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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itre 33: 33

◈ 248화. 아무 일이 있었다 (1)

[클래스 퀘스트 : 선악과]

절멸의 위기에서 세계수는 씨앗을 뿌리기 위한 열매를 맺었다.

허나, 세계수의 뜻과 다르게 열매는 선과 악이 공존하지 않고 나뉘어 맺히게 되었으니.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선과 악을 분리한 죄인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대뿐이다.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엘프들의 땅, 시슬리에 진입하라. (진행 중)

간만에 떠오른 클래스 퀘스트.

그 내용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군.

"빛이 있다면 그림자도 있는 법이니."

세상에 선(善)만 존재할 순 없다.

악(惡)이 존재하는 건 당연한 거지.

아르카나의 어머니라 불리는 세계수도 그걸 잘 알고 있었을 거다.

'그래서 선악과를 맺은 거야.'

세계수의 과실, 선악과.

문맥으로 때려 맞혀 봤을 때 선악과가 품은 게 바로 세계수의 씨앗이겠지. 하지만 그 선악과가 세계수의 의도와는 다르게 맺힌 게 문제의 발단이었다.

자, [포식자의 늪지대]에서의 기억을 되짚어 보자.

세계수의 씨앗을 싹 틔웠을 때.

나는 일말의 악의조차 느낄 수 없었다.

단지 따뜻함만을 느꼈을 뿐.

그 온기가 바로 '선'이었겠지.

[월드 퀘스트 : 세계수의 씨앗]

아마도 월드 퀘스트에 명시된 씨앗은 전부 '선'을 품고 있을 터.

그렇게 확신한 이유가 있냐고?

있다, 그것도 눈앞에 떡하니 있다.

"...틀림없이 어머니의 열매를 삼켰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드래곤들은 오직 악의만이 남은 '악과'를 삼킨 거겠지.

그런 의미에서 진짜 악랄하다, 누군지 모르는 악마 녀석.

'만약, 순순히 뜻에 따랐다면.'

유낙서스를 비롯한 드래곤들은 눈을 감는 순간까지.

진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육신을 양분으로 싹 트는 게.

악의 씨앗인지도 모른 채 죽어갔을 것이다.

'괜히 그랑펠이 말조차 섞지 않는 게 아니구나.'

역시 대화를 섞을 족속이 아니다, 악마 녀석들.

그나저나 대체 누구냐?

세계수와 드래곤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한 간 큰 악마는.

일단, 퀘스트 목표가 가리키는 곳은 첫 세계수가 뿌리를 내렸던 엘프의 땅, 시슬리였다. 용의 신전으로도 부족해서 엘프들의 땅이라니.

'여기선 유낙서스라도 든든한 아군이라도 있었지.'

엘프 중에서 내 편이라고는....

유스라 왕국에서 비약초 텃밭을 가꾸고 있는 엘시도어밖에 없는데 말이야. 그래도 다행이라면 엘프들에겐 '축복의 위계질서'를 들먹일 수 있다는 정도려나.

'결국, 하나씩 풀어가는 수밖에.'

악마 사냥꾼의 후각.

세계수의 족보.

마지막으로....

클라우디의 후광까지.

써먹을 수 있는 걸 최대한 활용하면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여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드래곤들의 의문도 해결해 줘야겠군.

나는 핵심부터 내뱉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대들은 농락당했다."

"...농락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대들이 삼킨 것은 진정한 세계수의 씨앗이 아니다."

나는 친절하게 선악과에 관한 이야기를 내뱉었다.

세계수의 뜻과 다르게.

그대들이 삼킨 열매에는 오직 악의밖에 남아있지 않았다고.

그러니까.

"그대들은 죽지 않아도 된다."

"...!!!"

그뿐만이 아니지.

만물의 왕이라는 칭호에 어울리지 않게.

잔뜩 움츠리고 있을 필요도 없어졌거든.

"뜻대로 창공을 활강해도 좋다."

현재 아르카나 대륙엔 주제 파악도 못 하는 악마들이 설치고 있다.

너희가 나선다면 저절로 기강이 잡히지 않겠어? 수십 마리의 드래곤이 일제히 하늘을 나는 모습을 보면, 제아무리 열등한 악마라고 하더라도 저절로 예절이 주입될걸?

"뜻대로 울부짖어도 좋다."

간혹가다 피어까지 내뱉어 주면 금상첨화겠지.

물론, 아르카나인들도 놀라기는 하겠다만.

오히려 반가워할 거다.

전설 속 드래곤이 두려운 존재라고 하더라도.

악마만큼은 아니니까.

'나도 덕분에 일거리를 덜 수 있을 테고.'

그런 속물적인 뜻에서 한 말이었건만.

'잠깐만....'

...너희들, 반응이 왜 그러냐?

유낙서스를 포함해서.

하나같이 눈가가 촉촉한 게....

설마, 충격을 받아서 그런 건가?

애써 삼켰던 선악과가 가짜라서 그런 거야?

내가 속으로 흠칫하던 찰나였다.

...불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로소 깨달았는가."

저 걸걸한 목소리를 불길하다고 말하는 데엔 이유가 있다.

익숙한 목소리였으니까.

내게 흑암룡이라는 이명을 붙였던 쿠드하낙스인가.

뭔가 하는 드래곤의 목소리가 확실하다...!

어째서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 걸까.

쿠드하낙스가 말을 잇는다.

"과거에도 지금도 우리를 헤아려 주는 것은 클라우디밖에 없지 않은가! 보아라. 오직 흑암룡만이 우리의 심정을 지켜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여 줬단 말이다!"

써먹기 위해서.

인정하고, 감내하기로 한 마당에.

클라우디의 지나칠 정도로 눈부신 후광?

...과분할 정도로 은혜롭다고 하자, 그래.

그런데.

그 흑암룡이라는 이명은 좀 어떻게 안 될까...?

물론, 그런 나의 속앓이가 전해질 리 없었으니.

그에 질세라 유낙서스가 입을 열고야 말았다.

"전룡이여. 우리는 이호열 클라우디, 클라우디께 또 한 번 은혜를 입고야 말았다. 이 헤아릴 수 없는 빚을 어찌 갚아야 하겠는가, 동족들이여!"

흑암룡에 이호열 클라우디에!

'총체적 난국이 따로 없구나....'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생명력이 깎여나가는 것 같군.

저 목청은 또 얼마나 커다란지.

혹시라도 누가 엿들을까, 두렵다 진짜.

하지만 용들은 더없이 진심이었다.

"...누구도 우리에게 그리 말해주지 않았다."

"죽지 않아도 된다고."

"뜻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드래곤들은 더 이상 맹약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자신들의 뜻대로.

의지에 따라서 진정으로 내게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고?

"전룡이 클라우디를 따르겠나이다."

유낙서스의 선언과 동시에.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으니까.

[만물의 왕, 드래곤에 대한 지휘권을 획득하셨습니다.]

[엘더 드래곤, 유낙서스 외 스물하나의 드래곤]

[현재 상태 : 명령 대기]

아르카나 대륙, 최강의 세력.

드래곤을 아군으로 포섭했거늘.

나는 마냥 기뻐할 수 없구나.

'다시 제로 산맥으로, 지구로 돌아간다고 치자.'

거기서 이호열 클라우디라는.

해괴한 이름을 울부짖기라도 하면?

흑암룡이라는 이명을 거론하기라도 하면...?

'낯을 들고 돌아다닐 자신이 없다.'

하지만 나의 이런 고뇌를.

드래곤들이 헤아려 줄 리가 없었으니.

이럴 땐 충성심 가득한 눈빛이 부담되기 그지없구나....

나는 시선을 옮겨 메시지를 바라봤다.

[현재 상태 : 명령 대기]

정말 뭐든 명령을 내려달라는 눈빛들이군.

'근데, 슬슬 이쪽이 한계다.'

차오르는 수치심 때문이 아니다.

죽음을 각오한 [『절대영도』]의 발현 때문이었다.

영약으로 끌어올린 냉기 속성 친화력. 그것도 모자라서 [첫 세계수의 축복]으로 인간을 초월한 생명력 재생 속도를 가진 나였거늘.

[주의 : 생명력이 너무 낮습니다.]

역시, 뒤가 없구나.

세니오스 원로의 마법은...!

대체 이런 고통을 어떻게 참은 거야?

젠장, 눈을 감으실 때.

조금이라도 아픈 티를 내셨더라면.

내가 조금 더 다른 방법을 찾아봤을 텐데.

'여러 의미로 존경스럽습니다. 진짜.'

그리고 그에 질세라.

끝까지 내색하지 않는 그랑펠.

너도 참 대단하다.

나는 유낙서스에게 말했다.

"명을 내리기 이전에 그대에게 묻겠다, 유낙서스."

"편히 말씀하시지요."

"그대는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

내가 죽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바체로 뛰고 있던 유낙서스의 드래곤 하트도 점차 멎어가고 있었다. 쇠약한 노룡의 회복력으로도, 나의 기이로도 치유할 수 없는 상처였으니까.

그치만 말이야.

수십의 드래곤이 힘을 한데 모은다면 어떨까?

나는 유낙서스 뒤편의 드래곤들을 바라봤다.

고오오오─

용들의 육체에서 거대한 기운이 일렁거린다.

단순한 마력이 아니다.

인간인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드래곤 하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유의 기운.

유낙서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찌하여 내게 영생의 기운을?"

어째서겠어.

다들 나름대로 반성하고 있는 거겠지.

반성의 뜻으로 자신들이 가진 영생의 축복을 유낙서스에게 나눠주고 있는 거겠지. 거기엔 뒤늦게 용의 신전에 기어들어 왔던 프로즈낙스도 포함이었다.

