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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45% MALDITOPALADIN / Chapter 5: 40-50

章 5: 40-50

40화 선택 (4)

"황녀가 에릭 국장 그대의 머리 위를 보면 참으로 기뻐하겠어. 이 나조차도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물건이라니."

황제가 손수 응접실 앞까지 에릭을 데려다주며 한 말이었다.

반짝이는 고리에 대한 건데.

'역시 황제군.'

르웰의 신성력으로 기척을 가려 뒀음에도 황제의 눈에는 훤히 보인 모양.

그런데도 황제는 고리의 존재를 숨겨 주었다.

'배포가 남달라.'

거대한 대제국에 걸맞은 마음 씀씀이였다.

에릭이 그리 생각하던 차에.

"그대 덕분에 막내가 된 황녀를 잘 부탁하겠네."

황제가 그리 말하며 사라졌다.

남겨진 박 집사가 응접실 문을 활짝 열고 에릭을 인도했다.

뚜벅, 뚜벅.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에릭은 털썩- 소파에 주저앉았다.

'황제가 은근히 뒤끝이 있어.'

지엄한 황실.

솔직하게 그 말은 개소리였다.

'황녀를 막내로 만들어 줬다니.'

그래서 황녀가 기뻐하며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고?

에릭은 관자놀이를 질끈 누른 채 고개를 내리깔았다.

"오오, 형님. 용 가죽으로 카페트를 만들었수다!"

에릭과 장두식은 화려한 응접실에서 황녀를 기다리는 중이다.

"용 가죽때기는 갑옷으로 쓸 물량도 모자라다고...."

드래곤의 가죽을 벗겨 한낱 장식품으로 쓰는 그런 대단한 장소다.

식탁 위에는 세계수의 이파리를 달여 만든 차가 올라왔고 다과로는 요정의 날개가 올려졌으니.

그런 사치로 가득한 응접실에 있음에도, 에릭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 이상함에 장두식이 말끝을 흐렸고.

"두식아, 황제의 말뜻이 뭘까?"

에릭은 장두식을 향해 의문을 토해 냈다.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뭐가 저리 화가 났수?'

보통 에릭이 이런 상태일 때는 어떤 대답을 해도 얻어맞았다.

장두식은 경험을 바탕으로 최대한 덜 맞는 답변을 골랐다.

"형님이 막내 황자를 죽여서 셋째 딸이 막내가 됐다 이말 아니요? 거, 뭐냐. 황녀는 그래서 막내딸 노릇 한다고 좋아라 하는 거고."

장두식의 최선은 사실을 기반으로 한 심플한 답변을 내뱉는 것이었다.

넷째 아들을 죽임으로써 셋째를 막내로 만들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냐."

에릭은 아주 덤덤하게 머리를 쓸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거참, 내가 꿀밤을 피하는 대답을 할 줄은 몰랐수다. 어떻수? 이 장두식이도 점점 학식이라는 게 무르익어 가는 것 같지 않수?"

"그렇군."

연달아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자 장두식이 방긋- 웃었다.

"크허허-! 형님의 인정을 받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오!"

반삭 머리 덩어리가 반짝이는 머리통을 흔들며 웃어 젖혔다.

'많이 웃어 둬라.'

에릭은 속으로 씁쓸함을 삼켰다.

정보 조직을 통해 황자 황녀들의 성정은 익히 알고 있었으니.

'미친년.'

타 죽었던 삼황자는 빙의 전부터 개망나니 미친놈으로 유명했다.

황녀는 다른 종류의 미침을 지녔는데, 어떤 면에서 보면 삼황자보다 더 또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유독 학구열이 뛰어나다고 했던가?

그 학구열을 인정받은 덕에, 까다롭기로 유명한 황실마탑주와 '할부지-!' 하는 사이라고 들었다.

"두식아, 네가 마법 스승이 필요하다 하지 않았었나?"

"거, 형님. 내가 독학으로 이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스승이 무슨 소용이겠수?"

장두식은 생긴 것과 달리 마법에 재능이 출중했다.

하나, 찬란한 재능에 비해 머리는 생긴 것과 비슷했다.

'독학은 지랄.'

장두식의 '독학(獨學)'의 실상은, 에릭과 리페로제가 주입식 교육으로 그의 머릿속에 마법진을 때려 박아 준 것을 의미한다.

그걸 독학이라 하다니....

'그래도 두식이의 재능은 진짜다.'

기사는커녕 뒷골목 행동대장이나 할 법한 흉악한 깡패상이지만.

'그 안에 지독한 순수함이 있는 놈.'

무식함이 순수함으로 느껴지는 천연덕스러운 놈이지만.

'누구보다 신의 있는 놈.'

그런 모순 덩어리 장두식이다.

에릭은 내심 미안함이 들었다.

이제부터 하게 될 일이 그에게는 터무니없는 부담이 될 터였으니.

하나, 그만한 이득도 따를 것이다.

어디까지나 일이 잘 풀렸을 때의 얘기다마는....

'인생이 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다, 두식아.'

에릭이 생각을 마쳤다.

여전히 장두식은 자신의 '독학' 능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몽둥이를 휘저으며 자랑스레 가슴을 쫙 펴고서.

"-이해하지 않고 외워서 마법을 쓴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겠수?"

달칵.

에릭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

세계수의 어린잎을 우려 낸 고아한 숲 향이 은은하게 피어났다.

차를 가볍게 한 모금 마신 뒤, 에릭이 장두식을 향해 묻기를.

"황실마탑주 정도면 어떻겠냐?"

"...거, 그, 뭐냐. 마법 스승 말하는 거요?"

에릭이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두식이 미끼를 문 느낌이었다.

"허어-. 황제 폐하의 오른팔 전투마법병단의 주인이 황실 마탑주 아니요?"

"그래서 어떠냐?"

장두식이 커다란 눈망울을 빛냈다.

"그, 그게 가능하겠수?"

넘어왔군.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라. 그러면 황녀가 너를 황실 마탑주에게 인도할 거다."

에릭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장두식은 익숙한 모략의 미소에 모골이 송연해졌으나, 황실마탑주라는 이름에 혹-해 버렸다.

거기에 에릭이 쐐기를 박았다.

"축성된 워-메이지 장두식."

"크으으으으-!"

황실마탑주는 '워-메이지'를 창시한 존재로.

샌님 마법사의 인식을 깡패처럼 바꿔 버린 존재다.

뒷골목에서 태어나 두 주먹으로 먹고 살던 장두식에게는 그야말로 꿈꿔 오던 이상향이었다.

"두식아, 꼭 말한 대로 해라."

"알겠수다!"

* * *

키잉-!

허공에 떠오른 십자가.

그 안에서 거대한 성기사가 나타났다.

스릉-챙!

"저, 전이의 기적을!"

"여기는 교황청이다!"

도착하자마자 날붙이가 에릭의 목을 겨눴다.

에릭은 말 그대로 기적을 행하여, 원하는 장소로 이동한 것이다.

그곳에서는.

"네놈은 누구냐!"

잔뜩 놀란 성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고 에릭을 둘러쌌다.

아직 에릭의 얼굴은 교황청에 알려지지 않았다.

'나를 모르는군.'

오늘 받게 될 세례식이 바로 에릭의 얼굴을 알리는 행사였으니, 몰라보는 자들이 많을 수밖에.

스승처럼 전공을 세운 것도 아니며, 위대한 업적을 이뤄 이름을 남긴 적도 없다.

'모르는 건 알겠다만....'

에릭은 이 무뢰배들에게 한마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직자라는 놈들이 타인의, 그것도 여자의 방에 우르르 몰려서 땀이나 흘려 대고 있다니.

"내 스승의 방에 불청객들이 잔뜩 있구나."

에릭은 교단의 순례자다.

성물을 가져와서 교황의 인정을 받았다.

얼굴을 모르면 어떤가?

툭.

에릭이 제국의 정복 어깨에 달린 철패를 꺼내 들었다.

투박하고 낡은 옥색 철패는 순례자의 징표였다.

신성이 담긴 물건에 성기사들은 고개를 조아렸다.

"에릭 순례자님을 뵙습니다."

"못 알아봬서 죄송합니다!"

에릭의 미간이 조금 펴졌다.

'제대로 된 상급자로 대하는군.'

고생한 보람이 느껴졌다.

괜한 텃세 혹은 낙하산 취급을 받을까 내심 걱정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었다.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다 뿐이지.

이름과 순례자 지위는 공식적으로 공표된 모양이었다.

'아버지를 걸었으니 당연한 일인가?'

역시 교황이었다.

이제 세례까지 받으면, 아스티아 교단에서 에릭의 이름과 얼굴을 모르는 이는 없을 터였다.

'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순례자임을 알아보고 어쩌고.

사실, 에릭에게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다.

왜, 이 방에서 저놈들이 땀을 흘려 댔는가?

"여기서 뭘 하고 있었지?"

자신의 지위를 알렸으니.

이제는 의문을 해결할 차례.

에릭의 눈이 방 안을 샅샅이 훑었다.

느릿한 동공의 움직임을 따라 성기사들이 흠칫- 놀랐다.

'추억이 더럽혀진 기분이군.'

에릭이 이동한 곳은 스승이 쓰던 방이다.

교황청의 가장 넓은 방.

방 한 면에는 아주 화려한 프레임이 장식된, 빛이 잘 들어오는 통유리창이 달렸다.

그 통유리창 앞에 모인 성기사들이 뭘 하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유리창 앞의 바닥에는 흘러내린 땀이 물웅덩이를 이뤘다.

"교황 성하께서, 이 방을 성기사들의 훈련소로...."

"훈련?"

에릭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그의 감정에 부응한 신성력이 흉포한 이를 들이댔다.

성기사들은 말끝을 흐리며 주춤- 뒷걸음질 쳤다.

같은 신성을 다루는 입장에서, 에릭의 존재는 괴물이나 다를 게 없었다.

'저게 열다섯이라더니....'

2미터가 훌쩍 넘는 키.

그리고 압도적인 근골.

거기에 선명하다 못해 쨍-한 금빛을 가진 신성.

'괴물.'

거기다가 인상까지 잔뜩 썼다.

절로 두려움이 일었다.

"대체 여기서 무슨 훈련을 한단 말이지?"

에릭은 스승의 방에서 웬 남정네 열댓 명이 모여 땀을 흘려 대는 꼴이 언짢았다.

리페로제가 쓰던 레이스 달린 침대나 마경의 나무를 베어다가 만든 고급 가구들은 그대로였다.

스승에게 풍기던 은은한 장미 향으로 가득했던 방은.

'땀내로 가득하군.'

지금은 아주 고약한 냄새가 풍겨 왔다.

스승님이 돌아온다면....

죄다 머리가 깨질지도 모른다.

서랍을 열어 보니, 스승이 쓰던 옷가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직 방을 뺀 것도 아니거늘.

'여자의 방에 함부로 들어와서 훈련을 해?'

실로 간만에 유교 보이 박지훈의 잔재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적막이 이어지자 에릭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두 번 물어야 하나?"

그제야 한 성기사가 나서 이곳이 훈련장이 된 연유를 읊조렸다.

"저 벽면의 검흔을 보며 심상 수련을 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에릭은 문 위에 새겨진 칼자국들을 바라봤다.

'흠.'

스승이 새긴 검흔(劍痕)이 선명하게 보였다.

장미 모양으로 문 위의 벽이 푹- 파여 있었는데, 저것에 무언가 검술의 묘리가 담기지 않았을까 하는 눈치였다.

"에릭, 교황은 너랑 닮았다."

"칭찬 감사합니다."

"칭찬? 교황은 빡대가리라는 말인데?"

"...."

익숙한 장미 문양을 보다 보니, 스승과 나눈 대화가 머릿속을 스쳐 간다.

에릭의 눈은 아련한 과거를 향해 있었다.

"교황은 무식하게 신성력이 강하고 성법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지만, 정말 검술에는 재능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교황이 된 겁니까?"

"주입식 교육."

에릭 또한 스승의 주입식 교육으로 성공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생각해 보니 장두식의 주입식 교육도 스승님이 함께했군.'

리페로제는 타고난 '스승'의 재능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교황은 그런 리페로제를 떠올리며 저 검흔을 조사하라고 했을 거지만.

'저건 그냥 장식일 뿐이지.'

실상은 스승이 좋아하는 장미를 조각품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회상을 마친 에릭은 성기사들을 지나쳐 문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말하기를.

"다시 돌아왔을 때도 방에 땀내가 진동한다면, 다들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손수 관리 감독을 하며 방 정화 작업을 하고 싶었다마는....

세례가 시작되는 시간이 코앞에 다가왔다.

사실 조금 늦었다.

* * *

아스티아 교단의 교황청.

말이 교황청이지 거대한 성(城)과 다를 게 없었다.

그 1층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예배실이 자리했다.

거대한 성의 한 층을 통째로 기도를 위해 쓰다니, 일반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일이었지만....

가장 무력이 강한 아스티아 교단에게는 가능한 일이었다.

"교황 성하, 3만이 넘는 신도들이 모였습니다."

강하지만 돈이 없는 교단은 무국적 지대의 몬스터 군락을 정화하고 그 자리에 교황청을 세웠다.

그래서 크기가 압도적이었다.

그런 거대한 교황청에 수용 인원을 초과한 사람이 모여들었다.

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1층 예배실에 삼만이나 모여드니, 콩나물시루가 따로 없었다.

"오랜만에 열린 세례식이라 다들 기대가 많은 모양입니다. 그, 그런데...."

교황의 세례식(洗禮式).

교황은 신체(神體)를 지닌 신의 대리인이요, 아스티아 신의 총애를 받는 지고한 강자였으니.

"순례자 에릭은 대체 언제 도착하는 겁니까?"

그런 교황의 앞에서 애달는 목소리로 대주교가 불안감을 토로했다.

정오에 이뤄지는 황제와의 만찬.

거기에 참석해서 바람맞은 게 아니냐는 뉘앙스였다.

'전이의 기적을 못 쓰니, 두 시에 열리는 세례식에는 참석할 수 없겠지.'

황도 제1구역도 아스티아 교단의 교황청도 전이의 기적이 불가능한 장소다.

그 장소를 떠나는 건 가능하지만, 도착 지점으로 정할 수 없다.

에릭이 최대한 서둘렀다 해도 지금쯤 교황청 외곽에 도착해 있을 터였다.

"뒤늦게 왔더라도 절벽을 기고 있겠구나."

게다가 교황청은 까마득한 절벽 위에 지어졌다.

성기사의 인내를 기르기 위해, 손수 절벽을 오르게끔 설계한 것이다.

"교황 성하, 신도들이 소란스럽습니다. 얼마나 더 미뤄야 하는지...."

중년인의 모습을 한 교황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결국 제국을 택한 게냐.'

그 스승에 그 제자라면, 에릭은 교단을 택했어야 했다.

에릭의 스승 리페로제는 교단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이 또한 너의 선택이로구나.'

교황은 결단했다.

삼만의 신도들 앞에서, 순례자 에릭의 세례식이 취소되었다는.

제 체면을 깎아 먹는 말을 하려는 결심이었다.

교황이기에 가능한 선택.

"내 직접 신도들에게-."

그때였다.

우당탕-!

에릭이 위에서 내려왔다.

황급히 서둘렀는지 교단의 새하얀 사제복이 조금 비뚤어진 상태였다.

"오오, 순례자 에릭. 아슬아슬하게 늦지 않겠군."

대주교가 에릭을 반겼다.

이제 교황과 함께 예배실에 들어서면 될 것인데....

"흠. 뭔가 이상하구나."

교황이 넋이 나가 있었다.

교황이 있는 장소는 교황청 3층의 집무실이었다.

그 위의 4층은 리페로제의 방과 성기사들의 훈련실이 자리 잡은 장소였다.

가만, 위에서 내려왔다고?

"전이의 기적을 행한 게냐?"

"늦어서 죄송합니다, 교황 성하."

대답 대신 에릭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리페로제, 또 어디에 샛길을 뚫어 둔 게냐?'

교황은 대략적인 상황을 이해했다.

황제를 보고 왔다는 것이 조금 괘씸했지만....

살짝 늦은 정도니 용납해 줄 생각이었다.

"이리 오거라."

교황은 에릭과 함께 예배실로 연결된 통로에 섰다.

성소(聖所)에서 쏘아진 빛이 엘리베이터처럼 천천히 교황과 에릭을 예배실로 인도했다.

쿠웅.

이내 바닥에 발이 닿고.

"순례자 에릭 경의 세례식을 거행하겠노라!"

장엄한 교단 원로의 외침과 함께 삼만 신도의 함성이 몰아쳤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압도적인 크기의 예배실.

그리고 에릭과 교황은 예배실 정중앙을 나란히 걸었다.

그 끝에는 선명한 빛을 내뿜는 아스티아 교단의 성물이 있었으니.

[아스티아의 성배(聖杯)]

41화 선택 (5)

지엄한 황실의 화려한 응접실.

그곳에서 거친 소음이 퍼져 나갔다.

후두룩- 으적으적.

게걸스레 다과를 먹는 소리.

'듣던 것보다 품위가 없구나.'

응접실의 반대편 문 앞에서 황녀가 눈가를 좁혔다.

황족의 상징인 붉은 눈동자가 가늘어지고, 그 좁은 눈 안에서 피처럼 붉은 안광이 일렁였다.

'천한 출생이라 들었는데, 품행을 보아하니.... 사실이었구나.'

듣기로는 웅혼한 신성을 지닌 거대한 성기사요, 성스러움이 묻어나는 찬란한 외모를 지닌 사내였다.

'아랫것들의 소문이란 과장되고 허황된 것이 대부분인 것을.'

황녀가 촥- 부채를 펴고 혐오감에 잔뜩 뒤틀린 입가를 가렸다.

그러고는 눈앞의 노인에게 눈짓을 줬다.

덜컥-.

노인이 응접실 문을 열었다.

그 안에서는 반삭 머리 덩어리가 요정의 날개를 한 움큼 집어서 입에 털어 넣고 있었으니.

으드득- 으적.

"쩝쩝, 거, 황녀 전하를 뵙수다."

황급히 입에 있는 것들을 씹어 삼키며 덩어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듣던 것보다 키가 작구나."

부채를 쥔 손을 파르르- 떨며 황녀가 억지로나마 인사치레를 건네자니.

"거참, 내 키가 180이요."

반삭 머리 덩어리가 손에 묻은 요정 가루를 털며 투덜거렸다.

그에 황녀는 툭- 하고 부채를 떨어트렸다.

'미친놈이로구나.'

황족으로서 이런 취급은 처음 받아 봤다.

존대 같지 않은 존대에 시정잡배 같은 행동거지.

거기다가.

"크으, 형님 말대로 황녀 전하의 용모가 아주 아름답수다."

대놓고 황족의 외모를 품평하는 작태까지.

'폐하께서 저런 놈을 중히 쓰고자 하시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겠지.'

제국의 지존이 선택한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거다.

황녀는 애써 무심한 척 담담하게 건너편 의자로 걸어갔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은발이 찰랑였고 타이트한 원피스가 몸매를 부각시켰다.

장두식의 동그란 두 눈이 황녀를 빤-히 바라봤다.

'노골적이구나.'

따각, 따각.

기다란 굽이 뾰족한 소음을 흩뿌렸다.

"앉지."

황녀는 차분히 손을 뻗어 건너편 의자를 가리켰다.

"크으, 이런 미인을 또 보게 될 줄은 몰랐수다."

덩어리는 또 한 번 황녀의 외모를 찬양하며 자리에 앉았다.

황녀의 무표정에 금이 갔다.

'내가 싫어하는 짓만 골라서 하는구나.'

진짜 미친놈이었다.

황녀의 외모를 찬양하다 목이 잘린 귀족가의 영식만 몇이었던가?

눈이 달렸다면 [제국일보]라도 읽었겠지.

천민 나부랭이여서 글을 몰랐다손 치더라도 귀가 뚫렸으면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황녀는 기가 찼다.

"황녀 전하는 내가 본 여인들 중 두 번째로 예쁜 여자요."

익히 들어 온 외모 칭찬에 황녀가 진절머리를 느끼려던 차.

그래서 저놈을 매질한 뒤 황제 폐하께 항의하려던 결심을 했던 순간에.

'뭐?'

번뜩- 놈의 말에 이상함을 느꼈다.

"두 번째?"

황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분노하여 삐쭉 올라갔던 눈썹이 평평하게 내려왔다.

날카로운 얼굴에 의문이 서렸다.

"그, 그런 게 있수다."

"내가 두 번째라는 말은 처음 들어 보는구나."

딱!

황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휙- 하고 바닥에 떨어진 부채가 날아들었다.

그때 장두식이.

"흐읍-!"

옆에 세워 둔 몽둥이를 들고 황녀를 겨눴으니.

몽둥이 앞에서는 반투명한 보호막이 생겨났다.

그냥 보호막이 아니었다.

'신성력이 마력에 섞여?'

왈패 같은 행동.

두 번째 미인이라는 말.

잔뜩 신경이 긁혔던 황녀가 우뚝- 멈췄다.

"-되었다."

그녀는 장두식의 몽둥이질에 반응하는 호위들까지 물렸다.

황녀는 저런 왈패한테 질 만큼 나약한 자가 아니었으니까.

"후우, 갑자기 부채가 날아드니, 놀라서 방어 마법을 펼쳤수다. 황족에게 몽둥이를 들이댄 죄는 달게 받겠수."

