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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18% REGRINFINT / Chapter 15: 15

Bab 15: 15

검은 뱀 (10)

"어…."

전명훈은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단지 멍청하게, 허공에다가 되물을 뿐이었다.

'내가, 단약이라고?'

단약을 만들 때, 약성에 생명력을 축적시키기 위해 생명체의 생명력을 뽑아 쓴다는 말은 들은 적 있었다.

그리고 금소해에게 축기단 등의 단약을 만들 때 인간을 사용한다는 말도 들은 적 있었고.

―물론 본문에 들어와서 비승까지 함께 하려면, 축기기 정도는 축기단 없어도 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자질이 뛰어난 이들이 아니고선 불가능하기 때문에 딱히 축기단 같은 걸 먹은 이들은 많지 않아.

금소해가, 금신천뢰문에는 천영근자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에 축기단 같은 걸 볼 일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한 것도 기억났다.

전명훈 자신도 인간으로 만든 단약 같은, 야만적인 단약은 먹을 일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단약?'

전명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스승인 금진찬에게 잡혀 온 뇌옥의 내부.

―앞으로 13시진 후, 단약사가 보조 재료들을 전부 숙성시키면 너를 천상금뢰단(天上金雷團)으로 제련하는 과정이 시작될 것이다, 그 전까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거라.

전명훈은 금진찬의 마지막 말에, 아직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내가, 여기서 이렇게 죽는다고? 10년간 개처럼 칠성제만 지내다가?'

억울했다.

화도 났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무서웠다.

'씨발…. 내가, 이렇게 죽는다고? 정말로?'

전명훈이 뇌옥 내부에서 머리를 감싸 쥔 채 굳은 표정을 지었다.

10년 동안 조금 기른 머리가 그의 손아귀 사이로 흘러내렸다.

'빌어먹을… 도대체 왜 이렇게….'

그가 절망하고 있을 때였다.

그그극….

전명훈의 뒤쪽 벽.

그곳의 일부분이 갑자기 빠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안쪽에서 금소해가 나타났다.

"…! 소해…!"

전명훈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소해는 눈을 찌푸리며 자신의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쉬잇! 조용히 해! 간수들 눈 피해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조용히 하고 이쪽으로 와."

전명훈은 침을 삼켰다.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금소해가 찾아온 지금만이 기회라는 것을.

그는 소리를 죽인 채 금소해에게 다가갔다.

"소해, 나, 날…."

"구해 주러 온 거 맞아. 제발 조용히 좀 해. 이쪽으로 와."

얼마 후, 전명훈이 갇혀 있던 뇌옥 안쪽은 완전히 빈 공간이 되었다.

그리고, 비어 버린 뇌옥으로 금진찬이 걸어왔다.

"흠, 소해가 잘 해 주겠지."

그리고 그 뒤쪽에서 홍수령이 걸어나오며 말했다.

"이제 금 원로는 다음 계획을 시작하러 출발하시지요."

"알겠소. 홍 원로야말로 제시간에 문파 대진을 해제했다가, 녀석이 탈출에 성공하면 대진을 발동시키시오."

"당연하죠."

금진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전명훈이 나간 석벽을 쳐다본 후, 뇌옥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는 뇌옥을 나가기 전 홍수령의 얼굴을 슬쩍 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홍 원로는 최근 안색이 안 좋구려. 무슨 일이 있소?"

"흠, 재미없는 사실을 알아서 말이지요."

"재미없는 사실이라, 최근 홍 원로와 서 장로 사이에 쌍수가 없다는 소문이 들리는데… 혹 서 장로의 하초에 무슨 문제라도…."

"하초를 잘라 버리기 전에 닥치시지요."

"험험…."

홍수령의 표독스러운 한마디에, 금진찬은 헛기침을 하며 빠르게 뇌옥을 나섰다.

뇌옥 안쪽에서, 홍수령은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시조님에게 금신천뢰문은… 당신의 후예들은 도대체 뭐였던 것이란 말인가…."

* * *

"소해, 정말 고마워. 정말로!"

뇌옥 건물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자, 전명훈은 식은땀을 훔치며 금소해에게 감사를 표했다.

금소해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됐어. 지금 장로님들과 원로님들은 전부 단약사와 함께 회의 중이셔. 단약도 엄청난 단약인 만큼 원로님들은 물론이고 태상장문님까지도 전부 모여서 만들어야 하는 단약인가 봐. 그 덕분에 한 시진 정도는 원로, 장로님들이 공백이시니까…."

그녀는 전명훈을 비행법기가 모여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금신천뢰문의 출전봉은 배 형태의 비행법기들이 잔뜩 정박되어 있는 곳이었다.

그녀는 출전봉에 정박된 비행법기 중, 금신천뢰문의 제자 5백 명을 동시에 태울 수 있는 소형 함선 형태의 비행법기에 법력을 불어넣었다.

"타. 초장거리 이동용 법기야. 법기 자체에 걸려 있는 비둔술 덕분에 수천 리도 무리없이 주파할 수 있어. 이걸 타고 뇌령도를 떠나."

"…고마워. 그런데… 같이 안 가는 거야?"

"내가 남아서 문주님한테 네가 금신천뢰문 인근에 숨어 있다고 거짓을 고할게. 그럼 시간은 벌 수 있겠지."

전명훈은 금소해를 바라보며 물었다.

"소해…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알 거 없어. 시끄러우니까 빨리 올라타."

금소해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전명훈을 함선 법기에 태웠다.

결단 초기인 금소해가 작정하고 전명훈을 태우자, 전명훈은 저항할 수 없었다.

"잠깐, 난 조종하는 법을 모르는데…."

그리고 전명훈이 걱정할 때였다.

츠츠츠츳!

거대한 그림자가 전명훈의 뒤쪽에서 치솟아 올랐다.

"너는… 홍범?"

거대한 검은 지네, 홍범이었다.

쿠구구구!

전명훈은 홍범에게서 느껴지는 영기의 파동과 의식의 크기를 보며 기함했다.

"잠깐, 너…! 벌써 결단기에 도달한 거냐?"

[아직도 기껏해야 금소해 님과 같은 결단 초기일 뿐입니다. 전명훈 님께서 칠성제 때에 천거를 겪지만 않았어도 능히 저를 뛰어넘으셨겠지요.]

"…정말 엄청난 재능이구나, 너는… 그나저나 넌 왜 온 거지?"

[함선을 대신 조종해 드리러 왔습니다.]

"네, 네가? 비행법기를 조종할 줄 안다는 말이냐? 어떻게?"

[주인님께서 함선을 조종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허어…."

전명훈은 탄성을 터트리려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잠깐, 네가 장로님의 애완 요수라면… 너는 네 주인이란 분에게 종속된 게 아니냐? 그럼 네가 나와 함께 움직이면…."

그는 의심의 눈초리로 홍범을 바라보았고, 홍범은 차분하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제 주인님께서는 명훈 님의 탈출을 지지하십니다. 애당초 천상금뢰지체 같은 인재가 천거 조금 겪었다고 단약이 되는 걸 원치 않으시는 분이시지요. 장로님 말고도, 금신천뢰문의 원로분들 중 몇몇 분들 역시 그런 입장이십니다.]

"뭣…!"

[영원히 도망치시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전명훈 님께서 몇 주 정도만 도망치시면, 그 이후에는 전명훈 님을 지지하는 원로와 장로진들께서 전명훈 님을 다시 구조하러 가실 것이니까요.]

홍범의 설명에 전명훈은 그제야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었다.

"…의심해서 미안하다. 그리고, 너 역시 고맙다."

[그저 장로님들의 명령이었을 뿐입니다.]

홍범은 말을 하며, 자신의 몸을 줄였다.

홍범의 거체가 줄어들며 전명훈이 탄 함성의 키를 잡았다.

"그럼, 전명훈."

금소해는 팔짱을 낀 채로 전명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중에 건강하게 보자."

"…고마워, 소해."

그는 입술을 악물었다.

'내 자신이 부끄러워지는군.'

여태껏 금소해를 '공략할 대상' 내지는 '미래의 쌍수 상대'로 여기고 계속 껄떡대기만 했던 그였다.

거기에 문파의 또 다른 여제자들에게로 틈만 나면 눈을 돌려 댔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전명훈은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만약, 내가 무사히 금신천뢰문을 벗어나고, 내가 다시 무사히 이곳으로 돌아오게 된다면… 그때는 오직 금소해만 바라볼 것이다.'

그리고, 홍범의 조종에 의해 비행법기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별들이 무수히 떠오른 광한계의 밤하늘 아래.

전명훈이 탄 함선은 금신천뢰문의 대진을 유유히 통과해 날아갔다.

전명훈은 금신천뢰문을 돌아보며 생각했다.

'반드시 다시 돌아오고 말리라…!'

그리고, 금소해는 떠나가며 손을 흔드는 전명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한숨이 튀어나왔다.

"하… 저 머저리 같은 놈…."

지난 10년간 많이 친해졌다지만, 금소해는 전명훈을 전혀 이성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머리가 많이 안 좋은, 지켜 줘야 할 동생 같은 느낌으로만 보는 것이 금소해의 시선이었다.

"아니, 함선을 타고 나가면서도 문파 대진이 발동 안 하는 게 이상하지도 않나? 으휴…."

그녀는 한참은 멀어진 전명훈의 함선을 보며 혀를 찼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옆으로, 백의를 입은 한 명의 남성이 내려앉았다.

"너무 추궁하지 마시지요, 아가씨."

"어머, 서 장로님?"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그녀의 옆에 다가온 '서 장로', 서은현을 바라보았다.

'홍 언니 원로님도 참 부럽지. 전명훈 같은 놈이 아니라 서 장로님 같은 분이랑 도려가 되다니….'

서은현은 잠시 전명훈이 사라진 곳을 쳐다보며 웃었다.

"그럼 이제 전명훈이 출발했으니, 대진(大陣)을 발동시켜 볼까요?"

"네, 고조부님께 말씀드리러 가 볼게요."

금소해는 비둔술을 써서 금벽호가 머무는 금뢰전으로 날아갔고, 서은현은 출전봉 위에 서서 작게 미소를 지었다.

'네놈은 정말 복 받은 거다, 전명훈.'

* * *

휘이이이―

전명훈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젠장할…."

모든 게 전부 완벽하리라고 여겼던 것이 다 틀어지기에, 10년은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다.

10년 동안 죽도록 하늘을 부르짖어도 하늘은 그를 허락하지 않았다.

금소해와 쌍수를 맺을 수 있을 것이란 그의 기대도 무참히 깨어졌고, 문파의 어른들 역시 전명훈이 천거를 극복하지 못하는 걸 보고 점차 그에게서 관심을 돌리기 일쑤였다.

특히나 성질이 폭급한 금벽호가 그에게 찾아와서 그를 욕하고 갔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였다.

―서은현은 손을 뻗자마자 어찌어찌해서 천거를 바로 뚫었다는데, 너는 못 하느냐?

―왜 못하느냐? 너는 천상금뢰지체다! 네가 서은현이 할 수 있는 걸 못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야! 상상도 못 할 둔재가 아닌 이상 그 정도는 해내야지!

―나와 내 벗들인 허곽과 청문선우는 연기기 때 축기기 급 법술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었단 말이다! 서은현도 하는데 왜 너는 못한단 말이냐!

―빌어먹을! 이따위 둔재에게 시간을 뺏기다니! 이 무슨 시간 낭비란 말인가! 으아아아아아!

특히나 아래로 여겨 왔던 서은현과 직접적으로 그를 비교하며, 격노를 내뿜었던 그 때의 기억은 금신천뢰문에서 있었던 최악의 기억이었다.

'젠장할….'

금벽호와 있었던 일을 생각하자, 전명훈은 금신천뢰문에 있었던 얼마 없는 정마저 우수수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정말, 너와 금소해, 그리고 몇몇 친구들만 아니었으면 진즉 나가 버렸을 문파였는데, 괜스레 남아 있어서 화를 당하는구나. 생각해 보면 태상문주부터 시작해서 늘 내게 분노와 한심함만 표출해 댔지."

전명훈은 사람 몸통만 한 크기로 줄어들어 키를 잡고 함선을 운용하는 홍범을 보며 말했다.

홍범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애정의 반대는 분노와 증오가 아닌, 무관심이라는 말이 있지요. 전명훈님께 보인 분노는, 원로진 분들께서 그만큼 전명훈 님을 놓고 싶지 않아 한다는 반증이 아니겠습니까?]

"흥, 웃기는군. 그 분노마저도 처음에는 잔뜩 뿜어내다가 안 되니까 아예 관심을 거두지 않았느냐? 봐라, 내 스승조차도 한참 동안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가 단약 같은 걸 만든다 하니 이제야 나를 찾아와서 뇌옥에 가둬두는 것 말고 언제 나를…."

쿠르르릉!

전명훈이 홍범을 향해 분노를 토로할 때였다.

우르르르릉!

어마어마한 우레 소리가 울리며, 전명훈의 뒤쪽에서 거대한 뇌성벽력이 울렸다.

전명훈은 화들짝 놀라 뒤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싯누런 번개 같은 것이, 구름을 따라 그들이 탄 함선을 쫓아오고 있었다.

"호, 홍범!"

[위로 올라가겠습니다. 꽉 잡으십시오.]

부우우웅!

홍범이 조종간을 움직였고, 그들이 탄 함선이 위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푸확!

전명훈과 홍범이 탄 함선 법기가 구름을 뚫고 올라갔다.

그리고, 그들을 쫓아오던 싯누런 무언가 역시 하늘로 떠올랐다.

쿠구구구구!

"아, 스, 스승님…!?"

그것은 거대한 금진찬의 모습이었다.

콰지지지직!

싯누런 번개들이 뭉쳐 이뤄진 거체(巨體)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번개의 폭풍이 거인의 형태로 변화한 듯한 모습!

"호, 홍범! 스, 스승님이 쫓아왔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천인기 급의 힘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마 의식을 분리하여 신외화신의 술로 법술을 담아 보내신 것 같군요. 기껏해야 천인기 잔혼 정도의 힘일 뿐입니다.]

"처, 천인기 잔혼이면 어느 정도란 말이냐! 네가 상대할 수 있느냐?"

[그러니까… 보통 천인기 수사의 잔혼은 결단 후기에서 대원만 즈음이라 하지요.]

홍범은 태연하게 말했다.

[당연히 제가 붙으면 홍범 튀김이 된답니다.]

그와 동시에, 금진찬의 모습을 한 번개의 거인이 함선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쿠구구구구!

어마어마한 뇌전의 힘이 몰리며 함선을 향해 쏘아졌다.

콰르르릉!

구름이 그대로 뜯겨져 나가며, 일대에 폭풍이 몰아쳤다.

전명훈은 비명을 지르며 함선의 난간을 붙잡았다.

"흐아아아아! 빠, 빨리 도망쳐다오! 제발!"

[예!]

부우우웅!

그와 동시에 함선의 속도 역시 높아져 갔다.

그러나 금진찬의 신외화신 역시 빠른 속도로 그들을 쫓아오기 시작했다.

쿠릉, 쿠릉, 쿠르릉!

"흐아아아아!"

전명훈은 그들을 향해 쏘아지는 뇌전 줄기에 혼비백산하며 난간을 붙잡고 덜덜 떨었다.

우르릉!

그리고, 그 와중 뇌전 줄기의 일부가 전명훈을 향해 떨어졌다.

전명훈은 그 뇌전을 바라보며 비명을 질렀다.

"흐아아아아! 살려…어?"

파직, 파지직….

하지만 예상외로 아프지 않자 전명훈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뇌전 줄기는 자연스럽게 전명훈의 몸으로 흡수되었고, 그는 그의 체내에 있는 뇌전들이 법력으로 바뀌는 걸 보며 탄성을 질렀다.

"호오… 이거…."

그리고, 그를 지켜본 홍범이 말했다.

[전명훈 님, 전명훈 님은 뇌전에 면역이라 하셔도 이 배는 그렇지 않습니다. 방금 전 같은 상황이 일면 곤란하니, 후미에 가셔서 신외화신의 공격을 막아 주십시오.]

"음…! 알겠다!"

조그마한 뇌전 줄기는 크게 영향이 없다는 걸 알아챈 전명훈의 얼굴에 자신감이 솟구쳤다.

그는 후미로 달려가 적뢰공을 끌어올렸다.

동시에 전명훈은 자신의 가슴 속에 있는 분노 역시 동시에 끓어올렸다.

파지지직!

전명훈의 주변으로 붉은 뇌전이 넘실거렸다.

"타아아앗!"

그가 결인을 맺자, 붉은 뇌전 줄기가 배를 향해 날아오는 뇌전의 잔재와 부딪혔다.

금진찬의 신외화신이 쏘아 대는 조그마한 뇌전 줄기의 잔재들은 전명훈의 적뢰공에 전부 상쇄되어 스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외화신이 쏘아 대는 뇌전의 잔재라 할지라도, 신외화신은 결단기 대원만의 실력이었고, 전명훈은 고작해야 연기기 6성이었다.

콰지지직!

"크윽…."

순식간에 전명훈의 법력이 닳아 버렸다.

하지만 전명훈은 이를 악물고 손을 뻗었다.

"와라!"

콰지지지직!

신외화신이 쏘아 대는 뇌전 줄기 중 하나가, 함선에 직격했다.

하지만 함선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전명훈이 손을 뻗고 있었다.

그의 손 안쪽으로, 뇌전이 모조리 빨려들어가고 있던 것이었다.

파지지직!

순식간에 전명훈의 법력이 다시 차올랐고, 전명훈은 끝없이 붉은 뇌전을 뿜어 댔다.

쿠르르릉!

그리고 전명훈이 자신의 공격을 막는 것이 거슬렸는지, 금진찬의 신외화신이 더더욱 빠른 속도로 그들을 쫓아오기 시작했다.

[명훈 님, 속력을 더 올리겠습니다. 지금부터 한시라도 적뢰공을 해제하면 안 됩니다!]

"그, 그래!"

피이이이잇!

함선이 둔광에 휩싸이며, 전명훈은 어마어마한 빛살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제길, 구역질이 다 나는군.'

하지만 전명훈은 홍범의 조언대로 절대 적뢰공을 해제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금진찬의 신외화신이 더더욱 가까운 곳에서 그를 쫓아오고 있었다.

거대한 뇌전의 거인의 얼굴이, 함선의 후미와 겨우 3장 거리밖에 되지 않는 곳까지 다가와서 뇌전을 쏘아 대고 있었다.

콰지지지직!

전명훈은 끊임없이 뇌전을 먹어치우고, 방출했다.

그 모습은 마치 빠르게 나아가는 함선의 후미에서 붉은 벼락이 뿜어지는 듯한 모습이었다.

"크으윽! 제기랄! 제자를 좀 내버려 두시지요! 홍범,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거냐!?"

[얼마 후면 뇌령도의 결계에 도착합니다. 결계만 넘으면 신외화신도 계속 쫓기는 힘들 겁니다!]

"그래!"

콰지지직!

전명훈은 적뢰공을 계속 유지하고 있자니 토할 것 같았으나, 이를 악물고 참았다.

'드디어…!'

그리고, 전명훈은 함선이 뇌령도의 끝자락에 도착한 것을 보고 눈을 빛냈다.

이제, 저 너머의 장막만 건너면 끝이었다.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그래…!"

그리고, 그때였다.

[노오오옴!!!]

쿠르르르릉!

전명훈과 홍범이 향하던 뇌령도의 끝자락에서, 또 다른 번개의 거인이 나타났다.

[감히 어딜 가려는 게냐!!!]

그것은, 부문주 진휘의 형상이었다.

[네 이놈, 감히 사문을 벗어나 도망치려 해!]

콰르르르릉!

