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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8% SWMASTERCIBERPUNK / Chapter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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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MASTERCIBERPUNK

作者: Kakao_Cuenta_4639

© WebNovel

章 1: 1

죽은 신입의 사회 (1)

25화. 죽은 신입의 사회

은은한 통기타 선율이 들려온다.

하늘하늘 흔들리는 얇은 쉬폰 커튼 자락 뒤로 은은한 햇살이 쏟아졌다. 한차례 걸러진 햇살은 한낮의 오후를 떠올리게 했다.

포근하고 나른했다. 지나가는 시간을 넋 놓고 바라보게 할 정도로.

고풍스러운 앤틱 가구들은 오래된 사진의 한 장면 같았고, 기다란 시계추가 달린 벽걸이 시계는 아직도 움직일 수 있다는 듯 삐걱거리며 진자운동을 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비현실적인 공간이었다.

"그게 뭐 어때서요?"

그리고 그 모든 배경의 중심인 커다란 앤틱 소파에서 로제가 뻔뻔한 얼굴로 대꾸했다.

"내가 생각했던 소문과 많이 다르던데."

나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말하자, 그녀는 오히려 더 뻔뻔하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아무렇게나 소문이 나면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뭔가 기억에 남아야 소문이 빨리 퍼진다고요!"

"기억에 남는다라······. '흑발흑안의 칼잡이를 만나면 조심해라. 언제 목이 달아날지 모르니.' 대체 이런 오글거리는 문장은 누구 아이디어지?"

"오, 오글거리다니요! 내가 이래 봬도 웹소설 출판제의까지 받은 사람이거든요?"

발끈한 로제를 쳐다보며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너였냐?"

"헙!"

깜짝 놀란 로제가 제 입을 틀어막았다. 커다랗게 뜬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내가 말없이 계속 쳐다보고 있자 슬그머니 시선을 돌린다. 자기도 찔리긴 했나보군······.

나는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그럼 그 '소드마스터'도 네가 붙인 별명이야?"

"아, 아뇨? 그건 저 아닌데요?"

그녀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오호라. 이 반응은 뭐지?

"그건 아니다, 라······. 그럼 다른 건 뭘까?"

"그,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소문이 나서 유명해지고! 몸값 올리고! 에?

그, 어? 더 많은 명성! 더 많은 돈! 이게 목적이잖아요?"

"······."

뭐라는 거야?

말을 돌리는 걸 보니 또 뭘 하긴 한 모양이다. 대체 밖에다가 나를 뭐라고 소문을 내고 다니는 걸까?

"아, 그래! 당신 마침 잘 왔어요. 딱 당신과 어울리는 지명 의뢰가 들어왔거든요."

"말 돌리네?"

"······그, 그냥 넘어가 주면 안 돼요?"

입술을 삐쭉 내민 그녀가 고양이 같은 눈망울로 나를 쳐다봤다. 이미 양 볼이 붉다. 더 꼬리를 잡았다간 쥐구멍에라도 들어갈 기세다.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곤 어깨를 으쓱했다.

"이번에도 경호였으면 좋겠는데. 편하고 좋더군."

"안타깝지만 그런 의뢰는 흔치 않아서요. 대신 이번 의뢰는 당신이 좋아할 만한 의뢰예요!"

화제가 넘어가자 그녀의 얼굴이 한껏 밝아졌다.

그나저나 내가 좋아할 만한 의뢰라? 돈은 많이 주고 시간은 짧은 의뢰인가?

"무슨 의뢰지?"

"갱 소탕 의뢰예요. 게다가 이번에도 42구역이라구요!"

로제가 신난다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것도 앙증맞은 주먹을 불끈 쥐면서.

물론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잠깐. 내가 좋아할 만한 의뢰라고 하지 않았나?"

"네. 당신 갱 싫어하잖아요."

로제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갱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나?"

"그렇게 시니컬하게 말하는 것 치고는 지난번 의뢰의 임팩트가 너무 강한데요?"

"······그건 그놈들이 대화도 하기 전에 총부터 뽑았으니까 그렇지."

"네에~ 그렇다고 할게요~ 그래서 이 의뢰는 안 받을 거예요? 이번엔 선량한 기업의 공장을 불법점유한 갱들을 퇴치하는 일이라고요!"

"퍽이나 선량한 기업이겠군."

"자꾸 그렇게 딴지 걸지 말고요. 요점은 갱이 기업 공장을 불법점유했다, 이거거든요?"

"뭐, 좋아. 일단 들어보고 결정하지."

내 대답에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히죽 웃은 로제가 설명을 시작했다.

"의뢰인은 42구역에 공장을 소유한 <차일드>라는 기업이에요. 납품받은 섬유와 그들이 만든 섬유를 섞어서 '특수합성섬유'를 만드는 기업이죠."

"화학 기업이 왜 <차일드>라는 이름을 쓰는 거야?"

차일드라면 어린이라는 뜻인데, 화학이랑 너무 안 어울리는데? 장난감 회사라면 모를까.

"본업은 그 섬유로 만든 아동복이거든요. 뭐, 아무리 빨아도 해지지 않고, 때가 타지 않는다나?"

"설명만 들어도 몸에 좋은 섬유는 아닌 것 같은데······ 아동복을 만든다고?"

"그런 기업이 한두 갠가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조금 전에 선량한 기업이라고 말하지 않았었나?

내 눈빛을 느꼈는지, 로제가 손을 휘휘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갱단이 공장을 불법점유한 게 벌써 10차례가 넘는다더군요."

"10번이 넘는거면······ 누가 문젠거야?"

42구역이니 당연히 치안은 엉망일 테고, 기업에서도 애초에 경찰의 도움은 생각도 안 했을 텐데.

보안을 늘리지 못한 기업? 아니면 정신을 못 차리고 맛집처럼 계속 찾아오는 갱단? 그것도 아니면 아무리 40번대 구역이지만 이 정도 사태까지 방치한 경찰?

음. 아무리 생각해도 전부 다 문제로군.

로제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중요한 건 기업에서도 참다 참다 칼을 빼 들었다는 거죠."

"그래서 의뢰를 넣은 거로군. 이참에 싹 다 쓸어버리고 싶어서."

"네. 거기도 큰 결단을 한 거죠."

"그런데 왜 여태껏 안 한 거지? 이렇게 해결사 의뢰까지 넣을 정도면 돈이 없는 기업도 아닌 것 같은데."

"푸훗. 그거야 당신 때문이죠."

로제가 눈동자를 반짝이며 나를 쳐다봤다. 재밌는 걸 발견한 어린아이 같은 눈빛이었다.

"나?"

"당신이 며칠 전에 42구역 갱단 중에서 커다란 하나를 날려버렸잖아요."

"아, 그렇지. 이곳도 42구역이긴 하군. 그런데 그게 왜?"

"그 자리를 놓고 대형 갱단끼리 싸우고 있어요. 그중 하나가 공장을 점유한이 갱단이고요."

음. 주인 없는 이권 때문에 싸움이 났다는 건데······.

잠깐. 그걸 노렸다면?

"······설마 기업에서 경쟁 갱단과 거래를 했나?"

"맞아요. 자기네가 이 갱단을 정리할 테니 앞으로 공장을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한 거죠. 경쟁 갱단에서는 손도 안 대고 코를 푸는 격이니 당연히 동의했고요."

"그래서 나한테 지명 의뢰가 온 거로군?"

이미 42구역 갱단을 지운 경력이 있으니까?

"그래요. 이 의뢰, 받을 거죠?"

"좋아. 수락하지."

이런 이유라면 의뢰비를 톡톡히 받아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 * *

나는 42구역으로 향했다.

약속된 장소에 도착하자 열댓 명의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친 얼굴과 모양새만 봐도 칼 밥 먹는 사람들이라는 게 팍팍 느껴졌다.

내가 다가가자 저마다 나를 훑어보더니, 허리춤에 칼자루를 확인하곤 관심을 껐다. 같은 종이라고 느낀 거다.

'해결사들이로군.'

이번 의뢰는 공장의 수복이었다.

백 명이 넘는 갱들이 공장을 점유하고 있는 데다가, 애초에 기업의 목적은 갱들의 섬멸이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뿌리째 뽑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물론 모조리 쓸어버려서 다른 갱단에게 경고하려는 의도도 보였고.

'저쪽이 용병단인가보군. <붉은 날개>라고 그랬나?'

해결사 무리들과 조금 떨어진 안쪽. 튼튼하게 설치된 군용막사 근처엔 용병들이 모여있었다. 이번 소탕작전에서 작전지휘를 맡은 <붉은 날개> 용병단이다.

제멋대로인 해결사들로만 이런 섬멸작전을 펼친다는 건 애초에 말이 되지 않았다. 위험한 일일 것 같으면 서로 안 하려고 할 테니.

나는 해결사 무리에 섞여 대충 구석에 자리 잡았다.

어차피 작전은 용병단에서 알아서 세울 거고, 나는 그 작전에 어울려주기만 하면 된다. 무리한 요구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때 용병단 천막에서 다소 앳된 사내가 껄렁한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자! 해결사들은 전부 모여라! 임무를 주겠다!"

해결사들이 모인 곳으로 다가온 사내가 외쳤다.

해결사들이 어슬렁거리며 사내에게 다가갔다. 나도 엉덩이를 뗐다.

"나는 <붉은 날개> 용병단의 플뢰르다. 당신들처럼 얼마 전까지 해결사 노릇을 하며 지냈지."

"뭐? 그런데 어떻게 <붉은 날개>에 들어갔지? 거긴 군인 출신만 받는다던데?"

플뢰르의 말에 수염을 잔뜩 기른 해결사가 물었다. 호기심 반, 부러움 반이 섞인 목소리였다.

그걸 느꼈는지, 플뢰르가 턱을 치켜들며 대답했다.

"그건 잘못된 소문이지. <붉은 날개> 용병단은 능력만 있으면 스카우트하니까."

"진짜? 그런데 그걸 어떻게 보여주는데?"

"나는 한 달 전 함께한 작전에서 스카우트 됐다. 당신들도 이번 작전에서 능력을 보여준다면 스카우트될 수 있겠지."

"오호······ 그렇단 말이지?"

해결사들의 얼굴에 저마다 다른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눈빛에 떠오른 감정은 열망이었다.

<붉은 날개> 용병단에 스카우트되겠다는 열렬한 바람.

'말솜씨가 꽤 좋군.'

말솜씨가 좋은 건지, 혓바닥을 잘 놀리는 건진 몰라도, 해결사들에게 동기부여는 확실히 했다.

<붉은 날개> 정도로 큰 규모의 용병단이면, 오히려 목숨이 위험한 일도 드물고 수입도 안정적이었으니까.

"그럼 지금부터 포지션을 알려주겠다."

플뢰르는 태블릿을 꺼내 해결사 리스트를 확인하며 말했다.

"아돌, 리들러! 당신들은 입구 좌측의 경비탑을 맡는다."

"오케이!"

"맡겨두라고!"

"비토리오, 엠마. 당신들은 입구 우측 경비탑이다."

"좋아쓰!"

이런 식으로 해결사들을 몇몇 조로 묶어 배치했다.

몇 번의 호명이 더 지나가고······.

"이름이 안 불린 사람들은 전부 입구에서 갱들과 교전을 펼칠 거다. 최대한 요란스럽게 싸워야 후방 작전이 편해지니까, 총이든 폭탄이든 쓸 수 있는 건 모조리 쓰는 게 좋을 거다."

그때 호명되지 않은 해결사 하나가 발끈하며 앞으로 나섰다. 처음에 용병단에 관해 물었던 수염이 잔뜩 난 해결사였다.

"뭐야? 그럼 우리가 미끼라는 거 아니야?"

"미끼 맞다. 물론 너희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용병단에서도 지원팀이 남을테니 걱정하지 말도록."

"지원팀만 남는다고? 만약 화력이 부족하면? 그럼 입구는 바로 쓸린다고!"

수염난 해결사의 말에 플뢰르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러니까 쓸 수 있는 건 모조리 쓰라고 말했잖나? 아끼다가 죽을 수도 있으니까."

"이, 이런 씨발! 너무 위험하잖아? 상대는 백 명이 넘는다며?"

"이게 위험해? 그럼 빠져!"

"뭐야? 무슨 말을 그따위로······!"

"너 하나 빠져도 상관없으니까 빠지라고. 그럼 편하게 놀면서 돈 벌려고 했나? 입구에서 시간 끄는 것도 못하면서 무슨 해결사를 하겠다고. 쯧!"

독설을 퍼부은 플뢰르가 경멸에 찬 얼굴로 혀를 찼다.

수염 난 해결사가 발끈하며 외쳤다.

"너 이 새끼! 어린 놈의 새끼가 뭘 안다고······!"

"야야. 그만해. 편하게 돈 벌려고 온 건 아니잖아."

"그래. 안으로 안 들어가는 게 어디야. 위험한 일은 저쪽에서 한다잖아."

"······씨발!"

친분이 있는 다른 해결사들이 말리자, 수염 난 해결사가 분하다는 듯 욕을 내뱉곤 뒤로 물러섰다.

화는 나지만 의뢰를 포기하지는 않겠다는 의미다.

하긴, 해결사 일을 하면서 이런 상황이 어디 한두 번이었겠나. 이보다 더 더러운 상황도 많이 봤겠지.

플뢰르가 거만하게 턱을 들어 다른 해결사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작전 설명은 이게 끝이다. 혹시 다른 질문이나 이의 있는 사람 있나?"

"······."

다들 별말이 없었다.

포지션 관련해서 한번 말싸움도 있었고, 맡은 임무가 그리 복잡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달랐다.

"잠깐. 진짜 이게 끝이라고?"

나는 지명 의뢰를 받고 왔다. 한두 푼도 아니고, 미끼 역할이나 시키려고 지명 의뢰를 넣진 않았을 거다.

"그래. 너는 무슨 불만이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 플뢰르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분명 허리춤에 매달린 칼을 확인하고 조소가 더 짙어졌다.

나는 녀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뭔가 착오가 있나 보군. 단장을 만나고 싶다."

"착오는 뭔 착오. 그리고 씨발! 너 따위가 뭐라고 단장님을 만나겠데? 우리 '붉은 날개' 용병단이 만만하냐?"

놈이 내게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며칠을 안 씻은 건지, 특유의 썩은 내가 진동했다.

