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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81% MALDITOPALADIN / Chapter 9: 80-90

Kapitel 9: 80-90

80화 마경(魔境) (3)

마경의 심처(深處).

까마득히 높은 육각 기둥 형태의 건물 위로 붉은 눈이 떠올랐다.

희번뜩-.

거대한 눈이 시선을 돌렸다.

위치는 에릭이 있는 절벽.

"역시, 토마스예요."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기다란 탑 위로 시뻘건 눈알이 안광을 빛냈고.

그 아래에서 베일을 덮어쓴 마키아와 양복을 차려입은 토마스가 에릭의 일행을 바라봤다.

"교황청의 위협에 성자가 나설 거라는 건 충분히 예측 가능한 부분이었지만, 제국의 성녀까지 딸려 올 줄은 몰랐군요."

토마스가 고개를 숙이자 그 아래로 새하얀 손등이 나타났다.

쪽.

창백한 피부가 입술에 맞닿자, 토마스의 등골을 타고 오싹한 전율이 흘렀다.

"이게 다 대표님이 믿어 주신 덕분입니다."

흑마그룹의 신사업.

신살(神殺)의 비원으로 향하기 위한 교두보로써, 성자와 성녀의 말살이 시작되었다.

검은 베일 아래로 마키아의 눈매가 활처럼 휘었다.

"그래서 토마스, 둘 중 하나라도 잡을 수 있을까요?"

대표의 질문에 토마스는 가진 전력을 수치화해 생각해 봤다.

'미궁 상층의 계층주 몇 마리, 그 외에 대형종 몬스터들....'

회사의 주주를 없애 버린 에릭이다.

효율이 떨어진다곤 하나, 강림한 흑룡을 멸하기까지 했으니.

'게다가 더 강해졌겠지.'

신의 총애를 받는다는 성자 에릭이다.

숨만 쉬어도 강해지는데, 미궁까지 다녀왔으니 더 괴물이 되었을 테지.

토마스는 제법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시우론의 흑기사를 보낸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전력만으로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나의 토마스라면 그리 말할 줄 알았어요. 미궁의 계층주를 조종해도 어렵다는 게.... 신의 힘이란 참으로 부조리하군요."

"대표님 말씀이 옳습니다."

"게다가...."

마키아가 말을 멈추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절벽 위로 보이는 풍경이 이상해졌다.

"그 사제, 지금은 제국의 성녀라 하던가요? 그녀가 사라졌군요."

한시도 눈을 뗀 적이 없건만, 절벽 위에는 세 사람밖에 보이지 않았다.

"대표님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겁니까?"

"그러게요. 전혀 보이질 않네요."

마키아의 눈조차 속인 제국의 성녀 르웰.

보통 일이 아니었다.

"토마스, 분명 무력은 하등 없는 외모랑 몸매만 빼어날 뿐인 호감작이 가능한 NPC라는 말을 하지 않았었나요?"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현실에서는 바뀐 부분이 생각 이상으로 많아져서.... 아무래도 그 리페로제의 영향이 아닐지 싶습니다."

"또 그녀인가요? 그녀가 건드린 모든 것들이 이상하게 변해 버렸죠. 르웰도 그 일환이겠지요."

마키아는 속이 썼다.

하필, 성자의 약점이 될 존재가 정체불명의 힘을 지니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래도 분명 약점은 있을 거다.

마키아는 차분히 절벽 위를 살폈다.

'웬 덩어리 하나랑, 검사에 성자 에릭.'

어차피 저들도 해치워야 할 적이 될 테니.

본래, 그들에게 몬스터 웨이브를 보내고 자리를 뜨려 했던 두 사람이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이참에 전력을 가늠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요."

"제가 남아서 지켜보겠습니다."

마키아는 토마스를 남기기로 정했다.

"비서실장과 부장급 빙의자를 붙여 줄게요. 토마스, 크게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걱정 감사합니다. 대표님도 무운을 빌겠습니다."

토마스가 고개를 조아렸다.

흑마그룹의 본사(本社) 위치까지 옮겨 가며 실행하는 사업이 바로, 성자와 성녀를 죽이는 일이다.

마키아와 토마스는 현재 제국과 인접한 마경에 있으나, 그들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다.

"저는 가증스러운 태양성국의 성녀를-. 흐흣."

징벌병으로서 전쟁의 창받이로 살던 시절을 떠올리며 마키아가 짙은 미소를 그렸다.

"언제나 대표님의 뜻대로 이뤄질 것입니다."

마키아가 손을 내밀었다.

쪽-.

* * *

[격리 주문에 갇혔습니다.]

에릭과 잭슨의 눈앞으로 [시스템 알림]이 나타났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을 둘러싸고 거대한 회색빛 장막이 생겨났다.

"거, 형님. 이거 흑마법사 새끼들이 쓰는 힘 아니요?"

장두식에게는 상태창이 보이지 않는다.

하나, 그 역시 자신을 격리시킨 이질적인 힘을 느꼈다.

과거 자주 겪었던 일이었으니, 모를 수가 있나.

"거, 뭐 절단이랬던가."

"두식이 너도 기억이라는 걸 하는구나! 이건 격리 주문이라는 거다."

에릭의 예상대로 그들을 겨냥해 흑마법사들의 스킬이 발동되었다.

빙의자의 [스킬]이지만, 황실마탑에서는 이를 '공간 격리 현상'이라고 명명했다.

힘을 파악했으니 파훼법 또한 명확했다.

"저 장막을 부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하거나, 가만히 24시간을 기다리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

장막만 있다면, 그냥 때려 부수고 나가도 그만.

하지만 장막을 향해 마경에서 흘러나온 몬스터들이 몰려오는 상황이다.

"허! 보스. 저거 몬스터가 서로 협력하는 거 맞습니까?"

에릭의 일행은 분쟁 지대의 까마득한 절벽 위에 있다.

교황청 인근의 절벽은 그 높이가 아주 높았다.

거리는 제법 멀지만 다가오는 몬스터들은 명백히 에릭의 건너편 절벽 위로 올라서고 있었다.

일사분란하게 절도 있는 움직임을 보이는 몬스터를 보며 에릭이 눈가를 좁혔다.

'저렇게 체계적으로 움직인다고?'

대형종(大型種) 몬스터들의 몸을 타고 중소형종 몬스터들이 절벽 위로 향했다.

그렇게 올라온 몬스터들은 마치 군대 개미처럼 저들의 몸으로 다리를 만들어 에릭이 있는 건너편 절벽으로 넘어갔다.

그 모습에 에릭은 마경 정중앙에 떠오른 붉은 눈알을 바라봤다.

"잭슨, 그 영화 기억하냐?"

"반지의 길을 모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잭슨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곧장 논지를 파악했다.

"아무래도 시우론이 강림한 것 같다. 잭슨, 그 영화 내용이 어땠더라?"

에릭은 거리낄 것이 없었다.

기척을 숨긴 르웰을 포함해 모두가 자신이 빙의자임을 아는 파티.

'편하네.'

숨길 것이 있는 에릭이나, 숨길 필요가 없는 동료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아주 큰 안도감이 들어왔다.

말하는 것도 그렇고.

대책을 논의하는 부분도 그렇고.

여러모로 편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문제는 에릭과 잭슨 둘 다 빙의한 지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점이다.

"허, 보스 저는 45년 전에 빙의해서 기억이...."

에릭도 워낙 어릴 때 봐서 자세한 설정은 모른다.

'빙의 전후를 합쳐 보면, 그 영화를 본 지 25년이 훌쩍 넘었지.'

그래도 워낙 유명했던 소설 원작의 영화라서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이 떠올랐다.

"악마나 몬스터를 이끄는 힘을 지녔고 시우론의 눈은 세상 전체를 지켜볼 수 있으며, 절대 반지를 없애면 저것이 사라진다는 것 정도."

논의를 해 본 결과 이 이상의 대책이 나오지는 않았다.

"거, 형님. 반지를 못 찾으면 어떻게 되는 거요? 그때 루시퍼 그놈도 십자가니 성경이니 찾다가 실패하지 않았수?"

"그때는 루시퍼처럼 그냥 패 죽여야겠지."

"뭐, 간단하구만요."

그래도 이만하면 충분하리라.

지구인이 강림시킨 악마가 무조건 본래의 설정을 따라가는 것도 아니니까.

애초에 그 루시퍼도 결국 패 죽였지 않던가?

여차하면 힘으로 찍어 누르면 그만이다.

게다가 강림한 악마가 창작물에 기반해 태어난 놈이니, 대책도 명확했다.

"군주의 눈이니까, 몬스터를 조종하는 힘이 있겠어."

"보스, 공포를 뿌리는 기사들도 수하로 부린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 그 와이번을 타고 다니는 놈."

오래전 기억이지만, 대화를 나누다 보니 몇 가지 정보가 더 떠올랐다.

이러한 것들을 기반으로 에릭은 시우론의 능력을 정리했다.

하나, 몬스터를 조종하는 힘.

둘, 세상을 내려다보는 눈.

셋, 시우론을 추종한다는 와이번을 타고 다니는 흑기사.

'흑기사는 보이지 않는군.'

놈들이 무슨 수작을 벌이는 모양이었다.

에릭도 이 사태를 본 직후 한 가지 함정을 파 뒀다.

'조금 위험하겠지만, 르웰이 잘해 준다면....'

쿠웅-.

생각을 마친 에릭은 묵직한 발돋움과 함께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처음으로 확인한 곳은 교황청과 그 앞의 절벽이다.

에릭을 가둔 [격리]와 교황청을 가둔 [격리]가 겹쳐져서 보이는 게 하나도 없었다.

하나, 에릭의 눈에 담긴 강대한 신성력은 이조차도 꿰뚫어 봤다.

'상층의 계층주랑 몬스터들이 다수.'

교황청의 광경은 숫제 마경을 방불케 하는 모습이었다.

50미터 높이의 절벽보다 커다란 몬스터들이 절벽 위의 성기사단을 위협하고 들었다.

개중에는 미궁 속 계층주로 불리는 강력한 개체들도 여럿 있었다.

후우웅-.

절벽 아래에서 아주 커다란 오우거가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 크기가 어찌나 크고, 속도는 또 얼마나 빠르던지.

절벽 위의 성기사단을 쓸어버릴 기세였다.

하나, 아스티아 교단은 강하다.

'교황 성하와 율리우스 님이 잘 잡아 주고 있군.'

성전기사단장 율리우스가 대검으로 그 몽둥이를 쳐 냈다.

뒤에서는 교황이 신성의 빛을 벼려 내 오우거의 심장을 향해 내리꽂았다.

그 광경에 에릭은 안도했다.

'역시, 마경을 벗어나면 덩치 큰 샌드백이 되네.'

마경의 몬스터는 미궁의 몬스터와 동일한 성능과 크기를 지녔다.

하나, 마경을 벗어난 순간부터 힘이 크게 줄어든다.

즉사기 패턴이라든가, 특유의 부정 계열의 힘을 사용하지 못하는 등의 제약이 달리는 것이다.

'그래도 수가 너무 많지만.'

에릭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몬스터 무리를 바라봤다.

까마득한 몬스터의 군체가 절벽을 건너 에릭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그에 에릭이 말하기를.

"잭슨, 장두식. 다 죽여 없애라."

* * *

흑마법사 클래스는 본신의 힘보다는 유틸리티에 치중된 면모가 강했다.

[포탈], [단절], [긴급 탈출] 등.

플레이어의 이동 거리를 줄여 준다거나, 제물을 바쳐 강제로 레이드 상태를 벗어나는 것도 가능하다.

그래서 길드마다 한둘은 반강제로 흑마법사들을 데리고 다녔다.

토마스 또한 그런 흑마법사 클래스 중 하나였다.

'교황청은 시간 끌기용이니까 문제는 없겠고....'

시우론의 눈 아래에서 토마스는 전황을 살폈다.

빙의자 토마스는 이 세계에 제법 잘 적응했다.

게임과 달라진 점들이 제법 많았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도 아주 다양해졌다.

유틸리티에 치중되었던 흑마법사 클래스는 현실이 되면서 아주 강대한 악마를 소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었다.

'이곳은 완전히 다른 세계다.'

거기에 더해 컨설턴트라는 본업을 살려, 흑마그룹의 부흥에 이바지하기까지 했다.

그 일환으로 토마스는 교황청을 묶어 두는 데 성공했다.

'체력에 한계가 명확하지.'

게임 캐릭터와 달리 사람은 지친다.

당연한 말이다.

대격변의 미궁 속에서 제국의 군인들이 죽었다.

그것도 고블린을 상대로.

'상층의 몬스터니까 시간 벌이는 충분하지.'

교황이건 성전기사단장이건 미친 듯이 몰려드는 몬스터를 상대로 무한하게 버틸 수는 없을 터였다.

그것도 일격에는 잘 안 죽는 맷집 좋고 커다란 놈들만 보내 놨으니, 아스티아 교단이 에릭을 도울 여력은 없을 거였다.

한데, 문제는....

'저놈은 왜 안 지치지?'

성자 에릭이다.

하늘 높이 날아오른 에릭은 사방으로 메테오를 내리꽂으며 몬스터를 지워 나갔다.

지고한 신성력을 쏟아 냈다.

'날개가 사라졌군.'

역시, 놈도 사람인가?

토마스는 지상에 내려온 에릭을 지켜봤다.

놈을 어찌해 볼 수 있을지, '각'을 한번 재 보는 것인데....

'몸이 금빛으로 일렁이더니 힘이 그대로 솟아난다고?'

한번 번쩍 빛을 발한 에릭은 땅에 내려앉은 채로 몬스터를 지워 나갔다.

날개가 없다 뿐이지, 힘 자체는 오히려 처음처럼 강력했다.

심지어 칼만 쓰는 게 더 강해 보였다.

"아스티아 교단에서 나온 최초의 성자라더니.... 괴물 같은! 토마스 이사님, 저게 말로만 듣던 아스티아식 중검술입니까?"

그 광경에 토마스의 옆에 있던 김 부장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적이었지만, 경외심을 품게 만드는 위용이었다.

토마스는 대답 대신 질문을 건넸다.

"김 부장님, 포탈로 기습하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이사님의 말씀이신데 가능이야 하지요. 근데 포탈을 열면 저놈도 일로 넘어올 수 있는 거 아시죠?"

"흐음...."

[성유물(聖遺物) 개벽(開闢)의 검 +1]

토마스가 안력을 높이자 아이템 네임태그가 떠올랐다.

"아니, 무슨 성유물을...."

진중한 성격인 토마스였으나, 성자의 무기를 보고는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었다.

