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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APOCALIPSISCHEF / Chapter 18: 18

章 18: 18

126화 암살 (1)

병문안을 끝마치고 난 뒤.

난 이번 지하행에서 얻은 마지막 보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니, 정리라고 하기보단.

[혼재된 마력의 블랙 푸딩]

[혼재된 마력의 선지국]

요리하고 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지.

"...꿀꺽. 주인님? 언제쯤 먹으면 될까요?"

"아직 안 끝났으니까. 조금만 참아."

"하아...."

요리를 앞두고 달뜬 숨을 내쉬고 있는 것은 내 권속.

[밤의 귀족]이라는 종족인 아리엘라였다.

한때는 우리 부대를 전멸시키고도 남았을 세력을 일궜으나.

우리 부대에게 토벌당한 뒤 쌓아 올린 힘과 권속을 모조리 잃어버린 녀석.

지금까지는 그 상태로도 그럭저럭 쓸만했다만.

조금은 더 쓸 만해져야 하지 않겠냐.

[이상식욕자의 혼재된 마력의 피]

이 녀석들은 흡혈을 통해 힘을 키운다.

지금 내가 요리하고 있는 것은, 저 [이상식욕자]의 피.

그 엄청난 덩치만큼이나, 그림자 속에 담아 뒀던 피의 양 역시 상당했다.

여러 괴물의 마력이 뒤죽박죽으로 섞인 탓에, 질이 높은 편은 아니었으나.

"...맛있겠다."

마력의 절대량만큼은, 굉장히 농후했다.

사실 아리엘라의 성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지는 꽤 되었다.

실제로 [교황]을 쓰러트렸을 때.

그 피를 요리해서 먹여 볼까 생각도 했지.

'교황의 피는 지나치게 고급 재료니까, 실패할 가능성이 있어서 건드리지 못했지만.'

이 피는 요리하는 데 무리가 없는 수준.

내 '흡혈'로 인해 능력을 크게 상실한 아리엘라였다만.

그 후로도 꽤 시간이 지났다.

내 명령에 의해 전투를 벌이면서 적들의 피를 꽤 많이 먹었을 것인 데다가.

내가 직접 하루 3끼 몬스터의 피로 만든 요리를 먹었으니까.

[뱀파이어 나이트]들의 숫자와 질은 과거에 비해 모자랄 수 있다.

하지만 아리엘라 본연의 능력치는 어느 정도 회복이 된 상태.

그리고.

이 녀석은 자기가 [남작]으로 승작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태라고 말하기도 했지.

그렇다면.

[코스 요리가 완성되었습니다.]

[테마 - 짙은 혈향]

"완성이다. 하나도 남기지 않고 먹도록."

"잘 먹겠습니다~!"

밀도 높은 마력을 품은 이상식욕자의 피.

그 엄청난 양을, 내가 '전력을 다해' 요리했다.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쌓인 피로 만든 요리들.

그 피를 국물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먹어 치운 결과.

[권속이 진화에 필요한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진화시키겠습니까?]

"큭큭. 역시나."

눈앞에 나타나는 문구.

내가 의도한 대로였다.

'경험치 바가 거의 다 찼으니. 막타만 치면 될 거라고 생각했지.'

그나저나.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뭔가 포X몬 같네."

"네?"

"그런 게 있어."

문구가 조금 우습긴 하다만.

포X몬에서 진화를 하지 않는 경우는....

귀여운 모습을 유지하고 싶은 게 대부분이었다던가?

슬쩍 시선을 돌려 내 권속을 바라봤다.

신나게 먹고는 배가 부른 듯 늘어져 있는 여자가 보였다.

'...딱히 지금도 귀엽진 않군.'

진화를 막을 이유는 없어 보이니.

시스템 창을 클릭해 곧바로 진화를 승인했다.

그러자.

[당신의 권속이 다음 단계로 나아갑니다.]

그 순간.

파악!!!

배부른 식사를 마치고 나른하게 늘어져 있던 뱀파이어.

그 몸에서, 검은 그림자가 폭발하듯 퍼져 나왔다.

* * *

고오오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 나른하게 누워있던 아리엘라.

그녀의 몸을 중심으로 검은 그림자가 퍼져 나간다.