나는 이를 살짝 깨물며 인내심을 끌어올리곤, 다시 천천히 말했다.

"후회할 짓, 하지 말고, 단장에게, 안내하지?"

"후회는 씨발? 이 건방진 칼잡이 새끼가 어디서 되지도 않는 협박이야? 너 우리가 누군 줄 알아? 뒈지게 처맞아야 정신을 차리려나?"

"······그만 씨부리고 단장 어디 있어? 저기 천막에 있나?"

나는 말이 안 통하는 놈을 무시하고 안쪽에 설치된 군용막사로 걸어갔다.

그러자 뒤에서 놈이 냅다 달려들더니 멱살을 잡으며 말했다.

"너 이 개새끼야! 말이 말 같지 않아? 하! 너 진짜 뒈지게 맞아봐야겠다."

"······."

조용히 마음속으로 인정했다.

굳이 용병단과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아서 참았는데······ 여기까지가 내 인내심의 한계였다.

나는 놈의 눈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너, 좀 맞자."

죽은 신입의 사회 (2)

26화. 죽은 신입의 사회

"무, 뭐? 이 새끼가 미쳤······ 커억!"

걸레를 문 놈의 아구창을 그대로 돌렸다.

주먹 한 대에 눈이 풀리고 비틀거린다. 거기에 복부에 한방 더 주먹을 꽂아줬다.

"커어어억!"

놈이 가슴을 부여잡고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한껏 벌린 입으로 침인지, 위액인지 모를 액체가 질질 흘러나왔다.

하. 겨우 이 정도 깡으로 저런 위세를 떤 거야?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오네.

내가 놈을 보면서 헛웃음을 짓고 있던 그때, 군용천막이 열리며 일단의 사람들이 나왔다.

"무슨 소란이지?"

우르르 용병들이 몰려들었다.

가장 앞에서 걸어 나오던 남자가 쓰러진 놈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이 왜 여기 있소?"

"해결사니까."

나는 남자의 말에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리고 주변을 가리켰다.

아직도 무슨 상황인지 이해 못 하는 해결사들이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뭔가 실수가 있었나 보군."

"뭐, 실수를 하긴 했지."

나는 바닥에 쓰러져 속을 게워내고 있는 플뢰르를 내려다봤다.

남자의 시선도 플뢰르를 향했다.

"신입! 이게 무슨 일이지?"

"끄으윽. 그, 그게······ 이 자식이 갑자기 공격을······!"

"갑자기?"

실소가 흘러나왔다.

딱 전형적인 쓰레기의 변명 루트다.

"조금 전까지 멱살을 쥐고 뒈지게 팬다던 말은 왜 빼지?"

"그, 그건 네놈이 건방지게!"

"그만! 신입 네가 함부로 입을 놀릴 사람이 아니다!"

"다, 단장님!"

플뢰르가 한껏 억울한 얼굴로 외쳤다. 억울한 얼굴이라······ 아직 정신을 덜 차렸네.

그나저나 역시 이 남자가 단장이었나?

나는 플뢰르에게 시선을 떼고 말없이 단장을 쳐다봤다.

"내가 대신 사과하지. <붉은 날개> 용병단의 단장, 레드우드라네. 아직 멋모르는 신입이라 용서해주게."

레드우드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바라보곤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확실히 바닥에 자빠진 신입과는 정치력이 다르다. 자기소개와 사과를 함께 해버리다니.

이러면 저 악수를 받아주면 용서를 한 게 되고, 그렇다고 받아주지 않으면 인사도 무시하는 쓰레기가 된다.

"강현재. 알고 있는 것 같으니 따로 소개는 필요 없겠지?"

그의 손을 맞잡았다. 오랜 경력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굳은살이 잔뜩 박힌 투박한 손이다.

저런 덜떨어진 신입 때문에 척을 지기엔 유능한 남자다. 해결사로 사는 동안 <붉은 날개>와 만나는 게 이번이 끝일 것 같지도 않고.

"막사로 가지. 작전 브리핑과 함께 당신 역할을 알려줄 테니."

"저 신입은 나보고 입구에서 미끼나 맡으라는데?"

"······그런 멍청한 작전은 하진 않을 테니 들어가지."

레드우드는 살벌한 눈으로 플뢰르를 노려보고는 뒤돌아서 천막으로 걸어갔다.

"다, 단장님······."

플뢰르가 하늘이라도 무너진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놈을 바라보며 킥킥 웃음을 터트리곤 휘파람을 불면서 막사로 걸어갔다.

휘휘휘~♬

뒤통수가 따가웠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 * *

용병단 지휘부가 모인 작전회의.

레드우드가 홀로그램으로 만든 공장지대의 지도를 가리키며 작전 브리핑을 시작했다.

"······작전은 간단하다. 밤이 되면 공장으로 향하는 전기를 끊는다. 그때 전면에서 해결사들과 지원팀이 교전을 시작하며 적들의 시선을 끈다."

조금 전 신입에게 들었던 내용이다. 아마 여기까지가 해결사들에게 오픈되는 내용이겠지.

"그사이 전투팀은 공장 후방으로 침투한다. 우리 목표는 총 두 곳이다."

홀로그램 지도가 확대되며 공장 중앙이 떠올랐다.

"하나는 적들이 지휘본부(Headquarters)로 사용하는 공장장 사무실이다. 이곳이 가장 큰 격전지가 될 거다. 따라서 이곳은 전투팀이 맡는다."

공장장 사무실이 지휘본부라면 가장 많은 병력이 상주하고 있을 터였다. 길바닥 인생인 갱들이라도, 간부급까지 올라가면 자기 목숨은 또 끔찍하게 아끼더라.

공장장 사무실을 비추던 홀로그램 지도가 이번엔 조금 거리가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다른 하나는 전산실이다. 이곳은 안전하게 확보해야 한다. 자칫 큰 폭발이라도 일어난다면 작전의 절반은 실패다. 따라서 이곳은 강현재. 당신이 맡는다.

이의 있나?"

레드우드를 비롯한 용병단 지휘부 전체가 나를 쳐다봤다.

그들의 눈빛에 떠오른 감정들은 호기심 반, 의심 반이었다. 아무리 적의 주력이 공장장 사무실에 몰려있더라도, 전산실의 중요도를 봤을 때 그곳에도 꽤 많은 병력이 있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걸 당신 혼자 처리할 수 있겠어? 그것도 그 허리춤의 칼 따위로?

말을 하진 않았지만, 눈빛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느껴졌다.

나는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것만 하면 되나?"

"······중요한 일이다. 전산실만 안전하게 확보하면 되는데 가능하겠나?"

"뭐, 좋아. 전산실 확보하고 상황 봐서 그쪽도 도와주도록 하지."

"······그건 알아서 하도록."

레드우드가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다른 시선들의 주인들은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다. 호기심이 더 짙어진 얼굴도 있고, 오히려 반감이 떠오른 얼굴도 있다.

나는 그 모든 시선을 유유히 받으며 의자 뒤로 편하게 몸을 기댔다.

* * *

어둠이 내려앉았다.

우리는 캠프를 접고 공장지대 인근으로 이동했다.

'확실히 분위기가 많이 달라.'

점점 밤거리의 불빛은 사라지고, 인적도 드물어졌다.

30번대 구역까지만 해도 빼곡한 네온사인 불빛으로 가득했는데, 이곳은 곳곳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어둠이 내려앉았다.

게다가 공장지대는 도시의 경계에 있었다. 바깥으로 향할수록 드문드문했던 불빛조차도 급속도로 사라졌다.

'여기는 완전 딴판이로군.'

이윽고 공장지대에 도착했다.

사위는 어둠에 잠겼고, 어둠을 비추는 유일한 불빛은 공장의 서치라이트였다.

그 모습이 마치 밤바다의 오징어배 같아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바로 작전을 시작한다."

이미 자정이 지난 시각이다. 시간을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전투조를 따라 공장을 크게 우회해서 접근했다.

그때 공장의 불빛이 꺼졌다.

공장지대는 순식간에 어둠으로 휩싸였다. 밤바다에 홀로 떠 있는 오징어배의 전등이 꺼진 순간이다.

동시에 저 멀리서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총구의 불빛이 별처럼 반짝였고, 폭발의 화광으로 밤하늘은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라졌던 공장의 불빛이 하나, 둘 돌아오기 시작했다. 보조전력장치가 돌아가며 전원공급을 시작한 탓이다.

물론 이걸 예상 못 한 게 아니다.

"전면에서 교전이 시작됐다. 우리는 잠시 기다린다."

풀숲에 몸을 숨기고 잠시 후문을 지켜봤다. 전력은 다시 돌아왔지만, 대낮처럼 밝던 이전과는 차이가 컸다.

보조전력장치는 말 그대로 '보조'다. 최소한의 전력만 공급된다는 뜻이다. 가장 많은 전력을 소비하는 서치라이트가 꺼졌고, 전등만으로 어둠을 밝혔다.

그 빛이 모자라는 건 당연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후문 경계를 서는 갱들이 우왕좌왕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겠지.

부아아앙.

끼익!

그때 어디선가 달려온 차량이 다급히 후문에 멈춰섰다.

갱들이 우르르 탑승했다. 갱들을 태운 차량은 그대로 공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마 전방으로 지원 가는 거겠지.

덕분에 후문의 경계는 약해졌다. 십수 명이 넘었던 인원이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전투조 작전 시작."

레드우드의 짤막한 말과 함께 퉁퉁거리는 저음의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후문의 갱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소음기를 장착한 저격이었다.

스스스슥.

갱들이 쓰러지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후문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전투조에서 후문 경계를 맡은 인원 두어 명이 빠지고, 나머지는 그대로 공장안쪽으로 진입했다.

퉁퉁!

가는 길에 마주치는 갱들이 아예 없진 않았다.

그럴 때마다 소음기를 장착한 총구에서 불이 뿜어졌고, 갱들은 영문도 모른 채 죽었다.

'왜 <붉은 날개>가 유명한 줄 알겠군. 용병단이 아니라 무슨 군사조직 같아.'

뒤에서 지켜본 그들의 솜씨는 훌륭했다. 빠르게 이동하면서도 은폐, 엄폐가 확실했고, 적들이 보이기 무섭게 반응하며 착실히 쓸어나갔다.

'저놈도 주둥이만 산 게 아니라 나름 가락이 있는 놈이었고.'

나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이동하는 플뢰르를 지켜봤다.

처음엔 용병단에서 왜 신입으로 놈을 스카우트했는지 의아했는데, 의외로 뛰어난 저격수였다. 첫 저격에서 후문의 갱을 저격한 것도 놈이었다.

비록 욕은 잔뜩 먹었을지언정, 나름 능력은 있었던 놈이다.

이윽고 공장 중앙에 거의 도착했다.

"이제 갈라지지."

저 앞에 보이는 우뚝 솟은 3층 건물이 공장장 사무실이었다. 나는 좌측으로 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전산실이 목표였다.

"잘 부탁한다."

긴말은 필요 없었다.

레드우드가 짧게 목인사를 하고 용병단을 이끌고 전방으로 사라졌다.

나 역시 그들을 일별하고 전산실로 향했다.

"이브. 저 건물 스캔해줘."

나는 그림자에 몸을 숨긴 채 전산실 주변을 살폈다.

2층짜리 건물이었는데, 바깥에 사람도 보이지 않고 고요했다.

얼핏 비어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럴 리 없었다. 기업에서 콕 집어 전산실을 언급했을 정도면, 갱들도 이곳의 중요도를 모를 리 없다.

-건물 내부에서 생체신호가 감지됩니다. 거리가 멀어서 정확한 숫자는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역시.

영악한 놈들이다. 안에 숨어서 낚시를 하다니. 방심하고 접근하는 순간 그대로 벌집이 되는 거다.

"CCTV는? 처리할 수 있겠어?"

-마스터께서 지난번처럼 옥상으로 접근해주신다면 가능합니다.

"그거야 문제없지."

-옥상으로 도약하는 지점까지 사각지대를 찾았습니다. 표시하겠습니다.

순간 시야에 반투명한 녹색 지대가 레드카펫처럼 깔렸다. 녹색 지대로만 움직이면 CCTV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오케이. 바로 간다."

나는 그대로 그림자에서 뛰쳐나왔다. 녹색 지대를 잔디밭처럼 질주하며 그대로 강하게 뛰어올랐다.

타앗!

발끝에 느껴지는 강한 탄력과 함께 시야가 폭포수처럼 스쳐간다. 온몸을 짓누르는 바람을 뚫고, 이윽고 공간의 정점에 도착한다.

후우웅.

잠깐의 체공이 지나고 건물 옥상에 조용히 착지했다.

-마스터. 사람이십······

"이제 식상하니까 그만해."

이브의 농담 아닌 농담을 흘려들으며 옥상의 전산시스템이 접속했다.

시야 한쪽으로 알 수 없는 문자가 주르륵 올라가더니, 경쾌한 이브의 목소리가 들렸다.

-장악 완료했습니다. CCTV 차단하겠습니다.

"좋아."

나는 조용히 옥상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뭔가 부산스러운 발걸음 소리와 목소리를 낮춘고함이 들려왔다.

"CCTV가 갑자기 왜 이래? 미친놈들이 설마 EMP라도 터트린 건가?"

"컴퓨터는 멀쩡한 것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씨발! 대체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네. 대체 누가 쳐들어온 거야?"

"아까 듣기론 해결사들처럼 보인다던데."

"해결사들? 오, 맙소사. '차일드', 이 망할 놈들 짓이겠지?"

"그렇겠지. 지난번에 돈 받으러 갔을 때도 이를 박박 갈더라고."

"미친 거지. 그깟 해결사들로 우리를 재끼려고 하다니. 이번 보상금은 무조건 더 받아내야겠어."

"그건 그렇고 CCTV는 완전 먹통인데? 이거 손봐야 하는 거 아니야?"

"아, 빌어먹을! 내가 다녀올게."

잔뜩 성난 목소리로 대화하던 목소리가 끊어졌다.

저벅저벅.

그리고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계단을 울리던 거친 발걸음이 어느 순간 뚝하고 멈췄다.

"누, 누구······?"

그림자 아래에 숨어있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저승사자."

"······!"

서걱.

은빛이 그림자를 뚫고 놈의 목을 갈랐다.

툭. 데구르르.

놈의 얼빠진 얼굴이 발치에 굴러왔고, 뒤이어 털썩하며 놈의 신형이 쓰러졌다.

