이는 한 천인기 수사를 바라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마족들에게는 일단 지하로 내려가 대피해 있으라고 한 상황.

점령지의 지상에 남아 있는 것은 이제, 나와 총독부에서 쉬고 있을 전명훈뿐이었다.

'어떻게든 내가 해결한다.'

천인기 수사 셋.

그리고 원영기 수사 여덟.

이 정도라면, 내가 어떻게든 할 수 있었다.

우우웅!

하늘이 울리며, 음기를 두르고 있는 흑포의 천인기 수사가 두루마리를 하나 꺼내 펼치고는, 읽기 시작하였다.

[인족 총연맹의 사자, 현신이 전한다. 인족의 배신자, 전 임시 총독 서은현. 그리고 학살마 전명훈은 나와서 순순히 총연맹의 체포를 받으라!]

"음?"

학살마 전명훈?

[특히 학살마 전명훈은, 1, 2, 3, 4차 점령지에 있는 무고한 인족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총연맹에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혔으며, 인족의 감찰관으로 파견된 사축기 수사를 격살한 죄를 물어, 저항한다면 즉결 처형을 하겠다!]

"…."

나는 입을 벌리며 전명훈이 있을 총독부 건물을 바라보았다.

'저 미친놈, 도대체 여기까지 오면서 무슨 짓을 벌인 거냐?'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현신이라는 자를 바라보았다.

"저… 이런 상황에서 조금 웃긴 질문이긴 합니다만. 4차 점령지가 전명훈에게 박살이 났으면… 본래 작전은 어찌 되는 겁니까?"

내 질문에 현신의 얼굴은 물론이고, 그와 같이 온 이들의 표정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인족 총연맹이 덕분에 난리가 났다. 저 미치광이가 폭주하며 작전 지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덕에, 지금 총력전 계획이 전부 파탄 나 버렸다! 저놈은 죽여서 그 혼백조차도 총연맹에 끌려가 재판을 받아야 하는 처지다! 물론 전 임시 총독, 네놈도 인족 배신 혐의가 있는 바 재판을 받아야 하니 그리 알아라!]

"…그럼 한 가지 더 여쭙겠습니다."

나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현신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면 계멸천공진 계획도 무산된 겁니까?"

만약 그렇다면, 마족들을 급하게 피신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 이들을, 죽이지 않아도 된다.'

마족들을 급하게 피신시키려는 이유는, 계멸천공진 계획이 시작되면 나와 인연을 맺었던 이들과 그들의 땅이 흔적도 없이 소멸되기 때문.

만약 계멸천공진 계획까지 무산되었다면, 나는 얌전히 이들에게 잡혀 줄 요량도 있었다.

마족들은 괴뢰를 부려 천천히 탈출시켜도 되니 말이었다.

그러나, 현신에게서 들려온 대답은 절망적이었다.

[무슨 소리! 계획이 파탄이 났다고 했지 무산되었다고는 하지 않았다. 본 사자가 속한 흑린어령문은 지족 중 흑룡족(黑龍族)과 깊은 관계가 있고, 다행히도 흑룡족의 합체기 흑룡왕(黑龍王)께서 이번에 본문과의 관계를 생각해 한 번 도움을 주신다 하니, 총연맹이 흑룡족에게 이권을 나눠 주게 될지언정 작전 자체는 크게 변하지는 않을 예정이다!]

"…그렇습니까."

나는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한 가지.

'이들을 제압하거나 죽인 후, 내 인연들을 빨리 피신시킨다.'

인족의 배신자가 되는 것을 감내하겠다!

내가 결의를 다졌을 때였다.

현신이 나와 전명훈의 기를 죽이려는 것인지, 버럭 일갈하며 외쳤다.

[여하튼, 죄인 서은현과 대역죄인 전명훈은 신성한 인족 총연맹의 체포에 순응하라! 응하지 않으면 서은현 네가 속한 창천개벽문도 불이익을 당할 것이며, 금신천뢰문의 마지막 생존자인 전명훈 네놈의 추후 행동에 따라, 금신천뢰문이 인족의 역사에 어찌 기록될지….]

그리고.

쿠르르릉!

총독부 건물이 폭발하며, 그 안에서 쉬고 있던 전명훈이 으르렁거리며 영언을 내뱉었다.

[…금신천뢰문의 마지막 생존자라니, 무슨 뜻이냐?]

[말 그대로다! 명귀계로 파견을 나간 금신천뢰문의 생존자들은 차원의 거리가 너무 멀어 생사불명이고, 이번에 진마계로 파견을 온 다른 금신천뢰문의 생존자 한 명도 최근 시운도에 있는 명적(命籍)에서 불이 꺼졌다!]

시운도는 인족에 속한 이들의 신분을 증빙해 주는 섬이었고, 시운도에는 명적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명적에는 시운도에 신분을 등록한 모든 인족의 생사를 알 수 있게, 인족의 생명반응을 통해 명적에 불이 들어오게 되어 있는 법술이 걸려 있었다.

인족의 생사를 총괄하는 명적은 인족 총연맹 소속 수사들만이 열람할 수 있었으며, 인족 총연맹은 명적을 통해 인족의 동향을 관리하였다.

그리고 현신의 말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런 젠장….'

결국, 전명훈이 연진의 죽음을 알아 버린 것이었다.

[다시 말한다! 두 죄인은….]

그리고 다음 순간.

파칙!

[신성한 총여….]

푸콱!

현신의 얼굴에, 세로로 핏줄기가 치솟았다.

잠시 후.

그의 몸이 그대로 절반으로 갈라졌다.

콰르르릉!

어느새 현신의 뒤에 날아든 전명훈의 손에는, 현신의 원영이 잡혀 있었다.

콰지지직!

녀석이 손을 움켜쥐자, 그대로 현신의 원영은 폭발했다.

쿠릉, 쿠르르릉!

현신이 불러온 먹장구름 안쪽에서, 시뻘건 번개들이 몸을 꿈틀거리기 시작하였다.

붉다!

전명훈의 경지는 원영기였으나, 어째서인지 놈의 의식의 크기가 점차 거대해지며 사방을 뒤덮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는 의념의 색을 보며 마치 시뻘건 핏빛이 천지를 덮는 듯한 착각을 느껴야만 했다.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지금껏 불안불안한 정신 상태로 휴식을 취하던 전명훈의 정신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명귀계에 간 동료들에게 가려면, 차원 간의 거리 때문에 200년은 걸린다. 그런데 남은 시간은 20년…. 그래서, 연진 한 명만이라도, 사문의 제자를… 단 한 명만이라도… 살리고자 왔거늘….]

뚝, 뚝….

전명훈의 두 눈은 흰자가 드러나게 뒤집혀 있었고, 눈가에는 피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 죽어 버렸구나. 모두 다… 그래….]

'아아….'

나는 알 수 있었다.

전명훈의 정신이, 지금 이 순간.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나는 저런 정신을 가진 이들을 본 적이 있었다.

서휼과 괴군.

그리고 원립에게 북향화를 잃었던 나 자신.

심상이 암흑에 휩싸인 이들.

오늘.

[다 필요 없다. 모조리… 죽어 버려라.]

전명훈이, 완전히 미쳐 버렸다.

이곳이 지옥이라도 (1)

쿠르르릉!

천지가 적뢰에 휩싸인다.

'빌어먹을….'

심어를 쏘아서 다시 정신을 안정시켜 보려 해도 나아지지 않았다.

심상 자체가 완전히 망가졌다.

원래도 위태위태하던 상태였는데, 연진마저 죽었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히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놈을, 내가 제압할 수 있을까?'

그리 생각할 때였다.

우득, 우드드득!

촤르륵!

"끄…으아아아아!"

"…??"

분명 전명훈에게 원영이 폭발해 버렸을 총연맹의 사자, 현신이 몸을 재생시키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어떻게!? 원영이 폭발한 걸 분명 봤건만….'

아무리 몸을 전부 잃어도 원영만 있으면 부활할 수 있는 게 원영기 이상의 수도자들이라지만.

반대로 말하면 원영기 이상 수도자들의 최대 약점은 곧 원영이라는 의미였다.

'원영이 터지고도 살아 있어?'

"잠깐, 저건…?"

우우웅!

현신의 등 뒤로, 세 개의 원영이 떠올랐다.

"…!?"

그리고 세 개의 원영 중 한 원영이 다시 현신의 체내로 들어간다.

곧이어, 현신은 완전히 부활하였다.

"네…놈…! 감히, 감히 내 원영을 한 개나 소비시켜…!?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

'원영을… 하나가 아니라 네 개씩이나 응결시킨 건가?'

전명훈은 말없이 번개 속에 휩싸여, 뒤집힌 눈으로 현신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굉장히 오싹한 광경이었고, 현신은 전명훈을 보고 흠칫하며, 제 스스로 원영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하, 하하! 본 흑린어령문의 사상원영(四象元靈)의 비술은 기존의 원영을 4개로 쪼갠 후, 천천히 성장시켜 총 4개의 원영을 얻는 게 가능하다! 네놈 따위에게 쉬이 당하지는 않는다!"

녀석은 말을 마친 후, 바로 결인을 맺었다.

우우우웅!

녀석의 등 뒤로 총 3개의 원영이 떠올랐다.

원영은 각기 'ㄱ' 자로 녀석의 등 뒤에서 자리를 잡으며, 녀석과 똑같은 형태의 결인을 맺었다.

우우우웅!

그와 동시에, 녀석의 등 뒤로 '口'자 형태의 공간 균열 같은 것이 모습을 드러낸다.

다만 사상원영이라는 것 중 하나가 사라진 상태여서인지, 공간 균열은 그렇게 온전한 상태는 아닌 듯했다.

"사축기 감찰관을 격살한 전명훈, 사축기 전력으로 추정되는 서은현! 너희 둘을 잡기 위해, 내가 왔노라!"

우우우우웅!

그와 동시에, 현신의 등 뒤에 생겨난 공간 균열.

그 안쪽에서 무언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는 두 눈을 크게 뜨며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뭐지, 저건…?'

기(氣)의 계위가 요동친다.

지족의 시야에서 음양이 회전하며, 기의 계위의 깊숙이 파고든다.

동시에 나는 저 공간 균열을 통해, 기의 계위에서 음양이 회전하며 무언가를 '끌어올리는' 듯한 것을 보았다.

우우우우웅!

그리고 현실에서 육안으로도 현신에게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그의 피부 위로 검은 비늘이 돋아오른다.

동시에 그의 등 뒤에 있던 검은 공간 균열에서, 시커먼 형체의 용(龍)의 그림자가 나와 그의 몸에 들러붙었다.

쿠구구구구구!

현신의 몸이 마치 반인반요 서란의 몸처럼 변화하였다!

[우리 흑린어령문의 제자는 상당수가 합체기 흑룡왕 현음(玄陰) 태수님이 인족 첩실을 들여 낳은 방계 혼혈들…. 그분께서 물려 주신 선수(仙獸) 흑룡(黑龍)의 진혈을 타고났기에, 머나먼 옛적 고대 선수의 힘을 끌어내는 게 가능하다…!]

쿠구구구구!

그와 동시에 날씨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천지간에 음기가 가득 차오르며 다시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이번에 내리는 비는 시커먼 흑수(黑水)였다.

쿠구구구구!

하늘의 먹장구름이 뭉치며, 마치 한 마리의 묵룡(墨龍)과도 같은 형태로 변화하였다.

콰아아아아!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땅에서 물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천지자연이 변화한다.

'이건….'

명백한 사축기 급의 힘!

'놈에게 들러붙은 흑룡의 그림자… 저게 놈에게 힘을 주고 있다!'

녀석이 수행한 힘이 아니었다.

저 선수 진혈이라는 것을 통해, 머나먼 어딘가에 존재하는 [뭔가]의 힘을 빌려 온 것이다!

묵룡의 아래에서, 현신이 전명훈을 가리키며 외쳤다.

[순순히 죄를 인정하고 원영을 내놓아라, 전명훈! 그렇지 않으면….]

그리고.

[아가리….]

콰아아아아앙!

[닥쳐라!]

하늘을 메운 구름이, 일격에 찢겨난다.

붉은 번개가 음기를 밀어내며, 하늘의 구름을 찢어발겼다.

적색의 뇌전이 마치 태양처럼 뭉치며 구름이 찢어졌고, 그 중심에서 전명훈이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모두… 다 죽어라. 아무 의미도 없는 이 세상에서, 다들 왜 살아 있는 거냐?]

콰르르릉!

하늘이 붉은 벼락으로 뒤덮였다.

현신이 자신만만하게 만들어 낸 먹장구름의 묵룡이 전명훈의 일격에 갈가리 찢어져 분해된다.

[자, 잠깐 이게 무슨….]

녀석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 전명훈은 현신의 앞으로 번개의 속도로 날아들어 녀석의 얼굴을 잡았다.

콰르르릉!

뒤늦게 천둥소리가 전명훈을 뒤따라갔고, 현신의 일행으로 온 천인기 수사들과 원영기 수사들이 당황하며, 각자 결인을 맺으며 전명훈을 향해 각기 법술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콰르르르릉!

온 천지가 적뢰로 덮였다.

8차 점령지 전체가 붉은 벼락이 한가득 차오르며, 삼라만상을 뒤덮는다.

현신을 보조하러 온 수사들은 물론이고, 나 역시 붉은 벼락에 덮였다.

순간, 세상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 * *

쉬이이이….