김 부장 역시 흑마력을 끌어내 안력을 높였다.

"+1강? 아스티아 교단은 성물을 강화까지 합니까?"

″...빙의자, 빙의자 관리국장!"

이런 미친.

토마스가 관자놀이를 질끈 붙잡았다.

제국의 빙의자 관리국은 미궁 공략에 큰 성과를 내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대체 뭘 하나 했더니....

"현지인들이 강화권을 쓴다고?"

김 부장이 화들짝 놀랐다.

지금 미궁은 32계층이 막 공략된 상황이다.

졸업템으로 불리는 [성유물]이나 [신화급] 아이템은 미궁 50계층 이상에서만 나온다.

하나, 현지인들은 다르다.

"저, 저! 현존하는 성물이나 황족의 월광무구에 강화를 하고 있나 봅니다!"

흑마그룹이 빙의자를 이용해 진짜 악마들을 강림시켰듯이.

제국과 교단은 다른 방식으로 빙의자를 다루고 있었다.

"일단 지켜보죠. 몬스터는 무한하게 많습니다."

이쯤 되면 놀랄 건 없겠지 싶던 토마스였으나.

"그런데, 저 덩어리 같은 놈은 대체 무슨 마법을 쓰길래 몬스터가 저렇게 활활 타 버리는 거죠?"

"시체도 남기지 않는 건 분명 신성력-. 어어?"

김 부장의 질문에 토마스는 또다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화염구를 쏘는데 신성력이 터진다고?'

반삭 머리 덩어리가 신성력이 담긴 마법을 쏘아 냈다.

사용하는 마법의 종류는 적었으나, 위력이 문제였다.

"신성 마법사?"

듣도 보도 못한 말이었다.

놈은 아주 간단한 마법만 원거리로 쏴 대고 대부분은 자신에게 마력 강화 쓴 뒤에 몽둥이로 몬스터를 패 죽이고 있었다.

"근데 싸우는 방식은 황실마탑의 워-메이지 같은...."

"깡패 같은 놈."

토마스가 질색했다.

"근데, 토마스 이사님, 저 아래의 검사는 뭡니까?"

"김 부장, 제발...."

토마스가 입술을 씹었다.

핏물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빙의자가....'

[수호의 맹세], [최후의 보루].

거대한 검의 형상이 절벽 위로 떠오르고, 기사와 덩어리를 감쌌다.

이는 3차 전직까지 마친 '수호기사'가 사용한다는 궁극기 스킬 중 하나였다.

'저걸 쓰면 자신은 피해를 입을 텐데?'

효과는 파티가 입은 피해를 자신이 대신 가져가는 것.

토마스는 에릭과 덩어리가 멀쩡한 이유를 깨달았다.

몬스터와 몽둥이를 휘두르며 초근접전을 벌이는 마법사는 다치기도 많이 다쳤다.

어째 상처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했더니, 수호기사가 스킬을 사용해서 그런 거였다.

'성자도 저 스킬 때문에 멀쩡한 거겠어.'

에릭의 비밀을 찾아냈다고 생각한 토마스였지만.

이어지는 현상에 도통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저, 저거 빙의자가 힐을 받는데요?"

수호기사는 분명 상처를 입었다.

피도 흘렸다.

그런데 하늘에 떠오른 에릭이 신성 치유로 빙의자를 치료해 버린 게 아닌가?

"...진짜로 빙의자의 페널티를 지워 버렸다니."

토마스는 뭘 해 볼 생각을 버렸다.

슬슬 퇴각할 각을 잡아야 할 판이었다.

'어디서 달달한 냄새가....'

이토록 끔찍한 소식만 가득한데 은은하게 풍겨 오는 고급스러운 단내가 얄궂게 느껴졌다.

81화 마경(魔境) (4)

태양성국(太陽聖國).

태양신을 모시는 루-솔라스교를 국교로 삼은 종교 국가다.

태양성국의 왕은 태양성왕이라 불리며, 세습 대신 성물의 간택을 통해 정해진다.

또한, 성국은 루-솔라스를 모시지 않는 모든 존재를 이단(異端)으로 치부하는 극단적인 종교 국가다.

"이단들이 세계에 재앙을 불러온 거야!"

미궁 입구를 수도에서 관리하는 제국과 달리, 태양성국은 이를 악(惡)의 원천이라 여겼다.

그래서 그들의 미궁 입구는 수도 옆 허허벌판에 있다.

불모지(不毛地), 모험가 길드조차 없는 황량한 땅에 투박한 지하 계단과 나무문이 덩그러니 놓였고.

루-솔라스의 조사단이 그곳을 둘러싼 채 조사를 이어 나갔다.

"살아 돌아온 놈들은 뭐래?"

이곳의 미궁에서도 생존자들이 나타나는 상황.

세상과 단절한 채 살아가는 극단적인 종교 국가여도, 미궁 속 상황을 파악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성자님, 생존자들의 증언이 모두 일치합니다."

저층의 모든 이가 죽었고, 중층 이상의 생존자들은 제국과 협력해 살아남았다.

상층의 생존자들은 아직도 나오는 중이라고 하니.

"아무리 그래도 이교도들과 손을 잡아? 그것도 제국에 붙어서!"

루-솔라스가 가장 혐오하는 것이 제국이다.

어떤 면에서는 흑마법사보다 더 싫어한다.

신성력조차 다루지 못하는 황제를 신과 동일선상에 두는 미친 국가였으니까.

"신벌이 내릴지어다-!"

쿠웅!

루-솔라스의 성자, 레이 솔라스가 신성을 일으켰다.

거세게 대기가 흔들리며 강렬한 태양빛이 생존자들의 위로 쏟아졌다.

거센 불길과 함께 미궁의 생존자들이 모두 타들어 갔다.

회색빛 연기와 새까맣게 타들어 간 태양군의 잔해를 바라보며 성자가 투덜거렸다.

"빙의자.... 그 역겨운 이단 놈들이 세계를 망치는 게 분명해."

아이같이 어린 외모와 150cm 언저리의 작은 키.

영락없이 꼬마의 모습을 한 성자에게 모든 성직자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성자님, 고정하시옵소서."

"그걸 제국이 부추겼잖아! 맞지? 빙의자 관리국? 어딜 미친 짓을!"

앳된 성자는 앳된 용모에 아이와 같은 말투를 사용했다.

하나, 그는 백 년을 넘게 살아온 태양성국 최고의 연장자다.

"죄수병들을 뽑아, 아마 제국은 이틈에 또 전쟁을 일으킬 거야!"

처세가 어리되 경험은 노련했다.

그는 살아온 삶을 기반으로 미래를 대비했다.

"아마 북부대공이 선봉에 서겠지, 그러니까 최대한 어리고 연약한 이교도들을 앞세워. 아니, 그냥 애들로 꽉 채워! 그놈은 약자들을 함부로 못 죽여! 그리고...."

성자가 황급히 말을 줄였다.

드높은 하늘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태양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끼예에에에에엑―!!!

그림자 틈에서 익룡을 닮은 무언가가 원을 그리며 날아다녔다.

"신종 몬스터? 와이번이랑은 좀 다른데?"

성자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와이번을 닮은 정체불명의 비행종 몬스터.

"그 위에는 흑갑을 입은 놈들이 있고...."

몬스터의 등에는 안장이 달렸고, 이상한 투구를 쓴 흑기사들이 와이번을 조종하고 들었다.

키잉―――!!

성자가 신성을 벼려 내 기다란 창의 형태를 만들었다.

"일단 한 놈 맞혀 보고 생각을-."

그때였다.

와이번들이 고도를 낮췄다.

그에 따라 와이번이 내지르는 비명이 더욱 커다래졌다.

"흐아아악-!!!"

성자를 둘러싼 모든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귀를 틀어막았다.

겁에 질리기라도 한 듯 눈빛이 흔들렸고, 일부는 구토를 하며 오열하기까지 했다.

"다들 왜 그래?"

지고한 신의 총애를 받는 성자 레이 솔라스.

그와 달리, 다른 이들은 강림한 재앙의 공포를 떨쳐 내지 못했다.

공포를 부르는 힘은 시우론의 흑기사가 지닌 설정이었고, 이는 권능으로 재현되었다.

"이게 무슨!"

수하들이 공포에 질린 틈에, 성자를 중심으로 거대한 흑마력이 일었다.

[암흑대지] [격리] [죽음의 제약] [악의 고리]

빙의자들의 스킬, 현지인 흑마법사들의 주문 온갖 것들이 대지를 검게 물들였다.

어둠 속에 갇힌 성자의 눈이 금빛으로 빛나고.

그의 입가에는 뒤틀린 미소가 지어졌다.

"이단들이 힘? 이걸로 되겠어?"

루-솔라스의 태양이 떠 있는 시간이다.

성자는 두렵지 않았다.

신성의 힘을 일으켜 모든 것을 불태우려 들었으나.

쿠구구구궁――!!

대지를 뒤흔드는 진동과 함께 거대한 물결이 일었다.

물결이 다가오면서 점점 그 형체가 뚜렷해졌다.

"마, 마경의 몬스터?"

태양성국의 수도와 마경은 거리가 멀다.

중간중간 도시도 많고 군대도 잔뜩 있을 텐데....

"대체 어떻게-."

레이 솔라스의 동공에 태양의 문양이 떠올랐다.

그의 눈에는 아득히 먼 곳에 놓인 붉은 눈알이 보였다.

그 아래에서는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이 짙게 웃고 있었다.

* * *

르웰은 몬스터를 거슬러 올라갔다.

마경 한복판에 놓인 첨탑에서 빙의자를 잡아 달라는 에릭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였다.

'역시, 몬스터는 나를 인지하지 못해.'

위험한 일이다.

하나, 그녀는 자신이 안전할 거라는 에릭의 말을 믿었다.

에릭이 말하기를, 잭슨이 그녀에게 향한 모든 공격을 흡수해 준다고 그랬다.

'황도군 장군 때처럼.'

심지어 직접 경험하기도 했으니까.

그녀는 망설임 없이 쏟아지는 몬스터를 역행해 마경으로 향했다.

슬쩍 뒤를 돌아봤다.

'멋지네.'

멀리서 보이는 에릭의 모습은 찬란했다.

그가 내뿜는 힘이 참으로도 대단하게 느껴졌다.

'나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돼야지.'

그녀는 안다.

자신이 에릭의 역린이라는 것을.

그러니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해 볼 생각이다.

'흑마법사들이....'

그녀 역시 흑마법사 사태의 생존자였으니까.

앞장서서 놈들을 죽이지는 못하지만, 빙의자 한 놈 잡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손만 슥- 대면 활활 타 버리는 놈들이니까.

'너무 오래 걸리는데?'

다만, 문제는 마경 중심까지 가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것.

가는 길에 몬스터를 피해 가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쿵!

그때 쏜살같은 속도로 늑대 형태의 몬스터가 르웰에게 부딪쳤다.

속도가 너무 빨라서 인지하기도 어려웠다.

'윽-!'

그녀는 일순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으나, 이내 현실을 깨닫고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녀와 부딪친 몬스터가 피떡이 되어 마경 한구석으로 처박혔다.

수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늑대였다.

'진짜 피해를 안 받네?'

스윽-.

그녀는 지나가는 몬스터를 향해 손을 들이밀었다.

쿵!

무언가 부딪치긴 했는데, 아프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녀의 팔에 닿은 몬스터가 옆으로 밀려났다.

'이러면 빨리 가겠어!'

그녀는 재빠르게 몬스터 한복판으로 몸을 날렸다.

마경에 들어온 직후 시야가 또렷해졌고, 직선거리로 거대한 탑이 보였다.

'저 위에 붉은 눈알 근처에 흑마법사들이 있다고 했으니까.'

르웰의 발걸음이 종종- 빨라졌다.

'진짜 일직선으로 달려가 버리시는군.'

에릭은 마경 한복판을 바라봤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기척이 느껴졌다.

아마, 자신의 신성을 내려받은 효과가 아닐까?

'다행이야.'

내심 르웰이 늦을까 봐 걱정이 들던 차였는데.

벌써 탑까지 다가선 르웰의 모습을 보며 에릭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끄아아아악-!!! 보, 보스-! 대체, 사제님이 무슨!"

옆에서는 잭슨이 미친 듯이 비명을 질러 댔다.

에릭은 가벼이 치유를 날려 주며 잭슨을 나무랬다.

"그것도 못 참나?"

신성으로 영혼을 지지는 고통도 참아 냈던 놈이, 뭘 이정도로 엄살을 부리는지....

"보스! 제가 올방 스탯이라 이렇지, 두식 형님이었으면 벌써 팔이 뜯겼-."

잭슨이 말을 멈췄다.

몬스터 한복판에서 몽둥이를 휘두르며 싸우던 장두식의 모습에 당황해 버렸다.

쩌억-.

장두식의 팔이 뜯겼다.

그 즉시 신성의 빛이 그의 팔을 새로 돋아나게 만들었다.

"거, 따까리야. 너도 형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거다."

투덜거리는 잭슨을 향해 장두식이 몽둥이를 들이밀었다.

"따까리야, 축성된 워-메이지 장두식이를 본받아라!"

전투가 시작한 이래로, 에릭은 장두식에게 아무런 힘을 쓰지 않았다.

한데 저런 미친 신성력이다.

'주교급 이상이군.'

축성을 한 적도 없다.

한데, 장두식의 몸에는 막대한 신성력이 깃들었다.

마치, 성직자들이 그렇듯이.

신성을 쓰면 다시 차오른다.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진짜 신성 마법사.'

대단한 일이었다.

아마, 두식이도 자신을 믿으며 일종의 종교인 취급을 받는 모양이었다.

"그, 두식 형님은 안 아프십니까?"

그때 잭슨이 황망한 듯이 장두식에게 물었다.

"꿀밤보다 아픈 게 있을 리가."

아프긴 한데, 잘 참는다는 의미였다.

잭슨은 신성의 고통을 떠올리며 자신도 참아 내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끄아아아아악-! 사, 산 채로 몸을 태우는-!"

르웰이 또 무언가에 부딪힌 모양인지, 거센 격통이 일었다.

이번에는 온몸을 무언가가 씹어 대는 느낌이었다.

에릭의 다시 신성력을 날려 잭슨을 치료해 줬다.

그리고 말하기를.

"다들 준비해라."

붉은 눈 바로 아래에서 르웰의 기척이 느껴졌다.

* * *

"김 부장님, 본사 이전은 이미 끝났으니, 우리만 몸을 빼면 됩니다."

