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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9% MULTIVERVENENOSO / Chapter 2: 2

章 2: 2

< 판매 개시(2)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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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가 싸워! >

장비 일체를 주문했다.

환상 여우 가죽 코트, 손목, 발목 보호대와 허리띠, 조끼와 바지, 일섬(一閃)을 펼칠 유엽비도(柳葉飛刀), 비폭(飛瀑) 용도의 폭우이화정과 사혈침, 나비 모양의 혈접(血蝶)···.

일주일을 기다려야 하는데.

남는 시간에 해독제 재료나 충분히 채집해두자.

그렇게 독초를 채집하고 법제해 원액을 만들고.

모기 해독제의 판매도 순조롭다.

매출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여차하면 매진.

언론들도 뒤늦게 취재에 열을 올렸다.

지역 신문사 '구례자유일보'에서는.

<백스 드럭샵, 모기독 해독제가 구례를 휩쓸고 있다.>

<개발자 김태주는 누구? 이름과 나이 말고는 아는 게 없어.>

<구례에서 활약하는 레이드 팀원들의 반응은? 모두 찬양 일색.>

<모기독 해독제가 구례를 구했다. 마수 웨이브 가능성 줄어들어.>

<시민들, 백스 드럭샵의 성공을 반기는 분위기, 오랫동안 구례 소외 계층을 위해 노력해온 백홍표 사장.>

그런데 조금 이상한 감이 든다.

백스 드럭샵이 모기 해독제로 구례 약국 시장을 휩쓸고 있음에도 희한하게 조용했다.

여타 약국이나 제약회사들의 손해가 막심할 텐데, 이쯤이면 뭔가 액션이 나와야 하는 게 아닌가?

당황해하거나, 간을 보는 중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필사적으로 약을 분석하고 있겠지.

제네릭, 즉 카피약이라도 만들어 보려고.

레이드에 필요한 약에는 허가 절차가 간소한 대신 특허권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 약 성분이 똑같지만 않으면 특허에 위배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비슷한 해독제 카피해서 만들어 놓고 거기에 비타민제 몇 개만 섞어도 무사통과.

하지만 분석해 봤자, 혼원무상독령공의 법제 방식을 파악이나 할 수 있을까?

'한 2년은 족히 걸릴 거다.'

어쩌면 더 걸릴지도.

모기 해독제.

몇 년 동안은 든든한 캐시카우가 될 터.

태주는 호텔방에서 룸서비스를 통해 아침을 먹었다.

생전 처음 경험해보는 호사스러운 생활.

파주 영지에 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비교조차 안 되지.

파주는 가난한 영지였으니까.

밥도 먹었겠다, 슬슬 준비하고 나가려 참이었다.

그런데!

띠리링!

외출복을 입자마자 걸려온 전화.

'백사장님인가?'

아니었다.

- 어이, 김씨!

"···아! 안녕하세요."

잠시 짐꾼 일을 할 때 알았던 중개인.

- 얼굴 보기가 이렇게 어려워? 일은 그만둔 거야? 어디 아픈 데라도 있어?

"네, 잠시 쉬고 있던 참입니다. 여전히 잘 계시죠?"

- 하아, 잘 지내긴 하는데, 요즘 짐꾼 수요가 늘어나 미치겠어. 찾는 데는 많고, 사람은 모자라고, 모기 해독제 때문에 구례에 마수 레이드팀이 엄청나게 늘어났잖아.

"힘드시겠어요."

모기 해독제의 나비효과인 듯.

실제로 구례 자유도시는 또 한 번의 부흥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곳곳에서 레이드팀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지리산 밀림 지대는 삼한제국 내에서 마수들의 밀도가 높기로 유명한 지역 중 하나.

그동안 그놈의 지긋지긋한 모기 때문에 사냥 만족도가 최하였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 그래서 부탁이 있는데 말이야.

"뭔데요?"

- 짐꾼 하나가 펑크를 냈어. 이번 한 번만 도와줘.

"···어."

- 짐꾼 대타 뛰어주면 안 될까? 보수는 넉넉히 챙겨줌세.

고민된다.

이젠 짐꾼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러죠. 도와드릴게요. 이번 한 번만."

- 오! 고맙네. 정말 고마워.

도저히 거절하지 못하겠다.

돈 한 푼 없이 구례에 처음 와서 일용직 짐꾼 일을 시작했을 때, 여러모로 도와준 사람이 바로 이 중개인, 물론 자신이 일을 잘한 이유도 있지만.

은혜는 10배로 갚아주라는 말이 있다.

10배까진 아니더라도 이 정도는 들어줘야지.

물론 원한은 100배.

태주는 대용량 짐꾼용 배낭을 꺼냈다.

원래는 버리려고 했는데.

호텔을 나와 약속 장소로.

옛날 옛적 지리산 국립 공원 주차장이 있던 자리.

'저 사람들이군.'

중개인이 스마트폰으로 레이드 팀장의 사진을 보내왔다.

"안녕하세요. 짐꾼 대타로 온 김태주라고 합니다."

그러자 팀장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면서 쏘아붙였다.

"씨발,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너 때문에 시간이 얼마나 지체됐는지 알아?"

"···대타로 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래서? 어쩌라고? 나불대지 말고 배낭이나 메고 따라와."

아무래도 잘못 왔나 보다.

원래 오기로 한 짐꾼이 펑크낸 이유를 알겠다.

'레이드팀 숫자도 많이 줄였네.'

원래는 15명이 국룰.

하지만 현 인원 7명.

짐꾼 2명, 적합자가 3명, 각성자 2명.

모기 해독제 판매 때문에 레이드팀 인원이 줄어드는 추세라지만 이건 너무 줄였다.

"이 인원으로 갑니까?"

"어라? 짐꾼 새끼가 건방지게···, 뒈질래?"

"야야야, 참아! 이 새끼 죽이면 짐은 누가 들어? 그리고 너! 한 번만 더 궁시렁거리면 팔다리 잘라서 마수 먹이로 던져준다. 알아들었어?"

"···."

끼리끼리 논다더니, 각성자 두 놈이 똑같다.

전투 보조로 같이 온 적합자들도 다를 바 없었다.

"구례 짐꾼 새끼들은 먹고 살 만한가 봐? 참나! 이 인원으로 갑니까? 짐꾼 따위가 이런 얘기 하는 거 처음 들어봤네."

"그만 패라. 저러다 도망갈라."

"낄낄낄, 이미 왔는데 지가 어쩌겠어? 도망가면 나한테 죽는 거지."

"쯧쯧, 빨리 가자. 프로님들 심사가 불편해지기 전에."

각성자나 적합자나.

대체 이 새끼들은 뭐지?

나름 짐꾼 생활 꽤 해봤는데, 이렇게 싸가지없는 놈들은 처음,

태주의 내면에서 점점 살심(殺心)이 치솟아 오른다.

'죽여야겠군.'

여기선 아니고 조용한 곳에서.

군용대검에 독기를 불어넣어 쿡, 하고 찌르면 일곱 발자국도 못 가서 죽겠지.

적합자와 각성자는 조금 더 오래 가려나?

'증거가 남으면 곤란하니까 6명 모두 독으로 죽이고, 시체는 화골산으로 녹여···.'

아! 화골산은 아직 없지?

시체야 밀림에 둬도 되지 않을까?

전처럼 마수가 먹어 치울 테니.

순간!

'응?'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람 죽이는 걸 너무나 쉽게 여기고 있었다.

'내가 왜···,'

심지어 자신 빼고 6명 다, 아무런 죄도 없는 동료 짐꾼까지 포함해서.

단지 증거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조심해야겠네.'

태주는 자신이 왜 그랬는지 알고 있다.

또 다른 자신

절대독마 당군악의 영향.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을 만나면 그냥 넘어가는 것보다 죽이는 걸 택하는 독심(毒心).

'후우!'

심호흡과 함께 살심을 가라앉히며 태주는 레이드팀 후방에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슬며시 다가와 말을 건네는 중년 나이의 동료 짐꾼.

"태주 동생, 잘 참았어."

이제 보니 안면이 있는 사람.

예전에 함께 짐꾼 일을 했던 기억이 났다.

"아! 형님이셨네요."

"어, 밀림으로 들어온 이상 기분 더러워도 참자고. 저 새끼 기분 수틀리면 우린 진짜 마수 밥이 될 수도 있어."

"···설마 그런 짓거릴 저지를까요?"

"다른 각성자야 모르겠지만 저것들은 충분히 그럴만해. 이미 소문이 파다하거든."

"알던 놈들이었습니까?"

"권동석 레이드 팀이라고, 최근에 구례로 흘러들어온 뜨내기들이야. 저 적합자들도 같은 패거리고."

그럴 줄 알았다.

아무리 공권력이 약한 구례라지만 저 짓거리 하다간 제대로 레이드 팀을 만들지도 못할 터.

"근데 소문은 무슨···,"

"며칠 전에 저놈들하고 같이 간 짐꾼 몇몇이 실종됐다는 말이 있어."

"자치위원회에서 가만히 나 뒀어요?"

"증거가 있나? 고발도 안 들어왔고, 흐지부지 넘어가는 거지."

어차피 일반인과 적합자, 혹은 각성자가 연루된 갈등에서 일반인들은 불리할 수밖에 없다.

마나에 적응한 이후, 무섭게 폭발한 인구.

삼한제국의 인구만 해도 6억이 넘었다.

인구가 많을수록 생명은 경시된다.

일반인은 말할 것도 없고, 마나 거부자가 죽으면 사인도 조사하지 않는다.

"그런데 형님은 왜 오셨어요? 여기 말고도 짐꾼 찾는데 많을 텐데."

"저놈이 팀장일 줄 알았나? 알았으면 안 왔지. 펑크낸 박씨도 여기 왔다가 저놈 얼굴 보고 돌아갔을걸?"

"아···."

된통 걸렸다.

어쨌든 왔으니 짐꾼 역할은 수행하자.

지리산 밀림으로 들어가는 레이드 팀.

늘 그렇듯 막공 레이드팀의 사냥 대상은 칼날이빨 담비.

태생이 담비인지라 가죽이 비싸게 팔린다.

놈의 이빨도.

사냥은 순조로웠다.

팀원 숫자가 적긴 하지만 모기 해독제를 복용해서인지 방충복에서 해방된 전투 요원들의 몸놀림.

서걱!

푸욱!

각성자가 담비를 처리하면 적합자들이 가죽을 벗기고 이빨을 뽑고, 짐꾼들은 부산물을 배낭에 쑤셔 넣고.

"에너지 결정체 나왔어요."

"오! 나한테 가져와!"

"분위기 좋네. 방충복 벗으니 날아갈 것 같군."

"낄낄낄, 역시 모기 걱정 안 하니 식은 죽 먹기였어."

그러더니 태주를 보며.

"야! 너 아까 이 인원으로 가냐고 물었지? 대답이 됐냐? 천한 짐꾼 새끼가 겁만 많아서는···."

"저러니 짐꾼이나 해 먹고 있지."

태주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러다 또 살심(殺心)이 올라오면 진짜 죽일지도 모르기에.

'기분은 더럽지만 빨리 끝나겠네.'

모기 해독제가 마수 레이드에 혁명을 가져온 건 맞긴 하는가 보다.

고작 5명의 전투 인원이 담비를 잡고 다니니.

하지만 그건 사냥 대상이 칼날이빨 담비일 때 가능한 이야기였다.

레이드팀은 곧 지리산에서 상대하기 어렵기로 유명한 마수와 맞닥뜨리고 말았다.

"크르르르르르···,"

묵직한 저음의 목울대 소리.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온몸의 털이란 털은 바짝 곤두설 것 같은 꺼림칙한 기분.

"어···,"

"저, 저게 왜 여기서?"

붉은 털 늑대.

몸집도 크고, 칼도 잘 안 들어간다는 빳빳한 가죽에, 흉포하기 이를 데 없는 공격성, 이놈의 가장 무서운 점은···,

"크르르르."

항상 암수 한 쌍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워우우우우!"

"우워어어어!"

늑대 특유의 하울링과 함께 앞쪽과 뒤쪽에서 동시에 나타난 붉은 털 늑대 두 마리.

"이, 이런 씨발!"

비기너 등급의 각성자 권동석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늑대 영역엔 가까이 갈 생각도 없었다.

비기너 등급의 각성자 4명이 있어도 감당하기 어려운 붉은 털 늑대.