스릉.

나는 칼에 맺힌 핏방울을 털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가는 저승길 심심하진 않을 거다."

저승행 특급 열차는 이제 출발이었으니까.

죽은 신입의 사회 (3)

27화. 죽은 신입의 사회

계단을 내려가 2층으로 들어섰다.

문을 열자마자 한껏 기울인 의자에 기대 먹통이 된 CCTV를 쳐다보는 갱이 보였다. 옥상으로 향하는 문이 보안실과 바로 연결돼있던 탓이다.

저벅저벅.

의자에 늘어진 놈이 고개만 빼꼼 돌리며 말했다.

"뭐야? 벌써 왔······? 뭐, 뭐야! 너 누구······ 컥!"

의자에 앉은 그대로 목을 날렸다.

데구르르 어디론가 굴러가는 머리를 일별하고 시체가 앉은 의자를 한쪽으로 치웠다.

"이브. CCTV 복구해."

-네, 마스터.

지지직!

까맣게 물들었던 CCTV가 복구됐다.

나는 화면에 비치는 갱의 숫자를 세어나갔다.

"흠. 여덟 명인가?"

목이 날아간 둘을 포함하면 총 열 명.

공장을 장악한 갱의 숫자가 백여 명에 육박한다고 하니, 십분지일이 이곳에 있는 셈이다.

"「방탄갑옷」 같은 귀찮은 장비는 딱히 안 보이는군."

화면에 비치는 갱들의 장비는 별거 없었다.

방탄조끼나 헬멧 같은 경장비를 제법 착용했지만, 그런 건 총탄이나 막을 수 있지 칼날을 막아주진 못한다.

목이 비니까.

"쉽게 정리할 수 있겠네. 이브야. 불 꺼라."

-네, 마스터.

탁!

전산실의 모든 불이 꺼졌다. 컴퓨터를 비롯한 서버 장비는 유지해야 해서 전 원 자체를 끊진 않았다.

난데없이 불이 꺼지자 사방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스릉.

나는 검을 고쳐잡고 그대로 보안실을 박차고 나갔다.

어둠에 물든 복도.

희미한 비상구 불빛과 CCTV의 붉은 초점만 반짝이는 그곳으로 당황한 갱들이 몰려나왔다.

"무슨 일이야!"

"불을 누가 끈 거야? 빨리 불 좀 켜!"

"씨발! 불이 안 켜지는데? 스위치가 먹통이야!"

나는 그 모든 움직임을 보며 득달같이 놈들에게 달려들었다.

서걱.

달려들던 속도 그대로 한 놈의 목을 날렸다.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뎅겅하고 잘린 얼굴이 허공에 떠올랐다.

뻗은 검을 유지한 채 몸을 빙그르르 회전했다. 회전하는 몸을 따라 칼날이 빠르게 따라붙었다.

크게 한걸음 내 걸으며 아래에서 위로 검을 올려쳤다. 원심력과 근력이 합쳐진 칼날이 빛살처럼 공간을 갈랐다.

아직 상황파악을 못 한 다른 한 놈의 목도 뎅겅하고 날아갔다. 쭉 뻗은 은빛 칼날 위로 희미한 비상구 불빛이 반사됐다.

그제야 다른 놈들이 나를 발견했다.

"적이다!"

놈들이 나름 재빠른 속도로 총구를 조준했다. 역시 이 세계는 다른 건 몰라도 길바닥 갱들조차도 사격술이 뛰어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겐 그 속도조차 너무나 느렸다.

푹!

"커억!"

그사이 한 놈을 더 죽였다.

턱 아래에서 정수리를 관통하는 찌르기다. 머리를 뚫고 칼날이 삐쭉 튀어나왔다.

투타타타탕!

그제야 놈들의 총구에서 불이 뿜어졌다. 어둠에 휩싸였던 복도가 노란 불빛으로 반짝거렸다.

퍽퍽퍽퍽!

나는 정수리를 뚫은 시체를 방패 삼아 놈들의 총알을 막으며 전진했다.

"이, 이런 미친 새끼가아아!"

"죽어어!"

복도에 있던 다섯 중 셋이 죽고 둘만 남았다.

겨우 둘의 사격으로는 시체방패를 뚫을 수 없었다. 이놈도 방탄조끼에 방탄팬츠까지 둘둘 입은 녀석이니까.

휙!

적당한 거리까지 좁힌 나는 두 놈 중 한 놈에게 시체를 던졌다.

그렇게 한 놈이 시체를 피하면서 총구가 내려갔을 때.

타닷!

그대로 벽을 박차고 반대쪽으로 날아갔다.

내 움직임을 쫓던 놈의 총알궤적이 내 뒤를 따라 포물선을 그리며 따라왔다.

두두두두!

뒤늦게 따라오는 총알들이 애꿎은 벽에 구멍을 뚫었다.

나는 반대편 벽을 또 한 번 박차고, 이번엔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느새 놈의 코앞이었다.

서걱.

불을 뿜는 총과 함께 놈의 양팔을 먼저 날렸다.

"끄아악! 컥!"

그리고 바로 목을 날렸다.

투타타탕!

뒤늦게 시체를 피한 다른 놈이 총을 쐈지만.

스릉. 휙!

나는 그대로 칼을 놈에게 던져버렸다.

손을 떠난 칼은 한줄기 빛살이 됐다. 눈으로도 쫓기 어려운 속도로 날아간 칼이 놈의 얼굴에 꽂혔다.

"꺼어억······."

투타타탕!

한줄기 신음을 흘린 놈이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다. 잠시 허공을 향해 불을 뿜던 총구도 이윽고 멈췄다.

"후우······."

이 모든 게 10초도 되지 않는 짧은 사이에 벌어졌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있자, 뒤늦게 쿵쾅거리며 1층에서 나머지 갱들이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섯을 처리했으니, 셋이 남았다.

"끝났군."

그리고 겨우 세 명으로는 이 상황을 바꾸지 못한다.

* * *

-전산실 폐쇄 프로그램 가동하겠습니다.

"그래."

나는 나머지 셋도 정리하고 미리 안내받았던 대로 전산실 폐쇄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불시의 사태에 대비해 주요 자료가 보관된 전산실의 특수구역을 폐쇄하는 시스템이었다.

-폐쇄를 시작합니다.

이브의 목소리와 함께 전산실의 일부 구역에 차단막이 내려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뚫으려면 제법 고생해야 할 철문이었다.

"기다렸던 것 치고는 일찍 끝났네."

자정까지 기다렸던 게 무색할 만큼 순식간에 끝났다.

물론 건물 밖으로 들리는 총성과 폭음으로 봤을 때, <붉은날개> 용병단의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지만······ 거기도 아마 시간문제일 거다.

그때 이브가 자못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거야 마스터께서 몸을 안 사리니까 그런 게 아닐까요? 오늘도 두 곳이나 총상을 입으셨는데요.

"어차피 금방 회복되잖아."

나는 피에 젖어 구멍 뚫린 옷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시체방패가 미처 막아주지 못한 흔적이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몸은 정직합니다. 총상을 입으신 순간 아드레날린이 치솟았으니까요.

"뭐······ 아프긴 했지. 『초재생』이 고통까지 막아주는 건 아니니까."

-장기적으로 부담이 갈 수 있습니다. 조금 더 몸을 아끼는 게 어떨까요?

"뭐야? 걱정도 해주는 거야?"

입꼬리가 나도 모르게 올라갔다.

누군가에게 걱정을 받는다는 것. 이런 감정의 교류는 언제나 반가웠다.

그게 비록 AI라 하더라도 말이다.

-마스터의 안위를 걱정하는 건 AI의 첫 번째 우선순위입니다.

뭔가 부끄러워하는 걸 숨기기라도 하듯 급격하게 딱딱해진 말투다.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가만 보면 이브 이 녀석도 참 귀엽단 말이지. 솔직히 이젠 가끔 AI라는 걸 까먹기도 할 정도다.

"그래, 알았어. 고마워 이브야."

-······전산실 안전모드 가동합니다. 마스터께서도 전산실 외부로 이동해주십시오.

"그래그래."

짜식, 말 돌리기는.

나는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전산실 바깥으로 향했다.

1층 입구로 나왔다. 멀리 보이는 공장장 사무실에선 총성이 여전했다.

하지만 외부에서 보이는 불꽃은 없었다. 이미 외부는 장악하고 건물 내부로 돌입한 듯싶었다.

"보아하니 저기도 곧 끝나겠군."

조금 고전하는 것 같으면 살짝 도와주고 생색낼까 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았다.

하긴, 애초에 지역갱과 <붉은날개> 용병단은 전력 차이가 컸다. <이누야쿠>나 마피아 같은 전국구(?) 갱이라면 모를까.

"끄응! 그나저나 생각보다 공장이 크네. 아동복이 꽤 잘 팔리나?"

나는 기지개를 켜며 주변을 둘러봤다.

화학공장이라고 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 규모가 있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직접 와보니 대학교 몇 개는 들어갈 법한 크기였다.

하늘로 수십 미터는 치솟은 굴뚝들과 비행기도 들어갈 것 같은 공장 건물이 못해도 열댓 개는 돼 보였다.

"이 정도가 되니까 갱도 맛집처럼 계속 털어먹었겠지."

돈이 없으면 갱이 계속 찾아왔겠어?

그렇게 휘휘 주변을 구경하는데.

"어?"

순간, 어둠 속에서 희미한 반사광이 반짝했다.

그리고.

-마스터!

이브의 다급한 음성이 이어졌다.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으나.

"크윽!"

나는 강하게 몸을 때리는 충격에 그대로 쓰러졌다.

끔찍한 고통이 몰려왔다.

순간 머리가 하얘지며 사고가 이어지지 않았다.

탕!

뒤늦게 총성이 들렸다.

저격이었다.

* * *

탕!

소음기를 빼버린 저격총의 소음은 컸다.

투타타타탕!

콰쾅!

하지만 전장은 이미 난장판이라 저격총의 소음은 들리지도 않았다.

뭐, 들린다고 해서 적들에게 무슨 수가 있을 것 같지도 않고.

탕!

플뢰르는 또 한 명의 갱의 머리를 날려버리곤 짧게 호흡을 골랐다.

벌써 몇 명째더라? 열 명은 아까 넘긴 것 같았는데.

저절로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이 정도 실적이면 이번 작전에서 자신의 공이 작다고 할 수 없었다. 어린 신입이라고 아직 못 미더워하는 선배들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겠지.

'여기서 확실히 자리 잡고 더 높은 곳으로 가는 거야!'

<붉은날개>에서 인정받게 되면 앞으로 용병 커리어는 승승장구다. 그렇게 몇 년만 경력을 쌓아놓으면 더 큰 용병단으로도 갈 수 있을 거다. 더 많은 돈을 받고 말이다.

유능한 저격수는 항상 수요보다 공급이 부족하고, 자신은 누구보다 촉망받는 저격수니까.

그러다가 갑자기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 나를, 감히 해결사 따위가 손찌검하고 망신을 줘?'

플뢰르는 이를 갈며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천한 칼잡이의 오만한 얼굴과 이 정도밖에 안 되냐며 멸시하는 눈빛.

다시 생각나는 그 모멸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개자식! 목숨을 걸고 도박하는 칼잡이 주제에!'

플뢰르 기준에서 칼잡이는 비렁뱅이와 다를 바 없는 최하층민이었다.

넘치는 혈기와 객기만으로 칼을 들고 설치는 미친놈.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하루살이.

'반드시 복수한다! 반드······ 엉? 저건 뭐야?'

그때 시야 한쪽에 있는 건물에서 작게 빨간 불빛이 반짝거리더니, 창문들이 철제셔터로 뒤덮였다.

극단적으로 외부 침입을 막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건물이었다. 보통 전당포 같은 곳에서 보안시스템이 발동됐을 때 보이는 상황인데.

'저게 왜 지금? 아! 저기가 전산실이로군!'

이번 작전 2개의 목표 중 하나인 전산실이었다. 그리고 그 건방진 칼잡이가 홀로 갔던 곳이기도 했다.

'건방진 새끼. 대체 뭔 짓을 하는······ 어?'

칼잡이를 욕하는 와중에 출입문에서 누군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한껏 느긋한 걸음걸이로 기지개까지 켜면서.

'저 새끼······.'

칼잡이였다.

'재수 없는 새끼. 옆에선 전투가 한창인데!'

플뢰르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칼잡이를 욕했다. 자기 일이 끝났다고 저렇게 여유 넘치는 꼴이라니!

배알이 뒤틀렸다.

저 여유 넘치고 오만한 얼굴을 다시 보니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철컥.

플뢰르는 자신도 모르게 저격총의 스코프를 칼잡이에게 향했다. 십자선 위로 놈의 건방진 얼굴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끼릭끼릭.

손가락이 간질거렸다.

이대로 방아쇠만 당기면 저놈 머리통은 그대로 박살 날 거다.

'시발? 그냥 쏴? 어차피 아무도 모를 텐데?'

아니. 설령 누군가 눈치챈다 해도 저놈은 길거리 해결사에 불과하다.

그 누구도 저놈을 찾지 않을 테고, 수많은 해결사가 그렇듯 다음날이면 깨끗이 잊힐 테지. 이 도시는 그런 곳이니까.

그럼에도 망설여졌다. 없던 양심이 갑자기 생긴 건 아니었다.

'작전 중에 이래도 되나? 혹시나 이 일이 내 용병 커리어에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이기적인 마음 때문이었다.

그때.

"······!"

칼잡이의 시선이 자신을 향했다. 십자선 위로 보이는 놈의 시선은 분명히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탕!

자신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겨버렸다.

스코프에 비치는 놈의 몸이 그대로 튕겨 나가며 쓰러졌다.

두고 볼 것도 없이 즉사다.

"흐, 흐하······ 흐하하하!"

손끝에서부터 멈출 수 없는 희열이 몰아쳤다. 극도의 아드레날린이 솟구친다.

머리가 뜨거워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한껏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올 줄 몰랐다. 마음껏 소리 내 웃진 못했지만, 키득거리는 웃음이 실없이 계속 터져 나왔다.

'건방진 새끼야! 이렇게 뒈질 줄은 너도 몰랐을 거다!'

오전 내내 쌓여있던 체증이 단번에 내려간 느낌이다.

플뢰르는 다시 한번 칼잡이의 최후를 확인했다.

