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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100%EXP / Chapter 19: 19

Capítulo 19: 19

* * *

사도(使徒).

마계왕의 권속을 부르는 말이었다. 사도는 마족일수도, 다른 차원의 생물일 수도 있다.

그 강함은 일반적인 마족들과는 비교할 것이 안된다. 그야, 마계왕으로부터 직접 힘을 하사 받은 이들이니.

'이 시점에 문명계에 존재하는 사도는 하나다.'

그렇다면 다른 셋은 어디에 있는가.

마계나 다른 차원에 있겠지.

'설마, 나보고 마계에 쳐들어 가라는 건가.'

이계 규율이 간섭한 영향인지 시스템의 영향인지. 아니면 나도 내심 속으로 사도를 없애겠다고 생각한 무의식이 반영된 결과인지.

알 방법은 없었다.

'아니면 이 세계로 다른 사도가 넘어온다는 뜻일 수도 있고.'

복잡했다. 미래의 일을 알고 있으니 그만큼 예상 가능한 경우의 수가 많아진다.

그렇게 여러 생각을 하다보니 밤은 금세 흘러갔다.

다음날 아침.

"뭔가 개운하지 못한 표정인데요?"

"아,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돌아가서 설명하겠습니다."

"또 미래에 끌려가는 건 아니죠······?"

"그건 아닙니다."

윤서현이 그럼 다행이란 말과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계획을 다시 점검하느라 거의 못 잤다. 원래 계획대로 사는 스타일은 아닌데,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

상황이 상황이다보니까.

물론 자연 회복과 자연 재생 스킬 덕분에 잠을 못 자도 피곤함은 없다. 충분한 휴식이 되었기에 컨디션을 최고조다.

푹 쉬고 나온 일본의 헌터들도 컨디션은 좋다.

"그러면 출발하겠습니다."

거점에서 보스의 동굴까지는 가깝다.

일본의 헌터들과 우리 일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보스가 위치한 동굴에 도착했다.

"우와아······. 진짜 크네요."

거대한 바위가 동굴을 가로막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봐야 전체가 보일 정도로 큰 크기다.

"여긴 저희에게 맡겨주십쇼. 어제 식사도 대접 받았는데, 힘 좀 써야죠."

"그래, 이런 데에서라도 활약해야지."

일본의 헌터들이 먼저 나서서 동굴에 박힌 바위를 부수기 시작했다. 다섯 명이 동시에 달려 들어 바위를 향해 무기를 내리쳤다.

쿵! 쾅!

파편이 튀고, 모래먼지가 터져나왔지만 바위는 좀처럼 부숴질 생각을 하지 못했다.

팔을 걷어 붙힌 헌터 중 하나가 머리를 긁적이며 우리를 돌아봤다.

"······. 이게 그냥 바위가 아닌가본데요. 마법적 처리가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엄청 단단해요. 시간 좀 걸리겠습니다."

그의 말대로였다. S급들이 달려들어도 부숴지지 않는 바위가 정상이라고 보긴 힘들었다.

조용히 지켜보던 윤서현이 앞으로 나섰다.

"제가 한 번 해봐도 될까요?"

"아, 혹시 처리해 주실 수 있으신 건가요?"

일본의 헌터들은 아쉬워하면서도 흔쾌히 뒤로 물러났다. 쓸데 없이 힘을 뺄 필요는 없으니까.

『 동료 윤서현이 스킬 '공간 조작 Lv.6'을 발휘합니다. 』

쿠구구구구······!

아무리 힘을 써도 미동조차 않던 바위가 윤서현에 의해 옮겨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동굴로 들어갈 수 있을만큼의 틈이 생겨났다.

"후우······. 쉽지는 않네요."

윤서현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역시 일반 돌은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훌륭한 서포트였다.

"뭘, 이렇게까지 해놓은 걸까요? 마치 들어오지 말라는 것처럼······."

"감사합니다. 선봉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들어가시죠."

붉은 갑주를 걸친 류노스케가 헌터들을 이끌고 먼저 앞으로 나섰다. 그들의 마법이 어두운 동굴 내부를 환하게 밝혔다.

보스가 있는 장소까지 나아가는 동안 오우거 몇을 마주했지만, 일본의 헌터들이 어렵지 않게 제압했다.

"별 것도 아닌 놈들이 까불고 있어."

"그렇다기엔 하야시 어제 벌벌 떨면서 아무것도 못했잖아."

"어이어이······. 창피하게 왜 그래······."

그들의 실력은 일본 1위 길드답게 훌륭했다.

팀 구성이 뒤섞인 채 따로 떨어졌기에 제 실력을 발휘 못했을 뿐이었다.

"잠깐."

분위기가 일변한 것은 보스의 영역으로 발을 내딛은 순간부터였다.

류노스케가 헌터들을 멈춰세웠다.

"여기서부터 보스가 있는 거 맞습니까?"

어두운 동굴의 내부로부터 강한 살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마기와는 다른 이질적이면서도 혐오스러운 기운이다.

"네, 맞아요. 그런데······."

윤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간계 능력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탐색과 탐사를 통해 조심스레 나아가야 할 여러가지 장애물을 단번에 통과하게 해주는 셈이었다.

함정, 지형지물, 마수의 위치가 단번에 파악된다.

불필요한 체력과 집중력의 소모를 막을 수 있다는 건 크나큰 장점이니.

"근데, 보스가 움직이지 않아요. 잠들었다기엔 뭔가 이상해요. 일단 직접 눈으로 확인해봐야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진입하겠습니다."

앞으로 나선 류노스케가 동굴의 좁은 틈을 빠져나갔다.

커다란 동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헌터들의 마법에 의해 동공 전체의 모습이 환하게 밝혀졌다.

"자, 잠깐······."

마주한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헌터들이 숨을 들이킬 정도로.

그으으으······.

일반 오우거의 3배는 될법한 크기의 대장 오우거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놈은 심각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상처에선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대장 오우거를 그 꼴로 만든 것은.

"그 고블린이다······!"

녹색 피부와 작은 키.

영락없는 고블린이었다.

허나, 일반적인 고블린들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외양이 존재했다.

검은 안대.

그리고 외팔.

자신의 몸보다 훨씬 큰 태도.

예상했던 대로 그 정체는 네임드 마수 쿠훌렌이었다.

놈의 몸에는 나에게 당했던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쿠훌렌은 우리를 바라보지 않고 말했다.

"크륵, 인간들인가."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류노스케가 일본도를 든 채 경계했다.

"조심하세요. 기괴한 검술을 사용합니다."

대장 오우거를 바라보고 있던 쿠훌렌의 시선이 천천히 우리를 향했다. 그의 눈에 피어오른 마력의 불꽃이 일렁였다.

"······!"

이쪽을 바라보는 쿠훌렌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네 놈은······!"

더욱 강한 살기가 쏟아졌다. 생생하고 질척이는 살기. 그 안에 담겨진 증오가 나를 향하고 있단 건 잘 알 수 있었다.

헌터들과 쿠훌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생겨났다.

그야, 당연하다.

S급 상위의 게이트에서 대장 오우거를 쓰러뜨린 고블린이니까.

"진짜로 저 놈을 혼자서 사냥한거야?"

"상처 하나 없어 보이는데."

"생각보다 더 엄청난 놈이었잖아······."

앞으로 걸어나가려는 찰나,

진세아가 내 옷깃을 붙잡았다.

"괘, 괜찮겠어요? 생각보다 무섭게 생겼는데."

생김새가 문제냐.

놈하고는 해야 할 이야기가 남아 있다.

"오랜만이군. 쿠훌렌."

"키륵······. 이런 곳에서 마주하게 될 줄이야."

놈의 증오스런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여기서 뭐하는 거지?"

"글쎄, 키륵."

놈은 자세를 흐뜨러트리지 않고 말했다.

류노스케와 일본의 헌터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뭐하시던 분인데 고블린하고 아는 사이인겁니까?"

"그럴 사정이 있어서요."

윤서현이 대강 설명을 해주었다.

쿠훌렌은 오만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키륵, 그래도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단 것은 칭찬해주마."

"그거 고맙군."

"대화는 이걸로 충분하다. 키륵. 남은 건 실력의 증명."

콰아아앙!

기괴하기 짝이 없다는 말이 딱 어울린다.

전조 없는 공격이었다.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쿠훌렌의 태도가 나를 향해 휘둘러진다.

직선과 곡선이 예측 불허하게 요동치다, 직각으로 떨어져내렸다.

콰아앙!

그래도 지금이 내게 막아내기란 어렵지 않다.

『 스킬 '태양의 검술 Lv.11'을 발휘합니다. 』

『 유니크 스킬 '영웅의 힘 Lv.11'을 발휘합니다. 』

나는 역전의 검을 들어 가볍게 방어했다.

"크륵······."

안대에 가려지지 않은 놈의 한쪽 눈이 찡그려진다.

녀석은 나와의 전투에서 큰 상처를 입었다.

눈과 팔을 한쪽씩 잃었다.

권속이 아닌 그에게 신체를 재생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으리라.

그럼에도 놈은 여기까지 왔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다.

재능.

압도적인 재능이 쿠훌렌에게 깃들어 있었던 거다.

본래대로라면 그저 A등급의 네임드 마수로 끝났을 쿠훌렌의 일생이.

팔과 눈을 잃음으로써 각성했다.

카앙! 카앙! 카앙!

예측불허의 검이 사방에서 쏟아진다. 대처하기 까다롭고, 막아내도 후속 공격이 곧바로 들어 오니 더욱 까다롭다.

고블린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움직임이 나를 덮쳐 온다. 충격파가 동공 전체를 두드린다.

"도,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공간 방어막은 걸어주고 있어요. 싸움에는······."

"끼어들기 힘들겠네요."

헌터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확실히 뛰어난 재능이다.

고블린이란 종족이 검으로 여기까지 오기란 불가능에 가까우니.

"키륵, 대적자라는 이름이 붙었음에도 겨우 이 정도인가?"

내가 줄곧 방어만하자 쿠훌렌은 도발까지 해왔다. 실제로 수세에 몰려 있는 것도 맞았다.

마계의 보너스를 받지 못하는 지금.

타재간파를 해방하지 않고서는 이기기 힘들어 보인다.

그만큼 강한 상대다.

허나, 나는 고민하고 있었다.

'쿠훌렌을 어떻게 해야하나.'

이전에 마주쳤던 또다른 고블린 황금왕 자볼.

그는 마족의 권속으로 세계 멸망에 일조한다.

멸망 이후 대한민국의 한 지역의 영주가 되어 고블린들을 다스린다.

그러한 미래도 보고 왔었다.

'완전 고블린 천지가 되지.'

그건 내가 아는 본래의 멸망한 세계의 모습.

그러나 내가 윤서현을 구하고 자볼을 죽인 미래에선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번에 내가 확인한 미래.'

쿠훌렌은 자볼 대신 고블린의 수장으로 군림하며 마족에게 저항한다.

그 최후는 불보듯 뻔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항거했다. 고블린만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마계왕에게 잡혀 노예 같은 삶을 살아가는 고블린들.

쿠훌렌은 그들의 유일한 희망인 셈이었다.

놈도 마족을 증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적의 적은 친구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고블린도 아군으로 삼지 못할 이유는 없다.

푸욱.

나는 방어를 포기하고 검을 땅에 박았다.

"포기라, 나쁘지 않은 선택이군. 키륵······!"

놈은 등 뒤로 크게 검을 들어 올렸다.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은 전투가 전부가 아니다.

여기서 쿠훌렌을 죽인다고 해도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다음 고블린의 수장이 마족에게 의탁할 건 뻔하다.

적이 늘어나는 셈.

놈과 달리 나는 개인적인 감정도 없거든.

그러니 나는 싸우지 않고 이기겠다.

『 레전더리급 스킬 '영웅의 격 Lv.6'를 발휘합니다. 』

『 강대한 격이 방출 됩니다. 주변의 존재를 압도합니다. 』

나는 감추고 스킬을 발휘해 내게 잠들어 있던 격을 개방했다.

"키륵······!"

검을 휘두르려던 쿠훌렌의 움직임이 멎었다. 동굴 전체를 메우는 격의 향연에 놈은 움직이지 못했다.

"큭, 무슨 이런······."

검을 쥔 손에 힘이 풀리고 놈의 무릎이 저절로 꺾여 내려간다. 놈이 몸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놈의 몸이 비틀비틀 휘청거린다.

"크윽!"

격 앞에 반항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무의미한 저항이다.

쿠웅.

길지 않은 저항 끝에 놈이 무릎을 꿇었다. 머리라도 조아리고 싶은 심정일 거다. 그러나, 놈은 정신력으로 끝까지 버텨냈다.

"크륵······. 대체······."

꺾인 고개 그대로 나를 노려보는 놈의 눈에 핏줄이 번졌다.

격이란 단순한 강함이 아니다. 격을 소유하지 않은 자는 철저하게 배척시키는 세계의 법칙이다.

그러니 얌전히 받아들여라 쿠훌렌.

그리고 들어라.

할 말은 하나다.

"마계왕을 죽이기 위해 협력해라. 거절한다면······.

나는 놈의 목에 칼날을 가져다 대었다.

"여기서 죽이겠다."

166화 오버 더 월드(4)

이지한의 검이 쿠훌렌의 목에 대어졌을 때.

'어째서······. 이만한 격차가······.'

고블린 쿠훌렌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압도적인 격의 차이 앞에서 그의 몸은 요지부동이었다.

'키륵······.'

이해할 수 없었다.

이지한과 쿠훌렌 자신의 차이를 도무지 인정할 수 없었다.

첫 이지한과의 전투 이후 쿠훌렌은 팔과 눈을 잃었다.

양 손에 쥐던 쌍태도를 더 이상 들어 올릴 수 없었고, 균형이 맞지 않는 몸으로 힘겹게 살아남아야 했다.

그의 신체를 고쳐주겠다는 마족도 있었지만 거절했다.

애시당초 고블린 일족의 멸망을 주도한 것은 마족.

마족의 손을 빌릴 바에는 죽는 게 나았다.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다시는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 이를 갈고 뼈를 깎는 수련을 지속했다.

그 결과가 지금의 쿠훌렌이었다.

고블린 중에서도 단연 빛나는 힘을 손에 넣은 전무후무한 존재.

친(親)마족파를 주도한 자볼이 죽고,

그 자리를 반마족파인 쿠훌렌이 이어 받았다.

이제 쿠훌렌은 고블린 일족을 이끄는 수장이다.

S급 게이트의 마수도 그의 상대가 못되며, 보스마저도 자신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눈 앞의 남자는 어째서.

어째서 이리도 강한 격을 소유하고 있단 말인가.

'이것이 재능의 차이인가? 종족의 차이인가?'

같은 시간축을 살아가는 존재로서.

필히 같은 시간을 보내왔을 터.

그럼에도 이 격차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남자는 마족을 차례차례 쳐부수고 대적자라고 불리는 존재가 되었다. 마족들이 무시 못할 위협이자 재앙.

'그 때 마무리 짓지 못한 것은 내 방심 탓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러한 남자가 쿠훌렌에게 선택을 종용하고 있었다.

여기서 죽을 것이냐.

아니면 인간의 편에 서서 마계왕과 대적할 것이냐.

둘 다 미친 짓이었다.

쿠훌렌이 죽으면 고블린 일족의 미래는 뻔했다. 마족의 노예로 부려지다, 짐승이나 다름 없게 변할 것이다.

이 세계의 일부를 손에 넣는다고 해도, 이성을 잃고 살육을 즐기는 마수가 될 것이다. 그리 된 종족을 쿠훌렌은 직접 보았다.

'그렇게 살아남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하지만 마계왕에게 대적하는 것 또한 제정신이 아니었다.

'일족 전체가 멸망할 수도 있다. 대체 어떤 선택을 해야 한단 말이냐.'

고민을 거듭하는 쿠훌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남자는 차가운 눈으로 쿠훌렌을 내려다 보았다.

"그러고보니 내 이름을 물었었지."

첫 싸움 때의 이야기였다.

쿠훌렌은 남자의 이름이 무엇인지 물었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돌이켜보면 패배였다.

싸운 상대의 이름 정도는 기억하고 싶었다.

그러나 남자는 말해주지 않았다.

"이지한. 이지한이다."

그 대답을 지금 듣게 될 줄이야.

격에 의해 압도되는 지금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저릿하게 귓가에 울렸다. 그가 한마디 할 때마다 몸이 부숴질 것만 같았다.

쿠훌렌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진짜 미친 놈이군.

그런 생각 밖에는 안들었다.

남자는 재차 물었다.

"그러니 선택해라. 죽을 거냐, 협력할 거냐."

"······."

방금 그걸로 생각이 말끔히 정리 되었다.

고민을 거듭했던 쿠훌렌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지한.

단기간에 상상을 초월하는 성장력.

만약, 이 자의 재능이 진짜라면.

그것이 마계를 뒤엎을 정도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걸어볼만 하다.

그것이 쿠훌렌의 판단이었다. 그는 힘들게 입을 열었다.

"키륵······. 다만 조건이 있다······."

그 조건은 마계왕에게 승리하면 고블린 일족의 자유 보장할 것.

이미 목 앞에 칼이 들이밀어진 상황.

사실상 동등한 동맹은 맺을 수 없다.

고블린 일족이 흘릴 피는 결국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종래에 얻을 자유만큼은 지켜내야했다.

쿠훌렌의 먼 미래를 내다본 판단이었다.

"그것만 지켜진다면. 협력하겠다. 크륵······."

이야기를 들은 이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조건이 아니었다.

쿠훌렌에겐 반쯤 협박 식으로 이야기하긴 했지만.

'모든 차원은 연결되어 있다.'

앞으로 마계와 대적할 다른 종족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을 억지로 굴복시킨 채 마계와 대적하게 해선 마족과 다를 게 없다.

"그래, 받아들이지."

쿠훌렌과 고블린 일족이 이지한의 휘하에 들어오게 되는 순간이었다.

* * *

쿠훌렌은 녹빛의 게이트를 생성해 사라졌다.

나는 방출하고 있던 격을 잠재웠다.

조용했던 뒤편에서 숨소리가 들려왔다.

"허억······."

"무슨 스킬인 겁니까······?"

일본 헌터들이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다. 류노스케와 코하쿠만이 멀쩡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경악스런 표정을 하고 있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지, 지금 고블린을 말로 설득한 거에요?"

"예, 그렇게 됐습니다. 이제 저 녀석이 인간을 공격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아니, 사실은 공격했다는 이야기도 조금은 이상하다.

'사람들을 일부러 나눠서 보스까지 도달하는 시간을 늦췄다. 보스는 입구까지 막은 채 자기가 처리해버렸고.'

놈이 역으로 헌터들을 구하려고 했다는 건 너무 과한 추측인가.

"그냥 저렇게 보내도 괜찮은 거에요?"

윤서현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네, 괜찮습니다. 상위의 격 앞에서 고블린 종족의 발언은 맹약의 성질을 띄거든요."

"그건 신기하네요······. 그건 미래에서 얻은 지식인가요?"

"네, 맞습니다."

윤서현이 일본 헌터들에게 들리지 않게 조심스레 한 질문에 가볍게 대답했다.

고오오······.

보스는 쿠훌렌에 의해 진작에 토벌되었다.

공동의 이어지는 통로 끝에서 검은 게이트가 일렁이고 있다.

"출구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아, 나가기 전에."

붉은 갑주의 류노스케가 내쪽으로 다가왔다.

"나가면 통역이 필요할 테니 미리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한때는 어떻게 되나 했는데, 이지한씨 덕분에 성공적인 공략이 될 수 있었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활을 든 코하쿠도 고개를 숙였다.

재능 획득 물약의 귀환 장소가 뒤틀린 탓에 일어난 우연이지만.

결과가 좋으니 오케이다.

화아아악!

바깥으로 나오자 기분 좋은 태양빛이 우리를 반겼다.

멸망한 세계의 붉은 하늘이 아닌, 청량한 푸른 하늘이다.

취재진과 길드 류구의 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플래쉬 세례가 터져나온다.

그들은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텐트로 돌아갔다. 우리를 보고 함께 가자고 손짓했지만 정중히 사양했다.

"우리는 바로 돌아가죠. 가능하죠?"

"물론이죠."

공간계 능력자가 있다는 게 이렇게 든든할 줄이야.

현시점 윤서현은 해외도 가볍게 넘나드는 수준이다.

"빨리 집에 가고 싶어요······."

"그래, 돌아가자."

외부인인 우리를 향해 관심이 쏠리기 전.

『 동료 윤서현이 스킬 '공간이동 Lv.9'를 발휘합니다. 』

우리는 한국을 향해 이동했다.

* * *

은빛의 날개.

"그러니까 정말로 오늘 온다는 거 맞지?"

길드장 윤지은은 손톱을 깨물으며 건물의 1층을 부산스럽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드물게 초조함이 드러나 있었다.

엘리스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80%정도······?"

S급 상위 게이트 공략 이후.

이지한과 윤서현 그리고 진세아는 실종되었다.

말그대로 실종이었다.

엘리스가 아니었다면 윤지은은 불안함에 잠도 제대로 못 잤을 것이다.

'지한씨가 같이 사라진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지만······.'

그래도 1달이 지났다.

무려 1달!

유지은 본인의 걱정도 걱정이지만, 딸(진세아)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하이테크 회장을 설득하느라 진땀을 뺐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이들이 귀환한단다.

"멀쩡히 돌아와야 할텐데."

그리 중얼 거리는 윤지은의 앞.

정문에 사람의 그림자가 비쳤다.

윤지은의 얼굴이 밝아지려는 찰나.

"어라, 길드장 누나 여기서 뭐해요?"

"성호왔니······."

천성호를 확인한 윤지은의 얼굴에 순간 그림자가 드리웠다. 괜히 찔린 천성호가 손을 내저었다.

"저 사고 친 거 없어요. 진짜요. SNS에 신태양보다 내가 세다고 올려서 댓글 불판 나고 기사 터진 것 정도······?"

"너······. 아냐, 나중에 이야기하자."

천성호도 자연스레 합류해서 의자를 깔고 와 앉았다.

"아아, 형이 오늘 온다고요? 그러면 저도 기다릴래요."

스마트폰을 살피던 엘리스가 소리쳤다.

"오, 대박이에요!"

"왜? 도착했대?"

"여기, 방금 일본 1위 길드 류구 공략이 끝났는데요······."

스마트폰의 기사에 올라와 있는 사진.

그 끄트머리에 조그맣지만 분명히 나와 있었다.

이지한과 윤서현.

진세아는 머리카락만 나왔다.

"어디, 어디? 나도 볼래."

"진짜잖아. 그러면 곧······."

모두가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순간.

"어? 다들 기다리고 있었네?"

"언니!"

그토록 기다리던 이들이 돌아왔다.

이지한은 양손 가득 봉투를 들고 있었다.

도쿄 바나나 빵과 병아리 빵이었다.

그는 봉투를 내려다 놓으면서 말했다.

"돌아왔습니다."

"어서와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형!"

"사부님! 어서오세요!"

모두를 맞이한 윤지은은 곧장 윤서현을 향해 달려갔다. 거의 울먹일 지경이었다.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완전. 나 애 아니라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면 깜짝 놀랄 걸."

"다행이다."

자매의 감격스런 만남.

윤지은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어디에 있었다 온 거에요?"

그녀의 물음에 진세아가 씩 웃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후후, 말하자면 길어요. 아니, 말해도 못 믿을 걸요. 야, 천성호. 지금부터 나한테 잘해. 너랑 나랑은 클라스가 다르니까."

"사라진 동안 이상한 거 먹은 건 아니지?"

천성호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내 앞으로 엘리스가 다가왔다.

"사부님, 전할 말이 있어요. 미래로부터 온 메시지에요."