끊임없이 넓어지며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그림자.

그 그림자들이 방 전체를 뒤덮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뭐야, 이건."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상가 건물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어둠으로 뒤덮인 정체 모를 공간이었다.

'[그림자 장막]이랑 비슷한가...?'

마치 우주에 내던져진 것 같은 기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속.

스륵....

그 공간의 중심부.

붉은색으로 불길하게 빛나는 보석 같은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보석이 아니군.'

내 권속.

아리엘라의 핏빛 눈동자.

그것만이 이 어두운 공간의 한 가운데서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권속으로 삼게 된 뒤.

내게 저항할 수 없다는 시스템 메시지도 있었기에 꽤 편하게 다뤘다.

꽤 쓸 만하기도 했다.

본래 성격이 그런 것인지, 요즘은 본인도 꽤 편해 보였지.

그런 모습을 보다 보면....

무심코 까먹어 버리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저 모습을 보고 나서야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는 것.

'이계의 괴물이라....'

[전투력 측정기]에 따르면, 이 녀석의 잠재력은 '파란색'

내가 지금껏 만나본 괴물들 중에서도 최고위에 해당한다.

배부르게 늘어져 있던 푼수 같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어두운 공간의 한 가운데 선 채.

타오르는 눈동자로 멍하니 나를 응시할 뿐.

'이 모습도, 괴물들이 가진 잠재력의 편린에 불과하겠지.'

이윽고.

사방으로 퍼져나간 검은 그림자가, 핏빛으로 물든다.

공간 전체가 검붉은 색의 끈적한 피로 채워지고.

다시금.

그녀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권속의 잠재력이 한 단계 해방됩니다.]

[카르슈타인 혈족의 준남작 -> 카르슈타인 혈족의 남작]

[소유중인 권속 (1)]

[아리엘라 카르슈타인]

[종족 - 뱀파이어]

[카르슈타인 혈족의 남작]

[강철 군단의 친위대장]

[혈족으로서의 서열은 여전히 낮으나, 그 잠재력이 일부 해방되었습니다.]

[여전히 말석에 불과하다고는 하나, 같은 귀족이 면전에 대고 욕하는 일은 없을 것 같네요!]

[권속을 소중하게 대하고, 키워 보세요!]

[당신의 보조에 따라 더욱 높은 경지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방을 가득 메웠던 핏빛 그림자가 모두 사라진 뒤.

방은 다시금 정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방 한가운데.

"후후... 후후훗!"

기분 좋게 웃고 있는 녀석.

겉모습에 큰 변화는 없었다.

"정말이지, 최고의 만찬이었나이다. 나의 주인이시여."

"그러냐."

하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는 변화는 있었다.

각성자로서의 감각이 말한다.

'권속 관계가 아니었다면....'

나 따위는 순식간에 죽일 수 있을 괴물.

"그만 웃어라. 정들라."

"후후... 네?"

"밥 다 먹었으면 일하자."

하지만, 뭐....

딱히 상관없겠지.

"응? 언제까지 쉬려고 그러고 있어."

"아, 넵. 죄송합니다."

권속이 아니었다면, 나 따위는 순식간에 죽였을 괴물이라고?

그럼 뭐 어쩔 건데.

'지금 권속이잖아?'

XX였다면~ 따위의 가정 섞인 변명 따위.

군대에서는 씨알도 안 통한다.

"큼! 그럼 그... 잃어버린 권속들도 채울 겸, 재활용할 쓰레기들을 찾으러 가볼게요."

"오냐. 보는 눈 없다고 중간에 놀지 말고."

"넵."

이번 전투에서 안 그래도 줄어든 권속을 더 잃었다.

살아남은 권속들은 이전보다 강해졌겠지만.

"아. 그러고 보니."

"응?"

"이번에 남작이 되면서 권속의 능력도 좀 더 다양해질 것 같아요."

"오?"

쓰레기들을 잡아다가 뱀파이어로 만들 수 있는 건 좋은데.

문제는 그 뱀파이어들의 직업이 [뱀파이어 나이트] 하나로 고정되는 것.

"일족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권속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래 봐야 미약한 수준이지만."

"오?"

이제는 아니란 거다.

과거에 싸웠던 괴물이라는 이유로 대놓고 쓰기는 힘들지만.

