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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 GENIOLINEADESANGRE / Chapter 21: 21

Chapitre 21: 21

7. 따란따도

"끄으으으, 사수, 절 이 사람 손에 두고 가지 말아요. 남자 품에서 자는 건 최악입니이이다아아아."

광익이 쓰러지며 말했다. 기절하면서도 이렇게 밉살맞게 말하는 걸 보면 이건 재능이다.

중봉은 광익을 안은 채로 생각했다.

버리고 갈까?

버리고 가도 죽지는 않을 거다. 살면서 이렇게 질긴 불멸자는 처음 본다.

이렇게 낭만에 젖은 채로 사는 불멸자도 처음이고.

"그 친구 이름이 뭡니까?"

협회 직원 중 하나였다.

절뚝거리는 다리, 왼쪽 이마부터 볼까지 굳은 피딱지, 이 전투에서 팔도 하나 잃은 거로 보였다.

왼쪽 팔꿈치 밑이 허전했다.

아무렴 어떨까.

살면 된다. 현대의 의술은 놀랍게 발전해서 사지 절단 따위, 재생 기술로 해결하면 그만이다.

비용이 들어서 문제지, 불가능의 문제가 아니다.

협회는 이 직원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알아서 뭐 하게?"

삐딱한 자세로 선 채, 중봉이 물었다.

"이름은 알아야죠. 생명의 은인인데."

"은인은 무슨."

"유광익입니다."

강희모가 다가와 말했다. 사지는 멀쩡하지만, 지친 얼굴이었다.

분석팀 일원으로 합류했기에 이 정도다.

전투원으로 달려든 외부 보안 1팀 팀원 중 반이 최소 한 달 휴직이었다.

"쉬벌, 갸가 갸여?"

모히칸 스타일의 변신족 남자가 다가왔다.

"네, 맞습니다."

검은 도끼 정동찬이 말했다.

그는 눈두덩이가 깊게 찢어져서 피를 흘렸다.

김말원도 다가왔다. 그의 곁에 협회 직원 둘이 붙었다.

팔다리 중 하나씩 잃은 꼴을 보니 사지 절단 협회라고 불러도 무방할 듯했다.

목숨을 건진 경찰 간부 중 하나가 다가와 입을 열었다.

"쿨럭, 쿨럭. 고맙다고 전해 주십시오. 태어날 딸 얼굴도 못 보고 갈 뻔했습니다."

말하며 웃는 걸 보니 이쪽도 정상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농담이 나오나.

"직접 해. 나한테 하지 말고. 나 이 새끼 대변인 아니다."

"그러죠."

한둘이 아니다.

스물이 넘는 요원과 경찰이 광익을 바라봤다.

전부 광익이 살린 사람이었다.

누군가 고개를 숙였고, 그걸 시작으로 전부 묵묵히 인사를 건넸다.

보는 사람이 없어도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다.

인사하고 돌아선다. 필요하다면 이들은 나중에 광익을 도울 것이다.

지금은 그거로 충분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중봉이 말했다.

"침 바르면 죽인다."

"낭만에 물든 친구군요. 침 안 바릅니다. 로맨티스트가 살기에는 세상이 좀 팍팍하죠."

정동찬은 그리 말하고 떠났다.

"애를 버려 놨다. 그따위 마음가짐으로 무슨 요원질을 한다고."

협회 부대장이 말했다.

그도 떠났다. 다 떠난 뒤, 중봉은 한숨 돌리고 입을 열었다.

"내가 가르쳤나, 지가 지 마음대로 사는 거지."

"아까 말하지 그랬어요."

김정아가 옆에 섰다.

"잠깐 졸았어."

말도 안 되는 핑계다.

김정아는 따지지 않았다.

팀장도 지칠 만했다.

네임드, 인류의 악몽이라 불리는 존재였다.

이제까지 단 한 개체도 죽이지 못했기에 악몽 그 이상의 흉몽이 되기도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불가사리를 죽일 순 없었다.

다만, 지진 않았다.

죽일 순 없었지만, 도로 들여보내긴 했다.

죽은 사람도 없다. 그래도 성공이다.

팀장은 팔과 안구를 잃었다. 그도 일주일은 정양해야 할 부상이었다.

"돌아가자."

중봉이 말했다. 그도 절뚝거렸다. 뼈마디 하나하나 전부 욱신거리는 기분이었다.

'또라이 새끼.'

팀장은 광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전투에 돌입한 자기보다 몸이 더 망가진 놈이다.

재생력이 탁월해서 이 정도지.

그게 아니었다면 진즉에 걸레짝이 되어 버렸을 놈이다.

그런 상황에서 타인을 구한다.

처음 보는 사람을 위해 몸을 던진다.

그게 쉬운 일인가?

동찬의 말대로 낭만주의자나 할 일이었다.

* * *

우적우적, 우걱, 쭈우우우웁.

왼손에 든 포크로 바싹하게 튀긴 꿔바로우 한 점.

씹을 때마다 육즙이 입안을 휘돌았다.

이거 맛집이다. 확실했다.

오른손에 든 젓가락은 곧바로 잘 구운 양 갈빗살을 집었다.

집는 순간 곧바로 입으로 직행이다. 들어오면 치아가 제 역할을 수행한다.

씹고 다져서 목구멍에 넘긴다. 혀로 느껴지는 예민한 미각이 이 집이 맛집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줬다.

목이 탔다. 바로 옆에 둔 맥주잔을 들었다.

꿀꺽꿀꺽!

"크아."

죽인다. 죽여주는 맛이었다.

"말했지? 이 집 맛집이라고."

요한 형이 말했다.

"인정, 쌉인정."

귀태가 말하며 나와 같이 전투적으로 음식을 섭취했다.

요한 형이 적당히 배를 채우고 물었다.

"오버랩 동대문 어땠냐?"

"뭐가 알고 싶은데?"

기밀이랄 것도 없었다. 그래서 순순히 말해 줄 마음이었다.

그 일이 끝난 지도 나흘이다.

팀장은 아직 회복 중이고, 임무에 참여한 모든 요원에게는 상여금과 휴가가 나왔다.

매번 휴가 나올 때마다 집에 갈 수도 없어서 이번에는 기숙사에서 탱자탱자 놀고 있었다.

요한과 귀태가 멀쩡해졌으면 밥이나 한 끼 하자고, 맛집을 찾았다기에 나온 참이었다.

첫날에는 나도 꽤 아팠다. 피로가 쌓인 거였다.

정신적으로도 지쳤고.

나중에 사수한테 대강 상황을 전해 들었을 때, 내가 얼마나 미친 짓을 했는지도 알았다.

사방에 휘몰아치는 불가사리의 공격 속을 뛰어다녔단다.

하핫.

"자살하고 싶다면 그 방법은 추천하지 않겠다."

사수는 그리 말했지만, 자살이라니.

턱도 없는 소리다.

할 만하니까 한 거다.

그나저나 네임드란 새끼, 생각하는 순간 지금도 팔에 우수수하고 소름이 돋는다.

정신 조종과 압도적인 파괴력의 몸통 기술, 부식, 투사 무기까지.

이제까지 단 한 마리의 네임드도 잡히지 않았다더니, 왜 그런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네임드 불가사리 직접 봤지?"

요한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물었다.

"봤지."

"어땠냐?"

요한은 태생이 그런 듯했다.

호기심이 많고, 제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하면 듣기라도 해야 하는 그런 인간이었다.

겹문과 새로운 네임드의 출현.

뉴스에서 동대문 인베이더 사건으로 나흘 내내 정부의 관리 소홀을 탓했다.

그만큼 큰일이었다.

나라가 들썩였다.

무엇보다 한국이란 작은 나라에 새로운 네임드가 출현한 것에 주목했다.

이 일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인지.

결과를 보고 원인을 찾아가는 중이라고 한다.

나도 듣기만 했다. 자세히는 모른다.

"진짜 개 음경 같은 새끼였지."

왜 네임드인지.

이름이 붙은 인베이더란 무엇인지.

그걸 말했다. 진부한 설명이지만, 더 붙일 말도 없었다.

"근데 그거 알아?"

요한이 내 얘기를 다 듣고 말했다.

"뭘?"

"그거 새로운 네임드 아니란다."

새로운 게 아니면 뭔데.

"미개봉 새 상품이었냐?"

내가 되물었다.

"비슷한 거지."

요한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농담한 건데 뭐가 비슷해.

귀를 기울였다.

요한은 소문을 듣는 귀재였고.

말을 전하는 대는 천재였다.

축약한 내용을 전하는 재주가 용하기도 했다.

"다른 지역에서 겹문이 열렸는데 그걸 임의로 막았다던데?"

"홀을 임의로 막아?"

귀태가 되물었다.

그래, 그건 말이 안 되지.

그걸 임의로 막을 수 있다면 이 땅에 홀이 열리게 놔둘 필요가 있나.

"어디까지나 소문이야. 그 겹문을 막는 바람에 새로운 네임드가 이 땅 저 땅 헤매다가 여기에서 터졌다는 거지. 그 터진 이유가 바로 한국에 원한이 있는 홀 클로저 때문이라고 하고."

"홀 클로저?"

"그렇게 부른다고 하더라. 문을 제 마음대로 닫을 수 있다고."

난 새삼 궁금해져 물었다.

"어디서 이런 걸 듣고 오는 거야?"

"능력이다. 알려고 하지 마. 다쳐."

"이거 기밀 아니냐? 막 퍼트려도 돼?"

귀태가 옆에서 말했다.

"알 사람은 다 안다고 하더라. 우리는 신입이라 이게 좀 늦는 거고."

요한이 말하며 손으로 새 모양을 만들어 날갯짓하는 시늉을 했다.

"갈까?"

"잘 먹었다."

둘이 먼저 일어났다.

"계산은?"

내가 물었다.

"탱자탱자 놀면서 상여금까지 받은 동기가 지금 나한테 뭐라고 한 거지?"

"방금 들은 내용을 암시장에 팔면 얼마짜리일까? 그 정보의 가치를 알면 나한테 계산서를 들이밀면 안 되지."

아니, 무슨 손발이 이렇게 잘 맞냐.

둘이 같이 콩트 짜서 어디 개그맨 시험 봐도 되겠는데.

"동생한테 밥을 얻어먹고 싶냐?"

내가 물었다.

"동기 사랑 나라 사랑. 우리 사이에 형제애는 없지. 동기애만 있을 뿐."

"난 이성애도 있어. 내 허리케인은 아직 열렬히 돌아가는 중이거든."

요한과 귀태가 번갈아 말했다.

"그래. 이 씹새끼들아. 형이 밥 산다. 거지새끼들, 평생 고기 한 번 못 먹어 본 새끼들, 궁핍을 덕지덕지 달고 사는 가난뱅이들."

속사포처럼 쏟아붓자, 요한이 말했다.

"좀 심한데, 이 새끼가 형한테."

"동기라며? 난 친구한테 원래 이렇게 말한다."

티격태격하며 계산대로 향했을 때다.

"저쪽 신사분이 계산하셨습니다."

양꼬치 집이라지만, 불멸자나 특수종을 손님으로 받는 곳이다. 꽤 비싼 곳이고 아는 사람만 아는 곳이란 거다.

우리가 먹은 것만 해도 삼십은 훌쩍 넘게 나왔다.

직원의 안내에 눈을 돌렸다.

알 듯 모를 듯한 얼굴이 보였다.

내가 기억력이 나쁜 건 아닌데, 스쳐 본 얼굴 전부를 기억할 순 없었다.

어디서 본 것 같긴 한데.

"...뭔데, 네 새로운 남친이냐?"

귀태가 물었다. 이 양반은 이게 농담이 아닌 것 같아서 더 무섭다.

"나 여자 좋아해. 자꾸 그러면 우미호랑 사귄다."

불가능하다. 내가 원한다고 해도 안 될 것이다. 원하지도 않지만.

"시발, 결투다. 이 새끼야."

귀태 형이 반응했다. 농담으로 무마하고 다시 그 신사라는 양반을 바라봤다.

진짜 알 것 같은데.

그가 일어나서 터벅터벅 다가왔다.

"고마웠습니다."

