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끼익.
수송 트럭이 드디어 멈춰섰다.
병사 하나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 내려요. 꾸물대지 말고 빨리."
닭장 같은 트럭에서 내리자 거대하고 칙칙한 시티의 장벽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중심업무지구 근방에서만 살았으니, 이리 가까이서 본 적은 없었는데 마치 웅장하고 높은 댐을 밑에서 바라보는 보는듯했다.
지옥같은 외부로부터 발두르 시티를 격리시키는 거대 장벽.
저 너머는 이곳과 다른 세상이겠지.
번쩍-
날이 밝음에도 적색 불빛을 내는 항공장애등은 일정 간격으로 시티 장벽을 수놓고 있었다. 장벽 중간에는 작달막한 관제 초소가 동그랗게 나와 있었는데 멀리서도 잘 보일 만큼 거대한 대물 저격총을 배치해 두었다.
분위기가 실로 흉흉했다.
이곳까지 오는 사람은 보통 두 부류.
시체 사냥꾼이거나.
시체가 될 놈이거나.
나는 둘중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길 바랐다.
"알아서 조심해요. 대열 벗어나면 총 맞으니까."
차가운 목소리의 병사가 끌려온 주민들을 괜히 겁주며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분위기상 나도 겁 먹은척을 해야 할 것 같아 잔뜩 어깨를 움츠렸다.
시티 장벽 앞에 길게 펼쳐진 허허벌판.
거기에는 체육관같이 옆으로 커다랗고 널찍한 건물 다섯 동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흑색과 붉은색, 청색, 황색 그리고 회색으로 칠해둔 건물은 모두 격리 시설로 보였다.
"당신들은 저 끝에 있는 회색 동이다. 따라와."
와중에 우리는 가장 바깥쪽에 있는 회색 건물로 배정받았다. 그렇게 내가 흑색 건물 앞을 지나가던 때였다.
'?'
심상찮은 느낌에 기감을 한번 넓게 펼쳐보자 검은색 건물의 안쪽에서 륭 이상 가는 강대한 기운이 여럿 느껴졌다.
'륭과 비슷하거나 더 강한 자가 다섯 이상.'
아마 저 안에 있는 이들은 시체들과의 전투 후에 자체적으로 격리를 선택한 기업이나 관청의 인사들일 것이다.
바로 옆의 붉은색과 청색 건물 역시도 만만치 않은 기운의 소유자들이 몇 명이나 있었다.
— 이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때마침, 수송 트럭 대신 고급스러운 의전 차량에서 내린 중년인이 병사들의 공손한 안내를 받으며 흑색 건물로 들어가는게 보였다.
의전 차량은 법인 차량인듯 번호판이 눈에 띄는 형광색이었는데, 그 앞판에 사천(四川)이라는 글자까지만 확인한 내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나는 차량과 중년인에 신경을 꺼버리고는 종전보다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금세 회색 건물에 당도했다.
"들어가."
이곳은 다섯 건물중 가장 면적이 넓었으나 외관이 낡고 추레했다. 안에서 느껴지는 기운도 대체로 형편없었다. 그래도 병사들에 의해 나름 체계적으로 통제되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앞서 걸어가는 주민들을 따라 안쪽으로 깊이 들어갔다. 입구는 나선형의 터널같은 구조였다.
건물의 안쪽에 이르자, 크게 펼쳐진 공동과 함께 열악한 환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시티 외곽의 주민들만을 모아놓은 곳인듯 싶었다.
우스운 것은, 그 안에서도 철창을 경계선 삼아 구역이 나뉘어져 있었다.
구역은 총 세 군데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좌측 구역은 비교적 행색이 멀끔한 인간들이 모여있는 곳이었고 중앙 구역은 왼쪽보다 못했지만 그나마 평이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우측 구역은 최악이었다.
척 봐도 상태가 이상한 인간들만 모여있었다. 저긴 아비규환이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마약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인간은 양반이었고 몇 명은 이미 사팔뜨기가 된 눈으로 돌아다니며 걸쭉한 침을 질질 흘려대는데 당장이라도 좀비로 돌변해 옆 사람을 물어뜯더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할 수준이었다.
- 이런 새끼들이랑 어떻게 같이 있으라고!
- 제발 내보내 줘!
덕분에 우측 구역으로 배정받은 주민들은, 입구를 지키는 병사에게 크레딧을 줄테니 다른 구역으로 자리를 바꿔달라 간청했다. 하지만 그들이 다른 구역으로 가는 일은 없었다.
곧, 우리를 인솔하던 병사도 입을 열었다.
"웨스트 정크타운 밀접 접촉자 넷. 우측으로."
병사의 어투는 단호했다.
나를 포함한 넷은 우측에 격리당할 신세가 되었다. 하기야 시티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슬럼가에서 잡혀 왔으니 이렇게 무시당해도 싸다.
그런데 앞에 가던 왕초삼이 그 소리를 듣자마자 갑자기 허리춤을 경박하게 털었다. 거기엔 개방의 철패 매듭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흔들리는 철패 매듭을 뚝 떼어 그 병사에게 보여주었다. 저번처럼 오결을 상징하는 홀로그램이 화려하게 솟구쳐 올랐다.
"?"
병사는 매듭을 받고선 유심히 확인하나 싶더니, 태도가 급변했다. 불만스러운 얼굴의 왕초삼을 향해서 고개를 짧게 숙여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가까이 가기만 해도 거지 특유의 구릿한 냄새가 나는 왕초삼의 앞에서도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말했다.
"지금 보니까 특별한 외상은 없어 보이네요. 그냥 중앙 구역으로 들어가시죠. 위에서 뭐라고 하면 내가 적당히 설명해 놓겠습니다."
녀석은 옅은 미소를 띈 채 왕초삼을 중간 구역으로 안내했다. 말단 병사의 입장으로 괜히 오결의 개방도를 막대해서 좋을게 없다고 생각하는 듯싶었다.
내가 혼자 떠나려는 왕초삼을 발로 툭툭 찌르자, 놈이 곧바로 눈치를 채고는 앞서가는 병사를 불러세웠다.
"병사 양반, 이 셋도 나랑 같이 중앙에 넣어주쇼. 다 멀쩡한 사람들이야."
"그렇습니까? 그러면 그리하십시오."
병사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허락했다.
연방군의 시설에서도 기업의 아성은 잘만 통했다.
왕초삼의 철패 매듭이 아니었다면 나는 필시 저 오른쪽 구역에 수감되었을 것이다.
중앙 구역에는 백 명 정도의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 시장통 속에 앉아 내면을 관조했다.
뷔에탕의 마력에 먹이로 던져줄 에센스를 빼놓고도 거대한 기운이 남았다. 영약이지 만병통치약은 아닌지라 지금보다 몸 상태가 괜찮아지면 천천히 단전과 심장에 흡수될 녀석들이었다.
에센스의 기운이 안정화되면 이제 슬슬 회로를 하나 더 늘려봐도 좋을것 같았다.
회로가 한 개 늘어날수록 구현해낼 수 있는 마법의 범위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전생에 얻은 노하우로 범용성 좋은 마법을 사용하고 있지만 고작 2위계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조금 시간이 흘렀다.
"거기. 잠깐 이리와요."
마스크와 고글에 방호 슈트까지 갖춰 입은 연방군 병사들은 주민들에게 뭔갈 캐묻고 있었다.
귀를 기울여보니 전신에 녹빛이 도는 언데드를 보았거나 들었냐는 질문들이 주를 이루었다.
연방군의 목표는 피해대책 수립이 아니라, 폭풍을 기회삼아 시티 안으로 기어들어온 어떤 좀비의 절멸인듯 했다.
얘기를 엿듣던 내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지금 밖이랑 연락 돼?"
"아예 안 됩니다. 먹통이에요."
루돌프가 고개를 저었다.
보호 마법진이 덕지덕지 걸려있는 시티 장벽이 가까워서 그런건지, 혹은 군에서 통신 방해 장치를 설치해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레반, 우리 여기 언제까지 있어야 할까?"
레나는 최근의 벌어진 일들이 모두 생소한것들 투성이라 종일 어안이 벙벙해 보였다. 시티 중심가 부잣집에서 태어난 아가씨가 이런 수모를 당할줄 어디 상상이나 해봤겠는가.
"나도 격리구역은 처음이라."
"아 그랬지···."
그때였다.
—야 이 개새끼들아!!!
옆 오른쪽 구역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못배운 외곽지대의 주민들을 한 장소에 강제로 끌고 와서 모아놓으니, 개중에 도를 넘어 지랄하는 인간들이 속속 등장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씨발! 이거 풀어달라고! 나 누군지 몰라?
짜증이 섞여 있는 사내의 고함.
저놈은 아까부터 역정을 내며 난동을 피우고 있었다. 허리춤의 칼을 보니 칼밥좀 먹은 무인이다. 동네에서 나름 한가락 하는 놈이겠지.
풍기는 기운을 보면 등평위와 비슷하거나 약간 못해 보였다.
놈이 쉴 새 없이 날뛰어대자, 결국 순진한 얼굴의 젊은 병사 하나가 철창을 두드리며 말했다.
"조용히 합시다."
"지랄하네 씨발! 내가 뭘 잘못했는데 수갑을 채우냐니까."
"나중에 문제없으면 풀어주니까 입 닫으시라고."
"아, 일단 풀어줘봐. 이거 풀어주는게 어려워? 나는 두 손이 자유롭지 못하면 정신병이 도진다고!"
그야말로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였지만, 병사는 순순히 철창 안으로 들어가 수갑의 중간고리를 풀어주었다. 심퉁난 얼굴로 손목을 툭툭 턴 사내의 다음 행동은 뻔했다.
속박이 풀리자마자 전광석화처럼 달려든 그는 눈앞의 젊은 병사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홰액!
헌데 3레벨쯤 될 법한 무인의 주먹을 가볍게 흘려낸 병사가, 그 팔을 붙잡아 그대로 메쳐버렸다.
뒤통수로 돌바닥을 때린 사내가 비명을 질렀다.
"커억!"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연방군의 무서운 점은 균일성이다.
아무리 말단이라도 연방군의 마크를 다는 순간 계급장과 함께 군용 칩을 하사받는데, 그 칩은 초기 연방의 권력자들이 온갖 절학(絶學)을 모아놓고서 평범한 이들도 쉽게 익힐 수 있는 전투능력과 토납법만을 뽑아 집대성해놓은 종합무술이다.
제대로 익혔다면, 저렇게 맨몸으로 덤벼드는 3레벨 무인쯤은 어렵지 않게 저지할 수 있다.
스르릉-
"이, 이 개새끼가. 너 어디 한 번 해보자 그래."
"!"
하지만 저렇듯 검을 들고 내력까지 써가며 달려드는 놈을 쉬이 저지할 수준은 아니다.
연방군 병사들이 하사받는 군용 칩의 특징은, 일정한 경지까지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강해진다는 것. 하지만 그게 전부이기도 하다.
보급형 군용 칩에 탑재된 무공과 토납법은 전부 실전적인 배움과 빠른 성장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기에, 그것들을 대성해봐야 4레벨 이상의 경지에 이르기는 힘들었다.
"죽어 새끼야!"
그렇게, 무인은 검을 들고 달려들었고.
퍼엉—
"컥!"
돌연, 무인의 손목이 폭발과 함께 터져나갔다.
그 광경에 주변의 모두가 찔끔하며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내려다보았다. 폭발한 저 수갑과 별다를바 없는 생김새였다.
"끄, 끄아아아악!"
황천에서부터 끌어올린 듯한 비명.
사내가 잘린 손목을 붙잡고 버둥댔다.
이윽고, 피가 뿜어져 나오는 사내의 손목을 토치같은 휴대용 화기로 지져버린 병사가 소리지르는 그 얼굴을 짓밟았다. 순해 보이던 얼굴은 어느새 군인의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너···."
병사가 뭐라 입을 열며 발을 들어 올렸을때, 뒤쪽에서 지휘관의 커다란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만-!"
"!"
그 호통이 떨어지자마자, 병사는 다시 순진한 얼굴로 돌아가 쩔쩔맸다. 그에게 지휘관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삽시간에 사색이 된 것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병사가 연신 쩔쩔매는 동안 손목이 잘린 사내는 찍소리도 못하고 조용히 구석에 가 처박혔다. 손목 하나가 잘렸다고 해서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다. 신경은 살아있을 테니, 크레딧을 모아 사이버웨어를 이식하면 될 일이다.
손목 하나가 날아가서 수갑을 채울 필요도 없었다. 사내는 처음에 원하던 대로 수갑을 벗게 된 것이다.
우리는 그 사내뿐 아니라, 이런저런 군상들을 구경하며 중앙 격리 구역에서만 48시간을 꼬박 보냈다.
그간 감염이 확실시 되어 질질 끌려나간 주민들을 여럿 보았고, 그들은 다시 격리 구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여기저기 들러붙어 떠드는 것을 좋아하는 주민에게 듣기로, 시체가 되기 전에 장벽 밖으로 걸어 나가게 한다고 들었다. 그게 더 인도적이라나? 사실 그냥 총탄을 아끼려고 그러는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그사이에 격리된 주민은 더 늘어 모든 구역이 주민들로 빽빽하게 채워지는 지경이 되었는데, 그 덕에 불쾌지수가 잔뜩 올라간건 두말할 필요 없었다. 마치 난민 대피소 같았다.
"그래도 하루만 더 지나면 나갈 수 있겠지?"
레나가 그런 말을 하던 즈음이었다.
이 14호 격리 구역에 무언가 이상이 생긴 때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격리 구역을 지키는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한 연방군 병사들이 썰물처럼 이곳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다급해 보였다.
심지어 나를 이곳으로 수송해왔던 나이 지긋한 지휘관도 황급히 개인무장을 챙기더니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여유롭게 즐기던 비스킷과 커피도 내려둔 채였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벌어진 듯 하자, 주민들이 저들끼리 모여 웅성댔다. 주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입김처럼 피어오른 불안감이 장내에 있는 모두에게 전염되고 있었다.
—! ——!
밖에서 들려오는 기파의 충돌과 큰 총성.
격리 구역 밖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붉은 건물보다는 조금 더 먼 곳으로 느껴졌다.
흑색 건물 쪽이다.
저기서 무슨 일이 터진 건가?
호기심이 동한 내가 조금 더 세밀히 기감을 펼치던 시점이었다.
콰앙—
방금 다급하게 나갔던 지휘관이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로 날아와 철창에 처박혔다.
주르륵, 철창을 따라 미끄러지는 사체.
연방군 병사쯤은 애 다루듯 하던 지휘관의 허망한 죽음이었다.
"······."
지난 이틀간 시장통보다 시끄럽던 격리 구역이 한순간에 도서관처럼 조용해졌다.
#29화. 변절자
#29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래폭풍 속에서 시체에 맞서 싸웠던 마법사가 자신의 감염 사실을 모른채 격리 구역까지 들어와 있을 줄은.
그리고 뒤늦게 감염을 인지하자, 장벽 밖으로 걸어 나가는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상위 마법을 사용해 감염된 사실을 숨겨왔음을.
— 젠장할······.
고급진 로브를 걸쳤으나 안색이 파리한 남자.
쿼롯 가문에 소속된 상위 마법사, 쿼롯 페디치.
6레벨 끝자락의 마법사인 그가 감염 사실을 눈치챈 것은 흑색 격리동에서의 첫날 밤이었다.
첫날 밤 이후부터 혹시라도 감염이 낫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에 기대어 이틀간 그 사실을 숨겨왔다.
스스로 장벽 밖으로 걸어가 언데드들에게 뜯어먹혔다는 소문들이 연방군 병사들의 입을 통해 속속 들려왔다.
그럼에도 페디치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은 세상의 선택을 받은 마법사이며 쓸모없는 그들과는 근본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렇듯 기구하고 허무한 죽음을 자신의 미래로 낙점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마지막 날을 넘기지 못했다.
점점 아득해지는 의식속에서 감염 사실을 숨겨오던 그가 마침내 언데드의 본능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꽈지직-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는 핑계를 댄 페디치는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뒤따라온 연방군 병사를 찢어 죽이고 살점에 코를 박았다.
흥건한 피냄새를 맡자 몸이 달았다.
신기하게도 비릿한 그 냄새가 황홀하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자신을 속박하던, 지금까지 그를 지탱해 왔던 이성이 깨끗이 무너져내렸다.
이 흑색 건물은 사회 고위층을 격리하는 동이었다. 이상이 생기는 즉시 알아챌 강자들이 여럿 있었다. 평소의 이성적인 그라면 당연히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이성이 무뎌지고 언데드의 본능에 침식당해 치밀하지 못했던 페디치의 살인 행위는, 같은 흑색 건물의 격리자들에게 곧바로 발각당했다.
"무슨!"
연방군 병사의 사체와 피칠갑을 한 페디치를 본 이들이 경악한 얼굴로 힘을 끌어 올렸다.
며칠간 고급 호텔의 숙박객같은 대접을 받으며 황제 못지않은 격리 생활을 즐기던 시티의 강자들이었다.
