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국, 선택해야만 했다.
이대로 가만히 이곳에 표류할 것이냐.
아니면 죽이되든 밥이 되든 일단 올라볼 것이냐.
사실 선택은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지만.
'오른다.'
오르기로 했다.
이 탑의 정상에.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저, 의도치 않은, 장애물 아닌 장애물이 나타났을 따름이었다.
란돌프의 육체가 30층에 있다.
탑이 란돌프를 강제로 소환한 것이다.
그리고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아마도 '나'에 의한 문제일 터였다.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지금은 용신이 된 그 녀석.
광룡 아인하사르가 란돌프를 소환하지 못한건 어찌됐든 '나의 영혼'이 그곳에 머물러 있었던 탓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나는 나를, 박현명을 움직이고 있다.
내 영혼은 하나다.
반면 움직일 수 있는 몸은 두 개였다.
하나를 움직이면 하나가 비게 되어있고, 영혼이 깃들지 않은 육체는 무방비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수호벽과 같은 이권으로 누군가의 공격은 막을 수 있지만, 챔피언의 의무를 위한 탑의 소환까지 막아주진 못하는 이유다.
머리가 터질 정도로 고민해봐도 그 이유 외엔 도저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 이 시련 자체는 너무나도 쉽지.'
그리고 산샤가 내린 시련은, 내게 너무나도 쉬운 문제였다.
특히 '신검합일'을 선택하면 더욱 쉬워졌다.
회피불가의 공격.
말인 즉, 무조건 상대에게 '타격'을 입히는 기술.
'나를 죽이면 산샤도 죽는다.'
하지만 내게는 그러한 '타격'을 반사하는 절대적인 능력이 있었다.
바로.
'태고의 갑옷을 착용하고 있는 한, 산샤는 신검합일로 나를 공격하지 못해.'
태고의 갑옷에 새겨진 물리 내성 50%와 함께 물리 피해를 210% 반사하는 옵션.
신검합일로 나를 공격하는 순간, 산샤는 죽는다.
그것을 '신검합일'을 사용하자마자 본능적으로 깨닫고 산샤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한 것이다.
시련을, 사명을 이어가야만 하는 존재가 다른 도전자들을 남겨두고 같이 동귀어진 할 수는 없지 않나.
그렇게 16층의 시련을 완료하고 17층으로 올라선 순간이었다.
"투신의 탑 16층 '산샤의 시련(1)'을 완료했습니다."
"업적 '고대의 악마 산샤의 시련을 최초로 이겨낸 자'를 달성했습니다."
"전승의 규격이 일정 수치를 넘어 한 단계 초월합니다."
"'위대한 전승'이 완전히 새로운 전승을 만들어냅니다."
"'파괴자', '워록', '천마', '성휘를 지우는 자', '디스트로이어'의 히든 클래스가 조합되고 초월하며 '파멸의 왕'으로 격상했습니다."
"히든클래스 '파멸의 왕'을 계승하시겠습니까?"
위대한 전승에 의한 히든 클래스의 계승!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일이건만.
'······ 히든 클래스가 초월했다?'
광신도
아드리움의 현.
그가 17층으로 이동한 직후.
"··· 신검합일이라며? 검은 휘두르지도 않았는데?"
"아무것도 안 했는데 합격이라고?"
모두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둘 다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합격이라니?
"······."
하지만 산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의 궁금증을 해결해줘야하는 의무도 없거니와, 산샤 또한 이러한 상황을 상정하지 못한 탓이다.
신검합일이 발동되고, 검을 겨눈 순간.
산샤는 알았다.
'휘두르면 죽는다.'
이 검이 휘둘러짐과 동시에 자신도 죽으리라는 걸.
신검합일은 상대를 '반드시' 타격하는 기술이다.
거기에 무조건 '치명상'을 입힌다.
검이 맞지 않아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게 가능한 고유기술.
한 마디로 신검합일은 강화된 의념을 실체화하는 것이다.
검을 뻗어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힌다는 생각 그 자체가 검기로 발현되게끔 만드는 일종의 '심검(心劍)'인 셈이었다.
그런데······ 심검합일을 펼치자, 산샤의 사고는 순간 정지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오로지 한 가지뿐이었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그에게 검을 뻗어 치명상을 입히면, 그 타격은 배가 되어 돌아와 자신을 즉사시킬 것이다.
'물리적인 피해를 배로 반사하는 능력······ 그런게 이 세상에 존재한단 말인가?'
반사의 개념을 가진 기술이나 장비는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결단코 '입은 피해' 이상의 반사를 시킬 수는 없다.
애초에 반사라고 이름 붙였지만 '공유'에 가까운 것이다.
기껏해야 고통을 공유하고, 피해를 공유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는 달랐다.
하여, 산샤는 움직일 수 없었다.
공격은커녕 합격을 말하며 검을 회수한 이유다.
······ 그리고 어쩌면 이게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건 빌헬름과 란돌프를 상대했을 때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이다······.'
산샤는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두 손이, 흐느끼듯 잘게 떨리고 있다.
본능적으로 더없이 강렬한 죽음의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다.
빌헬름과 란돌프를 상대할 때도 경외감은 느꼈으나 이런 '즉사의 공포'를 느껴본 적은 없건만.
산샤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이게 살아있다는 감각인가.'
··· 미소를 지으며, 산샤는 흥분했다.
살아있다.
질투의 악마에게 지배받았을 때와는 다르다.
그때는 살아도 죽어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역시 '탑의 시련'으로 되살아난 게 정답인 모양이다.
시작하자마자 이렇게 재밌는 놈을 만나게 될 줄이야.
'나는 더 강해질 수 있다.'
비로소 확신했다.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는 건 자신이 더 강해질 수 있다는 방증이었다.
그리하여 다시 란돌프에게 도전하리라.
도전해서 승리하리라!
고로, 아직 끝이 아니다.
진정한 시련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
파멸의 왕.
앞선 히든 클래스의 전승들이 합쳐지고 격상하며 만들어진 완전히 새로운 이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지고의 검성 클래스를 얻을 때와 비슷하군.'
심연미궁에서 모든 시련을 얻어낸 결과 나는 히든 클래스 '지고의 검성'을 거머쥘 수 있었다.
육각의 용사 라일리와, 지고룡의 시련 모두를 이겨내면서 말이다.
계속해서 클래스의 격상을 이뤄내며 마침내 완성한 히든 클래스였다.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시작점이지.'
당시엔 일반 클래스를 끊임없이 격상시켜 겨우 히든 클래스로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히든 클래스부터 시작한다.
게다가 그 이상의 진화마저 가능하다.
만약 천마나 다른 클래스를 그냥 계승했다면 땅을 치고 후회했으리라.
'어차피 올라야한다면.'
나는 시선을 위로 올렸다.
탑의 끝.
한 번 오르기 시작한 이상, 멈출 수 없다.
"'란돌프'의 존재가 조금 더 선명해집니다."
"'박현명'의 존재감이 흐릿해집니다."
······ 비록 탑을 오를수록 몸이 더 움직이지 않게 되더라도.
육신 전체가 마비되는 한이 있더라도.
'끝을 본다.'
항상 그래왔으니까.
중간에 멈출 것이라면 시작도 안했을 테니까.
물론 당장이라도 얻고 싶다.
탐나지 않는다면 거짓일 것이다.
파멸의 왕.
이름부터 전율스럽지 않은가.
클래스의 이름은 곧 증명이다.
그리고 그 증명의 이름은 일반적이지 않을수록 격이 높은 법이었다.
별의 계승자, 지고의 검성처럼.
그러할진대 '파멸의 왕'이라.
클래스에 '파멸'이라는 단어가 붙은 것부터가 심상치 않다.
그런 단어가 붙어있는 클래스는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결코 이게 '끝'은 아닐 터.
'파멸의 왕은 시작일 뿐이지.'
진화할 수 있다는 걸 안 이상,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시작부터 이 정도의 이름이라면, 과연 끝에 도달했을 때 어떤 이름이 튀어나올지 심장이 아플 정도로 기대됐다.
휘이이잉!
그때였다.
바로 옆에서 워프가 열리며 한 남자가 나타났다.
유심히 지켜보자, 워프에서 튀어나온 인물이 왜인지 낯이 익었다.
"아아, 여신이시여!"
······ 광신도 아론.
대체 어떻게 통과한 거지?
그 이유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힘줄이란 힘줄은 죄다 잘리고, 몸은 움직이지 못할 만큼 쇄약해져 있다.
말 그대로 죽기 직전의 상태.
그래서일까.
아론은 워프를 넘어오자마자 기절했다.
'자기희생 기도문을 외웠군.'
기절한 아론을 보며 생각했다.
산샤의 기술을 막거나 피하는 방법.
그중 하나는 스스로를 약화시켜 산샤도 똑같은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아론은 죽음을 각오하고 자기희생주문을 외웠다.
그 결과, 산샤의 시련을 통과할 수 있었다.
······ 말이 쉽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휘잉!
휘이이잉!
이후로도 하나, 둘 합격자가 워프를 타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 속도가 점차 가속화되더니 순식간에 100명을 채웠다.
"투신의 탑 17층에 온걸 환영한다."
101번째 등장자는 산샤였다.
스으윽!
곧이어 산샤의 주변으로 붉은 원이 그려졌다.
"17층은 16층과 반대다. 도전자의 기술을 내가 막는다. 그래서 내가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거나, 이 원을 벗어나게 하면 합격이다."
방어가 아닌 공격.
대처할 필요가 없으니 훨씬 쉽다.
그때 한 남자가 물었다.
"오로지 막기만 하는 건가?"
"그렇다. 나는 막기만 한다."
"··· 대단한 자신감이로군."
혹시 모를 확인도 끝났다.
방어일변도라.
도리어 16층보다 쉬운 시련이다.
"실패하면 어떻게 되지? 바로 탈락인가?"
"즉시 탈락은 아니다."
"즉시 탈락이 아니라면?"
"한 시간."
"······?"
"한 시간 내로 합격자가 나오지 않는다면, 나는 이 원을 스스로 벗어날 것이다."
"그 말은······ 스스로 벗어나, 우리와 싸우겠다는 거냐?"
"아아. 너희 전원과 나. 둘 중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운다. 이해가 됐나?"
"만약 한 명이라도 합격하면······."
"전원 통과."
전부 통과하거나,
혹은 전부 죽거나.
17층의 시련은 둘중 하나로만 귀결된다.
예외는 없다.
하지만, 진정으로 미친 자신감이었다.
오만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다.
한 시간 내로 계속해서 도전하면 산샤도 지칠 터.
한 발자국 정도는 쉬이 움직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방법은 상관 없겠지?"
"당연한 소리를 묻는군. 이곳은 투기장이다. 승리를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라."
모든 방법이 허용된다.
그저, 한 발자국만 움직이게 하라.
그러나 근본없는 만용은 아니었다.
'산샤는 16층에서 이미 우리의 능력을 모두 봤다.'
진정한 고수는 한 합만 겨루어도 상대를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산샤는 16층에서 이미 이곳에 있는 전원과 마주했다.
능력을 보고, 겪으며, 결론을 내린 것이다.
자신이 패배할 리 없다고.
60분동안 계속되는 공격에도 끄떡하지 않을 자신이 있노라고!
"······ 그럼 내가 먼저하지."
짜증 섞인 목소리로 태양의 기사 한체스가 나섰다.
초월자임과 동시에 강력한 대회 우승후보였던 자.
이곳에 모인 도전자 중에 능히 세 손가락안에 들어가는 강자다.
