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선계(仙界)의 시간도 빠르게 흘러갔다.
그동안 몇 번의 지구 선계 간 배송이 이루어졌고, 태주가 보낸 발모제로 제천대성의 털은 날로 풍성해졌다.
물론 그 털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신선이 있었지만.
오피스텔 모델하우스는 선계 핫 플레이스가 되었다.
"이 집이 선계와 천계에 만들어진단 말이오?"
"선계는 두 동이나 세 동 정도만 지을 거라 들었소. 하지만 천계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던데."
"24평이면 혼자 살기 딱 좋군."
"입주 조건은 어떻게? 청약 통장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황천계도 응모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야 상시 통로가 있어 선계에서 황천계로 출퇴근이 가능하니까···,"
그동안 신선들과 천인, 황천계 관리들은 집 욕심이 별로 없었다.
그까짓 것 있으면 뭘 해?
누우면 방이고, 하늘이 바로 천정인데.
그들도 생활하는 개인 거처가 있긴 했다.
그래봐야 토굴, 아니면 얼기설기 지어진 흙집이나 막집, 그나마 괜찮은 데가 나무와 풀로 지은 초가 정도.
그러나 이 오피스텔 모델하우스는 집 욕심이 안 생길래야 안 생길 수 없었다.
보자마자 혹했다.
커다란 전망 유리창, 푹신한 소파에 대형 TV가 달린 거실, 누우면 바로 잠이 올 듯한 안락한 침대의 침실, 양문형 냉장고, 오븐, 전자레인지가 빌트인으로 갖춰진 부엌, 화려한 타일로 장식된 욕실···,
모두가 기대했다.
최대한 빠르게 공사가 이루어지길.
모델하우스뿐만이 아니다.
무한공간에 들어갈 물건의 크기가 커졌다는 걸 깨달은 태주는 각종 대형 물건들을 보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대형 캠핑카.
크기가 버스만 하다.
하부엔 오픈형 컨버터블 스포츠카까지 장착되어 있었다.
이 밖에 덤프트럭, 대형 굴삭기 등 중장비도.
그 와중에 당군악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왜?
천선계 대규모 공사 계획 때문에?
아니다.
뜬금없이 시작한 공부 때문이었다.
마도 공학 수업.
당군악은 귀곡, 갈홍과 함께 황천계 업화궁에서 하루 종일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시험까지 쳤다.
한 문제라도 틀리면 온갖 핀잔을 다 들었고.
"신선이 그것도 외우지 못했소?"
"대체 등선은 어떻게 한 거요?"
"쯧쯧,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로 하는 법인데."
"참을성이 없어. 참을성이! 태주 대협 보기 부끄럽지 않나? 갑자기 영혼 연결이 이루어지면 어쩌려고?"
"지구였다면 대학도 못 갔을 게 뻔해."
"···태주도 대학은 안 나왔는데."
"어허! 핑계 대지 맙시다. 추해 보이오."
연일 계속되는 스파르타식 암기 학습.
그 결과 마도 공학의 기초 개념을 완전히 습득했다.
남은 건 심화 학습.
이미 귀곡과 갈홍은 심화 과정도 다 익혔다.
심지어 술법과 마도 공학을 결합해서 아티팩트 시제품까지 만드는 중이었다.
고생하는 건 당군악뿐이 아니다.
염라도 죽을 맛이었다.
초혼령으로 자크 델루안의 기억들을 불러내야 하니까.
이렇게 하는 목적이 뭘까?
첫째, 영혼 매개 차원 게이트를 손수 만들기 위해.
그리하여 태주 대협에게 보낸다.
그가 사용하면 선계 독선 앞에 게이트가 열린다.
독선만 넘어가지 않으면 영혼 합쳐짐 현상 같은 건 없다.
검선이 그랬던 것처럼 지구로 넘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둘째, 당군악을 마도 공학 전문가로 육성하여 차후 태주와의 영혼 연결이 이루어졌을 때 습득한 지식 전부를 고스란히 넘겨주기 위해.
마도 공학은 꽤 쓸만한 학문이다.
그래서 당군악은 힘든 상황에서도 군말 없이 익히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한계에 다다랐다.
좀 쉬면서 하자.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다.
그럼 쉴 명분을 찾아야 하는데···,
"우리 상위계 친목 도모를 위해 축구대회나 개최해 봅시다."
"축구? 공부 안 하려는 핑계는 아니고?"
"공놀이 같은 걸 해서 뭘 하려고?"
"뭐, 싫으면 하지 말든가, 상품도 거하게 풀 생각이었는데."
순간 귀곡과 갈홍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사, 상품?"
"···뭘 준비했소?"
걸려들었다.
상품은 참을 수 없겠지.
당군악은 태주가 배송해준 모든 지구 물품을 다 내어놓지 않았다.
잡다한 물건들이야 상시적으로 판매하지만, 수량이 적거나, 비싸고 귀한 물건들은 무한공간에 고이 모셔두고 있었다.
그걸 상품으로 내건다면?
"예를 들어 거액의 선도 코인이나···,"
"음?"
"아니면 선계 전용 스마트폰과 연동되는 최신 스마트 워치라든지,"
"오!"
"태주가 보내준 대형 캠핑카도."
"허억!"
"선계 오피스텔 모델하우스 입주권은 어떻소? 어차피 볼 사람 다 봤으니 누구 하나 거기서 자리 잡고 살아도 될 텐데."
"다, 당장 합시다."
"암! 적당한 휴식도 학습에 도움이 되는 법이니."
그리하여 상위계 전체에 친목 도모를 위한 전체 축구대회가 공지됐다.
처음엔 반응이 그리 좋지 못했다.
여기가 지구도 아니고, 무슨 축구대회?
하지만 막대한 상품이 걸렸다는 게 알려지자 상위계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황천계에선 염라대왕이 비상 회의를 소집했다.
"축구대회 상품이 뭐라고?"
"총상금 1,000만의 선도 코인과 대형 캠핑카, 스마트 시계, 대형 리무진, SUV도 걸려있다고 합니다."
"허어!"
"특히 최우수 MVP에겐 오피스텔 모델하우스 입주권을 준다고···,"
염라의 눈이 활활 타올랐다.
축구대회 참석팀은 천계, 선계, 황천계, 3팀밖에 안 된다.
거기서 1등을 못 한다고?
그럼 죽어야지.
강림차사도 자신에 찬 표정.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승은 우리 겁니다."
"그래도 방심하지 말고, 오늘부터 연습에 돌입해. 명단은 짰나?"
"네!"
천계에선 상제와 탁탑신장이,
"육체 이외의 힘은 봉인될 것이 뻔합니다."
"그렇지. 원숭이가 분신을 불러내 공을 차면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육체만으로 따지면 우리 신장들이 유리합니다. 1등은 떼 놓은 당상입니다."
"그래도 방심하지 말게. 신선들이 좀 유별난 놈들인가?"
"그렇지 않아도 예의 주시하고 있습니다."
선계에선 검선을 비롯한 신선들이 옹기종기 모였다.
"무림계 신선들은 무조건 1군이오."
"내공이나 선기는 쓸 수 없으니 외공이나 초식 연습해두고."
"뭐, 초식은 몸으로 기억하고 있소만."
"흐흐, 축구는 전술이지. 포메이션만 제대로 짜면 무조건 이겨."
단주 선인이 슬며시 손을 들며 물었다.
"···반칙도 필요하지 않을까?"
"아니, 그럼 반칙 안 하려 했소?"
"당연한 소릴···"
"그게 승패를 가르는 기준이야."
"헐리우드 액션 연습도 하고."
신선들은 이미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제천대성이 선계의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육신의 힘으로만 축구를 한다고 가정하면 인간이 원숭이의 스피드를 어떻게 이겨?
"황천계 애들은 연초에 찌든 놈들이라 전반전만 뛰어도 헐떡일 테니, 우리 경쟁자는 천계라오."
"에이, 그 무식한 천계 신장들이? 축구도 머리가 좋아야 하는 법."
"근데 황천계에서 천마와 혈마가 출전한다는 소문이···,"
"응? 걔들은 죄인이잖소. 부정 선수 아닌가?"
"지옥 관리인으로 승격한 지 오래요. 그럼 자격은 있으니까."
"···제기랄."
어쩔 수 없다.
"결국 반칙만이 살길이요. 교묘하게!"
"그러다 걸리면?"
"우겨야지! 목소리만 크면 다 이길 수 있잖소."
"심판 따위가 뭐가 두려워? 심판도 제끼면 돼!"
하지만 녹록하지 않았다.
독선, 염라, 상제가 합의해서 내세운 주심이 바로···,
"안녕하세요오! 심판 왔어요오! 열심히 할게요오오!"
해맑 선녀였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 부심은 하선고와 오도 판관이 맡았다.
< 공부도 좋지만 쉬어가면서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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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위계 축구대회는…, >
백서연은 후지 그룹의 계열사들을 주워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각 회사마다 인수 실사팀을 보내고, 현장 조사도 나가고.
그녀는 요즘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그럴 수밖에.
백서연은 과거 미리내 그룹을 그만두고 뉴서울에서 구례로 내려왔을 때부터 굳게 다짐했었다.
태홍 바이오, 아니 티제이 바이오를 삼한제국 최고의 대기업으로 만들겠노라고.
그 목표들이 속속 이루어지는 판인데, 어떻게 기분이 안 좋을 수 있을까?
티제이 그룹의 계열사들이 갑자기 늘어났다.
방심하지 말고 기틀을 단단히 다져야 한다.
"옥석을 걸러내야 합니다. 회장님, 정부 원칙은 완전 고용승계지만···,"
태주도 동의했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야지.
정부의 완전 고용승계 원칙도 하위직 고용자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그들은 정리해고하지 않고 오히려 처우를 개선해줄 계획.
"임원진들을 우리 사람들로 교체하세요. 필요하다면 밑에서 평판 좋은 과장급이나 팀장들 승진시켜 올리고."
"네, 알겠습니다."
"전 잠시 출장 다녀올게요. 나머진 알아서 해주세요."
"어디로 가시는지···,"
"금방 갔다 올 겁니다."
그리고 백서연에게 안겨 츄르를 빨고 있는 일백이에게.
"너, 요즘 살찐 거 같다?"
"···냥?"
"뒤룩뒤룩 돼지 새끼."
"냐앙!"
"부정하지 마라. 간식 그만 먹고 나랑 어디 좀 가자."
"냥!"
일백이가 펄쩍 뛰어 태주의 어깨 위로 올라왔다.
"어우, 어깨 내려앉겠네."
"냐아아아···,"
지금 갈 곳은 버려진 중국 땅이었다.
이미 결심했다.
비욘드 엘리트 마수를 레이드하기로.
지금 만리비검을 타고 가는 목적은 사전 답사.
쐐애애액!
태주가 처음 만났던 비욘드 엘리트는?
식별번호 BEM – C04, 일명 흑악지룡(黑惡地龍)이었다.
당시 북경 천리장벽을 향한 놈의 갑작스러운 북상에 삼한제국 전체가 발칵 뒤집혔었다.
태주도 놈의 부식독을 채취하기 위해 맞서다가 죽을 뻔했고.
다행히 혼원무상독령공이 9성으로 오르고 난뒤, 단주 선인의 부적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처리하긴 했지만.
사실 흑악지룡은 비욘드 엘리트 중 최약체.
게다가 놈은 혼자였다.
원래 비욘드 엘리트 마수는 한 지역을 다스리는 군주나 마찬가지.
즉 거느리는 부하가 많다.
흑악지룡은 세력다툼에서 밀려 도망치듯 북상했기에 혼자여서 잡는 것이 가능했다.
'이쯤이었나?'
흑악지룡과 마주친 데가.
그럼 더 내려가보자.
놈이 어디서 쫓겨왔는지.
쐐액!
그렇게 한참을 내려갔는데···,
거대한 강줄기가 보였다.
넓게 펼쳐진 들판, 원래는 곡창지대였어야 할 대평원이 셀 수도 없이 많은 마수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뭐가 이리 많아?'
그리고 저 멀리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기운.
"···미친!"
"캬악!"
느껴지는 기세만 해도 흑악지룡보다 더 강했다.
심지어 사하라 초원의 거울 게이트에서 나왔던 거대 괴수보다 훨씬 더.
저게 제 영역만 지키는 마수라 망정이지, 만약 제멋대로 이동한다면?
상당히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놈의 거대한 형체가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미끈한 외뿔이 달린 머리가 두 개씩이나.
'저놈 식별번호가 뭐였더라?'
비욘드 엘리트 마수의 특징.
각각의 크기와 성향은 다양하지만 최종 생김새는 뱀이나 용과 비슷하다.
어떤 마수로부터 진화해도 말이다.
아무튼 검색해보니.
'BEM – C09, 쌍두마룡(雙頭魔龍) 같아.'
아마 쌍두마룡이 흑악지룡을 쫓아냈을 것이다.
"만만치 않아."
"···냥!"
부하 마수들도 수두룩하고.
그냥 엘리트 마수 밭이었다.
일반 마수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일이삼백이가 백업을 해주면 되겠지만···,
'한 명 더 데리고 와도 괜찮지 않을까?'
예를 들어 지구의 검후 말이다.
'군대는 안 돼.'
여긴 마수 밀집 지대다.
현대 화기는 다른 비욘드 엘리트를 자극할지도 모른다.
'쌍두마룡부터 레이드 해보자.'
못 할 게 뭐가 있어?
태주 또한 흑악지룡을 해치웠을 때보다 훨씬 강해졌다.
'암기가 더 필요하겠어.'
가공되지 않은 흑암철 주괴로는 한계가 있다.
최소 백만 단위 이상의 날붙이 암기.
제작은 황궁의 도움을 받으면 되겠고.
만약 쌍두마룡 레이드에 성공해서 비욘드 엘리트 마나 결정체를 획득하면?
'선계로 보내야지.'
지구보다 더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빈센트가 사라짐에 따라 명맥이 끊긴 마도 공학은 다른 세상, 선계에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 ※ ※
선계, 천계, 황천계 대표팀들이 구성됐다.
단순한 축구 경기가 아니었다.
각자 자존심이 걸린 전쟁과도 같았다.
그래서 유니폼 선정과 선수 명단 제출부터 첨예한 대립이었다.
"왜 황천계가 검은색 유니폼을 입어야 하는지, 그건 편견이야. 우린 흰색을 입겠소."
"쯧쯧, 사자나 차사가 늘 입고 다니는 옷이 검정색 아닌가?"
"맞아, 지금도 시커먼 도포 입고 있으면서."
"···그, 그건, 그런데 선계는 왜 빨간색을?"
"삼한제국 대표팀 상징이 빨간색이니까, 뭐, 불만 있소?"
선수 명단 제출 과정에서도,
"천마와 혈마 새끼는 너무하잖아. 얘들이 자격이나 있는지 모르겠군."
"선계 월드 건설에 공헌한 놈들이오. 그래서 승진시켰소만?"
"죄인인데?"
"지금은 준 관리지, 갱생의 여지도 있고, 그리고 원래 사자들도 죄인 중에서 뽑는 법."
황천계도 트집을 잡았다.
"그럼 제천대성은? 원숭이가 신선인가?"
"여래계에서 넘겨줬잖소. 그리고 배달의 선계 사장이고, 건실한 기업인을 이런 식으로 매도하겠다고?"
"건실한 기업가가 신선과 무슨 상관인데."
"지금 차별하는 거요? 원숭이는 신선 되면 안 돼?"
다들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결국은,
"싸우지 마세요오! 선수 명단 다 인정합니다아."
"···음, 그럼 뭐."
"그렇게 합시다."
해맑이 나서자 그제야 조용해졌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천계 신장들이 잔디를 깔아 축구 경기장을 만드는 와중에도.
"술법진도 다 완성했소. 육체의 힘 말고는 모든 게 제한될 거요."
"흥! 누가 믿어? 선계에서도 술법진 보강 작업하겠소."
"당신들이? 난 선계 보강 작업이 더 믿을 수 없는데? 그럼 우리 황천계도 참여하겠소이다."
"허허허, 이렇게 나오시겠다? 그럼 천계 신장들이 마지막 점검을···,"
"한번 했으면서 또 해? 좋다. 아예 경기장은 진법으로 뒤집어 씌워버려."
"오케이! 콜! 끝까지 가보자고."
천계와 황천계가 이렇게 집요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신선들 때문.
이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애초에 불안 요소의 싹을 잘라놓아야 한다.
그 요란한 기세 다툼에 당군악은 잠자코 있었다.
속은 답답해서 썩어들어갈 지경이지만.
'···죄다 망나니뿐이야.'
같은 신선이라는 게 부끄러울 지경.
상위계 친목 도모를 위해 경기를 개최했는데, 이러다 제대로 경기나 치를 수 있을까?
차라리 공부하는 게 나았을 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맑 선녀를 심판으로 선임한 것이 신의 한 수.
그녀가 나서자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됐다.
"해맑이 아니었으면 내가 그냥 안 넘어갔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오."
"그만 좀 합시다. 천인들 보기 부끄럽지 않소?"
유니폼, 선수 명단도 확정됐으니, 남은 건 대진표.
3팀이라 짝이 맞질 않는다.
하는 수 없이 한팀은 부전승.