나는 연기가 모락모락 흐르는 몸으로 숨을 몰아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쿠릉, 쿠르릉….

하늘에서는 아직도 붉은 번개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창령성광오채대법을 한계까지 끌어낸 상태에서 이를 악물었다.

우우웅!

내 전신에 성광호체공의 별빛이 맴돈다.

나는 일전의 오현석처럼, 마치 밤을 형상화한 것처럼 몸이 변화하여 있었다.

'막…았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아래쪽에서 여파만으로 기절한 마족 무리들을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전명훈의 공격은 내가 지키려 했던 마족들을 죽이지는 못했다.

전력을 다해 몸을 던져 가면서 전명훈의 적뢰를 막았기 때문.

그러나 나는 긴장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전명훈은, 아직도 붉은 벼락으로 이뤄진 구체의 중심에서 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전까지 현신을 지원하던 천인기와 원영기 수사들은 전부 사라져 버렸다.

아마도 재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내가 상황을 파악하며 주변을 둘러볼 때, 저 멀리서 작은 구름 덩어리가 보였다.

그것은 음기로 이뤄진 먹구름이었다.

먹구름은 마치 작은 고치처럼 뭔가를 둘러싸고 있었고, 얼마 후, 그 먹구름의 고치 안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현신이었다.

그는 피를 토해 내며, 잔뜩 충혈된 눈으로 전명훈을 노려보았다.

총연맹의 사자랍시고 근엄하게 차려입고 온 그의 옷은 전부 찢어져 누더기가 되어 있었고, 전신은 노릇노릇하게 반쯤 익어 있었다.

그리고, 현신이 나를 쳐다보며 외쳤다.

"서은현! 네놈, 나를 도와라!"

그가 잔뜩 충혈된 눈으로 악을 썼다.

"저 미치광이 학살마를 막아야 한다! 놈을 이대로 풀어 두면 곳곳을 떠돌아다니며 학살을 자행할 것이다! 지금 놈을 봉인해야 한다! 나를 도와 놈을 봉인하면, 인족 총연맹 재판에서 내가 있는 힘을 다해 네놈의 편을 들어주마!"

촤라락!

현신이 입을 열고 그의 금단에서 일곱 개의 깃발 법보를 꺼냈다.

검은색의 깃발 법보에는 하나같이 여의주를 문 흑룡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흑룡의 입에 물린 여의주를 보며 눈을 빛냈다.

여의주는 마치 광한옥과 매우 비슷하게 그려져 있었다.

"점령지에 펼쳐진 결계를 이용해서 놈을 잡는다! 협조해라, 서은현!"

"…."

나는 침음하며 전명훈을 바라보았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냐, 전명훈.'

어쩌면.

나는 이번에 창천개벽문이 아닌 금신천뢰문에 들어가야 했을지도 몰랐다.

사정이라도 알았다면.

어쩌면 나는 완전히 미쳐 버린 그를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미 전명훈은 미쳐 버렸고, 나에게는 이번 생에 지켜야 하는 이들이 생겨 버렸다.

그러니.

'미안하다.'

우우우웅!

녀석을, 봉인해야 한다.

'이게, 지금의 내 최선이다.'

창령성광오채대법에 의해, 내 전신이 점차 더더욱 별빛으로 물든다.

성광호체공의 힘으로 육신의 강도를 끝없이 증폭시킨다.

내 몸은 마치 우주를 형상화시킨 듯 밤하늘의 별빛처럼 변화하였다.

그리고 단전에서는 오채색의 빛이, 양 주먹에서는 푸른 빛이 맴돌았다.

부우웅!

[전명훈을 붙들어 놓겠소, 그사이에 움직이시오!]

얄궂게도, 나를 잡으러 온 현신은 미쳐 버린 전명훈을 상대로 합작을 시작했다.

부웅, 붕, 붕, 붕!

나는 무형검을 꺼내 들었다.

'진짜 번개의 속도는 아니다.'

전명훈이 쏘아 내는 붉은 벼락은, 위력은 출중할지언정 진짜 천뢰의 속도에 비하면 한참 느렸다.

내가 눈으로 보고 피할 수 있을 정도.

그리고 피할 수 있다는 것은.

부웅!

슈칵!

가장 약한 점을 향해 정확히 검을 내질러 베어 낼 수 있다는 뜻!

쿠릉, 쿠르르릉!

벼락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며 예측하기 힘든 방향으로 나를 향해 쇄도한다.

하나, 예측하기 힘들게 변화하는 것은 무형검 역시 마찬가지.

나는 무형검을 앞으로 뻗었다.

무형검도 역시 기괴하게 변화하며 전명훈의 벼락에 맞섰다.

녀석이 뻗어내는 벼락 한 줄기 한 줄기가 그대로 공간을 베어 낼 정도.

하지만 계위를 넘어서는 눈을 얻어 낸 내게는, 공간을 베어 내는 것은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다.

'기(氣)의 계위가 이루는 공간….'

천지만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결국 계위에 의해 결정된다.

이 세상의 물질이란 것.

형이하학의 모든 것은 기(氣)의 계위에 밑바닥에 존재하는 낮은 차원의 영기!

그리고 그러한 영기들이 얼기설기 엮이며, 이 세상의 공간을 형성한다.

원영기에 이른 내 눈에 공간을 구성하는 기운들이 보였다.

원영기들은 어떻게 공간을 자르고 공간 이동을 하는 게 가능한가.

부웅!

나는 무형검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공간을 이루는 계위의 영기를 베어 내며 전명훈의 번개를 마주 베어 냈다.

본래 원영기는 공간을 이루는 기의 계위를 볼 수 있을 뿐이지, 그것에 손을 대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자유자재로 공간을 베고 허공간에 진입해 공간 이동을 하는 것은 오직 천인기 이상의 특권이었다.

하나, 계위를 넘나들며 자유자재로 베어 내는 내 무형검과, 원영기의 눈이 합쳐지며 나는 천인기 수사처럼 자유자재로 공간을 넘나들며 전명훈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었다.

쿠르르릉!

점차 녀석의 기운이 강해진다.

그리고, 다시금 녀석의 등에서 여섯 개의 깃발이 돋아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차례대로 깃발이 뽑히지 않았다.

콰릉!

한 번에 모든 깃발이 뽑혀 나간다.

우우웅!

동시에, 녀석의 주변을 뒤덮은 붉은 벼락이 형상을 변화시키기 시작하였다.

벼락이 형을 갖추며, 거인(巨人)의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그것은 마치 뇌신(雷神)과도 같아 보였다.

험상궂은 형상을 한 뇌신이 팔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뇌신의 어깻죽지가 늘어나며 뇌신의 팔이 한 쌍 더 돋아난다.

한 쌍 더 돋아난 뇌신은 한 쌍의 팔을 양쪽으로 벌렸다.

그리고 다시금 뇌신의 어깻죽지에서 한 쌍의 팔이 더 돋아났다.

이번에 돋아난 팔은 앞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육비(六譬)의 형상으로 변한 뇌신의 손에, 각각의 깃발들이 잡혔다.

오오오오오!

뇌신이 포효하였다.

그와 동시에, 하늘이 붉게 물들며 천지가 뒤흔들렸다.

쿠구구구구!

뇌신이 주변의 뇌력을 흡수하며 점차 크기를 키웠다.

뇌신의 손에 잡힌 깃발들 역시 점차 거대해져 갔다.

얼마 후 약 700장 크기만큼 거대해진 뇌신이 나를 내려다본다.

찌릿, 찌릿….

천지간에 뇌기가 가득 차, 움직일 때마다 정전기가 전신에 따끔거렸다.

나는 뇌신의 붉은 안광을 보며 말했다.

"…미안하다, 전명훈."

나는 기수식을 잡았다.

"괴물이 되도록 내버려 두어서."

쿠르르릉!

뇌신이 포효하며 깃발을 휘둘렀다.

여섯 개의 팔이 깃발을 휘두를 때마다 형형색색의 벼락들이 나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우리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 * *

인족 총연맹 총좌, 천인도.

그곳의 중심, 합체기 태수들이 머무르는 천인도 천부산(天缶山).

천부산에 있는 일곱 개의 동부(洞府: 수도자들의 거처, 주로 동굴을 파서 만들어 냄).

그중 한 곳에서 흰빛이 뿜어졌다.

얼마 후, 흰빛은 천부산의 정상으로 날아 올라가, 정상에 있는 작은 진법 한 곳에 내려앉았다.

우우웅!

진법이 발동되자, 흰빛은 그대로 한 남자의 인영으로 변해 진법의 한 곳에 자리를 잡았고, 얼마 후 진법 위로 6인의 희미한 인영이 떠올랐다.

[위 수사, 무슨 일로 태수회를 소집하셨소?]

인영 중 한 명이 흰빛의 인영, 위령선을 향해 물었다.

위령선의 인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일전, 인족 배신 혐의가 걸린 마계 8차 점령지 임시 총독 서은현을 체포하려 감찰관을 보냈고, 그 감찰관이 금신천뢰문의 생존자 전명훈에게 잡혀 죽어 다시금 현신을 보내어 잡아 오게 했습니다.]

[현신이라면, 흑린어령문에서 가장 선수 혈통을 진하게 타고난 자 아니오?]

[과잉 전력을 보냈군.]

[천인기 수준에서 고대 선수의 힘을 빌어 사축기 중기 최고봉의 힘을 낼 수 있는 아이일진대….]

[서은현과 전명훈이 둘 다 사축기 급의 전력이라 할지라도, 파악된 바로는 서은현은 사축기에 턱걸이할 정도. 그리고 전명훈은 짧은 시간 동안만 폭발적으로 사축기 중기의 힘을 낼 수 있는 자가 아니오? 하루 동안은 안정적으로 사축기 중기 최고봉의 힘을 낼 수 있는 현신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겠지.]

합체기 태수들의 말에, 위령선은 잠시 침음성을 흘리다가 말했다.

[마계 정벌군 총군사 현운에게서 방금 연락이 왔습니다. 그의 사형인 현신의 죽음을 느꼈다더군요.]

[뭣…! 그게 무슨…!? 현운이 잘못 느낀 게 아니오?]

[시운도에 있는 제 분신을 시켜 방금 명적도 확인했습니다. 현신의 명적이 스러졌습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전명훈과 서은현이 사축기 중기를 넘어선 전력이라고?]

위령선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현운에게서 온 전언으로 파악해 보아, 대강 이런 상황이라 하더군요.

전명훈이 감당할 수 없는 폭주를 시작해, 현신은 서은현과 잠시 손을 잡고 8차 점령지의 결계를 이용, 전명훈을 봉인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전명훈에게 치명상을 입고 사상원영의 비술마저 전부 흩어졌고, 현신은 현운에게 일의 경과를 비술을 써서 알린 후 사망했다고 합니다.]

[….]

[…서은현이 문제가 아니었군. 전명훈이란 녀석이 제일 문제였어….]

[이 무슨 어이없는, 선수 혈통을 타고난 이도 아닌 이들이 원영기의 경지에서 사축기 급 수사를 죽여…? 안 그래도 흑린어령문의 수사들은 생존에 특화된 이들인데…?]

잠시 태수회에 모인 태수들 사이에 침묵이 맴돌았다.

[…둘 다 하나같이 엄청난 인재들인 건 맞군.]

[이번 일만 아니었다면 인족을 이끌어 나갈 태수에 도달했을지도 모르는 일일진대….]

태수들의 사이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필이면 흑린어령문의 현씨 제자를 죽였단 말인가….]

[흑룡왕 현음이 극대노할 거요.]

[극대노는 무슨, 화난 척하면서 인족의 일에 간섭하려 하는 거겠지.]

[뭐가 됐든 그자에게 빌미를 줬다는 게 중요하오!]

[빌어먹을, 선수의 직계(直系)가 광분한 척 쳐들어가서 전명훈을 죽여 버리고, 그를 빌미로 서은현까지 죽이겠군.]

[인족의 인재들을 이 기회에 죽여 버리고, 마계 합체기 태수들을 막아 낸 후 그걸 빌미로 이번에 인족이 점령한 점령지 대부분을 흑룡족으로 뺏어갈 터요!]

합체기 태수들은 하나같이 침음성을 흘렸다.

[곳곳에서 난리군. 인족 출신 괴군이 각 종족을 헤집고 멸망시키고 다니면서 인족의 위신이 땅에 처박혔고… 야심차게 준비한 마계 침공은 제대로 힘도 못 쓰고, 그나마도 점령한 점령지는 흑룡족에게 대부분 뺏길 예정인 데에다 합체기 태수인 우리들이 하나같이 치명상을 입어 동부를 벗어나기도 힘든 상황이니….]

[이렇게 된 것, 계멸천공진 계획이나 제대로 시행해서, 아무도 이득을 보지 못하게 마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기나 합시다.]

[맞소, 어차피 전명훈 그 빌어먹을 놈에 의해 4차 점령지까지 전부 쑥대밭이 되었으니, 이리된 것 그냥 4차 점령지를 광한계로 편입시키지 않고 그대로 천공진을 폭발시키면….]

[흑룡족도 큰 이득을 얻진 못할 거요.]

[이렇게 된 거, 모두가 같이 망할 수밖에!]

그들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의견을 나눴다.

태수들의 회의는 며칠간 이어졌다.

그렇게 며칠 후.

태수들의 태수회가 열리는 천부산의 정상,

그곳으로 총연맹의 사축기 수사 중 한 명이 올라왔다.

