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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91% MERCENARIOQUEREGRESA / Chapter 17: 423-430

章 17: 423-430

423화 가장 강력한 전력을 사용하자. (3)

크르르릉....

에퀴데마가 몸을 낮췄다. 상대를 탐색하고 목표물이 결정되는 대로 바로 짓밟아 죽이려는 모습이었다.

다들 잔뜩 긴장한 채 지셀의 다음 말만 기다렸다. 뭔가 굉장히 불길한 느낌에 피오테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제, 제가 회복시켜 드릴게요!"

지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회복 안 시켜 줘도 돼. 그런데 힘쓸 필요 없어."

"네? 왜요?"

당황하는 피오테에게 알포이가 다가가 말했다.

"너 나 싫지?"

"네니요."

피오테가 고개를 저었다. 신을 모시는 사제가 어찌 다른 사람을 싫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항상 자신을 괴롭히는 알포이가 밉지만, 싫어하지 않도록 매일같이 기도하며 용서하고 있었다.

그런데 알포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싫어해도 돼."

"그게 무슨 소리...."

"내가 아니면 누가 지옥에 가랴!"

"네?"

텁!

피오테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알포이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피오테가 뭔가 반응을 하기 전에 냅다 에퀴데마를 향해 던져 버렸다.

"꺄아아아아!"

털썩.

피오테가 비명을 지르며 에퀴데마의 발 앞에 바로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에퀴데마도 흠칫 놀라 고개를 뒤로 뺄 정도였다.

"어, 어? 왜? 왜 나한테... 어...."

피오테가 공황 상태에 빠져 버렸다. 두려움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에퀴데마의 무시무시한 눈이 그의 코앞에 다가왔다.

크르르르....

에퀴데마의 증오에 가득 찬 두 눈이 보였다. 피오테는 살면서 이런 증오와 불길함을 가까이에서 마주해 본 적이 없었다.

피오테가 눈을 꼭 감았다. 절로 눈물이 글썽거렸다.

'나, 날 미끼로 던졌어! 알포이 저 새끼는 왜 나만 가지고 그래! 왜 다들 가만히 있는 거야!'

분하고 억울했다. 남 탓을 하지 않는 게 사제의 근본 자세이자 피오테의 심성이었지만, 알포이랑만 엮이면 미칠 거 같았다. 남 탓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알포이에 대한 증오, 인간에 대한 불신, 삶에 대한 집착, 죽음에 대한 공포 등 온갖 감정이 피오테를 감쌌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 탓을 하고 말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크어어어엉!"

에퀴데마가 앞발을 높이 들며 포효했다. 벨린다가 깜짝 놀라며 외쳤다.

"도련님!"

다른 사람들도 몸을 움찔거리며 피오테를 구하러 가려 했다. 하지만 지셀이 제지했다.

"괜찮아! 일단 지켜봐!"

꼭 여신과의 채널링이 아니더라도 지셀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사람들은 긴장한 채 피오테와 에퀴데마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는다. 결국 공포에 질린 피오테가 눈을 꼭 감으며 발악하듯이 외쳤다.

"여, 여신이시여!"

쿠르르르릉!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피오테의 머리카락도 은빛으로 물들며 그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신성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에퀴데마의 거대한 앞발이 피오테를 후려쳤다.

콰아아아아앙!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난다. 초인급의 힘을 가진 거대한 괴수다.

어지간한 사람이 맞는다면 아예 몸이 터져 버릴 것이다.

그런데 모두가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크아아아아!"

에퀴데마가 몸을 뒤로 빼며 괴성을 내질렀다.

치이이익!

강력한 신성력에 맞부딪친 에퀴데마의 앞발이 타들어 가고 있던 것이다.

정말 이 세상에 허락되지 않은 것처럼 신성력에 큰 타격을 받는 균열의 존재들과 달리, 에퀴데마는 강력한 힘으로 어지간한 수준의 신성력은 무시해 버렸다.

하지만 피오테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신성력에는 아무리 에퀴데마라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어?"

자신의 몸이 멀쩡하자 피오테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성력으로 에퀴데마에게 피해를 준다 쳐도, 강력한 공격을 받은 자신의 몸이 이렇게 멀쩡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여신과 연결이 되기도 전에 공격을 받았으니까.

쿠르르릉....

빛을 내리쬐려던 먹구름이 흩어지며 사라졌다. 피오테의 염원이 순간적으로 약해졌기 때문이다.

지셀이 그걸 보고 피식 웃었다.

"아, 쉽지 않네."

혹시나 이번에도 채널링에 성공하면 에퀴데마의 움직임을 잠깐이라도 멈추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사이에 다진 고기로 만들려고 했는데 피오테의 염원이 하늘에 닿을 정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도, 도련님?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벨린다가 떠듬거리며 물었다.

에퀴데마의 공격은 정말 무시무시했다. 피오테를 쳤을 때의 충격파만으로 주변의 균열인들이 다 터져 버릴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여신과 연결도 되지 않은 피오테가 그 공격을 버텨 냈다. 그의 신성력이 아무리 빠르게 늘고 강력해도 지금 수준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지셀이 대수롭지 않게 답해 주었다.

"성물을 하나 가지고 있거든."

"성물이요?"

"그래, 진짜 성물 말이야."

피오테는 '쥬아나의 가호'라는 반지를 끼고 있었다. 예전에 지셀이 포리스코에게 받아 와서 건네준 것이었다.

신성력만 있다면 절대적인 보호막을 제공하는 진짜 성물이다. 시전자가 의식할 필요도 없다.

에퀴데마의 공격력이 강력한 만큼 피오테의 신성력도 상당히 소모됐지만, 소모된 양에 비한다면 말도 못 할 정도로 강력한 보호막이었다.

"카아아아앙!"

에퀴데마가 분노에 찬 포효를 다시 뿜어내며 피오테를 후려쳤다.

콰아아앙!

피오테는 영문도 모른 채 그저 머리를 감싸고 쭈그려 앉아 있었다. 여전히 멀쩡했다.

그 모습을 본 지셀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가자, 미끼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공격해야지. 사제들은 피오테에게 계속 신성력을 주입하도록."

피오테의 신성력이 모두 소모되기 전에 에퀴데마를 잡아야 한다.

파아아앙!

지셀이 바로 대검을 들고 뛰쳐나갔다. 또 한 번 피오테를 후려치던 에퀴데마는 지셀의 갑작스러운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머리를 찍히고 말았다.

콰아아앙!

"크아아아아!"

에퀴데마가 분노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지셀은 어느새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그리고 그 틈을 이용해 테넌트가 에퀴데마의 발을 베었다.

촤아아악!

상처에서 푸른 연기와 푸른 피가 뿜어져 나오며 시야를 가렸다.

파아악!

연기를 가르며 에퀴데마가 테넌트에게 쇄도했다. 하지만 괴수가 공격하기 전에 벨린다의 단검 수십 개가 에퀴데마의 눈을 향해 날아갔다.

타타타타탕!

에퀴데마가 눈을 감으며 고개를 털었다. 그사이에 테넌트가 물러나고 길리언과 카오르가 에퀴데마의 양쪽 옆구리를 갈랐다.

"크아아아아아!"

에퀴데마는 더 크게 포효했다. 웬 벌레 같은 것들이 계속 치고 빠지니 화가 단단히 난 것이다.

다들 치고 빠지기만 하니 당연히 눈에 보이는 건 쭈그려 앉아 있는 피오테뿐이었다. 심지어 그가 뿜어내는 신성력은 균열의 존재들과 상극이었다.

에퀴데마는 끝 모를 증오심을 느꼈다. 순간 다른 놈들은 머릿속에서 사라질 정도였다.

그래서 그 증오심을 그대로 담아 다시 피오테를 후려쳤다.

콰아아아앙!

"으으으...."

피오테는 눈을 감고 바들바들 떨었다. 왜 안 아픈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안 아프다. 소리만 요란하지 그냥 산들바람이 와서 치는 거 같았다.

사람이 세게 밀리면 넘어져야 하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저 큰 괴수가 치는데도 자신의 몸은 미동도 안 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자신은 거의 무적과도 같은 상태였다.

그래서 피오테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내, 내가 죽더라도 여기에 있어야 해.'

자신이 맞고 있는 사이에 다른 이들이 싸우고 있었다. 그러니 피하면 안 된다. 죽더라도 이 자리에서 버텨야 한다.

놀랍게도 그는 이 순간에도 자신을 희생하려고 했다. 알포이와는 근본부터 다른 인간이었다.

콰아아앙!

'시, 신성력이....'

맞을 때마다 신성력이 뭉텅이로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다른 사제들이 계속 가호를 내려 신성력을 채워 주고 있지만 간에 기별도 안 갈 정도로 적었다.

어느새 자신의 신성력은 다른 사제들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늘어나 있던 것이다.

"크아아아아!"

에퀴데마는 피투성이가 된 채 연신 분노의 포효를 내뱉었다.

눈앞에 있는 작은 인간은 아무리 때려도 죽지 않는다. 날아가지도 않는다. 그저 그 자리에 박혀 있는 나무처럼 미동도 없다.

어떠한 물리적 충격도 전해지지 않아서 그런 것이지만, 에퀴데마가 그런 사정을 알 리 없었다.

그런데 그 틈을 타 벌레 같은 것들이 자신의 몸에 수도 없이 상처를 냈다.

"크르르르...."

점점 피투성이가 되어 가던 짐승은 드디어 알게 되었다. 자신이 지금 사냥당하고 있다는 걸.

미치도록 증오스러운 기운을 내뿜는 미끼가 앞에 있다.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자꾸 그것만 공격하게 된다.

그것이 마치 자신의 사명이 된 것처럼 말이다.

불리한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저 미끼를 눈앞에서 치워 버려야 한다.

"카아아아!"

에퀴데마가 그 거대한 입을 벌렸다. 먹으면 안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당장 먹어 치우지 않으면 자신은 사냥당하게 될 것이다.

피오테가 먹히기 직전임에도 다른 이들은 오히려 더 멀리 떨어졌다. 무언가를 피하려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에퀴데마가 거대한 입을 벌리며 피오테에게 다가왔을 때.

번쩍!

붉은 빛이 번뜩이며 강렬한 화염 줄기가 일행들의 뒤쪽에서 뻗어 나왔다.

그동안 마력을 모으며 기회를 노리고 있던 바네사의 마법이었다.

콰아아아앙!

"크아아아아!"

바네사가 쏘아 낸 화염의 광선은 에퀴데마의 입 안을 정확하게 강타했다. 피오테에게 달려들던 에퀴데마가 놀란 듯 물러났다.

하지만 마법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지잉―! 지잉―! 지잉―!

수십 개의 마법진이 하늘에 수놓였다.

이곳에는 아군이 많기에 광역 마법을 사용할 수가 없다. 그래서 바네사는 마법 하나하나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곧 마법진에서 강력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에퀴데마의 전신을 두들겼다.

사이사이에 알포이의 마법이 깨알같이 섞여 있었던 건 덤이다.

콰아앙! 콰아앙! 콰아아앙!

바네사는 힘을 아끼지 않았다. 가능하면 자신의 힘으로 끝을 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7서클 마법사의 모든 마력이 담긴 마법이 수도 없이 에퀴데마의 몸을 강타했다.

콰콰콰콰콰콰콰캉!

"크아아아앙!"

에퀴데마의 입과 상처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연기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간 입은 상처들은 마법을 맞아 더 크게 찢어지고 터져 버렸다.

알포이의 마법도 상처를 벌리는 역할을 하긴 했으나, 효과는 미미했다.

초인급에 이른 이 괴수의 방어력은 그야말로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에퀴데마는 모든 마법을 그냥 몸으로 버텨 냈다.

지셀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에퀴데마를 바라보았다.

"미친.... 상처에 저렇게 마법을 꽂아 넣었는데 저걸 다 버틴다고?"

"진짜 더럽게 안 죽네."

"죽을 때까지 패는 수밖에...."

힘과 속도보다 질긴 가죽과 체력이 저 괴수의 진정한 무기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지셀도 에퀴데마의 눈을 통해 머릿속을 파괴하지 않았던가.

바네사도 질린 눈으로 에퀴데마를 바라보았다. 모든 마력을 단번에 쏟아부어 마력이 거의 다 바닥났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걸 다 맞고도 아직도 살아 있다니! 괜히 종말의 괴수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물론 에퀴데마도 죽지만 않았을 뿐이지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뚝, 뚝, 뚝....

푸른 연기를 뿜어내던 에퀴데마의 벌어진 입에서 푸른 피가 엄청나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입을 벌렸을 때를 노려 정확하게 꽂힌 화염의 광선은 에퀴데마의 목 안에 큰 상처를 준 것이다.

"크르르르...."

으르렁거리는 에퀴데마의 머리 아래에는 피가 흥건하게 고이고 있었다. 확실히 타격을 많이 입은 모습이었다.

지셀이 대검을 앞으로 뻗으며 말했다.

"많이 지친 거 같군. 슬슬 끝을 봐야겠지?"

구오오오오.

지셀의 대검이 검붉은 기운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검붉은 안개에 가려졌다.

다른 이들도 모두 남은 힘을 다해 무기에 마나를 집어넣었다.

"크르르르...."

에퀴데마는 여전히 네 발로 대지를 굳건하게 밟고 있었다. 그것의 눈은 더욱더 증오와 살의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짐승에게는 임무가 있다. 그 임무야말로 짐승이 가진 삶의 이유이자 존재 가치였다.