화르륵!
그의 검이 뜨겁게 타올랐다.
"그 자신감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보마."
한체스가 검을 뻗었다.
동시에.
그오오오-!
산샤의 머리 위로 작은 태양이 떠올랐다.
그 작은 태양에서 쏟아진 빛이 한점으로 모이더니 이내 산샤를 태우고, 녹일 정도로 강력한 열을 발산했다.
"내 태양이 태우지 못하는 것은 없다. 움직이지 않으면 흔적도 남지 않고 소멸할 것이다."
"음, 뜨겁긴 하군."
"······?"
하지만 이어진 산샤의 반응에 한체스는 이맛살을 구겼다.
그는 마치 일광욕이라도 하듯 눈을 감고 태양의 빛과 열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멀쩡하진 않다.
치이익!
조금씩 타들어가고는 있다.
문제는 정말로 '조금씩' 타들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대로 산샤를 모조리 태우려면 족히 하루는 더 걸릴 것 같았다.
"······ 내 검에 깃들어라, 피닉스."
까아악!
작은 태양의 모양이 불의 새, 피닉스로 모습을 바꿨다.
이어 피닉스가 한체스의 검에 흡수되듯 빨려들어가자.
화아아아아악!
검에서 솟아난 불길과 함께 엄청난 열기가 17층을 가득 채웠다.
"뜨, 뜨거워!"
"아악! 타, 탄다······!"
사람들이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체스가 산샤를 향해 내달렸다.
촤앙!
산샤는 검을 들어 피닉스가 깃든 한체스의 일격을 가볍게 막았다.
챙! 챙! 채엥!
끊임없이 달라붙었지만 산샤는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모든 움직임이 읽히고 있는 것만 같다.
"···!"
한체스가 이를 악물었다.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태양의 기사라 불리며 수많은 기사의 귀감이 되었던 그다.
그런 그가 한 발자국도 못 물릴 줄이야.
이만한 실력 차이라니.
"언제까지 싸울 거야?"
"벌써 30분이나 지났다고!"
30분이 훨씬 지난 시점.
'빌어먹을······!'
한체스는 절망하고 있었다.
30분이 넘어가도록 검을 휘둘렀지만 산샤는 원 안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으므로.
툭!
결국 한체스는 검을 놓았다.
"허억! 허억!"
전신에서 흘러내리는 땀이 어느새 웅덩이를 이룰 정도였다.
'이길 수······ 없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을 듯했다.
산샤.
놈은 지치지 않는 괴물이다.
아무리 실력차가 압도적이라지만, 땀 한 방을 흘리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벽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젠장할! 다음은 나다!"
마음이 급해진 도전자들이 빠르게 나섰다.
하지만 달라질 건 없었다.
원거리에서 폭발하는 물약을 던지거나, 독을 풀기도 해봤지만 산샤는 멀쩡했다.
진정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라지 않았음에도 통하지 않는다.
"대체 뭐냐고······!"
"놈은 무적인가?"
그렇게 시간은 어느덧 50분을 지났다.
남은 시간이 채 10분도 남지 않은 상황.
그러자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나에게로 쏠렸다.
'다리가 안 움직인다.'
하지만 나도 나서고 싶지 않아서 나서지 않은 게 아니다.
운명의 역설.
층을 오를수록 내 몸도 정상과는 멀어졌다.
고작 17층임에도 불구하고 왼쪽 팔과 양쪽 다리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으음······."
그 찰나.
기절한 아론이 정신을 차렸다.
나는 즉시 아론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론."
"여기가··· 아! 여신의 의지를 전하는 분이시여. 저를 부르셨습니까?"
아론은 만신창이가 되었음에도 내 부름에 온힘을 다해 반응했다.
··· 다행이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내가 움직일 방법이 딱 한 가지 있기는 있었다.
"나를 '추앙'하거라."
"예······?"
"추앙의 기도문을 외워라."
그건 바로 추앙의 기도문.
그러나 여신이 아닌 자에게 추앙의 기도문을 외우는 건, 여신교의 금기다.
그래서 문제였다.
아무리 나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고는 해도 여신교의 신자라면 당연히 망설일 수밖에 없는······.
"기꺼이!!!"
······ 정말 단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아론이 추앙의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휘아앙!
빛이 나를 감싼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한 빛이.
아론은 남은 생명력과 신성력 한 톨까지 모조리 뽑아다가 쓰고 있었다.
자기희생 주문.
무려 자신의 죽음을 담보로 한 추앙의 기도문!
'움직인다.'
그러자 몸이 조금씩, 움직였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도전하겠나?"
산샤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16층에선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나, 17층은 서로 입장이 바뀌었다.
과연 여기서도 자신을 당황케 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이다.
설욕을 갚아주겠다는 강한 의지마저 느껴졌다.
"도전하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미소 지었다.
··· 탑의 정상으로 향할 수 있는 길이, 지금 막 보였으니까.
이 시련의 필승법 역시도 말이다.
[히든 등급 탈리스만 '천재지변'의 능력이 발현됩니다!]
쿠르르르릉-!
천재지변
'내 이름을 불러주셨어!'
아론이 전신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격한 감정이 솟구치는 걸 주체할 수가 없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두 여신을 목도한 이후.
아론의 사상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기적이었으니까.
썩어가던 사지가 다시 붙고, 말라버린 신성력이 돌아온 게 부가적으로 보일 만큼 아론의 인생에서 그만큼이나 충격적인 일은 단언하건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선택받았다!'
이것이 신의 계시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비록 천덕꾸러기, 악동의 취급을 받았으나 어찌 됐든 아론은 태어날 때부터 여신을 따르는 신도였다.
하지만 직접 여신을 마주한 적 없었다.
그 누구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심지어 여신과 직접 소통한다는 교황 성하마저도 거짓이라 생각했다.
여신교가 행하는 건 여신 비즈니스.
여신 사업과 다를 게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분께선, 오직 저분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여신의 사랑을 받으시는 분이시다! 그러니 저분의 선택은 여신의 선택과 다를 게 없어. 나는 구원받았다···!'
죄를 사하고,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 순간 두 여신이 자신을 향해 미소 지었다.
진정한 구원이다.
이게 구원이 아니라면, 무엇이 구원이겠는가!
그러니, 마땅히 그에 걸맞은 응답을 보여야만 한다.
추앙의 기도문?
저분께서 곧 여신이실진대 외우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기뻐하며 외치리라.
오히려 부족하다.
자신의 헌신을 보이려거든.
아론은 목숨을 바쳐 다시금 자신을 버렸다.
그 순간.
"기적이다···!"
아론은 기적을 마주했다.
*
쿠릉! 콰르르릉!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도전을 말하자마자.
탑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산샤는 인상을 구겼다.
'탑 자체를 뒤흔드는 힘. 카라스는 아닐진대······.'
투신 카라스에 의한 현상은 아니다.
이 모든 흔들림의 근원은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였다.
하지만 산샤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대체 뭘 하려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무엇이 됐든 소용없다.
무슨 짓을 해도, 지금 이곳에 있는 자신을 움직이는 건 불가능할 테니.
'위치고정. 이 자리에 있는한 나는 무적이다.'
애초에 실패를 염두에 둔 시련이다.
또한, 이는 산샤가 직접 도전자들을 상대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는 시련치고는 너무나도 강했고, 직접 도전자들과 싸우는 건 격이 맞지 않다.
하여 탑 자체가 그가 도전자들과 부딪히지 못하게끔 제약을 걸어놓은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우회하면 그만이었다.
제법 그럴싸한 시련을 던져주고, 실패하면 자신이 직접 나설 수 있게끔.
백만분의 일의 성공확률이라도 있으면 시련으로 인정되니까.
'신의 방패 이지스(Aegis).'
그것을 위한 방패다.
산샤는 한계를 넘어섰고 초월하며 한 가지 권능을 거머쥐었다.
죽음에서 돌아온 그가 얻은 절대적인 방패, 이지스!
고정된 위치에 있으면 모든 능력치를 방어로 전환할 수 있다.
절대로 뚫리지 않는다.
무너지지 않는다.
무적(無敵)이다.
'느껴보거라. 벽을.'
도전자들이 결코 넘어서지 못하는 벽.
16층에서 자신을 당황케 했을지는 몰라도 이번엔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자신이 느꼈던 그 기분을, 녀석도 맛보았으면 했다.
이후 시련이 실패하면 직접 녀석을 상대해줄 생각이었다.
모든 도전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후.
'란돌프.'
······ 산샤는 그에게 다시 도전하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다.
탑에서 되살아나 '시련'이 된 건 오직 그것만을 위해서였다.
다시 한 번, 제대로 싸우고 싶다.
그때의 벅찬 기분을 재차 맛보고 싶다.
질투의 악마가 아닌 지금의 상태로 란돌프를, 빌헬름을 마주하고 싶었다.
"음······?"
하지만.
한 번 흔들리기 시작한 탑은, 더 크게 균열을 만들기 시작했다.
쩌적!
쩌저적!
바닥이 갈라지고, 모든 게 '붕괴'해간다.
이상하다.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붕괴한 것들이 다시 재생되지 않았다.
하지만 탑은 자동적으로 수복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심지어 이곳엔 투신 카라스가 온전한 신격을 되찾고 주인으로 있지 않은가.
탑을 관리하는 관리자도 있을진대, 어떻게 탑을 무너트린단 말인가!
신격이 있는 탑은 무너트릴 수 없다.
설령 신격을 죽여도 '시련'의 일부로서 자체 작동하는 게 탑이었다.
그런 탑을 무너트린다고?
'탑 전체가 무너지는 게 아니다.'
산샤는 문제점을 정확히 포착했다.
탑이 아니다.
이 층이, 정확히 17층의 '시련'이 붕괴하고 있다.
"무슨 짓을······!"
산샤는 이 현상을 일으킨 게 다름 아닌 자신을 마주한 '남자'라고 확신했다.
16층에서도 알 수 없는 '즉사의 공포'를 일으키더니, 이번에도 제대로 시련을 마주하지 않고 수작을 부리는 것이다.
모든 도전자 중 유일하게 속을 알 수 없는 놈.
시련을 내줬더니 층 전체를 박살 내 버릴 줄이야!
"어, 어어!"
"무, 무너진다!"
"갑자기 이게 뭔······!"
쿠르르릉!
무너진다.
꺼지고, 떨어진다.
어이가 없었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와중.
'녀석'이 미소 짓는 걸 바라보며, 산샤는 말했다.
"··· 합격이다."
이제는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도리어.
······ 도저히 무슨 짓을 할지 예상을 할 수가 없어서, 다음엔 어떤 기현상을 보여줄지 기대마저 될 지경이었다.
*
'됐다.'
떨어지는 산샤를 바라보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움직이게 만들거나, 원 밖으로 나오게 하는 산샤의 시련.
즉, 원 자체를 사라지게 만들면 그만이다.
히든 등급 탈리스만 '천재지변'은 주변의 모든 영역을 '절대붕괴'시킨다.
설령 그것이 시련으로 고정된 던전이나 탑이라 할지라도.
'황금률 상점을 싹 쓸어서 히든 탈리스만 큐브로 조합했지.'
저 조합을 만든 건 우연이었다.
무한 새로고침과 함께 황금률 상점에서 쓸만한 탈리스만을 싹쓸이하고, 큐브에 넣던 도중 갑자기 큐브가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혹시 몰라 조합한 게 히든 등급으로 완성됐다.
