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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7% APOCMASCOT / Chapter 8: 8

章 8: 8

***

점심시간은 끝났지만 촬영 현장에 문제가 생겼다.

스태프들이 웅성거렸다.

"어? 이거 왜 이래?"

"모니터도 꺼졌는데?"

"전기가 안 들어옵니다!"

윤성준 감독이 인상을 구기며 물었다.

"발전기가 고장이라도 난 거야?"

"발전기는 되는데요. 이게 연결에 뭔가 문제가 있나 봅니다."

"그럼 빨리 고쳐야지!"

"이미 살펴보고 있습니다."

촬영팀 스태프들이 고장 난 장비의 상태를 점검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아무래도 케이블 연결 문제가 아니라, 이 장비 자체가 고장 난 거 같은데요."

조감독이 제안했다.

"감독님. 장비 새로 가져와서 촬영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금 언제 장비를 수배해서 언제 불러서 언제 촬영하라는 거야? 여기 오늘 날씨가 딱 좋아서 그림이 얼마나 좋고, 우리 촬영 스케줄도 다 잡혀 있는데! 이거 오늘 찍어야 한다고!"

오늘 카메오로 출연하는 서준영이 큰소리치면서 다가온다.

"감독님! 제가 좀 보겠습니다!"

"어? 네가?"

"제가 전자공학과 나왔거든요."

"아! 너 공대 출신이지? 야. 빨리 봐봐."

서준영이 큰소리치면서 발전기와 연결된 장비의 전원을 껐다가 켰다. 켜지기는 하는데 제대로 작동하지는 않았다.

"어…."

"왜? 알겠어?"

"이거 사람 불러야 해요."

"대학교에서 이런 거 안 가르쳐줘?"

"안 가르쳐주는데요? 그리고 제가 연기 하느라 수업을 잘 못 들어가서…."

"야. 그럼 그냥 사람 부르라고 했어야지! 시간 가잖아!"

차우진이 다가갔다.

"제가 좀 볼까요?"

윤성준 감독이 물었다.

"응? 차우진 씨도 이런 거 알아? 그냥 공대 출신이면 준영이랑 마찬가지 아닌가?"

"촬영이 없을 때는 전기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일단 좀 봐봐. 이거 못 고치면 우리 오늘 촬영 접어야 해. 이런 날씨 언제 또 올지 모른다니까?"

차우진이 장비를 확인했다. 사람들이 다가와 구경하려고 했다.

그는 그 장비를 수리하는 법은 모른다.

어떤 구조로 작동하는지는 안다. 하지만 고장 난 걸 수리하는 건 무리다.

대신에 고장 낼 줄은 안다.

차우진은 점심시간에 부품을 하나 빼돌려 장비가 맛이 가게 해놓았다.

현장 스태프는 장비의 부품이 빠진 상황까지 대처할 수는 없다. 그래서 고장 났다고 판단했다.

차우진은 그냥 고치는 척하면서 그 부품을 다시 끼워 넣기만 하면 된다. 물론 그걸 남들이 보면 안 된다.

차우진이 말했다.

"주변이 소란스러우면 집중에 방해되는데…."

윤성준 감독이 손을 흔들었다.

"다들 다른 거부터 챙겨요. 이거 고치면 바로 촬영 들어가야 하니까."

차우진은 감독이 사람들을 쫓아내는 동안 빼놓은 부품을 도로 끼워 넣었다.

감독이 물었다.

"그런데 우진 씨. 이거 고칠 수 있어?"

차우진이 일어나며 대답했다.

"다 고쳤습니다."

"어?"

"휴우. 힘들었네요."

72. 5월 5일

차우진이 야외 촬영 현장 전력 제어 장비에 전원을 넣었다.

장비는 당연히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조명도 들어오고 다른 장비들도 켜졌다.

윤성준 감독이 활짝 웃었다.

"이야아. 차우진 씨 막 자격증도 있고 그런 거 아냐?"

"전기 쪽으로는 기사 자격증이 두 개 있습니다."

"진짜 전문가였네! 정말 차우진 씨 덕분에 내가 도움을 많이 받아. 하하하. 다들 뭐해? 시간 더 늦어지기 전에 진행하자고. 오늘 찍을 거 많아!"

촬영이 재개됐다.

정예지가 다가와 물었다.

"우진 씨. 기사 자격증이 있어요?"

"전기 쌍기사입니다."

"그거 대단한 거죠?"

"그거면 밥은 먹고 삽니다."

"그런데 왜 엑스트라 알바를 해요?"

"요즘 쉬는 기간이라 한 번 해봤는데, 감독님이 자주 불러주셔서요."

"아. 그렇지. 그 우연히 와준 덕분에 제가 살았죠. 안 그랬으면 오토바이에 치였을 텐데."

"그날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이 없었으면 치일 일도 없었을 겁니다."

차우진이 그날 촬영장에 오지 않았다면 오토바이 촬영 장면은 나중에 다른 장소에서 찍거나 아예 빠질 수도 있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본 영화에서는 그 장면이 달랐으니까.'

차우진이 오토바이를 몰았기 때문에 그날 촬영이 진행됐다. 그러다 사고가 날 뻔했다.

'그 사고로 배우가 다치거나 교체될 운명은 아니었는데, 미래가 바뀔 뻔했어.'

윤성준 감독이 정예지를 불렀다. 그녀의 촬영 순서가 다가왔다.

"저 갈게요. 우리 영화 정말 우진 씨 덕분에 잘 될 거 같아요. 히히."

"설마 제 덕분이겠습니까?"

정예지의 출연 장면 다음 촬영에 차우진이 엑스트라로 출연한다.

그는 기존에 찍은 다른 장면과 겹치지 않게 하려고 얼굴에 분장을 했다. 여전히 대사는 없지만 그래도 그냥 지나가는 사람보다는 화면에 오래 나온다.

그 장면을 촬영한 후에 만족한 감독이 말했다.

"우진 씨. 아예 우리 촬영 현장에 매일 나오는 건 어때?"

"매일이라니요?"

"저번에 오토바이 사고도 그렇고, 오늘 장비 고장도 그렇고. 우진 씨가 다 해결하잖아. 그냥 매일 나와. 나오면 뭐든 할 일이 있을 거 아냐."

"음…. 매일은 저도 일이 있어서 좀 그렇지만, 당분간 자주 올까요?"

"그래. 나와서 현장 일도 좀 도와주고, 혹시 또 사고라도 나면 해결도 좀 해줘. 나올 때마다 스태프 수당은 챙겨줄게."

"제 실력으로 해결 가능한 일이면 그래야지요."

"하하하. 전기 계통의 문제는 다 가능하겠던데?"

윤성준 감독이 웃으면서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차우진은 촬영용 전기장비를 잘 고치는 사람으로 알려졌다.

오윤서와의 접촉을 자연스럽게 늘리려면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앞으로 오윤서의 촬영 스케줄이 언제인지 확인해서, 그날 그 시간에 맞춰서 현장에 나와야겠다.'

차우진은 그 후로 촬영 현장에 이틀에 한 번 꼴로 나왔다.

비록 고정된 업무는 없지만, 남들 일하는 걸 구경만 하면 좋은 인상을 줄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촬영장에 나오면 스태프들과 함께 현장 일을 도왔다.

동력 케이블이나 장비 연결처럼 전기와 관련된 일은 당연히 잘했다.

"차우진 씨는 목공도 잘하네? 어디서 배웠어?"

멸망한 세계는 자원이 모자랐다. 자원을 생산할 시설이 파괴됐기 때문이다.

반면에 쉽게 구할 수 있는 자원도 있었다. 대표적인 게 나무였다.

거의 모든 생존 커뮤니티는 나무를 깎거나 잘라서 물건을 만들어 사용했다. 차우진도 그런 곳들과 교류하면서 목공 기술을 배웠다.

그때 배운 기술은 촬영장 세트를 만들 때 잘 먹혔다.

세트 담당 팀장이 윤성준에게 말했다.

"감독님. 차우진 씨 말인데요. 그냥 고정으로 출근시키면 좋겠습니다."

"왜? 일 잘해?"

"임기응변 능력이 장난 아닙니다. 세트 작업하다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어떻게든 땜빵으로 해결하는데, 응용력이 정말 기가 막힙니다."

"본업이 따로 있어서 안 된다잖아. 여기 몇 푼이나 준다고 본업 제끼고 오겠어? 지금도 많이 와주는 거야."

차우진이 오윤서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다른 사람과 통화하고 있었다.

'정수찬 박사인가?'

그는 그녀와의 접점을 만들기 위해서 자주 촬영장에 오긴 한다. 그런데 파트 타임 스태프가 잘나가는 배우와 친해지는 건 쉽지 않았다.

다른 배우인 정예지는 차우진을 자주 찾아와서 놀다 갔다. 서준영은 본인의 출연 분량은 이미 다 끝났는데도 놀러 와서 오토바이 타는 법을 배웠다.

'오윤서는 쉽지 않네.'

차우진이 오윤서를 보며 접촉할 방법을 궁리했다. 그러고 있는데 정예지가 다가왔다.

"우진 씨. 윤서 언니 팬이죠?"

"아닙니다."

"아니긴. 내가 가만히 보니까, 윤서 언니 촬영 스케줄이 있으면 꼭 나오던데."

"그걸 세고 있었습니까?"

"내 스케줄만 있으면 안 보일 때가 있는데, 윤서 언니랑 겹치는 날에는 차우진 씨가 항상 있으니까 안 거죠."

"우연입니다. 본업을 하다 시간 날 때 오는 거라서."

"본업이 뭔데요?"

지구 멸망을 막는 일이다.

"그런 게 있습니다."

"뭐야. 딱 걸렸어. 역시 윤서 언니 팬이었어."

"아니라니까 그러시네."

"그럼 모래 어린이날에 뭐해요?"

"음?"

차우진이 그녀를 보며 물었다.

"어린이날은 왜 물어봅니까?"

"앗! 설마 애가 있어요?"

"미혼입니다만?"

"깜짝 놀랐잖아요."

"그게 왜 놀랄 일입니까?"

"없어 보여서?"

"당연히 있을 리가 없다? 그런 건가요?"

"아, 아뇨."

정예지가 손을 흔들며 말을 돌렸다.

"그날 우리 회사 전기 공사 좀 부탁하려고요. 그날은 회사에 직원들은 안 나오고 팀장님 한 분만 있을 거예요. 전 우리 영화 스케줄 때문에 강원도 영월에 가야 해요."

"전기 공사는 전문 업체에 맡기면 될 텐데?"

그녀가 자랑했다.

"제가 회사에 부탁해서 차우진 씨한테 맡기자고 했어요. 잘했죠?"

차우진은 그녀가 왜 그런 제안을 했는지 짐작했다.

'저번에 오토바이 사고에서 구해준 거에 대한 답례인가?'

그런데 그녀의 제안을 받을 수가 없다.

그날은 개발 2팀의 신형 탐사기 현장 테스트를 해야 하는 날이다.

"안 됩니다."

"왜요?"

"그날 일이 있어서."

"쳇. 회사에 이야기 다 해놨는데."

"다른 사람 불러요. 그런데…."

차우진이 오윤서를 보며 정예지에게 물었다.

"오윤서 씨는 누구랑 통화하는데 저렇게 표정이 밝을까요? 남자친구인가?"

"앗! 어떻게 알았지? 아니, 그거 비밀인데, 난 인정한 적 없어요!"

"그냥 눈치챈 겁니다. 행복해 보여서."

정예지가 오윤서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쵸. 행복하겠죠. 좋겠다. 남자친구가 미국에 있는데, 곧 한국에 들어온대요. 그래서 저렇게 좋아해요."

차우진이 정예지를 돌아보았다.

"곧?"

"이제 한 일주일 남았나?"

차우진이 생각했다.

'정수찬 박사 1차 접촉까지 앞으로 일주일.'

정예지가 말했다.

"그러니까 팬으로만 남아요. 윤서 언니 좋아하면 상처받아요."

"좋아하는 거 아니라니까 믿지를 않네."

***

이튿날 차우진이 딥어스테크 연구소 개발 2팀을 찾아갔다.

"곽 팀장님. 끝났습니까?"

곽수혁이 피곤에 찌든 얼굴로 대답했다.

"현장 테스트에서 필요한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는 상태. 딱 거기까지 겨우 만들었습니다. 다만, 야외로 가져가면 또 무슨 문제가 생길지 모릅니다."

"잘 될 겁니다. 곽 팀장이 할 수 있다고 장담했으니까요."

"그거 우리 민지가 그랬다면서요. 제가 직접 물어봤는데 우리 딸은 차 이사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던데요."

"하려고 했습니다. 내가 압니다."

"아, 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내일은 어린이날이다. 차우진은 예전부터 내일 테스트하겠다고 날짜를 정했다.

곽수혁이 물었다.

"그런데 차 이사님. 테스트 장소는 정하셨습니까?"

"강원도로 갈 겁니다."

"아…. 그냥 가까운 데서 하셔도…."

"경치 좋은 곳에 가서 테스트하고 옵시다. 5월 6일부터는 그동안 일한 시간의 대체 휴가를 팀원별로 돌아가면서 쓰시죠. 원하면 아예 2팀 전체가 쉬는 것도 좋고요."

원래 이 긴급 일정은 내일 테스트까지다. 다들 그 날만 지나면 여유가 생기길 원했다.

방금 차우진이 그걸 공식화해주었다.

곽수혁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 그러면 테스트 끝나고 경치 좋은 현장에서 회식할까요? 차는 술 안 마시는 사람에게 몰라고 하면 되니까요."

"그것도 좋고요."

"크으. 우리 차 이사님. 뭘 좀 아시네요. 모래부터는 푹 쉬어야겠습니다."

차우진은 조금 미안해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곽 팀장님은 휴가를 얼마 못 쓸 텐데.'

그래서 한마디 보탰다.

"수당은 확실히 챙겨드리죠."

"휴가에 수당까지. 하하하. 고생한 보람이 있네요."

"어…. 그러면 좋겠군요."

***

어린이날에 강원도 영월에 딥어스테크의 차량 몇 대가 현장에 도착했다.

개발 2팀이 동원한 건 각종 장비를 실은 대형 트레일러 한 대, 연구원들이 탑승한 SUV 승합차 세 대였다.

오늘은 테스트 일정이라서 개발자가 모두 올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아이가 있는 연구원들은 빠졌다.

대신에 부족한 인원은 다른 팀의 지원을 받았다. 넉넉한 수당과 휴가를 걸자 미혼 지원자가 많이 나왔다.

1팀에서 지원 나온 연구원들이 말했다.

"공기도 좋고, 경치도 좋고, 오늘 일하면 대체휴일에 추가 휴일도 하루 붙여준다고 하고, 거기다 휴일근무수당은 당연히 챙겨준다니까, 여행가는 셈 치고 나오면 딱 좋네."

"이게 다 예산이 충분히 나와서 그런 거잖아. 2팀은 그동안 이런 개꿀을 빨았단 말이지?"

"부럽다."

"대신에 2팀이 그동안 일은 엄청 많이 했더라."

차우진도 차에서 내렸다. 그가 주변을 보았다.

곽수혁 팀장이 옆에서 말했다.

"경치 좋네요. 이번 휴가 때 애들하고 여기 와봐야지."

"음…. 지금 쉬어두시는 게 좋긴 할 겁니다."

"하하하. 왜 무서운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을까요? 제 착각이죠?"

차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오늘을 테스트 디데이로 잡은 건, 테스트에 필요한 데이터를 얻기 딱 좋은 일이 일어나는 날이기 때문이다.

차우진이 옆을 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곽수혁도 그곳을 보며 말했다.

"영화 촬영 하나 본데요?"

"테스트 준비하시죠. 저는 인사나 하고 오겠습니다."

"네? 굳이…."

"저기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요."

차우진이 영화 촬영팀이 있는 곳으로 갔다.

다른 사람들은 차우진이 와도 그러려니 했다. 평소에도 촬영장에 와서 일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정예지는 달랐다. 그녀가 얼른 뛰어왔다.

"앗! 우진 씨. 오늘은 일하러 가야 한다더니 여긴 어쩐 일이에요? 생각이 바뀌었어요?"

차우진이 옆쪽을 가리켰다. 대형 트레일러의 옆쪽을 열어놓고 장비를 내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오늘은 저쪽 일로 왔습니다."

"아. 저기서 일하시나 보다. 전기 설치 일을 하는 거예요? 바빠 보이는데 여기 와 계셔도 돼요?"

"저는 뭐 깍두기 같은 거라서, 그냥 어슬렁거리는 게 일입니다."

"어머. 그게 뭐예요."

정예지가 신난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진짜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우리 막 전생에 옷깃을 비비고 그런 거 아니에요?"

"현생에 옷깃이 스쳐야 전생에 인연이 있는 겁니다."

"현생에 스치면요?"

"그냥 스친 거죠."

"에이. 그래도 이런 우연이 어디 흔한가요?"

우연이 아니다.

데이터를 얻을 장소는 강원도 영월이 아니어도 된다. 강원도로 와야 하는 건 맞지만, 굳이 여기일 필요는 없다.

그런데도 여기 온 건 그녀의 미래를 알기 때문이다.

차우진이 웃는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오늘 사고로….'

오늘 여기서 일어나는 사고로 정예지가 사망할 예정이다.

***

박창수가 멸망한 세계의 폐허에서 태블릿 PC를 찾았다.

배터리는 이미 방전된 상태였다.

"우진아. 이거 살릴 수 있냐?"

"이런 건 내 전문분야가 아니라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너 이런 거 잘 살리잖아."

"기다려봐."

차우진이 그 태블릿 PC에 보조 배터리를 연결했다.

사용 가능한 보조 배터리는 가끔 구할 수 있었다. 충전은 평소에는 태양광 발전기를 이용했다.

"뭐 들어 있냐?"

"영화 몇 편?"

"대박! 야. 이거 계속 켜놓을 수 있냐?"

"보조 배터리를 꽂아놓으면 되겠지?"

박창수가 손바닥을 비볐다.

"그럼 됐네. 이게 얼마 만에 영화냐. 보자."

방송국은 오래전에 무너졌다. 당연히 TV도 나오지 않는다. 지금은 녹화된 광고 영상만 봐도 재미있다.

그 태블릿에 들어 있는 영화 중 하나는 윤성준 감독의 '운명의 풍차'였다.

박창수는 그 영화를 보다가 정예지가 나오는 장면에서 아쉬워했다.

"저 배우 이름이 정예지인데, 이 영화를 찍다가 죽었어."

"왜?"

"영화 촬영 현장에서 사고로 죽었지."

"그럼 이 영화가 유작이네?"

"맞아. 감독이 정예지가 출연한 모든 장면을 시나리오까지 수정해서 살렸다더라."

"감독이 사고는 냈어도 인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나 보네."

영화가 끝난 후에 정예지가 어떻게 사망하는지 알려주는 추가 영상이 나왔다. 차우진이 그걸 보며 말했다.

"감독이 사고를 낸 게 아니구나."

그 추가 영상 마지막에 '정예지를 그리며'라는 자막과 함께 5월 5일이라는 날짜가 나왔다.

차우진이 말했다.

"사고 난 날이 그날이네? 딥어스테크의 탐지기가 일찍 개발됐다면 제대로 된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었을 거라던 그날."

박창수가 대답했다.

"그렇지. 그날이지. 멸망 이전에는 아무도 그 지진의 진짜 의미를 몰랐던 5월 5일이지."

73. 이벤트

차우진은 탐지기를 테스트해야 하는 날과 정예지가 죽는 날이 겹친다는 걸 안다. 그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는 건, 그날이 올해 5월 5일이기 때문이다.

차우진이 활짝 웃는 정예지를 보며 생각했다.

'역시 오늘 이곳에 오는 게 맞았어. 저 웃는 얼굴을 못 보게 되는 건 너무 아쉬우니까.'

탐지기 테스트 장소는 굳이 여기가 아니어도 된다. 강원도 다른 지역이어도 된다. 날짜만 오늘이면 된다.

그런데도 일부러 이곳을 테스트 장소로 잡았다.

차우진이 정예지에게 말했다.

"그럼 촬영 잘해요. 난 저쪽 회사에 가서 일해야 하니까."

정예지가 손을 흔들었다.

"이따가 밥 먹으러 와요. 오늘 밥은 맛있을 거래요."

"꼭 먹으러 가야겠네요."

차우진은 개발 2팀으로 돌아갔다.

2팀 연구원 박효정이 다가와 물었다.

"차 이사님. 여배우하고 아는 사이에요?"

"정예지 씨를 봤군요."

"역시 배우였어! 얼굴까지는 잘 안 보였는데, 배우는 멀리서 봐도 아우라가 다르더라고요."

"저쪽 촬영팀하고 좀 아는 사이라서."

"대박. 저 그럼 사인 좀…."

"정예지 씨 사인을?"

"아뇨. 남자 주인공이요."

"누군지 알아요?"

"몰라요. 그래도 잘생겼겠죠."

"난 촬영팀하고 알지, 배우들하고는 잘 모릅니다."

"방금 정예지는 아는 사이시던데요?"

"정예지 사인이라도 받아줘요?"

"아뇨. 전 남자배우만 좋아해서요."

연구원들이 삼각형의 꼭짓점 위치에 정보 수집 장치 세 대를 설치했다. 꼭짓점 사이의 거리는 각각 100m였다.

곽수혁 팀장이 외쳤다.

"1차 설치 완료! 이 기세로 세 개 더!"

그 삼각형과 겹쳐진 또 다른 삼각형이 그려졌다. 새로운 삼각형 꼭짓점에는 충격파 발생기를 설치했다.

차우진이 그 형태를 보며 말했다.

"육망성이네."

곽수혁이 옆에서 맞장구쳤다.

"하늘에서 보면 육망성이 되겠네요. 이러다 여기서 악마라도 소환되는 건 아니겠지요? 하하하."

"이런 단순한 형태로는 아니죠."

"그쵸? 뭔가 복잡한 그림도 쫙 있고, 신비한 글씨도 많이 쓰여 있고 그래야겠죠?"

"그런 거 좋아하시는구나."

"아니, 제가 아니라 우리 딸이…."

"민지가요? 의외네요."