어마어마한 수준의 낙뢰가 함선을 덮쳐 왔다.

[명훈 님!]

다급하게 홍범의 음성이 들려왔고, 전명훈은 그를 향해 꾸역꾸역 덮쳐 오는 뇌전을 받아냈다.

'모, 몸이 터질 것 같아!'

전명훈의 육신은 뇌전을 먹어치워 힘으로 돌렸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였다.

그의 한계 이상으로 뇌전을 주입한다면 법력이 한도까지 차올라 폭발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전명훈은 단전이 폭발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죽는 건….'

그때였다.

홍범의 음성이 전명훈의 뇌리를 울렸다.

[방출하십시오! 적뢰공을 운용하시며 힘을 무작정 방출하셔야 합니다!]

"…!"

전명훈은 이를 악물고 홍범의 지시에 따랐다.

그와 동시에, 붉은 벼락이 전명훈의 전신에서 뿜어졌다.

"흐아아아아아!"

일순간, 거대한 뇌전이 전명훈의 몸에서 뿜어졌다.

일대가 붉은 뇌전으로 뒤덮였고, 그곳에서 홍범과 전명훈이 탄 함선이 빠져나왔다.

[계속 적뢰공을 운용하십시오! 멈추시면 안됩니다, 아직도 금진찬 님께서 쫓아오고 계십니다!]

"그, 그래!"

전명훈은 혼이 나갈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뒤쪽에서 쫓아오는 금진찬을 향해 적뢰공의 벼락을 쏘아 댔다.

[뇌령도의 결계에는 동서남북, 네 군데에 결계가 약한 부분이 있어 그곳으로 나가야 합니다. 방금 동쪽에서 진휘 님을 만나 막혔으니, 이번에는 북쪽 끝으로 향해 뇌령도를 빠져나가겠습니다! 더 빨리 갈 터이니, 조금만 더 참아 주십시오!]

"그래…!"

* * *

쿠릉, 쿠르릉!

전명훈이 빠져나간 뇌령도의 동쪽 끝.

그곳에는 전명훈이 방출해 놓은 붉은 뇌전들이 사라지지 않고 한가득 남아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뇌전을 잡아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뇌전의 위쪽에서, 진휘의 신외화신이 결인을 맺었다.

[각항저방심미기.]

쿠구구구!

그와 동시에, 전명훈이 내뿜은 뇌전이 붉은 기둥으로 화하며 뇌령도의 동쪽 끝에 내리꽂혔다.

동쪽 끝에 내리꽂힌 붉은 기둥으로부터, 전명훈이 적뢰공을 쓰며 날아간 북쪽으로 희미한 붉은 길 같은 것이 떠올랐다.

* * *

북쪽 끝.

[네 이놈, 전명훈! 어찌 사문을 버리고 도망치려는 게냐!]

"제길, 당신들이 나를 단약으로 만들려 하는 게 아니었나!?"

전명훈은 북쪽 끝에서 자신을 막은 원로를 보며 소리를 질렀다.

콰르르릉!

또다시 어마어마한 뇌전이 전명훈에게 쏘아지며 전명훈을 튀겼다.

[그조차도 사문이 정했다면 받아들여야 하느니라!]

"말도 안 되는 소리!"

콰지지지직!

전명훈은 그에게 쏘아진 뇌전들을 배가 터질 때까지 들이마신 후, 홍범의 조언대로 적뢰공으로 방출했다.

[명훈 님, 북쪽 끝도 막혔으니 서쪽 끝으로 가겠습니다!]

"그래!"

홍범은 전명훈을 태운 함선을 조종하여 다시 움직였다.

그리고, 북쪽 끝에 나타난 원로의 신외화신은 또다시 전명훈이 방출한 붉은 뇌전을 모아 붉은 기둥을 만들었다.

쿠우웅!

붉은 기둥이 뇌령도의 북쪽 끝에 꽂혔다.

동시에, 붉은 기둥이 있는 곳으로, 뇌령도의 동쪽 끝에서부터 출발한 붉은 길이 도착했다.

[두우여허위실벽.]

북쪽 끝을 지키던 원로가 주언을 외자, 동쪽 끝에서 도착한 붉은 길이 북쪽 끝 기둥과 이어졌고, 원로가 손을 뻗자, 북쪽 끝 기둥에서부터 더더욱 진한 붉은 길이 뻗어 나와, 적뢰공을 사용하는 전명훈이 도망친 곳으로 길이 뻗어 나갔다.

* * *

서쪽 끝도 마찬가지였다.

"제길! 홍범, 동쪽, 북쪽, 서쪽도 다 막혔잖냐!!"

전명훈은 악을 쓰며, 서쪽 끝을 지키는 원로가 쏘아 낸 뇌전을 적뢰공으로 방출한 후 홍범을 향해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남쪽, 남쪽까지만 가 보겠습니다!]

"개소리하지 마라! 거기도 10할 확률로 막혀있을 게 뻔하지 않냐! 다른 탈출 방법을 생각해 봐야…."

콰르르릉!

전명훈이 다른 곳으로 갈 기미를 보일 때였다.

금진찬이 전명훈을 향해 뇌도법술이 아닌 다른 속성의 법술을 마구 쏘아 내기 시작했다.

전명훈은 식겁하며 소리쳤다.

"일단! 일단 어디라도 가라! 어디라도!!!"

홍범이 조종하는 함선이 남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쫓아가는 금진찬은 서쪽을 지키는 원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우우웅!

북쪽에서부터 이어진 붉은 길이 서쪽에 도달했다.

[규루유묘필자참.]

쿠구구구!

서쪽 끝에도 붉은 기둥이 생겨나 대지에 박혔다.

그리고, 서쪽 끝의 기둥으로부터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붉은 빛살이 뿜어지며 전명훈을 쫓아갔다.

* * *

"…이봐, 홍범."

[예, 명훈 님.]

"저기, 뒤쪽에서 스승님의 분신 말고도 뭐가 더 쫓아오는데?"

전명훈은 불길한 느낌에 홍범을 보며 말했다.

그들이 탄 함선 바로 뒤에서는 금진찬의 신외화신이 쫓아오고 있었고, 금진찬의 뒤쪽으로 붉은 '길' 같은 것이 만들어지며 전명훈과 홍범이 탄 함선을 추격해 오고 있었다.

홍범은 흘긋 뒤를 보며 말했다.

[용맥(龍脈)이로군요. 걱정하지 마시지요, 용맥을 다루는 류의 법술은 사용하려면 굉장히 오랜 시간의 준비 기간이 필요합니다. 사축기, 그것도 용맥을 다루는 데에 굉장히 정통한 사축기 수사가 아니라면 단시간에 용맥으로 뭔가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 그런데 저 용맥이 날 쫓아오고 있잖아! 어떻게 된 거야!"

[으음, 그건 저도 잘….]

"씨발! 이러다 나 단약 된다고! 어떻게 좀 해 봐!!!"

전명훈은 공포에 질려 홍범에게 마구 악을 써 댔고, 홍범은 담담하게 함선을 조종할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전명훈과 홍범이 탄 함선이 뇌령도의 남쪽 끝에 도달했다.

그리고 전명훈은 완전히 절망한 얼굴이 되었다.

남쪽 끝.

그곳에서는, 그의 스승인 금진찬의 본체가 기다리고 있었다.

"명훈아, 어디를 그렇게 가느냐."

전명훈이 무어라 할 새도 없이, 거대한 낙뢰가 전명훈에게 꽂혔다.

쿠르르릉!

빛의 기둥과도 같았다.

전명훈은 빛의 기둥 속에서, 배가 터져라 뇌전을 흡수하고, 다시 적뢰공으로 방출하며 겨우겨우 견뎌 냈다.

"왜 그리 사문을 도망치려 하는 것이야."

"당… 연… 히…!"

전명훈의 눈에 핏발이 섰다.

뇌전을 먹어치우고 힘으로 바꾸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전명훈은 마치 붉은 벼락의 정령과도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죽기… 싫어서…입니다…!"

콰르르르릉!

전명훈의 붉은 번개가, 금진찬의 뇌전을 떨쳐 냈다.

금진찬은 전명훈의 붉은 벼락에 손을 뻗었다.

허공으로 방출된 전명훈의 벼락이 금진찬의 손으로 모여들었다.

금진찬은 벼락을 기둥의 형태로 빚어내며 물었다.

"만약 죽이려 한 게 아니라면, 너는 본문에 계속 있을 것인가?"

어쩐지 금진찬의 얼굴에는 일말의 미안함이 깃들어 있었으나, 눈이 반쯤 돌아간 전명훈은 크게 소리쳤다.

"당연히 이딴 개 같은 문파, 바로 탈출해 버릴 겁니다! 지난 10년간! 나를 무시하고, 멸시하고, 둔재 취급한 곳이 아닙니까? 나를 죽이려 한 게 아니더라도 이딴 곳에는 더 발붙이고 싶은 생각 따위는…."

콰지지지직!

전명훈이 악을 쓰며 붉은 뇌전을 뿜어 댔다.

"더 없습니다!!!"

쿠르르릉!

그와 동시에, 전명훈을 따라오던 붉은 용맥의 길이 마침내 금진찬의 밑까지 따라왔다.

금진찬은 붉은 기둥을 대지에 박았다.

"…정귀유성장익진."

쿠구구구구!

전명훈은 흠칫 몸을 떨었다.

뇌령도의 공기가 바뀌었다.

그리고, 뇌령도 곳곳에 붉은빛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홍범, 종문으로 돌아가라."

[예.]

금진찬의 명령에, 홍범은 함선을 돌렸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그 모습에, 전명훈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 잠깐! 뭘 하려는 거냐, 홍범!!!"

부우우우웅!

홍범은 말없이 함선을 조종했고, 어느새 번개의 속도로 금진찬이 전명훈의 옆에 내려앉았다.

전명훈의 동공이 흔들렸다.

"스, 스승님…!"

"…명훈아."

그리고, 금진찬은 전명훈의 어깨를 잡았다.

"미안했다, 그동안."

"…예?"

쿠구구구구!

대지에서는 붉은 용맥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냥 용맥이 아니었다.

그것은 뇌전이었다.

그리고 특히나 전명훈에게 더더욱 익숙한 뇌전이었다.

전명훈 자신이 내뱉은 적뢰공의 뇌전이었으니까!

"저, 저게 어찌 된…."

자기 자신이 뿜어낸 힘을 알아본 듯, 전명훈은 혼란에 빠졌다.

뇌령도 전체가 전명훈의 힘으로 끓어오르는 듯했다.

금진찬은 미안하다는 듯이 뺨을 긁으며 말하였다.

"지난 10년간, 뇌령도 전체에 토목 공사를 하게 했다."

그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 * *

나는 출전봉에 앉아 전명훈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홍수령이 문파 대진을 조작하여, 뇌령도 곳곳에 흩어진 전명훈의 뇌전을 금신천뢰문 본파로 끌어모았다.

그리고 뇌운봉의 정상에서 금벽호가 직접 제의를 보조한다.

제의가 시작되는 동안, 금신천뢰문은 일순간 하나의 거대한 제단이었다.

"복도 많지, 전명훈. 문파의 태상장문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형 사제들, 모든 문도들이 오직 너를 위해 10년간 뇌령도 전체에 토목 공사를 하고, 진법을 깔아 칠성제를 지내기 위한 기반을 만들었으니."

오늘은 전명훈이 칠성제를 지낼 수 있는 시운의 날이다.

나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이 계획은 나로부터 나왔다.

청문령이 용맥을 끌어모아 장생과를 맺히게 했던 그 때를 떠올려 시작한 계획.

'천거 현상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만 뚫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자기 자신'의 범위란 어디까지인가?

법기를 들고 하늘을 향해 쏘면 그것도 자기 자신인가?

그렇다면 만약 내가 연기기 6성 정도의 법력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상품 법기를 만들어 준다면 그건 자기 자신의 힘인가?

'나, 김연, 그리고 오현석의 사례를 전부 생각해 봤을 때….'

단순히 상품 법기를 사용해서 천거를 밀어 버리는 건 안 되었다.

김연 역시 자기 자신이 '직접' 꼭두각시들을 조작해서 천거를 극복했듯이.

신외지물인 법기로는 천거의 극복이 불가능하다.

그게 가능했다면 청문령이 친구인 법기장인 공묘천색에게 부탁해서 그 당시의 내가 사용할 법기를 제작했으면 그만이었다.

요는, '자기 자신의 의지와 생명력'이 들어가 있어야만이 천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계획한 것이, 이 복잡하고도 거대한 계획.

쿠구구구구!

붉은 용맥 너머로 전명훈이 뇌령도 사방에서 쏘아재꼈던 뇌전들이 점차 증폭되며, '전명훈 자신의 기운'을 증폭시켰다.

그리고 저 높이, 전명훈의 함선이 뇌운봉에 도착했다.

'전명훈 자신의 기운을 용맥으로 증폭시켜 제단에 모은 후, 전명훈 자신의 의지로 그 기운을 모아 하늘로 쏘아올리면 된다.'

그렇게 하면 천거는 뚫릴 터였다.

'저 진법을 만들기 위해, 금벽호와 금신천뢰문의 무수한 원로진들이 10년간 뇌령도 곳곳을 헤집으며 공사를 했지.'

진법의 역할은 전명훈의 기운을 증폭시키는 것과, 전명훈이 거대한 기운을 다룰 때에, 그 조작을 보조하는 용도였다.

'놈이 이 거대한 기운을 제대로 제어해서 쏘아 올릴 수 있을 리가 없으니 말이지.'

금신천뢰문의 진법사가 총동원되었다.

놈 하나를 위해서.

"다들 대단한 의지로군…. 제자 한 명을 위해서 말이지."

나는 뇌운봉에 내리는 전명훈을 보며 읇조렸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내가 없었던 회차의 전명훈 역시, 문파의 원로들이 어떻게든 힘을 총동원해서 놈을 돕지 않았을까.

"천상금뢰지체, 금신자 양수진의 재림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못할까."

어느새 내 곁에 다가온 홍수령이 말했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호법을 서 주려 왔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로 말했다.

"네놈, 원영 중기에 들어서려는 거겠지?"

"…들켰군요."

"다들 전명훈에게만 정신이 팔려 있는데, 그래도 네놈의 쌍수도려인 이 몸쯤이나 되니 널 신경 써 주는 거다. 감사히 여기고, 마음 놓고 양신을 형성해라."

"감사합니다."

* * *

"…그랬던 거군요."

전명훈은 금진찬의 설명을 듣고,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무관심이, 아니었어.'

"이쪽으로 와라, 전명훈."

금벽호가 전명훈에게 손짓했다.

뇌운봉의 위쪽에는 칠성제의 제단이 세워져 있었다.

'다들, 나를 위해서….'

"…지금부터, 칠성제를 시작한다. 어느 칠수에 지낼 거지?"

"…저는 재능이 미욱하니."

'이토록 오랫동안 준비했었구나. 다들….'

"청존칠수께… 제를 지내도록 하겠습니다."

'나를, 생각해 주고 있었구나.'

무려 10년에 걸친 토목 공사.

전명훈 혼자만 몰랐던, 전명훈을 위한 거대한 계획이었다.

칠성제가 시작되었다.

전명훈은 각항저방심미기, 동방과 목(木)을 상징하는 청존칠수에게 제를 지내었다.

그리고, 하늘의 별빛을 내려받기 직전의 단계.

쿠구구구구!

먹장구름이 하늘을 뒤덮었다.

그와 동시에.

쿠구구구구구!

뇌령도 전체에 퍼져 있던 붉은 용맥이, 뇌운봉으로 올라왔다.

서은현이 입안하고, 금신천뢰문의 원로진과 진법사들이 실체화하여, 마침내 모두에 의해 완성된 계획.

청문령이나 서은현은, 영기가 부족한 수계에서는 시도할 수 없었지만, 영기가 썩어 넘치는 광한계였기에 가능한 방법.

뇌령도 전체의 영기를 무식하게 끌어모아, 한 인간의 법력을 증폭시킨다.

그리고 진법으로 정제해서, 증폭된 법력에서 순수한 '전명훈'에게서 비롯된 성질만을 남긴다.

그렇게 정제하고 정제해서 남은 기운은, 본래 증폭시켰던 기운의 수억 분지 일도 안 되는 미욱한 수준.

하지만 증폭한 진법의 크기가 뇌령도 전체에 달할 정도라면, 수억 분지 일도 안되는 미욱한 수준조차 축기기를 가볍게 뛰어넘는다!

전명훈은 자신의 주변에서 맴도는, '자기 자신의' 기운을 체내로 끌어당겼다.

체내에서 기운을 한 번 순환시킨 후, 하늘을 향해 뿜었다.

콰르르르릉!

전명훈의 적뢰공은 하늘에 닿지 못했다.

중간에 기세가 꺾여 시들었다.

하지만, 전명훈은 주변에 넘실거리는 무한한 힘을 끝없이 빨아들였다.

'단순히 번개를 흡수해서 법력화하는 것과도… 차원이 다르다!'

뇌전을 법력화할 때에 일어나는 힘의 소모가 없다시피 할 정도!

전명훈은 무한한 힘을 계속해서 퍼 올리며 하늘로 뇌전을 쏘아 올렸다.

시들었던 적뢰공의 기세가 무한히 증폭되며, 붉은 벼락 줄기가 하늘로, 점차,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뇌운봉의 끝자락에서, 전명훈은 하늘을 향해 힘껏 고함을 질렀다.

"하늘이여!!!"

콰르르르르릉!

붉은 벼락이, 하늘의 구름을 찢어발기며 별과 인간을 잇는 길을 낸다.

전명훈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으며 천지영성을 내려받았다.

그렇게, 전명훈은 칠성제를 지내고 연기기 7성에 진입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 * *

쿠릉, 쿠르르릉!

금신천뢰문의 한 구석.

모두의 관심이 천상금뢰지체 전명훈에게 간 사이.

원영 중기로의 승급을 시도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서은현이었다.

쿠르르르릉!

하늘이 일렁거리며, 쌍색의 천뢰를 떨구었다.

서은현은 눈을 감은 채 뇌도공법을 운용했다.

쿠구구구구!

원영기부터는 모든 수사들이 천겁을 맞는다.

결단기에서 원영기로 승급할 때는 한 줄기의 벼락.

원영 초기에서 중기로 승급할 때는 두 줄기의 벼락이 떨어진다.

쌍색의 천뢰가 서은현의 몸을 강타했다.

하지만 뇌전으로 자신의 몸을 보하는 서은현은 멀쩡했다.

쿠르르릉!

원영 중기에 이를 때 내리치는 두 번째 천겁이 다시 한번 벼락 줄기를 떨어뜨렸다.

방금 전보다 더더욱 맹렬한 기세를 지닌 천겁이었다.

꽈르르릉!

서은현은 두 번째 천겁을 맞았다.

빛의 기둥이 서은현을 내리찍고 있는 것만 같은 풍경!

그 빛의 기둥 속에서, 서은현은 눈을 감고 자신의 내부를 관조했다.

* * *

고작 10년 만에 둔재인 내가 어떻게 금신천뢰문의 공법 9천여 개를 익힐 수 있었는가.

그것은 내가 천뢰번의 주인에게 받은 저주 덕에, 뇌전에 대한 지식과 재능을 얻게 된 것도 있었으나, 동시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금신천뢰문의 9천여 개 공법은, 본래 모두 하나였다.'

공법을 점차 익혀 갈수록, 나는 금신천뢰문의 공법 구결들 중 '이어지는' 구결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나는 40여 개의 공법을 2, 3성까지 익혀 냈을 때 이 '이어지는' 구결의 '원문'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 구결의 원문은 나도 아는 것이었다.

