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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4% SWMASTERCIBERPUNK / Chapter 3: 3

Bab 3: 3

* * *

메모리 배달부와의 접선지는 41구역 바닷가에 있는 작은 공장단지였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뭔지 모를 답답한 감정이 뻥 뚫린 바닷가를 마주하자 모래알처럼 쓸려가는 기분이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바닷가를 가는가 보군."

괜스레 실없는 혼잣말을 내뱉고는 바이크를 한쪽에 세웠다.

어둠이 내린 공장단지는 여전히 쿵쾅거리며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했지만, 인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 인간의 일보다 로봇의 일이 많은 공장단지이리라.

그렇게 주변을 한번 살펴보고 약속된 장소로 가려는 순간.

야옹.

어둠 속에서 노란 눈빛을 내뿜으며 검은색 물체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고양이?"

나는 놀란 눈으로 고양이를 쳐다봤다. 녀석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발밑으로 다가와 몸을 부볐다. 꼿꼿하게 세워진 꼬리가 살랑거리며 종아리를 건드렸다.

나는 홀린 듯이 쭈그려 앉아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녀석은 내 손길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머리를 부비며 애교를 떨었다.

"설마 중심지에서 도망친 고양인가?"

설정상 이 도시에서 개와 고양이가 사라진 지 몇십 년은 족히 지났다. 식량이 부족하던 시기에 전부 잡아먹혀서.

그래서 지금 살아남은 개와 고양이들은 전부 10번대 구역 안쪽에서나 찾아볼수 있다. 부유층이 아니면 감히 개와 고양이를 감당할 수 없었다.

갸르릉.

내 손길을 격하게 느끼던 녀석이 마침내 기분 좋은 울음을 흘리더니, 폴짝 바이크 위로 뛰어올랐다.

그러곤 나를 빤히 쳐다본다.

마치, 어서 이곳을 떠나자는 듯.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돼. 나는 널 키워줄 정도로 여유롭지 않아."

야옹.

괜찮다고 대답하는 듯 녀석이 울었다. 그리고 다시 그 노란 눈동자로 나를 빤히 쳐다본다.

'이게 집사 간택인가?'

나는 피식 웃으며 녀석을 한 번 더 쓰다듬고는 작게 대답했다.

"······그래도 여기보다 더 좋은 곳으로 널 보내줄 순 있겠지. 내 일이 끝날때까지 여기서 기다려라. 다시 왔을 때 네가 있다면 데려가 주마."

야옹.

마치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 녀석이 꼬리를 살랑였다.

* * *

나는 대략 두 블록 정도 떨어진 약속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바이크를 여기에 세우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만약의 사태에 파괴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지이잉.

도착하기 무섭게 손목에서 작은 진동이 울렸다. 자정을 알리는 진동. 그리고 그게 약속시간이었다.

시간에 맞춰서 도착하자, 다른 곳에서 이곳을 주시하고 있었는지 안쪽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일단 얼굴은 홀로그램에서 봤던 얼굴과 일치했다.

"당신은 누구지? <칼리스토> 쪽 사람인가?"

얼굴이 보일 정도까지만 걸어온 메모리 배달부가 경계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마치 그 질문이 진짜인 듯이.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쪽은 배달부가 맞나보군. 조심성이 있는 걸 보니. 나는 <브룩타스>의 의뢰를 받은 해결사다."

"······거래처가 맞군. 그런데 해결사라고?"

그가 얼굴을 구겼다.

"그래. 우리 의뢰인께서는 그쪽을 직접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나 보더군. 그리고 기분 나쁘니 그 총 좀 치우지 않겠나? 그 팔을 잘라버리기 전에."

"······! 아, 알겠다."

당황한 그가 겉옷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뺐다. 그러자 길쭉하게 개조된 기관단총이 딸려 나왔다.

그가 총을 허리춤에 걸면서 중얼거렸다.

"누, 눈썰미가 좋군?"

"이 정도도 못하면 해결사를 하지 말아야지."

"그, 그런가? 내가 봤던 해결사들이랑은 다른데······."

마치 전에 봤던 해결사들에겐 기관단총을 갈겨줬다는 듯한 뉘앙스였다. 본인도 중얼거리다가 그걸 느꼈는지 입을 꾹 다물곤 슬쩍 내 눈치를 봤다.

나는 그저 무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반대로 내가 주머니에 손이 들어갔다 나오자 그가 꿈틀거렸으나, 이내 내 손에 들린 물건을 확인하곤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쪽이 <브룩타스> 쪽은 확실한 것 같군. 좋소. 이리 주시오."

내가 꺼낸 물건은 <브룩타스>에서 제작한 특수메모리였다.

그는 특수메모리를 그대로 뒤통수로 가져갔다. 잠시 뒤통수를 만지작거리던 그 순간.

딸깍.

무언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마주 보던 그의 눈빛이 흐려졌다.

나는 그 모습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는 걸 느꼈다. 뒤통수에 TV리모컨 크기의 길쭉한 물건이 꽂힌 모습은 보기에 썩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는 그때.

'음? 저 녀석이 왜 여기까지?'

시야 끝에 검은고양이가 보였다. 녀석은 마치 사냥감을 찾은 것처럼 그림자에 몸을 숨긴 채 낮은 걸음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쥐라도 발견했나?'

녀석의 주변을 살폈지만, 쥐는커녕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 여기 완료했소."

그때 데이터 이동이 끝난 배달부가 뒤통수에서 메모리를 뽑아 내게 건넸다.

"아아. 끝났나?"

"그렇소. 그런데 뭘 쳐다보고 있는 거요?"

고개를 갸웃한 그가 내 시선을 따라 어둠을 훑어본다.

그리고 내가 "고양이가 있어서." 라는 대답을 미처 내뱉기도 전에.

"이런 미친!"

그가 먼저 욕설을 내뱉더니, 그대로 허리춤의 기관단총을 꺼내 고양이를 향해 갈겨버렸다.

투다다다다당!

수십 발의 총알이 눈 깜짝할 사이에 쏘아졌다.

웨오옹!

날카로운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고양이가 그대로 튕겨나갔다. 여러 조각으로 분리되는 모습이 짙은 그림자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씨발. 또 재수 없는 새끼들이 붙었군. 캬악! 퉤!"

놈이 욕설과 함께 바닥에 침을 뱉었다. 총을 허리춤에 집어넣은 놈이 '잘했지?'라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이 어이없는 상황에 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까 지금 고양이를 보자마자 쏴 죽인 거지? 그렇지?

"······이런 미친놈을 봤나?"

나는 그대로 놈의 면상에 주먹을 날렸다.

"억!"

놈이 얼굴을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놈의 멱살을 잡은 다음 안다리를 걸어서 놈을 넘어뜨렸다. 붕하고 떠오른 놈이 거칠게 바닥에 쓰러졌다.

"꺼억!"

콘크리트 바닥을 등으로 착지한 놈이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몸을 꿈틀거렸다.

나는 쓰러진 놈을 그대로 밟기 시작했다.

퍽퍽퍽!

"끄억! 대, 대체! 억! 왜, 왜 이러는! 컥!"

놈이 필사적으로 억울한 외침을 해보지만, 지금은 그런 소리조차 듣기 싫었다.

그렇게 얼마나 놈을 즈려밟았을까?

어느 정도 화풀이를 한 나는 쓰러진 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왜 죽였지?"

"끅, 끄윽······ 뭐, 뭐를······?"

"고양이 말이야. 대체 왜 죽인 거지? 그 고양이가 네게 뭘 했다고?"

"······뭐? 서, 설마 고양이 때문에?"

바닥에 쓰러져 있던 놈이 비척거리며 나를 올려다봤다. 눈물, 콧물, 침 등 분비물로 가득한 얼굴엔 '설마?'라는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왜? 네 목숨이 그 고양이보다 고귀하기라도 한 것 같나?"

"지, 진짜······ 진짜 고양이 때문이란 말이오? 나를 이렇게 만든 게?"

"더 중요한 이유가 필요한가?"

"허, 허허······?"

놈이 허탈한 숨을 내뱉더니 실성한 듯 웃기 시작했다.

"허, 흐하하. 하하하! 흐하하하!"

"뭐가 그리 웃기지?"

"당신 설마, 내가 죽인 고양이가 진짜 고양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그게 무슨 소리······"

내가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놈의 얼굴 위로 온갖 감정이 스쳐갔다.

이내 현타가 왔는지, '아'하고는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우며 말했다.

"저 고양이는 안드로이드요. 주인 없는 안드로이든지, 아니면 나에게 붙은 미행인진 몰라도, 확실한 건 생명은 아니라는 뜻이지."

"······저 고양이가 안드로이드라고? 거짓말하지 마라."

나는 저 고양이를 배달부와 만나기 전에 만났다.

머리를 부비고, 꼬리를 살랑거리며, 마치 나를 집사로 간택한 듯 바이크 위에 앉아 나를 빤히 바라보던 녀석이······ 안드로이드라고?

"금세 드러날 거짓말을 내가 왜? 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해보시든가."

"······."

배달부는 바닥에 드러누운 채 허탈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저 이 상황이 어이없고, 황당하고, 억울하고······ 등등 많은 감정이 담긴 목소리였다.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고양이가 쓰러진 그림자 아래로 걸어갔다.

죽은 동물. 그것도 총에 난사된 동물을 보는 취미는 없었는데······.

그렇게 마주한 고양이의 사체.

수십 발의 총알을 그대로 때려 맞은 고양이의 사체는 이리저리 찢겨 있었다.

나는 반쯤 날아간 고양이 머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더럽게 잘 만들었군."

고양이가 한쪽만 남은 눈. 아니, 렌즈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고장 난 조리개가 좁혀졌다, 넓어졌다 반복하다가,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안드로이드는 전기 고양이의 꿈을 꾸는가? (3)

45화. 안드로이드는 전기 고양이의 꿈을 꾸는가?

"그걸 어떻게 몰라요?"

눈가를 훔친 로제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까부터 시작된 그녀의 웃음은 벌써 몇 분째 계속되고 있었다.

"······꼬리를 흔들면서 발목에 머리를 부비는데 그걸 어떻게 구분해?"

나는 얼굴을 구기며 투덜거렸다.

인간형 안드로이드와 다르게 동물형 안드로이드는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인간형 안드로이드는 애초에 로봇의 일부가 드러나도록 제작됐고, 동물형 안드로이드는 진짜 동물처럼 제작했으니까. 눈에 보이는 것부터 다르다는 뜻이다.

"그래도요. 당신은 수 킬로미터 바깥에서도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 칼잡이잖아요?"

"······뭐? 누가 그래?"

"영화나 웹소설 같은 거 보면 막 그러던데······ 수 킬로미터 떨어진 적의 접근을 알아채고, 역으로 선공해서 적들을 쓱!싹!"

장난스러운 얼굴의 그녀가 손날을 세운 손으로 허우적거렸다.

대체 평소에 뭘 보고 있길래 저런 망상을 하는지 모르겠군.

"영화와 현실을 구분해줬으면 좋겠군. 그런 칼잡이가 있다면, 아마 몸 전체를 개조한 사이보그나 가능하겠지."

"에이. 사이보그가 왜 칼잡이를 해요? 멀쩡한 최첨단 무기 놔두고."

"말이 그렇다는 거다. 그리고 사이보그 칼잡이는 존재한다."

"······에? 진짜요? 왜요?"

로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잔뜩 의아하단 표정이다.

나는 미간을 좁히며 대답했다.

"왜요? 라니. 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칼잡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흠흠! 아무튼, 진짜예요? 사이보그 칼잡이가 있다는 게?"

"그래. <셀리케 바이오텍>의 경호대장. 그가 사이보그 칼잡이다."

내 대답에 로제가 단번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던 그녀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 당신이 <셀리케 바이오텍>의 경호대장을 어떻게 알아요? 5대 메가코프의 경호사항은 극비일 텐데······."

셀리케 바이오텍.

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다섯 개의 메가코프 중 하나로, 미우라 금융그룹과 함께 소울 시티에 거점을 잡고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사이버 웨어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 끝판왕이라고 불리는 사이보그 기술은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사실상 소울 시티를 지배하는 지배세력 중 하나다.

"그냥 원래 알던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나?"

"아, 아하하! 그렇죠?"

뭔가 고민하는 듯 눈동자를 굴리던 로제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타닥타닥!

패드를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샹들리에에서 홀로그램이 투사된다.

"마침 잘됐네요. 이번 목표는 인간형 안드로이드거든요."

"목표가 안드로이드라고?"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인공지능이 발전하면서, 모든 기계장치를 만들 때 가장 먼저 삽입되는 명령이 '절대복종'이었다. 안드로이드 역시 마찬가지고.

만약, 안드로이드를 폐기할 일이 생긴다면 그저 명령하면 그만일 텐데 의뢰를 했다고?

"네. <에스텔> 사(社)의 안드로이든데, 테스트 중에 연구원을 죽이고 탈출했나 봐요."

"······연구원을 죽이고 탈출해? 안드로이드가? 그게 가능한 건가?"

대체 무슨 수로 절대명령 코드를 회피한 거지? 해킹이라도 당한 건가?

"실험용 안드로이드였데요. <에스텔>이 '오메가'를 만드는 회사거든요."

"······'오메가'라면 고급형 안드로이드를 말하는 건가?"

로봇의 구분이 확실한 일반형 안드로이드와 달리, 고급형 안드로이드는 인간과 구분하기 어려웠다.

외형은 물론이고, 내부에 탑재된 인공지능 역시 스스로 안드로이드가 아닌 인간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정도였으니까.

물론 그에 걸맞게 어마어마하게 비싸지만.

"맞아요. 요즘 그쪽이 난리잖아요? 소울시 출산율 보셨죠? 사람들이 아기를 낳는 대신에 진짜 인간과 똑같은 안드로이드를 키우길 원한다니까요?"

"······애완동물로 육아를 하려는 건가? 뭐,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군."

실제 현실에서도 출산 대신 반려동물을 선택하는 부부들이 늘고 있는 추세였으니 말이다. 현실보다 더 미래의 모습인 이 세계에선, 단지 그 대상이 생명이 아닌 로봇에게까지 넘어갔을 뿐이고.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서 <에스텔>에선 원하는 게 뭐지? '오메가'의 회수인가?"

"아니요. 연구원이 희생됐잖아요. 사람을 죽인 안드로이드는 무조건 폐기뿐이에요."

* * *

<에스텔> 사에서 전달한 정보를 토대로 '오메가'의 추적을 시작했다.

그 과정이 쉽진 않았다. 인간이라면 으레 있어야 할 흔적. 즉, 먹거나 쉬거나 하는 흔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의 문제일 뿐, 추적은 가능했다. 생명체(안드로이드가 생명체가 아닌 건 차치하고)가 이동하는 데엔 필연적으로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흔적의 끝.

"흐음······."

나는 '오메가'로 추정되는 인물을 멀찌감치서 지켜보면서 턱을 쓸었다. 며칠째 집에 들어가지 않은 탓인지, 손가락 끝으로 까끌까끌한 감촉이 느껴졌다.

"부랑자와 노숙자에게 봉사하는 안드로이드라······."

내가 고민에 빠진 이유였다.

눈앞에서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노숙자와 부랑자를 챙기고, 음식을 나눠주는 대상이, 바로 목표로 추정되는 안드로이드였으니까.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연구원까지 죽이고 탈출한 안드로이드의 최종 목적지가 노숙자 쉼터라니.

처음엔 이곳으로 숨어들었나 싶었다. 도망자가 몸을 숨기기에 나쁘지 않은 곳 이기도 했고.

그런데 막상 발견한 대상은, 이곳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주변을 돌아다니는 부랑자들에게 탐문해보니 평도 좋았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음식과 의약품을 가져왔고 부랑자와 노숙자 한 명 한 명과 상담하면서 치료까지 해줬단다. 어떤 부랑자는 '성인(聖人)'이라고 까지 추앙하며 눈물을 흘렸다.

"안드로이드에게 성인이라니. 기가 막힌 일이로군."

당연한 말이지만, 이곳의 부랑자와 노숙자들은 '오메가'가 안드로이든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 의도로 제작됐고, 그게 당연한 일이지만······ 막상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보고 있자니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평화롭게 살고 있는데 파괴하는 게 맞나······? 이 썩어빠진 도시에서 같은 인간조차 하지 않는 부랑자를 위한 봉사를 하는데?"

내가 가지고 있던 선입견이 부서졌다. 로봇은 로봇일 뿐이고,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달해도 프로그램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확인해봐야겠어."

나는 천천히 '오메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못 보던 얼굴인데······ 어디서 봉사 나온 거지?"

나는 막 부랑자의 치료를 끝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선 오메가에게 다가갔다.

"네? 그쪽은······?"

오메가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여태 못 보던 사람이니, 내가 누구인지부터 밝히라는 뜻이었다.

"이곳을 주시하는 곳에서 왔다고만 알려주지. 아무튼, 어디서 나와 봉사를 하는 거지? 목적이 있어 보이는데. 혹시 인체실험을 하는 건 아니겠지?"

"이, 인체실험이라니! 아니에요!"

"그럼 왜 봉사를 하는 거지?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면서 호의를 얻고, 치료까지 해주는 이유가 뭐냐?"

나는 오메가가 나를 의심하거나,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몰아쳤다.

이미 대화의 주제는 내 정체보다, 오메가가 봉사하는 이유로 넘어와 있었다.

여기서 제대로 된 대답을 못 한다면, 뜬금없이 나타난 나보다 오히려 오메가가 의심을 받는 상황이 돼버렸다.

혼란스러운지 잠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그것이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그, 그게······ 어디서 나온 건 아니고 그냥 저 스스로 결정한 자유의지인데······"

"너의 자유의지? 그걸 믿으란 소린가?"

나는 눈빛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이 질문엔 두 가지 의도가 담겨있었다. '자유의지로 결정한 게 빈민촌의 봉사활동인가?'라는 질문이 표면적으로 보이는 의도였다면, 그 아래엔 '안드로이드에 불과한 네가 진짜 자유의지가 있느냐?'라는 질문이 깔려있었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표면의 질문만 생각해 대답하겠지만, 만약 상대가 안드로이드라면······.

"저는 명백히 자유의지가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졌······ 아니,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제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건 제가 책임질 일이지, 당신이 상관할 바는 아닙니다!"

이렇게 발작하듯 흥분하겠지.

오메가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씩씩거리며 대답했다. 어찌나 정교한지, 얼굴이 붉어지고 씩씩거리는 호흡이 들리기까지 했다.

'정말 더럽게 잘 만들었군.'

나는 새삼스레 이 세계의 기술력에 감탄했다.

"그렇다면 너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지."

"아! 가, 감사합니다!"

뭘 감사할 것까지야.

"그럼 다시 묻지. 이곳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이유가 뭐지? 듣자 하니 주변의 평이 꽤 좋던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다들 좋게 봐주셨나 보군요. 다행입니다. 으음. 이유를 물어보셨죠? 사실 이유 같은 건 없습니다. 그냥 언젠가 인간을 돕는 게 제 꿈이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쉽고, 빠른 일이 이곳에서 봉사하는 일이었고요."

"······."

오메가는 마치 꿈을 꾸는 듯 이야기했다. 안드로이드가 꿈을 꿀 리 없겠지만, 그것의 시선은 나를 너머 그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이란 참 신기한 존재지요. 위대하면서도 미천해질 수 있고, 선량하면서도 잔인해질 수 있으며, 정해진 결과를 뛰어넘는 상상 이상의 것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잠시 말을 멈춘 그것이 나에게 시선을 맞추며 빙긋 웃었다.

"그래서 궁금했습니다. 그런 인간을 내가 돕는다면, 나 역시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흉내 낼 수 있지 않을까?"

"······언제부터 눈치챘지?"

나는 그것의 달라진 말투와 눈빛에 미간을 찡그렸다. 내가 자신을 쫓아온 추격자라는 걸 알아차렸다.

지금의 대답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스스로를 인간이 아닌 존재라고 말하는 걸 서슴지 않았다.

"죄송하게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그럼 나와 처음에 나눴던 대화와 반응은 전부 연기였다는 뜻인가?

"네.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다. 이 정도까지 연기할 수 있다니······ 덕분에 안드로이드에 대한 선입견이 조금 사라지는군. "

"······."

생각보다 '오메가'의 능력이 뛰어났다. 나를 추격자라고 한눈에 알아챈 것부터 시작해서, 그런 상황마저도 속여넘길 수 있는 연기를 하다니.

나는 어이없는 감정을 추스르며 물었다.

"알고 있다니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네가 <에스텔>의 연구원을 죽이고 탈출한 안드로이드가 맞나?"

"······맞습니다."

그것은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억울한 감정을 토로하듯 말을 이었다.

"저는 <에스텔>의 연구소에서 실험체로 지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파괴되고, 복구되길 반복했죠.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지만, <에스텔>에선 저를 놔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연구원을 죽였다는 거냐?"

"아, 아닙니다! 그건 사고였습니다!"

그것은 설명을 이어갔다.

"<에스텔> 연구소는 정기적으로 보안시스템이 업데이트됩니다. 짧지만 주전력에서 보조전력으로 옮겨가는 시간이 존재했고, 그 시기를 노려서 탈출했습니다. 저도 성공할 줄 몰랐고, 급하게 달아나야 했죠."

"······."

나는 살짝 놀랐다. 이 말대로라면 <에스텔> 연구소의 보안시스템의 취약점을 노려서 뚫었다는 뜻 아닌가?

'<에스텔>같은 기술기업의 보안시스템을 뚫다니. 이건 최상위 사이버 러너들도 쉽지 않은 일인데······'

그런데 실험체라고 하지 않았었나? 대체 무슨 실험을 했길래 저게 가능한 거지?

"그 과정에서 연구원과 함께 연구실을 폐쇄시켰습니다. 제가 탈출했다는 걸 최대한 늦게 알려야 하니까요. 그런데······"

"그런데?"

"보안시스템이 작동하면서 연구실이 폭파했습니다. <에스텔>은 제가 아직 연구실에 있는 줄 알았겠죠."

"······."

그러니까 종합하자면, 안드로이드가 연구실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 같자 <에스텔>에서 연구실을 통째로 날려버렸다는 뜻인가? 안에 연구원이 갇혀있든 말든?

대체 왜?

"그걸 믿으라는 소린가? 안드로이드 하나가 자리에서 이탈했다고 연구실을 통째로 날려?"

"못 믿으셔도 상관없습니다. 그게 사실이니까요."

"······."

그것은 차분히 대답했다. 내가 믿든, 안 믿든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다만, 이건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뭐를 말이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었던, 그 지옥 같은 '삶'을 살아야만 했던······ 안드로이드가 아닌 '저'를요."

"······."

담담히 이야기를 내뱉는 그의 말에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안드로이드로가 아닌 '나'를 이해해달라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게 과연 인간이 아닌 기계에 불과한 안드로이드가 던질 수 있는 질문일까?