스코프를 통해 확인한 칼잡이의 최후는······.

'뭐, 뭐야? 어디 갔지?'

없었다.

분명 조금 전에 쓰러진 걸 확인했는데, 잠깐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순간.

"······!"

뒷목이 서늘해졌다.

온몸을 치달리던 혈류의 온도가 차갑게 내려가는 느낌이다.

몸을 저릿하게 만드는 살기.

그 본능적인 위협에 플뢰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네, 네가 어, 어떻게······?"

그곳엔 스코프 너머에서 죽었어야 할 칼잡이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죽은 신입의 사회 (4)

28화. 죽은 신입의 사회

"네, 네가 어, 어떻게······?"

놈이 덜덜 떨며 입을 열었다.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린다. 당황과 두려움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눈동자에 떠올랐다.

그 반응을 보며 나는 입꼬리가 더 올라가는 걸 느꼈다.

"아직 정신 못 차렸네."

대가리 박고 사과부터 해도 살려줄까 말깐데, 뭐가 어째?

스르릉.

은빛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검을 꺼내 들자, 놈이 기겁하며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저격수라도 항상 지니고 다니는 권총이었다.

물론 의미 없는 반항이었다.

서걱.

권총을 빼어 드는 놈의 오른팔을 먼저 날려버렸다.

"끅, 끄아악!"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놈에게 다가가 왼팔을 잡았다.

끼릭.

금속이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딱딱한 촉감이 느껴졌다.

이놈도 정상적은 놈은 아니라, 왼팔은 기계 팔(Mechanical Arm)이었다.

"이쪽 팔은 귀찮게 기계 팔이네."

나는 놈의 팔을 잡고······ 그대로 '뜯어'버렸다.

콰지직, 콰직!

찢어진 인조 피부 아래로 기계팔이 드러났다.

얼기설기 엮인 전선이 끊어지고, 파직거리며 전깃불을 토했다. 늘어진 전선과 금속 사이로 피 대신 시커먼 윤활유가 뚝뚝 떨어졌다.

"끄아아아아! 내, 내 팔!"

양팔을 잃은 놈이 시끄럽게 비명을 질렀다. 멀쩡한 오른팔이 잘렸을 때보다 더 큰 비명을 지른다.

뭐지? 신경을 이을 때 잘못이었나?

그건 그렇고, 너무 시끄럽다.

"좀 닥쳐라. 시끄러우니까."

퍽!

놈의 턱을 부숴버렸다.

후두둑하고 이빨이 강냉이처럼 쏟아졌다.

"흐, 흐어엉! 흐어어어!"

놈이 바람 빠진 비명을 지른다. 여전히 시끄러웠지만, 훨씬 조용해졌다.

나는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놈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놈을 어쩐다······."

마음 같아선 그냥 죽이고 싶은데, 의뢰와 얽혀있어서 조금 복잡했다. <붉은날개> 용병단과도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았고.

마침 물어볼 사람이 도착했다.

"죽일까, 말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지?"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레드우드가 딱딱한 얼굴로 서 있었다.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거기까지 하지."

레드우드가 잔뜩 날이 선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금방이라도 폭발한 것만 같은 얼굴이다.

"이거 보이나? 당신네 잘난 신입께서 날 저격했다고."

나는 붉게 물든 어깨를 가리켰다.

가슴과 어깨 사이에 커다랗게 뚫린 구멍과 그 주변을 흥건하게 적신 핏자국을.

레드우드가 움찔했다. 폭발할 것 같던 얼굴 위로 자못 당황한 눈빛이 떠올랐다.

"······사실이라면 사과하지. 하지만 저격당한 것 치고는 너무 멀쩡하군."

"내가 멀쩡해서 아쉽다는 건가?"

"그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실이라면 사과하겠다."

"사과? 그게 끝인가? 당신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건 어떻게 보장하지?"

"무슨! 나는 <붉은날개> 용병단의 단장이다! 그런 추잡한 일을 했을 것 같은가!"

레드우드가 적잖이 기분 나쁜 듯 목소리를 높였다.

뭐래, 이 새끼가. 네가 지금 이럴 상황이 아닐 텐데?

나는 헛웃음을 한번 짓고는,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차갑게 레드우드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럼 네 손으로 죽여."

"뭐?"

"네 손으로 이 새끼 죽이라고. 작전 중 동료 뒤통수를 쏘는 새끼는 즉결처형 아니야?"

이게 암묵적인 룰이다.

용병이나 해결사나 결국 목숨 걸고 일하는 건 똑같기에, 작전 중에 뒤통수치는 행위는 절대 용서받지 못한다.

"그럴 수 없다! 나는 단장으로서 단원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하! 지랄하고 자빠졌네."

서걱.

나는 더 들을 것도 없이 그대로 플뢰르의 목을 날려버렸다.

데구르르.

플뢰르의 머리가 레드우드의 발치로 굴러떨어졌다.

일부러 의도한 거 맞다.

"······!"

레드우드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나는 그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물었다.

"자, 내가 죽였다. 이제 어쩔 거지?"

스릉.

검 끝이 레드우드를 향했다.

달빛을 머금은 검은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 * *

"······!"

레드우드는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강현재의 오만한 질문에도.

그리고 자신에게 검을 겨누는 행동에도.

'······보지 못했다.'

그건 서로 노려보면서 대화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강현재가 칼을 휘두르는 움직임을 놓쳤기 때문이었다.

소름 끼치게 빠른 움직임.

그건 분명히 인간의 인지를 벗어난 움직임이었다.

현시점에서 이런 움직임을 보여줄 만한 존재는 유일했다.

"······예상은 했지만, 너도 「각성자」냐?"

각성자.

하늘이 백광으로 물들였던 그 신비한 밤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한 초능력자들.

강현재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너'도'라고 말하는 걸 보니, 당신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이쯤에서 그만하는 게 어떤가?"

레드우드가 가라앉은 눈빛으로 강현재를 쳐다봤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을 겨누고 있는 하얀 칼날을 주시했다.

"그만해라? 이놈 배후에 당신이 없다고 어떻게 장담하지?"

강현재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대답했다. 검 끝 역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날 떠보는 건가? 진짜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 칼이 벌써 내 목을 날렸을 것 같은데."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자, 라는 주의라서."

"우리가 진짜 너를 노렸다면 이렇게 허접하게 하진 않았을 거다. 머리부터 날리고 온몸을 벌집으로 만든 다음 사체를 전부 잘라 소각시켜버렸겠지."

"······디테일한 설명 고맙군."

움찔한 강현재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는 칼을 거뒀다. 그제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던 분위기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3층 클리어. 사무실 장악 완료. 작전 성공했습니다!

-와아아아!

-예쓰으!

그때 레드우드가 착용한 무전기에서 작전종료를 알리는 무전이 들려왔다. 환호성이 무전기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직접 들릴 정도였다.

강현재가 힐끗 용병들이 몰려있는 공장장 사무실을 쳐다보곤 말했다.

"끝난 것 같으니 난 이만 가지. 나중에 딴소리하지 마라. 내 할 일은 다 했고, 너희 치부도 덮어주는 거니까."

'치부'라 함은 강현재가 당한 저격을 말한다.

작전 중 동료의 뒤통수를 쳤다는 게 알려지는 순간, <붉은날개> 용병단의 신뢰도는 바닥을 칠 거다.

일거리도 끊길 테고, 무엇보다 어떤 해결사들도 <붉은날개>와 함께 일하지 않으려 하겠지. 뒤통수에 구멍이 나고 싶은 해결사는 없을 테니 말이다.

레드우드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고맙다. 이 빚은 나중에 꼭 갚도록 하지."

"그 말. 잊지 마라."

강현재는 그 말을 남기고 미련 없이 돌아섰다. 희미한 달빛을 어깨에 짊어진 그는,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때 공용무전이 아닌 직통무전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장. 저대로 보낼 겁니까?

부단장인 오트톨랑이었다.

그는 <붉은날개>의 메인 저격수로 신입 저격수인 플뢰르의 실적과 기량을 체크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던 와중에 난데없이 강현재가 나타나 신입의 팔을 잘라버렸고, 급하게 단장을 호출했던 거다.

"이대로 안 보내면? 너랑 나, 둘 다 죽으면 용병단은 그대로 해체다."

-그전에 제 총알이 놈의 머리통을 터트릴 겁니다.

"······내 목이 먼저 떨어질 수도 있겠지."

레드우드가 회의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처 반응도 하기 전에 신입의 목이 떨어졌다. 눈앞에서 쳐다보고 있는데도 움직임을 놓친 거다.

게다가 보란 듯이 가리키던 그 상처.

옷에는 분명 저격 탄환이 뚫었을 것이라 여겨지는 커다란 구멍이 있었으나, 정작 그는 너무나 멀쩡했다.

반응도 하지 못할 정도로 재빠른 움직임. 그리고 비정상적인 회복력.

이 모습 때문에 그를 「각성자」라고 '확신'할 수 있었던 거다.

-그 정도란 말씀입니까?

무전기에서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오트톨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앞에서 칼을 뽑았는데도 반응조차 못 했다. 게다가 저격을 맞은 흔적은 있는데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고."

-······그게 진짭니까?

"그래. 믿기 어렵겠지. 나도 그렇다. 하지만 너도 이 바닥에 오래 있어서 알겠지? 가끔 상식을 파괴하는 괴물들이 있다는 거."

-······.

당장에 떠오르는 인물만 여러 명이다. 소울 이터의 암살자 존 위크라든가, UFC의 클랜장 은건우라든가, SCPD의 미친개 강철중이라든가.

여기에 몇십 년 구르다가 은퇴한 노괴들이나, 팬텀의 암살자들까지 포함하면 엄청나게 많아진다.

그래서인지, 이 바닥에 있다 보면 그와 비슷한 괴물들을 많이 만난다. 그리고 그런 괴물들을 상대하는 방법은 딱 하나였다.

"괴물은 괴물이 상대하는 거야. 우리는 더러워도 일단 피하는 거고. 그게 죽는 것보다 나으니까."

괴물은 괴물이 상대한다.

이게 이 도시에서 용병생활을 하면서 레드우드가 내린 결론이었다.

-······알겠습니다.

오트톨랑이 대답했다. 백 퍼센트 수긍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 인정은 하는 거다. 사람 보는 눈은 레드우드가 더 정확하니까.

"공장장실 정리 인원 제외하고, 나머지 인원은 전부 입구 쪽 교전 지원 간다.

갱들 투항은 받지 않는다. 전원 사살하도록."

레드우드는 공용무전으로 최종명령을 내리고 말없이 밤하늘을 쳐다봤다.

도시에선 보이지도 않던 별들이 이곳에선 제법 보였다. 그리고 그 별들 사이에 간신히 걸려있는 사라지기 직전의 초승달을 보며 생각했다.

'강현재. 그가 괴물이긴 해도, 그래도 말은 통하는 인간이라 다행이야.'

그가 억지를 부렸으면 정말 끝까지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자신 역시 얼마나 억지를 부렸는지 알고 있다. 뒤통수 맞은걸, 사고 친놈을 죽인 거로 퉁치자고 했으니까.

그래서 말이 통해서 다행이라는 거다. 이 바닥엔 말이 통하는 '사람'보다, 말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미친놈'이 더 많은 곳이니까.

'······나중에 뭘로 빚을 갚으라고 할지 조금 두렵긴 하군.'

물론 강현재 역시, 말이 통했다뿐이지 정상과는 조금 멀어 보이긴 했지만.

* * *

나는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레드우드의 시선을 의식하며 공장을 떠났다.

'운이 좋았다.'

솔직히 이번엔 좀 위험했다.

운 좋게 쏘기 전에 먼저 발견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반응도 하지 못하고 죽었을 수도 있었다.

구멍 뚫린 옷을 만지작거렸다. 손가락 세 개는 들어갈 정도로 크게 뚫려있다.

'이번엔 간신히 피했지만, 이런 걸 머리에 맞았다간 무조건 즉사다.'

이래서 내가 저격을 그토록 경계했던 거다.

물론 이번 일은 방심한 이유가 컸다. 설마 작전 중에 동료에게 뒤통수 맞을 거라곤 예상 못 했으니까.

잠시, 이 세계가 어떤 빌어먹을 세계인지 까먹었던 탓이다.

반성하자, 강현재.

-죄송합니다, 마스터.

시야를 공유해선지, 내가 가슴에 뚫린 옷을 만지작거리자 이브가 사과를 해왔다.

언제나처럼 딱딱한 말투였지만, 왠지 미안하다는 감정이 느껴졌다. 내 착각이겠지만.

"아니.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야."

이브가 여타 AI보다 뛰어나다 해도, 워치에 묶여있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 일은 이브의 문제라기보단, 물리적인 하드웨어의 한계였다.

-제 능력을 조금만 더 확장할 수 있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죄송합니다, 마스터.

"그래. 말 잘했다. 안 그래도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참에 알아봐야겠어."

-······?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스터?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소프트웨어적인 문제라면 몰라도, 물리적인 하드웨어가 문제라면······.

"이브, 너를 업그레이드할 방법을 슬슬 찾아봐야겠어."

그건 돈이 해결해줄 거다.

태양을 삼키다 (1)

29화. 태양을 삼키다

"크으!"

호텔에 도착한 나는 술부터 꺼내 마셨다.

뜨거운 기운이 온몸을 휘휘 돈다.

심장이 펌프질을 시작한다. 거친 혈류가 몸을 내달리고, 순식간에 알콜이 사지백해에 퍼진다.

나는 적당히 나른해지는 감각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이거야 원, 알콜중독자도 안 이러겠네."

솔직히 쓰기만 했던 술맛도 이젠 제법 끝 맛이 달달했다.

술이 달다니. 이건 심각했다.

"나중에 주정뱅이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주정뱅이 칼잡이라.

그것도 나름 웃기겠네.

"그건 그렇고······ 지금 이브를 업그레이드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저 말씀입니까, 마스터?

"그래. 너 말씀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우루사의 죽음에서도 봤듯, 아무리 『초재생』이라도 머리가 터지면 회복할 수 없다.

즉, 내 가장 큰 약점은 머리고, 그 약점에 가장 위협적인 공격이 저격이다.

뭐, 근거리에서 샷건을 맞는다거나, 목이 베여도 죽는 건 마찬가지겠지만, 솔직히 근거리에서 내가 당할 것 같진 않다.