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다면 살아 있을 가치가 없다. 그렇기에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

"카아아아앙!"

에퀴데마가 다시 포효하며 가장 가까이 있는 자에게 덤벼들었다. 정말 죽여 버리고 싶은 기운을 뿜어내는 자에게 말이다.

'또 나야!'

피오테가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공격당하지 않았다.

콰아아앙!

지셀의 거대한 오러 블레이드가 에퀴데마의 옆구리 상처를 후려쳤다.

"카아아악!"

에퀴데마가 순간 옆으로 밀려 났다. 그 사이에도 테넌트의 오러 블레이드는 집요하게 에퀴데마의 상처 입은 발목을 노렸다.

콰아아앙!

길리언과 카오르도 마나 블레이드를 엄청나게 뿜어내고 있었다. 얼핏 보면 오러 블레이드와 구별이 안 될 정도였다.

드래곤 하트의 조각을 먹고 최고급 마나 집속진까지 써 가며 훈련한 덕분에 마나는 넘치도록 많아진 두 사람이다.

아직 벽을 넘지는 못했지만 바로 전 단계까지 올랐다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지셀과 테넌트의 공격에 비틀거리는 에퀴데마의 몸을 사정없이 베었다.

"크어어엉!"

에퀴데마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누군가를 공격하려 하면 옆에서 견제가 들어온다. 공격 대상을 바꾸면 어느새 뒤로 빠져 있었다.

갈수록 상처가 벌어져 힘이 떨어졌다. 아무리 강력해도 짐승의 머리로는 지금 상황을 해결할 수가 없었다.

"비켜 봐요!"

벨린다의 몸에서 수십 개의 단검이 쏘아져 나갔다.

그녀 또한 드래곤 하트의 조각을 흡수하고 전용 마나 집속진으로 꾸준하게 수련을 해서 전보다 훨씬 더 강해진 상태였다.

벨린다의 로브 안에 연결된 수십 개의 단검이 에퀴데마의 상처 곳곳에 깊숙하게 꽂혔다.

"카아아아악!"

에퀴데마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벨린다가 뿜어낸 수십 개의 단검들은 마치 에퀴데마를 강하게 구속하는 것만 같았다.

트드드득!

에퀴데마가 몸을 흔들며 단검을 뽑아내기도 전에 벨린다가 스스로 단검들과 연결된 줄을 끊어 버렸다.

단검들은 에퀴데마의 상처 곳곳에 깊숙하게 그대로 박혀 버렸다.

"크르르륵...."

너무나도 많은 상처를 입은 에퀴데마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혼자서는 이 사냥꾼들을 이길 수 없다. 무엇 하나 제대로 공격하기가 힘들었다. 에퀴데마는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지셀이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되겠군. 몇 번만 더 치고 빠지자고."

전생에도 이런 방식으로 수많은 괴수를 잡았다.

소수의 실력자가 강한 괴수를 상대하는 동안 나머지는 균열인들처럼 상대적으로 약한 것들을 처치하는 게 가장 피해가 적었기 때문이다.

"크르르르...."

궁지에 몰린 에퀴데마가 조금 더 뒤로 물러났다. 지금도 균열인들이 계속 나오고 있지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펜리스의 기사들이 쉬지 않고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르르...."

에퀴데마는 이제 확실히 깨달았다.

자신은 저 사냥꾼들에게 죽을 것이다. 그리고 임무를 다하지 못할 것이다.

균열 앞까지 물러난 에퀴데마가 하늘을 보며 크게 울부짖었다.

"크아아아아앙!"

사냥꾼들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담긴 울음이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 같기도 했다.

지셀과 다른 이들이 조금 더 괴수와 거리를 좁혔다. 이제 정말 두어 번만 더 공격하면 끝장을 낼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 예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쿠우우우우!

이제 에퀴데마 몇 마리는 들어갈 정도로 넓어진 균열에서, 갑자기 하얗고 거대한 손이 뻗쳐 나왔다.

그 손은 마치 벌레를 잡듯 에퀴데마를 손바닥으로 찍어 눌렀다.

콰아아아앙!

424화 가장 강력한 전력을 사용하자. (4)

에퀴데마는 거대한 손바닥에 짓눌려 그대로 몸이 터져 버렸다.

콰지지직!

괴수가 있던 자리에는 으깨진 시체와 핏물만이 남았다.

그걸 본 모두는 사고가 경직되어 버렸다. 무슨 현상인지 뇌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지셀이 발을 구르며 크게 외쳤다.

"모두 뒤로 물러나라!"

지셀은 군대를 훈련시킬 때, 자신의 명령에 반사적으로 반응하도록 하는 데 가장 많이 신경을 썼다.

그 훈련이 이런 상황에서는 크게 도움이 되었다. 지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알포이도 곧바로 피오테를 끌어안고 마력을 뿜어내며 튀었다. 다른 건 몰라도 도망 하나는 정말 끝내주는 놈이다.

그사이 거대한 손이 다시 느릿하게 땅바닥을 후려쳤다.

콰아아아아앙!

쩌저저저적!

땅이 갈라지고 주변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이미 멀찍이 물러난 사람들도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졌다. 균열에서 나오던 균열인들은 그대로 터져 버렸다.

지셀을 비롯한 실력자들도 모두 균형을 제대로 못 잡고 비틀거릴 정도였다.

사람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균열에서 나온 거대한 손을 바라보았다.

"뭐, 뭐야!"

"저, 저런 게 균열에서 산다고?"

"전에 못 나오고 있다는 놈이 그럼...."

균열의 크기는 지금 상당히 커진 상태다. 거대한 괴수인 에퀴데마가 몇 마리나 튀어나올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저 넓은 틈으로도 고작 손만 겨우 나올 정도면 얼마나 큰 놈이란 말인가!

사람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다들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지셀을 돌아보았다.

지셀은 크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균열의 주인이다. 저놈을 없애야 균열이 닫힌다."

벨린다가 힐끗 균열을 바라본 뒤 물었다.

"그러면... 저놈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가요?"

"그래, 그래야 완전히 닫을 수 있으니까."

"에퀴데마가 죽었는데 균열의 확장은요?"

"에퀴데마가 죽었으니 영역도 점점 줄어들 거야. 영역 안에서는 균열인들이 활동할 수 있지만.... 아마 그러지 않을 거다."

나와 봤자 영역이 줄어들수록 균열인들은 저절로 소멸할 것이다. 그러니 당장 에퀴데마만 처치해도 한숨 놓을 수 있었다.

벨린다가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러면 저놈이 나와도 영역이 없으면 균열인들은 더 못 나오나요?"

그러자 지셀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놈이 나오면 그때부터는 영역이 중요한 게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놈은 에퀴데마처럼 영역에 상관없이 움직일 수 있거든. 그리고 저놈이 가진 기운만으로도 최소 수만 마리의 괴수들이 이 세상에서 활동할 수 있어. 저놈 주변으로 엄청나게 따라다닐 거야."

사람들을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도 균열 주변으로 영역이 제한된 덕분에 겨우 균열인들을 막고 있었다.

그런데 저 무지막지하게 거대한 놈이 수만의 괴수들을 이끌고 다닐 수 있다니, 그야말로 이동하는 균열 영역이 아니겠는가.

지셀이 피식 웃었다.

"에퀴데마가 선봉이라면 저놈이 진짜 본대라고 할 수 있지,"

"저거 뭐 원거리 공격하고 그런 건 아니죠?"

벨린다가 천천히 움직이는 손을 보며 찝찝한 표정으로 묻자 지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그런 건 없어. 아주 터프하게 몸으로 싸우는 놈이거든."

"그건 다행이네요."

저 거대한 덩치와 힘으로 원거리 공격까지 할 수 있다면 인류는 순식간에 쓸려 나갈지도 몰랐다.

모두가 천천히 균열 안으로 다시 들어가는 손을 보며 침묵을 지켰다. 너무 막막해서 할 말이 없는 것에 가까웠다.

가만히 균열을 노려보던 벨린다가 슬쩍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잡을 수는 있는 놈이에요?"

"잡을 수 있지. 우리 인류가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겠지만. 저놈도 무적은 아니야."

"그렇군요. 도련님은 이미 잡아 봤나 봐요?"

"그ㄹ! 아니."

갑작스러운 그녀의 수작에 잠깐 넘어갈 뻔했지만 지셀은 만만치 않았다.

순간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벨린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오랜만에 지셀을 압박했다.

"어떻게 다 알고 계세요? 균열이 나오기도 전부터 알고 계셨잖아요."

지셀은 한 점 부끄러움도 없이 당당하게 말했다.

"라비에르가 말해 줬어. 전에 만났던 그 구원교 사제."

"...그런 것치고는 너무 자세히 알고 계시는데요?"

벨린다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부터 지셀은 혼자서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었다.

그간은 뭔가 일이 잘되니 다들 그러려니 하고 살았다. 물어봐도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까지 오자 궁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상황이 그때와는 다르게 너무 스케일이 커졌으니까.

애초에 라비에르를 잡을 때도 다들 지셀과 함께했었다. 그가 뭔가를 말한 기억은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따져 물을 때마다 지셀은 처음에 혼자 만났을 때 들었다고 우겨 댔다.

모두가 의심의 눈길을 보냈지만 지셀은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그에게는 또 다른 필살기가 있었다. 바로 갈바릭에게 툭 하면 써먹었던 핑계였다.

"어릴 때 책에서 봤어."

"...."

"다들 책을 많이 읽도록 해. 공부해서 남 주지 않아."

"...."

벨린다가 팔짱을 끼었다. 어릴 때부터 지셀이 더럽게 책을 안 읽어서 강제로 읽힌 사람이 바로 그녀다.

그나마 귀족이라고 좀 큰 뒤에는 뭔가 읽기는 했다. 대부분이 소설이었기는 하지만.

어쨌든 벨린다는 당시 하녀장이자 가정교사로서, 지셀이 읽는 책을 전부 관리했다.

그중에는 절대 균열이니 뭐니 하는 이상한 책은 없었다. 전에 지셀이 알고 있던 신비한 지식들도 그렇고 말이다.

"아직도 그렇게 비밀로 하실 거예요?"

"비밀이 많은 남자가 매력적이라고 가르쳐 준 건 벨린다잖아?"

"...."

벨린다는 어쩌면 자신의 교육이 지셀을 저렇게 만든 게 아닐까 하는 반성을 조금 하게 되었다.

모두가 계속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자 지셀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말해 봤자 믿지도 않을 거면서.'

사실 몇 번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거짓말만 한다고 의심만 더 샀다. 그거 굉장히 피곤하다.

지셀이 넉살 좋은 미소로 말했다.

"책 말고도 내가 여기저기서 얻은 정보들이 좀 있어. 내가 나중에 꼭 말해 줄 테니까 다들 너무 서운해하지 말도록 해."

어차피 지금 얘기해 봤자 혼란만 더 커질 뿐이다. 상황이 조금 안정되면 그때 다시 말해 줘도 된다.

모두가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서운하거나 섭섭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다들 그냥 지셀을 믿고 따라왔으니까. 앞으로도 그러면 된다. 그러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이다.

기사들과 함께 있던 아렐이 바로 품에서 펜과 종이를 꺼내 끄적였다.

"비밀이 많은 남자... 매력적... 메모...."

뭐 하나 놓치지 않고 지셀을 배우려고 하는, 참으로 훌륭한 제자였다. 벨린다의 교육이 아렐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카오르가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야, 너는 그런 거까지...."

"네?"

"아니, 아니다."

영주가 신앙인 놈하고 무슨 대화가 통하겠는가. 그냥 저렇게 살게 내버려두는 게 나을 거 같았다.

지셀이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손뼉을 몇 번 치고는 외쳤다.

"자, 이쪽 균열은 이제 끝이다. 에퀴데마를 처치했으니 당분간은 영역도 줄어들고 안전할 거야. 북부군은 다음 균열로 이동한다."

"와아아아아!"

궁금한 건 궁금한 거고 이긴 건 이긴 거다. 이제야 사람들이 환호를 내질렀다.

아마 대기하고 있던 다른 북부군도 무척이나 기뻐할 것이다. 거의 피해가 없이 균열을 처리했으니까. 왕국의 어느 군대도 이루지 못했던 전과였다.

균열의 주인이라는 놈이 조금 무섭긴 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된다.

'영주님이 방법을 알고 있을 거야.'

'그때도 지금처럼 다 해결하겠지.'

'우리는 영주님만 믿고 따르면 돼.'

이런 강력한 믿음이야말로 북부를 이끌어가는 지셀의 진정한 힘이었다.

다들 진영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에퀴데마를 처치해서인지 푸른 안개도 점점 더 옅어지고 있었다.

돌아가기 직전, 다들 피오테에게 한마디씩 건넸다. 어찌 보면 그가 이 작전의 가장 큰 공로자였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역시 성녀... 아니, 성자님이십니다!"

"저런 공격을 맞고도 멀쩡하시다니!"

사람들의 칭찬에 피오테가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자신은 아무것도 안 하고 얻어맞았을 뿐이다.

처음에는 왜 맞았는지도 몰랐다. 신성력이 성물을 매개체로 쓰이는 것을 느낀 뒤에야 자신의 역할과 성물의 능력을 알게 되었다.

지셀의 측근들도 다가와 피오테를 칭찬했다.

에퀴데마는 이상할 정도로 피오테에게 집착했다. 피오테가 아니면 이렇게 쉽게 잡지 못했을 것이다.

