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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6% MALDITOPALADIN / Chapter 4: 30-40

章 4: 30-40

30화 재림(再臨) (3)

세계(世界)를 인간의 몸이라 생각해 보면, 흑마법사는 암 덩어리에 해당하는 존재다.

놈들은 멸절시켰다 싶다가도 갑작스레 다시 부활하곤 한다.

"-오오! 루-칸 님이시여!!! 이곳에 재림하소서!"

흑마법사들이 몸을 드러내고 활동을 시작할 때.

악마를 불러내는 행위를 일컬어, 그들 스스로 재림(再臨)이라 칭했으니.

'언제 들어도 지랄맞은 소리군.'

에릭은 그런 흑마법사들을 악성 종양, 혹은 암 덩어리로 여겼기에.

자신 스스로를 아주 강력한 백신이라 불렀다.

"제국에 암이 재발했어."

칙칙하게 녹아내린 숲속.

어두운 대지 위로 검은 흑마력이 넘실거렸고 질척거리는 기운은 모든 생(生)을 앗아 갔다.

"너, 너는 뭐냐!"

회색빛 세상에 찬란한 황금색 휘광을 내뿜는 거대한 성기사가 나타났으니.

성기사 에릭은 순례자요, 거룩한 신성을 휘두르는 악의 심판자다.

"황실 마탑에 넘길 표본은 둘이면 충분하겠군."

에릭은 꿈꾼다.

흑마법사의 멸절(滅絶)을.

쿠웅.

에릭이 힘껏 발을 내디뎠다.

대지가 흔들리고 흑마법사의 몸이 잠시 부웅- 하늘로 떠올랐다.

그에 흑마법사는 또 한 번 섬칫- 놀랐다.

"대, 대체 표본이 무슨-."

"조금만 참아라. 곧 알게 될 테니까."

오 년 전.

리페로제와 에릭의 활약으로 제국 수도의 흑마법사는 종적을 감추었다.

말이 종적을 감췄다지, 실상은 죄다 죽여 버린 거였다.

그런데 대뜸 흑마법사가 미궁 2계층을 장악한 게 아닌가?

'대체 어디서 튀어나왔지?'

세계에는 다섯 개의 미궁 입구가 존재하는데, 제국과 세 개의 왕국에 하나씩 있으며, 마경에도 하나가 더 있다.

미궁 저층은 각각의 입구별로 별개의 공간으로 나뉜다.

즉, 제국의 저층은 제국에서만 들어갈 수 있는 셈.

'저놈들이 죄다 수도에 숨어 있었다는 말인데.'

도통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했다.

수도가 어떤 곳인가?

제5구역, 더러운 빈민가는 보스 마르코의 이름으로 철저하게 관리해 왔고.

제4구역은 교단에서 주기적으로 봉사를 다니며 정화 활동을 벌인다.

하물며 제3구역은 성수를 애용하는 모험가들의 땅이요, 제2구역과 1구역은 고귀한 피가 살아가는 제국의 심장이었으니.

"제국의 미궁과 연결된 샛길을 만든 건가?"

생각을 마친 에릭이 묻자니.

흠칫-.

흑마법사의 로브가 흔들렸다.

"흑마력을 다루는 모습이 빙의자는 아니군."

그런데 미궁에 샛길을 만들었다라.

그 말인즉슨.

"흑마법사 클래스 빙의자가 네놈들과 협력하는 모양이야."

[흑마법사] 클래스의 [스킬]이라면, 미궁으로 샛길을 만드는 것 정도는 가능할 터.

빙의자는 게임 시스템을 쓰니까.

에릭은 홀로 결론을 지었다.

'묻지 않고 혼자 답을 내린다?'

그에 흑마법사 졸린은 의문을 느꼈다.

성기사의 덩치가 아주 커다랬고 얼굴은 이질적일 만큼 잘생긴 것이, 풍채와 용모만큼은 가히 신의 재림이라 보아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막상 신성력은 미미해 보였다.

'뭔가 이상한데?'

졸린이 에릭을 자세히 살펴보니 특이점들이 보였다.

각 잡힌 제국의 정복.

가슴에는 수많은 휘장들이 달려 있고 어깨 위에는....

고급스러운 제복과는 어울리지 않는 낡은 철조각이 붙어 있었는데.

'제국군은 아닌....'

졸린은 철조각에 그려진 문양을 알아봤다.

'음?'

기다란 십자가를 감싼 여섯 날개.

그 아래로는 무슨 글귀가 쓰여 있었다.

문자의 의미는 몰라도, 문양만큼은 뜻하는 바가 명확했다.

졸린은 차분히 상황을 판단했다.

'아스티아 교단의 성기사.'

그의 등 뒤로는 심장이 터진 흑마법사 시체가 놓였고 시체의 이마에는 검은색 줄 네 개가 그려져 있었다.

그 말인즉슨.

'네 줄보다 강한 성기사.'

졸린이 로브를 벗으며 두 손을 위로 올렸다.

"-자, 잠깐!"

로브 아래로 검은색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비단처럼 고왔고 그 사이로 드러난 얼굴도 아리따웠다.

그녀가 말하기를.

"하, 항복하겠습니다! 저는 가르시안 왕국의 귀족, 알펭가문의 졸린입니다! 포로로서 대우를-."

흔히 알려진 제국과 삼왕국 간의 포로 인도에 관한 조약이었다.

'본국에 돌아가면, 흑마법사 혐의는 지울 수 있어.'

흑마법사라 하여도 그녀는 엄연히 왕국에 속해 있는 귀족이다.

'여기서 포로 인도 조약을 지껄인다고?'

에릭의 입가가 삐딱하게 뒤틀렸고 승모근이 꿈틀거렸다.

그가 손을 뻗고 주먹을 움켜쥐며 읊조리기를.

"흑마법사에게 자비란 없다."

"그, 그게 무슨-."

펑-!

졸린은 말을 잇지 못했다.

심장이 터져 기울어져 가는 몸.

에릭이 성큼 다가서서 쓰러지는 졸린의 머리칼을 부여잡았다.

검은 머릿결이 우악스레 붙들리고 뒤통수과 귀 뒷면이 드러났다.

'인간이길 포기한 것들이.'

귀 뒤에는 세 개의 줄이 그어져 있었다.

백 단위로 사람을 죽이고는 한다는 말이....

뭐?

포로?

"이런 놈들이 여덟 남았단 말이지?"

에릭은 두 구의 흑마법사 시체를 모아 두고 다시 숲속으로 향했다.

표본 둘은 확보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정화 작업이다.

* * *

"정말 제국이구나!"

가르시안 왕국에 빙의자인 흑마법사가 나타났다.

그는 암암리에 흑마법사들의 조직과 교류하며, 왕국의 변경백령을 집어삼켰다.

1만이라는 수의 제물과 고위 흑마법사들의 조력을 받아 빙의자는 '포탈'을 설치했다.

그것도 제국의 미궁과 연결된 포탈을.

"말콤, 임무 중이니까 수도 관광은 나중에 하지."

"2계층의 탈출 비석도 다 부숴 버렸는데, 뭐가 그리 걱정이냐? 토비스, 그렇게 잡념이 많으니까 네놈 성취가 더딘 거다."

게다가 [흑마법사 클래스] 빙의자는 미궁의 탈출 비석을 파괴하는 아이템까지 지원해 줬다.

말콤과 토비스는 미궁이 열린 직후 포탈을 타고 제국의 2계층으로 이동했다.

그 뒤, 탈출 비석을 다 부수고 남은 한 개를 이용해 제국 땅에 도착한 참이다.

그들의 목적은 하나.

"르웰, 에릭. 둘 중 하나만 잡으면 된다. 빙의자 말로는 몸에 지니고 있을 거라더군."

66만의 생을 수확한 대륙 최악의 흑마법사 플레이어가 사용하던 유물을 찾기 위해서다.

"빙의자라 부르지 마라, 그분은 이제 우리 회사(會社)의 중진이 되실 테니."

"하긴 초대 회장님도 빙의자셨다지?"

제국 수도 아르만.

제3구역의 미궁 광장에서 두 흑마법사가 인파를 뚫고 르웰의 교회를 향해 이동했다.

"그런데 유물을 누가 가졌는지 어떻게 구분하지?"

"유물은 착용하고 있을 테니까 쉽게 알아볼 수 있다고 하더군."

[착용 시 귀속]

빙의자의 아이템에는 [시스템]의 보조를 받는 옵션이 존재한다.

인벤토리가 아니면 보관할 수 없는 아이템이라, 분명 몸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 빙의자의 말이었다.

"도통 믿을 수 있어야지."

"전세 사기 당한 것 때문에 그러는 거냐? 병신, 자기 편한테 속으면 어쩌자는 건지...."

"크흠."

빙의자가 건네준 [투명 물약] 덕분에 두 사람은 아무런 제지 없이 교회가 보이는 장소까지 도달했다.

투명 물약의 효과가 끝나고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템 효과는 확실하군."

"게다가 커뮤니티라는 것도 꽤나 신빙성이 있는 모양이야."

빙의자들의 커뮤니티에는 '리페로제와 에릭'의 악명이 자자했고.

그들이 머무는 3구역 교회의 외관 또한 익히 알려졌다.

애초에 [사진] 첨부 기능이 있으니,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사진을 그림으로 전달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림과 다르게 교회는 없고 고아원만 있군."

"새로 짓나 본데? 자재를 쌓아 두고 사제가 지시를 내리는 걸 보면 말이야."

두 흑마법사는 조금 더 교회의 터를 향해 다가섰다.

"...허어. 저런 미인이 실존했을 줄이야."

"저 요염한 자태, 설명 그대로다. 르웰이 틀림없어."

두 사람은 르웰의 미모에 감탄하며 잠시 숨을 죽였다.

시스루 소재의 딱 달라붙는 성복과 골반을 잘록이는 걸음걸이.

그에 따라 기다란 금발이 찰랑였고 여신의 현현을 떠오르게 할 법한 아리따운 얼굴이 돋보였다.

"엄청난 미인...."

"크흠, 흠. 시작하지."

두 사람은 어느덧 교회와 제법 가까워졌다.

"얘들아, 원하는 디자인이 따로 있을까?"

"르웰 사제님! 나는 예배실에 기둥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나, 나도! 그리고 그 에릭 오빠처럼 커다란- 사람도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있으면 좋겠는데-."

"맞아, 에릭 형 주일마다 혼자 참회실에 있는 거 불쌍했어."

르웰과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함께하는 이를 배려하는 마음이 묻어나는 일상적인 대화였다.

이는 곧 평화다.

"어린것들은 우리가."

"그래, 수고비는 있어야겠지."

흑마법사들은 평화 속에 피어날 절망을 기대하며 기운을 일으켰다.

구오오오오오오―

흑마력의 파동이 일고.

두 사람은 각기 모시는 악마를 떠올리며, 마법진을 그렸다.

얼굴에는 선명한 네 줄이 드러났다.

절뚝-. 절뚝-.

그때 웬 절름발이 하나가 다가오는 게 아닌가?

얼굴 한 면이 흉터로 가득했고 허리춤에는 투박한 검을 찬 남자였다.

"부유한 제국도 다 허명이야."

"맛대가리 없는 수확은 사절인데, 네놈이 먹는 건 어떠냐?"

실없는 농담을 하며 흑마법사들은 주문을 이어 나갔다.

마법진을 완성시키고 소원을 빌면 악마가 이를 이뤄 줄 터였다.

우오오오오오오―

거대한 산양을 닮은 괴물.

머리가 넷 달린 트롤의 형체.

두 악마가 마법진의 형태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끄히히-. 합법적인 성취의 시간이로다!"

웬 노인네의 센소리가 들려왔다.

"헤헤, 마르코가 칭찬해 주겠다."

"그러겠다!"

어느새 양옆으로 가면을 쓴 여자 둘이 나타났고.

"이러니 보스가 마음 편히 나다니질 못하는군."

절뚝-.

다리를 저는 흉한 사내는 계속 흑마법사들을 향해 다가섰다.

그가 말하기를.

"늙은이 한 놈은 네가 먹고 남은 하나는 생포한다."

"끄히히히힛-! 얼마 만의 합법적인 포식이냐!!!"

스릉.

절름발이가 검을 뽑았다.

"미친놈들인가?"

"저 늙은이 우리랑 동족인데...."

"얼굴에 표식도 없는 쓰레기가 뭔 동족이라고."

흑마법사 말콤과 토비스는 서로를 곁눈질로 바라봤다.

여유로운 척 말을 늘어 두지만, 명백히 이상한 상황임을 알아챈 것이다.

'마법진이 완성되었는데, 아무런 소란이 일지 않는다.'

커다란 악마의 형상이 두 개나 제국 수도에 나타났다.

그런데도 사방이 고요했다.

절뚝-.

다가오는 절름발이의 발걸음과.

"끄히히-."

웃어 젖히는 노인의 웃음이 전부.

"무슨 짓을 벌인 거냐?"

흑마법사 말콤이 묻는데, 이상한 말이 들려왔다.

"네놈이 말이 많을 것 같군."

"끄히히히-! 남은 하나는 내 거다!"

네 개의 줄을 지닌 흑마법사.

어지간한 기사는 잡아먹을 강자임은 틀림없었다.

분명 그랬는데.

절뚝-.

눈앞의 절름발이에게는 도무지 견적이 안 보였다.

'권능이 안 먹혀.'

악마는 계약자에게 하나의 권능을 내려 준다.

말콤이 얻은 권능은 약자멸시(弱者蔑視)로, 먹잇감을 사냥하는 데 최적화된 힘이다.

"찢고 튀자!"

말콤의 외침에 토비스가 끄덕였다. 흑마법사끼리 권능의 공유는 기본이다.

"내가 시간을 벌지."

순식간에 토비스가 권능을 발현했다.

"톨-칸 님이시여-. 권능을 보여 주소서-!!"

꾸드득.

흑마법사의 주문에 반응해 머리 넷 달린 트롤의 형체가 몸을 움직였다.

양옆에 달린 머리는 좌우의 가면을 쓴 여아들을 바라보고.

앞에 달린 머리는 절름발이를 노렸으며, 뒤통수에 달린 머리는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깡마른 노인을 향했다.

우어어어어―

섬뜩한 소음이 일었다.

트롤의 입이 찢어지듯 열리고 검은 액체가 줄줄 흘렀다.

그것들은 사람의 형체를 이루며, 네 사람을 향해 움직였다.

"하수인을 소환하는 권능. 수준은 낮지만 확실히 쓸 만해."

말콤은 토비스를 바라보며 감탄을 늘어 뒀다.

그의 손에는 티켓처럼 생긴 종이가 들려 있었는데....

[길드홈 전이권]

신성의 기적도 아니고.

마법진의 공간 연결도 아닌.

"빙의자의 물건."

[시스템]의 혜택을 받는 물건이었다.

저걸 찢으면 두 사람은 본거지로 이동하게 될 것이다.

분명 그랬지만.

"시스템 상점의 물건이군."

절뚝-.

어느새 절름발이가 코앞에 서 있었다.

"대, 대체 무슨...."

게다가 말콤의 손에 들린 티켓 두 장이 사라졌다.

그것은 두 쌍둥이의 손에 들려 있었으니.

"이거 보스가 못 사는 물건인데?"

"보스가 좋아하겠다."

도통 영문을 모르겠던 찰나에.

스륵-툭.

잭슨의 검이 움직였다.

그저 발도(拔刀)요, 검을 뽑았다 집어넣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검은 순식간에 뽑혔다 사라졌는데, 그 궤적을 따라 푸르른 오러가 넘실거렸다.

그리고 그 아래로.

투둑-데구르르.

핏물과 함께 검은 심장이 하나 떨어졌다.

심장은 여전히 박동하고 있었고 심장을 잃은 흑마법사의 몸은 진흙처럼 무너졌다.

그것들은 심장을 향해 꿈틀꿈틀 움직였다.

"마, 말콤?"

홀로 남은 토비스는 그 기괴한 현상에 뒷걸음질 쳤다.

그러고는 이상함을 느꼈다.

'내 권능이?'

수확한 영혼을 매개로 망자를 불러오는 권능이....

"쩝쩝- 흠, 네 줄이라 그런지 영양가가-."

늙은이의 식사로 전락한 게 아닌가?

모든 소환수가 사라졌고.

깡마른 노인은 어느새 보통의 체구로 변해 있었다.

"먹어라, 늙은이."

끄히히히히히히히

사방에 섬뜩한 웃음이 번졌다.

살아남은 토비스에게 늙은이가 권능을 발했다.

"포식."

악마를 부르지 않는다.

마법진을 그리지 않는다.

노인의 흑마법은 자신을 매개로 삼은 것이었으니, 그저 권능을 휘둘렀을 뿐.

쩌억-.

노인의 몸이 검게 부풀더니 토비스를 가둬 버렸다.

검은 장막 속에서 소름 끼치는 소음이 흩뿌려졌다.

"여전히 역겹군. 추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쩌적-쩍. 쯔악-.

게걸스러운 식사 소리에 잭슨이 투덜거리며 심장을 주워 들었다.

쿵-쿵. 맥동하는 흑마법사의 심장을 혐오감 가득한 눈으로 째려보고 있자니.

툭.

잭슨의 어깨에 손이 올라왔다.

'뭐지?'

쌍둥이는 결계를 이루고 있고.

늙은이는 밥을 먹느라 정신없는 상황이다.

흑마법사 하나는 먹혔고 하나는 심장의 형태로 생포되었다.

누구지?

'내가 기척을 못 잡아?'

잭슨이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특급 보호 대상의 얼굴이 보였다.

"흐읍-!"

지근거리에서 본 미모의 사제 르웰이다.

'보스가 기를 쓰고 지키려는 이유가 있어.... 절세 미인 그 자체군.'

잭슨의 흉터가 마구 꿈틀거렸다.

책잡힐 일이 없게 시선을 하늘 높이 올리며 미간에 힘을 빡 줬다.

그때 르웰이 묻기를.

"에릭의 부하랬지?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을 좀 해 줄래?"

31화 재림(再臨) (4)

"귀찮은 일은 이제 끝났군."

신성을 다루는 성기사에게 있어, 흑마법사의 온전한 시체를 얻는다는 건 제법 귀찮은 일이었다.

빙의자가 죄악이 된 큰 이유가 바로 흑마법사와 몬스터다.

그것들은 신성력에 닿으면 몸이 타 버린다.

'이제 힘 조절은 필요 없겠어.'

흑마법사를 신성력으로 죽이되 몸을 상하지 않게 하는 건 제법 귀찮은 일이었다.

에릭의 신성력은 흉포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그런 힘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에릭이 그런 귀찮음을 감수한 이유는 간단했다.

"네 줄이 1억, 세 줄이 1천만."

황실 마탑이 돈을 주고 사 가기 때문이다.

네 줄과 세 줄.

도합 1억 1천만 원의 금액이었으니, 제법 큰 부수입이 되어 줄 거였다.

'나머지는 두 줄 정돈가?'

황실 마탑은 세 줄 미만의 흑마법사 사체를 구매하지 않는다.

고블린 숲을 가득 메운 흑마력에 비해, 나타난 흑마법사들의 수준은 아주 형편없었다.

확실히 십 년 전 쯤보다, 흑마법사들의 질이 떨어졌다.

'만 단위로 제물을 바친 놈들이 넘쳐 나는 건....'

그거는 또 그거대로 문제였지만.

에릭이 어릴 적에는 전쟁이 잦았다.

제국과 세 개의 왕국.

거기에 왕국끼리도 서로 창칼을 겨눴다.

그때에 비해 상황이 더 좋았을 뿐이지, 에릭은 안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날카로워졌다.

'대격변 패치가 곧이다.'

이 시기에 흑마법사가 등장했다는 것은 모종의 전조 현상일지도 몰랐다.

흑마법사를 상대하며 날카로워진 기도만큼, 에릭의 생각도 더욱 예리해졌다.

[업적-흑마법사 사냥꾼]

천의 흑마법사를 없애고 얻어 낸 칭호.

게임처럼 머리 위를 둥둥 떠다니는 형태는 아니었고, 오직 에릭의 너덜너덜한 상태창에서만 보이는 문구로.

특수한 패시브 효과를 제공한다.

"예민해지는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단 말이지."

에릭의 오감은 보다 선명해졌다.

칭호에 대한 설명은 없었지만, 에릭이 경험한 바에 따르면.

'흑마법사 혹은 흑마력 근처에 가면 감각 수치가 +100% 증가.'

거기에.

'신성력이 더 예리해지지.'

[방어력 관통 +100%]

이 정도의 옵션일 것이다.

물론, 현실의 에릭은 여타 빙의자와 달리 스탯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업적으로 인한 보너스는 적용되는....

'잡종 비슷한 거지.'

잡종이건 뭐건, 에릭이 강력한 존재임은 틀림없다.

'잡종이라 살아남은 거고.'

잡종이었기에 기술을 익히고 힘을 연마하였고.

그렇기에, 흑마법사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강대한 신성을 휘두르는 것이니.