대강 무슨 내용일지 예상이 간다.

그 이야기를 듣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일단은 미래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겠습니다."

"미, 미래요? 잘못 들은 거 아니죠?"

윤지은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자세한 건 회의실로 가서 말해도 될까요? 저희도 이곳의 상황을 들어야하는 건 마찬가지니까요."

미래에서는 약 3주였지만.

이곳에서는 1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 사이, 많은 일이 있었을 거다.

회의실로 이동해 우리는 서로의 정보를 공유했다.

멀지 않은 미래 마족들에 의해 세계가 멸망하고 대부분의 인간이 죽는다는 충격적인 이야기.

"말도 안돼요. 아무리 그래도······."

이 부분은 같이 미래에 갔던 윤서현과 진세아가 있어 설명하기 편했다. 증인이 있으면 사실감이 더해지는 건 당연하다.

"지, 진짜냐······."

천성호는 아연실색한 얼굴이었다.

"그래, 너는 서현 언니 부하였다니까. 부하도 아니지, 따까리."

의기양양한 얼굴로 천성호를 놀리는 진세아.

"큭,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내가 따까리라니······."

꽤 충격 받았는지 넋이 나간 모습.

그리 풀 죽을 필요는 없다.

어떤 미래에선 네가 인류의 리더이기도 하니까.

"서현이가 여제······. 쉽게 믿어지진 않지만······. 믿을 수 밖에 없겠네요."

충격적인 이야기지만 윤지은은 진지하게 들었다.

"복잡하니,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이제 여기에서 있었던 일을 알려드릴게요."

미래에 관한 이야기가 끝난 뒤, 우리는 우리가 사라져 있던 1달 간의 일들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협회의 부협회장이 마족이었다는 게 밝혀진 이후로 전세계가 뒤집혔어요."

빔 프로젝터에 떠오른 화면에는 각종 기사가 떠올라 있었다.

- 대한민국의 협회 부협회장 마족으로 밝혀져.

- 다가오는 마족의 위협, 길드와 정부의 대처는?

- 전세계에서 한국을 주시하다.

각 나라의 정부에서는 마족을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대대적인 조사를 실시. 실제로 소기의 성과를 내고 있단다.

"정보 길드 호라이즌의 백묵. 그 사람의 입지가 굉장히 올라갔어요. 여론의 호응도 압도적이고요."

백묵은 나름대로 세를 불려나가고 있는 모양.

"늘어나는 게이트의 수와 더불어 헌터의 수도 폭증하고 있어요. 백묵은 대대적으로 마족을 사냥하기 위해 헌터들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길드에서 늘릴 수 있는 헌터의 수에는 제한이 있다.

하나의 길드에 힘이 치중되는 것을 막기 위한 규정이지만.

- 호라이즌 백묵 "헌터 아카데미 만들 것"

- 전세계의 헌터들을 S급 헌터로.

- "마족에게도 지지 않을 헌터 양성 목적" 백묵의 행보

백묵은 정부와의 로비를 통해 이런 부분을 편법으로 넘어갔다는 모양.

마족의 침략이 가시화 된 지금, 그의 행보는 그야말로 영웅적이었다.

'나쁘지 않군.'

그의 성장은 내게도 도움이 된다.

당장은 상부상조할 수 있는 관계니.

잠시 내 눈치를 보던 엘리스가 스마트폰을 꺼내 보여줬다.

"사부님, 사부님 기사는 전부 스크랩해놨어요."

- 초대형 S급 게이트 공략의 주역은 누구?

- 베일에 쌓인 천재 신인 '이지한'

- 수호 길드 사최헌 "탐나는 인재"

"헤헤."

"그래, 잘했다."

백묵의 폭로에 묻힌 감이 있지만, 실종 사건도 같이 묻혔으니 상관 없다.

그보다 신경쓰이는 점은 이거였다.

헌터 수의 증가.

마족들의 활동이 이 세계의 억지력에 영향을 준 것이다.

반대로말하면 그만큼 마족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단 의미.

아니나 다를까 윤지은이 말을 꺼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이 있어요. 돌아 온 첫 날부터 이런 말을 꺼내는 게 맞을까 모르겠지만."

띡.

바뀐 빔프로젝터의 화면에는 제주도의 지도가 떠올라 있었다.

그 중간에 보이는 게이트의 아이콘.

옆에는 97%라는 수치가 쓰여져 있다.

윤지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전세계의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말하고 있어요. 대한민국에 세계 최초로 SS급 게이트가 생길 거라고요."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대한민국은 한국의 헌터만으로는 클리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 타국의 길드에게 지원 요청을 보낸 상태입니다. 조만간 유례 없는 규모의 공략이 시작될 거에요."

세계 최초 SS급 게이트.

여기서부터는 모든 게 달라진다.

난이도도 공략의 방식도.

전세계의 헌터들이 힘을 합치지 않고서는 나아갈 수 없는 길.

아니, 합치더라도 나아갈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

이곳은 세계 멸망의 또다른 시작점이니까.

"지한씨도 참여하실거죠? 아니, 참여를 부탁하고 싶어요."

윤지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 준비는 지금까지 어떤 공략보다 철저해질 것이다.

엘리스와의 강화를 포함해서.

아직 얻지 못한 아이템까지.

새로운 지식들을 활용해, 남김 없이 모조리 챙겨갈 거다.

167화 오버 더 월드(5)

SS급 게이트 출현의 전조.

"한국에서 첫 SS급 게이트라······."

"왜 하필이면 한국이죠?"

"협회의 부회장이 마족이었던 것과 관련이 있는건가? 아니면 단순한 우연인가."

해외의 길드와 연구소들은 촉각을 곤두세운 채 그 출현 이유와 시기를 점치고 있었다.

게이트는 알파벳 등급으로 나뉘며, 또다시 상위 중위 하위 세 등급으로 나뉜다.

이번에 발생할 게이트의 규모는 도저히 S급이라고 볼 순 없었다.

출현 몇 주 전부터 자신의 등장을 예고하는 마력을 내뿜는 것만해도 그랬다. 전대미문의 마력이 제주도 근방에서 흘러넘치고 있었다.

SS급 게이트의 출현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태도는 다양했다.

"굉장한 연구자료가 되겠어."

"인류는 이걸로 한발자국 더 도약한다."

"대체 얼마만큼의 아이템과 마정석이 잠들어 있을지······."

호기심과 지적 탐구심으로 가득찬 이들도 있었으며.

"SS급 게이트의 출현이 마족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

"인간도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게이트를 마족이······?"

"애초에 다들 호들갑이라니까. 기준치를 보면 절대로 S급을 뛰어넘는 게이트는 존재할 수가······."

의심하는자도, 두려워하는 자도 있었으며.

"이 세계의 멸망이 다가오고 있는 게 분명해. 아포칼립스의 대비를······."

"마족은 인류에게 실제하는 위협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온 세계가 힘을 합쳐야 할 때."

"믿으세요, 믿는다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불온한 분위기를 이용하는 이들도 있었다.

"간단합니다. SS급 게이트라고 다를 건 없어요."

백묵은 명실상부 이런 분위기를 이용하는 자에 속했다.

정보 길드 호라이즌의 수장 '백묵'.

"각국의 S급 상위 헌터가 힘을 합친다면 공략 가능할 겁니다. 이전에 S급 게이트가 그랬고 A급 게이트가 그랬듯이요."

그는 대한민국에 숨어 있던 잠재적 위협인 '마족'의 정체를 밝혀낸 인물이었다.

다른 차원에서 넘어 온 이종족이 세계를 노리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을 넘어 세계에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그것이 백묵을 헌터계에서 핵심적인 인물로 급부상하게 했다. 그는 정보의 값어치를 알고 이용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하, 그런 뻔한 이야기는 됐습니다."

전세계의 주요 헌터들이 모인 회의장.

군복을 걸친 러시아의 헌터가 탁자에 발을 올린 채 삐딱하게 물었다.

"저희는 마족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러 온 겁니다. 그래서 이번 SS급 게이트에 마족이 관여했을 확률이 얼마나 된다는 겁니까."

"아아."

백묵은 고심하는 척 턱을 쓰다듬었다. 그의 의도된 침묵 앞에 헌터들의 이목이 쏠렸다.

현재 미국, 러시아, 일본 어디하나 마족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 곳이 없다. 그들의 침략이 확실시 되는 상황이다.

SS급 게이트에 마족이 관여하는가?

그것만큼 중요한 사실은 없었다.

"글쎄요. 이런 자리에서 불확실한 정보를 제공해드릴 순 없으니까요."

그리 말하며 곤란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백묵. 그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중국의 헌터 하나가 소리쳤다.

"저기요, 우리는 마족에 대해서 들으러 온 겁니다."

"마족의 강함은 차원이 다르던데, 만약 한국을 돕다가 저희 나라의 헌터들이 부상을 입거나 사망하기라도 하면 어쩔 겁니까?"

"거참, 속시원하게 말하는 게 없네. 자꾸 그런식으로 나오면 한국에 대한 원정을 포기할 수도 있어요."

헌터들의 불만이 쏟아지는 순간.

백묵은 담백하게 말했다.

"불안하다면 포기하셔도 됩니다."

순간 회장이 조용해졌다.

설마 그런 말이 나올 거라 예상한 헌터는 없었다.

SS급 게이트를 최초로 공략하게 되며 얻게 될 명성과 이득.

수많은 정보와 아이템들.

시시각각 변해가는 헌터계에서 그러한 최초의 타이틀은 압도적인 가치를 가진다.

그것을 포기할 수 있는 나라는 몇 없다.

각국의 헌터들을 느긋하게 둘러 본 백묵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시겠지만 저희 쪽에도 유능한 헌터가 있거든요."

백묵에 의해 알음알음 퍼져나간 비공개 영상.

상위 환상의 마족 처치.

모든 헌터들이 환상 속에 빠져 있을 때.

한 명의 헌터가 너무나도 손쉽게 제압하는 장면은 이미 헌터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 자의 이름은 이지한.

무한한 성장의 가능성을 가진 그가 대한민국에는 있었다.

너희들이 없어도 한국은 문제 없다.

그러한 입장을 취한 백묵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정보를 원하시는 분은 개별적으로 제공해드리겠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라면 못해드릴 것도 없으니까요."

물론 그 정보의 대가는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 * *

SS급 게이트의 발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헌터들만이 아니었다.

최상위 마족 둘에게도 중대한 지령이 떨어진 참이었다.

그 대상은 검의 마족과 예언의 마족.

마계의 틈.

"마계왕께서는 대적자의 처치를 원하신다. 예언은 가능한가?"

검의 마족은 정성스레 검을 닦아내며 말했다. 깔끔하게 닦아낸 검의 표면은 그녀의 백발을 비출 정도였다.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흑발의 남자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아뇨. 대적자의 행보는 인과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 있어요. ······정말 굉장한 존재에요. 여지껏 마족의 역사를 통틀어 이런 사람이 있었던가요?"

예언의 마족은 들뜬 얼굴이었다.

"이건 좀 외람된 말일 수 있지만, 마계의 주인과 마찬가지로 인과에 구애 받지 않는 이레귤러라고 할 수 있죠."

"외람되었다. 입 조심해라."

"하하, 그래도 그게 마계왕께서 책사인 절 파견하신 이유니까요."

최상위 예언의 마족.

그는 타고난 예언의 능력으로 마족의 최강자 반열에 올랐다. 그의 예언 앞에 무수한 종족이 무너져 내렸고, 피눈물을 삼켜야 했다.

미래를 앞지른다는 것은 승리를 의미한다.

예언의 마족 앞에서 모든 전략은 간파당하고 몇 년을 준비해 온 비장의 수도 무용지물이 된다. 기습이나 간계는 말할 것도 없다.

모든 것이 그의 손바닥 위.

그래야만 했을텐데.

"이런 변방의 차원, 변방의 조그마한 나라에서 나타난 균열······."

예언의 마족의 붉은 눈 위에 검은 이채가 감돌았다. 흥분을 감출 수 없단 표정이었다.

"짜릿하잖아요."

"······."

그런 예언의 마족을 조용히 쳐다보는 검의 마족.

이내 그녀의 입이 열렸다.

"그래. 네가 좋다면 그걸로 된 거겠지."

어깨를 으쓱인 예언의 마족이 놓인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그래도 준비는 철저히 하는 게 좋겠죠. 마계왕께서 어렵사리 준비해주신 기회니까요. 대적자 때문에 진짜 귀찮게 됐어요."

프로젝트 마기, 메이저 게이트, 아포칼립스까지.

전부 대적자가 틀어막았다.

최상위 마족인 이들이 문명계로 직접 넘어가게 되면 심한 마기의 손실과 더불어 능력의 감소가 이뤄진다.

"저희가 이대로 문명계에 가면 분명 상위 마족보다 못할 거에요. 선택지가 제한되는 거죠."

차원이 가진 고유한 방어 능력인 억지력 때문이었다.

"그러니 우선은 마계왕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SS급 게이트로 넘어갑니다. 저희의 목적은 게이트의 붕괴. 그걸 빌미로 억지력을 무시하고 문명계로 발을 디디는거죠. 제 능력이라면 가능해요."

목표는 SS급 게이트의 붕괴.

잠자코 듣고 있던 검의 마족이 미간을 좁혔다.

"다 좋다만, 어째서 그 시작이 대적자가 존재하는 땅인거냐? 다른 나라의 프로젝트 마기는 성공했을 터. 굳이 불리한 싸움을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아, 그건 간단해요."

그녀의 물음에 예언의 마족은 친절히 대답했다.

"마계왕께서 대적자의 죽음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나라에서 천천히 포위망을 좁히는 건 효과적이지만.

결과적으론 대적자의 성장을 기다려 주는 꼴이다.

"그런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언의 마족의 주변으로 세 개의 아이템이 두둥실 떠오른다. 모두 하나 같이 압도적인 성능을 자랑하는 에픽급 아이템들이었다.

"SS급 게이트부터는 에픽 아이템의 사용이 가능하죠. 예언을 굳이 안 해도 저희가 패배할 확률은 더없이 0%에 가까워요."

그의 표정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들의 세계에는 에픽 아이템보다 강한 아이템이 존재하지 않잖아요."

천진난만하게 말하는 그.

검의 마족은 그런 예언의 마족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 그렇겠지. 대적자라고 해봤자 고작이 인간. 그런데 어째서냐.'

예언도 능력도 아닌 단순한 직감에 불과하지만······.

그녀는 가슴 한 켠에서 느껴지는 불안을 지울 수가 없었다.

최상위 마족이 가진 제약과 능력은 인간이 대적할 바가 아니다.

에픽보다 강한 아이템이 존재할 리가 없다.

그러한 사실들을 알고 있음에도.

* * *

"그, 그래서 저는 미래에서 어떤 사람이었나요?"

"응? 엘리스는 내 부하······는 아니었고 2인자였달까."

"허억."

진세아의 답변에 엘리스가 숨을 삼켰다.

부하란 말에 충격 받은 건가?

"사, 사부님. 진짜인가요? 제가 2인자······?"

믿기지가 않는다는 투로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는 엘리스.

좋아하는 거였다.

"아, 맞다. 김건 아저씨도 만나러가야지. 그 사람 엄청난 사람이더라니까요! 아니, 말도 안돼요. 우주 전함을······."

"잠깐."

진세아가 엘리베이터로 향하려는 찰나, 윤지은이 녀석의 목덜미를 잡아 올렸다.

"세아, 너는 집부터 돌아가야 돼. 아버지가 찾으셔."

"엑. 자, 잠깐만요. 자, 잠깐······!"

그대로 끌고 가버렸다.

진세아에게 입단속을 시킬 필요가 있어 보인다. 미래에 대한 정보를 이야기하는 것도 문제지만 다른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할 필욘 없다.

긴급 회의는 끝났고.

윤서현이 내게로 다가왔다. 언니에게 미래에서 있었던 일을 말한 뒤라 한결 후련한 표정이었다.

"지한씨는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건가요? SS급 게이트 공략에 참여하실거죠?"

"물론입니다. 윤서현 헌터는······."

"저도 참가할 거에요. 그런 미래를 두 눈으로 봐놓고 나몰라라하는 건 좀 아니잖아요. 뭐, 그 전에 언니를 먼저 설득해야겠지만요."

도중에 미래로 넘어가버리는 바람에 윤서현은 아직 협회에서 나오지도 못했고 은빛의 날개에 입단하지도 못했다.

"도와줄거죠?"

"여제를 도울 수 있다니, 영광이죠."

"······놀리는 거 아니죠?"

윤서현은 협회로 향했다.

천성호는 자기가 부하였단 말에 괜히 충격을 받아서 숙소로 향했다.

남은 건 엘리스 뿐이다.

녀석은 자리에 남아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든, 무슨 일이든 맡겨만 달라는 느낌.

"엘리스, 너한테 부탁할 게 있다."

"뭔가요?"

"새로운 강화 아이템을 얻었는데, 네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서."

"뭐든 맡겨만 주세요! 사부님이 계시지 않을 때도 착실히 실력을 갈고 닦았으니까요!"

양 손을 쥔 엘리스의 눈에 열의가 느껴진다.

나는 무재조정의 보상으로 얻었던 아이템들을 꺼냈다.

『 강화의 돌 (유일) 』

- 무재조정으로 습득한 장신구를 강화합니다.

- 강화 확률에 따라 능력이 변화합니다.

- 기적(1%), 대성공(16%), 성공(33%), 실패(33%), 대실패(16%), 소멸(1%)

『 이계 규율 : 2★ 부여 두루마리 』

- 30% 확률로 1성 아이템을 2성으로 강화합니다.

이 두 개의 아이템은 이른바 확률형 아이템이다.

엘리스의 능력을 활용하면 확정적으로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어, 음······."

예상치 못한 아이템의 등장.

그것들을 확인한 엘리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두루마리는 구조가 짐작도 안 가요. 이건 제 힘으로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아요. 인과자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야하나······."

역시 이계 규율과 관련된 건 무리인가.

하지만 강화의 돌에는 긍정적인 대답이 나왔다.

"이건 가능 해요. 하지만 1%를 노리는 건 어렵지 않을까요? 아무리 잘해도 10번이 한계에요. 제가 엄청 성장하면 모를까. 그래도 대성공 정도는 충분히 노릴 수······."

"그래? 성장하면 된단 말이지."

"네?"

내 표정을 읽은걸까.

살짝 뒷걸음질 치는 엘리스.

나는 녀석을 붙잡은 뒤, 은빛의 날개가 소유한 A급 던전을 잡았다.

상위 S급 헌터는 A급 던전의 단독 공략이 가능하기에 어렵지 않았다. 물론 규정상 그렇다 뿐이지 실제로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으아아아아!"

마수의 무리에게 쫓겨서 도망가는 엘리스.

투두두두!

마구 총을 쏘며 백스텝을 밟지만, 쓰러지는 마수는 몇 마리 뿐이다. 도망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

나는 그런 녀석을 찬찬히 살펴봤다.

'엘리스가 개화한 재능은 한 개.'

바로 초시간인지라는 재능이다.

타재간파로 재능을 개화하면 5배 가량의 경험치를 더 받는다.

그 덕에 내가 없는 사이 엘리스는 S급 헌터가 되어 있었다.

'그렇다곤 해도 아직 부족하다.'

강화의 돌이 최고 옵션인 1% 기적을 뽑기 위해선 엘리스가 더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두번째 재능도 개화할 뻔했으나 도중에 멈췄다. 그러나 이 두번째 재능이 그녀에겐 필수적이다.

"사, 살려줘요. 사부님!!"

그 재능이란 바로······.

신태양과 같은 『 리미트해제 』.

너를 위한 일이기도 하니 조금만 참아라.

나는 불쌍한 엘리스에게서 눈을 돌렸다.

근처의 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두루마리를 펼쳤다.

역전의 검 오르티시아도 꺼내 바닥에 놓았다.

『 이계 규율 : 2★ 부여 두루마리 』

엘리스가 이계 규율에 간섭할 수 없다는 건 확인했다.

그렇다면 사용하는 수밖에 없다.

30%의 성공 확률.

딱히 나중에 사용한다고 확률이 높아지는 게 아니니까.

그렇다면 지금 쓰는 게 낫다.

혹시나 붙더라도 무기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니.

나는 두루마리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샤아아—!

마력에 감응한 두루마리가 황금색 빛을 내뿜기 시작한다.

여지껏 없는 강렬한 빛이다. 차마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 지경.

『 '이계규율 : 2★ 부여 두루마리'를 사용하시겠습니까? 』

'사용한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메시지창에 떠오른 확인 버튼을 눌렀다.

168화 새로운 세계의 법도(1)

두루마리의 빛이 역전의 검 위로 쏟아져내렸다.

샤아아——.

30%의 확률.

반대로말하자면 실패할 확률이 70%나 되는 셈이다.

쉽사리 붙을 거라곤 생각치 않는다.

'······그래도 붙어라.'

성(星)급 아이템의 등급을 올릴 수 있는 기회는 쉬이 찾아오지 않는다.

이 다음 SS급 게이트의 확정적인 공략을 위해서라도 성공해야 했다.

그러나, 화려하게 빛나던 빛은 순식간에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젠장, 실패인가?'

황금색 빛이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운 스킬도 터져주지 않는 모양이다. 이계 규율과 관련되어 그런 걸지도 모르고.

씁쓸함을 삼키며 검을 다시 집으려는 그때였다.

"?"

파직, 파지지직!

허공으로 터져나오는 붉은 스파크.

동시에 홀로그랭 창 하나가 떠올랐다.

'설마.'

『 이계규율 네번째 : 초월 간섭 』

눈 앞에서 새겨진 네번째 이계 규율.

『 초월자 '잊혀진 영웅'이 해당 차원의 인과에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

『 소수의 초월자들이 해당 결정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

샤아아—!

잿더미 속 희미해져가던 불씨가 타오르듯.

두루마리에서 사라졌던 빛이 치솟기 시작했다.

"오······."

내 입가에 환한 미소가 떠오른다.

지금까지 내가 확인한 이계 규율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 업적기록.

두번째 예외 규칙.

세번째 클래스.

그리고 네번째 초월 간섭.

이계 규율이 타차원의 초월자들이 이 세계 간섭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이러한 능력은 예고되어 있었다.

업적 시스템은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된다.

그것은 초월자들이 확인할 수 있고, 나를 주시할 수 있는 계기가 되니까.

『 잊혀진 영웅이 만족스럽게 미소짓습니다. 』

뭐, 이런 식으로 날 지켜보고 있다는 건가.

잊혀진 영웅에게는 한 번 더 도움을 받은 셈이다. 이전에 잊혀진 종족의 기술을 전승 받은 것도 모자라, 강화까지 도와줬으니.

샤아아······.

찬란하게 반짝이는 황금빛이 검 위로 천천히 내려 앉았다.

『 2★ 강화에 성공하셨습니다. 』

『 '역전의 검 - 오르티시아'의 형태와 이름, 능력이 변화합니다. 』

한층 더 날렵해진 역전의 검은 에메랄드 빛을 띄고 있었다.

검의 도신은 별빛을 머금은 듯 반짝이고 있었으며 손잡이에선 은은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 능력은 이전과는 또다시 차원을 달리한다.

아이템의 설명을 읽어내려가는 내 입꼬리가 내려갈 줄 모른다.

'이거 고맙군.'

초월자들은 이 세계에 직접적인 간섭이 불가능하다. 이계 규율이 다리를 놓아줬다지만 그도 상당한 대가를 지불했을 것이다.

초월자임에도 각 차원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마계왕의 경우가 특별한 거다. 아니, 변칙적인 수준이다.

『 아이템 정보 』

- 이름 : 봉인된 별빛의 검 오르티시아

- 등급 : 2★

- 능력치 : 공격력 450

- 특수 효과 : 역전의 기회

- 현재 고유 기능이 봉인되어 있습니다.

