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0화 그게 네놈들의 한계다. (2)
파르니엘이 고개를 돌려 모리스를 바라보고 물었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모리스는 자신보다 더 큰 파르니엘을 보고 기가 죽었다. 아니, 정확히는 초인을 한 번에 날려 버린 그 힘에 기가 죽었다는 게 맞을 것이다.
"나, 나는 루타니아 왕국군 총사령관 모리스 맥쿼리 후작이오."
파르니엘의 눈이 살짝 커졌다. 상대의 신분이 생각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성녀는 속세의 신분을 초월한 존재이지만, 그녀도 예의는 알았다.
파르니엘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런 자리에서 뵐 분은 아니었군요. 일단 저 삿된 자를 없애고 나서 마저 이야기하시지요."
"아, 알겠소이다."
콰아아아아!
날아갔던 비콘티스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크아아악! 네년은 누구냐!"
본래도 상당한 피로가 누적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 양팔이 으스러질 정도의 공격을 받으니 속까지 진탕되어 피를 토하고 말았다.
거기에 신성력이 침투하는 바람에 상당한 기운을 소모해서야 몰아낼 수가 있었다.
고오오오오....
그가 뿜어낸 검은 기운이 상처를 감싸며 일렁거렸다.
'크윽, 도대체 뭐지? 4대 교단에서 지원군을 보낸 건가?'
왕국군에 있던 사제는 모두 델파인군 손에 죽었다. 전투 능력이 떨어지는 사제들이니만큼 도망도 제대로 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나타난 여자는 사제들과 달리 전투에 아주 익숙해 보였다. 아니, 그냥 익숙한 게 아니라 전투 병기 수준이었다.
'이름이 파르니엘이라고 했나? 설마... 파르니엘!'
비콘티스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파르니엘이라는 이름을 쓰는, 거대하고 강한 여인. 저런 특징을 가진 자는 세상에 흔치 않았다.
"전쟁의 성녀!"
몇 년 전부터 암중에서 자신들과 싸웠던 모리아나 교단의 성녀다.
세상이 힘들어질수록 성녀니, 성자니 하는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나온다. 사람들이 그저 우러러보고 그렇게 소문을 내는 것이다.
하지만 파르니엘은 그런 흔해 빠진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전 교단이 인정한 진짜 성녀였다.
"크흐흐흐.... 어차피 잡아 죽일 년이 알아서 이곳에 찾아왔구나."
구원교의 입장에서 전쟁의 성녀는 골치 아픈 적이었다. 교단의 힘을 등에 업고 있으니 정면으로 맞서기도 힘들었다.
거기에 전쟁의 성녀는 수많은 신전 기사와 사제들의 보호를 받는다. 그러니 암살을 시도할 엄두조차 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혼자다. 분명 인근에 성녀를 쫓아온 자들이 있을 테지만,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죽이면 된다.
"신력을 가지고 있어 힘이 무척이나 강하다지? 그런데 그 정도로는 날 이길 수 없을 거다."
자신도 상당히 지치고 힘든 상태지만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신력 덕분에 최상급 기사에 육박하는 전투력을 발휘한다고 들었다. 사제들의 도움을 받으면 초인에 이르는 힘을 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니 혼자 있는 지금 죽여야 한다.
콰아아앙!
비콘티스의 몸이 앞으로 뻗어 나가며 검은 기운으로 이루어진 날개와 손톱이 자라났다.
그는 힘을 아끼지 않고 파르니엘을 죽일 생각이었다.
'크흐흐! 내가 드디어 큰 공을 세우는구나!'
순식간에 파르니엘의 앞에 다가온 비콘티스는 희열에 찬 미소를 지었다.
여신의 대리인인 성녀를 죽인 자, 영원히 낙원에서 살게 되리라.
"죽어라!"
콰아아아!
강대한 기운을 품은 그의 손톱이 공간을 가르며 내리꽂혔다.
파르니엘은 입술을 씰룩거리며 팔을 들어 올렸다. 근육으로 가득 찬 그녀의 팔이 하얀 빛을 내뿜었다.
"이 멍청한 년아! 맨몸으로 막을 수 있을 거 같으냐!"
비콘티스는 파르니엘의 팔이 잘릴 거라 확신했다. 이번 공격에 엄청난 기운을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콰아아아앙!
"어?"
하지만 자신만만하게 내리친 그의 공격은 파르니엘의 팔을 자르지 못했다. 오히려 비콘티스 쪽이 강한 방패에 부딪힌 듯한 충격을 역으로 받아 버렸다.
비콘티스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초인의 공격을... 맨몸으로 막아?'
아예 상처가 없는 건 아니었다. 붉은 줄이 그녀의 팔에 그어져 있었다.
즉, 조금 베이긴 베였다는 것이다.
"고작?"
얼이 빠진 비콘티스가 고개를 들었다. 사람 몸보다 큰 메이스가 태양을 가리며 허공에 떠 있었다.
"자, 잠깐!"
콰아아아앙!
으지직!
얼굴을 얻어맞은 비콘티스는 다시 날아가 버렸다. 맞은 쪽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지고, 눈도 터져 시야가 좁아졌다.
"끄아아아악!"
신성력이 침투하자 엄청난 고통이 몰려왔다. 검은 기운은 그것을 몰아내려 했지만 신성력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까보다 더 많은 신성력이 침투한 것이다.
"끄어어억! 네년! 네년이...."
비콘티스는 망가진 얼굴을 부여잡고 고통으로 울부짖었다. 상극의 기운인 신성력은 그에게 너무나도 큰 고통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인정할 수가 없었다. 강대한 힘을 가진 자신이 이렇게 얻어맞다니.
아무리 몸이 정상이 아니고 지쳤다지만 너무나도 굴욕적이었다.
"죽여 버리겠다!"
비콘티스가 높이 날아올랐다. 날개를 활짝 펴고 모든 힘을 끌어올리자 검은 기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며칠간의 전투로 그도 기운이 상당히 떨어진 상태였다. 이 기술을 쓰면 완전히 바닥날 것이다.
당분간 움직이기 힘들 테지만 그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여기서 성녀와 모리스를 반드시 죽여야 했다.
고오오오오오....
하나 남은 그의 눈이 짙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비콘티스의 온몸에서 주변 공간이 일그러질 정도로 강한 기운이 솟아올랐다.
이 기술을 쓰기에는 남은 기운이 다소 부족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생명력도 일부 끌어다 썼다.
그 정도로 눈앞에 있는 자들을 죽이고 싶었던 것이다.
파아아아악!
비콘티스의 몸에서 수천 가닥의 검은 기운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흐, 흐하하하! 막을 수 있으면 막아 봐라!"
성녀라면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주변에 있는 다른 자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
파르니엘은 그걸 보고 중얼거렸다.
"저주받은 빛, 심연의 절규."
옛 전쟁에서 구원교의 사제들이 쓰는 이 기술을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하늘을 가득 메운 검은 빛을 보며 파르니엘이 입을 열었다.
"보라, 내가 이 땅을 은총으로 보호하리라. 이제 성스러운 뜻을 펼치노니, 삿된 손길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믿음은 불멸할 것이니라."
파악!
그녀의 몸에서 찬란한 빛이 퍼져 나왔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보호막을 치듯 넓게 퍼지며 아주 큰 빛의 공간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 기적과도 같은 힘에 눈을 크게 떴다.
어둠으로 물든 빗줄기와 빛의 공간이 만났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검은 기운은 쉬지 않고 세차게 빛의 공간으로 내리꽂혔다.
그 충격이 어찌나 강한지 주변의 땅이 뒤집히고 우레와 같은 소리가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공격이 이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그 잠깐의 시간이 마치 억겁과도 같았다. 그 정도로 비콘티스가 사용한 마지막 기술은 강력하면서도 공포스러웠다.
하지만 빛의 공간은 깨질 듯하면서도 결국 깨지지 않았다.
"이, 이... 무슨...."
비콘티스가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모든 힘을 다 끌어내고 생명력까지 뽑아 썼다. 최상급 기사 수준으로는 막을 수 없는 공격이었다.
그럼에도 성녀는 혼자 그것을 막아 내었다.
우르르 몰려다니길래 그 실력을 과소평가했다. 그저 신성력이 좀 강할 뿐이라 보호받아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냥 성녀 자체가 괴물이었다.
"퉷."
파르니엘이 입에 머금은 피를 내뱉었다.
확실히 고위 사제가 온 힘을 다해 가하는 공격은 제법 매서웠다. 속이 조금 울려 피를 토할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그게 끝이었다. 이 정도로는 자신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없었다.
쿵!
파르니엘이 메이스를 강하게 틀어쥐고 다시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모든 근육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으, 으으...."
기운을 모두 소모한 비콘티스는 이미 땅에 내려와 있었다. 날개와 손톱을 유지할 힘도 남지 않은 것이었다.
기운이 부족해 생명력까지 끌어 쓴 탓에 그는 지금 어지간한 기사보다도 약해진 상태였다.
"제, 젠장!"
그는 바로 몸을 돌려 도망갔다. 하지만 파르니엘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다가간 파르니엘이 비콘티스의 등을 향해 메이스를 휘둘렀다.
콰아앙!
"끄아악!"
허리가 반대로 접혀 버리며 박살이 난 비콘티스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래도 구원교의 사제답게 즉사하지 않았다.
끈질긴 바퀴벌레를 보는 듯 혐오감 어린 표정으로 파르니엘이 메이스를 높이 들어 올렸다.
"너의 타락은 여기서 끝나리라. 신성한 빛이 너를 삼킬 것이니."
남은 손으로 성호를 한 번 그은 파르니엘은 무자비하게 메이스를 내리쳤다.
콰아앙!
"커어어억!"
다시 등짝에 거대한 메이스를 맞은 비콘티스가 피를 토했다. 몸은 이미 땅에 납작 붙어 버린 상태였다.
그럼에도 파르니엘은 멈추지 않았다.
콰앙! 콰앙! 콰아앙!
마치 바퀴벌레를 짓이기듯이 파르니엘은 쉬지 않고 메이스를 내리쳤다.
한참을 내려치다가, 비콘티스의 시체가 다진 육포처럼 변한 뒤에야 그녀는 공격을 멈췄다.
"후... 여신이시여. 오늘도 한 놈을 보냈나이다."
"...."
그 모습을 구경하던 모리스와 패잔병들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아무리 지쳐 있었다고 하더라도 초인을 저렇게 압도적으로 다져 놓다니.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괴물이 자신들의 앞에 나타났다.
이것이 훗날 대륙 7강이라 불릴 자들의 힘이었지만 그들이 알 수는 없었다.
놀란 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누, 누구냐."
어느새 도착한 추격군들은 더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멀찍이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자신들의 가장 큰 무기인 초인이 두들겨 맞아 죽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파르니엘이 오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며 말했다.
"오늘은 더 이상 살생을 하고 싶지 않으니 물러가라."
그녀는 구원교와 손을 잡은 이들이라 해도 가급적 사람을 죽이는 것은 피하려 했다. 모두 잡아서 패면 회개시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구원교의 사제들만 잡아 죽이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봐주는 건 아니었다.
"덤비면 모두 이 자리에서 여신께 보내 드리겠다."
"으, 으...."
추격군의 지휘자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모리스를 잡아야 하는데 상황을 보니 완전히 글러 버렸다.
파르니엘에게 겁을 먹은 그는 결국 추격군을 이끌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정리되자 파르니엘은 모리스에게 다가갔다.
"상황이 급박하여 소개가 늦었습니다. 전쟁의 여신을 모시는 종, 파르니엘이라고 합니다."
"그, 어... 고, 고맙소이다. 이, 이 은혜는 내 돌아가서 꼭 갚도록 하겠소."
"괜찮습니다. 구원교와 싸우는 것이 제 사명이니까요."
"그, 그렇소이까? 듣던 중 반가운 소리외다."
모리스가 어색하게 중얼거렸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정체도 불분명한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구원교의 사제를 때려죽인 걸 보면 그들과 적대적인 관계가 분명하다.
"어, 어디서 오셨소?"
"페이노스 교국에서 왔습니다."
페이노스 교국은 다른 왕국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국정이 운영된다. 교국에는 4대 교단의 총본단이 있고, 각 교단의 총대주교가 상주한다. 그들이 돌아가며 나라를 다스린다.
군사력이 강한 건 아니지만 종교의 힘이 막강하여 어떤 왕국도 그곳을 건드리지 않는다.
모리스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교국은 아주 멀리 있지 않소? 어쩌다가 이 루타니아 왕국까지 오셨단 말이오?"
"오고 싶어서 왔습니다."
"으, 음?"
파르니엘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며 어찌 말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이곳 루타니아 왕국이 구원교와 가장 격렬히 싸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으니 이곳으로 와 싸우고 싶다는 마음이 강렬하게 들었습니다. 아마 여신께서 인도하신 것이겠지요."
"아... 예...."
그냥 믿음과 말씀 하나로 살아가는 게 사제다. 뭐든 신의 말씀이라고 하면 통하는 사람들이다. 논리적인 이유를 원해서는 안 된다. 반박도 안 된다.
모리스도 그런 걸 좋아하는 편이라 금세 알아들었다.
"아하하, 점쟁이 할멈이 귀인을 만난다고 했는데, 아마 그쪽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휴베르트가 모리스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파르니엘의 표정이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4대 교단의 사제 앞에서 사이비 점쟁이 얘기를 꺼내는 건 싸우자는 뜻이다.
순간 목숨에 위협을 느낀 모리스가 헛기침을 했다.
"커흠흠. 농담입니다. 농담."
"재미없는 농담이었습니다. 하마터면 이단 심문에 들어갈 뻔했습니다."
"네...."
왕국의 사제들은 모리스의 권위 때문에 모르는 척했지만, 파르니엘은 그런 걸 무시할 만한 힘과 자격이 있었다.
민망해진 모리스가 다시 몇 번 헛기침을 한 뒤 말했다.
"일단 머물 곳이 없으시면 우리와 함께 갑시다. 어차피 같은 적을 두고 싸울 거면 힘을 합하는 게 좋지 않겠소?"
"감사합니다. 그러면 당분간 신세를 좀 지겠습니다."
"아휴, 무슨. 우리가 신세를 지는 거지요."
모리스가 정신을 차리고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구원교의 고위 사제들 때문에 전쟁이 무척이나 힘들어졌다.
그런데 새로운 초인급의 인물이 도와준다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자, 어서 갑시다."
"잠시만요. 일행이 있습니다."
"일행이요?"
모리스가 어리둥절하며 잠시 기다리자, 정말 일단의 무리가 파르니엘이 온 방향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사제복과 하얀 갑옷을 입은 백여 명의 사람들. 바로 파르니엘을 모시는 수행 사제들과 신전 기사들이었다.
가장 앞에 있던 자가 크게 외쳤다.
"성녀님! 위험하게 왜 혼자 멋대로 움직이십니까!"
그 소리를 들은 모리스의 눈이 커졌다.
"성녀? 정말 성녀란 말이오?"
파르니엘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바로 전쟁의 여신께 선택을 받은 성녀입니다."
"...."
성녀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너무나도 다르긴 했지만... 전쟁의 여신이 선택했다 하니 뭔가 어울리는 거 같기도 했다.
어쨌든 성녀라면 초인보다 더 깍듯하게 모셔야 한다. 그 이름이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성녀란 그런 존재였다.
모리스가 다시 고개를 깊이 숙였다. 상대의 신분이 성녀인 이상, 같이 싸운다는 말조차 우습다.
"루타니아 왕국을 도와주시기로 한 점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요. 이 또한 여신의 인도함이니."
파르니엘도 다시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녀에게 이런 대접은 익숙한 것이었다.
그렇게 성녀와 합류한 모리스와 패잔병들은 위풍당당하게 후퇴했다.
* * *
"비콘티스 심판관이 죽었다고?"
"네."
"허...."
포그렌 백작은 추격군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며칠 무리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초인이다. 그런데 패잔병들을 추격하다가 갑자기 난입한 자에게 맞아 죽었단다.
"도대체 그게 누군데?"
"모르겠습니다. 그냥 엄청나게 큰 여자였습니다. 모리아나 교단의 사제복을 입고 있던 것으로 보아 전투 사제가 아닐까 추측됩니다."
"전투 사제가 초인을 때려죽였다고? 이 왕국 어느 교단에 그런 사제가 있는데!"
포그렌 백작이 소리를 질렀다. 그런 사제가 있다면 이미 소문이 나도 진작에 났을 거다. 최소한 공작가의 정보망에는 포착되었을 터였다.
구원교로서는 자신들과 싸우고 있는 전쟁의 성녀에 관해 널리 알릴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포그렌 백작에게도 정보가 들어가지 않은 것이었다.
한참을 씩씩거리며 화를 내도 상황을 알 방도가 없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그보다 더 미칠 거 같은 이유는, 왕국군 총사령관을 눈앞에 두고도 놓쳤다는 것이다.
"후우...."
한숨을 내쉰 그가 참모들을 불러 말했다.
"이틀만 쉬고 바로 수도로 진군한다. 한두 번만 영주들의 군대를 격파하면 우리를 막을 군대는 없을 거야."
"이틀은 너무 짧지 않습니까? 병사들의 피로가 많이 쌓였습니다."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상당히 고된 전투를 했다. 고작 이틀만 쉬어서는 제대로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포그렌 백작은 참모들의 지적에도 고개를 저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연합군들이 있다. 그들이 오면 더 피곤해질 거야. 심판관을 잃었으니 더 빨리 움직여서 남은 놈들을 밀어 버리는 게 낫다."
상대 쪽에 초인급의 인물이 한 명 합류한 것 같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저쪽에 남은 병력은 무척이나 적다. 이쪽 지역을 지키는 영주들의 군대를 급히 모아 봤자 1만이 안 될 것이다.
자신들은 비록 절반을 잃었지만 아직 정예병 3만이 남아 있다. 또한 마법사 전력도 멀쩡했다.
이 정도면 초인 하나 정도는 충분히 죽일 수 있는 전력이었다.
"북부군은 2군단에게 밀려 버릴 거야. 설사 북부군이 이긴다 해도 우리를 막을 만큼 빠르게 움직이진 못할 거다."
포그렌 백작은 자신만만하게 단언했다. 그의 참모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휴식을 취하고 정비를 하는 동안, 하늘 위에서 까마귀 하나가 계속 빙빙 돌고 있었다는 것 말이다.
― 주인, 곧 군대가 움직일 거 같다.
이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건 마침 지셀이 소식을 듣고 막 출발했을 때였다.
다크를 통해 상황을 전달받은 지셀이 말 위에서 지도를 펼쳤다.
"다행히 시간은 맞출 수 있겠어."
3만이나 되는 군대는 아무리 빨리 걸어도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다. 그것도 며칠 간의 전투로 피로가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군대라면 더더욱 말이다.
그에 비해 펜리스 기동군은 왕국 최고의 기동력을 자랑한다. 사기도, 체력도 부족하지 않다.
양측의 속도를 대충 계산해 본 지셀이 지도 한 곳을 손으로 짚었다.
"이곳에서 잡도록 하지."
공작가는 아직도 펜리스군의 기동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거 같았다. 그저 지셀 자신이 초인이라는 것에만 꽂혀서 말이다.
아니면 비대해진 북부군의 전력이 한꺼번에 움직일 거라 여기든가. 어쩌면 자신이 없는 동안 북부군이 쓸려나갔을 거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게 네놈들의 한계다."
지셀이 서늘한 웃음을 지었다.
이번 기회에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확실하게 보여 줄 생각이었다.
471화 내가 하자고 하면 다 된다. (1)
현재 지셀이 직접 끌고 움직이는 기동군은 1만이었다.
모리스 맥쿼리 후작 쪽으로 배정한 군대는 2만이지만, 더욱 속도를 높이기 위해 그중에서도 최정예 1만을 뽑아 우선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두두두두두!
1만의 펜리스 기동군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움직였다. 그들이 쉴 때는 오직 말이 휴식을 취해야 할 때뿐이다.
북방에서 온 힘이 넘치는 말들은 휴식 시간도 짧았다. 거기에 영양가가 높은 펜리스의 전투 식량은 휴식 시간을 더 줄여 주었다.
두두두두두!
왕국을 제집처럼 돌아다니던 지셀이다. 익숙한 길에 부담 없이 속도를 높인 기동군은 금세 포그렌 백작이 이끄는 델파인군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델파인군을 따라다니던 다크가 의식을 통해 소식을 전해 왔다.
― 그놈들 열심히 나아가고 있어.
지셀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 밤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좋군. 우리가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을 테지."
상식적으로 이제 막 전투를 끝낸 북부군이 벌써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할 것이다.
실제로 전투에서 패한 마테스 백작이 보낸 전령도 아직 각 군단에 도착하지 않았다.
펜리스 기동군은 전령보다도 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지금부터 모두 푹 쉬어라. 밤새 움직여야 할 테니까."
며칠을 쉬지 않고 달려온 기동군은 지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대로 자리에 쓰러지듯이 누웠다. 훈련이 잘된 그들에게도 강행군은 강행군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제대로 된 숙영지조차 만들지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 말을 묶고 휴식을 취할 뿐이었다.
물론 이들이 그냥 누워서 쉰 건 아니다.
펜리스에는 이제 식량만큼 넘쳐나는 것들이 있다.
"크, 역시 돈이 많아야 좋다니까."
"다치지 않았을 때도 이걸 마시게 될 줄이야."
"옛날에는 비싸서 사지도 못했던 건데."
