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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100%EXP / Chapter 8: 8

Chapitre 8: 8

* * *

다음날.

통통.

오르티마가 내 얼굴에서 부비적 거렸다. 그 탓에 잠에서 깨어났다.

"윽, 숨막혀."

의도치 않게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는 느낌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를 하고선, 가스렌지 앞에 섰다.

"이리 와."

스르륵.

『 오르티마가 '철제 후라이팬 Lv.1'으로 변합니다. 』

어제 몇 가지 실험 끝에 오르티마의 활용법을 알아냈다. 오르티마가 삼킨 물건들은 전부 아이템화가 된다.

그리고 레벨이 생긴다.

주무기인 마족 학살자는 아직 오르티마에게 먹이지 않았다. 오르티마에게 마수를 먹여서 싸우게 할 수도 있으니까.

그때 내 무기가 없으면 곤란하다.

치이익.

나는 계란 세 개를 까서 후라이를 팬 위에 올렸다. 노릇하게 익은 계란을 확인하고서 가스렌지를 껐다.

『 스킬 '요리 Lv.11'을 발휘합니다. 』

"기가 막히게 맛있네."

남은 하나를 오르티마에게 던져주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 얻은 마도 조율장치. 이걸 사용하려면 그 던전으로 가야한다.'

그곳에 놈들의 작업장으로 이어지는 입구가 있다. 프로젝트 메이저 게이트를 막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일이다.

문제는 해당 던전 근처를 빌런 조직이 점거했다는 건데.

'빌런 조직 환령.'

지금은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놈들은 후에 극악무도한 빌런 단체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배신자 김상욱이 운영하는 흑결과는 비교도 안되게 미친 놈들만 가득했다.

'언젠가 처리할 생각이긴 했다.'

빌런 조직은 멸망하는 세계에서도 패악질을 부린다. 법과 질서가 사라진 세계에서 그들의 행패는 더욱 심해졌다.

자기들끼리 국가를 하나 세워 난민들을 습격할 정도였다.

'놈들 때문에 목숨을 잃은 영웅이 한 둘이 아니다.'

필히 죽여 놔야 할 놈들이었다.

현재 내 랭크는 C급 상위.

레벨은 60이다.

이것만 놓고 보면 어중간한 헌터. 그러나 실질적인 능력치는 A랭크 못지 않을 거다.

'내 능력치엔 배수가 적용 되어 있고, 가지고 있는 스킬의 갯수가 다르니까.'

거기에 더해 이번에 얻은 유니크 스킬 '웨펀 마스터'까지.

'아무리 그래도 혼자서 습격하는 건 어렵겠지.'

환령은 빌런 중에서도 난다긴다 하는 놈들이 모인 조직. 아직 제대로 성장하기 전이라지만, 나혼자서 모두를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가기도 뭣하다. 빌런들이 미래에 저지를 극악무도한 짓을 설명할 순 없는 노릇이니.

전화가 온 건 그때였다.

- 김상욱

'벌써 마족과의 접선이 끝났나?'

나는 스마트폰을 받아 들었다. 김상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쩐지 자신감이 묻어 있는 느낌이었다.

"시키신대로 임무 완료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말씀 드리려고 하는데 시간 괜찮으십니까? 제가 가겠습니다."

나는 김상욱을 만나러 근처 카페로 향했다. 창밖으로 외제차에서 내리는 김상욱이 보인다. 녀석은 양복을 쫙 빼입고 있었다.

"······."

그는 씩 웃으며 내 앞에 앉았다. 아무래도 생각보다 일이 잘 된 모양이다.

"덕분에 기록의 마족에게 인정 받았습니다. 흑결의 보스 자리에도 다시 앉았고요. 새로운 힘도 익혔는데 보여드립니까?"

종속 계약을 맺기는 했지만 그 성격은 그대로다.

"됐다. 그래서 다음 계획이 어떻게 되는데."

"여기서 말씀 드리기는 그렇고, 차에 타서 이야기 하시죠."

"그래, 계산해라."

"물론입니다. 잠깐, 5만원? 무슨 가격이······."

나는 김상욱에게 커피 값과 케이크 계산을 맡기고선 차에 탔다. 김상욱이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크흠, 저 왔습니다."

잠시 목청을 가다듬은 김상욱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기록의 마족의 다음 목적은 각성자를 납치하는 겁니다."

"각성자 납치?"

"맞습니다. 각성자의 영혼은 마기의 재료가 되거든요. 헌터들을 납치해서 부족한 마기의 원천만큼 제물로 사용할 목적인거죠. 그 일의 진행을 전부 저한테 맡기셨습니다."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다. 당연하지만 미래에선 프로젝트 마기가 정상적으로 진행되었으니 그렇다.

'김상욱을 써서 재물이 될 헌터들을 모으겠다는 건가.'

이 시점의 마족 치고는 꽤 세게 나온다. 마기의 원천이 하나 밖에 남지 않아서 강경책을 쓰는 모양.

"그런데, 그 납치라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21세기에 헌터 납치라니. 잘못하면 그대로 감빵 끌려가는 거 잖습니까. 애들 시키면 금방이지만, 또 꼬리를 안 잡히게 하려면 어려워서. 그게 고민입니다."

"······."

사람을 마족한테 가져다 바친다는 것부터가 미친 생각인 것 같은데.

"일반 헌터는 절대 안되고."

나는 짧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다른 조직의 빌런들을 데려가는 건 어때?"

"빌런 말입니까?"

어차피 쓸어버리려고 했던 조직 '환령'.

나중에는 마족이 주목하는 단체가 된다. 그들의 무분별한 범죄 행위를 침략에 사용한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 환령은 그저 널려 있는 빌런 모임 중 하나.

"빌런들이라면 사라져도 찾는 사람이 없겠지."

"호오, 그야말로 악마 같은 발상이십니다."

"······."

김상욱이 이끄는 흑결보다 지독한 빌런 조직 환령.

거기엔 그 놈들이 있다.

"빌런들이 모여 있는 좋은 장소를 하나 알고 있거든."

이이제이라고 하던가.

빌런들을 이용해서 빌런들을 전부 쓸어 버려야겠다.

59화 환령(2)

김상욱과의 만남 다음날.

내 계좌로 5000만원이 입금 되었다.

'오, 꽤 많은데.'

B급 게이트를 공략한 것 치고는 상당한 금액. 연금술사 이철형의 사심이 담긴 메시지는 덤이었다.

- 저희 길드 오시면 훨씬 잘해 드리겠습니다. 급성장 길드 TOP5 '패럿' 입니다. 그 훌륭한 실력과 연금술 재능 함께 꽃 피워보시지 않겠습니까?

"······."

굳이 답장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은빛의 날개도 거절한 마당에 패럿 길드에서 썩을 일은 없다.

나는 통장을 확인한 뒤 눈을 가늘게 떴다.

'생각보다 많이 모이진 않았네.'

다만 앞으로 벌 걸 생각하면 부족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나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고 있으니.

"이리 와."

통, 통.

바닥을 굴러다니는 오르티마에게 명령하자, 녀석은 한달음에 내 품으로 뛰어들더니 은색의 팔찌로 변했다. 눈에 띄지 않고 데리고 다니기 편한 점은 좋다.

'방어구부터 새로 맞춰야 겠어.'

오르티마를 방어구로만 사용하기엔 아쉽다. 무기로도 변하고, 아마 마수로도 변할 수 있는 녀석이니까.

나는 택시를 타고 아이템 제작자 김건의 가게로 향했다.

"지한님! 어서 오세요! 지난번에 만들어드렸던 방어구는 어떠셨나요?"

김건은 환한 얼굴로 나를 맞이해줬다.

'김건이 만들어 준 방어구들. 완전 부서지긴 했어도 그만한 값어치를 했지.'

정령 조종사 최유정과의 전투, 최하위 마족과의 싸움, 버서커의 공격까지 막아내고 나서 부숴졌으니 제 값은 톡톡히 했다.

가게에서 잠깐 김건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빚도 다 갚고, 길드에 밀려 있던 아이템도 전부 납품했다고 한다. 얼굴이 밝아 보이는 건 그 때문이었다.

"전부 지한님 덕분입니다."

눈물을 찔끔 흘리며 다이달로스의 망치를 들어 보이는 김건. 특유의 고집만 버리면 진작에 대성했을 놈이긴 하다.

멸망한 세계의 기인 중에서도 또라이라고 불렸던 김건이 그나마 정상이 된 것 같아 다행이다.

"잘 됐네요. 사실 오늘은 새로운 아이템 의뢰를 맡기러 왔습니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마정석을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 완벽한 마정석 B++ 』

『 훌륭한 마정석 B++ 』

각각 마족과 권속을 잡고 나온 마정석이었다. 이것과 바실리스크 아종에게서 나온 재료까지 꺼내 놓으니 김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렇게 좋은 재료를 대체 어디서 구하신겁니까?"

침까지 흘릴 기세로 김건은 아이템을 바라봤다. 보스를 잡고 나온 마정석의 경우엔 그 수요가 매우 많기 때문에 귀중하다.

"드리겠습니다. 그걸로 레어 방어구를 만들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김건은 고개를 숙였다. 아이템 의뢰를 맡기는데 도리어 감사 인사를 받게 되었다. 나는 거기에 더해 4천만 원을 김건에게 보냈다.

레어 아이템을 풀 세트로 맞추려면 원래 집 한 채가 들어가니, 이 정도 금액이면 사실상 거저나 다름 없는 가격이다.

"이 정도면 레어······. 아니며 어쩌면 그 이상도······."

중얼거리는 김건은 망치를 집어들고선 홀린듯 작업실로 향했다. 이러면 아이템은 금방 나올 것 같다.

'그러면 약속 장소로 이동해 볼까.'

오후에는 김상욱과 함께 빌런 길드 '환령'의 거점을 치기로 했다. 택시에 올라 약속한 장소로 향하고 있는데 문자가 도착했다.

- 대체 언제오는 거에요? 온다면서 ㅠㅠㅠ 나 갇혀 있다니까요!

진세아의 문자였다.

진세아는 하이텍트 사의 딸이었다. 아직 은빛의 날개 채용 시험 사건이 있은지 1주일이 채 안됐다. 아버지가 병원에서 못 나오게 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이번 일이 해결되는 데로 진세아를 만나러 가야겠어.'

조만간 진세아와 함께 훔쳐야 할 아이템이 하나 있다. 미래에서 얻은 정보를 하나라도 낭비할 생각은 없다.

"도착했습니다."

인적드문 시골의 버스 정류장 앞.

나는 택시에서 내려 도로를 따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푸른 하늘 아래로 산과 논밭이 보인다.

도로변에 검은 차들 여러 대가 줄지어 서 있다.

나를 알아 본 김상욱이 미소와 함께 다가왔다.

"어서 오십쇼!"

김상욱의 인사를 필두로, 그 뒤에 서 있던 깍두기 스무 명이 동시에 머리를 숙였다.

"······."

나는 천천히 그들의 모습을 살폈다.

이거 쳐들어간다고 동네방네 광고 하는 것도 아니고.

슬쩍 고개를 들어 내 표정을 살핀 김상욱이 머리를 긁적였다.

"어라, 이거 아닙니까?"

* * *

김상욱이 길드장으로 있는 빌런 조직 '흑결'.

그들과 함께 산 속으로 들어왔다. 검은 옷을 걸친 덩치들이 줄지어 따라오니 깡패들이 전쟁 나가는 것 같다.

하긴, 틀린 말도 아니다. 이제부터 소규모 전쟁이나 다름 없는 전투가 펼쳐질테니.

"아, 일단 이거 받으시죠."

김상욱은 품 안에서 검은 가면 하나를 내밀었다.

『 신원불명의 가면(레어) 』

- 얼굴을 숨깁니다, 시야가 제한되지 않습니다.

"철저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꽤 쓸만한 걸 준비해왔다. 나는 받아서 얼굴에 착용했다. 김상욱도 하나를 더 꺼내서는 자기 얼굴에 썼다.

"참고로 저희 애들 꽤 합니다."

김상욱은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등급은 F급에서 B급까지 다양합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A급이고요. 뭐, 아무리 빌런 놈들 모여 있어봤자 저희만 하겠습니까?"

글쎄다.

환령은 진짜 제정신 아닌 놈들만 모여 있거든.

김상욱이 이끄는 흑결은 그나마 표면적으로는 길드의 형태를 유지한다. 환령은 그럴 수도 없을만큼 범죄를 저지른 놈들이 모인 조직이다.