그가 말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뒷모습을 보는 순간, 기억이 났다.

동대문 겹문 사건 때의 경찰대원.

내가 구한 사람 중 하나다.

근데 여기는 특수종이 모이는 곳인데?

그때 거기 있던 경찰대원은 일반인이었다. 훈련받은 일반인, 그들은 특수종이 아니다.

고로 이 식당에 들어올 수 없다.

저 작자가 특수종이라면, 일반 경찰대원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나 먼저 간다."

말하고 그 뒤를 따라 달렸다.

2층에 있는 식당이었다.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밖이 어둑어둑했다.

늦은 저녁, 가로등과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사방을 비추는 시간이었다.

오감을 열었다.

걸음 소리와 기척을 잃고 방향을 잡았다.

일부러 소리 내서 쫓아갔다.

고맙다고 한 거면 날 피하진 않을 것이다.

생각보다 걸음이 빨랐다.

어느새 주변이 더 어두워졌다. 가로등 불빛이 깜빡이다가 꺼졌다.

내 앞에 그 남자의 등이 보였다.

꽤 널찍한, 운동 꽤 한 그런 몸이었다. 그래서 기억에 남았다.

전투가 시작하자마자 나가떨어진 작자, 몸뚱이가 아깝다고 생각했었다.

"맞죠? 그때 그 경찰?"

남자가 머리를 긁적였다.

"네, 맞습니다. 미안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초대해서."

"음?"

고개를 모로 꺾고 되물으니.

"오랜만이야."

어둠이 가려 준 장막 뒤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작 스무 걸음 안쪽.

예민한 내 감각을 속일 정도의 실력자였다.

감각의 영역에 두 명의 인영이 잡힌다. 처음 보인 건 까무잡잡한 피부의 여자였다.

머리에 캡모자를 쓰고 딱 달라붙는 청바지와 흰 반팔티를 입었다.

"초여름인데 일교차가 커, 감기 걸릴라."

말을 걸었다.

"이죽거리는 건 원래 이런 거지?"

그녀가 말했다.

발음이 어설펐다. 한국 사람이 아니었다.

목소리가 기억의 궁전 안에서 멋대로 튀어나왔다.

기억이 그때의 상황을 재생한다.

축능석 탈취 사건.

사수와 둘이 난입한 화이트홀.

팀장과 대치한 여자.

무전기 너머에서 들렸던 목소리.

그와 함께 스코프로 확인했던 몸의 선.

여자라서 관찰한 게 아니었다.

자세히 볼 필요가 있었다. 혹시나 나중에 마주칠 일이 있을까 봐 그랬다.

봐라, 결국 여기서 만났잖아.

상당한 글래머에, 얼굴도 꽤 예쁜 여자였다.

이름은 몰랐다. 다만, 그때 나눴던 대화는 기억했다. 그녀가 날 향해 지칭했던 호칭도.

"따란따도?"

내가 물었다.

"...난 저 새끼 마음에 안 들어."

동남아 여자, 테러 단체 프로메테우스의 일원이 말했다.

자기 나라말이어서 알아듣지 못했지만, 대충 의미는 알 것 같기에 답했다.

"나도."

적중했다. 의미가 통했다.

여자가 미간을 힘껏 찌푸렸다.

78. 동대문의 구원자

따란따도 여자 말고도 아는 얼굴이 있었다.

며칠 전, 처음 가 본 여자의 방에서였다.

사수가 저 낯짝을 보면 뭐라고 했더라.

상대하지 말고 냅다 튀라고 했다.

동남아인으로 보이는 남자다. 사진보다 훨씬 와일드해 보였다.

어깨는 딱 벌어졌고 눈은 부리부리했다.

불멸자에 비하면 한 수 쳐지는 얼굴이지만, 남성미는 물씬 풍겼다.

고로, 저 작자는 변신족이다.

"목적을 잊지 마라."

남자가 말했다.

묵직한 저음이었다.

생긴 것과 목소리가 딱 맞아떨어졌다.

남성미 하나만 보자면 불멸자보다 낫네.

괜히 허리를 세우고 어깨를 폈다.

그나저나 어쩐다.

뒤로 빠질까? 여기서 냅다 뛰면 안 잡히려나?

이전 동대문역 전투에서 배운 걸 써 볼까?

팀장의 기술을 훔쳐 배워서, 이름은 몰라서 나름대로 이름을 붙였다.

기척 흩날리기라고.

"알아."

여자가 답했다.

"그때는 고마웠습니다."

날 유인한 남자가 말했다.

수수하게 웃는 얼굴을 보니, 한 대 후리고 싶었다.

함정으로 끌고 들어와 놓고는 해맑게도 쳐 웃네.

"아들, 기억해. 한 번 속인 놈은 두 번도 속일 수 있어. 그런 놈들은 잘 기억해 둬."

"왜요?"

"다음에 잡히면 다리 몽둥이를 분지르, 아니, 잘 피해 다니라고."

도박꾼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보고 감명받으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변신족은 흥분하면 단순해서 잘 속는다는 둥, 넌 그러지 말라는 둥, 영화 한 편에 설교가 반 시간이었다.

네, 어머니.

저 얼굴, 똑똑히 기억했습니다. 넌 최소 사지 한 군데 뽀각이다.

슬쩍 왼발 끝을 틀었다.

의도를 보이며 상대의 반응을 유도하는 수였다.

따란따도가 미간을 찌푸린 채로 뭐라 말하려 했다.

칼날처럼 갈아 둔 오감이 그녀의 입술 움직임을 읽었다. 열리던 입술이 닫힌다. 그녀는 말을 잇는 대신 날 노려보며 한 걸음 나서려 했고.

뒤에 있던 '만나면 피해야 할 자식'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둘 사이에 암묵적인 동의가 오갔다.

퉁.

발로 바닥을 밀어낸다. 허벅지, 종아리, 발끝으로 이어진 힘이 가속을 가져왔다.

훅하고 사물이 밀려났다.

"제 이름은 스...."

사기꾼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어느새 그의 코앞에 내가 다다랐다.

왼손을 뻗는다. 잡아서 당기며 팔을 부러뜨리고 던지려 했다.

사기꾼은 반응하지 못했다.

놀라서 눈만 부릅떴다.

막 팔에 손이 닿는 순간, 난 불길한 예감, 아니, 유형화된 살기를 느끼고 고양이처럼 몸을 날려 벽을 차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짧은 순간, 난 환상을 봤다.

남자의 손이 내 머리를 잡고 팔을 잡아 뜯고 다리를 걷어찬다. 일격에 실린 파괴력이 몸을 터트리고 찢는다. 난 여덟 조각으로 나뉘어 땅에 널브러진다.

"나쁘지 않군."

남자가 말했다.

"난 몹시 나쁜데."

내가 답했다.

"이죽거리는 건 본래 그런 것 같고."

남자는 팔짱을 낀 채, 날 위아래로 훑었다. 시선이 느껴져 손을 들어 적절히 몸을 감추는 시늉을 했다.

"나 여자 좋아한다."

내가 말하자, 따란따도가 나섰다.

"주둥이 조심해."

어떤 언어든지, 일단 욕부터 배우라고 하더니.

저 여자, 주둥이란 말은 되게 또렷하잖아.

"후, 동대문 때도 그랬지만, 놀랍네요. 고작 1년 차 신입 요원인데."

사기꾼은 식은땀이 났는지 이마를 훔쳤다.

그리고 나도 어느새 뒷머리가 축축했다.

살기 한 번에 식은땀이라니.

어머니가 보셨다면 '난 널 그렇게 약하게 키우지 않았다'라고 하실 거다.

야생의 살기, 과외 선생 이후 이렇게 강렬한 건 처음이다.

"돌려 말하지 않겠어. 유광익, 너한테 제안을 하고 싶다."

따란따도가 말했다.

만나면 피해야 할, 그러니까 기피 대상 1호는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분위기가 묘했다.

날 죽이러 온 건 아니고.

잡으러 온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이 분위기는 뭔가.

"상황 설명부터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기꾼이 나섰다.

"제 이름은 스티븐 최입니다. 작지만 알찬 헤드헌팅 전문기업에 종사하고 있죠."

"경찰이 아니고?"

"그때도 광익 씨 만나러 간 건데, 일이 된통 꼬여 버렸지 뭡니까."

머쓱한 척하며 뒤통수를 긁으며 말하는데, 이상하게 밉다. 한 대 때리고 싶은 그런 얼굴이다.

슬쩍 다시 자세를 잡으니.

따란따도가 날 노려보며 읊조렸다.

"그만해라."

"내가 뭘."

오리발을 내밀었다.

그사이 사기꾼 놈이 말했다.

"정식으로 제안하죠. 인재를 원하는 곳이 있고, 인재가 있으면 그걸 연결하는 게 제 일입니다. 불멸특수대 2급 사원 유광익 씨를 소개합니다."

소개는 무슨.

"일 끝났으면 나와."

"네네, 제 일은 여기까지죠. 잊지 마세요. 불발이어도 수수료는 나옵니다."

"돈벌레 자식."

따란따도가 말했다.

상황은 복잡하지 않았다.

유인은 당했지만, 함정은 아니다.

하긴 여기서 한바탕하긴 얘들도 부담스러울 거다.

화림 본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일이 터지면 불특대 팀이 5분 내로 출동하겠지.

결론, 이들은 정말 스카우트 제안을 하러 왔다.

"유광익, 우리가 누군지는 알지? You know? 이건 정말 나쁘지 않은...."

"나 좋아하는 여자 있어."

고백은 하기 전에 거절하는 법이다. 다 듣고 나면 어색해진다고.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곧 앙칼진 외침이 울렸다.

"시발, 나도 너 싫어!"

내 이름은 구리게 발음하면 시발은 찰지기도 하네.

"그럼 됐네. 끝."

말과 함께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뒤에 선 남자가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이거 기분이 묘하네.

이대로 물러나면 몸이 반으로 쪽 쪼개질 것 같은 기분인걸.

팔짱 낀 채로 노려보기만 하는데 왜 이러는 걸까.

"유형화된 살기가 응축되면 사람도 죽여."

과외 선생이 말했었다. 난 그걸 실감했다.

피부가 따끔따끔한걸.

"약속은 지키실 거죠?"

사기꾼이 말했다.

끄덕.

기피 대상 1호가 고개를 끄덕이고 한 걸음 나섰다.

"듣고 나서 결정해라."

이대로 트렁크 입히고 머리에는 몽콘(무에타이 선수가 차는 머리띠), 팔뚝에는 프랏치앗(무에타이 선수가 팔뚝에 감는 띠) 따위를 채워 놓으면 무에타이 챔피언처럼 보일 것 같다.

제안이라며, 안 들으면 지금 당장 날 죽일 기세잖아.

"육체적 위협은 없을 겁니다."

사기꾼이 말했다. 저 작자는 나한테 영원히 사기꾼이다. 평생 변하지 않을 거다.

"왜요?"

"약속했거든요."

약속은 깨라고 있는 거 아닐까.

특히나 테러 단체의 간부에게 약속이란 두 글자가 얼마나 대단할까.

"우리와 함께하면 높은 지위를 약속하겠다."

"니 위로?"

따란따도가 말하기에 답하니까.

"캬앗! 그럴 리가 없잖아!"

흥분한다.

"당신 지위가 뭔데?"

"알 거 없어."

쩝. 떠보는데 말은 안 해 주네.

"그럼 뭐, 돈은 많이 주나?"

"갑부가 부럽지 않을 거다."

"여자는? 나 여자 좋아하는데."

"그것도 원하는 만큼."

경멸 어린 표정으로 답하는 게 꽤 귀엽다.

"집은? 나 펜트하우스 아니면 잠이 안 오는데."

"맨해튼? 강남? 원하는 곳 어디든."

"복지는? 내가 또 휴일을 끔찍이 챙긴단 말이야. 쉬는 날 할 것도 많고."

"프로메테우스의 간부가 되면 네 상상 이상의 삶이 펼칠 것이다."

"좋아. 거절."

참 대단한 자식들이긴 하네.

