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어느 전생자의 마지막
Prologue. 어느 전생자의 마지막
이번 생은 마법에 미쳐 살았다.
그리고 곧, 죽는다.
[ 내 너를 일찍이 만나길 잘했구나. ]
제국의 '위대한 세 별' 이라고 불리는 눈앞의 대마법사에 의해.
만신창이의 몸으로 고개만 겨우 들어 올린다.
"좋은 옷 입고 다니네."
고위급의 마법 술식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던, 지금은 다 찢어진 대마법사의 로브 자락이 보인다. 입맛이 조금 쓰다.
철저한 늙은이 같으니. 저 로브만 아니었다면 적어도 팔 한 짝은 가져갔을 것이다.
나는 허탈한 기분을 누르며 말했다.
"제국의 세 별이라는 작자가 이래도 되는 건가?"
[ 본래 괴물은 새끼일 때 잡는 것이다. ]
세상이 이렇게나 부조리하다.
늘 있던 제국과의 국경 분쟁에서 갑자기 8위계 대마법사라는 거물이 튀어나올 줄이야.
쿨럭-
전투에서 과도하게 운용한 마나회로는 전부 박살났고, 그로 인해 길 잃은 마나가 역류하며 전신을 걸레짝처럼 들쑤셔 놓았다.
내공 한 갑자를 쌓아둔 단전 마저 터져나갔다.
게다가 저 하늘 위에선 타오르는 유성이 천공을 두 갈래로 찢어발기며 떨어지고 있다.
짧은 한숨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 천재라는 말로도 부족하구나. 심지어 기사 따위나 익히는 검술에 적지 않은 시간을 쏟았음에도······. ]
"빨리 죽여라."
대수롭지 않게 말하니, 늙은이가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검붉은 유성이 허공을 잡아먹으며 몸집을 키우고 있었다.
[ 아이야, 너는 그 경이로운 재능을 제대로 꽃피워보지도 못하고 죽을 것이다. ]
그래서 지금 나더러 어떡하라고.
무슨 유언이라도 뱉길 기대하는 건가.
조용히 입을 닫고 있자, 이전보다 부드러워진 대마법사 늙은이의 말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 내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마. ]
웃기는 소리.
지금 내 몸은 신이 와도 되살릴 수 없다.
상대를 짓눌러 죽이기 전, 얄팍한 우월감이나마 느끼기 위한 늙은이의 고약한 여흥일 뿐.
아니면 해골로라도 되살려서 쓰려나.
"난 사내답게 죽으련다. 여기도 지겨워지던 참이라."
어차피 다 끝난 마당에 미련은 없다.
쓸만한 마법들은 전부 익혀뒀으니까.
푸욱!
품 안에 숨겨둔 단검을 비척비척 꺼내어 내 목을 찔렀다. 비릿한 핏물이 목 끝까지 차오른다.
울컥. 쿨럭-!
[ ······독한 놈이로고. ]
잠시 뒤, 유성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대지를 달구기 시작하자 눈앞의 늙은이는 날 더 골려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 듯,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이윽고.
세상을 환히 밝히는 거대한 광채와 함께 삐이- 하는 쨍한 이명만이 귓전을 메운다.
그렇게, 스물의 나이로 대륙 최연소 6위계를 목전에 두었던 왕국 마법사로서의 삶이자.
'다음 세상은···좀비 아포칼립스만 아니면 좋겠는데.'
나의 4번째 생이 끝을 맺는다.
#1화. 전생자
#1화.
나는 전생자(轉生者)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생의 삶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누군가는 너무 흔한 능력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기야, 기억을 가지고 과거로 회귀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전생을 기억한다는 이들은 왕왕 있으니.
다만.
자그마치 4번의 전생을 모두 기억하며, 각각의 생들을 '다른 세계'에서 겪었다는 것이 그들과 나의 차이점이다.
[ 첫 번째 생 - 한국 ]
나의 첫 번째 생.
상당히 평범하고 재미없는 삶이었다.
기억나는 건 별별 이상한 아르바이트들과 더불어 게임관련 개인 방송을 꽤 오래 했었다는 것.
전업 스트리머의 딱 하나 있는 장점을 꼽자면···비는 오디오를 채우기 위한 혼잣말을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다는 것 정도.
각설하고.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괜찮은 세상이었다.
살기 힘들다는 말이 나돌았지만, 이 뒤에 떨어진 세상들에 비하면 무릉도원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대체 누가 살기 좋은 21세기의 현대를 매도하는지 모르겠다.
참고로 난 대충 살다가 죽었다.
# - 서른하나에 사고사.
사망 원인 : 횡단보도를 향해 폭주하는 트럭.
[ 두 번째 생 - 좀비 아포칼립스 ]
모든 생을 통틀어 최악의 세계.
정말 다신 떠올리기도 싫은 기억이다.
전생을 겪은 사람 중 가장 불행한 사람.
입 밖으로 상태창을 백 번 정도 내뱉어본 사람.
이 세계에는 신 따위 없다는 걸, 상태창 백 번 외치고 나서야 깨달은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나다.
죽은 뒤에 간 곳이니 처음에는 당연히 지옥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지옥보다 더하면 더 했지 절대 덜 하진 않은 곳이었다.
두 번째 세계의 배경은 좀비 아포칼립스.
강력한 좀비 바이러스가 전세계에 창궐해 대부분의 인류가 좀비로 변해버린 세상.
미약한 초능력을 각성한 소수의 인간과 민간 생존자들, 군 병력이 뭉쳐 거점도시를 형성하기도 했으나 종국에는 싹 다 무너지고 뿔뿔이 흩어졌다.
역겨운 체취와 피, 시체, 살점들의 향연.
대충 기억나는 것들만 나열해도···
총에 맞아도 멀쩡한 놈.
탱크도 맨몸으로 깔아뭉개는 놈.
헬기 프로펠러를 뜯어먹는 놈.
펄스 뿜는 놈. 산성액 뱉는 놈.
사람과 똑같이 말하고 행동하는 놈.
그리고······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들.
참 절망스러웠고 하루하루가 개같았다.
그나마 정상적이던 인간들도, 실어증 환자처럼 아무말 없이 지내다가 종국에는 다른 인간들처럼 미쳐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어나는 좀비를 피해 다녀야 했으며, 순진한 얼굴을 한 인간은 좀비보다 더 위험한 존재였다. 주변의 모든 것이 위협이었고 이틀에 서너 시간 이상 자면 운수가 좋은 날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몸이라는 건 참 신비하다.
그런 극한 환경 속에서도 꾸역꾸역 살아가며 25년을 버텼으니 말이다. 비록 제정신과 인간성을 뇌 어딘가에 깊숙이 박아둔 채였지만.
아포칼립스에서 잔뜩 얻었던 온갖 트라우마와 정신병, 강박증은 전생의 회차를 뛰어넘어 아직도 남아있다.
가끔 멋대로 도지는 정신병덕에 낭패를 본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
또한, 힘에 대한 집착과 갈망이 생겨난 것도 바로 이 2회차부터였다.
좀비 아포칼립스 이후로도 두 번의 삶을 더 겪었으나, 뇌리 어딘가에 끈질기게 박혀있는 힘에 대한 갈망은 아직도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힘없는 자는 처참하게 유린당하다가 고통스럽게 뜯어 먹혀 죽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생지옥이었다.
약한 자의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 - 스물다섯에 의문사.
사망원인 : 무너진 마켓에서 식량을 구하던 도중 습격당함. 그 후로 기억이 없는 걸 보면······이하 생략.
[ 세 번째 생 - 중원무림 ]
전생 3회 차.
80년대 군협지나 무협지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강호인들의 세상.
세 번째 삶은 무림인의 길을 걸었다.
내겐 어릴 적 연이 닿은 스승이 있었다.
그는 무림의 십대고수이자 유명한 광인(狂人)이었는데, 좀비 아포칼립스에서 넘어간 직후, 정신나간 폐인이었던 날 제자로 받아준 인간인 만큼···
[ 네놈은 나보다 더 미친놈이로구나. ]
어딘가 틀어진 인간이었다.
첫 만남부터 어린놈 눈에 살기만 들어찼다며 나를 잔칫날 돼지잡듯, 아주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팼으니까.
하기야 괜히 광마(狂魔)라는 미치광이 별호가 붙었겠나.
아무튼 조화경(造化境)의 절대고수인 스승에게 어릴 적부터 거둬진 덕에, 이전 회차에서 잔뜩 쌓아뒀던 갈망과 집착은 더 높은 경지를 향한 집념으로 화했다.
고작 서른의 나이에 초절정 끝자락.
섬서에서 내 별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중원무림 전체를 따져봐도 십대 고수에 발가락 하나 얹을 정도는 되었을 거다.
오래 살았다면 더욱 상승의 경지까지 바라볼 수 있었고, 원한다면 어떤 자리든 꿰찰 수도 있었으며 유유자적 강호를 주유하며 살 수도 있었다.
전생에서 망가지고 피폐했던 정신머리도 늦게나마 제자리를 되찾아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구파일방 화산파의 본산인 화산.
그 화산(華山)의 북쪽 봉우리에 들렀다가 피어있는 매화가 참 아름답기에···평소 눈여겨보던 여인에게 전해줄까 하며 가지를 꺾던 도중, 관계자에 덜미를 붙잡혔다.
그리고 관계자가 하필-
[ 광마의 직전제자가 본산에는 어쩐 일이더냐. ]
본신의 경지가 하늘에 닿아 감히 매화검신이라 불리던, 화산파의 전대 장문인이었다.
절정의 무인도 손가락 하나로도 짓눌러 죽일 수 있는 중원의 절대자.
내 스승 광마보다도 두 단계 높은 배분의 노괴.
[ 무재는 놀랄 만큼 출중하구나. 화산에 올랐다면 좋았을것을······. ]
죽을 각오로 검을 휘둘러봤으나 열 합을 버티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보통 매화치고는 너무 화려하다 싶었다. 추측컨대 자소단의 재료로 귀하게 쓰이는 천봉(天峰) 매화였을 것이다.
나뭇가지좀 꺾었기로서니 다짜고짜 사람을 죽일 작자는 아니고···.
# - 서른다섯에 타살.
사망원인 : 광마의 제자라서.
[ 네 번째 생 - 라아기스 ]
조금 전, 유성에 뭉개져 죽은 네 번째 생은 중세 배경의 판타지 세계.
검과 마법, 기사와 마법사들의 세상.
몇 개의 왕국과 제국이 국경선을 따라 대립하는 대수림에는 위험한 괴물들과 종족들이, 높고 험준한 산맥이나 깊은 바다에는 상식의 한계를 초월한 용(龍)도 있었다.
기(氣)를 마나로 부르던 세계.
그 마나가 풍족하다 못해 흘러넘치는 세계.
나는 무림 시절의 기억과 경험을 살려 어린 시절부터 하단전에 내공을 쌓았다.
중원에 비해 높은 마나농도 덕분인지 내공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다. 더러운 길바닥에서 가부좌를 틀고 운공해도 공기맑은 심산유곡에 있는듯했다.
무림의 기준으로 일류의 경지에 접어들었을 무렵.
우연히 마주친 왕국 마법사와의 대화에서 [ 어릴 적부터 마나를 홀로 터득한 천재지만 훌륭한 스승이 없어 등신 같은 짓을 했구나! ] 같은 소리를 들었다.
마나는 자연으로부터 빌려와 사용하는 것이지, 한곳에 묶어두는 것은 드래곤하트를 가진 용이나 하는 짓이라던가.
어차피 이 세계를 꽉꽉 채우고 있는 마나입자인데 그냥 그때그때 빨아들여 쓰면 그만이라는 소리였다.
이 세계에서 나고자란 마법사 입장에선 그럴 만도 했다.
라아기스의 마법사들은 심장을 중심축으로 삼아 생성한 마나회로를 이용했다.
자연의 마나입자를 얼마나 많이, 빠르게 흡수한 뒤 순환시키느냐에 따라 그 수준이 갈리는 것이다.
결국 그 마법사의 손에 몰타왕국 마탑으로 끌려가 "자기가 용인 줄 아는 비운의 천재" 소리를 들으며 마법을 배웠고, 몰타 왕국의 마나 호흡법을 터득했다.
몰타에는 '고리를 엮는다'라는 말이 있었다.
마나 입자를 받아들여 순환하는 통로인 '마나 회로'가 늘어날 때마다 고리를 엮었다고 표현하는 것인데, 나는 마법을 배운지 13년 만에 총 다섯 개의 고리를 엮어버렸다.
나이 스물에 5위계 상급 마법사.
백 살 가까이 살아온 몰타 왕국의 대마탑주가 6위계에서 7위계 사이였음을 생각하면 장래가 매우 유망한 마법사였지만···
늘상 있던 제국과의 분쟁 도중 대륙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대마법사가 불쑥 나타날 줄 어찌 알았겠는가? 제대로 된 마을도 하나 없는 곳에 말이다.
무림에서도 그렇고···힘만 센 늙은이들과의 연이 질긴 듯하다.
그래도 쓸만한 마법들은 전부 기억하고 있어 다행이다.
# - 스물에 재해사.
사망원인 : 운석과의 박치기 대결에서 패배.
여기까지 총 네 번의 생을 겪었다.
덧붙이자면 왜 내게만 이런 특별한 일이, 혹시 난 신처럼 대단한 존재인가, 같은 부류의 망상들은 진작에 관두었다.
다음 세계로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기억뿐. 날 때부터 무인의 단전이나 마법사의 마나회로같은 것을 갖고 태어나는 것도 아니니까.
어찌 되었건, 이제 무공도 모자라 마법까지 익혔다.
만약 이 죽음이 전생 굴레의 끝이 아니라면, 내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져 어떠한 세계에 떨어진다면······이제는 허무하게 죽지 않을 것이다.
설령, 좀비 아포칼립스보다 더한 세계에 떨어지더라도.
*
—라고.
괜한 소리를 지껄였다.
역시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 #No 31. 기억관리 프로그램 종합 카트리지와 컨트롤 칩 이식 완료. 신경 동기화 작업 중입니다. 〕
보통의 전생들과는 무언가 다른, 고저없이 딱딱한 기계음이 5회차 인생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그리고 아까부터 생각한 거지만······
〔 3,650일간 전뇌 동면 활성화. 가상 기억관리 프로그램이 최대속도로 주기별 업데이트를 실행합니다. 뇌파 안정화 단계까지 예상 시점은 3,650일 뒤입니다. 〕
"······?"
뭔가가 잘못 흘러가고 있다.
- 프로그램이 실행됩니다.
그것도 아주 크게 말이다.
〔 안녕? 반가워! ]
〔 난 오늘부터 데이터 업데이트를 주관할 '지니' 라고 해! 가장 먼저 '감각'을 업데이트할 예정이야! 지금부터 시작할게! 〕
내가 뭐라 의문을 표현하기도 전, 순식간에 몽롱해져 가는 의식.
금세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밀려온다.
······
〔 안녕! 좋은 아침이지? 오늘은 '감정'을 업데이트할 예정이야! 〕
〔 안녕! 좋은 아침이지? 오늘은 '문자와 숫자, 언어의 이해' 를 업데이트할 예정이야! 〕
〔 안녕! 좋은 아침이지? 오늘부터 '세계의 문화 1편'을 업데이트 할 예정이야! 방대한 양인만큼 업데이트가 진행되는 30일간은 조금 어지러울 수 있어! 〕
파도처럼 꾸역꾸역 밀려 들어오는 정보. 기억들이 '업데이트' 되기 시작했다.
〔 — ! ———— 지? 오늘은 '연방의 역사'를 업데이트할 예정이야! 〕
〔 — ! ———— 지? 오늘은 '시티 외곽의 하루'를 업데이트할 예정이야! 〕
〔 — ! ———— 지? 오늘은 '크레딧의 개념'을 업데이트할 예정이야! 〕
〔 — ! ———— 지? 오늘은 '기업의 역사'를 업데이트할 예정이야! 〕
〔 — ! ———— 지? 오늘은 '정치와 경제의 상관관계'를 ———! 〕
〔 — ! ———— 지? 오늘은 '안드로이드와 휴머노이드, 사이버웨어의 이해'를 업데이트할 예정이야! 〕
〔 — ! ———— 지? 오늘은 '마법과 무공의 이해'를 업데이트할 예정이야! 〕
〔 — '시종의 기본자세'··· 〕
〔 — '마약의 역사'··· 〕
〔 — '성교육' —! 〕
〔 — '개척에 대하여' —! 〕
〔 — '이종족과 아인종' —! 〕
〔 — '내연기관의 이해' —! 〕
〔 — '죽지 않는 시체 언데드와 방사능의 상관관계' —! 〕
〔 — ! — ? #%^@ ! 〕
〔 ! ? #%^@ ! 〕
······
〔 안녕! 좋은 아침이지? 〕
"······."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지니의 인사와 함께 말짱히 깨어난 정신.
〔 오늘부터 #31은 발두르 시티의 마법계 제약회사 '반 바이오 컴퍼니(Van Bio Co.) 에 귀속되어 오너 일가이신 '잉그리드 반 레나' 님의 시종으로 본분을 다하게 돼! 〕
〔 #31! 3,650일간의 대규모 업데이트 중 손실된 내용이 있을 수도 있으니, 헷갈리는 내용이 있다면 지금부터 내게 음성으로 질문할 수 있어! 〕
귀속, 시종, 마법계 어쩌고 하는 얘기들이 머릿속을 웅웅 울려댔다. 그중 가장 반가운 것은 음성으로 질문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아, 들리나?"
〔 응! 네 성대는 아주 건강해! 〕
내 입에서 흘러나온건 아직 앳된 소년의 목소리였다. 자그마치 10년 만에 이 몸으로 처음 입을 떼어봤다.
혼란스럽고 요상한 일들이 벌어졌지만···차근차근 상황을 정리해본다.
"지니. 네 말을 요약하자면, 난 이제부터 대가리에 박힌 인공칩에 평생 강제로 통제당하는 인간 노예가 된다. 맞나?"
〔 응! 〕
"이거 아주 웃긴 새끼네."
입이 열리자마자 자동으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인공지능 지니는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태연히 대답했다.
〔 3650일 전, 반 바이오 컴퍼니에서 #31을 주문 예약했어. 오늘이 바로 #31의 출고날이야. 〕
"잉그리드 어쩌고가 인간인 나를 시종으로 쓰기 위해 주문했다. 그것도 내가 태어나기 하루 전에?"
〔 응! 〕
"어미는 뭐 하는 인간이길래······."
〔 인공 배양 시스템이야. 〕
"난 부모도 없나?"
〔 응. 〕
"······."
도무지 믿기 힘든 지니의 답변.
그 뒤로도 몇번의 날카로운 질문과 답변이 오가고 나서야, 나는 마침내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실은 진작부터 다 예상하고 있었던, 끝끝내 부정하고팠던 현실을.
'굉장히 좆같은 세상에 떨어졌군.'
나의 다섯 번째 인생은······
"그냥 죽어버릴까."
〔 #31! 그건 불가능하게 프로그램 되어있어. 〕
벌써 순탄치 않아보인다.
*
—— 그로부터 10년 뒤.
[ 오딘 스테이션 ▶ 발두르 시티 행 ]
시티 스테이션 앞에서 배속된 임원용 캐리어를 기다리던 한 남성이 옆을 보며 반갑게 말을 걸었다.
"이게 누구십니까. 루베르겐 집행관님 아니십니까?"
"칼스. 자네 꽤 오랜만이군."
대답한 이는 가슴팍에 연방정부의 표식을 달고 있는 남자. 일곱 개의 별을 이어놓은 연방정부의 위압적인 마크가 스테이션의 밝은 불빛을 받아 번쩍인다.
칼스라 불린 남자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물었다.
"그런데 들고 계신 서류는 혹시 이번 '반 바이오 컴퍼니(Van Bio Co)' 사건 관련 서류입니까?"
"그래. 듣자 하니 그쪽은 난리가 났다더군."
"그랬었죠. 아무리 자사의 승소가 확실시된다 해도 일개 중견기업이 무림계 시가총액 3위, 사천당가(四川唐家) 코퍼레이션에 겁없이 소송을 걸어버렸으니······."
일개 기업이 메가 코퍼레이션(Mega-Corp)에 소송을 건다? 말 그대로 정신나간 짓이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마법사란 족속은, 가끔 고개가 필요 이상으로 빳빳해질 때가 있단 말이지. 마법계 인사들은 그래서 골치가 아파."
"확실히 그런 면이 있죠. 아! 물론 집행관님이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쯧."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이 궐련을 빼어 무는 집행관.
화아악-
손끝에서 피어난 불길이 궐련에 옮겨붙고, 흰 연기가 자욱하게 퍼져나간다.
"칼스."
"예, 집행관님."
"자네도 반 바이오 컴퍼니 주식 샀나?"
"신제품 발표 전에 쓸어 담아뒀습죠. 당가와의 특허소송이 큰 산이지만 일단 승소는 확실할 테니-"
"그거 전부 처분해야 할 거야."
"······예?"
때마침, 스테이션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연방정부의 공무용 캐리어.
집행관은 『연방대법원 최종심』 — 『원고 반 바이오 컴퍼니 패소』 라고 적혀있는 통보서류를 휘적거리며 캐리어에 올랐다.
덤덤한 마지막 말과 함께.
"이제 곧 사라질 회사니까."
#2화. 레반
#2. 레반
발두르 시티.
고급 주거구역의 저택.
"그때 그 매화검신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더니 검강을 무슨 집채만 하게······"
"······."
새까만 머리칼에 작은 체구.
발두르 시티에 본사를 둔 마법계 제약기업 반 바이오 컴퍼니 회장의 차녀, 잉그리드 반 레나.
그녀의 고운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레반? 그 얘기 저번에도 했던 거잖아."
"아, 그랬나요."
레나가 가볍게 핀잔을 주자, 옆에 서서 이야기를 이어가던 레반이 말을 멈추었다.
전속 시종 레반.
레나가 정확히 10살이 되던 해, 회장이신 아버지로부터 받은 선물.
인간을 따라한 안드로이드나 휴머노이드가 아닌, 날 때부터 오직 그녀만을 위해 맞춤 제작된 진짜 '인간' 시종.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자라며 언제나 절대적인 레나의 편이자 친구가 되어준 존재.