제대로 성장하기 이전이라는 게 그나마 다행인 점이다.

'이번 기회에 아예 싹을 잘라놔야지.'

빌런들은 김상욱 밑으로 모아두는 게 차라리 낫다. 통제가 될테니까.

숲을 나아가고 있는데, 저 멀리에서 누군가가 보였다. 통찰 스킬 덕분에 멀리서도 잘 보일 뿐만 아니라 소리까지 들린다.

"사, 살려 주세요. 제발요······."

포박 당한 채 짐짝처럼 들려가는 여성. 그녀를 옮기는 두 명의 남성은 그 말이 들리지 않는 다는 듯 산을 오르고 있었다.

"곧 보스가 거점을 옮길 거라던데. 진짜냐?"

"임마, 너만 알고 있어. 이번에 죽인······."

둘 다 환령의 멤버였다.

난 손짓으로 김상욱을 멈춰 세웠다.

스르륵.

내 의도를 알아채기라도한 듯 오르티마가 회수의 창으로 변했다.

"저 놈들 처리해도 되나?"

"예, 상관없습니다. 제물로 쓸 몇 명만 목숨 붙여 가면 되는 거니까요. 근데 나무가 너무 많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걱정하는 김상욱을 뒤로 하고 나는 창을 던졌다.

『 스킬 '투창 Lv.10'을 발휘합니다. 』

올곧게 쏘아진 창은 나무를 연달아 관통하고서 환령의 멤버 중 하나에게 박혔다. 동시에 창의 회수 스킬을 써서 내 손으로 가져왔다.

"커허억!"

"누, 누구냐!"

당황한 나머지 한 명이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칼도 꺼내 들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다시 창을 던졌다.

『 스킬 '명중 Lv.11'을 발휘합니다. 』

이미 부숴진 나무 사이를 지나 창은 그대로 놈의 머리에 박혔다.

"꺄악!"

묶여 있는 여자도 덩달아 바닥에 떨어졌다. 그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김상욱.

"뭐해? 시작해."

"아, 알겠습니다."

"잡혀 있는 민간인은 건드리지 말고 풀어줘라."

"물론입니다. 얘들아, 움직여라!"

김상욱의 말에 흑결의 길드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산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목표는 환령 조직원들이 모여 있는 던전 내부다.

환령의 입장에선 생각도 못한 습격이었을 거다.

던전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멤버가 둘 있었지만, 밀려드는 흑결 놈들에게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

"와우, 진짜로 이런 곳에 모여 있었네요. 진짜 웃기는 놈들이네."

바위 위로 올라온 김상욱이 미간을 좁혔다.

"근데 이런 쓰레기 같은 놈들을 봤나. 그래도 저희는 민간인은 안 건드린다 이겁니다."

"······."

내 눈엔 너나 저 놈들이나. 그게 그거다.

화르륵!

던전 옆에 숨어 있던 환령 조직원 중 하나가 불 마법을 사용했다. 산불 같은 건 생각도 안하는 놈들이다. 갑작스런 기습에 흑결 몇이 잿더미가 되어 쓰러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김상욱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거 보통 빌런들이 아닌 것 같은데요?"

말했잖아. 아닌가, 안했던가.

아무래도 좋다.

"이 새끼들 다 죽여버려!"

"미친 놈들이 어딜 기어 들어와!"

흑결이 주춤하는 사이에 던전에서 환령의 조직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곳곳에서 칼날 바람이 몰아치고, 화염이 터져나왔다.

"아무래도 저도 참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상욱은 양 손에 단검을 들고 전투가 벌어지는 조직원들 사이로 뛰어 들었다. 확실히 눈에 띄는 실력이었다.

"크어억!"

마법을 쏘아내던 환령의 마법사가 김상욱이 쌍단검에 쓰러졌다. 그를 막기 위해 검을 든 환령의 빌런들이 뛰어 들었지만, 제대로 검을 맞대보지도 못하고 바닥에 누웠다.

"덤벼, 이 새끼들아!"

흥분한 김상욱이 던전 앞까지 파고들었을 때였다.

콰아앙!

거센 폭발이 터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던전 바깥으로 마수들이 쏟아져나왔다. 검은 갈기를 휘날리는 늑대들이었다.

"이, 이 놈들은 뭐야!"

늑대들은 날렵하게 움직이며 전장을 뒤흔들었다. 마수는 던전 밖으로 나오면 시스템의 제약에서 일부 벗어나게 된다. 던전 브레이크와 비슷한 원리였다.

그렇기에 한 마리 한 마리가 가진 능력치가 뛰어났다.

'일반적으로는 스스로 나올 수 없지만······.'

지금은 상황이 특수했다.

그렇게 다크 울프 네 마리가 모여드니 김상욱도 발이 묶일 정도였다.

"뭐, 뭐야. 이 타이밍에 던전 브레이크라고?"

"차분하게 상대해!"

"근데 이 새끼들 우리만 공격합니다! 이건 뭔가 이상······."

의아함이 늘어갈 때 즈음 던전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그 남자의 얼굴을 정확히 알아봤다.

'나왔구나. 신이준.'

창백한 얼굴을 한 남자. 그의 주변을 푸른 마력의 고리가 맴돌고 있다. 그는 지휘를 하듯 손을 움직였다.

그 움직임에 맞춰 던전에서 빠져나온 수 십 마리의 늑대들이 진형을 바꿨다.

"크아악!"

"이 새끼들!"

다크 울프들은 지휘를 받는 것처럼 행동했다. 마법을 사용하는 흑결 길드원을 우선적으로 제압하고, 흑결 길드원들을 몰아냈으며, 리더인 김상욱을 중심으로 포위망을 만들었다.

"앞에부터 뚫어!"

"젠장, 운도 더럽게 없지!"

"무슨 던전 브레이크가······."

이건 던전 브레이크가 아니다.

환령의 보스로 군림하는 신이준의 능력이다.

'마수 세뇌.'

던전과 게이트의 마수들을 조종하는 가히 사기적인 능력. 지난번에 봤던 정령 조종보다 한 단계 위의 능력이다.

던전 밖으로 마수들을 꺼내는 것만봐도 그 사기성은 충분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쳐들어와!"

"너희 뭐하는 새끼들이야!"

이때다 싶어 달려드는 환령의 조직원들.

흑결 길드는 순식간에 열세가 되었다. 환령의 칼부림에 흑결 길드원들이 하나둘씩 쓰러졌다.

신이준은 옅은 미소와 함께 손을 들어 올렸다. 보스의 명령에 환령의 조직원들이 멈춰섰다.

"너희들은 뭐냐. 어디서 우리 정보를 듣고 온 거지?"

신이준은 가느다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 뿐이었다.

다크 울프들에게 둘러쌓인 김상욱.

"큭, 니 놈들이야 말로 쥐새끼처럼 여기 숨어서 뭐하고 있던건데?"

그의 말을 들은 신이준이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이거야 원,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니 이야기가 끝나질 않겠군. 일단 리더로 보이는 너만 빼고 싹 다 죽여야겠다."

바위에 서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회수의 창을 들어 올렸다.

계속 구경만할 순 없을 것 같다.

이대로 흑결 길드가 전멸하는 건 원치 않는다.

'빌런이지만 그래도 말 들어 먹는 놈들이 낫거든.'

반면에 환령은 없애야 할 적이다.

심지어 놈들이 점거하고 있는 던전은 프로젝트 메이저 게이트와 관련된 장소.

더더욱 물러설 수는 없다.

쐐애액—.

내가 던진 회수의 창이 신이준을 향해 쇄도했다.

창이 신이준의 머리에 닿기 직전.

두 마리의 다크 울프가 그 앞을 막아섰다.

콰득, 콰득!

창날은 다크 울프를 꿰뚫고 신이준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얼마 바로 앞에서 보호막에 막히고 말았다.

쩌저적.

그렇다곤 해도 보호막에 심각한 금이 새겨졌다.

신이준의 미간 또한 찌푸려졌다.

"아직 한 놈이 남아 있었나. 꽤 강해보이는군."

"어이, 임마! 리더는 나다! 그 분은 나 정도는 아니야!"

김상욱이 어줍잖은 커버를 쳐주려고 한다. 근데 그런 거 필요 없다.

나는 창의 회수 스킬을 발동 시켰다. 다크 울프 두 마리를 꿰뚫은 창이 그대로 내 쪽으로 딸려 왔다.

스윽.

죽기 직전인 다크 울프에게서 창을 빼냈다.

"오르티마, 먹어라."

『 오르티마가 당신의 명령에 기뻐합니다. 』

창에서 슬라임으로 변한 오르티마는 다크 울프의 사체를 순식간에 뒤덮었다. 단숨에 늑대를 집어 삼킨 오르티마.

『 형상기억마수 오르티마가 '다크 울프'의 형상을 기억합니다. 』

몸을 꿀렁이던 녀석은 순식간에 다크 울프의 모습으로 변했다. 머리 부분의 은색털을 제외하면 완전한 다크 울프와 똑같다.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신이준이 조소했다.

"신기한 능력이군. 근데 그래서 어쩌겠다는거지? 고작 한 마리로."

크르르······.

어느새 내 주변으로 다크 울프들이 모여 들었다. 총 일곱 마리. 놈들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맹수 특유의 눈을 번뜩였다.

확실히 한 마리로 뭘 어쩌겠냐만은.

'일반 펫이었다면 그랬겠지.'

오르티마는 기본적으로 변한 대상의 능력을 그대로 소유하게 된다.

근데 그게 끝이 아니다.

오르티마가 변한 대상은 레벨을 가지게 된다.

『 다크 울프(오르티마) Lv.1 』

"오르티마 죽여라."

창에 꿰뚫린 늑대 중 한 마리. 아직 간당간당하게 숨이 붙어 있는 녀석의 목덜미를 오르티마가 이빨로 뜯어냈다.

그걸로 충분했다.

『 특성 '무재조정'의 효과로 모든 경험치가 10만 배가 됩니다. 』

『 펫의 경험치 또한 10만배가 됩니다. 』

오르티마의 몸에서 새하얀 빛이 휘몰아쳤다. 그 빛은 마치 폭풍처럼 주변을 감쌌다. 내 눈에만 보이는 거긴 하지만.

경험치가 10만배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 다크 울프(오르티마)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다크 울프(오르티마)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다크 울프(오르티마)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

···

..

.

『 다크 울프(오르티마)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

무수히 쏟아지는 메시지 창 속에서.

뀨!

Lv.100짜리 다크 울프가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울음소리는 멋없네.

60화 환령(3)

형상기억마수 오르티마.

녀석은 본래대로라면 줄곧 황금왕 자볼의 창고에서 잠들어 있다가, 멸망 이후가 되고 나서야 등장하는 존재다.

미래가 아니라면 사실상 부화조차 할 수 없는 몸이다.

'경험치를 말도 안되게 필요로 하니까.'

미래의 마수들은 광폭화로 인해 강해진만큼 더 많은 경험치를 제공하기에 가능했던 일. 그러나 현 시점에서 그렇게 많은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장소는 없다.

내 손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존재할 수 없는 마수가.

지금 이 곳에 나타난 것이다.

100레벨에 오르며 한껏 몸을 부풀린 오르티마는 일반 다크 울프에 비해 두 배쯤 커졌다.

콰드득!

마수들을 향해 돌진한 오르티마가 손쉽게 적을 쓰러뜨렸다. 발톱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다크 울프가 종잇장처럼 찢어진다.

그야말로 종횡무진.

오르티마는 마수들의 사이를 넘나들며 다크 울프들을 찢어 발겼다. 그 위세에 눌린 상대 다크 울프들이 뒷걸음질 칠 정도다.

'일반 마수는 상대가 안되는구만.'

던전 밖으로 빠져나와 강력해진 마수들이라지만, 경험치를 먹고 Lv.100을 달성한 오르티마 앞에선 무력했다.

뀨.

여전히 적응 안되는 울음소리. 순식간에 열 마리나 되는 다크 울프를 정리한 오르티마가 내 옆으로 다가섰다.

상황을 지켜보던 환령의 보스 신이준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대단하군. 근데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지? 네 놈의 부하들은 이미 내 손아귀에 있다."

던전에서 빠져 나온 환령의 조직원들과 또 다른 다크 울프들이 흑결을 포위한 상태. 내게 승산이 있다고 보긴 어려웠다.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이 녀석들 모두 쓸어버리도록 하겠다."

신이준은 빌런다운 비릿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신의 협박이 잘 먹혔다고 생각하는 모양.

"그러던가."

"뭐?"

"쓸어버리라고."