다들 품에서 포션을 하나씩 꺼내서 마시기 시작했다.
포션은 상처를 치유해 주기도 하지만 활력을 돋워 주기도 한다. 인위적으로 재생력을 높이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입에 금을 쏟아 넣는 행위나 마찬가지지만 다들 개의치 않았다.
엄청난 생산량 덕분에 그들은 모두 여분의 포션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훈련과 군율이 엄하긴 하지만 지셀은 언제나 군인들을 최고로 대우해 주었다.
그렇기에 이들의 사기는 전투를 거듭할수록 끝도 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휘이이이....
주변이 어둑해지며 스산한 바람이 불어올 즈음, 정찰을 나갔던 다크가 다시 의식으로 알려왔다.
― 주인이 말한 대로 이놈들의 이동 속도가 줄어들고 있어.
"전군 말에 올라라."
지셀의 명에 다들 군말 없이 말에 올라탔다.
"이제 움직인다."
지셀이 손짓하고 흑왕을 몰자 기동군이 뒤를 따랐다.
다시 의식을 통해 다크가 상황을 알렸다.
― 이놈들이 앞쪽부터 이동을 멈추고 있어.
"전군, 속도를 올린다."
두두두두두두!
달리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이들을 막는 장애물은 어떤 것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셀은 대기할 장소를 그냥 선택한 게 아니었다.
적들도 바보가 아니니 척후병을 운용할 게 뻔했다. 그리고 그 범위는 상당히 넓을 것이다.
그들에게 발각되지 않으려면 멀리 떨어진 곳에서 대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지셀은 말이 멈추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지형을 선택해서 휴식을 취했다.
― 숙영지를 건설하기 시작했어.
"더 빠르게 달려라!"
지셀이 크게 외치며 사나운 웃음을 지었다. 검은 기운이 흑왕의 몸을 감싸고 일렁이기 시작했다.
히이이이잉!
흑왕이 길게 울부짖으며 한 줄기 빛처럼 쏘아져 나갔다.
아군과 거리가 벌어지고 있지만 상관없었다.
언제나 가장 위험한 곳에는 가장 먼저 도착하는 것이 지셀의 역할이었으니까.
두두두두두두!
쏘아져 나가는 지셀의 뒤를 따라 기동군이 더욱더 빠르게 말을 몰았다.
그들은 언제나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전투에 임한다. 그렇기에 돌격에 온전히 모든 힘을 쏟을 수 있었다.
아무리 숙련되어도 3만의 대군이 머물 숙영지를 건설하는 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숙영지 건설이 완료되자 포그렌 백작이 부관에게 말했다.
"맥쿼리 후작에게 초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합류했다. 전력이 부족한 그들이 기습해 올 수도 있으니 경계에 만전을 기하도록."
"알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숙영지 주변에 말뚝과 칼날 함정을 설치해라."
포그렌 백작은 훌륭한 지휘관답게 승리한 뒤에도 방심하지 않았다.
행군으로 지친 병사들은 숙영지 건설이 완료되고 나서는 휴식을 취할 생각에 싱글벙글한 상태였다. 그 와중에 함정 설치 명령이 떨어지자 다들 조금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전쟁 중이니 대비를 허투루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정예병들답게 바로 움직였다.
"자자, 빨리하고 쉬자고!"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들도 하나둘 충원되기 시작했다. 임무 교대를 위해 움직이는 병사들도 있었다.
작업에 나간 병사들이 적당한 자리를 고르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두의 긴장이 풀리고 경계가 가장 흐트러지는 그 순간.
두두두두두....
병사 몇 명이 어디선가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소리가 그리 크지 않았다. 병사들은 그간의 경험으로 상대가 한 명이라는 걸 알았다.
"전령인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들의 얼굴이 곧 경악으로 물들었다.
두두두두두두!
한 기의 말발굽 소리를 집어삼키며 대규모의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심지어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직 주변은 완전히 어둠으로 물들기 전이었다. 어둑어둑해지긴 했지만 눈이 좋은 기사는 다가오는 자의 손에 창이 들린 것을 발견했다.
"적이다! 적이 나타났다!"
"무기 들어라!"
"어서 대열을 갖춰라!"
다들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함정을 만들려던 병사들도 도구를 집어 던지고 무기를 찾았다.
대비를 안 한 것도 아니었다. 이들은 전투 교범대로 행동했고 무엇 하나 허투루 하지 않았다.
그저 그 경계의 틈을 지셀이 절묘하게 찔렀을 뿐이었다.
지셀이 창을 뒤로 당겼다. 검은 기운을 머금은 창이 떨리기 시작했다.
"놀아 보자."
그 한마디와 함께 지셀이 붉은 눈을 번뜩이며 창을 던졌다.
콰아아아앙!
마나를 잔뜩 머금은 창은 쏜살같이 날아가 거대한 충격파를 터뜨렸다.
그 주변에 있던 병사들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몸이 찢겨 나갔다.
하지만 3만 군세는 거대했다. 지셀의 공격이 죽인 자들은 그중 일부에 불과했다.
적군은 아직도 너무나 많이 남아 있었다.
히이이이잉!
파앗!
정신을 못 차리는 델파인군의 숙영지로 흑왕이 길게 울부짖으며 뛰어들었다.
지셀은 안장에 있던 예비용 창을 쥐어 들었다.
"좋군."
적들은 아직도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절묘하게 틈을 파고들었다.
제대로 대열을 갖추기 전에 몰아쳐야 한다. 정신을 차릴 수 없게 해야 한다.
기동군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그 역할을 맡아야 한다.
"가자!"
화르르륵!
지셀이 외치자 흑왕을 감싸고 있던 검은 기운이 조금 더 커졌다. 동시에 그의 주위로 마력의 창 수십 개가 떠올랐다.
파아아아아아!
마력의 창은 사방으로 퍼지며 적들을 꿰뚫었다.
"크아아악!"
"막아라! 막아!"
"어서 대열을 갖추란 말이다!"
두두두두두!
콰앙! 콰앙! 콰아앙!
지셀과 흑왕은 마구 날뛰며 병사들의 목을 날렸다. 병사들의 혼이 빠지도록 숙영지 곳곳을 뛰어다녔다.
누군가는 무장을 갖추고 뛰어나왔고 누군가는 지셀을 피해 도망가기 바빴다.
여기저기서 지휘관들이 명령을 내렸으나 대열조차 갖추지 못한 병사들에게는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았다.
파아아아악!
"으아아악!"
뭔가 좀 해 보려고 하면 마력의 창이 날아와 공간을 휘저었다. 델파인군은 공포와 함께 혼란에 빠져 버렸다.
"뭐야! 도대체 누가 쳐들어온 거야!"
"일단 모여! 모이라고!"
"시발! 웬 괴물이 들어왔어!"
상대가 펜리스 백작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름대로 정예병이라는 건지, 3만에 이르는 대군은 외각 쪽에서부터 진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숙영지의 중앙에 있는 자들은 지휘관을 지키기 위해 빠르게 모였다.
철컹! 철컹! 철컹!
포그렌 백작 주변으로 마법사들이 모여들었다. 다시 그 주변을 기사들이 방패를 들고 에워쌌다.
최고의 정예병들 또한 그들 주위를 에워싸며 모였다. 상황은 알 수 없어도 일단은 지휘관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포그렌 백작이 짜증스럽게 외쳤다.
"뭐야! 도대체 경계를 어떻게 선 거야! 적이 쳐들어오지 않았느냐! 누구냐! 도대체 누구냔 말이다!"
"저, 적이 한 명입니다. 아직 정체가...."
그사이 사위가 더 어두워져 상대의 문장과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상대가 검은 기운에 둘러싸여 있어서 더 그랬다.
검은 기운을 쓰기로는 구원교의 사제들과 펜리스 백작이 유명했다.
구원교의 사제들이 자신들을 공격할 리가 없으니 상대는 펜리스 백작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은 펜리스 백작이 홀로 이곳에 왔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빨리 막아라! 어서 막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갑자기 당해서 그런 겁니다! 곧 아군이 포위해서...."
옆에서 보고하던 기사의 말이 중간에 끊겼다.
두두두두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강하게 울렸다. 땅이 이렇게 울릴 정도면 엄청나게 많은 기마병이 온다는 뜻이었다.
"무, 무슨...."
상황 판단이 제대로 끝나기도 전에.
1만에 이르는 기마병들이 델파인군의 숙영지를 덮쳤다.
콰아아아아아앙!
"으아아악!"
겨우 대열을 갖추고 있던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우수수 갈려 나갔다.
델파인군은 말을 타기는커녕 제대로 된 진형을 갖추지도 못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기마 돌격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숙영지 곳곳이 불에 타올랐다. 델파인군은 돌격하는 기마병들에게 학살당하기 시작했다.
"이, 이 무슨...."
포그렌 백작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직접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그 어떤 것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야간 기습에 대비해 함정까지 준비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자신들이 취약해진 짧은 틈을 타서 완벽하게 기습을 성공시키다니!
그러려면 실시간으로 자신들의 위치를 감시하고, 척후병들의 시야를 피해야 하며, 그에 맞춰서 거리와 속도를 가늠해야 한다.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저 상대방이 운이 좋았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때 문득, 포그렌 백작은 이런 기동력으로 유명한 자를 떠올렸다.
"서, 설마...."
말이 안 된다. 시간상 절대 그자일 리가 없다.
하지만 그게 아니면 지금 상황이 설명되지 않았다. 모리스가 이끄는 패잔병들은 이런 위용을 보여 줄 수 없다.
홀로 수많은 적을 상대하면서 날뛰는 자.
검은 기운에 둘러싸인 거대한 흑마.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마력의 창.
왕국 사람 모두가 인정하는 북부의 최강자.
"펜리스 백작!"
포그렌 백작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지셀이 반응했다.
"그래, 내가 펜리스 백작이다."
파아아앙!
지셀이 번개 같은 속도로 포그렌 백작을 향해 달려갔다.
아무리 기습을 당했어도 3만이나 되는 대군이다. 끝까지 발악하면 이쪽의 피해도 커진다.
특히 6서클 마법사들이 문제였다. 저들의 파괴력은 강하다. 자신에게 모든 시선을 집중시켜야 했다.
지셀의 예상처럼 포그렌 백작은 손가락질을 하며 외쳤다.
"죽여라! 모두 저놈을 공격해라! 저놈만 죽이면 이 전쟁은 우리의 승리다!"
어떻게 벌써 2군단을 처리했는지, 어떻게 벌써 이곳에 도착했는지 알 수 없다.
어떻게 이런 완벽한 타이밍에 이곳을 쳤는지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포그렌 후작은 단 하나는 알았다.
여기 있는 모두가 죽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저놈을 죽여야 한다는 것.
"구, 군단장님. 아군이 잔뜩 있습니다. 저희가 지금 마법을 쓰면...."
마법사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펜리스 백작은 마스터다. 그런 자에게 피해를 주려면 최고 수준의 마법만을 써야 한다.
대인 마법을 써도 주변에 피해가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포그렌 백작은 답답하다는 듯 마법사의 멱살을 잡고 소리를 질렀다.
"당장! 당장 죽이란 말이다! 이 멍청한 놈들아! 내버려두면 어차피 우리 다 죽어!"
이미 기세에서 밀리고 대열까지 망가졌다. 상대는 엄청난 기동력으로 숙영지를 쓸어버리고 있었다. 그저 많은 수 때문에 시간이 걸릴 뿐이다.
콰앙! 콰앙! 콰아앙!
지셀은 자신을 에워싼 병사들을 날려 버리며 포그렌 백작을 향해 달려갔다.
기사들이 죄다 포그렌 백작 주변에 있어 길을 뚫기는 어렵지 않았다.
계속 이렇게 시선을 끌어야 한다.
콰앙! 콰앙! 콰아앙!
"으아아아악!"
하염없이 쓸려 가는 병사들을 보며 마법사들이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포그렌 백작의 말이 맞았다. 지금은 아군을 배려하며 싸울 수가 없었다.
반드시 저 괴물을 여기서 죽여야 한다.
고오오오오오....
6서클 마법사와 5서클 마법사, 그리고 휘하 마법사들이 모든 마력을 끌어올렸다.
쿠르르릉!
6서클은 초인이라 불리는 7서클의 바로 아래 단계다. 초인은 아니어도 전쟁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전쟁 병기들이었다.
2군단보다는 적지만 이곳에도 6서클 마법사 두 명과 5서클 마법사 여섯 명이 참전해 있었다. 휘하 마법사만 해도 무려 50여 명에 이르렀다.
그들이 아군까지 모두 죽일 각오로 마법을 시전했다.
단 한 사람을 향해서.
자신 주위로 어마어마한 마력이 몰리는 걸 느낀 지셀이 흑왕의 고삐를 꽉 잡으며 말했다.
"콩이야, 잘 버텨야 한다."
파아아악!
지셀의 몸이 완전하게 검은 어둠에 휩싸였다. 그 안에서 붉은 눈이 번뜩였다.
히이이이잉!
흑왕 또한 일렁이는 검은 기운에 감싸이며 제 주인과 같이 붉은 눈을 빛냈다.
그 직후.
마법사들이 시전한 수많은 마법이 지셀에게 작렬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472화 내가 하자고 하면 다 된다. (2)
쾅! 콰앙! 콰아아아앙!
수많은 불과 얼음, 번개가 지셀이 있던 곳으로 떨어졌다. 그에게 달려들고 있던 델파인군의 병사들도 그 마법에 직격당했다.
"으아아아아악!"
"살려 줘!"
"마법이다! 피해!"
병사들은 마법이 어디서 시전됐는지 몰랐다. 갑작스럽게 기습을 당해 정신이 없던 와중이니 아군이 썼는지 적군이 썼는지 구분하지 못한 것이다.
마법의 효과는 확실했다. 지셀에게 달라붙던 병사들은 죄다 몸이 터지거나 찢겨 죽어 버렸고, 달려오는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최대한 범위가 적은 마법을 썼음에도 그 파괴력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강했는지 델파인군을 학살하던 펜리스 기동군도 잠시 멈칫할 정도였다.
파앗!
타오르는 불길과 연기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오며 외쳤다.
"멈추지 마라!"
"와아아아아!"
펜리스 기동군은 크게 함성을 지르며 공격을 이어 나갔다.
역시 영주다. 저런 대단한 공격에도 멀쩡하다. 잠시 머뭇거린 게 미안할 정도였다.
펜리스 기동군의 환호와 다르게 델파인군의 마법사들은 해쓱해진 낯빛으로 중얼거렸다.
"이, 이 무슨 괴물 같은...."
마법사들이 모든 마력을 쏟아부었다. 이 정도 마법에 직격됐으면 초인이라도 걸레짝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셀은 전혀 타격받지 않은 것처럼 검은 기운을 일렁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오히려 주변을 에워싸는 병사들이 없어져 더 빠르게 달려오는 중이었다.
"마, 막아라! 어떻게든 죽여!"
포그렌 백작의 말에 마법사들이 다시 마력을 끌어올렸다. 얼마 남지도 않은 마력을 한계까지 박박 긁어모았다.
콰콰콰콰콰콰콰쾅!
땅에서 불기둥이 솟아오른다. 대지가 무너진다. 하늘에서 번개가 수도 없이 떨어져 내리고 얼음이 주위를 에워쌌다.
지셀은 흑왕의 말고삐를 강하게 쥐었다.
피할 수 있는 건 모두 피했다. 피하지 못하는 건 기운을 끌어올리며 견뎌 내었다.
히이이이잉!
흑왕도 지셀과 함께 그것을 견디며 더욱더 성나서 투레질했다.
검은 기운이 보호해 주고 있다고는 하지만 타격이 없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거친 야성을 뿜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참으로 제 주인을 똑 닮은 말이었다.
으드드득!
지셀이 이를 악물었다. 과연 수십의 마법사들이 쏟아붓는 공격은 강력했다.
검은 기운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그의 입가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다크의 증폭으로 몸에는 으스러질 듯한 압력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래도 지셀은 웃으며 전진했다.
치고 빠지며 싸울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적들에게 필요한 건 압도적인 '공포'였다.
파아아악!
지옥과도 같은 마력의 폭풍 속에서, 지셀이 흑왕과 함께 뛰쳐나왔다.
그걸 본 사람들의 표정이 공포로 물들었다.
세차게 일렁거리는 검은 기운은 마치 웃음을 짓고 있는 듯했다.
두 눈에서 뻗어 나오는 붉은 빛이 마치 악마의 불꽃처럼 보였다.
검은 악마.
그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주, 죽여라."
포그렌 백작은 여전히 같은 말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서도 의문이 떠올랐다.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죽여야 할까?
아무리 초인이라도 저 정도로 두들겨 맞으면 죽어야 한다. 죽지는 않더라도 크게 다치고 지쳐 있어야 정상이었다.
저렇게 당당하게 서 있을 수는 없었다. 그게 상식이었다.
모두가 포그렌 백작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명령이 떨어졌음에도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들이 아무리 혹독한 훈련을 받은 정예병이라 하더라도, 본능에서 차오르는 공포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지셀이 움직였다.
파아아아앙!
"으아아아악!"
가장 먼저 포그렌 백작을 둘러싸고 지키던 병사들을 뚫었다.
앞을 막고 있던 병사들은 감히 창도 한 번 내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갈려 나갔다.
"마, 막아라!"
그 뒤에 포그렌 백작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검을 휘둘렀다.
공포에 휩싸였음에도 그들은 기사답게 움직였다. 눈앞에 다가온 검은 악마를 향해 푸른 마나를 힘껏 쏟아 내었다.
하지만 그 검에는 제대로 된 의지가 담기지 않았다. 그저 공포에 짓눌린 발버둥과 같은 것이었다.
오랫동안 수련했던 기술은 온데간데없고, 시정잡배들이 휘두르는 칼질과 다를 게 없었다.
콰아아아아앙!
"크아아악!"
기사들은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내보이지 못한 채 허무하게 죽어 갔다.
콰앙! 콰아아앙!
지셀의 창이 휘둘러질 때마다 적들은 부평초처럼 쓸려 나갔다.
누가 이들을 보고 왕국 최강의 정예병들이라 하겠는가. 그들은 그저 가만히 서 있는 허수아비와 다를 게 없었다.
마력을 대부분 소모한 마법사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다가오는 지셀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기사들보다 의지가 약한 그들은 이미 포기한 상태였다.
지셀의 의도대로였다. 그 많은 마법사들이 지셀 한 사람에게 묶여 버리고 말았다.
"주, 죽여라... 어서...."
상식을 초월하는 그 힘에 포그렌 백작은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멍하니 서서 자신의 앞을 막은 아군들이 쓰러지는 걸 보고만 있었다.
히이이이이잉!
"비켜라!"
천둥 같은 지셀의 외침에 다들 자신도 모르게 물러나 버리고 말았다. 전의를 상실한 것이다.
두두두두두!
흑왕이 델파인군 사이로 난 길을 내달렸다. 포그렌 백작은 다가오는 지셀을 넋이 나간 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파악!
지셀의 창이 가볍게 휘둘러지며 포그렌 백작을 스쳐 지나갔다.
쿠웅!
몸뚱이만 남은 시체는 그대로 말 위에서 떨어졌다.
주변에 있던 자들은 어떠한 행동도 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외곽 쪽에서 아직도 비명을 지르며 싸우는 병사들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다그닥, 다그닥.
여유롭게 말머리를 돌려 다가온 지셀이 포그렌 백작의 머리를 창으로 찍어 들어 올렸다.
이제 승리 선언을 할 시간이다.
크게 외치려던 지셀이 멈칫했다.
"얘 이름이 뭐였지?"
급하게 오느라 제대로 된 정보를 받지 못했다. 뭔가 얼굴이 낯이 익긴 하지만, 전생에도 잠깐 봤던 거 같지만 영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지셀은 옆에서 무기를 든 채 달달 떨고 있는 병사에게 물었다.
"야."
"네? 네?"
"너희 지휘관이 누구였냐."
"포, 포그렌 백작님이십니다."
"그래. 이제 기억났네."
지셀이 씨익 웃으며 크게 외쳤다.
"포그렌 백작이 죽었다!"
마나가 실린 외침이 전장에 넓게 퍼졌다. 그걸 들은 펜리스 기동군도 똑같이 외쳤다.
"포그렌 백작이 죽었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항복하면 살려 주겠다!"
갑작스럽게 기습당해 정신도 없이 밀리던 병사들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자신들의 지휘관이 죽었다는 말에 진짜인지 확인하려 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시선이 지휘부가 있던 쪽으로 향했다.
병사들이 무기를 버리고 바닥에 엎드리고 있었다.
계기만 있다면 전장의 분위기는 금세 바뀌는 법이다. 어차피 학살당하고 있던 터라 사기도 바닥나 있었다. 델파인군 병사들은 너 나 할 거 없이 무기를 던져 버렸다.
마법사들도 냅다 바닥에 엎드렸다. 그들은 누구보다 개인적인 자들이라 항복에 거부감이 없었다.
몇몇 기사들만이 끝까지 버티며 분전했지만, 전부 펜리스 기동군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포그렌 백작의 곁을 지키던 한 기사가 물었다.
"우리가... 항복하면 어찌할 생각입니까."
지셀은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답했다.
"다들 왕국군으로 재편입될 것이다. 다시 공작가와 싸워야 하겠지만, 지금 여기서 죽는 것보단 낫지 않나."
"그, 그게 말이 됩니까?"