"태수들께 보고 올립니다, 진마계의 입구에, 흑룡왕 현음께서 도착하시어, 진마계 입구를 장악한 총연맹 사자에게 통행 허가를 요구하고 계시다 합니다."

[결국 도착했군, 늙은이….]

회의를 이어 나가던 합체기 태수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통과시켜 주어라. 늙은이가 설치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 진마계 합체기들을 막아 줄 자는 그 늙은이가 유일하니 어쩔 수 없지.]

위령선이 혀를 차며 사축기 수사를 향해 말하였다.

[그리고, 늙은이가 8차 점령지에서 제 후손 복수를 한 후 최전선으로 향하면, 즉시 계멸천공진을 발동시키라 전해라.]

그의 눈이 섬뜩하게 물들었다.

[어차피 이리된 것, 누구도 이득을 보지 않는 게 좋겠지. 계멸천공진을 발동시킨 후, 흑룡왕이 돌아와서 항의하지 못하도록 진마계의 입구는 닫아 버리도록.]

그렇게, 인족 총연맹 태수회에서 인마대전의 끝을 알리는 명령이 내려졌다.

* * *

인족 구역 내 진마계의 입구.

그곳의 앞에서, 흑포를 입은 창백한 안색의 장년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장년인의 이마에는 흑청색의 작은 사슴뿔이 한 쌍 돋아나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는 사축기 경지의 총연맹의 사자가 쩔쩔매며 서 있었다.

"통행 허가는 도대체 언제 도착하는 거냐, 너희 인족은 굼벵이가 진화해서 태어난 종족인 거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하는군."

"흐, 흑룡왕께 정말 송구합니다만…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아까부터 조금만 조금만 조금만 계속 반복하면서 기다리라고 하는데, 도대체 그 조금만이 언제까지 반복되는 거냐."

"그것이…."

"내 후손인 현신이 뒈져서 지금 매우 불쾌한데도, 너희 인족 놈들을 향한 최소한의 존중으로 통행 허가를 기다리는 건데, 그마저도 이따위로 늦게 늦게 처리하면 내 기분이 어떻겠나?"

"그것이…."

그때였다.

우우웅!

사축기 수사의 허리춤에 있는 옥패에서 밝은 빛이 나왔다.

사축기 수사는 황급히 옥패를 미간에 가져다 대었다.

얼마 후 옥패를 통해 전해진 뜻을 읽은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허, 허가가 났습니다! 흑룡왕께선 이제 들어가셔도 무방하십니다!"

"흠, 이제 허가가 났다는 말이지?"

"예, 예!"

"그래… 아 그나저나, 혹 진마계 입구 측에는 위령선 놈이 분신을 안 파견해 놨느냐?"

"아, 예, 그렇습니다. 위 태수님께서는 슬슬 분신을 줄이시고, 총연맹 휘하의 수사들에게 인족의 관리를 맡기시…."

"그렇군. 그럼 마계 입구에서 인족 총연맹과 직접 연락할 수 있는 책임자는 누가 있지?"

"아 바로 제가 인족 총연맹과 직속으로 연락할 수 있는 총책임자입니다! 저 말고는 아무도 인족 총연맹과 직접 연락을 할 수…."

"그렇다면."

흑룡왕 현음은 사축기 수사를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너만 죽이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인족 총연맹은 모른다는 거로구나."

"…예?"

콰드득!

"끄어어억!"

흑룡왕은 사축기 수사가 반응할 틈도 없이 움직여, 그의 목을 잡고 들어 올렸다.

"끄륵, 끄르르륵!"

사축기 수사의 칠공에서 피가 뿜어졌다.

그의 전신의 혈맥이 꿈틀거리며, 전신의 피가 사방으로 튀기 시작했다.

"무, 무슨 짓을…."

"안타깝게도, 흑룡왕 현음이 진마계로 넘어간 직후 진마계 입구 쪽에 우연찮게도 운석이 떨어져서 자네들은 전멸할 예정이라네. 선량한 흑룡왕은 인족 총연맹 태수회의 허가를 받고 합법적으로 진마계로 넘어갔고, 진마계 입구에 운석이 떨어진 불운한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 정말 슬픈 일이지만 선량한 흑룡왕은 애도를 표하는 것 외엔 손쓸 방도가 없었다네. 잘 알겠지?"

쿠구구구구구!

진마계의 입구.

그곳의 위로, 천공에 거대한 흑수(黑水)가 뭉쳤다.

쿠구구구구!

흑수가 그곳으로 떨어졌다.

진마계에 입구에 주둔하고 있던 인족의 군대가 하늘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흐, 흐아아아아! 저게 뭐야!"

"흐, 흑룡왕이다! 흑룡왕이 우리를 죽이려 한다!"

"도망쳐! 인족 총연맹에 알려야 한다!"

수많은 천인기, 원영기 수사들이 비둔술을 펼치며 날아갔다.

그러나 비둔술을 펼치며 날아가던 천인기 수사 중 한 명은 뭔가 기이한 것을 느꼈다.

'어? 잠깐, 진마계 입구 근처 주둔지가… 이렇게 넓었었나?'

우우우웅!

천인기 수사가 의아한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주둔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왜, 왜?'

파아아앗!

그가 잠시 허공에 멈춰섰다가 다시금 비둔술을 썼다.

그러나 얼마 후.

천인기 수사는 다시금 똑같은 자리에 도착했다.

"뭣? 잠깐… 여기는 방금 왔던 곳인데?"

그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고? 이건…."

그 말고 다른 천인기, 원영기 수사들도 계위를 직시하며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경악하였다.

"고, 공간이 휘어졌다!"

"빌어먹을! 이곳에 갇혔어!"

그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던 흑룡왕은 잡고 있던 사축기 총연맹의 사자를 쥐어 터트렸다.

퍼엉!

그의 손짓에, 총연맹의 사자의 전신에 있던 수분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폭발했고, 도망치려던 그의 원영은 흑룡왕의 손에 잡혀 으스러졌다.

와지직!

사축기 사자의 원영을 으스러트린 흑룡왕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안타깝다는 듯이 읊조렸다.

"가엾게도 흑룡왕이 진마계로 넘어간 후에 운석이 떨어진지라 진마계 입구 주둔 인족군은 뭘 할 틈새도 없이 전부 전멸하다니, 너무 슬픈 일이로군. 본 왕은 전멸한 인족군에게 애도를 표하겠네."

말을 마친 흑룡왕 현음은 진마계의 입구로 걸어 들어갔다.

쿠구구구구!

그의 뒤쪽에서, 그가 소환한 흑수가 대지에 떨어지며 수많은 비명이 울렸다.

그리고 흑룡왕이 손을 쥐자, 오행이 변화하며 그가 떨어뜨린 흑수가 거대한 암석으로 변화하였다.

차원문을 넘어 진마계에 도착한 흑룡왕이 비릿하게 웃었다.

"썩어빠진 인족 놈들 같으니, 네놈들에게 한두 번 뒤통수를 맞는 줄 아느냐. 인족 놈들의 인성이면 내가 진마계로 넘어가는 즉시 진마계 입구를 닫아 버리겠지. 먼저 뒤통수를 맞기 전에 뒤통수를 쳐 버리는 게 인족을 상대하기 가장 좋은 방법이니, 이해하시게나."

그가 진마계의 허공으로 떠오르며 결인을 맺었다.

"자. 그럼, 혈음계 존자의 존안이나 한번 볼까?"

쿠구구구구!

흑룡왕의 주변으로 기이한 음기가 맴돌았다.

우우우웅!

그의 등 뒤로 네 개의 원영이 떠올랐다.

원영들은 공간 균열을 만들었고, 그 공간 균열 너머로 어쩐지 시뻘건 빛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흑룡왕 현음의 이름으로 청하니, 혈음계의 존자시여. 인족이 마계에 자행한 대학살과 악덕을 양분 삼아, 부디 그 존체를 드러내소서.]

쿠구구구구!

현음은 야심 차게 웃으며 주문을 외웠다.

[인족에게 학살당하고, 착취당하고, 잡아먹힌 수억에 달하는 마족들의 원령을 감히 대변하여 말씀 올리나이다.]

우우우웅!

현음의 뒤편에서 뻗어 나온 핏빛 광채가, 대지에 내리꽂혔다.

그리고 인족의 점령지 전체를 물들이기 시작하였다.

[오소서, 위대하신 존자의 본신이시여!]

인류가 자행한 무수한 악덕이 쌓인 대지.

약자들을 착취하고 학대해 온 모든 인족 점령지의 용맥에, 적색의 빛이 맴돌았다.

이곳이 지옥이라도 (2)

덜걱….

왈칵!

나는 잔해 속에서 피를 한 움큼 내뱉었다.

"거헉… 크억…."

덜, 덜덜덜….

전신이 아프다.

몸 곳곳에서 찌릿거리는 느낌이 울린다.

'이곳은….'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이곳은 무너진 총독부 건물이었다.

인근 점령지는 모조리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인족에서 지어 놓았던 모든 건물과 시설이 한 줌 재가 되었고, 조금 튼튼한 것들은 모조리 무너져 쓰레기 더미가 되어 있었다.

쑥대밭.

그래, 이곳은 쑥대밭이 되었다.

쿠릉, 쿠르르릉!

나는 한 곳에서 울리는 천둥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8차 점령지에 펼쳐진, 7개의 광한옥을 축으로 펼쳐진 결계진.

그 결계진의 중심부.

흑룡이 그려진 7개의 깃발이, 중심부에 결계와 같은 형태로 꽂혀 있었다.

'저건….'

나는 비틀거리며 깃발들에게 다가갔다.

'전명훈….'

깃발들은 하나의 진법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점령지를 덮은 결계의 힘을 빌어, 전명훈을 봉인하기 위한 진법.

우우웅….

나는 진법 결계에 걸터앉았다.

현신의 기운은 어디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전명훈을 상대로 남은 3개의 원영을 모조리 소진한 후 죽었던 것이리라.

거의 사흘 밤낮으로 싸웠었다.

전명훈이 익힌 뇌도공법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한 번 얻어맞으면 몸이 순간 마비되어 움직이지 못하며, 마비가 풀린 후에도 몸에 남은 뇌기를 쫓아 놈의 번개가 유도탄처럼 끝없이 쫓아온다.

거기에 진짜 번개에 비해 조금 느리다고는 해도 하나하나가 무시할 수 없는 속도였으며, 위력도 끔찍했다.

극한의 공격력을 자랑하는 뇌도공법을 상대로, 나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했다.

'9할의 힘을 써서 겨우겨우 이겼다.'

나는 깃발 진법의 정중앙에 갇힌 전명훈을 바라보았다.

시커먼 음기가 사슬이 되어, 진법의 중앙에 있는 뇌구(雷球)를 가두고 있었다.

전명훈의 금단(金丹)이었다.

나는 착잡하게 전명훈의 금단과, 그 안에 갇혀 있을 녀석의 원영을 바라보았다.

"네가… 어떤 시간을 살아왔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파치지직….

"어쩌면… 그래, 내 잘못이다. 나는 분명 그때 창천개벽문이 아니라 금신천뢰문을 선택할 수도 있었으니까. 단순히 진선을 어찌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창천개벽문을 선택했다. 하지만…."

진선을 어쩌지는 못할지언정, 녀석이 어떤 삶을 살아갔는지는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힘이 없다는 이유로 비겁하게 이 녀석이 고통받을 것을 알며 일부러 방치했던 것일 수도 있었다.

시간을 돌리는 회귀자에게 있어, 너무나도 모순된 말이지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은 시간이 돌아갈지언정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내 안에 남아 영원히 나와 하나가 되어 살아갈 것이다.

'미안하다.'

전명훈은 이걸로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어쩌면 내 손으로 같은 세상에서 온 동료를 처음으로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

"…푹 쉬어라."

왈칵!

다시금 전명훈에게서 입은 상처 때문에 입에서 피를 내뱉으며.

나는 그렇게 녀석에게서 등을 돌렸다.

울컥, 울컥….

피가 몇 됫박이나 입에서 뿜어진다.

'내가 보호하려 한 이들….'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원유를 통해, 견신과 함께 그들을 인솔해서 총독 관저 지하로 피신시켰다.

나는 다 무너진 총독 건물로 다가가, 잔해를 치웠다.

쿠웅, 쾅!

연체공법으로 강인해진 내 육신은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건물의 잔해쯤은 깃털처럼 가볍게 내던질 수 있었다.

나는 잔해를 치운 후,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를 찾았다.

저벅, 저벅….

천천히 지하로 내려간다.

얼마나 걸었을까.

나는 저 멀리, 녹빛이 비추는 것을 보았다.

저벅, 저벅.

녹빛의 너머에서는, 이곳에 살고 있던 마족들과 견신이 두런거리고 있었다.

"초, 총독님!"

"총독 아저씨!"

저 멀리서, 수인과 홍연이 피를 흘리며 걸어오는 나를 발견하고는 황급히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다들, 무사했구나.'

나는 그 둘의 뒤쪽에서, 내가 준 괴뢰에 올라타 황급히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견신을 보고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 * *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나는 전명훈과의 싸움을 복기하였다.

전투의 시작부터 끝.

그 사이사이에서 내가 부족했던 것들, 내가 잘했던 것들, 발전시킬 수 있는 것들.

그 모든 것들을 다시 돌아보며 나 자신을 발전시켜 갔다.

그러던 도중, 나는 문득 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뭔가… 뭔가 더욱더 높은 경지를 추구할 수 있을 것 같다.'