"걔가 옛날부터 이쪽을 좋아했습니다."

육망성 한가운데에 센서가 수집한 데이터를 통합하는 메인 시스템이 설치되었다. 이 시스템이 마그마 탐지기의 본체였다.

"설치 끝났습니다!"

곽수혁이 말했다.

"확인해봐."

탐지기 본체에 전원이 들어왔다.

박효정이 본체에 연결된 모니터들을 확인했다. 탐지기의 상태 정보가 줄줄이 올라왔다.

"충격파 발생기와 센서 모두 준비 끝났어요."

곽수혁이 지시했다.

"시작해."

"1호 가동 시작!"

그들이 밟고 선 땅에 아주 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연구원 중에는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로 약한 진동이었다.

"1호. 가동 성공입니다! 2호, 3호도 정상 가동됐습니다!"

잠시 후에 모니터에 숫자와 그래프들이 떴다.

"데이터 들어옵니다!"

연구원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여러 대의 모니터에 데이터가 주르륵 올라왔다. 연구원들이 충격파 발생기와 센서의 정보를 확인했다.

차우진은 테스트 과정을 지켜보았다. 금방 끝나는 일은 아니다.

테스트가 한 시간쯤 진행된 후에 차우진이 시계를 확인했다.

'이벤트 22분 전.'

그가 곽수혁에게 물었다.

"테스트 상황은 어떻습니까?"

"데이터는 잘 뽑히고 있습니다. 세 방향에서 땅속으로 충격파를 넣었고, 센서들이 지하로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반사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그 테스트는 한 번에 끝나는 게 아니다.

"다양한 파장으로 반복해서 테스트하고 수집한 데이터로 통계를 내 땅속 상태를 예측할 겁니다. 오후에는 탐지기 위치를 변경해서 다시 테스트한 후에 비교할 거고요. 다만 아쉬운 건…."

곽수혁이 촬영장을 보며 말했다.

"저쪽 영화 촬영장이 없었다면 데이터가 더 깨끗하게 들어왔을 텐데 말이죠. 이러면 강원도 조용한 곳까지 온 보람이 없네요."

"그런 노이즈도 다 걸러낼 수 있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이 장비를 숨소리조차 나지 않는 조용한 곳에서만 쓸 수는 없으니까."

"물론입니다. 저 촬영장 방향에서 발생하는 진동 데이터는 따로 수집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걸러낼 때 사용하려고요."

곽수혁이 모니터에 표시되는 데이터를 보며 말했다.

"이럴 때 작은 지진이라도 하나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사고가 날 정도는 아니고 약한 거로요. 그러면 땅속 아주 깊은 곳의 데이터도 손에 넣을 수 있을 텐데요."

차우진이 시계를 다시 보았다.

'지진 발생까지 20분 전.'

"이후 일정은요?"

"여기서 30분 정도 더 데이터를 수집한 후에, 점심 먹고 위치 옮겨서 다시 두 시간쯤 더 테스트하면 끝납니다. 장비를 회수한 후에는 이 경치 좋고 공기 맑은 곳에서 탐지기 테스트 성공 기념 회식을 해야죠. 흐흐."

차우진이 말했다.

"그럼 저는 영화 촬영팀에 가 있겠습니다."

"예? 테스트 더 안 보시고요?"

"저쪽에서 점심 같이 먹자고 초대해서요."

"아…. 부럽습니다. 정예지하고 같이…."

"예지 씨 팬이셨습니까?"

곽수혁이 손을 흔들었다.

"아닙니다. 제가 아니라 우리 민지가 팬이죠."

"아, 예. 나중에 민지 보면 물어볼 겁니다. 육망성 소환진을 아는 예지 씨 팬이 누구인지."

"아니, 그건 좀…."

***

차우진이 영화 촬영팀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는 오늘 지진 발생 시각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5월 5일 12시 정각.'

차우진이 시계를 확인했다.

'남은 시간 5분.'

정예지는 절벽 위에서 카메라를 보고 있었다.

'이건 예정된 그대로 진행되는 건가….'

차우진이 개입한 사건들은 결과가 바뀌었다.

차우진이 연쇄살인마 마상국을 제거했다. 덕분에 이선정 박사는 멀쩡히 살아있다.

정예지의 오늘 촬영은 차우진이 막지 않았다. 그랬더니 모든 일은 그가 알던 그대로 진행됐다.

지진까지 남은 시간은 5분인데, 그녀는 절벽 위에 서 있었다.

지금 저기서 정예지를 끌어내면 그녀를 구할 수는 있다. 하지만 촬영 도중에 그러면 그녀는 구해도 사람들의 의심을 사게 된다.

그러면 오윤서는 물론이고 정수찬 박사를 움직일 때도 문제가 생긴다.

'자연스럽게, 일이 터진 후에 움직이자.'

그래야 의심받지 않는다.

'나중을 생각하면 그게 나아.'

정예지가 절벽 앞에서 남자배우와 대사를 주고받았다.

차우진이 다시 시계를 보았다.

'지진까지 남은 시간 1분.'

그는 지금 이 상황에 관한 정보를 세 가지 방법으로 알았다.

정예지의 사망 사고는 멸망 초기의 다큐멘터리에 나온다. 사고의 원인인 지진이 가지는 가치 때문이다.

박창수에게 들은 것도 있다.

폐허에서 찾아낸 태블릿 PC 영화 속 추가 영상에서도 이 상황을 보았다.

"이선정 박사 사건은 내가 막을 수 있었는데."

마그마 탐지기도 원래와는 다르게 현장 테스트 단계까지 개발됐다.

그런데 정예지의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내가 개입하지 않은 일은 꿈속에서 본 그대로 일어난다고 봐야 하려나."

차우진이 앞쪽으로 움직였다.

그는 카메라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대신에 정예지 근처의 스태프들 바로 뒤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시계를 다시 확인했다. 기다리던 시간이 되었다.

"12시."

갑자기 땅이 흔들렸다. 사람들은 당황했다.

"어? 뭐야?"

"지진인가?"

"장비 안 넘어지게 확인해!"

장비가 문제가 아니었다.

정예지는 절벽 끝에 서서 연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진의 충격으로 그녀가 서 있던 바닥의 앞쪽에 금이 쩍 가기 시작했다.

"꺅?"

그녀가 서 있는 곳이 서서히 아래로 꺼졌다.

기울어진 채로 무너지는 땅을 두 다리로 뛰어서 벗어나는 건, 보통 사람이 하긴 어려운 일이다. 뛰는 건 고사하고 균형을 잡고 서 있기조차 쉽지 않았다.

게다가 바닥의 균열이 너무 빨리 벌어졌다.

그녀가 앞으로 손을 뻗었다.

"살려줘요!"

정예지의 상대역인 남자배우는 땅이 갈라지는 걸 보고 놀라서 뒤로 주춤 물러나던 중이다. 둘 사이의 거리가 더 멀어졌다.

남자배우가 뒤늦게 손을 뻗었지만 그녀의 손은 닿지 않았다. 어림도 없었다.

남자배우는 겁에 질려 당황한 소리만 냈다.

"어? 어?"

이제 바닥이 너무 많이 갈라졌다. 절벽 쪽 흙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꺄아악!"

비명을 지르는 그녀의 눈에 그쪽으로 달려오는 사람이 보였다.

차우진은 균열이 시작되자마자 뛰었다.

그의 옆쪽에 카메라가 있었다. 그 카메라의 하부 구조물은 다른 무거운 장비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카메라는 절벽 장면을 촬영하는 중이다. 이 사건이 미래에 영상으로 남은 건 그 카메라 덕분이다.

차우진이 밧줄을 던졌다. 밧줄이 카메라에 감겼다. 그 상태로 콱 잡아당겼다. 카메라가 옆으로 돌아갔다.

차우진이 남자배우를 스쳐 지나가며 점프했다. 무너지는 절벽 사이 균열을 단숨에 건너뛰어 정예지의 옆에 착지했다.

절벽 끝 땅바닥은 이미 무너지는 중이다.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위험해!"

차우진이 그녀의 허리를 왼팔로 안으며 말했다.

"위험한 거 모르는 사람이 있나 봅니다. 저렇게 알려주는 거 보면."

"우, 우진 씨? 왜…."

"예지 씨가 배우 오래오래 하려면 일단 오래 살아야지요?"

"왜 같이 죽으려고…."

"안 죽습니다."

차우진의 오른팔에 밧줄을 감았다. 그 밧줄의 반대쪽 끝은 카메라에 감겨 있었다.

밧줄이 팽팽해졌다.

"이렇게 동아줄이…."

바닥이 무너지면서 그 밧줄에 두 명의 체중이 실렸다. 밧줄이 팽팽해졌다.

문제가 생겼다. 카메라 지지대에 감긴 밧줄이 서서히 미끄러지면서 풀렸다.

차우진이 말했다.

"아. 밧줄이 풀린다. 고정이 덜 됐나 보네."

"꺄악!"

차우진이 사람들에게 외쳤다.

"밧줄 잡고 당겨요! 저거 풀리면 우리 다 죽어!"

차우진은 살 수 있다. 절벽에서 추락한다 해도 블링크 스킬을 사용하면 탈출할 수 있다.

어떻게 탈출했는지 설명할 방법도 있다. 완전히 추락하기 전에 절벽 안쪽을 붙잡고 겨우 목숨을 건진 척하면 된다.

하지만 그러면 차우진은 살아도 정예지는 죽는다. 그녀가 죽게 놔둘 수는 없다.

차우진이 소리를 질렀다.

"밧줄 잡으라고!"

카메라에 가까이 있던 스태프와 남자배우가 정신을 차리고 밧줄로 달려갔다. 그들이 밧줄을 급히 붙잡았다.

눈앞에서 절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절벽 근처에 있는 카메라까지 가려면 상당히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데도 몇 명이 더 달려왔다. 그들도 밧줄을 붙잡았다.

카메라에 감기고 남은 밧줄을 잡는 사람도 있고, 팽팽해진 부분을 잡는 사람도 있었다.

절벽이 완전히 무너졌다. 차우진과 정예지는 절벽 아래로 사라졌다.

밧줄이 아래로 팽팽하게 당겨졌다. 차우진은 오른팔에 밧줄을 감고, 왼팔로는 정예지의 허리를 단단히 안았다.

그가 정예지에게 말했다.

"나한테 매달려요. 떨어지지 않게 꽉."

정예지가 얼른 두 팔로 차우진을 꼭 껴안았다.

차우진이 절벽의 상태를 확인했다. 굴곡진 곳이 꽤 보였다. 그는 그녀를 왼팔로 안고 절벽에 발을 디뎠다.

발이 벽에 닿자 오른팔에 걸리는 부담이 좀 줄어들었다.

"이제 견딜 만하네요."

정예지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우, 우, 우리 죽어요?"

"살려주려고 이 고생을 하는 겁니다."

"그, 그쵸?"

위에서 윤성준 감독이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예지 씨! 살아있어요? 살아있으면 대답을 해봐요!"

"역시 감독님은 나보다 예지 씨가 중요하구나."

위에 모인 사람들은 무너진 절벽 끝까지는 다가오지 못했다.

"가봐야 하는 거 아냐?"

"그러다 절벽이 더 무너지면? 가까이 간 사람들도 죽잖아."

"어떻게 하지?"

절벽 너머에서 정예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살아있어요! 빨리 끌어올려 주세요!"

윤성준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아. 다행이다."

정예지가 한마디 더 했다.

"우진 씨도 살아있어요!"

"어? 맞다! 우진 씨는 괜찮아?"

정예지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 안 괜찮아요! 빨리 좀 구해달라니까!"

윤성준 감독이 스태프들에게 외쳤다.

"와서 이거 좀 끌어당겨! 뭐라도 돕…."

땅에서 진동이 다시 느껴졌다. 밧줄을 잡으러 가려던 사람들이 기겁했다. 밧줄을 놓고 뒤로 주춤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무너진다!"

정예지도 진동을 느꼈다.

"꺄악!"

위에서 떨어지는 흙이 두 사람의 머리에 닿았다.

"무, 무너지나 봐요!"

"날 믿어요. 더는 안 무너지니까."

"그, 그걸 어떻게 확신하세요?"

지금 제작 중인 이 영화를 이미 봤기 때문에 안다.

지금 그가 밧줄을 감아놓은 카메라는 원래는 절벽 상황을 찍고 있었어야 한다. 그 영상은 차우진이 이 영화를 본 태블릿 PC에 들어 있었다.

영상 속에는 정예지가 추락하는 순간은 빠져 있었다. 그건 슬퍼하는 감독과 배우의 인터뷰로 대신했다.

대신에 정예지가 추락한 후의 절벽 상황은 영상에 확실히 나왔다.

'여진이 오긴 하지만 절벽은 더는 무너지지 않아.'

차우진이 농담처럼 말했다.

"안 무너지면 같이 밥이나 먹읍시다."

"네? 지, 지금 이 상황에서 데이트 요청을…."

"물론 오윤서 씨와 함께."

"아 씨."

74. 구출

정예지는 차우진과 밧줄 딱 두 개에 집중하느라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말이 뇌를 거치지 않고 입에서 바로 튀어왔다.

차우진이 물었다.

"아 씨?"

그녀가 얼른 말을 바꾸었다.

"그, 그러니까, 나는 너를 본다. 뭐 그런 거?"

"그건 아이 씨 유이고."

"비슷하지 않아요?"

"안 비슷합니다."

정예진은 지금 절벽에 매달려 두 팔로 차우진을 안고 있다. 차우진도 그녀의 허리를 왼팔로 안고 있다.

그녀의 팔이 풀려도 아래로 떨어지진 않는다. 그렇지만 너무 무서워서 차우진을 진짜 꼭 안았다.

"아니, 이 상황에서 또 윤서 언니 이야기만 하니까…."

차우진이 이 촬영에 참여한 목적은 오윤서를 통해 정수찬을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오윤서와 같이 식사하자고 했다.

정예지가 말했다.

"윤서 언니 남자친구 있는데, 꼭 그래야만 해요?"

"남자친구도 같이 만나면 되겠네요."

그러면 더 좋다.

"네?"

"난 이성으로 오윤서 씨를 본 적은 없습니다."

"그, 그래요? 그럼 진짜 팬이라서…."

"그렇죠."

위에서 웅성거림이 들렸다. 윤성준 감독의 얼굴이 보였다.

윤성준은 절벽 끝에 엎드려서 머리만 내밀고 아래를 보고 있었다.

"휴우. 진짜 살아있구나. 예지 씨! 우리가 줄 당겨줄 테니까 놀라지 말아요!"

차우진이 대답했다.

"안 놀라니까 빨리 당기시죠."

윤성준이 엎드린 채로 손을 흔들었다. 뒤에 있던 사람들이 줄을 잡아당겼다.

차우진이 정예지를 왼팔로 안고 절벽을 밟고 올라갔다. 줄을 당기는 힘에 그의 다리 힘이 더해졌다. 몸이 위로 쑥쑥 올라갔다.

윤성준은 그런 차우진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와…. 마치 절벽을 저벅저벅 걸어서 올라오는 느낌이다. 그것도 사람을 한 명 매달고.'

혼자의 힘이 아니라 밧줄로 당겨주는 힘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라는 건 안다.

'밧줄이 아니라 와이어를 달아도 저렇게 걸을 수 있다는 거잖아. 그러면 액션 촬영에 쓸 수 있겠는데?'

보통 사람이 그런 움직임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우진 씨한테 스턴트도 해달라고 하면 해줄까?'

차우진이 절벽 위에 도착했다.

정예지가 지상을 보며 말했다.

"사, 살았나?"

차우진이 절벽 끝에서 안쪽으로 몇 걸음 걸어간 후에 그녀의 허리에 감은 왼팔을 풀며 말했다.

"이제 됐습니다."

그녀의 다리는 이미 풀린 상태였다. 그녀가 차우진을 꼭 껴안은 채로 말했다.

"모, 못 걷겠어요."

"여긴 좀 위험하니까 어쩔 수 없나."

차우진은 오른손을 흔들어 감겨 있던 밧줄을 풀었다. 그런 후에 오른팔을 그녀의 무릎 아래에 넣었다.

차우진이 정예지의 몸을 번쩍 들었다. 공주님 안기 자세였다.

"꺅?"

그가 그녀를 안고 절벽을 벗어나 촬영장 안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의 앞에 있던 스태프와 배우들이 양옆으로 쫙 갈라져 길을 열었다.

차우진이 정예지를 의자에 내려놓았다.

"괜찮아요?"

"아뇨. 저 살아있어요? 여기 혹시 천국이에요?"

"천국에 가려면 선행이 좀 부족하지 않나?"

농담을 듣고 나니 정신이 들었다. 그녀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하악. 하악. 살았어요. 살았어."

매니저가 달려왔다.

"예지야!"

"오빠는 어디 갔다가…."

매니저가 손을 보여주었다. 빨개져 있었다.

"너 살리려고 밧줄 당겼지!"

윤성준 감독이 호들갑을 떨며 다가왔다.

"살아서 진짜 다행이다. 난 정말 예지 씨한테 무슨 일 나는 줄 알고…. 아차. 우진 씨도."

차우진이 말했다.

"저는 뭐, 덤인 느낌이네요."

"하, 하하. 그럴 리가 있나. 우진 씨 아니었으면 우린 진짜 어휴."

***

탐지기 개발팀도 지진 때문에 난리가 났다.

곽수혁 팀장이 흥분해서 물었다.

"어떻게 됐어?"

박효정이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데이터가 쏟아져 들어와요!"

"깊은 곳은? 깊은 곳 데이터도 들어와?"

"들어와요! 지각 깊은 곳의 데이터도 제대로 된 걸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았어!"

지금 들어오는 데이터는 평소에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이다. 이 탐지 시스템에 사용하는 충격파 발생기의 출력으로는 이런 데이터는 얻기 어렵다.

곽수혁 팀장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오늘 우리가 여기서 테스트한 거, 로또 맞은 거야."

박효정이 맞장구쳤다.

"역시 차 이사님이세요. 이런 날을 고르셨잖아요."

"응? 에이. 알고 고르신 건 아니지. 지진이 오늘 일어날 걸 어떻게 미리 알겠어? 이 날짜는 벌써 2주 전부터 잡힌 건데."

"운도 실력이라잖아요."

"아. 그런 뜻이었어? 그건 맞네."

곽수혁이 촬영장 쪽을 보았다. 차우진이 그쪽에 간 건 알고 있다.

"어? 저기 무슨 사고 난 것 같은데?"

탐지기 개발팀은 지진이 나자마자 데이터에 집중하느라 촬영 현장을 본 사람이 없다.

박효정이 말했다.

"저기 절벽 말이에요. 조금 무너진 거 아니에요?"

"그런가? 난 잘 모르겠는데?"

"잘 보니까 아까랑 살짝 달라요."

"방금 지진으로 조금 무너졌나 보다."

"누구 사고라도 당한 거 아닐까요? 제가 가서 보고 올까요?"

"남자 주인공 구경하게?"

"차 이사님이 이야기하셨어요?"

"어? 농담한 건데 진짜였어?"

"앗! 아니에요!"

"어쨌든 사고가 났으면 저긴 난리가 났겠지. 큰일은 아닌가 봐. 차 이사님께 전화 걸어보지 뭐."

***

차우진이 전화를 받았다.

곽수혁이 안부를 물었다.

- 차 이사님. 거기가 소란스러워 보이는데 괜찮으십니까?

"절벽이 조금 무너지긴 했는데 다친 사람은 없습니다."

- 다행입니다. 아. 차 이사님. 여기 데이터가 대박입니다! 테스트 도중에 지진이 딱 발생해서 진짜 귀한 데이터가 쌓이고 있습니다!

"여기 상황이 정리되면 그리로 가서 보겠습니다."

차우진이 전화를 끊었다.

'데이터 수집 성공. 예상대로야.'

정예지가 옆에서 그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커피를 내밀었다.

"우진 오빠도 드세요."

"응? 오빠?"

그녀는 자기 얼굴이 조금 뜨겁다고 느꼈다. 죽을뻔했다가 구출된 흥분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그녀 자신도 알지 못했다.

"우진 씨라고 하면 너무 거리 두는 거 같아서…."

"어…. 뭐."

윤성준 감독이 다가왔다.

"우진 씨. 진짜 고마워. 우진 씨 아니었으면 예지 씨도 큰일 나고, 우리 영화도 접어야 했을 거야."

"그래도 감독님은 이 영화를 계속 찍었을 텐데요."

"응? 에이. 아니야. 내가 어떻게 그래."

정예지가 사고로 사망해도 이 영화는 완성되어서 영화관에 걸린다. 차우진은 멸망 후에 찾아낸 태블릿 PC에서 완성된 영화를 보았다.

그렇다고 윤성준이 너무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 영화는 정예지가 찍힌 모든 장면을 살려서 만든 추모 유작이었으니까.'

윤성준 감독이 말했다.

"내가 이 신세 어떻게 갚지? 내 다음번 영화에 나올래? 아니면 내가 아는 감독 영화나 드라마에 꽂아줄까?"

"그렇게 인맥으로 출연하면 이 바닥에서 살아남겠습니까? 일단 연기가 안 되는데요."

"연기가 안 돼도 액션이 되니까 대사 없고 멋있는 자리로…."

"아니요. 배우는 제가 갈 길이 아닙니다."

"그래도 내가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그러는데…."

차우진이 밧줄을 걸었던 카메라를 가리켰다.

"저기에 제 모습이 나왔습니까? 얼굴이 나왔으면 지워주시죠. 관심 끄는 게 싫어서요."

"어? 아. 저거 같이 확인해보자."

차우진이 감독과 함께 모니터를 확인했다. 정예지도 있었다.

정예지가 무너지는 절벽 앞에서 구해달라며 손을 뻗는 모습은 제대로 찍혔다. 그녀의 바로 앞 땅이 갈라지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다 카메라가 옆으로 휙 돌아갔다. 그때 차우진이 밧줄을 카메라에 감았기 때문이다.

그 후에는 비명이나 사람들이 다급히 외치는 소리만 계속 들렸다.

'이건 생각대로 됐는데.'

차우진이 물었다.

"개인 영상 촬영한 분은?"