[천재지변 탈리스만(히든)]
-태고의 갑옷에 장착되어 능력이 1.5배 증폭된 상태
-불가피한 현상
-절대적인 영역 붕괴
-붕괴의 범위는 마력에 비례
-재충전 시간 15일
옵션은 이게 전부다.
하지만 이만한 설명이면 충분했다.
절대 영역을 부수는 힘.
설령 그게 성역일지라도, 권능에 의해 펼쳐진 영역일지라도, 던전이나 탑이라 할지라도 파괴하고 부숴버린다.
농담이 아니라 이건 진짜 엄청난 것이다.
신비 파괴와 비슷한 능력이다.
하지만 비슷하면서도 약간은 달랐다.
'성도의 결계를 파괴하면 란돌프를 막아서는 모든 게 상쇄되겠지.'
성도 아드리움에 걸린 여신의 결계.
신비 파괴로도 그 결계를 없앨 수는 없다.
하지만 '천재지변' 탈리스만이 있으면 인간이 아닌 자를 잡아내는 그 무적의 결계조차 파괴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파괴되는 순간 눈치채긴 하겠지만,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어떠한 영역에 펼쳐진 결계도 다 부숴버릴 수 있는 능력.
잘만 이용하면 결계로 숨겨진 보물 던전 따위를 찾아내는 건 일도 아닐 터.
뿐만인가.
'··· 엄청나군.'
그 위력을 눈앞에서 보고 있자니, 나조차도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17층 전체가 무너지고 있다.
만약 적진에서 사용하면 그 순간 적들은 궤멸을 면치 못하리라.
이 정도면 웬만한 전술핵 못지않다.
······ 문제는 나도 같이 빨려들어간다는 건데.
'어디까지 빨려들어가는 거지?'
이건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17층에서 떨어지면 16층 아닌가?
하지만 밑도 끝도 없이 떨어지고 있다.
합격했으니 자동으로 18층에 이동될 줄 알았건만.
휘잉!
휘이이잉!
그런 내 생각에 반응하듯 곳곳에 워프가 나타났다.
"워프다!"
"살았어!"
떨어지던 이들이 하나, 둘 워프로 들어가며 강제 이동 처리 되었다.
무너지던 균열도 천천히 채워지는 중이었다.
탑이 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시련에 합격한 이들이 18층으로 이동되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주변의 모든 이가 워프로 이동됐다.
이제 내 차례인가 싶었건만.
······ 아무리 기다려도, 워프가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계속해서 떨어지고만 있었다.
밑으로.
끝없이 밑으로.
*
까악?
까악!
꺼지는 17층을 바라보며 까마귀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재의 일족들.
투신 카라스를 신으로 모시는 까마귀들!
흉의 일족과 달리, 재의 일족은 탑을 관리하는 권한과 능력이 없었다.
그들은 재앙과 죽음, 그리고 시련을 관장하는 까마귀들.
까악!
까아악!!
하여 재의 일족은 이내 안절부절못했다.
어떡하지?
투신 카라스는 자리를 비웠다.
의아함을 느끼고 30층으로 향한 카라스는 한참이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17층이 무너지게 놔뒀다간 탑 전체에 영향이 갈 것이다.
"까악! 까악!"
그때였다.
뒤뚱! 뒤뚱!
뒤룩뒤룩 살이 찐, 인간의 아이만 한 커다란 까마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까악!
까악!
까아아아악!
재의 일족들은 그 까마귀를 보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드디어 왔구나!
흉의 일족.
바로 이 탑을 관리하는 관리자였으니!
아마도 챔피언인 란돌프가 소환될 때 흉의 일족도 같이 소환된 모양이었다.
"까악!"
내게 맡겨라!
흉의 일족 까마귀가 날개로 가슴을 쳤다.
이어 자신감 있게 무너지는 17층을 수복시켰다.
슈웅!
슈아아앙!
균열을 메꾸고, 천장을 복원한다.
빠르게 17층은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갔다.
짝짝짝!
재의 일족들이 손뼉을 쳤다.
역시 흉의 일족.
탑의 관리는 흉의 일족이 최고다.
까악?
그때 한 재의 일족 까마귀가 의문을 던졌다.
떨어진 탑의 도전자 중에 한 명이 없는데?
"까악?"
흉의 일족은 눈을 깜빡거렸다.
수복하며 분명히 도전자들도 원상복구 시켰다.
그런데 한 명이 없다고?
까악!
까악!
까아아악!
그 순간 재의 일족 까마귀들이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큰일 났다!
진짜 큰일이야!
층의 '틈' 사이로 들어갔나 봐!
순간 흉의 일족 까마귀가 돌처럼 굳어버렸다.
층의 '틈' 사이.
심연도, 지상도, 천상조차도 아닌 완전히 다른 세계가 바로 그곳이었으니까.
허나 층의 '틈'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는 오직 '흉왕'만이 알고 있었다.
-'층의 틈'은 오직 우리 흉의 일족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관리자는 절대로 '층의 틈'을 들여다봐선 안 된다.
-당연히 들어가서도 안 되고, 누군가를 들여서도 안 된다.
-이는 흉의 일족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절대 규율이다!
-세계가 망하는 일이 있더라도, 절대로 안 돼!
탑의 관리자가 지켜야 할 절대 규율.
역대 모든 흉왕들이 신신당부한 약속!
만약 도전자 중 한 명이 그 '틈'으로 들어간 것이라면?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관리자의 규율을 자신이 깬 것이다.
···큰일 났다.
일생일대의 위기.
"까, 까악······?"
어, 어떡하지?
흉의 일족 까마귀가 사색이 된 채 몸을 벌벌 떨었다.
*
얼마나 떨어진 걸까.
하루? 이틀?
······ 모르겠다.
확실한 건 시간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 끊임없이 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17층에서 16층으로 떨어지는 것치곤 너무나도 긴 시간 나는 추락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시간의 개념마저 모호해질 때 즈음.
화아악!
갑자기 빛이 번져갔다.
영역 전체가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나도 강렬한 빛에,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여긴 또 어디야?'
세상은 모든 게 바뀌어 있었고.
-고오오오오.
눈앞엔, 하늘 끝에 닿을 듯이 거대한 두 마리의 까마귀가 있었다.
흉의 신, 재의 신
기적이다!
아론은 눈물을 흘렸다.
이건 도저히 기적이라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가 없었으니까.
'역시 여신의 총애를 받으시는 분······!'
탑을 붕괴시켰다.
강제로 산샤를 움직이게 했다.
하지만 아론은 그보다 자신에게 들이닥친 '기적'에 더욱 감동하는 중이었다.
'신성력이··· 한계를 넘어섰다.'
화아아악!
아론을 감싼 강렬한 신성력의 빛.
한계를 넘어섰다는 증명이다.
두 번의 자기희생 주문.
그리고 추앙의 기도문!
목숨을 바쳐 외웠을 뿐일진대 이런 하해와 같은 은혜라니.
'여신의 의지가 내게 닿은 것이다!'
여신께서 자신의 기도에 반응하신 게다.
형용할 수 없는 벅찬 기분에 아론은 온몸을 잘게 떨어댔다.
그도 그럴 게, 1년이 한참 넘도록 여신교는 정체되어있었다.
한계를 넘어 더 강한 신성을 획득하는 이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여신의 선택을 받는 아이도 태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여신의 가호가 더 이상 여신교와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신의 총애가 옮겨 갔을 뿐! 가호가 사라진 건 아니었어!'
허나 아니었다.
그저 여신교에서 그분에게로, 아드리움의 '현'에게로 옮겨갔을 뿐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이 세계에서 오직 자신만이 안다.
교황조차도 모르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더 많은 총애를! 더 많은 은혜를······!"
그분의 제1 사도가 되어 더 강한 총애를 얻으리라.
18층.
비록 그분께선 자취를 감추셨지만, 괜찮다.
위로 올라가면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으므로.
대회?
제국과 여신교의 관계?
이제는 안중에도 없다.
그딴 건 일말의 관심조차 없어진 지 오래다.
"모든 영광을 바치겠나이다!"
정상에 올라 모든 영광을 오롯이 그분에게 바치리라.
오직 그것만을 위해 아론은 탑을 오르기 시작했다.
*
황무지.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거친 땅의 위에 마치 탑처럼 솟아있는 두 거대 까마귀.
-형편없는 놈!
-모자란 놈!
-약해빠진 놈!
-그건 너다!
쿠웅-!
두 거대 까마귀는 느닷없이 몸을 부딪히고 육탄전을 시작했다.
단순히 부딪힌 것만으로도 세계가 흔들린다.
'여긴······.'
두 까마귀를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17층을 붕괴시키고, 시간의 개념이 사라질 정도로 오랫동안 떨어졌다.
그리하여 도착한 이곳은 탑도, 판게니아도, 그렇다고 심연도 아닌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완전히 다른 세계라고 확신한 이유는 별 게 아니다.
'태양이 두 개다.'
태양이 두 개인 세계는 나도 처음 봤으니까.
게다가 두 태양은 생김새가 완전히 달랐다.
'하나는 검은색의 태양, 또 다른 하나는 피처럼 붉은색의 태양.'
검은색의 태양은 왜인지 눈에 익었다.
'끔찍한 흉조'가 되어 도사 까마귀들을 소환해, 바알을 죽이기 직전까지 몰아붙인 적이 있지 않나.
그때 '도사 까마귀들'과 함께 소환된 태양이 바로 저 '검은태양'이었다.
-죽어라!
-죽어!
-같은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은 존재할 수 없다!
-가짜 자식!
-내가 진짜다!
-개소리!
-까마귀다!
-까악!
···뭐지.
저 의식의 흐름대로 내뱉는 것만 같은 대화는.
하지만 도저히 끼어들 수가 없었다.
꽈아아아아아앙-!
이 정도로 육중한 대결은 처음 봤다.
거인이라 하기에도 지나치게 크다.
구름 너머까지 뻗은 거대 까마귀들은 서로를 죽일 듯이 쉴 새 없이 부딪혔다.
'압도적이군.'
그렇게 대략 반나절가량.
태양이 지고, 노을이 지자, 싸움이 멈췄다.
-오늘은 여기서 봐주마!
-내일 태양이 뜰 때 다시 싸우자!
그리곤 익숙한 듯 서로가 등을 돌렸다.
하지만, 움직이진 않는다.
등을 돌린 채로 그냥 가만히 있는다.
"저기."
그제야 나는 조용히 둘의 사이로 다가갈 수 있었다.
동시에 두 까마귀가 슬쩍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뭐냐, 너는.
-너무 작구나.
-작은 콩벌레 같이 생겼군.
-하마 아니냐?
일부러 그러는 건가?
확실한 건, 둘 다 지능이 높지는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나는 두 까마귀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물었다.
"여긴 어디지? 투신의 탑 내부인가?"
-투신의 탑? 그게 뭐냐?
-먹는 거냐?
-맛없는 이름이군.
-맛있을 거 같은데.
둘 다 투신의 탑을 모른다.
이곳이 전혀 다른 별개의 장소라는 뜻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재차 말했다.
"여기서 어떻게 나가지?"
-못 나간다.
-우리의 싸움이 끝나기 전에는 아무도 나갈 수 없다.
"그럼 빨리 싸워서 결판을 내라."
-내일 태양이 뜨면 싸울 거다.
-지금은 밤이다.
낮에는 싸우고, 밤에는 쉰다.
둘 사이의 암묵적인 규율인 모양이었다.
'빠져나갈 방법이 있겠지.'
이 둘은 도움이 안 될 것 같았다.
어깨를 으쓱하곤 나는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머지않아 난관에 봉착했다.
