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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9% MALDITOPALADIN / Chapter 10: 90-85

Kapitel 10: 90-85

90화 레이드 (4)

에릭에 있어서 일이 잘 안 풀린다는 것은 곧 돈이 부족하다는 의미다.

그런 맥락에서 에릭은 수십만 골드의 신성을 갈아 넣어 가며, 과거의 기적을 재현하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세계의 법칙을 뒤틉니다.]

[전이 효과가 봉인되었습니다.]

우연이든 기연이든, 한번 해 봤던 일을 재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역시, 하면 된다.'

한 80만 골드쯤 쓰니까 성공해 버렸다.

특정한 힘을 막아 버린다는 의지.

전이의 기적을 행할 줄 알았으니, 그 힘의 구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도 가능했다.

'도망칠 생각은 버려라.'

흑마법사 클래스의 빙의자들은 [유틸리티]에 뛰어난 스킬을 지녔다.

포탈 생성이라든가.

게이트를 연다거나.

지정 대상에 대한 소환도 가능한 까다로운 존재들이다.

그러니 이를 원천 봉쇄 했다.

쿠웅-!

에릭의 거대한 신성력이 거미줄처럼 뻗어 나갔고, 그것은 이내 마경을 뒤덮었다.

그 기척을 느낀 강자들은 사방을 둘러싼 에릭의 힘을 보고서 잠시 멈칫했다.

"허, 저 말도 안 되는 신성력은 뭐란 말인가!"

최전선에서 흑마법사를 도륙 내던 율리우스가 경악했다.

힘의 질을 떠나서, 말이 되나 싶을 정도의 양이었다.

신성력을 즉시 최대치로 회복할 수 있는 에릭이기에 가능한 기예였으나.

이를 모르는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괴물 같았다.

'이미 신성력의 총량이 교황 성하와 비슷하단 말인가?'

공간을 지배하는 신성력.

에릭이 가진 신성력 총량의 80배에 달하는 힘이었으니, 가히 압도적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게 무슨...."

흑탑에서 전장을 살피던 흑마그룹 또한 같은 감정을 느꼈다.

그들은 현재 두 가지 플랜을 세운 상황이었다.

'유틸 스킬들이 다 막혔다.'

하나는 [게이트]로 이 자리를 뜨는 것.

흑마법사 클래스의 상위 전직에서 찍을 수 있는 스킬이다.

유틸리티의 끝판왕 [게이트].

미궁 공략 속도를 압도적으로 당겨 줄 수 있는 힘으로, 게이트를 소환해 특정 좌표와 연결 짓는 스킬이다.

이는 미궁의 계층을 넘나드는 말도 안 되는 성능을 지녔다.

[스킬 사용이 불가능한 지역입니다.]

토마스가 슬쩍 스킬을 발동해 봤으나, 불발됐다.

신성력은 흑마력과 상성이 좋지 못하다.

게다가 빙의자를 태우는 힘이다.

그게 마경 전체를 거미줄처럼 덮어 버렸다.

"대표님, 아무래도 게이트로 도망가는 건 무리일 것 같습니다."

토마스가 꿀렁거리는 검은 액체를 보며 고개를 조아렸다.

꾸드득.

마키아의 회복은 매우 더뎠다.

성창에 족히 수십 번을 꿰뚫렸으니, 그럴 법도 했다.

거대한 진흙 같은 덩어리에서 새하얀 손등이 먼저 제 형태를 갖췄다.

토마스는 그 손등에 입을 가져다 댔다.

쪼옥.

전율이 일었다.

'아아!'

제 형체가 없음에도 마키아라는 존재는 토마스에게 있어 그만큼 위대했다.

마키아의 손이 하늘하늘 흔들렸다.

"차선책은...."

토마스가 시우론의 눈 주변으로 모인 주주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은폐의 장막 속에서 열띤 토론을 벌이는 중이었다.

'싸울 것인가, 대계를 위해 다시 물러날 것인가.'

한번 리페로제를 피해 숨어들었던 주주들이다.

다시 돌아오자마자 성창폭격에 당해 버린 셈 아니던가?

'어쩌면....'

그간의 울분을 토해 내듯이 주주들이 앞장서서 싸우려 들지도 모른다.

물론, 선택은 주주들의 몫.

토마스의 시선이 마경의 구렁텅이를 향했다.

교황이 보였다.

'교황이 본격적으로 나섰으니 대주주님이 나서실지도 모르겠어.'

구렁텅이 위로 거대한 신성의 기둥이 솟구쳤다.

교황의 힘이었다.

마경 한복판에, 그것도 마경의 핵 위로 저런 신성을 세워 버린다는 것이 말이 되나 싶은 순간이었다.

싸아아아아아아—.

시우론의 눈을 따라 구렁텅이를 기어 올라오던 몬스터들이 입자로 화해 사라지기 시작했다.

"역시 교황 성하군."

에릭은 교황의 행동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흑탑은 구렁텅이 너머에 있다.

등 뒤에 몬스터를 내버려 둔 채 싸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니 교황이 저 정도의 신성력을 투자한 거겠지.

'싸울 건가?'

에릭의 시선이 흑탑을 향했다.

전이가 막혔다는 걸 눈치챈 흑마법사들이 분주해졌다.

교황의 진군은 어느덧 흑탑 지근거리까지 다가선 상황.

아직도 주주들은 검은 막 속에서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고, 교황은 탑 근처에 다가섬과 동시에 손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이 땅에 심판의 검을 내려 주소서!"

노인도 아이도 아닌, 거대한 성기사의 모습을 취한 교황이 손을 내리그었다.

쿠웅!

허공을 찢고 나타난 거대한 대검의 형상.

쨍한 금빛을 머금은 칼날이 흑마그룹의 사옥 위로 내리꽂혔다.

따앙————!!!

주주들을 둘러싼 검은 장막과 거대한 신성의 검이 맞부딪쳤다.

루드릭의 거인보다 거대한, 족히 수십 미터의 크기를 지닌 신성력의 대검이었다.

검과 장막의 힘이 충동하며, 둥근 고리 형태의 파동이 마경을 뒤흔들었다.

싸아아아아.

수면 위로 파동이 퍼져 나가듯이.

마경의 하늘에 금빛 고리가 퍼져 나갔다.

파동이 이어질수록 검은 점점 깊이 들어갔다.

쩌저적!

흑탑을 두른 장막에 변화가 일어났다.

'금이 갔군.'

9줄을 이룬 대주주라는 놈을 제하고도 흑마그룹에는 강자들이 즐비했다.

7줄은 기본이요, 8줄을 이룬 놈들도 간간이 보였다.

'역시, 저놈들 뭔가 문제가 있다.'

1억의 생명을 바친 놈이건만, 제 구실을 못 하는 모습.

그 아랫급들도 마찬가지였다.

흑마그룹의 주주들은 공세를 취하지 못했다.

막는 데 급급한 모습.

'하지만 막긴 막고 있지.'

장막에 금이 갔다 뿐, 교황의 힘은 더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뭔가 한 끗이 부족해 보였다.

에릭은 여기서 뭔가 도울 게 없을까 생각해 봤다.

'신성의 대검을 소환하는 힘이라.'

교황은 압도적인 크기의 검날을 소환했다.

말 그대로 소환.

'신의 기적을 빌려 온 건가?'

에릭 또한 유성우를 소환할 수 있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자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억쯤 쓰면 될지도....'

에릭은 [스킬 상점]을 개방했다.

* * *

"대계를...."

장막에 금이 갔다.

그 사이로 신성의 빛이 쏟아졌다.

주주들은 손을 내둘러 금빛을 막아 냈다.

"차라리 여기서 놈들을 끝내 버립시다!"

"아니 되오."

대주주의 옆에 서 있던 노인이 완강하게 손을 내저었다.

새하얗고 기다란 수염이 돋보이는 노인은 한쪽 팔이 없는 모습이었다.

늙고 주름진 얼굴과 달리, 전신에서는 흉포한 흑마력이 넘실거렸다.

"그 리페로제와 견줄 수 있는 교황이오. 불완전한 강림을 꺼내 든다고 될 리가 없소."

다만, 내뱉는 말만큼은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한쪽 팔이 없는 노인은 텅 빈 소매를 흔들며 한탄했다.

"그 상태창이라는 것에 개입한 지도 얼마 되지도 않았거늘...."

주주들은 빙의자들을 이용했다.

인수 합병을 통해 빙의자의 지식 속에서 '몽마(夢魔)'라는 개념을 흡수했다.

그리하여, 꿈을 지배하는 악마를 강림시켰다.

"조금만 더 하면...."

그 결과 상태창에 조금이나마 개입했다.

수천만에 다다르는 영혼을 대가로 바쳤고, 꿈을 통해 [상태창]을 살펴봤다.

그 성과로 흑마법사 클래스를 얻을 때, '어둠의 부름을 받은 자여.'라는 말이 들리도록 만들었다.

대단한 투자에 비해 보잘것없는 성과였다.

"그래서 빙의자들을 더 쉽게 모았지만, 여태껏 아무런 이득이 없지 않습니까?"

이득은커녕, 아직 원금 회수도 못한 상황이다.

"몽마의 힘이 기능하고 있지 않나? 분명 이 투자는 분명 성공할 걸세."

흑마그룹은 빙의자들에게 친숙한 환경을 만들었다.

흑마법사가 되지 않은 빙의자들은 캡슐 속에서 꿈의 세계를 전전하며 살았다.

그들이 꾼 꿈은 지구의 삶.

그것들은 곧 흑마그룹의 자양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인수 합병의 리스크를 없앨 수 있게 되는 게 무엇보다 급선무요."

빙의자와 주주가 하나가 되는 것이 흑마그룹의 인수 합병이다.

빙의자의 기억만 흡수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큰 이득에는 리스크가 따르는 법.

재수 없게 빙의자의 영혼이 주주의 몸을 차지하는 경우도 몇 번 있었다.

"놈들은 정신력이 유약해서 쓸모가 없지."

"그래도 토마스 같은 놈들도 있지 않습니까?"

주주의 몸을 차지한 빙의자들은 죄다 쓸모가 없었다.

그런 빙의자들은 [살인의 쾌락]과 같은 흑마법사 클래스의 패시브 스킬이 무효화되고 높은 수준의 격을 지니게 된다.

그렇게 강력한 정신력으로 무장해, 민주주의 사회의 구현이니 뭐니 개소리를 지껄였다.

"토마스와 같은 유능한 빙의자가 나타날 확률이 채 백에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거늘...."

그래서 인수 합병에서 빙의자가 몸을 차지한 경우, 해당 주주의 신체를 제물로 바친다는 그룹의 지침이 세워질 정도였다.

"빙의자들의 지식을 구체화하여 체득하는 것이 곧 우리의 최선책일세."

주주들의 뜻이 정리되었다.

그들이 앞으로 나설 수 없는 이유는 강림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우리가 모시던 악마들은 전부 허상이 아니었던가?"

기존에 모시던 악마들.

백만에서 수천만까지 제물을 바친 주주들이었으나, 강림한 악마들은 영민하지 못했다.

태반이 괴물과도 같은 모습.

괴물이 괴물 같은 힘을 받아 강림했으니, 압도적으로 강력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노련한 성직자나 군대를 상대하기에는 부족했다.

그저 부수고 파괴하며 학살하는 데 최적화된 힘일 뿐.

"강림한 신체가 오롯이 우리의 것이라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하나, 빙의자들이 바라보는 악마는 진짜였다.

흑마그룹은 큰 변화를 맞이했다.

"꿈의 지배자가 된 그대만 봐도 그렇지."

외팔이 노인의 시선에 검은 날개를 파닥이는 여인이 입가를 가렸다.

검고 기다란 채찍 같은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흐흐.... 소녀, 부끄럽습니다."