물론.
'······빌어먹을.'
그 전속 시종이 네 번의 전생을 겪은 것과.
방금의 그 얘기가 인공지능이 데이터를 조합해 만들어낸 공상 소설이 아닌, 자신의 3회차 생에서 실제로 겪었던 일이라는 것은 레나가 알 리 없는 사실이다.
'불면증 걸린 여자애한테 동화책이나 읽어주고 있는 신세라니. 스승이 보면 아주 뒤집어지겠군.'
잠시 자신의 처지를 속으로 한탄한 레반은 어떤 이야기 하나를 떠올렸다.
"그러면 이 이야기도 했나?"
"어떤 건데?"
"하루는 안전한 쉘터에서 식량을 독점하고 있는 무리를 봤어. 머릿수는 대략 열 명쯤. 쉘터 앞에는 식량과 은신처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인간들이 북적거렸지."
어둡고 낮게 깔리는 레반의 목소리.
레나가 조용히 귀를 기울이자, 그가 덤덤하게 말을 잇는다.
"웃긴 놈들이었지. 자기들이 내는 문제를 맞히면 안으로 들여보내주고 식량까지 제공해 준다더군. 몇 번 보니까 맞추기만 하면 정말 들여보내주긴 해. 그런데 이상한 게, 한번 들어간 놈은 다시 나오질 않아. 입구는 하나뿐인데."
자신의 2회 차 좀비 아포칼립스.
어떤 기괴한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세상이었다.
"생각해봐. 들어오는 족족 다 죽인거야. 식량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그렇게 총 여섯의 머저리가 당했을 때, 내가 쉘터에 불을 질렀지. 불붙은 놈들이 발광하며 뛰쳐나오더군. 못생긴 놈 순으로 다 쏴 죽이고 다시 던져넣었지."
"······."
숨죽여 듣던 레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인공지능이 즉석에서 텍스트를 조합해 만들어낸 허구의 이야기겠지만, 진짜로 겪은 일을 풀어놓는 것만 같다.
레반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랬더니 쉘터 앞에 있던 머저리들이 날 붙잡고 뭐라 그랬게? 불 꺼지면 같이 들어가서 먹어도 되겠냐고 묻더라고."
이야기가 점점 그로테스크해지자.
"···읍, 그게 뭐야."
결국 질려버린 레나가 헛구역질을 한다.
그런 그녀를 만족스러운 얼굴로 응시하던 시종 레반이 돌연 말투를 바꾸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귀찮은 주인의 마수에서 도망칠 기회다.
"아가씨."
"······응?"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조명은 소등해야겠습니다. 아가씨의 불면증은 애석하게 생각하지만, 부디 편안한 밤 되시길."
"!?"
레나의 눈이 동그래진다.
저렇게 끔찍한 얘길 하다가 중간에 끊고 그냥 이렇게 가버리겠다고? 사람 찝찝하게 만드는 것도 정도가 있지.
당황한 그녀가 황급히 소리치며 팔을 뻗었다.
"야 레반—!"
그러나.
이미 사라져버린 레반.
칠흑같이 어둡고 적막해진 침실 안.
누군가 쳐다보는듯한, 끈적한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아버린 레나는 소심하게 이불을 끌어 올렸다.
* * *
하루의 마무리.
레나의 침실을 빠져나와 시종의 방으로 가는 복도.
고개를 돌려 유리창 밖을 바라보자 저 멀리 '연방' 을 이루는 7개의 거대 도시 중 하나, 발두르 시티(Baldr City) 중심업무지구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
언제봐도 입이 벌어지는 광경이다.
심히 어둡고 우중충한 하늘.
그 하늘 턱밑까지 드높게 솟은 초고층 건물들의 스카이라인이 어두운 도심의 전경을 환히 밝히고, 건물 옥상으로 이어진 네온 라인을 따라 작은 우주선처럼 생긴 업무용 캐리어들이 이동한다.
중심업무지구의 한쪽 라인은 마법계 기업들의 빌딩들이, 다른 한쪽 라인은 무림계 기업임을 상징하는 동양풍의 고층 건물들이 경쟁하듯 주욱 늘어서 있다.
그 마천루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합금 기왓장이 용의 비늘처럼 촘촘히 박혀있는 초고층 전각.
저 압도적인 전각은 상위 메가콥인 무당 코퍼레이션 소유의 건물로, 3회차 중원때 보았던 제일의 기루보다도 열 곱절은 화려하며 웅장하다.
"무당은 어디서든 무당이군."
처음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상식을 애매하게 벗어난 세계.
하나의 세계 아래 무림계와 마법계가 나뉘어져 존재하는 것도 신기한데 21세기의 지구보다 최소한 반세기 이상 앞선 첨단기술까지 융합되어 있는 세계라니.
고도로 암호화된 무공, 마법 데이터 칩을 구매한 후 '다운로드' 받아 익히고, 첨단 사이버웨어와 나노기술의 발달로 팔 하나가 잘려 나가더라도 사이버웨어 파츠로 대체할 수 있는 세상이라니.
지니에게 기억을 주입당할 때까지만 해도, 믿지 않았었다.
게다가.
증기기관을 한계치까지 발전시킨 이종족들의 도시도 연방에 소속되어 있다.
엘프, 흡혈귀, 드워프 같은 것들이 주를 이뤄 살아가는 증기와 황동의 도시라고 하던데, 탈출에 성공한다면 그 광경을 내 눈으로도 볼 날이 오겠지.
나는 업무지구의 반대편으로 눈을 돌렸다.
해봐야 서울과 비슷한 면적의 도시라지만 있을건 다 있다.
지금 시간쯤이면 네온사인 조명과 간판이 그득한 저 시티 중앙 환락가에는 온갖 군상들이 다 몰려들었겠지.
한정판 마약 찾는 놈, 카지노에서 쫓겨난 놈. 자신의 페티쉬를 만족시켜줄 섹스토이 찾는 놈, 그냥 아랫도리가 심심한 놈, 강도질하는 놈, 실력 좋은 해결사 찾는 놈 등등.
그리고 저 시끄러운 중심 환락가를 지나고 슬럼화된 외곽 소도시 너머 거대한 장벽 밖에는······.
"빌어먹을 좀비는 좀 없었으면 더 좋았을걸."
이 세계의 화룡점정을 찍는···여기서 부르길 '죽지않는 시체' 혹은 '언데드'
부르는 말만 다르지 그냥 좀비가 맞다.
그러니까 이 세계에는 2회차 아포칼립스에서 겪었던 그 망할 좀비가 떡하니 존재했다.
지니로부터 주입받은 기억에 따르자면.
[ 언데드중 최근 가장 유명세를 탄 네임드 개체는 오딘 시티에 숨어있다가 레벨 9의 전설적인 연방집행관 '모리 무라타' 를 살해하고 유유히 달아난 '가륵' 이래. 정말 무섭지 않아? ]
9레벨은 무림으로 따지면 화경(化竟).
4회차 라아기스의 기준이라면 7위계 마법사인 왕국 대마탑주 정도의 강자.
인류의 전반적인 무력 수준은 그간 겪어왔던 세계중 가장 높다지만······.
그 정도로 초강자인 집행관을 죽였다면 내가 알던 2회차 아포칼립스 세계의 좀비들보다 아득히 강력하다는 얘기다.
심지어 저 가륵 사태는 약 15년 전, 내가 인큐베이터 속에서 인공지능 지니로부터 정보를 주입 받던 시절에 일어난 일이다.
시간이 지난 지금은 더 강해졌을지도.
아포칼립스에서의 경험상, 좀비는 오래 살아온 개체일수록 변이와 진화를 거쳐 강력해지고 영리해졌다.
아포칼립스 세상에서는 20년을 산 개체가 맨손으로 군전차를 부숴버리거나 건물 옥상에서 콘크리트 잔해를 던져 헬기를 격추하는 기행을 벌였었지.
그런데 이 세계는 좀비의 탄생이 자그마치 '150년' 전이다.
[ 그거 알고 있어? 최소 레벨9 이상으로 확인된 언데드인 '파루무치' 나 '악부' '구로신' '가륵' '녹량백량' 같은 네임드 개체가 시티를 공격하지 않는 이유는, 연방의 세 영웅인 삼존(三尊)이 늙어 죽기를 기다리느라 그런 거란 우스갯소리가 있대. 인간은 언젠가 늙어 죽지만 언데드는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니 시간이 갈수록 더 강해지잖아. ]
답이 보이질 않는다.
확인된 개체들을 제외하고도 저 장벽 바깥의 땅에는 상상 초월의 괴물이 몇 마리나 더 돌아다니고 있을지···.
아직 연방이 망하지 않은게 용할 정도.
하기야 이런 상황이니 대륙 전체가 좀비들의 땅이 되지 않았겠나.
인간 냄새에 환장하는 놈들덕에 전체 대륙 면적에 비하면 티끌 수준인 일곱 대도시와 소수의 지역만이 남았다.
초대형 우주 정거장까지 건설하며 우주 진출을 목전에 두었던 첨단 문명의 세계는, 150년 전 좀비의 등장이후 여기까지 주저앉은 것이다.
게다가 장벽 너머엔 좀비 하나만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다.
시티의 바깥은 방사선과 화학 퇴적물에 오염되고 절여진 생체기계들, 과거 무림과 마법계의 대전쟁에서 수거 못한 살상 지뢰, 주인없는 휴머노이드와 버려진 군용 안드로이드, 도망친 범죄자 등등이 손에 손잡고 떠돌아다니는 극히 위험한 땅.
연방에 소속된 일곱 거대 도시간 이동과 물류 수송은 대부분 공중을 떠다니는 캐리어로만 가능할 정도이니, 저 장벽 밖은 상상할 수도 없는 지옥이겠지.
이렇게 일부러 위험한 것들만 골라서 모아둔 것 같은 지금의 세계에서, 현재 시종일 뿐인 내 목표는 하나.
빌어먹을 좀비 사냥도 잃어버린 인류의 땅 수복 같은 거창한 것도 아닌.
툭툭-
'일단 컨트롤 칩부터 뜯어내야 한다.'
노예 탈출.
유리창에 이제 갓 소년티를 벗은 내 모습이 비친다. 또래 평균보다 조금 더 큰 키에 평범한 골격, 흐릿한 인상의 얼굴. 그리고 관자놀이 옆에 박혀있는 얇고 날쭉한 금속재.
저 금속재가 바로 태어날 때부터 박혀버린 전뇌 컨트롤 칩이다.
일반적인 맞춤형 인간 시종이었다면 아주 어릴 때부터 가상 기억관리 프로그램에 세뇌되어 뜯어낼 생각조차 못 했을 낙인.
당장이라도 뜯어내고 싶지만, 무작정 힘으로 뜯어내려 하다간 반병신이 될 수도 있다.
아무리 기술력이 좋고 마법적인 처리까지 되어있다고 하더라도 예민한 신경들과 연결이 되어 있기에 그렇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는다.
—꿈찔.
단전에서 고요히 움찔대는 무언가.
삼류 잡배 수준도 안 되는 나의 내공이다.
전뇌 컨트롤 칩의 행동 통제와 신체 이상징후 감지를 피해서 지난 10년간 호흡으로만 쌓아온 최소한의 내공.
3회차의 단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하나, 이 쥐꼬리만한 공력이 칩을 강제로 뜯어낼 때의 충격을 막아줄 안전장치 역할을 해줄 거다.
'마법계 기업만 아니었어도 진작······.'
마법의 사용이 가능하다면 이깟 컨트롤 칩 정도야 어렵지 않게 제거할 수 있겠지만···반 바이오 컴퍼니는 마법계 기업.
덜컥 마나 회로를 만들어 버리면 하루도 안 되어 발각당하고 말겠지.
망할.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 시종 레반. 확인되었습니다. ]
저택 구석에 있는 시종 전용 방 앞에 도착하자 두꺼운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두 개의 침대와 이불만 있는 작은 방. 미래화된 세상에 비해 너무도 썰렁한 시종 숙소. 그곳에서 누군가가 환한 미소로 날 반겨준다.
"레반! 오늘은 조금 늦었네?"
움푹 들어간 보조개에 큰 키.
허리까지 내려오는 밝은 금발의 누가 보더라도 매력적인 외모.
반 회장의 장녀이자 레나와 자매인 '잉그리드 반 루벤카' 를 모시는 시종이며 최고급형 안드로이드인 메리다.
"누가 봐도 사람같군."
"또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 한다."
단순히 인간과 유사한 모습의 기계를 통칭하는 휴머노이드(Humanoid). 그리고 거기서 발전한 단계인 안드로이드(Android)는 외형과 지능은 물론이고 인간의 감정까지 보유한 인조인간이다.
특히나 엄청난 값을 자랑하는 최고급형 수준이 되면 촉감이나 말투, 호흡같이 사소한 것조차 인간과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흡사한데 저 메리 역시 그렇다.
가끔은 나도 메리를 인간으로 착각할 정도니까.
"레반은 매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별 거 아니다."
"흐음···."
메리는 자연스레 내 옆으로 다가와 누웠다. 두 눈을 빤히 뜨고 날 바라보던 녀석은 고혹적인 미소를 꾸며내며 입을 열었다.
"특별히 한번 안아줄까? 너만 원한다면 내가 밤새 위로해줄 수도 있는데."
"헛소리하지 말고 가서 자라."
단호한 대답에 녀석이 웃음을 터뜨린다.
"농담인데 괜히 진지하기는. 설마 정말로 기대한 거야?"
"······."
"루벤카님 성격에 우리끼리 몸 섞는 걸 허락해주실리 없잖아. 그러니 레반, 이만 네 자리로 돌아가줄래?"
"메리, 여기가 내 침대다."
"괜히 부끄러워하긴."
"······."
한낱 기계의 장난질에 농락당하는 삶.
반드시 탈출하고야 만다.
#3화. 화경의 잡무 시종
#3화.
새벽 6시.
나는 전뇌 컨트롤칩 덕에 원치 않더라도 자동으로 잠에서 깬다.
싸늘한 냉기가 맴도는 이부자리를 정리한 뒤, 샤워를 하고 밖으로 나와 중심업무지구에 있는 반 바이오 본사로 출발해야 한다.
—끼이익.
[ 60 크레딧 결제 완료. ]
"60크레딧?"
이상하군. 원래 50크레딧 아니었나.
"거기, 안 들어가고 서서 뭐 합니까?"
"요금이 왜 60크레딧입니까. 내 목적지는 업무지구인데요."
"오늘부터 10크레딧 인상됐어요."
이미 비슷한 질문을 많이 받았는지, 트램 경비원은 귀찮은 얼굴로 손을 대강 휘적이며 대답했다.
나는 별수 없이 비어있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가격 인상의 여파인지 오늘은 비어있는 좌석이 많았다.
—위이이잉.
레일을 따라 움직이는 노면전차. 발두르의 대중교통수단인 시티트램이 레일 위를 빠르게 미끄러진다.
시티트램은 드높은 콘크리트 정글을 헤치며 나아갔다.
발두르는 연방의 일곱 거대도시 중 가장 규모가 작음에도 불구하고 1억에 가까운 인간이 득실댄다. 안드로이드와 휴머노이드를 뺀 순수한 인구.
한정된 면적때문에 초과밀개발이 일상화 되다보니 도심속에선 작은 공원조차 보기 힘들다.
이 좁아터진 도시에 뭐 이리 사람이 많은지.
빠르게 바뀌어가는 트램 밖의 풍경.
트램 옆쪽으로 길게 난 도로는 이 시간대에 늘 혼잡하다. 돈 좀 있는 중산층들의 자율주행 차량과 털털거리는 고물차, 시끄러운 바이크들이 한데 뒤섞여 느릿느릿 나아간다.
'오늘은 별일 없네.'
보통 출근길에 트램 밖을 구경하다 보면, 이따금 재미있는 광경을 볼 때가 있다.
도로에 뜬금없이 무장 강도가 출몰하기도 하는데, 개조한 바이크를 탄 강도들이 백만 크레딧을 호가하는 〈쿼롯 르길레라 GTS〉 차량에 총을 쏴대다가 그대로 머리가 터져나가는 걸 본 기억도 있다.
하기야 그만한 하이퍼카를 운용할 정도면 벌이가 꽤 되는 인간일 텐데, 그걸 타고 있는 작자가 돈 많은 기업가인지 혹은 지체높은 마법사나 무인인지 한낱 강도 따위가 어찌 알겠는가. 재수가 없었지.
[ 발두르 중심업무지구 역입니다. ]
트램에 탑승한지 20분쯤 지났을까.
시티트램이 중심업무지구의 초입에 들어선다.
여기까지 오며 지나쳤던 빌딩들보다 세 곱절은 높은 대기업의 초고층 빌딩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는게 보인다.
시티의 중심가는 햇빛이 없어도 초고층빌딩의 외벽 조명들 덕에 그 무엇보다 화려하다. 언제 멸망할지 모르는 도시치고는 말이다.
트램에서 내려 도보로 10분.
늦지 않게 반 바이오 본사에 도착한 나는 레나의 상층 집무실을 청소하고 먼지를 걷어냈다.
저택에서 식사를 마친 레나가 출근하기 전까지, 청소를 마치면 약 1시간 정도가 나의 유일한 자유시간이다. 보통 사내 매점에서 대충 밥을 사먹고 화장실에 다녀온 뒤 넷에 접속해 시간을 때운다.
[ 쿼롯 가문의 마법칩이 시장에 풀린다! ]
시티 공용네트워크에 접속해 최근 기사를 둘러보던 도중, 조회수가 꽤 높은 네트워크 기사가 눈에 띄었다.
[ 쿼롯 가문의 마법을 담은 '쿼롯 마법칩'이 경매에 등장해 화제입니다. 발할라의 마법계 대기업 '쿼롯 그룹' 의 계열사 '쿼롯 오토모빌'의 높은 부채비율을 해소하고 사업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최후의 수를 꺼내 든 것으로 보입니다. ]
[ 이 마법칩을 구매한다면 쿼롯 가문의 마법사들만이 배울 수 있는 고유의 마법을 익힐 수 있는데요. 관련 전문가들이 측정한 '쿼롯 마법칩' 의 판매가는 500만 크레딧입니다. ]
[ 한정된 100개의 물량이 모두 소진될 시, 수수료를 제외한 판매대금은 약 4억 크레딧으로 추정됩니다. 쿼롯 가문은 이 판매대금을 모두 기업가치 정상화에 사용하겠다며······. ]
크레딧만 넉넉히 있다면 데이터화된 무공, 마법칩을 언제든 쇼핑할 수 있는 세상이다.
신경과 연결된 링크포트에 능력이 들어있는 데이터칩을 꽂으면 저장된 데이터를 자연스럽게 흡수할 수 있다. 어떻게 그런 기술을 개발해냈는지는 몰라도, 차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칩을 사용하려면 단전이나 마나 회로는 가지고 있어야한다. 없으면 사용하지도 못한다.
툭툭-
한참 기사를 읽던 도중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1층 로비에서 잡무를 담당하는 직원이 두꺼운 책을 내밀며 말했다.
"쿼롯 그룹에서 반 바이오로 보내온 마법칩의 상세 카탈로그입니다. 레나님께 전해줘요."
"출근하시면 바로 전해드리죠."
"그래요. 그럼, 이만."
반 바이오는 마법계 기업이다. 그래서인지 저들의 판매 목록에 들어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가문의 마법인데 개나 소나 구매하게 두는것보단 적당하게 신용있는 곳에 팔아먹는게 나을 테니까.
[ 쿼롯 — 320년 가문 역사를 함께 써내려갔던 마법. 먼 과거 십이제(十二帝)의 1인이었던 고위 마법사 '쿼롯 아그리드' 의 정수가 담긴 마법으로써······. ]
카탈로그를 열어서 대충 읽어봤다.
가격, 할부 금리, 마법의 성능, 구매자에 대한 예우 등등.
'가문의 비전 마법이라곤 하지만 생각보다 전제 조건이 많다. 그래도 돈만 많으면 적당히 살만하겠네.'
나는 저런 기사를 볼때마다 늘 비슷한 생각을 한다.
내 머릿속에 가득 들어있는 무공과 마법도 나중에는 팔아먹을 수 있으려나···하는 생각.
기억하는 고유 마법만 수백 개. 명문대파의 절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무공 역시 머릿속에 있다.
35년의 무림생과 15년의 마탑 생활 동안, 혹시 모를 다음 생을 위해 쓰지 않을 무공과 마법까지 죄다 익혀뒀으니까.
기업의 재정위기 같은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시중에 풀리는 것들중 질 좋은 무공, 마법은 없다.
워낙 기업과 가문들이 자신들의 비전을 아끼는 탓에 허접한 칩도 괜찮은 값에 거래가 되는 판인데, 아마 내가 아는 마법과 무공을 시장에 풀어버리면 분명 반응이 뜨거울 것이다.
대부분이 기본적인 삼재검법 응조수, 죽엽수, 운기토납법등의 기본서와 듣도보도 못하고 화려하기만한 개잡무공들이 프리미엄 가득 붙여서 거래되는 판국이니.
하지만, 누가 시종 따위의 말을 믿어주겠나.
믿어준답시고 데려가면 오히려 더 큰일이다. 한평생 고문이나 당하면서 무공과 마법을 뱉어내는 자판기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
오전 9시.
레나가 사무실로 출근하는 시간.
내게 주어진 대단한 업무는 없다.
무료한 얼굴로 한쪽 구석에서 대기하다가 레나가 뭔가를 시킬 때 행동한다.
예를 들면 커피를 타오라는 심부름이나 다른 층에서 뭘 좀 받아오라는 잔심부름. 말 상대 해주기. 창문 열어서 환기하기 등등.
- 특허소송에 관한 대법원 판례가 보통···
솔직히 회사에서는 하는 것 없이 시간이나 축내고 있는거다. 비서도 아니고 말 그대로 오너의 '시종' 일 뿐이니까.
레나가 회사의 업무를 맡고 나서부터 이 시간이 미친 듯이 아까웠으나 별다른 방법이 없다.
그저 탈출할 기회가 생기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허전한 단전을 채워나가는 수밖에.