'··· 다시 돌아왔다.'
계속해서 걸어 나가자 다시 까마귀들이 있는 장소로 돌아왔다.
어느 방향으로 가도 마찬가지였다.
-작은 귀뚜라미가 잘 돌아다니는군.
-코끼리 같은 게 체력도 좋구나.
까마귀들은 그런 나를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다.
그러다가 서로 눈이 마주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이어 다시 아침이 되고, 태양이 뜨자.
-죽어라!
-죽어엇!
다시금 미친 듯이 싸워대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젓곤 싸움을 지켜봤다.
'완전하게 갇혔다.'
텔레포트나 워프도 작동하지 않는다.
로그아웃이나 로그인도 되지 않고, '롱기누스의 창'도 먹통이었다.
완전무결한 별세계에 갇힌 것이다.
게다가.
'몸이··· 굳어간다.'
다시 몸이 마비되어가는 것만 같았다.
움직임이 둔해지고, 양팔과 발이 마음대로 뻗어지지 않는다.
확신할 수 있었다.
이대로면 머지않아 완전히 육체의 작동이 멈춰버릴 것이다.
이 사태를 해결하고 이곳을 나가려면, 아무래도 저 둘의 도움이 필요할 듯했다.
-오늘은 여기서 봐주마.
-누가 할 소리를.
밤이 되면 거짓말처럼 싸움이 멈췄다.
유일하게 정상적으로 대화가 가능한 시간.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둘은 언제부터 싸우고 있는 거지?"
-8만 7천 년?
-13만 년이다 멍청아.
-사실 19만 년이다.
-아, 맞다. 이제 100만 년쯤 된 것 같군.
한 마디로 셀 수 없이 오랜 세월 동안 싸우고 있다는 말이다.
숫자만 들어도 아득해질 정도로 긴 시간을.
"대체 왜 싸우는 거냐?"
-내가 더 강하니까!
-내가 더 강하니까!
누가 더 강하냐를 겨루고 있다.
단순무식하기 그지없는 발언.
오직 그 하나의 증명을 위해 억겁의 세월을 싸우다니?
이쯤 되자 더욱 궁금해진다.
"너희 둘은 무슨 신(神)이지?"
둘 다 신격을 지닌 존재였다.
그것도 일반적인 신격이 아닌, 주신격의 신격을.
주신은 한 세계를 주름잡는 중심의 신을 말하는 것.
한데 그만한 존재들이 왜 티격태격 싸우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윽고 두 까마귀가 말했다.
-나는 흉(凶)의 신.
-나는 재(災)의 신.
그래도 묻는 말에는 잘 대답해줘서 다행이라 해야 할지.
그나저나, 흉과 재의 신이라.
'둘 다 탑을 관리하는 종족이다.'
탑 전체를 관리하는 흉의 일족.
그리고 탑의 시련을 조정하는 재의 일족.
둘은 완전히 다른 능력을 갖고 있다.
'투신 카라스는 재의 일족이지.'
엄밀히 따지자면 재의 일족의 왕이다.
그리고 흉의 일족과 왕은 비석을 남기고 모조리 멸망에게 전멸당했다.
란돌프의 몸으로 흉의 일족을 되살리는 데 성공은 했으나, 아직 비석 전부를 찾지는 못한 상황.
한데, 자신을 신으로 떠받드는 종족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음에도 둘은 이곳에서 주
구장창 싸워만 대고 있는 것이다.
"누가 더 강한지 결판만 내면 되는 건가?"
-당연하다마다.
-하늘 아래 태양은 오직 하나만 뜰 수 있는 법.
검은태양을 다루는 흉의 신.
그리고 붉은태양을 다루는 재의 신.
둘 다 막상막하다.
누가 더 강하다고 할 수가 없다.
잠시의 고민 끝에, 나는 묘안을 냈다.
"너희 둘의 기술을 내게 가르쳐라. 그럼 판단해주마. 누가 더 강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는지."
-뭐라는 거냐, 저 하루살이가.
-우리의 기술은 오직 일족만이 배울 수 있노라.
-까마귀도 아닌 녀석이 죽고 싶어 안달이 났군.
-다른 짐승은 까마귀의 우월함을 절대로 따라올 수 없다.
둘 다 코웃음을 쳤다.
일족도 배우기 힘든 기술.
하지만 나는 이미 한 차례 '시체 까마귀'가 되어본 적이 있다.
게다가 란돌프의 몸으로 검은태양을 소환한 적도 있었다.
흉왕의 의지를 이어받고, 카라스의 인정을 받은 자.
그게 나다.
"그럼 나를 까마귀로 만들면 되지 않나?"
하여 도박수를 걸었다.
어차피 이대로면 여기서 나는 고립된 채 죽는다.
사지가 마비되고, 심장도 멈추리라.
내 발언을 들은 흉의 신과 재의 신이 동시에 눈을 깜빡거렸다.
-까악?
-까악?
*
까악!
까아악!
재의 일족 까마귀들이 난장을 피웠다.
층의 틈 사이에 누군가를 들이는 건 금기다.
그곳을 들여다보는 것조차도,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위였다.
"까, 까악···."
흉의 일족 까마귀도 당황하긴 매한가지였다.
카라스 님은 어디 가신 거야?
이 사태를 정상화하기 위해선 투신 카라스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 지경까지 왔음에도 카라스는 온데간데 보이지 않았다.
란돌프의 소환에 이상을 느낀 그는 30층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후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30층.
탑의 정상이자 챔피언의 성역은 까마귀들도 들여다보는 게 허락되지 않은 곳.
"까악!"
어쩔 수 없다.
흉의 일족 까마귀는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자신의 능력으로 이 상황을 해결해보려는 의지를 피워낸 것이다.
까악!
까아악!
어이어이, 괜찮겠냐!
우리도 도와줄게!
재의 일족 까마귀들과 흉의 일족 까마귀가 의기투합했다.
탑을 관리하는 두 종족이 힘을 합친 이상 어떠한 문제도 해결할 수 있으리라.
문제는 두 쪽 다 '층의 틈'이 벌어졌을 때의 상황에 무지하다는 것이었다.
흉의 일족 까마귀가 틈새를 찾고, 재의 일족 까마귀들이 시련을 조정하며 탑을 마구 휘저을수록.
"탑의 구조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탑의 시련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탑의 구조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탑의 시련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탑의 구조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탑의 시련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
······.
"도전자들이 이동합니다."
"새로운 도전자들이 유입됩니다."
"챔피언의 권좌에 도전하는 방식이 바뀌었습니다."
"공지사항이 업데이트 됩니다."
"'투신의 탑'이 업데이트 되었습니다."
"'챔피언 란돌프'를 제거하십시오!"
까, 까아악!
까악! 까악!
까마귀들은 정신이 나간 채 울부짖었다.
이제는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까마귀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제대로 망한 것 같다고.
*
"공지사항이 업데이트 됩니다."
"······ 업데이트?"
"뭐야, 갑자기?"
"투신의 탑에 뭐가 업데이트 됐다는 거야?"
"란돌프······를 제거하라니?"
사람들의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들.
모든 각성자가 공지사항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관련된 내용을 파악한 건 각성자만이 아니다.
"예언이 내렸습니다!"
"별이 말했다! 투신의 탑을 오르라고!"
"수호자들이여, 탑을 오르자!"
"로드께서 명하신다. 탑을 오르라!"
··· 판게니아의 종족을 불문한 수많은 이들이 알 수 있었다.
탑을 올라야하는 이유와 함께.
그리고 탑을 오르려는 이들 중에는.
"락투샤."
"예, 흑왕 님."
"다크엘프, 그리고 개미왕 페르몬과 함께 투신의 탑을 올라 란돌프를 죽이고, 반드시 '그것'을 회수하도록."
"명을 받듭니다."
남부의 지배자, 흑왕의 명을 따르는 소드마스터 락투샤와 그의 동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까악~!
-까마귀가 되겠다고?
-크하하하하하! 아이고, 배야!
흉의 신, 그리고 재의 신이 한껏 비웃었다.
그들의 힘을 갈망하는 경우는 많지만 스스로 까마귀가 되겠다고 나서는 짐승은 그들도 처음 본 탓이다.
"설마 어려운 일인가? 가장 위대하다는 까마귀의 신도 불가능한?"
나는 진정으로 실망했다는 듯이 말했다.
억겁의 세월 동안 저 두 신이 싸우고 있다.
그 이유가 정말 '누가 더 강하냐'를 판가름하기 위해서라면 '가장 위대한 신'이라는 말에 반응하리라 판단한 것이다.
-내가 가장 위대한 신인 건 맞다.
-내가 가장 위대한 신인 건 맞다.
-따라 하지 마라.
-따라 하지 마라.
-이 자식이!
-이 자식이!
너나 할 것 없이 동시에 둘은 수긍했다.
그리곤 한참이나 말싸움을 하더니.
슈우우웅.
머지않아 눈앞에 두 개의 구(球)가 떠올랐다.
새까만 구슬과 피처럼 붉은 구슬.
이게 무엇인지 본 순간 알았다.
'핵이다.'
이건 괴물의 핵이다.
핵을 먹고 변신을 하라는 의미였다.
내가 '대식가'의 히든특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걸 저 두 신은 알아차리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일전에 내가 흡수했던 '시체 까마귀의 핵'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 두 구슬은, 일반적인 종의 핵이 아니다.
-내 기술을 배우고 싶다면 흉의 일족이 되거라.
-내 기술을 배우고 싶다면 재의 일족이 되거라.
······ 흉과 재의 일족이 지닌 핵이었다.
시체 까마귀와는 비교가 안 되는 최상위의 종.
탑을 관리하는 관리자의 일족이 되라는 말이었다.
물론, 강해지기만 한다면 단순 관리자의 차원을 넘어서는 막강한 '무력'을 지닐 수 있을 것이었다.
예컨대.
'나는 이미 한 번 끔찍한 흉조를 겪어봤지.'
······ '끔찍한 흉조'처럼.
바알을 죽이기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그 끔찍한 형상의 힘을 나는 한 번 경험해봤다.
그저 형상과 힘을 빌리는 것이었음에도 그 정도였을진대, 제대로 기술을 갈고 닦아 익히면 얼마나 엄청날지 상상도 안 갈 지경이다.
재의 일족인 '투신 카라스'는 또 어떤가.
한 번, 란돌프로 덤볐다가 패배한 전적이 있다.
비록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강해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무엇을 고민하느냐? 흉의 힘은 세상을 압도한다.
-헛소리. 재의 힘이야말로 세계를 전율케 만든다.
오직 하나만을 택해라.
둘 다를 얻을 수는 없다.
흉과 재.
이제는 선택할 시간이었다.
"나는······."
*
공지사항을 접한 즉시.
올리버는 모든 일정을 때려치우고 '로그인'했다.
그리하여 '허드슨'의 모습으로 판게니아에 나타난 그는 즉시 미궁도시로 향했다.
"여러분도 모두 인지하셨겠지만, 상황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습니다."
미궁도시엔 이미 란돌프를 따르는 다수의 사람들이 집결해 있었다.
허드슨은 한차례 그들을 둘러봤다.
이자벨라, 세렝게티, 세아 성녀, 아이작, 발테.
이세라, 루카리아, 그리고 엘프 아우릴까지.
어지간한 왕국 하나쯤은 가볍게 전복시킬 수 있는 최강의 조합.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돌처럼 굳어있었다.
허드슨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말했다.
"현재 '투신의 탑' 최상층에 있는 '란돌프'는 우리가 아는 그분이 맞습니다."