그녀의 뱀파이어들은 조건만 충족되면 매우 강력한 전력.

거기서 조합까지 갖춰진다는 것.

"그리고. 권속으로 삼을 수 있는 종족의 범위도 넓어졌어요."

그뿐만이 아니라.

자신과 닮은 종족.

예를 들면 인간 정도만 권속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던 이전과는 달리.

권속으로 삼을 수 있는 종족의 범위가 크게 늘어났다는 것.

"앞으로는 쓸 만한 괴물을 목격하면 그 녀석도 권속으로 삼을까 하는데. 괜찮으실지?"

"나쁘지 않네."

권속을 키워 보라고, 시스템 창이 그랬던가.

확실히.

키우는 맛이 쏠쏠하기는 했다.

* * *

그렇게.

성장을 마친 아리엘라가 권속을 늘리기 위해 바깥으로 나서고.

나는 부대의 업무에 복귀했다.

"기지라. 역시 가장 괜찮은 건 저 섬 아닐까 싶다만."

"그 망한 유원지가 있다는 거기 말입니까."

"어. 유원지 시설을 활용하면 방어시설 짓기도 용이할 것 같다고 공병들이-"

"그 부분은 좀 더 얘기해 보기로 하고... 다음 안건은 이겁니다. 그 상인 각성자라는 사람이 제시한 거래인데-."

부대 업무라고 해 봐야 별거 없다.

아니, 별거 있긴 한데.

'머리 좋은 놈들이 알아서 정해 주니까.'

큰 틀을 정하는 일에는 나도 어느 정도 의견을 내는 편이다만.

이런 세세한 일로 들어가면 아무래도 복잡한 얘기가 많다.

내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될 정도로.

"크흠. 그럼 잘들 얘기해 보고. 나중에 보고해 줘."

"들어가십니까?"

"난 밥 하러 가야지."

그래서 내린 결정이 이거다.

잘난 놈들한테 맡기기.

부대원들이 복잡한 얘기를 하면 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다가, 밥 시간이 되면 밥하러 가면 그만이란 거다.

평범한 군생활이었으면 욕 좀 먹었을 짓이다만.

"오늘 저녁 기대하겠습니다."

"오냐~"

다행히도 부대원들이 내 요리의 가장 큰 지지자였다.

애초에 내 직업은 요리사.

회의에 끼어서 머리 아픈 짓 하기보단, 밥하는 게 본업이다 이거지.

상가 건물에는 식당도 하나 있었다.

그곳의 시설들을 사용해 저녁 식사 준비를 마친 뒤.

"흠."

나는 의자에 걸터앉아 잠시 멍하니 생각에 빠졌다.

슬쩍 옆을 보니.

지금은 전기가 없어 사용하지 못하는 업소용 냉장고들이 보였다.

내용물은 비어 있다고 하나, 상당한 크기와 무게를 자랑하는 대형 냉장고.

약간의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그 앞에 다가간 뒤.

그 아래에 손가락 두 개를 집어넣었다.

쿠웅....

거대한 냉장고가 가벼운 스티로폼처럼 떠오른다.

"뭐... 될 것 같긴 했지."

예전이었다면 살짝 옆으로 옮기는 데에도 부대원 두셋은 붙어야 했을 대형 냉장고.

하지만 지금은 두 손가락이면 멀리 던져 버릴 수도 있을 정도였다.

'예전이면 상상도 못 했을 힘.'

나뿐만이 아니다.

423대대 시절부터 함께 해 온 부대원들이라면 누구나 이 정도 짓은 할 수 있을 테지.

피식.

'강해지긴 했네.'

부대를 내려온 지도 꽤 시간이 지났다.

여러 일이 많긴 했지만, 운도 따라 줬고.

...사실 실력이 없지도 않았던지라.

용케도 여기까지 강해질 수 있었구나 싶다.

내 성장은 물론.

권속이었던 아리엘라까지 성장을 마쳤으니까.

슬쩍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팝니다~."

군단의 거점 근처에 모여 장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

저 멀리에는 괴물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고 있는 각성자들의 모습도 보였다.

던전이 해방된 지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아직도 물때가 채 빠지지 않은 도시.