등급이 상승하며 역전의 검이 별빛의 검이 되었다.

기존의 300이었던 공격력이 450으로 50% 상승했다.

'미쳤군.'

그냥 수치만 놓고봐도 에픽을 한참 뛰어 넘은 수치다.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2★급 무기니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현 시점에서 이것보다 강한 공격력을 가진 무기는 없다.'

웬만한 방어구나 방패는 스킬 없이도 베어낼 수 있단 이야기.

그런데 파괴력보다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고유 기능이 봉인 되어 있다라.'

맨 처음 오르티시아를 손에 넣었을 때와 같다.

혹시나 싶어 홀로그램창의 해당 창을 터치해봤더니.

『 해방 조건 : 최상위 마수를 처치하여 경험치를 획득하십시오. 』

『 필요 경험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 0 / 100,000,000,000,000 ) 』

'일, 십, 백······. 배, 백 조?'

실로 어마무시한 수치다.

아니, 평소에는 볼 일도 없는 숫자가 새겨져 있다.

내 경험치가 50만배인 것을 감안해도.

이건 심하다.

최상위 마수가 경험치를 얼마나 주냐가 문제인데.

머릿속으로 대충 계산을 해보던 그때였다.

"흐아악······. 사부님······. 끝났어요······."

기진맥진 해진 엘리스가 내쪽으로 다가왔다. 어찌저찌 마수들을 다 처치한 모양.

나는 엘리스를 격려했다.

"그래, 하니까 되잖아. 잠깐 쉬어. 이제 몇가지만 더 하고 돌아갈테니까."

내 말에 엘리스가 마시고 있던 물병을 떨어뜨렸다.

"끄, 끝이 아니라고요······?"

당연한 소리를 한다.

* * *

엘리스가 미래로부터 받았다는 메시지를 대략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14레벨 일자베기를 사용하지 말 것.

- 매일 우유를 1리터 마실 것.

- 약과는 하루 하나만.

두번째부터는 나한테 하는 말이 아니라, 메시지를 본인에게 하는 말인 것 같은데. 엘리스는 착실하게 모든 내용을 내게 전달했다.

오타를 해독하느라 힘들었다는 영문 모를 말도 건네며.

'14레벨 일자베기······.'

미래에서 사용했을 때에는 딱히 아무런 패널티를 못 느꼈다. 별 다른 위화감도 없었고.

그러나 이곳으로 귀환하고 찬찬히 돌이켜봤을 때.

'미래의 내가 쓰던 것과 미묘하게 다르다.'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생각치 못한 패널티가 있을 가능성이 있단 거다.

'물론 그만큼 강한 힘이 숨겨져 있을 가능성도 있고.'

그렇다곤해도 중요한 상황이 되면 나는 망설임 없이 일자베기를 사용할 것이다.

당장은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훈련이 끝난 엘리스는 결국 재능을 개화하지 못했다. 그래도 앞으로 한 발자국 정도를 남겨 놓고 있다.

녀석을 은빛의 날개로 돌려 보낸 뒤.

나는 내 집으로 돌아왔다.

여전한 단칸방이다. 에어컨도 없어 여름엔 죽도록 더운 내 방.

먼지가 켜켜히 쌓여 있는 게, 한 달 동안 방치한 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꾸물, 꾸물.

그런데 방 한켠에서 꾸물대는 무언가가 보인다.

"아."

오르티마였다.

뀨우······.

나를 확인한 녀석이 망부석처럼 굳어졌다.

방울방울.

놈의 동그란 몸통에서 투명한 액체가 뚝뚝 흘러내린다.

아무래도 우는 것 같다.

토옹!

녀석은 한달음에 내 쪽으로 뛰어 들었다. 강아지처럼 마구 내게 달라붙는다. 나는 녀석을 쓰담었다.

"그래, 그래."

완전히 잊고 있······지는 않았다. 은빛의 날개에 없길래 집에 있을 줄 알았다.

녀석은 몸을 열심히 움직이며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하려고 했다. 본래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몸짓이 어째선지 이해가 간다.

'미래의 내가 겪었던 일을 체험해서인가.'

미래에서도 나는 오르티마와 다양한 차원을 넘나들었다. 그러한 경험이 내게 간접적으로 생긴 모양.

어쨌든 요약하자면.

우리가 사라진 뒤 은날의 길드장인 윤지은이 오르티마를 이곳에 데려줬단다.

그 뒤로 쭉 혼자 여기에 있었단 이야기.

한 달이나 되는 시간이었으니, 적은 시간이 아니다.

"고생했다······."

녀석은 다시 내게로 올라탔다. 어깨의 방어구로 변화해 안착했다. 왠지 모를 안정감이 느껴진다.

미래에 오르티마가 없었던 이유는 오르티마가 죽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차원들 중 한 곳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이 세계에선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해야겠지.

"그러면······. 나 나름대로 게이트 공략 준비를 좀 할까."

나는 스마트폰을 들어 잔고를 확인했다.

'볼때마다 놀라게 되는군.'

200억이 넘는 비현실적인 돈인 내 계좌에 있다.

이 돈이면 준비는 차고 넘치도록 할 수 있다. 시간과 노력은 조금 들여야겠지만.

회귀 전에는 돈이 없어 사지 못했던 헌터 용품과 아이템들이 이제는 굳이 필요가 없어 사지 않는다는 게 우스울 따름.

'일단은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띠리링.

때마침 스마트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인은 백묵이었다.

협회 마족 사건 이후로 입지를 강화한 그다.

바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지한씨. 백묵입니다. 귀환하셨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통화 괜찮으시죠?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소식이 빠르다.

- 이야, 지한씨 덕분에 뭐랄까 굉장히 득을 봤달까요. 단순히 감사하다는 말로 끝내기는 부족하단 생각이 들어서요.

뭐, 내 도움도 있었겠지만 그의 수완이 좋은 건 사실이다.

- 그래서 말인데요. 앞으로 지한씨를 전폭적으로 후원하고 싶습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요. 제 선의로 받아들여주시면 좋겠네요."

똑똑.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 아, 이건 접니다. 문 좀 열어주실래요?

문을 여니 밤바람이 불어왔다.

그 앞에는 정말로 백묵이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고급스런 열쇠가 들려 있었다. 스마트폰을 집어 넣은 백묵은 내 쪽으로 열쇠를 던졌다.

"자그마한 선물입니다. 단칸방에만 계시는 게 마음에 걸려서요."

뭐야, 집 열쇠인가?

"그리고 이것도요."

이번에는 조그만 상자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차키가 들어 있었다. 차의 종류를 잘 모르는 나도 이게 수입차의 차키라는 건 알겠다.

"전부 선물입니다."

"······."

갑작스런 선물 공세였다.

그가 야심있는 인물이란 건 알고 있다. 이런 식으로 나를 구워 삶으려고 하는 것도 물론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주는 것은 마다하지 않는다.

"주신다니 잘 받겠습니다."

"하하, 좋네요."

그리 웃은 백묵은 복도의 콘크리트 난간에 몸을 기댔다. 밤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오묘했다.

"아시겠지만 많은 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 변화의 한가운데 서 있는 게 백묵일 것이다.

그러나 미래에서 백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결말은 대강은 알고 있다.

멸망한 세계에서 그가 세운 나라는 결국 멸망한다.

살아남는 것은 압도적인 강자 뿐이다.

이상과 지략만으로 살아남기는 어려운 세계였다.

백묵은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저는 그 한가운데 지한씨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상 외의 말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백묵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SS급 게이트. 참가하실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내게 종이 하나를 건네었다.

"공략에 참가하는 한 헌터를 감시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정확히는 마족으로 의심되는 인물입니다. 해외의 헌터인데 말이죠······."

그가 내민 서류에는 러시아의 헌터에 대한 정보가 들어 있었다.

서류를 살피면서 살짝 놀랐다.

'과연 백묵이라 이건가. 정보력이 장난 아닌데.'

나야 미래의 정보를 알고 있다지만, 그는 독자적인 조사를 통해 알아낸 정보였다.

니콜라이 스미르노프.

러시아 1위의 헌터이자, 철혈의 네크로맨서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의 정체는 최상위 부패의 마족.

동시에 마계왕의 권속이다.

즉, 사도라는 이야기.

한계돌파 퀘스트를 위해 내가 처치해야 하는 적이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이 자가 마족이라면······. 예상치 못한 전투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내 의도를 이해한 백묵이 미소를 지었다.

"오히려 바라는 바입니다. 이 일과 별개로도 필요하신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씀해주세요. 진심으로요."

가볍게 손을 들어 올린 백묵.

"그러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새로운 집 주소는 문자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는 그대로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나는 그가 사라진 자리를 잠시 지켜보다, 방으로 돌아왔다.

백묵의 의도는 확실하다. 나를 자신의 편으로 삼겠다는 거다. 그 의도를 숨길 것도 없이 보여주고 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전부 말해달라 이거지.

나야 잘 됐다.

한 번 정리 해볼까.

나는 종이와 펜을 들었다.

슥, 슥.

정보는 있지만 내가 직접 가기 어렵고, 획득하기 귀찮은 아이템과 없애야 할 던전들을 적어내려갔다. 동시에 내가 필요했던 물품도 될 수 있는 한 적었다.

이제는 내게 이만큼의 정보가 있단 사실을 밝혀도 상관 없다.

백묵은 오히려 좋다고 내게 지원을 쏟아 부을테니.

백묵이 모르는 것은 하나다.

내가 영원히 그의 아래에 설 일이 없다는 것.

'그러면······. 더욱 확실하게 준비할 수 있겠다.'

백묵의 사람들을 이용하면 내가 직접 발로 뛰어야 하는 부분이 사라진다. 짧은 시간 안에 더욱 많은 것들을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리하여 공략 준비는 더할 나위 없이 순항.

이제 남은 건 SS급 게이트의 공략 뿐이다.

169화 새로운 세계의 법도(2)

SS급 게이트의 발생까지 하루.

- 하하, 이 정도로 일거리를 많이 주실 줄은 몰랐는데요. 뭐, 좋습니다. 지한씨께 필요한 일이라면 얼마든 환영입니다.

나는 잡다한 업무를 백묵에게 맡긴 뒤 새로 받은 집으로 들어왔다. 이삿짐이라고 할 것도 그다지 없어서 사실상 몸만 오면 됐다.

그렇게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온 순간.

"오."

곧장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은빛의 날개가 위치한 서울의 아파트다. 한강이 보이는 한강뷰. 유명 헌터들과 연예인이 거주하고 있다던 꿈의 장소.

회귀 전, 인터넷에서만 보았던 그곳이 내 집이 되어 있었다.

가구들과 인테리어가 모두 새로 준비되어 있었다. 50평대의 집 내부에는 불필요하다 싶을 정도로 다양한 것들이 있었다.

식재료부터해서 게임기, TV, 컴퓨터, 옷장, 와인 진열대······.

뀨우—!

내 어깨에서 튀어나간 오르티마가 푹신해 보이는 개집 안으로 들어갔다. 마음에 드는지 몸을 꾸물거리며 자리를 잡는다.

혹시나 싶어 집안을 살펴봤지만 카메라 같은 것은 없다. 애초에 백묵이 그런 걸 남길 사람이 아니기도 하고.

"나쁘지 않군."

베란다로 나가니 불어오는 바람에 슬쩍 미소가 지어진다. 한강 너머의 건물들과 도심을 바쁘게 가로지르는 차들이 한눈에 보인다.

단칸방에서 50평대 아파트로 단숨에 업그레이드 되었다. 기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렇다고 마냥 좋아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인류가 만들어낸 문명이 얼마나 쉽게 바스라지는지 나는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건 내가 있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마계왕을 처치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아파트도, 재산도 세계가 멸망하면 전부 휴지조각이다.

그러니 한시라도 바삐 움직여야 한다. 이 세계가 아직 온전할 때 최선을 다해야 후회가 없을테니까.

"오르티마, 은빛의 날개로 돌아가자."

토옹.

개집에서 기어나온 오르티마가 내게 달라 붙었다.

이사를 와서 좋은 점.

그건 은빛의 날개나 수호 길드까지 금방 이동할 수 있단 거다.

"어서 오세요, 이지한 헌터님! 오늘은 무슨 일이신가요?"

카운터의 안내 직원이 나를 맞이해주었다. 여기 소속은 아니지만 얼굴이 많이 알려진 탓이다.

"장인 공방의 김건을 만나러 왔습니다."

"아, 김건 제작자님이요? 최근 새로운 스킬을 발견해서 굉장히 바쁘시다 들었는데······. 잠시만요."

직원분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새로운 스킬?'

당장 떠오르는 게 하나 있기는 하다. 마침 SS급 게이트 공략 이전이니 타이밍이 좋다고도 볼 수 있다.

"이지한 헌터님이라면 언제든 가능하시답니다."

통화를 끝마친 직원이 미소와 함께 안내를 해주었다.

내가 사라졌던 한 달 사이, 김건은 아예 한층 전체를 통째로 맡게 되었다. 길드 내에서도 '마이스터'라는 칭호를 얻으며 파격적인 성과를 내고 있단다.

그런데 선객이 와 있었다.

다름 아닌 진세아와 엘리스였다.

"흐음, 흐음. 이 사람이 우주 전함을 만든 아저씨······. 다시봐도 믿기지가 않아."

"예? 제가요?"

"아, 사부님!"

자연스레 김건의 고개도 내쪽으로 돌아갔다. 그의 가슴팍에 달린 푸른 명찰이 새롭다.

"아, 지한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뭔가 나를 부르는 호칭이 달라졌다. 씨에서 님으로 격상되었다. 그는 격하게 나를 환영하며 두 손을 마주잡았다.

"지한님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해요."

"아뇨, 본인 실력이죠."

솔직히 말해 김건의 능력은 내 예상 이상이다.

본래 내가 아는 김건은 멸망한 세계의 기인 중 하나였다.

기인 중에서도 아이템에 미친 또라이.

그랬던 사람이 미래에서 기지도 만들고 전함도 만들어내니 정말 놀라운 재능이다.

"미래에 다녀오셨다고 들었는데, 정말이신건가요?"

"진세아······."

앞에 서 있던 진세아가 모른척 시선을 돌린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쉰 다음 말을 덧붙였다.

"미래처럼 보이는 곳이었지만 그게 환영인지 진짜인지는 모릅니다. 워낙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는 게 게이트니까요."

"그, 그렇군요."

"그래도 김건씨가 가진 재능은 진짜니까요. 진세아가 말한 미래가 현실이 되는 날도 머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김건까지 미래에 대해 알 정도면 길드 내에 소문이 쫙 퍼져 있단 이야기다. 뭐, 미래에 갔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니 진심으로 믿을 사람은 별로 없겠다만.

나는 진세아에게 물어봤다.

"그보다 집에 간 거 아니었어?"

"아, 당연히 도망쳤죠. 아빠랑은 말이 안통해요."

오른손으로 브이를 만들어 보이는 진세아.

애초에 미래에 갔다와서 강해진 녀석을 막을 사람은 없다.

하이텍트사의 회장도 골치 꽤나 썩겠네.

'······.'

그런 부분은 길드장인 윤지은에게 맡기자.

어차피 진세아는 내 말을 들을 녀석도 아니다.

이번 공략에 녀석이 필요하기도 하고.

"아, 지난번에 제가 만들어 드린 조각은 어떠셨나요? 구조가 신기하긴 해도 찬찬히 살펴보니 뭔가 될 것 같더라고요."

"굉장히 도움이 됐습니다."

김건이 신기한 재능의 파편을 조각으로 만들어 준 덕분에 미래에서 애매한 재능의 결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후, 다행이네요. 그래서 말인데요. 사실 이걸 말씀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까부터 무언가 말을 꺼내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김건이 직접 부탁을 하다니.

"한 번 말해봐요. 밑져야 본전이잖아요."

뒤에 있던 여직원이 그를 독려했다. 그에 힘입은 김건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이번 SS급 게이트 말인데요. 부디, 저도 갈 수 없을까요?"

폭탄 발언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내 답은.

"절대 안됩니다."

내가 확인한 모든 미래에서 김건은 죽었다.

이 인간이 미래에서 살아 있는 꼴을 못봤다.

그리고 이번 SS급 게이트는 더욱 위험하다.

"아아, 역시······."

역시나 실망하는 얼굴.

그래도 김건의 아이템을 향한 집착과 열정은 진짜다.

"대신 아이템을 가져오겠습니다. 김건씨가 최우선으로 모든 아이템을 확인할 수 있도록 은날 길드장에게도 말해두는 건 당연하고요."

"저, 정말인가요?"

그제서야 김건의 표정이 환해진다. 뒤에 있던 여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요, 사장님. 말씀드리길 잘했어요. 제 월급도 오르나요?"

"아, 아뇨. 그건 좀······."

하여튼 죽지만 말아라 김건.

그쪽이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으니까.

나는 본론을 이야기했다.

"그러고보니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셨다고 들었는데."

"사부님, 김건 제작자분께서 제 총도 강화해주셨어요!"

엘리스가 자랑스레 총을 보여줬다. 은은한 광택이 새겨져 있다.

'예상했던 대로다.'

김건은 별 거 아니라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지한씨께 무기를 드린 이후로 뭔가 숙련도가 빠르게 오르는 기분이더라구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생겨났는데."

김건도 타재간파의 영향을 받아 추가 경험치를 받고 있을 터.

그는 멋쩍은 표정으로 설명을 이었다.

"무기 개량이라는 스킬인데 별 거 아니에요. 그냥 무기의 성능을 30% 정도 올려주는 게 전부인걸요."

"······그게 대단한 겁니다."

나는 바로 인벤토리에서 무기를 꺼냈다.

『 별빛의 검 - 오르티시아 2★ 』

별빛이 서린 에메랄드 빛의 검.

"어······."

무기를 확인하는 김건의 눈빛이 확 바뀌었다. 그러더니 그대로 자리에 멈춰선 것처럼 굳어버렸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건 단순한 탐욕이나 물욕이 아니다.

더 좋은 아이템을 탐구하고, 더 좋게 개량하고 싶다는 성취욕. 그가 기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웅들에게 필요를 인정 받은 이유였다.

"김건씨?"

"예? 아, 예. 뭘까요. 이거. 지난번에 본 무기일텐데 완전히 달라져 있네요."

정신을 차린 김건이 침을 꿀꺽 삼켰다.

확실히 대단한 물건이긴 한데.

"이 무기도 강화하는 게 가능합니까?"

"실패하면 무기가 파괴되는데요. 괜찮으신가요?"

"······."

"노, 농담입니다! 맡겨만 주세요. 아니, 제발 맡겨주세요······."

거 되게 살벌한 농담이네.

어차피 그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뒤쪽에 다른 무기가 잔뜩 쌓여 있지만, 김건은 괜찮다며 손을 저었다.

"지한님 무기가 최우선이죠. 그리고 이 자태는······. 만져 보는 것만으로도 영광······. 아,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에요."

김건은 별빛의 검을 조심스레 안고 공방으로 들어갔다. 여직원도 그를 보조하기 위해 뒤따라 문을 열고 들어갔다.

유리창 너머 번쩍이는 빛이 보인다. 무기 개량을 시작한 듯하다.

진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특이한 사람이네요."

확실히 특이한 사람은 맞지만, 네가 그런 소리를 하면 안되지.

너도 만만치 않은 특이한 사람이었다니까.

검의 개량은 금방 끝났다.

김건이 흐르는 땀을 닦으며 바깥으로 나왔다.

그의 품에 안긴 별빛의 검은 한층 은은한 광택을 내고 있었다.

『 봉인된 별빛의 검 - 오르티시아 (2★) 』

- 개량되어 무기 성능이 32% 상승합니다. (현재 공격력 594)

가뜩이나 높던 공격력이 뻥튀기 되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공격력이다.

역시 김건.

실망시키지 않는다.

"정말 굉장한 무기에요. 어쩌면······. 에고 무기일지도 모르겠어요."

"······나중에는 말도 하고 그런다는 겁니까?"

"아, 아뇨. 에고 무기라고 전부 말을 하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여전히 누군가를 굉장히 경계하는 게 보여요. 혹시 짐작가는 게 있으신가요?"

"글쎄요."

얼버무리긴했지만 그 대상이야 뻔하다.

오르티마 말고 없다.

이전에도 먹히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김건을 통해서 뱉은 적이 있기도 했고.

"어쨌든 감사합니다."

"언제든 필요하면 맡겨주세요. 지한님이라면 대환영입니다!"

그는 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갈 때까지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멸망한 세계의 또라이 김건과 비교하자면 확실히 순해져 있다. 그런 그가 본인의 재능을 전부 펼칠 수 있도록 해야겠지.

'이번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절대 죽지 못하게 하겠다.'

이어서 검의 성능을 테스트하기 위해 트레이닝 룸으로 왔다.

서걱—!

길드에 준비된 최상급 경도의 인형을 가볍게 베어낸다. S급 헌터들도 전력을 다하지 않고선 단칼에 베어내기 힘든 수준의 인형이 두부처럼 썰려나갔다.

서걱—!

뭔가 더 베어보고 싶어도 테스트를 하기에 충분한 물질이 없다.

'SS급 게이트에 직접 들어가봐야 제대로 된 시험이 되겠어.'

2★으로 업그레이드 되며 검의 길이나 무게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나는 그런 세세한 감각을 조정하는 정도로 훈련을 끝냈다.

"으어어······."

바깥으로 나오니 바로 옆 트레이닝 룸에서 엘리스가 기어나왔다. 땀을 뻘뻘 흘린 채 꿈틀 거리는 게 애처로울 정도.

"으아아, 세, 세아양은 봐주는 게 없어요······. 사부님! 사부님!"

"안돼, 안돼! 아직 쉬는 시간 아니야!"

그런 엘리스를 질질 끌고 들어가는 진세아.

'잘하고 있군.'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 엘리스의 훈련을 녀석에게 맡겼다. 어쨌든 미래에서 실력을 갈고 닦아 강해진 건 맞으니까.

엘리스의 재능을 개화 시켜야 반지를 강화할 수 있다.

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는데 근처 휴게실에서 누군가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굳이 올 필요 없다니까! 말 좀 들어!"

"그러니까, 무조건 갈 거라니까!"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가보니,

윤지은과 윤서현이 박터지게 싸우고 있었다.

자매 싸움이었다.

"SS급 게이트가 어떤 곳인줄 알고 가겠다는거야?"

"그러면 언니는 뭐 달라?"

"경험이 지금까지 해 온 일들이 다르잖아. 길드장인 내가 안갈 수는······."

평소에는 차분하고 이성적인 윤지은이 이렇게 화를 내는 건 처음봤다. 그녀의 걱정도 이해는 간다만.

윤서현과의 약속도 있고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나는 그 사이에 끼어 들었다.

"윤서현 헌터가 이번 공략에 필수적입니다."

"······."

내가 말을 꺼내자마자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윤지은의 고개가 천천히 내쪽으로 돌아갔다. 왠지 모를 살기가 느껴진다.

음, 타이밍이 나빴나.

반면 윤서현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쵸? 내가 필요하죠? 지한씨도 그렇게 말하잖아."

단순히 윤서현의 편을 들려는 게 아니다.

"현 시점, 윤서현 헌터만큼 공간을 잘 다룰 수 있는 헌터는 없습니다. 분명 이번 SS급 게이트에서 핵심적인 전력이 될 겁니다."

"뭐, 그렇게까지 칭찬해 줄 필요는 없는데. 그래서 언니는?"

"······."

내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윤지은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후우, 알았어. 대신 무리는 하면 안돼. 이건 지한씨도 마찬가지에요."

"알겠습니다."

윤지은에게는 언니로서의 의무 뿐 아니라 길드장으로서 길드를 잘 이끌어야 하는 책임이 있다.

