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천리장성 웨이브 방어본부.
상황실에 모인 장성들과 황자, 황녀들.
초고도 정찰기에서 드론이 투하됐다.
그래서 죽은 비욘드 엘리트 마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진짜 죽었군."
"벌써 부패가 시작됐습니다."
군데군데 썩어 문드러진 비욘드 마수의 시체.
"결정체 반응은?"
"전무 합니다. 마나 반응도 보이지 않습니다."
마나 반응이야 죽었으니 그렇다 치고 결정체마저 없다니.
"원래 없었나?"
"마수를 죽인 그 남자가 가져갔을 지도."
"아깝네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특공대를 보내볼까요?"
"저길요? 화면 안 보이십니까? 마수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비욘드 엘리트가 죽었다.
이제 저긴 일반 마수 밀집 지역으로 변해갔다.
자신의 영역에서 내쫓겼던 마수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는 상황.
그런 이유로 천리장성 전쟁 또한 끝나가고 있었다.
천리장성을 향해 물밀듯이 밀려오는 마수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남쪽으로 도망치는 놈들도 나왔다.
시간이 흘러 한 마리도 남지 않고 사라진 마수들.
천리장성 웨이브 방어본부는 하루 정도 더 추이를 지켜보다가 마침내 전쟁의 종식을 선언했다.
<비욘드 엘리트가 죽었다! 마수 웨이브에 맞선 인류의 승리!>
<황제 폐하께서도 방어군 본부에 치하를 내려.>
<논공행상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 이 전쟁에서 최고의 공을 세운 사람은?>
이 부분에 대해선 이견이 없었다.
<참전한 병사들, 태홍 회복제, 태홍 생기불끈, 태홍 새살쑥쑥이 전쟁을 끝냈다고 한목소리로 주장.>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는 기적의 승리.>
<태홍 생기불끈과 태홍 새살쑥쑥, 어서 빨리 시판해줬으면···, 시민들의 요구 빗발쳐.>
하지만 비욘드 엘리트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의심도 생겨났다.
<흑악지룡이 죽은 원인에 대해선 알려지지 않아.>
<국방부 관계자에 따르면 자연사한 걸로 추정.>
<비욘드 엘리트 마수가 자연사했다???>
<전문가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흑악지룡 이동 영상을 공개하라고 요구.>
태주는 이미 구례로 돌아와 있었다.
< 다른 세상 물건 들인 게 죄는 아니잖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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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명 >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비욘드 엘리트 흑악지룡을 죽였다.
그것도 마수인 삼두백호와 함께.
제국 국방부는 황제의 명을 받아 흑악지룡이 죽는 영상도 삭제하고, 목격한 이들에게도 입단속을 시켰지만 비밀이 새어 나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상급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일부의 사람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성별이 남자였고, 모습만으로 나이를 판별할 수가 없지만 젊어 보였다.
영상이 먼지로 인해 흐릿해 정확한 외모와 각성 문양은 잘 보이지 않는다, 사용 무기는 검이고 몸을 투명화하는 마법 아이템을 소유하고 있다, 등등.
삼두백호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비욘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초엘리트급, 흑악지룡을 짓눌러 버릴 정도로 거대하다.
비욘드 마수의 강기 보호막을 뚫어버릴 정도로 강력하고.
사실 이런 이야기들은 흑악지룡 자연사 주장만큼이나 허무맹랑했다.
말하자면 증권가 찌라시 정도?
하지만 흑악지룡이 죽은 건 명백한 사실.
그런 이유로 전쟁이 끝나고 나서 초유의 관심사가 된 부분은 바로 비욘드 엘리트 마나 결정체의 존재였다.
세계 최초의 비욘드 엘리트 마나 결정체.
그걸로 무기나 영약을 만들면 어떤 효과를 보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욕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비욘드 결정체가 실존한다면 소유자는 한 사람.
흑악지룡을 죽였다는 그 남자.
수많은 세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계 각국 정부와 정보 조직, 민간 기업, 여러 사조직, 양지에 드러나 있는 세력이든, 음지에 숨어있던 세력이든.
그 남자를 찾아라.
그럼 비욘드 엘리트 마나 결정체도 같이 찾을 것이다.
※ ※ ※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또 다른 전쟁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제국 전역에서 말이다.
뉴서울 백두 마트 신양재점.
아직 개장도 안 했는데 주차장이 꽉 찼다.
심지어 1층 정문에도 사람들이 줄을 섰다.
대형마트에서 이런 오픈런이 벌어진다는 건 드문 현상.
태홍 생기불끈 드링크제가 민간시장에 첫선을 보이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입소문을 탔다.
전쟁에 참여한 병사들, 그들의 가족, 가족의 지인,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새살쑥쑥은 약국에서만 팔지만 생기불끈은 건강 드링크제라 마트에서도 살 수 있다.
드디어 판매 시작.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약을 실제로 체험하고 싶은 일반인들이 대부분.
공부에 지친 수험생들, 과중한 엄무에 시달려 하루 휴가를 낸 직장인들, 정가에 사서 비싸게 팔려는 되팔이들도 많았다.
드링크제가 제국 곳곳의 백두 계열 마트와 편의점에서 순식간에 팔려나갔다.
물량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채 2시간이 지나기 전에 이미 매진.
그리고 잠시 후.
SNS에서 인증샷들이 올라왔다.
죄다 드링크제의 효능을 칭송하는 게시물들.
- 이거 먹고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 이거 먹고 숙취로 절은 육신이 말끔해졌습니다.
- 이거 먹고 헬스장에서 하체 2시간 조졌습니다.
- 이거 먹고 야근 3시간 했습니···, 좋은 게 아니구나.
되팔이들도 기승을 부렸다.
제국 최대 중고 거래 사이트인 오이 마켓의 판매 및 구매 목록 상품은 거의 생기불끈.
그래서 미처 사지 못한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언제 물건이 들어오나?
예약제를 시행하면 안 되겠느냐?
되팔이들을 잡아야 한다.
백두 마트와 편의점은 일일 최대 매출을 달성했고, 반면 미리내 그룹 계열의 마트와 편의점은 매출이 수직 하락했다.
그래서 태홍 바이오 본사도, 뉴서울 지점도 정신없이 바빴다.
그들도 생기불끈을 입에 달고 일했다.
반면 태주는 조금 한가한 편.
오늘은 면접이 있는 날, 인성 좋고 재능있는 아이들을 거두어 무공을 가르칠 생각, 백홍표, 백서연 사장, 그리고 창훈이와 순철이 등, 주위 사람들에게 알음알음 소개를 받았다.
관상은 과학이란 말이 있다.
딱 보면 될성부른 나무인지 안다.
1차로 추려진 후보는 10명.
다 적합자들이었다.
물론 관상만 믿지 않았다.
졸업한 학교에서 생기부도 받아서 확인하고 사람을 써서 주변 평판도 알아봤다.
그렇게 고르고 골라 최종 선택된 제자들은 총 6명.
비밀 유지 맹세를 거치고, 미리 만들어둔 영약들을 먹이니 한 명도 빠짐없이 각성했다.
기본적인 심공인 오행신공부터 가르치고, 스킬도 배우게 하고, 숙련을 위한 훈련도 시키고···, 삼재검법 말고 적당한 검술 하나 있으면 좋겠는데.
그건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고.
이러다 보니 시간이 금방 흘러갔다.
그 와중에 태주에게 걸려온 전화들.
백두 그룹의 정욱철 회장이,
- 뉴서울에 언제 올라 올 건가? 함께 식사나 하세. 얼굴 잊어먹겠군.
리더스 클럽의 이고르도,
- 김태주 회원님, 방문해주시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연락만 주시면 뉴서울 역에서부터 에스코트해드리겠습니다.
제정원 문경식 차장도,
- 현재 추적 중인 마인의 단서를 잡은 것 같습니다. 곧 보강 수사 후에 정식으로 도움 요청하겠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다.
백서연을 통해서도 면담 요청이 쏟아졌다.
왜 이렇게 자신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지.
심지어 구례까지 직접 찾아온 사람도 있었다.
만나기에 조금 부담스러운 사람.
'왜 또 왔지?'
일백이를 두고 갈까 하다가 놈이 도통 곁에서 떨어지질 않아서 그냥 데리고 왔다.
태주는 일백이를 안고 태홍 바이오 본사 회장실로 갔다.
"오랜만이군."
황궁 최고 비서관 금수호였다.
"어서 오세요. 먼 걸음 하셨네요. 구례까지."
"구례야 그전에 몇 번 와봤네. 아무튼 요즘 바쁜 모양이지? 주인도 없는 방에서 혼자 기다렸더니 얼마나 뻘쭘하던지···,"
"미리 전화 주셨으면 기다렸죠."
전에 만났을 때보다 여유가 생긴 느낌.
태주가 방에 들어와도 금수호는 별다른 동작을 취하지 않았다.
"으흠, 오늘은 꽤 가깝게 계시네요. 뉴서울 호텔에선 멀찍이 떨어져서 이야기하시더니."
"솔직히 지금도 가까이 가고 싶진 않아.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금수호는 태주가 안고 있는 일백, 아니 삼백이를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가 키우는 고양인가?"
"그렇습니다만."
"귀엽게 생겼군. 안아봐도 되나?"
"에이, 양복에 털 묻습니다."
태주는 삼백이를 회장실 책장 밑에 놓았다.
주머니에서 츄르 몇 개와 고양이용 육포를 놓고.
"손님 오셨으니까 여기 가만히 있어."
"니야앙!"
눈치 빠른 사람이다.
얼굴이 수시로 바뀌는 놈인데,
살짝 아쉬운 표정의 금수호.
그러더니,
"혹시 자네, 투척 무기 말고 검(劍)도 쓰는가?"
"검이요? 검은 적성에 맞지 않아서 쓰진 않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도 없고?"
"···없습니다."
수상하다.
뭘 알고 왔나?
"구례로 온 김에 지리산에 갔다 왔네."
"그러셨구나."
"천왕봉에도 올라가 봤어. 그런데 없더군."
"뭐가요?"
"엘리트 삼두백호 말이야. 혹시 어디 갔는지 아는가?"
"···글쎄요."
태주의 얼버무리는 대답에 금수호는 일이삼백이가 들어가 있는 책상 밑을 힐끗 쳐다봤다.
"인간이 잘못된 방향으로 각성하면 마인이 되지만, 그 반대로 마수가 잘못된 방향으로 변이하면 우린 그걸 영수(靈獸)라 부르지. 혹시 알고 있었나?"
"들어는 봤습니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 공화국의 '타이탄 화이트 이글'처럼, 그렇다면 지리산 엘리트 삼두백호도···,"
이거 위험하다.
태주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무슨 일로 구례까지···?"
"아! 전과 비슷한 용건이네."
"또요? 폐하께서 편지를 보내신 건가요?"
"아니, 이번엔 비공식 편지가 아니라 공식적인 황명이야."
"···네?"
공식적 황명이라니!
대체 무슨 이야길 하려고?
"그래서 말인데, 자네 회사 회의실 좀 쓸 수 있나?"
"안 될 건 없죠."
"고맙네. 공식적인 황명 전달이라 자네 말고도 들어야 할 사람이 더 있거든. 이참에 백서연 사장도 부르게."
훈장이라도 주려나?
뭐, 이번 전쟁에서 회사의 신약들이 커다란 기여를 한 건 사실이니까.
※ ※ ※
태홍 바이오 본사 회의실 모인 사람들.
백서연 총괄 경영자도 왔다.
이정학을 비롯한 상임위원들과 일반 자치위원들도.
아마 금수호 비서관이 그들을 부른 모양.
그래서 26명 정도.
회의실 의자에서 일어난 금수호.
품에서 화려한 금박이 장식된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지금부터 황명을 전달하겠다."
그러자 사람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나 차려자세를 취했다.
- 먼저 이번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김태주 회장 및 태홍바이오 임직원에게 감사를 표한다.
- 그대들이 만든 회복제, 피로 해소 드링크제, 외상 치료제 덕분에 제국의 병사들이 단 한 명도 희생되지 않았다.
"이 내용은 감사패로 따로 나갈 거야. 감사패는 이따 전해주지."
황제의 칭찬에 뿌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백서연.
- 특히 신약의 개발자인 김태주 회장의 공은 크고도 크다.
- 전부터 그대를 따로 입궁시켜 직접 노고를 치하하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사업에 방해가 될까 봐 참아왔던 차였다.
-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제국민 모두가 그대를 칭송하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대에게 상을 내려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치고 있다.
- 이젠 입궁을 시키지 않는 것이 내겐 큰 부담이다.
···뭐야?
입궁하라고?
- 그런 의미에서 짐이 칙령을 내리겠다.
무슨 내용일까?
사람들이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 오늘부터 구례에 내려졌던 자유도시 지정을 철회한다.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사람들.
- 따라서 도시를 운영하고 있었던 상임위원 및 자치위원들의 권한 역시 즉각 박탈한다.
···이건 상이 아니라 처벌 아닌가?
- 대신 태홍 바이오 김태주 회장을 구례 시장으로 임명한다.
"어?"
"헉!"
"대, 대체?"
"···."
- 구례 시장의 임기는 종신이며 후임을 지정할 수 있는 권리도 부여한다. 또한 이 권리는 대대로 계승된다.
후임 계승권까지.
- 도시 운영 및 세금징수 권한은 제국의 영지에 준한다.
종신 시장, 이름만 다르다 뿐이지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와 다름없다.
- 이에 김태주 회장은 빠른 시일 안에 뉴서울 황궁으로 입궁해서 절차를 밟아라.
- 만약 종신 시장직에 뜻이 없다 하더라도 입궁해서 짐에게 그 이유를 논하라.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금수호의 눈길이 상임위원과 자치위원들에게 향했다.
"이 사실은 여기 있는 자네들만 알고 있게. 김회장이 입궁하고 나서 최종 결정될 문제니까. 그동안 마음의 준비나 하고 있어."
누구 말이라고 거역할까.
모두 그저 바짝 얼어있었다.
순간!
"와!!!"
짝짝짝짝!
백서연이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김태주 회장님 겸 시장님!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태주는 난감했다.
'축하는 무슨···, 나보고 시장을 하라고?'
그거 하면 놀지도 못하잖아.
게다가 받아들이든, 거절하든 무조건 입궁은 해야 한단다.
'귀찮은데···.'
어떻게 입장을 정해야 하지?
일단 사람들과 의논해보고.
※ ※ ※
선계(仙界).
도원 가장자리, 천도 나무 바로 뒤에 위치한 도화궁.
서왕모는 침상에서 일어났다.
"후우,"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그 아름다운 하늘색 엘메스 버킨백이 눈앞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도원 혹은 천선계를 다닐 때마다 들고 다녔던 선죽(仙竹) 바구니를 들어봤다.
여기에 보통 선도를 담고 다닌다.
술법이 걸려 있어 무게도 느껴지지 않고 선도의 신선도가 항상 유지되는 대나무 바구니.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아, 얼마나 초라한 바구니인가.
다른 세상에서 넘어왔다던 그 가방을 본 이상, 이젠 바구니를 들고 바깥으로 나갈 마음이 생기질 않았다.
"엘메스, 엘메스라···,"
독선이 말했다.
다른 세상의 여인들도 한번 들어보길 소망하는 가방이라고.
보기만 해도 품격이 절절 흐르는 것이 과연 그럴 만했다.
그 가방을 본떠 똑같이 만들 수는 있다.
그까짓 것 왜 못해?
적당한 가죽을 구해 염색해서 금속으로 장식과 징을 달고 손잡이를 만들면 감쪽같겠지.