"토마스 이사님부터 가시지요. 저와 비서실장은 이곳을 정리한 후에 떠나겠습니다."

첨탑 위에서 정장을 입은 두 사내가 몸을 뺄 준비를 마쳤다.

각종 서류를 모아 든 토마스와 달리, 김 부장은 딱히 들고 있는 물건이 없었다.

킁킁.

"이상하게 단내가 나지 않습니까?"

"그러게요. 신성의 잔향인가?"

토마스가 묻자, 김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르웰은 숨을 죽였다.

'향수!'

본디, 이런 상황을 예견하지 못한지라.

향수를 뿌리고 나왔다.

애초에 황궁 데이트를 가던 중 아니었었나?

옷도 잔뜩 빼입은 르웰이다.

'어쩌다가....'

생각해 보니, 상황이 참 얄궂게 느껴졌다.

분명 황궁 데이트를 마치고 교황청에 들르겠다고 들었는데.

그런 생각에 잠겨 있자니, 눈앞의 두 빙의자가 환히 웃었다.

"오! 대표님께서 태양성국에서 성자를 잡았답니다."

"크으-. 우리 대표님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니까."

"김 부장!"

"하하, 죄송합니다. 대표님이 좀 이뻐야죠. 얼굴과 몸매, 가히 제일이라 칭할 만하지 않습니까?"

태양성국의 성자가 잡혔다.

그리고 누가 가장 이쁘다고?

르웰은 중요한 정보들을 기억하며, 둘 중 누구를 노려야 할지 고민했다.

"김 부장님, 이곳은 대한민국이 아닙니다! 하물며, 여직원들도 아니고 대표님을 그렇게 희롱하듯이 표현하는 게 맞습니까?"

중소기업의 부장이었던, 김 부장은 빙의 후에도 여전했다.

그러나 상사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잘했다.

"시정하겠습니다."

"대표님 앞에서는 말조심하세요. 마음이 여린 분이십니다."

"넵!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김 부장님. 어째 단내가 더 심해진 것 같지 않습니까?"

토마스의 고개가 기울었다.

이질적인 향기.

"저 성자의 힘의 잔향인가 보군요."

아무래도 김 부장의 말이 맞는 모양이었다.

콰앙――――!!!

때마침 거센 충격과 함께 [격리]의 장벽 위로 균열이 생겨났다.

거센 신성의 빛이 작은 틈을 찢어발기며, 마경까지 흘러들었다.

"저 빛에 이런 고풍스러운 향기까지...."

"역겨운 힘입니다."

"...그렇죠."

김 부장은 포탈을 개방했다.

목적지는 태양성국 근처, 동부 대수림에 자리한 마경이다.

흑마그룹의 신사옥이 자리한 장소였다.

"김 부장님, 최종 점검 부탁드리겠습니다."

우웅-.

검은색 소용돌이가 떠오르고 토마스가 먼저 몸을 들이밀었다.

그의 뒤로는 시꺼먼 그림자가 따랐다.

아마도 비서실장이라 불린 사내가 아닐까?

두 사람이 사라진 직후.

"에이, 씨팔 놈들. 여기서도 만년 부장이야?"

김 부장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하나, 몸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흑마그룹의 전(前) 사옥에 심어진 흑마력을 폭주시킨 뒤, 그도 도망치려는 것이 본래 계획이었다.

"-멸악선포!"

그때 뒤에서 쨍-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 부장이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싸아아아아아―.

황금빛 신성이 그의 등을 건드렸다.

눈 아래로 다섯 줄이 새겨진 김 부장은 빙의자이되, 권능을 지닌 흑마법사다.

그런 그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신성력이다.

"끄아아아악-!!!"

순도 높은 신성의 기습.

예견하지 못한 공격은 그에게 권능을 꺼낼 틈도 주지 않았다.

삽시간에 몸이 타오르는 감각이 느껴졌다.

불길에 휩싸이는 김 부장의 흐릿한 시야 사이로 저 멀리서부터 날아오는 거대한 성기사가 보였다.

"사제님-!"

"에릭! 해, 해냈어."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르웰과 에릭이 만났다.

그녀의 앞에서는 성화(聖火)에 타들어 가는 빙의자가 보였다.

'이러다 죽겠네.'

후웅-.

에릭은 신성의 힘을 밀어내고, 빙의자를 살펴봤다.

진짜 죽기 직전이었다.

하여, 과거 잭슨을 치료했던 경험을 살려 빙의자에게 치유를 걸어 봤다.

"끄아아아아――!!!"

세상천지를 찢는 비명.

하나, 몸의 상처는 제법 많이 회복되었다.

'4티어의 힘인가?'

신전을 얻기 전에도 잭슨의 상처를 치료했던 에릭이다.

그때의 자신은 과한 신성으로 몸이 부서졌었는데, 지금은 다르다.

신체를 이루고 4티어를 개방한 이상, 어지간한 힘은 다 다뤄 낼 수 있었다.

"끄아아아아악-!!!"

물론 치료받는 빙의자가 느낄 고통은 그대로였다.

영혼을 태우는 고통을 느꼈다는 잭슨의 말이 있었다마는.

"다섯 줄이라."

사람을 만 단위로 죽인 미친놈에게는 이런 고통도 사치였다.

에릭은 더욱 거세게 신성력을 일으켜 놈을 치료했다.

이제는 비명조차 없었다.

껄떡껄떡 숨 넘어가는 소리만 냈다.

"거, 형님. 그놈을 왜 살려 주는 거요?"

뒤늦게 달려온 장두식과 잭슨이 양복을 입은 빙의자를 바라봤다.

"캐낼 건 캐내야지."

기껏 잡은 흑마그룹의 중진을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법.

"오, 보스. 잘하면, 저놈 술술 다 불겠습니다."

장두식을 따라온 잭슨은 빙의자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은 사라진 흉터건만, 자꾸만 환통이 느껴졌다.

'저만한 고통이 없겠지.'

상처와 함께 영혼을 태우는 고통.

잭슨은 리페로제의 꿀밤보다 에릭의 치료가 더 아팠다.

그걸 전신에 한다?

인격을 상실했을지도 모르는 일.

치이익-.

희뿌연 연기와 함께 김 부장이라 불린 빙의자가 제 형태를 되찾았다.

"오오, 형님 저놈 일어났수다."

흐릿한 동공이 서서히 주변을 훑었다.

이내, 두 눈이 에릭을 향해 멈춰 섰고.

김 부장이라는 빙의자가 입을 열었다.

"제, 제발. 편하게 죽여 주세요!"

82화 마경(魔境) (5)

김문식 부장은 대한민국 중소기업, 좋은 소프트웨어의 만년 부장이었다.

부장 아래로 직원이 열 명밖에 없는 작은 회사였다.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회사를 키워 온 김 부장은 애사심이 남달랐다.

'자동 사냥 돌리고, 집 가서는 골드팟 구해서 스펙 업 좀 하자고.'

회사에서는 스마트폰으로 가챠 자동 사냥 RPG 게임을.

집에서는 대륙 온라인에 시간을 쏟는 건실한 회사원이었다.

그날도 분명 퇴근 후에 버스를 받아서 자신의 캐릭터 스펙을 올릴 생각이었다.

집에 돌아간 그는 대륙 온라인에 접속함과 동시에 의식을 잃었다.

"여보! 오늘도 집에서 쉴 생각은 아니지?"

"아빠! 오늘도 우리 굶어야 돼요?"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웬 흑인 일가족이 자신을 가장으로 여기며, 물고기를 잡아 오라는 미친 소리를 해 댔고.

김문식은 화들짝 놀라서 그대로 낡은 나무집에서 도망쳤다.

집 밖의 풍경은 경악 그 자체였다.

"이게 무슨...."

가르시안 왕국의 빈민가.

오물투성이의 낡고 더러운 거리가 그를 반겼다.

바닥의 흙탕물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는데, 그는 흑인이 되어 있었다.

"이게 나라고?"

눈앞에 상태창이 떠오르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 현상을 명확히 파악하지 못했을 거다.

다행히도 상태창의 형태가 익숙했으며, 커뮤니티 기능 덕분에 그는 자신이 빙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밖에서는 이상한 구호까지 들려왔으니, 이 상황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빙의자를 죽여 없애라!

우리의 몸을 빼앗는 이계의 존재들을 척결하라!

하나, 자신은 대륙 온라인에 빙의했다.

둘, 들키면 죽는다.

'뭐, 이런 미친 세상이 다 있냐?'

가르시안 왕국 변경을 순회하는 종교 단체들은 빙의자 척결을 부르짖으며, 각 도시를 순회했다.

'이 세계 사람들은 우리를 사냥감 취급한다.'

빙의 후 먼치킨은 개소리다.

당장 살길 마련이 우선.

그래서 커뮤니티에 의존하고자 했다.

[게시글을 작성하려면 20레벨에 도달해야 합니다.]

게시글을 읽을 수 있지만, 자신이 글을 쓰고 댓글을 달려면 20레벨을 넘겨야 했으니, 같은 처지의 사람들의 도움을 받기란 어려웠다.

막상 숨어 살려고 해도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모험가들은 성수로 검증을 한다고?'

그나마 만만한 게 하급 모험가가 되는 건데, 이마저도 불가능에 가까웠다.

생판 타인과 어찌 미궁에 들어가겠는가?

'파티원한테 들켜서 밀고당할 가능성도 있으니까.'

보통은 여기서 흑마법사를 고를 테지만, 김문식은 그간의 게임 경력을 살려 근접 직군인 [전사]를 골랐다.

'혈기사 트리를 타야 솔플이 쉽지.'

다행이도 일부 [캐시템]이 인벤토리에 딸려 왔으니, 김문식은 이걸 이용해 빠르게 레벨을 올렸다.

20레벨을 찍은 그는 [커뮤니티]를 이용해 빙의자들의 단체와 접촉했다.

여기까지가 김문식의 일생이다.

"그러면 네놈은 시스템으로는 전사되, 현실에서는 흑마법사가 됐다는 말인가?"

그 모든 설명을 들은 에릭은 크게 놀랐다.

충격적이었다.

'잭슨처럼-.'

[시스템]에서 공격력 관련 스탯이 0인 잭슨은 육체적 경지가 소드마스터다.

[혈기사] 클래스인 흑마그룹의 김 부장은 현실에서 다섯 줄을 이룬 흑마법사다.

흑마그룹도 자신과 비슷한 방식으로 빙의자들을 육성하고 있다니.

'큰일이군.'

에릭은 진지하게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다행스럽게도 흑마그룹의 부장급 인사를 사로잡은 상황.

문답은 계속되었다.

"흑마 그룹의 상태는 어떻지?"

"동부 대수림의 마경으로 본사 위치를 옮겼습니다!"

김문식은 자신의 일생뿐만 아니라, 흑마그룹에 들어온 이후의 삶도 자세하게 서술했다.

"지금 진행 중인 일은 뭐지?"

"현재 진행 중인 사업은 성자와 성녀의 말살 프로젝트입니다!"

에릭의 질문과 함께 신성력이 피어올랐고, 그때마다 김 부장의 대답은 점점 빠르고 정확하게 이어졌다.

급기야, 묻지도 않았는데 중요 정보들을 꺼내 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저랑 같이 있던 분은 토마스 이사님인데, 빙의자십니다! 모 컨설팅 기업에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대표님은 빙의자가 아니시지만, 틈틈이 빙의자의 세계를 공부하고 계십니다."

"대표님이 게임에서는 필드 보스로 등장한다고 들었습니다!"

아는 것은 술술 다 불었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

"...이, 이제 죽여 주세요."

그는 영혼을 태우는 지독한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정말 너무나도 끔찍하게 아팠다.

"제발, 그런 고통은 그만...."

고통 내성 스탯을 무시하는 신성의 힘이란 지독했고, 그걸로 자신을 치료해 버린다는 게 더욱 두렵게 느껴졌다.

이미 몇 번을 반복해 자신을 태우고 되살려 낸 에릭이다.

거듭된 고통은 김문식으로 하여금, 죽음을 갈망하게 만들었다.

"-축복."

이 모든 말을 들은 에릭은 김문식에게 [신성 축복]을 사용했다.

희뿌연 연기와 함께 그의 몸이 괴상하게 뒤틀렸다.

"1만의 생명을 제물로 바치고 너는 편히 죽고 싶나?"

생판 타인의 몸으로, 이세계에서 적응하는 게 힘들겠지.

에릭도 이해하는 바다.

하나, 거기에도 정도가 있다.

"살인의 쾌락, 인간 실격. 네 업적이 삶을 증명하고 있다."

빙의자란, 상태창으로 인생이 드러나는 법.

저것들은 사람을 그냥 죽여서 생기는 업적이 아니다.

'즐기며 행해야 생기는 것들이지.'

에릭 자신이 흑마법사를 멸하고 관련 업적이 얻었듯이, 다른 빙의자들도 행동에 관련된 업적을 얻었다.

심지어 저놈은 흑마법사 클래스도 아닌데, 저런 업적들을 지녔지 않나?

"세상 모든 일에는 선이라는 게 존재한다."

김문식은 그 선을 넘었다.

'다른 사람들이 호구 병신이라서 착하게 선을 지키면서 사는 줄 아나?'

에릭은 박지훈 시절부터 저런 부류를 혐오했다.

가난, 생활고, 험난한 삶, 주변 환경 등.

온갖 것들을 탓하며 불법적인 방식으로 살아오는 자들.

불법 도박 사이트로 돈을 벌고, 고급 외제차를 타며 SNS에서 뭐라도 되는 양 설치는 부류를 한심하게 여겼다.

'해선 안 되는 일이니까 안 하는 거지.'

누구라도 악한 마음만 먹는다면, 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하나, 대다수의 사람은 그러지 않는다.

'수위가 달라졌지만,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

여기서도 마찬가지.

'잭슨, 박창호, 강풍호, 니시다 료, 아론 후작 그들은 다른 선택을 했어.'

아론 후작, 그는 2차 전직을 마친 고레벨 빙의자다.

하나, 그에게 인간을 해했다는 취지의 업적이나 칭호는 전혀 없었다.

그러니 에릭은 그를 죽이지 않고 재판을 받게 했다.

'엘프 유렌도 그렇지.'

수용소에 갇힌 빙의자들도 마찬가지.

에릭은 그런 무해한 빙의자들이 살아갈 도시까지 만들어 주는 입장이다.

같은 처지에서도 얼마든지 최선을 택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최선 대신 효율을 택한 놈들이 문제지만....'

에릭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김문식 그의 마지막은 결코 편해서는 안 된다.

싸아아아아아―.