그중에는 각성자들이 다가가지도 못할 정도로 위험한 장소들도 즐비하다.

하지만 지금.

꽤 많은 각성자들이 활기를 가지고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잘 풀리고 있네."

철저하게 박살 나 버린 인간들의 문명.

그게 조금씩이나마 복구되어 가고 있는 모습.

저기에 우리 영향이 적다고는 하기 힘들겠지.

조금은 뿌듯함을 느껴도 되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그걸 긍정하는 듯.

띠링.

익숙한 알림음이 귓가에 울렸다.

[ROK.17 지역의 영토, '대도시 (2)'의 지배권을 손에 넣었습니다.]

[영토의 지배권이 유지되는 동안, 추가적인 '점령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길드의 점령지가 확장되었습니다!]

[선정 가능한 간부의 인원이 '1' 늘어납니다.]

기대하지도 않고 있던 문구.

"...벌써?"

인제군 때와는 경우가 달랐다.

머무른 시간도 훨씬 모자라다.

우리는 아직 춘천시의 이곳저곳에 들른 것도 아니다.

춘천시의 도심 근처에 생긴 던전.

그 던전을 토벌하고, 반쯤 무너진 도시에 자리를 잡았을 뿐.

'왜 벌써 점령에 성공한 거지?'

어째서 벌써 점령에 성공한 것일까.

이유를 잠깐 생각해본 결과.

추측할 수 있는 결론은 하나였다.

"...다른 사람들 때문이구나."

[산맥]을 점령했을 때도, 사실 우리가 산맥 전체를 지배할 정도의 세력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그곳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이번에도 마찬가지.

점령전의 기준이 영향력이라고 한다면.

'식량은 물론, 거래에 필요한 재화까지... 모두 우리 길드의 영향 아래 들어와 버렸지.'

던전에서 풀려나온 수많은 각성자들.

그중에 우리 부대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기대도 안 했는데. 개꿀이잖아?"

[길드 – 강철 군단]

[지배 영토 목록]

[ROK.17]

[산맥 - 3%]

[소도시 (3) - 3%]

[대도시 (2) - 6%]

춘천시의 점령전 비중은 6%.

다른 두 점령지를 합한 것과 같은 수치였다.

"우여곡절이 많긴 했다만. ...잘하고 있다는 거겠지."

전역하고 뭐 할까 고민이나 하던 말년 병장 주제에.

여기까지 잘도 왔구나 싶다.

그리고 일단 여기까지 온 이상.

멈출 생각은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앞으로도 잘 헤쳐 나가다 보면... 언젠가.

'과거의 문명을 완벽하게 재건할 수 있을지도 몰라.'

뭐.

거기까지 가려면 아직 한참은 더 고생을 해야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던 찰나.

띠링.

"응?"

익숙한 알림음이 울린다.

무슨 일인가 싶어 정면을 바라보자.

[무당 : 영준아.]

길드 메시지.

거기서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단어가 하나 보였다.

'무당.'

지금은 423대대를 지키고 있는 [천문관]이자.

나와 함께 우리 부대의 단 둘뿐인 최고참 병사.

박태준 병장이었다.

[셰프 : 무슨 일이야?]

사실.

녀석과 연락이 뜸해진 지 꽤 시간이 지났다.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만....

군 생활 당시.

우리 기수에서 가장 에이스로 손꼽히던 건, 내가 아닌 저 태준이 녀석이었다.

어떤 문제가 생긴 건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태준이는 내가 굳이 끼어들지 않아도 어지간한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 만한 능력을 가진 녀석.

그렇기에 그저 믿고 기다리기로 했었다.

'이제야 그 문제가 해결된 건가?'

메시지를 보내온 것을 보면.

그 문제란 걸 해결한 게 아닐까 싶었으나....

[무당 : 미안하다.]

...어?

[셰프 : 뭐야. 불안하게.]

[무당 : 나름 막아 보려고 고군분투 해 봤다만 결국 시간 끌기가 한계였다. 뚫렸어.]

아무래도 그건 아닌 모양.

[셰프 : 뚫리다니.]

[무당 : 방어를 굳혀라.]

[셰프 : 그러니까. 아까부터 무슨 말....]

[무당 :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갑작스러운 연락과 메시지.

그 내용에 당황하며 답장을 하던 중.