하지만 그렇게 만들면 가짜다.
다른 세상에서 넘어온 물건이 아니다.
짝퉁을 들고 다닐 수 있나!
엘메스 버킨백은 다른 세상의 물건이라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넘어온 물건이 선계의 질서와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판관의 저울추가 증명한 판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서왕모는 의념을 이용해 미호 선자를 불렀다.
미호 선자는 여우 출신으로 아홉 개의 꼬리를 획득해 등선한 환수계 출신.
"부르셨나이까, 왕모님."
"그래, 미호야, 도원에 가서 천도와 제일 가까운 선도 나무에서 선도를 따오거라."
"···몇 개나 말이옵니까?"
"50개, 바구니에 담아서"
"알겠습니다."
도원의 선도가 다 같은 품질은 아니다.
1구역의 선도는 품질이 좋지 않고, 4구역의 선도가 가장 좋다.
왜냐하면 4구역이 천도 나무와 가깝기 때문이다.
신선들에게 주는 선도는 1, 2구역의 하품(下品), 천도와 가까운 나무의 선도는 최상품(最上品).
서왕모는 최상품 선도로 독선과 흥정을 할 생각.
이윽고, 미호 선자가 바구니 가득 선도를 담아왔다.
"빛깔이 좋구나."
"좋은 것만 담아왔습니다."
"들고 나를 따라오너라."
서왕모는 미호 선자와 함께 선계로 갔다.
독선 당군악이 만들었던 천막 극장이 있던 장소.
그런데.
'응?'
이상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왜 다들 밖에···,'
선인들이 천막 극장 안에 있지 않고 모두 바깥에 나와 있었다.
그것도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독선! 도옥선!! 도오오옥선! 제발 안으로 들여보내 주시면 안 되겠소?"
"내가 눈이 멀었소. 그동안의 은혜를 모르고 그만···,"
"이러다 죽겠소이다. 선인 하나 살리는 셈 치고, 한 번만 용서해주시오."
"월회비 두 배로 내겠소. 얼마면 되오리까? 얼마면?"
"이놈이 시켜서 거짓말한 것뿐이오. 난 결백하오!!!"
"난 왜 끌고 들어가? 배신자 새끼야!"
처절한 아우성이 선계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하지만 천막 안에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저 희미한 음악 소리만 들려올 뿐.
고개를 갸우뚱하는 서왕모.
'···날을 잘못 택했나?'
< 황명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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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궁(1) >
다시 세워진 선계(仙界) 엔터테이너 극장.
한때 가득 찼던 극장 안은 썰렁하게 비어 있었다.
당군악을 포함해도 선인들의 숫자가 10명이 안 된다.
나머지는 다 바깥에 있었다.
들여보내 달라고 떼를 쓰면서.
이번 사태는 전화위복이었다.
판관의 저울추에 의한 무죄 판결로써 정당한 명분이 만들어졌다.
다른 세상과의 교류는 혼돈(混沌)이 아닌 조화(造化)로운 일.
조화의 선인.
그가 바로 독선 당군악이다.
축하 파티는 해야 하지 않겠나.
당연히 샴페인으로.
퐁!
저쪽의 태주는 항상 최고급 물건만을 보내려고 한다.
이 아르망디 브리냑 샴페인도 돔페리뇽보다 더 비싼 술, 무려 5병이나 보냈다.
지구의 클럽이란 곳에선 아르망디 몇 병 주문하면 전광판에 주문자 이름도 뜬다던데···,
당군악은 푹신한 의자에 드러누워 영화를 시청하는 선인들에게 아르망디 한 잔씩 따라주었다.
쪼르륵, 황금빛 액체가 유리잔을 반쯤 채웠다.
그 와중에 밖에서 들려오는 애절한 외침.
"독선! 도옥선! 도오오오···,"
선인들이 혀를 끌끌 차면서 말했다.
"하아, 저 새끼들이! 술맛 떨어지게. 영화 대사가 귀에 안 들어오잖아."
"쯧쯧, 집중이 안 돼, 집중이!"
"저래도 절대 출입을 시켜주면 안 됩니다."
"귀곡, 결계는 확실하게 쳤소?"
"안심하시오. 이번엔 태상노군도 들어올 수 없을 거요."
밖에서 떠들든 말든 태백 선인은 황홀한 표정으로 샴페인을 들이켰다.
"크아! 역시 고급술답군. 탄산과 주정의 조화가 기가 막히는구나!"
당군악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명색이 술의 신선인데, 샴페인이 그렇게 맛있소?"
"맛있지, 이건 다른 세상의 술이야, 희귀성을 따져보게. 독선 자네가 아니면 내가 이걸 어디서 먹나?"
태백 선인의 말이 맞다.
값싼 군것질거리만 해도 선계에선 선도보다 귀한 것.
당군악은 자신의 편이 되어준 신선들에게 인심 좀 썼다.
아르망디도 공짜, 술안주인 최고급 치즈도 공짜.
그렇게 해주니.
"독선, 우리 끝까지 가는 거요!"
"필요한 건 뭐든 말만 하시오. 내 온 힘을 다해 그대를 돕겠소."
"천도를 훔쳐 오라 시켜도 그렇게 하리다."
"암! 우린 절대 배신하지 않지."
천막 안 선인뿐 아니라, 천막 밖 선인들도 이제 알아챘을 것이다.
독선이 선계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는 걸.
"그나저나 검선이 없다는 게 아쉽군."
"쯧쯧, 하필 도원을 털어서는."
"어쩔 수 없지. 이건 죄가 명백하니까."
검선은 아직 뇌옥에 갇혀있었다.
어떻게 빼내 올 방법은 없을까?
그때였다.
치지지지직!
귀곡 선인이 쳐 놓은 결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런! 망할 놈들이, 이젠 결계에 손을 대?"
"안 되겠소, 같은 선인 처지라 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혼쭐을 내줄 테다. 아르망디 거품이 꺼지기 전에 돌아오겠소."
"저쪽이 숫자가 조금 많지 않나?"
"···설마 죽기야 하겠소?"
"검선만 있었으면 저깟 것들 떼쓰지도 못할 텐데."
하지만 결계를 건드는 이들은 선인들이 아니었다.
천막 너머에서 간드러진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독선님? 저 미호 선자에요. 결계 좀 열어주시겠어요?"
미호 선자라면···,
"도화궁 선자 아니오."
"맞소. 서왕모를 보필하고 다니는 구미호지."
"무슨 일로 왔을까?"
귀곡 선인이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열어줘야 하는지, 막아야 하는지 물어보는 듯.
"뭐, 들어오게 해줍시다. 이야기 나누는 거야 어려운 것도 아니니."
당군악의 허락에 귀곡은 잠시 결계를 풀었다.
미호 선자뿐만이 아니었다.
"서, 서왕모?"
"어찌 여기에···,"
"또 무슨 트집을 잡으려고."
"에이, 괜히 열어줬군."
서왕모는 선인들의 불평 따윈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영화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독선, 만나기 힘들어졌군요."
"이게 다 누구 때문이라 보시오?"
"너무 매몰차게 대하지 말아요. 난 거래를 위해 찾아온 거니까요."
"거래?"
서왕모는 미호 선자에게 말했다.
"미호야, 바구니를 들고 오너라."
한가득 선도가 담겨있는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온 미호 선자.
"최상품 선도 50개랍니다. 원래 천선계에만 들어가는 물건이지요."
"이걸 왜?"
"말했잖아요. 거래를 원한다고."
사실 당군악은 그녀가 원하는 물건이 뭔지 알았다.
하지만 순순히 줄 수 있나?
무한공간에서 엘메스 버킨백을 꺼내.
"혹시 이걸 원하시오?"
그러자 서왕모의 표정이 한순간에 변했다.
눈동자에 가득 찬 가방에 대한 욕망.
미호 선자도 마찬가지.
눈이 획 돌아간 듯했다.
"그, 그래요. 그걸 원해요."
"선도 50개로 이걸 가지시겠다?"
"···모자라나요? 최상품만 모아왔어요."
"그건 서왕모께서 잘 알고 있을 텐데."
"하아···,"
서왕모는 한숨을 푹 쉬었다.
독선의 말이 맞다.
다시 봐도 아름다운 가방의 자태.
선계든, 인간계든, 그 어느 곳에서든 구할 수 없는 다른 세상의 물건, 반면 선도는 도원에 흔하게 널려있다.
"그대의 조건이 뭐죠? 자세히 말해보세요."
"말하면 들어줄 생각인가?"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그렇다면 한번 찔러나 보자.
"먼저 검선의 석방, 그의 죄를 사해주고 뇌옥에서 꺼내주시오."
"으음,"
살짝 뜸을 들이더니.
"힘써볼게요. ···그것뿐인가요?"
물론 하나 더 있다.
"그리고 선도도 주셔야지. 최상품 50개는 너무 염치없지 않소?"
"하, 하지만 최상품은 몇 개 없어서, 다시 열리려면 석 달 이상은 족히 기다려야···."
"최상품이 없으면 그 밑 상품 선도로 50개 더 주시오. 합쳐서 100개."
잠시 고민하는 서왕모.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저 가방을 가지려면 어떤 요구든 들어줘야 한다.
천도를 요구하지 않은 게 어딘가?
"알겠어요. 해드릴게요. 나머지 선도는 이따가 보내도 되나요?"
"좋소."
거래가 이루어졌다.
당군악은 엘메스 버킨백을 서왕모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무한공간 술법진이라도 그려드리리까?"
"아니에요.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다른 세상에서 넘어온 상태 그대로."
그럴 줄 알았다.
튜닝보단 순정이 최고.
손을 대지 않는 것이 훨씬 낫다.
지구에서도 여인들이 이 가방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나.
보통 비가 와서 우산이 없으면 들고 있던 가방으로 비를 막는데, 이 엘메스 버킨백은 절대 그런 취급을 받지 않는다.
여인들은 빗물로부터 명품가방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우산으로 삼는다.
서왕모는 감격한 표정으로 살며시 가방을 손에 들었다.
"미호야, 동경 거울을 꺼내보아라."
"네, 왕모님."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며 이리저리 몸을 돌려보는 서왕모.
"어떠냐?"
"아, 아름다우십니다."
"하지만 옷과 가방이 어울리지 않구나. 나중에 맞춰야겠어."
서왕모뿐만이 아니었다.
미호 선자의 눈에도 가방에 대한 열망이 뿜어져 나왔다.
슬며시 당군악에게 눈웃음을 치는 그녀.
여우가 폭스짓을 하는 게 무슨 문제겠냐마는.
'이 여우 년이···,'
어디서 교태를 부려?
태주가 사는 지구라면 저 눈웃음에 예금적금 다 깨서 가방을 홀라당 바치는 남자들이 줄을 섰을 테지만 여기선 어림도 없다.
그런데 거래가 끝났어도 아직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은 서왕모, 독선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잠시 머물러도 되나요?"
"···아! 영화도 보시고 가시려고?"
"그래요."
"뭐, 이 정도는 서비스로 해드리지."
"서, 서비스?"
"그런 게 있소. 편하게 앉아서 시청하고 돌아가시오. 아르망디도 한잔 따라드리리다."
"아!"
아마 내일 또 올 것이다.
그때는 요금을 받아야지.
당군악이 운영하는 선계 극장에 두 명의 관객이 더 늘었다.
※ ※ ※
금수호 비서관은 황명을 전달한 후, 뉴서울로 돌아갔다.
그리고 태주는 백서연, 그리고 백홍표와 함께 회장실에서 대책을 논의했다.
"자! 조언 좀 주세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백홍표가 말했다.
"종신 시장이라, 이건 영지 하사와 다를 바 없군. 아무리 신약으로 공을 세웠다지만···, 이건 너무 과해."
그의 말이 맞다.
훈장 상신이나 포상금만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사실 이유는 알고 있다.
황명 전달이 있기 전 금수호 비서관과 나눈 대화.
그는 뭔가 알고 있음이 틀림없다.
자신과 일이삼백이가 흑악지룡을 죽였다는 사실을.
반면 백서연은 호들갑을 떨었다.
"과하면 어때요? 고민할 필요 있나요? 구례 종신 시장님인데, 게다가 황제 폐하도 뵐 수 있고."
"서연아, 보통 사람이었다면 넙죽 받겠지만 우리 태주 회장은 달라. 벌써부터 귀찮아하는 표정이 보이지 않니?"
"어음, 그, 그런가요?"
"권한이 커지면 책임도 그만큼 커지는 법이지."
역시 백홍표는 자신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이다.
"결정은 온전히 자네의 몫이야. 어떤 결정을 내리던 자넬 지지하고 도와주겠네."
"고맙습니다."
어쨌든 받아들이나 안 받아들이나 입궁을 하라고 하니까···.
입궁해서 황제를 만나보고 결정하자.
"회장님. 제가 수행단 꾸려볼까요?"
"아뇨, 이번엔 혼자 갈게요. 황궁에서 사람을 보낸다고 했으니."
그리하여 또 한 번의 뉴서울 행이 결정됐다.
※ ※ ※
드디어 입궁 당일.
태주는 뉴서울 역에 도착했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일이삼백이는 억지로 지리산에 두고 왔다.
드레스 코드는 가죽 코트.
한 손엔 커다란 가방을 들었다.
역을 빠져나오자 출입구 바로 앞에서 자신의 이름이 쓰인 팻말을 들고 기다리는 누군가.
"김태주 회장님?"
"네, 접니다."
"어서 오십시오. 황궁 비서실에서 근무하는 서필명입니다."
"아! 반갑습니다."
"저도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가방 이리 주세요.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태주는 황궁 비서실에서 보낸 리무진에 올랐다.
삼한제국의 황궁은 뉴서울에서 가장 높은 산 아래 있다.
사방이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중앙엔 뉴서울에서 가장 높은 타워가 솟아 있는데, 그곳이 바로 황궁.
들어가는 통로는 하나.
태주가 탄 리무진은 황궁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에 들어섰다.
여길 지나면 황궁일까?
아니다.
황궁 근처에도 못 간다.
그만큼 넓은 곳이 황궁.
자동차가 멈춰서고, 신분 확인 절차가 이뤄진 후에 내부로 진입하는 리무진, 서필명이 관문 근위병에게서 받은 출입증을 태주에게 건넸다.
"이걸 목에 거시면 됩니다."
받아서 목에 걸고,
"바로 황궁으로 들어가나요?"
"아닙니다. 그랜드 홀이라는 방문자 대기실로 가실 겁니다."
뭐가 이렇게 커?
그랜드 홀.
하나의 거대한 공항 대기실 같은 공간.
방문객을 위한 식당과 커피숍, 기념품 매장 등이 있다.
그랜드 홀은 일종의 사교 무대이기도 하다.
서로 목에 걸린 출입증을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상대를 탐색하고, 인사도 나누고.
사교를 나눌 필요가 없는 태주는 묵묵히 서필명 비서의 뒤를 따랐다.
"검색대로 안내하겠습니다."
"네."
검색대에 길게 늘어선 줄.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
기다려야 하나?
"이쪽으로."
서필명이 태주를 사람이 아무도 서 있지 않은 검색대로 안내했다.
VIP용 검색대 같은데.
손에 든 가방과 함께 검색대를 통과한 후,
"흐음···,"
황궁으로 들어서는 마지막 관문.
일단 매우 넓었다.
숫자가 적힌 게이트 앞에서 또 줄을 서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황궁으로 입장하는 마지막 게이트입니다."
"그래요?"
"우린 1번 게이트로 들어갈 겁니다."