"생존자가 제법 많군."

에릭은 가까운 흑마력을 쫓아 이동했다.

그곳에서 악마에게 저급 모험가들을 바치는 흑마법사를 마주친 상황이다.

"-흐익!"

흑마법사는 겁에 질렸다.

세상 모든 것을 뒤덮는 찬란한 신성력이 흑마법사의 눈앞을 가득 매웠다.

싸아아아아.

신성이 바람을 타고 넘실거렸다.

검게 물든 대지 위로 푸릇푸릇한 생기가 맴돌고, 축 처진 나무들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죽음이 내려앉은 대지가 생기로 넘실거리고 있으니.

그 중심에는 거대한 성기사 에릭이 오롯이 서 있었다.

그가 흑마법사를 보며 말하기를.

"-사라져라."

에릭이 손바닥을 내리쳤다.

힘 조절은 없었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돈도 안 되는 두 줄 따리 흑마법사의 몸뚱이를 챙길 필요는 없으니까.

쩌저적. 쿵!

에릭은 한껏 흉포해진 신성을 휘둘렀다.

푹- 거대한 손바닥 형태로 땅이 파이고 그 위로 거대한 금빛 기운이 솟구쳤다.

신성은 흑마법사를 통째로 태워 정화시켰다.

으어어-.

허공에 떠오른 악마의 형체가 무너지고.

"-성불."

투박한 음성을 따라 희뿌연 연기로 화하여 사라졌다.

"신의 품에서는 편안하시기를."

흑마법사를 찍어 누르고 신성으로 태워 버렸으며 악마를 정화시켜 영혼을 구원했다.

일사천리로 이뤄진 모든 절차에서 에릭의 묵념이 가장 긴 시간을 차지했다.

싸아아―.

입자로 변해 사라지는 영혼들.

어느새 주변은 숲 본연의 모습을 되찾았다.

우거진 수풀과 드높은 푸른 나무.

본래 녹색 고블린이 숨어 있어야 할 장소지만, 남아 있는 몬스터들 역시 신성력에 소멸했다.

'남은 건 모험가들뿐인가?'

짜악!

에릭이 손뼉을 마주치자.

쩌엉- 공명음과 함께 금색 원형 고리가 사방으로 퍼져 갔다.

[광역 정화] 신성 주문이 사용된 것이다. 고리에 닿은 모험가들은 정신이 되돌아왔다.

"허억-. 서, 성기사님."

"젠장... 윌이.... 크흑."

누군가는 에릭을 보며 안도했고.

또 누군가는 이미 제물로 사라진 동료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에릭은 살아남은 생존자들을 확인한 뒤, 시선을 돌렸다.

거대한 금빛 기둥이 저 멀리 솟구쳐 있었는데.

이는 에릭이 세워 둔 '지침'이었다.

'두식이가 잘해 주고 있겠지.'

세 빙의자가 조금 신경 쓰이긴 했다마는.

당장은 생존자가 우선이다.

[광역 정화]의 고리가 생존한 모험가들을 스쳐 갔다.

마지막 열을 지날 때쯤, 에릭이 입을 열었다.

"다들-."

저 기둥을 향해 걸어라.

분명 에릭이 그리 말하려고 했었는데....

"아아악-!!! 뜨거!"

정화에 스친 한 모험가가 괴성을 지르는 게 아닌가?

응?

에릭의 고개가 45도쯤 기울었다.

* * *

"빙의자 1호야!"

"예! 두식 형님!"

생존자를 규합하면서, 박창호는 유능함을 인정받았다.

"거참, 쓸모가 많구만. 특별히 네놈은 나를 형님으로 불러도 된다."

그 결과 장두식을 형님으로 모시게 되었다.

여전히 강풍호는 신성 기둥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쓰였고 니시다 료는 할 일 없이 멀뚱거리는 게 전부였다.

그랬었는데,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저-기 숨어 있는 놈들, 빙의자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냐?"

장두식의 부름을 받은 박창호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때 마침 생존자 무리가 다가왔다.

"거참, 또 제국군이구만."

모험가들과 달리 제국군은 상대가 귀찮았다.

장두식이 대화를 위해 떠났다.

남겨진 박창호는 장두식의 질문을 떠올렸다.

저- 멀리 수풀에 사람 두 명이 숨어 있더라고.

'수용소에 갇히지 않는 놈들인가?'

빙의자는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아졌다.

잡힌 놈들, 죽은 놈들을 빼면, 나머지는 숨어 사는 놈들이라 봐야 할 터였다.

박창호가 고민에 빠져 있자니.

툭.

"창호 오빠, 어쩌게요?"

강풍호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예쁜 눈망울이 반짝였는데, 살짝 촉촉해진 느낌이었다.

어째 슬퍼 보이는 것이....

동족을 팔아?

그런 느낌이 물씬 풍겨 왔다.

같은 빙의자들끼리 서로를 밀고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어쩌지....'

제국군 생존자를 만난 덕분에 생각할 시간을 벌었다.

장두식이 몽둥이를 휘두르는 모습으로 보아, 저쪽의 책임자도 꽉- 막힌 귀족일 터.

그때였다.

"그 씹새끼들, 다 신고하자."

니시다 료의 제안이었다.

"병신 같이 숨어 사는 주제에, 우리 잡혔다고 맨날 농락질이나 하는데, 박창호 너는 화도 안 나냐?"

드물게.

니시다 료의 입에서 정론이 나왔다.

[뷰웅신들? 수용소에 갇혀서 죽을 날만 기다리죠?]

[사진]

[한잔해~ 아, 모험가 꿀잼이다.]

빙의자들의 커뮤니티다.

수가 늘기 전까지는 정보 교류와 서로의 생존을 위한 커뮤니티였는데, 지금은 달라졌다.

글의 수가 미친 듯이 늘어났고.

[513,412]

이용자 수도 터무니없이 늘어났다.

아무리 그래도....

50만 명이 넘는다고?

"창호야, 저 두 새끼도 분명 커뮤에 우리 조롱 글 올렸을 거다."

박창호가 혼란스레 커뮤니티를 바라보고 있을 때, 니시다 료가 그를 보챘다.

빙의자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우리처럼 잡혔거나....'

가르시안 왕국 같은 데 터를 잡고 무리를 이뤘거나.

마지막은 빙의자들과 섞이지 않은 채 현지인들 사이에 숨어 사는 자들이 있다.

띠링-.

신규 게시글이 올라왔다.

[와 ㅅㅂ 에릭 저거 개또라이네.]

[사진]

[흑마법사 4줄 3줄 보냈더니 교회 앞에 소드마스터가 죽치고 있네ㅋㅋㅋㅋ]

"어...?"

"흐잇."

"이, 이거 우리 에릭 국장님 얘기죠?"

세 빙의자가 경악했다.

어차피 잡힌 몸이다.

신성을 때려 박은 마법진까지 몸에 심긴 신세가 아닌가?

그리하여, 박창호는 결단을 내렸다.

"우린 이쪽에 붙는다."

강풍호와 니시다 료도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장두식이 몽둥이를 툭툭- 치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서 저- 두 마리는 빙의자가 맞냐?"

잊어버리지도 않고 했던 질문을 다시 꺼냈다.

그에 박창호가 답하기를.

"빙의자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보고드릴 사안이 있는데...."

장두식이 몽둥이를 까딱였다.

박창호는 침착하게 커뮤니티에 나온 내용을 읊조렸고.

"미궁과 밖의 시간비가 다른데, 어떻게 소통이 된단 말이냐?"

장두식은 도통 빙의자들의 말을 믿기 어려웠다.

저층은 좀 덜하다지만, 그래도 엄연히 미궁과 밖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그렇기에 물은 건데....

"그 시간비에 맞는 차이를 두고 게시글이 올라옵니다."

니시다 료가 명쾌한 답을 내밀었다.

"그래서 미궁에서 댓글을 달면, 밖에서는 수천 개의 댓글을 1초 만에 쓴 것처럼 보이죠."

니시다 료가 보이는 당당함이라니....

믿을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렇게 되니 장두식의 머릿속이 아주 복잡해졌다.

"거, 씨벌 것들이 정신이 나갔구만."

장두식은 반삭 머리를 마구 문질렀다.

숫제 미쳐 버리겠다는 느낌으로.

"형님한테는 내가 말하마."

아니, 어쩌면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한 게....

"대체 무슨-."

"에릭 형님이 6살 때 별명이 심판자였다."

심판자 에릭.

깡마른 꼬마 아이가 흑마법사를 패 죽이고 다녔다.

제 몸보다 큰 검을 질질 끌고 분쟁 지대를 떠도는 꼬마였다.

그는 흑마법사가 보였다 하면, 죄다 도륙 냈다.

흑마법을 익히지 않았어도 조력자도 전부 죽였다.

그들의 돈을 받아먹은 귀족까지 가리지 않고 전부 죽였기에.

"그때의 형님은...."

악마보다 더 악마 같았수다.

장두식이 말을 끝맺지는 않았지만, 세 빙의자는 그 뜻을 이해했다.

'우리 망한 듯?'

서로 흘깃 눈짓을 주고받았다.

저 장두식이 겁을 먹고 움츠러들 정도였으니, 에릭이 화가 난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저 두 놈은 저희가 잡아 오겠습니다!"

박창호는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려 들었다. 세 빙의자가 숲속을 향해 떠났다.

장두식은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거참. 정이 좀 드는가 싶었는데....'

마치 고인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 * *

"에릭, 빙의자들 사이에서도 강대한 흑마법사들이 다시 나타날 거야."

떠나기 전 스승이 말했었다.

"그때는 네가 홀로 그들을 상대해야겠지."

각오는 충분히 다졌다.

스승과 나눴던 대화가 현실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이미 흑마법사는 다시 나타났다.

그것도 빙의자들의 조력을 등에 업고서.

"오오-! 형님, 오셨수?"

에릭이 지침을 세웠고 장두식은 그 앞을 지켰다. 외길 사이로 거대한 에릭이 보였다.

그는 미궁 2계층의 모든 흑마법사를 없애고 돌아왔다.

에릭의 뒤로는 둥둥- 떠다니는 두 구의 시체가 보였다.

"황실 마탑에서 값을 후하게 쳐주겠수다. 형님은 대단하오!"

에릭이 세운 거대한 신성의 기둥 앞에는 천에 달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거, 뭐냐. 형님 덕분에 사람들이 아주- 많이 살아남았수다! 다들 아스티아 님을 부르짖으며 엉엉 울고 있는 게 보이지 않수?"

그 길목에서 장두식이 에릭을 찬양하고 들었다.

'이 새끼, 뭘 잘못했나?'

에릭은 장두식의 지나친 환대를 보며 이질감을 느꼈다.

장두식 뒤쪽으로는 일렬로 서서 차렷 자세를 유지 중인 열 명의 사람이 보였다.

'박창호, 강풍호, 니시다 료.'

세 명은 잘 아는 얼굴인데, 나머지는 처음 본다.

"거, 형님. 이놈들 숨어 있던 빙의자요. 모험가 길드도 눈깔이 병신인가 보오. 형님처럼 척- 보면 척- 할 줄 알아야지."

의문 어린 에릭을 향해 장두식이 보고 사항을 읊었다.

"저급 모험가는 관리가 힘들겠지. 두식아, 모험가가 어디 한둘이냐?"

"역시! 형님은 모르는 게 없수다."

수가 많은 저급 모험가다.

생계로 미궁에 들어서는 자들이 태반이었으니, 몸을 숨기기에는 적합했겠지.

에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묻기를.

"근데 너 무슨 잘못 했냐?"

"그, 그럴 리가 있겠수? 그냥 형님 기분 좋으라고-."

장두식은 왕만 한 눈을 끔뻑거리며, 모르쇠로 능청을 떨고 있었는데....

흠칫-.

니시다 료가 몸을 움찔했다.

[즉사 감지] 스킬이 계속 경종을 울려 댔다.

'이대로 가면 죽을 거야.'

두려웠다.

그리고 니시다 료의 직감은 분명히 틀리지 않았다.

에릭이 움찔한 니시다를 바라보고 있자니.

"거, 형님. 사실은 말이요-."

장두식이 고해성사를 하듯 말을 시작했다.

빙의자들의 커뮤니티.

그곳에 올라온 르웰의 교회의 참상이 주된 얘기였는데....

"그 씹새끼들이 뭐?"

르웰은 네임드 NPC였고, 흑마법사 사태를 함께 겪은 존재다.

그녀의 위험은 에릭 또한 예정한 바였으나.

"가, 가르시안 왕국 백작령에 흑마법사들이 모였수다. 그러고는-."

빠직.

예상하고 대비했다.

그 덕에 르웰은 무사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에 에릭이 성큼 내디뎠다.

"두식아, 일단 나가자."

장두식이 에릭을 따라 뛰면서 몽둥이를 까딱였다.

그에 멀뚱거리던 빙의자들도 오리 새끼처럼 장두식을 따라 걸었다.

"거, 형님 어쩌려고 그러슈?"

성큼 내딛는 에릭을 따르며 장두식이 물었다.

'형님이 전쟁터를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에릭의 성격상 고아원을 비울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생각이 없이 그러는 건 아닐 것 같은데.'

분노한 에릭의 얼굴인데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저 미소는 분명.

'누굴 개박살 내겠다는 의미요.'

저 미소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아스라졌던가?

그때 에릭이 말하기를.

"두식아, 원래 본진 털이는 내 손으로 하는 게 아니다."

32화 복수는 백 배로 (1)

대제국의 재상쯤 되면, 손짓 하나로 세상을 부릴 수 있을 것만 같겠지만....

하나뿐인 딸만큼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에리카, 그게 그렇게 어렵다는 말이더냐?"

"재상 각하,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재상의 명령에 에리카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의 안타까운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붉은 눈썹이 축- 처졌다.

"가문의 중대사와도 다름없는 일이다."

"가주님의 지시라 하여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재상으로서의 명령도.

공작가 가주로서의 지시도.

에리카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에 공작은 마지막 남은 수단을 꺼내 들었다.

"에리카, 아비로서 부탁하마."

"...."

"네 어머니를 만난 이후로 이런 감정은 처음이다."

재상이자 공작은 에리카의 손을 부여잡고 애원하다시피 읍소했다.

쨍-.

어찌나 급하게 손을 뻗었는지, 테이블 위에 놓인 고급스러운 찻잔이 전부 깨져 버렸다.

모양이 영 좋지 않았다.

'말년에 노망이 나셨나.'

당사자인 딸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그러는 모습에 가슴이 미어질 뿐이었지만.

"그 반지."

아무리 그래도, 커다란 핑크 다이아 반지를 르웰에게 전해 주라는 지시만큼은 따를 수가 없었다.

"암시장에서 사셨다고 하셨지요?"

에리카는 에릭을 제법 잘 아는 입장으로.

"원래 가격의 10배를 주셨다 하셨고요."

에릭의 행동 원리 또한 백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열 배면 에릭이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 아니야.'

에리카는 아직 아버지에게 기회가 남아 있음을 알았다.

그렇기에, 그를 만류했다.

"아버지, 그 반지를 열 배에 다시 사신 건 에릭이 준 기회입니다."

"에릭 그놈이 반지를 암시장에 풀었겠지.... 조금 돌아서 접근하라는 의미가 아니겠느냐?"

재상이 턱을 쓸었다.

반지를 암시장으로 돌려 전달한 것의 의미를 헤아렸다.

'천천히 접근하라는 뜻일 테지. 그래도 괘씸하군.'

암시장에서 반지를 다시 얻고 그 경위를 조사했을 때, 쉬이 넘길 수 없는 보고서를 읽었다.

[제5구역 암흑 조직의 보스 마르코 – 에릭의 수하로 추정됨]

'황제폐하께서는 기뻐하셨지만.'

재상의 입장에서는 썩 달갑지만은 않은 소식이었다.

에리카의 짝으로 점찍어 둔 놈이, 암흑 조직의 보스를 수하로 둬?

재상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흐음.'

에리카와 에릭이 결혼하고.

자신과 르웰이 맺어진다면....

'나쁘지 않아.'

두 사람이 두 아이의 부모가 되면 그만이겠군.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인 재상이다.

그저 되는 대로 생각하고 결론지어 버렸다.

재상이 기다란 수염을 파르르- 떠는 모습에 에리카의 눈썹이 좁혀졌다.

'또 헛된 망상을 하고 계시는구나.'

에리카가 말한 기회는 재상이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르웰과 다시 이어질 기회를 의미한 게 아닌, 그녀에게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를 뜻하는 건데....

문득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에릭, 르웰 사제님은 인기도 많으신데, 왜 남자만 만났다 하면 불같이 화를 내는 거냐?"

"어머니와 같은 존재에게 웬 왈패가 집적거리는 꼴을 그냥 볼 순 없지 않습니까?"

"그자는 소백작.... 아니, 미천한 천민인 너는 이해 못 하겠구나."

"뭐?"

그때 어린 에릭의 승모근이 꿈틀거렸고.

"백작가를 물려받을 귀족을 왈패라고 부르는 건 너밖에 없을 거야."

에리카는 모르는 척 여상하게 말을 이었다.

그때 에릭이 뭐라 했더라?

빠악-!

"나보다 강하지 않으면 르웰 사제님을 넘볼 수는 없다."

꿀밤을 내리치면서 저런 개소리를 지껄였었다.

그때는 몸이라도 작았는데....

어린 에릭은 자라나서 아주 커다래졌다.

압도적인 피지컬과 웅혼하고 거대한 신성력을 품은 진짜배기 남자가 되었다.

그것도 지위와 힘을 고루 갖춘 상남자가.

'사제님이 결혼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겠지만....'

사실 에리카에게는 르웰이 재상의 반지를 받게 만들 비책이 하나 있었다.

'반지만 주는 건 가능하겠지.'

세공 스타일만 빙의자들의 세련된 디자인으로 바꾼다면, 분명 르웰은 저 반지를 가져갈 것이다.

유독 빙의자들이 만들어 낸 복식을 즐겨 입는 르웰이다.

'명품을 좋아하시니까.'

잦은 교류로 에리카는 르웰의 취향 또한 잘 알았다.

'진짜 반지만 받고 마시겠지만.'

그렇다 해도 르웰과 공작이 맺어질 가능성은 0에 수렴했다.

르웰을 보고 자란 에릭의 눈이 높듯이, 에릭을 키워 준 르웰도 눈이 아주 높았으니까.

에리카는 공작을 바라봤다.

붉은 수염이 파르르- 떨리는 걸로 보아하니, 아직도 헛된 망상에 사로잡힌 모양이었다.

철혈의 재상이요, 대제국의 2인자다.

'그런 주제에 또 사랑에는 약하시지....'

에리카는 공작에게 현실을 직시시켜 줄 생각이다.

르웰의 앞에는 에릭이 있으니까.

당대의 최강자가 될 존재가 바로 에릭이다.

당장은 몰라도 훗날 그 분노가 되갚아질 수 있을 테지.

"아버지."

"후후, 으음?"

재상이 망상에서 깨어났다.

그의 눈앞에는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해 보이는 딸의 얼굴이 보였다.

굳세고 결의에 찬.

마치, 제 오빠가 미궁으로 의무를 다하러 떠났을 때와 같은 얼굴이었는데....

"제가 복날 트롤처럼 두드려 맞은 날을 기억하십니까?"

내뱉는 말이 사뭇 이상했다.

"내, 그날을 기억 못 할 리가 있나...."

열일곱의 에리카가 피떡이 되어 실려 온 날이었다.

고위 사제의 신성력이 먹히지 않는 중상을 입었다.

그때 사제가 뭐라 했더라?

"상처를 막은 신성의 기운이 터무니없이 강합니다. 최소한 주교님은 오셔야...."

'신성력으로 상처를 막아 버렸다고 그랬지.'

신을 모시는 자가 치료를 받지 못하게 신체를 훼손시킨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아주 악랄한 수법이었다.

뭐, 그 덕에 에리카가 겸손이라는 것을 조금 배우긴 했다마는....

아비 된 입장으로 가슴이 미어진 건 사실이다.

재상이 턱을 쓸었다.

"그래서 그 얘기를 그런 얼굴로 꺼내는 이유가 뭐냐?"

"그때 저는 에릭의 뺨을 한 대 때렸습니다."

"그래서?"

고풍스러운 다과 테이블 위로 늘씬하게 빠진 에리카의 손이 올라왔다.

기도하듯이 재상의 손을 감싼 채 에리카가 입을 열었다.

"에릭은 백 배로 갚아 주겠다며 저를 두드려 팼지요."

"열 배라는 말이...."

재상의 눈이 핑크 다이아로 향했다.

"아버지, 백 배가 되기 전에 그만두십시오."

재상은 '기회'의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했다.

―Ep. 8 복수는 백 배로.

"거참, 형님! 본진 털이는 남의 손으로 하는 거라면서! 그 이쑤시개는 왜 꺼내 든 거요!"

장두식은 성큼성큼 앞지르는 에릭을 막아섰다.