-정확히 어떤 부분의 업그레이드를 말씀하시는지요? 현재 소프트웨어적으로 12개. 하드웨어적으로 301개의 업그레이드가 가능합니다.

이브가 자신의 상황을 파악해서 알려줬다.

하지만 아직은 이브가 말한 '진짜' 업그레이드는 못 한다. 돈이 부족해서.

난 정확히 '옆그레이드'를 할 거다.

"너한테 정찰 드론을 연동시킬 거야."

저격을 막을 방법은 '지금은' 없었다. 이건 시나리오 중반부에 다다라서야 등장했다.

그렇다고 넋 놓고 기다릴 수만은 없으니, 지금 할 수 있는 걸 한다.

'지금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저격수를 내가 먼저 발견하는 거다.'

그리고 숨어있는 저격수를 먼저 발견하려면 전장을 내려다보는 눈이 필요했다.

-정찰 드론 말씀이십니까?

"그래. 가능하지?"

-물론 가능합니다. 하지만 정찰 드론의 성능에 따라 러닝(Learning) 시간이 조금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의뢰 몇 번 하면서 익히면 될 테니까.

"오랜만에 다이손 영감을 만나러 가야겠군."

* * *

다음날, 30구역의 만물상을 찾았다.

"오랜만입니다, 영감님."

"오랜만이라니? 자넬 만난 게 아직 열흘도 안 지났는데?"

"······그런가요?"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듣고 보니 진짜 열흘도 안 됐다. 엄청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거밖에 시간이 안 지났다니!

"그사이에 내가 그리워서 만나러 오진 않았을 테고, 무슨 일인가?"

"정찰 드론을 구매하고 싶습니다."

"정찰 드론?"

다이손이 고개를 갸웃했다.

"네. 카메라 성능도 좋고, 튼튼한 놈으로요."

"음······ 자네가 쓸 건가?"

"네. 제가······ 아니, 정확히는 이브가 쓸 겁니다."

"이브?"

"영감님이 준 AI요."

내가 손목에 찬 워치를 보여줬다.

다이손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AI에 이름을 붙여줬나?"

"네. 매번 야, 너, 저기라고 부르긴 좀 그래서요. 왜 그러시죠?"

"음! 아닐세. 취향은 존중해줘야지."

"······?"

"그 AI의 성능이라면 어디 보자······ 그렇지. 그놈이 딱 적당하겠군. 따라오게."

나는 다이손을 따라서 다른 방으로 이동했다.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따라 양옆으로 온갖 방들이 늘어졌다.

강화유리로 된 벽이라 내부가 전부 보였다. 권총, 소총 같은 소화기부터, 기관총, 저격총, 박격포 같은 중화기까지 없는 게 없었다.

무기 섹터를 지나자, 방탄조끼와 방탄갑옷들이 늘어진 방어구 섹터가 나왔고, 이후 전투 안드로이드로 보이는 로봇들과 기계팔이나 다리, 안구 같은 사이버웨어가 전시된 곳도 지났다.

이윽고 다른 곳보다 조금 큰 창고 같은 공간에 도착했다.

온갖 기계들이 전시된 공간이었다.

"여기에 있었는데······ 아! 저깄군!"

다이손이 벽면 유리에 손을 짚자, 유리벽이 스르르 내려가며 열렸다.

"자, 들어오게. 저놈이 자네가 말한 그 조건에 가장 알맞은 놈일세."

나는 다이손이 가리킨 곳을 쳐다봤다. 그곳엔 까만색으로 칠해진 드론이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생각보다 큰데요?"

드론은 내가 상상했던 크기보다 컸다.

이 세계로 빙의되기 전, 방송국에서 사용하는 촬영 드론도 실제로 봤었는데, 그것과도 비교조차 안 되게 컸다.

"자네가 평범한 정찰 드론을 구하려는 거였다면 애초에 나를 찾아오지도 않았겠지. 이놈은 카메라만 8개에 열화상, 적외선, 음파센서, 레이저 스캔까지 달렸고, 자율방어기동으로 지상의 총탄 정도는 스스로 피할 수 있다네."

"오······."

뭔가 화려한 이름이 주르륵 나열됐다.

"오······ 가 아닐세. 내가 갖고 있는 정찰 드론 중에선 가장 좋은 놈이야."

"그럼 이게 제일 좋은 드론입니까?"

"그건 아닐세. 이보다 좋은 놈은 군용이라 따로 구해야 하고······ 무엇보다 비싸다네. 자네 주머니 사정을 내가 모르진 않으니."

다이손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하긴, 그는 내가 칼 한 자루 빼곤 개털이었던 도시 밖에서 만난 사람이었다.

내 주머니 사정을 알고, 첫 만남에서 대뜸 고가의 AI워치를 보수라고 줬었으니까.

"쩝. 그렇군요."

나는 입맛을 다셨다.

돈돈돈. 역시 돈이 문제다.

"이놈은 얼맙니까?"

"1억만 내게."

"······얼마요?"

"1억."

"······."

현란한 스팩 설명에 싸진 않겠다라는 예상은 했지만······ 1억이라고?

그 돈이면 생활비와 술을 사고 현재 남은 돈 전부다.

"저······ 영감님······."

"안돼."

"아니,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만?"

"깎아달라는 거잖아? 안된다고. 지금 자네 수중에 1억 정도는 있을 거 아니야?"

"그렇긴 한데······."

"그거 다 주게. 참고로 내가 이놈을 가져온 가격이 1억 이상이야."

즉, 손해 보고 판다는 뜻이었다.

흐음. 장사꾼이 손해 보고 판다는 말보다 더 거짓말은 없다고 그랬는데.

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느꼈는지, 다이손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내가 자네한테 거짓말해서 뭐하나? 하나 알려주자면, 원래 1억으로는 저기 끝에 보이는 카메라 2개짜리 밖에 못 산다네. 자율방어기동? 그런 건 당연히 꿈도 못 꾸지!"

"······끄응!"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다이손은 내게 호감이 있었고 실제로 많은 호의를 베풀었으니까.

여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슬쩍 눈치를 보며 물었다.

"영감님. 이럴 바에 차라리······."

"공짜는 안되네! 그건 내 원칙에 어긋나는 거야!"

"······영감님. 독심술이라도 익혔습니까?"

어떻게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알고 답을 하는 거야?

"장사를 오래 하다 보면 미세한 표정,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다 아는 법일세. 아무튼, 공짜는 안되네. 그럼 내 호의의 가치까지 저렴해져!"

"······후우. 알겠습니다. 이거로 주십시오."

나는 어쩔 수 없이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명백히 다이손이 내게 호의를 베푸는 거였으니까.

그러다가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원래 내가 최종 목표로 생각했던 정찰 드론이 있었다. 게임 내에서 AI의 최종업그레이드에 필요한 아이템이기도 했다.

"영감님. 혹시 조기경보드론은 얼마나 하는지 아십니까?"

조기경보드론(Early Warning Drone). 현실의 조기경보기 포지션으로, 국가간 전쟁보다 도시간 전쟁. 즉, 국지전이 잦은 이 세계에 맞춰서 개발된 정찰 드론이다.

광범위 레이더로 구역 하나를 커버할 수 있으며, 그 엄청난 범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을 포착하고 연산해내는······ 일종의 맵핵이었다.

"조기경보드론? 설마 그걸 욕심내나?"

"욕심이야 자유지 않습니까?"

"과한 욕심은 절망을 불러일으킬 뿐일세. 나도 마음대로 못 구하는 물건이기도 하고."

엄살이다. 조금 과장을 보태면 사라진 핵무기까지 구할 수 있는 게 다이손이었다.

"만약 구한다면 얼마나 줘야 할 것 같습니까?"

"군용으로 납품되는 가격이 500억부터 시작일세. 조금 쓸만한 놈은 1, 000억이 넘어갈 테지."

"······단위가 상상을 뛰어넘는군요."

1, 000억 단위라니.

이 정도 돈은 현실에도 그랬지만, 이 세계에서도 비현실적인 단위였다.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있자, 다이손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진심이었나?"

"저는 언제나 진실만을 말합니다, 영감님. 그나저나 최소 500억이라니······

아직 먼 이야기로군요."

"흐음······."

다이손이 턱을 쓸어내리며 무언가 생각하더니, 툭하고 말을 던졌다.

"또 모르지. 자네가 지금보다 더 명성이 높아진다면."

"그게 무슨 소립니까?"

"자네도 대충 느꼈겠지만, 최근 해결사들의 의뢰 보수가 높아지는 추세라네.

억단위 의뢰가 흔한 게 아닌데, 자네도 벌써 하나 맡지 않았나?"

"로제가 말해줬습니까?"

"뭐, 안부 전화 겸 통화하다가 자네 이야기가 나와서 말일세. 그러고 보니 자네 이야기를 많이 하더군. 쉽게 정을 주는 아이가 아닌데 말이야."

"······'정'이요?"

글쎄. 그걸 정이라고 할 수 있나?

농담을 건넬 때마다 항상 쫓겨났던 것 같은데.

"끌끌! 그게 그 아이의 온정일세. 그나마 어릴 때 비하면 지금이 훨씬 사람 같아졌지. 그땐 어디 나사 하나 빠진 로봇 같았으니."

다이손이 옛날 일을 떠올리면서 허허로운 웃음을 지었다.

"아무튼, 해결사 몸값은 점점 올라갈 테고, 그건 능력 좋고 명성 높은 해결사는 더 심할 거라는 뜻일세. 이유가 뭐일 것 같나?"

"기업 간의 경쟁에서 무력이 동원되는 때가 많아졌다는 뜻이겠죠."

"역시 자네는 똑똑해. 칼잡이가 아니라 장사를 했어도 잘했겠어. 맞네. 기업의 의뢰가 많아질수록, 해결사들의 몸값은 더욱 올라가겠지."

"그래도 의뢰를 받아서 그 돈을 모으려면······ 한참 걸리겠죠."

나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가장 싼 놈도 500억이라니. 단순 계산으로 1억짜리 의뢰를 500번이나 해야 산다는 뜻이다.

말이 500번이지, 매일매일 의뢰를 받아도 1년이 넘게 걸린다.

"그렇지. 자네 말대로 돈으로 사려면 그렇겠지."

"······? 그럼 돈으로 안 사고 어떻게 구한다는 말씀입니까?"

"자넨 벌써 잊었나? 내가 자네에게 맡겼던 첫 번째 의뢰를?"

"그게 왜······ 아!"

저절로 눈이 커졌다.

다이손과 만났던 첫 번째 의뢰.

그 의뢰 보수가 조기경보드론을 구하려는 이유가 된 이브였다.

바보같이 이걸 생각 못 했다니!

"자네에게 의뢰를 준 기업 중에서 하나쯤은 조기경보드론을 보유하고 있지 않겠나?"

"그······ 렇겠죠."

"그래서 자네의 명성이 더 높아져야 한다는 뜻이네. 조기경보드론을 보유했다는 건, 군수업체나 자체 무력을 보유한 기업이라는 뜻이고, 그런 기업은 어지 간한 해결사에겐 코빼기도 비추지 않을 테니."

결국, 다이손의 말은 '네가 유명해져서 의뢰 보수로 조기경보드론을 요구해 라'라는 뜻이었다.

유명해져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 * *

나는 정찰 드론을 등에 짊어지고 만물상을 빠져나왔다.

등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에 괜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1억 플렉스!

잠시 이 흥청망청을 조금 더 느껴봐야지.

'그나저나 다이손 영감의 말대로라면 생각보다 빨리 조기경보드론을 구할 수도 있겠는데?'

돈으로 사려면 언제 일지 기약할 수 없었지만, 의뢰 보수라면 생각보다 일정이 당겨질 수도 있었다.

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강해지고 있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럼 슬슬 개조장인을 찾을 준비도 해야겠어.'

내 최종 목표는 조기경보드론이 아니었다. 정확한 최종 목표는 조기경보드론을 개조한 저고도 위성이자, 서버. 그리고 보급소였다.

그리고 그 이름은······.

'인벤토리(Inventory). 이 녀석만 갖게 되면 전투 수행 능력은 정점을 찍는다.'

* * *

"당신, 장사해요?"

미간을 찡그린 로제가 나를 보자마자 물었다. 그녀는 내가 짊어지고 온 정찰드론 박스를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쿵!

박스를 내려놓자, 대리석 바닥이 살짝 울렸다.

"장사꾼으로 봐줘서 고맙군."

"농담하지 말고요. 대체 뭘 가져온 거예요?"

"정찰 드론이야."

"정찰 드론요? 그걸 당신이 왜······?"

사실 정찰 드론은 개인으로 활동하는 해결사보다, 팀 단위로 움직이는 해결사팀. 혹은 더 나아가 용병단 정도가 운용하는 기계였다.

"저번 의뢰에서 느낀 게 많아서."

"······?"

로제가 말없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번 의뢰가 뭐였는지 잠시 생각하는 눈치다. 그러다가 눈을 날카롭게 뜨더니 물었다.

"혹시 <붉은날개>랑 무슨 일 있었어요?"

역시 눈치 하나는 빠르다.

"무슨 일이 있긴 했지."

"무슨 일인데요? 혹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거나······"

"그건 아니고. 단장이랑 이야기가 끝난 내용이야."

"······."

그녀의 입이 불만스러운 듯 삐죽 튀어나왔다.

"그것보다 이놈을 시험해봐야 하는데······ 적당한 의뢰가 있을까?"

"구체적으로요?"

"지난번처럼 갱단 소탕이 제일 좋고."

"그런 게 어디 흔한 줄 알아요? 기업들이 그렇게 적극적이었으면, 애초에 이 도시에 갱단이 멀쩡히 활동할 리 없잖아요."

"아니면 대충 비슷한 거라도."

"······기다려봐요."

불퉁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던 로제가 고개를 홱 돌리며 태블릿을 조작했다.

샹들리에에서 뿜어진 홀로그램이 현란하게 바뀌며 의뢰 목록을 띄워댔다.

"이건 현상수배 의뢰고······ 이건 잃어버린 고양이 찾기······ 이건 남편 뒷조사······"

별의별 의뢰가 다 있었다.

나는 잠시 소파에 앉아서 그녀를 지켜봤다. 불만 가득 빵빵했던 볼이 의뢰를 찾기 시작하자 정상으로 돌아왔다.

한참을 뒤적이던 그녀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가장 근접한 의뢰가 34구역 클럽에서 의뢰된 경쟁 클럽 박살 내기네요."