악마(惡魔)의 강림(降臨).

남부 대곡창 지대에 강림한 주주처럼, 보통은 소환한 악마에게 몸을 빼앗기게 된다.

하나, 빙의자들의 방식으로 강림을 이뤄 낸다면 흑마법사들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

자신이 추구하는 [악마]라는 개념의 힘을 지닌 채, 스스로가 강림체가 되는 것이다.

"시우론만 봐도 그렇지."

"언어 구사력이 좀 떨어졌어도, 명백하게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지 않던가?"

주주들은 압도적인 제물을 바쳐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강림을 했다가 모시던 악마(지금은 괴물이라 여기지만)에게 몸을 빼앗겨 허무하게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

이제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그런 삶이 아니다.

악마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제국 남부에서 죽은 란도르처럼 허무하게 갈 순 없지 않겠소?"

제국 남동부에서 에릭에게 죽어 버린 주주 란도르의 죽음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얼마나 더 해야 빙의자들의 꿈을 현실에서 보여 줄 수 있겠소?"

"소녀, 장담하지는 못하겠으나, 일 년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그만큼 많은 빙의자를 잡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요사스러운 말투.... 외형과 목소리 성격이 바뀐다는 건 좀 걱정이 드네."

힘을 쓰지 못한다는 제약이 있으니, 선택지는 퇴각이다.

"게이트는 막혔다만, 뭐."

"흑탑의 연결만 복원되면, 탑을 옮겨 가면 되지."

흑마그룹의 본사(本社).

사옥은 일종의 이동 요새다.

마경 곳곳에 동일한 형태의 탑들이 지어져 있고, 그들은 탑에서 탑으로 이동하는 것이 가능하다.

마경의 힘으로 탑을 바꿔치기하는 것.

전이랑은 다른 개념이다.

그 덕분에 주주들은 리페로제를 피해 대륙 곳곳으로 숨어 다닐 수 있었다.

"성창으로 두 동강 날 줄은 생각도 못 했군."

탑은 여전히 부러진 상태였으나, 그 힘의 근원은 착실하게 복원되는 중이었다.

슬슬, 이동하면 되겠다 싶었던 차에.

쿠웅————.

흑탑의 위로 거대한 무언가가 나타났다.

* * *

'저 새끼들 대체 문제가 뭐지?'

에릭은 의아했다.

스킬과 전이는 막힌 상태다.

그런데도 흑마그룹은 계속 방어에만 치중했다.

공세를 취하는 것도 아니고 막기만 한다고 사태가 해결될 리가 없었다.

뭔지는 몰라도 수상했다.

'저럴 놈들이 아닌데.'

수틀리면 자폭이라도 해서 최대한 많은 인명 피해를 일으키는 놈들이 흑마법사다.

지구의 테러 단체보다 악랄한 수준이다.

그렇기에 에릭은 재빠르게 스킬을 추려 냈다.

[심판(審判) - 1,000,000,000]

[신의 분노 – 3,000,000,000]

100억 골드짜리 [부활]처럼, 하단에 있던 값비싼 스킬들을 눈여겨 봤다.

그중에서도 이름으로 효과를 알 수 있을 법한 것들을 추려 냈다.

'교황 성하께서 분명 심판이라 하셨다.'

그 근거는 경험이다.

교황이 검을 소환할 때 [심판]이라는 말이 들렸다.

그러니, 이 힘도 비슷한 성능을 보여 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에릭은 10억 골드를 사용해 [심판] 스킬을 구매했다.

쿠구구궁.

에릭의 주변으로 거대한 기운이 일렁였다.

마치 [개벽]을 얻었을 때처럼.

사방 천지가 진동하고 중력을 거스른 듯이 모든 것들이 둥둥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경의 어둠을 뚫고 에릭의 육체가 찬란하게 빛났다.

와아아아아아아-!!!

그 위용에 교단의 성기사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전투를 하는 위중에도 하늘 위의 성자가 내보이는 기운에 감응한 것이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힘.

스륵.

에릭은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스킬 모션에 따라 손을 하늘 높이 뻗었다.

그 뒤 아래로 내리그었다.

스르륵.

서서히 내려가는 손.

그와 동시에 변화가 일어났다.

쿠웅———.

묵직한 진동.

마경이 뒤흔들리고.

구렁텅이 위의 하늘에 균열이 발생했다.

'심판의 검.'

교황의 것과 비슷한 거대한 검이 서서히 허공을 찢고 나타났다.

압도적인 크기.

그리고 강력한 힘.

쿠웅——!!

에릭이 소환한 검은 흑탑을 두른 장막을 향해 다가섰다.

서서히 하늘을 유영하듯이.

그렇지만 정확한 목표를 향해서.

'조금 더 아래로.'

여전히 교황이 소환한 검이 흑탑의 장막을 두드리고 있는 상황.

둘이 맞닿은 지점에는 선명한 금이 가 있었다.

'됐다.'

에릭은 정확하게 그 균열에 자신의 [심판]을 꽂았다.

푸욱—————!

거센 진동이 일고 흑탑의 장막이 찢어졌다.

91화 레이드 (5)

에릭의 검이 장막을 찢은 순간.

"크아아아악-!!!"

최전선에서 장두식이 고함을 내질렀다.

"끄아아-!!!"

잭슨도 마찬가지.

전두 중이던 성기사들이 일순 멈칫할 정도의 괴성이었다.

그들과 맞서 싸우던 흑마법사들도 당황한 듯이 뒤로 물러섰다.

두 사람이 내지른 고함에 전장이 수 초간 멈춰 버렸다.

"대, 대체 무슨 일이...."

정적이 일었다.

쿠웅-.

정적 속에서 두 사람을 중심으로 거센 진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싸아아아아아—.

두 인간의 몸에서 거대한 신성의 빛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으니.

"허어.... 이게 무슨!"

장두식과 잭슨의 몸 위로 금빛 막이 피어올랐다.

마치 성전기사단이 신성을 둘러 몸을 강화하는 것과 비슷했다.

"신의 총애가!"

"역시, 성자님께서 다 뜻이 있으셨구나!"

최전선에서 빛나는 두 인간을 보며, 찬사가 터져 나왔다.

"거참, 형님이 또 괴상한 힘을 얻었나 보구만."

정신이 나갈 만큼 거센 신성의 세례를 받았다.

장두식은 축복이니 축성이니, 비슷한 경험을 많이 해 봤다.

그래서 빠르게 회복했다.

"두, 두식 형님.... 모든 게 느려진 것 같습니다."

하나, 잭슨은 신성력에 친숙하지 못했다.

확장된 동공으로 잭슨이 사방을 훑어봤다.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다.

세상 만물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심지어 감각도 예리해진 것이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이게 진짜 신성력!"

잭슨은 경악스러웠다.

사고의 확장을 넘어서 힘까지 강해졌다.

거룩한 무언가가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를 두드려 주는 느낌.

'두식 형님이 저렇게 강한 이유가 다 있었군.'

잭슨은 장두식의 비밀을 알아냈다.

"두식 형님은 이런 세계에서 살았던 겁니까?"

그에 장두식이 몽둥이로 어깨 찜질을 하며 방긋 웃었다.

"따깔아, 네놈도 익숙해져야 할 거다."

그 뒤 조언을 덧붙었다.

잘못했다가는 몸이 터진다거나.

뇌가 타 버려서 백치가 된다는 섬뜩한 경고문이 이어졌으나.

"이, 이런 힘을 얻으려면 뭔 짓인들 못 하겠습니까?"

잭슨은 그런 리스크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에릭의 구원을 받기 전까지 신성력의 고통을 감내하던 잭슨이다.

영혼이 타는 고통도 이겨 냈는데, 뭔들 못 하겠는가?

"잭슨 네놈도 한 성깔 하는구만."

"큭, 두식 형님만 하겠습니까?"

상황이 일단락되었다.

이 와중에도 사방이 고요했다.

"거, 다들 멀뚱멀뚱 뭐 하자는 거요?"

장두식이 몽둥이를 고쳐 잡았다.

팔다리를 가득 채운 문신이 푸른빛을 토해 냈다.

그것은 곧 온몸에서 솟구치는 신성력과 뒤섞여 대륙 최초 신성 마법사의 위용을 내보였다.

신성 워-메이지 장두식이 잔상을 그리며 최선두로 나섰다.

"아그들아- 드가자!"

같은 시각, 흑탑의 내부.

르웰은 복잡한 탑을 돌아다니며, 자신만의 역할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지독한 놈들.'

무너진 흑탑의 벽 너머로 치열한 전장이 선명했다.

그녀 역시 분쟁 지대에서 살아왔던 바, 흑마법사를 끔찍이도 싫어했다.

'내가 앞장서서 싸우진 못해도,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그녀는 담대했다.

거침없이 흑탑의 내부를 휘젓고 다녔다.

은밀함이라는 자신의 개성과 신이 된 에릭의 힘.

믿을 구석은 충분했다.

몬스터 대신 수많은 흑마법사들이 르웰을 스쳐 지나갔으나, 그 누구도 그녀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리 뽈뽈대며 흑탑을 오르던 중에, 이변이 일어났다.

'갑자기 왜?'

흑마법사와 성기사단의 전투가 잠시 멈췄다.

그들은 전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쪽 벽이 무너져 내린 흑탑에서도 그 광경이 선명했다.

구렁텅이 위, 전장의 하늘이 찢어지고는 세상을 뒤덮는 황금빛 대검이 나타났다.

그 순간.

'으읏-!'

르웰의 몸이 휘청거렸다.

하늘에 거대한 검이 나타나더니, 이루 말할 수 없는 강렬한 힘이 그녀의 온몸에 깃들었다.

'에릭, 대체 뭘....'

마치 처음으로 아스티아 신의 힘을 받았을 때처럼.

아니, 그때보다 더 크게.

숫제 영혼을 뒤흔드는 신성력이 르웰이 몸을 휘감았다.

쿠구구구궁-.

르웰의 몸을 타고 거대한 금빛 기둥이 솟구쳤다.

마치 걸어 다니는 신성력 토템 같았다.

'이, 이런 강력한 힘이!'

르웰은 화들짝 놀랐다.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던 강력한 힘이 제게 깃든 것이 아니던가?

그야말로 전능하다 싶은 감각이었다.

그러나 그 부작용도 명확했다.

"저, 저기 왜 교단의 놈이!"

"동탄 미시룩을 입은 사제?"

"저, 저년 르웰이다!"

근처를 돌아다니던 흑마법사들이 그녀를 알아봤다.

'요즘 내가 쫌 유명해졌긴 하지.'

[커뮤니티]에도 사진이 여러 장 올라갔다고 들었다.

빙의자를 이용하는 흑마법사들이 자신을 알아볼 만도 했다.

문제는....

'내가 직접 싸워?'

슬쩍 주변을 보니, 도와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애초에 홀로 기척을 지운 채 흑탑 내부로 들어와 버린 상황이 아니던가?

"저년이 왜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크흐, 생포하자."

흑마법사들이 군침을 흘렸다.

추한 것들이 섬뜩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르웰은 소름이 돋았다.

'누구보고 년년 거려.'

어둠에 먹힌 존재들이 입을 함부로 놀리는 꼴이....

조금 짜증이 났다.

르웰은 치유 기도를 할 때처럼 슬쩍 힘을 방출해 봤다.

꽈앙———!

손끝에서 거센 금빛 레이져가 뿜어졌다.

흑탑 내부에서 쏘아진 르웰의 신성력이 흑마법사를 스쳐 갔다.

'스쳤네....'

머리를 노렸는데 이런 식의 힘의 운용은 처음이라서, 조금 조준에 실수했다.

'이러다 들키면 큰일인데.'

적진 한복판이다.

다른 층에도 이 소식이 전해지면,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일 상황.

한데....