에릭은 [개벽의 검]을 한 손에 들고 있었는데, 오늘따라 유독 검이 이쑤시개처럼 얇아 보였다.

그 말인즉슨.

그만큼 에릭이 거대해 보였다는 말이며.

"두식아, 남의 손으로 하더라도 내가 직접 개입해야 하지 않겠냐?"

이는 곧 분노의 크기를 의미하고 있었으니.

'이대로 나갔다가는 사달 나겠수다.'

장두식의 머릿속에 몇몇 얼굴들이 떠올랐다.

'따까리들.'

잭슨, 늙은이, 쌍둥이 가면.

장두식의 머릿속에서는 '따까리'로 통일된 존재들로.

장두식은 에릭의 계도를 받아 사람이 되었고, 그들은 '거래'를 통해 삶을 이어 갈 수 있었다.

잭슨의 흉터가 점점 짙어 가는 것에, 장두식은 측은지심을 느꼈다.

'여차하면 그놈들은....'

에릭이 장두식을 대하는 것과 따까리들을 대하는 태도는 명확하게 달랐다.

그래도 여러 일로 오며 가며 얼굴이 익은 사이다.

장두식은 같은 형님을 모시는 입장에서 그들이 더 살아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형님! 아무리 그래도 챙길 건 챙겨야 하지 않겠수?"

장두식은 시간을 벌었다.

에릭의 화가 조금이라도 누그러든 뒤에 미궁을 나가게 할 생각이었다.

'거참, 세계에 재앙을 풀어놓는 것도 아니고....'

잔뜩 분노한 에릭은 그토록 두려웠으니.

"형님, 거 보슈. 아이템이 이렇게나 많지 않수?"

우뚝.

성큼 나서던 에릭의 발걸음이 멈췄다.

에릭이 고개를 돌려 장두식을 바라봤는데....

'캐시템?'

그의 손에는 이질적인 형태의 물건이 들려 있었다.

에릭은 나아가던 방향에서 완전하게 몸을 돌려 세웠다.

'파밍을 참아?'

인간이라면 이를 무시하기 어려울 터.

장두식은 몽둥이로 손바닥을 툭툭- 치면서 에릭이 구축해 둔 [신성 결계]로 걸어갔다.

결계 안에서 겁에 질린 빙의자들이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저것들이 있었지.'

[신성정화]를 하며 발견한 빙의자로,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만큼 르웰이 습격받은 일은 충격이었으니까.

"이놈들 입은 걸 보아하니, 인벤토리에 돈이 제법 있겠수다."

장두식은 에릭을 아주 잘 안다.

그래서 화난 에릭도 멈춰 세울 마법의 단어를 꺼냈다.

"허어-! 흑마법사들이 쓰는 아이템은 황실 마탑이 비싸게 사 주지 않수?"

"빙의자들아 얼마 있냐? 뭐어? 형님! 이놈들 백만 골이나 숨겨 뒀수다!!"

"흑마법사들 옷가지도 뒤져 봐야 하지 않겠수? 형님이 말했잖수? 전투의 꽃은 파밍이다!"

[아이템] [골드] [파밍]

장두식이 내뱉는 말은 자극적이었다.

도파민을 자극하는 원초적인 단어들이었다.

'잭슨이 잘 해결했으니까.'

애초에 르웰이 습격을 받은 것도 아니고, 습격 미수 사건을 잭슨이 미리 제압한 셈 아닌가?

습격한 놈들이야....

거룩한 이름으로 지워 버리면 그만일 테지.

머리가 식은 뒤, 에릭은 몸을 움직였다.

"일단 여기 정리부터 끝내자."

"형님은 빙의자 놈들 인벤토리를 터슈, 나는 여기 흑마법사 시체를 뒤져 보겠수다."

장두식은 흑마법사들의 시체를 살폈다.

아니, 육신은 신성력에 증발했으니까.

남겨진 옷가지를 헤집었다는 게 더 올바른 표현이었다.

"거, 뭔 빙의자도 아닌데, 이런 종이 쪼가리는 왜 숨겨 둔 건지."

장두식이 옷가지 틈에서 기다란 티켓을 내들었다.

"헉-!"

그에 빙의자들이 무심코 침음을 흘렸다.

분노한 에릭을 보며 눈치껏 기척을 죽이고 있었으나....

'저게 왜 NPC한테 있냐?'

장두식의 손에 들린 종이는 무시할 수 없는 그런 물건이었다.

그걸 왜 빙의자도 아닌, 이곳의 주민이 가지고 있는 거지?

그만큼 티켓의 존재가 이질적이었다.

"두식아, 그거 뭐냐?"

작은 소란에 거대한 에릭이 반응했다.

[길드홈 전이권]

시종일관 무표정이던 에릭이 반응을 보였다.

떠오른 아이템 네임태그에 에릭의 눈썹이 휙- 올라갔다.

"길드홈?"

모험가 길드가 아닌, 게임 속 길드 시스템을 말하는 건데....

엔드 콘텐츠.

만렙을 찍고 한 시즌의 막바지에서나 꾸미는 것이 길드홈이었다.

그게 현실에 나타나?

에릭이 니시다 료를 불러왔다.

"조건이 뭐지?"

"그. 마지막 패치에서 길드홈 생성권이 캐시템으로 나왔습니다. 아마 그걸 가진 놈이 빙의한 게 아닐까 싶은데...."

'내가 빙의된 후에 생겨난 패치겠지.'

빙의 시점에 따라 게임 패치 버전이 다른 건 당연했다.

그가 알기로 지금은 [ver665. 프리시즌]이다.

'한번 점검을 해 봐야겠어.'

에릭은 빙의자들을 불러 [상태창]과 [커뮤니티]에 대한 여러 교차 검증을 진행했다.

"미치겠군."

에릭이 미간을 여몄다.

단순히 커뮤니티에서 금지어를 찾아보는 수준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특히 [커뮤니티]의 인원이 그랬다.

'빙의자가 50만 명이 넘는다고?'

후우.

에릭이 한숨을 내쉬자, '흐잇-!' 하며 빙의자들이 뒷걸음질 쳤다.

"대체 언제 빙의자 수가 50만 명까지 늘어난 거냐?"

"저, 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얼마 전까지는 2만 명이 좀 넘는 수준이었는데.... 아니, 미궁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습니다!"

에릭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한 단어가 떠올랐다.

메인스토리, [ver666. 대격변 패치]

에릭의 빙의 후로 [ver665. 프리시즌 패치]가 이뤄졌다.

RPG 게임에서 신규 콘텐츠가 나오기 전에 이뤄지는 패치였다.

'프리시즌 뒤에는 대격변 패치.'

빙의자들을 심문한 결과였고.

모든 국가와 종교 집단이 공통적으로 알아낸 사실이었다.

세계의 멸망이 시작되며 그에 따라 미궁 공략이 강제되는 이벤트였다.

'이미 패치는 시작된 셈이군.'

에릭이 어릴 적에는 빙의자가 100명 정도였다.

열다섯쯤부터는 2만 명 정도로 그 수가 늘어났고.

'먼저 빙의한 100여명의 존재들은 클로즈 베타 테스터, 나머지 2만 명 정도는 오픈 베타 테스터고.'

그렇게 생각해 보면.

'이제 곧 정식 오픈인 셈이로군.'

지금 끌려온 50만 명의 숫자는, 공식적인 시작을 의미한다.

헛된 추측일 수도 있겠다마는.

에릭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얼마 안 가서 세계에 큰 이변이 일어나겠지.'

빠르면 다음 미궁쯤이려나?

이런 쪽의 직감은 언제나 들어맞는 편이었다.

에릭이 생각을 마치자.

"거, 형님 파밍 끝냈수다."

장두식이 몽둥이 끝에 커다란 보따리를 내걸고 다가왔다.

흑마법사의 로브를 엮어 보따리로 만들고 그 안에 아이템들을 담아 온 것이다.

그 성실함에 에릭의 기분이 조금 더 풀렸다.

"고생했다."

에릭은 일행을 이끌고 탈출 비석을 향해 걸었다.

팔짱을 끼고 우뚝- 걷는 모습이 상념에 잠긴 모양새였는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요?'

장두식은 걱정이 많아졌다.

어느새 눈앞에는 탈출 비석이 보였다.

흑마법사들이 부수고 남겨 둔 마지막 비석으로, 달리 수작질을 해 둔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에릭은 비석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거, 형님. 어떡할 생각이요?"

질문은 장두식에게 나왔는데, 에릭은 대뜸 빙의자들에게 말을 걸었다.

"이 티켓을 찢으면, 길드홈으로 이동하는 게 맞냐?"

다가선 에릭이 빙의자들의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섬뜩한 표정에 오금이 저렸다.

니시다 료와 강풍호가 박창호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미친놈들.'

그에 박창호가 관자놀이를 질끈 누르며 읊조리기를.

"지정된 길드홈이 있다면.... 길드홈으로 가집니다!"

에릭이 입가에 미소가 배어 났다.

'신성 폭탄을 배달해 주마.'

33화 복수는 백 배로 (2)

인간은 효율을 추구한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들인 노력에 대비해 가장 큰 결과를 얻으려고 하는, 그런 인간의 욕심을 단어로 만들어 낸 것이 바로 효율이다.

오죽하면 '효율충'이라는 전문 용어까지 탄생했겠는가?

"충-! 국장님 왜 이틀 만에...."

지구와 다른 세계에서도 효율이라는 것은 인류에게 필수불가결한 말이었다.

그런데 고작 이틀 만에 미궁에서 빠져나왔다고?

'저번에도 하루 만에 나오더니.'

미궁 광장을 지키는 제국의 병사는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미궁의 효율이란 안과 밖의 시간비에 있으니까.

기를 쓰고 끝의 끝까지 파밍을 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아직 습격 사건이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군.'

에릭은 미궁 광장을 지키는 병사의 반응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토록 많은 모험가가 있었고 탈출 비석까지 길을 뚫어 줬음에도 정작 탈출한 파티가 하나도 없다니.

'모험가 새끼들.'

에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병사가 주춤- 뒷걸음질 쳤다.

"나 말고 나온 사람은 없었나?"

"예, 에릭 국장님 일행이 첫 귀환입니다!"

목격자도 많았을 건데 그 누구도 탈출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뭐, 생업이 달렸으니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마는....

그래도 흑마법사 문제가 아닌가?

'제국군이야 내부 정리를 해야 하니 남았다고 치지만. 모험가 놈들은....'

에릭의 승모근이 꿈틀거렸다.

그의 눈은 미궁 광장 한쪽 면에 지어진 모험가 길드를 향했다.

[모험가 길드 제국 본부]

거대한 직육면체 건물 위로 길드의 현판이 번들거렸다.

현판 옆으로는, 방패 위로 X자로 교차된 칼과 지팡이의 문양이 눈에 띄었다.

'기강을....'

모험가들 사이에서 발견된 빙의자, 흑마법사를 목격하고도 이를 알리지 않은 모험가들.

모험을 하겠다는 놈들이 흑마법사를 방치해?

"후우."

아니지.

에릭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만찬에서 황제한테 얘기를 해 봐야겠어.'

그 에릭이라 해도 모험가 길드는 함부로 건들 수 없다.

세상 곳곳에 퍼진 모험가 길드.

그들은 마경의 관리라는 막중한 의무까지 짊어지고 있었으니까.

에릭은 마음을 가다듬고 장두식을 불렀다.

"두식아, 병사들한테 사정 설명하고 에리카 경을 불러서 미궁 광장을 봉쇄하라고 해라."

"아, 알겠수다."

보통 뭔 개소리냐고 물었어야 할 장두식인데, 흑마법사 건으로 머리가 명석해졌다.

흑마법사가 나타났고 빙의자가 엄청 많아졌다지.

'형님이 참느라 고생이구려.'

장두식이 머리를 벅벅- 긁고 있을 때, 옆에서 '흐익-!'하는 비명이 들려왔다.

장두식이 흘깃 눈동자를 굴렸다.

"이 땅을 수호하소서-."

화려한 금빛을 뿜어 대며 에릭이 양팔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한마디 기도문을 읊조리자 미궁 광장 위로 거대한 신성이 피어올랐다.

키이이잉-!

사방에 쨍-한 신성의 빛이 공명음을 흩뿌렸고, 드넓은 미궁 광장에 찬란한 금빛 돔이 생겨났다.

그에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신을 부르짖었다.

"아아-! 아스티아 님이시여! 그이가 무사이 돌아오게 해 주소서!"

"...부디, 아내가 무사히 귀환하기를."

그 누가 봐도.

에릭이 거대한 축복을 내려 준 느낌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해 주마.'

미궁에서 나온 모험가들이 제멋대로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려는 속셈이다.

물론, 일반 모험가들이야 편하게 돌아다니겠지.

하지만 숨어 살던 빙의자라면 어떨까?

'공범이 있을 가능성.'

흑마법사다.

착한 흑마법사는 죽은 흑마법사뿐이요, 그들과 협력한 이들도 흑마법사와 다름없는 존재였으니.

"빙의자 관리국에서 너희를 데리러 올 거다."

금빛 돔 안에서 멀뚱거리고 있는 빙의자들을 향해 에릭이 무뚝뚝한 한마디를 남겼다.

빙의자들은 성큼성큼 멀어져 가는 거대한 등판을 바라보며, 겁에 질렸다.

* * *

"에릭!"

교회 정문을 열고 에릭이 나타나자, 르웰이 총총- 달려왔다.

'무사하셨군.'

알고 있던 사실인데, 실제로 확인하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에릭의 예민해졌던 기분이 조금 풀렸다.

달려드는 르웰을 보며 에릭이 팔을 활짝 벌렸는데.

짜악-!

등짝 스매시가 날아왔다.

"이이! 에릭-!!"

르웰이 뒤로 밀려났다.

에릭은 우뚝- 서서 그녀를 내려다봤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

"왜 화가 나셨습니까?"

"나 몰래 사람을 붙인 거니?"

"교회가 무너질 때 잭슨과는 안면을 트지 않으셨는지요."

자재가 잔뜩 쌓인 교회의 터.

그 한복판에서 르웰이 팔짱을 낀 채 에릭을 올려다봤다.

그녀의 옆에서는 흉터를 일그러트린 잭슨이 고개를 내리깔고 있었다.

마치 죄인과도 같은 모습.

"쟤들!"

르웰이 손가락으로 한구석을 가리키자.

"끄히히-!"

늙은이가 기겁했다.

그는 고아원과 연결된 통로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흑마법사를 포식해 퉁퉁해진 뱃살이 통로 틈으로 삐져나왔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기둥 옆으로 두 개의 가면이 보이는 것이....

"넷 다 들켰군요."

에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뚱뚱한 노인은 내가 4구역으로 구휼을 갈 때마다 보던 사람이고! 저 쌍둥이는! 어! 쟝의 마도구 상점 앞에서 팝업샵 운영하던 애들이고!"

르웰이 허리에 손을 얹고 잔뜩 성을 냈다.

굴곡진 몸매가 더욱 부각되었다.

에릭이 눈을 부릅뜨고 잭슨과 늙은이를 살폈다.

둘 다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르웰 사제님을 위해 준비한 경호원입니다."

"미리 말하면 어디 덧나니?"

"크흠. 죄송합니다. 저들의 신분이...."

"귀족이 아니면 다 같은 사람이지! 무슨! 신분을 따져?"

에릭의 변명에 르웰이 또 한 번 발끈했다.

신을 모시는 사제답게 정론을 내뱉었으나.

"그게 두식이랑 비슷한...."

에릭이 한마디 덧붙인 순간.

"뭐?"

르웰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깡패랑 비슷한 종자라고?"

르웰은 장두식을 싫어한다.

에릭의 계도가 이뤄지기 전.

장두식은 진짜배기 왈패였다.

그때 장두식은 르웰에게 말실수를 해 버렸다.

"거, 예쁘면 뭐 합니까? 나이가 사십을 앞뒀는데. 그리고 누님한테 누님이라 부르는 게 대체 무슨 문제요?"

에릭이 르웰의 나이를 알게 된 순간이었다.

"너는 왜 저런 애들이랑 어울리고 그러니?"

"다 같은 사람이라 하지 않으셨는지...."

"사람이 사람 같아야 사람이지."

르웰이 흘깃- 늙은이와 잭슨을 째려봤다.

두 사람은 눈을 감고 있었는데, 어째 그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더욱 내리깔았다.

"저 아이들은?"

"쌍둥이들은 순수.... 흠. 착한 애들입니다. 머리가 좀 나빠서 그렇지."

"두식이처럼?"

"그.... 예, 뭐. 비슷하다고 봐야죠."

"그렇구나."

르웰이 안타깝다는 듯이 쌍둥이 가면을 바라봤다.

체구를 보아하니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쟤들은 어디서 지내니?"

"제5구역의 빈민가에서 지냅니다."

에릭은 정직하게 사실을 읊었다.

르웰을 상대로 숨길 수는 있어도 거짓말은 통하지 않으니까.

"여기서 지내라 하는 건 어때?"

르웰은 아이들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가면을 쓴 두 아이는 열 살 언저리로밖에 안 보이는 체형이었다.

"고아원에 빈 방도 많잖아?"

언제 화가 났냐는 듯이, 차분한 어조와 다정한 눈빛이었다.

그에 에릭이 거대한 몸을 숙이고는 르웰의 귓가에 속삭였다.

"뭐?"

르웰이 파르르- 떨었다.

충격적인 말을 들은 모양인지 몸까지 휘청거렸다.

에릭은 르웰의 허리를 붙잡고 그녀를 진정시켰다.

"설마...."

르웰의 시선이 잭슨과 늙은이를 향했다.

"비슷합니다."

"세상에."

르웰의 입이 쩍- 벌어졌다.

"리페로제 님의 안배...."

"안배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에릭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말하기를.

"광신도적인 스승님의 망상이 도졌을 뿐이죠."

"일단, 따로 얘기하자."

르웰이 에릭을 이끌고 고아원으로 들어섰다.

교회는 무너졌어도 연결 통로는 멀쩡했다. 두 사람은 통로 끝에 설치된 신성의 막을 지나갔다.

"저 아이들은.... 여기도 통과 못 하겠네?"

아치형 통로를 지나며 르웰이 물었다.

아직도 에릭에게 들은 말에 충격이 가시지 않은 모양인지 몸이 휘청거렸다.

'빙의자의 아이들이라니!'

가히 충격적이었다.

르웰은 뒷목을 부여잡았다.

잭슨과 늙은이가 그 비슷한 존재라 하였으니....

"혹시, 그 잭슨이 아버지니?"

문득, 소드마스터급 강자가 흉터를 줄줄이 단 이유가 생각났다.

신성 치유가 불가능한 존재는 몬스터 혹은 빙의자와 흑마법사뿐이니까.

"그럴 리가요."

에릭이 르웰의 앞을 성큼 내질러 막아섰다.

르웰의 눈에는 드넓은 고아원 복도가 가득 찬 것처럼 보였다.

거대한 에릭이 르웰을 보며 사실을 고해했다.

"그놈이 낳은 자식들입니다."

그놈?

르웰의 뒷목이 더 뻐근해졌다.

에릭이 이름을 숨길 만한 존재.

'그놈'이라는 호칭.

"설마...."

"예, 그 설마입니다."

대륙에 재앙을 풀었던.

최악의 흑마법사 클래스 빙의자.

"저보다 15년 먼저 빙의한 놈이었죠."

르웰의 청록색 눈동자가 축- 내리깔렸다.

그 끔찍한 시절을 떠올리니 절로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그 사건과 연관된 아이들이라니....

끔찍한 기억보다 르웰에게는 아이들에 대한 마음이 더 중요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에릭을 바라봤다.

"사랑은...."

"생산이 더 어울리는 표현이겠죠."

맙소사.

생산이라고?

끔찍한 말이었다.

"조금 설명을 드리자면-."

사랑 없이 태어난 두 아이에 대해, 에릭이 차분히 설명을 이었다.

"스승님, 여기가 그놈이 숨어 살던 곳입니다."

7살의 에릭은 상당히 예민했다.

하루하루가 고통의 나날로.

언제 신성력이 폭주해 몸이 터져 죽을지 모르는 상태였다.

몸은 아파 죽겠는데....

흑마법사를 죽인 뒤처리까지 해야 했다.

"에릭, 세상에 인간 말종들이 너무나도 많지 않냐?"

그런 와중에 두 아이를 만났다.

대륙 최악의 흑마법사를 죽이고 찾아간 그의 은신처에는 두 아이가 잠들어 있었다.

"너는 어쩌고 싶으냐?"

"악의 씨앗입니다. 죽여 없애야 합니다."

에릭은 망설임 없이 3살 남짓한 두 아이에게 대검을 들이댔고.

까앙-!

"에릭, 참거라."

리페로제가 그를 막아섰다.

클래스와 [상태창]을 지닌 채 태어난 두 아이였다.

에릭의 눈에는 아이들이 악의 씨앗으로만 보였다.

"태어난 아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느냐?"