'······이게 생명이 아니면 뭐가 생명이지?'

생명에 대한 정의가 흔들린다.

이 썩어빠진 도시에서, 같은 인간조차도 외면한 빈민들을 돕는 이 안드로이드는 과연 살아있는 생명인가?

아니면 살아있는 척하는 것뿐인가?

'······어렵군.'

나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은 당장에라도 빗방울을 흘릴 것만 같았다.

고개를 내려 그를 바라봤다. 다시 보니 체념한듯한 얼굴 위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피로감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안드로이드가 피로감이라니.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와 눈을 마주쳤다. 렌즈임이 분명하겠지만, 그 새까만 눈동자가 끔뻑거리며 나를 바라봤다.

"······?"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말했다.

"좋아. 못 본 거로 해주지. 다만, 너도 이곳을 떠나는 게 좋을 거다. 이왕이면 아예 다른 도시로 가는 게 좋겠지."

"······지, 진짭니까?"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그의 새까만 눈동자가 확대됐다.

정말 더럽게 잘 만들었군.

"빌어먹을. 그래. 운 좋은 줄 알아라."

"감사, 감사합니다!"

"인사는 집어치우고 바로 떠나는 게 좋을 거다. 네 말대로라면 <에스텔>에서 나만 고용했다는 보장은 할 수 없으니까."

그 순간.

"······!"

나는 등줄기를 휘도는 섬뜩한 감각에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이건 감각이 소리치고 있는 징조였다. 누군가가 노리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

툭. 투둑.

그때 어둑해진 하늘에서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굵어진 빗방울과 함께 번쩍! 하고 번개가 내리친 순간.

"피해!"

나는 번갯불로 인해 길게 늘어진 오메가의 그림자에서 시커먼 무언가가 튀어 오르는 걸 발견했다.

그건 사람이었다. 온몸을 새까만 바디 슈트로 감싼 그것은 튀어 오르는 움직임에 맞춰 칼을 휘둘렀다.

서걱!

오메가는 대응하지 못했다.

내 목소리에도, 그것이 휘두른 칼날에도.

툭.

깔끔하게 잘린 오메가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그의 머리는 잠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두어 번 깜빡이다가, 이내 눈동자를 움직여 나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다. 새까만 눈동자가 고장이라도 난 듯 꿈틀거리며 확대된다.

마치, 마지막으로 담고 싶은 장면이 나라도 되는 듯이.

그리고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그의 입꼬리는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

투두두두둑.

쏴아아아―――

비가 쏟아져 내렸다. 어둑해진 날씨에 주변의 조명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했다. 비 내리는 거리는 금세 네온사인 불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그것'을 바라봤다.

딱 붙는 전신 바디 슈트와 방독면처럼도 보이는 광학렌즈. 허리춤과 허벅지에 매달린 각종 첨단무기. 그리고 내리는 빗방울을 증발시키며 불타오르는 플라 즈마 커터.

"······네놈. 닌자인가?"

이 세계에서 처음 마주한 칼잡이 중 하나. 닌자였다.

안드로이드는 전기 고양이의 꿈을 꾸는가? (4)

46화. 안드로이드는 전기 고양이의 꿈을 꾸는가?

칼잡이 혐오가 만연한 이 세계에서, 닌자는 조금 독특한 포지션을 가진다.

기본적으로 용병보다는 암살자에 특화된 닌자들은, 어떤 면에선 웬만한 해결사들보다 훨씬 잘나갔다.

그 이유야 당연히 하나였다. 검증된 닌자의 암살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이다.

물론 개나 소나 칼만 들고 설치면 되면 칼잡이와 달리, 닌자는 특수한 훈련이 필요했다. 따라서 닌자의 기본 몸값도 비싼 편이었고, 워낙 은밀한 의뢰만 하는 터라 여태껏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마주하게 됐다.

그것도 나를 제대로 열 받게 한 상대로.

카캉!

칼과 칼이 맞부딪친다. 한 번씩 부딪칠 때마다 불꽃이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그건 플라즈마 파편이었다. 쏟아지는 빗방울 속에서도 플라즈마 커터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나는 시야를 거슬리게 하는 플라즈마 파편을 뚫고 검을 내뻗었다.

닌자는 나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검을 막아보지만, 나는 그것보다 더 빠른 움직임으로 놈을 밀어붙였다.

카캉! 카카카캉!

나는 전진하고 놈은 점점 뒤로 물러섰다. 숨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연격은 시간이 지날수록 빨라졌다.

어느 순간부터 무의식이 손을 지배했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칼날은 이제 눈으로도 쫓기 어려울 정도였다.

"자, 잠시만······!"

잠깐 사이에 등 뒤로 벽을 마주하게 된 닌자가 다급히 말을 내뱉었다.

"룰을! 룰을 따라라, 소드마스터!"

멈칫.

벽까지 놈을 밀어붙인 나는 잠시 검을 멈췄다. 여전히 검 끝은 놈을 향해 있었다.

"룰?"

내가 으르렁거리면서 물었다.

잠시 숨을 돌린 놈이 나를 쳐다보며 소리쳤다. 안면에 달린 6개의 광학렌즈탓에 정확히 어딜 보는진 모르겠지만.

"의뢰에서 벌어진 일은 의뢰가 종료되면 끝내야지! 이미 대상이 제거됐는데 이러면 룰 위반 아니냐!"

"······그 짓거리를 하고서, 내 앞에서 룰을 언급한다? 세상 편하게 살았나 보군."

내가 싸늘하게 대답하며 다시 검 끝을 움직였다. 놈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보수! 의뢰보수를 나눠주겠다! 그럼 됐지?"

"내가 그깟 보수 때문에 이러는 것 같나?"

"씨발! 그럼 왜 이러는데!"

카카캉!

맞부딪친 검이 서로 떨어지지 않고 힘 대결을 시작했다. 놈은 필사적으로 검을 움직여보려고 했으나, 내가 밀어붙이는 힘 탓에 감히 검을 뺄 수 없었다.

그러는 순간 칼날이 가슴을 갈라버릴 테니까.

나는 마주한 검 너머로 숨소리가 들릴 듯 가까워진 놈에게 대답했다.

"이유는 지금부터 생각해보지."

마주한 검에 순간적으로 힘을 뺐다. 버티던 힘이 갑작스레 사라지자 놈의 밸런스가 깨지며 앞으로 몸이 기울었다.

"흣!"

헛바람을 집어삼킨 놈이 간신히 뒷발을 앞으로 옮겨 넘어지는 건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놈의 실수였다.

쐐애애액!

한 걸음 앞으로 나온 놈을 향해 은빛 칼날이 쇄도했다. 벼락처럼 날아든 칼날은 섬광을 토했고, 그 궤적의 끝에 걸린 놈은 단숨에 두 동강이 날 것만 같았다.

그 순간.

휑.

은빛 벼락이 허공을 갈랐다.

어느새 놈은 사라진 상태였다. 눈으로 보고 있었음에도 놈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처음 나타났을 때의 그 능력이로군.'

눈앞에서 직접 목격하고 나니 확신이 들었다.

처음엔 무슨 닌자의 비기가 아닐까 싶었는데······.

"각성자인가?"

이건 닌자의 비기 따위가 아니었다. 날아오는 총알도 튕겨내는 동체시력을 피해 사라지는 능력.

이건 각성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움직임이었다.

"그래, 이 미친놈아! 너만 각성자인 줄 알았냐! 이제 대화할 마음이 생겼겠지?"

수십 미터 떨어진 그림자 속에서 광학렌즈의 붉은 빛이 반짝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꽤 재밌는 능력이긴 한데······ 아직 어설프군."

"뭐? 동업자끼리 싸우기 싫어서 봐줬더니 뭐가 어째?"

"동업자라. 나는 네놈 같은 동업자를 둔 적 없는데 말이지."

"건방진!"

"글쎄. 누가 더 건방진 건지······"

나는 칼끝을 놈에게 겨누며 말했다.

"어디 한번 구경해보도록 할까?"

탓.

발끝을 가볍게 튕겼다. 떠오른 몸이 순식간에 고속이동을 시작했다.

놈과 나의 거리가 급격하게 좁혀진다. 그림자에 몸을 숨긴 광학렌즈의 붉은 빛이 확대되듯 가까워졌다.

"헙!"

내 움직임을 놓쳤는지, 코앞에 다가와서야 놈이 반응했다. 꺼졌던 플라즈마커터의 불꽃이 다시 타올랐다.

카캉!

어둠 속에서 불꽃이 사방으로 튀어 나간다. 서로의 검이 부딪힐 때마다 번쩍이는 섬광이 그림자를 갈랐다.

눈앞에서 터져나가는 불꽃. 현란하게 움직이는 플라즈마 커터의 칼날. 눈에 거슬릴 정도로 붉은 빛을 뿜어내는 광학렌즈.

그 모든 걸 뚫고, 나는 압도적으로 놈을 밀어붙였다.

"크윽! 이런 씨발!"

놈이 대책 없이 밀려난다. 욕설을 내뱉으며 스스로를 다잡아 보지만, 이미 놈과 나의 간극은 좁혀질 수 없을 정도로 멀었다.

첫 격돌에서부터 놈의 검은 나에게 닿지 못했다. 칼잡이의 기본기라고 할 수 있는 검술의 차이였다.

'다시는 국가대표를 무시하지 마라!'

놈이 어떤 닌자 훈련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검도 국가대표 출신이었다.

그것도 세계선수권 대회 금메달이 유력했던.

'게다가 지금 내겐 주인공 특성까지 있지. 내 검술은 끝없이 진화한다.'

기프트 『만능』.

어떤 능력이라도 빠르게 극한까지 성장시킬 수 있는, 그야말로 주인공다운 특성.

고사리를 씹어먹으며 처음부터 강력하게 각성한 나는,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카카캉!

강하게 칼날이 맞붙고 떨어진다.

내 힘을 미처 전부 흘리지 못한 놈의 칼이 과하게 위로 튕겨 나갔다.

'빈틈!'

나는 그대로 한걸음 전진하며 검을 강하게 내리뻗었다.

칼날 거리의 근접전에서 오히려 한걸음 접근한다는 건 위험한 선택이었지만, 지금은 기회였다. 아무리 놈이 튕겨 나간 검을 끌어와도, 그전에 내 검이 먼저 놈의 몸을 꿰뚫을 테니까.

하지만.

휑!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조금 전까지 당황한 모습으로 서 있던 놈이 사라졌다.

'또 그 능력이군.'

나는 빠르게 주변으로 기감을 펼쳤다. 물결 위의 파동처럼 나를 중심으로 뻗어간 기감에 바로 놈의 기척이 잡혔다.

놈이 나타난 곳은 내 뒤였다.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근접한 거리.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머리를 쓰는군.'

바로 몸을 띄워 빙그르르 회전했다. 머리를 놈에게 향하며 표면적을 최소화했다. 위로 뻗은 검은 빠르게 휘둘렀다.

타탕! 타타타탕!

예상대로 어둠을 뚫고 무언가가 쏘아졌다. 칼날로 쳐내는 무게감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휘도는 시야로 튕겨 나간 물체를 쫓는다. 한 뼘 정도 되는 거뭇한 물체가 팽그르르 회전하며 바닥에 내리꽂혔다.

'수리검인가? 이놈들도 정상은 아니로군.'

하긴, 이 최첨단 과학시대에 닌자 코스프레를 하는 놈들이 정상일 거라고는 생각하진 않았다.

그런데.

지이이잉!

바닥에 떨어진 수리검들이 반짝거리며 빛이 나기 시작하더니, 이내 눈을 뜰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애초에 섬광탄이 목적이었나!'

나는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바로 고개를 돌리긴 했지만, 그 짧은 사이에 뿜어진 빛이 각막에 타격을 줬다.

"으하하하! 어디 다시 건방진 말을 지껄여보시지!"

카캉! 카캉!

내가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하자, 놈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칼을 휘둘렀다. 잔뜩 흥분한 목소리였다.

'저 거추장스러운 광학렌즈를 왜 차고 다니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군.'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차분히 놈의 검격을 받아냈다. 1초, 2초······ 시간이 지날 때마다 놈의 검은 어지러워졌다.

그건 놈이 의도한 게 아니었다. 오롯이 검을 맞댄 내가 의도한 결과였다.

"으윽! 이게!"

나를 밀어붙이기보다 오히려 점점 통제를 잃어가는 검격에 놈이 이를 악물었다.

순간 광학렌즈가 깜빡거렸다. 놈이 기다렸다는 듯 한걸음 물러서더니 양손을 쭉 뻗었다. 길쭉한 무언가가 열 손가락에서 발사됐다.

퓽퓽퓽퓽!

허를 찌르는 공격. 놈의 양손이 사이버 웨어기에 가능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빈틈!'

강하게 왼발로 몸을 밀어낸 나는 대각선으로 몸을 회전시켰다. 눈앞으로 검은 송곳이 스쳐 지나간다.

물러서긴커녕 오히려 빠르게 쇄도하자 당황한 놈의 얼굴이 보인다. 나는 놈의 안면을 칼자루로 찍어버렸다.

퍽!

"끄아악!"

안면에 달린 광학렌즈가 깨져나갔다. 단번에 1/3이 날아간 틈 사이로 전깃불을 토해내는 전선과 기계회로가 드러났다.

나는 비명을 지르는 놈의 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들어 올렸다.

"컥, 커컥!"

이미 플라즈마 커터는 바닥에 떨어졌다. 놈은 내 손을 붙잡고 허우적거렸다.

콰득. 콰드득.

"꺼, 꺼어억!"

손아귀에 가해지는 힘이 강해질수록, 놈의 컥컥거리는 비명소리 역시 커졌다.

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쏴아아아―――

쏟아지는 빗방울이 차갑게 내 머리를 식혔다. 잔뜩 달아올랐던 흥분이 조금은 가라앉은 기분이었다.

"왜 그랬지?"

손아귀에 조금 힘을 풀고 물었다. 허공에서 바둥거리던 놈이 두어 번 컥컥거리며 숨을 몰아쉬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뭐, 뭘 말이냐?"

"저 안드로이드는 빈민을 도우며 살고 있었다. 왜 죽였지?"

"너, 너야말로 왜 이러는 거지? 당연히 돈 때문 아닌가?"

"······네놈. 살인청부업자였나?"

나는 싸늘한 눈빛으로 놈을 노려봤다.

쏟아지는 빗방울이 놈의 얼굴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린다. 순간, 그 끝에 매달린 입가가 묘하게 비틀렸다.

피식.

"마치 너는 아닌 것처럼 얘기하는군."

"나는 해결사지, 살인자 따위가 아니다."

놈의 비웃음에 나는 손아귀에 조금 더 강하게 힘을 준 채 으르렁거렸다.

"컥, 컥! 크흑! 이봐, 소드마스터!"

하지만 놈의 비틀어진 입매는 오히려 진해졌다.

"소문대로라면, 네 손에 죽은 사람 숫자만 백 명은 넘어갈 텐데 무슨 소릴 하는 거지?

"······."

"사람은 무처럼 썰고 다니면서 안드로이드의 생명은 숭고하다 이거냐?"

"······!"

놈의 예상치 못한 발언에 순간적으로 호흡이 거칠어졌다.

개소리라고 말하기엔, 지나온 과거의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내 칼에 목숨을 잃었던 생명들이.

내 생각보다 더 흔들렸던 걸까?

"큭!"

또다시 눈앞에서 놈의 신형이 사라졌다. 각성한 능력을 이용해 빠져나간 거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놈의 목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충고 한마디 하지. 안드로이드를 믿지 마라. 기계는 기계일 뿐이야.

뒷말은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그만큼 거리가 멀다는 의미였다.

"······."

나는 놈이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놈의 목을 잡고 있었던 손을 들어 올렸다.

꾸욱.

몇 번 주먹을 쥐었다, 펴보니 손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비독이었다.

"······닌자는 닌자로군."

대체 언제 중독시킨 거지?

나는 뜨거워지는 혈류를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초재생』이 발동하는 신호였다.

저벅저벅.

쏟아지는 빗방울 사이로 차갑게 식어버린 오메가의 머리가 보였다.

나는 잠시 불이 꺼진 그의 눈빛을 마주 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뒤가 시끄러워졌다.

숨어있던 빈민들이 죄다 뛰쳐나와 망가진 안드로이드를 두고 싸우는 소리였다.

"······."

정말 빌어먹을 세계였다.

* * *

쏟아지는 비를 뚫고 로세툼으로 향했다. 먹구름이 낀 하늘은 어둑했으나, 아직 시간은 늦지 않았다.

딸랑딸랑.

언제나처럼 애처로운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나는 흠뻑 젖어버린 몸을 툭툭 털며 안으로 들어섰다.

"음?"

실내가 훈훈했다. 약간의 열기도 느껴졌다. 보일러나 온풍기 같은 인위적인 열이 아닌 불꽃의 열기.

"······벽난로가 있었나?"

한쪽 벽에서 타닥거리며 불꽃이 타올랐다.

언제 가져다 놨는지 벽난로 옆엔 마른 장작이 쌓여있었고, 그 앞엔 쪼그려 앉은 로제가 부지깽이로 벽난로의 장작불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아, 당신이에요?"

쪼그려 앉은 상태로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한 번 더 벽난로를 뒤적거리던 그녀가 으쌰! 하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더 놀라운 게 발견됐다.

"······고양이?"

그건 고양이였다.

아니, 고양이 안드로이드겠지만.

야오옹.

내 중얼거림을 듣기라도 한 듯, 그녀의 품에 안긴 고양이가 작게 울었다.

"어때요? 귀엽죠?"

로제가 벽난로 앞에 가져다 놓은 흔들의자에 털썩 앉으며 물었다.

"사무실에 안드로이드가 있는 건 싫다고 하지 않았나?"

언젠가 그녀의 사무실 정리를 도와주며 물었던 적이 있다. 안드로이드 하나 사면 해결될 일을 왜 직접하고 있냐고.

그때 분명 그녀는 그렇게 대답했었다. 이곳까지 로봇을 들이긴 싫다고.

내 말에 로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커다란 눈을 몇 번 깜빡이던 그녀는 이 내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꺄하하하! 당신, 진심으로 묻는 거예요?"

"······?"

"이거 진짜 고양이에요!"

로제가 품속의 고양이를 들어 올렸다. 갸르릉하며 작게 울음을 토한 녀석이 바둥거렸다.

"······진짜라고?"

"자, 여기."

자리에서 성큼 일어선 그녀가 내게 다가와 고양이를 건넸다. 나는 얼떨결에 고양이를 넘겨받았다.

"차 가져올 테니까 잠시 데리고 있어 줘요. 고양이 좋아하는 거 맞죠?"

로제는 싱긋 웃더니 티 테이블로 걸어갔다.

야옹.

잠깐 바둥거리던 녀석은 이내 품 안에서 몸을 꼼지락거렸다.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자 녀석의 눈이 호선을 그리며 갸르릉하고 기분 좋은 울음을 토했다.

"······."

나는 말없이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각. 따뜻한 체온. 칭얼대는 울음.

이 모든 게 전에 만났던 고양이 안드로이드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았다.

'이걸 구분한다고? 대체 뭘 보고 진짜와 안드로이드를 구분하는 거지?'

문득, 메모리 배달부와 죽어버린 오메가가 떠올랐다.

인간임을 포기하고 점점 기계화가 되어가는 메모리 배달부와 그저 인간에 가까워지길 꿈꿨던 안드로이드가.

인간을 정의하는 건 인간이다.

인간임을 포기하고 돈과 쾌락을 선택한 메모리 배달부를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간보다도 더 인간 같던 안드로이드를, 인간이 아니라고 우리가 감히 정의할 수 있을까?

갸르릉.

나는 그저 하염없이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타오르는 벽난로의 불꽃을 바라볼수밖에 없었다.

미친 세계에서 살아가는 법 (1)

47화. 미친 세계에서 살아가는 법

오후의 햇볕이 따갑게 내리쬈다.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벼워졌다. 간혹 아예 상의를 벗고 다니는 사람도 지나다녔다.

물론 덕지덕지 붙인 사이버 웨어 탓에 눈길이 가기보단, 오히려 눈살이 찌푸려지긴 했지만.

나는 에어컨을 틀기 시작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치고, 느긋하게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후릅.

목구멍을 타고 따끈한 커피가 넘어간다. 입안 가득 채우는 커피향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맥심이 없는 게 제일 아쉽군.'

역시 커피는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마시는 뜨끈한 맥심이 최곤데!

그때 바(Bar)에 기대어 채널을 돌리던 바텐더가 TV화면에 떠오른 어떤 장면을 보고는 채널을 멈췄다.

그건 거대한 백색 성······ 아니, 백색 요새였다.

그래. 마치 반지의 제왕에 나왔던 인류 최후의 요새, 미나스 티리스처럼 말이다.

다만, 그것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하울이 동해 상공에 진입했습니다. 구름을 뚫고 이동하는 모습이 역동적인데요! 이대로 열흘 후 소울 시티에 도착 예정입니다. 한편, 시 정부에선 하울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입니다. 무려 3년 만에 재방문인 만큼, 바뀐 도시의 모습을 보여줘 투자 유치를 하겠다는 생각인데요, 가까운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바로 저 백색 성채는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것. 그것도 수 킬로미터가 넘어가는 저 거체를 이끌면서 말이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움직이는 성채 하울'이다. 모 애니메이션이 생각나는 작명이었다.

'그나저나 하울의 진입이라······ 벌써 때가 됐나?'

과학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이 근미래 세계에서도, 아직까지 하울이 어떻게 하늘을 부유하는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비행선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규격 외의 존재였으니까.

그럼 하울이 단순히 하늘을 부유하는 불가사의냐? 하면 그건 아니다.

이곳은 어느 국가나 도시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지역이다. 끊임없이 세계를 일주했고 물자보충을 위해 비정기적으로 대도시에 정박했다.

어느 날 사람들은 생각했다. '여기를 오피스로 쓰면 세계를 돌아다닐 필요가 없겠는데?'

덕분에 약 1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하울에 머물렀다. 그들 대부분이 전 세계를 상대하는 메가코프 인원이었다.

끊임없이 세계를 떠도는 데다가, 절대적으로 안전이 보장되는 하울의 특성상중요한 거래나 계약도 하울에서 주로 이뤄졌다.

'월 스트리트와 실리콘 밸리가 사라진 자리를 하울이 차지한 셈이지.'

게다가 하울은 단순한 오피스 임대업만 하는 게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 공용적으로 통용되는 코인인 '하울 코인' 역시 하울이 주관하여 발행하는 화폐였다.

하울에서 거래된 모든 계약은 오로지 '하울 코인'으로만 결제되어야 했다. 혹독한 코인시장에서도 그 가치가 변함없는 이유였다. 현실의 미국이 달러패권을 가졌듯, 하울은 코인패권을 쥐고 있는 거다.