그들은 연방군 병사들보다 먼저 움직여 온갖 다채로운 공격을 쏟아냈는데, 그 사이에는 사천당가의 임원도 끼어있었다.
꽈과광!
극독이 묻어있는 그의 비수들이 까다로웠던 페디치가 포탄처럼 흑색 건물의 입구를 부수고 뛰쳐나왔다.
도망쳤다기보다는, 꾸물거리며 이성을 잠식한 언데드의 본능이 원하는 것이 격렬한 전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무한정히 솟구치는 마력이 요사스러운 기운으로 변해 페디치의 전신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넘치는 마력이 자연스레 몸을 허공에 띄웠다.
피묻은 로브자락이 공중에 휘날렸다.
— ······사막에서 얼어 죽은 선인장을 목도하라. 그 가시가 곧 네 눈알을 파고 들어갈 것이다.
이윽고 공중에 자리잡은 페디치가 입술을 달싹대며 중얼중얼 뭔가를 외니 붉은색, 청색 건물에서 뛰쳐나와 앞을 가로막는 자들과 연방군 병사 수십이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그 말도 안되는 광경을 마주한 이들이 쉽사리 움직이지 못할 때였다.
콰직!
페디치가 섬광과도 같은 속도로 입을 벌렸다가 다물자, 한 뼘 길이의 탄환이 제 자리를 찾은 것처럼 물려있었다.
와직.
탄환을 이빨로 물어부순 다음에야 장벽 중간에 붙어있는 초소에서 벼락같은 총성이 메아리쳐 울려 퍼졌다.
단 한발로 사람의 허리를 두동강 내버릴 수 있는 연방군의 대물 저격총도 그의 몸에 생채기조차 내지 못했다.
— 하하······?
페디치의 육신이 더욱 달아올랐다.
이 절대적이고 권능과도 같은 힘이라면, 그토록 동경하던 발할라의 대마법사들과도 동수를 이룰 수 있을것만 같았다.
그렇게 신이라도 된듯한 전능감을 만끽하던 페디치가 문득 고개를 내려보니, 가장 나약하고 많은 주민이 격리된 회색 동 앞이었다.
페디치의 입꼬리가 주욱 올라갔다.
- 그만!!
그때, 회색 동에서 한 군인이 튀어나왔다.
연방군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나이든 사내.
페디치는 생각보다 강력했던 그 지휘관에게 발목 한 짝을 내주고선 그자의 목숨을 취할 수 있었다.
그자는 몸이 뻥 뚫려선 나왔던 입구로 다시 내던져졌다. 인간의 몸이었다면 꽤 고전했을 상대였다.
— 이건 정말······너무 좋은데.
회로를 휘돌며 끝없이 솟구치는 이 힘.
한계가 없다.
지휘관이 목숨을 던져가며 잘라낸 발목에도 피가 쏠리나 싶더니 꾸물대며 벌써 새 발목이 솟아나고 있었다.
입이 찢어져라 웃어 보인 페디치는, 두려움에 자신의 앞을 감히 막아서지 못하는 한심한 자들을 내버려 두고 회색 동으로 들어갔다.
* * *
그런 얘기가 있다.
높은 경지의 인간일수록, 언데드가 되면 더욱 강한 힘을 얻는다.
사실이었다.
과거에 연방을 배신하고 언데드의 길을 걸은 인류의 강자들로부터 깨닫게 된 사실. 연방의 누구도 그 사실을 깨닫고 싶지 않았지만 자연스레 그리되었다.
과거에 아직 인류의 터전이 충분히 남아있던 시절. 현재에 비하면 뭐든 희망차고 풍족했던 시절.
9레벨의 경지였던 한 전설적인 영웅은 자신이 늙어 죽기 전, 언데드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마지막 남은 가능성을 시험해보고 싶어했다.
그는 노환으로 어차피 곧 죽을 몸이니,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것을 연방에 선물하고 떠나겠노라 선언하고 장벽 밖으로 떠났다. 수십 년간 연방을 지탱하던 영웅이 사라지자 모두가 슬퍼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좁았던 문을 활짝 여는데 성공했다.
죽기 직전의 몸뚱이는 질기고 단단한 육신이 되었고, 눈에는 정광이 가득했으며 무인들의 환골탈태 같은 육체 재정립마저 필요치 않은 영생의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홀연히 사라졌던 그 영웅은 고작 100일도 지나지 않아 인세에 나타났다.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던 괴물의 모습을 하고서.
그는 일주일 만에 거대 도시 세 곳을 무너뜨리고 수천만의 인간을 학살했다.
인간의 피와 살점을 쥐어짜내어 드넓은 수영장에 가득 채우고 자신이 인간시절 그토록 좋아했던 수영을 마음껏 즐기던 광경이, 거대 도시인 '발리' 에서 마지막까지 생존했던 이의 각막렌즈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었다.
연방의 권력자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떠나기전 자신의 모든 절학을 물려주고선 "살아 돌아온다면 반드시 연방의 편에 서겠다" 고 굳건히 다짐했던 현명한 노인이었다.
그렇기에 연방은 고명한 그의 약속을 믿었고.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전설적인 존재의 타락은 언제나 훌륭한 언론의 먹거리였지만, 그때는 언론조차도 그 충격적인 내용을 쉽사리 보도하지 못했다.
보도의 파장이 시티 중심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것보다도 더욱 강력할 게 뻔했기에.
고작해야 100일, 본능에 잡아먹혀 흉한 악귀가 되어버린 그를 전설로 기억하고 회자하는 사람들이 세상엔 아직도 한가득이었다.
하지만 그 사건은 결국 대서특필되었다.
[ 전설로 남았던 영웅의 변절 ]
사람들이 그를 떠나보내고 슬퍼했던 기간보다 욕하고, 절망하고, 원망하는 기간이 수 곱절은 더 길었다.
그 사건의 여파로 끝나지 않을 자신만의 길을 걷기 위해, 언데드가 되어서라도 인류의 편에서 싸우고 싶다던 늙은 영웅들의 장벽 바깥 행이 줄줄이 취소되었다.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려던 그들은 자신들의 우상이자, 벗이자, 전설이 망가진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변절한 그의 모습을 보고 탄성을 내지르는 이도 있었다.
자신의 지식과 기억은 그대로 둔 채로 막대한 힘을 얻을 수 있다. 인간이길 포기한다면 저 넓은 바깥 세상에서 영생을 구가하며 신선놀음을 할 수 있다.
욕심을 내는 자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그 압도적인 매력에 정신이 팔린 자들은 어떻게든 연방의 감시를 뚫고 장벽 밖으로 나아갔다. 다른 이보다 더 강한 시체를 찾기 위해. 자신에게 격 높은 혈액을 나눠줄 강대한 언데드를 찾기 위한 여정이었다.
여정은 성공적이었다. 그들에게만.
5레벨이었던 자는 고작 한 달 뒤 6레벨급의 언데드가 되어 나타났고, 6레벨 초입에 머무르던 자는 단 3년 만에 7레벨의 벽을 깨부수고 강력한 언데드가 되어 나타났다.
힘을 얻었어도 인간 시절의 지능과 기억을 거의 그대로 계승한 채였다.
졸지에 인류를 지키던 강자들의 이탈이 가속화되었다.
시간이 지나자 연방은 고의적인 언데드화, 시체화에 대해 결벽증이라도 걸린 것처럼 재깍 반응하기 시작했다.
고의로 변절의 길을 걸었다면 그 조부모와 부모, 자식, 친인척, 친구와 이웃까지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다. 만약 변절자가 어떠한 가문과 기업의 일원이라면 그 가문과 기업 자체에 극심한 페널티를 부여했다. 변절자가 인간이었던 시절에 강하고 명망이 높을수록 그 처벌과 배척의 강도가 심했다.
극단적인 연좌제를 실제로 시행한 것이다.
그것은 이미 변절한 자들에 대한 벌이 아니라, 변절할 생각을 갖고있는 이들에 대한 연방의 강력한 경고였다.
연방은 그 외에도 다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였고, 변절자들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변절할 마음이 없었더라도 감염되는 순간 변절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신력으로는 신선과도 다름없던 초인들마저 굴복하는데, 그보다 못한 이들이 그 끔찍한 본능을 버텨낼 재간이 있을 리가 없다.
저 6레벨의 마법사인 페디치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몇 명이나 저 회색 동 안에 있는 건가?"
누군가 저 회색 건물 안에 주민이 얼마나 있냐 물으니, 한 연방군 병사가 천 명이 넘는다고 대답했다.
그 말에 누구는 인상을 찌푸렸고 누구는 안도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전부 다 죽겠군."
"젠장. 시간이나 실컷 끌어줬으면 좋겠네."
흑색 건물의 강자들을 비롯해, 저 회색 동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조금 전 가슴이 뚫려 죽은 지휘관을 본 연방군 병사들도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그 나이 지긋한 군인이 이곳 14호 격리 구역의 책임자였다.
그래도 믿을 구석이 아직 남아있었다.
"장군이 이리로 오고 있다고?"
"예."
강대한 무력을 보유한 연방군의 별.
연방군의 전력중 가장 강력한 축인 '장군'
때마침 연방의 장군 한 명이 이곳 14호 격리 시설에서 터진 비상사태를 확인하고 이동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언데드가 된 페디치의 불가사의한 힘을 마주한 그들은 이 상황을 종료시킬 유일한 존재가 서둘러 도착하기만을 기대했다.
"미치겠군. 쿼롯 가문의 마법이 저렇게 강했나?"
"죽지 않는 존재가 되었으니, 잠재력까지 마음껏 뽑아쓰고 있을 거다. 방어를 도외시하고 전력으로 마력을 뿌려대는데 그걸 어떻게 막아?"
"방벽진 치는 기업들은 돈을 그렇게 받아 처먹고 대비도 제대로 안하네. 씨발 뭘 하는거야 대체."
"언데드가 그렇게 많이 떨어질 줄 몰랐겠지. 연방에서 제일 코딱지만한 땅덩이잖아."
방금 흑색 건물 안에서 페디치와 전투를 벌였던 이들이 한 마디씩 뱉었다. 그들은 모두 6레벨 이상의 강자였는데 다섯 명이나 되었기에 망정이지, 혼자였다면 절대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다섯 명 중, 마지막으로 입을 꾹 닫고 있던 사천당가 코퍼레이션의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오시는군."
콰앙-!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대한 기운을 지닌 누군가가 하늘에서 유성처럼 떨어졌다.
모두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존재였다.
장군이라고 불리는 연방군의 수뇌.
반듯한 군복 견장에 자수된 한 개의 별이 기품있고도 은은하게 빛났다.
연방군 준장, 가르델.
도착한 그가 숨 돌릴 틈도 없이 고개를 돌리곤 시체의 요기가 느껴지는 회색 동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던 때였다.
스아아아악——
저 회색동 안에서.
"!"
무언가 기이하고 살기짙은 기운이 점차 커지더니, 시체의 거칠고 사나운 요기를 게걸스레 잡아먹으며 거대한 똬리를 틀었다.
이윽고, 똬리가 무너지며 탄생한 기의 파동이 해일처럼 넘실대며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해일같은 파동이 몰고온 기운의 조각들이 온 사방에 진하게 내리깔리자, 누구도 멀쩡하게 서있지 못했다.
연방의 병사들은 물론이고, 붉은색과 청색 건물에서 튀어나온 이들이 하나둘씩 구역질을 하며 쓰러졌다.
"끄윽!"
"씨이발, 갑자기 뭐야?"
심지어 6레벨이 넘는, 어디서나 걸맞은 대접을 받던 강자들이 그 항거할 수 없는 기운 앞에 자비라도 구하는 양 무릎을 꿇었다. 신체를 스멀스멀 침범해오는 기운에 전신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야말로 규격을 벗어난.
9레벨급의 초월적인 강자가 이곳에 존재를 드러내며 현현했다고 해도 믿을 법한, 상식 밖의 힘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주저앉기 바쁜 사이, 사천당가의 중년인이 천천히 걸어 나와 인상을 무섭게 찌푸리고 있는 가르델의 앞에 섰다.
그는 곧, 정중히 포권하며 입을 열었다.
"저 안의 상황이 심각한 듯한데, 제가 함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30화. 장군
#30화.
중년인의 동행 제안.
가르델 준장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
"······."
관심 없다는 듯한, 그 무례한 태도에 얼굴을 굳힌 당가의 중년인이 마지못해 포권을 풀고 기다렸다.
지금 가르델 준장은 회색 동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모든 정신과 신경을 쏟고 있었다. 누군가의 제안을 들어줄 만한 형편이 아니었다.
잠시 뒤, 당가의 중년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르신, 제가 돕겠습니다."
정중하게 말문을 열었던 조금 전보다 높아진 언성.
한참 대답이 없던 가르델 준장이 결국 시선을 돌려 중년인과 마주보고 섰다.
못마땅하게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였다.
"무얼 돕겠다는 말씀이신가?"
가르델이 무뚝뚝히 묻자, 중년인이 명함을 꺼내어 내밀었다.
"저는 사천당가의 공천립이라 합니다."
겸손하게 내민 중년인의 고급진 명함에는 사천당가 코퍼레이션 발두르 지부의 임원이라는 정보가 넉넉히 기입되어 있었다.
발두르 지부 '이사 공천립' 그 밑으로 깨알 같은 글씨로 쓰인 그의 약력이 죽 늘어져 있다.
공천립이 예의를 차리며 고개를 숙였다.
"시체의 요기와 마력이 저리도 강맹하니, 이런 무림 말학이라도 힘을 보태면 좋지 않겠습니까."
"흐음."
명함을 받아든 가르델 준장의 얼굴이 굳었다. 곁눈질로 그 반응을 확인한 공천립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가르델이 나지막이 뱉은 말에, 다시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귓가에 겨우 들릴 듯 말 듯한 읊조림.
- 당가의 명함은 맞지만 당(唐)씨는 아니군.
화르르-
가르델의 손 위에서 불길이 일었다.
곧, 활활 불타오르는 명함.
깊게 숙인 공천립의 얼굴에 짙은 노기가 서렸다가 이내 급히 사라졌다. 한낱 불길로 보이는 저 화염이 삼매진화(三昧眞火)라는 것을 알아챈 뒤였다.
"공천립 이사."
타오르던 화염은 명함을 완벽히 잿가루로 만들어 버린 뒤 사그라들었다. 가르델 준장이 그제서야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군인도 아닌 자가 왜 공적을 세우려 하나?"
"······."
"저 안에 있는 시체가 명망 있는 마법계 가문의 마법사이기 때문인가? 자네 명함에 자리할 약력이 한 줄 더 필요한 것은 아닌가?"
가르델의 어투가 명백한 하대로 바뀌었다.
공천립은 차오르는 수치심에 속이 불편 했으나, 감히 감정을 함부로 내보이거나 입 밖으로 불만을 늘어놓지는 못했다. 무력으로는 자신보다 몇 단계나 윗줄에 있는 연방의 장군이었기에.
- 그리한다고 당씨가 되는 것도 아닐진대.
저 말대로 사천당문의 당씨 성을 가진 직계였다면 또 모를까.
'무리겠군.'
여하튼 장군이 저렇게까지 강경히 나온다면 사천당가 발두르 지부라는 배경을 가진 공천립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상대의 뒤를 받치고 있는 곳이 바로 연방 아닌가.
담담한 가르델의 질책에 공천립이 허리를 굽혔다. 그의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였다.
"제 주제도 모르고 건방졌습니다. 말학의 실수는 부디 잊어주시고 보중하십시오 어르신."
공천립은 절도있게 포권하곤 몸을 돌렸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부족함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물러나는 듯 보였으나, 사실 그의 속에서는 천불이 나고 있었다.
연방군 병사들이 다가와 땀을 뻘뻘 흘리며 그를 모셔갔다.
그런 공천립의 뒷모습을 보던 가르델 준장이 속으로 조소했다.
연방의 장군이라는 위명에 기대어 명성과 공적을 세울 생각을 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저 당가의 인물이 크게 오해하고 있는게 있다.
방금 그건 시체 따위가 뿜어낸 마력이 아니다.
허나 그런 것까지 세세히 파악할 만한 실력자는, 가르델 본인을 제외하면 이 격리 구역에 아무도 없었다.
퍼져나온 마력의 조각들이 기감과 정신을 마구 흔들어 놓은 탓에, 그리고 저곳이 회색 동이라는 이유로 시체 말고는 특별한 존재가 있으리라 생각조차 못하는 것이다.
자신이 직접 말해주더라도 믿지 못하겠지.
그리 생각한 가르델 준장은 걸음을 옮겨 회색 동에 진입했다.
나선형의 입구를 걸어 들어가니, 커다란 공동이 있고 구역을 나누어 놓은 철창에 주민들이 하나같이 쓰러져 있었다. 철창 밑에는 나이 지긋한 군인이 한 명 죽어있었다.
그도 기억하는 얼굴이었다.