원문을 이전부터 알고 있었으며, 그 의미를 이해하고 뇌도공법에 접목시킬 수 있었기에 9천여 개의 뇌도공법 전부를 짧은 시간 안에 익힐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금신천뢰문 공법들의 원문이란 다음과 같았다.

―제1장. 모든 존재는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 존재는 하늘로부터 이성과 감성을 부여받았으며 서로 평등함을 인지하고 행동하여야 한다.

―제2장. 모든 존재는 존재, 계위, 시야, 경지, 출신, 기타의 물질계 또는 명계, 선계, 부해계 또는 기타의 신분과 같은 어떠한 종류의 차별이 없이, 이 제의가 규정하는 모든 권리와 자유를 향유할 자격이 있다. 더 나아가 존재가 속한 운명 또는 역사가 상위 존재에 대한 제약을 받느냐에 관계없이, 그 존재 또는 영혼의 운명적, 천부적 또는 계위적 지위에 근거하여 억압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

―제3장. 모든 존재는 생명과 운명의 자유와 보전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제4장….

이건 일종의 '공법 구결'이라기보단, 제의를 지내며 외는 축문의 일종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축문'의 원문을 알고 있었다.

'세계 인권 선언….'

지구에서 봤던 세계 인권 선언에서 단어만 이 세계에 맞게 바꾸고, 언어에 주술력을 부여하여 문장이 '힘'을 가지게 만든 것.

그것이, 금신천뢰문의 모든 공법을 익혔을 때 나타나는 구결이었다.

파지지지직!

나는 구결의 1장부터 29장까지를 속으로 되뇌며, 구결에 담긴 주술력과 힘에 따라 법력을 운용했다.

이처럼, 내가 세계 인권 선언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천뢰번의 주인이 부여한 저주의 반작용으로 뇌전 법칙의 이해를 가지고 있었기에 9천여 개의 공법을 10년 안에 전부 익히는 데에 성공한 것이었다.

'양수진은, 정말로 나와 같은 세계의 사람인 건가.'

이제는 확신이 든다.

양수진이, 종명자들이, 지구의 존재들이라는 확신이.

파지지지직!

구결의 1장부터 29장까지를 외자, 나는 뇌전의 힘이 극한에 도달한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일순간.

퍼엉!

극한에 도달한 뇌전의 힘이, 나를 압박하는 천겁을 떨쳐 냈다!

우우우웅!

그와 동시에 막혀 있던 수행이 노도처럼 몰아쳤다.

은은히 푸른빛이 돌았던 내 원영.

음신(陰神)이 절반으로 갈라지더니, 나머지 절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미간에서부터 선이 생겨나, 음신의 영역과 또 다른 원신, 양신(陽神)의 영역을 나누었다.

'드디어….'

음양신(陰陽神)을 전부 생성하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나는 뒤이어 닥쳐올 후폭풍에 이를 악물었다.

금신천뢰문 9천여 개를 합쳐 만든 구결은 분명 일순간 천뢰의 위력을 극대화시킨다.

그 덕에 내가 체내에 흐르는 뇌력을 증폭시켜 원영 중기에 이르른 것이었고.

하지만, 정작 천뢰가 극한에 도달한 다음에는….

피시싯….

내 주위를 맴돌던 뇌전이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단전에 가득하던 뇌전의 힘이 점차 흐물거리는 듯하더니 무색(無色)으로 흩어졌다.

이내, 나는 완전히 뇌도공법을 익히기 이전과 같이 변해 버렸다.

단전의 '힘'은 여전히 원영 중기가 맞았다.

뇌도공법으로 쌓았던 수행도 남아 있다.

하지만, 9천여 개의 공법을 합일한 구결을 왼 이후로, 뇌도공법의 뇌전 속성은 완전히 무속성(無屬性)이 되어 버려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졌다.

그랬다.

나는 금신천뢰문 공법을 모조리 합일하여, 그 동력으로 원영 중기에 이르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금신천뢰문 공법을 합일시킨 공법은, 이제 더는 금신천뢰문의 공법이라 부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원영 중기에 이른 걸 축하한다."

홍수령이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차며 말했다.

"다만… 정작 뇌도공법의 이점을 완전히 포기하고, 그냥 평범한 영기로 바꿔 버리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구결을 외는 걸 선택하다니… 도대체 왜 그런 거냐? 전명훈도 칠성제를 지내는 데에 성공했고, 놈이 원영기에만 올라도 공법 간 부조화를 해결할 수 있었는데…."

"뭐, 수행이 떨어진 건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별거 아니란 듯이 허허 웃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 무명 구결을 더 연구해 보지요."

"더 연구할 게 뭐가 있느냐. 역대 장문들이 숨긴 이유도 뻔해지는군. 익히면 그냥 뇌전 속성을 다룰 수 없게 되는 멍청한 공법이기 때문이잖느냐."

"뭐, 그건 그렇습니다만…."

"뭐가 그렇다는 거냐, 멍청한 놈! 됐다, 난 전명훈 놈이나 축하해 주러 가려니까 여기서 혼자 정말 잘 한 건지나 잘 생각해 보고 있어라."

홍수령은 어쩐지, 내가 뇌도공법을 잃게 된 것이 마음에 안 드는지 허공을 날아서 전명훈이 있는 뇌운봉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러나 나는 가만히 앉아서 이 무명 구결을 참오했다.

'이건 10할 확률로 양수진이 남긴 구결이다.'

거기다가 세계 인권 선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공법 구결.

분명 무언가가 있으리라.

어차피 양수진의 안배를 두 번이나 마주했던 나로서는, 이 공법 구결을 익히는 건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나는 아무런 속성이 없어져 버린 이 무명 구결을 다시 한번 처음부터 운용했다.

'흐음, 변화가 없나.'

하지만 무속성의 법력을 운용해 봤자 바뀌는 건 없었다.

심지어 법력을 쌓는 속도도 무지하게 느렸다.

'이 구결… 공법이 맞긴 한가?'

내가 그리 생각하며, 마지막 29장의 구결을 외웠을 때였다.

문득,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세계 인권 선언은 30조로 이뤄져 있는데….'

세계 인권 선언을 표절해서 1조를 1장으로 붙여놓은 무명 구결은 29장까지밖에 없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세계 인권 선언의 마지막 조항을 떠올렸다.

"이 선언의 어떠한 규정도 어떤 국가, 집단 또는 개인에게 이 선언에 규정된 어떠한 권리와 자유를 파괴하기 위한 활동에 가담하거나 또는 행위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아니 된다."

한 마디로 세계 인권 선언을 악의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조항.

내가 그 마지막 조항을 떠올렸을 때였다.

우우우웅!

"…!"

내 염상과 동시에, 무명 구결이 갑자기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내가 뭔가를 하려고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무속성의 법력이 노도처럼 움직이며, 전신을 꽉 채웠다.

그리고 무속성의 법력은 내 상단전으로 흘러들어 왔고, 상단전에서 중단전으로, 중단전에서 하단전.

금단 안쪽에 있는 원영으로 미친 듯이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파아아아앗!

나는, 문득 내가 기이한 공간으로 진입했음을 깨달았다.

'이곳은….'

촤르르르르륵!

어둡다.

깊고 깊은 어둠.

그리고 춥다.

마치, 예전 봉명주 최하층에서 [그]를 만났을 때와 같은 느낌.

내가 긴장하며 주변을 둘러볼 때였다.

"후대(後代)인가."

"…!"

어느새, 내 앞에서 누군가가 육성으로 내게 말하는 것이 느껴졌다.

"당신은…!"

나는 앞을 보려다가 움찔하고는, 아래를 쳐다보고 조심스레 물었다.

"당신은… 금신자이십니까?"

"그래. 후대냐고 물었다."

"예… 저는 금신천뢰문에 입문하여…."

"종명자가 아니라면 절대로 이곳에 들어올 수 없거늘. 내숭은 그만 떨지."

나는 눈앞에 있을 존재.

금신자 양수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금신천뢰문 공법을 전부 합쳤을 때 나타나는 구결… 그건…."

"그래, 너도 알 만한 것이지."

"…."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내가 명계의 주인에게 부탁해서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명계의 밑바닥에, 후대를 위한 자리를 만들고 사념을 남겨 놓은 이유를 들어야 하지 않겠느냐."

나는 긴장을 끌어올렸다.

"우선 시작 전에 한 가지를 경고하겠다."

금신천뢰문의 시조.

천뢰번의 주인에게서 천뢰번을 빼앗아 온 자.

무수한 풍파를 일으킨 존재, 금신자 양수진과의 대담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빛]을 조심해라. 그자는 제(帝)의 의지에 따라 네 곁에,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든. 네가 상상하지조차 못한 방식으로 네 주위를 맴돌고 있다."

인간은 무엇인가 (1)

빛을 조심하라.

분명,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그]에게서도 들었던 이야기였다.

"[빛]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 겁니까?"

"어선(御仙) 중 하나지."

"어선?"

"진선의 한계와 한도를 벗어난 이들을 어선이라 부른다. 상제(上帝)와 천존(天尊)이 그들이며, 전 삼천세계를 통틀어 열 존재밖에 없다. 육상제(六上帝)와 사천존(四天尊)이 그들이지."

꿀꺽.

나는 침을 삼켰다.

육상제와 사천존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전신에 힘이 빠진다.

동시에 머리가 멍해지기 시작했다.

주륵, 주르르륵….

어쩐지 기분이 붕 뜨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는 어째선지 내 몸이 녹아내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아니야….'

아니다.

착각이나 생각이 아니었다.

내 몸은, 실제로 양수진의 앞에서 촛농처럼 녹아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정신 차려라."

"허, 헉!"

'내, 내가 어떻게 된 거지!?'

나는 공포에 질리며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러나 그때였다.

딱!

양수진이 어둠 속에서 손가락을 튕긴다.

그와 동시에 내 몸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아직 네게는 존재를 아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나 보군."

"…???"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바, 방금 그건…."

"세계의 극점에 있는 존재들의 지식을 받아들였으니 유전자 단위에서 네 몸이 공포에 질려 소멸하려 한 거다. 그나저나 이상하군…. 아무리 어선들이라 해도 그냥 존재를 아는 것만으로는 원래 이렇게 반응이 심하지 않은데. 어선 중 하나가 주시하고 있는 게 아닌 이상…."

잠시 혼자 중얼거리던 양수진이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겼다.

치직, 치지지직!

그와 동시에 찌릿거리는 정전기가 주변에서 마구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하, 그렇군. 명계의 주인께서 당신의 영지에 종명자가 진입했음을 눈치챘다. 이쪽으로 강림하고 있어."

"…예?"

"너무 걱정은 마라. 생전의 나와 맺은 언약 때문에, 명계의 주인이라고 해도 나와 너의 대담 장소까지 찾아오는 데엔 시간이 꽤 걸리지. 제아무리 본인이 제공한 땅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대화를 나눌 시간은 충분하다."

나는 너무나 급작스러운 정보의 범람에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명계의 주인? 상제? 천존?'

내가 혼란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하지만, 나는 그 와중에도 일말의 정신을 부여잡았다.

"명계의 주인이란 분도, 당신이 말한 어선입니까?"

"그래. 천존 중 한 분이시지. 종명자를 감시하는 데에 혈안이 된 '빛의 주인'은 상제 중 하나고. 아, 네가 금신천뢰문을 통해 나와 만나게 된 것이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천뢰번의 원주인 역시 '천벌의 주인'으로서 상제 중 하나다."

"…!"

나는 갑작스럽게 알게 된 정보에 흠칫 놀랐다.

'짧은 시간에 엄청난 정보들을….'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빛의 주인]이란 존재가 [제(帝)]의 명을 받아 종명자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쇄천봉에서 보았던 당신의 잔영 역시 종명자를 누군가가 쫓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존재들은 동일 인물입니까?"

나는 말을 하면서도, 혹시나 내가 잘못 말하는 게 있을까 봐 조심스럽게, 느릿느릿 말을 내뱉었다.

혹시라도 말을 잘못 내뱉었다가 내가 말하는 대상이 나를 주시하게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양수진은 문제가 없다고 여긴 것인지 딱히 나를 제지하거나 하지 않았다.

"동일 존재다. 내가 어선들을 상제니 천존이니 하면서 예우를 하기는 했다만, 사실상 그 존재야말로 진정한 제(帝)겠지. 나머지는 그저 참칭자에 불과할 뿐…."

"그 존재는… 누구입니까? 누구이길래 종명자들을 노리는 겁니까?"

나는 침을 삼켰다.

이제야, 우리를 노리는 존재에 대한 명확한 진실이….

"나도 모른다."

"…예?"

그러나 양수진은 어둠 속에서 혀를 찰 뿐이었다.

"그야 나는 본체가 [그 존재]를 만나서 담판을 짓기 전에 분리된 사념이기 때문이다. 본체는 그 존재와 만난 후 소멸해 버렸고, 우리 선대의 종명자들도 그 존재와 대면한 후 대부분 같은 꼴이 되었으니 그저 우리를 별로 반가워하지 않는 존재가 아닐까, 하고 추측할 뿐이지."

"…."

"다만, 그 존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법한 이는 알고 있지. 나중에 성장하면 그분을 찾아가 보거라."

"그 존재가 누구입니까?"

"지금 이 공간 밖에서 미친 듯이 문을 두드리고 계신 분. 명계의 주인… 사후세계와 윤회를 관장하는 저승의 천존. 그분은 어떤 상제와 천존, 모든 어선과 진선을 통틀어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시니 차후에 그분에게 여쭈어라."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아 물었다.

"왜 차후에 물어야 한다는 겁니까? 지금 여쭈면 되는 게 아닙니까?"

"…저승의 주인께서는 참 묘한 분이시다. 그분은 종명자들이 약할 때는 종명자들을 잡아들여 명계 밑바닥에 가둬 두려고 늘 혈안이 되어 있다. 하지만 종명자들이 본인들만큼 강해지면 그때는 선선히 협력해 주시지."

"…."

"지금 상태의 네가 그분의 손에 잡힌다면 명계 밑바닥에 처박힌 채 영세영겁을 봉인당할 뿐이다."

꿀꺽….

나는 침을 삼켰다.

그 말대로라면….

'나와 동료들… 그리고 종명자들은 모두, [빛]뿐만이 아닌 '저승의 주인'이란 존재 역시 조심해야 한다는 건가?'

"…하면, 저승의 주인이란 분은…."

"이제 그 얘기는 슬슬 그만하지. 명계의 밑바닥이라면 다른 어선이나 [그 존재]의 시선을 거의 걱정할 필요가 없지만, 다름 아닌 저승의 천존만큼은 그 힘과 시선이 더더욱 선명해지니 말이다. 네가 그분을 떠올리고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그분과 너 사이에 인력이 생기고 있다."

"…!"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절로 소름이 돋아 나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뭘 궁금해하는지는 대략 짐작이 간다. 다만 저승의 주인께서는 종명자들이 명계에 진입하기 전이라면 잘 개입하지 않으니, 살아 있는 동안에는 명계에 가지만 않으면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물론, 그분이 명계 밖을 벗어나지 않는 것은 무슨 제약이 있는 게 아니라 그분의 개인적인 문제이니 너무 안심하지는 말고."

"…예. 일단 알겠습니다."

'천존이란 존재가, 명계 밖을 벗어날 수도 있다고?'

나는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인지조차 되지 않는 까마득한 존재가 무슨 짓을 하든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공포에 잡아먹히지 말고, 남은 시간을 이용해서 알아야 할 걸 알자.'

"…일단, 어선들에 관한 것 외에 저를 부르신 이유가 뭡니까?"

"좋군. 빠르게 어선들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다니, 정신력이 뛰어나구나."

양수진은 내가 질문을 돌리자 훌륭하다는 듯이 칭찬을 해 주었다.

"너를 부른 이유는 우선… 네가 내 명을 물려받은 후예인지, 아니면 그냥 종명자인지를 알기 위해서이다."

"당신의 명…?"

"그래. 종명자들이 부여받는 명은 정해져 있고, 불변한다. 선대 종명자들이 전부 [그 존재]에게 사라지면 후대 종명자들이 다시 명을 부여받아 이 세계에 태어나지. 물론 명을 부여받고 얻는 능력은, 명을 이룩하기 위해 세계가 최적의 힘을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번 다르지만…."

"…저는 당신과 같은 명을 가졌습니까?"

"음…."

내 물음에 양수진은 어둠 속에서 잠시 나를 쳐다보는 듯했다.

"아닌 것 같군. 전혀 다른 명을 가졌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양수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네 역사에 심상찮은 고통과 절망의 굴곡이 져 있는 걸로 봐서, 네 명도 나 못지않게 추악하구나. 큭큭…."

"예?"

명이 추악하다고?

내가 의아해할 때였다.

"우선… 내가 금신천뢰문을 왜 세웠는지부터 설명해야겠군."

양수진이 이어 설명을 시작했다.

"내 본명공법은 적뢰천겁공(赤雷天劫功)으로, 천상금뢰지체, 혹은 나와 똑같은 명의 보유자만이 익힐 수 있는 공법이다. 이 공법을 이용하면 천상금뢰지체가 지닌 힘을 극한으로 끌어내는 게 가능하지. 천상금뢰지체가 아니더라도, 나와 똑같은 명을 부여받은 종명자라면 능히 공법을 익혀 천상금뢰지체를 얻는 게 가능한 공법이다."

"…!"

"그리고, 너는 금신천뢰문의 모든 공법을 익히고, 공법 간에 숨겨진 구결을 찾아, 우리 고향에서 유명했던 그것의 마지막을 읊어 찾아온 거겠지?"

"맞습니다."

"금신천뢰문의 모든 공법을 합치면 나오는 공법은, 멸신겁천공(滅神劫天功). 너도 공법을 운용해 보아서 알겠지만, 사실상 그건 공법이 아니다. 일종의 축문이자, 제례 의식이지."

"…어째서, 이런 걸 만드신 겁니까?"

나는 양수진에게 질문했다.

홍수령에게 이 무명 공법.

양수진이 '멸신겁천공'이라고 말한 공법을 알려 주었을 때 그녀가 어떤 반응이었는지가 기억났다.

―뇌도공법의 속성을 잃게 하는, 제의의 일종이라고?

―그 무슨… 시조님이 만드셨을 금신천뢰문의 공법의 극한이, 금신천뢰문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제의란 말이냐?

―도대체, 12만 년 역사의 본문은 뭘 위해… 정체성을 잃어버리기 위해 끝없이 달려왔단 말인가…?

"금신천뢰결(金神天雷訣)에 도달하기 위해서였다."

"금신천뢰결…?"

"세계 인권 선언은, 존재의 권리를 보장하는 선언이다. 그리고 나는 그를 통해서 '인간'의 권한과 자유를 통해, 내 명(命)을 바꾸려 평생을 노력했다. 명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나의 숙원이었으며 비원이었으니…."

꾸욱….

어둠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으나, 나는 양수진이 주먹을 쥐고 있다는 걸 느꼈다.

"우리 종명자들은 대다수가 비참하지. 하지만 그중에서도, '좋은 명'을 부여받은 종명자가 있는가 하면, 나나 네놈 같이 '추악한 명'을 부여받은 종명자도 있다. 큭큭… 나는 추악한 내 운명을, 다른 종명자의 운명과 교체하기를 바랐다. '지금의 내 운명'을 상징하는 것이 적뢰천겁공. '내 운명을 비틀기 위한 의지'가 상징하는 것이 멸신겁천공. 그리고 마지막으로… '운명을 바꾸는 데에 성공한 나의 미래'가 금신천뢰결이었다. 정녕 나의운명을 바꾸어서 기쁨을 얻는 데에 성공했다면, 금신천뢰결이 탄생했겠지. 하지만…."

양수진의 목소리에서 힘이 빠졌다.