"······그런 의뢰도 받나?"

"뭐, 돈만 충분하다면야."

로제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고작 클럽이나 지키는 놈들을 상대하기엔 과분하지."

"그럼 지금은 없어요."

"흠······."

당분간 정찰 드론은 봉인해놔야 하나? 기껏 1억이나 플렉스했는데 묵혀놔야 한다니······.

그때 얼마 전에 그녀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49구역 오염체 토벌 의뢰. 그거 아직도 하는 중인가?"

태양을 삼키다 (2)

30화. 태양을 삼키다

49구역 오염체 토벌.

첫 번째 지명의뢰를 받던 날 들었던 시 정부 통합의뢰였다.

그때는 그냥 궁금해서 물었었고, 로제의 답변에 하지 않기로 했었다. 보수는 쥐꼬리만큼인데, 신경 써야 할 건 많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그렇긴 한데······ 오염체 토벌을 하려고요? 언제는 안 한다면서요?"

로제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거야 돈이 목적일 때고. 지금은 드론 성능 확인하는 게 우선이니까."

"안타깝지만, 당신은 해당 사항 없어요. 저번에 말했죠? 5인 1조라고."

"······현장에서 즉석으로 팀이 짜이진 않나?"

웹소설 같은 거 보면 현장에서 처음보는 사람들이랑 몬스터 사냥도 하던데. A급이니, 1급 괴수종이니 하는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놈들을.

"예전엔 그랬다는데, 지금은 사고가 너무 잦아서 무조건 팀 단위 접수만 받아요. 즉석 팀은 생존율도 떨어지고, 의뢰 지역 토벌이 안 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무엇보다 서로 뒤통수치는 경우가 많다더군요."

"흠······."

역시 던전 안에서 뒤통수치는 게 클리셰인 이유가 있었군?

그나저나 무조건 5인 1조라······.

친구 없는 게 이렇게 서러울 줄이야. 어차피 토벌은 나 혼자만 해도 되니까, 아무나 머릿수만 채워주면 되는데.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붉은날개>의 레드우드랑 연락되나?"

굳이 친구일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머릿수만 채우면 되는데?

"당연히 거래처 중 하나니까 연락은 되는데······ 뭐하게요? 문제가 있었다면 서요?"

"거기 용병 좀 빌리게. 머릿수 채우는 용도로."

지난번 의뢰에서 빚을 지워둔 걸 차감해준다고 하면 얼씨구나 하고 도와줄 거다. 그걸 이렇게 써먹는 게 맞는지 의문은 들었지만, 솔직히 이런 것 말고는 부탁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내 말에 로제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하? 머릿수요? 그걸 용병단에서, 그것도 <붉은날개> 같은 용병단에서 들어줄 것 같아요?"

"내가 부탁하면 들어줄 것 같군. 내가 빚을 지워둔 게 있어서 아마 거절하지 못할 테니."

"무슨 자신감이래? 요즘 '소드마스터'로 소문 좀 나셨다고 자존감이 많이 올라가셨나 보네요?"

로제가 코웃음 치면서 빈정거렸다.

그런데 잠깐만. 빈정거리는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뒤에 수식어는 네가 말할게 아닌 것 같은데?

"······그 소문은 네가 낸 거 아닌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로제를 쳐다봤다.

움찔한 그녀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아무튼요. 그런 부탁을 누가 들어주겠느냐고요······."

글쎄······.

레드우드가?

* * *

49구역.

소울 시티 북부 전체를 뒤덮고 있는 이 거대한 구역은 단일 구역으로 최대면 적을 자랑한다.

소울 시티지만, 소울 시티가 아닌. 그래서 아우터(Outer)로 불리는 곳.

그 입구에 도착했다.

"음!"

입구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대부분이 오염체 토벌을 위해 모인 해결사들과 용병들이었다.

"오염체 토벌에 지원한 용병들은 모두 모이시오!"

그때 시 정부 공무원으로 보이는 이가 허름한 천막에서 나왔다. 그는 대충 만든 가판처럼 생긴 곳에 앉아 용병들을 확인했다.

"후사드 팀? 다섯 명 확인했소. 레이드 태블릿 들고 가면 되오. 파손 시 벌금이 있으니 파손은 주의하시오."

용병들이 줄지어서 그에게 확인받고 49구역으로 떠났다. 그 모습이 영락없이 인력시장 같아서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과학이 아무리 발전했어도 밑바닥은 언제나 그대로였다.

그저 다른 모습으로 변해서 그걸 모를 뿐.

나는 주변을 살피며 일행을 찾았다.

"파릇파릇한 인턴 4명이라······."

어제 통화했던 내용을 떠올리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로제의 연결로 레드우드와 직접 통화했었다. 사정이 이래서 오염체 토벌을 가야 하니 머릿수만 맞춰줄 수 있냐 물었었다.

레드우드는 흔쾌히 부탁을 들어줬다.

-머릿수만 채워달라······ 어렵지 않은 부탁이군. 마침 훈련 중인 인턴이 있으니 보내주겠다.

-인턴? 용병단에 인턴도 있나?

-자네 같은 해결사는 모르겠지만, 우리 <붉은날개> 용병단에 입단하고 싶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나?

-사업 수완이 좋은 모양이군.

-사업이라니! 우리는 그들의 숭고한 꿈을 도와주는 것일세!

나는 목 끝까지 차올랐던 '용병일에 무슨 숭고함까지 찾아?'라는 말을 삼키고 알았다며 전화를 끊었다.

기껏 도와주겠다는 사람을 찾았는데 재를 뿌릴 순 없으니까.

"저 녀석들인가?"

용병들을 대충 눈으로 훑자, 누구나 알 정도로 티가 나는 초보 용병 네 명이 뭉쳐있었다.

나는 그곳으로 다가가 물었다.

"<붉은날개>의 인턴들인가?"

녀석들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나를 살폈다. 그러다가 허리춤에 매인 칼을 보고 눈빛이 바뀐다.

"그쪽이 해결사······?"

"그래. 강현재다."

"아! 저는 해리입니다. 이쪽부터 프랭클린, 트루먼, 드골입니다."

다들 건성으로 고개를 꾸벅 숙인다. 쳐다보는 눈빛에 호기심과 더불어 반항심이 엿보였다. 한창 혈기 왕성한 나이인 데다가, 인턴 용병인지라 건방이 하늘을 찔렀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어차피 머릿수만 채워주면 되니까 신경 쓰지 않았다.

"미리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오염체 토벌에서 너희들이 딱히 뭘 할 필요는 없다. 인턴이라고 들었는데, 견학이라고 생각해라."

"······진짜 그래도 괜찮습니까?"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마라. 괜히 헛짓거리하다가 너희가 죽어버리면 나도 곤란해지니까."

"······."

독설 아닌 독설에 인턴들 얼굴이 구겨졌다. 눈빛에 담긴 반항심이 더욱 거세졌다.

나는 피식 웃었다.

저런 반항심이 얼마나 오래갈지 궁금해졌다. 49구역은 절대 만만한 곳이 아니었으니까.

그것도 경험 없는 용병이 겪기엔 말이다.

"대충 알아들은 것 같으니, 우리도 이만 들어가지."

나는 앞장서서 공무원에게 향했다.

뒤에서 불만스러운 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어쩔 수 없이 녀석들도 내 뒤를 따라왔다.

이러나저러나, 녀석들이 받은 명령은 나를 따라서 오염체 토벌을 '구경'하는 것이니까.

"강현재 팀? 다섯 명 확인했소. 레이드 태블릿 들고 가면 되오. 파손 시 벌금이 있으니 파손은 주의하시오."

공무원은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늘어놓곤 손가락으로 옆 테이블을 가리켰다.

혹시 사람이 아니고 안드로이든가?

나는 앞선 용병들처럼 테이블 위에 놓인 태블릿 하나를 집어 들었다. 시대에 맞지 않게, 딱 봐도 튼튼하게 생긴 철제 태블릿이었다.

'이게 레이드 태블릿인가 보군.'

레이드 태블릿.

게임에선 없었던 물건이다.

이 물건의 용도가 게임 시스템으로 다 해결이 됐기 때문이었다.

나는 앞으로 걸어가며 태블릿을 켰다. 화면엔 49구역 전체 지도와 함께 우리 팀의 목표 지역이 빨갛게 표시되어 있었고, 한쪽엔 최소 할당량이 카운트되어 있었다.

[오염체 사냥 0/100]

인당 20마리씩.

한 팀당 최소 100마리의 오염체를 사냥해야 보상을 받을 자격이 생겼다.

'100마리라······ 원래라면 찾는 게 더 문제겠군.'

이 드넓은 황야나 다름없는 지역에서 100마리나 되는 오염체를 찾는 건 고역이다.

오염체라는 게 결국, 변이를 일으킨 야생동물들이다. 따로 서식지가 있거나, 출몰지가 있는 게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49구역 전체가 오염체의 서식지이자, 출몰지였다.

시 정부에서 돈을 써가면서 49구역에 용병들을 퍼붓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오염체는 본능적으로 살아있는 생명체를 탐하니까.'

즉, 미끼 겸 사냥꾼으로 용병들을 사용하는 거다. 생명체를 찾은 오염체들이 모습을 드러내도록.

'5인 1조도 웃기는 거지. 언제라도 잡아먹힐 수 있는 구성인데.'

야생동물들이 그렇듯, 오염체들도 똑똑하다. 대규모 토벌대가 꾸려지면 오염체들도 불리한 걸 알고 도망간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 시 정부에서 5인 1조로 팀을 꾸린 거다. 용병들이 죽든, 말든 오염체 사냥이 우선순위였으니까.

[서로 싸우다가 아무나 뒈져라.]

이게 시 정부의 숨겨진 의도였다.

'그놈들 눈에는 용병이든, 해결사든, 오염체든 다 똑같이 골칫덩이일 테니.'

뭐,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아서 별 감흥도 없다. 이 세계에서 부조리와 생명경시를 빼면 설명할 말이 떠오르지도 않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나의 길을 간다.'

미친 세계에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나만의 기준만 흔들리지 않으면 된다. 그게 개똥철학이든, 욜로라이프든, 뭐든 간에.

나는 잡스러운 생각을 내려놓고, 최초에 이곳에 왔던 목적을 떠올렸다.

'정찰 드론을 사용하기에 나쁘지 않은 환경이야. 일단 넓으니까.'

다만, 그 대상이 오염체라는 게 조금 아쉽긴 했다. 사람을 상대할 수 있다면 더 좋은 텐데.

'혹시 모르지. 로제의 말처럼 정신 나간 놈들이 습격해 올지도.'

이 미친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신기하지 않으니 말이다.

* * *

해리는 멀찌감치 앞서 걸어가는 해결사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이를 갈았다.

'아무리 훈련 중인 인턴이라지만, 겨우 해결사 따위를 지원하라니!'

자신의 훈련 성적은 최상위권이었다. 그건 함께 온 다른 인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수한 성적, 무르익은 신체.

이제나저제나 정식 단원으로 콜을 받는 날만 기다리며, 힘든 훈련을 참아내고 있던 와중이었다.

그런데 기껏 호출을 받고 들뜬 마음으로 갔더니, 해결사를 따라가서 전장을 '구경'이나 하라고? 그것도 멀쩡한 해결사도 아니라, 반쯤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 칼잡이를?

'그거만 해도 열 받는 상황인데······ 뭐가 어쩌고저째? 괜히 헛짓거리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 하!'

칼잡이는 한술 더 떠서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독설을 지껄였다.

마음 같아선 냅다 그 얼굴을 짓뭉개고 싶었으나, 단단히 언질 받은 내용을 떠올리며 필사적으로 화를 참았다.

그들이 이곳에 보내지기 전, 용병단에서. 그것도 단장인 레드우드가 직접 '칼잡이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 말라'고 했으니까.

'제길! 사고 치면 인턴에서 바로 잘라버린다고만 안 했어도 그냥 들이박는 건데!'

심지어 칼잡이랑 트러블이 생길 경우 인턴에서 바로 잘라버린다고 경고까지했다.

뭣 때문에 그 지옥 같은 훈련을 버텼는데? 겨우 칼잡이 따위와 트러블로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런데 대체 저 칼잡이가 뭐길래 단장님이 직접 그런 말을 한 거지?'

해리는 눈을 부릅뜨고 칼잡이의 뒷모습을 훑어봤다.

칼잡이는 캠핑이라도 가는 건지, 거대한 장비 박스를 짊어지고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다. 칼은 허리춤에 대롱대롱 매고 다녔으니, 분명 칼이 담긴 상자는 아닐 거다.

'마냥 무식한 칼잡이는 아닌 건가?'

그때 그의 곁으로 다른 인턴들이 다가와서 조용히 물었다.

"해리. 진짜 이대로 '구경'만 할 건 아니지?"

"맞아. 해리 네가 일단은 우리 대장이잖아. 뭔가 말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저 칼잡이 태도를 봐. 우리 무시하는 거. 우리도 대우해줄 필요 없지 않아?"

다들 불만이 팽배해있었다.

하긴, 해리 자신만 해도 이렇게 화가 끓는데, 다른 인턴들도 마찬가지겠지.

곰곰이 생각하던 해리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일단 저 칼잡이 말을 들어주는 척하자."

"왜? 진짜 가만있게?"

"그럴 리가. 칼잡이 몸은 하나야."

해리가 칼잡이의 뒷모습을 노려보면서 말을 이었다.

"즉, 잠깐만 눈을 피하면 우리가 자리를 비워도 모른다는 뜻이지."

태양을 삼키다 (3)

31화. 태양을 삼키다

오염체 사냥 구역에 진입했다.

황량한 대지는 끝없이 펼쳐졌고, 드문드문 보이는 건물들은 대부분 형체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흙먼지가 휘날렸다. 먼지 섞인 마른 공기가 입안을 텁텁하게 만들었다.

"퉤!"

입안에서 느껴지는 까끌한 감촉에 불쾌함이 올라왔다.

'이곳이 도시에 속한 곳이라는 게 놀라울 정도군.'

아무리 아우터(Outer)로 불린다지만 이건 너무 심했다. 하다못해 소울 시티로 오기 전에 들렀던 도시 밖 마을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느낌은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곳곳에 전쟁이 휩쓸고 간 흔적들이 흉물스럽게 남아 있었다.

'오염체 전쟁이었지, 아마?'