어느덧 에릭의 눈앞에서 새하얀 연기가 나풀거렸다.

김문식의 존재가 완벽하게 사라진 것이다.

* * *

빙의자를 태운 직후 에릭은 일행들과 함께 교황청으로 향했다.

그곳의 [격리]도 파괴된 상황이니, 슬슬 교황과 합류하려는 의도였다.

"에리카에게 듣기로는 흑마법사 빙의자도 신전에 끌려간다고 하더군요."

"엥? 진짜로?"

절벽을 따라 걸으며, 르웰에게 자신의 신전의 힘을 얘기했다.

"아마, 빙의자들은 전부 제 힘에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강림한 놈한테도 먹히지 않을까?"

"그렇긴 하겠지만, 놈이 빙의자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반지의 길이라는 영화 속 악당이 시우론이라면서!"

르웰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며, 에릭 또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흑마그룹이 제기한 방법이 인수 합병이라더군요. 어쩌면 그 몸의 주인이 이 세계의 흑마법사일 수도 있습니다."

김문식을 심문한 덕분에 여러 합리적인 추측이 세워졌다.

여럿이 함께 걷는 중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장두식과 잭슨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거, 형님. 그러면 놈들을 이용해도 되는 것 아니요? 신이 죄를 용서해 준다는 핑계는 어떻수?"

"오! 보스, 일리가 있습니다. 신전을 보고 자신의 죽음까지 확인한다면.... 배신자를 만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나름 괜찮아 보이는 의견이었다.

에릭 또한 김문식을 신전으로 끌어들여 다르게 써먹어 보자는 생각을 안 해 본 것도 아니다.

"아니야, 그 새끼들은 신전에 들어와서 자신의 영정 사진을 본다고 회개할 놈들이 아니다."

하나, 에릭에겐 확신이 있었다.

그런 방식은 빙의자들에게 절대 먹히지 않는다.

"잭슨, 너와는 다르다."

빙의 후 45년.

잭슨은 지구보다 여기가 더 고향 같은 놈이다.

다만, 근래에 끌려온 수십만의 빙의자들은 다르다.

'1년 차에서 3년 차까지.'

박창호, 니시다 료, 강풍호.

세 사람으로 이미 증명된 사실.

'그놈들이 신도가 됐을 때....'

고작 23GP를 획득했었다.

제국군들을 구원했을 때 만 단위로 GP가 올랐고.

잭슨이 신도가 된 후에도 GP가 1만 정도 올라갔다.

"-그러니까, 절대 지구의 놈들이 쉽게 신앙심을 가질 리가 없다."

여기까지 설명을 마치자.

"그놈들이 23GP라면...."

잭슨이 경악한 얼굴로 장두식을 바라봤다.

대체 뭘 어떻게 했길레 보스에 대한 충심이 그것밖에 안 되냐는 얼굴이었다.

"거.... 따까리야, 내가 그놈들을 꼭 사람으로 만들 거다."

장두식은 몽둥이를 꾹- 붙잡으며, 놈들에게 신앙심을 주입하겠다고 다짐했다.

하나, 르웰만큼은 다른 반응을 보였다.

"내가 있어도?"

그녀가 잘록한 허리에 손을 얹으며, 에릭을 바라봤다.

도도한 자세였다.

'음.'

에릭은 진지한 고민을 해 봤다.

지구의 사람들은 무엇에 열광을 하는가?

신전?

고매한 성직자의 경전?

십일조를 내 가며 듣는 기도?

목숨을 건 장엄한 사투와 위대한 업적의 실현?

'아니.'

그랬더라면, 니시다 료는 몰라도 강풍호나 박창호 정도는 반응이 달랐을 거다.

하나 23GP다.

그러니, 지구가 더 친숙한 빙의자들은 다른 방식으로 움직여야 한다.

'아이돌.'

에릭의 머릿속으로 직관적인 한 단어가 떠올랐다.

이를 구현하려면 여러모로 준비할 것들도 많겠지만....

에릭은 르웰을 바라봤다.

"너, 너무 빤히 보는데?"

얼굴을 붉히면서도 당당히 바라보는 저 눈빛.

'르웰이라면.'

지고한 미모요, 아찔한 몸매다.

그 어떤 지구의 아이돌도 그녀를 흉내 낼 수 없을 테지.

'하물며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게다가, 에릭은 르웰의 관종력을 잘 안다.

아는 것을 넘어서 이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괜히 어쭙잖게 동탄 미시룩 같은 이상한 것들을 설파할 바엔.

그녀 자체가 트렌드를 주도하는 파워 인플루언서이자, 세계의 아이돌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내, 내가?"

그 모든 설명을 들은 르웰은 화들짝 놀랐다.

"그... 아이돌? 파워 인플루언서? 내, 내가?"

"무려 황녀 전하가 사제님의 의복을 따라 입지 않았습니까? 르웰의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의미는 명확했다.

황실의 트렌드를 주도하는 황녀처럼, 그녀가 제국의 아이돌이 되어 세계의 유행을 선도하는 대단한 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흥흥~."

르웰이 입술을 핥으며, 종종- 달려 나갔다.

"하는 거 봐서!"

발걸음이 경쾌했다.

* * *

"성자 에릭."

교황은 에릭을 바라봤다.

까마득한 절벽을 따라 교황청으로 다가오는 그의 일행은 모두의 얼굴이 밝았다.

좀 전까지 마경의 몬스터들에 둘러싸여 지독한 사투를 벌이고도 해맑게 웃다니.

"나 또한 저래야 하거늘...."

고난 속에서도 웃을 줄 알아야 진정한 일류다.

성서에도 나오는 구절이다.

그만큼 과거의 세상이 험악했다는 말이기도 했다.

'이제는 현세가 성서에 나오는 고대처럼 변하겠구나.'

교황은 씁쓸하게 웃었다.

대륙에 마경에 늘어났고, 심지어 몬스터를 조종하는 흑마법사까지 나타난 상황이다.

'앞으로의 세상은 어디로 향하는 겐가?'

그리 고민했다.

그때, 성전기사단장 율리우스가 교황에게 말을 걸었다.

"교황 성하, 그가 쓰던 검은 분명...."

에릭이 교황청을 살폈듯이, 그들도 에릭의 전투를 봤다.

신성의 힘은 어둠을 밝혀 주니, [격리]에 갇힌 와중에도 그들은 서로를 살필 수 있었다.

그때 본 에릭의 검.

그건 분명 교단에서 사라진 성물, '개벽의 검'이었다.

'사라진 성물이 성자의 손에 들려 있다라....'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성물에 발이 달려 도망친 것도 아니고, 저게 왜 에릭의 손에 들려 있는가?

의문을 가질 법도 했지만, 에릭은 존재 그 자체로 모든 설명이 가능한 존재다.

교단의 유일이요, 최초의 성자.

"주인을 찾아간 게야."

"역시, 그렇군요."

"이 땅에 신이 내려와 여섯 날개를 휘날리며 개벽의 검을 휘두르니, 세상의 어둠이 지워졌노라."

두 사람은 성호를 그으며 나직이 교리를 읊조렸다.

짧은 기도를 마치자 어느덧 에릭의 일행이 근처까지 다가왔다.

"교황 성하를 뵙습니다. 성전기사단장 율리우스 님을 뵙습니다."

에릭은 성호를 그리며 교황과 율리우스를 바라봤다.

그 뒤 그의 시선은 교황청 주변을 훑었다.

'끔찍하군.'

절벽 아래로 몬스터가 가득했다.

신도들이 신성력으로 시체를 태우고 있는데도, 끝이 없어 보였다.

그에 에릭은 자신의 신성을 담은 성화(聖火)를 피워 내 절벽 아래로 내던졌다.

화르륵-.

작은 불씨가 절벽으로 떨어지자 황금빛이 번쩍이더니 순식간에 괴물들의 사체가 연기로 화하여 사라지기 시작했고.

그 광경을 본 율리우스는 콧잔등을 질끈 붙잡으며 놀라움을 토로했다.

"정말 숨만 쉬어도 강해지는구나."

최초의 성자.

저 불꽃은 그냥 성화가 아니다.

무려 신의 뜻이 담긴 불꽃이다.

'신성을 세우는 데 어떠한 신언조차 들리지 않는다.'

놀라웠다.

하물며, 별달리 힘들어 보이는 기색도 없다.

에릭 스스로가 신에 준하는 존재였기에 그런 것이지만, 이를 모르는 입장에서 보면 괴물이 따로 없었다.

"지고한 신성이로다."

교황도 감탄사를 내뱉었다.

'구구절절한 건 귀찮단 말이지.'

에릭이 보건대, 두 사람이 한참을 자신의 힘으로 떠들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두 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하여, 에릭은 대뜸 본론을 들이밀었다.

"교황 성하, 지금 당장 성전을 선포하시지요."

교황을 보고 예를 올리지도 않은 채, 제 할 말을 읊어 대는 모습은 다소 불경하게 보였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에릭을 불경하다 여기지 않았다.

"검은 힘을 몰아내는 것은 교단의 과업과도 마찬가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자리의 모두가 조금 전까지 지독한 사투를 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놈들은 이미 마경에서 사라졌다."

교황의 동공에 떠오르는 십자가.

신의 기적은 교황에게 마경의 모습을 훤하게 보여 줬다.

태양이 뜨지 못하는 마경 속의 어둠, 그것을 꿰뚫어 보는 것이 신성의 눈이다.

"놈들은 동부 대수림의 마경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에릭은 김문식을 심문하여, 놈들의 신사옥 위치를 알아냈다.

이런 설명을 곁들이고 에릭은 가장 중요한 말을 꺼내 들었다.

그러니까.

"이 기회에 모든 성창을 꺼내 들고 그놈들을 세상에서 지워 내야 합니다."

성창투척(聖槍投擲).

과거 광활한 왕국의 영토를 지워 버렸다는 교단의 최종 병기를 꺼내 들 시간이다.

83화 마경(魔境) (6)

아스티아 교단의 본청.

교황청은 제국 북동부에 자리한 무국적 지대 한복판에 있다.

사방이 허허벌판이며, 근처의 도시라고는 페르안이라 불리는 세계의 빈민굴이 전부다.

척박한 지역이라서 주인 없는 땅이 차고 넘쳤다.

그 덕에 교황청의 규모는 압도적이었다.

"허어.... 형님 무슨 공작령 주도의 성보다 더 큰 것 같수다."

교황과 성전기사단장 교단의 고위 간부들이 자리한 곳에서 장두식이 침음을 흘렸다.

"거참, 진짜 더 크구만."

몽둥이로 성의 크기를 가늠하는데, 끝에서 끝을 한눈에 담기 어려웠다.

잭슨이 눈치껏 장두식의 팔꿈치를 찔렀다.

"두식 형님.... 제발 여기 높은 분들이-."

하나, 황녀를 마누라라 부르고 황제를 장인어른이라 부르게 될 장두식의 입장에서 그런 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에릭도 눈치를 주지 않거늘.

어딜 따까리 쉑이.

"거, 따까리야. 왜 찌르고 그러냐."

그 두 사람의 모습을 에릭과 교황이 바라봤다.

"신성을 품은 마도사라니-."

교황은 반짝거리는 장두식의 머리통을 보며 감탄했다.

신성 마법사라는 말을 들었으나, 도통 믿기가 어려웠는데....

"참으로 순수한 영혼이로다."

생긴 건 험상궂되 새하얀 영혼을 지닌 장두식을 보아하니, 충분히 말이 되었다.

"허어...."

다만 문제는 잭슨이다.

교황은 잭슨을 보고 말을 멈췄다.

이질적인 힘이 느껴졌다.

이 세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빙의자의 상태창으로 발휘되는 기운이었다.

"성자 에릭, 저자는 설마!"

교황이 놀라 묻자, 에릭은 가벼이 신성력을 일으켰다.

"축복을 내려 주소서."

싸아아아아아-.

잭슨의 머리 위로 빛이 쏟아졌다.

거센 금빛 물결이 찬란하게 빛나고 잭슨의 전신을 휘감았다.

교황은 갑자기 빙의자를 태우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빙의자 포로인가? 아니야, 분명히 사이가 좋아 보였거늘....'

대체 무슨 영문으로 빙의자에게 신성을 쏘아 댄다는 말인가?

너무 뜬금없었다.

교황은 의문이 가득했고.

그 의문은 이내 경악이라는 감정으로 넘어갔다.

"아아아-!"

잭슨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웅혼한 힘이 담긴 신성의 축복.

잭슨을 둘러싼 빛에서 아스티아 교단 특유의 안정감과 온몸을 휘감은 거룩함이 느껴졌다.

"-아! 신이시여."

잭슨은 그야말로 신의 은총을 받은 기분이었다.

지고한 은혜에 감사하며 잭슨이 환희에 젖은 미소를 지었다.

우뚝.

일사불란하게 교황청으로 향하던 모든 인파가 멈춰 섰다.

행렬의 최선두에 있던 교황이 잭슨을 보고 굳어 버렸기 때문이다.

"서, 성하, 저, 저게 무슨!"

교황의 옆에서는 성전기사단장 율리우스가 입을 쩍- 벌렸다.

율리우스 역시 세례를 받아 신의 성을 지닌 존재로, 스스로 신성을 세울 수 있는 지고한 강자다.

하물며, 훗날 기사단장의 지위를 내려놓게 되면, 그 즉시 순례자로 내정될 만큼 고매한 신앙의 숭배자다.

그 역시 잭슨을 알아봤고 그에게 신성 축복이 내려진 것을 확인했다.

'빙의자가 신성에 타들어 가지 않는다고?'

율리우스는 눈을 끔벅였다.

그 뒤 다시 잭슨을 바라봤다.

불길은커녕 연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허어...."

교황의 반응도 비슷했다.

다만, 그는 리페로제 아스티아의 광신(狂信)을 떠올리며, 이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교황, 빙의자들에게 신의 뜻이 있는 거야."

"신성에 타들어 가는 존재들에게 어찌 아스티아 님의 뜻이 있단 말이더냐!"

"언젠가 그들도 죄를 용서받고 이 세계에 순응하게 되겠지. 분명 그들만의 역할이 있어."

그녀와 검으로 합(合)을 나누며 했던 대화였다.

'리페로제, 네가 맞는 소리를 했을 줄이야....'

지고한 신의 총애를 받는 리페로제, 그녀의 말이 옳았다.

신성을 받아들이는 빙의자라니.

"저, 저게!"

사색에 잠긴 교황과 눈을 휘둥그레 뜬 율리우스를 향해 에릭이 다가섰다.

