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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8% MAYORDOMOAPOC / Chapter 2: 2

Kapitel 2: 2

예상했던대로 나는 아포칼립스 속 집사와 동일한 능력을 지닌 '집사' 클래스가 된 모양이다.

게임과는 달라진 점들이 좀 많았지만….

더 좋아졌다고 봐야 하나?

[방어 설비 건설], 게임에서는 마지막에 열린 기능인데 현실에서는 시작부터 사용이 가능했다.

그도 그럴게, 당장 좀비 두 마리만 와도 내가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생존에 가장 필요한 능력 같아서 방어 설비 건설 탭부터 확인 했는데―

[고정 포탑: 100p]

[750RPM, 초당 12발, 7mm마탄 사용 / 능력치가 소모될 때까지 사용 가능 / 능력치 소진 시 초당 10p 차감]

게임과는 완전 다른 성능의 설비가 되어 있었다.

[잠금]

[잠금]

.

.

.

기존에 있던 '자동 포탑'이니 '탐지 레이더'니 하는 것들은 없었는데 아마도 잠겨 있지 않을까 싶다.

묻고 따지고 할 것 없이 무조건 고정 포탑을 먼저 지어야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 다른 스킬들도 확인을 해봤다.

[주거지 건설]

[벽: 50p(설치 불가)]

[대문: 25p(설치 불가)]

[잠금]

[잠금]

.

.

.

이건 게임이랑 똑같다.

아마도······.

'집'을 지을 수 있는 최소한의 토지를 마련하는 조건을 충족시키면 될 거고.

[요새화]

[이동식 요새: 5,500p]

[잠금]

[잠금]

.

.

.

이것도 게임이랑 이름은 좀 바뀌었지만, 기능 자체는 비슷한 것 같다.

집 자체를 이동시키는 것부터 시작하는 걸 보면.

[고양이 관리]

[키튼 사료 + 고양이 전용 우유: 50p]

[잠금]

[잠금]

.

.

.

『냐아······』

스트릿 출신이라는 설정은 쉽게 말하자면 버려진 아기 길고양이라는 뜻이고.

대부분의 아기 고양이들은 '허피스'라는 고양이만 걸리는 감기에 걸려 있다.

내 품에 있는 아기 고양이도 마찬가지.

관리를 전혀 못 받았는지 코가 조금 짓뭉개져 있고 눈꼽이 심하게 껴서 눈도 잘 뜨지 못한다.

이대로 두면 진짜 얼마 안 가 죽지 않을까 싶을 정도니.

파앗-!

「몬스터 웨이브 1. 남은 시간 12:00」

"미친…."

고양이 생각에 잠겨있던 순간에 갑자기 떠오른 초록색 알림 화면.

'몬스터 웨이브'라는 게 온단다.

아기 고양이를 두고 담배를 태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저걸 보고 나니 도저히 흡연 욕구를 참을 수가 없었다.

고된 전투와 지칠 대로 지친 몸 그리고 다가올 위협까지.

이상하리 만큼 담배에 끌리는 것 같았지만, 상황적으로 그러했으니 큰 의문을 가지지는 않았다.

지이익―

탑차에 쌓인 담배를 뜯어 입에 물었다.

치익!

떨어져서 피우면 담배 한 대 정도는 괜찮겠지?

"쓰으읍, 후우우우······."

「보유 포인트: 130p」

'고양이 사료'를 사면 '고정 포탑'을 지을 수 없다.

그말인즉슨.

나는 앞으로 나오게 될 몬스터 웨이브란 것에 혼자서, 그것도 맨몸으로 맞서 싸워야 한단 말이다.

"쓰으으읍."

치이이익―

담배는 계속해서 타들어가고 여전히 답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머리에 니코틴이 들어가서 기분이 조금은 편해졌다.

"후우… 언제 내가 뒤 보고 살았다고."

최소한의 생활수준만 유지한 채 월급의 대부분을 동물보호단체에 기부하던 나다.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어서 직접 키우고 싶어도 참고 살았던 나고.

불가항력이긴 했어도 기왕 내 품에 들어온 고양인데, 처음부터 잘 돌봐주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탁- 타악!

그래서 담배를 꺼 버리고 곧장 고양이 사료를 구매했는데······.

[키튼 사료 + 고양이 전용 우유: 50p]

가성비가 심각하게 떨어지는 느낌이다.

50p가 얼만지는 모르겠는데, 비싼 금액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고작 하루치 고양이 사료에 고정 포탑 설치비의 반을 썼다고 생각하니까 눈탱이 맞은 기분이 들고 있거든.

"우쭈쭈."

그래도 기왕 샀는데 제대로 먹여 줘야지.

『냐아······』

아기 고양이가 기운이 없는지 우유에 사료를 말아 먹여주는데 반은 흘리면서 먹는다.

차라리 치료제 같은 걸 팔면 더 좋았을 것을….

고양이 감기 허피스를 치료하는 법은 간단하다.

허피스 치료용 안약을 넣어 주고 잘 먹여서 면역력을 키워주면 끝.

뭐, 습도 조절이니 뭐니 할 것들이 조금 더 있지만, 멸망한 세계 속에서 습도까지 챙기기는 조금 어렵지 않을까 싶다.

안약을 구할 수 있을지가 문제다마는···.

『냐아…』

내가 자기를 먹여준다는 걸 아는지 내 손에 머리를 부비더니 다시 잠에 든 고양이.

나는 내 손바닥에 누워 있는 아기 고양이를 지그시 바라봤다.

검은색 털.

아직 어려서 그런지 눈동자 색이 파랗다.

종은 잡종이다.

전문용어로는 '코리안 숏헤어' 줄여서 코숏이라 부른다.

숏헤어라는 명칭에 맞게 부드럽고 짧은 검은색 털이 고양이의 몸을 뒤덮고 있었다.

눈동자는 무슨 색이 되려나?

건강을 생각하면 어릴 때부터 습식만 먹이는 게 좋다는데, 사료는 어디서 구하지?

허피스로 뭉개진 코는 잘 나으려나?

보다 보니 끝없이 사고가 늘어진다.

고양이는 귀엽다.

고양이는 사랑스럽다.

고양이는 완벽한 동물이다.

"에휴…."

조금 오바한 것 같네.

「몬스터 웨이브 1. 남은 시간 10:00」

두 시간이나 지나 있을 줄이야.

쉴 만큼 쉬었으니, 이제는 할 일을 해야 할 때다.

"끄윽…!"

탑차에 들어 있던 눈삽을 꺼내 집 마당에 널브러진 좀비 시체를 치웠다.

"흐아아앗!!!"

그다음 할 일은 잔해 치우기.

게임과 똑같은 배경인 '폭삭 무너진 나의 집'.

게임 속 시작 지점은 집 뒤편에 있는 2평 남짓한 방공호다.

실제로 내 집은 1970년대 지어진 낡은 주택이라 부엌 뒤편에 정체 모를 지하 공간이 하나 있었는데, 나중에 알아본 바로는 방공호 기능을 하는 장소였다.

습하고, 어둡고, 반은 묻혀 있는 콘크리트 덩어리.

하지만 멸망한 세상에서는 내가 살 수 있는 든든한 기반이 되어줄 것이다.

「몬스터 웨이브 1. 남은 시간 08:00」

게임에서는 클릭 앤 드래그로 끝인 작업이, 현실에서 몸으로 직접 하니 미친 난이도가 되어 버렸다.

무너진 목재 골조, 콘크리트 조각, 철근 같은 것들을 옮기는 일이 쉬울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시작한 일이지만···.

콰앙-!

하면 할수록 이게 뭔 개고생인가 싶다.

"후우… 후욱…."

188cm의 큰 키.

다년간의 노가다와 막노동으로 단련된 몸.

꾸준히 운동까지 해온 내 근육은 고작 편돌이 생활 2년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미친듯이 힘들다.

막노동으로 생긴 다부진 근육도 멸망한 세상의 잔해를 치우는 일에는 버티기 힘든 모양이다.

괴물이 몰려온다는데, 힘든 것은 좀 참으면 될 일.

탑차에 쌓인 생수로 수분도 채워주고 간간이 초코바로 허기도 달래주다 보니.

「몬스터 웨이브 1. 남은 시간 01:00」

몬스터 웨이브까지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대부분의 준비를 끝냈고.

[벽 건설: 50p]

이제 킬존(Kill Zone)만 만들면 끝이다.

#4. 좀비와 몬스터 (2)

킬존(Kill Zone).

디펜스 류의 게임에서 적을 죽이기 쉽게 만드는 길목을 뜻하는 말이다.

함정을 깔거나 벽을 둘러 이동 경로를 제한하는 등의 복잡한 설계가 가능한데, 거창한 이름과 달리 나의 킬존은 초라하기만 하다.

부아아아앙―

잔해를 치워둔 2평짜리 방공호.

끼이이익-

그 옆을 탑차로 막아 벽을 세운다.

탑차 건너편에 [주거지 건설] 스킬로 벽을 설치했더니, 2평짜리 공간은 한 줄짜리 일방통행 길로 변했다.

당장 내가 살게 될 장소에서 몬스터를 죽여야 한다니 조금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별다른 선택지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1m 정도는 땅에 묻혀 있기 때문에 구덩이 역할도 충분히 해줄 것이고.

「몬스터 웨이브 1. 남은 시간 00:10」

'1이라고 써진 것을 보면, 2도 있고 3도 있지 않을까?' 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시작할 때쯤.

「몬스터 웨이브 1. 남은 시간 00:00」

「몬스터 웨이브 1. 고블린 30마리.」

웨이브가 시작되었다.