뽑기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해맑 선녀가 나섰다.
무게와 크기가 똑같은, 각기 색깔이 다른 3개의 공을 상자에 넣고 눈을 가린 해맑이 손을 넣어 뽑으니,
"흰색이에요오!!!"
탁탑신장을 비롯한 천계 팀 선수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만세!"
"바로 결승이다!"
"역시 천지신명의 가호는 우리 천계를 향해 있구나."
"아무나 올라오시오. 가볍게 내려보내 줄 테니."
신선들과 황천계 관리들의 얼굴을 한껏 찌그러졌다.
"안 돼! 이거 뭐가 잘못된 거야! 다시 해!"
"해맑이가 뽑은 건데?"
"잘못됐나요오?"
"···."
"···."
간신히 첫 번째 경기.
축구 규칙이야 다 알고 있다.
이전에 천인, 신선, 황천계 관리들이 서로 어울려 풋살이나 축구 경기를 한 적도 많고,
신선들이 둥글게 모여 승리를 다짐했다.
"사실상 결승전이나 다름없소. 황천계 놈들만 이기면 끝나."
황천계도 그렇게 생각했다.
"검선하고 원숭이를 중점 마크해야 해. 나머진 허수아비일 뿐이야."
휘이익!!!
휘슬이 울리고 경기가 시작됐다.
검선을 의식해 집중 압박 수비에 들어간 황천계 관리들.
"참나, 강림, 밀착 마크도 정도가 있지, 두 명이나 붙어?"
"···그야 제일 위험하니까요."
그러나 선기를 봉인해도, 내공을 쓰지 못해도, 검선은 검선이었다.
스팟!
먼저 재빠른 몸놀림으로 압박에서 벗어났다.
그 틈을 노려 삼봉 선인이 가볍게 패스하자,
투욱!
검선이 마치 중원의 사령관처럼 손을 들어 외쳤다.
"원숭아! 달려라!!!"
파바바바바밧!
엄청난 스피드였다.
순식간에 중앙선을 넘어 상대편 골대로 달려가는 제천대성.
뻥!
검선이 찬 공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제천대성에게 정확하게 배송됐다.
너무 높나?
아니었다.
파앗!
제천대성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동시에 공보다 더 위에서 공중제비를 돌며 헤딩으로 찍어내렸다.
퍼억!
스팟! 출렁!
완벽한 헤딩슛.
골키퍼가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축구공은 골망을 흔들었다.
"우끼긱! 내가 넣었다!"
"들어갔다!!!"
"우리 원숭이가 최고야! 암!"
"경기 끝나면 바나나 우유 실컷 사주마!"
"십 대 빵으로 끝내버립시다."
제천대성이 유니폼을 벗어들고 기쁨에 겨워 검선에게 달려갔다.
"우끽, 최고의 어시스트요!"
"이리 오너라! 원숭아!"
검선도 두 팔을 벌려 그를 맞이했다.
하지만,
삐이이익!
부심 오도 판관이 깃발을 들자 해맑이 호각을 불었다.
"오프사이드입니다아아!!!"
"···뭐?"
"어?"
"왜?"
호각은 해맑이 불었지만, 신선들은 험악한 기세로 오도 판관에게 달려갔다.
"씨발, 눈이 삐었나?"
"오도 판관, 지금 같은 황천계라고 편들어주는 거요?"
"뭐 먹었어? 염라가 코인 주겠다고 약속하든가?"
"VAR 틀어!"
비디오 판정?
당연히 가능하다.
경기장 주변에 설치된 스마트폰이 몇 개인데.
"자! 확인해보세요오!"
"···어?"
오프사이드가 맞다.
그것도 황천계 수비진에 의해 철저하게 계산된,
"무슨?"
"아니 동네 조기 축구에, 오프사이드 트랩?"
누가 수비진을 지휘하는지도 알았다.
"···천마로군."
"아!"
"저 새끼···,"
깜빡 잊었다.
천마도 영혼 연결자, 그것도 지구의 같은 영혼과 연결한.
당연히 축구에 대해서 잘 알 터.
또 천마도 대군을 지휘한 경험이 있던 마교의 우두머리.
이때부터 선계 팀에게 악몽이 펼쳐졌다.
천마가 이끄는 수비진은 공포였다.
황천계 팀의 강점은 조직력.
치밀하게 준비했는지 손발이 착착 맞았다.
천마의 손짓에 따라 일자 수비 형태로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오프사이드 트랩을, 더불어 차사와 사자들의 압박 수비도.
혈마도 한몫했다.
제천대성이나 빠른 발.
뛰어난 개인기로 신선들을 젖히며 선계 팀 수비진을 괴롭혔다.
센터백 포지션의 단주 선인은 초조했다.
생각 같아선 부적을 날려 저 쥐새끼 혈마를 꽁꽁 묶어버리고 싶지만 선기가 봉쇄되어 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이놈!"
단주 선인이 혈마의 옆에 바짝 붙었다.
신경도 쓰지 않고 가볍게 공을 타악! 앞으로 보내면서 치고 달리는 혈마.
순간!
"어이쿠!!!"
단주 선인이 경기장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아아아악! 발목이···,"
귀를 찢을 듯한 비명도.
신선들이 저마다 두 손을 번쩍 올리며 부심에게 항의했다.
"하선고, 뭐 하느냐?"
"왜 깃발을 안 들어?"
"반칙이잖아!"
"우리가 남이야?"
하선고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이 우습지도 않은 상황을 해결해줄 존재가 저 멀리서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도도도도!
머리에 형형색색을 꽃을 달고 씩씩하게 뛰어오는 해맑 선녀.
"단주 선인님!"
"으응? 해, 해맑이구나. 혀, 혈마 놈이 날···,"
"다 봤어요오! 일어나세요오!"
"보, 보다니?"
"서로 부딪치지도 않았잖아요오."
"···아, 아니, 그게!"
"어휴,"
해맑이 한숨을 쉬었다.
"헐리우드에요오."
"···."
"거짓말은 나쁜 짓이에요오."
"···."
당황한 단주 선인이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험험, 해맑이 말이 맞아."
"빨리 일어나시오. 쪽팔리니까."
"사기를 칠 거면 감쪽같이 해야지."
"쯧쯧, 내가 봐도 허술했어."
그러자 단주도 벌떡 일어나서,
"허허, 발을 헛디뎠나 보군. 난 멀쩡하오."
물론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해맑 선녀는 머리에서 노란색 꽃을 뽑아 단주 선인에게 내밀었다.
"경고오오!"
"···."
하필 해맑이 심판이라니.
어떻게 항의도 할 수 없고.
이러나 지는 게 아닐까?
무슨 수를 내야만 했다.
매화 선인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내가 총대를 메겠소."
검선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숭고한 희생이 우리 승리의 밑거름이 될 거요. 부디 건투를!"
다시 시작된 경기.
투톱을 이룬 검선과 제천대성의 티키타카 패스가 천마에게 차단당하자,
파바바바박!
매화 선인이 이를 악물고 달렸다.
천마에게 가까이 달려가 미끄러지듯이 슬라이딩하면서,
스파앗!
발을 높게 들고 복숭아뼈를 향해 강하게 태클!
콰직!
"아아아악!"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천마가 공중에서 2바퀴나 돌며 땅에 떨어졌다.
"저런!"
"천마 새끼네, 저거 헐리우드 액션이야."
"엄살 부리지 말고 일어나라!"
"의, 의료진!"
"어허, 의료진은 무슨, 상처 치유하지 마시오. 처음부터 육신의 힘만으로 하기로 약조했으니."
"이, 이런 양아치 같은!"
또 해맑이 다다다닥! 달려왔다.
삐이이익!
그리고 정색한 표정으로 머리에서 빨간 꽃을 뽑아.
"매화 선인니임!!! 퇴장입니다아!"
"···미, 미안하오."
매화 선인은 고개를 푹 숙였다.
반칙한 것 때문에?
아니다.
해맑 선녀가 자신을 꾸짖는 눈빛이었기 때문이다.
해맑이 자신을 질책하다니,
매우 타격감이 컸다.
그러나 대의를 위해선 어쩔 수 없다.
매화 선인은 퇴장, 천마는 교체.
하지만 선계 팀은 멈추지 않았다.
슈우우웃!
혈마를 향해 곤륜 선인의 잔인한 후방 태클이 또 한 번 들어왔다.
사실 혈마도 예상하고 있었다.
천마가 이렇게 당했는데
살포시 폴짝 뛰어서 태클을 피하려는 순간,
"헉!"
어느틈에 나타난 삼봉 선인이 마주 뛰어올라 몸을 회전시켰다.
휘리릭!
동시에 팔꿈치로 혈마의 인중을 그대로 강타.
파앗!
콰직!
"끄어어억!"
실로 아름다운 팔꿈치 공격이었다.
삐이이익!
"둘 다 퇴장이요오!"
미간을 찌푸린 해맑이 매서운 눈초리로 빨간 꽃을 두 개나 들이밀었고,
"야이, 싯팔 새끼들아!!!"
분노에 찬 염라대왕이 경기장 안으로 난입했다.
판관들도 뒤를 따랐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니들이 신선이야? 깡패도 이런 짓 안 해!"
"이게 축구냐?"
"소림축구도 이보다는 평화롭겠다."
"다 지옥으로 처넣어버려!"
그에 질세라, 태상노군을 비롯한 신선들도 우르르 뛰쳐나왔다.
"뭐? 뭐?"
"경기하다 보면 이럴 수도 있지."
"정당한 몸 싸움이구만."
"맞은 놈이 잘못 아닌가? 왕년에 혈마 교주라면서 그걸 못 피해?"
"엄살도 정도가 있지, 툭 건들면 픽 넘어져? 인간계에선 산봉우리도 무너뜨리던 놈이."
서왕모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짚었다.
상제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당군악은 뼛속 깊이 후회했다.
상위계 축구대회는···,
개판이었다.
< 상위계 축구대회는…, > 끝
ⓒ 꾸찌꾸찌
=======================================
< 당신들 말고 내가. >
친목 도모를 위한 상위계 축구대회가 막을 내렸다.
그렇다면 우승팀은?
없었다.
결승전도 치러지지 않았다.
심지어 1차 경기 승리 팀도 없었다.
아수라장으로 변한 경기.
공이 아닌 상대의 발목과 머리통을 걷어차는 개막장 축구.
염라와 황천계 관리들이 분기탱천하며 몰려나왔고, 역시 맞대응을 위해 태상노군과 신선들이 뛰쳐나왔다.
내공과 선기, 신력, 법력이 봉인된 경기장이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름다운 폭력이 오고 가는 상위계 대전투가 벌어졌을지도 모를 일.
당연히, 마음씨 착한 해맑 선녀에겐 크나큰 충격이었다.
심지어 경기장에 주저앉아 엉엉, 대성통곡을 해댔다.
"으아아아앙, 나 안 해요오오! 안 할 거예요오! 이게 뭐야아아!"
해맑이 울음을 터뜨리자 신선들과 황천계 관리들이 화들짝 놀라며 달려왔다.
"해, 해맑 선녀, 우리가 잘못했소. 다신 안 그럴 테니 기분 푸시오."
그러나 달래도 소용없었다.
"싫어요오! 울 거에요오! 공이 아니라 사람을 막 차고···,"
"그, 그게 신선 놈들이 먼저···,"
"신선 놈? 이익! 교활한 황천 놈들아, 애초에 죄인을 선수로 기용한 게···,"
"으아아앙!"
해맑이 심판을 안 한다?
그럼 할 사람이 없다.
상제도, 서왕모도, 용왕을 불러온다고 해도 누가 맡겠나?
이보다 더 심한 참사가 벌어질 게 뻔한데.
여기서 끝낼 수밖에.
하지만 이 사태의 주역들인 검선과 신선 축구팀은 모른 체 딴청만 피워댔다.
"거, 축구 경기, 처음 누가 먼저 하자고 했소?"
"누구긴, 독선이지. 공부하기 싫다고 억지로 개최한 경기잖소."
"독선이 잘못했군."
"맞소. 독선이 책임져야 하오."
"신선이 무슨 축구야?"
"난 애초에 할 마음도 없었어."
"독선, 사죄의 의미로 전 품목 90% 세일 들어갑시다. 그럼 용서해주겠소."
당군악은 부들부들 치를 떨었다.
이런 망할 양아치 신선들 같으니라고.
저자들이 어떻게 우화등선했을까?
선계의 풀리지 않은 미스테리였다.
아무튼 축구대회는 한 경기도 치르지 못하고 종료됐다.
우승에 걸린 상품들도 붕 떠버렸고.
모두 허망하게 돌아가려던 찰나,
상제가 은근슬쩍 당군악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해맑이는 걱정 말게. 담아두는 애가 아니야. 저러다가 어느새 방실방실 웃고 다닐 테니."
"상처가 남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렴! ···그나저나 선계에 설치된 오피스텔 모델하우스 말일세."
"네."
"천계로 옮겨가면 안 되겠나?"
"···."
이 와중에?
"···왜 그러시는지요?"
"자미궁에 설치하려고, 아직 구경 못 한 천인들이 많아서."
당군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히려 좋다.
신선들 눈앞에서 치워버리자.
"그리하시지요."
"오! 고맙네."
서왕모도 대형 캠핑카 구매를 제안했다.
오피스텔과 마찬가지로 거주 시설이 완벽하게 꾸며진 이동 수단, 도화궁보다 훨씬 더 좋다.
"최상품 선도 500개, 상품 선도 2,000개면 어때요?"
"흐음,"
이참에 팔아버리자.
신선들이 캠핑카를 본 이상 가만히 있을까?
한번 타보고 싶다니, 같이 놀러 가자니 조를 게 뻔하다.
또한 괜찮은 제안이다.
하품 선도는 한두 달만 익히면 충분하지만 상품은 최소 3년, 최상품은 10년을 나무에 매달려 있어야 한다.
선도로 바꾸어서 태주에게 보내는 게 속 편하다.
"얼른 가져가십시오. 왕모."
"호호호, 선도는 미호를 통해 보내드릴게요."
진작에 이럴 걸 그랬다.
축구대회는 무슨!
※ ※ ※
한편 신선들은 심통이 잔뜩 났다.
캠핑카도 놓쳐버렸고, 오피스텔 모델하우스 입주권도 물 건너갔고, 선계 쇼핑몰 90% 세일 협박도 통하지 않았으니까.
당연히 당군악에게 불똥이 튀었다.
"대회도 끝났으니 독선에게 마도 공학 공부나 시킵시다."
"오늘부터 밤샘이오."
"평가도 엄격하게 하시오. 중간 기말 쪽지 시험까지, 조별 과제···, 아니 발표도 시키고."
"점수가 안 좋으면 나머지 공부도 해야 하오."
"우리가 독선이 미워서 그러나? 이게 다 태주 대협을 위한 거지, 암!"
당군악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지켜보자.
어디까지 가는지.
"그나저나 귀곡, 게이트 발생기는 다 만들었나?"
"에너지원만 확보하면···, 그것도 시간 문제긴 하오."
"다음 차례는 누구지?"
"검선이야 한번 다녀왔고, 독선은···, 험험, 절대 넘어가면 안 되니까."
"맞아. 독선은 안 돼."
"그럼 큰일 나지."
"우리끼리 제비뽑기나 합시다. 독선 빼고."
웃기고 자빠졌다.
자신을 바보로 알고 있다.
'날 뺀다는 소리를 아주 당연하게 하고 앉았군.'
계속 겁을 주며 최면처럼 주입하고 있었다.
독선은 넘어가면 안 돼, 자칫하면 영혼 합쳐짐이 일어나.
당신은 가만있어.
어쩔 수 없으니 우리가 대신 넘어가겠다.
'웃기는 개수작이지. 나라고 왜 못 넘어가?'
태주도 그렇고, 자신도 그렇고.
영혼 매개 거울 게이트의 속박은 충분히 끊을 수 있다.
게이트가 열리면 그냥 멀리 떨어지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뭐가 어려워?
'날 너무 만만히 보고 있어.'
축구대회 망쳐 놓고도 뻔뻔하게.
이 기회에 버르장머릴 고쳐놓아야겠다.
자신은 태주와 같은 영혼, 그래서 반은 지구인이나 마찬가지여서 신선들에게 기회를 주고자 했지만···, 이젠 배려할 필요가 없다.
'귀곡과 갈홍이 발생기를 다 만들면···,'
빈센트 모레티가 가지고 온 아공간 가방 10개.
그 안엔 골렘 말고도 영혼 매개 거울 게이트 발생기의 재료들이 들어있었다.
만드는 방법이야 알아냈으니 그대로 따라 하면 쉽게 제작할 것이고.
남은 과제는 발생기를 가동할 에너지원.
그것도 아공간에 재료가 있다.
약 3천여 개의 엘리트 마나 결정체.
빈센트가 그랬던 것처럼 이걸 압축하면 끝.
생각보다 쉽다.
선계에 지구 과학 장비는 없어도 대신 보패가 있다.
보패를 이용해 가열, 압축, 재결정화 과정을 거치면 끝.
즉 곧 지구로 넘어갈 수 있다는 의미.
차원 발생기는 일방통행.
당군악이 선계에서 발동하면 태주가 여길 오게 될 것이고, 태주가 지구에서 발동하면 신선들이 지구로 넘어갈 수 있다.