그 놈들 내 부하가 아니라 솔직히 상관 없거든. 그리고 피해를 감수한다면, 우리 쪽에도 충분히 승산 있는 싸움이다.

당황한 신이준의 표정이 보인다.

나는 땅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 스킬 '태양의 발걸음 Lv.11'을 발휘합니다. 』

촤아악!

한달음에 적진으로 파고든 나는 다크 울프의 목을 단번에 베어냈다. 그 옆으로 오르티마가 뛰어들며 진형을 붕괴시켰다.

"지금이다! 반격해, 젠장!"

"이 새끼들이 어딜!"

"일단 죽여버려!"

포위망에 균열이 생기자 흑결의 길드원들이 반항했다. 그대로 환령과의 난전이 시작되었다.

'수적으로 열세이긴 하다.'

흑결은 스무 명 가량인데 반해, 환령은 다크 울프에 조직원들까지 합쳐져 사십에 가까운 수 였으니까.

'물론 수가 중요한 싸움은 아니다.'

나는 곧바로 환령의 보스인 신이준에게로 달려들었다.

"쯧, 멍청한 선택을 하는군."

놈은 차분하게 손을 휘둘렀다. 신이준의 주위에 있는 푸른 고리들이 일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크르릉!

던전 내부에 남아 있던 다크 울프들이 신이준을 지키려고 달려나왔다. 놈들은 날카로운 발톱을 세워 날 치려고 했으나.

콰드득.

옆에서 튀어 나온 오르티마의 발톱이 놈들을 아작냈다.

"오르티마."

『 오르티마가 '회수의 창'으로 변합니다. 』

내 한 마디에 오르티마가 창으로 바뀌어 손에 쥐어졌다. 녀석의 변신은 그대로 다음 스킬과 연계가 된다.

『 스킬 '체인지 웨펀 Lv.11'을 발휘합니다. 』

『 무기에 일시적으로 마력을 부여합니다. 』

창날 위로 푸른 마력이 넘실 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대로 창을 던졌다. 근거리에서 던진 창인만큼 위력은 방금 전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강력했다.

콰아아아!

신이준을 지키기 위해 달려든 다크 울프들이 허무하게 꿰뚫렸다. 창은 그대로 신이준의 눈 앞에서 멈춰섰다.

"어림 없다."

그가 손을 펼쳐 만든 마력 방어막 때문이었다. 일반 방어막과 달리 겹겹이 층이 존재하는 다중 방어막.

확실히 창 한 자루로는 뚫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런데 내가 던진 건 더 이상 창이 아니었다.

한 마리의 늑대였다.

『 오르티마가 '다크 울프(Lv.100)'으로 변합니다. 』

넘실거리는 푸른 마력을 온 몸에 두른 오르티마.

『 유니크 스킬 '웨펀 마스터 Lv.1'을 발휘합니다. 』

『 무기의 위력이 증가합니다. 』

내 스킬은 오르티마를 무기로 규정하고 있었다.

콰드득!

오르티마의 이빨은 겹겹이 쌓인 방어막을 통째로 뜯어냈다. 그 가공할 파괴력에 신이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무, 무슨 말도 안되는······."

콰득!

뻥 뚫린 보호막의 틈으로 머리를 집어 넣은 오르티마가 신이준을 끄집어내서는 바닥에 내팽개쳤다.

"으윽!"

땅 바닥에 볼품 없이 쓰러진 신이준. 놈의 능력도 위협적이지만, 진짜 위험한 건 빌런들을 통솔하는 실력이다.

제각기 자신만의 쾌락을 추구하는 빌런들을 환령이라는 하나의 조직으로 묶어낸 놈이니까.

"잠깐, 잠깐. 기다려라, 이렇게 죽을 순······!"

『 스킬 '일자베기 Lv.12'를 발휘합니다. 』

서걱——.

나는 망설이지 않고 신이준의 목을 베었다. 녀석은 지금 이 시점에도 셀 수 없이 많은 범죄를 저질렀기에 살려둔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금 대검을 들어올렸다.

환령의 빌런들은 신이준이 죽어도 끝까지 저항 하고 있었다. 신이준이 죽으면서 속박에서 풀려난 마수들도 날뛰어 진짜 개판이 따로 없었다.

"오르티마, 정리해라."

나는 편하게 명령했다.

* * *

흑결의 승리로 상황은 마무리 되었다.

"허억, 허억······."

피투성이가 된 김상욱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기진맥진한 표정이었다.

"이 놈들 대체 뭡니까? 이만한 힘을 가진 빌런 조직이 왜 남아 있는 건지."

"이 참에 정리했으니 됐지. 이제 흑결보다 강한 빌런 조직은 없을 거다."

흑결도 꽤 피해를 많이 입었다. 사람 수가 줄어 있다. 환령이나 흑결이나 거기서 거기인지라 상관은 안한다.

"야, 몇 놈은 살려놔. 데려가야하니까."

바닥에 피가 섞인 침을 뱉어낸 김상욱이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나는 바닥에 죽어 있는 신이준을 바라보다, 문득 떠올라 물었다.

"오르티마, 혹시 사람도 먹을 수 있나?"

솔직히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긴 하다. 꺼림칙해서.

도리도리.

오르티마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한 모양. 다만,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드래곤도 높은 지성을 가지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미래에서는 그런 모습으로도 변했었으니까.

"요 놈은 키우시는 건가요? 기가 막히게 강하던데요. 어후, 굉장히 절 싫어하는 것 같네요."

김상욱이 다가가자, 다크 울프 모습의 오르티마가 으르렁거렸다. 뭐야, 평범하게 으르렁 거릴 줄도 아네.

나는 신이준이 팔목에 차고 있던 팔찌를 빼냈다.

단순한 디자인의 검은색 팔찌였다.

『 유니크 아이템 '마나 보조자' 』

- 착용자의 최대 마나를 25% 올려줍니다.

능력치 되게 좋네.

'내가 가진 마력양 자체가 워낙 적어서 큰 효율은 못 내겠지만.'

그래도 팔목에 꼈다. 조만간 마력을 크게 늘리는 스킬을 배울 생각이었다. 그때가 되면 이 팔찌의 효율도 크게 좋아질 거다.

"안으로 들어가지."

"옙. 얘들아, 몇 명만 따라와라. "

던전 내부로 들어가니 성 안에 거의 살림을 차려 놓은 수준이었다. 식량이나 무기가 빼곡히 준비되어 있었다.

남아 있는 잔당 몇을 처리하고 내부를 탐색했다.

"여기 사람들이 갇혀 있습니다."

부하 하나가 감옥을 찾아냈다. 거기에는 여자들이 갇혀 있었다. 반대편 감옥에는 남자들도 있었다.

모두 환령 놈들이 납치해 온 일반인들이었다.

"이 새끼들 진짜 악질이구만."

김상욱이 자물쇠를 부숴 감옥 문을 열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가질 못하고 우리 눈치만 보고 있었다.

"사, 살려주세요."

"저, 정말 나가도 되는 거 맞나요?"

"뭔 소리를 하는 겁니까. 빨리 나가십쇼."

김상욱이 재촉하니, 그제서야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간다.

"거기 그 덩치 큰 사람 따라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김상욱에게 감사를 표하는 여성. 김상욱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기분 묘하네, 이거."

늘 빌런이라고 생각하던 자신이 사람을 구하게 됐으니, 감정의 동요가 일어날 법도 하다.

김상욱은 종속의 계약 때문에 날 따르고는 있다만.

그 이유를 좀 더 명확히 해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김상욱, 돌아가면 기록의 마족이 가진 일기장을 열어봐라."

"예? 주인님. 전 아직 죽고 싶지 않은데요. 근데 그렇게 하겠습니다."

"안 걸리게 보면 되잖아."

어차피 종속의 계약 때문에 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미래의 김상욱은 그 일기장을 보고 마음을 돌렸다고 했다.'

마족이 그리는 미래에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빼고 인간이 다 죽으면 부귀영화가 무슨 소용이냐는 게 미래 김상욱의 설명이었다.

'그러면 구출은 다 끝났고.'

아직 중요한 할 일이 남았다.

* * *

그르르······.

보스 자이언트 다크 울프는 던전의 최하층에 포박 되어 있었다. 마법이 부여 된 쇠사슬로 칭칭 묶여 있다.

'보스까지는 세뇌하지 못한 건가.'

환령의 보스 신이준의 능력은 B등급 일반 마수를 세뇌하는 수준이었다. 본인의 등급도 B랭크 상위 정도였겠지.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이 강해진다만, 죽었으니 이제는 상관 없는 이야기다.

"이 놈은 안 죽이십니까?"

포박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보스를 올려다보던 김상욱이 물었다.

"조금 있다 죽일 거다. 아직 이 던전에 볼 일이 남았거든."

나는 인벤토리에서 곡괭이를 꺼내 오르티마에게 먹였다.

『 오르티마가 '곡괭이 Lv.1'로 변합니다. 』

곡괭이를 들고 던전의 한쪽 벽면을 쳐냈다.

『 스킬 '채굴 Lv.11'을 발휘합니다. 』

투두두두······!

모든 스킬에는 다 쓸모가 있는 법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던전의 벽면을 파내자 숨겨져 있던 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불길한 기운을 풍기는 검은 문 위로 금색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김상욱이 한 걸음 물러섰다.

"······여기에 왜 문이 있는 겁니까? 설마 이중 던전?"

"비슷한 거긴 하지."

"저도 몰랐는데 그걸 감지하시다니. 제 생각보다 뛰어나신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머리 박아."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박고 엎드리는 김상욱. 그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해명했다.

"오햅니다. 오해. C등급 상위라고 알고 있었는데, 체감상 훨씬 강하신 것 같아서······. 솔직히 S급인 줄 알았습니다."

"······. 일어나."

"헤헤."

하여간 입은 잘턴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검은 톱니바퀴를 꺼냈다.

『 마도 공학 : 게이트 조율 장치 』

이걸 문 가운데의 틈새에 끼워 넣으면.

철컥.

검은 문에 새겨져 있던 금색의 문양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더니 기이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쿠웅!

동시에 열쇠로 사용된 톱니바퀴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나는 그것을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 넣었다.

열린 문의 내부는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으로 가득했다. 김상욱이 손가락으로 어둠 너머를 가리켰다.

"설마 여기로 들어가는 겁니까?"

"아니, 넌 여기서 대기해라. 30분 뒤에도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문을 닫아라."

김상욱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다가 눈을 크게 뜬다.

"도, 돌아오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김상욱을 무시하고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짙은 마기가 느껴진다. 푹 가라앉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다시 한걸음 내딛었을 때.

『 특수 던전에 입장하셨습니다. 』

『 제 4구역 : 마도 공학 실험 장치 』

스러져가는 검은 유적이 나를 반겼다.

폐허나 다름 없는 공간의 중심부에는 새하얀 조각상이 놓여 있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곳은 '프로젝트 : 메이저 게이트'를 위한 장소.

마계와 현계의 중간 지점.

'아직 프로젝트가 시작되지 않았으니. 터만 잡혀 있는 거겠지.'

권속과 마족들이 가져온 부품들이 여기에 모이면, 마계와 직통으로 연결되는 메이저 게이트를 만들 준비가 끝나는 거다.

'우선은 메이저 게이트를 위한 뼈대를 부순다.'

눈 앞에 있는 새하얀 조각상을 향해 나는 대검을 들어 올렸다.

『 해당 지점에 위험 인자를 확인했습니다. 』

『 게이트 생성 장치가 자동방어 모드에 돌입합니다. 』

우우웅.

수많은 육각형의 조각들로 이뤄진 검은 보호막.

그것은 조각상을 지키기 위해 연신 마기를 뿜어냈다.

『 스킬 '데몬 헌트 Lv.11'을 발휘합니다. 』

『 스킬 '일자 베기 Lv.12'를 발휘합니다. 』

그러나 일자베기 앞에서는 무의미한 저항이다.

콰아아앙!

보호막 위에 그어진 강력한 한줄기의 빛이 모든 것을 집어 삼켰다. 폭발과 함께 산산조각이 난 게이트 생성 장치.

그 잔해가 발치로 굴러왔다.

'마족과의 전투까지 각오하고 있었는데,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군.'

『 게이트 생성 장치를 파괴했습니다. 』

『 '프로젝트 : 메이저 게이트'의 현재 저지율은 34%입니다. 』

『 저지율이 30%를 돌파했습니다. 』

『 보상 '재능 획득의 물약(레어)'를 획득합니다. 』

지난번 마기의 원천 회수와 마찬가지로, 퀘스트가 어느 정도 진행 될 때마다 보상을 주는 것 같다.