스승은 산뜻하게 웃으며 에릭의 칼날을 부러뜨렸고.

"악의 씨앗이 아닌 그저 아이들일 뿐이다."

스승의 손끝에서 고운 숨결을 내뱉으며 잠든 아이들을 보곤, 에릭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거기까지 설명이 이어지자.

짜악-!

"아무리 그래도 애들한테 칼을 들이대?"

르웰의 매서운 손바닥이 날아들었다.

그 반작용으로 르웰이 휙- 하고 뒤로 밀려났고, 에릭은 그녀가 밀려난 만큼 성큼 다가갔다.

"반성은 많이 했습니다."

빙의자 에릭이다.

박지훈 시절의 삶을 따져 보면 몸만 7살이지 머릿속은 성인이었을 터였다.

'지독하게 아팠지.'

하나, 신성의 고통은 그의 사고를 마비시켰다.

전쟁에서 신성력을 휘두를 때만큼은 고통이 사라졌기에, 에릭은 더욱 흉포해졌다.

그렇지만.

"사제님이 제게 은혜를 베푸셨듯, 저 또한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에릭은 변했다.

잭슨, 쌍둥이, 늙은이.

거기에 에리카까지.

많은 생명을 살려 주고 구원해 줬다.

"그래. 그때의 너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으니까."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에릭은 고개를 숙인 뒤, 미궁에서의 일까지 르웰에게 설명해 줬다.

모든 내막을 알게 된 르웰은 차분해졌다.

분노는 씻겼고 각오를 다진 얼굴이 되었다.

"그런 흑마법사들이 다시 나타났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싸움과는 거리가 먼 르웰이었으나, 그녀의 눈빛만큼은 에릭 이상으로 매서웠다.

* * *

"보스, 도통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들킬 만한 일은...."

"끄히히-! 나, 나는 실수하지 않았다!"

"보스가 아닌데?"

"저게 왜 보스야?"

고아원 밖을 나선 에릭.

네 사람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런 네 사람을 보며 에릭이 말하기를.

"사제님의 개성은 나도 알아챌 수 없으니, 너희들의 탓이라고 볼 순 없겠지. 고생들 많았다."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특히 늙은이가 기겁했다.

'쓰고 버리는 건가?'

어째 죽이겠다는 말 같았다.

에릭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다니, 대체 이게 무슨....

"앞으로 너희는 교회의 파수꾼이다. 정보 정리도 이곳에서 하도록."

얼빠진 부하들을 향해 에릭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교회 옆에 신성력의 효과가 없는 건물을 하나 지어 주겠다거나.

쌍둥이를 위해 별도의 집을 만들겠다거나.

"그... 보스."

듣다 못한 잭슨이 말을 끊고 묻기를.

"어디 아프십니까?"

에릭은 잭슨을 향해 성큼 다가섰다. 흉터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잭슨, 장두식처럼 굴지 말도록."

"...주제넘게 죄송합니다."

아무튼.

에릭의 말은 그들을 밖으로 풀어 주겠다는 의미와 다름이 없었다.

"끄히-. 보스, 대체 나는 왜?"

늙은이만큼은 도통 이해가 가질 않는 대목이었다.

그는 엄연히 흑마법사다.

사람을 죽인 적이 없다뿐이지, 흑마력을 다루는 존재임은 틀림없었다.

"대신, 늙은이 너한테는 조건이 하나 있다."

에릭은 늙은이를 '신성 폭탄'의 배달부로 사용할 생각이다.

설명을 다 들은 늙은이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보, 보스. 늙은이한테 신성을 담아서 흑마법사 본진으로 보내겠다는 게...."

잭슨도 놀란 듯 되물었다.

에릭은 대답 대신 기다란 티켓을 꺼내 보여 줬다.

"길드홈이 있는 놈들이었군요."

잭슨은 납득했고.

쌍둥이는 이해하지 못할 말들에 고개를 돌렸다.

늙은이는....

'끄히히-.'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따라와라, 계획은 세워졌으니 이제 황제 폐하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잭슨과 쌍둥이는 에릭을 따라 뒤뚱거리는 늙은이를 보며 애도의 마음을 표했다.

"영감, 잘 있어!"

"재밌었어!"

두 아이가 작별을 고했다.

"죽어서는 흑마법사로 살지 마시게나."

잭슨의 말이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에릭의 계획에는 늙은이가 돌아온다는 내용이 전무했으니까.

아무튼.

이제 신성 폭탄은 준비되었다.

34화 복수는 백 배로 (3)

"에릭 국장에게 신의 총애가 따른다더니, 사실이었군."

한 번은 우연으로 볼 수 있으나, 두 번 이상 반복된다는 것은 우연으로 치부하기 어려웠다.

황제는 옥좌를 두드리며 재상을 바라봤다.

"폐하의 말씀대로십니다."

재상은 고개를 조아렸다.

에릭은 미궁에 고작 두 번 들어갔다.

그런데 결과가 어떤가?

"처음에는 성물을 들고 와서 알만정교회에 압박을 주더니, 이번에는 흑마법사들의 수작을 막아 냈군."

성물도 그렇고.

흑마법사의 재림도 그렇고.

쉽사리 겪기 어려운 일이었다.

"신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도 피곤하겠어."

황제는 조금 씁쓸하게 헛웃음을 흘렸다.

툭-툭.

황좌의 팔걸이에서는 정보부에서 보내는 신호들이 연신 전달되고 있었다.

[에릭 국장-미궁 광장 봉쇄]

[치안청 1기사단 2기사단 투입]

미궁 광장을 봉쇄한다는 것은 빙의자 관리국장의 권한을 넘어선 일이다.

그러나.

"재상, 반항은 사형으로."

"황명이라고 전달하겠습니다."

황제는 에릭의 손을 들어 줬다.

대륙을 전란에 휩싸이게 했던 흑마법사다.

그런 흑마법사들이 미궁 2계층을 장악한 것도 모자라서, 빙의자와 엮여 있다니.

"빙의자 즉결 처형법을 괜히 폐지했나 싶군."

입이 텁텁-해졌다.

"폐하, 더 이상 제국이 미궁 공략을 전부 책임지긴 어렵습니다."

"그렇지. 나도 안다."

황제는 정복 전쟁을 준비 중이다.

말로만 듣던 [대격변 패치]가 코앞에 다가온 이상, 망설일 여유는 없었다.

미궁은 점점 더 인류를 괴롭힐 것이니까.

세계가 더 망가지기 전에 황제는 결단할 생각이다.

"다 같이 하나로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왕국 놈들은 제 밥그릇 챙기기 바쁠 뿐이구나."

허어-.

황제의 탄식이 대전을 가득 메웠다.

'일반적으로 공략하는 것도 힘든 상황에, 대격변 패치까지 이뤄진다면....'

그런 황제를 보며 재상이 수염을 쓸었다.

미궁의 최상층은 리셋이 이뤄지지 않는다.

그곳은 하나의 세계로, 계층주가 죽기 전까지 계속해서 이어진다.

공략되지 않은 몬스터는 재앙이 되어 세계로 풀려나게 된다.

"이번 대에서 공략이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왕국들은 남작 이하의 계급만 보냈겠지요."

본래는 협약에 따라 제국과 삼왕국의 귀족들이 최상층을 공략하는 것이 세계의 규칙이었다.

거기에는 황족과 왕족도 포함되어 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이 가장 앞장서는 거였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세 왕국은 미궁에 보내는 사람의 수를 줄여 왔다.

"왕과 귀족을 칭하는 자들이 그 의무를 저버렸다."

"벌써 다섯 계층을 제국이 홀로 공략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제국 신민이 황족을 찬양하고 귀족을 존중하는 이유.

그것은 그들이 세계의 멸망으로부터 백성들을 지켜 주기 때문이다.

먼 옛날 미궁이 생겼던 시절부터 이어져 온 관례였다.

"그들이 힘을 합치지 못하겠다니."

족히 십 년은 넘게 기다려 줬다.

황제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랐다.

빙의자 사태가 아니었다면, 적어도 십 년은 더 기다려 줬겠지만.

"제국에 합병시켜야겠지."

이제는 다르다.

빙의자로 미궁을 공략시키고.

황제는 세계를 통일하겠다는 생각이다.

하나가 되지 못하면, 하나로 만들어야지.

뚝-.

황좌의 팔걸이를 두드리던 손이 멈췄다.

재상은 복잡한 심경이 들었다.

'하필 에리카의 대에 정복 전쟁이 재개될 줄이야.'

필요한 일이며, 당연히 지지하는 입장이다.

하나, 딸이 그 최전방에 나서게 되는 것은 썩-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황제도 재상도 머릿속이 복잡하던 차에.

삐이-삐이.

대전 한복판에 놓인 수정구가 빛을 뿜어 댔다.

[빙의자 관리국]

[알현 요청자 – 에릭]

거대한 수정구에 떠오른 수신자의 이름을 보니, 복잡한 머릿속이 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황제가 눈을 빛냈다.

'저번에는 3억을 달라 했었나?'

이번에는 또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궁금하군.

호기심이 잔뜩 일었다.

리페로제 아스티아처럼 에릭도 굉장히 특이한 존재였으니까.

휙- 황제가 손을 올려 통신 허가를 내리자.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수정구 너머로 거대한 성기사가 나타났다.

에릭이 고개를 조아린 상태로 황제를 맞이했는데, 그의 뒤로 몸이 퉁퉁한 늙은이가 보였다.

그자는 어떻게든 에릭의 뒤에 몸을 숨기려고 들었다.

"고개를 들라."

황제의 말에 에릭이 고개를 들었다.

수정구를 통해 보이는 모습임에도, 그는 아주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 에릭이 말하기를.

-흑마법사의 본거지로 신성 폭탄을 배달하고자 합니다.

적막이 일었다.

어디로 뭘 배달해?

뜬금없는 말에, 황제와 재상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 * *

빙의자 관리 국장실에서 황제와 소통을 나누던 수정구의 빛이 꺼졌다.

'속전속결.'

에릭은 바삐 움직였다.

'황제가 화통해서 다행이지.'

지엄한 황실이라는 이명(異名)과 달리, 황제는 화끈한 성격이었다.

차라리 화끈한 황실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간단한 설명을 곁들이고 조력을 요청했을 뿐인데, 황제는 아주 흔쾌히 허락을 내려 줬다.

기대된다는 말까지 있었으니, 만찬을 앞당기는 것도 기대해 볼 법했다.

"이제 성전을 선포하면 끝이겠군."

황제의 허가를 받았고 미궁 광장을 봉쇄했다.

에릭의 다음 절차는 성전(聖戰)의 선포였다.

'길드홈 전이권'으로 신성 폭탄을 배달해 내부를 진탕으로 만들고 밖에서는 성기사단이 돌진하게 만들려는 계획이다.

에릭이 어깨에 달린 [순례자의 징표]를 꺼내 들었다.

"흐이이-. 보스, 뭘 선포한다고?"

한발 늦게 늙은이가 기겁했다.

본의 아니게 황제를 본 탓에 머리가 멍해져 있었는데....

이상한 말을 들었다.

뭐? 성전이라고?

늙은이 입장에서는 숫제 재앙과도 다를 게 없었다.

'나는 죽는 게로구나.'

늙은이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에릭의 손에 들린 옥색 철패에 쓰인 문구가 아주 선명했다.

[순례자(巡禮者) 에릭.]

리페로제의 이름은 지워지고 에릭의 이름이 새로이 새겨졌다.

저 기물은 단순한 신분 증명의 수단이 아니다.

'성전 선포.'

흑마법사 늙은이는 철패의 기능을 아주 잘- 알았다.

철패에 담긴 기적으로 좌표를 찍으면, 아스티아 교단의 성기사들이 몰려오겠지.

'끔찍하군.'

빙의자 관리국.

황궁이 있는 수도 제1구역에 있는 것도 무서울 지경인데....

이제 땀내 나는 성기사들까지 들이닥치게 생겼다.

'흐이이-.' 늙은이가 침음을 흘리고 있자니.

"늙은이, 쓸데없는 걱정 마라."

에릭이 그를 진정시켰다.

신성 폭탄 배달이라는 막중한 의무를 앞두고, 늙은이의 스트레스를 관리하려는 것이다.

"네가 사람을 죽이지 않는 한 내가 너를 죽일 일은 없다."

"흐으...."

늙은이 입장에서는 도통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에릭이 뭐라 했는가?

'내 몸에 신성 폭탄을 매달아 배달시키겠다면서....'

그런 주제에 또 걱정은 말라니.

"내가 약속을 어긴 적이 있나?"

근심 가득한 늙은이를 보며 에릭이 물었다.

'흐으음.'

늙은이가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에릭이 약속을 어긴 적은 없었다.

늙은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라, 늙은이. 좌표를 여기로 찍는 것은 아니니까."

에릭이 그리 말하면서, 순례자의 징표에 신성을 담았다.

키이잉-.

묵직한 신성의 빛이 국장실 한복판에 떠올랐다.

투박한 옥색 철패가 강렬한 금색으로 반짝였다.

"흐익-!"

늙은이는 기겁하며 방 구석에 몸을 숨겼다.

키잉-.

빛은 점점 강렬해졌고.

그에 따라 에릭의 몸에 찬란한 신성이 깃들었다.

에릭은 차분히 눈을 감고 좌표를 떠올렸다.

'이쯤인가?'

숫제 감으로 때려 맞히는 느낌.

건성건성 고개를 갸웃거리던 에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순례자의 징표]에 빛이 사라졌다.

뚝-.

언제 그랬냐는 듯, 국장실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토록 찬란하던 빛은 사라졌고.

겁에 질린 늙은이도 비명을 멈추었다.

고요함이 감도는 짙은 나무 색의 집무실.

"대, 대체-."

적막을 깨고 경악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에릭과 늙은이가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황실 로얄가드가 입을 쩍- 벌린 채 에릭을 바라보고 있더라고.

"에릭 국장께서...."

로얄가드는 신성의 빛을 알아봤다.

인간을 초월한 존재요, 벽을 깬 소드마스터만이 될 수 있는 황실의 로얄가드다.

신성은 그에게 허락되지 않은 힘이었다.

그러나 힘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알아볼 정도의 안목을 지녔다.

'집결.... 그리고 장소 지정.'

순례자의 징표에서 뿜어진 빛에는 그런 기능이 있었다.

"어찌 타국 백작령의 좌표를 알고 계신 겁니까?"

취조라고 볼 수도 있겠지마는.

에릭은 그 진의를 알아봤다.

'순수한 감탄. 그리고 의문이군.'

로얄가드의 질문에 불순함은 일절 없었다.

신성의 힘은 말하는 이의 숨겨진 뜻까지 헤아려 주는 법이니.

하여, 에릭 또한 순수한 답변을 주었다.

"스승님께 배웠다."

전이의 기적을 행하며 스승과 세계를 누비던 시절.

에릭은 어지간한 좌표를 전부 외웠다.

마법사들처럼 마나의 맥을 이용한 계산식을 만들 수는 없었고.

모험가들처럼 별자리와 천기(天機)를 읽어 장소를 유추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지독하게 맞았지.'

폭력을 동반한 주입식 교육으로 그 장소 자체를 완벽하게 외워 버렸다.

"리페로제 님께...."

로얄가드는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과정을 설명하진 못했지만, 스승의 이름값은 제 몫을 해 주었다.

의문이 해결되자 다시 로얄가드는 문 앞에 우뚝- 섰다. 에릭이 무얼 하든지 간섭하지 않는다는 제스처였다.

로얄가드가 물러난 것을 확인한 뒤에, 에릭은 늙은이를 향해 다가섰다.

방 구석에 몸을 욱여넣은 퉁퉁한 늙은이가 '흐익-!' 비명을 질러 댔다.

"이제 네 차례다."

성전은 선포했으니.

남은 건 신성 폭탄을 만드는 것뿐.

"흐히히히-!!!"

성큼 다가서는 발걸음에 늙은이는 겁에 질렸다.

* * *

쿠구구구구구궁-!!!

아스티아 교단 교황청.

무국적 지대에 놓인 거대한 건물에서 빛이 뿜어졌다.

까마득한 절벽 끝에 지어진 교황청은 성과 다름없는 외형을 지녔다.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진 외성.

그리고 그 안에 교황이 기거하는 내성이 있었으니.

철컥-.

육중한 성문이 개방되었다.

내성부터 외성까지 활짝 열린 문 사이로 곧게 뻗은 길이 드러났다.

쿠웅. 쿠웅. 쿠웅. 쿵-!

드넓은 길 위로 강직한 성기사들의 출정이 시작되었다.

펄럭-!

광역 축복을 내리는 성가대가 깃발을 들고 성기사단을 따랐다.

[아스티아 교단]을 뜻하는 기다란 십자가를 감싼 여섯 날개의 문양.

[성전기사단(聖戰騎士團)]을 뜻하는 붉은 십자가의 문양.

진군하는 성기사단 뒤로 교황청이 보였다.

둥근 지붕 사이로 스테인드글라스로 이뤄진 창문이 반짝였다.

"교황 성하, 갑자기 성전이 무슨 말입니까?"

창가에서는 교황과 대주교가 출정하는 성기사들을 내려다봤다.

"허허, 에릭이로구나."

교단에서 지정한 순례자는 도합 넷이다.

리페로제는 실종 상태니, 활동 중인 순례자는 총 셋일 테지.

"열다섯의 순례자가 성전을 선포했다는 게.... 지금이라면 멈출 수 있지 않겠습니까?"

대주교의 말마따나.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다.

순례자가 성전을 선포할 수는 있다지만....

"거룩한 성전이 선포되었는데, 어찌 멈추겠는가?"

근 백 년간 실제로 성전을 선포한 순례자는 리페로제 하나뿐이었다.

"근거가 있으니 성전을 일으켰을 게야."

하나, 교황은 나이로 사람을 재단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는 이미 에릭의 신성을 보았다.

그리고 느꼈다.

'아버지께 그토록 사랑받는 아이가 허투루 성전을 선포했을까?'

성전을 일으킬 전조는 없었다.

그렇지만 분명 이유가 있을 터.

"대주교, 좌표는 어디던가?"

"가르시안 왕국으로 보입니다."

신의 기적.

순례자의 징표는 교단의 전투 인력 모두에게 좌표를 보여 준다.

그러면 가용 가능한 인원이 전부 그곳으로 달려든다.

흑마법사의 재앙으로 개선된 성전 선포의 법칙이었다.

쾅-!

교황청 끝의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성기사들이 뛰어내렸다.

그 아래는 무국적 지대.

혹은 마경에 근접한 위험 지대로 불리는 장소다.

"전이의 기적을 준비하라-!"

까마득한 절벽을 노니는 성기사들이 하나둘 빛에 휩싸여 사라졌다.

키이이잉-!

그들이 나타난 곳은.

[가르시아 왕국 변경백령]

삐이이이익-!

변경백령의 순찰대가 황급히 성을 향해 달려왔다.

"크, 큰일입니다!"

"뭐가 큰일인데?"

변경백이 있어야 할 집무실에는 젊은 사내가 주인인 양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었고.

그의 옆에서는 변경백이 고개를 내리깐 채 시종처럼 대기했다.

"아, 아스티아 교단의 성기사단이 성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고를 위해 온 병사는 다급하였으나, 집무실을 점거한 사내는 아주 평온했다.

나긋하게 웃으며 병사를 바라봤다.

"쫄지 마, 흑마법의 징조는 새 나갈 일이 없어."

"태, 태수 님.... 창밖을 보시고도 그런 말이 나오십니까?"

순찰병이 당혹스레 되물었다.

변경백 집무실 창밖으로 기다란 창대가 보였다.

"하하! 머리가 꽂혀 있네."

빙의자 윤태수는 그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상황 파악을 못하고 웃어 젖히는 남자를 보며 순찰병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소리치기를.

"야! 윤태수! 씨발, 진짜. 변경백 놀이 하느라 정신이 빠졌냐?"

2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키, 검은 피부.

남부 전투 부족의 특징을 가진 윤태수가 지성인처럼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크큭, 지도 순찰대 놀이 하느라 정신없었으면서."

윤태수가 씨익- 웃자 시꺼먼 피부 속으로 하얀 이가 드러났다.

그가 말하기를.

"길드홈 시스템 때문에 교단 놈들이 흑마법을 알아챌 일은 없을 거다. 임지영, 쫄지 마."

"씨발, 본명으로 부르지 마."

임지영, 앞니가 빠진 시골 촌부의 모습을 한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슬슬, 미궁에 보낸 놈들이 올 때가 됐는데...."

파앗-!

그때 집무실 앞, 길드의 인장이 깔린 바닥에서 빛이 뿜어졌다.

길드원이 [길드홈 전이권]을 사용한 효과였다.

"오. 귀신같이 말하자마자 오네."

"그러게."

두 빙의자가 길드의 표식을 바라보고 있자니.

묵직-한 형태로 사람의 형태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음.... 저런 뚱뚱보가 있었나?"

"그, 글쎄? 세 줄 미만이면 우리가 얼굴을 모를 수도-."