파스스스스-.

르웰이 쏘아낸 신성력에 스친 흑마법사가 입자로 변해 사라져 버렸다.

그것도 모여 있던 셋 전부.

증발이라도 한 듯이, 허공에 희뿌연 연기만 넘실거렸다.

'이게.... 암살?'

르웰은 깜짝 놀랐다.

한때 에릭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에릭, 요즘 들어 악명이 안 들리네?"

미친 살인귀 에릭, 심판자 에릭.

그가 6살 때 얻은 별명이었다.

"요즘 들어 암살로 방식을 바꿨습니다. 그 뒤로 소문이 나질 않더군요."

그때 에릭은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마을 한복판에서 싱그럽게 웃었다.

"그, 지금 마을 하나를 없애고 그런 말을...."

"목격자가 없으면, 암살이 맞죠."

아주 작고 귀여운 꼬마의 미소는 흐뭇했으나, 그 발언은 조금 섬뜩했다.

"호오, 에릭! 아주 현명한 말이로구나."

그 리페로제마저 감탄할 정도.

'진짜였네.'

르웰도 공감했다.

암살을 직접 해 본바, 에릭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격자가 없으니까.'

은밀함을 쓸 수 없는 거친 신성력이 깃든 상황.

하지만, 두려울 건 없었다.

그녀는 목적지를 향해 더욱 과감하게 이동했다.

'몇 층만 더 가면 돼!'

* * *

에릭의 새로운 스킬, [심판].

이걸 발동하기 위해서 6천만 골드의 추가적인 지출이 있었다.

파앗-!

[에릭 - 4티어 신성력]

[보유 스킬: 개벽, 광휘의 날개, 유성우, 심판(new!)]

[보유 골드: 8,585,068,050]

즉발하던 다른 스킬과 다르게, 10억짜리 스킬 [심판]은 추가적인 신성력이 필요했다.

그것도 무려 6천만 골드의 신성력을 요구했다.

'10억 단위 스킬은 신성력이 부족하군.'

강력한 힘이다.

교황이 소환한 검과 비슷한 위력.

거기에 더불어 신도 강화라는 추가 효과까지 붙었다.

장두식과 잭슨, 르웰까지.

자신을 믿는 자들의 위치에 거대한 신성 기둥이 솟구쳐 올랐으니, 스킬 설명 없이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성능은 좋은데, 효율이 좀 떨어지나?'

대신 시전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다.

지금처럼 교단의 군대가 어그로를 끌어 주는 상황이 아니라면.

요컨대, 1:1 구도 같은 데서는 쓰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1만 골드를 사용해 신성력을 Max로 만들었습니다.]

6천만 골드치의 신성력을 채우는 것도 엄청난 시간이 들었으니까.

1초에 열 번 회복한다고 치더라도, 무려 100초가 걸린다.

긴박한 전장에서는 그다지 쓸 만한 느낌이 아니었다.

'5티어를 찍어야 10억대 스킬들을 원 없이 쓸 수 있겠어.'

무한에 가까운 힘이었으나, 공짜는 아니었다.

5티어를 찍어야 할 것이고.

그러려면, 이 전장을 정리해 뿌린 것들을 수확할 필요가 있었다.

'라핀 마탑에서 마도구도 팔았을 거고.'

생필품 대신 전쟁 물자를 생산한 보람이 있으리라.

또한 정식으로 [십일조]를 거행한다는 교단의 뜻도 있으니까.

에릭이 그런 고민에 빠져 있자니, 이변이 발생했다.

"저게 무슨-."

검은 연기가 일렁이더니, 흑탑의 부러진 부분을 이어버렸다.

그 직후, 탑 전체가 거대한 진동에 휩싸였다.

"탑을 이동시키려는 건가?"

전이와는 다른 힘이다.

무언가와 맞바꾸려는 듯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게 될 리가 있나.'

하지만, 에릭은 믿는 구석이 있다.

부러진 탑이라 하여도.

탑 한구석에는 [루-솔라스의 쐐기]가 박혀 있다.

그리고 탑 내부에서 르웰이 뽈뽈거리며, 창 주변을 서성이는 게 느껴졌다.

[심판]을 사용한 여파일까?

'아주 선명하게 느껴지는군.'

정확한 위치까지 가늠할 수 있었다.

'역시....'

르웰의 기척이 루-솔라스의 쐐기 지척에서 느껴진다.

눈치가 아주 예술이다.

루-솔라스의 힘을 주었고, 지금은 [심판]으로 강화까지 이뤄졌다.

그리 강대한 힘을 얻은 르웰이 창을 붙잡았다.

화르르륵-.

탑 중앙에 꽂인 창을 타고 불꽃이 번졌다.

끄아아아아악-!!!

흑마법사의 괴성이 사방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검은 막으로 이어졌던 탑이 다시 갈라지고, 이윽고 상층부가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아래에서 전투 중이던 성기사단과 흑마법사들은 재빠르게 떨어지는 탑을 피해 도망쳤다.

꽈앙————!!!

탑의 추락과 동시에 검은 연기가 피어 올랐다.

이 가증스러운 놈들!!!

아주 끔찍한 노성이 들렸다.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에릭은 싱긋 웃으며 무너진 탑을 향해 날았다.

"꼬우면 강림하든가."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7줄이건 8줄이건, 현지인 놈들이 강림해 봤자 유사 몬스터다.

그냥 힘이 엄청 셀 뿐이지.

한번 잡아 봐서 잘 안다.

'돈만 있으면 몇 마리든 잡을 수 있지.'

하물며 그때와 달리, 지금은 4티어까지 찍은 상황이다.

에릭은 자신만만하게 [개벽의 검]을 꺼내 겨눴다.

발아래로 흑탑의 낙하를 피해 후퇴했던 성기사단이 보였다.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에릭은 신성 치유 주문과 축복을 내려 주며, 그들을 항해 소리쳤다.

"신의 뜻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그 즉시.

와아아아아아!!!

거센 투지를 불태운 아스티아 교단의 성기사단이 거침없이 내달렸다.

'여기서 끝장낸다.'

전이도 막았고.

흑탑으로 도주하려는 것도 르웰이 방해했다.

이제 남은 곳은 구렁텅이 하나뿐.

한데, 미궁으로 뛰어드는 짓은 흑마법사들에게도 자살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저긴 시공간의 괴리가 있다.'

뒤틀린 공간.

괴상하게 흘러가는 시간.

그게 마경의 구렁텅이다.

수천 년 동안 없애지 못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분명 그랬는데....

"저놈들 왜 구렁텅이로 뛰어드는 거지?"

흑탑의 부러진 상층부를 감싼 주주들이 구렁텅이를 향해 뛰어들기 시작했다.

거대한 탑의 반쪽까지 챙겨서.

흥분한 성기사들은 거기까지 따라갈 기세였다.

"다들 쫓지 마라-!!!"

교황이 황급하게 신성 방벽을 세워 진군을 막아 냈다.

'저게 무슨....'

주주들이 탑을 감싸고 도망치는 모습은 추했다.

같은 흑마법사들도 전의를 상실한 상태로 황망히 그 광경을 바라볼 정도였다.

'초대 황제가 죽었던 곳이 마경의 구렁텅이다.'

또한 최초의 강림을 이뤄 낸, 마왕도 구렁텅이에 떨어져 죽었다.

'미궁의 보상으로 그 유해가 나타났었지.'

그러니, 분명 저건 자살 같은 짓이었다.

에릭이 놀라 있을 때, 교황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성하."

다가온 교황을 향해 에릭이 고개를 조아렸다.

"저놈들이 또 무슨 수작을 벌이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 당혹스러움을 얘기했는데, 교황은 에릭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외마디 계시를 읊조렸다.

"아버지의 계시가 내려왔노라."

그 내용인즉슨.

"가게 두어라."

* * *

리페로제 아스티아.

그녀는 결국 도망치던 최초의 빙의자를 사로잡았다.

"이, 이 신성의 벽을 풀어라!"

"어허! 또 무적기인지 뭔지를 쓰고 도망칠 생각이더냐?"

리페로제는 피떡이 된 척살자 루크를 가둔 채 질질 끌고 다녔다.

사방이 어둠이요, 길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다.

폐쇄된 미궁 속은 지독했다.

"리페로제 님! 이쪽입니다!!!"

"저희가 탈출구를 지키고 있습니다! 리페로제 님!"

하나, 함께 계층주를 공략한 동료들이 연신 그녀의 이름을 부르짖고 있었다.

"리, 리페로제, 목소리는 전혀 이쪽 방향이 아니다!"

척살자 루크는 공포에 질렸다.

그녀를 위해 공략대가 미궁의 문을 막아서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꽈앙-!

"내, 나이가 너보다 한참이 많거늘 어딜 반말을 쓰느냐?"

"끄윽. 내, 내가 미궁에 들어온 지 벌써 백 년이-."

"내 듣기로 빙의자들의 기본은 장유유서라 하였거늘, 어찌 고작 백 살 남짓한 놈이!"

꽈앙-!

또 꿀밤이 내리쳐졌다.

'저렇게 앳된 용모로 나보다 오래 살았다는 말이....'

지독한 신성력의 고통.

루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미 몸 전체가 만신창이였다.

회복도 불가능, 포션도 못 먹도록 온몸을 신성력이 둘러싼 판국이다.

"대, 대체 어디로 가는 거냐?"

"이쪽에 아버지의 뜻이 있노라."

그녀의 광신은 이미 계층주 공략에서 익히 알아봤다.

루크는 그저 입을 꾹 닫았다.

여기서 잘못 떠들었다가는 하루 종일 교리를 듣게 될지도....

"어, 어쩌다 이런 꼴이!"

"토마스, 진정해요. 그래도 주주님들이 우리가 일궈 놓은 문명도 전부 챙겨 왔지 않나요?"

"아아! 역시, 대표님은 빛이십니다."

그때 어둠 속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척살자 루크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쇄된 미궁에 어떻게 사람이 들어온 거지?'

그리 놀라 있자니.

"호오."

아주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바로 옆이었다.

리페로제 아스티아, 그녀가 등에 맨 거대한 대검을 꺼내 들며 루크를 바라봤다.

눈매가 호선을 그린 것이 몹시 기뻐 보였으나, 눈빛은 살인귀 같았다.

"루크, 네놈이 무적기를 쓴 후 체력을 회복하는 기술을 가졌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 그렇다."

그녀는 루크를 가둔 신성의 장막을 풀어 줬다.

"쿨타임이 돌았느냐?"

"그, 그렇.... 그렇습니다."

"가서 1분만 버텨라."

리페로제는 대검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마경의 어둠 속에 검을 내리꽂더니, 대뜸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아버지, 아스티아시여. 이 땅에 멸악의 신념을 바치나니, 부디 이 어둠을 밝혀 줄 힘을 내려 주소서."

그녀의 맑은 목소리를 따라 어둠 속에 빛이 스며들었고.

그 신성의 힘에 고통을 느낀 루크는 재빠르게 흑마법사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처, 척살자 루크다!"

무적의 괴물이 흑마그룹의 한복판에 등장했다.

또한 그 뒤에서는 세계의 최강자 중 하나가 검을 벼려 내고 있었다.

92화 수금 (1)

"가게 두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직경 50미터의 커다란 구멍이 스산한 바람을 뿜어 댔다.

"계시니라."

"계, 계시라고요?"

에릭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구렁텅이를 바라봤다.

흑마법사들의 기척은 사라진 지 오래.

'신의 뜻이라고 저걸 보내 줘?'

도통 믿기 힘든 일이었다.

에릭의 표정이 풀어지지 않자, 교황이 말을 이었다.

"마경의 구렁텅이니라. 초대 황제도, 최초의 마왕도 저곳에서 죽음을 맞이했지 않더냐? 그러니 그런 계시를 내려 주신 게야."