당연히 태주가 지구에서 발동하도록 배송을 통해 넘겨줄 터.
'다음 차례를 지들끼리 제비뽑기로 정한다고?'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지들만 넘어갈 생각.
지금도 꿈꾸고 있을 것이다.
지구로 가서 태주를 만나 블랙 카드를 받고, 검선처럼 클럽도 가고, 드라마나 영화의 배우도 만나며, 백화점 가서 쇼핑도 하고,
하지만 턱도 없다.
헛된 꿈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다음 차례는 바로 나야.'
신선들 뒤통수칠 마음에 가슴이 웅장해진다.
너무나 짜릿하다.
등선하기 전 절대독마의 본성이 스멀스멀 기어나왔다.
'흐흐흐, 결정적인 순간에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너무나 궁금···,'
멈칫!
불현듯 든 생각.
'흠···, 하아···,'
갑자기 미치기라도 했는지,
신선들 골탕 먹일 생각하니 좋아서 죽을 지경.
왜 이따위 걸 가지고 이렇게 즐거워하고 있지?
확실히 정상은 아닌데.
'설마 내가 물들었나?'
양아치 신선들처럼?
그들과 비슷해지고 있다고?
당군악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아직 거기까진 가지 않았어.'
애써 부정했다.
아마도 기분 탓일 것이다.
이런 속마음도 모른 채 귀곡과 갈홍은 연일 엘리트 마나 결정체 3천 개 압축 합성에 박차를 가했다.
태상노군의 보패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선약정(仙藥鼎)이라고 불리는 무쇠솥이다.
단약을 만드는 솥.
거기에 엘리트 마나 결정체를 곱게 갈아서 가열하여 불필요한 기운은 날리고, 엑기스만으로 결정체를 재구성하면 된다.
그리하여 결국,
영혼 매개 거울 차원 게이트 에너지원인 짝퉁 드래곤 하트를 완성해냈다.
"만들었소!!!"
"가즈아!"
"드디어 지구로 또 간다."
"이게 에너지원이오?"
"전에 태주 대협이 보내온 짝퉁 여의주와 비슷하군."
신선들은 축제 분위기.
"빨리 제비뽑기 합시다."
"뭐, 느긋하게 해도 괜찮지 않소. 어차피 순번이 다가오면 한 번씩 다 가게 될 테니."
"지구로 넘어가면 에너지원 재료 구해오는 거 잊지 말고,"
그리고 당군악에게 넘겨주면서.
"자자, 독선, 다음 배송 때 잊지 말고 태주 대협에게 꼭 보내주시오."
"···알았소."
그래, 좋다.
지구로 가보자.
'당신들 말고 내가.'
시간이 흐르고,
찌르르,
배송 신호가 떴다.
당군악은 영혼 매개 거울 게이트를 공유창고에 집어넣었다.
물론 정성껏 쓴 편지도.
※ ※ ※
태주는 황궁으로 입궁했다.
황제와 금수호 덕분에 후지 그룹 알짜 계열사를 거의 헐값에 매입해서, 감사하다는 인사도 할 겸,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그것 가지고."
"정치적으로 부담이 크셨을 텐데,"
"흐흐흐, 감히 누가 나에게 뭐라고 할까, 회사들이야 제 주인 찾아간 거지."
따로 부탁할 일도 있고.
"이게 흑암철 주괴라는 겁니다. 컨테이너선 밑창에 사용되는 금속이죠."
"아! 이거 이름이 흑암철이었군. 근데 이걸 왜?"
"이걸 모조리 탈명비도로 만들어 보려고요. 황궁에 소속된 장인 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응? 1만 개를? 자네 어디 전쟁이라도 하러 가는가?"
"전쟁은 아니고···."
태주는 옛 중국 땅 비욘드 엘리트 마수 솔로 레이드 계획을 밝혔다.
"뭐라고?"
"비, 비욘드 엘리트? 아무리 자네라고 해도 그건···,"
"안 돼! 난 반대하겠네. 위험부담이 너무 커."
"제국군 총동원령을 내려서 군사 작전과 병행하면 모를까."
"맞아. 차라리 그게 낫겠어."
군사 작전은 오히려 번거롭다.
"중국 땅 전역이 거의 마수 밀집지대잖아요. 군대가 진입하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인명피해도 클 겁니다. 조용히 잡고 빠질게요."
"···조용히 잡고 빠져? 허허, 비욘드 엘리트 마수가 무슨 긴꼬리 쎅토끼인가? 비욘드는 용과 다름없네. 물론 자네가 흑악지룡을 잡은 건 알고 있네만, 그건 가장 약한 놈이었어. 또 혼자였고."
황제는 열변을 토하며 반대했다.
하지만 금수호는 다른 생각.
혼자가 아니라 둘이면 가능할 수도.
"김회장, 혹시 그분과 함께하는가?"
"그분이라뇨?"
"거기, 경찰서에서, 도, 동빈이라는 분."
"아!"
검선을 말하는 모양.
"동빈님은 살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셨습니다."
"허어, 그렇다면 진짜 자네 혼자서?"
"네."
"그럼 나도 반댈세. 절대 안 돼!"
황제와 금수호의 반대도 이해가 가지만···,
태주는 픽, 하고 웃었다.
"왜 저 혼자 안 된다고 생각하세요?"
"자넬 못 믿어서가 아니야. 비욘드 엘리트는 그냥 마수들하곤 차원이 달라. 혹시라도 잘못되면···,"
"정말요?"
스스스스슷!
태주는 감추고 있었던 독령의 힘을 조금 개방했다.
"이래도?"
우우우우우.
진동하는 무시무시한 기(氣)의 소용돌이.
마치 쓰나미처럼 황제와 금수호에게 넘실넘실 밀려들었다.
"···헉!"
"이, 이럴 수가···,"
황제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검선에게 한번 당한 경험이 있는 금수호도 서 있기조차 힘든지 무릎을 후들거렸다.
"세, 세상에? 어, 어떻게 이런 힘을?"
"···자, 자네 정녕 인간인가?"
등선만 안 했을 뿐이지 태주의 힘은 거의 신선급.
아니, 한번 갔다 왔으니 등선한 셈 쳐야지.
맞다.
자신은 지구 최초의 신선이나 다름없다.
검선에겐 다소 미치지 못할지라도, 지구상의 어느 누가, 감히 자신을 감당할까?
사실 그동안 이런 힘을 동네방네 뿌리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늘 감추고 다녔다.
황제와 금수호는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김태주 회장이 영혼 연결자라는 건 알고 있었다.
자신들보다 강할 거라고는 여겨왔다.
그와 매우 친한 사이여서 별생각 없이 대했는데,
그건 크나큰 착각이었다.
강해도 보통 강한 것이 아니다.
넘사벽이었다.
마침내 마주하게 된 김태주 회장의 참모습.
도저히 넘볼 수가 없는 압도적인 위압감.
"제가 모자란 가요?"
"···."
"···."
"아직 힘을 다 드러내지 않았습니다만."
꿀꺽.
둘은 동시에 마른침을 삼켰다.
이것도 전부가 아니라고?
그럼 얼마나 강하다는 말인가?
"조용히 다녀오겠습니다."
황제와 금수호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태주의 힘을 겪은 이상, 자신들이 뭐라고 반대하나?
그가 하겠다고 하면 하는 거지.
※ ※ ※
태주는 황궁에서 나와 구례로 돌아왔다.
슬슬 레이드 준비해야지.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지만 황궁 장인들이 흑암철 탈명비도를 제작 완료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하루는 구례에 갔다가,
또 하루는 파주에 갔다가.
다음 날은 뉴서울에 갔다가,
그다음 날은 양산 조선소와 항구에.
오늘은 지리산이다.
일이삼백이가 레이드에서 한몫할 수 있게끔 훈련을 시킬 목적으로.
선도 하나씩 먹이고 나서.
"자, 변신!"
"냥!"
슈수수수수숙!
고양이 상태의 일이삼백이가 순식간에 거대한 몸집을 지닌 삼두백호의 본체로 변했다.
"캬악!"
"캬악이 뭐야, 캬악이, 지금 본체 상태란 걸 모르겠어? 고양이 아니잖아. 야성을 찾자."
"캬르르르르,"
"···캬르르? 너 지리산의 왕, 엘리트 삼두백호였어! 기억 안 나?"
"크, 크르르···,"
"더 위엄있게."
"크르르르르릉,"
피어가 느껴졌다.
살짝 야성이 돌아온 것 같다.
모자란 부분은 직접 사냥을 통해서 채우고.
'일이삼백이 하나로 되려나?'
원래는 정연희도 데리고 가려고 했다.
명색이 지구의 검후 아닌가?
엘리트 마수 몇 마리 정도는 찜쪄먹을 실력도 갖췄고,
하지만 자신이 비욘드 엘리트와 전투에 들어갔을 때 그녀를 돌볼 여유가 될까?
'그냥 혼자 가는 게 좋겠어.'
흑암철 탈명비도 1만 개가 완성되면 바로 떠날 예정.
금수호와는 계속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황궁 소속의 대장 장인 각성자들이 총동원되었다고 하니, 아마 내일쯤 다 완성될 것이다.
'이참에 무한공간 정리나 하자.'
비욘드 엘리트 마수를 잡으면 놈들의 사체까지 들고 올 생각이다.
그래서 무한공간을 여는 순간!
찌르르르,
때마침 울리는 배송 신호.
'떴네.'
그렇지 않아도 레이드 전에 배송 신호가 떴으면 싶었다.
흑암철과 천계꽃은 충분하게 부려놓고 가야지.
그런데,
'이건 뭐지?'
어디서 많이 본 물건.
'응? 설마···,'
확실하다.
영혼 매개 거울 차원 게이트 발생기였다.
'이게 왜?'
당군악이 보낸 편지도 있었다.
'필독'이라 쓰여있다.
편지 먼저 봐야 한다.
천천히 읽어나가는 태주.
빈센트 모레티를 어떤 방식으로 선계에서 처리했는지, 어떻게 발생기와 에너지원을 만들었으며, 또 이걸 가지고 뭘 하려는지···,
순간!
마지막 부분에서 태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검선처럼 누가 올 거라고는 예상했다.
그런데 그 대상이···,
'독선님?'
지구로 오겠다고?
"오!"
그럼 환영할 준비 해야지.
< 당신들 말고 내가. > 끝
ⓒ 꾸찌꾸찌
=======================================
< 독선, 지구 도착. >
드디어!
독선 당군악이 지구로 온다.
얼마나 좋은가?
사실 검선보다 먼저 왔어야 했다.
아무리 영혼 연결로 서로 간의 기억이 공유되어 모든 지구 문화를 간접경험 했다 쳐도 실제로 겪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가 지구 땅을 밟기 전에 먼저 준비부터.
마침 금수호에게서 흑암철 탈명비도 1만 개가 다 완성됐다고 연락이 왔으니.
태주는 다시 황궁으로 갔다.
어두운 밤에 만리비검으로 날아가니, 황궁 입구에서 금수호가 미리 마중 나와 있었다.
"금비서관님,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뭘, 이것 가지고."
금수호가 태주를 황궁 안쪽으로 안내하면서 슬쩍 말했다.
"안 그래도 자네에게 확인받을 것이 있는데,"
"확인?"
"사실 엊그제 청탁이 하나 들어왔네."
청탁이라니,
"누가요?"
"자네 아버지 김웅방 준장."
"아!"
"어음, ···전(前) 새어머니와 배다른 동생이 일본 땅에 있지 않나."
"네."
혼다 미쯔이는 아버지와 이혼한 후, 배다른 동생인 김태평과 김태천과 같이 규슈 영지에 유배당했었다.
"이번 일본 독립국 승인 때문에 규슈에 묶이게 생겼는데, 시베리아 개척도시로 데리고 와 관사에서 함께 살면 안 되겠냐고 묻더군."
"흐음, 안될 것 없죠. 제가 상관할 것도 아니고."
"아니지, 그래도 허락은 받아야지."
"편하게 사시라고 전해주세요.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나 연락하고."
"알았네. 쩝, 역시 천륜은 끊을 수 없는 법이야."
이해한다.
태주에겐 거의 남이나 마찬가지지만 김웅방에겐 그렇지 않았다.
그들을 나 몰라라 하는 게 더 파렴치하다.
"그나저나 물건은 어디 있습니까?"
"다 왔네. 저기 창고 안에 있어."
황궁 안 으슥한 건물로 들어가 보니,
흑암철 암기가 든 10개의 나무 상자와 함께 태주를 기다리는 황제.
이 양반은 왜 또···,
"폐하, 어떻게 이 밤에,"
"자네가 온다고 하니 당연히 기다려야지. 따로 할 부탁도 있고."
부탁이라,
들어줄 수 있는 건 들어줘야지.
태주는 나무상자부터 무한공간에 넣었다.
스슷, 스스슷.
"이젠 숨기지도 않는군. 대체 그건 무슨 능력인지?"
숨길 필요가 있나?
본신의 힘까지 드러낸 판에.
"아공간 가방의 일종이라 보시면 됩니다."
"···얼마나 들어가는가?"
"꽤 많이요. 참! 부탁하신다는 건?"
황제는 금수호와 잠시 눈빛을 교환한 후 입을 열었다.
"비욘드 엘리트 마수 레이드 말일세, 진짜 혼자만 갈 계획인가?"
"글쎄요. 일이삼백이는 데리고 갈 생각이긴 하지만,"
"그럼 우리도 레이드 함께하겠네. 나와 수호 말이야."
"···네?"
이건 또 무슨 소리?
삼한 제국의 기둥이나 다름없는 황제와 궁정 비서관이 정무는 내팽개치고 비욘드 레이드에 직접 나선다?
될 리도 없을뿐더러, 해서도 안 되는 일.
"설마 진심으로 말씀하시는 건 아니겠죠?"
"진심이네. 우리가 계획하고 있는 바가 있어서 말이야."
이 사람들 왜 이래?
또 무슨 이상한 일을 꾸미려고,
"자세히 설명 좀 해주세요. 들어보고 결정할게요."
"사실은 말이야···,"
황제가 자신의 계획에 관해 설명했다.
"하아, 그러니까 두 분이 사망을 위장하시겠다? 비욘드 엘리트를 사냥하다가 죽은 것으로?"
"그렇지. 정말 묘안이지 않나?"
"···."
묘안은 무슨.
금수호도 손사래를 쳤다.
"날 보지 말게. 난 처음부터 반대했어. 지금도 그렇고. 이런 얼토당토않은 계획···, 험험."
"뭐? 끝까지 말해봐. 눈알 굴리지 말고."
"그, 그게···, 그게 통하겠습니까?"
"너 요즘 많이 컸다?"
이어지는 자세한 설명.
제정원에서 일본 독립투쟁 조직을 수사하면 할수록 난항을 겪고 있단다.
"하나를 캐면 고구마 넝쿨처럼 주렁주렁 나오면 좋겠지만 점조직 형태라 찾아내기 어렵다더군."
금수호도 부연 설명했다.
"그런데 삼한제국의 비밀 결사 단체가 항한 독립조직뿐만이 아니야."
"더 있다고요?"
"그러네. 중국계 중화주의 결사 조직도 암약하고 있는 걸로 밝혀졌어."
기가 찬다.
정부는 왜 이 사실을 여태껏 모르고 있었지?
"내가 와병 중일 때를 틈타 비밀 결사 조직들이 엄청나게 성장해서 그래."
"건재함을 과시한 이후 수면 아래로 숨어들었고요?"
"맞아. 이 새끼들, 그냥 두면 제국의 기틀을 무너뜨릴 놈이란 말이야. 아마도 내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그럴 만하다.
홀로 국가를 일으켜 제국까지 세운 패도의 황제 류태현, 하지만 자식들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그가 죽으면 삼한제국 전체가 흔들릴 것이 뻔하다.
이것이 황제가 위장 죽음을 결심한 이유.
황당했다.
현실 정치를 드라마로 배우셨나?
황제의 죽음, 물론 '위장'이지만 그것의 후폭풍이 얼마나 엄청날지 모르는 바도 아니면서.
"공식적으로는 휴가를 낼 거야. 소수의 사람에게만 비욘드 엘리트 레이드 사실을 슬쩍 흘릴 거고."
"누구에게요?"
"황후들과 자식들에게만 조용히."
그 말인즉슨,
"삼한의 비밀 결사 단체들이 황자와 황녀, 그리고 황후님들과도 관련이 있다는 말씀이세요?"
"후우, 부끄럽지만···, 맞네."
황제의 말이 맞는다면 상당히 심각한 문제.
"죽음을 위장해서 그들에게 기회를 줄 거네. 그럼 움직임이 있겠지."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겠어요? 차라리 황위를 이양하시고 기회를 엿보시든지."
"그래도 놈들은 움직이지 않을 거야. 내가 죽기 전까진. ···자네가 황위를 이어받으면 마음 편하겠지만."
어림도 없다.
"알겠습니다. 일단 합류하는 걸로 하죠. 대신에 사망 위장은 알아서 하세요."
"흐흐흐, 고맙네."
"그리고 저도 부탁드릴 것이 있는데."
"뭐든!"
"여권과 신분증, 그리고 운전면허증 각각 하나씩 만들어주세요."