첫타부터 죽으란 법은 없는지 다행이도 나타나는 적이 고블린이었다.

「직업 전용 퀘스트 – 10레벨까지 고양이를 지켜라.」

「보상: 신성의 조각이 고양이에게 깃든다.」

그리고 파란색 창의 메시지가 허공에 하나 더 떠올랐다.

신성의 조각은 대체 뭐고, 10레벨은 어떻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마는 들려오는 기괴한 소리 때문에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갈 수는 없었다.

우우우웅-!

집 앞 무너진 도로 아래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는데.

-고르르륵!!!

-고르르륵!

그 정체는 비스듬히 꺼진 도로를 타고 나를 향해 돌진해오는 고블린들이었다.

-고르르륵!!!

"씨발."

도로를 타고 올라온 고블린들은 처음 봤던 고블린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철그럭.

철그럭.

애꿎은 담배만 태우며 애써 마음을 진정 시켜 보려 했지만, 저 무장을 보니 다시금 담배가 땡긴다.

철그럭.

녹슨 투구, 녹슨 갑옷, 녹슨 신발, 녹슨 철검과 방패.

스치기만 해도 파상풍 100%를 보장해줄 것 같은 외견의 철제 장비를 입은 고블린들.

주춤-

것도 대열까지 맞춰서 올라오고 있다.

순간 조금 쫄아서 뒷걸음질을 쳤는데―

『냐아….』

등에 멘 가방에서 들려오는 고양이의 숨소리가 다시금 나의 전의를 불러일으켜 줬다.

"후우…."

그래.

여기서 튄다고 살 수 있다는 보장도 없어.

이 작은 고양이는 내가 하루만 없어져도 금방 죽어버리고 말 거야.

나만 살아남아 봐야 별것 없다는 걸 알잖아?

이번엔 이 작은 생명이랑 같이 살아보자고.

작은 숨소리가 일으켜준 용기.

그 덕분에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이준(Lv.1) 32세 / 보유 포인트: 30p」

「클래스: 집사 / 능력치: 1」

「스킬: [방어 설비 건설], [주거지 건설], [요새화], [고양이 관리]」

상태창에서 아직까지 확인하지 못한 기능은 '능력치' 하나뿐이다.

보통의 게임이라면 '힘', '민첩', '마력' 같은 스탯으로 나타났을 힘이 아닐까? 어쩌면 적재적소에 맞게 힘을 강화시켜 주는 걸 수도 있어.

까지 생각이 이어졌고, 나는 철봉을 붙잡고 나름의 노력이란 것을 좀 해봤다.

-고르르륵!!!

철그럭.

무너진 담장을 넘는 고블린을 애써 무시하며 몸에 힘을 주거나 뭔가를 느껴보려 노력을 하다 보니―

우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이변이 일어났다.

"이, 이게… 뭔······."

혼잣말이 나올 정도로 기이한 감각이 느껴진다.

몸에 흐르는 피를 직접 움직인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다.

진짜 피는 아니고 '알 수 없는 무형의 어떤 힘'이다만, 비유를 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잠깐 사용해 본 '능력치'라는 힘.

이 짧은 시간에 나는 많은 것을 느끼고 알아낼 수 있었다.

1. 소모되는 느낌이 드는 걸로 보아, '1'이라는 수치는 사용 가능한 능력치의 총량이다.

2. 무기, 혹은 신체를 강화하는 용도로 쓸 수 있다.

3. '원하는 신체 능력'을 강화할 수 있다.

즉, 무기의 공격력을 늘리거나 점프력을 키운다거나 하는 기예가 가능해졌다는 말이다.

그 짧은 순간에 마치 손발을 움직이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깨달음이 찾아와줬다.

철그럭.

이 사태를 일으킨 시스템 같은 놈이 나를 죽으라고 내모는 건 아닌 모양이다.

-고르르르륵!!!!

담장을 넘어 무너진 현관의 잔해 앞으로 나타난 고블린.

놈이 나를 바라보며 탑차와 벽 사이에 있는 1m 깊이의 방공호 아래로 내려간다.

탑차와 벽으로 나름의 킬존을 만든 것이 실제로 먹히기는 했는데 눈앞에 보이는 것은 10마리밖에 없었다.

몬스터 웨이브 1이 '고블린 30마리'라는 걸 생각해 보면, 나머지는 벽 왼편이나 우측의 탑차 너머로 우회하지 않았을까 싶다.

즉, 놈들은 수적 이점을 살릴 줄 안다는 말이다.

"어이가 없네."

이럴 거면 첫 고블린도 똑똑하게 보내주든가.

그래도 선빵필승이라는 말이 있으니.

철그럭.

철봉을 힘껏 붙잡고 힘을 주었다.

탑차의 파티션을 나누던 조잡한 철봉에 푸른빛 빛이 감돌고.

부우웅-

퍼억-!

나는 그것을 휘둘러 구덩이를 딛고 올라오려는 첫 번째 고블린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그것에 맞은 고블린은―

촤아아악-!

녹색 피를 흩뿌리며 옆으로 나가떨어졌다.

원샷원킬까지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이 능력치라는 게 제법 뛰어난지 단 한 방에 놈을 죽였다.

"이럼 할 만하지."

고블린들이 갑옷을 입고 머리를 쓰게 됐다는 차이점은 생겼지만, 느려터진 이동속도와 작은 키는 그대로다.

그 말은 이제부터는 속도와 체급의 우월함을 이용해 치고 빠지기 전략이 가능하다는 의미고.

타앗-!

가방에 들은 고양이가 어지럽진 않을까?

순간 걱정이 들었지만―

『냐아!!!』

이런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지 등 뒤에서 씩씩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퍼억-!

퍼억-!

그래서 마음 놓고 탑차 뒤편으로 뛰어가 고블린 두 마리를 때려잡았다.

『냐아아!!』

어째 응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울음소리를 내 멋대로 해석한 자기합리화일 수도 있겠지만, 그냥 그렇다고 믿고 싶다.

철그럭!

철그럭!

타앗-!

-고르르르륵!!

퍼억-!

방공호의 구덩이 벽을 타고 올라오는 고블린 하나를 잡는다.

타앗-!

퍼억-!

뛰어서 탑차 뒤편으로 돌아오는 고블린을 잡는다.

이 짓을 몇 번 반복하다 보니, 탑차 건너편에 설치한 벽 너머로도 고블린들이 나타났다.

철그럭.

철그럭.

녹슨 갑옷을 입고 다가오는 열마리의 고블린.

정면, 좌, 우 모든 방향에서 고블린이 나타났기 때문에, '탑차-〉 방공호-〉 탑차-〉 방공호'루틴으로 꿀 빠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꿀이 막히면 다른 꿀을 빨면 되는 법.

타다다다다닷!!!

다음 전략은 간단하다.

그냥 방공호를 뛰어넘어 반대편에서 똑같은 짓을 반복하면 된다.

-고르르르르르르륵!!!!

-고르르르륵!!!!

고블린은 고블린인 모양이다.

그저 2평짜리 방공호를 뛰어 넘었을 뿐인데, 놈들은 왔던 길을 빙 돌아서 되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꼬우면 일로 다시 돌아오든가."

아니면 다 같이 방공호로 내려와서 건너오든가.

-고르르르륵!!!

대장 같은 놈이 손을 하늘 위로 올리며 소리치자 벽 너머로 돌아왔던 10마리의 고블린들이 다시 벽 너머로 사라졌다.

그냥 방공호로 내려왔다면 더 좋았을 것을.

"쯧."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해야지, 뭐.

부우웅-

퍼어억!!!

허겁지겁 방공호의 구덩이에서 방향을 돌리는 고블린의 머리통을 깨부순다.

탑차 쪽은 수를 좀 줄여놨으니, 이제는 벽 너머 놈들을 잡을 차례다.

타앗-!

대충 스무 마리 정도 남았나?

퍼억-!

벽 너머의 고블린의 머리통을 깨부시려고 봉을 내리쳤는데―

철그럭.

-고르륵!!!

공격이 처음으로 막혔다.

"끄응······."

'능력치'의 힘이 다 소진됐는지 더 이상 힘이 담기지 않는다.

나름의 위기라고 할 수 있는 상황.

하지만 내 마음은 평온하기 그지없다.

철그럭.

내 클래스가 집사가 아니었다면 좆됐다고 생각하며 다음을 도모했어야 했겠지만, 나는 집사다.

「이준(Lv.1) 32세 / 보유 포인트: 230p」

「클래스: 집사 / 능력치: 1」

「스킬: [방어 설비 건설], [주거지 건설], [요새화], [고양이 관리]」

1안 히트 앤 어웨이는 실패다.

이제는 2안으로 넘어갈 차례.

타앗-!

기존의 계획대로 놈들을 잡으면서 모은 포인트로 고정 포탑을 짓기 위해 곧장 뒤편의 대문 쪽으로 달려갔다.

[고정 포탑: 100p]

고정 포탑을 설지할 장소를 바라보니, 설치 가능한 땅은 푸른빛으로 보이고 설치가 불가능한 땅은 붉은빛으로 보이고 있었다.

좁은 면적만 막을 생각을 한다면 무너진 집이 있는 장소에 포탑을 건설해야 하는데,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위이이이잉-!

집이 무너지기 전, 부엌 옆에 붙어있던 방공호.

1m 깊이의 방공호 옆에는 탑차와 벽이 하나 올라와 있고 그곳에서 일직선상에 대문이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폭삭 무너져 버렸으니….

하여튼 대문이 있던 자리가 있다.

내가 정한 포탑의 위치는 무너진 대문 바로 옆의 빈 땅이다.