그저 담비만 잡아 배낭 꽉 채우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마찬가지로 각성자인 친구 장원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도, 동석아! 어,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도망가야지."

하지만 뒤를 보이면 안 된다.

늑대 마수는 등을 보이는 사람을 가장 먼저 공격하는 습성이 있다.

이 위기를 타개할 방법은?

늘 해왔던 방법이 있다.

이 레이드 팀에서 가장 쓸모없는 놈들을 활용하는 것.

천천히 거리를 좁혀오는 붉은 털 늑대.

권동석은 먼저 친구 장원준에게 눈짓했다.

장원준도 권동석이 무얼 하려는지 안다.

먹이 던져주고 도망가기.

늘 이런 식으로 위기를 극복해왔다.

전투 보조 마나 적합자들도 서로 눈짓하면서 천천히 움직이는 중, 한두 번 해보나? 그렇게 짐꾼 2명을 포위했다.

2명이니 1명은 앞의 늑대에게 밀고, 나머지 1명은 뒤의 늑대에게 밀고.

늑대 마수가 짐꾼들을 덮치는 순간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간다.

태주 또한 놈들이 무얼 하려는지 눈치챘다.

'하! 이 새끼들 봐라?'

이렇게 노골적으로?

하긴!

여긴 지리산 밀림이다.

짐꾼 2명이 마수에게 죽는 다고 해서 이상할 것 하나 없고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밀어!!!"

권동석이 태주를 가리키며 적합자들에게 외쳤다.

바로 그때!

츠핏!

태주의 손에서 길게 뻗어 나온 은색의 빛이 앞을 막고 선 붉은 털 늑대의 정수리와 이어졌다.

푸욱!

군용대검이 늑대 머리에 손잡이까지 박혔다.

그럼에도 아직 남아있는 잔상.

너무나 빨랐고 또한 정확했다.

"어?"

"주, 죽었어?"

"미, 미친!"

각성자와 적합자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거 뭐지?

저 건방진 짐꾼의 손에서 뭔가 번쩍하더니 늑대 한 마리가 죽었다.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 나가는 태주,

쓰러진 늑대의 머리에서 대검을 뽑았다,

그러자,

중간이 뚝 부러져 나온 군용대검.

군용이지만 그래도 마수 부산물이 섞였을 텐데.

"에이, 부러졌네. 역시 군보급품은···,"

멍하니 태주를 바라보는 권동석과 장원준.

대체 어떻게?

각성자 2명이 협공해도 상대하기 힘든 붉은 털 늑대.

그런데 짐꾼 주제에 저렇게 쉽게 처리한다고?

"크르르···, 크릉!"

자신의 반려자가 죽자 남은 한 마리의 늑대가 증오에 찬 눈빛으로 으르릉댔다.

하지만 놈도 힘의 차이를 알아차린 듯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이빨을 드러내며 몸만 잔뜩 웅크렸다.

붉은 털 늑대의 울음에 담긴 분노.

권동석과 장원준은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살 수 있다.

저 정체불명의 짐꾼이 나머지 한 마리마저 처리해 준다면.

모두 같은 생각인지 레이드팀 모두가 태주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태주의 입이 열렸다.

무심하게 권동석과 장원준을 보면서.

"싸워."

"뭐? 어···, 네?"

"한 마리 처리해줬잖아. 남은 건 니들이 해."

"아, 아니 그게 무슨 말···,"

"싸우라고! 우린 짐꾼이고 너희들은 전투 역할이잖아."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권동석.

반려를 잃은 늑대의 분노를 어떻게 감당해?

"대, 대신 죽여주면 안 될까? 대가는 충분히 치를게. 마수 부산물과 결정체 다 넘겨줄 테니···,"

그때였다.

핏!

권동석의 오른쪽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물체.

뜨끔! 하는 느낌과 함께 뜨뜻한 액체 같은 것이 오른쪽 얼굴 측면에서 흘러내렸다.

손으로 가져가 만져보니.

"으아아아악!"

뿜어져 나오는 시뻘건 피.

사라져 버린 오른쪽 귀.

짤랑짤랑.

태주는 손안에서 동전들을 굴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도망칠 생각은 하지도 마. 뒤통수에 동전이 박히기 싫으면! 그러니까 싸워!"

< 니가 싸워!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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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점 커지는 관심 >

한 쌍의 붉은 털 늑대 마수를 상대하는 방법, 장기전이 기본이다.

두 마리를 한꺼번에 상대하면서 지속적으로 힘을 빼놓아야 한다.

되도록 오래오래.

그래야 한 마리를 죽였을 때 나머지도 어렵지 않게 죽이지.

만약 하나를 너무 일찍 죽이게 되면 다른 한 마리는 광기와 복수심으로 생사를 도외시한 공격을 감행한다.

폭주 상태.

2마리를 상대할 때보다 더 어려워진다.

지금 남은 한 마리가 달려들지 않는 이유는 바로 태주 때문, 그에게서 피어오르는 살기가 남은 붉은 털 늑대의 공격을 잠시 억제하고 있었다.

늑대 마수는 아마 고민하고 있을 터.

저기서 가장 강해 보이는 인간에게 먼저 덤비느냐, 아니면 약한 놈부터 치우느냐.

태주는 살기를 담아 마수를 지그시 노려봤다.

늑대도 개라서 서열 정리가 필요하다.

감히 니가 나한테 덤벼?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마수 잡으러 지리산 온 거 아니었나? 좀 전의 자신감은 어디 간 거야?"

권동석과 장원준은 서로의 눈을 바라봤다.

도망칠까? 아니면 싸울까?

그들도 반려를 잃은 늑대의 무서움을 안다.

전투 요원 5명.

섣불리 달려들다간 전멸.

하지만 저 수상한 짐꾼 놈도 무시할 순 없다.

대체 어떻게 저런 힘을?

얼굴엔 문신도 보이지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짤랑짤랑.

현장엔 동전 소리만 들려왔다.

"좋아! 선택의 고민을 없애주지."

피핏!

마치 소음기 권총 탄환 쏘아진 동전 한 닢.

"끄아아악!"

이번엔 장원준의 왼쪽 귀를 자르고 지나갔다.

"아, 아파! 아프다고!!!"

동시에!

"크륵!"

훌쩍 날아 도약하는 붉은 털 늑대.

태주의 공격이 다른 인간에게 가해지자 결심을 굳힌 듯했다.

강한 인간에게 먼저 덤벼들다가 다른 인간들을 죽이지 못할 수도 있다.

약한 놈부터 죽이자.

최대한 많이.

"으아! 저, 저리 가···."

몸부림치는 장원준의 목을 물어 버리면서,

콰직!

"끅?"

앞발로 권동석을 밀어 넘어뜨리고,

콰악!

커다란 입으로 권동석의 머리통을 사탕처럼 씹었다.

꽈득, 꽈드드득!

비명도 나지 않았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는 적합자들.

"사, 사람 살려!!!"

"으아아아아!"

"오, 오지 마!"

하지만 분노한 늑대의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콰직!

"악!"

꽈득!

"켁!"

뿌득!

"사, 살려···,"

순식간에 5명을 물어 죽인 늑대가 머리를 하늘로 젖히며 울부짖었다.

"아우우우우우!"

승리의 하울링.

순간 태주의 손에서 동전 하나가 은빛 실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미물 새끼가···,'

대상은 붉은 털 늑대.

퍽!

반쯤 박힌 동전.

늑대는 움찔했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가죽은 뚫었지만 뼈는 뚫지 못한 모양.

'쯧, 역시 동전으론 무리구나.'

강호 무림에서도 동전을 암기로 사용하는 수법이 있다.

금전표(金錢鏢).

그러나 금전표에 쓰이는 동전도 암기로 제작해야 효과가 있다.

평범한 동전 가지고는 마수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몸으로 제압해야지.

타앗!

늑대가 땅을 박차고 높이 떠오른 채 태주에게 달려들었다.

스스슷!

태주의 신형이 아지랑이처럼 흐려졌다.

수도 없이 연습한 연계 동작.

환영미리보에 이은 혈인독장.

이미 초식의 요체와 비전은 완벽하게 알고 있다.

공력이 모자라는 게 문제일 뿐이지.

어느 틈에 날아오르는 늑대의 배 밑으로 이동한 태주.

시뻘건 손바닥이 무방비로 드러난 붉은 털 늑대에 부드러운 아랫배에 적중했다.

퍼억!

"깨갱!"

동시에 허공에 흩뿌려지는 핏빛 혈장.

수많은 손바닥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퍼벅! 퍼버버벅! 퍼버벅!

늑대는 바닥으로 제 발로 착지하지 못했다.

강력한 독기를 머금은 혈인독장에 의해 이미 허공에서 숨이 끊어진 후.

털썩!

'이놈 죽이려고 몇 방이나 후려갈긴 거야?'

마수라 해도 고작 늑대.

당군악이었다면 한번 째려보는 것만으로 끝났을 터.

자신도 가능하긴 하다.

혼원무상독령공의 경지를 올리면 말이다.

이제 남은 사람은 하나.

동료 짐꾼이 다리가 풀린 듯 주저앉아버렸다.

"태, 태주 동생, 사, 살려주게."

태주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참나, 제가 형님을 왜 죽여요?"

"···정말인가?"

"어디 다친 데 없죠?"

"어, 없지, 없고 말고. 있어도 없어."

태주는 동료 짐꾼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워주며 말했다.

"저, 부탁이 있는데요."

"말만 하게나."

"오늘 본 일은···,"

"무슨 일 있었나? 난 아무것도 보지 못했네만."

바들바들 떨면서 말하는 동료 짐꾼.

많이 놀랐나 보다.

아무리 험한 꼴 다 보고 사는 짐꾼이라고 눈앞에서 5명씩이나 죽는 걸 봤는데,

그나저나 대검이 부러졌다.

이제 쓸 수 있는 무기는 동전뿐.

군용이지만 나름 마수 부산물이 섞인 무기일 텐데.

태주는 대검을 던져버리고 동료 짐꾼과 함께 구례시로 돌아갔다.

시체들은 마수가 처리하겠지.

설악산 그때처럼.

직접 죽이진 않았지만 죽게 만들었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 같은 건 없다.

절대독마 당군악으로서도,

절대독마 김태주로서도,

제 몸 하나 살아보자고 약자를 방패로 삼는 놈들, 저런 놈들이 제일 싫다.

제갈세가 같은 새끼들이다.

※ ※ ※

구례시엔 수많은 드럭샵들이 있다.

그러다 보니 경쟁도 치열했다.

약을 구매하면 비타민제 같은 약도 끼워준다던가, 특점 약품을 독점 판매한다던가, 회원제를 채택해서 구매 금액에 따라 마일리지를 부여해준다던가···.

그런데 이런 드럭샵들의 판매 정책은 모조리 무용지물이 됐다.

백스 드럭샵의 변종 3줄 무늬 모기 해독제 출시 때문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무조건 백스 드럭샵에만 간다.

물량이 충분하게 풀려 잠시 식었을 때도 있었지만 ,바깥으로 소문이 퍼져 다른 도시에서 원정을 오는 바람에 구매 열기가 더 뜨거워졌다.

하루에 2개 구매 제한이 걸렸지만 그래도 오픈런까지 해서 간다.

일단 사두면 되팔 곳이 널렸으니까.

심지어 모기 해독제가 아닌 다른 약이 필요해도 백스 드럭샵이다.

다른 약국의 매출이 확 줄었다.

한때 구례시 매출 1위를 자랑했던 YJ 약국은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고.

이러다간 다 죽는다.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래서 모였다.

구례시 약국 협의회 소속의 약국 대표들.

그런데 모인 사람은 고작 3명.

YJ 약국 대표 조훈석, 구례누리 드럭샵 사장 이길호, 새지평 드럭샵 오남복.

구례시에 존재하는 약국의 숫자는 약 200여개, 그런데 이들 3명이 구례 전체 약국의 70%를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막대한 금력과 영향력으로 가격 담합과 덤핑, 독점 정책을 강화해 중소형 약국들을 말려 죽이고 소유권을 빼앗았다.

구례 자유도시에서 이 정도는 불법도 아니다.

그저 약육강식의 경쟁사회에서 승리한 이와 패배한 이로 구분될 뿐.

자치위원회에서도 약국의 소유권 따윈 관심이 없었다.

제대로 영업하는 약국의 숫자가 일정 상태로 유지되면 그걸로 끝.

그럼 나머지 30%는?

구례를 기반으로 하는 천왕 바이오 제약회사의 직영점.