"응?"
태주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황제.
"신분증?"
"이름은 당군악, 사진은 제 얼굴을 늙은 모습으로 필터링해서 넣어주면 됩니다."
"당군악? 그게 누군가?"
"접니다."
"···."
뜨악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거야 뭐, 수호가 준비해줄걸세."
이제 볼일 다 봤고.
독선을 맞이할 준비를 하자.
※ ※ ※
태주는 다시 구례로 내려왔다.
금수호 비서관이 만들어준 신분증과 그걸 이용해 개통한 스마트폰도 들고.
더불어 이번에 새로 받은 블랙카드, 자택에 주차된 자동차 키도 상자 안에 차곡차곡 넣었다.
그러고 난 뒤, 지리산 천왕봉으로.
"야앙?"
익숙한 곳에 오자 품에서 빼곡 고개를 내미는 이백이.
"쉿! 잠자코 들어가 있어."
"앙!"
실로 역사적인 순간 아닌가.
독선 당군악이 온다.
하지만 같이 있을 수 없다.
공교롭게도 자신은 비욘드 엘리트 마수 레이드 때문에 삼한을 잠시 떠나있을 예정,
그동안 검선이 그랬던 것처럼 마음껏 놀다 가시면 된다.
무한공간에서 게이트 발생기를 꺼냈다.
작동 방법은 이미 숙지했다.
에너지원도 장착되어 있었다.
안전장치를 해제하고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끝.
"자, 오세요."
먼저 소지품에 든 상자를 땅에다 놓고,
꾹!
버튼을 누르자,
우우우우웅!
화아아아악!
발생기가 찬란하게 빛났다.
째애애앵!
동시에 전면에 나타난 거울 게이트.
치치지지직!
게이트의 힘이 자신을 속박했지만,
"흐읍!"
툭, 투투툭!
독령과 선기의 힘으로 단번에 속박을 끊어버렸다.
스팟! 파파파파팟!
표홀질풍보가 펼쳐졌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지리산 천왕봉,
태주는 만리비검에 올라타서 하늘을 날았다.
저 멀리에서 타원형의 거울 게이트가 보였다.
※ ※ ※
선계(仙界).
당군악은 귀찮아 죽을 지경이었다.
어디 갈 때마다 자신을 병아리처럼 졸졸 따라오는 신선들.
심지어 떨어질세라 옆에 바짝 붙어서 움직이지도 못 하게 한다.
그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쯤이면 영혼 매개 거울 게이트가 지구로 배송됐다는 사실을.
"···좀 떨어져 주시오. 덥지 않소?"
"쯧, 섭섭하군. 다 독선이 좋아서 이러는 건데."
"맞아, 독선은 필요 이상으로 까칠해."
"흐흐흐. 친하게 지냅시다."
개수작 부리고 있네.
누가 모를 줄 아나?
태주가 지구에서 발생기를 작동하면 게이트는 독선의 바로 앞에 생성된다.
그때를 노릴 심산.
"제비뽑기로 다음 차례 정했다고 하지 않았소? 헌데 왜 다들 난리인지?"
"으음, 갈 때 배웅이라도 하게···,"
그러자 주선이 벌컥 화를 냈다.
다음 차례로 뽑힌 신선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내 말이 그 말이오! 당장 독선에게서 떨어지시오. 배웅은 개뿔!"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신선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렀다.
"에이, 주선도 너무 과민반응이야."
"맞아. 설마 우리가 새치기 할까? 검선처럼 그렇게 경우가 없지 않소이다."
"게이트가 열리면 어련히 빠져줄 테니 염려 놓으시오."
이들은 반드시 새치기할 것이다.
안 봐도 뻔하다.
무조건 한다.
얼마나 가증스러운가?
제비뽑기로 다음 후보를 선정하고 나서도 이 꼴이니.
당군악이 이쪽으로 움직이면 따라서 우르르르, 멀티플렉스 안으로 들어가면 또 따라서 우르르르.
"아, 제발 쫌!!!"
성질 부려도 소용없었다.
그저 딴청만 피우며 눈치만 살필 뿐.
그때였다.
'음?'
지끈!
머리에서 전해지는 기묘한 느낌.
'왔구나.'
태주가 지구에서 발생기를 작동했음이 틀림없다.
한번 경험했기 때문에 안다.
이제 신선들을 떨어뜨려 놓아야 할 때.
작전은 세워놨다.
다만,
'될까?'
상당히 고전적인 방식이라 통할지 모르겠다.
당군악이 갑자기 고개를 획 돌리며 과장된 목소리로 괴성을 질렀다.
"허어어어억! 저, 저게 대체 무슨!!!!!"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키자,
휙! 휙! 휙! 휙! 휙···,
신선들의 머리가 한꺼번에 돌아갔다.
'···이게 통하네?'
이미 무릎을 반쯤 굽히고 있었다.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츠핏!
사라랏!
살랑살랑 미풍과 함께 펼쳐지는 표홀질풍보.
신선들은 별일 아니었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돌렸지만.
"어?"
"뭐?"
"저, 저, 저···,"
"미친!"
"···,"
당군악은 이미 까만점으로 변해 달아난 뒤였다.
"독선이 도망간다!!!"
"이런 파렴치한!"
"멈추시오!"
단숨에 거리를 벌렸다.
순간!
째애앵!
앞에서 열리는 영혼 매개 거울 차원 게이트.
"허억!"
"여, 열렸다."
"잡아!!!"
"들어가게 해선 안 돼!"
파사삭!
속박의 사슬도 가볍게 부숴버리고.
하지만 지금 들어가면 안 된다.
'하나.'
두두두두두두!
뒤에서 흉측한 표정으로 부리나케 달려오는 신선들.
'둘.'
그래도 아직 아니다.
'셋.'
이제 됐다.
망나니들이 맹렬한 기세로 지척까지 다가왔다.
"도옥선! 자, 잠깐만 기다리시오."
"진짜 이러기오?"
"영혼이 합쳐진다니까···,"
합쳐지긴 개뿔.
당군악은 태주를 굳게 믿었다.
태주도 믿고 있을 것이다.
설령 태주가 바로 앞에 있다 해도 영혼 합쳐짐을 피할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쑥!
거울 게이트를 통과하는 독선.
동시에 게이트가 팟! 사라졌다.
"이, 이런, 제기랄!"
"···."
"하아, 씨발!"
"속았군."
"독선이 이럴 줄 몰랐어."
"내, 내가 다음 차례인데."
신선들은 망연자실했다.
하도 어이가 없어 화도 나지 않았다.
독선이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때릴 줄이야.
"이제 어떡하나?"
"어떡하긴 뭘 어떡해? 돌아올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야지."
"영영 안 돌아오면?"
"···서, 설마."
만약 독선이 돌아오지 않으면 선계는 끝이다.
지구 신상이고, 오피스텔이고, 다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아니, 저 문은 왜 일인분이오? 그 이상 못 들어가나? 그리고 너무 빨리 닫혀."
그러자 귀곡이 대답했다.
"에너지가 부족해서 어쩔 수 없소."
"그럼 충분한 에너지라면?"
"당연히 더 많이 들어가겠고, 더 오래 지속되겠지."
"하아, 어디 가서 구할 데도 없고,"
언제 나타났는지, 검선이 픽, 웃으며 유들유들하게 말했다.
"구할 데가 왜 없겠소?"
"응? 어디 있단 말이오."
"현재 발생기에 들어가는 에너지원은 짝퉁 여의주 비슷한 거 아니오."
"그렇지."
"헌데 진짜 여의주라면? 진퉁 여의주를 박아 버리면?"
신선들의 눈이 반짝 빛났다.
"···동해 용궁?"
"오!"
"맞아. 용궁이 있었지."
"내가 알기론 보관 중인 여의주가 꽤 많을걸?"
"원숭이 새끼가 가지고 있는 여의봉도 알고 보면 여의주로 만든 거 아니오."
"역시 검선이야!"
왜 그걸 모르고 있었을까?
진작에 진퉁 여의주로 문을 열었어야 했다.
그럼 눈치 보지 않고 여유롭게 넘어 갈수 있었을 터.
"자자. 다들 모여봅시다. 동해 용 새끼가 순순히 여의주를 내어놓을 리 없으니."
그리하여 동해 용궁 여의주 날치기 계획이 전격적으로 결정됐다
※ ※ ※
쑤욱,
당군악은 지리산 천왕봉에 열린 거울 게이트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아무도 없군."
아니 있었다.
까마득한 하늘 저편에서, 만리비검을 탄 태주, 손가락으로 뭔가를 가리켰다.
"아···,"
바닥에 놓인 상자 하나.
내용물을 확인하자.
"오!"
여권에 주민증, 그리고 운전면허증, 검정색 신용카드와 스마트폰도.
"미리 다 준비해놨구나."
이러니 신선들이 지구로 가고 싶어 환장하지.
지이이이잉!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 드디어 오셨군요.
"그래, 감개무량할 뿐이네. 내가 지구에 오다니."
- 푹 쉬시다 가세요. 어차피 전 떨어져 있어야 하니까.
"자넨 어딜 가려고?"
- 비욘드 엘리트 마수 잡으러 갑니다.
"아! 용이 되다 만 이무기들?"
- 맞습니다. 지구에 오셨는데, 가까이 있지도 못하고.
"섭섭하지만 어쩔 수 있나? 난 일단 자네 회사부터 먼저 들러보겠네."
- 미리 이야기해 둘게요.
"다른 곳으로 이동할 일이 있으면 연락하지."
뚝,
전화가 끊겼다.
당군악은 태주가 준비한 물건들을 무한공간에 넣었다.
'자, 가볼까나?'
목적지는 오기 전에 정했다.
태주가 세운 티제이 그룹 본사.
하지만 그전에,
스스스스스스,
당군악의 스마트폰이 허공에 둥둥 띄워졌다.
"나라고 해서 촬영 못 할 건 없지."
휘리릿!
스마트폰이 당군악의 주위를 돌며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검선은 이기어폰.
자신은 독령으로 움직이니까 독령폰.
본질은 똑같다.
< 독선, 지구 도착.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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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욘드 레이드(1) >
뉴서울 황궁.
류태현 황제는 가족들을 불러 모았다.
3명의 부인과 5남 3녀의 아들딸.
공식적인 이유는 황실 휴가 논의였다.
원래 1년에 한 번씩 다 함께 휴가를 가니까.
하지만 시기가 시기인 만큼 단지 휴가 때문만은 아닐 거라고 가족들은 추측했다.
그들도 안다.
황제의 일본국 독립 승인.
그리고 제정원이 항한 독립 투쟁 조직에 속했던 사람들에 대해 쥐잡듯 조사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도.
분명 그에 관련한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그래서 다들 얼굴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황후들, 너무 근심할 필요 없소.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뭔가를 추궁하기 위해 만든 자리가 아니니까."
황제는 천천히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을 이었다.
"할 일이 있어 이번 휴가는 함께하지 못할 것 같구나. 휴가는 나 혼자 보내마."
그러자 최황후가,
"폐하, 요근래 심기가 편치 않은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가족과 함께 돈독한 시간을···,"
염황후도,
"폐하께서 혼자 휴가를 떠나시면 불충한 호사가들이 황가의 불화를 들먹이며 온갖 추측성 이야기들을 만들어 낼까 염려되옵니다."
주황후도 반대했다.
같이 휴가를 보낼 것을 권유했지만,
"아아! 내가 그대들의 마음을 왜 모르겠나? 하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래."
반드시 할 일?
그게 뭐길래···,
"내가 삼한을 세우면서 꼭 이루겠다고 맹세한 일이 하나 있다.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
잠시 말을 끊었다가,
"짐은 금수호 비서관과 단둘이서 옛 중국 땅 비욘드 엘리트 마수들을 정벌한 생각이란다."
"네?"
"무, 무슨?"
"아, 아니, 비욘드 엘리트라니요?"
"가, 갑자기 그런 말씀을···."
뜬금없이?
놀라기보단 당황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있었던 흑악지룡의 북상을 기억하겠지? 너희들도 참전하여 알지 않느냐. 하마터면 제국이 위험할 뻔했다."
류진영 일황자가 대답했다.
"알고 있사옵니다. 그렇지만 결국 놈은 죽었잖습니까?"
"비욘드 엘리트가 어디 흑악지룡 하나뿐인가. 또 그놈을 누가 잡았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저 자연사라 추측하고만 있지. 놈이 죽은 건 행운이었어."
"아아···,"
"그대로 두면 흑악지룡 사태와 같은 일이 또 벌어질 것이 분명하다. 내 대가 아니라 너희 대에서라도."
"···."
반박할 수 없는 말이다.
바다가 막고 있으면 모를까, 중국 땅과 삼한 제국은 하나의 대륙.
"죽기 전에 이뤄야 할 숙원 같은 것이다. 놈들을 그대로 놓아두면 삼한 제국의 평화는 바닷가에 세워진 모래성일 터."
황제의 뜻은 제국의 지배자라면 당연히 비욘드 엘리트는 기필코 잡아 없애야 하지 않겠냐는 것.
허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황제와 금수호 비서관 단둘이 간다고?
이게 말이 돼?
진심으로 하는 말인 걸까?
아니면 말려달라고 던져보는 이야기일까?
맞다.
말려달라는 의도일 것이다.
납작 엎드려 절대 안 된다고 호들갑을 떨면 황제도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일 것이 분명하다.
"폐하! 아니 되옵니다."
"토, 통촉하여 주십시오."
"말씀을 거두어 주시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차라리 제국군 총동원령을 내려···,"
류태현 황제는 피식 웃었다.
"황제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설령 가족 앞에서라 하더라도."
"···."
"다른 이들에겐 절대 비밀로 해야 한다. 황후들도 마찬가지요. 외가의 친인척들에게도 꼭 함구해주시길, 난 그저 휴가를 떠난 것뿐이니까."
이로써 떡밥은 던졌다.
비밀이 유지될까?
웃기는 소리.
오늘 한 이야기는 몇 시간 안에 제국 곳곳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자, 그렇다면?
누가 먼저 미끼를 물까?
※ ※ ※
백서연은 구례 바이오 단지, 티제이 그룹 본사 사옥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오실 때가 된 것 같은데···,'
김태주 회장님에게 미리 연락을 받았다.
매우 귀한 손님이 오신다고,
자신과 그분은 한 몸이나 마찬가지니까, 똑같이 대하면 될 거라고.
심지어 회사 업무나 알려져선 안 될 비밀 정보도 원하신다면 물어보지도 말고 공유해 드리라고 했다.
대체 어떤 분이시길래?
전에도 손님 한 분이 방문한 일이 있다.
그분은 잠시 구례로 오셨다가, 뉴서울에서 회장님 카드로 돈을 펑펑 쓰시면서 다녔는데···, 이번에 오시는 분도 똑같을까?
'그나저나 언제 오시지?'
그냥 딱 보면 안다던데,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했지만 딱히 이분이다, 하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응?'
저 멀리서 회사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오는 노인 한 명.
백발과 백염, 전통 복색인듯한 흰색 도포를 입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서 마치 마술처럼 스마트폰이 허공에 뜬 채로 빙글빙글 돌고 있었고.
저건 또 뭐지? 초전도 스마트폰, 그런 건가.
그런데?
"···어머?"
보자마자 알았다.
'회장님?'
무척이나 닮았다.
회장님이 나이가 들어 수염을 기르면 분명 저 모습일 것이다.
'저분이시구나.'
백서연은 빠른 걸음으로 노인을 마중 나갔다.
"저어, 혹시 당군악님 되십니까?"
"음? 아! 자네가 백서연 사장인가?"
"그렇습니다. 이제부터 제가 모시겠습니다."
"반갑네. 태주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어. 아주 유능하다고. 자랑 많이 하더군."
"···아!"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는 백서연.
기분도 날아갈 듯 좋았다.
존경하던 상사에게 인정받은 기분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나.
"어디로 모실까요? 숙소부터? 회장님 쓰시던 자택 그대로 쓰시면 됩니다만."
"아니, 공장부터 가보세."
"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검선이야 놀고먹고 갔지만 당군악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왕 지구에 온 이상 태주에게 어떻게 도움이 될까, 하는 것만 생각했다.
공장 설비 점검해보고, 보완할 점이 있으면 보완하고, 더불어 신약도 새로 만들 수 있으면 만들고.
'조선소에, 해운에, 태주가 이룬 성과물들도 다 찍어 가야겠군.'
신선들이 그런 걸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생각해보니 할 일이 많다.
놀 시간이 어디 있겠나?
큰일 때문에 태주가 중국 땅으로 떠났는데,
'빈자리는 내가 지켜야지.'
※ ※ ※
중국 대륙.
옛날엔 하남성이라 불리던 그곳.
식별번호 BEM – C04 흑악지룡(黑惡地龍)의 영역이 바로 여기였다.
하지만 현재는 BEM – C09 쌍두마룡(雙頭魔龍)이 흑악지룡을 쫓아내면서 하남성을 차지했고.
태주는 하남성 북쪽 마수 밀집 지대에 있었다.
쌍두마룡이 직접 점령하고 있는 곳과는 다소 먼 거리.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일이삼백이의 야성을 깨우는 것부터.
"쓸어버려!"