그리고 말하기를.

"교황 성하, 스승님의 말씀이 실로 옳았습니다."

에릭 또한 스승의 말을 떠올렸다.

"신성력을 쓰는 네가, 신성력에 배척받는 이들을 이끌게 될 거다."

에릭은 스승의 말을 믿었다.

'결국 그 말 그대로 됐지.'

자신을 제외한 모든 빙의자는 신성력에 타들어 간다.

하나, 그의 신전을 통해 [신도]가 된다면,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처럼 신성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빙의자가 구원받았다. 아니지, 성자 에릭 그대가 구원을 내렸노라. 맞는가?"

누가 보더라도, 에릭은 그야말로 구원자였다.

* * *

"교황의 이름으로, 선포할 것들이 늘었구나. 십일조만 해도 머리가 아팠거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상황이 일단락된 후, 교황은 에릭을 이끌고 교황청 지하의 성소(聖所)로 향했다.

이곳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은 오직 교인들뿐.

그러니 잭슨과 장두식은 위층의 응접실에 남겨졌고, 에릭과 르웰만이 함께했다.

"십일조에 대한 교황청의 입장이 정리됐다는 말이다."

"빠르군요."

일전의 대화에서 에릭은 대략적인 실행안을 전했다.

[십일조, 주급의 10%를 신께 봉헌한다.]

이는 빈민들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돼야 한다. 신의 이름하에 이뤄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신, 교단은 빈민들에게 식량을 나눠 주고 주일마다 무료 배식을 해 준다.

"십일조는 명목이요, 빈민들에게 따듯한 밥을 나눠 주는 걸로 빈자의 삶을 구원하겠다는 의지가 아닌가?"

교단의 주교들은 정기적으로 신의 뜻을 공부한다.

이를 주교회(主敎會)라고 불렀다.

이번 주교회에서는 성자의 말을 주제로 삼아 뜻을 헤아렸다.

과연 십일조의 의미가 무엇일까?

수십 명의 주교들이 머리를 맞대고 성자의 뜻을 구체적으로 정리했다.

십일조의 초안이었다.

'빈자의 주급보다 식량이 더욱 값비싸거늘....'

가진 자들이 베풀고 교단은 그것을 이용해 빈자들에게 베푼다.

그 과정에서 교회의 신도가 늘어나는 구조였다.

교단 자금이 여유로워지는 것은 기본이며, 거기에 신도의 수가 늘어나고 빈민들을 구제하는 선업까지 이뤄지는 대단한 일이다.

그것이 바로, 십일조였다.

"부유층과 중산층의 십일조가 빈민들의 안온한 삶이 될 지어니. 그야말로 부의 재분배며, 만민의 행복이로다!"

교황은 이러한 성자의 뜻을 닮은 새로운 [성서]를 만들어 배포하겠다는 말을 내뱉었다.

"성자 에릭, 그대의 말과 행동은 모두 새로운 성서에 기록될 것이니라."

"그 정도로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허허, 겸양 떨지 말거라."

에릭은 성호를 그리며 겸손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숙인 고개 아래로 청록색 눈망울이 보였다.

"...크흠."

그 눈초리가 매서웠다.

매섭다 못해 숫제 미친놈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절대 저런 의도가 아닌데-.'

르웰의 입장에서는 에릭의 천연한 모습이 당혹스러웠다.

저거 대체 어떻게 하려고 저런 거짓말을 줄줄이 늘어 두는 거지?

'에릭은 스스로가 신이 되었고, 나는 교단을 저버린 입장인데....'

르웰은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그래서 교황청에 온 뒤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들키면 최소 사형.

한데, 저런 모습이라니!

르웰은 도끼눈을 뜬 채 뚫어져라 에릭을 노려봤다.

대책이라도 세우든가.

'에릭 너는 무섭지도 않니?'

그는 능청을 떨며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교황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교황 성하, 그러면 십일조는 언제부터 시행되는 겁니까?"

"대격변의 여파가 가라앉으면 그 즉시 모든 교회에서 진행할 예정이다. 이를 교황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주교들이 정리한 십일조의 뜻을 교리로 알릴 것이다."

"남는 여유 자금은 제가 좀 받아 가도 되겠습니까?"

"허허, 당연한 말을-!"

르웰은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저기서 남는 돈을 달라고 한다고?'

일이 너무 커졌다.

겁대가리를 상실한 수준.

'어이가 없어서!'

르웰이 그리 놀라 있자, 교황이 그녀를 바라봤다.

"르웰 사제, 그대 역시 대단한 일을 해 주었어. 저런 이를 키워 냈으니.... 리페로제 혼자였다면 에릭이 저토록 웅대한 뜻을 품기는 어려웠겠지."

"가, 감사합니다."

"성자를 키운 이가, 어디까지 사제로 머무를 수는 없는 법이거늘."

이참에 르웰의 직급이 올라간다는 얘기가 곁들여졌다.

"저는 이대로도 충분히-."

"어허! 성자를 키워 낸 자가 주교가 된다는데, 그 누가 방해를 하겠는가?"

무려, 주교였다.

르웰은 슬쩍- 에릭을 바라봤다.

그가 입모양으로 '쫄지 마시죠.'라고 중얼거렸다.

'그래, 답은 에릭이 찾겠지.'

르웰은 있는 그대로 신분 상승의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교황 성하의 은혜, 감사히 받겠습니다."

속으로는 '흥흥~.' 콧노래까지 불렀다.

피할 수 없으니, 즐기는 것이다.

"성소는 처음이겠구나."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교단의 심장이라 불리는 성소에 도착했다.

우우우우웅-.

거대한 빛의 장막이 그들을 반겼다.

지고한 신성이 광활한 지하실을 가득 채웠다.

둥근 돔의 형태였다.

순도 높은 강렬한 신성은 마치 황금색 벽처럼 보였다.

'여기가 성소.'

에릭은 그 힘을 느끼고자 노력했다.

아스티아 교단의 성소(聖所).

성서에서 일컫기를, 신이 승천할 때 남기고 간 육체의 일부분이 남은 장소가 성소라고 그랬다.

'대단한 힘이군.'

에릭의 눈이 찬란하게 빛나고 장막 너머의 풍경이 드러났다.

[성유물(聖遺物) - 아스티아의 맹약의 반지]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아이템의 네임태그였다.

그 뒤 네임태그 아래로 반지가 끼워진 손가락이 하나 보였다.

'손가락이랑 반지 하나에서 이런 힘이 나온다고?'

자신의 신전에 있는 모든 신성력을 합쳐도 이 성소에 담긴 힘의 반에 반에도 못 미쳤다.

진짜 말이 안 되는 힘이었다.

'신이라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어.'

황제와의 대화에서 말했듯이.

에릭은 신을 정말 신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지고한 힘을 얻어 육체를 초월해 이룬 경지가 '신'이라 불리지 않았을까?

지금 에릭은 그 경지의 수준을 확인한 셈이다.

'아득하지만, 길은 있어.'

[신앙 관리], [5티어 신성력].

에릭에게는 직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성장의 방향성이 보인다.

물론, 말이 안 되는 수준으로 비싼 금액이였다.

'하지만 나도 그만큼 잘 벌게 됐으니까.'

황제가 준 억만금.

그리고 교단에서 얻게 될 십일조.

이 또한 엄청날 것은 분명했다.

에릭은 그렇게 생각하며, 성소 내부를 훑었다.

[전설급 – 성창(聖槍)] × 10,000

아스티아의 손가락을 중심으로 수도 없이 많은 창이 꽂혀 있었는데, 하나하나가 쨍-한 금빛을 머금은 지고한 힘이 느껴졌다.

'정말 만 자루가!'

순도 높은 강렬한 신성력을 벼려 내 만드는 것이 바로 [성창]이다.

성유물에는 못 미치지만, 1회용 아이템 주제에 [전설급]이 붙은 물건이었다.

'되겠어.'

성창투척.

왕국을 멸했다느니, 대륙에 구멍을 뚫었다느니.

소문만 무성해서 궁금하던 참이었으니까.

* * *

아스티아 교단의 성전 기사단.

단장, 율리우스 아래로 100명의 엄선된 성기사들이 '성전 기사단'으로 임명받는다.

모두가 지고한 강자로, 단신으로 미궁 상층에서 생존이 가능한 존재들이다.

거기에 더불어 일반 '성기사'들이 1,000명.

그 뒤로 신성을 세울 수 있는 고매한 주교들과 광범위 축복을 위한 성가대가 따랐다.

쿠웅-. 쿠웅-.

선두를 걷는 성전 기사단의 위용은 대단했다.

숫제 세상이 뒤흔들리는 느낌이었다.

고작 백 명이 군대의 진군과 맞먹는 위용을 느껴지게 만들었다.

아아아아아――.

그 뒤로 천상의 음율이 세상을 찬란하게 물들였다.

일렬로 늘어선 성가대의 사이에는, 성기사들이 도열했다.

성기사들은 새하얀 천에 기다란 무언가를 감싼 채 아주 진중한 모습으로 그것을 운반했다.

신물을 대하듯이 정중한 자세와 장엄한 표정이었다.

"와아아아아아."

그 대단한 행렬은 제국 수도를 향하고 있었다.

성벽에 오른 백성들이 그 모습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인파 사이로 에릭과 장두식 그리고 잭슨이 서 있었다.

"거, 형님. 진짜로 제국 수도를 거쳐 가도 되는 거요?"

제국 북동부, 거기서도 한참을 올라가야 나오는 것이 무국적 지대다.

그곳에 있는 교황청과 제국 동남부에 자리한 대수림까지의 거리는 아득했다.

하물며, 동부 대수림은 마경이 뒤섞인 숲이라서 함부로 전이의 기적을 사용할 수도 없는 땅이다.

그래서 교황은 에릭과 상의한 끝에 지금의 동선을 만들었다.

"황제 폐하가 허가해 주셨다."

제국 수도의 전이 마법진을 이용해 제국 동부까지 이동한다.

거기까지 가면, 동부 대수림은 금방이다.

"미리 와서 장인... 큼, 황제 폐하께 허락을 받은 건 이해하겠수다. 한데, 저 세 놈은 왜 데리고 온 거요?"

장두식은 몽둥이로 세 명의 빙의자를 가리켰다.

몽둥이 끝이 예리하게 느껴지는 것이, 상당히 예민한 모습이었다.

박창호와 강풍호, 니시다 료는 고개를 내리깔았다.

'저 새끼 왜 저러지?'

아무런 잘못도 하질 않았는데.

장두식의 반삭 머리 사이로 주름이 잔뜩 잡혔다.

마치 매타작을 하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두식아, 애들 겁주지 마라."

에릭은 그런 장두식을 만류하며, 빙의자들을 바라봤다.

"흑마그룹이 다른 클래스의 빙의자를 모아 두고 있더군."

왜 다른 빙의자들은 이런 사실을 몰랐는가?

일종의 심문이었다.

성전 선포로 흑마그룹을 치는 것은 경각을 다투는 일이었으니.

이동하는 길에 빙의자들에게 확인할 것들을 알아내려는 것이다.

"커, 커뮤에도 그런 말은 없었습니다!"

"저희는 정말 몰라요오!"

"...흐으으."

세 빙의자는 정말 모르는 눈치였다.

'하긴 알았으면, 진작에 밝혀졌겠지.'

수용소의 빙의자들은 대부분이 무해하다.

[제국 정보부]가 24시간을 감시하며 대화록을 만들어 냈고, 그들이 완벽하게 평범하고 일반적인 빙의자라는 사실이 증명된 지 오래였다.

'흑마그룹은 그 많은 빙의자들을 통제하고 있단 말인가?'

제국 수도의 성문으로 들어서는 성전기사단을 바라보며, 에릭은 고개를 기울였다.

가르시안 왕국의 변경백령 사태부터 익히 알았듯이, 빙의자들을 집단으로 관리 및 양성하는 흐름이 존재하는 건 분명했다.

'흑마그룹은 대체 무슨 수로 빙의자들을 통제한다는 거지?'

기다란 창을 든 성기사들까지 전부 성내로 진입하는 모습을 보며, 에릭은 그런 의문을 품었다.

84화 초토화 (1)

"어째서 아직...."

대격변이 끝나고 며칠 동안, 대부분의 생존자들이 탈출했다.

계층마다 살아남은 자의 수는 천차만별이었고, 아이러니하게도 난이도가 높은 상층으로 갈수록 생환자의 수가 늘어났다.

여러 국가와 세력이 협력을 했기 때문이다.

다만, 최상층만은 달랐다.

"장군, 대체 최상층의 공략대는 언제쯤 귀환을 하련지요?"

"우리는 그저 이곳을 지키면 그만이다. 질문은 의미가 없지."

미궁 광장을 둘러싼 황도군은 오도 가도 못한 채 며칠을 머물렀다.

'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저토록 소식이 없단 말인가?'

미궁의 최상층은 별개의 공간이다. 그러니 다른 계층의 생존자들에게 정보를 얻기란 어려웠다.

키이이이―

미궁의 문은 반쯤 열린 상태로 스산한 바람을 연신 뿌려 댔다.

황도군 장군이 주먹을 꾹 쥐었다.

'에릭 놈이 성전까지 일으켰거늘.'

황실은 군비 확충에 전쟁 준비로 연이어 국란 회의가 이어지는 중이며, 자신의 발은 미궁에 묶인 상황이다.

겉으로는 담대하게 말했으나, 속으로는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대체 얼마나 더 이곳을 지켜야 하는가?'

장군은 미궁을 바라보며 눈을 서서히 감았다.

공략이 확실시되는 상황이지만, 어떤 위험이 도사릴지 모르는 것이 미궁이다.

그러니 자리를 비울 수는 없는 법.

와아아아아아아-!!!

그런데도 저 함성 소리를 듣자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장군, 아스티아 교단이 황도를 가로질러 간다는 게...."

군(軍)은 공격도 하지만 평소에는 국가 수호를 위해 존재한다.

그러니 황도군의 부장들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교단의 군대가 황도를 지나친다는 건 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시민들이 환호성까지 내지르는군.'

장군이 기감을 넓히자, 황도의 상황이 면밀하게 느껴졌다.

교단의 행렬 중심에 있는 한 무리의 기척이 유독 선명했다.

'제국의 성녀, 교단의 성자.'

제국민들의 찬양을 받을 만한 위인들이 둘이나 보였다.

장군은 그 주변을 살폈다.

'절름발이 검사는 몸이 고쳐졌고 옆에 몽둥이를 든 덩어리가 황녀 전하의 정인인가?'

면면들이 보통이 아니었다.