왜일까.

그저 기분 탓일까.

그러나 나는 단순히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분 탓이 아니다.'

명확하다.

뭔가 명확한 것이 나를 이 너머로 부르고 있다.

'뭘까, 이건….'

나는 한참을 고민하던 중 드디어 깨달을 수 있었다.

'아아, 그렇군.'

꿈 속이 찢어진다.

그것은 녹색의 박도(朴刀)였다.

먼 옛적에 보았던 압도적인 파괴의 흔적!

그때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어째서 굳이 이 순간 그 기억이 재생된 것일까.

이유야 뻔했다.

전명훈이 뿌리는 번개는 조금 미숙할지언정, 한없이 천겁(天劫)과 비슷했다.

그리고, 저 녹색의 박도도 마찬가지다.

'저것 역시, 천겁과 같다.'

파괴의 속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파괴의 힘 자체는 함천존자라는 자가 삶을 살며 얻어 낸 자신만의 깨달음.

내가 느끼는 것은, 저 파괴의 일격이 만들어진 원리!

'닮았다, 분명.'

함천존자의 일격은, 천겁(天劫)과 한없이 닮아 있었다.

'정확히, 뭐가 닮은 거지?'

하지만 나는 그의 일격과 천겁이 닮았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정확히 무엇이, 왜 닮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것을 깨닫는 날 이 [너머]로 갈 수 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수도자들이 심족을 두려워하고 혐오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기오막측하고 알 수 없는 공법을 익혀서가 아닐 수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꿈속에서, 멍하니 함천존자의 일격과 전명훈이 내쏘는 천뢰에 가까운 벼락들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 * *

깜빡….

"아, 아저씨!"

"총독 아저씨!!!"

눈을 뜨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여기는."

나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일어났다!"

"일어났어요, 총독님이 일어나셨어요!"

수인과 홍연, 두 마족의 말에, 주변에서 수많은 마족들이 달려왔다.

"아이고, 총독 대인!"

"일어나셨습니까?"

"이틀째 기절해 계셔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요!"

내가 얼떨떨하게 그들을 둘러보던 차.

[모두 비켜 보시게.]

철컥, 철컥, 철컥.

견신이 괴뢰의 머리에 올라타서 내게 다가왔다.

[서 대인, 괜찮으십니까?]

"아, 조금 쑤시는 곳이 있긴 한데 뭐, 괜찮소. 그나저나… 다들 반응이 왜 이런 거요?"

이전까지 마족들은 그렇게 나와 친하지는 않았다.

수인과 홍연 같은 아이들이야 그렇다 해도, 장성한 마족들에게 나는 악독한 인족 출신의 총독이었을 뿐이니.

심지어 최근에는 계멸천공진 계획 때문에, 마족들을 저 멀리 어딘가로 쫓아 버리려 한 악독한 이였으니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왜 다들 반응이 이렇단 말인가?

[제가 지금껏 동족들에게 구조 신호를 보내도 한참 동안 답이 오지 않았지요. 하지만 대인께서 전투하시던 중에 답변이 왔습니다.]

견신의 설명이 이어졌다.

[마계의 합체기 태수님들께서 최전선의 인족들을 사로잡아 심문한 결과, 계멸천공진 계획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것 때문에 총독께서 저희를 먼 곳까지 보내려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걸 마족들에게 알려 줬다는 건가."

아무래도 진마계의 합체기 태수들에게 잡혀 결국 계획은 탄로가 났다는 모양이었다.

"그게 다들 이렇게 좋아하는 이유인가? 어찌 되었든 나는 자네들을 고향에서 내쫓고 착취해온 사람인데…."

[하하하! 착취라니요, 대인. 아직 제 말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계멸천공진 계획을 알게 된 것은 알게 된 것이고, 이번에 진마계에 어마어마한 일이 터졌다고 합니다….]

견신이 진중한 목소리로 촉수를 꿈틀거렸다.

그의 촉수 한쪽 끝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은 공령지였다.

[대인,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왜 공령지라는 이런 귀중한 장소를, 진마계 측은 어째서 인족에게 이리 쉽게 빼앗겼으며, 진마계 마군 소속이었던 저는 왜 이 공령지에 대해 여태껏 한 마디도 대인께 말한 적이 없는지. 그리고 그 귀한 공령지가 어째서 인족이 점령한 점령지에, 가까운 간격으로 세 개씩이나 발견되었던 건지.]

"…뭔가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건가."

내가 굳은 얼굴로 묻자, 견신은 촉수를 까딱였다.

[대인이 잠드셨던 지난 며칠간, 마군 측에서 제게 연락을 준 바. 진마계에 어마어마한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어마어마한 소동?"

[그렇습니다. 저희가 보고 있는 이것은, 정상적인 공령지가 아닙니다.]

"정상적인 공령지가 아니라고?"

[예, 제가 들은 정보에 의하면, 눈앞에 보이는 것은 혈음계의 천마들이 진마계에 진입하고자 진마계의 차원 방벽을 바깥에서 긁어내느라 생겨난 흔적이라 하더군요.]

"뭣…!"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럼 저게 혈음계랑 연결되어 있다는 말인가!? 그, 그럼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 게 아닌가?"

들은 적 있었다.

혈음계의 천마들은 같은 마족이라고 해도 서로를 잡아먹기를 꺼리질 않으며, 진마계의 요마들보다도 훨씬 사이하고 악랄하며 교활한 이들이라 하였다.

그러나 견신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맞습니다. 저 공령지는 혈음계에서 만든 게 맞습니다. 하지만, 혈음계와 연결된 것은 아닙니다.]

"뭐?"

[혈음계 존재들은 부정하고 악한 기운을 먹고 자라나지요. 그리고 그러한 악덕(惡悳)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혈음계 존재들이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껏 인족들이 마계를 침식시키고 점령하며, 무수한 마족들을 학살하고 단약화하면서 쌓은 악덕으로 인해, 혈음계 존재들은 8차 점령지가 아닌 다른 점령지에 있는 공령지를 혈음계와 연결시키는 데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8차 점령지의 공령지는 혈음계 천마들이 혈음계와 연결시키지 못했지요.]

녀석이 씨익 웃었다.

다른 마족들 역시 안도감이 깃든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마군에서 전하기를, 8차 점령지는 혈음계와 연결될 만큼의 악덕이 쌓이지 않은, 유일한 인족 점령지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서 대인, 당신의 선량함에 의해 이 점령지는 지옥이 되지 않았습니다.]

"…."

[이곳의 마족들을 지금껏 학대하지 않은 것에, 단약화하지 않은 것에 가슴 깊이 감사드리며… 당신의 선량함 자체에 머리 숙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서 대인.]

견신을 비롯하여, 혈음계 천마들에 대해 알고 있다는 무수한 마족들이 내게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나야말로."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쩐지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전명훈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생각나는 것을 느꼈다.

뭔가, 이들을 보며 느낀 뭔가를 녀석에게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스스스….

지금 내게 감사를 표하는 이들의 모습이, 내 기령들에게 추가되었다.

나는 눈을 닦으며 이들의 인사를 돌려주었다.

"고맙다고 해 주어, 고맙다."

세상이 지옥이라도.

―다 필요 없다. 모조리… 죽어 버려라.

모든 것이 의미가 없지는 않다.

이 세상이 고통과 광기에 차 있을지언정.

어쩌면 무언가 의미가 있는 것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언젠가, 지금이 아니더라도.

그것을 꼭 녀석에게 전해 주고 싶었다.

나는 차원이 비치는 공령지의 안쪽에서, 내가 구해 낸 무수한 마족들의 감사를 받으며 그런 생각을 다졌다.

* * *

"…이거, 장관이군요."

무수한 행렬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거대한 전함들과, 무수한 광한옥을 실은 비차들.

그리고 수많은 인족 병사들이, 8차 점령지로 날아오고 있었다.

우우웅!

보랏빛이던 마계의 하늘은 어느덧 은은한 붉은빛이 휩싸여 있었다.

우우우웅!

비둔술과 함께, 익숙한 얼굴들이 8차 점령지의 결계 바깥에 내려앉았다.

"오랜만입니다, 참모장님. 아니, 이제는 군사님이라 불러 드려야 하나요?"

나는 누더기가 된 옷을 입고 있는 꾀죄죄한 꼴의 수도자를 보며 말했다.

"…놀리지 말고 결계를 열어 주시오, 서 총독."

그가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혈음계 존자(尊者)의 좌수(左手)와 좌족(左足)이 강림했소. 그래도 서 총독이 공령지를 잘 사수해 준 덕분에 존자의 좌안(左眼)까지는 강림하지 않는다 하더군. 광한계 본토에서 지원이 올 때까지, 8차 점령지에서 농성할 예정이외다."

그렇게, 지금까지 마족의 첩자이자 인족의 배신자가 다스리던 점령지는.

결국 인족 패잔병들의 마지막 희망이 되어 버렸다.

이곳이 지옥이라도 (3)

"역시 너는 틀리지 않았구나, 서은현."

나는 군사인 현운과 인족 패잔병들을 받아들인 후, 넘어오는 패잔병들을 보며 오현석과 대화를 나눴다.

현재 오현석은 상당히 초췌한 모습이었다.

"나도 나름대로… 이 불합리한, 마족 학살의 흐름을 막아 보려고도 했다만…. 창천개벽문에 불이익이 갈 수 있다는 말을 들은 후, 제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너는 다르군. 제대로 옳은 길을 선택해서 끝까지 관철해 냈어."

"책임감 없는 고집을 놓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 고집이 이제는 우리에게 희망으로 돌아왔지. 잘 버텨 주어서 고맙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저… 당연한 걸 했을 뿐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당연하다고 여겼던 모든 선의와 평화, 상식이 이 세계에서는 너무나도 하잘것없다고 여겨지더구나. 그 '당연함'이라는 건, 절대 당연하지 않아."

"그렇습니까…."

그때, 오현석이 흠칫 몸을 떨더니 말했다.

"아니, 잠깐. 너… 기억이 안 난다고 하지 않았느냐?"

"아, 기억 말입니다만…."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드디어, 다 찾았습니다."

"허허…."

그는 미소를 지었다.

"흐허하하하하! 그래, 그렇구나."

쾅, 콰앙!

그는 마치 창호자처럼 호탕하게 내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서은현!"

나는 그를 보며 미소지었다.

"예, 형님."

"좋아, 아주 좋구나. 이거 참 감격스럽군."

그는 입꼬리를 올려 껄껄 웃었다.

그리고 얼마 후.

점차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래, 너라도 기억을 되찾아, 다행이구나."

"…예."

"김연마저 저리 되었는데, 너라도 기억을 찾아서… 정말, 다행이다."

우리는 쓰디쓴 얼굴로 저 뒤쪽에 앉아 있는 김연을 바라보았다.

"에, 에헤헤헤…."

그녀는 혈음계 존자의 공격을 막아서던 도중.

의식에 엄청난 수준의 금제를 당했다고 했다.

덕분에 금제가 풀릴 때까지 그녀의 상태는 지금 백치 상태였다.

'그 거대한 의식이… 모조리 꾹꾹 억눌러져 봉인되어 있다.'

마치 오행혈주번의 작용과도 비슷하나, 그보다도 훨씬 뛰어나고 정교하다.

내가 그녀의 금제를 풀어 보겠다고 도전해 보았으나 도리어 저 금제에 내 정신마저 삼켜질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금제.

'저만 한 금제를 풀려면, 아마 괴군이 직접 와야 하겠지.'

기묘성채를 직접 끌고 와서, 기묘성채가 가진 광기로 금제에 충격을 주지 않는 이상, 그녀는 의식을 되찾을 수 없다.

'오행혈주번과 그래도 비슷한 계통인 건 확실한데….'

신통술 자체가 그녀의 의식 깊숙한 곳에 박혀 있고, 의식 자체를 약화하고 축소한 후 봉인할 수 있게 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자력으로 금제를 극복할 수만 있다면, 금제를 연화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이용하는 게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아마 그때의 위력은 내 오행혈주번보다도 훨씬 더 강력할 것이라는 게 내 예상이었다.

'물론 그것도 그녀가 저 금제에서 빠져나올 때의 얘기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녀가 금제를 자력으로 빠져나오는 걸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차라리 그녀에게 저 금제를 건 쇄성기 존자의 분체를 쓰러뜨리고 금제의 해주법을 전해 듣는 게 더 현실성이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그녀에게 가해진 금제는 상상 이상의 것이었으니.

나는 김연에게 다가가 다시금 금제를 관찰했다.

'오행(五行)에 팔괘(八卦), 그리고 태극(太極)의 이치까지 더해졌다. 거기에 혈음계 특유의 사이하고 괴이한 마(魔)의 성질 역시 금제에 섞여 있어.'

오행혈주번과 음혼귀주문, 기묘성심전과 답천의 심어를 총동원하면 간섭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간섭을 통해서 금제를 해제하려면 각을 잡고 100년 정도는 걸릴 터였다.

'아니, 사실 이 금제도 금제라기보다는 공격용 신통에 가깝다.'

내가 볼 때 이 금제 자체는 일반적인 사축기 수사조차 맞으면 그대로 의식이 흩어지고 혼백에 타격을 입으며 죽을 만한 저주였다.

하지만 오히려 동급 수사들보다 의식의 크기가 몇 단계나 더 큰 김연이었기에 의식이 봉인된 정도로만 작용이 그친 것이었다.