느슨한 약품 판매 허가 시스템을 이용해 마수 레이드와 관련한 신약의 효과도 알아보고, 더불어 이익도 챙기고.

딱 한군데.

백스 드럭샵만은 예외.

사실 이곳도 집어삼키려고 했다.

그러나 백홍표는 구례시에서 인망이 두터운 사람.

마수 웨이브 때문에 생겨난 고아들을 거둬들여 먹여 살리고 직업까지 구해주는 사람이었다.

자치위원회에서도 여기는 건들지 말라고 경고했었다.

그래서 가만히 나뒀다.

고작 하나 살려두는 건데, 큰일이야 날려고?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그 작은 백스 드럭샵이 현재 구례 약품 시장을 혼자서 뒤흔들고 있었다.

"성분 분석표 결과 제대로 나온 게 맞습니까?"

"같이 비교해봤잖아요. 다 똑같이 나오긴 했습니다만."

"그런데 왜 결과가 다르죠?"

"내가 묻고 싶은 말이오."

"이거 답답해서 미치겠군."

모기독 해독제 성분 분석.

한 곳에만 의뢰한 게 아니다.

구례시 대형 약국들은 해독제의 소문을 듣자마자 하나씩 구해서 제국 내 유명하다고 이름난 연구소로 각자 성분 분석 의뢰를 보냈다.

푸른 얼굴 버섯에, 비단 고사리, 할미 씀바귀 뿌리, 늪지 미나리···, 독초에서 뽑아낸 물질도 있고, 약곰취, 달맞이풀 같은 약초,

비율에 맞게 배분해서 정제수에 희석했다.

그렇다면 약효가 비슷하게 나와야 하지 않나?

"동물 실험도 완전히 망했소."

"쎅토끼 코에 가져다 댔더니 그 자리에서 죽었어."

"난 한 방울 찍어 먹었는데 죽다 살아났지."

여기 모인 사람들은 구례시에서 난다긴다하는 대형 약국의 약사와 오너들, 업장마다 간이 약품 제조 시설을 마련해두고 있었다.

똑같은 성분을 집어넣었지만 나온 건 해독제가 아니라 독약.

그렇다면 이보다 더 크고 기술력 있는 제약회사들은 어떨까?

"천왕 바이오 제약회사도 약국도 모기독 해독제 분석 중이라더군."

"어떻답니까?"

"우리랑 다를 바 없었소. 지금 현재로선 카피가 어렵다고."

"곧 만들 겁니다. 어차피 시간 문제니까."

"그거야 누가 몰라요? 지금이 힘들다는 거지. 기다리다가 다 죽겠어요."

"뭐, 할 수 없죠. 늘 하던 대로 할 수밖에."

"후우, 오랜만에 피를 보겠네요."

맞다.

늘 그래왔다.

그렇게 구례 약국 시장을 평정해왔다.

"시작합시다. 해독제 개발자 정보는요?"

"김태주, 기본적인 정보는 자치위원회에서 입수했어요."

"군 전역자군요. 파주 영지 출신이고···, 응? 아버지가 김웅방 준장? 마스터잖아요. 이거 너무 거물급인데."

"거물 아닙니다."

한때 구례시 최고 매출을 자랑했던 YJ 약국 사장 조훈석의 말에 의아해 하는 구례시 약국 협의회 대표들.

"아니, 맏아들이면 영지 계승자잖습니까? 그럼 거물이지."

"그건 표면적인 정보이고, 여기 이건 내가 따로 조사한 따끈따끈한 내용입니다. 한 장씩 받아서 읽어보세요."

"흐음, 어? 마나 거부자? 군에 입대한 이유가 집에서 쫓겨난 거다, 진짭니까? 이런 가정사는 아무나 알 수 없는 건데···, 어떻게?"

"파주에 정보통이 있어 수소문해봤죠. 그쪽에선 꽤나 유명하답니다."

아버지는 장군이지만 아들은 마나 거부자.

"친모는 죽었고 김준장이 새로 들인 부인은 혼다 미쯔이라는 일본계 여성, 배다른 자식이 둘씩이나 있고, 아마 그녀는 김태주가 죽길 바라고 있을걸요."

"호오! 알겠어요. 흔한 스토리네요."

"전역하고도 집에는 들리지 않고 심지어 연락도 끊었답니다."

설령 배경이 있으면 어때?

여긴 자유도시 구례.

파주와 여긴 매우 멀다.

"먼저 만나는 봅시다. 백홍표가 얼마를 약속했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공급가격을 더 많이 제시하면 판매권을 가져올 수 있을지도."

"놈이 거절하면?"

"작업 들어가야죠."

조훈석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판매권을 가져오든, 아니면 약품 제조 레시피를 가져오든, 그것도 안 되면 해독제를 못 만들게 하든, 셋중 하나만 해도 되지 않겠소?"

협상이 안 되면 협박.

거래가 안 되면 강탈.

이도 저도 안 된다면 아예 없애버린다.

그게 여태껏 자신들을 성공으로 이끈 방식이었으니까.

※ ※ ※

삼한제국 제국군 산하 지리산 마수 방어군단.

산청시에 군단 본부가 있다.

군단을 책임지고 있는 마스터 오진형 중장은 집무실에서 부관의 보고를 받았다.

"그래, 알아 왔나?"

"네, 구례 자치위원회에서 정보를 받아왔습니다."

"개발자가 누구라던가?"

"이름 김태주, 성별은 남성이고 나이는 29살입니다. 여기 제국주민번호를 통해 조회한 자세한 정보입니다."

현재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모기독 해독제의 개발자.

군부에서도 납품을 의뢰했었다.

지금까지 방어군단의 대 지리산 밀림의 마수 전략은 웨이브가 일어나지 않도록 상시적으로 감시하며 억제하는 것이 전부.

그런데 해독제가 나타났다.

잘하면 대대적인 소탕 작전을 생각해볼 기회.

하지만 물량이 부족하다고 거절을 당했다.

조금 기다려 달라고 말은 해왔지만 현재 구례시 공급만 봐도 빠듯해 보인다.

공권력의 힘으로 찍어누를 수 없는 지역이다.

즉 강제 집행이 불가능한 지역.

자유도시 구례.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보장하겠다며 황제 폐하께서 친히 칙령을 내리신 곳이기 때문이다.

천천히 보고서를 읽어내려가는 오진형 중장.

"김태주라, 가만! 전역 군인 출신? 그것도 제국군 장교였다고? 그럼 각성자?"

"아닙니다, 마나 거부자였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아하!"

오진형은 보고서 하단에 적힌 가족관계를 보고 납득했다.

"김웅방 준장 자제였군. 나도 소문은 들었지. 큰아들이 마나 거부자였다고. 그런데 전역은 왜 했지?"

"사유는 나와 있지 않지만 군 생활 부적응이지 않을까요? 자격도 없는 마나 거부자가 소위 계급을 달았으니···,"

"흠, 그럴 수도 있겠군."

아무튼 잘 됐다.

"파주 영지로 연락해. 내가 김준장과 통화를 원한다고."

"넵!"

김태주의 아버지를 통해 해독제 납품을 처리하면 간단하게 끝날 터, 어쩌면 더 싸게, 더 많은 물량을 확보할 수도.

부자 관계 아닌가?

둘이 의절하지 않는 이상에야.

< 점점 커지는 관심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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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탁 >

지리산 밀림에서의 사건은 조용히 묻혔다.

실종된 5명의 마나 적합자와 각성자가 구례에서 쭉 활동하던 자들이었으면 또 모를까, 외부에서 들어온 뜨내기들이 실종했다 한들, 없어졌다고 신고하는 사람도,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없었다.

목격자가 있다면 동료 짐꾼인데 마수 부산물과 에너지 결정체를 몰아줬고, 절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터였다.

태주는 백스 드럭샵 백홍표와 만났다.

"고아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다 작은 건물 하나와 주변 대지 구매했습니다."

"지하 대피 시설 완비된 곳이죠?"

"네, 그래서 조금 비싸게 샀습니다. 땅과 건물 합해서 10억 정도 들었고, 층수는 5층이지만 지하도 합하면 6층이라."

구례시 부동산은 그리 비싸지 않다.

물론 캐슬 안에 있는 공간은 매우 비싸지만.

"인테리어는···?"

"지하 대피소부터 작업하고 있습니다. 그곳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고맙습니다. 이런 것까지 부탁드려서."

"하하하! 뭘요! 얼마든지 부려 먹으세요."

대피소가 필요한 이유는 마수 웨이브가 겁나서가 아니다.

해독제 제조시설과 무기 창고가 필요했기 때문.

지하층 대피소는 나름 보안 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방해받지 않고 연구하면서, 중요한 물건을 보관하기에 안성맞춤.

지금까지는 백스 고아원 지하 대피 시설을 임시로 이용했다.

하지만 고아원에서 독물을 다루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또한 웨이브가 일어나면 아이들이 대피소를 써야 하니까.

그리고 언제까지 호텔에서 생활할 수는 없다.

맨 위 5층은 자신의 집으로 꾸밀 예정.

"약초와 독초 수급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약국에 공고를 붙였더니 다음날부터 재료가 원활하게 공급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들 새로운 작업실로 옮겨주세요. 비용은 제가 다 부담할게요."

사실 해독제를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다,

한 시간이면 10만 병 분의 원액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재료가 문제.

제조에 필요한 약초와 독초를 채집하는데 시간이 엄청 든다.

그래서 착안을 했다.

약초 및 독초를 좋은 가격에 전량 매수.

더불어 채집자들에게 모기독 해독제 우선 판매권.

종류는 지리산 전역에 서식하는 독초와 약초.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혹시라도 구별을 하지 못할까 봐 독초와 약초의 사진이 있는 간단한 책자도 만들어 배포했습니다."

구례시에서 하루에 출발하는 레이드팀만 약 200여 개.

그들이 모두 약초를 채집해서 가져올까?

채집은 어렵지 않다.

장갑과 마스크를 착용하고 자루에 집어넣으면 된다.

특히 짐꾼들의 반응은 긍정적.

짜투리 시간에 캐서 백스 드럭샵에 팔면 쏠쏠한 수익이 남으니까.

전보다 돈은 적게 들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집에 드는 시간이 훨씬 줄어들기 때문에 이게 훨씬 더 효율적.

백사장과의 면담을 마치고 태주는 새로 산 건물로 갔다.

자신의 명의로 구입한 첫 부동산.

지상 5층과 지하 1층의 건물.

지하엔 값비싼 재료와 무기를 보관하는 곳으로.

더불어 독과 약을 만드는 연구실로도.

순간 부르릉하는 소리와 함께 트럭 몇 대가 건물 앞에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누구?"

"아버지, 아니 백사장님께서 보내셨어요. 건물 인테리어 작업하러. 엊그제부터 쭉 작업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 어서들 와요."

작업 인부들이다.

모두 백홍표 사장이 거둬들인 고아원 출신들, 성인이 되어 고아원을 나와 각자의 영역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었다.

당연히 백홍표의 아낌없는 지원이 있었고.

"시작해도 되나요? 불편하시면 나중에···."

"아뇨. 저도 가봐야 할 데가 있어서, 그럼 부탁드릴게요."

"네! 신속하게 작업하겠습니다."

"하하하, 천천히 하세요. 천천히."

20대 초반의 젊은이들 같은데, 표정이 참 밝았다.

공사비는 높게 쳐준다고 했지만 따로 넉넉하게 챙겨줘야지.

※ ※ ※

태주는 구례장터로 갔다.

오늘이 바로 주문한 장비들을 받는 날.

가죽 공방 거리에서 잔금을 결제한 후, 환상 여우 가죽 코트와 장비 일체를 수령했다.

그리고 금속 공방에서 각종 암기들을 받아 커다란 배낭에다 넣고.

호텔로 돌아온 태주.

먼저 환상 여우 가죽 코트부터 입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코트.

이 무더운 아열대 기후에 코트가 웬 말이냐 하겠지만, 눈에 띄어도 어쩔 수 없다.

'괜찮네.'

겉보기엔 평범한 가죽 코트로 보이는 디자인.

원래 흰색이었지만 튀어 보일까 회색으로 염색도 했다.

절대독마 당군악도 긴 장포를 선호했다.

숨길 데가 많다는 이유로.

태주도 마찬가지.

코트 안에 빽빽하게 달린 다양한 크기의 주머니들, 바지도 입고, 조끼도 착용하고, 금속이 덧대여 있는 튼튼한 가죽 신발도.

