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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1% 13ATRIBUT / Chapter 5: 5

Bab 5: 5

"투신의 탑 20층을 돌파하여 페이즈 2에 대한 '힌트'가 주어집니다."

"······."

투신의 탑 20층을 힘겹게 클리어한 이들.

그들은 주어진 힌트를 바라보며 동시에 미간을 찌푸렸다.

당연한 일이다.

페이즈 2.

칼날용신의 약점에 대한 힌트가 정말 말도 안 됐으니까.

게다가 아주 단출하기 그지없는 힌트만 나타났을 뿐, 정확히 어떤 조건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만고의 준비 끝에 만신창이가 되어 겨우 도달한 곳이건만!

"지금 이딴 걸 힌트라고 준 거냐?"

"고작 이게 다야?"

"뭐 어쩌라는 거냐, 이건······."

모두가 오만상을 찌푸린 채, 재차 눈앞에 나타난 힌트를 바라봤다.

"힌트(Hint) : 란돌프"

란돌프 일대기

힌트.

답을 쉽게 풀 수 있게끔 도와주는 요소.

탑을 오른 모두가 기대했다.

칼날용신의 약점을 '힌트'로 말미암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적어도 유추는 가능하리라고.

하지만 나타난 힌트는 그들의 기대를 정면에서 박살내버렸다.

"힌트가 란돌프야?"

"아니, 그야, 탑의 정상에 란돌프가 있으니까 관계가 있기는 하겠지."

"사흉 바알, 이번엔 칼날용신? 둘 다 란돌프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야?"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저 '란돌프'라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하여, 탑을 올랐던 사람들은 정확한 유추를 위해 힌트를 유포했다.

그렇게 몇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세계 전역의 사람들이 힌트에 대해 알게 되었다.

지구와 판게니아를 불문하고.

"자, 타임라인대로 정리해보자."

"그러니까 칼날용신이 언제 나타났지?"

"이세라가 침략했을 때. 처음부터 나타난 건 아니야. 갑자기 한국에 용맥이 생기더니 그곳을 지키라고 월드 메시지가 떴어."

"그 다음은?"

"지키고 있는 와중에 유니온과 '검은 알의 사신님'이 나타났지. 마왕군은 워프로 강제 이동됐고."

"그리고 우리는 용맥이 완성될 때까지 마왕군과 격전을 벌였다······ 이세라가 본래 존재했던 지구의 용신 '루카리아'를 흡수했는데도 칼날용신이 이세라를 격퇴했지."

"문제는 폭주했다는 거야. 그리고 폭주한 칼날용신을 무언가가 제압하고 용맥으로 데려갔어."

"맞아. 그게 아마 '검은 알의 신'일 거다."

"'검은 알의 신'은 사흉 바알을 죽인 장본인이기도 하지."

"그 '검은 알의 신'이 란돌프라면?"

이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적어도 지금껏 나타난 바알과 칼날용신은 '검은 알의 신'과 깊게 관여되어 있다.

물론 '검은 알의 신'이 '란돌프'라는 확신은 없었다.

그러나 탑의 챔피언이자, 현재 토벌의 대상이 된 라스트 보스 란돌프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그제야 사람들의 눈에 이채가 뗬다.

"설마 지금 나타나고 있는 '중간보스'들이······ 란돌프가 격퇴하거나, 깊게 관여한 것들이라는 건가?"

"그럴 수도 있지."

"우리가 지금 '란돌프 일대기'를 체험하고 있는 거라고?"

란돌프의 일대기!

탑 자체가 그의 일대기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 둘, 의견이 모아졌다.

하지만 의아한 부분들도 분명히 있었다.

"갑자기 크람델에 있는 '신비의 탑'의 시련이 나타난건 어떻게 설명하지? 그것도 란돌프와 관계된 시련일까?"

"백왕 산하에 새롭게 나타난 오주력 란돌프. 이름이 같아서 설마 하기는 했지만······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 오주력 란돌프가 신비의 관을 끝까지 돌파한 최초의 까마귀라더군."

"오주력, 신비의 탑, 흉조, 바알, 칼날용신. ······이게 전부 란돌프. 아니, '팬텀'과 관계가 있다고?"

"그게 전부겠어? 더 있겠지."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팬텀은 신이겠군."

팬텀은 신이다.

그런 결론밖에 나질 않는다.

인간이라면 저것들 전부와 관계되어있을 수 없는 탓이다.

하물며 팬텀은 등장한지 몇 년이 지나지도 않았다.

그 사이에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압도적인 무력과, 신화를 이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측들이 전부 사실일 경우.

"대체······ 란돌프는 그럼 얼마나 강한 거야?"

꿀꺽!

사람들은 침을 삼켰다.

가늠이 안 됐으니까.

그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으니까.

란돌프는 단순히 별 다섯 개를 거머쥔 자가 아니었다.

동시에 그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서 탑이 무너지면 어떻게 되는거지?"

"저주가 방출된다. 탑의 모든 것들이 튀어나온다는 뜻이지."

"설마 란돌프도?"

"그래, 란돌프도. 하지만 우리가 아는 란돌프는 아니겠지."

"······ 란돌프가 탑의 저주에 잠식되어 있다는 말인가?"

"아아. 그러니 탑을 뛰쳐나오기 전에 저주를 정화해야만 해. 탑을 오르고, 페이즈를 높여서 란돌프에게 닿아야만 뭐가 됐든 답이 나올 거다."

"닿았는데, 해결이 안 되면?"

"······ 그럼 진짜로 토벌해야겠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최후의 상황까지 염두에 뒀다.

당연히 멈춰있을 수는 없는 노릇.

거대 길드와 연합들이 앞다투어 서로의 정보를 공유해나갔다.

"란돌프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 조사한 것들, 전부 가져와!"

"다른 길드랑도 연락을 취하고! 특히 한국에 있는 영웅연합! 그들이라면 무언가를 더 알고 있을 거다!"

"박태우와 연락이 안 된다고? 그럼 직접 가서라도 만나봐!"

"젠장할. 내가 직접 간다!"

*

빗발치는 연락.

하지만 한국 영웅연합의 수장인 박태우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

툭, 툭.

손가락으로 책상을 치며 그는 곰곰이 상념에 잠겨있었다.

'허드슨은 답을 알고 있다.'

박태우는 이 모든 힌트와 추론의 끝에, 허드슨이 있다고 생각했다.

용맥이 나타날 당시.

용신 루카리아를 데려오라며 자신과 마주했던 허드슨.

본래 오주력 란돌프가 주인으로 있었던 유적도시 룬델라를 그 대가로 넘겨주지 않았던가.

'허드슨의 지구 신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제는 그것이다.

허드슨은 강림체다.

지구인의 모습이 아닌, 황금률의 조각을 사용해 변신한 모습.

아무도 허드슨의 진짜 정체를 모른다.

그리고 그건 란돌프 역시 마찬가지.

'허드슨은 란돌프에 대해 알고 있다. 어쩌면 지구의 신분까지도 알고 있을지도 몰라.'

한때 소문이 돌기는 했다.

영국의 새로 나타난 '올리버'가 란돌프라는 소문이.

하지만 그 또한 실체를 확인한 사람은 없었다.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가.

지금 갖고 있는 정보로는 파악이 불가하다.

허드슨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그 외에도 한 가지 짚이는 건 있었다.

'칼날용신의 약점에 대한 힌트가 란돌프라면······.'