짊어진 것이 많으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쨌든 이번 공략에는 정말로 윤서현이 필요하다.

거기에 더해서······.

중요한 할 말이 있었다.

나는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그런데 이번 공략 다른 곳에서 하게 될 것 같습니다."

""네?""

두 여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윤서현이 자연스레 내게 물었다.

"어디서요?"

170화 새로운 세계의 법도(3)

다음날 SS급 게이트가 제주도에 발발했다.

연구자들의 예상보다 조금 이른 시기였다.

- 제주도 서귀포시에서 SS급 게이트가 발생했습니다. 현재 각국의 헌터들이 한국으로 집결 중에 있습니다.

- 대한민국의 3대 길드도 해당 공략 참여가 확정 되었습니다.

-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영국 등 13개국에서······.

- 전문가들은 공략 성공 확률을 97% 이상으로 예상······.

뉴스에서도 SS급 게이트에 관한 내용이 쏟아졌다.

수많은 취재진이 제주도로 모여들었다.

국내 외의 언론이 전부 모이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정부는 SS급 게이트의 중요도와 위험도가 크다고 판단.

민간인들의 출입을 막고 주변에 군인들을 배치 시켰다.

허가 받은 인물만이 게이트 근처로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인터넷 상의 반응도 뜨거웠다.

- SS급 게이트 이거 공략 가능하냐?

- 제주도 폐쇄 되고 마수 소굴 되는거지 뭐.

- 러시아, 미국, 일본, 중국, 영국 다 왔는데 실패를 어떻게 함ㅋㅋㅋ

- 2군 보낸 데가 대부분임

현시점 대한민국의 전력은 세계 14위 정도라고 평가 받는다.

멸망한 세계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재능있는 인물이 많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한국은 애초부터 강하지 않았다.

- 사최헌 있는데 무조건 이기지.

- 사최헌 ㅋㅋㅋㅋㅋ 니들이 좋아하는 사최헌은 세계 랭킹 20위권이야~

- 신태양이랑 이지한이라고 지난번에 활약한 헌터 있지 않음? 기사 봤는데.

- 세계 랭킹에는 못 비빈다니까. 10위권 헌터가 한국 헌터 언급하면 100억 기부한다.

ㄴ ??? ㅋㅋㅋㅋㅋ

한국만으로 세계 최대 규모인 SS급 게이트의 공략은 불가능하다는 게 주된 의견이었다.

뭐, 드러난 전력만을 보자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나는 스마트폰의 화면을 밀어내 마지막 덧글까지 확인했다.

'공략은 해외의 헌터들이 아무도 없어도 성공 가능하다. 문제는 마족이지.'

새로운 집에서 푹 쉬고서 은빛의 날개와 함께 제주도로 넘어왔다.

공간이동 능력자 윤서현 덕분에 번거로운 이동 과정이 생략 되었다.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한 번에 오다니."

"서현 신입 대단한데. 진짜 편하다. 길드장, 이래도 반대할거야?"

윤서현은 상쾌한 표정이었다.

"협회는 정말로 때려쳤어요. 이제는 은빛의 날개니까. 다들 잘 부탁해요."

은빛의 날개 길드원들은 윤서현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애초에 윤지은 말고는 반대하는 이가 없었기도 했고.

나는 슬슬 이동할 때다.

"그러면 저는 가보겠습니다."

"정말 가는 거에요?"

윤서현은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미리 말씀 드렸다시피 이번 공략은 길드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알겠어요. 그럼 나중에 봐요."

은빛의 날개에는 이번 SS급 게이트의 특성을 미리 설명해 뒀다.

내가 이번에 공략을 같이 할 건······.

"이야, 스승님과 함께 공략할 수 있다니. 오늘을 위해서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수호 길드다.

수호 길드의 텐트 근처로 이동하니 신태양이 과장스럽게 날 반겨줬다.

길드장 사최헌도 반가운 얼굴로 날 맞이했다.

"이지한씨가 저희와 함께 해준다면 든든하죠."

내가 수호 길드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효과적으로 부패의 마족을 막을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거니와, 대한민국의 1위 길드라는 타이틀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건너편을 살펴봤다. 스태프와 기자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가운데, 각국의 텐트가 자리 잡고 있다.

'이번 공략에 참가하는 러시아 1위의 헌터. 그의 정체는 부패의 마족이다.'

니콜라이 스미르노프.

그는 이번 게이트 원정에 직접 참가하고자 하는 의사를 강력히 내비쳤다.

건방진 것을 넘어 하늘을 찌를 듯한 오만방자함. 왠만한 하위 헌터들과는 말도 섞지 않는다고 하니 말 다했다.

따라서 놈을 견제하려면 수호 길드라는 명함이 필요하다.

'역시 가장 성가신 건 인간인 척하는 마족일지도 모르겠어.'

애매하게 건드렸다간 이쪽이 역풍을 맞게 된다.

역풍 수준이 아니다.

자칫하다간 국가 간의 분쟁으로 번지게 된다.

백묵이 처치가 아닌 증거 수집을 부탁한 이유도 그래서일거고.

"각국의 헌터들과 함께 공략할 수 있다니. 조금 두근거리네요. 제 실력이 어디까지 통할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신태양은 긴장하기보단 꽤 들뜬 얼굴이었다. 그런 녀석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간다.

"근데······. 스승님 혼자 오시는 거 아니였나요? 이 꼬맹이는 왜······."

"음, 이 사람은 여제의 부하2잖아. 오빠, 부하 나부랭이가 저한테 말을 거는데요? 어떡하죠."

"······."

내 옆에 서서 고개를 끄덕이는 진세아. 신태양의 미간이 좁혀진다.

"부하? 그게 뭔소리야?"

"그런 게 있어. 오빠와 나만 아는 비밀이랄까."

"······네가 이해해라."

진세아의 아버지인 하이텍트사 회장.

은빛의 날개의 후원자이기도 한 그는 공략을 반대했지만, 사실상 지금의 진세아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한가지 조건을 붙였다고 한다.

- 이지한 헌터와 동행한다면 허락하겠다는 연락이 왔어요.

오늘 아침 윤지은으로부터 전해 들은 소식이었다. 회장님도 나름대로의 정보가 있는 모양이다.

나야 진세아가 필요하니 잘 됐고.

그리고 다른 한 명.

"너도 있었구나. 동지. 넌 환영이지."

"신태양씨. 반가워요!"

엘리스가 신태양과 반가운 듯 인사를 나눴다. 진세아는 황당한 표정이다.

"뭐야, 둘이 왜 그렇게 친해 보여?"

이전 지옥 훈련의 여파로 친해진 모양이다. 목숨걸고 선혈의 마족을 잡기도 했고.

결론적으로 엘리스와 진세아가 나와 함께 출발한다만······.

큰 의미는 없다.

이번 SS급 게이트의 시작 지점은 랜덤.

모든 헌터가 뿔뿔히 흩어져 각자의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

수호 길드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도 합류가 진척된 이후부터 의미를 가진다.

'대략적인 준비는 끝난 것 같고······.'

취재진들이 몰려 들어 신태양의 인터뷰를 따갔다.

"세계의 유명 헌터들이 이렇게나 잔뜩······."

찰칵, 찰칵.

"후후, 헌터가 되서 한국에 오길 잘했어요."

엘리스는 신이 나서 스마트폰의 셔터를 눌러댔다. 대한민국의 헌터 뿐만 아니라 헌터계 전반에 대한 관심이 많은 모양.

회귀 전의 내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나도 필사적으로 정보를 모았었으니까.

"어?"

그런 우리의 앞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녀를 바라보는 엘리스의 눈이 커졌다.

"아, 아이돌 헌터 코하쿠! 이 분이 왜 여기에?"

지난번에 일본에 만났던 헌터였다. 그녀는 일본에서 아이돌 활동과 헌터 활동을 동시에 하는 연예게 헌터다.

엘리스가 아는 것도 당연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코하쿠는 스마트폰의 번역 기능을 사용해 내게 내밀었다. 머리를 쓸어 넘긴 그녀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 지난번에 도와줘서 고마워요, 게이트 내에서도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해주세요.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도와서 나쁠 건 없으니까.

옆에 있던 엘리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사, 사인 부탁해요!"

코하쿠는 옅은 웃음과 함께 사인을 해주었다. 사인지를 품에 안은 엘리스가 흡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이제 러시아의 니콜라이, 중국의 링링, 미국의 그렉스, 영국의 오스틴, 호주의 샬롯 헌터한테서 사인만 받으면 제 버킷리스트 완성이에요."

"너무 많은 거 아니야?"

"줄이고 줄인 게 이건데······."

진세아 말대로 많기도 하다.

돌아간 코하쿠는 일본 진영에 합류했다.

본래대로라면 선발대가 투입 되어 게이트의 상황을 조사하는 게 우선이지만, 이번 공략은 조금 다르다.

협회의 조사단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번 들어가면 공략 전까지는 돌아올 수 없는 게이트라······."

수호 길드에도 소식이 전해졌다. 각 길드들가 분주해지는 게 눈에 보인다.

'오성은······.'

나는 고개를 들어 오성 길드의 텐트를 확인했다.

오성의 김민수가 턱을 괸채 미간을 좁히고 있다. 평범한 인상이지만, 방심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 옆에서 실실 웃는 얼굴로 의자에 몸을 기댄 김상욱이 보인다.

'이번에는 직접 참여하는건가.'

진짜 인류의 배신자 김민수와 과거의 배신자 김상욱.

두 사람에 대한 정보는 미래에서 확인해 두었다. 그 결과가 조금 독특하지만, 그건 당장 중요한 게 아니다.

당초 예정되어 있던 공략 시간을 앞당기기로 결정된 모양.

"입장 시작합니다!"

미국의 헌터들이 가장 먼저 게이트 안으로 무리지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기와 장비를 숨기지 않는다.

세련되고 품질 좋은 최고등급의 장비가 빛을 받아 번쩍인다.

헌터 랭킹 세계 1위가 존재하는 명실상부 강국.

지금 보이는 건 2군이지만, 그 분위기만으로 주변 헌터들을 압도하기엔 충분했다.

이어서 정해진 순서대로 헌터들이 입장한다.

SS급 게이트로 각국의 헌터들이 첫 발을 디디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대한민국은 두번째 입장이다.

나는 엘리스와 진세아에게 다시 한번 강조했다.

"미리 설명한대로 행동해. 그러면 아무 문제 없을 거야."

"물론이죠."

"넵. 사부님 말씀대로 할게요."

"진세아 너는 절대로 아무거나 훔치지 말고."

"잠깐, 왜 나만······."

수호 길드의 입장.

신태양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스승님, 제게 해주실 말은 없나요?"

"너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는데, 하나가 떠올랐다.

"마수의 소재를 최대한 모아둬라."

"공략에 필요한 거군요. 명심하겠습니다."

아니, 김건 주려고.

소재가 필요하다잖아.

어찌되었든 수호 길드의 헌터들은 게이트 내부로 들어갔다.

게이트의 정보를 알리는 메시지창이 앞으로 떠오른다.

『 'SS급 게이트 - 초맹림계'에 입장하셨습니다. 』

『 공략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

『 맹수왕 '아한발타제' 굴복 ( 0 / 1 ) 』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메시지.

『 시작 지점이 랜덤하게 지정됩니다. 』

시야가 뒤틀리고, 파란 하늘과 녹빛의 숲이 어지러이 뒤섞인다.

상하좌우가 뒤바뀌는 중력의 교란.

이어지는 잠깐의 흔들림 끝에 감각은 = 제정상으로 돌아왔다.

찌르르······.

밀림의 어둠 너머로 풀벌레 소리만이 들려온다. 나는 몸에 뭍은 풀을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군.'

나만이 아니다.

모든 헌터들이 나뉘어 랜덤한 장소에 떨어진다. 합류할 때까지는 솔로 플레이를 해야 하는 셈이었다.

크르르······.

더욱이 주변에서 맹수의 기척이 느껴진다. 살기를 이렇게나 내뿜는데 못 알아채면 이상한 거겠지.

『 레어 스킬 '예민한 감각 Lv.1'을 습득합니다. 』

『 레어 스킬 '예민한 감각 Lv.2'를 습득합니다. 』

···

..

.

『 레어 스킬 '예민한 감각 Lv.11'을 습득합니다. 』

단번에 11레벨까지의 스킬이 손에 들어왔다.

'애매한 재능의 결실의 효과를 톡톡히 보는군.'

심지어 현재 내 스킬 레벨은 12레벨까지 개방된 상태다. 아직 성장의 여지가 남았단 걸 생각하면 든든하다.

'그래도 일단은 내 위치를 확인해야 한다.'

나는 적당한 격을 내뿜어 몰려드는 맹수들을 쫓아냈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던 맹수의 눈이 하나둘씩 사라져간다.

고지대를 향해 움직였다.

이곳은 윤서현의 초공간인지로도 다 확인하지 못할만큼 넒은 공간.

아니, 공간이라기엔······.

화아악!

수풀을 헤치고 고지대의 절벽 위로 뛰어 오르자 초맹림계의 전체적인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넓게 펼쳐진 숲과 두껍게 흐르는 강줄기.

저 멀리 반대편에는 에메랄드 빛의 바다까지 보인다.

지구의 허파라고 불리는 아마존에 왔다면 이런 기분일까.

'이곳은 그냥 공간이 아니다.'

S급 이하의 게이트가 버려진 세계의 일부를 보여준다면.

SS급의 게이트는 살아 숨쉬는 세계에 우리를 내던진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우리야말로 외인이자 불청객.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장소가 보인다. 이곳에 문명의 존재한다는 증거다.

'가장 우선시 해야 할 것은 합류다.'

내 목표는 SS급 게이트의 공략과 사도의 동시 처치다.

그 시기는 이르면 이를수록 좋다.

다른 헌터들이 죽어선 곤란하니.

제대로 된 미래를 위해선 그 한 명 한 명이 꼭 필요하니까.

'그래도 일단······.'

그르르르······.

뒤쪽에서 은빛 갈기를 가진 사자들이 나를 둘러싸듯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가볍게 발산한 격에도 기죽지 않고 다가온 놈들이다.

과연 SS급 게이트다.

이만한 마수 정도는 있어줘야지.

스릉.

나는 별빛의 검을 꺼내들었다.

『 봉인된 별빛의 검 - 오르티시아 (2★) 』

『 해방 : 최상위 마수를 처치하여 경험치를 획득하시오. 』

『 필요 경험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 0 / 100,000,000,000,000 ) 』

눈 앞의 마수들은 틀림없는 최상위 마수.

'최상위 마수들의 경험치부터 받아가볼까.'

사냥의 시간이다.

171화 새로운 세계의 법도(4)

SS급 게이트 공략 1일차.

입장한 모든 헌터가 SS급 게이트에 흩뿌려졌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는 게 헌터의 철칙.

그들은 연락 수단이 있는 헌터를 중심으로 무리를 짓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의도치 않게 다른 나라의 헌터와 엮이는 경우도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신태양과 일본의 류노스케였다.

"붉은 갑주 류노스케. 일본의 2위 검객 헌터. 맞죠? 한 번 대화 나눠보고 싶었는데. 잘 됐네요."

"별명으로 불리니 뭔가 쑥쓰럽습니다. 그쪽은 한국의 초신성 신태양. 맞습니까?"

간단히 통성명을 나눈 그들.

"절 알아봐주시다니. 이야, 이거 저도 유명해졌나보네요. 류노스케씨가 제 이름을 알 정도라니. 헌터 생활의 보람이 여기서 또 하나 늘어가네요. 잠깐, 그 무기는 레전더리급 무기 용의 숨결 아닌가요? 와, 미쳤네요. 만져봐도 되나요?"

"예······."

대외적인 이미지와는 반대되는 신태양의 수다적인 모습에 류노스케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 죄송합니다. 검을 제대로 사용하는 헌터를 만난 게 간만이다보니."

한바탕 말을 쏟아낸 신태양이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쨌든 다른 헌터들과의 합류가 우선인데······."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밀림.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나무와 덩쿨뿐이었다.

"제가 주변 지형을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신태양은 선뜻 먼저 말했다. 나무 위로 뛰어 오른 신태양이 주변을 확인하러 사라졌다.

류노스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지랑 달라서 잠깐 놀랐지만, 괜찮은 움직임이다. 역시 한국 헌터들의 수준은 높아.'

지난번에 공략에 도움을 받았던 이지한이라는 헌터.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은 헌터가 그 정도였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는 헌터 신태양의 실력은 어떨까.

'직접 실력을 보고 싶은데.'

그 기회는 금방 돌아왔다.

나무 사이를 건너서 뛰어 온 신태양은 가볍게 땅에 착지했다.

"이 근처에 마을로 보이는 지점이 몇 개 있어요. 일단은 그곳에서 사정을 설명하고 상황을 지켜보죠."

"좋습니다. 그런데······."

크르르······.

어둠 속에서 빛나는 맹수의 눈동자.

"저 놈들이 그냥 보내주진 않을 것 같네요."

"그러면 가볍게 준비운동하는 셈 치죠."

신태양이 검집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스승이 건네 준 에이나시아 영웅검 위로 푸른 검기가 피어 올랐다.

크르르!

살기를 감지한 맹수들이 사방에서 튀어 나왔다. 등을 맞댄 류노스케와 신태양이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콰드드득!

'뭐야, 이 놈들······. 무슨 가죽이 이렇게 질겨······.'

류노스케의 칼날이 검치 호랑이의 가죽에 가로막혔다. SS급 게이트의 마수다운 방어력이었다.

콰앙!

힘으로 밀쳐 내긴 했지만 검치 호랑이는 금세 충격을 떨쳐내고 일어섰다. 류노스케의 붉은 갑주 위로 붉은 마력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 이런 기분은 처음인데."

류노스케는 여지껏 S급 게이트에서 마수를 상대하면서 단칼에 죽이지 못한 마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세 마리의 검치 호랑이가 동시에 류노스케를 향해 달려 들었다. 그 속도와 힘은 S급과 비교해서 최소 5배 이상.

류노스케의 눈에 붉은 이채가 번뜩인 순간.

콰드드득!

마수 세 마리의 심장이 동시에 꿰뚫렸다. 마수들은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

진심을 다하지 않으면 가죽을 가르는 것도 어렵다. 아무리 버프를 받지 않은 상태라곤 해도 이 정도라니.

반면 한국의 신태양은 어떨까.

류노스케의 시선이 뒤쪽으로 돌아갔다.

"가죽이 진짜 질기네요."

신태양의 앞에 놓인 검치호랑이들은 완전히 두동강이 나 있었다.

'오, 단면이 거칠기는 하지만······.'

훌륭한 솜씨였다. 일점에 공격을 집중한 자신과는 달리 마수들의 가죽을 정면으로 베어냈다.

"아, 맞다."

감탄하고 있는 류노스케의 앞에서 신태양은 쭈그려 앉아 마수를 해체 하기 시작했다.

류노스케는 이 상황이 허탈하면서도 신기했다.

"잠시만요, 이런 상황에서 소재까지 챙기시는 겁니까?"

"네. 스승님께서 챙기라고 하셨거든요."

"스승······?"

이 정도 실력을 갖춘 신태양을 가르친 스승이 있다니. 류노스케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제게 중요한 가르침을 주신 분이 계시거든요. 나중에 류노스케 씨에게도 소개 시켜드리겠습니다. 아주 굉장한 분이죠."

"······. 설마 신태양씨보다 더 강한 헌터인겁니까? 사최헌?"

"아뇨, 길드장님도 강하긴 하지만 스승님에 비하면······."

류노스케의 얼굴이 굳어졌다.

게이트에서 보았던 무명의 이지한 헌터도 그리 강했는데.

그보다 유명한 신태양보다 강한 사람이 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한국은 정말 무서운 나라였군."

"네?"

"아닙니다."

류노스케는 동료들과 합류하면 이 사실을 알려주자고 다짐했다.

* * *

촤아악! 촤악!

별빛의 검이 백사자들의 가죽을 종잇장처럼 갈라냈다. 시원시원하니 휘두르는 맛이 있었다.

'무기를 업그레이드한 보람이 있군.'

백사자들은 내 상대가 되지 못했다. 놈들이 발톱을 들고 내게 달려드는 순간, 그대로 발톱째 잘려나갔으니까.

급기야 이를 드러내며 다가오던 백사자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어딜 도망치나.'

나는 놈들을 추격하며 사냥했다.

『 스킬 '공중 기동 Lv.11'을 발휘합니다. 』

땅을 박차고 뛰어 올라 놈들의 바로 앞에 착지.

촤아악!

검의 칼날이 백사자의 머리를 단칼에 베어냈다. 퇴로를 잃은 백사자들이 뒤돌아 도망치려하지만 이미 늦었다.

촤악, 촤악!

별빛의 검의 날카로움 앞에 그대로 쓰러지는 백사자들.

『 50만배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

『 경험치 '60,251,500,000'을 획득하셨습니다. 』

동시에 나타나는 막대한 양의 경험치 알림.

그 양은 자그마치 602억이다.

'이렇게 보니 더 터무니 없는 수치군.'

그럼에도 목표치인 100조에 도달하려면 약 1600마리 가량의 마수를 잡아야 한다.

'무재조정이 없었다면 절대로 불가능 했겠어.'

이계 규율이 내게 준 칭호 '초성장'과 '절대 성장'을 합쳐도 경험치 증가량은 5배다.

경험치 10만배를 주는 특성 무재조정이 없었다면 도전할 엄두도 못냈을 것이다.

'아마 이 말도 안되는 경험치 양은······.'

이 세계의 기준이 아니겠지.

촤아악!

마지막 사자의 목이 잘려나갔다.

10마리의 마수를 순식간에 처치했다.

'······남은 건 1590마리인가.'

무기의 성능이 뛰어난 게 크게 체감된다. 김건에 의해 무기 개량까지 막았으니, 어지간한 마수들로는 검을 막아낼 수 없을 거다.

그리하여 나는 사냥을 시작했다.

직접 마수들을 찾아다니며 밤낮 없이 전진했다.

『 스킬 '자연 재생 Lv.11'을 발휘합니다. 』

『 스킬 '자연 회복 Lv.11'을 발휘합니다. 』

헌터들이 합류를 시작할 때까지 시간이 남아 있다. 착실하게 사냥을 해놓아야 마족과 대항할 카드가 늘어난다.

무차별적인 사냥이 이어졌다. 마수들의 흔적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녀석들이 무리를 짓는 습성이 있기도 했고.

『 스킬 '탐색 Lv.11'을 발휘합니다. 』

여기 서식하는 마수들은 맹수왕의 비호 아래 있으니 흔적을 구태여 숨기지 않는다. 밀림의 최상위 포식자인 셈.

마수들의 피가 내 옷에 스며 들고, 죽음의 향기가 짙어짐에 따라 놈들이 나를 피해다니는 게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는다.

『 유니크 스킬 '마수 탐지 Lv.1'을 획득합니다. 』

『 유니크 스킬 '마수 탐지 Lv.2'을 획득합니다. 』

..

..

『 유니크 스킬 '마수 탐지 Lv.11'을 획득합니다. 』

더 빠르게 많이 찾아내면 될 뿐이니까.

* * *

초맹림계의 지배자는 맹수왕 아한발타제였다.

이곳의 주인들은 맹수의 형태를 한 마수들.

그들이 밀림을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었다.

몇 개의 마을이 있긴 하지만 그 규모가 크지 않았다.

"허, 외인(外人)들이 나타났단 말인가?"

인간들은 부족의 형태로 간신히 마수들을 몰아내며 살아가고 있었다. 맹수왕 아한발타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말이다.

"예, 그것도 수백 명에 달하는 큰 규모입니다."

"허어, 도대체······."

새하얀 수염을 기른 부족장의 얼굴에 주름이 깊어졌다.