생김새의 흉악함은 차치하고, 풍기는 분위기라든가 느껴지는 힘이 무언가 달라졌다.

장군이 그리 걱정에 잠겨 있자.

"게다가 이것 보셨습니까?"

그의 부관이 또 다른 문젯거리를 가져왔다.

장군을 향해 다가온 부관은 오늘자 제국일보의 첫 장을 펼쳐 보였다.

[빙의자 자진 신고 기간]

[7월 첫날부터 8월 첫날까지 자수한 빙의자에 한해, 특별 구획에서 살아갈 권리를 보장한다는 황실의 칙령이 내려왔습니다.

자비로운 황제 폐하께서는 수도 제5구역의 서쪽 구획을 '어스타운'이라 명명하셨습니다.

이곳을 빙의자들의 도시로 개발하여, 그들에게 살 곳을 제공한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위대한 황제 폐하의 뜻에 따라 타국의 빙의자들 또한 동일하게 생존권을 보장받을 것이며, 자진 신고 기간 이후로는 제국 전역에 대대적인 정화 활동이 벌어질 예정입니다.

...(중략)

이와 같은 지엄한 황실의 뜻을 받들어 제국일보는 빙의자 자진 신고 기간을 공표합니다.]

장군의 눈가가 좁혀졌다.

'폐하께서 저 땅을 에릭에게 하사하셨다지.'

한때는 자신의 아우였고, 지금은 받들어 모시는 황제다.

그는 성군이며 명군이자 지고한 뜻을 품은 강자다.

'또다시 알만정교회 때의 실수를 반복하시려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의 길이 완벽했던 건 아니다.

광활한 제국을 안정시키는 과정은 다사다난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종교를 이용한다거나, 전쟁에서 회군한다거나 하는 불상사가 발생했었다.

그 옆을 지켜 왔던 장군의 입장에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인간인 이상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가?'

우려가 깊어졌다.

황제는 한때의 약점을 메우고자 알만정교회와 혼인을 했다.

지금은 대륙 정복을 서두르고자 아스티아 교단을 끌어들인 셈 아닌가?

'성창이라니....'

그것도 성창투척이라는 미친 짓을 벌이는 교단을 말이다.

"폐하의 뜻에 의문을 갖지 마라."

장군은 속내와 다르게, 그리 말했다.

덤덤해 보이는 장군의 모습을 보고 부관이 궁금했던 질문을 건넸다.

"한데, 저 창이 뭐라고 위에서 그 난리가 난 겁니까?"

성전기사단의 행차가 쉽게 허락된 것처럼 보이지만, 제국 수뇌부에서는 짧고 굵은 논쟁이 오갔었다.

성창은, 대륙 통일이라는 제국의 뜻에 반하는 무기였다.

'세상 무엇도 남기지 않는 파괴밖에 없는 힘.'

부관의 질문에 장군은 옛 기억을 떠올렸다.

흑마법사의 난(難), 루시퍼 사태가 있기도 한참 전의 일이었다.

"자네 나이가 몇이지?"

"마흔셋입니다!"

"젊군. 자네가 태어나기 전에 제국 남동부에는 나라가 하나 더 있었네. 현 엘프 자치령의 아래쪽이지."

"그, 그 구멍 뚫린 황무지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곳이 본래 왕국이었다."

이어지는 설명은 없었다.

하나, 부관의 장군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곳은 허무(虛無)라 불린다.

―Ep. 18 초토화

"형님, 황실 따까리들이 왜 그렇게 우리를 훑어보는 거요?"

"아니꼬워서 그럴 거다."

장군의 기척을 느낀 장두식이 투덜거렸고, 에릭은 덤덤하게 그 연유를 알려 주었다.

"거참, 뺑이 치는 게 귀찮다고 우리한테 기감을 팍팍 쏴 대는 꼴이 우습수다."

"너무 신경들 쓰지 마라. 어차피 폐하께서 허가하신 일들이다."

"한데, 보스는 리페로제 님이 최상층에 계실 거라 추측하셨는데.... 아직도 장군이 있다는 건 최상층에서 돌아온 생환자가 없다는 말 아닙니까?"

에릭 또한 미궁의 소식을 들었다.

그러려고 데려온 것이 세 빙의자였다.

최상층의 공략대만 돌아오지 않는다지?

그 이유는 뻔했다.

"아마도 스승님은 첫 번째 빙의자를 찾으러 가셨을 거다. 찾았다고 데리고 나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최초의 빙의자.

그는 미궁의 공략법조차 모르는 게임 초창기의 유저다.

"보스, 그런데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겁니까?"

"나도 그게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최초의 빙의자로 추측되는 존재.

그가 알려진 이유는 미궁의 공략대 덕분이었다.

상층을 누비던 제국군과 모험가들이 도시 괴담처럼 '척살자'라는 이름을 부르짖었다.

황실은 조사단을 파견했고, 그 결과 척살자 루크의 존재가 실존함이 증명되었다.

그때 미궁군의 총대장과 그 휘하 직속 부대의 반이 죽었다던가?

"거, 형님. 대뜸 사람 배때기에 칼침을 놓는 미친 새끼를 데려와도 되겠수?"

장두식이 우려 깊은 얼굴로 묻자니, 에릭이 찬란한 신성력을 일으켰다.

쿠웅-!

황도를 가로지르던 행렬 한복판에 금빛 기둥이 솟구치고.

와아아아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이 울려 퍼졌다.

금빛 기둥은 에릭과 그 옆의 르웰을 찬란하게 비추었다.

"여러부우운-!!!"

그에 르웰이 한쪽 손을 허리에 얹고서는 손을 흔들었고, 세상천지가 뒤흔들릴 만큼 거대한 환호성이 들려왔다.

에릭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잭슨을 바라봤다.

"스승님의 신성력은 지금의 나보다 더 웅대하며 순도가 높지. 그리고 너도 성격을 알지 않냐?"

리페로제 아스티아.

아무리 강대하고 미친 빙의자라도 죽을 만큼 맞다 보면, 정신을 차릴 것이란 게 에릭의 지론이었다.

"개과천선한 미친 빙의자는 또 처음이구만요."

장두식이 고개를 끄덕일 정도.

"하긴.... 보스의 스승님은 빙의자인 제게 오러까지 가르치셨죠."

잭슨까지 납득하자 대화가 일단락되었다.

'전사 클래스면 전직을 뭘로 했으려나.'

수많은 제국민들의 찬양 속에서 에릭은 사색에 잠겼다.

[전사], [궁수], [기사], [마법사], [흑마법사], [네크로맨서], [성기사].

클래스별로 5~15년의 차이를 두고 빙의한 존재들.

에릭은 이들을 세계의 첫 번째 빙의자라고 불렀다.

'혹은 환생자일 수도 있고.'

공통점은 둘이다.

하나, 아이의 몸으로 태어났다.

둘, 최초로 해당 클래스를 개방했다.

'잭슨이 45년 차, 엘프 유렌이 50년 차지.'

대륙 온라인은 이전 클래스를 만렙으로 만들어야 다음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구조였다.

아마도 첫 번째 전사 클래스는 게임을 제대로 해 보기도 전에 빙의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궁수는 엘프 유렌, 기사는 잭슨, 마법사는 스승님이 아는 놈이고, 흑마법사는 죽였다. 그리고 마지막 성기사는 나지.'

일곱 빙의자들 중 밝혀진 존재는 다섯. 남은 두 빙의자를 찾는 것이 스승이 스스로 정한 과업이었다.

그리 생각에 잠겨 있자.

"근데, 미궁에서 산다는 게 말이 되는 겁니까?"

잭슨이 얼굴을 긁으며 물었다.

흉터가 있던 자리였다.

"...모른다. 그간 겪어 본 바로, 빙의자들은 딱히 미궁에 이점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게임에 대한 지식도 없는 첫 번째 빙의자가 대체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합리적인 의문이었다.

다만, 에릭도 명확히 답을 주지 못했다.

'설마, 처음 들어간 이후로 한 번도 나오지 않은 건가?'

미궁의 시간비는 인간에게 거대한 괴리감을 선사한다.

최상층의 공략대 수준으로 미궁에서 오랜 시간을 머무른 자들은 다시 최상층을 공략할 수 없다.

정신이 못 견디고 무너진다.

최상층만 아니면야 문제가 없지만.

'물론....'

따지고 보면, 최상층을 더 공략할 수야 있긴 한데.

그러면 미궁에서 나오지 못한다.

"빙의자는 가능할지도 모르잖습니까? 성직자들처럼."

"아니라고는 못 하겠지. 그런데 증명된 것도 아니지 않냐?"

"하기야, 성직자들과 비교하는 건 좀 그렇긴 하군요."

이러한 미궁의 특성을 무시한 채,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는 존재도 있다.

리페로제 아스티아, 교황이나 알만정교회의 교주과 같이 강력한 성직자들.

혹은 성자 성녀들.

물론, [성기사] 클래스의 에릭도 가능하다.

'그래서 신성력이 사기라는 소리를 듣는 거지.'

아무튼.

그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전이 관리소에 도착했다.

에릭은 거대한 마법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 명이 넘는 교단의 인물들이 마법진으로 이동하게 될 줄이야.'

에릭이나 교황쯤 돼야 아무 때나 전이를 쓸 수 있는 거지, 전이의 기적이란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물론, 마법도 마찬가지다.

황녀가 마도구 상점의 마법진을 보며, 감탄했듯이.

공간을 뛰어넘는다는 것이 사람의 힘으로 팍팍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하물며, 사람만 이동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보스, 성창을 마법진으로 옮길 수 있는 겁니까?"

"저 마법진은 엄연히 게이트와 비슷하다. 문을 넘어가는 원리니 가능하지."

두 사람의 대화를 보며, 장두식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게 뭔 개소리요?'라고 중얼거렸는데, 에릭은 가볍게 이를 무시했다.

우우웅-! 우웅-!

작동 준비를 마친 거대한 마법진이 푸른 파장을 뿜어 댔고, 그것을 바라보는 성기사단은 다들 굳센 각오를 다졌다.

"성자 에릭."

"예, 성하."

행렬 중앙에 있던 에릭은 어느덧 교황의 옆에 나란히 섰다.

커다란 에릭이 고개를 숙이자, 숙인 등판 너머로 도열한 성기사단이 보였다.

'본래였다면, 성전의 길을 직접 걸어야 하거늘.'

제국의 수도에 교단의 성기사단이라니....

어색한 풍경이었다.

제국이 교단의 군대를 공식적으로 황도에 들인 것이 최초이듯이, 교단이 성전을 위해 제국의 힘을 빌리는 것 또한 최초였으니까.

"시급히 해야 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었지만.... 나쁘지만은 않구나."

르웰의 덕분인지, 에릭의 덕분인지 몰라도 수도 전체에 거센 함성이 일었다.

시민들은 진심으로 아스티아 교단을 반겨 주었다.

[길을 따라 뜻을 이루리라.]

신께서도 이를 기뻐하며 교황에게 직접 계시를 내려 줬다.

'이게 옳은 길이라는 계시니라.'

신의 뜻이 내려왔으니, 교황은 확신했다.

하나, 이 모든 것들이 거저 주어질 리는 없었다.

제국의 수도를 관통해 이동하는 것이니, 대가를 요구할 테지.

"성자 에릭, 제국이 교단에 무얼 요구하던가?"

"폐하께서는 대수림을 관통하는 길을 요청하셨습니다."

동부 대수림은 마경의 영향을 크게 받은 숲으로, 안에 들어온 사람을 미쳐 버리게 만든다.

알만정교회와 제국군이 함께 반쯤 정화시킨 땅이었으나, 대격변 이후로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고 하니.

"군대가 지나갈 길을 말이더냐?"

교황의 물음에 에릭이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황의 눈가가 좁혀졌다.

'아버지의 계시.'

길을 따라 뜻을 이룬다는 것이, 어쩌면 제국과도 관련이 있어 보였다.

교황은 결단했다.

"내 친히 그 길을 다져, 제국과의 우호를 보장하마."

* * *

쿠웅-!

전이 마법진을 넘자, 까마득히 높은 마탑이 보였다.

이제는 에릭의 것이 된 '라핀 마탑'이다.

마탑 너머로 광활한 대곡창 지대의 금빛 곡식들이 바람에 흐드러졌다.

곡식의 끝에서는 조금 시들시들한 세계수가 에릭을 향해 선선한 바람을 보내 주었다.

에릭은 슬쩍-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세계수의 인사를 무시했다.

나무가 부들부들 떨리는 기척이 느껴졌으나, 에릭은 무심하게 동부 대수림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기가 세계수의 고향이랬나?'

지평선 끝으로 불길한 검은 연기를 뿌려 대는 시꺼먼 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섰다.

한때, 대지모신으로 불리는 세계수의 보금자리였지만, 지금은 마경에 더럽혀지고 오염된 숲이다.

그게 동부 대수림이다.

'세계수라.'

에릭은 [신앙 관리]창을 바라봤다.

화분을 심는 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 여겼는데, 르웰과 황도를 지나치면서 압도적인 양의 GP를 얻었다.

[신앙을 획득했습니다.]

[보유 GP 805,779]

'미친 속도군.'

르웰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더니, 실로 그러했다.

고작 행진 한 번.

그것도 손만 흔들었다.

그 결과, 한 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말도 안 되는 수치의 GP를 얻어 냈다.

'미궁에서 피 튀겨 가며 사람들을 구하는 것보다 르웰이 손 한번 흔드는 게 더 많이 오를 줄이야.'

조금 허탈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리 상태창을 바라보고 있자니, 쿡-하고 르웰이 옆구리를 찔렀다.

"에, 에릭?"

청록색 눈망울이 흔들렸다.

"대체 나는 왜?"

수도를 지나며 교회로 돌아갈 거라 생각했던 르웰은 그대로 전이 마법진을 넘어갔다.

에릭이 자연스레 에스코트를 해 줬기 때문이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방에서 성기사단이 기다란 창을 뽑아 들며 투창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거 전쟁 준비 아닌가?'

내가 왜 그 옆에 있지?

온갖 걱정이 머릿속을 흔들었다.

르웰이 그리 놀라 있자니, 에릭이 귓가에 속삭였다.

"여기가 제일 안전합니다."

중저음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르웰은 어딘가 안도감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보기 좋군."

그때 성전기사단장 율리우스가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성창이 한 움큼 들려 있었다.

혼자 수십 자루는 던져 대려는 모양이었다.

"성자 에릭, 그대도 성창을 챙겨야 하지 않겠나?"

율리우스가 그리 묻자, 에릭이 씩- 웃었다.