정말 놀란 모양인지 횡설수설 변명하는 장두식의 입에서 요정의 날개 조각이 튀었다.

황녀는 쥘부채로 가볍게 마력을 흩뿌려 그의 입에서 나온 잔여물을 막아 냈다.

그러고는.

"너는 에릭이 아니구나."

"그, 그렇수다. 에릭은 형님이고 나는 장두식이요."

장두식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형님만 믿고 있수다!'

장두식 특유의 말투.

어디가 모자란 것도 아니고, 장두식도 황족을 만날 때에는 일반적인 존댓말로 예의를 표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 정도 머리는 충분히 있었다.

황실 일원에 대한 무례함은 그 자리에서 사형을 당할 만한 중죄였다.

장두식은 이 모든 것을 알았다.

그러나.

"두식아, 황녀랑 대화할 때는 무조건 나랑 있을 때처럼 말하고 행동해라."

"아니, 더 과해야 한다. 나를 처음 봤을 때, 그 뒷골목의 장두식이가 되는 거다!"

황실 모독죄로 죽을 위험성보다 에릭의 조언을 더 믿은 것이다.

장두식이 바보처럼 보이는 데에는, 형님에 대한 지고한 믿음이 압도적인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네, 네가 그 에릭의 동생이란 말이더냐?"

한참을 머뭇거리던 황녀가 장두식에게 물었다.

"그렇수다."

"에릭 국장은 열다섯이라 들었다."

"그것도 맞수."

"그, 그러면 네가 열다섯보다 어리다는 말이냐?"

장두식의 얼굴은 암만 어리게 봐 줘도 30대 후반이다.

게다가 그의 행동거지나 말투가 거친 중장년 특유의 감성을 품었기에, 더욱 나이가 들어 보이기도 했다.

그런 장두식이 에릭의 동생?

"믿을 수가 없구나."

"친동생은 아니요. 오래전부터 나는 에릭 형님을 형님으로 모시기로 결심했수다."

"네 나이가 몇이지?"

"서른여덟이요."

황녀는 머리가 멍해졌다.

저런 놈은 처음 보는 유형이었다.

상대하기 어려운 타입의 인간이지만....

'만찬에 나타났다는 축성된 마법사가 저놈이겠지.'

이미 황녀는 호기심을 느꼈다.

머리도 나빠 보이는데, 마법을 쓰는 것도 그렇고.

'세계수의 뿌리로 만든 지팡이.'

황실의 마법사단 혹은 마탑의 원로들이나 쓸 법한 지팡이를 몽둥이처럼 들고 다니는 모습도 그렇고.

'마법식의 발동이 압도적으로 빠르다.'

저 말도 안 되는 마법식 계산 속도 또한 몹시 흥미로웠다.

당장 마법 얘기를 시작하고 싶었지만,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몇 개 있었다.

황녀가 묻기를.

"서른여덟인 네가 어떻게 열다섯인 에릭 국장의 아우가 된단 말이냐?"

"내가 형님으로 모시고 형님은 나를 아우로 대하겠다고 했으니, 이를 의형제라고 부른다고 했수다."

황녀는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나이를 기준으로 형과 아우가 나뉜다는 개념을 설명해야 할까?

의형제라는 게 두 배 이상 어린 동생을 형님으로 모시는 건 아니라고 말해야 할까?

황녀의 세계에서는 적어도 그게 정상이었으니.

'광신적인 눈빛이군.'

하나, 황녀는 이 화제에 대해 더 이상 나눌 말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자신이 마법을 연구할 때와도 같은 얼굴이었으니까.

그렇기에 황녀는 다음 질문을 건넸다.

"내가 두 번째 미인이라는 말은 무슨 말이더냐?"

"거, 뭐. 두 번째로 아름답다는 말 아니겠수?"

황녀의 눈썹이 휙- 올라갔다.

"첫 번째는 누구더냐?"

"그, 그걸 말하면 형님한테 꿀밤을 맞수다. 비밀이요."

장두식이 머리를 툭툭- 치며 말하는데, 머리에서 반짝이는 신성력이 일렁였다.

'질문은 소용없겠구나.'

단단히 미쳤다.

그런데 대단히도 흥미로웠다.

그에 황녀는 장두식을 마탑으로 초대하기로 결심했다.

짝짝.

"세바스찬-!"

황녀가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집사를 호출하자, 응접실 그림자 위로 백발이 성성한 노집사가 나타났다.

"마탑으로 가지."

집사가 고개를 숙이며 묻기를.

"손님으로 모실까요? 혹은-."

"손님이다. 일단은."

* * *

'두식이는 마탑에 초대를 받았을 테니....'

에릭이 생각건대, 황녀를 바람맞힌 일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였다.

잭슨이 조사한 대로라면, 황녀는 장두식을 아주 귀히 여길 것이 분명했다.

'지금 문제는 두식이가 아니지.'

괜한 장두식 걱정으로 생각을 돌려 봤지만, 그래 봤자 에릭에게 닥친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에릭은 다시금 현실에 집중했다.

"-아버지, 아스티아 님의 뜻을 이어받아 교단의 순례자가...."

아래에 모인 삼만의 신도.

드넓은 예배당의 단상 위.

[아스티아의 성배(聖杯)]

그리고 눈앞에서 잔을 든 교황.

그는 한 손을 에릭의 머리 위에 얹고, 다른 한 손으로는 신성한 잔을 든 채 기도문을 읊조렸다.

"아아, 아스티아 님께서 그를 자식으로 여기시며, 자신의 대변인으로 삼고자 하나니."

에릭의 눈가가 살짝- 일그러졌다.

무릎을 꿇은 채 성배를 든 교황의 축복을 받고 있자니.

'그걸 잊고 있었군.'

자꾸만 불길한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세례(洗禮), 신의 대리인 교황이 손수 신의 성을 내려 주는 거룩한 행사다.

그런데, 이 세례에는 신언(神言)이 따른다.

개인에게 계시의 형태로 내려오는 것이 아닌, 신전 전체에 퍼질 정도로 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꿀꺽.

침이 넘어간다.

'세례가 끝나면 무조건 가시적인 효과가 일어난다.'

신성의 빛이 일렁인다거나.

아스티아 신의 음성이 예배실에 울려 퍼진다거나.

"-그리하여, 순례자 에릭을 아버지, 아스티아 님의 열세 번째 자식으로 맞이하고자 이 성배를 내리노라."

교황의 기도가 끝났다.

에릭의 볼을 타고 한 줄기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성배를 마시고 신언이 들리지 않는다?

교인들은 물론, 눈앞의 교황부터 의심 어린 눈초리를 보낼 것이니.

"긴장하지 말거라."

에릭이 머뭇거리자, 교황이 인자한 어조로 작게 속삭였다.

아직 어리군.

그런 느낌이었다.

"모든 일은 아스티아 님의 뜻대로."

에릭은 예식의 절차를 따라 두 손으로 공손하게 성배를 받아 들었다.

찰랑.

교황의 기도문에 부응하여 성배가 신성한 물로 가득해졌다.

에릭은 성배를 들고 차분히 단상 아래를 내려다봤다.

"오오...."

"세, 세례식을 보다니!"

교인들은 눈물을 흘려 가며 감동에 젖어 있었다.

숫제 광신도들의 집단을 보는 느낌으로, 에릭 입장에서는 조금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흐음."

성배를 든 지 한참.

교황이 은근하게 독촉하듯 목청을 가다듬었으니.

'어쩔 수 없나....'

에릭은 눈앞에 상태창을 띄웠다.

그간 악착같이 돈을 벌어들인 이유는 신성력의 단계를 올리기 위함이었다.

10억에 달하는 [4티어 신성력].

그리고 상태창을 고치며 개방된 [성기사 고유 스킬].

기본적인 단위도 커졌고 사용할 요소도 늘어났다.

다만, 에릭의 늘어난 지출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벌이도 커졌으니.

'이럴 때 쓰라고 돈을 버는 거지.'

당장 황제가 주겠다는 10억 골드가 있지 않나?

게다가 르웰의 교회도 증축되어서 3,000명의 신도가 십일조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쓰는 만큼 번다는 보장이 주어진 셈.

그에 에릭은 망설임을 지워 냈다.

벌컥-.

성배를 들고 원샷을 때려 버렸다.

본디 신의 기운을 음미하며 느긋하게 비워야 할 성배를....

'한입에 털어 넣어?'

삼만 신도와 교황 그리고 세례를 준비했던 교단의 원로들까지 전부 경악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불경하구나."

"아스티아 님의 기운을 음미할 생각도 안 하다니!"

특히 원로들이 그랬다.

백 단위로 삶을 살아온 노인들답게 예식에 까다로운 편이었다.

그러나.

"리페로제의 제자라더니, 행동거지를 꼭 빼닮았구나."

"에잉, 쯧.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에릭의 스승은 또 한 번 좋은 핑곗거리가 되어 주었다.

그 스승에 그 제자.

이는 좋은 일에도 나쁜 일에도 적용되는 말이었다.

'미치겠군.'

정작 에릭은 타인의 시선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신체(神體) 51/100]

눈앞에 상태창이 떠올랐기 때문.

이는 상태창의 형태로 나타났던 깨달음의 편린이요, 에릭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이정표였기에.

성배의 물은 일반적인 성수(聖水)와는 다르다.

굳이 칭하자면 신수(神水) 정도가 되겠지.

'나한테는 레벨 업 영약과 같은 효과군.'

아주 좋은 일이다.

레벨 업 영약으로도 1밖에 오르지 않았던 [신체]의 스탯이 단박에 50이 오른 셈이니까.

남은 영약까지 다 먹으면 70까지는 올릴 수 있을 터.

그런데 문제는....

"왜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게지?"

"신언은커녕, 작은 빛무리조차 일지 않는다니."

단상 뒤편의 원로들의 중얼거림.

그리고 단상 아래의 신도들도 이상함을 눈치채고 있었으니.

신언이 들리지 않는다.

거기다가 성배를 마친 효과도 보이지 않는다.

"...설마."

세례식에 아무런 징표가 없다?

이는 곧 배교의 증거이기도 했다.

의심의 눈초리가 에릭을 향했다.

그리고 에릭은.

'이게 가장 이펙트가 뛰어나겠군.'

두 손을 모으는 척.

상점창의 구매 버튼을 눌렀다.

그것도 살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비싸고 화려한 스킬을 골랐다.

[광휘의 날개: 555,555,555골드]

위기는 돈지랄로 해결한다.

그의 철칙다웠다.

* * *

'황제를 보고 왔다더니....'

교단의 기록을 보면, 세례에서 배교의 징조가 나타났던 자들이 몇몇 존재했었다.

세례식은 신의 성을 하사받는 영광스러운 자리이다.

그리고 배교자를 미리 색출하는 기능도 함께 하고 있었는데.

이는 강력한 교인이 더 큰 권한을 갖기 전에 미리 검증하는 역할이다.

'개종 혹은 제국에 귀의할 생각을 먹은....'

그 징조가 에릭에게 보였다.

교황의 불안감이 점점 커져 갈 때쯤.

싸아아아아아―

에릭의 위로 거대한 신성력이 내리꽂혔다.

천상에서 지상으로.

찬란한 황금빛 기둥이 에릭을 감싸고 빛무리가 사방을 밝게 비추었다.

'내 수행이 부족했구나.'

그에 교황이 두 손을 모았다.

투덜거리던 원로들도 마찬가지.

"아아-! 이토록 강건한 신성!"

"아스티아 님이시여!"

체면치레도 잊고 교단의 원로들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토록 압도적인 신성을 보다니.

눈에서 절로 눈물이 흘렀다.

"흐읍-!"

단상 아래의 교인들은 웅혼한 신성력에 숨이 턱- 막혔다.

그 강대한 기척.

인간을 넘어선 초월자가 자신을 어루만지는 느낌이었다.

숨이 막히고 몸을 가누기 어려웠으나, 모순적이게도 정신과 마음만큼은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교인들은 신께 감복했다.

"신성이 형태를...."

가장 앞에서 에릭을 바라보는 교황은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성소(聖所)에서나 보이는 밀도 높은 신성력이 에릭을 감싼 것도 모자라 구체적인 무언가로 변하고 있었기 때문.

촤악-!

빛은 날개요.

이는 아스티아 신의 상징이니라.

"아스티아 님의 현신."

쿵-.

신의 대리인, 교황이 에릭에게 무릎을 꿇었다.

에릭의 거대한 등판 위로 황금색으로 강렬하게 빛나는 여섯 날개가 피어올랐으니.

이를 성서(聖書)에서 일컫기를.

지상에 신이 강림하였노라.

42화 성자(聖子) (1)

"제국 동부에는 마탑이 있으니까, 서쪽을 통해서 남부로 들어갈 생각입니다."

대표, 마키아 장첸이 대륙전도(大陸全圖)를 꺼내 펼치며 한 말이다.

흑마그룹, 한 기업의 대표답게 그녀는 리스크를 최소화한 선택을 했다.

"대표님, 제국 남부는 엘프 자치령과 너무 가깝지 않습니까?"

"다크엘프, 그들이 있으니 엘프들은 무시해도 괜찮습니다."

"역시, 대표님! 인맥이 대단하십니다."

마키아 대표는 실무진들을 모아 본격적인 제국 수확 사업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장소와 목표가 정해졌으니, 이제 준비할 것은 실행안.

"빙의자 몇몇과 접촉을 했다고요?"

"예, 커뮤 검열을 피해서 최대한 은어로 대화를 나눠 봤습니다."

"인증은요?"

"흑마법을 사용한 인증샷을 확인한 참입니다."

마키아 장첸은 빙의자가 아니다.

그런데도 흑마그룹의 대표직을 유지해 왔다.

"역시, 나의 토마스. 일 처리가 완벽해서 좋아요."

그녀의 가장 충직한 심복, 빙의자 토마스의 조력 덕분이다.

토마스가 고개를 숙이자, 마키아 장첸이 그의 입 아래로 손등을 가져다 댔다.

쪽.

"대표님, 영광입니다."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토마스는 전율했다.

필드 보스 마키아.

그녀가 괴물이 아닌 사람의 형태로 살아가는 세계.

토마스는 모종의 사명감을 느꼈다.

"인간은 다 사라져야 합니다!"

인간을 초월한 절세 미녀의 얼굴에 거대하고 흉악한 거미 몸통이 달린 필드 보스가, 온전한 사람의 형태로 자신의 눈앞에 있다니.

'감사할 다름이지.'

칠흑같이 검은 머리에 유리처럼 투명한 피부.

"토마스의 도움에는 언제나 감사하고 있답니다."

그리고 청량감이 느껴지는 밝은 목소리.

게다가 그 목소리로 이런 칭찬을 내려 준다니.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아름다운 얼굴은 마키아의 매력 중 하나일 뿐이다.

토마스에게 있어 마키아 장첸은 모든 분야에서 완벽한 여자였다.

"흑마노조에서 일거리를 달라고 시위를 했었죠?"

"예."

"그쪽으로 일감을 좀 몰아주죠. 능력이 조금 부족해도, 먹고살 거리는 있어야 할 테니까요."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마키아 장첸의 성품.

그녀는 흑마그룹의 대표이면서도 자비로운 마음을 지녔다.

"능력이 부족한 놈들은 정리 해고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토마스는 그런 성품을 느끼고자, 매번 그녀의 말에 토를 달아 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훗, 토마스도 참. 매번 이러시네요. 같은 흑마그룹에 속해 있는데, 애사심만 있다면 뭐라도 일을 주는 게 맞지요."

"그러면 노조의 흑마법사들은 제국에서 소환 관련 업무를 배정하겠습니다."

"좋아요. 제국이 종교에 더 물들기 전에, 최대한 서둘러 봐요."

성품 다음은 사업 능력이다.

일 못하는 직원들까지 챙겨 주는 대표는 사업에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

'이사회가 선택한 제국의 미궁만 아니었다면.... 분명 저번 사업도 성공했을 거야.'

토마스는 그녀의 기획 능력을 아주 높이 샀다.

지구에서는 유명 컨설팅 회사의 컨설턴트였던 토마스다.

그의 안목이니 틀린 말은 아니겠지.

"알만정교회가 제국 서부에 신전을 몇 개 가지고 있죠."

토마스의 생각대로, 마키아의 머릿속에서는 사업 기획이 끝난 상태였다.

"그들의 협력을 받아 제국 서부로 흑마법사 빙의자를 들이고, 남부 자작령으로 이동해서 포탈을 설치할 생각입니다."

"포탈은 마력 감지로 들킬 우려가 있지 않습니까?"

"이번에 이사회에서 배정한 예산에, 주주님의 조력이 포함되어 있더군요."

회사의 주주(株主)란.

흑마그룹이 탄생하기 전부터 살아가던 괴물들이다.

흑마법사는 살아간 기간만큼 수확한 영혼이 많다.

그렇기에 장생(長生)한 흑마법사들의 강함은 익히 알려진 사실.

"주주님이 세상일에 나서는 건 근 십 년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지요."

그들은 세상에서 몸을 숨겼었다.

하나, 이번 일을 기회로 주주들이 몸을 드러내겠다는 의미였다.

'역시 마키아 님.'

대표, 마키아 장첸이 그만큼 인정을 받는다는 의미다.

무려, 십 년을 잠적한 주주가 앞에 나서는 것이니까.

"주주님을 움직이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역시, 대표님!"

토마스의 칭찬에 마키아 장첸이 손등을 내밀었다. 쪽-입을 맞추며 토마스는 전율했다.

그런 토마스에게 마키아가 말하기를.

"어디서 성자라도 튀오나오지 않는 한, 이번 계획에 실패란 없겠지요."

―Ep. 10 성자(聖子)

모든 선택에는 결과가 따른다.

교황과 교단의 중진, 삼만 신도 앞에서 이뤄지는 세례식.

그 세례를 받고 성배를 마셨음에도 아무런 효과가 보이지 않던 상황이었다.

배교자로 몰리기 직전.

에릭은 5억이 넘는 큰돈을 사용해 위기를 모면했다.

[광휘의 날개]

자신이 구매할 수 있는 수많은 스킬들 중에 가장 멋있는 스킬을 골랐다.

'비주얼적인 게 중요하긴 하지.'

이름하여, 광휘의 날개.

[개벽]을 구매할 때부터 눈여겨봤던 스킬이다.

이름부터 이펙트가 화려할 것 같지 않나?

그런데....

'너무 지나치군.'

에릭은 수많은 시선을 감내하며, 천천히 주변을 훑었다.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싸아아아아아아―

금빛 기둥은 사라졌다.

그런데도 에릭에게서는 신성력이 쏟아지듯이 흘러나왔다.

그 원인은 등 뒤에 달린 날개.

"신이 이곳에 내려왔노라...."

그 날개를 바라보며 교황이 고개를 조아렸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감격에 겨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무려 교황이 자신을 바라보며 무릎을 꿇고 있는 게 아닌가?

'설마....'

교황은 주신, 아스티아 님 앞이 아니라면 결코 무릎을 꿇지 않는다.

신의 대리인이요, 지고한 교단의 주인이다.

그런 교황이 왜 에릭에게 무릎을 꿇었는가?

"현신이라고!"

"아아-. 아스티아시여."

그 괴이한 현상에 교단의 원로들과 세례식을 주관하던 주교들 모두 에릭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아스티아 교단의 성서가 일컫기를.

여섯 날개를 휘감고 지상에 신이 강림하였노라.

성서를 대충 읽는 에릭조차 알 만큼 유명한 문구였다.

그에 에릭은.

펄럭-!

"아아아-!!!"

[광휘의 날개]를 움직였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여섯 개의 날개.

펄럭-!

"오오오오-!!!"

마치 제 몸인 양, 날개는 뜻대로 움직였다.

에릭이 날개를 펄럭일 때마다 신도들이 감탄을 내뱉었다.

게다가.

펄럭-!

"아아, 위대하고 지고하신 아버지의 뜻을 이렇게 바라보나니-."

교황은 숫제 정신이 나갈 듯이 고개를 꺾은 채 신을 부르짖었다.

털썩.

원로들은 감격에 겨워 기절하였고 주교들은 오체투지로 에릭에게 온몸을 조아리고 있었다.

'흠.'

에릭은 처음에는 당황하였으나.

이내 현실을 직시했다.

펄럭-!

"아스티아 님이시여!!!"

날개짓 한 번에 수만 명이 목을 놓아 우는 꼴이....

'재밌군.'

슬쩍 올라간 입꼬리를 숨기며, 에릭은 날개의 형태를 확인했다.

안쪽으로 말린 날개.

이는 거대한 천사의 날개처럼 생겼는데, 아스티아 교단의 상징대로 세 쌍이 달려 있었다.

'정녕 아스티아 신의 힘인가?'

교단의 성물과 이름이 똑같은 스킬 [개벽].

그리고 교단의 심벌인 여섯 날개에 감싸인 십자가, 여기서 날개를 빼다 온 [광휘의 날개].

신언은커녕 기척조차 못 느껴 본 에릭이다.

'잘 모르겠군.'

뭔가 직감이 온 듯하였으나, 알 수 있는 것은 없었고.

에릭은 돈을 더 벌다 보면 해결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교황 성하."

모두가 넋을 놓고 자신을 찬양하는 이 세례식을 끝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아-. 아버지."