커버할 면적이 커진다는 단점이 생기지만, 멀리 본다면 이곳에 포탑을 짓는 게 올바른 판단이다.

어차피 나중에 대문도 짓고 담장도 세울 생각이니까.

위이이이이잉-!

기계음 같은 소리가 나며 고정 포탑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철컥-

철컥-

1m 정도 되는 정사각형의 땅에서 푸른빛이 일어나고 바닥에서부터 고정 포탑의 형체가 만들어진다.

우우우웅-!

바닥에서 솟아난 정육면체 큐브들이 기묘한 소리를 내며 허공에 떠오르고 서로 맞물리기 시작한다.

우우우웅-!

큐브들이 서로 뭉치고 겹쳐지면서 포탑이라 불러도 될법한 모습을 이루었다.

위잉-!

철컥-!

360도 회전이 가능한 하부 지지대.

지이이이잉―

회전하며 총알을 발사하는 중심부.

위이이이잉―

그 뒤편에는 사용자가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만들어진다.

철컥-!

마지막으로 총알이 발사될 수 있는 게틀링 건의 포화와 비슷한 총구까지 생겨났다.

철그럭.

철그럭.

그리고 그사이에 20마리의 고블린들은 대문 근처까지 다가있었고.

-고르르르륵!!!!

대장격으로 보이는 고블린이 칼을 높이 치켜들고 외치는데, 내 나름대로 해석해보자면 '돌격'이지 않을까 싶다.

-고르륵!

-고륵!!

고블린들도 나름 힘을 아껴뒀는지 조금 속도가 빨라진 느낌이 드는데....

딱히 위협적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내게는 크고 웅장한 '고정 포탑'이 있으니까.

풀썩!

재빨리 완성된 고정 포탑의 조종석에 앉아 자동차 핸들같이 생긴 조종대를 잡았다.

'아속집'에서는 본 적이 없는 수동 포탑인데, 각성 덕분인지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사용법이 흘러 들어왔다.

핸들을 당기면 발사.

좌로 꺾으면 왼쪽으로, 우로 꺾으면 오른쪽으로 포탑의 방향이 바뀐다.

위이이이잉―

750RPM, 초당 12발이라는 연사력.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적어도 싸구려 철봉을 휘두르는 것보다야 훨씬 나을 것이다.

위기?

고양이 집사이자 내 집의 집사로서 감히 말하건데, 내가 '집사'로 있을 수 있는 한 내게 위기란 없다.

투타타타타타타타타타타탓!

고작 2초라는 짧은 시간.

조종대를 당기면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번 쓸어줬을 뿐인데.

후두두두둑-!

고블린들은 고깃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후두두둑-!

고정 포탑의 위력이 내 상상을 초월한다.

고블린들이 입은 조잡한 녹슨 철갑옷 따위는 통으로 뚫어버리고 몸까지 산산조각 내는 고정 포탑의 힘.

내부를 휘젓고 관통한 총알.

사방이 녹색 피로 낭자하고, 하늘에서는 튀어나간 고블린의 살점들이 떨어지고 있다.

"와아...."

고작 반나절이 조금 넘는 시간.

본래도 비위가 강한 나인데, 그새 비위가 더 강해진 모양이다.

저걸 보고 감탄이 나오는 걸 보면.

후두둑-!

사방을 뒤덮은 녹색 피.

조각난 살점과 갑옷에서 튀어나간 철조각들.

다소 역한 광경임에도, 정신적 타격은 없고 오히려 묘한 짜릿함과 이상한 고양감만이 느껴지고 있다.

이상한데…?

왜 이렇게 몸에 힘이 넘치냐.

'상태창.'

「이준(Lv.2) 32세 / 보유 포인트: 530p」

「클래스: 집사 / 능력치: 2」

「스킬: [방어 설비 건설], [주거지 건설], [요새화], [고양이 관리]」

단순한 기분 탓이라기엔 조금 이상해서 상태창을 불러봤는데, 레벨과 능력치가 하나씩 올라 있었다.

"조건이 뭔질 모르겠네."

고블린 35마리, 좀비 1마리.

단순한 레벨업 조건으로 치부하기에는 그 수가 좀 많다.

'능력치'도 불분명하고.

힘을 담아 철봉을 열 번 정도 휘두르면 소진되었던 것 같은데···….

이게 레벨이 올라서 회복이 된 건지, 자연 회복이 된 건지 알 수가 없다.

그건 뭐, 앞으로 차차 알아 가면 될 거고.

「몬스터 웨이브 1. 클리어.」

「인벤토리가 개방됩니다.」

「인벤토리에 보상이 지급되었습니다.」

보상도 나중에 확인하면 된다.

그보다 먼저 할 일이 있으니까.

『냐아아~』

백팩에서 들려오는 귀여운 소리.

지이이익-

지퍼를 열고 고양이를 싸둔 천조각을 치웠는데, 암모니아 향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우쭈쭈. 볼일도 잘 보고 착해."

고작 4주밖에 안 된 고양이.

잘 먹고 잘 싸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해주고 있는 거다.

『냐아아~』

손바닥 위에서 갸르릉거리는 아기 고양이를 보자마자 고된 전투로 쌓인 피로가 눈 녹듯이 사라진다.

옆 빌라에 사는 아저씨의 죽음부터 끔찍한 괴물들과의 싸움까지.

정신적인 피로도 제법 쌓였건만, 그것마저도 순식간에 씻겨 나간다.

남은 것은 고양이의 귀여움에 대한 찬사.

그리고 작은 생명에게 싹트는 사랑.

여전히 내가 하나의 생명을 책임질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하나의 생명을 책임진다는 무게감과 그와 더불어 이 작은 고양이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분명히 내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다.

아직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어도.

오랜 기간 혼자였던 만큼 그런 나의 삶에 끼어든 작은 생명에게 이상하리만큼 쉽게 빠져들고 말았다.

『냐아아!!!』

"왜? 배고파?"

손가락을 물고 우는 게 아무래도 배가 고파 보인다.

재빠르게 구매했던 사료와 우유를 동봉된 일회용 그릇에 담아줬다.

찹, 찹.

이번에는 먹여주는 대신 직접 먹게 해줬는데, 고맙게도 아픈 몸으로도 밥은 잘 먹어준다.

먹으면서도 허피스 때문에 많이 불편한지 계속해서 몸을 움찔거리고 있지만···.

뭉개진 코.

눈꼽이 잔뜩 껴서 제대로 뜨지 못하는 눈.

'허피스'를 제때 치료하지 못하면 영구적인 안구 손상이나 장애가 생길 수도 있다.

생후 4주 정도의 어린 나이임을 감안하면 사망까지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

당장······ 약부터 구해야겠어.

「몬스터 웨이브 2. 남은 시간 48:00」

이 사태를 만든 놈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48시간이나 준 걸 보면 그사이에 뭐라도 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나는 그 시간 동안 고양이 용품들을 파밍할 생각이고.

상대적으로 경쟁률도 낮을 거고, 근처에 동물병원도 두 곳이나 있으니까.

나간 김에 주변 상황을 파악할 수도 있을 테지.

옆 빌라 아저씨로 추측하건데, 아무래도 생존자들이 더 있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미친 좀비가 되어 있거나.

#5. 파밍

편의점 일을 하기 전 탑차로 택배 배송일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상하차+택배라고 해야 되나?

어쨌든 내가 하던 일은 좆소기업의 물건을 대기업까지 운반해주는 게 주된 일이었다.

건실한 기업들은 자체적으로 슈퍼 배송에 납품할 탑차를 보유하고 있었으니, 나는 그 틈새인 좆소기업들을 노려야 했다.

일게 택배기사가 좆소라고 부르는 것도 웃기는 노릇이다만, 이 일을 하다 보면 그렇게 된다.

'슈펑'이라는 거대한 기업의 납품 갑질.

지정일, 지정 차량, 지정 배송요건, 제멋대로인 납품 수량, 최소 50일에서 100일까지 걸리는 결제일 등 까다로운 것들을 납품사에 요구한다.

다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르는데, 그쪽 사장들 말로는 그렇다고 했다.

그러면 납품사는 나 같은 픽업 기사에게 갑질을 한다.

밖에서 대기시켜두는 건 기본에, 팔렛트 납품을 하면서 지게차조자 없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괜히 좆소가 아니다.

지들이 패킹 요건을 못 맞춰 반품되는 걸 내 탓으로 돌리는 건 기본이요, 심하면 꼬박 반나절을 밖에 세워두기까지 했으니.

오죽 열 받았으면 근성으로 먹고사는 내가 고작 반년 만에 때려 쳤겠는가.

그래도 지금은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으니, 이제 와서는 신의 한 수였다고만 느껴진다.

탑차에 있던 짐들.

침낭, 휴대용 가스버너, 멕가이버 칼, 도끼, 공구 세트, 눈삽, 거치형 안전바까지.

구석에 박아두고 귀찮아서 그냥 내비 뒀었는데, 세상이 망하고 나니 정말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사람이란 참 간사한 존재다.

그 짜증나던 경험이 이렇게 값지게 느껴질 줄은 몰랐으니까.

부글부글.

해가 중천에 떠서 기울기 시작했으니 약 14시간 만에 하는 식사다.

중간에 물과 초코바 몇 개를 먹었어도 워낙 고된 시간을 보내서 그런지 미친듯이 배가 고파 오는 건 어쩔 수 없다.

고양이 약품을 파밍하러 가기 전에 최소한의 허기는 채워둬야 위기 상황에도 잘 대처하리라는 판단에 밥부터 제대로 준비하고 있다.

그래 봐야 라면이 전부지만.

"후루루루룩-."