"사람이 죽느냐 마느냐 하는 그 상황에서 찍긴 뭘 찍어. 여기는 그 정도로 나쁜 놈은 없어. 다들 두 사람을 구하기 위해 뭐라고 해보려고 뛰어다녔지."

영상은 남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일이 기사화되지 않을 리가 없다.

"감독님. 저한테 고맙다고 하셨죠? 그러면 예지 씨는 스턴트맨이 구출한 거로 처리해주시죠."

차우진이 이 촬영팀에 처음 참여했을 때 한 일이 카메라 앞에서 오토바이를 모는 것이었다.

그때 그가 보여준 오토바이 기동은 스턴트맨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러니 거짓말은 아니다.

스태프들은 차우진을 스턴트맨도 하고, 엑스트라도 하고, 촬영 장비 수리도 하는 사람으로 안다. 그러니 둘러대기도 좋다.

"어? 정말 그걸로 되겠어? 유명해질 수 있는데…."

"그런 거 관심 없다니까요. 영화배우가 될 것도 아닌데 얼굴 팔리면 피곤하기만 합니다."

"그래도 겨우 그 정도로…."

"그리고 하나 더."

윤성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 뭐든 말만 해."

"예지 씨의 방금 그 신. 바꾸시죠?"

"어?"

"설마 예지 씨를 다시 절벽에 세우고 같은 장면을 촬영하실 건 아니죠?"

윤성준이 절벽을 보았다.

이 절벽 장면은 꽤 중요해서 일부러 이곳까지 와서 촬영하던 중이다. 감독은 원래는 절벽을 꼭 넣을 생각이었다.

그가 다시 정예지를 보았다. 차우진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아…. 트라우마가 생길 수도 있…."

"그렇죠."

윤성준이 큰소리쳤다.

"다른 곳에서 다시 찍으면 돼. 당연히 그래야지."

"절벽이 아닌 곳에서요."

"당연하지! 넓은 공터로 할게. 나도 그러려고 했어."

"그럼 예지 씨는 오늘 촬영 분량이 없어졌으니까, 병원에 가도 되겠네요."

윤성준 감독은 당황했다.

"어? 예지 씨 다쳤어?"

정예지가 말했다.

"아뇨. 저 괜찮아요."

차우진이 말했다.

"지금은 멀쩡해 보여도, 시간이 지나면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플 겁니다. 지금은 흥분해서 못 느끼는 겁니다."

"그, 그래요?"

"그게 아니더라도 쉬는 게 좋아요. 몸에 반응이 오기 전에 병원부터 가요."

"그럼 우진 오빠도 우리 차로 같이 가는 거죠?"

차우진이 옆쪽을 가리켰다. 좀 떨어진 곳에서 딥어스테크 탐지기 개발팀이 일하고 있었다.

"난 저기 가서 마저 일해야 해서."

그녀가 불평했다.

"어머. 저기 대장은 누군데 이런 상황에서 오빠한테 일을 시켜요? 사람이 너무하네요."

차우진이 저기서 제일 높은 사람이다.

"으응?"

"왜요?"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이마에 뿔 달렸을 거예요."

"뿔은 안 달렸습니다."

"못생겼을 거야."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거 안 좋은 습관입니다."

***

정예지는 촬영을 중단하고 매니저와 함께 병원으로 떠났다. 당장은 멀쩡해 보여도 혹시 몸에 문제는 없는지 확인은 해야 했다.

윤성준 감독이 차우진에게 제안했다.

"치료비는 내가 다 댈 테니까 우진 씨도 병원에 가도 되는데."

"저쪽에 가서 일해야 해서요."

"아. 나도 일해야지."

윤성준이 스태프들을 다독여 나머지 촬영을 진행했다.

"예지 씨는 없어도 찍을 수 있는 건 찍어둡시다!"

조감독이 물었다.

"감독님. 이 부분은 빼신다고…."

"예지 씨만 넓은 공터에서 찍고 나서, 마치 절벽처럼 보이게 기교를 부릴 거야. 그리고 이미 세팅 다 해놓은 거 철수하면, 예산은 하늘에서 떨어지냐? 준비해. 오늘 찍을 거 많다."

"아, 예."

***

차우진은 탐지기 개발팀으로 돌아왔다.

"진행 상황은 어떻습니까?"

곽수혁이 활짝 웃었다.

"차 이사님이 오늘을 현장 테스트 날짜로 잡은 건 정말 신의 한 수였습니다. 기대도 안 했던 지각 심층 데이터까지 들어왔습니다. 그것도 아주 광범위하게요.

"좋군요."

"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더 고성능의 탐지기를 만들 겁니다."

"그러셔야지요."

멸망급 재난 중 하나인 마그마 폭발이 터지면 지금 이 지진이 재조명받는다.

멸망한 세계의 사람들은 이때 이미 단서가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이 당시에 지진만으로 마그마 폭발을 예측하는 건 당시 상황으로는 무리였다. 멸망한 세계의 기준으로 지금 시점은 마그마 탐지기도 없고 정수찬의 이론도 완성되지 않았다.

그래서 멸망한 세계에서는 이 지진을 이용하지 못했다. 멸망 초기의 전문가들은 그걸 그렇게 아쉬워했다.

차우진이 말했다.

"오늘 수집된 모든 데이터는 잘 보관해야 합니다. 절대로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럼 차 이사님한테도 보내드릴까요?"

"그게 좋겠군요."

"연구소로 돌아가면 싹 다 정리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곽수혁이 박효정과 연구원들에게 추가 작업을 지시한 후에 물었다.

"그런데 저 촬영장에는 무슨 일이 났습니까? 분위기가 좀 그런데요."

"못 보셨습니까?"

"지진이 났을 때는 다들 데이터에 집중해서요."

"전화로 말한 것처럼 그냥 절벽이 조금 무너졌습니다."

"다친 사람은…."

"뭐, 딱히."

"아. 다행이네요."

차우진이 촬영팀 쪽을 보며 말했다.

"그렇죠. 다행이죠."

그는 오늘 정예지를 살렸다.

그녀는 오늘 죽을 예정이었다. 지진이 일어날 때는 무너지는 절벽 위에 서 있었다.

꿈에서 본 그대로였다.

그런데 그가 개입하자 정예지의 미래가 바뀌었다. 그녀는 살아남았다.

그녀의 미래를 바꿀 수 있으면 다른 미래도 바꿀 수 있다.

"역시 멸망은 내가 막아야 하는구나."

많이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막을 방법이 있다는 게 어디냐."

75. 알바

정예지는 매니저와 함께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이동했다.

그 병원은 연예인의 프라이버시를 신경 써서 보호하는 곳이다. 그래서 평소에도 그곳을 이용했다.

그녀가 병원에 가는 도중에 오늘 지진에 관해 검색했다. 인명피해는 없다고 나왔다.

"피해자가 한 명 나올 뻔했지. 그게 나네. 와. 또 그 생각 하니까 심장이 두근거린다."

매니저가 운전하며 물었다.

"괜찮겠어? 그냥 가까운 병원 갈까?"

"아냐. 좀 놀라서 그렇지 안 아파. 가던 곳에 가."

그녀는 병원에 도착한 후에 기본적인 검진을 받았다.

일반적인 검진에서는 특별한 이상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오늘 하루는 병원에 입원하기로 했다.

그녀는 침대에 편하게 몸을 눕힌 후에야 오늘 죽을뻔했다는 게 실감 났다. 근육통이 본격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가 스마트폰에 대고 신음을 흘렸다.

"아야야…."

지금은 친구와 통화 중이다. 1인실이라 듣는 사람이 없어 스피커폰을 사용했다.

"허리도 쑤시고 어깨도 쑤시고 온몸이 다 쑤셔. 꼭 교통사고라도 당한 거 같아."

그녀의 친구가 물었다.

- 그 사고가 혹시 너의 하트에 그 남자가 꽂히는 사고였니?

"그런 거 아니야. 두근거리긴 했지만."

- 꽂혔네.

"아니라고. 절벽에 매달려서 대롱거렸더니 놀라서 두근거린 거야."

- 그래. 믿어는 줄게.

"나 정예지야. 남자가 나한테 꽂혀야지 내가 남자한테 꽂히는 게 말이 되니?"

- 하긴. 넌 옛날에도 단체 미팅 시장의 생태계 교란종으로 유명했지. 너 나타나면 그날 미팅은 망한 거였다고.

"근데 날 왜 데려갔냐?"

- 너 나온다고 해야 물이 좋아졌거든. 딜레마였지. 네 이름을 팔면 물이 좋아져. 근데 그 물이 다 너만 바라봐서 나한테 오는 게 없네?

"내 눈에 차는 사람은 없었어."

- 눈 높은 년. 어쨌든 연예계에는 너 같은 교란종이 많잖아. 배우끼리 꽂힐 수도 있지.

"응? 그 사람은 배우 아닌데?"

- 그럼?

"전기 기술자?"

- 이 결혼 반댈세.

"그런 거 아니라고!"

그녀가 통화를 끊은 후에 혼잣말을 했다.

"뭐, 오늘 좀 멋있긴 했지. 저번에 오토바이로 연기할 때도 좀 멋있긴 해고."

그녀가 스마트폰 메신저를 열었다.

"왜 다음에 윤서 언니랑 같이 밥 먹자고 했을까? 둘이서 먹어도 되는데…."

차우진은 절벽에 매달렸을 때 오윤서와 함께 식사하자고 했다. 오윤서의 남자친구도 같이 만나도 된다고 했다.

"그래. 윤서 언니만 오면 나만 손해지. 꼭 언니 남자친구도 데려오라고 해야겠다."

오윤서의 남자친구는 스톤파인더 사장이면서 지질학자인 정수찬이다. 정예지는 정수찬이 미국 영주권자라는 것만 알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른다.

"다음 주에 국내에 들어온다고 했으니까, 식사 약속은 그 후로 잡아야겠다."

같이 식사할 자리를 마련하려면 지금부터 이야기를 해둬야 한다. 그리고 왜 오윤서가 차우진을 만나야 하는지도 납득시켜야 한다.

그녀가 오윤서에게 톡을 보냈다.

- 언니. 저 오늘 죽다 살아났어요. 절벽에서 떨어졌다가 겨우 구출됐거든요.

곧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 절벽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녀가 살짝 상기된 목소리로 설명했다.

"아. 소식 못 들으셨구나. 그게 말이에요."

***

차우진이 영화 '운명의 풍차' 촬영에 참여한 건 오윤서와 접점을 만들어 정수찬과 접촉하기 위해서다.

"오윤서 씨와는 가끔 인사 정도는 하는 사이고."

오토바이 사고 장면 촬영 때 말 한두 마디 정도는 건네는 사이가 됐고, 한동안 촬영장의 자잘한 문제를 손보면서 좋은 인상을 주었다.

이제 정예지가 같이 식사할 자리를 마련하기로 했다. 그곳에 오윤서의 남자친구인 마이클 정, 정수찬이 나올 예정이다.

"정수찬 박사가 나오는 건 아직 확정은 아닌가? 정예지 씨의 수완에 달려 있겠네."

어쨌든 영화 촬영장은 이제 갈 필요가 없다.

얼굴을 더 보여주면 오윤서와 더 가까워질 수 있지만, 그 작업이 이전처럼 중요하지는 않았다.

"영화 쪽은 그만 나가자."

차우진이 곽수혁 팀장에게 물었다.

"우리 신형 탐지기의 스펙을 정리한 자료 있습니까?"

"필요하시면 개발 과정부터 단계별 설계 도면을 정리…."

"아니, 그렇게 본격적인 거 말고, 홍보용 요약 자료 정도면 됩니다."

"아. 업무보고용으로 정리한 게 있습니다만, 그걸 다시 요약할까요?"

"그게 좋겠네요. 일주일쯤은 시간이 있으니까 여유 될 때 부탁 좀 드리죠."

"에이. 부탁은요. 저도 박효정 씨한테 시킬 건데요. 하하하."

"그럼 박효정 씨는…."

"효정 씨가 일을 참 열심히 합니다."

***

이튿날 정예지는 콧노래를 부르며 촬영장에 나갔다.

윤성준 감독이 반갑게 맞았다.

"예지 씨. 이제 괜찮아?"

"그럼요. 하루 푹 쉬고 돌아왔더니 컨디션도 아주 좋아요."

"휴우. 다행이다."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차우진 씨는 어디 있어요? 저를 구해줬으니까 고맙다고 인사라도 하려고요."

"으응? 차우진 씨는 이제 안 나온다던데?"

정예지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왜요?"

"몰라. 어제 너무 무서운 일을 겪어서 부담스러운 거 아닐까?"

정예지는 그 말을 손톱만큼도 믿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래요? 그게 어디가 무서워한 사람의 모습이에요?"

"그래?"

"제가 같이 절벽에 매달려있었잖아요. 저 구출하는 모습이 얼마나 자연스러웠는데요. 저는 전문 산악 구조대인 줄 알았어요. 심지어 절벽에서 농담도 하던데요?"

"그런데 왜 이젠 안 나온다고 한 거지?"

"우리 현장에 실망하셨나? 안전관리가 안 돼서?"

"아니, 어제 사고는 지진 때문인데…."

***

정예지가 장소를 옮겨 차우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진 오빠. 이제 우리 촬영장에 안 나온다면서요?"

- 어차피 알바로 한 일이잖습니까?

"그 알바 계속해도 되잖아요."

- 조만간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지방 촬영에 계속 따라다니는 건 부담이 되어서요.

"웅…."

정예지가 잠시 궁리하다가 말했다.

"그러면 다른 알바는 어때요? 방송국에서 자체 제작하는 드라마가 있는데, 실내 세트장 알바가 있거든요. 전기 기술자가 필요하대요."

- 음…. 그거라면 생각해보죠.

차우진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매니저가 정예지의 옆에서 물었다.

"하겠대?"

"생각해보겠대."

"그런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뭐래. 생명의 은인한테 겨우 단기 알바 자리 소개하는 건데. 이 정도는 해야지."

"그 드라마에 너도 나오잖아."

정예지는 이 영화의 주연이 아니다. 그녀는 촬영하는 날보다 안 하는 날이 훨씬 더 많았다.

그래서 드라마에도 출연한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두 개에 출연한다. 둘 다 조연이라 스케줄 조정은 가능했다.

그중 하나는 원래는 사전제작 드라마였는데, 작가에게 문제가 생겨 촬영이 지연되는 바람에 사전제작이 아니게 됐다. 그래서 스케줄이 좀 꼬이긴 했다.

"내가 그 드라마에 나오니까 현장에 전기 기술자가 필요하다는 것도 아는 거지. 그래서 부탁도 할 수 있는 거고. 이건 내가 알아봐 줄 수 있는 최고의 알바 자리야."

매니저가 의심했다.

"정말 그게 다지? 만약 다른 게 있는데 대표님이 아시면 내가 큰일 나."

"속고만 살았나. 그게 다라니까?"

"예지야. 너 왜 목소리가 높아지는데? 사람 불안하게."

***

차우진이 새 알바에 대해 생각했다.

"방송국에서 얻어야 할 정보가 좀 있긴 한데…."

멸망을 막으려면 방송국을 이용해야 하는 일이 반드시 생긴다.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돌아가는 방식을 경험하는 것도 좋겠지. 미리 분위기나 보자."

알아봐야 할 건 또 있다.

"방송국에도 빌런은 있으니까."

***

KMTV는 드라마 일부는 자체 제작하고 일부는 외주를 준다.

정예지가 알아봐 준 자리는 방송국 자체 제작 드라마의 세트장 관리 업무다.

"실내 작업이라더니, 방송국 밖에서 일할 날이 더 많겠다."

방송국 내부에도 드라마용 세트장은 있다. 그런데 그곳에서만 촬영할 수는 없다.

그래서 서울과 일산 사이 땅값 저렴한 곳에 KMTV의 촬영 시설이 추가로 있었다.

그걸로도 부족해서, 야외 촬영이 있을 때는 아예 다른 장소로 가야 한다.

그래도 자체 제작 드라마라 방송국에 갈 일은 꽤 있었다. 알바 면접도 방송국에서 이루어졌다.

그 드라마 세트장 담당자가 물었다.

"전기 공사 경력이 많으시네요?"

"다양하게 했습니다."

"어이구. 하이 스카이 사태 때 복구 작업에 참여했어요? 그때는 고수들만 받았다고 들었는데, 실력 좋으신가 보네."

"그 일이 수당이 좋았거든요."

"그런데 그런 분이 왜 우리 방송국에서 알바를…."

차우진이 둘러댔다.

"요즘은 기간 짧은 거로 쉬어가면서 일합니다."

"그거 부럽네요. 나도 쉬고 싶다."

방송국에 취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에게 제안된 건 현재 제작 중인 드라마의 세트장 전기 공사다. 드라마 촬영이 끝나면 일자리도 사라지는 단기 작업이다.

게다가 매일 출근하는 것도 아니고, 필요한 작업이 있는 날만 나가는 자리다.

차우진이 첫날은 방송국 자체 세트장으로 갔다. 그곳에서 전기 배선과 조명 공사를 걷어내고 대본에 맞게 다시 깔았다.

같이 일하던 목수가 말했다.

"차 기사는 방송국에 온 첫날부터 일을 많이 하네요?"

"출근한 날만 돈 받는 방식으로 계약했는데, 일해야죠."

"난 목공이라 자주 나오는데 전기는…."

"저는 가끔 나옵니다."

"하긴. 가끔이라도 이런 일자리가 있는 게 어딥니까? 그리고 방송국에서 일하니까 배우들도 자주 봅니다."

"아. 전화가 와서."

차우진이 조금 옆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사덕리소스 서준석 사장이 말했다.

- 차 이사님. 오늘 임원회의는 오실 거지요?

"아니요."

- 가끔이라도 좀 오시죠? 직원들이 차 이사님 얼굴도 모릅니다.

"오늘 다른 일을 해야 해서."

- 딥어스테크에 중요한 임원회의가 있습니까?

"거기도 잘 안 갑니다."

- 다른 일이라면서요?

"전기 공사를 좀 해야 해서요."

- 예?

"요즘 알바를 하느라."

- 아니, 알바라니, 그게 무슨….

"제가 서 사장님 믿는 거 아시죠? 제가 없어도 잘하시겠죠."

- 너무 믿는 거 아닙니까?

"아니, 저 사람들이 지금 전선을 밟고…. 이봐요! 그거 밟으면 큰일 나! 서 사장님. 제가 바빠서 이만."

***

서준석은 당황했다.

"아니, 이게 무슨…."

유도진은 회사가 망하기 직전일 때도 현장팀장으로 일했다. 그러다 서준석과 함께 금광을 발견했다.

그 공으로 유도진은 이사로 승진했다. 그는 지금은 금광 현장 책임자와 비서실장을 겸임하고 있었다.

유도진이 물었다.

"차 이사가 오늘은 온답니까?"

"전기 공사 알바가 바빠서 못 온대."

"네? 알바요?"

"그렇다네?"

"우리 회사와 딥어스테크의 임원인 사람이 왜 공사 알바를…."

"그러게 말이다."

"그러다 회사에서 차 이사의 통수라도 치면 어쩌려고…."

서준석은 움찔했다.

"왜 그런 무서운 말을 하고 그러냐?"

"예?"

서준석은 차우진이 칼잡이 몇쯤은 혼자 때려잡는 고수라는 걸 안다. 차우진 덕분에 살아남을 때 그 전투력을 직접 보았다.

그는 그때 차우진이 적을 얼마나 확실히 박살 내는지도 똑똑히 보았다.

게다가 성구파와 천수파도 차우진에게 걸려서 전멸했다. 서준석은 그것도 차우진이 했다고 추측했다.

서준석이 진지하게 말했다.

"차 이사 통수 칠 생각 하지 마. 그러다 죽어."

"그게 무슨…."

서준석이 말을 돌렸다.

"난 쉽게 배신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지."

"아. 사장님이 훌륭하신 분인 거 당연히 알지요. 저는 딥어스테크 쪽을 걱정한 겁니다."

서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거긴 좀 걱정되긴 하네. 홍 사장은 차 이사가 어떤 사람인지 모를 테니까."

***

이틀 뒤에 방송국에서 다시 와달라고 연락이 왔다. 촬영 세트가 대규모로 수정되어 사람이 더 필요해졌다.

차우진이 전기 공사를 맡아 작업했다. 정예지가 세트장에 왔다가 차우진을 발견했다.

"우진 오빠. 어제는 없던데요."

"띄엄띄엄 일하는 일자리를 알아봐 준 사람이 예지 씨입니다만?"

"어머. 이런 거 하나 더 알아봐 줘요?"

그녀는 다른 드라마에도 참여하고 있다. 그건 아직 방송은 시작하지 않은 드라마였다.

그녀가 말했다.

"딱 좋은 드라마가 있는데요."

"사실 이 정도가 딱 좋습니다."

"역시 웰빙을 추구하시나 보다."

"웰빙?"

그녀가 손가락을 뺨에 대고 생각했다.

"웅…. 그러니까…. 예를 들면 숲 속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의 상쾌함을 즐긴다든지…."

"그런 거라면 너무 많이 해봐서."

꿈속 미래에서 아주 오래 그렇게 살았다.

"아. 캠핑 좋아하시나 보다!"

"밖에서 자는 거 싫어합니다."

"네?"

맨땅보다는 콘크리트 폐허가 나았다. 폐허 중에서도 상태가 좋은 곳은 벽이 서 있고 바닥도 남아있었다.

차우진은 그런 곳에 임시 캠프를 만들곤 했다.

"사실 방구석을 좋아합니다."

요즘은 안전한 벽으로 둘러싸인 거실에서 소파에 누워 TV를 보며 간식을 먹는 걸 즐긴다.

그건 멸망한 세계에서는 누릴 수 없던 편안함이다.

정예지는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76. 용구

정예지가 물었다.

"방구석이 좋다니요?"

차우진이 정정했다.

"캠핑보다는 거실 소파를 더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아. 그래서 배가…. 앗! 아니에요."

"보태준 것도 없으면서?"

"빼는 건 도와줄 수 있어요."

"거절합니다."

"언제든지 말만 해요."

차우진이 물었다.

"예지 씨는 오늘 촬영이 있나 보네요?"