이제 공작가는 루타니아 왕국뿐만이 아니라 전 대륙의 공적이었다. 구원교가 엮이는 바람에 4대 교단까지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공작가와 관련된 자들도 모두 이교도로 찍힌 상태였다. 교단은 자신들의 권위를 위해서라도 전부 죽이려 할 터였다.
그러니 델파인군의 기사들과 병사들도 죽을 각오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상대가 용서해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지셀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내가 그렇게 하자고 하면 다 된다."
"...."
"공작가 병력을 줄이고 이쪽 병력이 늘어나는 건데 이득이잖아? 윗대가리들만 죽이면 되는데."
"...."
정말 파격적인 발언이었다. 다른 귀족들과 교단의 반발은 무시하겠다는 뜻이다.
그야말로 이기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였다.
어느새 검은 기운을 해제한 지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해? 덤빌 거면 빨리 덤비고, 항복할 거면 제대로 하고."
기사가 지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발악하던 자들은 이미 다 죽었다. 병사들 대부분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엎드려 있었다.
완벽한 패배였다. 이런 전투가 가능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기사가 지셀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단하십니다. 그 빠른 시간에 이곳까지 와서 우리를 기습하다니."
"내 장기가 추격, 기습, 섬멸이거든."
반박할 수가 없었다. 과연 소문대로의 실력이었다.
기사는 검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만약 공작가가 구원교와 엮이지 않았다면 그는 끝까지 공작가를 위해 싸웠을 것이다.
하지만 공작가는 이미 명분을 잃었다. 사교와 손을 잡고 죄 없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죽여왔다.
균열 사태의 주범이 구원교라는 걸 안 뒤로 기사들은 이미 회의감에 휩싸여 있었다. 충성의 대상을 잃은 이들은 지셀의 항복 권유에 쉽게 무너졌다.
상대를 완전히 제압한 지셀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꽤 많이 살아남았네. 아주 좋아."
무려 2만에 가까운 포로가 생겼다.
워낙 번개같이 급습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많이 살아남은 것이다.
이제 이들은 왕국군에 합류하여 공작가와 싸우는 데 힘을 보탤 될 것이다.
지셀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조금 무리하는 바람에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피를 몇 번이나 다시 삼켰는지 모른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 보여 줘야 했다.
그래야 모두가 자신을 두려워할 테니까 말이다.
지셀이 창을 높이 들며 외쳤다.
"이번에도 우리가 이겼다!"
"와아아아아!"
펜리스 기동군도 무기를 들고 함성을 내질렀다.
강행군으로 인해 무척 힘든 상태였지만 그 모든 피로를 싹 씻어 내는 선언이었다.
기동군이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지셀을 따랐던 이들이다. 이들의 자부심은 이제 단순한 사기로 치부할 일이 아니었다.
펜리스의 깃발 아래에는 패배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철의 의지를 지니게 되었다.
자신들이야말로 불패의 군대였으니.
* * *
모리스가 이끄는 왕국군이 패배하고 물러난 요새는 을씨년스러운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까악! 까악!
반쯤은 무너진 요새 근처에는 시체와 까마귀들이 가득했다.
점령에 성공한 포그렌 백작도 잠깐 쉬었다가 그냥 내버려두고 진군했기 때문이다.
사람이라고는 눈에 띄지 않는 황량한 공간에 누군가가 지팡이를 짚으며 나타났다.
"흘흘흘...."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허리가 굽은 노파.
바로 모리스가 애지중지하며 데리고 다니던 점쟁이 할멈이었다.
노파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혼자 중얼거렸다.
"모리스 이놈아.... 미신 좀 그만 믿어라.... 내 책임도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를 깍듯하게 모신 네놈 덕분에 생활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무언가 재미있다는 듯 혼자 웃던 노파가 다시 중얼거렸다.
"운도 좋은 녀석, 그 아이가 때맞춰 도착한 덕에 살았구나. 그것도 네 운명이겠지...."
툭. 툭. 툭.
지팡이를 짚고 요새 밖으로 나가던 노파가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노파는 어느새 걸음을 멈추었다.
"지셀 페르디움. 정말 대단하구나. 정말 대단해. 이곳 루타니아 왕국을 싸움의 중심으로 만들고 원하는 대로 전쟁을 이끌어 가다니."
노파는 듣는 사람도 없는데 계속 혼자 중얼거렸다.
"운명을 이 정도로 개척해 낼 줄이야. 천 년 동안 너만 한 인물이 없었다. '우리'도 예상하지 못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실로 지셀이란 존재는 폭풍과도 같았다. 오랫동안 힘을 쌓아 오며 준비했던 구원교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을 정도였다.
미약하고 미약한 존재였던, 가난한 변경백의 후계자가. 이제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존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또한 너의 노력과 역량 덕분이겠지. 끊임없이 정진하는 너의 열정과 무너지지 않는 그 단단한 책임감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구나."
다시 무언가 생각하던 노파가 방긋 미소 지었다.
"에레네스가 너부터 만날 줄이야. 그만큼 네가 이 전쟁의 중심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겠지. 이번에 도착한 아이도 널 만날 테고 말이다."
노파의 몸이 점점 빛으로 변해 흩어지기 시작했다.
점점이 퍼져 가던 빛의 입자 속에서 언뜻 흐린 형상이 비쳤다. 거대한 날개를 가진 여인의 형상이었다.
빛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그 모습이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녀에게서 퍼져 나가는 위엄만큼은 세상을 짓누를 정도였다.
빛 속에서 희미한 음성이 다시 울렸다.
"지셀, 그 아이가 도움이 됐으면 좋겠구나.... '우리'는 더 이상...."
여인의 마지막 말은 허공에 흩어졌다.
빛으로 이루어졌던 그녀의 모습이 흩날리듯 사라진 것처럼.
473화 이쯤이면 알았을 텐데? (1)
펜리스 기동군의 나머지 1만이 전장에 도착했다. 그들은 싸우느라 지친 동료들을 대신해 전장을 정리하고 포로들을 챙겼다.
후속 부대와 함께 끌려온 사제 몇 명도 지친 몸을 이끌고 부상병들을 치료했다.
지셀은 이번 전투에서도 가장 앞장서서 싸운 기사들을 따로 불러 치하했다. 펜리스 기사단 중 200여 명이 기동군에 참여한 상태였다.
"좋아, 다들 수고했다. 오늘 하루는 푹 쉬고 내일 다시 이동한다."
고든이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갑니까! 다른 쪽으로 싸우러 가나요?"
"바로 다른 전장으로 이동하기에는 늦었다. 왕국군 총사령관부터 만나서 군을 새로 편제한 뒤에 북부군과 합류할 계획이다."
"알겠습니다!"
"오늘 경계는 후속 부대에 맡기고 전투에 참여한 자들은 술과 고기를 배불리 먹도록."
"와아아아아!"
다들 함성을 내질렀다. 며칠간 빠르게 이동하느라 가루만 먹었다. 다들 오랜만에 음식다운 음식을 먹는 것이었다.
델파인군은 수가 3만이나 되었던 만큼 보유한 식량도 꽤 되었다. 대부분 왕국군에 넘길 것이지만, 하루 정도 배불리 먹을 만한 여유는 있었다.
오랜만에 술을 먹고 취한 기사 몇몇이 싸움박질을 했다.
평소 군율이 엄격한 펜리스군에서는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셀은 혀를 몇 번 차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풀어 줄 때는 확실하게 풀어 주는 게 맞으니까.
1만의 후속 부대가 철저하게 경계를 서고 있었고, 주변의 위협 또한 완전하게 처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하루를 푹 쉰 펜리스 기동군은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다크, 영주들의 군대가 다시 규합해 방어선을 만들었을 거야. 그들도 우리가 지금 도착한 줄 모를 테니까. 병사들이 많이 모인 곳을 찾아 봐."
― 알겠어.
다크가 먼저 출발해 정찰에 나섰다. 펜리스 기동군은 포로들 때문에 조금 느릿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탈출에 성공한 모리스는 인근 영주들과 연합군을 규합해 다시 방어선을 구축한 상태였다.
모인 병력은 겨우 8천여 명 정도였지만 요새를 끼고 방비를 단단히 해서 버텨 볼 생각이었다.
모리스는 모두를 모아 놓고 주먹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비록 우리의 병력은 이곳으로 진군하는 델파인군보다 적지만! 여신의 은총으로 모리아나 교단의 '성녀' 파르니엘 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와아아아아!"
병사들은 힘껏 환호했다.
그들도 지금 남부 전선이 괴멸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델파인군이 이곳으로 진격 중이다.
공포에 떨던 그들에게 초인이자 성녀인 파르니엘의 존재는 마지막 희망과도 같았다.
모리스가 자신의 이름을 팔아 사기를 올리려는 것을 파르니엘도 뻔히 알았지만 순순히 받아 주었다. 성녀의 업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었으니까.
쿠웅!
그녀가 거대한 메이스를 땅에 찍으며 말했다.
"모리아나의 이름으로 구원교는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승리할 것입니다."
"와아아아아!"
병사들이 다시 환호했다. 파르니엘의 거대한 체구와 강력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이는 근육은 무한한 신뢰감을 주었다.
평소였다면 저게 무슨 성녀냐고 할 테지만 전쟁터에서만큼은 정말 믿음직함 그 자체였다.
모리스가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히야, 초인이 합류하니 든든하구먼. 우리 할멈도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점쟁이 할멈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구해 오지 못한 게 너무나 안타까웠다.
"할멈, 어떻게든 살아 있어야 해. 내가 남부 전선을 다시 탈환해서 구해 줄게."
모리스가 파르니엘에게 안 들리도록 작게 중얼거렸다.
그들이 그렇게 사기를 끌어올리고 있을 때, 정찰병이 달려와 외쳤다.
"인근에 군대가 나타났습니다!"
"드디어 델파인군이 도착했구나! 모두 전투를 준비하라!"
"아닙니다!"
"그럼 뭔데! 연합군이 또 왔어?"
"부, 북부군의 깃발을 들고 있습니다!"
그 말에 모리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북부군은 여기서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지금 다른 군단과 싸우고 있을 텐데 어떻게 이곳에 왔다는 말인가?
적들의 기만 전략일 수도 있다. 모리스는 전군에 전투 준비 명령을 내리고 성벽 위로 올라갔다.
과연 저 멀리서 수만의 대군이 몰려오는 게 보였다. 진짜로 북부군과 펜리스군의 깃발을 휘날리고 있었다.
"지, 진짜인가? 왜 여기에 북부군이?"
아무리 생각해도 올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설사 왔다 해도 이쪽으로 진군하고 있던 델파인군과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긴장하면서 보고 있는데 상대 진영에서 누군가 앞서 달려왔다.
검은 말을 탄 자의 모습을 확인한 모리스가 환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조카가 왔잖아?"
성녀가 합류했다 해도 델파인군을 상대하기는 어려웠다. 병력뿐만이 아니라 마법사의 수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럴 때 강력한 북부군이 왔으니 모리스로서는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어서 성문을 열어라! 아니, 내가 나가겠다!"
모리스는 측근들과 함께 바로 지셀을 마중 나갔다.
"으하하하! 우리 조카가 왔구나!"
"...살아 계셨군요. 다행입니다."
반갑게 맞이하는 모리스의 인사에 지셀은 담담하게 말했다.
만약 모리스가 죽었다면 북부군을 제외한 모든 군대의 사기가 떨어졌을 것이다.
총사령관이란 지위는 그런 것이니까.
모리스는 놀랍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그런데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델파인군이 이쪽으로 오고 있을 텐데 못 만난 거야?"
"그쪽은 이미 전멸했습니다."
"뭐? 지, 진짜?"
"살아남은 이들은 포로로 잡아 왔습니다."
지셀의 말에 모리스는 다가온 군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정말 상당한 숫자가 무장이 해제된 채 서 있었다.
"이, 이럴 수가.... 도대체 어떻게...."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패퇴시켰던 델파인군을 이렇게 쉽게 처리하고 포로까지 끌고 오다니.
펜리스 백작이야말로 이 난세를 끝낼 영웅이라는 소문이 괜히 난 게 아니었다.
"너, 저, 정말 대단하구나...."
모리스는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대단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이놈만 있으면 정말 전쟁에서 승리할 거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 할멈한테 더 자세히 물어볼걸.'
본인 점만 보느라 지셀에 관한 걸 거의 안 물어봤다. 그게 참 안타까웠다.
한참을 넋이 나가 있던 모리스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그, 그런데 포로가 너무 많은 거 같은데... 지금 우리는 이 많은 포로를 감당할 수가 없다."
얼핏 봐도 1만은 그냥 넘어 보였다. 아무리 무장이 해제됐다고는 하지만 순순히 따라온 게 놀라울 지경이었다.
아마 다른 군대였다면 진작에 다시 덤벼들었을 터. 상대가 지셀이라 얌전히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모리스의 걱정에 지셀이 피식 웃었다.
"그냥 다 왕국군으로 데려다 쓰세요. 새로 편제하면 될 거 아닙니까?"
"어... 그러고 싶은데 우리보다 수가 더 많아서 통제가 될지...."
"왕국군 총사령관께서 그 정도도 못 해요?"
그러자 모리스가 발끈했다.
"내가 못 한다는 게 아니고! 내 밑에 있는 애들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그러는 거지!"
"며칠 같이 먹고 자면 괜찮아질 겁니다. 그러면 오늘 바로 다 데리고 가시는 겁니다?"
"조, 좋지. 그, 그런데 나는 괜찮은데 다른 귀족들하고 교단에서 뭐라고 할지...."
공작가가 이미 이단으로 찍혔기에 그 수하들도 모두 죽여야 한다고 암묵적으로 합의가 된 상태다. 살려 뒀다가 무수한 교단의 항의를 받을 게 걱정이 되었다.
그러자 지셀이 다시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왕국군 총사령관께서 그 정도도 못 해요?"
"하, 하지. 내가 다 설득하지. 내가 하자고 하면 다 되지...."
솔직히 못 한다. 브랜포드 후작이야 그냥 넘어가더라도 교단의 주교들은 무척이나 피곤하게 자신을 괴롭힐 것이다.
재수 없으면 자신도 이단으로 찍힐 수가 있었다.
모리스가 머리를 굴려 다른 핑계를 댔다.
"시, 식량이 충분할까 모르겠네."
"델파인군이 가지고 있던 것도 전부 챙겨 왔습니다. 부족하면 제가 펜리스와 페르디움에 전해 바로 채워 드리겠습니다."
남부를 제외하고는 왕국 전역에 도로가 깔린 지 오래였다. 며칠만 있으면 식량이 잔뜩 쌓일 것이다.
'하 씨, 어떻게 하지? 창피해지기 싫은데.'
미신 맹신자 주제에 체면은 또 엄청나게 따지는 모순적인 남자가 모리스다. 그가 온 힘을 다해 두뇌를 굴리다 말했다.
"마, 맞다! 나는 다 좋은데! 여기에 지금 성녀가 와 계시거든."
"성녀요?"
"그래. 초인이야, 초인! 성녀를 만나서 내가 겨우 살아난 거야. 추격군이 왔을 때 딱 나타났거든! 캬, 진짜 하늘의 도우심이었지. 점쟁이 할멈이 참 용하다니까...."
모리스가 주절주절 자신이 겪은 일을 얘기했다. 하지만 지셀의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성녀인데 초인이라고요?"
"그래, 그렇다니까! 그런데 그분이 반대하시지 않을지 모르겠네... 아무리 나라도 성녀님 의견에 반대하기는 조금 곤란하잖아?"
성녀한테 한 수 접어 주는 건 창피한 게 아니다. 그게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리스의 말을 들은 지셀은 의심스러워하며 미간을 좁혔다.
자신이 아는 진짜 성녀는 하나뿐이다. 피오테...가 아니라 바로 전생에 대륙 7강의 일원이자 전쟁의 성녀로 불렸던 자.
그 성녀가 지금 루타니아 왕국에 왔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된다. 성녀가 이곳에 올 이유가 없었다.
"진짜... 성녀가 맞습니까?"
"그래! 진짜 교단이 인정한 성녀!"
모리스는 호들갑을 떨며 지셀을 데리고 갔다. 성녀 일행도 북부군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성문 앞에 나와 있었기에 바로 만날 수 있었다.
"성녀님, 이 친구가 요새 소문이 자자한 펜리스 백작입니다. 제 조카나 마찬가지인 친구죠."
"반갑습니다. 모리아나 교단의 성녀, 파르니엘입니다."
파르니엘은 담담하게 인사했지만 지셀은 그러지 못했다.
'진짜... 성녀가 이곳으로 오다니....'
어찌 저 체격과 위압감을 잊으랴. 지셀 또한 몇 번이나 그녀와 힘을 합쳐 싸워 봤기에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어째서 이곳으로 온 거지?'
성녀는 지금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다른 자를 막으러 가야 했다.
바로 이 혼란을 틈타 미친 짓을 벌이는, 또 다른 대륙 7강의 일원인 '망자들의 주인'을 말이다.
'성녀가 이곳에 왔으니... 그 미친놈이 더 날뛰겠군.'
사실 성녀가 있기에 지셀은 그에 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전생에 그들이 싸웠던 곳은 루타니아 왕국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녀가 이곳으로 온 이상 '망자들의 주인'은 방해받지 않고 다른 왕국의 세력을 갉아먹을 것이다.
그 결과 구원교가 다시 득세할 수 있는 틈이 생겨날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이것도 내가 만든 결과니까.'
전생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성녀가 루타니아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었다. 구원교는 정체를 숨기고 있었고 공작가는 이미 왕국을 모두 장악했을 테니까.
'내가 활약할수록 미래는 계속 바뀔 수밖에 없다.'
이곳 루타니아 왕국의 일부터 빨리 끝내려고 연합군을 끌어들인 건 자신이다.
그 덕분에 구원교의 고위 사제들이 이곳으로 더 많이 몰려들었다.
전략적으로는 틀리지 않는 판단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구원교와 공작가 세력을 최대한 많이 줄이는 게 목표였으니까.
그런데 성녀 또한 그걸 알고 나름 한 손을 거들기 위해 온 모양이었다.
지셀은 마음을 편히 먹었다. 어차피 미래를 바꾸기 위해 시작한 일이 아닌가. 그러니 미래가 바뀌는 건 당연한 일이다.
'차라리 성녀와 힘을 합쳐 루타니아 내부부터 빨리 정리하는 게 낫겠군.'
전략은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서 수정하는 게 맞다. 초인이 부족한 친왕파 진영에는 오히려 더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지셀이 그런 생각 때문에 잠시 뜸을 들이자 파르니엘이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파르니엘이 팔에 살짝 힘을 주었다. 자신의 외모만 보고 성녀라는 말을 못 믿는 자들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힘으로 신앙을 보여 주는 게 그녀의 특기였다.
지셀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교단의 성녀를 뵈어 영광입니다. 펜리스 백작입니다."
이미 성녀를 알고 있었기에 지셀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제야 파르니엘도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는 동안 백작님의 소문을 많이 들었습니다. 왕국을 구할 영웅이자 북부의 최강자라고요. 정말 대단하시더군요."
"과찬입니다. 이번에 총사령관님을 구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구원교의 고위 사제까지 처리하고 말이지요."
모리스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크게 웃었다.
"이렇게 두 사람이 함께 있으니 내 마음이 아주 든든합니다! 자, 조촐하지만 작은 연회라도 열 테니...."
모리스의 말은 중간에 끊겼다. 파르니엘이 근육을 꿈틀거리며 지셀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기 때문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녀를 지셀이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파르니엘이 메이스를 꽉 쥐며 웃었다.
"혹시 백작님께서는 성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고 계십니까?"
스르릉.
지셀도 천천히 검을 뽑으며 웃었다.
"뭇사람들 사이에 도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습니다.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이신다고...."
제멋대로 움직이고 나서 그저 여신의 뜻이라는 말로 끝내는 게 성녀다. 그냥 말이 안 통한다고 보면 된다.
여기에 논리를 요구하는 순간, 얻어맞는다.
파르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 마음이 백작님을 도와도 되는지 묻고 있습니다. 백작님을 보니 무언가 껄끄러워서 말입니다. 백작님의 진짜 '힘'을 봐야겠습니다."
파르니엘은 에레네스보다 더 구원교의 기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신성력은 구원교의 기운과 완전히 상극의 기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도 지셀을 만나자마자 무척이나 찝찝한 기분을 느꼈다.
찝찝하다면 확실하게 확인해야 한다. 눈앞에 있는 자가 '악'인지 말이다.
쿠웅!
파르니엘이 한 걸음 더 지셀에게 다가서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이 또한 여신의 뜻이겠죠."
그 모습을 본 모리스는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분위기가 아주 험악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왜 둘이 만나자마자 갑자기 이런 상황이 됐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셀이 굽힐 놈도 아니었다. 말려도 들을 놈도 아니다. 그런 놈이 아니라는 건 지금까지 충분히 봐 왔다.
저 새끼 이미 붙기도 전에 칼 뽑았다.
'할멈이 있어야 했는데.'
점쟁이 노파가 없으니 어찌해야 할지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정말 울고 싶었다.
* * *
#번외편: 루카스의 연애 상담 ― 실연한 어떤 기사를 위한 위로의 이야기
기사들의 술자리에서 일어난 싸움은 루카스의 헛소리에서 시작되었다.
지셀이 기사들을 치하하며 술과 고기를 베풀자 다들 무척이나 신나 했다. 한쪽에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 있는 기사 하나만 빼고.
지셀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뭐야, 쟤는 표정이 왜 저래? 실연당한 것처럼."