"크르르르르···,"
밀집 지대에 본체로 변신한 일이삼백이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쿠쿵! 쿵쿵쿵쿵!
워낙 거대한 놈이라 그런지 웬만한 마수들은 발로 밟아서 죽인다.
엘리트 마수들도 그냥 찢어버리는 수준.
앞발로 찍어 누르거나,
퍽퍽!
이빨로 물어 씹어버리거나,
꺄득, 꺄드득!
삼두백호 머리 3개, 일백이, 이백이, 삼백이가 각자 엘리트 마수들을 물고 와서 태주 앞에 내려놓았다.
툭, 투둑, 툭!
"냥!"
"야앙,"
"니아."
"···니들 지금 본체로 변한 상태야."
그러자,
"···크릉,"
"크르르,"
"크러러러렁!"
"그래, 이렇게 울어야지."
태주는 선도 3개를 꺼내 하나씩 던져줬다.
이 정도면 함께 해도 상관없겠다.
찌끄레기 정도는 충분히 처리하겠지.
비욘드 엘리트는 자신의 몫.
강기 보호막만 조심하면 된다.
농밀하게 응집한 마나를 이용해 발산하는 비욘드 엘리트의 강기, 접촉하는 건 뭐든 산산이 가루로 바스러뜨린다.
그래서 강기만 무력화시키면 끝난 게임, 문제는 어떻게 강기 보호막을 벗겨내느냐 하는 건데.
흑악지룡을 처치했을 땐 호신부의 도움을 받았다.
30초라는 극히 짧은 시간 동안 무적의 효과를 발휘하는 단주 선인의 보패.
그러나 쿨타임이 24시간이다.
30초 안에 못 죽이면 도망쳐야 한다.
호신부는 공격보다는 방어의 개념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렇다면 주요 공격 수단은?
'흑암철 암기라면 가능할지도.'
무려 지옥의 금속이다.
마수의 천적인 건 두말할 필요도 없고.
'부서지지만 않으면 되는데.'
과연 흑암철이 비욘드 엘리트 마수의 강기 보호막에도 파괴되지 않고 견뎌낼까?
'가서 확인하면 돼.'
여차하면 도망쳐야지.
그리고 뭐, 부적과 흑암철 뿐인가?
상황을 반전시킬 히든카드도 있다.
제천대성의 황금털.
도저히 실패할래야 실패할 수가 없는 사냥.
'슬슬 때가 됐는데···,'
태주는 위성 전용 스마트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GPS 좌표 정보도,
황제와 금수호를 만나기로 한 장소.
먼저 신나게 사냥 중인 일이삼백이에게,
"이리 와. 잠시 쉬자."
"냐앙!"
고양이 모습으로 작아져서 태주에게 달려와 안겼다.
잠시 기다리니.
부우우우우···,
저 하늘 꼭대기에서 은은하게 들리는 비행기 엔진음.
비행 마수를 피하기 위해 대기권을 벗어나 성층권에서 운항하는 초고도 수송기였다.
그리고 하늘에 찍힌 점 두 개.
점점 가까워지더니,
펄럭!
낙하산이 퍼졌다.
황제와 금수호였다.
'설마설마했는데 진짜 왔구나.'
그것도 낙하산을 타고.
대체 어떤 계획을 세워왔는지 모르겠지만···,
'뭐, 알아서 하겠지.'
※ ※ ※
선계(仙界).
동해 용궁 여의주 날치기 계획을 위해 신선들이 작당 모의를 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여의주 확보를 위해선 선행되어야 할 조건이 하나 있었다.
동해 용궁은 상위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강호무림, 인간계 바다 깊숙한 심해에 위치한다.
즉 용궁으로 가려면 강호 무림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의미.
"염라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하면···,"
"되겠소? 축구대회 때문에 서로 눈만 마주쳐도 으르렁거리는 판국에."
"그리고 인간계 문은 상제가 허락해야 하오."
"에잉! 황천계 깜둥이 새끼들은 영 도움이 안 돼."
"고작 문 하나 여는 것 가지고, 유세를 떨어대니,"
"맞소. 정작 가장 중요한 지구 문은 손도 못 대면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원숭아! 넌 왜 가만히 있어?"
"후우, 아까도 말했듯이 난 빼주면 안 되겠소? 한번 용왕에게 찍힌 몸이라 또 그러면···,"
"뒈질래?"
"이 새끼가, 선계에 빌붙어 여태껏 꿀 빨아온 주제에, 권리는 마음껏 누리고, 의무는 외면하시겠다?"
"대체 여의주 도둑질이 무슨 의무란 말이오?"
"닥쳐! 하자면 하는 거야!"
검선은 제천대성을 살살 달랬다.
"원숭아, 잘 들어 봐. 넌 진짜 지구에 갈 생각이 없는 거냐?"
"···그, 그게,"
"너도 알잖아. 지구에서 네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
제천대성도 알고 있었다.
영화에, 소설에, 애니메이션···,
저 다중우주 세상에 자신을 대상으로 한 창작물이 넘쳐난다는 걸.
"너도 가고 싶지? 가서 확인하고 싶지?"
제천대성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의견이나 꺼내."
그리하여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자세히 말해봐."
설명을 시작하는 제천대성.
"요마계는 천계, 황천계, 선계, 환수계와는 달리 상당히 불안정한 장소요. 왜냐하면 인간계의 요기를 흡수하는 곳에 있어서."
"나도 알아. 그 불균형을 이용해서 요괴들이 인간계로 탈출도 하고 그러는 거잖아. 너도 그랬고."
"···우린 그걸 계의 구멍이라 부르오."
"그러니까 계의 구멍을 이용해 인간계로 넘어가자? 야! 그게 언제 생길지 알고."
계의 구멍.
규칙적으로 생기는 게 아니다.
굉장히 희박한 확률로, 고정된 위치가 아닌 랜덤한 장소에 생겼다가 사라졌다가 한다.
요괴들도 운이 따라야 구멍을 통해 인간계로 도망칠 수 있다.
"하지만 강제로 열 수 있는 계의 구멍이 있다면?"
"오!"
"좋지."
"원숭아! 그 장소가 어디 있느냐?"
"허나 요마계 균형을 뒤흔들어야 하므로 엄청난 물리력이 필요하오. 사실 내가 일전에 천도를 도둑질하려 한 것도 그 때문이오."
그러니까 어마어마한 힘으로 요마계를 흔들어 균형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
"우리 신선들이 힘을 다 함께 합치면?"
"···뭐, 그럼 가능할지도."
"당장 안내해라!"
"알려줄 순 있지만 조건이 있소."
"조건?"
제천대성이 슬며시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난 빼주시오. 그···, 여, 여의주 도둑질 모의에서."
"알았다. 빼주겠다."
"정말이오?"
"쯧쯧, 신선의 약속을 뭘로 보고."
"알겠소. 안내해 드리리다."
검선에게 약속받아서 제천대성의 표정이 사뭇 밝아졌다.
※ ※ ※
신선들을 총동원됐다.
약 50여 명이 요마계에 모였다.
갑자기 신선들이 모이자 요괴들은 뿔뿔이 흩어져 숨어버렸고.
그들은 제천대성의 안내를 받아 계의 구멍을 강제로 열 수 있는 장소에 왔다.
"···여기, 저기, 또 여기를 흔들면 되오. 선기든 내공이든, 모든 힘을 다 쏟아부어서."
"그래? 빨리 시작합시다."
"우리가 다 넘어가야 하나?"
"맞소. 숫자가 많으면 눈에 띌 수도 있으니."
사실 가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다.
예전엔 그토록 강호무림, 인간계로 가려고 안간힘을 썼던 신선들이었지만 지금은 그곳보다 선계가 훨씬 재미있다.
그래서 다들 주저하는 표정.
검선이 정리했다.
"흔드는 건 다 같이, 넘어가는 건 10명 정도만."
"누가?"
"무림계 신선들은 열외 없소. 귀곡, 갈홍, 둘 중 하나와 단주 선인도,"
"좋소. 그럽시다."
신선들이 정해진 위치에 섰다.
그리고 땅바닥에 손을 대고.
우우우우웅!
각자 있는 힘을 다해 선기를 주입했다.
드드드드드드득!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린다.
콰득, 콰드드득!
점점 심해졌다.
흔들림은 요마계 전체로 퍼져나갔다.
"더더더더!"
"···으윽, 왜 이렇게 힘들어?"
"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조금만 더 힘을 내시오!"
콰득! 뿌드드득, 드드드드득!
진동은 요마계뿐만 아니라 선계와 천계, 환수계까지 퍼졌다.
콰쾅! 콰콰콰콰쾅!
심지어 폭탄 터지는 소리마저 들렸다.
그러더니,
쩌어어억!
지표면이 갈라지면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다.
"됐나?"
"된 것 같은데."
"됐다."
제천대성이 구멍을 가리키며 말했다.
"계의 구멍이오. 빨리 들어가시오. 언제 닫힐지도 모르니까."
"그래?"
순간!
파악!
제천대성의 엉덩이를 힘껏 발로 걷어차는 검선.
"어허헉!"
그대로 엉덩이를 강타당해 구멍 안으로 떨어지는 제천대성, 저 밑에서 격분의 외침이 들려왔다.
"씨바알! 내 이럴 줄 알았다아아아···,"
신선의 약속을 믿은 놈이 잘못이지.
검선이 과장된 몸짓으로 호들갑을 떨었다.
"아니! 이럴 수가? 원숭이 요괴가 인간계로 탈출했구나."
"요망한 요괴로다!"
"상습범이군. 제 버릇 개 못 주지, 암! 그렇고말고."
"뭐하시오? 당장 잡으러 갑시다."
신선 여의주 도적단도 구멍 안으로 몸을 날렸다.
< 비욘드 레이드(1)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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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욘드 레이드(2) >
태주는 황제, 금수호 비서관과 함께 쌍두마룡을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언덕에 서 있었다.
쌍두마룡(雙頭魔龍)의 외모적 특징은 이름처럼 대가리가 2개, 몸체는 단단한 초록 비늘로 덮여있고, 짧은 앞다리와 긴 뒷다리가 달렸다.
특히 뒷다리.
매우 인상적이다.
기다랄뿐더러 굵기까지 하다.
너무 길어서 다리를 오므리고 있다.
아마도···,
'개구리 새끼네.'
개구리 마수에서 진화한 비욘드일 터.
놈은 혼자가 아니다.
언덕 밑으로는 놈이 거느리는 엘리트 마수 부하들이 새까맣게 모여 있었다.
"저놈이군."
"하아, 내가 생전에 비욘드를 두 눈으로 보게 되다니."
"···기, 김회장, 정말 잡을 수 있나?"
"글쎄요. 부딪혀봐야죠."
흑악지룡보다 강하다는 건 알았다.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는 것도.
그래서 처음 답사를 왔을 땐 꽤 위협적으로 느껴졌었지만 지금은 그다지···,
'뭐, 가까이 와서 보니 잡을 수 있겠는데?'
독선도 확인시켜줬다.
전화로 비욘드 엘리트 마수를 잡으러 간다고 했을 때, 그의 태도가 어땠나?
위험했다면 당부의 말 한마디 정도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저 심드렁한 목소리로.
'아! 용이 되다 만 이무기들?'
그말 뿐이었다.
독선도 비욘드 엘리트의 수준이 어느 정도 되는지 알 것이다.
태주와의 영혼 연결로 흑악지룡을 잡았던 경험을 공유했으니까.
그런데도 조심하란 말조차 없었다면?
태주가 손쉽게 잡을 수 있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뜻.
물론 걱정거리는 있다.
뜬금없이 합류한 짐 덩어리들 말이다.
태주는 황제, 금수호 비서관에게 호신부 한 장씩을 건넸다.
일이삼백이에게도.
"이거 옷 속으로 넣어서 가슴팍에 붙이세요."
"응? 부, 부적?"
"여분의 목숨줄이라 생각하세요."
"자네 이런 거 믿나? 어디 아는 무당이라도 있는가 보군."
"무당이 써 준건 아니고, 호신부라고 부르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태주의 설명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두 사람.
"···30초 동안은 그 어떤 피해도 받지 않는다고?"
"네. 호신부가 발동하면 빠르게 안전한 곳으로 피하면 됩니다."
"허허, 도, 도무지 무슨 영문인지···,"
믿을 수 없는 눈초리였지만 호신부가 발동하면 알게 될 것이다.
발동하는 상황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그럼 가보죠."
"그, 그러세."
놈을 잡기 위해선 부하들부터 먼저 처리해야 한다.
공중으로 날아가서 놈만 잡고 빠지면 되지만···,
'급할 건 없어.'
당군악이 삼한 땅에 있고, 어차피 자신은 그와 함께하지 못한다.
시간적 여유도 넘쳐나니까,
최대한 천천히, 그리고 전투 감각을 일깨우면서 느긋하게 놀아보자.
"일백아!"
"냐앙?"
"변신."
"냥!"
쑤우우우우우우욱!
삼두백호의 본체로 변신한 일이삼백이.
그러자 흠칫! 놀라는 황제와 금수호.
"와!"
"···영물은 영물이군."
고양이가 삼두백호라는 사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실제 변신하는 모습도 처음 봤으니까
스팟!
태주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
사냥이 시작됐다.
전면에 있던 엘리트 마수들은 푹! 찍!
뚫리거나, 납작해지거나.
둘 중 하나였다.
※ ※ ※
전투가 시작된 지 겨우 10분이 지났을 뿐이다.
황제는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터벅터벅, 삼두백호의 뒤를 따라갔다.
쿵! 쿠쿵! 쿠쿠쿠쿵!
앞발을 땅에다 탁탁 치면서 엘리트 마수를 짓이기고 있는 삼두백호.
퍽퍽! 찍찍, 납작.
무슨 고양이가 쥐를 잡는 것도 아니고,
무자비하고 잔인했다.
별로 할 것이 없다.
괜히 나서다 방해만 될라.
솔직히 약간은 도움이 될 줄 알았다.
삼한제국 최강의 각성자가 바로 자신 아닌가?
아니, 정확히 말하면 최강이었었다.
지금은 저 삼두백호만도 못하다.
심지어 최정예 제국군을 동원해도 일이삼백 삼두백호를 잡을 수 있을까?
아마 못하겠지.
사실 삼두백호는 약과였다.
저 앞에서 온갖 암기를 뿌리며 나아가는 김태주 회장.
츠피피핏!
날카로운 단검이 엘리트 마수의 몸체를 아무런 저항도 없이 뚫고 지나간다.
푹! 푸푸푹!
단 한방에 절명하는 놈들.
'미쳤구나, 미쳤어.'
엘리트 마수.
마스터급 각성자가 최소 2명 이상은 되어야 공략 가능한 마수.
물론 자신도 혼자 잡을 수 있지만 어렵게 사투를 벌여야 간신히 한 마리 잡는다.
그런데 김회장은 손을 한번 뿌릴 때마다 세 마리, 네 마리씩 한꺼번에 죽이면서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간다.
저게 말이 돼?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지?
그런데,
"폐하! 지금 뭐하십니까? 놀러 온 게 아니지 않습니까."
땀을 뻘뻘 흘리며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금수호.
"···어음."
"전 지금 뼈 빠지게 고생하고 있는데, 일손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아, 알았어."
황제와 금수호가 맡은 일은 사냥이 아니다.
삼두백호와 김태주 회장이 잡은 엘리트 마수에게서 마나 결정체를 뽑아 아공간 가방에 수거하는 임무.
즉 짐꾼이었다.
이것 말고는 할 게 없었다.
그래도 마스터 짐꾼이라 작업 효율은 매우 빨랐다.
그거라도 위안으로 삼아야지.
※ ※ ※
태주는 서두르지 않았다.
현재 펼치는 기술은 소(小) 만천화우.
암기 500개를 꺼내서 허공에 띄운 후, 일부는 일섬(一閃), 또 일부는 비폭(飛瀑), 환영비도, 회류표, 일점홍 등등 암기술을 섞어 엘리트 마수들을 바느질하듯 줄줄이 꿰었다.
천천히 독령의 기운을 조절하면서 앞으로, 앞으로.
그냥 걸어가기만 하면 끝이다.
목표물이 보이면 의식하고, 그럼 독령이 암기를 움직여 임무를 수행하고, 끝나면 다시 회수되어 허공에서 대기하고.
독령은 AI 인공지능이나 마찬가지였다.
말만 못 할 뿐이지 태주가 의식하면 그대로 해준다.
목표물은 자동으로 지정됐고, 절대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점점 가까워졌다.
이제 넘어지면 코 닿을 듯 가까워진 비욘드와 태주 사이의 거리.
그 많던 엘리트 마수도 거의 다 사라졌다.
인간이 자신의 영역까지 침범해 들어왔음에도, 쌍두마룡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놈도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만만치 않다는 걸.
쫄았거나, 간 보고 있거나.
확실히 사하라 초원의 괴수와는 달리 지능이 있는 놈이다.
하지만 그것뿐.
'찔러볼까?'
지이잉!
독기와 선기, 마나가 가득한 탈명비도 한 자루로 일섬을 날려보니,
츠핏! 투웅!
비욘드 강기 보호막을 관통해서 본체에 박혀버린 암기.
'괜찮네.'
일반 금속 암기로도 보호막을 관통했다.