이세라가 침략했을 당시.

다크스타를 비롯한 모두가 도망칠 때, 박태우만은 끝까지 남았다.

끝까지 남아서 싸웠다.

마침내 칼날용신이 폭주하며 이세라를 죽였을 때도 그는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본 것이다.

물론 직접 본 건 아니지만, 루카리아를 데려온 장본인이라서일까.

아니면 자신의 클래스 '용령사' 때문일지도 모른다.

··· 느껴진 것이다.

폭주한 칼날용신의 가슴팍에서 번지던 고통이.

"란돌프······ 자체가 약점이다."

칼날용신이 '검은 알의 신'을 공격했고, 그 고통이 공유되었음을.

오직 박태우만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걸 말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박태우는 또한 알고 있었다.

"란돌프를 만나려면 칼날용신을 토벌해야하고, 칼날용신을 토벌하려면 란돌프를 만나야만 한다······."

힌트 그 자체가 답이었다.

그야말로 오픈북 시험인 셈이다.

그런데 답을 알려줬는데, 정작 풀 수가 없다.

이게 말이 되나?

답을 아는데도 풀 수 없는 문제라니!

그래서다.

알려줘봤자 소용이 없다는 건.

"하아······."

박태우는 깊은 시름에 빠졌다.

*

라이가.

그는 탑을 올랐다.

20층을 돌파하고, 21층에 도달했다.

"······."

하지만 그의 표정은 좀처럼 펴질 줄을 몰랐다.

'사흉 바알이 소환되고 토벌됐다.'

도저히 연유를 알 수가 없는 까닭이다.

왜 바알이 투신의 탑에 소환됐나.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다.

소환된 바알은 진짜니까.

"구현계······."

달그락.

달그락.

눈앞에 놓인 수많은 해골병사들.

허나, 개의치 않는다.

그보단 지금 이곳 탑 자체가 더욱 흥미를 끌었다.

구현계(具現界).

심연의 영역에서도 몇 번 경험해보았던, 특이한 현상을 일으키는 영역.

상상이나 생각 따위를 구현시켜놓은 독특한 세계.

그게 바로 구현계다.

구현계에서 형상화된 것들은 모두 진짜다.

진짜와 다를게 없다.

하지만 그렇게 소환되고 형상화된 것들은 모두 구현계를 다스리는 '주인'의 한계를 넘어서진 못한다.

고로, 지금 탑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란돌프'의 한계 안에 있다는 뜻이다.

더불어 '란돌프'가 구체화할 수 있을 정도로 직접 경험해본 것들이라는 의미였다.

단순한 망상만으로는 구현계에서도 실체화 시키는데 한계가 있으니까.

말인 즉슨.

"이곳은 란돌프의 꿈속이로군."

란돌프가 겪은 일을 되돌아보는 꿈의 내부다.

그렇다면 당연한 의문이 생긴다.

란돌프.

놈은 누구인가?

누구기에, 이처럼 다양하고 방대한 경험을 실체화했는가.

간혹 '죄인'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화자되는 인물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알을 소환한 게 못내 마음에 걸린다.

최근 그 역시 바알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황금 염소.'

그의 정통이 사신으로 소환해낸 사흉 바알.

황금염소는 당당하게 사신교의 간부로 자리매김했다.

허나, 사라졌다.

자신과 함께 심연에 들어갔다가 자취를 감추었다.

어쩌면, 자신의 '사라진 기억'과도 깊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는 그 녀석이.

그래서 궁금한 것이다.

'란돌프와 황금 염소. 둘은 무슨 관계지?'

란돌프는 죄인이다.

플레이어다.

하지만 황금 염소는 아니다.

사신교가 간부를 들이는데 죄인 하나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무능하진 않다.

무엇보다 '대천사'가 있는 이상, 궁 내부에서 죄인이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그러니··· 둘이 동일인물은 아닐 터.

그보단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는지.

'란돌프. 누구냐, 넌.'

······ 한 번, 알아봐야겠다.

"'박현명'이 투신의 탑 21층을 클리어했습니다!"

"'박현명'이 투신의 탑 22층을 클리어했습니다!"

눈앞에 느닷없이 나타난 메시지.

라이가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동시에 클리어했다?'

21층을 클리어하자마자, 22층이 클리어됐다.

라이가조차도 이 현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란돌프가 누구인지, 황금 염소는 어디 있는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프건만.

박현명이라.

순간 아드리움의 '현'이 떠올랐으나, 아무리 그래도 동레벨 규격의 계속해서 강해지는 해골병사들 1만 구를 상대하는 일이다.

그리고 동시에 두 개의 층을 클리어하려면 어떻게해야하지?

수많은 경험을 한 라이가도 도저히 떠올릴 수 없는 변칙이자 이적.

라이가의 미간에 생긴 골이 더욱 깊어졌다.

*

쿵!

쿠르르릉!

쾅! 쾅! 콰아아앙!

"······."

나는 가만히 눈앞에서 도미노처럼 쓰러져가는 해골병사들을 바라봤다.

신장만 10m에 다다를 만큼 거대하기 짝이 없는 거인의 해골병사들.

놈들이 손을 휘두르고 빛의 화살을 쏘아내면 도저히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거인 해골병사들이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맨 앞의 해골병사가 쓰러지자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도미노마냥 주르르륵 넘어지고 부서진다.

22층에 도달한 즉시 벌어진 현상.

'여기도 그대로군.'

거인의 특성을 지닌 해골병사들의 레벨은 '4'였다.

저 거대한 몸을 유지하기 위한 능력치로는 턱없이 부족한 레벨.

저 비대한 거체를 유지하고 움직이기엔 턱없이 부족했겠지.

앞에서 쓰러지는 거체를 받아내고 버텨낼 힘은 더더욱 없을 테니.

쾅! 쾅! 쾅! 콰아아앙!

-이건 사기다, 까악!

그 기가막힌 광경을 지켜보던 재의 신이 쓰게 한 마디 뱉어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사기라고.

하지만 현실이다.

내 레벨이 낮은걸 어떡하나.

앞서 몇만 구의 해골병사들을 사냥해도, 내 레벨은 여전히 '4'였다.

'극도로 레벨이 안 오르는 체질이라 미안하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보너스 스테이지.

하지만 보상은 여전히 달콤했다.

"'재의 시련(4)'를 극복했습니다!"

"보상으로 유일급 신비 '재의 왕'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획득하지 않을시, 다음 시련으로 넘어갑니다."

"갓포인트(GP) 15,000점이 수여됩니다."

"갓포인트를 사용해 '재의 상급 까마귀 소환술'의 레벨을 10으로 격상시킵니다."

"'재의 상급 까마귀 소환술'의 레벨이 최대치(10Lv)에 도달했습니다."

"'재의 상급 까마귀 소환술' 스킬이 '재앙의 까마귀 소환술(1Lv)'로 초월합니다."

가만히 지켜보던 흉의 신조차도 한 마디 내뱉었다.

-너무 퍼주는 거 아닌가?

-운도 실력이다. 결국 우리 아이가 대단해서 일어난 일이지, 까악!

-방금 사기라고 하지 않았나?

-닥쳐라, 흉한 놈아. 난 그런 말 한 적 없다, 까악!

-그나저나 상상이상의 속도로군. 나도 슬슬 '다른 쪽'을 준비해야겠어.

-크하하! 무엇을 내놓든 우리 '재의 아이'를 상대할 순 없노라!