알포이가 피오테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너와 나의 활약으로 잡을 수 있던 거지. 자랑스럽게 여겨."

"...."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알포이가 대놓고 집어 던졌으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피오테의 원망도 전부 알포이가 짊어지게 됐으니까.

지셀도 다가와 피오테의 어깨를 두드렸다.

"수고했어. 정말 큰 도움이 됐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

자신을 또 미끼로 쓰겠다는 말에도 피오테는 거절하지 못했다. 확실히 자신이 미끼가 되어야 괴수를 사냥하기 편해진다.

거부할 생각은 없었지만 궁금한 게 있었다.

"왜 나한테만.... 아니, 왜 저 존재들은 신성력을 증오하는 거죠?"

에퀴데마라는 괴수는 기이할 정도로 신성력에 증오심을 뿜어냈다. 사냥을 당하면서도 자신을 죽이려고 집착했다.

피오테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지셀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글쎄? 왜 그럴까? 흑마법사나 마족 같은 거 아닐까?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거지. 나도 다 아는 건 아니야."

"그렇군요...."

하긴 말도 안 통하고 이 세상의 괴수도 아닌 것들에게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아마 이 세상에 허락되지 않은 것들이라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보이는 것이리라.

다들 그렇게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일 때, 알포이가 깐족거렸다.

"아니면 뭐 여기 신들한테 사기라도 당한 거 아냐? 내 홀짝 마법에 여러 사람이 당한 것처럼 말이지."

신성 모독 발언에 피오테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배를 잡고 웃었다.

"으하하하하! 그러면 나 같아도 싫겠네."

"아, 그건 싫어해도 인정이지. 푸하핫!"

"우리는 성녀님이 있으니까 괜찮아!"

신성력 좀 싫어하면 어떤가. 어차피 미끼는 앞으로도 피오테가 할 텐데 말이다.

모두가 그런 생각으로 승리의 기쁨을 마음껏 누렸다.

그리고 지셀은... 알포이의 말이 뭔가 그럴듯하다고 느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 * *

북부군만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건 아니었다.

북부군의 소식을 전해 듣고 있던 친왕파의 수뇌부들도 연달아 들어온 승전보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역시 펜리스 백작입니다!"

"벌써 균열을 3개나 처리했다고 합니다. 엄청난 속도입니다."

"피해도 거의 없다지 않습니까? 정말 대단합니다."

균열이 열린 곳의 영지군들은 계속 밀렸다. 균열이 열리지 않은 영지의 영주들이 도와주어야만 했다.

그렇게 해도 에퀴데마는커녕 수도 없이 튀어나오는 균열인들조차 막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압도적인 성과를 보이는 북부군의 능력은 감탄스러운 것을 넘어서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모리스가 가슴을 탕탕 치며 외쳤다.

"그놈이 해낼 줄 알았다니까! 역시 내 조카 같은 놈이라 그런지 옛날부터 범상치가 않았어! 내가 많이 아꼈었잖아!"

"...."

친왕파 귀족들은 모리스의 말에 떫은 감 씹은 표정을 지었다.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 때는 언제고 사람이 확 변해 버렸다. 지원을 받을 때부터 저렇게 되어 버렸다.

그래도 왕국군 사령관 권한으로 지셀에게 힘을 실어 주고 있으니 뭐라 하기도 좀 그랬다.

브랜포드 후작은 속속 들어오는 보고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일이군. 왕국군이 남부 쪽을 견제하는 데 더 힘을 쏟을 수 있겠어."

현재 각 영지의 군대들은 모두 균열을 저지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니 남부를 견제하는 건 오롯이 왕국군의 몫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왕국군도 일부는 균열을 처리하기 위해 움직여야 했다. 그런데 북부군이 너무나 뛰어나니 왕국군을 전부 남부 전선에 몰아넣을 여유가 생겼다.

브랜포드 후작이 귀족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현재 내부의 균열을 쉽게 처리할 수 있는 건 북부군밖에 없소. 그러니 모든 권한을 내주고 지원도 최대한 해 주어야 하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할 리가 없었다. 지금 희망은 북부군뿐이었다.

현재 균열 인근의 영지들은 경제력이 마비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영지들과 거래하던 영지들도 점점 문제가 생기고 있었다.

꼭 거래가 막혀서 그런 것만은 아니고, 다들 군대를 본격적으로 운용하고 있으니 돈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왕국 전체의 경제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러면 공작가와의 전쟁에서도 전력을 유지하는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브랜포드 후작이 에일즈버 백작을 보며 말을 이었다.

"특히 펜리스 백작이 요청한 약들을 최대한 생산해서 각지에 지원하는 걸 잊지 마시오. 생산은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소이까?"

자금력이 풍부한 에일즈버 백작가가 다른 귀족들과 함께 약의 생산을 맡고 있었다.

에일즈버 백작은 문서를 꺼내 떠듬떠듬 현 상황에 대해 알려 주었다.

"에... 그러니까... 전염병에 대비한 약은 ... 지금 최대한 재료들을 구해서... 수도 인근의 왕국군에게는 전부 지급했으나... 아직 몇몇 영지에는... 재료가 부족해서... 그러니까 우리 마누라가 말해 줬는데...."

가주가 에일즈버 백작이니 수뇌부로 참석하고는 있지만, 실무는 사실 그의 부인인 메리엘이 진행하고 있다.

그녀가 알아서 다 진행하고 남편한테 통보하는 식이었다.

그걸 아는 귀족들이 따분해하는 표정으로 에일즈버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느낀 에일즈버 백작이 말했다.

"왜, 뭐? 내 사정 다 알면서 그러지 맙시다. 어? 뭐, 본인들은 나랑 크게 달라?"

"커험험."

귀족들이 헛기침을 하며 눈을 돌렸다. 사실 그들도 재료나 인력, 비용을 지원하는 거 말고는 딱히 하는 일이 없었다.

메리엘이 직접 회의에 참석하면 좋겠지만 그녀는 지금 로잘린과 함께 약의 생산을 맡고 있어서 무척이나 바쁘다.

유일하게 보고 내용에 집중하고 있던 브랜포드 후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재료가 왜 모자란다는 말이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구하라고 하지 않았소?"

"그게.... 요정의 축복이 워낙 비싸고 귀한 재료라... 다들 잘 안 내놓으려고...."

"다들 그런 지원도 제대로 못 해 주면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거요!"

쾅!

브랜포드 후작이 화를 내며 테이블을 강하게 쳤다.

균열은 펜리스가 해결하고 약 생산은 메리엘과 로잘린이 맡는다. 정국의 방향성은 브랜포드 후작이 잡는다.

어차피 남은 자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가만히 앉아서 상황 보고만 듣는 게 전부였다.

그러니 다른 귀족들은 가진 자원과 병력, 돈이라도 팍팍 내놓아야 한다. 모두의 힘을 모아야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브랜포드 후작의 분노가 커지는 듯하자 모리스가 한숨을 내쉬며 품에서 작은 병을 하나 꺼냈다.

"이거 근데 정말 효과 있는 거 맞아? 전염병 생기는 건 맞고? 수량을 맞추려면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하다고. 지금도 친왕파 전체가 휘청일 정도로 돈을 넣고 있는 상태고."

병을 내려놓는 모리스의 손짓에 따라 안에 든 보라색 액체가 찰랑거렸다. 지셀이 말한 전염병의 예방 및 치료제였다.

꼭 만들어야 한다고 지셀이 신신당부해서 만들고는 있지만, 그 필요성에 관해서는 다들 회의적이었다.

정말 전염병이 안 돌면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될 테니 다들 소극적으로 굴 수밖에 없었다.

브랜포드 후작 옆에 있는 귀족이 말했다.

"그래도 구원교의 사제가 그런 음모를 꾸몄다고 자백했다지 않습니까? 그러니 펜리스 백작을 믿고 진행하는 거고요."

"하, 그런데 이거 좀 찝찝하잖아? 출처도 모르는 배합에, 효과가 검증된 것도 아니고.... 전염병이 진짜 돌지 안 돌지도 모르고 말이야."

"방금도 펜리스 백작이 조카 같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믿어 봐야죠."

"어허, 아들이 권력을 잡으려고 아비도 죽이는 세상인데 조카라고 다 믿을 수야 있나. 내가 이거 먹고 잘못되면 어쩔 건데? 어?"

'아, 뭐 어쩌자는 거야. 이 새끼.'

귀족이 짜증을 숨기려고 얼굴을 돌렸다. 이 무식한 놈이랑은 뭔가 대화가 항상 이상하게 흘러간다.

그렇게 모리스가 불평불만을 내뱉고 있을 때, 기사 한 명이 허겁지겁 들어와 외쳤다.

"저, 전염병이 왕국에 퍼지고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모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모리스는 누구보다 빨리 앞에 놓인 병을 열어 약을 마셨다.

425화 강제로라도 받아 내야겠다. (1)

"꺼억, 아, 맛 구리네. 야, 이거 맛이 왜 이러냐?"

약을 마신 모리스가 쩝쩝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다른 귀족들이 황당해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모리스가 뻔뻔하게 말했다.

"뭐, 왜? 조카 같은 아이가 우리를 위해서 전염병 약을 줬는데 계속 의심만 하기도 그렇잖아? 실제로 전염병이 퍼지고 있다며?"

그는 옆에 있는 호위 기사에게 손짓했다.

"야, 물 좀 가져와라, 입 좀 헹구게."

기사가 물을 가져다주자 모리스는 입을 헹군 뒤 말했다.

"어, 시원하네. 그래, 마저 보고해 봐."

보고를 하러 들어온 기사가 잠깐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현재 균열이 열렸던 인근 지역에 전염병이 빠르게 돌고 있습니다. 특히 균열과 싸웠던 병사들은 대부분 전염병에 걸려 쓰러진 상태입니다."

브랜포드 후작이 눈을 감은 채 물었다.

"균열과 싸운 군대는 격리하라고 분명 전했을 텐데? 그 외의 지역에 퍼졌다는 말인가?"

"그게... 말을 안 듣는 영주들이 꽤 있었습니다. 격리 지역을 만들지 않아 군대가 영지민들과 섞였고, 그 상태에서 또 이동한 자들도 있어서 퍼진 거 같습니다."

"...한심한 놈들."

브랜포드 후작이 분노를 삭이며 혀를 찼다.

영주들이 전부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몇 번이나 공문을 보내고 강조했었다.

그럼에도 결국 전염병이 퍼져 버리고 만 것이다.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미리 펜리스 백작에게 들은 상태였다.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허투루 들을 수도 없었다.

만약 사실이라면 정말 위험하기에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준비한 게 아닌가.

브랜포드 후작이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제 알겠소? 펜리스 백작이 한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걸."

그간 긴가민가하며 지셀의 말에 적극적으로 따르지 않았던 귀족들은 할 말이 없어졌다.

오직 공작가와 균열과의 싸움에만 대비했지,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우리야말로 냉철한 사람들이라고 서로 자화자찬했었는데, 실상은 그들이야말로 멍청한 것이었다.

그나마 에일즈버 백작만이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마누라 말 듣기를 잘했다. 앞으로도 다 맡겨야지.'

전염병 약 생산에 엄청난 자금이 들어갔기에 에일즈버 백작도 상당히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메리엘은 적극적으로 움직여 상당히 많은 약을 확보했다.

지금 와서 보니 메리엘이 맞았다. 그녀 덕분에 백작가의 위상이 더 높아질 터였다.

브랜포드 후작이 차갑게 내뱉었다.

"펜리스 백작이 헤셀틴 백작에게 한 짓은 넘어가도록 하겠소. 본보기로 헤셀틴 백작의 작위를 박탈할 것이며 스펜벨 남작의 작위를 백작으로 승작한 뒤 영주의 권리를 인정해 줄 것이오. 이의 있소이까?"

"...."

그렇지 않아도 지셀이 한 짓에 대해 말이 많던 상태였다. 아무리 균열에 관해 모든 권한을 줬어도 다른 귀족의 권한을 박탈하는 건 선을 넘었으니까.

왕도 아닌 주제에 왕처럼 행세한다고, 펜리스 백작의 권한을 축소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왔었다. 지셀의 힘과 권한이 이제는 브랜포드 후작까지 넘어설 정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염병이 퍼지고 지셀이 한 말이 옳았다는 게 증명된 이상 따지고 들기 힘들었다. 헤셀틴 백작이 명령에 따르지 않아서 일이 커진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귀족들의 입을 닫게 한 브랜포드 후작이 기사에게 물었다.

"그래, 전염병은 어떠하더냐? 심각한가? 속도는 얼마나 빠르지?"

"병에 걸리면 고열이 나고 온몸에 붉은 반점이 생깁니다. 전염 속도는 무척이나 빠릅니다. 병에 걸린 대다수가 쓰러졌고 사망한 자도 계속 늘고 있습니다. 신성력도 통하지 않습니다."

"고열? 붉은 반점? 신성력도 통하지 않는다고? 그거 설마...."

"네, '영원의 형벌'과 같은 증상입니다."

"무어라? 그건 불치병이 아닌가? 그 병과 증상이 같다고? 그런데 전염성까지 있다고?"

"네. 증세는 조금 더 약하지만, 전염도 발현도 무척 빠릅니다."

"허어...."

'영원의 형벌'은 길리언의 딸 레이첼이 걸렸던 병이다. 지셀이 그 병의 치료법을 알고 레이첼을 치료할 수 있었던 것도, 균열이 열린 뒤 대륙에 퍼졌던 전염병과 같은 증상이었기 때문이다.