'거절할 생각은 하지 말아주라.'

아무리 지휘권을 획득했다고 하더라도.

나 혼자 수십의 드래곤을 이끌 수 있겠냐...!

지금이야 그랑펠식 화법에 감동을 하여 잠잠해졌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잖아?

화장실 들어갈 때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는 게.

괜히 있는 말이 아니거든.

나는 유낙서스에게 덧붙였다.

"살아라, 유낙서스."

"...!"

"살아있는 전설 또한 나쁘지 않지 않은가."

바닥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도 괜히 있는 게 아니라니까?

물론, 이 순간.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지만.

차라리 죽고 싶다...!

축복 덕분에 질겨진 생명력.

죽는 게 나을 것 같을 정도의 격통이 느껴진다.

'...서클을 개방할 때보다 고통스럽다니.'

영약을 동시에 집어삼키고 혼절했을 때보다 더한 고통이 있을 줄이야. 이젠 꼿꼿하게 서 있기도 벅차다. 어디 보자, 슬슬 묫자리를 찾아보자.

그나저나 죽는 순간까지 이놈의 폼생폼사.

"풍경이 나쁘지 않군."

그렇게 읊조리고는 신전의 기둥에 기대어 앉는다.

심장부터 천천히 얼어가는 육체 탓.

입가에선 하얀 입김에 뿜어져 나오는데.

태연하게도 지껄인다.

"차를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꺼내 든 것은 녹차 티백.

그러나 찬물용이 아니다.

갈 때 가더라도 따뜻한 녹차 한잔 정도는 괜찮잖아?

그보다.

너무 추워서 그런가.

사리분별이 되지 않는다.

"유낙서스, 찻물을 부탁해도 되겠는가?"

덕분에 내뱉고 나서야 자각했다.

세상에...!

드래곤한테 찻물을 데우라고 하는 건.

아르카나 역사를 통 틀어봐도 나밖에 없을 거다, 진짜.

"명에 따르겠습니다."

역시나 세상에.

브레스로 데운 찻물에 기껏 녹차 티백을 우려내다니.

역사는 물론, 미래에도 이런 만행을 저지른 건 나밖에 없겠지.

그래도.

'...뭐, 나쁘지 않았지?'

간만에 진입한 아르카나 대륙이었다.

[최후의 모험가] 효과가 존재하는 이상.

죽어도 잘 죽어야 한다고, 다짐했거늘.

'이 정도면 꽤 괜찮은 목숨 아니었나.'

스쳐 지나가는 주마등에서.

이번 진입에서의 성과를 되돌아본다.

일단, 유낙서스와 조우하기 전까지.

악마를 사냥한 덕분에 1레벨이 상승했다.

소소한 게 사실 기대한 것보다는 적은 수치이긴 했다.

'떼로 달려들 줄 알았는데 말이야.'

사망 페널티를 고려하면 아쉬운 수치긴 하다만.

중요한 건 레벨 같은 게 아니겠지.

무엇보다 세계수와 드래곤 사이에 얽힌 오해를 풀어냈으니까.

'콩가루 집안을 일으켜 세운 뿌듯함이랄까?'

유낙서스가 육체도.

엘더 드래곤의 명예를 회복한 것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거기에다가.

'...모른 체할 수 없지.'

클라우디가 아르카나 대륙에 실현되었다는 것도.

그런 클라우디에 관한 설정도 깨닫고야 말았다.

한마디로 올 것이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 진입에서는 그저 감사하자.

'다음엔 또 어떤 후광에 기겁하게 될지 모르니까.'

달칵─

그렇게 생각한 나는 찻잔을 집어 들었다.

찻잔에서 온기가 전해졌건만.

빌어먹을, 찻잔을 기울일 기운조차 없다.

결국 나는 커져가는 격통 속에서.

또 한 번.

찻잔을 놓치고 말았다....

쨍그랑!

귓가를 찌르는 소리와 함께.

드래곤들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온다.

글쎄....

[사망하셨습니다.]

[사망 페널티가 적용됩니다.]

[획득한 경험치가 하락합니다.]

[칭호, '최후의 모험가' 효과가 발동됩니다.]

[즉시 현실로 귀환합니다.]

다들 놀랄 거 없다니까, 그러네.

.

.

.

스윽─

서서히 눈을 뜨자 마탑의 최상층이었다.

결국, 녹차 한잔 마시지 못하고 돌아왔구만.

현실로.

툭툭─

서리가 맺힌 재킷을 대수롭지 않게 털어냈다.

일단, 피를 뒤집어쓴 그때보다 형편은 나아 보이는군.

덕분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시치미를 뗄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어째서 시치미를 뗄 생각부터 하냐고?

당연한 거 아냐?

'두렵다.'

아니, 부끄럽다.

아르카나 대륙에서의 나의 행적이...!

하지만 그런 나의 바람은 곧 물거품이 되었으니.

나는 낌새를 느꼈다.

...어째 조용하다.

조용해도 너무나도 조용하다.

마탑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일과가 끝난 야밤인가 싶어서.

시간을 확인하는데....

뭐냐, 이거?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날짜가 왜 이래?!

'달이 바뀌었어...?'

진입한 지 보름이나 지났다고?!

보름?

그래 뭐, 지날 수도 있지.

용의 신전도 그렇고 절대영도도 그렇고, 시간 감각이 온전치 않은 곳에서 난리를 치다가 돌아왔으니까. 하지만 내가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방금 전 도착한 재난 알림 메시지.

-지구 전역에 드래곤 출현

그와 동시에.

마탑의 방벽을 뚫고.

우레와도 같은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마치 슬픔을 집어삼킨 듯한 구슬픈 드래곤 피어.

나는 자각하고 말았다.

...설마, 내가 죽은 줄 알고 저러는 건가?

그 찰나에 차원을 찢고 날아온 거야?

마탑은 저런 드래곤을 막기 위해서 움직인 거고?

내가 진짜 미치겠다.

이놈의 팔자는.

어째 숨돌릴 틈이 없냐!

.

.

.

세상은 두려움에 떨었다.

십여 마리의 드래곤이 창공을 활보하고 있었으니까.

그 사실만으로도 경악할 일이었거늘.

저들은 애타게 부르짖고 있었다.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거잖아...!"

"그, 그게 대체 얼마나 대단한 용이길래."

"저렇게 목을 놓아서 울부짖고 있는 거야...?"

그랬다.

용의 신전에서 눈을 감은 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흑암룡을...!

◈ 249화. 아무 일이 있었다 (2)

겨우 한 사람의 공백이.

이렇게 크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이호열, 그가 자취를 감추기 전까지는.

오히려 전후사정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걱정하지 않았다.

"총대장님이 누구한테 걱정을 받을 처지신가?"

"그러니까. 걱정할 시간에 우리 걱정이나 좀 해라."

"레벨 꼬라지가 이게 뭐냐, 진짜."

주고받은 말대로.

호열은 타인의 우려를 받을 존재가 아니다.

증명할 것도 없이 그간의 행적만 봐도 알 수 있었으니.

우려를 기우로 바꿔버리는 활약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가 아니었던가?

더 나아가서.

그 어떤 상황에서도.

꼿꼿함이 꺾인 적이 없었던 호열이었다.

"그래, 다들 별 걱정은 하지 않고 있군. 이 수석."

살랑─

마탑의 최상층.

탑주는 바닥에 발라당 누운 채 꼬리를 흔들었다. 허나 평소와 다르게 꼬리의 움직임이 미묘하게 곤두서 있었으니, 이유는 당연하게도 호열 때문이었다.

"구경 값 한번 비싸군, 그래."

보름 전.

호열이 아르카나 대륙으로 향하던 그날.

그냥 평소처럼 낮잠이나 퍼질러....

아니, 회복에만 전념하고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아르카나 대륙으로 통하는 포탈이라니. 외면할 수가 있겠냥...."

마법사로서의 본능이 동한 게 문제였다.

하루이틀까지는 모른 채 할만도 했거늘.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부터는.

신경이 쓰여 양피지에 발도장조차 제대로 찍을 수 없었다.

별안간, 들려오는 마르셀로의 목소리.

"업무를 내팽개치시고 또 누워 계시는 겁니까?"

"꼬마 수석. 나는 지금 심각한 상황이다."

"심각한 것과 업무는 별개입니다."

"무엄하다. 말대답하지 말거라."

"시끄럽습니다. 가만히 계십시오."

슥─

마르셀로가 바닥에 엎어진 탑주의 뒷덜미를 잡고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적당한 상석에 탑주를 옮겨두었다.

마치 물건처럼.

영 탐탁지 못한 시선이 탑주에게 이어진다.

"곧 선임들이 최상층을 찾을 겁니다."

"선임들이? 최상층에? 왜?"

"무엇 때문이라 생각하십니까?"

탑주는 흠칫했다.

...설마, 건성으로 발도장 찍은 걸 알아차린 것인가.

단체로 의의제기라도 하려고 몰려온 건가.

냥심.... 아니, 양심이 찔렸으니까.

하지만 다행히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 수석님에 관한 우려 때문이겠지요."

마탑.

수뇌부를 포함한 선임 마법사들은 호열이 어떤 각오로 아르카나 대륙으로 진입했는지 알고 있었다.

호열이 자신의 입으로 각오를 말한 건 아니었다만, 그 행동에서 알 수 있었으니까.

탑주가 괜히 구시렁거렸다.

"그러게 뭣 하러 결전용 마도구를 챙겨서는...."

투덜거림은 거기까지였다.

곧 스무 명의 선임 마법사.

전원이 마탑 최상층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들의 뒤에서 원로 마법사.

유그위드가 멋쩍게 빠져나온다.