황제가 기거하는 본궁은 1번 게이트, 황후들이 있는 내궁은 2번 게이트, 황태자 및 황자들이 사는 별궁은 3번 게이트, 황궁 내부 실무 관청은 4번 게이트, 행사장은 5번 게이트.
태주는 서필명과 함께 1번 게이트 앞에 섰다.
'나 혼자인가?'
그런 것 같다.
사실 황제를 만나기 그리 쉬울까?
게다가 요 몇 년간 1번 게이트에 선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태주 혼자 만이었다.
다른 게이트엔 사람들이 바글바글하지만 1번 게이트엔 단 1명, 당연히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1번 게이트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태주는 사람들의 주목을 애써 참으며 1번 게이트 출입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1번 게이트라면 황제와 만난다는 말이잖아.'
'누구지?'
'황제 폐하와 만난다고? 몇 년간 폐하를 만난 사람이 있었나?'
'금수호 비서관과 황족들 말고는 없지.'
'가만! 출입증 이름이···, 김태주?'
'아! 태홍 바이오!'
'오! 저 사람이 회장이었어?'
'김태주 회장이라면 어쩔 수 없지.'
'저 정도는 되어야 황제 폐하와 독대하는구나.'
다 들린다.
뜨거운 시선도 함께 느껴진다.
태주는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바로 옆 2번 게이트를 통과하기 위해 기다리던 사람들, 제국군 정복을 입은 장성들과 함께 서 있는 두 명의 중년 부부.
태주는 흠칫 놀랐다.
보자마자 그들이 누구인지 알았다.
'···아버지.'
김웅방 준장과 새엄마 혼다 미쯔이였다.
아무리 세상이 좁다지만 하필 여기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태주는 그저 말없이 김웅방을 쳐다보았다.
한참을 서로 바라 보았다.
동시에 무언의 대화가 오고 갔다.
태주는 아버지 김웅방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다.
순간!
1번 게이트의 문이 열리고.
"태홍 바이오 김태주 회장님, 1번 게이트를 통해 입궁하시길 바랍니다."
그러자 천천히 등을 보이며 돌아서는 김웅방.
태주도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등을 돌렸다.
그리고 황궁 비서 서필명의 안내를 받으며 1번 게이트로 들어갔다.
김웅방은 입궁하는 아들의 뒷모습을 더는 쳐다보지 않았다.
이미 남남이 된 마당에 대화를 나누는 것도 무의미했다.
자신이 태주에게 살가운 태도를 보이면 아내는 그걸 빌미로 계속 졸라댈 것이다.
아들이 가진 재산과 권력을 빼앗으려고.
'그걸로 됐다.'
마나 거부자로 태어나 20살 중반을 넘기지 못할 것 같았는데,
성공한 아들을 바라보는 뿌듯한 아비의 심정.
하지만 그보다 부끄러운 마음이 더 컸다.
아들을 볼 면목이 없다.
앞으로 다신 태주를 볼 일이 없을 것이다.
먼저 연락할 생각도 없을뿐더러, 연락이 와도 받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아들을 어떻게 봐?
해준 것 하나 없는데.
태주의 친엄마는 자신이 사관학교를 다닐 당시 선임 교관의 딸이었다.
일반인이지만 첫눈에 반해 결혼했다.
장인인 교관도 자신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혼수품으로 영약 하나를 쥐여 보냈을 정도였으니까.
그 덕에 마스터까지 올랐다.
불행하게도 몸이 약했던 아내는 태주를 낳자마자 죽었다.
죽어가는 아내의 손을 잡고 맹세했었다.
아들을 반드시 잘 키우겠노라고.
하지만 태주가 마나 거부자라는 걸 알았을 때 덮쳐왔던 지독한 상실감.
아들마저 일찍 떠나나?
마음이 약해지니 기댈 데가 필요했다.
그래서 재혼했고,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희한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내의 얼굴도 잊어버렸고, 또한 마나 거부자 아들마저 짐으로 다가왔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이미 돌아선 감정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새로운 가족들이 생겼으니까.
새 아내가 태주를 죽이려고 했던 걸 나중에 알았을 때도 그걸 묵인했다.
그로 인해 죄책감은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혀왔다.
하지만 절연한 아들이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이제는 마음이 편해졌다.
'부디 잘살 거라.'
반면 혼다 미쯔이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녀의 귓가에 사람들의 쑥덕대는 소리가 노골적으로 들려왔기 때문이다.
'뭐지? 김태주 회장과 김웅방 준장, 서로 아는 사이 같아. 안면이 있었나?'
'몰랐어? 김태주 회장, 원래 파주 영지 장남이었잖아.'
'아! 마나 거부자라서 쫓겨난 아들이 김태주 회장이었어?'
'호적에서도 팠고, 절연한 상태래.'
'단단히 미쳤구나. 굴러 들어온 복을 제 발로 찬 거야?'
'설마 김웅방이 그랬겠어? 새엄마가 지 친아들 영지 물려주려고 헛짓거리 한 거지.'
'쯧쯧, 쌤통이네. 자업자득이야.'
'그래서 저렇게 구경만 하고 있었구나.'
대부분이 비웃음.
밀려오는 수치심에 얼굴만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휘적휘적 저쪽으로 걸어가는 남편 김웅방.
"당신···,"
이 순간 그녀는 김태주보다 남편이 더 미웠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한 채 얼굴이 시뻘게진 혼다 미쯔이.
마치 악귀와 같았다.
< 입궁(1) > 끝
ⓒ 꾸찌꾸찌
=======================================
< 입궁(2) >
황제의 부인은 3명.
후사를 보기로 결심했을 때 3명의 황후를 동시에 맞아들였다.
본처와 첩의 구분은 없다.
모두가 다 같은 황후의 위치.
마나 적합자들이었고.
첫 번째 부인 최황후는 아들 둘만 낳았다.
연년생으로 황태자와 이황자, 어렸을 때부터 앙숙이더니 다 커서도 싸운다.
두 번째 부인 염황후는 아들 하나와 딸 둘.
삼황자와 일황녀, 삼황녀.
세 번째 부인 주황후는 아들 둘과 딸 하나.
사황자와 오 황자, 그리고 이황녀.
오늘 혼다 미쯔이와 김웅방은 두 번째 부인 염황후를 만나기 위해 2번 게이트 앞에 있었다.
둘만 온 것이 아니다.
김웅방의 장인이자 미쯔이 부인의 아버지인 혼다 카즈오도 함께 왔다.
염황후에게 제국 내 일본계 세력들이 줄을 대고 있었으니까.
이미 사망한 염황후의 아버지는 염씨로 창씨개명, 아니 성본 변경을 한 일본계 장성이었다.
황제는 민족 통합정책의 일환으로 그녀를 황후로 받아들였다.
혼다 카즈오와 미쯔이 부인 일행은 염황후에게 줄을 대러 왔다.
그나마 잘 만나주지도 않는 걸 삼고초려 끝에 겨우 약속을 잡았다.
하지만 김태주는 오자마자 1번 게이트를 통해 입궁했다.
미쯔이는 아침부터 계속 기다리고 있었고,
그뿐만이 아니다.
남편 김웅방의 태도.
그가 김태주를 바라보는 눈빛.
김태주를 향한 애틋한 감정.
그것이 혼다 미쯔이는 미치게 만들었다.
"억울한 모양이구나."
"···아뇨, 그냥 화가 나요."
어느새 다가와 그녀에게 슬쩍 말을 건네는 아버지 혼다 카즈오.
"그럴 만도 하지, 우린 염황후에게 줄을 대려고 2번 게이트에서 이름이 불리길 목 빠지게 기다리는 중인데 저놈은 황제와 독대를 하려고 들어갔으니."
왠지 약 올리는 듯한 목소리.
"김태주가 황제와 만나서 무슨 이야길 나눌지 궁금하구나."
카즈오는 딸이 자신의 말을 듣든 말든 이야기를 혼자 이어나갔다.
"다 가진 놈이야. 돈도 많이 벌었을 테고, 잘나가는 기업체도 있고, 따르는 사람도 있을 테고···, 하지만 놈이 가지지 못한 것이 하나 있지."
그제서야 아버지를 보며 입을 여는 미쯔이.
"뭐죠? 놈이 가지지 못한 게?"
"땅.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할 수 있는 기반."
"···으음."
미쯔이는 아버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챘다.
"이, 이미 쫓겨난 놈이에요. 남편과는 남남이고."
"호적이야 법원에 재심을 걸어 복원하면 되지. "
"그건 끝난 문제라 되돌릴 수 없어요. "
"김태주가 황제에게 부탁하면 넌 막을 수나 있고? 놈은 돈이 많다. 재판하게 되면 반드시 이길 거야. 판사들이 누구 편을 들까?"
"···."
순간!
"규슈 영지 혼다 카즈오 중장님 일행은 2번 게이트를 통해 입궁하시길 바랍니다."
카즈오는 피식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잘 생각해보아라. 허나 시간이 그리 많지 않구나."
사실 혼다 카즈오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김태주가 황제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든 말이다.
황제의 상태가 어떤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안다.
이번 흑악지룡 북상 사태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황제.
병환이 매우 깊다는 소문이 있다.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김웅방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다 해도 신경 쓸 여유조차 없을 것이다.
황제가 죽으면 제국은 황위 계승의 진흙탕 속으로 빠져들게 될 터, 그때가 바로 규슈 영지를 떠나 파주에 정착할 기회다.
※ ※ ※
태주는 비서관의 안내를 받으며 1번 게이트를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를 만났다.
하지만 무덤덤했다.
원망 같은 건 조금도 없다.
도리어 아버지의 행복을 빌었다.
특별한 것이 있나?
부모와 인연을 끊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다만 시간이 아주 많이 흘렀을 때, 그래서 자신의 감정이 희석되었을 때, 한번은 찾아갈지도 모르지.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독립한 이상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먼저 챙겨야 한다.
그럴 목적으로 황궁까지 왔고.
황제에 대한 정보는 미리 조사해 왔다.
200살로 추정되는 황제의 나이.
그럼에도 겉모습은 40대 중년처럼 보인단다.
또한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정보도 확보했다.
리더스 클럽의 이고르 바라노프와의 전화 통화로.
- 황제 폐하께서 요 몇 년 동안 공식 석상에 나타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여러 추측들이 난무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신빙성 있는 건 폐하께서 투병 중이라는 정보입니다.
투병이라, 그랜드마스터가? 대체 무슨 병이길래.
- 병명은 저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황태자와 황자, 그리고 외척들의 움직임을 보면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고르는 황위 다툼을 언급하고 있었다.
- 황제 폐하가 건재했다면 서로 싸울 일도 없었겠죠. 벌써 클럽 내부에서도 편이 갈라졌습니다.
만나면 알게 되겠지.
진짜 병중인지, 아니면 그런 척하는 건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엘리베이터를 타겠습니다."
황궁 타워 최상층에 올라갔다.
꼬불꼬불한 복도를 지나 정면을 가로막은 철문.
곧 황제와 만난다.
앞에 다가서자 문이 스르륵 저절로 열렸다.
안에는 사방이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방.
"다 왔습니다. 전 여기까지 옵니다."
"네? 다 왔다니···."
태주가 안으로 들어가자 바깥문을 닫고 돌아가는 서필명.
동시에.
지이이이잉!
벽면이 열렸다.
그러자 나타나는 벽면 너머 풍경.
수많은 의료기기들이 위치한 중앙 침상에서 상반신만 일으키고 있는 중년 남자, 그리고 그 옆을 지키고 선 금수호 비서관.
'보안 한번 철저하네.'
황제의 거처니 오죽할까?
단순한 방이 아니었다.
일종의 중환자실 느낌이었다.
'소문이 맞았구나.'
금수호가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 폐하께 예를 갖추게. 당장 무릎을 꿇고···,"
"아아!"
황제가 금수호를 제지했다.
"됐네. 자네도 안 하는 짓을 왜 남에게 강요하나?"
"저도 처음엔 납작 엎드렸습니다만?"
"지금은 안 하잖아."
"아니, 김회장은 초면인데 왜 불공평하게···,"
황제는 금수호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손을 들어 태주를 불렀다.
"쿨럭쿨럭, 거, 거기 엉거주춤 서 있지 말고 이리 가까이 오게."
"네."
"몸이 좋지 않아서 짧게 이야기하겠다."
잠시 숨을 가다듬더니.
"금비서관에게 이야길 들었겠지만, 짐은 그대에게 구례 종신 시장이라는 직위를 부여하고자 한다. 부담 가질 필요 없다. 영지 하사와 똑같은···,"
만나자마자 본론부터 꺼내는 황제.
하지만 태주에겐 황제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조금 전부터 계속 풍겨오는 역한 냄새.
오직 자신만 맡을 수 있는, 추악하고 끈적한, 마기의 악취.
'설마 황제가···,'
아니다.
마인에게서 나는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정상적인 마나도 함께 섞여 있다.
'강제로 주입된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다.
병상에 누운 이유이기도 할 테고.
황제는 말을 늘어놓다 말고 태주를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불편한 거라도 있나? 내 말에 집중하지도 않는 것 같고."
"아! 죄송합니다."
구례 종신 시장 용건으로 황제를 알현하는 입장이지만.
'확인은 해보자.'
할 건 해야지.
"폐하. 외람되오나···,"
"응? 왜 그러는가?"
"하나만 여쭈어봐도 될는지."
"어려워 말고 편하게 물어보라."
"혹시 병환의 이유가 마인 때문입니까?"
흠칫 놀라는 황제와 금수호.
"···어, 어떻게?"
"폐하에게서 마기의 냄새가 납니다."
"허어, 냄새라···, 말을 들었지만, 그럼 날 마인으로 의심하진 않았나?"
"그 정도는 구별합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인했다.
"맞다. 마인과 싸우다가 일격을 당했다. 천둥벌거숭이처럼 세상 높은 줄 모르고 날뛰다가 큰코다친 셈이지."
솔직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타공인 제국 최강자인 황제를 이렇게 만들 실력의 마인이 존재한다고?
"내 몸 안에 놈이 남긴 마기의 말뚝이 있다. 마나 로드와 심장, 그리고 이 머릿속에 박혀있지. 시한폭탄 같은 거랄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자신이 직접 이기언을 처리할 때 썼던 방식이니까.
"짐이 그대에게 편지를 보내 경고한 거 기억하는가?"
"네."
"자네가 얼마 전에 합빈 교도소에서 마인을 검거해 준 건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조심, 또 조심해야 해야 한다. 마인들을 만만히 보지 마라. 난 제국의 인재를 잃고 싶지 않아."
"···."
"신경 쓸 필요 없다. 그대는 내 병 때문에 온 것이 아니다."
황제는 생각보다 좋은 사람 같다.
지배자의 풍모가 엿보였다.
'고쳐줄까?'
그가 건재하면 제국이 안정될 터.
'혼원무상독령공으로 밀어버리면···,'
황제의 맥문을 잡아서 마나 로드로 독기를 주입해 마기의 말뚝을 강제로 부수는 방법.
하지만 그러기엔 황제의 몸이 너무 쇠약하다.
강력한 힘으로 파괴해야 하는데, 그걸 견딜 수 있을지나 모르겠다.
말뚝을 없애는 방법은 두 가지.
스스로의 능력으로 해소하거나, 아니면 마나를 남긴 놈이 회수해가거나.
'하나가 더 있긴 하지만···,'
사실 가장 확실한 방법.
'가지고 오길 잘했네.'
아마 오늘 이후로 황제는 달라질 것이다.