생각해 보면 내가 바로 프로메테우스가 가진 양지의 사업체를 뒤집어엎은 주범 중 하나인데, 스카우트 제의를 한다니.

이런 발상 자체가 대단하다.

"잘 생각해. 후회할 거다."

따란따도가 말했다.

"안 해."

"후회할 거다."

"당신이 조금만 내 타입이었으면 고민했을 텐데, 너무 별로야."

말하니, 발끈한 따란따도가 인상을 찌푸렸다.

기피 대상 1호가 고개를 저었다.

"제안은 이게 마지막이다."

그거로 끝이었다.

이들은 유유히 물러갔다.

처음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로 어둠에 몸을 숨기고, 깜빡이는 가로등을 배경으로 사라졌다.

스티븐 최라도 잡으려 했는데, 그도 어느 샌가 자리를 비웠다.

거참, 능력이 너무 출중해도 난리야.

적이라 할 수 있는 집단에서도 이렇게 탐내다니.

내 매력이 문제일까.

* * *

가게로 돌아가니, 요한과 귀태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떠들 일은 아니었다. 아니, 요한에게 말하기가 싫었다.

이런 일은 직접 말해야 맛이지.

내일은 다시 출근이었다.

집에 돌아가서 꿈도 안 꾸고 숙면을 취했다.

"이건 좋네."

내 샤워 타월을 찢은 정기남은 일회용 고급 타월을 썼다.

각 잡고 수납한 물건 전부 고오오급이다.

난 그걸 하나씩 꺼내 썼다.

"룰루랄라."

기남은 샴푸도 고급이었다.

자식이 돈 벌어서 다 여기다 쓰나.

다 씻고 알몸으로 나왔다.

"내 거 썼지?"

기남이다. 날 기다리고 있었다.

"야, 너 변태 같아. 샤워 끝나는 거 기다리면서 그러는 거 아니다."

"이 개자식."

자식이, 너무 쉽게 흥분한다.

요원은 냉정함이 첫째인데.

달려드는 기남의 주먹을 피하고 수건으로 주먹을 돌돌 말았다.

얍, 수건 글러브.

뻥.

스트레이트가 기남의 턱주가리에 꽂혔다.

"또 당할 줄 알았냐?"

의기양양하네. 기남이 내 수건 펀치를 양 손바닥으로 아슬아슬하게 막았다.

그래, 한 방 막은 거 칭찬해.

난 발을 걸었고 균형을 잃은 기남의 목울대를 손날로 후렸다.

"꺽!"

반응할 수조차 없는 신속한 연계기다.

컥컥거리는 기남의 경동맥을 팔뚝으로 감싸며 백 포지션을 잡고 발로는 허벅지를 안았다.

매미권이다.

"누가 보면 오해하겠네."

알몸으로 다른 남자를 안고 있다니, 이거 참.

기남은 버둥거리다 고이 잠들었다.

난 친절하게 포스트잇에 메모를 남겼다.

(지각하지 말고. 우리 기남이.)

옷을 입고 출근길에 나섰다.

날은 조금씩 더워졌지만, 새벽 공기는 언제나 상쾌했다.

출근길이 도보 5분 거리, 사옥 최고다.

오늘은 내가 처음이었다.

사수도 아직 안 왔다.

이른 아침 출근은 언제나 행복한 법이다.

섬유유연제 냄새가 나는 캐주얼 흰 셔츠에 연 청바지, 오늘은 기운이 좋았다.

맑은 햇살을 감상하는 사이 사수가 출근했다.

"일찍 왔네."

"네."

"좋은 일 있어?"

"좋은 일은 아니고 어제 참, 아니다. 이따가 다 오면 할게요."

'나 할 말이 있어요'를 온몸으로 표현하고 앉았다.

사수는 딱히 호기심을 표하지 않았다.

두꺼운 파티션 너머의 동료도 출근을 시작했다.

"오, 동대문의 구원자."

"네?"

"몰라? 너 그날 이후로 붙은 별명인데."

옆 팀 대리다.

사람 말보다 빠른 뉴스는 없다고 했던가.

그날 있었던 일은 빠르게 퍼졌다.

그 입 싼 요한이 말해 주지 않아서 몰랐다. 한방 쓰는 정기남은 대화 자체가 불가능한 생명체였고.

띠딩.

메신저가 울렸다. 요한이었다.

[김요한] 놀랐냐? 동대문의 구원자 나리,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다.

"오, 동원자."

누군가는 줄임말로 날 부르기도 했다.

"쑥스럽네요."

난 어깨를 딱 편 채로 겸양을 보였다.

사람이 겸손을 모르면 오만해 보이기 마련이다.

"쑥스러운 거 맞아?"

출근한 팬더 대리가 피식 웃었다.

나흘 만에 보는 얼굴이다.

반가웠다.

특히 오늘은 더욱더.

"팀장님은 출근하는 법 까먹으셨답니까?"

"이 새끼야, 돌아서기만 하면 뒷말이냐?"

"아닌데, 정면에서 했는데요."

저 뒤에서 오는 거 다 봤다.

팀장도 출근했다.

"너 죽이기 전에는 나도 안 그만두지."

저런 말을 진지하게 하니까 농담 같지가 않네.

"동대문의 구원자? 웃기고 자빠지셨네. 구원자가 다 얼어 뒈졌냐? 시발."

그래,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섭섭하지.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난 무게를 잡고 말했다.

이제 말할 때다. 이것 때문에 요한에게도 말 안 했다.

"어이가 없더군요."

보안 3팀 전원이 날 바라봤다. 옆 팀에서도 귀를 기울였다.

"살면서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시발, 뜸 들이는 거 재수 없네."

팀장이 끼어들었다. 하여간 초를 쳐요.

"프로메테우스, 거기서 저한테 일자리를 권하더군요."

어때 놀랐지? 적조차 인정한 남자, 유광익.

동대문의 구원자 유광익.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남자 유광익.

그 남자가 바로 여기에 있다.

79. 우물 안 병아리

"첩자로?"

팬더 대리가 물었다. 어째 웃음을 참는 얼굴이네.

"네? 아뇨. 정식으로 제안하는 거라...."

"풉."

옆 팀 대리가 웃었다. 사수도 은근히 고개를 돌린다. 저건 분명 웃긴 거다.

팀장을 바라봤다.

"여기 그 시방새한테 제안 안 받아 본 사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아, 시발.

상황 파악은 빨랐다. 프로메테우스 이 개나리 새끼들.

나한테만 제안한 게 아니잖아.

여기저기 다 찔러 본 거였냐?

"새끼야, 병아리 새끼야, 노란 병아리 새끼야. 우물 안 병아리 새끼야."

팀장이 즉석에서 노래를 만들었다. 노래는 더럽게 못 하면서 목소리는 쓸데없이 고운 미성이다.

"아니, 전 몰랐죠."

낯부끄럽네.

"회의나 참석해, 외부 보안 3팀 오전 미팅이다."

팬더 대리가 말했다.

"어서 가시죠."

무안했다. 이 자리를 떠날 필요가 있었다.

"여, 프로메테우스가 탐낸 동대문의 구원자."

누군가 풀로 내 부끄러움을 들춰냈다.

"1절만 합시다."

말하고 발을 재게 놀렸다. 팀장이 얄밉게 천천히 걸었다.

"빨리 가죠. 본부장님 화내십니다."

점잖게 타이르자, 그제야 팀장도 제 속도로 움직였다.

승강기로 향하는 길에 출근하는 기남과 마주쳤다.

이 자식 얼굴을 보니, 그제야 속이 좀 편했다.

"일찍 일찍 좀 다녀라."

내가 말했다.

사옥에 온 뒤로 기남은 지각 대장이 됐다.

까드득.

기남이 어금니를 갈았다.

"야, 정기남, 지금 몇 시야?"

사수가 그를 갈구는 소리가 들렸다. 정겨웠다. 내 덕분이다.

"근데 무슨 회의예요?"

승강기에 타서 물으니.

"임무."

"무슨 임무요?"

"구출 작전."

팬더 대리가 말했다.

"누구요?"

"나도 모르지."

어깨를 으쓱한 팬더 대리 대신 팀장을 봤다.

"뭐, 시발."

널 본 내 잘못이지.

"사수, 저 그 자식 봤어요."

"누구?"

"그, 사수 방에 있던 프로메테우스의 기피 삼 남매요."

웃으라고 한 말에 얼음장이 내려앉았다.

승강기 안이 싸늘하게 식었다. 역대급 한파였다.

"분위기 왜 이럽니까."

아니, 사람이 농담하면 좀 받아 줘야지.

"셋 중 누구?"

팀장이 물었다.

"동남아 근육 괴물이요."

직접 상대해 보니 알겠더라. 그 자식, 맨손으로 사람을 찢어발길 놈이었다.

물론 나도 어느 정도 여건이 되면 그런 괴력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걸 단숨에 해내는 것과 젖먹던 힘을 쥐어짜서 해내는 건 상당히 다른 종류였다.

"용케 살아왔네."

팬더 대리가 "허" 하고 한숨을 내뱉고는 말했다.

"네?"

죽일 생각도 없던데.

"진짜 스카웃 제의를 했다고?"

팬더 대리가 되물었다.

"네."

사수는 말없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날 쏘아보고.

팀장은 피식피식 웃었다.

"따란따도 그 여자도 있었고요."

"그때 그 아더 사이드에서 봤던 애?"

팀장이 되물었다. 드물게 욕설이 없는 정상적인 물음이다.

"네."

"그 여자 꽤 거물이었죠?"

팬더 대리가 물었다. 난 몰라서 어깨를 으쓱했고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광익이 탐내는 곳이 많네요."

팬더 대리가 말하며 사수의 어깨를 툭 쳤다.

전투 모드 직전에 돌입한 사수가 눈에 힘을 풀었다. 눈에서 광선을 뿜는 줄 알았다.

"아주 재밌는 개새끼들이야. 프로메테우스."

팀장이 말했다.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다 말했는데 특이점은 없었다.

대신 팬더 대리는 회의실 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급히 메신저로 몇 군데 연락을 돌렸다.

"아직 국내에 있으면 꼬리가 잡힐 겁니다."

"잡히면 말해 주세요."

사수의 말에 팬더 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팀장이 회의실 문을 열었다. 일단 날 찾아온 미친 남매는 뒤로하고, 지금은 일할 시간이었다.

그런데 복귀하자마자 임무라니.

이 회사 사람을 너무 막 굴리는 거 아닌가.

동대문의 구원자니, 뭐니 해서 이제까지 한 일도 예삿일은 아니었는데 말이야.

그래도 어쩌겠는가.

봉급을 받는 직장인이나, 대가를 받고 싸우는 군인이나.

명령에 복종하는 건 당연한 일인 것을.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자리 잡은 본부장이 보였다.

"나흘 쉬었으면 푹 쉬었지?"

말투에 가시가 돋았다.

하얀 머리의 파견 본부장은 이런저런 일로 우리 팀을 싫어할 만했다.

특히나 머니 & 세이브 일로 신경이 곤두서 있기도 하고.

그 일로 정치적 입지를 꽤 잃었다고 들었다.

"적당히 쉬었죠."

"근데 어떻게 니들은 나보다 늦게 오냐?"

"네, 죄송합니다."

팀장이 귀를 후비며 답했다.

하나도 안 미안해 보였다.

본부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앉아."

외부 보안 팀 대리가 홀로그램 영사기 버튼을 켰다.

"이번 작전의 타깃입니다."

영사기가 허공에 빛을 방사해 입체적인 형태를 그렸다.

안경 쓴 사십 대 초반쯤의 남자였다.

특수종은 아닌 것 같은데.

"이름 박병준."

본부장이 브리핑을 시작했다.

가평 어디쯤 숨어 있는 과학자를 찾아서 데려오라는 말이었다.

"홀 클로저라는 이름은 들어봤지? 그 클로저라는 작자가 유럽 등지에서 활동할 때, 보조를 맡은 과학자가 바로 이 사람이다. 이번 이상 현상에 관한 단서이기도 하니, 구출한다. 이상."

난 내용을 머릿속에 쑤셔 박고 작전에 필요한 사항을 암기하며 사수에게 물었다.