'그래도 이 전뇌 컨트롤 칩만 제거한다면······전생의 경지보다도 더 높이 갈 수 있다.'
배양 인큐베이터에서 보낸 어린 시절.
내가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정신은 말짱하지만 아무 말도 못 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아이의 몸으로, 날이 지날 때마다 원래 알았던 것처럼 주입되는 기억을 받아들일 뿐.
그렇기에 명상과 심상 수련을 병행했다.
자그마치 '10년' 이나.
그 기나긴 시간 동안 그간의 공부를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자신의 의념을 오랜 기간 가다듬을 시간이 있었던가.
의념이 깊어지고 또 깊어져 무아(無我)에 빠지고, 무아 지경은 곧 깨달음의 시간으로 이어졌다.
결국, 내공 하나 없는 아이때부터 임독양맥(任督兩脈)이 시원스레 뚫려 상단전이 활짝 열려버렸다.
어느 순간 무아를 벗어나 의식을 차려보니 세상이 한 걸음 더 다가와 있더라.
다시 말해 조화경(造化境).
[ 응? ]
무림 시절에도 도달하지 못했던 그 고절한 깨달음의 경지에, 내공도 없는 아이의 몸으로 올라서버린 것이다.
본래 태어날 때는 열려있던 임독양맥이 나이를 먹고 탁기가 쌓여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닫히는 형식인데, 갓난아이 때부터 10년간 면벽수행을 한 꼴이 되어버렸으니 이상할 일도 아닌가.
문제는 정신과 육체의 괴리감이 너무 크다는 것.
내공도 없고 육체도 단련하지 못한 시종의 몸이다.
상단전을 열어 조화경에 다가서면 뭘 하나? 삼류 강도가 칼을 휘두르면 픽 하고 쓰러져 죽을거다.
대체 이걸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그 대단한 보리달마(菩提達磨)가 소림굴에 틀어박혀 깨달음을 얻었던 면벽수행이 9년인데······.'
달마대사보다도 면벽수행을 오래한 사내.
정신만큼은 화경인 사내.
그것이 바로 나다.
"레반! 이 서류좀 로비에 빨리 전달해줘!"
"······."
조화경의 잡무 시종, 레반.
#4화. 염원하던
#4화. 염원하던
한 초고층빌딩 외벽을 차지한 거대한 스크린에서 낭랑한 목소리의 광고가 흘러나온다.
[ 사는 게 지겹고 힘들다고요? 섹스토이와 한 판 뒹굴 때 강렬한 자극이 필요하시다고요? 그렇다면 이 제품을 구매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사천당가만의 철학과 노하우를 녹여낸 『DG 모르핀-9호』 패키지 세트가 새롭게 출시되었습니다! 단돈 200 크레딧으로 맛볼 수 있는 값싼 행복! 바보처럼 망설일 시간에 지금 바로 주문하세요! ]
반 바이오 컴퍼니 본사 회장 집무실.
투명한 창밖으로 인스턴트 마약 광고를 바라보던 중년의 남자, 잉그리드 반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 마약 카르텔로 가야 할 서류가 이쪽으로 잘못 도착한 것 같습니다만."
"제대로 도착했네."
"······."
연방 대법원의 오래된 전통.
최종심의 판결문은 연방 집행관이 직접 원고와 피고 양측에 방문해 통보한다.
판결 불복이나 도피 등,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한다는 명목이다. 반 회장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엔 그의 예상을 벗어난 결과가 인쇄되어있었다.
『 원고 반 바이오 컴퍼니는 피고 사천당가 코퍼레이션에 배상금 5억 크레딧을 즉시 지급하라 』
"보다시피, 귀측이 소송에서 패했네."
연방 집행관의 날벼락 같은 통보에 반 회장이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군요."
몇 달 전부터 이어진 소송의 골자.
자사에서 개발한 나노 해독제 "Van-Type 4"는 마약중독을 효과적으로 치료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매우 성공적인 임상 결과를 거둔 만큼 수요자는 차고 넘쳐날 것이라 생각했건만, 시장에 출시하기도 전에 문제가 생겼다.
세계의 제약 시장과 마약 시장을 지배하는 무림계 메가콥인 사천당가에서 나노 해독제의 출시를 반기지 않았다는 것.
그냥 반기지 않는 정도로 넘어갔으면 좋았으련만, 그들은 반 바이오에서 개발한 나노해독제가 자사의 특허를 침해한 제품이라며 전방위로 압박해왔다.
무림계의 거목 대(大)사천당가.
연방 증권시장 전체 시가총액 7위.
메가콥 중에서도 상위권에 위치한 그룹.
그럼에도 반 회장은 소송을 선택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황당한 횡포질에 마법사 특유의 자존심이 발동한 것이다.
아무리 그 위세가 대단한 메가콥이라도 본사에서 내세운 증거들을 무마할 순 없으리라 생각했다. 본사에서 자력으로 개발해낸 제품이 확실했으니까.
부패한 시티 법원은 몰라도 연방대법원까지 소송을 끌고 간다면 분명 승소하리라 여겼다.
덧붙여 본사와 이해관계에 있는 대기업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란 계산도 밑바닥에 깔려있었다.
자신의 장녀인 루벤카, 그 아이의 약혼자가 마법계에서 입지있는 그룹의 후계였기에.
하지만 철저한 오판이었나보다.
오늘 아침, 약혼으로 연을 맺은 그룹에서는 일방적인 파혼을 통보해 왔고 연방 대법원은 최종심 패소를 선고했다.
게다가.
"소송 배상금···5억 크레딧 즉시 지급?"
주식시장(F&S 연방증권거래소)에 상장된 반 바이오 컴퍼니의 시가총액은 약 9억 크레딧. 반 회장이 가진 오너 지분과 자사주의 지분을 합쳐도 보유한 지분은 총 40%.
기업을 시장에 통째로 팔아넘겨도 당장 5억 크레딧은 마련할 수 없다. 나노해독제 제조시설 투자로 인해 본사의 현금성 자산도 바닥이다.
사실상 강제적 파산선고나 다름없는 연방 대법원의 판결.
본사에서 자신있게 제시한 증거나 연방 대법관 따위는···상위권 메가 코퍼레이션의 저력 앞에선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못했던 거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또 있을까.
찌이익- 찌직-
집행관이 들고 온 통보 서류가 반 회장의 마력에 의해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더니, 잘게 찢겨 가루로 흩어진다.
"잘난 대법관도 메가콥의 뒷구멍이나 핥아먹는 개들이었군요. 벌레만도 못한······판결권을 끝까지 인공지능에 맡기지 않았던게 그따위 한심한 이유 때문이었다니."
상스러운 반 회상의 욕설이 이어진다.
그러나 그의 서슬 퍼런 기세에도 집행관은 태연하게 물을 뿐.
"괜찮은 뒷배가 있었나?"
"······예. 오늘 아침 끊어졌습니다."
"음, 자네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으니 뻣뻣하게 굴었을 테지."
"소송을 결심하기 이틀 전, 새파랗게 어린 당가의 말단 직원이 찾아와서 내게 뭐라 지껄였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야 협박 비슷한 걸 했지 않겠나."
"해독제의 코드와 특허권을 넘기면 체면은 차리게 해주겠다더군요. 감히 나를 상대로 말입니다."
"제법 성공한 마법사의 자존심만큼 뭉개기 쉬운 것도 없지."
쾅!
분노한 반 회장이 자리를 박찼다.
삽시간에 들불처럼 일어나는 마력.
회장실의 모든 집기가 우그러지며 허공에 떠오르더니, 당장이라도 천장을 뚫고 나갈 듯 진동한다.
그것은 실로 위협적인 광경이었으나.
"내게 하소연해봐야 소용없네."
집행관의 태도는 시종일관 덤덤했다.
"······."
그러자.
쿵!
반 회장이 다짜고짜 무릎을 꿇었다.
그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마법계 인사가, 누구나 부러워하는 중견기업의 회장이라는 직함도 벗어던진 채로.
"제 자식들은 충분히 유능하니 배상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힘써주십시오. 오딘···발할라···어디로든 가서 사람처럼만 살게 해주십시오."
기업의 지분이 두 딸에게도 있다.
레나와 루벤카가 각각 지분 1%씩. 지분을 보유한 오너일가이니 사천당가의 마수는 반드시 자신의 두 딸에게까지 뻗칠 것이다.
연방 집행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실로 무책임한 부성애일세."
"돈을 드리겠습니다."
"······황당하군."
"루베르겐 집행관님. 크레딧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그닥 대단치도 않은 제 귀에까지 집행관님의 소문이 들어옵니다."
"그럼 못 들은 것으로 해주겠나."
"5천만 크레딧."
"그만하지."
"1억 크레딧. 두 명만 힘써주십시오."
"자네 돈 많군."
"1억, 그리고 블러디 에센스까지 내드리겠습······."
"내가 분명 그만하라지 않았나."
순간 일변해 목을 조여오는 집행관의 압도적인 기세에 반 회장의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이 이상의 설득은 불가능하리라 느낀 반 회장은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판결 불복하겠습니다."
"본 집행관은 협상을 하러 온 게 아니라 대법원의 뜻을 통보하러 온 걸세. 그러니 불복이라는 선택지는 없네."
"입 닫고 조용히 죽으라는 거로군요."
"지금까지는 대부분 그랬지."
"······."
조개처럼 굳게 닫히는 반 회장의 입.
잠시 가만히 앉아 분을 삭이던 그가 끝내 머리를 감싸 쥐는 모습을 확인한 집행관은 그제야 몸을 돌렸다.
"확인한 것으로 알고 가보겠네."
조금 뒤.
사신같은 연방 집행관의 모습이 사라지자 허공으로 떠올랐던 집기들이 후두둑 떨어진다.
대부분이 형편없이 우그러지고 뭉개진 채였다. 꼭 반 일가가 겪게될 앞으로의 일들처럼.
"······."
그렇게 홀로 남은 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망가진 집무실의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반 회장은 돌연, 마약에 중독된 사람처럼 웃어대기 시작했다.
"흐, 하핫······."
이윽고.
실핏줄이 터져 빨갛게 물든 그의 눈동자가 집무실 구석의 한 공간으로 향한다.
* * *
반 바이오 컴퍼니, 레나의 사무실.
"아가씨."
"벽보고 조용히 서 있어."
"아. 예."
오늘은 아무래도 시원한 콜라와 태업을 요구하기는 힘들 것 같다. 전속 시종의 삶은 이렇게나 부조리하다.
어젯밤 일로 아직까지 심기가 불편한 레나가 업무를 보는 동안, 몰래 공용 시티넷에 접속해 시간을 보낸다.
발두르 의회에서 무슨 법이 통과되었다는 둥 군수기업이 파산했다는 둥의 뉴스들이 줄을 이었다.
문득, 연방증권거래소에 접속한 나는 하나의 기업을 검색했다.
'사천당가.'
[ 기업명 ]
사천당가(四川唐家) 코퍼레이션
[ CEO ] : 당벽운(唐碧雲)
[ 본사 위치 ] : 수르트, 남경(南京)
[ 대표 업종 ] : 제약업
[ 시가 총액 ] : 1,884억 크레딧
[ 총액 순위 ] : 7위 ▲ —
[ 연 매출액 ] : 193억 크레딧
[ 총 직원수 ] : 359,000명(추정)
F&S 연방증권거래소에서 공시해둔 기업 사천당가의 대략적인 정보다.
시가총액 세계 7위.
워낙 음흉한 놈들이라 실제로는 드러난 수치보다 더 대단할지도 모른다. 가진 힘의 전부를 꺼내 보이는 건 뒷골목 흑도방파나 하는 짓이니 말이다.
'구파 일방들도 그렇고···다른 세계라도 당가는 확실히 당가인가.'
그에 반해.
[ 기업명 ]
반 바이오 컴퍼니
[ CEO ] : 잉그리드 반
[ 본사 위치 ] : 발두르
[ 대표 업종 ] : 나노 의료기기
[ 시가 총액 ] : 9억 크레딧
[ 총액 순위 ] : 711위 ▲ 54
[ 연 매출액 ] : 5,700만 크레딧
[ 총 직원수 ] : 1,300명(추정)
반 바이오 정도면 발두르에서 나름 알아주는 기업인데도 당가와 비교하면 많이 초라하다. 최근 들어 기업이 급성장했음에도 이렇다.
현재 증권가를 달구고 있는 이슈.
나노 해독제를 둘러싼 반 바이오와 사천당가간의 특허소송 전쟁.
'잘못되면, 그대로 끝이겠어.'
내가 아는 당가는 상식적인 놈들이 아니다. 3회차 세계인 중원의 사천당가도 그랬고, 지금까지 20년을 눌러앉아 살아본 결과 이곳의 당씨들 역시 꼴통이다.
무림시절 사파의 절대고수들과 기인이사들도 당문과는 부딪치길 꺼려했다.
한 번 시비가 붙으면 상대가 누구든 죽기 전까지 피를 말리는 독종놈들.
그런데.
내가 주인으로 모시는 레나의 아비가 얼마전 그런 당가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무슨 특허 소송이라던가.
애초에 저만큼이나 차이가 벌어져 있는데 무슨 자신감으로 반기를 든 건지 모르겠다.
그깟 마법사의 자존심이 그리도 중요한가? 잘나봐야 뭐 얼마나 잘난 마법사라고.
경험상,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단단히 일어날 것이다.
"레반!"
생각에 잠겨있던 나를 부르는 소리.
드디어 콜라를 허락해 줄 생각인가.
나는 하던 생각을 뒤로 밀어둔 채 씩씩하게 대답했다.
"예! 아가씨."
"저, 저기좀 봐야할 것 같은데······?"
"?"
사무실의 입구쪽을 가리키는 레나의 손끝을 따라가자, 이쪽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는 한 남성이 시야에 들어온다.
상당히 큰 키에 중년의 외모.
칠흑같이 어두운색의 러프한 정장.
당당하며 기품이 느껴지는 걸음걸이.
밖으로 드러난 손목과 손가락엔 군용 펄스건과 단분자 와이어 사출기로 추정되는 금속 무기가 탑재되어 있고, 볼 테면 보란 식으로 가리지 않은 일곱 개의 별 마크. 가슴팍엔 고급스러운 홀로그램으로 띄워진 공무원증이 보인다.
『 연방집행관 - 유크 루베르겐 』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연방집행관?
연방집행관이 여길 왜 찾아왔지?
뚜벅-
코앞까지 다가온 집행관은 발걸음을 멈추더니 나를 천천히 응시했다.
단순히 시선이 스치고 갈 뿐인데도 몸이 저릿할 정도의 위압감. 업무를 보던 레나 역시 연방 집행관 출두라는 당황스러운 사태에 눈알만 굴리고 있다.
"저 아가씨 시종인가? 언제부터?"
나를 향한 집행관의 느닷없는 질문 세례.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가지 의문들을 숨긴 채 기계적으로 답한다.
"올해로 10년째입니다."
"그렇군."
"혹시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아닐세. 그저···."
말과 동시에 몸을 숙인 집행관이 내게 조용히 속삭인다.
- 마법계 기업 시종이 단전에 내공쌓는 취미도 있나 궁금하지 뭔가.
"······."
담담한 어투에 살기가 어려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연방 집행관이 어째서 나를? 아니 애당초 이런 괴물이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와선······.
온갖 생각들로 머릿속이 난잡하게 변해가던 도중, 뒤이어 들려오는 집행관의 목소리가 내 잡념을 깨버렸다.
"당가도 참 지독하군."
"······?"
"도착하면 적당히들 하라고 전해주시게."
의문스러운 그 말만 남겨둔 채, 금세 몸을 돌려 떠나는 집행관.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레나가 참았던 숨을 내뱉는다.
느닷없이 나타나 무슨 소리일까.
저런 거물이 한낱 시종 따위에게 다가와 실없는 농담을 할 리는 없고.
'적당히 하라고 전해라······뭘?'
그리고 그런 나의 의문은—
그리 오래가지 않아 완벽하게 풀렸다.
유크 루베르겐이라는 이름의 연방집행관이 떠난 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치르릉-
치르르릉-
사내 통신망으로 연결된 수화기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연이어 울린다.
"뭐, 뭐야? 놀래라. 다들 갑자기 무슨 일······."
[ 1층 로비입니다. 사천당가에서 찾아왔는데 회장님과 약속이 있으시다고······. ]
[ 지하 경비소입니다. 사천당가의 임원분께서 회장님을 찾아오셨는데 위로 올려보낼까요? ]
[ 사천당가 발두르 지사의 전무님께서 반 회장님을 찾아오셨······. ]
본능과 직감이란 게 있지 않은가.
아까 연방 집행관이란 작자가 찾아와 했던 얘기가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스으으-
"······."
그 순간.
피부로 느껴지는 묘한 기시감.
오감이 보내오는 정보에 집중한다.
분명 어디선가 맡아본 듯한, 술에 물 탄 듯한 애매한 향이 언젠가부터 후각을 자극하고 있었다.
어렴풋이 기억속에 남아있는 향.
지금의 상황으로 미루어 봤을 때······
'미혼산(迷魂散).'
무색 무형 유취.
흡입한 자의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마약. 나는 미혼산이 어디선가 하독되었음을 인지한 즉시 호흡을 멈추었다.
흡-
그래, 오늘이 개 잡는 복날이었군.
쥐톨만한 단전의 내공을 조금씩 끌어올리며 들이마신 미혼산의 약기를 몰아낸다.
"···졸리네. 잠을 못 자서 그런가."
레나는 약을 한껏 들이마셨다.
이미 동공이 반쯤 풀려있는 상태.
잔뜩 들이마셨다면 나도 별다른 수가 없다. 얼마 못 가서 쓰러질 것이다.
그때.
콰광-!! 꽈과광-!!!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건물의 최상층부에서 고막을 떨어 울리는 거대한 기파와 폭발음이 연신 터져 나온다.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듯 흔들리는 바닥.
누가 보더라도 심상치 않은 사태가 터진 이 시점에서, 평범한 시종인 나는···
"오늘이 복날 맞군."
차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혼산이고 뭐고—
그토록 염원하던 탈출의 기회가 드디어 찾아왔으니까.
▶ 긴급 상황
▶ 보호 대상 - 잉그리드 반 레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수행합니다.
덥썩-
머릿속을 웅웅 울리는 경고음.
나는 전뇌 컨트롤 칩의 강제력을 따라 기절한 레나를 짐짝처럼 집어들곤, 미친듯이 사무실 밖으로 내달렸다.
#5화. 나는 갈것이다
5화.
대피로 계단을 네 칸씩 뛰어 내려간다.
그것도 축 늘어진 레나를 둘러멘 채.
지금, 이 천금 같은 기회를 기껍게 받아들인 육체가 한계 이상의 성능을 내는 건지도 모른다. 사실 당장 무릎이 부서진대도 즐겁게 달릴 수 있으리라.
아무튼 나는 몸이 부서져라 달렸다.
로비와 승강기는 누군가 지키고 있을 것이 뻔하기에, 레나의 사무실이 있는 33층부터 비상 대피로를 따라 계속 밑으로 내려갔다.
염원하던 노예 탈출이 코앞까지 왔다.
이대로 내려가 본사 바깥으로 나간 뒤, 시티 트램이나 사이버 택시, 캐리어를 잡아타고 어디론가 가서 처박히면 끝이다.
빌어먹을 전뇌 컨트롤 칩의 허락도 떨어졌으니, 위협에서 벗어났다고 판단할 때까지는 어디로든 도망칠 수 있다.
그곳에서 계획대로 칩을 제거하고 자유의 몸이 된다.
하지만.
그 전에 들려야 할 곳이 한군데 있다.
반 바이오 본사 23층에 있는 반 루벤카의 사무실.
'분명 남아있다.'
최근, 루벤카의 시종인 메리로부터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시종 숙소에서 네 주인이 잘났네 우리 주인이 잘났네하며 유치하게 나누었던 잡담들 중 하나였다.
[레반, 루벤카님은 학회에 가실 때 항상 챙겨가시는게 있어. 루벤카님 사무실 데스크의 두 번째 서랍을 열어보면 출장 전용 가방이 있거든. 그 가방에 뭐가 들었는지 알아?]
[안 궁금하다고 두 번이나 말했다.]
[우리 회사의 베스트셀러인 '의료용 나노로봇 시리즈'의 6세대 프로토타입이랑 이번에 자체 개발한 나노해독제 Van-type 4를 담아둔 카트리지 통이야!]
[그래. 다 들었으니까 자도 되나?]
[발할라 시립 아카데미에서 개최되는 학회에 갈 때마다 그걸 가져가서 여기저기 홍보겸 자랑을 하셔. 본사의 기술력을 진심으로 자랑스러워 하시는거지. 심지어 신제품에 저명한 고위마법사 몇 분이 관심을 보이셨어!]
[그러면 뭐 해? 성격이 아주 개차반인데.]
[마음은 여리신 분이야. 이상하게 레반만 보면 행동이 과격해지셔서 그렇지.]
의료용 나노로봇.
반 바이오 컴퍼니를 지금의 중견기업 자리까지 끌어올린 제품이다.
신체에 이식받으면 온갖 질병과 독을 몰아내주는 것은 물론, 시간만 있다면 손이나 발이 잘려도 재생시킨다.
현재 반 바이오에서 판매하는 제품들 중 가장 고급형인 5세대 의료용 나노로봇.
그 5세대 제품이 시술 비용까지 합하면 무려 300만 크레딧을 넘어간다. 시티의 고급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는 거금이다.
그런데 6세대?
아직 출시가 되지 않은 프로토타입이라지만 그 자존심 강한 루벤카가 직접 들고 다니며 홍보하고 자랑까지 늘어놓을 정도라면, 이미 제품의 안정성은 입증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약한 내게 그만한 보물은 없다.
20년이라는 세월을 탈출만 보고 버텨왔는데 막상 나가자마자 칼이라도 맞아서 죽으면 억울하잖은가.
그때 듣기 싫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길 잘했다. 귀담아듣지 않았던 메리의 오너 자랑이 내게 도움이 될 줄이야.
'프로토타입만 빠르게 챙겨서 나간다.'
그렇게 도착한 23층.
미혼산은 23층 플로어에도 옅게 퍼져있었다.