역사에 이름을 남긴 최강자들도 어찌하지 못한 마경의 구렁텅이였다.

'어쩌면....'

하나, 에릭은 다른 생각이 들었다.

'흑마법사 스킬.'

빙의자, [흑마법사] 클래스라면.

그들은 미궁 속에서 게이트라든가, 포탈을 사용할 수 있다.

마경의 구렁텅이에서도 통할지는 모르겠으나, 그게 가능하다면 놈들이 구렁텅이로 뛰어든 이유도 말이 됐다.

'분명 그러니까 뛰어들었겠지.'

다 잡은 고기를 미궁 속으로 풀어 준 셈 아닌가?

차라리 악착같이 쫓아서 몇 놈이라도 붙잡아야 했는데.

에릭이 으득 이를 씹었다.

하필 교황의 판단이라 토를 달기도 어려운 상황.

'사실, 추측뿐이지만....'

이런 불길한 쪽의 예감은 언제나 들어맞지 않았던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주주들을 이대로 놓쳤다는 건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는 셈.

에릭이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던 차에.

콰앙————————!!!

구렁텅이 위로 순백색 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이, 이게 무슨!"

에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경의 핵으로 불리는 구렁텅이.

육안으로 볼 때는 커다란 구멍이지만, 실상은 완벽하게 세상과 격리된 공간이 아니던가?

한데, 그 내부에서 어떠한 힘이 솟구쳐 나왔다.

'설마.'

게다가 그 힘이 아주 친숙하다는 것은....

"허어, 보내 주시라는 계시가 이런 의미였구나!"

교황이 순백의 기둥을 보며 감탄을 내질렀다.

"스승님이 저곳에 계셨군요."

에릭은 교황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콰아아아—.

거대한 구멍을 통째로 메운 강렬한 힘이 마경 한복판에 기둥처럼 솟구쳤다.

'분명 스승님의 힘이다.'

순백에 가까운 백금빛 신성력.

에릭의 스승이자 세계의 무법자인 리페로제 아스티아의 힘으로, 매우 흉포하다는 특징이 있다.

"실로 오래간만에 느끼는 힘이로구나."

교황이 구렁텅이에서 솟구친 신성력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파스스-.

손이 바스라졌다.

하나, 교황은 가벼이 재생시켰다.

"허어, 여전하구나."

심지어 그러기를 반복했다.

족히 수십 번의 재생이 끝난 뒤, 교황이 에릭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움이 짙은 눈빛이었다.

"성자 에릭, 네 스승을 맞이할 준비를 하거라."

아이처럼 자그마해진 교황이 그리 말했다.

에릭은 그 말뜻을 이해했다.

'여길 수습하라는 뜻.'

에릭은 주변을 둘러봤다.

성기사단은 잔존 흑마법사들을 처리하는 중이었다.

교황과 에릭 대신 성전기사단장 율리우스가 앞장서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당장 나설 필요는 없겠어.'

에릭은 안도하며, 멀어져 가는 하나의 기척을 잡아냈다.

그의 시선은 남아 있는 흑탑의 반쪽을 향했다.

"성하, 저는 탑의 수습을 맡겠습니다."

"그리하거라."

교황과 인사를 마친 에릭은 흑탑을 향해 성큼성큼 나아갔다.

반 토막 난 흑탑의 1층 정문.

그곳을 뛰쳐나와 멀어져 가는 한 존재를 바라봤다.

'저쪽은 태양성국 방향인데.'

쿠웅-.

에릭은 날개를 뽑아 들고 바닥을 박찼다.

쏜살같은 속도로 흑탑을 지나쳐 멀어져 가는 기척을 따라 움직였다.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고작 몇 초.

콰앙!

흙먼지를 날리며 착지한 에릭.

그 여파로 작은 진동이 일었다.

"으윽!"

후다닥 도망치던 르웰의 앞을 거대한 에릭이 막아섰다.

굴곡진 몸이 거칠게 흔들렸다.

"까, 깜짝이야! 에, 에릭이구나. 나를 멀리 숨겨 줘! 리, 리페로제 님이 오신다고!"

화들짝 놀란 르웰이 에릭을 향해 소리쳤다.

"사제님, 혹여 스승님께 무슨 잘못을...."

에릭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리페로제의 기척을 느끼자마자 도망치다니.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에릭은 스승의 기척에 떨떠름하면서도 반가움을 느꼈으나, 르웰은 전혀 다른 모양이었다.

"그, 그게...."

좀처럼 말을 꺼내지 못하는 모습.

심지어 그 이유를 말하는 것조차 꺼리는 기색이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부담되신다면 굳이 말하실 필욘 없습니다."

아마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스승이 분노했던 게 아닐까?

괴팍한 리페로제였으니, 그럴 법도 했다.

"어차피 5년이나 지났으니까, 벌써 까먹으셨을 겁니다."

"진짜 그럴까?"

에릭은 위안의 말을 건넸고, 르웰은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되물었다.

"스승님 성격에 어지간한 건 벌써 다 잊었겠죠. 잘 알지 않으십니까?"

괴팍한 만큼 호쾌한 면이 존재하는 리페로제다.

성격만큼은 상여자 그 자체였다.

그러니 5년 전 일쯤은 까마득히 잊혔을 테지.

"돌아가시죠, 저쪽은 태양성국입니다."

르웰은 에릭의 손끝을 바라봤다.

저 먼 곳으로, 거대한 성벽이 보였다.

성벽에 새겨진 태양의 문양이 선명했다.

"루-솔라스로 개종하실 생각이 아니시라면-."

"무슨 끔찍한 소릴!"

르웰이 한껏 놀라 소리쳤다.

"돌아가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에릭은 부드럽게 손을 내밀었다.

르웰은 조금 망설이더니 그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벌써 세 번째....'

에스코트가 점점 익숙해져 가는 느낌이었다.

두 사람은 흑탑을 향해 걸었다.

"에릭, 그 힘은 뭐야?"

시꺼먼 마경 한복판을 거닐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눴다.

"갑자기 내 손에서 드래곤 브레스처럼 신성이 막 솟구치던데?"

"새로 산 스킬입니다."

"스킬?"

"10억 골드짜리죠."

르웰이 황당하다는 듯이 에릭을 바라봤다.

'십억이라니.... 그거면 샤넬 백을 백 개는 살 수 있겠네.'

돈의 단위가 크게 달라졌다는 것이 실감났다.

르웰이 놀라 있자니, 에릭이 질문을 건넸다.

"그보다, 탑 안에서 위험한 일은 없었습니까?"

"위험은 했지. 그런데, 네 스킬 덕분에 잘 해결했어. 다 알면서 뭘 이제야...."

"선뜻 위험한 임무를 맡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릭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은밀함이라는 개성.

묵히기에는 너무 대단했다.

"새삼 뭘 이런 걸로!"

"역시, 배짱은 여전하십니다."

에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르웰과의 과거가 떠올랐다.

분쟁 지대에서 숨어 살아 고단했던 시절.

'그때의 경험이 그러한 개성을 이뤄 냈겠지.'

거기에 더불어 에릭의 신도가 되면서 르웰의 신성력이 더욱 거룩해졌다.

'교황 성하도 르웰의 기척을 못 잡았다.'

조금 위험한 일이었지만, 에릭은 과감하게 르웰에게 흑탑으로 잠입할 것을 부탁했다.

"나는 나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에릭, 너도 잘 알잖아?"

그녀 역시 원하는 바였다.

애초에 르웰은 에릭의 어린 시절에도 그저 보호받기만 한 입장이 아니었다.

'자신의 자리에서 늘 최선을 다해 오셨지.'

지금도 마찬가지일 뿐.

"고생 많으셨습니다."

"흥흥~. 뭘, 이 정도로."

어느덧 두 사람의 눈앞에는 반 토막 난 흑탑과 그 주변을 둘러싼 성기사단이 보였다.

가장 앞에서는 장두식이 몽둥이를 흔들며 에릭을 반겼다.

"거, 형님! 여기 이 미친놈들 좀 어떻게 해 보슈!"

그 말에 에릭의 얼굴이 구겨졌다.

―Ep. 20 수금

성기사단은 흑탑 내부에 숨어든 흑마법사들을 정리했다.

저항하는 이는 신성력에 타 죽었고, 항복한 자들은 공개 처형을 대가로 조금의 삶을 허가받았다.

또한 빙의자 협력자들은 별도로 분류되어 한구석에 결박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흐이이익-! 저, 저리 가! 이 야만인들아!"

사로잡힌 빙의자들이 남았다.

그들은 성기사들을 보며 괴성을 질렀다.

"저놈들이 캡슐에 있던 사람들이라는 거지?"

에릭은 흑탑 옆에 놓인 캡슐을 바라봤다.

'진짜 미래형 VR 기기 같군.'

반투명한 회색 유리가 덮인 계란 형태의 기기.

니시다가 말하던 가상현실 캡슐과 흡사한 형태였다.

이미 들었던 얘기라 캡슐은 그렇게 놀랍진 않았다.

문제는 그 캡슐에서 나온 사람들이지.

"저, 저리가! 카, 칼! 저걸로 우리를!!!"

성기사단을 보며 기겁하는 모습.

발작하는 것이 결코 대화가 통할 것 같지 않았다.

'대체 흑마그룹 놈들한테 무슨 짓을 당했길래....'

그들은 숫제 괴물을 보는 듯이 겁에 질려 있었다.

"다, 다가오지 마!!!"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한 성기사가 에릭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상황을 설명했다.

"회유는 전혀 먹히지 않습니다."

"대화는 해 봤나?"

"대화가 통하질 않더군요. 죄를 사해 준다 해도 계속 저 상태입니다."

회유책은 불가.

하면, 강경책이 있지 않나?

에릭이 묻기를.

"하면, 신성력으로 고통을 줘 보지 그랬나."

"그 방법도 통하질 않습니다."

"그럴 리가, 흑마그룹의 부장급 빙의자도 굴복한 힘인데."

에릭이 당황한 듯이 성기사를 바라봤다.

그가 알기로 무력과 공포는 만능해결책이다.

단 한 번의 실패도 없는 성공률 100%를 자랑하는 방식이 아니던가?

의문 어린 에릭을 보며, 성기사가 말을 이었다.

"신성력으로 고통을 줘 봤지만 전혀 진정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을 구워 먹으려 든다며 더 발작하더군요."

고통이 소용없다니.

"그러면 저들을 통제할 수단 같은 것도 없었나?"

"저 이상한 타원형 기물에 과한 집착을 보입니다."

에릭은 빙의자를 꺼냈다던 캡슐을 바라봤다.

"지, 집으로 보내 줘!"

"우리를 해방해라! 이 야만적인 식인종들아!"

그들은 캡슐을 향해 내달리려 했다.

꾸욱-.

성기사들이 발버둥 치는 빙의자들을 붙잡아 둔 채 에릭을 바라봤다.

"죄를 짓지 않은 빙의자들은 우호적으로 대하라는 성자님의 지시가 있었지만. 저걸 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성기사들은 뭘 해야 하는지 답을 알지 못했다.

"흐음...."

에릭은 나름의 해결책을 떠올려 봤다.

그래서 박창호를 불러왔다.

'세계의 유일한 동양인.'

조금 친숙함을 느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었다.

거기에 더해 에릭은 성기사단을 멀찍이 물렸다.

"도, 동양인!"

"어, 어떻게 지구의 얼굴로!"

"그, 혹시 박창호 씨 아닙니까?"

예상대로 빙의자들은 박창호를 보며, 조금의 안도감을 보였다.

심지어 알아보기까지 했다.

"저를 아세요?"

"알죠, 알아! 유명한 펜싱 선수! 국뽕의 신! 결승에서 일본 놈을 상대로 압승했잖아. 그래서 사과 폰 광고도 찍고!"

