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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8% CSALVILL / Chapter 1: 1
CSALVILL CSALVILL original

CSALVILL

Autor: Maxi_Rojas

© WebNovel

Capítulo 1: 1

1화 이름조차 없는 뉴비 암살자

지하철과 버스 타는 시간.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시간

화장실에서 큰일 보는 시간.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나는 스마트폰으로 소설을 읽는다.

시간에 쫓겨 사는 팍팍한 일상에서 발견한 유일한 낙이었다.

노잼 소설로 시간을 낭비할 때면 깊은 빡침이 골수를 타고 올라왔지만, 읽을 맛이 나는 보물을 찾는 날이면 그것에 푹 빠져 자투리 시간을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다,

"이건 무슨 소설이지?"

몇 년 전에 하나의 소설을 알게 됐다.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

제목부터 이상한 이 소설은 콘셉트부터 참으로 묘했다.

악당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라니.

당연히 소설의 주인공들도 전부 악당이었다.

회귀한 악당부터, 빙의된 악당, 환생한 악당 등 수많은 기연으로 강력해진 악당들이 영웅들을 농락하고 세상을 혼란에 빠트리는 이야기였다.

악당들의 욕구 충족과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변태 같은 소설.

'확실히 병맛 소설이긴 한데….'

콘셉트는 변태 같은데, 이상하리만큼 중독성이 있었다.

악당들이 주인공이다 보니 시원한 맛이 있었다.

명분 따윈 개나 주라는 듯 막아서는 모든 것을 불도저처럼 파괴하고 밀어버린다.

현실에선 도저히 불가능한 일들이 이곳에선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세상이 망하면 어떻고, 영웅들이 죽어 나가면 어때.

'어차피 소설 속 세상인데.'

알바 면접을 준비 중일 때, 중요한 시험을 준비 중일 때, 취업을 준비 중일 때.

'그러다 전부 실패하고, 돈도 바닥났을 때.'

그때도 소설은 계속 연재되었고, 인생이 답답해지면 난 이 소설을 또 찾게 되었다.

잠시나마 힘든 현실을 잊을 수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힘들 때 당기는 소주처럼 이 소설이 내 인생의 일부분처럼 깊숙이 자리 잡았다.

어엿한 회사원이 된 지금까지도.

"와, 악당 새끼. 현실로 데려온 뒤 팀장 앞에 세워놓고 싶다."

직원 화장실.

변기에서 큰일을 보던 나는 짬을 내서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을 읽었다.

악당이 영웅 하나를 묵사발 내는 장면이었는데, 피떡이 되는 영웅을 팀장으로 상상하며 행복 회로를 돌리고 있었다.

이 장면도 수없이 읽은 내용이지만, 팀장을 대입시키니 또 느낌이 색달랐다.

갑갑한 느낌에 넥타이를 풀어 헤치며 투덜거렸다.

"하, 유부남 새끼가 여직원들에게 치근덕거리기는."

아침 브리핑 시간에 팀장이 나를 세워놓고 사원들 앞에서 창피를 준 일이 떠올랐다.

직권 남용이라고 해야 하나?

직급을 이용해서 이 여자 저 여자들을 쿡쿡 찔러보는 데 속이 거북해서 눈치를 줬더니, 그때부터 눈만 마주치면 큰소리다.

"돈만 아니었으면 턱주가리 날리고 사표 던졌을 텐데."

학자금 대출, 자동차 대출, 카드 대금 등을 떠올리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손에 쥔 것은 쥐뿔도 없는 것 같은데, 눈에 보이는 건 빚뿐이다.

최근에 대리로 승진하면서 월급도 오른 상황이라 더러워도 참아야 했다.

난 스마트폰에 비친 제목을 빤히 응시했다.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

참으로 오랫동안 함께해 온 녀석이다.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오늘은 특히 더 현실과의 괴리가 느껴졌다.

현실이 힘들어서 그런가.

가끔은 소설 속 세상이 부럽기도 했다.

물론, 악당이 되고픈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저 자기 꼴리는 대로, 제멋대로 살아가는 삶이 부러울 뿐이었다.

그건 영웅들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소설이니까 가능한 일이겠지.'

학교 졸업 후 어엿한 회사원으로 자리 잡을 때까지, 연줄이나 돈도 없는 이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래.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인간의 상상으로 만들어낸.

현실로 돌아오니, 답답함이 느껴졌다.

"그래도 너 때문에 산다. 고맙다."

난 피식 웃으며 허리를 폈다.

너무 오래 있었나?

엉덩이가 뻐근했다.

슬슬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고 하는데, 순간 시야가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어? 갑자기 왜 이래?"

전등이 미친 듯이 깜박였다.

어떤 놈이 장난을 치는 건가 생각했을 때, 시야가 푹 꺼져버렸다. 주변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난 황급히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손전등 어플을 켜려고 한 것인데, 화면에 뜬 문구는 하나의 '공지'였다.

"스토리 수정 공지?"

지금껏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가 공지를 올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용상 모든 영웅이 몰살당하고, 세상이 파멸로 치닫는 막바지 단계일 텐데?

화장실 불이 꺼진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난 멍하니 화면을 응시했다.

내게 작은 위안이 되어주었던 소설.

"뭐 상관없으려나?"

추천 버튼을 누르며 수정이든 뭐든 응원한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나쁜 놈들이 승리하는 내용이니, 소설이 인기가 있을 리 없다.

내용이 어떻게 수정될지 궁금하기도 했다.

영웅들이 오죽 불쌍해야지.

그만큼 악당들은 비열했고, 강력했다.

'그래서 주인공들의 공략법을 수도 없이 상상하기도 했지.'

이참에 악당들의 대항마로 강력한 영웅이 등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그렇게 댓글 완료 버튼을 눌렀을 때, 화면이 푹 꺼져버렸다.

"뭐야…?"

다시 찾아온 암흑.

인기척은 없었다.

화장실을 이용하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는 모양.

어둡다 보니, 덜컥 겁이 났다.

공지 따윈 잊고 다급히 손을 뻗었다. 마무리를 위해 주변을 더듬거렸지만 잡히는 게 없다. 소설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들어올 때 가장 중요한 것을 확인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욕설을 내뱉었다.

"…시발, 휴지가 없잖아?"

그게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야. 일어나."

단잠을 자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잠에서 깨고 싶지 않아 꿍얼거리며 등을 돌렸다.

더 자고 싶다고.

하지만 상대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퍽―!

"끄어어억!"

지독한 고통에 허리를 새우처럼 접었다.

등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씨발, 먹을 때랑 잘 때는 개도 안 건드리는데!

두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든 순간, 큰 주먹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퍽―

"꾸엑!"

얼굴이 뭉개질 것 같은 고통.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이곳은 집이 아니었다.

그럼 어디야?

코를 부여잡고 가까스로 눈을 뜨니 사내 셋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근데 복장이 이상했다.

가죽 재질의 갑옷과 등에 걸친 살벌한 무기들, 판타지 코스프레 축제서나 보던 해괴한 복장이었다.

이 새끼들, 뭐야?

하지만 입으로 나온 말은 공손 그 자체였다.

"서, 선생님들, 누구십니까?"

"선생님? 누구십니까? 이 새끼가 미쳤나? 단장, 어떻게 할까요? 죽일까요?"

"신입이다. 정신만 차리게 해."

"알겠습니다."

주먹을 휘둘렀던 사내가 성큼 다가오더니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정신만 차리게 하라며?

"반항하지 마라. 뼈 부러진다."

"자, 잠깐만… 아악!"

무자비한 발길질이 이어졌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아니고 이 무슨 개 같은 상황일까.

여긴 어디고? 이 사내들은 왜 나를 구타하고 있는 걸까.

상황 파악을 하고 싶었지만,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일단 너무 아팠다.

"그만."

"끄...."

"치료하고 창고에 남겨둬. 어차피 쓸데는 정해져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때리던 사내가 다가오자, 나는 몸을 웅크렸다. 그 모습에 사내는 피식 웃더니, 뺨을 툭툭 두드렸다.

"동료끼리 너무 겁먹지 말라고."

동료?

시발, 동료 좋아하네. 딱 봐도 일진과 빵셔틀 관계 같구만.

사내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목덜미를 붙잡힌 채 나는 창고 안으로 질질 끌려왔다.

사내는 내 몸을 살피더니, 눈앞에 병 하나를 내려놨다.

붉은 액체가 담긴 병이었다.

"마시고 쉬어. 앞으로 정신 똑바로 차려라. 임무 중에 또 헛소리하면 다음에는 이 정도로 안 끝날 거야."

"…네네."

뭔 소린지 모르겠지만, 일단 상황을 넘기기 위해 나는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였다.

"우린 정보 수집을 위해 하루 정도 자리를 비울 거야. 넌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어. 사람이 올 테니까."

내 머리를 툭툭 두드리던 사내는 나를 덩그러니 남겨둔 채 자리를 벗어났다.

"...."

사내가 떠난 자리를 난 한동안 멍하니 바라봤다.

미친 토네이도가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것 같았다.

"큭!"

창고 안에 스며든 쌀쌀한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몸을 움직이자 비명이 절로 흘러나왔다.

온몸이 저미듯 아팠다.

'이 새끼들 전문가다.'

아프기는 한데 움직이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처맞았는데 뼈 하나 부러진 데가 없다. 사람 패는 데 도가 튼 사람 같았다.

끙끙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시선이 눈앞에 놓인 병에 닿았다.

움켜쥔 병 안에는 붉은 액체가 찰랑거렸다.

처음 보는 물건.

하지만 곧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회복… 물약?'

처음 보는 정보가 뇌리에 떠올랐다. 마시면 고통을 줄여주고, 회복력을 올려주는 마법 물약.

내가 이 정보를 어떻게 알고 있지?

황당함이 몰려왔지만, 일단 병따개를 따고 원샷을 때렸다.

고통을 줄여준다는데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감기약 같네."

시럽이 섞인 애들용 감기약 맛이 목구멍을 타고 들어갔다.

썩 좋은 맛은 아니지만, 배 속이 따뜻해지고 고통이 서서히 줄어들자 살 것 같았다.

상태가 좋아지자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현실과 마주할 시간이다.

"일단 꿈은 아닌 것 같고,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며 소설을 본 것까지 기억난다.

휴지를 찾다가 의식을 잃은 것 같은데, 그 이후로 눈을 뜨니 이런 상황이다.

잠시 빈 병을 만지작거렸다.

나름 인싸라 인터넷 정보에 밝은 편인데 이런 물약이 출시됐다는 정보는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일단 이름부터가 구렸다.

회복 물약이라니.

아, 스마트폰은?

현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물건이 떠오르자, 나는 서둘러 품을 뒤졌다.

이런 옷은 도대체 언제 입힌 거야?

가죽 갑옷 속을 뒤적거리길 잠시, 난 어색한 감각에 멈칫했다.

미간을 좁히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은한 횃불이 창고 안을 밝히고 있는 상황.

난 두 손바닥을 살폈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야무지게 박혀 있다.

쇠질을 수없이 해야 만들어질 법한 헬창 손바닥이었다.

참고로 난 회사 일에 치여 운동과 담을 쌓은 몸이었다.

뱃살이 나온 몸이란 뜻이다.

그런데,

'…내 몸이 아닌데?'

굳은살을 시작으로 더듬거리는 감촉에서 단단한 근육이 잡혔다. 가슴은 탄탄했고, 배에선 왕(王) 자가 선명히 느껴졌다.

변태처럼 다른 사람의 몸을 만지작거리는 느낌마저 든다.

"시발."

하루아침에 몸짱이 됐는데, 욕설이 절로 흘러나왔다.

몸이 바뀌었다.

이전 몸뚱이와 차이가 너무 확연해서 부정하기도 힘들었다.

그제야 바닥에 뒹구는 빈 병이 무섭게 다가왔다.

죽을 듯이 처맞아도 이거 한 병이면 컨디션이 돌아온다.

회복 물약.

그딴 게 현실에 존재할 리 없다.

어째 여긴 다른 세상 같았다.

정신이 나간 듯 창고를 샅샅이 뒤적거렸다.

바깥에 나가고 싶었지만, 대기하라는 놈의 말이 떠오르자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표정 하나 안 변하고 사람을 죽일 듯이 패는 놈들이다. 바깥에 나갔다가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그 이후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렇다고 이유 없이 도주를 포기한 건 아니었다.

창고 안을 둘러보고 자리로 돌아왔을 때, 몇 가지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해코지를 할 의도는 없는 것 같은데."

때린 놈들을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밧줄로 자신을 묶어둔 것도 아니고 회복할 물약도 놓고 갔다. 심지어 바깥으로 통하는 문도 잠겨 있지 않았다.

나갈 생각만 있다면 언제든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는 의미.

나는 품에서 나온 몇 가지 물건을 살폈다.

"단검, 금화 주머니, 지도라…."

일단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저들은 자신을 동료라고 했고, 창고에서 대기하며 사람을 기다리라고 했다.

'나를 신입이라고 불렀지.'

즉, 자신은 저들과 한패란 뜻이다. 단검을 남겨둔 것이 그 증거였다.

"단검이라서 더 문제지만."

차라리 총이었다면 현실을 떠올리며 덜 불안했을 텐데.

그리고 금화가 든 주머니.

금화는 처음 보는 이상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만약 이 금화가 화폐 용도라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나는 접힌 지도를 들어 올리며 주저했다.

왠지 지도를 편 순간, 애써 부정했던 불안감이 현실이 될 것 같았다.

"하...."

한숨을 내쉬며 나는 결국 지도를 폈다. 다른 선택지가 존재했다면 좋았을 텐데,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지도를 펴는 것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

난 멍하니 펼쳐진 지도를 바라봤다. 처음 보는 대륙과 지형이 조악하게 그려져 있다.

처음 보는 문자가 적혀 있지만, 신기하게도 그 뜻이 전부 이해가 됐다.

그래서 난 이 기가 막힌 현실과 마주할 수 있었다.

―엘레토르 성곽.

"엘레토르…."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이다.

화장실에서 스마트폰을 읽으며 알게 된 지명이니 모를 수가 없었다.

한 소설에서 등장하는 유명한 지명 중 하나.

그 성곽 주변에 붉게 표시된 영지가 하나 있었는데, 그 위에 적힌 메모 내용이 가관이었다.

―암살 표적, 블라이어 영지의 카멜 공자.

"좆됐다."

카멜은 내가 알고 있는 소설 속 악당 주인공의 이름이었다.

난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의 소설 속에 들어와 있었다.

그것도 소설 속 이름조차 없는 뉴비 암살자로.

2화 자폭 벌레 붐(boom)

끔뻑―

꿈이길 바라면서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떠봤다.

소설 속 세계관을 보여주는 지도만 덩그러니 보이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하,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아니, 진짜 장난질일 수도 있다.

신들의 장난.

진짜 안 당해본 사람은 모를 거다.

솔직히 말이 안 되잖아?

그저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을 뿐이다.

소설 속 세상을 동경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건 소설 속 먼치킨 주인공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을 때고.

이런 경우라면 죽으라는 말과 같았다.

그만큼 눈앞에 닥친 상황이 최악이란 뜻이었다.

죽음.

현실에선 내일 뭘 하고 뭘 먹을지를 고민하지, 죽음을 걱정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수틀리면 죽는다.

그것도 아주 높은 확률로.

'그 많고 많은 캐릭터 중에 왜 하필 암살자냐?'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에서 암살자는 악당에게도, 영웅에게도 양 귀싸대기를 처맞는 희생양이었다.

호구 중의 상호구 포지션.

무협 소설에선 지나가던 산적, 판타지 소설에선 처음 등장하는 고블린이라고 보면 된다.

물론, 암살자라도 사전에 대비한다면 죽음을 피할 수 있겠지만,

'표적 암살, 공자 카멜.'

죽음의 수레바퀴는 이미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이런 미친, 그 카멜을 암살하라고?

이대로 끌려가면 무조건 죽는다.

'생각해라. 생각해.'

첫 번째로 도주를 떠올렸지만, 바로 계획을 접었다.

임무 중이라고 들었다.

도주한 순간 정보 누출 방지를 위해 개떼처럼 추격할 테고, 붙잡힐 거다.

'그럼, 죽겠지.'

신체 능력이 전의 몸보다 압도적으로 좋다고 한들, 난 싸움 경험 한 번 없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게다가 주변 지리도 잘 모른다.

추격을 따돌릴 자신이 없었다.

다행이라면 이 몸뚱이의 기억이 천천히 각인되며 떠오른다는 것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조금 전에 암살자들이 자리를 비우지 않았더라면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의심해서 죽였을지도 모른다.

암살자들은 변수를 싫어했으니까.

하루 정도면 기억이 어느 정도 회복될 테고, 직장인 눈치 짬밥 정도면 의심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업데이트가 왜 이리 느려?'

다른 소설에선 주마등처럼 기억이 스쳐 간다는데, 이 몸뚱이의 기억은 더디게 떠올랐다.

이제 막 유년 시절의 기억이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고아.

굶주림, 폭행.

불쾌한 감정이 불쑥 올라오는 유년 시절을 받아들이며 나는 소설의 내용을 떠올렸다.

'카멜이면 1챕터인데.'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은 각 챕터가 존재했고, 그 챕터마다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달랐다.

물론, 후반부에는 모든 악당이 등장하며 서로 죽고 죽이는 각축전이 벌어지지만, 초반에는 각 악당의 성장 과정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그중 카멜은 첫 챕터의 대표적인 악당이었다.

카멜과 관련된 스토리.

그 내용을 떠올리자 암담함이 몰려왔다.

'미치겠네.'

난 이 소설의 대략적인 스토리를 알고 있다.

문제는 그 스토리가 주인공을 중심으로 흘러간다는 점이었다. 나 같은 조무래기 암살자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는 건 불가능했다.

즉, 스토리를 토대로 내 운명을 추리해야 한다는 건데.

'공자 신분이라고 했어. 그럼 카멜이 아직 후계자 신분이란 뜻이야.'

카멜 블레이저.

전 대륙을 피로 물들인 폭군 중의 폭군.

그는 블라이어 영지를 기반으로 세력을 키운 후 학살자의 길을 걷는다.

공자 신분이면 영지를 물려받기 전이니 스토리 초입 부분이었다.

'그리고 내가 속해있는 암살 조직은 카멜을 암살하려고 한다.'

악당에게 적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들에게 암살자는 껌딱지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공자 시절의 카멜을 노리는 암살 조직이라면 하나뿐이었다.

'암살 단체 크룩스!'

크룩스를 떠올린 순간, 전 몸뚱이 주인의 유년 기억이 청년으로 넘어갔다.

크룩스와 관련된 기억 하나가 또렷이 각인됐다.

노예 상인에게 잡혀 노예 시장에 끌려간 뒤 누군가에게 팔려 가는 장면.

그 누군가가 단검 한 자루를 선물했다.

"단검?"

나는 단검 손잡이 끝부분을 살폈다.

포효하는 늑대 문양이 각인되어 있다.

크룩스의 문양이었다.

소설 속에 빙의된 몸뚱이의 신분이 파악됐다.

호구 중 상호구인 암살자 집단 중에서, 세력은 최약체이며 악명만 드높은 비양심적인 암살 단체, 크룩스의 신입 암살자.

"시발."

삼국지 속 엄백호의 수하의 수하도 이것보단 낫겠다.

욕설이 흘러나온 순간,

끼이익―

창고 문이 열리더니 후줄근한 후드를 걸친 사내가 안으로 휘적휘적 걸어 들어왔다.

그는 나를 발견하곤 멈칫하더니 살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사람이 있었군요. 실례합니다."

공손한 말투.

하지만 난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답을 했다.

"저도 마구간인 줄 알았습니다."

암구호였다.

등줄기로 땀이 흘러나왔다.

때마침 크룩스 조직에 관한 기억이 떠올라서 다행이지, 그냥 흘려들었다면 그는 나를 죽였을 것이다.

암구호를 대자마자 놀라던 사내의 표정이 무표정하게 바뀌었다.

'시발, 순간순간이 살얼음 길이네.'

사내는 주변을 빙 둘러보더니 나무판자에 걸터앉았다. 그는 연초를 물더니, 불을 붙이며 물었다.

"다른 형제는?"

"주, 주변 조사를 나갔습니다."

"못 보던 얼굴인데?"

"신입입니다."

"아, 그렇군. 신입."

신입이란 말을 듣자, 그가 반응을 보였다.

다른 의미로 나를 알고 있는 듯했다.

사내가 연초를 스윽 내밀자, 나는 빠르게 다가가 공손히 연초를 받아 피웠다.

쿨럭―

더럽게 독했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연초를 물고 사내 앞에 섰다.

눈앞의 사내가 누군지는 모른다. 하지만 덜덜 떨리는 몸뚱이가 말하고 있었다. 사내는 함께 온 셋을 다 합친 것보다 위험한 인물이라고.

사내는 연초만 조용히 피울 뿐 다른 말을 건네지 않았다.

한동안의 침묵.

10초가 10년 같았다.

그 침묵에 심장이 쪼그라드는 압박감을 느꼈을 때, 사내가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열린 상자에는 벌레가 꾸물거리고 있었다.

이건 설마…?

"씹지 말고 삼켜."

"네?"

"삼키라고. 앞으로 내 입에서 똑같은 말이 두 번 나오면 네 혀를 뽑아버릴 거다."

"네, 네!"

"벌레가 죽어도 마찬가지야."

"알겠습니다!"

난 우렁차게 외치며 벌레를 집어 들었다.

끽끽끽끽―

…무슨 벌레 사운드가 호러물도 아니고.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크기.

다리 수십 개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습이 마치 돈벌레를 연상케 했다.

꾸물거리는 모습이 참으로 혐오스럽다.

내가 방송 BJ고 백만 원의 별풍선을 후원받아도 먹을 자신이 없는 극강의 비주얼.

하지만 이 벌레는 천만 원이 아니라 억대를 줘도 절대 먹으면 안 된다.

"뭐 하는 거지? 기다리게 할 건가?"

그런데 눈앞에 나를 죽일 수 있는 사내가 빤히 나를 올려다보고 있고, 단검을 만지작거리고 있다면?

꿀꺽!

울며 겨자 먹기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벌레를 산 채로 삼키자, 구역질이 올라왔다.

나는 연초를 쭉 빨았다. 몇 번 길게 빨았더니 정신이 몽롱해졌다가 이내 퍼뜩 돌아왔다.

'마약류인가?'

"받아라."

사내는 임무 중에 필요할 것이라며 연초 한 보따리를 내게 넘겼다.

사내는 입에 물고 있던 연초를 퉤 뱉더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곤 내 몸을 잠시 살폈다.

심장 부근을 확인하던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짓더니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가 지도 한 장을 내게 건넸다.

"표적의 암살 실행은 사흘 후, 저택 경비가 무력화되는 순간이다. 표적이 머무는 방을 따로 표기해 두었다."

저택 지도였는데, 경비 위치까지 상세히 표기되어 있었다.

"신입."

"네, 네!"

"첫 암살 의뢰에 꼭 성공하길 바란다. 조직에서 널 눈여겨보는 형제들이 많다는 것을 기억해."

"여, 영광입니다!"

영광은 시발, 이 개새끼들아.

크룩스 조직은 수하를 부속품으로 소비하는 조직으로 유명했다. 즉, 신입의 사망률이 타 암살 조직과 비교해서 압도적으로 높다는 말이었다.

벌레를 보자,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럼 나중에 웃으면서 보자고."

어깨를 두드리던 사내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눈앞에서 사람이 사라지는 신비한 광경을 목격했지만,

"허허허…."

난 세상을 해탈한 노인처럼 헛헛하게 웃고만 있었다.