가르델은 부릅뜬 그 시신의 눈을 감겨주었다. 과거 일반 장교였던 자신과 함께 사선을 넘나들었던 병사이자 전장의 벗이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죽어나가는 연방군에서 말단 병사로 시작해 수십 년간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뛰어난 능력을 증명해주는 일이었다.
시신의 링크포트에서 칩을 뽑아 소중히 챙겨넣은 가르델이 누군가의 앞에 뚜벅뚜벅 걸어가 섰다.
유명 가문의 마법사에서, 이제는 시체가 되어버린 쿼롯 페디치. 이 14호 격리 구역을 난장판으로 만든 원흉.
— ······으으.
연방군 병사들을 상대로는 어마어마한 힘을 보이던 페디치는, 마치 뱀 앞의 개구리라도 된 듯 발을 땅에 붙이고 멈춰서 있었다.
그게 가르델의 투기 때문인지, 아니면 터져 나왔던 누군가의 마력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 페디치를 앞에 둔 가르델 준장은 돌연 철창 안쪽으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나를 기억 못하시겠지요?"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가르델은 확신에 차있었다.
어떻게 잊어버리겠는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던 그 신위를.
"오랜만입니다."
파도처럼 터져나와 시체의 요기를 누르고 근방을 휩쓸었던 그 기운은, 명백히 카스트라 뷔에탕의 마력이었다.
가르델이 아직 장군이 아니던 시절.
그는 대 마피아 토벌전에서 두 눈으로 보았던 9레벨 인형사의 힘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연방과 메가콥의 고수들을 마치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며 농락했던 그 마력이 이곳에 또다시 현현해 있었다.
뷔에탕이 힘을 내보인 이유는 명확해 보였다.
십이제의 지위에서 축출된 뒤에도 로키 시티 위에 군림하고 있는, 그 괴이하고 강대한 여인은 자신의 '인형' 을 망가뜨리는 행동을 극도로 싫어했었으니.
'저자가 그 인형이로군.'
가르델의 눈에 어렵지 않게 들어온 한 사내.
중간 구역의 철창 안쪽, 한 젊은 사내가 바닥에 엎어진 채 칠공으로 피를 쏟고 있었다.
숨이 거의 넘어가기 직전으로 보였는데, 얼마나 강대한 마력이 그자를 매개로 터져나왔던지 마력의 잔향이 아직도 그 사내의 주변에 고스란히 깔려있었다.
"이 일은 고맙게 되었습니다."
가르델은 말을 끝마치고 몸을 돌렸다.
이윽고 칼날같은 그의 시선이 연방군 병사의 피로 칠갑을 하고있는 페디치에게 꽂혔다.
*
'지랄났군. 이래서야 며칠 버틸 수 있으려나?'
앞에 보이는 시야가 피처럼 붉었다.
내 모든 구멍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겨우 목숨만 붙어있다고 보는게 맞으리라.
아마 오늘 일로 수명이 수십 년은 줄었을 것이다. 뷔에탕의 저주를 유지하던 마력을 뽑아내 최대로 증폭시키느라 모든 힘과 진력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하나, 그럼에도 레반은 아직 살아있었다.
오직 마력을 부풀리기위해 에센스의 기운까지 떼어다 쓴 그는, 정신을 잃은 척하며 눈앞에서 얽히는 괴물들의 전투를 조용히 주시하고 있었다.
콰앙-! 콰앙-!
격리 구역을 제집인 양 날아다니며 전투 중인 저 좀비는 7레벨의 경계에 발을 걸친 상태로 보였다. 레반에게 에센스를 퍼주고 세상을 떠났던 그놈보다 월등히 강력한 존재였다.
사실, 감히 비교하기도 미안한 수준.
여유만만한 얼굴로 허공을 자연스레 날아 들어오던 놈을 본 레반은 차마 기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법인 차량에서 내린 그 당가의 중년인보다도 강한 기세를 펄펄 흘렸으니.
이것저것 재가며 어찌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살아 나가고 싶다면 가진 밑천을 남김없이 쏟아부어야 했다.
놈의 형태를 두 눈으로 확인하자마자 뷔에탕의 마력을 끄집어냈다. 자신이 딱 죽지 않고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최대한.
[ ······아아아. ]
이런 허접한 인간들 사이에서 뜬금없이 터져 나온 강대한 마력에 놈은 극도로 당황하며 혼란스러워했다.
덕분에 약간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 뒤.
놈을 쫓아 들어왔을 연방의 한 군인은 정말 거대한 투기를 보유한 자였는데, 그는 시체보다 레반이 내뿜은 기운에 먼저 관심을 기울였다.
뷔에탕의 마력을 일전에 겪어본 눈치였다.
[ 이 일은 고맙게 되었습니다. ]
그리고 그 우연은, 레반이 뜻하지 않았음에도 사태의 전개를 좋은 방향으로 틀어버렸다.
저 군인이 레반 자신을 뷔에탕의 꼭두각시쯤으로 오해한 것이다. 하기야 뷔에탕은 인형사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었으니. 이대로 대충 엎드려 있는다면, 어디론가 끌려가 마력의 정체를 추궁당할 일은 없을 듯했다.
— ······이빨이 부러진 암석을 손에 들어라. 부유한 자들이 네 앞에서 스러져갈 것이다.
웅얼대며 공동을 울리는 좀비 마법사의 주문.
그 마법 주문이 끝나자 원형으로 뭉친 마력들이 삽시간에 펄펄 끓어올랐다.
사아아아—
마력의 구체가 좀비 마법사의 몸을 중심으로 고속 회전했다.
구체에 닿는 모든 것이 분쇄되어 갈려 나갔다. 구역을 나누던 철창마저 마력구체에 닿자, 지우개로 지운 것마냥 사라질 정도였다.
꽤 상위의 마법이었으며 대단한 마력이었다.
최근에 좀비로 변했을 저 마법사는 강했다.
그것은 레반도 장담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저기 군복을 입고있는 괴물에게 위해를 입힐 만큼의 힘은 아니었다.
뒤늦게 견장의 별을 보고서야 알았다.
연방의 장군.
발두르에서 명망 있는 초고수들도 한 수 접어준다는 거물이었다. 연방군 투쟁의 역사를 그 등에 지고 있는 존재들이니까.
후욱-
물샐틈없던 마력구체 사이로 성큼성큼 들어간 연방의 장군이 손을 뻗었다. 화들짝 놀란 좀비 마법사의 신형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와중에 고속으로 회전하는 마력 구체들은 그대로 남겨둔 채였다.
곧, 장군의 사방을 가둔 마력구체들이 단번에 폭발하며 자욱한 마력의 안개를 만들어냈다. 그 폭발 속에선 제 아무리 강대한 장군이라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고생했네."
— !?
마력의 안개를 섬전처럼 가르고 나온 장군의 손아귀가 허공에 둥둥 떠있던 좀비 마법사의 목을 우악스레 움켜잡았다.
이윽고 그 손에 핏줄이 일어나나 싶더니, 그토록 강력한 마법을 뽐내던 좀비 마법사의 목덜미가 순두부처럼 으깨졌다.
뿌지직- 소리와 함께 피와 살이 비산했다.
시든 풀처럼 힘없이 아래로 꺾여버린 좀비의 목.
마법사 좀비는 그 좋아하는 마법 주문을 더 이상 웅얼대지도 못하고 비명에 가버렸다.
'······.'
악력으로 저 단단한 피륙과 뼈를 뭉개?
경이로운 그 무력에 레반이 감탄하는 사이, 손을 털어낸 가르델이 크게 호통쳤다.
[ 쓰러져 있지 말고 전부 기상해라! ]
가르델의 사자후에 담긴 기운이 내부에 내려앉은 뷔에탕의 마력 잔해들을 씻어내렸다.
뷔에탕의 마력에 당해 신음하던 연방군 병사들이 하나 둘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장군의 견장에 붙어있는 별을 확인한 연방군 병사들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대경실색하여 경외심 가득한 거수경례를 올렸다. 그들에게 장군은 그야말로 하늘 같은 존재였다.
이윽고, 상황이 빠르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지휘관의 사신을 수습하고 죽은 좀비 마법사의 사체를 치웠다. 그리고는 광이 날 때까지 구역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호스에서 뿜어져나온 물대포 세례에 직격당한 주민들이 있었지만, 이미 기절한 상태라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강력한 시체가 기어들어와 난동을 부렸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주변이 금세 깔끔해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렇게, 순식간에 상황을 끝내버린 가르델 준장은 미련없이 떠났고 다시는 14호 격리구역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
회색 동에 침입한 시체 사태로 인해, 하루 남았던 격리 기간이 다시 꽉찬 3일로 늘어났으나 뒤늦게 깨어난 주민들은 아무런 불만을 표하지 못했다. 저번처럼 난동을 부리는 주민들도 전혀 없었다.
억지로 뷔에탕의 마력을 뽑아 부풀리느라 속부터 박살이 난 덕에, 운공조차 쉽사리 못하는 레반에게는 큰 호재였다.
시끄러운 것보단 고요한 게 집중하기 편하니.
다만, 후폭풍이 몰고온 고통의 강도는 주변의 소란과 상관이 없었다.
'젠장.'
육체의 고통이 어찌나 심각한지 심마의 벽을 똑똑 두들길 정도였다. 마음 같아선 수혈을 짚어 강제로 잠에 빠지고 싶었다.
심지어 아직 마나액의 후유증이 남아있던 상태에서 뷔에탕의 마력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증폭시키는 미친짓을 벌였으니, 며칠간 정양을 했던 노력마저 수포로 돌아가버렸다. 이제 몸에는 일말의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극성의 무선대지신공이 육체를 떠나려는 정신을 힘겹게 붙잡고 있었 뿐이었다.
고통 속에서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그 사이 연방군이 약속했던 3일이 지나자, 그는 드디어 격리 구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연방군의 수송 트럭이 부지런히 주민들을 수송하며 정크타운 입구에 던져놓고 사라졌다. 던져놓고 간 타운 주민들중에는 레반과 그 무리도 있었다.
레반은 타운 입구에 내리자마자 어딘가로 향했다.
타운 입구 주변.
어느 인적 드문곳에 이르러 땅을 깊숙이 파니, 하얀 연기가 새어나오는 무언가의 카트리지가 불쑥 튀어나왔다.
왕초삼과 밴스가 의아해하는 가운데, 눈을 동그랗게 뜬 레나만이 그 정체를 알아챘다.
반 바이오 나노로봇 시리즈의 프로토타입.
"레반? 이, 이거 설마 우리······?"
"그래, 루벤카한테 잘 좀 설명해줘."
"으, 응?"
레반은 밴스와 레나를 륭의 사무소로 급히 보낸 뒤, 왕초삼의 도움을 받아 택시를 잡았다.
그의 몸은 지금 한계에 봉착해 있었다.
육신이 지금보다 더 망가져 버리기 전에 개방에 빈객으로 있다던 그 의사를 찾아가야 했다.
#31화. 화타와 관우
#31화.
덜컹-
길바닥의 요철을 밟는 소리.
저급 택시는 부지런히 이동하고 있었다.
나는 덜컹대는 승차감을 애써 무시하며 사색에 잠겼다.
격리 시설에 갇혀있던 일주일 가량은, 한바탕 긴 꿈을 꾼 것만 같았다.
당가의 임원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하필 그 격리 구역에 수용되질 않나, 거의 7레벨에 가까운 상위 마법사가 감염 사실을 숨기고 있다가 돌변해 난동을 피우질 않나, 나중에는 연방의 장군이라는 거물까지 등장했다.
나에게는 아직 멀고도 먼 존재들.
연방군의 14호 격리 구역에서 벌어진 사태는 지금 백만방도같은 넷 사이트에서 알음알음 퍼져나가고 있었다. 다행인건 그 장군 말고는 뷔에탕의 마력을 알아본 자가 없는지, 뷔에탕의 마력이나 기운에 관한 얘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
다행히도 후환은 없을 듯했다.
그리고 그 좀비 마법사는 쿼롯 가문 출신이라던가? 후에 알아보니 우습게도 가문의 마법칩을 판매하겠다며 반 바이오에 기별을 넣었던 그 쿼롯 그룹이 맞았다.
쿼롯의 마법사가 좀비가 되어 선보인 마법이 대단하여 쿼롯 가문의 마법칩에 프리미엄이 붙어 불티나게 팔린다든가 하는 우스갯소리가 백만방도를 통해 뜬소문으로 나돌았다.
그러나 쿼롯 그룹에서 그 꼴을 두고보지 못하고 위력이라도 행사하는 모양인지, 좀비 마법사 사건은 넷에서 그리 큰 화젯거리가 되지 못했다. 당장 쿼롯에서 낸 기업 홍보영상이 백만방도 포털의 메인을 장식하고 있었다.
[ 쿼롯 — 320년 완성차 역사의 정수를 담았다. 올 시즌의 대미를 장식할 3,200마력 호화 스포츠카 출시! 지상 최고 속도 685km/h! 폭발적인 퍼포먼스와 거친 드라이빙을 경험하고 싶은 오너들에게 극상의 파트너가 되어드립니다. 스피드 리미트 해제시 공중 드라이브모드 활성화가 가능한 투 트랙 모델로써, 일반형과 컨버터블 쿠페형 200대 한정······ ]
화젯거리가 되지 못했던 이유.
포털 전면에 광고를 워낙 많이 걸어주는 작자들이다 보니, 고객 관리를 해야하는 개방이 광고주 보호에 들어간 듯싶었다. 왕초삼도 아마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이미 저승으로 가버린 놈의 묘를 파헤쳐 뭐하겠는가. 시체가 되는건 쿼롯의 마법사 한 놈으로 충분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저 언덕만 넘으면 돼."
연방 출신의 솜씨좋은 사이버 닥터가 있다는 곳은 정크타운에서 꽤 멀리 떨어진 소도시였다.
발두르 시티 남쪽, 웨스트 정크타운에서 차량으로 30분 거리에 있는 '다그'
정크타운같은 외곽 지대에 비하면 환경이 나름 괜찮은, 시궁쥐 튀김이나 칼로리 스틱이 주식인 슬럼가보다는 조금 더 발전한 동네.
노동자의 비율이 높아 하층민 거주 구역쯤은 되는 곳이다.
" 다그 888 스트리트 "
888 스트리트에 이르러, 왕초삼은 황금색 난쟁이 벽화가 그려져 있는 대형 플라자 건물을 찾고 있었다.
곧 택시의 차창 밖으로 커다랗고 우스꽝스러운 황금색 난쟁이 벽화가 눈에 띄었다. 어디에 있던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아주 개똥같은 디자인이다.
끼이익-
반사회적 페인팅 벽화가 즐비한 구획.
택시에서 내리자 길바닥에서 스프레이 락카통을 흔들던 동네 양아치들이 우리를 흘깃 쳐다본다. 왕초삼과 나는 흘깃대는 양아치들을 무심히 지나쳐 플라자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 이거 진짜 신기한 건데 좀 보고 가세요!
- 바카라 좋아해? 블랙잭은 어때?
상가와 판매점들의 호객 행위를 무시한 채 플라자의 가장 지하층으로 직행했다.
" 다그닥 다그닥 "
"바로 여기다. 다그닥 다그닥."
겉보기엔 락카스프레이를 판매하는 잡소매점.
내가 그 소매점 안쪽으로 발을 들이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의 페인트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소매점에는 무인 판매기와 휴머노이드 점원이 하나 있었다.
- 어떤 물건을 찾으세요?
"저건 그냥 무시하고 따라와. 읏차!"
무인 판매기의 뒤쪽으로 걸음을 옮긴 왕초삼이 거대한 자판기를 가볍게 들어 올리자, 깊은 지하로 통하는 듯한 좁은 계단이 드러났다.
그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전당포처럼 두꺼운 강철문으로 막혀있는 입구가 눈에 들어온다. 안쪽은 밖에서 볼 수 없게 철저히 막아두었다.
끼이이익-
"흡!"
왕초삼이 통짜 강철문을 밀어 열자, 또 끝없는 계단이었다.
어두운 곳에서 미끄러져 다치지 말라고 곳곳에 친절하게 호롱불까지 친절하게 켜놓은 괴상한 계단.
호롱불은 정말로 많았다.
못해도 수 천개는 되는 듯했다.
아픈 몸을 이끌고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가자, 좁고 어둡던 계단의 풍경이 점점 바뀌며 계속 넓어졌다. 십 분쯤 내려갔을까? 넓어지고 넓어진 계단은 어느새 사람 수십이 들어가고도 남을 공간까지 넓어졌다.
그런데도 계단은 끝이 보이질 않았다.
역시, 무언가 이상했다.
'진법이군.'
그 사이버 닥터라는 자는 평범한 의사가 아닌 모양이다.
제 쪽박 채우기도 벅차다며 나누어주지 않는 거지들의 개방이 빈객으로 모시고 있는 것만 해도 그랬다. 애초에 개방 거지들이 무슨 빈객을 받는단 말인가?