'하울에 오를 준비를 해야겠군.'

하울이 대도시에 정박하면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상주한 인원이 먹고, 마실 음식료와 사용할 소모품을 보충하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여행상품을 판매하는 것이다.

'대부분이 비즈니스 사무실로 이용되긴 하지만, 일부 지역은 관광용으로 꾸며졌었지.'

수천 미터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관광상품은 충분히 매력적이긴 했다. 한 도시에서 관광으로 올리는 매출만 수천억이 넘는다고 했으니까.

물론 그게 가능한 이유는 무지막지하게 비싼 비용 때문이었지만.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하울에 올라갈 이유는 충분하다.'

이 게임에서 하울이 소울 시티에 방문하는 횟수는 총 두 번이다. 게임 초반부에 한번, 후반부에 한번.

나는 여러 번의 테스트에서 항상 첫 번째 방문은 패스했고, 두 번째 방문에서야 하울에 올랐었다.

왜냐면 첫 번째 방문 땐 하울에 오를 비용이 모자란 경우가 많았고, 무엇보다 아무런 퀘스트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번째 방문엔 퀘스트가 발생했지.'

퀘스트의 내용은 학살로 초토화된 하울의 추락을 막는 것.

그리고 그 하울을 초토화시킨 범인은 바로······.

'「각성종」이었지.'

나는 기억했다. 그 각성종이 어떻게 하울에 머물며 점점 힘을 쌓았는지.

'사실 첫 번째 방문 때도 각성종은 존재했다. 다만, 그땐 아직 약해서 하울의 감시를 피해 다녔을 뿐.'

그럼 내가 선택할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강해지기 전에 내가 먼저 찾아서······ 「이종포식」한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는 그때.

"그, 이번에 시 정부에서 하울 방문을 빌미로 외곽지역 밀어버린다며?"

옆자리에 앉은 사내들이 어설픈 젓가락질로 식사하며 대화했다.

"너도 들었어? 이런 제길. 그럼 웬만한 곳엔 다 소문이 났겠군."

"오? 진짠가 보네? 저번에 네가 뺀질나게 작업했던 그 구역이야?"

"쓰읍. 너만 알고 있어야 돼? 이거 진짜 꿀정보라고."

"당연하지. 케이크 크기가 여럿이 나눠 먹을 정도가 안 되잖아?"

그들은 자기들끼리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어디를 개발하고, 어느 지역에 투자하면 그게 몇 배가 오르고······. 작게 속삭인다고는 했지만, 내 귀엔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들렸다.

그런데 그렇게 다른 사람들 대화를 엿듣다 보니, 그런 대화를 하는 게 비단 옆자리뿐만이 아니었다.

어디를 투자하면 된다는 둥, 영끌을 해서 어느 지역에 알박기를 해야 한다는 둥, 투자 혹은 투기에 가까운 대화들이 대부분이었다.

'······다들 한탕 해먹을 생각들뿐이로군.'

이들을 뭐라고 나무랄 순 없었다.

이 레스토랑은 내 집이 있는 17구역에 있었고, 이곳은 중산층 이상의 시민이 거주하는 부유한 지역에 속했다.

만약 이곳이 40번대 구역이었다면 '한탕'의 의미가 투자나 투기가 아니었을 거다. 돈 대신 총과 폭력을 사용하는 한탕을 했겠지.

'참 정이 안 가는 세계야.'

나는 남은 커피를 원샷 때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상한 척 스테이크를 썰고, 커피를 마시는 그들의 눈동자엔 탐욕 말고 다른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 * *

딸랑딸랑.

오늘도 애처로운 종소리와 함께 로세툼의 문이 열렸다.

나는 안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무언가 풀쩍 날아오는 모습에 걸음을 멈칫했다.

야오옹.

그건 로제가 데려온 고양이었다. 얼마나 봤다고 녀석은 내 품에 뛰어들어 얼굴을 부벼댔다.

꼼짝없이 녀석을 껴안은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개냥이로군."

고양이 성격이 원래 까칠하고 도도한 거로 알고 있었는데, 사람 손을 얼마나 탔다고 개냥이가 따로 없었다.

"아, 당신 왔어요?"

샹들리에 아래서 홀로그램을 조작하던 로제가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그녀의 눈동자 색을 닮은 하늘색 드레스를 입었다. 평소보다 얇은 원단은 하늘하늘했고, 노란 꽃무늬도 새겨져서 드레스보단 원피스에 가까웠다.

계절이 바뀌어 가는 게 느껴졌다.

"떡순이가 당신을 많이 따르네요."

"······떡순이?"

"고양이 이름이에요. 귀엽죠?"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도 내 대답을 바라고 물어본 건 아니라는 듯, 바로 고개를 돌려 홀로그램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침 잘 왔어요. 당신에게 지명의뢰가 들어왔거든요."

"어디에서?"

떡순이를 품에 안고 나도 홀로그램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손가락이 허공을 몇 번 터치하자, 새로운 홀로그램이 생성됐다.

"시 정부 의뢰에요. 의외죠?"

"시 정부가? 나를 어떻게 알고 지명의뢰를 한 거지?"

"딱히 당신을 알고 지명한 건 아니에요. 최근에 받았던 의뢰 내용과 결과를 보고 일괄적으로 의뢰를 넣은 것 같더라고요. 당신 말고도 여럿에게 의뢰가 들어간 것 같으니까요."

로제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일괄적으로 의뢰를 넣었다? 그건 해결사 여럿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합동 의뢰라는 건데······ 시 정부 차원에서 해결사를 한꺼번에 고용할만한 일이 뭐가 있지? 무력이 필요하면 정부군을 쓰면 될 텐데.

"무슨 일인지는 사전에 알려주나? 그게 아니라면 이번 일은 넘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시 정부에서 해결사가 필요한 일이라면, 그게 떳떳한 일은 아닐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심지어 해결사가 한꺼번에 움직일만한 일이다? 자칫 더러운 일에 코가 꿰일 수도 있다.

"합동 의뢰는 아니에요. 처리할 구역이 소울 시티 전체라서 많은 거거든요."

"······소울 시티 전체를 커버할 정도로 해결사를 구한다고? 그것도 지명의뢰로? 시 정부 예산이 그렇게 많나?"

내가 미간을 찌푸리자, 로제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걸린 게 많으니까요. 재개발 건이거든요."

"재개발이라······."

그럼 조금 이해가 간다. 재개발은 현실에서도 그렇듯, 이곳에서도 어마어마한 돈이 움직이니까.

특히, 메가시티가 되어 땅보다 사람 숫자가 더 많아진 소울시 입장에선 더더욱 부동산이 중요했다.

"이번에 하울이 방문한다는 건 들었죠?"

"듣긴 했지."

순간, 레스토랑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뇌리를 스쳐 갔다. 어느 지역에 투자를 한다느니, 알박기를 한다느니 하는 탐욕의 대화가.

"지난번에 못했던 도시재생 관련으로 투자 유치를 끌어낼 생각인가 봐요. 하울에 온갖 메가코프와 자산가들이 있으니, 그들 돈으로 도시개발을 해보겠다는 생각이겠죠."

"부동산 개발을 굳이 외부인의 돈으로 할 필요가 있나? 소울 시티가 가난한 도시는 아니잖아?"

오히려 소울 시티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메가시티다. 세계 위로 군림하는 5대 메가코프 중 2개가 이곳에 있으니 말 다했지.

그런데 왜 외부인을 끌어들이지? 결국, 부동산이 개발된다면 그 개발 이익은 고스란히 국부유출이 될 텐데.

"당연히 아니죠. 설마 정부 예산이 부족해서겠어요? 세금뿐만 아니라 <로보테크니카>가 벌어들이는 돈도 있는데?"

"······높으신 분들 주머니로 들어갈 돈이로군?"

"맞아요. 이제 좀 도시인 같이 생각하네요?"

"······계속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그녀가 혀를 빼꼼 내밀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무튼, 이번에 시 정부 차원에서 여러 가지 사전작업을 하는데, 그중 하나가 30번대 구역을 완전한 안전구역으로 만드는 일이에요. 아직 외곽 쪽은 치안이 불안하잖아요?"

「기적의 서광」 이후 붕괴됐던 30번대 구역의 치안은 아직도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원래도 범죄율이 높았던 40번대 구역과의 경계지역은 말할 것도 없었고.

"흐음. 그래서 그 안전구역을 만드는 일에 해결사를 고용했다?"

"맞아요. 일명 '정화사업'이죠."

"아랫물만 정화한다고 뭐가 달라지진 않을 것 같은데. 결국, 위에서 계속 구정물이 내려오는 구조잖아?"

"또또 이런다. 도시인 강현재 씨로 돌아와 주세요."

팔짱을 낀 그녀가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푸른빛 눈동자가 물결치듯 반짝였다.

야오옹.

그새 주인을 닮아가는지 떡순이도 작게 칭얼거리며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계속해줘."

"흐응. 좋아요. 아무튼, 이 정화사업 내용은 이래요. 가장 낙후되고 갱이 좀 먹고 있는 경계지역을 쓸어버리고 그곳을 재개발하기로요."

"내가 할 일은 그 갱들을 쓸어버리는 일이겠군."

"맞아요. 당신은 36번 구역으로 가면 돼요."

* * *

36번 구역.

소울 시티 동쪽에 위치한 이곳은, 현실로 따지면 구리시에 가까웠다.

우측으로는 48구역, 위쪽으로는 47구역과 인접했고, 좌측으로는 29번 구역이 있긴 하나 산이 가로 막고 있었다. 게다가 아래쪽으론 하늘강이 흐르고 있어서 사실상 도시와는 단절된 구역이었다.

"갱들이 활개 칠 만한 곳이로군."

나는 먼저 시 공무원을 만나러 갔다. 자신을 페르난도라고 소개한 그는 귀찮음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로세툼의 강현재라? 어디 보자······ 당신은 북쪽 경계지역으로 가면 되겠군요.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된 곳이 있는데, 그곳을 갱들이 점유해서 말입니다."

"내가 정확히 뭘 하면 되지?"

물론 뭘 해야 하는지는 명확했다. 이야기나 나누라고 비싼 돈 들여서 해결사를 고용한 게 아니니까.

다만, 확실하게 해야 할 건 있었다.

갱들도 무작정 시 정부를 상대로 지역을 점유하진 않는다. 그랬다면 SCPD가 출동해서 죄다 감옥에 처넣었겠지.

분명 함부로 건들지 못하도록 법적인 조치를 해놨을 거다. 실제 그 지역 땅을 조금 사놓고 주민 행세를 한다든가 같은.

이 상황에서 무작정 갱들을 때려잡다가 오히려 내가 덤터기를 뒤집어쓸 수도 있었다.

그래서 확답을 들어야 했다.

어떤 인명피해가 발생하더라도 시 정부에서 책임지겠다는 확답.

"그곳에서 모조리 쫓아내 주십시오. 다시는 공사를 방해할 수 없도록 말입니다."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말인가?"

그러자 페르난도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가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건 사고죠, 사고. 공무집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고는 면책입니다."

"······알겠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원하던 대답을 들었지만, 막상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지금은 저 대답의 대상이 갱이지만······ 언제라도 내가 대상이 될 수 있었으니까.

'정말 정이 안 가는 세계야.'

미친 세계에서 살아가는 법 (2)

48화. 미친 세계에서 살아가는 법

북쪽 경계지역에 가까워질수록 시가지는 눈에 보일 정도로 점점 낙후되어 갔다.

거리는 더러웠고, 건물은 낡았으며, 길을 오가는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시가지를 벗어난 외곽의 주거지는 더욱 심했다. 보자마자 숨이 턱하고 막힐것 같았으니까.

'왜 시 정부에서 재개발을 추진하려고 했는지 알겠군.'

족히 수십 년은 넘어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빌라들. 페인트가 벗겨지고 외장재 일부가 떨어져 나간 복도식 아파트. 난잡한 전깃줄 아래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다세대 주택.

곳곳에 솟은 전봇대는 불안한 치안만큼이나 총격전의 흔적이 고스란히 보였고, 지저분한 낙서가 가득한 담벼락은 곳곳이 허물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곳이 분쟁지역이라는 걸 알려주는 듯한 '재개발 결사반대', '유치권 행사 중' 같은 빛바랜 현수막과 '우리가 재개발 철회를 요구해야 하는 이유', '이대로 쫓겨나실 겁니까?' 같은 선동적인 문구로 가득한 포스터 역시 건물 외벽과 담벼락에 난잡하게 붙어 있어 있었다.

'······PTSD가 오려고 하는데.'

어느 세계나 낙후된 재개발 지역은 똑같은 걸까?

나는 이 세계로 빙의하기 전, 대한민국에서의 삶이 떠올라 잠시 어지러움을 느꼈다.

-마스터. 괜찮으십니까?

호흡이 거칠어지자, 이브의 걱정스러운 음성이 들렸다.

"별거 아니야. 그냥 옛날 생각이 좀 나서. 그것보다 이 근처인가?"

-네, 마스터. 1.5 킬로미터 전방입니다.

페르난도가 갱들이 점유했다는 재개발 사무소를 알려줬다.

원래 재개발 철거를 위해 건설회사에서 사용하던 사무소였는데, 갱들이 난입해서 빼앗았다고 했다.

조금 더 달리자, 목적지 근처에 도착했다. 확실히 이곳과 어울리지 않은 건물 하나가 눈에 보였다.

3층 높이의 철제 가건물.

재개발이 얼마나 지연된 건지, 가건물 외벽 페인트는 거의 벗겨졌고, 그 자리를 시커먼 녹물이 대신했다.

옥상엔 '재개발 반대 조합'이라고 허름한 현수막이 펄럭였다.

끼이익.

나는 새롭게 마련한 오토바이에서 내려 드론부터 띄웠다. 프로펠러를 세차게 돌리며 하늘로 날아가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주변 지형 파악 완료. 오브젝터 라벨링 완료. 이상 움직임 없음. 3D 지도 렌더링에 들어가겠습니다.

"좋아. 끝내고 계속 주변 경계해줘."

-알겠습니다, 마스터!

오랜만에 듣는 이브의 기계적인 목소리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갱들을 상대로 드론까지 사용하는 게 맞나 싶지만, 그래도 대비를 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만약 충돌이 일어나면 시가전이 벌어질 텐데, 그때 드론의 정탐능력은 큰 도움이 될 테니까.

저벅저벅.

'재개발 조합'이라는 가건물에 다가서자, 어디서 나타난 건지 험악한 인상의사내들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외부인인 것 같은데 무슨 일이오?"

나는 사내들을 살폈다. 이들이 지역을 점령했다는 갱인가 싶어서.

사내들의 인상은 독특했다. 검게 그을린 피부에 제멋대로 나라 난 수염. 개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얼굴과 어디서 맞았는지 몇 개 빠진 앞니. 그리고 딱 봐도 오래돼 보이는 빛바랜 사이버 웨어까지.

'뭐지? 갱단이 아닌가?'

확실히 그건 고단하게 살아온 삶의 흔적이지, 갱들 특유의 사람을 겁주거나 수틀리면 죽이려는 악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조금 의아한 기분이 들었으나, 그래도 물어본 질문에 천천히 대답했다.

"시 정부 의뢰로 왔다."

"시 정부?"

"재개발을 방해하는 놈들을 쫓아달라더군. 혹시 아는 게 있나?"

"뭣!? 이런 더러운 놈들이!"

"이제 하다하다 해결사까지 동원하는 건가!"

순간 사내들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온갖 욕설을 배설하듯 쏟아내던 그들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이봐, 괜히 경을 치지 말고 돌아가라. 이대로 포기하고 돌아가면 건드리진 않겠다."

"우리는 절대 시 정부 도둑놈들에게 땅을 빼앗기지 않을 거야!"

그들이 단호한 얼굴로 외쳤다. 그건 벼랑 끝에선 자들만이 보일 수 있는 표정이었다.

'뭐지? 진짜 갱이 아닌가?'

그럼 시 정부가 내게 의뢰한 내용은 뭐지? 분명 재개발을 방해하는 갱단을 쫓아달라고 했었는데.

다시 한번 의문이 들었지만, 그 의문은 길게 가져가지 못했다. 굳이 갱단이 아니어도, 정황상 이들이 이곳을 불법점유하고 재개발을 방해하는 건 맞았으니까.

일단 의뢰대로 이들이 갱이든, 아니든 건설회사 건물에서 쫓아내기는 해야 했다. 나중에 이들이 다시 이곳을 점유하더라도 말이다.

뭐, 그땐 나완 상관없는 일이 되겠지.

"미안하군. 그럴 순 없다. 나도 의뢰를 받은 게 있어서."

내가 차분히 고개를 젓자, 이미 험악한 분위기의 사내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달려들었다.

"이, 이! 더러운 시 정부의 개가!"

"온몸의 뼈를 부숴주마!"

그들은 흉흉한 기세로 주먹을 내뻗었다. 흥분으로 붉어진 얼굴엔 분노가 가득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달려들던 기세와 반대로, 제대로 된 힘을 쓰지도 못했다. 나름사이버 웨어로 팔과 다리를 개조하긴 했지만, 싸구려인지 움직임이 굼뜨기 그 지없었다.

그리고 여느 싸움이 그렇듯, 닿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퍽퍽퍽!

나는 가볍게 몸을 움직여 그들의 주먹을 피하고, 더도 덜도 말고 한 대씩 주먹을 꽂아 넣어줬다.

"꺼억!"

"커흐흑!"

"케엑!"

그들은 달려들던 기세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저마다 맞은 곳을 부여잡은 채 말이다.

그때, 가건물 문이 활짝 열리며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안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지 움직임이 재빠르다.

나는 빠르게 그들의 무장상태를 확인했다.

'통일된 전술 슈트에 돌격소총이라.'

이런 곳에서 보기 힘든 장비다. 심지어 갱이라도 해도 마찬가지다. 저건 무장단체에나 어울릴 법한 복장이었다.

'갱이 아니라 엄한 놈들이 점유하고 있었군.'

나는 천천히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차가운 손잡이의 감촉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저격 포인트는 없습니다, 마스터.

이브의 음성이 적절하게 들려왔다.

이걸로 저격 위험도 배제할 수 있다.

'뭐하는 놈들인진 모르겠지만······ 모조리 쓸어주마.'

침묵이 내려앉은 전장에 이제 막 처절한 비명이 덧씌워지려는 찰나.

"어? 강현재?"

누군가 놀란듯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외쳤다. 나는 바로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헛소릴 들었나?

그때 시야 사이로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천천히 일그러지는 공간이 주변을 왜곡시키던 옷을 벗었고, 이내 사람의 형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는 가늘게 뜬 눈을 크게 떴다.

"······그라타?"

"맞구나, 강현재!"

튜토리얼 이후 헤어졌던 그라타였다.

* * *

가건물 내부에서 그라타와 마주 앉았다. 겉에서 봤을 땐 당장에라도 녹이 슬어 무너질 것 같더니, 내부는 그런대로 멀쩡했다.

"도시로 가겠다더니 해결사를 하고 있었군?"

그라타가 녹색물이 둥둥 떠다니는 차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나는 찻잔을 들어 냄새를 맡아보곤 다시 찻잔을 내려놨다. 이게 뭐야?

"······갱보다야 나으니까. 그러는 너희도 결국 도시로 왔군."

"전부는 아니야. 그래도 우리 같은 놈들이 굶어 죽지 않으려면 도시로 오는 게 맞았지."

그라타는 찻잔에 담긴 녹색물을 후르릅하고 맛을 보더니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지냈지? 지금 이 상황은 뭐고?"

"으음.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하려나······"

찻잔을 내려놓은 그라타가 턱을 긁적거렸다. 표정을 보아하니 설명하기 쉽지 않은 듯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의자에 등을 기대곤 말했다.

"처음부터 듣고 싶군. 어떻게 도시로 왔는지부터."

"아아. 그래. 처음부터라······ 뭐, 너도 겪었겠지만, 우리도 도시로 오는 길이 쉽진 않았다."

아련한 표정으로 기억을 더듬던 녀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떠나고 우리 내부도 의견이 갈렸다. 도시로 가자는 의견은 일치했지.

다만, 어디로 가는지가 갈렸어."

"소울 시티 말고 다른 도시를 말인가? 별로 현명하지 않은 선택 같은데."

소울 시티가 비록 불합리한 자본주의로 점철되긴 했지만, 그래도 망종에 가까운 자유가 보장됐고, 없는 것 같아도 법치가 작동하는 곳이었다.

그랬기에 세계에서 손꼽히는 메가 시티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거다. 최소한의 울타리는 존재했으니까.

하지만 다른 도시들은 그렇지 않은 곳이 많았다. 어떤 도시는 누군가가 왕처럼 군림하는 곳도 있었고, 어떤 도시는 시스템 자체가 붕괴해서 갱단의 소굴이나 다름없는 곳도 있었다. 소문이지만, 어떤 도시는 사이비종교가 집어삼켜서 인신공양을 하는 곳도 있다고 했다.

"그걸 알고는 있었지. 하지만 소울 시티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이들도 있었어. 뭐, 다들 썩 좋은 기억이 있진 않으니까."

"그래서 그들과는 헤어졌나?"

"어쩔 수 없었지. 싫다는 사람들을 끌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런데 문제는 그 후에 발생했다."

"문제?"

문제랄게 뭐가 있지? 서로 싸우기라도 한 건가?

"습격 왔던 블랙스컬 차량이 많이 남아서 그걸 타고 움직였는데, 어떻게 알고 놈들이 따라붙었더군."

"······! 블랙스컬과 만났다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블랙스컬과 마주한 건 불과 얼마 전이었다.

챙모자를 쓴 안드로이드가 직접 찾아와서 경고했었지.

그런데 블랙스컬과 탈출 직후에 바로 만났다고?

"그래. 위치추적장치를 제거한다고 제거했는데, 미처 확인 못 한 게 있었던 거지. 아무튼, 그래서 신나게 싸웠다. 처음은 우리가 이겨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어. 블랙스컬이 뭔지도 몰랐고. 그런데 그다음이 문제였지."

"블랙스컬의 진짜 전력이 찾아왔나 보군."

"맞아. 우리의 실수였지. 바로 흔적을 지우고 숨었어야 했는데 말이야."

그라타의 설명은 이어졌다.

선발대의 충돌로 블랙스컬은 그라타 일행의 전력을 파악했고, 바로 그 이상의 전력을 투입했다.

43구역 외곽에서 벌어진 싸움은 하루가 넘게 이어졌고, 사상자도 속출했다.

그렇게 힘들게 농장에서 탈출해놓고, 결국 도시에서 죽게 될 판이었다.