어디선가.

인기척 같은 것이 느껴졌다.

'...?'

눈앞은 아니었고.

등 뒤도 아니다.

[무당 : 몬스터 웨이브가 올 거다.]

박태준 병장의 메시지가 시야를 가렸으나.

그 내용을 확인할 틈 따위는 없었다.

'머리 위...!'

정체 모를 인기척의 정체.

날카로운 칼날이, 내 정수리를 노리고 쇄도했다.

127화 암살 (2)

강원도 서북부.

본래는 인간들의 도시가 자리 잡았던 장소.

그러나 지금.

그곳의 높은 건물들에는,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야만스러운 문양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본래 인간들이 거닐던 번화가에는.

쿠웅....

발소리가 땅을 울릴 정도로 거대한 덩치의 괴물들이, 아무렇지 않게 활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도시 중심에 있는 건물.

한때는 청사라고 불렸던 건물의 중앙에는, 다른 괴물들의 두 배는 될 법한 거인이 앉아 있었다.

-보고하라. 대주술사.

근방 일대를 장악하는 데 성공한 이들.

[녹색갈기 부족]의 수장을 맡고 있는 대전사.

그 앞에 서 있는 것은 대전사에 비하면 왜소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

-혹시라도 또 출전을 미뤄야 한다고 말한다면, 아무리 주술사들의 의견이라고 한들....

-걱정 마시게.

녹색갈기 부족을 이끄는 수장은 본래 대족장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모종의 사정으로 대족장이 죽은 지금.

이 부족을 이끄는 것은 이 자리에 서 있는 둘.

대전사와 대주술사었다.

대전사가 부족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주술사의 의견을 존중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 결과.

그들 부족의 진격은 꽤 오래 막힌 상태였다.

과거.

주술사가 남긴 말의 영향이었다.

-동쪽에 무언가 있는 것은 확실하나, 볼 수가 없다.

-무슨 의미인가?

-동쪽에 있는, 드높은 산맥... 그곳에 있는 존재가 내 눈을 가리고 있다.

주술사가 앞일을 점치고 전사들이 싸운다.

그것이 부족의 전쟁 절차.

하지만 누군가가 주술사의 눈을 가로막았다.

별의 운행을 엿볼 수 없도록.

'주술사의 눈을 가릴 만한 존재가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조심해야만 했다.

그만한 존재가 있는 곳에 어떤 정보도 없이 쳐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리고.

-드디어 끝을 보았소.

-그 말은.

-별의 운행을 가로막던 이와의 싸움이 드디어 끝났소. 저쪽이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고 있던 탓에 조금 오래 걸렸지만.

-드디어!

대주술사의 말을 들은 대전사가 거칠게 몸을 일으켰다.

광소를 내뿜으며 소리치는 대전사.

-전사들을 소집하라!

-이미 소집령을 내려두었소. 그뿐만 아니라....

그들 부족이 행하고 있는 것은 정복 전쟁.

그리고 전쟁에 앞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정보 수집.

그리고 또 하나는.

-암부를 보내 두었지.

요인의 암살.

-전쟁에 방해가 될 만한 녀석들은, 지금쯤 처리가 되었을 거요.

* * *

[무당 : 몬스터 웨이브다.]

눈앞에 나타난 태준이 녀석의 메시지.

하지만.

그 메시지를 읽을 틈 따위는 없었다.

"...큭!"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스산한 기운.

그 기운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급하게 칼을 뽑아 들고자 했으나....

[독고구식]의 손잡이를 쥔 순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늦었다.'

지금 칼을 뽑아서 휘두른다고 한들.

이 공격을 쳐낼 수는 없으리란 것을.

의미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칼집에서 칼을 뽑아 든다.

그 순간.

마치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말이 있었다.

-그러다 언젠가 호되게 당하실걸요?

얼마 전.

탄약대대에 잠시 방문했다가 다시 그곳을 떠날 때.

이상아 대대장이 한 말이었다.

-군단장님도 사람이잖아요? 사람인 이상 언제나 완벽할 수는 없는 법이거든요.

바쁜 일도 어느 정도 정리된 참.

나와 부대원들은 남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성장을 이루었다.

심지어 기대도 안 했던 점령전에서도 성과를 올렸다.