지셀의 전생에서와 마찬가지로 지금 대륙에 퍼지는 전염병도 '영원의 형벌'과 증상이 같았다. 증세가 상대적으로 약한 대신 빠른 전염성을 갖춘 변종이라 할 수 있었다.

귀족들은 무척 찝찝해하며 표정을 구겼다. 치료할 수 없다고 알려진, 걸리면 저주에 걸렸다는 말까지 듣게 되던 병이 돌고 있는 것이다.

멍하니 듣고 있던 에일즈버 백작이 다른 귀족들에게 말했다.

"잠깐, 그러면 지금 이 약으로 '영원의 형벌'도 치료할 수 있다는 거 아냐? 지금 요정의 축복을 엄청나게 적은 비율로 넣고 있는 거잖아. 그 비율을 높이면?"

"그, 그렇겠죠? 불치병을 치료할 수 있다니...."

"아니, 그걸 펜리스 백작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귀족들이 입을 모아 웅성거렸다.

아무리 구원교 사제에게 정보를 들었다 해도 전염병이 돈다는 건 예언에 가깝다. 거기에 그 치료법까지 알고 있다니?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정도면 펜리스 백작이 일부러 병을 퍼트렸다고 해도 믿을 법했다.

귀족들이 뭔가 의심하는 듯하자 브랜포드 후작이 말했다.

"그런 건 일이 끝난 뒤에 따져도 될 일이오. 전염병이 실제로 발생한 이상 이제는 강제로 일을 진행해야겠소이다."

"무엇을 말입니까?"

"왕국 내에서 약 제조에 필요한 재료들의 거래를 금지하겠소. 또한 제조 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않았거나 적극적으로 약을 제조하지 않는 영지에서는 약의 재료를 강제로 몰수할 것이오. 보상은 후에 하는 걸로 하겠소."

"으음...."

귀족들은 침음성을 내뱉었다.

어지간하면 귀족의 사유 재산을 건드리거나 거래를 제한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게 좋다. 귀족들은 왕실이 그 권한을 보장해 주어서 왕실에 충성을 바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랜포드 후작은 서늘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 권리를 찾다가는 다 죽을 판이오. 이런 판국에도 개인적인 욕심을 부리는 자들이 한가득하오. 더는 용납할 수 없소. 알겠소이까?"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욕심만 부리다가는 정말 다 같이 죽게 될 판이었다.

혼란이 커질수록 브랜포드 후작의 권세만으로는 통제가 어려워졌다. 조금 더 강압적으로 다스려야 했다.

"가용한 병력을 모두 움직여 강제력을 발휘하시오. 현 상황을 이용하려는 자에게서는 권리를 박탈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시오. 그리고...."

브랜포드 후작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숨을 크게 들이쉰 뒤 말했다.

"모든 일이 끝나면 페르디움 가문의 승작 건에 대해 논의하겠소."

"후, 후작님 그건...."

모두가 깜짝 놀랐다. 지셀이 백작으로 승작을 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승작 건을 논한단 말인가.

게다가 펜리스가 아니라 페르디움 가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는 건, 지금 왕국에서 유일무이한 공작 가문을 하나 더 만들겠다는 뜻이다.

'후작을 더 높은 작위로 올린다고?'

'그간의 관례를 깨고 북부에 공작 가문이 생긴다는 말인가?'

'브랜포드 후작이 펜리스 백작을 후계자로 생각한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루타니아 왕국에는 다른 왕국과 조금 다른 관례가 있다. 건국 때부터 이어진 관례로, 공작가는 오직 '델파인 가문'만 허용한다는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왕실의 후손도 공작의 작위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건국왕 때부터 이어진 관습이 그러했기에 왕실 방계도 후작의 작위에 머물렀다.

왕국 최고의 권력가인 브랜포드 후작 또한 공작에 오르지 못했다.

다들 왜 그런지는 몰랐다. 그저 오래전부터 그러했기에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살아왔을 뿐이다.

그런데 그 오랜 관습을 드디어 깨부수겠다는 말이 브랜포드 후작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도 후작 자신이 아니라 지셀을 위해서 말이다.

모리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보게, 그거는 좀.... 아무리 내 조카 같은 아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당장 결정하자는 것은 아닐세. 델파인 공작가가 없어지면 논의해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닌가. 자네도 그걸 바라지 않았던가?"

"어?"

모리스가 살짝 콧구멍을 넓혔다. 생각해 보니 델파인 공작가가 없어지면 이제 그 관례도 무효가 되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자신의 가문도 공작에 오를 수 있었다.

"크흠흠, 그렇지. 뭐 그때 가서 다시 얘기해 보자고."

'으흐흐흐. 맥쿼리 공작가라, 이거 멋지잖아?'

모리스가 히죽 웃었다. 자신의 대에서 공작에 오른다면 그건 정말 대대손손 자랑할 만한 일이었다.

'그것도 무려 내전을 종식시킨 공신 가문으로서 공작위에 오른다면 말이지. 으흐흐흐.'

모리스까지 별말이 없자 다른 귀족들도 모두 입을 닫았다.

브랜포드 후작은 그렇게 분위기를 잡고 쐐기를 박았다.

"펜리스 백작에게 내 뜻을 전하시오. 내가 다 책임질 테니 마음껏 움직이라고. 균열을 처리하는 것도 급하지만 전염병을 빠르게 잡는 것도 중요한 일이오."

"끄응...."

귀족들은 곤란해하는 기색을 드러내면서도 반박은 하지 못했다.

브랜포드 후작은 지셀을 확실하게 밀어줄 생각이었다.

현재 균열과 싸우느라 왕국을 가장 많이 돌아다니는 군대가 바로 북부군이다.

왕국군도 일부가 자원들을 확보하러 움직이겠지만 북부군이 이동하며 거둬들이면 더 효과적일 터였다.

브랜포드 후작은 북부군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뜻은 지셀이 바라는 바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 * *

"와아아아! 이겼다!"

또 하나의 균열을 없앤 뒤 병사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현재 북부군의 사기는 최고조에 이른 상태였다.

벌써 몇 개의 균열을 없앴음에도 피해는 전혀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조건 달려들기만 하는 균열인들은 그 수가 아무리 많아도 압도적인 펜리스의 기술과 힘 앞에서는 쓸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

사실 다른 군대도 균열인보다는 에퀴데마를 상대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 초인급에 이른 그 괴수를 잡을 실력자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부군에는 이제 에퀴데마도 어렵지 않은 상대였다.

"카아아아앙!"

"여신이시여!"

피오테가 그냥 눈 감고 에퀴데마의 앞에 주저앉으면 된다. 그러면 지셀이 바로 외쳤다.

"미끼를 물었다! 빨리 잡자!"

에퀴데마는 피오테만 보면 환장해서 그에게 덤벼들었다. 그사이 다른 실력자들이 협공하면 쉽게 잡을 수 있었다.

거기다 시간이 갈수록 서로 손발이 잘 맞게 되니 점점 에퀴데마를 상대하기가 쉬워졌다.

병사들은 에퀴데마를 잡고 오는 지셀과 그의 측근들을 보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우리가 왕국 최강인 거 같아."

"이 속도면 금방 다 쓸어버릴 거 같은데?"

"다른 군대는 겨우겨우 막고만 있는 상태래. 우리처럼 밀어 버리는 곳이 없다더라."

가난한 북부의 영지에서 겨우 먹고살기만 했던 병사들이다. 그동안 살면서 이런 자부심은 가져 본 적이 없다.

그들은 지셀을 따를수록 점점 정예병처럼 변해 갔다. 끊임없이 전투에 참여하며 자신감을 키우니 당연한 일이었다.

북부군 소속이라는 자부심과 긍지가 커질수록, 그들이 지셀을 바라보는 눈빛도 달라져 갔다.

"차라리 펜리스 백작님이 북부를 통일했으면 좋겠어."

"우리도 펜리스 소속이 되는 거지."

"펜리스 백작님이 우리 영지를 치자고 하면 나는 무조건 따를 거야."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하던가. 북부군 내에서 자발적 배신자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지셀이 북부 전체를 점령하기를 바랐다. 모두의 열망이 북부군 전체로 퍼져 나갔다.

마치 거기에 기름을 붓기라도 하듯 북부군에 브랜포드 후작의 뜻이 전해졌다.

벨린다가 신나서 말했다.

"전쟁이 끝나면 또 승작에 관해 논의한다고요? 우리 도련님 공작이 되는 거예요?"

지셀이 피식 웃었다.

"작위가 뭐가 중요하겠어. 일단은 전란부터 끝내는 게 우선이지. 그리고 승작을 해도 아버지가 우선이지."

지셀은 그깟 작위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벨린다가 주먹을 꽉 쥐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이 기회에 북부군을 전부 이끌고 북부를 완전하게 통일하시죠. 다들 도련님께 충성을 못 바쳐서 안달이거든요. 충분히 가능해요."

"...벨린다 야망 있네."

지셀은 그냥 웃어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벨린다는 장난이 아니라는 듯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그 뒤에 북부 대공에 오르는 거예요!"

"뭐? 뭔 대공?"

"북. 부. 대. 공!"

"...북부 대공?"

"그럼요, 그거 멋있는 거라고요. 그게 로망이라고요!"

"대공이라니, 그게 로망으로 하는 거야? 아니, 그 전에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거야? 대공은 왕실의 일원만 될 수 있는 거 아냐?"

그러자 벨린다를 비롯한 측근들이 모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평생 남의 눈치는 전혀 안 보고 살아온 사람이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 도련님 마음대로 안 한 게 있어요? 그냥 도련님이 대공 하고 싶으면 하는 거죠."

"...."

지셀은 할 말이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건데 남들 눈에는 미친 망나니가 제멋대로 구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벨린다가 지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의 눈빛은 야망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너무 부담돼서 피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어차피 다 마음대로 할 거잖아요? 그러니까 해요. 북부 대공. 그냥 공작보다 더 멋있는 거 하시라고요."

"...아버지는?"

"은퇴하셔야죠. 그간 고생 많이 하셨잖아요. 이제 쉬실 때가 되긴 한 거 같아요. 항상 고생하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제가 가슴이 아팠다니까요?"

어차피 벨린다에게는 지셀이 최우선이다. 그리고 즈발터도 매일 쉬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으니 찬성할 것이다.

지셀이 침을 꿀꺽 삼켰다.

뭔가 이야기가 패륜을 섞은 반역 비슷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426화 강제로라도 받아 내야겠다. (2)

벨린다만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었다. 길리언도 그녀의 말을 거들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결국 북부를 모두 거두셔야 할 겁니다."

"뭐야, 갑자기 길리언까지 왜 그래?"

"이미 북부군에 속한 병사들이 전부 펜리스로 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전란이 끝나고 북부군이 해체되더라도 저들은 자신들의 영지에 불만을 가질 겁니다."

"흐음...."

"병사들은 우리와 함께하며 펜리스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다 알게 됐습니다."

"그건 그렇지, 아마 비교가 많이 될 거야."

"맞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북부군에 합류한 뒤에 더 배불리 먹고 있습니다. 돌아간다면 죄다 영지에서 탈출해 우리 쪽으로 올 게 뻔합니다."

지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지금 북부군 병사들 사이의 분위기를 모르는 게 아니었다. 노골적으로 펜리스에 오고 싶어 하는 병사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길리언이 다른 문제도 짚었다.

"단순히 탈출해서 우리 쪽으로만 오면 모르겠으나, 전란이 끝나고 북부군이 해체하면 분명 많은 문제가 생길 겁니다. 병사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끄는 기사와 지휘관까지 있으니까요."

펜리스의 관리들이 병력을 차출할 때, 해당 영주와 혈연관계에 있는 지휘관들은 모두 배제했다. 통솔권을 확실하게 쥐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이들이 지휘관이 되어 북부군에 합류했다. 당연히 그들도 대부분 펜리스로 오고 싶어 했다.

지휘관과 병사들의 뜻이 일치하는 군대는 흔치 않다. 그리고 그 군대는 자신들의 영지에 불만이 많다.

이대로 북부군이 해체된다면 그들은 도적 떼로 변하거나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길리언이 고민하는 지셀을 보며 말을 이었다.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입니다. 모두가 영주님을 따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둬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더 절망할 겁니다."

카오르도 옆에서 끼어들었다.

"그래, 남부도 어차피 공작가가 다 차지했는데 북부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 솔직히 다들 원하는데 그냥 하시죠? 그냥 군대만 돌려도 다들 무릎 꿇을걸?"

알포이도 끼어들었다.

"그럼 나 영지 하나 주는 거야? 나도 영주 하고 싶은데. 작위는 백작 하고 싶다."

그는 바로 바네사에게 입이 막힌 채 끌려갔다.

지셀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저 영지와 가문을 지키기 위해 시작한 일인데 이제는 스케일이 커져도 너무 커져 버렸다.

자신에게 그런 야망은 없었다. 하지만 거대한 시대의 흐름이라는 것을 아예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또한 자신이 만들어 낸 일이었으니까.

"그 건은 나중에 다시 얘기하도록 하지. 어차피 지금은 더 바쁜 일들이 있으니까."

사람들은 살짝 미소 지었다. 지셀이 완강하게 거부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들 작정을 했군.'

지셀이 다시 혀를 차고 지도를 폈다.

"일단은 급한 것부터 처리하자고. 지금 전염병이 퍼지고 있는데 영주들이 영 협조를 안 하고 있거든."