'재능 획득의 물약이라니.'

그것도 레어다.

날 미래로 날려 보냈던 건 유니크.

이건 레어.

기대감으로 허공에 나타난 물약을 집어 들려는 순간이었다.

토옹!

바닥에서 뛰어오른 오르티마가 물약을 집어 삼켰다. 너무 갑작스런 행동이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빨리 뱉어."

나는 오르티마를 붙잡고 상하로 흔들어댔다. 먹어도 되는 게 있고 아닌 게 있다. 어제 시험해 본 결과 소모품으로는 변할 수 없단 걸 확인했다.

답답한 마음에 슬라임 형태의 오르티마를 이리저리 잡아 당기던 찰나.

『 형상기억마수 오르티마가 '재능 획득의 물약(레어)'를 기억합니다. 』

녀석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61화 마력의 샘(1)

"······."

슬라임 오르티마가 재능 획득의 물약을 삼켰다. 먹었다기보단 흡수했다고 보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그 탓에 오르티마의 동그란 몸에선 은은한 붉은 빛이 스며나오고 있었다.

'뭐야, 효과가 있는 건가?'

통통.

유적 바닥을 뛰어간 오르티마는 쓰러진 조각상의 잔해 틈에서 파편 하나를 끄집어 냈다. 짙은 검은 색의 파편.

그걸 머리에 이고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 파편의 정보를 확인했다.

『 마도(魔道) : 부숴진 핵 』

내가 부순 조각상은 게이트 생성 장치의 뼈대였다. 이 파편은 그걸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 중 하나였을 거고.

'근데 이게 어쨌다는거야.'

녀석은 보란 듯이 몸을 부풀렸다.

『 오르티마(재능개화형)의 능력을 발휘합니다. 』

스르륵.

부숴진 핵은 오르티마의 몸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잠시동안 꾸물대던 녀석은 퉤하고 무언가를 뱉어냈다.

'이건······.'

그걸 받아드는 내 눈이 커졌다.

『 미약한 재능의 파편 』

- 소유자의 재능이 미세하게 상승합니다.

- 파편을 모아 상위 아이템으로 조합할 수 있습니다.

재능 획득의 물약(유니크)를 마신 뒤 얻었던 파편이었다. 정확히는 미래에서 일자베기 12레벨을 달성하고 받은 보상.

이걸로 총 두 개째의 파편이 모았다.

하나를 얻었을 때도 그 체감이 컸었는데, 벌써 두 개가 되었다.

"근데 그거 지속 시간은 얼마나 되나?"

내 질문에 대답하듯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 오르티마(재능개화형)의 지속 시간은 1시간입니다. 』

통통.

튀어오르는 오르티마. 직접적인 대화는 불가능해도 시스템을 사용한 간접적인 대화는 가능했다.

어제 확인한 바로는 이 녀석 꽤 지능이 높다. 내가 하는 말도 대부분 알아듣고 행동할 수 있으니.

나는 오르티마를 한 번 쓰다듬어 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빨리 가야지, 오르티마의 지속시간도 있지만 오래 머물러서 좋을 건 없다.'

아직 프로젝트 메이저 게이트가 시작되지 않아 방치된 장소라지만, 왠만하면 마족과 마주치는 건 피해야 했다.

'최하위까지는 상대해도 괜찮지만.'

그 이상은 아직 곤란하다.

게이트 생성 장치를 부쉈으니 당장의 목적은 완수했다.

이걸 다시 구축하려면 시간 꽤나 걸릴 거다.

나는 내가 들어왔던 문으로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 * *

길드 은빛의 날개.

최신식 설비로 가득한 전용 트레이닝 센터.

부길드장 윤지은이 손가락을 튕겼다.

"부담가지지 마세요. 이미 뽑히신 거나 다름 없어요. 그래도 절차라는 게 있어서 실력을 한 번 보려는 것 뿐이니까요."

"네, 네?"

얼떨떨한 표정으로 윤지은을 올려보는 신아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바로 어제 자신의 히든 특성 '광화'를 깨우친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대한민국 2위 길드인 은빛의 날개에서 자신을 스카웃하고 싶다니.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긴장하실까봐 사람도 저밖에 없어요. 편하게 하시면 돼요."

윤지은이 은은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서현이 말대로라면, 이 사람의 잠재력은 엄청 날 거야.'

변칙 게이트에서 보여줬던 엄청난 활약에 대한 협회 관계자 윤서현의 증언과 이지한의 추천 때문이었다.

'이런 시기일수록 인재를 놓쳐선 안 돼.'

수호 길드의 신태양은 연일 주가를 올리는 중이었다. 대대적으로 선전까지 나가면서 수호 길드의 이미지도 계속해서 상승 중이었고.

'정말로 능력만 뒷받침 된다면······.'

신아람을 적극적으로 키워줄 생각이 있었다. 윤지은은 조금 초조한 마음으로 신아람을 바라봤다.

단순하게 훈련용 더미를 공격해도 되고 자신 있는 기술을 보여줘도 된다.

'뭐든 좋아.'

신태양을 넘어설 수 있는 조커 카드가 되어주길. 지금의 은빛의 날개가 다시금 날아오르기 위해선 그런 인재가 꼭 필요했다.

그렇게까지 생각했던 윤지은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건 너무한 바람인거겠지.'

그만한 천재가 어디 쉽게 나오던가.

"그······."

"네, 뭔가 필요하신가요? 무기라면 얼마든지 이용하셔도 돼요."

"그게 아니라······."

신아람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긴장했으려나.'

왠지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게이트 브레이크로 부모님을 잃고, 서현이와 둘이서만 헤쳐나가야 했던 막막한 시절.

실력에 대한 자신감도 없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도 없을 때.

그렇기에 왠지 정이 갔다.

윤지은이 신아람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그 때.

신아람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광화 특성은 자신의 체력이 30% 이하로 내려가야만 발동한다.

그러니까 실력을 보여주려면 이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결연한 의지와 함께.

주먹을 꽉 쥔 신아람이 말했다.

"저 좀 때려주실 수 있나요?"

* * *

던전 내부에 있던 게이트 생성 장치는 파괴했다.

나는 보스를 처치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아쉽게도 보스급의 마수는 아직 오르티마가 삼키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바깥으로 나오자 통신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하면서 스마트폰이 울렸다.

띠링.

윤지은으로부터였다. 신아람을 은빛의 날개에 추천했는데, 잘 됐으려나.

신아람은 미래에선 신태양의 제자였지만 여기에선 달라질 거다. 더 빨리 그 능력을 펼칠 수 있게 되었으니.

- 어디서 이런 사람을 찾은 거에요? 고마워요. 진짜 고마워요.

반응을 보니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다.

근데, 신아람이 광화 상태에 돌입하려면 체력이 줄어야 할텐데. 그 부분은 어떻게 한 건지. 어쨌든 잘 됐다니 다행이다.

"제물로 잡아갈 빌런 놈들도 묶어놨고, 주변 정리도 끝났습니다. 흔적을 보니까 이 놈들 보통 악독한 게 아니던데요. 하여튼 진짜 미친 놈들입니다."

내 쪽으로 다가온 김상욱이 어깨를 으쓱였다. 환령이 더 큰 조직으로 성장하기 전에 막아 다행이다.

"솔직히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다친 놈들도 꽤 있고요. 죽은 놈들은······. 뭐, 어쩔 수 없죠. 저희 일이 다 그런거니까요."

어깨를 으쓱이는 김상욱. 부하들을 소모품으로 보는 게 빌런 조직 수장답다.

"그래도 덕분에 한 건 해냈습니다. 이걸로 제 위신도 회복 될겁니다."

환령 습격은 이렇게 일단락 됐다.

'이번 일로 기록의 마족이 김상욱을 더 신뢰하는 계기가 되겠어.'

배신자 김상욱이 깊숙히 마족의 네트워크 안으로 파고들수록 더 많은 정보를 캐낼 수 있을 거다.

"근데 말입니다. 여기에 이 놈들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아신 겁니까?"

"왜, 궁금해?"

"그야, 그렇죠. 영웅 협회에서도 모르는 놈들이고, 저도 몰랐으니까요."

실제로 환령 놈들은 길드를 통해 던전을 구입하고, 거기를 거점으로 삼아서 활동하고 있었다. 영웅 협회에서도 그들을 쉽게 발견하기란 불가능.

지속적인 범죄를 저지름에도 주기적으로 거점을 옮기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알려주지."

"쩝, 그럴 것 같았습니다. 어쨌든 덕분에 큰 일이 해결 됐습니다. 기록의 마족도 이렇게 빨리 제물이 준비 될 거라곤 생각 못했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김상욱은 한숨과 함께 하늘을 바라봤다.

"······. 뭐, 영웅 노릇도 나쁘진 않네요."

인질들을 구출한 게 꽤 인상 깊었던 모양.

"기회가 되면 기록의 마족의 일기장을 꼭 봐라."

"또 그 말씀이십니까? 대체 뭐가 적혀 있길래······."

"난 먼저 간다."

"어, 벌써 가십니까?"

김상욱을 향해 손을 적당히 흔들어 주고선 산을 내려왔다.

희미한 붉은 빛을 내뿜는 오르티마. 아직 재능 획득의 물약의 지속 시간이 유지 되고 있었다.

'시간을 낭비할 순 없지.'

오르티마는 나를 재촉하고 있었다.

* * *

남은 시간은 약 1시간 정도.

솔직히 어딘가로 멀리 이동하기엔 부족한 시간이었다. 이미 오르티마가 삼켜버린 이상.

이전에 마셨던 물약처럼 새로운 장소로 이동할 것 같지도 않았고. 일단은 어디로 향할지 위치만이라도 알아두자는 심정이었는데.

『 오르티마(재능개화형)이 대기 상태에 들어갑니다. 』

『 해당 형태의 지속 시간이 대폭 늘어납니다. 』

오르티마가 완전히 알처럼 변했다.

그 위에서 몽글몽글 솟아오르는 붉은 기운.

그것이 스마트폰 위로 퍼져나가며 내가 가야할 장소를 알려줬다.

'굉장하네.'

다시봐도 질리지 않는 효과다.

스마트폰의 지도 앱에 찍혀진 위치는 서울. 나는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그러는 사이 해가 저물었다.

서울의 야경 사이로 거대한 건물 하나가 보인다. 하이텍트 사의 로고가 박힌 빌딩 하나.

'온 김에 진세아도 데리고 가야 하나.'

내가 다음으로 공략할 던전은 진세아가 있다면 말도 못하게 난이도가 쉬워진다. 프로젝트 메이저 게이트를 저지하기 위해 이제 남은 건 발전의 마족을 처리하는 것 뿐.

그걸 위한 준비였다.

'이거 차라리 윤서현 헌터까지 불러온다면······.'

꽤 괜찮은 파티가 구성될 것 같았다. 생각을 정리하는 도중,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대기 상태에 있던 오르티마도 깨어났다.

화려한 간판과 네온 사인으로 넘쳐나는 거리. 평일인데도 꽤나 번잡하다. 어느새 손목 시계로 변한 오르티마의 초침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가는 건지.

'당장 필요한 건 마력 관련 스킬인데. 정확히는 마력양을 늘려주는 스킬.'

태양의 발걸음과 태양류 검술. 둘 다 상당한 마력을 잡아먹는 스킬이다보니, 100% 힘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새로운 일자베기만해도 엄청난 마력이 드니까.'

그만큼 파괴력은 보장되어 있다만. 연달아 쓸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지난번 게이트에서도 광화 스킬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거다.

그렇게 몇 분쯤 걸었을까.

나는 화려한 거리를 지나 지하철 역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은 중년 남성 하나가 보인다.

오랫동안 씻지 않아 꾀죄죄한 모습과 공허한 눈동자. 그의 앞에는 허름한 벙거지 모자가 뒤집힌 채로 놓여 있었다. 동전과 지폐가 조금 놓여 있다.

'설마.'

오르티마의 초침은 그 남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홀린 듯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내가 그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자,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이, 비켜. 안 보이잖아."

나는 슬쩍 비켜 섰다. 그가 바라보는 방향에는 커다란 전광판이 보였다. 그곳에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수호 길드의 신태양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남자는 그걸 진지하게 바라보더니 이렇게 중얼거렸다.

"58점. 아무리 봐도 좋은 점수를 못 주겠네. 이거 수호 길드도 끝장이구만."

나는 그런 중년 남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그가 기분 나쁘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앙? 뭐냐, 내가 웃겨?"