-대단한 자신감이로군. 까악.

흉의 신이 껄껄대며 웃었다.

과연 그 자신감이 언제까지 유지될지 지켜보겠다는 듯.

고오오오오.

그 찰나.

눈앞에, 거대한 무언가가 소환됐다.

"······."

그것을 본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말았다.

해골병사가 아니다.

그러한 시련과는 비교가 안 된다.

눈 앞에 나타난 거구의 괴물.

그건 어딘가 익숙했지만, 무척이나 살벌하기 짝이 없는 진짜 괴물 중에 괴물이었으니까.

"'재의 시련(5)', '끔찍한 흉조'가 등장합니다."

팬텀 죽이기

결국 박태우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페이즈 2.

칼날용신의 약점을 마냥 숨기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태우의 기자회견을 들은 사람들의 절망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란돌프 자체가 약점이라니?"

"이게 말이 돼······?"

"중간보스를 꺾어야 라스트 보스를 만날 수 있는 게 국룰 아닌가?"

"그런데 라스트 보스가 약점이라고?"

진짜 미치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가 이런 게임을 만들면 제작자는 돌팔매에 맞아 죽을 것이다.

앞뒤전후가 완전히 잘못된 설계였으므로.

도저히 깨라고 만든 게임이 아니었으니까.

칼날용신은 중간 보스다.

그런데 중간 보스를 깨려면, 라스트 보스를 먼저 깨야 한단다.

하지만 라스트 보스를 만나려거든 중간 보스를 이겨야만 했다.

애초에 제대로 된 공식 자체가 성사가 안 된다.

"이걸 어떻게 깨?"

"진짜 무적이네······."

"그래서 이세라가 약점을 못 찾은 거구나."

"당연히 찾을 수가 없지. 란돌프가 거기 없었는데."

"잠깐. 그럼 칼날용신이 태어난 게 란돌프의 업적이라는 거야?"

이세라의 침공 당시, 갑작스럽게 생성된 용맥.

플레이어들은 필사적으로 그 용맥을 지키며 칼날용신을 탄생시켰다.

그런데 용맥을 만들고 칼날용신이 태어난 게 모두 란돌프의 의지였다면 이건 결코 허투루 넘어갈 문제가 아닌 것이다.

"··· 메인 퀘스트 10 말이야. '광룡 아인하사르'의 시련이 '용신 아인하사르'의 시련으로 바뀐 것도 그쯤이지?"

"새로운 용신의 탄생에 '용신 아인하사르'가 도움을 줬나?"

"그게 보상일지도 모르고."

"최근에 용신 아인하사르의 업적 깬 사람이 있어? 한번 물어볼 수 없나?"

"아인하사르한테 물어보려면 메인퀘 10 밀고 그 보상으로 질문해야 하는데, 다른 좋은 보상들 포기하고 누가 그걸 물어봐?"

메인퀘스트 10을 클리어하면 그 보상으로 아인하사르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잘만 하면 유일등급 도안마저 찾을 수 있는 질문이었기에, 클리어한 사람들 모두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 질문하는 편이었다.

당연히 그토록 중요한 질문을 '칼날용신의 탄생'과 관련하여 날려먹을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만약 란돌프가 칼날용신의 주인이라면?

······ 란돌프는 그 즉시, 유일무이한 '지구의 수호자'로 등극한다.

란돌프.

그는 누구인가?

약점이 없다고 가만히 넋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전보다 열심히 사람들은 '란돌프'를 조사하기 시작했고, 그를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가져온 정보라는 게 이게 전부냐?"

"어떻게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어?"

······ 너무나도.

정말 어이가 없을 정도로 아는 것이 없었던 탓이다.

제아무리 란돌프가 조용하고 은밀하게 행동했다 한들, 그만한 위업을 이룬 자의 족적은 어딘가에 남아있어야만 했다.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너무나도 많은 신화를 달성하며 완성한 자.

그러나, 없다.

란돌프의 흔적이 어디에도 없다.

누군가가 깔끔하게 지워놓은 것처럼.

"란돌프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 몰랐군······."

"그만한 업적들을 달성했음에도 우리는 버그니, 치트이니, 운영자이니, 자기합리화 하기에 바빴으니까······."

"본능적으로 인정하기 싫었던 거지. 란돌프와 나의 차이를."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됐으니 말이야."

"눈을 돌리고, 외면했다··· 우리도 영웅회의 '팬텀 죽이기'에 암묵적으로 동조한 셈이다."

"사실 우리보다 영웅회가 더 란돌프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을까?"

그랬다.

항상 거짓된 정보를 퍼트린 영웅회를 욕하고, 플레이어들을 좌지우지하는 그들을 손가락질하면서도, 정작 란돌프에 대해 제대로 알아볼 생각을 안 했다.

은연중에 영웅회의 거짓 정보를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했다.

빌헬름의 대원정은 처참하게 실패했고, 란돌프의 행보는 모두 거짓이며, 피도 눈물도 없는 위선자가 바로 팬텀이라는 이야기를.

팬텀 죽이기.

그 진행에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조한 것과 다를 게 없다.

하여, 그들은 몰랐다.

란돌프가 어디서 시작했고 어디까지 닿았는지.

말도 안 되는 전설과 신화를 수없이 이룩했음에도 말이다.

그러자 플레이어들은 자처하며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sns를 통해, 방송을 통해, 모든 소통의 창구를 통해서.

"이 탑은 우리가 외면하여 생긴 '업보(業報)'다······."

"인과응보. 우리의 영웅을 우리가 스스로 타락시킨 것이다."

"··· 나는 침묵했다. 내 일이 아니었으니까. 거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한들 란돌프의 일대기가 딱히 진실이라는 게 믿기지도 않았으니까."

"이 탑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란돌프'가 행한 모든 게 진실이었음을. 우리에게 직접 경험케 하고 있는 것이다."

"영웅회의 말들은 모두 거짓이다! 우리의 우상을 그들은 짓밟았고, 우리는 침묵하며 결과적으로 그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우리에게 닥친 현실이다! 보아라, 저 저주받은 탑을!"

"더 이상 침묵하지 마라. 일어나라! 일어나서, 탑을 올라라! 모두 '란돌프 일대기'를 함께하자!"

그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는 피하지 않을 것이다.

란돌프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플레이어만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란돌프의 이름을 각인하게 된 순간.

지구의 2세대 각성자들도 하나, 둘 탑을 오르기 시작했으며, 판게니아에서도 더 많은 도전자가 '투신의 탑'을 방문했다.

"현재 투신의 탑을 오르는 도전자의 숫자가 100,000명을 넘겼습니다."

도합 10만!그렇게 모두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른 그 찰나였다.

"탑의 저주가 약화됩니다."

"페이즈 2, '칼날용신'의 무력이 20% 약화되었습니다."

약화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공략은 불가했다.

"진짜 답이 없는 거야?"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어떻게 해야 노여움을 푸실련지······!"

몇몇 플레이어는 이 현상 자체를 '란돌프의 분노'로 정의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탑을 올라 그의 일대기에 공감하면 분노를 풀어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답은 없었다.

도저히 길이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좌절하던 그때였다.

"'약점'이 해방되었습니다."

"칼날용신의 '무적' 상태가 일시적으로 풀렸습니다."

갑자기, 난데없이.

······ 칼날용신의 무적이 풀렸다.