연신 아버지를 부르짖는 교황의 눈빛이 풀려 있었다.

에릭은 슬쩍 날개를 움직였다.

펄럭-.

교황의 동공에 초점이 잡혔고.

"교황 성하."

"아아-."

교황이 그제야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신의 상징이라니....'

에릭에게서 뿜어진 신성력은 강렬하였으나, 교황이 정신이 빠질 수준은 아니었다.

교황이 맛이 간 이유는.

'성자를 내려 주셨구나.'

아스티아 교단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성자(聖子)'의 존재 때문.

신의 상징을 내보이는 자를 각 종교들은 성자 혹은 성녀라 불렀다.

교황이 생각에 잠겨 있자니.

펄럭-!

에릭의 날개가 움직였다.

다시 교황의 눈빛이 흐릿해졌다.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아스티아 교단의 설움이라 함은.

성자와 성녀의 부재였으니.

"아아-."

교황이 다시 휘청거리자.

"교황 성하."

싱그러운 호선이 그려진 입매로 에릭이 교황을 불러 세웠다.

우뚝-.

휘청이던 교황은 이내 몸을 다잡았다.

교황은 조금 전까지 얼빠진 노인의 모습이었는데,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진중한 중년 사내의 모습으로 변했다.

쿠웅!

교황이 발을 구르자, 장내의 모든 기운이 예배실 단상 위로 모여들었다.

좌중은 압도되었다.

"아버지께서 진정한 아들을 이 땅에 내려 주셨음에-."

수만의 신도들의 시선을 받으며, 교황이 이번 세례식을 마무리 지었고.

이를 일컬어.

"순례자 에릭을 아스티아 교단 최초의 성자라 부르겠노라."

진정한 의미에서.

신의 첫 번째 아들이 태어났다.

* * *

'내가 성자라니....'

세례식이 끝난 뒤.

에릭은 교황의 집무실에서 오붓한 티타임을 가졌다.

'내가 성자라고?'

교황의 성자 선언 직후 날개의 효과는 사라졌다.

당연히 [스킬]인 만큼 쿨타임과 지속 시간이 존재했다.

사실, 그런 건 부차적인 문제고.

"성자님."

가장 큰 문제는 교황이 극존대를 하게 되었다는 점인데....

달칵.

"성소에서 직접 기른 허브잎을 달인 차입니다."

교황이 손수 차를 내려 에릭에게 공손하게 건네다니.

지나치다 못해 과한 대접에, 에릭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교황 성하, 부디 전처럼 말을 편하게 해 주시지요."

에릭의 입장에서는 실로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의 스승 리페로제가 100살이 넘었으니, 눈앞의 교황도 그에 준하는 나이일 테지.

유교 보이 박지훈의 잔재가 장유유서(長幼有序)를 강조하였다.

교황은 이에 질세라, 교리를 읊어 가며 에릭에게 존대를 하는 타당성을 설파했다.

"교황은 주신 아스티아 님, 아버지의 대리인일 뿐입니다. 세례를 받은 신도 역시 신의 뜻을 대변하는 대변인이지요. 순례자라 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하나, 성자(聖子)는 다르다.

"신이 직접 증표를 내려 주신 성자님, 이는 곧 신의 뜻과도 같으니, 제가 어찌-."

에릭의 미간이 점점 구겨졌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권한과 지위뿐.

'구구절절한 허례허식은 피곤하단 말이지.'

말이 길어지는 건 사양이다.

에릭은 교황이 말을 잘 듣게 만들 비책을 떠올렸다.

하여 교황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말하기를.

"이는 곧, 아버지. 아스티아 님의 뜻입니다."

"...허어."

"신의 대리인, 교황 성하를 존중하라는 의미지요."

"들리셨습니까?"

"예."

성자는 자유롭게 신과 소통할 수 있으니.

교황은 성서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물론, 에릭의 거짓말이다.

그는 신의 목소리는커녕, 온 정신이 다른 데 팔려 있었다.

그런데 거짓말이면 어떠랴?

'내 말이 곧 신의 뜻일 텐데.'

성자라는 이름에는 그만한 이름값이 따랐다.

알만정교회, 루-솔라스교.

둘 다 성자와 성녀를 내새워 위세를 떨치지 않았나?

게다가 아스티아 교단에서는 처음으로 등장한 성자가 아니던가.

"그래, 그래야지. 아버지의 뜻을 어찌 어길소냐."

예상대로.

교황의 말투가 바뀌었다.

지엄한 신의 뜻이라는 성자의 말을 믿을 수밖에.

"성자 에릭."

에릭을 바라보는 교황의 눈빛이 그윽했다.

기특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치.

"교황청에서 지내는 건 어떻겠나? 리페로제가 쓰던 가장 넓은 방을 비워 주겠네."

급기야, 그녀의 실종 이후로 한 번도 비워진 적 없던 방까지 내주겠다고 하다니.

"스승님께서 돌아오실 곳을 제가 어찌 차지하겠습니까?"

에릭이 고개를 숙였다.

교황은 그의 마음씀씀이에 감동하였다.

"그리고 제집은 어디까지나 르웰 사제님의 교회입니다."

"그래, 그게 너의 뜻이라면 그게 옳은 것이니라."

성자 취급이 아주 훌륭했다.

뭔 말만 하면, 신의 뜻과 같다며 기뻐한다.

흑마그룹의 등장으로 심란했던 상황에, 아주 좋은 일이 벌어졌다.

'교단에서 큰 힘을 얻었군.'

[광휘의 날개]를 사는 데 5억을 넘게 써서 돈이 부족하던 상황.

황제의 10억은 [4티어] 승급에 사용할 예정이니.

"교황 성하."

에릭이 입을 열었다.

진중한 어조에 굳건한 눈빛으로.

'신의 뜻이 있었구나.'

교황은 에릭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과연 주신 아스티아께서 성자를 내려 가면서, 어떤 뜻을 내리셨을까?

'마경을 정화하라거나....'

대륙에 즐비한 마경(魔境).

강대한 몬스터들이 즐비한 장소.

그리고 인류의 비원(悲願)이 숨겨진 땅.

이는 곧 아스티아 교단의 과업이기도 했으니까.

교황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때.

"대륙의 모든 교회에서 십일조를 거두어야 합니다."

에릭이 자신의 뜻을 읊조렸으니.

"마경 정화... 아니, 십일조?"

교황은 당황하여 되물었고.

"아스티아 교단을 찾은 모든 신도가 주급의 10%를 십일조로 봉헌해야 합니다."

에릭은 다시금 자신의 뜻을 알렸다.

교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또한 뜻이 있겠지.'

교인들에게 가입비를 받는 '알만정교회', 거기다가 기도와 치유 등 모든 신성 행위에 대가를 요구한다.

하물며 '루-솔라스'교는 어떤가?

그들의 사제가 되려면, 속세의 허물을 벗어야 한다며 전 재산을 받아 간다.

이에 비하면, 십일조 정도는 우스웠다.

"십일조라, 이를 모든 교회에서 시행하려면 일이 많아지겠구나."

에릭은 이 또한 기획해 놓은 바가 있다.

하나, 아직은 시기상조.

"구체적인 시행안은 황실에 다녀온 후에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곧 황실 파티가 시작되겠군.'

황녀를 바람맞혔으나, 황제를 바람맞히는 건 위험할 터.

"어딜 간다고...?"

"이 또한 신의 뜻입니다."

천연덕한 얼굴로 태연자약하게 그리 말하는데....

'성자가 되자마자 제국을 가?'

교황은 뒷골이 당겼다.

거기에 에릭이 덧붙이기를.

"제가 꼭 제국에 국교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43화 성자(聖子) (2)

황실에서 연회가 열렸다.

명분은 이십 년 만에 이뤄진 만찬의 영광, 그 주인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다.

주체자는 무려 황제.

"오오, 파에도 준남작 그대도 참석하셨구려!"

"김씨상회 상단주 아니신가!"

보통 황제의 연회라 함은 하급 귀족들은 참석지도 못할 자리라 여기겠지만.

제국은 다르다.

자작 이하의 하급 귀족들, 큰 부를 이룬 평민 상인 할 것 없이 자질이 있다면 누구라도 초대장을 받을 수 있다.

"이 거대한 연회궁에서 우리의 차례까지 올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초대장을 받는다 뿐이지, 하급 귀족이나 평민 상인들이 제국의 권력자와 만나는 일은 요원했다.

황실의 연회는 '연회궁(宴會宮)'에서 열리는데.

"이번에도 저희끼리 친목질이나 하다가 집에 가야겠지요."

"자격이라...."

이는 말 그대로 궁전 하나를 통으로 연회장으로 쓴다는 말이다.

궁의 크기가 워낙 커다래서, 신분과 작위에 따라 구역을 나눌 정도였다.

하여, 하급 귀족과 평민 상인들이 황제의 연회를 일컫기를.

"...일확천금의 꿈이 찾아오긴 어렵겠죠."

간혹 가다.

이 연회에서 귀인을 만나 인생이 바뀌는 경우도 있었기에.

황실의 연회는 하급 귀족과 평민들의 꿈이라 불리었다.

"꿈은 아니지."

김씨 상단주의 말에 파에도 준남작이 히죽- 웃었다.

"내 아들이 미궁에서 에릭 국장님의 수하께 도움을 받았다더군."

하급 귀족도 명분이 있다면, 연회궁의 상층에 들를 수 있다.

파에도 준남작은 운 좋게 이 기회를 잡아냈다.

"이름이... 흠, 맞아. 장두식이라고 했었지."

"장씨 성을 가진 두식이라. 저처럼 평민이겠군요."

"그래서 그런지 직급도 특이했었네. 뭐랬더라.... 음, 맞아. 오른팔이라는 직급이었네!"

연회궁의 1층은 북적북적했다.

그 화려한 궁전의 호사스러움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어찌 보면 시장통과도 다를 것이 없었다.

연회궁의 1층은 그야말로 꿈을 파는 자리였으니까.

"에릭 국장의 측근께 아들의 목숨이 구원을 받았으니 감사 인사는 건네는 게 맞을 게야."

"직계 가족, 그것도 아들이면 명분으로는 충분하겠습니다."

"아마 황실 로얄가드도 내 사정을 듣는다면 위로 가는 길을 열어 주겠지!"

"정말 대단한 기회를 잡으셨...."

"크하하-! 조만간 준남작 딱지를 뗄 수 있겠-."

꿈에 겨워 한껏 웃던 파에도 준남작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눈앞에서 함께 웃던 김씨 상단주가 얼굴을 굳혔기 때문.

주변을 둘러보니 사방이 고요했다.

'무슨 일이지?'

그에 준남작도 입을 다물고 천천히 주변을 훑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고요함의 원인이 자신은 아닌 모양이었다.

'왜 다들 난간에....'

드높은 연회궁의 상층, 고위 귀족들이 모두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니까.

"...허어. 황제 폐하가 드신 이후로 아직도 안 왔단 말인가."

연회궁은 1층 로비를 내려다볼 수 있는 구조로 지어졌다.

이는 귀빈의 참석에 모두가 박수를 치며 환영하기 위함이요.

1층의 하급 귀족과 평민들 중 유망한 이에게 동아줄을 내려 주기 위해서였으니.

그래서 황제는 늘 마지막에 연회궁으로 들어섰다.

'폐하가 드신 지 한 시간이 넘게 지났다.'

연회궁 상층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황제 다음으로 올 사람이 있었기에, 그 무례함에도 황제가 화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그렇게 참았음에도.

"아직도 오지 않는단 말인가."

"폐하, 너무 노여워 마십시오."

붉은 머리를 지닌 재상을 필두로, 제국의 사대 공작가의 일원들이 황제를 진정시키고 있었다.

그 말인즉슨.

어떠한 귀빈이 황제를 기다리게 만들었다는 의미인데.

'대체 누가?'

꿈이 가득한 1층 로비에 불안감이 내려앉았다.

파에도 준남작은 침음을 삼켰다.

이러다가 연회를 파하기라도 한다면....

'에릭 국장을 만나 보지도 못하고.'

그렇게 되면 준남작의 동아줄은 끊긴 것과도 다를 게 없게 된다.

준남작은 계속해서 위에서 들리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폐하, 부디 진정하시지요. 저를 봐서라도 조금만 더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제국의 유력 귀족들이 전부 참석하는 자리였다.

북부를 지키느라 만찬에는 참석하지 못했던 북부 대공도 연회에는 뒤늦게나마 찾아왔다.

그런 자리에 늦다니.

"허, 기가 차는군."

황제가 연회장 난간을 묵직하게 내리치려던 순간.

그 뒤에 연회를 파(破)한다고 선언하려던 때.

드르르륵- 쿵!

연회궁의 정문이 활짝 열렸다.

그와 동시에 황실의 시종들이 나팔을 불었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우렁찬 환영 인사가 시작되었다.

뿌우우우우우―

"제국의 별, 지고한 황실의 피요, 황실마탑주의 친우. 율리아 로펜 아르만, 황녀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따각, 따각.

호화로운 연회궁에 가장 화려한 이가 등장했다.

뾰족한 구두굽 소리를 울리며 황녀가 쥘부채를 촥- 펼쳤다.

그러고는 황실의 전령을 바라봤다.

황녀의 눈이 가늘어지자.

뿌우-우-우―

나팔이 한 번 더 울렸다.

긴장한 전령의 호흡이 흐트러졌고 나팔이 뚝뚝- 끊겼다.

입장을 알리는 인사말도 마찬가지.

"그, 그리고.... 그, 에릭 국장님의 오, 오른팔이신, 장두식 경 입장하십니다!"

* * *

"에릭 국장, 황녀가 어째서 그대의 수하와 함께 들어오는 겐가?"

황제의 기분이 언짢다는 건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었다.

마치 애착 인형이라도 되는 양, 반삭 머리 근육 덩어리와 팔짱을 낀 황녀의 모습.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황제의 얼굴.

꾸욱-.

으드득.

황제에 손에 붙잡힌 난간이 으스러졌다.

가루가 흩날리는 연회궁 최상층에서 에릭은 황제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말하기를.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뚝.

아무런 소리도 없었지만-.

"지금 무어라 하였는가?"

황제의 무언가가 끊어졌다는 건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흉포한 기세가 연회궁을 가득 메웠다.

"폐하-."

그저 황제가 기세를 일으킨 것만으로, 연회궁에 이변이 일어났다.

쨍- 쩌저적.

연회궁이라 함은 수도 제1구역의 일곱 개의 궁중 하나다.

황실마탑의 정수를 담은, 수많은 방어 마법진에 둘러싸인 장소다.

그 방어 마법들이 얇은 유리처럼 겹겹이 부서졌고.

"에릭 국장! 이 무슨 행패란 말인가!"

"어찌 저런 평민 나부랭이를 황녀 전하와 엮어!"

제국의 인사들은 하나같이 에릭을 나무랐다.

조금이라도 황제의 노여움이 가라앉기를.

그런 마음이었는데....

'웃어?'

정작 에릭의 얼굴은 해맑기 그지없었다.

황제가 직접 영광을 내려 주고.

연회를 베풀었음에 이런 배은망덕함을 보여?

칼이라도 빼 들어야 할 분위기였다.

"폐하."

그때 에릭이 황제에게 한 발 다가섰다.

쿵- 묵직한 발걸음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황제도 잔뜩 구겨진 얼굴로 에릭을 바라봤다.

짜악-.

에릭이 황제를 바라보며 두 손을 모았으니.

그 박수 소리에 소란스러워졌던 장내가 조용해졌다.

황제의 기세도 누그러들었으며.

"저, 저거...."

"이게 무슨!"

에릭을 나무라던 대신 관료들은 말문이 턱- 막혔다.

싸아아아아아아아―.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리꽂히는 웅장한 신성의 기둥.

그리고 그 안에 선 거대한 에릭의 모습.

"나, 날개?"

게다가 그 신성이 형태를 이루고 있었으니.

촤악-!

에릭의 등에 세 쌍의 금빛 날개가 피어났다.

눈가에서는 교단 순례자의 징표가 환한 빛을 발하였으며, 머리 위에서는 동그란 고리가 반짝였다.

"허어...."

펄럭-!

에릭의 날갯짓에 황제의 노여움이 가라앉았다.

"아스티아 교단에서 신의 표식이 나왔다라."

황제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웬 왈패랑 제 딸을 엮어 주려는 모습에 잔뜩 노여움이 올라왔었는데....

"폐하, 두식이는 제 아우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다른 의미로 느껴졌다.

두식이에 대한 말을 무시하고 황제는 곧장 본론을 꺼내 들었다.

"성자가 되었는가?"

"부끄럽게도, 아스티아 교단 최초의 성자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본디, 황녀랑 안면이라도 트게 해 주고 에릭과 황녀를 이어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세례식에 참석했을 줄이야.

'그러고는 곧장 성자가 됐단 말인가?'

성자라는 게 열댓 명씩 있는 것도 아니고, 각 종교별로 많아야 둘밖에 없는 게 성자와 성녀다.

그들의 존재는 신의 직접적인 증거와도 다름이 없었기에.

'황녀로는 급이 맞지 않는군.'

알만정교회의 성녀는 교주보다 지위가 높다.

루-솔라스교의 성자 성녀도 태양성왕(太陽聖王)보다 종교적 지위가 앞서 있다.

아스티아 교단에 몸담은 에릭.

굳이 따지고 보자면....

'교황의 위로군.'

무신론자인 황제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몇 있다.

교황이나 교주 혹은 태양성왕과 같은 종교 단체의 수장.

리페로제 아스티아와 같은 소수의 강자.

그리고.

'부조리한 힘의 소유자들....'

신의 증거를 지닌 존재들.

그들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강한 신성과 기적을 지녔다.

노력에 비해 결과가 압도적으로 뛰어나며,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강해지는.

마치....

"열다섯에 얻은 그 강함이 이해가 되는구나."

에릭과 같은 존재들.

황제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제국의 중진들은 몇 마디 안 되는 짧은 대화에서 모든 맥락을 이해했다.

'열다섯.'

어린 나이다.

그런데 순례자의 제자였고.

교황이 절차를 무시한 채 그 지위를 이양해 줬다.

그 모든 것이.

"성자가 되기 위해서였군."

황제는 납득했다.

"아니, 성자였기에 그렇게 된 것인가?"

혼잣말처럼 내뱉는 황제의 의문에 에릭이 짙게 웃었다.

펄럭-.

세 쌍의 날개가 신성력을 흩뿌렸다.

* * *

장두식은 세바스찬의 안내를 받아 황실마탑에 들어섰다.

제국 첨단 기술의 집약체가 황실마탑이었기에, 수많은 보안 절차가 있어야 했겠지만-.

"내 손님이다."

황녀의 한마디에, 프리패스로 마탑주의 앞까지 도달했다.

"제자야, 이건 대체 뭐냐?"

반짝거리는 장두식의 머리통을 보며 황실마탑주는 경악했다.

바닥까지 끌리는 긴 수염이 더듬이처럼 날아들어 장두식의 곳곳을 훑었다.

"제 것입니다."

황녀는 뾰족한 굽으로 마탑주의 수염을 짓밟았고.

"욕심이 과하구나."

마탑주는 황녀와 장두식을 두고 기 싸움을 벌였다.

허공에서 마력 파장이 일고.

파칭-쾅!

장두식을 제외한 모든 공간이 부서졌다.

"허어-. 황녀, 많이 늘었구나."

"스승님의 가르침 덕입니다."

장두식이 눈을 끔뻑거리는 동안 수많은 공방이 오갔다.

마법의 정수(精髓)가 담긴 대단한 싸움에서 장두식은 하품을 쩌억- 했다.

"거, 사람 불러다 놓고 뭐 하자는 거요?"

마탑주의 마법진이 흩어졌다.

황녀의 쥘부채는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 뒤에 마탑주와 황녀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암묵적인 합의를 마친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에 신성을 담다니!"

"수식 계산 속도가 말도 안 되는 구나!"

두 사람은 장두식에게 마법을 보여 달라고 부탁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장두식의 마법은 굉장했기에, 연신 감탄이 터져 나왔다.

마력에 신성력이 뒤섞였고.

복잡한 마법을 어떠한 계산도 없이 즉발로 사용한다.

가짓수가 적으면 어떠랴.

"그야말로 워-메이지의 지향점이로다!"

황실마탑주가 장두식을 마탑의 미래라고 여겼으니.

"부탑주의 자리를 주마."

황실마탑의 2인자 자리까지 내놓았다.

지금 있는 놈?

끽해야 8서클 마법 몇 개 깔짝이는 수준.

세계에 백 명 정도는 있는 흔한 존재다.

반면, 장두식은 어떤가?

한껏 올라간 황녀의 어깨.

"스승님, 제가 세계에서 유일한 신성 마법사를 초빙했습니다."

황녀의 말대로.

장두식은 유일(唯一).

그야말로 세계에 하나뿐인 존재.

"거참. 그냥 외워서 쓰는 게 뭐가 대단하다고 그러는 거요?"

"...그 수식을 외워서 매번 같은 위력을 낸다는 게-."

마탑주와 황녀가 여러 설명을 들어 가며 장두식의 대단함을 알려 줬다.

그러고는 비결을 물었다.

"대체 어떻게 그걸 다 외울 수가 있지?"

"...매가 약이라는 말 들어 봤수?"

대화는 조금 안 통했는데, 그러면 어떠랴.