이곳 미궁도시의 주인이자, 그들이 절대적으로 맹신하며 따르는 로드(Lord) 란돌프.
그가 지금 투신의 탑 30층에 있다.
하지만 이자벨라는 이해가 도저히 되지 않았다.
"분명히······ 란돌프 님은 나와 함께 발란 왕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챔피언의 자격으로 강제소환된 것이겠지요."
"그런데 왜 란돌프 님께서 '도전'이 아닌 '토벌'의 대상이 된 거지?"
본래라면 '챔피언'의 자격으로 탑에 오르는 이들의 '도전'을 받아줘야 정상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토벌'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예전, 심연미궁이 떠오르며 '육각의 영웅 라일리'를 토벌했을 때처럼 말이다.
그라시아를 비롯한 수많은 플레이어와 제국, 그리고 사주력 중 하나인 사왕마저 동원되었지만 실패했던 일.
결국 란돌프가 토벌에 성공했으나, 그랬던 그가 왜 이번엔 반대로 토벌의 대상이 된 건지 아무리 고민해봐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 보통 모두에게 고지되는 '토벌'은 '막고 있는 존재'들에게 해당됩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쉽게 설명해봐라."
세렝게티가 묻자 허드슨이 나름대로의 결론을 입에 담았다.
"심연 미궁에서 마주했던 구제국 육각의 영웅 라일리와, 균열의 탑 1층의 군주 솔바렌. 이 둘은 모두에게 고지된 '토벌의 대상'이었습니다."
플레이어만이 아닌 판게니아 전원이 알고 있는 토벌의 대상들.
플레이어는 '공지사항'을 통해, 판게니아의 주민들은 온갖 방법을 통해 전해지는 시련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란돌프.
플레이어와 판게니아의 주민 모두에게 그의 토벌이 '고지'되었다.
"그래서?"
"무슨 공통점이 있는거지?"
허드슨은 자신의 생각을 풀어서 설명했다.
"라일리는 이곳 심연미궁이 대륙으로 편입되는 걸 막고 있었습니다. 군주 솔바렌은 종족마다 설정된 '한계'를 막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뿐만이 아닙니다."
"······?"
"터지기 직전. 그들은 토벌하지 않으면 엄청난 위험을 대륙 전역에 안겨주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지고룡 라일리는 폭주하고 있었다.
솔바렌은?
오랜 시간 잠들어있던 그가 균열의 탑에서 깨어났다.
1층의 정복에 실패했다면, 그는 다시 '부활'했을 것이다.
군주라는 이름처럼 대륙 정복을 시작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 란돌프에게 허드슨이 전해들은 이야기는 그러했다.
세렝게티가 재차 물었다.
"그럼 란돌프 님께서 폭주하기 직전의 상태란 말이냐?"
"아마도······ 원인은 모르겠습니다만, 토벌의 보상이 '다섯개의 별'인 걸 보면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섯개의 별? 설마?"
"예. 란돌프 님이 소유하신 별들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별들.
멸망의 파편과 여신의 파편 4개를 말하는 것이다.
신의 섬에 존재하는 '거룩한 별'을 포함한 모든 별의 소유권이 양도된다는 뜻이었다.
"별은··· 소유자가 죽으면 대륙 전역으로 흩어지는 게 아니었나?"
세렝게티의 말마따나 이는 별에 대한 기본상식이다.
하지만 허드슨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게······ 란돌프 님은 엄밀히 말하자면 온전한 소유자라 칭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무리가 있다니?"
"별을 먹고 '초월'한 게 아니시니까요."
소유했을 뿐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소유는 아니다.
별을 통해 초월한 자들만이 제대로 된 소유자라 할 수 있는데, 란돌프는 오직 별을 갖고만 있었다.
"······ 초월한 게 아니라고? 그 상태가?"
세렝게티가 경악한 표정으로 두 눈을 치켜떴다.
하기야 란돌프는 어지간한 초월자보다 강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란돌프는 아직 초월하지 않은 상태다.
레벨 10에 이르지 못했으니까.
균열의 탑을 통해 한계레벨이 올라갔다고 해도, 초월할 수 있는 레벨은 10으로 여전히 고정되어 있었다.
"어쨌든, 무려 다섯 개의 별을 한꺼번에 주는 토벌입니다. 당연히 종족을 불문하고 엄청난 인파가 투신의 탑으로 몰려들 건 자명한 일."
"우리도 올라야겠군."
"예. 게다가··· 앞선 '토벌'들을 보았을 때, 분명히 란돌프님을 '약화'시키는 장치들이 존재할 겁니다. 우리는 그 '장치'들을 없애야만 합니다."
심연미궁에서 라일리를 토벌할 땐 '황금 티켓'에 의해 약화됐다.
솔바렌도 점수를 통해 약화되는 조건이 붙어있었다.
마찬가지로 란돌프의 토벌도 그를 약화시키는 무언가가 존재할 것이다.
허드슨은 처음부터 토벌에 관심이 없었다.
'어떻게든, 무슨 방법을 써서든, 란돌프 님을 지켜야만 한다.'
란돌프가 폭주하여 세상에 화를 가져다주는 존재라고?
아서라.
그럴 리가 없지 않나.
설혹 그게 사실이라 해도, 허드슨은 상관없었다.
란돌프와 세렝게티만 지킬 수 있다면 허드슨에겐 그 어떤 세상이라도 멸망해도 좋았다.
그리고 그건.
"좋다. 나도 함께하지."
"······ 반드시 지킬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음, 아무래도 빠질 수는 없겠군."
이곳에 모인 모두가 같았다.
란돌프.
그는 이들에게 따라야할 주군이자, 절대적인 은인이었다.
란돌프에게 칼을 겨누는 자야말로 토벌할 대상이다.
또한, 여태껏 지켜져 왔으니, 이번엔 반대로 그들이 란돌프를 지킬 차례였다.
*
-공지사항 봤냐?
-란돌프를 토벌하라는 게 대체 무슨 의미야?
-오주력 란돌프를 말하는 건가?
-아니야, 투신의 탑 앞에 세워진 동상 봤지? 팬텀 란돌프 말하는 거 같은데?
플레이어 톡.
이용자들 모두가 난데없이 떠오른 '공지사항'에 떠들썩해졌다.
이야기의 중심은 당연히 '란돌프'에 관한 것이었다.
-와, 근데 대박이다. 별을 다섯 개나 모았었어?
-그럼 5성 초월자라는 말?
-진짜 개미쳤네...
-팬텀신은 영원하라!
-너무 빨리 강해져서 토벌 대상이 된 건가?
-그럴 리가. 다음 메인 퀘스트 진행 중인 거 아니겠냐?
-그러고 보니 메인퀘스트 12 밀 차례지? 12가 뭐였더라?
-무슨 토벌 관련이었던 것 같은데······ 메인퀘스트 11부터는 알려진 게 거의 없어서
-엥? 그럼 토벌 대상이 되는 게 내용이라고?
-메인 퀘 말고 다른 거 진행 중인 듯
하지만 돌연 듯 토벌의 대상이 된 란돌프의 행보는 그들도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란돌프가 자처하여 토벌이 대상이 되었다는 게 중론.
메인 퀘스트가 아닌 다른 '신화의 완성'을 위한 행보라는 의견으로 이야기가 모아졌다.
-그런데 너무 위험한 거 아님?
-자신있겠지. 5성 초월자를 누가 이기냐
-팬텀신! 팬텀신! 팬텀신!
-5성 초월자 상대하려면 진짜 라이가 정도는 돼야 할 것 같은데
-제국제일검?
-그러고보니 라이가가 투신의 탑에서 대회 열고 있지 않았나?
-헐, 그럼 대회 어떻게 되는 거임
-설마 라이가도 도전하나?
-라이가만 도전하겠냐. 은둔고수들 죄다 출동할 듯ㅋㅋㅋ
-그런데 그라시아는 뭐하냐, 요즘
-그러게. 영웅회 박살나곤 통 안 보이네
-그라시아도 투신의 탑 오르는 건 아니겠지?
한때 인류의 최강자였던 그라시아.
하지만 영웅회의 몰락 이후, 그의 행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였다.
-그라시아 투신의 탑 오르는 중
-뭐? 진짜?
-황금률 마법사 유니온이랑 같이 오르던데
-뭐하고 있나 했더니...
-유니온이면 걔 아니야? 그 이세라가 침략해왔을 때
-맞음
-와, 둘이 파티라고? 묘한 조합이네
-오크들도 대거 이동중
-다크엘프들도 떼거지로 움직이던데
-로드급 괴물들이 갑자기 탑으로 들이닥쳐서 들어갈 엄두가 안난다
-진짜 미쳤다 미쳤어...
-란돌프 죽는 거 아님?
-에이, 설마
-지금 유일신인 팬텀신을 모욕하는 거냐?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그야말로 초유의 사태.
그 찰나였다.
모두의 눈앞으로 또 다른 메시지가 떠올랐다.
"'황금률의 마법사 유니온'이 '챔피언 란돌프'에게 도전합니다."
"페이즈 1, '사흉(四凶) 바알'이 출현합니다."
느닷없이 떠오른 글귀의 내용에 모두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바알?
-바알이 왜...?
-오주력 란돌프가 바알을 다룬다는 소문이 있기는 했는데...
-그럼 팬텀 란돌프랑 오주력 란돌프가 동일인물이라고?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거야?
*
이미 한 번 겪어본 일.
하지만 이전과는 분명히 다르다.
-호오.
-이건··· 상상이상이로군.
내 모습을 바라보며, 흉의 신과 재의 신이 감탄을 흘렸다.
나의 변신은 그들의 상상을 웃돌고 있었으니.
나는 까만색 깃털로 가득한 양 손을 넓게 펼치곤 세상을 향해 크게 외쳤다.
"까악~!"
공략불가
플레이어라면 모두가 궁금해하던 화두(話頭)가 하나 있다.
-란돌프는 얼마나 강할까?
그건 바로 란돌프의 무력(武力)에 관한 궁금증이다.
등장한 직후부터 끊임없이 명예의 전당 1위를 탈환한 인물.
란돌프는 일반적인 사고로는 달성하는게 불가능할 정도의 신화와 점수를 숱하게 이룩하며 이름을 알렸으나.
정작 그 무력에 관해서는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팬텀은 원래부터 그랬다.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분분했다.
버그성 플레이를 지향해서, 남과 어울리는 걸 싫어해서, 인간이 아니라서, 운영자라서 등등······.
하지만 정작 제대로 밝혀진 이유는 없다.
판게니아에서 팬텀은 유일무이한 존재다.
그가 작성한 수많은 '공략'은 아직까지도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진리처럼 사용되고 있었다.
뿐만인가.
팬텀이 키운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레벨 대비 강함'의 정도가 달랐다.
단순한 컨트롤 차이를 말하는 게 아니다.
육성법부터가 남다른 탓이다.
단 하나의 캐릭터도 허투루 키우지 않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팬텀신'이라고 불리겠나.
하여, 여태껏 팬텀을 자처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이번엔 진짜다.
-진짜 '팬텀'이다!
란돌프는 팬텀의 캐릭터다.
팬텀이 판게니아로 소환되며 빙의한 캐릭터가 란돌프였다.
당연히 가장 지고지순하게, 열정을 다해 키웠을 터.
어째서 란돌프가 '토벌'의 대상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렇다면.
-이건 기회다.
-란돌프의 강함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
란돌프는 얼마나 강할까?
그 궁금증을 풀, 절호의 기회였다.
*
사흉 바알!