"구출 맞아요? 납치 아니고?"

"쉿."

열 명이 들어오면 꽉 차는 회의실이다.

내 목소리는 본부장의 귀에도 들렸다. 한때는 흰 머리 악마라고 불렸다는데, 지금은 회사 내 정치적 입지를 잃은 고약한 중년 남성이 된 작자가 입을 열었다.

"너희는 신입 교육을 어떻게 하냐?"

"동대문의 구원자가 되게끔 합니다."

팬더 대리가 말했다.

"야, 이동훈."

"네, 대리 이동훈. 귀 잘 열고 듣고 있습니다. 브리핑 숙지했습니다."

"...이런 미친 새끼들이, 이중봉."

"네, 팀장 이중봉, 귀 잘 열고 듣고 있습니다. 브리핑은 얘가 잘 숙지했습니다."

"가지가지 하네. 진짜."

팀장과 팬더 대리는 불만을 표했다. 시키는 대로는 하는데 화는 난다는 거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이 일을 굳이 보안 3팀에 맡긴 것부터가 문제고.

이 작전이 사실은 구출이 아니라 납치라는 것도 문제다.

거기에.

"소수 정예로 해결할 일이다. 위에서 주시하는 일이고. 실적에 도움 되는 거 챙겨 준 건데, 왜 지랄들이야."

그 말에 난 시발 팀장을 훔쳐봤다.

이거 말려야 되는 거 아닌가.

실제로는 실적에 도움이 된다기보다 악명을 얻는 일이고, 수틀리면 사 측에서는 입을 닦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겹문, 이상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나서긴 해야지만,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을 강제로 데려오는 건 문제가 있는 거니까.

애초에 박병준 박사라는 양반이 어디 갇혀 있는 것도 아니고.

정부에서 호출했는데 거절했으니까 이런 작전이 나온 거겠지.

회사 생활 7개월째에 접어드는 나도 앞뒤 상황만 보고 아는 일이다.

팀장과 대리 둘이 이걸 모를 리 없었다.

사수는 아깐 한 말에 아직도 눈에 불을 켜는 중이었고.

팀장과 대리는 대놓고 본부장을 비아냥거리는 중이었다.

에휴, 내가 제 명에 못 살지.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세 사람 내가 아니면 누가 챙기리.

본부장 또는 팀장이 욕설을 뱉기 전,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날 바라봤다.

난 모범생 출신이다.

맨 처음 불멸자 작대기 과외 선생에게 훈련받을 때도 눈을 반짝이며 훌륭한 수강생의 자세를 보였다.

지금도 마찬가지.

회사 생활 별거 없다. 상사에게 잘 보이고 시키는 일 잘하면 된다.

난 그렇게 했다.

이 브리핑의 목적은 작전 목표를 인지하는 것.

그걸 인지했음을 말하고.

그대로 행동하겠다고 말하면 될 뿐.

"네, 본부장님. 귀 잘 열고 듣고 작전 숙지했습니다. 구출이라 이름 붙인 작전이고, 가서 박사 생포해 올 것. 인지 완료."

"이 개자식들이 단체로 돌았어? 왜, 사장이 빽이라 눈에 뵈는 게 없냐? 너희 팀장이 너 그렇게 가르치디?"

본부장이 빡쳤다. 화가 났다. 분노를 표출했다. 헐크다.

우드득.

실제로 입고 있는 셔츠를 우악스럽게 찢고 날 향해 달려들려 했다.

"앗, 왜 이러십니까, 분노조절장애 있으십니까."

차분하게 뒤로 뛰며 말했다.

아니, 말 잘 듣고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데 왜 성질이야.

"아니, 저게 왜 내가 가르친 거야. 난 저런 시발 같은 거 안 가르쳤다고."

팀장도 덩달아 흥분했다.

"이런 개새끼들이."

왜 흰 머리 악마라고 불렀는지 알겠다. 흥분하니까 머리가 삐쳐 올라가더니, 왼쪽 오른쪽 위로 뿔처럼 솟았다.

"개 신기."

감탄했다.

"그만해, 이 미친놈아."

팬더 대리가 날 당기며 말했다.

"가요. 좀."

1팀 대리가 말했다.

"지원은? 진짜 달랑 넷이 가?"

팀장이 물었다.

"1팀에서 한 명 차출해 가면 됩니다. 대리급 이하로요. 분석팀에서도 한 명 붙고요. 강 대리가 갑니다."

와, 1팀 대리 쇼 미더 머니 나가도 되겠는데, 말이 굉장히 빠르다.

그럴 만했다.

"다 죽어, 시발, 다 죽여 버린다."

활화산이 폭발한 본부장이 달려들기 직전이었다.

"뭘 죽인데, 자꾸. 계급장 떼고 떠 보든가."

팀장이 활화산 위에 헬기를 띄워 기름을 쏟았다.

아주 분화하라고 고사를 지내는구나.

"팀장님, 약자를 배려해야 합니다."

난 말리기 위해 말했고.

"미친놈아, 그만해."

정신 차린 사수가 날 밀었다.

그렇게 우리는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방음 시설 완벽한 회의실은 문이 닫히기 직전까지, 조용히 흥분한 외침을 토해 내는 본부장의 하울링이 지속됐다.

불멸자로 살다 보니, 특히 화림 내에서 생활하다 보니 저런 노스탤지어의 외침을 자주 듣게 된다. 소리 없는 아우성까진 아니지만, 조용한 아우성쯤은 된다.

"너는 팀장님보다 한 수 더 뜨냐?"

팬더 대리가 날 나무랐다.

"제가요?"

살면서 제일 불쾌한 말을 들은 기분인데.

"시발, 표정 안 풀어?"

팀장이 그걸 보고 시비를 걸었다.

"제 표정이요?"

모른 척 되물었다.

"말을 말자."

팀장은 고개를 팩 돌리고 턱턱 걸어갔다.

곤란한 작전이긴 하다. 이걸 맡게 된 이유도 뭔가 불합리해 보이기도 하고.

그런데 요즘 여기저기서 꽤 활약하고 있는데 이런 건 사장 선에서 막아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병아리, 무기 좀 챙겨라. 시이발, 존나 챙겨 주기 싫네."

팀장이 떠나며 말했다.

참, 말 한마디 한마디 예쁘게 하는 사람이다.

뒤에서 왼손으로 오른 주먹을 감싸 위로 올렸다.

이거나 처먹어라

"다 보인다. 뼝아리 새끼야."

된 발음이 찰진 팀장은 뒤에도 눈이 달렸나 보다.

사실 불멸의 감각이라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지. 나도 안다.

"아, 오른 주먹이 간지러워서요."

대충 핑계 대고 돌아섰다.

팬더 대리와 사수가 날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넌 난놈이야."

팬더 대리가 말했다.

당연한 말씀을 하시네.

"근데 무슨 무기요?"

표준 규격 장비 챙기는 건 일도 아니다. 그걸 굳이 누가 챙겨 줘야 하나?

나도 어디서 챙기는지 아는데.

"스탠다드 말고."

"커마요?"

"꿈이 크다. 그건 네 돈 주고 하고."

그럼? 눈으로 묻자.

"직접 봐."

사수가 말하고 앞장섰다. 무기는 좋을수록 좋다. 특히 변신족이 쏘는 레이저 사출 무기를 보는 순간, 난 반해 버렸다.

하다못해 레이저 강선이라도 있으면 어딘가.

난 성큼성큼 걷는 사수의 뒤를 부리나케 뒤따랐다.

80. 누나가 생겼다.

사수와 난 지하 6층 무기고로 향했다.

"여기에 표준 장비 말고 뭐가 더 있어요?"

"있지."

사수가 말했다.

있긴 했다. 장비가 아니라 사람이 우리를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올라가면서 팬더 대리가 이미 연락을 넣은 듯했다.

뻐끔.

"너야?"

담배 연기 한 모금 머금은 불멸자가 말했다. 나이를 가늠하긴 쉽지 않지만, 말투나 태도, 그런 걸 봤을 때 최소 쉰은 넘었을 터다.

반백의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묶고 헐렁한 박스티를 입었는데 지금 밖에 나가도 어지간한 청년들 가슴에 불을 지를 법한 외모였다.

"네?"

"그 동대문 구원자인지 뭐시기인지."

"네, 아, 2급 사원 유광익입니다."

딱 봐도 나보다 직급이 높아 보였다.

군대식으로 인사하고 나니, 한 걸음 거리로 다가오더니 담배 연기를 내 얼굴에 뿜는다.

변신족의 예민한 후각이 냄새를 구분했다.

알싸한 민트향, 담배 특유의 냄새와 구강구취제의 향까지.

거기에 반사적으로 숨어 있는 향까지 잡았다.

쇠 냄새와 탄내, 탄약의 향.

방금까지 기관총이라도 갈기고 온 그런 냄새다.

"너 변태니?"

"네?"

나도 모르게 코를 킁킁거렸나 보다.

눈앞에 있는 불멸자와 옆에 선 사수까지도 눈빛이 묘했다.

"냄새에 좀 민감해서."

되는대로 둘러댔다.

"맞춤 제작한 거 아니면 이 정도가 최상일 거다."

말하며 웃는데, 정말 매력적인 미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날 보더니 큰 누님 불멸자가 말했다.

"반하지 말고."

"전 이상형이 명확해서요."

"너 재밌구나."

"유머러스함이야말로 제 가장 큰 장점이죠."

"고르기나 하셔."

픽 웃은 큰 누님이 정글도 한 자루와 샷건 하나를 꺼냈다.

정확히는 칼은 들었고 샷 건은 카트에 실어 왔다.

"칼날 아다만티움이다. 알지? 아다만티움?"

들어도 봤고, 비공식적으로는 보기도 했다.

머니 & 세이브 비밀 금고를 이룬 금속이기도 했다.

더럽게 단단하고 무거운, 쉬이 닳지 않는 금속.

최소 강철의 3배에 달하는 무게.

그 이름은 신화에서 따와 그대로 붙인 광물이다.

따로 묵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무게를 줄이려고 칼날에만 접합했지. 나머지 부분은 크롬강이고."

건네주기에 한번 들어 봤다.

묵직한 게 장난 아니었다.

일부러 정글도 모양으로 만들었구나.

앞으로 쏠린 무게 중심을 살리려면 일반 나이프 모양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나저나 이 무게, 꽤 손에 감긴다.

이대로 휘두르면 어지간한 나무라도 중간부터 싹둑 잘릴 것 같다.

좋다. 훌륭한 무기였다.

대신 무게 중심 잡기가 묘하게 어려웠다.

"주문 그대로 만들었는데, 정작 들어 보더니 들고 휘두르는 데 집중하느라 더 심력이 소모된다고 지랄하지 뭐냐."

"그렇습니까?"

맞다. 어지간히 무게 중심이 흐린 물건이다. 칼날 무게 때문에 들고만 있어도 앞으로 중심이 쏠리는 기분이다.

잡는 순간, 어떻게 쓰는지 방법과 활용도가 머릿속을 스쳤다.

계속 들고 휘두르기에는 나빠도 다른 방도로 활용하면, 나쁘지 않다.

"이거 좋네요. 이거 할게요."

"꽤 무거운데 평소에 운동 열심히 하나 봐?"

불멸자는 온갖 훈련으로 근력을 기른다. 타고난 근력이 뛰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은 그걸 집어서 한 말이다.

"네."

훈련도 열심히 하고 변신족이기도 하고 뭐, 그렇습니다.

덕분에 이 정도 무게는 상관없는 거고.

"그 총은 뭡니까?"

약간 반푼이 같긴 해도, 이 칼만 해도 표준 규격 장비보다 월등한 퀄리티다. 욕심이 나서 물었다.

"이건 구색이나 맞추려고 가져온 거야."

말하며 뒤로 숨긴다. 뭔가 싶어서 보니, 사수가 내 팔을 잡았다.

"저건 못 쓸 거야."

"뭔데요."

거, 보기나 합시다.

큰 누님이 수줍게 웃었다.

"삼 년 전에 욱해서 만든 건데, 정작 불멸자가 쓸 물건은 아니더라고."

말하며 카트를 내민다.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대체 뭔데.