장두식처럼 대단한 천재는 원래 대화가 잘 안 통하기 마련.

황실마탑주는 마법의 천재다.

황녀 역시 마찬가지.

"같이 마법을 연구하다 보면, 알게 되겠지."

천재가 천재를 알아보는 건 당연한 일.

세 사람은 여러 마법을 쓰며 다양한 대화를 나눴다.

"도통 알 수가 없구나."

마법의 교류 끝에서 마탑주가 알아낸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다른 제안을 건넸다.

"피를 좀 뽑아도 되겠느냐?"

"여기 형님이 적어 준 단가표가 있수다."

이때다 싶어 장두식이 종이 조각을 꺼내 들었다.

"두식아, 네 체질이 퍼져야지 미래의 재앙을 막을 수 있다."

대의를 빙자해 돈을 버는 에릭의 수법이다.

'거, 뭐. 피 좀 뽑는다고 문제 될 것도 없고.'

쭈욱- 마탑주의 수염이 장두식의 피를 뽑아 옮기는데, 뽑히는 족족 새로운 피가 돌기 시작했다.

"허어.... 무슨 신성 축복을 받은 몸 같구나."

마탑주가 슬쩍 윈드커터로 장두식의 피부를 베어 봤는데, 상처도 곧장 재생되었다.

뽑힌 피가 돋고.

상처는 순식간에 원상 복구.

"신성 마법사는 워-메이지의 미래임이 틀림없다!"

마탑주는 다시 제안했다.

"그래서 부탑주의 자리는 어떻느냐?"

그리고 장두식은 답했다.

"거, 나는 에릭 형님의 오른팔이요."

여기까지가 장두식이 겪은 일이었다.

웅장한 연회궁의 최상층.

용의 심장을 박아 만든 샹들리에 아래에서 에릭은 장두식의 썰을 들었다.

"뭐, 재밌었수다."

"다친 데는 없냐?"

"피 좀 뽑고 피부 좀 베인다고 다치겠수?"

거, 꿀밤을 그렇게 맞아 댔는데.

고작 그 정도로....

장두식은 말끝을 흐렸다.

에릭의 등 뒤, 알현궁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황제가 뚫어져라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

장두식은 슬쩍 몸을 돌려, 에릭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형님은 대체 무슨 일이 있었수?"

에릭은 간략하게 있었던 일들을 요약해 줬다.

"그러니까... 형님이 교황청에 가서 날개를 뽑았더니 성자가 됐고, 지금 막 황제 폐하와 비슷한 위치가 됐다는 말이요?"

"그래."

"날개는 언제 보여 줄 수 있수?"

"한 시간쯤 뒤에."

장두식은 뒤통수가 따가웠다.

슬쩍 돌아보니, 황제가 도끼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원한을 산 기억은 없으니, 원흉은 눈앞의 에릭일 터.

"형님은 황제 폐하랑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한 거요?"

황제의 시선에, 정말로 머리가 뚫릴 것 같아 장두식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 에릭이 답하기를.

"두식이 네 혼사 얘기를 좀 했다."

44화 성자(聖子) (3)

협상에 있어서 눈높이를 맞추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에릭은 뜻밖에 성자라는 지위를 얻어 냈고, 교황의 극존대를 듣는 호사까지 누렸다.

그런 성자의 지위는 과연 어느 정도인가?

'황제와 비슷한 위치.'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지위가 비슷하다고 대제국의 황제와 동등해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살아온 세월이 다르지.'

황제의 세월이란 건 권력을 유지한 채 살아가기만 해도, 영향력을 마구 키워 주는 거였다.

열다섯, 에릭이 이 세계에서 살아온 세월은 황제에 비하면 한없이 작았다.

'그래도 이름값은 엇비슷하지.'

진정한 의미로 신의 자식이, 성자이니까.

그 덕분에 이뤄진 협상.

이름하여, 장두식 결혼시키기.

"...형님, 내 귀가 이상한 거요?"

눈을 끔뻑거리는 장두식에게 에릭이 다시금 했던 말을 반복했다.

"제대로 들었다. 두식이 네 혼사 얘기를 하고 있었지."

"허어.... 참말이요?"

장두식은 감동했다.

에릭을 형님으로 모시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었던가?

요즘이야 에릭의 위세가 대단해졌지, 그가 힘을 숨기고 살았을 시절의 장두식은 숫제 정신병자 취급을 받아 왔다.

"아그들아-! 형님 지나가시는 데 안 비키냐?"

지금은 모험가들이 알아서 길을 쫙- 터 주지만, 에릭의 어린 시절에는 달랐다.

작디작은 꼬마가 제 몸만큼 커다란 철검을 질질 끌고 다녔다.

반삭머리 덩어리가 그 꼬마를 형님이라 불러 대는 것이.

"웬 존만 한 꼬마를 형님이라 부르냐? 약을 할 거면 적당히 처하든가."

비아냥과 조롱은 기본.

약쟁이 취급을 받으며 뒷골목에서 쌓았던 인망도 모두 잃었다.

무국적 지대는 거친 야생이었고, 거기서 작은 꼬마를 형님으로 모시는 장두식은 병신 취급을 받았다.

'서러운 세월이었수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여자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두식 오빠야, 그 꼬마는 뭐야?"

"꼬마라니, 이제부터 우리가 모시게 될 에릭 형님이다!"

페르안 지역의 빈민가에서 사귀던 여자가 있었는데, 장두식은 그녀에게 에릭을 소개해 준 직후 차였다.

그 시절의 장두식은 강제로 에릭을 형님이라 불렀어야 했다.

리페로제가 걸어 둔 제약이었다.

'지금은 만족하지만....'

그때는 참 힘들었수다.

장두식이 그간의 서러운 기억을 회상하고 있을 때.

"두식아, 그렇게 감동이냐?"

"허어, 형님. 당연한 걸 묻고 그러슈."

장두식은 현실로 돌아왔다.

빈민굴의 깡패는 제국 황도, 그것도 제1구역의 연회궁에서 호사스러운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언제 이렇게 됐는지....'

감동이었다.

이쯤 되니 자신의 상대가 궁금하기도 했다.

'젊고 어리고 예쁜 여자는 바라지도 않수다.'

장두식은 스스로를 잘 안다.

반삭 머리의 울퉁불퉁한 깡패 상, 좋게 봐도 미남은 아니다.

서른여덟이라는 나이 또한 혼인 시장에서 한참 뒤떨어진 나이였다.

장두식은 여관 주인장 정도의 안정적인 직업을 지닌 또래의 여인을 바랐다.

그랬는데....

"그래서 내 혼인 상대는 대체 누구요?"

"제국의 별."

에릭의 말이 사뭇 이상했다.

"별?"

끔뻑- 끔뻑-.

'별, 제국... 거, 뭐냐. 그거 황제 자식들 아닌가?'

장두식은 황제의 자녀들을 떠올렸다.

미궁에 들어간 황태자.

전쟁터를 전전하는 둘째 황자.

그 뒤에는 황녀가 있고 가장 막내인 황자는 에릭이 터트려 죽였다.

"넷, 아니 셋 중에...."

"두식아, 네가 게이도 아닌데 뭘 그렇게 고민하냐?"

"허어, 내 너무 놀라서 깜빡했수다. 황녀님은 하나밖에 없잖수!"

따각, 따각.

때마침 장두식의 뒤에서 뾰족한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다.

달빛을 머금은 새벽의 숲 향이 은은하게 풍겨 왔다.

"에릭 성자님을 뵙습니다."

쥘부채로 입을 가린 황녀가 에릭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에릭이 장두식에게 설명을 해 주었듯이, 황제도 황녀에게 상황을 알려 준 모양이었다.

"아스티아 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기를."

성자라 불렀으니 에릭은 그에 걸맞게 성호를 그리며 황녀를 맞이했다.

그러고는 대뜸 본론을 꺼내 들었다.

"제 아우의 아내가 되실 테니, 제수씨라 부르겠습니다."

툭- 쥘부채가 떨어졌다.

황녀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고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녀가 묻기를.

"제, 제수씨?"

"오붓한 시간 보내시지요."

에릭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황급히 황녀에게서 멀어졌다.

성큼성큼 걷는데, 황녀는 항의할 타이밍을 놓쳤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서는....

끔뻑, 끔뻑.

왕만 한 눈망울을 빛내는 장두식이 보였으니.

그는 진한 감동에 겨워 있었다.

형님을 모신 보람이 톡톡했다.

'이 장두식이도 빛을 보는 날이 오는구나!'

무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예쁜 여자가 자신의 아내가 된다니.

잠깐.

장두식이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 이 혼담은 진작 예정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 전조가 제법 많지 않았던가.

"황녀 전하는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던 거요?"

"허어! 나를 데려다가 황실마탑에 데려가고, 부탑주라는 지위를 주려는 것도 다 혼인 때문...."

"거, 내 출신이 천하다고 그런 배려까지 해 줬을 줄은 몰랐수다!"

"에릭 형님이 마누라가 생기면 자기는 뒷전에 둬도 된다 했으니, 걱정하지 마시요!"

그 순박한 눈망울.

속사포처럼 쏘아 대는 말.

그리고 반짝거리는 축성된 머리통.

쥘부채를 주워 든 황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 * *

"하하,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아닙니까?"

그 광경을 보며 에릭이 웃었다.

옆에 있는 황제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잔뜩 열이 받았으나-.

"약조한 대로 황녀 본인의 뜻을 가장 우선시하기로 했다."

황제는 화를 꾹 눌러 담았다.

친(親)제국적인 교단의 유력자.

지위는 무려 성자요, 열다섯에 전무후무한 힘을 지닌 기재다.

'제국을 위한 길.'

흑마그룹의 등장은 황제 역시 아는 바.

앞으로는 무엇보다 교단의 조력이 중요해질 테지.

게다가.

'알만정교회나 루-솔라스교에 비하면....'

아스티아 교단과 연을 맺는 건 아주 큰 이득이었다.

세 종교는 모두 신에게 미쳐 있으나, 아스티아 교단은 그나마 그 정도가 덜하였으니까.

게다가 에릭이 제국에 적을 두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

[친동생처럼 아끼는 존재 장두식, 르웰과 고아원 아이들처럼 에릭의 역린(逆鱗).]

제국 정보부가 샅샅이 살펴본 에릭의 정보였다.

황제가 아무런 생각 없이 에릭을 중용한 건 아니다.

에릭의 지위적 기반은 '아스티아 교단'에 있지만.

"그의 모든 것은 이 제국에 있습니다."

재상의 말처럼, 에릭이 쌓아 온 인연과 정서적 기반은 전부 제국 안에 들어 있었다.

장두식은 에릭과 우호를 다질 존재인 동시에 약점과도 다를 게 없었다.

그런 장두식을 맡긴다?

그것도 황녀의 데릴사위로?

"폐하가 저를 믿었듯이, 저도 폐하를 믿고 있습니다."

에릭도 황제에게 신의를 가졌다는 의미다.

그런데도 떨떠름했지만....

황제가 마지못해 답하기를.

"황녀가 그를 마음에 들어 하길 바래야겠군."

연회는 점점 무르익었다.

각종 유력 인사들은 서로 인사치레를 마쳤고, 황제는 뚱-한 표정으로 연회궁 옥좌에 앉아 재상과 잡담을 나누었다.

그리고 에릭은....

"제네딕 라핀 공작일세."

눈이 쭉- 째진 소용돌이 모양의 수염을 지닌 사내와 마주했다.

제국의 마탑주이자 9서클 마법사인데, 작위는 무려 공작이다.

'에릭이라, 듣던 것보다 크군.'

황실을 떠받드는 네 개의 기둥.

사주(四柱)라 불리는 공작가의 일원이었으니.

'혼사는 어렵겠어.'

제네딕 라핀 공작은 황제의 행동을 보며 상황을 유추했다.

성자라는 지위가 얼마나 높은가?

황녀를 그의 수하랑 맺어 줄 만큼 압도적인 지위였다.

'돈을 좋아한다고 했지?'

그렇기에 공작은 전략을 바꿨다.

본디, 빙의자 사업으로 에릭과 연을 트고 싶어 했던 제네딕 공작이다.

'역시, 이게 좋겠어....'

대뜸 인사를 건네고는 말없이 생각에 잠긴 공작.

"무슨 일이신지요?"

에릭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속을 모르는 늙은 대귀족의 등장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나, 제네딕 라핀 공작의 존재는 제법 가치가 있었기에, 에릭은 차분히 기다렸다.

'늙은 마탑주.'

9서클 마법사, 압도적인 강자다.

게다가 제국 동부 마탑의 주인이 제네딕 라핀 공작이다.

에릭은 연장자에 권력과 힘을 고루 갖춘 공작을 존중해 존대로 대해 주었다.

그런데 대답이 계속 없다니.

'장난하나?'

2분쯤 기다려 줬다.

에릭은 충분히 인내를 발휘했다.

에릭의 미간이 좁혀졌다.

갑자기 찾아와서 이름을 대고는 묵언 수행이라도 하는 건가?

그때였다.

"마탑 구경을 하고 싶지 않는가?"

대뜸 이름을 대더니 뜬금없는 제안을 건넸다.

에릭의 고개가 조금 더 기울었다.

"아, 내 말이 짧았군. 동부 마탑에서 이번에 신성 마도구를 제작하고 있다네."

이어지는 발언에 에릭의 고개가 우뚝- 똑바로 섰다.

"아스티아 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기를-."

에릭이 성호를 그리며 라핀 공작에게 성큼- 다가섰다.

공작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목이 뻐근한데, 조금만 뒤로 가 주시게나."

에릭이 성큼- 한 발 물러섰다.

너무 반가운 소식을 들은 터라, 조금 들뜬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성 마도구.'

[신성 폭발 마법진]처럼 신성력을 응집해 마법진 같은 곳에 담아 둘 수는 있다.

그러나 마도구에 적용하는 건 대단히 어려웠다.

마도구란, 마력으로 작동하는 도구다. 마법사가 마력에 신성을 못 섞듯이 마도구도 그랬다.

그러나.

"에릭 국장의 오른팔이 신성 마법사지 않소?"

이제는 그 가능성이 열렸다.

축성된 마법사 장두식은 마력에 신성력을 섞어 쓴다.

한데, 그걸 어디서 들었단 말이지?

에릭이 의문스레 제네딕 공작을 바라봤다.

"황실마탑주께 들었네."

"역시, 황궁은 소문이 빠르군요."

에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겪은바, 황실의 소문은 빙의자들의 [커뮤니티]보다 전달력이 좋았다.

"폐하의 치세 덕분이지."

황제가 깔아 놓은 정보부의 힘이다.

"다시 한번 제안하겠네. 마탑 구경 어떻겠나?"

'라핀 마탑이라.'

에릭은 잠시 생각해 봤다.

제국 남동부에 자리한 마탑, 지리적으로 황도와 거리가 제법 된다.

전이의 기적 한 방이면 끝이지만, 거리가 멀다는 건 그만큼 심리적인 부담이 되기도 했다.

"제안을 한번 들어 보지요."

그런 부담감을 이겨 낼 이득이 따른다면, 에릭은 기꺼이 제국 남동부를 방문할 의향이 있었다.

* * *

연회가 끝나고, 에릭은 르웰의 신축 교회로 돌아왔다.

교회의 가장 은밀한 곳.

잭슨이 비밀리에 지어 둔 지하실.

벌컥- 벌컥-.

팅-구르르르.

어두운 주황빛 광원 아래에, 낡은 탁자가 놓였다.

그 위에 나뒹구는 빈 병.

그리고 병을 비워 낸 거대한 에릭.

절뚝-.

지하로 향하는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려온다.

'보스가 술을?'

에릭의 호출에 잭슨이 지하로 내려왔는데, 보이는 풍경이 심상치 않았다.

매캐한 석유 향이, 아주 독한 술 냄새 같았다.

분명 에릭이 제게 '한잔하지' 이런 제안을 하긴 했는데....

제국법상, 20세 미만은 술을 마실 수 없다.

마법과 오러를 쓰는 세계에서 음주 사고는 거대한 재앙을 불러오기 마련이었다.

"보스? 술을-."

테이블에 다가선 잭슨이 말을 멈췄다.

[레벨 업 영약- 사용됨]

빈 병의 정체가 눈앞에 떠올랐기 때문.

"잭슨, 한잔할까?"

그리고 에릭이 새 병을 들어 자신에게 건네는 것이 아닌가?

잭슨은 실로 당황했다.

절뚝-.

"보스, 그게 뭔지 알고 드시는 겁니까?"

잭슨이 낡은 탁자로 다가섰다.

드륵- 잭슨은 에릭의 건너편에 앉았다.

그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 아래에 만든 지하실이다.

그런데 대단히 낡고 투박하며 빛바랜 장소였다.

"잭슨, 아직도 아내 생각이 나냐?"

잭슨이 살던 분쟁 지대의 소박하고 낡은 집이 딱 이런 느낌이었지.

에릭은 잭슨의 눈을 바라봤다.

흉터가 꿈틀거리는 것이 영 불편해 보였다.

"여전히 모든 빙의자를 죽이고 싶고?"

잭슨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평화로 위장된 일상, 그 속에서 잭슨이 숨겨 왔던 분노가 일어났다.

"글쎄, 이젠 복수도 의미가 없다고 느껴져서."

그리 말했지만, 잭슨의 눈빛과 일그러진 흉터는 다른 말을 했다.

"안 마시면, 내가 마시지."

에릭은 묵묵히 잭슨을 바라보며, [레벨 업 영약]을 한 병 더 비웠다.

"크, 맛이 아주 좋아."

에릭의 얼굴도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런 에릭을 향해 잭슨을 다시 묻기를.

"보스, 그게 뭔지 알고 드시는 겁니까?"

기도가 사나웠다.

그에 에릭이 또 다른 병을 꺼내 잭슨에게 건넸다.

"잭슨, 너도 한잔해라. 아주 별미다."

잭슨은 병을 잡지 않았다.

"보스."

보채듯이 간절한 어조였기에.

"레벨 업 영약이지."

에릭이 순순히 답을 주었다.

잭슨의 온몸이 삐걱였다.

쿠웅-.

거센 오러가 피어올랐다.

"설마.... 보스도?"

배신감에 젖은 눈빛.

잭슨이 쾅- 하며 의자를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리춤에 손을 얹고 에릭을 노려보고 있자니.

"까불지 말고 앉아라."

에릭이 묵직하게 잭슨을 노려봤다.

사나운 모습이지만, 에릭의 눈빛 속에 동정심이 숨겨져 있었다.

잭슨 또한 그 눈빛을 읽었다.

조금 차분해진 잭슨을 바라보며, 에릭이 담담히 읊조리기를.

"99레벨, 3차 전직을 앞둔 검사 클래스. 본명은 기욤 펄리프, 국적은 프랑스였던가?"

잭슨의 빙의자 인적 사항이었다.

오래전, 잭슨이 지워 버린 이름이었다.

"45년 전에 이 세계에 태어난, 잭슨 사무엘."

에릭의 말은 이어졌고.

이 세계를 살아가는 잭슨의 인적 사항을 읊조렸다.

"20여 년 전 스승님을 만나서 상태창을 봉인당했고, 너는 그 덕에 소드마스터가 됐지."

그리고.

"루시퍼, 그 씹새끼가 제 아내와 두 딸을 제물로 바쳤지요."

에릭의 말을 끊고 잭슨이 이를 들이댔다.

눈빛에 담긴 것은 분노요, 가족을 잃은 자의 복수심이다.

그에 에릭이 한결 부드러운 얼굴로 잭슨에게 손을 건넸다.

"비워라. 그리고 속 시원하게 얘기나 좀 나누자고."

그의 손에는 새 병이 들려 있었다.

45화 성자(聖子) (5)

"내가 기억하는 첫 순간은 어머니의 양수를 찢고 나왔을 때다."

어두운 지하실에 묵직한 중저음이 내려앉았다.

에릭의 과거요, 무거운 대화였다.

"태어난 직후 이쪽 세계의 부모님은 흑마법사의 제물이 되었지."

분노로 꿈틀거리던 잭슨의 흉터가 멈췄다. 그만큼 에릭의 말이 진중했기 때문이다.

"갓난아기의 몸으로 태어난 직후, 보호자가 검은 마력에 녹아드는 모습은 아주 끔찍했다."

게임을 하다가 정신을 잃었고.

눈을 떠 보니 갓난아기로 태어났는데....

태어나자마자 주변의 모든 사람이 흑마법에 죽어 버린 상황.

"이대로 나도 죽겠구나 싶었다."

그때 에릭의 눈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0티어 신성력 – 10,000골드]

"불완전한 상태창이었다."

레벨도 없고 스탯도 없으며 투자할 스킬도 존재하지 않았으나.

"내가 빙의했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지. 뭐, 환생일수도 있겠다만...."

그 어린 몸을 억지로 움직여서 겨우겨우 녹아 내린 부모의 시신에서 돈주머니를 집어 냈고.

"어이가 없더군."

무국적 지대의 빈민가.

부모의 주머니에는 20골드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흑마력에 건물이 녹아 내렸고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으로 죽음을 기다렸지."

그때 세상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들려왔으니.

이곳으로 집결하라-!!!

"그러면.... 그때 리페로제 님을 만나신 겁니까?"

"그래."

생명의 기척을 찾아온 리페로제가, 어린 에릭을 구했다.