"엥? 저런 늙은이가 있었어?"

푸른빛이 홀로그램처럼 일렁이더니 뚱뚱한 늙은이가 나타났다.

얼굴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해 이목구비를 알아보기 어려웠으나, 그 몸집은 빵빵한 살로 이뤄졌다.

두꺼운 살 아래가 유달리 반짝거리는 느낌이었다.

늙은이가 두 빙의자를 바라보더니 대뜸 웃어 젖혔다.

"흐, 흐히히히히-!!!"

35화 복수는 백 배로 (4)

부부의 연(緣)은 세계를 넘어서 이어진다고 한다.

전생이니 환생이니 하는 형태로 여러 콘텐츠에서 소비되던 단골 소재다.

세기와 세계를 넘나드는 부부의 인연이란 그만큼 매력적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이었다.

"여, 여긴 어디지?"

"꺅-! 저, 저리 가!!"

윤태수와 임지영은 한날한시 한 지붕 아래에 빙의했다.

처음에는 서로를 경계하였으나, 작은 습관을 하나씩 알아채며 서로의 정체를 깨달았다.

'문고리를 천으로 닦는 습관. 설마....'

강남 성형외과에서 갓 나온 듯한 인위적인 미녀가 임지영이다.

그런데, 지금의 모습은 영락없는 시골 촌부의 외모였다.

게다가 성별까지 달라졌다.

윤태수는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너 윤태수지?"

하나, 임지영은 커다란 흑인 사내가 윤태수임을 확신했다.

작은 과도를 슬쩍- 허리춤에 숨긴 행동부터, 습관적으로 창문과 문을 살피는 눈짓.

영락없는 자신의 남편이었다.

"진짜 임지영?"

둘은 서로를 알아봤다.

협력자이자 동반자인 서로를 만난 덕분에, 두 사람이 빙의라는 현상을 받아들이기란 쉬웠다.

"야만인 새끼들한테 전세 사기 맛 좀 보여 주자."

시작은 귀족에게 접근하는 것부터.

과거 대법원 판사 마누라까지 등쳐 먹었던 희대의 사기꾼이 임태수다.

주식 사기, 전세 사기, 투자 사기 등등 안 쳐 본 사기가 없었다.

공교롭게 둘이 빙의한 시기도 아주 좋았다.

때마침 제국이 빙의자 즉결 처형법을 폐지했으니까.

"운은 때에 맞춰 찾아온다더니."

게다가 두 사람은 귀인을 만났다.

@기울임/"반갑소, 흑마그룹의 인사부장이라 하오."

지구처럼 기업형으로 운영되는 조직의 간부였다.

그는 변경백과 다리를 놔 주고, 부부가 빙의자로서 성장할 수 있게 레벨링을 도와주었다.

@기울임/"마법진을 그려 놨으니 저쪽 마을에 '공양' 스킬을 사용하면 되오."

인생이 이렇게 꿀 같아도 되나?

[흑마법사]로 전직하면서, [살인의 쾌락]이라는 스킬을 얻었다.

이는 마약과 같은 쾌감을 선사해 줬다.

황홀함을 느끼다 보면 레벨이 올랐고 스탯이 강해졌으며 스킬의 선택지가 늘어났다.

"인생 개꿀이네."

"그러게 여기서는 팔자 좀 피려나 보다."

범죄자로 힘들게 살던 부부는 다른 세계에서 편안한 삶을 찾았다.

성별이 바뀌고 모습이 변한 건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

부부는 변경백을 등에 업고 변경백령이라는 대규모 영지에 전세 사기를 일으켰다.

돈을 엄청나게 벌었다.

@기울임/"회사 사업을 좀 도와줬으면 하네만."

하나,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인사부장이라는 사내가 몇몇 흑마법사를 데려와서는 도움을 요청했다.

빙의자가 아닌, 현지에 사는 진짜배기 흑마법사였다.

@기울임/"대가는 이렇게 지불함세."

그간 받은 게 있어 내심 긴장했던 부부였는데....

막상 인사부장의 제안은 아주 달콤할 뿐이었다.

@기울임/"회사의 일원인 내가 무보수로 부탁할 리가 있겠소? 그간 해 준 거? 허허, 그건 투자요."

[길드홈 생성권]

빙의자 커뮤니티에서도 실물을 본 적이 없다던, 대단한 아이템을 보상으로 내밀었다.

게다가 [길드홈 전이권]이라는 캐시템까지 덤으로 줬으니.

"부탁이라더니 너무 쉽네."

받은 것만 잔뜩 생겼다.

[흑마법사] 스킬로 [포탈]을 열어 주고, [길드홈 전이권]을 전달해 준 게 끝이었다.

여기까지가 윤태수와 임지영 부부의 빙의 후의 인생이었다.

그리고 지금.

"끄히히히히히-!!!"

웬 미친 늙은이가 길드홈 전이권을 쓰고 오더니, 한참을 웃어 댔다.

"변경백, 아는 얼굴?"

윤태수가 묻자 변경백이 고개를 흔들었다.

투박한 사내, 변경백의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렀다.

"사내 새끼가 질질 짜기는."

빡-!

그런 변경백의 뒤통수를 때리고는 윤태수가 임지영을 바라봤다.

"죽이자."

그는 노인을 변수라고 판단했다.

"죽이는 건 안 돼. 회사 사람일 수도 있잖아?"

하나, 현명한 부인 임지영은 윤태수를 만류했다.

"...음, 그건 그렇네."

아내의 말을 듣고 손해 본 적이 없었으니, 윤태수도 동의했다.

늙고 퉁퉁한 노인에게서 느껴지는 힘은 분명 흑마력이다.

한데, 얼굴에 줄이 하나도 없었다.

조금 애매한 느낌이었다.

"어차피 미궁 리셋될 때 회사에서 온댔으니까, 가둬 두는 건 어때?"

흑마법사들을 회수할 겸, 회사에서 금주의 여섯 번째 날에 찾아온다고 했으니.

두 사람은 늙은이를 지하 감옥으로 옮기려 들었다.

그때였다.

"흐히히히히히-!!!"

늙은이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숫제 목청을 찢어 버리는....

촤악-!

"에잇, 씨이팔! 더럽게."

아니, 목을 찢는 괴성이었다.

늙은이의 찢어진 목에서 핏물이 솟구쳤다.

"아, 뭐지? 좀 뜨겁지 않아?"

임지영의 팔에 핏물이 묻었는데, 피부 위로 치익- 하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하여튼 현지인 흑마법사 새끼들 마법 더러운 건 알아줘야-."

그때였다.

문득, 이상한 게 느껴졌다.

"저거 죽은 건가?"

웃어 젖히던 늙은이가 숨소리조차 멈춘 채 미동도 않았다.

아내의 말에 괜히 섬뜩한 기분이 들어, 박태수도 늙은이의 옆으로 다가섰다.

툭-툭.

"꿀떡거리는 게 살아는 있는 듯?"

그때.

키이이이잉-!

늙은이의 입속에서 쨍-한 금빛 섬광이 피어났다.

"앗-뜨거."

"꺅-!"

빛은 점점 크기를 키우더니, 어느덧 길드홈을 가득 채웠다.

변경백의 성(城)이 황금색으로 가득 찼다.

그러더니 사방을 뒤흔드는 한마디 말이 날아들었다.

@기울임/"회사가 남아 있었군."

묵직한 중저음.

그리고 무서우리만치 무거운 감정이 담긴.

그런 목소리였다.

* * *

"정녕 이곳으로 성전을 선포했단 말인가?"

성전기사단(聖戰騎士團)의 단장.

율리우스 아스티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휘오오- 바람이 불자 거대한 흰색 성복이 펄럭였고, 그 아래로 조각처럼 단련된 근육이 부각되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선포자가 에릭 국장이랬나?"

변경백령(領), 그중에서도 영지의 성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아스티아 교단의 깃발이 나부꼈다.

성스러운 신의 문양 아래 도열한 성기사단은 갈 곳을 잃은 어린양처럼 눈을 말똥거렸다.

그들은 전의(戰意)를 잃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저희 변경백령에 흑마법사라니요."

순박한 시골 청년이 낡은 가죽 갑옷을 입고 덜덜- 떨고 있었다.

주변의 다른 병사들도 마찬가지.

시골 마을 청년들에게 갑옷을 입혀 순찰대로 쓰는 것이, 영락없는 변경의 영지였다.

혹시나 빙의자일 경우도 대비해 축복을 내려 봤지만....

"아아, 이 따스함-."

"저희 같은 평민에게도 이런 은혜를 내려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요."

"아스티아 님이시여!"

다들 감사하며 엉엉 울어 댔다.

이 순수한 시골 청년들이 있는 곳에 흑마법사라고?

말이 변경 백작이지, 따지고 보면 그냥 땅이 좀 큰 시골 영지였다.

"단장님, 어쩌실 겁니까?"

부관의 물음에 성전기사단장 율리우스가 콧잔등을 질끈 붙잡았다.

"리페로제 님의 제자.... 교황 성하께서 호언장담하시기에 믿었거늘."

"서, 설마."

리페로제 아스티아는 성전을 선포한 적이 있다.

그때 그녀가 찍은 좌표에는 광활하고 메마른 대지가 횡-하게 펼쳐졌고.

그녀는 그 한복판에서 광소를 터트리고 있었다.

@기울임/"와, 진짜 성기사들이 죄다 몰려오네? 땀내 나니까 저리 좀 떨어져 줄래?"

그녀가 선포한 성전의 이유를 한 단어로 옮기자면....

'궁금해서' 정도가 되겠지.

"그 스승에 그 제자라더니."

율리우스와 그의 부관은 리페로제의 장난을 떠올렸다.

'아주 혼을 내 줘야겠군.'

그녀와 달리 에릭은 아직 어리다.

그러니 바로잡을 기회도 있을 터.

그리 생각하며, 율리우스가 회군을 선언하려던 순간.

채앵-! 쩌적-쩌저적.

변경백의 성에 금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저게 뭐지?"

"처음 보는 현상입니다."

성은 멀쩡한데, 성을 둘러싼 공간 자체에 금이 간 모양새였다.

명백한 이상 현상임은 분명했다.

"다들 발검하라-!"

율리우스는 본능적으로 칼을 뽑아 들었다.

뒤따르는 성기사들도 마찬가지.

다들 뛰쳐 나갈 준비를 하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성가대 준비-!"

신을 부르짖는 성가대도 깃발을 하늘 높이 올리며, 합장의 진영을 만들었다.

공명하는 신의 노래가 모든 악(惡)을 몰아낼지어니.

성가대 위로 황금색 십자가가 피어났다.

"이단 혐의를 받기 싫다면 다들 얌전히 투항하라."

성기사단과 성가대가 전투태세에 돌입함과 동시에, 전투 사제들이 변경백령의 순찰병들을 제압했다.

그 순박한 시골 청년들을 [신성 결계]에 가두었다.

청년들은 겁에 질려 한 마디 신음도 내뱉지 못했다.

싸아아아아아―

언덕 위로 바람이 불어온다.

무릎까지 올라온 높은 갈대풀이 바람을 따라 휘어지고.

변경백의 성벽까지 이어졌다.

바람이 자연을 타고 성벽을 두드리는 모습은 아름다웠으나.

"역겨운 흑마력이군."

그 성벽에서 새어 나오는 기운은 범상치 않았다.

쩌적-쩌저적.

성벽 위로 커다란 균열이 생겨났다.

"돌진 준비이이이-!!!"

그 안에서 검은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흑마력(黑魔力).

그것도 최소 5줄 이상의 흑마법사가 펼쳐 낸 [죽음의 땅]의 흔적이었다.

"돌겨억-!"

율리우스가 거대한 방패와 롱소드를 들고 앞장섰다.

쐐액- 쏘아진 활처럼 그는 곧고 빠르게 변경백의 성벽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뒤로는 수많은 성기사들이 안광을 빛내고 있었으니.

숫제 피에 굶주린 맹수 같았다.

최선두의 성전기사단장 율리우스는 그중에서도 단연코 가장 흉포했다.

"검으로 악을 정화하라-!"

율리우스가 거대한 성벽을 향해 검을 휘두르자.

쩌엉-!

선명한 금빛 검기가 피어났다.

무국적 지대의 광인과 흉포한 마경의 몬스터를 막기 위한 거대한 성벽이 종잇장처럼 찢겼다.

그리고.

"신성?"

찢긴 성벽 사이로 쨍-한 신성력이 새어 나왔다.

성내는 금빛으로 가득해 가시 거리가 '0'에 가까웠다.

율리우스는 눈에 신성력을 품었다. 그러자 성벽 안의 실체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단장님, 안은 어떻습니까?"

"저곳은 하나의 격리된 세계다. 흑마법사 혹은 빙의자들의 소행이로군."

신성은 안에서 새어 나온 힘일 뿐, 공간 자체는 이질적이었다.

[길드홈]은 인벤토리처럼 지정된 건축물을 바깥과 격리시켜 주는 아이템이다.

[길드]로 지정된 곳은 바로, 변경 백작의 영주성.

범위는 내성과 외성을 이룬 성벽까지였다.

"흑마력이 줄줄 새는데 신성은 또 뭐란 말인가?"

에릭이 보낸 늙은이는 [길드] 내부를 신성력으로 활활-태워 버렸다.

게다가 밖에서 율리우스의 검격까지 있었고.

안과 밖의 충돌은, 성벽의 균열을 걷잡을 수 없이 키웠다.

"순례자 에릭이 무언갈 한 모양이군."

째앵-!

격리된 세계가 무너졌다.

투박한 성벽, 그리고 그 너머의 변경백의 성.

외형은 그대로였지만.

"근원을 부숴 버리다니."

분명 변화는 있었다.

일반 성기사들의 눈에도 내부의 상황이 선명하게 보였으니까.

"흐아아악-!"

"뜨, 뜨거워!!"

무너진 성벽 안으로 보이는 영주성의 참상.

이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생지옥이 따로 없군."

* * *

[업적 – 만마의 천적]

[1만의 흑마법사를 사냥하다.]

[특급 보상이 주어집니다.]

[업적 - 빙의자 사냥꾼]

[1천의 빙의자를 사냥하다.]

[특급 보상이 주어집니다.]

[업적 - 어둠 속에 빛을 숨기다.]

[흑마법과 신성을 조합해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일으켰습니다.]

[신전이 보다 선명해집니다.]

쉼 없이 떠오르는 상태창 메시지에, 에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만?"

5살 때부터 흑마법사를 죽여 왔으니, 1만이라는 숫자가 불가능한 것도 아닐 테지.

그렇지만....

에릭이 기억하기로는 흑마법사를 8천 정도 죽였었다.

근데 갑자기 2천이 늘어?

"비정상적으로 많군."

빙의자도 마찬가지였다.

흑마법사와 달리, 빙의자는 그렇게까지 죽인 적이 없었다.

그 말인즉슨.

"이 영지에 그만큼 숨어 있었다는 말이지?"

수백 단위의 빙의자와 천 단위의 흑마법사가 [길드] 시스템 아래에 몸을 숨겼다.

그런데도 [커뮤니티]에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았다.

에릭의 상태창에는 커뮤니티 기능이 없었지만, 조력자들을 통해 늘상 검열을 해 온 에릭이다.

'쌍둥이나 잭슨이 정보를 숨겼을 리가 없고.'

그들은 확실한 우군이었으니.

아무튼.

[흑마법사 사냥꾼]과 [빙의자 사냥꾼] 업적은 수가 많다뿐이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은 없었는데.

문제는.

"신전?"

처음 보는 업적 알림이었다.

에릭이 처음 본다는 말은 게임 속에서도 본 적 없고, 빙의자들에게도 들은 적 없다는 의미다.

"그래도 신전이라 하면, 확실히 좋은 의미겠어."

에릭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마음 같아서는 한껏 기뻐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흑마력에 당한 듯 화상을 입은 피난민들이 미친 듯이 몰려들고 있었으니까.

"사, 살려 주십쇼!!"

"끄아악-!"

드넓은 변경백의 영지에 일어난 재앙이다.

성기사단과 성가대는 흑마법사 잔당과 빙의자 무리를 토벌하는 것에 전념해야 할 터.

생존자들을 돕는 것은 '전투 사제' 혹은 신성을 갓 내려 받은 '일반 사제'들의 몫이다.

"이쪽으로 오시죠."

치유의 기적을 행하지 못하는 사제들은 포션을 풀어 생존자들을 구하려 들었다.

"교단에서 무상으로 베푸는 것이니 걱정 말고 드시면 됩니다."

사제 엘리제가 부상자들에게 [회복 포션]을 내밀었다.

그때 그녀의 고운 손목을 커다란 손이 툭- 붙잡았다.

엘리제가 고개를 돌려보니 거대한 가슴 근육이 보였다.

그녀는 조금 더 고개를 올렸다.

금발의 절세 미남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더라고.

'누, 누구시지?'

엘리제의 마음이 두근거렸다.

그 거대한 성기사가 투박한 철패를 꺼내 들며 말하기를.

"순례자 에릭이다."

그의 뒤로는 웅혼한 신성이 피어올랐다.

엘리제는 신성에 취해 몸을 휘청거리며 에릭을 향해 몸을 눕혔다.

에릭은 슬쩍- 몸을 돌려 그녀를 피했다.

그러고는 성큼 부상자들을 향해 다가섰다.

"교단이 왜 치유 사제가 없는 피난민 대피소를 만들었는지 아나?"

대답은 없었으니, 에릭이 대신 답을 알려 주었다.

"너희 같은 영악한 빙의자를 잡아내기 위해서다."

36화 복수는 백 배로 (5)

본래 사람은 자신의 눈으로 보기 전까지 남의 말을 함부로 믿지 않는 법.

특히, 부상당한 농민들을 빙의자라 일컫는 것은 더더욱 그랬다.

"잠깐만요!"

엘리제는 에릭을 막아섰다.

아스티아 교단 견습 사제 중에서도 일미로 꼽히는 그녀다.

'나를 안 잡아 줘?'

에릭이 휘청거리는 그녀를 안 잡아 준 것도 불신에 대한 근거로 작용하였으니.

엘리제가 당차게 부상자들 앞에서 팔을 벌렸다.

에릭의 접근을 막아서듯이.

"저들이 어째서 빙의자라는 말이죠?"

에릭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막 축복을 내려 확인 절차를 해 주려던 차에 저런 말이라니.

'공범인가?'

혹여, 교단 내부에 흑마법사나 빙의자 조직의 끄나풀이 있는 것은 아닐까....

괜한 의심이 피어났다.

"왜, 왜 그런 눈으로 저를-."

배교자(背敎者)에게는 신의 재앙이 따르는 법.

아스티아 신은 배교자의 신성력을 앗아 가고, 그 신체에 낙인(烙印)을 새겨 버린다.

즉, 성직자의 배신은 신성의 유무로 판단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신성력이 있는데 그럴 리가.'

에릭은 이내 의혹을 떨쳐 냈다.

대신 하급 사제 엘리제에게 현실을 보여 주었다.

"저들은 모두 빙의자다."

구구절절 설명을 하는 것보다는, 보여 주는 것이 효과적일 터.

"치료-."

에릭이 대충 읊은 한마디 기도문에 대피소 천막이 신성으로 뒤덮였다.

"치, 치유의 기적!"

엘리제가 신성의 힘에 감탄하고 있자니.

"끄아아아악-!"

"사, 살려 줘!!!"

부상자들이 [신성 치유]에 불타 버리기 시작했다.

그 끔찍한 광경에 엘리제는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정말 빙의자....'

조금 전까지 자신이 손을 부여잡고 달래 주던 자들이 아닌가?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이 이상 설명이 필요한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빙의자들을 태워 버린 거대한 사내.

여전히 신의 현신과도 같은 용모였으나.

'수, 순례자랬지....'

느껴지는 격은 아득했다.

하급 사제 엘리제는 순례자는커녕 일반 성기사와 마주친 적도 몇 번 없었다.

경험이 일천했다.

귀족을 모르는 자가 귀족을 보고 대단하다 느끼지 못하듯이.

처음에는 엘리제도 그랬었다.

지금은 어떤가?

"끄아아악-!!"

[치유의 기적]에 불타 사라져 가는 빙의자들.

희뿌연 연기 속에서 엘리제가 눈을 질끈 감았다.

'사는 세계가 달라.'

순례자니, 주교니, 성기사니.

무릇 그 이름에는 그에 걸맞은 힘이 따르는 법.

그녀는 보고 느끼고 깨달았다.

하여 고개를 내리깔았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부상자들을 받을 때 손에 신성력을 담아 건드려 보도록."

에릭은 어린 사제에게 가르침을 내려 줬다.

그러고는 성큼- 천막 너머로 사라졌다.

'저 많은 부상자가 다 빙의자는 아니겠지?'

영주성이 있는 영지의 심장에 일어난 재앙이다.

그만큼 피해자의 수가 많을 터.

교단에서 세워 둔 천막은 수도 없이 많았다.