다 수납이 가능하도록 주머니를 만들었다.

이젠 암기를 넣어볼까?

폭우이화정, 철환은 안쪽 주머니, 휘금석은 조끼, 크기가 다소 큰 탈명비도는 허리띠에 빙 둘러서, 나머지 손목 보호대나 발목 부분, 그리고 여분의 주머니는 모조리 작은 유엽비도로 채우고,

"어우, 엄청 무겁네."

무게도 무게지만 움직이는 데 불편함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익숙해져야겠지.'

이 암기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상징.

어느 상황에서도 든든한 힘이 되어줄 절대독마의 모든 것.

굳이 독을 묻힐 필요도 없다.

태주의 혼원무상독령공.

의지에 따라 독기를 부여할 수도, 않을 수도 있었다.

스슷!

손을 한번 털자 어느새 쥐어진 유엽비도.

스르륵,

다시 거둬들이고.

암기의 출납과 수납.

기술은 다 알고 있지만 이것도 몸으로 익혀야 한다.

'이젠 밀림 깊숙이 들어갈 수 있겠어.'

지리산 밀림 가장자리 쪽에서 나오는 독초는 그리 강하지 않은 것들, 안쪽에 더 많은 독을 품고 있는 독물들이 있다.

그리고 식물독 말고도 곤충독 같은 동물독도 채집할 필요가 있다.

흡수하는 독이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독정(毒精)의 성취가 올라가니까.

'다른 약도 만들고.'

이참에 제약회사를 차리자.

돈을 긁어모아서 삼한제국, 아니 전 세계 약품 시장을 장악해야지.

'뭘 만들어볼까?'

절대독마 당군악이 가진 지식.

태주의 머릿속에 다 들어 있다.

독약은 물론, 해독제, 치료제. 심지어 영약 제조까지 모두 가능하다.

바로 그때!

띠리링!

호텔 전화기가 울렸다.

'응? 왜 전화가.'

태주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고객님, 안녕하세요.

호텔 프런트에서 온 전화.

"네, 무슨 일이죠?"

- 고객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이 계셔서요. YJ 약국 조훈석 대표님입니다. 로비 커피숍에서 좀 뵙자고.

"그래요?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 그, 그건 저도 잘···,

호텔에서 알려줬나?

기분이 팍 상했다.

호텔 옮겨야지.

아무튼 YJ 약국이라면 구례시에서 가장 큰 대형 약국.

대표 조훈석이 자신을 만나려는 이유가 뭐겠나.

'해독제 때문이겠군.'

이해가 간다.

현재 백스 드럭샵의 해독제 독점 판매로 꽤 많은 피해를 입고 있을 터.

'만나볼까?'

뭐라고 하는지 들어는 보자.

태주는 로비로 내려가서 조훈석을 만났다.

"처음 뵙겠습니다. YJ 약국 대표 조훈석입니다."

"김태주입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본론을 꺼내는 조훈석.

"빙 둘러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부탁 하나 합시다. 저희 약국에도 모기독 해독제를 납품해 주세요."

이미 예상했다.

대답도 나와 있었다.

"현재로선 곤란합니다만, 아시잖아요? 백스 드럭샵에 들어가는 물량도 부족한 판에."

"그럼 백스 드럭샵과 공급 계약을 끊으세요."

웃기는 사람이네.

막무가내로 와서 계약을 끊으라고?

"이거 부탁인가요? 협박인가요?"

"지금은 부탁입니다."

나중엔 협박으로 변할 수 있다는 의미.

"싫은데요?"

"위약금 때문이면 제가 다 갚아드릴게요. 또 백스 드럭샵보다 공급가를 2배, 아니 3배로 맞춰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전 신뢰 없는 사람이 되기 싫어서···."

"약물 제조식이라도 파세요. 50억 드리겠습니다."

이런 양아치 같은 놈을 봤나?

뭐? 50억?

"조 사장님 같으면 팔겠어요?"

"···."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그러자 조훈석이 태주를 매섭게 노려보면서 말했다.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구례 바닥에서 자리 잡기 어려울 텐데···."

이 새끼 봐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알아서 잘 할게요."

"뭐, 두고봅시다. 잘하는지 못하는지."

태주는 그대로 일어나 호텔 밖을 나갔다.

'확실히 소문대로야.'

구례에서 짐꾼으로 일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 많이 들었다.

몇 개의 대형 약국들이 담합해서 새로 진입하는 약국을 말려 죽이고 업장을 빼앗은 후, 몇몇 인기 있는 약의 가격을 올려 폭리를 취한다는 의혹.

견제가 들어올 거라 예상은 했다.

어떤 방식일지는 알 수 없지만.

'곧 알게 되겠지.'

조훈석은 태주의 뒷모습을 싸늘한 시선으로 노려보며 스마트폰을 들었다.

"생각보다 뻣뻣한 놈이더군요. ···맞아요. 놈이 거절했소. 작업 시작합시다."

먼저 1단계 시작.

아주 약한 거부터.

※ ※ ※

파주 영지.

중심부에 세워진 사각형의 요새 건물.

파주의 행정을 담당하고, 영주 가족들의 거처가 있는 곳이다.

요즘 혼다 미쯔이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결국 눈엣가시 같았던 배다른 자식 김태주를 처리하지 못했다.

눈치를 채고 전역해 버린 것.

그놈은 왜 그리 끈질긴가?

'마나 거부자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음에도 죽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아 사람을 불안하게 하더니···,'

놈을 죽이려는 시도도 실패했다.

멍청한 것들.

일반인보다도 못한 몸뚱아리를 지닌 놈을 제대로 처리하지도 못하고.

그나마 관련자가 모조리 죽어 탄로날 일은 없지만

그래도 소득은 있었다.

바로 어제.

남편이 공식적으로 김태주의 파주 영지 계승자 자격을 박탈했다.

맏아들과의 인연을 끊어버리겠다고 선포한 것, 그리고 실제로 파주 영지 영주의 권한을 이용해 호적에서 김태주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이제 친아들인 김태평과 김태천 둘 중 하나가 이 영지를 물려받게 될 터.

남은 건 파주를 발전시켜 인구를 늘리고 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부자 영지로 만드는 것.

파주는 개척 영지.

과거 DMZ, 비무장지대와 맞닿은 곳.

그곳은 마수 밀집지대 중 하나.

마수를 몰아낸 땅은 오롯이 파주로 귀속된다.

하지만 그러려면 병력이 있어야 한다.

적합자와 각성자로 구성된 부대 하나를 운영하는 데 드는 비용이 얼마일까? 상상을 초월한다.

더구나 파주는 별다른 수익 산업이 없다.

마수 토벌을 시작해 부산물을 생산하면서 대기업의 투자도 받고, 공장도 유치하고, 산업을 발전시켜야 영지를 운영할 세금이 나오는데.

지금까지는 규슈 영지에서 지원받는 걸로 버텨왔다.

솔직히 그것도 한계가 있지.

김웅방 준장이 진급해서 야전 지휘관으로 전출 간다면 모를까.

영주가 제국의 부름을 받아 자리를 비운 영지는 엄청난 지원을 받으니까.

사실 혼다 미츠이의 친정 규슈 영지가 파주 영지를 지원해주는 속내는 따로 있었다.

삼한제국의 식민지인 규슈 영지.

거긴 위태위태한 곳이다.

마수 때문에?

아니다.

점점 올라가는 해수면.

언제 물에 잠겨도 이상하지 않을 지역.

그래서 혼다 미쯔이는 규슈에 있는 자신의 가족들과 세력, 재산 일체를 파주로 옮겨올 작정, 김태주가 계승자가 되어 영지를 물려받았다면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계승 문제도 끝났고 본격적으로 파주 영지를 개발할 때.

부족한 자금을 조달하는 방법만 찾으면 된다.

'아버지께 또 도와달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그쪽도 자금이 충분치 않다.

파주보다는 여력이 있다지만.

바로 그때!

"사모님!"

급한 일이라도 있는지 별채 문을 박차고 들어온 영지 관리.

"왜 그래?"

"제국군 남부 지리산 방어 군단장, 오진형 중장이 영주님과 전화 면담을 요청해왔습니다."

"뭐? 오중장님이?"

오진형 중장은 제국 군부 내에서 제법 큰 파벌에 속한 인물.

궁금하다.

무슨 대화를 나누려고,

"남편은?"

"집무실에서 오진형 중장의 전화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혼다 미쯔이는 서둘러 남편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여보!"

"어서 오시오."

"오진형 중장님이 왜 전화를 하신데요?"

"나야 모르지. 스피커폰으로 전환할 테니 같이 들읍시다."

잠시 후.

따르르릉!

울리는 전화벨.

"여보세요."

- 김웅방 준장인가? 나 오진형일세.

"멸마! 준장 김웅방 전화 받았습니다."

- 허허, 그래 오랜만이군. 다른 게 아니라 자네 아들 말이네.

"아, 아들 말입니까?"

- 그래, 훌륭한 아들 둬서 기쁘겠군.

훌륭한 아들이라, 사관학교에 보낸 두 아들을 말하나 보다. 누구지? 태평이? 태천이?

- 염치없지만 부탁을 해야겠어.

"···부탁이라뇨?"

- 모기독 해독제 말이야,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지리산 방어군단에 꼭 필요한 약품 아닌가, 하지만 물량이 모자라서 공급할 수 없다더군. 자네가 태주군에게 잘 말해서···.

모기독 해독제? 태주?

'뜬금없이 무슨···,'

잘못 들었나?

태평이, 태천이가 아니고?

- 이번 거래만 잘 성사되면 내가 육본에다 자네 진급에 영향력을 행사해봄세. 자네도 야전 부대를 지휘할 때가 되지 않았나.

"자, 잠깐만요. 전역한 제 큰아들 태주를 말씀하시는 게 맞습니까? 그리고 모기독 해독제라니오?"

- 음? 설마···, 자, 자네 모르고 있었군.

"네, 그렇습니다. 죄송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부탁드립니다."

- 허어, 자네 아들이 변종 3줄 무늬 모기 독 해독제 개발자라는 걸 모른다고?

"아···,"

- 현재 구례시 돈을 쓸어 담고 있다는 것도? 거긴 발칵 뒤집혔는데?

"···."

김웅방 준장은 어안이 벙벙하다.

옆에서 듣고 있는 혼다 미쯔이도 마찬가지였다.

김태주의 이름이 왜 여기서 나와?

< 부탁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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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독제 하나 더 추가(1) >

삼한 제국의 군대는 모병제로 운영된다.

각성자와 마나 적합자, 마나 순응자인 일반인도 사병이나 부사관으로 지원이 가능하다.

장교들은 야전장교와 행정장교로 나뉘며 당연히 야전이 연봉도 더 높고, 대우도 좋고, 진급도 빠르다.

장군은 어떨까?

삼한 제국군에서 장군, 즉 별을 달려면 무조건 충족되어야 할 조건이 있다.

바로 마스터.

마스터가 되지 못하면 대령으로 정년을 채우고 전역해야 한다.

마스터는 시스템 등급의 최종점.

물론 개인 간의 격차는 있겠지.

그래서 마스터 중에서도 남들보다 월등하게 강한 이들을 그랜드 마스터(grand master)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어쨌든 시스템상으로는 모두 마스터.

제국군에서 마스터의 숫자는 108명, 대부분 영지의 지배자이거나 야전 부대의 지휘관들, 물론 육해공 본부나 합참에서 근무하는 장성들도 있다.

마스터가 되었다고 해도 야전 지휘관이 되는 건 또 다른 문제, 지휘 능력을 인정받아야 전투 부대를 책임지는 야전군 지휘관이 될 수 있다.

별 하나로 시작하는 준장은 영지만 받는다.

사실 받은 영지도 영원하진 않다,

권리가 인정되는 건 3대까지만.

자식을 마스터로 키워내지 못하더라도 손주가 마스터가 되면 다시 또 3대로 기간이 연장되고.

보통 마스터의 재능은 유전이라 아버지가 마스터면 자식도 마스터가 될 확률이 높다.

그래서 영지 지배자들은 자식들을 많이 낳는다.

20명씩 낳아 기르는 자들도 있는 판에.

어쨌든 하사받은 영지를 잘 운용하고 발전시키면 능력을 인정받아 소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지휘관이 된다.

그러나 김웅방 준장은 20대에 마스터에 올랐지만 50이 넘도록 야전군 지휘관 보직을 받지 못했다. 자식도 많지 않고.