수도에서 온 전령은 현재 상황을 전해 주었다. 영주들이 약을 비싼 값에 팔려고 재료들을 사재기해서 숨기고 있다고 했다.

대부분이 그러고 있는데 약 제조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왕국 전역에서 약이 부족하니 전염병이 더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지셀이 지도의 몇 군데를 짚으며 말했다.

"가끔 이렇게 욕심이 과한 놈들이 있어. 그리고 이런 놈들이 꼭 일을 키우지."

길리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바로 군대를 돌릴까요?"

"균열도 급하긴 하지만 당장 사람들이 죽어 나가니 어쩔 수 없지. 강제로 재료를 몰수하고 약을 만드는 수밖에. 난 사실 강제로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자유를 사랑하거든."

지셀이 모두를 둘러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못된 심보로 피해를 키우고 있으면 강제로 할 수밖에 없잖아?"

사람들이 미소를 지었다. 역시 마음대로 할 거면서 뭐 저렇게 자꾸 빼는지.

그냥 벨린다 말처럼 북부 대공이든 뭐든 빨리 하는 게 나을 거 같았다.

어쨌든 브랜포드 후작이 왕실의 이름을 빌려 재료 거래를 금지했다지만, 그렇다고 영주들이 쉽게 내놓을 리 없었다.

전염병은 대륙 전체를 휩쓸고 있었다. 타국에 약재를 팔든 약을 만들어 팔든 거액을 만질 수 있을 터였다.

처음에는 지셀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아직 균열이 너무 많아.'

균열은 점점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힘이 강한 영주들도 균열인들을 막지 못하고 점점 밀리는 추세였다.

작은 영지는 버티기도 힘들어서 계속 후퇴를 거듭하는 중이었다.

결국 북부군이 가서 해결해 줘야 한다. 다른 영주들이 에퀴데마를 처리하려면 너무나도 큰 피해를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공작가와의 싸움에 쓸 병력이 없어진다.

하지만 전염병으로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러면 균열을 없애도 이긴 게 아니다.

"군대를 돌려라. 말을 안 듣는 영주들부터 만나야겠다."

지셀의 결단에 따라 북부군이 방향을 틀었다.

왕국군과 왕실의 관료들도 움직이고는 있지만, 빠르게 영주들의 손에서 약재를 빼앗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영주들을 상대로 강제 수색을 하고 싸움박질하며 뺏기는 힘들 테니까.

그걸 알기에 브랜포드 후작도 지셀에게 모든 권한을 주고 그 뜻을 전달한 것이다.

'한 마디로 대신 칼춤을 출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지.'

지셀이 피식 웃었다. 그 또한 이 사태를 빨리 정리하고 싶은 사람으로서, 그런 역할을 마다할 생각은 없었다.

"북부는 일단 안전하니까 클로드에게 연락해서 비축분을 전부 보내라고 전해라. 빠르게 전염병부터 퇴치하겠다."

북부는 전염병이 퍼지지 않았다. 페르디움을 비롯한 일선 군대는 모두 약을 먹었고, 애초에 균열이 근처에 생기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벨린다가 새삼스럽게 궁금해하며 물었다.

"전염병이 균열 때문에 생긴 게 맞아요?"

"응. 침식된 지역에서 옅게 펼쳐진 푸른 안개 봤지? 그게 전염병을 일으키는 거거든. 에퀴데마의 숨결이 퍼진 거라고 할 수 있지."

"아하, 그래서 병사들이 병에 걸린 거군요."

벨린다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북부군은 출정하기 전에 전원이 펜리스에서 생산한 약을 먹었다. 지셀이 밀어붙이니 일단 따르긴 했는데, 왜 전염병이 퍼지는지는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지셀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맞아. 그래서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격리하라고 한 거야. 늦든 빠르든 마나를 다룰 수 없는 사람은 결국 병에 걸릴 수밖에 없고 그러면 퍼질 수밖에 없거든."

"영주들은 그걸 다 듣고도 말을 안 들은 거네요."

"욕심 때문이지."

지셀의 말을 믿지 않았던 영주들도 약재를 사재기한 건 마찬가지였다.

브랜포드 후작의 주도 아래에서 약의 제조를 시작하면 해당 재료들의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으니, 눈치 빠른 영주들은 그때부터 약재들을 쟁여 두었다.

분명 각 영지에서도 여력이 된다면 약을 만들어서 전염병에 대비하라고 일렀다. 하지만 그들은 약을 만들었음에도 제대로 풀지 않았다.

지셀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걸로 돈 벌 생각만 하는 미친놈들이 너무 많아졌어."

그리고 그 행동이 지금 왕국에 심각한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왕국의 주요 군대와 귀족들도 생산 중인 약을 먹긴 했지만, 그래도 물량이 아직 현저하게 부족했다.

"근처에서 가장 약재를 많이 구매한 놈이 누구지?"

"잠시만요."

지셀의 물음에 벨린다가 왕실에서 받은 서류를 뒤적거렸다. 클로드와 로웰이 없을 때는 벨린다가 지셀의 참모 역할도 같이 했다.

그녀는 의외로 정보 수집과 분류 능력도 뛰어나서, 도대체 왜 집사장이 그런 걸 할 줄 아냐고 다들 수군거릴 정도였다.

첩보관은 로웰이 맡았지만 첩자들의 교육은 대부분 그녀가 맡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하여튼 여러모로 신비한 여자긴 했다.

"그래프턴 백작이에요. 최근까지 엄청나게 많이 구매했어요."

"그런데 주변에는 다 전염병이 퍼진 상태라는 거지?"

"네, 약은 거의 풀리지 않았고 지원도 소극적이네요. 영주의 가족들과 그 측근들, 영주성 인근 부대만 멀쩡해요."

"눈치는 빠른 놈이네. 우선 그쪽으로 가자."

북부군은 바로 방향을 돌려 그래프턴 백작령으로 향했다.

지셀은 이동 중에 그래프턴 백작에 대한 정보를 훑어보았다.

그래프턴 백작령은 제법 큰 영지로, 운 좋게도 균열의 영역에서도 벗어나 있었다. 그러니 군대도 주변에 지원 나간 일부를 제외하면 온전히 유지되었다.

백작 본인은 제법 상재도 뛰어나 많은 부를 축적했다.

"확실히 그간 구매한 양에 비해 약을 푼 게 너무 적어. 다른 쪽에 주기 싫다는 거겠지. 분명 보상을 해 주겠다고 얘기했건만."

그래프턴 백작은 왕실에서 공문을 내린 뒤 바로 약재를 모았다. 그런데 실상 약이 풀린 건 중요 도시와 영주성 인근뿐이었다.

남은 약재들은 거래를 할 생각인 게 분명했다.

"사람 목숨으로 장사하는 놈들한테서는 강제로라도 받아 내야겠다."

테넌트가 옆에서 조언을 올렸다.

"영주들이 반발하면 후에 정말 위험할 때 발목을 잡힐지도 모릅니다. 분명 두고두고 원한을 품고 있을 테니까요."

테넌트는 귀족의 습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 또한 그런 영주와 함께했었기 때문이다.

"상관없다. 후환이 두렵다고 지금 썩은 곳을 도려내지 않으면 더 병이 든다."

지셀은 전생에서 그런 경우를 수도 없이 많이 봤다. 눈앞의 욕심에 눈먼 자 때문에 결국 그를 포함한 모두가 파멸하는 그런 결과를 말이다.

대륙 전체를 지셀의 뜻대로 움직일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루타니아 왕국에서만큼은 그런 일이 일어나게 놔둘 생각은 없었다.

이곳이야말로 지셀이 지키고 싶은 모든 것이 있는 곳이니까.

지셀의 예상처럼 그래프턴 백작은 큰돈을 벌 생각에 싱글벙글한 상태였다.

"하하하하! 정말 전염병이 돌 줄이야. 긴가민가했는데 말이야! 펜리스 백작과 브랜포드 후작의 말이 사실이었군!"

그의 웃음에 가신 중 한 명이 조금 불안해하며 말했다.

"왕실에서 모든 약재의 거래를 금지했습니다. 괜찮겠습니까?"

"그래서? 약재를 팔지 말라고 했지, 약을 팔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

"그, 그건 그렇지만...."

가신이 식은땀을 흘렸다. 확실히 약재를 팔지 말라고 했지, 약을 팔지 말라고는 안 했다.

그래프턴 백작은 이미 균열이 터졌을 때부터 약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실제로 균열이 생긴 걸 보니 전염병도 퍼질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가신이 다시 떠듬거리며 말했다.

"야, 약이 금지되지 않았다고 해도 막상 팔면 손가락질을 받거나 몰수당할 수도 있습니다. 현재 각지에서 전염병 때문에 난리가 난 상황입니다."

"쯧쯧쯧, 왜 그렇게 소심해? 적당히 눈치 보다가 타국에다가 팔면 되지. 타국은 더 난리가 났다며? 우리처럼 미리 준비하지 못해서 말이야."

"그, 그렇습니다."

"그래. 그러니까 왜 그렇게 왕국 내로만 한정하냐, 그거야. 시야를 넓히면 세상이 얼마나 넓은데. 그쪽에서 얼마나 많은 돈을 우리에게 부르겠냐고."

"그래도... 왕국의 안위를 우선시해야...."

"쓰읍, 돈은 이럴 때 버는 거야. 원래 돈에는 피도 눈물도 없다고. 내가 빠르게 움직인 덕분에 이렇게 벌 수 있는 거 아닌가?"

가신들은 아무런 말을 못 했다.

확실히 그래프턴 백작은 머리가 좋았다. 누구보다 빠르게 분위기를 읽고 누구보다 많이 약재를 준비했다. 그것은 그의 탁월한 안목 덕분이긴 했다.

주변에서 약재를 못 구할 정도로 사재기를 하고, 그 탓에 사람이 죽어 가는 걸 내버려둘 정도로 악독한 심성도 타고난 것이 문제지만 말이다.

가신이 다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면 저희 영지라도 제대로 약을 풀어 빨리 전염병을 치료해야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내 군대와 영주성 인근은 이미 다 배급이 끝났으니 이제 세금이 잘 걷히는 곳을 추려서 도시 위주로 풀어라."

"네? 추리라고요?"

"그래, 세금이 잘 안 걷히는 도시하고 마을은 그냥 내버려둬."

"하지만 그들도 우리 영지민들입니다. 결국 영지민들이 살아 있어야 계속 세금을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쯧쯧, 생각을 좀 해 봐. 그런 가난한 놈들 살려서 받는 세금보다 그 양만큼 타국에 파는 게 더 이득이야."

"네?"

"영지의 수십 년 치 세금에 달하는 큰돈을 단번에 만질 수 있는데 뭐 하러 돈을 날려? 그깟 영지민들이야 시간이 지나면 다시 늘어나는 거고, 영 부족하면 사 올 수도 있는데?"

가신들은 침만 삼킬 뿐 말을 얹지 못했다.

이미 영주는 계산을 다 끝내 놓은 상태였다. 돈 욕심에 영주의 의무마저 저버리다니,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라 할 수 있었다.

'저 좋은 머리를 영지를 위해 썼으면 좋으련만....'

가신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영주가 그러기로 했으면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자신들에게도 영지의 부강이 우선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곧 들려온 소식에 잔뜩 긴장했다.

"부, 북부군 사령관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지셀이 아무런 연락도 주지 않고 곧바로 영지로 찾아온 것이었다.

427화 내가 너희를 구해 주겠다. (1)

펜리스 백작이 찾아왔다는 소식에 그래프턴 백작은 눈을 가늘게 떴다.

"흠."

균열과 싸우고 있는 북부군이 온 이유는 뻔했다. 약재와 약을 몰수하러 왔을 것이다.

피식 웃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새 가장 유명하신 분이 왔는데 만나 뵈어야지. 안으로 모셔라."

"밖에서 바로 보겠다고 합니다."

"뭐?"

"바깥에 이미 자리를 마련해 놨습니다."

"허, 성격도 급하군."

그래프턴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멈칫했다.

펜리스 백작은 이제 왕국에서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특히 마스터에 이르렀다는 그 실력과 막무가내인 성격이 그렇다.

만약 그 미친놈이 화가 나서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면 막을 수가 없다.

고민하던 그가 소식을 전한 기사에게 물었다.

"병력은 얼마나 끌고 왔더냐? 북부군이 다 왔더냐?"

"아닙니다. 북부군은 외성 밖에서 대기하고, 기사 몇 명과 병사 수십 명 정도만 데리고 왔습니다."

"그래?"

그래프턴 백작이 잠시 턱을 쓰다듬다 가신들에게 물었다.

"만약에 펜리스 백작이 약을 안 푼다고 화를 내면서 이곳에서 날뛰면 어쩌지? 걔 미친놈이라며."

"...."

대답을 못 하는 가신들을 보며 그래프턴 백작이 혀를 찼다.

"쯧쯧, 아무 생각도 없는 거냐. 한심하기는. 펜리스 백작이 마스터라고 해도 그 정도로 병력이 적으면 우리가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자 가신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영주님! 절대 안 됩니다!"

"마스터는 홀로 수천의 병사를 상대할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북부군과 맞붙어서 좋을 건 없습니다! 우리 다 죽습니다."

가신들의 반응에 그래프턴 백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싸워 보지도 않고 겁을 먹기는.... 나도 싸울 생각은 없다. 그냥 물어본 거야. 그놈이 아무리 미친놈이라도 이유 없이 이곳에서 날뛸 리는 없지. 안 그래? 우리가 뭐 법을 어긴 건 없잖아."