안 그래도 쓰러지기 직전인 내 표정이 한껏 구겨지자, 옆에서 괜히 뜨끔한 왕초삼놈이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게 참, 그 선생이 하도 괴짜라서 나도 어쩔 수가 없구만. 이렇게 가다보면 언젠가 나오지 않겠어?"
"초삼아, 너는 힘이 아주 넘치는구나."
"하하! 그런데 말이야."
곧, 집요한 눈빛으로 바뀐 왕초삼놈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당신은 누군가의 인격 메모리칩이라도 우연히 얻은 거야? 나는 그게 참 궁금해."
인격 메모리칩.
살아가며 얻은 기억과 심득을 메모리칩에 모두 저장해 후인들에게 물려주는 수단.
일신의 심득과 기억을 포함한 전인의 거의 모든 것이 담겨있으며, 그 칩을 받아 얼마나 체득할 수 있는지는 후인의 수준에 달렸다.
과거 강대한 네임드 시체 '가륵' 에게 살해당한 9레벨 연방 집행관 '모리 무라타'의 포트에서 뽑은 인격 메모리칩을 누구에게 물려주느냐로 한바탕 정쟁(政爭)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 그가 후인도 정하지 못하고 급작스레 죽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살아온 인생의 모든 것을 물려준다고 봐도 이상하지 않다. 그 기억들이 얼마나 강렬한지, 때에 따라 성격이나 성정마저 그대로 옮겨가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연방의 장군과 집행관, 유력 가문들의 장문인이나 가주들은 그 인격 메모리칩을 자신의 유산삼아 넘겨주기도 한다.
다만 꺼리는 곳도 분명히 있다.
일단 무언가를 담는 매개가 '메모리 칩' 인만큼, 넷 러너들이 해킹 공격을 시도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기업이 이렇게 발전한 세상에서 아직도 종이로 서류를 작성해 보관하는 이유였다.
아무튼.
전인의 기억과 무공, 마법, 심득등을 인격 메모리칩이라는 형태로 전승받는 연방의 강자들이 현재에도 있다. 어찌보면 영생을 살아가는 좀비들에 대항할 수 있는 연방의 대응 수단인 셈이다.
물론 나는 아니지만.
"초삼아, 그런거 가지고 있으면 나부터 줘라. 바로 대가리 열고 꽂게."
"하하하! 그런 귀물이 내 손에 있을 리가 있나."
"흐흐 웃던 놈이 오늘은 하하하 웃는구나."
"···그야 기분이 좋아 그랬다."
뭐, 인격 메모리칩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내공이나 마력은 그리 대단하지 않은데 쓸데없을 정도로 많은 걸 알고 있는데다 뷔에탕의 마력을 꺼내어 증폭까지 마음껏 해댔으니.
잠시 말을 쉬던 왕초삼은, 흐뭇하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반 바이오 컴퍼니같은 중견기업에서 이런 세기의 천재들이 둘이나 나왔구만."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왕초삼은 계속 말을 이었다.
"반 루벤카는 천재니까 그렇다 치고···아니, 그 여인도 인격칩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는 거잖아. 이건 솔직히 총타 보고감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리고 또······."
아.
이제 슬슬 머리가 어지러웠다.
장난을 이 이상 받아줄 수는 없었다.
이쯤 했으면 나는 손님으로써의 도리를 충실히 이행했다고본다.
"머리 울리니까 이제 장난은 그만합시다."
"응?"
"선생님, 제 초삼이를 돌려주세요. 모자라지만 착한 녀석입니다. 아니면 저도 좀 치료해주시든가요."
"그게 무슨···."
후욱-
내가 영문을 모르는 얼굴을 하고있는 왕초삼을 주먹으로 치자, 왕초삼이 수증기처럼 흩어짐과 동시에 계단이 거꾸로 뒤집어졌다.
곧이어 방금 전의 계단과는 아예 딴판인 장소가 눈앞에 신기루처럼 생겨났다. 이번엔 호롱불이 켜진 다락방 같은 곳이었는데, 거기에는 향이 좋은 나무 문이 하나 있었다.
이윽고.
하늘에서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 네놈같이 의뭉스러운 놈은 안 받는다. 살고 싶으면 저 문을 열고 나가라. ]
음, 평범한 사이버 닥터가 절대 아닌게 맞군.
나는 더 들을것도 없이 다락방에서 시선을 떼곤 다시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택했다. 동시에 계단을 밝히는 수많은 호롱불에 시선을 가져갔다.
챙그랑!
마침 눈에 드는 호롱불 등잔 하나를 그대로 떼어 바닥에 던지니, 목소리가 별짓을 다 한다는듯 말했다.
[ 불을 끄면 그 어둡고 먼 길을 어찌 돌아가게? 조금이라도 힘을 아껴야지. ]
하지만 나는 그 뒤로도 몇 개의 호롱불을 신중히 골라 깨버렸다. 수천 개는 있을 법한 호롱불중에 미세한 기운이 묻어있는 특별한 호롱불이 몇 개씩 숨어있었다.
아마도 이 진법의 축이 되는 물건이리라.
'내가 전생에 수도승들이랑 빌어먹을 진법가 새끼들 덕에 얼마나 고생했는데.'
진법의 축을 부수면 진이 알아서 무너진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상단전이 열린 뒤부터는 세계가 나와 한층 더 가까워졌으니, 작정하고 펼친 고도의 진법이 아닌 이상에야 내 기감을 완벽히 속일 수는 없었다.
챙그랑! 챙그랑!
나는 기운이 담긴 호롱불들을 일곱 개나 발견해 집어던졌다.
'머리아픈 그 페인트 냄새부터 시작이었나?'
이미 계단에 들어오기 전부터 저자의 진법 속이었을 거다. 플라자 락카 소매점의 자판기부터 해서 이유 없이 놓여진 물건은 없었을 테고.
오장육부가 찢어져 곧 승천할 노인마냥 정양을 하던 왕초삼이 그 커다란 자판기를 번쩍 드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었다.
그런데도 내가 저자에게 장단을 맞춰준 것은, 날 눕혀놓고 시술할 의사에게 무작정 시비를 걸어 좋을건 없었기 때문이다. 내 목숨줄을 쥘 인간이니까.
"자, 마지막입니다. 맞죠?"
계단을 계속 오르내리던 내가 드디어 마지막 축이 되는 여덟 번째 호롱불을 찾아 던지려고 할 때였다.
[ 다 죽어가는 놈이 고집은 세네. ]
화악—
더 이상의 실랑이 없이 진법이 걷혔다.
계단과 다락방의 광경이 하늘로 말려 올라가며 커튼처럼 걷히자, 차량 정비소와 의약 연구실을 합쳐놓은 듯한 진짜 내부 공간이 펼쳐졌다.
테크 장비가 가득한 사이버 닥터의 수술실.
치과의 수술의자와 비슷한 사이버웨어 조립대가 중간에 자리잡았고, 그 주위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각종 디스플레이들과 해체 장비들이 서늘한 냉기를 뽐낸다.
와삭-
"어디서 어깨너머로 진법좀 배운 모양이구나."
와삭-
의자에 앉아있는 한 사내가 먹다 남은 부리또를 베어 물며 말했다.
진법의 하늘에서 울렸던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그는 긴 장발을 하고 하얀 가운을 입은 사내였는데, 얼굴에 긴장감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먼저 여기 데려왔을 왕초삼놈은 동물 마취제라도 맞았는지 이미 침상에 누워 깊은 잠에 빠져있는 상태였다.
"이놈이 어찌나 지랄을 하던지. 흐흐! 아이고 안돼요~! 저 인간이 없으면 나도 죽는단 말입니다! 하고. 아주 숨겨둔 연인인 줄 알았다. 그래서 콱 재워버렸어 그냥."
사내는 긴 머리를 찰랑이며 왕초삼의 말투를 따라 했다. 그의 말투는 가볍고 경박했으나, 느껴지는 법력은 묘할 정도로 심후했다. 굳이 그 사실이 아니더라도 방안에 또 무슨 짓을 해두었을지 모르기에 허투루 보아선 안됐다.
"꼭두각시답게 네 등판에 그림 그린 괴물한테 가서 치료해달라고 하지. 뭐 주워먹겠다고 여기까지 찾아왔어?"
"······."
사내의 질문에도 나는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입술을 한번 빼쭉 내민 그가 왕초삼이 누워있는 침상을 탕! 치며 말했다.
"이 기묘한 놈아. 내가 보니까 이 초삼이놈 코를 제대로 꿰두었던데? 그런데 이놈 이거 무식해 보여도 풍령개 제자야. 너무 함부로 다뤘어."
풍령개(風鈴丐).
개방에서 호방하기로 이름난 팔결의 원로다. 놀랍게도 저 왕초삼놈은 용두방주와도 맞먹는다는 그 노고수의 제자인 모양이었다. 어쩐지 비싼 건틀릿을 가지고 있다 했지.
"알아 들었냐?"
탁!
그리 말하며 내 뒤에서 귀신처럼 나타난 그가 손에 들고있던 카트리지를 빼앗아갔다. 잠시 자기 물건을 맡겨둔 사람처럼 너무도 당당했다. 곧바로 가방을 열어본 그는 꽤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호, 보면 볼수록 재미있는 놈일세. 몸은 죽어가는데 확실히 믿는 구석은 있었구만?"
텁!
돌연, 내 손목을 잡은 그가 자신의 기를 흘려보냈다.
하지만 무인들의 내기와는 근본이 조금 다른 것이었다. 이를테면 중원 시절 새외에 궁을 짓고 평생을 금욕하며 살던 수도승들의 법력(法力)과 비슷했다.
법력이 심후하고 진법에 대한 이해가 높으며 각종 의술까지 뛰어난 사내라···그럼 연방에서 일했던 사이버 닥터라는 왕초삼의 말은 거짓일 확률이 높을거다.
저들은 어디에 적을 두고 일하는 자들이 아니니까.
"소림의 중들보다 속세에 관심이 없다는 진주언가의 수도자(修道者)가 무슨 대단한 빚을 졌길래 개방의 빈객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아 시끄럽다. 지금 집중하고 있잖아. 인생이 다 그런거지 뭘 묻고 있어."
그는 '진주언가' 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짜증이 잔뜩 난 얼굴로 말했다. 언가의 수도자들은 가문 밖으로 나오지 않고 심산유곡에 틀어박혀 평생을 수련만 하다 떠나는 유령 같은 자들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궁금함이 일었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일족이기에 심기를 더 건드리기보다는 조용히 입을 닫고 흘러오는 법력에 몸을 맡기는게 나았다.
그때, 법력을 흘리던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놈 이거 뭐 이래. 마법사야 아니면 무인이야? 게다가 그리 강해 보이지도 않는데 임독양맥은 또 어찌 뚫었냐? 진짜 별종이로구만."
이윽고.
진맥을 마친 그는 별 대수롭지 않게 의자에 털썩 앉더니, 내 얼굴을 힐긋 바라보며 말했다.
"최근에 진력을 무리하게 끌어다 사용했지? 그 지랄을 몇 번이나 한 탓인지 '그릇' 하나는 참 넓구나. 본의 아니게 고행(苦行)을 한 게지. 이번 기회에 몸을 회복하면 능히 전화위복할 수 있겠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나는 그제서야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그런데 그런 내 얼굴을 보고선 코웃음을 친 사내는 카트리지 통을 집어 자신의 책상에 소중히 갖다 놓더니, 팔짱을 끼며 조소했다.
"하지만 마음이 동하질 않는구나. 내가 왜 네놈 좋은 일을 해야하지? 네가 보물처럼 들고 있던 저것은 이미 내 수중에 떨어졌는데."
내가 즉시 답했다.
"풍령개의 제자인 왕초삼을 살려드리지요."
"푸핫, 웃기는 놈이군. 설마 내가 저 정도 마법도 못 풀 사람으로 보이나? 같잖은 저주 마법좀 안다고 감히 누구 앞에서 유세야 유세가? 건방 떨지마라 이 놈아."
하찮다는 듯이 마음껏 비웃는 언가의 사내.
그를 잠시 뚫어져라 쳐다보던 나는, 누워있는 왕초삼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가서 해봐요. 그럼."
"그러마. 하라면 못할줄 알았냐?"
그는 곧장 일어나 자신만만하게 누워있는 왕초삼의 머리에 손을 댔다. 역시나 심후한 법력이 사내의 몸에서 흘러나오며 왕초삼의 몸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러길 십 분여.
왕초삼은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채 시신처럼 누워있었다.
"······."
자존심이 크게 상한듯, 몇번 더 법력을 쏟아부은 그가 마지못해 등을 돌렸다.
"이야, 이거 잘 안되네?"
"그렇죠?"
당연했다.
내가 가진 마력의 경지가 낮은거지, 저주 마법의 수준 자체가 낮은게 아니니까.
저건 제국의 마법사들이 첩자에게 사용하던 저주 마법이다. 꽤 높은 마법적 지식을 요구하며, 아무리 심후한 법력을 가진 사람이래도 파훼식을 모르면 곧장 풀 수가 없다.
뭐, 저 언가의 사내가 며칠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풀어본다면 또 모르겠지만···.
"처음에 타운에서 사흘 버티고, 연방군에 끌려가 일주일을 더 갇혀 있는 동안 마력 보충을 못 해줬습니다. 원래 일주일이 한계였던 저주인데, 이제 저놈이 얼마나 더 버티려나 모르겠습니다."
"······."
"풍녕 뭐시기 제자인데, 저놈 저거 죽어도 상관없겠어요? 그럼 저 진짜 갈까요?"
지금 한 말에 거짓은 하나도 없었다.
내가 몸을 회복한 뒤 마력을 보충해주지 못하면 왕초삼은 정말로 죽는다. 어쩌면 벌써 심장이 느려지고 있을 수도 있다.
결국 언가의 사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그래, 내가졌다. 그런데 네가 가져온 저걸 몸에 집어 넣으려면 살과 근육을 갈라야 한다. 고통이 극심할 거라 마취를 해야하는데, 네 몸은 죽기 직전의 시한부와도 다름없어서 마취약이 제대로 듣지도 않을 테지."
"그럼 그냥 바로 합시다."
"?"
망설임은 없었다.
나는 겉옷을 부욱 찢어 재갈처럼 입에 꽉 물었다.
그런 내 모습을 말없이 보고있던 언가의 사내는, 더없이 황당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가 무슨 관우냐?"
#32화. 한바탕 해야 하겠군요
#32화.
쓱. 쓰윽.
칼이 살갗을 가르는 소리.
나는 차가운 시술대 위에 누워있었다.
원래 나노 로봇 시술이란, 시티의 유명한 대형병원에서 셋 이상의 시술 전문의가 몇 시간 동안 달라붙어야 할 정도로 복잡한 고난도의 시술로 알려져 있는데······.
스걱.
이 언가의 사내는 그런 건 모르겠다는 듯, 길쭉한 칼을 허벅지에 대더니 피부와 근육을 슥슥 들어내고 뭔가를 그 안에 집어넣었다.
그야말로 생살을 썰어내는 고통이었다.
치직-
심지어 가끔 전류같은 것을 흘려 넣기도 했는데 내 머리카락은 시술을 받는 내내 쭈뼛 선채 내려올 기미가 없었다. 살 타는 내음이 시술대 위를 풍성히 채우고 있었다.
이거 내가 죽기 전에는 끝나는 거 맞나?
으드득.
범람하는 격통에 꽉 물고 있던 옷가지는 헌 걸레짝이 되어 끊어진지 오래였다.
이를 부러져라 악문 내가 겨우 입을 열었다.
"언 선생, 이거 언제 끝납니까?"
"어련히 끝날테니 귀찮게 묻지마."
자신을 '언 선생' 이라고 부르라던 이 진주언가의 젊은 수도자는, 실로 전형적인 불친절 의사였다.
나는 아득해지려는 정신줄을 기합으로 붙잡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거기서 고통을 참다가 부러진 치아 조각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혹시 기절하면 그사이에 시술을 재빨리 끝낼 방도가 있습니까?"
"없다. 말 걸지 마라."
"······."
이 격통을 어찌 참아야 할지 도저히 감이 오질 않았다. 관우를 여기에다 데려다 놓았어도 나만큼 버티지는 못할것 같았다.
사실 그놈은 살만 좀 도려내서 뼈만 설설 깎은 것 아니던가?
한순간에 그 대단한 관우를 그놈 따위로 격하시킨 내가 뭐라 말을 더 하려 할 때였다.
서걱. 투둑-
어디서 힘줄같은 것이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분명히 눈을 감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언 선생의 당황한 표정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자르면 안 될 곳에 칼을 댄것이 분명했다.
"아이, 이거 조졌네."
푸쉬익-
곧 피분수가 사방으로 솟구쳤다.
나는 관운장 못지않은 전생자의 끈질긴 정신력과 호기로움으로 이 고문보다 더한 시술을 꾸역꾸역 견디고 있었으나, 슬프게도 언 선생은 화타같은 고금제일의 신의가 아니었다.
"아 몰라. 네놈이 알아서 잘 참아봐라."
"······."