"저는 선임들께 충분히 설명했답니다, 탑주님? 우리 수뇌부에게 숨기는 건 없다고. 우리라고 이 수석의 뜻을 전부 알고 있는 건 아니라고 말입니다."

선임 마법사의 대표격.

흑마도학 선임, 마티스 딘 카를.

그가 입을 열었다.

"이 수석님의 뜻을 물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유그위드가 고개를 돌려 되묻는다.

"그렇다면 용건은 무엇인가요, 마티스 선임?"

용건이라.

간단명료하다.

언제까지 기다리기만 할 수 없다.

그것이 용건이었다.

"마도구, 접속기의 사용을 허가해 주십시오."

결전용 마도구를 열 하고도 두 점이나 대여했다는 의미는 명확하다.

이 수석께서는 자신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적과 마주할 각오를 마치시고 아르카나 대륙으로 진입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 수석께서 보름이 지나도록 마탑으로 복귀하지 않으셨다는 의미는....

"분명, 이 수석께서는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처하신 겁니다."

마탑 최상층에 비장함이 맴돌았다.

탑주의 꼬리가 흔들렸지만.

역시나 그 털이 한껏 솟아 있다.

"그런 게 가능했다면."

"...?"

"그대들에게 그 마도구의 사용을 허가하기 이전에. 내가 먼저 그 접속기라는 괴상한 마도구를 사용했을 것이네. 꼭 내가 아니더라도...."

탑주는 마르셀로를 바라보았다.

마르셀로가 반박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같은 생각이었으니까.

탑주와도 선임들과도.

"하지만 유감이네, 마티스. 그럴 순 없으니."

보름을 넘어서.

설령 수개월 동안.

이호열 수석이 마탑에 복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접속기를 통해 아르카나로 진입하는 일은 용납할 수 없었다.

이유야 간단하다.

"원칙론자, 이 수석이 선언하지 않았던가?"

"...!!!"

"반드시 그 절차에 따라 사용하겠다고."

수뇌부라고 아르카나 대륙으로 진입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단지, 호열이 남긴 말이 있었기에. 접속기라는 선택지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것뿐이지.

'경이라면 절차를 어긴 도움 따위 원치 않으실 테니까요.'

마르셀로는 덧붙였다.

"또한 제가 아는 이 수석님이시라면, 그 절차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마탑으로 복귀하실 것입니다. 아니, 그러시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선임 전원.

"맞습니다. 그렇고 말고요."

그중에서도 절차에 된통 당해 본 벤쉬 윌리엄이 유독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갑작스러운 회담이 그렇게 마무리되려던 순간이었다.

바짝─

순간, 탑주의 털이 곤두섰다.

비단, 탑주만이 느낀 기척이 아니었다.

원로, 수석, 선임.

심지어는 최상층 아래의 숙련, 견습 마법사들까지도.

"...이건?"

헤아릴 수 없이 거대한 기척에 직감하고 말았다.

콰르르릉─!

순식간에 어둠이 깔린 하늘.

쏟아지는 비.

벼락.

그 풍경과 겹치듯 떠오르는 용마대전의 기록들.

그랬다.

이건 아무리 봐도 용의 출현을 예고하는 전조 증상이었다.

저들의 목적을 알 수 없었으나 탑주는 신속하게 대응했다.

"이 시간부로 마탑 전원의 출탑을 허가한다."

용마대전의 교훈?

간단하기에 잊지 않는다.

감히 드래곤과 맞서려고 들지 마라.

"쯧."

그러나 맞서지 않는다면.

모험가들의 세계는 어떻게 되는가?

마탑은 플레이어, 모험가들의 수준을 잘 알고 있었다.

호열을 비롯한 몇몇을 제외하면 견습 마법사보다도 약한 존재들.

그런 이들이 영웅으로 추앙되는 세계였다.

"온전치 못한 전력으로 2차 용마대전이라니."

그렇기에 맞설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마탑이 타인을 위해 희생을 각오하다니.

스스로 돌아봐도 웃긴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째 탑주의 공석보다도 이 수석의 공석이 크군."

수석, 호열이 자리를 비운 지금.

그가 짊어졌던 크나큰 짐을 대신 짊어지는 건.

자신을 비롯한 마탑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마탑의 절차니까.

"이리도 무거운 짐을 어찌 홀로 짊어지고 있던 건가, 이 수석?"

.

.

.

신속하게 움직인 건 마탑만이 아니었다.

제로 산맥.

사냥에 한창이던 플레이어들도 변화를 느꼈으니까.

"다들 멈춰."

"이게 무슨 일이래요...?"

"방금까지 해가 쨍쨍했는데, 갑자기 웬 비가?"

단순하게 소나기라 치부하기는 과했다.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째 이놈의 일기예보는 맞는 적이 없냐, 진짜."

"...잠깐만요."

"왜? 장마라도 시작됐대? 아니면 태풍?"

"아뇨, 그런 게 아니라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제가 문과라서 그런데요. 전 세계에 동시에 비가 오는 게 가능한 일이에요? 과, 과학적으로...?!"

말 그대로였다.

쏴아아아─

일 년 내내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사막.

심지어는 눈이 내려야 할 극지방에도 비가 내린다.

할 말을 잃어버릴 만큼 의아한 일이었거늘.

역시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크롸롸롸─!

"...!!!"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주의 : 정신력이 너무 낮습니다.]

가공할 만한 드래곤 피어의 후폭풍이.

"드, 드래곤...!!"

랭커라 불리는 최상위 플레이어들조차 감히 상태이상에 저항하지 못했다.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일반인들도 피어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말 그대로 전조에 불과했으니.

"한 마리가 아니야. 세 마리, 아니,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총 십여 마리의 드래곤들이 차원을 찢고 나타나서는.

지구 전역을 활강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충격에 빠진 건 AAU였다.

대한민국 지부.

"하하...."

박민재가 허탈한 웃음을 뱉었다.

드래곤이 어떤 족속인지, 잘 알고 있는 자신들이었기에.

현재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인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렇지! 선배, 스칼이 있잖아요!"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이라는 걸까?

패닉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성현준이 윤수겸을 붙잡고 말을 잇는다.

"히든 클래스 용기사라면 어떻게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아니, 스칼이라면.... 벌써 행동에 돌입했을지도 몰라요!"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짬밥치고는 좋은 사고방식이라며 어깨를 두들겨 줬었겠지.

하지만 모니터에 떠오른 드래곤들의 상태가 문제였다.

박민재가 나지막이 입을 연다.

"스칼이고 뭐고, 누구도 접근할 수 없을 거야."

지구 전역에 쏟아지고 있는 폭우.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저건 용의 눈물이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하늘을 나는 드래곤들은 어째서인가, 정말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으니까. 저들이 내뱉는 용언(龍言), 드래곤 피어로도 말하고 있지 않은가?

"누구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멈추지도 않을 거다."

"...지부장님."

"저 흑암룡이라는 걸 찾기 전까지는."

그 탓에 AAU 전 지부에는 비상이 떨어진 상황이었다. 드래곤들이 찾는 흑암룡의 정체를, 어떻게 해서든 특정해야 한다는 비상령이 말이다.

그러나 어떤 데이터베이스를 뒤져도.

"...찾지 못했습니다."

흑암룡과 관련된 정보 따윈 없었다.

"그래? 그럴 것 같더라."

박민재가 썩은 미소를 흘렸다.

"흑암룡, 내가 저런 이름을 듣고도 잊어버릴 리가 없지."

그렇다면 역시나, 이 사태에 관해 알고 있는 건 레이먼 션.

그 자식밖에 없을 터.

아니지, 호열이라면 무언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만....

'...총책임자님에게 의존할 순 없다.'

호열은 자리를 비운 상태.

게다가 언제까지 받기만 할 순 없다.

양심을 되찾자, 박민재.

벅벅─

박민재가 마른세수로 정신을 추슬렀다.

그러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역시, 마탑 측에 정보를 제공하는 게 최선이겠군."

호열이 자리를 비운 현재.

인류 최강의 전력은 단연컨대 마탑이었다.

무엇보다 마탑은 드래곤이 나타난 순간.

전원이 드래곤에 대응하기 위해 마탑 밖으로 나섰다.

확실한 아군이라는 뜻이었다.

"물론, 성전 연합군 측에도 정보를 전달해야겠지."

유스라, 프로스트, 성지 뮤온으로 이어지는 성전 연합군도 간과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다만, 그 비교 대상이 드래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라는 게 문제였지만....

'이길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충돌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승패를 떠나서 뒤따르게 될 피해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일 테니까.

그러니까.

"죄송합니다...."

박민재는 주먹을 쥐고 간절하게 빌 수밖에 없었다.

하느님도, 부처님도, 알라신도 아니다.

가장 빌어서는 안 되는 존재에게.

염치없게도 또 한 번 빌고야 말았다.

"...총책임자님."

.

.

.

마탑의 마법사.

성전 연합군.

그리고 플레이어들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각오가 무색해지는군."

하르콘은 담담하게 읊조렸다.

전설 속의 드래곤.

그 살아있는 전설들이 십여 마리씩이나 모습을 드러낸 상황.

목숨을 내던지겠노라, 다짐했거늘.

아무래도 이곳을 전장이라 부를 수 없을 것 같았다.

"뭔데, 저렇게 우냐."

"그러게 말이다."

"거, 나까지 우울해지게...."

남태민과 레오니는 말꼬리를 흐렸다.

히사기가 빗물이 맺힌 턱을 훔치며 말했다.

"저들의 감정이 전해져 오는군요."

그 감정이 무엇인지는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되었다.

흘러내리는 비가 저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으니까.

마탑 또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벤쉬가 뱅그릿에게 속삭였다.