"결국 보다시피 실패했다. 나는 [그 존재]와 대면하기 전까지 시도했지만 결국 운명을 교체하는 건 허상에 불과했지."

"…그렇다면, 금신천뢰문이라는 건…."

나는 양수진의 말을 들으며, '금신천뢰문'의 존재 의의를 얼핏 눈치채고 흠칫 몸을 떨었다.

"당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한… '의식의 대상'이었던 겁니까?"

"그래. 정확히는 운명을 바꿀 때 쓸 제의의 준비물이었다. 결국 성공하지 못한 실패작이지만 말이지."

나는 양수진의 말투에 내심 어이가 없어 쏘아붙였다.

"당신의 후예들에게 실패작이라니… 말씀이 지나치신 게 아니신지요? 세계 인권 선언을 구결에 집어넣으신 분께서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으음?"

그러나, 양수진은 도리어 내 말에 의아해하는 듯했다.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예?"

"세계 인권 선언이 뭐가 어쨌단 말이더냐? 그건 인간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는 선언이다."

"예, 그런데 어째서…."

"한 가지 묻지. [인간]이란 뭐냐?"

"예?"

나는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존엄하고 자유로우며 지성을 지녔으며…."

"그래. 잘 아는군. 요는 '자유'다. 오직 '자유'를 지닌 존재, 혹은 '자유'를 획득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만이 [인간]이며, 세계 인권 선언의 권리를 향유할 자격이 있는 존재이다."

꽈아악….

양수진이 어둠 속에서 주먹을 쥐며 외쳤다.

"그러므로, 오직 우리 종명자만이 [인간]이며, 이 세계에 존재하는, 진선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비인간]이다!"

"…예?"

나는 그 황당하고도 극단적인 주장에 아연해져, 절로 모르게 입을 벌렸다.

인간은 무엇인가 (2)

"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아연해져서 되물었다.

'도대체 이게 일반인의 생각인가? 아니, 아니군. 그는 진선의 최고봉에 도달했던 존재….'

천인기만 되어도 한 구석이 돌아 버리거늘.

진선의 극점에 도달한 양수진이라면, 어쩌면 그의 논리와 상식은 이미 평범한 인간과는 도저히 간극을 좁힐 수 없을 정도로 멀어졌을지도 몰랐다.

나는 빠르게 정신을 수습하고 되물었다.

"…종명자만이 자유로우니 '인간'이란 말씀은, 다른 존재는 자유롭지 못하다는 겁니까?"

"그래. 이 세계의 삼라만상 모든 것은 운명의 인도에 따라 움직인다."

어둠 속에서 양수진이 웃으며 말했다.

"이 세계의 문명 수준이 어째서 중세 수준에 머물러 있는지 아는가? 수십만 년의 역사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늘 같은 생활상, 비슷한 문명을 영위하는지 아는가?"

어쩐지, 양수진의 웃음은 비웃음처럼 보였다.

"모조리! 모조리 운명의 노예이기 때문이다. 운명과 인력의 휘어짐에 따라 삼라만상 모든 존재는 영세영겁을 진화하지 못하고, 어리석게 같은 문명만을 답습한다. 이 세계에 사는 모든 존재는 생각하고, 말하고, 감정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들이 보이는 행동 하나하나, 말 하나하나, 감정 하나하나까지도 전부 운명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 누구도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아!"

"…그렇다면."

나는 양수진의 극단적인 사상에 거부감을 느끼며 물었다.

"심족(心族)은 어찌 설명하실 겁니까?"

"심족?"

"예, 그들이야말로 마음과 심상을 극도로 갈고닦아 운명에 저항하는 이들입니다. 말씀대로라면 심족이란 이들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어야 합니다."

"심족, 심족이라…. 하하, 아하하하하하!"

그리고, 내가 '심족'이란 말을 꺼내자마자, 갑자기 양수진이 폭소하기 시작했다.

"흐흐, 흐하하하하! 흐하하하하하하!"

쿠구구구구!

어둠 속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것은, 마치 광기에 찬 광소같이 느껴졌다.

나는 어쩐지 이 광소가 굉장히 기분 나쁘고 섬뜩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양수진이 굉장히 기분 나쁜 진실을 말하리란 것이 예감되었다.

"심족이 운명에 저항하는 자유로운 존재들이라고? 틀려…."

어둠 속에서, 양수진은 웃음을 거두고 말을 이었다.

어째서인지 양수진의 목소리는 굉장히 음울하고 꺼끌꺼끌했다.

"오히려, 심족이야말로 그들이 운명의 노예이자 장난감에 불과하다는 가장 직접적인 증거다."

어째서인지 양수진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노기(怒氣)가 깃들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감정이나 의념을 읽을 수는 없었으나, 나는 양수진의 목소리에서 그가 먼 옛날 심족과 관련해서 어떤 일을 겪었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너는 심족이 자연 발생했다고 생각하느냐?"

"천족과 지족이 약소 종족을 학대하니, 자연히 발생한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수계에서는 왜 심족이 탄생하지 않았나?"

"그야 수계의 수도자들은 직접적으로 한 종족을 노예 취급하거나…."

"그럴 리가. 수계의 요족들이나 인족들도 서로를 잡아다가 목장을 만들어 사육하는 일은 빈번하게 해 댔다."

"…."

나는 해룡족의 사례를 떠올려 입을 닫았다.

그 말대로였다.

수계에서도, 어쩌면 막리세가 출신으로 입천에 이른 존재가 있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없었다.

도대체 왜일까.

양수진이 어둠 속에서 팔을 움직였다.

그의 어슴푸레한 윤곽이, 한 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게 보였다.

"그런데 왜 심족이 수계에서는 태어나지 않았을까? 왜 진마계엔 천, 지족에 대응하는 천마나 요마는 있어도 심족에 대응하는 마족은 없을까? 왜 광한계에만 심족이 있는 걸까? 왜 천인기에 대응하는 경지에 오르면 천겁을 추가시키는 미친 공능을 가졌음에도 그렇게 약세일까? 왜 천, 지족들은 심족들을 미친 듯이 혐오할까? 왜 혐오하다 못해 심족들을 박제해서 만든 법구 하나가 없을까? 왜 심족이 극점에 도달해서 나타나는 진선은 어떤 정보도 없고 누구도 모를까?"

"…."

말 그대로, 너무나도 많은 의문이었다.

양수진의 설명이 이어졌다.

"간단하다. 심족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존재들이다."

"…!"

"그리고, 종명자가 나타나기 이전에 갑자기 와르르 나타났다가, 종명자들이 모두 사멸하면 동시에 전부 멸망하고 쇠퇴해서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지."

"…!!!"

양수진이 폈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

나는 양수진이 말해 준 정보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게 무슨…!'

"알겠느냐? 심족이란, 종명자들이 이 세계에 발을 디딤에 따라 운명적으로 생겨나는, 또 다른 형태의 운명의 노예들일 뿐이다. 심족이야말로 정녕 이 세계의 존재들에게 자유 의지가 없음을 증명하는 존재들이지."

나는 한동안 침묵했다.

너무 충격적인 사실이라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장익과 유화, 그리고 무수한 심족들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면, 왜 우리는 자유 의지가 있다는 겁니까? 우리야말로 정해진 명이 있고, 우리야말로 명에 따르는 존재들이 아닙니까?"

"우리는, 운명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왔으니 말이다."

양수진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운명도 신도 기적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온 존재들이고, 우리를 강제하는 명도 결국에는 남이 부여한 것이니… 우리는 언젠가는 반드시…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는 존재들인 것이다."

"…."

나는 양수진의 극단적인 사상에는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양수진의 목소리는 어쩐지, 자기 자신도 운명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듯한 느낌이 풍겼다.

'자유로워질 수 있는 존재들이라면… 양수진조차 아직 자유로워지지는 못했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이 말을 입 밖에 내뱉지 않았다.

"뭐, 궁금한 건 다 물었나? 이제 슬슬 명계의 주인께서 이곳의 장벽을 박살 내기 직전이라 네게 전해 줄 걸 전해줘야 할 성싶은데…."

"아직 궁금한 게 산더미 같습니다만…."

"뭐, 네가 궁금한 건 차후에 알게 될 게다. 지금 전해 주려는 게 더 중요하다."

"…어떤 것을 전해 주시려 하는 겁니까?"

"멸신겁천(滅神劫天)."

어둠 속에서, 그가 내게 손을 뻗었다.

"멸신겁천은… '운명을 비트는 의지' 그 자체. 결국 운명을 비트는 제례 의식이다. 비록 내 종명자로서의 운명은 교체할 수 없었지만…."

그의 어투는 어쩐지 씁쓸해 보였다.

"다른 진선들이 부여하는 운명은, 제의를 통해 극복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완벽히 통하는 건 아니다만…."

터억!

양수진의 손이 내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머릿속으로 어마어마한 지식의 격류가 휘몰아치는 걸 느꼈다.

"…!!!"

멸신겁천공… 아니, 멸신겁천의 제(祭)를 지내기 위한 구결이 뇌리로 흘러들어 왔다.

"지금 궁금한 것이 있더라도, 내가 지금 답을 못 해 주더라도… 멸신겁천을 통해 네게 인력을 부여했다. 언젠가, 네가 궁금한 것들을 전부 알게 될 것이다. 멸신겁천이 너를 그렇게 인도할 것이니…."

완전히 무속성으로 변한 뇌전의 힘을 통해, 운명을 조금이나마 비틀어, 압도적으로 불합리한 존재와의 싸움에서 조금이나마 승률을 올려 주는 제의.

그것이, 멸신겁천의 제의였다!

금신천뢰문의 공법 9500개 분량의 구결이 모조리 양수진에 의해 '제례용 구결'로 바뀌어서 뇌리로 흘러든다.

세계 인권 선언을 주축으로 한 무수한 축문과 구절들이 정신에 새겨진다.

나는 이를 악물고 정신이 무너지지 않게 하며 제례용 구결들을 받아들였다.

"이제 시간이 다 되어 가는군."

쿠구구구구구!

어둠의 공간.

그곳으로, 어쩐지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춥다.

아니, 추운 정도가 아니었다.

이것은….

'추워추워추워추워추워죽어죽어죽어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죽음….'

깊고거대한자가어둠저건너편에서나를주시하고있었으나 양수진이 내 어깨를 쳤다.

"기왕 공간을 제공해 주신 것, 후배와 편안히 대화를 나누게 도와주시지 어찌 그리 급박하십니까."

양수진은 저 어둠 건너편을 향해, 어쩐지 조롱기 섞인 어조로 말했다.

"크흐흐… 그리도 종명자를 손에 넣고 싶으십니까? 당신조차 운명의 흐름에 따라 종명자는 손에 넣을 수 없습니다. 운명은 우리를 억압하지만, 동시에 지켜 주기도 하니 말이지요. 당신이라면 오히려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우우우우우―

어둠 속에서 기이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울음소리에는 기이한 지식과 진리가 섞여 있었고, 거기에 귀를 기울이면 무수한 지식과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더, 더 듣고 싶어….'

저 소리에 섞인 지혜에 집중하면, 어쩌면 귀도음화선근에 버금가는 뭔가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

"멸신겁천을 운용해라."

치직!

"…!"

양수진의 손이 내 등에 닿자, 갑작스레 체내에서 무속성의 법력이 움직였다.

동시에 나는 저 울음소리에 집중하고 싶은 기분이 싹 사라지는 걸 느꼈다.

"아무리 명계의 주인이 제공한 공간이라지만, 이곳은 본체가 전성기 시절에 직접 저승의 천존과 담판을 짓고 언약을 맺었던 장소…. 저승의 천존이라 하셔도 여기까지 진입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쿠구구구구!

그러나, 양수진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어째 저 멀리서 들리는 울음소리가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았다.

"자, 그럼, 한 30초 뒤면 그분이 도달하실 테니 이제 슬슬 돌려보내 주도록 하지."

어둠 속에서, 나는 양수진의 몸이 점차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몸이… 흩어지고 있습니다…!"

"그래, 명계의 주인의 배려 아래 이 공간에 사념을 밀봉해 두고 있었다만… 이제 밀봉이 풀렸으니 흩어지는 것뿐이다."

양수진은 비누 거품처럼 흩어지며 말을 이었다.

"내 역할은 다했다. 종명자는 찌꺼기를 남길 수 없지만, 나는 명계의 힘을 빌어 사후에도 찌꺼기를 남기는 데에 성공했으니 이 얼마나 위대한 위업인가…. 후대여… 부디 너는 운명에 지지 말아라. 우리 종명자야말로 진정 [인간]이라는 것을 하늘에 알려라…!"

"…."

나는 흩어져 가는 양수진을 보며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사상은 너무 극단적이었고, 듣는 이를 불편하게 할 정도였다.

하지만, 같은 고향에서 온 그가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패배하고 저렇게 스러져 가는 것을 보니 마음이 좋을 수가 없었다.

"자아… 나는 간다. 후대여, 종명자들이 후대를 위해 남겨 놓은 전언은, 나뿐이 남긴 것이 아니니 계속해서 찾아보아라. 가장 보편적으로 찾을 수 있는 종명자의 전언은…."

스르륵!

그가 손을 뻗자, 나는 몸이 뒤로 밀려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따뜻하고 빛이 비취는 곳을 향해 떨어져 나가며, 나는 양수진의 말에 집중했다.

"인과 연이 이름에 들어간 연인을 찾아라. 그들이 하나 되는 것을 축복해 주면, 최강(最强)의 종명자였던 존재의 잔영을 만날 수 있을 것이야…."

"…!!"

"유호덕의 찌꺼기가 그들에게 관심이 많으니… 힘을 기른 후에 혈음을 만나 보아라…."

츠츠츠츠츳!

나는 환한 빛에 휩싸이며, 어둠의 공간에서 빠져나왔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양수진의 사념이 어둠 속에서 흩어지며, 거대하고 깊은 존재가 어둠 속에서 나를 가만히 지켜보는 모습이었다.

찌이이잉―

머릿속으로, 양수진의 말이 울렸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명계에 갈 수밖에 없다. 후에 명계에 가게 된다면, 절대로 뒤를 보지 말고 최대한 빨리 곧고 좁은 길로 들어서라. 그것만이 네가 다음으로 갈 수 있는 길이리니….

그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눈을 떴다.

"허억…!"

저 멀리, 뇌운봉에서는 축제 분위기가 맴돌고 있었다.

전명훈이 연기기 7성에 도달한 것일 터.

내 체내에서는 원영 중기에 달한 수행이 느껴졌다.

차가운 밤공기와, 익숙한 광한계의 달이 내 머리 위 중천에 떠 있었다.

"허억, 헉…."

식은땀이 절로 흐른다.

'돌아왔…다.'

"…살아 있군."

마지막에 봤던 깊고 거대한 존재.

그 존재를 봤던 것 때문인지, 나는 '살아 있다'라는 것에 너무도 깊은 감사를 하게 되었다.

"…일단 다시 동부로 돌아가…서?"

철퍽!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그대로 몸이 앞으로 고꾸라져 쓰러졌다.

"어…?"

순간 당황했으나, 이내 바로 알 수 있었다.

'전신에 힘이 빠졌다. 그리고… 축축하군.'

전신이 식은땀 범벅이었다.

그리고 어쩐지 피부가 창백하고,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명계에 갔던 것 때문인가? 아니… 그 깊고 거대한 존재를 본 탓이다….'

나는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양수진이 내게 뭘 해 줬는지 알 수 있었다.

'계속 나를 보호해 줬었군….'

천벌의 주인이란 존재를 한 번 직시한 것으로 회귀를 넘어서까지 저주가 따라왔는데, 그보다 더 위격이 높으리라고 예상되는 저승의 천존이 나를 직접 주시했다.

그런데도 고작해야 몸을 못 움직이는 것에 끝난 것은, 필히 양수진이 나를 그 존재의 시선으로부터 한참은 지켜 줬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래도, 일단 여기 엎어져 있을 순 없으니….'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전신을 꿈지럭거렸고, 한참을 노력해 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나는 힘겨운 몸을 움직여 동부에 도착했고, 그대로 동부에 만들어 놓은 침상에 엎어져 기절해 버렸다.

축기기에 이른 후로는 딱히 잠을 잘 필요가 없었으나, 원영 중기에 이르고도 졸음이 쏟아질 만큼 명계에서 있었던 일은, 양수진의 비호를 받고도 어마어마한 피로를 야기했다.

* * *

다음 날이 되었다.

깜빡….

"…어."

눈을 뜨자 보인 것은, 금벽호였다.

금벽호는 잔뜩 굳은 얼굴로 내게 말했다.

"손목을 줘 보거라."

"…."

인간은 무엇인가 (3)

'손목을 달라고?'

나는 바로 금벽호가 내게 뭘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천인기쯤 되면 충분히 꿰뚫어 볼 수 있을 텐데 구태여 손을 달라는 건….'

아마, 그로서도 믿기지 않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일단 순순히 손목을 내밀었다.

그는 천천히 내 손목을 잡더니, 마치 의원이 진맥을 하듯이 내 맥을 짚어 보았다.

우웅!

그리고 금벽호의 의식이 혈맥에서부터 시작하여, 내 신체 전부를 한 번 빠르게 휩쓸고 지나갔다.

"…너."

금벽호는 어쩐지 무거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의 눈에는 어쩐지 착잡한 기색이 깃들어 있었다.

"…원로들로부터 듣기는 했다. 네가 본문의 모든 공법을 익히기 시작했다고…. 그래. 그래서 어쩌면, 한 천 년 정도 공법들을 연구하면 숨겨진 구결을 발견하고, 숨겨진 공법을 발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금벽호의 착잡한 기색 안쪽에는, 어쩐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감정도 섞여 있었다.

"10년 만에 결국 모든 공법을 전부 익혀서 전설로만 내려오는 공법을 재현하다니…. 이걸 잘했다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공법을 재현해서 네 뇌도공법 전반과 뇌성체를 함부로 날렸다고 꾸중을 해야 하는지…."

"…."

나는 겉으로는 담담하게 있었다.

하지만 금벽호가 내뱉은 말은 상당한 풍랑이 되어 내 가슴을 흔들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금벽호는 한숨을 쉬며 계속 말을 이었다.

"진휘에게 들었는지는 모른다만, 네가 찾아낸… 모든 공법을 익힐 때 드러나는 그 공법의 진짜 이름은 멸신겁천결. 시조님께서 금신천뢰문에 남기고자 하셨던 가장 큰 깨달음이라고, 역대 문주들에게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지."

"그렇습니까…."

"공법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 하나, 익히기 시작하면 체내에서 이미 익히고 있던 뇌도공법이 전부 투명하게 무속성 법력으로 변화해서, 뇌도공법으로 누려 왔던 이점이 모조리 사라진다는 것. 둘…."

조금 뜨악한 표정으로, 금벽호가 말했다.

"원래 가지고 있던 영근이 사라지고, 몸이 범인(凡人)의 몸이 되어서 더 이상의 수행이 사라진다는 것이 그것이다. 원래 가지고 태어난 자질 자체가 소멸한다고 하지. 한 마디로… 너는 이제 더 이상 수선이 불가능하다."

"…."

"천인기에 이르렀다면… 방법이라도 있었겠건만."

확실히, 체내를 관조해 보니 오기조원을 통해 만들어 놓았던 오행영근 역시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체내에 법력은 있으나, 육신이 법력을 빨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기분이었다.

영기를 정제해서 법력으로 빨아들일 수 없으니, 앞으로는 법술을 쓰면 더 이상 법력을 회복하지 못한다.

그러나 금벽호는 영근을 잃은 것 자체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영근 자체는 신경 쓰지 마라. 홍령체를 얻을 수 있게 해 주는 홍령삼이나, 기타 특수한 영근을 얻을 수 있게 해 주는 영약들을 구해 오면 영근은 회복할 수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문제가 되는 건… 네가 뇌성체를 잃었다는 것이야."