반 바이오 빌딩의 23, 33, 43층은 오너 일가가 사용하는 층인 만큼, 다른 곳들보다 보안이 철저하다.
그런데도 전부 이 꼴이라면 아마도 건물 전체가 이 지경일 것이다.
- 으으···.
좀비처럼 비틀거리거나 이미 기절해 누워있는 직원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천당가의 행사는 실로 과감했다. 업무지구 한복판에서 이런 짓을 벌이더라도 후에 감당할 자신이 있다는 얘기겠지.
23층 가장 안쪽, 루벤카의 집무실 앞에 당도한 나는 기절한 레나의 사원증을 갖다 댔다. 닫힌 사무실의 입구가 열린다.
심플한 사무실이었다.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넓은 통창 밖으로는 업무지구의 화려한 빌딩들이 보였다.
고개를 급하게 돌려가며 사무실 내부를 빠르게 훑자, 메리가 말한 데스크 서랍이 눈에 들어왔다.
덜컥-!
굳게 잠겨있는 서랍. 곧바로 내공 실린 주먹을 연신 내질렀다.
콰직- 콰직-
살갗이 찢어져 뼈가 보이고 삼류의 내공이 바닥을 보일 때쯤, 서랍이 우그러지며 데스크가 통째로 내려앉았다.
두 번째 서랍 속에는 메리가 말했던대로 작은 가방이 있었다.
후우우-
지퍼를 열자 하얀 수증기가 흘러나왔다.
냉장 기능이 있는 유리 카트리지에 정갈하게 담겨있는 저게 바로 나노로봇 6세대 프로토타입. 그 옆에 몇 개의 나노해독제 신제품도 소담스레 놓여있었다.
'찾았군.'
반 바이오 컴퍼니의 업종은 '나노 테크놀러지' 주력분야는 의료용 초정밀 나노로봇 제작. 기술력 하나는 발두르 시티와 업계에서 알아주는 수준이었고···.
이제 그 시리즈의 최후가 되어버릴 물건을 얻었다.
콰과광—
벼락같은 굉음이 울린다.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더 있을까.
지금 43층 회장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여유를 부릴 시간은 없다.
나는 사무실을 뒤집어엎으며 열어볼 수 있는 건 다 열어봤다. 서랍, 스타일러 옷장, 카본 선반에 쌓여있는 온갖 트레이들과 가짜 화분 밑까지 열심히 뒤적였다.
다행히도 선반 위에서 쓸만한 놈들이 나왔다.
고농도 마나액 주입기 한 박스.
그리고 신경 부스터와 혈류 조절기.
보자마자 무슨 용도인지 단박에 알아챘다.
'그 대단한 루벤카가 쓰는 물건들은 아닐 테고······고문이나 심문용이겠군.'
고농도 마나액은 마법사들에게는 시간제 영약같은 물건이다. 하지만 마나회로가 없는 지금의 내겐 아무런 쓸모가 없다.
이런 몸에 섣불리 사용했다간 부작용으로 쓰러지거나 죽겠지. 이건 나중을 위해 챙겨둔다.
다음은 신경 부스터. 진한 커피 열 잔을 단숨에 들이켠 것 같은 신경 각성 효과를 준다. 세상을 인지하는 속도가 빨라진다. 혈류 촉진기와 같이 사용하면 효과가 곱절로······
콰과과과광-!!!
천장에서 먼지가 부스스 떨어진다.
"······."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무지막지한 굉음.
빌딩 바닥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최상층의 소란이 점점 커지고 있다.
당가의 손님들이 제대로 된 무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얘기인데—
이 이상 여기있는 건 위험하다.
전신의 감각이 이제는 정말 나가야 할 때라고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사무실을 빠져나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두 가지 문제가 생겼다.
하나는 들쳐멘 레나와 이것저것 쑤셔 넣은 가방이 너무 무겁게 느껴진다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계단으로 가는 길목에 방독면을 차고 있는 남자가 하나 있는데 척 봐도 우리쪽 직원은 아니라는 것.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푹!
허벅지에 신경 부스터와 혈류 촉진기를 꺼내 쑤셔 박았다.
피처럼 붉은 액을 눌러 주입하자, 토할것만 같은 울렁임이 찾아옴과 동시에 심장이 폭발할 듯 박동하기 시작했다.
탓!
이윽고 땅을 강하게 박찼다.
방독면의 지척까지 순식간에 쇄도한 나는, 또 하나의 주입기를 꺼내 들었다.
푸욱!
고농도 마나액 주입기.
- !?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감전된 듯 우뚝 멈춰버린 그를 지나쳐 계단을 뛰어 내려간다.
심장이 당장이라도 터질듯 고동쳤다.
23층에서 2층 필로티 정원까지 단숨에 뛰어 도착한 나는, 레나를 업은 채 본사 뒷편에 주차된 차량 위로 뛰어내렸다.
쾅!
무릎과 허리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태연하게 행인 무리에 섞여 들며 생각했다.
'트램 역까지는 도저히 못가겠군.'
그렇게 생각한 나는, 급한 대로 눈에 보이는 무인 사이버택시를 잡아탔다.
- 오늘도 좋은 하루입니다.
내부 전면의 디스플레이에서 듣기 좋은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레나와 가방을 옆자리에 풀썩 던져두고 몸을 뉘었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하······."
이제야 주변이 조금 보이기 시작했다.
코끝으로 부드럽게 들어오는 가죽 냄새.
밖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막상 들어와 보니 기함급 택시였는지, 퍼스트 클래스 부럽지 않은 좌석과 위스키 잔이 준비되어 있었다. 기본요금이 아마······.
사실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이 쓰레기같은 몸이 기절하기 직전이거든.
- 제게 목적지를 말씀해주세요. 요금이 정상결제되면 운행이 시작됩니다.
디스플레이가 확대되며 발두르 시티의 지도를 띄운다. 현재는 내가 위치한 중심업무지구에서 램프가 깜빡깜빡 점등 중이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여기."
서서히 아득해져가는 정신속에서 손가락을 놀렸다.
틱-
시티 중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구역을 찍었다.
저 뒤로는 포장도로가 끊겨있고 거대한 방어장벽으로 막혀있어 택시로도 갈 수 없는 최후의 외곽 구역.
발두르 최악의 슬럼가.
나는, 웨스트 정크타운으로 갈 것이다.
#6화. 더 늦기 전에
#6화.
발두르 시티, 서쪽 외곽구역.
그 섹터에는 빈곤 계층이 모여 형성된 슬럼가이자 치안이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최악의 타운이 있다.
갱을 표방하는 집단이 하루가 멀다하고 총질을 일삼으며 유흥주점과 도박장, 암시장, 클럽, 마약, 사창가, 청부 사무소, 무허가 의료시술소 등의 온갖 불법과 편법이 공존하는 곳.
공권력이 닿지 않는 그들만의 리그에서 총성을 자장가 삼아, 길거리에 쓰레기처럼 굴러다니는 시체를 구경거리 삼아 하루를 살아가는 빈곤계층이 모인 구역.
무법지대(無法地帶), 웨스트 정크타운.
"정크타운에 온 걸 환영한다. 좆만아."
"······."
스각-
콧잔등에 빨간색 장미 문신을 그려 넣은 말라깽이 하나가 내 앞에서 나이프로 묘기를 부려댄다.
관자놀이 쪽에 구닥다리 1세대 넷 링크포트를 장착하고 있는 걸 보니 돈이 있는 놈은 아니다.
아마 이 슬럼가 타운에서 평범하게 볼 수 있는 양아치, 범죄자, 미친놈. 셋 중 하나겠지.
'나노로봇 카트리지는 땅에 묻어두고 오길 잘했군.'
정신 사나운 나이프 묘기를 멈춘 놈이 말했다.
"1인당 입장료 2천 크레딧. 너희는 둘이니까 합쳐서 5천 크레딧이다."
"······."
묶음 할인율이 마이너스인 기적의 계산법.
" 잔고 / 9,000C "
네트워크 계좌에 잠들어 있던 1만 크레딧 중 고급택시 요금에 1천 크레딧을 보태 사용했고, 아직 9천 크레딧이 수중에 남아있으니 입장료를 낸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다.
이건 그냥 내주고 넘긴다.
"지금 입금했습니다."
"응? 진짜 입금했다고 5천 크레딧을? 너 지금 나랑 장난치냐?"
"한번 확인해 보시죠."
다만.
이 냄새 나는 외곽 동네까지 와서 처음 받아보는 인사가 얼굴에 칼빵 놓기라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
화악-
칼에 베인 부위가 화끈거린다.
"···허. 진짜네? 스물도 안된 것 같은 꼬맹이가 무슨 돈을···일단 오케이. 넌 특별히 통과다. 내 앞에서 꺼져."
"······."
"근데 이놈 이거 눈깔 봐라. 아~그깟 면상 좀 그었다고 꼴 받았냐? "
"아닙니다."
"사내새끼치고 얼굴이 너무 깨끗하길래 들어가서 무시당하지 말라고 하나 새겨준 거야."
"꼴 안 받았어요."
"정말?"
"예."
"근데 네 눈깔은 아니라는데?"
스윽.
놈이 내 목에 또 칼을 들이밀었다. 그냥 죽여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이 한심한 몸 상태로 무작정 적을 만들 수는 없다.
"업힌 년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어디서 섹스토이라도 훔쳐가지고 배달온 모양인데. 주문한 놈이 누구든 난 신경 안써. 그러니까 눈알 착하게 굴리자. 죽여버리기 전에."
신기하게 못생긴 놈이 같잖은 허세는.
- 밴스! 받았으면 빨리 보내 그냥! 교대하러 가야 한다고!
저 멀리 허름한 초소에서 총을 쥐고 있던 덩치가 소리치자, 눈앞의 말라깽이가 아쉽다는 듯 말하며 날 툭툭 밀었다.
"이제 꺼져라. 훠이!"
그래.
행인들 돈 빼앗느라 고생했는데, 가는 김에 칭찬 하나라도 해주고 가야겠군.
"근데 그거 루돌프 맞죠."
"?"
"콧잔등에 한 딸기 문신, 굉장히 멋지네요."
스걱-
화끈한 감각이 얼굴을 가로지른다.
아까 전보다 깊게 베인 탓인지 피가 주르륵 흘러 턱 밑으로 뚝뚝 떨어진다.
"······새끼가, 딸기?"
"아닌가요."
"장미다 이 애새끼야. 너 그거 네 눈깔 아니지? 눈알파츠 해킹이라도 당했냐 이 병신-"
놈이 다시 칼을 휘두를 준비를 한다.
그때.
- 야 이 새끼야! 지랄 적당히하고 보내라니까! 교대 안 할 거면 너 혼자 한 타임 더 뛰든지!
저 멀리서 다시금 들려오는 고함.
얼굴을 와락 찡그린 루돌프놈은 마지못해 칼을 거두곤, 충고인지 협박인지 모를 소리를 한다.
"너 객기부리다간 바로 골로 간다. 얼굴이 반반한 게 딱 그쪽인 놈들이 좋아하게 생겼거든."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충고 고맙습니다. 우리 또 봐요."
"또 보자고? 큭큭. 그래 꼭 또 만나자! 타운에서 뒈지지 말고! 응? 또 보자 꼭!"
"예."
"어우, 피 나는거 봐. 아프겠다 야."
빨간 코에 말라깽이 루돌프.
내 얼굴에 칼질하고 욕설 뱉음.
이놈은 똑똑히 기억해 둬야겠군.
정크타운 입구에서 삥 뜯는 둘을 지나쳐 5분 정도 걷다 보니, 뺨을 타고 주르륵 흐르던 피가 어느새 멎어간다.
'고작 2세대도 이렇게 쓸만한데.'
2세대 의료용 나노로봇의 능력.
어릴적, 레나 덕에 시술을 받았다.
거창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때는 어렸던 레나가 선물받은 시종이 다치면 어쩌냐며 반 회장 앞에서 떼를 썼었던가.
이젠 썩다리 구식으로 평가받는 2세대 의료용 나노기기의 가격이 아직도 30만 크레딧부터 시작이니, 평범한 시티 주민들은 꿈도 못 꾼다.
효과는 충분히 괜찮은 편.
피부가 갈라지는 상처 정도는 구태여 지혈하지 않아도 금방 피가 멎는다. 반나절이면 갈라진 살이 붙고, 하루가 지나면 흉터만 남는다.
단순 골절도 일주일쯤 내버려 두면 자연히 회복된다. 아예 뼈가 가루처럼 으스러지거나 살점이 떨어져 나가면 답이 없지만···.
곧 시판도 안 된, 최고급 6세대 나노로봇으로 교체할 수 있을 것이다.
잠시 후.
오래되고 울퉁불퉁한 도로 옆 갓길.
[ 여기부터 정크타운 ]
다 녹슬어버린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그 표지판의 뒤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명 참 쓸데없이 화려하네. 어지럽고."
거대한 슬럼가의 풍경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발두르 인구 약 1억. 그중 가장 밑바닥 계층에 위치한 이들이 자신들의 터전으로 삼은 소도시.
마치 90년대 홍콩의 뒷골목 야시장과 구룡성채를 보는듯한, 번쩍대는 옥외 간판과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싸구려 야광 조명으로 잔뜩 떡칠해둔 구식 건물들의 군집.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골목과 낡아빠진 저층 건물들. 그 사이는 조잡한 철판과 나무판자를 구름다리처럼 연결해 지나다닐 수 있게 해놓았는데, 그 다리와 옥외간판의 수가 워낙 많아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마치 반짝반짝 빛나는 개미굴같다.
나와 레나, 두 사람 정도라면 저 거대하고 복잡한 개미굴 속에 몸을 숨기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으리라.
나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레나를 들쳐멘 채 걸음을 재촉했다.
쿵. 쿵. 쿵.
정크타운의 길거리.
누군가 내 머리 위의 구름다리를 지나다닐 때마다 냄새나는 톱밥과 녹슨 쇳가루, 새까만 먼지가 후드득- 떨어진다.
발두르 중심업무지구의 첨단화된 풍경과는 매우 극명하게 대비되는 동네지만···
차라리 이런 분위기가 내겐 더 친숙하다.
- 아아아악-!
왁자지껄한 소음에 귀가 따끔거린다.
- 아악-! 이거 놓으라고 이 새끼야!
- 그거 들었냐? 찰스 그 멍청한 개자식. 어젯밤에 마약하다 뒈져버렸더라고.
- 요앞 펍에 괜찮은 섹스토이가 새로 들어왔다는데? 얼마 쓰지도 않은거래!
- 이봐 주인장, 배양육 버거 하나에 20크레딧이 말이 돼? 좆같이 맛없는데 가격은 왜 맨날 올라? 햄버거가 새끼라도 낳냐!
- 꼬우면 처먹지 말고 나가! 재료값이 또 올랐다니까? 나도 어쩔 수 없다고.
- 이미 다 먹었다 새끼야! 배양육인데 재료값이 오르긴 지랄. 돼지같은 네 살이 더 오른 거겠지.
그렇게, 온갖 군상이 난무하는 길거리를 지나가던 그때였다.
툭.
- 어이 형씨.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마약과 술에 찌든 얼굴.
먹물처럼 탁한 눈빛에 떡진 긴 머리. 제 몸 하나 못 가누는 인생막장 부랑자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여기까지 오면서도 비슷한 놈을 몇 명 봤다.
- 그거, 파는 거야?
"?"
놈의 시선은 내 등에 업혀있는 레나에 꽂혀있었다. 손가락으로 동그란 구멍을 만들어 보인놈이 한심한 얼굴로 히히덕댔다.
- 그거 말이야. 한 번 하는데 30크레딧 어때? 내가 최대한 빨리 끝내볼게!
대충 봐도 제정신이 아닌 부랑자.
따뜻한 온정을 베풀어 주기로 한다.
"그거라면···30크레딧은 무슨. 10크레딧만 받아도 충분하지."
- 뭐? 정말이야?
뻐억-
둔탁하고 묵직한 타격음.
놈이 명치를 부여잡고 꺽꺽댄다.
- 끄억···?
이놈 오늘 운수 좋은 날이네.
"외상으로 달아둬. 나중에 돈 많이 벌면 그때가서 꼭 갚으마."
고통에 신음하는 거지놈을 대충 발로 밀어 넘어뜨리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낄낄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 뭐야 저 꿈틀대는 굼벵이는.
- 들어보니까 30크레딧은 있는것 같던데···
- 한번 가서 뒤져볼까?
사람이 쓰러져 꺽꺽대는 중인데도 행인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몇 명의 아이가 다가가 쓰러진 부랑자의 주머니를 신나게 뒤적거릴 뿐.
웨스트 정크타운은, 원래 이런 곳이다.
*
나는 곧바로 지낼 숙소를 찾았다.
허름하고 다 쓰러져 가는 뒷골목 여관. 네온사인 간판마저 군데군데 꺼져있는 곳이다.
"하루 숙박료는 40크레딧. 특실은 80크레딧. 둘 중에 어디로 할거요."
퉁명스러운 말투의 여관 주인.
이런 곳에서 친절한 서비스 같은 걸 기대하긴 어렵겠지.
스윽. 슥.
주인장이 권총을 닦으며 다시 묻는다.
"어디로 할 거냐니까."
"특실."
"오호? 어려 보이는데 통이 크시군. 근데 들쳐업고 있는 여자는 죽은건가?"
"그건 아니고 많이 취해서."
"그래 뭐, 방 안에서 죽지만 마쇼. 치우기 힘드니까. 그리고 벽에 구멍 같은 거 뚫으면 재미없을 줄 아쇼."
그렇게 배정받은 방은 여관 2층 끝방.
말만 특실이지 사실상 곰팡이 잔뜩핀 반지하 원룸과 비슷한 수준이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레나를 침대에 던져놓았다. 피로감이 온 몸을 잡아먹으며 몰려왔다.
당장이라도 누워서 한숨 자고 싶지만.
"······레반, 여기 어디야?"
어느새 부스스 깨어난 레나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레나가 기절했던 동안 일어난 일을 말해 주었다.
사실 그간 일어난 일이라고 해봐야, 본사 빌딩에서 무작정 시티외곽의 슬럼가로 도망온 것 밖에 없다.
"아무리 사천당가라고 해도 이건 말도 안 돼. 그럼 우리가 소송에서 졌다는 얘기인데······."
중간까지 묵묵히 듣던 레나는 결국,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비교적 어린 나이부터 회사 업무를 하던 녀석이다. 또래보단 성숙하다지만, 또 이런 상황이 심심찮게 일어나는 세상이라곤 해도 마냥 이성을 지키긴 힘들겠지.
그 뒤로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조금 진정이 된 듯한 레나가 습기찬 눈가를 문지르며 입을 연다.
"메세지가 와있어. 다행히 언니는 지금 발할라에 있대. 파혼 일로 따지러 갔다가 거기서 소식을 들었다고···"
반 회장의 장녀 잉그리드 반 루벤카.
그 괄괄한 성격이 목숨을 살린 듯하다.
차라리 다행이군.
성격 드세기로 유명한 루벤카 그 여자가 반 바이오 본사에 있었다면 아마 사천당가고 뭐고 빌딩이 다 무너져 내릴 때까지 저항했겠지.
시종인 메리도 같이 살아있을 것이다.
"······괜찮아. 우린 아직 괜찮아."
"?"
"연방으로 찾아가면 돼. 오딘 시티의 연방 정부로 가서 도움을 요청하면···."
당연하게도 괜찮은 상황은 아니지만, 레나는 괜찮은 척하며 이 말 저 말을 아무렇게나 주워섬겨댔다.
무슨 얘기인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자기가 무슨 말을 뱉고 있는지도 모를 테니.
어차피 나는 내 방식대로 할 예정이다.
"레나."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놀라지 마라."
"······응?"
레나가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릴 하냐는 듯 눈을 깜빡인다.
나는 그럴싸한 변명을 지어내려다 문득, 설득할 시간조차 아까워졌다.
여기가 행동을 조심해야 할 반 바이오도 아닐뿐더러, 이미 충분히 오랜시간 기다려왔지 않은가.
조금이라도 더 미루는 건······
이제 사절이다.
"레반, 설마 옛날에 시술한 나노머신이 오류라도 일으킨거······."
"지금부터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절대 건드리지 마."
"······."
오줌이라도 마려운 사람처럼 급하게 말끝을 얼버무린 나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호흡을 골랐다.
손가락 끝으로 내 관자놀이 부근을 더듬자, 살갗 아래에 볼록 튀어나온 금속이 느껴진다.
으직.
빌어먹을 전뇌 컨트롤 칩의 측면부.
망설임 없이 손가락에 힘을 주어 강하게 틀어쥔다. 하단전에 잠들어 있던 쥐톨만한 공력도 기혈을 내달릴 준비를 마쳤다.
이윽고 내 전신이 화로처럼 끓어오른다.
"지, 지금 뭐 하는 거야? 레반!"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빌어먹을 인큐베이터 10년, 눈칫밥먹는 시종 생활 10년. 도합 20년. 내 성격에 많이도 참았다.
그러니 이제는 더 늦기전에 돌아갈 시간이다.
부잣집 딸 전속시종 따위의 삶이 아닌, 전생자의 삶으로.
"뽑고 나면, 아까 그 루돌프부터 찾아가야겠군."
으지직-
#7화. 누가보면 고수인줄 알겠어
#7화.
잉그리드 반 레나.
누가 인생에서 가장 당황스러웠던 때를 꼽아보라 한다면, 그녀는 지체없이 지금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본사 사무실에서 끊겨버린 기억.
정신을 차려보니 전혀 모르는 장소인 데다, 개인 넷으로는 아버지인 반 회장이 전송한 영상이 도착해 있었다.
3분 가량의 일인칭 시점 영상.
짧은 고해성사와 사랑한다는 말.
그리고.
회장 집무실의 벽을 부수고 들어온 사천당가의 간부들, 아버지가 들고 있던 소량의 붉은 액체를 들이켜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영상은 끝이 났다.
기업 간 소송의 결말을 모를 리 없는 그녀이기에, 어떤 상황인지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자신들은 당가와의 소송에서 패했고.
회사는 감당이 불가능할 만큼의 배상금을 물어내야 할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천문학적인 배상금은 무슨 수를 써도 갚을 수 없다.