식사를 마친 후에는 파밍을 떠날 준비를 했다.

『냐아아!!!』

밥을 먹고 잠들었던 고양이를 가방에 넣고, 허리춤에 도끼를 찬다.

철그렁-

사거리가 길다는 장점을 지닌 철봉을 손에 들었고 마지막으로―

'인벤토리.'

파앗-!

「저급한 집사복 세트」

「방어력 +10, 집사 능력을 강화한다.」

퀘스트 보상을 확인했는데······.

보상이 어떤 수준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방어력 10이라는 게 어떤 수치인지도 모르겠고, '집사 능력 강화'라는 것도 뭘 말하는지 잘 모르겠다.

'집사'로서 역할을 다할 때 강해진다는 말인가?

'집사 클래스'의 스킬이 강해진다는 말인가?

잘 들어맞는 내 감에 의지해보자면 전자가 맞는 것 같은데, 대체 '집사'로서의 역할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포칼립스 속 집사'를 기준으로 보자면, 내가 사는 곳을 관리하고 고양이를 돌보는 중의적인 의미로 집사가 통용되었다.

아마도 현실에서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철그렁-

확인은 차차 하면 될 일이니, 일단 옷부터 입자.

기껏 준비를 다 끝냈더니 옷이 튀어나올 게 뭐람.

파앗-!

눈앞에 나타난 인벤토리 창에 손을 가져다 대자 집사복이 화면 위로 튀어 나왔다.

작은 아이콘이 옷으로 바뀌는 것이 제법 신비롭게 느껴졌다만, 그것도 잠시.

"크흠······."

이걸 입어야 된다는 사실에 창피함이 밀려온다.

집사복은 엄밀히 말하자면 연미복에 속하는 옷이다.

흰색 와이셔츠와 그 위에 입을 베스트, 목에는 검은색 나비넥타이까지 있다.

여기까지는 애교 수준이다 그 위에는 '드레스 코트'라고 불리는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긴 정장 자켓을 입어야 한다.

게다가 흰색 구두까지 있으니······.

옛날 영화에 나오는 과장된 모습의 집사 같달까?

근육질의 내가 이걸 입는다 생각하니 조금 부끄럽기도 한데, '세트'라는 말을 보면 뭐 하나를 빼트리는 요령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방어력 +10'과 '집사 능력 강화'.

지금 입고 있는 츄리닝보다는 훨씬 낫겠다마는 저런 옷을 입어볼 일이 없는 현대인으로서 드는 거부감은 어찌할 수 없다.

바스락.

바스락.

불평을 늘어놨어도 '능력치'라는 힘의 맛을 봐버렸기 때문에 '방어력 +10'의 유혹을 이길 수는 없었다.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었는데······.

맞춤 정장처럼 완벽하게 내 몸에 맞아 떨어졌다.

근육 때문에 단추가 조금 땡겨지긴 한다만, 착용감에 불편함은 전혀 없다.

마치 알몸 같은 편안함.

나비넥타이를 메고 편안함을 느끼니 더 수치스러운 기분이 든다.

"크흠."

내 모습을 보면 그야말로 '아포칼립스 속 집사'라는 말에 걸맞은 모습이니까.

철그렁-

"미친...."

집사복 허리춤에 도끼를 차고 녹색 피범벅된 철봉을 드니까 꼴이 더 우스워졌다.

컨셉질마저 제대로 못하는 좆밥 같아 보인달까?

『냐아아~!!』

"너는 마음에 드니?"

가방에서 머리를 삐쭉 내밀고 머리를 부벼대는 것을 보니, 그래도 고양이는 이 모습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그래, 네가 좋음 됐다."

내 집과 집앞의 골목.

그 너머의 세상이 어떤 꼴일지 알 수가 없으니 단단히 준비를 했다.

또각, 또각.

걸음걸이에 맞춰 펄럭이는 집사복의 드레스 코트와 하얀색 정장 구두가 내는 소리가 무너진 잔해 속에 울려 퍼지고 있다.

치이익-

"쓰으읍."

여기에 담배까지 피우니,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이런 컨셉충이 또 있을까 싶을 거다.

멸망한 세상에서 연미복, 것도 나비넥타이에 흰 구두까지 챙겨 신었으니······.

또각, 또각.

대문을 넘어 비스듬히 무너진 골목길이 드러나고―

우우우우웅-!!

그 아래에 자리한 포탈이 눈에 들어왔다.

푸른색으로 일렁이는 빛과 기괴한 소리를 토해내는 포탈.

'이 너머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일어났지만, 저기에 머리를 들이밀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애써 무시한 채 길을 걸었다.

또각, 또각.

무너진 골목길을 피해 빌라 잔해와 골목의 끝쪽을 조심스럽게 걷는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상황에 휩쓸려 제대로 보지 못했던 주변 광경이 생생하게 뇌리에 박히기 시작했다.

나야 운 좋게 밖에 있었다지만, 첫 지진에 탈출하지 못하고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죽지 않았을까 싶다.

대각선으로 무너진 옆 빌라.

폭파된 것처럼 폭삭 무너진 옆옆 빌라.

골목길 끝자락에 있는 잘 지어진 2층 단독주택마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게 무너졌다.

내진설계에 문제가 있는 건지, 그만큼 지진이 심하게 왔던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아니, 지진이라기엔 좀 다른 느낌이었다만.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법한 집 앞의 골목길을 나오면 2차선 도로의 길이 나오는데―

촤아아아아악-!!

어디 수도관이 터졌는지 사방이 물천지였다.

-크르를르르르르.

그리고······.

-크르르르르륵!

고스란히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서있는 좀비 두 마리가 보인다.

이 길에서 아래로 조금만 내려가면 내가 일하던 편의점이 나온다. 편의점 건너편에는 24시 동물병원이 하나 있고.

-크르르륵!!

좀비들이 좀 문제지만.

우우웅-!

일반 철봉으로 팼을 때는 별 타격을 주지 못했던 좀비들.

부우웅-!

콰직!

'능력치'를 사용하니.

-크르······.

손쉽게 놈들을 쓰러트릴 수 있게 되었다.

푸욱-!

2로 성장한 레벨, 2로 증가한 능력치.

몸 쓰는 게 뛰어난 나여서 그런지,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런지는 몰라도 능력치를 다루는 것에 제법 익숙해졌다.

우우웅-!

고블린을 팰 때보다는 조금 더 많이 힘을 담는다.

그리고 있는 힘껏 봉을 휘둘러 머리통을 후려친다.

콰직-!

이번에는 한 방에 좀비를 보내버렸다.

파아앗-!!

좀비가 죽자, 전과 마찬가지로 좀비 위로 물컵과 빵이 나타났다.

저딴 걸 먹을 생각은 없지만.

사람이었던 존재가 좀비다.

그런 좀비를 죽여서 나오는 음식이라는 게 영 찝찝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시각적으로 보이는 형태만 봐도 도저히 입에 대기 어려울 지경이니.

저걸 왜 먹어?

탑차에 있는 것만으로도 반년은 넘게 버틸텐데.

또각.

이번 좀비는 왜 침을 뱉지 않았을까?

또각.

다른 사람들은 저 빵과 물을 먹고 사려나?

또각.

같은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편의점이 있던 장소에 도착했고, 예상했던 대로 편의점과 건너편의 24시 동물병원은 폭삭 무너져 있었다.

"어어······?"

그리고 그 앞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거, 덩치 큰······ 저 친구는 옷이 왜 저래?"

츄리닝을 입은 아저씨.

잠옷을 입은 아줌마.

반쯤 찢겨진 옷을 입은 20대 남자.

롱패딩에 맨 다리로 서 있는 20대 여자.

구석에서 덜덜 떨고 있는 잼민이들 셋인데······.

그 위로 보이는 장비들이 심상치가 않다.

"혹시 여기서 일하던 분 아니에요?"

내게 다가온 아줌마가 물었다.

핑크색 구름이 그려진 수면바지와 잠옷 윗도리가 보이고, 그 위로는 가슴을 반쯤 가리는 철갑옷을 입고 있었다.

허리춤에는 칼을 차고 있고 등에는 50cm 정도 되어 보이는 원형 방패를 메기까지 했으니······.

"그 갑옷은 뭡니까?"

"아니, 편의점 청년 맞냐니까요?"

"맞는데, 갑옷이―"

"그 상태창이란 거 안 나왔어요?"

나왔다.

나도 나왔는데, 니들은 왜 갑옷과 무기를 들고 있는지 궁금해서 묻는 거다.

그러니―

"무슨 말씀이신지······."

"하이고야, 클났네. 괴물도 안 만났고요?"

"자다 깨서 나와 보니 세상이 이꼴이 되어 있네요."

정보 수집을 위한 블러핑을 시작했다.

"여보, 쓸데없는 말 하지 말어!!"

"에휴, 이게 뭐 숨길 거라고. 저 청년 빼면 여기 죄다 각성했는데, 팍팍하게 그러지 마!"

"편의점 청년, 잘 들어. 그러니까―"

흠······.

어째 이상하다 싶었어.

구석에서 떠는 잼민이들도 죄다 갑옷을 입고, 활과 화살, 지팡이, 칼 등의 무기를 가지고 있다.

저 잔해를 치우는 아저씨들도 마찬가지.

아주머니의 말로는, 여기 있는 사람들은 첫 지진에 다 같이 탈출한 동네 주민들이다.

그리고 다 같이 퀘스트를 깼다고 한다.

'전사'는 철갑옷이랑 칼과 방패.

'궁수'는 가죽갑옷이랑 활과 화살.

'법사'는 로브랑 지팡이.