바람처럼 몸이 잽싸 '윈드'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기사는 그 말에 더욱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루카스가 윈드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웃었다.
"진짜 실연당했대요. 푸하하하!"
전쟁 중이지만 북부군의 화살 배송은 여전히 성황리에 운영 중이었다. 북부군이 빠진 자리는 영지에 남은 병사들과 새로 고용된 일꾼, 용병들이 대신하고 있었다.
그 화살 배송이 이번에는 안 좋은 쪽으로 작용했다. 윈드가 얼마 전에 화살 배송으로 이별 편지를 받은 것이었다.
"으음...."
지셀은 팔짱을 끼고 고민했다. 사실 그도 연애는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조언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담백하지만 진심을 담아 위로의 말을 건넸다.
"힘내라. 앞으로 더 좋은 일이 있을 거라 믿는다."
다른 건 몰라도 연애 상담은 쥐약이기에 지셀은 후다닥 자리를 떠 버렸다.
술과 고기가 차려진 뒤, 조금 취한 루카스가 윈드의 옆에 앉아 입을 열었다.
"내가 실연당했던 얘기를 해 줄게. 연애 상담 같은 거야."
"아, 됐어. 하지 마. 듣기 싫어."
"나도 여기 오기 전에 정말 사랑했던 여자가 있었지."
루카스가 남의 말은 듣지도 않고 혼자 아련한 눈빛으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결혼까지 약속했던 사이였어. 하지만 그 당시에 난 가진 게 없었어. 그러자 그 여자가 말했지. 괜찮다고, 자기네 집에서 같이 살면 된다고."
다들 루카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사이였는데 왜 헤어졌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루카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난 그게 정말 고마웠어.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지. 그래서 자신 있게 말했어. 진심으로 우리 엄마처럼 모시겠다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거든.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됐어."
고든이 옆에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게 왜 문제가 돼? 자기 엄마처럼 모시겠다고 하면 더 좋은 거 아니야? 여자도 좋아했을 거 같은데. 그런 남자 흔치 않잖아."
루카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래, 그 여자도 처음에는 좋아했지."
"그런데 왜?"
"내가 진짜 우리 엄마처럼 대했거든."
"...???"
"배고프면 밥 차려 달라고 하고 집에서 속옷만 입고 다니고 용돈도 달라고 하고 음식 투정도 하고 잘 때 깨우면 짜증도 내고.... 아무튼 난 우리 엄마한테 그런다고."
"...."
"그래서 결국 쫓겨났어. 아, 나는 그분을 우리 엄마처럼 대했는데 그분은 우리 엄마처럼 날 대해주지 않더라고."
'미친 새끼인가?'
다들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몇몇 여기사들은 생각했다.
'엄마처럼 모시겠다는 놈 있으면 조심해야겠다. 함정이 있었네. 그냥 예의를 지키라고 해야지.'
루카스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뒤에 이런 일 저런 일 하다가 펜리스까지 온 거지. 시간 지나면 다 괜찮아지더라고. 어때? 내 실연 이야기가 조금 도움이 됐나?"
눈곱만큼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옆에 있던 기사들이 모두 일어나 루카스를 밟기 시작했다.
"억! 싯팔! 뭐야! 왜 그래!"
펜리스 기사들 중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나다고 한 루카스도 여러 명의 협공은 당해 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루카스가 맞는 동안 윈드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지만 먹먹한 가슴은 좀처럼 시원하게 뚫리는 거 같지 않았다.
'....'
누구나 한 번쯤 실연을 겪는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아픔은 자신만이 아는 법이다.
섣부른 위로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루카스의 엉터리 조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사랑한 만큼 아파하다 보면 분명 괜찮아지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 믿는다.
그러니 지금은, 실컷 아픔에 취해도 괜찮을 것이다. 지칠 때까지 땀을 빼 보는 것도, 아니면 그저 이렇게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자신의 별명과 같이, 지금의 아픔도 바람처럼 흘러갈 것이기에.
그리고 영주의 말처럼, 앞으로 더 좋은 일이 가득할 것이 분명하기에.
그 모든 건 내일 다시 생각해 봐도 될 것이다.
지금은 개소리를 지껄인 루카스를 패는 게 우선이다.
"후우...."
크게 숨을 내뱉은 윈드는 바로 달려가 다른 이들과 함께 루카스를 밟았다. 일단 루카스라도 이렇게 밟으면 속이 좀 풀릴 거 같았다.
퍽! 퍼억! 퍽!
찰진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끄아아악! 이 새끼들아! 그만하라고!"
밤하늘에 루카스의 비명이 길게 울려 퍼졌다.
474화 이쯤이면 알았을 텐데? (2)
지셀이 살짝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여기는 장소가 안 좋으니 밖으로 나가시죠."
이미 파르니엘이 기세를 뿜어낼 때부터 싸워야 함을 직감한 지셀이다. 그렇기에 검을 뽑아 든 것이다.
전생에도 그녀는 마음 가는 대로 행동했다. 하지만 그 결과가 딱히 나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어쨌든 그녀에게는 '악'을 처단하겠다는 신념이 있었으니 말이다.
지셀의 제안에 따라 두 사람은 밖으로 나섰다. 당연히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바깥에서 대기하던 펜리스 기동군은 언제라도 달려올 듯 고삐를 잡았고, 파르니엘을 따라온 사제들과 신전 기사들도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 한번 해봅시다."
파아악!
지셀이 마나를 끌어올리자 그에게서 풍기는 어두운 기운이 더 짙어졌다.
그걸 본 파르니엘이 눈을 가늘게 떴다.
"상당히 수상스러운 기운입니다."
"어쩌다 보니 말입니다."
다크 덕분에 힘을 증폭할 수 있게 된 건 좋은데 이런 상황이 참 피곤하다.
그래도 에레네스와 파르니엘을 제외한다면 이 정도로 반응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이 워낙 이 기운에 민감하다 보니 일어나는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파르니엘은 에레네스와 달랐다. 싸우다 보면 지셀의 힘이 구원교 놈들의 힘과는 다름을 알 것이다.
신성력이란 그런 것이니까.
쿠웅!
파르니엘이 메이스를 들고 다가섰다.
"최선을 다하셔야 할 겁니다."
파아아악!
갑자기 그녀의 메이스가 지셀의 머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마치 산사태가 일어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공격을 한 대라도 맞으면 사람은 죽는다. 그런데도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콰아아아앙!
지셀의 검이 위로 들리며 파르니엘의 메이스를 막았다. 하지만 그 힘을 그대로 받아 내는 건 무식한 짓이다.
카가가가각!
지셀의 검과 몸이 함께 돌아가며 힘을 흘려 보냈다. 마치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검이 앞으로 뻗어 나갔다.
파악!
파르니엘의 볼에 상처가 나며 피가 솟았다.
지셀의 눈빛은 섬뜩할 정도로 무감정했다. 이쪽도 상대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각오가 없이는 상대에게 상처조차 주기 힘들 테니까.
부우웅!
파르니엘은 얼굴에 검날이 스치자마자 다시 메이스를 휘둘렀다. 맞으면 지셀의 옆구리는 그대로 박살이 날 것이다.
콰앙!
지셀은 검으로 공격을 막으며 뒤로 물러났다.
신력을 타고난 자답게 파르니엘의 힘은 엄청났다. 그러니 맞부딪칠 때마다 힘을 해소해야 했다.
파르니엘이 다시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유령 같은 움직임이구나.'
자신의 힘이 제대로 통하지 않고 있었다. 상대의 기술이 한 수 위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그렇다면 압도적인 힘과 속도로 눌러 버리면 그만이다.
뿌드드득.
그녀의 근육이 부풀어 오르며 힘줄이 솟아났다. 몸은 희미한 빛으로 감싸이기 시작했다.
곧 파르니엘이 엄청난 속도로 지셀에게 접근해 메이스를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메이스는 애꿎은 땅을 내리쳤다. 하지만 보고 있는 사람들은 지셀이 피했다고 안심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내리찍은 부분의 땅이 피를 토하듯 흙먼지를 뿜어내며 깊게 파였기 때문이다. 마치 운석이 떨어진 듯했다.
콰앙! 콰앙! 콰아앙!
대지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울려 댔다. 벌레를 잡는 것처럼 내리친 메이스는 곳곳에 거대한 구덩이를 만들어 냈다.
모든 공격을 피한 지셀도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후, 진짜 힘 하나는 무식할 정도로 대단하군. 엘레나도 저렇게 돼야 할 텐데.'
파르니엘은 대륙 7강 중 싸움 방식이 가장 터프했다. 그건 모두가 인정하는 바였다.
어쩔 수 없이 지셀은 힘을 더 끌어올렸다.
파아아악!
검은 기운이 일렁이며 피어올랐다. 지셀은 3개의 코어를 활성화하고 빛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콰아아앙!
파르니엘의 메이스가 다시 땅을 내리친 순간, 지셀이 번개처럼 그녀의 팔을 베었다.
카가각!
팔 하나는 자를 정도의 힘이 실린 공격이었다. 그런데 철판이 갈리는 듯한 소리가 나며 얇은 실선만 생겼을 뿐이었다.
'역시.'
지셀은 혀를 차며 물러났다. 성녀의 무서운 점은 바로 이 방어력이었다.
어지간히 강한 기운이 아니면 신성력으로 무장된 몸에는 제대로 상처를 줄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 방어력을 믿고 공격할 때마다 엄청난 힘을 실어 싸울 수 있는 것이다.
'후,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군.'
성녀의 무서운 점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신성력을 활용해 지칠 줄 모르는 체력 또한 강력한 무기였다.
성녀는 몇 날 며칠이라도 자가 회복을 하며 쉬지 않고 싸울 수 있었다. 그렇기에 온갖 시체들을 이끌고 다니는 '망자들의 주인'과 싸울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언제나 구원교의 사제들을 바퀴벌레라 칭하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그 말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무서워서 파르니엘 앞에서 대놓고 말하지 못할 뿐이었다.
콰앙! 콰앙! 콰아앙!
파르니엘은 엄청난 힘과 속도로 계속 메이스를 휘둘렀다. 하지만 뭐 하나 제대로 맞지 않았다.
'대단하구나. 어찌 이런 기술을....'
자신도 전투 사제로서 어릴 때부터 꾸준하게 기술을 익혀 왔다.
전쟁의 성녀라는 신분상 게으르게 수련하지도 않았다. 언제나 여신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정진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기술만으로도 자신을 뛰어넘는 기사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타고난 신력과 체구에 더해 뛰어난 기술까지. 자신이야말로 전투를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참으로 여신이 내려 주신 축복이었다.
'그런 나를 뛰어넘을 정도라니.'
그녀 또한 성녀지만 전투의 길을 걷는 자.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저 경지에 들 수 있음을 알기에 경외감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전투가 이렇게....'
교단에서만 살아온 그녀는 그간 자신과 동등한 상대를 만난 적이 없었다. 모두가 그녀를 우러러보고 무릎을 꿇었다.
구원교의 사제들도 약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쓰는 기운이 아무리 강해도 기술적으로는 자신보다 한 수 아래였다.
친구조차 없었다. 그저 경전을 읽고 기도하며 수련을 하는 게 전부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언제나 외롭고 고독한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즐거울 줄이야!'
파르니엘은 난생처음으로 전투가 재미있다고 느꼈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상대와 어울리고 싶었다.
뿌드득!
파르니엘이 웃으며 이를 꽉 깨물었다.
콰아아아아앙!
메이스가 땅에 부딪힐 때마다 큰 폭발이 일어나며 땅이 뒤집어졌다.
파르니엘이 휘두른 메이스는 이제 공간까지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지셀은 그 모습을 보고 마주 웃었다.
'드디어 재미가 붙었나 보군.'
전생에도 이러했다. 그녀는 전투를 거듭할수록 전투 그 자체에 희열을 느끼기 시작했다. 대륙 7강을 비롯한 강한 상대들을 만날 때마다 말이다.
이것이 전쟁의 여신을 모시는 성녀의 진짜 모습이었다.
'나도 조금 더 어울려 볼까.'
파아악!
지셀의 몸이 완전히 검은 기운으로 둘러싸였다.
그 또한 이런 전투의 열기를 좋아한다. 싸움을 싫어했다면 용병왕의 자리에 오를 리가 없었다.
드디어 지셀의 검이 파르니엘의 메이스와 맞닿았다.
콰아아아아앙!
지셀의 마나와 파르니엘의 신성력이 맞부딪치자 강렬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함께 터져 나온 빛 때문에 구경하던 사람들이 모두 눈을 질끈 감았다.
콰앙! 콰앙! 콰아앙!
두 사람의 싸움은 더욱더 격렬해졌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몇 번이나 뒤로 물러났다.
파르니엘이 희열에 찬 표정으로 외쳤다.
"펜리스 백작! 정말 대단하구나!"
"알고 있어."
콰아아아앙!
두 사람은 마음껏 자신의 힘과 기술을 뽐냈다.
증폭을 오랫동안 쓸 수 없는 지셀은 부족한 힘을 기술로 메우며 전투를 이끌어 갔다.
두 사람의 전투가 이어질수록 모리스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가셨다.
그는 성녀가 합류한 뒤로 무척이나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거기에 지셀이 이곳으로 진군하던 델파인군까지 괴멸시켰다는 말을 듣자 하늘을 날 거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런데 왜 둘이 싸우냐고!'
지셀이야 원래 꼴통으로 유명했으니 그럴 수야 있다. 그런데 듬직했던 성녀도 그에 못지않은 꼴통일 줄이야!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대던 그가 옆에 있는 사제에게 말했다.
성녀를 따르는 사제단을 이끄는 자였다.
"저기, 성녀 좀 말려 보시오. 이러다가 진짜 누구 하나 죽겠소이다."
사제는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성녀께서 행하시는 바는 여신의 뜻과 같습니다."
괜히 성녀가 여신의 대리자라 불리는 게 아니다. 하자고 하는 건 말릴 수 없다. 솔직히 말려도 말 안 듣는다.
답답한 소리에 모리스가 성을 내었다.
"아니! 뭔 여신의 뜻이야! 적도 아닌데 왜 저렇게 열을 내면서 싸우냐고! 그냥 말리면 되잖아!"
"그게 다 여신의 뜻입니다."
"에라이! 그러면 우리 점쟁이 할멈의 말도 여신의 뜻이다!"
"후, 후작님! 지, 지금 그건 위험한 발언입니다! 이단 심문에 들어갈 수 있는...."
성녀가 무서운 거지, 사제들은 안 무섭다. 성녀 앞이라 몸을 사린 거지, 모리스는 원래 그렇게 막 살아왔다.
"여기가 교국이야? 여기 루타니아 왕국이야! 나 이 나라 총사령관이라고! 이 동네 사제들도 나한테는 한 수 접어 주는 거 몰라?"
"아무리 그래도 어찌 점쟁이 따위를 여신께 비하십니까!"
"아, 몰라! 빨리 말려! 성녀님은 뇌까지 근육으로 되셨냐고!"
"어허! 말씀이 너무 심하십니다!"
"심하긴 뭐가 심해! 너희들이 더 심해!"
싸움을 말리기는커녕 모리스와 사제들의 말싸움이 추가되었다.
주변에 있던 지휘관들과 병사들도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쪽은 성녀고 한쪽은 북부군 사령관이다. 두 사람이 싸워 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건 그들이 보기에도 뻔했다.
그 불안감이 전염되자 요새 전체가 술렁거렸다.
펜리스의 기사들은 정말 뛰쳐나가려는 듯 몸을 몇 번이나 움찔거렸고 말들까지 긴장한 채 투레질을 했다.
모리스가 이제는 사제의 멱살을 잡고 외쳤다.
"젠장! 이게 도와주러 온 거야? 이러다가 진짜 다 죽어! 저쪽 안 보여? 쟤네가 왕국 최강의 군대라고!"
모리스의 외침에 사제가 힐끗 고개를 돌려 펜리스 기동군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정말 당장이라도 달려올 것처럼 험악한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저 많은 수가 달려들면 자신들은 다 죽는다.
자신들이 죽는 것까지 여신의 뜻이라고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원래 사람 마음이란 게 다 그렇다.
"아, 알겠습니다. 저희가 한번 말려 보겠습니다."
파르니엘을 말리는 방법이 하나 있기는 했다. 자주 쓸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녀를 따라왔던 사제들과 신전 기사들은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성녀가 더 눈이 돌아가기 전에 말려야 한다.
"성녀니이이이이임! 이제 그만하십시오오오오오오!"
그들은 동시에 달려가 파르니엘의 주변에 엎드렸다.
지셀을 공격하던 파르니엘이 메이스를 멈췄다. 여기서 온 힘을 다해 내려치면 주변에 있는 사제들은 아예 산산조각이 나 버릴 것이다.
이미 그녀 주변의 땅도 모두 박살이 나 있었으니까.
그녀가 공격을 멈추자 지셀도 뒤로 물러나며 웃었다.
"이쯤에서 그만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나는 아직 몸이 덜 풀려서 말이야."
"끝까지 가면 둘 중 하나는 죽는다."
"그 또한 여신의 뜻이라면 어쩔 수 없지."
"적당히 해. 내가 구원교와 상관없다는 건 이쯤이면 알았을 텐데?"
"...."
파르니엘은 입술을 실룩거렸다. 상대의 말이 옳았다.
지셀의 힘은 구원교의 기운과 비슷하지만 달랐다. 그간 구원교의 사제들과 계속 싸워 왔기에 알 수가 있다.
신성력과 상극인 힘이니만큼 그녀는 지셀의 힘이 무언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싸우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계속 밀어붙였던 것이다.
지셀이 기운을 가라앉히며 말을 이었다.
"우리 둘 중 하나라도 죽으면 구원교가 좋아할 거야. 그게 여신의 뜻인가?"
"...."
"분위기도 안 좋으니 이쯤 하지. 더 하겠다면 나도 끝장을 볼 수밖에 없다."
지셀이 차가운 눈빛으로 파르니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힘이 필요하긴 하지만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어쩔 수 없었다.
온 힘을 다해서 최대한 빠르게 처리하는 수밖에.
"푸우...."
잠시 머뭇거리던 파르니엘은 아쉬운 숨을 내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다들 불안한 눈빛으로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더 했다가는 정말 큰 사달이 날 것이다.
그전에 자신을 말리러 온 사제단 일원들은 다 죽어 나자빠질 것이고.
그건 정말 구원교가 기뻐할 일이다. 그런 짓을 저지를 수는 없었다.
"알겠다.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하도록 하지."
"앞으로 신나게 싸울 일이 많을 거야. 강한 놈들은 많거든."
"그 또한 여신께서 인도하시겠지. 기대하겠다."
파르니엘은 아쉬움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원교와 손을 잡은 귀족들은 많았다. 뛰어난 기사들과 초인들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 구원교의 고위 사제들까지 포함하면 정말 죽어라 싸울 일만 남았다.
방금 싸운 상대처럼 재미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싸움을 멈추자 겨우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바닥에 엎드린 사제단 일원들도 죽었다 살아났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리스가 다가와 다행이라는 듯이 말했다.
"휴, 내 간이 떨어질 거 같으니까 아군끼리 싸우지는 맙시다. 일단 어서 들어갑시다. 어이! 포로들도 챙겨라! 지셀, 포로에 관한 건 전략 회의부터 하고 다시 얘기하자."
대기하던 북부군들은 그제야 요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한바탕 소란이 끝나고 겨우 상황이 정리되자, 모리스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럴 때는 빨리 화제를 돌려야 한다. 그는 지셀과 파르니엘, 그리고 남은 지휘관들과 참모들을 모았다.
실세는 지셀과 파르니엘이지만, 어쨌든 그가 총사령관이니 명목상 회의를 주도하는 역할은 그의 것이었다.
"자자, 일단 개인적인 감정은 나중에 풀고, 지금 상황에 대해서 먼저 논의합시다. 북부군이 선전하고는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우리가 밀리고 있잖아?"
확실히 그랬다. 아직도 두 개의 군단이 수도를 향해 진격 중이었다.
특히 동부를 향해 가장 먼저 움직인 델파인군 5군단은 누구도 막지 못하고 있었다.
모리스가 지도를 보며 말했다.
"성녀님이 더 급한 쪽으로 가 주셔야 할 거 같은데...."
그가 말끝을 흐리자 지셀이 상황을 알려 주었다.
"남부 전선을 뚫고 온 델파인군 4군단을 저지하기 위해 북북부군이 이미 움직였습니다."
"오호라! 그러면 남은 곳은 동부군. 동부까지만 막으면 다 틀어막을 수 있을 거야!"
북부군이 하나의 군단을 막는 동안 성녀가 동부로 빠르게 이동하면 된다. 그녀를 따르는 사제단까지 힘을 합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쪽은 어떻게든 버티고만 있으면 된다.
그 뒤 북부군이 승리하고 동부로 이동하면 수도로 진격하던 델파인군은 모두 끝장나는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이번 전쟁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지!"
델파인군이 남부에 얼마나 더 남았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최소한 승기를 잡았다고 말할 수는 있을 터였다.
그렇게 그들이 전략을 논의하고 있을 때, 전령이 급하게 달려와 새로운 소식을 알렸다.
"동부에서 싸우던 델파인군의 5군단이 진군을 멈췄습니다!"
"뭐? 왜?"
모리스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설마 새로 만든 방어선이 그들을 막아 냈다는 말인가?
하지만 전령의 입에서 나온 건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었다.
"레이폴드 백작이 움직였습니다!"