그 말에 가신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프턴 백작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머리 좋은 그는 이미 이런 상황에도 대비해 놓은 상태였으니까.

그래프턴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귀하신 분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 그리고 다들 입조심해라. 알겠나?"

"알겠습니다."

가신들이 고개를 숙이자 그래프턴 백작은 흡족한 미소를 띠고 걸음을 옮겼다.

그래프턴 백작과 가신들이 나가자 과연 영주성 앞에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군대에서나 쓰는 작전 회의 테이블과 의자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지셀은 그 자리에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주변에는 들은 대로 소수 병력뿐이었다.

너무나 단출한 모습에 그래프턴 백작이 혀를 차며 지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쯧쯧, 다과라도 내오너라. 귀한 손님을 이리 맞을 수 없지 않으냐."

하녀들이 움직이자 그래프턴 백작이 그제야 지셀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서 오시오. 그래, 요새 활약은 잘 듣고 있었었소이다.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오셨소이까?"

지셀은 무표정으로 답했다.

"이미 공문은 받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현재 전염병이 빠르게 퍼지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소식이지요. 그래서 저도 최대한 약을 생산해서 나눠 주고 있소이다."

"그런 것치고는 너무 적더군요. 백작님 영지의 외곽 쪽에 사는 이들은 죄다 전염병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주변 영지들도 마찬가지고요."

"어쩔 수가 없지 않소. 약이 부족한데 나 혼자서 어쩌겠소이까? 다른 영주들은 진작 준비를 안 하고 뭘 한 건지.... 쯧쯧쯧."

그래프턴 백작의 뻔뻔한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지셀이 말을 이었다.

"저는 상대의 권리와 재산을 강제로 뺏어가는 건 원하지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비축된 약과 재료를 건네시면 샀던 가격만큼 식량과 돈으로 충분히 보상해 드리겠습니다. 이건 왕실이 보증하는 일입니다."

"허어, 정말 더 없는데 어찌하란 말이오? 여봐라, 어서 서류들을 가져오도록 해라. 내 확실히 증명해야겠다."

그의 말에 가신이 몇 가지 서류를 가져왔다. 이미 조작할 대로 조작한 재고 현황 서류였다.

지셀은 서류를 받아 훑어보았다. 그가 따로 받은 정보와 차이가 나도 너무나 났다.

지셀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래프턴 백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권유하겠습니다. 협조해 주시지요. 많은 사람이 죽어 가고 있습니다. 보상은 충분히 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보고도 모르시오? 정말 없는데 뭘 더 내놓으라는 것이오?"

말이 통하지 않는다. 결국 지셀이 손을 들고 길리언에게 말했다.

"전부 샅샅이 뒤져라. 약재와 약을 찾아라."

"알겠습니다."

지셀이 끌고 온 병력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모습을 본 그래프턴 백작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백작! 남의 영지에서 이게 무슨 짓이오! 지금 나를 뭐로 보고 이런 짓을 저지르냐는 말이오!"

지셀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팔짱을 낀 채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래프턴 백작이 그 모습을 보고 비웃음을 지었다.

"내 이 일은 잊지 않을 것이오. 백작이 막무가내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리 사람을 의심할 줄은 몰랐소이다. 내 명예를 실추시킨 대가는 반드시 치를 것이오. 다른 귀족들도 이 일을 그냥 좌시하지는 않을 것이오."

명백한 협박이다. 차후에 지셀이 하는 일에 전부 발목을 잡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귀족들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움직이는 지셀을 곱게 볼 리가 없었다.

그래도 지셀은 여전히 말없이 기다릴 뿐이었다.

몇 시간이 지난 뒤에야 길리언이 돌아와 어두운 기색으로 말했다.

"말한 수량 외에는... 약재와 약이 없습니다."

그 말에 그래프턴 백작은 다시 웃었고 그의 가신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반면 지셀이 끌고 온 북부군 병력은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까지 지셀이 한 일 중에서 이렇게 빗나가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프턴 백작이 비웃음을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남은 약재는 왕국의 법이 그러하니 필요하면 다 가져가시오. 나중에 셈을 치르겠소이다. 그런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소? 우리도 열심히 만들어서 주변에 나눠 줄 건데. 그리고 약은 아직 거래 금지나 몰수 명령이 내려지지 않았으니 내가 알아서 쓰겠소이다."

그 말을 들은 지셀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아....'

이런 놈들이 가장 문제였다. 법과 범죄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며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놈들.

어느 정도까지는 이해해 줄 수 있다. 누구나 자신의 이득을 우선으로 하니까. 하지만 과하게 선을 넘는 놈들이 문제다.

지셀에게는 자신이 세상을 깨끗하게 만들겠다는 신념은 없다. 실제로 펜리스의 규모가 커질수록 선물의 탈을 쓴 뇌물을 받는 관리들도 늘어나고 있었다.

그런 것까지 지셀이 일일이 간섭하지는 않는다. 그런 건 클로드(?)와 다른 관리들에게 맡기고 있었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니까.'

자신도 밑바닥에서 굴러 봤기에 알고 있다. 인간의 욕심은 완벽하게 막을 수 없다.

그렇기에 영지의 법과 체계를 확실히 정하고, 그 선을 넘지만 않으면 묵인하고 넘어갔다. 애초에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다 따지고 할 시간도 없었다.

하지만 선을 넘는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본보기는 확실하게 보여 준다.

그게 지셀의 통치 신념이다.

마음을 굳힌 지셀이 그래프턴 백작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프턴 백작, 이제 내가 그대를 '설득'해야 할 거 같군."

"허허, 설득이라? 그래, 뭐든 내 도움이 필요하면 설득해 보시오. 내 사정이 되면 도와드리리라."

그래프턴 백작이 거만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지금 짜릿한 쾌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저 북부 최강이라 불리는 펜리스 백작이 자신을 설득한다고 한다. 자신의 도움을 얻고 싶어 한다.

그 사실 자체가 그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주었다.

지셀이 손을 옆으로 뻗자 흑왕의 안장에 있던 창 하나가 날아왔다.

"오?"

그래프턴 백작이 그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마스터에 오르면 저런 신기한 수법도 쓸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지셀이 창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설득을 시작하지."

"그게 무슨...?"

콰아앙!

지셀과 그래프턴 백작 사이를 막고 있던 테이블이 순식간에 박살이 나며 양옆으로 날아가 버렸다.

둘 사이를 막고 있는 건 이제 아무것도 없다.

당황하는 그래프턴 백작에게 다가간 지셀이 그의 어깨에 바로 창을 꽂아 넣었다.

"끄아아아악!"

그래프턴 백작이 깜짝 놀라며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지셀은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창을 다시 뽑은 뒤.

콰지지직!

앉아 있는 그의 허벅지에 창을 꽂아 넣어 의자와 하나로 만들어 버렸다.

"끄아아아악!"

그래프턴 백작이 핏발 선 눈으로 고함을 내질렀다. 의자와 한 몸이 되어 버렸으니 일어날 수도 없었다.

곁에 있던 그의 가신들마저 화들짝 놀랐다.

"여, 영주님!"

"사령관 각하! 이게 무슨 짓이옵니까!"

"어, 어서 창을 거두십시오!"

남의 영지에 찾아와서 이렇게 갑작스럽게 무력을 쓰다니! 전쟁이 일어나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막 나가도 너무 막 나간다. 다들 넋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래프턴 백작의 호위 기사들이 검을 뽑았고 영주성의 병사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몰려든 그들도 감히 지셀을 공격하지 못했다.

"각하! 그만하십시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어서 창을 뽑고 물러나십시오!"

그저 안절부절못하며 지셀을 에워쌀 뿐이었다.

그래프턴 백작은 고통스럽게 외쳤다.

"무얼 하느냐! 어서 이놈들을 쳐라! 어서 치란 말이다!"

고통으로 인해 정신이 반쯤 나간 그는 무작정 지셀을 치라고 외쳤다.

하지만 지셀의 위명을 잘 알고 있는 기사들은 감히 그를 공격하지 못했다.

지셀이 냉랭한 눈빛으로 그래프턴 백작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길리언."

"예, 영주님."

"내 일을 방해하는 자들은 그 자리에 척살하라."

"받들겠습니다."

차앙!

길리언이 검을 뽑자 펜리스의 다른 기사들도 동시에 검을 뽑았다.

뒤따라온 북부군 병력도 창을 치켜세웠다. 이곳에는 그래프턴 백작의 병력이 훨씬 더 많지만 그 누구도 겁을 먹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다들 표정에 여유가 가득했다. 그 정도로 북부군과 이들의 전투력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북부군이 싸울 기세를 드러내자 그래프턴 백작의 병력은 겁을 먹고 조금 더 뒤로 물러났다.

지셀이 사나운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네놈 같은 놈들은 내가 아주 잘 알지. 좋게 말로 하면 절대 안 통하는 놈들 말이야."

"끄윽... 너.... 이딴 짓을 하고도 정말 무사할 줄 아느냐.... 다른 귀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래프턴 백작이 고통 속에서도 발악하듯이 외쳤다. 하지만 지셀은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어차피 지금 균열과 전염병을 제대로 막지 않으면 다 죽을 텐데 그게 무슨 상관이지?"

지셀은 그래프턴 백작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겼다.

이글거리는 지셀의 눈을 코앞에서 본 그래프턴 백작은 순간 말을 잃었다. 날 것 그대로의 살의와 증오가 느껴졌다.

도대체 이 자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싸우는 걸까?

의문이 사라지기도 전에 지셀이 으르렁거렸다.

"네놈이 혼자 다 처먹든 말든 나랑은 관계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런 시기에 남한테 피해는 주지 말아야지. 먹어도 적당히 먹었어야지. 꼭 내가 개입하게 해야 했나?"

지셀이 허리춤에서 손도끼를 꺼내 그래프턴 백작의 다른 쪽 어깨를 찍었다.

콰직!

"끄어어어억!"

"말해라, 어디에 숨겼는지. 당장 여기서 목이 날아가고 싶지 않으면 말이다."

"끄으윽, 없어, 없다. 그게 전부라고! 이 미친놈아!"

그래프턴 백작은 발악했다. 상대가 미친놈이라고는 들었지만, 정말 증거도 없이 이렇게 막 나가는 놈일 줄이야!

머리 좋은 그는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현재의 고통에 굴복해 약을 숨긴 곳을 말했다가는 결국 처벌을 당할 것이다.

죽기 싫으면 오히려 숨겨야 한다. 그래프턴 백작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는 역으로 협박의 말을 건넸다.

"이게 왕국의 귀족에게 할 법한 일이냐! 후환이 두렵지도 않냐는 말이다! 모든 귀족이 너에게 등을 돌릴 것이다! 당장 이 미친 짓을 멈춰라!"

그 모습을 본 지셀이 웃었다. 역시 간 큰 짓을 할 만한 놈이긴 했다.

사실 꼼꼼하게 조사를 한다면 결국 알아낼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일에 시간을 허비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지셀이 그래프턴 백작의 어깨에 꽂힌 손도끼를 뽑으며 허리를 폈다.

"그래, 그런 일을 너 혼자 할 수는 없지."

숨을 한번 내쉰 지셀이 손도끼를 앞으로 내밀며 모여 있는 가신들에게 물었다.

"이곳의 총관과 재무관이 누구냐. 앞으로 나와라."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도끼를 본 가신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428화 내가 너희를 구해 주겠다. (2)

지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사람이 바닥에 엎드리며 외쳤다.

"저, 저희는 죄가 없습니다! 저희는 반대했습니다!"

"모두 영주님이 시킨 일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래프턴 백작은 충성을 받을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총관과 재무관은 고문도 하기 전에 자백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지셀이 다가가자 두 사람이 엎드린 채로 다시 외쳤다.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말에 그래프톤 백작은 얼굴이 창백해져서 소리를 질러 댔다.

"이 멍청한 놈들아! 닥쳐라! 입을 다물란 말이다!"

하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두 사람은 미주알고주알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모두 지셀에게 말했다.

그래프턴 백작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마을에 지하 창고를 몰래 만들어서 약재를 보관했다. 거기에 제조 시설까지 갖추어 약을 생산하고 있었다.

얘기를 다 들은 지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길리언, 당장 병력을 이끌고 가서 그곳을 확인하라. 이 두 놈을 안내인 삼아서."

"알겠습니다."

길리언이 총관과 재무관을 데리고 움직였다. 그때까지도 그래프턴 백작은 발악을 멈추지 않았다.

"으아아아! 뭣들 하는 거냐! 어서 쳐라! 북부군은 다 외성 밖에 있지 않느냐! 어서 이놈들을 치고 전쟁을 준비하란 말이다!"

어차피 모든 걸 잃게 될 거라면 싸움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기사들과 병사들은 그래프턴 백작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했지만, 감히 그러지 못했다. 분명 병사들이 점점 더 몰려들어 영지 소속 병력이 훨씬 더 많아졌음에도 지셀에게 덤벼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마스터에 이른 펜리스 백작하고 싸우라고?'

'왕국에서 손꼽히는 강자인데?'

'우리가 다 덤벼도 이길 수 있는 게 맞아?'

마스터도 사람이니까 다 덤비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누가 먼저 덤비겠는가? 가장 먼저 덤비는 놈은 반드시 목이 달아날 텐데.