결국 오너 일가는 몰락하고 반 바이오의 모든 사업체는 합법적으로 당가에 흡수될 것이다.
뻔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기에 아버지, 당신께선 법원의 판결에 불복했고 목숨을 태워 가면서까지 대항했다.
5레벨의 마법사가 블러디 에센스까지 과량 투여하며 발악했으니 시종일 뿐인 레반이 자신을 업고 도망칠 시간을 벌 수 있었던 거다.
절망적인 현실이었다.
언제 그들에게 발각되어 쥐도 새도 모르게 죽거나 연방 재판장에 서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다만, 어릴 적부터 함께했던 시종인 레반만은 옆에 남아있다. 믿고 의지할 곳이 전부 사라지진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희망찬 생각도 잠시.
- 루돌프 새끼. 넌 뒤졌다.
으지직-
"······!??"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중얼중얼 늘어놓던 레반이 돌연 머릿속의 컨트롤 칩을 강제로 뽑아내는 것이 아닌가!
단숨에 뽑혀 나온 컨트롤 칩은 바닥을 뒹굴고 있고, 관자놀이에선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데도 미동조차 없이 눈을 감고 앉아있는 레반의 모습.
"······."
기괴한 광경에 압도되어 말을 잃었지만, 레반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놀라지도 말고 건드리지도 말라고 했다.
그래 믿자. 레반을 믿고 기다리자.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건, 가만히 앉아 이 이해 못할 사태가 끝나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한 시간.
두 시간.
그리고 다섯 시간쯤이 지났을까.
레반은 마침내 감고있던 눈을 떴고.
"레나, 시원한 콜라 좀 사다줄래."
"······??"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자신에게 명령을 내렸다.
"목이 마르다. 가서 콜라 없으면 다른 거라도 사와 얼른."
레나는 다시금 할 말을 잃어버렸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지? 지금 이게 정상적인 건가?
아니야. 이건 꿈이 틀림없다. 요즘 잠을 통 못 이뤄서 불면증이 심해진 덕에 이런 악몽이 찾아온 거다.
벌떡!
돌연 호기롭게 일어난 레나가 자신의 양 뺨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찰싹! 찰싹!
아니나 다를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양 뺨이 얼얼하고 쓰라리며 통통하게 부어올라 열감만이 느껴질 뿐.
아프진 않았다. 정말로 그랬다.
"그러면 그렇지···."
정말 다행이다. 그냥 평범한 악몽이라서.
휘유-
레나는 그제야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멀뚱히 앉아있는 레반을 바라보았다. 그에 화답하듯, 레반도 평소와 같은 미소를 하곤 입을 열었다.
"콜라 없으면 시원한 물이라도. 빨리."
*
자그마치 20년인가.
'상단전을 여는 소득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길었군.'
차가운 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슥슥-
약간의 여운을 즐긴 후, 더러워진 전뇌 컨트롤 칩을 옷으로 닦곤 주머니에 챙겨넣었다. 나중에 써야 할 곳도 있으니 잘 챙겨 둬야지.
쩌적.
시간이 지나 얼굴에 잔뜩 눌어붙은 피를 대충 떼어낸다. 와중에 묘한 표정으로 날 경계하는 레나가 신경 쓰여 몇 마디를 던졌다.
"레나, 바뀐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
"······바뀐게 없다고?"
곧이 곧대로 믿기는 힘들겠지.
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든 없는 일이든 이미 벌어진 일이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건 레나의 몫. 나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말했다.
"알아서 받아들이고 적응해라."
"······최대한 노력은 해 볼게. 그런데 정말 어떻게 된 거야?"
"너를 업고 나오다가 계단에서 구르는 바람에 머리를 크게 다쳤다."
"거짓말에 성의가 하나도 없네."
자포자기한 레나가 침대에 털썩 눕는다.
이해는 한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해도 못 믿을걸.
"아까 집행관 일도 그렇고, 혹시 당가에서 고용한 첩자? 아니면 넷 러너한테 당해서······."
"그만."
"···응."
하기야, 레나 입장에선 저게 그나마 납득 가능한 스토리다.
컨트롤 칩이 장악되어 제멋대로 폭주하는 시종. 뭔가 있을 법한 일이지 않은가.
"아무튼 눈 좀 붙이고 있어라. 난 잠깐 다녀올 곳이 있다."
"가, 갑자기 어디를?"
다급하게 일어나 내 손을 덥썩 붙잡는 레나.
조막만 한 손으로 얼마나 강하게 붙잡았는지, 손이 저려왔다.
레나는 해명하듯 횡설수설 말했다.
"혼자 남은 내가 도망이라도 치면 어쩌려고?"
"네가 뭐 하러?"
"그야···어···이런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운 상황에는 왜인지 도망쳐야 할 것만 같아서?"
"그래서 어디로 도망칠 건데. 애초에 돈은 있나?"
"크레딧이야 당연히 계좌에······."
거기까지 말한 레나가 아차한 표정을 짓더니, 잡고 있던 손을 마지못해 놓아주었다. 이미 반 바이오의 오너 일가가 사용하던 크레딧 계좌는 압류되고도 남았을 시간.
그녀는 이제 완벽한 빈털털이다.
"···그럼 너무 늦지는 말아줘."
"머리좀 식히고 있어라. 금방 돌아오마."
밖으로 나와 여관 주인장을 찾았다.
우당탕!
내가 카운터 안으로 얼굴을 쑥 내밀자마자, 다급히 선반에서 권총을 꺼내 닦는 시늉을 하는 주인장.
왜인지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이, 이미 돈 냈으면 방은 못바꿔 줘. 솔직히 우리 여관 컨디션 정도면 괜찮은 편이지. 아암! 다른 데는 뭐 다른 줄 아쇼? 사람이 바가지도 써보고 해야 성장하는 거야."
"난 뭣 좀 물어보려고 온 건데."
"뭐요?"
주인장은 뻘쭘하게 권총을 내려놓았다.
"진작 말하지. 뭐가 궁금한데? 물어보쇼."
"그 총, 어디 가면 구할 수 있지?"
* * *
개미굴처럼 골목 사이로 엮여있는 슬럼가.
독한 담배 냄새와 기름 냄새, 먼지 냄새가 한데 섞여 코를 간지럽힌다.
여관 주인장이 말해준 대로 좁은 골목길을 따라 정크타운의 가장 깊숙한 구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과거 이 슬럼가가 시작된 곳.
정크타운 1번가.
다른 허접한 상가들에 비해 유난히 크고 넓어 보이는 3층짜리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총과 탄환 모양의 네온사인 간판이 빛을 내고 있다.
" 거너 하우스 "
딸랑-
입구로 들어가니, 가슴을 다 드러낸 시원한 옷차림의 여인이 카운터에 앉아있었다.
여인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날 훑어봤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턱을 괸 한쪽 팔 전체가 사이버웨어.
차가운 강철파츠가 무심하게 빛난다.
평범한 카운터 점원의 인상은 아니라 생각하며 매장 내부를 둘러봤다.
"총을 좀 사려고 하는데."
"꽤 어려 보이는데 말끝이 짧네."
"내가 부모 없이 자라서. 미안합니다."
"풋! 그냥 장난 한번 친 거야."
"장난이었나? 수틀리면 쏠 것 같던데."
"어머, 쏘긴 뭘 쏴? 큰일 날 소리 한다. 우린 고객한테 그런짓 안 해."
"그럼 저 총구들은 신뢰의 일종인가?"
턱짓으로 카운터 뒤쪽 벽을 가리켰다.
먹빛처럼 어두운 벽지와 진열된 물품들 사이사이, 소름 끼치도록 새까만 총구가 내 머리를 겨냥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총구만 하나. 둘. 세 개.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여인이 입을 빼쭉 내밀며 장난스레 웃었다.
"눈썰미 좋네. 티 많이 나?"
"많이는 아니고 조금."
"그래도 치워줄 순 없어. 손님이 갑자기 날 껴안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
"괜찮으니까 걱정말고 마음껏 둘러봐~허튼짓만 하지 말고."
특이한 여인이군.
더 이상의 잡담없이 매장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1층에서 판매하는 품목은 대부분 단검류나 둔기, 중고 재래식 총화기들인가? 건물이 꽤 크다 했더니 화기 사격장까지 매장 안쪽에 구비해 놓았다.
2, 3층은 더 값비싼 놈들일텐데.
밑바닥 슬럼가 중심에 이만한 규모의 총기상이라···.
"유탄 종류도 판매하나?"
"품절이야. 전부 다 나가고 없어."
"원래는 그것도 판매한다는 소리군. 대구경 라이플이나 산탄총은?"
"없어. 그런 화기들은 시체 사냥꾼들이 웃돈주고 전부 쓸어가거든. 자기도 혹시 그쪽에서 온 사람이야?"
"아니다."
"흐음, 그래?"
"지금 2층도 구경할 수 있나?"
"2층은 보증금 1만 크레딧부터 시작이야. 크레딧부터 확인시켜주면 올려보내줄게."
내 수중에 남은 돈은 4,000 크레딧.
어쩔 수 없이 1층에서 골라야겠군.
어차피 평생 쓸 무기는 아닐 테니까.
"당신 정말 돈은 있는거 맞지~?"
철컥- 철컥-
실실 웃으며 묻는 여인을 무시한 채 총기 몇 개를 집어보다 7.62mm탄을 사용하는 자동소총 한 정과 30발입 탄창 세 개. 두 뼘 길이의 단검 하나를 골랐다.
내가 2회차에서 즐겨 사용했던 무장과 비슷한 구성이다.
"그렇게 대충 골라도 되겠어? 전부 중고품이라서 잘 골라야 할 텐데."
"평생 같이 살 애인 보는 것도 아니고."
"시원하네? 합쳐서 9,000 크레딧이야."
"지금 4천 크레딧밖에 없는데."
내 말에 여인이 눈살을 팍 찌푸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장난스럽게 꾸며낸 표정이었다.
"손님, 그러면 내려놓으셔야죠?"
"나머지는 외상으로 달아두고 저녁까지 갚지. 내가 어디서 받을 돈이 좀 있거든."
"농담이야?"
"진담이다."
"정말?"
"그래."
"좋아 뭐, 그럼 그렇게 하든지."
이건 의외로군.
해줄 리 없다고 생각하며 던져본 말인데.
방금까지만 해도 눈살을 찌푸렸던 여인은, 자기가 언제 그랬냐는듯 흔쾌히 외상을 허락했다. 나처럼 정신이 온전치 못한 여인인가? 이유야 어찌 되었건 잘 됐군.
"대신 약속한 대로 못 갚으면 자기, 죽어도 할 말 없는 거 알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그 정도 거래라면 받아들여야지.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는 주인장이군."
"그런 얘기 자주 들어. 그쪽 얼굴이 너무 당당해서 한 번 믿어보려고."
"당당하기만 하면 총을 내주는 곳이었나?"
"이 정크타운에 당신같은 사람은 몇 없거든. 수천 크레딧씩 들고 오는 고객도 몇 없지. 죄다 빚투성이에 술, 마약에 쩌든 인생들이니까."
"여관 주인장은 권총을 가지고 있던데."
"여관? 숙박비가 보통 15크레딧이야. 그거 한푼 두푼 모아선 어림없지. 모형 권총이나 딸랑 사뒀으려나?"
"······."
"얼굴 보니까 바가지 썼구나? 처음 오면 바가지 써주면서 알아가는 거지 뭐."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
마지막에 한 말 빼고는 전부.
여튼, 너무 쉽게 내주는 것 같길래 개나 소나 들고 총을 다니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라 이거지.
"한번 쏴 보고 싶은데. 가능한가?"
"얼마든지. 이 동네 총이란 총은 우리 쪽에서 다 팔아 치운건데, 쓰레기를 팔았단 소리는 나도 듣기 싫어."
여인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탄환 2개가 꽂혀있는 탄창을 던졌다.
그대로 받아 끼우고 사격장의 표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타앙-! 타앙-!
명중.
오랜만에 맡아보는 화약냄새와 강한 반동.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근데 어디다 쓰려고? 외상값 못갚고 죽으면 곤란한데~?"
툭.
카운터에서 내어준 얄상한 총가방에 자동소총과 탄창을 쑤셔 넣으며 대답했다.
"호신용."
"그 이유라면 권총을 샀겠지. 솔직히 말해봐. 어디랑 시비가 붙은 거야? 여기 갱들 잘못 건드렸다간 평범하게 죽는 걸로 안 끝나."
말하는 어투로 봤을 때 뭔가 짚이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한번 확인이나 해볼까하는 마음에 여인을 향해 물었다.
"혹시 루돌프처럼 생긴 놈 아나?"
"루돌프?"
"콧잔등에 빨간 장미 문신이 있는 말라깽이."
"당연히 알지. 얼굴 상처, 걔들 작품이구나?"
"걔들?"
"정크타운에 유명한 사람은 몇 없어. 유명해지기 전에 다들 죽거든. 이름을 날리는 건 대부분 집단이지."
"놈들 정보좀 알 수 있나? 1천 크레딧. 필요하면 더 가져다주지."
"아냐. 나도 마침 걔들 싫어하거든."
도르륵-
재미있겠단 표정을 한 여인이 별안간 커다란 지도를 꺼내어 카운터 유리장에 펼쳐놓았다. 삐뚤빼뚤한 점과 선이 그득한 아날로그식 지도.
추측하기로 이 정크타운의 구조인 듯 싶었다.
"타운에는 크게 5개의 무력집단이 있어. 삼호문(三虎門), 하레니오 갱단, 거너 하우스, 륭 사무소, 라네치아 패밀리. 그 중에 네가 말한 빨간 장미는 하레니오의 일원임을 상징하는 문신. 놈들 아지트는 17번가에 있는 클럽이랑 술집."
사이버웨어 손가락이 이곳 저곳을 찍는다.
"인원은?"
"단원 스물에 구식 사이버웨어를 덕지덕지 바른 두목이 하나. 그리고 마법사 한 명인데 4레벨급이라는 소문이 있더라?"
"4레벨급 마법사?"
"그래, 당황스럽지? 이런 동네에 4레벨 마법사라니.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객기 부리지 말고 타운을 떠나는게—"
"혹시 중고 화기도 매입해주나?"
내가 말을 중간에 끊고 묻자, 여인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뭐, 그렇긴 한데. 그건 왜 물어?"
*
딸랑-
레반이 구매한 무기를 챙겨 나간 후.
거너 하우스의 총책임자, 친씨아 블랑키.
한가하고 지루하다는 이유로 직원 대신 카운터를 보고 있던 그녀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냥 평범한 또라이겠지? 아주 지 할 말만 하고 바람처럼 사라지셨네. 누가 보면 엄청난 고수인 줄 알겠어."
그러자.
누군가 매장 벽을 밀고 나와 묻는다.
"쫓아가서 죽이고 회수해 올까요?"
"아니, 내버려 두고 미행만 붙여."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따가 몇 명 추려서 하레니오 애들 있는 곳으로 가봐. 17번가에 있는 휴머노이드 바."
"하레니오 갱단 근거지 말입니까?"
"응."
카운터에 붙어있는 작은 메모지.
그 남자가 휘날려 쓴 글이 남아있다.
왜 별 쓸데도 없는 내용을 외상까지 걸어가며 꼬치꼬치 캐묻나 했더니···
『 두 시간 뒤, 하레니오의 아지트로 짐 옮길 직원들 보내줄 것. 상태좋은 중고 총기 다수 판매 예정. 』
"얼마나 미친놈인지 확인은 해보려고."
#8화. 새로운 시종
#8화.
좀비 아포칼립스의 1원칙.
- 살아남을 것.
좀비 아포칼립스의 2원칙.
- 1원칙을 지킬 것.
두 가지 생존 원칙을 지키는 법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내 직감을 먼저 따르고.
항상 방아쇠를 가볍게 유지하는 것.
끝장나버린 세상에서 같은 인간은 이름이 붙여진 좀비만큼이나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내게 위협이 된다고 판단이 들면, 여자, 노인, 아이 상관없이 망설이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90% 확률로 터지는 시한폭탄 앞에서 터지지 않을 10%의 확률까지 신경 써줄 여유는 없었다.
그게 당연한 세상이었다.
그랬던 내가 바뀌게 된 계기는 3회차 중원 무림의 어릴 적, 사파의 절대고수이자 미치광이로 악명을 떨쳤던 내 스승을 화음현의 객잔에서 우연히 만나고부터였다.
스승이라는 인간은 객잔 구석탱이에서 조용히 소흥주를 퍼먹고 있었다.
그런데 반대편 자리에서 만두를 깨작대던 나와 몇 번 눈이 마주치나 싶더니, 대번에 내 상태를 알아보고는 '그 썩어빠진 눈빛을 고쳐주겠다' 라며 다가와 머리채를 잡는것이 아닌가.
말 그대로 미치광이였다.
스승은 그날로 저항하는 나를 여기저기 끌고 다니며 매일같이 두들겨 팼는데, 난 늘 머릿속에 각인된 1, 2원칙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몰래 숨겨둔 비수로 기습도 해보고 음식에 하독도 해봤다. 살문에 청부를 넣기도 했으며, 야밤에 변소 밑에 숨어있다가 칼을 들고 기습도 해봤다.
그러나 우습게도 한 번을 성공하지 못했다.
나는 그만 질려버렸다.
[ 아, 내가 졌다. 그때 만두를 먹으러 가는 게 아니었어. ]
[ 독기가 골수까지 들어찬 놈이 끈기는 왜 또 이 모양인고? 그러지 말고 더 해봐라. 네 1원칙이 어쩌고저쩌고 지껄이지 않았더냐. ]
[ 어차피 안 통하는데 뭐 하러 더 해? ]
[ 쯔쯔, 넌 아직도 덜 처맞았느니라. 운남성 똥개만도 못한 놈. ]
[ 차라리 죽여라. ]
[ 이놈아. 널 죽이면 지금까지 두들겼던 시간이 허송세월이 되지않느냐? 무공도 알려줘 가며 패는데 감사한 줄도 모르고. ]
내 스승은 진짜배기 광인이었으며 사람을 미치도록 잘 때렸다.
죽진 않고, 딱 죽도록 아플 만큼만.
그렇게 제자라는 명목으로 개처럼 끌려다니며 두들겨 맞기를 2년.
고작 2년 만에 전생부터 내내 뒤틀려있던 인격이 그나마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 그만 때리라고 이 새끼야! ]
[ 주둥이 꾹 닫고 죽을 때까지 묵묵히 맞다 갈 줄 알았더니, 이제는 그만 때리라는 말도 할 줄 아는구나. 일취월장이다. ]
[ 더 때리면 관에 신고할 겁니다. ]
[ 어디 해봐라. 내가 직접 데려다주랴? ]
[ 알겠으니까 그만 좀 때리세요. ]
[ 이제야 덜 금수 같구나. 허나 넌 아직 더 맞아야 한다. 왜냐하면 말본새가 특히 싸가지 없기 때문이다. ]
매질의 효과는 확실했다.
정신이 홰까닥 가버린 놈도 꾸준히 시간을 들여 고문하고 죽기 직전까지 두들기다 보면 언젠간 바뀌게 되어있다.
꾸준한 매질과 폭력은 좀비 아포칼립스에서 25년을 산 미친놈마저 변화시킨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그런데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잘 고정되어 있던 뼈가 툭- 하고 빠지며 탈골되듯. 스승에게 당한 모진 매질에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2회차의 인격이 불쑥 튀어나오는 날이.
그럴 때마다 깊이 감탄한다.
정말 스승의 말이 맞았구나.
난 아직도 덜 두들겨 맞은 거다.
두들겨 맞고 인간성을 되찾았던 게 아니라, 단지 스승의 매질이 두려웠던 2회차의 인격이 내 무의식 깊은 곳 어딘가로 처박혀버렸던 것이 아니었을까.
20년이면 아주 오래도 처박혀 있었지.
일리가 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꾸욱. 꾹.
그리곤 손끝으로 얼굴을 만져본다.
아직도 화하게 욱신거리는 상처.
참 웃긴 놈이다.
"내 스승도 얼굴에 칼은 안댔는데."
나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철걱. 철걱. 철걱.
총가방이 경쾌하게 덜그럭댄다.
* * *
웨스트 정크타운 17번가.
펍과 클럽, 사창가가 극도로 밀집해있는 구역.
간판이든 건물이든 상관없이 붉은색 계열의 형광 네온사인을 잔뜩 떡칠해 놓았는데, 슬럼가나 빈민가의 야경은 왜 하나같이 저런 걸까.
보기만 해도 눈이 상당히 어지럽다.
"오빠! 오늘 나 어때?"
또, 헐벗은 채 행인을 유혹하는 섹스토이들도 귀찮다.
어딘가 사람같지 않은, 이질감이 느껴지는 안드로이드들. 저가형이거나 오래된 중고 모델이겠지.
"지나갈게요."
"오빠! 정말 싸게 해줄게!"
"저 여자예요."
"여자도 문제없이 커버 가능한데?"
"네, 그럼 한 바퀴 둘러보고 올게요."
"그럼, 옷이라도 여기 두고 갔다 와!"
"좀 지나갑시다."
친한 척 붙임성 좋게 들러붙는 능숙한 섹스토이들을 지나쳐 걸었다. 깊게 들어가면 갈수록 호객이 적어졌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나는 17번가의 끝자락에서 호객도 못 하고 우물쭈물대는 섹스토이를 발견하고 다가갔다.
한 번 할 수 있겠냐 물어보니, 대번에 얼굴이 환해졌다.
"다, 당연하죠! 저만 따라오세요!"
그 손에 이끌려 들어간 곳은 프리랜서 섹스토이들이 손님을 받는 공유 사창가였다.
작은 침대와 보송한 이불이 아기자기하게 준비되어 있는 방.
눈을 환하게 빛내는 섹스토이에게 물었다.
"얼마지?"
"80···아니, 90 크레딧이요!"
"아까 보니까 초입에서는 50 크레딧에 해준다던데? 거기로 가야겠군."
"···그, 그럼, 저도 그 가격에 해드릴게요! 대신 몸을 망가뜨리시거나나 하는 플레이는······."
녀석은 어리숙한 초짜 섹스토이였다. 능숙한 사창가 초입의 섹스토이들에 밀려 구석에 박힌 초짜.