"내 상태가 너무 안 좋았다. 스승은 내 죽음을 예상하며 추모 기도를 읊조렸고, 나는 필사적으로 스승님에게 손을 뻗었지."

리페로제의 가슴팍에 보인 돈주머니, 에릭은 그걸 집어 냈고.

그 즉시 [인벤토리]로 수납하여, 0티어 신성력을 얻어 냈다.

"말을 하기 전까지 스승님은 나를 빙의자라고 생각하지 못하셨다. 잭슨, 너를 먼저 만났기 때문이겠지."

처음 듣는 애기였다.

신성력을 쓰는 빙의자라고?

"그게...."

"최초의 기사 클래스 잭슨 사무엘, 나는 최초의 성기사 클래스 에릭."

거기까지 듣자 잭슨은 이해했다.

만렙을 찍고 새 캐릭터를 개방한 존재는 모두 빙의했다.

그리고 신규 캐릭터를 개방한 마지막 빙의자가 바로 에릭이었으니.

"스승님처럼 빙의자의 존재가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만, 확실한 건 하나 있지."

"뭐가...."

"이 세계에 빙의자가 끌려온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전사], [궁수], [기사], [마법사], [흑마법사], [네크로맨서], [성기사].

클래스의 대분류.

여기서 2차 전직이니 3차 전직이니 추가가 되지만 결국 핵심 정체성은 [기본 클래스]였다.

"이제는 50만이 넘는 빙의자가 있다. 그들을 전부를 죽여 없앨 필요는 없겠지."

잭슨은 에릭의 말뜻을 이해했다.

모든 빙의자를 죽일 필요는 없다.

자신을 소드마스터로 만들어 준, 리페로제의 뜻이었다.

잭슨은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었으나.

"쌍둥이, 늙은이랑 지내 보니 좀 달라지지 않나?"

"...그렇군요."

근 십 년 가까이 붙어 지낸 세 존재 덕분에, 잭슨의 분노는 올바른 방향성을 찾을 수 있었다.

"모든 빙의자가 아닌, 사람을 해하는 흑마법사, 빙의자를 잡아 족쳐라. 보스의 말은 그런 뜻이겠군요."

극악무도한 빙의자 루시퍼의 쌍둥이 딸.

잭슨에게는 원수의 딸과 다름이 없었다.

흑마법사인 늙은이도 마찬가지.

"넷이 붙어 지낸 보람이 있군."

대화가 일단락되었으나, 잭슨에게는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었다.

"보스는 레벨도 없다면서 그 영약을 왜 그렇게...."

그제야 에릭이 본론을 꺼내 들었다.

"소드마스터에서 더 올라갈 길이 보이지 않지?"

"...예."

"내 추측으로, 빙의자의 벽은 레벨이다."

에릭이 얻은 [신체(神體)]라는 스탯, 그리고 잭슨이 멈춰 선 99레벨.

"벽을 깨려면 그에 준하는 레벨이 필요한 거다."

"...하면, 제 상태창의 봉인은?"

"잭슨, 스승님은 네가 소드마스터에 도달하면 스스로 봉인을 깰 수 있게 만드셨다. 너도 알고 있지 않나?"

머뭇거리던 잭슨.

흔들리던 동공이 바로잡혔다.

"나는 에릭이다. 빙의 전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아. 다만 이 세계에서 특이한 힘을 다룰 뿐이지."

잭슨은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

그래서 빙의자가 원망스러웠고 자신이 그들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네 정체성을 받아들여라."

그리 말하며 에릭은 지하실 계단을 올랐다.

텅 빈 테이블에는 빈 병이 굴러다녔고, 잭슨의 눈앞에는 온전한 [레벨 업 영약]이 한 병 놓였다.

뚜벅, 뚜벅.

계단으로 사라지는 거대한 에릭의 등판을 보며 잭슨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았다.

"여보.... 아가들아."

스릉.

잭슨이 검을 뽑아 들었다.

검 위로 푸르른 오러가 피어올랐다.

챙-쩌엉!

잭슨의 검날은 상태창을 뒤덮은 황금빛 신성을 향해 휘둘러졌다.

그 뒤 잭슨은 영약을 벌컥- 비워 냈다.

"끄윽."

[3차 전직이 가능해졌습니다.]

* * *

"외, 외출이라니!"

빙의자 박창호는 한껏 들떴다.

수용소에 갇힌 이후로 1년이 넘게 지났는데....

처음으로 외출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미궁이랑 감옥에만 있어서 답답해 죽는 줄 알았어요오-!"

옆에서 강풍호가 산뜻 웃으며 박창호에게 팔짱을 꼈다.

"창호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무사한 거 아니냐!"

등 뒤에서 니시다 료가 박창호의 등을 두드렸다.

'기분 잡치네.'

박창호는 조금 언짢았으나, 첫 외출이라는 기쁨에 애써 참아 냈다.

등 뒤에 황실 로얄가드라는 괴물이 감시역으로 붙긴 했어도, 모처럼 누리는 자유가 아니던가?

"너희에게 허용된 장소다."

그들은 제2구역의 상점가를 구경했다.

안전을 보장받은 채 이 세계를 마음 편히 돌아다녀 본 건 처음이였기에.

"오오-!"

"미개한 중세에도 쇼윈도가 달려 있구나!"

세 사람은 잔뜩 흥분했다.

숫제 관광을 하는 기분이었다.

빙의하고 몇 달에서 수년, 커뮤니티에 올라온 안전 수칙으로 숨어 살다시피 했던 빙의자였다.

그러나.

"인증샷 한 방 찍을까요?"

무려, 황실 로얄가드의 안내를 받으며 제국의 황도를 구경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야 말로 벼락출세.

그 어떤 빙의자들이라도 그들을 보면 부러워할 것이 분명했다.

"니시다, 나랑 창호 오빠 같이 찍어 주라!"

모두가 20레벨을 넘긴 덕분에 커뮤니티에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커뮤니티에 게시글을 작성할 때는 자신의 시야를 사진의 형태로 업로드할 수 있다.

"내가 고등학교 때 사진부였다."

니시다 료가 자신만만하게 박창호와 강풍호를 두 눈에 담았다.

그 뒤.

[빙의자 관리국 개꿀]

[로얄가드 호위 받으면서 플렉스 해 버리기~!]

[사진]

커뮤니티에 사진이 올라갔다.

당연히 에릭의 허가를 받고 커뮤에 글을 올린 것이다.

┗ ??? 진짜 황도네?

┗ 저기 왜 동양인이 있냐.

┗ 옆에 미녀는 누구?

순식간에 댓글이 달렸다.

┗ 작성자: ㅋㅋㅋㅋ 부럽냐? 빙의자 외형 변경권으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건데?

┗ 그게 진짜였어?

┗ 작성자: ㅇㅇ외변권 쓰면 지구 모습된다. 나처럼.

┗ 옆에 여자는?

┗ 작성자: 지나가다 갑자기 앵기드라, 이뻐서 델꼬 다니는 중 ㅎㅎ 애인 비슷한 거야.

니시다 료가 히죽이고 있자니.

"너, 왜 나를...."

박창호가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또한 강풍호도 토라진 듯 볼을 부풀리며 니시다 료를 째려봤는데....

"우리 아직 사귀는 사이는 아니거든요!"

내뱉는 말은 조금 이상했다.

'이 미친 새끼들.'

박창호는 관자놀이를 질끈- 눌렀다. 숨이 좀 트이나 싶더니, 이래서는 미궁이랑 다를 게 없었다.

이제 수용소도 저 두 사람과 함께 쓰는 처지인데....

그때, 니시다 료가 한껏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박창호, 정보 교란 몰라? 에릭 국장님이 자기 정보를 곧이곧대로 쓰지 말랬잖아."

'이 병신이....'

그걸 네가 나인 척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지.

박창호는 피가 거꾸로 솟았으나, 로얄가드의 눈치를 보며 참아 냈다.

달각, 달각.

로얄가드가 세 사람을 보면서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으니까.

뽑을까 말까.

저게 진짜 쓸모가 있는 건가?

그런 눈치였다.

"크흠, 아무튼.... 너무 바이럴 티 안 나게 게시글 잘들 쓰라고."

이제 세 사람은 쇼핑을 시작했다.

관광의 묘미라 함은, 무릇 쇼핑이 아니겠나?

인증샷도 찍고.

황실에서 준 돈으로 적당한 물건도 몇 개 구입했다.

"와.... 요정 날개 튀김?"

"가격이 무슨 갑옷보다 비싸냐."

"날개 한 짝이 50만 골.... 한화로 치면, 오천만? 미친."

제국 수도의 2구역.

고급 상점가답게 파는 품목도 아주 특이했다.

가격은 압도적이었고.

[50만골짜리 요정날개튀김 존맛]

비싼 건 눈치껏 사지 않았으나, 니시다 료는 마치 양껏 먹은 양 자랑을 해 댔다.

"진짜 이세계 관광 온 기분이네."

물론, 모든 매장에 들어서지는 못했고, 로얄가드가 지정해 준 몇몇 가게로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충분히 재밌었다.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세계를 누비는 기분.

"오, 아스티아 교단 심벌이다."

세 사람의 투어는 계속 이어졌고 어느덧 [쟝의 마도구 상점]까지 도착했다.

마도구 상점 앞에 놓인 거대한 십자가, 그리고 그걸 감싼 여섯 개의 날개.

"에릭 국장님이 무슨 성자가 됐다던데...."

"저 날개가 등에 달렸다더라."

자연스레 그들은 에릭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황제가 인정하고 교황이 존중하는 그 에릭.

게다가 그는 커뮤니티의 유명 인사다.

빙의자들의 재앙, 리페로제의 제자이기까지 했으니까.

'이번 주도 미궁에 들어가야겠지.'

에릭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조만간 다시 미궁에 들어가게 될 텐데, 거기서 또 어떤 괴물 같은 짓을 벌여 댈까?

"후우, 오늘은 일 얘기는 말자고."

세 빙의자는 암묵적인 동의를 마치고 마도구 상점의 문을 열었다.

딸랑-.

문 위에 달린 종이 울리고.

"거, 마누라. 자꾸 내 머리는 왜 문지르는 거요?"

"...마, 마누라?"

몽둥이를 든 장두식과 화려함이라는 단어를 빚어 만든 듯한 미인이 나타났다.

여인의 부채가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어...?"

벙찐 세 빙의자 앞으로 로얄가드가 성큼 나섰다.

그리고 말하기를.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 * *

'몸이 뻐근하군.'

황실에 다녀온 탓에 에릭은 짙은 피로감을 느꼈다.

제 딸을 장두식과 엮은 것이 심히 못마땅했는지, 말하는 내내 황제의 위압감이 에릭의 몸을 옥죄었다.

"후, 좀 살 것 같네."

에릭은 새로이 지어진 예배실 한편에 몸을 눕혔다.

오페라 가르니에를 닮은 예배실의 3층 자리는 아주 호사스러웠다.

'황족과 고위 귀족을 위한 자리랬나?'

잭슨의 철두철미한 성격다웠다.

아주 편안한 것이 여기서 르웰의 기도를 바라보면....

절로 마음이 녹아들 것 같았다.

그런 편안함을 느끼며 에릭은 상태창을 바라봤다.

[신체(神體) 69/100]

성수로 50을 채웠고, 니시다 료가 찾은 히든 피스의 영약으로 19를 더 올렸다.

남은 하나는 잭슨의 3차 전직에 투자했다.

'번견.'

에릭이 정한 잭슨의 포지션이다.

[상태창]을 이용한 빙의자로서의 힘과 순수하게 단련해 이룬 소드마스터의 경지.

이 두 힘의 조화라면, 충분히 교회를 지킬 수 있을 테지.

'거기에 늙은이도 부활을 마쳤으니까.'

교회를 두고 며칠 자리를 비워야 하는 상황.

에릭은 조금 심란했다.

제국 남동부에 자리한 라핀 공작의 마탑, 에릭은 공작을 만나기로 정했다.

[1,145,605,000골드]

황제에게 10억 골드를 받아 왔는데, 이는 4티어를 위해 비축해 둘 생각이다.

공작의 보석을 판 돈은 르웰의 교회를 재건하는 데 다 써 버렸다.

'마도구 상점은 이제 어렵게 됐고.'

성물 상점으로 리뉴얼을 하기 전까지, 마도구 상점의 수익은 기대하기 어려워졌으니까.

[시스템 상점]의 기본 아이템.

에릭은 상점이 리셋될 때마다 전량을 구매해 팔아 왔는데....

'빙의자가 50만 명이나 되니까.... 잘해야 한두 점을 건지는 게 고작이지.'

수십만이 경쟁하며 사 대니 물건 구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런 타이밍에 라핀 공작이 좋은 제안을 준 것이다.

"신성 마도구의 판매 수익 30%를 지급하겠네."

"5 대 5 아니면 안 갑니다."

"...자네는 장두식을 파견해 신성 마력의 원리만 제공하는 건데, 반이나 먹겠다는 말인가?"

"반이나 드리는 거죠."

애초에 자신이 아니라면, 신성 마도구는 제작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좋다. 대신 부탁을 하나 들어줬으면 하네."

라핀 공작은 그런 흐름을 이해하고 5:5라는 파격적인 비율로 합의를 봤다.

게다가 귀찮은 건 다 라핀 공작이 해 준다.

'제작에 유통에 판매까지.'

에릭 자신이 할 일은 마탑의 설비를 점검한 뒤에 축성된 장두식을 파견해 주는 것이 전부.

'공작의 부탁도 하나 들어줘야 하고.'

말이 부탁이었지, 5:5로 양보해 준 대가라고 봐도 무방했다.

다만, 그 부탁이라는 것도 아주 간단했다.

"남부의 엘프 자치령과 대곡창 지대를 한번 살펴봐 주게."

엘프 자치령에는 세계의 두 번째 빙의자가 있다.

에릭은 그녀와 구면이다.

'이참에 인사나 해야겠군.'

물론, 그녀는 에릭이 빙의자라는 사실은 모른다.

그렇지만....

오랜만에 기강 정도는 잡아 주는 게 맞겠지.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달달한 향기가 풍겨 왔다.

고급스러운 단맛을 향으로 옮겨 놓은 듯한 냄새.

'르웰이군.'

에릭은 짙은 향기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르웰 사제님, 냄새로 다 알아챕니다."

"흥흥~. 알아. 그러라고 뿌리는 건데!"

르웰이 에릭의 뒤편에서 기척을 드러냈다.

"이번에 제국 남동부로 간다고?"

"예, 신성 마도구를 만들러 갑니다. 돈이 될 것 같은 사업이죠."

보통 큰돈을 벌 때의 에릭은 함박웃음을 짓곤 한다.

그런데 오늘따라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흥흥, 우리 성자님이 왜 그렇게 기분이 언짢을까?"

르웰은 그리 말하며, 허리에 손을 얹고는 자신만만하게 에릭을 바라봤다.

그에 에릭의 얼굴이 마구 일그러졌다.

"그거 어떤 새끼가 만든 옷입니까?"

"예쁘지?"

예쁘다.

그러나 에릭은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롱 원피스인데, 몸에 아주 쫙- 달라붙어 몸매 라인을 잔뜩 부각시켰다.

얇은 소재에 아이보리색 컬러, 그리고 허벅지를 따라 옆 라인이 탁 트인 치마.

'저거....'

지구에서 아주 인기가 많았던-.

"통탄 미시룩이라고, 교회에 헌금하러 온 후작가에서 선물해 줬어."

이 미친 새끼들.

에릭이 뒷목을 잡았다.

46화 노련한 사냥꾼 (1)

"거, 마누라. 낭군님이라 해 보슈. 부부 될 사이인데, 계속 네놈이라 부를 거요?"

황녀는 신박한 미친놈을 만난 탓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저- 반짝거리는 축성된 머리통.

거기에 혹해서 따라다녔을 뿐인데, 제 일터까지 찾아온 마누라 취급을 받고 있었다.

"장두식, 내게 더 이상 무례를 범하지 말거라."

황녀의 한마디 말에 마도구 상점에 냉기가 뚝뚝- 떨어졌다.

인사를 건넨 로얄가드도.

그를 따라온 세 빙의자도 눈치껏 한구석에 서서 고개를 조아렸다.

그에 장두식은.

"황녀 전하가 먼저 내 머리를 막 만져 대지 않았수?"

황녀에게 제 할 말을 주절주절 떠들었다.

"내 머리통에 손을 댄 건 리페로제 누님과 에릭 형님 외에는 황녀 전하가 처음이요."

"그, 그건...."

"지엄한 황실의 황녀 전하께서, 지아비 될 자도 아닌 외간 남자의 머리통을 마구 만지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슈?"

개소리였다.

그런데 묘-하게 일리가 있었다.

자유분방한 제국이지만, 그 자유분방함이란 게 황족에게는 예외였으니.

혼인은 정치다.

황녀가 아는 세계에서 결혼이란 그런 거였다.

제 아비, 황제 역시 두 번째 마누라를 원치 않는 종교인으로 들이지 않았던가?

게다가 지금 황녀가 처한 상황도 에릭이라는 존재와 우호를 다지기 위한 혼인 동맹이라고 봐야 했다.

물론, 에릭 본인이 아니라 그의 오른팔이 상대라는 사소한 문제가 있었지만....

"외간 남자 머리통을 만지작거리고, 지금 와서 다른 소리를 하려는 거요?"

"그건 아니다."

그런 와중에도 황녀의 시선은 장두식의 머리통에 꽂혀 있었다.

반짝거리는 신성력을 머금은 사람의 머리통.

'획기적인 발견.'

아직 그 편린조차 알아내지 못한 상황.

게다가....

'내게 이런 취급이라니.'

처음 겪는 이상한 대우에 묘한 호기심이 일어나기까지 했다.

대제국의 황녀에게 누가 저런 식으로 군단 말인가?

"거, 만지지 말고 보시오."

장두식이 토라진 듯, 몽둥이로 마력을 뿜어냈다.

황녀의 눈앞에 떠오른 것은.

"-아름답구나."

우웅- 푸른 빛무리가 화려한 장미꽃을 피워 냈다.

푸르른 마력 위로 신성이 뒤섞여 장미는 황금빛으로 반짝거렸다.

거기에 황녀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

"황녀 전하만큼은 아니어도, 내가 아는 가장 예쁜 꽃을 만들어 봤수다."

장두식이 방긋- 웃었다.

황녀는 장미에 손을 얹었다.

마력과 신성이 뒤섞인 기이한 마법이 손끝을 찌르르 울렸다.

'몸 전체에 신성이 흐르는 거였어!'

단순히 예쁜 게 아니다.

장두식이 만든 황금 장미꽃은 그야말로 마법과 신성의 조화(調和)였기에.

"대단하구나, 두식아."

"두식.... 지금은 그 정도로 만족하겠수다. 호칭은 천천히 서로 익숙해지면서 정리하는 거요!"

이놈-!

저놈-!

장두식-!

하던 황녀가 두식이라는 호칭을 불렀다.

장두식은 거기서 만족했다.

"처음에는 그냥 미친 듯이 들이대라. 황녀가 언제 그런 취급을 받아 봤겠냐?"

"그리고 적당할 때, 호칭 같은 걸로 살살 긁어 봐. 반응이 온 뒤에는 네 재주껏 잘하고."

그 뒤 연애에 있어서 밀고 당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는 말이 덧붙여졌다.

'거, 밀당이라더니 형님 말이 진짜였구려.'

장두식은 두루뭉술한 에릭의 조언을 토대로 제 나름의 요령을 부려 봤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그 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랬으니, 이제 찬찬히 거리를 좁혀 나가면 될 것이다.

"그래서 두식아, 저들은 누구더냐?"

적당한 거리감을 가지고 황녀가 장두식을 바라봤다.

그녀의 쥘부채는 상점 한구석에 서 있는 세 빙의자를 향해 있었다.

"에릭 형님의... 흐음. 거, 빙의자들인데, 따까리는 아니고."

"실험체?"

대답을 고민하던 장두식에게 황녀가 명료한 답을 내주었고.

"역시 황녀 전하요! 거참, 그런 찰떡같은 이름이 있을 줄은 몰랐수다."

장두식이 한껏 기뻐했다.

그 뒤 장두식은 세 빙의자를 불러 황녀 앞에 도열하게 했다.

"정식으로 소개하겠수다. 에릭 형님의 빙의자 실험체 1, 2, 3호요."

"빙의자들에게 외출을 시켰다더니, 그게 저들이었구나."

말로만 듣던 빙의자 관리국의 실험체들.

황실마탑의 빙의자 연구와는 방향성이 조금 다르다고 들었다.

"팔다리가 다 붙어 있는 빙의자라니, 참으로 신기하구나."

"형님 말로는 저놈들을 키워서 미궁을 공략할 거라 그랬수다."

"그래서... 폐하가 대륙통일군을 불러들이셨구나."

그런 황녀와 장두식의 대화를 들으며, 세 빙의자는 겁에 질렸다.

'황실마탑의 실험체.'

초창기의 빙의자는 말 그대로 몬스터 취급이었다.

신성력에 불타는 존재.

좋게 봐 줘야 흑마법사였다.

'내가 그래서 1레벨로 있던 건데.'

사실 대다수의 빙의자는 강풍호처럼 1레벨을 유지하며 어딘가에 숨어 지냈다.

이제는 달라지겠지만....