"전부 다 아다만티움으로 만든 산탄총이야. 그래서 어지간하면 닳질 않아. 내구도가 환상이거든. 아다만티움 칼날이 크롬강 칼날을 가를 수 없어도 깨 먹는다는 얘기는 많이 들어 봤지? 그럼 금속을 써서 통짜로 무기를 만들면 어떨까? 탄까지 맞춤으로 만든다면?"

흥분했네. 난 반도 못 알아들었다.

"아, 미안. 쉽게 말해 줄게. 이거 개 무거워."

손을 내밀어 손잡이를 쥐었다. 거뜬히 들어 올리려고 했는데, 묵직한 무게가 팔근육을 당겼다.

힘을 더 줬다.

그제야 총구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일반 산탄총의 모양에 위아래에 손잡이가 붙었다.

"너 힘 좋구나."

말하며 눈을 반짝이는 큰 누님이다.

"손잡이는 왜 만든 거예요?"

"처음에는 총이었는데 아무도 총으로 못 쓰잖아. 한 손으로 쓰는 소드 오프 형태 샷건인데 들질 못하니. 조준은 택도 없잖니."

"그래서요?"

"안 되면 몽둥이로라도 쓰라고."

발상이 참신함을 넘어서 괴팍하다.

총이 안 되면 휘두르기라도 하란 거잖아.

변신족한테 몽둥이로라도 쓰라고 할 셈이었나보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또 묘하게, 휘두르기 나쁘다.

"엄청 비싸겠네요."

오면서 사수에게 들었다. 지금 받는 무기는 무료가 아니다.

화림은, 내 회사는 몹시 치사했다.

이런 무기쯤은 그냥 보급품으로 줘야 하는데, 회사 자산이란 거다.

사고 싶으면 돈을 내란다. 치사한 인간이 가득하다. 사회가 썩었다.

"그거 쓸 수 있어?"

큰 누님이 물었다.

대강 무게를 가늠해 보고 계산기를 돌려 봤다.

무겁긴 하다. 보통이라면 운동 조금 열심히 했다고 쓸 만한 무기는 아니다. 확실히 변태 같은 무기다.

"네, 뭐. 조금 무리하면."

약한 척을 하며 말했다.

꽤 쓸 만한 물건이었다. 탄의 위력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근데 이럴 거면 일반 총을 쓰지, 왜 굳이 이걸.

큰 누님이 눈을 반짝였다. 이 누님은 눈에 별을 담았나. 왜 자꾸 반짝거려.

"무기는 내 자식 같은 거야. 근데 태어나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걸 보면 기분이 어떨 것 같니?"

"...네?"

의인화가 심하시네.

"근데 그 아이가 쓰인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다. 다 그냥 줄게."

"네?"

이번에는 사수가 되물었다.

이런 일이 굉장히 드문가 보다.

"유광익, 너라면 이 아이를 쓸 수 있다는 거잖아. 혹시 창고에 처박아 두면 용서 안 한다."

난 눈을 좌우로 굴렸다. 사수가 놀란 얼굴을 보였다.

눈썹이 조금 올라가고 미간이 슬며시 좁아졌다.

이건 매우 놀란 표정이었다.

"이 친구 이름은 뭡니까?"

변신족 어머니와 불멸자 아버지 사이에서 영재 교육을 받아 길러진 눈치다.

내가 말하자, 큰 누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은 네가 정해야지."

"네, 그럼 천천히 짓겠습니다. 누나라고 불러도 될까요?"

"까짓거 해버려."

기분파구나. 이 누나.

"누나."

"동생."

의기투합이란 이런 거다.

난 큰 누님과 손을 맞잡고, 이 친구를 반드시 쓰겠다고 약속하며 아다만티움 합금 정글도를 받아왔다.

"후련하다."

큰 누님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인사하고 돌아서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이다. 사수가 입을 열었다.

"최소 삼천은 굳었어."

"삼천이요?"

"원자잿값이 더 비싼 무기야. 둘 다. 불량품이라 고작 이 정도지."

실패작이라.

"그래도 그냥 준다니."

사수가 말을 흐렸다.

그만큼 드문 일이란 거겠지.

양손이 묵직했다. 물리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사무실로 돌아가니, 내 룸메이트가 와 있었다.

"왜 왔어? 친구?"

난 손을 들며 기남을 반겼다.

"알 거 없다."

여전한 개나리다.

"너희 사이 안 좋냐?"

팀장이 툭 튀어나와 기남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말했다.

어깨동무다. 나한테는 한 번도 하지 않은 어깨동무.

"아니요. 죽마고우입니다."

내가 말했다.

"누가, 니 친구야."

"아니었어?"

순직한 척 눈을 크게 뜨고 되묻자.

기남은 말을 잃었다.

대신 어금니만 박박 갈았다.

자식아, 이빨 다 닳겠다.

"이쪽 1팀에서 이번 작전 지원 온 헬퍼."

팬더 대리가 앉은 채로 의자만 팽 돌리고 말했다.

"하고 많은 사람 중에 너희 기남이를요?"

내가 물었다.

"우리 기남이다. 새끼야."

팀장이 피식피식 웃으며 답했다.

난 그 웃음을 보고 확신했다.

분명 나 엿 먹이라고 데려온 거다.

그런데 어쩌나.

"뭐, 좋네요. 기남이가 또 실력은 좀 떨어져도 열심이니까."

"죽여 버리겠다."

기남이 살벌한 기세를 뿜어냈다.

이 친구, 인내심도 제로지.

기남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난 아다만티움 소드 오프 샷건 손잡이를 쥐었다.

순간, 큰 누님의 자식이자, 이제는 내 친구가 된 이 녀석의 이름이 떠올랐다.

4번 타자다. 총의 이름을 정했다.

손잡이를 쥐고 기남의 허벅지를 노렸다. 부러뜨릴 순 없으니, 적절한 힘 조절이 필요했다.

덕분에 팔근육에 힘줄이 바짝 올라왔다.

훙.

무게감 실린 4번 타자가 허공을 갈랐다.

텅.

"이 새끼, 뭘 들고 다니는 거야."

기남은 맞지 않았다. 대신 팀장이 내 4번 타자를 손바닥으로 막았고.

그사이 기남이 내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그건 내가 고개를 꺾어서 피했다.

"니 동기 죽일 일 있냐?"

팀장이 사납게 말했다.

"아뇨, 이건 어디까지나 반사적인 보호 본능인데요."

이걸 막네, 굳이? 왜 기남이가 다치면 자기 마음이 아픈가? 팀장, 이 새끼 기남이를 이성으로 좋아하나?

이걸 왜 막아.

그동안 난 숱하게 때리면서 기남이 때리는 건 막네.

"웃기고 있네. 이거 뭐야?"

"선물 받았습니다."

사수가 말했다. 아까 있었던 일이 꽤 충격이었는지, 사수가 꽤 길게 설명했다.

"그 양반도 참."

팬더 대리가 말하고.

"너 얘 때리지 마라. 지켜본다."

팀장이 나에게 경고했다.

"덤빈 건 제가 아닌데요."

"말로도 때리지 마. 새끼야."

"아니, 입이 달렸으면 말을 하고 살아야지. 마음대로 말도 못 합니까. 공산국가야 뭐야."

"...주둥이 꿰매 버린다."

살기다. 불멸자인 팀장에게 야성의 살기가 느껴졌다.

"네, 주의하겠습니다."

내가 발을 뺐다.

"하기 싫다."

뒤에서 누군가 읊조리는 게 들렸다. 내가 물러나는 바람에 들린 거지. 본래라면 들리지 않을 혼잣말이었다.

돌아보니, 아는 얼굴이 보였다.

"강 대리님."

내가 인사하자, 강희모 대리가 희미한 웃음을 보였다.

"이제 다 모였네. 브리핑 준비 끝났지?"

팀장이 강희모 대리에게 물었다.

"네. 끝났습니다."

강 대리가 답했다.

왜 이렇게 수척해지셨어요. 대리님.

"정말 신입 사원을 지원으로 데려가는 겁니까?"

강희모 대리가 물었다.

"팀 구성에 불만 있으면 니가 팀장 해."

팀장은 부드러운 설명으로 그 질문을 회피했다.

성격 참 못났다. 못났어.

"걱정하지 마세요. 대리님. 제가 있잖아요."

나만이 대리님을 위로했다.

"그래. 가자."

팬더 대리가 그걸 보고 키득키득 웃었다.

"가자."

팀장이 말했고, 우리는 곧 회의실에 모였다.

"현재 위치 파악은 끝났습니다. 다만, 아시다시피 강압적으로 데려올 입장이 아닙니다. 일이 좀 꼬이기도 했고요."

"설명해."

강희모 대리가 딸깔딸깍 리모컨을 눌렀다.

멀리서 촬영된 사진을 다시 입체적으로 구성한 홀로그램이 회의실 중앙에 떴다.

마당이 넓은 별장 같아 보였다.

거기에 사람으로 추정되는 덩어리가 대략 열 이상이다.

"칩거 생활 중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내가 물었다. 칩거치고는 고용인이 좀 많네.

"칩거가 아니라 숨어 있는 거지. 저 사람 사고도 꽤 치고 다녔더군요. 불멸교랑도 사이가 안 좋고. 프로메테우스, 이시스랑도 일이 좀 있습니다."

테런 단체랑 골고루 인연이 있는 양반이구나.

불멸교, 프로메테우스, 이시스.

전부 범국가적 테러 단체다.

"뒤가 더러운 일이네."

팬더 대리가 말했다.

처음부터 깨끗할 거로는 기대도 안 했기에, 다들 그러려니 했다.

"엑스큐라시나 사이오닉 협회가 끼어들진 않아?"

팬더 대리가 물었다.

"네, 대리님.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쪽은 박병준 박사 말고 다른 쪽으로 일을 진행하고 있는 거로 압니다."

강 대리는 분석팀에서 모든 정보를 통합해서 온 참이었다.

그나저나 팬더 대리가 더 위였구나.

"결론이 뭔데?"

팀장이 물었다.

"박병준 박사가 가진 재산으로 사람을 좀 썼습니다."

"사람?"

"용병을 고용했습니다. 지금 보시는 별장을 요새로 만들어 버린 거죠."

구출이라 쓰고 납치라 부르는 작전에 용병이 출현했다.

"어디?"

"이름 있는 곳은 하나뿐입니다. 블루 트윈스입니다."

용병, 다른 말로 하면 민간 군사 기업.

국내에도 몇 군데 있다.

그들은 전부 프리랜서이고 반쯤은 범죄자 취급을 받기도 한다.

한국은 땅덩이도 좁아서 대규모 민간 군사 기업은 없었다.

하지만 외국으로 눈을 돌리면 달랐다.

"미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애들이네요."

팬더 대리가 말했다.

"그쪽에서 나온 인원은 셋이 전부입니다. 나머지는 현지, 한국에서 고용한 병력입니다."

강희모 대리가 말하며 버튼을 다시 눌렀다.

"예상 인원은 스물, 그 별장을 지키는 인원입니다."

팀장이 그걸 보고 킥킥 웃었다.

팀장 곁에 있던 기남이 움찔하는 게 보였다.

야, 그런 거로 놀라지 마. 원래 저런 사람이다.

"실패하라고 던진 일이구나. 이거."

강희모 대리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버린 일, 실패할 게 뻔한 일에 투입되는 건, 진급에 큰 무리를 주는 일이니까.

왜 안색이 그렇게 안 좋나 했다.

"하여간 윗대가리 새끼들 생각하는 거 하고는. 이동훈."

"네."

"디테일한 건 가면서 짜. 정아."

"네."

"가면서 기남이 포지션 잡아 줘."

"네."

"뼝아리."

누굴 부르는 걸까? 여기에 그런 사람은 없는데.

"시발."

"네."

이번에도 무시하면 때렸을 거다. 확신한다.

"강 대리랑 먼저 출발해서 거점 파악해."

"먼저요?"

내가 되물었다.

"응. 너희는 지금 당장 출발. 우리는 내일 오전 출발."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하지만, 급해도 너무 급한 거 아닌가.