그가 말하기를.

"저는 다른 창을 쓸 생각입니다."

에릭의 눈이 상태창을 향했다.

[성창(聖槍) 루-솔라스의 쐐기: 200,000,000골드]

타 교단의 성물이다.

하나, 신이 된 지금은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85화 초토화 (2)

"놔, 놔 주란 말이야! 이 더러운 흑마력을 치우라고!!!"

동부 대수림, 마경 한복판에 지어진 흑색 기둥.

최상층에서 성자를 내려다보던 마키아의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그 안의 동공은 또렷하게 루-솔라스교의 성자를 노려봤다.

성자는 추접하게 마경의 오염된 땅에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후훗. 가증스러워라."

짙은 눈웃음에 싱그러운 미소였으나, 이는 명백히 분노를 의미했다.

'여전히 동자같이 해맑은 눈이네요.'

생긴 것과 달리 백 년을 훌쩍 넘게 산 성자다.

하나, 하는 짓과 말투는 어린애와 다름없었다.

'저런 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고작 무교라는 이유로 죄인의 낙인을 찍었단 말이죠?'

즉, 마키아가 징벌병으로 살아온 삶은 전부 저 성자가 애처럼 고집을 부려서였다는 의미다.

짜악-!

검은 그림자가 채찍처럼 휘둘렸다.

성자의 머리가 반으로 찢었다.

툭 하고 뜯긴 머리통이 바닥으로 뒹굴었으나, 순식간에 신성의 불꽃이 차올라 성자의 얼굴을 본모습으로 되돌렸다.

바닥에는 뜯긴 얼굴이 나뒹구는데, 머리 위로는 새 머리가 돋아나는 모습이 기괴하게 느껴졌다.

"대체 얼마나 더 회복을...."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성자를 바라보던 토마스가 경악한 듯이 중얼거렸다.

'대체 저 몸은 뭐지?'

사르곤의 힘으로 무한에 가까운 몬스터를 보냈다.

거기에 흑마법사들이 [격리] 주문을 사용하고 각종 저주나 재앙급 질병을 흩뿌렸다.

신의 자식이니 뭐니 떠들어 봤자 쪽수에는 답이 없었다.

결국 힘이란 바닥나기 마련이고, 아무리 강대한 신성력을 지녔더라도 소모된 힘을 회복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니까.

"신성이 바닥났어도 저런 재생력이라니...."

그런데도 루-솔라스의 총애를 받는 저 몸뚱이는 죽을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힘이 없으나 영원토록 재생하는 몸이라니.

"토마스 놀라지 마요. 잘 죽지 않는 몸을 지녀서 저는 더 행복할 따름입니다."

마키아가 베일을 벗으며 싱긋 웃었다. 분노와 희열이 뒤섞인 오묘한 미소였다.

새하얀 얼굴에 붉디붉은 입매가 요요하게 토마스를 홀렸다.

토마스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으윽!'

아니, 진짜 터질 기세였다.

절로 고개를 내려 깔았다.

숙인 얼굴 아래로 새하얀 손등이 내려왔다.

쪽.

토마스가 전율감에 몸을 떨자니, 마키아가 신음을 내질렀다.

"아아-!"

토마스가 눈길을 돌려보니 마키아의 흑마력이 성자를 난도질하고 있었다.

"드디어!!!"

마키아 역시 강렬한 전율감에 휩싸인 모습이었다.

흑마력으로 성자를 농락하듯이 찢어발기는 과정은 그녀에게 일종의 해방감을 선사했다.

'그때의 무력함이 해소되는 기분이에요!'

그녀가 징벌병으로 전장에 끌려다니는 건 벌써 수십 년도 지난 일이었지만, 어린 날의 고난은 지독하게 뇌리에 남아 있는 법이다.

어쩌면 영원토록 기억되겠지.

[흑마그룹 대표실]

마키아의 시선이 방 안의 명패를 훑었다.

그 새하얀 얼굴에 자부심이 깃들었다.

'더 이상 나의 낮은 두렵지 않아.'

어린 날의 고난과 역경을 딛고 얻어 낸 자리였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끔찍한 기억은 성자를 사로잡으면서 해방감이 되었다.

과거의 고통을 이겨 냈다는 성취감은 그녀의 자리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어 줬다.

'나는 모든 흑마법사를 대표하는 얼굴이 됐어.'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그녀를 충동질했다.

그에 마키아는 이 같잖은 복수극을 끝내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토마스, 이제 슬슬 끝을 내야겠죠."

서서히 멀어지는 새하얀 손등.

토마스는 아쉬움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흐릿하고 탁한 검은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 올곧은 눈빛에 토마스는 정신을 부여잡고 똑바르게 섰다.

"성자를 제물로 바치겠다는 말이십니까?"

"그래요, 저 정도의 힘을 양분으로 삼는다면.... 빙의자들의 꿈이 더 선명해지지 않겠어요?"

토마스는 지시를 따르겠다며 고개를 조아렸다.

'고작 하루 만에 복수를 끝내실 줄이야....'

마키아는 흑탑의 최정상 대표실의 통유리창 아래로, 고깃덩어리처럼 변한 성자가 보였다.

성자는 불꽃에 휩싸여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고, 그런 성자를 바라보는 마키아의 눈빛에는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하나, 행동은 그렇지 않았다.

대의를 위해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는 그녀를 보며 토마스는 깊은 존경심을 품었다.

"주주님들-."

까마득한 흑탑의 정상에서 마키아가 주주들을 향해 성자를 제물로 바치겠노라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희번뜩.

탑 위에 떠오른 붉은 눈알이 데굴 굴렀다.

드르륵.

그와 동시에 대표실의 문이 절로 열리며, 철갑을 두른 흑기사가 들어섰다.

흑기사의 손가락에서 금빛 반지가 선명하게 빛을 발했다.

"교단이 움직였다."

마경의 어둠을 떠올리게 하는 목소리였다.

그가 말하기를.

"성창이다."

* * *

키이잉――――!

사방 천지에서 쨍한 공명음이 일었다.

성전기사단장 율리우스를 필두로, 모든 기사단이 성창을 거머쥐었다.

그들의 창끝은 어둠으로 가득한 동부 대수림을 향했다.

끼예에에엑-!

숲의 어둠이 일렁이며 수도 없이 많은 마물이 쏟아졌다.

고블린, 트롤, 오크, 십 미터가 넘는 오우거나 용종까지.

마경에 자리 잡은 미궁 속 몬스터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아스티아 교단을 향해 달려들었다.

거대한 검은 물결 같았다.

그것은 압도적이며 헤아릴 수 없는 자연재해였다.

"성기사들은 몬스터를 상대한다!"

그런 끔찍한 것들을 향해.

아스티아 교단의 성기사들은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성창이 쏘아질 시간을 벌어라!"

신성을 벼리고 벼려 만든 창날.

그 안에는 지고한 신의 힘이 압축되어 있다.

일반적인 성기사들은 운반하는 게 고작이다.

그러니 투창을 맡은 성전기사단을 지키는 것이 일반적인 성기사들의 의무였다.

미궁에서 마경으로 흘러온 괴물들은 하나하나가 거대했고 강력한 존재였다.

하나, 교단의 성기사들은 두렵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이 땅에 신성을 세우시니. 우리의 앞에 광명이 깃들지어다."

강렬한 은총이 담긴 신성이 솟아올랐다.

교황의 힘이다.

쿠구구궁―――!

검은 숲을 바라보는 대지 위로 신성의 기둥이 세워졌다.

그 힘이 교단의 성기사들을 감싸 주었으니.

그들의 앞에는 어둠이 가득하였으나, 등 뒤의 거룩함을 믿으며 검을 휘둘렀다.

후웅-.

인지를 초월한 괴물들이 압도적인 힘을 휘둘렀다.

거대한 오우거의 팔이 최전선의 성기사들을 두드렸다.

산이 휘둘러지는 것 같았다.

푹. 쩌억-!

그런 커다란 오우거를 향해 내지르는 검은 작고 가늘었다.

성기사들의 오우거 팔에 생채기를 냈고, 휘둘러진 오우거의 주먹은 검을 잡은 손 채로 성기사의 팔을 뜯어 버렸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지켜 주실지어다."

교황의 주기도문이 읊어졌다.

잘린 기사들의 팔이 재생되었다.

팔이 뜯기는 지독한 고통을 아스티아 신의 따스함이 보듬어 주었다.

"아스티아 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기사단은 베이고 물어뜯기고 찢기기를 반복했다.

하나,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팔이 뜯기면 주먹을 내질렀다.

그 미약한 움직임이 오우거의 팔에 작은 상처를 만들었다.

고작 생채기가 전부였으나, 그것들이 모여 결국 거대한 오우거의 팔을 잘라 냈다.

쿠웅-!

거대한 오우거의 팔과 다리가 떨어졌다.

거대한 몬스터가 괴성을 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성기사들은 피 칠갑을 한 채 오우거의 몸을 타고 올라 목을 뜯어냈다.

꾸륵-.

핏물을 토하며 오우거의 숨이 멎었다.

거대한 몬스터는 그 사체가 남아 방벽의 기능을 한다.

하나, 기사단의 뒤의 성가대가 정화의 음율을 읊조렸다.

아아―――.

천상의 아버지께서 길을 내어주실지어니.

그 뜻에 따라 몬스터 사체가 희뿌연 연기를 내뿜으며 사라졌다.

"한 보 전진하라!"

광활한 숲에서 쏟아지는 몬스터를 향해 나아가는 성기사단.

검은 도화지에 그려진 작은 금색 점을 보는 듯했다.

그러나 그 점은 작지만 착실하게 나아가고 있었다.

그 작은 한 걸음 덕분에 성전기사단장 율리우스가 거창(擧槍)을 완료했다.

쿠우웅.

묵직한 파공음이 일고 율리우스의 몸이 뒤로 젖혀졌다.

꾸드득-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는 투창을 위해 허리를 돌리고 한 팔을 쭉 뒤로 뺐다.

그 뒤.

쿠르르릉――――――!

천둥과 같은 굉음이 일고 작은 금빛이 쏘아지듯 검은 숲을 향해 날아들었다.

'모든 몬스터를 통제하는군.'

쏘아지는 금빛 섬전을 바라보며 에릭의 눈가가 좁혀졌다.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거대한 용종 마물들이 창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쐐애애애액-.

하나, 쏘아진 성창(聖槍)이다.

미궁 속 강대한 몬스터들도 그 압도적인 질량과 신성에 소멸되어 버렸다.

수십 미터는 되는 용종들이 구멍이 숭숭 뚫린 채 터져 버렸다.

쿠르릉.

그 결과 첫 번째 창이 동부 대수림에 꽂혔다.

작은 울림이 일고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이 꽂혔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숲에 비해 작디작은 창이다.

그러나 그 안에 든 것은 지고한 신의 힘이다.

그러니.

콰앙―――――!!!

그 힘이 터져 나오며, 광활한 대수림에 구멍이 뚫렸다.

압도적인 질량이 대지와 숲을 통째로 밀어 버린 것이다. 거기에 그 안에 담긴 신성이 퍼져 가며 어둠 속에 금빛을 흩뿌렸다.

그 빛에 숲 전체가 비명을 내질렀다.

"거창하라-!"

그사이 다른 성전기사단원들도 투창 준비를 마쳤다.

그들은 율리우스처럼 창을 든 손을 뒤로 빼며 투창의 자세를 취했다.

"투창!"

쐐애애액-!

백 명의 기사단이 만 자루의 성창을 쏘아 대기 시작했다.

콰앙-! 콰앙-! 쾅!!!

검은 숲에 금빛이 퍼져 나갔다.

해가 들지 않는 어둠의 마경이다.

그 마경에 태양이라도 떠오른 양, 세상천지가 반짝거렸다.

"거참, 미친 힘이구만."

"두식 형님은 체력도 좋습니다."

최전선에는 장두식과 잭슨이 있었다.

장두식은 마력 몽둥이를 휘둘러 몬스터를 때려 죽였고, 잭슨은 오러를 휘둘러 몬스터를 베어 냈다.

뿌직.

갑자기 잭슨의 팔이 터졌다.

"거, 사제님이 또 뽈뽈대면서 돌아다니는구만...."

"끄으, 이 정도는 뭐."

잭슨은 덤덤하게 흉터가 있던 자리를 긁적거렸다.

그사이 잘린 팔이 돋아났다.

그들 또한 교황의 신성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크으, 장관이다! 창이 끝도 없이 쏟아지는구만."

최전선의 성기사단과 함께 싸우던 장두식과 잭슨.

후웅-.

그들의 머리 위로는 금빛 섬전이 연이어 그려졌다.

쏘아지는 금빛 잔상을 보다 보니, 잭슨의 머릿속에 투창이라는 전술의 직관적인 예시가 떠올랐다.

'전술 폭격....'

지구에서 자료로 보았던, 미군의 전쟁처럼.

교단이 쏘아 낸 창은 황무지를 만들었다.

숲은 사라지고 대지는 움푹 파였으니, 그야말로 불모지 황야를 양성하는 힘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비단, 빙의자 잭슨만 그리 느낀 것은 아니었다.

"내 생에 투창을 다시 경험하게 될 줄이야."

그 장엄한 광경을 보며, 율리우스가 콧잔등을 쓸었다.

그는 옆에 있는 에릭을 바라보며 물었다.

"성자 에릭, 그대는 아직인가?"

어둠에 가려진 마경을 성창이 밝혀 주니, 에릭의 눈은 그 안에 담긴 적의 본진을 찾았다.

빛이 들지 않는 마경은 어두웠다.

게다가 흑마그룹이 손을 써 두었는지, 에릭의 눈으로도 정확한 장소를 찾기 어려웠다.

'반이나 태웠는데 보이질 않는-.'

율리우스가 열 번째 성창을 쏘았을 때.

그리하여, 숲의 반 정도가 황무지로 변한 시점에, 에릭의 눈이 반짝였다.

"찾았다."

기다란 흑색 탑을 발견했다.

성창의 여파로 어둠이 일렁이는 찰나였다.

탑 위로 붉은 눈까지 보였으니, 저곳이 흑마그룹이 옮겨갔다는 신사옥이 분명했다.

[성창(聖槍) 루-솔라스의 쐐기: 200,000,000골드]

에릭은 2억 골드를 사용해, 루-솔라스의 성창을 꺼내 들었다.

키잉-.

반짝거리는 공명음과 함께 태양의 심벌이 새겨진 기다란 창이 에릭의 손에 들렸다.