'이대로 가면 무난하게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아주 조금이지만.

그런 생각에, 마음이 늘어진 것도 사실이었다.

'방심했다.'

거기에, 태준이 녀석이 보내온 메시지.

그 내용에 집중하다 보니 주변의 경계에 소홀해졌다.

'...실수했다!'

방심한 것으로도 모자라.

실수까지.

지금까진 어떻게든 잘 헤쳐 나가며 살아남았다만.

나도 결국은 한낱 인간에 불과하니까.

언제나 완벽할 수는 없고, 실수를 저지를 때도 있다.

예전이었다면 실수 한 번쯤이야 문제 될 것도 없었을 테지만.

문제는....

-지금 세상은 실수 한 번에 정말 큰일이 날 수도 있는 세상이잖아요.

그 한 번의 실수를 봐주고 넘어갈 정도로.

인심 좋은 세상이 아니었다는 것.

꿀꺽.

'이렇게 죽는 건가...? 이렇게 허무하게?'

짧은 시간이었으나.

나는 오랜만에 찾아온 죽음의 위협 앞에, 진심으로 공포를 느꼈다.

하지만.

이상아 대대장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었다.

[사람 일은 혹시 모르는 거잖아요? 그러니.]

한 차례의 경고 뒤.

조언과 함께 내 품에 안겨 준 것이 있었다.

[잔말 말고 데려가세요.]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스산한 기운.

그 기운이, 내 정수리를 두 동강 내버리려던.

바로 그 순간.

-끼잉!

군복의 가슴팍 사이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팍!

이윽고, 검은색의 작은 형체가 내 머리 위로 솟구친다.

검은 고양이처럼 생긴 괴물.

[강철을 먹는 맥].

귀여운 외모와는 달리.

우리 부대를 전멸시킬 수도 있었을 괴물이었다.

캉!

"나이스, 까망아!"

철이 부딪히는 소리.

내 머리를 두 동강 내려던 기운이, 까망이에게 부딪혀서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나는 급하게 몸을 던졌다.

"후욱. 후욱."

제기랄.

진짜 뒈질 뻔했네.

까망이의 도움으로 적에게서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안전해졌다 생각한 나는 자세를 추스른 뒤.

나를 공격한 존재를 노려보았다.

"너, 뭐 하는 새끼야."

[식재료 감별(강화)]

[녹색갈기 오르크 암부]

눈앞에 있는 것은, 덩치가 2미터가 넘는 거대한 괴물.

그 덩치를 보자 소름이 돋았다.

공격 자체도 공격이었지만.

'저만한 덩치를 가진 괴물을 눈치채지 못하다니.'

녀석의 이름에는 [암부]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었다.

대충 짐작은 간다.

'암살자다.'

내가 [환경동화] 특성을 유용하게 활용하는 것과 마찬가지.

녀석도 무언가 기척을 감추는 특성을 가지고 있단 거겠지.

-크륵...!

-끼잉!

그 녀석은 지금은 까망이와 대치를 이루고 있었다.

이제 보니, 까망이의 입에는 처음 보는 낯선 쇠붙이가 하나 물려 있었다.

괴물의 오른쪽 손에 들려 있는 것과 완전히 똑같이 생긴 칼.

'...까망이가 없었으면, 저게 내 머리를 으깨 놓았을 거라 이거지?'

그렇게 생각하니 식은땀이 흐른다.

등줄기를 스치는 약간의 서늘함.

그 뒤에 찾아온 것은.

"이 새끼가."

차가운 분노였다.

분노의 원인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지금까지 어떻게 아득바득 살아남았는데,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려 들어?"

잠깐이지만.

진짜로 뒈지는 줄 알았다.

'쪽팔리게.'

간만에 느껴 본 죽음의 공포.

이딴 공포를 내게 안겨 준 녀석에 대한 분노.

그리고 두 번째는.

'방심을 해?'

신영준 이 병X 같은 새끼.

요즘 잘 나간다고 뭐라도 된 줄 알았냐?

뭣도 없는 놈 주제에 방심하고 있다가 죽을 뻔했다.

안일하기 그지없던 나 자신에 대한 분노.

-%^!#@^!.