"이게 그나마 확률이 높겠죠."

강희모 대리가 말을 덧붙였다.

무슨 말인가 싶어 보니.

"저 별장 겸 요새에 병력을 더 불러들이기 전에 먼저 치겠다는 거다."

기남이 말했다.

"나도 알아."

"웃기시네."

때리고 싶다. 그런데 팀장 옆에 딱 달라붙는다. 이 개나리 새끼는 권력 지향적인 인간이었다.

81. 너 진짜 분석팀 안 올래?

"거, 뭐 한다고 이렇게 사람을 모은 거요?"

돈 몇 푼에 사람 머리에 총알을 박는 놈들.

용병이란 그런 이들이었다.

인베이더와 블랙홀, 특수종이 판치는 세상의 하이에나들.

박병준 박사는 용병을 딱 그 수준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자기 속내를 이야기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왜? 일하기 싫어? 싫으면 가고."

박사의 말에 머리를 바짝 자르고 얼굴에 알록달록한 불꽃 문신을 새긴 용병이 입술을 내밀었다.

"사람 참 까칠하시네."

"헤이."

블루 트윈스 직원이 박사 옆에 서며 용병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알겠수다."

용병이 픽 하고 바람 새는 웃음을 보이며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블루 트윈스 직원은 고작 셋이었지만, 확실히 강자의 반열에 속한 이들이었다.

문신을 새긴 용병은 저 셋이 어떤 특수종인지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럼 어떻게 하나.

얌전히 말을 따라야지.

어차피 자기는 돈만 받으면 그만이었다.

계약 기간은 한 달, 그 기간까지 요새가 된 별장을 지키면 그만이었다.

박병준 박사는 그런 용병을 보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당신은 참 쓸모없는 데 돈을 쓴다."

블루 트윈스 직원이 말했다.

"네 알 바 아니다."

그럭저럭 인연이 닿아 고용한 이들이었다.

일반 용병이 하이에나라면 블루 트윈스는 무리를 이룬 사자 집단 같은 거다.

그리고 돈만 주면 무엇이든 하는 놈들이지.

가령 사람을 산 채로 해부하거나 연구하는 일도 한다.

특이한 혼혈이 있으면 잡아가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블루 트윈스는 그런 놈들의 집합체였다.

"전부 아는 사람 아니었나?"

딱딱한 영어 발음은 그 출생지가 영국이라는 걸 알려 줬다.

'난 알지.'

하지만 저 새끼들은 자신을 모르겠지.

박병준 박사는 대답 대신 싱크대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 막잔에 콸콸 쏟아 한 모금 마셨다.

그걸 본 트윈스 직원은 입을 다물었다.

* * *

부르르.

"저 전화 좀."

"지금?"

강희모 대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어쩌겠나.

어머니 전화다.

요즘 어머니의 히스테리가 늘었다.

아버지 말에 따르면, 내가 나가고 나서 허전함을 느껴서 그런다는 데.

내가 볼 때는 요새 부쩍 늘어난 아버지 출장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부자는 그렇게 서로의 의견을 교환했고, 서로 물러서지 않았다.

다만. 하나의 결론은 공유했다.

어머니의 허전함을 채워 줄 뭔가가 필요하다는 것.

고양이라도 한 마리 기르라고 해 볼까.

어머니는 애견 샵 유리창 앞을 지나면 눈을 떼지 못했었다.

"한 마리 길러 보세요."

다만, 이렇게 권해도.

"툭 치면 죽을 것 같아서."

이리 말씀하시곤 거절했기에 키울 기회는 없었다.

그 말이 물리적인 현실감으로 다가오기에 나도 더 권하지 않았고.

귀여워한다고 반려동물을 기르라는 것도 우습고.

키우는 것과 보는 건 다르니까.

"급한 전화라서요."

휴게소를 지나, 산길이 굽이쳐 이어진 길이었다.

꼬불꼬불 이어진 길을 타고 가자니, 무슨 비밀 기지를 찾아가는 기분이었다.

가평에 있는 펜션은 전부 이따위 구간을 지나야 나오긴 하지만, 여긴 그 정도가 심했다.

박병준 박사가 요새로 삼은 별장은 가평에서도 골짜기 안쪽이었다.

펜션 몇 개를 지나쳐 들어서니, 그제야 목적지가 보여서 거리를 두고 차를 세운 참이었다.

난 적당히 강희모 대리가 들리지 않을 거리까지 움직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어머니."

"바쁘니?"

"아무리 바빠도 어머니 전화는 받아야죠. 동대문구 제일 미녀, 세상이 사랑하는 미녀, 아직도 나가면 처녀 소리 듣는 미모의 어머니이신데요."

"미모 찬양을 하려면 성경 두께만큼 책을 써 오렴."

"그건 좀."

"주말에 한 번 들를래?"

"네? 주말에요?"

이번 주말이라. 이 일은 며칠 걸릴까.

오늘이 목요일이니까, 이틀이면 끝나려나.

"무슨 일 있으세요?"

"그냥."

어머니와 무기력이란 단어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어머니는 지금도 무기력하지 않았다.

다만, 몹시 불편한 기분이라는 건 알았다.

"반드시 가겠습니다."

이건 가야 한다. 가서 해결책을 강구해야 한다.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일이 모두 끝나면 아버지에게 물어봐야겠다.

진짜 고양이나 강아지 한 마리 입양을 고민해 보는 건 어떻냐고.

통화를 끝내고 돌아오니, 강 대리가 쌍안경 스코프를 들고 상황을 살피는 중이었다.

"어때요?"

"여기선 안 되겠다."

굽이쳐 올라가는 길이었다.

별장은 산 중턱에 있는 형태였기에, 아래에서 위를 보며 정찰하는 건 무리였다.

난 좌우로 시선을 돌렸다. 왼쪽에 꽤 높은 능선이 보였다.

저기라면 위에서 밑을 볼 수 있겠지.

"갈까요?"

긴 설명이 필요 없는 말에 강 대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산을 타야 한다니."

"그렇게 싫어요?"

"너 군대 안 갔다 왔지?"

"물론입죠."

"난 군대 전역하고 입사한 케이스다."

내가 얼굴로 의문을 표하자, 강 대리가 말했다.

"미필은 모르는 세계다."

거, 사람 되게 무시하네.

군대 한 번 안 갔다 왔다고 이러기 있나.

"네, 미필은 모르렵니다."

"농담이야."

"알죠. 근데 산은 탈 줄 아시죠?"

"산악구보는 지겨울 정도로 했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차를 으슥한 갓길에 대고 대충 옆에 나뭇가지 수십 개를 부러뜨려 덮어 놨다.

비포장도로와 포장도로가 만나는 지점의 공터였다.

이 정도면 가까이 와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찾기도 힘들 터였다.

"가죠."

난 어릴 때부터 어머니 손에 이끌고 산을 탄 몸이다.

그놈의 변신족은 본능 때문에 극기라는 두 글자를 머리에 때려 박아야 했지.

아마 시간이 됐으면 히말라야도 올랐을 거다.

아버지 몰래 그럴 시간은 없었기에, 난 한국의 산만 탐방했다.

솔직히 말하지.

그래서 난 한국의 산이 익숙했다.

몇 번 걸음을 옮긴 것만으로 난 짐승이 다니는 길을 찾았다.

품에서 에너지 바를 하나 꺼내 씹어 삼켰다.

"길이 험하네요."

"내가 산악구보 중대 출신이라니까."

강희모 대리가 말했다. 여유가 느껴졌다.

군필은 다 나처럼 이 정도 산은 타는구나.

그럼 좀 빨리 가 볼까나.

반쯤 기울어진 경사로에 발을 딛고 두꺼운 가지를 쥐고 몸을 위로 당겼다.

걷는 게 아니라 반쯤은 매달려 오르는 기분이었다.

길은 험해도, 이게 시간은 짧다. 그리고 이 정도는 갈 만하다.

더구나 그 산악구보 뭐시기 출신이라니까.

강희모 대리도 알아서 쫓아올 테고.

산을 오르며 챙겨온 무장을 점검했다.

겸사겸사다.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멀티테스킹,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해서 생각을 많이 해. 그럼 본능을 제어하기 쉬워."

변신족 과외 선생이 시킨 일과 유사한 방식이다.

본능을 제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나도 그렇게 했다.

올라가면서 할 일은 딱히 없으니 무장 점검이다.

왼쪽 허리춤에 슬러그 나이프.

이전에 축능석 사건 이후 경호팀장에게 선물 받은 물건이었다.

칼로도 쓸 수 있고 근거리 폭발 산탄을 쏘는 괴물 같은 무기다.

꽤 비싸기도 하고.

슬러그 나이프 앞쪽에 아다만티움 칼날 정글도, 이 친구는 아직 이름을 못 붙였다.

오른쪽 허리에는 4번 타자.

통짜 아다만티움 덕분에 무장 무게가 확 늘었다.

나머지는 표준 규격 장비다.

방검방탄복과 기관단총 MP5 한 자루는 허리 뒤로 돌려 맸다. 탄창 여덟 개는 방검방탄복 곳곳에 박아 넣고 수류탄 네 개, 연막탄 두 개, 섬광탄 하나.

든든하고 무겁다.

큰 누님에게 4번 타자의 탄도 받았는데 이것도 무거웠다.

진짜 변신족 아니면 쓰지도 못할 무기다.

거기다 통짜 아다만티움으로 만드는 덕분에 조준하는 가늠쇠가 개판이었다.

고로 불멸자의 감각이 아니면 누굴 쏘아 맞히기 힘든 그런 총이자, 무식하기 짝이 없는 무기다.

턱턱, 오른발로 삐죽 솟은 돌을 밟자, 우직하고 돌이 밑으로 쑥 빠졌다.

아다만티움의 무게 덕분이었다.

그 탄력을 이용해 왼쪽으로 뛰어서 가지를 잡고 위로 몸을 뽑아 올렸다.

경사로가 점점 험해지는 기분이었다.

우직하고 나뭇가지가 부러졌다. 그럼 다시 오른쪽으로 가면 되지.

가지를 던져 버리고 우측에 있는 두툼한, 경사로 중간에 쑥 솟은 소나무에 걸터앉았다.

드드득.

무게 때문에 이 나무도 부러질 것 같았다. 이쪽 지반은 그리 튼튼하지 못한 것 같았다.

우드득.

나무가 부러져 밑으로 쏠렸다.

흙무더기와 내 몸통만 한 나무가 부러져 밑으로 대롱대롱 매달렸다.

나무가 퉁 하고 길바닥을 때렸다.

정확히는 경사가 진 벽과 같은 길바닥에 통통 부딪혔다.

그 위에 더 두툼한 나무가 있길래 올라섰다. 흙 사이에 솟은 돌로 된 단단한 발받침도 있었다.

이번에는 꽤 큰 바위였는지 쑥 뽑히는 불상사가 없었다.

그렇게 밑을 보는데.

"야."

강희모 대리가 흙투성이가 되어서 눈을 빛내는 게 보였다.

"...산사태라도 맞으셨습니까?"

정중하게 물었다.

"나와. 내가 먼저 간다."

에헷, 이건 생각 못 했네.

내가 던진 나뭇가지며 흙무더기에 반쯤 산사람이 됐다.

강희모 대리는 거미처럼 경사로를 타고 올랐다.

발과 손을 이용해서 쑥쑥 오르더니 나보다 위로 갔다.

강대리의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우적.

난 에너지 바를 하나 더 꺼내 씹으며 물었다.

"힘드세요?"

"말, 후아, 걸지 마."

네.

그때부터는 말 없는 등산이었다.

이게 영화였다면 참 지루했을, 그런 순간이다.

그렇게 능선 위로 다다른 뒤다.

난 좌우로 돌아보며 강 대리에게 말했다.

"이 산이 아닌가 본데요?"

번뜩.

살기가 느껴졌다.

강 대리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했다.

"뭐?"

"농담입니다."

아니, 하도 산악구보, 산악구보 하길래 등산의 전문가인 줄 알았지.

우리 어머니랑 산 탔으면 중간에 실족사했겠다.

불멸자니까 죽진 않겠지만, 하여간 고생 좀 했을 건데, 나니까 좀 편하게 온 건데.