"혹시 한국분?"

국뽕이니 뭐니.

실로 대한민국스러운 대화였다.

"네네! 와아, 진짜 이 야만적인 세계에서...."

마치 이산가족 상봉과도 같은 모습.

빙의 후 등장한 최초의 동양인의 위용이었다.

"와.... 진짜 몇 년 만에 보는 아시아인이냐."

외국 출신 빙의자도 박창호를 반겼다.

반가움도 잠시, 잡담은 금세 끝이 났다.

"그, 근데.... 우리, 저기로 돌려보내 주면 안 돼요?"

빙의자들은 불안감을 토로하며 박창호에게 본론을 내밀었다.

"예?"

그 목적은 캡슐로 자신들을 보내 달라는 것.

"그게 무슨-."

빙의자들이 말하기로는.

"지구의 삶을 살게 해 주는 기계예요. 그냥, 저 안에 들어가면 평소랑 똑같다니까요!"

흑마그룹이 만들어 낸 캡슐에 들어가면, 지구에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었다.

"심지어, 제가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어요!"

"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2017년으로 돌아가서 비트코인에 전 재산 몰빵하고 있었는데...."

"나, 나는 배달의 만족 먼저 만들어서 막 매각을 앞뒀었다고!"

배경은 지구요, 삶은 뜻하는 대로 이뤄진다 하니.

그야 말로 유토피아가 아닌가?

"창호 씨도 빙의자면 알죠? 이 야만적인 세계...."

"그, 지금 하신 말씀이 저 캡슐에 들어가면 그런 꿈을 꿀 수 있다는 얘기죠?"

"그렇죠. 진짜 뭐든 다 할 수 있다니까요!"

여러 말이 이어졌다.

롤드컵 우승을 거머쥐는 프로 게이머가 된다거나.

강남 펜트하우스에서 웹 소설만 읽고 살 수 있다거나.

거기에 생명의 위협도 전혀 없이, 안전이 보장된 기기라는 말이 덧붙여졌다.

'그 대가라는 게....'

하나, 박창호의 입장에서는 도통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 모든 게 공짜는 아니었으니까.

"그 대신 여러분의 꿈을 흑마그룹이 본다는 얘기죠?"

"SNS 안 해 봤어요? 공짜로 쓰는 대신 우리 정보 다 빼 가서 써먹는 거잖아요. 그 비슷한 거라 보면 되죠!"

흑마법사들이 꿈을 통해 모든 걸 파악한다는 게, SNS랑 같은 의미는 아닐 텐데....

"그 뭐냐, 운동복 검색하면 비슷한 광고 주르륵 나오는 것처럼요."

"허...."

박창호는 캡슐에 집착하는 빙의자들의 모습을 도통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를 엿듣던 에릭의 입장에서도 비슷했다.

오히려, 에릭은 더 심각하게 생각했다.

'그냥, 약쟁이 중독자처럼 산다는 소리 아닌가?'

에릭의 미간이 좁아졌다.

어찌할까 고민이 들었다.

그때, 빙의자들의 말이 이어졌다.

"여기 있어 봐야 식인종들한테 둘러싸여 살아야 하는데.... 저기엔 꿈이 있다고!"

"뭐든 이룰 수 있는 꿈!"

극심한 중독 증세다.

거기에 세뇌까지 당한 느낌.

'해결책은 쉽지.'

에릭은 알코올 중독에 빠졌던 한 여자를 떠올렸다.

그때 가장 효과를 봤던 치료법은 주변에서 술 자체를 없애 버린 거였다.

그러니.

"두식아, 가서 다 부숴라."

해결책도 간단했다.

* * *

"요, 용역 깡패!"

빙의자 임장호는 황망한 듯이 장두식을 바라봤다.

뻐억-! 뻑! 퍼억!

반삭 머리를 한 조폭 같은 놈이 문신에서 빛을 내뿜었다.

손에 들린 커다란 몽둥이가 움직일 때마다, 캡슐이 부서졌다.

"아, 안 돼!"

자신의 할당 캡슐이 부서질 때마다 빙의자들 사이로 통곡이 터져 나왔다.

이 야만 세계에 떨어진 뒤로 찾은 유일한 해방구가 저것이 아니던가?

꿈속에서나마 지구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기계였다.

한데, 그 소중한 것을 웬 용역 깡패가 때려 부수는 상황.

"제, 제발 그만하세요!"

강제 철거를 당하는 주민들의 고통을 여실히 통감했다.

그들의 마음처럼.

빙의자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장두식을 향해 뛰어들려 했다.

그때였다.

키잉-.

그들의 앞으로 금빛 장막이 솟구쳤다.

"으아아악-!"

하나, 소용없었다.

극심한 중독 증세를 증명이라도 하듯, 빙의자들은 신성력에 몸을 태워 가며 캡슐을 향해 나아갔다.

그에 에릭이 성기사들을 불러 그들을 결박했다.

콰앙-! 쾅!

"거참, 뭐가 이렇게 단단해."

장두식은 투덜거리며 마력과 신성력을 뒤섞어 캡슐을 두드렸다.

사방으로 파편이 흩날렸다.

"아아...."

"내, 내 삶이."

"이제 우리 가족을 못 보는-."

빙의자들은 강제로 붙들린 채 소중한 캡슐이 부서지는 광경을 바라봤다.

절망감이 짙어졌다.

그들과 달리, 에릭의 입가에는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오."

빙의자들의 절망에 기뻐한 것은 아니었다.

'신성이 안 먹혀?'

장두식은 신성 마법사다.

그는 신성력과 마력을 뒤섞은 힘으로 캡슐을 내리쳤다.

보통, 흑마력을 기반으로 한 기물들은 신성력에 닿으면 부식되듯이 마모되거나 소멸하기 마련.

한데, 부서졌다.

"두식아, 몇 대만 가져와라."

"후우-. 알겠수다. 뭐가 이렇게 단단한 건지."

장두식이 땀을 훔치며 캡슐 몇 대를 에릭에게 가져왔다.

보기보다 가벼운지 사람보다 큰 캡슐을 한 번에 네 개나 쌓아서 옮겼다.

"나머지는 다 부수면 되겠수?"

"산산조각을 내 버려라."

"알겠수다!"

장두식이 방긋 웃으며 떠나고, 에릭은 캡슐을 살폈다.

'미궁산 재료인가?'

뭔진 모르겠으나, 신성력에 반응하지 않는 물질이었다.

으득.

캡슐의 옆면을 반으로 쪼갰더니, 회색빛 판 사이에서 흑마력이 흘러나왔다.

에릭은 신성력을 흩뿌렸다.

흑마력은 신성력에 정화되었으나, 회색빛 물질만큼은 불변한 채 제 형태를 유지했다.

머릿속이 번뜩였다.

'이걸로 신성 마도구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조만간 제국군이 이곳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교단이 뚫어 준 길을 통해 태양성국을 향해 진군할 예정이다.

'제국군 입장에서 신성력을 상대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될 테지.'

하나, 다음 왕국으로 가면 어떨까?

가르시안 왕국처럼 빙의자와 흑마법사들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흑마력 혹은 빙의자의 스킬.

여러모로 제국군이 경험하기 힘든 변수가 발생할 터였다.

'이걸로 신성 마도구를 만든다면?'

병사들 수만 명이 신성 마도구로 신성력을 쏴 대면 어지간한 빙의자나 흑마법사는 해결되지 않을까?

비싸게 팔아먹어도 될 물건이다.

하물며, 수요도 아주 많다.

'그 전에, 스승님을 먼저 뵈어야겠지만....'

그런 고민도 잠시.

구렁텅이로 솟구치는 신성의 빛이 에릭의 시선을 끌었다.

번쩍! 번쩍!

짧게 점멸하는 기둥.

분명, 과거에 정해 두었던 신호였다.

그 의미는 분명했다.

'도와 달라고?'

그 리페로제가 대체 뭘 도와 달라는 건지....

93화 수금 (2)

'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꼬였지?'

토마스는 미칠 노릇이었다.

대주주의 판단하에, 마경의 구렁텅이로 뛰어든다는 극단적인 결정을 했다.

그 과정에서 잃은 것들이 얼마던가?

'본사 1층에 모아 둔 재화들....'

미궁의 지형지물과 흑마력을 섞어 만든 캡슐들.

재료비는 그렇게까지 나가지 않았지만, 하나를 만드는 데 족히 열흘이 넘게 걸리는 물건이었다.

그런 게 수백 개.

'손해가 아주 막심하다.'

회계 장부를 처리할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리던 차였다.

"처, 척살자다!"

경계를 서던 흑마법사들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이 부장, 그게 무슨 말이지?"

"저, 저쪽에 척살자가 나타났습니다!"

척살자 루크는 흑마그룹의 미궁 심층 탐사를 방해하던 존재다.

하필 그놈이 왜 여기 있단 말인가?

"격리 걸어!"

"이, 이놈 면역 상태입니다!"

다급한 흑마법사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더니....'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고.

실로 옳은 말이었다.

'밖에서는 미친 교단 놈들이 창을 꽂아 대더니, 폐쇄된 미궁에는 척살자가....'

온 세상이 흑마그룹을 억까 하는 느낌이었다.

토마스는 넥타이를 졸라맸다.

"내가 간다."

아직 마키아의 하반신이 재생되지 않은 상황.

하물며, 부장급 빙의자들은 [게이트] 생성에 총력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대주주님 말씀대로 스킬은 작동하고 있지만....'

시전 시간이 제법 걸렸다.

하나, 척살자 하나를 상대하는 정도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토마스는 기사 클래스의 3차 전직을 마친, [죽음의 기사]다.

게다가 그의 육신은 6줄을 이룬 흑마법사다.

잭슨이 그렇듯이 토마스 또한 육신의 힘을 갈고닦았다.

쿵-!

토마스가 [인벤토리]에서 방패를 꺼내 들었다.

[죽음의 방패 – 전설급]

죽음의 기사 전용 무구.

사용자의 체력을 초당 1%씩 깎는 대신, 방어한 피해량만큼 공격력을 ×5배로 증가시킨다는 옵션이 붙었다.

"어둠이 나를 감싼다."

스르륵.

토마스를 흑마력이 뒤덮었다.

이로서 무구의 페널티까지 무효화가 되었다.

그렇지만 토마스의 얼굴은 잔뜩 구겨진 상태였다.

'흑마력을 쓰긴 싫었는데....'

질척거리는 진흙을 뒤집어쓴 모양새가 되었다.

현지 흑마법사들은 빙의자들과 달리, 마법의 구현이나 형태가 지저분했다.

그래도....

'저 미친 살인마를 상대하려면 어쩔 수 없지.'

국적과 신분을 가리지 않고 다가오는 모든 존재를 죽여 버리는 살인귀.

그게 척살자다.

'이참에 정체를 알아보자.'

빙의자라는 설도 있고, 미궁에 먹힌 괴물이라는 말도 있다.

대화가 통한 적이 없어, 인간형 랜덤 등장 보스라는 추측까지 나올 정도.

드르륵.

붉은 오러를 뒤덮은 남자가 흑마법사들을 도륙 내며 다가왔다.

토마스는 눈가를 좁혔다.

척살자 루크를 유심히 살폈다.

'상처가 짙군.'

상처투성이의 척살자.

그의 전신은 화상을 입은 듯이 붉게 그을렸다.

피가 줄줄 흐르는 검상이 수두룩했다.

"-피의 축제."

그때, 척살자가 조용히 몇 글자 말을 읊조렸다.

그의 검 위로 붉은 검광이 번쩍였다.

'스킬 모션.'

특정 행동에서 정확하고 절도 있는 자세를 보였다.

토마스는 정확하게 알아봤다.

붉은 오러를 둘렀으나, 놈이 휘두르는 힘은 [스킬]이다.