"그들의 목적은 무엇인지 물어보았느냐?"

그의 물음에 몸에 장신구를 걸친 소녀가 답했다.

"맹수왕 아한발타제의 굴복. 그리 말하더군요."

"이제야 인간의 영역을 구축하고, 식량을 확보한 참인데······. 신도 무심하시지. 이럴 수가 있나."

이런 외인의 침입이 과거에도 있었다.

모두 아한발타제의 먹이가 되어 사라졌다.

그 사건 탓에 부족은 뿔뿔히 흩어지고 말았다.

이번에도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외인들을 전력으로 막아야······."

부족장이 그리 말하려던 찰나.

누군가가 다급하게 천막을 열고 들어왔다.

"부, 부족장님! 큰일났습니다!"

청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구릿빛 피부에는 명중을 뜻하는 검은 문신이 새겨져 있다.

그는 몹시 당황한 표정이었다.

"뭔 일인데 그러느냐."

부족장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청년이 숨을 가다듬는 동안, 부족장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설마······. 외인이 맹수왕의 애완마수를 건드린 건 아니겠지?"

그 말에 줄곧 부족장과 이야기를 주고 받던 소녀가 코웃음을 쳤다.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찢기지나 않으면 다행이지요."

초맹림계에 존재하는 백색(白色)의 마수들.

그들은 맹수왕이 애지중지하는 애완 마수들이다. 일반 마수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함을 가진 존재.

외인들이 어설피 상대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만약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상처를 입혔다면.

맹수왕의 분노는 피하기 힘들 것이었다.

"그, 그게 아닙니다."

숨을 고른 남자가 드디어 말을 꺼냈다.

그 입에서 나온 말은.

"외인이 맹수왕의 애완마수들을 모조리 학살하고 있습니다. 벌써 확인한 것만해도 몇 백마리입니다!"

대학살.

그것도 맹수왕의 애완마수들을.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허어억······!"

그대로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 부족장.

"부족장님! 부족장님!"

"뭣들하고 있냐?! 냉수라도 퍼와라!"

"정신 차리십쇼!"

한바탕 소란이 이어졌다.

그러한 소란스러운 가운데.

소녀의 눈이 빛났다.

"그게 진짜라면······."

멋모르는 외인이 저지른 대참사.

그건 이미 막기에는 한참 늦었다.

아주 화끈하게 저질러 주셨다.

하지만 그런 미친 짓을 벌일 수 있는 힘과 능력.

백(白)마수쯤은 가뿐하게 죽일 수 있을 정도라면······.

"할아버지, 일어나보세요. 어쩌면 맹수왕을 몰아낼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 * *

1002마리.

주변에 있는 마수는 모조리 때려 잡았다. 놈들의 흔적을 찾고 추격하는 것도 이제는 어렵지 않다.

'특히 하얀 놈이 경험치를 많이 주더군.'

하얀 놈들은 맹수왕이 직접 기르는 우두머림 개체다. 강한만큼 경험치도 두둑하다.

'다른 녀석들은 어떻게 하고 있으려나.'

내가 따로 움직임을 취하지 않는다면 모든 헌터가 집결하기까지 1주일이 넘게 소모될 거다.

'아니지, 윤서현이 참여했으니 내가 없어도 모이는 속도는 더 빠를 거다.'

나는 굳이 사람들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 윤서현측에서 먼저 접근해 올테니.

'문제는 마족인데.'

이 게이트에 존재하는 마족은 예언과 검.

그리고 부패의 마족이다.

부패의 마족은 헌터로 위장하고 있으니 먼저 건드리지 않는 이상 공격해 올 일은 없으니 일단은 논외.

'예언의 마족이라면 분명히 맹수왕과 결탁해서······.'

거기까지 생각을 마쳤을 때였다.

피잉! 팍!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 하나가 발 앞에 꽂혔다.

동시에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멈춰라, 외인.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

밀림의 어둠 속에서 나타나는 단발의 소녀.

까무잡잡한 피부, 붉은색과 푸른색 옷으로 치장한 것으로 보아 이곳 부족의 무녀가 틀림 없다.

이쪽을 먼저 마주할 줄은 몰랐는데.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잘 알고 있지. 사냥."

"그런 뻔한 걸 말한 게 아니다. 넌 맹수왕의 애완마수를 죽이고 있는 거다. 당장 맹수왕의 병사가 널 죽이러와도 이상하지 않다고!"

그리 말하는 소녀.

"그런데? 여기에 맹수왕의 병사가 있나?"

"······."

조심스레 주변을 살피는 소녀.

병사의 기척은 커녕 그 시체조차 찾을 수 없다.

소녀의 미간이 좁혀졌다.

"운이 좋은 건가······?"

운일 리가.

맹수왕이 마족과 이야기를 나누시느라 바쁠 뿐이다.

애완마수들이 죽어나가는 걸 모를 정도로 달콤한 제안이겠지.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내 쪽에서도 할 말이 있다. 나는 검을 집어 넣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아스카할 부족의 무녀 렘."

이름을 불린 렘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린다.

"뭐? 내 이름을 어떻게······?"

그야, 당연히 알고 있다.

"렘, 네 부족을 구원하고 싶다면 협력해라."

지금 이곳 SS급 게이트에서 일어나는 일은.

미래의 내가 한 번 겪었던 일이니까.

172화 새로운 세계의 법도(5)

이름을 불린 렘은 한층 경계하는 태도로 내게 말했다.

"타차원의 예언자라도 되는거야? 우리 부족을 구하다니 그게 무슨······."

"예언자 비슷한 거라고 해두지. 어차피 너도 부족을 구하기 위해 여기에 온 거 아닌가?"

나는 그리 말하며 이미 쓰러진 마수들에게서 마정석을 채취했다.

부산물은 신태양에게 챙기도록 말해뒀으니, 나는 핵심이 되는 부분만 챙길 예정이다.

현 시점에서 SS급 게이트의 마정석은 엄청난 가치를 지녔으니까.

부족의 무녀 렘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너 뭔가 착각하고 있나본데. 맹수왕의 애완마수를 조금 잡았다고······."

"조금이 아니라 하룻밤 사이에 천 마리. 피차 시간이 없으니 짧게 말하지."

외인인 나에게서 주도권을 잡고 싶어 하는 것도 알겠다. 그들의 입장에선 자신들의 땅이 침입 당한 것일테니.

하지만 예언의 마족이 맹수의 편에 붙을 게 확실한 이 시점에서, 내가 부족 전체를 통솔할 수 있는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완벽히 승리할 수 있다.

"맹수왕과의 전쟁은 무조건 일어난다. 우리에게도 반드시 그를 굴복 시켜야 할 이유가 있거든. 너희 부족이 원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초맹림계에 피바람이 몰아칠 거란 소리다."

마찰은 피할 수 없다.

맹수왕이 굴복하던가, 헌터들이 전멸하던가 둘 중 하나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부족민들은 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내 단호한 말에 렘이 입을 다물었다.

잠시 고민하는 듯한 얼굴의 렘.

이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맹수왕을 쓰러뜨린다면 그 뒤는?"

게이트가 클리어 되고 차원을 잇던 통로는 닫힌다. 우리는 본래의 세계로 돌아갈 뿐이다. 너희 세계엔 관심 없다.

"너희 부족이 초맹림계의 승자가 되겠지. 우린 관여하지 않을 거다."

"그 말을 믿으란 거야······?"

그들의 입장에선 갑작스레 나타난 엄청난 기회다. 믿기 힘든 것도 당연하다.

'정확히는 시스템이 이어준 결과지.'

F등급 게이트부터 시작해 S등급에 이어, SS등급의 게이트.

그 등급이 올라감에 따라 헌터들도 강해진다.

그 결과, 시스템은 우리에게 다른 차원의 지배자를 쓰러뜨리라고 말하고 있다.

'마치 세계가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처럼.'

어쨌든 부족민들의 입장에선 더할 나위 없는 기회다.

우리를 믿냐, 믿지 않느냐는 그들의 선택이지만.

한참을 망설이던 렘이 인상을 찌푸렸다.

"젠장, 믿을 수밖에 없잖아."

그녀는 부족을 구원하고 싶어한다. 맹수왕은 인간들의 반란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맹수왕의 눈에는 외인이나, 부족민들이나 같은 사람이니까.

실패하게 된다면 그들의 전멸은 확실시 된다.

결국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그래도······. 확인해 봐야 하는 게 있으니까. 잠시 움직이지마."

렘의 주변으로 푸른 반딧불이 같은 불빛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녀가 착용한 장신구들이 부드럽게 부유했다.

그녀의 스킬인 능력 판정.

대상의 현재 능력을 꿰뚫어 보는 힘이다. 내 강함을 판단하려는 거겠지.

그런데, 그 도중에 내 앞 공간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우우웅!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후우······. 맞게 찾아왔나보네요."

허공에서 나타나 바닥에 착지한 윤서현 헌터.

꽤 지친 얼굴이었다.

"넓어요. 여기 더럽게 넓다구요. 간신히 찾았어요."

"가장 먼저 저한테 온 겁니까?"

윤지은과 먼저 합류할 줄 알았는데.

"네? 아, 어쩌다보니. 지한씨가 보여서 온 거지. 절대로 노리고 찾아 온 건 아니에요. 그냥 우연. 음, 우연이죠."

윤서현이 수상쩍게 변명하는 동안.

능력을 사용하는 렘의 미간이 좁혀졌다.

"뭐, 뭐야? 한 사람이 늘었잖아······."

"어머, 귀여워라. 이 아이는 누군가요?"

"윽, 비켜 방해니까. 아니 이렇게 된 거 둘 다 능력을 확인······."

『 동료 렘이 스킬 '절대 판정 Lv.8'을 발휘합니다. 』

녀석이 구사하는 스킬의 수준은 상당히 높다. 그녀가 무녀여서가 아니라, 초맹림계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능력치가 전체적으로 높다.

"······."

스킬 사용이 끝난 렘이 굳어졌다. 시스템의 메시지를 확인하는 모양이다. 녀석은 혼자서 중얼중얼 거렸다.

"······뭔가 이상한데? 이럴 리가 없어."

그러다간 고개를 들어 나와 윤서현을 번갈아 본다.

"고작 외인 둘이 맹수왕만큼 강할 리가······. 다시······."

"······."

"다시······."

몇 번을 다시 판정하는 렘.

녀석은 지쳤는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후우······. 후우······. 진짜로······?"

정말로 믿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이어서 다섯 번을 더 시도하고 나서야 인정했다.

마지막 시스템창을 확인한 렘이 볼을 긁적였다.

"저······. 건방지게 굴어서 죄송했습니다. 어떻게 부탁 좀 드릴게요······."

* * *

초맹림계에 존재하는 부족의 수는 총 98부족.

대부분 소수이거나 약소한 부족이다.

무녀 렘이 있는 아스카할 부족이 그들의 대표였다. 전투력도, 번영도도 가장 높다.

"일단 과일이라도 드시면서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부족장님이 쓰러지셨다가 방금 정신을 차리셨거든요."

특수한 문양이 새겨진 천막 안.

우리 앞에 고급스런 과일이 한가득 놓였다.

윤서현이 포도처럼 생긴 것을 한 알 집어 들었다.

"처음보는 과일이네요. 맛 있으려나?"

무녀인 렘의 발언은 부족내에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녀를 설득한 시점에서 대부분의 협의는 끝났다고 볼 수 있다.

"와, 엄청 맛있어요. 잠깐 능력치가 증가······?"

나도 옆에 있는 뾰족한 사과를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 '렝톰 열매'를 섭취하여 영구적으로 힘이 1스탯 증가합니다. 』

여기에 있는 건 보통 열매가 아니다.

무려 능력치가 올라가는 열매다.

우리 문명계에서는 영약 취급을 받지만 여기에는 널려 있다.

'많이 먹으면 내성이 생긴다지만, 효과가 쏠쏠하긴 하군.'

와구, 와구.

나는 열심히 과일을 섭취했다. 윤서현도 질세라 열심히 과일을 입에 넣었다. 능력치를 주는데 남길 순 없지.

마침 배고프기도 했고.

초맹림계에 있는 마수들과 인간들이 강인한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아, 이 분들이 렘이 말한······. 아, 신경쓰지말고 드시게나."

부족장이 나타났다. 새하얀 수염이 인상적인 그는 외관상 70대로 보였다. 실제 나이는 더욱 많을 거다.

각성자나 마나의 영향을 받은 사람은 수명이 늘어나니.

부족장의 옆에는 렘이 있었다. 그녀가 과일 바구니를 뒤로 당겼다.

"그······. 과일은 많이 있으니 천천히 먹어도 돼요. 그보다 이야기를 좀 하죠."

"앗, 나도 모르게. 과일이 참 맛있네요."

윤서현이 멋쩍은 헛기침을 했다.

렘이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두 분 다 상당한 실력자이지만 맹수왕을 상대하긴 어려울 거에요. 그의 아래에 존재하는 다섯의 야수 전사들이······."

"그런 잔챙이들은 상관 없습니다.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으니까요."

"큰 문제요?"

"마족에 대해서 들어봤습니까?"

그들은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이었다.

"예언의 마족과 검의 마족이 맹수왕의 배후에 있습니다. 그들의 강함은 맹수왕을 아득히 초월하고요."

"······거짓말이죠?"

"뭐하러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이미 동맹이나 마찬가지인데."

천막 내부에는 부족장와 무녀인 렘 뿐 아니라 다른 중역들도 있었다. 그들 전체가 술렁이는 건 당연했다.

"맹수왕과 그 부하들도 한층 더 강해져서 돌아오겠죠. 대비를 해야 합니다."

"허어······. 하지만 우리가 가진 전력으로는 턱도 없다네."

부족장이 한숨을 내쉬는 그때였다.

"외인들의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천막 바깥에서 한 청년이 들어왔다.

"동쪽에선 언데드로 구성된 대군이 밀림을 넘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서쪽에서는 맹수왕의 야수 전사들이 패퇴했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검을 잘 다루는 자가 있더군요."

언데드 대군은 러시아의 헌터 니콜라이.

서쪽의 검을 잘 다루는 자는 신태양인가?

"각 부족에게 합류한 외인들도 상당 수 있습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야수왕의 보물창고가 털렸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건 아마 진세아일 거다.

남자는 곳곳에 퍼져 있는 정보를 취합해서 보고해주었다.

그 소식을 들은 부족장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야수 전사가 쓰러졌다고? 그것도 외인들의 손에 의해? 이전에 봤던 외인들과는 완전히 다르군."

"생각하시는 것처럼 저희 헌터들은 약하지 않습니다."

헌터들도 나름대로 집결하려고 하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부족하고 충돌하기 전에 손을 써야겠군.'

마수가 아닌 다른 차원의 인간과 접촉하는 건 처음이 아니다. 게이트와 동시에 생겨난 탑. 그곳에는 NPC라는 존재가 있었다.

NPC(None Playable Character).

게임에서 나온 말이지만, 이것은 탑 안의 지적 존재들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된다.

타차원의 부족민들도 처음엔 그런 취급을 받을 거다.

물론, 적의를 사지 않도록 행동하는 게 일반적인 행동 요령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충돌이 있으면 곤란하니 미리 언질을 줘야 한다.

윤서현이 손가락을 튕겼다.

"잘 됐네요. 헌터들의 위치가 파악되고 있단 거잖아요. 그 정보망을 이용하죠. 헌터들이 합류하는 시점이 더욱 빨라지겠네요."

"우리가 도움이 된다니 다행이군. 최대한 협력하도록 하겠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서현 헌터는 헌터들의 위치를 확인하는 순서대로 제 의견을 전달해주세요. 행동을 같이하진 않더라도 쓸데 없는 충돌은 막아야하니까요."

"네, 알겠어요. 협회 짬밥 수 년차. 그 정도야 어렵지 않죠."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무녀 렘이 나를 불러 세웠다.

"잠깐, 아직 마족에 대한 이야기가 안 끝났잖아. 그쪽 말대로 마족이 그런 상식 외의 괴물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이길 건데······?"

고분고분했던 존댓말도 관두기로 한 모양.

그녀 입장에선 답답할만도 하다. 부족 전체가 맹수왕에게 억압 받은 세월이 한 두해가 아닐테니.

"일단은 전력 확인부터 해야겠지."

천막 밖으로 나오자, 부족이 세운 마을의 모습이 보인다. 높은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듯 마을의 상황이 한 눈에 보인다.

뭐, 진짜 한 명 한 명 붙잡고 능력을 물어볼 필욘 없었다.

미래의 내가 경험했던 지식이 내게 있으니.

'부족민 한 명의 전투력은 S급 헌터와 엇비슷하다.'

하지만 전투력이 강하다고 끝이 아니다.

뒤따라 천막을 나온 렘도 그걸 지적했다.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은 꽤 많아. 근데 소용 없어. 무기가 충분하지 않거든."

그녀는 활을 꺼내 보였다.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지만 일반 등급의 무기다.

우두머리 부족의 무녀인 렘이 들고 있는 무기가 일반 등급이다. 다른 부족민들이 들고다니는 무기가 어떨지는 안봐도 뻔했다.

"맹수왕도 알고 있을 거야. 우리가 전쟁을 할만한 상황이 아니란 걸. 제대로 된 무기는 그가 독점하고 있어."

이들에게 필요한 건 아이템이다.

'초맹림계는 우리와는 상황이 다르다.'

게이트가 있는 게 아닌, 맹림계 전체가 게이트인 상황.

'맹수왕의 보물창고가 털렸다곤 하지만······. 이들 전부의 무기를 감당하려면 부족할 거다.'

초맹림계를 되찾는 일에는 부족이 참전해야 한다. 애시당초 의도가 뻔한 달성 목표다. 이 넓은 초맹림계는 야수왕의 터전이나 다름 없다.

전력은 헌터들이 강하다지만, 이런 곳에서 승리하려면 지리에 능한 부족민들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즉, 무기와 방어구만 있으면 된다 이거지.'

장비의 보급.

그 해답은 의외로 간단한 곳에 있다.

"각 부족들에게 무기를 운반할 사람들을 불러."

"저기, 너무 멋대로잖아. 무기도 없는데 다짜고짜 사람들을 부르란거야?"

"그래."

나는 이계 규율의 상점을 열었다.

"그 무기가 지금부터 생길 예정이거든."

파직, 파지직!

붉은 스파크가 튀어나온다.

무기를 들고 마수를 사냥하면 나는 포인트를 얻는다.

미래에서 나는 세이비어에 탑승해 검의 마족이 이끄는 대군을 물리쳤다. 세이비어의 압도적인 마력 함포가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순간을 똑똑히 확인했다.

그렇다면 미래에서 내가 함장으로 있던 세이비어는 무기인가?

거기에 대한 답.

그것이 지금 내 앞에 펼쳐졌다.

『 대상 이지한이 획득한 포인트가 해당 시간선의 인과 한계치를 아득히 초월합니다. 』

『 시스템이 해당 인과 타당성을 검토합니다. 』

촤르르륵!

끝없이 올라가는 포인트의 수치!

백만대에 위치하던 포인트의 자릿수가 바뀌기 시작했다.

500만, 1000만, 5000만을 넘어······.

샤아아—!

마침내 억단위의 숫자가 찍혔다.

『 보유 포인트 : 122,302,509 Point 』

1억 2천만 포인트라는 막대한 양이 내게 깃든다.

『 다량의 포인트가 '초월의 코인'으로 변환됩니다. 』

내 앞으로 떨어지는 두 개의 초월의 코인.

그걸 제외해도 이만큼의 포인트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압도적인 양.

내 입가의 미소가 진해지는 순간이었다.

『 이계 규율 상점에 새로운 항목과 물품이 다수 추가 됩니다. 』

나는 이계 규율의 상점의 스크롤을 내리며 렘에게 말했다.

"뭐가 필요한지 말만해라. 전부 보급해 줄테니."

173화 전쟁의 판도(1)

"자자, 필요한 무기의 목록을 적어오세요! 각 부족에게도 전달해주시고요!"

무녀 렘의 명령에 따라 마을의 전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익숙한 밀림 내부를 빠르게 오고 갈 수 있었으며, 주술을 활용한 통신에 능했다.

내가 할 일은 이계 규율의 상점에서 무기를 구입해 나누어 주는 것 뿐.

『 유니크 무기 '섀도우 크리티컬 보우'를 구입합니다. 』

『 5500 포인트를 소모합니다. 』

『 유니크 무기 '아크타의 이빨 단검'을 구입합니다. 』

『 4300 포인트를 소모합니다. 』

『 유니크 방어구 '레살리아제 천갑'을 구입합니다. 』

『 12000 포인트를 소모합니다. 』

···

..

.

초맹림계에 퍼져 있는 부족의 수는 약 100개.

싸울 수 있는 자들의 숫자는 2000명 정도다. 그들 모두에게 유니크 아이템을 풀세트로 나눠줘도 포인트가 남아돈다.

미래에서 마족의 대군을 물리치고 획득한 포인트가 1억 2천 가량이니. 인당 3만 포인트를 잡아도 6천만 포인트가 남는다.

"저는 활로 주십쇼."

"활이 좋습니다."

"저도 활을 부탁합니다."

아스카할 부족 내에서는 활을 달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무녀가 지니고 있던 활도 그렇고 이들의 주특기는 활이 틀림 없다.

다른 부족들은 다양하게 무구를 받아갔으니, 밸런스는 맞다.

"이, 이런 아이템을 받아도 되는 겁니까?"

"이만한 물량을 도대체 어디에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들 조심히 실어!"

무기와 방어구가 수레에 잔뜩 실렸다. 아이템들은 그대로 각 부족을 향해 최단 거리로 운송된다.

맹수왕의 활동이 주춤한 지금이 아이템을 보급하기엔 최적의 시기다.

모든 상황을 관리 감독 하던 무녀 렘.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그녀도 내가 아이템을 마구 뽑아내자, 표정이 바뀌기 시작했다.

"······. 믿을 수가 없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도와준다는데도 의심이 참 많다.

"맹수왕도 마족과 결탁해 부하들을 강화해서 올 거다. 우리 헌터들만으론 막기 어렵고."

SS급 게이트.

이것을 공략하기 위해 세계 유수의 헌터들이 모두 모였다.

희생을 감수하면 부족의 도움 없이도 공략이 가능할 정도다.

그러나 이번에는 마족이 관여했다.

단순히 전력을 쏟아붓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부족 전사들의 능력치는 죄다 S급. 이런 이들이 무기가 부족해서 싸우지 못한다면 어마어마한 전력낭비지.

'물론 나도 그냥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건 아니다.'

유니크급 무기들.

가져다 팔면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규모의 아이템이다. 그것들을 각 부족에게 뿌리고 있는 이유가 있다.

『 소수의 초월자들이 당신의 활약을 기대합니다. 』

『 선 성향의 초월자들이 당신의 선의에 감동합니다. 』

이계 규율을 통해 초월자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

당장은 떨어지는 게 없지만 이들이 간섭이 심화되는 지점이 올 것이다.

'무엇보다 이 세계에도 존재 한다.'

나는 무녀 렘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몸에 두르고 있는 장신구들과 각종 제사 도구.

그녀의 존재가 이미 증명하고 있다.

모든 부족이 따르고 숭배하는 신이 있다는 것을.

신이라는 이름의 초월자가 이 세계에는 분명히 존재한다.

"너희들의 유적을 확인하고 싶은데."

"그러니까, 여기 처음 오는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냐고······."

"예언자 비슷한 거라니까. 거기로 안내해라."

렘은 어이 없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실질적인 도움을 받은 시점에서 렘도 한결 누그러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레 유적으로 발을 돌리려던 렘이 멈춰섰다.

"근데, 문제가 있어."

그녀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맹수왕의 부하들이 점령하고 있어."

그런 거라면 문제 없다.