"레이폴드 백작? 아멜리아? 그런데 왜 5군단이 진격을 멈춰?"
동부를 유린하는 델파인군은 그 수만 5만이었다. 레이폴드가 강군이라고는 하지만 델파인군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전령이 조금 머뭇거리며 답했다.
"레이폴드 백작이 행한 기습이 성공해서 델파인군이 큰 피해를 봤다고 합니다. 현재 그 피해를 수습하는 중입니다."
"오오! 좋군! 그러면 레이폴드 백작은 지금 방어선에 합류하러 움직였겠구나!"
"그, 그게 아닙니다. 레이폴드 백작은 합류하지 않았습니다."
"뭐? 왜? 그러면 뭘 하는데?"
"도망갔습니다."
"응?"
"델파인군에 피해를 주자마자 즉시 전장에서 벗어난 뒤에...."
"벗어난 뒤에?"
"비어 있는 영주들 땅을 점령하고 이제 자신의 땅이라 우기고 있습니다. 델파인군에 피해를 줬으니 협약을 지킨 것이라면서...."
보고가 맞나 싶은 웬 미친 소리에 모리스는 황당해하며 입을 떡 벌렸고.
지셀은 예상했다는 듯이 웃음을 지었다.
475화 이쯤이면 알았을 텐데? (3)
모리스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영지를 차지하고 자기 거라고 우긴다고?"
"네, 현재 델파인군이 북상하며 버려진 영지 3개를 차지했습니다."
"아니, 아무리 비어 있었어도 어떻게 3개를 단시간에 차지해? 병력이 주둔해야 하잖아! 레이폴드군이 얼마나 있는데!"
그냥 말로만 내 땅이라고 한다고 받아들여지는 게 아니다. 비어 있는 땅이어도 당연히 군사를 배치해야 자기 땅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전령이 여전히 긴가민가하는 표정으로 답했다.
"그, 그게... 치안 유지를 명목으로 병사 100여 명, 행정관 한두 명만 일단 영주성에 배치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
알 박기용으로 딱 명분 쌓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인력만 보냈다는 말이었다. 그 병력을 치면 전쟁하자는 뜻이나 마찬가지니까.
이건 완전히 산적과 다를 게 없었다.
아니, 산적은 재화만 털고 그냥 떠나기라도 하지, 이렇게 상도덕 없이 영지를 통째로 집어삼키지는 않는다.
모리스가 얼빠진 표정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이,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야?"
아멜리아가 분명 말하긴 했다. 균열이 열리거나 공작가가 차지한 영지는 알아서 처리하고 가져가겠다고.
친왕파 귀족들은 그 조건을 우습게 보고 수락했다. 당시에는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아멜리아 혼자서 뺏긴 영지를 수복할 수 있을 거라 믿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이렇게 많은 영지를 먹어 버리면 굉장히 애매해진다.
모리스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균열이든 병력이든, 저쪽이 차지하고 있는 땅을 뺏기로 한 거잖아? 어? 비어 있는 곳을 차지하는 게 아니라! 뭔가 좀 이상한 거 아니야?"
현재 아멜리아가 차지한 곳은 델파인군이 쓸고 지나간 지역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친왕파가 관리하지 못하고 있는, 상대의 영향력에 들어간 영지는 맞았다.
그런데 또 그곳에 델파인군은 정식으로 주둔하고 있지 않았다. 말 그대로 비어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수도기 때문에 다른 영지는 내버려두고 진군한 것이다.
이러니 모리스의 머릿속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 이거. 와, 이거. 뭐, 뭐. 어떻게 해야 해?"
사고가 정지해 버린 모리스는 계속 같은 말만 반복했다.
분명 영지를 뺏긴 영주들이 난리를 피울 것이다. 그들은 델파인군을 몰아내고 영지를 다시 찾을 생각만 가득할 테니까.
그런데 델파인군에 피해를 주고 영지를 차지한 아멜리아한테 꺼지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모리스는 웃고만 있는 지셀에게 물었다.
"아니, 웃지만 말고. 이거 뭐 어떻게 해야 좋겠어?"
"인정해야죠."
"뭐? 이걸 인정하라고?"
"그렇게 협상하시지 않았습니까. 레이폴드가 참전하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아니, 그건 싸우라고 허락해 준 거지, 이렇게 빈 땅에 가서 깃발 꽂으라고 한 건 아니지."
"그래서 싸우지 않았습니까."
"하... 미치겠네."
말은 틀린 게 아닌데 느낌이 굉장히 달랐다. 제대로 싸운 것도 아니고 기습하고 도망가서는 빈 땅을 차지해 버렸으니.
모리스가 머리만 박박 긁자, 지셀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냥 인정해 주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동부 지역에서 유일하게 델파인군에 피해를 준 군대입니다."
"끄응.... 영주들의 반발이 심할 텐데...."
"어쩔 수 없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영지를 뺏겼고, 레이폴드 백작이 그걸 다시 뺏은 건 맞으니까요."
"그래도! 이걸 뺏은 걸로 인정해 줘야 하나...."
"하십시오. 지금은 내버려둬야 합니다."
지셀이 눈을 빛내며 강하게 말했다.
아멜리아가 야만인의 침공을 막은 대가로 이번 일을 지지해 주기로 했다. 그 약속을 지키는 중이었다.
하지만 단지 약속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금은 그녀의 전략적 판단과 능력이 필요했다.
지셀이 지도에서 동부 지역을 짚었다.
"레이폴드 백작이 차지한 곳은 델파인군의 후방입니다."
당연하다. 협약상 빈 곳을 차지하려면 델파인군이 지나온 곳밖에 없다. 그런데 그 위치가....
지셀의 손가락을 보던 모리스가 눈을 빛냈다. 그가 평소에는 바보지만 전쟁에서만큼은 바보가 아니다.
"후방... 그러면... 이놈들 보급로가 위험하잖아?"
"네, 델파인군은 지금 굉장히 거슬릴 겁니다. 앞에는 한 번 더 싸워야 할 방어선이 존재하고 뒤쪽의 보급로는 언제든 레이폴드 백작이 끊어 버릴 수 있으니까요."
"다시 뒤를 정리하려고 할 수 있겠군."
"그렇습니다. 레이폴드 백작이 맞서 싸워 주면 말이죠."
아멜리아가 멍청하게 그 대군에 맞서 싸울 리가 없다. 그녀는 점령한 곳을 버리고 또 도망갈 것이다.
무주공산인 동부에 깃발을 꽂을 곳은 많으니까 말이다.
지셀이 웃으며 지도에 여러 선을 그었다.
"델파인군으로서는 레이폴드 백작이 신발 안의 가시처럼 계속 거슬릴 수밖에 없습니다. 전진하자니 보급이 위험하고 뒤로 다시 가면 시간을 소모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그, 그렇지."
"게다가 그들은 공성 병기를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수도 카르데니아를 포위하면 후속 부대가 가져올 생각이겠죠. 그들은 어떻게든 후방을 확보해야 합니다."
"다 좋은데 레이폴드 백작이 금세 잡혀 죽으면?"
"지금 하는 거 보면 모르시겠습니까? 열세인 걸 알면서도 붙을 거 같아요? 델파인군은 이제 레이폴드 백작을 잡기 위해 머리를 굴려야 할 겁니다."
어떤 전략을 짜느냐에 따라 상황이 달라지긴 할 것이다. 하지만 지셀은 아멜리아가 쉽게 잡힐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사람이었으면 전생에 진작 나한테 죽었겠지.'
그러니 동부 전선은 일단 아멜리아에게 맡겨 두면 된다.
어차피 지셀은 동부의 땅을 누가 먹든 관심도 없었다. 필요하지도 않지만, 필요하다면 동부의 땅은 나중에 다시 뺏어 와도 된다.
그의 목적은 오직 델파인 공작가와 구원교뿐이었다.
지셀의 말에 모리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옳거니, 만약 레이폴드 백작이 시간만 끌 수 있으면...."
"북부군이 남은 델파인군을 처리하고 바로 이동하면 됩니다."
"그래, 그렇게 하면 돼."
모리스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지셀과 파르니엘이 있는 이상 남은 델파인군을 처리하지 못할 리가 없다.
솔직히 자신도 초인이 없어서 당했지, 초인만 있었어도 막았을 거라는 자신감이 들었다.
연합군 덕분에 병력은 이쪽이 더 많았지만, 아무튼 다 초인이 없었던 탓이었다.
지셀이 모리스에게 말했다.
"대신 총사령관의 권한으로 레이폴드 백작에게 명령해야 할 게 있습니다."
"무엇을?"
"확실하게 델파인군의 보급로를 위협하라고 하십시오. 그래야 인정해 주겠다고요. 만약 동부가 완전히 뚫려 수도가 포위당하면 친왕파와도 싸워야 할 거라고 협박하셔야 합니다."
"응? 왜? 본인도 죽기 싫으면 그리 해야 하지 않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라서 말입니다."
아멜리아는 혼란을 원한다. 한쪽이 압도적으로 승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지금은 남부 전선이 완전히 무너진 친왕파를 돕고 있지만, 상황이 달라지면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그러니 당장은 사고를 치지 못하게 압박해야 했다.
다루기는 피곤하지만 어떻게든 그 능력을 써먹어야 할 사람. 그게 지금 아멜리아의 위치였다.
모리스도 지셀의 말을 알아들었다.
"알겠어. 꼭 그리 전하도록 하지. 그쪽은 그렇게 진행하고! 포로는 말인데...."
모리스가 파르니엘의 눈치를 힐끗 보았다. 솔직히 그 많은 수를 다 죽이기는 애매하지만, 데리고 가기도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파르니엘은 대충 상황을 알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다만 모두 개종시키는 조건으로 하시지요."
그 말에 모리스의 표정이 환해졌다.
솔직히 귀족들과 사제들의 반발이 제일 걱정이었다. 하지만 성녀가 그러라고 했다고 핑계 대면 모리스도 빠져나갈 수 있었다.
파르니엘에게는 루타니아의 사제들을 무시할 수 있는 힘과 자격이 있었다.
'후후, 성녀가 하라고 했는데 뭐 어쩔 거야.'
마음이 한결 놓인 모리스가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모든 포로를 모리아나 교단으로 개종시키고 새로 편제하도록 하지."
지셀이 피식 웃었다. 참으로 속이 훤히 보이는 사람이다. 그게 장점이라면 장점이고 단점이라면 단점이겠지만.
파르니엘과 사제들의 도움으로 포로들의 개종이 진행되었다.
워낙 많은 이들이라 그냥 몇 그룹으로 묶어 대충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포로들도 큰 거부감은 없었다. 어차피 그들 대부분은 본래 4대 교단의 신자들이었으니까.
강제로 모리아나 교단으로 들어가게 된 건 좀 찝찝해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포로들의 개종이 끝나갈 즈음, '근육의 오줌싸개' 고든이 파르니엘의 앞으로 나섰다.
펜리스 기사들을 당황했고 지셀도 저놈이 왜 저러나 싶어서 가만히 바라보았다.
"후우...."
크게 숨을 내쉰 고든이 갑자기 갑옷을 벗고 상의까지 찢어 자신의 근육을 내보였다.
"저, 저 미친놈이 뭐 하는 거야!"
모리스가 손가락질하며 소리를 질렀다. 어디 감히 성녀 앞에서 흉하게 옷을 벗어젖히고 근육 자랑을 한다는 말인가!
"잡아! 저 새끼 끌어내! 저, 저 꼴통 새끼!"
"푸하하하핫!"
모리스가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자 지셀과 펜리스 기사들은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왕국군 지휘관들과 참모들은 그 모습을 보고 썩은 표정을 지었다. 펜리스군이 전투력 빼고는 정말 개판이라더니, 저게 용병들인지 정규군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주위에서 그러거나 말거나 고든은 열심히 몸에 힘을 주고 포즈를 잡으며 자신의 대흉근과 이두근, 삼두근 등을 자랑했다.
"호오...."
그 모습을 본 파르니엘이 흥미로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고든을 붙잡으러 나온 병사들까지 제지하며 그를 관찰했다.
모리아나는 전쟁의 여신이었다. 당연히 육체 단련도 미덕으로 삼았다. 그게 무조건 근육을 키우라는 뜻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파르니엘은 고든의 도발에 씨익 웃으며 자신의 소매를 어깨까지 걷었다.
그녀가 팔을 한번 접으며 힘을 주자.
"아아...."
고든은 몸에서 바로 힘을 빼 버렸다.
이길 수 없었다. 저 떡 벌어진 어깨와 팔만 봐도 안다. 다른 건 볼 필요조차 없다.
타고난 재능이란 저런 것일까? 저 완벽하고 거대한, 조각과도 같은 육체는 고든이 평생 꿈꾸던 것이었다.
평범한 자들은 모른다. 오직 근육을 키우기 위해 살아온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잘 먹고 운동을 해도 저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리라. 과연 성녀라 할 수 있었다.
"...."
다른 이들도 모두 침묵을 지켰다.
고든은 펜리스 기사 중에서도 가장 거구였다. 타고난 덩치도 큰데 근육에 미쳐 체구를 더 키웠기 때문이다.
그런 고든조차도 성녀 앞에서는 일반인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예 상대가 되지 않았다.
털썩.
결국 고든이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졌습니다."
"그대도 훌륭했다. 열심히 단련하였구나."
"성녀님의 근육에 비하면 제 몸 따위는 지방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아니다. 그대만큼 단련한 자는 이 대륙에 몇 없을 것이다."
파르니엘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거품 근육을 가진 자는 정말 오랜만에 보았다. 그만큼 육체의 단련(?)을 쉬지 않고 규칙적으로 하며 잘 먹었다는 뜻이다.
아무리 거품 근육이라 해도 그 또한 여신의 뜻을 성실히 이행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파르니엘이 물었다.
"어느 신을 모시는가?"
"저는... 현재 쥬아나 교단을 따르고 있습니다."
사실 고든도 처음에는 모리아나 교단의 신자였다. 용병 출신이라 그냥 관습에 따른 것이다.
그러다가 피오테가 몇 번 강력한 신성력을 보여 준 뒤 그대로 갈아탔다. 어차피 헌금 한 번 안 하고 살아서 그냥 형식적인 신자라 할 수 있었다.
파르니엘이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말했다.
"개종하겠는가? 그리하면 내 이 자리에서 너에게 축복을 내려 주겠다."
"하겠습니다!"
"좋다, 이 또한 여신께서 인도하심이니."
파르니엘은 바로 고든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문을 읊었다.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며 고든의 몸에 흡수되었다. 이제 어지간한 악의 기운은 고든에게 침투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이제 신을 믿는 신자들은 성녀의 축복을 받은 고든을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파르니엘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너는 이제부터 모리아나 교단의 팔라딘이다."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감사합니다! 근육에서 힘이 더 나는 거 같습니다!"
"...."
파르니엘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고든이 모리아나 교단의 팔라딘 자격을 얻게 되자 가장 놀란 건 파르니엘을 따라온 사제들이었다.
"서, 성녀님의 축복을 어찌...."
"그냥 근육 바보로 보이는데...."
"저, 저런 놈이 팔라딘이라니...."
다른 이들도 빠짐없이 입을 쩍 벌렸다. 성녀가 직접 축복을 내려 주다니!
일국의 왕이 부탁해도 성녀의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즉, 평생을 살면서 성녀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한두 명 볼까 말까 하다는 뜻이다.
심지어 성녀의 축복을 받은 자는 심사 없이 바로 팔라딘 자격을 얻는다. 본래는 강한 신성력을 발휘한 자가 교단의 엄격한 심사를 통과해야만 팔라딘이 될 수 있는 것과 비교하면 큰 특혜였다.
그런 귀한 축복을 웬 이상한 놈이 근육 자랑 한 번 하고 냉큼 받아 버린 것이다.
"...."
배를 잡고 웃던 지셀과 펜리스 기사들도 입을 다물었다. 저런 놈한테 축복을 내려 주다니. 세상이 말세인 게 분명했다.
지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놈 운도 참 예사롭지 않아."
저 바보가 지금 자신이 받은 축복이 뭔지나 알까? 아마 본인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냥 성녀의 근육에 반해 개종해 버린 것이니 말이다.
글을 몰라서 사기도 종종 당하던 고든이다.
그런데 마수의 숲에서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아 글도 배우고 소설도 쓰더니, 이제는 드래곤 하트 조각을 포함해 좋은 건 은근히 다 먹었다.
고든은 지셀을 만난 덕분에 인생이 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잠깐 소란이 있었지만, 그사이에도 조직 재편은 계속되었다. 포로까지 합치자 무려 2만 5천에 가까운 병력이 만들어졌다.
"크... 우리 조카 덕분에 다시 싸울 힘을 얻었구나!"
모리스가 흡족함에 미소를 지었다.
패배하고 쫓겨 다닐 때만 해도 얼마나 절망스러웠던가. 이제 펜리스군과 성녀도 합류했으니 남은 델파인군과 싸워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셀이 기뻐하는 모리스에게 말했다.
"방심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 하루만 쉬고 내일 바로 움직이시죠."
"그래, 힘들겠지만 그래야겠지."
북부군에 남겼던 다크는 이제 마력이 다해 사라졌다. 그러니 소식을 바로 알 수가 없었다.
전력만 따지면 중부 지역의 델파인군보다 북부군이 위다. 하지만 그만큼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으니, 북부군이 방어선을 제대로 갖췄느냐가 관건이었다.
다음 날, 전력을 정비하고 출발하려는 그들에게 때마침 기쁜 소식이 당도했다.
476화 나의 세계가 완성되었다. (1)
"북부군이 델파인군 4군단의 진격을 저지했습니다!"
전령이 들고 온 희소식에 모리스가 만면에 화색을 띠었다.
"그래? 뭐야? 싸워서 이긴 거야?"
"아닙니다. 따로 보급 부대를 습격하여 보급로를 끊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오오! 우리 조카 말고도 북부군에 그런 걸 할 사람이 있었어?"
지셀이 그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동부에서 아멜리아가 델파인군을 잡아 둔 방식과 같았다. 북부군은 진군 속도가 느리니, 시간을 벌기 위해서 클로드가 따로 부대를 나눠 움직인 모양이었다.
북부군이 벌써 움직일 거라 생각하지 못한 델파인군은 당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다행이군요. 양쪽이 맞붙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수도와 북부에서 계속 보급을 받는 친왕파 측 방어선과 달리 델파인군은 점점 보급로가 길어지고 있다. 그런 와중에 보급로가 끊겼으니, 그쪽도 상당히 곤란할 것이다.
그리고 그 틈을 타 북부군 선발대도 방어선에 합류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상황이 이쪽에 유리하게 돌아간다고 해서 방심해서는 안 되었다. 그쪽에서 허를 찌르는 방안을 내놓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셀이 모리스에게 말했다.
"저와 성녀가 펜리스군을 이끌고 먼저 움직이겠습니다."
"뭐? 그럼 나는?"
"천천히 뒤따라오세요. 상황이 바뀌면 다른 곳으로 병력을 보내야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방향을 틀어 수도를 방어하러 움직이거나 남부 전선을 막으러 가야 할 수도 있었다.
"으음.... 부담되네. 이거 통제가 제대로 될지...."
모리스가 뒤를 힐끗 바라보았다. 개종까지 한 포로들이지만 수가 너무 많았다.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빠르게 지셀을 쫓아가는 건 무리였다.
남은 왕국군에 연합군, 포로들까지 섞어서 만든 군대다. 그런 잡탕 군대가 제대로 속도가 날 리 없었다.
모리스가 자꾸 뒤를 돌아보며 부담스러워하자 지셀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아니, 왕국군 총사령관께서 그 정도도 못 하세요? 한 번 크게 지더니 소심해지셨네."
"아니거든? 그냥 조심하는 거거든?"
지셀에게 한 소리 들으면 모두가 유치해진다. 총사령관의 위엄은 벗어던지고 바락바락 핏대를 세우는 모리스의 모습에 다들 고개를 저었다.
본심을 숨긴 모리스와 지셀은 한참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파르니엘이 사제단을 놓고 가기로 합의를 봤다.
사제단은 성녀를 따르는 단체이니 포로들이 한 번 더 조심할 거라는 기대였다.
결론이 나는 듯하자 이번에는 그간 조용히 있던 휴베르트가 끼어들었다.
"마법사 안 필요해? 내가 따라갈까?"
휴베르트도 여기 있기 싫었다. 지셀과 파르니엘의 조합이라니, 그건 못 참는다. 두 사람 옆이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곳임이 확실했다.
지셀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마법사 전력은 여기 같이 있어야죠."
"에잉, 나도 가고 싶었는데."
툴툴거리던 휴베르트가 은근하게 물었다.
"알포이는 잘 있지?"
원래는 후계자 자리에서 쳐 내려고 했는데, 저번 마탑 교류회에서 그의 활약에 큰 인상을 받고 일단은 보류해 둔 상태였다.
지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솔직히 잘 지내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응은 확실하게 한 상태였다. 서클도 오르지 않았는가.
휴베르트가 살짝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뭐... 잘 지내면 됐어."
몇 번 버렸더니 사제 관계가 상당히 어색해진 상태였다. 관계 개선이 필요할 거 같았다.
뭔가 시무룩해 보이는 모리스와 휴베르트를 본 지셀이 고개를 저었다.
평소에는 멀쩡하다가도 자신만 나타나면 무작정 의지하려고 한다. 나이는 먹을 만큼 먹은 사람들이 징그럽게 말이다.