그녀의 능력이 오히려 상식 외로 커서 공격용으로 쏘아 낸 저주가 겨우 금제 수준밖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이라고 봐야 할 터였다.

'이제 곧, 김연에게 이만한 공격을 쏘아 낸 쇄성기 존자와 맞서야 한다는 건가.'

존자

그 이름은 광한계는 물론이고 진마계, 혈음계, 그리고 수많은 중경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이름이었다.

신화의 존재나 다름없는 개열기 수사를 제외하면 모든 중경계의 최고봉은 결국 성반기 수사였고, 쇄성기는 그런 성반기의 바로 아래에 존재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쇄성기부터는 사실상의 신(神)이나 다름없다.

당장 나만 해도 쇄성기 급 존자, 함천존자 장익의 일격을 기억하면 그때마다 무시무시한 공포에 휩싸이지 않는가?

'그 무시무시한 괴군조차 쇄성기 존자와 싸워 패배했다.'

그조차 본신이 아닌, 먼 차원계에서 먼저 보낸 분신 같은 것에 패했다.

'이길 수 있을까….'

나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너무도 없다.

그러나 한층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내 옆으로 오현석이 다가왔다.

"그나저나, 서은현."

"예, 말씀하십시오."

"지난번 세 번째 색을 보게 된 후, 세 번째 이외에 무수한 색을 더 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에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더더욱 많은 색을 볼 수 있게 되었지."

그는 설명을 이어 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문득 이 색상들을 '합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더구나. 이 색상들을 합치게 된다면… 어쩌면 더더욱 새로운 영역에서 전투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

"너라면 왠지 그 경지에 대해 아는 것 같다만, 혹시 내가 향하는 방향이 맞는 일인지 알려 줄 수 있겠느냐?"

"…허허…."

나는 오현석을 보며 낮게 탄성을 질렀다.

어마어마하다.

설마 벌써, 벌써 오기조원의 영역에 발을 들이려 한다는 말인가?

'무공 그 자체에 특화되지는 않았다만… 무공에도 재능이 나쁘지는 않아.'

김영훈처럼 말도 안 되는 재능은 아니지만, 그도 무공 자체에 순수하게 영재인 듯했다.

'과연 현석 형님이 지닌 무공 자질은 어디까지인가.'

김영훈에는 절대 못 미친다.

하지만, 그도 단련시키면 등봉조극까지는 도달할 수 있을까?

쿠릉, 쿠르릉….

나는 저 멀리.

결계 너머의 마계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부터 하늘의 붉은빛이 점차 진해지고 있다.

현운의 말로는 혈음계 존자의 왼손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중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천기 현상이라고 했다.

아마 사흘 내로 혈음계 존자가 이곳에 도착할 터였다.

그렇다면.

'그 안에 최대한 전력을 강화해 놓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나는 오현석을 도와 그가 오기조원에 완벽히 이르도록 돕기로 하였다.

* * *

그를 도와 오기조원의 깨달음을 확립시키는 것 자체는 어렵진 않았다.

이미 사실상의 모든 의념을 깨닫고, 모든 의념에는 경계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삼화취정의 극한에 도달한 셈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의념을 통합시키고 의식을 하나로 만들어 진화시킨 다음 오기조원에 이르게 하는 것뿐이다만….'

솔직히 걱정될 것도 없었다.

이미 그는 말 그대로 깨달음을 전부 얻었으니까.

'그나마 영근이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그조차 사실 큰 문제는 없지.'

내가 그동안 연구해 온 바.

인족에서도 환골탈태와 오기조원 등에 대한 연구는 존재해 왔다.

무공 자체가 이 세상에서 진화할 여지는 없었지만,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여러 수도공법을 시도하다가 수렴 진화를 하며, 무공과 비슷한 결과를 내는 공법들도 많이 개발되었다고 했다.

애초에 기묘성심전 역시 그런 부류였고.

그리고, 오기조원과 환골탈태 등은 '요수공법' 쪽을 인족이 연구하면서 생긴 결과였다.

요수공법은 지속적으로 숙련자의 환골탈태를 요구하는 공법이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요수공법은 오기조원과 비슷하게 오행영기를 받아들여 오행영근을 강제로 생성시키기도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영근을 생성시키는 요수공법은 천족 측에서는 거의 배우지 않는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결국 오기조원으로 오행영근을 얻으면 천영근이던 수련자는 잡영근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오히려 수행 자질이 퇴보해 버리니 단일 영근 입장에서는 끔찍한 일인 것이었다.

결국 그런 끔찍한 일을 방지하기 위하여 일반적인 요수공법에서 오행영근을 얻는 공정을 빼 버린 것이, 인족 측에서 익히는 일반적인 연체공법의 시초라고 했다.

'하지만 오현석은 일문성체. 모든 속성의 공법을 전부 익히는 게 가능하다. 한 마디로, 오행영기로 추가로 오영근을 얻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

그러므로 내가 지도해 주어 오기조원의 경지를 얻게 해 준다면, 오히려 그로서는 전력이 조금이나마 늘어나는 일일 터였다.

우득, 우드드득!

나는 오현석의 옆에서, 그가 환골탈태를 마칠 수 있게 호법을 서 주었다.

그는 천천히 오기조원의 깨달음에 따라 천지영기를 인도하며 환골탈태를 마치고 있었다.

'…잠깐.'

나는 오현석의 환골탈태를 보던 도중.

한 가지 상념에 생각이 이르렀다.

'일반적인 연체공법은 요수공법에서 오행영기를 얻는 공정을 비롯해 몇몇 공정을 인족에게 맞게 개조한 거다. 창령성광오채대법의 오행장원전 역시, 일반적으로는 오행장원전을 전부 익히지 않고 한 속성 공법만을 익히고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스승님 역시 목도장원전을 기반으로 성광호체공과 창령격원결을 익힌 것이다. 그리고 추후에 원영 후기의 경지에서 오행의 속성을 지닌 법보를 통해 오행장원전의 힘을 미약하게 끌어내는 것이고.'

원영 후기에 이른 이들은 대다수가 경지의 특수성 때문에 오행 속성을 지닌 법보를 품는다.

하지만 오현석은 물론이고, 나 역시 오행장원전의 오행공법을 '전부' 익혔다.

그렇다면….

'지금 나와 현석 형님이 익힌 창령성광오채대법은… 원본 요수공법에 한없이 가까운 거 아닌가?'

거기에 나는 요단까지 생성이 가능하니….

'흐음….'

지금껏 답천의 경지에 달한 이후로, 요단을 생성한 적은 없었다.

요단은 이미 무형검에 녹아서 내 몸 안을 흐르는 중인데 뭣 하러 내단을 굳이 또 만든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어쩌면 창령성광오채대법을 수련하며 내단을 형성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 역시 들었다.

'창령성광오채대법은 원영기부터 제대로 수련할 수 있는 공법이다. 지금까지는 맛보기에 불과하다고 스승님께서 그러셨지. 그렇다면… 추후에 시간을 들여 그리 해 봐야겠군.'

나는 생각을 정리하며 오현석의 옆에서 호법을 섰다.

어느새 하늘은 점차 붉어졌다.

아마 쇄성기 존자가 그만큼 가까이 왔다는 증거이리라.

그리고 마침내 며칠 후.

오현석은 내 호법 아래에서 느릿하게 환골탈태를 마칠 수 있었다.

그는 김영훈처럼 무공 재능이 있는 것도, 나처럼 인체에 대한 의술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환골탈태의 속도가 확연히 느릴 수밖에 없었다.

"후우…."

쿠구구구구!

그리고, 환골탈태를 마친 오현석은 어쩐지 이전보다도 훨씬….

'요괴 같은 느낌이 나는군.'

나는 요족 특유의 기질을 흘리는 오현석을 보며 쓰게 웃었다.

나중에 그가 등봉조극에 도달하면, 정말로 창령성광오채대법이 요수공법으로 진화하는 게 맞는지도 몰랐다.

"정말 끝내주는구나, 은현아. 그나저나…."

그의 시선이 시뻘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뿐이 아닌, 어느새 인족 패잔병들 상당수가 이 근방으로 나와, 저 멀리 산맥 너머로 다가오는 '무언가'의 기운에 집중하고 있었다.

현운 역시 이곳으로 도착하여 저 너머의 존재를 향해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는 중이었다.

"온다…."

현운이 침을 삼켰다.

오현석이 주먹을 쥐었다.

나는 의식을 집중하며 저 너머에서 오는 존재를 지켜보았다.

쿵, 쿵, 쿵….

거대한 산맥.

산맥 너머에서 울리는 진동.

거대하다.

저 너머에서 오는 존재가 거대하다는 것이 아닌, 저 존재가 지닌 존재감 자체가, 너무나 거대해 압사당할 것 같다.

"저것이…."

쿵, 쿵!

혈음계 쇄성기 천마.

존자(尊者)의 왼손.

쿵!

필멸자의 테를 벗어가는 존재의 분체.

"존자…!"

신이 되어 가는 이의 일부.

쿠구구구구!

하늘이 시뻘겋게 변한다.

분명 광한옥으로 침식시켜 두었을 점령지 전체에 마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저 존재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만으로, 천지영기가 침식당한다.

쿵!

산맥 너머로, 그것이 존체를 드러낸다.

산호!

붉은 산호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너울거리고 있다.

그런 산호의 군체가 표피를 덮고 있었으며, 그 표피 곳곳에는 거대한 '눈' 같은 것이 수십 개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붉은 산호의 표피와 눈들이 둥쳐, 하나의 '왼손' 같은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붉은 손길이, 산맥을 넘어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게, 혈음계 존자의 왼손과, 일전이 시작되었다.

이곳이 지옥이라도 (4)

그 손은 거대했다.

말 그대로 손 하나의 크기가 산맥 하나를 뒤덮을 정도.

그리고 그 거대한 손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붉은 광채가 퍼져 나가며 하늘을, 대지를, 천지간 모든 것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개전(開戰)은 빠르게 시작되었다.

"으오오오오오!"

현운이 결인을 맺자, 그의 등 뒤로 현신처럼 네 개의 원영이 나타났고, 그에게도 흑룡의 그림자가 들러붙었다.

그의 수행이 폭증했고, 그는 폭증한 수행을 바탕으로 법술을 펼쳤다.

츠츠츠츠츳!

사방에 물안개가 깔리는 듯하더니, 현운의 목소리가 마치 귓가에서 들리듯 상세하게 들린다.

아무래도 이 물안개가 그의 목소리와 의도를 더욱더 명확하게 전달시키는 듯했다.

현운의 지휘에 따라, 남아 있는 수만의 인족 패잔병들이 힘을 쓰며, 산맥 너머에서 결계가 있는 곳까지 다가오는 왼손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쿠궁, 쿠구구구궁!

원영기, 천인기 수사는 물론이고, 사축기 급의 전력인 나와 오현석, 그리고 몇몇 사축기 사령관들 역시 전력을 다해 공격을 한 결과

쉬이이….

존자의 왼손은, 전신에서 연기를 흘리며 잠시 자리에서 멈춰섰다.

'통한… 건가?'

저 존자의 왼손이란 것.

저것은 당최 심상을 읽기가 힘들었다.

일반적인 존재들의 심상과는 아예 구조 자체가 달라서 파악이 힘들다.

하지만 어쨌든 존자의 왼손에는 그럭저럭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한 상처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통한다! 존자의 본체가 아니니만큼, 공격하면 부상을 입는다! 모두 결사의 각오로 임하면 질 수 없단 말이다!"

현운이 필사적으로 소리 지르며 아군의 사기를 끌어 올렸고, 다시금 그의 지휘에 따라 존자의 왼손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광한옥 결계는 합체기 급의 일격도 막을 수 있다! 아무리 존자라지만, 손 하나만 온 시점에서 사실상 합체기 태수 정도로 힘이 떨어졌을 것이야! 이 안에서 버텨 가며 일격을 먹여라!"

펄럭, 펄럭!

뒤쪽에서 현운이 소환한 물로 된 인형이, 커다란 검은 깃발을 휘둘렀다.

그러자 동시에 아군 전원의 귓가로 명령이 들렸고, 우리는 현운의 명령에 따라 대열을 재정비했다.

"정도 수사들 앞으로!"

척, 척, 척!

정도공법을 익힌 수도자들이 앞으로 나가, 각기 파사현정의 힘을 지닌 법술을 존자의 왼손에게 뿌려 대었다.

쿠구구구구!

쇄성기 존자의 왼손 역시 반격을 하려는 듯, 결계 바깥에서 마기를 끌어모으고 있었다.

"존자가 공격한다! 마수들은 앞으로 나서라!"

마도공법을 익힌 마수들이 앞으로 나서 방어진을 펼쳤다.

번쩍!

핏빛이 폭발한다.

그와 동시에, 어마어마한 충격이 결계진의 위쪽을 때렸다.

쿠릉, 쿠르르릉!

결계진은 단박에 무너지기라도 할 듯 미친 듯이 일렁거렸으며, 안쪽에 있는 마도 수사들 역시 그 충격파를 걷어 내는 데에만도 여념이 없었다.

촤륵, 촤르르륵!

무엇보다 절망적인 것은….

"노, 놈이 재생한다!"

"틈을 주지 마라!"

녀석의 표피를 뒤덮은 산호들이 꿈틀거리며, 점차 우리에게 공격을 맞은 부위가 다시 돋아나기 시작했다.

꿈틀, 꿈틀….