"안내해."

전부 쓸어버리면 되니까.

* * *

"이제 마지막 남은 건······. 러시아의 헌터들······. 알아서 잘 모여 있어서 금방 끝나겠네."

윤서현은 부족민들의 도움을 받아 초맹림계에 흩어진 헌터들을 도왔다. 이지한의 말을 전하고, 그들이 본인의 길드와 합류할 수 있도록 했다.

그 마지막 차례가 러시아의 헌터들이었다.

주변이 풍경이 일변하며 윤서현이 공간을 넘어섰다.

언데드와 해골병사들로 가득한 한가운데.

러시아의 헌터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은 흩어진 상황에서도 가장 먼저 합류에 성공했다.

길드장 니콜라이의 언데드들이 밀림 전체로 퍼져, 헌터들을 모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의 윤서현을 향해 시선이 모였다. 주근깨가 있는 금발의 소년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엇, 뭐야? 공략대이신가요?"

"한국 은빛의 날개 소속 윤서현입니다. 몇가지 전할 말이 있어서요."

윤서현은 부족민들과의 연합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아하, 그래서 대장은 어떻게 할 건데?"

나무에 기대어 있던 니콜라이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의 군복 바지는 이미 맹수들의 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런 쓸데 없는 이야기를 전하려고 여기까지 온 건가?"

"······. 이야기는 전했으니 돌아갈게요. 서로 방해만 안된다면 저희도 상관은 없거든요."

윤서현은 어깨를 으쓱이고선 바로 공간 너머로 사라졌다. 협회에서 일하며 온갖 진상들에게 익숙해진 그녀였다.

말이 안통할 게 뻔하면 굳이 이야기 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

"엇······.

윤서현이 사라진 자리를 향해 손을 뻗었던 금발의 소년이 아쉬운 듯 손을 내렸다.

"간섭에 실패했어요. 한국에 저런 공간이동 능력자가 있었나요?"

그리 말하는 소년의 눈은 탁했다. 이어서 장발의 여성 헌터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목이 기이하게 꺾였다.

"대적자와 연관이 있는 건가? 죽여서 확인해봤으면 됐을텐데. 아쉽네요."

"대장, 다시 오면 어떻게 할까요. 저런 공간이동 능력자는 우리도 필요해요."

10명 가량의 러시아 헌터들.

그들 중에 살아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살아 움직이는 시체이자, 니콜라이를 따르는 충실한 언데드였다.

러시아 1위 니콜라이.

최상위 부패의 마족이기도 한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아, 죽여서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지. 하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대적자다.

그의 손에서 검은 기운이 감도는 오브가 떠올랐다.

"나는 상황을 만드는 것 정도면 충분해. 이 무대는 예언의 마족과 검의 마족의 것이야. 마계왕께서도 내가 나서길 원하시지 않을테니까."

그는 담배를 한 대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인 담배 연기가 뿜어져 나오지만, 니콜라이의 표정은 여전히 일그러져 있다.

"담배 맛 더럽군. 인간들이 만든 건 죄다 이래. 하여간 자료나 수집해라. 러시아의 수뇌부를 장악할 일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바스락.

그런 그의 뒤로 나뭇잎이 밟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소리였으나.

"!"

니콜라이는 그 즉시 손을 휘둘렀다. 동시에 바닥에서 날카로운 뼈 창이 솟아났다.

콰드득!

뼈 창에 꽂힌 맹수 한 마리. 놈의 몸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대장, 그 정도는 저희한테 맡기시지. 아니면 무슨 문제라도?"

니콜라이는 소년의 물음을 무시하고 혼잣말을 했다.

"쯧, 최근 안 좋은 소식을 너무 들어서 예민해졌나."

그리 말한 니콜라이는 다시 한 번 손 끝에 검은 구체를 띄워 올렸다. 에픽급 아이템이 그의 손에서 빛나고 있었다.

"완전 격리 구역. 이걸로 대적자를 가두고 공략을 저지한다."

그는 흡족스런 얼굴이었다.

"이걸로 대한민국은 멸망할 거다."

그는 예민한 상황의 탓으로 돌렸지만, 니콜라이의 감각은 날이 서 있었다고도 볼 수 있었다.

실제로 불청객이 있었기 때문이다.

맹수가 있던 장소와 정확히 반대편.

절대은밀기동으로 몸을 숨긴 진세아가 있었다.

'호오······.'

오빠에게 들어서 니콜라이가 부패의 마족이란 건 알고 있었는데.

러시아 헌터들 전부가 언데드일 줄이야.

심지어 저 아이템은······.

진세아의 눈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 * *

무기의 보급도 맹수왕과 싸우기 위한 전술의 준비도 끝났다.

그 사이 내가 향해야 할 장소는 하나다.

이 세계의 신이 기거하는 유적지.

"······지한씨 말대로 소름끼치던데요."

"그가 다루는 언데드는 기존의 섭리를 벗어난 존재라고 하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죠."

임무를 마친 윤서현과 대화를 나누며 렘의 안내를 따라 유적 내부로 들어섰다. 뒤를 흘끗 쳐다보던 렘이 물었다.

"근데 두 사람은 무슨 관계? 연인?"

"동료."

"······그치, 동료지."

"흐음······."

잡담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유적으로 통하는 길목에서 맹수왕의 부하를 마주쳤기 때문이다.

푸른 호랑이 수인.

놈은 이빨을 드러내며 우리를 위협했다.

"아스카할의 무녀인가. 맹수왕께서 유적에 발을 들이지 말라고 했을텐데."

그의 몸 위로 살기가 피어오른다.

적은 방어구를 전부 갖추고 있다. 일반 부족민들이 상대하기엔 강한 적이다.

"다시 찾아왔다는 건 죽고 싶다는 말이겠지."

놈의 입가에 주르륵 침이 흘러내린다. 렘을 먹이로밖에는 보지 않는 시선이다. 그 섬뜩한 모습에도 렘은 기죽지 않았다.

"면상에 화살이 박히면 그 생각도 달라질 걸?"

"크르르······. 뭐, 좋다. 죽는 게 소원이라면."

일순 호랑이 수인의 모습이 사라졌다. 적어도 렘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 거다.

"뭐?!"

놈은 나무 위로 뛰어 오른 뒤 날카로운 발톱에 마력을 부여했다.

'빠르군.'

나는 곧장 타재간파의 서를 발동시켰다. 포인트의 압박이 사라진 지금. 타재간파의 서는 상시 발동이 가능하다.

『 타재간파의 서를 발휘합니다. 』

서걱—!

허공에서 휘두른 발톱째로 놈의 몸이 잘려나갔다. 방어구도 종잇장처럼 단번에 베어내는 공격력이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의 격차지만, 쓸데없는 자비는 없다.

렘의 얼굴이 순식간이 밝아졌다.

"여, 역시! 대단해!"

"안에는 맹수왕의 부하들이 더 많이 있는 건가?"

"그럴 거야. 놈들이 유적을 훼손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발을 동동 구르는 렘.

팅!

우리는 나무를 걷어내고, 유적으로 들어갔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유적의 내부. 정교한 조각상들과 각종 벽화가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아아······."

렘의 실망한 목소리가 유적 내부에 울려 퍼진다.

윤서현은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는 굉장히 독특한 느낌이 나는 공간이네요. 다른 공간과 분리된 특별한 느낌······."

동시에 내 눈 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 무성(無星)등급 칭호 : 기적의 발현자 』

『 유적 필드에서 데미지가 1,000% 상승합니다.』

이전에 엘프 학자 세레네를 도우며 얻었던 칭호다.

"응? 뭐야, 인간 놈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거야?"

"입구를 지키던 놈은 어디갔어?"

"일단 죽여!"

앞쪽에서 진을 치고 있던 수인들이 일제히 우리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맹수다운 날렵한 움직임이다.

렘이 활 시위에 화살을 매겼다.

피잉!

그녀의 활 또한 유니크 아이템으로 바꿔준 상태.

파악!

마력을 품고 올곧게 나아간 화살은 수인의 머리에 정학히 박혔다. 수인은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렘은 뒤로 빠지며 소리쳤다.

"나머지는 부탁할게요!"

"오케이, 신체 능력은 좋아보이지만 별 거 없네요."

윤서현의 주변에서 보랏빛 오오라가 퍼져나갔다. 수인들이 위치한 공간이 만화경처럼 나뉘며 분리되었다.

"뭐, 뭐야······?"

"큭, 움직여지지가 않아!"

녀석들은 그대로 공간에 고정되었다. 수 십 마리의 수인이 별다른 저항도 못한 채 속박된 것이다.

"윤서현 헌터. 좋습니다."

"이 정도야 별 거 아니죠."

서걱—! 서걱—!

나는 놈들을 베어내며 앞으로 전진했다.

다 쓰러져가는 유적의 중심부.

거기에는 검은색 바위가 놓여 있다. 그 크기는 익숙하다.

『 초월의 비석 』

그 아래에 놓여 있는 녹슨 대야.

금이 가고, 칠이 벗겨져 보기 흉할 정도다.

"으윽, 얼마나 지났다고 이렇게······. 여기는 원래 신을 모시던 장소야. 맹수왕의 탄압이 심해지는 바람에 빼앗겼지만······."

렘이 아쉬운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의 지켜오던 터전이자,

맹수왕에게 빼앗긴 자리.

나는 품 안에서 초월의 코인을 하나 꺼냈다.

이 코인의 사용법을 이제는 알고 있다.

『 소수의 초월자가 당신의 행동에 관심을 보입니다. 』

아마, 보고 있을 거다. 이 세계의 신이라고 불린 초월자도. 여기까지 왔는데 못 알아채는 건 이상하니까.

팅!

나는 초월의 코인을 튕겨 대야에 던져 넣었다.

그 순간.

샤아아아—!

새하얀 빛이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한때는 번영한 초맹림계를 이끌던 초월자.

이제는 쇠락한 유적을 지키는 초라한 신이지만.

그런 건 상관 없다.

이계 규율이 그를 억지로라도 불러 올테니까.

유적 내부에 몰아치기 시작하는 빛의 폭풍.

"지, 지한씨. 이거 괜찮은 거 맞아요?!"

"으아아, 신께서 노하셨다······! 죄송해요! 유적을 못 지켜서!"

바닥에 바짝 엎드리는 렘.

범상치 않은 등장이지만 문제는 없다.

이윽고, 빛의 무리 속에서 메시지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 쇠락한 신궁(神弓)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

드디어 나타나셨구만.

네 부족을 구하는 대신.

나도 받아야 할 게 있다.

174화 전쟁의 판도(2)

예언의 마족과 검의 마족.

그들은 맹수왕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예언의 마족은 고급스런 가죽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최상급의 과일을 입에 던져 넣었다.

여유로운 예언의 마족에 비해, 검의 마족은 어딘지 불편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쯧, 초맹림계의 지배자라는 작자가 줏대도 없군."

"하하, 그런 무위를 보여주면 누구라도 쫄 걸요."

검의 마족의 불만과 달리 맹수왕은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듣도보도 못한 마족이란 놈들이 나타나서, 초맹림계를 멋대로 주무르겠다는데 가만히 있을 왕이 어디에 있겠는가.

물론 그러한 반항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경이로운 수준의 실력 차이 앞에서 맹수왕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마족들의 제안은 맹수왕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마계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만 한다면 새로운 힘인 '마기'를 주겠다는 제안.

그건 초맹림계를 완전히 장악하고 타차원까지 손을 뻗을 수 있는 기회였다.

"뭐, 권속을 늘렸으니 좋다쳐도. 지금 당장 대적자를 치러가지 않는 이유는 뭐지?"

자신의 은발을 만지작거리던 검의 마족이 예언의 마족에게 물었다.

SS급 게이트로 넘어오며 상당한 능력의 손실이 있었던 건 맞지만, 그럼에도 검의 마족이 느끼기에 전력차는 압도적이었다.

자신들은 수 없이 많은 차원을 지배해 온 최상위 마족인데 반해 대적자는 한낱 인간.

"신중을 기하자는 의도는 알겠지만······. 그게 오히려 놈들에게 대항할 기회를 주는 게 아닌가?"

"그것도 맞는 말이네요. 하지만 신기하게도 저희는 아직까지도 모른단 말이죠."

"뭘 말이냐."

허공에 떠오른 시스템 창을 만지작 거리던 예언의 마족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적자의 능력이요. 이해가 안가요. 그래서 더 흥미로운거지만."

"검을 사용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내 상대는 아니다."

"다른 무기도 쓰더라니까요? 부패의 마족으로부터 받은 영상인데, 한 번 보실래요?"

예언의 마족이 보여준 영상에는 항마의 활을 사용하는 이지한이 담겨 있었다. 상위 환상의 마족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바로 그 장면.

"······."

검의 마족의 눈썹이 올라갔다.

"근데 이거 한 번 사라졌던 기술이거든요. 약소 종족이 사용하던 쓰레기 기술. 근데, 그게 대적자의 손을 거치니······. 마족을 죽이는 치명적인 기술이 된거에요. 대단하지 않나요?"

예언의 마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입가에는 시원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대강 짐작은 가요. 더 나은 수준의 능력 복사라던지. 확실치는 않지만요."

초맹림계의 지형이 담긴 지도 앞에 섰다.

"대적자의 행적은 꽤 베일에 쌓여 있었어요. 말하자면 신출귀몰. 우리 입장에선 최근에서야 모습을 드러낸 셈이죠. 아, 정확히는 우리 마족이 대적자에게 관심을 가진 게 최근이라는 말이 맞겠지만요."

그는 맹수왕을 본따 만든 말을 지도의 중앙으로 옮겼다.

"그러니까 정보 수집입니다. 제 예언이 어디까지 통하나 시험도 해보고, 대적자의 수준도 가늠해보는 거죠."

철저한 분석과 예언을 필두로한 압도적인 승리.

"네가 그렇다면 그런거겠지."

검의 마족은 못내 고개를 끄덕였다.

예언의 마족 앞에서 쓰러진 영웅의 수가 헤아릴 수 없다. 마족에게 저항하던 그 어떤 존재도 그의 앞에서 쓰러졌다.

그의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때였다.

"마족들이시여, 부하들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맹수왕이 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백호였던 그의 털은 마기로 완전히 물들어 검게 변해 있었다. 그의 몸에서 마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나 신비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야, 마기 적응력이 뛰어나네요. 굉장히 잘 어울리네요. 랭크가 한단계는 올라갔을지도 모르겠네요."

"이질적이긴 하지만 적응하니 오히려 힘이 샘솟는 것 같군."

"좋네요. 그럼 부하들을 한 번 보러갈까요."

뒷짐을 진 예언의 마족이 맹수왕을 따라 방을 나섰다.

맹수왕의 땅 아래에 도열한 야수 병사들의 모습. 모두 마기에 의해 광폭화 된 상태였다.

검은 마기와 붉은 눈.

그들은 당장 싸우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았다.

"분명 부족 인간들은 제대로 된 무기도 없다 그랬었죠?"

"그렇다."

"압도적인 싸움이 되겠네요. 대적자가 어떻게 나오나 한 번 보자고요."

예언의 마족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아아아—!

그것을 확인한 맹수왕이 크게 울부짖었다. 마력이 실린 흑호의 울음소리가 병사들을 움직였다. 무질서하게 밀림으로 나아가는 병사들.

그들의 붉은 안광이 밀림의 어둠을 가르며 빠르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 쇠락한 신궁(神弓)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

초월자란 무엇인가.

그 대답은 미래의 내가 겪었던 무수한 차원 속에 있었다.

'신이라고 불리는 자들도 초월자의 한 종류.'

그들은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숭배 받기를 원한다. 그래야만 초월자로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영향력이란 세계에 대한 간섭.

신탁이나 예언을 주거나, 직접적으로 세계를 변화시킨다.

'초월자들마다 목표는 다르지만······.'

결국에는 그러한 힘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세계에 조금도 간섭할 수 없게 되는 거다.

내가 가진 초월의 코인은 그러한 초월자의 힘이자 영향력 그 자체.

따라서 유적에 잠들어 있던 신을 깨우는 방아쇠가 된 것이다.

"어, 어······?"

콰아앙—!

강렬한 빛은 이내 한줄기 벼락이 되어 렘을 향해 쏘아졌다. 당황한 윤서현이 급히 보호막을 만들었지만 그럴 필욘 없다.

『 쇠락한 신궁(神弓)이 무녀 렘의 몸에 깃듭니다. 』

그가 우리와 대화하고 싶은 것 뿐이니까.

렘이 천천히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이 새하얗게 빛나기 시작하고, 거대한 격의 급류가 유적을 채워나갔다.

빛무리가 파도처럼 흘러 유적 내부를 뒤덮는다.

"괘, 괜찮은거죠?"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격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윤서현의 표정이 좋지 않다.

『 레전더리급 스킬 '영웅의 격 Lv.6'를 발휘합니다. 』

강림한 게 아니라 그저 빙의 했을 뿐인데도 이만한 격이다.

허공에 떠오른 렘의 고개 천천히 돌아간다.

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격이 실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타차원의 필멸자여. 어째서 나를 깨웠는가. ]

그 목소리에 담긴 격이 전신을 관통한다.

[ 내게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나는 몰락한 신. 줄 수 있는 것이 없다. ]

렘의 입을 빌어 말하는 초월자. 본체를 직접 마주하는 게 아닌데도 굉장한 압력이다.

줄 수 있다는 게 없다지만 녀석은 부름에 응했다.

내가 던져 넣은 초월의 코인 탓이겠지만.

그만큼 받아놓고서 입 닫을 생각을 하면 안되지.

나는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네가 가진 기술을 배우고 싶다."

[ ······. ]

그 말을 들은 초월자는 잠시 침묵했다.

[ 의미가 없다. 기술은 사라지고 잊혀졌다. 알려 준다 해도 인간의 수준으로는 구현해 낼 수 없다. ]

"그건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알려주기나 해라."

[ 조잡한 모조품에 불과하다. 도움이 될 리가 없다. ]

답답한 녀석이군. 그런 내 심정을 대변하듯 메시지가 올라왔다.

『 잊혀진 영웅이 몰락한 신궁을 비웃습니다. 』

『 소수의 초월자들이 이지한의 업적을 가리킵니다. 』

『 이계의 찬탈자가 몰락한 신궁의 아둔함을 한탄합니다. 』

몰락한 신궁은 초맹림계의 초월자.

초월의 코인으로 방금 막 불러냈으니 내 업적을 모르는 게 당연하다.

즉,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래도 다른 초월자들이 이렇게 직접 개입해 줄 줄은 몰랐다. 이계의 찬탈자? 새로운 초월자인가?

초월자들의 비난이 쇄도하자 몰락한 신궁의 얼굴이 굳어졌다.

[ 이게 대체······. 이해가 안가는군. ]

나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기술이나 전수해라. 그게 네 부족을 살리는 일이다."

고민하던 신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걸로 충분하다면 그리하지. 이 아이에게 새겨두겠다. 타차원의 필멸자여.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

모르겠다면 직접 봐라.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 ······지켜보겠다. ]

『 몰락한 신궁의 간섭이 약해집니다. 』

유적을 둘러싸고 있던 격이 잦아들고, 빛무리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부유했던 렘이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초월자라······. 신기하네요. 어쨌든 이걸로 된거죠?"

윤서현이 앞으로 다가가 렘을 받아들었다.

그때였다.

"모두 살아계셨군요!"

부족 소년 하나가 급하게 유적으로 들어왔다. 렘을 확인한 소년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 잠깐 무녀님은 괜찮으신겁니까?"

"잠든 것 뿐이에요."

소년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서 무슨 일입니까?"

야수 병사들이 위치한 이곳까지 왔다는 건 꽤 중요한 일이란 건데.

"아, 맹수왕의 군대가 움직임을 개시했습니다."

내가 아는 것보다 더 빠르다. 예언의 마족이 일부러 한발자국 빠르게 움직인 모양이다.

녀석에게는 예언의 능력이 있으니 내가 알고 있는 미래가 바뀌는 게 특별하진 않다.

"빠, 빨리 대비를······."

윤서현이 품에 있던 렘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정신을 차린건가.

신궁이 사용하던 기술.

그건 렘이 얻었을 거다.

그러면 이제 이곳에는 볼 일이 없다.

"필요한 건 얻었으니 돌아가죠."

* * *

"합류한다고 연락을 준 길드는 일본, 미국, 한국의 다른 길드들 정도네요. 나머지 국가들은 따로 행동한답니다."

아스카할 부족이 위치한 마을에 헌터들이 모여들었다.

'애초에 모든 국가가 협력하는 건 불가능하다.'

세계 최초의 SS급 게이트 공략.

당연히 단순한 게이트 클리어 이외에도 조사, 채집 등의 다른 업무도 포함 된다. 여기서 우위를 점하는 국가가 이후의 게이트 공략을 주도하게 되니까.

마족이라는 공통의 적이 있음에도 아직 인류는 하나가 아니다.

'세계가 멸망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으니 당연하다만.'

마을에는 부족의 전사들과 헌터들이 섞여 있었다.

근처의 통나무에 앉아 있던 엘리스가 나를 발견하고 뛰어왔다.

"사부님! 반가워요!"

"그래, 다들 모인거야?"

"오고 있어요. 오면서 마수를 몇 마주쳤는데 마족이 깊게 관여한 향기가 나네요."

대답한 것은 은날의 길드장 윤지은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윤지은의 눈이 가늘어졌다.

"잠깐, 세아는요?"

이번에는 은빛의 날개가 아닌 내 옆에 딱 붙어서 공략을 하기로 했었다.

입장때부터 갈라져서 어디에 있는진 모른다.

"모릅니다. 맹수왕의 보물창고를 털었다는 정보는 들었습니다. 세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겁니다. 마음 먹고 숨으면 저도 못찾으니까요."

"그래요, 어쩔 수 없죠······."

손톱을 잘근잘근 씹는 윤지은.

하이텍트 회장의 압력이 꽤 센 모양이다.

미래에서 훈련을 마친 진세아의 능력을 제대로 알면 고민이 안 생길텐데······

"준비 끝났습니다. 다른 부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헌터들은 얼추 모였고, 부족의 전사들은 전부 준비가 끝났다. 내가 나눠준 무기를 온 몸에 걸친 그들은 완벽한 병사였다.

"오르티마."

나는 어깨의 보호구로 변해 있던 오르티마를 바닥에 던졌다. 녀석과 함께 하는 오랜만의 사냥이다.

녀석은 기쁜 듯 튀어 오르더니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켰다.

쿠구구구······.

거대한 크기의 목룡이 몸을 일으켰다.

"우와, 뭐야?"

"대, 대단한데······."

"엄청난 크기다."

부족의 전사들이 각자 놀라며 한걸음씩 물러섰다.

나는 목룡으로 변한 오르티마의 위에 올라탔다.

"렘, 너도 올라와라."

"나도? 우앗!"

렘까지 태운 목룡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자 밀림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대단해. 여기라면 지휘하기에도 적격이겠어."

저 멀리 맹수왕이 위치한 협곡이 희미하게 보인다. 불길한 마기가 섞인 바람이 내게로 훅 끼쳐왔다.

"렘, 너희의 신으로부터 스킬을 받았을텐데."

"응. 근데 그리 대단한 스킬은 아니야. 지금 필요해?"

나는 검을 들어 올렸다. 에메랄드 빛의 검이 별빛을 머금은 듯 반짝였다.

"아니."

당장은 필요치 않다.

"지금은 그냥 봐둬라."

나는 목룡의 머리 앞쪽으로 발을 내딛었다.

"너희가 상대할 적이 얼마나 강한지."

검을 쥔 손에서 푸른 마력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자세를 취했다.

14레벨 일자베기.

원근을 무시한 참격을 날릴 수 있는 필살기.

미래에서 이걸 사용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받은 참이다.