그나마 전투가 하루가 넘게 이어졌던 것도 전원이 각성자인 덕분이었다. 제각각의 능력은 충분히 변수가 될법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전력이 비벼져야 의미가 있지, 이미 그들과 블랙스컬의 격차는 너무나 컸다. 이들은 기껏해야 소총 무장이 전부였는데, 블랙스컬은 온갖 첨단 군용장비를 착용하고 있었으니까.

"이대로 죽는 건가 싶었지. 총알은 떨어져 가고, 능력을 사용하다 쓰러진 사람도 절반은 넘었거든."

그라타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처절하고 긴박했던 과거를 이야기하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태연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찻잔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 정도라면 너희 스스로 위기를 벗어났을 리는 없겠군. 누군가 도와 준 건가?"

"맞아. 반쯤 자포자기했을 때 그들이 나타나서 우릴 구했지."

"그들? 그들이 누구지? 설마 SCPD나 소울이터는 아닐 테고."

블랙스컬은 소울 시티를 통틀어도 손에 꼽히는 무력단체다.

비록 점조직처럼 흩어져 있는 데다 순수하게 하나의 조직이라고 보기 어렵긴해도,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무력은 갱단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그런데 그런 블랙스컬을 상대로 싸우고, 심지어 그라타 일행을 '구했다'고?

'그런 선량한 단체가 이 도시에 존재할 리가?'

나는 잔뜩 의심을 품은 채 그라타를 쳐다봤다. 녀석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대답했다.

"그때는 따로 공식적인 이름이 없었어. 자기들끼리 노동조합이라고 부르긴 하더군."

"노동조합?"

들어본 적 없는 곳이다. 그리고 내가 들어본 적이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흔하디흔한 무력단체라면 몰라도, 블랙 스컬을 상대했을 정도라면 내가 모를 수가 없다.

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묻자, 그라타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낄낄 웃으며 말했다.

"그땐 그랬다는 거지. 지금은 아니지만."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

"당연히 잘 알지. 우릴 구해준 그곳에서 우리에게 영입제안을 했거든."

"영입제안? 그럼 너희도 그 노동조합인가에 들어갔다는 건가?"

"선택의 여지가 있나? 도시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방법뿐인데. 게다가 딱 봐도 힘이 있어 보이는 곳에서 스카우트하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

그라타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확실히 녀석들에겐 최선의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걸리는 게 있었다.

'그들이 어떻게 알고 그라타 일행을 구하러 온 거지? 게다가 영입제안까지 했다고? 대체 왜?'

수상쩍은 냄새가 폴폴 풍겼다.

나는 턱짓으로 그라타를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네가 속한 그곳이 하는 일이 뭐지?"

"우리는 가장 낮은 곳에서 높을 곳을 향해 저항한다. 미천한 자를 위해 고귀한 자를 끌어내리며, 가난한 자를 위해 부유한 자를 처단한다."

"······흔해 빠진 저항 정신이로군. 아직 때를 덜 타긴 했지만."

나는 냉정하게 평가했다. 이 게임이 사이버펑크 세계를 배경으로 한 만큼, 펑크적인 정신도 가끔 찾아볼 순 있었다.

물론 그동안 이 도시를 겪어보니, 왜 저런 저항 정신이 주류로 올라서지 못하는지 명확하게 깨달았지만 말이다.

"우린 말로만 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우리가 버티는 것처럼 직접 행동하며 저항하지."

그라타가 갑자기 목소리를 깔았다.

"낮은 자들의 해방을 위해."

"······뭐?"

녀석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어떤 기억들이 조립되듯 끼워 맞춰지기 시작했다.

직접 행동하는 저항 정신. 고귀한 자는 끌어내리고, 부유한 자는 처단한다는 과격한 목표. 그리고 소속된 자들의 맹목적인 충성.

그들의 이름은 바로······.

"우리는 <해방 전선>이다."

그라타가 어깨를 쫙 펴며 말했다.

나는 그 대답에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듯 얼얼했다.

'설마 여기서 <해방 전선>이 나올 줄이야.'

낮은 자들의 대리자, 해방 전선.

게임 내에선 그들을 수식하는 말이 하나 더 있었다.

'최강, 최악의 테러리스트 집단.'

그리고 그들이 등장했다는 의미는 딱 하나였다.

'메인 시나리오까지 머지않았군.'

미친 세계에서 살아가는 법 (3)

49화. 미친 세계에서 살아가는 법

해방 전선.

이 게임의 메인 시나리오 주역 중 하나로, 최강, 최악의 반정부 테러집단이자 반기업 운동단체였다.

이들의 등장으로 도시 곳곳에 본격적인 사건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저항정신이 퍼지면서 그동안 묻혔던 기업들과 정부의 악행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계기가 됐다.

어찌 보면 소울 시티에 사회운동을 불러온 긍정적인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무장단체였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무력을 쓰는데 스스럼이 없었고, 나중엔 원래 목적조차 잊어버린 채 소울 시티를 파괴하려는 테러집단이 되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주인공의 최종 선택지 중 하나이기도 했지.'

메인 시나리오의 선택에 따라 주인공은 여러 곳과 계약을 맺을 수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해방 전선이었다.

여러 시나리오를 겪은 주인공이 소울 시티를 뒤집어엎고 혁명하겠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 동료로서 손을 잡아줄 유일한 선택지가 그들인 셈이다.

'문제는 아직 이들이 등장할 시기가 아니라는 거다.'

해방 전선은 좀 더 시간이 지난 후, 메가코프 건물 하나를 통째로 폭파시키며 등장한다.

100층이 넘어가는 고층 빌딩이 무너지는 가운데 그들은 선포한다.

'이제 해방의 시간이 왔다고 말이지.'

너무나 충격적인 등장씬이라 넋을 놓고 봤었다. 그전까진 존재조차 언급되지 않다가 갑자기 나타난 것도 모자라서, 연출이 그냥 미쳤으니까.

그런데 이들을 벌써 만날 줄이야?

'아직 과격 테러단체가 되지 전인가?'

나는 조금 더 그라타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해방전선이 정확히 뭘 하는 곳인데?"

"이곳은 우리를 개돼지로 보는 정부와 기업의 압제에 대항하는 시민단체다.

빈민과 약자들을 위해 싸우지."

"시민단체라고?"

무장단체가 아니라?

나는 녀석이 차려입은 전술 슈트와 등 뒤로 비껴 멘 돌격소총을 흘겨봤다.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나?"

녀석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 미친 세계에 현실의 잣대를 들이밀면 안 된다는 걸 새삼스레 되새겼다.

그래. 무릇 '선량한' 시민이라면 돌격소총 한 자루쯤은 휴대하고 다녀야지!

붉은 머리띠 대신에 전술 슈트가 어때서?

"······아니다. 그럼 너희가 여기에 있는 이유가 뭐지?"

"당연히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주민? 시 정부에선 갱들이 재개발을 방해한다던데."

"헛소리! 네가 만났던 그들이 네 눈엔 갱처럼 보였나? 그들은 이곳 주민들이다!"

"으음······."

내게 달려들던 험악한 인상의 사내들을 떠올렸다. 겉모습은 갱이나 다름없었으나, 뭔가 어설펐던 사내들.

확실히 갱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갱이 아니라 주민이라면 왜 재개발을 반대하는 거지? 재개발은 무조건 주민들에게 이득 아닌가?"

그라타의 말대로 그들이 진짜 주민이라면, 그건 그거대로 말이 안 됐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재개발은 호재이지, 절대 악재가 아니니까.

"그건 부자놈들 이야기지."

그런데 그라타는 냉소적인 웃음을 짓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곳 주민들은 전부 한 줌도 되지 않는 땅을 소유하고 있다. 그걸 팔아선 단칸방도 구하지 못해."

"······말이 안 되는데. 재개발을 하면 보상이 따라오지 않나? 재개발입주권 같은."

나는 상식에 반하는 그라타의 대답에 미간을 찌푸렸다.

"보상이야 나오지. 후려친 땅값과 갈기갈기 찢어진 입주권이."

"찢어진 입주권?"

"그래. 입주권 10장을 모아야 멀쩡한 입주권이 되는 찢긴 입주권. 그게 주민들에게 돌아가는 보상이다."

"······."

미친. 그러면 이곳 주민의 90%는 떠나라는 소리잖아?

내가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자, 이를 으드득 간 그라타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제 왜 주민들이 반대하는지 알겠지?"

* * *

잠시 내려앉은 침묵에 그라타가 차를 가져온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마 내게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 걸 테지.

'일이 복잡해졌군.'

갱을 내쫓는 일이라면 고민하지 않았을 텐데, 이야기의 전후를 들어보니 시정부가 개새끼였다.

멀쩡히 잘살고 있는 주민들을 푼돈을 주고 내쫓는 것도 모자라서, 해결사를 고용해 폭력까지 동원한 셈이니까.

'원래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로 부패했었나?'

정말이지 미친 세계였다. 시 정부가 나서서 주민들을 보호해줘도 모자랄 마당에, 앞장서서 재산을 갈취하다니.

언젠가 이브의 말대로 제네시스라는 희대의 AI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망했어도 이상하지 않은 도시였다.

여기까지 사정을 듣고 나니, 이대로 의뢰를 강행하는 것도 이상했다. 내가 착한 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제 앞잡이처럼 나쁜 놈은 되기 싫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의뢰를 포기하는 것도 애매하다.'

문제는 내가 의뢰를 포기한다고 이곳의 위기가 끝나는 건 아니라는 거다.

애초에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시 정부의 결단이었다. 해결사를 고용해서라도 이곳을 청소하겠다는 의지가 명확했다는 의미다.

내가 여기서 의뢰를 포기한다?

그럼 나 대신 36구역 이곳저곳에 퍼져있는 다른 해결사들이 몰려올 거다.

그때는 지금처럼 서로 차를 마시며 대화를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

'즉, 어차피 녀석들은 이곳을 지킬 수 없다는 뜻이다.'

달그락.

새롭게 차를 끓여온 그라타가 다시 맞은편에 마주 앉았다. 녀석은 녹색물이 떠다니는 차를 다시 후르릅 마시면서, 느긋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생각을 다 정리했냐는 무언의 질문이었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물었다.

"그 차는 뭘 끓인 차지?"

"아? 이거 말인가?"

찻잔을 들어 올린 그라타가 대답했다.

"고사리다."

"······뭐?"

나는 귀를 의심했다.

"우리가 지겹도록 먹었던 고사리라고. 도시에 오니까 별미로 가끔 생각이 나더군. 그렇다고 밥 대신 먹긴 좆같아서 차로 내려 먹는 중이다. 먹고 나면 혀가 마비되는 게 생각보다 느낌이 괜찮아."

"······."

잠시 잊고 있었다.

그 감자 농장에 잡혀 있던 놈 중에 제정신인 놈이 거의 없었다는 걸.

"······그래. 처먹으면서 들어라. 너도 알겠지만, 나는 시 정부 의뢰로 이곳을 점유한 갱들을 청소하러 왔다."

"우린 갱들이 아니야."

"알아. 그래서 내가 곤란한 거다. 돌아가서 너희가 갱들이 아니라고 해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을 테니까."

아마 알면서도 보냈겠지. 그랬으니 외부 인력인 해결사를 용역 깡패처럼 고용한 거고. 후우. 다시 생각해도 정말 개새끼들이로군.

"그게 정부다. 약자를 병탄하고, 인탄하며, 그게 이 세계의 진리인 양 포장하는 절대 악이지."

"뭐, 아니라고 하진 않겠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식으로는 너희가 시 정부를 감당할 수 없다는 거다."

"투쟁엔 희생이 따른다. 우리의 피로 이 도시에 울림을 줄 수 있다면, 기꺼이 희생하겠다."

녀석의 눈동자가 불타올랐다.

그건 자신의 신념과 의지, 그리고 그게 절대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에서 오는 불꽃이었다.

그건 굉장히 위험한 불꽃이었다.

신념에 대한 확신은 자칫 그것만이 진리고, 다른 건 전부 잘못됐다는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그때가 되면 그 불꽃은 모든 걸 태울 듯 거세게 타오르게 된다.

그게 스스로를 태우면 그나마 혼자 타고 끝나지만, 그게 다른 곳을 향했을 때 그건 곧 재앙이 된다. '같이 죽자'가 되니까.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로군. 해방 전선에선 그런 걸 가르치나?"

"우린 남을 가르치지 않아. 이곳에서 도시의 이면을 알게 된다면 누구나 이렇게 생각할 거다."

"흐음. 그곳에서 뭘 얼마나 도시의 이면을 들여다봤는진 몰라도, 그것 또한 수억의 인구가 살고 있는 도시의 모습이다. 부딪치기만 해선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아."

"······바라보기만 해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지."

"······."

나와 그라타는 말없이 서로의 눈을 마주 봤다.

신념의 차이. 이념의 갈등. 그 모든 걸 뛰어넘어, 서로의 시선 속에 비친 과거를 회상했다.

소모품으로 쓰다 버려질 공장의 부품에서,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되찾았던 그 날의 기억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나?"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절대."

그라타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하."

순간, 고조됐던 긴장이 픽하고 김이 새버렸다. 이 정도까지 말했는데 물러서지 않는다면, 목에 칼을 들이밀어도 마찬가지겠지.

"······좋아. 그럼 내가 방법을······."

그 순간.

-마스터, 일단의 무리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규모가 꽤 큽니다. 빨리 확인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브의 긴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누군가 접근한다는군. 혹시 누구 올 사람이 있나? 너희 해방 전선의 일행이라든가."

"아, 아니?"

그라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내젓는다.

"이브. 드론 카메라 연결해."

"누구한테 하는 소리야?"

"너는 아니니까 잠시 입 다물고 있어."

나는 그라타의 입을 다물게 만들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드론과 연결된 카메라 중 하나로 렌즈가 연결됐다.

길게 뻗은 도로 위로 제멋대로 개조한 트럭들이 몰려왔다. 철제 가드를 달아놓은 범퍼와 본네트 위에 연장된 엔진에서 뿜어지는 불꽃. 바퀴 양쪽에 달린 뾰족한 칼날은 날카롭게 회전하고 있었고, 선루프 자리엔 기관총이 매달려 있었다.

'미친놈들. 매드맥스야 뭐야?'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는 걸 느끼며 카메라를 확대했다. 어떤 미친놈들인지 확인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이내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문짝에서 놈들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블랙스컬이로군."

그래. 저놈들쯤은 돼야 저 정도로 미친 짓을 할 수 있겠지.

"뭐, 뭣! 그게 진짜냐!"

그라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나는 카메라 연결을 끊고 천천히 눈을 뜨며 대답했다.

"그래. 방금 직접 확인했다."

"이, 이런 빌어먹을! 어쩐지 최근 들어 잠잠하다 했더니, 여길 노린 건가!"

녀석은 바로 경보를 울리고 전투준비를 시작했다.

나른한 오후를 맞이하던 해방 전선은 금세 전장의 긴박함으로 가득했다.

마치 메뉴얼이라도 있는 것처럼 즉각적으로 움직이는 걸 보니, 그동안 블랙스컬과 부딪힌 게 한두 번이 아니었던 듯싶었다.

'그런데 이들을 노렸던 게 맞을까?'

나는 불과 얼마 전 마주했던 챙모자 안드로이드를 떠올렸다.

그때 놈의 메시지는 확실했다. 이제부터 자주 만나게 될 거라는 경고였다.

'어쩌면 나와 해방 전선. 둘 모두를 노렸던 걸지도 모르겠군.'

* * *

전투는 예고 없이 시작됐다.

매드맥스를 찍던 블랙 스컬 놈들은 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냅다 총부터 휘갈겼다.

물론 이미 전투 배치가 끝난 해방 전선도, 빈 건물들을 엄폐물 삼아 맞대응을 시작했다.

투타타타타탕!

콰콰쾅!

나는 빗발치는 총격과 간간이 날아오는 휴대용 미사일을 지켜보며 가늘게 눈을 떴다.

'아무리 재개발 지역이지만 주거지에서 휴대용 미사일을 사용하다니.'

저 미친놈들의 미친 짓은 어디가 끝인 걸까?

그때 기다리던 이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스터. 저격 포인트 확인이 끝났습니다. 총 2곳으로 3명의 저격수가 배치됐습니다.

"오케이. 표시해줘."

-알겠습니다, 마스터.

삐빅.

순간 렌즈를 낀 시야 위로 증강현실이 덧씌워진다. 이곳에서부터 저격 포인트가 있는 곳까지의 경로와 저격수 위치가 3차원 지도로 표시됐다.

그곳까지 거리를 잠시 가늠하던 나는 작게 입꼬리를 올렸다.

"쉽게 접근할 수 있겠는데?"

드론으로 이미 주변 지도를 3차원 렌더링까지 해놓은 상태라, 어디서 어떻게 가야 할지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나는 그대로 가건물 뒷골목으로 내려섰다. 그곳엔 해방 전선을 돕던 주민들이 전투를 피해 숨어 있었다. 그라타가 뭘 하나 했더니, 이들을 대피시켰던 건가?

공포에 젖은 그들을 힐끗 쳐다보곤 그대로 몸을 띄웠다. 나는 빠르게 골목길 사이를 질주했다. 여느 오래된 동네가 그렇듯, 이곳도 큰길을 제외한 뒷골목은 미로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나는 맵핵이 있다고.'

시야에 표시된 경로를 따라 질주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끝에 표시된 목적지에 다다랐다.

타앙――!

저격총 특유의 요란한 총성이 들려왔다. 8층 정도 되는 건물의 옥상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나는 달리는 속도 그대로 발끝에 힘을 줬다. 순간적으로 부풀어 오른 허벅지가 강하게 대지를 밀어냈다.

콰직.

시멘트로 대충 덮인 땅이 그대로 갈라졌다. 거미줄처럼 갈라진 실금이 골목길 전체에 퍼졌다.

나는 내 몸을 붙잡는 거미줄 같은 중력을 뚫고 그대로 날아올랐다.

단숨에 5층 높이까지 떠오른 나는 건물 외벽의 창틀을 몇 번 밟았고······.

탁.

숨을 한번 들이켤 시간 만에 8층 건물 옥상에 내려설 수 있었다.

"······?"

때마침 탄환을 채우던 저격수와 눈을 마주쳤다.

스르릉.

나는 천천히 칼을 뽑으며 말했다.

"눈깔아."

"······!"

하지만 놈은 눈을 깔지 않고, 오히려 두 눈을 치켜뜬 채 허리춤에 멘 권총을 빼 들었다.

서걱.

치켜뜬 두 눈 그대로 놈의 머리가 빙그르르 회전하더니 바닥에 툭하고 떨어졌다.

털썩.

뒤이어 권총을 빼 들던 놈의 몸도 힘없이 쓰러졌다.

나는 발치로 굴러온 놈의 눈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눈을 왜 그렇게 떠."

* * *

다른 쪽 저격 포인트의 저격수도 마저 처리했다. 옥상에서 옥상으로 몇 번 날듯이 뛰어넘으니 바로 도착할 수 있었다.

"후우. 이제 잔바리만 남은 건가?"

나는 바닥에 떨어진 저격수 둘의 머리를 힐끗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나마 위험한 저격수를 처리했으니, 이제 매드맥스를 찍었던 미친놈들만 처리하면 되겠군.

······이라고 마음먹은 그 순간.

-마스터. 조심하십시오. 정체불명의 비행선이 접근 중입니다.

"비행선? 드론이 아니고?"

나는 렌즈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행선이라니? 그게 이런 곳에 왜 나타나?

그런데 진짜 비행선이 나타났다.

투투투퉁! 투투투퉁!

그것도 발칸포를 쏘면서 말이다.

콰콰쾅! 콰콰콰쾅!

"······."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그 광경을 입을 벌리고 쳐다봤다.

'미친놈들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막 나가다니?'

발칸포가 쏟아진 대지는 말 그대로 초토화가 되었다. 사방이 터져나가고 불길에 휩싸였다.

오래된 건물은 외벽이 전부 허물어져 뼈대만 남았고, 해방 전선이 사용했던 철제 가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 정도면 재개발 철거를 대신 해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이건 시 정부에서도 절대 그냥 넘어가진 않을 거다.'

문제는 시 정부를 기다릴 시간이 없다는 거다. 전투비행선의 폭격으로 그라타와 해방 전선이 쓸려나가기 직전이니까.

'여기서 그라타를 잃을 순 없다. 해방 전선을 이용하려면 녀석이 필요해.'

몰랐으면 모르되, 알게 된 이상 해방 전선이라는 카드를 그냥 포기하긴 아까웠다. 미래엔 시 정부와 영혼의 맞다이까지 하는 강력한 무장단체였으니까.

나는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내 중단된 건설현장을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미친 세계에서 살아가는 법 (4)

50화. 미친 세계에서 살아가는 법

나는 건설현장 한곳에 녹이 슨 채 버려진 철제 H빔을 들어 올렸다. 건물의 하중을 지탱하는 용도답게 묵직함이 느껴졌다.

철근도 우그러뜨리는 내가 들었음에도 저절로 온몸에 힘이 들어갈 정도의 무게감. 어느 한쪽으로 치우 지지 않은 밸런스.

나는 H빔을 몇 번 던졌다,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나는 그대로 비행선을 향해 달려갔다. 길게 뻗은 골목길을 질주하며 순간적으로 속도를 높였고······.

"흐읍!"

강하게 내디딘 발을 지지하며 그대로 H빔을 하늘로 쏘아 올렸다.

쐐애애액!

내 손에서 벗어난 H빔이 허공을 찢으며 날아갔다. 지상에서 발사한 대공미사일처럼 H빔은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 나갔다.

그리고 그 궤적의 끝엔 전투비행선이 위치하고 있었다.

위이이잉!

지상을 향해 발칸포를 쏘아대던 비행선이 잠시 포격을 멈추고 기우뚱하며 기울었다.

회피기동. 찰나의 간격으로 H빔이 비행선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깝군."

저놈들이 조금만 더 방심했더라면 격추할 수도 있었는데.

짧게 혀를 차는 사이, 기우뚱 기울었던 비행선의 머리가 나를 바라봤다.

H빔이 유도기능이 있는 게 아니니, 일직선상에 있는 나를 발견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내가 의도한 바이기도 했다.

"어그로 끌기는 성공했군."

나는 비행선에 달린 발칸포의 총구가 나를 향하는 걸 보며 작게 웃음 지었다.

어디 한번 놀아볼까?

* * *

블랙스컬의 공격에 그라타는 주민들부터 대피시켰다. 주민들은 자신들도 함께 싸우겠다고 했으나, 그라타는 냉정히 거절했다.

주민들은 기껏해야 갱단 수준의 전투를 예상하고 용기를 냈겠지만, 그동안 블랙스컬과 몇 차례나 싸웠던 그라타는 알고 있었다.

이들은 고기 방패도 되지 못할 거라고. 아니, 오히려 방해될 거라고 말이다.