"아닙니다."

나는 지갑에서 오만원 짜리 다섯 장을 꺼내 그의 벙거지 모자에 넣어줬다. 지갑에 들어 있던 돈 전부였다.

"너무 후한 점수여서요."

"으응?"

남자는 몸을 일으켜 모자에서 돈을 꺼내들었다. 금액을 확인하는 그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갔다. 그러다가 의심스런 눈길로 나를 바라본다.

"뭐야, 정말로 나한테 주는 거냐?"

걸인(乞人) 송정호.

노숙자, 거렁뱅이, 거지.

그를 부르는 별명은 다양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사람을 찾을 줄은 몰랐다. 워낙에 전국 팔도를 돌아다녔다기에 직접 찾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물론입니다."

이 남자는 멸망한 세계의 기인 중 하나였다.

노동하지 않으며, 거래하지 않고, 가치 있는 일을 하지 않는다.

오로지 구걸만으로 삶을 살아가는 독특한 인물.

나는 그를 잘 알고 있다. 어쩐지 정겨운 느낌까지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꽤 오랜 시간을 그와 함께 했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재능도 없던 내가 마지막까지 살아 있을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말이 있었다.

- 아, 뜨끈한 물에 몸을 지질 수만 있으면 소원이 없을텐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영웅 중 하나.

나는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같이 근처 찜질방에라도 가시겠습니까?"

오르티마가 나를 여기로 안내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의 능력 중 하나는 끝없이 샘솟는 마력.

그리고 그건 배울 수 있는 스킬이었다.

62화 마력의 샘(2)

멸망(滅亡).

돌이킬 수 없는 끝. 그 두 글자는 이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마저도 앗아간다.

사람들은 나름의 방법으로 그러한 멸망을 받아들인다.

어떤 이는 분노하고 슬퍼하며, 또 어떤 이는 그저 겸허히 받아들인다. 어찌되었든 세상이 멸망했다는 사실은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

환세의 도둑 진세아는 처음부터 물건을 훔치지 않았으며, 또라이 김건도 아이템에 광적으로 집착하진 않았다.

멸망이 사람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걸인 송정호.

그는 처음부터 한결 같았다.

"크아, 시원하군. 얼마만에 오는 찜질방이야. 고맙네, 학생."

걸걸하게 웃으며 내 등짝을 두드리는 송정호. 깔끔하게 씻고 나니 매력 있는 중년 남성이 되었다. 지저분하던 수염조차 특유의 분위기를 낸다.

'평소엔 잘 오지도 않던 곳인데, 막상 오니 괜찮네.'

뜨거운 탕에 몸을 담그고 나오니 한결 몸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당연한 것들이 멸망한 세계에서는 누릴 수 없는 일이었다.

"크흠, 시원하게 담구고 나오니 목이 마른데 말이야."

송정호는 매점 쪽을 바라보며 은근한 눈치를 줬다. 원래 이런 사람이다.

나는 씩 웃으며 매점에서 달걀과 식혜를 구입해 왔다. 송정호는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오, 학생이 센스가 있구만."

탁.

맥반석 달걀을 깨서 입에 넣은 뒤, 식혜를 벌컥 벌컥 들이켜는 송정호.

"크으, 그래 이 맛이지."

꽤나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그는 달걀을 바닥에 툭툭치면서 물었다.

"그래서 학생이 아무 이유 없이 날 찾아왔을 리는 없고. 어디서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나본데, 대체 무슨 이야기를 들었을까."

마족의 침략으로 세계가 멸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나는 우연히 송정호에게 적선을 했다. 솔직히 불쌍하게 생겨서 기부한 거였다만, 그 덕에 목숨을 건졌다.

마수들에게 습격 당하는 나를 송정호가 구해준 것이다.

- 좋은 일을 했으면 보답 받는 게 당연하지. 그렇고 말고.

그 일을 계기로 송정호 아저씨와 친해졌다. 그는 모든 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아크 메이지였다.

처음엔 믿지 않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영웅들이 그의 존재를 주목하기 시작했으니까.

그가 가진 스킬 '고유 서클 생성' 때문이었다.

일자베기와 마찬가지로 기초적이면서 엄청난 효율을 가진 스킬. 그렇다고 들었지만, 나는 끝끝내 배우지 못했다.

재능이 부족해서.

그것에 대해 배우고자 여기에 왔다 그리 말하려고 했는데.

"왜 송정호씨 정도 되는 사람이 노숙자처럼 살고 계신겁니까."

"응?"

나도 모르게 물어버렸다. 멸망한 세계의 송정호는 끝까지 알려주지 않았다. 송정호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나 정도 되는 사람이 뭔데?"

"S급 헌터."

"내가? 에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사레를 치면서 깐 달걀을 위로 던져서 한 입에 넣었다. 그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아, 식혜를 더 먹으면 생각이 날 것 같기도 한데 말이야."

"······."

먹고 싶다면 얼마든지 사줘도 된다. 나도 이전과 같은 F급 헌터가 아니거든. 지금의 내 재력이라면 매점 정도는 털 수 있다.

그리 생각하며 매점으로 향하는 찰나였다.

"······?"

찜질방 한켠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분명히 갇혀 있다고 그랬는데.'

잘못 본 건가 싶어 천천히 고개를 돌려봤다. 확실하게 있었다.

"엥?"

분홍색 찜질복에 양머리 수건을 걸친 진세아. 맥반석 달걀을 입에 넣으려다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진세아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외쳤다.

"앗, 배신자!"

* * *

"어떻게하면 내 간절한 구조신호를 모른 척 할 수가 있어요?! 결국 내가 알아서 탈출했잖아요."

"······."

진세아는 가출한 상태였다. 병원에 가만히 있는 게 너무 지루해서 감시를 피해서 몰래 빠져나왔단다.

곧 가주려고 했는데······. 이러면 하이텍트 회장을 볼 낯이 없다.

"마침 심심했는데 잘 됐네요."

녀석은 먹던 사이다와 계란을 들고 나를 쫄래쫄래 따라왔다. 매점에서 달걀과 식혜를 더 사서 돌아가니 송정호 아저씨가 진세아를 살펴봤다.

"이 애는?"

"제가 아는 앤데, 잠깐 데리고 있겠습니다."

"흐음, 뭐 상관 없지. 그래서 어디까지 말했었지?"

"왜 노숙자 생활을 하고 있는지 물어봤습니다."

멸망한 세계에서도 여러 소문이 돌았었다. 가족이 전부 죽었다느니, 미쳐버렸다느니······.

그러나 송정호의 답은 간단했다.

"그냥 이렇게 사는 게 좋아서지. 이러면 답이 됐나?"

"그렇습니까."

미래에서 그가 말했던 것과 같은 답이었다. 송정호는 달걀을 까먹으며 말을 이었다.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가진다는 것은 언제나 잃을 위험을 내포하는 일이거든. 그러니 이런 삶이 나에게는 적격인거지."

"음, 알죠. 알죠."

진세아가 머리를 연신 끄덕인다. 뭘 알았다는 건지.

'말해주지 않는건가.'

어차피 방금 만난 사이인 나에게 깊은 이야기를 바라는 것도 무리가 있다. 나는 그냥 본론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그러면 송정호씨를 찾아온 진짜 이유를 말하겠습니다."

"그래, 그럴 것 같았어. 아까부터 유심히 보곤 있었는데 두 사람 다 일반인은 아니지?"

눈썰미 하나는 기가 막힌 사람이었다. 그의 평가나 판단은 상당히 날카로운 면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검성이 언제 죽을지를 꽤 정확히 맞췄었다.

"헐, 어떻게 알았어요? 역시 티나나?"

진세아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랐다. 이 정도로 놀랄 일은 아니었다. 각성자와 비각성자 정도는 통찰 스킬이 있는 나도 구분할 수 있으니까.

"예, 헌터 맞습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송정호씨가 가지고 있는 스킬을 하나 전수 받고 싶습니다."

"흐음."

팔짱을 끼고서 미간을 좁히는 송정호.

"고유 서클 생성. 그 스킬 하나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실제로 스킬의 전수는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이 세계에선 스킬 하나 하나가 큰 가치를 가지고 있으니까.

"거참, 대체 어디서 소문이 줄줄 새는건지. 그렇게 입조심하라고 항상 이야기하는데 말이야. 다들 들어먹을 생각을 안 해."

내가 아는 송정호는 이런 부탁을 절대 거절하지 않는다. 자신의 손에 쥐는 것 없이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므로.

곤란한 척 하던 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

"특별히 이번만 가르쳐 주도록 하지."

"고유 서클 생성? 그런 스킬이 있어요? 서클이면 그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그거에요?"

진세아는 처음 듣는다는 표정이었다.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스킬이니 당연하다. 이름만 보면 별 거 없어 보이지만, 일반적인 서클 생성과는 궤를 달리하는 스킬이다.

식혜를 쭉 들이킨 송정호가 입을 열었다.

"음, 좋은 질문이야. 서클이 마법사를 위한 것이라면, 내가 고안한 이 고유 서클은 소유자의 능력에 맞춘 마력 저장소라고 할 수 있지. 나는 이걸 마력의 샘이라고도 부른다."

마력을 사용하지 않는 직업은 없다. 대부분의 스킬은 필연적으로 마력을 소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력 양을 마나라고도 한다.

"마법사냐, 검사냐, 궁수냐. 이것에 따라 마력을 담는 그릇은 필연적으로 달라져야 하는 법이지. 뭐, 설명은 여기까지 하고.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한 번 보는 게 낫겠지."

송정호는 가부좌를 틀더니 눈을 감았다. 숨을 길게 들이마심과 동시에 전신의 마력을 희미하게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약한 마력.

그러나 자세히 보면 분명히 보이고 있다.

송정호의 심장 근처를 회전하는 다섯 개의 원.

원들은 서서히 심장에서 멀어져 송정호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맹렬히 회전하는 원들의 궤도는 불규칙하면서도 빨랐다.

'근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허공을 맴도는 원과 고리.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오늘 싸웠던 환결의 수장 신이준이 저걸 사용하고 있었다.

'진짜 아무한테나 알려주나보네.'

각 원의 궤적이 만들어내는 서슬퍼런 마력의 선.

그것을 유심히 지켜보던 진세아가 말했다.

"전혀 모르겠는데요. 아저씨."

"······이건 완성 단계니까 알기 어려운 게 당연하지. 일단 마법사가 아니어도 서클을 생성할 수 있단 걸 새겨두면 된다."

진세아도 관심 있어 하는 것 같다. 송정호는 너그러운 사람이니 진세아 하나 더 배운다고 뭐라고 하진 않겠지.

현재 진세아의 헌터 랭크는 D.

신태양은 수호 길드에, 신아람은 은빛의 날개에, 윤서현은 협회에 속한 것에 비해 진세아의 성장 수준이 현저히 낮다.

빨리 수준을 끌어 올려야 했다.

'진세아의 스킬 절대 강탈은 본인의 능력치에 영향을 받는다.'

어디서든 훔칠 수 있지만, 자신보다 강한 존재에겐 통하지 않는다. 그 결점을 메워야 했다.

미래에 다녀오고나서 확신했다. 최후의 11인의 능력을 그대로 썩히는 건 너무 아깝다.

진세아도 성장해 줘야겠다.

녀석에겐 앞으로 꽤 여러 역할을 맡길 것 같거든.

"일단은 서클을 생성하는 것부터 시작해 봐라. 마력을 심장 주변부로 끌어오는 거다."

서클 생성 자체가 마법사 연합에서 정말 비싸게 팔아 먹는 스킬인데. 송정호는 친절히도 무료로 알려주고 있었다.

"으으······."

끙끙대는 진세아를 바라보는 송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쉬운 게 아니란 말이지. 최소 3개월은 잡고 훈련해야 할······."

"됐어요!"

아직 송정호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진세아가 소리쳤다. 진짜로 진세아의 심장 주변을 맴도는 서클이 보인다.

송정호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더니 나를 바라본다.

"알고 있었나?"

"뭘요."

"이 꼬맹이 천재잖아."

알고 있었다. 최후의 11인이 달성한 SSS랭크는 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자기 분야 하나에서만 뛰어난 걸로는 부족하다.

모든 분야에서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나야 했다.

그 중 하나가 진세아다.

"엥, 내가 천재?"

송정호의 말을 들은 진세아가 눈을 반짝였다. 천재라고 신태양처럼 자기 재능을 잘 아는 건 아니다.

"뭐,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코를 쓱 훔치는 진세아. 왠지 자신만만해진 얼굴이다.