"지독한 놈들."

에릭은 하나하나 모든 천막을 살폈다.

빙의자들이 할 법한 일은 속속들이 다 꿰고 있는 에릭이다.

예상대로였다.

"저, 정말 빙의자라고?"

"아스티아 님이시여, 제게 어찌 이런 시련을...."

그가 들린 천막에서는 연신 비명이 새어 나왔다.

그에 따라 하급 사제와 전투 사제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질끈 감고 신을 부르짖었다.

"아아-. 잘린 팔이 돋아나다니. 제게 이런 기적을...."

드물게 일반 백성들도 뒤섞여 있었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기도를 읊조렸다.

그 감사함에 에릭이 답하기를.

"치료된 자들을 전부 이단 심문관에게 인도하라."

정적이 일었다.

'방금 치료해 준 사람을....'

어디로 데려가?

하급 사제, 전투 사제 할 것 없이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교단의 원칙을 깨는 건가?"

순례자의 징표를 들이대며 명령하는데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상명하복이라는 교단의 철칙이 있었으니까.

이단 심문관을 향해 가는 사제들을 보며, 에릭은 사색에 잠겼다.

'협력자도 분명히 있을 테지.'

회사(會社).

흑마그룹이 아직도 남아 있는 형국이다.

그들은 악랄하다.

회장이니 사장이니 하는 형태로 실무자들이 앞장서지만, 실소유주는 주주라고 불리는 미지의 존재들이다.

'그놈도 결국엔 바지 사장이었지.'

스승과 함께 죽였던, 대륙 최악의 빙의자.

66만이라는 인간을 제물로 바쳤던, 스스로를 '루시퍼'라고 칭하던, 중2병에 걸린 정신 나간 놈을 떠올렸다.

'빙의자와 흑마법사의 조합은 위험하다.'

그때였다.

생각에 잠긴 에릭을 향해, 금빛 섬광이 내리꽂혔다.

콰앙-!

에릭의 앞에 흙먼지가 일고 그 안에서 한 사내가 나타났다.

중년의 외모 그리고 거친 이목구비, 한 손에는 아주 커다란 창을 들고 있었다.

창은 그렇다 치고.

허리에 꽂힌 롱소드과 등에 맨 방패까지, 영락없는 성기사의 모습이었는데....

'여전히 엄청나게 크군.'

아주 드문 일이 일어났다.

그 사내는 에릭보다 눈높이가 높았다.

"에릭, 오랜만이군. 아, 이제는 순례자 에릭이라 불러야 하나?"

"성전기사단장, 율리우스 님을 뵙습니다."

성전(聖戰)을 총괄하는 이답게, 온몸에서 흉포한 신성이 느껴졌다.

'창은 왜 들고 온 거야?'

에릭의 눈이 율리우스가 든 무기를 향했다.

그 눈길을 알아챈 율리스우가 크게 웃었다.

"크하하-! 성전인데 투창을 못 하니 아쉽더군. 그래서 그냥 들고만 있을 뿐이네."

"...투창을 하면, 지도가 바뀔 테니 자제하시지요."

일반 백성도 섞인 땅에서 그럴 리는 없겠다마는.

내심 불안한 것도 사실.

'창을 꺼내?'

성전기사단의 특징.

그들은 좌표를 찍고 그 자리에 창을 집어 던진다.

그 창이라 함은.

[전설급 - 성창(聖槍)]

무려 전설급 무기로, 성물보다 한 단계 낮은 아이템이다.

네임태그에 이명이 붙지 않은 이유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전설급' 아이템이기 때문으로.

쉽게 말해 양산형 아이템이다.

"창의 축성이 벌써 끝났습니까?"

교황청에 마련된 성소에서 오랜 기간 축성을 받은 아이템이 바로 [성창]이다.

"축성이 끝난 지는 좀 됐다."

"수는 얼마나 됩니까?"

[성창]의 개수는 본디 성전기사단의 기밀이다.

"리페로제의 순례자 지위를 제대로 이양받았더군."

저 말은 허락해 준다는 말을 길게 늘여 표현한 것이다.

나이에 걸맞게 말이 길었다.

에릭은 고개를 살짝- 올려 율리우스를 바라봤다.

긴 백발을 쓸어넘기며 율리우스가 거칠게 웃었다.

"크핫-! 준비된 성창이 5천, 곧 완성될 성창이 5천일세."

에릭은 감탄사도 잊은 채 입을 쩍- 벌렸다.

성창이 만 자루?

왕국 하나를 지도에서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 규모였다.

"루시퍼 때를 떠올려 보면, 만 자루도 부족하지."

빠득.

율리우스가 콧잔등을 잔뜩 구겼다.

* * *

정리는 순조로웠다.

미궁 광장을 포위한 황제의 군대가 탈출한 모험가들을 체포했다.

흑마법사의 재림이었기에, 모험가 길드도 항의하지 못했다.

"빙의자도 아니고 흑마법사도 아닌데.... 협력자가 이렇게 많다니!"

심문 결과를 듣고서 모험가 길드는 문을 걸어 잠갔다.

흑마법사와 내통한 모험가들이 색출되었기 때문.

대다수가 모험보다는 생업을 중시한, 저급 모험가였다.

가족의 목숨을 빌미로 협박당했다거나, 목숨을 대가로 한 잔혹한 흑마법에 당했다거나.

그런 이유였기를 바랐지만.

"돈? 아이템?"

생각 외로 이유는 간단했다.

별다른 신념이 없으니, 저급 모험가였을 테지.

"아내가.... 영혼을 되돌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가르시안 왕국 변경백령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부유한 제국의 수도와는 달리 가난한 왕국의 변경에는 돈과 아이템에 넘어가는 이가 없었다.

대신 가족들의 목숨을 저당잡혔다.

"회개할 기회를 주시라는 계시가 내려왔다."

교황은 그런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그리하여, 상황이 일단락되었다.

[제국일보 - 빙의자 관리국장 에릭, 흑마법사의 재앙을 막아 내다.]

[제국일보 – 황제 폐하의 선견지명, 이러한 사태를 미리 예견하신 제국의 지존께 찬사를!]

[제국일보 – 가르시아 왕국, 성전 선포로 초토화. 미궁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국가의 몰락!]

그 결과, 에릭의 위상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마치, 전쟁의 영웅처럼.

제국 유일 신문 [제국일보]에서는 연신 에릭을 부르짖었다.

"거, 형님. 제국일보에는 왜 성기사라는 말이 한마디도 없는 거요?"

쟝의 마도구 상점에서 장두식이 물었다.

"황제 폐하께서 그만큼 나를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는 의미다."

"그렇긴 하겠수다. 신문에서는 황제 폐하가 만찬을 앞당겼다는데, 그건 무슨 말이요?"

[황제 폐하, 에릭 국장과 예정된 만찬을 앞당기기로 결정!]

에릭이 미간을 여몄다.

황제의 만찬(晩餐)이라 함은, 일종의 검증을 의미한다.

서슬 퍼런 단두대 옆에 온갖 산해진미를 늘어 두고 시작되는 만찬으로.

그 끝에는 죽음 혹은 영광이 따르게 된다.

'예정된 영광인가.'

물론, 에릭의 경우는 결과가 정해져 있었다.

3황자를 죽였되, 능력을 검증받을 기회로 '빙의자 관리국장'의 자리를 받았다.

그 결과가 어떤가?

"흑마법사를 패 죽이고 먼 나라의 재앙을 막아선 영웅인데, 왜 그렇게 죽상을 쓰고 있수?"

에릭이 잔뜩 구긴 얼굴로 장두식을 바라봤다.

그리고 말하기를.

"두식아, 교황 성하께서 세례를 내려 주신다더군."

"거, 뭐요. 좋은 일 아니요?"

"그렇지."

에릭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수려함보다는 흉악함이 돋보였다.

"근데 황제 폐하의 만찬과 같은 날이다."

"허어...."

장두식이 당황했다.

"몸을 두 개로 만드는 기적은 없수?"

눈을 끔뻑거리며 진지하게 묻는 장두식을 보며 에릭이 웃음을 터트렸다.

"크흐흐."

웃음은 흐느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니, 실제로 에릭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미친 황제, 미친 교황 같으니.'

만찬 일정보다 한발 빠르게 세례를 잡은 교황.

그리고 그 세례에 맞춰 만찬을 앞당긴 황제.

절대 우연일 리는 없었다.

'두 세력이 나를 가지려고 애를 쓰는군.'

좋은 일이나, 선택에는 막중한 책임이 따를 터였다.

황제를 바람맞히면?

텅 빈- 만찬장의 단두대 앞에서 황제 혼자 식사를 마칠 것이고.

그 뒷감당을 해야 하겠지.

교황을 바람맞히면?

수만의 신도 앞에서 이뤄지는 경건한 세례.

교황은 주체가 없는 세례식에서 혼자 뻘쭘하게 서 있게 될 것이니.

"순간이동의 기적을 쓰는 건 어떻수? 거, 뭐냐. 형님은 교황청에도 샛길을 만들었다 하지 않았수?"

그때 장두식이 명답을 주었다.

교황청이나 황궁과 같은 곳에는 전이의 기적이나 텔레포트 같은 현상을 방지하는 결계가 구축되어 있는데.

에릭은 스승 덕분에 교황청에 샛길을 하나 만들어 뒀다.

"그걸 잊고 있었군."

대비책이 마련되었다.

만찬과 세례는 주일로, 약 하루의 시간이 남은 상황.

"한 주 내리 뛰다녔는데 좀 쉬는 건 어떻수?"

"두식아, 쉬는 건 죽고 나서도 충분하다."

거, 뭐.

죽으면 평생 쉬는 거니 그렇겠수다.

장두식이 대충 납득하고 있자니.

에릭이 커다란 상자를 꺼내 들었다.

"허어. 그거 특급 보상 아니요?"

에릭의 어린 시절, 흑마법사를 잡고 얻었던 보상이다.

"흑마법사를 대체 얼마나 죽였길래 상자를 세 개나 얻은 거요?"

그리고 이 상자는 에릭이 장두식의 영험함을 확인하게 된 계기였다.

"형님, 쓰레기만 나오는 상자를 대체 왜 그렇게 애지중지 하는 거요?"

"네가 열어 보든가."

에릭이 연 상자에서는 [투박한 철검]이 나왔는데, 장두식이 연 상자에서는....

[성유물 - 신념의 조각 1/10]이라는 개사기 아이템이 나왔었다.

"지금까지 모은 조각은 총 8개다."

지금껏 도합 1만의 흑마법사를 잡았다.

거기에 각종 특별 보상으로 [특급 보상]을 몇 번 더 얻었다.

그 결과 지금까지 에릭은 총 8개의 신념의 조각을 모았고.

"두식아, 이거 다 까면 10개다."

뜻밖에 10개를 모으게 되었다.

'운이 엄청 좋은 건가?'

복수는 백 배로.

흑마법사를 만났고, 그 대가로 본거지를 없앴다

그저 평소처럼 행동했을 뿐인데, 특급 보상을 세 개나 얻었다.

"신의 은총이 함께할지어니-."

에릭이 장두식의 반삭 머리에 손을 얹었다.

빛나는 장두식이 눈을 끔뻑이며, 거대한 상자를 열었다.

휙-.

[모닥불]

처음 나온 아이템은 불씨가 없는 모닥불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미친."

에릭의 입이 쩍- 벌어졌다.

[성유물(聖遺物) - 모닥불]

이름은 투박하나, 등급은 찬란하였으니.

자세한 설명이 없어 용도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 횃불이랑 비슷한 기능.'

미궁의 '횃불'과도 비슷한 쓰임새겠지.

유추는 가능했다.

에릭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장두식은 기세를 태웠다.

"두식아, 상자깡이나 템 보상 확인하는 건 기세다!"

운칠기삼.

좋은 아이템이 안 나온 것은 자신의 기세가 부족했기 때문이랬지.

장두식은 거침없이 남은 두 개의 상자를 열었다.

"그렇지! 두식아!"

에릭이 시원한 감탄사를 내질렀다.

장두식은 질끈 감았던 눈을 살짝 떠서 상자를 바라봤다.

[신념의 조각]

그에게 아이템 네임태그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과거에 보았던 조막만 한 유리 조각과 비슷한 생김새였다.

"애새끼도 아니고 뭔 유리 조각에 실실거리슈?"

그때는 몰랐지만.

에릭이 빙의자임을 안 지금은 달랐다.

장두식이 생각에 잠긴 틈에.

철컥.

에릭이 신념의 조각을 완성했다.

둥근 원형 고리가 반짝거렸고.

[성유물: 신념의 고리 - 획득 시 귀속]

완성된 아이템의 이름과 설명이 나타났다.

그리고.

키잉-!

신성의 울림과 함께 고리가 둥둥- 떠올랐다.

그것은.

"거, 뭐요. 형님 머리 위에서 고리가 반짝거리는데...."

에릭의 머리 위에 떠올랐다.

'헤일로.'

마치 천사의 링을 떠오르게 하는 모습이었다.

고리의 착용 효과는 간단했다.

[신념을 세워 기적을 이루리라.]

37화 선택 (1)

"강풍호, 지금 뭘 하는 거야?"

빙의자 관리국의 수용소.

빽빽하게 둘러진 철창 사이로 박창호가 강풍호를 노려봤다.

"지나, 강지나라고 불러 줘."

찰랑- 단발머리를 흔들며 강풍호가 박창호를 바라봤다.

눈망울이 반짝였다.

아름다운 동그란 눈망울에 박창호는 순간 '흡!' 하고 숨을 삼켰다.

'저건 40대 중년 강풍호다.'

미인계에 넘어가지 않도록 자신을 다잡으면서 박창호가 말을 이었다.

"지금 커뮤니티에 글을 쓰려던 건 아니겠지?"

박창호가 말을 건 이유는.

강풍호, 그녀가 허공에 손을 얹고 타이핑을 했기 때문.

"그, 그게...."

강풍호가 우물쭈물 다리를 꼰 채 머뭇거리고 있자니.

"창호야, 언제까지 병신 취급 받고 살 건데? 우리도 폭렙 하고! 어! 사람같이 대우받는다고 알려야 하지 않겠어?"

니시다 료가 발끈했다.

박창호, 강풍호, 니시다 료.

세 빙의자는 에릭 국장의 특별 허가를 받아 대형 수용소에 갇혔다.

20평 남짓한 넓은 방 안에서 세 사람은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게 끝이 아니다.

"이제 흙바닥이 아니라 침대에서 잔다고!"

니시다 료의 목청이 쩌렁쩌렁 울렸다.

다른 빙의자들이 시샘 어린 눈으로 그들의 수용소를 바라봤다.

같은 철창 안에 있을지언정, 처지가 남달랐다.

화장실이 달린 방이라니!

부러움 담긴 시선을 느끼며 강풍호가 한마디 곁들이기를.

"게다가 주 1회 외출도 가능하잖아."

무려, 외출권이다.

물론 황실 로얄가드의 감시하에 움직여야 한다는 전제가 붙었지만.

다른 빙의자들은 2평 남짓한 감옥 속에서 배식만 먹고 사는 처지임을 생각해 본다면....

'확실히 대단하긴 하지.'

박창호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커뮤니티에 자랑을 하는 건 좀....

머리가 지끈거렸다.

"병신들아, 밖에 있는 놈들은 애초에 갇혀 있지도 않은데, 자랑해 봤자 조롱만 받을 거다."

"씹.... 생각해 보니까 그렇네."

납득은 쉬웠다.

수용소에 갇힌 빙의자들 사이에서야 이들의 처우가 좋은 것이지, 밖을 노니는 놈들에 비하면 그들은 여전히 조롱거리였다.

물론, 박창호는 단순히 그런 이유로 커뮤니티 게시글 작성을 막은 게 아니다.

박창호가 주변을 살피며 두 사람에게 손짓을 했다.

강풍호와 니시다 료가 귀를 기울였다.

"에릭 국장.... 분명, 빙의자들을 잘 알아. 스킬 트리부터 시작해서 커뮤니티 관련된 것도 아는 눈치였고."

박창호가 속삭였고 강풍호와 니시다 료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궁 속에서 본 에릭의 모습이 어떻던가?

'괴물 같이 강하고.'

'살인에 망설임이 없지.'

'잘생겼어!'

세 빙의자는 [커뮤니티] 게시글의 위험성을 깨달았다.

"이거 봐."

[종교쟁이 생존법 막혔다 ㅅㅂ]

[지금 부상자 막사인데, 이 미친 새끼들 이제 포션 안 주고 신성 축복 스크롤로 치료해 준다.]

"...와, 이게 막혀?"

기존에 공유되었던 생존법이 막혔다.

하급 사제나 전투 사제가 관리하는 부상자 및 피난민 막사로 가면, 신성력의 직접 접촉을 피할 수 있다는 꿀팁이었다.

"봤지? 제국도 그렇고 아스티아 교단도 그렇고, 분명히 커뮤글을 확인할 수단이 있는 거야."

"하긴, 흑마그룹인지 그것도 여기서는 쉬쉬하는 눈치잖아."

세 사람은 조심스레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그 모든 내용은 제국 정보부에 기록되고 있었으니.

[빙의자 대화록 요약]

[빙의자들 사이에 커뮤니티 게시글을 불신하는 기조가 생김.

이런 기류를 확산시키면, 빙의자들이 더욱 숨어 살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고 사료됨.]

"와, 씨. 에릭 국장 존나 무서운 새끼였네."

니시다 료가 작은 말로 중얼거렸다.

"맞아.... 여자한테 험한 일도 막 시키고."

강풍호도 거기에 거들었다.

'병신들아.... 상태창에 나타난 커뮤니티 내용도 알아내는데, 말은 다르겠냐?'

박창호는 관자놀이를 질끈 누르며, 침대에 몸을 뉘었다.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잠시 고민을 해 봤다.

'쟤들이랑 계속 미궁에 들어가는 게 맞을까?'

솔직히 두 번의 공략에서 그들과 정이 들지는 않았다.

선택의 기로마다 두 사람은 자신을 바라보며, 총대 메기를 강요했고.

'눈치도 더럽게 없지.'

사실, 지금 일도 그렇다.

말조심해라, 이렇게 말해 봤자 듣지 않겠지.

기왕이면 두 사람이 밉보여서 다른 사람과 교체되길 바랐으니.

"난 잔다."

박창호는 선택했다.

이를 말미암아 자신의 파티원이 바뀔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그리고.

[빙의자 니시다 료, 강풍호 에릭 국장에게 불만이 많음.

박창호, 관리자 역을 소홀히 하는 것으로 확인됨.

상세 대화록을 별첨에서 확인할 것.]

그게 어떤 방식이든, 선택에는 결과가 따른다.

―Ep. 9 선택.

"거, 형님. 내가 다 부끄럽수다."

"닥쳐라, 두식아."

[신념의 고리]를 얻은 에릭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장두식과 함께 제3구역과 연결된 관문을 거닐자니, 사방 곳곳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말들이 귓가를 스쳐갔다.

"머리 위에 달린 저건 뭐냐?"

"성기사님... 저, 저 덩치! 만찬에 초대받은 에릭 국장이다!"

"오오, 성기사시라더니 머리 위에 특이한 게 달렸군."

거대한 에릭은 언제나 이목을 끌었다.

2미터가 훌쩍 넘는 키.

그리고 신의 현신이라 불릴 법한 수려한 외모.

거기에다가.

'이걸 달고 살아야 하는 건가?'

머리 위로는 황금색 헤일로까지 장착하게 되었으니.

[획득 시 귀속] 아이템은 주인이 정해진 순간 그 신체에 귀속된다.

그 말인즉슨.

떼고 싶어도 뗄 수 없다는 말로.

"이 장두식이의 축성된 머리통보다 반짝거리는 건 처음봤수다."

"두식아-."

에릭이 꿀밤을 내리치려 손을 들어 올린 순간.

"히익-!"

건너편에서 비명이 들렸다.

에릭은 관문에 서 있는 붉은색 머리칼을 발견했다.

에리카였다.

'왜 또 잔뜩 성질이 난 거지?'

그녀는 재빠르게 투구를 쓰고 치안청으로 들어서려 했으나.

성큼 다가온 무언가가 툭- 하고 투구를 든 손을 붙잡았다.

'설마....'

에리카가 고개를 들어 보니 에릭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빛이 살벌했다.

그에 에리카가 눈동자를 살짝 올려다보니.

'고리?'

꿈틀.

에릭의 승모근이 움직였다.

에리카는 다시 시선을 내려, 에릭과 눈을 맞췄다.

"에리카 경, 혹시 교회에 다녀왔습니까?"

"흐윽-. 잠깐 들렸는데, 르웰 사제님이 나를 보자마자 축객령을 내리셨다. 뭔가 건물이 엄청 멋지게 변한 것 같더군."

에릭이 고개를 갸웃했다.

'벌써 교회가 다 지어졌다고?'

에릭이 가르시안 왕국에 다녀온 동안, 잭슨에게 교회를 완공하라는 지시를 남겼었다.