척살자는 스킬을 두른 검으로 흑마그룹의 수하들을 상대했다.

죄다 검사로 구성된 빙의자들이었는데, 하나같이 상대가 안 됐다.

'이상한 검술을 쓴다.'

몹시 투박하며 체계가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위험했다.

"젠장, 기술로는 안 된다!"

"우로보로스여, 이곳에 강림하소서-!!!"

다섯 줄짜리 빙의자 흑마법사가 강림을 시전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죽음을 먹는 뱀'이라는 악마였다.

거대한 뱀 형태의 악마가 척살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콰직-!

단숨에 척살자의 어깨가 씹혔다.

"크아아아아아!!!"

뒤틀린 미궁의 어둠 속에서 붉은 남자가 괴성을 질렀다.

비명이 끝난 후, 그의 전신을 감싸고 일렁이는 붉은 오러가 피어올랐다.

"크으-. 죽어라!"

후웅-!

척살자가 투박한 검을 휘둘러 뱀을 토막 내기 시작했다.

방어도 없이 일변도로 공격에 치중된 모습.

척살자 역시 공격을 받았다.

그는 아랑곳 않고 검을 휘둘렀다.

그때마다 상처가 회복되었다.

'혈기사 클래스.'

거기까지 판단을 마친 토마스는 방패를 내세우며, 척살자를 향해 다가섰다.

"왜 같은 빙의자를 공격하는 거지?"

우선 대화를 시도해 봤다.

"눈 아래로 여섯 줄을 그리고도 스스로를 지구인이라 생각하나?"

뱀의 모가지를 떨어트리며, 척살자가 소리쳤다.

불쾌하다는 말투였다.

그에 토마스는 미소를 지었다.

'소문과 달리, 대화가 통하는군.'

문답무용 살인귀.

듣던 것과는 달랐다.

놈은 생각하면서 움직였고, 싸우면서 대화했다.

토마스는 다음 수를 꺼내 들었다.

"밖에서는 우리를 먹을 것 정도로 여기는 식인종 현지인 놈들이 가득하지."

"미친 소리를-."

"게다가, 성직자란 자들은 먹을 것도 아니고 태워 버릴 장작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척살자 루크는 발끈해서 소리치려다가 마지막 말에 입을 닫았다.

'장작이라니.'

척살자 루크는 잠시 멈칫했다.

리페로제에 당한 것들을 생각해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놈들을 다 합쳐도 그 미친 종교쟁이는 못 이긴다.'

미궁에서 이성을 잃고 살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기억했다.

이성을 잃은 행동 역시 자신의 잠재의식의 영향을 받은 것 아니던가?

그의 목적은 하나다.

'나는 집에 돌아갈 거다.'

그러니.

저놈들이랑은 상종해선 안 된다.

"나는 네놈들 말을 안 믿는-."

척살자가 단호하게 토마스에게 일갈하려던 순간.

콰아앙————————!!!

미궁의 어둠을 몰아내는 백금빛 신성력이 사방을 뒤덮었다.

* * *

쿠웅-쿵!

구렁텅이에서 솟구치는 빛.

이는, 에릭과 리페로제가 정한 신호였다.

"도움이라는 뜻인데...."

"그 리페로제가 뭘 도와 달라는 게냐?"

교황이 에릭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도통 이해가 안 갔다.

에릭은 모스부호를 참고한 신호 체계를 만들었다.

어릴 적, 분쟁 지대의 전장에서는 서로를 알아볼 신호가 필요했다.

'보통은 내가 썼지.'

주로, 위험한 상황에서 에릭이 도와 달라는 신호를 보내는 용도였다.

"분명 어지간한 의사소통은 다 가능하실 텐데...."

사소하게는 배고프다는 것부터 크게는 모 왕국 방향에 흑마법사들이 출현했다와 같은 것까지.

복잡한 신호 체계를 만들지 않았던가?

그리 고민하자니, 르웰이 다가왔다.

"그 에릭, 혹시 기억하는 신호가 저거 하나뿐인 게 아니실까?"

"오...."

실로 일리 있는 말이었다.

"오 년이면 다 까먹으셨겠군요."

리페로제의 성격상 사소한 건 금세 잊는 편.

"에릭, 세상은 쉽다. 죽일 놈과 지킬 놈만 기억하면 되지."

굉장히 심플한 사고방식이 아니던가?

"혹시 찾으러 오라는 의미는 아닌 게냐?"

교황이 전전긍긍 애달픈 얼굴로 질문을 건넸다.

에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길 들어갔다가 다른 장소로 보내질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허어...."

미궁은 리셋 중이다.

대격변 패치에 걸맞게 거대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을 터였다.

[게이트]라든가 [포탈]처럼 믿을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

'혹시....'

에릭은 게임 속 미궁을 생각해 봤다.

게임에는 저런 구렁텅이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으나, 일종의 벽 뚫기 버그 같은 것들이 많았다.

보스룸까지 숏컷을 만든다거나.

위험할 때 벽 너머로 캐릭터를 이동시키는 플레이가 가능했다.

'나도 마지막에 그랬지.'

65계층 개미굴.

거기서 박지훈은 성기사 캐릭터를 좁은 통로로 넘겨 몰려오는 유저와 NPC들을 상대했었다.

'비슷한 공간 아닌가?'

구렁텅이 내부는 미궁이되 정식으로 정해진 구역이 아니다.

즉, 가시거리 0의 어둠 속이라는 의미.

"허, 빙의자들은 미궁을 그렇게 이용했단 말이더냐?"

이러한 추측을 교황에게 알려 주자, 그는 상당히 놀랍다는 듯이 박창호를 바라봤다.

"그, 그게.... 가, 감사합니다."

박창호는 자신이 말한 적도 없는 일로 칭찬을 받았다.

사실을 고하려 들었으나 에릭의 매서운 눈초리에 그저 고개를 조아렸을 뿐.

"부, 부럽다."

니시다가 그런 박창호를 시샘했다.

"역치 창호 오빠!"

강풍호는 칭찬을 건넸다.

박창호의 입가가 미묘하게 부들부들 떨렸다.

그들을 바라보던 에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골 때리는 놈들.'

그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교황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저런 곳에서는 횃불과 비슷한 물건이 필요한 법이죠."

미궁 40계층의 테마는 어둠이다.

게임 속 버그 지형은 '어둠' 필드 효과가 적용되곤 했었다.

신성의 빛도 마법의 빛도 어둠에 금방 먹혀 버리는 지형.

그때 필요한 것이 횃불과 같은 아이템이다.

'비슷할 거다.'

또한, 에릭에게는 이를 타개할 아이템이 있다.

장두식이 뽑아 냈던 대단한 아이템.

[성유물 – 모닥불]

찬란한 등급과 달리 생김새는 불씨가 없는 장작더미였다.

만일, 그 용도가 횃불과 비슷하다면, 이는 분명 어둠 효과에 저항하는 물건이겠지.

"허어, 고대의 성물이 아니더냐?"

예상대로.

에릭이 [인벤토리]에서 꺼낸 물건을 보며 교황이 흥미를 보였다.

"지고한 신성력.... 그러고도 효과는 빛을 내어 어둠을 몰아낸다가 끝이로구나."

에릭은 또다시 박창호를 바라보며, 설명을 곁들였다.

미궁의 40계층의 어둠과 이를 이겨 내기 위한 신의 안배가 아닐까라는 얘기였다.

"실로 그렇도다! 노란 빙의자는 아버지의 부름을 받았음이 분명하구나!"

화르륵.

교황은 그리 말하더니, 에릭이 건네준 모닥불 위에 신성력을 담았다.

둥근 원판에 놓인 장작더미에서 불꽃이 일렁였다.

새하얗고 순백에 가까운 불빛.

마치 형광등처럼 하얬다.

후웅-.

교황은 구렁텅이로 그것을 집어 던졌다.

그리고 기도했다.

잠시 묵념이 이어졌다.

* * *

모닥불이 떨어지고 한 시간.

마냥 놀기만 할 순 없으니, 에릭은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거, 형님 이거 보셨수?"

흑탑 내부를 샅샅이 뒤졌다.

그 결과 엄청난 양의 재화를 발견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흑마법사들도 골드를 쓰며 생활한다.

에릭은 쌓여 있는 돈 더미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달러에 환장하는 북한 놈들 비슷한 거지.'

최신형 방탄 벤츠를 타는 공산주의의 수장이라든가.

수억 원의 명품백과 시계를 수집하는 테러리스트 수장이라든가.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했다.

"한 30억 골드는 되겠수다."

진짜 본거지를 옮겨 온 게 맞는지, 한화로 약 3,000억에 달하는 거금이 쌓여 있었다.

장두식이 방긋 웃었다.

"전 재산을 쌓아 두고 도망치는 걸 보면, 놈들도 어지간히 쫄보인가 보오!"

한껏 웃는 두식이와 다르게, 에릭은 고개를 기울였다.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놈들 규모를 생각하면 더 있을지도....'

최초의 마왕의 후손.

그게 흑마법사들이다.

흑회에서 흑마그룹으로 이름이 바뀌긴 했지만, 근본은 수천 년을 이어져 온 무장 테러 집단이 아니던가?

그런 놈들이 지닌 자본이 고작 30만 골드가 전부일 리가 없지.

'빙의자의 인벤토리도 무한하지 않으니까.'

자신과 달리 빙의자들의 인벤토리 용량은 게임과 엇비슷한 수준이다.

'이놈들 여기저기 뭘 숨겨 뒀을 것 같은데.'

마경은 수두룩하게 많다.

무국적 지대에는 마경 속에 미궁 입구까지 달려 있지 않던가?

'천천히 마경을 다 뒤져 봐야겠군.'

점점 할 일이 늘어났다.

에릭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평화로운 세계.'

쉬는 건 죽어서도 충분하겠지.

장두식과 성기사들이 쌓아 두는 온갖 물자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에릭이 눈가를 좁혔다.

'스승님이 오고 계신가?'

괜히 싸한 느낌이 들었다.

구렁텅이에서는 더 이상 빛기둥도 솟구치지 않는 상황.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더욱 불안했다.

에릭은 본격적으로 스승을 맞이할 준비를 시작했다.

"니시다 료, 이쪽으로 와 보도록."

* * *

"뭐, 뭔가 옵니다!"

흑탑의 재화를 정리했을 때쯤.

구렁텅이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쨍한 하얀빛과 함께 굉음이 울려 퍼졌다.

쿠욱-! 쿵!

뭔가를 찍고 벽을 딛는 소리.

그리고.

"끄아아아아아악-!!!"

남자의 비명 소리.

아주 끔찍한 괴성이었다.

"사, 사람이다!"

붉은 막에 뒤덮인 사내가 [모닥불]을 든 상태로 작은 여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살아 움직이는 성화봉 같았다.

치이익.

신성의 빛이 실시간으로 남자를 태웠다.

남자가 비명을 지를 때마다 하얀 소녀가 그의 칼 끝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상처가 회복되었다.

그걸 본 에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혈기사 클래스다.'

리페로제가 미궁에 들어갔다는 건 이미 아는 사실.

그리고 목적도 들었다.

'최초의 빙의자라니....'

솔직히 믿지 않았다.

한데, 눈앞에 산 증거가 있지 않던가?

"저, 저거 혈기사!"

리페로제보다 혈기사에게 이목이 집중되는 상황.

'...여전히 스승님은 작군.'

소녀의 외형이다.

키는 165cm 남짓하려나?

에릭에 비하면 한참 자그마했다.

'그만큼 대단한 힘을 지녔지.'

그녀의 신장은 곧 그녀가 인간을 초월한 시점을 의미한다.

즉, 리페로제는 열다섯 살쯤에, 벽을 넘어섰다는 의미다.