이로써 마지막 확인을 끝냈다.
자신의 강기가 훨씬 강하다.
"쿠르르? 크릉, 크르르르···,"
쌍두마룡은 일격을 당하자 당황한 듯한 어쩔 줄 몰라 했다.
바로 그때!
다닥! 파아아앗!
휘리리리리리릿!
"오!"
난다.
그 거대한 쌍두마룡이 하늘을 날았다.
강하고 긴 뒷다리로 태주를 깔아뭉개기 위해 허공으로 도약했다.
커다란 몸체가 해를 가려 주위가 어두워질 정도였다.
"장관이네."
멍청한 개구리 새끼.
저렇게 배를 훤히 드러내고 달려들면 어쩌자고?
스스스스스슷!
5만여 개의 흑암철 주괴와 흑암철 탈명비도 1만 개가 무한공간에서 폭풍처럼 쏟아져나왔다.
"크륵?"
흑암철.
마수들이 두려워하는 지옥의 금속.
씽두마룡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고 눈알을 데굴데굴 굴렀지만, 이미 뛰었는데 어떻게 피해?
콰콰콰콰콰콰콱!
흑암철 주괴가 쌍두마룡 배 부분의 강기 보호막을 두드렸다.
채채채채채채채챙!
보호막 이곳저곳이 균열을 일으키며 깨어졌다.
그 틈을 통해 파고드는 무수한 흑암철 탈명비도.
배에도 꽂히고, 등에도 꽂히고, 다리와 대가리에도 꽂히고···,
푸푹! 푸푸푸푹! 푸푸푸푸푸푹!
"꾸웨에에에엑!"
쌍두마룡이 땅으로 착지했을 때···.
놈의 몸은 이미 고슴도치처럼 변해있었다.
황제와 금수호는 입에서 침이 흐르는 것도 모른 체 그저 입만 떡 벌리고 있었다.
"···수호야, 보고 있냐?"
"추르릅! 네네, 보고는 있죠. 꾸, 꿈인가 싶지만,"
그들도 마지막 확인을 끝냈다.
김태주 회장은 인간이 아니다.
※ ※ ※
신선들이 도망친 요괴를 잡기 위해 인간계로 나오면 무슨 일부터 먼저 할까?
요괴의 흔적을 쫓아 강호 곳곳을 탐색하고 돌아다니긴 하지만 주목적은 따로 있다.
천천히, 느긋하게 강호 유람도 다니고, 객잔에 들러 향기로운 술과 맛있는 음식도 먹고, 속세의 삶에 녹아 들어가 보기도 하고.
감옥과 다를 바 없는 갑갑한 선계에서, 활기 넘치는 인간계로 왔는데, 어찌 요괴만 잡다가 돌아갈 수 있나?
때로는 인연을 만들기도 했다.
재능있고 될성부른 사람을 만나면 자신의 깨달음 한 조각을 슬쩍 넘겨주면서 인간계에 개입하는 경우 말이다.
강호 무림의 역사에서 이런 일이 종종 있다.
신선에게 가르침을 받아 고금 무적의 고수가 되었다거나, 보패를 얻어 부자가 되었다거나,
그러나 제천대성과 함께 넘어온 10인의 신선 도적단들을 오직 직진이었다.
강호 무림 인간계 따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들이 가진 집념.
여의주를 훔친다.
그걸 영혼 매개 거울 차원 게이트 발생기에 박아넣는다.
더 많이, 더 오래 지속되는 문을 만들어 낸다.
그럼으로써 마침내 지구로 우르르 넘어간다.
강호 무림?
선계보다 재미없는데?
그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한 지구로 가는 길이 있는데?
한눈팔지 말고 빠르게 용궁으로.
용궁은 인간계 동해에 있다.
그것도 바다 깊숙한 곳에.
빛도 안 들어오는 심해, 그리고 무시무시한 수압 때문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아무리 신선이라 해도 어렵다.
단주 선인의 수령부를 붙여서 운신이 나아지긴 했지만.
바닷속을 유영하면서 밑으로 잠수하는 검선 일행.
당연히 제천대성도 함께였다.
- 약속이 틀리지 않소?
전음을 이용해 검선에게 쏘아붙이자.
- 응? 무슨 약속?
- 날 빼주기로···,
- 허어, 내가 언제 그런 약속을 했다고, 그대들은 들었소?
- 아니? 그런 말 못 들었는데.
- 나도 그렇소.
으득!
제천대성은 꾹 참았다.
신선들을 믿은 게 잘못이었다.
- 뭐, 어찌 됐든 이왕 왔으니 빨리 용궁으로 가자꾸나.
- ···.
검선이 제천대성을 억지로 데리고 온 이유.
그는 용궁에 온 적이 있으니까, 여의주가 보관된 보물 창고의 위치도 알고 있고.
- 바로 저기요.
- ···뭐야? 저거 그냥 동굴이잖아.
- 그럼 용궁이 무슨 화려한 기와집이라도 되는 줄 알았소?
- 쩝, 저런 데서 어떻게 살아?
- 들어가면 육지가 있긴 해?
- 발 디딜 데는 있소.
일단 들어가 보자.
검선이 단주 선인에게 말했다.
- 투명부 한 장씩 나눠주시오.
- 여기···,
스르르륵.
부적을 붙인 제천대성과 신선들의 몸이 투명해졌다.
그들은 조심조심 동굴 안으로 숨어들었다.
입구는 좁았지만 내부는 매우 컸다.
수면 위로 올라오니 밟을 수 있는 땅도 있다.
'보물 창고는?'
'저쪽으로.'
살금살금, 조심조심, 어두운 동굴 안쪽으로 걸어가는 일행들.
현재까진 아주 순조로웠다.
여의주가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그때였다.
화악!
동굴 내부에서 떠오르는 눈부신 광구.
"거기까지."
동시에 검선과 신선들을 막아선 존재들.
스슷!
투명했던 몸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헉!"
뭐지?
"···어?"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는 용왕.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염라.
그리고 한숨을 푹 쉬어대는 상제.
"드, 들켰다고? 어, 어떻게?"
"천계와 선계를 그토록 뒤흔들어놓고, 우리가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했나?"
"···으음."
"난 지진이라도 난 줄 알았네."
"구멍이 아주 크게 뚫려있더군. 그걸 막느라 한참을 고생했어."
구멍을 낼 때 너무 요란을 떨었나 보다.
검선은 데굴데굴 눈알을 굴렸다.
어떡하지?
일단 제천대성의 목덜미를 덥석 잡으면서.
"이, 이거 다 오, 오해요. 워, 원숭이 놈이 선계를 탈출하려고 해서 잡으러 왔을 뿐이오."
"···."
"정말이라니까? 날 못 믿소?"
"···."
"나 우화등선한 신선이야!"
"···."
뻔뻔하게 우겨댔지만,
"검선, 이제 그만합시다. 추하오."
"···에이, 씨발!"
믿어줄 리 있나?
용왕이 씹어먹을 듯한 눈빛으로 신선들을 노려봤다.
"죽을 자리에 제 발로 굴러 들어왔구나. 네놈들을 수중 감옥에다 집어 처넣어주지."
수중 감옥은 개뿔,
좋다.
이렇게 된 이상 용궁을 폭파한다.
이판사판이다.
난장판을 만든 다음, 보물창고 털어서 여의주 가지고 튄다.
검선은 신선들을 보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신선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원숭이도 귀에서 이쑤시개 같은 여의봉을 꺼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용왕, 이 망나니들의 처우는 내게 맡겨주시오."
염라가 나섰다.
"허허, 대왕을 뭘 믿고? 어차피 그대들은 한통속 아니오?"
"쯧쯧, 한통속이라니, 내가 이 양아치놈들에게 어떤 꼴을 당했는데!"
염라는 짐짓 화를 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용왕, 그러지 말고 우리 선계로 같이 가서 자세한 이야길 나눠봅시다."
"내가 그곳을 왜?"
"혼쭐을 낼 때 내더라도, 신선들이 이런 짓을 벌인 이유를 확인해야 않겠소."
"···이유?"
"선계에 해답이 있소. 일단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는 게 어떨는지?"
그 와중에 검선에게 눈짓하는 염라.
'음?'
검선은 염라의 의도를 깨달았다.
'아하!'
맞다.
전략을 수정해야 할 때.
억지로 무장해제 시키려면 부작용이 더 크다.
스스로 벗게 만들어야 한다.
일명 선계 햇볕정책.
자신과 신선들이 가진 간절함을 용왕에게도 전할 수 있다면?
마약과도 같은 지구 문물의 지독한 독으로 중독시키면?
아마 손수 여의주를 가져와 넘겨줄지도.
그래서 용왕에게 머리를 푹 숙이며,
"용왕, 내가 잘못했소. 죽을죄를 지었소. 사과하리다."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자 용왕도 조금 누그러졌다.
"그걸 아는 신선이!"
"변명의 여지가 없구려. 사죄의 의미로 사비를 털어 선계 풀코스를 그대에게 대접해주겠소."
"···선계 풀코스?"
"마음에 들 거요. 최선을 다해 성심껏 준비하겠소. 용궁 관리와 장수들도 함께 대접할 테니 같이 오시오."
"···."
제발 넘어와라.
넘어오면 끝난다.
용왕은 절대 모를 것이다.
일단 선계 맛을 보면 두 번 다시 원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몸으로 변한다는 걸.
< 비욘드 레이드(2)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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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욘드 레이드(3) >
당군악은 티제이 그룹 회장실에서 집무를 보는 중.
공장을 돌아다니면서 설비 점검도 끝냈고, 신약 레시피들도 확인해서 보완해야 할 부분도 지적해줬다.
솔직히 자신이 관여할 부분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강호 무림과 지구의 제약 부분은 서로 결이 달랐기 때문에.
당가의 제조 시스템은 숙련된 장인의 수작업으로 고품질의 단약을 만들어 내지만, 지구의 시스템은 대량 생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인챈트 마도 공학이 도움이 될 수도 있겠는데.'
그러나 아직은 배움의 성취가 낮아서 딱히 조언해줄 수도 없다.
귀곡과 갈홍이 넘어온다면 모를까.
다만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선약정(仙藥鼎)을 가져올 걸 그랬나?'
태상노군의 보패
약제의 정수를 뽑아 정제해 효능을 높여주고, 자동으로 약을 만들어 대량 생산도 가능케 해주는 무쇠솥.
선계에서 거울 차원 게이트의 에너지원, 짝퉁 여의주를 만들려고 태상노군에게 빌린 것이다.
'지구로 보내려면 딜을 해야 하는데···,'
무조건 팔긴 할 것이다.
적당한 가격만 제시하면.
태상노군은 선계 대표자 지위를 포기할 정도로 지구 문화에 빠져있었다.
타고 다니던 선학(仙鶴)을 방생하고, 거액의 코인으로 중형 세단을 구입해 타고 다니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이제 좀 쉬어볼까?'
당군악은 스마트폰으로 요즘 삼한에서 제일 이슈가 되고 있는 사안이 무엇인지 검색했다.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뉴스 랭킹 사이트에 들어갔는데.
<너튜브 사하라 초원 게이트 괴수 레이드 영상, 최단기간 20억 뷰 돌파.>
<노인의 정체는? 영혼 연결자일 가능성 높아.>
<한편에선 조작 가능성도 주장, 마치 영화를 찍는 듯한 고도의 카메라 워킹이 그 증거.>
<그렇다면 생방송과 수많은 실제 목격자는? 절대 조작이 아니라는 주장도.>
'검선이 남긴 흔적이군.'
20억 뷰라면 지구 인구 절반 가까이가 검선의 얼굴을 봤다는 말.
'쯧, 마음에 안 들어.'
지구 최강자?
어림도 없는 소리.
'감히 우리 태주를 두고···,'
검선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기고만장해할까?
심지어,
<이윤미 배우, 예능에 나와 전격적으로 공개, 도빈이라는 이름을 가진 일반인 남성을 짝사랑한다고 밝혀.>
<예능에 출연한 이유도 그 사람을 찾기 위해서라며, 이 방송을 본다면 꼭 연락해 달라고 당부>
도빈이라면 검선이 반로환동 했을 때 사용한 가명.
'쯧쯧쯧, 신선이 채신머리가 없어.'
아무 데나 질질 흘리고 다니고 말이야.
두 번은 못 보내겠다.
한 번 더 지구에 오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순간!
똑똑,
노크가 들리더니.
"부회장님."
당군악의 공식적 직함은 티제이 그룹 부회장이었다.
"오! 어서 오게. 백사장."
"기차 시간이 다 됐습니다."
"그런가?"
"수행원은···,"
"아니야, 번잡한 건 질색이니 나 혼자 조용히 다녀오지."
"네, 알겠습니다."
오늘은 기차를 타고 뉴서울에 갈 예정.
맨날 일만 할 수 있나?
노는 것도 중요하다.
검선이 그랬던 것처럼, 이왕이면 가장 큰 도시에서.
품위에 맞게 놀 생각이다.
선계 신선으로써?
웃기는 소리.
신선에게 품위가 어디 있다고.
그딴 건 예전에 포기했다.
자신은 티제이 그룹 부회장이다.
그 격에 맞게 움직일 생각.
자칫하다 회사에 손해를 끼치기라도 하는 날엔 태주 얼굴에 먹칠하는 셈이니까.
※ ※ ※
사실 땅에 착지할 때부터 쌍두마룡은 죽어 있었다.
암기도 암기지만 독령이 조합한 맹독과 선기의 신령한 기운을 이겨낼 리가 없었다.
휘리리리릭!
태주는 고슴도치가 된 놈의 몸에서 암기들을 죄다 수거했다.
그리고 만리비검으로 놈의 배를 갈랐다.
쩌어어어억!
그러자 심장에 박혀있던 거대한 비욘드 엘리트 마나 결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그란 구체였다.
게다가 빛깔은 얼마나 형형색색인지,
크기는 헬스장에서 사용하는 짐볼보다 조금 더 컸다.
"오오, 이럴 수가!"
"이, 이게 비욘드 엘리트 결정체?"
헐레벌떡 달려온 황제와 금수호가 비욘드 결정체를 구경하면서 소감을 늘어놓았다.
"처음 봅니다."
"나도 그래. 누군들 처음 아니겠나? 김회장 빼고."
"크, 크고 아름답군요."
"품고 있는 기운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조차 안 돼."
"이걸로 영약을 만들어 먹으면···."
"쯧쯧, 욕심부리지 마라, 네 거냐? 그러니까 머리가 뒤로 후진하지."
"제가 언제 욕심냈다고요! 그리고 발모제 발라서 풍성합니다."
한참 구경하도록 내버려 둔 후,
"다 보셨죠?"
"실컷 구경했네."
스슷!
무한공간에 집어넣고···, 나머진?
'다른 부산물을 챙겨갔으면 좋겠는데.'
일단 비늘은 쓸 수가 없을 것 같다.
흑암철 주괴와 탈명비도에 찔리고 부서져 엉망이었다.
'약재로도 사용할 것이 있을까?'
개구리 마수다.
독을 품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놈의 체액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봤다.
'흐음,'
그러나 독성이나 약성은 느껴지지 않았다.
'냅두자.'
비욘드 결정체 하나면 됐지 뭐.
"호신부 발동하신 분 없으세요?"
"···뒤에서 결정체만 파냈네만. 한 것도 없어."
"하하, 그럼 좀 쉬었다가 다음 장소로 이동하시죠."
"응?"
황제와 금수호가 놀라며 물었다.
"비욘드 사체를 그냥 두고 가자고?"
"별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그럼 우리가 가져도 되겠는가?"
"그러세요."
"오오오, 아, 알았네. 잠시만 시간을 내주게. 이것저것 해야 할 일도 있네만."
"천천히 하세요."
태주는 쌍두마룡 시체에서 떨어져 고양이로 변한 일이삼백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수고했다."
"크르르르르···,"
"···너 지금 고양이잖아."
"냥?"
"청개구리냐? 왔다갔다 하게."
"냐아아아."
그 와중에 황제와 금수호는 바쁘게 움직였다.
쌍두마룡의 비늘이 성한 게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그중에서도 상태 좋은 것만 뜯어냈다.
큼지막한 발톱도 잘라냈다.
비늘과 발톱을 가공해서 방어구와 무기를 제작하면 최고의 장비가 될 수 있을 터.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요?"
"그래, 충분해.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해보세."
부산물 채취 말고도 해야 할 일이 더 있다.
이제 여기서 죽어보자.
죽음을 위장할 순간이 왔다.
"가져온 거 꺼내게."
"네."
금수호가 아공간 가방에서 빨간 혈액 팩 두 개를 꺼냈다.
오기 전에 미리 채혈해 둔 것.
꽤 많이 뽑아왔다.
먼저 옷의 일부분을 조각조각 찢었다.
찌직, 찌지직! 찍!
황제도 금수호와 똑같이 했다.
소매와 밑단, 바지자락···, 골고루 피를 묻혔다.
신발 한 짝 벗어서 거기에도 묻히고, 남은 건 땅바닥에 뿌리고, 손에도 흠뻑 묻힌 후,
지잉! 지이잉!
황제와 금수호는 각자 검을 들고 강기를 불어넣었다.
태주에게 받은 보검이 아닌 이전에 가지고 다녔던 검.