자신이 활약한 데 따른 부작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에휴, 저 먼저 출발합니다. 자, 빨리 가자! 아군을 도우러 가야 한다!"
지셀이 혀를 차며 기동군과 함께 출발했다. 파르니엘도 남은 말 중 가장 거대한 말을 타고 따라갔다.
멀어지는 그들을 보며 모리스가 입을 다셨다.
"할멈이 있으면 물어봤을 텐데.... 아쉽다."
끝까지 점쟁이 노파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는 모리스였다.
* * *
수도를 향해 진군하던 델파인군 4군단장, 팔가우 백작은 고민에 빠졌다.
"으음, 상황이 좋지 않군."
뒤따라오던 보급 부대가 습격을 당해 전멸했다. 보급 부대도 상당한 병력인데 전멸했다는 건,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뜻이다.
그 밖에도 안 좋은 소식이 연달아 들려왔다.
"2군단이 패배하고 북부군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북부군에 숨겨진 초인이 있었습니다!"
"5군단은 현재 레이폴드군 때문에 진군을 멈춘 상태입니다!"
팔가우 백작이 참모들에게 물었다.
"3군단은?"
"3군단의 정기 연락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으음.... 그쪽도 전투 중인 건가."
3군단은 지셀에게 기습당해 전멸했지만 그들은 아직 그 소식을 듣지 못했다. 전령조차 도망가지 못하게 지셀이 완전하게 괴멸시켰기 때문이다.
남부 전선을 박살 내고 빠르게 올라가던 팔가우 백작은 코앞까지 다가온 위기에 이를 갈았다.
"보급로를 다시 확보할 것이냐... 이대로 밀고 갈 것이냐가 문제인데...."
밀고 가려면 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들 앞에 남은 방어선의 병력은 무척이나 적었다. 그곳만 뚫으면 수도가 지척이었다.
하지만 수도를 포위해도 문제였다.
"공성 병기 없이는 카르데니아를 쉽게 함락할 수 없다. 시간을 끌면 보급도 부족해질 테고... 북부군이 우리를 포위할 거야."
역으로 포위당하면 이쪽에 초인이 있어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펜리스 백작은 북부 최강이라 불리는 인물인 데다, 상대 쪽에는 그 말고도 또 다른 초인이 있다는 게 알려졌다.
이틀이나 고민하던 팔가우 백작이 결단을 내리고 참모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수도로 가지 않는다."
"네? 그러면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동부에 있는 5군단과 합류한다."
"그 말씀은...."
"5군단이 상대해야 하는 병력은 이쪽보다 더 많다. 연합군들이 가장 먼저 지원을 나간 곳이라 그렇지. 심지어 지금 5군단은 보급로까지 위협받고 있다."
팔가우 백작이 지도 곳곳을 짚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5군단에 합류해서 방어선을 침과 동시에 보급로를 다시 확보한다. 우리 병력의 일부만 빼도 보급로는 지킬 수 있을 거야."
"그러면 이쪽은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바로 움직이면 북부군이 따라올 거다. 그러니 계속 수도로 진군하는 척해야겠지."
"진군하는 척, 말입니까?"
"그래. 일단 계속 북상하여 방어선을 괴멸시킨다. 그렇게 되면 북부군은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바로 올라갈 거야. 그 틈을 타 우리는 동부로 빠진다."
참모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황이 점점 불리해지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수였다.
5군단과 합류하면 그 수는 무려 10만에 이른다. 보급로를 지키면서도 적 방어선을 괴멸시키고 수도를 포위하기에는 충분한 병력이었다.
초인을 세 명이나 거느리고 병사 수도 10만이나 되는 2군단이 북부군에게 당한 것을 생각하면 조금 불안하긴 했다.
하지만 다시 보급로를 확보하고 수도만 포위하면, 분명 공작가에서 새로운 지원을 보내줄 것이다.
팔가우 백작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쪽 보급로는 그냥 포기한다. 북부군도 시간을 벌려고 보급로를 친 거야. 그러니 우리는 쉬지 않고 북상한다."
팔가우 백작은 클로드의 의도를 눈치챘다. 북부군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었다면 굳이 보급로를 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팔가우 백작은 보급로까지 포기하면서 강행군을 감행했다.
팔가우 백작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들 앞을 막은 요새에 모인 병력은 고작 1만이 전부였다.
기존에 남은 5천과 클로드가 급히 보낸 5천을 합한 수였다.
"작은 요새다. 금방 점령할 수 있겠군. 쳐라."
시간에 쫓기는 델파인군은 바로 공격을 시작했다.
파아아아아!
델파인군의 마법사들이 대규모 마법을 요새에 뿌려 댔다.
안타깝게도 왕국군 측에는 마법사가 없었다. 그렇기에 팔가우 백작도 안심하고 마법 공격을 명령한 것이기도 했다.
요새의 병사들이 날아오는 마법을 보고 공포에 떨던 그때, 한 엘프가 앞으로 나섰다.
"순환하는 흐름이여, 너의 순수함으로 이곳을 감싸라."
콰아아아아!
거대한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며 푸른 물결로 이루어진 여인의 모습을 이루었다.
바로 물의 상급 정령인 엔다이론이었다.
엔다이론의 몸이 넓게 퍼지며 요새를 감쌌다. 델파인군에서 쏘아 보낸 마법이 푸른 장막에 부딪혔다.
콰콰콰콰쾅!
장막은 마법에 직격당해 위태롭게 흔들렸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요새의 병사들이 모두 경이감 가득한 표정으로 엘프를 바라보았다.
엘프는 바로 길리언과 함께 이곳에 먼저 온 에레네스였다.
그녀 입이 다시 움직였다.
"속삭이는 울림이여, 너의 강인한 의지를 이곳에 펼쳐라."
쿠르르르릉!
델파인군의 진영에서 갑자기 땅이 꺼지고 곳곳에 바위가 치솟기 시작했다.
대지의 상급 정령, 노에아넨이 움직인 것이었다.
"으아아악! 뭐야!"
"정령이다! 막아라!"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비하지 못했던 델파인군은 순식간에 진영이 무너졌다.
100여 명의 마법사 중 절반이 나서서 노에아넨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도록 봉쇄했다.
나머지 절반은 쉬지 않고 계속 마법을 요새에 날렸다.
콰앙! 콰앙! 콰아앙!
정령에게 계속 기운을 쏟아붓고 있던 에레네스가 길리언에게 물었다.
"이곳에 투석기는 없나?"
"한 대도 없다고 합니다."
"얼마나 버텨야 하지?"
"이틀 정도면 될 거 같습니다."
"그 잔망스러운 놈이 이건 예측하지 못한 건가?"
"그나마 보급 부대를 습격한 덕분에 이들이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한 겁니다."
보급 부대가 괴멸한 뒤 델파인군은 어찌할지 고민하느라 이틀이나 시간을 끌었다. 그래서 선발대가 아슬아슬하게 이곳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에레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힘겨운 싸움이 되겠군."
"마법 공격만 막아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든 버텨 보겠습니다."
길리언이 비장하게 말했다.
급하게 출발해야 해서 자신과 에레네스만 먼저 도착했지만, 함께 온 궁기병들이라면 몇 배나 되는 적도 막아 낼 수 있다.
상대측에도 초인이 있고 기사들이 많긴 하지만 쉽게 다가오기는 힘들 것이다.
에레네스가 정령에게 계속 기운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쉽지 않을 거야. 나는 적 마법사들에게 묶여서 도와줄 수 없다."
홀로 저 많은 마법사를 막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정령에게 기운을 계속 집어넣으면서 싸울 수는 있지만, 그녀는 초인을 상대해야 했다. 이 이상 기운을 분산할 수는 없었다.
나머지 기사들과 병사들은 길리언이 혼자 다 맡아야 하는 것이다.
"괜찮습니다. 이런 일은 익숙합니다."
길리언이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무언가를 지키는 건 이제 그에게 정말 익숙한 일이 되었다.
보급 부대를 습격한 카오르와 벨린다가 돌격대를 이끌고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올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콰앙! 콰앙! 콰아아앙!
물의 장막이 끊임없이 흔들렸다. 요새 안의 병사들은 긴장한 채 무기를 꽉 쥐었다.
생각보다 마법 공격을 잘 버티는 모습에 팔가우 백작이 놀라서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뭐지? 어떻게 이 많은 마법사들의 공격을 막을 수가 있는 거지? 정령이 확실한 건가?"
옆에 있는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마법이 아니라 정령의 기운입니다. 이 정도면 초인급에 이른 정령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허어.... 도대체 저런 인물들이 어디서 튀어나온 것이냐."
아직 제대로 소식을 듣지 못한 4군단에 에레네스의 존재는 날벼락 같은 것이었다.
예상외의 저항에 막히자 팔가우 백작은 조금 고민하다 말했다.
"마법사들은 쉬지 말고 공격해라. 저 정령사를 묶어 두고 나머지가 요새를 공격한다."
마법 전력을 전부 쓰지 못하는 게 아쉽긴 하지만 초인을 묶어 두었으니 됐다.
다른 변수는 없어 보였다. 이 상태로 전군이 진격하면 요새는 금세 함락될 것이다.
"공격하라!"
"와아아아아!"
공격 명령이 떨어지자 5만의 병력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작은 요새를 향해 해일처럼 다가오는 델파인군을 보고 기존의 패잔병들은 다들 겁을 먹었다.
오직 펜리스에서 온 병력만이 전의를 불태웠다.
"준비하라."
길리언이 손을 들자 루미나를 필두로 모든 궁기병이 활시위를 당겼다.
다들 긴장한 채 다가오는 적들을 지켜보았다. 시간이 마치 멈춰진 것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와아아아!"
대군을 이용해 단숨에 점령하려는 듯 델파인군은 몸을 사리지 않고 뛰어들었다.
드디어 그들이 사거리에 들어오자 길리언이 크게 외쳤다.
"쏴라!"
파아아아앗!
5천의 궁기병이 쏘아 낸 화살이 적 진영에 떨어졌다.
하지만 피해는 미미했다. 숙련된 정예병들답게 보병들마저도 작은 방패로 화살을 막으며 달려들었다.
"멈추지 말고 쏴라!"
길리언이 다시 외쳤다.
펜리스 궁기병들의 활은 휴대성을 높인 접이식 활이었다.
장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양 끝에 도르래와 같은 기계 장치를 달아 쏘는 데 힘이 거의 들지 않았다. 그렇기에 무척이나 빠른 연사가 가능했다.
파아아아앗!
숨 한번 제대로 쉬기도 전에 다시 화살 비가 쏟아졌다.
"으아아악!"
"뭐야! 왜 이렇게 빨라!"
"신중하게 화살을 막아라!"
두 번째 화살 공격은 델파인군도 예상하지 못했는지 피해가 늘어났다. 화살을 막고 다시 달리는 중에 갑자기 날아왔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델파인군의 진군 속도가 느려졌다. 펜리스 궁기병들은 그 틈을 타 정말 쉬지 않고 화살을 날려 댔다.
쿵! 쿵! 쿵!
결국 요새 벽에 사다리가 붙었다. 화살 공격으로 상당한 피해를 당한 델파인군은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상태였다.
그들은 이를 악물고 성벽을 올라갔다. 수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있으니 어떻게든 올라가기만 하면 쉽게 점령할 수 있을 것이다.
"붙어라!"
철컹! 철컹! 철컹!
왕국군 병사들이 잔뜩 긴장한 채 벽에 붙었다. 궁기병들이 계속 활을 쏘게 하려면 이들이 잘 막아 내야 했다.
지이잉―!
길리언과 함께 온 200여 명의 펜리스 기사들도 모두 갑옷의 마법을 활성화했다.
이제부터 신나게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어서 올라가라!"
5천의 화살로는 5만의 대군을 전부 막을 수가 없다. 결국 델파인군의 기사 일부가 방패의 벽을 뚫고 성벽 위로 오르는 데 성공했다.
"다 죽여라!"
호기롭게 외친 델파인군 기사가 마나를 끌어올리며 앞으로 나섰다.
퍼억!
앞으로 나서자마자 길리언의 도끼에 머리가 쪼개졌지만 말이다.
"버텨라! 충분히 막을 수 있다!"
길리언이 도끼를 들고 크게 외쳤다.
곳곳에 생긴 빈틈으로 적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수가 너무 많았다.
하지만 길리언과 펜리스 기사들은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올라오는 적들을 전부 때려눕혔다.
콰앙! 콰앙! 콰앙!
드래곤 하트를 흡수하고 최상급 수준에 오른 길리언의 무력은 그야말로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병사들은 올라오자마자 쓸려 나갔고 기사들도 몇 수를 버티지 못했다.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었다. 화살도 끊임없이 날아가 요새 아래의 병사들을 죽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팔가우 백작이 손가락으로 요새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래도 지금 나가 주셔야겠습니다."
"그리하지요. 저자가 하얀 사자라 불리는 길리언인 모양입니다."
"그런 거 같습니다. 반드시 죽여야 할 인물 중 하나이지요."
"잘됐습니다. 이번에 처리하도록 하지요."
검은 로브를 입은 구원교의 심판관이 나섰다. 그는 4군단에 합류한 초인으로 남부 전선을 뚫는 데 큰 힘을 보탠 자였다.
바로 그때, 전장의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한 존재가 나타났다.
― 와우, 다들 바쁘네.
전장의 하늘 위에, 한 마리의 까마귀가 빙빙 돌기 시작했다.
477화 나의 세계가 완성되었다. (2)
콰앙! 콰앙! 콰아앙!
길리언의 위용은 누구나 혀를 내두를 정도로 대단했다.
요새 위를 종횡무진 뛰어다니며 적을 학살하는 모습은 별명 그대로 성난 사자와도 같았다.
피범벅이 된 그가 하늘이 울리도록 소리쳤다.
"겁먹지 말고 싸워라! 충분히 버틸 수 있다!"
"와아아아아!"
병사들은 그런 길리언의 모습을 보고 힘을 냈다. 올라오는 델파인군의 병사들은 그 기세에 주눅이 들어 버렸다.
에레네스는 적 마법사들의 공격을 막으며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상하군.'
그녀가 봐도 길리언의 기술은 정말 대단했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기세는 이미 일가를 이루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연 최상급 기사다운 실력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에레네스는 더 궁금했다.
'어째서 벽을 넘지 못한 거지?'
저런 기술과 기세는 수련만 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수많은 사선을 넘어야 한다. 그 점에서 길리언은 벽을 넘을 자격이 충분했다.
마나 또한 부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몰랐지만 이미 길리언은 드래곤 하트의 조각을 흡수한 상태였으니까.
그럼에도 벽을 넘지 못했다는 건 자신만의 세계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하나의 세계를 만들 토대를 충분히 쌓았는데도 말이다.
에레네스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무척이나 촉박하게 전투가 이뤄지고 있는데 고민에 빠져 있을 여유는 없었다.
"샐라임, 모두 태워라."
퍼어엉!
요새 아래에 거대한 불도마뱀이 나타나 불길을 쏘아 내기 시작했다.
파아아아악!
"끄아아악!"
올라오던 병사들이 불에 타며 쓰러졌다. 요새 벽에 붙었던 사다리도 같이 불타 무너지고 말았다.
상급 정령을 셋이나 소환한 그녀 덕분에 델파인군의 진격이 잠깐 멈췄다.
그 틈을 타 다크가 길리언에게로 날아왔다.
"어이, 길리언."
"너는? 어떻게 벌써 온 거지?"
길리언이 깜짝 놀랐다. 돌격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다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다크가 거만하게 고개를 들며 말했다.
"후후, 조금만 더 버텨라. 주인이 기동군을 끌고 오고 있다. 엄청 대단한 친구를 데리고 말이야."
"잘됐군."
길리언의 표정이 환해졌다. 카오르와 벨린다가 올 때까지 최소한 이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때까지 버텨야 한다고 각오하고 있었는데, 벌써 지셀이 오고 있단다.
같이 오는 친구가 누구인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지셀과 기동군, 그리고 이곳에 있는 자신과 에레네스의 힘만으로도 확실하게 승리할 수 있으니까.
"다들 들어라! 영주님이 지금 이곳으로 오고 계신다! 북부군 사령관께서 오고 계신단 말이다! 그러니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우와아아아아아!"
북부군뿐만이 아니라 왕국군까지 모두가 빠짐없이 환호를 내질렀다.
북부 최강을 넘어 왕국 최강을 향해 가는 지셀의 이름은 승리의 상징이다.
그 이름을 듣자마자 모두의 사기가 말도 못 할 정도로 치솟아 올랐다.
그가 오면 반드시 이긴다. 그는 불패의 군주다. 그것이 모두의 마음속에 굳게 자리 잡은 믿음이었다.
물론 그건 지셀이 올 때까지 버텨야 가능한 얘기다.
퍼어억!
"케엑!"
갑작스럽게 날아온 검은 기운을 맞고 다크의 분신은 그대로 터져 버렸다.
길리언은 바로 뒤로 물러나 겨우 피했다.
타앗.
요새 위로 가볍게 올라온 이는 구원교의 심판관이었다.
"쯧, 엉뚱하게 까마귀가 맞다니... 음? 뭐야, 시체가 어디 갔지? 가루가 되어 버렸나?"
마나로 이루어진 다크는 그대로 터져 사라졌으니 시체가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흠, 너무 강하게 공격했나 보군. 네가 이곳의 지휘관... 하얀 사자 길리언이 맞는가? 나는 구원교의 심판관 카스파르다."
자신을 카스파르라고 소개한 구원교의 사제는 잔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길리언은 공작가에서도 우선 척살 순위에 올린 북부군의 핵심 전력이다.
이곳에서 죽인다면 큰 공을 세우게 되는 셈이다.
"와아아아아!"
쿵! 쿵! 쿵! 쿵!
다시 델파인군이 성벽에 사다리를 대며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래에서 난리를 피우던 샐라임은 마법사들에 의해 다시 봉쇄되었다.
어차피 장막으로 막힌 요새는 내버려두고 날뛰는 정령들부터 제압한 것이다.
아군이 진입한 이상 대규모 공격 마법을 쓸 수도 없으니까 말이다.
고위 사제가 나타나자 길리언이 에레네스를 바라보았다. 초인을 상대하는 건 그녀의 일이다.
그때 에레네스가 바람의 정령을 이용해 길리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 네가 상대해 보는 게 어떠냐?
"무슨...."
― 네가 그자를 잡고 있으면 더 적은 피해로 내가 적들을 막을 수 있다.
"...."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는 초인이다. 과연 자신이 막을 수 있을까?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카스파르가 움직였다.
콰아아앙!
"큭!"
길리언이 도끼를 들어 막으며 뒤로 밀려 났다. 엄청난 힘과 속도였다. 조금만 늦었어도 목이 날아갈 뻔했다.
"흐읍!"
하지만 길리언은 바로 다리에 힘을 주어 버티며 도끼를 내리찍었다.
카가각!
곧바로 따라붙던 카스파르는 가슴에 길게 상처를 내며 물러섰다.
"이놈이...!"
카스파르가 분노로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저런 자세에서 저런 강공을 펼칠 줄이야. 확실히 명성대로 실력이 뛰어났다.
콰아앙!
카스파르가 다시 뛰어들어 길리언을 공격했다. 그의 힘과 속도는 초인답게 무척이나 강하고 빨랐다.
캉! 카앙! 카앙!
맨손으로 공격하는 카스파르를 길리언은 힘겹게 막았다. 마나를 잔뜩 끌어모았음에도 그의 손과 부딪칠 때마다 도끼의 날이 점점 나가고 있었다.
"으하하하! 너도 별거 아니구나!"
카스파르가 크게 웃으며 길리언을 밀어붙였다.
카스파르의 기술은 조악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수준이 낮았다. 좋게 말해 줘도 기초 체술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예 다른 시간에서 살고 있는 저 감각이 문제였다.
퍼억!
"크윽...!"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길리언의 몸 곳곳이 파이며 상처가 나기 시작했다.
길리언이 이를 악물었다.
최상급 기사와 초인은 딱 종이 한 장 차이다.
최상급 기사는 언제든 깨달음만 얻으면 바로 초인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죽을 때까지 못 오를 수도 있다. 그렇기에 그 종이 한 장의 차이는 아득하게 멀기도 했다.
지금 그 종이 한 장이 카스파르와 길리언을 완벽하게 가르고 있었다.
"크흐흐! 하얀 사자라 위명을 떨치더니 별거 아니지 않은가."
카스파르는 일부러 더 길리언을 도발했다. 하지만 사실 그의 속도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어째서 치명타가 들어가지 않는 거지?'
기술이 떨어지는 그는 길리언이 모든 공격을 예측하며 싸우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다른 시간을 점유하면서도 왜 그를 죽이지 못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또 하나.
"으아아악!"
아군이 제대로 요새 위로 오르지 못하고 있다. 웬 엘프가 정령들을 소환해 학살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괴상한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들도 무척 뛰어났다. 그들이 설쳐 대니 아군 기사들이 제대로 요새 위를 점거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진입로를 제대로 만들어야 병사들이 올라와서 모일 게 아닌가.
'저년부터 잡아야겠군!'
카스파르가 눈을 빛냈다.
어쩐지 이 주변에 아무도 덤벼들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길리언에게 자신을 맡기고 나머지는 착실하게 아군을 죽여 가고 있었던 것이다.
카스파르가 몸을 돌려 에레네스를 공격하려고 할 때, 길리언이 움직였다.
카아아앙!
"이놈!"
카스파르가 분노하며 도끼를 쳐 냈다. 피투성이가 된 주제에 자신의 발목을 잡으려 하다니.