"50만의 빙의자를 정화 작업으로 찾아낼 수 있겠느냐?"

"에릭 형님이 어릴 때부터 빙의자랑 흑마법사 찾아내는 데는 귀신이었수다."

"이 넓은 제국에서 어떻게 전부를 찾는단 말이더냐?"

"형님말로는 감이라던데-."

황녀와 장두식의 말을 들으며, 세 빙의자는 침음을 삼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빙의자 관리국에 붙잡힌 건, 다행을 넘어 기적이나 다를 게 없었다.

"-에릭 형님의 어릴 적 별명이, 노련한 사냥꾼이었수다."

노련한 사냥꾼은 사냥감을 찾는 것부터가 사냥의 시작이다.

그리고 장두식의 말에 따르면.

"형님은 그- 루-, 크흠. 그놈까지 직접 찾아냈수다."

장두식이 빙의자들을 흘겨보며 말을 흐렸지만, 황녀는 명확하게 그 뜻을 이해했다.

대륙에 재앙을 풀고 사라졌던 대악마 루시퍼.

세간에는 리페로제 아스티아가 찾아내 죽였다고 알려졌지만, 그 실체는 달랐다.

'그놈을 찾은 게 에릭 국장이었다고?'

―Ep. 11 노련한 사냥꾼

"그 동탄 미시룩이라는-."

"이 샤넬백이나 에르메스처럼 빙의자 세계의 명품 이름 아니니?"

웅장한 예배실에서 에릭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동탄 미시룩을 뭐라고 설명하냐.'

고민을 해 봤는데, 차마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한 신도시의 특징을 '미시룩'으로 내려쳐 버린 신조어라는 설명을 해야 할까?

아니면 핫한 여자들이 즐겨 입는 복식이여서, 판매업자들이 '동탄 미시룩'을 키워드로 지정할 정도였다고 말을 해야 하나?

'아니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다.

에릭은 대답 대신 질문을 건넸다.

"그래서 아론 후작이라고요?"

옷을 선물했다는 귀족의 이름.

"풀 네임은 몰라, 그냥 아론 후작가의 사람이라고 그러던데?"

에릭의 핏대가 더욱 솟구쳤다.

르웰은 에릭의 반응을 즐기며, 눈웃음을 흘렸다.

'즐기시는군.'

매번 옷을 살 때마다 이런 극한의 반응을 내보이니, 재미야 있겠지.

"르웰 사제님."

"응?"

"조만간 후작가에 대대적인 빙의자 관련 조사를 시작할 생각입니다."

그의 분노는 후작이 감당하면 될 것이다.

따지고 보면, 빙의자 관리국장의 집에 빙의자가 만든 옷을 보낸 것이 아닌가?

"제게 보내는 도전장이 분명합니다."

제국 내 빙의자 사업은 아직 합법이 아니다.

일부 귀족이 허가를 받고 실험 정도를 하는 상황.

물론, 에릭의 조언으로 황제는 실험에 이용되는 빙의자에 제한을 두었다.

[제국민을 해한 자.]

[살인의 쾌락, 생명 수확, 인간 실격 등의 업적을 지닌 자.]

업적과 스킬의 검증은 에릭이 맡는다.

평소 빙의자 관리국에서 수행하는 임무에는 신규 빙의자의 상태창을 감별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이게 뭐라고 도전장이라고 여기는지는 모르겠는데, 잘해 봐!"

르웰은 결의에 찬 에릭을 보며 파이팅! 팔을 굽혔다.

'이미 다른 의류업체들이 카피를 시작했을 거야.'

앞으로 비슷한 옷은 언제라도 살 수 있을 터였다.

아론 후작의 일은 뭐, 에릭이 알아서 하겠지.

르웰이 그런 생각에 잠겨 있자니.

"사제님 덕을 크게 봤습니다."

에릭이 성큼- 다가서며 감사의 말을 읊조렸다.

뜬금없는 말에 르웰이 고개를 기울였다.

"아론 후작은 이번에 만날 라핀 공작의 측근입니다."

제국은 사대 공작가를 중심으로 귀족들의 파벌이 나뉘어 있다.

그중 마탑과 마도구 쪽으로 카르텔을 형성한 것이 라핀 공작의 파벌이다.

"후작을 빌미로 공작한테 이득을 더 취할 생각이구나!"

"그렇죠. 이게 다 사제님 덕입니다!"

에릭은 뜻밖에 르웰의 덕을 본 것이 기꺼웠고, 르웰은 에릭이 잘될 것이 기뻤다.

두 사람은 텅 빈 예배실에서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소리. 보스가 기분이 좋군.'

그때, 눈치를 보던 잭슨이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달칵.

문이 열리자, 예배실에 가득했던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잭슨, 무슨 일이지?"

조금 언짢은 투로 에릭이 물었다.

문 앞을 지키라 했건만....

가면을 쓴 쌍둥이까지 달고 나타났다.

그에 잭슨이 예배당 중앙으로 들어서며 상황 설명을 시작했다.

절뚝-.

"보스, 쌍둥이가 모르는 게 있다더군요. 저도 모르는 말이라서...."

쌍둥이는 커뮤니티 검열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다.

빙의자들과 달리 쌍둥이 자매는 지구의 용어를 잘 모른다.

그래서 에릭은 쌍둥이들에게 새로운 신조어나 은어를 보면, 빙의자 관리국을 찾아가라는 말을 남겼었다.

"빙의자 관리국 쪽은?"

"황녀 전하가 계시답니다."

"두식이는?"

"두식 형님은 황녀 전하와 함께 있습니다."

호오.

장두식의 수완에 에릭이 눈을 치켜올렸다.

'잘하고 있구나.'

두식이가 생긴 게 좀 그래서 그렇지, 나름 순정이 있는 놈이다.

"이러다 진짜 황녀의 남편이 되는 건 아닌지...."

에릭이 혼잣말을 흐리자, 르웰이 한껏 놀라 소리치듯 물었다.

"뭐? 그 깡패-. 아니, 두식이가?"

"크흠,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아무튼.

쌍둥이가 관리국에 들르지 못한 이유는 알았으니.

"뭐를 모르겠어?"

에릭이 쌍둥이를 보며 몸을 숙이자, 두 아이는 잭슨의 뒤로 숨어들었다.

'마르코의 얼굴보다는 훨씬 잘생겼을 텐데....'

그런데 어째 더 겁을 먹은 느낌이었다.

두 아이는 잭슨의 뒤에 숨어서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그, 막 이상한 초성이 쓰여 있는데-."

에릭은 차분히 쌍둥이의 말을 들었다.

'이상하군.'

머머리와 같이 대를 머로 쓴다거나, 귀를 커로 쓰는 종류일 줄 알았는데....

'처음 보는 유형이야.'

커뮤니티 게시글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슬기로운 빙의자 생활]

[모험가로 숨어드는 법]

일부 유명한 생존법을 누군가가 대물림해 업로드하는 것 외에는 남겨지는 글이 없다.

물론.

[그 에릭 근황]

[에릭이 삼황자 태워 죽인 썰 품]

[리페로제 외형 특징 공유]

이런 유의 게시글.

[성수로 머머리 치료됨.]

이런 식의 공통된 관심사를 표방한 글들도 자주 반복되곤 하는데.

[ㅇㄷㅇ ㅂㄹㅇ ㅂㅇㅈㅇ]

'뭐지?'

이번에 쌍둥이가 말한 글귀는 처음 보는 종류였다.

"으음. 엉덩이 별로야?"

"사제님,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힌트는 하나 더 있었다.

우물쭈물하는 쌍둥이를 향해 에릭이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또 무슨 얘기가 있었어?"

"그, 막 어디로 모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그런 뉘앙스로 쓰인 글인데 집결지 위치가 이상했다.

"알만정교회라니...."

쌍둥의의 말에 르웰이 침음을 흘렸다.

"보스, 빙의자들이 자살을 하려는 건 아니겠죠?"

잭슨은 흉터를 긁적였다.

신성에 불타는 존재가 알만정교회의 신전을 왜 찾아간단 말인가?

"미친놈들."

그에 에릭이 짙게 웃었다.

"제국 수도의 귀족들도 빙의자를 써먹는 마당에, 종교라고 다를 리가."

게다가 알만정교회 교주가 은근하게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입지 않았던가?

마침 그쪽 사람인 2황비의 유폐도 끝난 상황이니까.

"보스, 그러면.... 빙의자들을 알만정교회가 숨겨 준다는 말입니까?"

"하! 진짜, 미친놈들이네."

참된 종교인 르웰이 뒷목을 부여잡을 정도였다.

"숨겨서 어디까지 데려가나 지켜봐야겠군."

에릭은 그저 기꺼울 다름이었다.

황제에게 제국 정화 작업을 제안하였으나, 여러 귀족들의 반대로 시간이 조금 걸린다는 답을 들은 참이었다.

그러나.

'제국 서부에 빙의자가 나타난다?'

그것도 알만정교회를 통해서?

지엄은... 개뿔, 화끈한 황제 성격에 귀족회고 뭐고 그냥 들이박을 가능성이 높았다.

* * *

'그러니까, 일부 빙의자가 알만정교회를 통해서 제국 내부로 이동한다는 말인데....'

에릭은 간단히 상황을 정리했다.

쌍둥이 말에 따르면, 게시글 참여자들은 서로 어떠한 인증 절차를 거쳤다고 그랬다.

글이 남지 않아 무슨 인증이었는지 확인은 어려웠으나, 에릭의 직감이 명확하게 가리키는 존재가 있었으니.

'흑마법사겠군.'

쿠웅-.

생각을 마친 에릭이 교회에 결계를 둘렀다.

쌍둥이 자매는 교회 뒤편에 마련된 자신들의 집으로 보냈다.

이제부터 이뤄질 것은 어른들의 대화.

그것도 흑마법사 빙의자로 추정되는 존재들을 놓고 나누는 대화다.

"역시 은근 배려가 깊다니까."

르웰이 에릭을 대견하게 바라봤다.

쌍둥이를 돌려보냈기 때문으로.

에릭은 [흑마법사] 클래스로 태어난 두 아이를 배려해 준 것이다.

"태어난 아이에게 죄는 없습니다."

쌍둥이에 대한 얘기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어른들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보스, 스킬 추천 좀 해 주시죠."

"잭슨, 너는 내 뭘 믿고 스킬 추천을 맡기는 거냐?"

에릭 입장에서 스킬 추천이야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는 건데, 잭슨이 대체 뭘 믿고 100레벨 치의 스킬 추천을 맡기는지 궁금했다.

"보스 성격에 게임에서도 대단했을 것 같은데, 아닙니까?"

대답하는 대신 에릭은 두 눈에 신성을 품었다.

잭슨의 3차 전직까지의 흐름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기사 – 보호 기사 – 수호 기사]

가족을 지키지 못한 자의 설움이 담긴 느낌이었다.

에릭은 잭슨의 뜻을 존중했다.

"칼질은 소드마스터 실력으로 충분할 테지. 벽도 곧 깰 테고."

에릭은 '수호 기사'라는 컨셉을 중심으로 여러 스킬 조합을 조언해 줬다.

거기다가.

"스탯은 올방으로 투자해라."

잭슨이 고른 스킬셋을 기반으로, 스탯 조언까지 마쳤다.

"이게 이렇게 된다고?"

선택을 마친 잭슨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완성된 스킬셋을 보니, 스킬 하나하나가 허투루 낭비되는 구석이 없었다.

게다가 올방 스탯과 시너지도 훌륭했다.

"보스, 빙의 전 정체가 뭡니까?"

에릭, 아니 박지훈은 아주 대단한 플레이어였다.

미궁 공략 1위 길드의 부길마.

그리고 PVP 랭킹 1위에, 모든 캐릭터 만렙 달성 최단 기록 보유자.

에릭은 점잖게 자신의 플레이 기록을 읊조렸다.

"크으, 대단하시군요. 저 때는 유저도 없어서 스킬 연구도 직접 해야 했는데."

그 뒤 잭슨이 묻기를.

"그래서 그 벽이라는 게 3차 전직으로 깨지는 겁니까?"

잭슨이 빙의하고 직접 이룩한 경지, 소드마스터.

여기서도 벽을 몇 번 깼느냐로 경지가 나뉜다.

이는 성기사도 비슷했다.

"잭슨, 간만에 신성력 실험을 해 보는 건 어떻겠냐?"

에릭이 손끝에 신성을 일으키며 잭슨에게 다가섰다.

"허, 설마 보스는 벽을...."

잭슨이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이마의 흉터를 신성력으로 가져다 댔다.

싸아아아아아―

치유의 기적을 빚어 만든 신성력이 잭슨의 흉터로 스며들고.

치이익-.

"끄으윽! 크아아하하하-!"

고통에 찬 괴성이 들려왔다.

비명이되 함성이며 웃음이었다.

고통은 여전하였으나.

"끅. 보스는 설마 저희들의-."

잭슨의 이마에 난 흉터가 조금이나마 사라졌다.

"이게 진짜로?"

에릭과 잭슨 사이로 르웰이 종종- 다가섰다.

그러고는 뚫어져라 잭슨의 흉터를 바라봤다.

'에릭이 빙의자를 치료해?'

스킬 트리니 뭐니 도통 알아먹을 수 없는 대화의 연속.

조용히 상황을 관망하던 르웰은 줄어든 잭슨의 흉터를 보며, 화들짝 놀랐다.

그 말인즉슨.

"에릭이 아스티아 교단의 성자에, 빙의자의 구원자라고?"

47화 노련한 사냥꾼 (2)

"구원자는 너무 과한 말 같습니다."

경악한 르웰과 잭슨을 바라보며, 에릭이 담담하게 읊조렸다.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고서 저런 모습을 보인다니....

'보스는 역시 괴물이군.'

상식을 초월한 존재에게 내뱉는 찬사의 말이었다.

잭슨의 눈에는 에릭이 그야말로 괴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지독하게 아픈 건 그대로지만....'

얼굴을 가득 메운 흉터가 조금 사라졌다.

그의 옆에서는 르웰이 정신이 빠진 것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빙의자에게 신성이 제대로 먹힌다니-."

그러면 빙의자의 죄를 사해 줄 존재가 에릭이라는 건가?

에릭은 교황도 못 하는 일을 해냈다. 그야말로 르웰이 경악할 만한 중대 사안이었다.

분명, 종교적으로 해석하면-.

"-그걸 구원자 말고는 대체 뭐라 표현하겠어."

혼이 뒤바뀌고 신성력에 배척받는 빙의자.

말 그대로 에릭이 그들의 죄악(罪惡)을 지워 줄 만한 존재라는 의미다.

혼잣말을 내뱉은 르웰이 잭슨을 바라봤다.

흉터가 잔뜩 일그러져 있었는데, 입가가 미묘하게 삐쭉 위로 올라갔다.

이는 미소다.

'빙의자에게 자유를 줄 존재.'

잭슨은 먼 옛날부터 리페로제와 함께 신성 적응 훈련을 해 왔다.

물론 결과는 썩- 좋지 못했다.

얼굴을 가득 메운 흉터가 이를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보스, 청출어람 하셨군요."

그 말인즉슨.

교황이나 리페로제와 같이 세계의 최강자조차 못 했던 일을 에릭이 해냈다는 의미다.

"보스, 설마 벽을 넘으신 겁니까?"

"아직 벽을 넘진 않았다. 다만, 그 실체에 접근했다는 느낌이지."

에릭이 싱긋 웃었다.

'확실히 신성력에 뜻을 품을 수 있게 됐어.'

에릭의 생각대로, [신체(神體)] 스탯이 올라갈수록, 신성에 오롯이 제 뜻을 입힐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부작용은 명확했다.

신성을 일으켰던 에릭의 팔에는 균열이 잔뜩 생겨났는데....

후두둑.

에릭의 팔에서 피부가 부스러져 떨어졌다.

"보스가 상처를?"

잭슨은 그 팔을 바라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더욱 이질감이 들었다.

빙의자를 치료한 신성력보다, 에릭이 상처를 입었다는 게 더욱 충격으로 와닿았다.

"조금 긁힌 정도로 뭔 상처냐."

에릭이 무심한 표정으로 팔을 슥- 가렸다.

"그저 넘지 못한 벽 너머를 탐한 대가일 뿐이지."

떳떳하고 당당한 말투였다.

마치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이를 강조하는 느낌으로....

"-윽. 에릭!"

그때 르웰이 몸을 비틀거렸다.

"르웰-!"

그와 동시에 에릭의 표정이 다급하게 변했다.

팔을 짓이기는 듯한 고통이 누그러들었기 때문.

"사제님, 대체 왜...."

르웰은 두 개의 개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은밀함이고 나머지 하나는 나눔이었는데.

이 나눔이라는 게.

에릭의 입장에서는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개성이었다.

"힘을 거두시지요."

"너 또 몸이 터지려고 그러니?"

"전에 비하면 별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까지...."

"이게 별게 아니니?"

르웰이 눈가를 잔뜩 찌푸렸다.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빚어 만든 존재가 르웰인데.

그런 그녀가 고통에 몸부림치니 에릭의 가슴이 철렁했다.

제 대신 피를 토해 가며 고통을 나눠 가졌던 어린 날의 르웰이 떠올랐다.

"쬐끄만 꼬맹이가 이런 고통을 혼자 감당할 필요는 없잖아? 그러니까, 편히 자렴-."

그녀 덕분에 잠든 나날들.

'젠장, 생각이 짧았어.'

에릭은 황급히 신성을 일으키며 르웰과 자신의 팔을 치유했다.

"-치유."

[1만 골드를 사용해 신성력을 Max로 회복하였습니다.]

[1만 골드를 사용해 신성력을 Max로 회복하였습니다.]

.

.

.

상처를 치료하는 데에는 무려 10만 골드의 신성력이 소모되었다.

벽 너머를 탐한 대가였으니, 소모되는 신성의 양도 압도적이었다.

"에릭, 또 몸을 망치려 들지 마."

치유의 기적에 몸을 맡긴 르웰이 에릭을 바라봤다.

또렷한 청록색 눈동자를 보며, 에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르웰의 우려대로, [신체(神體)]를 100까지 채우지 않은 채 4티어를 찍었다가는....

'이번엔 진짜 몸이 터지겠군.'

* * *

소동은 금방 진정되었다.

"이럴 때 기대야 할 곳이 바로 아버지의 품이야."

에릭이 구원자라는 게 어지간히도 충격적이었는지, 르웰은 아스티아 신께 기도를 시작했고.

"보스,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잭슨은 광신적인 눈빛으로 스스로 교회의 번견(番犬)을 자처했다.

그 뒤 에릭은 황궁으로 향했다.

안전에 만전을 기했으니, 마음 편히 라핀 공작을 만나러 갈 생각이었는데....

'불청객이군.'

붉은 머리통 두 개가 눈앞을 어지럽혔다.

단순 시각적인 어지러움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피로감도 더했다.

"에릭, 너의 호위를 맡게 됐다."

에리카의 말로는, 이번에 제국 근위대로 발령 난 자신과 함께 라핀 마탑에 들르라는데....

에릭이 생각건대, 그녀가 같이 갈 이유는 없어 보였다.

그래서 에릭은 에리카의 옆에 있는 재상을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러고는 그대로 돌직구를 날렸다.

"제게 에리카 경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에 재상은 헛웃음을 흘렸다.

붉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재상이 말하기를.

"에릭, 이는 황명이다."

무려, 황명이란다.

에릭의 얼굴이 일그러지던 순간.

"더 이상 에리카와 자네를 엮을 일은 없을 걸세."

재상이 단호한 표정으로 내뱉은 말이다.

에릭 입장에서는 참으로 다행인 말이 아닐 수가 없었다.

줘 팬 기억밖에 없는 여자가, 다 커서도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는 모습은 영- 불편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두려워하는 에리카였으니까.

'나랑 엮을 게 아니면 왜 에리카를?'

에릭은 잠시 생각해 봤다.

그리고 금세 결론에 도달했다.

'내가 힘의 균형을 깨 버렸군.'

제국에는 네 개의 파벌이 존재한다.

황제와 재상을 필두로 한, 황제파.

라핀 공작을 내세운, 마도 연합.

북부 대공이 주도하는, 강경파.

약소 귀족들의 모임, 온건파.

대제국(大帝國)답게, 반황제파란 건 존재하지 않았으나.

네 파벌은 각기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나를 황제파로 취급하는군.'

황제가 에릭의 존재를 아주 제대로 써먹을 생각인 듯싶다.

황실 근위대란, 로얄가드와 달리 황궁을 벗어날 수 있는 존재다.

그런 근위대에 에리카를 임명했다는 것은 '근위대 기사단'을 호위로 붙여 주겠다는 의미로.

"이참에 라핀 공작에게 압박을 주겠다는 거군요."

황제파에서 이 기회로 정치적 견제를 노린다는 의미였다.

에릭은 굳이 황궁의 암투에 엮이고 싶지는 않았으나.

'하필 라핀 공작이 제국 정화 사업을 반대했단 말이지.'

미궁 공략에 대한 건 절대적인 지지를 해 왔던 라핀 공작이, 유독 빙의자 관련된 일로는 반대표를 많이 던진다고 들었다.

어찌 보면 필요한 일이었다.

대격변 패치 이후의 세계는 녹록지 않을 테니까.

에릭의 예상대로.

"라핀 마탑에 근위대와 함께 들어가서, 빙의자 관련 비리를 찾아내라는 황명이 있네."