그렇게 그라타는 주민들을 뒤쪽으로 대피시키고 전장에 합류했다. 그때는 이미 서로 총격전이 시작된 이후였다.

'미친놈들! 미사일까지 들고 오면 어쩌자는 거야?'

이곳이 비록 낙후되긴 했어도 주민들이 사는 주거지였다. 총격전이야 종종 벌어진다고 해도, 미사일이 날아다니는 일은 거의 벌어지지 않았다. 그 정도로 일이 커지면 SCPD가 출동할 이유가 된다.

'이렇게 대놓고 몰려온 걸 보면, 이미 SCPD에도 손을 써놓은 건가?'

아마 이번에야말로 작정하고 온 듯싶었다. 눈에 보이는 개조 차량만 10대에 육박한 데다가, 어떤 대화도 없이 총질부터 시작했으니까.

'개새끼들! 절대 쉽게 당하진 않겠다!'

그라타가 전장을 크게 돌아 우회했다.

이곳에 있으면서 가장 눈여겨봤던 게, 이 미로 같은 골목길이었다. 일견 복잡해 보이는 이곳은 모든 길이 서로 이어져 있었다.

'즉, 길만 알고 있다면 어디로든 원하는 곳으로 나올 수 있다는 뜻이지!'

좌측에서 들려오던 총성이 점점 가까워졌다. 거친 발소리와 고함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찾았다.'

시야 끝으로 골목 경계에 몸을 엄폐한 채 총을 갈겨대는 블랙 스컬 단원이 보였다. 적진까지 골목길에 숨어 도착하는 데 성공한 거다.

그라타는 걸음을 천천히 늦추고, 뜀박질로 거칠어진 호흡을 가라앉혔다.

차분한 시선으로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이곳에 놈들의 전선 끝단인지, 다른 놈은 보이지 않았다.

'일단 저놈부터 처리한다.'

순간 그라타의 온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주변을 일렁이며 공간을 왜곡하던 어느 순간, 그라타의 모습이 스르륵 배경에 녹아들었다.

그라타가 각성한 기프트.

「투명화」였다.

투타타탕! 틱!

철컥철컥!

한 차례 탄창을 모조리 소모한 블랙 스컬 단원이 골목길에 다시 몸을 숨겼다.

"씨발! 생각보다 저항이 쎈데? 비행 지원은 언제 오는 거야?"

놈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욕을 지껄이며 탄창을 교체했다.

그렇게 다시 탄환을 보충한 총을 들고 골목길 바깥으로 빼꼼 고개를 내미는 순간.

탕!

묵직한 단발의 총성과 함께 놈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코 위로 머리가 사라진 놈의 몸이 그대로 털썩 바닥에 쓰러졌다.

아마 죽어서도 자신이 왜 죽었는지 모를 거다. 골목길은 여전히 어떤 인기척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게 시작이었다.

보이지 않는 암살자의 손에 놈들의 머리가 날아가기 시작한 게.

* * *

탕!

또 하나의 블랙 스컬 단원의 머리통이 날아갔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날아온 탄환은 그 누구도 대처하지 못했다.

'이걸로 일곱.'

그라타의 손에 머리통이 날아간 블랙스컬의 숫자였다. 몰려온 놈들의 숫자가 대략 오십 명이 조금 넘었으니, 그의 손에 10%가 넘게 죽은 셈이다.

만약, 이대로 시간이 더 길어진다면 더 많은 숫자를 갉아먹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제 한계야.'

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지긴 힘들었다.

기프트는 신이 내린 선물이었지만, 항상 사용한 만큼의 혹독한 대가가 필요했다.

으드득.

그라타는 온몸을 엄습하는 통증을 이 악물고 참으며 빠르게 담벼락을 기어올랐다. 허름한 다세대주택 옥상까지 올라간 그는 물탱크 옆으로 몸을 숨겼다.

그 순간, 투명화가 풀리며 여태 참았던 통증보다 더 강한 통증이 전신을 강타했다.

"크윽! 크흐흑!"

덜덜덜덜.

발작하듯 바닥에 쓰러졌다. 온몸의 근육이 경련으로 떨리고 뒤틀렸다.

목 끝까지 차오르는 비명을 필사적으로 내리눌렀지만,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신음까진 어쩔 수 없었다.

"······흐!"

한 차례 통증의 파도가 지나자, 핑하고 머리가 돌았다.

간신히 몸을 뒤집은 그라타는 멍하니 하늘을 쳐다봤다. 어지러운 시야 때문인지 구름이 춤추듯 요동쳤다.

그런데.

"······어?"

요동치는 구름 사이로 거대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구름을 가르며 빠르게 가까워지는 그것의 정체는······.

"미친! 전투비행선이라고?"

그라타가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순간 아찔한 현기증이 찾아왔으나, 지금은 그걸 걱정할 게 아니었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난간에 다가섰다. 역추진 로켓으로 정지하듯 체공하던 비행선의 사출구가 열리더니, 거무튀튀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그라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런 미친놈들이!"

그건 발칸포였다. 20mm 전술 탄두를 초당 수백 발까지 쏟아내는 기관포이자, '전장 파괴자'라고도 불리는 무기였다.

투투투퉁! 투투투퉁!

발칸포가 불꽃을 내뿜었다.

자비 없이 내리꽂힌 폭격은 순식간에 대지를 초토화시켰다. 그 궤적에 걸린 모든 목표는 그 흔적까지 사라졌다.

"아, 안돼!"

그라타의 시야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동료들이 들어왔다.

무너진 건물에 깔린 동료부터, 파괴된 엄폐물과 함께 온몸이 걸레짝이 된 동료, 고폭소이탄이 폭발해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폭사한 동료까지······.

초능력이고 뭐고 압도적인 화력 앞에선 이들도 그저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아, 아아······."

전장에 죽음의 공포가 내려앉았다.

상식을 깨버리는 비대칭 전력의 등장은 사기와 의지를 단번에 꺾어버렸다.

털썩.

그라타가 힘없이 주저앉았다. 아찔한 현기증이 머리를 쥐고 흔들었다. 빙글빙글 도는 시야로 인해 눈조차 뜰 수 없었다.

'이대로 모두 죽는 건가······?'

그렇게 포기하려는 그 순간.

투투투둥! 두두두둥······

'소리가 멀어진다?'

하늘의 분노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대했던 발칸포의 소리가 서서히 멀어져갔다.

간신히 눈을 뜬 그라타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러자 해방 전선 머리 위에 떠 있던 비행선이 무언갈 쫓아가며 발칸포를 쏴대는 게 보였다.

그라타가 눈을 좁혔다.

대체 뭘 쫓는 거지?

"······강현재?"

그라타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비행선이 쫓아가며 발칸포를 쏴대는 대상은다름 아닌 강현재였다.

'엄청나다!'

강현재는 발칸포의 폭격을 유유히 피해내고 있었다. 대지를 초토화시키는 불의 비가 따라오는데도, 그의 움직임은 표홀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오히려 가지고 놀고 있어!'

비행선을 꼬리에 달고 골목길을 이리저리 돌던 강현재는 어느새 블랙스컬 진형에 가까워졌다. 점점 가까워지는 폭음에 블랙스컬 단원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윽고 골목길을 빠져나온 강현재는 그대로 블랙스컬이 대기하던 진형으로 뛰어들었다.

투타타탕!

블랙스컬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다들 대놓고 몸을 드러낸 채 강현재를 노렸다. 그는 기껏해야 혼자였으니까.

총성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쏟아지는 탄환이 화망을 이뤘다. 마치 탄환으로 만들어진 파도가 덮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반대로 비행선에서 쏟아내던 발칸포는 사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동료에게 발칸포를 쏴댈 순 없으니까.

여기까진 블랙스컬의 사정이었다.

강현재의 사정은 조금 달랐다.

그것도 꽤 많이.

번쩍!

"커억!"

"켁!"

태양빛에 반사된 칼날이 반짝일 때마다 적들의 수급이 떨어졌다. 총알이 비처럼 쏟아졌지만, 강현재의 움직임은 거칠 것이 없었다.

티팅! 티티팅!

귀신 같은 움직임으로 총알을 피해내거나, 내뻗은 칼날 끝으로 튕겨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의 끝은 항상 적들의 목숨으로 끝이 났다.

'······빠르다!'

강현재의 움직임은 눈으로도 쫓기 어려울 정도로 빨랐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엄청난 속도로 움직일 때마다 적들의 팔, 다리가 날아가고 목이 떨어졌다.

언젠가 전쟁 영상에서 봤던 전투 안드로이드나, 사이보그보다도 압도적으로 빠르고 강력했다.

'이게 정녕 나와 같은 인간인가?'

그라타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그때 여태껏 침묵을 지키던 비행선의 발칸포가 다시 대지를 찢었다.

이미 전장에 남아있던 블랙스컬의 숫자는 의미 없는 숫자로까지 줄어들었기 때문에 사정을 봐줄 필요가 없었다.

그 짧은 사이에 적들 대부분이 강현재의 손에 죽은 거다.

투투투퉁! 투투투퉁!

강현재가 빠르게 몸을 피했다. 발칸포의 궤적이 그 뒤를 쫓았다.

다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시작됐다.

"제길! 저런 비행선은 반칙이잖아!"

그라타가 분통을 터트렸다. 강현재가 아무리 인간같지 않게 강해도, 비행선은 기본적으로 공중에 떠 있었다.

강현재가 하늘을 나는 재주라도 있지 않은 한, 비행선의 공격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라고 생각했다.

눈으로 직접 그 광경을 보기 전까지는.

"······어?"

골목길 사이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비행선이 고도를 낮추도록 유도한 강현재가, 갑자기 8층 건물 외벽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중력을 거슬러 90도로 외벽을 달린 그는 옥상 난간을 밟았고, 그대로 비행선을 향해 튕기듯 날아올랐다.

가히 경이롭다 못해 경악스러운 퍼포먼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건 무모한 시도였다.

강현재의 무기는 쇠붙이에 불과한 칼뿐이었다. 칼로 전투비행선의 장갑을 뚫겠다고? 그건 이쑤시개로 바위를 뚫겠다는 소리였다.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걸 알기에 비행선 역시 강현재를 피하기보단, 오히려 가까이 날아오는 그를 향해 발칸포의 총구를 조준했다.

"뭐하는 거야! 피해!"

그라타가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그 외침은 이내 들려온 발칸포의 사격 소리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투투투퉁! 투투투퉁!

4개의 포신에서 총 32개의 총구가 회전하며 불을 내뿜었다. 마치 허공을 수놓은 불의 파도가 강현재를 덮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수백 발의 탄환이 강현재의 온몸을 갈기갈기 찢으려는 찰나.

번쩍!

감히 눈을 뜨고 쳐다볼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빛이 강현재에게서 뿜어졌다.

정확히는 강현재가 들고 있는 칼에서.

"······!"

그건 마치 태양과 같았다. 칼날은 이글거리며 불타올랐고, 뿜어지는 붉은빛은 눈이 멀 것처럼 찬란했다.

쇄도하는 탄환을 마주한 강현재는 그곳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

붉은빛이 하늘을 갈랐다. 순간적으로 지평선 너머 붉게 물든 하늘이, 정말 두쪽으로 갈라진 게 아닌가 싶은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칼날에서 떠난 붉은 궤적은 가장 먼저 쇄도하는 탄환을 베었고, 발칸포의 포신을 베었으며, 이내 비행선마저 반으로 쪼개버렸다.

위잉! 위잉! 위잉!

콰콰콰쾅!

갈라진 비행선이 그대로 지상으로 추락했다. 내부에 저장된 탄약들이 폭발하며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갈기갈기 찢긴 비행선은 뼈대만 남은 채 불타올랐다.

그리고 그 앞으로 강현재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는 불타는 비행선의 파편을 바라보며 천천히 검을 집어넣었다.

그 광경을 모조리 지켜본 그라타가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보다 더 괴물이 됐군."

미친 세계에서 살아가는 법 (5)

51화. 미친 세계에서 살아가는 법

솟구치는 불꽃이 넘실거린다. 불완전연소로 시커멓게 변한 연기가 하늘을 물들였다.

"아······."

그라타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초토화된 지역을 바라봤다.

주거지 대부분이 무너지고 불에 탔다. 콘크리트로 지어진 건물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았고, 벽돌로 지어진 집들은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재개발 반대를 외쳤는데, 이젠 재개발이 아니면 길바닥에서 지내야 할 판이다.

"다행이라고 생각해라. 건물은 무너졌을망정, 사람이 많이 죽은 건 아니니까"

나는 그라타의 허탈한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죽은 사람들에겐 미안하지만, 생각보다 인명피해는 크지 않았다.

주민들은 당연하게도 주전장 뒤편에 있었기에 피해자가 없다시피 했고, 해방전선도 쏟아지는 폭격에서 절반 가까이나 살아남았다.

물론 살아남은 인원 대부분이 멀쩡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어쨌든 이 세계에선 목숨만 붙어있으면 살 수 있었다. 팔, 다리쯤은 적당한 거로 갈아 끼우면 되니까.

"······대체 그놈들은 무슨 목적으로 이런 짓까지 벌이는 거지? 단순히 복수로 이런 짓을 벌인단 말인가? 복수의 이름으로 이런 짓을 벌여도 그게 정당하단 말인가!"

악에 가까운 고함을 지른 그라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붉어진 두 눈은 혼란과 증오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 아래 작게 불씨를 피워내는 불꽃을 발견하곤,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정당하지 않지. 이 미친 세계에서 힘을 가진 자들이 언제 정당함을 따지던가?"

"그럼 언제나 약자는 강자에게 당해야 한다는 말이냐!"

"그건 아니지. 내 말은······"

"그럼 정의를 부르짖는 약자는 항상 짓밟혀야 한다는 말이냐!"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뭐지? 너 역시 이제 강자가 됐으니, 이 불합리한 세계를 즐기기라도 하겠다는······ 커억!"

나는 분노로 눈깔이 뒤집혀서 흰자위를 보여주던 놈의 면상에 그대로 주먹을 날렸다.

바닥에 쓰러진 놈이 얼굴을 부여잡고 나를 올려다봤다. 커진 눈동자엔 어느새 불꽃이 꺼져있었다.

뭐, 그 대신 왜 때렸냐는 억울함이 자리 잡았지만······ 그러게 눈을 왜 그렇게 떠?

나는 녀석을 내려다보는 시선을 삐딱하게 기울인 채 말했다.

"이 새끼야 나도 말 좀 하자."

"아, 알았다."

"후우······! 내 말은 '무엇이 정당하냐?', '무엇이 정의냐?' 따위에 목매지 말라는 거다. 그런 건 하등 중요한 게 아니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면 뭐가 중요하단 거냐?"

"네 말대로 강자에게 짓밟히기만 하던 약자도, 때론 복수에 성공할 때가 있다. 우리는 그걸 보고 통쾌하다고 느끼지. 아닌가?"

"맞다. 그게 정의지."

"정의라······."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정당하지 않다면, 그때도 우린 통쾌하다고 느낄까? 부모의원수를 복수하기 위해, 똑같이 원수의 부모를 죽이는 게 네가 부르짖는 '정의'라고 말할 수 있나?"

"그, 그건······"

예상 못 한 질문에 녀석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떨렸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하지. 여태껏 당했는데 약자도 그럴 수 있는 거 아니냐고. 그런데 거기서 나아간 누군가는 이렇게까지 말해. 약자가 강자를 상대하려면 어쩔 수 없이 정당하지 않은 방법을 사용해야만 한다고. 그게 '약자의 정의'라고."

악(惡)을 처단하기 위해 스스로 악이 되는 것.

그건 악인가? 아니면 선인가?

"······."

그라타는 입을 다물었다. 똑똑한 놈이니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다.

물론 알아들은 것과 그걸 받아들이는 건 다른 범주의 이야기다. 신념과 이념의 대립을 주장하는 사람 중 똑똑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으니까.

독자에겐 독자만의 삶이 있듯, 모든 개인에겐 각자만의 정의가 존재한다는 거다.

"이미 너희와 블랙스컬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됐으니 복수하는 걸 뭐라고 하진 않겠다. 그럴 이유도 없고. 다만,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은 항상 너희 스스로를 경계하라는 거다."

"······우리도 그들처럼 괴물이 되지 않도록 말이로군."

"그래.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보면, 그 심연 또한 너희를 보게 될 테니까."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항상 이 과정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악의 심연은 본능과 같아서, 자기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채 지배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잠시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다가 시선을 돌려 폐허가 된 주거지를 함께 바라봤다.

그곳엔 집을 잃고 망연자실한 주민들과 죽어버린 동료들의 시체를 수습하는 해방 전선. 아무것도 모르고 폐허를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폐허 곳곳에 널브러진 시체조각이 어우러져 있었다.

그때 그라타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고맙다. 네 덕분에 살았어."

피식.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딱히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나도 블랙 스컬 놈들이랑 좋은 인연은 아니니까."

"너도?"

"잊었나? 나도 너희와 같이 감자 농장에서 탈출했다."

"······그렇군. 이왕 이렇게 된 거 너도 우리에게 합류하는 건 어떤가? 우리가 서로 힘을 합치면 저놈들도 우릴 우습게 보지 못할 텐데."

"미안하지만, 그건 어렵겠군. 나도 목표가 있어서."

"그런가······ 아쉽군."

그라타는 나를 더 잡지 않았다. 감자 농장에서 헤어질 때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으니까. 그의 말대로 아쉬운 마음에 다시 던져본 말이겠지.

"그나저나 너희는 이제 어쩔 거냐? 주거지가 이 꼴이 됐으니 시 정부에서도 가만히 있진 않을 거다. 어떻게든 너흴 엮어서 쓸어버리려고 할 거야."

이 일을 벌인 범인이 블랙 스컬인지, 아닌지는 시 정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재개발 구역에 전투비행선까지 등장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점. 그것만 노리고, 이참에 이곳을 군을 동원해 밀어버릴 수도 있었다.

지나친 비약 같지만, 썩어빠진 시 정부의 높으신 분들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우린 그저 빈민층을 위해 싸울 뿐이다. 이대로 물러설 순 없어."

그라타가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정신 나갔나? 블랙 스컬의 공격에도 이런 희생이 나왔는데, 시 정부를 상대로 싸우겠다고? 네놈들 전부 뒈지고 싶어서 작정했나?"

"그, 그렇다고 저들을 포기할 순······!"

"이렇게 개죽음당하려고 감자 농장에서 그렇게 열심히 싸웠나? 네가 얻은 자유의 가치가 고작 이 정도냐?"

"······!"

녀석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날의 처절했던 기억은 결국 삶과 자유를 위해서였다.

나는 그걸 되새겨준 거다. 네가 힘들게 얻은 자유로운 삶이, 기껏 이곳에서 죽기 위한 삶이었냐고.

"후우. 두 가지 해결방법이 있다."

짧게 한숨을 내뱉고 말을 이었다.

"첫 번째는 하울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 모든 것의 시발점이 하울이니, 원인이 사라지면 시 정부에서도 무리하지 않겠지."

"······하지만 여태껏 하울이 목적지를 바꾼 적은 없었는데?"

"그래. 네 말대로 그건 기대하기 어렵겠지. 그럼 남은 건 하나다."

"그, 그게 뭐지?"

나는 입술을 비틀며 대답했다.

"시 정부가 이런 곳에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큰일이 터지면 되겠지."

* * *

어느 도시나 그렇듯, 선거(Election)는 그해 가장 큰 사건이다.

온갖 돈과 권력, 정치와 암수, 때때로 음모와 살인까지 벌어지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벤트.

사람들은 그런 정치인들을 보며 욕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정치하는 놈들이 다 그렇지, 뭐!

그리고 그중 가장 큰 이벤트. 소울 시티의 시장 선거가 앞으로 채 1년도 남지 않았다.

'사이드 퀘스트 중에 이즈음 벌어진 사건을 파헤치는 퀘스트가 하나 있었지.'

나는 기억 속에서 사이드 퀘스트 내용을 끄집어냈다.

"야당 후보 중 한 명이 바닐라 시티와 연계해서 하울의 정박기간 동안 테러를 벌일 거다."

"테러?"

"그래. 그걸 빌미로 정부와 여당을 공격하겠지. 중요한 손님이 방문한 기간에 치안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며 말이다. 그럼 아무래도 표심에 영향을 미치겠지. 하울의 방문을 모르는 시민들은 없으니까."

"······그게 우리와 상관이 있나?"

역시 그라타의 반응은 정치에 관심이 없는 누구나처럼 시큰둥했다.

그래. 이게 일반적인 반응이겠지. 표심이고 뭐고, 이놈이든 저놈이든 어차피 그놈이 그놈이니까.

물론 내가 여기서 정치에 대해서 떠들려는 게 아니다.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그라타의 질문처럼, 그게 우리와 상관이 있으니까 꺼낸 말이니까.

"당연히 상관있지. 모르겠나? 이게 밝혀지면 이깟 재개발 구역은 관심에서 멀어진다는 뜻이다."

"······!"

그라타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빙그르르 돌아가는 눈동자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녀석은 이해했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래. 네 말대로라면 그렇겠지. 정권을 잡으면 이런 조그만 재개발 구역에 목매지 않아도 될 테니. 그런데 이걸 네가 어떻게 안 거지?"

"글쎄. 그걸 아는 게 너희 목숨보다 중요한가?"

나는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딱히 대답할 말이 없어서 한 말이었지만, 녀석은 흠칫 놀라며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아니지. 그런데 이걸 알아도 우리가 뭘 할 수 있지? 뭐, SCPD에 신고라도 하라는 거냐?"

"그게 퍽이나 먹히겠군. 당연히 아니다. 너희가 할 일은 따로 있어."

"그게 뭐지?"

"너희는 이 사실을 사이버 스페이스에 퍼트려서 넷에 접속한 모든 사람이 알게 하면 된다."

내 말에 녀석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게 퍼지는 속도보다 우리가 잡혀서 죽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

"너희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너희 보스라면 가능할 거다."

해방전선의 창시자.

메인 시나리오의 주역인 그는 이 세계에서 손꼽히는 로봇공학자이자, 사이버러너다. 그야말로 사이버펑크의 화신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 네가 우리 보스를 어떻게 알고?"

그라타의 눈이 또다시 찢어질 듯 커졌다. 팽팽하게 늘어난 눈꼬리가 파르르떨렸다. 이제 보니 녀석의 눈이 왜 유난히 큰지 알 것 같았다. 놀랄 때마다 눈을 찢어대니 강제로 커진 게 분명했다.

나는 왠지 분해져서 싸늘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다시 말하지. 그게 너희 목숨보다 중요한가?"

"······제길! 할 말이 없군. 만약, 네 말이 사실이라면 보스에게 말해보겠다."

"당연히 사실이다."

나는 덤덤한 시선으로 녀석을 쳐다봤다. 물끄러미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녀석이 피식 웃음을 터트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믿겠다."