하긴, 찜질방에서 서클 생성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천재는 천재다.

"그래서, 학생은."

송정호가 왠지 기대감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한 번 해볼까······.'

마력을 심장으로 움직이라 그랬나.

근데 그걸 어떻게 하냐는 거다.

대부분의 상위 헌터들이 할 수 있는 이 간단한 마력 조작이 내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순간이었다.

스륵.

손목 시계로 변해 있던 오르티마의 근처에서 붉은 물방울이 솟아났다. 물방울은 느릿하게 내 손 위로 올라왔다.

그 언저리에서 익숙한 기운이 솟아오른다. 체인지 웨펀을 통해서 무기에 마력을 부여할 때와 같은 느낌.

'이게 마력.'

그러나 그 감각은 금방 희미해져간다. 나는 다시 한 번 내가 소유한 마력을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내 손 위로 푸른 기운이 조금이지만 넘실 거리기 시작한다.

회귀 전.

송정호에게 마력에 관한 지도를 받은 적이 있었다. 꽤 열심히 도전했었는데, 결과는 영 시원찮았다.

그는 내게 말했다.

- 아쉽겠지만 넌 마력 적성이 없다. 그렇지만 걱정하지 마라. 어중간한 재능보다는 아무 재능도 없는 게 때로는 나을 수도 있는 거야. 그 점을 긍정해라.

말 그대로였다. 본래의 내 재능이라면 마력을 불러오는 것조차 불가능. 아니, 마력을 느끼는 일조차 불가능했을 거다.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한없이 0에 가까웠던 재능.

구제 불능의 둔재.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 기초 스킬 Lv.11의 효과로 레어 스킬 습득 확률이 올라갑니다. 』

『 인벤토리에 미약한 재능의 파편이 두 개 존재합니다. 』

비록 헤아릴 수 없지 적다고는 하나.

내 재능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조금이나마 늘어났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리고 존재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20만배의 경험이 되어 축적된다.

촤르륵!

『 일반 스킬 '서클 생성 Lv.1'을 전수 받습니다. 』

『 스킬 '서클 생성 Lv.2'를 획득합니다. 』

『 스킬 '서클 생성 Lv.3'를 획득합니다. 』

···

..

.

『 스킬 '서클 생성 Lv.10'을 획득합니다. 』

푸른 원 하나가 내 심장 주변으로 모여든다.

마력으로 이뤄진 선명하고 푸른 구체.

마법사들만이 가진다는 서클이 분명하다.

그것을 바라보는 송정호의 입이 벌어졌다.

"······."

그는 눈을 깜빡이더니 말했다.

"내가, 뭘 잘못 보고 있는 건가?"

63화 마력의 샘(3)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송정호. 그는 목이 타는지 식혜를 벌컥벌컥 마시더니, 입가를 슥 훔쳐냈다.

"이거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밖으로 나가지."

서클을 생성하는 걸로 끝이 아니다. 아직 고유 서클의 생성 단계가 남아 있었다.

"뭐야, 나보다 더 대단한 거에요?"

진세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완전히 말이 안되는 상황은 아니었다.

대마법사 김민수나 최후의 1인이었던 천성호였다면 일반 스킬인 서클 생성 스킬은 가볍게 마스터 했을 거다.

어쨌든 나와 진세아는 송정호를 따라 찜질방을 나왔다. 그렇게 향한 곳은 어느 한적한 공원.

어둑해진 밤 하늘 아래.

"내가 꽤 여러 놈들을 가르치고 또 많이 봐왔는데 너 같은 놈은 처음이다."

송정호는 헤진 벙거지 모자를 고쳐 쓰더니 팔짱을 꼈다.

"지금 등급이 어떻게 된다고 그랬지?"

"C등급입니다."

정확히는 C등급 상위. 60레벨이니 B등급이나 마찬가지지만. 특성 무재조정의 효과로 레벨업이 제한되어 있는 상태였다.

"본인의 재능에 대해선 알고 있는 건가? 그게 중요하거든."

자신의 재능을 알고 있는가.

"대강 알고 있습니다."

그 말에 송정호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대강? 그걸론 부족해. 내가 확실히 알려주지. 두 사람 다 S급 헌터가 될 거다. 대한민국에서 노는 수준이 아니라 세계에서 먹힐 헌터."

자신감에 차서 말하는 송정호.

그의 보는 눈은 실제로 정확하다. 나는 그렇다쳐도 내 옆의 진세아만해도 멸망한 세계에서도 살아남는 SSS급 헌터가 되니.

진세아는 실실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에이, 그건 너무 간 것 같은데요. 아저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당연히 알지. S급 헌터인데. 그리고 내 눈은 정확해."

"예?"

못 믿겠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진세아. 나는 간단히 대답했다.

"진짜에요?"

"진짜."

"······."

일반적인 상식선에서 말이 안되는 이야기이긴 하다. 허름한 행색의 중년 남성이 S급 헌터라니.

송정호는 그런 진세아를 보며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두 사람 다 기본적인 서클 생성에 성공했으니 다음으로 고유 서클 생성에 대해 알려 주지."

그는 마력으로 바닥에 푸른 원을 그려내더니, 그 안에서 다시금 서클을 불러왔다. 정신 없이 그의 주변을 돌아다니는 구체들.

스스스······.

찜질방에선 드러나지 않았던 그의 마력이 발산되며 흩어졌다. 주변의 나뭇잎이 흔들리고, 옅은 돌풍이 나와 진세아를 스치고 지나갔다.

"지, 진짠가보네."

당황한 표정의 진세아가 침을 꿀꺽 삼켰다.

"봤지? 방금과 같은 느낌으로 고유 서클을 만들면 된다. 이 뒤로 마력을 사용하는 방향에 따라 서클의 성질도 변화 할 거다. 이걸로 설명은 끝."

송정호는 모자를 고쳐쓰고선 자신이 그려둔 원 안에서 벗어났다.

"둘 다 충분한 재능이 있으니.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해도 입만 아프겠지."

그러고서는 미련 없이 돌아서려는 송정호.

'아니, 전혀 모르겠는데.'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진세아처럼 진짜 천재가 아니다. 이건 너무 설명이 생략 됐다.

나는 급하게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송정호가 귀찮다는 듯 돌아봤다.

"왜. 감사 인사는 됐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좀 더 봐주면 안됩니까?"

"뭘, 봐달라는 거야?"

순간 뒤쪽에서 푸른 빛이 휘몰아쳤다.

"오, 진짜 되네! 대박!"

그 사이에 고유 서클 생성에 성공한 진세아. 송정호는 흘깃 진세아를 쳐다보더니,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학생도 어서 가서 해 봐."

* * *

되기는 됐다.

『 동료 진세아로부터 스킬을 전수 받습니다. 』

『 레어 스킬 '고유 서클 생성 Lv.1'을 획득합니다. 』

약 세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원 안에서 씨름한 결과 나는 고유 서클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드디어 됐다."

나는 살짝 감격했다. 고유 서클을 만드는 건 일반 서클을 만드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어려움이었다.

도중에 오르티마의 재능 획득 물약의 효과도 사라지면서 스킬 습득이 미궁으로 빠질 뻔 했는데.

다행히 진세아가 있었다. 고유 서클 생성은 전수가 가능한 스킬. 굳이 송정호가 아니어도 진세아에게 배우면 해결 되는 일이었다.

"해, 해냈다. 드디어 해방이다!"

나를 가르치느라 지친 진세아가 연신 만세를 불렀다.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그 아저씨 틀림 없이 사기꾼이야. 이렇게 간단한 걸 세 시간 동안 하는 사람이 천재일 리가 없지."

"······."

사실 세 시간만에 성공한 것도 내게는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어쨌든 드디어 손에 넣었다.

나는 다시금 고유 서클을 불러왔다. 조금은 각진 마력의 구체 하나가 내 주변을 빙글 빙글 돈다.

심장에서 벗어나 고유의 궤적을 공전하고 있다.

압도적인 양의 스킬 경험치가 내게로 흘러들어왔다. 구체는 더욱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푸른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 스킬 '고유 서클 생성 Lv.1'을 획득합니다. 』

『 스킬 '고유 서클 생성 Lv.2'를 획득합니다. 』

..

.

『 스킬 '고유 서클 생성 Lv.10'을 획득합니다. 』

『 마력양 100% 증가, 마나 회복량 50% 증가, 마력의 용법에 따른 특수 효과 획득 』

몸을 가득 채우는 신선한 마력이 느껴진다. 송정호의 말대로 마력의 샘이라고 불릴만한 효과였다.

'레어 스킬 수준이 아닌데.'

내가 가진 '자연회복 Lv.11'과 합쳐지니 마력이 차오르는 속도가 남달랐다. 이런 느낌이라면 지속적인 전투도 부담되지 않는다.

"넌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나는 진세아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가출한 것 같은데 그냥 놔둘 수는 없다.

"집에 가야죠, 뭐."

집에 갈 생각 전혀 없어보이는 말투.

진세아의 사정은 이렇다. 녀석의 아버지인 하이텍트 사의 회장은 진세아가 영웅이 되길 원하지 않는단다.

'빌런들에게 노출 되는 영웅은 헌터보다 위험하니까.'

실제로 사고율도 훨씬 높았다. 마수를 사냥하는 것과 범죄자와 전투를 벌이는 건 다르니.

그런 이유로 차라리 헌터가 되라고 진세아를 은빛의 날개 채용 시험에 꽂아 넣은 거였단다.

'근데 그 채용 시험에서도 문제가 터졌다는 건가.'

백묵 밑에서 던전을 돌던 것도 진세아가 집안 몰래 한 일이었다. 백묵은 진세아의 신분을 알았을 것 같은데.

그걸 알고 던전에 집어 넣는 백묵이 제일 미친 놈 같다.

'내가 하이텍트 회장을 설득하는 건 불가능하고.'

세계가 멸망할 거니, 댁의 딸은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따위의 말을 믿어줄 리가 만무하다.

'이럴 땐 지인 찬스를 쓰자.'

나는 스마트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윤서현이었다.

- 여보세요?

"잠깐 제가 말해주는 주소로 나올 수 있으십니까?"

- 저기요, 저도 제 생활이 있거든요······.

안되려나. 당분간이라도 진세아를 보호해주면 좋을텐데. 단념하려던 순간이었다.

- 그······. 대신 다음에 제가 원할 때 한 번 도와줘요.

그거야 어렵지 않다.

"좋습니다."

잠시후, 공간이 일렁이더니 윤서현이 나타났다. 볼 때마다 느끼지만 참 사기적인 능력이다.

"응? 세아?"

"서현 언니!"

진세아가 반갑다는 듯 윤서현에게 달려갔다. 둘은 지난번 채용 시험 때 봤었는데, 그 사이에 친해진 것 같다.

단순히 진세아를 맡기려고 부른 건 아니다.

나는 두 사람을 향해서 말했다.

"공략해야 할 던전이 하나 있습니다. 두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데.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공간이동과 도둑.

이 두 가지가 있으면 못할 게 없거든.

* * *

다음날 아침.

집 근처 공원가 집합 장소였다. 나는 그곳에 미리 나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스마트폰의 화면에 떠오른 기사의 스크롤을 쓱쓱 올렸다.

'벌써 기사가 나왔나.'

어제 처리한 빌런 조직 환령에 대한 기사가 벌써 나와 있었다.

'빠른데.'

바로 어제 있었던 일인데, 오늘 포털 사이트가 환령에 대한 기사로 전부 도배가 되어 있었다.

- 범죄 빌런 조직 '환령'의 피해자들 기적적 구출

- 하룻밤 사이 빌런 조직 소멸, 수수께끼 집단의 자력 구제?

- 조직 간의 항쟁으로 추측

- 영웅 협회도 못한 일을 해낸······.

환령에서 살아나온 사람들이 곧장 영웅 협회와 경찰서로 향했던 모양.

인터넷에서도 아주 난리였다.

미래에 환령이 저지를 범죄에 비교하면 하룻밤의 화젯거리에 불과하겠지만.

놈들은 정부와 영웅 협회가 끝까지 뿌리 뽑지 못했던 놈들이니.

'나중에는 마족이 뒤를 봐주고 있었을 정도니 영웅 협회에서도 잡기 힘든 게 당연했지.'

한결 홀가분해진 기분이었다.

'이제 프로젝트 메이저 게이트를 저지하는데에 집중할 수 있겠어.'

나는 방어구로 변해 있는 오르티마를 살폈다. 이전에 쓰던 것 그대로다.