"나 왜 이중봉 팀장님이 이해가 가려고 그러냐."

"네?"

"아니다."

지쳐서 앉은 강희모 대리를 두고 난 쌍안경 스코프를 들었다.

위에서 밑으로 보이는 각도를 잡았기에, 박병준 박사가 용병을 고용해 만든 요새도 보였다.

"스물이라면서요."

스코프에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물었다.

"늘었네."

바로 옆에 강희모 대리가 섰다.

쌩하고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여름이 시작됐지만, 아직 산 위는 추웠다.

난 눈으로 사람 숫자를 셌다.

대략 서른아홉.

예상했던 것보다 숫자가 배는 많았다

"위성 사진이 집 안까지 찍어 주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많긴 한데."

강희모 대리가 중얼거리며 말을 이었다.

"사람을 더 모은 거다."

말과 함께 대리님이 설명했다.

이 정도면 한국에 있는 어지간한 용병 회사 규모를 넘었다는 것.

잘나간다는 한국 PMC도 잘해야 쉰 명 내외라고 했다.

제일 큰 곳이 백 명이 조금 넘고.

나머지 고만고만한 곳은 열 명이 안 되는 곳도 많았다고 하니.

"박사라는 작자가 부자인가 봅니다."

내가 말했다.

용병 마흔 명.

적지 않은 숫자였다.

"세 시간, 지속 관찰한다."

정찰의 기본은 목표의 패턴을 파악하는 거다.

우리는 그렇게 했다.

에너지 바만 먹으니 물리긴 하지만, 그래도 배고픈 것보다는 나았다.

젤리형 단백질 음료수를 삼키며 딱 세 시간이 지났을 때다.

"골치 아프네."

강희모 대리가 말했다.

"그러게요."

나도 동의했다.

통행로가 하나다.

좌우로는 산이 가로막은 형태인데, 저 요새 안에 숨으면 저격이고 나발이고 소용없을 터였다.

"유광익."

"네."

"저기 봐라."

강희모 대리가 가리킨 곳을 육안으로 보고, 다시 스코프로 바라봤다.

넓게 쭉 뻗은 통행로다. 경사로는 있지만, 승용차 세 대쯤은 올라갈 넓이다.

"저쪽으로 생필품이나 무기를 보급했겠죠. 보급로입니다. 저 뒤에 M60 세 정은 보셨죠?"

"길만 보지 말고 넓게 봐라."

강희모 대리가 말했다.

큰 기대가 어린 목소리는 아니었다.

"잘 보면...."

막 강 대리가 뭐라고 하려는 순간, 난 스코프에 어린 사람들의 움직임을 읽었다.

단 몇 초지만, 모인 무리의 행동이 눈에 들어온다.

집중된 감각? 아니, 그것과는 달랐다.

1 더하기 1이 2라는 게 뻔한 것처럼.

넓은 통행로.

거치된 기관총의 위치.

드럼통에 불을 피우고 그 위에 뭘 구워 먹는 용병 무리.

저들의 목소리가 귀에 닿지는 않았다.

그래도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저 통행로와 용병 무리의 움직임이."

"함정이네요."

강 대리의 말을 잘랐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 들어온 내용을 풀어서 말했다.

"통행로요. 보니까 대부분 용병이 저곳과 거리를 둡니다. 특히나 드럼통에 불을 피운 놈들, 거리가 꽤 떨어져 있어요. 저 구석은 풀이 높고 나무가 많습니다. 불을 보고 꼬이는 벌레도 많겠죠. 용병이라면 서바이벌에도 능숙할 텐데, 위치 선정이 너무 개판입니다. 거기다 저 기관총 위치, 사수가 경계하는 곳은 진입로가 아니라 오히려 산등성이 쪽이에요. 지금 보니까 저 뒤쪽 능선 쪽에 저격수도 있을 수 있겠네요. 저격수, 기관총, 거기에 특수종 용병까지, 전부 통행로와 거리를 두고 거기에 신경을 덜 쓰고...."

다다다다 말을 하고 나서야 내가 뭘 떠들었는지 알았다.

강희모 대리가 날 빤히 바라봤다.

"에, 제 생각은 그렇다는 겁니다."

말을 끝맺으니, 내 어깨에 손이 올라왔다.

잠깐의 침묵과 함께 분위기가 묘해지는 가운데, 강희모 대리가 말했다.

"너 진짜 분석팀 안 올래?"

이 양반 왜 이래.

첫눈에 반한 여자를 보는 듯한 그런 눈, 몹시 강렬한 눈빛이었다.

82. 페어

후속으로 온 시발 팀장은 험비를 몰고 왔고 한 차에 팬더 대리와 사수, 기남이가 함께였다.

"함정과 기관총, 특수종으로 추정되는 전투 가용 인원 사십, 그 외 전력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강희모 대리가 정찰 결과를 말했다.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분석팀 에이스."

이 작자는 나한테만 칭찬이 박하다.

"아니요. 광익이가 한 겁니다."

강희모 대리가 말했다.

"시발, 뭐, 딱 보면 아는 건데 뭘 대단한 일 했다고."

말이 변했다.

이중적인 인간이다.

"잘했어."

사수가 뒤에서 다가와 톡톡 어깨를 두드려 줬다.

잘한 건가.

그냥 보이는 대로 말한 건데.

보였고 느꼈고 이해했다. 그래서 말했을 뿐이다.

"꽤 많네. 이 작자는 무슨 꿍꿍이야."

팬더 대리가 손목 위로 홀로그램을 띄운 채로 중얼거렸다.

사수는 쌍안경을 들었고 팀장은 말없이 목표 지점을 바라봤다.

난 기남에게 다가갔다.

"장난 아니지?"

"말 걸지 마라."

장족의 발전이다. 처음에는 대답도 안 하던 놈이 이제는 말도 곧잘 하니까.

역시 스킨십이 중요한 법이다.

걸핏하면 목 조르고 주먹과 얼굴을 맞닿게 하니, 이렇게 친해지는걸.

나중에 귀태 형한테 말해 줘야지.

미호를 꼬시려면 일단 싸움을 잘해야 한다고.

"우리 팀장님. 장난 아니잖아. 다 안다."

난 동기끼리 우애를 다지는 시간을 갖고자 했다. 타인을 욕하며 우리 서로 공감대를 쌓아 보지 않으련?

"재수 없는 새끼."

내 제안을 기남이 거절했다. 그 표정에 떠오른 경멸과 혐오감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새파란 새벽이다. 해가 뜨면 흰 구름으로 보이겠지만, 아직은 거뭇거뭇한 그림자로 보이는 구름 사이로 아버지의 잔상이 보였다.

난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사람을 죽여도 될까요? 동기고 아는 얼굴이지만, 갑자기 살의가 끓어올라서요.

가상의 아버지가 답했다.

"안 돼."

네, 알겠습니다.

"오래 살아라."

그래, 죽일 순 없지.

난 아량이 넓은 사람이기에 덕담을 건넸다.

기남이 그런 날 노려봤다.

그런 기남에게 혀를 보여 줬다. 백태가 끼지 않도록 깨끗이 관리하는 게 장수의 비결임을 알려 줄 셈이었다.

그런데 놈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덤빌 거면 덤비든가.

"여기서 싸우면 둘 다 징계다."

강희모 대리가 그걸 보고 말했다.

기남이 훽 하고 고개를 돌렸다. 토라진 여자친구 같았다.

시선을 돌리니, 팬더 대리는 홀로그램에 요새 지도와 주변 지형을 살피는 중이었고.

사수는 스코프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팀장은 그사이에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알싸한 향이 일행 사이사이로 퍼졌다.

"뼝아리, 의견 말해 봐."

팀장이 연기를 훅 내뿜으며 말했다.

"저요?"

"여기에 우물 안 뼝아리가 너 말고 또 있냐?"

이 작자는 사람 별명 붙이는 취미가 있나.

성격 개차반 시발 팀장, 줄여서 성개시발 팀장의 말에 난 생각했다.

보고 듣고 느낀 것.

이제까지 경험한 작전, 배운 것, 규칙과 판을 흔드는 법.

모든 걸 고려해 입을 열었다.

"정면 돌파합니다."

말이 끝나고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은 팬더 대리가 깼다.

"팀장님, 지형 파악했습니다. 작전 수립할까요?"

"괜찮아."

이어서 사수가 말하고.

"미친놈."

기남이 날 응원했으며.

"작전 수립은 팀장님께 맡기자."

강희모 대리가 어깨를 두드렸다.

어째 무시당하는 기분인데.

이 양반들아,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지.

"후면 돌파, 잠입, 전부 다 대비했을 겁니다. 상대의 의도를 찌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난 말을 끊고 정찰하며 느꼈던 점을 정리했다.

"오합지졸입니다."

훈련된 군인 열이면 오합지졸 백을 잡는다.

이쪽은 비전투 인원인 팬더 대리를 제외하면 시발 팀장, 사수, 강 대리, 나, 개나리까지 다섯이지만.

전력은 충분하다. 적어도 내 계산으로는 그랬다.

"미친 뼝아리."

팀장의 말에 고개를 돌리는데 얼핏 미소를 지은 거로 보였다.

그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팀장이 중앙에 서자, 자연스레 그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모였다.

"위협 저격 포인트 제거에 둘, 기관총 사수 견제에 하나. 둘만 간다."

분업이다. 겨우 다섯인데 여기서 인원을 또 나눈다는 거다.

근데 그 둘은 누구입니까.

팀장이 말을 이었다.

"강 대리, 정기남 포인트 찾아서 털어."

훌륭한 인선이다.

개나리가 성격은 개차반이지만, 가진 재능은 훌륭하다. 상대의 기척을 읽는 건 발군이란 거다.

강희모 대리는 다양한 작전 수행 경험이 있는 불멸특수대다.

베테랑이란 소리. 그라면 기남의 부족한 경험적인 면을 채울 수 있을 터.

"소리 없이."

팀장이 추가 주문을 넣었다.

"알겠습니다."

강 대리와 기남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관총은 정아."

"네."

캐쉬히포가 불을 뿜으면 위치를 들키는 건 금방일 텐데, 괜찮으려나.

"총 말고."

팀장의 말에 사수가 캐쉬히포를 챙겨 넣고 다른 무장을 꺼냈다.

그녀가 허리 뒤에 긴 막대를 꺼내더니, 딸깍하고 조립하자, 곧 유선형의 긴 막대가 되었다.

그리고는 까맣고 두툼한 골무를 꼈다. 금속 재질로 보였다.

이후, 긴 막대 사이에 동그란 버튼을 끼워 조작하자, 곧 유선형 막대 사이로 지잉 하고 레이저 줄이 나타났다.

내가 빤히 보자, 사수가 말했다.

"양궁 국가 대표 출신."

"누가요?"

"누구겠냐?"

팬더 대리가 핀잔을 줬다.

몰랐다. 우리 사수는 활도 쐈다.

특수 제작된 활은 총보다 효율성이 높을 때가 많다.

가령, 소리 없이 적을 암살할 때 같은 경우.

또는 기관총 사수 같은 걸 저격할 때.

"포인트 제거, 기관총 사수 제압과 동시에 정면 진입을 시도한다."

홀로그램 타이머를 꺼낸 팀장이 말을 이었다.

"지금 시각 오전 4시 45분."

여름의 해는 일찍 뜬다. 벌써 새파란 새벽을 지나 황금빛 태양이 뜨는 중이었다.

곧 환한 아침이 될 것이다.

"작전 시간 오전 6시."

"네."

나만 빼고 전부 대답하면서, 강 대리와 기남은 곧바로 움직였다.

다른 능선을 타고 포인트를 제압하려면 시간이 촉박할 것이다.

사수는 레이저 활줄에 화살 대용의 긴 막대를 끼우는 중이었다.

레이저 사출 무기는 낭비가 심하지만, 활로 쓰면 얘기가 다르다.

근력 비약을 먹고 장력을 한계치로 당겨 쏜다. 애초에 인간 이상, 특수종의 근력을 견디기 위해 만든 게 레이저 활 줄이다.