'힐러'는 아직 없어서 모른다고 하는데, 아마 사제복이랑 메이스 같은 걸 들지 않을까 싶다.

메이스라······.

조금 탐이 나는 무기네.

"감사합니다."

"에휴, 뭘. 여기 다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이니까 편하게 얘기해 봐."

"뭐를…?"

"담배, 라면, 햇반 이런 거 다 어디 있어?"

씨이발.

어째 너무 친절하더라니.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나였다.

세상에 공짜가 있을 리 없단 걸 너무도 잘 아는 나이기에 마음속으로 이런 상황에 대비를 해 뒀지만.

"저도 막 나와서 잘은 모르겠네요······. 아마 저 뒤편 잔해 밑이 창고니까 그쪽에 뭐가 있지 않을까요?"

"여보!!!! 거기 말고 더 뒤쪽 파야 된대!!!"

"에잇, 씨이팔. 이쪽엔 뭐 없대?"

"없어!!! 창고가 저 뒤편이라네!!"

고작 3m도 안 되는 거리에 있으면서 저리 고함을 질러대는 이유가 뭘까?

"청년, 고마워. 이거 우리가 저 잔해 속에서 꺼낸 건데 하나 가져가."

아줌마가 건내준 것은 껌이었다.

뒤편에 내가 미처 못 가져간 컵라면과 과자 봉지들을 쌓아두고 있으면서, 굳이 껌을 주다니······.

역시 대한민국 인심이 최고야.

"아, 네. 감사합니다."

"아니, 근데 내가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뭐요?"

「몬스터 웨이브 2. 남은 시간 46:00」

이미 여기 30분을 붙들려 있었는데 뭘 또 물어 보겠다고 그러는지―

"그 옷은 취향이야? 아니면 평소에도 그렇게 입고 다니나?"

씨이발.

"하아… 제가 옷 취향이 좀 그렇습니다."

"기분 상한 건 아니지?"

"네. 전 가볼게요."

"그래, 여기는 우리 '행복 빌라' 사람들이 먼저 왔으니까 청년은 다른 데 뒤져 봐. 그 좀비라는 괴물한테서 물이랑 빵 얻을 수 있는 거 잊지 말고!!!"

어째 돌아가는 상황이 좀 그렇네.

'행복 빌라', 'XX 빌라' 단위로 묶여서 다니면, 나중에는 아파트나 지역구로 저 지랄을 하는 거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또각, 또각.

에휴······.

뭐, 재난 상황의 인간이 비정해지고 이기적으로 변하는 건 이해하겠다만.

혼자 사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안녕하세요."

24시 동물병원이 있던 잔해.

그 앞에도 이미 선객이 자리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의사 가운 같은 옷을 입고 허리춤에는 메이스를 매달고 있는 여자.

아마도 '힐러'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24시 동물병원의 수의사가 아닐까 싶고.

"어어?"

아포칼립스가 온 세상과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내 옷차림이 신경 쓰였는지 이 사람도 인사 다음으로 하는 말이 '어어?'였다.

또각.

"혹시―"

"더, 더 다가오지는 마세요."

고양이에 대한 것들을 물어보려 했는데, 어째 대하는 태도가 변태를 만난 모양새다.

"크흠, 옷차림이 사정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편의점 맞죠?"

"네. 혹시 이 병원 수의사이십니까?"

나는 다들 처음 보는 얼굴들인데, 저들은 나를 잘 아는 지 죄다 내 얼굴을 알아보고 있다.

야간 편돌이의 숙명이라고 봐야겠지.

"아, 네. 옷차림도 그렇긴 한데······. 덩치가 크셔서 조금 놀랐네요. 미안해요."

"뭐, 괜찮습니다."

188cm 근육질의 떡대가 무서워 보이는 건 이해한다.

것도 아포칼립스가 온 세상에서는 더더욱 그렇게 보이겠지.

"혹시 허피스 치료 안약 있습니까?"

자꾸 이상한 대화로 시간이 끌리는 것 같아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는데.

"네???"

지이이익-

"이 병원 수의사 아니셔요?"

『냐아아~~!!』

"맞는데······."

가방에서 고양이를 꺼내 그녀에게 보이며 물었다.

"혹시, 진료 보십니까?"

#6. 진료

"...네?"

사제복으로 추정되는 옷을 입은 수의사.

허리에 찬 메이스가 아니라면, 멀쩡하게 야간진료를 보고 있지 않았을까 싶은 모습이다.

"고양이 진료 좀 봐 주시죠."

아포칼립스가 온 세상에서, 것도 근무시간이 지나서 묻는 무례한 질문인 건 안다만….

『냐아...』

당장 죽어가는 소리를 내는 우리 고양이를 내버려둘 수 없다.

"하... 이 와중에 고양이 진료를 봐 달라고요?"

"네. 진료 좀 봐 주시죠. 사례는 꼭 하겠습니다."

뜸들이는 그녀의 태도에 조금 답답하긴 했지만, 당장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건 저 수의사다.

내게는 아픈 고양이가 있고 그녀는 그런 고양이를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하아. 세상이 이꼴인데 사례는 무슨. 고양이나 줘 봐요."

처음에 까칠했던 태도와는 달리 그녀는 제법 친절한 사람이었다.

"우쭈쭈, 진료 봐야지."

내게 고양이를 받아 들기 위해 수의사가 손을 뻗었다.

『냐아아!!!』

낯선 손이 닿자 고양이의 목소리가 커진다.

『하아악!』

"얘 벌써 하악질을 하네요. 외견만 좀 그렇지 기운 넘치는 걸 보면 금방 회복할 것 같아요."

"우쭈쭈, 괜찮아. 너 치료해주려는 거야."

『냐아…』

내 말을 알아듣는지 얌전해진 아기 고양이가 순순히 수의사의 손으로 넘어갔다.

"애기 이름은 뭐예요?"

"그게... 아직."

"뭐, 애기 상태 보면 이해는 가네요. 그래도 살아남길 바라면 이름부터 정해주세요."

이름이야 진작에 생각해 뒀다.

다만,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서 미뤄두고 있었을 뿐이지.

견뎌내리라 믿고 있는 나지만, 아직까지 내 고양이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확신은 없었으니까.

혹시라도 상처받을 나를 생각해서 자제하고 있었을 뿐이다.

32년 독고다이인 내 삶 속에 처음으로 들어온 다른 생명체니까 나도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확실하게 말씀드리는데, 죽을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코에 흉터가 좀 남을지도 모르는데, 그것 말고는 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아포칼립스가 온 세상에서 수의사의 확신을 믿을 순 없다. 그래도 '살아남길 바라면 이름부터 지어라'라는 그녀의 말이 머릿속에 자꾸 맴돌았기에.

"…로라. 이름은 로라입니다."

생각해뒀던 이름을 알려줬다.

"거 봐요. 벌써 이름도 지어놨으면서. 아픈 아기 길냥이 주워온 사람들이 대부분 다 그러니까 자책하실 필요는 없어요."

처음에는 진료를 거부하는 느낌이라 별로라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막상 진료를 시작하고 나니 그야말로 프로 중의 프로의 모습을 보이는 수의사.

그녀가 잔해 틈에서 비닐에 담긴 거즈 같은 걸 들고 와서 고양이의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

"괜찮아. 너는 돌봐줄 사람이 있잖아. 저 잔해에 깔린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하는 말은 좀 그렇다만....

저 아래에 동물들이 깔려 죽었단 말 아닌가?

그걸 하필 내 앞에서 말할 건 또 뭐고.

"뭐라 할 말이...."

저 말에 대답할 거리가 없다.

그래서 부고 소식에 등장하는 단골 멘트를 쳐봤는데―

"그쪽한테 한 말 아니니까 신경 끄세요."

차갑고 매서운 답변이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혹시 치료약은...?"

지금의 나는 철저한 '을'의 위치에 있다.

수의사만큼은 아니겠지만, 고양이에 대해서는 아는 게 많은 만큼 허피스를 치료하려면 '약' 문제를 해결해야한다는 것도 안다.

"저어기 안쪽에 약들을 보관하는데... 보시다시피 꼴이 저렇네요."

그녀가 가리킨 방향에는 거대한 콘크리트 더미와 무너진 벽의 잔해들이 있었다.

"저희 로라 좀 잘 봐주시죠."

내 손으로 50층 건물도 지어봤는데 저깟 잔해를 못 치우겠어?

나는 작고 귀여운 아기고양이 로라의 '집사'다.

고양이를 위해서는 못 해낼 일이 없다.

"으라차!!!!"

콰아앙-!!

이걸 한 방에 날려 버린다고...?

'상태창.'

「이준(Lv.2) 32세 / 보유 포인트: 590p」

「클래스: 집사 / 능력치: 2」

「스킬: [방어 설비 건설], [주거지 건설], [요새화], [고양이 관리]」

레벨과 능력치에 변화는 없다.

1에서 2가 되었다고 열 배 이상 세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

「저급한 집사복 세트」

「방어력 +10, 집사 능력을 강화한다.」

그렇다면 이 말도 안 되는 힘의 근원이 이 옷 때문이라는 건데....

쿠우우웅-!!!

조금 전에 날린 거대한 벽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최소 톤 단위는 되지 않을까 싶은데.

"와아... 힘이 되게 세시네요."

직접 한 나는 놀라워 죽겠는데, 저 수의사에게는 그냥 '힘이 센' 정도로 느껴지는 모양이다.

"그러게요. 이게 어찌…."

"기왕 하신 김에 저쪽도 치워주시죠. 진료비 대신으로."

아직도 얼떨떨한 나에게 다짜고짜 비용을 청구하는 수의사.