나는 금벽호의 의념을 읽었다.

겉으로는 잔잔해 보였으나, 그는 현재 복장이 뒤집혀 터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긴, 천상금뢰지체가 겨우 고비를 넘게 했더니 이번에는 다른 녀석이 갑자기 범인이나 다름없어진 채로 자질을 잃어버린 셈이니.'

갑자기 눈알이 뒤집혀서 어떻게 된 거냐며 내 멱살을 잡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폭급한 성질을 생각했을 때, 나름 필사의 의지로 참고 있는 것이리라.

"뇌성체를 잃은 채로… 금신천뢰문에 남을 수 있겠느냐?"

그가 내게 물었다.

그러나 나는 그 질문에 대답을 하기보단, 다른 질문을 되물었다.

"그 전에 한 가지, 태상장문께서는 이 '멸신겁천'의 구결을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면, 이 멸신겁천의 구결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등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대강은 알고 있다. 멸신겁천은 공법용이 아닌, 제례용 구결로써, 여러 '제의'와 융합해서 사용하는 신통이지. '제의'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공법으로 알고 있다. 물론 그런 공법을 남기신 선조님의 뜻은 전해지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금벽호는 멸신겁천공의 존재와, 대강 어떤 공법인지만을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원래 그렇게 전해진 것일 수도, 아니면 처음에는 잘 전해졌으나 세월이 지나며 전해지던 것들이 전부 전해지지 않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혹 멸신겁천과 관련된 종문의 규약 같은 것이 있습니까?"

"흠, 예전에는 있었다고 들었다만 내 대에 와서는 그런 규약들은 대다수가 전해지지 않게 되었다."

"그렇습니까…."

나는 살짝 미간을 꿈틀거렸다.

멸신겁천과 같은, 양수진이 직접 남긴 공법의 경우, 분명 조금만 행동을 잘못해도 큰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런 공법에 대한 규정은 중요했다.

혹여나 내가 이 공법을 꾸준히 익히는 것만으로 어떤 존재의 눈길을 끌지도 몰랐으니까.

'그러니 그런 규정은 알아 놔야겠는데….'

금벽호가 모른다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얼마간 내 몸 상태,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물었다.

"멸신겁천을 익혔다면, 더 이상 본문의 뇌도공법은 사용해도 어쩔 수가 없다. 무속성의 공법으로 변화했으니 기존의 뇌도공법의 구결을 운용해 봐야 뇌도공력으로 운용하던 구결이 제대로 운용될 리도 만무할뿐더러… 새로 뇌도공법을 익히려 해도 멸신겁천결에 흡수당할 거다."

"혹시… 뇌도공법을 이제 더는 못 익히니 금신천뢰문에서 쫓겨난다거나 하는 겁니까?"

"뭐?"

그리고, 내 질문에 금벽호는 혀를 차며 말했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설령 네 재능과 오성이 모조리 사라졌다고 해도 너는 엄연한 원영 중기의 장로. 원영을 응결한 경험이 있는 이상 너는 광한계에서도 대접받는 장로 중 한 명이다. 그런 전력을 포기할 수도 없으며… 또한 멸신겁천 역시 시조께서 남기신 유지. 너는 멸신겁천을 꾸준히 익혀 가며 그 구결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연구하는 역할도 남아있다."

'그런가….'

나는 싱긋 웃었다.

따지고 보면 금벽호의 말은 지극히 정론이기도 했다.

"뇌성체를 잃고도 상관없느냐고 물으셨지 않습니까? 예. 상관없습니다."

"…!"

"앞으로도 계속 금신천뢰문이 저를 받아들이는 한, 이곳의 제자로 있겠습니다."

"그렇군… 고맙다."

그는 내 어깨를 쳐 주었다.

'어차피, 뇌도공법을 못 익혀도 할 게 있으니….'

어찌 되었든 천뢰번은 훔쳐야 한다.

그 역시 이번 생의 목표 중 하나였으니 말이었다.

그러나 내 흉악한 목적을 아는지 모르는지.

금벽호는 대견하단 표정으로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나는 흠칫 놀라 어깨를 치며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건가 싶었으나 다행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뇌도공법과 영근을 잃었지만, 어쨌든 넌 종문의 인재다. 차후에 영근을 보완할 영약도 따로 보내 주마. 그리고… 안타깝긴 하지만 어쨌든 본문의 모든 공법을 익혔던 위대한 제자이기도 하지. 앞으로도 잘 부탁하마."

"예."

그는 얼마간 나를 격려해 준 후, 내 동부에서 나갔다.

그가 나간 후, 나는 눈을 감고 체내를 관조했다.

무속성의 투명한 법력이 체내에서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드디어."

나는 늘 조금씩 내 몸을 갉아먹고 있던.

뇌전화의 저주가, 드디어 사라졌음에 미소지었다.

"해방되었다."

뇌전화의 저주에 걸린 지 약 5백여 년.

두 번이나 죽었음에도 풀리지 않고 미약하게 남아 나를 뒤따라오던 그것은, 멸신겁천의 법력이 체내에서 뇌전을 무속성으로 변화시킬 때에 완전히 해제되어 버렸다.

그동안 워낙 큼직한 일들이 일어나서 신경 쓰지 못했으나, 저주가 풀렸다는 것 자체로 나는 이번 생의 주요 목적 중 하나를 이룬 것이었다.

'물론 천인기에 오르고, 천뢰번을 훔친다는 목적은 아직 이루지 않았다만….'

나는 숨을 들이마시었다.

우우웅!

내 호흡에, 천지영기가 내게 들어왔다.

나는 용맥기공을 운용하며, 빠르게 다시 한번 오기조원의 환골탈태에 들어갔다.

뚜두둑….

환골탈태로 바뀌는 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냥 몸을 푸는 정도?

하지만, 어찌 되었든 오기조원의 영기가 체내로 들어가며 오행영근을 다시 생성해 내는 게 느껴진다.

"후우우…."

나는 오영근을 느끼며, 새로이 만들어 낸 오영근으로 천지영기를 빨아들였다.

소모되었던 법력들이 빠르게 차오르며, 나는 순식간에 만전의 상태를 회복하였다.

'원영 중기에 올랐다.'

양신을 만드는 데에 성공했으니, 양기를 모으기만 하면 양신의 극점에 이르고, 원영 후기로 넘어갈 동력을 얻을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후부터는 매우 쉬울 터다.

'그럼, 일단 내가 해야 할 것, 얻은 것 등을 전부 다시 정리해 볼까.'

얻은 것은 귀중한 정보와, 운명에 저항하는 구결인 멸신겁천.

그리고 내가 해야 할 것은 천인기에 오르는 것과 천뢰번을 훔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멸신겁천을 얻으며, 해야할 일이 하나 더 생겼다.

'금신천뢰문에는 멸신겁천에 대한 전승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뭔가 이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느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전승을 잘 알고 있을 만한 사람을 찾아가 봐야겠지.'

나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명계의 밑바닥에 다녀온 영향인지, 몸에 생기가 없었고 곧 죽을 노인처럼 전신이 삐그덕거렸다.

하지만 한숨 자고 나니 그래도 움직일 수는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동부의 입구로 가, 요족어로 외쳤다.

"홍…범…!"

웅웅웅!

영기의 파동이 사방으로 울렸다.

얼마 후.

쿠구구구구!

마디 하나하나가 이제는 집채보다도 커진 거대한 지네가 허공을 날아왔다.

검은 갑각을 자랑하는 홍범은 내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인 일이십니까, 주인님."

"최근 10년간 금신천뢰문에 새로이 입문한 광한계 출신 신규 제자들의 목록을 가져오너라."

"예."

스르르륵!

홍범은 군말 없이 허공을 날아갔고, 얼마 후 다시 내게 돌아왔다.

홍범의 앞다리에는 녀석의 크기에 비해 자그마한 두루마리가 몇 개 들려있었다.

"신규 제자들의 목록입니다."

"그래, 고맙다. 그럼 어디…."

나는 두루마리를 펼쳐, 빠르게 명단에 있는 이름들을 읽어내렸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내가 원하던 이름을 찾아낼 수 있었다.

'여깄군. 8년 전에 입문한 제자… 빠른 수선 속도로 장로들의 관심을 받아 최근 녹뢰 제자가 되었다라….'

나는 목록에서 한 이름을 가리키며 말했다.

"홍범, 여기 이 녀석을 내 동부까지 데리고 와라."

"예, 주인님."

홍범은 내 명령을 받자마자 빠르게 다시 한번 날아갔다.

'그녀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얼마 후, 홍범은 저 멀리서 한 명의 축기 초기 제자를 물고서 이쪽으로 날아왔다.

휘익, 꽝!

"흐아아악! 처, 천천히 던지라고!"

홍범이 툭 던지자 바닥을 구른 그 녀석은 그대로 땅에 머리를 박아, 머리를 싸잡고 홍범을 부루퉁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물론 결단 초기인 홍범이 말없이 쳐다보자 입을 닫아야 했지만 말이었다.

녀석은 잠시 홍범을 쳐다보다가, 이내 나를 보며 놀라는 듯하더니 예의를 갖추었다.

"어, 어… 금신천뢰문 녹뢰 제자, 연진(淵珍). 자뢰의 서 장로님을 뵙습니다."

익숙한, 흑백의 머리칼이 섞인 외모.

금빛 장포를 입은, 조금 앳되어 보이는 수도자.

내 옛 벗인 연진이었다.

"앉거라."

나는 동부 안쪽으로 녀석을 불러 자리에 앉힌 후, 천천히 움직이며 영차(靈茶)를 준비했다.

영기가 흐르는 찻잎을 우려 낸 후 녀석에게 따라 주자, 연진은 황송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부담 가지지 말거라."

"감사합니다, 장로님!"

"아, 아직 맛보지는 말거라."

나는 혹시나 연진이 먼저 마실까 봐 말렸다.

"이 뇌엽차(雷葉茶)는 금신천뢰문의 제자들 사이에서 아주 인기가 좋은 차지. 장로들 역시 즐겨 마시는 차이며… 한 모금만 마셔도 뇌도공법의 법력이 오르는 귀하디귀한 영차이다. 원영 중기 수사들조차 한두 달 치 수련한 수준의 법력을 얻으며, 아마 축기기인 너라면 축기의 영성을 두서너 개는 바로 더 쌓을 수 있을 것이다."

"어, 어찌 이런 귀한 것을…."

"귀한 손님을 대접하려면 귀한 걸 준비해야지."

"아닙니다. 저는 일개 녹뢰 제자에 불과하고…."

우웅!

나는 한 줄기 법력을 일으켜, 내 동부에 내가 미리 쳐 놓았던 금제들을 발동시켰다.

츠츠츠츳!

동부 안쪽에 있던 결계가 발동하며, 외부와 내부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자. 그럼 나오시지요, 선배님."

"에…?"

"후배 말학이, 선배님은 뭘 좋아하실지 몰라 무난한 뇌엽차를 끓여 보았는데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갑작스레 존댓말을 쓰는 나를 보며, 연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녀석의 의념은 모조리 내게 읽혔다.

'대체 어떻게'라는 의념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

그리고.

우우우웅!

얼마 후, 연진의 안쪽에서부터 뭔가가 올라오는 듯하더니, 연진의 머리칼이 바뀌었다.

우득, 우드드득….

소년이었던 연진의 몸.

그 음양이 반전되며, 연진은 방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풍기는 소녀가 되었다.

"흐음…."

연진이 팔짱을 끼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연진이 아니지.'

그녀가 나를 흘겨 보았다.

"어떻게 안 게냐?"

나는 연진의 선조.

'연위'를 보며 인사를 올렸다.

"후배가 재주가 좀 많아야지 말입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4)

잠시 나와 그녀의 시선이 부딪혔다.

다음 순간.

치지지지직!

허공에서 번개가 튀기는 듯하더니, 나와 그녀 사이에서 의식이 충돌했다.

"갑자기 후학에게 의식 공격이라니… 무섭습니다."

"흥… 어린놈이 사축기 정상의 의식 공격을 정면으로 막아 내면서 엄살은…."

나는 연위가 갑자기 내게 걸어오는 의식 공격에 저항하며 빙긋 웃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의식만 남아 있는 수준의 그녀는 지금 내 수준이라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멸신겁천 덕택에 뇌도공법의 속성이 전부 사라졌다지만, 뇌도공법의 속성이 무속성이 된 것뿐이지, 정작 다른 힘들은 멀쩡했다.

그녀 역시 방금 전의 기습으로 그를 눈치챘는지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않고 다소곳이 자리에 앉아 차를 들이켰다.

"그래서, 연약하신 후배님께서, 문파의 배신자인 나를 어째서, 어떻게 찾아내어 부르신 것일까? 그것도 태상장문인 금벽호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말이지."

지금까지는 뇌전화의 저주를 푸는 방법을 찾는 것.

그리고 전명훈을 관찰하는 것 때문에 제대로 그녀와 대화를 나누거나 궁금한 걸 물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일단 최우선 과제가 해결되었으므로, 이 정도를 물어볼 여유는 생긴 상태였다.

"궁금한 것이 있어 여쭤보려 모셨습니다. 태상장문께는 절대 함구할 터이니 염려 놓으소서."

"나와 연진의 안위를 보장해 줄 게냐?"

"그러지요. 제 원영에 대고 두 분의 정체에 대해서는 함구하겠다고 맹세하겠습니다."

내 선선한 답에, 연위는 살짝 의심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난 천천히 질문들을 꺼냈다.

"우선 첫 번째. 선배님께선 금신천뢰문 문주의 자격을 지니셨을 뿐, 문주의 위에는 오르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하나, 그래도 문주의 위에 올랐던 분들과 친분이 깊었다고 하니… 혹여 '멸신겁천'이란 구결에 대해 아는 바가 있으신지요?"

그리고, 바로 반응이 왔다.

"…뭐?"

연위의 동공이 졸아든다.

"뭐라고? 그 웃기지도 않은 전설을 왜 묻는 거지?"

'알고 있군.'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시는군요. 선배님께 후학의 성취를 알려 드리자면… 후학은 '멸신겁천'의 구결을 얻는 데에 성공하였습니다. 그 결과…."

나는 무색의 법력을 뿜어내며 말했다.

"이렇게, 뇌도공법의 힘을 전부 잃어버렸지요."

"…!"

연위의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그, 그걸 정말로 익혔다고…?"

"예. 후학이 궁금한 것은, 선배님의 대에서는 이 멸신겁천에 대한 소문이나 전승이 제대로 전승되었는지입니다. 4만 년 이전에는, 이 멸신겁천이 어떻게 전승되어 왔습니까?"

얼마간 그녀는 멍청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의념은 마치, '설마 정말로 가능하다고?' 라는 의문이 가득한 의념이었다.

"…그걸 익히는 게 가능한… 아니, 뭐 일단 그렇다 치고… 흐음…."

그녀는 당황한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후 정신을 차렸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일단 알겠다. 그래, 내 대에는 '멸신겁천'에 대하여 전승이 꽤 있었지. 문파 내에서 '멸신겁천'에 대한 내규도 전승이 되고 있었고."

"…! 부디 후학에게 전승과 내규를 일러 주시기 바랍니다."

연위는 잠시 나를 이해되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멸신겁천은, 기본적으로 역천(逆天)의 비술이다. 말 그대로, 하늘을 겁박하는(劫天) 신통이지."

'그래서 겁천인가….'

"우리가 전승받은 내용으론, 멸신겁천은 문파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면 그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지녔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그리고, 멸신겁천을 대성(大成)하는 법은 굉장히 특이해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지."

"어떻게 대성하는 겁니까?"

그리고 이어진 말에, 나는 굉장히 아이러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금신천뢰문에는 시조령이라는 것이 있지. 말 그대로 장문인이 시조의 명령을 대리하여 집행하는 일을 시조령이라 한다. 이 시조령으로 명해진 것은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하며, 시조령 자체가 굉장히 신성한 것으로 전승되기에 잘 사용되지도 않는다. 주로 문파가 비상 시국에 왔거나, 혹은 문파에 대역죄를 저지른 죄인을 파문(破門)시킬 때에 쓰인다."

연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바로 시조령으로 파문되었지. 시조령으로 파문된 제자는 복권될 수 없으며, 그는 절대적이다. 그리고, 내가 아는 바로 멸신겁천의 대성은, 바로 이러한 시조령으로 '파문받음으로써' 대성할 수 있다."

"…??"

"시조령으로 파문받아 금신천뢰문의 제자로서 폐(廢)하여지면, 일종의 의식인 멸신겁천이 완성되며 멸신겁천을 익힌 이가 자유자재로 멸신겁천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하더군."

"…그렇군요."

나는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그리고 양수진이 들려준 진실들을 떠올리며 금신천뢰문에 대한 씁쓸한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처음부터 양수진에게 금신천뢰문은 완전히 장기 말이었을 뿐이었다.

'적뢰천겁공을 익히다, 멸신겁천을 익혀 자신의 힘을 무화시키고, 금신천뢰문으로 하여금 시조인 자신을 파문시키게 하여 운명을 폐(廢)하게 한 다음 금신천뢰결을 얻어 다른 운명을 얻으려 한 것인가.'

오로지 한 종명자의 비술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문파.

그것이 금신천뢰문이었다.

"대략 이 정도가 멸신겁천에 대해 전승받은 정보다. 그리고 멸신겁천에 관한 문파 내규는 대략 4가지 정도가 있다."

그리고, 그녀가 말하는 멸신겁천의 내규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멸신겁천을 익힌 이는 절대로 천뢰번에게 구결을 알려 주면 안 된다.

둘째, 멸신겁천을 사용할 때 천뢰번을 들고 사용하면 아니 된다.

셋째, 함부로 고위급 존재의 앞에서 대놓고 멸신겁천을 사용하면 오히려 진노를 살 수 있으니 조심하라.

넷째, 멸신겁천은 결코 상서로운 제의가 아니며, 액(厄)을 불러일으키는 제의이니 명심하라.

이상이 금신천뢰문에 전승되는 멸신겁천에 관한 내규라고 하였다.

'천뢰번에 대한 건… 이해할 수 있겠군.'

천벌의 주인이 천뢰번을 통해 멸신겁천을 알게 되면 곤란할 수 있으리라.

세 번째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양수진의 입장에서 '고위급 존재'는 진선 급 이상일 테니, 괜히 진선이 보는 앞에서 그 진선을 대상으로 이런 비술을 쓰면 오히려 상대를 화나게 할 수 있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마지막 내규.

'멸신겁천은 재액을 불러온다'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재액을 불러오는 제의라는 게 무슨 의미지? 말 그대로의 의미인가?'

나는 멸신겁천의 구결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멸신겁천을 사용하면 반동이 뒤따르게 되어 있는데, 아무래도 그 반동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단순히 멸신겁천의 반작용을 조심하라는 것일 확률이 높겠군.'

나는 머릿속으로 정보를 정리했다.

"…일단 정보에 감사드립니다."

"뭐, 문파의 후학이 부탁하는데 말해 줘야지."

"하하, 기왕이면 몇 가지 더 여쭈고 싶은 게 있는데 말입니다."

"뭐지?"

"천뢰번에 대해서입니다."

내가 천뢰번에 대한 얘기를 꺼내자, 연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천뢰번은, 일단 신물(神物) 같은 게 아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흉물이라고 불러야 할 상서롭지 못한 것이며, 계속 그렇게 봉양하다간 분명… 으응?"

그녀는 내가 선선히 천뢰번의 불길함을 인정하자 당황했는지 눈을 껌뻑였다.