황제는 화제를 돌렸다.
"어떤가? 구례 종신 시장을 받아들일 텐가? 아직 답을 듣지 못했다."
맞다.
지금까지도 못 정했다.
책임이 무거워지는 게 부담스럽기도 하고, 반면 제2의 고향이 된 구례를 제국 최고의 도시로 성장시키고 싶은 마음도 있긴 하고.
"제 능력이 구례라는 큰 도시를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됩니다."
"하하하, 그대면 충분하지. 지나친 겸손은 위선이다. 설사 못 미친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대는 인복이 있는 사람이니까."
뭐, 인복으로 따지면 어디 가서 꿀리진 않지.
"짐을 보라. 몇 년 동안 이곳에만 처박혀있는데도 제국은 평화롭게 돌아가고 있다. 사람만 잘 쓰면 돼. 그대는 정책의 방향성만 제시해도 충분하다."
황제의 말에 태주는 결정을 내렸다.
"네, 받아들이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힘을 가지자.
온갖 풍파가 밀려와도 꿈쩍하지 않고 당당히 버티는 힘을.
"곧 승전식 행사가 열릴 것이다. 자네에게도 곧 연락이 갈 테고. 짐도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참석할 테니, 그때 시장직을 제수하도록 하지."
"황공하옵니다."
태주는 고개를 숙이고 나서 가지고 온 가방을 탁자 위에 올렸다.
"여기···,"
"이건 뭔가?"
"진상품입니다. 처음 폐하를 뵙게 됐는데, 빈손으로 올 수는 없죠."
"···혹시 고라니 고기? 그렇지 않아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다. 그거 때문에 입맛이 돌아서 기운을 차렸거든."
"고라니 고기는 아닙니다. 더 좋은 겁니다. 두 개 넣었습니다. 금비서님과 나눠 드십시오."
"응?"
"정말 귀한 거라서···, 억만금을 줘도 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폐하의 병세에 도움이 될지도···,"
"대체 뭐길래?"
아무튼 용건은 끝났다.
간단하게 서로 덕담을 나눈 후, 금비서가 밖으로 태주를 안내했다.
"폐하의 상태에 대해선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네. 누가 물어보면 여전히 건재하시다고 말하면 돼."
"걱정하지 마십시오. 금비서관님."
태주는 황제의 처소를 빠져나갔다.
금수호는 황제에게 슬쩍 물었다.
"어떠십니까?"
"듣던 대로 대단해. 보기만 했는데도 알 것 같군. 내 상태가 좋을 때 붙었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겠어."
"어떻게 폐하께선 싸우는 생각밖에 안 하십니까? 그 때문에 이런 고초를 겪고 계시는 데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방이나 열어봐."
금수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가방을 열었다.
그러자 방안을 가득 채우는 기막힌 향기.
"뭔가?"
"복숭아 같습니다. 크기도 매우 크고."
"···복숭아?"
살짝 실망한 표정의 황제.
"생각보다 김회장 통이 작군. 난 영약이라도 주는 줄 알았지."
"쯧쯧, 이번 전쟁으로 돈도 갈퀴로 끌어모았다면서 고작···,"
"그래도 향기는 좋군. 이리 가져오게."
금수호는 가방을 들어 침상에 기대고 있는 황제의 앞에 놓았다.
"오! 이렇게 큼지막하다니, 자네도 하나 먹어."
"이따 갈 때 가져가겠습니다."
별 감흥은 없었다.
귀한 거라고 했지만 그래봤자 복숭아다.
'뭐, 가지고 온 성의를 봐서···,'
황제는 복숭아 2개 중 하나를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으적,
입안에서 터지는 과즙.
후르릅.
황제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한 번 더 씹었다.
으적, 우물우물.
이제부터는 아예 입을 떼지 않았다.
으적, 으적, 으적···,
복숭아 먹방의 현장.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꿀꺽,
지켜보고 있던 금수호의 입에도 군침이 고인다.
'하나는 내 거라고 했지?'
슬쩍 손을 뻗어 가방의 손잡이를 잡는 금수호.
하지만 그 순간!
덥석!
황제가 복숭아를 먹다 말고 금수호의 손목을 잡았다.
"자네 지금 뭐 하고 있나?"
"하나는 제 거라서, 좀 전에도 먹어보라고 하셨잖습니까?"
"내가 언제?"
"···네?"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황제.
"뭔가? 그 눈빛은? 짐을 도둑놈 취급하는 눈치인데."
"기, 김회장도 나눠 먹으라고···,"
"난 못 들었네."
"···."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하지만 황제는 이 복숭아가 왜 귀한지 깨달은 후였다.
"내가 자네보다 나이도 많고, 몸도 온전치 않은데, 이 귀한 걸 더 구해주진 못할망정 빼앗아 먹으려고 해? 김회장도 내게 도움이 될 거라 말했지 않은가!"
"아, 아니 그래도···,"
"하아, 내가 너무 오래 살았어. 그때 죽었어야 했는데, 살아서 민폐만 끼치고."
"···다 드십시오."
그제서야 만족한 미소의 황제.
어느새 한 개를 다 해치우고, 남은 하나마저도 손에 들었다.
으적, 으적, 으적···,
결국 금수호가 한마디 했다.
"저어, 하, 한 입만···,"
물론 황제는 들은 체도 안 했다.
금수호와는 오랫동안 우정을 나눈 사이지만 이건 도저히 양보할 수 없었다.
이 씨도 없는 복숭아는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한입 베어 물자마자 온몸으로 퍼지는 상서로운 기운.
'영약 먹었을 때와는 비교가 안 돼.'
몇 년 동안의 투병 생활에서 오늘처럼 몸이 가뿐한 적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떨치고 일어날 수 있을 것 같다.
'허어, 벌써 다 먹었나?'
황제는 모를 것이다.
이것이 선도(仙桃)라는 사실을.
선기(仙氣)를 담고 있는 선계의 과일이란 것을.
아무리 미약하다 해도 선기는 부정하고 삿된 기운을 물리치는 특성이 있다.
혼탁할 수밖에 없는 마인의 마나와는 천적 관계.
그래서 황제의 마나 로드에 단단히 틀어박혀 있던 마기의 말뚝에,
찌직!
미세한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 입궁(2)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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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궁 이후(1) >
황제와의 면담을 마치고 바깥으로 나오자 서필명 비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회장님, 모셔드리겠습니다. 어디로 갈까요? 구례로 가실 거면 제가 역까지···,"
태주는 오늘 구례로 돌아갈 생각이긴 하지만 이왕 뉴서울 온 김에 몇 명 만나보고 가자.
"아뇨, 역 말고 리더스 클럽까지 데려다주실 수 있습니까?"
"네, 당연하지요."
그래서 리더스 클럽으로 왔다.
리무진이 클럽 정문에 도착하고 안에서 태주가 내리자,
"어?"
"헛!"
"빠, 빨리!"
갑자기 부산해지는 가드들.
태주는 리무진에서 내려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문이 열리자 저 끝에서 헐레벌떡 달려오는 이고르 바라노프.
"회, 회장님! 아, 아니 회원님!"
"오랜만입니다."
"미리 연락을 주시지 그랬습니까? 입궁하셨다면서요?"
"벌써 소문이 퍼졌나요?"
"하하하, 말도 마십시오. 난리도 아닙니다."
이상할 것도 없다.
입궁할 때부터 그렇게 시선을 끌어댔는데.
"구례로 가기 전에 얼굴이나 보려고 왔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이참에 며칠 쉬었다 가시지···."
"하하, 할 일이 많아서요."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죠. 이리로!"
태주는 이고르와 함께 다이아몬드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띵!
문이 열리고 안에서 내리는 사람들.
순간!
"···어?"
"아!"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뜬 백발의 노인.
"기, 김회장!"
"정회장님."
백두 그룹 정욱철 회장이었다.
"이 사람아! 볼일을 마쳤으면 나한테 먼저 연락할 것이지."
"안 그래도 하려고 했습니다."
"허허, 같이 올라가세."
다이아몬드 등급을 받은 지 꽤 오래됐지만 전용룸에 온건 이번이 두 번째.
심지어 처음 왔을 때 마인 세르게이를 잡느라 앉아있지도 못했다.
푹신한 소파에 앉은 세 사람.
태주와 정욱철, 이고르 바라노프.
"자자, 나도 소문 들었네. 입궁했다면서?"
"했죠."
"황제 폐하와 만났나?"
"입궁의 목적이 그거였습니다만."
정욱철은 태주의 눈치를 보더니 속삭이듯 물었다.
"어떠셨던가?"
"뭘요?"
"황제 폐하 말이네. 자네도 알고 있었을 테지만 떠도는 풍문이 있었어. 으음, 모, 몸이 좋지 않으시다고."
이고르도 그게 궁금한 눈치.
모두 태주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떡할까?
금수호 비서관은 누가 황제의 건강 상태를 물으면 그냥 건재하다고 둘러대라고 했다.
그런데 그게 진짜 사실이 될 수도 있다.
황제가 선도를 먹었다면 말이다.
'2개를 줬으니까 하나는 먹었겠지?'
가방은 분명 열어봤을 것이고, 향기를 맡았다면 참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진실을 말해도 된다.
금수호의 부탁도 어기지 않는 일이니까.
"건재하십니다."
당장은 아니지만 곧.
"으음, 진짜인가?"
"제가 왜 여기서 거짓말하겠습니까?"
"허어, 듣던 거와는 달라서 그러네. 폐하의 병환이 심각한 수준이란 소문, 거의 정설로 알고 있네만."
이고르도 정욱철과 다를 바 없었다.
"정욱철 회원님 말씀이 맞습니다. 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클럽의 다른 회원님들도 이쪽저쪽에 선을 대는 상황이고요."
둘 다 믿기 어렵다는 기색.
그럴 수밖에.
현재 벌어지고 황위 계승 투쟁의 불씨가 바로 황제의 병환이었다.
"아무튼 전 진실을 말했어요. 폐하께선 건강하십니다. 믿고 말고는 알아서 하시고."
"···으음."
"후우."
고민은 길지 않았다.
제일 먼저 행동한 건 이고르 바라노프.
"우리 회원들에게 경고 정도는 해야겠습니다. 황제 폐하 와병설, 혹은 조기 사망설에 베팅한 사람들이 많아서, ···괜찮겠습니까?"
"알아서 하세요."
"감사합니다. 대신 정보의 출처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백두 그룹 정욱철 회장도 그 자리에서 스마트폰을 들었다.
"나야, 오늘 제안 들어온 거 있지? 그거 백지화시켜. ···하라면 해! 내가 책임지면 되잖아."
전화를 끊고 나서 태주에게.
"사실 오늘 이황자 측에서 접근해왔네."
"왜요?"
"원래 이황자 스폰서가 미리내 그룹이거든. 그런데 관계를 끊을 계획이라더군."
"흠."
"이황자도 무서운 사람이야. 이기언이가 중환자실에 입원한 후, 미리내 그룹 사정이 어려워지자 저렇게 냉혹하게 나오는 걸 보면···, 결국 팽당한 거지."
무슨 사정인지 짐작 간다.
"미리내 그룹에게 줬던 특혜를 우리에게 넘겨줄 테니, 이황자 세력과 백두 그룹 간의 파트너쉽 계약을 맺자고 권유해왔어."
"그래서 맺었어요?"
"검토해보겠다고 했었네. 방금 그걸 백지화시켰고."
"잘하셨어요."
"퇴짜 맞았으니 다시 미리내와 손잡을 거야. 뭐, 우리 사업은 조금 어려워지겠지만."
"그건 걱정하지 마시고."
아직은 황제 와병설이나 조기 사망설이 우세할 것이다.
그 출처가 황궁이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황제와 가까운 사람들에 의해 흘러나왔다.
황후, 또는 황자, 황녀.
그래서 황제가 건재하다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태주 말고는.
리더스 클럽 이고르가 경고 메시지를 돌리고 있지만 믿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의문.
'뭐, 알아서 하겠지.'
그때였다.
찌르르르,
'왔구나.'
태주는 소파에 일어나 말했다.
"저 잠시 화장실 좀."
화장실로 걸어가면서 무한공간을 열었다.
일단 보낸 물건부터 확인하자.
'와! 대박!'
수북하게 쌓여있는 귀한 선도들.
공유창고가 또 커졌는지 150개 이상 들어있었다.
전에 온 것들과 다 합치면 300개 가까이.
이제부터는 하루에 한 개씩 먹어도 되겠다.
'이번엔 편지가 없네.'
쓸 시간이 없었겠지.
열리는 시간이 극히 짧으니까.
태주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면서 공유창고에서 선도를 빼내고 준비한 물건들로 채워 넣었다.
당군악을 위해 항상 준비된 답례품들.
비욘드 엘리트 마나 결정체도 넣었다.
염치없지만 독선에게 결정체 가공을 부탁하려는 목적, 신령비도를 만든 선인도 있다고 했으니.
그리고 미리 써 놓은 장문의 편지도 함께 넣었다.
마지막 영혼 연결로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보내준 물건을 어떤 용도로 사용했는지, 현재 혼원무상독령공의 성취는 어느 정도인지.
'실제로 만나봤으면 좋겠는데.'
당군악이 지구로 오든, 자신이 선계로 가든 말이다.
'···그건 불가능하겠지?'
태주는 다시 돌아와 정욱철 회장, 이고르 바라노프와 밤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한적한 곳으로 가서 만리비검을 꺼냈다.
올라올 때는 기차로 왔지만 내려갈 때는 날아서 가보자.
※ ※ ※
궁정 비서관 금수호는 포자 독 낙타 고라니 스테이크가 올려진 트레이를 끌고 황제가 거처하고 계시는 병실로 들어갔다.
진상품 복숭아를 혼자서 다 먹은 얄미운 주군이지만 식사는 챙겨줘야지.
스르륵, 바깥 문을 통과해, 지이잉, 안쪽 문까지 열고 들어가서,
"폐하! 식사를 준비···, 헉!"
깜짝 놀라는 금수호.
황제가 침상에서 내려와 두 발로 서 있었다.
"마, 맙소사! 대체 이게 무슨?"
"호들갑 떨지 말라. 겨우 말뚝 하나 치웠을 뿐이다."
"어, 어떻게?"
"무엇 때문일 것 같나?"
"···설마?"
"맞네. 김회장이 준 복숭아 덕분이지."
금수호는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마인에게 당한 후, 몇 년 동안을 꼼짝없이 병실에서만 누워지내던 황제 폐하였다.
그런데 고작 복숭아 2개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김회장에게 몇 개 더 달라고 해볼까요?"
"쯧쯧, 그 귀한 걸 또? 짐을 염치없는 군주로 만들 셈인가? 그렇지 않아도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하나, 고민이 태산 같은데,"
"그래도 눈 딱 감고···."
"귀한 복숭아 2개면 충분하네. 마기 말뚝이 많이 약해졌어. 다 치워버리는 건 시간 문제야."
"아아아아!"
감격한 표정의 금수호.
"황후님들에게 당장 알리겠습니다."
"아니, 알리지 말게. 아이들에게도, 그냥 가만히 있어. 승전식장에서 보이면 돼."
왜 그러는지 짐작이 간다.
"흐음, 폐하다우시군요."
"뭐가?"
"황후님들을 비롯해 황태자, 황자, 황녀님들이 기절초풍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거 아닙니까?"
"껄껄껄, 역시 수호, 자넨 내 마음을 잘 알아. 일종의 충격요법이라고나 할까."
황제는 금수호가 가지고 온 트레이 앞으로 걸어가 잘 구워진 고라니 스테이크를 칼로 자르며 말했다.