그 거대하기 짝이없는 괴수를 마주한 순간.
황금률의 마법사 유니온은 심장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 페이즈 1? 란돌프가 아니라 바알이라고?'
상대를 확인하고자 빠르게 도전했건만 정작 나온 대상은 란돌프가 아니었다.
란돌프를 상대하기 위해선 바알을 꺾어야만 한다.
이세라와 함께 지구를 침략했던 유니온.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래, 꼭꼭 숨어 있거라. 내가 곧 가마.'
유니온은 자신이 있었다.
비록 정통에게 속고, 이세라와의 대결에서 무참하게 패배했지만, 이후 절치부심하여 원래의 힘 대부분을 회복해냈다.
'감히 내 경험치 물약을 훔쳐가다니······!'
그때만 생각하면 이가 갈렸다.
자신이 약한 게 아니다.
경험치를 저장해둔 경험치물약을 전부 도둑당해 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약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이세라와의 대결에서 그토록 허망하게 패배하지도 않았으리라.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증명해주마. 나의 힘을.'
원래의 힘을 되찾은 유니온은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증명하고자 하였다.
란돌프를 꺾어서, 투신의 탑 챔피언을 홀로 토벌하여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었다.
투신의 탑은 지구에서도 오를 수 있으니까.
-구오오오오오-!
순간 사방으로 강력한 저주가 퍼진다.
사흉 바알.
어지간한 이들이라면 바알을 눈앞에 둔것만으로도 피를 토하고 죽을 터이나.
"한때 지고했던 가련한 짐승이여."
휘이이이익!
유니온은 황금률로 빛나는 지팡이를 들었다.
"죽어라."
그 순간.
쿠릉!
콰콰콰콰콰콰쾅!
사방에서 소환된 '운석'이 바알을 향해 떨어졌다.
*
"'황금률의 마법사 유니온'이 패배했습니다."
"페이즈 1, '사흉(四凶) 바알'의 남은 체력 85.7%"
"오랜시간 도전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사흉 바알'의 체력이 회복됩니다."
"투신의 탑을 오르십시오."
"오른 층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높은 층에 오를 수록 '챔피언 란돌프'의 공략이 더욱 쉬워집니다."
"15일 내로 '챔피언 란돌프'를 토벌하지 못할시 '투신의 탑'이 지상으로 쓰러집니다."
유니온의 패배.
사람들 대부분이 예상한 대로의 결과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주 소득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혼자서 거의 15%나 깎았네?
-이세라랑 싸울때는 세상 좆밥이더니
-그러게. 그라시아가 데리고 다닐만 한데?
-지금 소환된 바알이 약한 걸수도 있지
-음, 나도 그렇게 생각함
혼자서 15%가량의 체력을 깎을 정도라면, 해볼만 할지도 모른다고.
그때였다.
플레이어 톡을 기준으로, 란돌프에 대한 플레이어들의 의문이 하나, 둘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란돌프가 어떻게 사흉 바알을 소환한 거지?
-챔피언 란돌프면 팬텀이 맞잖아.
-팬텀이 아무리 신화적인 시련을 해결했대도 바알은 이미 소멸했지 않나?
-오주력 란돌프가 그때 나타난 '흉조'가 아니냐는 얘기가 있기는 했었지
-잘 생각해봐. '제주도 소실 사건'때 나타난 '검은 알의 신' 말이야
-검은 알의 신이 왜?
-그러고보니까 바알이 흉조를 잡아먹고, 바알의 배가 갈라지면서 '검은 알'이 나타났다고 했지?
-맞아. 그리고 '검은 알의 사신'님께서 남은 사람들 전부를 워프로 돌려보내주셨어
-그럼 란돌프가 그 '검은 알의 신'이라는 거야?
-바알의 배를 가르고 나타난? 그래서 소환도 할 수 있는 건가?
-검은 알의 신은 제주도 사람들이 신처럼 여기는 존재인데
-만약 이게 사실이면...
-와, 나 지금 소름 돋음
란돌프가 '검은 알의 신'이라는 데 의견이 모아진다.
그렇다면 동시에 란돌프는 '끔찍한 흉조'이기도 하다는 말이었다.
심연에 갇힌 사람들은 끔찍한 흉조가 바알을 몰아붙이는 걸 모두 보았다.
그 기기괴괴하기 짝이없는 저주의 힘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그곳에 있던 전원을 얼어붙게 만들었으니.
그러할진대, 그게 란돌프라니!
제주도민이 신처럼 따르는 자.
심지어 이세라가 침략했을 때 '검은 알의 사신'은 다시 한 번 나타나 활약했다.
-검은 알의 사신이 따르는 게 란돌프라면 앞뒤가 맞네
-심연에 있던 사신이 왜 지구에 나타난건지도 말이야
-설마 '검은 알의 사신'도 보스로 등장하는 거임?
-페이즈 1이잖아. 그럼 2나 3도 있을 수 있다는 거니까 정말 그럴지도?
-심연미궁 때 검성 라일리가 페이즈 몇까지 있었지?
-페이즈 5... 였지 아마?
-하, 시바. 미치겠네. 나 제주도 사람인데 도저히 탑 못 오르겠다
-나도. 염치가 있지...
-그리고 만약 검은 알의 사신이 란돌프를 따르는 게 확실하면, 영웅회가 주장했던 '란돌프는 지구일에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도 정면에서 반박됨
-사실 누구보다도 더 지구를 지키는데 진심이었던 거지, 란돌프는... 아니, 팬텀은
분위기가 바뀐다.
단순히 란돌프의 정체가 놀라워서만은 아니다.
란돌프의 헌신이 하나, 둘 와닿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태껏 란돌프는 혼자서 잘 먹고 잘 산다는 이미지가 없진 않았다.
이 또한 영웅회의 발언들 탓이었다.
영웅회는 란돌프와 팬텀의 이미지를 망치는데 진심으로 총력을 다했으니까.
그들이 내건 슬로건은 실로 간단했다.
'팬텀은 혼자다. 절대로 남을 생각하지도, 의식하지도 않는다.'
'지구가 망하든, 말든,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메인 퀘스트를 민 것 말고 그가 한 게 대체 뭔가? 있기는 한가?'
신비적인 존재임과 동시에 이기적임을 부각하는 선전들.
하지만 전부 틀렸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혼자서 묵묵히 모두를 위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구원하고자 진심으로 총력을 다했다.
모습을 드러내고, 인기를 얻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들을 하고 있었다.
마왕군의 첫 침략인 망자의 왕을 홀로 공략한 것부터.
바알로부터 사람들을 구하고, 두 번째 침략인 이세라와의 대결에서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팬텀신...
-나... 팬텀교... 입단할게
-오늘부터 1일 하자...
-민초단... 탈퇴한다...
-그동안 욕해서 미안해... 팬텀신...
-이게 다 영웅회... 아니다. 내가 곧이곧대로 믿은 잘못이지...
숙연해진 게시판의 분위기.
하지만 마냥 숙연해하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오우거 로드'가 '챔피언 란돌프'에게 도전합니다."
"페이즈 1, '사흉(四凶) 바알'이 출현합니다."
"'바알'의 남은 체력 81%"
"'레드 드래곤'이 '챔피언 란돌프'에게 도전합니다."
"페이즈 1, '사흉(四凶) 바알'이 출현합니다."
"'바알'의 남은 체력 75%"
"'뱀파이어 로드'가 '챔피언 란돌프'에게 도전합니다."
"페이즈 1, '사흉(四凶) 바알'이 출현합니다."
"'바알'의 남은 체력 69%"
······.
판게니아에 존재하는 로드(Lord) 급의 괴물들.
그중에는 드래곤이나 뱀파이어 로드마저 섞여 있었다.
마치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계속해서 쉬지 않고 도전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바알의 체력은 더 이상 낮아지지 않았다.
-남은 체력 54%?
-끝난건가?
-러쉬야 뭐야?
-와, 기겁했네. 도시 하나는 가볍게 찜쪄먹을 괴물들이 왜 이렇게 많아?
흔히 말하는 네임드.
만약 발견했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쳐야만 하는 괴물들이 이토록 많이 출현할 줄이야.
하지만 괴물들도 힘의 격차를 느꼈는지 도전이 뜸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더 이상 이렇다 할 도전자가 나타나지 않아서 안심하고 있던 그때였다.
"'소드마스터 락투샤'가 '챔피언 란돌프'에게 도전합니다."
"페이즈 1, '사흉(四凶) 바알'이 출현합니다."
······.
···.
"'소드마스터 락투샤'가 바알을 토벌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한순간에 바알이 토벌됐다.
그것도 단 한 명에게.
남은 체력을 순식간에 깎아먹은 것이다.
플레이어 톡 게시판은 다시금 난리가 났다.
-?????
-미친, 뭐야?
-54%를 한방에 깎았다고?
-락투샤가 누군데?
-흑왕 측근 중 하나인데... 이상하네 락투샤가 바알을 이길 정도로 강하진 않을텐데?
-호들갑 떨지말자. 아직 페이즈 1일 뿐이잖아. 다음 페이즈도 있겠지
-페이즈 2는 뭐야? 뭐가 나타나는 거야?
모두의 관심이 모아졌다.
페이즈 1에서 나타난 게 무려 사흉 바알이다.
페이즈 2는 보다 강한 개체가 나타날 터.
플레이어만이 아닌, 탑에 오르는 모든 이들이 락투샤의 다음 도전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
"후욱······."
락투샤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떨리는 양손을 한 차례 털어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으니까.
사흉 바알.
놈의 강함은 예전 그대로였다.
수련자의 산에서 굴욕을 당했던 그 기억은 아직도 락투샤의 머리에 남아있었다.
'바알은 그대로지만, 나는 더 강해졌지.'
허나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바알은 그대로인 반면에, 자신은 강해졌기 때문이다.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흑왕에게 검과 은혜를 더 받고, 개미왕 페로몬과의 대련으로 벽을 넘었다.
그럼에도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역시 사흉은 사흉인가?
비록 껍데기뿐인 사흉이라 할지언정, 그 강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절망이 더 강하군.'
확실한건 바알보단 절망이 더 강하다는 것이다.
사흉 절망은 껍데기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
"다음은 뭐냐?"
페이즈 1.
어쨌든 이제 첫 번째 시련을 통과했을 뿐이다.
끝까지 도달해, 바알의 파편을 회수하는 게 그의 목적.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래도 바알과 같은 수준이라면, 가능성은 있다.
그 찰나.
지이이이익!
곧이어 그의 앞으로 황금색의 워프가 열리며, 누군가가 나타났다.
척.
발길을 내디디며 나타난 여자.
인간의 형태이나, 인간은 아니다.
순간 락투샤의 사고가 정지했다.
'이게 무슨······.'
정지할 수밖에 없었다.
바알과는 차원이 다르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바알은 그저 체력이 높고 힘이 강한 무식한 괴물일 뿐이었다.
준비 여하에 따라서 충분히 공략할 수 있다는 말이다.
반면에 눈앞의 여자는······.
"페이즈 2, '칼날용신'이 출현합니다."
······ 약점이, 없다.
'영원(永遠)'의 시련
락투샤의 본능이 외쳤다.
이길 수 없다고.
아무런 공격도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적어도 지금 상태로는 이길 수 없다-.'
확신했다.
저 여자는, 칼날의 용신은, 무적이다.
무적을 상대로 싸우는 것만큼 미련한 짓은 없다.
하지만, 떠볼 수는 있을 것이다.
좌아아악!
검강이 늘어난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거대해져간다.