재상이 구체적인 실행안을 건넸다.

"보상은 돈이면 되겠나?"

물론, 단순한 명령은 아니었다.

엄연히 대가를 전제로 한 거래였다.

그리고 에릭은 거래에 있어서 우위를 점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니.

"재상 각하, 성자인 제게 계속 반말을 쓰실 생각입니까?"

에릭이 싱긋 웃었다.

재상의 붉은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이...."

재상은 고개를 삐딱하게 튼 에릭을 보며 말끝을 흐렸다.

아스티아 교단의 성자요, 황제 폐하의 히든카드가 에릭이다.

사실 존대는 당연지사였다.

"뭐, 농담입니다."

물론, 에릭은 호칭 따위에 연연하는 성격이 아니다.

그저 거래를 앞두고 농담으로 지위적 압박을 줘 본 것이다.

실제로 이는 잘 먹혔다.

순례자의 징표에 성기사들이 쩔쩔맸듯이.

'성자....'

에릭이 직접 내뱉은 성자라는 칭호에 재상은 실로 당황했다.

오랫동안 봐 온 존재가 하루아침에 거물이 되어 있는 판국이 아니던가.

'도통 믿기지 않는구나.'

대화를 나눠 보니 더욱 어색했다.

열다섯에 성자에 순례자다.

재상은 에릭을 아주 어릴 때부터 봐 왔다.

'그 작은 천민 꼬마가-.'

"성자님."

저렇게 장성했다.

재상의 눈에 묘한 자긍심이 깃들었다.

"사례금은 황제 폐하께서 직접 지급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재상은 그 자긍심에 걸맞게 에릭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발언 또한 그러했다.

'하사가 아닌 지급이라고?'

이번에는 에릭이 역으로 당황했다.

"재상 각하, 이전처럼 편하게 대하시지요."

호칭정리를 시작으로 대화는 일단락되었다.

"성자님이 그렇게까지 말하셨으니, 내 말은 편하게 하겠네."

재상은 에릭의 부탁대로 평소처럼 그를 대했고.

"폐하께 꼭 좋은 소식 전해다 드리죠."

에릭은 황명을 따르기로 정했다.

황제파는 황족과 재상을 필두로 한 귀족회의 인물들이 뒤섞여 있다.

에릭 입장에서는 진정한 우군으로 봐야 할 터.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는 건 당연한 일이다.

'말이 사례금이지.'

황제 성격에 분명 억만금을 건네줄 거였다.

대륙에서 가장 부유한 곳이 제국의 황실이니까.

'여차하면 신성 마도구 사업은 물 건너갈 수도 있겠어.'

물론, 리스크도 분명했다.

'동탄 미시룩'을 보낸 후작은 라핀 공작의 수하다.

이를 보아하니, 그들의 수장인 라핀 공작도 빙의자로 무언가 일을 벌이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본래 집단은 머리를 따라간다고 하지 않던가?

마침 명분도 있겠다.

"재상 각하, 저도 부탁 하나만 드리겠습니다."

에릭은 재상에게 한 가지 청을 건넸다.

"내 친히 제국 집행부를 소환하겠네."

* * *

에릭은 에리카와 함께 수도 제1구역에 있는 전이마법진 관리소를 찾았다.

예정된 계획이었기에, 마법사들은 제국 남동부와 연결된 전이마법진으로 에릭을 안내했다.

마법진의 마력 충전을 기다리면서 에리카가 인사치례를 건넸다.

"성자님, 요즘 별일 없으셨는지요?"

"별일? 흠, 삼황자를 태운 이후로 내가 너무 바빠져서 문제군."

"그, 그러십니까?"

전이마법진(轉移魔法陳) 위에서 에릭이 농담을 건넸다.

에리카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보다, 에리카 공녀. 천민 나부랭이가 성자가 되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에리카는 간만에 튀어나온 에릭의 뒤끝에 소름이 쫙- 돋았다.

"아, 미천한 천민 고아 나부랭이였나?"

에릭이 골똘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미천한 천민 고아가 나를 가르쳐? 비쩍 마른 천것이 무슨 검을 휘두르겠다고!"

에리카는 어릴 적 자신의 치기 어림에 한탄했다.

세상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더니.

그 꼬마가 자신을 줘 패는 강자였고, 나아가서는 한 교단의 성자가 되어 버렸다.

"성자님.... 분명 그때의 원한은 잊기로 약조하지 않으셨는지요."

에리가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내리깔았다.

짓궂은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에릭.

어쩌다가....

'저런 얼굴에 빠져서.'

얼빠 기질이 다분한 에리카는 한탄스러웠다.

공주 대접도 아니고, 웬 쌍놈 대하듯이 자신을 취급하는데.

콩-콩.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나, 넘보지 못할 존재였다.

"공녀님, 농담입니다."

에릭이 짙게 웃으며, 평소처럼 말투를 바꿨다.

'아아-.'

그에 에리카는 또 한 번 심장이 철렁하였으나, 여상히 이어지는 에릭의 덤덤한 음성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이번 일정은 생각보다 위험을 동반할 겁니다."

그 에릭이 위험이란 단어를 칭했기 때문.

'위험?'

황제 앞에서 날개를 뿜어 대던 에릭이 위험을 논해?

이상한 말이었다.

"흑마법사 빙의자들이 제국 서쪽으로 침범한다더군요."

"그게 무슨...."

"황실에 알렸다가는 정보가 새 나갈 가능성이 큽니다."

짓궂은 농담 뒤에 나온 말이 심상치 않았다.

"흑마법사요?"

뭐, 이런 무거운 주제를 꺼내기 위한 농담이었다마는....

"게다가, 황실에서 정보가 새 나간다는 건 대체 무슨 말인지요."

에릭의 말은 지엄한 황실에 세작이 숨어들었다는 의미로.

'황제 폐하가 계신 곳에 어찌.'

무겁다 못해 불경한 발언이었다.

압도적인 강자에 성자라는 지위를 갖춘 에릭에게도 황실 모독은 허락되지 않는 법.

에리카는 매서운 눈초리로 에릭을 바라봤다.

에릭은 그 건방짐에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황제 폐하도 어찌 못하는 분이 계시지요. 마누라라고."

"아."

에리카는 재상의 빽으로 승진한 게 아니라, 실적을 기반으로 근위대에 차출되었다.

나름 명석한 두뇌를 지녔다는 의미로.

'알만교 교주랑 폐하 사이가....'

그녀는 에릭의 말이 충분히 일리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래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진중한 에리카를 보며 에릭이 귓가에 속삭이기를.

"전처럼 말 편하게 하시지요."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거기에 덧붙여진 말.

"새로 얻은 수하들 입단속 부탁하겠습니다."

눈을 질끈 감은 채 에리카는 평소처럼 대답했다.

"그, 그러마-."

말끝이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바닥의 마법진이 빛을 발했다.

빛이 점점 커지고.

우우웅-!!!

굉음과 함께 대규모 전이마법진이 발동되었다.

에릭과 에리카, 그 외 황실 근위대 기사단 20여 명을 거대한 푸른빛 돔이 가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빛무리가 흩어지며 이질적인 공간이 나타났다.

위이이이잉- 철컥.

정체 모를 설비들이 가득한 공간.

그 기이한 기계들이 굉음을 내며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장소.

"여, 여기는...."

에리카는 처음 보는 이질적인 기계장치들을 보며 긴장했다.

함께 따라온 근위대 기사단도 마찬가지.

그들은 검집에 손을 얹은 채 예리한 기도를 뿜어냈다.

반면 에릭은.

'라핀 공작은 대단히 미쳤군.'

간만에 박지훈의 향수를 느꼈다.

드르르르륵-.

자동으로 자재를 운반하는 컨베이어 벨트.

위잉- 철컥.

사람 대신 기계가 금형 틀에서 무언가를 찍어내 조립한다.

그야말로.

'자동화 공장.'

그것도 마도구를 만들어 내는 자동화 공장이었으니.

그 공장의 기계 설비 사이로 한 사내가 나타났다.

"성자 에릭, 정말로 와 주었군!"

그는 아주 환한 미소로 에릭을 맞이했다.

'이 말도 안 되는 공장을 만들었단 말인가?'

성성한 백발을 깔끔하게 넘긴 제네딕 라핀 공작.

그가 둥글게 말린 수염을 쫙- 펴며 에릭을 바라봤다.

그의 쭉- 째진 실눈이 살짝 떠졌다.

"혼자 올 줄 알았더니, 불청객을 줄줄이 달고 왔구려."

48화 노련한 사냥꾼 (3)

"장두식, 황명이다!"

쟝의 마도구 상점에 황실의 전령이 찾아왔다.

달의 조각을 꺼내 든 전령은 황제 폐하의 임명장를 펼치며 구구절절한 황명을 읊조렸다.

"...하여, 장두식을 정식으로 빙의자 관리국의 부국장으로-."

"거, 오른팔이 더 익숙한데-."

"두식아."

황실 전령이 임명장을 읽던 중 장두식이 그의 말을 끊었고, 황녀는 다정한 세 글자 이름을 읊조려서 장두식을 멈춰 세웠다.

'달 조각을 든 전령의 말은 황제 폐하의 말과도 같거늘....'

저 무식한 놈.

장두식의 행동거지에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황녀는 전령을 째릿- 노려보았다.

전령은 장두식의 무례에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칙서를 마저 읽었다.

그 태도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웠다.

"장두식은 이 시간부로 자랑스러운 대제국의 빙의자 관리국 부국장임을 천명한다."

장두식에게 정식으로 직함이 생겨났다.

'옆에서 지켜봐야겠어.'

황녀는 어쩌면.

만에 하나라도.

장두식이 남편이 될 가능성을 떠올리니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장두식의 재능은 진짜다.'

분명 마법의 천재다.

체질도 아주 특이한 게, 귀족가에 태어났다면 벌써 이름을 떨치는 마도사가 되었을 재목이다.

'어차피 폐하가 정한 혼사이니.'

게다가 장두식의 묘-한 매력에 끌려 버렸다.

왈패 같은 행동거지에 무슨 매력이 있겠냐 싶겠지마는....

'조금 귀여운 구석이-.'

은근 황녀 취양에 맞는 듯했다.

반삭 머리 깡패에게 대체 왜 이런 감상이 드는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황녀는 잠시 장두식을 지켜보기로 결심했다.

그러다가 진짜 마음에 들면?

'내가 쓸 만하게 키워 주면 되지.'

대제국의 황녀는 자신의 남자를 그녀가 원하는 자리에 앉게 만들 능력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하암. 다 끝났수?"

기지개를 켜며 황제 폐하가 하사한 임명장을 한 손으로 집어 드는 꼴을 보아하니, 갈 길이 멀어 보였다.

"그...."

황실 전령이 장두식의 미친 짓을 보며 일순 몸을 부르르- 떨었으나, 황녀의 매서운 눈초리를 보고는 그대로 자리를 떠나갔다.

문제 하나는 해결했는데, 황녀에게는 의문이 남아 있다.

"그래서 저 가면을 쓴 꼬마들은 누구더냐?"

황녀의 쥘부채가 상점 뒤편의 창고를 가리켰다.

가면을 쓴 두 꼬마가 슬쩍- 몸을 기울인 채 장두식의 임명식을 엿보고 있었다.

그에 장두식은 쌍둥이의 정체를 알려 줬다.

"따까리요."

"따, 따까리?"

"아우 취급도 못 받는 반쪽짜리 수하라고 보면 되겠수다."

자랑스러운 듯이 작은 아이들을 보며 그리 말하는데....

'저 화법에 정신이 나가겠구나.'

황녀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때 장두식이 꼬마들을 보며 물었다.

"작은 따까리들아, 무슨 일로 마법진까지 타고 온 거냐?"

황녀는 창고에서 일어난 마력 파장을 느꼈다. 그래서 두 꼬마의 존재를 알아챘다.

한데, 막상 아이들을 바라보니 마력도 없는 아주 평범한 꼬마들이었다.

그 말인즉슨, 아이들이 타인의 마법진으로 이동했다는 말인데....

'고정된 전이마법진을?'

전이마법진을 고정시켜 두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상시 마력 충전이 가능해야 하며, 좌표를 개념화하고 전이라는 현상을 담은 마법진을 안정적인 장소에 고정시키는 복잡한 작업이 필요하다.

'행동거지가 그래서 그렇지, 두뇌까지 명석하구나.'

제1구역의 전이 관리소에서나 쓸 법한 정교한 마법진.

"저걸 장두식, 네가 설치한 건가?"

"그렇수다."

황녀는 금세 두 꼬마에게 흥미를 잃고 장두식을 바라봤다.

"...어떻게?"

"외웠수다."

황녀의 머리가 한층 더 어지러워졌다.

'전이 좌표를 외워서 고정된 마법진에 섞었다고?'

황실에서도 고위 마법사들이 복잡한 수식을 계산해 가며 만드는 일이다.

작은 실수가 전이의 실패로 이어지고, 이는 사망 혹은 신체 절단이라는 끔찍한 사고를 유발하기 때문인데....

"그걸 혼자서?"

"외운 뒤에 마력을 담아 마법진만 그리면 끝인데 뭐 문제 있수?"

장두식은 르웰의 교회와 마도구 상점 그리고 암흑가 본거지의 좌표를 달달 외웠다.

꿀밤 100대로 해낸 기적이다.

"아니, 그게 왜 되는...."

황녀가 말문이 막힌 틈에 두 꼬마가 장두식에게 종종 다가왔다.

장두식이 고개를 숙이자 쌍둥이 가면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보스가, 대신 미궁 공략하래."

"그 물약 못 찾으면 꿀밤이래."

오늘은 주일로, 내일은 미궁이 개방되는 날이다.

장두식이 황급히 몸을 움직였다.

황녀의 등장부터 시종일관 죽은 듯이 기척을 죽이고 있던 세 빙의자에게 다가갔다.

"빙의자들아! 내일 미궁에서 히든 피슨지 뭔지를 꼭 찾아야 한다."

에릭이 장두식을 시키면.

장두식은 빙의자를 굴린다.

흔한 내리갈굼이었다.

"못 찾으면, 기대해라."

장두식의 몽둥이가 신성을 담은 마력을 뿜어 댔다.

몽둥이에 겨눠진 세 빙의자가 주춤거렸고.

'이런 씹-.'

니시다 료와 강풍호가 박창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 * *

라핀 공작의 마탑 내부.

에릭은 당혹을 넘어 충격적인 광경에 말문이 막혔다.

'공장을 지어?'

에릭은 잠시 사색에 잠겼다.

박지훈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봤다.

'저걸 어떻게?'

한때는 박지훈도 이 세계에서 대단한 발명을 이룩해 현대 문명을 재현해 보겠다는 욕심을 가졌다.

물론,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약? 회복 포션 말하는 건가?"

"...뭐? 먹으면 열이 내린다고? 성수가 있는데 굳이?"

빈민가에 태어나 분쟁 지대에서 살았던 박지훈은 처음에 의약품에 관심을 가져 봤다.

빵에 난 푸른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이 탄생하였다는 건 알지만, 이를 어떻게 정제하고 배양하는지는 모른다.

'만들 수도 없지만 애초에 필요하지도 않았지.'

애초에 이 세계에서는 정화 마법이나 성수로 어지간한 병이 다 해결되어서 의약품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여, 의약품을 버리고 기술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 뭐? 필라멘트? 전기가 뭔데."

문과생 박지훈은 대단한 잡학 지식을 지녔으나, 막상 전구 하나도 구현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마법으로 세계가 애매하게 발전한 탓에, 어지간한 건 이미 존재했다.

'마석등, 통신 마도구, 전이마법진.'

그래도 탈것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그가 리페로제에게 자동차라는 개념을 설명해 봤을 때.

"최대 시속 200키로면 나보다 느린데? 에릭, 자꾸만 쓰레기를 만들려는 이유가 뭐냐? 저번에는 뭔 곰팡이를 키워서 포션을 만들겠다는 미친 소릴 하더니."

반쯤 병신 취급을 받았다.

신성력과 오러, 마법을 다루는 괴물들이 즐비한 세계에서 교통수단의 필요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말이 있긴 한데, 이 또한 의전용 사치품 취급이 아니던가?

이미 무역품은 화물용 전이마법진으로 운송되는 세계였다.

"오, 신문이란 것에 정보를 담아 전달한다니, 참으로 신기한 생각이구나!"

그리고 그 욕심은 고작 일 년의 시도 끝에 타협점을 찾았다.

결국 할 수 있는 건 장사였다.

그것도 아이디어만 있으면 누구라도 따라 할 수 있는 간단한 종류로, 지구에서 보았던 시스템과 아이템만 따오는 방식이었다.

"포차라고? 이동하는 식품 매장, 그것도 제법 좋아 보이는구나."

대다수의 빙의자가 에릭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 사업에 손을 대는 것이다.

의류라든가, 쇼핑 앱의 시스템을 따온다거나, 혹은 어중간한 금융 지식을 남발하고.

'로켓 배송, 다단계, 뭔 놈의 주식회사를 만든다느니....'

그것마저 태반은 어설프게 따라 하다 단두대로 끌려갔다.

막상 지구의 지식으로 무언갈 만들어 내는 건 대단히도 어렵고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는데.

위이이잉-철컥. 쿵!

자동화 설비로 마도구를 만드는 공장이라니.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에릭은 그야말로 넋이 나갔다.

"성자 에릭, 어찌 그리 멍하게 있는 겐가?"

라핀 공작의 말이 에릭의 정신을 현실로 돌려 주었다.

"저건 금형 틀 아닙니까?"

"그렇네."

"사출 기계.... 게다가 조립하는 로봇 팔까지."

정신이 돌아온 에릭은 공장의 설비 하나하나를 가리키며 이것저것을 물어 왔다.

그에 라핀 공장은 기쁜 마음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똑같이 만들 필요는 없잖는가? 개념만 따와서 마법을 적용한 걸세."

"그러니까 저 기계장치가 다 마법으로 움직인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전기라든가 프로그래밍을 해서 반복 학습을 시켜야 한다거나 하는 말을 들었다마는-."

에릭은 그 비결을 알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라핀 공작의 성공 비결은 간단했다.

"요는, 마법도 못 쓰는 미개한 세계의 법칙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일세."

애초에 빙의자들이 전파한 문명의 기능만을 받아들이고, 기술 자체를 직접 만들었다는 말이다.

'근위대를 끌고 와서 다른 생각을 먹은 줄 알았건만....'

감탄하는 에릭을 보며, 라핀 공작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반면, 에리카는 미칠 지경이었다.

'아니.... 에릭, 네가 그렇게 좋아하면 어쩌자는 거냐?'

근위대 2기사단 단장, 에리카.

그 외 20명의 황실 근위대.

도합 스물한 명은 멀뚱멀뚱 에릭의 등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신성 마도구를 만들겠다는 거였군요."

라핀 공작의 설명을 다 들은 에릭이 아주 감탄했다.

"신성력을 다루는 게 사람이 아니니까 안정성이 더 높아지겠습니다."

"그렇지! 역시, 성자라더니 한눈에 그게 보이는가?"

에리카는 에릭의 표정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거액을 십일조로 냈을 때와도 같은 얼굴이 아니던가?

"하하하! 역시, 마도 연합의 수장다우십니다."

"허허허-! 내 무신론자였는데, 성자 에릭을 보고서 마음이 흔들리려 하는군!"

하하호호 웃음이 오가는 현장.

'대체 황실에 뭐라고 보고를 해야 하는....'

그에 에리카는 임무 실패를 기정사실화하고 변명을 떠올리려 했는데.

뚝-.

갑작스레 에릭이 얼굴을 굳혔다.

"아, 근데. 허가받지 않고 빙의자를 이용하셨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허어.... 우리 사이에 그러긴가?"

갑작스러운 에릭의 태세 전환에, 라핀 공작이 눈가를 좁혔다.

어린놈이 이렇게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이....

'버릇이 없군.'

9서클 마도사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저 기분이 망가진 것 하나만으로 거친 마력 파장이 일었다.

에릭 또한 신성을 일으키며 마력을 밀어냈다.

"신성 마도구 사업은 충분히 가능하겠습니다만-."

그러고는 덤덤하게 제 할 말을 읊조렸으니.

"공작님의 수하가 저지른 잘못은 해결하시는 게 맞겠지요."

"...그게 무슨 말인가?"

"머리가 훌륭한데 팔다리가 멋대로 움직이면 제가 어찌 공작님과 함께 사업을 하겠습니까?"

공작이 기세를 누그러트렸다.

"아론 후작가가 르웰 사제님께 씻지 못할 죄를 지었습니다."

에릭은 역으로 기세를 키웠다.

쿠웅- 내려앉은 신성력에 마탑의 공장 설비가 멈춰 버렸다.

마탑이란 마도사의 집이요, 보금자리며, 모든 정수가 담긴 심장이었다.

그런 장소에서 이런 위협을?

숫제 전쟁을 하자는 것과 다름없는 말일 터.

'하필 교회를 건드렸단 말인가?'

하나, 라핀 공작은 참아 냈다.

그 역시 제국의 사주(四柱)로 불리는 공작이었으니까.

정보부에 연줄도 있고 자신이 운영하는 정보 조직도 따로 존재한다.

그래서 에릭이 유독 아끼는 존재들을 잘 안다.

'성자의 역린이랬나.'