나는 이후로도 그 끔찍한 상황을 몇 시간이나 더 버텨내야만 했고······
우여곡절 끝에 언 선생의 시술이 마무리되었을 때, 내 치아는 단 한 개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야, 용케도 안 죽었네."
언 선생은 의료용 나노로봇 시술을 끝내자마자 청량한 향이 감도는 갈빛 약초를 꺼내더니 그것으로 가루를 내어 호롱불에 태웠다.
그러자 요즘 세상에도 저런 약초가 있나? 싶은 생각과 함께 잠이 솔솔 찾아왔고, 어느 순간 눈을 떠보니 자그마치 하루가 지나있었다.
하루가 일 분처럼 쏜살같이 지나갔다.
'이건 진법의 영향이군.'
그런데 신기한 것은, 잠에 들기 전까지만 해도 산산히 조각나 버릴것만 같던 육체의 고통이 너끈히 견딜만 해졌다. 약간의 오한이 들고 으슬으슬한 것 말고는 별 통증이 없었다.
나는 신기한 마음에 곧장 일어나 몸을 내려다봤는데, 내 전신은 깜짝 놀랄 정도로 멀쩡했다.
어제 칼을 대어 활짝 열었던 살갗들은 모두 흔적조차 없이 아물어 있었으며, 외상의 흉터 하나 남지 않았다.
이것은 진법이 아니라 프로토타입 나노 로봇의 효과였다.
'이 정도였나?'
반 루벤카가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고 다닌 이유가 있었군.
그야말로 역작이라 불릴만했다. 당가가 나노해독제보다 이 기술을 빼앗기 위해 반 바이오를 무너뜨렸대도 단숨에 납득했을 것이다.
그만큼 효과가 뛰어났다. 신체 말단이 잘려 나가도 술집에서 싸웠던 좀비놈처럼 재생시켜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닌지 문득 궁금해질 정도였다.
단 하루 만에 죽음 직전의 시한부나 다름없던 육체를 이만큼 회복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얘기인가.
몸속에 진짜 화타가 들어온 모양이다.
아마 시중에 팔렸다면 전무후무한 수익이 났을 것이다. 반 바이오 컴퍼니가 대기업의 반열에 올라설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것은 영영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회사는 불타 사라져버린지 오래였으니.
쿨럭-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때, 허공에서 연기처럼 나타난 언 선생이 다짜고짜 뭔갈 내밀었다. 동그랗고 누리끼리한 단약이었다.
그는 터져나오는 기침을 가리며 말했다.
"받아서 꿀떡 삼켜라."
"이게 뭡니까?"
"기환단이다. 빨리 처먹고 운공하든 해서 저기 저놈부터 살려야지. 어제 세상을 뜰 운명이었는데, 내 법력으로 숨만 붙여 놓았다."
아.
너무 놀라 잠시 잊고 있었군.
고개를 돌리자 그의 말대로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 왕초삼이 보였다. 느림의 미학이라는 이름의 악독한 마법은, 놈의 멱살을 틀어쥐고 삼도천 앞까지 끌고 간 참이었다.
내가 곧바로 누리끼리한 단약을 삼키자, 화한 기운이 가슴께를 문지르다 전신 세맥으로 흩어졌다.
조용히 가부좌를 튼 채 운공하자, 기운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움직이며 곳곳을 누비다가 단전과 회로에 사뿐히 자리 잡았다.
이윽고 충만한 내기가 두 곳에서 동시에 솟구치며 전신을 휘돌고 사라졌다. 나중에는 상쾌한 기운과 함께 여분의 내력이 몸에 남았는데, 뷔에탕의 마력을 사용한 후폭풍과 중첩된 후유증이 잠시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정말 귀물이군요."
"귀물은 무슨, 그저 흔한 단약일 뿐이다."
"제가 가져온 나노로봇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이놈아, 장벽 밖으로 던져버리기 전에 개소리 집어치우고 저놈부터 살려라."
"그럴까요?"
내가 왕초삼의 문신에 마력을 주입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고르게 되었다. 맥은 규칙적이었으며 전보다 얼굴의 혈색이 확실히 돌았다.
그러나 언 선생은 만족 못한 얼굴로 말했다.
"언 발에 오줌 누냐? 빨리 풀어줘라."
기세를 보아하니 마법을 완벽히 풀지 않는 이상은 그냥 보내주지 않을듯 했다.
이용 가치가 상당한 왕초삼이었으나, 이미 원하는 것을 얻고 목숨까지 구했으니 이런 거지쯤은 사내답게 놓아주기로 했다.
내가 시간을 들여 저주 마법을 풀어버리자, 언 선생은 그제야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그리곤 대뜸 나를 붙잡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다.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는데 썩 꺼지라고 할 때는 언제고? 아예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갑작스러운 관심이 조금 부담스러웠으나 언 선생같은 정크타운 바깥의 사람과 대화할 기회가 흔치 않아 도리어 괜찮다고도 생각했다.
게다가 내 목숨을 다시 붙여준 은인 아니던가.
그리고 또 대화를 나누어 보니, 언 선생은 괴짜일지언정 악인은 아니었다. 애시당초 평범한 사람들과는 관심사 자체가 달랐다. 진주언가의 수도자는 다 저러나 싶었지만, 비교적 젊은 나이의 수도자이니 유별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대화 중에 언 선생이 물었다.
"그래서, 당가로부터 도망치고 있다고?"
"예, 열심히 노력하는 중입니다."
"당가의 위세가 닿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겠구만. 그럼 역시 발할라인가?"
"아무래도 그렇죠. 선생께서 힘 좀 보태주실래요?"
"푸핫, 너같은 무지렁이 하나 살리자고 당가랑 척을 지라고? 되었다. 네 놈은 어차피 당가가 아니라도 커다란 짐덩이를 하나 더 달고 있잖냐? 독해 죽겠다 아주."
언 선생이 코를 막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카스트라 뷔에탕의 마력은 수도자인 그가 보아도 흉악한 듯했다. 그 얘기를 듣던 내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선생, 만약 이 마법의 파훼법을 알려드린—"
"네 마력으로 꼬아놓은 것도 못 풀었는데 그리 흉악한 걸 건드려볼 수나 있겠냐. 어불성설이다."
언 선생은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자신을 낮추며 거절 의사를 확실히 밝혔다. 사실 나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기에 고개를 주억이고는 맥이 끊어지는 상황을 물 흐르듯이 넘기려했다.
"그러니까, 그거는 직접 가는거 말고는 답 없어. 가서 담판을 짓든가 아니면 뒈지든가 해. 알겠냐?"
그러나, 이미 킬킬대며 재수 없게 웃는중인 언 선생이 눈에 들어왔다. 방금 전과는 달리 또 금세 바뀌어버린 태도에 내가 입을 닫았다. 마치 다른 사람이 내 앞에 있는 것 같았다.
휘익-
돌연 그가 손을 휘젓자 허공에서 웬 부리또가 생겨났다. 그는 김이 펄펄 나는 고기 부리또를 우적우적 씹어먹으며 입을 열었다.
"근데 너는 내가 쭉 보니까 오래는 못살 운명이다. 언젠가 또 힘을 무리하게 끌어다 쓰고 죽을 테지. 대충 몸이 회복되면 여기서 얼른 나가라. 썩 꺼져."
그리고 그게 언 선생의 마지막 말이었다.
- 으하하!
옆에서 보기에 언 선생은 수시로 마음이 오락가락하는 사람이라, 가만히 명상을 하다가도 갑자기 박장대소하며 웃어댔다. 또 왕초삼을 한참 치료하다가도 한동안 집중해 책을 읽는 등 종잡을 수 없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죽은듯이 누워있는 왕초삼의 혈자리에 가끔 시침을 했으며, 하루에 한 번은 이곳을 찾아온 의문의 중년인들을 만나 바둑이나 장기를 두기도 했다. 모두 나이가 지긋한 개방도들이었는데, 언 선생과는 오랜 구면인듯 싶었다.
나는 그런 언 선생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몸을 추스르고 운공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노로봇 덕에 몸 상태가 최상이었으니, 후폭풍도 오래 가지 않아 잦아들었다.
그런데 축기를 하는 과정에서 이전과는 달라진 점을 발견했다. 단전에 토납되는 내기의 양이 거의 두 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더니.
이번 나노로봇 시술에 더해 뷔에탕의 후폭풍을 회복하는동안 격차가 크게 벌어졌던 심신이 조화를 이루며 나약했던 시종의 육체가 무인의 것이라 할만큼 일정 반열에 오른듯 싶었다.
이제 툭 쳐도 깨져버릴 것 같던 시종의 육체는 없다.
나는 이틀간 충분히 정양을 한 뒤, 언 선생에게 절을 한 번 올리고는 거처를 빠져나왔다. 밖으로 발을 내딛자 진법이 걷히며 플라자 상인들의 호객 소리가 들려왔다.
언 선생은 내가 나가는 순간에도 그놈의 부리또를 우적대고 있었다.
*
그렇게 정크타운으로 돌아온 나는, 먼저 삼호문주 등평위에게 연락을 넣었다.
[ 등평위, 아직 살아있나? ]
[ 아니 대협! 대체 그간 뭐 하시다가 이제야 연락을 주십니까? 꼼짝없이 죽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
모래 폭풍과 좀비들이 정크타운에 상륙해 아주 전체적으로 박살을 내버렸기 때문에, 삼호문이 있던 구역도 그 재앙을 피해가진 못했다. 천운으로 사망자는 없다지만, 기루와 도박장이 몇 개나 무너졌다며 등평위가 우는소리를 했다.
그래도 몇 번 죽을뻔한 나보다야 사정이 낫겠지. 나는 징징거리는 중년의 무인을 가볍게 무시했다.
[ 시끄럽고, 내가 있던 17번가 술집에 문도 몇 명 보내서 정리해라. 쓸만한 것들은 따로 빼서 크레딧으로 바꿔오고. ]
[ 알겠습니다. 대협. ]
그리고, 같은 날 오후 즈음.
나는 곧바로 륭을 만나서 바 테이블에 나란히 앉았다. 휴머노이드 바텐더가 술이나 음료를 권유했으나, 그는 단칼에 거절했다.
"시원한 콜라 한 잔."
- 네, 알겠습니다.
내가 콜라를 들이켜는 동안, 륭은 자연스레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진한 담배 연기가 한 차례 퍼져나간 뒤 그가 입을 열었다.
"그때 구해다준 에센스가 경지의 상승에 많은 도움이 되었나 봅니다."
그것이 륭의 느닷없는 첫 마디였다.
나는 륭이 폭풍이 끝나면 사무소로 찾아와 달라던 이유가 궁금했지, 고작 시시한 칭찬과 생색이나 들으려 온 것은 아니었다.
"그거야 내가 손해 보는 거래였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갑시다."
"······."
내 말에 륭의 눈이 어느덧 깊게 가라앉았다.
사무 보조인 클로에가 옆에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 조금 더 어둡고 침침했다.
치익-
그는 벌써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이곤, 날 만나고 싶어했던 이유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라네치아 패밀리의 라네치아가 돈을 내고 피신한 주민들을 시체의 먹잇감으로 던져줬습니다. 거기서 피냄새가 퍼지는 바람에 죽지 않아도 될 타운의 주민들까지 죽었습니다. 그날 밤, 정크타운이 유독 큰 피해를 보았던 원인입니다."
라네치아.
좀비가 몰려온 게 그 새끼들 때문이었나.
하기야 이 타운에 쓰레기들이 어디 한 둘인가. 며칠 전만 해도 인신매매를 하는 놈들이 깽판치며 돌아다녔던 이 슬럼가에서 말이다
륭은 연기를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
"감염된 주민들은 제가 직접 고통없이 보내주었습니다. 기백 명은 되었을 겁니다. 그들을 마주했을 때는, 이미 시체로 변모하는 중이었습니다.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뒤는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되었을 말.
그는 은연중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뭐, 나도 2회차 생의 초반에는 륭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었다. 그랬기에 그를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륭은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마음 같아서는 그자를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지만, 라네치아와 내 사무소는 보호 계약서로 묶여있습니다. 그러니 내 손으로 직접 계약의 당사자를 죽였다간 앞으로 아무도 내게 의뢰하지 않을 겁니다."
담배를 몇 번 빨아들인 륭이 뒷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다. 초콜릿처럼 생긴 구형 메모리 칩이었다.
"놈들의 만행이 담겨있는 영상입니다. 직접 보면 이해하기 편할 겁니다."
어차피 뻔한 장면이 들어있을 것이다. 좀비한테 사람을 먹이로 던져주는 등의 고어 영상같은 것 말이다.
내가 괜찮다는 얼굴로 손을 젓자, 칩을 다시 회수해 넣은 륭이 입을 열었다.
"레반씨가 라네치아와 간부들을 죽여주십시오. 그렇게 강하진 않으니 눈먼 총만 조심한다면 죽이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을겁니다. 대신, 라네치아 패밀리가 공격을 당하면 나는 계약에 따라 움직일 겁니다. 못해도 한 시간 내로 도착합니다."
"도착하면 나랑 한바탕 해야 하겠군요."
"예, 제가 레반씨를 공격해야 합니다. 많이는 바라지 않겠습니다. 최소한 목숨 걸고 싸우는 척은 해야 하니, 딱 스무 합만 버텨주시면 제가 이번에 얻은 에센스를 모두 내어드리겠습니다. 전투중에 예기치 않게 몸이 상하시더라도 충분히 감수할 만한 양일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얘기로군.
내 명분을 위해서 싸워달라.
조금만 버텨주면 맷값을 내어주겠다.
"합리적이네요."
륭의 제안은 매우 합리적이었다.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있는듯 했다.
'마침 이사할 곳을 찾아보려 했는데.'
집단중 한 곳인 라네치아는 정크타운에 있는 한은 언젠간 마주치게 될 놈들이었는데, 멍석을 깔아준다면 나로서도 환영할만한 일이다.
더해서 놈들이 운영하는 구역의 돈줄을 고스란히 손에 쥘 기회.
이사도 하고, 에센스와 크레딧도 바짝 당기고.
무엇보다···
폭풍 속을 돌아다니며 야차처럼 좀비를 썰어버리던 저 6레벨의 실력자와 진심으로 싸워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기꺼웠다.
지금 내 수준을 가늠해볼 좋은 기회가 아니던가.
나는 어렵지 않게 그 제안을 수락했다.
"그럽시다."
"그럼, 곧 연락 드리겠습니다."
#33화. 무아로구나
#33화.
- 안녕히 가십쇼~
가는 손님을 본체만체 인사하는 주인장.
나는 육포를 뜯으며 길가에 대둔 지프차에 올랐다.
이곳은 륭 사무소와 지척에 있는 한 모텔이었는데, 정크타운에 처음 왔을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 하룻밤이었다. 누군가 사용한 콘돔이 침대 밑에 있어서야 되겠는가.
과연, 집 떠나면 고생이라더니.
"돌프야."
"예, 형님."
"빨리 출발해라. 이사 가야지."
연락을 주겠다던 륭은 단 하루만에 연락을 해왔다.
나는 워낙 마음이 여린 사내이기에 살인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라네치아는 죽을만한 짓을 한 놈이니 크게 괘념치 않기로 했다.
"아악!"
쾅!
폭풍이 지나간 탓에 좋지 못한 노면.
길바닥에 있는 콘크리트 덩이를 밟자, 루돌프의 박치기에 차 천장이 움푹 들어간다. 역시나 오프로드용 지프라 그런가, 저 정도 충격에도 에어백은 터지지 않았다. 아니면 원래 에어백이 없는건가.
어찌 되었건 루돌프의 맷집을 잔뜩 길러준 지프는 라네치아 패밀리가 지배하는 40번가로 접어들었다.
중심가나 유흥가와는 사뭇 다른 풍경.
달동네 판자촌 집에 철골 뼈대만 덧붙인 것 같은, 허접한 주택들과 포장마차 같은 노점 상가들이 길 양쪽으로 늘어서있다. 대부분의 포장마차들은 무너져 내렸거나 반파되어 있었다. 검은색으로 딱지진 혈액이 얼룩덜룩하다.
공포 영화에서나 볼법한 외관이라 썩 보기 좋은 꼴은 아니다.
곧, 내 시야에 높은 빌딩 하나가 들어왔다.
"형님, 저깁니다."
타운 40번가에 위치한 '투레 더 타운'
3층 총포상이나 4층의 삼호루가 높은 편인 이 동네에서 홀로 10층을 자랑하는 건물.
원래는 더 높은 층수를 목표로 준공을 시작했으나, 중간에 짓던 이들이 도망가는 바람에 완공되지 못한 채 덩그러니 남겨졌다던가.
투레 더 타운의 외벽은 두꺼운 방수 천막과 비닐 등으로 조잡하게 인테리어 된 흉물이었지만, 그것보다 더 못나고 허름한 주택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고고함을 뽐내며 솟아있었다.
그 미완공의 빌딩을 장악하고 본거지로 삼은 것이 라네치아 패밀리.