"그래, 여기가 그 곰팡이 가득핀 여관방보다야 낫겠지."
"네?"
나는 초짜 섹스토이에게 100크레딧을 송금해주며 물었다.
"여기 두 시간쯤 혼자 있을 수 있겠나?"
날 뭐라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섹스토이는 오랜만에 얻은 불로소득에 기쁨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로 방을 빠져나갔다.
"걱정 붙들어 매세요! 즐거운 시간 보내시구요!"
섹스토이와 이름 모를 변태 남정네들이 몸을 섞었을 침대에 가부좌를 틀고앉았다. 방해받지 않고 운공을 하기 위해서였다.
여기까지 도망쳐오느라 죄다 써버린 내공이 조금씩 차오른다.
10년간 호흡으로만 축기를 하다 제대로 심법을 사용해 운공을 하니, 그 망할 컨트롤 칩의 통제에서 벗어난 것이 새삼 실감 났다.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전투 전 간단한 재충전을 마친 나는, 한 층 맑아진 몸과 정신으로 공유 사창가를 나왔다.
총포상의 그 여자가 알려준 놈들의 본거지는 17번가 유흥중심지에서 한 블록 떨어져 있는 2층짜리 술집.
어렵지 않게 그곳을 찾을 수 있었다.
군용 조끼에 다 보이게 권총을 찔러둔 놈 하나가 17번가 골목에서 유독 한산한 술집을 지키고 서 있다.
팔뚝에 자랑스레 새겨놓은 장미문신.
그 루돌프 놈과 똑같은 문신이다.
놈에게 다가가 반갑게 묻는다.
"여기 아직 영업합니까?"
"영업? 뭐야 이 멍청한 애새끼는. 네 눈에는 여기가 평범한 술집 같아 보여?"
"입장료도 미리 냈는데. 5천 크레딧."
"뭐라 지껄이는 거야? 이 새끼가 대가리에 구멍나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
문지기가 조소하며 슬쩍 권총집으로 손을 가져갔다. 놈은 살인에 익숙해 보였다.
"온 김에 이거나 한 방 맞고 가라. 이 등신 애새···."
푹!
순식간에 튀어 올라 놈의 쇄골 아래에 단검을 박아 넣자.
"억!?"
찢어질 듯 눈을 부릅뜨는 문지기.
그대로 벽에 밀어붙인다.
"대답 잘해. 개소리하면 뽑는다."
"뽀, 뽑지 마!"
"시끄러워도 뽑는다."
놈이 목소리를 낮추며 신음했다.
"······제발 진정하라고 친구. 원하는 게 있으면 이러지 말고 대화로 좋게좋게 풀면 되잖아. 내가 살짝 거칠었지?"
내게도 친구가 생겼다.
역시 폭력은 효율적인 수단이다.
"타운 밖에서 온 외지인이 입장료를 안 냈을 때는 어떻게 되지?"
"그건 왜······."
우직!
맛보기로 검날을 조금 비틀었다.
곧바로 빠릿빠릿한 대답이 나온다.
"크흐···씨이발! 이, 입장료를 낼 때까지 굴려 먹어야지."
"어떻게?"
"계집이면 우리가 관리하는 영업장에 보낸다."
"남자는?"
"고, 공장! 공장에 보낸다고 들었어."
"무슨 공장인데?"
놈의 동공이 지진 난 듯 흔들린다.
"그건 나도 정확히는 몰라."
"모르면 됐고, 코에 빨간 장미 문신하고 못생긴 말라깽이. 누군지 알지."
"밴스? 알지. 알아. 끄윽···."
"지금 어디 있지?"
"이 안에···! 마침 안에 있어. 이봐! 뭔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난 밴스 그 멍청한 새끼랑 아무런 관련이 없어. 가서 죽여도 상관없다고···."
확실히 잘 찾아왔군.
"그거 좋아 보이네. 좀 빌리자."
쥐고 있던 단검에서 손을 떼곤 놈이 가지고 있던 권총과 조끼를 빼앗아 걸쳐 입었다.
"사, 살려줘. 난 이 일 시작한지 얼마 안 됐어. 진짜야···."
쇄골 밑에 칼이 박힌 채 구슬피 끅끅대는 놈.
총가방에서 소총을 꺼내 탄창을 끼우고 예비 탄창은 조끼 허리춤에 비스듬히 꽂아둔 후 숨을 몰아쉬는 놈에게 다가간다.
"가진 돈 좀 있냐?"
"어, 없어. 진짜 없어."
"그렇겠지. 그나저나 누가 저 술집 안에 있지? 그 마법사나 너희 두목도 안에 있나?"
"마법사? 그, 그 인간은 지금 다른 곳에 있어! 내가 다 알려주지. 거기가 어디냐면···."
"이놈 이거 연기 되게 잘하네."
"뭐?"
"이미 안에 있는 놈들한테 호출 때렸잖아. 안이 너무 조용한데?"
"뭔···아니야! 이 씹! 진짜 아니라고! 아무것도 안했어! 목에 칼이 박혀있는데···!"
"그렇군. 진심이 느껴져. 그런데."
놈의 목에 손잡이처럼 박혀있는 단검 손잡이를 틀어쥐곤.
콰득.
가볍게 힘을 주어 뽑아낸다.
"시끄럽게 굴면 뽑는다고 했잖아."
"이 미친···!"
붉은 피가 솟구치자, 놈이 기겁하며 손으로 상처를 틀어막는다.
기억관리 프로그램 지니는 주인에 대한 세뇌만 제외하면 매우 정확한 정보를 제공했다.
갱이나 마피아, 빈민가의 정보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런 놈들중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놈은 없다.
99% 확률로 밑바닥 인간쓰레기.
나머지 1%라면···참 안된 일이다.
"끅······!"
"내 친구, 입 열지 말고 잘 들어. 상처에 손가락을 쑤셔 넣어서 혈관을 막으면 버틸 수 있다. 그래. 너라면 분명 할 수 있어."
헉헉대며 쓰러지는 문지기에게 진심이 가득 담긴 응원과 방금 지어낸 생존솔루션을 제공한 뒤, 총구를 앞세워 입구로 들어간다.
술집 1층.
어두운 조명 아래서 발랄하게 뿅뿅거리는 아케이드 게임기 모니터들과 시끄러운 음악, 싸구려 술을 섞어파는 휴머노이드 바텐더 하나가 날 맞이해준다.
아직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 어떤 술이 필요하십니까? 오늘같이 칙칙한 날씨에는 쌉쌀한 블루 마티니를 추천해 드립니다.
바텐더를 무시하고 계단을 오른다.
그때였다.
계단 위, 2층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려온다.
- 5천 크레딧을 진짜로 입금하던데? 대체 뭔 놈인가 싶었다니까.
- 주변에서 전당포라도 털었나?
- 몰라. 아무튼 얼굴이 반반하길래 진짜 남자로 만들어 줬더니, 지랄을 떨더라고. 교대 시간만 아니었어도 진작 쏴 죽여버렸을걸.
- 앙칼진 놈이네. 얼굴 한번 보러 갈까?
- 킥, 미친놈.
고개를 슬쩍 내밀어 확인한다.
널찍한 호텔 로비같이 생긴 술집의 2층.
놈들은 소파에 아무렇게나 몸을 기댄 채 담배를 태우며 떠들고 있다. 총 여덟 명. 총기는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두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루돌프 놈도 있군.
음···.
서로 간의 대화는 필요 없겠지.
이 쇳덩이와 납덩이들이 내 의지를 실컷 표출해 줄 테니까.
나는 단숨에 계단을 뛰어올랐다.
딸칵-
소총의 조정간을 연사로 돌린다.
총의 방아쇠는 항상 가볍게.
드르르르륵-
무방비한 할머니 갱단 놈들의 머리 위로 불을 뿜는 총구.
방금까지만 해도 히죽히죽 웃고 떠들던 셋과 하물을 꼿꼿이 세운 채 불룩한 바지를 자랑하던 변태 놈은 절명하고 살아남은 절반은 소파와 테이블 뒤로 몸을 던진다.
이제 넷 남았다.
"무, 무슨···!"
"저 개새끼 뭐야!"
"총! 야 내 총 어디있어!"
틱! 틱!
난사로 인해 동난 탄창.
진각(震脚). 내공을 잔뜩 실어 바닥을 때려 밟자 눈앞의 테이블이 앞으로 쓰러진다.
놈들이 허둥지둥하는 사이, 두꺼운 철제 테이블을 방패 삼아 탄창을 갈아 끼운다.
철컥.
"귀가 안 들려 씨팔!"
"입 닥치고 갈겨 그냥!"
텅텅텅···!
놈들이 다급하게 쏟아붓는 총탄이 애먼 테이블 위를 퍽퍽 때려댄다.
섬뜩한 총성이 잠시 느려졌을 즈음.
방패 삼던 테이블을 발로 밀어찬다.
끄그그극-
귀 따가운 소리와 함께 바닥을 긁으며 놈들 쪽으로 미끄러지는 테이블.
그 뒤에 바짝 따라붙어 달리자.
옆에서 갑자기 한 놈이 달려든다.
총을 어깨에 견착한 뒤 다른 손으론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달려들던 놈의 손바닥을 찌른다.
푹!
"끄아악!"
우직하게 밀어 넣는다.
으드득.
손바닥을 꼬치처럼 관통해 밀고 들어간 단검이 놈의 가슴팍 깊숙이 박혀 들어간다.
이 묵직한 손맛.
한번 맛보면 쉽게 못 끊는다.
정신 나간 사파와 마교의 무인들이 대개 그렇다.
"계속 안 쏘고 뭐해 새끼야!"
"아 씨팔. 탄이 끼었···."
테이블 위로 총구를 올린다.
드르르륵-
욕설이 들린 방향에 대고 남은 탄창 분을 전부 긁어버리자, 바닥으로 붉은 피가 넓게 퍼져 나온다.
이제 남은 건 루돌프를 포함해 둘인가.
찰나간, 귀를 먹먹하게 울리던 총성의 메아리가 잠시 멎는다.
무섭도록 고요해진 2층.
철컥.
나는 테이블 뒤에서 마지막 탄창을 결합하며 입을 열었다.
"설득을 해봐."
고요한 2층 로비 어딘가.
누군가의 덜덜 떠는 숨소리가 내 귓전을 간지럽힌다.
"사랑하는 아이가 있다든지, 자선 단체에 매월 얼마씩 기부한다든지 뭐 그런 거."
"······."
대답이 없다.
"없구나. 알았다."
끄그그극-
다시 테이블을 강하게 찬다.
그러나 이번엔 그 뒤로 붙지 않았다.
제자리에서 옆으로 구르자, 상기된 얼굴로 애먼 테이블에 총탄을 낭비하고 있는 마지막 엑스트라가 보인다.
탕-!
이제 남은 건 루돌프 하나.
그런데 바로 그때.
어정쩡한 폼으로 날 바라보는 구석의 루돌프와 눈이 마주친다. 놈이 다급하게 장전손잡이를 덜걱거린다.
탈칵. 탈칵. 탈칵.
나는 빙그레 웃어보였다.
"저런."
"미, 미친 새끼가."
루돌프놈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겁에 질려 커다랗게 치켜뜬 눈동자가 사슴의 눈망울을 떠올리게 한다. 어딘가 마음이 아려와 잠시 녀석을 동정했다.
"언제는 사람도 막 죽여봤다며. 사실 총 처음 써보는구나."
불쌍한 녀석 같으니.
시체 밭에서 이도 저도 못 하고 주저앉아 있던 루돌프놈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너, 너 진짜 이래도 괜찮겠냐? 자신 있는거야? 이미 우리 단장이 이쪽으로···."
"루돌프야."
놈의 말을 무심하게 끊고 물었다.
"네 관자놀이에 붙어있는 1세대 링크포트, 거기 좋은 칩 하나 박을 생각 있나?"
"······뭐?"
나는 주머니를 뒤적이다 손끝에 걸린 작은 물건을 꺼내 보였다. 약간 쿰쿰한 피비린내가 나는···
강제 노예행 전뇌 컨트롤 칩.
이미 링크포트를 뚫어둔 녀석이니 호환도 충분히 가능할 테지.
아무래도 다른 놈 머리에 박는 만큼, 성능은 내가 쓸 때보다 떨어지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레나가 새 시종을 마음에 들어해야 할 텐데."
#9화. 밑바닥의 생리
#9화.
찰칵-
컨트롤 칩이 포트에 맞아 들어간다.
이제 컨트롤 칩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 시종의 행동강령이 놈의 뇌신경을 타고 동기화된다. USB 메모리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를 컴퓨터에 옮기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거부반응이 심하면 백치가 되거나 죽겠지만···
실패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어차피 당장 죽어도 아무런 상관없는 놈이니까.
"끅, 끄아아-!"
나는 고통스럽게 소리를 질러대는 놈에게 소감을 물었다.
"느낌이 어때? 혹시 어지럽진 않니."
"어떻긴 이 씨팔! 내 포트에 뭘 꽂은거야 이 또라이 새끼야!"
"괜찮아 보이는군."
"너, 너 삼호문이랑 관련 있는 놈이냐? 아니면 청부 해결사? 뭐 하는 놈인지는 몰라도 두목이 도착하면 넌—"
"시끄럽게 굴지 말고 주둥이 닫아."
콰직.
팔꿈치로 놈의 머리를 내리찍는다.
수박통 깨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찰흙처럼 찌그러지는 루돌프놈의 얼굴.
꺽꺽대는 놈을 발로 차 밀어두고, 죽은 시체의 가슴팍에 박혀있던 단검을 뽑았다. 붉은 피가 꿀럭이며 흘러나온다.
"루돌프야. 너 하나 때문에 애먼 사내가 일곱이나 죽었다."
"미친, 네가 죽였잖아!"
이 놈은 눈치라는게 아직 없구나.
아니면 아직 자기 처지를 잘 모르는 건가.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다. 내가 금방 고쳐줄 수 있으니까.
스릉-
피묻은 단검을 놈의 앞에 가져다 댄다.
"······?"
"자, 이제부터 눈치가 생긴 것 같으면 말해."
서걱-
부지불식간 단검을 휘둘렀다.
놈의 얼굴에 깊게 새겨진 십자 혈선.
갈라진 상처를 타고 피가 줄줄 흐르기 시작하자,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챈 루돌프놈이 술집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댄다.
"어억···? 잠깐! 잠깐만!"
놈의 고함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역수로 쥔 단검을 내리찍는다. 눈알은 두 개니까, 하나쯤 없어도 괜찮다.
"생겼어요. 눈치 생겼다고요-!"
뚝.
단숨에 비굴해진 놈의 동공 바로 앞에서 칼질을 멈추었다.
"벌써 눈치가 생겼나?"
"그럼요! 제가 전부 다 잘못했어요."
"역시 네 생각도 그렇지?"
"예! 다 저 때문이죠 형님. 하하하. 나도 참."
고작 칼질 몇 번 했다고 저렇게 붙임성이 좋아지다니. 의외로 성격이 밝은 놈일지도 모르겠다.
"그럼 아까 말하던 거 계속해봐. 누가 온다고?"
"아! 예! 지, 지금 무스코 단장이랑 그 뱀눈깔 마법사가 이리로 올 겁니다. 단장은 멀쩡한 팔다리를 죄다 자르고 사이버웨어 파츠로 대체한 인간인데요. 얼마 전에는 크레딧이 어디서 났는지, 피부까지 리얼 스킨으로 대체할 거라더라고요. 아주 미친놈이에요. 형님이라도 분명 위험하실 겁니다. 또···또, 아! 방금 제가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미리 고백할게요. 죄송합니다. 지금이라도 같이 도망치죠. 참고로 제가 이 동네 길은 빠끔하고요, 생각보다 쓸모가 많아요. 절 죽이시면 진짜 존나게 후회하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루돌프 놈의 장황한 설명을 뒤늦게나마 끊어낸다.
"그냥 닥쳐라."
"예!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저 배신 뭐 그런 거 기가맥히게 잘합니다!"
"자꾸 쓸데없는 말을 왜 이렇게 길게 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넌 지금, 이 상황이 즐거워?"
뻐억-!
놈의 복부에 주먹을 내지른다.
고작 이것도 못 버티고 기절하거나 죽어버리면 어쩔 수 없는 노릇.
다시 말하지만, 죽어도 별 상관 없다.
컨트롤 칩만 회수해서 다른놈 머리에 꽂아보지 뭐. 동네에 널려있는 게 이런 놈들인데 유독 칩빨 잘 받는 놈이 하나쯤 없겠는가.
뻐억! 뻐억!
이러다간 진짜로 죽겠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무자비하게 쥐어팬다. 부위는 가리지 않는다.
"···아니, 왜! 악 씨펄···."
"욕은 하지 말고."
"···억! 억!"
온 힘을 다해 몇 분 정도 두들겼을까.
의외로 잘 버티나 싶던 것도 잠시. 원래도 형편없던 얼굴이 더 형편없어진 루돌프가 내 다리를 부여잡고는 엉엉 울부짖는다.
"죄송합니다···살려주십쇼···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이 새끼들 진짜 악질입니다. 사람도 우습게 죽이고요. 시체를 토막내서 갖다 팔고 그러더라니까요. 저는 사실 본성이 착해서 그런 거 못하거든요. 어휴, 잘 죽었다 저 망할놈들."
붉은 핏물로 덮여 더욱 빨갛게 물든 콧잔등의 장미 문신.
그리고 머리를 많이 맞았는지 아직도 알아듣기 힘든 말을 지껄이는 걸 보면, 그새 머리가 더 나빠지기라도 한 건가.
그래도 전혀 불쌍하지 않았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짓을 했는데 죽이진 않았으니, 이미 충분한 자비를 베푼 것이다.
내가 이리도 자비로운 사내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네? 아 그럼요. 물론입죠."
나는 행사하던 폭력을 멈추고 느긋하게 주변의 시체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놈들이 사용하던 각종 총기와 선반에서 발견한 총기들, 100 크레딧 짜리 낡은 현물지폐 30장.
거기다 쓸만한 칼도 하나 얻었다.
도신이 다섯 뼘에 조금 못 미치는 직도. 짧은 단검보다야 월등히 낫겠지.
내가 한창 그러고 있던 그때.
- 후우, 후.
뒤쪽에서 루돌프가 똥 마려운 개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불규칙한 숨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놈이 뭘 기다리고 있는지 뻔히 보여 웃음이 새어 나왔다. 피로 범벅이 된 총기들을 가방에 눌러 담으며 말했다.
"네가 기다리는 놈들 안 올 거다."
"······예? 뭐가요?"
놈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발뺌한다.
나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갱이랍시고 총까지 들고 다니던 놈이 밑바닥의 생리를 모를줄이야.
"생각을 해 봐. 어떤 놈이 혼자 쳐들어와서는 눈 깜짝할 새에 저만 빼고 다 싹 죽여버렸습니다. 다들 목숨이 있었는데. 이제는 없습니다. 아무튼 어서 달려와서 죽은 동료들의 복수를 해주세요······라고 전하면 네 친구들이 의리있게 뛰쳐와줄 것 같아?"
"어······."
뒷골목 양아치들 주제에 그럴 리가.
갓 죽은 시체에 페티쉬라도 있지 않은 이상에야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거다. 뒤늦게 상황 파악이나 하러 기어 오겠지.
"제 목숨이 소중한 놈들이면 안 와."
"···그렇네요? 저라도 그랬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와서 이거나 눌러 담아라. 더 두들겨 처맞기 전에."
"알겠습니다. 형님! 헤헤."
"웃지마."
"예."
나의 오랜 흑도 경험상, 장담할 수 있다.
밑바닥 인생은 괜히 밑바닥 인생이 아니고, 삼류 양아치는 괜히 삼류인 게 아니다.
모두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법.
"가자. 받아라."
나는 두둑한 가방 두 개를 루돌프에게 던지다시피 건네주곤 1층으로 내려왔다. 아까와 똑같이 아케이드 게임기의 소음과 바텐더의 질문이 들려온다.
- 오늘 같은 날씨에는 씁쓸한 블루 마티니 어떠세요? 정말 훌륭한 선택일 겁니다.
"제일 비싼 놈으로 한병 줘."
- 네. 알겠습니다.
휴머노이드 바텐더에게 술 한 병을 통째로 받아 챙긴 후, 어정쩡히 서 있는 루돌프를 바라보며 명령했다.
"먼저 나가봐라."
"네?"
"혹시 내 말이 틀렸을 수도 있잖아. 누가 밖에서 총을 쏴 갈길 수도 있으니, 네가 먼저 나가서 확인하라고."
"······아."
세상 무엇보다 안전이 제일이다.
안전. 좋아.
"싫으냐?"
"사실은 그게요."
"쓸모가 없다면 폐기 처리 해야겠지."
"······."
루돌프는 잠시 미적거리다 내 뒷춤에 꽂아둔 칼을 힐긋 쳐다보고는, 결국 발을 절뚝이며 밖으로 향했다.
이제야 눈치가 조금 생긴 것 같다.
물론, 예상대로 총알이 빗발치는 상황은 없었다. 예상대로 쥐죽은 듯 고요한 술집 입구와 여전히 한산한 골목. 숨이 끊겨있는 문지기의 시체만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그 시체를 보며 끌끌 혀를 찼다. 놈이 정말로 상처에 손가락을 쑤셔 넣은 채로 죽어있었기 때문이다.
"농담인데. 그걸 진짜로 믿었네."
곧 루돌프와 함께 행인과 섹스토이가 북적이는 17번가 길거리로 스며들었다.
혼잡한 거리와 붉은 네온사인 조명 밑이라면 얼굴에서 피를 좀 흘리고 있더라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리라.
그렇게 5분 정도를 걸었을까.
누군가 뒤를 쫓아오는 기색이 느껴졌다.
나는 걸음을 멈추곤 직도 한 자루와 상태좋은 권총 몇 정을 골라 챙긴 뒤, 노획한 가방 두 개를 모두 바닥에 던져놓았다.
"와서 가져가."
그러자.
"······."
골목에서 얼떨떨한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낸 두 명의 사내. 그들은 나와 루돌프를 번갈아 바라보다 자신들을 소개했다.
상당히 조심스럽고 공손한 어투였다.