'김건에게 맡겼던 방어구가 완성 됐으면 좋았을텐데.'

어제 맡겼던 방어구가 하루만에 뚝딱 나올 리가 없었다.

'그러고보니 이것도 레벨업이 다시 되려나.'

오르티마가 먹은 아이템은 레벨이 생기는데, 그게 성장형 아이템에도 적용 되려나.

아이템 정보를 살피는 와중이었다.

"와, 오빠. 일찍 나왔네요. 서현 언니의 언니가 은빛의 날개 윤지은 헌터님인 거 알고 있었어요?"

진세아가 윤서현과 함께 공원에 도착했다. 진세아는 윤서현 헌터의 집에서 하룻밤 묵었다.

던전을 공략할 거라고 미리 이야기 해뒀기에 둘 다 움직이기 편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마침 오늘은 휴일이었다. 윤서현도 협회에 나가지 않는 날이었다. 들뜬 진세아와 달리 윤서현은 조금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진짜 괜찮은 거 맞죠? 생각해보면 지한씨랑 같이 공략했던 게이트 모두······."

"모두 어땠는데요?"

"죽을 뻔했지."

틀린 말은 아니다. 이번 게이트도 완전 편할 거라고는 장담 못한다.

나는 미소로 얼버무렸다.

"일단 가시죠."

"뭐, 던전에 대한 정보는 확인 했으니까."

윤서현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스킬을 발휘했다.

『 동료 윤서현이 스킬 '공간이동 Lv.4'를 발휘합니다. 』

주변의 풍경이 일그러지며, 딛고 있던 땅의 모습이 변했다. 공원의 하얀 타일에서 잡초 돋은 회색 바닥으로.

"와, 놀이동산인데······. 망한 곳이었네."

주변을 둘러보던 진세아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경영난을 이유로 오래전 폐쇄된 놀이동산이다.

방치되어 녹슨 롤러코스터와 낡은 회전목마. 저 멀리 대관람차도 보인다만.

어쩐지 음산한 기분마저 느껴진다.

"이쪽입니다."

내 앞에 기묘한 형상을 한 철문이 보인다. 여기가 오늘 공략할 장소다.

"세 명이서 공략할 수 있는 거 맞죠?"

"아시다시피 여긴 D급 던전입니다. 저랑 윤서현씨가 B급이고, 세아가 D급이니 인원 수도 맞고요."

일반적으로 D등급 던전을 공략하는 데 필요한 인원은 D등급 다섯 명. 한 단계 높은 C급은 2명, B급은 3명으로 계산한다.

"등록도 끝 마쳐놨습니다."

백묵의 비서를 통해서 잡아 놓은 던전이다.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건 그런데······. 왠지 평범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아마 그 느낌이 맞을 거다.

미래에서 얻어 온 정보에 의하면 이 던전에는 최하위 마족이 둘이나 있다.

'그 이유는 내부에 존재하는 마도공학 핵.'

'프로젝트:메이저 게이트'의 예비 부품이 여기에 있다. 물론 예비 부품들은 세계 곳곳에 퍼져 있기에 여기 하나를 턴다고 달라지는 건 크게 없지만.

'발전의 마족의 연구소로 향하는 열쇠가 여기에 있으니 꼭 공략해야 하는 장소다.'

발전의 마족은 메이저 게이트를 책임지는 하위 마족. 녀석을 처치하는 걸로 프로젝트의 완전 저지가 성립한다.

마족들의 목표를 저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내 레벨업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면 들어갈까요."

끼이익, 쿠웅.

육중한 철문이 큰 소음과 함께 열렸다. 나는 그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 뒤를 진세아와 윤서현이 따라온다.

"레벨업 잔뜩해야지."

"이번에는 별 일 없기를······."

게이트를 넘어가자 놀이동산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쏟아질 듯한 은하수가 흐르는 밤하늘. 거대한 세 개의 달. 넓게 펼쳐진 평원.

달빛 덕에 밤이지만 전혀 어둡지 않다.

감탄을 내뱉는 두 사람. 나는 그들의 앞으로 나섰다.

"딱 보니, 저 멀리에 있는 탑까지만 가면 될 것 같네요."

평원의 끄트머리에 높게 솟은 탑. 저기가 우리의 목적지다.

"공간이동을 다시 쓰려면 30분은 기다려야 해요."

"문제 없습니다."

그 정도야 기다리면 되는 일이다.

* * *

탑의 꼭대기 층.

두 마족이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쥐새끼가 들어 온 모양이네."

"거참 이상하군."

중독의 마족과 부동의 마족이었다. 그 둘은 최하위 마족이었다.

그들이 있는 방 한가운데에 놓여진 궤짝 하나. 그곳에선 마기의 연기가 끊임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을 지키는 게 그들의 임무였다. 뿔 하나가 길게 난 부동의 마족이 미간을 찌푸렸다.

"여긴 마기와 마력을 최대한 억제한 던전인데, 어떻게 알고 들어 온 거지?"

"내가 말했잖아. 위치가 안좋다니깐. 어쨌든 잘 됐어. 심심하던 찰나에 가지고 놀거리가 생겼네. 내가 갔다 온다."

중독의 마족은 낄낄대더니 창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쯧."

부동의 마족은 혀를 찼다. 하등 종족만 보면 괴롭히고 싶어서 안달난 놈.

'우리 임무는 봉인된 궤짝을 지키는 건데 말이야.'

바로 며칠 전 권속을 하나 잃어 놓고서도 저 모양이다. 어쨌든 부동의 마족 자신은 이곳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었다.

'발전의 마족의 명령을 무시할 순 없지.'

그는 최하위인 자신들보다 높은 하위 마족이다. 특히나 이번 침략에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고 있는만큼, 발전의 마족이 앞으로 마계에서 차지할 위치는 정해져 있었다.

'줄을 잘 선다는 게 이런 거겠지.'

최하위 마족으로 태어난 이상, 결국 누구의 뒤에 서느냐가 전부였다.

부동의 마족은 자신의 판단에 만족하며 뒤돌아섰다.

그 순간이었다.

우우웅.

방 안의 공간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부동의 마족은 잠깐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

일그러진 공간에서 갑자기 세 명의 인간이 나타났다. 두 명의 여성과 한 명의 남성. 던전 내부로 들어왔던 인간들이었다.

"뭐, 뭐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긴 탑의 최상층이다. 이곳에 도달하려면 치명적인 함정과 난폭한 마수들을 거쳐야만 했다.

그런데 그걸 무시하고 단번에 여기까지 오다니?

깊이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뭐긴, 니 무덤이지."

당황한 부동의 마족을 향해, 무식하게 큰 대검을 든 남자가 달려들었으므로.

64화 마계의 틈(1)

카아앙!

부동의 마족이 꺼내든 검과 내 대검 마족 학살자가 부딪혔다. 마주한 두 검날 사이에서 터져나오는 불똥. 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크윽, 인간 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내 대검 위로 타오르는 형형한 마력은 조금씩이지만 녀석을 밀어내고 있었다. 부동의 마족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나와라, 나의 권속들이여!"

공간을 쩌렁쩌렁 울리는 마족의 외침. 등 뒤에서 솟아난 검은 기운이 방 안으로 퍼져나갔다.

이내 두 마리의 리자드맨이 모습을 드러냈다. 빨간 놈과 검은 놈.

"주인이시여, 부르셨습니까."

"시키실 일은 무엇인지?"

계약에 의해 소환된 권속은 총 두 마리. 놈들은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들의 언어가 시스템에 의해 구현되고 있다고 보는 게 맞다.

어쨌든 그들 하나하나가 네임드 마수에 필적하는 존재란 의미였다.

부동의 마족이 짜증난다는 듯 소리쳤다. 내게 힘으로 밀리고 있는 상황인지라 더욱 그랬다.

"멍청한 새끼들, 보면 모르겠어?! 내 눈 앞에서 저 버러지 같은 인간들 치워버려!"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리자드맨들은 초승달처럼 휘어진 시미터를 양 손에 쥐고 있었다. 놈들은 가벼운 연기를 남기고선 모습을 감췄다.

"언니, 뒤에요!"

『 동료 진세아가 '절대 직감 Lv.3'을 발휘합니다. 』

진세아의 외침대로였다. 자취를 감췄던 리자드맨 둘이 뒤에서 시미터를 내리 찍으며 떨어졌다.

『 동료 윤서현이 '순간이동 Lv.3'을 발휘합니다. 』

그러나, 윤서현의 순간이동이 다시 한 번 위치를 바꿨다. 공간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그녀를 상대로 뒤를 잡는 건 무의미한 일이었다.

콰앙!

리자드맨들의 참격이 애꿎은 바닥을 때렸다.

갑작스런 위치 변환에도 불구하고, 진세아는 감각적으로 뛰쳐나갔다. 마치 사전에 합의라도 한 것 같은 반응속도였다.

푸욱!

진세아의 단검이 리자드맨의 옆구리를 꿰뚫었다.

"크아악!"

고통에 몸부림 치며 시미터를 휘두르는 리자드맨. 진세아는 오히려 앞으로 전진하며 시미터를 회피했다.

푸욱! 푸욱!

날렵한 움직임으로 리자드맨의 등, 허리, 목까지 순서대로 단검을 찔러넣는 진세아. 집중한 녀석의 눈에 진홍빛의 이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동료인 검은 리자드맨이 뒤늦게 시미터를 휘둘렀지만, 윤서현의 마력사슬에 손목이 붙들렸다.

'압도적인 전투센스다.'

지금까지는 진세아의 제대로 된 전투를 볼 틈이 없었다. 진세아의 능력은 거대한 마수와의 전투에서보단 대인전에서 특출났다.

"어디를 보는 거냐!"

나와 검을 맞대고 있던 부동의 마족이 분노하며 소리쳤다. 나는 크게 힘을 주어 마족을 한차례 밀어냈다.

나는 놈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권속들 전부 죽게 생겼네."

"하, 인간한테 당할 정도로 약한 놈들이라면 죽는 게 낫다."

부동의 마족이 검은 마기를 자신의 검으로 끌어 올렸다. 나 또한 스킬 데몬 헌트를 발휘했다.

새까맣게 코팅 되는 대검.

『 스킬 '고유 서클 생성 Lv.10'을 발휘합니다. 』

내 주변으로 푸른 구체 하나가 떠올랐다. 그것은 빠르게 내 주변을 공전하기 시작했다. 이게 유지되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마력을 회복한다.

'그 말은······.'

태양의 발걸음과 태양류 검술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단 의미였다.

미끄러지듯 나아간다. 부동의 마족이 휘두르는 검은 어설프기 그지 없다.

"이 벌레 같은 놈이!"

계속해서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지만 힘에만 의지한 빈틈투성이 검술이었다. 보법으로 간격을 재니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

'초보자를 상대하는 것 같다. 저 놈이 진짜 마족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네.'

최하위 마족을 상대로 여유로운 전투가 가능하다니. 미래에서 배워 온 기술의 위력을 새삼 깨닫는다.

대검으로 놈의 공격을 흘리자, 놈의 검이 바닥에 쳐박혔다.

"이제 끝이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일자베기를 발휘했다. 마력 소모 걱정 없이 힘껏 휘두르는 참격.

『 스킬 '일자베기 Lv.12'를 발휘합니다. 』

데몬 헌트 때문에 영롱한 검은색으로 변한 한줄기 직선이 부동의 마족을 양단했다.

"크아아악!"

마족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놈은 쓰러졌다. 자신의 제약도 사용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주, 주인님!"

당황한 권속 리자드맨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서걱—!

진세아의 단검이 녀석의 목을 베어냈다.

* * *

"와, 경험치 대박."

진세아는 그런 태평한 소리를 하면서 방 안을 이리저리 뒤지고 다녔다.

"음······."

반으로 갈려진 마족을 유심히 살피던 윤서현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마족 맞죠."

특징적인 뿔과 보랏빛 피부. 부정할 수 없는 마족의 증거였다.

"네, 맞습니다."

"엥, 진짜요?"

네 말에 진세아가 의외라는 듯 말했다.

"그런데 지난번처럼 엄청나단 느낌은 안 들었는데요."

은빛의 날개 채용 시험에서 마주했던 흐름의 마족. 같은 최하위 마족이지만 임팩트는 그쪽이 더 컸다.

"그때는 특수한 상황이어서 그랬을 거야."

체내에 많은 양의 마기를 저장할 수 없는 최하위 마족 특성상 마기의 원천의 유무에 따라 강함의 차이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윤서현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나를 바라봤다.