그리하여 하늘을 뒤덮은 검강을 락투샤가 일격에 쏟아냈다.
꽈아아아아아아앙!
피할 수 없는 공격.
칼날용신은 그 공격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어 공격이 닿자.
'강제 무효화.'
칼날용신에게 닿은 영역의 검강만이 무(無)로 돌아갔다.
검강조차도 무력화시키는 능력이라.
그렇다면 남은건 실력이다.
락투샤가 오른발을 뻗었다.
휘이익!
한달음에 달려나간 락투샤의 검이 칼날용신의 머리를 베었다.
차창!
칼날용신의 날개뼈가 길게 늘어나 락투샤의 검격을 막았다.
'막았다.'
락투샤의 눈에 이채가 뗬다.
검강은 무효화시켰으면서, 직접 검을 휘두르는 건 막아섰다.
직접적인 타격에는 어느정도 반응한다는 뜻.
'공격해온다.'
무적이라 하였으나, 그게 적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직 방어력 하나만 무한대라는 의미.
칼날용신도 이곳에 소환된 이상 락투샤를 쓰러트려야만 한다.
샤샥!
스아아아악!
곧이어 칼날용신의 등 뒤에서 길게 솟아난 뼈들이 락투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치 촉수처럼.
셀 수 없이 많은 촉수가 전방에서 덮쳐온다.
쩌어어억!
그러자 락투샤의 근육들이 순식간에 팽창했다.
'방어일변도. 공격할 생각 자체를 버린다.'
무적이긴 해도 공격력 자체가 방어력만큼 높지는 못할 것이다.
락투샤는 모든 기운을 집약해 오로지 방어에만 치중했다.
'어디 한 번 뚫어보거라.'
절대로 뚫리지 않는 갑옷.
이 상태의 락투샤는 그야말로 무적이다.
사흉 바알의 무식하기 짝이없는 공격도 락투샤의 갑옷을 뚫지는 못했다.
서로가 무적이 된다면 과연 이 싸움의 행방은 어찌될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슈우우욱-!
'막았······.'
푹-!
푸푸푸푹!
*
"유니온. 정신이 드나?"
황금률의 마법사 유니온.
누군가의 목소리에 그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으음······."
눈을 뜨자 자연스럽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마치 태양처럼 란돌프의 황금 석상이 미치도록 반짝이며 시선을 강탈하는 곳.
'탑의 입구.'
이곳은 투신의 탑 입구였다.
하지만 몸이 꿈쩍도 하질 않는다.
'바알의 저주로군.'
이유는 뻔했다.
바알의 저주가 온몸을 잠식한 탓이다.
그나마 죽지는 않아서 다행이라 해야 할지.
"··· 그라시아."
유니온은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남자, 그라시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라시아는 여전히 무감정한 표정과 어조로 입을 열었다.
"멍청한 짓을 했더군."
"······ 내가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기억이 안 나는 거냐?"
"무슨 기억을 말하는 거냐?"
되묻자 그라시아의 미간이 살짝 모였다.
"바알과의 전투를 말하는 거다. 탑에 들어가자마자 갑자기 도전하지 않았나? 그리고 스스로 탈출했으니 살아있겠지."
바알과의 전투!
확실히 유니온은 투신의 탑에 입장하자마자 바알에게 도전했다.
하지만 인벤토리를 이용한 온갖 변칙적인 공격의 귀재인 그도 '사흉 바알'의 체력을 15% 정도 깎는 데 그쳤다.
그 괴물은 자신의 변칙성을 뛰어넘는 체력과 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무서운 바알의 면모(面貌)는 따로 있었다.
"아······."
순간 유니온이 몸을 잘게 떨었다.
그제야 자신이 살아있는 이유가 생각난 까닭이다.
솔직히 전투의 양상 자체는 단조롭기 그지없었다.
압도적인 공격력, 혹은 대비만 되어있다면 바알의 체력을 깎는 건 어렵지 않다.
문제는 그 뒤다.
"저주······ 도, 도전해선 안된다. 바알을 토벌해선······!"
"그게 무슨 소리냐?"
"바알은··· 저주를 모으기 위한 제물일 뿐이다."
"저주를 모은다? 무엇을 위해?"
"더욱 무섭고 두려운 것들을 이 탑으로 '소환'하기 위해!"
유니온의 안색이 하얘졌다.
그가 스스로 탈출한 이유.
바알은 단순히 체력만 높은 고깃덩어리였다.
원한다면 더 많은 체력을 깎을 수 있었을 터이나, 그러지 않고 빠져나온 것은 바알이 '미끼'임을 알아봐서다.
이곳에 소환된 사흉 바알은 저주의 집약체.
더 크고 무서운 저주를 행하고자 스스로 준비된 제물이다.
얼마나 큰 '저주'를 행하려고 바알 정도의 제물을 준비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탑을 올라, 저주를 정화하지 않고 바알을 토벌하면, 걷잡을 수 없는 '대재앙의 저주'가 시작될 것이다.
하여 유니온은 전투를 중단하고 탈출을 마음먹었다.
고작 바알의 토벌은 이 뒤에 일어날 일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알았으니까.
그라시아가 더욱 진중한 눈빛으로 물었다.
"뒤에 뭐가 소환된다는 거지?"
"··· 모르겠다. 확실한 건 아무 생각 없이 바알을 토벌했다간 존재하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 그 모든게 한데 뒤섞여 소환될 것이라는 거다. 모든 게 뒤틀리고 종국에는 '재앙' 그 자체가 탑을 잠식하며 세계를 뒤덮겠지."
유니온.
그는 오랜 세월을 살며, 제국의 초대 황궁마법사로서 수많은 마법의 극을 본 자다.
그중에는 '저주계열'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 이곳, '투신의 탑'에서 행해지고 있는 저주는 그조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규모의 저주였다.
먼 옛날 신화시대에나 일어날 법한 저주가 왜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건지도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제물로 바쳐진 건 바알만이 아니다.'
이곳엔 온갖 저주의 형태들이 모여있다.
그걸 바알을 공격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너무나도 거대하고, 강력해서, 황금률의 마법사인 그조차도 인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설마 4대 악신을 소환하려는 건가?'
발락가스, 앙그라 마이뉴, 가즈, 디아블로.
그중 하나의 악신 그 자체를 소환하려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판게니아는 다시 한 번 또 다른 형태의 '멸망'을 마주하게 되리라.
여신을 잃은 판게니아는 절대로 그 악신에 대처하지 못할 터.
"바알은 이미 토벌되었다."
"······ 뭐?"
찰나, 유니온의 두 눈가가 거칠게 떨렸다.
"소드마스터 락투샤라는 놈이 토벌했다는군."
"제대로 저주를 정화하지 않고 말이냐?"
"그렇겠지."
"아······."
유니온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제물의 공양이 끝나버렸다.
왜 바알을 1층에서도 손쉽게 공략할 수 있게끔 만들어 놨겠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함정이라는 게 너무 뻔한데도.
공략을 해버린 것이다.
유니온이 입술을 깨물곤 물었다.
"다음으로 소환된 건······ 뭐냐."
"칼날용신."
"지구에서 새로 태어난 그 용신?"
"그런 것 같다."
"······ 이세라도 찾지 못한 무적의 조건을 찾아야만 토벌할 수 있겠군."
마왕군의 두 번째 사령관.
다른 두 용신을 먹어치운 이세라도 칼날용신의 약점을 찾지 못했다.
그랬을진대, 탑에 오르는 자들이 어떻게 그 약점을 찾을 수 있겠는가.
모두가 머리를 모으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설령 머리를 모으더라도 과연 공략이 가능할는지.
태어날 때부터 이세라를 상대로 어느정도 우위를 점했던 용신이다.
지금은 그 당시보다 훨씬 더 강해져 있을 것이다.
감히 예측마저 되지 않을 만큼.
"유니온. 왜 칼날용신이 소환됐는지 짐작가는 바가 있나?"
그때였다.
그라시아가 심각한 눈빛으로 물었다.
도저히 그도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흉 바알, 그리고 칼날용신.
그 둘이 무슨 관계가 있어서 소환된 건지.
유니온이 반 자포자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궁금하면 직접 물어봐라. 대체 왜 소환에 응했는지."
칼날용신은 지구의 수호자다.
신성한 존재라는 뜻이다.
왜 저주를 매개로 한 소환에 응했는지는 칼날용신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다.
차라리 심연의 주인들이라면 모를까.
완전히 상반되는 격을 지닌 칼날용신이 소환된 건 확실히 이례적이었으므로.
"무적이라 하지 않았나?"
"그라시아. 그렇게 궁금하면 탑을 올라라. 어쩌면 조건을 알려줄지도 모르니."
모든 열쇠는 탑에 있다.
탑을 오르지 않고 도전하는 자들은 절대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다른 탑의 시련들도 뒤섞이고 있다.'
바알의 죽음으로 인해 탑의 시련마저 요동치는 중이다.
난이도가 급격하게 상승했다.
하여, 유니온은 탑을 오르는 걸 포기했다.
물론 다른 탑의 시련이 뒤섞여도 결국 시련은 시련.
도전자가 포기하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가능성이 생긴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예외가 있었다.
'왜 하필이면 그 탑의 시련이······.'
하필이면 '그 탑'의 시련이 뒤섞였다.
절대로 깨는 게 불가능한, '영원(永遠)'의 시련이.
*
전 챔피언 산샤.
그는 탑의 변화를 보고, 작심했다.
'탑의 끝에 올라 란돌프에게 다시 도전하리라!'
이건 하늘이 준 기회였다.
다시 란돌프와 대결을 치루라는.
란돌프처럼, 탑의 끝까지 올라 도전자의 자격으로 그에게 재차 도전해 챔피언의 자리를 탈환하리라!
"음······?"
그렇게 탑의 20층에 도달한 산샤는 눈앞에 펼쳐진 시련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해골병사' 1만 구의 레벨은 도전자의 레벨과 같습니다."
"착용한 장비를 제외한 모든 도구의 사용이 금지됩니다."
"모든 가호와 수호의 작용이 벗겨집니다."
달그락!
달그락!
눈앞에 놓인 1만 구의 해골병사들.
문제는 일반적인 해골병사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마주한 산샤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대체 이 시련이 왜 투신의 탑에······?"
강해질수록 어려워지는 신비의 탑.
오로지 크람델의 괴물들만 도전해왔던 그 탑의 시련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
시간은 흐른다.
속절없이 계속해서 흘러만 갔다.
"48시간이 경과했습니다."
"'투신의 탑'을 공략하십시오!"
"13일이 더 흐르면 '투신의 탑'이 쓰러지며 저주가 방출됩니다."
"탑의 20층을 클리어하면 '페이즈 2'를 공략할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층을 올라갈 때마다 힌트는 더욱 구체화됩니다."
계속해서 추가되는 공지사항.
점점 상황은 위험해지고 있었다.
탑의 더 높은 곳에 올라야만 공략의 힌트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페이즈 2가 시작되고, 모두가 도전하는 것을 포기했다.
-용신은 약점을 못 찾으면 공략할 수 없다매?
-신비의 탑 시련은 뭐야? 저거 크람델에 있던 거 아니었어?
-20층 이상 오르는 건 불가능함
-저거 신비의 탑에서도 최악의 난이도로 분류되는 거임. 신화난이도였던가...
-아니, 나랑 같은 레벨의 해골병사 1만 구를 어떻게 상대해?
-아무리 템빨이 좋아도 1만 구는 좀...
단순히 칼날용신의 문제가 아니다.