또한, 에릭이 그토록 친애하는 '르웰 사제'에 대한 정보도 제대로 가지고 있다.

얼마 전부터 르웰은 제국의 유명인사나 다름없어졌다.

'페르나시아 공작이 구애를 했다지?'

그 블러드 다이아를 찾고자 온 암시장을 들쑤셔 놨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내 그렇게 행동거지를 조심하라고 했거늘.'

아론 후작은 공작의 왼팔 정도는 되는 인물이다.

암만 그래도....

저 에릭과 인연을 갖는 것에 비하면 왼팔 정도는 버려도 무방할 테지.

"내 어찌하면 되겠나?"

라핀 공작이 결단했다.

"저는 공작님을 믿고 부탁을 먼저 들어드리겠습니다."

의도한 바를 이룬 에릭이 기세를 누그러트렸다.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를 참아 내며 에릭이 등을 돌렸다.

"갑자기 부탁이라니?"

"제게 대곡창 지대와 엘프 자치령을 살펴봐 달라 하셨지요."

"그, 그랬다마는...."

"제가 돌아올 때까지 그 후작 놈 여기다 데려다 놓으시죠."

* * *

에리카는 에릭을 오래 봤다.

지금이야 거물들과 만나며 어느 정도 표정을 숨긴다지만, 원래의 에릭은 자신의 기분을 숨기는 인물이 아니었다.

사실, 에릭의 심경 변화는 숨기고 싶다고 숨겨지는 것이 아니었다.

'후작 얘기를 할 때 승모근이 조금 들썩거렸는데, 막상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가 있었으니까.'

표정 관리를 하게 된 지금도 에리카는 에릭의 상태를 명확하게 인지했다.

'후작에게 화가 난 건 사실이지만, 공작을 만나서 더 기쁜 상태야.'

에릭이 어떤지는 알겠는데, 왜 그런 상태인지는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던 차였다.

에리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저 대단한 공장을 얻었는데, 구경을 미루게 됐군요."

에릭이 에리카를 불러 세웠다.

그의 뒤로는 까마득히 높은 '라핀 마탑'이 보였는데, 마치 에릭은 그 마탑을 제 것인 양 여기는 모습이었다.

아무튼.

요점은 이거다.

'나 때문에 구경을 못 하게 됐다는 건가?'

에리카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에 에릭은 성큼- 에리카에게 다가섰다.

"재상 각하께서 저를 이용해 정쟁을 하려 하시니, 일이 복잡해졌습니다."

"아, 그건...."

"물론, 황제 폐하의 뜻이겠죠."

에릭은 차분히 에리카를 바라보며, 제 뜻을 알렸다.

"라핀 공작의 측근, 마도 연합의 왼팔인 후작을 잘라 내는 정도로 만족하시겠습니까?"

에리카는 그제야 일련의 흐름이 이해됐다.

'후작의 죄를 빌미로 공작이 비호를 못 하게 만들었구나.'

그러면서도 '신성 마도구' 사업에 끈은 연결해 두었다니.

"...대단, 아니 폐하께서도 그 정도면 만족하실 거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에릭이 짙게 웃으며, 에리카를 지나쳐 마탑 아래를 내려다봤다.

제국의 남부에는 상주하는 기사단이 없으며, 그곳의 귀족들 또한 다른 지역과 달리 무력이 없다시피 하다.

'엘프와의 맹약이랬지.'

엘프들을 제국에 받아들이며 생긴 조건인데.

"엘프들이 일을 아주 개같이 하는 모양입니다."

에릭이 저어- 멀리 보이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들썩거리는 승모근에 에리카가 '흐익-!' 신음했다.

그 뒤 에릭이 말하기를.

"제국 남부에서 검은 마력이 느껴지는군요."

아주 섬뜩한 목소리였다.

49화 노련한 사냥꾼 (4)

"아론 후작, 반역죄로 그대를 체포한다."

검은 갑주를 두른 기사들이 아론 후작의 저택에 들이닥쳤다.

오직 황명으로만 움직인다는, 제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집행부(執行部)의 출두였다.

"막아라-!"

"후작가를 위하여-!"

방계로 이뤄진 가문의 기사들이 황실 집행부를 막아섰다.

집행부가 나섰다는 건, 이미 후작의 명줄이 끊긴 거나 다름없다는 의미였고.

그렇기에 후작가의 기사들도 싸우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었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다고 집행부가 들이닥친단 말인가?"

철저하게 제압당하는 자신의 기사를 보며 후작이 침음을 삼켰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황제 폐하의 심기를 거스를 법한 일을 벌인 적은 없었다.

굳이 생각해 보자면.

'사업을 조그마하게 했을 뿐이건만....'

라핀 공작의 마탑에 큰 도움을 주긴 했지만, 문제는 없을 터였다.

명확하게 소유권과 책임 소지를 정리해 놨기 때문이다.

후작이 직접 벌인 일이라고는 자그마한 의류 브랜드 몇 개를 만든 게 전부였다.

그 북부 대공도 예티코트라는 브랜드를 운영하는 판국에....

이 정도는 눈감아 줄 법도 하지 않나?

후작이 당황해 있자니.

"후작님. 혹여, 다른 문제는 없으신지요?"

그의 책사(策士)가 다가와 물었다.

제국 사관학교를 수석 졸업 한 영재요, 제국군 시절 전장에서 이명까지 얻은 유능한 자였다.

"생각나는 게 전혀 없다."

"몇 년 전에 누락한 세금 문제는-."

추궁하듯이 묻는 책사의 말을 끊고 후작이 말하기를.

"황제 폐하는 귀족의 탈세로 집행부까지 부르시는 분이 아니시다."

황제는 꽤나 자비롭다.

특히 아론 후작처럼 귀족의 의무를 지는 가문들에게는 더욱이 유한 편이다.

"윤 책사, 집행부가 온 이상 이유 따위를 찾을 필요는 없네."

뭐, 이유가 뭐가 되었건.

집행부의 출두는 무조건적인 유죄를 가정하고 진행된다.

일종의 유죄 추정의 원칙이다.

윤정식 책사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후작가의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전혀 없었다.

"라핀 공작 각하께 연통을 넣겠습니다."

"집행부라면.... 아마 공작께서도 나를 버리려 드실게다."

책사가 긴급 마법 통신으로 신호를 보내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뚜뚜- 하며 암호문이 회신되어 왔다.

군부에서 쓰는 신호 체계였다.

"...벌써 답이 오다니. 라핀 공작께서는 뭐라시더냐?"

그 빠른 응답 속도에 후작의 불안감이 점점 커졌다.

'미리 알고 버리시는-.'

"공작 각하께서 전이 마법을 써 주시겠답니다."

"어쩔 수.... 뭐어라?"

"이곳으로 전이마법진을 설치해 주신다고-."

"그으래? 그래! 역시 마도 연합의 삼인자인 나를 버릴 생각은 아니셨구나!"

아론 후작은 깊이 안도했다.

집행부가 왔는데 친히 전이마법진을 열어 주겠다는 말은 곧, 공작께서 후작을 비호해 주겠다는 의미다.

'그 공장 지분을 얻으려고 얼마나 많은 지식을 풀었던가.'

말도 안 되게 돈과 시간을 쏟아부은 보람이 느껴졌다.

후작은 윤 책사에게 최후의 명령을 전달했다.

"전 가솔들에게 전하라. 항전 대신 투항으로."

한 가문의 수장으로서 살게 된 이상, 최대한 많은 인원을 살려 둬야 한다.

그래야 공작의 도움으로 억울함을 풀었을 때, 후작가가 우뚝- 일어설 수 있을 테니까.

"나는 공작 각하께 운신을 맡기고 이 억울함을 풀 방안을 모색할 것이다."

말을 마친 즉시, 후작의 앞에 거대한 마법진이 나타났다.

후작은 마법진 위로 올라섰다.

"윤 책사, 뒷일은 맡기겠네."

우우웅-!

푸른빛과 함께 후작은 사라졌다.

* * *

알만정교회의 표식을 새긴 빙의자들이 제국의 성문을 넘어왔다.

그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국군이 관리하는 검문대를 피해 알만정교회의 검문대로 향했다.

"알만 신의 은총이!"

치이익-.

두른 로브 아래로 희뿌연 연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그에 검문소를 담당하는 목사가 황급히 신성력을 거두며 물었다.

"...그대들이 그분께서 말한 자들인가?"

알만정교회의 목사는 실로 당황스러운 상황에 놓였다.

'정말로 빙의자구나.'

알만정교회 대목사의 딸이자 제국의 2황비가 내린 지시를 떠올렸다.

"몇몇 빙의자가 지나갈 건데, 그냥 보내 주거라."

"아무리 황녀님의 지시라 해도...."

"내 지시? 이는 아버지의 뜻이다."

황녀의 아버지라면, 대목사였다.

'헛소리가 아니었다니....'

그녀의 말대로, 알만교의 로브를 걸친 빙의자들이 나타났으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목사는 슬쩍 신성력을 일으켜 봤다.

"앗- 뜨거."

또다시 로브 아래로 연기가 피어났다.

이번에는 비명도 들렸다.

'진짜 빙의자! 이 어찌!'

목사가 당황해 있자니, 백색 로브로 전신을 가린 다섯 명의 빙의자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스윽-.

그 뒤 한 남자가 목사의 앞으로 다가섰다.

로브 사이로 시꺼먼 동공이 번뜩였다.

그가 목사의 귀에 속삭이기를.

"야, 씨발. 너 위에서 내린 지시 못 들었어?"

그 섬뜩한 음성에, 목사는 예정대로 신호를 주며 관문소 문을 열어 주었다.

"병신 같은 새끼, 저러니까 천년만년 여기서 뺑이나 치지- 퉷!"

목사에게 침을 뱉은 사내는 일행들과 함께 건너편 문으로 걸어갔다.

"아아...."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목사는 기도의 자세를 취했다.

두 주먹을 모아 턱 아래 대고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무지한 신도가 묻나이다.'

저런 인성 파탄 난 빙의자를 비호하는 게 정녕 당신의 뜻이옵니까?

그리하여 어떤 대업이 따를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신의 종으로서 저는 이 또한 거대한 흐름의 일부로 여기며 계속 기도하겠나이다-.

"에휴, 저 병신."

신실한 기도를 보며, 로브를 두른 빙의자가 중지를 들어 올렸다.

옆에서는 다른 빙의자들이 낄낄거렸다.

"NPC 새끼들 수준에 뭘 바래?"

"기본 교육도 못 받은 빡대가리들이니까 저따위로 기도나 처하고 있지. 신은 무슨 지랄인지."

"흑마그룹도 족같긴 마찬가지잖아?"

"얌마, 그래도 어-! 초대 회장님이 우리랑 동지잖아. 딴 데랑은 다르지."

덜컥-.

잠시 수다를 떨다 보니, 그 제국의 성벽을 넘어 버렸다.

관문소 통로 너머로 드넓은 내성 풍경이 드러났다.

"와...."

알만교의 로브를 두른 다섯 빙의자들은 처음 보는 제국의 모습에 입을 쩍- 벌렸다.

"존나 미개하네."

"대제국이라더니, 중세 수준인 거 실화냐?"

투박한 벽돌로 지어진 건물.

그리고 길을 오가는 수수한 차림의 사람들.

제국의 변방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야, 볼 것도 없다. 물약 빨고 빨리 가자."

다섯 빙의자들은 [인벤토리]에서 가속화 물약을 꺼내 들었다.

제국 안에 들어온 이상, 불시 검문을 받을 일은 없었다.

알만정교회의 로브를 둘렀기 때문으로, 백색 로브는 '교회의 임무'를 맡았다는 의미다.

어지간해서는 제국의 병사들도 건들지 않을 터.

"크으, 뽕맛 죽이네."

[가속화 물약]의 효과는 굉장했다. 그들은 순식간에 도시를 가로질러 반대편 성벽에 도착했다.

그러고는 아무런 제지 없이 성벽 밖으로 이동했다.

"와, 씨. 저거 뭐냐."

"대곡창 지대라더니...."

빙의자들은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농작물을 바라보며 경악했다.

"미친.... 저게 다 마법으로 재배된다는 거야?"

투박한 옷차림과 구식 건물들에 비해, 너무나도 대단한 식량 재배 방식이었다.

"다는 아니지, 저기 중간에 농가가 따로 있잖아."

재배는 마법으로 해도, 관리하는 사람이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보통 그런 일들은 영지의 평민들이 도맡아서 하는데.

"먹자."

[살인의 쾌락] [인간 실격] 업적을 지닌 이들답게 사람을 보며 군침을 질질 흘렸다.

"야, 주주님부터 부르고 하자."

빙의자들은 맡은 임무를 위해 잠시 욕망을 미뤄 뒀다.

[흑마법사] 클래스로 2차 전직까지 마친 다섯 사람이다.

"스킬 준비하자고."

게다가 모두가 [포탈 생성]과 [지정 소환] 스킬 보유자다.

이번에 쓸 스킬은 [지정 소환]으로, 소환 대상이 너무 강해서 다섯 명이 동시에 소환을 해야 했다.

"셋, 둘, 하나-."

다섯 사람이 바닥으로 손을 뻗었다.

스킬 모션에 반응해 쿠웅- 흑마력이 일어났다.

손끝에서 피어나는 검은 소용돌이가 하나로 합쳐지더니 작은 문 크기로 검게 물들었다.

이는 흑마력의 침식 효과다.

"이 정도면 안 들키겠지?"

그리고 [지정 소환]은 흑마력 특유의 침식 효과가 가장 약하다.

백 미터 안쪽에 있는 게 아니라면 감지가 불가능하며, 침식 또한 허공에 생겨나서 엘프들이 알아챌 방법도 없었는데-.

"씹, 다 방어막 쳐!"

흑마법사 빙의자들의 팀장, 민준호가 다급히 소리쳤다.

[위기 감지] 특성이 발동했기 때문.

빙의 후 이 년간 한 몸처럼 지냈던 다섯 명은 동시에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손을 뻗은 방향에서는 거대한 금빛 구체가 다가오고 있었다.

쐐애애애애액-!

"메, 메테오?"

마치 유성우를 닮은 돌덩이.

그런데 황금빛이라니.

치지지직-.

"아악-! 이거 신성력-."

다섯 흑마법사가 펼친 방어막 스킬이 소멸했다.

금빛 돌덩이가 도달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흑마법사들은 끔찍한 고통에 비명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여기서 왜 신성력이-.'

빙의자에 흑마법사가 더해졌으니, 신성력에 더욱 고통받는 것은 당연지사.

콰아아앙-!

타들어 가던 빙의자들 위로 금빛 돌덩이가 낙하했다.

그 직후.

끼예에에에에엑-!!!

끔찍한 소음이 일어났다.

타들어 가는 흑마법사들 사이에서 아주 시꺼먼 무언가가 나타났으니.

"아아, 이 끔찍한 힘은 뭐란 말인가."

* * *

라핀 공작령의 주도(主都)는 수도 바로 옆에 있으나, 공작의 마탑은 제국 남부와 가장 가까운 변경에 자리했다.

이때 엘프들은 발작하다시피 제국에 항의했었다.

"세계수를 노릴 속셈이냐!"

엘프들의 고향이요, 어머니 대자연의 근원이 바로 세계수였으니.

그들은 황제와 맹약을 맺었다.

제국이 남부에서 군대를 물리는 대신, 자신들이 대곡창 지대에 풍요를 가져다주겠다고.

싸아아아아아아―

바람을 따라 황금빛으로 잘 익은 벼들이 고개를 움직였다.

멀리서 바라보니 그 광경이 참으로도 아름다웠다.

"에릭, 엘프들은 맹약을 잘 이행하고 있다."

그런 자연의 축복을 바라보며 에리카가 엘프를 변호했다.

그에 에릭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에리카 단장, 지랄도 정도껏 합시다."

꿈틀거리는 에릭의 승모근을 보며 에리카가 입을 꾹- 닫았다.

'아무런 기척도 없는데....'

대자연(大自然), 세계수의 비호를 받는 땅이다.

엘프들의 영역 너머, 제국 남쪽까지 그 비호가 이어져 있으니, 흑마력이 느껴졌다면 분명 엘프들이 나섰을 터인데....

"뭔가를 소환하려 하는군."

에릭의 눈은 지평선 끝자락을 향해 있었다.

거리가 아주 멀어서 서둘러도 몇 분은 걸릴 것이며, 3티어로 얻은 원거리 신성력 또한 사거리에 닿지 않는 상황.

게다가 이미 소환까지 시작되었다.

[별부름: 100,000,000골드]

에릭은 망설임 없이 1억 골드를 사용했다.

뭐든 소환되자마자 신성 폭격을 때려 박고 시작하겠다는 의지였다.

"악랄한 새끼들."

에릭은 흑마법사들이 제국 남부를 노린 이유를 추측해 봤다.

'제물.'

저 대곡창 지대에는 힘없는 농민들이 살아가고 있다.

마도구로 농사를 짓지만, 이 드넓은 땅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수천의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식량이겠지.'

세계수의 비호를 받는 제국 남부 지역은 제국령 전체를 먹여 살릴 만큼 식량 생산량이 많다.

여기에 침식을 일으키기만 해도 제국민들 태반이 쫄쫄 굶게 될 것이며, 이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성직자들이 정화 작업을 벌어야 할 터.

"이 악랄한 씹새끼들."

에릭이 으득- 이를 씹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끝에서 반짝이는 신성의 빛이 솟구쳐 올랐고, 그것은 곧 하늘 높이 날아올라 갔다.

한 방울 두 방울, 물방울처럼 작은 빛이 구름 위로 날아들더니-.

쿠웅.

묵직한 파공음이 하늘 높이 울려 퍼졌다.

'정말 흑마법사가....'

한없이 무거운 신성력을 느끼며 에리카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근위대 돌격 준비이-!!!"

에리카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른다.

적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방향은 에릭이 인도해 줄 터였다.

에리카는 일단 달렸다.

스윽.

눈앞에서 사라지는 에리카의 붉은 잔상을 보며, 에릭이 손을 내렸다.

"빛을 따라라-!"

그의 손짓을 따라 저 높은 창공을 가르고 빛의 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쐐애애애액-!!!

압도적인 크기의 금빛 구체들이 바람을 찢어발기며 지평선을 향해 날아들었다.

"별이 떨어진다-."

최선두를 달리는 에리카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무심코 내뱉은 말이었다.

금빛 구체들은 지평선을 따라 기다란 잔상을 남겼다.

신성의 금빛이 흩어지며 조각조각 은빛을 남기는 것이 꼭 밤하늘의 유성우를 보는 느낌이었고.

그 아름다운 별들의 끝에는-.

"역겨운 힘이로다."

끔찍한 무언가가 서 있었다.

쾅-! 콰과과광-!!!

그 검은 것은 손을 휘저으며 신성의 구체를 지워 냈다.

저릿한 파동에 돌진하던 근위대가 멈춰 섰다.

"더러운 존재로다."

검은 것이 근위대를 바라봤다.

여전히 그 검은 것 위로는 신성의 별이 떨어지고 있었으나, 그는 더 이상 개의치 않는다는 듯 무심히 걸었다.

"일어나라- 흑의 추종자들이여."

무겁고 무서운 목소리였다.

그 말에 타들어 가던 다섯 명의 흑마법사가 벌떡 일어섰다.

"주주님을 뵙습니다."

그들은 동시에 고개를 숙여, 검은 것에게 인사를 올렸다.

여전히 하늘에서는 신성 덩어리가 내리꽂혔는데, 그것은 더 이상 빙의자들의 위협이 되지 않았다.

'저, 저게 무슨....'

신성의 빛이 다가옴과 동시에 소멸했다.

검게 물든 무언가가 신성력을 지워 버렸다.

그 괴상한 현상에 에리카는 검은 것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이마에 줄이....'

검은 것은 말 그대로 모든 게 칠흑같이 검었으나, 이마에 선명한 일곱 개의 선이 그어져 있었으니.

"배, 백만-."

한 근위대원이 주춤- 뒷걸음질 치며 겁에 질렸다.

"다, 다들 겁먹지 마라!"

에리카는 황급히 기사단의 사기를 북돋았다.

그리 말을 했지만....

속으로는 그녀도 겁에 질린 상태였다.

'종말급이라니....'

백만의 영혼을 수확한 흑마법사.

여섯 줄만 해도 '재앙급'이라 불리며 군대를 동원하는 판국에, 일곱 줄이 나타났다.

에리카 역시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믿는 구석이 남아 있었고.

"우리 뒤에는 성자님이 계신다-!"

그렇기에 그녀는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그러나 권능을 얻은 흑마법사는 그녀의 용기 따위는 가볍게 부숴 버렸다.

검은 것이 명령하기를.

"자살하거라, 제국의 쓰레기들아."

스릉-.

그 즉시, 에리카를 필두로 모든 기사들이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눴다.

날붙이가 목을 누르는 느낌에 섬뜩함을 느끼던 순간.

키잉-!

허공이 십자로 갈라졌다.

'에, 에릭-.'

그 안에서 거대한 성기사가 압도적인 신성을 내뿜으며 나타났으니.

아스티아 교단의 성자요, 순례자며, 흑마법사들의 천적으로 불리는 에릭이다.

"이 땅을 수호하소서-."

거대한 성기사가 경건한 기도문을 읊조렸다.

50화 노련한 사냥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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