망했다.

죽더라도 차라리 도주를 감행했어야 했었다.

하지만 벌레를 삼켰으니 이젠 빼도 박도 못했다.

'…설마, 내가 처먹게 될 줄이야.'

붐(boom).

내가 삼킨 벌레를 가리키는 은어였고, 붐이란 이름처럼 벌레는 사람을 숙주로 삼은 뒤 신호에 맞춰 폭발한다.

뼛조각과 살점으로 표적을 타격하는 인간 폭탄이 된다는 의미였다.

자살 테러는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서나 보던 거 아니었어?

난 벌레가 자리 잡은 심장을 만지작거리며 울적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젠 도망을 쳐도 죽고, 표적 앞에 서도 죽는다.

"웃으면서 보자고? 다음에 보면 그 입부터 찢어주마."

소설 속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늘어나는 건 원망이요, 욕뿐이다.

소설의 제목은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인데 어째 나에겐 '악당 세상 속 서바이벌'로 바뀌어 있었다.

'그런데 이번이 몇 번째 암살 시도지?'

암살 횟수가 늘어날수록 카멜 주변은 강력한 호위들로 채워진다. 즉, 뒤쪽 순서로 갈수록 뒈질 확률이 올라간다는 뜻이다.

이를 어떻게 타개할지 막막했다.

* * *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아!"

창고에 홀로 남겨진 인간의 처절한 외침.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펜싱 종목 박상영 선수가 '할 수 있다.'로 스스로 암시를 건 후 금메달을 쟁취한 모습은, 좌절로 포기하는 이들로 하여금 용기를 얻게 해주었다.

내가 지금 딱 그 처지였다.

가만히 있어봤자 누가 대신 내 목숨을 살려주는 상황이 아니었다.

스스로 살길을 헤쳐 나가야 한다.

'용기를 다오!'

벽에 이마를 콩콩 찍으며 평소에 굴리지도 않는 머리를 한계까지 굴렸다.

그렇게 살 방도를 고민하고 있을 때, 나를 쥐어팼던 놈들이 돌아왔다.

'벌써 하루가 지났다고?'

사흘의 시한부 인생이 이런 기분일까.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다행히 몸뚱이 주인의 대략적인 기억이 주입된 상태다.

지금 상황을 보건대,

'이들의 눈 밖에 나서는 안 된다.'

기회를 잡기 위해서라도 충직한 신입의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난 빠릿빠릿하게 그들을 맞이했다.

"수, 수고하셨습니다!"

"신입, 창고 잘 지키고 있었어?"

"네!"

"배고프니까, 나가서 먹을 것 좀 사와."

"맡겨주십쇼!"

떠날 땐 셋이었는데, 머릿수가 여섯으로 늘어나 있었다.

임무 시기에 맞춰 합류한 암살자들이라고 했다.

원래 암살자는 조용하고 냉혹한 이미지 아니었어?

하나같이 무슨 동네 건달 같은 비주얼이다.

들어보니, 나까지 포함 이곳 일곱 명이 표적 암살에 투입된 머릿수였다.

…어? 잠깐만, 일곱이라고?

밖으로 나가려던 나는 흠칫했다.

메인 악당의 첫 등장 신.

카멜 블레이저가 소설 속에서 처음 등장했을 때, 그는 암습을 당하고 있었다. 그때 암살자의 수가 딱 일곱이었다.

이거 설마…?

그리고 강렬했던 한 장면.

[쾅!]

'기습적인 자폭 공격!'

주인공에게 온몸을 날리며 자폭했던 한 암살자를 보며 개쩐다고 생각했는데.

시발, 설마 그게 나야?

알고 보니, 난 카멜 블레이저의 퍼스트 킬 캐릭터로 당첨된 것이었다.

3화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다

"얼른 다녀오라고. 배고프니까."

"넵!"

난 식량을 구하기 위해 창고 밖으로 나왔다.

한적한 시골 마을.

목조 건물은 하나같이 허름했고, 눈에 띄는 큰 건물은 몇 채 보이지 않았다.

바깥세상을 처음으로 구경한 셈이지만, 설렘 따윈 없었다.

그런 감정은 여유가 있을 때나 느끼는 것이고, 벌레, 붐(boom)을 삼킬 때 예상은 했지만, 설마 거기서 자폭할 운명이었다니.

난 무거운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음식점으로 보이는 건물로 들어갔다.

"빵과 수프, 마실 것 좀 포장해주세요."

"얼마나 드릴까요?"

"이 짐 가방에 가득 들어갈 만큼요."

단장이 며칠분의 식량도 지시했기에 난 큰 가죽 가방을 통째로 가져왔다. 음식을 주문한 뒤 난 식당 안을 살폈다.

각 테이블에 드문드문 앉아 수다를 떠는 사람들이 보인다.

평범한 일상 속의 풍경이다.

하지만 난 그 풍경 속에 스며들지 못했다. 내 눈동자는 문밖을 향하고 있었다. 표정에는 짙은 갈등과 망설임이 흘러나왔다.

'지금이 도망칠 마지막 기회인데.'

원래 도주할 계획은 없었다.

그런데 신입 암살자의 기억을 얻으면서 도주 가능성을 점쳤다.

눈썰미와 생존 경험이 생긴 것이다. 이 주변 지리도 어느 정도 떠올랐다.

'블라이어 영지에서도 아예 살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하지만 그 방법은 되도록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죽을 확률이 너무 높았거든. 시도하기 전에 죽을지도 몰랐다.

'나설 때 의심하는 낌새는 없었어. 감시자도 붙지 않았고.'

음식점 건물 뒤쪽에 우거진 숲을 확인했다. 도주로로 괜찮은 장소였다. 도망친 후 추격만 따돌릴 수 있다면 살 방도가 있었다.

심장에 붐(Boom)이 기생 중이지만, 붐을 해제할 인물을 난 알고 있었다.

'해? 말아?'

우유부단한 성격이 절대 아닌데, 한 번 선택으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니 망설임이 생겼다.

'그래. 이게 살 확률이 높아.'

그렇게 엉덩이를 들썩이며 도주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졌을 때였다.

"손님, 포장한 음식 나왔습니다."

식당 주인이 빵빵해진 가죽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이거 가지고 튀는 거다.

난 가방 안을 확인하곤 가방 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런데,

'응?'

순간 내 시선이 가방 안쪽 한 곳에 고정됐다. 그것을 본 순간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1골드 20실입니다."

"아… 네."

친절한 태도를 보이는 식당 주인에게 동전을 건네곤 난 음식점을 바로 나왔다.

조금 전 갈등이 무색할 만큼 내 걸음은 창고로 향하고 있었다. 도주로로 봐두었던 숲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심장이 쿵쿵쿵! 거칠게 뛰었다.

'골로 갈 뻔했다.'

수프용 간이 수저가 '일곱 개'다.

식당 주인이 넣어준 것인데, 난 음식을 주문했지, 그에게 몇 명이 먹을 것이라 말한 기억이 없었다.

음식 주인이 창고의 존재를 알고 있다?

물론, 우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신입 암살자의 기억에 크룩스의 숨겨진 비밀 거점에 관한 정보가 있었다.

'창고로 돌아온 뒤 암살자들의 행동에 여유가 넘쳤어.'

임무 중에 그런 여유가 드러났다는 건 이곳이 무척 안전하다는 말이었다. 이 마을이 그런 비밀 거점 중 하나라면 도망치는 순간 발각당한다.

"빌어먹을,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네."

평화로웠던 작은 마을이 이젠 달리 보였다. 힐끗거리며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감시자처럼 느껴졌다.

일단 행동은 보류다.

난 이를 악문 채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 * *

'더럽게 맛없네.'

자본주의의 빵 맛에 길들여진 나에게 이 빵은 돌덩이 같은 맛이었다. 그나마 빵을 수프에 찍어 먹으니 목구멍으로 넘어가긴 했다.

맛은 없지만, 난 억지로 빵을 삼키며 최대한 먹으려고 했다.

체력은 국력이란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었으니까.

"신입."

"넵!"

한곳에 모여 식사 중이었는데, 단장이 멀찍이서 나를 조용히 불렀다.

입 속에 빵을 욱여넣으며 난 단장에게 후다닥 달려갔다.

"사람이 왔었나?"

내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자, 단장의 시선이 내 심장에 잠깐 머물다 사라졌다.

그 시선을 놓칠 내가 아니었다.

'이 새끼….'

[신입은 창고에 남겨둬. 쓸데가 정해져 있으니까.]

하루 전, 저자가 나를 내려 보며 했던 말이다. 그땐 흘려들었는데, 당해보니 그 뜻을 이젠 알 것 같았다.

저 단장 새끼는 내 심장에 기생 중인 붐(Boom)의 존재를 눈치챘다. 내가 이 지경이 될 것이란 사실을 미리 안 것이다.

"전달 사항은?"

난 사내에게 건네받은 저택 지도와 연초 보따리를 건넸다. 작전에 관해 전달받은 내용도 함께 보고했다.

"사흘 후 시작이라…."

단장은 날짜를 중얼거리며 연초 보따리를 살폈다. 그러곤 나를 잠시 빤히 바라봤다.

재수 없게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어째 불안감이 느껴지는 시선이다.

"그가 내게 따로 남긴 말은 없었나?"

"없었습니다."

"그래? 알았다."

단장은 더는 사내에 관해 묻지 않았다.

그 반응에서 난 그 의문의 사내가 단장보다 더 높은 직급의 인물임을 눈치챘다.

단장은 저택 지도에 시선을 돌리며 손짓으로 나를 물렸다.

제자리로 돌아온 난 주변을 둘러보며 눈치를 살폈다. 각자 자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암살자들이 보인다.

'저들은 얼마나 강할까?'

기억 속에 저들의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보가 없었다. 물론, 이곳의 모든 암살자는 악당을 위한 한 줌의 희생양일 뿐이니,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진짜 궁금한 건 나 자신의 무력이다.

신입 암살자이자, 버려지는 패.

실력이 형편없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기억을 더듬어보니 또 그런 건 아니었다.

아니, 내 기준에선 실력이 무척 뛰어나 보였다.

'한 번 쓰고 버리기엔 아까운 패 같은데.'

내 목숨이 걸려서 그런 게 아니라, 크룩스에서 이 캐릭터를 제법 공들여 키운 흔적이 보였다.

조직 내에 무슨 사정이 있든가, 아니면 이 정도 무력은 이 세상에서 별것 아니든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저들의 무력이 더더욱 궁금해졌다. 비교할 데이터가 될 테니까.

"집합."

잠시 후, 단장이 암살자들을 소집했다.

"이틀 안에 표적이 머무는 블라이어까지 도착해야 한다."

"바로 움직입니까?"

"당장 짐을 챙겨라."

단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암살자들은 출발 준비를 위해 부산히 움직였다. 난 식량이 든 짐 가방과 약초 보따리를 챙기고 그들 뒤를 쫓았다.

새벽이 된 시간.

마을은 조용했다.

암살자들은 음식점에 붙어 있는 마구간으로 들어갔다.

일곱 마리의 말이 준비되어 있었다.

말을 모두 바깥으로 꺼내고, 마을을 벗어날 때까지 그 누구 하나 밖을 내다보는 이가 없었다.

그 모습에서 확신했다.

이 마을은 크룩스의 비밀 거점이 맞았다.

행동을 보류한 판단이 옳았다.

푸르릉―!

어둠으로 흩어지는 말 투레질 소리를 끝으로, 암살자들은 숲속으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 * *

'휴, 큰 고비 하나 넘겼네.'

난 경마장에서 말 구경은 해봤지만, 말을 직접 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말 한 마리가 내 앞에 떡 놓이고, 암살자들이 말을 탄 채 나를 모두 내려 보는 상황이 펼쳐졌다.

'못 탄다고 하면 죽일 것 같았지.'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자칫 이곳이 무덤이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지만, 희망이 있었다.

바로 신입 암살자가 가진 승마 경험.

그리고,

"하얏!"

지금 나는 그 경험을 빌려 말을 능숙하게 타는 신기한 경험을 하는 중이었다.

숲속을 거침없이 질주하며 나는 말 위에 몸을 실었다.

익숙한 듯 몸이 움직였다.

그렇다면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암살 능력도 익숙하게 펼칠 수 있을까?

생존 확률이 발톱의 때만큼 올라간 것 같았다.

두두두두―

일행은 잠깐의 휴식을 취하는 시간 외에 쉬지 않고 움직였다.

온종일 정신없이 달려도 끝나지 않는 숲길을 달리는 건 나름 신선한 경험이었다.

이토록 넓은 숲이라니, 나중에 이 숲의 이름이 '라웁'이란 것을 듣고 기겁했다.

'공포의 라웁 숲!'

메인급 악당 중 하나인 미치광이 마법사 하나가 숨어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 악당의 눈에 띄면 몰살 각이었지만, 그럴 일은 단연코 없을 것이라 스스로 위안 삼았다.

이 파티는 그 미치광이가 아니라 카멜의 먹잇감이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이동은 순조로웠다. 다만, 휴식을 취할 때마다 단장의 지시로 난 매일같이 불침번을 서야 했다.

오직 나만 불침번을 홀로 섰다.

'졸려 뒈지겠네.'

피로한 두 눈덩이를 부라리며 난 선두에 선 단장을 노려봤다.

저 단장 새끼는 상도덕이 없었다. 다음에도 불침번을 시킨다면 확 들이받으려고 했다.

"이곳에서 잠깐 쉰다. 신입!"

"네, 넵!"

"불침번을 서라."

"맡겨주십시오!"

개뿔.

그게 말처럼 될 리가 있나?

여긴 군대보단 더 빡세다. 항명은 곧 죽음이었으니까.

난 얌전히 단장이 시키는 대로 이튿날도 불침번을 섰다.

'괴롭히는 느낌은 아닌데 말이지.'

날 바라보는 눈빛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의도적으로 잠을 재우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뭐, 상관없었다.

어차피 나에겐 살 방도를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고, 불침번은 좋은 구실이 됐다.

실제로 밤을 뜬눈으로 보낼 때마다 쓸만한 계획 몇 가지가 머릿속으로 그려졌고, 세부적인 내용도 차곡차곡 쌓이는 중이었다.

나는 결국 숲을 통과하는 내내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리고 이튿날 저녁.

캬아아악!

"전투 준비!"

난 처음으로 이 세계의 몬스터와 조우했다.

* * *

소설 속은 다양한 몬스터가 사는 세상이었다.

우거진 넝쿨에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말들을 기습한 몬스터는 짙은 회색 털을 지닌 '놀'이었다.

두상은 하이에나를 닮았고, 인간 덩치로 이족 보행을 하며 도끼를 휘둘렀다.

히이잉―!

"신입! 말을 지켜!"

"아, 알겠습니다!"

말 두 마리가 놀이 던진 도끼에 맞고 쓰러졌다. 그중 단장이 타던 말도 있어서 왠지 모르게 속이 시원했다.

콱 죽어버리지.

아쉽게도 단장은 말에서 구른 후 곧장 암살자들을 데리고 놀들을 공격했다.

수는 엇비슷했다.

난 놀을 응원했다.

제발 다 죽여버려라.

하지만 그 기대는 희망에 불과했다.

투투투퉁―!

일제 사격한 석궁에 놀들은 삽시간에 쓰러지며 무력화됐다.

진형이 무너진 놀들 사이로 암살자들이 순식간에 파고들어 단검술을 펼쳤다.

이들의 실력을 이제야 볼 수 있었다.

민첩한 단검술, 정확히 급소를 찔러 넣고 목숨을 끊었다.

몸놀림도 무척이나 날렵했다.

일반인 서넛은 눈 깜짝할 새에 죽일 실력자들이었다.

하지만,

'강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

비교 데이터를 통해 확실해졌다.

이 신입 암살자는 확실히 한 번 쓰고 버리기엔 아까운 패였다.

'거기서 그렇게 찌른다고?'

말들을 지켜야 했기에 난 전투와 관심에서 배제됐다. 도망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너무 순식간에 끝나버렸거든.

전투를 지켜보면서 암살자들의 손동작을 작게나마 흉내 내봤다.

어째 익숙하다.

왠지 머릿속 동작을 전부 흉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마음가짐이었다.

"...음."

잔혹하게 죽은 놀의 사체들이 눈앞에 밟혔다.

죽은 몬스터는 처음 보지만 뭐랄까. 이상하게 혐오감이 들지 않았다.

암살자의 기억과 섞이면서 내 성격에 변화가 생긴 것일까?

만약 인간의 시체를 보고도 이런 감정이 든다면?

'썩 좋은 느낌은 아닌데.'

일개 회사원이었던 내가 사람을 죽인다?

상대의 눈을 마주하고도 단호하게 단검을 휘두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상황에 놓인다면 난 단호해지기로 했다.

죽고 싶지 않았으니까.

다음 날 아침, 나는 악당 카멜 블레이저가 머무는 블라이어 영지에 도착했다.

4화 파양초

블라이어 영지로 들어가는 성문에 많은 인파가 붐볐다.

성문 검문을 통과하기 위해 암살자들은 모두 용병 차림으로 변장했는데, 하나같이 인상이 더러워서 진짜 용병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어쭈?'

단장을 시작으로 암살자들이 차례차례 용병패를 꺼내 병사 앞에 내보였다.

설마, 진짜 용병인 거야?

요즘 암살자는 투잡도 뛰는 모양이었다.

'그럼, 나는?'

난 왜 용병패 안 주는데?

저들이랑 친해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왠지 소외된 기분이라 이상하게 기분이 더러웠다.

"이 녀석은 뭐지? 용병은 아닌 것 같은데."

내 차례가 되자, 병사가 날 무섭게 내려다보며 물었다.

소설 속 '병사1' 주제에 있는 척은 오지게 한다. 배알이 뒤틀렸지만, 지금 내 처지는 병사1만도 못해서 잔뜩 엎드려야 했다.

내가 어색한 미소로 단장을 바라보자, 단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탕탕 두드렸다.

크룩스는 연기도 가르치나, 왜 이리 자연스러운데?

"하하하, 병사님, 이 녀석은 짐꾼입니다."

"짐꾼? 짐꾼도 데리고 다니나? C급 용병단이면 장비 맞출 돈도 빠듯할 텐데?"

"싹수가 괜찮아서, 짐꾼으로 쓰다가 용병으로 키우려고 데려왔습니다."

"이놈을? 차라리 귀족한테 팔지 그래. 반반하게 생겼는데."

이 '병사1' 새끼가 뒈지고 싶나. 사람을 앞에 놓고 못 하는 소리가 없네?

내 얼굴이 반반하고 비율도 쩔긴 했지만, 너 같은 놈은 횟감도 안 되는 놈이라고.

표정이 와락 구겨졌지만,

"그럼, 짐꾼 가방에 든 물건은 뭐지?"

병사의 다음 말에 내 표정은 거짓말처럼 환하게 미소를 띠기 시작했다.

굴욕적이지만 참아야 한다!

가방 안을 보여주는 건 곤란했으니까.

"시, 식량이 전부입니다."

"식량? 열어봐."

"저, 그게…."

"안 열고 뭐 해?"

가방 안에는 식량 외에 연초 보따리가 있었다.

난 연초를 한 번 피워 본 적이 있었다.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이 평범한 풀때기가 절대 아니었다. 걱정이 들었지만, 그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대기자도 많은데 그냥 통과시켜. 귀찮게 뭘 자꾸 들춰?"

"추, 충! 알겠습니다!"

단장이 선임 병사들 주머니에 슬쩍 무언가를 찔러주자, 가방 확인은 무슨, 병사들의 인사를 받으며 성문 안으로 프리패스가 됐다.

은화를 처먹이고 처먹는, 아주 우애 좋은 뇌물 현장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회사원 시절에도 못 볼 꼴 많이 보긴 했지.

지금이 딱 그 꼴이다.

'돈이면 다 되는 더러운 세상아.'

현실이고, 소설 속이고, 사람이 굴러가는 세상은 다 똑같은 모양이었다.

블라이어 외성 안으로 입성했다. 광산업이 발달한 블라이어는 상업 도시답게 무척 발전된 영지였다.

대로(大路)를 따라 끝없이 늘어진 물건 좌판과 상인들, 구경 나온 손님들로 득실거렸다.

단장은 주점이 딸린 큰 여관에 짐을 풀고 암살자들을 방으로 불렀다.

"넷만 움직인다."

"남은 자들은 어찌합니까?"

"다른 소식이 올 수 있으니 대기하면서 기다려."

"알겠습니다."

단장은 새로 합류한 셋을 여관에 남기고 기존 멤버 넷과 여관을 나섰다. 당연히 그 멤버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는 말 다섯 마리와 함께 어딘가로 움직였다. 그중 나는 모든 말의 고삐를 잡아끌며 인파로 빽빽이 들어찬 거리를 힘겹게 뚫고 있었다.

"신입, 눈 크게 뜨고 길 잘 뚫어라. 길 잃으면 저번처럼 혼난다."

"아, 알겠습니다!"

"큭큭큭, 서두르라고. 너 때문에 늦으면 굶길 거야."

단장은 가만히 있는데, 뒤에 선 꼬봉들이 지랄이다. 첫 만남에 날 구타했던 코쟁이 새끼들.

죽이고 싶다.

말들을 챙기랴, 뒤에선 갈구고 인파에 치이는 상황.

난 정신없이 대답하면서도 머리를 팽팽 돌리고 있었다.

바로 생존 계획 말이다.

'도주는 힘들 것 같고.'

블라이어 영지는 인파로 득실거리는 공간이라, 몸을 빼기 좋은 장소였다. 일행이 감시하는 것도 아니니 도주는 언제든 가능한 상황.

하지만 이틀 동안 고민하면서 뒤늦게 알게 됐다.

도주는 그야말로 최악의 판단이란 사실을 말이다.

'당장은 탈출에 성공할 수 있어도, 그 이후에는 감당할 수 없거든.'

크룩스는 임무 중 도주한 암살자를 절대로 살려두지 않는다. 그건 다른 암살자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다.

암살자가 표적 사냥 전에 도망친다?

조직의 근간을 뒤흔드는 배신행위였다. 다른 암살자 조직과 연합해서라도 끝까지 추격할 것이다.

'암살자가 판타지 속 고블린 같은 존재라도 다굴에는 장사 없다고.'

기연이란 기연을 모조리 처먹고 강해진다면 모를까.

지금은 뼈도 못 추리고 죽는다.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거나, 나를 잊게 만들 방도가 필요했다.

나에겐 시간이 무조건 필요했으니까.

'현재 임무를 유지하면서 생존하는 방법.'

지금으로서 한 가지뿐이다.

'시발. 이건 진짜 피하고 싶었는데.'

바로 현 암살 계획을 이용하는 것.

나는 저 너머 내성 중심에 우뚝 선 웅장한 탑을 올려다봤다.

탑에 머무는 한 사내.

그리고 내일 새벽 내가 죽여야 할 표적.

'카멜 블레이저.'

피에 미친 학살자라 불리는 그놈만이 암살 조직 크룩스의 눈에서 날 가려줄 수 있었다.

악당을 이용할 계획을 짜다니, 나도 미치긴 했나 보다.

하지만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카멜에 대해 나만큼 잘 아는 인간도 없을 테니까.'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

난 이 소설을 모두 읽은 독자다.

오직 나만이 악당 주인공들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악당들에게 비밀이란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 될 약점이자 능력이었다.

나는 그런 카멜 블레이저의 비밀을 파고들 생각이었다.

* * *

서쪽 성문 근처에 즐비하게 자리 잡은 옷가게 거리.