"사장님께서 보내셔서 왔습니다. 따라붙은 잔당들이 있나 확인한 것인데, 혹여 미행처럼 느껴져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럼 가방부터······확인해 보겠습니다."
이윽고.
가방을 열어본 놈들이 피와 기름이 잔뜩 묻어 얼룩진 화기들을 보곤 눈가를 좁혔다.
중고 총기들 상태가 보통 다 저렇지 않은가?
괜히 찔리기에 설명을 보탰다.
"사용감이랑 기스가 조금 있네. 그래도 탄은 잘 나가던데. 내가 직접 맞아봤거든."
"그런 게 아니라, 생각보다 양이 많아 확인과 분류에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잠시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럼 그냥 가져가고 내일 다시 들리겠다고 전해줘요."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 * *
피로 칠갑이 되어있는 술집 2층.
처참한 일곱 구의 사체와 전투 흔적.
레반이 17번가를 떠난 후, 뒤늦게 근거지에 모습을 드러낸 남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다 뒈졌네. 바로 튀어 왔으면 우리도 저 옆에 나란히 누워있었겠어."
"근데 밴스 그놈이 안 보이는데?"
"무서워서 튀었나보지. 총도 싹 긁어서 가져갔네."
"칼 맞아 죽은 시체가 하나 있긴 한데 나머지는 전부 총상이야. 작정 하고 쓸었어."
"삼호문 놈들인가? 그 한심한 쫄보 새끼들이 그랬다기엔 너무 가차 없는데?"
단원들의 대화에 전신을 사이버웨어로 도배한 거구, 하레니오의 두목인 무스코가 분노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뭐 이딴 개 같은 상황이 있나."
이런 적은 여태까지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멋들어진 총격전을 벌인 것도 아니고 자신들의 안방에서 일방적으로 학살을 당한 꼴이 아닌가.
무스코의 입가가 푸들푸들 떨리던 그때였다.
"어라?"
아까부터 이곳저곳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훑어보던 한 남자의 눈에서 마력이 옅게 요동친다.
2층 계단 바로 앞의 나무바닥.
바닥재가 움푹 패인 부분을 잠시 주시하던 그가 피식 웃으며 운을 뗐다.
"이야, 무림계 놈인가 본데?"
그 말에 저 멀리서 열을 내고 있던 무스코가 땅을 울리며 다가와 물었다.
"무인이라고? 확실해?"
"봐, 여기 패여있는 발자국. 내공을 실어서 밟은 흔적이 확실해. 탄착점도 확인해 보니까 전부 한 놈이 벌인 짓이야. 여기 계단서부터 시작했군."
"······무인이라면 사냥이 쉽지. 공장에서 거래대금 대신 받아온 거, 이놈 잡는데 써보면 되겠어."
"그 짝퉁 산공독(散功毒)?"
"그래. 내가 이 개새끼 낯짝 구경하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지?"
무스코의 분노섞인 물음에, 뱀처럼 찢어진 남자의 두 눈에 푸른 마나가 깃들었다.
곧이어 그가 혀를 날름대며 말했다.
"이틀."
* * *
차가운 한기가 목 주위를 감돈다.
낡아빠진 여관방으로 돌아온 나는 현재, 좁은 방에 꿇어앉아 있는 루돌프를 중간에 둔 채 레나와 눈싸움을 벌이고 있다.
"쟤가 이제부터 네 새로운 시종-"
"아, 그래?"
레나가 경멸하는 표정을 짓는다.
솔직히 조금 껄끄럽기야 하겠지.
이게 다 못생긴 루돌프 탓이다.
"······그래서 네 칩을 저 사람 포트에 꽂아둔 거야?"
"기왕 이렇게 된거 어떻게든 써먹는 게 낫다. 그리고."
내가 네 옆에 붙어 다닐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널 떠날 생각도 없다.
무장이라도 한 새 시종이 옆에 붙어 있으면 그나마 마음이 편하겠지. 이건 다 널 위해서.
—라는 식의 달콤한 논리로 끈질기게 회유하자, 그녀의 표정이 점점 시무룩해져만 간다.
딱히 큰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곧, 그녀의 속눈썹이 축 쳐진다.
"말은 고맙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저렇게 다 죽어가는 사람을 데리고 오면···."
"괜찮다. 생각보다 튼튼하더라고."
그렇게, 내 얼굴에 칼질을 하던 루돌프놈은 레나의 시종으로 살게 되었다. 놈을 죽기 전까지 괴롭혀줄 생각에 하루는 금방 지나갔다.
그리고 그날 새벽.
나는 잠에 들지 않았다.
오늘 있었던 일.
아마 며칠은 조용히 넘기더라도, 나름 갱단이라 자처하는 놈들이 언제까지고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사태 파악이 끝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추적을 해오겠지.
'4레벨급 마법사가 있다고 했던가.'
"레벨"
이 세상은 연방의 공인 아래 무림계, 마법계, 이종족, 사이버웨어 시술로 보유한 무력의 경지를 하나의 척도로 통합해 사용한다.
그것이 바로 1부터 12까지 총 열 두개의 단계로 나뉘는 "레벨" 이다.
간단히 나눠보자면.
1레벨. 기를 느낄 수 있는 일반인.
2레벨. 입문자 수준.
3레벨. 삼류무인, 회로가 한 개인 1위계 마법사
···
7레벨. 절정무인, 5위계 초위 마법사
8레벨. 초절정, 6위계 상위 마법사.
9레벨. 화경, 7위계 고위 마법사.
—보통 이런 식이다.
10레벨 이상은···그냥 말할 필요도 없는 규격 외의 존재들이니 제외하고.
아무튼 4레벨이라면 왕국 마탑 기준으로 고리를 두 개 엮은 2위계 마법사. 무인 기준으로는 이류의 경지 정도.
기본적인 방어 마법 몇 개는 익히고 있다고 봐야한다.
그러니, 소총만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일단, 마나 회로부터 만들어야겠군.'
#10화. 세상은 만만치 않다
#10화.
마법사와 무인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우선 무인은 단전에 내공을 쌓아두고, 기경팔맥을 통해 공력을 발산한다.
하지만 내공을 쌓기가 어디 쉬운가?
제 아무리 대단한 내공심법을 익혔다고 하더라도 정순한 내공을 단전에 쌓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무선대지신공(舞仙大地神功)이라는 절세심법을 익힌 나라도, 하루 이틀 운공을 해봐야 당장 얻을 수 있는 내공은 보잘것없다는 뜻.
어디 천년 하수오나 설삼, 공청석유 같은 영약 혹은 이 세계의 영약인 '에센스'를 구해 먹는게 아닌 이상은 말이다.
그러니, 당장은 마나회로 제작을 우선한다. 회로 하나만 있어도 하위계 마법 정도는 우습게 사용할 수 있을테니까.
이미 5개의 마나회로를 만들어 봤던 내게는 어렵지 않은 과정.
구태여 오래 생각지 않아도 된다.
[ 아이야, 너는 그 경이로운 재능을 제대로 꽃피워보지도 못하고 죽을 것이다. ]
전생의 제국 대마법사가 인정했던 그 재능, 이 세상에서라도 열심히 써먹어야 하지 않겠나.
*
이튿날 아침까지 꼬박 이어진 마나회로 제작.
어느 순간.
막혀있던 가슴께가 시원하게 뚫리는 느낌과 함께, 심장을 중심축 삼아 대회전 하는 마나 회로 '두 개' 가 자신의 탄생을 알리듯 주변의 마나 입자를 마구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두 개?"
흡수된 마나입자가 마법의 발현과 함께 방출될 때만을 기다리며 고고하게 흐른다.
두 개의 마나 회로에서.
"이건 나도 예상 못했는데."
처음 한 개를 제작하는 건 예정되어 있는 일이었다. 정신력과 집중력을 극한까지 요구하는 일이지만, 경험이 있던 만큼 어렵지 않게 성공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하나를 이미 엮었음에도 내겐 정신의 여력이 충분히 남아있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두 번째 회로 제작에도 도전했는데 꽤나 수월하게 자리를 잡는 것이 아닌가.
결국 나는 하룻밤 사이에 두 개의 고리를 엮어버렸다.
임독양맥이 뚫려 상단전이 열린 것이 마나 회로를 제작하는데도 도움을 준건가?
그렇다면 잃어버린 10년이 제 할 일을 했다.
어지간한 마법사가 이 모습을 봤다면 아마 거품 물고 쓰러졌겠지. 전생의 나라도 부럽다며 거품을 물었을거다.
물론, 초창기의 나약한 회로인 터라 레벨 4에는 못 미치는 수준.
아무튼 다음 세 번째 마나 회로를 만들기 위해선 갓 자리잡은 지금의 회로들을 끝없이 사용하며 길을 들여야 한다.
명인급의 대장장이가 칼 한 자루를 수천 번 담금질하듯, 중심축이 될 첫 번째와 두 번째 회로를 견고하게 다져둬야만 이후에 탄생할 마나회로도 흔들리지 않는다.
기반이 탄탄하지 못하다면 언젠가 모래성처럼 뒤틀려 무너져버릴 날이 올 테니까.
그런데 뭐···
마법 발현을 서포팅해주는 인공지능이나 일회용 마법 메모리칩, 마법 수식 고속 연산장치, 고농도 마나액 주입기 따위가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그딴 걸 누가 신경 쓰기나 할까?
모르겠고, 이제 배나 좀 채워야겠다.
나는 기지개를 켜며 졸고 있는 루돌프를 강하게 걷어찼다.
"억···!"
정크타운의 아침.
사위가 칠흑처럼 어두웠던 밤에 비해 살짝 옅어져, 먹구름이 심하게 낀 정도로 바뀌었다.
"오늘 날씨 괜찮네요. 형님."
평범한 아침이다.
햇빛이 쨍쨍하게 비치는 날은 연중 일주일도 채 되지 않으니, 인간이 우울해지기 딱 좋은 세상.
그렇기에 어둠을 밝히는 수많은 조명과 네온사인은 아침에도 꺼지지 않는다.
- 10크레딧 줄 테니까 제발 한 번만!
- 안 꺼져? 별 거지 같은 새끼가···아니다. 그냥 뒤져라! 뒤져!
- 억!
밥 먹으러 가던 길에 어제 길에서 봤던 부랑자를 또 마주쳤다.
저건 무슨 게임속 변태 NPC인가.
답 없는 슬럼가에서 저따위로 빌어먹고 사는데 아직 목이 붙어있는 것도 대단한 능력이군.
두들겨 맞는 놈을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 또봉이네 맛있는 리얼버거 "
목적지는 여관 근처의 패스트푸드점.
간판의 길쭉한 디스플레이에 햄버거 광고가 자동 재생되고 있다.
- 우리 " 또봉이네 맛있는 리얼버거 "에서 사용하는 배양육 패티와 진짜 고기로 만든 패티의 차이점이 뭔지 아십니까? 위생? 맛? SNS감성? 영양? 아니죠. 가장 큰 차이는 가격입니다 가격! 배양육은 싸서 마진이 많이 남으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배 터지게 햄버거를 처먹을 수 있는 겁니다! 아주 감사한 일이죠?
햄버거 광고 주제에 굉장히 솔직하다.
지잉.
매장 입구의 자동문이 열리자.
시끄럽던 손님들이 찰나간 조용해졌다가 저들끼리 모여 웅성거리는 분위기로 바뀐다.
딴엔 작게 소곤대는 소리가 정확하게 들렸다. 아마 어젯밤 회로 제작으로 마나와 친숙해졌기 때문이리라.
- 예쁜데?
- 벌써 봤냐? 단골 펍에 새로 들어온 섹스토이보다 낫네.
수군대는 첫 번째 이유는 레나의 외모.
- 근데 옆에 있는 말라깽이는 하레니오 아냐?
- 보지마. 괜히 또 쌩지랄할라.
- 아오, 쟤들은 햄버거 배달시켜 먹으라고 하면 안 되나? 괜히 기어들어 와서 분위기나 십창내고 말이야.
- 야 목소리 낮추라니까.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하레니오의 단원인 루돌프놈이 일행에 끼어있기 때문일 것이며.
아마 세 번째 이유는.
- 시펄, 뭐야 저거? 총 아녀?
내가 권총을 들고 있기 때문인가.
- 우리 나가야 하는 분위기 아니야?
- 설마 비싼 총알 아깝게 우리한테 쏘겠냐. 조용히 카운터만 털고 튀겠지.
이걸 내가 언제 꺼냈더라.
이거 참, 습관적으로 그만 실수했군.
나는 얼른 권총을 바지춤에 집어넣었다.
"그런 사람 아닙니다."
매장 안 손님들의 오해를 친절히 풀어준 뒤 자리를 잡고 앉는다.
앉자마자 카운터 뒤에 숨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날 주시하던 꼬마 직원이 쪼르르 달려온다.
강도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나 보다.
"뭐 드실 거예요? 크레딧은 있는 거죠?"
"돈 있다."
"어떤 거 드실래요?"
하레니오 놈들에게서 노획한 현물 지폐를 보여주며 햄버거 세 개와 감자튀김 양 많이 그리고 콜라를 주문하자, 주문을 받은 꼬마가 주방에 쪼르르 달려가 뭐라 외쳤다.
그리곤 다시 이쪽으로 달려와 속닥인다.
"사실 여기 햄버거 되게 맛없어요."
"꼬마야. 프렌차이즈 햄버거가 어떻게 맛이 없냐."
"정말인데요. 이 매장이 유독 맛없거든요. 손님들 눈탱이 맞았어요."
"그럼 좀 진작 말해주지 그랬니."
"에이, 그러면 사장님이 혼낸단 말이에요. 형 옆에 있는 저 하레니오 아저씨도 무섭구요."
굉장하군.
이 동네는 장사를 이렇게 하나?
신기한 판매 방식이다.
"그럼 가서 여기 햄버거 만드는 놈 나오라고 해. 다시는 햄버거를 만들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주마."
"에이~그럼 제가 일자리를 잃는걸요? 대신 3 크레딧만 팁으로 주시면 제가 햄버거를 맛있게 튀겨드릴게요! 튀기면 신발도 맛있어요!"
장사를 싹싹하게 잘하는 녀석이다.
나중에 다 크면 좋은 점소이가 되겠어.
"좋다. 그렇게 하자."
"정말요?"
"그래."
"헤, 감사합니다! 금방 가져올게요."
꼬마가 싱글벙글한 얼굴로 돌아가자.
루돌프가 친한 척 귓속말을 속닥거렸다.
"형님. 여기 배양육 패티에 돌빵이라 튀겨도 맛없습니다. 감자튀김도 숯덩이로 나오고요. 돈도 있는데 그냥 다른 거 먹으러 가시죠."
"내 돈이지 네 돈이야?"
"······."
"넌 먹지말고 굶어. 아침 공복이 건강에 이롭다."
곧바로 정색해준다.
감히 한낱 종놈 주제에.
- 음식 나왔습니다!
주문한 음식이 빠르게 세팅된다. 나는 버거 하나를 빼서 서빙하는 꼬마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너 먹어라."
"네? 정말이요?"
"그래, 커서 좋은 점소이가 되거라."
"감사합니다!"
꼬마 녀석은 미안한듯 햄버거의 원래 주인인 루돌프를 쓱 훑더니, 고개를 꾸벅 숙이곤 돌아갔다.
쭈욱-
나는 콜라부터 집어 시원하게 빨았다.
지친 몸에 생기가 돌아오는 기분이다.
레나도 그간 배고팠는지, 별 말도 없이 작은 입을 오물대며 노릇한 감자튀김을 마구 탐한다.
루돌프놈이 말한것보단 음식 상태가 괜찮았다.
"감자튀김이 숯덩이로 나온다며?"
"그러게요. 이상하네? 여기 감자튀김은 원래 까맣던데 오늘은 왜 노랗지."
"네놈한테만 탄 걸 팔았겠지. 꼴 보기 싫어서."
"······."
조금 시간이 지나자, 레나가 이제야 살 것 같다는 얼굴로 말을 꺼낸다. 입가엔 감자튀김 기름을 잔뜩 묻힌 채로.
"레반."
"그래."
"우리, 상황이 괜찮아지면 발할라 시티로 가는게 좋을 것 같아. 얼마가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반 루벤카가 있는 발할라 시티.
레나의 유일한 혈육이 있는 도시다.
"그래서 말인데 레반. 다른 시티까지 운행하는 사설 캐리어 티켓이 일인당 5만 크레딧이 넘는 거 알지? 앞으론 밥값도 최대한 아껴야 해."
"음."
그 말을 듣고 테이블을 바라봤다.
말라비틀어진 감자튀김이 몇 개만이 트레이 위를 뒹군다.
어떤 누군가가 자기 몫의 햄버거는 그대로 남겨둔 채 공공재인 감자튀김만 미리 싹 쓸어간 것이다.
왜 갑자기 저런 말을 하나 했더니.
레나를 빤히 쳐다보자 자기도 민망한 듯 고개를 수그린다.
"오늘은 배가 고파서···."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레나, 돈이 있어도 캐리어는 못 탈 거다. 네가 승강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BCPD에 체포되거나 당가가 손을 쓰겠지."
"그렇지만 만약을 대비해 크레딧은 꼭 모아둬야 해. 뭔가 방법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그래서 말인데 레반, 혹시 가진 돈 좀 있어?"
"주식하려고?"
"자신 있는 게 증권쪽이니까."
연방 증권거래소를 말함이다.
각 기업의 주식을 사고파는 증권시장.
레나는 반 바이오 컴퍼니의 자산운용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 능력이 나이에 비해 이상하리만치 출중해 꽤 큰 이익을 거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수익 비중에서 가장 높았던 것이 주식투자였다.
인공지능 트레이더나 대형 기업, 어마어마한 자본금을 보유한 자산운용사와 프로그램 거상(巨商)들이 날뛰는 증권시장에서 수익을 보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총알 대신 크레딧으로 전쟁하는 증권시장에서 몇 년을 굴렀으니, 돈 냄새 맡는 감각 하나는 탁월할 테지.
사실, 루벤카의 사무실에서 가져온 고농도 마나액 주입기 박스만 팔아도 당장 티겟값은 구한다. 어차피 못 타겠지만.
나는 레나에게 슬쩍 운을 띄웠다.
"초기자금은 얼마나 필요한데?"
"아무리 적어도 1만 크레딧은 있어야 해. 레반 네가 가지고 있는 비상금이 있을 테니까 일단 그걸로 계좌를 트고······."
"그거 이미 다 썼다."
"레반, 지금이 장난칠 때야?"
"진짜야. 네 옆에서 쫄쫄 굶고있는 새로운 시종이 뜯어간 돈만 5천 크레딧이거든."
"······아. 입장료를 냈다고 했지."
"그래."
"······."
그 말에 감자튀김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루돌프가 대역죄인처럼 대가리를 푹 숙였다.
"그런데도 햄버거를 먹으려해? 아주 보통 염치없는 새끼가 아니야. 눈치 말고 염치를 먼저 만들어줬어야 했는데."
내 말에 레나가 푸후 하고 한숨을 내쉰다.
잠깐의 어색한 정적이 흐른 후,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받으러 갈 돈이 있어. 1만 크레딧 정도는 충분히 될거야. 대신 조건이 하나 있다."
"···?"
의아한 듯 눈을 빛내는 레나.
지금은 발할라로 가는 것보다, 비상금을 모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내 육체를 안정화시켜주고, 경지를 빠르게 올려줄 기운.
"크레딧이 모이는 즉시 에센스부터 구할거다."
— 에센스
백 년 전, 인류는 살아있는 시체의 혈액 속에 존재하는 아주 극소량의 무언가를 발견했다. 마나입자 즉, 기(氣)를 농축해 머금고 있는 무언가. 그것이 오늘날 에센스라고 불리는 물질의 발견이며.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영약' 이다.
무인에겐 공력을. 마법사에겐 마력을.
쥐뿔 아무것도 없는 일반인에겐 건강을.
오랫동안 생존한 개체이거나, 가진 힘과 능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놈들의 혈액이 머금고 있는 에센스의 질도 훌륭해진다.
오죽하면 상품(上品)이상의 에센스는 부르는 게 값이라는 말이 돌겠는가.
과거 에센스라는 대체 영약이 발견되자마자, 에센스 채혈을 업으로 삼는 전문 시체 사냥집단이나 기업 에센스 수급 부서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을 정도이니 말 다 했다.
그러나.
직접 좀비를 사냥해 에센스를 채혈하는 짓은 극악의 위험도를 자랑한다.
전설적인 9레벨의 초강자조차 시티 안으로 숨어든 좀비에 목이 따이는 판국에, 그런 괴물이 즐비할 장벽 밖에서 좀비 사냥? 현재의 나로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나는 내 처지를 나름 잘 파악하고 있다.
5번의 전생을 겪었지만, 지금 내 수준으론 뒷골목 깡패들이나 때려잡는 것이 한계다. 장벽 밖은 상위 레벨들도 퍽퍽 죽어 나가는 곳이니까.
어찌 되었건.
삼류 무인에 2위계 마법사.
정신적인 성취는 높아도 경지는 낮다.
현대식 총기와 기술의 힘을 빌린다면 조금 달라질지도 모르겠지만, 자체적으로 평가한 내 수준은 완숙한 레벨 3정도.
그렇기에 에센스가 절실하다.
이렇게 거대한 슬럼가라면 시체 사냥꾼과 거래하는 브로커나 그쪽에 선이 닿는 놈 하나쯤은 있겠지.
"그러니 우선순위는 에센스다. 크레딧은······."
그때였다.
눈앞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지더니.
——쾅!
"?"
루돌프의 머리가 테이블에 처박힌다. 고개를 들자 루돌프의 얼굴을 짓눌러대며 킬킬 웃는 놈들이 보였다.
귀밑에 촌스러운 빨간 장미 문신.
아, 하레니오인가.
"밴스. 야 이 멍청한 새끼야. 어차피 이럴 거 뭐 하러 도망갔냐? 그냥 거기서 같이 뒈져버리지."
한 놈이 비웃기 시작하자 놈의 뒤에서 루돌프를 욕하는 여러 목소리가 섞여 들려온다.
"저 새끼는 저 사이에 껴서 뭘 처먹고 있는 거야? 정신 나갔나?"