동시에 녀석의 손 곳곳에 돋아난 눈알이 뒤룩거리더니 우리 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오현석이 식겁하며 소리쳤다.

"모두 눈을 마주치지 마시오!"

그 다급한 말에 현운 역시 소리를 높였다.

"놈이 멸혼음주(滅魂陰呪)를 쓴다!"

쿠구구구!

그와 동시에 존자의 눈알들에 핏빛이 모이는 듯하더니, 이쪽으로 쏘아져 온다.

"끄아아아아! 아아아…."

"아아아…."

몇몇 수사들은 불운하게도 찰나 간 저 존자의 눈알과 눈이 마주쳤고, 나는 옆에서 전투하던 수사들의 혼백이 그대로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저게 김연이 당한 그 술수인가?'

방금 죽은 수사들은 천인기 수사들이었다.

법술에 직격당하면 천인기 수사조차 여지없이 죽는다!

우우웅!

점차 왼손 쪽에서 뿜어지던 적광이 잦아들었다.

그제야 우리는 다시금 왼손을 쳐다보았다.

쉬이이이….

우리가 잠시 눈을 돌렸던 그 짧은 틈을 통해, 왼손은 그새 부상을 입은 신체를 전부 재생하고 다시금 마력을 끌어모으는 중이었다.

우우웅!

하늘이 불길하게 타오른다.

붉은빛의 하늘이 기이하게 일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모두 방진을 짜라!"

현운이 깃발을 휘두르며 명령을 내렸고, 수많은 수사들이 서로 뭉치며 방진을 짜기 시작했다.

'잠깐, 저거…!'

그때, 나는 무언가 수상한 것을 눈치챘다.

"조심하시오! 저건 하나의 법술이 아니외다! 저 법술 뒤에 하나의 법술을 교묘히 숨겼소!"

촤라라라락!

백란축성문의 힘이 사방으로 퍼지며, 맑은 축복의 힘을 주변에 덧씌웠다.

"저주! 놈이 저주를 쓰려 하고 있소!"

느껴진다!

저주의 극의에 다다른 나만이 느낄 수 있는, 저 너머에서 느껴지는 진득한 악의의 힘이!

오오오오오!

일렁이는 하늘에서, 불길이 뭉치며 화염의 비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화염의 비는 허공에서 일렁이며 마력을 영력으로 바꾸었다!

마기가 영기로 전환되는 신통!

그 불의 비들은 영기로 된 결계진을 후려치며, 마기로 된 공격들보다 더더욱 좋은 효율로 결계진을 뒤흔들었다.

현운의 지휘대로 마도수사들이 앞으로 나서 충격파를 막아섰다.

그들은 차분히 충격파를 막아 낸 후, 내 경고에 따라 뒤이어 따라오는 저주 공격 역시 거뜬히 막아 내었다.

그때였다.

찌이이잉!

나를 포함하여, 오현석, 현운 등.

모든 수도자들이 일시에 비틀거렸다.

'이게 무슨….'

나는 전신을 감싸는 기이한 마기를 통해 알아차렸다.

'뭣… 2개가 아니라 3개였다고…?'

물리 공격 뒤에 저주를 섞어 보내고, 그 저주 안쪽에 또 다른 공격을 하나 더 섞어 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공격은 결계진의 결계를 교묘히 돌파하여, 누구에게도 걸리지 않고 수도자들에게 도달했다.

나는 이 공격의 속성을 알 수 있었다.

'정신 공격이다…!'

찌이이잉!

나는 어마어마한 격통과 함께, 의식이 저 아래로 침잠하는 것을 느꼈다.

'제…길….'

정신력의 문제가 아니다.

신통의 구조상, 무조건 한 번은 정신을 잃게 되는 신통이다.

나는 바로 쇄성기 존자가 쓰는 신통의 본질을 알아보았다.

심마(心魔)를 촉발시키고, 그 틈새로 악의를 불어넣어 인간을 완전히 욕망과 악의에 가득 찬 괴물로 만들어 버리는 신통이다,

결국 자기 자신을 마주 보아야만 하는 신통이기에 어떤 존재든 상관없이 한 번은 걸리게 되어있다.

쿠웅!

나는 발을 디디며, 무너지는 몸을 부여잡았다.

'아니, 아니군.'

몸을 부여잡았다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이곳은… 나의 심상 속.

투명한 도산지옥이었다.

주륵, 주르륵….

내 몸은 도산지옥의 유리검들에 찔려, 피를 흘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핏물은 점차 흐르고 흘러, 어느덧 내 앞의 그림자가 되었다.

그림자가 입을 열었다.

"네가 하는 일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나? 네가 정말 옳다고 믿나? 네가 한 일들에 어떤 가치가…."

그리고, 나는 그림자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이봐, 이봐."

피식.

웃음이 난다.

심마?

"안 그래도 최근에 우리 얘기해 본 주제잖냐. 아무리 쇄성기 존자의 신통에 당했다고 해도, 조금 참신한 주제를 가져오면 안 되는 거냐?"

"…."

그랬다.

이미 극복한 심마를 한 번 더 불러일으켜 봐야, 그저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어떤 존재든 상관없이 한번은 걸리는 신통.

다시 말해.

어떤 존재든, 한 번'만' 걸리면 된다.

퍼엉!

나는 내 마음에 나타난 심마를 밟아서 터트렸다.

"너만 터트리면 끝이란 거군. 오랜만에 다시 만나서 즐거웠다. 잘 가라."

철퍽, 철퍽….

내 발에 밟혀 터져 버린 심마의 조각이, 사방으로 튀며 꿈틀거렸다.

그리고는 내 심상을 장악하려 마구 버둥거리기 시작하였다.

질척, 질척….

심마, 아니 심마였던 그림자가, 내 심상 전체를 물들이며 오염시킨다.

삽시간에 주변이 더럽고 질척거리는 어둠으로 휩싸였다.

[선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세상은 지옥이다!]

[네 정신 상태를 보라고! 지옥을 살아가는 자의 것이 아닌가!]

[모조리 다 망해 버려도 싸다!]

[존자의 명을 받들자! 존자께서 지옥에 걸맞은 새로운 길을 네게 알려줄 것이다!]

"오호라, 정말 설득력이 높은 세뇌 작업이로구나. 이거 참 무시무시한걸."

그리고, 나는 등을 돌려 도산지옥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푸콱, 푸콱!

한 걸음을 올라갈 때마다 고통과 함께 전신이 검들에 의해 꿰뚫린다.

그리고 내가 고통을 느낄 때마다 뒤쪽에서 나를 따라오는 질척거리는 악귀들의 속삭임이 들렸다.

[존자께 충성하자!]

[이 세상이 지옥이라면, 오직 지옥의 법도만이 제일 유용한 게 아니냐!]

[약육강식! 강자는 약자에게 무슨 짓이든 해도 된다!]

[너도 강자에게 학대받았던 기억이 있지 않으냐?]

[존자께서 너를 그 강자보다 강인하게 만들어 주시리니….]

저벅, 저벅….

저것은, 내 심마가 아니다.

내 심마를 통해 존자가 내 심상에 불어넣은 타인의 악의들.

그래, 악덕(惡德)이다.

인족들이 마계에서 행해 왔던 모든 악덕을, 존자가 가공하여 내 심상에 불어넣는 작업.

하지만, 나는 악덕들을 마주 보지 않고, 고통을 느끼면서도 말없이 도산지옥의 위를 향해 묵묵히 올라갈 뿐이었다.

등 뒤에서는 질척거리는 고함이 들리며 점차 존자의 술법이 나를 무섭게 압박하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도산지옥의 검을 밟으며 알 수 있었다.

'내가 밟는 검들은, 모두가 곧 삶.'

그래, 이 투명한 검들 하나하나가 곧 나의 기억들이다.

그리고 기는 곧 의.

계위에 대한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그러한 사실을 알았으니, 한 마디로 바깥의 기와 안쪽의 심 역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게 가능하다는 소리.

'어쩌면….'

나는 검들을 밟고 올라가며 생각했다.

'만상인연도란, 결국 내 심상이 반영된 것이었을지도.'

이 검은 곧 고통이자 상처.

하지만 동시에 내 삶의 흔적을 반증하는 역사.

그러므로, 내 역사를 기록했던 만상인연도란….

우우우웅!

이 심상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을지도 몰랐다.

파아아앗!

점차, 내 뒤쪽으로 희미한 인영들이 나타났다.

심상을 통해 내 육신의 기(氣)를 느낀다.

육신의 기의 중심에 있는 금단과, 금단의 안에 잠든 원영.

그 원영이 품고 있는, 삼천 자루의 무색유리검.

그 무색유리검과 연동된 만상인연도가, 역으로 내 심상에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저벅, 저벅, 저벅….

나는 말 없이 산을 올라갔고, 그럴 때마다 등 뒤로 인영들이 계속 생겨나며, 나와 저 질척이는 목소리들의 간격을 넓혔다.

질척이는 목소리들은 만상인연도로 만들어 낸 인영들에게 막혀, 점차 나를 쫓아오는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이봐, 혈음계 존자."

푸콱, 푸콱….

피를 흘리며 도산의 정상을 향한다.

나는 등 뒤쪽에서 부르짖는 존자의 신통술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맞는 말이다. 나는 분명, 지옥에 살고 있다."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것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느꼈다.

저벅, 저벅….

푸콱, 푸콱….

"하지만…."

우우우웅!

점차 나와 녀석 사이에 인영들이 많아졌다.

그 수는 가히 세는 것이 불가능하여, 존자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이 인산인해를 뚫고 내게 도달하지 못했다.

푸콱!

나는 전신을 뚫고 들어오는 검들의 감각을 느끼며.

잠시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우우우웅!

그리고,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산!

무색으로 이뤄진 투명한 검들의 도산.

그리고, 무수한 인파로 이뤄진 인간의 산.

이것이, 나의 세계였다.

"…정말로 우리가 사는…."

파아아아앗!

그와 동시에, 만상인연도와 검의 산이 빛을 뿜었다.

그 새하얀 빛은 점차 형을 갖추며, 백란(白蘭)의 형태로 변화하였다.

저주의 극의에 이른 음혼귀주문.

그리고, 내 백란축성문은 그러한 음혼귀주문을 대성하고, 초월한 상태에서 나아간 공법이었다.

어째서 저주에서 나아간 깨달음이 축복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저주와 축복은 결국 한 끗 차이일지도 몰랐다.

저주도 축복도.

지옥도 천국도.

모두가 사실은 한 끗 차이.

그렇다면 그 한 끗이라는 건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파아아앗!

저주로부터 나아간 새하얀 빛에, 저 아래에서 나를 잡으려 헐떡이던 존자의 목소리들.

그 목소리들을 향해, 한 장의 꽃잎이 떨어진다.

그 꽃잎은 등 뒤의 인영들을 지나칠 때마다 점차 수가 많아졌다.

무수한 인연을 거치며 축복은 점차 거대해지고 많아지며.

마침내는 파도가 되어 악의를 덮쳤다.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한 끗은, 분명 사람과 사람이 주고받았던 마음들….

파츠츠츳!

만상인연도로 증폭된 백란축성문이, 새하얀 파도가 되어 어둠을 씻어 내었다.

존자의 신통이 일거에 쓸려 나가며 스러진다.

"이곳이 지옥이라도…."

그 모습은 마치.

시커먼 밤하늘에, 무수한 별들이 풀려나는 것처럼도 보였다.

밤은 분명 어둡지만, 그 안쪽으론 무수한 별들이 채우고 있어 어둡지만은 않다.

사람의 세상 역시 밤처럼 어두운 지옥일지언정.

서로의 마음을 존중할 줄 알고, 소중히 여길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선(善)이었고.

"선의(善意)가 아무 의미 없지 않다. 이곳이 설령 진짜 지옥일지언정, 그 선의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분명히….'

나는 아래쪽에서 나를 뒤따르는 만상의 인연들을 내려다보았다.

'이곳에 있으니까….'

나는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더더욱 높은 곳을 향해 걸어나갔다.

파아아앗!

그와 함께, 정신이 번쩍 들며 나는 현실로 되돌아왔다.

"후우…."

나는 숨을 들이쉬며 허리를 폈다.

잠시 기절했었다.

그리고 그 짧은 찰나, 어느새 존자의 왼손은 결계 지척에 도달하여 힘을 끌어모으는 것이 보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수많은 인족 패잔병들은 존자의 술법에 당해 정신이 침식되는 중인 것인지.

모두 머리를 싸매고 거품을 물며 자리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애초에 내가 아니라면 극복하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했을 정도의 것이니, 이들이라면 쉽지 않을 터였다.

우우웅!

파앙!

나는 존자가 내 몸에 건 법술을 완전히 파해해 버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백란축성문의 기운이 몸에서 흘러나오며 존자의 술법을 역전시켜 버렸고, 존자의 왼손은 술법이 역전되자 잠시 힘을 끌어모으는 것을 멈추고 몸을 떨었다.

나름 회심의 비술이었던 듯, 한 사람이 법술을 떨쳐 내니 그 반동을 조금은 받는 모양.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지었다.

"이봐, 혈음계 존자."

우우웅!

전신에 피어오른 백란축성문이, 점차 사방으로 번지기 시작하였다.

"방금 쓴 그 비술… 실패하면 반동이 조금은 있나 보지?"

그렇다면.

"이곳에 있는 모든 인족이, 심마를 극복하고 네 비술을 극복하면, 그 조금이 쌓여 너도 꽤 타격을 입을 것 같은데…."