"저도 천뢰번의 흉험함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누구도 모르게 천뢰번을 훔쳐, 다시 수계에 천뢰번을 봉인할 예정입니다."

"…!"

내 말에, 연위의 안색이 밝아졌다.

"좋군! 바로 그거다! 하하하, 문파에 흉물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으로 가는 게 맞겠지! 그 년도 마땅히 봉인되는 것이 옳다!"

"흐음?"

나는 천뢰번에 대해 굉장히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그녀를 보며 물었다.

"천뢰번에 대해 잘 아시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잘 알지. 나 때만 해도 매해, 천뢰번에 담긴 의식을 초혼(招魂)하여 천뢰번의 음성을 문파에 전하는 의식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참 말을 예쁘게 하는 녀석이었다. 정말, 초혼되자마자 한숨도 쉬지 않고 금신천뢰문과 시조님에 대한 악담과 저주를 미친 듯이 퍼부어 대는 미친 것…. 그게 천뢰번일진대, 어찌 흉물이라고 안 부르겠느냐? 그리고 어찌 그런 것을 신물이라며 감히 봉양하겠느냐?"

"…그런 일이 있었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언젠가 천뢰번을 훔쳐 수계에 봉인하는 것이 제 목적입니다. 만약 차후에 선배님께서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뭐… 돕고 싶어도 지금은 연진의 몸에 빌붙어서 목숨만 겨우겨우 부지하는 중인지라 힘들 것 같구나."

"직접 도와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내게 필요한 건 다른 것.

"수계에 봉인해야 하는 참이니, '수계'로 내려갈 수 있는 법을 알려 주십시오."

어떻게 해야 정확히 우리가 비승한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별일 아니란 듯이 말했다.

"우리가 비승했던 그 세계로 가는 건 쉽다. 네가 천인기에 오르기만 하면 되지."

"예?"

"천인기에 이르면 바로 알 수 있을 게다. 어떻게 가야 하는지. 뭐, 천인기 이전에 가고 싶다면 다른 방법이 필요하긴 하다만…. 수계와 이곳에서 너와 같은 행동을 하는 존재… 혹은 너와 같은 의지를 가진 존재가 동시에 같은 것을 시도하고 있다면, 서로 간의 동질성에 의해 서로가 이끌려서 만나게 된다."

"그러니까, 운명의 인력이 있다면 다시 수계로 내려갈 수 있단 겁니까?"

"맞아. 그런 류의 운명의 인력이 있다면 굳이 천인기가 아니어도 아무 공령지, 비선대로만 진입해도 수계로 내려갈 수 있겠지."

"…흐음, 참고하겠습니다."

'하루빨리 천인기에 올라야겠어.'

나는 마음을 다지며, 마지막으로 가장 궁금했던 걸 궁금했다.

"혹, 4만 년 전에 금신천뢰문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말씀해 주실 수…."

"없다."

"…?"

이렇게 단호하게 거부할 줄은 몰랐기에 나는 흠칫 놀랐다.

그러나 나는 연위의 의념이 미친 듯이 격동하고 있는 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그녀에게 물으면 안 되는 역린인가 보군.'

그에 대한 건 천천히 알아보자.

"뭐, 그러시다면 일단 오늘로써 궁금한 것은 대강 알았습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흠… 정말로 나와 진이를 금벽호에게 넘기진 않겠지?"

"원영에 대고 맹세하지 않았습니까?"

수도자가 자신의 원영에 대고 한 맹세는 상당한 강제력을 지니기에, 수사들이 서로 약속할 때에 간혹 쓰고는 하는 방식이었다.

"원영에 대고 맹세해도 그걸 어기는 기상천외한 놈들을 살아오면서 심심찮게 봐 와서 말이지."

"어찌 후학이 선학께 맹세한 것을 어기겠습니까."

"큭큭… 나는 엄밀히 말하면 선학이 아니다. 시조령으로 폐해진 제자이니. 솔직히 네가 당장 나를 잡아다 금벽호에게 넘겨도 내규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렇군요…."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나, 그리되면 선배님의 후손인 연진은 괜스레 연좌제로 끌려가지 않겠습니까? 단순히 선배님을 위한 게 아닌, 신입 제자 연진을 위해서이기도 하다고 치지요."

"…고맙다."

연위는 내 말에 내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런 후, 그녀는 나와의 대화가 끝났다 생각한 것인지 연진의 의식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얼마 후, 연진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자신의 몸을 되찾았다.

"핫! 장로님, 혹시 저희 선조님이랑 대화를 하신 건가요?"

"그래. 네 안전은 내가 보장해 줄 테니 금벽호에게 들킬 걱정은 안 해도 된다."

"…! 감사합니다, 장로님!"

나는 감사 인사를 올리는 연진을 보며 축객령을 내렸다.

연진은 내게 인사를 한 후, 천천히 내 동부를 빠져나갔다.

'천인기, 천인기에 올라야 한다.'

천인기에 오른다면, 금벽호가 천뢰번을 들고 있어도 해볼 만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천뢰번을 들고 당당히 수계로 내려가서 천뢰번을 봉인할 수 있다.

'문파에 파문당하는 게 멸신겁천의 대성 조건이라고?'

나는 문득, 일전 허곽이 내게 준 육극음뢰신의 공법 구결이 적힌 두개골로 시선이 갔다.

'…흑색귀골곡.'

인간은 무엇인가 (5)

전명훈은 눈을 뜨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전에는 안 보였던 것이 보였다.

자신에게 남은 수명, 천기라고 하는 대략적인 것들….

'저게 천기….'

금진찬은 앞으로 수행을 쌓아 갈수록 저 천기와 운명이란 것이 더더욱 또렷하게 보일 것이라고 하였다.

'이게 연기기 7성인가.'

그는 희망으로 가슴이 잔뜩 부풀어 올라 있었다.

10년을 걸쳐 칠성제만 지내다가, 비로소 연기기 7성에 도달했다.

이제부터 쌍수 상대를 얻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요, 앞으로 있을 수련은 이런 식으로 제의를 지내는 수련은 결단기 승급 전까지는 없다고 했다.

'이제부터는 탄탄대로나 다름없다!'

희망에 부풀어 있는 전명훈의 앞으로 거대한 지네가 지나쳤다.

"아, 홍범!"

홍범이었다.

그러나 홍범은 전명훈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여 준 후, 어딘가로 날아갈 뿐이었다.

"흠, 바쁜가?"

어쩐지 바빠 보이는 홍범의 모습에 전명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얼마 후.

"히야아아아아악! 사, 살려 주세요, 전 맛이 없어요!"

홍범이 축기기 녹뢰 제자로 보이는, 반백반흑의 머리를 가진 소녀를 물고 어딘가로 다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아니, 잠깐. 남자인가.'

전명훈은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는 연진을 보며 남자인지 여자인지 순간 헷갈렸다.

'재밌는 녀석이군.'

전명훈은 홍범의 외모만 보고 비명을 지르는 연진이 재밌다고 생각하며 혀를 찼다.

"뭐, 홍범은 바쁜 것 같으니… 나중에 만나는 것도 좋겠지."

그가 뒤로 돌았을 때였다.

"전명훈."

"음?"

금소해가 비둔술로 날아와 전명훈을 불렀다.

"이제 네 쌍수 상대가 정해질 거야."

"아, 그런가."

전명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금소해는 전명훈의 태도를 보고 조금 의아해졌다.

'예전에는 얼굴에 쌍수를 원한다고 써 놓고 다니던 녀석이, 왜 저렇게 담담하지?'

그리고 그 답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소해, 혹시… 네가 내 쌍수가 돼 줄 수 없어?"

"음?"

금소해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전명훈은 남동생 정도로만 생각해 왔고, 이성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그녀로서는 조금 당황스러운 제안이었다.

그러나 전명훈의 표정은 진지했다.

"지난 10년간, 솔직히 모두가 나를 따돌리는 줄 알았어. 그동안 나한테 말을 걸어 준 건 홍범하고 너, 그리고 몇몇 정도였고."

그의 말이 이어졌다.

"솔직히 10년간 조금 힘들긴 했고, 아마 네가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지도 모르겠어."

"그게 나랑 쌍수가 되고 싶은 이유야?"

"그게 끝은 아니야."

전명훈의 눈빛에 진중함이 깃들었다.

금소해는 눈을 빛냈다.

'조금… 사람이 바뀌었네.'

"지난 10년간, 내가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 동안 문파의 모든 사람이 나를 위해 일을 해 주고 있었다는 걸 또 깨달았어. 그러니까… 문파가 가족 같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아. 아마 쌍수 상대와 도려를 맺으면 정말로 더 가족 같아지겠지. 하지만 소해, 나는…."

전명훈은 조심스럽게 그의 진심을 말했다.

"이왕 진짜로 이곳의 가족이 된다면, 너를 통해 진짜 가족이 되고 싶다."

"흐음…."

금소해는 전명훈을 바라보았다.

10년간 겪었던 고통과 울분 때문일까.

그리고 그 울분이 한 번에 씻겨 나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일까.

묘하게 달라진 모습이 그녀의 흥미를 끌었다.

'사람이, 바뀐 건가.'

어쩐지, 금소해는 의문이 들었다.

'만약 사람이 바뀔 수 있다면, 전명훈은 어디까지 바뀔 수 있을까.'

예절조차도 배우지 않아, 첫날부터 문파의 어른들에게 헛소리를 하다가 얻어맞고, 그녀에게 예절을 교육받았던 천방지축 전명훈이었다.

그런 그가 저렇게 진중해지다니, 사람 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궁금했다.

전명훈이 바뀐다면, 어디까지 바뀔 수 있을지.

"흠…."

결국 고민하던 금소해는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러면 쌍수는 맺어 줄게."

"…!"

"대신, 도려는 아니야. 도려는, 네가 정말 괜찮아졌다 싶을 때, 그때 맺기로 할게."

"…기회를 줘서 고마워."

전명훈은 금소해를 마주 보며 웃었다.

그날, 전명훈은 금소해와 맺어질 수 있었다.

금벽호는 어쩐지 마뜩잖은 듯했으나, 어쨌든 금소해의 의견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한 달이 지났다.

* * *

"후우우…."

전명훈은 자신의 동부에서 숨을 들이쉬었다.

우우우웅!

전명훈의 단전 어림에서 새하얀 빛이 빛났다.

연기기 13성, 일원일응의 단계.

그리고 마지막!

쿠우웅!

전명훈의 단전에 맺힌 영기 덩어리가 폭발하며, 전명훈은 연기기 14성, 무극영운의 단계에 도달하였다.

쿠릉, 쿠르르릉!

은은한 뇌운(雷雲)을 주위에 두르며, 전명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연기기 극성이다."

금소해와 쌍수를 시작한 덕일까.

그도 아니면 나머지 구간에서는 억지스럽게 전명훈을 막아 내는 억지력이 없기 때문일까.

전명훈은 한 달 만에 연기기 7성에서 14성까지를 천상금뢰지체의 선통후각으로 빠르게 뚫어버렸다.

아예 수도구결의 용어를 몰라서 허둥거리던 10년 전과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흐음, 전명훈? 드디어 도달한 거야?"

전명훈의 동부 밖.

금소해가 걸어 들어오며 물었다.

전명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그래, 이제 축기기도 들어설 수 있어!"

"어머, 그럼 축기기도 들어갈 거야?"

"아니, 축기기는 내일 들어가도록 해야겠어. 오늘은 14성을 뚫느라 조금 피곤해서…."

"그래, 그래. 수고했어."

금소해는 자연스럽게 전명훈을 넘어뜨렸다.

"그런데, 내 수련도 안 도와줄 거야?"

"당연히 도와줘야지."

얼마간 두 사람은 쌍수를 시작했고, 몇 시진 후 전명훈은 조금 퀭해진 얼굴로 동부에서 나왔다.

"축기기에 이르면 조금 나아지려나… 젠장."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일이면, 그도 축기기에 들 터였다.

실패하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전명훈은 서은현을 떠올렸다.

'기다려라, 서은현. 곧 따라잡아 주마!'

경쟁심을 불태운 전명훈은 이내 금신천뢰문 곳곳을 돌아다니며, 지난 10년간 자신을 돌봐 준 친구들을 찾아다녔다.

아마 축기기에 이르게 되면, 금소해와 홍범 정도를 제외하면 더 이상 전명훈과 그들은 단순한 친구 관계로 남을 수는 없을 터였다.

전명훈은 그랬기에 마지막으로 그들을 찾아가 담소를 나누었다.

10년간 그들뿐이 아닌, 문파 전체가 그를 위해 나서 줬다는 것이야 알고 있었으나, 어쨌든 심정적으로 고마운 친구들이었다.

전명훈은 10년간 그의 옆에 있어 줬던 이들을 둘러보고 동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음? 홍범!"

전명훈은 저 멀리서 금신천뢰문의 봉우리 사이를 유영하는 홍범을 보며 소리쳤다.

홍범의 시선이 전명훈에게 향했다.

[아, 잘 지내셨습니까? 벌써 축기기에 이르려 하시다니, 역시 명훈 님의 자질은 저따위보다 훨씬 위대하십니다.]

"됐다, 띄워 줄 거 없어. 네 자질도 어마어마하니까. 그나저나 말이다."

전명훈은 홍범에게 말했다.

"네 주인이라는 장로분, 축기기에 든 후에 한번 찾아뵙고 싶은데, 혹시 가능한가?"

[축기기에는 내일 들어가실 예정이십니까?]

"그렇다만?"

[하면 조금 기다려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내일이라면, 저희 주인님께서도 경지를 넘으시는 단계이시니 말입니다.]

"네 주인이신 장로분이 원영 초기셨던가? 그럼 이번에 원영 중기로 넘어가시는 것이겠군."

그러나 홍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희 주인님께서는 내일 원영 대원만으로 넘어가십니다.]

"으음? 아, 그렇군. 원영 후기셨나 보군."

[음….]

전명훈은 빠르게 납득하며, 동시에 홍범의 주인에 대하여 속으로 경외심을 품었다.

'내일 대원만에 이르시면, 천인기도 코앞이신 게 아닌가. 조금 있으면 원로 직도 꿈이 아니시겠어.'

"축기기에 이르고 나서, 그분이 원영 대원만에 이른 후 찾아뵈면 되겠지."

[예, 그렇게 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내일 찾아가마."

[예, 찾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전명훈은 홍범에게 약속을 잡은 후 동부로 돌아가며 생각했다.

'서은현 녀석이면 지금쯤 원영 초기 최고봉은 찍었으려나? 나도 더 빨리 속도를 내야겠어.'

그리고, 전명훈이 그의 동부로 갔을 때 그를 반겨 준 건 금소해였다.

"내일 축기기에 이르니까, 오늘 미리 기(氣)를 모아 두자."

"잠깐, 소해. 그런 것보다 난 피로를 풀어야 할 거 같은…."

"조용히 해. 빨리 들어와!"

전명훈은 안색이 창백해져서 그녀에게 잡혀 동부 안쪽으로 끌려 들어갔다.

* * *

다음 날이 되었다.

쿠구구구구구!

전명훈은 가부좌를 틀고, 동부 위쪽 봉우리 위에서 주변으로 몰아치는 적뢰공의 뇌운을 빨아들였다.

후우우우우―

뇌운이 그의 주변으로 회전하며, 그의 몸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그와 동시에, 전명훈의 단전 중심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진정한 영성(靈星)!

축기 1수, 각(角)의 단계였다.

'이제, 축기에…!'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전명훈은 하늘에서도 뇌운이 몰아치는 것을 보았다.

'저건…?'

그리고, 푸른 낙뢰가 전명훈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콰르르릉!

빛의 기둥이 전명훈에게 내리꽂혔다.

하지만 전명훈은 빛의 기둥 안에서 웃었다.

'천겁인가?'

콰지지지직!

천겁에게조차 사랑받는 자질, 천상금뢰지체.

전명훈의 몸 안쪽으로, 청뢰가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전명훈은 그제야 [어떻게] 자신의 천상금뢰지체의 재능을 끌어올릴 수 있는지를 알았다.

'그렇군, 굳이 법력화해서 수행을 늘리지 않아도, 천겁은 내 체내에 저장해 놓았다가 필요할 때 바로 방출해서 유사시 공격용으로도 쓰는 게 가능하다…!'

전명훈에게 천겁은 단약이자, 동시에 법보였다.

그는 청뢰를 자신의 몸 속 깊은 곳에 갈무리했다.

이 청뢰는 유사시 전명훈을 보호해 줄 무기가 될 터였다.

쿠구구구구!

그와 동시에, 전명훈은 그의 전신에 미세하나마 정순지력이 흐르는 것을 확인했다.

"후우…."

이제 그는 삼단전 중 하나가 완전히 파괴되지 않는 이상, 결코 쉽게 죽지 않을 터였다.

혈맥 안에 노도처럼 흐르는 생명력을 느끼며, 전명훈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됐다! 드디어 소해에게 지지 않을 수 있어!'

물론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으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홍범의 주인분께서 경지 상승을 마치면 찾아가 볼…."

그리고.

쿠르르르릉!!!

전명훈은 황급히, 어마어마한 천겁의 기운이 몰아치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 저건…!"

말 그대로, 그것은 천겁의 폭격이었다.

전명훈이 맞은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뇌겁의 비가, 저 멀리서 뇌운 아래로 내리치고 있었다.

* * *

쿠릉, 쿠르르릉!

원영 후기, 여오악지수(如五岳之壽)는 오행(五行)을 하나로 엮어야 한다.

이 단계부터는 천영근자라 할지라도 체내에 다른 속성의 법보를 받아들여 오행을 다루는 게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오행지력을 받아들여 혼탁한 기운을 쌓아 생명력과 이어 요력으로 전환하는 요족의 경우, 일반적인 천족 수도자보다 여오악지수의 단계에 오르기 쉬운가?

아니었다.

오히려 요족 수도자의 경우, 기운이 혼탁하기 때문에 오행을 완벽하게 분할해야 원영 후기에 이를 수 있었다.

천족 수도자가 원영 후기에 이르는 경우는 천영근자인 경우가 절대 다수였으니, 오행법보를 갖추고 연화하는 데에 시간이 걸린다면, 지족 수도자는 이미 가지고 있는 오행을 분할하는 데에 시간을 쓰는 것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천족 수도자 중에서 오영근을 가지고 태어난 이가, 오행 속성의 천족 공법을 익혀 원영 중기에 도달하면 그것은 어찌 되는가?

쿠구구구구구―

나는 체내에서 회전하는 오행의 힘을 보며 미소지었다.

'역시….'

연기기 시절, 축기기에 이르기 위해 오행을 전부 익혀 경지를 뚫기를 염원하였다.

그리고, 나는 연기기 기초공법서인 오월입도경을 모조리 익혀 축기경을 뚫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우우우웅!

나는 체내에 있는 오월입도경의 법력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오행의 변화를 갖추는 것을 관조하였다.

오월입도경을 기반으로, 요수공법화된 창령성광오채대법의 오행장원전이 오행으로 분할된다.

오행의 비율은 오기조원으로 맞춘 균형이 완벽하게 잡아 준다.

그리고 어느 순간.

꽈아앙!

음양신으로 나뉜 원영의 주변으로 오행이 회전하다가, 마침내 원영의 안쪽으로 회전하는 오행의 기운이 흘러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나는 하늘에서 꿈틀거리는 기운을 느꼈다.

'원영 후기 천겁인가.'

자, 와라.

이제 네놈 따위는 두렵지 않다!

결단기에서 원영기로 갈 때는 금색 천뢰 한 줄기가.

원영 초기에서 중기로 갈 때는 금색 천뢰 두 줄기가.

중기에서 후기로 갈 때는 금색 천뢰 세 줄기가 내리친다.