눈에 보이는 수많은 옷가게 중 일행은 한 곳을 방문했다.

크룩스의 조직원만 알고 있는 비밀 표식이 옷가게 간판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난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맞이한 이를 보며 말했다.

"아, 사람이 있었군요. 몰랐습니다."

"마구간인 줄 알았습니다."

이 병신 같은 암구호를 장소 구애 없이 사용하다니, 암구호를 만든 새끼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게을러터진 게 분명했다.

2층으로 안내되자 뚱뚱한 중년인이 단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보니, 조직원이 아니라 암상인이었다.

암상인은 창밖의 말들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말이 다섯 마리뿐이던데. 나머지 두 마리는?"

"오는 길에 습격받아서 잃었다."

"내가 받을 대금은 말 일곱 마리인데, 부족한 대금은 어찌할 거요?"

"금화로 충당하지."

단장이 나를 보며 턱짓하자, 난 가방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건넸다. 주머니를 확인한 암상인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옷가게에 전시된 의복 상자 중 한 곳을 가리켰다.

확인해보니, 의복 상자 구석에 일곱 벌의 병사복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블라이어 내성 병사들이 입는 의복이었다.

난 병사복을 가방 안에 욱여넣었다.

그 사이, 단장과 암상인은 내성 정보를 주고받으며 대화 중이었다.

"사냥 신호는?"

"큰불이 날 거요. 그때 움직이시오."

"표적이 지닌 아티팩트 정보는 알아냈나?"

"보호의 권능이 담긴 마법 구슬이라더군. 물리적인 피해로는 힘들 거요. 방도가 있소?"

"방도라…."

단장은 대답 대신 옷을 챙기는 신입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암상인은 더는 말하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괜한 호기심은 명을 단축할 뿐이다. 어차피 사냥은 저들의 몫이었으니까.

"난 오늘 이곳을 뜰 거요. 아, 당신의 마스터가 전해달라는군."

"마스터가?"

"좋은 소식을 기다리겠다."

"...."

그것으로 두 일행의 대화는 끝이 났다. 내성 정보와 병사복을 챙긴 일행은 숙소로 빠르게 복귀했다.

* * *

이 세상에 떨어진 이후 식사다운 식사를 처음 해봤다.

육류가 들어간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살짝 고기 비린내가 났지만, 간이 되어 있어서 먹을 만했다.

"더 먹고 싶은 건?"

암상인과 거래를 끝내고 늦은 저녁에 숙소에 도착한 뒤 주점에서 식사 시간을 가졌다.

무슨 이유인지, 단장은 나를 옆에 앉혀놓고 먹고 싶은 음식들을 모두 시켜줬다.

코쟁이들이 가늘어진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부모를 빼앗긴 애들처럼 심술이 얼굴에 가득한 표정이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거, 이거, 이거, 이거요."

"알았다."

"술은 안 됩니까?"

"시켜라."

숟가락을 쥔 코쟁이들의 주먹에 힘줄이 돋아났다.

꼬우면 너네도 인간 폭탄 되든가.

나는 이 식사가 사형수에게 먹이는 최후의 만찬임을 잘 알았다.

입맛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음식이 입 안으로 잘 들어갔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이상하게 불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암살자가 되더니 신경이 굵어진 건가?

그렇게 커져 버린 간땡이를 붙잡고 코쟁이들과 눈싸움을 하고 있는데,

"그거 들었어?"

"뭐 말인가?"

테이블 바로 옆자리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영주님의 병환이 점점 깊어진다는데? 어쩌지?"

"네놈이 그걸 어떻게 알아?"

"성을 방문하는 치료사와 사제의 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고."

"그렇게 심각해?"

"차도가 전혀 없다고 은연중 소문이 돌고 있어.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할 게 없다고 말이야."

"그럼, 곧 후계가 발표되는 거 아니야? 윌리엄 공자님이 후계를 승계하시겠지?"

"장자 신분이니 명분이 있겠지. 영주님이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소문도 있고."

"둘째인 카멜 공자의 능력이 범상치 않다고 들었는데, 자작님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실패한 모양이야."

차기 영주를 놓고 윌리엄과 카멜을 비교하는 이야기. 하지만 이들 대부분이 윌리엄이 영주 자리에 오를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그 흐름대로 흘러가는 게 맞겠지.

'카멜이 엄청난 대악당이 아니라면 말이지.'

영주인 리암슨 자작이 윌리엄을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영지민들이 아무리 그를 지지해도 어차피 이 영지의 주인은 카멜이었다.

그의 행보는 파격 그 자체이니까.

영주가 되는 과정을 소설로 읽으면서 소름 돋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블라이어 차기 영주가 누가 될지를 두고 도박판 같은 거 안 열리나?'

몰빵 베팅이 가능한 도박인데 살짝 아쉬움이 몰려왔다.

이딴 생각이나 하는 걸 보니, 나도 맛탱이가 간 모양이다.

'…개 졸리네.'

눈꺼풀이 천근만근이다.

조금 전 헛생각이 들 정도로 졸음이 미친 듯이 쏟아졌다.

이틀 동안 잠을 못 자고, 눈앞의 음식을 배 터지게 처먹었으니 졸릴 만도 했다.

하지만 이건 좀 심한데, 수면제를 먹지 않고서야….

거기까지 생각을 마쳤을 때,

'...!'

내 시선이 조금 전 마신 맥주잔에 고정됐다. 깨끗하게 비워진 잔.

그제야 잔을 비운 후 일행들의 대화가 끊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을 돌리니, 코쟁이들이 비웃음을 띤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했다!

고개를 돌려 단장을 바라보려는데,

쿵―

난 그대로 식탁 위에 코를 박았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만 올라가지. 녀석을 업어라."

"네."

"녀석의 가방에서 '파양초'를 꺼내."

단장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귓속을 파고들었다.

'…파양초?'

그제야 난 연초의 이름이 파양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층 숙소로 올라가는 계단을 끝으로, 내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의식이 끊긴 것이다.

5화 정글 속 임팔라들

"으으…."

의식이 돌아왔다.

지독한 두통에 인상을 찡그리며 신음을 토해냈다. 그러자, 머리맡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단장, 이 녀석 깬 거 같은데요?!"

"뭐? 그럴 리가…."

당혹감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내가 지금 깨어나면 안 되는 건가? 분위기를 파악한 나는 다시 의식을 잃은 척했다. 월급쟁이로 살아온 눈칫밥이 얼만데.

내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거친 손길이 느껴졌다. 순간 얕게 들리는 호흡 소리. 느낌을 보니 단장 같았다.

"무의식중에 움직인 것 같으니, 하던 일 계속해."

"분명 의식을 차린 것 같았는데…."

"파양초를 이만큼 흡입하고 제정신을 유지한 인간을 그동안 봤었나?"

"모, 못 봤습니다."

"신경 끄고 파양초나 계속 피워."

"알겠습니다."

다행히 넘어간 것 같았다.

파양초?

내 머리맡에서 뭔가를 계속 태우는 것 같았는데, 전에 한 번 맡아본 냄새였다.

창고에서 만난 사내가 건넨 연초.

'그거였나?'

가방에 연초 꾸러미를 넣고 다녔는데, 그 연초의 이름인 모양이었다.

소설 속에서도 파양초는 처음 들어본다.

무슨 효과이기에 내 머리맡에 피우는 거지?

두 가지는 확실했다.

좋은 효과는 절대 아닐 것 같다는 거. 그리고 내게 쓰기 위한 용도로 가져온 풀때기라는 거.

"단장, 한 줌 분량을 다 태웠습니다."

"다음 교대자가 올 테니, 녀석의 머리맡에 파양초를 추가로 더 올려놔. 중독되면 두통이 심해지니까, 서둘러."

"다, 다 했습니다."

"바로 교대한다."

잠시 후, 단장 일행이 나가고 두 명이 새로 들어왔다. 코쟁이 녀석들이었다. 그들은 머리맡에 놓인 파양초를 조심스레 태우며 대화를 나눴다.

"이런 건 어디서 구한 거야?"

"주술사에게 구한 거라고 하던데."

"주술사?"

"파양초를 장기간 흡입하면 영혼이 나가서 텅 빈 인형이 된다고 하더라고. 바보가 돼버리는 거지."

"그런 걸 왜 신입한테 쓰는 거야?"

"단장이 흘린 말로는 암시를 건다고 했어."

"암시? 무슨 암시?"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이번 임무에서 이 녀석은 버리는 패야."

"확실해? 이 녀석, 마스터 직속 휘하라고. 훈련 성적이 역대급이라 마스터가 직접 키운다고 데려간 거 몰라?"

"그딴 게 뭐가 중요해? 암시잖아, 암시. 뻔하잖아. 붐(Boom)."

"...."

"입 다물고 시간이나 정확히 재. 파양초를 과다 흡입하면 정신이 오락가락해진다니까."

"아, 알았어."

긴장한 듯 파양초를 태우던 코쟁이들도 시간이 지나자, 다른 이들과 교대했다.

이번엔 새로 투입된 암살자들이었다. 그들은 코쟁이 녀석들과 달리 조직의 소문에 더 밝았다.

이들의 대화 주제는 당연히 나였다. 유망주가 갑자기 버린 패로 취급되니 호기심이 동한 모양. 분위기를 보니, 단장 빼곤 이 사실을 모두 몰랐던 것 같았다.

"간부들 사이에서 차기 마스터로 촉망받던 녀석인데, 무슨 일이지?"

"아케인의 예언 때문이란 소문이 있어."

"아케인? 그 점성술사?"

"마스터가 그쪽에 귀가 얇잖아. 아케인에게 이 녀석과 관련해서 안 좋은 예언을 들은 모양이야."

"예언 한마디에 버려지다니, 이 녀석도 재수 어지간히 없는 놈이네."

"이크! 다 탔다. 얼른 나가자."

난 반나절 동안 기절한 척하며 저들의 대화 내용을 유심히 엿들었다.

메인 스토리만 알고 있는 나에겐 무척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이름 없는 캐릭터들의 서브 스토리를 엿보는 느낌이랄까.

내가 알던 단순한 소설이 아닌, 이곳도 크고 작은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하나의 세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화 내용에서 유독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점성술사, 운명의 아케인.'

인간의 운명을 예언하는 점성술사로 유명한 인물이다.

악당 혹은 영웅의 그릇을 판단할 때 그는 운명의 구슬로 그릇을 점지했는데, 그 내용에 따라 인물들은 소설 속 세상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카멜 블레이저가 받은 점지 내용이 [두 길을 걷는 탐욕 군주]였지?'

그의 점지는 소설 속에서 큰 파문을 불러왔기에 아케인은 메인 캐릭터로 취급되는 인물이었다.

악당도, 그렇다고 영웅도 아닌 중립적인 인물.

그런 그가 크룩스의 마스터와 인연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의 말 한마디에 내 운명이 나락으로 가는 중이었다.

'언제고 만난다면 호되게 따져야겠네.'

암살자들은 파양초의 효과를 맹신하고 있었다. 내가 깨어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건 단장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맥주에 약을 탔어. 시벌놈.'

맛있는 거 사준다고 넙죽 받아먹는 건 다섯 살짜리 코흘리개도 안 하는 짓인데, 개 쪽팔렸다.

다행인 건 단장의 의도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파양초가 정신을 바보로 만든다고?

'정신이 이렇게 또렷한데?'

조금 전 약을 탄 맥주를 마시고 기절한 듯 잤더니, 모든 피로가 풀린 것처럼 상쾌했다.

난 코로 깊게 숨을 마시며 파양초의 매캐한 연기를 흡입했다.

길빵을 당한 것처럼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저들이 말한 것처럼 정신이 나간다거나, 이성이 마비되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오래 기절하는 척했더니 허리가 아픈 정도?

'유통기한이 지난 거 아니야?'

조금 전 코쟁이들이 구토를 해대며 도망치듯 빠져나간 것을 보니, 그런 건 또 아닌 것 같았다.

그럼 파양초가 나한테만 안 통한다는 건데.

둘 중 하나였다.

이 몸의 원래 능력이거나, 아니면, 내가 이 몸에 빙의하면서 어떤 능력을 얻었거나.

지금은 알아볼 방법이 없으니, 참고만 해둘 생각이었다.

잠시 후, 파양초를 모두 태우자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단장이 나를 내려다보며 암시를 걸기 시작했다.

표적 제거.

표적 제거.

표적 제거.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난 표적에게 달라붙은 후 스스로 자폭하게끔 암시가 주어졌다.

와,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거였어?

소설 속에선 '암살자 한 명이 카멜의 눈앞에서 자폭했다.' 이거 딱 한 줄로 요약됐는데, 준비 과정은 무슨 전설급 아티팩트 제조 과정 수준이었다.

'단점도 좀 치명적인 것 같고.'

이 벌레 폭탄에는 명확한 단점이 있었다.

바로 원격으로 벌레를 터트릴 수 없다는 것.

벌레를 삼킨 대상에게 암시까지 걸어야 하는 번거로운 과정이 이해가 안 됐는데, 벌레를 터트리려면 숙주의 마나 운용이 필요했다.

즉, 세뇌나 암시가 아니면 벌레를 터트릴 수 없다는 뜻이었다.

'원격 폭발이 가능했다면 크룩스가 그저 그런 암살 조직으로 남아 있을 리 없겠지.'

나에겐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일단 살아남기만 하면 벌레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눈을 오랫동안 감고 있었더니 슬슬 졸리기까지 했다.

암시를 거는 단장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다.

졸음을 참으며 난 묵묵히 신호를 기다렸다.

"일어나라."

"...."

기다렸던 신호가 왔다.

드디어 시작된 연기 타임.

흐리멍덩한 눈으로 난 단장 앞에 섰다. 침을 뚝뚝 흘리며 흐느적흐느적 그를 따라다녔다.

이성이 마비되어 단장의 목소리에 인형처럼 움직이는 모습.

내가 연기에 이렇게 소질 있었나?

크룩스 조직원은 확실히 연기도 교육을 잘 받는 모양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연기 흉내가 자연스레 잘됐다.

베테랑 배우처럼 영혼이 없는 바보처럼 움직이길 잠시, 고개를 끄덕인 단장은 더는 내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 앞으로 벌어질 임무에 집중하는 것 같았다.

"빠르게 정비한다."

암살자들은 각자 준비에 들어갔다. 나를 포함해 모두 병사 복장으로 갈아입었으며 옷 안으로 날카로운 무기를 숨겼다.

새벽으로 넘어간 시간, 병사로 위장한 암살자들이 거리 밖으로 나섰다.

상업 도시답게 새벽 거리인데도 건물 곳곳은 시끄러웠다.

다만, 소란을 부리다가도 우리를 보면 조용해졌다.

눈치를 보는 모습이 역력하다.

'옷발 죽이네.'

내성 경비대는 블라이어 영지의 정예군이라 영지민들도 어려워한다더니 사실이었다.

당연히 경비대로 위장하다가 걸리면 즉결 사형이었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저, 저게 뭐야?"

"불? 부, 불 아니야!?"

"내성 쪽에 불이 났어! 불이야!"

작은 소란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영지의 주인이 머무는 성에서 벌어진 큰 화재.

내성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얼마나 큰 불인지, 매캐한 연기 위로 컴컴한 하늘이 붉게 물들 정도다.

[큰불이 날 거요. 그때 움직이시오.]

신호가 떨어졌다.

"사냥을 시작한다."

단장을 시작으로 암살자들은 내성으로 민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표적을 사냥하기 위한 암살자들의 눈빛이 날카롭기 그지없다.

오직 나만이 멍한 눈빛으로 그들의 뒤를 쫓을 뿐이었다.

'사냥 좋아하네. 정글 속 임팔라 새끼들 주제에.'

물론, 그 두 눈동자 속에는 짙은 조롱이 담겨 있었다.

* * *

"병사들은 모두 이쪽으로 모인다!"

"물통을 준비해. 서둘러!"

내성 안으로 진입하는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큰 화재로 혼란에 빠졌는지, 열린 성문 사이로 사람들이 정신없이 북적거렸다.

내성에 들어서자, 화재 모습이 눈에 담겼다.

큼지막한 보관 창고에서 번진 불이 그 주변 건물을 태우며 빠르게 번지고 있었다.

작정하고 벌인 짓 같았다.

"물통을 들고 우물로 움직여! 어서!"

기사들의 성난 지휘에 병사들, 시종들 가릴 것 없이 물통에 물을 옮기며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모든 시선이 화재에 집중되어 있을 때, 보관 창고 반대편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일곱의 병사들이 있었다.

암살자들이었다.

그들은 성벽을 따라 빠르게 내달렸다. 성벽 끝자락에 솟구친 웅장한 첨탑이 그들의 목표였다.

"거기!"

그때 반대편에서 기사들이 뛰어오더니 우리를 막아섰다.

기사의 수는 고작 셋.

하지만 그들이 앞에 서자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침이 바짝 마를 정도.

어깨에 달린 푸른 휘장이 보이자, 그들이 정식 기사임을 알게 됐다.

정식 기사는 소설에서 괴물 같은 실력을 뽐내는 클래스로 표현된다.

최소 오라 3성급.

능숙한 마나로 초인 같은 능력을 내는 괴물들이란 뜻이다.

참고로 난 이제 갓 오라를 깨친 1성급 암살자 뉴비였다.

단장이 2성급이었지 아마?

이곳 멤버로는 대응 불가능한 전력. 그런 기사들이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앞에 선 단장에게 물었다.

"혹시 윌리엄 공자님을 봤나?"

"1공자님 말씀입니까?"

"그렇다."

"못 봤습니다."

"이런…."

기사들은 짧게 혀를 차곤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그들의 목적이 1공자의 행방인 것 같았다.

"그런데, 너희들은 지금 어디로 가는 중이지? 소집령이 떨어진 곳은 이 방향이 아닐 텐데?"

"아, 그게...."

"화재 대응 중 아니었나?"

"저희는 따로 명을 받고 첨탑으로 가는 중입니다."

"첨탑?"

"인위적인 화재라 불미스러운 세력이 있을 수 있다고 하여, 첨탑에서 감시를…."

"아. 그렇군."

일리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기사들은 크게 의심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은 지금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잠시 자리를 비운다던 1공자가 갑자기 사라졌다. 호위 기사로서 1공자를 서둘러 찾아야 했다.

"혹여라도 1공자님을 찾게 되면 우리에게 바로 알리도록."

"충!"

거수하는 동안 기사들은 벌써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엄청난 몸놀림.

더럽게 빠르네.

인간 맞아?

정식 기사와의 조우로 잔뜩 긴장했는지, 암살자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기사들의 존재감이 확실히 컸던 모양. 호랑이 굴이 따로 없었다.

"시간이 지체됐다. 서두른다."

밤하늘을 가른 듯 까마득한 높이의 첨탑이 우릴 반겼다. 블라이어 영지 전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블라이어 영지의 랜드마크였다.

입구를 감시하는 병사들은 화재 진압에 동원됐는지 텅 비어 있었다.

우리는 표적이 머무는 꼭대기 층으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탁. 탁. 탁. 탁. 탁!

첨탑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계단 밟는 발소리만 허공에 조용히 울렸다.

카멜 공자는 이 시간, 첨탑 꼭대기에 있을 것이란 정보가 있었다.

암상인이 확언할 정도로 확실한 정보라고 했는데, 그는 누구에게 이 정보를 얻게 된 것일까.

'카멜은 진짜 첨탑 꼭대기에 있거든.'

그리고 난 조금 전 기사들이 애타게 찾던 윌리엄 공자의 위치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순식간에 첨탑 꼭대기에 다다랐다. 숙련된 암살자답게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

실력은 없지만, 체력 하난 좋은 녀석들이었다.

첨탑 꼭대기와 이어진 통로는 모두 세 곳. 단장은 그중 중앙 계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진입한다."

콰앙―!

계단 끝, 닫힌 철문을 부수듯이 열고 들어간 순간이었다.

"아, 기다렸던 손님들이 왔군."

맑되 무미건조함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머리, 짙은 회색의 눈동자를 지닌 건장한 청년이 우리 쪽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

6화 구원자의 존안을 뵙습니다!

카멜 블레이저.

챕터1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메인 스토리의 악당.

그리고,

"…이게 무슨!?"

카멜이 시선을 돌리자, 그와 함께 있던 청년도 놀란 표정으로 우릴 바라봤다.

카멜과 묘하게 닮은 청년.

카멜의 형인 윌리엄 공자였다.

병사 복장을 했지만, 석궁과 단검을 움켜쥔 수상함에 윌리엄은 대로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네놈들은 누구냐!? 감히 이곳이 어딘 줄 알고!"

암살자들은 윌리엄 공자를 발견하곤 잠시 멈칫했다. 조금 전 기사들이 급히 찾고 있던 인물이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의외의 인물이 표적 근처에 있자, 암살자들은 잠시 주춤했다.

같이 제거하기엔 너무 거물이었기 때문이다.

그 찰나의 순간,

"...!"

그 고민을 덜어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카멜이 윌리엄 뒤쪽에서 미소를 지었다.

손에 들린 단검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푸욱―!

"끄어어어억! 너… 너!!!"

"금방 끝날 겁니다. 형님."

"끄아악!"

절망 섞인 비명과 함께 두 사내의 검은 머리카락이 차가운 바람과 뒤섞이며 흩날렸다.

윌리엄의 심장을 냉혹히 꿰뚫고 나온 한 자루의 단검.

카멜은 그 튀어나온 검 끝을 천천히 비틀며 우리를 바라봤다.

씨익―

그 섬뜩한 미소에 소름이 올라온다.

미친놈.

그 미소가 신호가 됐다.

단장이 이를 악물곤 외쳤다.

"표, 표적 제거!"

암시가 떨어졌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난 주저 없이 일행을 지나쳐 카멜에게 질주했다. 내가 맹렬히 다가오고 있음에도 카멜의 표정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난 카멜의 왼손에 들려 있는 구슬에 집중했다.

보호 권능이 깃든 마법 구슬.

하지만 정보와 다르게 구슬은 하나가 아니다.

무려 '다섯 개'였다.

그리고 형을 앞세운 인간 방패까지.

소설 속에서 읽은 내용과 똑같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를 거다."

카멜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사까지.

나는 그대로 수직 낙하하듯 카멜 앞에 바짝 엎드리곤 외쳤다.

"항복하겠습니다!!!"

굴욕적이라고?

지금 상황에선 나 같은 인간 폭탄이 트럭째 몰려와도 카멜을 죽일 수 없었다.

아마 크룩스의 마스터가 와도 안 될걸?

왜냐고?

아까 들었잖아.

이번에는 다를 거라고.

'회귀자' 카멜 블레이저.

저놈은 현재 상황은 물론 향후 10년 이내 벌어질 사건을 모두 알고 있는 대악당이었다.

회귀한 악당이란 얘기였다.

그는 악당이 10년 전으로 회귀하면 얼마나 판타스틱(?)한 세상이 펼쳐지는지 알려주는 인물이었다.

그는 탐욕을 위해 지배를 즐기는 독재자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명예나 명분, 양심은 개한테 줘버린 인간이었다.

눈앞의 그림만 봐도 딱 답이 나오지 않나?

형을 뒤에서 찔러 죽였다.

개 같은 놈.

그런데 이건 내 속마음이고,

"구원자의 존안을 뵙습니다!"

난 카멜을 향해 이마를 쿵쿵 찍었다. 내 입에선 카멜을 향한 꿀 같은 드립이 흘러나왔다. 어쩔 수 없잖아?

나도 살아야지.

"뭐지?"

"무, 뭐냐!"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앞뒤에서 똑같은 물음이 튀어나왔다.

카멜과 단장이었다.