"있었죠. 조금 전에 끝났어요."

차우진이 시계를 보았다. 아직 오후였다.

"밥 먹으러 갈 시간은 아니군요."

정예지가 방실방실 웃으며 물었다.

"저랑 밥 먹고 싶으세요?"

"그냥 한 말인데."

"쳇."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이번에는 정예지가 물었다.

"일 많이 남았어요?"

"오늘 일은 끝났습니다. 내가 맡은 일은 필요한 작업만 마치면 가도 되는 업무라서."

그녀가 손뼉을 치며 부탁했다.

"잘 됐다. 그럼 나 좀 도와줄래요?"

"공짜는 아니겠지요?"

"웅…. 나랑 같이 즐기는 오붓한 저녁 식사?"

"오붓한 거 말고 호화로운 거."

"꽃등심?"

"콜."

정예지가 활짝 웃었다.

"가요. 차 매니저."

"내가 매니저입니까?"

"우리 매니저가 급한 일이 있어서 어디 갔어요. 남들은 다 매니저랑 오는데 나만 혼자 가면 그렇잖아요. 그냥 매니저인 척하면서 같이 있기만 하면 돼요."

정예지는 예능 피디가 소집한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 참석자는 그 예능에 출연할 연예인들과 그들의 매니저였다.

차우진은 정예지의 옆에 앉아만 있었다. 다른 매니저들은 의견을 냈지만 그는 진짜 매니저가 아니라서 구경만 했다.

피디가 말했다.

"그런데 이번 회차 촬영 장소가…."

그가 정예지를 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강원도 영월입니다. 천문대 근처인데…."

정예지처럼 게스트로 참여하는 가수가 말했다.

"영월 좋죠."

다른 출연자가 끼어들었다.

"어? 정예지 씨가 며칠 전에 거기서 사고를 크게 당했다고 들었는데?"

영월이 좋다고 했던 가수가 당황한 얼굴로 정예지의 눈치를 살폈다.

"저기, 난 몰랐습니다."

피디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장소를 바꾸려고 했는데, 이미 장소 섭외부터 대본까지 다 끝난 상태라서…."

피디가 이런저런 말을 붙이긴 했지만, 결론은 촬영은 예정대로 진행된다는 말이었다.

그럼 남은 건 정예지의 선택뿐이다.

'내가 그냥 출연하거나, 하차하거나.'

정예지가 오윤서처럼 주연급 배우면 이런 대접을 안 받겠지만, 그녀는 조연급 배우다. 이 예능은 인기가 꽤 있어서 출연하면 인지도 향상에 도움이 된다.

정예지가 차우진을 돌아보았다.

차우진은 테이블 위의 과자를 먹을까 말까 고민하던 중이다.

'회의 끝나고 꽃등심을 더 맛있게 많이 먹으려면 저건 참아야 하는데….'

멸망한 세계에서는 그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 그때는 가져갈 수 없거나 보존할 수 없는 식량은 최대한 먹어둬야 한다.

그러다 시선을 느끼고 정예지를 돌아보았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차우진은 아무 생각 없이 눈을 깜빡였다.

정예지가 활짝 웃었다.

'자기만 믿고 하라는 뜻이구나.'

그녀가 피디를 돌아보며 말했다.

"전 괜찮아요. 트라우마나 뭐 그런 거 전혀 없어요."

피디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아. 그래요? 윤성준 감독님 말로는 정말 위험했다고 해서 걱정했습니다. 하하하."

"진짜 괜찮아요."

그녀가 차우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굉장히 멋지게 구출됐거든요."

회의실을 나온 후에 정예지가 말했다.

"우진 오빠. 우리 영월에 갈 때요. 일당 많이 챙겨달라고 회사에 확실히 이야기할게요."

차우진이 물었다.

"우리가 영월을 가다니요? 왜 우리일까?"

"네? 방금 회의에서 그날 나랑 같이 가기로 했잖아요."

"내가?"

"네. 오빠만 믿으라면서요."

"언제?"

"회의 중간에 내가 쳐다봤을 때 눈 깜빡였잖아요. 그게 OK 아니었어요?"

"그냥 깜빡인 건데, 어떻게 거기까지 생각을 했을까?"

"네? 진짜요?"

"네. 진짜요."

정예지가 손가락을 살짝 깨물었다.

"안 되는데…. 우진 오빠가 같이 가주는 줄 알고 큰소리친 건데…. 혼자 가면 무서운데…."

"매니저 있을 거 아닙니까?"

"매니저는 절벽이 무너질 때 저를 구해줄 수 없잖아요."

"절벽이 또 무너지진 않을 겁니다."

"와. 단호박."

차우진은 정예지와 함께 엘리베이터 앞으로 이동했다. 정예지는 시무룩한 얼굴로 같이 걸어갔다.

차우진이 그런 그녀의 얼굴을 슬쩍 보며 생각했다.

'영월이라…. 갈까?'

엘리베이터 앞에는 이미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정예지를 보더니 손을 슬쩍 들었다.

"어. 정예지 씨."

정예지가 얼른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최용구 부장님."

"이번에 영월에 간다며?"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나도 그날 그 근처에 가거든."

그녀의 영월행이 확정된 건 조금 전 회의에서지만, 스케줄이나 참석자 명단은 이미 나와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정예지가 엘리베이터 밖에서 인사했다.

"먼저 내려가세요. 저희는 올라가야 해서요."

"그래?"

최용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후에 정예지가 툴툴댔다.

"다음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가야겠다."

정예지도 아래로 내려가야 했지만, 최용구와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기 싫어서 일부러 올라간다고 말했다.

차우진이 물었다.

"저 사람 여기 직원입니까?"

"아. 예능국은 아니고 보도국 부장이에요."

"용구가 방송국 출신이라더니, 그게 KMTV였네."

"네? 혹시 아는 사이세요?"

"아니요. 들은 이야기입니다."

차우진이 박창수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

박창수가 말했다.

"용구는 멸망 전에는 방송국 기자였어."

차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조폭 두목이 아니라?"

"조폭하고도 커넥션이 있는 기자였지. 방송국 간부급 기자였는데, 조폭에게 빽을 알선해주고, 수사 정보도 넘겨주고, 기사도 내주는 놈이었다더라."

"지금 하는 짓을 보면, 그때도 그것보다 더한 짓까지 했겠는데?"

"당연히 그랬겠지."

"잠깐만. 왔다."

차우진이 망원경으로 무장집단을 확인했다.

"적 확인. 열 놈이네. 소총 셋, 엽총 둘, 공기총 둘, 칼잡이 둘."

"남은 하나는?"

"권총. 용구가 직접 왔어."

박창수가 망원경을 넘겨받아 권총을 가진 놈의 얼굴을 확인했다.

"역시 용구가 이쪽 마을을 기습하려고 왔구나."

생존 커뮤니티는 보통 자체 방어 능력이 있다. 멸망한 세계는 전투력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가혹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지금 그들이 말하는 마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전투병력이 항상 커뮤니티 내부에서 대기하는 건 아니다. 식량 확보나 거래 등을 이유로 전투병력이 커뮤니티를 떠나 있을 때도 있었다.

요즘이 바로 그런 때였다. 지금 그 마을에서 확실한 전투력을 가진 사람은 총으로 무장한 세 명밖에 없었다.

그 정도 전력으로는 열 명의 무장 약탈자에게 기습당하면 버티기 어렵다.

차우진이 말했다.

"돌아가서 마을 사람들과 같이 매복하자."

"오케이. 기습의 카운터는 역시 매복이지."

***

차우진이 방송국 복도에서 작게 말했다.

"용구. 오랜만이다."

정예지가 물었다.

"네? 뭐라고요?"

차우진이 도로 물었다.

"용구가 영월 촬영장 근처에 간다는 거 말인데, 무슨 일인지 아는 거 있습니까?"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이번 예능에 출연하는 연예인 소속 기획사에서 누가 최용구 부장님한테 접대라도 하나? 아니면 또 누구 꽂아주려고 그러나?"

"보도국 부장이 예능에 꽂아주기도 합니까?"

"최용구 부장은 우리 쪽에 관심이 많거든요. 연예계 관련 기사도 곧잘 쓰고 그래요. 아. 부장이지만 기자거든요."

"그렇군요."

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윤서 언니도 거기에 스케줄 있다고 했는데, 그걸로 기사 쓸 일이 있나?"

"오윤서 씨도 영월에 갑니까?"

"봐봐. 또 윤서 언니 스케줄에 관심 있다니까?"

"팬이라서 그런 겁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진짜요?"

"매번 진짜라고 말했는데 믿지를 않네."

그녀가 슬쩍 제안했다.

"윤서 언니가 궁금하면 우리 촬영장에 올래요?"

"그러죠."

"앗! 진짜요? 좀 전에는 안 된다면서요?"

"안 된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그냥 눈을 깜빡인 거라고 했지. 일당 많이 준다는데 당연히 가려고 했습니다."

"쳇. 역시 내 팬은 아니고 윤서 언니만 팬이야."

"그래서 그런 거 아닙니다."

"네. 알았으니까 우리 밥 먹으러 가요."

"그냥 밥 아니고 꽃등심."

"알아요. 꽃등심."

"화려하고 푸짐하게."

"알았다고요."

***

차우진이 정예지와 고기를 먹으며 최용구에 관해 물었다.

"용구가 비리를 많이 저지르지요?"

"아까부터 궁금했는데요. 그렇게 이름 막 불러도 돼요? 연예계에 영향력이 꽤 있는 보도국 부장이잖아요."

"용구 새끼라고 안 하는 게 어디입니까?"

정예지가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히힛. 아. 웃으면 안 되는데."

그녀가 얼른 표정을 고쳤다.

"최용구 부장은 연예계에 영향력이 커요. 기획사들이 알아서 길 정도로요."

"연예부 기자입니까?"

"그건 아닌데요. 최용구 부장한테 찍힌 기획사의 비리가 뉴스로 나간 적이 있거든요."

"마음에 안 드는 곳은 손해를 보게 만드는 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군요. 기획사들이 반발 안 합니까?"

"일단 대형 기획사는 안 건드리고요. 중견 기획사는 잘 보이면 연예인 미담 기사를 내주거든요. 그러니까 다들 뭐든 찔러주죠."

"이번 영월 출장처럼?"

"저도 잘 모르지만, 아마 접대하러 오는 곳이 있을 거예요."

"그러면 용구와 조폭과의 관계는 혹시 압니까?"

정예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 그런 소문은 못 들었는데요? 이 바닥에는 양아치가 많으니까 그런 놈들하고 엮였나?"

식사를 마친 후에 정예지가 제안했다.

"영월에 갈 때는 우리 차로 가요."

"내 차로 갈 겁니다."

"왜요? 거기 꽤 먼데."

현장에서 최용구를 조사해야 할 수 있다. 그러려면 기동력이 필요하다.

"거기서 볼일이 또 있어서."

"쳇. 알았어요."

***

차우진이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차유리가 먼저 와서 소파에 누워 있었다.

그녀가 코를 킁킁댔다.

"응? 이것은 소고기 냄새?"

"그냥 소고기 아니고 한우 꽃등심."

"네가 샀냐?"

"아니. 얻어먹었지."

"누나는 라면으로 때웠는데 너는 꽃등심을 얻어먹어? 누구한테? 응? 잠깐만. 이것은 화장품 냄새?"

"개코냐?"

"형사의 감이라고 해라. 저번에 가죽 재킷 사준 걔냐?"

"어."

"그 옷에 꽃등심까지…. 백퍼 네 장기를 노리는 거라고 본다."

"그런 거 아니라고."

차우진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오늘 수집한 정보를 정리했다.

"용구는 멸망한 세계에서는 빌런이 되는데."

차우진은 그 멸망을 막기 위해 뛰고 있다.

"창수 형은 그놈이 멸망 전에도 조폭과 작당했다고 했단 말이야."

차우진이 실패하면 10년 후에 멸망이 시작된다. 그러면 최용구는 약탈자 그룹의 두목이 된다.

그런데 그건 10년 후의 일이다.

"지금 시점에서 용구가 조폭과 커넥션이 있는지가 파악이 안 되네."

그래서 고민했다. 현대 문명이 무너지면 최용구는 강력한 빌런이 된다.

하지만 지금은 성격 나쁘고 뇌물 잘 받는 부장급 기자 정도일 수도 있다.

"지금은 어느 정도인지 확인은 하자."

***

며칠 후에 차우진이 강원도 영월로 향했다.

차우진이 촬영장 근처에 도착해서 주변 상황부터 확인했다.

정예지는 촬영장 한복판에서 선글라스를 쓰고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차우진이 말했다.

"여긴 분위기가 괜찮은데."

촬영장 주변에서 연예인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조금 보였다. 스태프 몇 명이 관광객의 접근을 막았다.

이곳은 경치가 좋고 오늘은 날이 좋아서 관광객이 많았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예능 촬영을 구경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그럼 용구는 어디에 있나."

차우진이 구경하는 사람 중에 최용구가 있는지 확인했다.

거기서 아는 얼굴을 발견했다.

"응?"

딥어스테크 개발 2팀장 곽수혁이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정예지의 팬이 아니라더니."

곽수혁은 혼자가 아니었다. 바로 옆에 곽민지가 있었다. 곽민지도 촬영 현장을 반짝이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저 곽민지와 그 민지가 같은 사람이라니. 느낌이 너무 많이 다르잖아."

멸망 초기의 연예인 민지는 저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지금 곽민지는 한없이 가벼운데 연예인 민지는 위태위태한 느낌이 있었다.

"뭐, 쟤는 이번에는 연예인을 안 할 수도 있지. 공부만 잘하면."

이번에는 곽수혁이 사망하지 않았다. 그러니 곽민지의 미래도 바뀔 수 있다.

곽민지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차우진과 눈이 마주쳤다.

"앗!"

곽민지가 신나서 뛰어왔다.

"아저씨!"

"네가 왜 여기 있냐?"

"가족 여행이요. 저쪽에서 캠핑하고 있어요."

"학교는?"

"쨌어요."

"뻥이네?"

"앗! 어떻게 알았지?"

"넌 거짓말하면 얼굴에 표가 난다."

"우와. 나 되게 순수한 소녀였구나."

"자꾸 뻥 치지 마라."

"히히. 개교기념일이요."

77. 도인선 기자

곽수혁이 뒤늦게 차우진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차 이사님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아는 사람이 있어서 들렀습니다. 곽 팀장님은요?"

"우리 민지가 학교에 안 가는 날이라서 저도 휴가 내고 캠핑 왔습니다."

탐지기의 테스트가 끝난 후에 개발 2팀은 특별 휴가를 돌아가면서 쓰는 중이다.

차우진이 물었다.

"이곳을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까?"

"저번에 탐지기 테스트하러 왔을 때, 이 동네 경치가 참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렇죠. 여기가 경치가 좋긴 하죠."

"아. 식사 안 하셨으면 같이 가시죠."

옆에서 곽민지가 말했다.

"아저씨. 우리 오늘 소고기 먹어요."

"그거 내가 먹으면 너 먹을 거 없을 텐데? 나 많이 먹는다?"

"아저씨가 이사님이라면서요. 소고기는 아저씨가 사달라는 말인데요?"

"응?"

"아빠가 고기 까먹고 왔거든요. 우린 밥이랑 김치만 먹게 생겼어요."

곽수혁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 하하. 평소에 안 하던 걸 갑자기 하니까…."

차우진이 곽수혁을 보며 말했다.

"가족분들이 오붓하게 드시는데 제가 끼면 민폐죠."

"민폐라니요. 차 이사님이야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제 와이프도 꼭 뵙고 싶어 합니다."

차우진이 현장을 보았다. 최용구는 보이지 않았다. 오윤서 쪽은 상황이 괜찮았다.

곽수혁은 마그마 탐지기 개발 책임자다. 그의 주변에 다른 문제는 안 생기는지 확인할 필요는 있다.

차우진이 말했다.

"고기부터 사러 가야겠네요."

곽민지가 옆에서 정정해주었다.

"소고기요."

"이런 곳에서는 돼지고기가 더 맛있어."

***

KMTV의 부장급 기자 최용구가 강원도 영월에 도착했다.

"크으. 공기 좋구만. 서울은 다 좋은데 이거 하나가 마음에 안 들어. 공기."

부동산 개발업자 조성식이 말했다.

"그러니까 이 경치 좋고 공기 좋은 곳에 리조트를 지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대박이 날 겁니다."

"조 사장님. 환경을 지켜야지요. 환경."

"에이. 왜 이러실까? 이 사업이 성공하면 최 기자님께는 지분 1퍼센트 드릴 건데."

"그거 조 사장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투자자들과 이야기 다 끝냈습니다. 누가 차명으로 받을지만 지정해주시면 됩니다."

최용구가 실실 웃었다.

"흐흐. 좋군요. 그런데 그거 받아도 나 혼자 먹는 거 아닙니다. 나도 여기저기 나눠 먹어야 해요. 알지요?"

"당연히 압니다. 그래서 리조트 다 지으면 최 기자님께는 따로 선물이 있습니다."

최용구가 입맛을 다셨다.

"이거 기대되는데?"

"성수기에도 방 하나는 무조건 내드릴 겁니다. 평생 무료로."

"겨우 방 하나?"

"거기서 뭐든 편하게 하실 수 있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을 겁니다. 숙박 기록이 안 남는다는 거지요."

최용구의 웃음이 커졌다.

"흐흐흐. 역시 조 사장님은 말이 통한다니까."

"그러니까 최 기자님도 지원사격 확실히 부탁드립니다."

"이쪽에서 준비 끝나면 내가 뉴스 빵빵하게 때려드릴게. 여기에 허가받으려면 언론 지원이 있어야지."

조성식이 제안했다.

"그럼 좋은 곳으로 가셔서 술이라도 하시겠습니까? 나인세븐만큼은 아니라도 괜찮은 애들로 준비했습니다."

"아니, 지금은 됐습니다. 나중에 합시다."

"예?"

최용구가 조금 떨어진 곳을 보았다. 촬영이 한창이었다.

그 촬영장에서 좀 떨어진 주차장에 차가 한 대 도착했다. 최용구가 그 차를 보며 서늘하게 웃었다.

"오늘은 다른 볼일도 있어서 왔으니까."

***

인터넷 언론사 소리언덕의 기자 도인선이 차에서 내렸다.

'소리언덕'은 인터넷 언론사다. 회사가 작아 종이 신문은 꿈도 못 꾼다. 대신에 가끔 단행본은 낸다.

소리언덕의 수익은 주로 인터넷으로 공급하는 기사에서 나온다. 그쪽으로는 수요도 있고 독자도 꽤 있었다.

회사가 작다 보니 얼마 안 되는 기자들을 전문분야별로 나눌 수가 없었다. 특히 돈이 되는 연예 기사는 모든 기자가 써야 했다.

도인선은 오늘 오윤서와 공식 인터뷰 스케줄을 잡았다.

그녀가 차에서 내려 촬영장을 찾았다. 촬영이 진행 중인 곳은 두 군데였다.

"어느 쪽이지?"

일단 한쪽에 먼저 가봤다. 정예지가 보였다.

"와아. 정예지다."

도인선은 정예지가 최근에 이 근처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들었다.

"멘탈이 진짜 대단한데? 죽을뻔한 곳인데 어떻게 다시 왔대?"

차우진이 그녀의 옆으로 쓱 다가왔다.

"속이 단단한 사람이니까요."

"앗! 누구세요?"

차우진이 비닐봉지를 들어 보였다.

"캠핑 온 관광객입니다."

"아. 그러시구나.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들이대는 거 잘하시나 보다."

"반가워서 그런 건데."

"네?"

"팬이라서요. 정예지 씨의."

"아아. 저도 팬이에요."

도인선이 물었다.

"그런데 혹시 오윤서 씨가 어느 쪽에서 촬영하는지 아세요? 촬영 세트가 두 개라서 잘 모르겠네요."

"여기는 아니고 저쪽에 있습니다."

"고마워요. 덕분에 찾는 수고를 줄였어요."

도인선이 가볍게 인사한 후에 오윤서가 있는 촬영장으로 걸어갔다.

차우진이 그런 그녀를 보며 혼잣말을 했다.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네. 도인선. 얼굴도 멀쩡하고."

그가 기억하는 도인선은 얼굴 한쪽에 세로로 지나가는 기다린 흉터가 있었다. 그 상처로 한쪽 눈을 잃었다.

지금 그녀의 두 눈은 멀쩡했다. 얼굴에 흉터도 없었다. 어깨에는 카메라를 메고 있었다.

차우진이 기억하는 도인선은 카메라가 아니라 소총을 메고 다녔다.

"역시 카메라가 더 잘 어울려. 이래서 지구 멸망을 막아야 한다니까."

차우진이 고기를 가지고 캠핑장으로 갔다.

곽민지가 투덜댔다.

"돼지 잡아서 고기 떼어오나 보다. 배고픈데."

"이거 소야."

"앗! 믿고 있었다고요!"

"꽃등심."

"왜 벌써 오셨어요? 소 키워서 오셔도 되는데!"

곽민지는 콧노래를 부르며 숯을 준비했다. 차우진이 고기에 밑간을 하며 말했다.

"고기 구울 줄은 아냐?"

"당연한 거 아녜요? 나 고기에 진심인 여자예요."

"고기에 진심인 고삐리겠지."

"고딩 정도로 합의 보죠?"

"골목에서 담배 피우던 고삐리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곽민지가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듣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변명했다.

"그날 담배 안 피웠거든요? 피울 줄도 모르거든요? 그땐 그냥 아는 언니 따라간 거거든요?"

"그래. 믿을게."

"안 믿는 거 알거든요? 그리고."

곽민지가 주변을 다시 두리번거렸다.

"엄마가 알면 전 죽어요. 비밀 지켜줘요."

"곽 팀장님이 알면 안 죽고?"

"아빠한테는 혼나긴 해도 죽지는 않을걸요? 근데 엄마한테 걸리면 진짜 죽어요."

차우진도 주변을 돌아보았다. 곽수혁과 그의 아내는 채소와 다른 식재료를 다듬으러 갔다.

차우진이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쪽에서 거슬리는 느낌이 들었다.