파아아앗!

전신에서 피어난 백란축성문이 사방팔방으로 퍼졌다.

우우웅!

그와 동시에, 주변으로 수많은 희뿌연 기령들이 나타나며 백란축성의 기운을 증폭시켰다.

삽시간에 사방팔방이 축복으로 가득 차올랐고, 무수한 백란들이 사람들의 머릿속으로 하나둘 들어간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존자가 몸을 진동하기 시작했다.

존자의 왼손은 심상을 읽기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나는 대강 녀석이 격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꾸우우웅!

녀석이 다시금 일격을 쏟아부었다.

결계가 벌벌 떨리고, 그 충격파에 전신에서 피가 쏟아졌지만 나는 웃었다.

"화를 내는 걸 보니, 맞나 보군."

파아아앗!

저주의 반대는 축복이다.

음혼귀주문으로는 상대에게 저주를 걸어,

저주인형, 고통 공명, 부식, 상처 전이 등 다양한 술법을 쓸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저주의 반대인 백란축성문은 어떤 효과를 지녔는가.

효과는 두 가지였다.

힘의 증폭, 그리고 정신의 인도(引導).

백란축성의 축복으로, 사람의 정신을 더더욱 올바른 곳으로 인도하여 정신을 회복시키고, 인간의 정신을 강화하며, 정신 공격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이것은 내 개인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닌, 집단 전체에게 가능한 것이었으며.

파아아아앗!

만상인연도가, 내 축복을 증폭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효과는 지금 극대화되는 중이었다.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그래도 네 덕에 확실히 백란축성문의 효용을 더 잘 알게 되었다, 존자!"

백목련의 파도, 그 중심에서.

나는 존자를 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만상인연도, 백란축성문. 이 두 가지가 있는 한… 내 정신은 무적(無敵)이다."

쿠구구구구!

다시금 존자의 왼손이 일격을 날렸다.

나는 피를 한 움큼 토하며 충격파에 잠시 몸을 낮췄다.

'결계가 버텨 줄 때까지, 이들이 일어날 수만 있다면….'

존자의 비술을 반전시켜, 존자의 왼손에게 상당한 타격을 줄 수 있을 터였다.

그때였다.

우우우웅!

"…?"

주변에 쓰러진 이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으…아아아…."

"끄…아아…."

'이 자들….'

나는 눈을 찌푸렸다.

모두가 눈에서 붉은 안광이 깃들었다.

존자에게 조종당하고 있다!

"정말, 존자께서도 참 가지가지 하시는구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차분히 힘을 끌어올렸다.

쿠구구구구구!

사방에서 수많은 천인기와 원영기, 그리고 사축기 급의 수사들이 힘을 끌어올리며 나를 압박한다.

존자의 조종에 조종당하며, 내 백란축성의 힘을 등대로 조종에서 빠져나오려 노력하는 중이었기에.

전부 전력을 드러내고 싸울 수는 없으리라.

그렇다면….

파아아앗!

모두가 백란축성문에 의해 확실하게 정신이 돌아오는 중이었다.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될 뿐.

나는 이들에게서 버티기만 하면 된다.

"버티는 건 내가 제일 잘 하는 거라서 말이지."

우우웅!

나는 금단에서 그동안 소중히 보관해 두었던 것을 꺼냈다.

쿵, 쿵, 쿵, 쿵!

삼천 자루의 무색유리검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주변에 꽂혔다.

"그럼 어디…."

나는 저물도를 펼쳐, 그동안 모아 두었던 백홍주를 꺼내 한 모금 마셨다.

부우웅!

무색유리검들이 진동하며 나와 영혼 깊숙이 연동된다.

"목숨을 걸어 볼까."

나는, 이번 생에서 처음으로 본명법보를 꺼내 들며 자세를 잡았다.

무형검이 무색유리검에 깃든다.

본래 무색유리검은 유리로 만들어졌기에, 그 강도도 역시 유리나 다름없었다.

물론 결단기 수사의 단화로 법보로 제련하며 조금 단단한 유리 정도로 올라갔지만, 그뿐이었다.

하나, 서 장군 시절의 1,000년은 금단을 통한 제련이 제대로 되지 않아 빼더라도.

이번 생의 100년.

그 시간 동안은 끊임없이 단화로 제련하는 데에 힘을 썼다.

그 결과, 본래 유리 정도의 강도를 지녔던 무색유리검은, 이제는 청동검 정도의 강도를 지닌 법보로 성장하였다.

청동검으로 비교하자면 굉장히 약했지만, 애초에 무색유리검의 진가는 유리검에 새겨진 회로들이 발하는 특수 능력이었기에 별 상관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예전처럼, 조심스럽게 쓸 필요가 없다.'

잘못 휘두르면 깨져 버리는 유리와 달리, 청동검 정도의 강도만 되어도 내가 무형검을 덧씌울 때에 훨씬 수월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전력의 수직 상승으로 이어진다.

쉬릭, 쉬리릭!

무색유리검들이 무형검을 씌운 채, 나를 중심으로 회전한다.

그 회전에 공기가 진동하며 살이 떨려 왔다.

무색유리검들은 전부 내 몸과 떨어져서 회전하는 것 같았으나, 실상은 무형검으로 인해 내 몸과 이어져 있다.

그렇기에.

"월수궁무록."

슈팟!

무색유리검들이 일제히 월수궁무록을 사용하자, 나를 노리던 수도자들이 일제히 의아해하며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인지를 베어 수도자에게서 도망치던 무공.

그 무공은 나에 의해 점차 진화하며, 내가 수도자가 되고, 무형검을 얻어 계위를 가르며, 계위를 보는 눈을 얻게 됨에 따라 본래의 성능을 초월해 버리게 되었다.

부웅!

공간의 틈새 그 자체에 숨는다.

그리고 그 틈새의 사이에서 내게 향하는 세계의 흐름 그 자체를 베어 낸다!

오직 원영기의 시야를 가지고, 무형검을 펼치는 나만이 펼칠 수 있는 극한의 극한!

사축기 수사들은 그나마 얼핏얼핏 감지는 되는 건지 내가 있는 곳을 향해 공격을 날리기는 했으나, 정작 한두 호흡을 늦게 나를 발견했기에 공격은 절대로 맞지 않았다.

물론 광역기를 써 버리면 어떻게든 맞을 수밖에 없겠으나, 그런 강력한 법술은 존자에게 조종당하는 지금의 상태로는 쓸 수 없는 모양들이었다.

'이대로 버티기만 하면…!'

그때였다.

뒤룩.

"…!"

존자의 왼손.

녀석의 몸체에 달린 눈알이, 월수궁무록을 펼치는 '나'를 정확히 직시하였다.

그리고, 녀석에게 조종당하는 수많은 인원들이 일시에 내가 있는 자리를 향해 공격을 퍼붓는다!

'제길, 존자쯤 되면 이 정도의 월수궁무록도 아무 소용 없다는 거냐….'

수많은 인족의 수사들이 나를 몰아붙였다.

이렇게 시야의 우위가 사라진다면 나로서는 밀릴 수밖에 없었다.

부웅! 부웅! 붕!

쿵! 쿵! 쿵!

점차 내 발자국의 깊이가 깊어진다.

나는 우공이산을 펼치며 이를 악물었다.

점차 강해지기는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규토장성도, 천린수해도, 음혼귀주도.

지금 상황에서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괴뢰들을 많이 만들어 놓았으면 조금 달랐겠지만, 너무 시간이 부족했다.

이렇게 압도적인 일 대 다수의 상황은 역시 힘에 부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콰아아아앙!

푸른빛이 내게 날아온다.

오현석이 양손에 창령격원결을 두르고 내게 쇄도한다.

가장 성가신 건 역시나 그였다.

그의 일격을 한번 받아칠 때마다 전신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콰아앙!

'우공이산으로 점차 강화되고는 있지만….'

부족하다.

이대로라면 충분히 공격이 강화되기 전에 내가 말라죽을 터였다!

어찌하면….

문득.

김영훈의 환영이 내 앞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 상황에 맞는 무공을 만들어 내지 않았을까.'

나는 그럴 수 있는가.

'못 하지.'

무공의 창조 자체는 무공을 수련한 세월이 있으니만큼 어렵지는 않다.

하지만 창조한 무공을 한 번에 극성까지 익혀 전투 도중에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김영훈이야 말도 안 되는 재능이 있으니 창조한 무공을 그 자리에서 대성해 버리고 사용해 댔지만, 나는 무공의 창조 자체는 가능해도 그런 짓은 힘들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어찌 타개해야 하나.

콰아아앙!

오현석의 일격을 공곡전성의 초식으로 되쳐 버린 후 자세를 잡고 무형검을 들어 올렸다.

무색유리검이 무형검과 함께 천변만화하며, 무형검의 경로를 보완한다.

수많은 초식이 삼천 자루의 무색유리검을 통해 펼쳐지며 사방을 초토화시킨다.

하지만 그 이상의 공격이 사방에서 들어오며, 전방에서는 오현석이 나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전세를 역전시킬, 단 한 번의 수만 있으면, 그러면 숨통이 트일 텐데!'

백란축성문의 힘이 점차 존자의 신통을 몰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내가 이긴다!

하지만, 이제는 그 조금만 더 버틸 힘조차 없다.

이대로 가다가는 필패!

대책을!

대책을!

김영훈이었다면, 오현석이었다면, 김연이었다면, 북향화였다면.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만약 어떻게 했을까!

뭔가 방법을…!

문득.

그러던 도중, 나는 무아지경에 빠져 한 가지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답천의 경지에 오를 때….'

나는 김영훈과는 완전히 '다른' 길에 들어섰었다.

분명했다.

그의 인영이 아닌, 나 자신의 인영을 보고 답천에 들었으니까.

그런데 왜 나는 아직도 김영훈을, 또는 타인을 찾고 있는가.

'…그런가.'

그동안 남에게 기생하며 살아왔으니까.

김영훈의 재능에 묻어가며 무공을 올렸고, 청문령의 깨달음에 묻어가며 수도에 입문했고, 북향화의 업적에 묻어가며 법보를 얻었으며.

괴군과의 천 년에 묻어가며 회로를 얻었다.

오직 묻어가기만 하며, 남의 것을 얻기만 한 삶.

어찌 보면 그것이 재능 없는 나의 인생이었다.

피식.

나는 어쩐지 그 사실을 깨닫자, 굉장히 웃기다고 느껴졌다.

필사의 각오를 다지고 얻은 깨달음이, 내가 얼마나 잘 묻어가는 놈인지라니.

'묻어가는 인생이라….'

하지만 나는 뒤쪽에서 나를 지켜보는, 무수한 기령들을 보며 미소지었다.

'나쁘지 않았지.'

무수한 이들의 은혜를 입어 온 몸이다.

은혜를 입기만 하는 게 내 재능이라면, 흉내 내고, 묻어가고, 타인에게 받기만 하는 게 내 재능이라면.

'그렇게 해 주자.'

흉내 내자.

따라 하고, 뒤쫓아가고, 혹은 묻어가서라도.

'그렇게라도, 지키자!'

나는 내가 살면서 보았던 가장 강력한 일격을 떠올렸다.

지난번 꿈을 꾸며 보았던 함천존자의 일격!

그것을, 재현해 보자.

츠츠츳!

그 압도적인 파괴!

그 말도 안 되는 힘!

우우웅!

무형검이 명동한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디.

내 실력으로는 절대, 그 힘의 발뒤꿈치조차 따라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내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라도!'

파아아앗!

사방으로 흩어졌던 삼천 개의 무색유리검이 하나로 합쳐진다.

무색유리검, 총천(總天).

거기에 괴군의 회로를 덧씌운다.

창익천쇄의 힘을 집어넣는다.

백란축성을, 만상인연도를, 음혼귀주를, 천린수해를, 내가 익힌 모든 공법과, 모든 역사(歷史)를!

"단악검법(斷岳劍法)."

김영훈이라면 아마 잡스러운 잡기가 없이, 순수한 무(武)를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순수한 무공을 추구하기에는, 내가 삶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나도 크고, 또 많으니까.

"제이십오초(第二十五招)."

24초식으로 이뤄진 단악검법의 너머로,

내가 이뤄 온 모든 것을 바쳐 새로운 초식이 개화한다.

"의해(義海)!"

일순간.

나는 내 검(劍)이 무언가 다른 영역으로 접어들었다고 느꼈다.

'이게… 답천의 [너머]인가?'

느껴진다.

나는 재능이 없다는 것이.

그렇기에 지금 보는 영역은, 오직 함천존자의 일격을 흉내 내고, 모든 힘을 쥐어짜 내 그 일격에 도달하려는 노력 때문에 일시적으로 도달한 영역,

하지만 이것이라면 충분하다.

"은산(恩山)!"

삶에게서 받은 은혜가, 살아오며 봐 온 모든 것을 흉내 낸 일격이 눈앞의 오현석에게 날아갔다.

파앗!

내 검은 그대로 오현석을 관통했다.

하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아아….'

내 검이, 혼(魂)의 계위에서 정확히 오현석의 혼(魂)의 깊숙한 영역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의 혼을 파고든 검은 한 자루의 심검(心劍)이 되어, 백란축성의 성질을 품은 채 오현석의 심상 안에 자리 잡은 존자의 신통을 깨끗이 지워 냈다!

파앙!

이상하다.

나는 전신의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피를 토했다.

우공이산의 반동이 찾아온다.