자폭하라고 보냈더니, 암살자가 표적에게 항복을 선언하는 황당한 상황이다.

카멜은 자신이 아는 미래와 달라진 상황에 미묘한 표정을 지었고, 단장은 신입의 돌발 행동에 당황한 듯 입을 벌린 채 경악하고 있었다.

난 고개를 살짝 틀어 단장을 바라봤다. 두 눈이 마주친 순간, 단장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이를 갈았다.

이제야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미 늦었어.

난 그동안 단장에게 담아온 내 진심을 처음으로 입 밖에 표출했다.

"시발, 단장 이 개새끼야!"

단장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들이밀자, 암살자들의 표정이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

"저놈과 표적을 죽여!"

단장의 사나운 외침에 암살자들이 앞으로 쇄도했다.

나는 다급히 고개를 돌려 구명줄이 될 카멜을 올려다봤다.

그는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눈빛.

확실히 이 녀석은 상대하기 어려운 놈이었다.

난 계획한 대로 생각해둔 말을 내뱉었다.

"'그'가 보내서 왔습니다!"

"그?"

"저, 저도 그가 누군지는 잘 모릅니다. 그는 당신을 '다시 태어난 구원자'라고 불렀습니다!"

"...."

그 말이 끝난 순간,

콰작―

카멜이 손에 들고 있던 구슬 하나를 파괴했다.

구슬에서 빛이 터져 나오더니, 카멜과 나를 부드럽게 감쌌다.

둥글게 만들어진 보호막.

카앙― 캉―! 쾅!

그 위로 암살자들이 석궁을 쏘고, 단검을 찔렀지만, 보호막은 불꽃만 토해낼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카멜은 보호막 바깥에서 발악하는 암살자들을 한 차례 훑어보곤 가볍게 턱짓을 했다.

작은 신호.

신호가 떨어지자, 통로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들이 벼락처럼 들이닥쳤다.

매복이었다.

"...!"

푸른 휘장을 어깨에 단 정식 기사들.

그 수가 무려 열 명이다.

파앗―

최소 오러 3성급.

기사들의 몸에서 붉은빛이 터져 나왔다. 두 눈을 깜빡인 순간,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빠르다.

그리고,

"크, 크억!"

"끄아아악!"

도륙이 시작됐다.

내 눈에 정말 강해 보였던 단장이 고작 다섯 번의 칼질에 목이 날아갔고, 남은 암살자들에게 시선이 닿았을 땐 그들은 이미 온몸이 꿰뚫린 채 죽어있었다.

몰살하는 데, 10초? 아니 5초도 안 걸린 것 같았다.

'…시발.'

죽은 이들의 모습이 눈동자에 박히자, 욕설이 절로 흘러나왔다.

두 손이 덜덜 떨려왔다.

왜냐고?

태어나서 살인 장면을 처음 보는데 솔직히 무섭잖아.

그나마 다행인 건, 정신줄을 끝까지 안 놓은 거다. 암살자의 기억이 확실히 내 멘탈을 강하게 만들어준 모양이었다.

피 묻은 검을 겨누며 기사들이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꿀꺽―

난 마른침을 삼키곤 카멜을 찾았다.

카멜은 형인 윌리엄의 시신을 질질 끌고 첨탑 창가로 향하고 있었다.

형을 부축하듯 세운 카멜은 죽은 윌리엄과 함께 창가에 섰다.

차가운 바람을 타고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저 드넓은 블라이어의 영지가 보이십니까? 부친도 영지민도 모두가 저것이 형님 것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닙니다."

카멜은 윌리엄의 심장에 박힌 단검을 뽑았다. 단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그는 말을 이었다.

"블레이저 가문을 위해 이 영지를 제게 주십시오. 전 이곳에 만족하지 않고 왕좌를 세울 겁니다."

그는 윌리엄의 시체를 첨탑 밑으로 밀어버렸다. 빠르게 추락하는 형의 시체를 응시하며 카멜은 작게 중얼거렸다.

"제 왕좌의 첫 발판이 되어 주십시오."

"...."

와, 살벌한 새끼.

그리고 자신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미친 또라이였다.

모든 것을 갖기 위해 혈육을 죽인 행위는 그 어떤 핑계를 대도 정당화할 수 없었다.

물론, 놈은 곧 그것보다 더한 짓도 할 새끼였다.

"끌고 와."

기사들이 우악스러운 손길로 내 어깨를 붙잡고 카멜 앞에 던져놨다.

일단 여기까진 생각대로 흘러갔다. 이제부턴 진짜 긴장해야 했다. 말 한마디에 목이 날아갈 수 있었으니까.

"다시 묻지, '그'는 누구지?"

"저, 정말 모릅니다!"

"그가 나를 '다시 태어난 구원자'라 말했나?"

"그렇습니다! 전 그가 보낸 전달자로...."

"아니. 그걸로는 부족해. 그가 내 '비밀'을 알고, 내 상황을 파악했다면 너에게 더 확실한 단어를 알려줬을 거야. 내가 이 자리에서 너를 살려줄 수밖에 없는 단어."

"...."

"죽여."

이 새끼야! 깜빡이 좀 켜고 들어와!

바닥에 비친 검 그림자가 하늘로 솟구쳤다.

죽는다!

난 울부짖듯 외쳤다.

"피, 피를 마시는 잔!!!!!"

"잠깐."

카멜은 손을 든 채 잠시 침묵했다.

그 모습에 기사들은 의문 섞인 눈빛을 보냈다.

주군은 적에게 자비가 없는 냉혹한 사람이었다. 한 번 내린 지시에 주저가 없는 분인데, 저리 갈등하는 모습이라니.

'피를 마시는 잔'이 무엇이길래?

잠시 후, 카멜이 고개를 젓자 기사들은 살짝 놀란 표정으로 검을 치우곤 물러났다.

주군이 명을 번복하는 경우를 처음 봤기 때문이다.

나는 바짝 타들어가는 입술을 적시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뒷덜미가 서늘했다.

칼날이 닿았다가 떨어진 흔적.

1초만 늦었으면 목이 뎅강 잘렸다.

'이 개 같은 시키가….'

진짜 욕밖에 생각이 안 났다.

내 생각을 알 리 없는 카멜은 내 앞에 앉아 단검으로 카펫을 콱콱 찍었다. 시선은 여전히 나를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감정 하나 없는 눈빛.

섬뜩한 기분이 들었지만, 놈이 날 죽이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피를 마시는 잔은 카멜의 역린이니까.'

피를 마시는 잔은 회귀 전 카멜을 죽인 대악당의 별명이었다. 그 이름을 듣고도 나를 죽일 수 있을까?

카멜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그려지자,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뜻대로 안 될 때 짓는 놈의 미소다.

살았다.

"'그'라… 계획에 없는 놈이 나타났어. 미꾸라지에 불과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

"심문할 것이 있으니 놈을 지하 감옥에 가둬놔."

"충!"

"형님을 죽인 암살자다. 그렇게 공표하도록."

"아, 아니! 그게 무슨…!"

"살린 김에 써먹어야지."

난 억울한 표정으로 카멜을 바라봤지만, 사실 아무렇지도 않았다.

내 목표는 처음부터 '생존'이었다. 사람을 죽였다고 누명을 쓴들 지금 상황에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중요한 건 놈이 내가 던진 미끼를 물었다는 것이다.

날 살린 것이 그 증거다.

이제부터 놈의 행보를 떠올리며 그 틈을 이용해 벗어나야 했다.

'놈을 속일 수 있을까?'

첨탑 지하에 자리한 감옥으로 끌려가는 동안, 내 머릿속은 팽팽히 굴러가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영업 교육을 마스터한 월급쟁이의 말발이 얼마나 먹힐지 모르겠다.

각오는 했지만,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현실과 소설이 피부로 느껴지는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컸으니까.

* * *

"...."

카멜은 첨탑 꼭대기 창가에 홀로 서서 시뻘건 화마(火魔)로 뒤덮인 영지를 바라봤다.

영주관 다음으로 보안이 철저하다는 광물 저장 창고가 모조리 불타고 있었다.

핵심 요충지였기에 영주성 사람들은 창고 불을 끄기 위해 제 목숨처럼 달라붙었다.

아마 다른 곳으론 시선도 주지 못할 것이다.

"시원하게 잘 타는군."

하지만 카멜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다. 저 광물 창고를 태운 것이 자신이었으니 당연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영주가 되는 길을 앞당겨야 했으니까.

형이 죽었으니, 이제 자신의 앞길을 막는 이는 한 명뿐이다.

불이 잡히기 전에 모든 것을 끝낸다.

카멜은 탑을 천천히 내려왔다.

그가 향한 곳은 영주관이었다.

"문안을 알려라."

블라이어의 주인, 리암슨 자작의 처소에 카멜이 도착했다.

카멜이 문 앞에 다가섰지만, 이를 막아서는 이는 없었다. 기사들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물러났다.

"아버님, 저입니다."

"우, 윌리엄이냐?"

문 너머로 1공자 윌리엄을 찾는 자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멜이 이곳에 나타날 리 없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카멜은 미소를 짓고 처소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문을 닫기 전, 그는 기사들을 한 차례 바라봤다.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문을 닫는 순간, 기사들은 검을 뽑아 들고는 복도를 거닐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저택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7화 사과해라.

"...."

퀴퀴한 약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병환으로 몸져누운 지 한 달.

리암슨 자작의 몸은 앙상한 뼈밖에 남지 않았다.

노환이라, 약이나 축복으로도 호전이 힘들어 보였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자작은 눈앞에 나타난 아들이 윌리엄이 아닌 카멜이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네, 네가… 어찌! 윌리엄은? 쿨럭!"

"제가 못 올 곳을 온 모양입니다. 아님, 죽었어야 했나요?"

"우, 윌리엄! 윌리엄을 불러라!"

"형님은 암살자들에게 죽었습니다."

"이, 이...!"

"아버님이 제게 보낸 암살자들에게 말이죠."

"이놈!!!"

자작은 호통을 내지르며 기사들을 불렀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방문을 두드리는 이가 없다.

카멜은 자작의 침대 앞에 섰다. 그리고 베개를 집어 들었다.

그런 카멜의 모습에 자작은 허탈하게 웃었다.

"왜 저는 안 됩니까?"

"네가 지워버린 마을들을 잊은 것이냐? 무려 여섯 곳이다!"

"세금은 가문의 존속에 필수적인 겁니다. 본보기를 보였을 뿐입니다."

"네놈은 악마다. 이 영지를 피로 물들게 할 거야!"

"그럼, 더 철저하게 준비하시지 그랬습니까?"

"그 전에 죽였어야 했어. 내 망설임이 모두를 죽게 했구나...."

"망설임이 없었더라도 불가능했을 겁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카멜은 베개로 자작의 얼굴을 거칠게 짓눌렀다. 그리고 온몸으로 베개를 누르기 시작했다.

카멜의 몸 밑에서 미친 듯이 버둥거리는 자작.

그런 자작을 내려다보며 카멜은 미소를 지었다.

"전 모든 것을 알고 있었거든요."

자작의 두 팔이 축 늘어졌다.

구겨진 옷을 탈탈 턴 카멜은 더는 자작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문밖으로 나왔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기사들이 보인다.

복도는 이미 피바다였다.

집사를 포함한 리암슨 자작을 따르던 시종들은 모조리 도륙된 상태였다.

피로 물든 복도를 차박차박 걸으며 카멜은 지시를 내렸다.

"아버님께서 형님의 암살 소식에 충격을 받아 돌아가셨다. 모든 성문에 부고 깃발을 달고 장례식을 준비해라."

"충!"

"화재가 진압되는 대로 기사 단장과 그를 따르는 기사들을 포박해라. 내성 책임자로서 광물 창고를 태운 책임을 물어야겠다. 이 모든 지시는."

카멜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건네자, 기사들은 공손히 한쪽 무릎을 꿇고 서신을 받들었다.

"나 카멜 블레이저가 블라이어 영주의 이름으로 명한다."

"충!"

기사들이 자리를 비우자, 카멜은 영주관을 나와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급한 일은 전부 끝났지만, 진짜 중요한 확인이 남아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를 뒤틀어버린 존재.

그 암살자 놈.

원래는 자폭으로 터졌어야 할 놈이 용서를 구하며 나타났다.

이번 계획의 유일한 오점이자 변수였다.

'내 회귀 사실을 알고 있는 존재가 있다라….'

암살자가 '그'라고 칭했다.

암살자를 보낸 그가 누군지 궁금했다.

미래의 기억을 뒤적거렸지만, 딱히 떠오른 인물이 없었다.

자신 외에 미래를 알고 있는 존재가 있다는 건 무척 치명적인 일이었다.

회귀 후 몇 년을 웅크리고 고심하며 계획한 대륙 정벌의 밑그림이 모두 어그러지기 때문이다.

"암살자 놈을 먼저 만나봐야겠어."

카멜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첨탑으로 향했다.

암살자에 대한 처우는 일단 보류였다. 물론, 죽일 확률이 아주 높았지만 말이다.

* * *

첨탑 지하 감옥.

음울하고 칙칙한 철창 사이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퍽―!

"끄어어!… 쿨럭!"

난 꽉 막힌 속을 토해내듯 피를 한 움큼 게워냈다.

발끝에 고인 피 웅덩이를 보니, 제법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내가 얼마나 맞았지?

낮이야, 밤이야?

살아서 잡혀 온 것까진 좋았는데, 예상치 못했던 복병이 숨어 있었다.

바로 지하 감옥 고문관 새끼.

그는 하루라도 사람을 패지 못하면 무좀이 난다는 변태 새끼였다.

'누구냐?'라는 말에 '암살자다!'라고 답했더니, 그때부터 복날의 개처럼 쇠사슬에 매달려 처맞기 시작했다.

'방금은 살짝 위험했다.'

조금 전 맞은 부위는 복부였는데, 충격이 더 가해졌다면 내장에 심한 손상이 올 뻔했다.

싸움꾼도 아니고 이딴 지식을 평범한 회사원이 알 리 없다. 크룩스에서 배운 암살자의 지식이었다.

'더 맞으면 살짝 위험한데.'

온통 피로 물든 방 안.

눈앞의 살벌한 돼지 새끼.

지독한 고문까지.

공포에 질릴 만도 한데 난 침착하게 상황을 바라봤다.

못이 박힌 고문관의 몽둥이를 보고도 두려워하기보단 최대한 빗맞으려고 몸을 틀었다.

정신이 공포와 패닉에 삼켜졌지만 버틸 만했고, 통증으로 미칠 것 같다가도 참을 만했다.

뭐랄까.

자극이 일정 한계를 넘어가면 리셋이 된다고 해야 하나.

이게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지금은 썩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 새끼가! 눈깔 안 치워!"

퍽―!

"끄으으…."

내 무던한 반응이 고문관의 성질을 건든 모양이다.

처음에는 놈의 비위를 맞춰주려고 했다.

난 평화주의자니까.

그런데 놈은 그저 나를 패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삐걱삐걱 흔들리는 쇠사슬 아래, 난 피 섞인 침을 퉤 뱉어내고는 고문관을 빤히 바라봤다.

"사과해라."

"뭐? 사과? 푸하하하! 이런 정신 나간 새끼를 봤나."

고문관은 끅끅거리며 배를 잡고 웃었다. 나름 신선하게 들렸나 보다. 그래. 내 목숨을 쥔 위치니, 내 말이 웃겨 뒈지겠지.

그런데 넌 모를 거야.

네 목숨을 움켜쥔 인물이 나란 사실을.

"살고 싶으면 '잘못했습니다.'를 외치고 먹을 것 좀 가져와."

"아직 덜 맞았구나.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내가 혀를 놀리면 넌 죽으니까."

"그 혀를 뽑아버리면?"

"감당할 수 있겠어? 난 중요한 심문 대상인데, 혀를 잘못 뽑았다가 네 목이 뽑힐 수도 있어."

"...."

얼굴을 살짝 일그러트린 고문관은 한쪽에서 불로 달군 쇠꼬챙이를 들고 다가왔다.

"한쪽 눈 정도면 괜찮겠지."

"이 돼지 새끼가...."

"죽여달라고 빌게 해주마."

어이? 적당히 하지?

하지만 고문관은 '적당히'가 없었다. 돼지 새끼라고 한 게 그렇게 싫었어?

새빨갛게 달궈진 꼬챙이가 다가왔다. 그 섬뜩한 열기가 내 뺨을 타고 눈으로 올라오려는 순간, 난 '좆됐다.'를 속으로 외쳤는데, 고문관이 움찔하곤 뒤를 돌아봤다.

타이밍 한번 죽이네.

설마, 악당 새끼를 내가 반기게 될 줄은 몰랐다.

"비켜라."

"허, 헉! 카멜 공자님."

카멜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기사 하나를 대동했는데, 고문관은 그 둘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모습.

기사는 고문관을 무심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공자가 아니라 영주님이시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카, 카멜 영주님 오셨습니까!"

"거칠게 다뤘군."

신발이 피로 물들자, 카멜은 미간을 구겼다. 더러워진 신발 때문에 심기가 불편한 게 분명했다. 내 모습은 보고도 있지 않았으니까. 그 모습에 고문관은 넙죽 엎드렸다.

"바, 반항이 심해서 교육을 하고 있었습니다! 놈에게 뭐든 물어보십시오! 다 불게 만들 테니."

반항? 시발아, 배고파서 밥 달라고 한 거밖에 없는데 무슨 반항.

이걸로 네놈의 운명은 정해졌다.

크흠, 목을 한 번 풀었다.

그리고 억울한 얼굴로 크게 외쳤다.

"고문관님! 정보는 이미 다 불지 않았습니까? 제발 풀어주십시오!"

"뭐?"

내 말에 반응을 보인 건 카멜이었다. 당연히 고문관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무, 무슨 소리냐!? 난 네놈에게 정보 따윈 들은 기억이 없어! 어디서 수작질이야!"

"당신이 고문하면서 다 불라고 했잖아! 난 전달자라고! '그'에게 들었던 것을 전달하기만 하는데, 숨길 게 뭐가 있어!"

"…아니야! 아닙니다, 영주님!! 이 녀석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고문관."

"네, 네! 영주님, 말씀하십시오!"

"고문은 왜 한 거지?"

"…그건!"

그러게, 그냥 네 방에서 잠이나 처주무시지. 왜 악취미를 살려보겠다고 부지런히 날 고문하냐고. 이 두툼한 엿가락 같은 새끼야.

차마 손이 근질거려서 고문했다는 말은 할 수 없었나 보다.

고문관이 우물쭈물한 순간, 그의 운명은 정해졌다.

내가 어중이떠중이 죄수였으면 그냥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카멜의 민감한 '약점'을 알고 있는 그의 전달자다.

"리옹."

카멜이 나직이 이름을 부른 순간, 기사의 검이 벼락처럼 뽑혀 나왔다.

"제, 제발… 살려…! 커억!"

기사의 검이 고문관의 심장을 꿰뚫고 들어갔다. 주저앉은 고문관이 간절한 눈빛으로 올려다봤지만, 기사는 검을 뽑은 후 가차 없이 그 목을 날려버렸다.

데구르르―

목이 굴러와, 내 발밑에서 멈췄다.

공포의 한순간이 굴러온 얼굴에 담겼다.

당한 것을 되돌려 준 것뿐인데, 기분이 더럽다.

확실히 난 악당 타입은 아닌 모양이었다.

기사가 검을 털며 내게 다가왔다. 그는 품에서 붉은 병을 꺼내더니, 내게 먹였다.

회복 물약.

품질이 좋은 것인지, 컨디션이 빠르게 회복됐다.

그래도 한동안은 움직이기 힘들 것 같았다. 고문관 새끼의 손속은 그만큼 잔인했다.

잘 죽인 건가?

기사는 의자를 가져와 내 앞에 놓았다. 카멜은 의자에 앉은 후 나를 올려다봤다.

내 시선은 카멜에 닿기 전에 잠깐 기사에게 향했다.

브론즈색 머리카락에 무감정한 눈빛. 날렵한 검술을 쓸 것 같은 체구다.

묘하게 분위기가 카멜과 닮았다.

카멜의 입에서 나온 기사의 이름을 분명 들었다.

'리옹 마트레인.'

학살자의 오른팔.

리옹은 카멜이 지닌 회귀자의 지식으로 일인군단의 힘을 얻게 되는 카멜의 검 중 하나다.

이곳, 블라이어 기사단의 부단장으로 시작했다고 하더니, 이때부터 충성을 맹세하고 신뢰를 받았던 모양이었다.

이 자리에 리옹을 데려왔다는 것이 카멜의 신뢰를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

리옹은 아마 몇 차례의 시험과 숙고 끝에 선택됐을 것이다.

'호위가 필요한 녀석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겠지.'

카멜은 카리스마형 군주였다. 그는 무력에 큰 재능이 없는 대신 누군가를 지배하는 데 특출난 재능을 보였다.

그만큼 통찰력도 뛰어나고 심계(心計)가 깊어 쉽게 속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 놈을 속여야 한다.

위험한 도박이지만, 성공만 한다면 크룩스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해볼 만한 도박이었다.

"그럼, 들어볼까?"

"...."

"'그'가 너를 왜 보냈지?"

"동맹 제안입니다."

"동맹? 동맹은 이익이 서로 일치해야 가능한 것인데, '그'가 내게 원하는 게 있나?"

"황금입니다."

"...."

황금이란 말에 카멜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는 막대한 황금이 필요하고, 당신이라면 충분히 그 황금을 제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블라이어는 수많은 광산을 소유하고 있지만, 황금 광산은 없다."

"한 달 안에 생길 것이라 했습니다."

"흥!"

코웃음을 쳤지만, 카멜은 속으로 상당히 놀랐다.

'황금 광산의 존재를 알고 있다.'

광산 개발은 카멜의 다음 계획이었는데, '그'는 그 사실도 파악하고 있었다.

회귀 전 카멜의 기억 속에 없었던 인물.

대체 어떤 놈일까.

'설마, 나와 같은 회귀자인가?'

카멜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니다.

가진 '성질'이 달랐다.

카멜은 그를 모른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회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상대가 회귀자라면 번거롭게 정체를 밝히고 전달자를 보낼 필요가 없다. 어떻게든 회귀 경쟁자를 죽이기 위해 먼저 수를 썼겠지.

즉,

'나에 대해 알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는 건데.'

카멜은 일종의 '예지'가 아닐까 추측했다.

핵심은 그가 자신을 얼마만큼 알고 있냐는 것이었다.

많이 알면 많이 알수록 큰 위협이 되는 인물.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던 카멜이 미소를 띤 채 물었다.

"동맹을 거절한다면?"

"에토르 가문과 손을 잡겠다고 했습니다."

"하하하!"

카멜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광산 개발 이후 첫 발판으로 쓸어버릴 에토르 영지와 손을 잡겠다라.

이건 한마디로 카멜의 앞길을 철저히 막겠다는 뜻이었다. 정확하게 자신의 약점을 파고든 선택지.

"내가 아주 큰 착각을 했어."

카멜은 큭큭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미꾸라지 따위가 아니었다. 카멜은 이를 환하게 드러내며 웃었다.

그런 표정 변화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시발, 이건 좀 무서운데?'

누군가를 기필코 죽이겠다는 살심(殺心)을 드러냈을 때, 카멜은 웃는다.

바로 저렇게.

8화 그, 더미(Dummy)

이빨 보이지 마. 무서우니까.

다행히 어그로는 튀지 않았다.

카멜은 '그'라는 인물에 대해 큰 위협을 느끼는 것 같았다.

카멜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될수록 나에겐 좋다. 그래야 추후 나에게 향하는 시선을 떨어트릴 수 있을 테니까.