"어째, 제가 아는 용마대전 속 드래곤과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러게요. 되게 난폭했다고 적혀 있었는데요."

"그렇죠? 제가 잘못 읽었던 게 아니죠, 뱅그릿 선임! 분명, 쏟아지는 고위 마법을 보고도 즐거운 듯 실실 웃었다고 적혀있었는데 말이에요...!"

저게 용마대전에 기록된 오만한 드래곤이 맞단 말인가?

보고 있으면서도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대체 그 흑암룡이란 게 저들에게 어떤 존재이길래...?"

만물의 왕.

드래곤이 하릴없이 슬퍼하고, 그리워하고, 울부짖으며.

그를 찾는 것일까?

물론, 그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내, 당사자가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또각─

.

.

.

젠장.

이놈의 구두 소리는 언제나 주목을 집중시킨다.

돌아보는 이들의 시선과 마주한다.

마르셀로, 하르콘, 남태민.... 밉상 고양이까지.

기껏해야 몇 시간 전에 만난 것 같은데.

현실 시간으로는 보름이나 지났단 말이지?

그렇다면 저렇게 화색이 도는 표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너희는 아니잖아?

나는 하늘을 바라봤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유달리 반짝거리는 드래곤.

"...!"

빙룡 프로즈낙스와 말이지.

'이건 내 추측인데....'

극한의 추위는 사람, 드래곤을 가리지 않고 성질머리에 악영향을 주는 게 확실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세니오스와 프로즈낙스의 날뛰는 감정 변화를 설명할 수 없을 테니까.

'죽일 듯이 달려들더니, 이제 와서 운다고...?'

어이가 없었지만.

내색은 할 수 없구나.

나는 그저 언제나처럼 입을 열었다.

"말하지 않았나."

"...!"

"그대들도."

한 차례 시선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대들도 걱정할 것 없다고."

그래, 이렇게 살아있는 거 봤으니까.

이제 됐지?

특히 드래곤, 너희한테 하는 말이다...!

'진짜로...!'

죽은 줄 알았던 내가 살아있으니까.

놀랄 만도 하겠지, 그래.

그 심정은 너그럽게 이해하겠는데.

혹시라도.

기쁘다고 내 이름을 부를 생각은 하지 마라?

그렇다고 이명을 부를 생각도 하지 말고.

'이호열 클라우디, 흑암룡.... 쨌든, 뭐든 안 된다!'

흑역사를 온 세상에 떠벌릴 바엔.

차라리 감동적인 재회로 오해받는 편이 나을 테니까.

어쩔 수 없다, 그냥 지금처럼 계속 울어라...!!

◈ 250화. 아무 일이 있었다 (3)

창문 너머로 비쳐오는 햇살이 쨍쨍하구나.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애써 주변을 둘러본다.

이럴 때는 마탑의 비현실적인 구조가 야속하게도 도움이 된다.

드래곤에 덩치에 맞게 알아서 확장된 크리스탈 홀.

그런 드래곤을 흘겨보는 이들까지.

함께 착석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여유가 있다.

'...그냥 넘어갈 순 없겠지.'

아무 일도 없었다며.

시치미를 떼려던 나의 계획은 드래곤들의 호들갑으로 완벽하게 무산되었으니까...! 이 순간, 지구에는 드래곤들의 눈물바람에 의한 후유증이 한창이었다.

'적의는 없어서 다행이다.'

드래곤들이 내뱉은 피어라고 해봤자 흑암룡.

내 이명을 부르짖는 것밖에 더 되겠냐?

덕분에 다들 휘청거리는 수준에서 끝난 거겠지.

왜, 프로즈낙스를 훈육하는 바람에 살의가 담긴 드래곤 피어가 어떤 위력을 가졌는지는 잘 알고 있었거든.

'그런 걸 내질렀다고 상상하면 끔찍하다, 진짜.'

플레이어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일반인들은 그 생명에 위협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자칫 잘못하면 위험한 상황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그대들을 소집한 이유는 간단하다."

어디에 내놓아도 한 치 부끄럼 없는 이놈의 긍지가.

가만히 입 다물고 있을 수 있으랴.

그래서 이렇게 크리스탈 홀에 모였다.

"그대들에게 설명이 필요하리라 생각했다."

내뱉는 와중에도 입맛이 쓰다.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하필이면....

어째서 수십의 드래곤 중에서 하필 '쟤'냐?

왜 전과가 있는 대지룡, 쿠드하낙스란 말이냐...!

"알다시피 나는 포탈을 통해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했다."

사실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것이야 어렵지 않다.

사소한 건 떼어놓고 굵직하게 설명하면 되잖아?

왜, 평상시 그랑펠이 잘하는 것처럼.

"그 원리는 접속기를 모방."

사실을 나열하면 되는 일이니까.

"그 목적은 엘더 드래곤, 유낙서스를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더 나아가서는 그와의 선약을 지키기 위해서였지."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드래곤과의 선약이라.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나 혼자 한 약속이었거늘.

어쨌든, 다들 벌써부터 놀란 표정들이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인데 말이지.

나는 태연하게도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래곤들을 지도 교육했다."

과연, 천하의 그랑펠다운 요약이었다.

지도 교육이라.

사실 그만큼 명확한 한 줄 요약도 없었다.

어머니 세계수와 자식 드래곤 사이의 오해를 풀고, 또 유낙서스랑 드래곤들을 화해시키고, 긍지를 깨닫게 하고.... 지도 교육이 맞긴 하겠네.

다만 그 과정이란 걸 지나치게 생략했다는 게 문제였지만! 빙룡과 죽을 듯이 치고받고 싸우고, 용의 신전이란 히든피스를 발견하고, 거기서 찻잔을 깨트리고 죽었다는 것까지.

아주 그냥 화끈하게 생략했구나, 그랑펠.

아주 그냥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설명이다.

그나저나....

'그래도 고마워해야 하나?'

평소와 다른 게 있다면.

그런 나의 개고생을 알고 있는 청중이 하나 있다는 걸까.

그렇다, 쿠드하낙스를 말하는 거다.

모든 걸 지켜본 쿠드하낙스는 지그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쿠드하낙스를 흘겨보고 있었고.

'제발 계속 그렇게 다물고 있어주라.'

이호열 클라우디.

혹은 흑암룡이라는 호칭을 꺼낼까 봐.

진심으로 두렵구나.

그래도 눈치가 빠른 유낙서스라면 함축적인 내 말에서 속뜻을 알아차렸을 텐데.... 안타깝게도 유낙서스는 아르카나 대륙에 있었다.

'전룡이 현실에 나타난 게 아니었으니까.'

아마도 스물하나의 드래곤이 둘로 나뉘어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을 활강하며 나를 찾아 헤맸던 모양이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더욱더 아찔해진다.

'현실도 모자라서 아르카나 대륙까지...!'

흑암룡이라는.

나의 빌어먹을 이명이 울려 퍼졌겠구나.

그러나 마음 단단히 먹자, 호열아.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쿠드하낙스만 허튼소릴 하지 않도록 단속하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는.

지금의 작은 소란이 더없이 감사했다.

"...나,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분명, 드래곤을 지도 교육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역시 보름 동안 자리를 비우신 이유가 있으셨구나."

"...너, 진짜 믿겨서 하는 소리야?"

"긍지가 부족하구나, 레오니. 믿어. 그냥."

남태민, 레오니, 히사기, 슈레이그.

그래, 지금처럼 그렇게 속닥거려 주라.

시선을 옮겨 아르카나 청중 쪽을 바라본다.

"이번에도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고 왔군, 경!"

"오늘을 계기로 용마대전의 역사를 새로이 써야겠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탑주님?"

"상상, 그 이상이군. 우리 잘나신 이 수석은 언제나."

하르콘, 유그위드, 마르셀로, 탑주....

마찬가지로 계속 웅성거려도 좋다.

오늘만큼은 잡담을 얼마든지 허용하겠다.

그깟 잡담보다도 쿠드하낙스에게 입을 열 틈조차 주지 않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으니까.

다행스럽게도.

쿠드하낙스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경청했다.

뭔가 이유가 있는 건가, 싶긴 했는데....

모든 이들이 물러가고 나서야 쿠드하낙스가 내게 말해왔다.

"후후. 클라우디시라면 능히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전설'에도 힘이 깃든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전설에 담긴 힘은 세간에서 얼마나 회자되느냐에 따라 달린 법이지요."

쿠드하낙스.

유낙서스와 동시대를 살아온 노룡이라고 했던가.

덕분에 정말로 아는 게 많았다.

전설에 관한 이야기만 하더라도 그랬다.

'전설에는 진짜로 힘이 깃든다라.'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추상적인 이야기는 아니겠지.

귀철과 같은 [전설] 등급의 아이템이 존재하는 것처럼.

[전설]이라는 내가 알지 못하는 시스템이 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살 구멍은 언제나 환영이다.'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순 없다만.

내가 가릴 처지는 아니잖아?

생각하던 도중.

쿠드하낙스가 흡족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지켜보았습니다. 과연, 아르카나 대륙과는 완전히 다른 이 세계에도. 클라우디와 흑암룡의 전설이 충분히 울려 퍼지고 있는가를."

그 말에 등골에 소름이 돋아났다.

...그러니까 저 말은 지금.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지켜봤다는 거 아냐?!

그러니까 속된 말로.

나를 향한 주접이 부족했더라면 쿠드하낙스, 본인이 나서서 클라우디와 흑암룡의 명성과 위상에 관해 떠들어댔을 것이었다는 뜻이었다...!

'어쩐지!'

내가 지나치게 고개를 끄덕거린다 싶었다.

자칫 잘못하면 흑암룡으로도 모자라서.

클라우디에 관한 이야기까지 발설될 뻔했다고 생각하니까.