물론 나는 거기에 푸른 벼락도 하나씩 더 추가되니, 총 여섯 줄기의 천뢰를 맞아야 했다.

콰르르릉!

쌍색의 천뢰가 나를 때렸다.

하지만 지족과 천족의 방식으로 동시에 경지에 오르는 내게는, 이 정도 천겁이야 충분히 견딜만 했다.

쌍색의 천뢰가 나를 때리기를 세 번.

쿠구구구!

나는 마침내, 원영 중기를 탈피하여 원영 후기.

여오악지수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후우…."

하지만, 끝이 아니다.

'바로 대원만에 도달한다.'

나는 눈을 감고, 원영을 상단전으로 올려 백회를 통해 바깥으로 내보냈다.

내 원영의 모습은 음양신이 미간의 중심축을 기준으로 나뉘고, 체내에는 오행(五行)이 오방(五方)으로 표시되어 자리를 잡은 양태였다.

그 모습은 기이한 상서로움이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어딘가 작위적이고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저 부자연스러움을, 자연스럽게 만든다.

"우상월음도(右上月陰圖)."

나는 가부좌를 튼 상태에서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원영에서 음신이 분리되어 내 뒤쪽 오른편에 뭉쳐 달이 되었다.

"좌상일양도(左上日陽圖)."

나는 오른손을 내리고, 왼손을 들어 올렸다.

양신이 분리되어 내 뒤쪽 왼편에 뭉쳐 해가 되었다.

나는 음양의 일월에서 먼 옛날의 그리움을 느꼈다.

어머니… 아버지….

엄마, 아빠….

음양은 존재의 근원이다.

결코 잊지 않으리.

"제좌오악도(帝座五岳圖)."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오행오방의 도식이 다섯 개의 빛무리로 변해, 내 뒤쪽에 다섯 개의 오악(五岳)을 형성했다.

오악은 제좌(帝座)가 되어 주인이 앉을 자리를 마련하였다.

그렇게, 내 뒤편에는 완벽한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가 자리를 잡았다.

창령성광오채대법이 일월오악도의 완벽한 균형을 잡았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여기까지는 원영 후기에 도달한 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원영 대원만에 이르는 건 지금부터다.

내 등 뒤에 펼쳐 놓은 일월오악도는, 내 원영을 풀어헤쳐 놓은 상태.

저 원영을 유지한 상태에서, 내 정신을 다시 한번 분리한다.

우우웅!

나는 정신을 풀어헤쳤다.

이 과정은 기묘성심전이 도움을 주었다.

내 정신은 완전히 사방으로 흩어져 몽롱하게 주변을 침잠했다.

이제 이 상태에서 하나의 표상에 의지해 의식을 내 앞에 집결시켜야 한다.

이 과정은 무형검이 도움을 주었다.

나는 검(劍)이 되어 의식을 합일하였다.

잠시 몽롱해졌던 의식을 차리니, 나는 어느새 '나'와 '일월오악도'를 앞에 두고 있었다.

나는 검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서은현이었다.

저벅.

한 걸음을 딛자, 나는 점차 검에서 인간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저벅.

두 걸음을 딛자, 나는 음양이 이지러지는 풍경과 함께 거의 인간의 형태로 돌아왔다.

세 걸음을 딛자, 나는 무수한 법칙과 세상의 흐름이 휘몰아치는 광경을 보며, 인간의 형태로 돌아온 내 몸에 은은한 빛살이 맴도는 것을 보았다.

네 걸음을 딛자, 나는 28개에 달하는 무수한 별자리들이 주변에서 휘몰아치는 것을 보았다.

다섯 걸음을 딛자, 나는 별들이 뭉치며 백성들의 시전, 관리들의 궁전, 왕의 어전과도 같은 형태로 장엄한 광경을 드러내는 것을 보았다.

이내 별들은 완연한 성천도를 드러내며 무량한 우주를 그려 내었다.

그리고 나는 우주의 끝에서, 어느새 내 몸이 별빛을 받아 성대히 빛나는 것을 보았다.

저 멀리, 내 육(肉)과 그 뒤쪽에 있는 일월오악도가 보였다.

이제 일월오악도의 제좌에 앉기만 하면 된다.

저벅, 저벅, 저벅….

나는 계속해서 제좌를 향해 걸어갔다.

아무리 걸어가도 제좌는 가까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미친 듯이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제좌는 가까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의 별들은 점차 뒤쪽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 보아서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점차 별들이 나를 스쳐 지나가는 속도가 빨라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츠츠츠츠츳!

별들은 기억이 되었다.

마치 원영기에 처음 올랐던 그때처럼, 나는 삶을 역순으로 되짚어 가며 기억의 바다를 건너갔다.

기억을 되짚어 볼수록 점차 일월오악도가 가까워지기 시작하였다.

2천5백 년 어치의 기억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16회차의 5백 년을 엿보려 했으나, 어째서인지 16회차의 기억은 전부 까맣게 덧칠되어 있어 볼 수가 없었다.

언젠가, 다시 저 기억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익숙한 광경에 이르렀다.

어머니 아버지가 나를 낳는 그 광경.

이전과 똑같다.

하지만 나는 그 광경에서 무언가 다른 것을 보았다.

어머니 아버지의 형상이 점차 거대해진다.

그리고, 두 분의 형상은 거대해지고 거대해지다 못해, 하나의 '개념'으로 화하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하늘과 땅이었다.

'아아, 그렇구나….'

나는 어째서 기(氣)가, 생명(生命)이 태극(太極)의 형상을 취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나는 단순히 부모님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부모님은 천지(天地)의 개념이라 하였다.

화과산에 사는 돌원숭이는 낳은 자가 없었지만 스스로의 어버이를 하늘과 땅이라 칭하였다.

모든 생명의 어버이는 결국 천지로 대표되는 세계(世界) 그 자체이기에, 생명은 곧 음양이자 태극.

나는 그 개념을 이해하며, 마침내 일월오악도에 도달하였다.

일월오악도는 그 자체로 완성된 것이 아니다.

제좌의 주인이 자리에 앉아야지만 일월오악도가 완성되는 것.

일월오악도는 곧 원영(元靈)이었다.

그렇다면 원영의 주인은 누구인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그 자리에 앉으며 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삶이다.

서은현의 삶 그 자체를 영성으로 형상화한 것이, 지금의 '나'였다.

내가 제좌에 앉음과 동시에, 일월오악도는 완성되었고, 풀어헤쳐졌던 원영은 다시 본래의 형상으로 돌아가, 그렇게 '완성'되었다.

* * *

우우웅―

원영이 육신의 백회를 통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천겁이 날뛴다.

쿠르르르릉―

이번에 맞아야 할 천뢰는 총 여덟 줄기.

쌍색의 천뢰 네 차례였다.

꽈앙!

첫 번째 쌍색 뇌겁에 눈을 떴다.

꽈앙!

두 번째 쌍색 뇌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꽈앙!

세 번째 쌍색 뇌겁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뇌겁은 나를 해치지 못한다.

진정한 원영신(元靈神)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천겁.

번쩍!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완성된 원영에서부터 비롯된 막대한 '힘'이 손에서부터 뿜어져 나와 천겁을 밀어 올렸다.

쩌어엉!

무형검이 아니었다.

그저, 순수한 힘 그 자체.

손에서 뿜어져 나간 힘은 그대로 천겁을 갈라 올리며 하늘로 뿜어져 나가 천겁을 내리는 먹구름에 손바닥 형상의 구멍을 뚫어 버리고 천공을 사른다!

쿠구구구!

"드디어…."

2천5백 년의 세월을 걸쳐.

나는 마침내, 천인기를 코앞에 두는 데에 성공하였다.

인간은 무엇인가 (6)

나는 원영기 대원만에 오른 후, 경지를 안정시키기 위해 자리에 앉아 체내를 관조했다.

얼마 후, 수많은 둔광들이 내 동부 방향으로 빠르게 쏟아져 왔다.

금신천뢰문의 원로들, 그리고 장로들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금벽호가 있었다.

"이, 이게 무슨…."

금벽호의 눈에는 당혹스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현재 경지에서 드러나는 압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중이었고, 그 영압으로 인해 모두가 내가 원영기 대원만에 달한 것을 눈치챘다.

내가 원영기 대원만에 오른 것을 알자, 다대수의 원로와 장로진들의 눈알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

"…."

"…."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모두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든 것과는 별개로, 주변은 굉장히 조용하고 차분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너무나' 소란스러운 의념들 덕택에 잠시 머리가 멍할 정도였다.

말 그대로, 현재 장로, 원로진과 금벽호의 의념은 '미쳐 날뛰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으하아아아아아!!"

천인기 원로 중 한 명이, 갑작스레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시조시여어어어!!!"

그 원로를 시작으로, 대다수의 원로진과 장로진들은 격정에 찬 얼굴로, 하나둘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감정은 전염되는 것일까.

심지어 그 금벽호마저 눈시울이 조금 붉어지는 것이 보였다.

"네, 네가… 네가…."

저벅, 저벅….

그는 내 앞에 떠 있지 않고 내려앉았다.

금벽호는 내게 다가와 내 어깨를 잡고 얼굴을 푹 숙였다.

"네가… 종문의 미래구나."

슬픔의 눈물이 아닌, 기쁨을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어서 터져 나오는 격정의 눈물.

그것이, 금신천뢰문 지도부 전체에게서 터져 나오는 중이었다.

"모두 들어라!"

금벽호가 큰소리로 외쳤다.

"여기 서은현은, 금신천뢰문 1만여 개에 달하는 모든 공법을 전부 익히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어떠한 이유로 인해 뇌도공법을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보았다시피, 여기 서은현은 현재 천재적인 재능으로 인해 그조차 극복해 내고 단기간에 원영기 대원만에 이르렀다! 모두 들어라!"

금벽호가 큰소리로 외쳤다.

"나 금벽호는 태상장문의 권위로 차차기 장문인에, 서은현 장로를 추천한다!"

"…!"

그리고, 갑작스레 외친 금벽호에 말에, 원로진 일동들 역시 하나둘 외치기 시작했다.

"현 장문인 금민은 역시 서은현 장로를 추천한다!"

"나 부문주 진휘 역시 추천한다!"

"나 원로 금진찬 역시 이하동문!"

"나…."

무수한 원로진들이 나를 동시에 추천했고, 장로진들이 이에 동의했다.

그리고, 만장일치로 내가 차차기 장문인에 임명되었다.

"앞으로 현 장문인 금민이 사임하면, 차기 장문인 금진찬이 물려받아, 차후에 차차기 장문인 서은현에게 장문인령을 맡긴다! 그리고! 오늘부로 장문인의 자격을 지닌 차차기 장문인 서은현 장로에게!"

우우웅!

금벽호가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사축기 수사인 그의 손이 공간을 넘어, 금신천뢰문 안쪽의 어딘가와 이어졌고, 그가 금색 혁대를 꺼냈다.

금뢰(金雷)라는 글자가 적힌 금색 혁대였다.

"장문인의 자격을 상징하는 금(金) 씨의 성을 하사한다!"

금벽호는 자랑스럽다는 얼굴로 내게 금색 혁대를 건네며 말했다.

"받아라, 너는 이제부터 금은현이다!"

그렇게, 나는 혁대를 받아 듦으로써 금신천뢰문의 차차기 장문인 금은현이 되었다.

* * *

금신천뢰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은 천재, '금은현'의 탄생은 이내 전 문파와 전 천공도로 퍼져 나갔다.

금벽호는 금은현의 차차기 장문인위 확정을 위해 한 달 뒤 축하연을 열기로 했으며, 각 천공도의 다른 인족 문파들에도 초청장을 보냈다.

많은 이들이 초청에 응했다.

그리고, 그 초청에는 심지어 합체기 태수들까지 분체를 파견한다고 되어 있었다.

많은 이들이 경탄했고, 금은현을 우러러보았다.

전명훈을 제외하고.

"…."

[왜 그러십니까, 명훈 님?]

전명훈은 자신의 앞에서 장죽을 물고 피우는 거대 지네, 홍범을 보며 말이 없었다.

[주인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 그래. 그랬지."

전명훈은 멍청한 얼굴로 홍범의 뒤쪽에 있는 동부를 바라보았다.

그 동부는 전명훈에게도 익숙한 동부였다.

들어가 본 적은 없다만, 그가 10년 내내 의식하고 있었던 이의 것이었으니까.

홍범에게 말해 그의 주인을 만나러 가겠다 했을 때, 홍범은 선뜻 전명훈을 태우고 한 동부로 향했고, 전명훈은 기대감에 두근거렸다.

수많은 천겁이 내리치던 곳, 그곳으로 종문 전체의 원로진들과 장로진들이 날아가던 그 모습은 잊을 수가 없었다.

전명훈은 그렇게 유망한 장로의 눈에 띄어 10년간 홍범을 통해 도움을 받은 것이었다.

아마, 앞으로 저 장로.

아니, 이제 곧 '원로'에 이를 그와 함께 전명훈은 문파를 이끌어 나갈 터였다.

그러나, 홍범이 그를 데리고 온 곳은 서은현의 동부였다.

처음에는 머리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아 잠시 머뭇거렸다.

다음은 부정이었다.

그냥 막 원영기 대원만에 달한 장로가 서은현의 동부에 들렀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홍범이 그에게 확인 사살을 해 주었다.

―제 주인이신, 서은현 님의 거처입니다.

그것이 바로 방금 전까지의 상황이었다.

'서은현이, 벌써 원영기 대원만?'

전명훈은 축기기에 아슬아슬하게 도달했을 때, 서은현은 벌써 원영기 대원만이었다.

그는 어처구니가 없어 한참을 동부 앞에 서 있었다.

축기기에 도달했다고 기뻐한 자기 자신이 굉장히 하찮게 느껴졌다.

'내가 축기기에 도달할 동안, 서은현은 벌써 천인기를 눈앞에 두고 있던 건가…. 내가 지닌 천상금뢰지체가 뇌성체보다 좋은 자질이 아니었던 건가…?'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동부 안쪽을 넘어, 동부 바깥, 봉우리 전체를 감싼 거대한 의식 영역의 주인이, 서은현이 아니라 믿고 싶었다.

뿌득….

하지만, 현실이었다.

그리고 전명훈은 이를 악물고, 동부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저벅, 저벅….

전명훈의 발걸음은 무거웠으나, 결코 멈추지 않았다.

원래의 전명훈.

이 세계의 전명훈이었다면, 그는 이런 상황에서 절대 안으로 들어서지 않을 것이었다.

그저 현실 부정을 하거나, 현실과 타협해서 '숨겨진 재능이 있었거니, 운수가 좋았겠거니' 하며 넘겼을 뿐.

절대로 상대를 만나러 가지 않았을 것이었다.

절대로 상대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을 터였다.

원래라면.

하지만, 전명훈은 마침내 동부 안쪽에서 가부좌를 틀고 경지를 안정시키는 서은현의 앞에 섰다.

"…같은 문파 안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꽤 오랜만에 보는군."

"…."

전명훈은 서은현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은현은 한쪽 손을 까딱였다.

그의 손짓에 서은현의 옆으로 저물도가 펼쳐지며, 안쪽에서 작은 방석 하나가 나와 전명훈의 앞에 내려앉았다.

곧이어 저물도 안에서 찻잔과 찻주전자 등 다기들이 주르륵 나왔다.

"앉지."

전명훈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서은현이 손을 까딱이자, 허공에서 찻주전자가 움직이고, 찻잎들이 움직여 찻주전자 안으로 들어갔다.

물방울이 응결되며 찻주전자 안으로 들어가 끓기 시작했고, 얼마 후 서은현은 영차를 내려 전명훈의 앞에 부었다.

"운지장차(運之掌茶)라는 차다. 향만 맡아도 법력 증진이 원활해지며, 결단기 이하는 사흘 동안 수행 속도가 세 배 증대하고, 축기기라면 한 달간 수행 속도가 증대한다고 하지. 축기 초기에 든 네게 유용할 거다."

전명훈은 찻잔을 잠시 들고, 눈을 꾹 감은 채 차를 마셨다.

향을 맡거나, 즐기는 기색 없이 마치 독한 술을 들이켜듯 뜨거운 차를 한 번에 들이킨 전명훈이 입을 열었다.

"…귀한… 차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서 장로님."

"…흐음."

그리고, 전명훈의 존댓말에 오히려 서은현이 놀란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무슨 심정이지?"

전명훈은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느릿느릿하게, 그러나 서은현의 눈을 또렷이 마주 보며 말했다.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나를? 네가?"

"아닙니다."

그는 주먹을 쥔 채로 말했다.

"제가 그동안 게으르게 수행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흐음…?"

"분명 같은 세계에서 왔고, 같은 동료였고, 같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서 장로… 님… 은 벌써 그 경지에 있고, 오히려 신화적인 자질을 지녔단 소리를 듣는 저는 아직도 고작해야 축기기입니다. 언젠가, 제 쌍수 상대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진정 수도에 뜻을 둔 수선자들은 잠도 자지 않고, 밥 먹을 시간도 빼고서 끝없이 수련에 매진한다고요. 그때는 그게 인간 같은 삶이 아니라 생각해서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전명훈은 서은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보니, 제가 당신보다… 게을러터졌던 것 같습니다.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

"앞으로, 당신을 뛰어넘기 위해 끝없이 수련에 매진하겠습니다. 당신의 경지를 뛰어넘은 다음에야, 당신의 직책을 뛰어넘은 다음에야 다시 예전처럼 평대하겠습니다."

서은현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놀랍군. 네가 이렇게 변할 수 있는 게…."

"…그동안 홍범을 통해 가르침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흐음… 그래."

서은현의 말에 전명훈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서은현의 동부를 나섰다.

전명훈은 서은현의 동부를 나와, 서은현의 의식 영역을 완전히 나와, 그제야 한숨을 쉬었다.

"…휴우."

그의 등에는 식은땀이 잔뜩 나 있었다.

분명 그는 서은현을 인정했다.

10년 전과는 달랐다.

하지만 서은현을 인정했던 만큼, 전명훈은 자신이 서은현을 괴롭혔던 짓들을 떠올렸다.

'다행히… 별로 신경은 안 쓰는 것 같았는데….'

서은현이 그 자신에 대한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자, 전명훈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몇 대쯤은 얻어맞을 줄 알았다만….'

전명훈 자신도 얻어맞을 각오를 한 채 서은현에게 호기롭게 소리친 것이었다.

하지만 서은현은 시종일관 투명한 눈으로 그를 지켜만 볼 뿐, 별말을 하지 않았다.

'예전 녀석이라면 웃음을 참지 못했을 상황인데… 정말로 아무 감정이 없는 것 같이 보였다.'

전명훈은 서은현의 눈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 녀석… 뭔가 예전하고 많이 바뀐 것 같은데. 내가 10년간 변한 것처럼 녀석도 많이 변한 건가?'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됐다, 이제 놈에 대한 건 신경 꺼야지."

10년간 서은현과 계속 비교당해 왔다.

그리고 마침내, 서은현은 원영기 대원만에 도달함으로써 원로를 눈앞에 두게 되었고, 전명훈은 아직도 기껏해야 막 상뢰 제자에 도달했을 뿐이었다.

'앞으로, 서은현을 신경 끄고, 내 자신의 길을 믿고 걸어가자.'

그는 더 이상 서은현에 대한 열등감을 갖지 않고, 그저 그를 향한 순수한 호승심만으로 서은현을 넘어서기로 했다.

그는 그렇게 마음을 다지며, 자신의 동부로 돌아가 수련에 매진했다.

그러니까, 한 이틀 정도는 그 마음에 흔들림이 없었다.

금벽호가 종문 전체에 '차차기 장문인 금은현'을 선포하기 전까진.

"젠장할!!! 차차기 장문인이라고!"