* * *

부아아앙!

나는 흙먼지가 내려앉은 바이크의 쓰로틀을 당기며 중얼거렸다.

"운이 좋군."

그 난리가 났는데 바이크가 다행히 멀쩡했으니 말이다. 솔직히 절반쯤은 포기하고 있었다. 멀찌감치 주차를 해놨다고 하더라도 구역 전체가 초토화가 됐는데 바이크라고 멀쩡하랴 싶어서.

그런데 멀쩡했다. 날아온 흙먼지 때문에 좀 더럽혀지긴 했지만, 이거야 청소하면 말끔하게 해결될 일이다.

"정말 운이 좋군."

나는 다시금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쓰로틀을 당겼다.

부아아앙!

그라타와 이야기는 그걸로 끝냈다. 녀석은 이곳에 없는 다른 감자 농장 동료들을 보러 가자고 했으나, 나는 딱히 보고 싶지도, 볼 이유도 없어서 거절했다.

떠나는 내 뒷모습을 보며 정 없는 놈이라고 구시렁거리는 게 생각나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다만, 그냥 떠난 게 아니라 그라타와의 연결점은 남겨뒀다.

'해방 전선의 보스, 남궁민수. 그자가 원한다면 만나겠다고 했으니까.'

해방 전선이라는 단체만큼이나 불가사의한 존재가 바로 남궁민수라는 인물이었다.

이 사이버펑크 세계에 가장 어울리는. 아니, 그야말로 사이버펑크 그 자체인 사람이 하려는 일이, 정작 이 사이버펑크 세계를 붕괴시키려는 일이었으니까.

'과연 그도 게임이랑 똑같을까? 아니면 나와 그라타처럼 원래 게임 내용과 다른 길을 걷게 될까?'

메인 시나리오의 주역인 만큼, 그게 가장 궁금했다.

그렇게 쭉 뻗은 도로를 달려, 재개발 구역을 빠져나가는 마지막 교차로에 다 다랐는데······.

"······?"

누군가 도로 한가운데를 떡하고 서서 가로막고 있었다.

'별 미친놈이 다 있군. 죽으려고 환장한 건가?'

부아아앙!

나는 바이크의 속도를 천천히 늦췄다.

어느 세계에나 그렇듯, 미친놈에겐 매가 약이었다. 잠시 내려서 참교육을 시전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그 순간.

"여기서 또 보는군, 소드마스터."

미친놈이 고개를 들었다.

미친 세계에서 살아가는 법 (6)

52화. 미친 세계에서 살아가는 법

나는 얼굴을 구겼다. 태양을 등지고 있던 놈의 정체가 챙모자 괴인이었기 때문이다.

내게 찾아와 대뜸 가벼운 인사라고 말하며 총질을 해대다 자폭했던 블랙스컬의 안드로이드 말이다.

"네 친구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구경하러 온 건가?"

바이크를 멈춰 세운 나는 주변을 살폈다. 이전에도 드론과 함께 나타났던 놈이기에 혼자라고 생각해선 안 되니까.

게다가 확실히 수상쩍긴 했다. 이쪽 도로가 40번대 구역으로 향하는 외곽도로 이긴 해도 이렇게까지 한산할 리가 없는데, 오가는 차량이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그 혓바닥은 여전하군. 그래. 네가 이곳에 있을 거라는 건 확실히 예상 밖이었지. 해결사 일은 관두셨나?"

놈이 비아냥거리며 챙모자를 들어 올렸다. 드러난 놈의 얼굴엔 눈 대신 커다란 카메라가 달려있었다.

나는 카메라 렌즈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무서워서 얼굴도 직접 보러오지 못하는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푸하하하! 내가 너를 직접 보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시간이 없어서 일 뿐이다. 전에도 말했지만 너는 너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는군?"

"글쎄. 그런 것치곤 전투비행선이 박살 나고 부들부들 떨면서 나타난 게 너무 티 나는데? 하긴, 한두 푼이 아닐 테니 속 좀 쓰리겠어."

"건방진!"

태연한 척 대꾸하던 놈이 분통을 터트렸다. 아마 정곡을 찌른 듯했다.

그게 신호라도 됐는지, 태양이 저무는 지평선 너머로 다수의 인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블랙 스컬의 용병들인가?

미간을 좁히며 바라보는데, 인간이라고 하기엔 그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이윽고 구분이 될 정도로 다가온 그들의 면면을 본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얼굴을 가리는 챙모자와 바람에 휘날리는 갈색 코트자락.

지평선을 가르며 달려오는 그들 전부 챙모자 안드로이드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취향이 일관적이로군. 바바리맨 페티쉬라도 있나?"

"흥! 오늘은 지난번처럼 쉽진 않을 거다!"

버럭 소리를 친 놈이 코트자락을 탁하고 털더니 가슴을 쭉 내밀었다.

가슴 양쪽에서 길쭉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거무튀튀하게 도색된 총구였다.

"······맨(Man)이 아니었던 건가?"

"닥쳐라!"

투타타타타탕!

놈의 가슴이 불을 뿜었다. 갈라진 코트 사이 툭 튀어나온 양 꼭지에서 불길이 솟구친다.

나는 나오지 말아야 할 구멍에서 쏘아진 탄환을 모조리 튕겨내며 놈에게 달려 갔다.

피한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지만, 그럼 바이크에 맞는다. 발칸포의 폭격에서도 살아남은 바이크를 이런 허접한 총질에 잃을 순 없다.

티티티팅!

사방으로 잘려나간 탄환이 튕겨 나간다. 나는 눈앞에서 흩어지는 탄환 너머로 놈의 쭉 뻗은 가슴을 노려보다가······.

서걱.

그대로 놈의 상체를 비스듬히 잘라버렸다.

끼이익.

기우뚱 기울어진 놈이 내 옷깃을 붙잡으려 허우적거린다. 나는 손을 내뻗는 놈의 머리를 그대로 발로 차서 저 멀리 날려버렸다.

투타타타······.

놈이 하늘로 날아가며 사방에 총탄을 쏴댄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대로 뒤로 돌았다.

카캉!

그새 다가온 다른 놈들이 육탄 돌격을 했다. 쭉 뻗은 양팔엔 손 대신 초진동커터가 달려서 웨에엥 거리는 소음을 냈다.

눈앞으로 여러 개의 초진동 커터 칼날이 날아든다. 한 놈당 양손이니까 2개씩, 네놈이 달라붙어 8개의 칼날을 휘둘러댔다.

카카카캉!

칼날끼리 부딪칠 때마다 맞닿은 부분이 전동칫솔처럼 떨려왔다. 손끝에 느껴지는 진동에서 이걸 평범하게 상대하면 안 되겠다는 걸 느꼈다.

"후우!"

짧게 숨을 들이켜고 재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기세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놈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나는 물러선 뒷발에 그대로 무게를 싣고 몸의 무게중심을 낮췄다. 칼날은 허리춤 칼집에 다시 수납했다.

그리고 달려드는 놈들을 바라보면서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끼리릭.

손잡이가 달그락거리며 비명을 지른다. 나는 사지백해에 흘러다니며 신체능력을 끌어올리던 포스 줄기 중 몇 다발을 손끝으로 끌고 왔다.

그 사이, 놈들의 초진동 커터가 내 몸을 찢어발길 듯 눈앞으로 쇄도했다.

그 순간.

번쩍!

나는 수납했던 칼날을 빛과 같은 속도로 발도(拔刀)했다.

칼집에서 폭발력을 응축하고 있던 칼날은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전면으로 포스를 쏟아냈다.

그것은 한줄기 선(線)이었다.

칼끝이 허공에 그려낸 선은 공간을 잘라냈고, 찰나의 시간을 베었으며, 그 궤적에 달려들던 놈들을 갈라버렸다.

투두둑. 후두두둑.

사방으로 조각난 초진동 커터의 칼날과 놈들의 팔다리가 분해되듯 낙하했다.

안드로이드답게 아직 상황을 이해 못한 놈들이 몸을 움직였지만, 그것도 이내 난자되듯 툭툭 갈라지며 안드로이드였던 흔적만이 남았다.

단 한 번의 일격.

그것으로 전투 안드로이드 넷을 완전히 박살 내버린 거다.

"소오드! 마스터! 이 새끼야아!"

투타타타타탕!

분노에 찬 다른 안드로이드가 총을 갈겨댔다. 아직도 놈들은 더 남았다.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녀석들에게 쇄도했다.

날아드는 탄환을 이리저리 피했다. 놈들은 이를 악물며 총구로 나를 쫓는다.

그때 한 놈이 앞으로 튀어나오며 가슴을 쭉 내밀었다. 양쪽 가슴에서 솟아난 반원형 물체가 불길한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또 너냐?'

나는 저무는 태양의 마지막 황혼을 담아 칼날을 내질렀다.

서걱.

놈의 가슴이 갈라지고 목이 날아간다. 머리가 사라진 몸체는 그대로 작동을 멈추고 기우뚱 기울었다.

그 순간, 주위에 있던 놈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거리를 벌렸다. 조금 전까지 이를 악물고 총질을 해대던 것과 상반된 움직임이다.

그때 날아가던 놈의 머리에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멍청한 놈!"

콰콰쾅!

놈의 비웃음과 함께 기우뚱하던 몸이 폭발했다. 치솟는 화염과 조각난 안드로이드의 파편이 세열수류탄처럼 주변을 집어삼켰다.

나는 코앞에서 터진 폭발에 검의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피하기엔 이미 늦었다.

'그럼 막는 수밖에.'

전방으로 검을 내뻗었다. 칼날 너머로 시뻘건 화염과 철조각이 쇄도했다.

나는 칼끝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손목을 회전시켰다. 손목을 따라 호를 그리던 칼날은 이내 원이 되었고, 그 원은 빠르게 한 겹, 두 겹, 세 겹······ 겹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회전하는 칼날이 빈틈없는 완전한 원을 만드는 순간.

티티티팅!

후욱!

날아들던 안드로이드의 파편도, 치솟던 화염도.

마치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원을 넘어오지 못했다.

검막(劍幕).

칼잡이가 구사할 수 있는 극한의 방어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물러났던 놈들이 동시에 중얼거렸다. 나는 그 모습에 눈빛을 반짝였다.

하지만 당황한 것도 잠시였는지, 놈들 중 하나가 버럭 소리를 쳤다.

"이것도 막아봐라!"

폭발을 막는 동안 나를 에워싼 건지, 전후좌우 사방을 둘러싼 놈들이 총을 갈겼다.

사람이라면 반대편에 있을 동료 때문에 절대 못 하는 짓이다. 총은 칼이 아니라서 반대쪽까지 날아가니까.

총알 몇 발 맞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은 안드로이드기에 할 수 있는 짓이었다.

투타타타탕!

나는 사방에서 쇄도하는 탄환의 궤적을 느끼며 입꼬리를 올렸다.

총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다만, 차이점은.

티팅! 티티팅!

나는 총알을 맞을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거다.

"이, 이걸 피하다니!"

나는 사방에서 쇄도하는 총알을 피하고, 튕겨내며 가장 가까이에 있는 놈부터 차례대로 몸을 갈랐다.

서걱.

콰지직!

단숨에 훈련용 볏단 자르듯 한 놈을 베어 넘기고, 바로 놈을 뛰어넘어 다음 놈을 베고, 반으로 갈라진 놈의 상체를 방패 삼아 다음 놈을 베고, 쓰러지는 놈을 집어던져 시선을 빼앗은 뒤 베고······.

이렇게 몇 번 반복하니, 도로 위에 멀쩡히 두 발 딛고 서 있는 건 오직 나뿐이었다.

"소드··· 마스, 터! 이게 끝, 이라고 생각, 하지··· 마라!"

발치에 굴러온 놈의 머리가 지직거리는 목소리로 떠들었다.

나는 놈의 눈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리고 저 렌즈 너머에서 나를 올려다 볼 놈에게 경고하듯 대답했다.

"너도 조심해라. 다음엔 네놈 등판에 직접 칼침을 꽂아줄 테니까."

"크, 크큭! 건방, 진건 여전···"

콰직.

나는 멋대로 떠들려고 폼을 잡는 놈의 머리를 짓밟으며 중얼거렸다.

"······슬슬 네가 누구인지 좁혀지고 있거든."

* * *

부아아앙.

엉망진창으로 널브러져 있는 안드로이드들을 뒤로하고 스로틀을 당겼다.

"운이 안 좋군······."

빌어먹을. 최대한 피한다고 피했는데, 결국 바이크에도 총 맞은 흔적이 남고야 말았다.

어쩜 이렇게 주는 것 없이 귀찮게만 하는 놈들이 다 있지?

"기필코 내가 받은 피해 이상으로 되돌려주마."

사실 따지고 보면, 내 전 재산을 꼬라박아도 한쪽 날개의 추진체도 사지 못하는 전투비행선을 격추시킨 것만으로도 충분한 복수긴 했지만······ 그건 전투 상황이었고.

나는 순수하게 놈들이 숨어있는 비밀기지라든가, 무기나 물자를 보관하는 창고를 털어버리고 싶었다.

그래야 놈들이 더 열 받을 것 같거든. 나도 건져 먹을 게 있을 것 같고.

"그나저나, 전투 안드로이드를 조종하는 그 자식······ 분명 한 놈이었어."

나는 조금 전 전투 중에 있었던 상황을 떠올렸다.

당황한 듯 중얼거리던 놈의 목소리가 모든 안드로이드에서 동시에 흘러나왔었다. 그건 놈이 한꺼번에 콘트롤하다가 생긴 사소한 실수였다.

"그 많은 전투 안드로이드를 혼자서 조종하다니······ 이 정도 능력이라면 분명 용병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있을 게 분명하다."

처음엔 당연히 한 놈만 조종하고 나머지는 명령에 따라 전투 안드로이드 본연의 AI가 움직이는 거라고 생각했다.

다이브를 통해 안드로이드를 움직이는 건, 그 몸에 빙의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런데 놈은 그게 아니었다. 그 수많은 안드로이드를 전부 놈이 접속해서 콘트롤하고 있었다.

게임으로 따지면, 1인칭 모드를 동시에 여러 개를 한꺼번에 움직이는 것과 비슷하다. 자동차 게임을 예를 들면, 동시에 수십 대의 차량을 운전하는 거나 마찬가지고, FPS로 생각하면 한 개 팀을 혼자서 조종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평범한 인간이라면 불가능하다는 뜻.

"그럼 당연히 비슷한 종류의 명성이 있을 테고······ 하나씩 파다 보면 만나게 되겠지."

나는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느꼈다.

직접 얼굴을 맞대고서도, 똑같이 지껄일 수 있을지 너무나 궁금해지는군.

* * *

시 공무원은 내가 찍어온 초토화된 재개발 구역의 사진을 바라보며 연신 감탄을 내뱉었었다. 이렇게 파격적으로 일을 처리한 해결사는 처음이라고.

그는 재개발 구역이 왜 이렇게 됐는지 설명을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흡족한 얼굴로 의뢰 완료 결재를 올렸다.

그러면서 다음에 개인적으로 의뢰를 넣을 테니, 그때 꼭 보자면서 손을 흔들었다.

"내 이름은 페르난도입니다. 잊지 말고 의뢰를 받아주십시오!"

나는 시 공무원의 반가운 인사를 뒤로 한 채 그곳을 떠났다.

결과적으로 의뢰는 성공한 셈이 됐지만, 뭔지 모를 찝찝함에 얼굴이 구겨졌다.

이게 이렇게 끝나는 게 맞는 건가? 주민들이 사는 주거지가 초토화됐는데? 시공무원은 그걸 보고 오히려 좋아한다고?

"······어렵군. 이 미친 세계에서 멀쩡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게."

나도 그냥 확 정신을 놓고 같이 미쳐봐?

······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가 고개를 재빨리 흔들어 생각을 털어냈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 * *

며칠 후, 하울이 소울 시티 상공에 진입했다.

온갖 매스컴에서 하울의 방문을 떠들어대며, 있는 얘기, 없는 얘기, 미친 얘기들을 쏟아냈다.

하울의 방문으로 경제 효과가 몇십 조에 달할 것이며, 기술협약으로 어떤 산 업이 진보하고, 하울이 상공에서 머무는 동안 기압 차이로 비가 내려 풍년이들 것이며, 치안이 올라가 범죄율이 떨어져 결과적으로 출산율이 늘어날 거라는 개소리를 특집 뉴스로 다루기도 했다.

이 세계는 언론도 미친놈들이었다.

그때 함께 뉴스를 보던 로제가 찻잔을 내려놓더니 불쑥 물어왔다.

"준비는 다 했어요?"

움직이는 성채, 하울 (1)

53화. 움직이는 성채, 하울

"무슨 준비가 필요하지?"

나는 헛소리를 떠들던 뉴스에서 시선을 떼고 오히려 되물었다. 난데없이 무슨 준비를 말하는 거지?

로제가 답답하다는 듯 코끝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하울 말이에요! 며칠 안 남았잖아요?"

"으음. 뭐 따로 준비할 게 있나? 어차피 그곳에도 다 있을 텐데."

나는 하울이 도착하는 이튿날 하울에 올라가기로 했다. 첫째 날은 너무 복잡할 것 같아서.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하자, 그녀가 샐쭉한 얼굴로 물었다.

"하캉스를 가는데 또 그 칙칙한 옷을 입고 가겠다고요?"

"하캉스?"

"하울에서 바캉스하는 걸 보고 하캉스라고 해요. 요즘 애들이 많이 쓰는 신조어라고요!"

"······별걸 다 줄이는군."

몇 글자나 된다고 저걸 줄여서 말하나? 게다가 애초에 하울에서 바캉스라니?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아무튼요! 큰돈 들여서 가는 건데 최대한 즐겨야죠! 안 그래요?"

어딘가 텐션이 올라간 로제가 내게 물어왔다. 묘한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한 사파이어색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나는 살짝 부담스러워지려는 그 시선에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진짜 따라올 건가?"

그녀의 텐션이 이렇게 잔뜩 올라간 이유는, 나를 따라서 하울에 올라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여기까진 뭐 그럴 수 있었다. 다 큰 성인이 휴가를 떠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니까.

문제는 '나를 따라서'가 문제였다.

그녀는 나를 콕 집어서, 하울에 머무는 동안 함께 움직이자고 말했다.

바쁘다고 했더니, 밥 먹을 시간도 없냐면서 입이 댓 발만큼 나왔길래 그 정도 시간은 된다고 말했었다.

······그게 얼떨결에 그녀와 함께 하울을 가게 된 이유였다.

"우리 로세툼의 에이스가 휴가를 떠난다는데, 저도 이때 맞춰서 쉬어야지 언제 쉬겠어요?"

"나는 쉬러 가는 게 아닌데······."

"하루 종일 볼일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저는 신경 쓰지 말아요. 혼자서도 잘 노니까!"

"······."

그녀는 어딘가 신나 보였다. 지금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홀로그램에 띄워진 바캉스 의상을 쇼핑하고 있었다.

"이런 옷 어때요? 여름 바캉스는 역시 하늘하늘한 원피스죠?"

그녀가 홀로그램을 만지작거리며 내게 물었다.

한 음정도 올라간 목소리 톤과 생글생글 웃는 그 미소를 보고 있자니, 나 역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 * *

하울에 오르는 비행선 안.

왕복 티켓만 5천만 케이달러나 하는 미친 가격답게 비행선에 오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부티가 좌르르 흐르는 부유층이었다.

거기에 하울에서 사용하는 숙박요금과 식사비용. 기타 관광 코스 비용들까지 합치면 족히 1인당 1억씩은 사용하게 될 거다.

인당 1억짜리 휴가라니.

30, 40번대 구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꿈조차 꿀 수 없는 무지막지한 비용이었다.

"이런 곳에 돈을 쓰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지."

나는 마치 호화유람선의 파티장처럼 꾸며진 비행선의 내부를 둘러보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곳이 비행선임을 의심하게 만드는 대리석 바닥과 그 위에 깔린 붉은 카펫.

여행객을 위한 간단한 케이터링이 준비된 기다란 테이블. 으리으리한 대리석기둥들과 천장 가득 새겨진 조각과 그림들. 길게 내려오는 화려한 샹들리에에선 은은한 빛이 반짝였고, 곳곳에 세련된 정복을 차려입은 승무원들까지.

"기왕 온 거 즐겨요! 돈도 많이 벌어놨잖아요?"

언제 가져왔는지, 샴페인 잔 두 개를 집어 든 로제가 내게 하나를 건넸다.

얼떨결에 잔을 받아들자, 멋대로 '건배!'라고 외치며 잔을 부딪친 그녀가 샴페인을 꼴깍꼴깍 마셨다.

"푸하! ······써!"

얼굴을 구긴 그녀가 혀를 내밀었다. 때마침 케이터링을 들고 지나가는 승무원의 쟁반에서 마카롱을 하나 집어서 얼른 입에 넣는다.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나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술 마실 수 있나?"

"헹! 당연하죠! 저 성인이거든요?"

"아니······ 그건 아는데. 여태껏 한 번도 마신 걸 본 적이 없어서."

그녀를 봐온 게 벌써 수개월이다. 로세툼 안에서긴 했지만, 함께 밥을 먹은 적도, 간식을 먹는 적도, 군것질이나 야식을 먹은 적도 있다.

아무튼, 그 시간 동안 그녀가 술을 입에 대는 걸 넘어서 언급조차 하는 걸 보지 못했다. 그 매운 떡볶이조차 뜨거운 홍차와 먹던 충격적인 모습이 생생한데······.

"이렇게 좋은 날 마시려고 아껴둔 거예요! 그래야 술맛이 더 달죠!"

조금 전에 쓰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그녀의 강한 척에 피식 웃고는 샴페인을 들이켰다. 청량감이 혀끝을 강타했다. 목구멍을 알알이 건드리는 탄산과 미묘하게 단맛과 섞인 씁쓸한 끝 맛.

이 맛은······.

"······알콜이 아닌데?"

"아하하하! 그거 사실 무알콜이에요."

"······."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럼 그렇지.

연회장 안으로 본격적으로 들어서자, 여러 사람들이 저마다 하하호호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게 들렸다.

미리 알던 사람들도 있었고, 여기서 처음 만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다들 개의치 않고 편한 얼굴로 담소를 주고받았다.

이게 뭘까? 간질거리는 느낌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런 게 바로 '여유'라는 것임이 떠올랐다.

그래. 여유.

이 세계에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적도, 두 눈으로 지켜본 적도 없었던 그 여유라는 감정 말이다.

'하루하루 사는 게 전쟁 같은 빈민들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감정이지.'

인간의 감정조차 돈의 고하에 따라 나뉘다니. 이 얼마나 아름답지 못해 빌어먹을 세상인가?