가슴 깊숙한 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온다.

"쓸데없는 걱정이군."

"후후. 노룡의 노파심이지요."

물론, 내뱉지는 못했지만 말이야.

"그럼, 명에 따라 복귀하겠나이다."

...그나저나 명이라고 하니까.

내가 진짜 주제도 모르고 드래곤한테 명령이라도 내린 것 같잖냐, 쿠드하낙스. 말을 건네기는 했다만, 그건 명령 같은 게 아니라 순수한 걱정에서 우러나온 말이었거든.

오직 순수한 악의만이 담긴 세계수의 열매.

악과(惡果)를 삼킨 드래곤들이었다.

듣기만 해도 몸에 좋지 않을 것 같은 기운이 팍팍 느껴지지 않는가? 그래서 되도록 빨리 그 열매를 뱉어내는 게 좋겠다, 권유했던 나였다.

"그대들이 방도를 찾길 바란다."

하지만 보다시피.

삼켰던 악과를 쉽게 뱉어낼 순 없는 모양이었다.

그것이 드래곤 소화 기관의 한계인지.

악과의 효과 때문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뭐, 이쪽도 나름대로 노력을 해볼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쿠드하낙스.

"나 또한 방도를 마련해 볼 테니."

뻔뻔하게 '나'라고 답했거늘.

'사실 나보다는 전문가들에게 부탁해야겠지.'

실상은 벨리에 선임과 클레를 비롯한 치유마법학 마법사들이 고생을 좀 하겠지.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들의 연구에 차질이 생기지 않게 출탑 신청서에 허가를 휘갈기는 것뿐.

"쿠드하낙스, 은혜에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부담스러운 인사를 끝으로.

쿠드하낙스가 차원을 찢고 용의 신전으로 돌아갔다.

이로써 드디어 소란이 일단락됐구나.

'하루가 왜 이렇게 기냐?'

잠시 숨을 돌릴 법도 하거늘.

이놈의 업무 중독.

질리지도 않고 다음 할 일을 떠올린다.

나는 의미심장하게 읊조렸다.

"비로소 가려진 어둠을 들출 때인가."

가려진 어둠.

그랑펠식 화법을 번역하자면, 디엔드가 발견한 클라우디 가문의 저택을 말하는 것이었다.

수치스러운 클라우디 가문의 후광조차 써먹겠다고 다짐했던 나다.

'긍정적인 사고방식.'

그래.

사실 외면하려고 발악하는 시간에.

차라리 익숙해지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지.

'빌어먹을 로미오....'

물론, 노력한다고 익숙해질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호열아.

지금이야말로.

자신의 과거를 스스로 책임지는 어른의 긍지를 보일 때다.

"허나, 그조차도 절차에 따라야겠지."

매도 일찍 맞는 게 낫다고.

사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당장 클라우디 가문이라는 걸 두 눈으로 목격하고 싶었다.

왜, 드래곤들이 성대하게 눈물을 흘려준 덕분에 아르카나 대륙에서도 흑암룡에 관한 이야기가. 전설이 퍼져 나가고 있을 터.

'대륙에서도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기 전에...!'

한발 빠르게 저택이란 걸 목격하고, 써먹을 수 있는 설정들을 확인하고 싶었거든. 하지만 [최후의 모험가] 페널티가 발목을 붙들었다.

[쿨타임 : 21시간 42분.]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사망 페널티와 동일한 [최후의 모험가] 페널티 효과. 때문에 포탈을 열든, 접속기를 사용하든 앞으로 하루 동안은 아르카나 대륙에 재진입할 수 없었다.

게다가 떠맡은 짐이 워낙 많아야지.

'보름이나 지났다니.'

보름이나 자리를 비웠으니.

수석으로서도, 총책임자로서도, 권한자로서도.

쌓인 업무가 장난이 아닐 게 당연하다.

보자, 사회인의 경험을 되살려본다.

'무단결근 보름이면.... 대충 수습해도 일주일은 걸리겠는데?'

하지만 내가 누구던가?

[첫 세계수의 축복] 소유자.

끊임없이 재생되는 생명력 덕분에.

매일같이 한계를 자극하는 노가다 클래스 퀘스트를 수행하고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책상에 앉아 업무를 수행하는 독종이 아니던가.

자신감 넘치는 선언.

"하루면 충분하다."

거기에 또 그랑펠식 화법이 빠지면 섭섭하지.

"내게는 흘러가는 시간조차도 숫자에 불과하니."

네네, 잘나셨습니다. 그랑펠님.

'여튼 잘난 척은 빠지지 않는구나.'

냉혹한 현실에 부딪혀봐야 철이 들 텐데....

나 때문에 울부짖는 드래곤들을 보고 나니까.

그따위 생각은 말끔하게 사라진다.

그걸 넘어서 오히려 두려워진다.

'이래서 사춘기가 중요한 건데.'

이렇게 오냐오냐했다가는, 갈수록 점점 오만해지는 거 아닌가 하고는. 그리고 갈수록 커져갈 수치심을 내가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하고는...!

그러나.

'나중에 걱정하자.'

말했다시피.

앞으로 마주하게 될 상대들 앞에선 모든 걸 끌어와도 역부족일지도 모르니까. 그래, 이 오만함조차도 원동력으로 삼아서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다.

항상의 자세.

덕분일까.

곧바로 해야 할 일이 떠올랐다.

[클래스 퀘스트 : 선악과]

절멸의 위기에서 세계수는 씨앗을 뿌리기 위한 열매를 맺었다. 허나, 세계수의 뜻과 다르게 열매는 선과 악이 공존하지 않고 나뉘어 맺히게 되었으니.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선과 악을 분리한 죄인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대뿐이다.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엘프들의 땅, 시슬리에 진입하라. (진행 중)

퀘스트 목표이자 또 다른 목적지, 시슬리.

그에 관한 정보 수집 또한 잊어선 안 되겠지.

나는 마르셀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간 탑주님께서 경의 공백을 대신하셨습니다."

게으른 고양이가 일 처리를 제대로.

그랑펠의 기준치를 충족할 정도로 해냈을지는 모르겠다만.

마탑에 쌓인 업무보다는 유스라에 쌓인 업무가 더 많을 터.

그 우선순위에 따라서 나는 포탈을 발현했다.

목표 좌표는 당연하게도.

유스라 왕국, 황금 궁전이다.

.

.

.

황금궁전.

『품격의 화원』

그 주인이 알게 된다면.

기겁할 이름을 비약초 텃밭에 붙인 건 엘시도어였다.

"다들 이제야 봐줄 만하구나."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의 손길이 닿은 비약초가 단순한 꽃 취급을 받는 것?

엘프의 긍지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물론.

"한낱 도마뱀이 무엇을 알겠느냐?"

드래곤이 울부짖는 그 순간에도.

엘시도어는 동요 없이 비약초를 가꿨다.

그런데, 잠깐만...?

무엇이냐?

저 과할 정도로 커다란 꽃잎은?

울퉁불퉁한 열매는?

엘시도어의 손이 덜덜 떨렸다.

'...설마, 수확하지 않아서인가?'

추측은 정확했다.

호열이 보름 동안 비약초 텃밭....

아니, 품격의 화원을 찾지 않았기에.

넘치는 축복을 받고 과성장한 비약초였다.

엘시도어는 떠올렸다.

'그 인간은 누구보다 미관을 중시한다.'

감히 평가하건대.

그 인간, 호열의 심미안만큼은 엘프와 비교해도 절대 뒤처지지 않았다. 그가 화원에 저런 꽃이 핀 것도 모자라 흉측한 열매까지 맺힌 걸 본다면 무어라 말할까?

-"내가 없는 동안 편안했던 모양이군."

다음 말을 상상하자 소름이 돋아났다.

-"그대에게 긍지를 느낀 건 나의 착오였나."

그놈의 긍지라는 게 뭔지 아직도 모르겠다만...!

확실한 건 긍지가 없다면.

어머니의 축복을 되돌려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엘시도어가 결단을 내렸다.

"...뽑아주마."

이렇게 많은 꽃 중 하나가 사라진다고 눈치채겠는가?

결심한 엘시도어가 과감히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전신을 얼어붙게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목소리가 들려왔다.

"품격의 화원이라."

"...?"

"무슨 짓을 하고, 하고 있는 것인가. 엘시도어."

"!!!"

.

.

.

...엘시도어, 너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짓을 했길래?

[히든피스, '품격의 화원'에 진입하셨습니다.]

비약초 텃밭에 이런 휘황찬란한 수식어가 붙은 거냐...?

내가 정말 흑암룡만으로도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는데!

이젠 하다 하다 텃밭에 금칠이라니. 형제가 쌍으로 막내를 이렇게 괴롭혀도 되는 거냐? 어째 드래곤과 엘프에게서 우리집 웬수들의 향기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막내라서 서럽다....'

한탄하기도 잠깐.

나는 우물쭈물거리는 엘시도어에게 다가갔다.

그래서 뭔데.

등 뒤에 숨긴 거.

필사적으로 숨기고 싶은 눈치지만 소용없다.

"물러나라."

[엘프, 엘시도어에게 '축복의 위계질서'가 발생합니다.]

암만 못살게 굴어봤자, 엄마는 막내 편이거든.

◈ 251화. 우애가 필요하다면

히든피스.

아르카나가 게임일 때부터 소문은 무성했다. 존재 여부조차 불분명했는데도, 히든피스를 찾겠다는 목표 하나로 탐험가 클래스를 택한 이들까지 있을 정도로 말이지.

이유야 간단하다.

히든피스.

이름부터 어마어마한 보상이 뒤따를 것 같잖아?

하지만 대격변 이후.