"아무리 아이들은 싸우면서 큰다지만···, 그래도 지켜야 할 선이 있는 거네. 마누라들도 문제가 있고, 이참에 집안 단속이나 해야겠어."
"네네, 뭐, 가화만사성에 수신제가하셔야죠."
"그래서 말인데,"
"하명하십시오."
"승전식 일정을 좀 늦춰보게. 내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서 그렇다고 슬쩍 흘리고."
그리고 그날.
제국 궁정 비서실에서 각 기관으로 공문이 날아갔다.
언론에도 보도자료가 뿌려졌다.
<제국 황실 정부, 천리장성 전쟁 승리 공신 명단 발표 연기.>
<승전식 날짜 또한 연기될 것으로 전망.>
<연기의 이유는 알려지지 않아.>
<행사 연기도 연기지만, 황제 폐하의 승전식 참석 여부도 불투명.>
<연이은 폐하의 공식 행사 불참, 진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익명의 궁정 비서실 관계자에 따르면 황제 폐하의 건강 상태에 문제가 있는 걸로 알려져.>
온갖 소문들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날이 갈수록 더 했다.
황태자를 비롯한 황자, 황녀들은 아버지 병환이 얼마나 나빠졌는지 접견을 요청했지만 모조리 거부당했다.
황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며칠이 지나자 황제 와병설은 완벽한 정설로 굳어지고 말았다.
※ ※ ※
선계(仙界).
당군악의 천막 극장에 모인 10여 명의 선인들.
검선(劍仙)도 무사히 풀려나 합류했다.
뇌옥에 오래 갇혀서인지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아무리 급해도 좀 씻고 올 것이지.
"이보오, 독선! 두부 없소?"
"두부는 무슨!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보셨군."
"흐흐흐, 겨우 몇 편 봤다고."
주선 태백 선인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당군악에게 물었다.
"참! 드라마에서 나오는 그 녹색병 술은 언제 마실 수 있는 거요?"
"···아, 소주 말이군. 그건 너무 싸구려 술이라 태주가 안 보낼 텐데."
"비싸고 싼 게 어디 있소? 저쪽 세상 술이면 다 귀하지. 태주씨에게 맥주도 같이 보내라고 편지를 써보시오, 소맥이나 말아보게."
"공짜로?"
"선도 200개짜리 신선주면?"
"콜!"
"나도 콜! 당장 술 단지 가져오겠소이다."
검선도 할 말이 있는 듯 은근하게 말했다.
"우리 언제까지 이 초라한 천막 안에서 놀 생각이요?"
"천막이 어때서?"
"아니, 드라마 보니까 지구의 인간들은 죄다 번듯한 건물에서 영화를 보더만, 선계에도 멀티플렉스를 만들지 말란 법이 없지."
"···멀티플렉스?"
"그렇소, 판관의 저울추로 족쇄가 풀린 마당에, 거리낄 것이 뭐가 있을까?"
당군악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검선의 말이 맞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하지만 걸림돌도 있다.
"그 커다란 건축물을 어떻게 지으려고? 인력과 장비도 마땅치 않은데."
그러자 비릿하게 웃음 짓는 검선.
"인력이야 밖에서 무릎 꿇고 있는 배신자들 써먹으면 되고, 장비야 술법으로 대체하면 되고."
"아하!"
"쟤들도 알고 보면 불쌍한 놈들 아니겠소? 건물 건축에 동원해서 일 잘하면 용서해줍시다."
당군악도 동의했다.
이러나저러나 같은 선인들.
조만간 용서해주려는 마음도 있었다.
'일단 태주에게 물어보고.'
그때였다.
찌르르르.
"떴다!"
당군악의 외침에,
"헉!"
"왔구나!"
"떴다, 떴어!"
10여 명의 선인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먼저 침착하게 공유창고 안에 든 물건들을 옮겼다.
그리고 서왕모가 준 최상품 선도와 상품 선도를 차곡차곡 안에 넣고, 주선이 가지고 온 고급 신선주 단지도 받아서 넣고.
그러고 나서 편지를 읽어보려던 참이었는데.
'편지가 너무 길군.'
이거 다 읽다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겠다.
태주에게 보낼 편지나 써넣자.
당군악은 만년필과 종이를 꺼냈다.
언제나 귀한 물건을 보내줘서 감사하다는 내용, 선계에 멀티플렉스를 만들 작정인데 어떻게 생각하냐는 내용, 신선주 만든 선인이 소맥을 먹고 싶어 한다는 내용 등등.
빠르게 작성해서 공유창고 안에 넣으니 곧바로 빛이 사라졌다.
'휴우, 아슬아슬했군.'
그러고 나서 당군악은 태주의 편지를 읽었다.
길게 쓰인 편지였지만 꼼꼼하게 읽었다.
'하아!'
잡다한 일상이 쓰여있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눈물이 절로 나온다.
다른 세상의 내가 이렇게 고생하며 살고 있다니.
'마인···,'
똑같진 않다해도 저쪽 세상의 빌어먹을 마교 종자들.
'게다가 비욘드 엘리트 마수라니.'
대체 어떤 요괴길래, 9성의 혼원무상독령공으로도 힘들단 말인가?
부적의 힘을 이용해 가까스로 잡았다지만.
'지구도 마냥 평화로운 세상이 아니었어.'
스슷!
당군악은 태주가 보내온 비욘드 엘리트 마수의 마나 결정체를 꺼냈다.
'이게 그놈 몸에서 나온 거였군.'
신선들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음?"
"어?"
"···이건?"
"여, 여의주 같은데."
"아니야, 여의주치고는 기운이 작고 혼탁해."
"용이 씹다 뱉은 건가?"
당군악은 철장 선인에게 물었다.
"철장, 이걸로 무기를 제련해 줄 수 있겠소? 선도는 넉넉하게 쳐주리다."
"안 될 건 없지만 너무 잡스러운 기운이 많아서."
그러자 옆에서 나서는 귀곡 선인.
"정화하면 되지. 내가 정화해주겠소."
"그럼 만들어보겠소."
검선에게도 물었다.
"검선."
"말씀하시오."
"그대가 아는 검술 중에 인간들이 배울 만한 것이 있소?"
"왜? 저쪽의 그대가 익힐 거요?"
"아니오. 태주의 수하들이 배울 예정이라, 절대독마가 그깟 검술 배워봐야 뭐하겠소?"
"에잉! 누가 독선과 같은 영혼 아니랄까 봐 검술을 너무 경시해."
검선은 못마땅하다는 눈치였지만,
"있소, 없소?"
"아주 많지. 검법서 하나 써 드리리까?"
"그럴 필요는 없고, 찍어서 보내면 되오."
"찍는다니?"
설명보다는 직접 보여주는 게 낫겠다.
당군악은 무한공간에서 태블릿 하나를 꺼냈다.
"응? 그건 우리가 영화 볼 때 사용하는 건데."
"다른 용도로도 쓸 수 있소이다."
그리고 카메라 어플을 실행해 짧은 동영상 하나를 찍어 보여주니.
"오오오오오!"
"대, 대단하군."
"미쳤구나, 미쳤어!"
"···과연 지구는 어떤 세상일까?"
순간!
뭔가 떠오른 듯한 검선의 표정.
"가만! 혹시 내가 검을 펼치는 모습을 이걸로 찍는단 말이오?"
"정확하오."
"그럼 내 모습을 다른 세상의 인간이 볼 수 있고?"
"이 태블릿을 통째로 보내면 볼 수 있을 거요."
"허어."
갑자기!
검선이 팟! 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팟!
다시 나타났다.
고풍스러운 도복을 입고, 지저분한 수염도 말끔하게 정리하고, 단정하게 머리를 묶은 체, 번뜩이는 보검을 손에 들고 나타난 검선.
"난 준비 됐소."
실로 완벽한 신선의 풍모였다.
< 입궁 이후(1)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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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궁 이후(2) >
구례에서의 일상은 변함없었다.
간만의 휴식이다.
뉴서울 지점도 폭발적인 매출 성장에 힘입어 안정적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게다가 전쟁도 끝났겠다, 제정원에서도 마인 수사 요청이 오지 않고.
그저 일이삼백이와 침대에서 뒹굴다가, 배고프면 선도 하나 꺼내 먹고, 심심하면 백화점이나 마트에 가서 독선 당군악에게 선물할 물건을 사서 무한공간에 쟁여뒀다.
선도는 하루에 하나씩 꼭 먹을 생각.
희미하지만 선기가 점점 조금씩 늘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무한공간이 미세하게나마 넓어지고 있었고.
슬슬 신약 개발을 할 시기.
이미 생각해 둔 약이 있었다.
그전부터 염두에 뒀다.
바로 마나 거부증 치료제.
마음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얼마 전까진 마나 거부자였는데.
하지만 태주로서도 매우 난이도가 높아서 고민만 하고 있던 차였다.
왜 어렵냐고 하면 마나 거부증이 선천성 질병이기 때문이다.
강호 무림에서도 '절맥증'이라고 부르는 증상이 있다.
거기서도 고치기 매우 어려운 병이다.
인위적인 방법으로 혈맥을 타통시키고, 벌모세수를 이루면 낫는다지만 그게 어디 쉽나?
절맥증은 혈맥이 막혀 기의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아 시름시름 앓다가 20 초반을 넘기지 못하고 단명한다.
여기까지 보면 마나 거부증과 비슷하지만 서로 본질적으로 다르다.
절맥증은 기의 축기와 순환이 안 되는 것이고, 마나 거부증은 아예 마나 자체가 독으로 작용한다.
즉 절맥증보다 치료하기 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마리는 잡았다.
선도?
그건 안된다.
제국만 해도 마나 거부자 숫자가 얼만데?
최소로 잡아도 200만, 혹은 그 이상.
그리고 선도가 마나 거부자에 효과가 있을지도 불확실하고.
그렇다면?
성공적으로 마나 거부증을 극복한 사람을 사례로 삼아, 어떻게 고쳤는지 들여다보면 된다.
그게 누굴까?
여기 있지 않나.
태홍 바이오 회장 김태주.
태주는 독으로 마나 거부증을 극복했다.
물론 혼원무상독령공이란 절세 신공이 있었기에 가능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독이 자신의 체질을 변화시켰다.
답은 독에 있다.
해독제가 아니라 독약을 만들어보자.
독을 이용해 마나 거부자들의 체질을 개선시킨다.
그러기 위해선 더 많은 독이 필요하다.
전엔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독 말이다.
바닷가로 가서 싱싱한 복어알을 듬뿍 넣어 알탕도 끓여 먹고, 온갖 종류의 뱀을 잡아서 팔뚝에 독니를 박아넣어 보기도 하고, 지리산 밀림에 가서 변종 장수말벌 집을 툭 건드려 벌침에 쏘여 보기도 하고,
'한 번쯤은 해외로 나가봐야 하는데···,'
다른 환경에서 생성된 독물들을 맛보고 싶다.
아열대 구례보다 더 더운 찐열대 기후라든가, 아니면 사막이라든가.
전갈이나 독거미, 독개미, 각종 파충류와 양서류, 그리고 독을 가진 식물들.
해외로 가는 건 어렵지 않다.
검선의 검, 만리비검이 있으니까.
승전식 끝나고 일정을 짜보기로 하고.
그 와중에 태주는 승전식 연기 소식을 언론을 통해 들었다.
황제의 병환이 심상치 않다는 보도도.
'뭐야? 선도 안 먹은 거야?'
아니면 선도를 먹어서 증세가 더 악화되었거나.
알아보려고 스마트폰을 든 순간 금수호 비서관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여보세요? 금비서관님."
- 자네도 소식 들었나? 다름이 아니라···,
금수호가 태주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선도가 효험이 있다, 너무 감사하다, 완전한 회복을 위해서 잠시 시간을 가지는 중이다, 그래서 승전식을 연기했다···.
- 폐하께선 지금 마기를 몰아내느라 혼자 폐관 중이시네. 그래서 내가 대신 전화하는 걸세. 김회장, 정말 고맙네. 덕분에 마기의 말뚝을 두 개나 없앴어.
겨우 두 개?
"총 몇 개였습니까?"
- 7개. 5개밖에 안 남았네. 이젠 시간문제야.
시간이 너무 걸린다.
승전식까지 말뚝을 다 없앨 수 있으려나?
황제가 건강하다고 사람들에게 큰 소리 떵떵쳤는데.
'거짓말한 꼴이잖아.'
그냥 차도가 있는 수준이어선 안 된다.
예전의 그 모습 그대로 돌아가야 한다.
또한 태주도 궁금했다.
건강했을 때 황제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어차피 시간문제라고 하니 기다릴 것 없이 앞당겨주자.
"흐음, 제가 먹던 술이 있는데···, 그걸 마시면 빨리 효과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선도 50개짜리 신선주.
단지에 담긴 술을 소주병에 옮겨 담았다.
그래서 나온 소주병이 여덟 병.
병당 복숭아 6개 정도의 선기가 있다고 보면 될 터.
그중에 두 병은 마셨고 백홍표 형님, 백서연 총괄경영자, 수제자인 순철이와 창훈이에게 각각 한 병씩, 지금은 두 병이 남았다.
- 술? ···그것도 혹시 귀한 건가?
"네."
- 복숭아처럼?
"그보다 더 귀하고, 구할 수도 없어요."
- 으, 으음···,
"드릴까요? 딱 한 병 남았거든요."
- 사실 폐하께서 그대에게 받은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지 고민 중이었네. 그래서 선뜻 달라고 하기엔 너무 염치가 없군.
"저한테 사시면 되죠."
- 오! 그렇군. 그럼 가격은 뭐로 치를까? 돈? 금? 보석?
"요즘 엘리트 마나 결정체가 부족하긴 한데."
- 알겠네. 내 당장 구례로 가지.
몇 개라고 말도 안 했는데,
달랑 하나 가지고 오진 않겠지?
어디 한번 지켜보자.
금수호 비서관이 구례에 도착한 시간은 전화를 끊고 나서 3시간 후, 기차가 아니라 항공기를 이용한 것 같다.
태주는 태홍 바이오 본사에서 금수호와 만났다.
만나자마자 가지고 온 여행용 캐리어 두 개를 태주에게 건네는 금수호.
"가지고 왔네."
"···이건?"
"황궁 비고에서 꺼내 온 거야. 일단 100개 정도, 더 가지고 오려면 장부에 기록을 남겨야 해서."
"···."
엘리트 마나 결정체가 무려 100개란다.
그것도 기록에도 남지 않는 물건.
마수와 투쟁하면서 영토를 넓힌 제국의 역사를 생각하면 그동안 쌓아둔 결정체의 숫자는 셀 수도 없이 엄청날 테지만.
'···기대 이상이야.'
물론 신선주에 비하면 모자란다.
태주는 무한창고에서 미리 꺼내놓았던 신선주 한 병을 코트 주머니에서 꺼냈다.
"여기 있습니다."
"···소주?"
"겉만 소주병입니다. 내용물은 달라요."
"아!"
"이것도 폐하와 같이 드세요."
"···응?"
뭔가 생각났는지 스마트폰을 꺼내는 금수호.
"다, 다시 말해줄 수 있나?"
"뭘···?"
"방금 했던 말."
태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무슨 말을 했지? 그냥 폐하와 같이 드시라고···, 아!'
설마?
"혹시 복숭아 못 드셨어요?"
"···."
"한 입도?"
"···."
그런 것 같다.
아마 권력으로 눌렀겠지.