한쪽 공터에 세워둔 차에 남자가 다가갔다. 그 차는 도인선의 차였다.

차우진은 도인선이 한쪽 눈을 잃은 사고가 생각났다. 직접 본 건 아니고 들은 이야기였다.

'멸망 훨씬 전에 시골에서 자동차 사고로 다쳤다더니, 그게 지금이었나?'

할 일이 생겼다.

차우진이 말했다.

"아. 이런. 고기 못 먹겠네?"

"네?"

"나 급한 일이 생겨서 가야 돼."

"아싸. 개꿀! 아저씨 꽃등심까지 내가 다 먹어야지."

"붙잡는 시늉이라도 해라."

곽민지가 고기 집게를 흔들었다.

"얼른 일하러 가세요."

***

도인선은 오윤서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내용은 무난했다. 현재 촬영 중인 영화 이야기도 나왔다.

영화 이야기가 나오면서 최근에 있었던 사고도 언급됐다.

촬영 중 사고는 대부분 기사로 나가봤자 좋을 게 없다. 그런데 이번 사고는 절벽이 무너지고 사람이 추락한 대형 사고인데도 다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오윤서가 말했다.

"그때 촬영장에 있던 분이 절벽에서 추락하는 정예지 씨를 구했다고 들었어요. 난 현장에 없어서 못 봤지만요."

"와아. 위험했을 텐데 누군지 몰라도 대단하네요."

"예지한테 물어봐요. 예지랑 잘 아는 분이니까."

"안 그래도 기왕 온 김에 인터뷰 따려고요."

도인선은 오윤서와는 인터뷰를 마쳤다.

출장비를 효율적으로 쓰려면 기사를 하나라도 더 뽑아가야 한다. 그녀는 예정에는 없던 정예지를 인터뷰하기 위해 그쪽 촬영장으로 이동했다.

"갑자기 인터뷰 요청을 하면 거절하는 거 아닐까? 그냥 들이밀어 봐?"

그런 걱정을 하면서 촬영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정예지는 차우진과 만나고 있었다.

"응? 아까 그 캠핑 손님이네?"

정예지가 차우진의 가죽 재킷을 확인하고 실실 웃었다.

"흐응. 오늘은 내가 사준 옷 입었네요?"

"바람이 불 것 같아서."

"안 오는 줄 알았잖아요. 저쪽부터 갔다 온 거예요? 역시 윤서 언니 팬."

"그런 거 아닙니다."

차우진이 캠핑장을 가리켰다.

"아는 분이 저기 있는데, 고기나 좀 얻어먹으러 갔다 왔습니다."

"그렇구나. 앗. 나도 촬영 끝나고 얻어먹으러 가도 돼요?"

"저기 규칙이 자기가 먹을 고기는 사와야 한다던데."

두 사람에게 도인선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정예지 씨. 소리언덕 기자 도인선이에요."

"네? 아. 네. 안녕하세요."

"괜찮으시면 인터뷰 좀…."

"죄송해요. 소속사하고 이야기 먼저 하셔야 해요."

"그럼 하나만 여쭤볼게요. 절벽에서 구출될 때 구해준 분이요. 그분에 관한 건데…."

정예지가 차우진을 본 후에 딱 잡아뗐다.

"잘 몰라요."

"네?"

그녀는 차우진이 얼굴이 공개되는 걸 불편해한다는 것을 안다. 그 사람이 눈앞에 있다고 기자 앞에서 말할 수는 없다.

대신에 차우진이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개인적으로 정말 고마워하고 있어요. 좀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모르는 것 같단 말이죠. 어쨌든 일반인이신 분 이야기를 기자 앞에서 함부로 말할 수는 없어요."

도인선이 물었다.

"스턴트 배우…가 구해준 거 아니었어요?"

"앗! 그렇게 알고 계시면 그런 거로 해요. 더는 묻지 마세요."

그녀가 차우진에게 말했다.

"나중에 봐요."

정예지가 촬영장으로 돌아갔다.

도인선이 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기며 말했다.

"아. 기자 하기 진짜 힘들다. 난 힘든데 정예지 씨는 신나는 일이라도 있나 보다. 표정이 되게 밝네요."

그녀가 차우진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캠핑 왔다면서요? 정예지 씨 팬이라더니 아는 사이였어요?"

"아는 사이도 팬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러시구나. 난 회사나 돌아가야겠네요. 월급 받으려면 기사 써야지."

차우진이 제안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좀 태워주시죠."

"네?"

"시내에 볼일이 있어서."

"음…. 네. 뭐. 어차피 시내를 지나가야 하니까."

차우진이 도인선과 함께 그녀의 차로 걸어갔다.

그녀의 차는 SUV였다. 차외 겉모습은 전쟁터에서 굴려도 될 것처럼 생겼다. 그런데 차가 너무 낡았다.

도인선이 차 키를 돌려 운전석 문을 열었다.

차우진이 차에 타기 전에 차체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인선이 물었다.

"왜요?"

"낡은 차라서 불안해서요."

"얻어타는 분이 그런 것도 따지세요?"

"무사고는 아니죠? 고친 곳이 많아 보이는데."

"나는 차를 제대로 모는데 꼭 누가 와서 들이받는단 말이죠."

"그건 운전 스타일에 문제가…."

"험한 놈들 취재하다가 보면 그럴 일이 생기기도 하거든요? 그리고 그걸 공짜 승객한테까지 듣고 싶지는 않아요."

차우진이 말했다.

"오늘은 사고가 나더라도 주 기자님 운전 스타일 때문이 아닐 겁니다."

그는 조금 전에 누군가 이 차에 접근해서 차체에 손을 대는 걸 보았다. 그 손댄 부분에 뭐가 있는지 슬쩍 보았다.

'위치추적장치네.'

몇만 원이면 살 수 있는 흔한 추적장치가 작은 충격만 받아도 떨어져 나갈 만큼 대충 붙어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

이 차에 폭탄을 붙였다면 멸망한 미래에 도인선이 살아있을 리 없다. 한국에서 폭탄으로 차량을 터트려 사람을 죽이면 사고로 위장할 수 없다.

누군가 이 차에 손댄 시간은 짧았다. 손댄 위치까지 고려하면 차를 고장 낸 것도 아니다.

그래서 위치추적장치를 의심했는데, 예상대로였다.

차우진이 위치추적장치는 그대로 놔두고 운전석의 도인선을 보았다.

그녀는 멸망한 세계에서 생존 커뮤니티를 이끌던 사람이다. 그곳에서 가끔 어울려 지내기도 했다.

***

박창수가 말했다.

"도인선 씨 말이야. 얼굴에 그 흉터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냈다."

"시골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했잖아."

"어? 너 그거 어떻게 알았냐?"

"그냥 말해주던데?"

"와. 인선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 차별하네."

"도인선 씨에게 들은 거 아니야. 그 마을 사람들이 말해줬어."

"하긴. 나도 그렇게 들었지. 근데 난 여러 번 물어보니까 알려주던데, 너는?"

"묻지도 않았는데 그냥?"

"사람 차별한 거 맞네!"

차우진이 말했다.

"흉터가 조금만 옆으로 갔으면 한쪽 눈을 잃지는 않았을 텐데, 난 그게 안타깝더라."

***

차우진은 그녀의 눈을 지켜주고 싶었다.

78. 트럭

차우진은 도인선의 한쪽 눈을 지켜주고 싶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신세를 제법 졌다. 그것도 무시할 수 없었다.

차우진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도인선이 물었다.

"어디까지 가요?"

"도인선 씨 가는 곳까지?"

"뭐지? 설마 나 꼬시는 거예요?"

"그럴 리가. 우린 가는 길이 많이 다른데."

꿈속 미래에서 도인선은 생존 커뮤니티를 이끌었다. 그 생존 커뮤니티는 방어와 생산 성향이었다.

그녀는 멸망에서 살아남는 방식이 차우진이나 박창수와는 달랐다.

도인선이 물었다.

"내가 어떤 길을 가는지 알아요?"

"기자?"

"그게 다가 아닌데, 뭐. 됐어요. 진짜로 어디에 내려줘요?"

"가다가 적당한 곳에서 말할 테니까 거기서 내려줘요."

도인선이 차우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예 모르는 사람이 이런 소리를 했으면 당장 내리라고 할 텐데, 그가 정예지와 아는 사이라는 것 때문에 그러진 않았다.

'가는 길에 차비로 기삿거리나 뽑아볼까? 정예지 씨 인터뷰 대신으로.'

"알았어요. 가요. 차비 준비하고."

"차비는 내가 받아야 할 텐데."

"뭐래."

차가 출발했다.

한적인 시골길을 달리며 그녀가 물었다.

"정예지 씨하고는 어떻게 알아요?"

"촬영장에서 알바를 잠깐 했습니다. 방송국 알바도 가끔 하고요."

"알바?"

"세트장 공사나, 사람 없으면 엑스트라 땜빵 같은 거."

"그러시구나. 아. 그러면 혹시 저번에 영월 절벽이 무너졌을 때도 거기서 일했어요?"

"아니요. 그날은 다른 일이 있어서."

그때는 촬영장 알바가 아니라 근처에서 탐지기를 테스트했다.

"그럼 혹시 소문 들은 거 있어요? 정예지 씨를 구해준 사람은 누구예요?"

차우진이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연예부 기자가 평소에 원한 쌓을 일이 많습니까?"

"왜 말을 돌린대요? 그리고 나 연예부 기자 아니에요. 회사가 작아서 가리지 않고 다 취재하는 거지."

"누가 쫓아오는데."

"네?"

도인선이 급히 룸미러를 보았다. 뒤쪽에서 트럭이 속도를 높이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냥 추월하는 차 아니에요?"

차우진이 앞을 가리켰다. 앞쪽 도로가 휘어져 있었다.

그 왼쪽은 급경사와 계곡이 있었다. 도로 위에 추락을 막는 시설은 얇은 가드레일 하나뿐이었다.

"저 트럭이 지금 이 차를 작정하고 받으면 저 가드레일로는 못 버팁니다. 그럼 이 차는 계곡 아래로 슈우웅."

"에이. 설마 누가 날 죽이려고…."

"운 좋으면 눈 하나 잃는 정도로 끝나겠지요."

차우진은 미래의 도인선이 눈을 어떻게 잃었는지 들은 적이 있다. 그것도 그녀에게 직접 들은 게 아니라 그 커뮤니티의 사람에게 짧게 들었다.

'시골길, 계곡, 커브, 교통사고로 인한 차량 추락, 구사일생. 대신에 눈을 하나 잃었다고 했지.'

지금 상황이 그때 들은 것과 겹쳤다.

차우진이 물었다.

"다시 질문. 이 차를 트럭으로 들이받아서 도인선 씨를 죽일 사람이 있습니까?"

도인선은 이름 하나가 퍼뜩 떠올랐다.

"최용구?"

"아. 용구가 그래서 여기 왔구나."

"최용구를 아세요?"

"KMTV 기자. 직위는 부장. 인간성은 개새끼."

"제대로 아시는구나."

도인선이 바짝 긴장했다.

"그럼 방금 말한 이 상황, 진짜예요?"

"아까 촬영장 근처에서 용구를 봤습니다. 그 새끼가 도인선 씨를 오늘 죽이려나 봅니다."

"이, 이제 어떻게 해요?"

"일단 속도부터 높여요. 트럭이 추월하게 두지 말고 더 빨리 저길 빠져나가요."

"아! 맞아요! 도망쳐야죠!"

트럭은 이미 상당히 가까워졌다.

도인선이 가속페달을 깊게 밟았다. 낡은 SUV의 속도가 빨라졌다.

문제는 앞쪽 커브다. 고속으로 커브를 돌기 시작하자 높이가 높은 SUV가 왼쪽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당황한 도인선이 속도를 늦추었다. 트럭이 다시 가까워졌다.

트럭이 도인선의 차를 도로 밖으로 밀어내려고 바짝 달라붙었다.

"꺄아아악!"

차우진이 말했다.

"이러면 어쩔 수 없나."

"포, 포기하면 안…."

차우진이 말했다.

"운전에 집중해요."

도인선은 옆을 볼 여유가 전혀 없었다. 두 눈으로 앞만 보면서 어떻게든 차가 밀려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자칫하면 차가 도로 밖으로 튕겨 나가 벼랑 아래로 추락할 상황이다. 그녀는 지금 눈동자조차 옆으로 움직이지 못했다.

차우진은 뒷좌석으로 이동한 후에 창문을 열었다.

바로 옆에서 트럭이 밀고 들어오는 중이다. 트럭과 SUV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뒷좌석은 블랙박스에 찍히지 않는다.

차우진이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을 사용했다. 그의 모습이 SUV 뒷좌석에서 사라졌다가 트럭 짐칸에 나타났다.

그 트럭은 운전석 뒤쪽에 창문이 있었다.

도인선만 옆을 볼 여유가 없는 게 아니다. 트럭을 운전하는 청부업자도 커브길에서 왼쪽에 있는 도인선의 차를 밀어붙이느라 다른 곳으로는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트럭의 내부에는 블랙박스가 없었다.

'증거를 남기지 않아야 하니까 당연하겠지.'

창문이 조금 좁긴 한데 사람이 통과할 수는 있는 크기다.

'열려 있으니까 유리는 안 깨도 되겠네.'

차우진이 트럭 뒤쪽 창문에 상체를 집어넣었다. 그는 그 상태에서 차를 밀어붙이느라 바쁜 청부업자의 뒤통수를 왼손으로 잡고 앞에 있는 운전대에 처박았다.

"켁!"

청부업자는 한 방에 기절했다.

차우진이 즉시 운전석으로 들어갔다. 그는 운전대를 오른쪽으로 당기고 왼발을 운전석 쪽으로 집어넣어 브레이크를 밟았다.

도로 오른쪽은 콘크리트로 만든 낙석 방지벽이 있었다. 트럭이 콘크리트 벽을 긁으며 조금 달리다 멈췄다.

차우진이 짐칸으로 이동했다.

도인선의 차는 가드레일까지 밀려났다가, 트럭이 옆으로 움직이는 바람에 겨우 그 사이에서 빠져나갔다.

그녀는 가속페달을 밟고 현장을 빠르게 벗어났다. 거리가 조금 벌어지자 뒤를 볼 여유가 생겼다.

룸미러에 보이는 트럭은 낙석 방지벽에 달라붙은 채로 완전히 정지해 있었다.

"뭐야? 설마 그냥 사고였던 거야? 내가 괜히 겁먹은 거야?"

그녀가 조수석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봐요. 당신이 괜히 그런 소리를 해서…."

옆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녀가 급히 브레이크를 밟으며 차를 세웠다.

"뭐야! 이 사람 어디 갔어!"

그녀가 운전석 문을 벌컥 열고 뛰어내려 도로를 보았다. 차우진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 떨어진 거야?"

그녀가 트럭을 향해 뛰어갔다.

운전석에 있는 남자는 머리를 처박고 기절한 상태였다.

"설마 그 사람, 차에서 뛰어내려서 죽…."

그녀의 뒤에서 차우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 안 죽었습니다."

그녀가 뒤를 휙 돌아보고 화들짝 놀랐다.

"뭐, 뭐야! 어디 있었어요?"

"앞쪽은 위험해 보여서 뒷좌석에 피해 있었습니다만?"

"아니, 언제 뒷좌석으로 넘어갔어요?"

그녀는 조금 전에는 가드레일 너머로 떨어지지 않고 앞만 보느라 다른 쪽은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때 뒷좌석으로 이동했다.

그러고 나서는 트럭으로 옮겨탔다.

차우진이 말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아. 그렇죠. 그런데 저 사람은 기절한 거예요?"

"트럭이 콘크리트 벽에 부딪힐 때 머리를 잘못 부딪쳤는지 기절했습니다. 내가 그런 거 아니니까 경찰에 잘 말해요."

"경찰이요? 저놈 정체가 뭔데요?"

"딱 봐도 트럭을 이용한 살인청부업자입니다만?"

도인선은 조금 전에 차우진과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 그럼 최용구 그 새끼가 진짜로 나를…."

"그 개새끼가."

"그 개새끼가 나를 죽이려고…."

"나도 있었는데."

"우리 오빠처럼…."

"오빠?"

"우리 오빠가 작년에 실종됐는데, 최용구를 조사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나도 최용구를 조사하던 중이었죠."

"음…. 저놈을 조사해서 좋은 성과가 나오면 좋겠군요. 저런 놈들은 단서를 잘 남기지 않지만."

"꼭 알아낼 거예요. 일단 경찰서에 같이 가서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차우진이 거절했다.

"내가 좀 바빠서."

"네?"

"경찰이 오면 알아서 잘 설명해요. 내 이야기는 빼놓고. 나는 여기 없었던 거로 합시다."

"하지만 이런 사건이 생겼는데 어떻게 차우진 씨만 그냥 보내요?"

"음. 그런가?"

"당연히 그렇죠."

차우진이 혀를 찼다.

"이런 거 알려지면 누나가 날 잡아먹을 텐데."

"네? 누나요?"

"우리 누나가 사람 탈을 쓴 맹수라서."

"그게 무슨…."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차우진이 뒤를 돌아보았다. 도인선도 깜짝 놀랐다.

"앗. 지금 저 트럭이 굴러오는 거 맞죠?"

"음? 청부업자는 기절했는데?"

트럭을 낙석 방지벽에 붙여서 세워놓긴 했는데, 시동도 끄지 않았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걸지도 않았다. 기어도 파킹으로 전환하지 않았다.

충격으로 기절한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하는 건 말이 안 되기 때문에 손댈 수가 없었다.

낙석 방지벽에 닿아 있던 차가 그곳을 벗어나더니 바퀴가 조금씩 구르기 시작했다.

"아. 차 굴러온다."

"어, 어떻게 해요?"

"이대로면 이 도로에서 대형 사고가 납니다. 저놈을 살려놔야 조사를 하지요. 도 기자님 차라도 끌고 와서 막아요."

"네? 아!"

도인선이 급히 그녀의 SUV로 달려갔다. 그녀가 차를 후진시켜 서서히 굴러오는 트럭의 앞을 막았다. 그러고 브레이크를 꽉 밟았다.

트럭은 시동이 걸린 상태로 기어까지 들어가 있었다. 그 트럭이 도인선의 차를 조금씩 밀었다.

도인선의 SUV 뒤쪽이 조금씩 찌그러졌다. 대신에 트럭의 속도는 확실히 느려졌다.

"내 소중한 차가! 최용구 이 개새끼야!"

차우진이 운전석 문을 열고 올라가 트럭의 시동을 끄고 사이드 브레이크도 걸었다.

"됐습니다."

"휴우."

"이제 진짜 경찰 부릅시다."

"아. 네!"

"그동안 난 도 기자님 차의 블랙박스를 확인할 테니까."

"네?"

차우진이 둘러댔다.

"우리가 습격당했다는 증거가 확실히 남아있는지 봐야 하니까요."

차우진은 공간이동으로 빠져나간 흔적이 영상에 남아있는지, 후방카메라에 찍힌 건 없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가 블랙박스 영상을 재생했다. 외부만 촬영하는 그 카메라에는 차량 내부 모습은 아예 찍혀 있지 않았다.

후방카메라에도 스킬을 사용해 공간을 건너뛴 차우진의 모습은 나오지 않았다.

"됐네."

도인선이 신고를 마치고 다가왔다.

"되다니요?"

"트럭이 대놓고 우리를 공격하려고 가속한 장면이 찍혔습니다. 이거 경찰에 넘겨요."

"최용구는요? 그거면 최용구도 잡을 수 있어요?"

"용구가 직접 청부했다면 모를까, 한 다리 건넜으면 증거가 있으려나…."

***

최용구가 회사 직원의 전화를 받았다.

"이 근처에서 교통사고가 났다고?"

- 예. 부장님. 소리언덕의 도인선 기자가 살인청부사건이라고 난리를 쳐서 형사들이 조사하고 있답니다.

"그냥 사고 아니야?"

- 그럴 것 같긴 한데, 기자가 피해자인 사고라서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마침 최 부장님께서 그쪽에 가셨다길래 전화 드렸습니다. 직접 가보시겠습니까?

"나 오늘 연차야. 괜한 설레발에 내가 왜 가겠어? 다른 사람 보내."

- 그럼 제가 그 지역 언론하고 협조해서 기사만 받아볼까요?

"그러던가. 아. 기사 받으면 올리기 전에 나한테도 보내. 무슨 상황인지 궁금해서 그래."

- 알겠습니다.

최용구가 전화를 끊고 욕을 했다.

"씨발."

'천 사장 일 하는 게 왜 이래? 깔끔하지가 않잖아.'

부동산 개발업자 조성식이 술잔을 들었다.

"우리 최 기자님. 휴가 중이신데도 바쁘시네요."

"내가 없으면 방송국이 안 돌아가니 어쩔 수 없지요."

조성식이 웃으며 양옆의 여자들에게 말했다.

"잘 모셔라. 저분이 연예계에 인맥이 엄청난 분이야. 너희가 잘 보이면 영화나 드라마에 꽂아줄 수 있는 분이라고."

최용구가 씩 웃었다.

"내가 좀 꽂긴 하지요."

"하하하. 정말 잘 꽂으시죠."

***

차우진은 도인선과 함께 경찰서에 갔다.

그는 원래는 도인선만 경찰서로 보내고 사라지려고 했다. 하지만 트럭이 움직여서 그가 그걸 직접 세우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어졌다.

블랙박스에 그 장면이 찍힌 걸 도인선도 아는데, 그걸 굳이 삭제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도인선이 형사 앞에서 흥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블랙박스 영상 보셨잖아요. 그놈이 우리를 죽이려고 했다니까요?"

"그 트럭을 운전한 사람은 긴급체포해서 사고인지 아니면 사건인지를 조사 중입니다."

"사건이죠. 사고는 무슨."

형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용의자는 자기가 왜 기절했는지 모르던데…."

79. 용구 II

형사는 용의자인 트럭 기사가 기절한 이유를 의심했다.

도인선이 얼른 말했다.

"당연히 트럭이 콘크리트 낙석방지벽에 부딪혔을 때 그 충격으로 기절한 거잖아요."

"그렇게 보기엔 이마에 상처가 크던데…."

"정면충돌 사고에서는 그렇게 다치기도 해요."