유흥가를 포함한 구역에서는 삼호문과 하레니오가 대립했고, 륭과 친씨아는 본질적으로 슬럼가의 사람이 아니기에 타운 내 알력 다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그러니 여기는 오롯이 놈들만의 세상이다. 그간 월세나 꼬박꼬박 받아먹으며 편하게 지냈겠지.
허나 그것도 현 시간부로 끝이다.
[ 이제부터 한 시간입니다. ]
마침 륭으로부터 콜 사인이 떨어졌다.
권총 한 정과 압축도를 챙겨 차에서 내린다.
"돌프야, 쏴라."
"예."
두두두두-
다짜고짜 갈긴 총탄이 외벽에 틀어박힌다.
갑작스러운 총성에 놀란 주변 주민들이 몸을 숨기고, 투레 더 타운 내부에 있던 라네치아 패밀리의 일원들이 집을 공격받은 벌들처럼 우르르 뛰쳐나왔다.
루돌프가 나를 보며 물었다.
"많이도 튀어나오네요. 이제 어쩔까요 형님?"
"너 알아서 잘 버티고 있어라."
"······네? 형님! 아니 형님!"
나는 절규하는 놈을 대충 내버려 둔 채 한산한 빌딩의 뒷문으로 들어갔다.
투레 더 타운 빌딩의 1층 로비.
"뭐···뭐야! 너 뭔데 거기서 나, 나와."
바깥의 큰 소란에도 데스크만 지키고 있던 한 놈이 뒷문에서 튀어나온 나를 수상쩍은 표정으로 노려본다.
놈의 두 다리는 불안한 듯 떨리고 있고 눈동자의 초점은 흐릿했다. 호흡은 일정하지 않고 신경질적 말투와 공격성을 보면 심각한 마약 중독일 것이다.
"누···누구냐니까? 이···."
별 대꾸 없이 건물 안을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10층이나 되는 빌딩답게 임시 승강기가 존재했다. 10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갈 필요는 없겠군.
"신경 쓰지 마시고 나가서 일 보세요."
꾹.
나는 승강기 버튼을 찾아 누르며 말했다.
그러자 안내원 놈은 웬 식칼을 꺼내어 위협적으로 들이댔다. 목덜미에 서늘한 칼날이 닿는다.
"내···내 말 안 들려? 귓구녕을 확 파줘? 너···너 누구냐고!"
나는 칼집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이어서, 부드럽게 이어지는 발도술.
승강기 옆으로 드러난 철골조와 콘크리트가 두부 잘리듯 잘려나간다.
"······."
돌가루가 비산하며 떨어지는 와중에 놈이 뭔가를 툭- 떨어뜨렸다. 자세히 보니 칼을 쥔 놈의 손목이 바닥에 떨어져 구르고 있었다.
"내 손목? 손목이···!"
"너희 보스는 몇 층을 쓰니?"
"시···십, 십 층인데요."
"고맙다. 이제 일 봐."
"네···."
자신의 손목이 잘렸는데도 큰 반응이 없는 마약 중독자 놈을 대충 치우고 승강기에 올라타 최상층인 10층을 눌렀다.
거북이보다 느릿한 속도로 최상층에 도착한 임시 승강기의 문이 양쪽으로 열리자.
철컥.
수많은 총구가 나를 환히 반겨주었다.
다들 1층 데스크의 그놈처럼 마약에 절어있는 얼굴들이었다.
"자, 여기서 이름이 라네치아인 사람?"
- ······.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이라,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푹 넣은 채, 투레 더 타운 최상층의 전경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소파와 각종 가구들.
벽에는 적당히 큰 금고가 하나 붙어있으며, 부동산을 볼 때 가장 중요한 옵션 중 하나인 전망은 타운의 유일한 10층인만큼 상당히 좋았다. 개미굴 같은 슬럼가에 가득 들어찬 네온사인들과 어두운 판자촌 뷰가 확실하게 내려다보인다.
같잖은 우월감을 느끼기엔 이만한 곳이 없겠군.
문득, 훌륭한 전망을 구경하다 입을 열었다.
"오늘부로 너희는 해산이다. 라네치아랑 윗대가리만 남고 싹 나가라."
"개소리. 감히 누구 앞에서 네 좆대로 말하는 거냐?"
아까부터 가죽 의자에 거만하게 기대 앉아있던 사내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놈은 안주머니에서 시가를 꺼내 기요틴에 끼우더니, 대가리를 싹둑 자르며 말했다.
"너 무스코를 죽인 그놈이지? 삼호문과도 친하다며. 그럼 사창가랑 기루 똥이나 받아먹으면서 살지 왜 여기까지 와서 설쳐? 아! 폭풍에 다 박살나서 도망갔겠군."
"네가 라네치아니?"
"그렇다면 어쩔거냐."
라네치아는 뱃살이 푸짐한 남자였다.
금색으로 겉을 도금한 사이버웨어 팔과 입안에 박아 넣은 금니가 눈부시게 번쩍댄다. 정크타운의 최대 부동산 소유주답게 부유한 티는 나는군.
놈은 상황 파악이 힘든지, 계속 실실 웃으며 여유를 부렸다.
"날 죽이러 온거면 크게 실수한거다. 내가 륭과 계약을 맺어둔 건 알고 이러는 거냐? 큭, 이미 그 괴물이 여기로 달려오고 있을걸."
"그거 정말 무섭군."
"자! 눈이 있으면 밑을 봐라. 여기서 보이는 길거리가 전부 내 거야. 무슨 소리 알아? 모르겠지. 저게 다 6레벨의 괴물을 수족처럼 부리게 해주는 크레딧 뭉치들이라고!"
라네치아는 한심한 자기 자랑을 늘어놓으며 껄껄 웃었다. 저 뚱뚱한 녀석은 정크타운의 건물값을 다 합쳐봐야 시티 업무지구 메인에 자리한 빌딩 한 채의 자릿세만도 못하다는 걸 알고나 있을까.
"핫핫핫! 세상은 다 땅과 건물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나는 입이 찢어져라 웃는 놈을 바라보다가···
주머니 속에서 쥐고 있던 테크리볼버의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라네치아의 이마에 빨간색 구멍이 생겨났다.
즉사였다.
"내가 부동산 강의 들으러 온 것 같니?"
쿵!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가는 뚱뚱한 시신.
돈 깨나 만지던 건물주로서는 참 허망한 죽음. 팔은 진작 사이버웨어로 교체했어도 눈치는 사이버웨어로 교체하지 못한 탓이다.
"패밀리니까 방금 죽은 놈이 아비인가? 이제부터 죽은 아비의 복수를 할 놈들만 남고 다 나가라. 늦으면 지각비는 목숨으로 내는거야."
- ······.
장내의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싸늘해졌다.
그러나 밖으로 나가는 놈은 한 명도 없었다.
이미 죽어버린 보스의 눈치를 보는 건 아닐 테고, 이리로 달려오고 있을 륭을 기다리는 건가? 아니면 매일 배급 받는다는 마약 때문인 건가.
아무튼 건물주는 뭐가 달라도 다르군.
유산을 받아 가려는 아들들이 죽은 이후에도 목숨을 걸고 곁을 지켜주니 말이다.
하기야 말로 한다고 해서 깍듯이 들어주면 밑바닥 인생들이 아니지.
나는 개중에 간부로 보이는 놈들을 타깃으로 삼아 신형을 쏘아냈다.
뻐억!
사람들 사이에 숨어 몰래 방아쇠를 당기려던 놈의 머리가 뭉개졌다. 놈은 코에서 피를 쏟아내며 그대로 요절하고 말았다.
이후에 몇 명을 더 비명에 보내고 나서야, 투레 더 타운을 깔끔히 비울 수 있었다.
"쯧."
실랑이도 수준이 맞아야 하는 것이다.
정크타운에 갓 들어왔을 때라면 몰라도, 이제는 이런 식상한 양아치 놈들과 말만 섞어도 심신이 피곤해졌다. 새로운 자극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둔감해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타운의 집단 하나가 허무하게 사라졌다.
나는 빌딩 안에 전셋집을 차려둔 라네치아 놈들을 몰아낸 뒤에는 1층으로 내려와 루돌프 놈과 즐거운 만담을 나누었다. 녀석은 이번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는데, 목숨줄 질기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돌프야, 너도 참 대단하구나."
"감사합니다."
"이쯤 되면 죽을 때도 되었다."
"외공을 익히고 있어서 그런가. 요즘 잘 안 죽네요."
그때.
먼 저편에서 거세게 일어나는 먼지구름.
안력을 돋우니 먼지구름 속을 질주해오는 륭이 보였다. 이제 일의 마무리를 할 시간인듯했다.
"다녀오마."
"형님, 어차피 짜고 치는 거라지만 저는 형님만 응원하겠습니다."
"그래라."
스르릉—
저편에서 달려오던 6레벨의 거한이 좌중을 압도하는 살기를 흩뿌리며 적색의 도검을 뽑아들었다. 17번가 술집 앞에서 눈알 좀비를 두 쪽으로 갈라버렸던 그 병기였다.
투우소를 연상케하는 돌진에 나도 압축도를 뽑아 들고 기수식을 취했다.
점처럼 작게 보이던 륭의 형체가 어느새 스무 걸음 앞까지 가까워졌을 때.
스읍.
한 호흡에 솟구친 내공은 잔잔한 진동을 일으키며 도에 힘을 보탰다. 뒤이어 가볍게 내딛는 일 보(步). 머리를 두 쪽 낼 듯 정직하게 떨어지는 륭의 도검을 향해 내 압축도가 들불처럼 치고 일어났다.
기검토룡(起劍土龍).
콰과과곽!
도의 궤적을 뒤늦게 쫓아가며 쩌억 갈라지는 땅바닥. 지면을 통째로 들어낸 나의 칼날이 몸뚱이를 틀어 위로 솟구쳤다.
곧이어, 허공에서 륭의 도검과 내 도가 맞부딪친다. 이미 평범한 인간의 완력을 벗어난 륭의 힘에 순간 손목이 끊어질 듯 아려왔다.
이윽고 내가 딛고 있는 지면이 움푹 패여 들어갔다. 칼이 부딪히며 일어난 반탄력마저 무시한 채 압도적인 힘으로 눌러오는 륭.
그 기백이 대단해 급히 공력을 거두곤 뒤로 훌쩍 물러났다. 찢어진 내 손아귀에서 도병을 타고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러자 륭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쇄도해왔다. 날카로운 파공성이 귀를 먼저 때리고, 횡으로 내리긋는 검격이 허공을 양분했다.
나는 잘 갈아놓은 그의 검날이 코앞까지 들이쳤을 때를 노려 마력을 끌어올렸다. 허공에 떠있던 륭의 다리가 덜컥 멈추었다.
"······."
간단한 속박 마법.
허나 그를 묶어 두는 건 불가능하다.
그저 공격의 흐름을 잠시 끊어내는 용도일 뿐.
내 예상대로 찰나간 자세가 흐트러진 륭의 검에 빈틈이 생겨났다. 공력을 잔뜩 빨아먹은 압축도가 륭의 목줄기를 노리고 쏘아졌다.
그러나 륭이 방어를 도외시한 채 살을 주고 뼈를 취할 것처럼 똑같이 검을 휘둘러오자, 다시 한번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뒤로 물러난 나는, 그에게서 언뜻 묘한 느낌을 받았다.
'일부러 힘을 빼느라 그런 건가?'
앞선 연방 격리 시설에서 괴물들의 전투를 보았기 때문인지, 내 눈에는 지금까지 륭이 펼쳐낸 초식과 동작들이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그 뒤로 몇 합을 더 겨루며 유심히 지켜보니, 그런 느낌을 받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륭이 보유한 내공의 양은 레벨에 비해서도 비정상적으로 많았으나, 그것들을 세상 밖으로 꺼낼 무공은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한 상태였다.
내게 모아둔 에센스를 넘겨 주겠다며 에센스에는 별 미련을 가지지 않는듯한 륭의 행동과 지금의 상황이 맞아 떨어졌다.
그러니까, 륭은 내공이 무지막지하게 많은 사내이나 절정의 벽에서 배움이 막혀있는 무인이었다. 내가 처음에 륭을 보았을 때 느꼈던 기이함은 바로 거기에서 기인한듯 싶었다.
투박한 무공에 비해 내공만 너무 많다. 나처럼 성취를 내공이 못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성취가 내공을 따라가지 못하는 특이한 형태였다.
카앙!
일단, 이렇게 열 합.
이제 딱 절반이 남은 것인데···.
나는 한 가지 결심을 마치고는, 그 뒤의 열 합동안 그의 도검을 의도적으로 흘려가며 륭의 검로를 교정해주기 시작했다. 륭은 한 끗 차이로 극성의 조화를 이루지 못했는데, 그 부분을 친히 어루어만져가며 도자기처럼 다듬었다.
내가 열심히 싸우기는 커녕 검만 툭툭 쳐내자, 처음에는 영문을 모르고 눈살을 찌푸리던 륭은 세 합을 남기고서야 내 의도를 알아챘다. 그는 곧바로 의문을 지운채 무섭게 몰두하며 검로를 눈으로 좇아 움직였다. 6레벨은 딱지치기로 딴 것이 아닌지, 척하면 척이었다.
그렇게 열합 하고도 다섯 합 더.
총 스물다섯 합.
우리가 처음 상정했던 것보다 다섯 합을 초과했을 시점.
"······."
쾅! 쾅! 콰아앙!
그는 숫제 미친 듯 검을 내리치고 있었다.
검끝에는 힘이 붙었고 속도는 전보다 배로 빨라졌다. 바람을 가르던 도검이 이제는 바람을 때려 터뜨리고 있었다.
언제는 스무 합만 적당히 받아 달라더니···
나를 뼈째로 발라서 세꼬시로 만들 심산인가?
'아니, 이 새끼 이거 지금 뭐 하는 거야.'
본디 스무합 내에 내 쪽의 패배로 적당히 끝났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륭의 눈빛에는 기이한 열기가 감돌고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어두워 생기가 없었던 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죽어가던 노인이 잠시 정기를 되찾은 것처럼 륭은 나와의 비무에 모든 정력을 죄다 쏟아붓고 있었다.
심지어.
화아악-
그의 도검에서 짙게 일렁이는 검기(劍氣).
대체 잉여 내공이 얼마나 많으면 절정에 이르지도 못했는데 저만한 검기를 쑥쑥 뽑아낸단 말인가?
내가 놀라 급히 눈짓했으나, 륭은 검기를 거두지 않으며 조용히 뇌까렸다.
"······조금만. 조금만 더."
이런.
이미 혼이 반쯤 나간 저 얼굴을 보면.
그리고 저자가 뜬금없이 미치지 않은 이상에야.
'무아(無我)로구나.'
전투를 벌이던 륭은 급작스레 무아지경에 빠져버렸다.
가짜 비무가 한순간에 생사결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역시 빌어먹을 정크타운답다.
이 동네에서 그나마 상식이 통하는 인간인 줄 알았더니, 절대 멀쩡한 정신 상태는 아니었군.
아니. 이번에는 내 잘못도 약간은 있겠지.
오랜만에 진짜배기 무인과 칼을 섞어서 그런가, 나도 모르게 기분을 낸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륭이 저렇듯 번뜩이는 깨달음을 잡으려 무아에 빠질 때까지 한 수 가르쳐 보이겠다며 주접을 떨었겠는가.
만약 저 무아지경을 잘 헤쳐 나온다면 그를 가로막고 있던 벽을 깨부수는데 큰 도움이 될 테지만, 전투중에 무아로 빠져들었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 아니었다.
깨달음이라는 무형의 실타래를 잡기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힘을 가졌는지조차 망각하고 진심 전력으로 검을 휘둘러 올 것이다.
온 정신이 극도로 한 점에만 몰려있을 터인 륭의 기도는, 그리 생각하는 순간에도 점점 더 사나워지고 있었다.
'이러다 진짜 한바탕 하게 생겼군.'
나는 륭이 만들어낸 검기를 보며 눈을 부릅떴다.
완숙한 6레벨의 무인이 전력으로 휘둘러오는 검.
이대로 죽으면 언 선생의 예언이 며칠 만에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청개구리의 마음으로 도를 손 쥔에 힘을 주었다.
이윽고.
륭의 거대한 신형이 번갯불처럼 사라짐과 동시에, 도를 쥔 내 오른팔이 서걱 잘려나갔다.
#34화. 참 못났다
#34화.
푹-푹-
혈도를 찔러 들어가는 손가락.
나는 즉시 잘려나간 부분의 혈도를 짚어 쏟아지는 피를 막았다.
딱히 방심하지도 않았건만.
그래도 아주 최악은 아니군.
죽여버릴 작정이었다면 곧바로 목을 쳤겠지.
그러니, 깨달음이라는 실타래가 잡힐만한 곳에 하필 내 오른팔이 있었을 뿐이다. 나는 그렇듯 낙천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이만큼이나 너그럽고 도량이 넓은 사내이다.
"······."