황제의 마음도 이해가 가고, 금수호 마음도 이해가 가고.
그래서 또 녹음 어플이 실행되고 있는 스마트폰에다 또박또박 말했다.
"황제 폐하, 그리고 금비서관님, 두 분 꼭 같이 드세요."
그제야 만족한 미소의 금수호.
솔직히 측은해 보인다.
황제 다음으로 권력이 강한 사람인데.
이번엔 먹었으면 좋겠다.
※ ※ ※
파주 영지.
김웅방 준장은 밤늦게까지 집무실에서 업무에 여념이 없었다.
작은 영지이지만 할 일이 많다.
기본적인 행정업무, 세금과 재무회계, 치안, 영지 건설, 영지민 복지···,
이것 말고도 더 있다.
황제가 내리는 영지는 거의 마수 밀집지대 부근에 있다.
파주 영지도 마찬가지.
과거 DMZ라고 불리었던 지역.
그 옆에 연천 영지, 철원 영지도 DMZ 근처.
주기적으로 마수 토벌을 해서 숫자를 조절해야 한다.
이것 때문에 영지의 예산이 살살 녹는다.
토벌을 위해선 엄청난 비용이 필요하다.
각성자와 적합자를 비롯한 영지 상비군, 혹은 민간 용병 고용 비용, 무기나 장비, 전투 소모품···, 마수 부산물 판매로 일부는 충당 가능하지만 그래도 항상 부족하다.
이렇게 매년 예산에 허덕이는 이유는 파주 영지가 가진 한계 때문.
내세울 만한 수익산업이 없어 기반 시설이 부족하고, 주 세금 수입원인 영지민 숫자도 많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도 김웅방은 예산을 쥐어짜느라 잠을 잘 생각도 못 했다.
순간!
똑똑.
집무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
"아직 일이 많이 남았어요?"
파주 영지 안주인 혼다 미쯔이였다.
"곧 끝나가오. 먼저 자지 그랬소?"
"그럴 수야 있나요? 가장이 아직 일하고 있는데."
그러면서 따끈따끈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책상 위에 올렸다.
"마나 십전대보탕이에요. 이거 마시고 하세요."
"···흐음."
김웅방은 미쯔이가 만들어온 보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어째 실망한 듯한 그의 표정.
"후우,"
한숨 푹 쉬더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마음을 정한 모양이군."
"네?"
"결국 선을 넘기로 한 거요?"
"···무, 무슨 말을?"
"당신은 마스터를 너무 우습게 보는구려."
김웅방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미쯔이가 움찔, 한걸음 물러났다.
갑자기 남편이 달라 보였다.
"이해는 하오.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에, 매번 처가에 손을 벌려야 하는 내가 한심해 보였겠지."
"여보! 대체 왜 그러세요?"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소? 남편에게 독약을 먹이려 하다니."
"···아."
당황한 미쯔이.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어떻게 알았을까?
하지만.
"뭐, 뭐라고요? 내가 독살이라도 하려고 했단 말이에요?"
"그럼 이 보약 당신이 먹지 그러오? 지금 여기서."
"···."
미쯔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황궁 게이트에서 태주를 만난 이후로 행동이 이상하더군. 게다가 당신은 적합자 아니오. 마스터쯤 되면 적합자가 품은 살기 정도는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소."
"오, 오해에요."
"그럼 먹어보시오."
"···아아아."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 미쯔이.
다 들통났다.
"여, 여보,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나 봐요. 아, 아버지, 아버지가 시킨 일이에요."
"알고 있소. 당연히 혼자 계획하진 않았겠지."
"···그, 그럼?"
김웅방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 전에! 당신이 태주를 죽이려 한 사실을 모를 줄 알고? 그때는 문제 삼지 않았지. 태주도 죽지 않았고, 또 가정도 유지하고 싶었기에, 그런데 그게 내 실수였어."
혼자 미쯔이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역시 남편은 알고 있었다.
모두 다!
빠져나갈 길이 없다.
용서를 구하는 방법 말고는.
"요, 용서해 주세요. 살아온 세월을 생각해서라도 한 번만···,"
"하아,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용서는 하나밖에 없소."
"뭘···,"
"죽이진 않으리다. 당장 짐을 싸서 규슈로 떠나시오. 이혼장은 추후에 보내지."
"···."
이혼.
그 말을 듣자마자 미쯔이의 표정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날 내쫓고 태주를 다시 불러들일 생각인가요? 그놈에게 영지를 물려주려고?"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군. 태주가 이깟 영지에 신경이나 쓸 것 같소?"
"무슨···?"
이깟 영지라니.
그거 때문에 배다른 자식과 남편까지 죽이려 했는데.
"폐하께서 구례시를 태주에게 하사한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소. 이번 전쟁의 일등 공신이 되는 건 거의 확실하고."
"마, 말도 안 되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되는 거였소. 그러나 당신과 당신 아버지의 조급증이 일을 망친 거지."
미쯔이는 원독에 찬 눈빛으로 김웅방을 노려보며 말했다.
"끝까지 제 탓이네요. 당신 잘못은 하나도 없어요?"
"···너무 많지. 지금 이 독약을 당장 들이키고 싶을 정도로,"
"지금 그렇게 하지 그래요."
"나 혼자만으론 부족하오. 우리 천천히 같이 말라 죽읍시다."
급기야 화를 못 이긴 체 몸을 부들부들 떠는 미쯔이.
"두고 봐!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날, 그녀는 두 아들 김태평과 김태천을 데리고 파주 영지를 떠났다.
※ ※ ※
선계에선 검선이 펼칠 검술을 두고 토론이 벌어졌다.
"검선의 검이라면 하나밖에 없지. 천둔검법(天遁劍法)!"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검선,
하지만 당군악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대체 제정신이오? 보통 사람이 익힐 검술이 필요하다고 했잖소! 따라 할 수 있는 걸 골라야지."
"어···, 맞네. 그럼 태극혜검?"
"그것도 탈락. 무림인 중에서도 요결을 이해하는 자가 몇이나 될까?"
"천하삼십육검은?"
"어림도 없지. 종남파 장문인이나 익히는 것을."
"이십사수 매화검법도?"
"그보다 더 쉬운 걸로."
도문 출신답게 검선의 입에서 도가 절세 신공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결국 채택된 건 복마검법(伏魔劍法).
앞에 말한 검법에 비해 익히기 쉽고, 무엇보다 마(魔)를 굴복시킨다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신선들이 모여 촬영할 장소를 선정했다.
역광이 들어오는 곳은 피하고, 조명이 부족하면 술법을 부려 빛을 더하고.
대본도 마련했다.
검선의 검수를 받아 당군악이 직접 썼다.
영상 촬영자는 귀곡 선인.
머리가 원체 좋은 신선이라 태블릿을 몇 번 만지작거리니 금세 사용법을 터득했다.
더빙 역할도 당군악이,
검선은 삼한제국의 언어를 모르기 때문이다.
마침내 태블릿 렌즈 앞에 선 검선.
당군악이 손을 번쩍 들었다.
"레디···,"
모두가 숨을 죽였다.
"액션!"
카메라 어플 작동 시작.
형형한 눈빛, 바람에 휘날리는 긴 수염, 검 끝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검선이 한 걸음 나아갔다.
"복마검법 제일초, 격검축마(擊劍警魔), 검을 휘둘러 마귀를 쫓아내다."
당군악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검선의 검이 허공에 수놓아졌다.
동시에 시작되는 해설.
"검 옆면으로 적을 강하게 후려치는 걸로 초식을 시작한다. 이때 오른발을 같이 내디디면서, 기운은 곡지혈에 일푼, 노궁혈에 일푼을 주되, 합곡혈을 닫고 소지혈로···,"
일초식 촬영은 4번 반복됐다.
정면에서, 오른쪽에서, 왼쪽에서, 뒤에서.
그리고,
"컷!"
"수고하셨소."
"고생했소이다."
"역시 검선이야! 금방 끝나겠군."
초식 시현을 마치자마자 황급하게 뛰어오는 검선.
"독선, 괜찮았소?"
"아주 잘 빠졌소이다."
"어디 봅시다."
태블릿에서 촬영된 영상이 재생됐다.
신선들도 우르르 몰려와 함께 구경했다.
하지만 점점 굳어지는 검선의 얼굴.
"흐음···,"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
"다시 갑시다."
"음? 왜···?"
"표정이 별로야. 너무 굳어있어. 자연스럽지 않아."
"지금 표정이 중요한 게 아니지 않소."
"나한텐 중요하오! 다시 갑시다."
"···."
아무래도 촬영이 길어질 것 같다.
신선들도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한마디씩 했다.
"지가 배우인지 아나?"
"그럴 거면 메이크업부터 하고 오지."
"자칫하면 장편 영화 한 편 찍을 기세야."
"쯧쯧, 저게 말로만 듣던 연예인병이군."
그러나 검선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 입궁 이후(2)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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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착(1) >
삼한제국 식민지 규슈 영지.
영주 혼다 카즈오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딸아이의 어설픈 일 처리로 인해 그동안 공을 들였던 백년대계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게 생겼다.
"그래, 좋다. 실패한 건 그렇다 쳐도, 독약은? 그릇은 잘 치웠겠지?"
"두, 두고 왔어요."
"···뭐? 네 지문이 덕지덕지 묻은 걸 그대로 놓고 왔다고?"
"경황이 없어서 그, 그만···,"
"멍청한 년!"
증거를 그대로 두고 왔다는 말.
영주관 안에 CCTV가 없을 리가 없다.
딸 미쯔이가 독이 섞인 십전대보탕을 가지고 온 모습, 심지어 직접 독을 타는 영상도 찍혔을 수 있다.
김웅방이 독으로 죽거나 쓰러졌다면 증거인멸은 일도 아니었겠지만.
"아이들은 왜 데리고 왔느냐?"
"제 아이들이잖아요. 아버지 외손자들이고요."
"하아, 답답하구나. 정말 답답해."
아이들은 남겨놨어야 했다.
이혼했다손 치더라도 아이가 파주에 있어야 끈이 유지될 것 아닌가.
그나저나 마냥 한심한 줄만 알았던 사위였다.
주제에 마스터라는 건가?
'이러다 진짜 망하겠어.'
삼한제국 법률로서 일본계 장성이 제국 본토를 영지로 하사받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가라앉고 있는 일본 땅만을 영지로 가질 수 있다.
물론 식민지에 사는 개개인이 본토로 이주해 살아가는 건 제한이 없다.
집도 가지고, 재산도 소유하고, 필요하다면 성본 변경을 통해 제국식 이름을 쓸 수도 있다.
영지 하사를 제외하고는 제국민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는 모두 다 인정됐다.
하지만 혼다 카즈오는 그걸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제국을 다스리는 강력한 권력자가 사망한 후, 반드시 일어나게 될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 그 틈을 타서 잊혀진 일본의 옛 영광을 제국 땅에서 재현하고 싶었다.
딸 미쯔이를 파주로 시집보내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여왔나.
예산이 부족하다면 돈을 빌려주고, 그 대가로 일본계 적합자, 각성자들을 파주 영지군으로 집어넣고, 심지어 일본계 일반인들도 파주 영지로 이주하게 했다.
그런데 이혼이라니.
반대 소송을 걸면 되지만 유책 사유가 딸 미쯔이에게 있기 때문에 극히 불리하다.
그래도 태평이와 태천이가 있기에 상속권이 남아있지 않느냐고?
김웅방은 큰아들 김태주마저도 호적에서 판 놈, 두 아들이라고 그러지 못할 법이 없다.
이혼은 규슈 영지와의 결별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존 딸과 자신이 구축했던 세력들을 몰아내겠지.
사위 김웅방은 적어도 파주에서만큼은 왕이나 마찬가지니까.
'놈을 죽여야겠군.'
시간 싸움이다.
속전속결로 해치워야 한다.
혼다 카즈오 자신이 직접 결행할 생각.
시나리오는 금세 만들어졌다.
딸과의 이혼 선언에 상심한 장인.
사위를 설득하기 위해 파주에 방문하게 되고, 당연히 말다툼이 일어난다.
설득에 실패해 격분한 장인은 자신의 분을 참지 못해 칼을 빼 들게 되고, 그리하여 의도치 않게 사위를 찔러 죽인다.
계획 살인이 아닌 과실치사.
재판을 받아서 실형을 살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웅방이 죽으면 상속권은 무조건 큰 외손자 김태평에게 넘어간다.
오히려 전화위복일지도.
'진작에 이럴 걸 그랬어.'
실형을 받는 것?
그 정도야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
비싼 변호사를 선임해 형기를 줄이거나, 집행유예로 풀려나면 금상첨화.
'밑밥부터 깔아야겠군.'
이렇게 된 이상 선수를 친다.
황제 와병설에 제국 정치계가 뒤숭숭해진 지금이 바로 적기.
전승식이 열리기 전에 끝낸다.
혼다 카즈오는 아들 지로에게 지시했다.
"지로야, 뉴서울에 신문사에게 기삿거리 몇 개 던져줘."
"네, 아버지."
"될 수 있으면 자극적으로."
그리고 다음 날 터져 나온 가십성 기사들.
중앙지가 아닌 황색 언론들이었다.
이들이야 돈만 주면 어떤 기사도 써주니.
<태홍 바이오 김태주 회장의 친부로 알려진 파주 영지 김웅방 준장, 부인과 갑작스러운 이혼 선언.>
<평소 부인과의 금실이 좋은 것으로 알려진 터라 주변 사람들 충격에 빠져.>
<이번 이혼 선언에 소문이 무성, 조강지처를 버린 이유는?>
<미쯔이 부인은 평소 성격이 소탈해 영지민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린 것으로 알려져.>
<김웅방 준장의 장인인 규슈 영지 혼다 카즈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 사위를 설득할 것이다.>
슬슬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일단 혼자 만나러 가는 모양새를 취한다.
그러나 마스터를 잡는 일이다.
조심 또 조심해도 모자라지 않는다.
오히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준비해야 한다.
"지로야, 파주 영지에 심어둔 각성자, 적합자들에게 준비하라고 일러라."
"이미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리고 저도 가겠습니다. 아버지."
"아니, 넌 여기 있어야 해. 의심받을 수도 있어."
"마스터가 두 명은 되어야 놈을 확실하게 잡습니다. 전 제 심복들을 이끌고 몰래 밀항하겠습니다. 비공식적으로 파주에 들어가면 됩니다."
"흐음."
혼다 카즈오는 잠시 고민했다.
아들의 말이 맞다.
일 처리는 철저해야지.
"좋다. 넌 지금 당장 출발해라."
"네!"
그렇게 아들 혼다 지로 일행이 무사히 제국 본토로 숨어 들어갔다는 걸 확인한 후, 혼다 카즈오는 규슈 영지를 출발했다.
※ ※ ※
제국 정보원, 제정원은 마인 파트 말고도 안보와 군사기밀, 적국에 대한 정보 수집 분야를 책임지는 파트가 있다.
제정원 안보 파트 장상호 2차장은 오늘도 여기저기서 올라온 정보 보고서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정보는 여러 통신매체나 SNS를 통해 전달된다.
남들이 보면 일반적인 내용과 다를 바 없다.
옷 자랑, 여행 자랑, 오늘 먹은 음식 자랑, 그리고 평범한 태그들.
하지만 그 내용 안에 암호화된 정보가 숨어있다.
그걸 해독해 문서로 만들어진다.
그러다 규슈 영지에 심어뒀던 정보원이 전한 보고를 읽는 장상호, <긴급>이라고 붉게 적힌 글씨가 찍혀있다.