"야. 형이 지금 좀 빡쳤거든?"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 분노를 방출할 방법이 눈앞에 있었다.

"너는 좀 맞자."

[요리사의 눈]

[중급 요리 비결 - '녹색갈기 오르크 손질법의 깨달음'을 획득합니다]

[중급 요리사의 리자드 육포]

[절대 미각의 효과로 요리의 효과가 상승합니다.]

오른손에 [독고구식].

왼손에 [검정중식].

두 자루의 식칼을 양손에 나눠 쥔 채 놈을 향해 몸을 날렸다.

* * *

-!@%$!@%%....

정체 모를 외계어를 중얼거리며 쓰러지는 거대한 괴물.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퉷!

"별것도 아닌 게."

암습을 당했을 때는 정말로 죽는 줄 알았지만.

다행히도 전면전에서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대놓고 내 목숨을 노리고 온 암살자.'

이런 괴물이.

과연 한 마리만 달랑 찾아왔을까?

"습격이다!"

나는 식당 문을 열고 나서며, 건물 전체에 울려 퍼질 정도로 소리쳤다.

"다들 적습에 대비하라!"

나를 찾아온 암살자.

이 한 마리로 끝날 리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몬스터 웨이브다.]

태준이 녀석이 남긴 말.

'몬스터 웨이브.'

게임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어기도 하다.

엄청난 숫자의 괴물들이 몰려드는 현상.

보통은 디펜스 게임에서나 쓰이는 용어이지만.

'하필 지금은 현실이란 말이지.'

소름 끼치는 단어일 수밖에 없다.

"신 병장님!?"

"습격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

"말 그대로다! 다들 방들 돌아다니면서 부대원들 상태 확인해."

내 경고를 듣고 무기를 챙긴 병사들이 보였다.

명령을 내리자, 건물 곳곳을 뒤져 가며 다른 병사들의 상태를 체크하러 뛰어가는 녀석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나대로 생각했다.

'보아하니... 모든 부대원들이 습격당한 건 아닌가 본데.'

내 명령을 받은 병사들.

놈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적어도 나처럼 습격을 받지는 않았다는 뜻.

어쩌면 정말로 나만 노린 습격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가정했을 때.

저들이 공격당하지 않고, 나는 공격당한 이유가 있다면.

'주요 인물만 습격했다는 건가?'

평범한 병사들과 달리.

나는 이 부대의 대장이자 유일한 식량 공급책.

암살자가 노리기에는 적당한 주요 인물이다.

그런 면으로 생각했을 때, 나 말고도 습격당할 만한 이들을 떠올렸다.

'민재 형, 광일이, 수혁이?'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부대의 간부급 인물들.

그리고.

-카하하하하!!! 심심하던 차에 재밌게 됐구나!

광일이의 방이 있는 방향에서 들려오는 괴성.

그뿐만이 아니었다.

타다다다당....

콰릉.

동시에 수혁이와 민재 형의 방 쪽에서 총성과 번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저쪽은 문제없는 것 같고."

나처럼 방심한 상태라면 모를까.

대부분 제 한 몸은 지킬 수 있는 실력자들이니까.

평상시에는 전투 면에서 나보다 훨씬 강한 인간들이다.

방심해서 죽을 뻔한 나와 달리.

무난하게 적습을 막아내는 데 성공한 모양.

그렇다면 그 외에는 누가 있을까.

대부분은 괜찮을 것 같은데....

'아.'

생각해 보니.

딱 한 명.

괜찮지 않을 것 같은 간부급 인물.

'아니.'

간부가 있었다.

"김 중위님. 지금 어딨어."

"김 중위님이요?"

"아, 저 압니다. 최근에 합류를 결정한 신참 부대원들하고 면담한다고 면담실에...."

병사의 말을 들은 나는 급하게 몸을 내던졌다.

면담실은 임시 거점으로 삼고 있는 거점의 가장 위층에 있었다.

"어, 보십쇼!"

"면담실 문이 부서져 있슴다!"

"설마."

김 중위.

과거 423대대 시절에는 있으나 마나 한 수준의 폐급 간부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광역 버프에 특화된, 초고효율 서포터.'

대규모 군대에 퍼센트 버프를 뿌려 줄 수 있는 광역 버퍼.