'더미(Dummy)를 놓길 잘했네.'

카멜에게 언급한 '그'는 일종의 더미였다.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

탈출 이후 생존에 필요한 힘을 얻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고, '그'란 더미는 카멜의 시선을 끌며 시간을 버는 역할을 할 것이다. 지금까진 더미가 카멜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듯 보였다.

"동맹을 통해 내가 얻게 되는 이득은?"

"모릅니다."

"몰라?"

"동맹 의사를 표한다면 직접 얼굴을 보고 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직접 얼굴을?"

그 말에 카멜이 흥미를 보였다.

"시간과 장소는?"

"보름 후 엘레토르 성곽 주변에 자리한 작은 마을입니다. 지도를 주신다면…."

"그건 나중에 알아보면 될 테고, 동맹 표시 말인데, 혹시 너를 풀어주는 건가?"

"...."

누가 지능캐 아니랄까 봐. 눈치가 더럽게 빨랐다.

하지만 단순히 목숨을 구걸하는 정도로는 안 된다.

악당에겐 더 뻔뻔해져야 한다.

"2, 2만 골드."

"뭐?"

"절 풀어주는 것과 2만 골드를 요구합니다."

금전 요구에 카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금 광산 지분을 거래 조건으로 내미는 상대가 고작 2만 골드를 요구하다니.

"널 풀어주는 건 그렇다 치고 2만 골드는 뭐지?"

"제가 쓸 겁니다."

"뭐?"

"제 노후 자금이거든요."

"...."

"저 암살자 그만둘 겁니다."

카멜은 피식 웃었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회귀 전, 자살 공격으로 자신의 얼굴에 큰 상처까지 남겼던 놈이, 이젠 눈앞에서 은퇴를 언급하며 돈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

뜻대로 흘러가지 않은 상황에 카멜은 짧게 혀를 찼고, 난 아주 해맑게 두 눈을 끔뻑이며 카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정말 시킨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이 정도까지 했으면 살려줘, 새끼야.

잠시 숙고하던 카멜은 곧 리옹을 불러 몇 마디를 남기고는 나를 바라봤다.

"동맹에는 신뢰가 필요한 법이지."

"무, 물론입니다! 당장 저를 풀어주신다면 '그'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겁니다."

"그 동맹 표시 말인데. 잠시 미뤄야겠어."

"…네? 그게 무슨."

"나도 사실 확인이 필요하니까."

무슨 확인이 필요하다는 거지?

그러고 보니, 리옹이 안 보인다. 이 녀석은 어딜 간 거야.

살짝 불안감이 올라왔을 때, 리옹이 누군가를 데리고 감옥에 들어왔다.

탁한 회색 로브를 걸친 작은 체구의 인물이었다.

"부르셨습니까?"

"네 능력이 필요하다."

눈앞의 사내가 로브를 벗는 순간, 나는 숨을 헙 들이켰다.

얼굴 전체부터 목 아래로 이어지는 부분까지, 모든 부위가 흉측한 문신으로 빼곡했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어딘가 섬뜩함을 자아냈다.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놈이었다. 인간을 많이 죽여본 느낌이 난다고 해야 하나?

소맷자락 사이에서 투명한 수정 구슬을 꺼내는 모습에 난 놈의 직업을 바로 파악했다.

'주술사!'

신비 혹은 흑주술로 크고 작은 기적을 발휘하는 존재들.

신비 쪽은 자연과 생명을 주로 다루기 때문에 해코지당할 걱정이 없지만, 눈앞의 놈은 아무리 봐도 흑주술 쪽에 특화된 놈 같았다.

악당 곁에 붙어 있는 놈이니 당연한 건가?

수정 구슬을 내밀고 물건을 품평하듯 나를 살피고 있는 눈빛이 영 불안했다.

"이놈의 기억을 어디까지 뽑을 수 있지?"

"죽여도 됩니까?"

죽여도 되냐니.

첫마디부터가 소름 돋는다.

이 문신충 새끼가.

그나저나, 기억을 뽑는다고? 그 짓이 벌써 가능해?

"죽는 건 곤란해."

"무슨 기억이 필요하신 겁니까?"

"최근 한 달 정도의 기억 정도라면?"

"백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카멜은 잠시 나를 바라봤다. 내가 백치가 됐을 때를 잠시 계산해보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다."

'…이런 시발.'

잠시 깜박했다.

카멜 저 새끼는, 피도 눈물도 없는 1챕터 대악당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조금 전까지는 분위기 좋게 교섭이 흘러가는 것 같더니, 놈은 처음부터 제대로 된 교섭을 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래도 나를 살려두는 것까진 좋았는데,

'배, 백치라니!'

위기감이 몰려왔다.

변수였다.

학살자의 세력을 돕는 흑주술사들이 등장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건 챕터 중반 부분이었다. 설마 이 시기부터 인간의 기억을 뽑아내는 흑주술사를 곁에 데리고 있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카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 발밑에서 의식을 준비하는 주술사의 모습에 난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그냥 붐(Boom)을 터트리고 다 같이 죽어버려?'

주술사는 몰라도, 리옹의 보호를 받는 카멜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물론 자살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난 살고 싶다고.

"보름 전까지 그가 말한 장소로 제가 도착해야 합니다!"

"그 장소로 '살아서만' 가면 되는 거 아닌가?"

"아, 아니! 그 장소는 저만 알고…!"

"기억을 뽑아내면 알게 되겠지."

말이 안 통한다.

분명 다른 의도로 내 기억을 뽑아내려는 게 분명했다.

'그의 정체!'

카멜은 '그'가 자신과 접촉했을 거라 확신하고 이 짓을 벌이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억이 뽑히면 구라가 들킬 텐데, 그럼,

'죽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때, 주술사가 몸을 일으키더니, 카멜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자리를 잠시 비워주셔야겠습니다."

"나가란 말이냐?"

"의식에 필요한 약초를 태울 건데, 정신에 무척 해롭습니다."

"정신에 해로운 약초?"

"파양초란 것인데, 중독되면 정신 방벽이 무력화됩니다. 기억을 뽑기 위한 사전 준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주술사의 마지막 말에 내 정신이 번쩍 들었다.

파양초?

크룩스 암살자들이 내 머리맡에서 태웠던 독초의 이름과 같았다. 파양초의 효과가 대상의 정신 방벽을 무너트리는 것이었나.

그러고 보니, 익숙한 풀들이 내 밑으로 잔뜩 깔려 있었다.

이게 파양초라면.

'나한테는 안 통했는데?'

장시간 파양초를 흡입해도 중독은커녕 멀쩡하기만 했다. 그 덕에 암시에서 벗어나 이렇게 살아남지 않았나.

그 파양초를 나에게 태운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쳤을 때, 난 카멜을 향해 다급히 외쳤다.

놈이 등을 돌린 채 방을 벗어나려고 했기 때문이다.

"소, 소용없을 겁니다!!"

다행히 놈의 발걸음을 멈추는 데 성공했다.

"주술에 걸리지 않을 거란 말입니다. 제 기억을 알아내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그'에게 가호를 받았으니까요. 그는 이것까지 예상했습니다."

예상은 무슨.

일단 생각난 대로 지껄인 것이다.

왠지 버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내 외침에 바닥에 깔린 파양초를 태우던 주술사가 클클클 웃으면서 나를 비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릴 지껄이는구나. 네 몸에 흐르는 기운으론 파양초를 버틸 수 없어. 반나절이면 네 영혼에서 기억을 모조리 뽑아내고도 남는다."

"...."

"흐흐흐, 두렵나?"

당연히 두렵지 문신충 새끼야.

너였으면 오줌 지렸어.

난 대답 대신 입을 꾹 다문 채 카멜만 바라봤다. 때론 침묵이 더 강한 설득력을 보일 때가 있다. 제발 먹혀라.

"네놈 말대로 된다면 다시 얘기하지."

하지만 씨도 안 먹힌 채 카멜은 기사와 함께 문밖으로 사라졌다.

나와 주술사만 공존하는 공간.

썩은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는 놈을 보니, 자살 충동이 올라왔다.

'확, 터트리고 죽어?'

주술사는 투명 구슬을 움켜쥔 채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그 순간 구슬에서 반응이 나타났다.

파아아앗―!

"...!"

구슬에서 보랏빛이 흘러나와 주술사의 몸을 에워쌌다.

그때부터 주술사는 알 수 없는 주문을 웅얼거리며 파양초를 태우기 시작했다. 파양초가 타며 감옥 안을 뿌옇게 채웠지만, 주술사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모습이었다.

몸을 둘러싼 보랏빛이 주술사의 정신을 보호한 듯 보였다.

"쿨럭, 쿨럭!"

전에 암살자들이 태웠던 양보다 훨씬 많았다.

지독한 연기에 눈과 목이 따가웠다. 화생방이 떠오를 정도의 매캐함.

다행히 그것 빼곤 멀쩡했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파양초는 내게 안 통한다.

'설마, 내 능력인가?'

소설 속으로 흘러들어온 나에게 어떤 특별한 능력이 주어진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처음에는 이 몸뚱이의 능력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건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랬다면 암시에 넘어가 카멜 앞에서 붐(Boom)을 터트리지 않았겠지.'

파양초를 견디는 힘은 분명 나와 관련이 있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보랏빛으로 물든 연기 속은 음울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어느 순간부터 주술사는 내 눈앞에 수정구를 올리고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기억을 뽑아내려는 의식 같은데, 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파양초는 파양초고 사람을 홀리듯 빛을 뿌리는 수정이 왠지 위험해 보였다.

감옥에선 연신 주문 소리만 흘러나왔다. 제법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어느 순간,

"...."

주문이 뚝 멈췄다.

난 살며시 눈을 뜨곤 앞을 바라봤다. 주술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수정구를 살피고 있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주술이 실패한 듯 보였다.

'백치가 되는 건 피한 건가.'

당당하게 큰소리를 쳐놓긴 했는데, 주술이 진짜 안 통할 줄은 몰랐다.

내 능력이 파양초의 면역에만 국한된 게 아닌 건가?

이건 여유가 된다면 꼭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의 생존에 정말 큰 힘이 될 것 같았으니까.

"네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내 상태가 완전 멀쩡해 보이자, 주술사가 내 목을 거칠게 움켜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자, 잠… 커억!"

이 문신충 새끼야. 이렇게 목을 조르면 대답을 못 하잖아. 대답을 듣고 싶으면 목을 놔달라고.

버둥거렸지만, 쇠사슬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목을 움켜쥐던 주술사가 갑자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전보다 거칠고 사납다.

수정 구슬이 내 눈앞에 둥둥 떠올랐다.

뭔가 심상치 않았다.

번쩍―

주술사의 두 눈이 짙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그 보랏빛 눈동자와 마주치자 머리가 지끈거리더니 곧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고통으로 바뀌었다.

"크아아악!"

내가 비명을 지르는데, 뇌리로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레 같은 놈! 꿇어라!'

성난 주술사의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내 정신을 강제로 집어삼키는 느낌.

최면에 걸린 듯 내 눈동자 역시 주술사와 같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더니 공허함이 몰려왔다. 진짜 백치가 될 것 같은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렇게 고통과 혼란이 잠재된 의식 속에서 정신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였다.

쾅―!

"...!"

머릿속에 큰 폭발이 터졌다.

아니, 폭발이 터진 것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카작―!

허공에 둥둥 떠 있던 수정 구슬에 금이 가더니 파삭하며 깨져버렸다.

내 목을 조르던 주술사의 손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난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숨 막혀 죽을 뻔했다.

"크윽! 이게 무슨…!"

반쯤 나갔던 정신이 돌아왔다.

두 눈에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눈물인 줄 알았는데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액체는 붉었다.

뜨거운 콧물도 마찬가지.

눈, 코, 입 그리고 귀에서 검붉은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하지만 난 그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고 바닥 밑 참혹한 광경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쓰러진 주술사가 보였다.

그런데,

"...머리가."

주술사의 머리가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폭탄에 맞은 것처럼.

9화 아, 빌어먹을 신이시여

소란스러움을 들은 것일까.

닫혔던 감옥 문이 활짝 열리며 기사 리옹이 들어왔다.

그는 눈앞의 상황을 둘러보곤 표정을 굳혔다. 잠시 후, 연기가 빠지고 카멜이 손수건으로 코를 막은 채 들어왔다.

그는 머리가 터져 죽은 주술사를 잠시 응시하더니 내게 시선을 던졌다.

이유를 묻는 눈빛이다.

눈 떠보니 벌어진 상황이라, 나도 뭐라 대답을 해줄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지.

조금 전 던진 말이 있는데.

"소용없을 거라 말하지 않았습니까."

"네놈이 한 짓이냐?"

"전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가호가 제 목숨을 살렸을 뿐입니다."

씨익―

난 처음으로 카멜 앞에서 썩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왠지 그러고 싶었다.

그 미소에 답을 하듯,

"리옹."

"네."

"가서 주술사들을 더 데려와라."

뭐 이 새끼야?

카멜의 지시에 리옹이 주술사 셋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비주얼과 풍기는 기운이 딱 봐도 흑주술을 다루는 놈들이었다.

헛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영지 한 곳에 웬 주술사들이 이렇게 많아? 특히 흑주술사들은 악명이 높아 개인플레이를 선호했기에 이렇게 모여 있는 경우가 드물었다.

즉, 대가를 받고 카멜 곁에 머무는 것이 분명했다.

'회귀 직후부터 주술사들을 포섭한 건가? 어떻게?'

주술사들은 돈으로 움직이는 이들이 아니었다. 고작 공자 신분이었던 카멜은 무엇을 제공했기에 주술사들이 곁에 머무는 거지?

'…설마?'

순간 카멜이 공자 시절에 행했던 잔혹한 행보가 떠올랐다.

마을 여러 곳을 몰살시키고 다닌 사건.

그리고 사라진 시체들.

이때부터 싹수가 미쳤다고 생각했는데, 그 짓의 이유가 주술사들의 포섭을 목적으로 했다면 확실히 이 새끼는 미친놈이 맞았다.

인간을 대가로 지불하고 저들을 곁에 두는 것이었으니까.

'부친이 암살자를 보낼 만도 하네.'

물론, 그 암살자 파티 중 한 명으로 내가 포함된 것은 지독한 불행이었다. 그리고, 그 불행은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이놈의 기억을 뽑아내는 자에게 마을 하나를 통째로 주지."

내 생각이 맞았다.

힘을 위해 영지민도 물건으로 취급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새끼.

그 잔혹한 새끼가 나를 노리고 있으니 죽을 맛이었다.

"클클클, 안 그래도 제물이 부족했는데."

"이놈은 내 거야. 눈독 들이지 마라."

"머리가 날아간 코로토니의 시신이 안 보이나? 우습게 보지 마라."

마을 하나면 그 수가 천에 이른다.

실로 파격적인 포상이라, 주술사들은 각자 탐욕을 드러낸 채 나를 잡아먹을 듯 다가왔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아, 빌어먹을 신이시여."

평소에 관심도, 찾지도 않았던 신을 찾았다. 이딴 상황에 날 던져 놨으니 뭐라도 책임을 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주술사 한 명이 성큼 다가와 내 앞에 섰다.

마약 중독자처럼 붉게 충혈된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며 웃는다.

무서워 이 미친 새끼야.

딸랑― 딸랑― 딸랑―

이번엔 방울이냐?

주술사의 손에 쥐어진 작은 방울들이 시끄럽게 울어댔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끄아아악!"

두통이 다시 시작됐다.

* * *

퍽―!

"...."

카멜은 주술사의 머리가 터지는 광경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첫 번째로 죽은 주술사와 똑같은 몰골로 죽은 주술사를 바라보며 그는 생각이 복잡해졌다.

암살자가 말한 대로 놈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마치 주술사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처럼 보일 정도.

'이게 가호라고?'

카멜은 눈썹을 찌푸렸다.

주술을 건 주술사의 머리를 박살 내는 가호라니. 이딴 가호는 듣도 보도 못했다.

그의 기억 속에도 없는 능력.

"끄아아악!"

뒤이어 두 번째 주술사가 다른 방법을 시도했다가 머리를 움켜쥐더니 뒹굴기 시작했다.

눈이 뒤집히고, 침을 질질 흘리는 것이 정신이 나가버린 것 같았다. 잠시 후, 축 늘어진 주술사. 가슴이 움직이지 않는다.

죽었다.

카멜은 셋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노인을 빠르게 불렀다.

"렌구아."

"부르셨습니까?"

"지시를 변경한다. 놈의 기억이 아니라 가호가 뭔지 알아내."

"시도는 해 보겠습니다만…."

"위험할 것 같으면 바로 중단해라. 문책하지 않겠다."

"알겠습니다."

렌구아는 현재 그가 포섭한 주술사 중에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닌 이였다.

이곳에서 그를 잃으면 앞으로의 대계에 큰 차질이 생기기 때문에 카멜은 그의 안전부터 챙겼다.

렌구아는 암살자로부터 두 걸음 떨어진 채 수정구를 붙잡고 여러 가지 주문을 외웠다.

주문마다 렌구아의 반응은 다양했다. 미간을 좁히거나,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고, 가슴을 움켜잡거나 피를 토하기도 했다.

잠시 후, 구슬에서 손을 뗀 그는 질린 표정으로 암살자를 바라보곤 카멜 앞에 섰다.

"가호가 반응을 보이는 건 정신 계열뿐입니다."

"자세히."

"놈의 정신이나 영혼에 충격을 가하면 잠시 후 지독한 반발력이 돼서 돌아옵니다. 주술사들이 머리가 터지거나 미치는 이유가 그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외에는?"

"보다시피 몇 가지 저주를 걸어봤는데…."

카멜의 시선이 암살자에게 닿았다.

부들부들 떨며 거품을 물고 있는 모습. 고통스러운지 온몸을 벌레처럼 배배 꼬며 비명을 지르고 있다.

육체에 건 저주의 여파인 듯싶었다.

카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 계열 빼곤 아무것도 아니라는 소리다. 하지만 가장 필요한 부분이기도 했다.

'우습게 볼 놈이 아닌가?'

카멜은 '그'에 대한 경계심을 한층 더 높였다.

정체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쉽게 상대할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과 척지고 에토르를 돕는다면 무척 골치가 아파질 것 같았다.

"기억을 뽑아내는 건 불가능하다는 건가? 재료나 제물은 얼마든지 제공해줄 수 있다."

"…그게."

"솔직하게 말해라. 불이익은 없을 테니까."

"제 실력이 미천하여 저자의 기억을 건드리는 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오르도르 숲의 마녀라면 가능할 것 같은데…."

렌구아가 한 마녀를 언급하자 카멜은 짧게 신음을 흘렸다.

오르도르 숲의 마녀.

오르도르의 숲에는 수많은 마녀가 살아가지만, 오르도르 숲의 마녀라 불리는 이는 한 명뿐이다.

확실히 그녀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를 포섭하기엔 아직 그가 가진 힘이 너무나도 미약했다.

그녀를 불렀다가 오히려 자신이 잡아먹힐 수 있었기에, 카멜은 그녀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저주를 풀고 치료해라. 암살자 놈에게 듣지 못한 말이 있으니."

"알겠습니다."

기억을 뽑아내는 데 실패했으니, 이젠 저 암살자를 매개체로 '그'에게 접근해야 했다.

카멜이 그 다음 움직임에 대해 고민하는 사이, 렌구아는 저주의 효과를 제거하기 위해 서둘러 움직였다. 암살자에게 걸린 저주가 제법 많아서 서두르지 않으면 불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쇠사슬에서 완전히 해방됐지만, 암살자는 지독한 후유증으로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모습을 무심히 지켜보던 카멜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쯧. 오늘은 대화가 힘들 것 같군."

"죄송합니다. 하루면 정신을 차릴 겁니다."

"낼 다시 오지. 리옹. 시체를 처리해라."

"충."

카멜과 렌구아가 감옥을 나가고, 리옹은 병사를 불러 시체들을 처리했다.

리옹이 자리를 비우고, 남은 병사들이 바닥의 피를 닦고 청소하고 있을 때, 쓰러져 있던 암살자가 정신을 차렸다.

"으…."

"어? 정신이 든 모양인데?"

"근데, 뭐라고 웅얼거리는 거야?"

"가까이 가봐."

"내, 내가? 왜?"

"뭔, 쪽팔리게 겁을 먹고 그래. 손발에 수갑 채운 거 안 보여? 의식을 차리면 곧장 보고하라고 지시가 내려왔다고. 확실하게 해야지."

병사는 창을 쥔 채 암살자에게 다가갔다.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암살자는 고개를 내리깐 채 작게 웅얼거리고 있었다.

"배…."

"뭐라고?"

"배, 배고파, 이 시발놈들아."

"...."

살았다.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 이번에는 내 말을 뒷구멍으로 흘리지 않고 음식이 제공됐다.

배가 고픈 것도 있지만, 식사 바구니 안에 든 음식은 매우 훌륭했다.

빵은 부드러웠고, 수프도 달달하고 뜨뜻했다. 갓 조리해서 나온 돼지고기와 식후에 먹으라고 와인까지 내줬다.

현대 음식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퀄리티.

이건 평민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닐 것이다. 제공된 음식을 통해 현재 카멜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일단 위기는 넘긴 것 같은데.'

흘러가는 분위기를 보니, 더는 목숨을 가지고 위협당하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애초에 카멜의 목표는 내가 아니라 '그'였으니까.

난 마지막 남은 빵 한 조각까지 우걱우걱 씹어 넘겼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공간이고, 머리 터진 시체까지 봤다. 그런데도 음식이 잘 넘어가는 걸 보니, 알게 모르게 환경에 적응이 된 모양이었다.

'그래도 조금 전 고통은 적응이 될 것 같지 않네.'

주술사의 저주는 정말이지 끔찍했다.

고문관에게 매질 당한 기억이 좋은 추억으로 남을 정도니, 그 고통의 강도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었다.

'책에서 보던 저주를 내가 경험하게 될 줄은….'

그래도 얻은 건 있었다.

주술사 렌구아.

놈의 이름은 나도 알고 있다.

카멜이 만든 흑주술사 단체.

[주술사들의 둥지]의 핵심 인물 중 한 명. 그런 그가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다.

'정신 계열이라….'

정신 쪽 공격을 흡수하거나 튕겨내는 능력이라고 했다.

일종의 반사 같은 건가?

어느 정도의 충격까지 버티고 튕겨내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좋은 능력이었다. 이 능력 덕에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이니 말이다.

'문제는 내가 터무니없이 약하다는 건데….'

육체에 걸린 작은 저주 몇 가지에 저승의 문턱을 밟고 돌아왔다.

정신 방벽이 강하다 한들 칼질 한 번에 죽을 수 있다는 의미다.

'오라 1성.'

이제 갓 마나에 눈을 뜬 단계.

악당의 수하, 그 수하가 부리는 하수인들에게도 죽을 수 있는 무력.

'갑자기 왜 눈물이 나지?'

어떻게 보면 소설 속 악당 세계관에선 최약체인 셈이다.

악당들의 세상에서 무력은 곧 생존과 직결된다. 지금 상태라면 누굴 만나든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이를 타개할 방법이 필요한데.

'빨리 강해지는 방법.'

난 고민을 하다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배가 부르니 잠이 쏟아진다. 확실히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 * *

"입어라."

눈을 떴을 때, 리옹이 나를 찾아왔다. 여시종 하나를 데리고 왔는데, 그녀가 내민 평상복을 보자, 내 몰골이 떠올랐다.

확실히 엉망진창이긴 하지.

고문으로 피딱지가 된 옷은 걸레짝이나 다름없었다.