AAU가 플레이어들에게 아르카나의 정보를 공유한 뒤로.

히든피스는 허무맹랑한 농담이 됐다.

-보상 구현도 안 됐다는 걸 뭐하러 찾음ㅋㅋㅋ

-ㄹㅇ 애초에 찾으라고 만든 게 아니자너

-걍 찾아도 맥 빠질 듯ㅋㅋㅋ

대격변 이전.

히든피스는 당시에 등장할 콘텐츠가 아니었다.

쉽게 말해 나중에나 써먹을 미구현 콘텐츠였다는 거지.

때문에 AAU 측도 보상이나 존재 여부를 알지 못했다.

'그게 당연하지.'

다른 플레이어들보다 앞서서 개고생....

아니,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굵직한 경험을 해온 나였거늘.

그런 나조차도 히든피스를 발견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히든피스, 빙룡의 설산]

[히든피스, 용의 신전]

사실 뒤에 붙는 이름만 봐도 저절로 납득이 된다.

히든피스, 한 마디로 이름값을 제대로 했거든.

일단, 진입 난이도부터가 상상을 초월하잖아?

'빙룡의 설산만 하더라도.'

차원의 틈에서 빙룡, 프로즈낙스와 만나야 한다는 조건이 따랐으니까. 뭐, 용의 신전은 그보다 더하겠지. 드래곤이 아니면 접근할 수도 없으니까, 저긴.

'인정하긴 싫다만....'

...나야 흑암룡이니까 예외였던 거고.

여튼, 히든피스는 그만큼 거창한 장소란 말이다. 그런데 기껏해야 비약초나 키우는 유스라 왕국 텃밭에 히든피스라는 수식어가 붙다니...!

생각할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내가 없는 보름 동안.

텃밭에 무슨 일이 생긴 거구나.

엘시도어.

축복의 위계질서 발동.

"!"

그 탓에 한 발짝 물러나는 엘시도어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딱 봐도 켕기는 게 있는 눈치잖아, 이거는.

마음 같아서는 엘시도어를 붙잡고 속 시원하게 묻고 싶었다.

어차피 위계질서도 있겠다.

내게는 숨기고 싶은 게 있어도 숨길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랑펠이 누구인가?

지나치게 고결한 긍지의 소유자.

불의의 사정으로.

보름 동안 화원에 들르지 못한 것 또한.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무게라고 생각하는 귀찮은 성격의 소유자였으니.

'엘시도어를 추궁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러니 내 눈으로 보고 판단하는 수밖에.

우선, 엘시도어가 가리고 서 있던 건 비약초였다.

그런데, 잠깐만....

어째 생김새부터가 심상치 않다?

꽃잎이 지나치게 넓고 흐드러지게 피었다.

또한 무엇보다 눈에 띄는 큼지막한 열매까지.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수확 시기를 지나친 탓인가."

정말로 별 뜻 없이 한 말이었는데.

"헉...."

엘시도어가 흠칫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과잉반응 뭔데?

누가 보면 내가 진짜 노예처럼 부려 먹고 있는 줄 알겠다.

수확 시기를 놓친 것도 따지고 보면 내가 화원을 찾지 못한 탓이니까.

천하의 그랑펠이 남 탓을 할 리가 없는데 말이다.

우려할 것 없다고.

너그럽게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실로 기이하게 자라났군."

그렇다.

눈앞에 보이는 열매가 진짜 '기이'했으니까.

내가 그 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마왕의 전리품,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

그 효과 덕분에 아르카나에 존재하는 모든 식물과 광물에 관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는 나였다. 하지만 그 지식 속에도 이 열매에 관한 정보는 없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하다.

저 열매는 외관만 '기이'한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기이』]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비약초 텃밭에 히든피스라는 거창한 수식어가 붙게 된 것도 이해가 된다. 기이가 자라난 텃밭이라면, 어쩌면 히든피스라고 불릴 자격을 얻게 될 만도 한 거겠지.

'그래서 중요한 건.'

어떻게.

텃밭에 기이한 열매가 자라났느냐는 것이다.

나는 열매를 살피며 엘시도어에게 물었다.

"그대 이외에 화원에 방문한 이가 있었나?"

"...없다."

"확신하는가?"

"그렇다. 나는 한순간도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하긴 물으나 마나 한 질문이었나?

엘시도어의 성질머리야.

첫 등장 때부터 세상에 널리 알려졌었다.

지금이야 위계질서 때문에 별소리를 못 하고 있는 거지.

인간은 물론, 자신을 제외한 모든 걸 업신여기는.

그 성질머리가 고쳐졌으리란 기대는 하지도 않는다고.

'그런 엘시도어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누가 감히 텃밭에 들렀겠어?

그렇다면 역시 가능성은 하나뿐이다.

엘시도어, 스스로 말한 것처럼.

한순간도 자리를 비우지 않고 비약초를 돌본 덕분에.

비약초는 [『기이』]하게 자라난 것이다.

기이.

완전히 다른 두 개념이 서로 합쳐진 것.

비약초의 성질에 더해.

엘시도어가 어떤 영향을 끼쳐서.

기이가 된 건지는 모르겠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일단, 보는 것만으론 효과를 알 수 없다는 것.

그 효과를 알기 위해선....

'먹어봐야겠지.'

물론, 미쳤다고 현실에서 열매를 삼킬 생각은 없다.

효과를 아는 영약을 섭취했을 때도.

그 반동으로 찻잔을 떨어트린 채 기절했었단 말이다...!

'아르카나 대륙에서 말이야.'

뭐, 아프긴 하겠지만.

거기선 죽어도 죽지 않으니까.

어쨌거나 잘했다, 엘시도어.

덕분에 뭔지는 몰라도 범상치 않은 과실을 얻었구나.

나는 입을 열었다.

"그대의 긍지가 결실을 맺었군."

긍지가 결실을 맺다니, 표현 참....

내뱉는 나로서도 알아듣기 힘든 그랑펠식 화법.

그러나 또 어찌어찌 뜻은 통하는 모양이다.

"그런가. 하하...."

엘시도어의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돌았거든.

어느새 엘시도어도 비약초를 키우는 데 진심이 된 건가.

농부가 엘프 적성에 맞는 일이었나.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아차,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네.

'그러고 보니까 물어볼 게 있었지.'

─엘프들의 땅, 시슬리에 진입하라. (진행 중)

간만의 클래스 퀘스트.

세계수와 선악과.

그리고 악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그 단서를 쫓기 위해 시슬리에 진입을....

"!"

아니, 잠깐만.

순간, 감전된 것처럼.

찌릿했다.

선악과.

눈앞에 보이는 열매.

엘프들의 고향, 시슬리.

엘프, 엘시도어가 상주하고 있는 품격의 화원.

전혀 다른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선악과.

전혀 다른 두 성질, 기이를 품고 있는 열매.

...이거 우습게 볼 공통점이 아니었잖아?

*

황금 궁전.

그러나 자신이 머무는 별채가 아니다.

엘시도어는 이 순간, 극도의 불안감을 느꼈다.

'뭐지?'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대의 긍지가 결실을 맺었군."

과정을 떠나서 그 마지막엔 분명 그런 말을 들었다.

그래서 안심했다.

벌써부터 어머니의 축복을 돌려받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화원 관리에 소홀히 했다는 질책은 면했으니.

하지만 이게 갑자기 무슨 날벼락인가.

"따라오도록."

또각─

어느새 호열의 뒤를 따라 졸졸 쫓고 있는 자신이었다.

엘시도어는 자신의 행동을 되짚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심기를 거스른 행동은....

'...설마?'

역시, 들킨 건가?

뿌리부터 뽑으려고 했던 것부터?

그렇게 따지고 보면 찔리는 구석은 넘쳐났다.

몸으로 꽃과 열매를 가려보려다가 한소리를 듣고 물러난 것까지.... 그렇기에 엘시도어는 쭈뼛거리며 호열의 집무실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쿵─

'윽.'

문이 닫히는 순간.

새삼 끔찍한 기억이 떠오른다.

위계질서 때문에 호열에게 아무 말도 못 하고 고분고분 대답하던 그때가. 경험이 있어서일까. 엘시도어는 쓸데없는 잔머리를 굴리지 않았다.

'반항해 봤자 소용없다.'

애초에 위계질서를 거스를 수 있었다면.

이런 꼴을 당하고 있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러니까 먼저 자진해서 입을 열었다.

"묻는 것에 순순히 답하겠다."

그러자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

엘시도어는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정말 모든 걸 말해야 하는가...!'

호열이 자리를 비운 보름.

엘시도어는 자신의 과오를 되짚어보았다.

역시나, 제일 걸리는 건 쉴 새 없이 중얼거리던 혼잣말이었다.

-"보아라. 내가 주는 물이 더 낫지 않느냐."

-"하하, 이래서야 누가 화원의 주인인지 모르겠군."

-"이게 품격이고, 품격의 화원이지."

...그걸 전부?

순간, 고뇌에 빠진 엘시도어.

그런 엘시도어에게 호열이 말을 이었다.

그건 조금도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엘시도어."

"...듣고 있다."

"그대는 시슬리에서 어떻게 지냈는가."

...시슬리?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갑자기 과거의 일을 물어올 줄은.

추궁을 하려던 게 아니었나.

엘시도어가 끝까지 의심하던 순간이었다.

자비로운 권유가 이어졌다.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겠군."

"...!"

"어쩌면 이야기가 길어질지도 모르니."

정말로.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를.

궁금해하는 것인가?

"...."

태어나 처음으로 들어보는 질문.

게다가 걱정했던 질문이 아니었기에.

엘시도어는 대수롭지 않게 답할 수 있었다.

시슬리에서의 일과라고 해봤자 정말로 유별날 게 없었으니까.