"꼬라지 봐. 쥐어 터졌나 보네."
"비응신. 자알 하는 짓이다."
매장 내 눈알들이 조용히 돌아간다.
이윽고 슬슬 눈치를 보던 손님들은 익숙한 상황인 듯,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어느새 매장에 들어찬 열댓의 양아치들. 더러운 몸에는 하나같이 빨간 장미 문신을 달고 있다.
"음······."
하레니오 갱단.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갱단치곤 이른 아침부터 분주한 편이군.
'마법사는 저 뒤쪽에 빠져있는 뱀눈깔인가.'
업무지구만 가봐도 4레벨은 발에 채일 정도로 많으나, 이곳 정크타운이 밑바닥 슬럼가라는걸 고려해야한다.
저 놈 수준이면 타운 전체에서 한 손에 꼽는 강자겠지.
"나같으면 들어오면서 총질부터 했을 텐데. 다들 예의가 바르군."
내가 그렇게 시부렁거리며 상황을 보는 사이 누가 봐도 나 갱단 두목이오! 할 법한 덩치놈이 쿵쿵대며 걸어와 묻는다.
"어이, 햄버거가 목구멍으로 넘어가?"
살기와 광기가 반반쯤 섞인 눈빛.
나는 일단 부정했다.
"오햅니다. 걔들 제가 안 죽였어요."
"지랄하지 마라."
"저 빨간코 루돌프가 한 짓입니다."
"주둥이 닥쳐. 다 알고 왔으니까."
"그렇군."
다 알고 왔구나.
서둘러 발뺌을 포기했다.
늦었지만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너희도 햄버거 먹으러 왔니? 오늘 감자튀김 물 좋아."
쾅!
강철과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진 주먹이 테이블을 부순다. 신체 강화용 구세대 사이버웨어로군.
"······하나 묻겠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벌였지? 이유나 들어 보고 싶은데."
"놈들이 죽을 짓을 했겠지."
"좋게 대답하는 게 나을 거다."
"내가 못 할 짓을 한것도 아니고 왜들 이래? 서로 남자답게 잊고 넘어가자. 화해하면 되잖아."
"화해? 지금 화해라고 했나?"
후웅-
내 머리 위로 주먹을 뻗어오는 덩치놈.
순식간에 놈의 팔목을 낚아채며 단검을 뽑아 내리찍는다.
팅!
"······."
그러나.
끝이 구부러져버린 단검.
쩍 갈라지는 두목의 겉옷 밑으로 숨겨져있던 철제 속살이 드러난다.
놈이 조소한다.
"아주 재미있는 짓을 하는군."
이러면 나로서도 어쩔 수 없지.
곧바로 머리 숙여 사과한다.
"미안합니다."
"괜찮다. 나도 할 거니까."
턱-
코웃음을 친 갱단 두목놈이 내 어깨에 손을 떡하니 올려놓는다.
강한 악력에 우둑거리는 어깨뼈.
고개를 숙이곤, 당황한 눈앞의 레나에게 잠시 눈웃음을 지어 보인다.
"어이, 무인이면 네 좆대로 까불고 다녀도 될 줄 알았나? 버러지들만 모여있는 정크타운이라 헤퍼 보였어? 뒤진 놈들이 너도 보내달라고 지옥에서 아주 난리야."
우드득-
악력이 점점 강해진다.
팅. 팅.
나는 어깨를 붙잡고 있는 손가락 파츠를 툭툭 치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시종 때보다 인기가 많아진 건 좋은데 왜 하필 냄새나는 이런 놈들이 꼬이는 건가. 밥 먹는데 옆에서 쇠비린내 풍기며 쫑알대는 거한이라니.
"사주에 도화살이 끼었나···."
거칠게 꿈틀대는 하단전.
드르륵.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며 허리춤에 꽂아둔 직도에 손을 가져간다. 일단 이 덩치 팔부터 썰고, 다음은 저 재수 없는 뱀눈······.
덜컥.
"?"
뭐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거칠게 꿈틀대던 공력이 갑자기 꼼짝도 하지 않는다.
호수의 수면처럼 고요해져 버린 하단전.
잠시 우두커니 서서 상황을 곱씹던 나는···
일단 넘어진 의자를 바로 세우곤 침착하게 자리에 앉았다.
"우리, 무승부로 하지 않을래?"
세상이 이렇게나 만만치 않다.
#11화. 마법사 하기 좋은 세상
#11화.
"무승부? 지랄."
회심의 무승부 제안을 가차 없이 내친 두목놈은 곧장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튀김기의 감자튀김을 양껏 집어 먹었다.
"맛있군. 더럽게 비싼 산공독을 넣은 감자튀김이라 그런가."
산공독(散功毒).
내공을 흩뜨리거나 기맥을 막는 독. 무공의 경지가 높으면 쉽게 파훼하겠지만, 쥐톨만한 내 공력으론 불가능한 일이다.
어쩐지 단전이 이상하게 잠잠하더라니.
감자튀김 트레이에 뿌려놓은게 산공독이었나?
"나는 그냥 시즈닝인줄 알았지."
"큭큭."
공력 사용은 당분간 불가하다.
이러면···놈들과 타협할 수밖에 없겠지.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곤 떳떳하게 고함쳤다.
"그때는 술에 취한 상태였다!"
"그래서 뭐 어쩌란 거냐."
"게다가 난 나이가 어려서 아직 철도 덜 들었다. 사내답게 한 번 넘어가준다면 앞으로 열심히 살겠다!"
"어떤 역겨운 동네에서 왔는지 몰라도, 적어도 정크타운 얘기는 아니군. 취했든 애새끼든 사람을 일곱이나 쏴 죽였으면 대가는 치러야지. 안 그러냐?"
"······!"
사람을 몇 명씩이나 쏴 죽였다는 말에 잠자코 듣고 있던 레나의 동공이 마구 흔들린다.
충실한 십년지기 시종이었던 레반이 사실은 끔찍한 연쇄 살인마? 라는 식의,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눈빛.
이 질문은 인정하지 말아야겠다.
"이젠 없던 일까지 지어내는군. 역시 무시무시한 갱스터."
우적-
이왕 다시 앉은 김에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물어본다.
곧,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진다.
모래 씹는 식감에 누린내 나는 육즙, 찌든 내 가득하고 기름진 패티. 최대한 멀리 집어던지고 싶은 신기한 맛이다.
튀겼는데도 맛이 이따위일 줄이야.
"괜히 돈까지 줘가면서 튀겨 달라고 했나."
그렇게 아쉽다는 듯 말하니, 병풍처럼 서 있던 갱단원 하나가 딴지를 걸었다.
"킥, 호구새끼. 튀겨주는 건 원래 공짜인데."
세상에, 참 장사수완이 좋은 꼬맹이다.
들고 있던 버거를 땅바닥에 내던진 나는, 산공독에 절은 감자튀김 트레이 위. 아직도 고개를 처박곤 침을 질질 흘리는 루돌프놈을 노려봤다.
"루돌프야. 햄버거는 원래 공짜로 튀겨준다고 왜 말 안 했니."
"맛없으니까 다른 데 가자고 했잖아?"
이런 싸가지 없는 놈.
"했잖아는 반말이잖아."
"뭐 어쩌라고. 너 몇 살이야?"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라."
"다음? 다음이 있겠냐? 넌 끝났어. 여기서 뒈지는 거라고! 알어? 온갖 센 척은 다 하더니 아침부터 뭔 놈의 햄버거를 잡수시겠다고 꾸~득꾸득 기어 나왔어? 앙?"
놈이 신나서 삿대질을 해댄다.
사람 열받게 하는 재주는 확실히 있군.
침까지 튀어가며 열심히 욕을 뱉는 루돌프를 빤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풉, 뭐라는거야 새끼가."
"한 번만 더 욕해대면, 먼저 네 손톱을 전부 뽑을 거다. 다음은 손가락 마디마디. 그것도 다 뽑아내면 열심히 지혈해주고. 발가락으로 넘어가지. 다 뽑으면 시체들 밥으로 내던져주마. 이빨 무른 놈들로 잘 골라서."
"또 허세 부리네. 그런다고 내가-"
"못할 것 같나."
"······."
파르르 떨리는 루돌프의 안면근육.
와중에 혹시 모른다는 생각을 할 만큼의 눈치는 남아있다.
까부는 건 아직 덜 맞아서 그렇다. 계속 맞다 보면 언젠간 착해진다. 예전의 누구처럼.
- 레반.
레나가 입모양을 숨겨가며 조용히 속닥거린다.
- 어, 어떻게 하면 돼? 나도 싸울까?
"괜찮다."
괜히 귀하신 몸에 총구멍 뚫릴라.
나는 남아있던 콜라를 해치우고 일어났다.
아침 식사는 아쉽지만 이걸로 끝이다.
"독이 단전에 잘 받는 체질인가봐. 아니면 생각보다 경지가 허접한 건가?"
내가 식사를 끝내자, 아까 전부터 신경 쓰이던 뱀눈 마법사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어온다.
이 매장 내에서 가장 요주의 인물.
비꼬는 뱀눈 놈의 말에 입을 대강 닦으며 대꾸했다.
"너는 눈매 교정부터 해야겠군."
"곧 죽여달라고 빌어야 할 놈이 입은 살았네. 주둥이로만 의협을 논하는 무인다워."
"무인?"
"일부러 온갖 군데에 총질해서 숨기면 모를 줄 알았냐? 말 해봐. 몇 레벨 무인이야? 삼류지?"
놈이 도마뱀마냥 혓바닥을 날름댄다.
타운에서 보기힘든 마법사라 그런가? 콘셉트를 희한하게도 잡았다.
대답없이 돌연, 손을 들어 올렸다.
"뱀눈, 내가 마법사일 가능성은 없나?"
슥—
그리 대단치는 않은 움직임.
손가락 끝으로 눈앞의 허공을 반듯하게, 천천히 그어간다.
매장의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천천히.
"뭐하냐?"
조소하면서도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가는 뱀눈만 빼고는 다들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손 내려 인마. 잘라 버리기 전에."
"왜 이리 예민하지? 그냥 장난이다."
뱀눈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긋는다.
왼쪽 끝에서부터 오른쪽 끝까지 길게.
그 간단한 동작을 끝낸 나의 손가락이 뚝 멈추자, 눈가를 더욱 좁힌 뱀눈이 감자튀김을 주워 먹고 있는 두목을 불렀다.
"무스코."
"왜?"
"저놈 뭔가 느낌이 안 좋아. 그냥 지금 죽이자."
무스코라 불린 두목놈은 황당한 얼굴로 성을 냈다.
"웬 개짖는 소리야? 절대 쉽게는 못 보내주지. 남자 밝히는 놈들 찾아서 며칠 굴리다가 공장으로 보낼 거다. 저 옆에 붙어있는 년도 똑같이 해줘야 직성이 풀리겠어."
나는 잠시 귀를 닫고 집중했다.
마법을 발현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
4회차, 라아기스의 마법사들은 흔히 영창으로 대변되는 시동어나 일련의 동작, 물체를 매개체삼아 마법을 발현시키곤 했다.
나는 그중 '동작' 을 통한 마법의 발현에도 꽤나 능통했었고, 방금 전 내가 한 일련의 동작은 사실상······
"······!?"
공격 준비를 끝냈다는 말과도 같았다.
내 심장 주위로 갑작스럽게 응집하는 마력을 느낀 뱀눈이 화들짝 놀라며 이쪽을 돌아본다.
나는 최대한 천연덕스럽게 대응했다.
"오해다. 난 무인이거든."
"이런 미친···."
"눈 뜨고 잘 봐."
"전부 다 대가리 숙여!!!"
이윽고.
심상치 않은 마력의 움직임을 눈치챈 놈이 보호 마법을 전개하는 것과 동시에, 허공을 그었던 내 손가락 끝에서 손톱 크기의 마력 투사체 수십 개가 쏘아진다.
"끅!"
"아악! 내 눈!"
"제기랄, 앞이 안보여!"
4회차. 왕국과 제국의 국경선.
왕국의 병사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갑주를 씌운 군마를 타고 돌진해오는 강력한 기사였다.
흉포한 기사의 투기(鬪氣)에 어지간한 마법은 근처도 못 가고 흩어져 버리니, 결국 기사를 저지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마력 투사체를 쪼개 철갑주 아래로 드러난 군마의 두 눈을 노리는 것.
위력은 벌레나 죽일 정도라지만, 짐승의 눈알을 긁어 혼란스럽게 하는 정도로는 차고 넘치지.
"병신같이 얼타지 말고 안 보이는 놈은 뒤로 빠져!"
격분하며 크게 소리치는 뱀눈.
그 고함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런 씨발, 갈겨버려!
"······!?"
—그냥 쏴 갈겨! 내가 보호해준다!
내 입에서도 뱀눈의 목소리가 흘러나와 매장을 쩌렁쩌렁 울린다.
최전선에서 싸웠던 내 잔재주 중 하나.
『 마나 공명 』
인간의 음성이 내는 진동은 마나입자를 타고 흐른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진짜 음성을 구분하기는 어렵다.
눈 한번 깜빡이는 찰나의 시간.
타앙-!
나는 순식간에 권총을 꺼내 방아쇠를 마구 당겼다. 아무래도 시작을 끊어줘야 반응이 오겠지.
타앙-!
"으억 뭐야!"
근접한 거리에서 총성이 들리자마자 레나를 온몸으로 보호하며 바닥에 몸을 던지는 루돌프놈.
컨트롤 칩이 정상적으로 자리 잡았군.
긴급한 상황임을 감지하고 놈의 행동을 강제하고 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레나는 지키려 들 것이다.
- 쏘, 쏘라고? 눈이 안보이는데?
- 보호해준다잖아. 그냥 쏴 갈겨!
철컥. 철컥. 철컥.
듣기 좋은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온다.
나는 달아오르는 분위기에 편승해 신나게 소리쳤다. 물론, 뱀눈 놈의 목소리로.
—괜찮으니까 그냥 쏴! 피떡으로 만들어!
그에 진짜 뱀눈은 대경실색해 총을 내리라며 고함을 쳐보지만.
인간의 음성은 탄환보다 느리고, 밑바닥 삼류들의 동료애는 짐승의 생존본능보다도 한참 뒷전이다.
총든 장님은 적아를 가리지 않는법.
——!!!
찰나간, 귀를 멀게 만드는 수십 발의 총성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탄환 세례. 총구들이 시뻘건 불길을 뿜는다.
나는 일이 벌어짐과 동시에 하나의 마법을 구현했다.
『 몰타의 껍질 』
몰타 왕국 마탑의 공용마법.
전신을 밀착해 둘러싸는 마나 보호막. 맞으면 많이 아프기야 하겠지만, 총알 몇 발에 죽을 일은 없다.
퍼억···! 퍼어억···!
총격전에 아비규환으로 변해가는 내부.
지근거리에서 눈먼 총탄에 난사당한 놈의 전신에 빨간 점들이 피어나더니, 피가 울컥 뿜어져 나온다.
천천히 쓰러지던 놈의 총구가 또 다른 단원들이 있는 곳을 주우욱 긁어버리고, 패닉에 빠진 채 계속 방아쇠만 당겨대고 있는 놈들을 향해 내 권총도 불을 뿜는다.
탕-! 탕-!
이윽고.
멍한 정적이 흐르는 매장 안.
1분도 채 흐르지 않았으나 멀쩡하게 선 인간은 단 셋.
방어 마법이 잠깐 흩어진 사이 도탄을 맞고 얼굴에서 피를 흘리는 뱀눈, 그리고 멀찍이 떨어진 카운터에 몸을 숨긴 거한. 그리고 나.
정적을 먼저 깬 건 뱀눈이었다.
"······말도 안 돼. 분명 내공을 사용한 흔적이었다. 그런데 마법사라고?"
그리고 그 다음은, 내가 이어받았다.
"믿어주지 않아서 슬프더군."
푹!
고농도 마나액 주입기를 꺼내 가슴 언저리에 찔러 주입하자-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농도의 마나가 회로를 잠식해 나가며 황홀할 정도의 전능감이 전신을 난타한다.
이거, 마법사 하기 좋은 세상 맞네.
내가 히죽 웃으며 몸을 한번 떨자, 멍한 얼굴로 서있던 두목이 격하게 흥분하며 고성을 내질렀다.
"···이런 좆같은 새끼가!"
육체의 절반 이상을 잠식한 사이버웨어 파츠들이 우득거리며 서슬 퍼런 칼날과 총구를 드러내고.
"씨발, 마나액 주입기도 가지고 있었어. 우릴 가지고 논 건가······? 몇 레벨이지? 4레벨? 아니면···5레벨?"
뱀눈은 아직 정신이 나간 듯 혼잣말을 연신 중얼거리고 있다. 작은 눈은 한계까지 부릅떠진 채로 다시 좁아질 기미가 없어 보인다.
나는 이제야 놈들의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다.
*
중심가 총포상.
여느 때와 다름없어야 할 아침, 친씨아 블랑키는 자신의 앞에 놓여진 것을 심란한 눈으로 바라본다.
피와 기름이 엉겨 붙어있는 각종 총기.
친씨아가 제법 놀란 얼굴로 턱을 괸다.
"허세는 아니었네? 미친놈 맞구나."
뒤에있던 직원이 조용히 덧붙인다.
"단신으로 17번가 아지트를 쓸어버렸습니다."
친씨아가 머리를 긁적였다.
저렇게 나댈 정도면 보통내기는 아니란 얘기인데, 중고 총기까지 주워와서 알뜰히 팔아치우고······뭐 카지노에서 놀다가 전재산이라도 날렸나?
그러던 그때였다.
——!!
어디선가 들려오는 희미한 총성과 굉음이 연속해서 거리를 울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친씨아의 네트워크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 사장님. 15번가 사거리 리얼버거 매장에서 총격전이 일어났습니다. ]
"들었어. 무슨 일인지 제대로 알아봐."
[ 그게······ ]
[ 하레니오의 두목 무스코와 위험인물로 분류해두었던 마법사 포함, 하레니오 갱단원 모두 사망했습니다. ]
"······정말?"
지금 제대로 들은게 맞나?
친씨아는 믿기 힘들다는 어투로 되물었다.
"다 죽었어? 확실해?"
[ 예. 총포상에 들렀던 그자의 소행입니다. 그리고······무스코의 사이버웨어와 노획한 총화기의 판매를 원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처리할까요. ]
정크타운의 일부를 지배하던 무장집단이 하루 아침에 황망히 사라졌다. 그것도 햄버거 매장에서. 고작 한 명에 의해.
그렇다면···더할 나위 없이 최고다.
보통내기는 아님이 분명하거니와, 코 끝으로 살살 풍겨오는 달달한 크레딧의 냄새.
"어쩌면 괜찮은 단골이 생길 것 같네. 당분간 심심하진 않겠다."
친씨아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12화. 진상을 부리러 온 손님
#12화.
총격전과 전투의 여파로 폐허가 되어버린 패스트푸드점.
테이블 위에 걸터앉아 고농도 마나액의 여파로 울렁대는 속을 게워낸다.
"형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루돌프야."
"네."
"아까 말한 고문 말이다. 날 잡자."
"그거 없던 일로 해주시면 안될까요? 제가 잠시 미쳤었나봅니다."
"그럼 너도 저렇게 되는 건 어때."
"어······."
매장 바닥에는 루돌프가 철썩같이 믿고 의지하던 갱단 두목놈의 시체, 그리고 얼굴이 처참하게 뭉개진 뱀눈 마법사와 유사 갱스터들의 시신들이 떼거지로 늘어져 있었다.
살처분이라는 단어가 정확히 어울렸다.
그러게 나는 의와 협을 논하는 무인이 아니라 하지 않았나. 본래 목숨이 판돈인 실전에는 협 따위 없는 법이다.
"사, 살려주십쇼."
"고문도 싫고 죽기도 싫으면 나더러 어쩌라는 거냐."
"형님, 여기 총알 스친 자국 보이세요?"
"보인다."
"그렇죠? 형님도 보이시죠? 이건 레나님을 보호하기 위해 뛰어들었다가 얻은 상처입니다. 자, 어떻습니까."
루돌프놈이 식은땀을 줄줄 흘린다.
어차피 칩을 갈아 끼울만한 놈들도 죄다 죽어버렸으니, 이번 한 번 정도는 넘어간다.
"앞으로 잘하자."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사실 나도 고문하기 싫었다. 너같은 놈은 최대한 고통받다가 천천히 죽어야해."
"······네?"
나는 코를 시원하게 먹는 루돌프를 무시한 채 레나를 찾았다. 엎드려서 몸을 떠는 모습은 마치 껍데기를 깨고 세상 밖에 나오려는 병아리 같았다.
"레반, 나 이제 조금 괜찮아졌어."
"화기에 토사물이 묻으면 제 값 못받는다."
"······아까 그런 건 미안해. 그런데 이젠 정말 괜찮다니까."
감자튀김 트레이를 내려놓은 레나.
그녀는 피로 진창이 된 바닥과 끔찍한 시체들을 목도하더니 또다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우웁!"
좋은 곳에서 좋은 것만 보고 자란 부잣집 영애에게 이런 살풍경은 아직 무리일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언젠가 무뎌질 날이 올 테지.
"분류는 다 끝났습니다. 저희 차로 같이 가시죠. 모시겠습니다."
총포점의 그 여인이 보내준 직원들.
화기와 사이버웨어를 포함해 돈이 될 만한 건 깡그리 수거한 직원들이 시체와 짐을 나누어 픽업트럭에 실었다.
곧 털털대는 디젤 엔진 특유의 소음과 함께, 매캐한 연기가 훅 뿜어져 나왔다. 직원 하나가 뒤를 돌아보며 양해를 구한다.
"구식이라 승차감은 별로입니다. 이해해주십시오."
진동하는 탄내를 맡으며 총포상으로 향한다. 총성과 굉음에 몰려든 거리의 구경꾼들 사이, 이쪽을 우묵한 눈으로 주시하는 변태 거지도 보였다.
저 거지놈은 아직도 안 죽었군.
철컥.
몰려드는 시선에, 어쩐지 동물원 원숭이가 된 것 같아 권총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탕—!
무일푼 구경꾼들이 혼비백산해 뿔뿔이 흩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