당연하다.

파주 영지가 이 모양 이 꼴인데.

어떻게 지휘 능력을 인정받아?

반면 오진형 중장은 신의주 영지의 지배자이자 지리산 마수 방어 군단 사령관.

영지 운용 능력도 탁월했고, 지휘 능력도 입증했다.

지리산이 변방이긴 하지만 그래도 군단장 아닌가.

이런 사람의 입에서 버린 자식이나 다를 바 없는 큰아들의 이름이 거론됐다.

제발 아들을 잘 설득해서 모기독 해독제를 납품하게 해 달라고, 그럼 진급 심사에 도움을 주겠다고.

전화 통화를 마쳤음에도 아직 못 믿겠다는 표정의 김웅방 준장.

아들이 전역한 지 삼 개월 조금 지났나?

그새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아니 그보다 큰아들 태주가 맞아?

혼다 미쯔이도 영문을 모르는 건 마찬가지.

그래도 그녀는 직접 확인했다.

스마트폰으로 지리산 밀림, 모기독 해독제 검색.

"아···,"

주르륵, 기사가 쏟아졌다.

모기독 해독제 선풍적인 인기, 연일 매진행렬, 타지역에서 해독제를 구하기 위해 일부러 구례까지 방문, 모기독 해독제의 경제적 효과, 그리고 개발자 김태주.

돈을 쓸어 담고 있단다.

그럴 수밖에.

그녀도 들은 기억이 난다.

지리산 밀림에서 가장 무서운 건 자이언트 반달곰도 아니고, 강철 깃 부엉이도 아닌 바로 작디작은 모기라고.

또한 변종 3줄 무늬 모기가 어디 지리산 밀림에서만 서식하나?

자신이 고향이었던 규슈 영지 마수 밀집 지대에도 그 모기가 살고 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혼다 미쯔이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태주를 설득해 해독제를 군에 납품하게만 해준다면?

진급 심사에 유리해지고 남편은 소장을 달고 부대 지휘관으로 승진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제국 차원에서 파주 영지를 지원할 테고,

'그뿐만이 아니야.'

모기독 해독제를 규슈 영지로 보내면?

큰 힘이 될 것이 분명하다.

또 태주가 쓸어 담고 있다는 돈.

그 돈에 자신의 몫이 없을까?

없어도 있게 만들어야지.

혼다 미쯔이는 태주를 죽이려 했던 자신의 행동은 이미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래서 환하게 미소 지으며 김웅방에게 말했다.

"어쩜, 태주는 언제 이런 걸 다 배웠을까? 몸이 약해 대학에도 못 보냈는데."

"후우, 그러게 말이오."

"역시 우리 태주가 언제고 큰일을 할 거라 믿었어요."

"···."

김웅방은 침묵했다.

난데없이 우리 태주?

"여보. 직접 가서 태주를 만나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태주는 사회생활 경험이 많지 않잖아요. 큰돈을 손에 쥐었을 텐데, 나쁜 사람 만나서 사기당하거나 하면 어떡해요?"

"하아."

"부모로서 의무를 다해야죠. 빨리 기차표부터 끊어서···,"

"놔둡시다!!!"

신음처럼 터져 나온 김웅방의 말.

"네? 뭐라고···,"

"그냥 내버려 두자고, 어차피 우리 품에서 떠난 자식 아니오,"

"떠나다뇨?"

"호적에서 태주 이름도 지워졌소. 이제 남남이요."

혼다 미쯔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맞다.

호적에서 팠다.

이럴 줄 알았다면 파지 않았을 테지만.

남편의 말대로 김태주는 남남.

부모로서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관계.

"호적은 호적이고, 천륜을 쉽게 끊을 수 있나요? 300년 전에는 아예 호적에 손댈 수조차 없었어요."

"시대가 변했소. 언제적 이야기를, 귀찮게 하지 맙시다."

"귀찮게 하는 게 아니라 도와주자는 거예요."

어쩌면 이렇게 노골적일까?

참 뻔뻔한 여자였다.

자기 편한 대로 입장을 바꾼다.

김웅방은 아내에게 또 한 번 실망했다.

그런 남편의 속내를 알아챈 모양.

미쯔이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말을 이었다.

"알았어요, 솔직하게 말할게요. 당신도 알잖아요. 파주 영지의 사정을."

"그게 무슨 상관이요?"

"언제까지 당신 장인 도움만 바랄 거에요? 태주도 파주 영지에서 자랐어요. 내가 키웠다고요. 걔도 영지 발전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하지 않나요?"

"정말 양심이 있다면···."

표정이 매섭게 변하는 미쯔이.

"양심?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당신이 태주를···."

김웅방은 도저히 끝까지 말할 수 없었다.

'당신이 태주를 죽이려고 했잖소?' 라는 말을.

잠시 침묵이 흘렀다.

혼다 미쯔이도 조용했다.

'설마 이이도 알고 있을까?'

자신이 태주의 살해를 지시했다는 사실을.

안다고 해도 상관없다.

도구로 사용했던 장인동 중위는 죽었고, 증거는 하나도 없으니까.

"···가서 만나봐요. 한마디만 하면 되잖아요. 군에다 해독제를 납품하라고. 우리도 모기독 해독제가 필요하다고."

"정말 이렇게까지 할 거요?"

"태주만 당신 아들이에요? 태평이와 태천이는? 그 아이들 장래는 안중에도 없어요? 지금 걔들 사관학교 학비도 빠듯해요. 파주 영지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그럼 당신이 직접 가보면 되겠군."

"···."

혼다 미쯔이는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지은 죄가 있는데.

'너무 급하게 쫓아냈나?'

아무리 미워도 곁에 뒀어야 했다.

진짜 이럴 줄 몰랐다.

해독제라니, 배운 것도 하나 없는 놈이 어떻게?

'암살 의뢰만 하지 않았어도···.'

해독제 판매는 한철 벌었다 끝나는 장사가 아니다.

화수분처럼 계속 쏟아져 나오는 돈.

혼다 미쯔이는 태주가 얼마를 벌었는지 미치도록 궁금했다.

※ ※ ※

파주 김웅방과 통화를 마친 오진형 중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군.'

아무래도 수상쩍다.

아들의 소식을 자신에게서 처음 듣는 눈치였다.

자식이 그렇게 엄청난 일을 벌이고 있는데 부모 된 사람으로서 아무것도 몰랐다고?

'뭔가 있어.'

원래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구실로 개발자 김태주와 접촉하려 했었다.

- 자네 아버지와 통화를 했다.

- 매우 흡족해하는 눈치더라.

- 자네도 한때 군에 몸을 담지 않았나.

- 그 사정을 참작해서라도 해독제를 군에 납품해 주길 바란다.

그러나 뭔가 꼬여있다.

일단 알아봐야겠다.

'잠시 보류해야겠어.'

사연이 있을 것 같은 느낌.

애초에 마나 거부자인 자식을 군 장교로 꽂아 넣은 것도 궁금하고, 그리고 돌연 전역한 것도 이상하고, 전역하고 나서 집으로 가지 않고 구례로 간 것도 그렇고.

오진형 중장은 부관을 호출했다.

"김태주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게. 파주 영지 상황과 설악산 전초기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한 전역한 이유도."

"네! 알겠습니다."

늦더라도 확실하게 알고 나서 판단해보자.

※ ※ ※

태주는 YJ 약국 대표 조훈석을 만나고 난 후, 그길로 지리산 밀림으로 들어갔다.

기분이 언짢다.

감히 일개 약국의 대표 따위가 협박을 해?

제약회사 사장이면 또 몰라.

'아니지. 재벌 회장이든, 뭐든!'

그 누구든 용납할 수 없는 일.

심지어 삼한 제국의 황제라 하더라도.

절대독마 당군악.

그의 자긍심은 하늘을 찔렀다.

오만하다는 말도 수없이 들었다.

그래도 된다.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현재의 김태주는 그에 미치지 못했다.

당군악의 기억과 경험을 고스란히 받았어도 말이다.

힘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조훈석 같은 놈들이 함부로 수작 부리지 못할 터.

물리적인 힘은 충분하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

하지만 무공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돈.

당군악도 돈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마교를 몰아내고, 강호를 발아래 두면서, 사천 당가를 중원 최고의 가문으로 끌어올린 힘, 돈이 없었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래,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벌어보자.

그러기 위해선 모기독 해독제로는 부족하다.

태주는 스마트폰의 지도앱을 실행해 밀림 안쪽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가는 도중 마수들이 습격해왔지만.

츠핏!

태주의 손목 보호대에서 빠져나온 유엽비도가 날랐다.

콰악!

"켁!"

머리에 비도가 박힌 채, 네 다리를 하늘로 쭉 뻗고 드러누운 칼날이빨 담비.

마수 부산물은 채집할 필요가 없다.

그거 일일이 하다간 시간 낭비, 귀찮기도 하고.

'역시 암기가 최고야.'

손에 착착 감긴다.

당군악이 강호에서 사용하던 암기와 최대한 똑같이 만들었다.

'당분간 유엽비도만 써야겠네.'

가장 범용성이 높은 암기.

균형적이기도 하다.

폭우이화정이나 철환은 그 자체만으로 살상력이 떨어진다.

암기의 크기가 작고 요혈을 노리지 않으면 부상만 입히지, 그 자리에서 죽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걸 보완하기 위해 독기를 실어야 하고.

반면 유엽비도는 암기 자체만으로 충분한 살상력을 가진 무기.

쑤욱!

태주는 칼날이빨 담비의 머리에서 유엽비도를 뽑아냈다.

핏물을 털어내고 다시 제자리에 수납.

부산물 채집은 안해도 암기는 수거해야지.

'비도 한 자루에 돈이 얼만데.'

돈도 돈이지만 모자라면 다시 주문을 넣어 기다려야 하고.

혼원무상독령공이 7성에 이르면 기를 움직여 원격으로 암기를 뽑아낼 수 있다.

허공섭물과 비슷한 방식인데, 아직은 경지에 이르지 못하니, 일일이 손으로 해야 한다.

폭우이화정이나 세침, 철환 같은 무기는 위험할 때나 쓰자.

비폭 용도로 말이다.

"캬악!"

어디서 나타났는지 얼룩덜룩한 털을 가진 마수 한 마리가 태주에게 달려들었다.

츠핏!

순식간에 쏘아지는 유엽비도.

푸욱!

'응? ···피했어?'

머리를 노렸지만 몸통에 맞았다.

칼날이빨 담비는 아니다.

놈은 암기를 몸에 적중당하고도 공중제비를 돌며 태주를 위협했다.

'오! 독 발톱 삵이구나.'

반갑다.

독이 있는 마수는 언제나 환영.

그리고 한방으로 못 죽이면···,

츠핏! 츠피피핏!

한 다섯 방쯤 꽂으면 그만.

푸푸푸푸푹!

털썩!

쓰러지는 독 발톱 삵.

'엘리트는 아니군.'

마수 중엔 같은 종이면서도 특이하게 센 놈들이 존재한다.

변이로 인해 더 강하고 우월한 마수.

그런 놈들을 엘리트 마수라고 부른다.

이놈은 일반 마수.

엘리트 마수와 마주치면?

간단하다.

암기에 독을 먹이면 된다.

태주는 삵의 발톱을 정성스레 잘라냈다.

입으로 가져가 쪽 빨아 먹어보니.

'알싸하네.'

독정(毒精)에 또 하나의 독 DNA가 추가되었을 터.

게다가 동물독이다.

'독샘이 어디 있더라···,'

태주는 독 발톱 삵의 복부를 갈랐다.

그러자 쓸개 옆에 붙은 독주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터지지 않게 조심조심 잘라서 비닐에 담아 보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지리산 밀림의 끈적한 무더위.

환상 여우 가죽 코트의 온도 조절 능력 때문에 그다지 덥지는 않다.

'빨리 한 마리 잡아야 하는데.'

태주가 밀림에 온 목적.

바로 '포자 독 낙타 고라니'였다.

그리 강한 놈은 아니다.

신체 능력도 담비보다 약한 편이다.

게다가 비선공 마수.

하지만 웨이브가 일어나면 사람들을 가장 많이 죽이는 마수 중 하나.

동물과 식물의 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적을 만나 공격을 받게 되면 등에 돋아난 혹이 터지고, 그 안에서 수만 개의 포자를 쏟아낸다.

포자는 티끌처럼 작은데, 이게 퍼지면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

변종 칠점사 이상의 독을 품고 있는 고라니의 포자.