옷을 벗으며 씻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는데, 시종이 물통을 가져와 내 몸을 닦기 시작했다.

'갑자기 웬 호의?'

카멜의 의중이 의심됐지만, 난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렌구아가 약초를 덕지덕지 발라놓은 탓에 냄새가 지독했거든.

그래도 렌구아가 신경을 써서 치료한 덕분에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도 내 몸은 걷는 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회복이 되었다.

병 주고 약을 준 셈인데, 이것조차 감사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도 서럽다.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자, 리옹이 철문을 열었다.

"따라와라."

난 리옹의 뒤를 따라 철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횃불로 이어진 끝없는 통로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철문이 존재했다. 지하 감옥은 독방 구조로 이뤄진 듯 보였다.

복도 끝에 다다랐을 때, 계단을 보며 드디어 태양을 보나 싶었는데,

'응?'

리옹은 위층 계단이 아닌 아래층 계단으로 나를 이끌었다.

왜 지상이 아니라 지하로 더 내려가는 거지?

여기 지하 감옥이잖아.

"어디로 가는 겁니까?"

"...."

리옹이 대답해줄 리 없다고 예상했기에 난 욕설을 삼키며 그 뒤를 따랐다.

지하 3층?

지하 4층?

지하 감옥은 생각보다 깊었다.

나는 나선형 계단을 따라 계속 내려갔다.

계단이 끝나는 가장 밑층까지 내려왔을 때, 리옹이 눈앞에 닫힌 커다란 철문을 톡톡 두드렸다.

천천히 열리는 철문.

그리고,

―살려줘!

―아악!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비명 소리.

피 냄새와 악취.

'설마, 아니지?'

문득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을 때, 문이 활짝 열리며 안쪽 광경이 드러났다.

"시발…."

나도 모르게 욕설이 흘러나왔다.

조용했던 독방 감옥과 달리, 이곳은 수많은 인간이 갇혀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었다.

긴 복도 양쪽으로 철창이 끝없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 안에 갇힌 엄청난 수의 사람들.

그들은 나를 보자, 살려달라며 아우성쳤다.

그 복도 끝,

그곳에서 카멜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대한 식탁, 화려한 만찬을 준비한 채.

10화 만찬 분위기 죽이네.

'설마....'

지하 감옥 가장 밑바닥.

이 지옥 같은 풍경을 본 순간, 문득 '그곳'이 떠올랐다.

학살자 카멜 블레이저의 핵심 세력 중 하나이자, 주술사들로 이뤄진 광기 섞인 연구 집단.

'주술사들의 둥지' 말이다.

주술사들의 둥지는 제물을 이용해 저주와 주술을 연구 혹은 강화하는 반인격적인 조직 단체였다.

제물은 당연히 '인간'.

불타버린 마을에서 사라진 영지민들이 어디로 갔나 했더니, 여기 다 모여 있었다.

"따라와라."

"...."

난 입을 꾹 다문 채 리옹 뒤를 따라 긴 통로를 지났다. 길 사이사이 철창에는 잡혀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하나같이 텅 비어있는 눈동자, 체념 어린 눈빛이다. 그들은 살아있지만, 이미 죽은 자들처럼 보였다.

그러다 주술사들이 나타나면 살려달라 외쳤다.

비어있는 공간 곳곳에 주술사들의 흔적이 눈에 띄었다. 대부분 잔혹한 흔적으로 가득했다.

이곳은 주술사들의 둥지 혹은 그 초기 단계의 장소 같았다.

'등장 전부터 주술사들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우고 있었어.'

소설에선 카멜이 영주에 등극한 뒤 주술사들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설마, 카멜의 첫 장면 전부터 이렇게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을 줄 몰랐다.

암살자들의 대화를 엿들을 때부터 느끼긴 했지만, 이곳은 단순한 소설 속 세상과 달랐다.

너무나도 짙은 현실성과 인과 관계.

완벽한 하나의 세계를 보는 것 같았다.

'소설 속 내용만 믿고 움직이다간 대가리 제대로 깨지겠는데?'

눈앞의 광경에 큰 경각심을 느끼고 있는 사이, 카멜 앞에 당도했다. 나를 본 카멜이 옆자리 쪽으로 시선을 주며 말했다.

"앉아라."

그 통로 끝, 공터는 딴 세상처럼 꾸며져 있었다.

크고 고급스러운 원탁 테이블 위에는 화려한 만찬이 차려져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고급 음식들이 크리스탈 접시에 가득 담겨 있었고, 몽롱한 색감을 지닌 술과 와인, 눈이 즐거운 디저트로 꾸며져 있었다.

완벽한 만찬이었다.

뒤쪽에서 들려오는 처절한 비명만 아니라면 말이지.

'만찬 분위기 죽이네. 미친 사이코 새끼.'

인간을 짐승처럼 가둔 감옥 한가운데서 식사라니.

그 어떤 산해진미를 먹어도 체할 것 같았다.

'일부러 보여준 건가?'

심리적인 압박을 위한 장치였다면 성공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나도 갇힌 이들처럼 될 수 있겠단 두려움이 밀려왔으니까.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자리에 앉았다. 내 시선은 곧 옆을 향했다. 손님은 나 하나가 아니었다.

결박된 중년 사내가 오른쪽 옆자리에 앉아 있는데, 풍겨오는 분위기와 다부진 체격을 보니 기사처럼 보였다.

카멜을 바라보는 사내의 표정은 허탈함으로 가득해 보였다.

삶의 의지가 꺾인 느낌이랄까.

내가 도착하자, 리옹이 그 사내의 결박을 풀어줬다. 리옹이 곁에 오자, 사내의 표정이 순간 사나워졌다.

그는 원망 섞인 시선으로 리옹을 노려봤다.

"리옹 부단장, 그대는 부끄러움을 모르는가?"

"단장, 전 두 공자 중 한 명을 택한 것뿐입니다."

단장?

난 두 눈을 크게 뜨곤 분노에 찬 중년인을 바라봤다.

저자가 블라이어 영지의 기사 단장 록터 펠리스라고?

"헛소리! 선택은 네놈이 아니라 주군이 하는 것이다!"

"주군은 돌아가셨습니다. 승계 유언조차 없이."

"주군은 네놈이 죽인 거나 다름없어!"

"1공자님의 암살 소식에 충격을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애석한 일입니다."

"이놈!!!"

억압이 풀린 록터는 식탁에 놓인 나이프를 낚아채곤 벼락처럼 휘둘렀다. 그는 블라이어 영지에서 가장 강한 기사다. 작은 나이프 하나만 있어도 인간병기가 될 수 있다는 뜻.

하지만 나이프는 허무할 만큼 쉽게 리옹에게 막혔다. 블라이어 영지 유일한 5성급 기사라고 보기엔 형편없는 모습이었다.

'마나를 봉인당한 건가?'

이곳이 주술사들의 둥지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주술사 렌구아의 실력이라면 기사 단장의 마나를 일시적으로 봉인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까.

제압당한 록터가 카멜을 노려보더니 짙은 탄식을 토해냈다.

"공자! 어찌 이리 참담한 짓을 벌였단 말입니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이 상황에서 저를 농락할 생각 따윈 집어치우십시오! 주군과 1공자… 당신이 한 짓 아닙니까!?"

카멜은 피식 웃고는 찻잔을 기울였다. 차를 음미하며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그는 잔을 내려놓곤 록터를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록터 펠리스, 그대는 이미 알고 있지 않았나?"

"무엇을 말입니까?"

"부친이 날 죽이기 위해 암살자를 고용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건!"

"내가 그 시각 첨탑에 있을 거란 사실도, 그쪽 경비를 뺀 것도, 그 시각 내성 경비 정보를 제공한 것도, 전부 그대가 한 짓 아닌가?"

"...."

"난 그저 살아남기 위해 반격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승리했을 뿐이지."

"…설마 창고를 불태운 사람이?"

"그대의 시선을 돌리려면 그 정도 대가는 당연하다."

"이, 이런 미친! 창고에 저장된 광물들은 영지의 1년 예산과 다름없습니다! 다 같이 굶어 죽을 작정입니까!?"

"난 성격 좋고 멍청하기만 한 형님과 달라. 아무 대비도 없이 그랬을까?"

"윌리엄 공자는 영지를 사랑했습니다. 당신과 다릅니다!"

"나도 영지를 사랑한다.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지."

록터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감옥에 갇힌 영지민을 가리켰다.

"…저게 당신이 사랑하는 방식입니까?"

"나를 위해 희생하는 이들이다. 영광스럽지 않나?"

"다, 당신은 미쳤어!"

"그 미친 결과가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내 선택이 옳았던 거다. 난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쭉 살아있을 테니까."

록터는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정도로 비틀린 신념이라니.'

그동안 발톱을 숨기고 있던 2공자가 발톱을 드러냈다.

그런데 부친과 형제를 죽인 것도 모자라, 영지민을 물건 취급하는 영주라니. 상상을 초월하는 미치광이였다.

록터는 앞으로 먹구름이 낄 영지를 떠올리며 절망에 빠졌다. 영지에 헌신했던 기사 단장의 삶이 전부 부정당한 것 같았다.

"칙칙한 대화는 이쯤에서 끝내지."

카멜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시종들이 우르르 나와 록터와 내 앞에 식기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카멜은 나이프와 포크를 들더니, 나와 록터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대들을 위해 준비한 만찬이다."

록터는 그런 카멜을 경멸스럽게 노려봤다.

그리고 나는?

'시발, 이 분위기에서 뭘 처먹으라고.'

난 미간을 좁힌 채 눈앞의 스테이크를 내려다봤다. 이때만큼은 록터의 패기가 부러웠다. 하지만 난 새가슴이라서 말이지.

고민은 짧았다. 카멜이 핏물이 흐르는 스테이크를 오물오물 씹으며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으니까.

표정 없는 눈빛이 싸늘하다.

"자, 잘 먹겠습니다."

난 어색하게 웃으며 식기를 집어 들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레드 콤보를 먹어도 토할 것 같은 분위기지만, 나한테 거부권이 있을 리 없다.

내 현재 포지션은 아무것도 모르는 '그'의 전달자다. 카멜의 눈에 난 돈에 욕심 많고 제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인간이어야 했다.

체할 것 같아서 소녀처럼 깨작깨작 먹고 있는데, 카멜이 내 잔에 와인을 따르며 물었다.

"렌구아가 그러더군. 심장에 자폭 벌레가 기생하고 있다고."

"...."

"왜 자폭하지 않았을까?"

"그분 덕에 아, 암시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아아, 그 빌어먹을 '가호' 말이군. 이해했어."

더는 질문이 이어지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 속의 식사.

속이 더부룩했다.

이 정도 식사 자리라면 앞으로 대기업 회장과 일대일 식사에서도 농담 따먹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새 식사를 끝낸 카멜이 물어왔다.

"두 사람에게 제안 하나 하지."

'제안?'

여기서 제안할 게 있나?

록터는 그쪽을 못 죽여서 안달이고, 난 그쪽으로부터 얼른 탈출하고픈 사람인데?

"내 밑으로 들어와라."

"...!"

갑자기 카멜의 머릿속을 보고 싶었다. 대체 어떤 정신머리를 가지고 있어야 이런 정신 나간 제안을 할 수 있는 건지 말이다.

"그 대가로 살려주지."

하지만 카멜의 다음 말을 듣곤 생각이 많아졌다.

동맹 표시를 위해서라도 내 목숨은 붙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살려준다라.

이게 무슨 뜻일까?

"답할 가치도 없는 제안이군요."

록터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비웃음을 날렸다.

명백한 거절 표시.

그 표시에 카멜이 피식 웃었다.

"죽고 싶나?"

"죽이십시오."

"그래? 그대를 따르는 이들마저 모조리 처형할 생각을 하니 안타깝군."

"그,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1공자를 암살한 이들 배후에는 과연 누가 있었을까?"

"그건 당신이잖아!"

단장의 말투가 사납게 변했지만, 카멜은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록터, 어리석구나. 현재 블라이어의 주인이 누군지 잊었느냐? 바로 나다."

"...."

"배후는 지목하기 나름이지."

카멜이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생각해보니, 난 1공자를 죽인 암살자로 잡혀 왔다. 내가 거짓 증언을 하면 역적처럼 다 엮어서 처형시킬 수 있다는 말이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거짓 증언을 못 하겠다는 개소리는 집어치우자.

난 바로 할 거다.

다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거기까진 갈 것 같지도 않았다.

록터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으니까.

"원하는 게 뭡니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충성을 맹세해라."

"…그거면 됩니까?"

"창고를 태운 책임도 져야겠지. 광산에서 6개월간 노역을 하게 될 거다. 대신, 모두 살아남겠지."

록터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그러곤 힘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 하나를 희생해 모두를 살릴 수 있는 제안, 거절은 힘들다.

'와, 악당 같은 새끼.'

악당에게 악당이라고 하는 게 이상한 건 아니지만, 이 새끼는 진짜 완벽한 악당 새끼였다.

또한, 그 심계(心計)가 무섭기도 했다.

'기사 단장을 볼모로 삼아서, 남은 세력을 흡수할 생각이야.'

블라이어 영지의 주도권은 현재 카멜이 쥐고 있지만, 아직 전대 영주와 1공자의 세력이 남아 있는 상황이다.

같은 날, 같은 시각 가주와 1공자가 죽었으니, 2공자 카멜을 의심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고, 이는 자칫 큰 내전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광물 창고마저 홀라당 타버린 상황에서, 이들까지 등을 돌린다면?

영지는 순식간에 마비가 돼버린다. 카멜로서는 달갑지 않은 상황이니, 그 전에 두 세력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록터를 이용하려는 것 같았다.

'중심을 잡아줄 존재가 없으면 두 세력은 힘을 잃게 되니까.'

록터와 그 지지 세력이 광산에 고립된 사이, 카멜은 회유와 겁박을 통해 잔여 세력을 완벽히 흡수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포섭하려고 하지?'

내 가치는 전달자 외엔 쓸데가 없었다. 의문이 길었지만, 답을 기다리는 카멜의 시선에 바로 고민을 접었다.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록터의 경우를 보니, 애초에 거절은 불가능해 보였다. 회유냐 협박이냐의 차이겠지. 차라리 넙죽 엎드린 후 기회를 엿보는 게 낫다.

일단 사지(四肢)가 멀쩡한 채로 이곳만 탈출하면 될 것 같았으니까.

"눈치가 빨라서 좋아. 동맹 표시를 전달하고 영지로 복귀하면 네 심장에 기생 중인 벌레를 제거해주지."

주술사를 통해 붐의 존재를 파악한 모양인데, 이 벌레의 작동 원리는 카멜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니 벌레를 회유 카드로 내밀었겠지.

다만, 벌레는 내가 자살하고 싶지 않은 이상, 내게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돌아와? 내가 왜 돌아와? 미쳤냐?'

탈출하는 대로 블라이어 영지로는 오줌도 누지 않을 생각이었다.

"호위를 붙여주마."

"…네?"

"목적지를 들른 후 곧장 복귀하도록."

뭐 이 새끼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카멜이 어떤 인간인지 잘 알고 있다.

안전하게 복귀할 수 있도록 호위를 붙여준단다. 말이 좋아 호위지, 이건 감시다.

놈의 목적은 뻔했다.

나를 붙잡아 이곳으로 끌고 오는 것.

그 전에 딴 생각 하지 못하도록 회유하는 척 친절을 베풀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왜?

'...아!'

카멜의 의도를 파악했다.

가호!

'그'가 건 가호가 영원할 리 없으니, 가호의 힘이 끝나면 기억을 뽑아내서 '그'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려는 것이다.

기억이 뽑히면 죽거나 백치가 된다.

'이 미친 새끼가!'

벌떡 일어나 머리를 들이박고 싶었지만, 카멜 곁을 지키는 리옹과 눈이 마주치자 몸이 절로 웅크려졌다.

진짜 몸을 터트리고 같이 죽어?

물론, 말뿐이란 걸 나도 잘 안다. 짧게 숨을 뱉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괜찮아. 예상 못 한 것도 아니고.'

미행이 아니라 대놓고 옆에 붙일 줄은 몰랐지만, 일단 밖으로만 나가면 기회가 있을 것이다.

정 안 되면 '그곳'으로 가버리면 되고.

대략 보름 정도.

시간은 충분히 있으니, 고민은 접어두고 눈앞의 상황부터 얻을 게 있는지 생각해야 했다.

왜냐하면, 옆에 있는 사내.

'록터 펠리스가 내 곁에 있으니까.'

블라이어 영지의 기사 단장, 록터 펠리스.

처음 본 순간 어쩌면 큰 기회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록터에게 제안한 카멜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괜히 악당이겠는가.

록터가 볼모로 광산에 갇혀 있는 동안, 록터의 지지 세력들은 하나둘 숙청당해 사라진다.

피의 숙청.

이를 계기로 록터 펠리스의 인생은 180도 바뀐다.

'배덕의 기사 록터 펠리스.'

광산을 탈출한 뒤 그는 '배덕의 기사'라 스스로를 칭하며 카멜 블레이저에 대항하는 저항군의 수장으로 등장한다.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에서 등장하는 첫 번째 영웅.

배덕의 기사와 인연을 만들 기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11화 내 이름은….

배덕의 기사는 학살자의 세력 확장을 저지해줄 강력한 대항마였다.

카멜의 공포 정치에 희생당한 이들 대부분이 배덕의 기사를 중심으로 한, 저항군에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기간은 짧았다.

불과 2년.

배신자의 존재로 배덕의 기사가 암살당하면서 저항군은 그 중심을 잃고 삽시간에 무너졌고, 카멜 세력은 그때부터 엄청난 성장세를 보이며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그만큼 배덕의 기사가 카멜의 성장세에 큰 걸림돌이 된다는 소리였다.

'이 사실을 카멜이 알았다면 눈앞의 록터는 바로 죽었겠지.'

하지만 카멜은 1회차 회귀를 한 악당일 뿐이고, 난 그런 카멜의 회귀 스토리를 전부 알고 있는 독자였다.

'정보를 알려줘야 하는데.'

소설 속에 들어오면서부터 나는 이미 카멜과 웃으며 지내긴 그른 상황이었다. 아니, 미래엔 같은 하늘을 두고 살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가 나란 사실마저 나중에 알게 된다면?

'날 죽이려고 미친 듯이 달려들겠지.'

그의 비밀을 알고 있는 날 절대 살려둘 리 없었다.

다른 말로 하면 학살자의 세력이 커질수록 내 목숨이 위태롭다는 의미였다.

그 세력을 견제해줄 강력한 카드가 바로 옆에 있는데, 어떻게든 도움을 주는 게 맞았다. 하지만 눈앞에 학살자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는 상황이라 대화는커녕 시선조차 주기 힘든 상황이었다.

'배신자에 대해 어떻게 알려주지?'

광산 내에 카멜이 심어둔 배신자에 대해선 꼭 알려 줘야 했다.

록터에겐 두 명의 배신자가 존재했는데, 그중 첫 번째 배신자인 광산 동료에게 오른팔이 잘리면서 무력을 크게 잃게 된다.

본신의 무력만 유지해도 미래가 달라질 수 있는 일이라, 첫 단추를 끼우는 것처럼 아주 중요했다.

그렇게 눈치를 살살 보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푸른 휘장을 단 기사 하나가 다급히 입구에서 나타나더니, 리옹 곁으로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뭐?"

리옹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장 카멜에게 이 사실을 귓속말로 알렸다.

역시나, 카멜의 눈썹도 살짝 올라갔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놈이 반응을 보였다.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 터진 모양.

기사의 등장으로 시선이 다른 쪽으로 쏠린 사이, 난 재빨리 발끝으로 록터의 정강이를 툭툭 찼다.

록터의 시선이 잠시 나를 보더니, 다시 카멜에게 향했다.

카멜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기사 단장, 그대를 지지하는 세력이 예상보다 많았던 모양이야."

"...."

"내가 건넨 제안, 슬슬 답을 내려줘야겠어. 그래야 나도 손을 달리 쓸 테니까."

가주와 1공자의 세력이 기사 단장의 구금 사실을 듣고 병사들을 움직인 것 같았다.

다만, 록터의 충성 맹세만 받으면 알아서 무너질 세력들이라, 카멜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반대로 내 속은 검게 타들어갔다.

저 제안은 거짓이다. 하지만 이를 타개할 방법도, 말을 해줄 수도 없는 상황.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그저 그의 정강이를 툭툭 건드리는 것밖에 없었다.

묵묵한 바위처럼 두 눈을 감고 있던 록터가 잠시 후 카멜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현명한 선택이다."

"배가 고프군요."

록터는 만찬을 내려다보며 쓰게 웃었다.

"광산으로 끌려가면 이런 만찬은 구경도 못 하겠지요. 전 최후의 만찬을 즐겨야겠습니다. 그러니…."

록터는 카멜을 사납게 올려다보며 나직이 말을 내뱉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그 더러운 면상 좀 치워줄 수 있겠습니까?"

"...이!"

도발적인 언사에 리옹이 발끈하면서 검을 뽑아 들자, 카멜이 이를 저지했다. 대신, 카멜은 록터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두 사람을 위해 준비한 만찬이니, 실컷 즐겨라."

"...."

"잠시 후 사람을 보내지."

카멜은 리옹을 데리고 문밖으로 나갔다.

이 아저씨, 저놈 성질을 제대로 건드렸네. 광산에서 바로 뒈지는 건 아니겠지?

그럼에도 제 할 말 하는 사내가 멋져 보였다. 이런 모습을 동경하게 돼서 소설에 빠지게 됐는데, 어째 내 삶은 이곳에서도 크게 변한 것 같지 않았다.

'달라지는 날이 올까?'

문득 든 상념을 접고 나는 록터를 바라봤다.

그래도 록터가 기지를 발휘한 덕에 단둘이 대화할 기회가 생겼다.

뒤쪽에 기사들이 감시를 서고 있었지만, 카멜이 자리에 없으니, 눈치 볼 필요가 없었다.

록터는 우악스럽게 음식들을 씹어 삼켰다. 술과 와인을 입 속에 병째로 들이붓기도 했고, 과일 서너 개를 한입에 넣어서 아작아작 부숴 먹기도 했다.

툭―

그러다 과일 바구니를 툭 쳐서 내 쪽으로 떨어트렸다.

과일들이 바닥에 쏟아지자, 난 과일들을 주워서 록터 곁에 올려놨다. 록터는 나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그 곁에 살짝 붙은 나는 작게 속삭였다.

"당신은 곧 황금 광산으로 끌려갈 겁니다. 그곳에서 에펠로아란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오렌지 좀 먹겠나?"

"전 오렌지보단 '말린 사과'를 더 좋아합니다. 하루에 열 개도 먹을 수 있지요."

"...."

"에토르에 표식을 남기십시오. 찾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아, 아닙니다."

차마 앞으로 벌어질 참담한 현실을 알려줄 순 없었다. 알려주는 순간, 록터는 이 자리에서 죽음을 택할 테니까.

끝말을 쓰게 삼킨 나는 자리로 돌아왔다.

대화는 순식간에 끝이 났다.

그 뒤로 나와 록터는 조용히 만찬을 즐겼다.

'이젠 그의 선택에 달렸다.'

난 전대 영주였던 리암슨 자작의 그림자인 척 연기했다.

영주의 최측근인 록터도 그림자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에 암구호 '오렌지'로 물어왔고, 그 암구호에 대한 답이 '말린 사과'였다. 리암슨 자작이 가장 좋아하는 간식 말이다.

하루에 열 개도 먹을 수 있다는 건, 내가 열 번째 그림자란 뜻이었다.