그런 존재가 백 년을 넘게 살아왔으니, 이루 말할 수 없는 괴물이 될 수밖에....

쿠웅-! 쿵!

가녀린 손이 커다란 남자의 두 발목을 움켜쥐고 마경의 구렁텅이를 등반했다.

"저, 저게 무슨!"

괴상한 광경이었다.

하나, 이를 보던 교황의 입가에는 점점 미소가 지어졌다.

"다행이로다."

완벽한 실종 상태로 5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생환이 반가울 따름이었다.

"성자 에릭, 스승의 귀환이 좋지 않은 게냐?"

그런데 잔뜩 인상을 쓴 에릭을 보아하니, 의문이 들었다.

그녀가 백 년 넘는 세월 속에 처음으로 만든 제자가 아니던가?

하물며, 자신의 지위까지 이양해 준 존재가 에릭이었다.

그런 제자라는 놈이 한껏 인상을 쓰고 있다니....

"성하, 스승님께서는 제 실력이 얼마나 늘었냐고 검부터 들이대실 겁니다."

"허어. 분명 그렇겠구나...."

교황이 안타깝다는 듯이 에릭을 바라봤다.

그때였다.

후웅-!

구렁텅이 아래에서 붉은 남자가 던져졌다.

"끄아아아악-!"

[모닥불]을 든 최초의 빙의자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붉은 이펙트까지 씌워지니, 진짜 인간 성화봉 같았다.

몇 초 뒤.

휙-.

새하얀 잔상이 구렁텅이에서 솟구쳤다.

하얀 성복과 거대한 대검.

그리고 기다란 백발.

"성복이...."

한데, 리페로제의 옷은 검게 칠해진 상태였다.

신성으로 어떠한 오물도 지워 버리는 존재가 어떤 이유로 저런 차림이 되었는가?

"하하하하!!!"

쿵- 하고 착지한 리페로제가 사방을 훑었다.

성기사들은 물론 교황과 성전기사단장까지 보이는 상황.

"뭐가 그리 좋다고 나를 보러 이렇게 나왔냐?"

그녀가 웃으면서 성복 가슴 자락에서 심장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교황을 향해 다가섰다.

작은 체구에 종종거리는 걸음이었으나, 그녀는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르게 움직였다.

"교황, 이건 네 선물이다."

리페로제가 펄떡이는 시꺼먼 심장을 건넸다.

"이름이 토마스라던가? 흑회 놈들의 이사? 그런 직책이라더군."

리페로제의 동공이 교황의 옆으로 움직였다.

거대한 존재.

찬란한 외모.

"호오.... 에릭, 엄청 자랐구나."

몹시 반가운 말투였다.

백발 여인의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그녀는 입술을 핥으며 등허리에 찬 대검을 꺼냈다.

후웅-.

"저놈은 에릭, 네 선물이다."

그러고는 검 끝으로 척살자 루크를 가리켰다.

그 뒤 그녀가 에릭에게 묻기를.

"키만 큰 건 아니겠지?"

리페로제가 짙게 웃었다.

그에 시종일관 침묵을 유지하던 에릭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스승님."

묵직한 중저음이었다.

리페로제의 입가가 싱그러운 미소를 그렸다.

그때 에릭이 덧붙이기를.

"대련을 하실 생각이라면, 삼 초라는 방식을 적용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삼 초?"

"제가 말씀드렸던 장유유서처럼 빙의자들의 법칙입니다."

에릭은 간단하게 삼 초를 양보하는 규칙에 대해 설명했다.

"스승, 혹은 손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할 때 세 번의 공격을 양보하라는 의미죠."

"호오, 흥미롭구나. 동방예의지국이라는 곳의 법칙이겠군."

어떻게 지냈냐.

별일은 없었냐.

그런 대화는 일절 없다.

"혹여, 네놈이 지어낸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오 년 만에 만난 사제의 대화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니시다 료, 동방예의지국 옆에 붙은 작은 섬나라의 빙의자입니다."

에릭은 옆에 있는 니시다를 가리켰다.

니시다 료는 고개 한번 들지 못한 채 몸을 덜덜 떨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살벌했고.

느껴지는 기운들은 흉포했다.

다정한 대화 속에서 날카로운 비수가 느껴졌다.

"방어는 가능한가?"

"세 번의 공격을 방어도 하지 않은 채 맞아 주시면 됩니다."

"삼 초를 양보하는 규칙이라니. 몹시 재밌겠어.

리페로제는 거리를 벌렸다.

마경의 구렁텅이 옆에서 새하얀 여인과 금빛의 사내가 마주 보는 구도가 되었다.

에릭은 [스킬]을 발동했다.

"흐음-. 그렇게 찢어 놓은 걸 꾸역꾸역 고쳤구나."

촤악-!

날개를 뽑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오, 제법 아스티아 님의 특징과 비슷하구나."

쿠웅-.

그리고 힘을 집중했다.

"지루하구나."

6천만 골드를 투자해 [심판] 스킬을 발동.

콰지직——————!!!

거친 굉음과 함께 하늘 위로 압도적인 크기의 대검이 떠올랐다.

그 광경에 성기사들은 물론, 빙의자들과 사로잡힌 흑마법사까지 기겁했다.

"미친."

수년 만에 만난 스승한테.

저런 공격을 가한다고?

후웅-!

수십 미터짜리 대검이 하얀 여인의 위로 꽂혔다.

94화 수금 (3)

스승과 제자가 있다.

제자는 아주 작은 꼬마였다.

그 꼬마는 매일같이 고통에 시달렸다.

시한부 인생이었다.

'그토록 작은 꼬마가....'

하나, 스승은 꼬마를 위해 수없이 많은 노력을 해 왔다.

머리를 내리쳐서 제자의 몸에 쌓인 신성력을 흩어 주고.

잠을 못 이루는 밤에는 그의 고통을 나눠 주면서, 편안한 밤을 기도해 줬다.

'내 그토록 아껴 준 보람이 있구나.'

리페로제는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칼날을 바라봤다.

압도적인 크기의 대검.

그리고 그걸 쏘아 낸 제자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후웅-!

리페로제의 머리 위로 황금빛 칼날이 떨어졌다.

'잘 자랐어.'

그녀는 싱긋 웃었고, 때마침 검끝이 머리와 맞닿았다.

콰앙——————!!!

굉음과 함께 구렁텅이 주변으로 거센 파장이 일었다.

리페로제의 백발이 나부꼈다.

"에릭, 제법이구나."

상식적으로다가.

수십 미터 크기의 대검은 인간을 그대로 뭉개 버렸어야 했다.

하나, 검은 허공에 정지했다.

리페로제의 백발에 거대한 검이 맞닿은 형국.

"저, 저게 무슨...."

"허어-."

그 광경에 모두가 말을 잇지 못했다.

쿠웅-!

여전히 검은 리페로제를 뭉개려 들었다.

하나, 그녀의 육신은 그 어떠한 침범도 허가하지 않겠다는 듯이 굳건한 자세를 유지했다.

손과 발을 움직이지 않은 것은 물론, 신성력조차 일으키지 않았다.

육신의 단단함이 반신의 경지에 이르렀기에 가능한 기예.

"고작 이게 끝이더냐?"

거대한 대검과 머리를 맞댄 상태로 리페로제가 고개를 돌렸다.

에릭과 눈이 마주쳤다.

"크흐흐-. 여전하십니다."

에릭은 허탈한 듯 웃으며, 그녀에게 말을 이었다.

"1초식은 아직 이어지고 있습니다."

쿠우웅-!!!

장두식과 잭슨 그리고 아주 먼 거리에 떨어진 르웰의 위치에서 금빛 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호오, 수하들에게 신성을 입혀 강화하는 힘이로구나."

그 모습에 리페로제가 감탄했다.

'이 힘만 해도 제법이건만, 저런 기예도 가능했단 말이냐?'

아무렇지 않은 척했으나, 리페로제는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열다섯 살 시절을 떠올려 봤다.

'나도 그때 벽을 넘어섰지만, 에릭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역시 나의 제자로다.

청출어람에 다가서는 제자의 모습.

스승으로서 이보다 가슴 벅찬 순간이 어디 있겠는가?

뿌듯했다.

'키도 그렇고 외모도 그렇고....'

하물며 겉모습도 마찬가지.

자신처럼 작은 체구로 살까 봐 내심 걱정이 많았다.

'내 취향대로 잘 자라 주었구나.'

그 조그만 꼬마가 저런 상남자로 자라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하하하!!!"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호쾌한 웃음소리가 마경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흐뭇하게 웃는 스승 리페로제와 달리, 그 제자 에릭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진 상태였다.

"잭슨, 장두식. 너네 뭐 하냐?"

에릭이 정한 첫 번째 초식은 [심판]을 사용하고 강화된 수하들의 공격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한데, 장두식과 잭슨이 도통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거, 형님. 미쳤수? 나, 나보고 리페 누님을 패라는 소리요?"

"보스- 부디 재고해 주십쇼!"

잭슨과 장두식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신성력이 만능이라고 하지만, 영혼에 각인된 공포까지 지우지는 못하는 모양.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그래도 내 말을 무시해?'

괘씸하긴 했지만....

"강화를 해 줘도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들을 과연 한 초식으로 봐야겠느냐?"

"...그렇군요."

리페로제의 눈매가 풀렸다.

'스승님이 지루함을 느끼면 안 된다.'

에릭은 그녀의 흥미가 꺼지기 전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하여, 곧바로 다음 초식을 꺼내 들었다.

'어쩔 수 없지.'

여섯 날개의 힘으로 드높은 하늘 위에 떠 있던 에릭.

후웅-.

쏜살같은 속도로 에릭이 리페로제를 향해 쏘아졌다.

떨어지는 별똥별처럼 금빛 섬전이 허공을 그었고.

그와 동시에 에릭이 개벽의 검을 똑바르게 내리그었다.

쩌엉———————!!!

검면을 따라 공간의 균열이 일어나고 그 안에서 쨍- 한 금빛이 쏟아졌다.

"허!"

백발이 나부끼고.

리페로제가 검을 뽑아 들었다.

쿠구구구궁-!!!

검과 검이 맞부딪쳤다.

거대한 에릭이 개벽의 검으로 행하는 [개벽].

작은 리페로제가 소녀의 몸으로 휘두르는 투박한 대검.

"정말.... 믿을 수 없이 강해졌구나."

리페로제가 검을 뽑아 들었다.

삼 초를 양보한다는 규칙을 어긴 것이다.

"어찌 방어를 하셨습니까?"

"...내가 죽었으면 좋겠더냐?"

"그럴 리가요."

에릭이 짙게 웃었다.

"건방지구나-."

꾸득.

리페로제가 손에 힘을 주었고, 에릭의 몸이 조금씩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삼 초를 적용한 규칙에서는 내가 졌으니, 보답으로 가르침을 내려 주마."

"끄윽-."

속수무책으로 밀려나는 에릭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리페로제를 바라봤다.

"그게 무슨 미친 소리-."

채앵!

결국 에릭의 검이 튕겨 나갔다.

그 반작용으로 그의 몸도 바닥을 뒹굴었다.

사방의 풍경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아직도 이렇게 차이가 난단 말인가?'

에릭이 당혹스러운 심정으로 몸을 세우려던 차에.

휙!

새하얀 백발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 직후.

꽈앙—————————!!!

꿀밤이 내리쳐졌다.

"끄윽!!!"

뒤로 날아가던 와중에 수직으로 꽂힌 꿀밤.

에릭은 그대로 바닥에 꽂혔다.

"허어-. 미친 사제(師弟)로다."

그 광경에 교황이 침음을 흘렸다.

옛 추억이 떠올랐는지 교황의 손이 움찔거렸다.

'우리가 지금 뭘 보는 거지?'

'주, 주인공이 저 백발 소녀인가?'