*

-누가 흉한놈 아니랄까 봐, 흉한 짓만 골라서 하는구나!

'재의 신'이 대노했다.

'흉의 신'이 대결을 위해 소환한 개체.

하필이면 '끔직한 흉조'를 불러들인 탓이다.

그 저주받은 흉조는 일반적인 '흉의 일족'이 아니다.

태양과 달처럼, 흉의 일족 이면에 존재하는 저주의 덩어리였다.

이제 막 '재의 일족'이 된 어린 까마귀는 절대로 상대할 수 없는 괴물!

-걱정하지마라. 충분히 '대등한 대결'을 펼칠 셈이니, 까악!

-어디가 대등하다는 거냐? 머리에 구멍이 났냐, 까악?

-누가 더 빠르게, 더 많은 '시련'을 깨는지의 대결이다. 이정도면 충분히 대등하지 않나, 까악?

-··· 오호라.

그제야 재의 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레벨의 해골병사 1만 구를 누가 더 빠르게 토벌하느냐.

하물며 더 많은 '히든 특성'도 추가된다.

-허무, 거인, 드루이드. 세 가지 특성이 추가된 해골병들이다.

-부족하다, 까악. 손재주와 올마스터, 웨폰마스터도 넣지.

-음, 죽을텐데?

-그래야 더 확실한 표본이 잡히지 않겠느냐? 까악.

-그것도 맞다.

재의 신은 한 술 더 떴다.

아예 여섯 개의 특성이 추가된 1만 구의 해골병사를 투입하기로.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운명의 역설'이 발동합니다."

"'박현명'의 존재감이 희미해집니다."

······ 몸이, 전혀 움직이질 않는다.

끔찍한 흉조가 등장한 즉시.

마치 정지라도 해놓은 듯 꿈쩍하지 않았다.

그제야 알았다.

저건 끔찍한 흉조이며, 동시에.

"'끔찍한 흉조(凶兆), 란돌프'"

··· 란돌프다.

정확히 말하자면 '란돌프'로 직접 변신했던, 심연에서 바알을 죽기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형태의 하나였다.

란돌프의 형태 중 하나가 형상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저건 가짜이되 가짜가 아니다.

이 탑에서 구현된, 란돌프의 일부였다.

'탑 자체가 란돌프의 손과 발이 되었다.'

투신의 탑.

탑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란돌프의 일부다.

그 중에서도 구체적으로 형상화된 저 '끔찍한 흉조'는 가히 란돌프의 손이나 발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래서 운명의 역설이 발동한 것이다.

-자, 시작하거라.

-재의 아이야, 해낼 것이라 믿는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둘은 천하태평하기 그지없었다.

꽈아앙!

동시에 세상의 중심부에 투명한 벽 하나가 세워졌다.

그 벽은 정확히 나와 끔찍한 흉조를 나눠놓았다.

곧이어.

달그락!

달그락!

내가 있는 곳, 그리고 끔찍한 흉조가 있는 곳에 거대한 해골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숫자가 각각 1만 구.

게다가 이번엔 쓰러지지 않는다.

무려 여섯 개의 히든 특성을 지녔으니, 거구를 지탱하기 위한 능력치가 부족해도 충분히 만회가 되는 거겠지.

각종 무기를 들고, 정령을 소환하며, 수많은 클래스로 압도한다.

신비의 탑, 신화의 관을 끝까지 오를 때보다 훨씬 더 어렵다.

그때도 6개의 히든 특성이 추가된 해골병사가 등장하진 않았다.

'더이상 요행은 통하지 않는다.'

그런 뜻인가?

이제야 제대로 된 시련이 시작된 느낌이다.

지금까지 행해온 시련은 모두 애들 장난이라 여겨질 정도.

까아아아아악-!

반대편에서 끔찍한 흉조가 울부짖었다.

까악!

까아악!

동시에 검은 태양이 떠오르며 수많은 '도사 까마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태양'에선 피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떨어진 피가 바닥을 적시자.

쩌적!

쿵! 쿠우웅!

해골병사들이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한다.

절대적인 죽음.

저 죽음을 피하고자 바알도 '멸망의 파편'을 드러낼 정도였다.

멸망의 파편이 아니었다면, 바알은 저 검은태양 앞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터.

이길 수 없다.

아니, 이대로 있다간······.

'죽는다.'

······ 확실하게, 죽을 것이다.

*

칼날용신 하나.

그녀를 정면에서 마주한 누군가가 작게 감탄했다.

"굉장한 신격이로군."

새로운 도전자다.

하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도전자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인간과 비슷한 크기의 '개미'가 있었다.

변종, 혹은 돌연변이.

그러나 느껴지는 기세는 결코 개미라고 할 수 없다.

그 기운은 일전에 도전한 도전자보다도 훨씬 더 드셌다.

하지만 이곳에 오른 이상 멸해야 할 적일 뿐.

스릉.

하나를 상대로 검을 뽑아 든 개미가 말했다.

"내 이름은 페르몬. 개미의 왕이다."

개미의 왕 페르몬!

흑왕에 의해 만들어진 변종.

돌연변이 히든 특성을 부여한 수많은 벌레들을 고독처럼 가둬두고, 그곳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괴물이다.

한데, 페르몬이 들고 있는 검은 무척 특이한 검이었다.

붉은 기운이 호수처럼 흐르는, 추악하기 그지없는 저주가 깃들어있는 검.

성검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마검(魔劍)이었다.

하나의 시선이 검에 닿자 페르몬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설명했다.

"참고로 이 검은 악마를 봉인한 검이다. 음. 뭐였더라, 무슨 죄악이었는데."

페르몬이 더듬이를 마구 움직였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듯.

아무렴 별 상관은 없었다.

"그런데 너는 검에 가두기엔 아깝다. 그래서 너를 잡아먹을 거다."

결정을 내린 페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이어서 말했다.

"내가 사흉 '절망'을 먹어치운 것처럼."

페이즈 3

개미왕 페르몬.

놈은 물건이었다.

흑왕이 만들고 창조한 것 중에서도 단연코 으뜸가는 지적생명체.

오랜시간 셀 수 없이 많은 은혜를 베풀었으나, 페로몬만큼이나 강한 욕망을 지닌 개체는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다.

'놈에게는 두 가지 본능밖에 없다.'

흑왕은 미소 지었다.

페로몬이 진화하고자 남겨둔 본능은 두 가지뿐이다.

살아남는 것.

그리고 강해지는 것!

그 두 가지 개념 외엔 모두 버렸다.

그래서일까.

무엇을 가르치든 순식간에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검기를 발현하고 검강을 발산하기까지 수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절망'의 세포를 이식받기는 했지만 말이다.

'사흉은 모두 개성이 뚜렷하지.'

멸망이 탄생시킨 가장 강력한 네 마리의 괴수.

사흉은 그 하나하나가 전혀 다른 개성을 갖추고 있었다.

예컨대 바알은 저주의 집약체다.

그 단단하고 거대한 몸뚱이는 어마어마한 양의 저주를 저장하는 저장고에 불과하다.

집약된 저주로 말미암아 현상을 비트는 게 바알의 진정한 쓰임새였다.

지금 투신의 탑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처럼.

그곳에서 '소환'된 모든 것들은 바알의 저주에 의한 것이다.

'바알은 소환하고, 절망은 복제한다.'

사흉은 모두 개성이 넘치지만 단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개체를 불려나간다는 것이다.