대한민국을 모델로 만든 소울 시티의 위치는, 현실로 따지면 서울과 경기도 주변이었다.

즉, 소울 시티 북쪽에 있는 49구역은 굳이 따지자면 북방한계선 근처였다.

열강들의 핵전쟁으로 초토화된 대륙과 맞닿은 곳이라는 뜻이다.

'대륙은 개박살 났고, 오염체들은 먹이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왔지.'

이게 오염체 전쟁의 서막이었다. 그리고 그 최전선에 있었던 곳이 지금의 49구역이다.

도시 밖보다 못한 폐허가 되었어도 여전히 도시 구역에 속해있는 이유였다.

'음! 대충 저기에 자리를 잡으면 되겠군.'

나는 태블릿의 지도를 확인하며 근처에 무너진 건물 하나를 대충 거점으로 정했다.

드론 박스를 가져와 짐도 있었고, 그것 말고도 다른 짐들(?)도 있었으니까.

"여기를 거점으로 삼는다. 다들 거점 수비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겠지?"

"······알고 있습니다."

짐덩이들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거점 수비를 맡기지. 나는 오염체 탐색을 하고 올 테니."

물론 거짓말이다.

탐색 따위는 필요 없으니까.

쿵.

등에 짊어진 드론 박스를 내려놓고, 미리 연습했던 대로 드론을 꺼냈다.

내부를 정리하던 인턴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이내 드론이 나오는 걸 보고 흥미를 잃었는지 자리를 떴다.

나는 드론을 가동시켜서 바깥으로 보내고, 나도 걸음을 옮겼다.

"진짜 혼자 가십니까?"

그때 인턴 하나가 다가와서 물었다.

뭐더라. 이름이 해리였지?

"왜? 같이 가고 싶나?"

"어, 그게······."

예상치 못한 질문인지 녀석이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희는 일단 거점 수비만 신경 써라. 오염체를 만나고 싶은 거라면, 이따가기회를 줄 테니."

"오염체는 저희도 본 적이 있습니다."

"글쎄. 너희가 본 것과 이곳에서 경험하는 건 차이가 클 것 같은데."

"······."

녀석의 얼굴에 불쾌한 감정이 떠오른다.

자기를 무시한다고 느낀 건가? 음. 감각이 좋은 녀석이군.

"특이상황 발생하면 무전하고, 절대 허튼짓하지 마라. 너희들 생각보다 이곳은 무서운 곳이니까."

"······."

나는 끝까지 녀석들을 무시하는 말을 하곤 거점을 떠났다. 뒤통수에서 인턴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뭐 어쩌라고?

'괜히 저놈들이 객기대로 설치다가 죽어버리면 나만 곤란해져.'

부탁한 물건을 사용했으면 곱게 돌려주는 게 예의다.

이 세계에서 예의를 따지는 게 웃기긴 하지만, 괜히 시체로 돌려보냈다가 이상한 소문이라도 날 수 있으니까.

* * *

"이브. 주변 정찰 시작하자."

-알겠습니다, 마스터. 카메라를 연결할까요?

"음. 일단 한번 보기나 하자."

-네, 마스터.

부웅! 하고 하늘 위로 날아간 정찰 드론이 잠시 허공에 체공한다.

왼쪽 시야에 반투명한 화면 8개가 동시에 켜졌다. 전후좌우. 사각지대 없이 지상을 비추는 화면과 드론 주위를 비추는 360도 캠과 원거리 광각카메라까지.

'아, 벌써 어지러운데?'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화면인 데다가, 반투명하기까지 해서 벌써 멀미가 몰려왔다.

하지만 이게 시작이었다.

-정찰비행 시작하겠습니다.

정찰 드론이 움직이자, 화면도 움직였다. 8개의 각기 다른 화면이 한꺼번에.

"아! 이브야. 화면 연결 끊고, 네가 탐색해서 알려주는 게 좋겠다."

-······? 알겠습니다, 마스터.

반투명한 화면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어지럼증이 사라졌다.

확실히 AI가 할 일은 AI가 해야 하는 걸 느꼈다. 그게 아니면 뇌에 컴퓨터칩을 이식하던가.

나는 뇌의 일부를 들어내고 컴퓨터칩을 박는 장면을 상상하며 몸을 떨었다.

으!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는군.

-마스터. 오염체를 찾았습니다. 화면 띄울까요?

"어. 카메라 하나만 포커스해서 띄워줄래?"

아니면 멀미 때문에 토할지도 모르니까.

-화면 전송 시작합니다.

왼쪽 시야로 화면이 띄워졌다.

화면엔 사족보행의 오염체들이 무리로 몰려있었다.

각 개체당 2미터 남짓한 크기. 흡사 멧돼지처럼 탄탄한 근육이 고스란히 드러난 무모증의 괴물들.

"헬하운드인가?"

헬하운드(Hellhound).

지옥의 사냥개, 혹은 지옥견이라고도 불리는 오염체로, 이름에서 느껴지듯 개과 동물이 오염체로 변이한 개체다.

각각이 강한 개체는 아니나, 개과 동물의 무리사냥 습성이 남아있어 상대하기 까다로운 오염체였다.

"뭘 하고 있는 거지?"

멀리서 줌으로 확대된 화면엔, 헬하운드 무리가 무언가를 게걸스럽게 뜯어먹고 있었다.

뭘 뜯어먹고 있나 봤더니······.

"······습격을 당했나 보군."

사람 시체다.

그것도 대여섯 명은 되어 보이는.

"아무리 인간의 존엄성이 땅에 떨어진 세상이라지만, 한낱 미물이 인간을 습격하고 먹이로 먹다니······."

내가 대단한 인본주의자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인간으로 태어났고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에 저 장면은 참을 수 없었다.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자신이 무언가의 '먹이'가 된다는 생각을 하고 살아가진 않을 테니까.

타앗!

발끝이 대지를 박찼다.

세찬 바람이 몸을 때린다. 바이크를 탔을 때만큼이나 느껴지는 맞바람이다.

거리는 빠르게 좁혀졌다. 애초에 헬하운드를 발견한 지점까지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이윽고 저 멀리 헬하운드 무리가 보였고, 개과 동물 특유의 지린내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그리고 그건 헬하운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컹컹!

아우우우!

거의 나와 동시에 발견했는지, 놈들이 긴 울음을 내뱉으며 내게 달려왔다. 황야를 질주하는 놈들의 모습은 흡사 멧돼지 떼 같았다.

그와 동시에 시야 한쪽에 띄워진 화면이 사라졌다. 이제 화면이 필요 없다는 이브의 판단이었다.

눈앞에 있으니까.

스르릉!

평소보다 거친 울림을 토하며 칼이 뽑혔다. 손잡이를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쐐에에엑!

달려드는 속도를 더한 휘두르는 검격은 바람을 가르다 못해 찢어발겼다.

서거걱.

헬하운드 한 마리가 머리부터 통째로 반으로 갈라졌다. 두부처럼 갈라진 놈의 몸이 양쪽으로 비산했다.

그 사이를 헤집고 다른 헬하운드가 달려든다.

서걱!

올려친 검격에 달려든 헬하운드 머리가 날아갔다. 머리를 잃은 몸이 제어를 잃고 그대로 꼬꾸라진다.

이번엔 양쪽에서 헬하운드의 날카로운 이빨이 쇄도했다.

땅을 밟고 몸을 띄웠다. 3미터가량 뜬 몸 아래로 놈들의 주둥이가 지나간다.

그대로 몸을 뒤집으며 두 놈의 목을 날렸다.

깨갱! 깽!

단말마와 함께 두 놈이 쓰러진다. 하지만 헬하운드 무리의 공격은 이제 시작이었다.

촤르륵! 촤륵!

서걱! 서걱!

태양을 머금은 칼날이 현란하게 춤췄다. 때론 눈부시게 질주했고, 때론 은밀하게 쇄도했다.

칼날이 번뜩일 때마다, 놈들의 머리가 하나씩 떨어졌다. 허리가 갈라지고 내장이 쏟아졌다.

찰박!

언젠가부터 대지를 밟는 촉감이 습해졌다. 헬하운드가 흘린 피로 주변은 피바다로 변했다.

황톳빛 대지는 붉게 물들었고, 텁텁했던 마른 공기는 비릿한 습기로 가득했다.

털썩!

마지막 헬하운드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칼날이 피륙을 가르는 소리. 헬하운드의 울음소리. 핏물이 대지를 적시는 소리.

그 모든 소리가 일순간에 소거되며 정적에 빠졌다.

휘이잉.

정적을 뚫고 한차례 세찬 바람이 불었다.

노린내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이 짓도 못 할 짓이로군."

뚝. 뚝.

온몸이 피에 젖었다. 다수를 상대하는 난전이라 피를 피할 방법이 없었다. 하물며 그 다수가 달려드는 개떼였다.

나는 축축한 소매를 들어 대충 얼굴을 닦았다. 소매도 피에 젖긴 마찬가지였지만, 피를 뒤집어쓴 얼굴만큼은 아니었다.

"씨발. 냄새."

저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그냥 피 냄새도 불쾌한데, 개과 동물의 노린내까지 섞이니까 구역질이 치밀정도다.

"후우······ 이게 다 몇 마리지?"

한눈에 보기에도 수십 마리는 돼 보였다. 주변이 온통 헬하운드 시체였으니까.

-정확히 29마리입니다, 마스터.

아, 그렇지. 이브가 있었군.

"29마리라. 일단 머리부터 모아야겠네."

놀러 온 게 아니라 엄연히 토벌 의뢰를 받아 이곳에 왔다. 오염체를 잡았으니, 당연히 증거를 남겨야 할 터.

나는 칼로 헬하운드의 머리를 푹푹 찍어서 한곳으로 모았다. 그리고 일렬로 머리를 늘어뜨린 뒤 레이드 태블릿을 꺼냈다.

"이걸······ 이렇게 하는 건가?"

성과측정 프로그램과 연동된 카메라를 구동시켰다. 그리고 카메라를 헬하운드얼굴에 가져다가 하나씩 사진을 찍었다.

QR스캔처럼 헬하운드 머리를 스캔할 때마다 태블릿 한쪽에 떠 있는 할당량의 카운트가 올라갔다.

이윽고 29마리 전부 다 스캔을 완료하자.

[오염체 사냥 29/100]

태블릿의 카운트가 맞춰졌다.

"아······ 아직 71마리나 남았네."

저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이 숫자가 많아 보였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노린내는 도저히 적응되지 않았다.

"인턴들을 데리고 와야 하려나?"

조막손이라도 빌릴까 싶다가 그냥 고개를 저었다. 괜히 짐 덩어리 달고 다니다가 더 속도만 늦어질 수도 있었다.

"이브야. 다시 정찰 시작하자."

-네, 마스터. 정찰 드론 이동합니다.

나는 하늘로 날아가는 정찰 드론을 쳐다봤다.

쏟아지는 태양을 마주하며 날아간 드론은 이내 하늘 너머로 사라졌다.

* * *

"프랭클린! 그쪽으로 한 마리 가고 있다!"

"알고 있다고! 우하하하!"

타타타탕!

해리, 프랭클린, 트루먼, 드골.

이 네 명의 인턴은 거점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오염체를 사냥하고 있었다.

탕!

둔탁한 소리와 함께 쏘아진 저격 탄환이 오염체의 머리를 관통했다. 오염체는 달리던 관성 그대로 자빠지며 땅을 굴렀다.

그 위를 소총탄이 헤집는다.

투타타탕!

오염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목숨이 끊어졌다.

"이햐! 이놈들 별거 아니잖아?"

소총을 갈겨대던 트루먼이 낄낄거리면서 말했다. 잔뜩 흥분한 고양감으로 얼굴이 살짝 붉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인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따위 것들 잡는 걸 무슨 '구경'씩이나 하라고 여길 보낸 건지!"

"단장님이 우리가 무슨 훈련을 받는지 잘 모르는 거 아니야?"

"낄낄! 우리가 오염체도 잡았다는 걸 알면 아마 다들 놀라겠지?"

"야. 다들 기념사진 박게 이리 모여봐라."

"오! 기념사진 좋지! 문구도 박자. 첫 번째 오염체 사냥을 성공적으로 마치다! 캬!"

"미친놈! 유치하게! 큭큭큭!"

다들 웃음이 흘러넘쳤다.

그들이 사냥한 오염체는 무려 7마리. 1인 1마리를 넘어 2마리에 가까웠다. 그것도 단 한 번의 전투에서 말이다.

"자아! 사진 박는다! 하나, 둘!"

찰칵!

그래서였을까?

자아도취에 빠진 그들은, 그들을 주시하는 다른 시선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곳, 49구역이 어떤 곳인지도 잊어버렸다.

태양을 삼키다 (4)

32화. 태양을 삼키다

정오가 막 지난 시각.

머리 위로 떠오른 태양의 열기가 뜨거웠다.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벌판.

쏟아지는 뙤약볕이 대지를 달구고, 물기 하나 없이 마른 벌판으로 어지러이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때 지평선 너머로 거친 먼지가 일었다. 일단의 무리들이 황색 먼지를 뚫고 정신없이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씨, 씨발! 저 새끼들은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야? 헉헉!"

황색 먼지를 뚫고 나타난 이들은 다름 아닌 인턴들이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 오염체 사냥에 흥분해 기념사진을 찍을 정도로 여유 있었는 데, 지금은 그런 여유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투타타탕!

퍽퍽!

"끄으윽!"

인턴들의 뒤에서 총알이 비처럼 쏟아진다. 등판에 총알을 두어 방 맞은 트루먼이 잠시 비틀거렸다.

"트루먼!"

"괘, 괜찮아! 방탄조끼 위에 맞았어!"

다행히 방탄판 위에 맞았는지, 충격은 있을지언정 출혈은 없었다.

하지만 정말 다행일까?

"크하하하! 애송이들아! 더 발바닥에 땀 나도록 뛰어라!"

"그렇게 느려서야 저승으로 보내주고 싶잖아! 푸하하하!"

저 멀리서 사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총알을 쏟아낸 주인공들이었다.

"저 개새끼들!"

프랭클린이 발끈해서 뒤를 쳐다봤다. 그럼에도 달음박질치는 발걸음은 멈추질 않았다.

"프랭클린! 저 새끼들 도발에 넘어가지 마!"

"알아! 안다고!"

다들 이를 악물고 뛰었다.