저거로 쏘는 화살은 어지간한 강철 따위는 시원하게 관통할 터.

팔뚝 반만 한 막대를 꺼내 비트니, 그 끝에 지잉 하고 레이저가 삐죽 솟는다. 상대를 때리는 순간, 화살촉이 솟아 뚫어 버리는 이중 타격 레이저 애로우다.

이름이 길긴 하네.

막대를 조작해 레이저 화살촉을 만들어 본 사수도 주변을 둘러보더니 발걸음을 뗐다. 기관총 사수를 저격하기 위해 자리를 옮기는 거로 보였다.

"잠시만요."

그런 사수의 뒷모습을 보며 난 팀장을 불렀다.

"뭐?"

"저는요?"

난 할 일이 없는데.

"너 뭐?"

"전 뭐 해요?"

"네가 꺼낸 작전에 책임져야지."

언제 꺼냈는지 노트북을 꺼내 뭘 두드리던 팬더 대리가 말했다.

책임?

"팀장님이랑 페어, 정면 돌파."

아니, 시이발. 이건 아니지.

"사수, 저랑 바꿔요. 사실 제가 전생에 주몽이었습니다."

급히 사수를 불렀다.

사수는 무시하고 쌩하니 사라졌다. 발이 무척 빨랐다.

사수를 뒤로한 채, 팀장에게 물었다.

"굳이 우리 둘이 해야 할까요?"

"그럼 귀한 기남이나 분석팀 에이스를 굴리리? 정아가 안 되는 이유는 알지?"

비약 인간은 불멸자가 아니다. 지뢰 하나 잘못 밟으면 곧바로 은퇴다.

"동훈 대리님, 숨겨 둔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세요."

"응. 잘 가."

쳇.

내 역할도 정해졌다.

팀장과 정면 돌파다. 몹시 싫지만, 어쩌겠는가.

선택의 여지가 없는걸.

"발목 잡으시면 안 됩니다."

화림 내 최연소 진급자이자, 동대문의 구원자로서 말했다.

팀장은 그 말을 듣더니, 웃었다.

진짜 큭큭 대며 웃는데, 공포 영화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어디서 너 같은 놈이 똑 떨어졌을까? 적으로 만났어야 했는데."

그 말에 등줄기에 벼락이 치듯 소름이 쫙 돋았다.

가시 돋치다 못해 가득한 말이었다.

"농담입니다. 농담."

"나도."

아닌데, 팀장은 농담 아닌 것 같은데.

팀장과 난 능선에서 내려갔다. 툭툭 타고 내려가는데, 팀장은 나만큼이나 산을 잘 탔다.

내려가서 자리를 잡으며 도핑 약을 챙겼다.

이번에 챙긴 건, BB-8.

약칭 오딘의 축복, 흔히 말하길 전투 뽕.

팀장과 단둘이 있으니 꽤 어색했다. 팀장도 그렇게 느꼈는지 입을 열었다.

"감각을 갈고닦으면 불길함을 시각화할 수 있다."

"...."

뭐라는 거야.

움찔, 그 순간, 팀장의 발밑에서 뭔가 튀어 올랐다. 아니, 곧 올라와 내 턱을 갈길 것 같았다.

적어도 난 그렇게 느꼈다.

내가 급히 고개를 젖히며 뒤로 굴렀다.

결론만 말하자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지? 뭐냐? 변신족이 뿌리는 야생의 살기와는 다르다.

어느새 왼손은 슬러그 나이프 손잡이를 역수를 쥐고, 오른손은 정글도 손잡이에 올려 둔 채였다.

"앉아. 긴장 풀고."

팀장이 말했다.

다시 본래대로 앉았다. 여름이 오는 계절이지만, 새벽의 땅바닥은 차가웠다.

"이너 피스, 내면의 평화를 유지한 채, 불길함만 느낀다. 감각을 깎고 깎아 날카롭게 만든다."

팀장이 말했다.

"왜 이러는데요."

내가 물었다.

팀장은 답 대신 왼손 검지를 까딱였고.

움찔.

내 직감이 다시 경고성을 발했다. 이번에는 왼쪽 정강이다.

발을 당기고 옆으로 굴렀다. 동시에 슬러그 나이프를 꺼내 정강이 앞을 대각선 방향으로 대고 막았다.

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같은 수법으로 두 번이다.

그리고 세 번, 네 번, 팀장은 기다리는 내내 날 괴롭혔고.

난 다섯 번째가 돼서야 팀장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았다.

기척 흘리기였다.

정확히는 의지를 담고 손가락, 발가락을 까딱하는 거로 내 직감을 건드리는 거다.

겨우 다섯 번, 전신이 땀에 젖고 더없이 감각이 날카로워진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몰랐다.

"시간 됐네."

팀장이 말했다.

어느새 5시 55분이다. 6시까지는 5분도 남지 않았다.

"가자."

툭툭, 팀장이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왜 그런 겁니까?"

못내 궁금해 물었다.

"머리는 장식이냐? 정면으로 가면서 지뢰 찾기라도 하면서 가게? 시발, 밥을 씹어서 위장 속에 쑤셔 넣어 줘야 하나."

아, 팀장의 욕설 섞인 조언이 머릿속을 섬광처럼 치고 지나갔다.

예민한 감각을 지닌 불멸자는 육감과 직감을 단련한다. 그 육감은 때론 피할 수 없는 걸 피하게 한다.

즉, 보이지 않는 칼과 탄환을 느낀다.

그것과 같았다.

둘은 정면으로 걸었다. 함정은 발동하지 않았다.

팀장이 나한테 한 짓, 내가 땀을 줄줄 흘리며 한 것.

단시간 육감을 더없이 예민하게 만든 거다.

전보다 날카롭게 달궈진 감각이 땅을 '읽었다'. 색이 다른 타일을 밟으면 안 되는 것처럼 직감으로 모든 걸 피한다. 클레이모어, 지뢰, 갖가지 함정이 준비된 길은 산책로가 됐다.

처음 느껴보는 고양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보였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밟아야 할 곳, 피해야 할 곳, 전부가.

"누구냐."

경계병, 용병 중 둘이 우리를 맞았다.

눈코입은 보이지 않아도 말소리가 닿고 서로의 체형은 볼 수 있는 거리다.

아직 오르막이 끝나지 않은 길 위에서 둘이 밑으로 총구를 겨눴다.

"...저 새끼들 왜 멀쩡히 걸어오냐?"

둘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밟으면 터지는 압력식 지뢰가 가득한 땅이긴 했지.

다 피해서 밟고 왔단다.

영화와 달리 대부분 지뢰는 밟는 즉시 터진다. 고로, 이렇게 멀쩡히 걸어오는 나와 팀장이 신기하긴 할 것이다.

나라도 유령 보는 눈으로 봤겠지.

지금 저 둘처럼 말이다.

그나마 정신을 차린 친구가 외쳤다.

"쏴!"

83. 투명 감옥

"쏴, 쏴!"

타다다당!

총알이 쏟아졌다. 피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총구를 보고 좌우로 뛴다. 위에서 본다면 마구잡이로 뛰는 것 같지만, 정확히 총구 방향의 사각으로 움직였다.

"터트려!"

용병 하나가 외쳤다.

그 말과 동시에 땅 밑에 삐죽 솟은 쇳덩이가 보였다. 둥근 부분이 배불뚝이처럼 솟은 폭발물이자, 지뢰다.

진입로가 끝나는 시점에 만든 마지막 함정, 클레이모어다.

수백 개의 쇠 구슬이 몸을 걸레로 만드는 무기, 지향성 산탄 지뢰.

C4 폭약을 수동으로 터트리는 구조다.

그러므로 경계조 저 둘 위에도 진입로의 정면 돌파도 어느 정도 대비했다는 말이다.

앞에서 폭발이 일어날 것이다. 무자비한 파편, 쇠 구슬이 덮칠 것이다.

그런데도 난 걱정되지 않았다.

동이 터 등을 따스하게 만드는 적당한 기온.

산속 특유의 풋풋하고 상쾌한 공기.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게 너무 잘 보이고.

코를 통해 갖가지 냄새가 뇌를 즐겁게 한다.

혀를 통해 공기의 맛이 느껴졌고.

방검방탄복과 방탄 헬멧의 감촉이 생생하게 날 감쌌다.

워밍업이 잘된 근육이 적당히 꿈틀거리고, 신경 다발 하나하나가 원하는 대로 반응하고 움직였다.

땀 한 방울 한 방울, 등을 타고 흐르는 게 생생히 느껴졌다.

적당한 긴장과 고양된 정신이 불가능의 영역을 엿봤다.

난 미래를 봤다.

클레이모어가 터지는 걸 눈으로 보고 피할 순 없었다.

더없이 예민한 오감이 육감의 영역으로 나아가 번개 치듯 상황을 미리 보여 줬다.

정면에서 약간 사선으로 쏟아지는 폭발의 여파, 그로 인해 예상되는 쇠 구슬이 날아드는 각도.

모든 정보가 한순간에 머릿속을 휘저었다.

난 터지기 직전, 가장 합리적인 행동을 취했다.

4번 타자를 뽑으며 엎드리듯 자세를 낮췄다.

아다만티움은 C4 폭심지 한가운데 던져 놔도 그을음만 생길 뿐이다.

고로, 최고의 방패다.

오른손에 비스듬히 4번 타자를 들어 기울이고 방탄 헬멧을 벗어 왼손에 들었다.

양손을 앞으로 내밀고 엎드린다.

따다다다다다다다다당! 꽈과광!

쇠 구슬이 내가 만든 방패를 때렸다. 몸이 뒤로 밀린다. 충격이 전신을 뒤흔든다. 그와 함께 지뢰 몇 개가 발동해 터지며 2차 폭발이 일어났다.

지뢰 몇 개는 압력식이 아니라 충격식이었다.

폭발이 일어나고 폭연이 날 감쌌다.

* * *

"별 미친 새끼들 다 보겠네."

격발 장치를 누른 용병이 다가오며 말했다. 턱이 삐죽 솟아 주걱턱을 가진 놈이었다.

그 용병이 경계를 서는 두 놈을 보고 물었다.

"몇 명이나 왔는데? 분대급이야? 시발, 여기에 왜 이런 걸 심나 했더니, 쳐들어오는 놈이 있긴 하네."

의뢰인의 요구로 만든 함정이었다. 쓸 일이 있을 줄은 몰랐다.

"미쳤다고 용병한테 헛돈 쓰겠냐? 둘."

경계하는 용병 중 하나가 말했다.

"둘?"

주걱턱이 되물었다.

"둘."

"미쳤나, 이 새끼들이. 겨우 두 명이면 걍 쏴 죽여야지."

그러려고 했다. 근데 쏴도 안 맞는다. 아니, 몇 발은 맞추기도 한 것 같은데, 모르겠다.

엉겁결에 총알을 갈겼다.

"넌 못 봐서 그래."

경계 서던 다른 용병 하나가 말했다.

덥수룩한 머리카락이 헬멧 밖으로 삐져나온 놈이었다.

말한 놈이 쓱 하고 목덜미를 닦았다. 끈적한 땀이 묻어나왔다.

보는 순간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오밤중에 유령을 마주친 기분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더 섬뜩하다. 칼날이 목에 닿거나, 총구가 머리를 겨누고 있을 때나 느낄 법한 위협, 그런 걸 느꼈다.

"염병, 됐어. 그게 니들 돈이냐?"

"대장한테 보고는 해야지."

투덕투덕 말을 나누다 말고 주걱턱 용병이 뒤로 돌아섰을 때다.

"야, 야, 야!"

덥수룩한 머리카락의 용병이 손가락 대신 총구로 폭연이 가득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폭발과 함께 회색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른 그 사이로 그림자 두 개가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확 하고 연기를 뚫고 나온 둘이 셋과 마주했다.

클레이모어와 지뢰의 폭발 속에서 사지 멀쩡히 걸어 나온 둘이었다.

"그걸... 살았네?"

주걱턱 용병 하나가 혼잣말을 뱉었다.

"그럼 죽을 줄 알았냐?"

그리고 둘 중, 불멸자가 분명한 외모의 남자가 말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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