어째서 파괴의 극한인 함천존자의 일격을 흉내 냈는데.

결과로 나온 초식은 파괴의 초식과는 전혀 다른 초식일까.

분명 흉내 내 오기만 했거늘….

'아….'

나는 등 뒤에서 힘을 보내 주는 만상인연도의 기령들을 보며 알 수 있었다.

'그렇군.'

흉내 내 오며 성장한 나의 역사.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어 흉내 내 오고, 모방하고, 따라 하기에만 바빴다.

하지만, 이제는 등 뒤로 무수히 많은 족적이 생기지 않았는가.

이제는 흉내를 낸다고 할지언정 흉내조차 나만의 색이 깃든 것일지도 몰랐다.

우우우웅!

심검(心劍)은 사방으로 전염되며, 존자의 신통에 전염당한 수많은 인족의 수사들의 심상을 훑고, 마침내 모두의 의식을 해방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너머]를 엿보았다.'

[너머]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단 한 번 [너머]의 일격을 재현해 보았으니, 언젠가.

자력으로 답천을 넘어선 그곳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나는 극도로 분노한 존자의 왼손이 마기를 끌어모으는 것을 보며.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정신을 차린 것을 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콰아아앙!

녀석의 일수에 결계가 마침내 박살이 났다.

"제, 제길! 존자의 왼손이 침입했다!"

"서은현! 괘, 괜찮은 거…."

오현석은 내게 달려와서 나를 부축해 주었고,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괜찮…습니다."

"일단 피신하자! 놈이 결계를 부쉈어!"

"다… 괜찮…."

"그래도 네 덕분에 모두가 정신을 차렸어! 서은현! 괜찮으냐!? 눈을 떠라!!"

쿨럭, 쿨럭!

나는 피를 뿜어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웃었다.

"괜찮…습니다. 모든 게…."

늦었다.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시간은 맞췄다.

철컥철컥철컥….

저 멀리서, 기묘한 성채(城砦)가 허공을 날아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발버둥 쳤던 모든 결실이 하나하나 나타나고 있었다.

스승의 은혜 (8)

부우우웅!

벌떼가 우는 듯한 소리가 귓가로 울린다.

환청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기묘성채(奇妙城砦) 안쪽에서부터 무수한 벌들이 나와 날개를 휘젓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저 벌들 하나하나는 축기 급 전력이었지만, 나는 저 벌들의 무서운 점이 단순한 경지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부우웅!

벌들이 결계 주변을 뒤덮으며, 땅을 갈아엎고, 공간을 넘어 다니며 기묘성채 안쪽에서 가져온 괴뢰들로 대지를 메웠다.

점차 근방 자체가 기묘성채를 중심으로 한 요새로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쇄성기 존자의 왼손은 그러한 요새의 중앙에 갇혀 버린 형국이 되어 가는 것이었다.

웅!

존자의 왼손이, 표피에 돋은 산호들을 꿈틀거리며 사방팔방으로 혈광을 쏘아 낸다.

하나하나가 상대의 정신을 박살 내는 무시무시한 저주!

그러나, 상성이 너무 좋지 않았다.

덜걱덜걱덜걱….

존자의 왼손이 쏘아 낸 정신 금제에, 일순간 괴뢰들이 움찔거렸으나, 다시 멀쩡히 작업을 이어 갔다.

당연했다.

괴뢰들이 지닌 가짜 혼은 결국에는 가짜.

고도의 심상을 지니고 있지 않았으니, 심상을 봉인하거나 영향을 주는 혈음계 존자의 법술에 최악의 상성인 셈이었다.

혈음계 존자의 왼손은 정신계 법술이 먹히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는지, 마기를 끌어모으며, 물리력을 동반하는 법술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하늘이 다시 벌겋게 물들며, 천지간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점령지 일대를 날려 버릴 셈인가!?'

필히 이번 공격은 존자조차도 상당히 힘을 소모하는 공격이다.

그 증거인지, 왼손에 돋아난 눈알들이 바싹 졸아들며 진중한 의념을 흘리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 역시 상대를 잘못 만났다.

끼이이익….

기묘성채에 있는 세 개의 문이 동시에 열렸다.

그리고, 안쪽에서 괴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주변을 요새화시키는 일꾼 괴뢰들이 아닌, 말 그대로 진정한 괴군의 전투 괴뢰들.

쿠구구구구!

'…미쳤군, 나비 효과 때문인가. 지난 생보다도 훨씬 빨리 저 정도 괴뢰들을 제작하다니….'

나는 어이없는 눈으로 괴군을 바라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어….'

자칫하면, 이이제이의 전략으로 불러온 괴군에게 깡그리 잡혀가 존자의 왼손 옆에서 개조당하는 수가 있었다.

"아아… 저것이 과연 쇄성기의 신체 일부인가? 너무나도 감격스럽군. 합체기까지는 그대로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었는데, 쇄성기 이후부터는 도대체 뭘 어떻게 만들어야 그 정도 괴뢰를 제작할 수 있을지 감이 안 잡혔는데… 이렇게 훌륭한 자료가 내 앞에 나타났구나…."

오싹, 오싹….

오랜만에 들은 괴군의 목소리도 목소리였지만.

나는 그것보다는 괴군이 끌고 나온 저 괴뢰들을 보며 더더욱 소름이 끼치는 걸 느꼈다.

"합체기 괴뢰 9기, 사축기 괴뢰 204기, 천인기 괴뢰… 1050기, 원영기 괴뢰… 후, 설명하기 귀찮군. 아무튼 전부 쇄성기 연구 자료를 잡아 와라! 흐히힉, 드디어…."

뒤룩, 뒤룩….

기묘성채의 상공으로 떠오른 괴군이, 양 눈을 다른 방향으로 뒤룩거리며 주변을 둘러본다.

그리고, 그의 눈이 나를 정확하게 포착했다.

"드디어드디어드디어드디어… 아아! 자아, 꼬마야 약속을 지킬 시간이다. 그 괴뢰로 보내 준 서신에 분명 약속을 지키겠다고 했었지? 자아, 준비는 되었느냐? 걱정하지 마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모두 내가 더더욱 우월하게 진화시켜 제대로 준비를 시켜 줄 마음이 매우매우 깊단다!"

뿌드득, 우득, 우드득!

괴군은 미친 듯이 손가락을 마구 씹으며 사방으로 소리쳤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현운에게 전음을 보냈다.

[군사님, 사람들을 대피시키십시오….]

저 멀리서, [그녀]를 필두로 한 합체기 급 괴뢰 9기가 존자의 왼손을 포위하였다.

[진짜 괴물들의 싸움이 시작될 것입니다….]

사축기 괴뢰 204기가 합체기 괴뢰들의 아래에서 그들을 보좌하며 진을 짠다.

존자의 왼손이 눈알을 뒤룩거리며 전력을 재어 보는 것이 느껴졌다.

현운 역시 눈치가 없지는 않았는지, 황급히 인족들을 지휘해 피신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주변으로 도망가기는 힘든 상황이었기에, 인족군의 피난지는 자연히 한 곳으로 정해졌다.

8차 점령지 지하, 공령지가 있는 동굴.

쿠구구구구구!

빠르게 우리가 피신을 가는 사이, 존자의 왼손과 괴군의 군단이 부딪혔다.

혈광이 사방으로 뿜어지며 괴뢰들을 밀어냈다.

우리에게 걸어 놓은 의식 금제의 반동이 왔다고 해도.

썩어도 존자의 분체인지, 존자의 왼손은 합체기 괴뢰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무지막지한 힘으로 그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전에나 지금에나 괴군의 전술은 늘 일관적이었다.

인해전술.

우우우웅!

200기가 넘는 사축기 괴뢰들이 일제히 진을 짜고 빛을 발하자, 진의 중심에 있는 존자의 왼손에 어마어마한 부담이 가해지는 것이 육안으로도 보였다.

거기에 사축기 괴뢰들로 짠 진의 바깥에서 [그녀]와 8기의 합체기 괴뢰들이 합공을 하자, 존자의 왼손은 붉은 장막을 펼쳐 내고 수세에 몰리는 것이 보였다.

'빌어먹을.'

쿠우웅!

어마어마한 충격파에, 그동안 존자의 공세를 막으며 누더기가 되어 버린 점령지 결계가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인족군은 피신을 가면서도 그 충격파에 짓눌려, 하나같이 피를 토해 내야 했다.

'결계가 깨졌다….'

힐끗.

나는 결계의 중앙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쿠릉, 쿠르르릉!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며, 결계의 중심에서 뭔가가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인다.

'전명훈… 놈의 봉인이 해제되었어.'

이제 저놈까지 눈이 뒤집힌 상태에서 날뛰기 시작하면, 말 그대로 대혼돈의 장.

'이 혼란을 틈타, 하려던 일을 해 볼까.'

괴군을 불렀으니,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다.

애당초 마족 합체기 태수들을 상대하기 위해 그에게 서신을 썼을 때부터 이번 일을 계획했다.

물론 미치광이 괴군이니만큼 상당한 변수를 생각해야 했고, 실제로 엄청난 변수들이 많이 생겼지만 큰 틀은 바뀌지 않았다.

나는 오현석의 등에 업혀 피신을 가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괴군은 기묘성채의 위쪽에서 기묘성채를 통제하고 있었고, 기묘성채는 괴군의 지시에 의해 전장을 통솔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묘성채의 안쪽에서 '서 장군'의 기척이 느껴졌다.

'좋아.'

느껴지는 상태로 보아, 기묘성채에게 통제권을 뺏기고 괴군에 의해 추가로 더더욱 개조된 것이 느껴졌다.

애당초 서 장군을 괴군에게 보낼 때부터 이렇게 될 줄은 예상했다.

그리고 예상했기에 보낸 것이다.

'괴군의 기묘성채 안에서 서 장군으로 천 년을 보냈다.'

기묘성채가 괴뢰들을 통솔하는 명령어는 물론이고, 기묘성채의 체계와 그 안쪽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서 장군의 회로 안쪽에, 기묘성채의 명령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명령어들을 몰래 입력해 놓는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괴군은 그런 서 장군을 빼앗는답시고 아무 의심 없이 기묘성채에 박아 놓았으니, 내가 서 장군 안에 심어 놓은 독은 이미 기묘성채 전체에 흩어져 있었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본래 계획은 진마계 합체기 태수들과 괴군이 한판 붙는 상황에서, 내가 서 장군에게 입력한 명령어들을 사용하여 기묘성채의 명령 체계에 혼란을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틈새를 이용하여 연이의 능력과 내 기묘성채에 대한 이해도를 바탕으로 기묘성채 연의 연을 발동.

그렇게 괴군을 성불시켜 준 후, 기묘성채를 손에 넣은 후 김연과 함께 생존을 도모하려던 것이 본래의 계획.

하지만 진마계 합체기 태수들이 아닌 혈음계 쇄성기 존자의 왼손과 괴군이 일전을 붙게 되었고, 거기에 전명훈이라는 변수까지 끼어들었으며 연이는 존자의 왼손이 쓴 법술에 정신이 금제되어 있다.

처음에 상정한 계획과는 조금 동떨어진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괜찮다.

'지금부터, 피신해 있는 연이에게 가서 그녀의 금제를 풀어 준다.'

본래부터 괴군의 기묘성채가 근처에 오면, 기묘성채의 광기를 이용해 연이의 금제를 부수려 했으나, 이제는 내 손으로 할 수 있다.

괜히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거기다, 전명훈도 지금 미쳐 있는 상태이니 괴군을 상대로 조금은 시간을 끌어 줄 수 있을 거야.'

쿠릉, 쿠르르릉!

어느덧 전명훈은 몸을 다시 완전히 재생시킨 후, 번개를 흩뿌리며 괴군과 존자의 왼손 사이의 전투에 끼어든 상태였다.

괴군이 껄껄 웃으며 흥미로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흐허허! 네 녀석은 또 무어냐? 오오, 그렇구나. 너도 슬픔을 겪었구나. 아아, 그래. 많은 사람을 잃는 그런 끔찍한 일을 겪은, 다 썩은 심상이야…."

괴군은 두 눈에서 눈물을 닦으며 미쳐 날뛰는 전명훈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려무나, 네가 더 이상 슬프지 않게, 우월한 이 세계에 받아들여 진화시켜 주겠다."

[다… 죽어 버려라!]

"너를 기묘성채의 장군으로 받아들여 주마. 이름이 뭐냐?"

[이 더러운 세상 따위, 모조리 쓸어버리겠다!]

"그래그래, 번개를 쓰니 적당히 전(電) 장군이 좋겠구나. 네 이름은 내일부터 전 장군이란다."

[다 죽어, 다 죽어, 다 죽으란 말이야!]

"아아, 보고 있소, 당신? 오늘도 우리처럼 슬픈 사정을 지닌 이를 발견했소. 그리고 내일이면 이 젊은이를 더 이상 괴롭지 않게…."

둘은 서로 입을 열고 말을 하고는 있었으나, 놀랍게도 말을 하면서도 한 마디도 대화가 성립하지 않는 진기한 광경을 볼 수가 있었다.

'…걱정 마시오.'

지금부터, 내 계획이 성공하면 모두가 안정을 찾을 것이다.

존자는 소멸할 것이고, 기묘성채는 연이의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전명훈은, 다시금 봉인되어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들, 조금만 기다려라….'

나는 지하로 들어가며, 천공에서 벌어지는 벼락을 두른 뇌신과, 무수한 괴뢰들의 싸움을 뒤로하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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