"어쩐지 평범한 던전을 공략한다고 했더니······. 이번에도 알고 있었던 거죠?"

"글쎄요.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나는 방 한가운데에 있는 궤짝으로 다가갔다. 하얀 목재 재질로 만들어진 궤짝의 표면에는 복잡한 문자가 새겨져 있다.

음습한 기운이 넘실거린다.

궤짝을 열어보려고 고리에 손을 가져다 댄 순간.

파직!

'큭.'

검은 스파크가 내 손을 타고 올랐다. 찌릿한 감각이 팔 위로 올라왔다. 억지로 열려고 하면 이 고통은 더 심해질 거다.

'이 안에 마도 공학핵과 연구소의 열쇠가 들어있다.'

연구소란 프로젝트 메이저 게이트의 책임자인 발전의 마족이 거주하는 공간. 최종적으로는 그곳을 전부 없애야 한다.

'그냥은 못 열겠지.'

이중 삼중으로 마법적 처리가 되어 있는지라, 마기를 다룰 수 있는 마족이 아니면 절대로 열 수 없는 구조일 거다.

나는 방 안에 있는 항아리를 깨부수고 있는 진세아를 바라봤다. 어느새 녀석의 팔목에 뭔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여기 완전 가져갈 거 많아요. 일반템이기는한데 능력치 좋은 듯."

"이리와서 이 안에 있는 걸 훔쳐줄래?"

"그거요? 안 그래도 확인해 보려고 했는데."

진세아를 데리고 온 진짜 이유기도 했다.

"그러면 한 번 해 볼게요."

녀석은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 궤짝 위에 손을 올렸다. 새하얀 빛이 진세아의 손 위로 솟아났다.

『 동료 진세아의 스킬 '절대 강탈 Lv.5'가 발휘 됩니다. 』

'스킬 레벨이 벌써 1 올랐다고?'

절대 강탈은 이름부터 그러하듯, 일반 스킬이 아니다. 최소 유니크에서 레전더리 사이의 스킬일텐데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1레벨이 올라 있었다.

'재능이란 게 무섭네.'

본인은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지만, 이번 전투 한 번으로 진세아도 스킬을 얻었을 거다. 움직임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이게 다 뭐에요?"

진세아의 손 위에 올려진 검은색 마공학 핵. 투명한 유리 구슬 안에 검은 톱니바퀴가 담겨 있는 생김새다.

거기에 더해 검은색 열쇠 하나.

"글쎄, 자세한 건 조사를 해봐야 알 수 있겠지만, 마족들이 사용하는 인공 에너지원 같은 거겠지. 이건 은빛의 날개에 넘길 거야."

은빛의 날개는 최첨단 기술을 가진 하이텍트와 이어져있다.

이걸 조사하면 마족들의 사용하는 기술에 대해 알아낼 수 있을 거다. 그런 걸 리버스 엔지니어링이라고 하던가.

"지난번부터 계속 궁금했는데, 대체 마족들은 뭐에요? 단순한 마수들하고는 다른 것 같은데. 최근 늘어나는 변칙 게이트하고도 관련이 있는거죠?"

윤서현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겁니다. 제가 확실히 아는 건 놈들이 위험하다는 겁니다."

진세아에게서 마공학 핵을 가져오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탑의 창문 위로 무언가가 훌쩍 뛰어올라왔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머리 양 쪽에 달린 뿔.

방 안을 슬쩍 둘러본 마족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기가 찬다는 얼굴이었다.

"허, 이런 미친······. 어디갔나 했더니 벌레 새끼들이 집 구석까지 기어들어와 있었네?"

또 다른 마족의 등장에 진세아와 윤서현이 얼어붙었다.

녀석이 올 건 알고 있었다.

게이트에 존재하는 마족은 총 둘.

놈들의 임무는 마공학 핵이 담긴 궤짝을 지키는 것. 여기를 벗어날 수 없으니, 돌아 오는 게 뻔했다.

"뭐냐, 어떻게 그걸 빼낸 거야. 당장 내려놔라. 네 놈들 같은 버러지가 만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진세아가 들고 있는 마공학 핵을 바라보는 중독의 마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진세아가 들고 있는 마공학 핵을 내 손으로 가져왔다. 그대로 인벤토리에 집에 넣으려는 찰나.

콰아앙!

마족이 걸터 앉아 있던 창틀이 그대로 박살이 나며 파편이 튀어올랐다. 쏘아지듯 내 쪽으로 다가온 중독의 마족의 주먹이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놈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인다.

"이 버러지가······!"

마족 놈들은 어째 반응이 다 한결 같다. 나는 마공학 핵을 인벤토리에 던져 넣고선, 손바닥을 쫙 폈다.

『 오르티마가 '도끼 정령 파괴자'로 변화합니다. 』

방어구였던 오르티마가 한순간에 도끼로 바뀌었다. 나는 손에 쥔 도끼를 연신 휘둘렀다.

콰앙! 콰앙! 콰앙!

마기가 실린 주먹으로 내 공격을 막아내는 중독의 마족은 조금씩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인간이 무슨······!"

나는 일자베기를 시전하기 위해 도끼를 들어 올렸다. 본래 검으로만 시전 가능한 스킬이지만, 지금은 다르다.

『 유니크 스킬 '웨펀 마스터 Lv.1'을 발휘합니다. 』

『 무기의 종류에 상관 없이 스킬을 사용합니다. 』

촤아악! 거센 마력의 흐름이 중독의 마족을 집어 삼켰다.

"크아악!"

가까스로 몸을 틀어낸 중독의 마족. 녀석은 재빨리 바닥을 굴러 방 구석으로 도망쳤다.

"네 놈들이 지금 누구를 건드리고 있는지 알고나 있는거냐?"

잘려나간 팔을 부여 잡은 중독의 마족이 소리쳤다. 놈은 품 안에서 자그마한 상자 하나를 꺼내들었다.

"후회하게 해주마."

도망치는 주제에 말은 잘한다. 제약을 사용하지 않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제약을 시전하는 마족 자신도 제약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근데, 저 상자는······.'

분명 본 적이 있다. 마족들이 종종 들고 다니는 상자다. 그 능력은 아마······.

딸칵.

보랏빛 상자가 열렸다. 그와 동시에 주변의 풍경이 기이하게 끌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이거 뭐에요?!"

"지한씨!"

"괜찮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공간은 점차 안정되더니 하나의 형상으로 굳어졌다.

"윽, 징그러운데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탑 내부의 방 안이었는데, 지금은 주위가 완전히 붉은색으로 가득했다. 붉은 동굴이라고 해야할까.

마치 어떤 생물의 내장으로 들어 온 것 같다.

"크하하, 네 놈들은 다 죽었어!"

그리 말하는 중독의 마족 주위로 검은 마기가 휘몰아친다. 녀석은 그 힘으로 공중으로 떠올랐다.

'여기는······.'

마족이 소유하는 개인 아공간. 마계의 틈이라고 불리는 장소다. 불리한 상황에 처한 마족이 꺼낸 마지막 카드.

'일이 재밌게 돌아가는군.'

마족의 도발에 열받은 진세아가 소리쳤다.

"도망치면서 말 참 많네!"

"뭐, 뭐? 이 건방진 놈이······."

그러나 우리쪽으로 다가올 생각은 없어보였다. 놈이 손짓하자 검은 마기가 땅바닥으로 퍼져나갔다.

마기가 훑고 지나간 자리에는 권속들이 서 있었다.

그 수는 총 스물.

오크, 고블린, 리자드맨, 골렘······.

그 종족도 참 다양했다.

그들 모두가 마기로 둘러싸여 흉흉한 붉은 눈을 빛내고 있었다.

"너희들은 나를 상대할 것도 없다."

승리를 확신한 중독의 마족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저기에 있는 권속들 하나하나가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을 거다.

지난번에 상대했던 다크 엘프 발렘.

그도 중독의 마족의 권속이었으니까.

'최하위 마족치고는 엄청난 수긴 하네.'

근데, 어쩐지 질 것 같지가 않다.

나는 대검을 꺼내 들었다.

일반적으로 게이트가 현실 세계와 마계의 중간이라고 한다면.

마계의 틈은 마계와 한없이 가까운 장소였다.

『 칭호 '마계의 재앙(災殃)'의 효과를 발휘합니다. 』

『 필드 '마계(魔界)'에서 마(魔)속성 대상으로 1000%의 데미지를 줍니다. 』

내 앞으로 떠오르는 메시지를 바라보며 나는 조소했다.

"정말로 무덤을 팠군."

녀석을 잡으면 최하위 마족 두 마리를 죽이는 셈이 된다. 이번에는 이계 규율이 어떤 보상을 줄지.

궁금해 미칠 것 같다.

65화 마계의 틈(2)

붉게 물든 동굴 안.

중독의 마족은 니글거리는 낯짝으로 말했다.

"어떠냐, 지금이라도 바닥에 엎드려서 비는 게 좋을 거야."

스무 마리의 권속이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있다. 그 하나 하나가 가지고 있는 힘은 최소 B급. 충분히 두려워 할 법도 했다.

"기세 등등하게 말하는 것치고는 점점 멀어지는 것 같은데."

그러나 놈이 우리를 불러낸 이곳은 마계의 틈새다. 내 칭호 '마계의 재앙' 덕분에 마계 필드에서 내 데미지는 10배고.

내 비웃음에 중독의 마족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큭, 네 놈만큼은 치욕스럽게 죽여주마."

녀석은 이미 팔 하나를 잃었다. 오히려 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중독의 마족은 마기에 휩싸여 서서히 하늘 위로 올라가더니 위쪽에 뚫린 구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냥 도망 친 거 아닌가?"

"그런 것 같네."

진세아의 말에 윤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눈 앞의 권속들을 상대로 전투를 해야하는 건 변함 없다.

우우웅.

윤서현의 양 손 위로 검보랏빛의 구체가 떠올랐다.

"어떻게 된 건지 설명을 들을 시간은 없겠죠?"

"저도 잘 모릅니다. 이중 던전이라고 생각하면 편하지 않을까요."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너무 당황을 안하잖아요."

"글쎄요."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는 윤서현을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피해요!"

진세아가 소리쳤다. 권속들이 쏘아낸 마력의 탄환이 동굴의 붉은 바닥을 두드렸다.

쿠과광!

마족의 아래에 있는 권속이라고는 하나, 스무 마리나 되다보니 쏟아지는 폭격의 양이 차원이 다르다.

폭격을 당한 바닥에서 검은 연기가 한가득 피어올랐다.

"뭐야, 별 것도 없잖아."

권속 하나가 비웃음을 머금는 그 순간.

우리 일행은 이미 권속들의 뒤에 있었다.

서걱—! 푸욱!

진세아의 단검과 내 대검이 권속 두 마리를 단숨에 처치했다. 윤서현의 순간이동 덕분에 유리한 위치를 계속해서 선점할 수 있다.

"이 놈들 어느 틈에!"

"뒤를 봐!"

놈들이 허둥대며 뒤쪽을 향해 마력을 난사했다.

『 동료 윤서현이 스킬 '순간이동 Lv.3'를 발휘합니다. 』

다시금 반대편으로 이동 되었다. 움켜 잡은 대검의 칼날 위로 푸른 마력이 솟아올랐다.

나는 대검에 무게를 실어 있는 힘껏 휘둘렀다.

『 스킬 '일자베기 Lv.12'를 발휘합니다. 』

콰아앙!

굵직한 선 하나가 공간을 베어내며 강한 폭발을 일으켰다. 권속 다섯 마리가 한 번에 잘려나가며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보호막은 어디갔어!"

"걸었어 이 새끼야!"

"무, 무슨······."

겁에 질린 놈들이 조금씩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마력이 부족해서 이제 순간이동은 못 써요. 근데 보아하니까······."

권속들은 아예 뒤를 돌아서 도망가기 시작했다. 전의를 상실한 움직임이었다.

"필요 없을 것 같네요."

권속들은 각자 흩어져서 동굴에 난 통로 속으로 사라졌다. 주인의 명령이 구체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죽을 때까지 싸우라곤 하지 않았을테니.'

그때, 진세아가 살짝 얼빠진 듯한 얼굴로 물어왔다.

"오빠, 왜 이렇게 강해요? 아니, 진짜 순수하게 어이가 없어서 그래요."

방금 봤던 일자베기가 인상 깊었던 모양. 나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천재라 그런가."

"그게 말이 돼요?"

어깨를 으쓱인 뒤,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잠깐만 쉬어도 될까요?"

윤서현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그녀의 얼굴이 살짝 창백해져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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