근데, 그걸 며칠 만에 짓다니.

'역시 잭슨의 일 처리군.'

또한 르웰이 에리카의 방문을 막은 이유도 분명했다.

교회가 완공되었으니까.

"원래 이런 건 가족들끼리 보는 거야!"

르웰의 첫 교회.

제4구역 구석에 지어진 허름한 목조 건물 앞에서 그녀는 에릭과 몇몇 아이들을 둘러싸고 그런 말을 했었다.

그때 에릭은 짓궂은 농담을 건넸었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추억에 잠긴 에릭을 향해 에리카가 한 발 다가섰다.

붉은 머리칼이 눈앞을 스쳤다.

"이 팔은 좀 놓아 주거라."

에릭은 여전히 에리카를 붙잡은 상태였다.

"그 말투는 언제 들어도 어색합니다, 공녀님."

에릭은 짓궂게 웃으며 에리카의 팔을 놔줬다.

그러고는 구역 관문을 넘어 제3구역으로 향했다.

"거, 형님. 저 여자는 형님을 무서워하면서도 은근히 쫓아다니는 게 변태 같수다."

뒤에서 멀뚱멀뚱 구경하던 장두식이 방긋 웃었다.

"하하-! 두식아, 간만에 맞는 말을 하는구나!"

에릭도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이상하게 줘 팬 기억밖에 없는데, 어릴 적부터 에리카는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곤 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시키지 않아도 교회를 잘 챙겨 준단 말이지.'

에릭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었다.

"생각해 보니까 형님한테 얻어맞은 사람들은 죄다 형님을 따라다니고 있지 않수?"

"음...."

장두식, 에리카, 잭슨, 늙은이.

에릭의 머릿속에 수많은 이름들이 스쳐 지나갔다.

'생각해 보니까 고아원 1기 생들도 그렇군.'

그런 잡소리를 나누며 에릭과 장두식은 재건된 교회 앞에 들어섰다.

아치형 문 앞에는 절름발이 소드마스터 잭슨이 보였다.

"오, 따까리, 살아 있었구만!"

장두식이 방긋- 인사하자.

잭슨이 흉터를 마구 구기며 에릭을 바라봤다.

"보스-. 두식 형님은 왜?"

"일이 좀 있다."

잭슨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문을 개방했다.

그 안으로.

"허어. 형님, 교회라는 게 며칠 만에 뚝딱 지어지는 거요?"

거대하다 못해 웅장하고, 화려하다 못해 휘황찬란한 교회가 드러났다.

거대한 스무 개의 기둥 위로 뾰족한 장식물이 보인다.

벽면에는 수많은 조각들이 새겨졌고, 기둥 사이의 창문으로는 스테인드글라스가 영롱한 빛을 뿜어 댔다.

높이는 고아원과 엇비슷한 수준.

절뚝-.

"보스, 지구의 라스 라하스 성당의 외견과 지옥문이라는 조각품을 참고한 디자인입니다."

잭슨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장두식을 흘겨보는 것이 묘-한 경쟁 의식이 느껴졌다.

"소드마스터가 건물을 지으면 이렇게 되는군."

에릭이 감탄했다.

지구의 유명한 성당과 조각품을 베껴 만들었다지만....

가히 웅장함 그 자체였다.

'교황청보다 멋지군.'

조금 과한 느낌이 있다마는.

아무렴 어떤가.

"흥흥-."

르웰의 콧노래를 듣자 하니, 교회의 주인도 만족스러워하는 건 분명했다.

'화가 다 풀리셨군.'

수하들을 붙여 둔 걸로 언짢음을 토로했던 르웰인데, 지금은 아주 행복한 얼굴이었다.

"에릭-!"

밝게 다가오는 르웰을 향해 에릭이 고개를 숙였다.

"내가 누구?"

"제국 최대 교회의 오너십니다."

꺄르르- 르웰이 굴곡진 몸을 꺾으며 한껏 웃었다.

에릭 또한 마주 웃자니.

"그래서 이번에도 그 농담은 없는 거야?"

르웰이 허리에 손을 얹고 물었다.

그에 에릭이 눈을 질끈 감았다.

르웰의 첫 교회 개관식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제가 몸이 이럴 뿐이지, 머리는 서른 살입니다. 사제님을 어머니로 여기기엔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지 않습니까?"

"엄마처럼은 안 보인다? 쬐꼬만 꼬마가 그러니까 더 귀엽다! 그래서 가족이 되기 싫다는 거야?"

그때의 르웰이 서른쯤이었으니, 박지훈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법했다.

"부부가 된다면 또 모르겠지만요."

르웰은 에릭의 등짝을 치며 한껏 웃었다.

짜악!

"뭐래, 이 꼬마가!"

1미터가 조금 넘는 작고 귀여운 아이의 말이었으니, 그 실체가 빙의자여도 귀엽게만 보였겠지.

그런데 지금의 에릭은 다르다.

눈을 뜬 에릭이 르웰의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르웰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에릭?"

청록색 눈망울이 에릭을 향했다.

에릭은 고개를 숙이며 르웰의 귓가에 속삭였다.

"감당되시겠습니까?"

흠칫-.

르웰이 몸을 떨었다.

약 열 걸음 뒤로 종종- 물러섰다.

"흥흥, 뭐, 봐서."

그러면서 그녀는 교회 안으로 들어섰다.

활짝- 열린 교회 내부로 3층으로 나뉜 좌석이 나타났다. 가장 안쪽으로는 기도문을 읊는 단상이 보였다.

'보스가 어색해하는 기색이군.'

묘-한 기류에 눈치껏 숨을 죽였던 잭슨이 재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큼, 흐흠. 보스, 안쪽은 파리의 오페라 가르니에 내부를 참고해서 만들었습니다."

에릭은 잭슨의 눈치가 달가웠다.

하여, 재빠르게 대화를 이었다.

"소드마스터의 조각 실력이 제법이야."

교회 내부는 장엄한 오페라 하우스를 방불케 하는 느낌으로.

기둥 하나하나에 천장까지 모든 것에 예술적인 조각이 가미되어 있었다.

"봤던 것들을 따라 하는 것뿐이니 작은 재주일 뿐입니다. 이쪽에는 저작권 문제도 없잖습니까?"

잭슨은 지구의 건축물들을 최대한 따라 만들었다.

어쭙잖게 창작을 할 바에는, 그 가치를 인정받은 유명 건축물을 참고한 것이다.

"3층 구조가 특히 마음에 드는군."

사실 에릭은 건축미라든가, 조각의 예술적 가치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최소 천 명은 수용이 가능하겠어."

얼마나 많은 인원이 십일조를 낼 수 있는가?

여기에 쏠려 있었다.

"1층 외곽의 스탠딩 라운지를 개방하면, 총원의 세 배까지 인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당연히 잭슨도 이를 염두에 뒀다.

'조만간 잭슨이랑 한잔해야겠군.'

에릭은 그리 다짐했다.

* * *

"흥흥, 어때?"

단상 중앙에 선 르웰이 에릭을 내려다봤다.

약 2미터 높이의 단상.

그 위에서 성전을 든 르웰의 모습은 아름다우면서도 성스러웠다.

그녀의 뒤에 깔린 스테인드글라스에 햇빛이 반사되어 아주 장엄하면서도 신성한 느낌을 자아냈으니.

"이번 예배에서 아주 큰 돈을 벌게 되겠군요."

에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는 호선이 그려져 있었다.

교회 증축을 서두른 이유?

주일에 예배를 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합법적 십일조다.

앞으로 돈이 천문학적으로 들어가게 생겼는데, 절대 멈춰서는 안 되는 법.

'이미 신성 폭탄에 1억을 태웠으니까.'

늙은이의 몸에 1억 원어치의 신성력을 담았다.

그러니까 [길드홈] 시스템이 박살 나고 내부에 있던 흑마법사의 [영역]까지 초토화된 것이다.

세계가 변하면서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돈의 규모가 달라졌다.

"잭슨이 조오기- 입구 옆에 함까지 준비해 놨더라."

르웰의 손끝에는 거대한 상자가 보였다.

상자의 크기가 대변하는 것은, 예배에 참석하게 될 사람의 수였다.

"이렇게 규모가 큰 기도는 처음이라 조금 긴장되네."

내심, 거대한 신축 교회에서의 기도가 긴장되던 르웰이었다.

그에 에릭이 말하기를.

"아이들이 사제님을 잘 보조할 겁니다."

"응? 아이들이?"

르웰은 벙-쪘다.

에릭의 말이 이어졌다.

"사제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뭘 아냐는 말은 없었지만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제국일보]부터 시작해서 온 세상이 떠들썩했으니까.

"어어? 그, 그러면...."

에릭은 황제의 만찬에 초대받았다.

거기에다 르웰은 에릭이 교황의 세례를 받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교황 성하가 교회의 연락망으로 엄청나게 홍보를 했었다.

"에, 에릭, 설마.... 새 교회에서 예배를 보는 나를 내버려 두고 거길 가겠다는 거야?'

르웰은 에릭이 황제와 교황을 내팽개치고 자신의 예배를 위해 왔다고 여겼었다.

분명 그랬는데....

"에릭, 아니지?"

38화 선택 (2)

'많이 서운할 법한데도....'

가족이 괜히 가족인가?

서운할 일이 있어도 이해하고 배려해 주기 때문에 가족이라 불리는 것일 테지.

에릭은 르웰의 자비심에 가슴 깊이 감사했다.

신축 교회에서 이뤄지는 첫 기도를 바람맞힌 셈 아니던가.

그런데도 그녀는 에릭의 편의를 봐주었다.

"에릭, 아마도 너는 두 곳을 다 가려고 생각하고 있겠지."

토라진 듯 뚱- 하게 굴던 르웰이 에릭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어딜 가든 성질 죽이고! 특히, 교황 성하는 뒤끝이 조금 긴 편이니까 조심해!"

에릭에게 조언을 건네주었다.

그의 성정을 잘 아는 르웰로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

"-황제 폐하한테 십일조니 뭐니 그런 소리는 자제하고!"

한참 잔소리가 이어졌다.

에릭은 묵묵히 그걸 들었다.

"그리고 그 고리, 네 성격에 신경 쓸 게 뻔해서 말 안 하고 있었는데... 괜히 사람들이 쳐다본다고 인상 찌푸리지 마!"

르웰은 잔소리를 쏟아 내며 까치발을 들었다.

에릭이 슬쩍 몸을 낮추자, 그녀가 에릭의 고리 위로 손을 얹었다.

'기척을 지우는 힘을....'

르웰의 손길을 타고 따스한 힘이 느껴졌다.

머리 위의 고리의 기척이 흐릿해졌다.

"으읏.... 남한테는 처음인데, 조금 힘드네."

"감사합니다."

에릭은 흐릿해진 고리를 느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제 진짜 황궁으로 향해야 할 시간이다.

전이의 기적을 사용할 수 없는 수도의 제1구역.

그의 뒤에서 르웰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황궁 데이트! 약속 꼭 지켜!"

르웰이 배려를 해 줬다지만,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무려 황궁에서의 데이트를 대가로 내걸었으니까.

'황제랑 딜을 잘해 봐야겠군.'

저 멀리서 손을 흔드는 르웰에게 에릭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고는 교회 정문 앞에 서 있던 장두식과 잭슨을 바라봤다.

오른쪽 옆으로 재빠르게 장두식이 따라붙었다.

절뚝- 한발 늦게, 잭슨이 에릭의 왼편에 섰다.

"따까리야, 네 자리는 왼쪽이다."

장두식이 방긋 웃고, 잭슨은 흉터를 일그러트렸다.

에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잭슨을 바라봤다.

"잭슨, 손님들 관리는 더 철저하게 하도록."

자신 없이 이뤄지는 예배에 만전을 기하는 것.

[인벤토리]에서 온전한 흑마법사의 심장까지 꺼내 들었다.

"네 줄짜리 심장이다. 이걸 먹여서 늙은이도 빨리 부활시켜라."

"예, 보스."

"그리고 고아원 아이들이 손님들과 함부로 접촉하지 않게 최대한 주의를 주고."

"예, 보스."

"교회 전체에 신성 결계를 쳐 둘 생각이니, 쌍둥이보고 함부로 나돌아 다니지 말라고 전해라."

"예, 보스."

한참 대화가 이어지고.

"잭슨, 교회는 믿고 맡기마."

"예, 보스."

우직한 잭슨이 절뚝이며 정문 앞에 섰다.

허리춤에 꽂힌 검의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예리한 기도를 내뿜었다.

'흑마법사가 나타나서 그런가?'

에릭이 보건대, 잭슨의 기세가 보통 예리한 게 아니었다.

그와 처음 만났던 전장이 떠오를 만큼 진중한 모습.

그에 부응하여 에릭도 단단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결계."

에릭의 손끝에서 [신성 결계]가 발동되었다.

쿠웅- 묵직한 신성력이 르웰의 교회를 뒤덮었다.

선명한 황금빛으로 보아, 빙의자건 흑마법사건 스치기만 해도 소멸할 수준이었다.

"거참, 섭섭하구만. 나는 뭘 하면 되는 거요? 바닥에 마법진이라도 깔면 되겠수?"

장두식이 아공간 주머니에서 몽둥이를 꺼내 들며 열의를 불태웠다.

"두식아, 너는 날 따라와야지."

"황궁에 가는 거 아니었수?"

성큼- 에릭이 걷자 장두식이 황급히 따라붙었다.

"형님, 진짜요? 나도 황제 폐하를 보는 거 맞수?"

에릭이 황제의 만찬에 초대받았다고는 하나, 수행인을 하나 데려갈 수 있다고 하니.

"그래, 두식아. 네 역할은 나의 수행원이다."

"무슨 일을 하는 거요?"

"그냥 잘 따라다니면 되는 거다."

"귀족들 수행원이 개꿀 직업이라던데, 진짜 그런 것 같수다."

장두식이 한껏 들떴다.

고개를 돌려 교회 정문을 바라보니, 잭슨이 시선을 돌린 채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따까리 쉑.'

장두식이 으쓱했다.

르웰의 교회는 점점 멀어지고 어느덧 제2구역과 연결된 구역 관문이 나타났다.

에릭이 뚝- 하고 걸음을 멈췄다.

"흠, 두식아. 마중을 나온 것 같구나."

제국의 황도 아르만.

어지간한 소왕국만큼 커다란 곳이 제국의 수도다.

히이이이잉-!

사두마차와 함께 황실 근위대가 에릭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채만 한 새하얀 백마가 네 마리요, 그 뒤로는 통짜 진은(眞銀)으로 만들어진 마차가 보였으니.

마차에는 황실의 손님을 뜻하는 별이 수놓아져 있었다.

절로 감탄이 나올 지경.

"오오, 형님. 저게 말로만 듣던 말이요? 느려 터진 주제에 의전을 위해서만 키워진다는...."

한껏 들뜬 장두식이 에릭의 표정을 보고는 황급히 말을 줄였다.

'대단한 업적을 세워야만 보내 준다는 마차를....'

에릭은 심란했다.

아무래도 황제가 제게 단단히 반한 느낌이었다.

* * *

"폐하, 만찬의 준비가 완료되었나이다."

황궁 수석 시종이 고개를 내리깔았다.

황제가 실로 간만에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뚝-.

뼈마디가 굉음을 일으키고 대전이 흔들렸다.

"박 집사, 의전은 어떻게 처리했지?"

"최대한 예후를 갖췄습니다. 황실의 신의를 알리기 위해 사두마차를 보냈고 에릭 국장님의 호위는 황실 근위대가 맡았습니다."

기다란 백색 수염을 쓸며, 박 집사가 보고를 이어 나갔다.

"황국까지 오는 길은 수도의 전 백성들이 환영할 것입니다."

"좋군, 만찬의 관객들은 어떠한가?"

"제국의 백작위 이상의 귀족들과 수도에 머무르는 타국의 귀빈들까지 확실하게 초대했습니다."

"완벽하군."

황제는 박 집사의 일처리에 만족하며, 만찬장으로 향했다.

수도 제1구역은 일곱 개의 궁전으로 이뤄졌다.

가장 중앙에 있는 궁전은 황제가 기거하는 곳으로, 대륙궁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대륙 통일에 대한 제국의 비원이 담긴 궁전이기 때문.

"제국의 지존, 만백성의 아버지. 위대한 은빛 달의 후예요, 대륙을 하나로 이끄실 위대한 지도자, 에스페로자 로펜 아르만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대륙궁 1층에 마련된 만찬장에서, 황제의 입장을 알리는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사방에서 박수 갈채가 터져 나왔고 그 사이로 황제의 묵직한 발걸음이 들어섰다.

뚜벅- 뚜벅-.

황제는 느긋하게 좌중을 훑으며 단상 위로 걸었다.

반 층 낮은 높이에는 제국의 인사들과 타국의 귀빈들이 앉아서 황제의 위용을 바라봤다.

끼익-.

박 집사가 정중하게 의자를 빼 주자 황제가 자연스레 그곳에 앉았다.

의자를 빼는 것부터 앉는 것까지 마치 한 동작처럼 보였다.

황제는 식탁에 놓인 엄선된 요리들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듯 박 집사를 칭찬했다.

그 광경에 좌중은 압도당했다.

'드래곤 꼬리 조림이라니.'

드높은 단상 위에는 기다란 식탁이 놓였고 그 위로 온갖 산해진미가 들어섰다.

사냥하는 데만 몇 개의 기사단과 마도병단이 필요하다는 드래곤이다.

피부와 가죽, 이빨, 뼈, 피와 살점까지.

무엇 하나 버릴 게 없는 존재가 드래곤인데.

'저걸 먹는다고?'

황제의 만찬에서는 그저 식재료일 뿐.

'저, 저거는....'

미궁의 특별 보상으로만 나타난다는 귀하디귀한 [요정의 엘릭서]가 커다란 물병에 담겼다.

만찬에서 물은 요정의 엘릭서다.

'뇌만 멀쩡하다면 100% 회복시켜 주는 아이템을 물처럼 마셔?'

돈지랄도 이런 돈지랄이 없구나.

제국의 귀족 타국의 귀빈 할 것 없이 모두가 경악할 다름.

그 이유는 만찬의 요리들이 황제의 건너편, 에릭이 앉을 자리까지 쭉-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예정된 만찬이란 건가?'

원래 만찬장의 꽃은 단두대에 있다.

황제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자가 단두대에 목이 잘리고, 그걸 안주 삼아 황제가 식사를 하는 행사가 바로 만찬이었다.

'역사적으로 손에 꼽는 일이겠군.'

귀족들은 머릿속으로 에릭의 가치를 가늠했다.

그 만찬에서 영광이 예정된 자가 몇 이나 있었지?

'순례자 리페로제.'

가장 최근에 있었던 만찬은 20년 전이다.

'공교롭게도 그녀의 제자로군.'

그 스승에 그 제자라는 건가?

그때와 마찬가지로 만찬장 옆에 놓인 단두대가 휑-한 모습이었으니.

'칼날을 뺀 단두대.'

의미는 명확했다.

예정된 영광을 주겠노라.

황제의 의도였다.

* * *

"두식아, 황제가 나를 놔줄까?"

다그닥-거리는 마차 안에서 에릭이 물었다.

"거, 뭐냐. 황제폐하가 보내 준 마차에서, 말을 그리 막 해도 되겠수?"

"황제가 보냈으니 그래도 되는 거다."

이 마차는 황실의 신의를 뜻한다.

도청은커녕, 마차에 탄 자는 무기를 소지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게 제국 황실의 믿음이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냐?"

설명을 마친 에릭이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에릭은 황제를 만나고 식사만 마친 뒤에 자리를 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사두마차로 보아, 어지간해서는 만찬 뒤의 행사까지 참석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느낌이 들었다.

"마차로는 잘 모르겠수다. 거, 뭐냐 황궁에 입장할 때 황실 따까리가 소리치는 걸로 알 수 있지 않겠수?"

흠.

충분히 납득 가는 말이었다.

요컨대, '순례자 에릭 공 입장' 혹은 '빙의자 관리국 에릭 국장 입장' 이 정도 수준이라면,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수식언이 두 개만 안 넘으면 된다.'

에릭이 생각에 잠겨 있자니.

히이이이잉-! 푸르륵.

말의 투레질과 동시에 마차가 멈추었다.

황도 제1구역, 그중에서도 가장 중심에 있는 대륙궁에 도착했다는 의미다.

똑똑.

정중한 노크에 에릭이 문을 열었다.

덜컥-.

활짝 열린 문 너머로 황실 근위대가 보였다.

그들은 좌우로 늘어서서 칼을 뽑아 들고 X자로 교차했다.

이는 황실 근위대가 보이는 최상급 의전이었다.

"두식아, 어지간하면 입은 열지 마라."

에릭은 마차를 내려와 검의 길 아래를 거닐었다.

장두식은 두리번거리며 에릭을 따랐다.

손끝에는 몽둥이가 들려 있었는데, 장두식은 웅장한 황궁의 모습에 취해 이를 집어넣을 생각조차 못했다.