"정면충돌은 아니잖습니까?"

"블랙박스 보셨잖아요.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어요?"

형사는 조금 찜찜했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렇긴 하죠."

블랙박스에는 트럭이 혼자 벽을 들이받는 모습만 찍혔다.

그 트럭이 SUV를 바로 옆에서 밀어붙이다가 일어난 일이기 그 상황이 정면에서 찍힌 건 아니다. 그래도 트럭이 혼자 벽에 충돌했다는 것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당연히 충돌 순간의 운전석 모습은 영상에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트럭의 유리 틴팅이 진해서 운전석 내부는 영상 내내 보이지도 않았다.

차우진은 뒤쪽에 앉아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 시계를 보며 물었다.

"제가 바쁜 일이 있는데, 저는 가도 되겠습니까?"

형사는 당황했다.

"예? 이 상황에서요?"

"진술이 필요하면 도 기자님이 다 할 텐데요. 저는 옆에 타고 있던 것뿐입니다."

"그렇긴 한데, 트럭이 다시 움직일 때 운전석에 들어가서 차를 세운 분이니까…."

"그때 그 트럭을 안 세웠으면 운전석에 있던 청부업자는 계곡에 떨어져서 죽었습니다."

"아. 그건 그렇죠. 아니, 아직 청부업자라고 밝혀진 건 아니고요."

도인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가요."

"예? 두 분 다 가십니까?"

"진술 다 했잖아요. 누가 죽은 것도 아니고 우리가 피해자인데, 더 있어야 하나요? 필요한 거 있으면 전화 주세요."

***

형사가 붙잡았지만 도인선은 뿌리치고 나왔다. 뿌리칠 때는 기자 명함이 효과가 있었다.

경찰서 밖으로 나온 후에 도인선이 물었다.

"어떻게 될까요?"

"트럭을 운전한 청부업자는 사고라고 주장하겠지요."

"역시 그렇겠죠?"

"살인미수보다는 사고가 나으니까, 아무리 압박해도 자백은 안 할 겁니다."

"이제 어떠실 거예요?"

"캠핑장으로 돌아가야죠."

도인선이 부탁했다.

"아까는 제가 태워줬으니까 이번엔 저 좀 태워줘요."

"서울이 아니라 영월 캠핑장으로 돌아간다니까요?"

"그니까요. 저도 오늘은 거기 가려고요."

"어…. 내 차는 캠핑장에 있는데."

"택시 타셔야죠? 한 명 더 타도 차우진 씨가 내는 요금은 똑같겠네요."

"기자는 월급이 나올 텐데?"

"내 차 수리하려면 돈 아껴야 해요. 그 트럭 때문에 많이 망가졌잖아요."

"수리비가 중고차 시세보다 많이 나오겠던데."

"그래도 고칠 거거든요?"

***

차우진이 도인선과 함께 캠핑장으로 돌아왔다.

도인선의 차는 꽤 부서진 데다가 경찰이 증거품으로 가져간 상태였다. 그래서 돌아올 때는 택시를 이용했다.

차우진이 도인선과 함께 곽수혁 팀장 가족의 텐트에 먼저 들렀다.

곽민지가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어? 아저씨. 오늘은 안 오는 줄 알았는데, 오셨네요?"

"볼일이 있다고 했지 오지 않는다고는 안 했다. 그런데 고기가 남았네?"

"아까 바로 안 먹고 좀 더 놀다가 늦게 굽기 시작했거든요."

곽수혁이 제안했다.

"차 이사님. 식사 아직 안 하셨으면 와서 좀 드시죠. 고기가 많이 남았습니다."

곽민지가 말했다.

"아저씨가 산 꽃등심은 다 먹었지만요. 그것부터 먹었거든요."

곽수혁이 대체품을 제시했다.

"삼겹살하고 목살은 남았습니다."

"고기 안 가져오신 거 아니었습니까?"

곽수혁이 어색하게 웃었다.

"찾아보니까 밑에 깔려있는데 못 찾은 거더라고요. 제가 회사 일만 하다 보니까 캠핑이 안 익숙해서. 하, 하하."

최근에 회사에서 일을 시킨 건 차우진이다.

차우진이 말했다.

"돼지고기 좋아합니다."

멸망한 세계의 한반도는 가축으로 키워진 소가 살아남기 쉬운 환경은 아니다.

그런데 돼지는 가끔 볼 수 있었다. 멧돼지도 있고, 집돼지가 야생화된 것도 있었다.

***

멸망한 세계에서 박창수가 오랜만에 구한 멧돼지 고기를 보며 아쉬워했다.

"불판에 이 고기랑 신김치를 같이 굽고 소주 마시면, 캬아. 진짜 맛있을 텐데."

차우진도 입맛을 다셨다.

"그치. 그거 맛있었지."

"생각나니까 더 먹고 싶네."

"도인선 씨네 마을이 여기서 가깝잖아. 거기서는 김치 비슷한 절임음식을 만들더라."

"오래 보존하려고 만든 그거? 음. 그거라도 교환하러 갈까? 술도 곁들여서."

"술이 있을까? 술까지 만들 정도로 식량이 넉넉하진 않던데."

박창수가 장담했다.

"거기서 소독약으로 쓸 에틸알코올을 만들잖아. 그거에 물에 타면 그게 바로 소주지."

"그걸 주겠어?"

"돼지고기랑 바꾸자고 하면 꺼낼걸? 도인선 씨도 술 좋아했다고 했잖아. 같이 먹자고 하면 아마 못 참을 거야."

차우진이 짐을 챙겼다.

"뭐해? 가자."

***

차우진이 곽수혁에게 물었다.

"불판 있습니까?"

"숯불이 아니라요? 있긴 한데."

"김치도 있지요?"

"그거야 당연하죠. 신김치도 가져왔습니다."

"소주는?"

"어? 있습니다. 제가 마시려고 산 건데, 와이프랑 민지가 구박해서 맥주만 마셨더니 남았습니다."

차우진이 활짝 웃었다.

"완벽하네요."

그가 도인선을 돌아보았다.

"술 좋아하죠?"

"좋아하긴 하는데, 그런데…."

그녀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이사님이었어요?"

"조그만 회사의 이름뿐인 이사입니다."

"아. 그렇구나."

곽민지가 곽수혁에게 물었다.

"아빠. 큰 회사 다니는 거 아녔어?"

"어? 우리 회사가 그 정도면 큰 편인데…."

"차 이사 아저씨는 회사에서 중요한 일 한다며?"

"연구소에서 굉장히 중요한 일을 맡은 분이지."

도인선이 물었다.

"학생. 아버님 다니시는 회사 이름이 뭔데?"

"딥어스테크요."

"그럼 중견기업인데?"

딥어스테크는 최근에 뉴스에 여러 번 나왔다. 주로 사건 사고 때문에 나오긴 했지만 어떤 회사인지는 기자인 도인선도 알고 있었다.

곽민지는 그녀의 반응에 만족했다.

"그쵸? 우리 아빠 회사 큰 회사 맞죠."

"맞아. 맞는데."

그녀가 차우진에게 물었다.

"왜 이사님이라는 거 말 안 했어요?"

"안 물어봤으니까?"

"그렇긴 한데, 그런 분이 왜 촬영 현장에서 엑스트라…."

"고기 먹읍시다."

불판이 곧바로 준비됐다. 차우진이 고기와 김치를 올려놓고 도인선에게 술을 권했다.

"일단 마셔요. 오늘 힘들었을 텐데."

"아. 그건 그래요. 오늘은 술이라도 마셔야 버티겠어요."

그녀가 소주부터 한 잔 마셨다.

"크으."

옆에서 곽민지가 삼겹살을 먹으며 물었다.

"그런데 아줌마는 누구세요?"

"언니라고 불러주면 안 될까?"

"음…. 언니?"

"난 기자야."

"우와! 기자!"

"왜? 꿈이 기자야?"

"아뇨."

"아니구나."

"그럼 언니는 아저씨는 어떻게 알아요?"

"저쪽 촬영 현장에 취재하러 왔다가 우연히 만났어. 내가 인터뷰한 배우와 아는 사이라길래 알게 됐지."

곽민지가 차우진에게 물었다.

"아저씨가 배우를 어떻게 알아요?"

"촬영장 알바 하다가 인사 정도는 하게 됐어."

"근데요. 여기 기자 언니를 오늘 처음 만났는데, 벌써 꼬셨어요?"

도인선이 기침했다.

"콜록."

차우진이 말했다.

"내가 아는 골목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곽민지와 처음 마주친 곳은 골목에서 양아치들과 있을 때였다. 그게 집에 알려지면 곽민지는 끝장이다.

곽민지가 얼른 손을 들었다.

"항복. 완전 항복."

***

캠핑장에서 고기는 같이 먹었지만 곽수혁 가족의 텐트까지 신세 질 수는 없다.

차우진은 고기를 주로 먹었다. 술은 조금만 마셨다. 그의 해독 스킬은 이 정도 알코올쯤은 빠르게 분해한다.

그 캠핑장에는 몸만 오면 쓸 수 있는 글램핑 텐트가 있었다. 당연히 유료였다.

도인선은 그 텐트를 빌렸다.

"우진 씨는요?"

"난 촬영장에 볼일이 있어서."

"그럼 난 좀 쉴게요."

차우진이 촬영장으로 가고, 도인선은 텐트에 들어가 누웠다.

"오늘 너무 피곤하긴 한데…."

누워 있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산책 좀 하면서 생각을 정리해야겠다."

그녀가 캠핑장을 걸으며 궁리했다.

"오늘 그 트럭은 최용구가 보낸 거야. 확실해."

차우진은 트럭 기사가 청부업자라고 했다. 그녀는 최용구가 그 청부업자를 보냈다고 확신했다.

그녀는 기자로 살면서 다양한 분야를 취재했다. 그러면서 욕먹는 일도 가끔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 이런 짓을 할 사람은 최용구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증거가 없다. 증거가."

트럭 기사는 교통사고였다고 주장하는 중이다.

살인미수보다는 사고가 처벌 수위가 훨씬 낮다. 운이 아주 좋으면 보험처리로 넘길 수도 있다.

"우진 씨 말이 맞아. 트럭 몰던 청부업자가 자백할 확률은 없어."

도인선의 걸음이 느려졌다. 맞은 편에 아는 얼굴이 있었다.

"최용구?"

최용구가 그녀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어. 도 기자. 여기서 우연히 만나네?"

그가 도인선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사고 났다더니 멀쩡해 보이네?"

도인선은 그 말을 듣고 상대의 의도를 깨달았다.

'우연이 아니야. 내가 여기로 돌아온 걸 알고, 내 상태를 직접 확인하러 온 거야.'

그녀가 숨을 들이마신 후에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보내준 트럭은 잘 받았다. 최용구 부장."

최용구가 인상을 썼다.

"넌 위아래가 없냐? 신입 기자일 땐 눈도 못 마주치던 게 어디서 말을 까?"

"지금 내가 말 높일 상황은 아니지? 기분 나쁘면 다음에는 더 큰 트럭을 보내. 트럭이 너무 작아서 내가 안 죽더라고."

최용구가 얼굴을 구기다가 갑자기 표정을 펴며 실실 웃었다.

"난 무슨 트럭 이야기인지 모르겠는데? 난 다른 곳에서 술 먹다가 전화를 받았어. 그래서 사고가 났다는 걸 알게 된 것뿐이다."

"알리바이가 있다?"

"진실이 내 편이라는 거지."

도인선이 피식 웃었다.

"딩신한테 진실은 거짓을 감추는 포장지 같은 거 아니었나? 진실 속에 거짓을 끼워 넣어 기사 쓰는 게 당신 주특기잖아."

"취했군."

"당신은 항상 그런 식으로 말을 돌리면서 넘어가고 나중에 뒤에서 일을 꾸미지?"

최용구의 표정이 굳었다.

도인선이 말했다.

"난 포기 안 해. 당신도 내가 포기 안 할 거 알잖아. 그래서 그 트럭을 보낸 거고. 그렇지?"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캠핑장에 있는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최용구가 말했다.

"쉬는 사람들 방해하지 말고 그냥 가자고."

그가 그렇게 말하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도인선이 뒤에서 침을 뱉었다.

"퉤!"

최용구는 걸어가면서 혼잣말을 했다.

"저년은 죽다 살아났는데도 왜 기가 죽지 않아?"

도인선은 최용구의 뒤를 캐는 기자다.

그녀는 KMTV 방송국에서 쫓겨났는데도 포기하지 않고 인터넷 언론사에 들어가 계속 최용구를 조사했다.

최용구가 인상을 썼다.

"저년이 오늘따라 너무 당당해. 오늘 내가 청부업자를 보냈다는 것도 확신하고 있어."

찜찜해졌다.

"그동안 내 뒤를 캐더니 뭔가 알아낸 건가? 뭘 알아낸 거지? 이번 리조트 일? 아니야. 더 큰 거…."

마음에 걸리는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중 하나가 생각났다.

'아니면 설마…. 레드?'

최용구의 인상이 더 일그러졌다.

"다른 놈을 보내서 저년이 뭘 아는지 알아내야겠어."

***

도인선 기자는 걸어가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후욱. 후욱. 저 새끼 얼굴을 봤더니 화난다."

그녀의 걸음이 빨라졌다.

"이제 나도 막 나가야 해. 시간이 없어."

***

차우진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역시 도인선. 듣던 대로 옛날에는 일단 저지르고 봤구나."

멸망한 세계의 도인선은 생존 커뮤니티를 이끌었다. 그때는 방어와 생산 성향이었고 조심성도 많았다.

박창수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도인선 씨 말이야. 교통사고로 한쪽 눈을 잃기 전에는 그렇게 잘 들이받았대. 아주 그냥 뒷일은 생각 안 하고 덤볐다더라.'

그녀가 눈을 잃은 사고는 오늘 차우진이 개입해 막았다.

상처 없이 사고를 피한 도인선은 차우진이 멸망한 세계에서 알던 것보다 더 과감하게 행동했다.

이미 최용구가 트럭을 보내 그녀를 죽이려 했다. 한 번 한 살인 청부를 두 번이라고 못할 리 없다.

차우진이 말했다.

"이러면 용구가 먼저 움직이겠는데?"

80. 도인선 기자 II

최용구가 대포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그런 후에 전화를 걸고 따지듯이 말했다.

"천 사장. 일을 왜 이렇게 어설프게 해?"

상대편에서 천상칠의 능글거리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 최 기자 기분이 왜 이렇게 안 좋을까? 일이 잘 안 풀렸나?

"그냥 안 풀린 정도가 아니지. 그년은 멀쩡하고 청부업자는 체포됐으니까."

- 체포? 쯧쯧. 일이 꼬였군.

"지금 그렇게 한가하게 말할 때야?"

- 이런 장사 한두 번 하나. 걱정하지 말라고. 그놈은 절대로 입을 열지 않아.

"확실해?"

- 살인미수보다는 교통사고가 유리하다는 걸 아주 잘 아는 놈이니까.

최용구의 인상이 조금 펴졌다. 그가 본론을 꺼냈다.

"천 사장. 일이 복잡해졌다. 그년이 뭔가 알아낸 것 같아."

천상칠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 어디까지? 설마 최 기자랑 내 관계도 알아낸 건 아니겠지?

최용구는 도인선이 뭘 알아냈는지 모른다.

"그럴 수도 있지. 천 사장이 믿을만한 애들로 보내봐. 납치해서 뭘 아는지 물어보자고."

***

도인선은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 문제는 교통수단이다.

"내 차는 경찰서에 맡겨놨는데…."

그녀가 타고 온 차는 지금 여기 없다.

택시를 캠핑장으로 불러 시내로 나가는 방법은 있다. 그런데 그건 망설여졌다.

"그 택시를 청부업자가 몰고 오면 어떻게 하지?"

이미 청부업자가 트럭으로 그녀의 차를 들이받았다. 트럭이 가짜였으면 택시도 진짜가 아닐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캠핑장에 돌아올 때도 차우진과 같은 택시를 타고 왔다.

고민하는 그녀의 눈에 촬영을 마치고 철수하려는 촬영팀이 보였다.

"아! 저거다!"

이미 캠핑장의 텐트를 빌려놨지만 상관없다. 대여료는 선불로 냈으니까 사람이 머물지 않는다고 캠핑장이 문제 삼을 리도 없다.

그녀가 촬영팀 쪽으로 뛰어갔다. 거기서 아는 얼굴을 찾았다.

정예지가 보였다.

"정예지 씨!"

"어머. 도 기자님. 아직 안 가셨어요?"

"네. 차가 고장 나서요. 혹시 서울 가시는 길이면 저도 좀 태워주시면 안 될까요?"

"음…. 서울까지요?"

"어려울까요?"

"윤서 언니한테 물어보고요. 전 윤서 언니 차 타고 가기로 했거든요. 우리 차는 먼저 보냈어요."

정예지가 오윤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인선은 옆에서 긴장한 얼굴로 기다렸다.

이야기를 들은 오윤서가 대답했다.

- 난 상관없어. 그 기자님이 가는 도중에 인터뷰만 안 하면.

정예지가 물었다.

"인터뷰만 안 하면 괜찮대요."

"그냥 조수석에서 없는 듯이 타고 갈게요."

잠시 후에 오윤서의 차가 그쪽으로 왔다. 그녀의 차는 연예인용 대형 밴이었다.

차 문이 열렸다. 정예지가 안쪽을 보며 말했다.

"역시 언니 차가 우리 차보다 넓고 쾌적해. 난 언제 이런 차 타고 다니나."

"돈 많이 벌면 네가 그냥 사도 돼."

"갈 길이 정말 머네요."

오윤서가 도인선에게 제안했다.

"뒤쪽에 우리랑 같이 타세요. 자리 넓어요."

"앗. 고맙습니다!"

차가 출발했다. 강원도 영월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멀다. 인터뷰를 하지 말라고 했지 입을 다물라고 하지는 않았다.

이런저런 잡담이 오갔다. 그러다 정예지가 오윤서에게 물었다.

"언니. 오늘 우진 오빠 봤어요?"

"아니?"

"아까 왔는데."

"스태프로 온 거야? 아니면 단역으로?"

정예지가 웃으며 말했다.

"아뇨. 내가 놀러 오라고 했어요."

"전부터 느낀 거지만 차우진 씨는 참 여유 있게 산다. 그치?"

"맞아요. 백수라서 그러나?"

도인선은 살짝 당황했다.

"백수요?"

아까 캠핑장에서 곽수혁 팀장이 차우진을 차 이사님이라고 불렀다.

'딥어스테크의 개발이사한테 왜 백수라고 하지?'

정예지는 그녀의 표정을 잘못 읽고 얼른 설명했다.

"아. 진짜 백수는 아니고요. 자유로운 영혼인가 봐요."

"이해가 잘 안 가요."

"그러니까 예술가 타입? 가끔 촬영장 스태프도 하고, 엑스트라도 하면서 살아요. 그러고 보니까 무슨 회사에서 알바도 가끔 한다던데."

"네? 알바요?"

"왜 놀라세요?"

"아, 아니요."

도인선은 혼란스러웠다.

'왜 내가 아는 차우진 씨와 이 사람들이 아는 차우진 씨가 다르지?'

궁금했지만 그걸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다.

'차우진 씨와는 죽을뻔한 차 사고에서 같이 살아나온 사이니까, 이런 비밀 정도는 지켜줄 의리는 있어야지.'

그렇다고 궁금증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차우진 씨는 도대체 정체가 뭐야?'

***

도인선은 오윤서의 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그 뒤를 청부업자들의 차가 미행했다.

청부업자가 대포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그년이 연예인 차를 타고 가는데 어떻게 할까요?"

- 연예인 누구? 하꼬냐?

"오윤서를 봤습니다."

- 젠장. 오윤서는 너무 유명하잖아. 어떻게 아는 사이야?

"그건 모르겠습니다.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어서 무슨 말이 오가는지 듣지 못했습니다."

- 어쨌든 인기 배우와 함께 움직인다는 거지? 도 기자가 머리를 썼네. 다시 트럭에 받히고 싶지는 않다는 거겠지.

"어떻게 할까요?"

- 계속 미행해. 그 차에서 언젠가는 내리겠지.

***

도인선은 서울 외곽에 있는 전철역 앞에 내렸다. 그곳은 행정구역은 경기도지만 전철을 타고 몇 정거장만 가면 서울이 나온다.

도인선이 인사했다.

"고마워요. 덕분에 편하게 왔어요."

정예지가 차에서 손을 흔들었다.

"우리도 재미있었어요. 취재할 때 뒷이야기 좋네요."

마음 같아서는 집에까지 데려달라고 하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그래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면 연예인들 사이에 그 이야기가 소문날 수 있다.

연예계의 소문은 기자도 듣는다. 그러면 최용구도 그녀가 한 이야기를 알게 된다.

그녀는 최용구가 오늘 사건을 어디까지 파악했는지 알지 못한다.

'최용구에게는 작은 단서라도 넘기기 싫어.'

그래서 도인선은 오늘 겪은 일을 굳이 설명하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오윤서의 연예인 밴 차량이 출발했다.

전철역 출입구는 50m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전철역 앞에서 내려달라고 했더니 운전을 맡은 로드 매니저가 그곳에 내려주었다.

주변에는 전철역 쪽으로 걸어가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이 정도면 안전하겠지."

그녀도 전철역으로 걸어갔다.

갑자기 덩치 좋은 남자가 접근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도인선 기자님?"

그녀가 옆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옆구리에 날카로운 게 닿았다.

"이거 칼이야. 같이 가주셔야겠는데."

도인선은 당황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전철역 근처에서 대놓고 납치를 시도할 줄은 몰랐다.

"누, 누구야?"

"그건 알 거 없고."

"최용구가 시켰어?"

"알 거 없다니까."

칼이 조금 더 들어왔다.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도인선은 바짝 긴장했다. 겁도 났다.

그녀의 허리에 칼을 댄 청부업자가 말했다.

"조용히 가자. 골목 안에서 널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시니까."

"최용구?"

"그렇지."

도인선도 최용구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이번에는 증거를 잡을 수 있을까?'