"나와 동족들은 시슬리에서 자연과 교감하며 영원을 향유했다. 굳이 비교하자면.... 지금과 비슷한 삶이었다. 물론, 시슬리에선 공을 들이지 않아도 알아서 자라났기에. 지금처럼 번거로운 수고는 필요치 않았지만."

"거기엔 세계수도 포함인가?"

"당연하다."

당연한 것을 넘어서.

세계수를 보호하는 것이 자신들의 사명이었으니.

교감의 대상에는 당연히 어머니도 포함이었다.

"...마셔도 되나?"

"물론."

"...고맙다."

엘시도어는 호열이 내어준 찻잔을 들고는 기울였다.

'녹색 물?'

씁쓸한 맛 따윈 상관없었다.

과거 이야기를 하는 데엔 온기만 있더라도 충분했으니까.

엘시도어가 무엇 하나 아쉬울 게 없었던.

시슬리의 삶에 관해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순간.

다시금 질문이 이어졌다.

"그렇다면 세계수 또한 열매를 맺을 수 있었겠군."

"그랬겠지."

"그대들의 보살핌이 있었다면 말이다."

과연, 인간답지 않은 심미안의 소유자다.

단번에 우리의 위대함을 알아보는군.

엘시도어는 어느샌가 콧대가 우쭐해졌다.

"씨앗을 뿌리는 것이 도마뱀들의 역할이라고는 한들. 우리가 어머니를 돌보지 않는다면, 어머니는 씨앗을 품은 열매를 맺을 수조차 없다. 그러니 지금 사태의 책임은 우리가 아닌 도마뱀들에게 있는 것이다."

먼저 심기를 거스른 쪽은 드래곤, 도마뱀들이었다.

그렇기에 자신과 동족들도 책임을 다하지 않았을 뿐이다.

어머니가 제대로 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죽은 것도.

드래곤들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씨앗을 뿌린 것도.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각하던 도중이었다.

달칵─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그랬나."

언제나처럼 확신에 찬 목소리가 이어졌다.

전과 마찬가지로.

또 한 번 예상치 못한 말이 이어졌다.

"모든 건 형제의 긍지가 부족한 탓이었군."

.

.

.

일단,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랑펠, 넌 녹차 중독이 맞다.

녹차의 카페인이 들어가서겠지.

'두뇌 회전에 막힘이 없는 기분이야.'

그래서일까.

엘시도어의 말을 듣는 순간, 얽혔던 실마리가 풀렸다.

어디서부터 오해가 시작됐는지 알아차렸단 뜻이다.

'드래곤과 엘프에겐 각자 사명이 있었다.'

드래곤에게 씨앗을 뿌려야 하는 사명이 있었다면.

엘프에겐 씨앗을 품고 있는 열매를 맺게 하는 사명이 말이야.

그러나 엘시도어는 분명히 말했다.

자신과 동족들은 책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그렇다면 세계수의 열매.

선악과는 애초에 제대로 자라나지 않았다는 의미다.

드래곤들도 마찬가지다.

드래곤의 책무는 단지 씨앗을 뿌리는 것이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씨앗을 싹 틔우는 게 아니었다.

시작부터 '누군가'에게 농락을 당했단 뜻이다.

"모든 건 형제의 긍지가 부족한 탓이었군."

형제의 긍지.

그랑펠어를 해석하자면 우애를 말하는 거겠지.

말뜻대로 우애가 부족하지 않았다면.

서로 대화를 나눴다면.

오해를 풀었다면.

사건의 원흉을 찾아냈다면.

지금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겠지.

'이래서 가정이 화목해야 된다는 건데.'

후회해도 어쩔 수 없다.

그랑펠 사전에 후회란 단어는 없거든.

단지 후회할 시간에 나아갈 뿐이지.

"허나 그 또한 바로 잡으면 되는 일이다."

"...?"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시슬리에서 할 일이 한 가지 더 늘어난 셈이다.

클래스 퀘스트를 수행하는 것은 물론.

"지도 교육을 통해서 말이다."

"?!"

드래곤과 엘프.

형제의 우애 회복까지.

어떻게 된 게 이놈의 집안은....

막내가 북 치고 장구 치고 혼자 다 하게 생겼냐!

.

.

.

타다닥.

자판 위에서 춤추는 손가락.

커뮤니티에 새 글이 갱신된다.

[제목 : 그런데 흑암룡인가 하는 뭔가 말인데]

[글쓴이 : ㅇㅇ]

[내용 : 그거 왠지 호열 님 같지 않음...?]

◈ 252화. 흑암룡 (1)

사건의 흐름을 되돌아보자.

마탑도, 랭커들도, 성전 연합군도 어찌할 수 없던 드래곤들이었다. 그뿐만 아니다. 붕괴한 균열에서 뛰쳐나온 몬스터를 신속하게 처리해왔던 인류의 과학마저도.

-수천억짜리 전투기도 접근조차 못 했다면서 ㄷㄷ

-ㅇㅇ 날갯짓에 추락할 뻔했다더라

-음속 미사일보다 빠른데 어떻게 맞추겠다고;;

만물의 왕.

드래곤 앞에서는 무용지물.

말그대로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사태는 단 한 사람의 등장으로 정리되었다.

마치 이 사태 또한 예견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름만에 모습을 드러냈어도.

평소 다를 바 없던 호열에 의해 말이다.

장관이었다.

포효하던 드래곤들이 호열의 앞에 집결.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은.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금 포탈을 통해 사라지는 모습도.

언제나 상상, 그 이상의 모습을 보여줬던 호열이거늘.

드래곤을 그저 한마디 말로 되돌려보낼 줄이야.

누구도 예측할 수 없던 일이었다.

동시에 크나큰 의문이었다.

온갖 추측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대체 보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임??

-ㄹㅇ 무슨 일인데

-뭔진 몰라도....

다른 플레이어도 아니고 호열이었다.

호열이 예상치 못하게 보름간 자리를 비웠다?

의미하는 바는 간단하다.

호열조차 예상할 수 없던 일이 벌어졌다는 뜻.

화살은 '한 단어'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 스케일이면 흑암룡밖에 없지 않아?

-바로 확신할 정도라고?

-아니, 이름만 들어도 딱 느낌 오지 않음???

역시나, 흑암룡.

드래곤들이 일제히 울부짖었던 그 이름.

흑암룡밖에 없었다.

-내 생각엔 호열 님이 흑암룡에 관한 단서를 찾은 것 같음 ㅇㅇ

-ㄹㅇㅋㅋ 그렇지 않고서야 드래곤들이 얌전히 돌아갔겠냐고

-뇌피셜치고 그럴듯함 ㄷㄷ

-흑암룡 정도면 호열 님이 보름 동안 매달릴만 하지

그것이 현시점에서 가장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물론, 간혹가다.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글들이 있기는 했다만.

[제목 : 그런데 흑암룡인가 하는 뭔가 말인데]

[글쓴이 : ㅇㅇ]

[내용 : 그거 왠지 호열 님 같지 않음...?]

아무리 그래도 상식선이라는 게 있었다.

아무리 상식을 뛰어넘는 활약을 보여온 호열이라고 한들.

상대는 드래곤이 아니던가?

-에이 아무리 호열 님이라도 그건 좀....

-일단 인간이 어떻게 용이라고 불리냐 그건 아니지ㅋㅋㅋㅋ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함 그건

좋다, 백번 양보해서.

호열이 보름 만에.

드래곤이라 불릴 정도로 성장했다고 쳐보자.

그럼에도 말이 되지 않았다.

-용들이 눈물을 흘렸다니까???

-드래곤이 인간 때문에 운다고? 말도 안 되지ㅋㅋㅋ

-뭣보다 울 이유가 없자너ㅋㅋㅋ

-그니까 평소랑 똑같이 멀쩡했는데 우리 호열 님은?

영겁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드래곤이다.

그들이 흑암룡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는 건.

흑암룡이 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친 존재라는 건데....

아무리 호열이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그런 게 보름 만에 가능하겠음?

보름은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다.

반박 댓글은 달리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상식적으로 흠잡을 곳이 없는 추측이었으니까.

하지만 단지 미련을 버릴 수 없을 뿐이었다.

...그야 어딘가 그럴싸하지 않은가?

-한없이 깊은 어둠 그리고 흑암룡....

-그래도 뭔가 관련 있는 거 같지 않음?

-듣고 보니까 또 그러네...?

둘 다 시커먼 게 공통점이 있어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게 근거가 될 순 없었다.

그랬다, 거기서부터는 단지 믿음의 영역.

그러니 기대할 뿐이었다.

-흑암룡에 관한 떡밥 또한 풀어내시리라 믿습니다.

그저 호멘이라고....

*

...뭐, 그저 호멘?!

유감이지만,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하필이면 이명을 가져다가 붙여도 흑암룡이라니....

한없이 깊은 어둠이랑 묘하게 이미지가 겹치잖아, 그거!

'필사적으로 다물게 하길 잘했다.'

만약, 쿠드하낙스가 무어라 한마디라도 했다면.

나는 반박하지 못한 채.

흑암룡이란 끔찍한 이명을 인정하고 말았겠지.

게다가 무엇 하나 숨기지 않는 그랑펠의 긍지라면.

흑암룡이라는 이명이 비롯된 이유.

클라우디 가문에 관해서도.

숨김없이 발설할 가능성이 차고도 넘쳤으니.

그때가 바로 내 제삿날이 될 뻔했구나, 호열아....

유스라 왕국의 집무실.

나는 엘시도어를 내보낸 후 밀린 업무를 확인하는 데 한창이었다.

국왕, 하쿠나가 제 몫 이상을 해줘서 살았다.