담력이 세도 보통 센 게 아닌 모양이다.

하기야 허리춤에 달린 메이스가 완전히 녹색으로 물든 걸 보면 그녀도 힘든 시간을 보냈겠지.

쿠우웅-!!

"안약이 어떤 거죠?"

잔해를 치우고 나니 단단한 철제 선반이 드러났고 그 안에는 플라스틱 박스에 들은 약들이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일부는 깨지고 일부는 멀쩡한 걸 보면, 허피스 치료제 정도는 있지 않을까 싶다.

"다행이네요. 거기 노란색 안약 가져오시면 됩니다."

대략적인 고양이 지식은 있어도 허피스가 낫는데 얼마나 걸리는지는 모른다.

한 움큼 집어서―

"아니!! 두 병이면 충분해요."

대뜸 잔소리를 시작하는데....

아니, 또 재발하면 어쩌려고 저런 소릴 하는지 모르겠네.

"크흠… 혹시 또 걸릴 수도 있지 않습니까."

"어차피 개봉하면 한 달밖에 못 써요. 정 불안하면 4통 챙겨 가시든가요. 하긴, 환경을 생각해보면 면역력을 키우기는 어렵겠네요."

환경?

"제가 지금 로라를 부양할 자격이 없다는 겁니까?"

홀로 세상을 살아온 나다.

밥, 빨래, 청소, 설거지, 전등 교체, 싱크대 수리, 수전 교체까지 못하는 게 없는데다가―

쿠우웅-!!!

지금은 초인적인 힘까지 얻었다.

"아, 아니 그런 말이―"

쿠우웅-!!!

"제가 무슨 자격이 부족합니까?"

쿠우웅-!!!

조금의 시간을 들인다면 주거지 또한 개선될 건데, 환경을 탓하다니.

"자, 잠깐만 진정하세요. 그런 말이 아니고 이 세상을 말한 거예요."

세상?

"건물이 무너지고 이상한 괴물들이 나타나는 환경을 말한 겁니다. 그, 그쪽 분 자격 얘기가 아니고요."

"크흠, 오해였다면 뭐.... 그쪽이 아니라 이준입니다."

본디 내가 사과를 했어야 할 상황이지만, 시종일관 까칠하게 굴던 그녀가 먼저 저자세로 나와 줬기 때문에 사과 대신 통성명을 시작했다.

"아, 네."

예의가 없어서 그런지 아직도 내가 무서워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는데, 수의사는 자기 이름을 댈 생각이 없어 보인다.

"안약은 이렇게 넣어 주시면 돼요."

그래도 일은 잘 해주고 있으니 다행이지.

또옥. 또옥.

그녀가 조심스럽게 손바닥 위에 있던 고양이의 눈에 안약을 떨어트린다.

"애기 좀 데리고 계세요."

그러고는 내가 치워둔 장소로 가 몇 가지 물품들을 챙겨왔다.

"빨간 건 소독약이고, 파란 건 연고예요. 아직 애기라 크게 저항하진 않을 거니까 서너 시간에 한 번씩 뭉개진 코에 발라주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아, 아… 네. 그리고 허피스 말인데요…."

전문지식이 없는 나를 위해 상세한 설명까지 곁들여주니, 직업적으로 프로 정신을 따져 본다면 이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제 가셔도 됩니다."

허나, 아직 내 용건은 끝나지 않았다.

"혹시 사료 좀 가져가도 됩니까?"

아까 잔해를 치우면서 아래에 깔린 것들을 좀 봤는데 고양이 사료가 제법 많이 있었다.

냉장고로 추정되는 부서진 기계 속에는 습식사료도 제법 보였고.

"어… 되긴 되는데, 저걸 다 치울 수 있으시겠어요? 힘도 많이 쓰신 것 같은데…."

당연한 말을.

백문이 불여일견.

콰아아아앙-!!!

"으읏차! 그럼 편하게 가져가겠습니다."

콰아아앙-!

잔해라 해봐야 고작 무너진 벽과 철근 따위인데, 내가 못 치울리가 없지 않는가?

쿠우우웅-

푸스스스스―

"저, 치우는 건 좋은데 사, 살살 좀…."

거, 먼지 조금 날린다고 예민하게 굴기는.

"좀만 참아 주시죠."

50p를 내고 살 수 있는 식량은 좆만한 키튼 사료캔 한 개와 우유뿐이다.

여기 있는 사료만 다 가져가도 족히 반년은 먹이지 않을까 싶다.

"휴우. 혹시 이 저울도 가져가도 됩니까?"

잔해를 치우고 나니 쓸만한 것들이 많이 보인다.

"아, 네…."

"혹시, 여기 장난감들도 챙겨가도 되겠습니까?"

"아, 네…."

"여기 이 숨숨집도 챙겨가도 될까요?"

"하아... 그러세요. 그냥 치우다 나오는 건 다 가져가셔도 돼요."

내가 하는 짓이 진상짓인 건 안다.

무려 2년간 편돌이를 했는데, 그걸 모를 리가 있나.

"제가 꼭 답례를 해드리고 싶은데, 혹시 저희 집에 오시지 않을래요?"

고양이 진료도 봐주고 약도 준다. 게다가 사료랑 장난감까지 챙겨 줬으니....

것도 멸망한 세상에서.

뭐, 치우는 건 직접했다마는 그래도 그걸 도와주고 우리 로라 치료까지 해준 은혜는 꼭 갚아주고 싶다.

"...."

침묵에 잠긴 수의사.

별생각 없어 보여도 그녀도 머릿속으로 나름의 계산이란 걸 하고 있을 거다.

몇 시간 동안 주변을 치우면서 봤는데 그녀에게 식량 같은 건 없어 보이고, 바로 건너편에 있는 '행복 빌라' 사람들과도 가까워 보이진 않는다.

주변에 다른 사람들도 보이지 않고 있으니, 우리 집에 와서 얻어갈 걸 찾아보는 정도는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던 중에....

상상도 못한 대답이 나왔다.

"이상한 것을 요구하실 거면, 그냥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괜히 속는 건 싫거든요. 어차피 여자 혼자서 다른 선택지도 없어 보이고요."

내가 개나 소나 집에 들일 리가....

그냥 보답이나 하려고 부른 건데.

"크흠, 전혀 그런 생각은 없고요. 그냥 집으로 초대만 하는 겁니다. 와서 살라는 말이 아니라."

주춤-

"...진짜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뒤로 한 발 물러나며 나를 올려다보는 수의사.

흐음....

"혹시 제가 좆같이 생겼습니까? 그래도 어렸을 때는 나름 준수하다는 말을 많이 듣고 살았는데."

나를 무슨 강간범 보듯이 말하는데, 뭔가 확실히 해둬야겠다 싶어서 돌직구를 날렸다.

"그거는... 아니고요. 조금 무섭게 생기신 것도 맞긴 한데, 그보다 옷차림이 너무 변태 같아서요. 진짜 그런 길쭉한 정장 상의는 처음 봤어요. 그... 나비넥타이랑 빽구두도요."

씨발.

"아까 말했지 않습니까? 사정이 있다고...."

"그, 집에서 코스튬―"

"아니, 절대 아닙니다."

"그럼 뭔데요?"

'대뜸 이 옷은 집사복입니다. 저는 집사 클래스로 각성했거든요.'라고 말하기는 좀 그런데....

마땅한 핑계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야, 멸망한 세상에서 빽구두에 나비넥타이를 멘 사람을 뭐라 설명해야겠는가?

"휴우.... 진짜 아니시라면 믿을게요."

내내 까칠하게 굴다가 갑자기 이런다고?

"대체 왜…?"

"아, 세상이 이 꼴이 되고도 아기 고양이 챙기는 거 보면 그리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서요. 좀 까칠하게 군거는 제가 원래 성격도 좀 그렇고, 좀 떠본 것도 있어요."

"아… 네."

그렇다는데 어쩌겠어.

이해는 간다.

좀 어이가 없을 뿐이지.

"안내해요. 왜 멀뚱멀뚱 서 있어요?"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나의 집.

가는 길에 무뚝뚝하게 있기도 뭐 해서 잡담을 좀 했다.

"강소현이에요."

시작은 수의사가 먼저였다.

아까 못 다한 통성명을 이어서 하듯이 대뜸 이름부터 대며 시작된 대화.

"이준입니다."

또각.

명함과 이름은 서로 맞교환하는 거라는 가르침을 주고자 나도 같이 이름을 댔다.

또각.

"알아요. 근데, 이준 씨는 집이 안 무너지셨어요?"

"폭삭 무너졌습니다만."

또각.

"그러면 집으로 초대하시는 이유가 뭐예요?"

또각.

"식량이나 잡다한 것들이 있어서 사례하고자 합니다."

또각.

"아, 네."

또각, 또각.

"그… 구두 소리가 너무 거슬리는데, 좀 살살 걸으실 순 없나요?"

또각.

"크흠, 죄송합니다. 이게 어쩔 수가 없습니다."

무슨 마법의 구두라도 되는지 별 지랄을 다 해도 똑같은 크기의 소리가 울려 퍼진다.

또각.

맑고 청아한 구두굽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잠시 정적에 휩싸였다.

"그, 혹시 전직 뭘로 하셨어요? 저는 힐러로 전직했는데."

무료했는지 또다시 먼저 말을 건 수의사.

당연히 '집사요.'라는 대답은 하지 않는다.

내 감이 말하는데 이걸 여기저기 밝혀 봐야 고생길만 열릴 것 같으니까.

"힘쓰는 거 보셔서 알겠지만, 전사입니다."

"갑옷은...? 칼이랑 검도."