청부업자가 칼을 도인선의 옆구리에 댄 채로 그녀를 골목길로 끌고 갔다. 코트로 손을 가리고 있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는 칼이 보이지 않았다.

그 골목 안에는 목격자가 없었다.

청부업자가 그녀의 가슴에 칼날을 대고 밀었다.

그녀가 뒤로 밀려났다. 등이 벽에 닿았다.

도인선이 물었다.

"최용구는 어디 있어?"

"기자라면서 생각보다 순진하군. 그 말을 믿었어?"

"뭐? 최용구가 여기 있다고 했잖아!"

"당연히 거짓말이다."

"최용구가 이러라고 시켰어? 내가 오늘 청부업자 잡아서 신고한 거 몰라? 내가 죽으면 누가 의심받을 거 같아? 최용구야!"

"우리는 그런 사람 몰라. 추가로 생기는 문제는 의뢰인이 알아서 해결하겠지."

"나를 찌르면 당신은 괜찮을 거 같아? 뒷감당이 되겠어? 나 기자야! 기자를 죽이면 당신도 잡혀!"

청부업자가 실실 웃었다.

"그러면 이건 묻지 마 살인이 되겠지. 범인은 못 찾거나, 아니면 이 근처 노숙자 하나가 자살한 채로 발견되겠지. 그 근처에서 흉기가 발견될 테고. 깔끔하지?"

도인선 얼굴이 창백해졌다.

청부업자가 날카로운 칼끝으로 그녀의 가슴을 누르며 말했다.

"그러게 사람 잘 봐가면서 덤볐어야지."

청부업자의 등 뒤에서 차우진이 말했다.

"그러게. 너도 그러지 그랬냐?"

"뭐?"

깜짝 놀란 청부업자가 뒤로 몸을 휙 돌리며 단검을 크게 휘둘렀다.

"누구냐!"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

정예지가 뒷좌석에서 스마트폰을 발견했다.

"앗! 이거 도인선 기자님 휴대폰 같은데?"

"놔두고 내렸나 보다."

"어떻게 하죠?"

"지하철 개찰구에 들어갈 때 휴대폰이 없다는 걸 알겠지. 역 위로 도로 올라올 거야."

그녀가 운전 중인 로드 매니저에게 말했다.

"차 돌려."

로드 매니저가 내비게이션의 지도를 확인했다.

"누나. 유턴 말고, 저 앞에서 우회전해서 골목으로 들어갈까요? 그러면 전철역 근처에 차를 잠깐 댈 수 있겠는데요."

"그렇게 해."

***

청부업자의 무작정 휘두르는 칼에 맞아주기에는 차우진의 전투 센스가 너무 좋았다. 적이 몸을 돌릴 때 어깨 움직임만 봐도 칼날이 어디로 날아올지 뻔히 보였다.

차우진이 몸을 슬쩍 젖혔다.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차우진의 적의 칼을 쥔 손목을 덥석 잡아 비틀었다. 그러면서 다리를 툭 걸었다.

적은 뒤로 돌아서면서 칼을 휘두르느라 중심이 흐트러진 상태였다.

적이 옆으로 넘어졌다. 오른손목은 여전히 차우진이 잡고 있었다.

손목은 제자리에 있는데 몸만 자빠졌다.

적의 팔이 저절로 꺾였다.

"으아악!"

도인선은 깜짝 놀랐다. 칼을 들이대면서 납치하려던 놈이 순식간에 나자빠졌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차우진이 언제 나타났는지는 보지 못했다.

차우진은 마스크는 쓰고 있지만 다른 신체 보정은 하지 않은 상태다. 옷도 그대로였다.

그래서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어? 여길 어떻게…."

차우진이 둘러댔다.

"그냥 지나가다가 우연히?"

차우진은 오윤서의 밴 차량을 미행했다. 도인선에게 오늘 당장 일이 터진다는 건 몰랐지만, 그녀가 위험하다는 건 알았다.

멸망한 세계의 최용구라면 참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오윤서의 대형 밴을 미행하는 차를 발견했다. 그때부터는 그 차의 뒤에서 두 대를 다 미행했다.

차우진이 말했다.

"지나가다 봤는데, 다행히 늦지 않았네요."

"진짜 지나가다 본 거 맞아요?"

"사람 말 잘 안 믿으시네. 기자라서 그러나?"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차우진 씨가 나를 따라올 이유는 없어. 그런데 영월 캠핑장에 있어야 하는 사람을 여기서 우연히 만난다는 게 말이 되나?'

골목 반대쪽에서 남자가 다가왔다.

"거기 무슨 일입니까? 도와드릴까요?"

차우진이 말했다.

"갈 길 가시지."

남자가 더 빨리 다가왔다.

"아닙니다. 나쁜 놈을 잡은 거면 제가 도와드리…."

다가오는 남자를 차우진이 걷어찼다.

"켁!"

남자가 뒤로 나자빠졌다.

도인선이 깜짝 놀라 외쳤다.

"왜, 왜 사람을 막 패고 그래요?"

"저놈도 한패입니다."

"네? 그걸 어떻게…."

"느낌?"

그가 미행하던 차에서 두 놈이 내렸다. 그중 하나가 방금 지나가는 사람인 척하면서 다가왔다. 그래서 걷어찼다.

팔이 꺾인 놈이 왼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에 칼이 하나 더 있었다.

차우진이 그놈의 팔을 더 꺾으며 옆구리를 걷어찼다.

"케엑!"

다가오다 뒤로 나자빠졌던 놈도 벌떡 일어났다. 그놈이 칼을 뽑았다.

"이 새끼! 어떻게 알았지?"

"너한테서 썩은 내가 나더라고."

청부업자가 칼을 휘두르며 차우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죽어!"

***

오윤서의 차는 골목을 통해서 전철역 입구로 이동했다.

그런데 그 골목 앞에 문제가 생겼다.

운전하던 로드 매니저가 차를 세우며 급히 말했다.

"어? 어? 저기 싸움 났습니다!"

오윤서와 정예지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정예지가 깜짝 놀라 말했다.

"앗! 저기 벽에 도인선 기자 아녜요?"

"그러네? 그럼 다른 사람들은? 누가 누구 편인 거야?"

정예지가 손으로 차우진을 가리켰다.

"저쪽이 우리 편이에요. 칼 휘두르는 쪽이 나쁜 놈들이고요."

"그걸 어떻게 알아?"

"저 사람 우진 오빠잖아요."

"응? 마스크를 썼는데 어떻게 알아봤어?"

"저 재킷…."

차우진이 입고 있는 재킷은 그녀가 사준 것이다. 그녀가 손가락을 아래로 살짝 내리며 핑계를 댔다.

"마스크를 쓰긴 했지만 저 배를 어떻게 까먹어요?"

차우진이 적의 칼을 피하며 옆구리에 주먹을 먹였다.

"컥!"

적이 비틀거리며 몸을 뒤로 빼려 했다. 그러는 놈의 팔을 차우진이 잡았다. 칼을 쥔 쪽 팔이었다.

"어딜 가게?"

차우진이 적의 손목을 꺾었다.

"으아악!"

적이 몸을 비틀며 다른 손을 내밀었다.

차우진이 적의 팔을 잡은 채로 배를 걷어찼다.

"케엑!"

저항하던 적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팔을 잡힌 상태라 넘어지지도 못하고 얻어맞았다.

오윤서가 밴의 창문 유리를 내리고 머리를 내밀며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차우진이 대답했다.

"강도 잡습니다."

"네?"

도인선 기자가 급히 설명했다.

"저 도와주는 거예요! 저놈이 저를 칼로 협박하면서 납치하려고 했어요. 그리고 지금 나가떨어진 저놈도 한패예요!"

오윤서가 얼른 차 안으로 들어와 로드 매니저의 어깨를 밀었다.

"너 뭐 하니? 가서 너도 싸워!"

로드 매니저가 겁먹은 얼굴로 물었다.

"네? 제, 제가요?"

81. 도인선 기자 III

오윤서가 로드 매니저에게 말했다.

"너 태권도 유단자라면서. 그럼 가서 같이 싸울 수 있잖아."

"그거 사실 초등학교 때 딴 건데요?"

"응? 그럼 정식 유단자가 아니야?"

"네! 아닙니다. 저 약합니다!"

뒤에서 정예지가 말했다.

"제가 나갈게요. 이 차에 무기 좀 있어요? 총 같은 거요."

"네? 총이 왜 있겠습니까?"

"그럼 테이저건은?"

"없는데요?

"괜찮은 무기가 없구나. 좀 사두지."

로드 매니저가 말렸다.

"정예지 씨. 지금 나가면 위험합니다. 저놈들은 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칼을 가진 놈들이 일방적으로 맞고 있잖아요."

"그건 딱 봐도 상대가 너무 세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지, 저놈들 정말 위험한 놈들입니다."

"아. 끝났다."

"네?"

로드 매니저가 앞으로 보았다.

차우진이 나자빠진 적의 손을 발로 콱 밟았다.

"으아악!"

적이 칼을 놓치며 비명을 질렀다. 차우진이 그 칼을 발로 툭 차서 치웠다.

이제 두 놈 다 바닥에 쓰러져서 꿈틀댔다.

그걸 본 로드 매니저가 사물함에서 삼단봉을 꺼낸 후에 차에서 뛰어내렸다.

"도와드리겠습니다!"

"뭐야! 무기 있네!"

차우진이 적을 밟으며 말했다.

"다 끝났는데?"

로드 매니저가 어색하게 웃었다.

"한발 늦었네요. 도와드릴 수 있었는데."

오윤서와 정예지도 차에서 내렸다.

정예지가 말했다.

"와. 절벽에 매달렸을 때 운동 잘하는 건 알았는데, 보기보다 싸움 잘한다."

차우진이 물었다.

"보기보다?"

"아니, 그게, 오빠는 체형이 쪼끔…."

"배가 나와서 못 싸울 줄 알았다?"

"아니, 뭐…."

차우진이 도인선을 돌아보았다.

"괜찮아요?"

"네? 네. 괜찮아요."

"저놈이 칼로 가슴을 찌르던데 진짜 안 다쳤어요?"

"괜찮아요. 브라가 뽕브라라서."

"아. 어쩐지."

멸망한 세계에서 봤을 때와 달라 보이긴 했다.

도인선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왜요? 뭐요? 그럴 수도 있지!"

차우진이 정예지를 돌아보았다.

정예지가 두 손으로 가슴을 가리며 발끈했다.

"왜 날 보죠? 내가 그런 의심스러운 시선을 받을 사람은 아닌데!"

오윤서가 옆에서 말했다.

"예지야. 너 들켰나 봐."

정예지가 혀를 찼다.

"쳇. 배 나왔다고 했다고 복수하나 보다. 근데 이거 완전 비싼 건데 왜 들켰지?"

***

칼에 찔릴뻔한 도인선이 직접 경찰에 신고했다.

순찰차는 금방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경찰들이 바닥에 쓰러진 청부업자 두 명을 보고 인상을 썼다.

"신고자분께서 이렇게 하신 겁니까?"

도인선 기자가 도로 물었다.

"제가 그렇게 싸움 잘할 것처럼 보이나요?"

"아니군요."

"당연히 아니죠."

"그런데 이 사람들 너무 많이 다쳤는데요. 구급차부터 불러야…."

옆에 서 있던 차의 문이 열렸다. 거기서 오윤서가 내렸다.

"제가 목격자예요. 저 두 놈이 도 기자님을 칼로 찌르려고 했어요. 분명히 봤어요."

경찰은 깜짝 놀랐다.

"헉! 오윤서! 아니, 오윤서 씨?"

정예지도 차에서 내렸다.

"맞아요. 나도 봤어요. 막 칼 휘두르고 엄청 위험했어요."

"헉! 정예지 씨?"

"진짜 장난 아니었어요. 오늘이 도 기자님 제삿날인 줄 알았다니까요?"

"그, 그렇습니까?"

"저기 칼 있잖아요. 저기도 있고요. 둘 다 저놈들 칼이에요.

"어…. 일단 수갑부터 채우자고."

경찰들이 맞아서 기절한 두 명의 손에 수갑을 채웠다. 바닥에 실제로 칼이 굴러다니는 데다가 유명 연예인 두 명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 대화에서 나온 피해자의 신분도 문제였다.

경찰이 도인선에게 물었다.

"기자이십니까?"

도인선이 명함을 꺼냈다.

"소리언덕 도인선 기자예요. 기자 협회에도 등록되어 있어요."

유명 연예인 두 명이 목격자이고, 칼에 찔릴 뻔한 피해자는 기자다.

단순 강도 사건이라도 일이 간단하지 않은데, 이러면 현장에 출동한 경찰 선에서 처리하기 어렵다.

경찰 한 명이 지원을 요청했다. 다른 경찰은 도인선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일단 지구대로 가셔야 할 듯합니다."

정예지가 옆에서 말했다.

"그래요. 우리도 가서 다 증언할게요."

"본격적인 진술은 경찰서로 가셔야 할 것 같은데…. 그런데 누가 이렇게 한 겁니까?"

정예지가 얼른 대답했다.

"우리 매니저랑 경호원이요."

"네?"

차우진과 로드 매니저가 차에서 내렸다. 로드 매니저가 삼단봉을 가슴 앞으로 세운 후에 옆으로 뻗었다.

"여기 경호원 형님이랑 제가 잡았습니다."

"어…. 그러면 두 분도 같이 가셔야겠는데요?"

정예지가 반발했다.

"앗!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체포하세요?"

경찰이 급히 설명했다.

"아니요! 체포는 아닙니다. 협조 요청입니다. 협조 요청."

***

그들은 지구대는 스치기만 하고 경찰서로 이동했다.

유명 연예인 두 명은 얼굴을 선글라스와 마스크, 스카프로 가렸다. 하지만 옷 스타일이나 몸매를 숨기긴 어려웠다.

경찰서에 있던 사람들의 고개가 자기도 모르게 그쪽으로 돌아갔다.

"누구지?"

"얼굴이 안 보이는데도 미인이라는 걸 알겠다."

"쩌는 미인이라는 데 내 손목을 건다."

"경찰이 손목이나 걸고 잘하는 짓이다."

형사팀장이 그들을 안내했다.

"이쪽 회의실로 오시죠. 그게 편하실 것 같습니다."

정예지가 방긋 웃었다.

"어머. 고마워요. 형사님. 친절하시다."

"하하. 형사팀 팀장입니다."

"어머! 고위층!"

"하하하."

그들은 회의실에서 오늘 본 걸 진술했다.

오윤서나 정예지는 목격자라서 거리낄 것이 없었다.

도인선은 피해자다.

문제는 차우진이다.

형사팀장이 설명했다.

"차우진 씨가 그놈들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힘을 많이 쓰셨던데, 이거 그쪽에서 걸면 걸립니다."

"도 기자님을 칼로 찌르려던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건 그런데요. 음…. 블랙박스 영상이 있으면 도움이 될 겁니다."

오윤서가 말했다.

"없어요."

"예?"

"최근에 고장 났는데 바빠서 못 고쳤어요."

아까 일부러 고장 냈다. 차우진이 일방적으로 패는 장면을 공개할 순 없어서였다.

도인선도 말했다.

"저 진짜로 찔렸어요. 여기 옷에 구멍 난 거 보세요. 뽕에도 칼자국이 있다니까요?"

"아니, 그것까지 보여주실 필요는 없…."

"뽕을 증거물로 제출할게요. 그리고요."

도인선이 더 밀어붙였다.

"저놈들은 칼을 가지고 있었잖아요. 그런 놈들을 어떻게 살살 잡아요? 우리 경호원은 맨손인데."

"그야 그런데…."

정예지가 말했다.

"저쪽에서 법적으로 걸면 우리 쪽에서도 법적으로 확실히 받아치고 언론도 움직일 거예요. 윤서 언니랑 저랑 쫌 유명한 데다가, 도 기자님은 기자잖아요."

도인선이 맞장구쳤다.

"맞아요. 기자들은 누가 어디서 맞으면 서로 협조 잘하거든요."

형사팀장이 소매로 땀을 닦으며 말했다.

"저쪽도 함부로 걸지는 못할 겁니다. 오히려 조용히 넘어갔으면 하겠지요."

팀장이 차우진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선생님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걱정 안 합니다."

차우진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칼잡이가 법으로 고소하면 차우진은 법으로 해결할 생각이 없다.

'고소할 놈이 없어지면 고소는 못 하겠지.'

***

그들은 진술을 마치고 경찰서를 나왔다.

차우진이 도인선에게 물었다.

"용구 짓입니까?"

"그럴 거예요. 그놈들한테 최용구 짓이냐고 물었을 때는 애매하게 대답하긴 했지만요."

"애매하게?"

"최용구가 시켰냐고 물어보니까 처음에는 그렇다고 하더니, 골목에 들어가고 나서는 누군지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저놈들은 도 기자님을 유인하기 위해 거짓말했다고 하겠군요. 단순 강도였다고 할 테고요. 그래야 처벌이 그나마 약할 테니까."

"그래도 최용구가 시킨 거 맞아요. 아까 마주치기도 했고, 이 정도로 원한을 쌓은 건 최용구뿐이니까요."

"용구가 저놈들을 직접 보내지는 않았을 겁니다. 누구 짓인지는 압니까?"

"최용구와 커넥션이 있는 조폭 두목이 있어요. 그놈이 보냈을 거예요."

"두목 이름은요?"

"조사하는 중이에요. 거의 다 찾았으니까 조만간 알아낼 수 있어요."

차우진이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오늘 납치 미수 사건, 기사로 낼 겁니까?"

"당연하죠. 조회수 많이 나오겠다. 앗! 그러면 안 되는 건가요?"

차우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당연히 기사로 내야지요. 가만히 있으면 다음에 또 해도 되는 줄 알고 또 칼이 날아올 겁니다. 기사로 터트려야 당분간은 못 건드립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원래는 오늘 집에 가면 바로 기사 쓰려고 했어요. 그러다 칼 맞을 뻔했죠. 아까 트럭 사건이랑 이 기사랑 둘 다 써야겠어요."

차우진이 말했다.

"그 기사에서 내 이름은 빼줘요."

"네?"

"내가 그런 식으로 이름이 알려지는 거 별로 안 좋아해서."

"아…. 뭐. 그러시면…."

정예지가 얼른 조언했다.

"우진 오빠에 대해서는 그냥 경호원이라고 써요. 연예인 전문 경호원."

***

상칠파 두목 천상칠이 술병을 집어 던지며 화를 냈다.

"이 등신 새끼들아! 일을 실패한 것도 모자라서 현장에서 잡혀?"

"죄송합니다. 형님."

"나가! 이 새끼들아!"

부하들이 나간 후에 KMTV 부장급 기자 최용구가 마스크를 내리며 인상을 구겼다.

"천 사장. 이거 어떻게 해결할 거야?"

"기다려봐. 생각 중이잖아. 집으로 사람을 보낼까? 거기가 아파트면 어려울 텐데. 아니면 다시 한 번 습격을…."

천상칠의 동생 천중칠이 스마트폰을 검색하다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잠깐. 기사가 떴는데?"

"뭐?"

"그 여자 기자가 벌써 기사를 냈다고."

"가져와 봐!"

천중칠이 스마트폰을 넘겼다. 천상칠이 급히 기사를 확인했다.

"아니, 씨발. 무슨 기자가 경호원을 데리고 다녀?"

"기자가 아니라 같은 차를 타고 서울에 온 연예인들의 경호원이었대."

"머리 진짜 잘 돌아가네. 이러려고 일부러 연예인들하고 움직인 거였어."

최용구가 물었다.

"천 사장. 그래도 해결은 해야지?"

"해야지. 그런데 당장은 움직이기 어려워."

이제 도인선이 죽거나 실종되면 사고로 위장할 수 없다. 당연히 경찰 수사가 더 철저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다 상칠파가 연루되었다는 게 알려지면 일이 심각해진다.

최용구가 말했다.

"어지간한 건 내가 덮어준다니까?"

천상칠이 기사를 보여주며 화를 벌컥 냈다.

"어지간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그러잖아!"

***

며칠이 지났다.

도인선은 습격당하지 않았다.

차우진이 미국 스톤파인더의 사장이면서 지질학자인 정수찬을 만나기로 한 날이 왔다.

그 식사 자리는 차우진이 질벽에서 추락하는 정예지를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 차원에서 마련되었다.

그래서 오늘 식사 자리에는 정예지도 나온다.

정예지가 옷장에서 옷을 고르면서 혼잣말을 했다.

"그냥 둘이 밥 먹어도 되는데 굳이 윤서 언니도 불러달라고 해? 아무리 윤서 언니 팬이라도 이거 너무한 거 아냐?"

그녀가 툴툴댔다.

"윤서 언니는 남자친구도 있는데."

오늘 식사 자리에는 오윤서의 남자친구인 정수찬도 온다고 했다.

"우진 오빠가 아쉬워하겠네. 꼴 좋다. 흥이다."

***

차우진은 평소보다 옷을 깔끔하게 입었다.

차유리가 그걸 보고 물었다.

"너 뭐냐?"

"뭐가?"

"여자 만나러 가냐?"

"응."

차유리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너 누구 만나는 거냐? 야. 조심해.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여자가 너 만나준다는 건 네 장기를 노리는 거야."

"그런 사람 아니야."

"얼굴에 아니라고 써놨냐? 내가 뒤 좀 캐 줄까? 아니다. 뒤 캐는 건 수연이가 최고지. 당장 전화해야겠다."

"그런 거 아니라고."

"네가 어떻게 알아? 이름이 뭐야?"

"정예지."

"정예지? 연예인하고 똑같은 이름이네? 야. 그거 본명 아니다. 아무 이름이 생각나는 대로 둘러댄 거야."

"얼굴도 똑같아. 연예인 정예지 본인이니까."

"뻥 치고 있네."

"진짜야."

"응?"

"진짜라고."

차유리가 입을 떡 벌렸다.

"네가 정예지를 어떻게 만나? 정예지가 머리에 총이라도 맞았대?"

"오윤서 씨도 같이 만나."

"아…. 데이트가 아니구나."

"당연한 거 아냐?"

차유리가 납득한 얼굴로 소파에 도로 누웠다.

"하긴. 당연하지. 네 주제에 연예인이라니. 말도 안 되지."