동부에서 퀭한 얼굴로 나온 전명훈은 얼굴을 시뻘겋게 붉혔다.

그의 스승 금진찬은 차기 장문인으로 유망한 921세의 젊은 원로였다.

그리고 금진찬은 전명훈에게 늘 귀에 딱지가 얹히도록 말해 왔다.

―너는 내 뒤를 이어 문파의 장문인이 되어야 한다! 정신 차려라, 지금은 비록 서은현보다 밑이지만, 천상금뢰지체의 모든 신화와 명예를 걸고 내가 너를 장문인으로 만들겠다!

심지어, 그가 칠성제를 지내는 데에 성공한 날에도.

―믿고 있었다. 앞으로는 쭉쭉 수행이 증진할 테니, 네가 진정 내 뒤를 이을 장문인이다!

전명훈은 은연중, 서은현이 장로에 이어 원로까지는 되더라도 장문인은 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천상금뢰지체를 가진 금신자 양수진은 금신천뢰문의 신(神)이었고, 전명훈은 그 신의 육체를 가지고 온 신자(神子)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전명훈은 자신이 금신천뢰문의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리라 굳게 믿었다.

'비록 지금은 서은현보다 밑에 있지만, 장문인은 나다!'

하지만, 이제는 장문인이 되더라도 서은현의 '다음 대' 장문인일 뿐이었다.

절대로, 금신천뢰문 안에서는 서은현을 넘을 수 없었다.

"제길!!! 빌어먹을! 서은현!"

이틀 전에 서은현을 순수한 호승심으로 넘겠다고 했던 다짐은 전명훈의 머릿속에서 바로 날아가 버렸다.

"반드시 뛰어넘는다! 반드시!"

빠직, 빠지지직!

전명훈이 축기기에 오른 후부터 익히기 시작한 적뢰공의 진화판이자, 칠뢰진경의 첫 구결인 '적뢰진경'이 전명훈의 열등감에 반응해서 더더욱 붉어진 번개를 내뿜었다.

한 달 후.

차차기 장문인 '금은현'을 위한 축하연이 열렸으며, 금은현을 축하해 주기 위하여 무수한 종문들이 사절을 보냈다.

이는 뇌령도에 있는 종문들뿐이 아닌, 인족 영역의 다른 천공도의 대표 종문과, 더불어 인족의 합체기 태수들 몇몇도 분체를 파견했다.

* * *

"받으시게, 차차기 장문인."

"아… 감사합니다."

나는 다른 천공도에서 축하를 해 주러 온 각 천공도의 대표 문파의 대표자들.

그리고, 창령도의 대표자인 '창호자'가 따라 주는 술을 받으며 감사를 표했다.

창호자는 껄껄 웃으며 내 등을 호탕하게 두들겼다.

"그때도 느꼈던 건데, 정말 납치라도 해서 우리 창천개벽문으로 데려왔어야 했어! 으하하! 어떠냐, 우리 창천개벽문으로 와볼 생각은 없나?"

"저도 창천개벽문에 가지 못해 아쉬울 따름입니다. 금신천뢰문에서 받은 은혜가 막중하니, 아무래도 그 제안은 힘들 듯합니다."

나는 싱긋 웃으며 창호자와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우리의 얘기를 듣던 금벽호가 창호자를 노려보며 외쳤다.

"갈(渴)!"

"그래, 한 잔 따라 주지."

창호자는 웃으며 금벽호에게도 술을 한 잔 따라 주었고, 창호자가 따라 준 술을 마신 금벽호가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차차기 장문인 금은현 장로는 본 종문의 보물이며, 그에 대한 욕심을 부리는 것은 나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겠네!"

콰르릉!

금벽호의 몸에서 칠색의 뇌전이 뿜어져 나와 창호자를 후려쳤다.

"흐하하, 이 인간 또 옛날 성격 나왔군."

퍽, 퍽!

창호자는 껄껄 웃으며 금벽호의 배를 몇 번 후려쳤고, 금벽호는 배를 부여잡고 몇 발짝 물러나더니 창호자에게 달려들어 그를 붙잡고 하늘로 올라갔다.

독한 영주(靈酒)를 마신 두 문파의 최고 어른들이 갑자기 술에 취해 비무를 벌이는 것이었다.

"또 저러시는군…."

"하하, 추태를 보여 죄송합니다. 하지만 창호자 님과 금벽호 님, 그리고 백골귀마 님께서는 젊은 시절부터 친분이 있으셨다 보니 저렇게 노시곤 합니다."

창천개벽문의 사절단은 내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내 잔에 창호자 대신 술을 따라 주었다.

"그렇구려, 한데 흑색귀골곡은 어째서 안 온 건지 알고 있소?"

나는 창천개벽문의 사절단 인원에게 의아한 듯이 물었다.

그는 의아한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흑색귀골곡은 내 축하연에 사절단을 보내지 않았다.

"음, 최근 흑색귀골곡이 있는 천공도의 정세가 조금 불안정하다는데…."

듣기론, 흑색귀골곡이 자리한 흑연도는 아직도 전쟁 중이라고 하였다.

흑색귀골곡이 기존 대표 종문을 밀어내는 데에 성공했으나, 기존 종문의 잔당들이 곳곳에서 성화를 부리고 있었기에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 흑색귀골곡의 섭명함을 운용하며 난동을 부린다는 것이었다.

들리는 말로는, 흑색귀골곡은 아예 섭명함을 한 대 더 제작하려 자원을 끌어모으고 있다는 소문도 들려 왔다.

"뭐, 그쪽은 아무래도 바쁘니 말이지요."

"그렇군요. 흑색귀골곡과도 나눌 얘기가 있었는데 안타깝습니다."

나는 살짝 아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힘을 빌릴 수 있을까 싶었는데….'

나는 창천개벽문의 사절단과 얘기를 하고, 또 다른 이들과도 계속 담소를 나누며 머리를 굴렸다.

무수한 천공도에서 사절단을 보내 준 것은 기회였다.

'천뢰번 봉인 계획을 원활하게 흐르게 할 기회다.'

그중에서도, '같은 수계'에서 올라온 수도자들과 안면을 트는 것이 중요했다.

나는 어차피 천벌의 주인이 강림하기 전에 천인기에 오를 자신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천뢰번을 수계에 봉인하기 위해 하계로 내려갈 방도가 없는 차였다.

하지만, 내가 천인기가 되어 내려갈 수 없다면 누군가 나를 데려다주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그 대상으론 같은 수계 출신 천인기 수도자들이 가장 적당했다.

내가 대상으로 삼은 상대는 아무래도 흑색귀골곡의 천인기 수도자였다.

이번에 흑색귀골곡에서 사절단을 파견해 천인기 원로와 대면한다면, 몰래 그에게 나와 협력해 달라고 한 후, 그 대가로 흑색귀골곡으로 이적한다고 하려 했었다.

'그런데 결국 흑색귀골곡에서 이번 축하연에 부재했으니 어쩔 수 없나.'

아무래도 대안을 찾아야 할 듯싶었다.

그리고 내가 사절들과 계속해서 안면을 트고 있을 때였다.

"이봐, 너!"

갑자기, 어딘가에서 빛무리가 날아들었다.

다음 순간.

꽈아아앙!

거대한 폭음이 울리며, 축하연이 열리는 금신천뢰문의 금뢰전 전체가 흔들렸다.

쿠구구구구!

"이 무슨 일이냐!!!"

허공에서 창호자와 대련을 하던 금벽호 역시 술이 깨서 내려왔다.

그러나, 그는 사건의 주동자를 보자 눈동자가 커졌다.

"다, 당신은…!"

쿠구구구!

나는 먼지구름이 걷히자 눈살을 찌푸렸다.

댕기 머리를 한 검은 무복 차림의 여인이, 내게 주먹을 뻗고 있었다.

툭, 툭….

나는 먼지를 털며 말했다.

"당신은…."

"좋구나! 이 헌위(巚危)의 공격을 막아 내다니!"

쿠구구구!

나는 일단 갑자기 나를 공격한 그녀의 경지를 가늠했다.

'천인기 중기… 미친 건가? 아무리 원영기 대원만이라 해도 천인기 중기씩이나 되어 아래 경지에게 그 정도 공격을 날린 건….'

사실상 죽으라고 공격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나는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금벽호 님은 왜 갑자기 안절부절못하시는 거지?'

금벽호는 자신을 헌위라고 칭한 여인이 나타나자 입술을 쥐어뜯으며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심지어 창호자 역시도 그녀를 제지해야 할지 말지 고민하는 느낌이었다.

'높으신 분의 딸인가?'

나는 그녀의 위치를 가늠했다.

"송구하오나, 인족 총연맹 본부에서는 딱히 사람을 보내지 않았는데 그쪽의 분이실 리는 없고, 혹 어떤 분의 자제이십니까?"

"하하하! 눈치는 빠르구나! 그래, 이 몸은 위대하신 인족 합체기 태수의 혈통을 타고난 몸이다!"

'태수의 딸이었군.'

나는 일단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귀하신 혈손께서 어찌 제게…."

"됐고!"

그러나 그녀는 내 말을 대뜸 끊었다.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나는 아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혼하자!"

인간은 무엇인가 (7)

'결혼?'

나는 갑작스레 내게 청혼을 하는 이 여자를 보며 당황했으나, 이내 뇌리가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어찌 보잘것없는 제게 청혼을 하십니까. 저는 경지도 고작 원영기에다, 태수님의 따님이시라면 훨씬 좋은 혼처를 정하실 수도 있으실 텐데요?"

"흥! 시끄럽다, 나는 네놈을 남편으로 맞이하기로 결정했다! 조용히 하고 결혼해라!"

그때였다.

"흐음…."

스르륵….

어느새 우리 근처로 다가온 홍수령이 싸늘한 눈빛으로 헌위를 바라보았다.

"재미있는 아가씨로군요. 다만, 여기 금 장로는 현재 제 쌍수도려랍니다."

꿈틀―

그러자 헌위가 미간을 씰룩거리며 말했다.

"뭐 어쩌라는 거냐. 이 내가 저 녀석과 혼인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니 네 녀석이 쌍수도려를 포기하면 되는 게 아니더냐?"

"흐음…."

홍수령은 헌위를 쳐다보며 더더욱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다음 순간이었다.

번쩍!

"그만하시오, 홍 원로!"

콰악!

순간 번갯불이 번뜩이는 듯하더니, 어느새 홍수령이 비검을 한 자루 잡고서 헌위에게 칼끝을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금벽호가 홍수령과 헌위의 사이에 끼어들어 홍수령의 팔목을 붙잡고 있었다.

"어머나, 조금 더 찔러 보지 그러셨나?"

홍수령의 비검은 헌위의 코끝에 살짝 닿을락 말락 하는 상태였고, 금벽호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홍 원로, 일단 진정하고 비검을 집어넣게. 그리고 아가씨께서도 일단 물러서 주시지요."

"…흥!"

홍수령은 비검을 집어넣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헌위는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꼈다.

"꼬마 아가씨, 미안하지만 금신천뢰문의 천재라고 소문난 네 도려는 내가 가져야겠어."

"합체기 태수의 딸이면 다인가? 네가 뭔데 내 도려를 물건처럼 가져가겠다는 거지?"

홍수령은 싸늘한 눈빛을 지우지 않고 물었다.

그러자 헌위는 팔짱을 풀고 허리를 펴며 말했다.

"그래, 내 소개가 너무 짧긴 했지."

헌위는 홍수령은 쳐다보지도 않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아버님께서는, 현재 건곤중역의 건곤성에서 수호태수직을 맡고 계신다."

'건곤성주?'

건곤성은 하계의 수도자들이 비승하는 비선대가 있는 곳.

건곤성은 5천 년을 주기로 천, 지족에서 번갈아 관리한다.

그리고 심족이나 진마, 혈음계 마족, 명귀계 귀물들의 습격을 막기 위해 건곤성에는 늘 수많은 사축기 수사가 거주하며 건곤성을 지키고 있었고, 그 사축기 수사들을 통제하기 위해 천, 지족에서는 그들의 관리 시기가 돌아올 때마다 합체기 태수를 한 명씩 선발해서 건곤성의 성주(城主)라는 이름으로 봉(封)하였다.

그렇게 건곤성주가 된 합체기 태수들은 건곤성에서 일어나는 업무와, 건곤성이 불의의 습격을 받았을 때, 혹은 하계에서 비승자가 아니라 이상한 괴물이 올라왔을 때 제지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런 업무 때문에, 건곤성주는 본래 직책인 건곤성주보다 수호태수(守護太修)라고 많이 불렸다.

한 마디로, 나와 하계 사람들이 막 비승했을 때 건곤성의 성주직을 맡고 있었던 이가 헌위의 아버지라는 수사인 모양이었다.

'괴군이 처음 건곤성의 사축기 수사를 납치해 갔을 때 코빼기도 안 보였던 태수가 헌위의 부친인 거로군.'

생각해보면, 그때 괴군이 녹갑 목인을 납치했을 때 헌위의 부친이란 자가 괴군을 포획하려 달려들었으면 괴군은 꼼짝없이 그 자리에서 정신병이 치료되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건곤성주는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 결과 괴군은 유유히 도망쳐서 결국에는 기묘성채를 극한으로 진화시키게 된다.

따지고 보면 괴군이 일천 년 동안 광한계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었던 건 그녀의 부친 탓이기도 했다.

"또한 부친께서는 인족 영역에서 다섯 손가락에 들어가는 수도선파인 봉래궁(蓬萊宮)의 궁주이시며, 본녀는 봉래궁의 21호법사자 중 하나이다. 네가 본녀와 혼인한다면, 금신천뢰문은 앞으로 봉래궁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을 뿐이 아니라 건곤성주를 뒷배로 둘 수 있다. 또한 너 역시 아버님께 부탁드려서 아버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게 해 주마!"

"…."

"무조건 나와 혼인하는 것이 좋을 것이야. 네가 봉래궁에 들어온다면 봉래궁주의 자식들만 익힐 수 있는 공법인 태산열제공(太山裂帝功)을 익힐 수 있게 지원해 주겠다!"

그녀의 말에, 여기저기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허어, 아무리 그래도 외부인에게 태산열제공을…"

"어마어마한 의지로군."

"여태껏 봉래궁주의 혈손과 직계 제자 말고 태산열제공을 익힌 이가 몇이나 된단 말인가?"

나는 탄식을 내뱉는 자를 보았다.

일단 뇌령도의 총령이자, 합체기 태수 위령선의 분체.

그리고 합체기 태수 응연의 분체, 태수 개진의 분체가 연이어 탄식을 터트리고 있었다.

합체기 태수들조차 저런 반응을 보일 정도로 '태산열제공'이란 것이 강력한 위력을 지녔단 뜻이었다.

'거기다가 이름만 들어봐도 토 속성 공법이겠군. 나와도 잘 맞겠어.'

내가 얻을 수 있는 이득만으로 따진다면 도저히 거절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나는 머리를 차갑게 식힌 후 웃으며 대답했다.

"아가씨께는 죄송스럽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이미 문파에서 정해준 쌍수도려가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다른 누군가와 혼례를 올릴 생각이 없습니다."

"흐음…."

그러자, 그녀의 얼굴에 호승심이 가득 차올랐다.

"애처가로구나! 더더욱 가지고 싶어졌어."

"…단순히 저를 가지고 싶으셔서 청혼하신 겁니까?"

"아니, 그렇지 않다. 네가 내 공격을 막은 걸 보고 네게 단단히 반했다! 그러니 나랑 결혼하자!"

"흐음…."

나는 투명한 눈으로 헌위를 관찰했고, 홍수령은 코웃음을 치며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헌위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아직도 마음이 정해지지 않은 모양이군. 그렇다면 우선…."

따악!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녀의 옆에서 그녀의 저물도가 입을 벌렸다.

그리고, 저물도의 안쪽에서 어마어마한 빛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이, 이건…!"

금벽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고, 저물도 주변에 있던 금신천뢰문의 제자들과 축하사절들도 놀라서 하늘로 올라갔다.

쿠구구구구!

저물도에서, 무수한 영석이 폭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영석의 폭포에, 이내 금뢰전이 있는 금뢰봉의 정상이 영석으로 뒤덮여 버렸다.

대충 봐도 2, 3백억이 넘어가는 양의 무지막지한 영석!

하지만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다.

금뢰봉의 정상이 영석으로 뒤덮일 정도를 넘어, 그 아래로 영석들이 질질 흐를 정도가 되자 헌위의 저물도는 영석을 뿜는 것을 멈췄다.

"중계 영석 1천억 개! 이 정도라면 백 년 정도는 너희 문파의 재정이 부족할 일은 없을 게다! 우리 봉래공의 사람에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나와 혼인한다면 이보다도 더한 지원을 무궁무진하게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금벽호는 입을 다물 줄 몰랐고, 나 역시 그 압도적인 분량에 놀라 잠시 헛웃음을 흘렸다.

'재물이면 안 되는 게 없다는 건가….'

확실히, 이건 그럴 만한 액수기는 했다.

더군다나 그녀와 혼인한다면 이보다 더한 지원을 준다 하니, 일반적인 수도자라면 가슴이 절로 떨릴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금벽호는 영석 무더기를 본 이후로 어째서인지 아까보다 더더욱 공손해진 태도로 헌위에게 다가갔다.

"일단 지원에 감사합니다만, 아가씨. 금 장로는 본문의…."

"내가 소속을 봉래궁 소속으로 옮기라는 것이 아니다! 그냥 나와 혼인하여 금신천뢰문이 봉래궁과 자주 왕래하면 될 뿐. 그리고 이 지원금은 일단 금은현 장로의 차차기 장문인 축하선물로 준 것이니, 부담 없이 받아라."

"허, 허억…!"

"그럼 나는 이만 가 보마! 앞으로도 자주 찾아와 '축하 선물'을 줄 테니, 잘 생각해 보거라. 원영기에서 천인기로 올라가려면 자원도 자원이지만 봉래궁에는 천인기의 깨달음을 도와줄 기물들이 더더욱 많으니!"

말을 마친 헌위는 마지막으로 씩씩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본 후, 그대로 비둔술을 타고서 날아가 버렸다.

짧고도 강렬한 그녀의 등장에, 얼마간 축하연에는 침묵이 맴돌았다.

"험, 험… 거 부럽구만. 일단 축하연은 계속해야지?"

창호자는 얼떨떨해하는 금벽호에게 눈치를 줬고, 금벽호는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결단기 청, 남뢰 제자들에게 눈짓을 주었다.

그러자 결단기 제자들이 빠르게 날아다니며 영석들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하, 하하… 그럼 일단 축하연을 재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어마어마한 영석의 폭포를 본 무수한 타 문파의 대표들에게서부터 어마어마한 축하의 목소리가 금벽호에게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경사가 나셨습니다!"

"하하하, 헌 선자라면 성격이 쉽지 않다고는 하나, 쓸 때는 화끈하게 쓰는 성격이라 두 사람이 도려가 되면 금신천뢰문은 앞으로 탄탄대로로군요."

"태수님의 말괄량이 따님이지만, 그래도 봉래궁의 재산은 인족에서 두 손가락에 든다 하니 정말 좋은 기회가 아닙니까!"

이어지는 무수한 축하 공세에, 금벽호는 정신을 못 차리는 느낌이었다.

홍수령과 나는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혀를 차며 말했다.

"정신 나갈 것 같은 노괴더군. 조심해라, 금은현. 입으로는 반했다니 뭐니를 외쳤지만, 속내는 완전히 다른 년이었어."

"…예, 저도 봤습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그녀가 진심으로 내게 반해서 사랑을 고백했다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의념을 기억했다.

'말 그대로, 노회한 노괴들이나 보이는 의념.'

절대 쉽지 않은 상대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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