우리 부대가 대규모 전투를 벌일 때.

내 요리 다음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이 바로 김 중위다.

능력치를 일정 수치 이상 고정 상승시키는 내 요리.

능력치를 퍼센트로 상승시키는 김 중위의 지휘.

두 버프는 엄청난 상승효과를 일으키니까.

'만약 김 중위님이 죽었다면.'

그냥 부대원 한 명 죽은 정도랑은 비교도 안 된다.

말 그대로 뼈가 아플 정도의 손실-

"히, 히익!"

"어? 살아 계시네?"

일 터였으나.

다급히 달려간 면담실 안.

꼴사납게 바닥을 뒹굴고 있는 김 중위가 보였다.

다행히 죽지는 않은 모습.

습격이 없었던 건가 싶었지만.

그 앞.

[녹색갈기 오르크 암부]

나를 습격했던 거대한 괴물이 쓰러져 있었다.

다만,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신체의 절반이 이빨 같은 것에 뜯겨 나간 모양새.

"과연."

꽤 강력했던 괴물.

김 중위는 신참 부대원들과 면담을 하고 있다고 했다.

김 중위와 신참들만으로 처리할 수 있는 괴물이 아니라 생각해서 달려온 것이었다만.

생각해 보니.

지금 신참 중에는, 조금 특별한 사람이 하나 끼어 있었거든.

[이현진]

[Lv.2 이상식욕자]

"구, 군단장님."

"잘 해줬어."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여자.

다만, 그 피 중 대부분은 본인의 것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 레벨 하나 올랐네. 이 녀석 잡고 오른 건가.'

레벨과 스탯으로는 비견될 자가 없다고 생각했던 나지만.

그런 나보다도 높은 스탯을 가진 '신참'.

"여, 영준아. 저 신병. 보통 신병이 아니다."

"저도 잘 압니다."

"아, 안다고?"

커다란 이빨 같은 것에 씹어 먹힌 사체의 모습.

"이 녀석을 먹은 거냐."

"네, 네에."

힘없이 대답하는 이현진.

그녀의 오른팔은, 녹색의 근육질로 변한 상태였다.

"그. 제 팔이 이렇게 된 건."

"다시 괴물이 되려고 하는 건 아니니까. 안심해."

지금 쓰러져 있는 저 괴물.

그 녀석과 비슷하게.

'괜히 최고의 보상이라고 생각한 게 아니지.'

[이상식욕자]라는 직업을 얻은 그녀.

그녀가 가지고 있는 특성은 하나였다.

[식탐]

[이상식욕자의 끝없는 배고픔이, 다른 형태로 발현됩니다.]

[이종족을 섭취할 경우, 대상의 마력에 따라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이종족을 섭취할 경우, 섭취한 대상이 가지고 있던 신체 능력, 특성, 스킬 중 일부를 재현할 수 있습니다.]

[한번 섭취된 대상의 능력은 소화가 완전히 끝나기 전까지 보존됩니다.]

[이상식욕자의 소화에는 대략 한 달의 기간이 소요됩니다.]

자신이 먹어 치운 적.

그 적의 능력을 재현할 수 있는 특성.

즉.

'개사기 특성.'

적의 특성을 자유자재로 끌어다 쓸 수 있다는 점에서, 어떤 식으로도 활용 가능한 전천후 특성이다.

다른 특성이나 스킬을 타고나지 않는게 이해가 갈 정도.

이 녀석 덕에, 김 중위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다시 말하지만. 정말 잘 해줬어. 김 중위님은 지금 죽어선 안 되는 사람이거든."

"네. 네에.... 저기, 면담실이 좀 많이 부서졌는데. 인간이 되고 나서 싸워 본 적은 처음이라 힘 조절이 안 된 부분은 죄송...."

"그런 건 신경 쓸 필요 없고. "

맘 같아선 좀 더 칭찬해 주고 싶었으나.

"일단 쉬고 있어."

"아, 네."

"그리고. 김 중위님은 이리로."

아쉽게도.

지금은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여, 영준아? 나는 왜."

"회의실로 갑시다."

"회의실?"

태준이 녀석의 말대로라면.

이 공격은 어디까지나 맛보기.

"진짜 공격은 아직 오지도 않았거든요."

128화 요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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