에릭도 마찬가지였다.

'제국은 돈이 얼마나 있는 거지?'

빙의자 관리국장 일로 제1구역에 몇 번 오긴 했다마는....

코앞에서 대륙궁을 본 건 처음이다.

'저게 다 진은이군.'

건물을 통짜 진은으로 만들었다는 게.... 보고도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오러를 가장 잘 받아들이는 소재가 진은이며, 미스릴보다 등급이 높은 광물이 진은이었다.

드르르륵.

반짝이는 달빛을 머금은, 거대한 황궁의 문이 개방되었다.

그리고 기다란 복도로는 황궁의 시종들이 고개를 내리깔며 에릭을 환대했다.

마치 황족을 대하듯이 정중한 태도였다.

'쉽지 않겠어.'

에릭은 시종들 사이로 쭉 걸었다. 그 길의 끝에 황제의 만찬장이 드러났다.

화려한 보석과 제국의 신화를 조각으로 옮겨다 둔 거대한 문.

만찬장의 문 앞에서 황실 시종이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말하기를.

"미궁의 흑마법사를 처단한 구원자요, 제국의 빙의자를 총괄하는 빙의자 관리국장이며, 아스티아 교단의 순례자 지위를 지닌 에릭 공께서 입장하십니다!"

맙소사.

에릭이 관자놀이를 질끈- 눌렀다.

'황제보다 하나가 적군.'

수식언의 수가 남달랐다.

이는 황제가 얼마나 이 자리를 고대했는지를 의미한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제국에 영광을!"

"앉게."

기다란 식탁의 끝과 끝.

에릭은 황제를 마주 보고 자리 앞에 섰다.

본디 수행원이 의자를 빼 주는 것이 기본적인 의전이었지만.

'이놈이 그런 걸 알 리가.'

드르륵-.

에릭은 스스로 의자를 빼 그 자리에 앉았다.

장두식은 멀뚱멀뚱 고개를 내리깐 채 에릭의 오른편에 섰다.

그에 황제가 껄껄- 웃으며 말하기를.

"그 스승에 그 제자인가."

에릭은 리페로제 또한 황제와 만찬을 가졌음을 안다.

그러나.

'스승님이 수행원을 데려와?'

들은 적 없는 일이었다.

하여, 물었다.

"폐하-. 스승님은 수행원으로 누굴 데려왔습니까?"

"빙의자였다. 그때는 정확한 명칭이 없었으니, 그녀는 그자를 세계의 이물질이라고 칭했었지."

20년 전에 등장한 빙의자.

에릭보다 선배인 존재였다.

'엘프겠군.'

에릭은 자신보다 먼저 빙의한 몇몇 존재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모두 에릭처럼 어린아이로 태어났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환생자일 수도 있고.'

호칭이 뭐가 중하겠는가?

"그래서, 옆의 덩어리도 빙의자더냐?"

당장 중요한 것은 장두식의 존재 각인으로.

에릭은 장두식의 입지를 키워 줄 생각이다.

그래야 자신의 운신이 자유로워질 테니까.

하여 묻기를.

"폐하, 잠시 신성력을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황제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손을 까딱였다.

리페로제는 만찬에서 신성력에 불타는 빙의자란 존재를 선보였었다.

'기대되는군.'

흑마법사가 아닌데, 신성에 불타는 존재는 그야말로 획기적인 발견이었으니.

과연 이번엔 어떨 것인가?

황제의 붉은 눈동자가 한층 선명해졌다.

"-축성."

에릭은 그 시선을 받으며, 장두식에게 축성을 내렸다.

키이잉-!

반짝반짝 빛나는 빛무리가 장두식의 위로 피어났다.

축성, 신성력을 인간의 몸에 한계까지 담는 행위에 만찬장에 불려 나온 귀족과 귀빈들이 경악했다.

'터져 죽을 건데?'

흑마법사의 난에서, 신성력의 활용법에 많은 발전이 있었다.

하나, 실험에는 부정적인 결과도 따르는 법.

그중에서도 인간에게 축성을 가하는 것은 일종의 금기(禁忌)로 여겨졌다.

과한 신성은 독이다.

분명 그랬는데.

"돼, 됐수?"

반짝거리는 덩어리가 빛무리를 흩뿌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허어. 스승은 빙의자를 처음 선보였는데, 그 제자는 인간에게 축성을 성공시키는 걸 처음 선보이는구나."

황제의 눈이 반짝였다.

마치 보물을 발견한 골드 드래곤 같은 모습.

그에 에릭이 한껏 웃었다.

"장두식, 아직은 그만이 축성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장두식이라, 과연. 생긴 것과 달리, 마법사였구나. 저 무식한 몽둥이는 지팡이겠구나!"

황제가 식탁을 탁- 치며 감탄했다.

그야말로 새로운 발견이 아닌가?

연약한 마법사가 축성을 받고 살아남았는데, 저걸 기사에게 적용한다면 어떨까?

정복 전쟁을 앞둔 황제는 구미가 당겼다.

'오러에 신성을 담아 휘두르는 기사단.'

머릿속으로는 그 명칭까지 정해 버렸으니.

"제국 신성기사단."

에릭은 그저 고개를 조아렸다.

숙인 고개 아래로는 비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39화 선택 (3)

대화를 나눌 때는 가벼운 스몰 토크부터 시작하는 것이 기본이다.

사회성이 있는 인간이라면, 어느 정도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소양으로.

"제국 신성기사단이라니, 참으로 멋진 이름입니다. 폐하-."

황제와의 대화도 그러했다.

"대륙통일군 또한 짐이 정한 이름이지."

에릭은 나름 절대자와의 대화법에 일가견이 있다.

스승 리페로제로 단련된 것인데.

'역시, 별것 아닌 걸로 칭찬하는 게 효과적이군.'

대단한 자들일수록 사소한 칭찬에 목말라 있었으니까.

에릭은 또 한 번 황제의 작명 센스에 감탄해 주었다.

"대륙을 통일하겠다는 일념이 아주 잘 느껴지는 이름입니다, 폐하-."

가벼운 대화는 곧 산뜻한 식사로 이어졌다.

"들지."

황제가 먼저 포크를 들어 거대한 드래곤 꼬리를 집었다.

투박한 손에 들린 포크가 장난감처럼 작아 보였다.

'강자존(强者尊).'

강한 자만 황제가 된다는 황실의 철칙에 어울리는 손이었다.

황제가 포크를 든 뒤, 에릭도 손을 뻗어 요리를 제 앞으로 옮겼다.

"드래곤 꼬리를 좋아하는가?"

황제와 같은 메뉴였다.

에릭이 산뜻 웃으며 말하기를.

"별미였습니다. 스승님과 무국적 지대에서 수행을 하며 즐겨 먹곤 했죠."

비슷한 식사 취향으로 대화는 무르익었다.

조용한 식탁 위에 소소한 잡담이 스치듯이 오고 갔다.

"호오, 만드라고라 튀김은 조금 쓸 텐데."

"하하, 제 입맛에는 잘 맞습니다."

용 꼬리, 요정의 엘릭서, 만드라고라, 세계수의 이파리 찜 등등.

온갖 산해진미를 먹으며 에릭은 황제의 의도를 헤아렸다.

제국의 정점이 고작 밥 한 끼 먹자고 이 난리를 피운 건 아닐 테니까.

'돈이군.'

먹다 보니 이를 모를 수가 없었다.

족히 수억 골드를 한 끼 식사에 태워 버렸다.

그 말인즉슨.

황제가 에릭을 중히 쓰는 대가로 내놓을 것도 돈이라는 말이었다.

"황제는 아주 좀팽이다. 내게 맛대가리 없는 풀떼기만 잔뜩 주더라고."

근거도 명확했다.

리페로제에게 들었던 메뉴와 에릭의 메뉴는 완전히 다른 수준이었으니까.

식사가 무르익고 식탁 위에 빈 접시가 더 많아졌을 때 쯤.

"식사는 이쯤 하지."

황제가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내뱉은 말이다.

옆에서는 박 집사가 정중하게 새 냅킨을 팔에 걸고 황제의 옆에 다가섰다.

힐긋- 에릭이 눈을 돌리니, 장두식이 만찬장 아래에 앉은 귀족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냅킨은커녕, 짝다리를 짚은 채 몽둥이를 지팡이 삼아 서서 두 눈을 끔벅거렸다.

'어지간히도 신기한 모양이군.'

장두식이 귀족들을 보며 놀랐듯이, 귀족들 역시 축성된 장두식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황제와 에릭의 대화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사실 실속 없는 음식 얘기가 태반이었으니.

'제국 신성기사단.'

귀족들은 이 만남의 핵심이 처음의 대화에서 이뤄졌다 여겼다.

다들 황제의 말에 정신이 쏙- 빠진 모양.

하나, 본론은 이제부터다.

대다수의 귀족이 장두식을 봤지만, 실세라 불리는 대귀족들의 눈은 여전히 황제와 에릭을 향해 있었다.

'슬슬 시작이겠군.'

에피타이저로 스몰 토크.

그 뒤 식사를 나누며 적당히 예열을 하였으니, 이제 시작될 것은 본론이다.

제국 황실의 전통, 만찬(晩餐).

그 정수는 식사 뒤에 이뤄지는 대담이다.

"만찬 뒤에는 주제가 필요하지."

황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릇 제국의 지존이란, 모든 대화를 주도하고 이끄는 존재인 법.

에릭은 고개를 조아렸다.

마주 앉아 식사할 영광을 얻었으나, 황제는 황제였다.

이제 나올 것은 주제를 정해 두고 나누는 대화다.

'대격변 패치 얘기를 하려나?'

말이 대화지 사실, 국정을 놓고 커다란 논담을 나누는 것이 만찬의 실체다.

'아니면, 미궁 최상층 공략에 대한 얘기가 나올지도 모르겠고.'

에릭은 제국의 주인이 관심 있어 할 법한 것들을 떠올리며, 할 말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황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조금 뜻밖이었다.

"정보국에서 말하길, 빙의자가 50만 명이 넘는다더군."

그 주제는 바로 '빙의자'.

미궁에서 에릭이 확인했듯이, 그 수가 50만이 넘었다.

"이들을 어떻게 관리해야겠는가?"

황제가 화두를 던졌다.

그리고 에릭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그려졌다.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니던가?

'영지 하나를 잡아먹은 전세 사기, 흑마그룹의 등장.'

이러한 것들이 대격변 패치나 미궁 공략보다, '빙의자 문제'를 더 중요하게 만들었겠지.

하여, 에릭이 답하기를.

"제국 전역에 정화 작업을 진행해야 합니다."

* * *

흑마그룹 이사회(理事會).

마경 한복판에 놓인 거대한 흑색의 육각 기둥, 흑마그룹의 본사(本社)가 북적거렸다.

"아니, 변경백령에 투자한 게 얼만데.... 그걸 들켜서 영지를 통째로 날려 먹어?"

"미치겠군. 그러니 내 말하지 않았소? 대표 자리는 어디까지나 빙의자여야 한다고!"

"크흠, 흠. 뭐가 되었건 대표는 다시 뽑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흑마그룹의 핵심은 지분을 가진 주주들이다.

회장을 제외한 모든 인력은 이사회의 결정으로 선출된 자들로, 일종의 대리인과 다를 게 없었다.

회사의 주인, 주주들은 드높은 단상 위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곳에서 한 여인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으니.

"마키아 쟝챈 사장, 어디 해명할 게 있다면 지껄여 보게나."

청문회(聽聞會)가 열렸다.

눈 아래로 여섯 개의 검은색 줄을 지닌 여인이 단상 위의 이사들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칠흑 같이 검은 머리칼이 고개를 따라 흘러내렸고.

"실패의 원인은 제국의 미궁 2계층에서 수확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고개를 내린 채 할 말을 읊조렸다.

고고하면서도 당돌한 어조.

"허어. 그러면 이사회가 제국을 채택한 탓이다, 이건가?"

"대주주님 앞에서 그런 소리를 했다가는 네년은 그 자리에서 제물로 바쳐졌을 게다!"

그녀의 말에 흑색 단상 위에 앉은 이사회 원로들이 발끈했다.

그에 흑마그룹의 대표, 마키아 장첸 사장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검고 칙칙한 눈동자가 단상 위를 나긋하게 훑었다.

"흡."

대표라 불린 여인은 미인이었다.

기다란 머리카락부터 입고 있는 원피스에 머리 위에 걸친 베일까지.

그녀의 모든 것은 검었다.

또한 눈동자는 한층 터 짙고 탁한 흑색이었으니.

'눈빛이 아주 탁한 게 아름답구나.'

흑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제일미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지경.

"제국 외곽의 영지를 공략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런 대표가 이사회를 향해 대뜸 제안을 건넸다.

청문회란, 묻고 답하며 잘못을 지적받는 자리다.

거기서 역으로 제안을 한다고?

당돌하기 그지없으며.

어찌 보면 건방질 지경이었는데, 그 내용 또한 정신 나간 수준이었다.

"제국에는 정보부가 있다."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느냐?"

곧장 반발이 나왔다.

여인은 베일을 걷어 올리며, 이사회를 바라봤다.

검은 것들 사이로 투명한 유리 같이 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아스티아 교단, 알만정교회, 루-솔라스교. 세 종교 집단의 위세가 가장 약한 곳이 제국입니다."

당당한 말투요,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리고 눈 아래의 6줄은 그녀의 실력을 의미했다.

사업의 추진력, 대표자로서의 풍모,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능력까지 충분하단 의미로.

이사회는 그녀의 말이 일리 있다고 여겼다.

'수도와 대공령를 제하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황제와 대공은 괴물이다.

하나, 제국에서도 변경, 거기서도 한미한 영지는 얘기가 다르겠지.

생각을 마친 이사회 원로가 묻기를.

"제국에서 수확,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다만, 그 리페로제의 제자는 어찌할 생각인가?"

에릭, 열다섯에 괴물 같은 신성력을 지닌 아이.

그 어린 나이에 순례자에 빙의자 관리국장이라는 자리에 오르기까지 했으니.

"그놈이 미궁 2계층의 계획을 무산시켰지 않느냐?"

"놈이 성전을 선포한 바람에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네."

칠흑 같은 장막 사이로 이사회의 움직임이 북적해졌다.

단상 아래로 소리를 차단한 채 저들끼리 회의를 진행하는 모양.

흑마그룹의 대표는 당당하게 그 장막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고.

"방법을 들어 보지."

"일리가 있다면, 대표자 해임 건은 무산시키고 제국 사업에 예산을 책정해 주겠다."

여인은 짙게 웃으며 입가를 가렸다.

검게 물든 기다란 손톱이 나른하게 움직였다.

손 위로 떠오른 것은 제국의 지도.

"전선과 가까운 자리는 위험하니 남쪽을 노려 볼까 합니다."

제국의 남쪽.

광활한 식량의 재배지요, 제국의 배를 채워 주는 비옥한 땅.

그리고.

"그쪽 귀족은 미궁의 의무가 없지요."

제국 남부는 무력이 약하다.

부(富)를 몰아주었으니, 무(武)를 줄여 힘의 균형을 맞춘 것이다.

그리고 여인은 그 땅을 선택했다.

"돈놀이를 좋아하는 귀족이 많다더군요."

"흐음, 가르시안 왕국처럼 빙의자를 이용해 보겠다?"

"예. 이사회도 아시다시피 그들의 수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그렇다 해도 정화 작업 한 번이면 빙의자들은 소멸하지 않는가?"

빙의자들은 유약하다.

사람 하나, 아니 몬스터도 제대로 못 잡아서 1레벨에서 빌빌거리는 것들이 워낙 많아야지.

"그래서 알만정회 쪽에 협력자를 구했습니다."

"종교쟁이들이 협력을?"

"제국에 불만이 많더군요."

"빙의자들을 잘 숨길 수 있겠구나."

그런 유약한 빙의자여도, 다른 면에서는 대단한 부분이 존재했다.

'온갖 사기에 능통하며, 금융 지식이 남다르지.'

애초에 흑마그룹이 생겨난 것에도 빙의자의 입김이 작용했으니까.

현지에 숨어 사는, 빙의한 지 얼마 안 된 것들을 이용한다면....

게다가 알만정교회가 황실의 눈을 가려 주기까지 한다면.

충분히 가능하겠군.

"허가(許可)."

타앙-!

이사회가 예산을 정했다.

시꺼먼 단상 위에서 거대한 도장이 내려찍혔다.

펄럭- 하늘 위에서 떠내려 오는 종이를 잡아 들며, 여인은 짙게 웃었다.

* * *

"빙의자 자진 선고 기간을 두고, 그 뒤에 정화 작업을 하자는 말이로구나!"

황제는 에릭의 제안이 기꺼웠다.

제국 연금마탑에서 성수(聖水)의 모조품을 만든다고 하지만, 드넓은 영토를 전부 관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신을 부정하는 황제다.

설령 신이 존재하더라도 신보다 드높아야 황제며.

가장 위대한 존재가 황제다.

"예, 폐하. 저희 교단의 사제와 기사단이 제국 전역의 빙의자를 찾아낼 것입니다."

종교 집단에 이러한 제안을 먼저 하는 건 황제의 성미에 안 맞았다.

황제는 전지전능하며, 가장 위대한 존재여야 한다.

'북한의 김씨 부자랑 비슷한 거지.'

물론, 능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다르지만....

여하튼, 이를 알기에 에릭은 먼저 그런 제안을 건넸다.

"그 빙의자들이 수십만이거늘, 어떻게 관리할 생각인가?"

"성직자들의 엄중한 관리를 받는 하나의 신도시를 만드시면 어떻겠습니까?"

황제는 단상 아래로 보이는 붉은 수염을 바라봤다.

재상의 수염이다.

파르르- 떨리는 것이 분명 제국에 큰 이득이 될 제안이었다.

'문화, 문물.'

빙의자들의 사상이 위험해서 그렇지....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황제가 허허- 웃었다.

"좋군. 교단의 의뢰니, 내 값은 후하게 쳐주도록 하지."

에릭의 눈이 반짝였다.

아마, 대담은 이걸로 끝이라는 느낌이다.

'식사도 끝났고 대담도 마쳤으니.'

만찬에서 따르는 영광(榮光).

이제 주어질 것은 보상이다.

드르륵-.

"만찬을 마치도록 하지."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뚝 선 그의 몸은 하나의 무기 같았다.

거대하고 흉포하며 한계까지 단련된, 인간을 초월한 무언가였다.

그 황제가 팔을 휘둘렀다.

후욱- 풍압이 일자 만찬장 아래의 귀족들이 바람에 휘청거렸다.

모든 이목이 황제에게 집중되었다. 아니, 황제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존재감이었다.

"미궁에서 제국을 노린 흑마법사의 암약을 막아 낸 에릭 국장에게 10억 골드를 포상금으로 지급하라."

에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단박에 4티어로 올라설 만큼의 돈이 주어진 것 아닌가?

'2억을 벌겠다고 그 지랄을 했는데....'

포차니 신문이니 푼돈 벌어 보자고 고생했던 기억이 에릭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수면 위로 능력을 드러냈을 뿐인데, 돈의 규모가 달라졌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추후 신설하게 될 빙의자 도시는 황실 직할령으로, 그 관리는 에릭 국장이 맡을 것이다."

교단 소속임을 감안해, 작위는 주어지지 않았지만....

'유사 영주.'

일종의 꼼수였다.

교단의 반발을 염두에 둔, 황제의 재치랄까.

에릭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대담이 빨리 끝나서 다행이군.'

이제 눈치껏 잘 빠져서 교단으로 이동하면 되겠지.

에릭이 그리 생각하자니.

"본디 연회는 밤에 열리지, 하나 짐은 에릭 국장과 나눈 담화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하여, 황제가 말하기를.

"에릭 국장, 마지막 포상으로 황실의 일원과 안면을 틀 기회를 주지."

황제에게 제안은 없었다.

묻지 않는다.

그저 명을 내릴 뿐.

에릭은 살짝 좁혀진 미간을 숨기며 고개를 조아렸다.

에릭은 황제를 따라 만찬장을 벗어났다.

"에릭 국장, 내게 막내딸이 하나 있다는 걸 아는가?"

기다란 복도를 걸으며 황제가 가볍게 자식 자랑을 늘어 뒀는데....

"첫째 아들은 미궁 공략에 뜻을 두었고 둘째 아들은 전쟁에 불세출의 재능을 가졌지, 셋째 딸은 마나의 사랑을 받는 마법의 천재지."

'이 미친 황제가.'

영락없이 딸의 소개팅을 주선하는 팔불출의 모양새였다.

에릭이 눈을 질끈 감았다.

"얼마 전부터 막내딸이 에릭 그대에게 관심이 많더군."

'음....'

황제의 말에 어딘가 위화감을 느끼던 찰나.

"자신을 막내로 만들어 줬다고 어찌나 기뻐하던지."

우뚝.

에릭의 발걸음이 멈췄다.

40화 선택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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