필시 엘리스의 시간 조작으로도 회복이 불가능한 패널티가 있는 거겠지.

이에 대해 고민한 결과, 답은 이렇다.

'문제가 되는 건 각성 14레벨 일자베기다.'

그게 아니라면 미래에서 사용했을 때 바로 알아 차렸을 거다.

그런고로, 14레벨 일자베기는 굳이 아껴 놓을 필요가 없다.

『 레전더리 스킬 '일자베기 Lv.14'를 발휘합니다. 』

밀림 너머 희미하게 보이는 협곡.

그 위에 올라선 맹수왕의 성.

푸른 빛의 선명한 선이 사선으로 협곡을 가로지른다.

그대로 무너져 내려야 했을 성이지만.

쿠구구구구······.

무너지는 건 목표에서 한참 벗어난 장소다. 산사태와 함께 형체를 잃고 무너지는 협곡. 뒤늦게 흙먼지가 솟아오른다.

'검의 마족인가.'

물론 임팩트는 충분했다.

렘은 눈을 깜빡인 채 말을 더듬을 정도였다.

"저······. 저거······. 그쪽이 한거야······?"

"저쪽에서도 공격이 온다."

마기로 둘러쌓인 검기가 이쪽을 향해 쇄도한다. 나는 별빛의 검을 들어 검기를 막아냈다.

콰아아아앙!

타재간파의 서를 발휘하고서야 막을 수 있는 강렬한 일격.

무식하게 강하다. 검기를 받아낸 손이 저릿저릿하다.

'이게 최상위 마족의 힘······.'

쿠과과과과······.

이번에는 내 뒤쪽 멀리에 위치하던 산이 천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얼빠진 표정의 렘은 말을 잃어버렸다.

방금의 일격으로 깨달았을 거다.

지금부터 펼쳐지는 건 기존의 상식을 뛰어넘은 싸움이다.

한마디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승부.

"······."

"각오해야 할 거야."

이것을 신호로 부족민들의 함성이 들려 온다.

동시에 맹수들의 울음소리가 저 멀리서 아득하게 들려 온다.

"이기려면 정신 똑바로 차려야하니까."

각자의 목적을 위한 전쟁이 지금 시작 되었다.

175화 전쟁의 판도(3)

맹수왕 아한발타제.

땅에 검을 박아 넣은 그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쿠구구구······.

비록 성에서 떨어진 장소라곤 하나 협곡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인 중에 저만한 힘을 가진 자가 있었단 말인가······?'

맹수왕은 과거 외인을 몇 번 마주한 적 있었다. 모두 입만 산 잔챙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방금 그 일격은 본질적으로 무언가가 달랐다.

그의 등 뒤로 차가운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마족들이 없었다면 성째로 무너졌겠군.'

지형을 바꿔내는 검격 대단하나, 이쪽에 있는 마족의 실력도 범상치 않았다.

은발의 마족.

분명 검의 마족이라고 했던가.

검격의 궤도를 틀어버린 뒤, 바로 반격을 날렸다. 그녀의 검기는 저 반대편의 산을 무너뜨렸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검술이다.

마기를 습득하기 이전이라면 패배를 받아들이는 게 최선이었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맹수왕에게도 마기가 있다.

부하들에도 마기를 잔뜩 뒤집어 썼으니, 승리는 손에 넣은거나 다름 없었다.

분명 그럴텐데······.

급히 달려와 상황을 보고하는 부하들의 소식이 그다지 반갑지 못했다.

"맹호 부대가 탈란 늪에서 대치 중입니다. 인간들의 반격이 거센 모양입니다."

"늑대 부대가 아흐렌 부족의 접경 지역에서 전멸했습니다."

"맹아 부대와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북쪽에 있던 보물 창고가 털렸습니다."

죄다 안좋은 소식 밖에 없었다.

분명 압도적으로 부족민들을 쳐부수고 있어야 할 수하들이 패배를 거듭하고 있었다.

"뭐? 말이 되는 소리를······. 마족들이시여 이게 어떻게 된겁니까?"

이를 악무는 맹수왕의 어깨에 예언의 마족이 손을 올렸다.

"진정하고 여기를 좀 봐요. 부족민들은 무장을 못 했다고 들었는데. 이건 아무리 봐도 유니크 아이템을 둘둘 두르고 있는 것 같은데."

예언의 마족이 사역마를 통해 보여준 화면에는 부족민들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맹수왕의 눈에 실핏줄이 돋아났다.

'이럴 리가······. 이런 무기와 장비들이 대체 어디에서······?'

아이템과 자원은 철저히 관리하고 있었을 터. 숨기고 있는 것도 불가능하다.

"음, 반응을 보니 예상도 못했나보네. 대적자의 짓인가."

예언의 마족이 손가락을 튕기자, 검의 마족이 코웃음을 쳤다.

"대적자가 무슨 초월자라도 되나보군."

"······. 진심으로 한 말이에요. 여기까지 내다보고 무기를 준비해 온 건지 뭔지는 몰라도······. 하여튼 진짜 신기하네요."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짓는 예언의 마족.

반면 맹수왕은 죽을 맛이었다.

'젠장, 이 마족 새끼들. 네 놈들만 믿고 나는 전 병력을 쏟아부었단 말이다. 그런데 뭐, 신기하네? 빌어먹을······.'

힘의 차이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찢어 발겼을 놈들이다.

다행히 패배 소식만 있는 건 아니었다.

처음의 패배는 부족민들의 전력을 파악하지 못했기에 발생한 해프닝.

이어지는 전쟁의 양상은 호각.

그러나 그것도 맹수왕에게 있어선 치명타였다.

압도적으로 쓸어 버려야 할 벌레 놈들과 호각이라니.

이래선 자신의 명성에 금이 가는 게 당연했다.

끄응.

앓는 소리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거, 표정 좀 폅시다."

예언의 마족의 마기가 맹수왕을 짓눌렀다.

"커허억!"

두개골이 바스라질 것 같은 압력에 맹수왕은 몸을 제대로 가눌 수조차 없었다.

"끄으윽······."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지금 우리가 벌레보다 못한 널 지켜주고 있는 겁니다. 지금 당장 대적자가 여기로 쳐들어와서 네 목을 딴다음에 사라져도 이상하지가 않다고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이지한이 단숨에 쳐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최상위 마족 두 명이 건재하기 때문이다.

예언의 마족은 맹수왕을 깔고 앉았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경고하듯 맹수왕의 귀에 들려왔다.

"그러니까 조용히 지켜보기만 합시다. 예언은 우리의 승리를 가리키고 있으니까."

* * *

부족민들을 도와 맹수왕 토벌에 함께한 길드는 일본의 류구와 미국의 넥스트 길드였다.

촤아악!

"계속해서 나아갑시다."

특히 류노스케와 신태양의 활약이 눈부셨다. 두 검사의 화려한 검술이 맹수들과 밀림의 나무들을 통째로 베어내었다.

"우리 둘 의외로 합이 잘 맞는 것 같지 않아요?"

"동의합니다. 몇 번 맞춰보지도 않았는데······."

부족민들이 근처 지형을 안내해 준 덕분에 훨씬 수월한 공략이 가능해졌다. 처음보는 장소임에도 검만 휘두르면 되니, 효율적일 수밖에 없었다.

"크르르르! 막아라!"

"그르르······. 놈들을 죽여라!"

광폭화한 수인들이 침을 질질 흘리며 달려 들었지만,

두 사람의 검 앞에선 한 걸음을 채 걷지 못하고 쓰러졌다.

『 동료 신태양이 '백화요란 Lv.10'을 발휘합니다. 』

꽃잎처럼 흩어진 푸른 검기가 맹수들의 몸 속에서 폭발하듯 터져나왔다.

『 동료 류노스케가 '전광석화 Lv.9'를 발휘합니다. 』

빛살처럼 쏘아져나간 류노스케의 검이 어느새 수인의 목을 꿰뚫었다.

다른 장소의 상황도 좋았다. 맹수왕의 부하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 모든 상황을 높은 장소에서 지켜보던 이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부의 텐트로 들어가니, 전장의 정보가 한층 더 일목요연하게 모인다.

"데리마 부족 진영에서 승리!"

"탈란 늪에서 현재 대치 상태입니다."

"아라민 부족에서 지원 요청입니다!"

생활양식이 얼핏 문명화 되지 않은 듯하지만, 실제로는 마석을 이용한 통신 시스템이 활발히 사용되고 있었다.

사령탑인 무녀 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생겨났다.

"나쁘지 않아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아요."

광폭화한 마수를 상대로 이리 잘 싸울 줄이야. 헌터들은 그렇다쳐도, 부족민들의 실력이 내 예상보다 훨씬 좋다.

"문제는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거지만요."

입술을 깨문 렘이 나를 슬쩍 바라봤다. 검의 마족과 예언의 마족은 아직까지 참전하지 않은 상태.

당장은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것 같은데.

"뭐, 그 부분은 신경쓰지마. 내가 해결할테니."

계속해서 몰아붙이다보면 놈들 쪽에서 먼저 움직일 거다. 내가 굳이 놈들의 입 속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다.

"다만 장기전이 되면 우리 쪽이 불리할 거야."

마족들이 잘난듯 말하는 종족의 상성이란 개념이다. 실제로 수인들은 인간에 비해 체력이 좋다. 감각도 예민하고.

나는 밀림의 내부가 그려진 지도 앞으로 이동했다.

"결국 맹수왕을 빠르게 처치하는 게 승부의 열쇠가 되겠지."

성이 그려진 장소.

거기까지 도달하는 건 어렵지 않다.

윤서현의 공간이동으로 충분히 돌파가능하다.

문제는 어떻게 두 명의 최상위 마족을 상대하느냐.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상대.'

멀리서 마주한 검격이 그 정도였다.

솔직히 말해 지금 수준으로는 이길 수 없다.

'부패의 마족도 뭔가 꿍꿍이가 있는 모양이고.'

언데드 병사들을 움직이지 않은 채 대기하고 있다. 그 위치가 참으로 수상하다.

아군이라면 든든한 위치지만, 적이라고 생각하면 언제든 쳐들어 올 수 있는 자리.

후방은 믿을 수 있는 윤지은과 윤서현에게 맡겨두기로 하고.

'그렇다면 내가 해야할 건······.'

나는 텐트 바깥으로 나왔다.

"뭐야?! 어디가?"

렘이 허겁지겁 뛰쳐나왔다. 모든 부족을 통솔해야 하는 그녀는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다.

"초월자로부터 배웠던 그 스킬. 지금 나한테 전수해라."

"그거야 어렵지 않은데. 이제부터 어쩔 셈인데?"

어쩌기는.

수련이다.

* * *

"사부님, 저희는 어디로 가는 건가요?"

나는 엘리스를 데리고 전장으로 뛰어 들었다.

"밀리고 있는 지역을 돕고, 경험치를 쌓으려고."

더불어 엘리스의 재능도 얻게 해야한다.

『 대상 엘리스의 재능 '리미트 해제'의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

『 '마수 2000 마리 사냥' 혹은 '높은 수준의 감정 고양' 』

두번째는 억지로 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결국 첫번째 마수 2천 마리 사냥인데. 녀석은 벌써 1900마리가량 잡았다.

그간 열심히 구른 결과가 나온 거다. 녀석이 리미트 해제에 성공해야 스킬 향상 반지의 강화를 할 수 있다.

그전까지 나도 별빛의 검에 경험치를 쌓아야 한다

여기까지 오며 처치한 마수를 제외하니,

남은 마수의 수는 약 300마리.

크르르르······!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붉은 눈이 포착되었다.

엘리스의 권총이 그 즉시 불을 뿜어냈다.

마력이 실린 탄환은 빠르게 나아가 마수의 미간을 꿰뚫었다. 이전보다 섬세하고 강한 마력이 압축되어 있는 게 느껴진다.

파아앙!

"좋은데."

"감사해요! 세아양이랑 특훈한 성과가 있나봐요!"

『 타재간파를 활성화합니다. 』

투두두두!

엘리스와 함께 근처에 보이는 마수들을 쓸어 버리며 전진했다.

얼마지나지 않아 앞쪽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포위되어 있던 부족민들과 헌터들이었다.

"지원이다! 지원이 왔어!"

"조심하세요! 놈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요!"

탈란 늪.

발이 푹푹 빠지는 늪 지형도 문제지만, 나무를 자유롭게 타고 이동하는 맹수들이 활약하기 좋은 장소다.

"가라, 오르티마."

나는 오르티마를 풀어놨다. 목룡으로 변한 녀석이 밀림의 나무들을 쓸어버리며 전진했다.

수인 놈들이 올라타서 발톱과 이빨을 마구 휘두르지만, 나무로 된 목룡을 긁어봤자 데미지는 미미하다.

그에 따라 아군의 사기가 올라가는 건 덤이다.

"오오오!"

"우리도 따라가!"

촤아악, 촤악!

도망치는 맹수왕의 수하들을 쫓아 앞으로 나아간다. 이쪽 전선까지 확대해 놓는다면, 당분간 우리가 밀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자, 잠깐······!"

"놈들이 엄청나게 옵니다······!"

"이거 함정이었나본데요?!"

정신 없이 놈들을 추격하던 전사들과 헌터들이 멈춰섰다.

좌우를 포위하듯 숨어 있던 수 백 개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뜩인다. 우리를 끌어들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게 틀림 없다.

"아뇨, 함정이 아닙니다."

나는 조용히 검 위로 마력을 불어 넣었다. 당연히 함정이 아니다. 내가 알고 들어 왔는데 함정일 리가 없다.

"그게 뭔 소리입니까? 누가봐도 완전히 우리가······."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 올랐다.

『 스킬 '공중 기동 Lv.11'을 발휘합니다. 』

마력에 의해 몸이 붕 떠오른다. 어둠 속에 있는 마수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별빛의 검이 녹빛의 잔상을 흩뿌리며 마수들을 차례차레 베어냈다.

촤좌좌좌자—!

검에 닿자마자 방어구와 통째로 잘려나가는 마수들.

『 타재간파 특수 스킬 '신속(神速) Lv.11'의 효과로 스피드가 올라갑니다. 』

전투를 거듭하며 상승한 스피드다.

놈들의 속도로는 나를 따라잡을 재간이 없다.

"크아아아!"

"잡아! 저 놈을 잡아라!"

"불가능합니다······! 크르르!"

이어지는 건 그야말로 학살에 가까운 사냥.

『 경험치 '59,151,000,000'을 획득합니다! 』

『 경험치 '63,436,000,000'을 획득합니다!

『 경험치 '86,001,500,000'을 획득합니다! 』

···

..

.

『 별빛의 검에 막대한 양의 경험치가 깃듭니다. 』

50만배가 된 경험치가 별빛의 검 위로 남김 없이 흡수되고 있었다.

"허······."

"저 헌터 이름이 뭐라고?"

"내가 뭘 본 거냐······."

사냥이 끝났을 때 남아 있는 마수는 없었다. 늪 전체가 놈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긴장감 속에서 힘이 풀린 헌터들은 바닥에 주저 앉았다.

탈란 늪의 전투는 우리쪽의 완전한 승리다.

그러나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나는 별빛의 검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채웠다."

50만배 경험치임에도 하루 동안 꼬박 사냥을 했다. 그러고 나서도 한참 사냥을 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말도 안되는 경험치량.

이 세계의 기준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수치였다.

그래도 결국에는 달성했다.

『 100,000,000,000,000 의 경험치를 모두 채우셨습니다. 』

자그마치 백 조라는 어마어마한 경험치를 전부 모았다.

샤아아—!

별빛의 검이 환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 봉인된 별빛의 검 오르티시아의 봉인이 해제 됩니다. 』

『 고유 기능이 해제 됩니다. 』

그 결과는.

당연하게도 대박이었다.

176화 전쟁의 판도(4)

맹수왕을 따르는 수인 병사들.

마기를 받아 광폭화한 그들은 더욱 야성적이고 난폭해져 있었다.

"크윽, 이 자식들! 거칠구만."

"버프 내쪽으로 몰아줘, 앞 놈부터 뚫어낸다!"

그러나 숱한 전투를 경험해 온 헌터들의 노련함은 그들의 야성을 뛰어 넘었다.

"내가 어그로를 끌테니, 후방 지원 부탁해!"

이성을 잃은 채 달려드는 수인들. 그들은 헌터의 도발 스킬에 이끌려 무작정 달려들기만 했다.

"으아아아!"

콰아앙!

미국의 탱커 데이비드가 큰 방패로 달려든 수인 병사들을 막아섰다. 다섯이나 되는 수가 마구 발톱을 휘둘러대지만, 그의 튼튼한 방패를 뚫기엔 역부족이다.

"이놈들아, 고작 그걸로 되겠냐?"

슈우우우—! 콰아앙!

이어서 뒤쪽에서 날아드는 전격과 불길이 수인 병사들을 헤짚어 놓았다. 전열과 후열의 역할이 잘 분배된 전투였다.

"크아아!"

"크르르······! "

"도망쳐라!"

광폭화의 여파에도 야수 병사들이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상황의 유불리 정도는 따질 수 있는 자들이 먼저 밀림 속으로 도망쳤다.

나머지는 헌터들의 스킬과 칼에 허무하게 쓰러졌다.

"좋았어! 다들 잘했어."

꽁무니를 빼는 수인들을 바라보는 미국의 헌터들. 그들의 입가엔 승리의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뭐, SS급 게이트도 별 거 없구만."

"이대로면 맹수왕이 있는 성까지 금방 도착하겠어요."

"조심해야 할 건 마족 정도인가."

그들도 사전에 마족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실제로 마주한 적은 없었지만, 이대로라면 마족이 나와도 문제 없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미국의 길드 넥스트.

그 중에서도 2군에 속하는 헌터들이지만, 실력 자체는 1군에 비교해도 크게 뒤쳐지지 않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조사팀은 잘하고 있지?"

"후방은 이상 없다네. 이곳 지리와 마력 농도, 생태 파악 하느라 정신이 없다네."

"누구는 죽어라 싸우는데, 팔자도 좋아."

"진작에 탐구 스킬을 얻었 놓을 걸 그랬어."

그리 잡담을 주고 받으며 나아가는 그들의 앞.

스으으으······.

검은 마기를 뿜어내는 검은 곰 한마리.

몸에 갑옷을 걸치고 있다 보는 게 맞을 듯한 차림새였다.

어찌되었든 헌터들에겐 일반 마수나 다름 없게 느껴졌다.

"어이쿠, 또 나타났네."

"이번에는 한 마리인가. 빨리 처리하고 쉬자."

"그래, 어그로는 내가 끌테니까······."

탱커인 데이비드가 방패와 검을 든 채 곰에게 다가간 그 순간이었다.

투우우웅—!

곰의 정권이 데이비드의 방패에 정확히 직격했다. 데이비드는 그대로 허공에 떠올라 바닥을 굴렀다. 덩쿨과 나무들을 뚫고 수십 미터를 굴러서야 멈출 수 있었다.

"커허어억······."

바닥에 쓰러진 데이비드의 입에서 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데이비드!"

"뭐야, 저 놈······!"

예상 외의 파워에 놀란 헌터들이 데이비드를 돌아봤다.

데이비드의 눈이 커졌다.

방심한 게 아니다.

분명 모든 스킬을 활성화하고 있었다.

방패까지 똑바로 들어 올렸는데도, 치명상에 준하는 피해를 입었다.

조심해야 한다. 지금까지와는 다르다.

데이비드가 소리치려고 했으나, 내상 때문인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가 허망하게 손을 들어 올리는 때에는.

"크아악!"

"무, 무슨······! 으아악!"

"커헉!"

곰이 믿기지 않는 속도로 길드원들을 덮친 뒤였다. 놈의 앞발이 검사의 갑옷을 찢고, 짧다란 발이 딜러를 공중으로 차올렸다.

길드원들이 약한 게 아니었다.

눈 앞의 적이 너무 강하다.

"사, 사천왕이잖아요······! 다들 도망쳐요!"

곰을 확인한 부족의 전사 중 하나가 소리쳤다. 그도 방금 확인한 모양이었다.

맹수왕이 거느리는 사천왕.

선택 받은 그들의 실력은 다른 수인들과 차원을 달리 한다.

그러나, 데이비드에겐 알 바가 아니었다.

사천왕? 뭐, 그런 어줍잖은 게 다 있냐.

그리 생각하는 데이비드의 시야는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동료가 데이비드를 들쳐 업으려고 했지만, 곰이 가까워지는 게 더 빠르다.

"정신차려, 데이비드! 치료는 돌아가서 받으면 되니까."

데이비드는 모기 같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러다······."

"이러다 다 죽는다고? 제기랄, 알 게 뭐야. 살아도 같이 살아야지!"

"토마스······."

승리를 거듭하다보니, 게이트에서 떠올려야 할 가장 중요한 철칙을 잊었다.

절대로 방심하지 말 것.

그런 기초를 잊다니, 넥스트 길드에 먹칠을 해도 유분수······.

고오오—.

데이비드와 동료의 위쪽으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스산한 마기가 요동치는 게 느껴질 정도다.

최후를 직감한 데이비드와 토마스가 눈을 질끈 감는 그 순간이었다.

번쩍—!

별안간 나타난 푸른 선이 벼락처럼 내리쳤다. 단순한 선이 아니었다. 선 위로 반짝이는 무수한 별빛에 잠시나마 아름답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방금 전까지 죽음 각오하던 걸 잊을 정도로 아름다운 선.

그들을 덮치던 흑곰이 우뚝 멈춰섰다.

그제서야 그들의 시선이 흑곰에게로 향했다.

촤아악!

앞발을 들어 올린 흑곰은 그대로 좌우로 나뉘어 바닥에 피와 내장을 쏟았다.

"괜찮으십니까?"

흑곰 너머로 보이는 남자.

그의 차가운 눈이 데이비드를 응시했다.

"다, 당신은······. 한국의 헌터?"

영상 속에서 마족을 향해 화살을 쏘던 바로 그 남자였다.

"응? 날 알아보는 겁니까?"

"무, 물론······."

"말하지 마세요, 상처가 심각해요."

그의 옆에서 다가오는 금발의 소녀. 그녀는 미소와 함께 데이비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회복 시켜 드릴게요."

엘리스가 미국의 헌터를 치료 하는 동안,

이지한은 별빛의 검을 들여다 봤다.

'굉장한 효과군.'

경험치를 쌓아 새로운 능력을 개방한 별빛의 검.

『 아이템 정보 』

- 이름 : 해방된 별빛의 검 오르티시아

- 등급 : 2★

- 능력치 : 공격력 594

- 특수 효과 : 역전의 기회

- 해방 효과 : 별의 울음

선공권을 가지는 특수 효과인 역전의 기회 바로 아래에 해방 효과가 생겨났다.

『 해방 효과 '별의 울음' 설명 』

- 다음 일격에 100% 확률로 크리티컬이 적용됩니다.

- 크리티컬 데미지는 통상의 3.5배 데미지를 가집니다.

- '필드 : 별이 보이는 밤하늘'에서 데미지 300% 상승

일자베기에 추가된 별빛의 이펙트가 바로 별의 울음의 효과였다.

'조건 없이 데미지가 3.5배라······.'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크리티컬이라는 개념이 적용되어 있다.

급소를 맞추게 해주거나, 급소에 맞췄을 때 데미지를 추가하는 스킬은 있어도······.

공격자체가 크리티컬이 되는 스킬은 존재하지 않는다.

* 별빛을 충전하여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매번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고, 밤하늘의 별빛을 충분히 머금었을 때 1회 사용할 수 있다.

충전에 필요한 시간은 약 1시간.

사실상 강한 적과 마주할 때마다 사용할 수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 곰을 한 방에 쓰러뜨린 거야?"

"깔끔하게 절반이 됐네."

"데이비드! 괜찮아?!"