바알은 저주를 통해 막강한 존재들을 소환하고, 절망은 자신의 세포를 이식하여 스스로를 복제한다.

사흉이 넷만으로 찬란했던 구제국 문명을 멸망시킬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다.

'페르몬은 절망의 세포를 이식받고도 살아남았다.'

지금까지는 페르몬이 유일한 성공 개체다.

흑왕이 '히든 특성'의 은혜를 베풀어 개체를 강화시킨 건 오직 '절망의 세포'를 이식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절망의 군단'을 완성하고, 이 세계를 파멸시킨다.

그리하면······ 그리해야만.

'······ 천상에 닿을 테니.'

거만하고 오만한 자들의 이상향.

오로지 완벽만을 추구하는 그 세계에 발을 들일 테니.

하여 흑왕은, 진심으로 페르몬이 투신의 탑 정상에 오르기를 바랐다.

'항상 궁금했지. 사흉의 서열에 대해서.'

사흉들 간에도 서열이 있을 터.

또한, 이번 싸움은 대리자를 내세워 겨루는 바알과 절망의 1차전이다.

충분히 가늠할 수 있으리라.

누가 더 우위인지.

물론 흑왕은 절망이, 페르몬이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최고와 최고가 만나 최강이 됐다.

심지어 페르몬은 아직까지도 끊임없이 성장 중인 괴물.

놈의 강해지고자 하는 열망은, 실로······.

'페르몬은 탐욕 그 자체다.'

······ 실로 탐욕적이었으므로.

*

"퉤!"

페르몬이 살점을 뱉어냈다.

칼날용신의 어깻죽지를 물어뜯는 데 성공했지만, 그것을 씹어삼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페르몬은 상대의 진실을 알았다.

"뭐냐, 넌. 가짜냐?"

외견은 분명히 진짜인데 진짜가 아니다.

칼날용신의 격을 빌려와 저주로 빚어놓은 인형이었다.

어떻게 전혀 반대되는 격을 빌려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건 저 '저주'는 자신이 흡수할 수 없는 종류라는 것이다.

"인형인 주제에······ 이건 어떻게 한 거지?"

페르몬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양팔이, 잘려있었으니까.

칼날용신의 뼈는 모조리 잘라내어 바닥에 널브러트렸다.

더 이상 뼈를 재생할 수도 없는 상태일진대, 완벽하게 제압했다고 생각한 순간 반격을 해온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인지를 뛰어넘어서.

"이렇게? 이렇게 하는 건가?"

스르르륵.

잘려나간 양 팔이 재생한다.

재생한 팔로 말미암아 다시 검을 들고 휘저어보았다.

일견 무성의하게 휘두르는 것 같지만, 그 안에는 조금 전 하나가 이용한 기술의 묘리가 담겨 있었다.

순식간에 페르몬의 기세가 달라지며 공간 자체를 장악한 것이다.

하지만 페르몬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 아직은 어렵군. 공간을 비틀어서 심상으로 움직이는 검 같은··· 음?!"

촤악!

순간적으로 페르몬이 고개를 젖혔다.

그러자 더듬이 하나가 잘려나갔다.

그야말로 찰나와 같은 시간.

조금만 늦었어도 목이 잘렸으리라.

오금이 저려왔다.

아무런 살기도 없다.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다.

오로지 본능에 의지해서 피해낸 것이다.

"인형이지만······ 넌 강하군."

페르몬은 고개를 주억이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칼날용신.

저 녀석은 인형이지만, 강하다고.

틀림없이 본체는 더 강하겠지.

역시 세상에는 강한 놈들이 많다.

그래서 즐거웠다.

아직 자신이 넘어설 것이 더 많음에.

더 강해질 수 있다는 확신에!

'너 역시 넘어서 주마!'

*

"'개미왕 페르몬'이 '칼날용신'에게 패배했습니다."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 67%"

무적이 풀려서일까.

개미왕 페르몬의 도전으로 칼날용신의 체력이 대폭 깎여나갔다.

물론 실패했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물 밀 듯이 도전이 이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크엘프 로드'가 '칼날용신'에게 패배했습니다."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 55%"

"'대토룡'이 '칼날용신'에게 패배했습니다."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 47%"

"'궁귀'가 '칼날용신'에게 패배했습니다."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 36%"

······.

······.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 15%"

그렇게 반나절가량이 지나자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은 고작 15%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이후로도 끊임없이 도전이 이루어졌으나.

"'라이가'가 '칼날용신'에게 패배했습니다."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 15%"

"'산샤'가 '칼날용신'에게 패배했습니다."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 15%"

체력이, 더 이상 깎이지 않는다.

제국의 최강자인 라이가와 전 챔피언인 산샤가 도전했음에도 1%도 깎이지 않았다.

다른 괴물들도 깎은 걸 그 둘이 깎지 못할 리가 없으니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 상태로 시간이 지날수록.

"'칼날용신'의 체력이 회복됩니다."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 18%"

"'칼날용신'의 체력이 회복됩니다."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 21%"

······.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 78%"

체력이, 복구되어간다.

어느덧 피해의 대부분을 수복했다.

"아, 안 돼······!"

"이러다가 100%가 되겠어!"

"끄, 끝이다······."

사람들은 절망했다.

아무리 애를 쓰고 수를 모아봐도 결국 공략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15%에서 왜 더 안 깎인 거야?"

"또 다른 무적기라도 있는 거야 뭐야?"

"아무나 다시 도전해 봐!"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납득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위로 올라, 저주를 정화해야만 한다.

란돌프에게 닿아야만, 란돌프를 해방시켜야만 이 사태를 걷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작 페이즈 2에서 막혀버렸다.

이대로 며칠만 더 지나면 탑은 판게니아와 지구 전부를 파괴하리라.

그렇게 모두가 절망하던 그때였다.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 77%"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 76%"

······.

"뭐, 뭐야?"

"왜 다시 체력이 깎여?"

"지금은 도전 안 하는 중일 텐데?"

돌연히 칼날용신의 체력이 깎여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도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칼날용신에게 더는 아무도 도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체력은 시간이 갈수록 더 빠르게 줄어들었다.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 18%"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 17%"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 16%"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 15%"

마침내 다시금 15%가 남게되자.

"또 회복되는 거 아니야?"

"어차피 여기서 다시 안 줄어들겠지."

그리 말하면서도, 모든 이들이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에 집중했다.

하지만 한참이나 15%에서 줄어들지 않았다.

"역시."

"그러면 그렇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던 그때.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 0%"

"페이즈 2, '칼날용신'이 토벌되었습니다!"

"······!"

"······!"

모두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뜰 수밖에 없었다.

15%에서 한꺼번에 남은 체력이 0%가 되며, 토벌이 완료된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누가 도전을 하고, 토벌을 했는지, 아무런 정보도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 됐든 칼날용신은 토벌되었다.

그리고 토벌되었다면.

"다음은······."

"뭐가 나타나는 거야?"

··· 페이즈 3으로 나타날 건 무엇인가.

탑을 오르는 이들, 오르지 않는 이들 모두가 다음으로 출현할 존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쿠웅!

쓰러진다.

거인의 해골 1만 구가.

하지만 해골병사들이 쓰러지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보다 더욱이 중요한 건.

까아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며, '끔찍한 흉조'가 타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조금씩 타오르다가, 이내 완전히 재가 되어버렸다.