하지만 륭은 내 오른팔을 단숨에 절삭해낸 뒤, 다시 도검을 들어 올려 조용히 기수식을 취하고 있었다. 뿔을 세워 돌진을 준비하는 들소처럼 보였다. 도검에 흘려넣은 기운이 펄펄 흘러나와 멀리서도 또렷하게 보일 지경이니.
이제 나도 살고 륭도 살고, 잘린 팔도 얼른 주워 붙이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저자의 무아지경을 신속히 끝내주는 것.
내가 여러 능력을 사용한다 해도 아직 륭과의 격차는 크다. 절정(絕頂)은 못 되어도 바로 그 밑의 초일류. 그것도 다른 이들보다 내공이 수상하리만치 많은 초일류 사무라이. 어디서든 알아주는 실력자의 반열이다.
다만, 륭은 시체 사냥꾼이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싸워온 상대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 좀비 놈들이었다는 얘기. 칼에 조금만 찔려도 움직임이 극히 제한되는 인간과의 전투 경험은 적어 보였다.
그래서인지 륭의 검은 지극히 실전적이었고, 티끌만치도 자비가 없었다. 더해서 모든 동작마다 상대방의 육신을 단박에 두 동강 낼 것처럼 힘이 과하게 들어가 있었다.
후우웅-
상체를 숙여 공기를 찢어발기는 륭의 검을 피하고 다리를 걸었다. 허공에서 빙글 돌아 땅으로 내려온 그가 다시 검을 들었다.
"······."
시체 사냥꾼더러 갑자기 사람을 때려잡으라고 하니, 검로와 보법이 평소와 다르게 투박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곧이어 다시 짓쳐 들어오는 륭. 하지만 이번에는 언제든 반응할 수 있도록 힘을 적당히 준 상태였다.
그래도 그간의 공부가 나쁘지 않은지, 그는 무아지경 속에서 가파르게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후우욱!
열 합이 더 지나자 투박하고 어딘가 부족했던 움직임은 금세 날카롭게 다듬어져 내 목줄기를 노려왔다. 흉흉한 검기와의 정면 대결을 피해 가면서도 한쪽 팔로만 공격을 흘려내는 게 보통 고된 작업이 아니었다.
유불리를 떠나 무조건 내 쪽이 밀리는 형세.
이후에도 두 사내의 합은 순식간에 쌓여갔다.
한 팔로 륭을 상대하는건 도통 무리였으나 그래도 어찌어찌 시간은 흘러갔다. 륭의 도검에서 끝없이 일렁이던 검기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잡힐 듯 말듯, 줄다리기처럼 이어지던 륭과의 전투는 어느새 종막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무아에서 빠져나온 때는, 단전에 내공이 한 줌도 남지 않아 대략 정신이 멍해질 즈음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일백 합은 넉넉히 넘겼을 것이다.
"아아···."
돌연 도검을 손에서 떨어뜨린 륭이 눈물이라도 흘릴 듯 감격스러워했다.
그는 뛸듯이 기쁜 기색을 잠시간 내비치고는 얻은 깨달음과 심득을 놓칠세라 길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공에 들어갔다. 무아에서 얻은 잠깐의 배움을 정리해 확실하게 체화하는 단계에 돌입한 것이다.
'후우, 저 시발놈.'
그 와중에 나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길가에 멀뚱히 서있었는데, 먼 곳에서 몇몇 주민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중간의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륭이 처음 원하는 대로 패해주었으니, 이제 라네치아를 죽인 살인자놈은 전투에 패해 쓰러져 퇴장할 차례였다.
"크헉!"
내가 잘려서 나동그라져 있는 팔을 부여잡고 목석처럼 쓰러지자, 쏜살같이 달려온 루돌프놈이 나를 그대로 업어서는 지프 뒷자리에 올려 태웠다. 한껏 격앙된 루돌프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형님! 아무리 실감나게 한다 해도 아예 팔을 잘라버리는데요? 이거 두분이 협의가 된 겁니까?"
"생각을 좀 해라. 이게 협의가 된 거겠니."
"아···역시 그건 아니죠?"
"입 닫아라."
"예."
심한 욕설이 턱끝까지 올라왔지만 당장은 접어두고 회복에 집중할 때였다.
나는 잘린 오른팔을 물로 깨끗이 씻은 뒤, 떡하니 환부에 붙이고 기다렸다. 루돌프가 그런 나를 안쓰러운 눈으로 보았지만, 이 잘린 팔은 반드시 붙고 말 것이다.
무슨 재주인지는 몰라도 이전에 다 죽어가던 나조차도 살려 놓을 정도로 성능이 좋으니, 반 바이오의 역작이자 6세대 의료용 나노로봇은 이번에도 분명히 해낸다. 혼잣말로 '너는 할 수 있다' 라고 몇 번을 간절히 읊조렸는지 모른다.
어떻게 구한 건데, 반드시 붙어야지 않겠는가.
그리고 정확히 두 시간 뒤.
녀석은 분에 넘칠 만큼 기대에 부응했다.
놀랍게도 이미 푸르스름해졌던 오른팔이 언제 그랬냐는 듯 떡하니 붙어 혈색을 되찾았고, 손가락과 피부로 느껴지는 감각까지 말짱했다.
탄탄히 붙은 팔을 몇 번 더 구부렸다 펴본 나는 흡족하게 입을 열었다.
"기계 팔로 바꿔야 하나 걱정했는데, 다행이군."
*
다음날.
8번가 륭 사무소.
칠 척의 덩치에 시커먼 구릿빛 피부의 거한.
하룻밤을 꼬박 길바닥에서 새고 돌아온 륭은, 이가 다 보이도록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본래의 어둡던 분위기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 팔을 치료하셨다니···진심으로 다행입니다."
또 원래의 기묘한 느낌도 중화되어 없어졌는데, 륭은 어제 길바닥에서 기어이 절정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했다.
가로막던 벽을 부수고 7레벨을 달성한 것이다.
"팔이야 원래 뭐 붙는 거고. 아무튼 축하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지금도 믿기지 않습니다."
그는 오성과 자질이 괜찮은 사내였다.
아마 내 도움이 아니더라도 끝내 이르렀겠지.
륭은 아직 나이가 많지도 않으니 더 성장할 여지가 남아있고 쓸만한 스승을 만나거나 기연을 얻어 30, 40년쯤 더 정진한다면 7레벨의 극위나 운이 좋으면 초절정, 그러니까 8레벨의 초입까지도 가능할 것이다.
쓸만한 재능을 가진 이들이 온갖 기연을 만나 한평생을 갈고닦는다면, 열 명중 한 명정도는 연이 닿아 도달할 수 있는 최상승의 경지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나를 기다려주고 있는 동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가봐야 합니다."
"이리 급하게요? 어디로 가는 겁니까?"
"하하하! 글쎄요."
륭은 7레벨이 되기 무섭게 타운을 떠난다고 했다.
뜬금 없었으나 그는 내가 들어온 뒤에도 연신 밝은 표정으로 짐을 싸고 있었고, 클로에는 옆에서 아무런 말 없이 묵묵하게 그를 도와가며 사무소를 정리했다.
내가 뭐라 참견할 것은 아니었다.
그때, 뭔가를 찾은 륭이 내앞에 쿵 내려놓았다.
"이거 받아주십시오."
웬 커다란 보관함을 통째로 내어주었는데, 그 양이 묵직한게 보통이 아니었다.
안쪽을 언뜻 살펴보니 농도가 다른 에센스들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한가득 있었다. 가격으로 따져도 4, 5백만 크레딧은 우습게 넘어갈 듯했다.
발두르 시티의 아파트 몇 채를 받은 것이다.
베테랑 시체 사냥꾼이 알음알음 모아둔 에센스와 이번 사태로 얻은 에센스까지 합친 양인가?
이건 많아도 너무 많군.
"의뢰값에 더해 잘린 팔 값, 그리고 목숨걸고 제 성취를 도와주신 값입니다."
"그렇습니까?"
"사실 이것으로도 갈음하기 모자랍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꽤 급해 보입니다. 어디로 갑니까? 두 번째 묻습니다."
호기심을 떨쳐내지 못한 내가 다시 한번 물었다.
하지만 륭에게서는 괴상한 동문서답만이 돌아왔다.
"이제 짐도 거의다 정리했으니, 끝나고 절 받으시죠."
"······."
그는 다시 몸을 돌려 짐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내가 보기에 륭은 내내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 보였다. 그리고 조금 전에 말했던 대로 짐 정리가 얼추 끝나자, 자기 멋대로 구배지례를 했다. 본신보다 월등히 강한 7레벨의 제자를 둔 사내는 이 세상에 내가 처음일 것이다.
"감사했습니다. 진심입니다."
륭은 자신만의 구배지례를 마친 뒤, 그길로 클로에와 함께 정크타운을 바람처럼 떠나버렸다.
검을 나눈 사이건만 헤어짐은 극히 짧았다.
세상 누구도 그의 속사정은 알 수가 없는 것이라 나는 떠나가는 굳이 그를 배웅하지 않았다.
한시도 지체할 수 없다는 듯 정크타운을 빠져나가던 륭의 얼굴은 어떠한 후련함으로 가득 물들어 있으니까.
사무실에는 그가 두고간 담배들만 가득했다.
아무튼 그렇게 륭은 떠났고.
며칠이 지났다.
한참 에센스의 기운을 다스리고 있던 때였나.
륭이 죽었다는 소식이 귀에 들려왔다.
시티 장벽 밖에서 수많은 시체들을 베어 넘기다가 결국 장렬히 산화했다던가?
아.
이토록 헤아리기 힘든 것이 사람 마음이다.
나는 가부좌를 튼 채, 내 앞에 찾아온 한 여인을 보며 말했다.
"사냥꾼으로 살다 사냥꾼으로 죽었으니 명복을 빌어야겠습니다."
"명복은 무슨, 크레딧만 잔뜩 남겨두고선 자기 여자를 팽개치고 가버린 사람인걸요?"
같이 타운을 떠났던 륭의 보조, 클로에였다.
클로에의 얼굴은 뭐라 형언할 수 없었다.
나는 또 낙천적인 사내가 되어 말했다.
"세상은 돈이 전부입니다. 한 밑천 단단히 잡았으니 그 돈으로 잘먹고 잘살면 되겠군요."
죽음은 안타깝지만, 그가 원하는대로 갔으니 마음속 응어리는 모두 풀고 가지 않겠는가.
"진짜 너무 하시네요. 되게 잔인한 말인거 알아요?"
"나조차도 그 거금이 탐나던 참입니다. 되도록 내가 모르는 곳까지 멀리 가서 살아요."
"칫, 필요하시면 좀 나눠드릴까요?"
내 빈말에 주머니를 뒤적이는 시늉을 하는 클로에.
그녀는 그러다 쓴웃음을 짓곤 고개를 떨궜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돈 없는 과부보다 돈이라도 많은 과부가 처량함이 덜할테지요."
"그럼 레반씨도 과부 만들지 않게 조심하셔야겠어요. 혹시 PTSD나 정신병 같은건 없죠?"
"누가 과부가 됩니까?"
"레나요. 사무소에서 같이 지내는 동안 정이 꽤 들었었거든요. 청소도 매일 도와줬는데···."
다그 언 선생의 거처에서 며칠 머무는 동안, 결이 맞는 여인끼리 무슨 대화들을 그렇게 나눠댔는지 둘은 거의 절친한 사이가 되어있었다.
그녀가 레나의 앞길에 생각보다 걱정 근심이 많아보이기에 몇 마디를 보탰다.
"어릴 때부터 내가 업어키운 시간만 십 년입니다. 안전하게 발할라로 갈 수 있을 겁니다."
"다행이네요."
클로에는 내 말에 활짝 웃어보이고는 곧 길을 떠났다. 그녀는 길을 떠날 때 기회가 되면 또 보자고 했으나 어디로 가는지조차 묻지 않았으니, 다시 볼 날이 올지는 모를 일이다.
나는 그렇게 클로에를 떠나보내고, 발치에 놓인 물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녀가 가져와선 여기에 놓고 떠난 적색 검집.
어찌 찾아왔는지는 몰라도 륭이 쓰던 그것이 확실했다.
검집의 장식에는 군번줄처럼 무언가가 늘어져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는데, 그것은 륭의 삶과 기억, 성취 등이 담겨있을 인격 메모리 칩이었다.
나는 그 귀물을 보고도 웃지 못했다.
"쯧."
깨달음의 단초를 얻지 못했다면 정크타운에 자리잡고 해결사 노릇이나 하며, 또 소도시의 숨겨진 은둔고수 노릇이나 하며 클로에와 평생을 해로했을 사내였다.
그런 그가 나와의 비무를 통해 염원하던 7레벨의 경지에 이르더니, 단 며칠 만에 장벽 밖에 나가 마지막 응어리를 다 불사르고 죽은 것이다.
동료를 다 잃고 그리워하는 시체 사냥꾼.
무아에 빠진놈을 건져놓은 줄 알았는데, 그의 삶은 이전부터 무아지경이었다. 정신이 한곳에 온통 쏠려 스스로를 잊고 있는 경지. 눈이 멀어 자신의 인생마저 잊어버렸으니 어찌 무아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분명 원하는 삶을 살다 갔으나 마음이 괜히 착잡한 것은 어찌 설명할 도리 없는 일이었다.
좆같은 세상이라도 말짱히 살아가는 군상들이 있길래 괜찮은 줄로만 알았는데, 이번 륭 사건으로 인해 확실히 망해가는 세계라는 사실이 깊숙이 와닿았다.
그 일이 있었던 직후.
우리는 40번가의 투레 더 타운 빌딩으로 거처를 옮겼다. 타운 최상층에서 정크타운의 전경을 바라보던 레나는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들어 했다.
내가 루돌프를 밀치며 레나 옆에 섰다.
"비켜라. 지금은 너같이 못난 놈을 눈에 담고픈 심경이 아니구나."
"아, 예."
오늘은 아침부터 유난히 세상이 밝았다.
일 년에 몇 번 보기도 힘든 해가 지상에 내리쬐고 있었는데, 이는 상당히 드문 일이었다. 타운을 밝히던 네온사인 불빛들이 오늘만큼은 햇빛에 밀려 그 힘을 잃었다.
나는 그 뒤로도 꽤 오랜 시간 정크타운의 전경을 내려보다 입을 열었다.
"동네 참 못났다."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도 어딘가 좆같은 동네였다.
#35화. 열반을 좇아 방랑하는 안드로이드 1
#35화.
내면을 관조하던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못해도 반 갑자는 얻었군."
륭이 유품으로 두고간 에센스는 양이 꽤 많은 탓에, 흡수해 기운을 다스리는 과정만 해도 꼼짝없이 많은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그러니 클로에가 떠난 뒤에도 이틀이라는 시간이 더 걸릴수 밖에 없었다.
하나 신기했던 건 내가 에센스를 흡수하고 운공에 매진하는 동안 무려 삼일 연속으로 해가 뜨고 날이 밝았는데, 이는 정말 드물디 드문 일이었다.
나는 그것이 강력했던 모래폭풍과 연관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폭풍이 근방을 통으로 휩쓸고 지나가며 더러운 대기를 깡그리 갈아엎기라도 한 모양이다.
그렇기에 오늘도 날은 밝았다. 네온사인이 내는 불빛에 익숙한 타운 주민들은, 날이 청명한데도 오히려 인상을 찌푸리면서 걸어 다녔다.
가끔 나는 옥상에 올라와 햇볕을 쬐며 운공하기도 했는데, 투레 더 타운의 옥상은 벤치 몇 개와 풀밭이 있는 테라스 구조였다. 풀 한 포기 보기 힘든 세상이라, 나는 그 점이 마음에 들어 여기를 찾곤 했다.
이전 주인인 라네치아는 이 옥상 말고도 빌딩을 층마다 구분해 취향대로 꾸며놓았다.
투레 더 타운의 지상 2~8층은 일반 조직원들의 숙소, 식당, 마약을 하는 방과 섹스를 즐기는 방, 연회장 등으로 크게 나뉘어 있었다. 상층인 9, 10층은 라네치아와 간부들의 공간이었고 지금은 레나가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지하에는 차고와 작은 사격장, 심지어 값비싼 장치를 구비해둔 홀로그램 상영관까지 있었다. 자체적으로 만들어 둔 것들이라 조악하긴 했지만, 시티의 상류층을 따라 해본답시고 자기들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태가 났다.
마약은 카트리지째로 차곡차곡 보관해두었는데 우습게도 사천당가에서 판매하는 양산형 저가 마약들이 가장 많았다. 놈은 값이 싸지만 중독성이 강한 마약을 부하들에게 배급해가며 세를 유지한 듯싶었다.
[ 회사원, 졸부, 갱스터, 크레딧만 있다면 아이들까지도 편하게 구해 즐길 수 있는, 간편한 인스턴트 마약! 며칠간 뼈 빠지게 일해 모은 크레딧을 여기에 바치세요! 몽롱하고 행복한 삶을 즐기실 수 있답니다! ]
당가 놈들의 인스턴트 마약 광고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 해, 혀를 몇 번 차곤 고개를 털었다.