세상이 이꼴이된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건만, 뭐 이리 예리하게 구는지....

"불편해서 인벤토리에 넣어뒀습니다."

"아… 그렇군요."

차라리 조용한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입을 꾹 닫고 묵묵히 걷고만 있었는데―

"정부에서 온 재난 문자 어떻게 생각하셔요?"

엄청난 질문을 받아 버렸다.

'문자'라니....

나도 문자를 받긴 했는데, 내 문자는 '신 비스끄므리한 존재'가 보낸 거였다.

고양이가 보낸 건 아닐테니까···.

"핸드폰을 잃어 버려서 재난 문자는 못 봤습니다."

"폰은 어쩌다가…?"

'사실, 제 폰이 고양이로 변했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편의점에서 뛰쳐나오다가 어디 흘린 것 같습니다만."

집사복과 마찬가지로 적당히 둘러댔고.

"그렇군요."

이번에는 그녀도 그냥 넘어가 줬다.

"그러면, 제가 알려드릴게요. 보세요."

그녀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건네주었다.

파앗-!

[긴급 재난 문자 - 2024/12/27 12:23]

[2024년 12월 27일 02:00분부터 지구 전체에 일어난 차원 충돌이 확인되었습니다. 주어지는 퀘스트를 클리어해 생존에 신경 써주시기 바랍니다. 군대가 상황을 정리하고 있으며, 수도권의 경우 인근 학교에서 보급소를 운영할 계획에 있습니다.]

문자는 어딘가 조잡했으나, 그 내용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1. 정부가 살아있다.

2. 통신도 살아있다.

3. 군대가 남아있다.

4. 보급을 준단다.

사방팔방을 둘러봐도 멀쩡해 보이는 게 없는데, 그 와중에 군대랑 정부는 살아남은 모양이다.

대체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 저, 저게 뭘까요?"

쿠우우웅-!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동.

내가 사는 동네다.

그리고 이곳 뒤편에는 아직 남아있는 미군 기지가 있었는데―

쿠우우웅-!

그곳에 최소 100m 높이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바위 괴물이 있었다.

저걸 보고 나니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다.

5. 문자는 구라고 정부와 군대는 망했다.

#7. 손님

주한 미군기지 이전 협정이던가?

2017년부터 2027년까지 용산에 있는 미군기지를 철수하고 평택으로 이전한다는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미군은 실제로 조금씩 철수를 했고, 지금은 미군 기지의 일부분이 공원으로 개방되어 있기도 하니까.

그래도 아직 한·미 연합사령부랑 일부 미군 부대가 남아 있는 걸로 아는데....

쿠우웅-!!!

이제는 남아 있지 않다는 확신이 든다.

"아무래도 저기 군부대 있는 자리 같은데요?"

"구, 군대요?"

탑차를 몰고 이 동네를 뽈뽈데고 돌아다니던 나다.

그런 내가 확신하건데, 저 위치는 '출입 금지' 팻말과 군복을 입은 군인들만 들어가던 그런 장소다.

"아무리 봐도 저쪽은 미군기지 남은 애들이랑 한미 연합 사령부가 있던 자리 같습니다만."

뭐 공원도 있겠지만, 저 괴물이 공원이나 부수자고 나타났을 것 같진 않다.

"군대가 남아 있기는 할까요?"

흐음....

수의사 강소현.

말투로 보아하건데 그녀는 문자의 내용을 그대로 믿고 싶어하는 눈치다.

그리고 내 생각으로는―

"단언컨데, 군대는 커녕 정부도 쫄딱 망했을 겁니다. 기껏해야 목숨 연명한 사람 몇 정도는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정부와 군대는 없다.

쿠우웅-!!

저 거대한 바위 괴물이 소리 소문 없이 어떻게 나타났을까?

생긴 것만 보자면 '골렘'에 어울리는 외형.

까마득한 키와 걸을 때마다 소형 지진이 일어나는 걸로 보아 저 골렘은 말도 안 되는 무게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모종의 수단으로 그 무게를 지탱하면서 이족보행이 가능할 거고.

즉, 지구의 '물리법칙'이니 하는 것들은 앞으로 나타날 것들에게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다.

나만 봐도 벌써 톤 단위의 벽을 날려버리지 않았나?

그러니까....

총, 미사일, 어쩌면 핵무기까지도 이 망해버린 세상에서는 전혀 의미가 없어졌을 것이다.

"...그런 관점으로도 볼 수 있군요."

덤덤하게 내 말을 받아들이는 강소현 수의사.

"그래도, 저는 문명이 이렇게 쉽게 무너질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다.

"그렇군요. 각자 생각이 다를 수 있는 거니까요."

설득?

굳이 그런 걸 왜 해.

생각이 다르면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면 될 일이다.

결과는 각자의 몫이고.

"여기부터는 바닥이 무너져 있으니 조심해서 가야 합니다."

거대 괴물을 조금 구경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집 앞 골목에 도착했다.

우우우우웅-

주춤.

"여기는 이게 왜…?"

강소현, 그녀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무너진 도로 아래에 있던 포탈을 바라보며 내게 물었다.

"원래 다 있는 거 아닙니까?"

당연히 다들 전담 포탈 같은 게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그럴 리가요. 각성 퀘스트랑 몬스터 웨이브 때만 나타나던 문인데...."

'각성 퀘스트랑 몬스터 웨이브는 똑같이 일어났구나, 정말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던 차에―

"그, 혹시 녹색 괴물 몇 마리나 나왔어요?"

그녀가 어딘가 불길한 느낌을 주는 질문을 했다.

"처음엔 다섯, 몬스터 웨이브 때는 서른 마리가 나왔습니다만...."

그리고 그런 나의 불길한 느낌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미친."

처음으로 듣는 수의사 강소현의 욕설.

"이준 씨, 당장 거점을 옮기든가 하세요. 저는 지금까지 녹색 난쟁이 괴물 세 마리 잡은 게 전부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충격 발언.

"세 마리요? 혹시 고블린들이 갑옷도 입고 있었나요?"

"고블린이라 하는군요. 갑옷은 무슨, 그냥 알몸이던데.... 빌라 쪽 사람들도 똑같았구요. 이준 씨는 갑옷까지 입고 나왔어요?"

아무래도 내 난이도만 좀 이상한 것 같다.

하기야 '고정 포탑'이니 '벽 건설'이니 하는 기괴한 능력을 가졌는데, 난이도 정도는 조금 올라주는 게 형평성에 맞겠지.

「몬스터 웨이브 2. 남은 시간 43:12」

"크흠, 그래도 제 집은 안전합니다. 당장 시간도 널널하고요. 43시간 정도 남은 건 똑같죠?"

"아, 네. 시간은 같네요. 문구는 몬스터 웨이브 2예요."

이건 똑같네.

"지, 진짜 안전한 거 맞아요?"

"아니면, 제가 어떻게 여길 지나갔겠습니까?"

서로 다른 경험을 한 만큼, 그녀도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운듯하다.

"하아... 별거 없기만 해봐."

또각, 또각.

뒤에서 우물쭈물 거리며 따라오는 강소현을 데리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냐아아!!!』

고양이는 영역동물이다.

고작 반나절 있었다고 이곳이 제 영역으로 정하기라도 했는지, 기분 좋게 가방에서 내려와 폐허가 된 마당을 뽈뽈거리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강소현 수의사와 함께 마당을 돌아다니는 작은 검은색 털뭉치를 바라보고 있기를 한참.

"얘 진짜 금방 낫겠네요."

수의사가 직접 로라의 회복력을 보장해줬다.

"수의사 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그 보답이 대체 뭘까요? 굳이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걸 보면, 좀 무섭기도 한데요. 포탈도 있고. 현관이 이상한 기관총도 달려 있고. 취미는 존중하는데… 밀리터리 쪽은 아무래도 좀 무섭네요."

"이게, 취미가 아니라 진짜 총이랑 비슷한 건데―"

"이 와중에 애지중지 모신 걸 보면 알겠네요. 저는 진짜 관심 없으니까 그 보답이란 거나 좀 보여주시죠."

이상한 오해를 받아버렸지만, 차라리 이게 낫겠다 싶다.

'집사 능력으로 지은 포탑인데요.'라고 설명할 수는 없는 상황이니까.

게다가 집사복부터 쌓인 스택이 있기도 하고.

드르륵―

"자, 편하게 골라 보시죠."

기브 앤 테이크는 언제나 확실한게 좋은 법.

짐칸에서 떨어진 문을 주워서 다시 막아놨었는데, 그것을 치우고 그녀에게 탑차 짐칸을 보여줬다.

"오, 이건 제법 좋을 것 같은데요?"

씨리얼, 과자, 초코바, 라면 등등.

생수, 유통기한이 긴 캔음료, 휴지 같은 생필품.

"그, 그건 좀...."

그런데 그녀가 고른 것은 하필 하나밖에 없는 휴대용 가스버너였다.

"왜요? 뭐든 다 줄 것처럼 굴더니. 그럼 이거는요?"

"그, 그것도 좀...."

그다음에 고른 것은 멕가이버 칼.

내것은 특제라 그 크기가 30cm는 된다.

용도별로 7종류의 칼날이 달려 있고 유사시에는 무기로 쓸 수 있는 그런 소중한 물품.

"에휴, 뭐 이리 쪼잔한지.... 당연히 이것도 안 된다고 할 거죠?"

"아… 네. 죄송합니다."

그녀가 가리킨 것은 공구함.

못, 망치, 전동드릴, 나사 등등.

내 집의 재건을 위한 필수품이라 줄 수 없다.

"제가 와서 음식 몇 개 들고 갈 거라 생각했어요?"