흩어져 있던 넥스트의 헌터들이 이지한이 있는 장소로 모여들었다. 엘리스의 시간 조작 덕분에 치명적인 고비는 넘겼다.

그들 중 하나가 이지한에게 말을 걸었다.

"완전 도움 받았네요. 이야, 이지한씨 맞죠?"

"저를 알고 계실 줄은 몰랐는데요."

"아뇨, 마족을 한 번에 물리치는 그 대단한 헌터분이잖아요. 영상에서······."

"야야."

신나서 말하는 헌터의 어깨를 미국의 다른 헌터가 꽈악 붙잡았다.

"뭐, 어때 본인인데."

이지한은 그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

'마족에 대한 영상이 아니라 내 영상이 돌아다니고 있단 것 같은데.'

백묵이 이지한 몰래 영상을 팔아치운 상황이다.

나는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 영상에 대해서 좀 자세히 듣고 싶은데요."

최소한 허락은 맡고 팔았어야지.

* * *

맹수왕의 성.

"······."

처음으로 예언의 마족의 안색이 변했다.

"왜 그러지?"

그 미묘한 변화를 눈치 챈 검의 마족이 그에게 물었다.

"······예언이 뒤틀렸습니다. 외부의 변수가 개입한 게 틀림 없어요. 승리로 향하던 예언 전체가 완전히 뒤바뀌었어요."

"그, 그 말씀은······."

그 이야기를 들은 맹수왕이 바짝 엎드린 채 말했다. 예언의 마족은 언짢은 표정과 함께 대답했다.

"맹수왕은 죽음을 피할 길이 없다. 그 정도겠죠."

"······."

맹수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마족들만 믿고 있으면 승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와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니.

맹수왕은 당장이라도 소리치고 싶은 기분을 간신히 억눌렀다.

실력의 격차를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었으므로.

"저······. 문제가 생겼습니다."

뒤쪽에서 문을 열고 들어 온 전령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보고를 해왔다.

"사천왕 흑곰 잘러스가 전사했다고 합니다."

"크윽······."

"다른 사천왕들과도 연락두절······."

맹수왕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느라 손이 떨려올 지경이었다.

보고를 들은 예언의 마족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개같은 마족 놈들······.'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 자기 일이 아니라고 뻔뻔한 것 봐라.

멀쩡한 병사들을 사지로 보낸 기분이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속으로 분노를 삭힐 수 밖에 없었다.

맹수왕은 그들에 비하면 한참이나 약했으므로.

"오케이, 관망은 여기서 끝. 정보는 충분히 모였으니, 직접 움직여야 할 타이밍이네요."

우우웅.

예언의 마족의 옆으로 검은 구체가 떠올랐다.

- 나다. 슬슬 움직이면 되는건가? 가만히 있자니 좀이 쑤시거든.

통신이 연결된 대상은 러시아 헌터 니콜라이.

그의 정체는 최상위 부패의 마족.

인간들 틈에 숨어 있는 그가 이번 일의 핵심이다.

예언의 마족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부패의 마족이 들고 있는 '에픽 아이템 격리 차원의 구'. 그걸 사용하면 대적자를 완벽히 묶어둘 수 있다. 다만······. 대적자 편에 있는 공간 능력자가 걸린단 말이지.'

공간계 능력자가 밀림을 돌아다니며, 헌터들을 결집 시켰단 사실은 예언의 마족도 알고 있었다.

사실상 그는 밀림에서 일어나는 일들 전부를 꿰고 있었다. 야수들이 보내주는 첩보와 그의 예언 능력이 합쳐지니 당연한 결과였다.

이지한에 대한 것만 의문으로 남아 있을 뿐.

그러나 지금은 움직여야 할 때다.

'정보가 부족한 건 대적자도 마찬가지일 거다.'

예언의 마족 자신보다는 훨씬 저열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예언의 마족이 내린 판단이었다.

자기 자신을 뛰어 넘는 지성이나, 능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당연한 결론.

계산을 마친 예언의 마족이 입을 열었다.

"네, 진행해주세요. 나머지는 저희한테 맡기시면 됩니다."

- 그래. 재밌는 그림을 그려보라고.

통화는 끝이 났다.

예언의 마족의 검의 마족을 돌아봤다.

"움직이죠. 가장 먼저 공간계 능력자를 죽이면 될 것 같네요."

"변수를 완전히 차단하겠다는건가. 좋다."

두 최상위 마족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복도를 통해 바깥으로 나가려던 예언의 마족이 돌연 뒤를 돌아봤다.

"아, 맹수왕."

"예······."

"잠깐 움직이지 말아주세요. 음, 그대로. 부탁할게요."

"알겠습니다."

그의 말에 맹수왕이 멈춰섰다. 드디어 이 빌어먹을 놈들이 사라지나 싶은 마음도 있었다.

차라리 혼자가 된다면 눈치보지 않고 부하들을 움직일 수 있을테니까.

물론 그 생각은 이뤄질 수 없었다.

철컥.

검의 마족이 가볍게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집어넣었다.

가벼운 납도.

"?"

그와 동시에 맹수왕의 몸이 기우뚱 기울어졌다.

투두둑.

그의 신체가 블럭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피 한방울 없이 신체가 분리 된 맹수왕의 동공은 빛을 완전히 잃었다.

그 블럭들 사이에서 예언의 마족이 심장을 주워들었다.

두근, 두근.

격동하는 맹수왕의 심장.

파직, 파지직······!

게이트의 억지력이 격하게 요동친다.

심장에 손을 대는 것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예언의 마족은 그걸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검의 마족이 먼저 나섰다.

서걱—! 투욱.

예언의 마족의 왼팔이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

그러자 요동치던 억지력이 잠잠해졌다.

예언의 마족이 맹수왕의 심장을 품 안에 집어 넣었다.

"괜히 데리고 다니다가 죽기라도 하면 불상사가 따로 없으니까요. 이 편이 낫겠죠."

게이트의 클리어 조건은 맹수왕의 굴복.

예언의 마족은 맹수왕이 굴복할 일 자체를 없애둔 것이다.

마족이 죽지 않는 한 헌터들은 절대로 게이트를 클리어할 수 없다.

"이제 출발하죠."

그는 산뜻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 * *

담배에 불을 붙힌 러시아의 헌터, 니콜라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장, 움직이는 건가요?"

"연락이 온 거군요."

"그래, 그래."

니콜라이는 품 안에서 검은 구체를 꺼내들었다.

에픽 아이템 '격리 차원의 구'.

급박한 상황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한 장소로도, 적을 가두는 공간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범용성 좋은 아이템이다.

"한국 헌터들에게 협력한다고 말한 다음에 대적자의 위치를 물어라. 좋다고 협조해 줄테니."

"이야, 대장의 비열함에는 따라갈 수가 없어요."

소년은 신나는 표정으로 텔레파시를 발휘했다. 그가 한국의 헌터들을 통해 대적자의 위치를 찾아내는 사이였다.

"······."

잠시 한 손으로 담배를 들었다가 내린 니콜라이의 미간이 좁혀졌다.

"어이, 이반. 네가 가져갔나?"

방금까지 멀쩡히 손에 들려 있었던 격리 차원의 구가 사라졌다. 이반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예? 아뇨. 대장이 들고 있었잖아요."

"그래, 내가 분명 들고 있었지."

니콜라이가 인상과 함께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그게 왜······."

인벤토리에 집어 넣은 것도, 사용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감쪽 같이 손에서 사라져 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잘 찾아봐요. 바닥에 떨어뜨린 거 아니에요?"

"아니, 그런 게 아니야······."

바닥에 떨어졌다면 소리를 못 들었을 리가 없다.

아니, 애초에 자신이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무언가가 사라진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니콜라이의 눈이 커졌다.

"언데드들을 전지역으로 퍼뜨려라. 전부 움직여!"

"에, 에?!"

그의 눈에 실핏줄이 돋아났다. 언데드들과 러시아의 헌터들이 영문도 모른 채 일사불란하게 뛰쳐 나갔다.

밀림으로 그의 언데드 부대가 빠르게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였다.

눈 뜨고 에픽 아이템을 도둑 맞았다.

"이 빌어먹을······! 개같은 쥐새끼가!"

그런 말도 안되는 결론이 답이었다.

"당장 찾아내라!"

177화 예언하는 자의 최후(1)

니콜라이로부터 에픽 아이템을 훔쳐낸 진세아.

그녀는 밀림의 어둠을 가르며 빠르게 달려나갔다.

'대적자라면······. 분명히 오빠를 말하는 거지? 이걸로 오빠를 가두겠다는 거잖아.'

진세아의 손에 들린 에픽 아이템 '차원 격리의 구'.

진세아도 니콜라이가 부패의 마족이란 건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뒤를 밟았던 거고.

그러한 미행은 결과적으로 대박이었다.

'내가 있는데 그런 계략을? 후후, 어림도 없지.'

아이템을 훔쳐냈으니 마족의 계획을 절반 정도 저지했다 볼 수 있다.

남은 건 이 아이템을 들고 오빠에게 도달하는 것 뿐.

그런데, 생각보다 포위망이 만만치 않다.

'뭐가 이렇게 많아······?'

언데드들이 밀림 전체를 횡단하며 퍼져나가고 있었다. 밀림 곳곳에 숨어 있던 해골들도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대강 눈으로 확인한 것만 기백 마리.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은 수의 언데드들을 조종할 수 있나봐.'

이것도 오빠에게 전해줄만한 가치가 있었다. 뭐든 알고 있는 듯한 이지한이지만, 알려줘서 나쁠 건 없으니까.

빠르게 달려나가던 진세아의 걸음이 멈춰졌다.

'진짜 너무 많은데.'

그어어어······

언데드들의 포위망이 상상 이상으로 두터웠다. 언데드들은 원형으로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것도 겹겹이.

'아직 내 위치는 모르나본데? 그냥 수로 밀어 붙이려고 하는 걸까.'

진세아는 SS급 게이트에 들어오고 나서 재능 하나를 새로 개화했다. 미래에서의 훈련 성과가 여실이 들어난 것이다.

그 재능이 '절대 은밀 기동'

완벽에 가까운 은신 능력을 제공하는 기술.

진세아가 전신의 마력을 끌어 모았다.

자신의 기척과 모습을 숨기는 건 기초 중의 기초다. 진정한 은신을 위해선 주위에 주는 영향까지 감춰야 했다.

스륵.

체중을 줄이고 닿는 면적을 최소화 한다. 진세아는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은 채, 언데드들 사이로 과감하게 뛰어들었다.

그어어······.

그어······.

언데드의 바로 옆을 지나가도, 녀석들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다. 그들의 감각이 진세아의 은신을 따라잡지 못한 탓이다.

'좋았어.'

진세아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미래에서 한 훈련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뭐, 훈련을 할 때는 죽을 맛이었지만.

- 너는 생각해 본 적 없겠지만, 알고보면 천재라는 거지.

자연스레 미래의 자신이 해줬던 이야기를 떠올린다.

지금까지 그녀는 딱히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윤서현, 신태양, 신아람 그리고 이지한에 비하면 그녀의 능력은 대단치 않아보였으니까.

'할 수 있겠어.'

그러나 진세아는 미래에서 분명히 목도했다.

자신의 가능성.

세이비어를 이끄는 함장 진세아가 이뤄낸 업적.

진세아의 재능이 갈고 닦아 만들어진 결실.

그러한 재능이 있다는 걸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천지차이다.

자신의 재능을 확신하는 순간.

발걸음은 거침이 없어지고 움직임에는 자신감이 깃든다.

밀림을 빽빽하게 메운 언데드들 사이를 자유롭게 지나치는 진세아는 가벼운 해방감마저 느낄 정도였다.

'더 은밀하게, 더 빠르게.'

앞을 가로막는 나무와 수풀, 덩쿨들이 더 이상 장애물로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의 움직임을 숨길 수 있는 유용한 도구가 된다.

- 결국에는 네 기척조차 훔쳐내는 거야. 네 존재마저 훔칠 수 있다면, 누가 널 찾겠어?

- 그게 뭔 개소리에요?

그때는 그렇게 답했지만, 지금 이 순간 조금은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언데드들은 더 이상 진세아의 상대가 아니었다. 바로 앞에 있어도 눈치채지 못하는 허수아비나 다름 없다.

'그런데 이 언데드들은 어디까지 있는거야?'

예상보다 니콜라이의 언데드들이 넓은 범위에 포진해 있다. 일반적인 헌터의 조종 범위를 아득하니 넘어서 있다.

그래도 조금만 더 가면 언데드들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 생각한 순간이었다.

"흐음······. 뭔가가 있기는 있는데. 빠르네요. 으, 내 다리로는 오래 못 달려."

진세아의 옆으로 나란히 달리는 금발의 소년.

러시아의 S급 헌터 이반이었다.

'뭐야, 어느 틈에······?!"

진세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들킨건가?'

그러나 그런 기색은 아니었다. 이반의 시선은 정확히 진세아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그 언저리를 대강 짚어낼 뿐이었다.

"조금 천천히 가죠."

그러나 발견 당한 것은 맞았다.

파아앙—!

이반의 주변으로 푸른색의 노이즈가 방사되었다. 진세아의 몸이 일순 기울었다. 잠깐이지만 몸이 안 움직였다.

'윽, 몸이!'

촤아악!

달려나가던 반동에 의해 진세아는 그대로 바닥에 미끄러졌다. 밀림의 진흙에 진세아가 넘어지며 만든 자국이 선명하게 생겨졌다.

"아, 놀랐죠?"

이반도 따라서 자리에 멈춰섰다.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제 특기는 텔레파시. 아무리 기척을 숨겨도. 정신적인 활동까지 멈출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안 거에요."

묻지도 않은 말을 나불나불 잘도 말한다.

퉤, 퉤.

진세아는 얼굴에 묻은 진흙을 털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저 녀석 어디를 보는거야?'

절대 은신 기동은 해제되지 않았다. 이반은 실제 진세아가 있는 곳과는 다른 쪽을 보고 있다.

'완벽히 들킨 건 아니야. 그대로 빠져나가면······.'

진세아가 몸을 움직인 순간이었다.

뻐억!

이반의 발차기가 진세아를 향해 날아왔다. 오른팔로 막아내긴 했지만 저릿한 통증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도망치면 곤란해서요. 아이템은 돌려주세요. 대장이 화났어요."

"······."

"대답이 없으면 무력을 쓰는 수밖에요."

이반의 반대쪽 다리가 그대로 진세아를 공격해 왔다.

뻐억! 뻐억! 뻐억!

러시아의 군용무술 시스테마를 바탕으로 한 압도적인 체술이었다. 이반은 보이지 않는 진세아를 상대로 거침없이 몰아붙였다.

뻐어억!

'뭐야, 내가 분명히 더 빠를텐데······.'

막아내는 게 고작이었다. 수십 차례에 걸쳐 쏟아지는 연타 앞에 진세아가 한 방을 허용하고 말았다.

뻐억! 쿠우웅!

그대로 나무에 받혀 쓰러진 진세아. 입가에서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으윽, 대체 어떻게 한거야? 내가 보이지도 않을텐데······.'

이반은 검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쳤다.

"생각이 전부 읽히거든요. 이런 점이 능력의 상성이란 거겠죠."

스피드에선 앞서있지만 진세아의 움직임이 전부 읽히고 있었다.

이반은 무전기로 보이는 물건을 들어 올렸다.

치지직, 치직.

텔레파시를 활용한 노이즈가 퍼져나감과 동시에 통신이 연결되었다.

"대장. 찾았어요. 얼굴은 아직 확인 못했어요."

- 누군지 확인해라. 어디까지 들었나도 확인하고.

"절대 정신 세뇌. 사용해도 되는 거에요? 알겠습니다."

그어어어······.

설상가상으로 언데드들이 몰려들어 완벽히 주위를 포위하고 있었다. 진세아가 이를 악물었다.

'큭······.'

분명히 이전보다 더 강해졌을텐데, 왜 여기에 쓰러져 있어야 하는거야.

"그러면 대장이 오기 전에 얼굴을 먼저 볼까요. 아이템을 훔쳐간 인물이 누군지. 국제적인 비난을 감수해야겠죠."

같은 S급이지만, 이반은 니콜라이가 만든 언데드다. 신체의 한계를 무시하고 행동할 수 있으니, 체술에서도 체급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선을 넘었으면······. 그냥 여기서 죽어야겠지만요. 아니다, 혹시 대적자의 동료라면 인질로 쓸모가 있겠네요. 어라, 말해버렸네."

진세아에겐 알 바가 아니었다.

어쨌든 졌다.

살아남지 못하면 무의미하다.

뭘 하려는지 몰라도 그냥 당하고 있을 순 없다.

진세아가 몸을 일으켰다.

'훔쳐야 해.'

미래의 자신은 분명히 말했었다.

- 너와 내가 훔칠 수 있는 건 겨우 물건이나 아이템이 아니야. 마음 먹기에 따라 더 대단한 것도 훔칠 수 있어.

미래의 자신이 했다면.

나라고 못할 거 없지 않은가.

"응? 다시 일어난 거에요? 편하게 누워있지. 괜히 고통스러울텐데. 세뇌하려면 정신을 꺾어 놓을 필요가 있으니까요."

뻐억!

이반의 발차기가 진세아의 오른팔에 막혔다.

"반항해도 결과는 같을텐데."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진세아의 왼손이 이반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것뿐이라면 이반이 금세 빠져나왔겠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진세아의 눈에 붉은 이채가 감도는 그 순간.

『 레전더리 스킬 '절대 강탈 Lv.10'을 획득합니다. 』

『 추가 효과 : 비물질적인 대상을 강탈 할 수 있습니다. 』

샤아아—!

『 대상 '오를로프 이반'의 스피드를 강탈합니다. 』

"뭣?!"

이반은 자신의 속도를 강탈 당했다.

일시에 그의 움직임이 느려진다. 슬로우 비디오의 주인공처럼 완전히 정지한 것처럼 흐느적거렸다.

이반 본인은 인지조차 못하고 있을 것이다. 사고도, 판단도, 인지능력도 전부 느릿하게 흘러가고 있을테니.

그의 눈엔 세상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처럼 보리리라.

'······해냈어!'

반면 진세아의 움직임은 압도적으로 가속했다.

콰앙! 쾅! 콱! 콰앙!

이반의 급소에 연격을 꽂아 넣고선, 언데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속된 시간 속.

언데드들의 움직임조차 느리게 보였다. 진세아는 끊임없이 단검을 휘두르며 전진했다.

『 강탈 가능한 스피드가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

콰아앙!

빽빽하게 주변을 감싸고 있던 언데드들 뚫고 진세아는 밀림을 빠져나왔다.

"허억······. 허억······."

체력도 정신력도 이제 슬슬 한계다.

'헐······.'

그런 진세아의 앞에 나타난 것은 거대한 절벽.

그 간격은 뛰어넘을 수 없을 정도로 넓다. 뛰어내리자니, 지금의 컨디션으로 다시 올라올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그어어어······!

그어어!

진세아의 뒤로 밀림을 뚫고 다가오는 언데드들.

일반적인 언데드가 아니었다. 무장을 한 언데드 워리어와 레인저들이 진세아에게 무기를 겨눴다.

그 사이에서 몸이 완전히 부서진 이반이 걸어나온다. 빼앗았던 속도도 되찾은 모양이다.

"아아, 반항하지 말라니까요. 그쪽이 도망갈 장소는 없어요."

영화 속의 좀비처럼 몸에서 내장이 흘러나오고, 팔에 뼈가 튀어나온 끔찍한 몰골이다.

'윽, 진짜로 언데드잖아.'

그러나 이반은 실실 웃고 있었다. 고통따위는 없다는 표정이다.

"절벽으로 뛰어서 죽는다면 그것도 좋죠. 새로운 동료가 생기는 거니까요."

그리 말하는 이반의 뒤로 수백 마리의 언데드들이 걸어나왔다.

"만약 살아남는다해도······. 저 아래에 우리의 동료가 없을 것 같나요?"

진세아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

일단 저 무리에 끼는 건 죽어도 싫다.

그렇다고 여기서 투항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진세아의 스킬 '절대 위험감지'가 머릿 속에서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이반 쪽으로는 죽어도 가지 말라고.

이반과 언데드들이 문제가 아니다. 그 뒤는 더욱 거대한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

절벽 쪽이 조금이나마 가능성이 있는 장소다.

'아씨, 오빠 말 잘 들을 걸.'

빨리 합류나 하지 괜히 뭣 좀 해보겠다고 설친 게 급 후회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한 번 엎질러진 물.

되돌리는 방법은 없다.

타다다닷!

진세아는 뒤돌아 뛰었다. 아무것도 없는 절벽을 향해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투웅—! 투웅—!

언데드 레인저들이 뒤늦게 쏜 화살이 하늘을 뒤덮었다.

"진짜에요?!"

이반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보이지는 않아도 진세아가 귀찮은 선택을 했단 건 알 수 있었다.

파아앙—!

그의 주변으로 뒤늦게 파란 노이즈가 뿜어져 나왔다.

노이즈는 절벽을 향해 뛴 진세아를 덮쳤다.

'으아아아아!'

이반의 공격 때문에 순간, 몸이 굳었다.

그 탓에 도움 닫기가 짧았다.

강하게 몸을 끌어당기는 중력 앞에서 진세아는 생각했다.

'뭐, 뭘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반대편 벽에 닿기라도하면 단검으로 떨어지는 속도를 늦출 수도 있겠지만.

이미 도움 닫기를 실패했다.

턱 없이 멀다.

이건 그냥 추락이나 다름 없다.

'아, 나 죽나.'

솔직히 이제 좀 강해졌는데.

도움 좀 되겠다 싶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떨어져서 죽는 건 너무하잖아.

슈우우우——!

그리 생각하는 찰나였다.

'어?'

절벽의 밑바닥, 검은 와이번이 진세아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이런 장소에 와이번이 있어도 특별히 이상하지는 않지만.

그 위에 타고 있는 것은······.

"잡아요!"

금발을 흩날리는 엘리스였다.

진세아의 눈이 커졌다.

엘리스가 뻗은 손이 이렇게까지 감동적일 수 있다니!

터억!

진세아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아슬아슬하게 와이번의 등에 올라탈 수 있었다.

십년감수했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거였구나.

"허억, 허억······. 주, 죽는 줄 알았어······. 어떻게 알고 온거야······?"

자신이 여기에 숨어 있단 사실은 아무도 몰랐을텐데.

"후후. 그냥 와이번을 타고 드라이브하고 있었는데, 세아양이 있는 거 아니에요?"

"아니, 그게 가능할 리가······."

그리 말하는 진세아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엘리스.

그녀의 눈에는 금빛 이채가 감돌고 있었다.

이전에는 없었던 한없이 밝은 금색의 빛이 눈동자에 머물고 있다.

엘리스는 새로운 재능 '리미트 해제'를 개화하고 SS급에 도달한 것이었다.

"물론 농담이고, 예지했어요. 어떤가요?"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만든 엘리스.

"완벽해······!"

진세아는 엄지 손가락을 치켜 들었다.

"고생했다. 진세아."

엘리스의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습을 드러낸 인물은 다름아닌 이지한이었다.

활공하는 와이번의 바람에 그의 머리가 휘날렸다.

"오빠······."

진세아는 품 안에서 검은 구체를 꺼내들었다.

"이거, 훔쳤거든요······?"

이지한은 진세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어."

"아으······."

진세아의 눈가에 눈물이 핑돌았다. 다시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러면 가볼까."

구체를 받아 품에 넣은 이지한은 와이번의 고삐를 바로 잡았다. 그의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예언의 마족을 잡으러."

모든 퍼즐 조각은 맞춰졌다.

예언의 마족 놈.

크게 당황 좀 해야 할 거다.

178화 예언하는 자의 최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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