그게 아니었다면 꼬박 며칠은 붙잡고 있었어야 했을 텐데 말이야.

"말하지 않았나, 하루면 충분하다고."

아주 그냥 말은 뻔뻔하게 잘한다, 진짜.

어쨌거나 쉬지 않고 서류를 넘긴 덕분.

대강 정리가 끝나간다.

그런 의미에서 나를 좀 돌아볼까?

드래곤들이 워낙 성대하게 귀환식을 치러준 덕분에.

아직 확인하지 못한 게 몇 개 있으니까.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숭고, 초월자, 흑암룡]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681]

[능력치]

근력 : 159 / 민첩 : 155 / 마력 : 577 /  행운 : 12 / 심미 : 上 / 집념 : 2

[보유 포인트 : 0]

간만에 열어본 상태창.

무엇보다 거슬리는 건 칭호의 '흑암룡'이구나.

그러나 징징댄다고 떼어놓을 수도 있는 게 아니니까.

미련은 버리자.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다.

'경험치 페널티는...?'

일단, 눈에 띄지 않는 것만으로 안도감이 드네.

레벨이 상승하면서 요구 경험치도 상승한 탓일까.

경험치가 하락했어도 크게 티가 나지 않았다.

절대적인 경험치의 하락량은 같아서 조삼모사나 다를 게 없겠지만.

레벨이 하락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군.

'앞으로 19레벨인가.'

이 펄럭거리는 재킷에 팔을 끼워볼 수 있는 게.

자연스럽게 에픽 등급 아이템, 여명 세트의 효과까지 확인할 수 있겠지. 19레벨이라, 요구 경험치량을 떠올려보면 머나먼 일이라 생각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누구던가?

악크샨의 유일한 생존자.

덕분에 악크샨에게 물려받은 유산이 존재했으니.

그래, 아끼고 아껴온 나의 적금.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있다.

이 순간에도.

악마를 사냥하며 경험치와 명성을 쌓고 있을 기계탑 말이야.

'하나만 찾아서 회수해도.'

700레벨,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서두르자, 호열아.

내일이면 [최후의 모험가] 페널티도 사라진다.

현실에서 밀렸던 일만 처리하면 곧바로 아르카나 대륙으로 재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아르카나 대륙에서도 순서를 지켜야겠지만.

'사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최우선.

가장 시급한 목적은 클라우디 저택 방문이었다.

이유야 말하지 않았던가?

빌어먹을 흑암룡 전설이 아르카나 대륙에 널리 퍼지기 전에.

그나마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을 때.

목격해야 여러모로 편할 것 같았거든.

하지만.

"여명 앞에서 어둠은 허울과도 같은 것."

알게 됐잖아?

"어둠을 들추는 것이야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이지."

선악과를 둘러싸고 어떤 오해가 있었는지를.

심지어 클래스 퀘스트가 떠오른 걸로 추측했을 때, 그 원흉은 악마 혹은 악마와 관련됐을 게 확실했다.

악마라면 두고볼 수 없는 그랑펠의 발길은 시슬리를 향할 수밖에 없겠지.

물론.

『위대한 가문의 후계자였으나 악마에게 그 가문이 몰락.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인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이하 그랑펠은 그 악마에게 복수하기 위해 악마 사냥꾼의 길을 걷게 됐다.』

클라우디 가문도 악마에게 몰락한 건 마찬가지지.

하지만 그랑펠의 말대로.

아직 내 두 눈으로 클라우디를 목격하지 못했으니까.

게다가 그랑펠의 고귀한 긍지가.

대의보다 집안일을 우선시할 리가 없거든.

"교육의 시기 또한 중요한 법이니."

하여튼....

마탑에서 기이를 설파할 때부터 아주 그냥 유능한 교육자 다 되셨습니다, 그랑펠님? 내가 내면으로 구시렁거리며 깃털펜을 다시 쥔 순간이었다.

똑똑─

"?"

별안간, 누군가 집무실의 문을 두들겨왔다.

*

호열의 등장과 함께 조용히 물러간 드래곤 무리.

인류가 절멸의 위기를 탈출한 순간.

인류가 느낀 감정은 전부 엇비슷했다.

놀라움, 안도, 기쁨....

그러나 수십억 분의 일.

인류와 동떨어진 감상에 빠진 이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십수 년 동안 수십억 분의 일이라 불렸던.

아르카나 공식 랭킹 1위, 스칼이었다.

"...알렉산더, 나 꿈꾸는 거 아니지?"

지구 전역에 드래곤 출현!

그 사실에 스칼은 비로소 자신의 꿈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호열에게 극진한 감사 인사부터 전했다.

"감사하옵나이다, 호열 경...!"

그럴 수밖에.

스칼은 호열이 보름 동안 종적을 감춘 이유를 나름대로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그랬다. 클래스 퀘스트, [전룡소집(全龍召集)]에 이어 떠오른 월드 퀘스트 덕분이었다.

[월드 퀘스트 : 노룡의 마지막 비상]

죽어가는 노룡은 결단했다.

자신의 최후를 동족의 미래를 위해 불사르겠다고.

노룡의 꾸짖음에 대륙이 전율하리라.

─노룡의 최후를 목격하라. (실패)

퀘스트 목표는 실패였다.

하지만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노룡이 정말 최후를 맞았는지, 맞지 않아서 실패인 건지.

스칼로서는 알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드래곤이 현실에.

그것도 열 마리도 넘게 튀어나온 지금.

퀘스트 따위 성공이든, 실패든 아무래도 좋았다.

"있었어. 정말로!"

자신의 목표가 허상이 아니었다는 증거.

그 목표에 언젠가 다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걸 넘어서 저런 거대한 드래곤을 타고 날아오를 생각을 하니까....

"...알렉산더, 이건 못 본 거로 해줘."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로.

스칼은 감격하고 말았다.

그래서일까.

스칼은 드래곤의 울음소리.

피어 하나를 흘려들을 수 없었다.

"으으."

강렬한 피어에 다리가 후들거려도.

꾹 참아내고 용기사의 관점으로 상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실마리를 찾아냈다.

"...흑암룡이다."

클래스 퀘스트부터 월드 퀘스트.

마지막으로 흑암룡까지.

분명 이어지는 스토리 라인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저 흑암룡이라는 걸 찾는 데에.

드래곤들에게 도움을 준다면...?

"어쩌면 친밀도를 쌓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한 스칼이 행동에 돌입하려던 순간이었다.

별안간, 호열이 나타났다.

감히 누구도 손댈 수 없던 상황을 순식간에 정리해 버렸다.

스칼은 멈칫했다.

"설마, 이번에도 경께서는...?"

흑암룡에 관해서도 무언가를 알고 계신 겁니까?

"면목이 없지만...!"

스칼은 염치를 무릅쓰고 당장이라도 호열에게 달려가 묻고 싶었다.

죽어가던 노룡은 어떻게 된 건지부터.

흑암룡에 관한 정보까지.

궁금증이 산더미 같았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알고 있었다.

"절차. 절차. 절차를 잊어선 안 된다."

그래서 기다렸다.

황금 궁전 앞에서.

호열이 복귀하기를.

"부탁입니다. 에노크 경!"

그리고 이젠 완전히 안면을 튼 라이언 하트의 기사.

에노크에게 사정을 전달했다.

이러한 용건이 있기에 호열 경을 뵙고 싶다고.

그에 관한 대답은 머지않아 되돌아왔다.

스칼이 애타는 눈빛으로 에노크에게 물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

.

.

문을 두들긴 건 에노크였다.

정확하게는 스칼의 소식을 전해 온 에노크였다.

그래, 용기사 스칼이다.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스칼.'

눈물을 글썽거릴 정도로.

스칼이 드래곤에 진심이라는 걸 알고 있던 나였으니까.

그런 스칼보다 내가 먼저 드래곤 위에 올라타게 될 줄이야.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참....'

나조차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

'때론 모르는 게 약이다, 스칼.'

뭐, 굳이 그 사실을 말할 필요는 없다.

그랑펠은 몰라도.

나, 이호열은 배려라는 걸 할 줄 아는 사회인 아니겠는가?

게다가 스칼이 아니었다면.

유낙서스에 관한 소식을 알 수 없었을 테니까.

'그와 얽힌 히든피스도, 퀘스트도 그냥 지나쳤을 거야.'

스칼의 협조 덕분에 성과를 얻은 만큼.

나도 스칼에게 협조해 줘야겠지.

나는 언제나처럼 읊조렸다.

"주고받음인가."

그 소릴 왜 안 하나 했다, 내가.

주고받음도 주고받음이지만.

나는 알고 있다.

아무리 잘났다고 하더라도.

혼자서는 역부족이라는 걸 말이야.

'스칼은 특기 전력이다.'

히든 클래스, 용기사.

그 잠재력은 대마법사 제시 하인네스 이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어쩌면, 스칼과 드래곤이 좋은 관계를 맺게 하는 것도.

성전 연합군 총대장의 무게일지도 모르겠지.

그런 의미에서.

사전에 약속되지 않는 만남이지만, 귀를 열었다.

합당한 목적만 있다면 만나주려고 생각했단 말이다.

...그런데, 뭐라고?

"스칼 경이 흑암룡에 관해 묻고 싶은 게 있다고 전해왔습니다."

왜, 하필 많고 많은 드래곤 중에서 흑암룡인데?!

.

.

.

미끌─

"...네, 네?!"

찻잔을 들고 있던 스칼의 손에서 힘이 빠진다.

청천벽력.

호열이 어느 때보다 냉랭히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장담하지."

"앞으로 무슨 일이 있다고 한들."

"그대는 흑암룡에 다다를 수 없다."

◈ 253화. 흑암룡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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