당연히 그럴 줄 알았지.

아니었으면 데려오지도 않았을 거다.

"뭐라 할 말이 없네요. 죄송합니다."

"하아...."

고작 눈꼽 닦아주고 연고 몇 번 바른 걸로 내 귀중한 생존도구를 줄 수는 없는 법.

그래서 그녀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원하는 물품 하나, 그리고 충분한 식량을 제공하겠습니다."

"갑자기?"

"공짜는 아니고요."

"조건이 뭔데요?"

"그... 중성화 수술 가능하십니까?"

거래할 내용은 '로라의 중성화 수술'.

"얘는 딱 봐도 1개월밖에 안 돼 보이는데, 중성화가 되겠어요?"

"지금 말고 나중에 말하는 겁니다."

"네에...?"

보통 6개월 정도면 중성화 수술이 가능하다.

작은 땅콩이 없는 걸로 보아 로라의 성별은 암컷이다. 그리고 고양이는 중성화를 안 하면 인간과 같이 살 수 없다.

내가 알기로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며 사방에 오줌을 뿌리고 다니거나, 집을 나가는 등의 기행을 저지른다니....

고자가 되는 건 좀 불쌍한데, 아니 암컷이니까 불임이라고 해야 되나?

발정 스트레스로 인한 기행.

호르몬 관련 질병.

자궁질환.

같은 것들에서 해방되는 것이니 고자가 되도 꼭 받아야 한다.

불임보다는 고자가 좀 더 듣기 좋은 느낌이니, 그냥 고자라고 부르기로 했다.

같은 생각을 하는 동안 수의사 강소현은 고장난 것처럼 그자리에 멈춰서 있었다.

"...."

"첫 발정 전에 해야 효과가 좋다는데.... 어떻게 예약진료 어려우시겠습니까?"

"하아... 진짜 상상을 초월하시네요. 저를 뭘 믿고요?"

"뭐, 망한 세상에서 계약서라도 쓰시겠습니까?"

"어휴, 뭔 말을 못해."

그렇게 나는 로라의 중성화 수술 예약을 잡았다.

"지금 로라가 생후 한 달쯤 됐으니, 제가 주기적으로 로라 진료 보는 걸로 하죠. 중성화 타이밍은 애기 상태 보고 정해야 해서요."

덤으로 정기 왕진까지.

"편하게 고르시죠."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네요."

[맥가이버 칼]

[라면 20봉지]

[스팸 10개]

[햇반 10개]

로라의 중성화 수술과 정기 왕진의 대가로 내준 물품은 생각 이상으로 출혈이 컸다.

그래도....

당장 내가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수의사니까, 어쩔 수 없지.

"이참에 잠이나 잘까요?"

그런 그녀가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허나.

"죄송합니다만, 감정 없는 잠자리는 지양하는 주의라서."

나는 혼자가 좋다.

"하아, 미치겠네. 그 잠 말고 수면이요, 수면! 남은 시간도 긴데, 번갈아가면서 망봐주면서 자자는 말입니다!!!"

「몬스터 웨이브 2. 남은 시간 40:06」

다짜고짜 자자고 하지 말고 설명을 하든가.

다소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만, 당장 나도 눈꺼풀이 무거운 것은 마찬가지.

"제가―"

"제가―"

동시에 나온 '제가'.

그다음에 나올 말은 '먼저'고.

마지막 말이 두 개로 갈린다.

일단 내가 하려던 말은 '내가 먼저 자겠다!'였는데, 그녀는 어떨지 모르겠다.

"제가 먼저 망볼게요."

내가 뜸을 들이자 먼저 입을 연 그녀.

"대신, 저는 두 시간 더 잘 거예요. 야간진료보다 이 사단이 난 거라."

'야간 편돌이는 괜찮다 이건가?' 싶었는데, 당장 기절할 것처럼 졸린 상태기에 한 번 참기로 했다.

* * *

"일어나시라고요!!!"

"흐읍…!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앞에 카운트 뜬 거 안보여요?"

「몬스터 웨이브 2. 남은 시간 29:32」

10시간이나 자다니....

평균 수면시간 6시간의 강철체력이 내 장점이건만, 아포칼립스 한 방에 그게 무너져버렸다.

"뭔, 여섯 시간만 자도 쌩쌩하다더니. 순 허당이야, 허당!"

"크흠… 언릉 주무시죠. 언제 깨워드릴까요?"

눈뜨자마자 들은 말이 강소현의 잔소리였기 때문에 조금 화가 나긴 하는데, 6시간을 자겠다며 호언장담을 한 게 바로 나였기에 화를 낼 수는 없었다.

"15시간."

30대 초중반으로 나와 비슷한 나이 대 같긴 한데, 그렇다고 반말을 할 사이는 아니다.

그래도 이해는 해줄 생각이다.

새벽 두 시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최소 30시간은 넘게 깨어있었다는 말이니까.

상대방이 좀 예민하게 군다고 나도 그럴 필요는 없고.

일단, 로라 주치의니까.

『냐아아!!!』

로라 밥 주고, 강소현이 자는 동안 나는 집 청소나 좀 해야겠다.

* * *

「몬스터 웨이브 2. 남은 시간 15:00」

정확히 15시간을 남기고 스스로 일어난 강소현.

몸에 무슨 시계라도 달렸는지 수면시간이 칼 같다.

"이, 이게 다 뭐래요?"

그녀가 일어나자마자 본 것은 깔끔해진 나의 집이다.

집의 입구인 대문은 얼굴과 같다.

그래서 무너진 대문과 담장을 치우고 포인트를 사용해 깔끔하게 벽을 둘러 놨다.

담 내부에 있는 폐허가 된 집의 잔해들도 다 치워버렸기에 우리가 침낭을 깔고 자던 탑차 밖은 텅빈 운동장처럼 되었다.

"와아... 각성이 진짜 좋긴 하네요. 그걸 15시간 만에 다 치운다고? 벼, 벽은 대체 어찌?"

그러게 말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집사'라는 클래스와 '집사복'의 옵션이 좋은 거지만.

"휴유, 하다 보니까 다 되네요. 원래 노가다를 하던 몸이라, 건설 쪽에 조예가 조금 있습니다."

높이 1m의 낮은 담장으로 둘러진 나의 집.

대충 둘러댔는데, 그녀도 '집사'라는 각성과 담장 건설 스킬 같은 것을 생각하진 못했는지 그냥 넘어갔다.

의심스러운 눈초리기는 그대로였지만.

「이준(Lv.2) 32세 / 보유 포인트: 365p」

「클래스: 집사 / 능력치: 2」

「스킬: [방어 설비 건설], [주거지 건설], [요새화], [고양이 관리]」

가로+세로 총합 5m를 기준으로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한 '벽'을 가로로 길게 해 설치했고, 포탑 왼편 대문이 있던 자리에 다시 대문을 박아놨다.

조잡한 목재 문이다만, 문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크니까.

"이렇게 된 걸 보니까, 왜 굳이 여기서 살겠다고 하는지도 이해가 가요."

그럼.

누구 집인데.

"그래도 전 학교 쪽으로 가볼까 합니다. 여기서 10분이면 가는 가까운 곳이기도 하니까요."

흠, 10분이라.

"저 진짜 신뢰 있는 사람이에요. 그 표정 좀...."

'클래스'나 '스킬'에 대한 몇 가지 정보 교환을 한 뒤 이어지는 강소현의 말에는 배려심이 담겨 있었다.

먹튀는 안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긴 한다만 멸망한 세상에서 100%는 없으니 내심 먹튀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걸 알기라도 하는지 굳이 가까운 거리에 있을 것임을 강조해 준다.

"먹튀 걱정은 안 하니까 조심히 가십쇼."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살아서 또 봐요. 만약에 제가 안 오면 한 번 찾아라도 봐주세요."

"학교라.... 차라리 두 번째 웨이브 끝나고 병원 있던 데서 한 번 더 보시죠. 로라 상태도 한 번 볼 겸."

'로라의 주치의'를 잃을 순 없으니, 다음 진료 예약부터 잡았다.

"네! 그렇게 해요. 배웅은 필요 없습니다~!"

내심 그녀도 불안한 마음이 있었는지 내 말에 밝은 표정으로 대답하고는 곧장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휴우...."

수의사 강소현과의 눈치 게임.

나와 타인들의 정보 오차 수정.

폭삭 무너진 집의 재건작업까지.

『냐아아~!!!』

힘들 법도 하건만, 전혀 지치는 느낌이 없다.

『냐아아~!!!』

로라 덕분이겠지?

참 대단한 생명체야.

『냐아아~!!!』

균일하게 울려 퍼지는 앙칼진 울음소리는 밥을 달라는 말이다.

"아빠가 밥 줄게."

아기 고양이 밥은 달라고 할 때마다 주면 된다.

고양이는 어릴수록 열량을 많이 필요로 하니까.

찰그락-

24시 동물병원 잔해 속에서 건져온 물품들.

습식 사료 20개입 두 팩, 츄르 120개, 밥그릇, 키튼 건사료 네 포대, 장난감 한 무더기.

습식 사료와 건식 사료를 반씩 섞어서 주자, 곧장 로라가―

찹, 찹, 찹, 찹.

소리를 내면서 식사를 시작했다.

찹, 찹.

나는 로라의 밥먹는 소리를 들으며 몬스터 웨이브를 맞이할 준비를 시작했고.

「몬스터 웨이브 2. 남은 시간 00:00」

그리고 두 번째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되었다.

「몬스터 웨이브 2. 남은 고블린 2,000마리.」

그런데 그 수가 어째 심상치 않다.

#8. 옘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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