'휙휙 하더니 에릭 오빠가 바닥에 꽂혔어?'

세 빙의자는 처음 보는 괴상한 광경에 넋이 나갔으며.

"거, 따까라. 우리 뒈질 뻔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잭슨과 장두식은 에릭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에 안도를 느꼈다.

그리고....

"히익!"

저 멀리 있던 르웰은 종종 달려 나갔다.

* * *

상황이 일단락되었다.

리페로제는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요약해 줬다.

"그, 그게.... 척살자를 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다짜고짜 미궁을 공략해서 최상층까지 클리어하셨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그러고 계시를 받아서 폐쇄된 미궁을 헤매다가 흑마그룹의 잔당들을 만났다는 얘기고요?"

"그래."

에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그녀의 힘이라면 못해도 8줄 이상의 주주를 생포하고도 남을 터였다.

"어째서 고작 6줄짜리 토마스를...."

"내 말했지 않더냐."

상황은 간단했다.

흑마그룹의 대주주.

그를 보좌하는 8줄짜리 외팔이 흑마법사가 리페로제를 보자마자 발작을 일으켰다.

'영혼까지 베어 버리는 검술.'

리페로제의 힘의 개성은 세상 만물을 베는 검이다.

에릭의 상태창마저 갈기갈기 찢어 버린 미친 능력.

그녀의 검은 정말 모든 것을 벨 수 있다.

'영혼이 잘리면 회복도 불가능하지.'

그녀는 걸어 다니는 재앙과도 비슷했다.

'재생 불가의 상처를 입힌다는 게....'

몸이 터져도 재생할 수 있는 세상, 죽지만 않는다면 모든 부상을 원상태로 되돌릴 수 있다.

장애라는 게 없는 세계에서 장애를 일으킬 수 있는 존재라니.

이 얼마나 공포스러운가.

"놈들이 나를 보자마자 차원문을 열더구나."

그들은 엄청난 제물을 바쳐, [게이트]의 시전 시간을 앞당겼다.

그 제물로, 일부 주주가 희생되었다고 한다.

"그러더니 죄다 도망쳐 버렸다."

후방을 맡은 몇몇 흑마법사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게이트로 몸을 내던졌다고.

"그래도 이사면 제법 직급이 있군요. 대표 아래니까요."

"대표?"

"그, 마키아라고-."

"혹시 탁한 눈을 지닌 하얀 년을 말하는 게냐?"

"오! 어떻게 아십니까?"

"토마스라는 놈을 붙잡으니까, 둘이 찢어져라 울더구나. 내가 이름을 다 외울 정도였으니...."

에릭은 짙게 웃었다.

교황의 손에서 펄떡거리는 심장.

저게 재생하면 흑마그룹의 중추라 불릴 수 있는, 이사가 나타나게 될 테지.

"제법 좋은 패를 얻었군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 정도는 고생도 아니니라."

대화는 끝이 났다.

잠시간의 정적이 일고, 에릭이 입을 열었다.

"그, 스승님. 대체...."

그런데도 리페로제는 요지부동이었다.

"언제 내려오실 생각입니까?"

에릭은 자신의 무릎에 앉은 리페로제를 바라봤다.

"흐음, 참으로 늠름해졌구나."

에릭은 당황스러웠다.

"네놈이 어렸을 적에는 매일같이 내 무릎에 앉아 있지 않았더냐?"

"...그때는 제가 아프지 않았습니까."

후웅-.

리페로제가 팔을 올렸다.

에릭은 여상하게 말을 이었다.

"스승님, 오랜만에 옛 생각이 나고 좋습니다."

"그렇지?"

"예, 그렇습니다."

마경 한복판.

구렁텅이 옆에 놓인 의자와 거기에 앉은 에릭.

그의 무릎에는 리페로제가 앉아서 발을 까딱였다.

'강제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군.'

이게 무슨 수치 플레이인가.

사방을 둘러싼 성기사들이 흘깃흘깃 에릭을 바라봤다.

에릭이 눈가를 좁혔다.

아주 먼 곳에 익숙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 배신자 새끼들.'

에릭은 덩어리 놈과 잭슨을 노려봤다.

장두식과 잭슨은 아예 거리를 멀찍이 벌려서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두 사람은 에릭의 방향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심지어 세 명의 빙의자들도 장두식을 따라다녔다.

'스승님만 가시면-.'

그리 복수심을 다지고 있자니, 리페로제가 말을 걸어왔다.

"그래서, 저놈은 언제 깨어나는 게냐?"

[개벽]을 사용한 순간 기절해 버린 척살자 루크.

그에 대한 얘기였다.

"흐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에릭은 모르쇠로 대응했다.

놈은 지금쯤 텅 빈 신전에서 자신의 죽음을 마주 보고 있을 터.

물론, 에릭이 직접 신전에 들어가 확인할 수도 있겠지만, 당장은 불가능한 일이다.

'스승님이 내게 유하신 편이지만, 광신만큼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지.'

리페로제가 어떤 반응을 내보일지 모른다.

'배교자라며 칼을 들이대시진 않겠지. 그래도 신전 자체를 부정하실지도 모른다.'

신전에 놓인 석상이 하필 르웰의 모습이 아니던가?

그런 복잡한 심경을 느끼고 있자니, 리페로제가 고개를 삐딱하게 틀었다.

"이래도 안 온단 말이더냐?"

그녀의 시선은 저- 먼 곳.

제국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르웰....'

에릭은 관자놀이를 질끈 눌렀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5년 동안 스승이 마음에 담아 두고 있단 말인가?

'왜 도망치지 않고 서성거리는 건지.'

골 때리는 상황이었다.

* * *

"허, 여기는 어디지?"

척살자 루크.

그는 리페로제와 에릭의 싸움이 시작된 직후 도망쳤다.

온갖 스킬과 미궁의 보물들을 사용해 순식간에 몸을 회복했고, 그 뒤 마경의 어둠 속으로 몸을 내던지려 했다.

하나, 허공으로 금빛 섬전이 그어진 순간.

그는 정신을 잃었다.

'구름 위에 지어진 신전?'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기이한 공간이었다.

구름 위를 걷다 보니 거대한 금빛 신전이 보였고, 그 신전 주변으로는 희뿌연 신성력이 넘실거렸다.

"젠장, 어쩌다 저런 미친 괴물한테 붙잡혀서. 나, 나는 미궁을 올라야 하는데...."

32계층.

그는 믿는다.

계속해서 미궁을 오르다 보면,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다.

아내와 딸과 함께하는 따듯한 삶으로 돌아갈 거다.

스르륵-.

그때 갑자기 구름이 거둬졌다.

구름 사이로 그리운 풍경이 드러났다.

지구를 닮은 현대적인 무언가.

그 안에 담긴 네모난 액자.

'영정 사진?'

그 사진 속에는 자신의 얼굴이 박혀 있었다.

아득한 시간 만에 보는 본래의 자신의 모습.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 감상에 젖어 있자니.

"여보. 오랜만이네. 제인, 아빠한테 인사해야지."

"아빠, 안녕."

그리운 두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은 루크의 영정 사진을 보며 기도했다.

'대, 대체 얼마나 시간이....'

아이가 많이 컸다.

벌써 초등학생은 되어 보였다.

아내의 옆은 횅했다.

몇 년은 흘러간 것 같은데, 여태 재혼도 안 하고 혼자 살아가는 모양이었다.

'아아....'

심장이 미어졌다.

비통했다.

이 상황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면서도 아내와 아이가 반가웠다.

고맙고 미안했다.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가 척살자 루크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그리 슬퍼하자니.

쿠웅—————!

세상이 뒤흔들리고 척살자의 시야가 뒤바뀌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이게 이놈이 가지고 있던 물건들입니까?"

"2티어 강화권이라는 게 제법 있더구나."

자신을 사로잡았던 새하얀 여인과 아주 커다란 금빛 사내가 온갖 물건을 쌓아 두고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제가, 요번에 스승님과 검을 맞대 보고 깨달은 게 있습니다."

"뭐더냐?"

"성물, 개벽의 검은 너무 작습니다."

척살자 루크는 눈을 끔뻑거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자신은 바닥에 누운 상태였다.

등허리에서 음산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 마경 흙바닥에 누워 있는 것 같았다.

'꿈을 꾼 건가?'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조금 전의 일이 꿈은 아닌 것 같은데....

"척살자 루크라고 했나?"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거는 거대한 성기사를 보아하니,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고되게 살아서 헛것을-.'

루크가 일순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의 사내.

가까이에서 보니 더욱 커 보였다.

그가 말하기를.

"인벤토리에 숨겨 둔 게 제법 많더군."

그의 손끝에는 기다란 티켓들이 들려 있었다.

[2티어 강화권]이다.

'저, 저건 내 아이템?'

리페로제에게 빼앗긴 물건이었다.

"인벤토리에 든 걸 다 내놔라."

그녀는 더 이상 뭐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자신을 팼다.

루크는 독했다.

끝까지 버텼다.

'인벤토리는 잡아떼면 그만이다.'

그렇게 꺼낸 게 총, 8장.

인벤토리에 숨겨 둔 건 12장.

아무리 때려도 끝까지 없다고 우기면, 알아차릴 방도가 없지 않나?

척살자 루크는 모르쇠로 대응하려고 했다.

하나, 그러기도 전에.

"강화권에, 단독 공략 보상으로 받은 상자들도 제법 많군. 요정의 엘릭서는 리터 단위로 들고 있고.... 허어, 무슨 황실급으로 요정의 엘릭서를-."

줄줄이 에릭의 말이 이어졌다.

[인벤토리]의 내용물을 훤히 꿰고 있는 모습.

"흠, 아이템은 잘 모르나? 세트템을 왜 인벤토리에 모셔 두고 있지?"

그 태연한 모습에, 자신의 영정 사진을 봤던 건 까마득한 꿈처럼 느껴졌다.

"그, 그걸 대체 어떻게-."

척살자 루크가 뭐라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의 머리 위로 백발의 여인이 나타났다.

"호오, 네놈 나를 속인 게냐?"

"스승님, 패는 건 추후 교화 시간에 하시죠."

에릭은 황급히 리페로제의 손을 붙잡았다.

"허어! 어딜-."

"커다랗게 변한 개벽의 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대검 형태의 개벽의 검이라. 그래, 내 한번 참아 보마."

에릭은 부드럽게 리페로제의 팔을 내려놓고서는 루크를 바라봤다.

'악명이 자자하다더니....'

척살자 루크, 냉혹한 살인마로 알려진 것과 달리 순한 어린양처럼 눈을 말똥거렸다.

'저거 왤케 쫄보냐?'

붉은 이펙트 때문에 살벌한 인상이라 여겼었는데.

스킬을 두르지 않은 그의 모습은 몹시 착해 보였다.

저어기 가르시안 왕국 변경백령의 순박한 마을 청년 같은 외형이 아니던가?

'일이 쉽겠어.'

에릭은 한결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루크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선, 2티어 강화권부터 다 꺼내 봐라."

무슨 삥을 뜯는 모양새였다.

에릭은 루크의 존재가 몹시 달가웠다.

'대신 이런 걸 다 모아 와 주네.'

[1티어 강화]도 끝마치지 않은 개벽의 검이다.

그간 강화의 필요성도 못 느꼈고, 작은 롱소드가 대검처럼 변하려면 2티어 강화권까지 필요해서 미뤄 뒀던 일이다.

하나, 이제는 달라졌다.

'원트에 2티어까지 간다.'

척살자 루크가 부들부들 떨며 손을 내밀었다.

파앗-!

[2티어 강화권] × 12

강화할 아이템과 재료를 모았으니, 이제 필요한 것은....

"두식아-!!!"

신도가 되어 더욱 영험해진 장두식이다.

95화 수금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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