그것을 보며 흉의 신과 재의 신이 소리를 내질렀다.

-사기다, 까악!

-사기다, 까악!

······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사기라고.

나 역시 이런 일이 가능할 줄은 몰랐으니까.

아니,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파격적일 줄은 몰랐다.

'운명의 역설은 내게만 작동하는 게 아닌가 보군.'

운명의 역설.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존재감이 희미해진다는 것.

그건 비단 나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닌 듯싶었다.

란돌프 또한 '운명의 역설'에 영향을 받고 있다.

그 증거가 바로 '끔찍한 흉조'가 타올라 재가 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끔찍한 흉조'의 옆에 있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 내가, 신들이 세워놓은 투명한 벽을 뚫고 끔찍한 흉조를 죽일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롱기누스의 창으로 벽을 뚫다니!

-그런 활용은 생각도 못했는데!

사지가 전부 경직되기 직전에, 롱기누스의 창을 냅다 끔찍한 흉조를 향해 던졌다.

도저히 그것 외엔 방법이 안 떠올랐기 때문이다.

차원을 강제로 통과시키는 힘이라면 '보이지 않는 벽' 정도는 뚫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그 생각은 다행히 적중했다.

'존재의 대결.'

롱기누스의 창으로 벽을 뚫은 즉시, '재앙의 까마귀'를 소환해 나는 끔찍한 흉조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함께 타오르며 '존재의 대결'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끔찍한 흉조는 란돌프가 만들어낸 허상.

단순한 존재의 대결로 간다면 내가 승리할 수밖에 없다.

스르르르.

곧이어 재가 된 '끔찍한 흉조'가 이내 내게 깃들었다.

오른팔이 마치 암흑물질 마냥 완전히 까맣게 잠식됐다.

'······ 이런 식이었군.'

이건 끔찍한 흉조의 존재, 란돌프의 일부다.

탑을 올라, 계속해서 '존재의 대결'을 벌이며, 하나가 되는 것.

아무래도 이게 내게 주어진 진정한 시련인 듯싶었다.

"'재의 시련(5)'를 극복했습니다!"

"보상으로 초월유일급 신비 '끔찍한 흉재'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획득하지 않을시, 다음 시련으로 넘어갑니다."

"갓포인트(GP) 30,000점이 수여됩니다."

"갓포인트를 사용해 '재앙의 까마귀'의 레벨을 10으로 격상시킵니다."

"'재앙의 까마귀'의 레벨이 최대치(10Lv)에 도달했습니다."

"'재앙의 까마귀' 스킬이 '대재앙의 까마귀(1Lv)'로 진화합니다."

해골병사 1만 구를 누가 더 빠르게 퇴치하느냐.

그런 건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상대를 제거하면 결국 내가 1등이니까.

어깨를 으쓱하며, 나는 두 신을 향해 말했다.

"다음은 뭐지?"

*

"페이즈 3, '영원의 란돌프'가 등장합니다."

총결집

영원의 란돌프!

그 이름이 떠오른 순간 투신의 탑은 다시 한 번 소란에 휩싸였다.

"드디어······!"

"진짜 란돌프인가?"

"페이즈 3이 라스트 보스라고?"

사흉 바알, 그리고 칼날용신.

둘 다 도전자들을 압살하는 천재지벽급의 괴물임은 틀림없었다.

하여 페이즈3에 무엇이 나올지 모두가 긴장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페이즈3이 란돌프라면?

"끝! 끝이다!"

"마침내 저주를 풀 수 있는 거야!"

어쩌면, 드디어 라스트 보스의 페이즈에 진입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도전 조건'이었다.

"으음······."

"도전 자체가 말도 안 되게 어렵군."

떠오른 메시지를 보며 사람들은 침음을 삼켰다.

"페이즈 3, '영원의 란돌프'가 등장합니다."

"투신의 탑 25층에서 도전할 수 있습니다."

"투신의 탑 25층은 '자유 투기장'입니다."

"승점을 높여 도전하십시오!"

"승점이 높을수록 '영원의 란돌프'가 약화됩니다."

"'자유 투기장'에서 패배하거나, '영원의 란돌프'에게 패배한 자는 1층으로 돌아가며 '지배의 저주'에 걸립니다."

"'지배의 저주'가 3개 쌓이면 '영원의 란돌프'에게 지배를 당하게 됩니다."

25층에서만 도전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20층 이상에 오른 도전자 자체가 극소수다.

도전자의 레벨과 같은 해골병사 1만 구.

하물며 층을 오를수록 특성이 추가되는데, 아무리 만반의 준비를 해간다고 하더라도 한계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뿐만인가.

'이런 빌어먹을······!'

최강남.

신의 섬 튜토리얼에서 3위에 자리했던 2세대 각성자!

영웅연합의 전폭적인 지원과 압도적인 재능으로 22층까지 어떻게든 클리어할 수는 있었지만, 그도 23층의 벽에 막혀버렸다.

'층을 오를수록 레벨이 오른다. 레벨이 오르면 해골병사의 레벨도 오른다.'

도전자의 레벨이 오르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저레벨에서 소위 말하는 '템빨'로 무장한다고 해도 1만 구의 해골병사를 잡으면 당연히 레벨이 오르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레벨이 오를수록 난이도는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이딴 걸 깨라고 만들어 놓은 거냐?"

욕이 절로 목 끝까지 차올랐다.

최강남의 몰골은 이미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훤칠하고 수려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단번에 끌었던 그는, 쉴 새 없이 바닥을 구른 끝에 먼지와 일체가 되어버렸다.

"'투신의 탑' 입장자가 500,000을 돌파했습니다."

"탑의 난이도가 하향조정됩니다."

그나마의 희망은 투신의 탑으로 도전자가 몰리고 있다는 것.

그 숫자가 어느덧 50만이다.

탑의 난이도가 계속해서 하락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도저히 깰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신이 못 깨면 그 누구도 못 깬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자신감은 단번에 부숴졌다.

'박현명은 이걸 어떻게 깬 거야?'

박현명.

신의 섬에서 압도적인 무위로 모두를 꺾고 1등의 위업을 이룬 그 괴물.

놈은 벌써 탑의 25층에 도달했으니까.

'대체 어느 거대 단체가 박현명을 지원하는 거지?'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영웅연합은 현재 세계적으로도 가장 유망한 곳.

자신의 재능과, 전폭적인 영웅연합의 지원이라면, 그 괴물 같은 박현명조차 넘어설 수 있으리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을 비웃듯 박현명은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올라가고 있었다.

영웅연합 이상의 단체가 박현명을 지원하는 걸까?

이 탑은, 절대 혼자의 힘으로 오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게 가능할 리 없었다.

"'그라시아'가 25층에 오릅니다."

"'황금률의 마법사 유니온'이 25층에 오릅니다."

"'이자벨라가' 25층에 오릅니다."

"'다크엘프 로드'가······."

하지만 25층에 오르는 도전자의 숫자는, 계속해서 증가추세였다.

꽈아악!

최강남이 입술을 깨물었다.

달그락!

달그락!

지긋지긋하기 짝이 없는, 거대한 해골병사들을 바라보며.

"내가 최강이다. 내가 최강이란 말이다······!"

검을 들었다.

*

그라시아와 유니온은 25층에 도착한 즉시 전방을 둘러보았다.

"우리가 제일 먼저 도착한건가?"

"음, 박현명은 25층에 있을 텐데."