작아서 눈에 잘 보이지도 않았다.

나풀나풀 날아가 머리에 붙을 수도, 입이나 콧속에 들어갈 수도, 안구에 닿을 수도 있다.

방독면을 착용해도 아예 필터를 녹여버린다.

시간이 지나면 독기가 점차 사라지지만, 입안이나 콧속, 기관지, 폐, 심지어 피부에만 직접 접촉해도 단 1분 안에 죽을 터.

그런데 이걸 잡으러 다니는 미친놈들도 존재한다.

왜?

극상의 맛을 자랑하는 고라니 고기 때문에.

혹에 있는 포자 외엔 몸 어느 곳에도 독이 없어서 정성스럽게 손질하면 최고의 요리재료가 된다.

심지어 고라니를 잡았다는 소문이 들리면 삼한 제국 황실에서 관리들을 파견해 고기를 구매해 간다.

그래도 잡지 않는 게 최선이다.

목숨이 중요하지.

평상시엔 비선공이라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다른 곳으로 간다.

하지만 웨이브가 문제.

그때는 포자 독 낙타 고라니도 선공 몬스터로 변한다.

수천 마리의 고라니 떼가 도시로 몰려와 포자를 퍼트린다고 상상해보라.

'끔찍한 일이지.'

포자 독의 해독제를 만들어보자.

혹시라도 일어날지 모르는 웨이브에 대비해서.

아울러 고기도 먹어보고.

< 해독제 하나 더 추가(1)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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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독제 하나 더 추가(2) >

지금 현재 태주의 성취는 강호에서 이류 무사와 일류 무사의 중간 정도라고 보면 된다.

아직 약하다.

절대독마를 앞에 붙이기에 부끄러운 수준.

'단계를 밟아 가야지. 급히 쌓은 건 쉽게 무너져.'

4성으로 가는 발판은 다져놓았다.

안정화된 독정 덕분에 더 강하고 더 많은 양의 독을 받아들일 수 있다.

사실 엄청난 속도다.

지구의 김태주, 그리고 강호 무림의 당군악.

같은 혼원무상독령공을 익혔지만 수련의 방향이 정반대이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

당군악은 독정을 키워가며 깨달음을 얻었지만, 태주는 깨달음부터 얻고 나서 독정을 키우고 있었다.

솔직히 태주에게 혼원무상독령공은 복습.

개사기지.

무공도 그랬다.

모든 걸 깨닫고 시작한다.

그래서 지리산 밀림의 엔간한 마수들은 잘 차려진 밥상.

피핏!

독기를 머금고 날아가는 유엽비도.

일단 한방씩 꽂아두고 환영미리보로 이리저리 피하면서 시간을 끌다 보면.

바르르르 떨면서

털썩, 털썩, 털썩···,

쓰러지는 마수들.

혼원무상독령공 3성의 독정(毒精)에서 나오는 독기는 절정의 무사라도 얕볼 수 없는 경지.

독공이 이래서 좋다.

거의 치트키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

'그나저나 포자 독 낙타 고라니는 어디 있는 거야?'

이놈도 천적이 있다.

지리산 밀림을 주름잡고 다니는 흉포한 마수, 바로 자이언트 반달곰이다.

자이언트 반달곰에게 웬만한 독은 무용지물.

크고 강력한 마수의 웅담이 외부에서 들어오는 독을 즉시 해독시켜버린다.

웅담은 매우 채집하기 힘들뿐더러, 영약과 만능 해독제의 재료로 사용되기에 가격이 많이 나간다.

순간!

부스럭!

밀림 수풀 사이에서 고개를 빼곡 드러낸 마수 한 마리.

'찾았다.'

포자 독 낙타 고라니.

등에 쌍봉낙타처럼 혹 2개가 있어 붙여진 이름.

놈이 자신을 빤히 쳐다본다.

학습효과일 터.

웬만한 인간들을 자신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니까.

태주도 놈을 못 본 채 지나가는 척하면서···,

휘릿!

환영미리보.

단번에 놈의 지척으로 이동.

콰악!

양손에 쥔 탈명비도 두 자루로 놈의 목덜미를 사정없이 찔렀다.

"으아, 으아아아, 으아아악!!!"

사람이 지르는 비명과 흡사한 고라니의 울음.

동시에!

퐁!

낙타 고라니 혹에서 셀 수도 없이 무수한 포자들이 솟아 나왔다.

퐁!

나머지 혹에서도.

먼지들이 사방으로 날아다닌다.

극독을 품고 있는 미세한 크기의 포자.

공기 중에 노출되고 1시간이 지나면 독은 사라진다.

하지만 이 아까운 독들을 그냥 날려?

태주는 즉시 혈인독장(血印毒掌)을 시전했다.

독기를 방사해 공력으로 포자들을 자신에게 이끈다.

스읏, 스스스스스스!

손짓에 따라 공 모양으로 뭉쳐지는 포자 먼지.

혼원무상독령공이 3성에 이르러 이젠 손바닥으로 독기를 흡수할 수 있었다.

물론 직접 먹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오히려 천천히 흡수하는 것이 더 낫다.

'변종 칠점사 독보다는 훨씬 강하네.'

그때 독정을 생성하려다 얼마나 고생했나?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혼원무상독령공의 통제하에서 천천히 흡수되는 포자 독.

미처 끌어오지 못한 포자들이 사방으로 흩날린다.

피부에 닿자 붉은 반점이 생겼다 금세 사라졌다.

독공을 익혀 이 정도지만 각성자라도 피부에 닿으면 위험할 터, 방독면 필터도 녹여버리는 수준인데.

'4성 가나?'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괜찮다.

기회가 왔으니 간다.

포자로 만든 공의 크기가 점점 작아진다.

그럼 더 끌어모아서,

스슷! 스스슷!

독기가 소용돌이친다.

그 바람에 여우 가죽 코트가 들썩인다.

태주의 혈맥으로 치닫는 포자 독의 흐름.

기해혈로 이르면 독정(毒精)이 놓칠세라 넙죽넙죽 받아먹는다.

동시에 각인되는 포자 독의 DNA.

독정이 성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원숙해진 혈인독장.

허공에 손을 휘저으면 포자들이 빨려 들어오고, 그것들은 태주의 몸속에서 독기로 치환되었다.

먼지 한 톨도 놓치지 않는다.

그렇게 포자 독을 가득 품었지만,

'조금 모자라나?'

태주는 미리 채집해둔 독 발톱 삵의 독낭을 꺼냈다.

그마저 입에 털어 넣고,

잠시 후 긴 호흡과 함께,

"후우···,"

태주는 드디어 혼원무상독령공 4성에 올랐다.

1성의 차이는 크고도 크다.

이젠 일류 무사라고 해도 거리낌이 없을 경지.

독공이 성장하려면 이미 섭취한 독을 암만 먹어봐야 소용없다.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독을 섭취해야 한다.

이번에 4성으로 오른 것도 포자 독과 삵의 독낭 때문이고.

'이놈 말고도 독을 가진 놈들이 많겠지?'

한 300년쯤 묵은 독삼(毒蔘) 같은 걸 발견하면?

중간 목표는 7성.

혼원무상독령공 7성은 독인의 경지.

흡수했던 독으로 온갖 종류의 독을 만들 수 있는 경지, 아마 마스터들도 한 줌의 독수로 만들 수 있을 터.

포자 독을 다 쏟아낸 고라니가 목이 반쯤 잘린 채 죽어 있었다.

그냥 둘 수 있나?

도축해서 가져가야지.

도축은 당군악의 특기.

마교에 쫓겨 가문 전체가 멸문의 위기에 처해 도망쳤을 때, 산짐승이라도 잡아서 먹어야 했기에 수도 없이 했었다.

태주는 탈명비도를 들고 고라니에게 다가갔다.

이것도 암기의 일종이지만 크기가 제법 큰 비도.

서걱, 서걱, 서걱.

능숙하게 가죽을 벗겨내고 고기와 뼈를 분리하는 태주.

고기만 아니라 뼈와 내장도 챙긴다.

특히 내장엔 놈이 즐겨 먹는 식물들이 들어있을 터.

해독제 개발의 실마리가 되어 줄 것이다.

'마침 배도 고프니까···.'

그 자리에서 불을 피웠다.

등심 부분을 꼬챙이에 끼워 얹으니.

지글지글,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는 고기.

태주는 후후, 불어 열기를 식히고 한입 베어 물었다.

이빨 사이에서 주르륵 흐르는 육즙.

'···뭐야? 이 맛은?'

소금과 후추 간도 하지 않았는데 이 정도라고?

"와! 미쳤다, 미쳤어."

왜 극상의 맛이라는지 알겠다.

이러니 삼한제국의 황제도 환장하지.

남은 건 냉장고에 보관해서 숙성시키고.

근데 한 마리로는 부족할 것 같다.

'몇 마리 더 잡아볼까?'

4성에 오른 기념으로 말이다.

흡수하느라 채집하지 못한 포자 독도 다시 채집할 겸.

※ ※ ※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태주는 새로 산 자신의 소유 건물로 돌아왔다.

더 이상 호텔에선 묵지 않을 예정.

태주는 건물 안 지하 통로를 통해 대피소로 내려갔다.

마수 웨이브를 피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지하 대피소, 바깥 문을 열고 계단으로 한참을 내려가니 또 하나의 거대한 철문이 있었다.

그 위에 살포시 붙여진 종이.

<지하 제조실 인테리어 다 끝마쳤습니다. 확인하시고 마음에 드시면 비번 바꾸시고 사용하시면 됩니다.>

'빠르게 끝냈네.'

디지털 기기로 된 잠금장치.

미리 알고 있는 비밀번호를 눌러서,

띡, 띠딕, 띡, 띡, 띡, 띡.

육중한 문을 손으로 당겨 열었다.

그러자.

"와!"

생각보다 훨씬 넓다.

새로 칠한 페인트 냄새, 각종 작업대와 실험실 도구, 그리고 벽면에 가득 붙어있는 약제 저장고.

"깔끔하네."

자신의 돈으로 직접 마련한 공간.

특히 신경을 쓴 건 저장고.

독초와 약초는 온도에 민감하다.

서늘하게 보관해야 하는 게 있고 냉동시켜야 하는 것이 있다.

태주는 배낭을 열어 고라니 고기를 냉동실에 넣었다.

처음 한 마리 잡은 후, 2마리 더 잡아서 총 3마리.

그러다 보니 고기와 뼈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그 큰 배낭이 가득 차서 나무 덩굴로 묶어 손에 들고 왔을 정도, 혼자 먹기엔 너무 많다.

'백사장님에게 이야기해서 고아원 아이들과 나눠 먹어야겠다.'

그 아이들이 고라니 고기 맛이나 봤을까?

바로 그때!

띠리링!

걸려오는 전화.

발신인을 보니 백홍표 사장이었다.

'마침 잘됐네.'

직원들하고 고아원 아이들하고 회식이나 하자고 하자.

"네, 백사장님, 접니다. ···네? 뭐라고요? 아! 알겠습니다. 바로 갈게요."

태주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 ※ ※

백스 드럭샵.

지금은 영업을 종료했지만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심각한 표정의 백홍표 사장.

태주가 오자 애써 미소를 지으며 반겼다.

"어서 와요, 태주씨."

"···백사장님, 고생이 많으시네요."

"뭘요. 별거 아닙니다."

사실 별게 맞다.

군데군데 비어있는 약국의 선반과 진열대.

마치 폐업 떨이하는 것처럼 황량해 보였다.

"어떻게 된 겁니까?"

"앞으로 제약회사 영업사원들이 물건을 공급하지 않겠다면서 물건을 빼갔습니다."

"···."

모기 해독제를 제외하고 각성자와 적합자, 혹은 일꾼들에게 필수적인 약들이 있다.

상처를 치료해주는 순간 지혈제, 외상 치유 연고, 마나를 점진적으로 회복시켜 주는 마나 회복제, 다른 독에 중독됐을 때 중독을 지연시켜주는 종합 해독제, 그리고 마나 진통제, 각성제···, 등등.

이것들은 레이드에 있어 필수적인 물건들, 만약 없다면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

지금까지 모기독 해독제를 팔면서 위의 약들도 같이 팔아왔다.

당연히 백스 드럭샵의 이익은 극대화됐고.

그런데 갑자기 약이 공급되지 않는다니.

"혹시 YJ 약국의 조훈석 짓인가요?"