"흐음,"
내용은 이랬다.
- 혼다 카즈오 중장, 규슈 영지에서 출발, 예상 도착지 파주 영지.
장상호는 혼다 카즈오가 왜 파주로 가려는지 안다.
'사위의 이혼 선언 때문인가?'
요즘 가십 언론이나 사교계에서 떠들썩하다.
일반인들이 하는 이혼과는 차원이 다르다.
특히 파주 영지라서 더더욱 그렇다.
'설득이라도 하려는 모양이군.'
그런데 정보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 카즈오의 아들, 혼다 지로와 익스퍼트 급 각성자들도 규슈 영지에서 자리를 비웠음. 미행 결과 해안가에서 어선에 탑승, 역시 파주행이 유력.
이건 조금 이상하다.
그때!
갑자기 번뜩 떠오른 생각.
'···이놈들이 설마?'
확인해봐야 한다.
장상호는 누구보다 파주 영지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제정원 주요 보호 인물 중에서 특급으로 분류된 김태주 회장의 친부가 바로 김웅방 준장 아닌가.
장상호는 즉시 전화기를 들고 가장 능력이 뛰어난 현장 요원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금 즉시 파주로 들어가서 김웅방 준장 주변 감시해. 그리고 파주 내 일본계 각성자들 동향도 알아봐. 영지군과 민간 각성자까지 포함해서."
자신이 추측한 바가 옳다면···,
'혼다 카즈오가 김웅방 준장을 죽일 작정이군.'
확실치는 않지만 그럴 가능성이 다분하다.
이혼이 성립되면 닭 쫓던 개꼴이 되니까.
원래 황제 폐하께선 일본계 장성들에 한해 제국 본토의 영지는 절대 하사하지 않으셨다.
제국 건국 역사와 관련이 있다.
황제 폐하께서 제일 처음 세운 나라는 대진국.
100여 년 전, 경상북도에 터를 잡으셨다.
당시엔 국가라는 체계도 잘 잡혀있지 않았다.
수 많은 국가들이 난립하고 있던 시절, 그저 약육강식의 대혼란 상태.
그러다 잦은 지진과 지구 온난화로 일본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은 절망했다.
자신들이 살던 땅이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조건 새 땅을 찾아야지.
어디서?
당연히 가장 가까운 한반도였다.
선전포고도 없이 동해와 남해를 통해 일본 각성자와 적합자, 그리고 군대가 한반도에 전격적으로 상륙했다.
폐하의 대진국은 그 일본 침략자들과 맞서면서 성장한 나라.
무시무시한 무력으로 일본의 공격을 막아내는 동시에 주변 국가들 또한 복속시켰다.
그리고 한반도 중남부를 통일할 때쯤 황제께선 일본 정벌을 단행했다.
일본에도 수많은 국가가 난립해 있었다.
하나하나 굴복시키고, 일본 점령과 한반도 통일을 이뤄가며, 동시에 북벌도 단행해 불과 40년 만에 삼한제국의 기틀을 세우셨다.
그 후 일본과 만주, 중앙아시아 초원, 시베리아까지 뻗친 삼한제국의 영토.
황제 폐하는 제국 대통합 정책의 일환으로 일본계 제국민을 포용했다.
중국은 나라 자체가 사라진 터라, 오갈 데 없는 유민들을 인도적인 차원에서 받아주었고.
하지만 여전히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하는 일부 일본계 족속들은 절대 믿지 않았다.
아직도 중화 운운하며 망상에 사로잡힌 일부 중국계도 그랬다.
그래서 제국 내 중국계 및 일본계 요주의 각성자들의 동향은 제정원 안보 파트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사안.
'아직 이혼 전이라 이거지?'
장인과 사위가 만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딸과의 이혼을 수습한다는데 누가 말려?
하지만 이혼을 막지 못한다면?
'혼다 카즈오에게 남은 해법은 김웅방 준장의 죽음밖에 없어.'
불의의 사고가 났다고 가정해보자.
예를 들어 말다툼 끝에 장인이 사위를 죽이는 끔찍한 사고 같은 거 말이다.
혼다 카즈오야 감옥에 가겠지만 영지 승계권은 그의 외손자에게 넘어간다.
그리고 딸인 미쯔이도 미망인 자격으로 파주에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테고.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퍼즐이 맞춰지고 있었다.
뜬금없이 가십 기사가 터진 이유가 뭐겠나?
이혼의 원인은 알 수 없지만, 기사 내용은 교묘하게 김웅방의 잘못을 부각시키고 있었다.
앞으로 저지를 일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도일 터.
만약 모든 예상이 실제로 일어나게 되면···,
감히 편법을 통해 제국 본토로 진출하려고 해?
황제 폐하께서 건재하셨다면 이런 일은 꿈도 못 꿨을 것이다.
게다가 혼다 카즈오는 든든한 배경이 있다.
바로 염황후.
성본 변경을 했지만 그녀는 일본계다.
만약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 그녀가 개입한다면···,
'파주는 혼다 카즈오의 손에 떨어지겠군.'
물론 그렇게 되기 전에 막는다.
아무튼 기다려보자.
믿음직한 현장 요원 파견했으니 곧 결과를 보고하겠지.
※ ※ ※
태주가 요즘 하는 고민은 한가지다.
황색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아버지의 이혼 소식?
아버지와는 이미 연을 끊었다.
또한 이혼을 결심했다면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고.
어쨌거나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
그보다는 독선이 전해주는 귀한 선도에 대한 답례품으로 어떤 물건을 준비해야 하는지, 그게 주된 고민이었다.
답례품의 다각화.
독선이야 아무거나 보내라고 했지만 사람 마음이 안 그렇다.
그 와중에 무한공간에 생긴 변화.
내부 공간도 넓어지고 있지만 수납할 때 제한됐던 물건의 크기도 커졌다.
확인해보니 이제 가로 세로 높이 2m 크기의 물건도 집어넣을 수 있다.
게다가 공유창고의 전체 부피도 처음 생겼을 때보다 3배 이상 늘어났고.
'이젠 TV를 보낼 수 있어.'
85인치 크기의 초고화질 대형 TV를 말이다.
아무리 빔프로젝터의 성능이 좋다고 하지만 TV 모니터에 비할까.
일단 3대를 준비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음향을 들을 수 있게 최고급 사운드바까지.
그밖에 엘리트 마나 결정체로 돌아가는 발전기도 한 대 더, TV에 연결할 수 있는 각종 케이블과 멀티탭도.
거기에 다운 받은 영상 컨텐츠 물이 꽉꽉 들어간 스마트폰도 10개.
비록 전화나 통신은 되지 않지만 영상 저장용으로는 태블릿보다 낫다.
순간!
찌르르르.
"왔다!!!"
"냥?"
느닷없는 태주의 환호에 머리를 갸웃하는 일백이.
태주는 바로 공유창고를 열어 물건을 꺼냈다.
쏟아져 나오는 선도.
그런데 빛깔이 예사롭지 않다.
더불어 신선주가 담긴 술단지도.
"오!"
그렇지 않아도 다 마셨는데.
준비한 물건들로 빈틈없이 차곡차곡 채웠다.
대형 TV 3개와 사운드바, 발전기, 과자와 술, 간편 조리 음식, 군것질거리···.
이제 편지를 읽어볼까?
내용은 보낸 물건의 정체와 두 가지 부탁.
'흐음, 소맥이라, 이거야 어렵지 않지만,'
독선이 멀티플렉스 극장을 선계에 만들고 싶단다.
'···가능할까?'
인간을 초월한 신선들의 능력이라면 건물 하나 뚝딱 만드는 건 어렵지 않을 테지만 극장은 조금 다른 문제.
건물 겉면은 몰라도 내부 설계는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조언을 받아봐야겠는데,'
이건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다.
그래서 그 내용을 답장으로 썼다.
공유창고에 편지를 집어넣은 후, 태주는 독선이 보낸 최상품 선도 하나를 꺼냈다.
"어후,"
"냐앙! 냐아앙!"
꺼내기만 해도 선기(仙氣)가 물씬 풍긴다.
일백이도 흥분해서 혀를 날름거렸다.
"넌 안돼."
"냐아아아···,"
"대신 일반 선도나 드세요."
"냥!"
태주는 하품 선도 3개를 꺼내, 일백이, 이백이, 삼백이에게 차례차례 나눠줬다.
그러고 나서 최상품 선도를 으적으적 씹었다.
'아아아아아···,'
과연 최상품이라 할만하다.
맛도 너무 좋다.
하나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
앞으로 최상품과 상품은 혼자서 먹을 생각.
선도 200개짜리 신선주도.
어쩔 수 없다.
무한공간과 공유창고가 왜 계속 커질까?
늘어나는 선기 때문이다.
그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다.
꾸준히 먹어서 공간을 늘리자.
그럼 선계로 물건을 더 많이 보낼 수 있다.
그때였다.
지이이잉!
진동하는 스마트폰.
걸려온 번호를 보니.
'제정원 문경식 차장이네?'
마인 수사 관련 때문인가?
태주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장상호 차장님이군요. ···네? 어, 정말입니까?"
일순 굳어지는 태주의 표정.
"···네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파주 영지에서 사건이 터졌다.
혼다 카즈오와 김웅방 준장이 만난 직후에.
괴성과 함께 전투가 벌어졌다고 한다.
지금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현재로선 알 수 없고.
급하게 병력을 보냈는데 시간이 걸릴 거란다.
'아버지···.'
결국 천륜은 끊어낼 수 없는 건가.
그리고,
'혼다 카즈오.'
태주의 표정에 드러난 은은한 분노.
단전의 독정도 꿈틀거렸다.
"이백아, 가자!"
"야앙!"
태주는 집 밖으로 나와 무한공간에서 만리비검을 꺼내 올라탔다.
< 결착(1)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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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착(2) >
태주가 제정원 2차장 장상호의 전화를 받기 1시간 전.
야심한 밤.
김웅방 준장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장인, 아니 장인이었던 혼다 카즈오와 마주하고 있었다.
"안녕하신가, 사위."
"우리가 서로 인사할 사이요?"
"장인이 사위에게 인사하는 게 어때서?"
"헛소리 마시고, 딸이 실패해서 아버지가 직접 끝을 내려왔군."
싸늘한 김웅방의 말이었지만 여전히 혼다 카즈오는 유들유들한 표정이었다.
"자네가 고분고분하게 죽어줬으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 덕분에 일이 얼마나 틀어졌는지 아는가?"
"아까부터 대단한 악당 흉내를 내고 싶은 모양인데, 그거 하지 마시오. 역겨우니까."
"허어?"
"당신은 그저 삼류 양아치일 뿐이야. 자기 손에 피 묻히기 싫어서 딸에게 남편을 죽이라고 한 주제에."
"···아이 딸린 홀아비에게 곱게 키운 딸아이 시집보내줬더니,"
혼다 카즈오는 허리춤에 찬 엘리트 일본도 무라사마 일본도의 손잡이를 잡으며 말을 이었다.
"이걸로 1단계는 충족됐군. 장인과 사위의 말다툼, 그로 인한 장인의 격노. 이제 널 죽이는 것만 남았나?"
"멍청하기는, 자신의 계획을 이렇게 막 떠벌려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나 보군."
"클클클, CCTV를 믿는가 보군. 내가 혼자 온줄 아느냐? 이 영주관 경비 통제실은 이미 내 손안에 들어왔다. 그리고 파주 영지 통신 시설도 차단했어. 우리 대화가 바깥으로 흘러나갈 일은 없을 거야. 내 장담하지."
김웅방은 피식 웃었다.
"고생했소. 쓸데없는 짓 하느라."
"···무슨?"
"내 부관이 어디 있는 줄 아시오?"
혼다 카즈오는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 파주 영지에 진입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김웅방의 손발을 묶는 것, 그래서 놈의 심복인 부관부터 찾았는데 어디에도 없었다.
"황궁으로 갔소. 폐하께 올리는 상소를 궁정 비서실에 전달하기 위해."
"···상소라니?"
"파주 영지 지배권 포기한다는 내용의 상소문, 그리고 내 아내가 날 독살하려는 증거도 같이 가지고."
"뭐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영지를 다스리기에 내 그릇이 부족하더군. 그래서 영지를 포기하기로 했소."
"이런 망할 놈이···, 흐흐흐, 그런데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지금 황제가 네 상소문을 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득의만면한 혼다 카즈오의 표정.
"자기 병도 다스리지 못해 몇 년 동안 얼굴도 안 비치는 황제 따위를?"
김웅방도 알고 있다.
황제가 와병 중이라는걸.
태주가 입궁할 당시, 김웅방도 카즈오와 함께 염황후를 만났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왔던 말.
- 얼마 전에도 폐하를 만났다.
- 병실에서 누워 지낼 만큼 병환이 심각하시다.
- 어의 말로는 마약성 진통제를 맞으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계신다.
- 아마 얼마 버티지 못하실 거다.
"네 잘난 아들, 김태주에게 그건 듣지 못했구나. 분명 황제와 만났을 터인데."
스르릉.
혼다 카즈오는 칼집에서 엘리트 무라사마를 뽑아 들었다.
"어차피 황제가 죽으면 모든 일이 순리대로 돌아갈 것이야. 네놈은 그걸 막을 수 없다. 왜냐하면 너도 여기서 뒈질 테니까."
김웅방도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이제야 본론으로 들어가는군. 어디 해보시오. 날 죽일 수 있을지."
순간!
벌컥!
집무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한 남자.
"매제, 윗사람에게 영 버릇이 없어. 제국 조센징의 종특인가?"
카즈오의 아들이자 미쯔이의 오빠.
규슈 영지의 또 다른 마스터, 혼다 지로였다.
김웅방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여기서 죽을 운명이군.'
죽는 건 두렵지 않다.
다만 아들 태주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못 하고 먼저 떠나야 한다는 것이 아쉬울 뿐.
'···한 명은 반드시 데리고 간다.'
빠드득!
김웅방은 검을 힘차게 움켜잡았다.
그때였다.
와장창!
집무실 유리창이 산산조각이 나더니.
쐐액!
동그란 물체가 혼다 지로에게 쏘아졌다.
서걱!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반으로 가르는 혼다 지로.
그러자,
퍼엉! 화아아악!
눈부심 섬광과 함께 짙은 연기가 방안에 가득 찼다.
"헛!"
"감히 허튼수작을?"
김웅방은 자신의 등 뒤에서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었다.
"장군님, 제정원입니다. 일단 피하시지요."
제정원?
생각은 다음에 하고.
김웅방은 제정원 요원이 이끄는 대로 깨진 창문을 넘어 밖으로 뛰어내렸다.
"쯧쯧, 어디로 도망치려고."
"그러게 말입니다, 결국 잡혀 죽을 것을, 번거롭게시리."
혼다 카즈오와 혼다 지로도 창문을 넘어 추격에 나섰다.
※ ※ ※
투타타타타!
헬기를 타고 파주를 향해 날아가는 제정원 소속 특작 부대.
제정원 2차장 장상호는 초조한 마음에 손톱만 잘근 씹었다.
파주로 보낸 현장 요원에게서 영지 내부의 일본계 각성자들이 영주관을 접수했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병력을 소집했다.
그리고 비행 중에 전해진 추가 보고.
- 혼다 카즈오와 혼다 지로, 김웅방 준장 살해 시도.
- 김웅방 준장 신병 확보해서 현재 탈출 중, 경로는 DMZ 마수 밀집지대.
'씨발, 쪽바리 새끼들이 감히!'
분통이 터진다.
정말 설마 설마 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야욕을 드러내?