넓디 넓은 투기장.

그곳에는 그라시아와 유니온뿐이었다.

먼저 도착했어야할 터인 박현명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라시아와 유니온이 이토록 빠르게 25층에 도달한 방법은 간단했다.

경험치를 물약으로 만들어 저장하는 수법.

그리하여 레벨을 강제로 다운 시킨 뒤, 탑을 오른 것이다.

물론 레벨이 낮아졌다고 쉬운 일은 아니었다.

도전자가 많아지며 탑의 난이도가 몇 차례나 하향조정된 끝에 겨우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스으윽!

스아아악!

그런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도전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종족과 성별, 나이를 불문하고.

그들 모두 각자의 방법으로 그 거대한 해골병사들을 처리했으리라.

"그라시아?"

찰나, 그라시아의 귀로 익숙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그라시아는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로군."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

아이언 왕국의 왕, 프리드릭 왕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뒤 판게니아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가 된 그녀를 그라시아가 모를 리 만무했다.

하지만 단순히 유명해서 아는 것만은 아니다.

둘은 직접적으로 접점이 있었다.

'바알에게 패한 뒤 심연에서 만났었지.'

가장 마지막으로 본 게 '심연'에서 '바알'을 상대할 때다.

그때 그라시아는 세렝게티에게 추태를 보였다.

바알에게 패하고, 정신을 놔 버렸으니까.

-아름답구나.

-너 같은 천사가 있다면, 천국도 나쁘지 않겠군.

-그럼 지옥에 왜 천사가 있지?

세렝게티를 보고 한눈에 반한 듯이 행동하지 않았었나.

당시의 기억이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다.

··· 그래서일까?

'으음.'

좀처럼 그라시아는 세렝게티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보고 있노라면 왜인지 껄끄러웠으므로.

물론, 당시 세렝게티는 '허드슨'이 변형물약을 통해 변신한 모습이었다는 걸 그라시아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허드슨. 그리고······ 숫자가 꽤 많군.'

게다가 나타난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동료로 보이는 자들.

특히 개중에는 '허드슨'도 있었다.

미궁도시의 실질적인 운영자라든가.

오주력 란돌프를 대신해서 그곳을 이끄는 인간.

허드슨과 세렝게티의 대화로 보건대, 둘의 사이가 평범한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

그 순백의 기사가 저토록 당황하는 것을 보면.

'란돌프의 동료들인가.'

그들 모두가 바로 란돌프의 동료들이다.

이 강력한 저주를 일으킨 란돌프의 동료들이 탑을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한 명 한 명이 제법이다.

특히······ 저 아이들.

일견 평범해 보이는 소년과 소녀.

두 아이들에게서 정체 모를 불길함이 느껴진다.

그라시아가 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대도, 쉽게 대할 수가 없을 듯했다.

쉬이이익!

곧이어 다른 이들이 나타났다.

"주력들이로군."

유니온의 말에, 그라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왕을 따르는 크람델의 괴물들.

궁귀, 대토룡, 메두사, 그리고 아리아.

백왕의 딸 아리아를 비롯한 주력들이 총집합했다.

'강해졌다.'

크람델의 괴물들.

예전 그대로라면 그라시아 혼자서 저들을 모두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력들 역시 강해졌다.

그리고 주력들이 강해졌다는 건.

'백왕이 힘을 되찾았나?'

백왕이 온전한 힘을 되찾았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저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이전과 비교를 할 수가 없었다.

특히 저 반인반수의 여자.

'백왕과 같은 어금니를 갖고 있군.'

그라시아도 보자마자 알았다.

저 여자가, 아리아가 백왕의 자식이라는 걸.

다른 주력들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다.

흑왕이 세력을 불리며 강해지고 있을 때, 그들 역시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는 의미다.

그들 중 한 명.

거대한 용, 대토룡이 허드슨을 발견하곤 물었다.

"넌 허드슨이로구나. 오주력은 어디있느냐?"

"······ 대토룡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허드슨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대토룡과 허드슨은 몇 차례 안면이 있었다.

균열의 탑 1층에서 쓰러진 대토룡을 성녀 세아와 함께 치료해주기도 했고, 그 이후에도 몇 차례 접점이 있었다.

'아는 사이라면 곤란하게 됐군.'

친숙한 듯한 둘을 보며 그라시아는 조심히 검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일대 일이라면 누가됐든 이길 자신이 있으나, 숫자가 너무 많다.

유니온과 자신은 고작 둘뿐이다.

또한, 저들은 숫자만 많은 것도 아니었다.

양과 질. 모두를 만족하는 그룹들.

"오주력이 어디 있냐 물었다."

"죄송합니다만,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음. 그럴 거라 생각했다. 허나, 탑을 오르면 알게 되겠지."

"······ 쉽지 않을 겁니다."

다행히 두 파벌이 서로 호의적이지만은 않은 것 같다.

적대적으로 노려보며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

그때였다.

쉬이이익!

다시 한 번 워프가 열렸고.

대토룡은 고개를 돌려, 살기를 흩뿌렸다.

"······ 락투샤."

"··· 진짜 안 죽었었군."

오크로드이자 소드마스터인 락투샤도 인상을 구겼다.

균열의 탑.

그곳에서 만난 대토룡을 죽였다고 생각하고 흑왕에게 보고했는데, 흑왕은 대토룡이 살아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데, 진짜로 살아있는 것이다.

막상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니 어이가 없었다.

그 상처를 입고 어떻게 살아있는 걸까?

"살아돌아갈 생각은 버리거라, 락투샤."

"내가 할 말이다."

예견된 난투극이다.

하지만 나타난 건 락투샤만이 아니다.

'개미왕 페르몬.'

놈은 본 즉시, 그라시아의 전신에서 소름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불쾌하다고 해야 할까?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는 것도 싫을 만큼 역겹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허나 락투샤도, 개미왕 페르몬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이미 한 번 '칼날여왕'에게 패한 뒤 막대한 데미지를 입은 것이다.

그나마 멀쩡한 건 세 번째 나타난 자였다.

'다크엘프 로드······.'

얼굴과 전신을 검은 천으로 가린 정체불명의 존재.

이 역시 까다롭다.

"난 먼저 도전하겠다."

"······ 페르몬, 또 독단으로 행동하겠다는 거냐?"

"이런 허접한 놈들과 싸우고 있을 시간이 없다. 난 더 강한 놈과 싸울 거다. 분명히 '영원의 란돌프'라는 놈은 칼날여왕보다 강할 테지."

그 말을 끝으로.

"'개미왕 페르몬'이 '영원의 란돌프'에게 도전합니다."

슈욱!

멋대로 도전을 시작했다.

개미왕 페르몬이 사라지자, 락투샤가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락투샤가 눈을 떴을 때.

"······."

"······."

적막이 흘렀다.

하지만, 모두가 더없이 긴장하고 있었다.

란돌프의 동료들, 그라시아와 유니온, 백왕 산하의 주력들, 그리고 흑왕의 최측근들.

이들이 한데 뭉쳐 싸우면 격변이 일어날 건 자명했으니.

그러나,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재밌는 놈들이 모여있군."

"으음, 정말 투신의 탑이 이상해지고 있구나······."

제국 최강의 검, 라이가.

전 챔피언 산샤.

다시금 분위기가 뒤바뀌었다.

이제는 진짜 승리를 장담할 수가 없다.

그라시아의 손에 식은땀이 맺혔다.