"그놈이 주로 사용하던 방식이라서, 거의 확실하겠죠. 또···,"

백사장이 머뭇거리다 말을 이어갔다.

"···오늘 자치위원회 약품 허가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뭐라고요?"

"모기독 해독제를 복용한 다수의 사람에게 이상 반응이 일어났다고, 조사해야 하니 해독제 성분표를 보내달라는···,"

얼씨구!

이거 너무 노골적인데.

"안 주겠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최악의 상황이면 판매금지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쪽에서도 그런 뉘앙스를 풍겼고."

"조훈석이 자치위원회 소속이죠?"

"네, 상임은 아니고 일반 위원입니다."

"흐흐, 그렇군요."

솔직히 태주는 백스 드럭샵에 1년간만 독점 판매를 한 후에, 구례시 약국 전체로 공급하려고 했었다.

'역시 구례시 답구나.'

아무리 자유도시라고 해도 제국이 완전히 손 놓은 건 아니다.

제국에서 파견된 상임 위원도 존재하지 않나?

하지만 그도 한통속이라면?

뭐, 해독제만 팔아도 상관없다.

그래도 손님들이 몰릴 테니까,

하지만 야비한 수작질이 괘씸하다.

또 이거만 준비했을까?

아마 여러 곳에서 압력이 들어올 것이다.

실제 판매금지를 내릴지도 모르고,

돈줄을 말리려고 할 수도 있고,

물리력을 사용할 수도 있고.

놈들은 구례시 토호 세력들이다.

캐슬에 살면서 여러 인맥을 통해 구례 약품 시장을 쥐고 흔들었던 놈들.

타협은 절대 없다.

당하고 나서 방법을 찾는 것도 싫다.

그전에 때려버려야지.

"백사장님."

"네!"

"우리가 먼저 들이받읍시다. 협박도 협박 같은 걸 해야지."

"네? 먼저?"

"모기독 해독제 판매 중지해버리죠. 이상 반응? 참나! 내일부터 약국 문 닫아요."

"어어···, 그, 그럼."

"해독제 먹고 부작용 생겼다지 않습니까? 그럼 팔지 말아야죠."

백홍표도 태주의 의도가 뭔지 눈치챘다.

"당분간 돈은 벌지 못하겠지만 조금만 버텨봐요. 고아원 운영은 저도 힘을 보탤 테니까."

"아, 괜찮습니다. 저도 모아둔 돈이 있으니 고아원은 아무 문제없을 겁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조훈석이 엎드려 빌 때까지요. 이 새끼, 늘 하던 방법 계속 먹히니까 이번에도 될 거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정신 차리게 해줘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자 결심을 굳힌 듯 고개를 끄덕이는 백홍표.

"네, 싸워봅시다."

태주가 걱정 말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잘될 겁니다. 절 믿으세요. 참! 제가 좋은 고기를 구했는데, 내일 전체 고아원 회식 어떻습니까?"

"하하하! 좋죠. 직원들하고 아이들 불러 준비해 놓겠습니다."

금방 끝날 것이다.

사람들이 아예 해독제를 먹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미 맛을 봤으니···.

해독제 없는 사냥?

아마 매우 힘들 것이다.

※ ※ ※

다음 날.

거하게 벌어진 잔치.

백스 고아원은 구례뿐만 아니라 삼한제국 내에서도 상당한 규모를 차지하는 시설, 현재 돌보는 원생만 해도 200명이 넘었다.

이들 모두 예전 마수 웨이브 때 부모를 잃은 아이들.

최초 백홍표가 잘 알고 지내던 지인의 자식들을 재워주고 먹여주면서 보살피던 것이, 지금에 와선 구례 전체, 심지어 산청이나 함양 등지로 번졌다.

이 잔치에 원생뿐만 아니라 고아원을 독립한 성인들도 같이 왔다.

그럼 고기가 모자라는데.

어쩔 수 없다.

솥을 걸고 사골과 고기로 국을 끓여 뜨끈한 국밥을 말아야지.

구워 먹으면 금상첨화지만 포자 독 낙타 고라니의 고기는 삶아도 기가 막히게 맛있다.

그야말로 천상의 맛.

도리어 고라니 고기 맛을 보고 난 뒤. 다른 고기를 먹지 않으려 할까 봐 걱정일 정도.

"아니, 이거 무슨 고기입니까?"

"소고기죠."

"아닌 것 같은데."

아이들도 난리가 났다.

"너무 맛있어요!"

"혹시 한 그릇 더 먹어도 돼요?"

"돼지야! 그만 먹어!"

"넌 안 먹을 거야?"

"아, 아니!"

무슨 고기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한우 사골 정도로 생각하겠지.

국밥뿐만 아니라 각종 과자에 음료수, 떡과 아이스크림···, 이왕 하는 김에 넘치게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태주도 원생들과 친해졌고,

잔치를 벌이고 난 후에도 백홍표는 약국의 문을 열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마침내 구례 자유도시가 발칵 뒤집혔다.

< 해독제 하나 더 추가(2) > 끝

ⓒ 꾸찌꾸찌

=======================================

< 돈줄 확보하기 >

며칠째 굳게 닫힌 백스 드럭샵의 셔터.

마수 레이드 산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백홍표 사장이 직원들과 함께 휴가를 갔거니 생각했다.

그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으니까.

직원들 복지는 끔찍하게 챙기는 백사장 아닌가.

그래서 하루 이틀 정도는 참아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3일이 지나고 4일이 지나고 5일째가 됐는데도 열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약국문,

"뭐야?"

"왜 문을 안 열지?"

"어후, 그동안 사놓은 모기독 해독제도 점점 떨어져 가는데."

"설마 망한 거야?"

"에이, 그럴 리가 있나? 내가 백사장 번호 아니까 전화해본다."

"이미 해봤어. 꺼져있더라고."

사람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모기독 해독제를 살 수 있는 곳은 백스 드럭샵 뿐.

이러다 영영 못 사게 되면?

지긋지긋한 방충복을 다시 껴입어야 한다.

하지만 백스 드럭샵은 다음 날도 문을 닫았다.

다음다음 날도, 다음다음다음 날도, 한번 내려진 셔터는 올라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 퍼지기 시작한 소문.

- 모기독 해독제 이상 반응을 신고한 사람들이 있다.

- 제조식 공개 요구를 해왔다.

- 자치위원회가 판매를 중단시킬지도 모른다.

- 백사장과 개발자가 압박을 견디다 못해 문을 닫아버렸다.

인구가 200만이라도 의외로 좁은 동네.

금방 퍼져나갔다.

"이상 반응? 까고 있네. 알레르기란 알레르기는 다 가진 나도 물먹듯이 먹는 건데."

"이거 먹고 잘못됐다는 사람, 한 명도 못 봤어,"

"잘못될 리 있어? 그게 벌써 얼마나 팔렸는데, 이거 작업이야."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에이,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어? 부작용 없는 약은 없잖아."

"나도 동감, 내친구가 자치위원회 약품 허가부에 있는데, 신고 전화가 꽤 많다던데."

금방 뭉개졌다.

"그래서 부작용 생긴 사람이 누군데? 연기 났다며? 그런데 왜 안 보여? 제발 한 명이라도 알려주라."

"씨발, 난 이 속담이 제일 좆같아. 헛소문 퍼뜨려놓고 뭐라 하면 아니 땐 굴뚝 운운하는 새끼들."

백사장이 헌신하며 기른 자식들도 참전했다.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는 백스 고아원 원생 출신이 손님과의 대화에서.

"요즘 우리 남편이 애가 말랐어."

"왜요?"

"아니, 글쎄 모기독 해독제를 구하지 못해서 사냥 갈 기운이 나지 않는데."

"아! 백스 드럭샵에서 파는 물건 말이죠?"

"어머? 알고 있어?"

"그럼요. 무슨 협박이 들어왔다고 들었어요."

"협박?"

"해독제를 왜 혼자만 파냐고, 우리도 공급해 달라면서, 헛소문 퍼뜨리고 다른 약품이 들어오는 걸 막았다나?"

"그래? 그게 누군데?"

술집 바에서 손님들은 응대하는 바텐더 직업의 백스 고아원 원생 출신도.

"YJ 약국이 개입했다는 소문이···,"

"쯧, 내 이럴 줄 알았어. YJ 약국 조훈석, 그 새끼 욕심 많은 건 이 바닥에서 다 알지. 그런 식으로 헤쳐 먹은 약국만 해도 몇 개야?"

"아! 그랬나요? 전 잘 몰라서."

"그나저나 언제 재판매한다는 말 들은 적 없어?"

"글쎄요. 아버지, 아니 백사장님 말씀 들어보니 개발자분이 화가 많이 나셨다고."

"어이쿠! 나라도 화가 나지."

고아원 원생 출신 각성자 또한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며.

"난 절대 구례시 약국에서 약 안 살 거야."

"···약은 어디서 사려고?"

"남원이나 하동에서 택배로 시키면 돼. 돈을 더 주고서라도."

"그래? 나도 동참한다. 아무래도 백사장님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아."

이런저런 소문들이 퍼지고 퍼졌다.

이건 약국끼리 힘겨루기 경쟁의 문제만이 아니다.

모기독 해독제가 개발된 이후, 얼마나 많은 숫자의 각성자와 적합자들이 구례로 몰려왔나?

그러면 마수 사냥이 활발해지고 구례 경제가 발전함과 동시에 웨이브로부터 안전해지는 건 당연한 일.

"이거 가만히 있으면 안 되잖아."

"근데 지역 신문에선 왜 조용한 거야?"

"기레기들이 뻔하지. 조훈석, 그놈의 달달한 젖꼭지나 빨면서 돈이나 챙기겠다는 거지."

"자유, 자유, 거리더니 정작 진짜 자유는 하나도 없는 동네가 바로 구례였네."

"이제 알았어?"

일부 사람들이 행동을 개시했다.

약국 불매운동과 레이드 팀 활동 거부.

실제로 활동 중인 지리산 밀림 마수 사냥 레이드 팀 숫자가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다.

이건 저항 운동 때문만이 아니었다.

모기독 해독제 판매 중지도 한몫했다.

효과를 톡톡히 봤던 사람들은 이제 해독제 없이 사냥 가는 걸 꺼렸다.

사람들은 더 이상 구례 약국으로 가지 않았다.

택배비가 비싸도 타지역에서 주문해서 사용할 뿐.

점점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구례시 자치위원회도 이 문제에 대해 논의를 시작했다.

※ ※ ※

자치위원회 상임 위원 3명이 모였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모기독 해독제 갈등.

상임위원들은 1시간이 넘는 토론을 끝내고 결론을 짓기 위해 마지막 발언을 준비했다.

먼저 노고단 길드 이정학 길드장.

"저는 개입해야겠습니다. 당장 조훈석 대표를 자치위원회로 소환해 담합과 중소형 약국 괴롭히기 의혹을 추궁할 생각입니다."

이정학 길드장이 딱히 정의로워서 그러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각성자들과 적합자들의 여론이 백스 드럭샵에게 손을 들어주고 있기 때문에.

또 구례 토착 길드인 노고단 길드 소속 각성자와 적합자도 불만이 대단했다.

모기독에서 해방된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그 두꺼운 방충복을 입고 사냥하란 말인가?

조훈석을 족치는 것이 문제 해결에 있어 가장 빠른 길.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달랐다.

구례를 기반으로 성장한 천왕그룹 민동열 회장이.

"저는 반대입니다. 솔직히 약품 허가가 너무 느슨해요. 이번에도 부작용이 발생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제조식을 공개하지 않고···,"

"부작용요? 진짜 근거 있습니까? 그리고 약품 성분표야 죄다 분석해서 다 알고 있으면서,"

"조훈석 자치위원은요? 그가 중소형 약국를 괴롭혔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그럼 이대로 두잔 말인가요?"

"명색이 자유도시입니다. 이런 일로 사람을 핍박하면 안 되죠. 더구나 우리 식구인데."

이정학 길드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지광인 내무청 사무관을 바라봤다.

상임 위원 3인의 최종 의사결정은 결국 다수결.

지광인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저도 민동열 회장의 말에 동의합니다. 조훈석 대표는 오랫동안 구례를 위해 헌신한 분 아닙니까? 큰 갈등 없이 잘 끝날 겁니다. 한번 믿어봅시다."

이로써 결정이 났다.

그러나 지광인을 노려보는 이정학 길드장.

'새끼, 조훈석에게 돈 처먹었구나.'