20층 이상에서 발생하고 있는 '탑의 시련이 바뀌는' 현상 자체가 문제였다.
신비의 탑.
괴물들조차 오르기 힘들다는 그 탑의 시련 중에서도 최악으로 분류되는 난이도!
'플레이어 톡'의 분위기는 한층 더 심각해졌다.
하지만 모두가 내린 결론은 똑같았다.
-답이 없네...
도저히, 답이 없다.
3일이 지나고, 4일이 지나도, 칼날용신의 체력은 여전히 100%였다.
사람들의 표정에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5일 차가 되던 날 하나의 새로운 메시지가 떠오르기 전까진 말이다.
"'박현명'이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천기누설
-······.
-어린 까마귀가 꽤 하는구나!
흉의 신, 그리고 재의 신은 굉장히 흥미롭다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봤다.
넓은 평야.
곳곳에 널린 뼈의 산 앞에서 나는 크게 울부짖었다.
"까악!"
까악!
까아악!
내 주변을 날아다니는 더 많은 '까마귀'들.
까마귀의 핵을 흡수한 이후, 신이 내려준 '시련'을 통해 나는 기술을 연마하는 중이었다.
왜 갑자기 '신비의 탑'에서 겪었던 시련을 내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보다 더 쉽군.'
나로선 감사할 일이었다.
처음 시체 까마귀가 되어 크람델에 도착했을 때.
나는 신비의 탑을 오르며 해골병사들을 상대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백왕마저 이룩하지 못한 업적을 달성해 '영원의 란돌프'를 얻었다.
한데, 지금 나는 이곳에서 똑같은 시련을 마주하는 중이다.
'레벨4. 하물며 그때보다 능력치도, 장비도 좋으니까.'
레벨 4의 해골병사 1만 구.
기껏해야 단일 능력치는 40에 불과하다.
능력치 총합 200, 웬만한 초보자들도 상대할 수 있는 수준.
전투 능력도, 센스도, 모두 한참 떨어지는 단순무식한 괴물.
1만 구가 모였다고 해도 10레벨을 넘어서는 능력치를 지닌 내가 상대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심지어 장비도, 장비에 착용한 탈리스만마저도 처음 신비의 탑을 올랐던 때와 비교가 안 된다.
-······.
-크하하! 아주 훌륭한 까마귀로다.
흉의 신은 힐끔 나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재의 신은 입이 귀에 걸릴 듯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둘의 태도가 이토록 극명하게 갈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재의 일족의 핵을 먹었으니.'
나는 '흉의 일족'이 아닌 '재의 일족'을 택했다.
이미 란돌프가 '끔찍한 흉조'가 되어 흉 일족의 의지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저 두 신은 내 상태를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저들은 나한테 많은 게 섞여 있는 걸 이미 알고 있다.'
계속해서 나를 부르는 호칭을 다르게 한 것.
콩벌레, 하마, 코끼리, 귀뚜라미 등등.
단순히 저들이 까마귀라서, 지능이 낮아서만은 아니다.
주신의 말은 하나도 허투루 흘려들어선 안 되는 법이었다.
그들의 표현과 인간의 표현은 분명히 다르고, 그 말의 안에 담긴 무게 역시도 무척이나 다르므로.
당연히 저들이 장난식으로 표현한 호칭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 두 신은 내 상태를 꿰뚫어보고, 더 나아가 란돌프에게 닿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닿았을 것이다.
'란돌프가 끔찍한 흉조라는 걸 투신 카라스는 보자마자 알아봤었지. 저 둘은 투신 카라스가 관찰한 것보다 더 많은 걸 알아봤을 터.'
하여, 선택에 더없이 신중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내가 '재의 일족'을 택하자 흉의 신은 입맛을 다셨다.
-둘 다 먹을 줄 알았는데.
-재의 일족이 더 우월하다는 증명 아니겠느냐? 크하하하!
-생각보다 현명한 까마귀로군. 둘 다 먹었으면 배가 터져 죽었을 테니.
-'다른 쪽'은 이미 흉의 일족을 택했으니, 이제야 비로소 완벽한 비교가 가능하렷다!
그런 내 생각은 둘의 대화를 통해 입증됐다.
핵을 고르는 것 역시 신의 시련 중 일부였던 셈이다.
욕심을 부려 두 개를 전부 먹으려 했다면 죽었을 것이고, '흉의 일족'을 택했다면 나는 '무력의 비교'가 불가능해져 이곳을 탈출하지 못했을 것이다.
두 신의 비교를 위해선 둘 다를 알아야만 한다.
'흉의 일족에 대해선 알고 있다. 남은건 재의 일족뿐.'
식은땀이 흘렀다.
솔직히 긴장하지 않았다면 거짓이리라.
핵을 둘 다 먹는 것도, 이미 알고 있는 흉의 일족을 택하는 것도 모두 고려 대상이었으니까.
게다가 처음부터 더 시선이 간 것도 '흉의 신'이었다.
언제나 흉의 신이 먼저 말했고, 재의 신은 받아치는 형식으로 대화가 진행됐다.
당연히 주도권이 '흉의 신'에게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흉의 일족이 되는 길을 택했으리라.
'전부 함정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재의 일족이 되는 길 외엔 전부 함정이었다.
저 둘은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의 시련을 연달아 내리고 있었다.
이게 필멸자와 불멸자의 차이일는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쉰 그때였다.
"'재의 시련(2)'을 극복했습니다!"
"보상으로 신화급 신비 '재의 까마귀'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획득하지 않을시, 다음 시련으로 넘어갑니다."
"갓포인트(GP) 5,000점이 수여됩니다."
"'갓포인트'로 '재의 신'이 지닌 기술을 익히거나, 익힌 기술의 레벨을 올릴 수 있습니다."
"익힐 수 있는 기술은 '붉은 태양', '활화산', '잿더미', '재의 바다', '재의 하늘', '붉은 죄악'이 있습니다."
"현재 익힌 기술은 '재의 까마귀 소환술(5Lv)입니다."
"갓포인트를 사용해 '재의 까마귀 소환술'의 레벨을 10으로 격상시킵니다."
"'재의 까마귀 소환술'의 레벨이 최대치(10Lv)에 도달했습니다."
"'재의 까마귀 소환술' 스킬이 '재의 상급 까마귀 소환술(1Lv)'로 초월합니다."
란돌프로 끔찍한 흉조가 되기 전에 걸었던 길.
시체 까마귀 소환술을 이용해 신비의 탑을 올랐던 그때와 똑같다.
'벌써 두 번째.'
첫 번째 '재의 시련'은 핵을 선택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가 같은 레벨인 1만 구의 해골병사를 쓰러트리는 것이었다.
이제는 다음 시련을 깨부술 차례.
그리고 내 예상이 맞는다면.
-다음 시련도 마찬가지로 해골병사 1만 구를 쓰러트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나타날 해골병사는 이전의 해골병사와는 비교가 안 되게 강하지. 까악!
재의 신이 음흉하게 웃었다.
어디 이번에도 이길 수 있겠느냐는 듯이.
-그래도 도전해 보겠느냐?
내심 피식 웃고 말았다.
'나에 대해 전부 아는 건 아니로군.'
아무래도, 내가 무슨 업적을 달성했는지까지는 재의 신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신비의 탑을 이미 끝까지 올라본 경험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면 같은 시련을 내릴 리 없으니까.
나는 자신있게 외쳤다.
"도전하겠다, 까악!"
그 순간이었다.
"도전자가 더 높은 단계의 시련에 도전합니다."
"업적 '재(災)의 신화에 도전하는 무모한 도전자'를 달성했습니다!"
달그락!
달그락!
동시에 쓰러진 해골병사들이 다시 일어난다.
"'해골병사'의 레벨은 도전자의 레벨과 같습니다."
"'해골병사'가 '허무'로 인한 상극의 속성을 갖게 됩니다."
상극의 속성을 지닌 채로!
신비의 탑을 올라 이놈들을 처음 만났을 땐, 얼마나 당황했던가.
하지만 이제는 절로 미소가 지어질 지경이었다.
시련의 끝.
그 끝에 얻을 보상 역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달콤하리라는 확신이 있었으므로!
게다가 시련을 오를 때마다 갓포인트만 얻는 것도 아니었다.
신비의 탑에서 획득 가능했던 '신비'마저 계속해서 초월하는 중이다.
그때와 같은 시련이지만, 전혀 다른 이름으로.
나는 숨을 가다듬었다.
'다시 한번 끝을 보자.'
*
20층을 최초로 돌파한 '박현명'의 이름이 뜬 즉시.
-뭐?
-박현명?
-'신의 섬' 튜토리얼 1등?
-저 이름이 여기서 왜 갑자기 튀어나와?
모두 당황하고 말았다.
이제 막 튜토리얼을 끝낸 2세대 각성자의 이름이 나타났으니까.
-2세대 각성자도 투신의 탑을 오를 수가 있나 근데?
-ㅇㅇ가능함
-판게니아 붕괴율이 높아질수록 던전이나 탑 같은 게 지구 곳곳에 생겼는데, 그중 투신의 탑으로 들어가는 탑도 몇 개 생기긴 했을걸?
-하긴. 2세대 각성자도 메인 퀘스트 목록은 똑같으니까
-근데 '투신의 탑 오르기'는 메인 퀘스트 9 아니냐? 왜 벌써 올랐대?
-그러게. 벌써 메인 퀘를 거기까지 다밀었나?
-아니, 불가능한 미션 아니었어?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해 봐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박현명이 벌써 투신의 탑을 올랐는지, 올라서 어떻게 20층을 클리어했는지.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야. 깰 수는 있지. 레벨의 한계를 넘어선 무력만 갖췄다면
-그게 말이 쉽지 쉽겠냐고
-그러니까 준비가 필요하지. 기술을 연마시키고 장비를 몰아줘야하니까. 거대 길드나 연합들은 이미 눈치채고 준비중일걸?
-아아, 템빨로 몰아붙이겠다?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런데 박현명은 어떤 거대 세력이 뒤에서 밀어주는 걸까?
튜토리얼이 끝난 이후 박현명은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
무려 란돌프를 넘어서 1위를 탈환했음에도 은둔자의 생활을 이어갔다.
그런데 느닷없이 투신의 탑에 나타난 것이다.
사람들은 박현명의 뒤에 어떤 '거대 세력'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실제로 '거대 세력'을 등에 업은 사람들이 하나, 둘 투신의 탑을 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확히 7일 차가 된 무렵.
동시다발적으로 대량의 20층 돌파자가 발생했다.
"'그라시아'가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루시퍼'가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최강남'이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쿠에쿠'가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이자벨라'가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허드슨'이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세렝게티'가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아이작'이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발테'가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성녀 세아'가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이세라'가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루카리아'가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
······.
"'라이가'가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산샤'가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아론'이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개미왕 페르몬'이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다크엘프 로드 카산드라'가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민트초코맛있어요'가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아리아'가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궁귀'가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메두사'가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대토룡'이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물론, 그중에는 정말 의외의 이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들이.
당연히 각성자들과 관련된 모든 커뮤니티는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만에 몇 명이 20층을 클리어한 거야?
-와, 최강남이랑 쿠에쿠도 올랐네. 1세대 각성자들은 뭐하냐?
-그라시아 있잖아
-민초도 있음!!!
-민초단이여 다시 일어나라!
-이세라랑 루카리아는 뭐야? 설마... 가명이겠지?
-크람델을 다스리는 괴물들도 있는데?
-그럼 페이즈 2에 대한 힌트도 얻은 건가?
-제발 누가 공유좀 해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