저 둘의 존재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이들 모두를 긴장케 했다.

그리고.

슈우욱!

"아아아, 여신이시여! 여신의 인도를 받는 분이시여! 여신의 총애를 받는 분이시여! 어디 계십니까?! 저 아론이 왔습니다!!!"

······ 저놈은 또 뭐냐.

*

개미왕 페르몬은 다른 이들과 경쟁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저, 보고 싶은 것이다.

더 강한 자들을 마주하고 싸우고 싶은 것이었다.

비록 칼날여왕을 이길 수는 없었으나.

'나는 그 한 번의 싸움으로 더 강해졌다.'

페르몬은 강해졌다.

더욱이 강한 상대와 싸울수록 페르몬은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져 갔다.

이대로면 충분히 칼날여왕과 다시 싸운대도 5할의 승률은 가져갈 수 있으리라.

이길 수 있다.

계속해서 강해지기만 한다면, 그 누구라도 꺾을 수 있다!

"······? 네가 란돌프냐?"

곧이어, 개미왕 페르몬의 앞으로 한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인간이었다.

딱히 강해 보이진 않는다.

도리어 칼날여왕이 더 강할 것 같았다.

'별로 배울 것도 없겠군.'

페르몬은 내심 실망했다.

칼날여왕에 비하면 란돌프는 진정으로 볼품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페르몬은 단말마를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어?"

콰드득!

무언가가, 깨지고 있다.

부서지고 있다.

파괴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물질적인 게 아니다.

자신의 육체나, 기운 따위도 아니었다.

쩌어어억!

그런데도 확실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육체나 마력보다도 더욱 중요한 게.

존재의 격을 나타내는 지표이자, 자신의 증명과도 같은 것이.

"어어어?"

페르몬은 당황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던 탓이다.

란돌프가 행하고 있는 것은 페르몬에게 그야말로 불가해 그 자체였다.

하지만 당황하고 있는 사이에도, 파괴행위는 계속해서 일어났다.

그리고 머지않아.

"뭐, 뭐냐······!"

사라졌다.

완전하게, 모습을 감췄다.

이처럼 무력했던 적이 또 있을까.

이에 페르몬은 온몸을 움츠리며, 란돌프를 향해 두려운 목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었다.

"내, 내 '신비'를 어떻게 파괴한 거냐······!!"

신비의 제왕

신비(神祕).

게임에서 캐릭터를 키울 때 일정 자격에 도달하면 획득하는 '이펙트(effect)'다.

비슷한 말로는 특수효과, 오라 등이 있다.

간혹 '위광'이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하며, 그 이름처럼 캐릭터의 위엄과 권위를 나타내는 증명인 셈이다.

하지만 인간의 신비와 괴물의 신비는 그 중요도가 사뭇 다르다.

인간의 신비는 추가적인 능력보다 '외관'에 치중되어 있다.

더 휘황찬란하게 그 사람을 표현하는 데 집중됐다.

허나, 괴물의 신비는 그 괴물이 일생 간 쌓아온 '격'과 다름이 없다.

신비 자체가 중요한 능력과 연관되거나, 생명 혹은 무력과 연결이 된다.

심한 경우 존재의 모든 것을 신비에 담아두는 괴물도 있었다.

신비를 끄고, 켤 때 극적으로 달라지는 괴물들.

예컨대 가장 극적으로 신비를 사용하는 종족은 '요정'이다.

그리고.

"아, 아아······ 안 돼······!"

개미왕 페르몬의 신비.

그건 페르몬의 존재의 의의 그 자체였기에.

페르몬은 전신을 떨며 두려워했다.

"다, 다시 돌아갈 순 없다. 나는··· 나는 왕이니라······!"

개미의 왕.

그 이름과 관계된 신비일까?

허나, 그저 왕의 신비가 파괴된 것이라면 다시 쟁취하면 그만이다.

페르몬은 단순한 자격의 상실 때문에 이 정도로 두려워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보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

절대로 잃어선 안 되는 페르몬의 근원이 파괴된 탓이다.

꾸르르륵!

동시에 페르몬의 전신이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부풀기 시작했다.

"대체 어떻게 '은혜'를······!"

신비로 입혀진 은혜.

히든 특성 돌연변이!

흑왕의 가장 위대한 능력인 '은혜 입히기'는 바로 신비를 주입하는 것이다.

신비에 '히든 특성'을 넣어 상대에게 입히는 게 그의 주능력이었다.

당연히 '히든 특성'을 담은 신비는 유일급으로 지정되어 절대로 파괴할 수 없다.

유일등급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은 이 세계에 없으니까.

······ 한데.

페르몬의 두 눈이 '영원의 란돌프'에게로 향한다.

란돌프.

투신의 탑에 존재하는 최종 보스이자, 다섯 개의 별을 거머쥔자.

처음에는 그가 페이즈 3으로 마침내 등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틀렸다.

상대의 실체를 파악한 페르몬은 그제야 이 현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

"넌··· 넌 인간이 아니로구나. 네놈은······ '신비'······!"

유일등급을 뛰어넘는.

'영원의 란돌프'라는 이름을 지닌, '규격외'의 신비라는 걸.

신비가 실체를 가지고 형상화한 것이다.

마치 요정처럼.

요정은 자신의 모든 격을 신비에 넣어두니까.

그러나 란돌프는 요정이 아니다.

고로, 저게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다.

'저건 란돌프······의 일부에 지나지 않다.'

덜덜덜덜!

온 몸이 떨린다.

두렵다.

무섭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페르몬은 '공포'를 느꼈다.

지능을 갖고 '절망'을 마주했을 때와는 결이 다른 공포다.

그때도 무력했으나 도리어 뛰어넘어주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하지만 지금의 페르몬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미래를 향한 의지조차 피워내는 게 불가능했다.

항거할 수 없는, 절대적인 공포.

'신비를 파괴하는 신비라니! 저런 신비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신비는 자격이다.

일생을 일구어온 자격을 누군가가 강제로 파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그것은 분명히.

'신비의 제왕······.'

지금, 페르몬의 눈앞에 있는 저것은 모든 신비의 위에 존재하는 지배자였다.

신비의 위에 군림하는 제왕의 신비.

오직 제왕만이 모든 자격을 파괴할 수 있을지니.

··· 자격을 부여하는 흑왕이 제왕이라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아니었던 것이다.

한데, 저 제왕의 신비조차, 유일등급의 '신비'를 파괴하는 것조차 란돌프의 일부일 뿐이다.

사흉 바알, 칼날용신, 그리고 신비파괴자!

이 뒤에 나타나는 건 그럼 무엇이란 말인가?

이놈은, 란돌프는, 흑왕의 천적이다.

하늘이라 생각했던 흑왕의 능력은 란돌프의 '신비 파괴' 앞에 무력할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흑왕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대비하기 위해선 전해야 하지만, 전할 수 없다.

'퇴화한다.'

더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언어 자체를 잊었다.

시력이 감퇴되고, 점차 본능만이 남아간다.

예전의 하찮기 그지없던 개미로 돌아가는 것이다.

'싫다.'

싫다.

싫다······!

"'개미왕 페르몬'이 패배했습니다."

"'영원의 란돌프'의 남은 체력 100%"

"'지배의 저주'가 중첩됩니다."

"'지배의 저주'가 발동합니다."

"'개미왕 페르몬'이 '영원의 란돌프'에게 지배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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