하긴!

구례시 약국 협의회의 자본력이면 백스 드럭샵 정도는 충분히 말려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민동열도 마찬가지.

그도 바이오 계열사와 약국을 소유하고 있었다.

아마 누구보다 모기독 해독제 제조식을 원하고 있을 터.

그런데 조훈석이 대신 해준다고 하니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되고.

"좋습니다. 일단 두고 보겠습니다."

이정학도 한발 물러났다.

약이야 누가 팔든 상관이 있을까?

아무나 이겨서 빨리 판매했으면 좋겠다.

※ ※ ※

조훈석은 자신이 있었다.

백스 드럭샵 말려 죽이기.

그런데 놈들이 의외로 세게 나온다.

선제 판매 중지라고?

'여론을 이용하겠다는 말이지?'

가소로운 놈들.

그것도 생각 못 한 줄 아나 보다.

사람들에게 욕먹는 게 뭐가 두려워서.

그 정도야 이미 익숙해져 있다.

그에게 필요한 건 자치위원회의 의중.

구례시에 다수의 바이오 직영 약국을 소유하고 있는 천왕그룹 민동열 회장은 거의 우군 수준, 차관급 인사인 2급 사무관 지광인은 약국 협의회 로비에 찌들어 있는 사람이었다.

제일 우려하는 건 역시 자경단을 맡고 있는 무력 집단 노고단 길드, 이정학 길드장의 입장이 중요했다.

'법보다 무서운 게 주먹이라.'

그가 움직이면 자신도 어쩔 수 없다.

아무튼 방금 연락받았다.

이정학 길드장은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됐어!'

그렇다면 2단계.

뒷말 나오지 않게 지역 언론도 단속하고.

그러고 나서 구례시 은행 지점장들과 만났다.

"백스 드럭샵에다 대출금 조기 상환 요구하세요."

"···어, 그, 그건."

"선택하세요. 우리 구례 약국 협의회인지, 아니면 망할 게 뻔한 백스 드럭샵인지."

"아, 알겠습니다."

돈줄도 끊었고.

이 구례에서 진정한 자유는 바로 돈,

돈이라면 이쪽이 더 많다.

결국 자신이 이긴다.

※ ※ ※

태주는 할 일이 많았다.

너무 바쁘다.

언젠가는 백스 드럭샵을 오픈해야 하고, 그 후에 판매할 해독제 물량을 충분하게 확보해야하기 때문에.

또한 틈틈이 포자 독 낙타 고라니 해독제도 개발해야 하고.

태주의 건물 지하 연구소엔 해독제 원액이 든 20L들이 물통이 가득가득 쌓였다.

물통 숫자만 어림잡아 300여 개, 10ml 들이 병으로 따지면 180만 개,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차 있었다.

더 만들어도 쌓을 데가 없을 만큼.

든든하다.

저거만 해도 얼마인가?

그러나 역시 마음에 걸리는 건,

"백사장님, 고아원 재정 상태는 어때요?"

"으음, 버, 버틸만 합니다. 후원도 들어오고요. 모자라면 대, 대출이라도 받아야죠. 하하하."

"대출? 은행에서 대출금 조기 상환 통보받지 않으셨나요?"

"···그걸 어떻게?"

"원생 출신 약국 직원이 말해줬습니다."

"아···."

백홍표는 말하지 않으려 했다.

괜히 꺼냈다 힘만 빠질까 봐서.

돈은 다른 경로로 구할 생각이었다.

"아끼면 됩니다. 교육비, 통신비, 교통비, 도서 구입비, 의외로 줄일 데가 많거든요. 그럼 몇 달은 버틸 수가 있습니다."

"그걸 왜 줄여요. 그렇지 않아도 힘든 아이들인데,"

"하지만 돈이···."

"절대 줄이지 마세요."

태주는 단호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고. 저 해독약 원액 만들어 논거 보이시죠?"

"네."

"싹 팔아봅시다."

"그, 그럼 다시 약국 문을···,"

태주는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뇨, 약국에서 안 팔 겁니다. 전에 지리산 마수 방어군단에서 납품 의뢰 들어왔다면서요?"

"···어? 그러네요. 이제 기억납니다."

"한 100만 병 정도 팔아보죠. 가격은 그대로 5만 원으로 해서."

백홍표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아아, 그러면 되겠군요. 가, 감사합니다."

"뭘요. 저도 돈 벌자고 하는 짓인데."

"지금 당장 교섭해보겠습니다."

액수만 해도 500억.

드럭샵의 몫은 150억.

세금을 뗀다 해도 130억이 넘는 금액.

대출금 조기 상환해도 돈이 남는다.

"그리고 군부에 넌지시 언질을 보내보세요."

"언질이라면?"

"이번에 포자 독 낙타 고라니 해독제도 개발했는데 관심 있냐고."

"포, 포자 독 낙타 고라니 해독제? ···헉! 설마 잔치 때 먹은 그 국밥이?"

"네, 고라니 고기입니다."

"맙소사! 어쩐지 입에 착착 감기더라니."

만약 해독제가 진짜라면?

고라니 사냥이 가능해진다.

가끔 마수들끼리 싸우다 죽은 고라니 시체가 발견되면 황실에서 관리가 내려와 사 간다는 그 고라니 말이다.

더불어 일반 사람들이 복용하면 마수 웨이브가 일어났을 때 생기는 피해를 대폭 줄일 수 있다.

"포자독 해독제 가격은 5만 원보다는 많아야겠죠?"

"당연합니다."

※ ※ ※

제국군 지리산 방어 군단 오진형 중장은 부관이 가져온 보고서를 읽고 침중한 표정이었다.

"후우, 이거 산 넘어 산이군."

파주 영지를 둘러싼 계승 갈등.

마나 거부자인 맏아들, 그리고 계모와 제국 사관학교에서 공부 중인 배다른 자식들.

오진형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영지를 둘러싼 갈등이 드문 일도 아니고, 지금도 종종 일어나는 일.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지 못한 김태주는 설악산 전초기지로 쫓겨났고, 거기서 암살 위협까지 받고 전역해버렸다.

급기야 호적에서도 파였다.

군에 대한 인상도 좋지 않을 것이다.

오진형은 모기독 해독제가 간절했다.

지리산 남쪽이야 민간 각성자들이 마수들의 숫자를 줄여준다지만 이곳 북쪽은?

'방법이 없을까?'

마수 토벌을 위해 지리산에 시원하게 대규모 폭격을 감행하면 어떻게 될까?

바로 웨이브가 일어난다.

지리산에 있던 수많은 마수들이 사방으로 풀려날 터.

그로 인해 대규모 인명 피해가 일어나면?

'보직 해임 당하겠지.'

그렇다고 소극적으로 대처하다간 비슷한 결과가 일어나겠고.

적극적인 토벌 작전을 위해선 모기독 해독제가 필수.

'내가 직접 찾아가 요청해봐야겠군.'

김웅방 준장 이야기는 절대 꺼내지 말고.

그때였다.

"중장님!"

노크도 없이 집무실로 들어오는 부관.

"무슨 일이야?"

"백스 드럭샵에서 모기독 해독제 납품하겠답니다."

그러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는 오진형 중장,

"뭐라고? 무, 물량은?"

"그게 조금 많습니다."

"얼마나 준대?"

"100만 병입니다. 금액만 500억이라."

지금 돈이 문젠가?

"군단 유보금 여력이 없나?"

"있긴 합니다."

그렇다면 고민할 거리도 안 된다.

"무조건 산다고 해. 아니, 마음이 바뀔지 모르니까, 계약금으로 절반 입금해줘."

"네, 알겠습니다. 참! 그리고 백사장이 또 이야기한 것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

"포자 독 낙타 고라니 해독제도 개발했는데, 관심 있으시냐고."

"···뭐?"

잘못 들었나?

"그 등에서 독 포자 터뜨리는 낙타 고라니 말인가?"

"네."

"구워 먹으면 육즙이 분수처럼 솟아 천상의 맛이라는 그 고라니?"

"맞습니다."

"지, 진짜 고라니 포자 독 해독제라고?"

"분명히 그렇게 들었습니다."

오진형 중장은 곧바로 스마트폰을 꺼내며 말했다.

"백사장 전화번호 불러! 내가 직접 대화를 나눠보겠네."

< 돈줄 확보하기 > 끝

ⓒ 꾸찌꾸찌

=======================================

< 회사 설립 >

삼한제국 영토를 볼 때 한반도 중남부 지역은 일종의 변방이나 다름없다.

오진형 중장이 지휘하는 제국군 지리산 마수 방어군단은 결국 웨이브를 막고 마수들을 통제하는 현상 유지의 임무에 한정되어 있었다.

방어군단 지휘관.

티가 나지 않는 자리다.

잘해야 본전이고 실패하면 그 책임을 고스란히 뒤집어써야 한다.

반면 시베리아를 개척하는 전투 군단이나 중앙아시아 방면으로 진출하는 제국군 군단의 지휘관은 조금만 성과를 내도 빛이 확 나는 직책, 따라서 같은 지휘관이라도 우열이 있었다.

모기독 해독제는 소극적 현상 유지 임무를 넘어 적극적인 토벌 작전을 가능케 해준다.

게다가 포자 독 낙타 고라니 해독제라고?

잘하면 북부와 서부의 제국군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종래엔 본부, 혹은 합참으로 영전할 수 있는 발판이 만들어졌다.

유배지라 여겼던 지리산이 기회의 땅으로 탈바꿈했다.

백스 드럭샵 백홍표 사장과의 전화를 마친 오진형 중장.

"허허, 세상일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더니."

포자 독 낙타 고라니 사냥.

웨이브 피해를 대폭 감소시킬 수 있다는 것도 좋지만···, 그에 따라오는 보너스, 고라니 고기.

자신도 먹어본 적 없다.

워낙 비싸고 귀하기 때문이다.

"해독제가 확보되면 고라니 사냥부터 먼저 보내야겠군."

지리산으로 발령받았을 땐 여기가 군 생활의 마지막인 줄만 알았다.

그래도 명예를 생각해 끝까지 임무를 잘 완수하고 전역하리라 생각했다.

이젠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준비되면 연락을 준다고 했으니까 자네가 직접 가서 물량 받아와. 그리고 포자 독 해독제 계약도 하고, 웬만하면 우리 지리산 방어군단을 통해서만 거래하도록 유도하는 거 잊지 말게."

"알겠습니다."

만족한 듯 미소를 머금은 오진형 중장.

그러다가,

"그런데 말이야.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뀐 거지? 처음엔 물량이 부족해서 안 판다고 하더니."

"부작용 때문에 판로가 막혔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부작용? 그게 있었어?"

"제가 알아본 바로는 갑자기 퍼진 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 부작용 환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마 구례시 다른 약국들과의 갈등 때문에···."

"아하!"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짐작이 간다.

안 봐도 뻔하다.

그 갈등이 오진형에겐 있어서 크나큰 행운이었다.

있지도 않은 부작용 때문에 기회를 잡게 됐다.

"무슨 갈등인지 따로 알아봐."

"네!"

"그리고···,"

은근한 눈빛으로 부관을 바라보는 오진형.

"자네, 뉴서울 중앙 일간지에 잘 아는 기자가 있다고 했지?"

"한동네에서 자란 고향 친구가 편집장으로 있습니다."

"그래? 부탁 하나 해도 될까?"

"명령만 내리십시오."

"이번 모기독 해독제 계약과 포자 독 낙타 고라니 사냥 가능성에 관한 기사를 중앙 일간지에 띄울 수 있을까? 잘 포장해서 말이야."

"당장 이야기해놓겠습니다. 그쪽도 특종이라고 좋아할 것이 분명합니다."

"자네만 믿겠네."

지리산 마수 방어군단의 전략 자체가 바꿀 수 있는 수단이 생겼다.

그런 의미에서 변종 3줄 무늬 모기독 해독제는 사실상 전략 물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0만 병.

이거 금방 소모된다.

산청, 남원, 함양 등지에서 하루에 투입되는 정찰, 수색, 작전 군인의 숫자는 몇백 단위 수준으로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대규모 토벌 작전이 시작되면?

더 많은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추가 예산이 필요하다.

효과가 입증되고 성과를 올리면 제국 황실에서 지원이 나올 터.

'그건 그렇고, 파주 쪽은···,'

이미 틀어진 부자 관계.

어느 편에 서야 할지는 명확하다.

김웅방 준장과는 친한 척도 하지 말아야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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