나는 압축도를 천천히 뽑아들고는 내공을 불어 넣었다.
우우우웅-
이윽고 게걸스레 내공을 먹어치우던 압축도가 잘게 진동하며 푸르스름한 아지랑이를 흘렸다. 륭처럼 검기를 줄기차게 뽑아내는 지경은 아니었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단편적인 도기(刀氣)정도는 얼마든 뽑아낼 수 있을듯 싶었다.
언 선생의 거처에서 나노로봇 시술에 성공한 뒤, 나약했던 근골과 혈맥이 바로 서고 수련의 효과가 나타나며 축기의 효율이 눈에 띄게 좋아진 것이 주요한 까닭이었다.
환골탈태까지는 못 되더라도 한 반골세수(返骨洗髓)쯤은 될 것이다. 조금만 격하게 움직여도 숨이 차고 농도 높은 마나액을 쑤셔박으면 그 후유증에 몇 날을 고생하고, 내공수발마저 자유롭지 못하던 병신같은 몸은 이제 확연히 바뀌었다.
물론, 륭이 준 에센스도 제 몫을 톡톡히 했다.
그리고 두 개의 마나 회로 역시, 그간의 고행과 폭포처럼 쏟아부은 에센스덕에 한계까지 두드려 단조된 쇳덩이처럼 단단해졌다.
나는 지체없이 세 번째 회로 제작에 착수했고, 어제부터 내 심장을 중심으로 대회전하는 회로는 세 개가 되었다.
이제 세 개의 고리를 엮은 3위계 마법사라는 뜻. 다른 힘은 미뤄두고서 이미 마법사의 경지로만 5레벨을 달성한 것이다.
게다가 이 소도시에서 가장 높은 빌딩을 차지하고 앉았으니, 시종 출신의 사내로는 아주 제대로 출세한 게 틀림없다.
내가 그렇게 옥상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때, 급히 올라온 루돌프놈이 나를 찾았다.
"형님, 지금 연결됐는데요? 내려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투레 더 타운의 지하.
라네치아가 만들어둔 홀로그램 상영관.
넓은 테이블 위를 자기 입맛대로 세팅해둔 레나가 루돌프와 함께 홀로그램 장치를 열심히 조작하고 있었다.
확실히 이런 슬럼가에 어울리지 않는 고급장치였다. 저 테이블 밑의 서랍에는 라네치아의 뚱뚱한 알몸과 헐벗은 사내들이 나오는 영상이 여럿 있었다는데, 자신이 질펀하게 즐긴 섹스를 나중에도 감상하기 위해 절찬리에 구비해둔 물건인듯 싶었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입체 홀로그램의 레이저가 유려하게 솟구쳤다. 빛무리처럼 단숨에 쏟아져 나온 레이저는 사람의 형상을 복사하듯 허공에 그려냈다.
곧, 익숙한 목소리가 그 형상에서 흘러나왔다.
[ 이렇게 보니까 좋네. 거의 두 달 만이야. ]
빨려 들어갈 듯 깊은 눈동자를 가진 여인.
같은 도망자 신세인데도 자신감 넘치는 태도와 상대를 내려다보는 듯한 저 오만한 표정. 그리고 입만 닫으면 적당히 아름다울 얼굴.
[ 레나, 레반은 어디있어? 얼굴좀 보자. ]
그 아름다운 여인은 다짜고짜 나를 먼저 찾았다.
하기야 레나로부터 믿기 힘든 얘기만 주야장천 들어댔을 테니, 큰 호기심이 생겼겠지. 애초에 이 홀로그램 대면도 저 여인이 강력히 요청한 덕에 성립된 것이다.
여인은 당가의 추적을 의식했는지 외형이 많이 바뀐 상태였다. 레나와 같이 새까맣던 흑장발은 금발로 바뀌었고, 귀밑과 드러난 목 아래로는 복잡한 문신들이 빈공간 없이 그려져 있었다. 대신 저 문신은 저주가 아니라 원하는 즉시 마법을 발현하기 위해 그려둔 수식이었다.
나는 홀로그램 앞으로 보무당당히 걸어가 그와 얼굴을 마주했다. 옛날 시종 시절 같았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다짜고짜 뺨부터 후려갈겼을 여인이니까.
[ 안녕? ]
"······."
잉그리드 반 루벤카.
레나와는 자매지간.
세간에 알려진 바로는 18세에 5레벨을 달성, 연방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교육기관인 발할라 시립 마법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수료했던 천재.
삼존칠좌(三尊七座)의 반열까지는 아니라도 언젠가 십이제(十二帝)의 지위에 도전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마법사. 26세인 현재 완숙한 6레벨.
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레벨 7의 벽까지 벌써 돌파해버린 괴물.
가진 마법적 재능은 물론이고 육체조차 마나를 받아들이는 것에 극도로 특화된, 말 그대로 마나의 축복을 받은 육신. 더해서 발할라 시립 아카데미의 학장이자 9레벨의 고위마법사가 관심을 표했다던 젊은 마법사.
그것이 홀로그램 저편에 있는 여인이다.
[ 흐음, 얼굴은 비슷한데······. ]
그리고 루벤카는, 지금 저 조그마한 머리통을 굴려가며 온갖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루벤카는 실제로 어마어마한 다혈질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다혈질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레나로부터 믿기 힘든 내 소식들을 전해 들었을 테니, 함부로 굴었다간 내가 레나를 어찌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걸 그대로 내버려 둘 내가 아니었다. 나는 머리를 굴리며 할 말을 찾는 루벤카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 앞에다 불러놓고 무슨 생각을 그리 하나? 이 버릇없는 년아."
[ ······뭐? ]
순간 루벤카의 입이 붕어처럼 벌어졌다.
저 여인이 내 앞에서 저렇게 황당하고 멍청한 표정을 짓는 건 10년 시종 인생중 오늘이 처음이다. 나는 조금 전의 단 한 마디로, 빌어먹을 시종 신세를 벗어났다는 것을 다시 실감할 수 있었다.
"레, 레반······!"
옆에 있던 레나가 오히려 더 기겁하며 팔을 붙잡았지만, 나를 제대로 말리지는 못했다. 루벤카가 과거에 시종이던 내게 저질렀던 만행들을 레나도 어렴풋이 알고있기 때문이다.
폭행은 예삿일이었고 2세대 나노로봇 시술을 받은 날에는, 효과를 확인시켜 주겠다며 화염 마법으로 피부를 태우기도 했다.
사실 스승의 폭력에 비하면 조족지혈도 안 되는 귀여운 수준이라 버텼지, 평범하게 대가리가 빈 깡통 시종이었다면 업무 외 스트레스로 인한 신경망 손상으로 죽고 말았을 거다.
반 루벤카는 동생인 레나에 대한 애정과 마법에 관한 재능만 출중할 뿐, 성격은 아주 빌어먹을 미친년이었던 것이다.
나는 말문이 턱 막힌 루벤카를 대신해 물었다.
"메리랑은 잘 지내나? 귀찮게 군다고 버리지 말고 잘 챙겨줘라. 주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한 녀석이다."
[ 걱정 하지마. 메리는 잘 지내고 있······. ]
"너 시집도 제대로 못 가고 파혼당했다며."
루벤카는 고요한 침묵으로 답했다.
저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을 보아하니, 뇌수까지 치민 울화를 꾸역꾸역 삼키는게 틀림 없어 보인다. 복장이 터져도 레나가 내 옆에 있으니 화가 미칠까 감히 큰 소리를 못내는 거겠지.
저년의 외형과는 정반대인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이렇게 골려먹기 쉬울 수가 없었다.
[ 내 동생, 잠시 자리좀 비켜줄래? ]
한동안 말이 없던 루벤카가 드디어 입을 뗐다.
레나는 의문을 표하면서도 착실하게 루벤카의 말에 따랐고, 루벤카는 시야에서 사라진 레나를 확인하곤 조용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곧이어.
수백 권의 책이 꽂혀있는 책장이 한순간 거꾸로 뒤집어지고, 책이 한 권 한 권씩 공중으로 뽑혀 나온다. 촤르륵-소리를 내며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넘어간 책은, 예고도 없이 일어난 새빨간 화염에 게걸스레 집어삼켜진다.
곧이어 붉은 도깨비불 수백 개가 입체 홀로그램 속 화면을 가득 메운다.
결국 책장에 꽂혀있던 모든 책이 뽑혀나와 삽시간에 불타 사라지고, 책대신 검은 잿가루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 광경을 목도한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어쩌자고."
[ ······. ]
저런 식으로 나오면 여태껏 시종인 나는 '불편한 게 있으셨다면 죄송합니다' 라는 멘트를 입에 달고 살았었다.
설마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던 건가.
내가 홀로그램 너머의 루벤카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자기도 아차 했는지 황급히 고압적인 자세를 풀고는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 그게···그게 그러니까, 과거에 내가 많이 심했지? 레반 너한테 미안했다는 깊은 뜻을 담아서 책을 태워본 건데······. ]
"할 말 있으면 빨리 하고 꺼져라."
[ ······. ]
이제 주변에 더 태울 것도 없어 보이는 루벤카는 어떻게든 머리를 식히려는 듯, 눈썹을 파르르 떨며 눈을 감았다.
애초부터 이런 식의 일방적인 대화를 원한 것은 절대 아니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대화를 이어가며 의문스러운 내 실체를 캐보려 했을테지.
결국.
[ 아~모르겠다. ]
약 1분간 눈썹을 파르르 떨던 루벤카는 이제 도저히 못 버티겠다는 듯, 대마초 같은 풀을 귀 뒤에서 꺼내어 꼬나물고는 다리를 한껏 꼬아 앉았다.
[ 하 씨발~안 해보던 걸 하니까 적응이 안 돼서 도저히 못 하겠네. 정체가 뭐야 너? 그냥 시원하게 말해주면 안 되냐? ]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군. 악독한 년."
[ 뭐, 그걸 쉽게 말해 줄 리가 없지. 여하튼 내가 너를 보자고 한 이유는······. ]
루벤카는 오만한 얼굴로 풀떼기를 씹으며 말했다. 평소처럼 신경질적인 말투는 아니었는데, 나와 더 말을 섞었다간 감당할 수 없이 터져나오는 자신의 화가 레나의 신세를 망치리라 굳게 믿고 있을 것이다.
[ 당가에서 발할라까지 무인들을 보냈어. 벌레같은 것들이 귀찮게 굴길래 어쩔 수 없이 내가 몇 명 잡아 죽였으니까 이제 당가쪽에서도 바짝 독이 올라서 더 공격적으로 나올 거야. 몸조심하라고. ]
사천당가의 무인을 한낱 벌레 취급하는 루벤카의 말투에서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드높은지 느낄 수 있었다.
[ 설령 너희들이 재수없게 붙잡히게 되어도 나는 움직이지 않을 거야. 어차피 내가 간다고 한들 당가에서 너희들을 살려두지 않을 테니까. 내 발목을 잡는 손목이 있으면 그 손목을 썰어야지, 내 발목을 썰어버릴 수는 없는 일이잖아. ]
말버릇은 없어도 하는 말은 정답이다.
역시 인성이 비정상적인 계집이라 그런지, 나와 통하는 구석이 약간은 있다.
[ 그래도 지금 발할라 내의 여론은 나쁘지 않아. 이번 반 바이오 일로 무림계 기업에 대한 반감이 더 심해졌거든. 그러니 길어야 한 달이야. 존나게 대단하고 잘난 내가 어떻게든 너희를 외부로 빼 올 방법을 찾고 있으니까 눈에 띄는 짓 하지 말고 그 슬럼가에 잘 숨어 있으라고. 이상 전달 끝. 간다.]
뚝!
뭐라 답할 새도 없이 급하게 연결이 끊기고, 홀로그램 레이저는 잠시 파도처럼 꿀렁거리다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어쩐지 이미 꺼진 홀로그램 저편에서 분노로 치를 떠는 루벤카의 얼굴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필시 날 어찌 죽일지 고심하고 있겠지?
'음, 7레벨 이전에는 절대 만나면 안 되겠군.'
나는 곧장 반 루벤카와의 대화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리고 그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았을 때, 삼호문주 등평위에게서 웬 연락이 하나 왔다.
[ 대협! 지금 기루가 큰일났습니다. 요상한 안드로이드가 갑자기 나타나서 기루를 다 때려 부수고 있는데 좀 도와주십시오! ]
등평위는 전에 없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고 보니 이 빌딩 바깥으로 나갔던 것이 언제였던가? 날도 좋은데 루벤카를 마주한 탓에 불길해진 마음도 다스릴 겸 오랜만에 삼호문에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했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산보하며 기루로 향했다. 루벤카년을 조금이나마 골려준게 크게 기꺼워 크게 박장대소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기루 외벽의 디스플레이가 보인다.
늘 그렇듯, 흩날리는 꽃이 재생되고 있다.
등평위에게 연락을 받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루에 도착한 나는, 쨍한 소음이 들려오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안에서 느껴지는 힘의 파동이 어딘가 심상치 않았다. 온 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였다.
"?"
산책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왔건만.
내가 의문을 삼키며 기루에 발을 들이자 안에선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윗층 난간에서 아래를 보며 비명 지르는 안드로이드 기녀들이 보인다.
- 꺄아악!
- 꺄악!
획일화된 기녀들의 비명을 들으며 눈을 돌린다.
등평위가 말한 안드로이드가 저것들은 아닐 테고.
밤 시간대가 아니라 기루를 찾아온 손님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알싸한 주향이 채우고 있어야 할 기루 안은 격렬한 전투의 여파로 인해 먼지구덩이로 변해 있었다.
기이잉-
부서져 흩날리는 목재와 먼지구름 사이.
내 시야에 들어온 이형의 존재는 외형부터가 상당히 독특했다.
얇은 팔다리를 가진 인간형의 신체에 머리 위에는 중들이나 쓸법한 넓은 나무 삿갓을 쓰고 있는 휴머노이드. 혹은 안드로이드.
그 아래로 혈액처럼 붉게 빛나는 기계안광이 보였다.
남체인지 여체인지는 명확지 않았고, 전체적인 신체 파츠의 훼손도가 극심했다. 오랜세월 관리없이 방치되었는지, 오히려 멀쩡해 보이는 부위를 찾는 것이 더 힘든 수준.
놈은 하얀 돌같은 것을 꿴 염주들을 얇은 발목에 주렁주렁 두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굵은 줄에 허연 뭔가를 잔뜩 꿰어놓았는데 꿰어져 있는 것이 인간의 손가락뼈와 매우 흡사했다. 아니, 손가락 뼈가 분명했다.
인간의 손가락 뼈를 장식품 처럼 꿰어놓은 녀석의 행동거지는 평온하고 침착했다. 앞에서 칼이 날아오고 있는데도 말이다.
캉-! 카앙-!
내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등평위의 철선과 여량천의 검이 놈을 두들기고 있건만, 척 봐도 어림 없어 보인다. 칼끝은 놈의 근처조차 가지 못한채 튕겨 나가고 있었다.
한 눈에 보아도 고장나고 오래 되었으며 부서진 곳 투성이의 기계라지만, 말로 다 할 수 없는 이질감이 느껴졌다.
저런 존재가 왜 기루에서 깽판을 치고 있는가 고민하고 있자니, 이름없는 삼호문도 하나가 슬금슬금 다가와 설명 했다.
"갑자기 나타나서 진상 고철인줄 알고 내쫓으려 했는데, 보다시피 보통이 아닙니다."
그때, 저 앞에서 놈과 어울리며 칼을 휘두르던 여량천이 기세 좋게 엎어졌다. 물에 젖은 생쥐처럼 축 늘어져 있는 꼴이 여간 한심해 보이는 게 아니었다.
조금 더 멀뚱히 서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결론을 내렸다.
도시 밖의 황무지를 떠돌다가 이번의 모래폭풍을 타고 장벽 안으로 유입된 군용 안드로이드 혹은 오래전 대전쟁 시절에 버려진 무언가.
오랜 떠돌이 생활로 인해 보유하고 있던 화기는 힘을 잃었을 테고, 사출 블레이드같은 날붙이 무기만이 제대로 남아있을 터인데······.
"!?"
그 순간이었다.
등평위의 철선을 귀찮은 모기쫓듯 쳐내는 기계의 팔뚝에 작고 흐릿하게 새겨진 문구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Angulimara - 16
"······앙굴리마라?"
앙굴리마라.
시티 장벽 밖의 '방랑자' 들중 하나.
과거 대전쟁에서 활약한 대(對) 마법사용 전쟁병기. 그 기억속에서 잊혀져가는 이름을 입 밖으로 낸 것과 동시에 놈과 내 시선이 교차했다.
카앙-!
녀석은 끈질기게 달라붙던 등평위를 강하게 쳐내곤,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곧, 오랜 세월에 깎여 뭉개지고 깨어진 음성이 놈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 나의 의문을 풀어줄 마법사, 드디어 만나게 되었군요. ]
#36화. 열반을 좇아 방랑하는 안드로이드 2
#3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