황제 폐하께서 건재하셨다면 꿈도 못 꿀 일을 스스럼없이 행하고 있다.
'막 가자는 얘기지?'
김웅방은 김태주 회장의 친부.
비록 불미스러운 이유로 남남이 되었다지만 혈연은 쉽게 끊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반드시 구출해야 한다.
파주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어림잡아 1시간 정도?
김웅방과 함께 탈출 중인 현장 요원 이영철은 슈페리어 익스퍼트 각성자.
잠입과 탈출에 능하고, 관련 스킬도 보유하고 있어, 어느 정도 시간은 끌 수 있을 터.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하는데.'
그러자 장상호 옆에 앉은 백발 성성한 노인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걱정 말게. 장차장. 조금 늦어도 상관없을 거야."
황궁 비서관 금수호였다.
이번 사태에 대해 금수호에게 보고하자 바로 달려와 함께 헬기에 탔다.
"마스터가 2명입니다. 과연 김웅방 준장이 버텨줄까요?"
"김태주 회장에게 연락했다면서?"
"하긴 했습니다만, 구례에서 파주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야 전투 헬기를 타고 날아온다지만···,"
"김회장, 이미 파주에 도착해있을 거야."
"저, 정말입니까? 어떻게요?"
금수호는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다.
사실 자신도 잘 모른다.
그저 김태주가 옛 중국 땅에서 흑악지룡을 죽이고, 몇 시간 후에 구례에 와있을 정도로 신출귀몰하다는 사실만 알뿐.
※ ※ ※
DMZ 마수 밀집지대.
길다란 띠의 형태이고 폭은 약 4㎞, 면적은 900㎢가 넘는다.
원래부터 야생 동물들이 많이 살아서 마나의 침범으로 변이된 마수들의 숫자도 엄청나다.
DMZ 마수 밀집지대를 따라서 많은 영지들이 분포된 곳, 오크와 포자 독 낙타 고라니의 최대 서식지이기도 하다.
어둠을 뚫고 DMZ를 질주하는 김웅방 준장과 제정원 현장 요원 이영철.
하지만 일본계 각성자들이 턱밑까지 쫓아왔다.
마스터가 무려 2명이라 따돌리기도 힘든 상황.
"저쪽이다!"
"탈출로 차단해!"
김웅방 준장은 허탈한 표정이었다.
추적자 중엔 규슈 영지 각성 군인뿐 아니라 파주 영지군들도 있었다.
즉 부하들에게 쫓기고 있는 셈.
사실 파주 영지는 혼다 카즈오에게 넘어간 거나 다름없었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 김웅방의 심사를 알아챘는지 제정원 정보요원 이영철이 그를 위로했다.
"장군님, 힘내십시오. 살아남기만 하면 모든 걸 되돌릴 수 있습니다."
글쎄,
살아나갈 수 있을까?
"제가 길을 열겠습니다. 마음 단단히 먹고 혼자라도 이곳을 빠져나가십시오."
"···나보다는 자네가 더 가능성이 있겠군. 혼다 부자는 내가 상대할 테니, 지금 당장 가까운 영지로 달려가게."
"아직은 여유가 있습니다. 함께···,"
"아니! 이미 늦었어."
"네?"
순간!
정면 어둠 속에서 유유히 걸어 나오는 혼다 지로.
"쥐새끼들이! 아무리 발버둥을 친들, 결과는 정해졌다는 걸 모르나?"
그리고 뒤쪽에서 혼다 카즈오도,
"이게 무슨 부끄러운 짓인가? 제국의 장군이 싸워볼 생각도 하지 않고 도망만 가다···, 음?"
김웅방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파앗!
순식간에 혼다 지로에게 쇄도해서.
츠핏!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검을 뿌렸다.
채앵! 채채챙!
매우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는 공방전.
강기와 강기가 맞부딪치면서 백색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혼다 지로는 김웅방에 비해 비교적 약한 편, 그래서 연신 내려치는 검의 힘에 밀려 뒷걸음질만 치고 있었다.
"이영철 요원 빨리 탈출···,"
하지만 마스터는 혼다 지로 하나뿐이 아니다.
"이놈!!!"
뒤에서 날아드는 섬뜩한 기운.
김웅방은 급하게 몸을 회전해 혼다 카즈오의 무라사마를 걷어냈다.
채앵!
이영철도 도망갈 수 없었다.
혼다 부자가 데리고 온 익스퍼트 각성자들의 협공에 궁지에 몰렸다.
그래도 고군분투하는 김웅방.
한 명이라도 빨리 죽여야 한다.
방어는 생각하지 않는다.
가장 약한 놈부터 먼저.
푸욱!
김웅방의 강기 어린 검이 혼다 지로의 복부를 찔렀다.
"끄아악! 이, 이, 개새···,"
느낌이 왔다.
적어도 치명타는 먹였다.
하지만,
서거거걱!
화끈거리는 어깨.
"크헉!"
카즈오의 무라사마가 등 뒤에서 김웅방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절반이나 잘린 채 너덜거리는 오른쪽 어깨.
즉시 왼손으로 검을 옮겨 잡고 대항했지만···,
채앵!
카즈오의 공격에 검마저 손에서 놓쳐버렸다.
"아아···,"
비릿하게 웃는 혼다 카즈오.
"이제야 끝났구나."
"이 개 같은···,"
김웅방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래도 한 명 잡았다.
그런 줄 알았다.
복부가 찔려 쓰러진 줄 알았던 혼다 지로의 비릿한 미소를 보기 전까진.
"으흑, 제기랄! 아파 미치겠군."
어찌 된 일이지?
비틀비틀, 그러나 두 발로 걸어오는 놈, 심지어 복부에서 흘러나와야 할 피도 멎어있었다.
"후우, 저, 정말이지 태홍 회복제와 새살쑥쑥이 없었다면 주, 죽을 뻔했어."
"···."
크게 조소하는 혼다 카즈오.
"껄껄껄, 아이러니하구나. 네가 버린 아들의 약이 내 아들 목숨을 구한 셈이니."
무라사마를 두 손으로 잡고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래도 한때 내 사위였던 시절을 생각해 편하게 보내주마."
김웅방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참으로 후회가 많은 삶이었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바로 그때!
"크르르르르르르르르···,"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마수의 울음이 DMZ 전역에 깔렸다.
"···!"
"뭐···,"
"아···,"
모두 꼼짝없이 얼어버렸다.
혼다 카즈오와 혼다 지로도, 제정원 요원 이영철을 몰아붙이던 규슈의 익스퍼트 각성자들도, 김웅방을 배신한 파주 영지 군인들도,
동시에,
어두운 숲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형체의 마수.
너무 커서 고개를 한껏 젖혀야 보일 정도.
"세, 세상에!"
"무, 무슨?"
"···맙소사."
DMZ 전체에 적막이 흘렀다.
그리고 아무도 움직이지 못하는 사이.
저벅저벅.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오는 한 남자.
무릎 밑까지 내려오는 긴 코트를 입고 있었다.
"넌?"
혼다 카즈오는 그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봤다.
"···김태주?"
혼다 카즈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여길 어떻게 왔지?
무슨 수로 자신들을 찾았고?
소문을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마스터마저 능가한다는 놈의 무위를.
"잠깐! 이건 집안싸움이다. 넌 끼어들 자격이···,"
츠피릿!
혼다 카즈오는 끝까지 말을 하지 못했다.
빛이 번쩍하더니,
푹!
은빛의 무언가가 자신의 가슴을 꿰뚫고 지나갔다.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 대체?"
고개를 숙여 가슴팍을 내려다보는 카즈오.
커다란 구멍이 보인다.
왼쪽 가슴 절반이 날아갔다.
그제야 줄줄 흘러내리는 붉은 피.
"어어어···,"
혼다 카즈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 구멍과 선혈, 자신에 몸에서 난 것이 맞나?
그의 눈에서 생명의 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파, 판단 착오였어···, 애비와 인연을 끊지 않았나?'
황제보다 저놈을 더 신경 썼어야 했다.
이런 실력을 가진 놈인지 진작 알았다면 파주는 꿈도 꾸지 않았을 텐데.
자신의 아버지가 저렇게 된 상황에서도 혼다 지로는 꼼짝도 못 했다.
그는 직감했다.
자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김태주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도, 도망을···,'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는 혼다 지로.
순간 김태주의 눈이 자신에게로 향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사, 살려···,"
태주는 눈동자를 위에서 아래로 움직였다.
츠핏!
그러자 신령비도가 하늘에서 떠 있다가 태주의 의지에 따라, 혼다 지로의 정수리로 떨어져 내렸다.
푸아악!
혼다 지로의 머리를 관통하고 그의 턱밑으로 빠져나와 태주의 손으로 다시 돌아간 신령비도.
"치, 칙쇼···,"
혼다 지로가 앞으로 넘어지듯 쓰러졌다.
혼다 카즈오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뒤로 넘어갔다.
그리고 태주는 다시 고개를 돌려 김웅방을 바라봤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김웅방은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만 질끈 감았다.
※ ※ ※
선계(仙界).
어디서부터 잘못되기 시작한 것일까?
아마 귀곡 선인이 무심결에 툭 던진 한마디가 원인이었을 것이다.
"검선의 검술 시연을 저쪽 세상에서 볼 수 있다면 우리도 가능하지 않을까?"
선인들이 반응했다.
"···어?"
"오!"
"그런 수가!"
"아하!"
그걸 왜 지금 알았지?
"귀곡, 당신 서울대 나왔소?"
"서울대는 저쪽 세상에 있고."
"그런데 무슨 명분으로? 검선처럼 검술을 가르칠 것도 아니고."
그러자 태백 선인도 슬며시 입을 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가 너무 예의가 없었어."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지구의 귀한 물건들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이렇게 꼬박꼬박 챙겨주는데, 어찌 인사 한번 안 했단 말이오."
"오오오! 그렇지. 태주씨에게 인사 정도는 해야지. 그래야 신선 된 도리지."
그리하여 선계에 밀어닥친 영상 촬영의 열기.
10여 명의 선인이 한자리에 모여 토론을 시작했다.
"이번엔 우리 육성이 나가야 하오."
"암! 더빙은 의미가 없지."
"그런데 어떻게 삼한의 언어를?"
귀곡 선인이 손을 들고 나섰다.
"내가 도와주리다. 선도 하나씩만 주시오."
"어떻게?"
"그대들이 하고 싶은 말이 삼한의 언어로 읽히게 대본을 써주겠소."
"자, 잠깐만 기다리시오."
"나도!"
"조금 이따가."
팟팟팟팟!
사라지는 신선들.
'이거 큰일이군.'
당군악은 진심으로 후회했다.
태블릿의 촬영 기능을 알려주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귀곡에게 태블릿을 넘겨주지 말았어야 했다.
순간!
"응? 다 어디 갔지?"
급기야 서왕모와 미호 선자까지 나타났다.
"독선, 왜 혼자 계시는지."
"그, 그게···,"
어떻게 설명할까?
신선들이 나타나면 남의 눈치는 보지도 않고 촬영부터 시작할 텐데.
어째 점점 일이 커지는 기분이 들었다.
< 결착(2) > 끝
ⓒ 꾸찌꾸찌
=======================================
< 승전식(1) >
일이삼백, 삼두백호는 아직 본체 상태였다.
태주와 교감한 듯 오로지 적들에게만 피어를 발산했다.
그래서 꼼짝도 못 하며 떨고만 있는 영지 반란군과 규슈 영지군.
태주는 아버지 김웅방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태주가 무심하게 회복제 하나 건네주면 김웅방은 받아서 먹고.
태주가 새살쑥쑥을 꺼내면 김웅방은 등을 돌리고 앉아 약 바르기 좋게 상처를 보여주고.
그렇게 응급처치를 끝내자 비로소 김웅방의 입이 열렸다.
"고맙다."
태주 역시.
"네."
그게 전부였다.
순간!
투타타타타타!
멀리서 들려오는 헬기 프로펠러 소리.
태주는 고개를 들어 일이삼백이에게 신호를 줬다.
스스슷!
순식간에 사라지는 거대한 본체.
잠시 후 재정원 특작 부대 요원들이 헬기에서 떨어져 내렸다.
"모조리 체포해!"
그리고 궁정 비서관 금수호, 제정원 2차장 장상호도 헬기에서 내려왔다.
"봐! 내 말이 맞지? 이미 와있잖아."
"어, 정말이네요."
"그건 그렇고 혼다, 이 새끼는 어디 있어? 아! 저기구나."
김웅방이 재빨리 금수호에게 걸어가서 말했다.
"금비서관님."
"음, 김준장, 무사한가?"
"괜찮습니다. 상처를 입긴 했지만···, 그리고 이놈들, 제가 혼자 다 죽였습니다."
"···자네가?"
"네."
"혼다 카즈오와 혼다 지로도?"
"둘 다요."
"얘들 마스터인데?"
"저도 마스터입니다만."
금수호는 김웅방이 왜 이러는지 알 것 같다.
혼다 부자는 제국 내 일본계 세력의 중심인물 중 하나.
둘의 사망은 그냥 덮어버릴 문제가 아니다.
진상조사가 이루어질 수밖에.
일본계 제국민들의 반발도 예상되고.
그럼 태주가 곤경에 처할 것이다.
"왜 그러는지는 알겠는데,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 김회장 말고 자네 걱정이나 해."
"그래도···,"
"불법 영지 침입에 대응한 정당방위라서 문제 될 것도 없어. 또 여기 이 많은 목격자들, 어떻게 입막음하려고?"
"···."
금수호의 말이 맞긴 하지만.
"혼다 부자는 염황후와 삼황자의 후원 세력입니다.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폐하께서 총애하시는 사람을 건들겠다고? 할 수 있으면 해보라고 해."
"하지만 폐하께선 병환 중이신···,"
"사람들 말 믿지 말게. 너무 건강하셔서 탈이야. 심지어 술주정까지 부린다네."
"네?"
"어디 가서 말하지는 말고 자네만 알고 있어."
"아!"
깜짝 놀라는 김웅방.
"그리고 자네가 보낸 상소문은 폐하께서 읽으셨어."
"···네."
"상황이 달라졌는데, 마음이 변하지 않았나? 원한다면 다시 물려도 돼."
"변하지 않았습니다. 전 영지를 다스릴 그릇이 못 됩니다."
"그렇군. 그럼 그대로 처리하지."
김웅방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로 가는가?"
"파주 영지로 돌아갈 겁니다. 정리할 것도 있고."
"오랜만에 아들을 만났는데, 회포나 풀지 그래?"
가만히 서서 태주를 바라보는 김웅방.
아들과 눈이 마주치고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그러나 아직은 함께 긴 이야기를 나눌 용기가 없었다.
"다음에요.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김웅방은 혼자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태주에게 말을 거는 금수호.
"자네도 김준장과 할 말이 없나?"
"저야 좀 있지만, 그닥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시지 않는 것 같아서···, 언젠간 기회가 오겠죠."
"뭐, 원래 부자 사이는 무뚝뚝한 법이지."
금수호의 말에 태주는 픽, 하고 웃었다.
"참! 전에 드린 술은···? 설마 이번에도?"
"하아, 딱 석 잔 마셨네. 그것도 애걸복걸 졸라서."
"다행이네요."
"아니, 솔직히 후회돼. 안 마실 걸 그랬어. 이젠 다른 술들이 맛이 없어졌거든."
"폐하의 건강은요?"
금수호도 씨익 웃으며 말했다.
"승전식에 와서 확인하시게. 아주 재미있는 일이 펼쳐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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