굳이 열 번째를 들먹인 건, 록터도 얼굴을 모르는 그림자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은밀한 전력이지만, 그림자들은 회귀자인 카멜에게 모조리 죽었다.

그 사실을 록터가 이미 알고 있다면 날 신뢰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도 알지 못하는 황금 광산을 언급했고, 나중에 접근하는 인물 중에 에펠로아란 사람이 있다면 경계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다 광산을 탈출하게 된다면?

'에토르 영지를 떠올리겠지?'

필요한 정보는 다 건넨 셈이다.

카멜이 없어서일까.

분위기는 여전히 최악이었지만, 음식을 먹어도 전처럼 속이 더부룩하거나 토할 것 같진 않았다.

그건 록터도 마찬가지였던 모양. 잠시 후, 복도 바깥쪽에서 리옹이 모습을 드러내자, 록터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나를 바라봤다. 처음으로 그의 시선이 느껴진 순간, 난 알 수 있었다.

조금 전 건넨 대화가 통했다는 것을.

하지만,

"이름이 뭔가?"

뒤이어 흘러나온 질문에 내 이성은 마비가 됐다.

...이름?

나에게 큰 파문을 던지는 질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떨어진 뒤 난 '신입'으로 불렸다.

내 이름은 뭘까?

기억을 살필수록 내 얼굴은 점점 당혹으로 물들었다.

없다.

이름이 없어?

록터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한동안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잠시 후, 리옹이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 록터는 아쉬운 듯 숨을 내뱉으며 등을 돌렸다.

서서히 멀어지는 록터.

그 뒤로,

"아, 아서, 아서 클레이튼입니다."

아서 클레이튼.

하나의 이름이 내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아서라…."

록터는 내 이름을 잊지 않으려는 듯 잠시 서서 중얼거렸다.

리옹이 도착한 순간, 만찬이 끝이 났다.

이 만찬에서 수많은 자의 운명이 결정됐다.

그중에는 나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난 리옹과 함께 복도로 사라지는 록터를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봤다.

"이름이라…."

암살자의 기억에는 이름이 없었다.

부모 없는 새끼.

비루한 노예 새끼.

인간 백정 암살자.

이름이 필요 없는 인생이라니.

이 몸의 주인은 참으로 기구한 인생을 살아온 것 같았다.

그래서 불현듯 떠오른 이름 하나를 이 몸의 주인에게, 그리고 내게 선물했다.

그저 생각 없이 정한 이름.

"하필 떠오른 게 아서 클레이튼이라니."

소설,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의 최종 후반부.

악당들의 손에 인류가 몰락의 길을 걸었을 때, 타 종족 왕국들이 하나둘 멸망했을 때, 종국에 세상이 멸망으로 치달았을 때, 살아남은 인류는 '영웅들의 묘지' 앞에 모여 소망의 노래를 불렀다.

그저 절망을 잊게 해줄 '절대 존재'를 상상하며 불렀을 뿐이다.

악당들에게 말살당한 영웅들에게 바치는 노래.

그리고 새로운 구원자를 바라는 희망의 노래.

누군가에겐 희망으로, 절망으로, 공포로 군림하는 절대 존재.

아서 클레이튼.

아서는 소설 속에서 존재하지도 실존하지도 않은 영웅이다.

그저 희망을 담은 노래 한 구절에 등장하는 상상 속의 인물.

그래서 이 이름을 선택했다.

주인 없는 이름이었으니까.

난 입맛을 다시곤 포크를 내려놨다.

"그래도 이제 좀 사람 같네."

스스로 지은 이름이지만, 존재를 증명하는 이름이 생긴 셈이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소설 속 세상에서 난 '이름'을 얻었다.

하지만,

"이름이랑은 전혀 안 어울려. 빌어먹을…."

난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보며 짧게 욕설을 내뱉었다.

아서 클레이튼은 희망을 노래하고픈 이들이 소망을 담아 지어낸 주인공이지만, 그 이름을 빌린 현재의 나는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

난 말없이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 * *

"꿇어라! 기사 단장 록터 펠리스여!"

성벽 성루 중앙.

검은 망토를 둘러쓴 카멜 블레이저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오연히 허리를 펴곤 외쳤다.

그 당찬 외침에 기사 단장 록터는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곤 천천히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성문을 두고 대치 중이던 이들은 그 광경에 신음을 흘리며 무기를 떨궜다. 대부분 슬픔과 당혹감이 섞인 눈빛이었다.

배신감에 치를 떠는 이들도 있었지만, 눈앞의 현실이 말해준다.

기사 단장이 가문의 승계자로 2공자 카멜을 택했다. 그의 충성 맹세로 블라이어의 기사단은 카멜을 모두 따르게 될 것이다.

이길 수 없는 싸움.

"쯧, 싱겁게 끝나겠어."

렌구아는 혹시 모를 충돌에 대비해 주술을 준비하고 있다가 아쉽다는 듯 수정구를 거두었다.

새로 개발한 주술을 실험해볼 좋은 기회였는데, 분위기를 보니 이대로 정리가 될 듯 보였다.

그는 성벽을 내려와 첨탑으로 향했다.

그리고,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는 계단.

우우우웅―!

"...!"

렌구아는 수정구에서 느껴지는 격한 떨림에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다.

그는 재빨리 수정구를 품 안에서 꺼냈다.

성스러운 빛이 수정구에서 흘러나온다. 예고 없이 흘러나오는 그 빛에 렌구아는 감탄을 토해내며 두 눈을 부릅떴다.

"시, 신명!"

신명은 일종의 '신의 점지'다.

뛰어난 주술사나 마녀 혹은 예언자가 지닌 물건에서 희박하게 발현되는 기적인데, 신명은 세상을 변화시킬 인물의 등장을 예지했다.

'또 다른 신명의 주인이 탄생한 건가?'

렌구아는 흥분한 표정으로 수정구를 살폈다. 자신의 물건에 신명이 발현되는 건 육십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 자신의 물건에 신명이 찾아올 정도라면 엄청난 인물이 각성했다는 뜻과 같았다.

렌구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정도 반응이라면 전 대륙의 이름 있는 주술사나 마녀들도 모두 신명을 받았을 것이다.

"도대체 누구기에…."

그 순간 수정구에 떠오른 점지.

렌구아는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두 눈을 크게 뜨고 수정구를 응시했다.

[XX XXXX – XX XX XXX]

[X XX XX.]

"...."

하지만 곧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지닌 능력으로는 단 한 글자도 해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렌구아는 이를 해석할 만한 이들을 떠올리며 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대부분 두 사람을 떠올릴 것이다.

모든 신명을 받드는 신의 사자라 불리는 신비의 두 존재.

점성술사 운명의 아케인.

그리고,

"오르도르 숲의 마녀, 릴리."

* * *

"리, 릴리!!!"

문이 부서지듯 펑퍼짐한 로브를 걸친 여인들이 우르르 그녀의 방으로 몰려들었다.

그녀들의 손에는 각자 개성 있는 물건이 쥐어져 있었는데, 모두 똑같은 색의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신명의 빛.

"뭔가 나타났어!"

"이 바보! 이건 신명이야! 신명!"

"오늘 의식은 어떡해!?"

1년에 한 번 마녀들이 모여 오르도르 숲의 결계를 치는 중요한 의식이 있는 날.

전신이 드러나는 커다란 거울 앞에 선 소녀는 '도르타'란 상급 마녀들의 방문에도 큰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저 말없이 거울만 뚫어지게 응시했다.

허리까지 치렁치렁 늘어진 흑발.

그 흑발을 가지런히 묶은 붉은색의 큰 리본이 눈에 띈다.

거울에 비친 투명한 피부의 소녀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평소에는 그런 자신을 거울에 비추며 외모에 대한 만족감과 격한 자랑을 늘어놓으며 주변 마녀들을 피곤하게 만들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우, 우리 중에 내용을 해석한 이가 한 명도 없어!"

"단 한 글자도!"

"릴리라면…."

마녀들의 시선이 쏠린 자리.

릴리의 시선은 거울을 물들이고 있는 검붉은 문자에 닿아 있었다.

예고 없이 찾아온 신명이지만, 그 어떤 때보다 강력한 느낌을 받았다. 묘한 이끌림이 들었다.

왜냐고?

"...."

그녀는 거울에 나타난 점지를 손가락으로 슥슥 문질렀다.

숲의 마녀 그 누구도 해석할 수 없었던 점지 문자.

하지만,

[아서 클레이튼 ― 균열 속의 은둔자]

[제3의 정신 방벽]

"누구야. 너."

릴리는 정확하게 그 점지가 보였다.

12화 인챈터(Enchanter)의 재능

"아니, 충성을 맹세했는데, 왜 또 독방이야?"

만찬이 끝난 후 기사 하나가 나를 안내했는데, 그 끝이 지하 감옥이었다.

난 인상을 찡그리곤 나를 안내한 기사를 돌아봤다. 어깨에 휘장이 없는 것을 보니, 수습으로 보였다.

카멜과 대면하고 와서일까.

간땡이가 부었는지, 눈앞의 기사가 만만하게 느껴졌다.

물론, 날 해코지 못 할 것이란 확신도 있었기에 난 현재의 불만스러움을 표정으로 전부 드러냈다.

기사는 미간을 구기고는 천천히 답을 했다.

"넌 1공자를 죽인 암살자로 지하 감옥에 잡혀 왔다."

"그런데요?"

"널 노리는 이들이 바깥에 깔렸다는 얘기지. 1공자 세력만 해도 널 잡아서 1공자를 죽인 주범을 확인하고 싶어 하거든."

"...."

"널 빼내기 위해선 작업이 필요하다고 부단장님이 말씀하셨다. 그때까진 감옥이 안전할 거다. 붙잡혀서 고문당하고 갈가리 찢겨 광장에 버려지고 싶나?"

"잘 부탁드립니다!"

난 군말 없이 독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바깥에 날 노리는 이들이 좌판 물건처럼 깔렸단다. 영지를 벗어나기 전까진 확실히 지하 감옥이 안전할 것 같았다.

철문이 닫히자, 난 주변을 둘러봤다.

'대우가 확실히 좋아지긴 했네.'

첫날은 묶어놓고 복날에 개 잡듯이 때리더니, 지금은 구속도 없이 자유로웠고, 내부 환경도 무척이나 깔끔했다. 게다가 안내한 기사를 심부름꾼으로 붙여줬는데,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를 통해서 얻을 수 있었다.

'충성을 맹세한 대가라는 건가?'

신뢰를 주기 위한 카멜의 작업일 것이다.

현재 나는 '그'와 접점이 있는 유일한 존재, 어리숙한 암살자 따윈 쉽게 구슬릴 수 있다고 확신했겠지.

근데, 내가 카멜 블레이저의 시커먼 속내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서 말이지.

'일단 호의에 반응을 보이며 상황을 이용해야겠지.'

빼먹을 수 있는 건 모조리 빼먹을 생각이었다. 나는 철문을 탕탕탕 두드렸다. 철문 위로 시선을 교환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이 탁 열리자, 난 재빨리 말했다.

"언제쯤 나갈 수 있습니까?"

"나도 모른다. 주군께서 정하실 거다."

"최대한 빨리 나가야 한다고 전해주십시오.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그'에게 동맹 표시를 알릴 장소를 카멜에게 이미 전달한 상태였다.

넬리토리 돌산 협곡.

블라이어 영지에서 사흘 정도 떨어진 곳에 큰 바위로 이뤄진 거대한 협곡이 존재하는데, 동맹을 알리려면 그곳으로 가야 한다고 말해놨다.

많은 고민 끝에 정한 장소다.

그리고 시간에 쫓기면 넬리토리 돌산 협곡을 선택한 이유가 사라진다. 최대한 여유 있게 그곳에 도착해야 했다.

'보름 중 벌써 이틀이 지났어. 내일이면 사흘째, 서둘러야 해.'

넬리토리 협곡 어딘가에 있을 '칼바람의 저주'를 찾으려면 여유 시간이 필요했다.

동맹 표식이야, 저들이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내가 원하는 장소와 시각에 터트리면 그만이다.

난 동맹 표식을 터트린 후를 생각하고 있었다.

'분명 강제로 끌고 가려고 할 거야.'

감시자가 붙은 이유는 내 복귀와 관련되어 있었다.

동맹 표식 이후부턴 내 맘대로 움직이기 힘들다. 감시자를 떨구려면 신호를 터트리기 전이나 직후여야 한다는 뜻.

칼바람의 저주와 맞물리는 협곡을 찾아 도주로를 확보해야 했다.

'운이 좋다면 '그것'도 얻을 수 있을 테고.'

협곡에 숨겨진 고대 문양 하나가 떠올랐다.

세이렌의 비명(Siren's Scream).

훗날 카멜의 핵심 전력이 될 흑주술사 도네콜린트가 얻게 될 능력인데, 그 정보는 대략적으로 파악한 상태였다.

계획이 잘만 풀린다면 고대 문양까지 노려볼 생각이었다.

"죽은 암살자들의 물건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놈들의 물건을?"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제 '임무'에 꼭 필요한 일이라 전해주십시오."

"기다려라."

기사가 다시 돌아오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인기척과 함께 철문이 끼익 열리더니 큰 보따리 하나가 툭 던져졌다.

"암살자들의 물건을 모두 담았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모두 가져도 된다는 명이 떨어졌다."

"가져도 된다고요?"

"그래. 그리고 이틀 후 움직이게 될 거다."

"이틀 후라…."

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시기가 적당했다.

말을 마친 기사는 철문을 쿵 닫았다. 보따리는 제법 묵직해 보였다.

보따리를 집어 든 나는 기분 나쁜 감촉에 눈살을 찌푸렸다. 끈적이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피?'

보따리 밑으로 핏물이 뚝뚝 떨어진다. 난 짧게 숨을 뱉고는 보따리를 풀었다.

역한 냄새가 훅 올라오자, 코를 틀어막고 가져온 물건들을 살폈다.

빌어먹을 새끼들, 물건을 가져다 달라고 했더니, 옷까지 다 벗겨서 가져왔다.

난 보따리 안에서 단검을 꺼내, 검 끝으로 옷가지부터 휙휙 치웠다. 물건을 살피길 잠시, 난 짧게 혀를 차곤 고개를 절레 저었다.

'약초는 싹 다 긁어갔네.'

파양초와 독초가 있다면 몰래 챙겨두려고 했는데, 주술사들이 전부 챙겨간 모양이었다.

남은 건 죽은 암살자들이 쓰던 무기와 옷가지뿐.

단장이 쓰던 단검 세 자루와 석궁만 따로 챙기고 나머지 무기는 그대로 놔뒀다. 옷가지는 단장의 옷만 골라서 뒤졌다. 쓸 만한 것이 나온다면 단장의 소지품에서 나올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주변 지리가 그려진 지도가 있길래 지도 한 장을 챙겼고, 바지 주변을 살필 때였다.

"응?"

피로 물든 구겨진 쪽지 하나를 발견했다. 중요한 내용은 아닌 듯 바지 속에 그대로 들어있었지만, 내용을 읽어보니, 내겐 민감한 내용의 쪽지였다.

[아기새 죽음 확인. M.]

'아기새라… 이건 난데?'

'아기새'는 은어로 신입을 가리킨다.

즉, 단장에게 내 죽음을 반드시 확인하라는 지령이었다. 그 지령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M', 크룩스의 마스터 되시겠다.

"내 죽음을 확인까지 한다고? 무려 마스터란 양반이?"

나와 마스터 사이에 무슨 악연이라도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바로 죽이지 않은 것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 망할 아케인이 운명이니 뭐니 하면서 내 죽음을 종용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쪽으로 귀가 얇은 양반이라고 했으니까.

'대체 뭐라고 씨부렁거린 거야?'

갑자기 아케인이 미워졌다.

영화나 소설에 자주 나오는 전설 속의 마법사, '멀린' 같은 존재를 떠올리며 봤던 인물이라 나름대로 호감이 있었는데 말이지.

이유가 어쨌든 크룩스의 마스터는 내 죽음을 원하고 있다. 그럼, 크룩스를 향한 나의 포지션은 명확해진다.

크룩스는 이제부터 내 적이다.

"일단 이 정도인가?"

난 바닥에 놓인 단검 세 자루와 석궁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파양초를 얻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무기를 얻는 것도 나름 괜찮았다.

지하 감옥에서 최소 하루 이상은 머물 것 같으니, 몸을 제대로 움직여 볼 생각이다.

지금은 조직에서 버려졌지만, 마스터가 눈여겨보고 차기 마스터로 지적될 만큼 뭔가가 있는 몸뚱이였다. 그 특별함이 무엇인지 알아볼 생각이었다.

난 단검을 양손에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자리에서 통통 튀며 눈앞의 벽을 향해 자세를 잡았다.

단검을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보쌈을 썰 때 빼곤 내가 검을 쥐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정말 인생은 모를 일이었다.

"잘 되려나…."

오늘 같은 여유가 또 찾아온다고 장담할 수 없다. 기회가 있을 때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했다. 그게 내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면 더더욱.

난 전력을 다해 단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 세계에 들어와 단검을 움직이는 첫 발걸음.

텅 빈 독방 안, 칼바람 부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이 세계의 무력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소설만 읽어도 쉽게 알 수 있는 정보이기도 했다.

태초의 기운, 마나를 바탕으로 각기 파생되는 네 가지 힘.

강화의 기운, 오라.

역행의 기운, 마력.

심연의 기운, 영력.

그리고 이 셋에 포함되지 않은 신비의 기운, 신력.

마나를 깨친 이들은 3성에 이르면 가진 운과 재능에 따라 이 네 기운 중 하나를 익히게 된다.

참고로 이 몸의 기운은 1성이었다.

이제 막 마나를 깨친 뉴비란 뜻이었다.

암살자는 3성이 되면 강화의 기운, 오라를 대부분 익힌다.

육체에 특화된 직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희박한 확률로 신력을 익힌 암살자도 존재했다.

신력은 특별한 힘이다.

얻는 방법도 두 가지뿐이었다.

하나는 선천적인 재능을 타고난 경우. 초능력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계승자의 신기'를 얻는 경우.

각 대륙에 숨겨진 비밀 장소에는 수천 년 전부터 내려오던 절대자들의 비기가 담긴 계승자의 신기가 존재한다.

다만, 계승자의 신기는 발견도 어렵고, 승계 조건이 극악이라서 기연이 닿지 않은 이상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알려졌기에 대부분의 신력은 선천적인 경우가 많았다.

"와, 이 몸으로 올림픽을 나가면 금메달 다 휩쓸고, 연금 받아서 평생 떵떵거리며 살 텐데."

UFC에 나가도 모든 경기를 다 휩쓸 것 같았다. 그러다 보면 라운드걸과 스캔들도….

"아."

밑도 끝도 없는 잡생각을 털어버리곤 다시 집중했다.

고작 1성의 마나지만, 마나를 사용한 순간 육체 능력은 일반인의 신체 능력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지금 스파이더맨처럼 독방 천장 구석에 착 달라붙어 있는 것도 마나를 사용한 육체 능력 덕이었다.

가볍게 바닥에 내려온 나는 다시 단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한계까지 가볼 생각이다.

"헉… 헉…."

얼마나 휘둘렀을까.

팔다리가 덜덜 떨리고 정신이 멍한 것을 보니, 제법 오랫동안 움직였던 것 같았다.

처음에는 딱딱한 마네킹처럼 엉성했는데, 지금은 자세가 자연스레 교정되며 날카롭고 정확하게 원하는 곳으로 단검을 움직일 수 있었다.

'조금만 더….'

뭔가 잡힐 것 같은데, 잡히지 않았다.

내가 멈추지 않고 단검을 끊임없이 휘두르는 이유가 있었다.

몸을 한계까지 움직이니, 암살자 신입으로 수련했던 과거 기억들이 명확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스위치가 켜진 듯 신입 수련 과정의 장면 장면들이 뇌리에 떠올랐다가 천천히 사라지는 기분.

그중.

[넌 특별한 재능을 지녔다.]

크룩스의 마스터와의 대화도 기억났다.

그가 개인 지도를 할 만큼의 재능.

꿈에 부푼 기대감.

그리고,

[빌어먹을, 네놈의 재능은 쓰레기야! 내 눈이 틀렸어!]

짙은 좌절감.

냉혹한 시선으로 나를 버리고 떠나는 마스터의 뒷모습이 보였다.

번뜩 정신을 차린 나는 제자리에 우뚝 섰다. 젖은 땀에 온몸 위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올랐다.

운동과 담을 쌓고 지내와서일까.

이런 고양감이 어색하면서 좋았다.

간질간질 올라오며 잡힐 듯 잡히지 않았던 하나의 감각.

난 조금 전 떠오른 기억 속에서 그 실마리를 잡았다.

바로 특별한 재능.

"후…."

짧게 숨을 내뱉고, 나는 단검을 앞으로 겨눴다. 이를 지그시 깨물고 눈앞의 단검에 신경을 집중한 순간,

우웅!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기억 속에서 각성한 이 몸뚱이의 재능.

처음 말을 탔던 때처럼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난 옅은 푸른색으로 덮인 단검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1성인데, 무기에 기운을 담을 수 있다고?

물론, 5성 이상의 전유물인 오라 소드와는 완전히 달랐다.

마나가 아닌 특별한 기운을 싣는 능력이라고 해야 하나?

다만 1성이라 속성이 아닌 그저 기운만 담겼다.

벽을 향해 단검을 던지자, 벽에 단검이 반쯤 박혔다. 단검만 던졌을 땐 흠집만 났던 벽인데, 기운을 담자 날카로움이 강화된 것 같았다.

"이 녀석, '신력'에 재능이 있었네."

벽에 박힌 단검에는 여전히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나였다면 던지는 순간 사라졌을 것이다.

특별한 기운.

태어났을 때 숨 쉬듯 알게 되는 선천적인 재능인 신력이 분명했다.

무기에 속성을 부여하는 '인챈터(Enchanter)'.

떠오른 기억 속에서 답을 찾았다.

이 녀석은 인챈터의 재능을 깨친 신력 소유자였다.

13화 권력이 좋긴 좋네.

신력 각성자라면 크룩스의 마스터가 직접 그 휘하로 데려가 키운 것도 이해된다.

반대로 버린 이유도 알게 됐다.

'운명의 아케인 때문만은 아니었네.'

1성.

마스터가 긴 시간 동안 직접 투자와 시간을 쏟아부었는데, '고작' 1성이다.

수만 골드의 가치를 지닌 '마나과실(mana fruit)'이란 보석이 있다. 섭취 시 마나 성취에 큰 도움을 주는 연금 물질인데, 이 몸뚱이는 그 마나과실을 세 개나 처먹고도 1성을 겨우 깨친 머저리였다.

엘리트 교육과 물질적 도움을 받았으니, 동료 암살자들보단 뛰어났지만 그뿐. 가성비 면에선 최악이었다.

마나과실 세 개면 정식 기사를 암살할 수 있는 3성 암살자를 키울 수 있는 비용이었으니까.

'최악의 마나 감응력.'

신력을 지닌 존재라 처음에는 큰 관심을 보인 것 같지만, 마스터는 투자에 실패했다고 확신했던 것 같았다.

신력의 잠재력은 마나 그릇을 기반으로 함께 성장했는데, 극악의 마나 감응력은 신력 소유자에게 저주나 다름없었다.

2성이 되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고, 또 얼마나 많은 마나과실을 처먹어야 할까.

마스터의 입장에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로 느꼈을 것이다.

반쪽짜리 신력 각성자.

"최악의 상성이긴 하네."

즉, 이 녀석은 신력을 타고났지만, 그 한계가 명확했다.

키우기도 버리기도 모호한 패.