그러고 난 뒤, 시체가 된 쌍두마룡 위로 올라가 연신 칼질을 해댔다.
자신들의 스킬을 이용해 가르고, 베고···, 그리고 머리와 몸통에 검을 손잡이까지 박아넣었다.
피가 묻은 옷 조각들도 쌍두마룡 시체 주위에다가 넓게 뿌렸다.
신발도 이쪽저쪽에다 한 짝씩, 갖가지 소지품도 간격을 두고 떨어뜨려 놓고.
"됐군."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금수호는 마지막으로 피 묻은 손을 이용해 위성 스마트폰을 꺼냈다.
긴급 구조신호 버튼을 쿡, 누르고 땅에다 던졌다.
곧 SOS 신호는 제정원과 제국군 수뇌부로 전해질 것이다.
"믿을까요?"
"믿을 수밖에 없지. 우리가 평범한 마수와 싸운 것도 아니고, 비욘드 엘리트 쌍두마룡 아닌가."
"하긴···,"
"우린 쌍두마룡과 싸우다 양패구상한 거야.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
빠르면 오늘, 늦어도 내일이면 이곳으로 구조대가 파견될 것이다.
미리 피를 묻혀 뿌려놓은 옷 조각과 스마트폰을 주워갈 것이고, 그걸 토대로 과학 수사 연구소에서 감식하겠지.
피도 자신들의 것, 시체에 박힌 검도 자신의 검, 위성 스마트폰도···, 게다가 지문도 곳곳에 찍혀있으니.
당연히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회장, 다음 사냥은 어디로?"
"남서쪽으로 가보죠."
"알았네. 빨리 뛰어가세."
힘들게 왜 뛰어가?
태주는 만리비검을 꺼내 허공에 둥둥 띄우고 올라탔다.
"···어."
"무, 무슨?"
"자, 제 손 하나씩 잡으세요."
"그, 그냥 뛰어가면 안 되겠나?"
"빨리요."
"으음."
덥석!
손을 잡고.
쐐애애애애액!
한 손에 황제, 한 손엔 금수호.
빛살처럼 날았다.
"어헉!"
"떠, 떨어진다."
"···저, 절대 손 놓지 말게!!!"
옛 중국 땅 수복이 눈앞이다.
비욘드만 싹 처리하면 끝이다.
'여기다 나라나 세워볼까?'
하지만 태주로선 직접 다스리기 귀찮고.
'아니면 삼한제국 영역으로 두고, 땅은 개인 소유로 등기 이전한다거나···.'
세계 최고의 땅 부자가 되겠다.
태주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 ※ ※
선계(仙界).
용왕은 용궁 신하들과 용족들을 이끌고 선계로 건너왔다.
염라가 문을 열어주어 승천을 통하지 않고도 쉽게 올 수 있었다.
검선도 사과했고, 염라와 상제의 권유도 있었고,
그래서 못이기는 척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용왕도 궁금했다.
선계, 천계, 황천계까지.
상위계 존재들이 왜 다른 세상의 문물에 그렇게 혹하는지 말이다.
하지만 그동안은 모른 체하고만 있었다.
전에 모였던 상위계 대 회합에서 혼자서만 딴지를 걸어댔기 때문이다.
세속적 물욕에 집착하는 신선들을 꾸짖었고, 질서를 망가뜨리는 독선을 엄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 상위계 대회합에도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다 뭐지?
과연 자랑할 만하다.
"대체 저 난잡스러운 기구들은···?"
"놀이기구들입니다. 잘 보시오, 용왕. 천인들의 표정이 행복해 보이지 않소?"
"···흐음, 뭐, 그런 것 같긴 하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용왕은 즐겁게 뛰어노는 천인들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상전벽해라더니···,'
언제 선계가 이렇게 변했지?
곳곳에 깔린 도로, 그 도로를 통해 작은 탈것을 타고 다니는 천인들과 신선들, 각종 놀이기구, 작은 저쪽에 높게 세워진 건물, 음료와 간식을 파는 가게들.
원숭이들도 돌아다녔다.
'흐음, 제천대성의 분신들이군.'
배달의 선계라는 글씨가 적힌 조끼를 입고 있다.
'배달이라, 나 원 참, 웃기지도 않아.'
검선이 굽신굽신 용왕에게 말을 건넸다.
"일단 멀티플렉스부터 안내해드리겠소."
"머, 멀티? 그건 뭐요?"
"풀코스 첫 단계지요. 마음에 들 겁니다."
언제나 그랬듯 풀코스의 시작은 극장 관람.
지구 문물이 어떤 형식인지 학습하는 것이 먼저다.
그래야 뭐가 좋은 줄 알지.
갈홍 선인이 천리신통(千里神通) 술법진을 설치해 놓은 터라 언어의 장벽은 문제 되지 않는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보면 슬슬 물들어갈 것이다.
나오는 음식을 먹어보고 싶을 것이고, 술도 마셔보고 싶겠고, 각종 가전제품, 스마트폰, 자동차, 이런 모든 것들이 궁금할 거고.
용왕 일행을 멀티플렉스 상영관으로 안내한 후, 검선이 신선들을 불러 모았다.
"절대 저들을 자극하면 안 되오. 진상 짓을 해도 참으시오."
"걱정하지 마시오. 용 새끼와 생선들이 진상부리면 얼마나 부린다고."
"일단 극장에 들어갔으니 팝콘하고 콜라 한 잔씩 돌립시다."
"공짜로?"
"미끼일 뿐이오. 가격도 얼마 안 되지 않잖소."
"맞소. 길을 들여야지. 자잘한 건 서비스로 제공하고, 큰 건 돈을 받고."
"흐흐흐, 결국은 여의주를 팔 거요."
그러고 나서 선계로 놀러 온 도화궁 미호 선자를 불러,
"여우야, 상영관 안으로 가서 용왕과 일행들에게 콜라와 팝콘, 그리고 군것질거리 서빙 좀 해다오."
"···내가 왜요?"
"쯧쯧, 우리가 뭘 하는지 모르는 바도 아니면서, 넌 지구로 가기 싫으냐?"
"저까지 기회가 오겠어요?"
"···올 수도 있지."
"헹! 어쩜 이렇게 기대가 안 되지? 그리고 비린내 난단 말이에요. 가까이 가기도 싫은데,"
검선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이걸 대가로 주마."
"···뭔데요?"
"스마트폰 케이스와 인형 고리, 지구에서 직접 사 온 거다."
"으음,"
잠시 고민하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미호.
"좋아요."
"허허, 그래, 비린내 난다고 얼굴 찡그리지 말고!"
"참아 볼게요."
"아! 오징어 버터구이와 문어가 들어간 다코야키는 빼라. 화를 낼 수도 있으니."
용궁 놈들의 반응은 어떨까?
뉴서울 갓 상경한 촌놈들처럼 눈깔이 정신없이 돌아가겠지.
사실 상영관에 들어간 이상, 여의주는 반쯤 넘어온 거나 마찬가지.
곧 지구의 문이 열릴 것이다.
더 크고, 더 오래 지속되는 게이트 말이다.
검선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태주 일행이 떠나고 쌍두마룡의 시체만 거대한 산처럼 남았다.
비욘드 엘리트 마수의 기운이 사라지자 주변에 있던 마수들이 서서히 몰려오기 시작했다.
순간!
투타타타타타타!
저 먼 하늘에서 들리는 항공기 소리.
삼한 제국군 공군이 보유한 VT – 23 네오스프리, 틸트로터 수직이착륙 수송기였다.
쿠웅!
수송기가 평지에 수직으로 착륙하자,
"빠르게 내려! 전투조 마수들부터 정리하고, 수색조들은 신호를 찾아! 마수들이 더 몰려오기 전에 끝낸다."
제국군 최정예 각성자 군인들이었다.
마스터들도 수두룩했다.
신속하게 쌍두마룡이 죽어 있는 장소로 달려가는 각성 장교 군인들,
하지만,
"···아!"
"헉!"
"이런!"
그들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폐하와 금 비서관의 것으로 보이는 피 묻은 옷가지, 스마트폰, 그리고 쌍두마룡에 머리와 몸통 부분에 꽂힌 검.
하지만 그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마수들이 남긴 흔적만 있을 뿐.
"주, 주위엔 아,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런 제기랄!"
제국군 지휘관은 탄식했다.
"촬영은 하고 있나?"
"네."
"···일단 옷조각과 무기, 그리고 스마트폰은 오염되지 않게 조심해서 모조리 수거해."
"알겠습니다."
긴급으로 하달된 상부의 지시.
VVIP 구출 작전.
처음엔 누군지 몰랐지만 나중에 알았다.
그 VVIP가 바로 황제 폐하라는 걸.
아니, 휴가를 떠나셨다고 알려지신 분이 왜 비욘드 엘리트 마수의 영역에?
'휴가가 아니라 사냥 가신 거였어.'
도무지 모르겠다.
두 분께선 왜 이렇게 위험한 일을···,
아무튼 비욘드 쌍두마룡과 혈전을 치르다 전사하신 게 확실해 보인다.
'후우···,'
큰일 났다.
황제 폐하와 금수호 비서관이 사망했다고?
삼한을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이?
어떡하나.
제국의 미래가 암담해졌다.
분명한 건 이 사태로 삼한제국이 발칵 뒤집힐 것이다.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 비욘드 레이드(3)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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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북성 무한 >
태주는 하남성에서 쌍두마룡을 잡고 남서쪽 방면으로 내려왔다.
도착한 곳은 섬서 서안성 마수 밀집지대.
서안에서 마주한 비욘드 엘리트는 BEM – C05 흑오토룡(黑蜈土龍), 길죽한 몸체에 지네처럼 달린 다리, 마치 잠수함처럼 땅속으로 이동하는 놈이다.
어렵지 않았다.
이동은 땅속으로 해도 공격할 땐 바깥으로 나와야 하니까.
그래서 가볍게 잡아주고, 비욘드 마나 결정체 하나 더.
엘리트 결정체도 아공간 가방에 가득 찰 정도로 모였다.
일이삼백이가 부하 엘리트 마수들을 섬멸하다시피 했고 뒤따라온 황제와 금수호가 짐꾼 역할을 톡톡히 해주니.
그리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중경, 중국어로 충칭.
300년 전 중국의 대도시.
인구만 해도 3천만이 넘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그 높던 마천루가 다 무너졌고, 콘크리트 쓰레기 더미만 쌓인 폐허였다.
여기도 비욘드 마수가 존재한다.
무려 충칭을 멸망시킨 놈.
BEM – C02 철각뇌룡(鐵角雷龍)라는 마수가 중경을 자신의 영역으로 삼고 있었다.
크기가 1톤 트럭 정도라 비욘드 마수 중에서 가장 작았지만 의외로 엄청 까다로웠다.
날쌘 놈이다.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뇌룡(雷龍).
전격 공격을 하는 건 아니지만 번개처럼 빠르다.
스피드가 최대 강점인 놈.
그리고 철각(鐵角), 무시무시한 금속 뿔.
그것에 받히면 건물이든, 탱크든, 풍선처럼 터져버린다.
철각뇌룡 레이드의 핵심.
빠른 속도를 효과적으로 대응해야 하고, 뿔 박치기는 무조건 피한다.
만약 그러지 못하면···,
츠파팟!
콰아악!
"허억!"
콰쾅!!!
철각뇌룡 뿔에 받혀 반쯤 무너진 건물 벽에 처박혀버린 금수호.
지이잉,
다행히 호신부가 발동됐다.
금수호뿐만이 아니었다.
츠파팟!
콰아악!
"크헉!"
지이잉,
황제도,
콰직!
"크릉?"
일이삼백이도,
놈은 은신해 있다가 후방에서 기습해왔다.
다른 비욘드와는 달리 자신의 기척을 숨겼다.
심지어 가장 약한 존재부터 공격해왔다.
금수호가 먼저 당하고, 황제, 일이삼백이 순서로.
'···머리도 좋네.'
철각뇌룡은 뿔 박치기 돌진으로 겨우 1초 안에 세명을 거의 동시에 타격했다.
호신부가 발동해서 다친 사람은 없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
'빨리 잡아야겠어.'
놈의 공격이 태주를 향했다.
스팟! 파파팟! 파팟!
번쩍, 번쩍, 번쩍.
지그재그 스텝을 밟아가며 태주에게 달려오는 철각뇌룡.
독령을 깨닫기 전이었다면 저 속도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스스스스스슷!
이미 수만 개의 암기가 출격 지시만을 기다리며 허공에 둥둥 떠올라 있었다.
슈웅! 슈우우우웅! 피피피핏!
암기의 융단 포격이 펼쳐졌다.
화들짝 놀란 철각뇌룡이 다급하게 방향을 꺾었다.
번개처럼 도망쳤다.
태주의 흑암철 탈명비도가 유도 미사일처럼 따라갔지만,
피피피피핏!
놈의 몸에 명중하지 못하고 땅바닥에 박혀버렸다.
태주는 살짝 놀랐다.
독령을 깨달은 이래로 발출한 암기가 빗나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오! 이걸 피해?"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다.
암기 몇 자루 피한 것이 뭐 대수라고.
무한공간에서 선계 철장 선인의 보패, 신령비도(神靈飛刀)를 꺼내,
'쫓아!'
영성을 가졌기 때문에 독령으로 제어하지 않아도 처음 내린 지시를 끝까지 수행하는 무기.
스파앗!
신령비도가 은빛의 긴 꼬리를 남기며 집요하게 뒤를 쫓았다.
방향을 전환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앞에는 놈을 기다리고 있는 암기의 먹구름.
"키킥?"
콰콰콰콰곽!
암기가 벌떼처럼 덮쳤다.
서거거거걱!
철각뇌룡이 갈가리 찢겼다.
무서운 뿔도, 두꺼운 피부도, 단단한 뼈도,
모조리 사라졌다.
남아있는 건 비욘드 마나 결정체뿐이었다.
'이번 결정체는 크기가 작네.'
물론 비욘드답게 마나가 진하게 응축되어 있었지만.
오히려 크기가 작은 것이 더 낫다.
가공하기도 편하고.
'그나저나···, 잠시 쉬어야겠지?'
황제, 금수호, 일이삼백이의 호신부가 동시에 발동했다.
24시간이 지나야 다시 쓸 수 있으니···,
'오늘은 여기서 쉬자.'
황제와 금수호는 멀리서 질린 듯한 표정으로 태주를 바라봤다.
그의 말은 절대 틀리지 않았다.
처음 비욘드 마수가 뒤에서 습격해왔을 땐 꼼짝하지도 못했다.
죽음 위장이 아니라 진짜 죽는 줄 알았다.
그런데 멀쩡했다.
그 섬찟한 뿔에 찔렸지만 상처조차 나지 않았다.
"부적이 진짜였어."
"네.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나저나 짐 덩어리 신세가 됐군."
"뭘 새삼스럽게, 처음부터 그랬는데요."
"···쯧, 황후나 자식들도 깨달아야 할 텐데, 저 힘 앞에서 제국의 권력을 차지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김회장 입장에선 삼한 제국 따윈 그저 가소로울 뿐이겠죠. 그런데 선심 쓰듯 제국을 넘겨주니 마니 했으니."
"쩝, 이 정도일 줄 알았나? 우린 우리 일이나 신경 쓰세. 천상계에서 노는 김회장은 내버려 두고."
태주는 적당한 장소를 골라 천막을 치고 의자와 테이블도 설치했다.
특별히 신선주와 선도를 꺼냈다.
일이삼백이는 엘리트 마수들 정리하느라 고생했고, 황제와 금수호는 일일이 배를 갈라 결정체를 수거해줬으니까.
고즈넉한 분위기.
어느새 어두워져 달빛이 아득했다.
사이좋게 술과 선도를 나눠 먹고 모닥불 주위에 동그랗게 모여 앉았다.
하지만 서로 대화 대신 각자의 일에 열중하느라 정신이 없다.
톡톡! 토토톡!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날리는 금수호.
따로 연락을 취하는 누군가가 있는 듯했다.
"흐음."
"어떻다던가? 현재 상황은?"
황제가 금수호에게 넌지시 묻자.
"조용합니다. 기대했던 반응은 아직 없습니다."
"그래? ···아마 당황했나 보군."
"당연하지요, 쉽게 믿을 수 있는 사안이 아니지 않습니까? 시간이 더 필요할 듯합니다."
"느긋하게 기다려보자고. 시간은 많으니까."
황제와 금수호의 죽음.
섣불리 판단할 사안이 아니다.
거짓 죽음을 알리는 건 쌀을 씻어 압력밥솥에 넣어 취사 버튼을 누른 것과 같다.
이제 칙칙, 김이 올라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태주도 당군악과 메시지를 나누는 중.
독선은 지금 뉴서울에 있었다.
리더스 클럽에서 이고르 바라노프를 만나는 것 같은데,
같은 신선이라 해도 검선과 독선은 서로 성향이 완전 달랐다.
극과 극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검선은 눈치 따윈 조금도 보지 않았다.
돈을 씀에 있어서 고민 같은 것도 없었다.
내키면 그냥 질러댔다.
반면 독선은 조심스러웠다.
뉴서울로 상경한 지 꽤 됐는데, 카드 결제 알림 메시지도 거의 울리지 않았다.