거기에 북부군도 요새 균열을 처리하며 그 명성이 드높아졌다. 아니, 애초에 펜리스군은 정예병으로 유명하다.

이 자리에는 몇몇만 와 있지만, 밖에는 8만이나 되는 북부군이 있다. 그들이 쳐들어오면 이곳에 있는 자들은 순식간에 짓밟힐 게 뻔하다.

인망이 없는 그래프턴 백작에게 그 정도로 충성할 사람은 없었다. 그저 기사단장이 체면 때문에 고민하다가 떠듬거리며 말했을 뿐이다.

"와, 왕국의 법을 집행하는 일이니 일단 결과를 보고 나서...."

"이 미친놈아! 네놈이 그러고도 나에게 충성을 바치는 기사란 말이냐! 결과는 무슨 결과를 봐!"

희극과도 같은 상황에 지셀이 피식 웃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난 진짜 강제로 하는 거 좋아하지 않아."

사람들이 안 믿어 줘서 그렇지, 용병 출신인 지셀은 정말 자유를 사랑했다.

그냥 세상이, 시대가, 환경이, 자꾸 그를 그렇게 몰아갈(?) 뿐이었다. 진심이다.

지셀이 길리언을 기다리는 동안 그래프턴 백작은 계속 악을 썼다.

"어서 저놈을 죽이란 말이다! 이놈들을 절대 성으로 들여보냈으면 안 됐었는데! 날 건드리면 다른 영주들도 너희를 막을 것이다! 왕국의 모든 영주와 전쟁이라도 할 셈이냐!"

혼자서 별별 얘기를 다 하고 있었다. 그래도 모두가 그의 말을 무시했다. 심지어 같은 편마저도.

차라리 처음부터 지셀에게 덤벼들었으면 기세를 타서 싸움이 벌어졌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이렇게 되니 이제는 누구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시간이 좀 지나자 길리언이 돌아와 보고를 올렸다.

"찾았습니다."

"그래, 얼마나 있지."

"정확한 수량은 파악해 봐야 알겠지만, 얼핏 보기에도 제조된 약만 수만 병에 이릅니다. 약재들도 상당히 많이 쌓여 있습니다."

"많이도 처먹었군."

지셀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래프턴 백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놈의 작위를 박탈한다. 감옥에 가둬 놔라. 영지는 왕실이 몰수했다가, 훗날 공을 세운 자에게 하사될 것이다."

그래프턴 백작의 얼굴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이럴 수는 없다. 전쟁 한 번 안 해 보고 어이없이 영지를 빼앗겼다.

북부군 병사들이 그를 묶고 일으켜 세웠다. 그래프턴 백작은 그때까지도 고래고래 악을 썼다.

"당장 이놈들을 치라니까! 뭣들 하는 게야! 어서 치란 말이다! 이런 억지가 어디에 있느냐! 내가 이곳의 주인이다! 왕이라도 나에게 이럴 수는 없다!"

가신들과 호위 기사들은 그저 눈치만 보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지셀의 행동이 조금 심한 감이 있긴 하지만, 먼저 법을 어긴 건 자신들의 영주였다.

애초에 영주의 권한이라는 것도 왕실과 영지민들에 대한 의무를 지키는 대가로 주어진 게 아닌가. 그걸 먼저 저버린 것은 그래프턴 백작이었다.

'난리가 난 상황인데 우리 영주님이 너무 하긴 했지.'

'사람들이 병 때문에 픽픽 죽어 나가고 있어. 균열 막는 것도 다들 벅찬 거 같은데.'

'사실 균열도 북부군이 처리하고 있잖아? 우리는 운 좋게 그 자리에서 벗어나 있던 거고.'

다들 이런 생각으로 합리화하며 눈을 감았다. 딱히 목숨을 걸 정도로 그래프턴 백작에게 충성을 바치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도 같이 엮일까 봐 전전긍긍하는 게 전부였다.

지셀은 그래프턴 백작의 기사들 몇 명을 직접 가리킨 뒤 말했다.

"너희들은 당장 주변 영지로 가서 이 일을 똑바로 전해라. 우리가 약을 나눠 주는 동안 알아서 준비해 놓으라고. 알겠나?"

"알겠습니다!"

지셀이 알려 준 곳은 균열의 여파에서 벗어났지만, 약재를 사재기하거나 제대로 협조를 안 해 주는 영지들이었다.

아마 이번 일을 전해 들으면 알아서 준비를 잘 해 놓을 것이다. 이미 정보는 입수해 두었으니 오리발을 내밀어도 소용없다.

끝까지 반항하면 지금처럼 실력 행사를 하는 수밖에 없다. 지금은 사정을 봐주면서 일을 진행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지셀은 다시 그래프턴 백작가의 가신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 죄는 영주에게만 묻겠다. 너희들까지 다 잡아가 버리면 영지에도 나름 문제가 생길 테니까. 새로운 주인이 정해질 때까지 펜리스의 관리가 와서 이곳을 맡을 것이다. 모두 잘 협조하도록."

"아, 알겠습니다."

누구의 명이라고 거절할까. 그래프턴 백작가의 가신들도 모두 고개를 숙였다.

지셀이 몸을 돌리며 길리언에게 말했다.

"주변의 약들을 회수하는 대로 빠르게 전달할 방법을 짜야겠다. 일단 전염병이 크게 퍼진 곳들부터 파악하자."

본보기를 보여 줬으니 이제는 다시 움직일 때였다.

* * *

전염병은 무척이나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일단 균열과 싸운 병사들과 접촉한 영지민들이 많았다. 더 큰 문제는 그들 중에서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었다. 상인들에 전령들, 모험가와 용병들까지.

약을 나눠주는 속도보다 병이 퍼지는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

지셀이 미리 생산 시설을 갖추고 약을 준비하게 했지만, 그리 잘 통하지는 않았다. 영주들은 지셀의 말을 믿지 못하고,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소극적으로 굴었다.

그래도 전염병이 퍼지기 시작하자마자 약 생산을 시작했지만, 전염병으로 버려지는 도시는 점점 많아졌다.

그렇게 버림받은 도시의 사람들은 고통에 절규했다.

"으으으.... 영주님은 도대체 뭘 하는 거야...."

"약이 있다고 들었는데.... 왜 약을 안 주는 거야...."

"우린 버림받았어.... 버림받은 거라고...."

멀쩡하던 사람들이 고열에 시달리며 쓰러졌다. 주변 사람들은 그들을 피했지만, 이미 잠복하고 있던 전염병은 시간이 지나자 모두에게 발현됐다.

도시에 있던 귀족들과 행정관들은 도망을 간 지 오래였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다른 영지에 병을 퍼뜨렸다.

이 도시는 그렇게 버림받았다.

생산 활동이 멈췄다. 상인들도 찾아오지 않는다. 경제가 마비되니 다들 굶어 쓰러졌다.

집 안에, 거리에 시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직 증세가 덜한 사람들이 헝겊으로 입을 가리고 시체들을 치웠지만, 그들도 얼마 가지 못하고 쓰러졌다.

도시 전체에 죽음이 드리웠다.

절망도 힘이 있을 때 하는 거다. 이들은 절망조차 할 기운이 없었다.

그저 천천히 죽어 가는 게 이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엄마...."

소녀는 침대에 누워 있는 엄마의 코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아직 살아 있다. 온몸에 붉은 반점이 돋고 고열로 시름하고 있지만 옅은 숨결이 느껴졌다.

'먹을 게 없어....'

식량은 떨어진 지 오래다. 이대로 있으면 병으로 죽는 것보다는 굶어 죽는 게 더 빠를 것이다.

소녀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먹을 걸 구해야 해....'

상단도 오지 않고 영주도 버린 도시에서는 식량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소녀는 밖으로 나갔다.

몸에 붉은 반점이 생기고 열이 올랐지만 그래도 아직은 움직일 만했다.

'추워....'

추운 날씨가 아님에도 몸이 으슬으슬 떨려 왔다. 뜨거울 정도로 열이 나는데 몸은 추워서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그래도 소녀는 움직였다.

'제발 누가 좀....'

누군가 도와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다들 자기 몸도 못 가누는 상태였다.

언제나 시끄럽게 떠들던 과일 가게 아저씨도, 언제나 웃으며 맞이해 주던 잡화점 언니도, 심지어 가끔 거리에서 행패를 부리던 건달들까지도 보이지 않는다.

다들 병에 걸려 쓰러진 것이다.

거리는 적막했다. 온갖 쓰레기들이 쌓여 있고 파리가 날아다녔다. 한쪽 구석에서 썩어 가는 시체도 보였다.

'도시 밖으로 나가야 해....'

도시 안에서는 이제 그 무엇도 구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쓰러졌고 모든 것이 썩어가고 있었다.

도시 밖에서 약한 짐승이라도 사냥해 와야 한다.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지만,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눈이 퀭해진 소녀는 그 생각만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시 밖으로 나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병사들마저 쓰러져 아무도 지키고 있지 않았으니까.

'추워....'

소녀는 자신의 몸을 팔로 감쌌다. 그럼에도 추위는 가시지 않았다.

머리가 점점 어지러워지고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거 같았다.

쿠웅.

도시 밖으로 나간 소녀는 결국 얼마 걷지도 못하고 쓰러졌다.

'엄마....'

영주님과 귀족님들은 약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조금만 기다리면 약과 식량을 가지고 올 거라는 소문을 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계속 기다리고 기다려도 그 누구도 자신들을 구하러 오지 않았다.

자신들은 버림받은 것이다.

"으...."

소녀는 어떻게든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일어날 수가 없었다.

며칠을 굶은 데다 병 때문에 몸이 너무나 아프고 어지러웠다.

'일어나야 하는데....'

쓰러진 엄마를 구할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다. 소녀는 안간힘을 썼지만 일어나지 못했다. 감기는 눈을 애써 힘겹게 뜨는 게 전부였다.

'제발....'

절망 속에서 신께 기도를 올리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제발 누가 좀....'

소녀는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절규하다 결국 눈을 감았다.

펄럭.

그리고 그 순간, 따뜻한 무언가가 소녀의 몸을 감쌌다.

동시에 청량한 무언가가 그녀의 입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은 순식간에 몸 안으로 흡수되어 다시 활력을 돋워 주기 시작했다.

"아...."

소녀가 힘겹게 눈을 떴다. 자신은 고급스러운 망토에 감겨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었다.

"누, 누구...."

소녀의 물음에 남자가 대답했다.

"지셀 페르디움, 펜리스의 영주이자 북부군 사령관이다."

소녀는 그가 하는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자신을 안은 남자는 도시 사람들과는 달랐다. 머리도 찰랑거리고, 피부도 깨끗하고, 입은 옷도 고급스러웠다.

그리고 뭔가 이름 뒤에 많이 붙은 걸 보니, 무척이나 높은 위치에 있는 귀족 같았다.

그래서 소녀는 애원하듯이 말했다.

"도와주세요...."

남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소녀가 다시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도와주세요.... 엄마가...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어요...."

그러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그 목소리에서는 그 어떤 어려움도 해결해 주겠다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그 어떤 문제도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오만함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소녀는 불안감을 완전히 벗을 수 없었다.

모두가 죽어 가고 있었다. 정말 눈앞에 있는 이 귀족이 혼자서 모두를 구할 수 있을까?

소녀는 입술을 꾹 깨물고 간절하게 남자의 팔에 매달렸다.

"우리는... 버림받았어요. 아무도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았어요. 제발 어디든 소식을.... 약과 식량을...."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희는 버림받지 않았다. 내 뒤를 보아라."

소녀는 떨리는 숨을 내쉬며 그의 품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남자의 뒤에 펼쳐진 풍경에 눈을 크게 떴다.

지평선을 가득 메울 정도로 많은 군인이 수많은 깃발을 휘날리며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덜컹, 덜컹, 덜컹.

남자의 양옆으로 식량과 약을 가득 채운 수레들이 끝도 없이 지나갔다.

그 모습을 본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아...."

자신들은 버림받지 않았다.

자신들을 구하러 온 사람이 있었다.

소녀가 다시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눈물로 앞이 흐려져 남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의 목소리는 똑똑하게 들려왔다.

"내가 너희를 구해 주겠다."

429화 내가 너희를 구해 주겠다. (3)

소녀는 지셀과 함께 돌아왔다. 소녀의 엄마는 여전히 누워 힘겨운 숨만 내쉬고 있었다.

지셀은 소녀의 엄마에게 바로 약을 먹였다.

'영원의 형벌'도 하루 만에 치료할 수 있는 약이었다. 희석하긴 했지만, 병의 증세 또한 전염성이 생기며 약해졌으니 효력은 충분할 터였다.

몇 분이 지나자 소녀의 엄마는 눈에 띄게 혈색이 좋아지고 반점이 옅어졌다.

"엄마...."

소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엄마의 손을 잡았다. 고비를 넘긴 것이 눈에 보였다.

엄마가 살았다는 기쁨과 안도감이 몰려왔다.

소녀의 엄마도 천천히 눈을 뜨고 물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니...."

"엄마? 괜찮아?"

"응... 몸이 훨씬 편해졌어."

"귀, 귀족님이 오셨어. 그분이 우리를 구해 주셨어!"

"귀...족...?"

"으응, 부, 북부? 백작님이래! 아, 펜리스! 펜리스의 영주님이라고 하셨어!"

"펜리스?"

소녀의 엄마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펜리스에 대한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귀족들 사이에 퍼진 소문 속 지셀은 악마 그 자체지만, 영지민들 사이에서는 전혀 달랐다.