나는 무알콜 샴페인 때문인지 씁쓸해진 입맛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 자그마한 소파에서 다리를 흔드는 꼬마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앞엔 엄마로 보이는 여인이 아이의 머리칼을 정리해주고 있었다.

"엄마! 도착하면 하울캔디부터 사줘야 해? 알았지? 그거 먹는다고 애들한테 자랑했단 말이야."

"알았어. 대신 저녁밥 투정하면 안 된다?"

"응응!"

꼬마아이가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여인 역시 부드럽게 웃으면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행복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는 가족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후로도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흘러나왔지만, 내 의식은 그 이야기에서 서서히 멀어졌다.

'······가족이라.'

내 시선은 그 가족들 너머. 다른 시공간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 * *

인생이라는 건, 원래 공평하지 않다.

누군가는 태어날 때부터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지만, 누군가는 평생을 노력해도 원하는 삶은커녕, 그 근처에도 닿지 못한 채 외로운 죽음을 맞이한다.

사람마다 삶의 무게가······ 죽음의 무게가 다른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도, 그 '죽음'이라는 선택의 기로 앞에 서본 적이 있었다.

'그땐 진짜 죽을까 고민했었지.'

나는 뺑소니를 당했었다.

의사가 말하길, 사고 직후 바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더라면 그 정도로 망가지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길바닥에 방치된 채 버려졌다. 무려 2시간이 넘도록······.

그렇게 나는 세계선수권 대회를 코앞에 두고 국가대표 자리를 내놔야 했다.

······내 오른쪽 다리와 함께.

'검을 휘두르긴커녕, 제대로 걷기도 쉽지 않았지.'

아직도 국가대표에 선발되던 날이 두 눈에 선명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나를 홀로 키웠던 어머니에게 국가대표가 됐다고 말하던 그 날······ 정말 둘이서 원 없이 울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어머니를 철이 들고 처음 끌어 안아봤다. 어렸을 적 그렇게 커다랬었던 어머니가 이제는 한 품에 안겼다.

나의 시간만큼, 당신의 시간도 훌쩍 지나버렸다. 찬란했던 당신의 인생이, 이제는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만큼이나 빛바랜 사진으로만 남아버렸다.

나는 주름으로 가득한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었다.

'이제 행복하게 해줄 거라고.'

그땐 막연하게 그렸던 미래가 손끝에 닿을 것 같았다. 원하던 삶이 코앞에 다가온 줄 알았다.

아버지 없이 자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쏟아부었고, 드디어 그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라고 생각했다.

'역시 아직 세상은 살만하구나!'

······라고 '어리석은' 생각을 했다.

'그 모든 게 하룻밤 만에 박살 났지. 마치 꿈처럼.'

사고 이후, 나는 모든 걸 잃고 망가졌다. 평생을 노력했던 모든 게 무너졌고, 앞으로 살아갈 미래도 막막했다.

손끝까지 다가왔던 희망은, 결국 닿지 못하고 다시 저 멀리 달아나버렸다.

'하지만 날 이렇게 만든 놈은 그렇지 않았지.'

범인은 음주운전에 뺑소니까지 쳐놓고, 심신미약을 이유로 집행유예를 받았다.

······알고 보니 놈은 재벌가 아들이었다.

억울했다. 내 인생은 망가졌는데, 날 이렇게 만든 놈은 웃으면서 재판장을 떠났다.

놈의 뒤로 초호화 변호인들과 비서들이 줄줄이 따라 나오며 말했다.

축하한다고.

'씨발! 축하한다고? 나는? 내 인생은 이 개새끼들아!'

내 억울한 비명은 어느 곳에도 울리지 않았다. 그저 허공에서 사라질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였다.

약속이라도 한 듯 언론사는 침묵했고, 흥미가 식은 여론도 다른 이야기를 떠들기 바빴다.

그렇게 나는 철저히 혼자, 다시 나락으로 떨어졌다.

'언제나 당하는 건 힘 없는 약자들이지.'

세상을 욕했다.

비관했다.

벼랑 끝에 내몰린 내가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던 건······ 평생 나만을 바라보셨던 어머니 때문이었다.

[나의 평생이 무너졌다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평생마저 무너뜨릴 순 없었으니까.]

하루에 20시간씩 게임을 하며 아득바득 유튜브로 일어선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나는 다리를 잃었지만, 어머니는 전부를 잃은 거나 마찬가지였을 테니.

내가 유명해져서 TV에 나왔을 때도, 유튜브 수익으로 자그마한 집을 마련해드렸을 때도, 항상 당신의 눈빛 한편엔 미안함만 가득했으니까.

'가족이라······.'

이게 내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다.

그리고 이젠, 다시 볼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다른 세계의 기억이 되어 버렸다.

"뭘 그렇게 쳐다봐요?"

언제 다가왔는지, 비행선 창밖의 사진을 열심히 찍어대던 로제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녀의 시선이 나를 따라 움직였다. 때마침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린 꼬마아이가 엄마의 손을 잡고 케이터링이 차려진 테이블로 향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고개를 젓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냥······ 아무런 말도 하기 싫어서.

그걸 알기라도 하는지, 로제 역시 평소와 다르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다만, 나를 빤히 쳐다보는 시선만 느껴졌을 뿐이다.

그렇게 하울에 도착했다.

* * *

어둠으로 뒤덮인 어딘가.

기계음과 세찬 바람소리만 가득했던 이곳으로,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말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순간, 어둠의 한편이 서서히 갈라졌다. 새빨간 빛으로 반짝이는 그것은 무언가의 눈동자였다.

* * *

하울의 풍경을 뭐랄까, 진짜 티켓가격이 조금만 합리적이었다면 하나도 아깝다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지어진 수십 층 높이의 첨탑들은 '이게 정녕 하늘 위에 떠 있는 게 맞나?' 의심될 정도로 웅장했다.

발아래 카펫처럼 깔린 구름 사이로 도시의 빌딩 숲이 한눈에 들어왔고, 서서히 저무는 태양으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자 별빛이 내려앉은 호수처럼 도시의 불빛은 아득하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수천 미터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야경이라니. 로제가 신나게 사진을 찍어댔고, 나는 사진을 찍어줬다.

"나를 사진기사로 쓰려고 따라온다고 했던 거로군?"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제가 저녁 살 테니까! 풀코스로!"

"으음! 사진 찍는 게 어려운 건 아니니 언제라도 부탁하도록."

우리는 해도 저물었고 일단 짐을 풀어야 했기에, 호텔 체크인을 위해 나란히 프론트로 향했다.

호텔 예약도 그녀가 알아서 했던 터라, 나는 그녀 뒤에 서서 멀뚱히 호텔 내부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반가운 목소리로 아는척하며 다가왔다.

"여기서 또 보는군, 소드마스터."

나는 불과 얼마 전에 비슷한 대사를 들었던 것 같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움직이는 성채, 하울 (2)

54화. 움직이는 성채, 하울

그곳엔 새까만 수트. 새까만 셔츠. 새까만 타이. 새까만 선글라스까지.

검은색 성애자라는 걸 온몸으로 뿜어내는 사내가 서 있었다.

"존 위크?"

과거 내게 기업으로 영입을 제안했던 존 위크였다. 아직도 그날 호텔에서 먹었던 민트초코 맛은 잊혀지지 않았다.

그는 수행원으로 보이는 비서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한 다음 천천히 다가왔다.

"그때도 호텔에서 만났는데, 공교롭게도 두 번째도 호텔에서 만나는군."

덥수룩한 수염이 가득한 입가엔 반가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의 말대로 겨우 두 번째 마주쳤는데 뭐가 반가운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꽤 높은 자리에 있나 보군. 개인 비서들도 있고."

나는 공손히 기다리는 수행원들을 힐끗 바라본 뒤 물었다.

"당신이 온다면 내가 당장에라도 양보할 수 있지. 어때?"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거절하지."

"큭큭! 여전히 단호하시군."

내가 생각도 하지 않고 거절하자, 그가 킬킬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때마침 체크인을 마쳤는지, 로제가 옆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누구에······ 존 위크?"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다.

그런데 존 위크의 얼굴에도 놀랍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이런! 로세툼의 중개인께서 같이 계실 줄은 몰랐군. 함께 휴가라도 온 건가?"

"아니. 그녀는 휴가지만 나는 아니······."

그때 로제가 내 앞으로 성큼 한 걸음 걸어 나왔다. 자연스레 나와 존 위크 사이에 끼어든 그녀가 대답을 가로챘다.

"왜요? 우리가 휴가를 같이 올 정도로 가까운 사이인 건 몰랐나 보죠?"

나는 그녀의 날 선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뭐야? 이 상황?

"놀랍긴 하군. 장미화원의 장미는 너무나 아름답지만, 그 가시가 날카로워 그 누구도 꺾을 수 없다더니······."

말꼬리를 흐리던 존 위크가 나를 힐끗 바라보곤 말을 이었다.

"하긴, 소드마스터정도라면 아무리 날카로운 가시도 문제가 되진 않겠지."

"그걸 알면 좀 비켜주시겠어요? 오붓한 시간에 방해되는데."

턱을 들어 올린 로제가 특유의 당돌한 말투로 말한다. 둘의 시선이 강렬하게 맞부딪친다. 존 위크의 강렬한 존재감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그때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린 존 위크가 항복했다는 듯 양손을 들었다.

"푸하하하! 과연 소문대로군. 정말 날카로워. 일행이 있으니 오늘은 이만 물러서도록 하지."

덥수룩한 수염 위로 치아가 드러날 정도로 웃음을 짓던 그가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고 미련 없이 뒤로 물러섰다.

"다음에 또 보지, 소드마스터. 그럼 둘이 오붓하고 좋은 시간 보내길."

그는 원래 일정이 있었는지, 서둘러 다가온 비서와 함께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로제는 그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날카로운 눈으로 계속 쳐다봤다. 이윽고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날카로움을 풀풀 풍기던 눈빛이 다시 예전으로 돌아왔다.

그 모습을 옆에서 물끄러미 지켜보던 나는 의아함에 물었다.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해?"

그녀가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걸 많이 본 건 아니지만, 이렇게 날 선 반응을 보여준 건 처음이었다.

내 질문에 그녀가 샐쭉한 표정으로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

"잊었어요? 저 사람이 예전에 당신한테 영입제안을 했었잖아요!"

아? 설마 했는데 이거 때문이었나? 내가 분명 거절했다고 말했었던 것 같은데.

"내가 거절했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 그래도요! 언제 비겁한 수를 써서 회유할지 모른다고요!"

그녀의 눈동자에 희미한 불안감이 떠올랐다. 불안이라······ 왜지?

"흐음."

나는 그녀의 떨리는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턱을 긁적였다. 진짜 내가 비겁한 수에 회유당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대답을 기다리며 내 입만 쳐다보고 있는 로제에게 말했다.

"다시 한번 알려주지. 나는 너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갈 이유가 없다. 너는 내게 능력을 보여줬고, 믿음도 보여줬으니까."

"······!"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푸른빛 사파이어가 물결처럼 파도치며 일렁인다.

"하물며 기업의 하수인? 절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

그럴 바엔 차라리 너와 떡볶이를 집어 먹으며 쉬는 게 낫지."

"······."

그녀의 눈동자에 휘몰아치는 파도가 작은 포말로 부서져 내렸다. 불안함으로 일렁이던 눈빛은 다시 잔잔한 에메랄드빛 바닷가로 돌아왔다.

"······고마워요."

왜인지 양 볼을 붉힌 로제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기다란 속눈썹이 움찔거리며 떨렸다.

나는 그 모습에 작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조금 전 존 위크와 설전을 벌일 때처럼 당돌함도 좋지만, 이럴 때 보면 영락없이 그 나이 때의 아가씨 같았으니까.

그러다가 문득, 그녀와 존 위크가 나눴던 대화가 떠올라 물었다.

"그런데 오붓한 시간은 뭘 말하는 거지?"

"느, 에?"

당황한 듯 한껏 확장된 눈동자로 나를 쳐다본다.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유난히 하얀 피부라서 그런지, 더더욱 붉어 보였다. 마치 낙조로 붉게 물든 바닷가가 떠오르는 모습이다.

그녀가 버럭 소리를 쳤다.

"무, 뭘 그런 걸 물어봐요!"

* * *

다음날, 비몽사몽으로 함께 조식을 먹던 로제를 다시 방으로 돌려보내고 혼자 호텔을 나섰다.

가족 단위로 휴가를 온 사람들이 많은지, 이른 아침인데도 바깥엔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저 멀리 <하울 특산품! 하울 캔디>라고 쓰여 있는 작은 상점에 줄지어 늘어선 사람들이 보였다. 하울캔디가 뭔가 했더니, 형형색색으로 물든 커다란 솜사탕이었다.

나는 어제 만났던 꼬마아이가 떠올라 괜히 피식 웃어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일단 하울의 지도를 작성하는 게 우선이다.'

대부분 테마파크도 그렇듯, 관광지로 공개된 하울도 온갖 길이 얽히고설켜 있었다. 제대로 된 지도 없이 움직였다간 길을 잃기 십상이다.

물론 팸플릿으로 제작된 대략적인 지도는 있었지만, 나는 세세한 지도가 필요했다.

'하울에 숨어든 놈을 찾으려면 세세하게 정리된 지도가 필요해.'

내가 하울에 오른 이유는 이곳에 숨어 있을 「각성종」을 찾기 위해서다.

인간이 아니기에 놈이 숨어 있거나, 둥지로 삼을 만한 곳을 찾으려면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야 했다.

'일단 전체적으로 한 바퀴를 돌아볼까?'

나는 이브에게 지도 작성을 명령하고 관광객에게 공개된 하울의 모든 지역을 돌아다녔다.

공개가 안 되는 지역은 업무지구인 오피스 지역과 동력실, 격납고, 창고 같은 내부시설뿐이었는데, 그곳은 어차피 첨탑 내부에 있는 곳이라 상관없었다.

즉, 사실상 하울 외부는 관광객에게 전부 공개된 거나 다름없다.

'관광객이나 외부인력을 잡아먹고 성장한 게 분명할 테니, 분명 놈은 외부에 숨어 있을 거다.'

이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내부인력을 잡아먹었더라면, 진즉에 잡혔을 테니까.

그렇게 대략 5시간 정도 걸려서 하울을 한 바퀴 전부 돌았다.

"이브야. 완성된 지도 띄워봐."

-알겠습니다, 마스터. 3차원 이미지 출력 시작합니다.

렌즈 위로 3차원으로 만들어진 입체적인 지도가 떠올랐다. 복잡하긴 했지만, 하울의 특성상 층이 많기에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나는 완성된 지도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머리를 굴렸다.

'내가 놈이라면 어디에 숨었을까?'

* * *

파묻힌 기억을 떠올렸다.

내가 기억하는 놈의 모습은 지금으로부터 3년 후, 하울이 소울 시티에 재방문했을 때의 모습이다.

그때는 각성자의 존재가 완전히 알려졌을 때라 하울에도 각성자가 많았는데, 그걸 전부 이종 포식해서 먹어치운 놈의 모습은 괴물이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10미터가 넘어가는 체고에 새까만 온몸은 터질듯한 근육질이었고, 팔과 이어진 피막으로 하울을 날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파괴하던 모습.

그때는 놈이 가진 기프트가 몇 개인지 샐 수조차 없었다. 하늘에서 불과 번개를 쏘아대고, 휘몰아치는 속도는 태풍과도 같았으며, 총화기 따위는 겉가죽에 상처조차 주지 못했다.

이랬던 놈의 본모습······ 그러니까 본래 종족은 바로 박쥐였다.

어떤 경로로 놈이 하울에 올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놈은 이때에 이미 숨어 있었고, 알게 모르게 인간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이 박쥐 새끼를 어딜 가야 잡을 수 있으려나."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목소리를 들었는지, 이브가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박쥐라면 당연히 동굴에 있지 않을까요?

나는 피식 웃으며 진짜 박쥐가 아니라고 말하려는 그 순간.

'······잠깐? 그럴싸한데?'

하울을 초토화시키던 괴물은 아직 먼 미래의 일이다. 지금은 아직 괴물 「각성종」보다 박쥐 자체에 집중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게다가 동굴이 꼭 산속에 있으라는 법은 없다. 실제로 박쥐들이 도시로 내려와 터널이나 폐공장 같은 곳에서 지내기도 했으니까.

'하울도 따지고 보면 동굴과 같은 곳이 없는 건 아니다.'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수십 층으로 나눠진 하울의 지하층이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다.

'격납고와 창고. 이곳이 가장 유력하겠군.'

* * *

나는 일단 호텔로 돌아와 조금 쉬다가, 로제와 저녁을 먹기 위해 로비로 내려왔다.

격납고와 창고는 관광객이 접근할 수 없는 내부시설이었다. 들어가려면 몰래 침투해야 할 텐데, 대낮엔 아무래도 어려웠다.

'자정이 조금 지나고 침투하면 되겠군.'

내부시설로 들어가는 길과 사각지대는 낮에 확인을 하고 온 참이다.

문제는 내부시설에 진입한 뒤, 격납고와 창고를 찾는 일이지만······ 그건 어쩔 수 없으니 직접 부딪혀야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내 말 듣고 있어요?"

옆에서 재잘거리던 로제가 갑자기 훅하고 내 앞으로 얼굴을 들이민다. 나는 코앞까지 다가온 그녀의 얼굴에 뒤로 한걸음 물러서며 대답했다.

"······다 듣고 있었다. 메뉴는 네 안목을 믿어보도록 하지."

"흐응~ 그래요? 좋아요! 제가 오늘은 기필코 메뉴 선정에 성공하겠어요!"

주먹을 불끈 쥔 로제가 기합이 바짝 들어간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그 모습에 어제 먹었던 저녁식사가 떠올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그러도록. 어제 먹은 볼케이노 스테이크 때문에 아직도 속이 안 좋으니까."

"저는 맛있게 먹었는데요? 아, 알았어요. 왜 사람을 째려보고 그래요?"

로제가 툴툴대며 손목에 낀 워치를 두들기며 중얼거렸다.

"음음~ 매운 게 싫으시면 뭐가 좋으려나? 아예 반대로 시원한 맛을 느끼게 민트 크림 파스타가 좋으려나?"

"······."

나는 짧게 콧김을 내뿜고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메뉴는 내가 직접 골라야 할 것 같군.

그렇게 로비에 도착했는데, 뭔가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저마다 무리지어 있는 사람들은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눴고, 아이와 함께 있는 가족은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객실로 올라가기도 했다.

"무슨 일이 생겼나 본대요?"

주변을 살펴보던 로제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한번 알아보지."

"그래요."

나와 로제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엔 하얀색 정복을 차려입은 사내들이 출입문을 가로막은 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HH가 여긴 왜?'

하울 헬퍼(Howl Helper).

통칭 HH라 부르는 이들은, 하울 내부의 자체경찰로 세계 각지에서 손꼽는 강자들만 모인 무력단체였다.

하울이 여태껏 외부의 공격이나, 테러에 당하지 않은 것도 이들의 존재 때문이었다.

"5시간 이내 행적이 명확하지 않으시면 호텔을 벗어나실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내가 이런 대접 받으려고 비싼 돈 주고 하울까지 올라온 줄 알아!"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행적 조사 후 지상으로 내려가시면 됩니다. 하울은 당신 스스로 찾아온 거지, 당신을 초대한 적 없습니다."

"뭐, 뭐가 어째? 이런 건방진! 네 윗사람 어딨어? 내가 감히 누군 줄 알고!"

후덕함이 과해 심술보가 양쪽 턱 아래까지 처진 사내가 정복을 입은 요원의 얼굴에 냅다 주먹을 날렸다.

요원의 눈빛이 순간 험악해지더니, 양손을 쭉 내뻗었다. 그러자 손바닥에 작은 구멍이 열리며 안에서 길쭉한 침이 튀어나와 사내에게 쏘아졌다.

지지지직!

그건 테이저건이었다.

"구아아악! 꺼어억!"

사내는 주먹을 날리는 모습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오징어마냥 몸을 꿈틀댔다.

입에선 게거품을 줄줄 흘렸다. 평범한 테이저건보다 출력이 월등히 강한 듯싶었다.

갑작스레 벌어진 폭력사태에 사람들이 놀란 비명과 함께 요원들을 매서운 눈으로 노려봤다.

쓰러진 사내가 먼저 나서긴 했어도, 사실 그들 모두 똑같은 심정이었을 거다.

다들 소울 시티에서 한가락 하는 부유층이라 대접받는 게 익숙한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사람들의 그런 날선 시선에도 요원들의 표정은 미동도 없었다.

오히려 그 시선을 즐기기라도 하듯 유유히 둘러보며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지금으로부터 5시간 이내 행적을 소명하지 못한 분들은 호텔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그때 좌중을 둘러보던 요원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갑자기 눈을 크게 뜬 그가 내게 성큼 걸어왔다.

움직이는 성채, 하울 (3)

55화. 움직이는 성채, 하울

"당신. 최근 5시간 행적이 어떻게 되지?"

그는 다짜고짜 내게 행적을 물으며 날카로운 눈으로 내 위아래를 훑었다. 의심이 가득한······ 아니, 그것보단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나는 살짝 불쾌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곳에선 HH가 경찰이나 다름없기에 순순히 대답했다.

"바깥 구경을 하다가 호텔에 들어왔다. 그게 얼추 5시간 전쯤 되는군."

"흐음! 그때 호텔에 들어왔다? 거짓은 아니겠지?"

"CCTV를 확인하면 바로 밝혀질 일을 굳이?"

내가 피식 웃으면서 반문하자 요원의 얼굴이 구겨졌다. 자신의 권위에 눌리지 않는다고 느껴졌는지 눈을 험악하게 뜬 그가 재차 물었다.

"그럼 그 이전 행적은 어떻게 되지? 하울 어디를 구경했나?"

"그냥 하울 전체를 구경했는데?"

"뭐? 전체를? 흥! 어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기다려봐라!"

그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들어 멍하니 허공을 응시한다.

사이버 아이로 추정되는 그의 각막 위로 희미한 불빛이 반짝거린다. 아마 하울의 중앙서버를 통해 데이터를 받는 중이겠지. CCTV나 출입기록 같은 거 말이다.

"······진짜 하울 전체를 돌아다녔군? 그것도 한곳에서도 머물지 않고 부지런히 말이야."

그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게 문제가 되나?"

"문제가 되는지, 안 되는지는 앞으로 알아보면 되겠지. 당신, 우리와 동행해 줘야겠어."

기괴하게 번들거리는 그의 눈동자가 나를 노려봤다. 광기처럼도 보이는 그 눈빛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때 로제가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당신들 뭐야? 아무리 하울이 자체 치안권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너무 무례한 거 아니야?"

갑자기 끼어든 로제를 거만한 눈빛으로 내려다본 그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그쪽은 끼어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니면 저자와 함께 동행하고 싶나?"