아무리 화가 나고 분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들 네 명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으니까.

"씨발! 스캐빈저 이 비겁한 새끼들!"

스캐빈저(Scavenger)!

그들은 49구역 주민들과 갱들이 모인 집단인 스캐빈저였다.

이름 그대로 죽은 시체를 뒤져서 먹고사는 놈들이다. 다만, 그 죽은 시체 대부분이 그들이 죽인 시체라는 게 문제였지만.

그야말로 49구역의 무법자이자, 약탈자들이었다.

투타타탕!

탕! 탕탕!

비겁하거나 말거나, 스캐빈저들은 인턴들을 서서히 압박하면서 추격하고 있었다. 언뜻 보이는 숫자만 열 명이 넘었다.

"거점에 놔둔 장비만 있으면 버틸 수 있어! 버티면서 구조요청을 하면 될 거야!"

해리가 이를 갈면서 동료들을 독려했다.

이런 곳에서 뒈지려고 그 힘든 훈련을 참아왔던 게 아니다. 게다가 정식 단원이 아니라 가족들에게 보험금 지급도 되지 않는다!

더더욱 이를 악물고 허벅지에 힘을 주고 달리는 이유였다.

"킬킬킬! 저놈들 아무래도 거점으로 가는 것 같지?"

멀리서 인턴들을 쫓던 스캐빈저가 잔뜩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거 같은데? 이거 오늘은 쏠쏠하겠어!"

"내가 뭐랬어? 네 명인 게 이상하다고 했잖아? 킥킥킥!"

투타타탕!

다른 스캐빈저들이 장난치듯 총을 쏴 갈겼다. 그때마다 인턴들은 바닥을 구르고, 몸을 허우적거리며 나름의 회피기동을 했다. 그걸 뒤에서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무엇보다 그들이 인턴들에게 놀리듯 총을 쏘면서 아직 살려두는 이유는, 거점까지 털어먹기 위함이었다.

지금 죽이면 4인분의 물건밖에 노획하지 못하지만, 거점을 찾으면 다른 한 명과 거점에 보관 중인 물자들도 약탈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저놈들 장비를 보니까 어중이떠중이 해결사 놈들은 아닌 것 같은데, 용병단에서 실습으로 보낸 거 아니야?"

"그랬으면 다섯 명 다 보였겠지."

"만약 거점에 있는 한 명이 저놈들을 인솔한 엘리트 용병이라면?"

"엘리트 용병이 할 일이 없어서 저런 애송이들 보모 노릇이나 하러 오냐?"

"킬킬킬! 아무래도 그렇지?"

"그리고 엘리트 용병이더라도 우리한테 상대가 되겠어? 눈에 띄면 바로 벌집이 된 고깃덩이가 될 텐데! 푸하하하!"

"그건 맞지! 크하하하!"

스캐빈저들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소리에 인턴들의 뜀박질은 더욱 빨라졌다.

* * *

"하······? 이 새끼들 아직도 안 왔네?"

나는 비어있는 거점을 둘러보며 혀를 끌끌찼다.

오전에 거점을 떠나기 전, 놈들이 쑥덕거리는 걸 들었다.

놈들이야 나름 속삭인다고 속삭였지만, 그게 어디 숨겨지던가. 눈빛만 봐도 불만이 풀풀 풍기는데 모여서 작당까지 하니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그래도 그냥 눈감아줬다.

정확히는 눈감았다기보다 적당히 둘러보다가 돌아오겠지, 라는 생각이었다.

내가 녀석들 보모도 아니고 그런 것까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으니까.

다만 거하게 사고 치지만 않았으면 했다. 어쨌든 목숨은 살려서 돌려보내야 했으니까.

"그런데 아직도 안 돌아왔다?"

벌써 정오가 지난 시간이다. 중천에 뜬 태양도 서쪽으로 조금 더 기운 상태.

내가 오전에 나갔으니, 이놈들이 거점을 비운 게 최소 4시간은 됐다는 의미다.

"하······ 스트레스. 이 짓도 두 번은 못 해 먹겠구만."

나는 수건을 적셔서 대충 몸을 닦았다.

끈적한 피와 헬하운드의 내장과 살점들이 툭툭하고 바닥에 떨어진다. 당장에라도 마을로 뛰쳐 가서 샤워하고 싶은 마음을 내리눌렀다.

핏물에 젖은 수건을 몇 번이나 꾹꾹 짜내고 닦길 반복했다.

훨씬 나아진 기분에 수건을 던지곤 드론을 살폈다. 얼마나 썼다고 흙먼지를 한 바가지 뒤집어쓴 모습이다.

이대로 놔둘 수 없었다. 이게 얼마짜린데.

"이브야, 어때? 거의 익힌 것 같아?"

칙칙!

나는 에어 스프레이로 드론의 흙먼지를 조심스럽게 털며 물었다.

-드론의 정찰 시스템 90% 이상은 학습했고, 조금 전 실전에서 사용해봤습니다.

"오, 벌써?"

헬하운드와 첫 전투. 그리고 그 이후 여섯 번의 전투가 더 있었다.

첫 번째 전투에서 피를 뒤집어쓴 이후로, 느긋하게 사냥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사라졌다. 보이는 족족 죽였고, 오염체 할당량 100마리는 진즉에 넘겼었다.

물론, 최소 100마리라 그보다 많이 잡은 오염체도 전부 카운트됐다. 그게 아니었으면 내가 자원봉사자도 아니고 더 잡을 필요가 없지.

그렇게 한차례 화풀이 겸 살풀이를 하고 거점에 돌아온 찰나였다.

-나머지 시스템도 개활지보다 시가지에 맞는 시스템이라서 사용하지 못한 겁니다, 마스터.

왠지 자존심 상했다는 듯한 말투였다. 언젠가부터 점점 말투와 목소리에서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 아무렴 네가 알아서 잘했겠지. 나는 너만 믿는다? 이브야?"

-······맡겨만 주십시오, 마스터!

쯧쯧. 이런 단순한 AI 같으니라고.

그때.

투타타탕!

탕탕!

"이게 뭔 소리지?"

저 멀리서 희미한 총성이 들려왔다.

물론 이 구역에서 총소리는 매우 흔한 편이다.

실제로 여섯 번의 전투를 하면서, 꽤 가까운 거리에서 다른 토벌팀이 오염체를 사냥하고 있는 것도 봤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점점 가까워지네?"

총성이 점점 가까워진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오염체 토벌팀이 이곳에 몰려올 일은 없었다. 내가 마주쳤던 곳은 할당 구역 외곽이었고, 이곳은 우리가 할당받은 구역 중심이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운 네 명의 인턴들이 떠올랐다.

"이 새끼들이······ 그렇게 사고만 치지 말랬더니!"

나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총성이 들리는 방향으로 태양이 기울고 있었다. 지평선 너머로 시커먼 물체들이 다가왔다.

어지러이 일렁이는 아지랑이를 뚫고 모습을 드러낸 정체는······.

"······하. 맞네."

역시 인턴들이었다.

렌즈의 시야를 확대했다. 녀석들은 이를 악물고 거점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꼬라지를 보니, 이미 당할 대로 당한 모습이다. 얼굴은 땀과 흙먼지로 뒤범벅이 됐고, 찢어진 옷 곳곳에 혈흔과 상처가 보였다.

쏟아지는 역광을 뚫고, 그 너머를 봤다. 일단의 무리들이 낄낄거리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전부 오토바이를 탄 놈들이다.

"스캐빈저로군. 흠! 여길 노린 건가?"

죽일 수 있음에도 죽이지 않고 있다. 기동력도 우수하고, 딱 봐도 숫자가 많았다.

이 세계가 인간의 목숨을 갖고 노는 미친놈들이 많은 세상이라지만, 스캐빈저는 거기서 하나의 목적이 더 추가된다.

약탈!

시체를 뒤져서 빌어먹고 사는 놈들답게, 거점까지 털어먹기 위해 인턴들을 몰이 사냥하듯 몰고 있는 게 분명했다.

"허억! 허억! 다, 당신이 언제······!"

내가 거점 입구에서 뚱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자, 나를 발견한 놈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한다.

"시계 안 보고 다니냐? 대체 거점을 몇 시간을 비워둔 거야?"

"그, 그게······!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스캐빈저가 우리를 습격했습니다!"

"하? '우리'?"

차가운 시선으로 놈들을 노려봤다.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도 못 지키는 새끼들이 뭐? '우리'?

"나는 습격을 받은 적이 없고, 거점도 습격을 받은 적이 없는데, '우리'라?"

눈빛에 살기가 실렸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던 해리라는 녀석도. 그 뒤에서 숨을 헐떡이며 반항스러운 얼굴을 하던 다른 녀석들도.

눈을 마주치기 무섭게 다들 시선을 피했다.

그나마 리더격인 해리가 가장 깡이 있었는지, 더듬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근처에 어슬렁거리는 오염체만 잡고 오려고 했는데!"

"변명은 됐고. 어디 보자. 다들 멀쩡하지?"

나는 인턴들의 안색과 몸 상태를 확인했다.

다들 지친 데다가 몇몇은 총상도 입어서 안색이 푸르죽죽했지만, 딱히 죽을 만큼 다친 놈은 안 보였다.

"네, 네? 괘,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럴 게 아니라 빨리 본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본부? 용병단 본부?"

"네! 스캐빈저의 습격을 받았다고 하면 분명 도와주러 올 겁니다!"

해리가 희망찬 얼굴로 말했다. 슬쩍 다른 녀석들의 얼굴도 보니 마찬가지였다.

나는 저절로 나오는 탄식을 감출 수 없었다.

"허어······! 너희들 정말 용병 훈련을 받은 건 맞냐? 어떻게 이런 멍청한 생각을 하는 거지?"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 햇병아리들아. 너희들이 구조요청을 한다고 용병단에서 달려올 것 같아?"

"동료 구조는 저희 붉은날개 용병단의 자랑이자 자부심입니다!"

"그거야 너희들이 살아있다는 전제가 있을 때 이야기고. 스캐빈저가 어떤 놈들인지 까먹기라도 한 거야?"

"······!"

잠시 생각을 하던 인턴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스캐빈저.

시체를 약탈하는 시체사냥꾼.

즉, 그들에게 살아있는 인간은 필요 없었다.

나는 그사이 절망스러운 얼굴이 된 인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쯧! 너희 단장한테 가서 꼭 전해라. 이거 너희들이 사고 친 거니까, 부탁 하나 더 들어줘야 한다고."

"네, 네? 그게 무슨 말씀······"

"무슨 말씀은 인마. 너희 목숨빚 달아두겠다는 말이지."

스르릉.

나는 천천히 검을 뽑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거점을 확인한 스캐빈저들 역시 오토바이에서 내렸다. 맛집이라고 소문이라도 났는지, 어느새 숫자가 늘어났다. 각자 무기를 빼어든 놈들이 진형을 맞춰서 천천히 접근하고 있었다.

"어, 어떻게 하시려고요? 적들이 너무 많습니다!"

뒤에서 해리의 악에 받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어깨너머로 뒤를 쳐다보며 말했다.

"눈먼 총알에 맞지 말고, 잘 보고 레드우드에게 전해라. 너희들이 이곳에서 뭘 봤는지."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제대로 구경······ 아니, '견학'시켜주마."

* * *

잘됐다 싶었다.

물론 눈물 쏙 빼게 고생한 인턴들의 모습이 고소해서는 아니었다.

'안 그래도 정보량이 모자랐는데, 잘 됐어.'

나는 이곳에 온 목적을 잊지 않았다.

이브의 정찰 드론 딥러닝.

그 목적을 이루기에 오염체들과의 싸움은 너무나 시시했다. 제법 똑똑한 놈들이긴 해도, 오염체는 야생동물에 가까웠으니까.

딥러닝이라는 것 자체가, 많은 활용과 변수가 동반되어야 한다. 야생동물 사냥하는데 무슨 거창한 활용을 하겠으며, 돌발변수가 발생하겠나. 기껏해야 정찰목적 망원경이나 레이더 용도밖에 안 되지.

'하지만 사람이라면 다르지.'

부족한 딥러닝은 물론이고, 이브 역시 여러 가지 장비를 사용해볼 수 있을 거다.

'오히려 잘됐어.'

안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있었는데, 이렇게 때마침 알아서 와줄 줄이야.

의뢰보수에 포함되지도 않는 녀석들이라 조금 귀찮긴 하지만, 실험을 위해서라면 이 한 몸 충분히 움직여줄 용의가 있었다.

'뭐, 어차피 남들 죽이고 약탈하는 놈들이라 딱히 거리낄 것도 없고 말이지.'

현실에서는 모든 생명의 무게가 같다고 하지만, 글쎄······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아니, 달라졌다.

타인의 생명을 주머니 속 동전보다도 못한 취급하는 이 세계에서 그런 생각은 사치였으니까.

'나'는 '나'로서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그저 그뿐이다.

"이브. 놈들 전력 파악해."

-네, 마스터!

이브도 이제 주인을 닮아가는지, 곧 있을 학살에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얘를 잘못 키운 건 아닌지 슬슬 걱정된다······.

아무튼, 그건 그거고.

부우우웅!

정찰 드론이 힘있게 하늘을 향해 날아간다.

스캐빈저 놈들이 날아가는 드론을 향해 애꿎은 총알을 낭비해보지만, 그런 눈먼 총에 맞을 드론이 아니다.

-총 스물일곱 명 확인했습니다. 전원 총기를 소지했고, 이중 신체개조를 받은 인간이 여덟 명이며 중화기를 든 인간이 넷입니다.

"생각보다 많이도 몰려왔네."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칼을 뽑았다.

스르릉.

손끝에 들리는 감각이 묵직하다.

태양 아래서도 은빛 칼날은 서늘한 예기를 토했다.

"저 미친놈은 뭐야?"

"잔뜩 분위기 잡길래 긴장했더니 칼잡이잖아? 푸하하하!"

"아씨! 괜히 쫄았네 씨바! 크흐흐흐!"

내가 검을 뽑자, 멀찌감치서 진형을 잡고 있던 스캐빈저들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리 웃긴지 자기들끼리 농담을 지껄이며 배를 잡고 웃었다.

그리고 나 역시 웃음을 지었다.

"그래. 갈 땐 가더라도 웃으면서 가는 게 좋지."

그래야 나도 덜 미안하잖아.

태양을 삼키다 (5)

33화. 태양을 삼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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