펜리스에서는 그 어떤 이도 굶지 않고 그 어떤 이도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소문만 들으면 지상 낙원이지만 확인할 방도가 없다. 평민들에게는 거주의 이동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문을 들을 때마다 정말인지 궁금했다. 펜리스에 꼭 한번 가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곳의 영주가 와서 도시의 사람들을 구해 줄 줄이야!

"아...."

소녀의 엄마가 고개를 돌려 앞에 서 있는 지셀을 보았다.

그녀는 어떻게든 일어나 절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지셀이 손을 저었다.

"됐다, 굳이 예를 차릴 필요 없다."

"하, 하지만...."

"그냥 몸조리나 더 하도록."

소녀의 엄마가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지셀은 애초에 예의니, 신분이니 하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성격이다.

그는 바로 길리언을 돌아보며 말했다.

"길리언, 다들 기력이 없을 테니 모든 집에 빠짐없이 식량을 챙겨 주고 병사들이 직접 음식을 해 주게 해라. 당장은 다들 회복하는 게 우선이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도시 청소와 수리도 동시에 하는 게 나을 거 같군. 오면서 보니까 다른 병까지 퍼지겠어."

"빠르게 처리하겠습니다."

길리언과 병사들이 바로 움직였다. 지셀은 나가기 전 소녀의 어깨를 토닥이고 눈을 맞춘 뒤 말했다.

"엄마를 잘 보살피거라. 나는 이제 다른 이들을 도와주러 가야겠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소녀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바닥에 엎드리려 해도 지셀이 하지 말라고 손을 휘젓는 통에 고개만 꾸벅거릴 수밖에 없었다.

지셀은 계속 감사 인사를 하는 소녀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냥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망토는 선물로 주마."

소녀는 여전히 몸에 두르고 있던 지셀의 붉은 망토를 꼭 움켜쥐었다.

몸을 돌려 나가는 지셀을 향해 소녀가 외쳤다.

"제가, 제가 꼭!"

"응?"

지셀이 돌아보자 소녀가 망토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외쳤다.

"언젠가 꼭 이 은혜를 갚겠습니다!"

"기대할게."

지셀이 씨익 웃고 다시 몸을 돌렸다. 소녀는 지셀의 등에서 끝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소녀에게는, 다른 누구도 아닌 지셀이 이 세상의 구원자였다.

지셀은 소녀의 가족들만 구한 게 아니었다.

덜컹, 덜컹, 덜컹.

수도 없이 많은 수레와 병사들이 도시 안으로 들어왔다.

지셀의 명령을 받은 북부군은 재빠르게 움직여 사람들을 구하기 시작했다.

도시 안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제대로 움직이기조차 힘든 상태였다. 병사들은 모든 집과 골목을 뒤져 사람들을 구했다.

"어이, 빨리빨리 움직여!"

"여기 아직 살아 있다!"

"담요와 깨끗한 물을 좀 가져와!"

아직은 전염병이 퍼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몸이 약한 자들은 어쩔 수 없이 사망했지만 살아 있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병사들은 사람들에게 직접 약을 먹여 주고 음식까지 만들어 먹였다.

위생을 위해 거리를 청소하고 시체를 치우고 집을 수리했다.

도시 안에만 무려 1만의 병사들이 들어왔다. 그들이 움직이자 모든 문제가 순식간에 해결되었다.

처음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영주가 구하러 온 줄 알았다. 하지만 금세 그게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오오, 펜리스 백작님이...."

"소문으로만 듣던 북부군이 와 주다니...."

"역시 그분이 오셨구나...."

사람들은 감격했다. 세금을 바치던 영주도 자신들을 버렸는데, 자신들과 아무 상관이 없는 저 먼 북부에 사는 영주가 자신들을 구해 준 것이다.

그들의 가슴 속에 지셀의 이름이 깊게 박히는 순간이었다.

"역시 미친 망나니란 소문은 거짓말이었어."

"귀족들이 질투해서 낸 소문이 분명해."

"그곳 총관님도 엄청 청렴결백하다며? 도박이나 뇌물 같은 건 전혀 모르시는 분이래."

"노예들도 전혀 없는 곳이라더라. 엄청 훌륭한 마탑 후계자님도 계신대."

"그게 다 영주님이 깨끗하니까 가신들도 깨끗한 거야. 지금만 봐도 알 수 있잖아?"

잘못된 소문도 같이 퍼지고 있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시민들의 오해를 등에 업고 병사들이 도시를 살리는 동안, 지셀은 지도를 펴고 측근들과 다음 계획을 상의하고 있었다.

그저 가장 가까이 있기에 먼저 이 도시로 온 것이었다. 이곳을 전염병 퇴치의 중심지로 삼고 다른 곳도 구할 생각이었다.

"다크, 클로드에게 연락해서 행정관도 여러 명 보내라고 해. 비어 있는 도시들이 너무 많다. 추가 보급품과 약도 전부 이곳으로 보내라고 하고."

귀족들과 행정관들은 전염병이 퍼지자 가장 먼저 도망갔다. 도시를 관리할 사람이 없었다.

다크가 까마귀로 변해 떠나자마자 지셀은 지도 곳곳을 짚으며 말을 이었다.

"급한 곳은 이 정도다. 병력을 나눠 약과 식량을 최대한 빨리 보낸다. 각자 임무를 할당해 주겠다."

죄다 영주들이 제대로 약을 나눠 주지 않아 전염병이 퍼진 곳들이었다. 더 위험해지기 전에 빠르게 전염병을 잡아야 한다.

지셀은 펜리스의 지휘관들에게 새로운 편제를 고지하고 약, 식량 등 반드시 배급해야 할 품목과 양도 정해 주었다.

설명을 들은 길리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균열은 어떻게 할까요?"

도시와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균열이 확장되고 있었다. 그곳의 영지군은 계속 밀리다 못해 북부군에 지원을 요청한 상태였다.

그곳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기마병을 이용하면 약을 운반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펜리스군이 약을 옮기는 동안 나머지 북부군이 균열인을 상대하면서 버티면 된다."

"그렇다면 통솔은 누가...."

지셀이 테넌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테넌트, 네가 북부군을 이끌고 저지선을 지켜라.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그 말에 모두가 놀랐다.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심지어 원래는 적이었던 자에게 그런 대규모 병력을 맡기겠다니.

테넌트마저도 조금 당황하며 물었다.

"저한테 병력을 맡겨도 되겠습니까? 제가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지셀이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네가 북부군을 데리고 다른 짓을 하자고 하면 병사들이 따를 거 같아?"

"...."

그 말에 테넌트는 아무런 말도 못 했다. 확실히 북부군이 지셀을 향해 보내는 충성심은 하늘을 찌를 정도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본전도 못 건진 테넌트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지선을 만들어 놓고 있겠습니다."

"그래. 버티기만 해도 돼."

테넌트 정도면 괜찮은 지휘관이었다. 비록 펜리스에 패하긴 했지만 대군을 이끌어 본 경험도 있다.

북부군의 능력이 압도적인 만큼 저지선을 만들고 버티는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테넌트는 곧바로 북부군 병력 대부분을 이끌고 균열로 향했다.

지셀은 측근들을 쭉 둘러보다가 카오르와 알포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카오르, 알포이. 명단을 줄 테니까 너희 둘은 그 영주들한테서 약과 약재들을 뜯어와. 할 수 있지?"

"크, 그거야말로 나에게 잘 어울리는 일이지. 아주 탈탈 다 털어 올게."

"영지 뺏어서 내가 영주 하면 안 돼? 나 백작 하고 싶은데."

두 녀석은 누군가를 도와주는 일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놈들이다. 차라리 남은 영주들에게 약재를 뜯어 오는 일을 훨씬 잘할 것이다.

나머지 지휘관들도 바쁘게 움직였다.

"빨리 띄워라!"

마법사와 병사들을 태운 열기구 수백 대가 공중에 떠올랐다. 지셀은 전생에 쓰였던 방법을 지금도 써먹을 생각이었다.

도로가 연결된 곳은 기마병들로 빠르게 약과 식량을 운반할 수 있다. 하지만 도로가 깔리지 않았거나 지형이 안 좋은 곳은 열기구로 움직이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열기구에 매달고 실을 수 있는 양에는 한계가 있으니 많은 곳을 돌지는 못하지만 가장 멀고 가기 힘든 곳을 우선으로 가면 된다.

두두두두두두두!

모두 말을 탈 줄 아는 펜리스군은 약과 식량 수레를 이끌고 곳곳으로 퍼졌다.

지셀은 흑왕에 올라타며 말했다.

"길리언이 여기를 지키고 있어. 클로드가 약과 식량을 이곳으로 보내 줄 테니까."

그는 비교적 작은 마을 여러 군데를 직접 돌기로 결심했다. 병력을 자잘하게 나눠서 개별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건 여러모로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꼭 영주님께서 직접 움직이셔야 합니까?"

"그게 가장 빠르고 효율적이거든."

"끄응, 알겠습니다."

놀랍게도 지셀은 수행 기사 몇 명과 소수의 병력만 데리고 움직이겠다고 했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하나였다.

"콩이야, 가자!"

히이이잉!

흑왕이 크게 울부짖으며 앞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무려 100대가 넘는 수레가 저절로 지셀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덜컹! 덜컹! 덜컹!

지셀이 마나의 실로 수레를 잡아끄는 것이었다.

그 경이로운 모습을 본 다른 이들이 입을 떡 벌렸다.

특히 카오르는 감탄하면서도 심란해했다.

'와, 진짜 괴물이구나. 저거 어떻게 이기지?'

자신도 처음에 지셀을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 어쩌면 당시의 지셀보다 강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괴물은 날이 갈수록 더 빠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으으.... 일단 영감부터 확실히 밟고 생각해야겠다.'

최근 길리언의 실력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무래도 또 뭔가 격차가 벌어진 모양이었다.

거기에 테넌트인지 뭔지 새로 합류한 놈은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놈이다.

'마음에 안 들어.'

원래 서부제일검이라 불릴 정도로 잘 나가던 놈이라고 한다. 신분도 카오르보다 높고, 나이도 더 많으니 실력이 카오르보다 좋을 수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카오르는 지금 당장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했다.

'집사장도 그렇고 알포이 그놈도 그렇고.... 바네사는 아예 7서클이고....'

겨우 따라잡았다 싶으면 어느새 다들 앞으로 나아가 있다. 그러다 보니 요새 자신의 활약이 또 흐려지고 있었다.

카오르는 그게 은근히 분했다.

'두고 보자고. 다 내가 따라잡을 테니까.'

그는 근성은 없어도 독기는 있는 남자다. 툴툴거리면서도 어떻게 하면 더 강해질지 고민했다.

당장의 분기는 약을 안 내놓는 영주들을 패면서 풀면 된다. 카오르는 부랴부랴 돌격대를 이끌고 움직였다.

알포이도 지셀의 실력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카오르만큼 의식하진 않았다.

'난 마법사니까.'

어차피 분야가 다르다. 나중에 마법왕(?)에 오르면 영주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노예 계약도 끝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흐흐흐, 그때는 나도 영주 하고 백작 해야지.'

마탑의 후계자가 될 정도로 총명했던 그는 펜리스에 오고 나서 약간 상태가 안 좋아졌다. 단순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곳이 펜리스였기 때문이다.

그는 마법사들과 호위 기사 몇 명을 이끌고 움직였다. 영주들을 만나서 어떤 갑질을 할지 생각만 해도 좋았다.

그렇게 모두가 빠르게 움직이며 약과 식량을 곳곳에 나눠 주기 시작했다.

그 덕에 목숨을 건진 사람들은 모두 지셀을 칭송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백작님 덕분에 우리 가족이 살았습니다."

"꼭 이 은혜를 갚겠습니다."

지셀이 구해 준 곳은 대부분 소외된 지역들이었다. 영주들이 욕심을 부리느라 버렸거나, 준비를 제대로 못 해 구할 수 없었던 곳들이었다.

영주들이 자신들을 버렸다고 절망하던 사람들이다. 전염병의 고통 속에서 그들의 영주에 대한 충성심은 진작에 사라졌다.

대신 그들의 충성심은 다른 곳을 향했다.

"펜리스 백작님에게 여신의 축복을!"

"우리를 구해 주신 분은 펜리스 백작님이다!"

"펜리스 백작님이야말로 구원자입니다!"

지셀이 구해 준 도시와 마을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지셀이야말로 이 전란을 끝내고 모두를 구할 '구원자'라는 소문이 말이다.

혹자는 펜리스 백작이 여신에게 선택받은 자라고도 했다. 예전 수도에서 지셀이 성자로 소문이 난 걸 근거로 한 얘기였기에 상당히 그럴듯했다.

그게 포리스코와 짜고 친 엉터리 연극이었다는 건 지셀 본인이 잘 알고 있었지만.

'구원자라....'

구원교와 뜻이 비슷한 단어라 조금 거부감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멋대로 부르는 걸 막을 수도 없었다.

문득 지셀은 고개를 돌려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몬스터가 가득한 그림자 산맥. 그곳에서 몬스터와 오랫동안 싸우고 있는 튜리안 왕국이 있는 방향이었다.

'구원자.'

그건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 전생에 그 칭호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그놈도 슬슬 세상 밖으로 나올 때가 됐군.'

전생에 대륙 7강 중 하나에 속해 있던 자.

진짜 '구원자'라 불릴 인물이 곧 나타날 것이다.

430화 내가 너희를 구해 주겠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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