"정말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그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더 세차게 넘실거렸다. 순간 길리언이 있던 자리에서 검은 빛의 기둥이 솟아올랐다.
콰아앙!
꽤 범위가 넓었지만 에레네스가 주변에 정령들을 둘러 병사들을 보호했다.
하지만 기둥의 중심부만큼은 그녀도 손을 쓰지 못했다.
파악!
길리언은 가까스로 몸에 마나를 잔뜩 두르고 빠져나왔다. 그의 몸 이곳저곳이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길리언은 여전히 성난 듯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이를 악문 채 도끼를 휘둘렀다.
카아아앙!
날이 다 나간 도끼임에도 어마어마한 힘이 실려 있었다.
팔을 들어 도끼를 막은 카스파르가 그 틈을 이용해 다시 손을 뻗었다.
파아아아앙!
무언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길리언이 뒤로 나동그라졌다.
"후, 지겨운 자식. 확실히 숨을 끊어 주마."
카스파르가 잔뜩 표정을 일그러트리고 길리언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을 본 펜리스 기사들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교관!"
에레네스도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결국 넘지 못하였는가.'
그리 쉽게 넘을 수 있다면 세상에는 초인이 넘쳐날 것이다. 아쉽지만 당연하기도 한 일이기에 에레네스가 기운을 끌어올렸다.
상급 정령을 셋이나 소환하고 있어 기운이 상당히 소모된 상태지만, 이제 자신이 초인을 붙잡아 놓고 있어야 했다.
그때, 길리언이 부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모두 각자의 위치를 지켜라!"
그 호통에 달려오던 기사들이 멈칫했다. 이런 상황에 익숙한 그들은 입술을 앙다물고 다시 델파인군을 상대하러 돌아갔다.
"후우...."
크게 숨을 내쉰 길리언이 허리를 폈다. 여전히 그는 철탑과도 같이 굳게 서서 맹렬하게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그 눈빛을 본 에레네스가 다시 바람을 통해 말했다.
― 무엇이 너를 막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하나 펜리스 백작이라면 이미 너에게 가르침을 줬을 터.
잠시 뜸을 들인 그녀가 말을 이었다.
― 이번 기회에 목숨을 걸고 너의 세계를 정립해라. 이런 기회는 흔치 않음이니.
최상급 기사가 초인과 싸우면 높은 확률로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초인이되 그 기술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구원교의 사제라면.
어쩌면 목숨을 걸고 벽을 넘을 기회인지도 모른다.
에레네스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조금 더 길리언에게 맡겨 볼 생각이었다.
카스파르는 진득한 살기를 풀풀 풍겼다.
"이놈이 끝까지...."
구원교의 고위 사제들이 반쪽짜리 초인이란 소문이 여기저기 퍼져 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초인도 아닌 길리언이 계속 덤벼드니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다고 이 주변을 전부 초토화할 수는 없었다. 아군까지 몰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직접 저놈의 목숨을 끊어야 했다.
"그 머리를 박살 내 주마!"
콰아앙!
카스파르와 길리언이 다시 맞붙었다.
콰앙! 콰앙! 콰앙!
길리언은 계속 상처를 입으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목숨을 도외시하며 날리는 공격은 카스파르도 흠칫할 정도였다.
두 사람의 이동 범위는 극히 짧았다. 어떻게든 가까이 붙어서 상대에게 치명상을 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잠깐의 시간에도 길리언은 넝마가 될 정도로 심한 상처를 입었다. 반면 카스파르는 조금 피곤해 보이는 거 말고는 멀쩡한 상태였다.
콰아앙!
도끼날이 반쯤 나갔음에도 길리언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 넘을 수 있을 거 같은데 넘을 수가 없었다. 초인의 벽이 이리 높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했다.
― 펜리스 백작이라면 이미 너에게 가르침을 줬을 터.
그랬다. 지셀은 자신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다.
드래곤 하트 조각뿐만이 아니라 누구나 탐낼만한 기술들까지 말이다.
타고난 재능과 오랜 경험에 지셀의 가르침까지 얻었으니, 진작 초인의 경지에 올랐어야 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자신은 벽을 넘지 못한 걸까?
'어째서 나는 나의 세계를 아직도 정립하지 못한 것이냐!'
퍼억!
카스파르의 손이 목을 스치자 피가 뿜어져 나왔다. 끝없이 솟아오르던 마나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다.
초인과는 기운을 쓰는 효율성조차도 달랐다. 초인의 공격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마나를 엄청나게 쓸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나는....'
목숨이 위협받자 분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자신의 신념은 오롯하다. 은혜 때문에 따랐던 건 계기에 불과했다.
'영주님....'
지셀의 꿈이 자신의 꿈이 된 지는 오래였다. 그 대단한 남자가 어디까지 오를 수 있는지 보고 싶다. 그 역사적인 여정에 함께 하고 싶다.
자신의 충성은 영원히 꺾이지 않을 불굴의 의지다. 언제든 지셀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버릴 수 있었다.
이미 자신의 세계는 그렇게 정립된 상태였다.
그런데 왜 아직도 벽을 넘지 못하는가!
'왜!'
타오르는 분노와 억울함 속에서, 길리언의 마음 깊이 숨어 있던 어둠이 조용히 떠올랐다.
'너에게 그런 자격이 있는가?'
그는 천한 용병이었다.
열 살 때 먹고 살기 위해 검을 잡았다. 어린 나이부터 다른 용병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살았다.
당연히 더러운 짓도 많이 했다. 살기 위해서, 이득을 위해서, 동료를 위해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아무리 포장한다 해도 그것이 용병의 삶인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게 자유롭게 살아왔다. 많은 경험과 실력까지 쌓이니 더 거칠 게 없었다.
작은 명성을 얻었다.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이 있었기에 오만하게 살아왔다.
어지간한 귀족조차도 무시할 정도로 말이다.
그러다 지셀을 만났다. 남은 생은 은혜를 입은 그 남자를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
'나는 분명 그렇게 살아왔다.'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며 그의 뜻을 따라왔다. 목숨 따위는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은 평생 용병으로 살아왔다. 지셀과 함께한 시간보다 더 오래.
그렇기에 무언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만 같았다.
기사라니, 충성이라니.
자신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 아닌가.
정말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가?
혼란스럽다. 왜 이제 와서 이런 생각들이 든다는 말인가.
그간 지셀은 수많은 욕을 먹어 왔다. 천한 용병들을 끌고 다닌다며.
자신을 향한 욕설이야 익숙하니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지셀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게 아닐까 신경 쓰였다.
자신도 그 평판에 한몫하는 거 같아서 말이다.
천한 용병 출신, 길리언.
그것이 그의 정체성이자 오만했던 만큼 자신을 깎아 먹던 과거였다.
'사실 나는... 그냥 명예롭게 죽을 곳을 찾고 있었던 게 아닐까?'
아니면 지셀과 함께하며 이름을 날리고 싶은 욕심 때문인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지셀은 누구의 평판도 신경 쓰지 않았다.
용병이 아니면서도 누구보다 용병 같았던 사람. 결국에는 용병단까지 만든 사람.
그런 그의 매력에 홀려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많은 실력자가 그의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
가난한 영지의 망나니였던 그는, 이제 북부 최강이라 불릴 정도로 성장했다.
'이제 나는 정말 필요한 사람인가?'
그래서 길리언은 이유를 찾았다. 몇 번이나 자신이 그와 함께해야 하는 이유를 찾았다.
이제는 그를 위해 싸운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 늙은 몸을 이끌고 저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과 함께할 이유가....
문득 그가 딸의 병을 고쳐 주었을 때가 생각났다.
― 병을 고쳐 주겠다니까? 아픈 사람 고치는 데 뭐 거창한 이유가 필요한가?
'....'
다짜고짜 찾아와서 딸의 병을 고쳐 주겠다고 우겼다. 이유를 묻는 자신에게 지셀은 그렇게 말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마음이 가는 대로, 발길이 가는 대로 움직이는 그런 사람.
그럼에도 영지와 사람들을 위한다는 마음만은 굳건히 품고 있는 사람.
―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강요하는 취미는 없거든. 싫다는데 어쩌겠어.
지셀은 처음부터 자신에게 거부할 권리를 주었다.
지셀을 따르기로 한 건 그 자신이었다. 지셀이 강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군.'
콰아앙!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잠깐 떠올랐던 상념이 사라졌다.
시간의 괴리가 느껴졌다. 찰나의 시간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온몸에 상처를 입고 피투성이가 된 길리언이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도끼는 완전히 박살이 나 사라지고 도낏자루밖에 남지 않았다.
"끝이구나!"
카스파르가 희열에 찬 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었다. 이제 저 지긋지긋한 하얀 사자의 심장을 뚫을 시간이었다.
그때, 까마귀 하나가 소리를 지르며 카스파르에게 달려들었다.
"이야아아아압!"
퍽!
다크의 몸통 박치기가 흥분한 카스파르의 얼굴에 적중했다.
"뭐야!"
그 틈을 타 길리언이 몸을 살짝 틀었다.
푸욱!
덕분에 카스파르의 손은 길리언의 오른쪽 가슴에 파고들었다.
"쿨럭!"
즉사는 면했지만 중상이었다. 길리언이 입에서 피를 토했다.
"길리언! 정신 차려! 지금 주인이 왔...."
파아아악!
카스파르가 다른 손을 휘두르자, 다시 나타났던 다크는 말을 하다가 그대로 터져 버렸다.
"이 까마귀 새끼는 뭐지? 분명 아까 죽지 않았나?"
말하는 까마귀에 카스파르가 잠깐 정신을 판 사이, 길리언이 요새 밖을 돌아보았다.
두두두두두두두!
온다, 그가 오고 있다.
펜리스의 깃발을 휘날리며 전장을 쓸어버릴 듯한 기세로 달려오고 있다.
지셀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길리언!"
"영주님...."
"내가 왔다! 버텨라!"
길리언이 피를 머금은 이빨을 내보이며 웃었다.
싸우라고 하면 싸우고, 지키라고 하면 지키면 된다.
그리고 버티라고 하면 버티면 된다.
길리언이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생각이 너무 많았구나. 나도 모르는 어둠이 내 안에 있었을 줄이야."
"넌 끝이다. 길리언."
카스파르가 자신의 손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길리언은 왼손으로 그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내가 바로 영주님의 검이자 방패다."
"뭐라?"
"내가 영주님의 적을 처단할 것이고 내가 영주님을 지킬 것이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충성이다. 그리고... 충성에 꼭 자격이 필요한 건 아니지."
"이 미친놈이 뭐라는 거냐."
카스파르가 힘을 주었다. 그런데 억센 손아귀에 잡힌 손이 빠지지 않았다.
초인인 자신의 힘에 밀리지 않는다니.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이놈이 어디서 이런 힘을!"
카스파르가 다른 손으로 길리언을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길리언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푸욱!
도낏자루가 번개 같은 속도로 카스파르의 목을 꿰뚫었다.
"컥, 커억...."
길리언이 불타는 눈빛으로 카스파르를 노려보며 말했다.
"오늘, 나의 세계가 완성되었다."
카스파르의 목을 뚫은 도낏자루에는.
맹렬하게 빛나는 오러 블레이드가 솟아나 있었다.
478화 나의 세계가 완성되었다. (3)
목이 뚫린 카스파르는 기운을 끌어모으며 어떻게든 회복하려 했다.
하지만 목에 박혀 버린 도낏자루 때문에 회복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오러 블레이드가 끊임없이 솟구쳐 있었기 때문이다.
"쿨럭! 너... 어떻게.... 그르륵...."
카스파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피거품을 게워 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상대는 자신보다 한 수 아래였다. 기술이 뛰어나 조금 곤란하긴 했지만, 다른 시간을 점유하는 자신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에 벽을 넘어 초인의 경지에 오르다니!
"크륵.... 내가... 널 각성시켰구나...."
상황을 깨달은 카스파르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는 최상급 기사였다. 언제 깨달음을 얻어 벽을 넘을지 모르는.
대부분이 초인에 오르지 못하기에 그 위험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자신의 손으로 구원교의 강력한 적을 하나 더 만든 셈이었다.
길리언이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 덕분에 목숨을 걸고 벽을 넘었다. 보답으로 편히 보내 주도록 하지."
파아악!
오러 블레이드가 세차게 뿜어져 나오며 카스파르의 목을 완전히 갈랐다.
구원교의 심판관이자 초인인 그는 그렇게 방심한 대가를 치르고 말았다.
"쿨럭!"
카스파르를 처치하자마자 길리언도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상처가 너무 많아 제대로 서 있기가 힘들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올라오는 델파인군 기사와 병사들이 아까보다 더 늘어 있었다.
수가 많다는 이점을 이용해 기어코 왕국군 병사들을 뚫고 올라온 것이다.
"저놈부터 죽여라!"
델파인군의 기사가 크게 외치자 몇 명이 길리언에게 달려들었다.
길리언이 이를 악물고 일어나려 했지만 다리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주변에 있던 펜리스 기사들이 그 모습을 보고 달려왔지만, 델파인군 기사들이 조금 더 빨랐다.
델파인군이 길리언을 덮치려던 순간, 에레네스가 움직였다.
파아아앙!
"으아아악!"
순식간에 다가온 에레네스가 정령들을 소환해 델파인군의 기사들을 밀쳐 버렸다.
그사이 달려온 펜리스의 기사들이 넘어진 그들을 공격했다.
자세가 무너진 그들은 별다른 반항도 하지 못하고 죽었다.
주변이 정리된 걸 확인한 에레네스가 길리언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축하한다. 드디어 벽을 넘었구나."
"...감사합니다. 이걸 노리신 겁니까?"
"진작 벽을 넘었어야 할 자가 넘지 못하고 있으니, 혹시나 해서 말이다."
"하마터면 정말 죽을 뻔했습니다."
길리언이 웃으며 말하자 에레네스가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목숨을 걸 정도로 확고한 세계를 정립하지 못하면 초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법이지."
에레네스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그녀는 지금까지 제대로 힘을 끌어내 싸우지 못하고 있었다. 길리언이 죽지 않도록 계속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제대로 전투에 집중할 수가 있었다.
그녀가 요새 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펜리스 백작이 왔구나. 보면 볼수록 참으로 신기한 자다."
3군단을 처리하러 간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이곳에 도착하다니.
전쟁 하나에서만큼은 정말 신기에 이른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저자와 함께한다면 이번에야말로 구원교를 뿌리 뽑을 수 있으리라.
"내 선택이 옳았군."
에레네스가 미소 지으며 기운을 끌어올렸다. 정말 북부군에 합류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클로드가 해 둔 뒷공작을 모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콰아앙!
에레네스가 잔뜩 기운을 끌어올려 다양한 중급, 하급 정령들을 소환했다. 정령들은 곳곳으로 퍼져 나가 아군 병사들을 도왔다.
강한 기운을 쓰면 주변에도 피해가 미치니 난전에 어울리는 방식을 쓴 것이다.
길리언의 손에 구원교의 심판관이 죽고 요새 위가 점점 정리되어 갈 즈음, 아래쪽에서는 난리가 나 있었다.
"페, 펜리스군입니다! 펜리스의 기마병들이 오고 있습니다!"
참모들의 호들갑에 팔가우 백작이 욕설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두두두두두두!
족히 2만은 되어 보이는 기마병들이 펜리스의 깃발을 휘날리며 달려오고 있다.
가장 앞에서 달려오는 인물은 처음 봤지만 누구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펜리스 백작!"
그의 외형은 너무나도 유명했다. 뒤따라오는 것도 펜리스군이 확실하니 다른 사람일 리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벌써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쓸데없는 일을 계속 고민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곧 기마 돌격이 이곳으로 들이닥칠 것이다.
"이러다가 옆을 공격당합니다!"
참모들의 외침에 팔가우 백작이 주변을 살폈다. 달려오는 펜리스군 때문에 다들 동요하고 있었다.
요새 위로 올라가는 중에 옆에서 적들이 달려오고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팔가우 백작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모두 물러나라! 모두 물러나! 일단 기마 돌격부터 막아라!"
둥! 둥! 둥!
부우우우우우!
사방에서 북과 나팔 소리가 울렸다.
새로운 명령을 받은 병사들은 황급히 물러나며 진형을 다시 정비하려 했다. 분명 그러려고 했다.
"멈추지 말고 쏴라!"
요새 위에서 길리언이 크게 외치자 펜리스 궁기병들은 화살을 아끼지 않고 쏘아 댔다.
파아아아악!
하늘을 새까맣게 물들인 화살 비가 물러나는 델파인군의 진형으로 떨어졌다.
"으아아악!"
"막아라! 막아!"
"천천히 물러나라!"
기사들과 지휘관들이 고래고래 외치며 병사들을 수습하려 했다.
하지만 적이 다가와 마음이 조급해지고, 요새 위에서는 화살이 쏘아지니 병사들의 진형은 더 망가져 갔다.
두두두두두!
그러는 사이에 펜리스군은 엄청난 속도로 다가왔다. 곧 부딪칠 것이다.
결국 보다 못한 팔가우 백작이 다시 외쳤다.
"마법사! 마법사들은 어서 저놈들을 공격해라!"
"무리입니다! 지금 전부 정령을 막고 있습니다! 정령이 날뛰면 화살 공격에 무방비하게 당할 겁니다!"
여기서 마력을 풀어 버리면 요새 아래와 아군 진영에 봉쇄되어 있던 상급 정령들이 움직일 것이다.
지금처럼 진형이 망가진 상태에서 그런 공격을 받으면 완전히 무너질 것이다.
에레네스는 여전히 상급 정령들에게 가장 많은 기운을 쏟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마법 전력을 묶어 놓으려는 속셈이었다.
클로드가 에레네스를 이곳에 보낸 이유이기도 했다. 그녀는 마법 전력과 일반 전력에 모두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법사가 어느 쪽을 막든 델파인군은 무너지게 될 것이다.
"이이이익!"
팔가우 백작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믿었던 초인마저 사망해 버렸다. 아군 진영에는 언제 정령이 날뛸지 모른다. 그런데 옆에서는 적 기마병들이 달려오고 있다.
"끝났구나."
이번 전투는 패배다. 4군단은 이렇게 전멸하고 말 것이다.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그냥 펜리스 백작을 공격해라! 어서!"
병사들은 포기한다. 어차피 질 거라면 펜리스 백작과 저 강력한 기마병들의 수를 하나라도 줄여 놔야 했다.
마법사들이 팔가우 백작의 뜻을 알고 모든 마력의 방향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에레네스가 소환한 상급 정령들이 움직였다.
콰아아아앙! 콰아아앙!
"으아아악!"
요새 아래에 소환되어 있던 거대한 불도마뱀이 다시 불을 내뿜었다. 물러나던 병사들은 순식간에 타오르며 쓰러졌다.
더 깊숙하게 들어왔던 대지의 정령은 땅을 무너뜨려 병사들을 넘어뜨렸다.
그렇게 무방비 상태가 된 병사들은 쏟아져 내리는 화살 비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저놈들을 죽여라!"
팔가우 백작은 몇 번이나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군의 희생을 담보로 한 공격이었다. 어떻게든 펜리스의 기마병들에게 큰 피해를 줘야 했다.
파아아아아아!
마법사들이 시전한 마법이 달려오는 기마병들을 향해 쏘아졌다.
땅에도 거대한 마력이 몰리기 시작했다.
그때, 지셀의 옆에서 달리던 파르니엘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쿠웅!
파르니엘이 메이스를 땅에 박자 찬란한 빛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 빛은 대지를 물들이며 강력한 신성력의 보호막을 만들었다.
쿠쿠쿠쿵!
땅 밑에서 솟아오르던 마법들은 보호막에 막혀 모두 그 자리에서 터지고 말았다.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울리며 곳곳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뛰어난 기마술을 자랑하는 기동군은 극소수의 병사들만 낙오되었을 뿐 대형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콰앙! 콰앙! 콰아앙!
날아오는 수많은 마법도 보호막과 충돌하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빛의 보호막은 몇 번이나 흔들리면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화르르르륵!
지셀의 주변에 수십 개의 마력이 창이 생성되어 하늘로 쏘아져 나갔다.
콰아아앙!
마력의 창들은 날아오던 마법들과 부딪치며 동시에 사라졌다.
마법사들이 쏘아 보낸 마법들은 그렇게 지셀과 파르니엘에게 막혀 버렸다.
"이, 이런...."
델파인군의 마법사들은 당황하며 표정을 구겼다. 몇 명 넘어뜨려서 진형을 조금 흐트러트린 거 외에는 아무런 효과를 주지 못했다.
이미 상당한 마력을 소모한 상태에서 쏟아부은 공격이었다. 그게 막히니 이들은 다시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저 어떻게 도망갈지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모든 수가 막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델파인군의 진영으로 지셀이 들이닥쳤다.
콰아아아앙!
"으아아악!"
이미 진형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델파인군이었다. 지셀과 펜리스 기동군이 밀고 들어가는 대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쓸어버려라!"
지셀과 펜리스 기동군은 거침없이 델파인군을 밀어붙였다. 어찌나 돌격이 강했는지 델파인군 진형이 단번에 움푹 파일 정도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말을 버리고 순식간에 달려온 파르니엘의 공격은 그야말로 발군이었다.
콰앙! 콰아앙! 콰아아아앙!
사람보다 큰 메이스를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한 번에 수십 명씩 찍어 버리는 파르니엘의 모습은 전장의 학살자라 불리기에 충분했다.