가끔 커피숍에서 몇천 원 정도 긁혔지만, 그것뿐.
그래도 간혹 보내주는 사진들이 있었다.
즐겁게 지내고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
오늘도 그랬다.
리더스 클럽에서 사람들과 함께한 사진들.
'흐음, 기분이 좋으신가?'
얼굴들을 보니 다 알만한 사람들.
배우, 탤런트, 가수, 예능인들···,
사진에서 독선은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연예인들 좋아하시구나.'
연예기획사라도 인수해야 할지도.
배우들은 알는지 모르겠다.
선계의 신선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걸.
밤이 깊어간다.
타닥, 타닥, 타닥,
모닥불이 거세게 피어올랐다.
"참! 내일은 어디로 갈 예정인가?"
황제의 물음에 답하는 태주.
목적지는 이미 정해놨다.
"무한으로 갈까 생각 중입니다만."
"음?"
고개를 갸웃하며 재차 물어오는 황제.
"···무한? 호북성?"
"네."
"흐음, 무한이라,"
호북성 무한, 중국 명칭으론 후베이성 우한.
과거 중국 군대의 핵탄두가 가장 많이, 집중적으로 투하된 곳.
거기에만 10기 이상이 떨어졌다.
"무한 일대를 영역으로 삼고 있는 비욘드 엘리트가 무언지 아는가?"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비욘드가 무한에 있다고는 들었는데 정보가 나오질 않아서요."
"나도 몰라. 사실 거긴 정찰이 안 되는 곳이라 그래."
"···드론도?"
"초고도 항공기를 띄워 드론을 투하했지만 보내는 족족 부서졌네. 항공 촬영에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고,"
"이유는 파악하지 못했나요?"
"그걸 어떻게 아는가? 핵이 떨어진 이래, 무한에 직접 가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비욘드 정찰은 매우 중요하다.
위치도 대충 가늠할 수 있고, 식별번호도 매기고.
하지만 무한의 비욘드는 그걸 할 수 없었다는 의미.
"아무튼 이상하긴 해. 유독 무한만 그렇단 말이지."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 무한이라고,
만약 세상이 멸망한다면 그 시작점이 바로 그곳이라고.
"솔직히 전 핵무기 방사능 때문에 비욘드 엘리트가 탄생했다는 것 자체가 이해 가지 않습니다."
"맞아. 과학적 근거는 하나도 없고, 단지 추론일 뿐이니까."
황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네."
"어떤 말을?"
"중국이 왜 무리하게 핵을 터뜨렸을까? 그것도 무한에만 10여 발씩이나."
"글쎄요."
"비욘드 엘리트가 그 전에 존재했다는 가설이 있어. 핵무기로 비욘드를 만든 것이 아니라, 비욘드 때문에 핵무기를 썼다는 거지."
"아!"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달라질 것이 있나?
인과관계가 어찌 됐든 중국이 비욘드 때문에 망한 건 사실이고. 지금도 인류의 평안이 위협받고 있는 게 사실이니까.
※ ※ ※
다음날.
태주 일행이 탄 만리비검이 호북성 무한으로 날아갔다.
황제와 금수호는 태주에게 매달려 날아가는 식이지만 그래도 제법 적응이 된 모양인지, 매우 안정적이었다.
핵무기가 떨어진 후.
무한은 정찰도 불가능한 전인미답의 지역으로 변했다.
아무도 가보지 못했기에 비욘드에 대한 정보도 없었다.
태주는 기대가 됐다.
대체 얼마나 강한 놈이 있길래, 드론 촬영조차 못 하는 걸까?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호북성의 경계를 넘자마자 덮쳐오는 꺼림칙한 기운.
'···응?'
아직 무한은 굉장히 멀리 있는데 벌써?
일단 계속 가보자.
쐐애애액!
가까이 가면 갈수록 기운이 더더욱 진해진다.
'이거 심상찮은데?'
지금까지 느꼈던 비욘드의 기운과는 차원이 다르다.
"김회장, 이거···,"
황제도 느낀 모양.
더불어 태주의 품에서 쿨쿨 자던 일백이도,
"냐아아?"
고개를 내밀고 경계했다.
'안 되겠네.'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평지에다 황제와 금수호, 일이삼백이를 내려놓았다.
"여기서 기다리고 계세요, 저 혼자 살펴보고 올게요."
"우리도···,"
"예감이 좋지 않아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저 혼자 도망치는 게 편합니다."
"···아, 알았네."
혼자 날아가니 속도는 매우 빨라졌다.
기세도 피부가 저릿저릿할 정도고 강해졌고.
'평범하지 않아.'
대체 뭘까?
혹시 모르니 투명부도 붙이고.
스르륵,
저 멀리 보이는 자욱한 안개.
그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폐허.
무한이었다.
도시 외곽은 비교적 옅었지만 안쪽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안개가 두껍게 깔렸다.
'다 왔나···, 어?'
멈칫!
허공에서 멈춰 선 만리비검.
태주는 제 눈을 의심했다.
도시 가장자리, 옅은 안개에서 빠져나온 거대 생명체 하나.
"무슨···?"
비욘드 엘리트였다.
거대한 파충류의 모습을 한 변종 용(龍).
놈이 존재한다는 건 이상한 것도 없지만···,
"크르르르르,"
"크러렁! 컹!"
"캬오오오···,"
"그륵, 그르륵!"
.
.
.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폐허로 변한 도시, 자욱한 안개로 덮여있는 무한엔 온통 비욘드 마수 천지였다.
"미친!"
각자 고유의 영역이 있는 비욘드 엘리트들이 한군데 모여 있다고?
서로 싸우지도 않고?
같이 어울려 다녀?
저 모습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엘리트 마수의 생태적 특징과 비슷하다.
원래 엘리트도 제 영역을 가진 마수.
하지만 비욘드가 거느리는 부하 엘리트들은 종속된 놈들이라 영역 분쟁 없이 다 함께 모일 수 있다.
'무한의 비욘드들이 그보다 더 강한 놈에 의해 종속됐다는 건가?'
좀 더 살펴보자.
촬영도 하고,
태주는 스마트폰을 꺼내 동영상 촬영을 실행하고 독령으로 허공에 띄웠다.
그때였다.
펄럭, 펄럭, 펄럭,
어디선가에서 들리는 날갯짓 소리.
고개를 올려보는 태주.
역시 안개 자욱한 하늘이었지만,
"···."
많다.
안개에서 빠져나온 숫자만 족히 수백 마리는 되어 보였다.
"꾸르르륵, 꾹"
"쿠룩, 쿡!"
"크라라라라락!"
"크아아아아!"
.
.
.
날개 달린 비행 마수.
하나같이 비욘드였다.
놈들도 용의 형상을 하고 있으니 익룡이라 해야 하나?
숫자가 엄청났다.
저것도 일부분일지도 모른다.
'특이점이 있다고는 생각했는데···.'
확실해졌다.
대장이 있다.
무려 비욘드 마수를 부하로 거느리는 지배종이.
바로 이 무한에 말이다.
'어쩌면 중국이 핵무기를 발사한 이유도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를 수 있어.'
또 비욘드가 탄생한 원인도.
'···일단 물러나자.'
혼자였다면 모를까.
황제와 금수호가 있으니까.
죽음을 위장하러 왔다가 진짜 죽을 수도 있다.
※ ※ ※
용궁 햇볕정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신선들은 날마다 서로 결과를 공유하며, 상황에 따라 어떤 전략과 전술로 움직여야 할지 의논했다.
대표적인 소통의 매체는 오직 신선만이 가입할 수 있는 선계 커뮤니티 보패드림.
보패드림에 수많은 글이 올라왔다.
[속보] : 드라마를 보던 용왕, 분기탱천!
- 황좌의 게임을 시청하던 용왕, 불을 뿜는 도마뱀을 목격한 순간 경악하면서 고래고래 고함질러, 저게 무슨 용이냐면서.
└ 클클클, 용이 아니라 드래곤이라 일러 주지 그랬소?
└ 그래서 내가 말했지, 답답하면 지구로 직접 가보자고, 진정한 용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주자고.
└ 좀 더 뽐뿌질 해봅시다.
[속보] : 용궁 어인(魚人) 대내 상궁, 영화 인어공주 관람 후 오열!
- 어인 상궁, 영화 보고 찔찔 짭니다.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어인 얼굴이 너무 시커멓다고 난리요. 보는 내가 가슴이 아프구려.
└ 어인이라고 다 흰색인가? 물고기 중에도 검정색 돌돔이 있고, 은색 감성돔도 있고, 붉은 참돔도 있는데 말이오.
└ 인종차별 발언이라고 하지 그랬소.
└ 생선이 인종차별은 무슨! 어종차별이지.
[속보] : 용궁 백경 대장군, 아무리 다른 세상이지만 지구의 해양 마수가 바다를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심심한 우려 표시.
└ 멍청한 고래 놈이로다. 우려를 심심하게 하는군.
└ 쯧쯧, 심심하다는 게 그 뜻인가? 깊다는 말이잖소.
└ ···나, 나도 알고 있소. 노, 농담 한번 해본 거요.
└ 아무튼 용궁 군대가 지구 바다에 투입되면 해양 마수 따위는 걱정 없겠네.
└ 그럼 흑암철 수요도 줄어들겠어.
└ 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야. 황천계 놈들 흑암철로 유세 떨었던 것이 꼴 보기 싫었던 참이었는데.
[속보] : 용왕, 스마트폰에 관심 가져, 염라에게 용궁에 문을 열어 선계 네트워크를 연결할 수 있는지 문의.
└ 흐흐흐, 내게도 스마트폰을 어떻게 구할 수 있는지도 묻더군.
└ 그래서?
└ 코인이 많아야 한다고만 말했소.
슬슬 물들어 가고 있었다.
아직은 그리 적극적으로 나오진 않았지만.
하긴, 여의주 얻기가 쉬운가?
그것 말고도 넘어야 할 장애물이 있다.
└ 독선이 빨리 돌아와야 하는데, 스마트폰 같은 귀중한 물건들은 그의 무한공간에 다 들어있잖소.
└ 사실 돌아와도 문제요. 독선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 맞아. 그는 우리가 지구로 건너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 태주 대협에게 폐를 끼친다고 그런 거겠지.
결국 독선이 허락해야 한다.
└ 우리가 넘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면?
└ 어떤?
└ 예를 들어, 사하라 초원 게이트 요괴보다 더 강한 놈들이 나온다거나.
└ 허허, 최소한 괴물은 되지 맙시다. 지구의 불행을 이용해 우리의 욕망을 채우면 그게 신선이오?
└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리고 지구에 제천대성 같은 대 요괴가 출현하지 말라는 법도 없고.
└ 왜 날 걸고넘어져? 내가 무슨 대 요괴요?
└ 어? 원숭이 새끼가 보패드림에 어떻게 가입했어?
└ 당장 제명해!
< 호북성 무한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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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요 없어! >
태주는 황제, 금수호와 함께 삼한으로 복귀 중이었다.
그들을 안전한 곳에 두고 혼자 올 생각.
원래는 식별번호가 알려진 비욘드들을 모두 처리한 후 돌아오려 했지만, 무한의 비욘드 무리를 목격한 이상 우선순위가 달라졌다.
그래도 성과는 충분히 만족스러울 만했다.
비욘드 결정체도 3개나 확보했고, 엘리트 결정체는 숫자를 셀 수도 없을 정도니까.
하지만 중요한 건 결정체 따위가 아니다.
무한은 비욘드 마수 밀집지대, 심지어 비욘드 비행 마수도 존재했다.
만약 놈들이 동쪽으로 무작정 날아오면?
구례, 파주, 양산···, 삼한 제국은 끝장이다.
무조건 소탕해야 한다.
이미 결정 난 거다.
한 가지 고민되는 것은···,
'독선에게 알릴까?'
살짝 주저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마치 동네 양아치에게 맞았다고 힘센 형아에게 쪼르르 달려가 일러바치는 꼴이라서.
그래도···,
'우린 같은 영혼이니까.'
맞다.
'내가 나한테 고자질하는 데 뭐가 문제야?'
그래서 태주는 스마트폰으로 독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 ※
뉴서울.
당군악은 나름 알찬 시간을 보냈다.
검선이야 지구에 와서 별짓 다 하고 갔지만.
그리고 더는 지구에 문을 열고 싶지 않다.
와봤자 신선들이 분탕질이나 치고 갈 텐데 뭐하러.
사하라 초원 게이트 사태가 일어난다고 해도 태주 혼자서 충분하다.
조력자도 있다.
제천대성의 털도 나날이 풍성해지는 판에.
신선들은 민폐일 뿐이다.
그런 이유로 지구에 강림한 마지막 신선은 자신이 될 것이다.
다른 신선들이 지구에 가고 싶다 난리를 쳐도 차원 발생기를 지구로 보내지 않으면 그만.
당군악은 현재 뉴서울 리더스 클럽에 있었다.
삼한에서 내로라하는 유명 인사들이 다 모이는 곳.
클럽의 오너, 이고르 바라노프와 만났다.
미리 연락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누군지 궁금해하는 눈치여서 어쩔 수 없이 검선의 흉내 좀 내봤다.
"이고르, 자네 선도를 먹었군."
"헉!"
놀라서 동그래진 눈동자.
"마, 맞습니다."
"아무나 먹는 게 아니야. 인연이 있어야 하는 거네. 앞으로 천수를 누리며 건강하게 살 걸세."
"···감사합니다."
"태주도 성심껏 도와주고."
이고르가 허리를 숙이며 공손하게 물었다.
"저어, 부회장님, 아직 회원증 없으시죠?"
"당연히 없지."
"그럼 만들어드리겠습니다."
"허허, 뭘 그런걸···, 험험, 등급은?"
"당연히 다이아몬드 등급이죠."
"사양하지 않겠네."
단번에 다이아몬드 회원증이 발급됐다.
'훗, 검선도 이건 없을 거야.'
있을 리가 있나?
격의 차이가 이 정도다.
'눈높이가 다른 거지.'
검선은 아라비아 옥타곤이라는 향락의 클럽에 가서 놀았고,
자신은 리더스라는 사교와 교양의 클럽의 회원이다.
"더 필요하신 건···,"
왜 없을까.
검선이 했던 거, 자신도 해보고 가야지.
"이 클럽에 영화배우나 가수들도 종종 들리는 걸로 아는데."
"자주 옵니다. 우리도 편의를 제공하는 부분이 많아서."
리더스 클럽엔 삼한 연예계 톱스타들도 회원으로 있다.
"지금 여기 와 있는가?"
"네, 마침 클럽 연회장에서 갑오징어 게임 시즌 14 종방연이 열리고 있습니다."
"오! 갑오징어 게임이 벌써 시즌 14나 됐나?"
"곧 시즌 15 제작도 들어갈 겁니다."
거기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모두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배우들.
검선이 만났던 조연 배우와는 차원이 다르다.
"만나서 같이 사진이라도 찍었으면 좋겠네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제가 바로 자리를 마련해보겠습니다."
그래서 주연 배우들과 함께 사진도 찍고 대화도 나누고.
그걸 찍어서 태주에게도 보내고.
'이거 재미있네.'
검선이 이랬던 이유를 알겠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쇼핑도 충분히 했다.
주로 건설 자재.
백서연의 도움을 받아 시멘트, 벽돌, 단열 자재, 벽지, 타일 등등 무한공간에 꽉꽉 채웠다,
아무튼 슬슬 선계로 돌아갈 날이 온 것 같다.
지구 관광은 원하는 만큼 했으니, 미련도 남지 않았고.
순간!
띠링, 지이잉.
스마트폰 알림음이 떴다.
태주가 보낸 메시지.
"오!"
마침 잘 됐다.
작별 인사도 미리 해둬야 하니.
그래서 메시지를 확인해 봤는데,
"음?"
영상이 하나 첨부되어 있었다.
뭐지?
비욘드라는 요괴들 사냥 영상인가?
당군악은 영상을 실행했다.
그러자 드러나는 모습들.
"···허허."
기가 막힌다.
이렇게 많이?
일단 비욘드 요괴라는 건 확실하다.
태주도 쉽게 잡을 수 있는 놈들.
그런데 숫자가 심상치 않았다.
안개로 짙게 덮인 지역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가장자리에서 관측된 숫자만 해도 엄청났다.
많아도 너무 많다.
보통 이렇게 강한 놈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영역을 설정하고, 서로 침범하지 않으며 살아간다던데···.
'상식이 무너졌군.'
극히 위험하다.
심지어 날개가 달린 요괴도 있다.
지금은 한곳에 모여있지만 이놈들이 날아서 전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지구는 또 한 번 멸망의 위기에 처할지도 몰라.'
그냥 놔둘 순 없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그래서 당군악은 태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날세."
- 보셨나요?
"봤지. 내가 직접 가보려고 하는데, 자넨 지금 어딘가?"
- 지금 구례로 가는 중입니다. 저 혼자뿐만이 아니라서, 나중에 다시 와보려고요.
"알았네. 내가 직접 가보겠네."
- 그럴 필요까지는, 그냥 편하게 쉬시다가···,
뚝,
당군악은 전화를 끊었다.
시간이 없다.
선계로 돌아가기 전에 두 눈으로 똑똑히 관찰해야 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