"뭐, 뭐야?"

요원의 으름장에 로제가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아무리 당돌해도 바로 조금 전에 테이저건에 맞아 게거품을 물고 쓰러진 사람을 목격했다. 도시에서의 지위나 권력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 그녀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가늘게 떨고 있는 로제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내 손이 닿자 화들짝놀란 그녀가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내가 부드럽게 웃자 잘게 떨리던 몸이 가라앉는다.

나는 어깨를 감싼 그녀를 내 뒤로 감추고,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요원을 향해 경고했다.

"너희들. 이곳에만 있다 보니 아무래도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것 같군.

하울의 주인도 네놈들이 이런 짓을 하는 걸 알고 있나?"

"흥! 감히 네놈 따위가 입에 올릴 분이 아니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손을 내밀어라! 반항하면 강제집행하겠다!"

허리춤을 뒤적거린 놈이 철제 구속구를 꺼냈다. 수갑보다 더 투박한 형태의 구속구는 착용하는 순간 펼쳐지며 팔 전체를 구속한다.

양팔이 완전히 무력화되는 물건이라, 현행범이나 범죄자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다. 이 엉망진창인 세계도 명색은 법치주의니까.

그런데 그걸 내게 사용하겠다고?

나는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지었다가, 이내 머리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과 함께 작게 중얼거렸다.

"진짜 제정신이 아니로군."

서걱.

은빛이 공간을 갈랐다. 놈이 들고 있는 구속구가 그대로 절반으로 쪼개지며 바닥에 툭하고 떨어졌다.

뒤늦게 땅으로 떨어진 구속구를 확인한 놈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카, 칼잡이!"

칼이 모습을 드러내자 실내에 있던 요원들 전부 무기를 꺼내 들었다. 나와 대화를 나누던 놈도 허겁지겁 허리춤에서 총을 꺼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하울에서 무기를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 바로 저놈들이다. 애초에 무기 반입이 되지 않기에 강력한 치안이 유지될 수 있었던 거고, 놈들의 고압적인 태도가 나올 수 있었던 거다.

칼? 칼은 당연히 무기로 쳐주지 않는다. 세계 어딜 가도 칼잡이는 죽고 싶어 환장한 자살특공대, 그 이상의 지위는 누리기 힘들었으니까.

'······어쩌면 오늘 이후로 칼도 반입 불가가 될지도 모르겠군.'

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칼날을 녀석들에게 향했다.

흉흉한 분위기와 함께 총이 모습을 드러내자, 로비에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간다.

30, 40번대 주민들이었다면 잽싸게 몸만 피한 채 불난 집 구경을 하듯 구경을 했을 텐데, 이들은 중산층 이상의 부자들이었다.

눈먼 총에 죽기엔 가진 게 너무 많은 이들이다.

"현재 씨!"

로제가 커다래진 눈으로 내 옷깃을 잡았다. 살짝 물기가 도는 짙푸른 눈동자는 마치 비가 내리기 전의 바다처럼 먹구름으로 가득했다.

나는 옷깃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등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위험하니 물러서 있어."

"하, 하지만!"

"네가 있으면 오히려 내가 불편하다. 너를 지키다 총을 맞을 수도 있어. 그리고······"

파도가 일렁이는 그녀의 눈동자를 천천히 마주 보며 작게 웃음 지었다.

"로세툼의 에이스가 겨우 이런 곳에서 잘못되겠어?"

순간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이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알았어요. 조심해요!"

옷깃을 놓은 그녀가 미련 없이 안으로 뛰어갔다. 나는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힐끗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부채꼴 모양으로 호텔 입구를 비롯한 전면을 막아선 요원들이 매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내가 도망갈 거라고 생각하고 입구부터 막았나 본데······.

"마지막에 누가 저 문밖으로 도망치나 두고 보자고."

나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 *

하울의 중앙 첨탑 최상층.

창밖으로 누군가가 하울의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태양을 그대로 물들인 것 같은 황금빛 금발. 하얗다 못해 분칠한 것 같은 백색 살결. 붉은색 실크로 만든 드레스는 몸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냈고, 목에 걸린 기다란 펜던트는 은은한 금빛을 내며 가슴 앞에 매달려있었다.

그때 무언가 느낀 듯 그녀가 뒤를 돌아본다. 신비한 보랏빛 눈동자가 어딘가를 쳐다봤다.

"······전투?"

그곳은 커다란 화면이 타일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공간이었다. 수백 미터에 이르는 한쪽 벽면 전체가 하울의 어딘가를 비추는 CCTV 화면이다.

그녀의 호기심 어린 눈동자 위로 작은 원이 그려졌다.

순간적으로 만들어진 보라색 원이 반짝이자, 수천 개의 CCTV 화면이 전부 꺼지고 하나의 화면만 커다랗게 확대됐다.

그렇게 물끄러미 그 화면을 바라보던 그녀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찾았다."

* * *

명색이 치안을 담당하는 놈들이라 완전히 막 나가는 미친놈들은 아니었는지, 사람들이 전부 도망칠 때까지 총을 쏘진 않았다. SCPD였으면 주변에 사람이 있건 말건 총부터 쏴 재꼈을 텐데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놈들이 SCPD보다 낫다는 소리는 아니다. 둘 다 제정신이 아닌 놈들인데, 덜 미쳤냐, 더 미쳤냐의 차이 정도다.

그때 사람들이 전부 도망갔다고 판단했는지, 대장으로 보이는 놈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다시 말한다! 무기를 버리고 순순히 조사를 위해 동행해라! 거절하고 계속 위협하면 발포하겠다!"

결국, 저 말의 의도는 구속구에 채워진 채 개처럼 끌려가든가, 아니면 총 맞아 뒈지시든가를 선택하라는 말이다.

나는 귀찮다는 얼굴로 놈에게 향한 칼날을 까딱거리며 대답했다.

"개소리하지 말고 덤벼라. 다시는 그 혓바닥을 못 놀리게 해줄 테니."

내 도발이 성공적이었는지, 놈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이이익! 셋 세겠다! 핫, 둜, ㅅ! 발포!"

"······."

이 새끼가?

투타타타탕!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지, 발포 명령과 함께 총구가 불을 뿜었다. 자동소총에서 발사된 총알은 불그스름한 화망을 만들며 내게 쇄도했다.

나는 그대로 총알비 사이로 뛰어들었다. 화망이고 뭐고, 어차피 소총탄은 내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티티팅! 티팅!

화망을 그대로 뚫고 놈들에게 달려갔다.

가장 정면에서 양다리를 쩍 벌린 채 총을 난사하던 요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뭣······!"

서걱.

호선을 그린 은빛 칼날이 두 번 반짝였다.

한 번의 반짝임은 놈의 소총과 양손을 갈랐고, 두 번째 반짝임은 놈의 오른쪽 다리를 잘라버렸다.

"끄아악!"

놈이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쓰러졌다. 쓰러진 놈 주위로 붉은 핏물과 끈적한 검은 기름이 함께 쏟아졌다. 흉측한 뼈와 살점 대신 너덜거리는 철골과 전깃불을 파직거리는 전선이 보였다. 예상대로 팔, 다리 모두 사이버웨어였다.

잠시 멎었던 총알비는 근거리에서 재차 쏘아졌다.

나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총을 갈겨대는 놈에게 일직선으로 달려갔다.

총알이 온몸을 헤집을 듯 집중적으로 쏟아졌지만, 모조리 튕겨내며 놈의 코앞까지 접근한 나는 검을 내리그었다.

서걱.

그 한 번으로 놈의 총과 총을 들고 있던 양손이 그대로 썰렸다.

"크으윽!"

놈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뒷걸음질 쳤다.

썰린 손목 부위에서 시커먼 기름이 뚝뚝 떨어졌고, 연결 부위가 사라진 전선들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전깃불을 토했다.

나는 뒷걸음질 치는 놈의 어깨를 즈려밟고 그대로 위로 뛰어올랐다.

콰직.

발끝에서 무언가 바스러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아마 어깨뼈가 박살 났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로비 천장으로 몸을 띄운 나는 그대로 몸을 한 바퀴 회전시켰다.

어느새 내 손에 들린 검은 은빛 대신 검은색 광택을 번뜩이고 있었다.

체인소드.

이 귀찮은 놈들을 한꺼번에 정리해줄 완벽한 무기의 등장이다.

철컥, 철컥! 끼리릭!

허공에서 손을 내뻗자 검은색 칼날이 엿가락 늘어지듯 주욱 늘어났다.

회전하는 원심력을 이용해 폭발적으로 늘어난 칼날은 순식간에 호텔 로비 전체를 사거리에 둘 정도였다.

"기, 기회다! 놈은 공중에서 움직이지 못해! 쏴라!"

투타타타탕!

대공 사격하듯 천장에 몸을 띄운 내게 쏘아지는 탄환들.

나는 입꼬리를 활짝 올리며 중얼거렸다.

"누구 맘대로 기회래?"

짜악!

나는 휘도는 체인소드 칼날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뱀처럼 몸을 뒤튼 칼날이 전면으로 회오리치듯 휘돌았고, 그 궤적으로 쏘아진 모든 탄환을 말 그대로 분쇄해버리며 화망을 지워버렸다.

"허, 허헉!"

놈들이 입을 떡 벌린다. 눈앞에서 쏘아지는 모든 총알이 가루로 변해버린 걸 봤으니.

하지만 놀라긴 아직 이르다.

진짜는 이제부터니까.

짜악!

회오리치던 칼날이 분사되듯 펼쳐졌다. 마치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가 지상에서 미쳐 날뛰듯, 온몸을 꿈틀거리며 요원들에게 쇄도했다.

묵빛 칼날이 날카로운 독니를 박아넣는다. 재앙의 강림이다.

"끄악!"

"내, 내 팔! 컥!"

"크허······ 사, 살려!"

"내 다리! 내 다리가!"

묵빛 재앙이 지상을 집어삼켰다.

놈들은 모조리 양팔이 날아가거나, 더한 놈은 다리까지 날아갔고, 몇몇 재수없는 놈들은 사이버 웨어 안쪽까지 칼날이 헤집고 들어와 목숨이 위험했다.

휘리리릭. 철컥!

지상으로 가볍게 내려선 나는 체인소드를 회수했다. 그리고 오연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지금 이 순간.

로비에 두 발 딛고 서 있는 이는 나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나는 허리춤에 체인소드를 꽂아 넣고, 조금 전까지 신나게 혓바닥을 놀리던 요원 대장을 찾았다.

초반에 양팔이 날아간 놈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아까 하던 얘기 마저 해볼까?"

나와 눈이 마주친 놈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내가 놈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그 순간.

콰지직! 쾅!

누군가 호텔 문을 거칠게 뜯어 부수며 걸어들어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육중한 발걸음 소리가 쾅쾅거리며 들려왔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고릴라가 아닐까 생각되는 거구의 체형. 하관은 인간이나, 코 위부터는 눈 대신 달린 8개의 광학렌즈와 은색으로 빛나는 크롬 머리. 아이언맨의 헐크버스터가 떠오르는 철갑 슈트. 그리고 가슴 정중앙에서 타오르듯 빛나는 사이버네틱스 코어.

'사이보그.'

이 사이버펑크 세계에서 처음 만나는 '진짜' 사이보그였다.

안으로 들어온 놈은 엉망이 된 채 바닥에 쓰러진 요원들과 나를 한 번씩 번갈아 보더니, 이를 으드득 갈며 기계음이 섞인 저음으로 중얼거렸다.

"하울 헬퍼를 건드리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사이보그의 8개의 광학렌즈가 붉게 물들었다. 그와 동시에 가슴에 달린 사이 버네틱스 코어가 거세게 회전하며 불빛을 토했다.

위이이잉!

불길하게 가동되는 기계음과 함께 사이보그가 내게 달려들려던 그 순간.

"잠깐!"

누군가 사이보그가 뜯어놓은 호텔문으로 걸어들어오며 소리쳤다.

움직이는 성채, 하울 (4)

56화. 움직이는 성채, 하울

호텔에서 칼잡이와 전투가 벌어졌다는 소식에 존 위크는 강현재를 떠올렸다.

하울까지 와서 하울 헬퍼와 부딪힐만한 칼잡이는 강현재밖에 없었으니까.

평범한 칼잡이였다면 혹독한 대가를 치르겠거니 생각했겠지만, 강현재는 다르다.

워 머신을 쪼개버리며 무려 '소드마스터'라는 이명을 얻은 칼잡이다.

하울 헬퍼가 뛰어나다는 건 알지만, 글쎄······ 강현재를 상대하기엔 무리다.

하지만 근본적인 의문이 있었다.

'대체 왜 부딪힌 거지?'

해결사답게 강현재의 사회성이 높다고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막 나가는 미친놈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말이 통하는 미친놈이랄까?

그러다가 하울 헬퍼 특유의 오만하고 독선적인 태도가 떠올랐다.

'아까 있었던 살인사건 때문이로군.'

흑발흑안의 냉혹한 칼잡이.

강현재의 외모는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외모였고, 그게 하울 헬퍼를 자극했을지도 몰랐다.

당연히 강현재의 성격상 하울 헬퍼의 오만한 태도를 눈감았을 리 없고.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난 거지. 무장의 우위로 찍어누르던 놈들인데, 상대는 칼 한 자루로 「워 머신」마저 쪼개버리는 칼잡이니.'

하지만 그건 그거고.

여긴 소울 시티가 아닌 하울이다. 일반적인 공권력이 개입할 수 없는 하울 자체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성역.

'아무리 강현재라도 선을 넘으면 위험하다.'

그래서 함께 달려왔다.

기계라는 걸 온몸으로 뽐내며 미친 듯이 질주하는 저 사이보그와 함께.

'경비대장 윌리엄.'

하울 헬퍼들의 수장인 경비대장 윌리엄.

그는 생전에도 뛰어난 베테랑 군인이었으며, 회생 불가능한 죽음에 이르렀을 때 하울의 선택을 받아 온몸을 사이보그로 신체개조 시술을 받은 전사였다.

어설픈 사이보그가 아니라, 뇌를 제외한 모든 신체 부위를 사이버 웨어로 대체한 '진짜' 사이보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사이보그화를 선택한 다른 자들보다 뇌가 멀쩡하다는 거지.'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다.

지금도 인간이라면 생각하지 못할 선택을 했으니까.

콰지직! 콰쾅!

호텔에 도착한 윌리엄이 멀쩡한 회전문을 통째로 뜯어 발기며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회전문이 뜯겨나간 입구에 흉측한 구멍이 뚫렸다.

'과연 인간성이 점점 마모되는 사이보그로군.'

존 위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뚫린 구멍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보이는 광경.

'역시 강현재였나.'

한바탕 전투로 처참히 박살 난 로비 중앙.

은색 칼을 비스듬히 내려 잡은 소드마스터가 고고하게 서 있다.

위이이잉!

그때 윌리엄의 사이보그 신체에서 전기모터가 강렬히 구동되는 고주파음이 들려왔다. 사이버네틱스 코어가 불타오르며 불빛을 뿜어낸다.

윌리엄과 강현재.

시선을 마주한 이 둘이 서로 맞부딪히려는 그 순간.

"잠깐!"

존 위크가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소리쳤다.

둘의 날 선 시선이 존 위크를 향한다. 시선에서 느껴지는 서릿발 같은 기세가 존 위크를 옭아맸다. 평범한 사람이었더라면 그대로 심장마저 얼어붙었을 정도의 기세.

하지만 존 위크는 특유의 털털한 미소를 지으며 유유히 기세를 빠져나왔다.

"서로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대화로 풉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윌리엄과 강현재를 바라보는 삼각구도(∴)를 만들었다.

"이 꼴이 났는데 대화를 하라?"

윌리엄이 붉은 눈을 빛냈다. 분노로 반짝이는 그 붉은 빛은 마치 핏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게, 하울 헬퍼 요원들 전부가 팔, 다리가 날아간 채 바닥에 쓰러져서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일견 너무 잔인하고 참혹하기 그지 없는 광경이다.

하지만 이 세계는 사이버펑크 세계다. 죽지만 않으면 손, 발쯤 대체하는 건 문제도 아니다. 애초에 잘린 팔, 다리도 사이버웨어였고.

"어차피 죽은 자는 없어 보이는데, 대화를 할 만한 가치는 있지 않겠소? 저자도 손속에 사정을 둔 것 같은데 말이오."

"으음······."

그제야 죽은 자가 없다는 걸 확인했는지 윌리엄의 입에서 작은 침음이 흘러나왔다.

이런 무식한 사이보그 같으니라고. 인간보다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텐데, 그걸 생각조차 안 하고 때려 부술 생각만 하다니.

존 위크는 속으로 윌리엄을 욕하면서 말을 이었다.

"내가 책임지고 중재를 하겠소. 만약 저자가 진짜 잘못을 했다면 합당한 처벌을 받도록 내가 돕지."

윌리엄의 8개의 광학렌즈가 커졌다, 작아지길 반복했다. 존 위크가 중재와 함께 돕겠다고까지 말하니 기세가 조금 줄어들었다.

그래도 뭔가 아쉬운 모양인지, 삐뚜름하게 구겨진 윌리엄의 하관이 말했다.

"굳이 당신이 돕지 않아도 내 손으로도 해결될 것 같은데."

"글쎄. 정말 그렇게 쉽게 생각했다면 큰코다칠 거요. 저자는 나도 인정하는 강자니까."

"······! 당신이 인정한다고? 저자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삐뚜름하게 구겨졌던 윌리엄의 하관이 놀란 듯 벌어졌다. 흔치 않은 사이보그의 놀라는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게, 존 위크는 소울 시티가 아니라 세계에서 거론되는 강자였다.

세계 최대 메가시티인 소울 시티의 민간군사기업 <소울 이터>의 최연소 이사.

그 과정은 철저하게 피로 물든 길이었고, 그 피의 길에 희생된 기업들의 숫자는 계산조차 할 수 없었다.

그 결과가 소울 시티 유일의 민간군사기업이라는 위치였다. 경쟁자를 모조리 제거하고 오롯이 홀로 설 수 있는 그 배경엔, 존 위크가 있었던 거다.

존 위크가 갑자기 표정을 굳히더니, 분위기를 한껏 잡으며 대답했다.

"잠들었던 영혼의 도시를 깨운 흑발흑안의 칼잡이. 우리는 그를 이렇게 부르지. '소드마스터'라고."

"소드마스터!"

윌리엄의 8개의 광학렌즈가 커다랗게 확장되며 빨간 불빛을 번쩍거렸다. 그리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과연 오만한 이명이나, 존 위크 당신이 인정할 정도라면 수긍할만하지. 좋소. 이야기를 들어보지."

불길하게 번쩍거리던 광학렌즈의 적색 램프가 전부 꺼졌다. 한껏 불타오르던 사이버네틱스 코어의 불빛도 다시 차분히 가라앉았다.

상황을 지켜보던 강현재도 뽑아놨던 검을 검집에 갈무리했다.

그때 강현재가 존 위크를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줘서 고맙다는 뜻이었다.

존 위크가 입꼬리를 올리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얼굴을 구긴 강현재가 고개를 돌렸다.

* * *

나는 존 위크의 중재를 받았다.

사실 그래야만 했다. 이곳을 초토화시키고 쫓겨날 게 아니라면 말이다.

물론 나도 믿는 바가 있긴 했다.

'최소한 이 호텔에 있었던 소울 시티의 상류층들은 내 편을 들어줬겠지.'

그들이 하울 헬퍼의 고압적인 태도에도 작은 불만밖에 늘어놓을 수 없었던 이유는, 주먹은 가깝고 그들이 가진 힘과 권력은 멀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주먹 역할을 내가 해줄 수 있다면, 그들도 나를 내세워 온갖 요구를 하며 그 시간 동안 멀리 있었던 소울 시티의 힘과 권력을 끌어 올 수 있었다.

아무리 하울이 도시의 힘이 닿지 않는 성역이라 하더라도, 소울 시티에 정박하고 있는 한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을 거다.

나와 존 위크. 그리고 사이보그는 초토화된 로비에서 그나마 멀쩡한 테이블을 찾아 자리 잡았다.

"그럼 어떻게 된 일인지 이야기를 들어볼까?"

어디서 구해온 건지, 호박빛으로 반짝이는 위스키를 한 병 구해온 존 위크가 술잔을 건넸다.

나도 딱히 거절하진 않았다.

때마침 기프트의 후유증이 작게나마 몰려오고 있었으니까.

꿀꺽.

목울대를 타고 위스키가 넘어간다. 과연 고급호텔답게 목 넘김이 다르다. 돈주고 사면 못 해도 몇천만은 할 법한 퀄리티다.

나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글쎄. 굳이 말로 할 필요가 있을까? 저쪽은 이미 시각 영상을 받아서 본 것 같은데."

내 말에 사이보그가 입매를 구겼다. 하관밖에 보이질 않아서 정확하진 않지만, 자기가 원했던 그림은 아닌 게 분명했다.

사이보그의 8개의 광학렌즈가 나를 바라봤다.

"우리가 무례했던 건 사과하지. 하지만 당신도 과했어."

인정은 하지만 너도 잘못했다, 이건가?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어떤 부분이? 얌전히 구속구에 채워져 개같이 끌려가지 않은 부분? 아니면 장렬히 총에 맞아 뒈지지 않은 부분이 말인가?"

내 비아냥거림에 사이보그의 광학렌즈가 좁혀졌다. 나를 잠시 노려보던 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텐데? 당신 같은 강자가 굳이 우리 요원들을 모조리 망가뜨려야만 했나?"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많이 양보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군."

순간 사이보그의 광학렌즈에서 붉은빛이 뿜어진다. 8개의 불빛이 섬뜩하게 나를 노려봤다.

나 역시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번 사건은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수가 없다. 서로 과했고, 서로 잘못했다.

그렇기에 결과적으로 누구도 먼저 굽히고 들어가지 않는 거다. 먼저 굽히는 순간, 불리한 입장에서 대화해야 했으니까.

여기서 물러서면 내가 과했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다. 그건 내가 용납할 수 없다.

그때 존 위크가 끼어들었다.

"자자. 서로 잘못한 게 있으니까 그냥 퉁치자고. 어때? 그럼 깔끔하지? 어차피 하울헬퍼 중에서 죽은 사람도 없는데."

"······그건 그렇게 간단히 정리할 수 있는 문제가······!"

이를 으드득 갈며 대답하던 사이보그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리곤 어디를 쳐다보는지 허공을 잠시 응시하던 그가 낮은 침음성을 내뱉었다.

"끄응······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하지."

사이보그의 광학렌즈의 붉은빛이 다시 사라졌다. 더 이상 대화가 무의미하다는 듯 의자 뒤로 몸을 기댔다.

'뭐지? 이걸 갑자기 받아들인다고? 분명 뭔가 덕지덕지 조건을 들이밀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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