계륵 같은 처지가 된 상황에서 아케인의 방문이 이 녀석의 운명을 나락으로 결정지은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이 능력은?

'찐 대박이지.'

무기에 속성을 담는 능력.

이 능력은 속성이 무엇이냐에 따라 누군가에겐 재앙이 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이 세계에는 '속성 카운터'란 것이 존재했다.

불(火)에게는 물(水)이, 물에게는 나무(木)가, 나무에겐 다시 불이, 가위바위보로 맞물리는 대표적인 세 속성 외에도 수많은 속성이 서로를 물고 뜯는 상성을 지니고 있었다.

마나 감응력이 최악이라고?

그딴 건 나와 상관없었다.

애초에 수련으로 강해질 생각 따윈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어느 세월에 육체를 단련하고, 마나를 모으고, 깨달음을 얻는단 말인가.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

이 소설은 제목처럼 강한 악당들이 시시각각 판을 치는 혼돈 속 미치광이들의 세상이었다. 이 재앙들과 마주쳐 휩쓸린 순간, 억울하게 뒈진다는 뜻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제목대로 악당들이 강해지는 별의별 기연들이 이 세계에는 존재했다.

마나과실?

나중에는 줘도 안 먹는, 개 허접스러운 물건일 뿐이다.

'모조리 싹싹 긁어주마.'

악당 것이건, 영웅 것이건, 기회가 되면 모조리 뺏어줄 생각이었다.

아서 클레이튼.

좋든 싫든 나도 이젠 이 세상 이름을 가진 이 세계의 구성원이었다.

먼저 주운 자가 임자였다.

* * *

"네 이름은 이제부터 '알'이다."

"알?"

하루가 지나고 새벽 시간, 지하 감옥 앞에 웬 사내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난 사내가 건네는 구리 명패를 받았다.

C급 용병패.

명패에는 '알'이란 이름과 간략한 신상명세가 적혀 있었다.

두 눈을 끔뻑이며 난 눈앞의 사내를 바라봤다.

얼굴에 깊은 상처가 있고, 험상궂어서 급이 높은 용병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심부름꾼을 맡던 기사가 그를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이자, 내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습 기사가 고개를 숙일 정도라면 그 위의 하나밖에 없다.

정식 기사.

이를 지그시 꽉 깨물었다.

'카멜 이 빌어먹을 새끼, 선 오지게 넘네.'

학살자를 향해 원망이 쏟아졌다.

신입 암살자에게 무슨 정식 기사가 호위로 붙는단 말인가. 계획에 차질이 생긴 건 아니지만, 무식하게 강한 놈이 감시자로 붙었다. 게다가 동행할 이들은 이놈 하나가 아니었다. 기사와 함께 온 일행이 있었는데, 이들은 기사가 고용한 용병들로 보였다.

모두 넷이었는데, 하나같이 풍기는 기세가 거칠고 단단했다. 베테랑 놈들이 분명했다.

'내가 도주할 것을 대비해서 데려온 건가?'

그렇다면 추적에 특화된 놈들일 확률이 높았다.

설마, 이놈들 말고 또 있는 건 아니겠지?

나 같은 놈에게 이 정도 전력을 붙일 정도라니, 카멜이 '그'를 얼마나 의식하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정식 기사 하나에 베테랑 용병 넷.

감시자들의 압박감이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다.

갑자기 생존 난이도가 노멀에서 헬급으로 수직 상승한 느낌이었다.

"나와라."

"잠깐."

자신을 벤이라 소개한 기사는 내가 발길을 막자, 사납게 노려봤다.

무섭다. 시발.

하지만 여기서 주눅이 들면 안 된다. 앞으로 계획을 밀어붙이려면 내 위치를 바로잡아야 했다.

첫 만남은 기세로 위치를 정하는 자리. 굽신거리는 순간, 계속 끌려다니게 된다.

"내게 줄 게 있을 텐데요?"

"줄 거?"

"설마 빈손으로 온 건 아니겠죠?"

난 벤 눈앞에 손을 내밀었다.

분명 카멜에게 받은 게 있을 텐데, 어지간히 만만하게 보였나 보다.

벤이 험악한 기세를 풍기며 나에게 바짝 다가왔다.

"내가 보관하는 게 안전할 거다."

"주군의 명입니까? 당장 가서 물어볼까요?"

"...."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 하고 있네.

협박한다고 내가 쫄 거 같냐?

벤은 나를 노려보더니,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건넸다. 안을 살펴보니, 알록달록한 색감을 뽐내는 손톱 크기의 보석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난 보석에 대해 잘 모르지만, 딱 봐도 엄청 비쌀 것 같은 느낌이 팍팍 들었다.

"금화로 준비하면 부피가 클 것이라고, 주군께서 보석으로 준비해주셨다. 보석 가치는 정확히 2만 골드다."

'…이 새끼가.'

생존과 함께 약속받은 2만 골드.

근데 이놈이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2만 골드를 언급했다. 날 엿 먹이려는 게 분명했다. 실제로 용병들의 눈빛이 변하는 게 느껴졌다.

그들의 시선이 보석 주머니로 쏠린다.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기사는 주군께 충성하고 약자를 보호하는 정의의 상징으로 표현되지만, 이 소설에선 그딴 모습을 기대하면 안 된다.

대악당을 주인으로 모시는 기사에게 정의를 바란다고?

지나가던 똥개가 웃을 일이다.

놈의 기세에 눌려 끝까지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내 돈을 꿀꺽했을 놈이었다.

그릇 이상으로 욕심 많은 새끼였다.

이참에 잘못 건드리면 내 이빨에 물릴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려줘야 했다.

"당신이 일러준 대로 이제부터 제 이름은 알입니다. 동시에 주군께 충성한 가신이기도 하지요."

"네놈 따위가 어디서 감히 가신을 입에…!"

"이틀 전 저는 주군과 식사 자리를 가졌습니다. 충성을 대가로 약속받은 것이 제법 많습니다. 2만 골드도 그중 하나죠. 2만 골드가 당신에게는 우스운 금액입니까?"

"...."

2만 골드는 정식 기사라도 평생 벌 수 없는 큰 액수였다. 이유가 어떻든 겉으로 카멜은 내게 2만 골드를 줬다.

그 사실이 중요했다.

기사 놈이 나와 카멜 사이에 주고받은 대화 내용을 알 리 없다. 알았다면 뒈져서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겠지.

어느 정도 선에서 뻥카를 쳐도 사실을 파악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행동에 조심하십시오. 이번 임무의 중요성을 알고 계신다면 말이죠."

"...."

"지금처럼 거슬리게 행동하시면 임무 실패 시 제 입에서 어떤 변명이 주군 귀에 들어갈지 모릅니다. 이름이 벤이라고 했죠? 저 혼자 죽을 것 같습니까?"

"이 새끼가…."

"또 새끼라고 부르면 당장 주군께 편지를 보낼 겁니다. 그 내용은 상상에 맡기죠."

내 도발에 기사 벤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그는 입을 꾹 다물고 한발 물러섰다. 용병들을 둘러보니, 조금 전과 달리 나와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일단 내 도발이 먹힌 분위기였다.

2만 골드가 들킨 이상, 차라리 금액을 강조해서 카멜에게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어필하는 게 낫다.

난 벤 일행을 따르기 전에, 수습 기사에게 지도를 건넸다. 단장의 유품에서 가져온 지도였다.

"이 물건을 주군께 전해주십시오. 건네주면 뭔지 아실 겁니다."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곤 지도를 받아 들었다.

지도에는 카멜이 '그'와 접선할 장소가 표시되어 있었다.

왜 이 지도에 표시했냐고?

아주 기가 막힌 장소를 찾았기 때문이다.

난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수습 기사를 응시했다.

"목숨을 걸고 임무를 꼭 완수하겠다고 주군께 전해주십시오."

"알았다."

"떠나기 전에 주군께 인사를 올리고 싶습니다."

감옥을 벗어나기 전, 나는 결심에 찬 표정으로 카멜이 머무는 집무실 방향을 향해 넙죽 예를 올렸다. 그 충직한 모습에 수습 기사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카멜, 이 개새끼야. 우리 다신 보지 말자.'

물론, 내 속마음은 행동과 전혀 반대였지만 말이다.

난 용병 복장으로 갈아입은 뒤 지하 감옥을 나왔다. 동이 트기 전 가장 어두운 시간이라, 주변은 어두컴컴했다.

일행은 나를 포함해서 총 여섯 명.

내성을 나온 이후, 일행은 벤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며칠 전 터진 내전으로 내성의 감시는 무척 삼엄했지만, 벤이 나서자 용병 복장임에도 별다른 검문도 없이 술술 통과되었다.

'권력이 좋긴 좋네.'

카멜 말 한마디에 1공자를 죽인 암살자에서 C급 용병 '알'이 되었다.

고작 중소 영지의 성주일 뿐인데도, 그 권력은 말 몇 마디에 한 사람의 운명을 좌지우지했다.

학살자인 그가 한 지역의 지배자가 된다면?

대륙은 온통 피로 물들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됐고 말이다.

이번에는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겠다.

내가 끼어들게 됐거든.

내성을 나오자, 다리 입구에 마차가 대기 중이었다. 일행은 그 마차에 탄 뒤 조용히 다리를 건넜다.

내성을 지나 외성 광장을 지나는 길.

광장 중심부는 횃불로 유독 밝혀진 장소라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음."

난 광장의 참혹한 광경에 신음을 흘렸다.

처형대가 보인다.

발가벗겨진 썩은 여섯 구의 시신과 교수형을 당한 시신 한 구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돌팔매를 수없이 당했는지, 시신들은 보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다.

목판에 적힌 글귀.

[윌리엄 공자를 암살한 극악무도한 이들을 처단한다!]

며칠 전 함께했던 암살자들이 끔찍한 몰골로 죽어 있다.

그중 나는 홀로 교수형을 당한 시신을 무거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어제 오후 교수형을 당한 암살자란다.

내게 향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죽은 대역이었다.

대역으로 누굴 죽인 것일까.

카멜에겐 그 선택도 숨을 쉬듯 쉬웠을 것이다.

갑자기 기분이 더러워졌다.

덜컹―!

광장을 빠르게 지나친 마차는 바깥으로 통하는 성문에 다다랐다. 굳게 닫혀 있던 거대한 성문이 서서히 열린다.

마차는 그대로 성문을 통과해 서서히 밝아지는 바깥세상으로 나아갔다.

처음 계획한 대로 카멜을 이용해 암살 단체인 크룩스의 눈길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아직 카멜의 손에서 탈출할 일이 남았지만, 이도 곧 해결될 것이라 스스로 위안 삼았다.

그 이후에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으로 빠르게 묻히는 블라이어 영지가 보인다. 광장에서 본 처형대를 떠올리며, 처음으로 강렬한 욕망 하나가 피어올랐다.

'강해진다.'

카멜이건 누구건 나를 건들 생각 못 하게 말이다.

블라이어 영토를 벗어난 마차는 넬리토리 협곡 근처에 자리한 영지, 베네타로 향했다.

14화 자유도시 베네타

자유도시 베네타에 도착하기까지의 시간, 지루하다면 지루할 수 있는 시간이지만, 나에겐 하루하루가 심심할 틈도 없는 아주 스펙터클한 나날이었다.

우린 출발선부터 이동 경로를 두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는데, 벤은 라웁 숲을 가로질러 베네타로 가려고 했고, 나는 라웁 숲을 우회하길 강력히 주장했다.

'미쳤냐? 라웁 숲을 가로지르게?'

곧 밝혀지겠지만, 라웁 숲에는 사람을 납치해서 인체 실험을 하는 미치광이 마법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미친놈은 현재도 라웁 숲에서 실험을 진행 중일 텐데, 미쳤다고 그 숲을 기어서 들어간단 말인가.

하지만 베네타까지 라웁 숲을 가로지르면 이틀, 우회하면 사흘이 넘게 걸리는 상황이라, 내 의견은 벤보다 무게가 실리지 않았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던진 게 미끼였다. 난 그들 눈앞에 보석 주머니를 흔들며 말했다.

"우회해서 사흘 안에 베네타에 도착한다면 '푸른 장미'에서 거하게 쏘겠습니다."

"푸, 푸른 장미?!"

"네. 그것도 5층입니다."

"5층!!"

"베네타를 방문하는데, 그 유명하다는 푸른 장미 5층은 가봐야죠."

내가 베네타의 명물, 푸른 장미를 들먹이는 순간, 불꽃 튀던 벤과의 신경전은 사막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벤이 헛기침하며 한발 물러났기 때문이다.

내 의도대로 된 건 좋은데, 왜 찝찝함이 드는 거지?

눈앞의 벤이란 기사, 감시자로 온 것 아니었어?

미끼를 이렇게 덥석 물다니, 어떤 의도를 가지고 내 제안을 승낙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난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용병들에게 푸른 장미로 출발하라 소리쳤다.

애초에 핑계를 대서라도 꼭 방문해야 할 곳이었기 때문이다.

마차는 라웁 숲을 우회해서 숲 외곽을 따라 쉬지 않고 강행군을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 나타났다.

바로 도적 떼의 존재.

이틀이란 시간 동안 숲을 우회하면서 마주친 도적 떼의 수가 몇이나 될까.

"시발, 이 개 같은 소설."

무려 스무 번이다.

무슨 알람 설정도 아니고, 도적 새끼들은 아침 점심 저녁 텀을 두고 숲속에서 쉴 새 없이 튀어나와 마차를 막아섰다.

[으하하하핫! 멈춰라!]

"...."

[으하하하핫! 우리는 검은 도끼 도적단이다!]

"또냐?"

[으하하하핫!]

"그만 나와!"

이딴 레퍼토리만 수없이 듣다 보니, 이젠 마차 밖에서 웃음소리만 들려도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호위 없이 달랑 마부 하나만 마차를 몰고 있으니, 쉬운 먹잇감으로 표적이 된 것 같았다.

그래도 위기나 위험에 빠지는 일은 없었다.

일단 도적 떼의 전력은 형편없었고, 마차의 전력은 3성 기사 한 명에 B급으로 이뤄진 용병 넷이었다.

용병들이 나서면 대부분 해결이 됐고, 벤이 나선 경우는 단 두 번뿐이었다.

이때 벤과 용병들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었는데, 용병들은 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벤의 경우엔 무조건 튀는 게 답이었다.

그래도 붙여놓은 감시자라고 벤과 용병들은 절대로 같이 움직이지 않았다.

벤이 나서면 용병들이 내 곁에 붙어 있었고, 용병들이 나서면 벤이 내 곁에 머물렀다.

카멜에게 감시하란 지시를 받긴 받았는지, 저 인상 더러운 기사 놈은 내 곁에서 껌딱지처럼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완벽한 감시자의 모습이냐?

'이 골 빈 새끼의 정체가 뭘까?'

내 옆에 붙어 코를 골며 자는 벤이 보인다.

인간이 잠을 자는 거야 당연하긴 한데, 가끔 용병들이 자리를 비울 때도 놈은 내 곁에서 잠을 자곤 했다.

세상 편히 자는 모습인데, 아무리 봐도 연기로 보이지 않았다.

마치 죽이고 도망가라는 것 같잖아? 감시자로 어설퍼도 너무 어설펐다.

베네타에 도착하기 바로 전날.

라웁 숲 도적 떼로부터 서른 번째 습격 횟수를 채웠을 때, 난 용병을 이끄는 가비스에게 물었다.

"라웁 숲에 도적들이 이렇게나 많습니까?"

"많긴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닙니다. 한번 물어볼까요?"

"누구한테요?"

[으핫핫핫핫! 멈춰라!]

"저놈들한테요."

때마침 알람처럼 도적 떼가 고함을 내지르며 우르르 나타났다.

난 서른한 번째 도적들을 통해 습격이 빈번했던 이유를 듣게 되었다.

피투성이가 된 두목이 가비스에게 잡혀 내 앞으로 질질 끌려왔다.

"외곽으로 내몰린 거라고?"

"그, 그렇습니다!"

"이유가 뭐지?"

"형제들의 아지트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사건이 계속 발생해서...."

라웁 숲에 자리 잡은 도적 소굴들이 땅으로 꺼지듯 사라지는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두려움에 질린 도적들이 바깥쪽으로 내몰렸다는 얘기였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팔뚝에 솜털이 오소소 곤두섰다. 사건의 원흉을 단박에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놈이다!'

도미닉 후아튼.

온갖 생명체를 뜯고 맛보고 즐기는 변태 같은 존재. 생체 키메라를 제작하는 그 미치광이 짓이 분명했다. 재료 수급이 떨어지면서 슬슬 밖으로 나설 준비를 하려는 건가?

라웁 숲을 우회한 건 정말이지 잘한 선택이었다.

난 벤과 용병들을 돌아봤다.

실험체로 전락하는 횡액을 면했으니, 나한테 고마워하라고.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숲을 가로질렀으면 이런 고생 안 했을 텐데."

"그러게. 누구 때문에 숲을 우회해서 이 고생을 하는 건지."

"닥쳐! 푸른 장미 안 갈 거야?"

"...."

시시덕거리는 저들은 자신들이 죽다 살아난 것도 모를 테지.

저 면상 더러운 기사 놈도.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사흘이 흘렀을 때, 마차는 거대한 성을 마주했다.

"저기가 자유도시 베네타?"

난 소설을 읽으며 상상했던 베네타의 풍경을 고스란히 올려다봤다.

마차가 굴러갈수록 큰 바위를 통째로 깎아 만든 높고 가파른 성벽이 다가왔다.

예술적이면서 실용적인 아름다운 성벽. 인간의 손재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예술적 가치를 지녔다.

자유도시 베네타는 드워프 도르네프가 지배자로 있는 곳이었다. 인간 외에 다양한 유색인종들이 머물며 쉬어 가는 곳, 우린 베네타 성문 쪽으로 마차를 몰았다.

* * *

베네타는 자유도시였기에 기사나 병사가 없었다. 검문은 병사가 아닌 용병들이 맡고 있었다.

베네타의 주인, 도르네프와 계약한 A급 이상의 용병단이 주기적으로 치안대를 맡았는데, 대부분은 드워프제 무기를 허리에 착용하고 있었다.

용병 주제에 무기가 저렇게 좋다고?

"저 무기를 얻으려면 베네타의 치안대로 몇 년을 굴러야 하죠."

용병 리더인 가비스는 부러운 시선으로 검문하는 용병들의 무기를 가리키며 친절히 설명을 해줬다.

확실히 돈이 좋긴 좋나 보다.

푸른 장미를 쏘겠다는 말에 딱딱했던 용병들이 살갑게 다가온 것을 보니.

용병들도 처음에는 눈치를 봤지만, 고용주인 벤이 가만히 있자, 가끔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로 진전이 됐다.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경쟁률이 치열합니다. 양산품이지만, 인간 대장장이가 만든 검에 비할 바가 안 되죠. 드워프제 갑옷까지 입으면 목숨을 여벌로 가지고 다니는 것과 같으니까요."

"갑옷도 줍니까?"

"전속 계약을 해야 하는데, 그 정도면 베네타의 사병이 됐다고 봐야 합니다. 근속 연수가 최소 10년 이상이니까."

베네타의 주인은 무구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실력 있는 용병들을 휘하로 꼬드겼다. 그중에는 3성 이상의 방랑 기사도 제법 있어서 베네타의 전력은 타 영지와 비교해도 절대 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강할지도 모른다. 일단 템빨부터가 지렸으니까.

나도 하나 장만해볼까?

드워프제 무기라니, 갖고 싶어지는 게 당연하잖아.

"푸른 장미로 바로 가실 겁니까?"

하지만 가비스의 인기척에 그 생각은 접어두었다. 괜히 무기를 맞췄다가 경각심을 주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저리 살갑게 굴어도, 상황에 따라 언제든 내게 검을 겨눌 수 있는 놈들이었으니 말이다.

'무기를 맞춘다고 정식 기사인 벤을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전투 말고 다른 방법으로 저들을 요리할 방법이 있으니, 굳이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었다.

부담스러운 가비스의 눈빛에 난 빙그레 웃었다.

푸른 장미에 가고픈 마음에 직접 말고삐를 잡고 마차를 몬 장본인이 이놈이다.

푸른 장미 5층을 방문해보는 게 꿈이라고 했던가.

가비스의 물음에 다른 용병뿐 아니라 벤도 눈치를 주며 나를 응시했다.

이 새끼들 진짜 감시자 맞아?

사흘 동안 지켜본바, 빈틈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아무래도 몇 가지 확인 작업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내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학살자, 카멜 블레이저였으니까.

"마법 상점에 먼저 들러야 합니다."

"혹시 뭘 사실지 물어봐도 될까요?"

"생활용 스크롤입니다."

"생활용 스크롤이라, 바로 모시죠."

베네타는 용병들의 대우가 좋은 곳이라, 용병패를 내밀자, 검문은 순식간에 통과되었다.

가비스는 대로를 따라 주저 없이 마차를 몰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서쪽 외곽에 도착한 마차는 길게 늘어진 고층 건물 중 한 곳 앞에 멈춰졌다.

"용병들이 자주 들르는 마법 상점입니다."

"유명합니까?"

"호구 안 잡기로 유명한 곳이죠."

"…호구?"

"마법에 무지한 용병들이 뭘 알겠습니까?"

호구를 안 잡아서 유명하다니.

마법 상점이 그렇게 무서운 곳이었나.

베네타에 대해 잘 아는 것을 보니, 가비스는 베네타를 여러 번 방문했던 모양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상점 안으로 들어가자, 벤이 뒤를 따랐다.

로브를 걸친 소녀가 종업원인지, 그녀는 싹싹하게 인사를 해왔다.

"손님! 무엇이 필요하세요?"

"발화 스크롤 있습니까?"

"물론이죠."

난 발화 스크롤 여섯 장을 주문했다. 발화 스크롤은 간단히 불을 피우는 마법이었다. 야영 때 들고 다니는 생활용이라, 벤도 발화 스크롤에 관해선 뭐라 하지 않았다.

푸른색 양피지로 만들어진 발화 스크롤을 구매하고, 난 잠시 고민했다.

"혹시 환상 스크롤도 팝니까?"

"물론이죠. 어떤 모형을 원하세요?"

"나비인데, 흰나비여야 합니다."

"흰나비라… 잠시만요, 축제에서 쓰다가 남은 것이 있을 거예요. 대용량뿐인데 괜찮으시겠어요?"

"용량은 상관없습니다."

종업원이 양해를 구하고 창고로 사라진 사이, 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환상 스크롤은 왜 구하는 거지?"

"쓸 일이 있을 거 같아서요."

"쓸 일?"

"알려줘요? 주군과 관련된 일인데."

주군을 들먹이자, 벤은 입을 꾹 다물었다. 확실히 핑계로는 이것만 한 것이 없었다. 녀석이 물고 늘어질 만큼 위험한 물건도 아니었고.

환상 스크롤은 말 그대로 축제에서나 사용하는 불꽃 용품 같은 것이었다.

불꽃이 아닌 흰나비가 밤하늘을 수놓는 것이지만 말이다.

환상 스크롤을 살 생각은 없었는데, 도적에게 도미닉의 소식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 미친 마법사가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보험으로 준비해두려는 것이었다.

생체 키메라의 선구자로 불리는 광기의 도미닉.

그 미친 마법사의 과거를 난 알고 있으니까.

발화 스크롤과 환상 스크롤을 구매한 나는 마차에 탔다.

"푸른 장미로 가시죠."

그토록 기다렸던 말이 떨어졌다.

말고삐를 쥔 가비스의 손이 갑자기 다급해졌다. 마차는 전보다 빠르게 광장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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