"으아아악!"
"살려 줘!"
"도망가라!"
델파인군은 그 모습을 보고 완전히 전의를 상실해 버렸다. 펜리스의 기마 돌격이 서서히 힘이 빠지는 동안에도 파르니엘은 더욱더 강하게 날뛰었기 때문이다.
콰앙! 콰아앙! 콰앙!
바퀴벌레를 찍어 누르듯이 움직이는 파르니엘을 보며 지셀이 감탄했다.
"엘레나 무기를 바꿔 줘야 하나? 역시 신력을 살리기에는 둔기가 더 나은 거 같군."
거대한 무기 중에 당장 쓸 만한 게 도끼밖에 없어서 그걸 줬는데, 아무래도 갈바릭에게 부탁해서 새로 만들어야 할 거 같았다.
"자, 우리도 성녀한테 질 수 없지! 더 힘을 내자!"
"와아아아아!"
전장에 펜리스 기동군의 큰 함성이 울렸다. 이미 승기를 완전하게 잡은 그들은 쉬지 않고 적들을 학살했다.
요새 위에서도 큰 함성이 울렸다. 버티기 힘들 거라 각오한 것이 무색하게도 단번에 전세가 역전되었기 때문이다.
펜리스 궁기병들은 의욕에 가득 차서 쉬지 않고 화살을 날렸다. 너무 빠르게 연사하니 화살이 벌써 바닥을 보일 정도였다.
콰앙! 콰앙! 콰아앙!
"끄아아악!"
전장에는 델파인군의 비명만 울려 퍼졌다.
기마 돌격에 무방비로 당해 버리고 곳곳에서는 정령들이 날뛰고 있다. 물러나려는 병사들은 위에서 쏟아지는 화살 비에 속수무책으로 죽어 갔다.
그들은 완전한 혼란에 빠졌다. 도망갈 구석이 없음에도 무기를 버리고 도망가려 애썼다.
델파인군은 이제 군대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진 상태였다.
팔가우 백작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전장을 둘러보았다.
'도대체 이게 뭐지?'
분명 자신들이 우세했다. 보급 부대가 습격당해 잠시 시간을 끌기는 했지만, 상대방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으려 했다.
후퇴하지 않는 이상 자신이 행한 판단은 옳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그랬다.
심판관이 죽었어도 점령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셀 페르디움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도망가! 어서 도망가라!"
가장 먼저 마법사들이 외치며 도망갔다. 그들은 남은 마력을 박박 긁어모아 온 힘을 다해 전장에서 벗어났다.
주변에 있던 병사들도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항복을 해도 상대가 받아 줄 만한 상황이 아니다. 사방에서 공격이 들어오고 난리가 났는데 뭘 믿고 엎드린다는 말인가.
그래서 델파인군은 더 빨리 무너졌다. 공포에 전염된 병사들은 개미 떼처럼 흩어지기에 바빴다.
"돌아와라.... 어서 저들을...."
팔가우 백작은 여전히 넋이 나간 채 중얼거리기만 했다.
단 한 사람.
단 한 사람 때문에 이렇게 전세의 판도가 뒤바뀌어 버리다니.
도대체 다른 군단은 뭘 했길래 저자의 발목을 잡아 두지 못한 것인가!
"피하셔야 합니다!"
호위 기사의 외침에 팔가우 백작이 입술을 깨물며 검을 뽑았다.
피하기는 어디로 피한단 말인가! 펜리스 백작은 자신을 절대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때, 또다시 부활한 다크가 그의 머리 위에 나타나 외쳤다.
"여기 있다―!"
팔가우 백작은 얼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세상 어떤 까마귀가 말을 하는가.
당황하기도 잠시, 그는 갑자기 들려오는 폭음에 다시 고개를 내렸다.
콰아아아앙!
"으아아아악!"
한 남자가 앞을 막은 병사들을 뚫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몸 곳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지랑이와 같은 검은 기운.
입꼬리에 매달린 사나운 웃음, 붉게 빛나는 두 눈.
직접 본 건 처음이지만 귀가 닳도록 들어서 그런지 무척이나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남자가 말 위에서 허리를 펴며 창을 뒤로 당겼다.
팔가우 백작은 그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퍼어어억!
창이 단숨에 날아와 자신의 가슴을 뚫을 때까지 말이다.
479화 나의 세계가 완성되었다. (4)
"커억...."
가슴을 파고드는 화끈한 고통에 팔가우 백작이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면 뭘 하는가. 이미 전투는 끝이 난 것과 마찬가지인데.
아군은 빠른 속도로 몰살당하고 있었다. 이게 정말 5만이나 되는 대군이었는지 의심이 갈 지경이었다.
그 수가 고작 자신들의 절반밖에 안 되는 적에게 이렇게 패배하다니.
정체를 모르는 정령사의 존재가 컸다. 마법사들이 너무 많이, 오래 묶여 있었다.
하지만 그것까지 감안해도 비등한 수준의 전력이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무너진 것은 허를 찔린 기습에 완전히 당했기 때문이었다.
"펜리스 백작.... 북부군...."
공작가와 구원교는 실로 터무니없는 상대를 적으로 두었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 이렇게 분산되어 싸울 만한 적이 아니다. 전력을 빨리 하나로 모았어야 했다.
"비록 나는 여기서 패배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펜리스 백작은 모른다. 자신들은 고작....
퍼억!
팔가우 백작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지셀이 번개같이 다가와 그의 목을 날렸다.
쿠웅!
"후.... 아슬아슬했군."
지셀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만약 모리스와 함께 오려고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요새가 위험했을 것이다.
다크를 통해 길리언이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고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상대도 바보는 아니다. 어떻게든 상황에 맞춰 최적의 전략을 취하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다.
지셀이 주변에 있는 기사들에게 말했다.
"끝났다. 전장을 정리해라."
팔가우 백작의 목이 떨어졌으니 전투는 이제 끝난 것과 다름이 없었다. 델파인군은 전부 도망가느라 바쁘지, 덤벼드는 자는 보이지도 않았다.
"항복해라!"
"무기를 버리고 엎드려라!"
"항복하면 살려 줄 것이다!"
곳곳에서 펜리스군이 외치자 도망치기보다 항복하는 자들이 많아졌다.
에레네스는 기마 돌격이 성공했을 때 이미 정령들의 소환을 해제한 상태였다.
공세가 줄어들었기에 델파인군의 항복은 더 빠르게 이루어졌다.
워낙 공격이 격렬했기에 살아남은 자들은 채 1만도 되지 않았다.
이들도 왕국군에 편입되어 새로운 전력이 되어줄 것이다.
지셀은 전장 정리를 주변에 맡기고 바로 요새로 들어갔다.
"길리언."
"영주님...."
피투성이가 된 길리언이 아렐에게 부축받으며 다가왔다. 에레네스가 물의 정령을 통해 그의 상처를 조금 치료했고 포션도 들이부었지만 여전히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마나도 바닥이 났고, 검은 기운이 아직도 남아 상처 회복을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살아 있으니 됐다. 며칠 쉬면 괜찮아질 것이다.
지셀이 길리언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드디어 벽을 넘었군. 기회만 있다면 반드시 넘을 줄 알았어."
"영주님과... 에레네스 님 덕분입니다."
지금의 실력을 갖춘 건 모두 지셀 덕분이다. 하지만 이번에 계기를 만들어 준 건 에레네스였다.
그녀가 길리언의 잠재성을 알아보고 목숨을 걸 기회(?)를 양보해 주었으니까.
지셀이 의아해하며 에레네스를 바라보았다.
"그래? 뭐 좋은 조언이라도 해 준 건가?"
"아니다. 그냥 한 번 더 목숨을 걸면 될 거 같더군. 그래서 초인과 싸워 보라 한 것이다."
"이런, 각성을 못 했으면 죽었을 거 아냐. 길리언은 소중한 인재라고."
지셀의 너스레에 길리언이 웃었다. 저런 모습이 언제나 마음을 편하게 해 준다.
에레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죽을 수도 있었겠지. 그래서 계속 신경을 썼다. 위험할 때 개입하려고."
말은 쉽지만, 정말 찰나의 순간에 실수라도 하면 죽었을 것이다. 아무리 상대가 반쪽짜리라고 해도 초인은 초인이었으니까.
그런 위험한 짓을 종용하고도 에레네스의 얼굴은 참 평온했다. 역시 오래 살아서 그런지 어지간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사람을 말만으로 흔드는 클로드와 알포이가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다크가 날아와 지셀의 어깨 위에 앉으며 말했다.
"길리언, 내가 살려 준 거 알지? 나 아니었으면 죽었을 거 알지?"
"...그래."
길리언이 피식 웃었다. 용감하게 달려든 다크 덕분에 급소를 피할 수 있긴 했다.
벽을 넘어서는 그 찰나에 심장이 뚫렸다면 정말 위험했을 테니까.
"와아아아아!"
갑자기 들려온 환호에 지셀이 요새 위에서 전장을 바라보았다.
기동군 모두가 이번 승리에 기뻐하고 있었다. 미칠듯한 이동 속도 때문에 힘들긴 하지만 델파인군을 격파한다는 뿌듯함이 더 컸다.
그 와중에 요새에 있던 펜리스군에게 소식을 전해 듣고 모두가 환호성을 지른 것이었다.
바로 길리언이 초인에 올랐다는 소식이었다.
초인은 전쟁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존재다. 그런 존재가 북부군에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이제 단일 세력으로서 북부군을 상대할 곳은 없을 것이다. 공작가도 초인들을 하나로 모을 수밖에 없게 된다.
지셀은 결국 쓰러져 실려 가는 길리언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좋군, 길리언이 벌써 벽을 넘다니."
적 세력에는 아직도 많은 강자가 남아 있다.
왕국제일검 카이엔 발자크 백작, 7서클 마법사 일로이스, 그리고 대륙 7강 중 하나였던 아이던을 비롯해 구원교의 고위 사제들까지.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이쪽도 더 많은 초인이 필요했다. 그러니 길리언의 각성이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역시 길리언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최고의 전력이자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였다.
"역시 엘레나한테 준 도끼를 다시 뺏어 와야 하나...."
초인에 올랐으니 그 도끼는 길리언이 써도 어울릴 것이다. 길리언도 모든 무기를 달인 수준으로 잘 쓰기는 하지만 도끼를 가장 즐겨 쓰니 말이다.
"하, 그래도 이미 준 걸 다시 달라고 하기가 좀 그렇네. 정들어서 못 준다고 하면 어쩌지?"
엘레나가 좋아할 거라는 생각은 못 하고 섭섭해할까 봐 걱정하는 지셀이었다.
* * *
다그닥, 다그닥.
덜컹, 덜컹, 덜컹.
길게 늘어선 수레들이 루타니아 왕국 방면으로 향하고 있었다.
여러 도시를 오가며 거래하는 상단의 행렬이었다.
전쟁이며 균열로 대륙 전체가 난리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싸움박질만 하는 건 아니다.
누군가는 여전히 농사를 짓고 누군가는 여전히 무언가를 만든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걸 팔러 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다들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세상이 어수선해지니 도적놈들이 무척이나 많이 날뛰는 것이 달라졌다면 달라진 점이었다.
그래서 상단주도 용병들을 고용했다. 요새 전 대륙의 용병계를 통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커진 '펜리스 용병단'이었다.
그들을 고용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지간한 도시에는 펜리스 용병단 지부가 있었으니까.
현재 상단을 호위하고 있는 용병들은 50여 명, 그리고 이들을 이끄는 용병대장은 꽤 경력이 있는 베테랑이었다.
용병대장이 상단주에게 말했다.
"이곳만 지나면 습격 위험은 낮아질 겁니다."
"으음.... 지금이 가장 위험하겠군요."
"네, 이곳에 도적놈들이 꽤 자주 출몰하니까요."
용병대장의 말에 용병들은 모두 긴장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요새 도적들은 나약했던 예전과 다르다. 대규모로 뭉쳐 다니고 정규군 출신들도 많았다.
전란이 계속될수록 다들 먹고 살기 힘들어져서 독이 잔뜩 올라 있었다. 거기서 더 독한 놈들이 기어코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뺏는 도적이 되는 것이다.
악독한 영주들도 그 현상을 가속하는 데 한몫했다.
악의와 증오가 겹치고 겹쳐 사방 천지에 도적들이 깔리게 된 것이다.
긴장한 용병들을 보며 상단주가 분위기를 풀어 보려고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마법사'님이 함께 하시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아... 마법사요."
그 말에 모두의 고개가 뒤따라오는 수레로 돌아간다.
짚을 깔아 놓은 수레 위에 한 젊은 청년이 누워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뭐가 즐거운지 노래도 흥얼거리고 다리도 까딱거린다.
용병대장이 혀를 차며 의심 어린 눈길을 보냈다.
"진짜 마법사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청년은 검은색에 금빛 자수를 수놓은 로브를 입고 있었다.
요즘 사람들은 검은색 로브를 잘 입지 않는다. 구원교의 사제들로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고급스럽게 박힌 금빛 자수가 없었다면 진작에 잡혀갔을 것이다.
외모도 영 마법사다운 위엄이 풍기지 않았다.
젊은 건 둘째 치더라도 싱글벙글한 미소와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그냥 장난꾸러기 같아 보였다.
체구는 그리 크지 않고 마른 편이었다. 공부 좀 하는 학자 같은 분위기는 있었다.
그나마 그런 부드러운 인상 때문에 악의는 없어 보였다.
용병대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법사가 맞다 해도 저서클 마법사겠죠."
솔직히 본인 입으로 당당하게 마법사라 말하니 검증하기도 뭐했다. 정말 마법사라면 괜히 싸움이 붙어 피해를 볼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니 다들 슬쩍슬쩍 눈치만 보고 내버려둘 뿐이었다.
그렇게 떠들며 조금 더 나아가자 용병대장의 예상대로 도적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도적들이다! 전투 준비!"
용병대장의 외침에 다들 긴장해서 무기를 들었다.
예전에는 영주들이 토벌대를 보낼지도 모른다는 핑계로 적당히 협상해 위기를 벗어날 수도 있었지만 요새는 그런 게 없었다.
영주들은 상단이 털려도 신경을 쓸 여유가 없으니, 도적들은 무조건 죽이고 가져가는 걸 선호했다.
"으하하하! 오늘은 털 게 많구나! 전부 다 내놓으면 목숨은 살려 주겠다!"
험악하게 생긴 도적 두목이 크게 외쳤다. 100여 명이나 되는 머릿수에 자신감이 차오른 것이다. 요새 들어서 지원자가 더 많아지는 추세였다.
용병들은 도적 떼의 수가 생각보다 더 많아 잔뜩 긴장했다.
루타니아 왕국 내에서 펜리스 용병단은 무척이나 위명이 높았다. 지셀의 명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력이 뛰어난 용병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왕국에서는 조금 달랐다. 반강제적으로 펜리스 용병단에 가입시키다 보니 실력이 떨어지는 자들이 더 많았다.
이곳에도 기사급 인물은 한 명도 없었다. 그냥 평범한 용병들이 펜리스 용병단이라는 이름만 달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지셀이 마구잡이로 용병들을 흡수한 탓에 일어난 결과이었다.
"젠장, 너무 많잖아."
용병대장이 입술을 몇 번이나 깨물었다. 상대 수가 자신들의 거의 두 배나 되니 이겨도 피해가 꽤 클 것이다.
게다가 저쪽에는 정규군 출신 병사나 기사가 섞여 있을 수도 있다. 이래저래 오늘은 목숨을 걸어야 할 거 같았다.
용병대장이 청년이 있던 수레를 바라보며 말했다.
"도적들이오. 마법사님께서 조금 도와주셔야 할 거 같소."
청년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일어나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아, 나 일반인한테는 마법 안 쓰는데."
"...그게 무슨 말이오."
"음, 내가 사람 죽이는 걸 별로 안 좋아하거든."
용병대장이 몇 번이나 눈가를 씰룩이다가 말했다. 마법사에 대한 예우가 더 이상 필요 없을 거 같았다.
"...일반인이 아니라 도적들이다. 뭐든 해서 도와야 하지 않겠나? 안 그러면 피해가 클 텐데? 너 마법사라고 공짜로 탔잖아."
그 말에 청년이 머쓱한지 뒷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아, 그건 고맙게 생각하는데.... 아, 무슨 마법 써야 하지? 너무 많아서 뭐가 좋을지 모르겠네."
"...아무거나 도움 될 만한 걸 써라."
"아무거나 쓰면 너무 강.력.하.거.든."
'미친놈인가?'
용병대장이 한 소리 하기도 전에 도적 두목이 크게 외쳤다.
"협상할 생각이 없나 보다! 그냥 다 죽여 버려!"
"와아아아아!"
도적들이 크게 함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어차피 도적들이 협상이고 뭐고 안 하는 건 사실 양쪽 다 알고 있었다.
그저 상대를 주눅 들게 하려는 목적 외에는 없는 제안이다.
용병대장이 검을 꽉 쥐며 외쳤다.
"막아라! 최대한 동료 곁에서 싸워라!"
상단주와 일꾼들은 용병들이 짠 진형 안으로 들어가서 벌벌 떨었다. 청년은 얼떨결에 같이 보호받게 되었다.
차앙! 창! 차앙!
용병들과 도적들이 맞붙었다. 그나마 용병들의 실력이 조금 더 나아서 잘 버티고 있었지만 수가 부족하니 계속 싸우면 밀리게 될 것이다.
상단주가 청년을 붙잡고 울었다.
"아이고, 마법사님 제발 좀 도와주십시오! 이러다가 용병들도 다 죽고 우리도 다 죽겠습니다!"
"어, 어? 그, 그렇지? 그래! 도와줘야지!"
청년은 당황했다. 정말 머릿속에서 너무 많은 생각이 떠올라 복잡해졌다.
그래서 일단 바닥에 있는 돌을 집어서 던졌다.
빠악!
"케엑!"
용병과 싸우고 있던 한 도적이 이마가 깨지며 쓰러졌다.
"오."
청년은 이 방식이 조금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빠악! 빠악! 빠악! 빠악!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돌들이 도적들을 향해 날아갔다. 청년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돌들을 열심히 집어서 던졌다.
용병들이 도적들을 막고 있으니 공격당할 일도 없어서 더 좋았다.
"뭐, 뭐. 뭐야!"
돌팔매질에 도적들이 마구잡이로 쓰러지자 두목이 깜짝 놀랐다. 돌에 맞아 이마가 깨진 도적들은 용병들에게 쉽게 죽었다.
맞는 족족 쓰러지니 싸움이 될 리가 없었다.
"두, 두고 보자! 내가 애들 더 데리고 올 테니까! 여, 여기서 기다려라!"
결국 혼자 남은 도적 두목이 냉큼 몸을 돌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도망간다!"
"잡아라!"
"저놈을 놓치면 안 돼!"
정말 부하들이 더 있으면 피곤해진다. 어쩌면 인근의 다른 도적까지 끌고 올 수도 있었다.
그런데 애초부터 조금 떨어져 있던 두목이 작정하고 도망간 거라 따라잡기는 글렀다.
용병대장이 청년을 돌아보며 외쳤다.
"마법! 마법으로 저놈 잡아! 도망가잖아!"
"그, 그렇지? 잡아야지?"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돌을 잡아서 잽싸게 던졌다.
쐐애애애액!
콰앙!
"꿱!"
엄청난 속도로 날아간 돌은 두목의 뒤통수를 맞췄다. 두목은 그대로 뒤통수가 깨져 쓰러지고 말았다.
뒤따라간 용병들이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두목을 잡아서 끌고 왔다. 이런 놈은 잡아가면 현상금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투가 끝나자 모두 얼이 빠진 얼굴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돌팔매질이 신기에 다다랐다. 자신들이 보호는 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쉬운 일은 아니다.
용병대장이 떠듬거리며 물었다.
"그, 그게 마법인가? 정말 마법사 맞아?"
사람들의 눈치를 슬쩍 보던 청년이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무척이나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아아, 모르는가? 이건 '매직 미사일'이라는 마법이다."
"...."
매직 미사일은 마력의 덩어리를 뿜어내어 쏘는 1서클 마법이다. 마력 대신 돌을 던지는 마법이 절대 아니다.
대부분이 알고 있는 상식이지만 아무도 딴지를 걸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저 돌 던지는 솜씨가 너무 예사롭지 않았으니까.
용병대장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곧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믿겠다. 확실히 너는 마법사가 맞군."
전혀 아닌 거 같지만 이상한 놈이랑 말싸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나 진짜 마법사라니까."
청년이 이제야 오해가 풀렸냐는 듯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정말 마법에 자신 있었다. 일상생활도 마법 덕분에 무척이나 편하게 하고 있었으니까. 그에게 마법은 그냥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저 성격상 사람들 앞에서 요란하게 마법을 쓰는 걸 싫어할 뿐이다.
마법사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이 잔뜩 깔린 세상이었으니까.
용병대장이 대충 주변을 수습하고 다시 크게 외쳤다.
"자, 출발하자!"
덜컹, 덜컹.
수레가 움직이고 청년은 그 위에 누워 다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펜리스 백작이라.... 한번 만나 보고 싶단 말이지.'
요새 구원교와 싸우는 지셀의 명성은 대륙 전체로 퍼져 나가는 중이었다. 그만큼 지셀이 구원교와 잘 싸웠기 때문이다.
'재미있겠어.'
뭔가 자신과 잘 맞을 것 같았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청년은 부푸는 기대감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480화 당분간은 좀 편할 거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