"내가 어때서?"

"네 배한테 물어봐라."

"이건 안 뺄 거라고."

"그런데 정예지랑 오윤서를 네가 왜 만나는데?"

"촬영장 알바 하다가 도와준 게 있거든. 그래서 밥을 산대."

"비싼 거 사달라고 해라."

"당연히 비싸고 맛있는 거 사겠지. 연예인들이니까 좋은 거 많이 먹어봤을 거야."

***

차우진이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곳은 국밥집이었다.

정예지가 씩 웃으며 말했다.

"윤서 언니 남자친구분께서 미국에 사시거든요. 미국에 있을 때는 이 집 국밥이 그렇게 그리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여기로 하자고 했어요."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일부러 그런 거 같은데?"

"어머어. 제가 왜 일부러 이러겠어요? 여기가 언니랑 그분이 데이트할 때 자주 온 곳이라니까요?"

어차피 뭘 먹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정예지와 데이트하러 온 것도 아니다.

오늘 차우진의 목표는 정수찬이다.

오윤서가 사과했다.

"예지가 꼭 여기로 해야 한다고 해서요."

"어머. 언니. 내가 그랬어요?"

"응. 그랬어."

82. 정수찬

그 국밥집에는 몇 명만 따로 밥을 먹을 수 있는 별실이 있다. 오윤서는 그곳을 데이트 장소로 이용하곤 했다.

정수찬은 조금 늦게 도착했다.

"정수찬입니다. 제가 괜히 낀 건 아닌가 싶군요. 하하하."

"그럴 리가요. 차우진입니다."

정수찬이 명함을 내밀었다.

정예지는 차우진은 명함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얼른 차우진에 관해 설명했다.

"우진 오빠는 배우도 하고, 스태프도 하고, 경호원도 하고, 그리고 또 전기 전문가예요."

"그걸 다 한다고?"

"자유로운 영혼이죠. 예술가 느낌이랄까?"

차우진이 말했다.

"왜 내 소개를 예지 씨가 할까?"

"누가 하면 어때요?"

식사와 함께 간단한 이야기가 오갔다. 차우진이 수육을 먹으며 말했다.

"정수찬 박사님. 1월에 발표한 논문, 잘 읽었습니다."

정수찬은 살짝 놀랐다.

"그 논문을 보셨다고요?"

"예. 관심이 있어서."

정예지가 옆에서 물었다.

"왜? 뭔데요? 나도 읽어본 건가?"

오윤서가 말했다.

"넌 못 읽어."

"나 한글 알거든요?"

"그거 영어로 발표된 논문이야. 전문용어도 많이 나오고 내용도 어려워. 나도 읽어보려고 했는데 하나도 모르겠더라."

정예지가 의심했다.

"그런 걸 우진 오빠는 어떻게 알아요? 진짜 읽어본 거 맞아요?"

차우진이 대답했다.

"물론."

읽어본 적은 없다.

대신에 멸망 초기에 일반인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정리된 기사나 영상 정보는 여러 번 보았다.

정수찬이 물었다.

"영화계에서 일하신다고…."

"여러 가지 일을 합니다."

"그 논문은 주목받지 못했는데, 그 분야에 관심이 많으신가 봅니다."

"그런 편이죠."

정수찬이 논문 이야기를 슬쩍 꺼냈다.

"제 논문이 마그마 상태에 관한 거라는 것도 아시겠군요."

"개념만 이해한 거죠."

차우진은 멸망한 세계에서 그 논문을 분석한 기사나 영상을 많이 봤다. 그래서 정수찬이 논문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꺼냈을 때 적당히 대답할 수 있었다.

심지어 지적질도 가능했다.

차우진이 말했다.

"그런데 그 이론에 문제가 조금 있더군요."

"예?"

그 논문 속 이론은 아직 완성된 게 아니다. 아직은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그 이론은 은퇴했던 정수찬이 지구 멸망을 막아보려고 돌아온 후에야 완성된다.

하지만 그러면 너무 늦는다.

차우진이 말했다.

"폭발 위험이 있는 마그마의 압력을 낮추는 방법."

멸망급 재난을 막으려면 그게 필요하다.

"지금 그 논문에서 주장하는 방식대로 하면 마그마 폭발을 가속할 위험이 있습니다."

"아. 그걸 파악하셨군요!"

"역시 문제가 뭔지 이미 알고 계셨군요."

"성공 확률이 더 높긴 하지만, 변수를 통제하지 못하면 위험한 건 사실이니까요. 더 연구해서 그 부분을 보완할 생각입니다."

"문제는 역시 지각 내부 상황을 직접 볼 수 없다는 거겠지요?"

"그렇지요. 현재 확보한 데이터만으로 계산하고 시뮬레이션을 돌려야 하니까요."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예? 어떻게요?"

논문에서 어디를 수정해야 하는지는 기사에서 봤지만, 직접 설명할 정도로 구체적인 수식을 기억하는 건 아니다.

생각나는 건 힌트 정도다.

'그건 정수찬이 나중에라도 해결하는 문제니까, 지금도 연구만 계속한다면 정답을 찾을 수 있겠지.'

그러기 위해서 꼭 써야 하는 장비가 있다.

"딥어스테크라는 회사에서 신형 마그마 탐지기를 개발 중입니다. 이미 테스트 중이죠."

"네? 마그마 탐지기요?"

"원래는 광물을 찾기 위한 탐지기인데, 특정 상황에서는 아주 깊은 곳의 마그마 상태를 볼 수 있습니다."

"특정 상황이라면…."

"지진이죠."

정수찬이 오윤서를 돌아보았다.

"잠깐만요. 윤서야. 저번에 영화 촬영장에서…."

"지진 때문에 예지가 절벽에서 추락할 뻔했어요. 그때 구해준 분이 차우진 씨고요."

정예지는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지진 이야기가 나오자 손뼉을 쳤다.

"앗! 그때 옆쪽에서 뭔가 테스트한다던 그 회사가 거기에요? 우진 오빠도 그날 그 연구팀이랑 왔던 거잖아요."

차우진이 대답했다.

"맞아요. 그때 테스트하던 탐지기가 그겁니다. 마침 그때 지진이 발생해서, 지하의 마그마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정수찬이 물었다.

"강원도 지하의 마그마요?"

"지하 깊은 곳에 큰 덩어리가 있더군요."

"오호."

"백두산 쪽과 일본 쪽 정보도 꽤 얻었습니다."

"그 탐지기의 정확도는 어느 정도입니까?"

"아직 개발 중이라 그리 높지는 않습니다. 지진이 제법 컸던 덕분에 넓은 범위를 탐색했지만, 정확한 지도를 그릴 정도는 아닙니다."

"앞으로 개발 계획은…."

"회사가 총력을 기울여 개발 중입니다."

딥어스테크 연구소는 차우진이 통제할 수 있다.

문제는 정수찬이다. 멸망급 재난을 막으려면 정수찬의 회사인 스톤파인더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마그마 폭탄은 강원도나 백두산, 일본에서만 터지는 게 아니다.

지구 곳곳에 마그마 폭탄이 숨겨져 있다.

차우진이 말했다.

"스톤파인더도 탐지기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시면 좋을 텐데요. 피드백을 주시면 도움이 많이 될 겁니다."

정수찬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주식회사잖습니까? 돈이 안 되는 프로젝트는 투자자들이 싫어합니다."

차우진도 안다.

'그 마그마 폭탄들이 10년 후에 동시다발적으로 터진다는 걸 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어떤 곳에서는 화산이 터지고 어디서는 멀쩡하던 땅이 터진다. 터진 지역은 당연히 폐허가 된다.

나라 하나가 통째로 날아간 곳도 있다.

그런 마그마 폭탄이 한두 개가 아니다. 지구 곳곳에 여러 개가 깔려있다.

그런데 그건 너무 깊은 곳에 있다. 지금 당장은 위험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

'10년 후에 멸망급 재난이 터진다고 아무리 말해봤자, 이론적 근거를 댈 수 없으면 의미 없어.'

그걸 증명하려면 정수찬이 본격적으로 조사하고 연구해야 한다.

'역시 이 정도로는 설득이 안 돼.'

예상은 했다. 그래도 시도는 해야 했다.

그렇다고 포기한 건 아니다. 다음 계획이 또 있다.

'딥어스테크의 탐지기가 개발되고 정수찬도 계속 활발히 활동한다면 결국 밝혀내겠지.'

멸망 초기의 전문가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은퇴했던 정수찬이 복귀한 후에 대응책 개발이 급속도로 진행된 것이 그 증거였다.

'그러니까 정수찬이 은퇴하지 못하게 막고,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설득해야 해. 그럼 더 빨리 결과가 나올 테니까.'

차우진이 오윤서를 보았다.

정수찬이 모든 의욕을 잃고 회사도 팔아버린 건, 오윤서가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 사고가 언제였더라?'

그녀가 크게 다치는 때가 있는데,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았다.

'창수 형이 병원에서 촬영하다가 사고를 당한다고 했는데….'

그때 그녀를 구해야 한다는 건 안다. 하지만 미리 경고할 수는 없다.

미리 경고했다가 상황이 변하면 차우진이 돕지 못할 수도 있다.

차우진이 오윤서의 곁을 계속 맴돌 수는 없다. 그 정도 친분은 없다. 그러다 괜히 정수찬과의 관계가 틀어지면 될 일도 안 된다.

차우진은 오윤서와 가까운 정예지를 돌아보았다.

'이쪽에 길이 있으려나.'

정예지가 하품을 하다가 얼른 입을 가렸다.

"앗! 이거 그거 아니에요."

"우리 이야기가 어려워서?"

"날 뭐 바보로 아나!"

"우리 집 바보보다는 똑똑한 거 인정합니다."

"네? 우진 씨네 집 바보요?"

"우리 누나."

"혹시 누나가 하시는 일이…."

"형사."

"와. 똑똑하시겠다! 경찰 시험 어렵잖아요."

차유리는 그런 시험 없이 무술특채로 경찰이 됐다.

정예지는 만족했다.

"그럼 나도 똑똑한 거네. 칭찬이었구나."

"어…."

"뭐죠? 그 묘한 표정은?"

정수찬이 웃었다.

"하하하. 국밥 먹으면서 제 논문 이야기를 이렇게 깊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정예지는 또 논문 이야기가 나올까 봐 얼른 말했다.

"그럼 우리 밥 먹고 나서는 어디 갈까요? 소주? 위스키? 코냑? 아니면 와인?"

차우진이 물었다.

"왜 선택지가 다 술입니까?"

"맥주는 배부르잖아요."

"그러니까 왜 다 술이냐고요."

"제가 살게요! 오늘 이거 제가 사는 자리잖아요."

***

차우진은 정예지의 소개로 방송국에 출근한다.

자주 가는 건 아니다. 그의 일은 촬영 세트 제작에 전기 기술자가 필요할 때뿐이다. 그것도 사람이 부족할 때만 전화가 왔다.

전화가 왔다고 꼭 가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가 거절하면 다른 사람을 부른다.

오늘도 차우진을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마포구 세트장이요? 거기에 드라마 세트장이 있습니까?"

- 아! 저희는 '친구와 연인 사이'라는 드라마인데, 잘하신다는 소문 듣고 전화 드렸습니다.

"아아. 친구와 연인 사이."

차우진은 그 드라마를 안다.

'오윤서가 촬영 중인 드라마.'

그는 방송국에 출근할 때는 그 드라마의 촬영 일정도 확인하곤 했다.

상대방이 계속 설명했다.

- 빌린 건물에 사무실 세트를 새로 꾸미는 일 때문인데요. 그 드라마에 딱 맞는 건물이 합정역 근처에 있거든요.

"저한테 먼저 전화한 겁니까?"

- 아니요. 다른 분을 불렀는데, 그 건물 전기 배선이 이상해서 차우진 씨를 불러야 한다던데요.

"내가 방송국 일을 얼마나 했다고 나를 그렇게 믿습니까?"

- 실력 좋다고 소문났던데요.

그가 통화하는 곳으로 딥어스테크 연구소 곽수혁 팀장이 걸어왔다.

"차 이사님. 개발회의 참석하셔야죠."

차우진이 휴대폰을 손으로 막고 곽수혁을 돌아보았다.

"개발은 곽 팀장님이 알지 내가 뭘 안다고요."

"농담도 잘하십니다. 차 이사님이 우리 탐지기의 중요한 개발 포인트를 한두 번 짚어주신 게 아닌데요. 저보다 더 본질을 잘 알고 문제점도 다 파악하셨잖습니까?"

차우진이 파악한 게 아니다. 멸망 초기의 다큐멘터리와 기사에서 본 것 중에 생각나는 걸 말했을 뿐이다.

그게 그의 기억에 남아있는 건 중요한 이슈들인 데다가 여러 번 봤기 때문이다.

어쨌든 차우진이 개발 2팀에 알려준 건 멸망한 세계의 전문가들이 찾아낸 과거의 실수들이다.

개발 2팀 사람들은 차우진은 언제나 정답만 말한다고 생각했다. 대단한 공학자라고도 착각했다.

물론 깊게 이야기하면 당장 밑천이 드러난다. 그래서 차우진은 깊은 이야기는 피하는 편이다.

'지금도 곤란한 걸 물어볼 분위기인데?'

자리를 피할 핑계가 필요했다. 어차피 오윤서 때문에라도 이 드라마 촬영장에 가봐야 한다.

차우진이 휴대폰을 들었다.

"주소 보내주시죠. 지금 가겠습니다."

- 아! 고맙습니다!

차우진이 통화를 마치고 말했다.

"난 바빠서 그 회의 참석 못 합니다."

"네? 비서실에서 차 이사님은 오늘 일정이 없다고 들었는데 어디 나가십니까?"

"전기 공사하러 갑니다."

"네?"

"날 애타게 찾는 공사 현장이 있어서."

"아니, 왜 아직도 그걸…."

"오늘 개발회의는 곽 팀장님만 믿겠습니다."

***

차우진이 마포구 합정동으로 이동했다.

한강이 멀지 않은 곳에 낡은 건물이 서 있었다.

차우진이 건물의 전기 설비 상태를 조사했다.

"여기를 고쳐서 세트장으로 쓰시겠다고요? 굳이?"

"문제가 많습니까?"

"건물이 버려진 거나 마찬가지라서 배전반이나 분전반이 다 나갔네요. 이건 정식으로 업체에 맡겨 수리해야 합니다."

조연출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는 촬영 끝나면 철수할 텐데, 그리고 이 건물도 낡고 텅 빈 건물인데 전기 공사를 해줄 순 없잖습니까? 예산 문제가 있어서…."

"그래서 나한테 해결해달라?"

"먼저 섭외한 분한테 이야기했더니, 이건 차 기사님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던데요."

"그분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 말만 남기고 갔습니다."

"튀었구나."

조연출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하하. 역시 그런 거군요."

"이거 답이 없는데…."

"어떻게 좀 도와주시죠."

지금 이 드라마는 차우진이 원래 일하던 곳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 오윤서가 출연한다.

차우진이 물었다.

"이 드라마에 병원 장면도 나오지요?"

"나옵니다. 조만간 병원에서 촬영이 있습니다."

83. 유소진

유소진은 연쇄살인마 마상국에게 납치됐던 피해자다.

그녀가 지금은 차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살해당하기 직전에 연쇄살인마 마상국이 죽었다.

그녀의 오빠가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차에서 전화를 받았다.

"나 촬영 현장 앞이야."

- 촬영팀에는 내가 이야기를 해뒀으니까, 너는 안 나가도 돼.

"괜찮아. 나 다 극복했어."

- 하지만….

"원래 내 인생으로 돌아가고 싶어. 죽어버린 살인마 새끼 때문에 내 생활을 포기하긴 싫어."

그녀는 마상국에게 납치돼 죽어갈 때 다시 예전처럼 살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 지금 그 기회가 왔다.

그녀가 심호흡하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괜찮아. 다 괜찮아."

그녀가 차에서 내렸다. 바로 앞에 낡은 건물이 보였다.

유소진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촬영 현장에 복귀했다.

***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차우진이 그쪽을 돌아보았다.

젊은 여자가 현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녀를 환영했다.

"유소진 작가님. 현장 복귀를 환영합니다!"

그녀가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이제 건강은 괜찮으신 거죠?"

그녀의 몸에는 마상국 때문에 생긴 칼자국이 몇 개나 있다.

"그럼요. 다 나았어요. 이제 안 아파요."

차우진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그녀를 보며 조연출에게 물었다.

"누구십니까?"

"이 드라마 쓰신 작가님이요."

"젊어 보이는데."

"그렇죠. 이번 드라마가 첫 장편인데, 대본이 진짜 좋습니다. 전에 사고를 당하셨을 때는 드라마까지 다 엎어지는 거 아닌가 했었죠."

"안 엎어진 이유가 있습니까?"

"이거 사전제작 드라마니까요. 덕분에 병원에서 치료받고 나올 시간이 충분히 있었죠."

"조만간 방송 시작한다면서요. 촬영이 다 끝났습니까?"

"아니요. 사전제작 드라마로 계획했는데, 지연되는 바람에 얼마 못 찍고 바쁘게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래도 되나 보군요."

"유 작가님 집에서 이쪽 일을 하니까 다른 문제는 알아서 잘 해결했죠."

"그렇군요."

차우진은 유소진을 오늘 처음 보는 게 아니다. 연쇄살인마 마상국의 창고에서도 그녀를 보았다.

그가 그녀의 표정을 보며 생각했다.

'몸은 후유증이 없어 보이는데, 왜 억지로 웃고 있는 것 같냐.'

그녀를 구출할 때가 생각났다.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조금 도와주고 싶어졌다.

어차피 오윤서 때문에라도 이 드라마에 발을 담그긴 해야 한다.

차우진이 조연출에게 말했다.

"여기 내부 전기 시설 수리는 때려치우고."

"아이고. 이 장소 겨우 섭외했는데."

"외부에서 선 끌어와서 해결하겠습니다."

"어? 그러면 해결됩니까?"

"좀 부족하긴 해도, 딱 필요한 공간만 세팅하면 촬영은 할 수 있습니다."

"이야아. 역시 차 기사님!"

"대신에 발전차량을 써야 합니다. 거기서 전기를 끌어올 거라서."

"그건 피디님한테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연출이 피디에게 차우진의 말을 전했다.

피디가 이 드라마의 작가인 유소진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병원에서 치료받거나 집에서 쉴 때도 대본 수정 작업을 했다.

"유 작가. 이거 어디 다른 데서 찍는 거로 수정할까? 여기서 찍으면 준비하는데 시간 걸릴 것 같은데."

"아뇨. 이거 꼭 여기서 찍어야 돼요. 대본 쓸 때 이 건물을 보면서 썼단 말이에요."

그녀가 조연출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임시 전기 공사는 얼마나 걸려요?"

조연출이 당황했다.

"네? 그건 안 물어봤는데…."

"전기 기사님은 어디 있죠?"

"저기."

"가요. 어떻게 공사할지 물어보고 싶으니까요."

유소진과 피디, 조연출이 차우진을 찾아갔다.

그녀는 차우진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저기요. 혹시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어요?"

차우진은 그녀가 알아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마상국에게 납치됐을 때 많이 얻어맞고 칼에도 찔렸다. 맞은 눈이 너무 부어서 앞을 선명하게 보지도 못했다.

게다가 그때 차우진은 마스크를 쓰고 배도 집어넣은 상태로 싸웠다.

"우연히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르죠."

"그런가?"

피디가 차우진에게 물었다.

"공사하는 데 얼마나 걸립니까?"

"대본을 훑어봤는데, 거기 나온 거 다 해결하려면 사흘?"

"우리 촬영 스케줄이 딱 사흘인데…. 기간을 줄일 방법은 없습니까?"

"있지요. 충분한 예산과 인원을 투입하면 시간은 줄어듭니다."

"아니, 그게 안 되니까…."

"그럼 제 말대로 하셔야지요."

이미 다른 전기 기사가 두 손 들고 빠졌다. 차우진이 아니면 대안이 없다.

차우진이 유소진의 얼굴을 본 후에 대안을 제시했다.

"대본을 보면 촬영 장소가 한 곳이 아니더군요. 이 공간에 먼저 전기 넣어드릴 테니까 촬영하시죠. 그러는 동안 다른 곳도 작업해둘 테니까요."

피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촬영이 좀 복잡해지긴 하지만 그러면 되겠네요."

이 드라마는 앞부분을 좀 찍어놨기 때문에 방영 시작 일정은 지킬 수 있다. 그렇다고 스케줄에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나머지 부분도 서둘러 찍어야 나중에 탈이 안 난다.

차우진은 다른 드라마에서는 이렇게 일하지 않는다. 사흘이나 연속으로 하지도 않는다. 그러면 다른 일에 영향을 끼친다.

이 드라마에 오윤서가 출연하기지만, 문제가 되는 병원 촬영 일정은 이미 알아냈다. 병원 촬영 때 스태프로 참여하면 좋지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방법은 있다.

'그래도 기왕이면 이 드라마에 참여하는 게 자연스럽겠지.'

마음에 걸리는 것도 있었다.

유소진은 차우진의 정체를 추측할 수 있는 말은 경찰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에 대해서는 본 게 없다고 딱 잡아뗐다니까, 나도 좀 도와주지 뭐.'

차우진이 대답했다.

"촬영은 점심 드시고 오늘 오후부터 하시죠."

피디가 물었다.

"그렇게 빨리요?"

"이 장소에만 먼저 전기 넣어드린다니까요."

"그럼 우리야 좋지요!"

***

오후가 되자 한쪽에서는 드라마 촬영이 진행됐다.

차우진은 자기가 작업하는 쪽은 전기를 넣지 않고 알아서 작업했다.

유소진이 피디에게 물었다.

"저기서 전기 공사하는 분이요. 어떤 사람이에요?"

"아. 현장에서 급할 때 부르는 사람인데, 실력이 좋대. 빠르고 정확하게 해결해준다더라."

"그렇게 실력이 좋은데 왜 급할 때만 불러요?"

"방송국 직원이 아니야. 찾는 곳이 많나 봐. 시간이 맞아야만 와줄 수 있대. 오늘은 우리가 운이 좋았지. 사흘이나 해준다잖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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