그에 율리우스가 흠칫 놀랐으나, 에릭은 여상하게 말을 이었다.

"저쪽에 이 창의 주인이 있다더군요."

성자, 레이 솔라스의 납치.

교황의 눈은 이러한 흐름을 명확하게 읽었다.

그러니 교단의 인물들도 이를 알았다.

그런데도 대뜸 타 교단의 성물을 든 에릭의 모습에 율리우스는 의아함을 느꼈다.

'태양신 루-솔라스의 성자를 구하는 아스티아 교단의 성자라.'

하나, 성자들의 일이니 무언가 있겠지라며 스스로 납득하고 넘어갔다.

꾸욱-.

에릭은 창을 굳게 붙잡았다.

창끝은 시꺼먼 탑의 한복판을 향했다.

[태양은 불태우는 힘.]

새하얀 창대를 타고 금빛 문양이 솟아올랐다.

의미심장한 문구였다.

화르륵-.

문양을 따라서 불꽃이 일더니 에릭의 몸이 불길에 휩싸였다.

성화라기에는 강렬한 열기를 띈 불의 힘이었다.

열기가 강렬했으나 불꽃은 에릭을 주인이라고 여겼는지, 오히려 그에게 힘을 보태 주었다.

불꽃을 따라 에릭의 등에서 여섯 개의 날개가 솟구쳤다.

쐐액―――――!

에릭은 날개의 힘으로 증폭된 전능한 불의 힘을 느끼며 창을 쏘아 냈다.

* * *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세 빙의자들은 멀뚱멀뚱 최후방에서 이 전장을 바라봤다.

박창호의 눈이 터질 듯이 커졌다.

'저게 무슨....'

끔찍한 몬스터들을 쏟아 내는 검은 숲이 처음에는 두렵게 느껴졌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빙의자들에게 다른 감정이 피어났다.

"저게 뭐냐?"

눈앞의 광경은 그야말로 장엄함 그 자체였다.

'무슨 백린탄 폭격도 아니고....'

검은 숲도 기괴했는데, 그 숲을 황무지로 바꾸는 힘은 더욱 공포스러웠다.

성창폭격에 감탄한 박창호와 달리, 강풍호는 최전선의 성기사들을 바라봤다.

"불사의 군대...."

강풍호가 침음을 흘렸다.

몸이 베여도 무한하게 재생하는 성기사단은 괴물 같았다.

저거 무슨 네크로맨서도 아니고.

찬란한 금빛을 뿜으며 무한히 재생하는 성기사단이라니.

"대체 이걸 왜 보여주는 걸까?"

"허튼 맘 먹지 말라는 거겠지."

창 한 자루가 숲을 통째로 없애 버리는 모습은 이루 설명할 수 없는 경악을 느끼게 했다.

박창호, 강풍호, 니시다 료.

너 나 할 것 없이 입을 쩍 벌린 채 이 광경을 지켜봤다.

"드디어 움직이신다!"

그때였다.

시종일관 침묵을 유지하던 니시다 료가 소리쳤다.

그의 시선의 끝에는 거대하고 찬란한 성기사, 에릭이 보였다.

"불타는 창?"

세 사람과 가장 연관이 있는 자가 에릭이었으니, 자연스럽게 빙의자들의 눈은 에릭을 향했다.

그들의 신이 곧 에릭이었으니, 세 사람은 그의 움직임을 면밀하게 지켜보았다.

번쩍-.

불타는 창을 들고 있던 에릭인데, 어느새 그것을 쏘아 냈다.

육안으로 인지하기 불가능한 속도였다.

과정은 몰랐더라도 결과만큼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콰앙―――――――!!!

세 빙의자는 교단의 성가대 옆에 있었다.

족히 수 킬로는 떨어진 자리였다.

하나 창이 떨어진 충격파에 온몸이 뒤흔들렸다.

"으윽-!"

에릭이 쏘아 낸 창은 마경 속을 대낮처럼 훤하게 밝혀 줬고, 거대한 검은 탑을 반으로 똑- 부러트려 버렸다.

어느새 동부 대수림은 검은색보다 하얀 황무지가 더 많아져 있었다.

"어어.... 저거-."

그 광경에 니시다 료가 침음을 흘렸다.

근신 처분을 받은 뒤로, 참고 참았던 한마디 말이 결국 니시다의 입 밖으로 내뱉어졌다.

"버스터 콜!"

86화 초토화 (3)

"자네 말만 믿었다가 교회의 위신이 바닥을 치고 있네. 대체 어떻게 할 겐가?"

알만정교회의 교주는 미칠 노릇이었다.

세계를 삼분하는 세 종교 중 하나이건만, 지금은 대외적인 이미지가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렸다.

"그 에릭이란 놈은 빙의자는 무슨 신성의 축복을 받은 몸이었지. 게다가 성자가 돼서, 동부 대수림으로 향했다더군."

30년쯤 전에 한 사내가 알만정교회를 찾아왔다.

그는 스스로를 예언자라 칭하며, 세계에 빙의자들이 나타날 거라는 사실을 알렸다.

"그러게요.... 저도 성자로 임명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교주의 앞에서 고개를 내리깐 사내는 태연하게 그리 말했다.

사실 예언자라는 놈은 사기꾼이 아닐까?

교주에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면 그놈을 키웠다는 리페로제가 빙의자일 건데...."

"뭐?"

교주는 말문이 턱- 막혔다.

"리페로제, 그 미친년은 절대 빙의자일 수가 없다. 나이가 백이 넘었거늘."

"그러면 르웰? 아니지, 걔는 호.... 크흠. 아무튼 르웰도 아니고, 대체 누구지?"

"대체 에릭 그놈의 주변에 빙의자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뭐더냐?"

교주의 독촉에 가면을 쓴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새하얗고 텅 빈 가면 위로 낙서라도 한 듯한 눈코입 모양이 그려졌다.

"아니, 십일조를 하는데...."

"우리 또한 교회에서 가입비를 받고 있는데, 주급의 10%를 내는 십일조가 대순가?"

"아니, 그게 진짜 빙의자들이-."

"오히려 내 눈에는 자네가 더 빙의자같이 보인다네."

쿠웅-.

사내의 발치에서 거대한 성법진이 빛을 발했다.

교주가 갑작스레 힘을 일으킨 것이다.

새하얀 로브를 두른 예언자를 거센 신성력이 옥죄었다.

"교주님, 제가 빙의자도 아니고 이런 신성에 타겠습니까?"

남자가 조소를 지었다.

가면 속 입매가 뒤틀린 것이 몹시 얄미웠다.

"진짜 빙의자도 아니고. 허어...."

교주는 어이가 없었다.

놈의 말 하나하나가 빙의자스러운 면모를 보였으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교주는 예언자의 조언을 떠올려 봤다.

"삼황자 건으로 직접 가시는 건 어떠십니까? 가신 김에 몇 가지 확인 좀 부탁드릴게요."

2황비는 대목사의 딸이다.

따져 본다면 친부인 대목사가 나서야 했을 일이지만, 교주는 예언자의 조언대로 직접 제국으로 향했다.

그 결과가 어떻던가?

"네놈 때문에 졸렬한 교주로 낙인이 찍혀 버렸고, 아스티아 교단과는 완벽하게 틀어져 버렸지."

알만교 교주가 가면을 쓴 예언자를 째릿 노려봤다.

그에 가면이 또 한 번 뒤틀린 미소를 그려 냈다.

"그건, 그쪽이 오래전부터 아스티아 교단을 호구 잡아서 생긴 일 아닙니까?"

"어허! 어딜 그런 경박한 말을!"

"같은 종교인들끼리 화합할 생각은 못 하고 호구를 잡아 대셨으니, 인과응보...."

또 한 번 거대한 신성력이 가면을 쓴 사내를 옥죄었다.

이번에는 물리력이 동반된 신성이었다.

쩌저적-.

가면이 갈라졌다.

"쿨럭! 끄으, 제법 아픕니다."

가면과 얼굴 사이로 핏물이 줄줄 흘렀다.

"엄연히, 삼신의 신성력은 서로 별개의 힘이며, 교리 또한 다른 법이니라! 신성이 흑마법사와 몬스터를 태우는 탓에 한데 묶여 불릴 뿐이거늘."

교주는 성경을 꺼내 들며, 가면의 예언자에게 가르침을 내렸다.

성경의 말이 읊어지자, 가면의 얼굴이 스르륵- 사라졌다.

약 두 시간이 지나서야 기도가 끝이 났다.

예언자가 슬쩍 입을 열었다.

"아스티아 교단은 무식한 놈들이죠."

교주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 무식하게 때려 부수고 몸뚱이로 모든 걸 해결하겠다는 놈들이 무슨 신성을 논한다고."

아스티아 교단은 '육신의 힘'에 최적화된 방식으로 신성을 다룬다.

이 힘이라는 게 부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회복하고 강화하고 때로는 전이의 기적이나 광범위 축복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단, 모든 힘의 근원은 신성력을 다루는 사람이다.

"우리의 성법처럼, 체계화된 신성력의 사용법을 익혀야 맞는 법."

반면, 알만정교회는 힘을 마법진과 비슷한 방식으로 사용한다.

몸에 지닌 신성을 '성법진'을 이용해 투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들은 갑옷이나 스크롤과 같은 소모품을 필수적으로 사용한다.

일종의 장비빨을 내세운 성직자들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돈에 집착하기 마련.

"대신, 비싸잖습니까?"

"그러나 제값을 단단히 하지."

황금을 뿌리고 다니는 교주의 행차는 역설적으로 그만큼 알만정교회가 금전에 가치를 둔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데.... 이 말을 하자고 그 긴 성경을 읽으신 겁니까?"

가면 위로 검은색 선이 찍찍 그어졌다.

질색한 표정이었다.

"본론은 식객으로 찾아온 자네가 말해야 하지 않겠나?"

"아, 그쵸. 일단 대목사의 딸은 불러들이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황제 성격에 봐줄 것 같진 않은데요."

"내, 대목사에게 물었는데, 딸만 열셋이라 하나쯤은 괜찮다더군."

가면 위로 휘둥그레진 눈알이 그려졌다.

"허! 대목사님은 아들도 열이 넘지 않습니까?"

"목사에게 자식은 다다익선일세."

"이야.... 종교인이 정략혼을 무기로 삼는 건 진짜 신기하네요."

예언자라는 사내는 경박하다.

놈은 자신이 필요할 때만 알만교를 찾는다.

그 필요라는 건 정보 교류를 빙자한 거래였다.

물론, 알만교 입장에서 큰 이득이 따르는 거래였다.

하여, 묻기를.

"뭘 원하고 뭘 줄 생각인가?"

"제국의 정보가 필요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에릭 주변에, 신분이 밝혀지지 않은 빙의자가 있는지. 혹은 특이한 존재가 있다거나."

"또 그 에릭인가? 집착하는 것도 아니고...."

가면의 눈이 오묘한 선을 그려 냈다.

"아직 2황비께서 계시니 아는 게 있지 않으십니까?"

"신성을 다루는 마법사가 나타났네."

"호오.... 그게 어떻게 되죠?"

"낸들 알겠나?"

가면의 눈이 동그랗고 반짝이는 그림을 그렸다.

"이름은요?"

"장 씨 성을 가진 두식이라는 이름일세. 빈자들의 흔한 작명이나 자네가 말하는 빙의자들의 이름이기도 하지."

"애매한데요?"

"그 에릭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사이라더군. 제국에 오기 전부터를 말하는 걸세. 분쟁 지대의 인연이라던가?"

가면의 눈이 아주 가늘어졌다.

"동부 대수림이라.... 그 장두식이라는 놈. 이번에는 제가 직접 봐야겠습니다."

* * *

"버스터 콜이라니...."

박창호가 말끝을 흐렸다.

니시다 료가 씹덕스러운 발언으로 분위기를 초 친 것이 여러 번이지만, 이번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콰아아앙――――――!!!

강렬한 태양이 떠오른 듯이.

대수림 한복판에 거대한 화염이 일어났다.

그 주변은 성창으로 초토화되어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로 변해 버렸다.

[버스터 콜 직관]

[창을 미사일처럼 던져 대는데, 어지간한 왕국 규모가 통째로 사라지는 중.]

[사진]

"그, 풍호 누나. 버스터 콜이 뭐냐 하면은-."

"여자인 나도! 버스터 콜 정도는 안다고! 그, 그리고 누나라고 부르지 말아 줄래?"

니시다 료가 설명을 해 주려 하자, 강풍호가 입을 가리며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그 광경에 박창호가 복잡오묘한 얼굴을 지었다.

'니시다는 또 커뮤에 글을 올리고, 풍호는.... 아아.'

박창호는 애써 눈을 돌려, 불바다의 한복판을 바라봤다.

그리고 붉은색 눈을 발견했다.

"저거 진짜 시우론의 눈 맞네."

에릭이 던진 창은 마경을 불바다로 만들더니, 이윽고 거대한 흑탑을 반으로 똑 부러트렸다.

쓰러지는 탑 위로 붉은 눈알이 선명하게 보였다.

어릴 적 영화에서 본 모양새였다.

"저거 찐이네."

니시다의 보장이 있었으니, 시우론의 강림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빙의자 흑마법사가 저런 걸 한다는 거지?"

소문만 무성했던 일인데, 실물로 보니 경악스러웠다.

아니, 지구의 창작물 속 괴물을 현세에 불러온다는 게 말이 되는 건가?

그러면....

"타노스가 강림하면 핑거 스냅 한 방에 인구 반이 날아가는 거냐?"

"씹, 말을 해도 그런 엿 같은 걸...."

웃긴 농담처럼 들리는 발언이었으나, 이 자리의 그 누구도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의 우린 죽었지.'

그들은 지구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즉, 여기서 살아야 한다는 건데.

"에엑! 어, 어쩌지?"

강풍호가 절망스레 소리치자, 그녀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단발머리가 찰랑였다.

하늘을 올려다본 강풍호의 눈망울에 찬란한 존재가 담겼다.

"대륙 인구의 반을 지우는 사기적인 존재를 강림시키려면, 대륙의 생명체 전체를 제물로 바쳐도 불가능할 거다."

압도적인 체구.

묵직한 중저음.

'와....'

동부 대수림에 성전을 일으킨 에릭이었다.

세 빙의자가 화들짝 놀라 몸을 곧추세웠다.

'무슨 스킨을 씌운 것 같네.'

거대한 날개를 뽑은 에릭.

한데, 그 날개 위로 태양의 불꽃이 일렁였다.

게임 속 캐릭터에 캐시 아이템으로 멋진 아바타를 입힌 느낌이었다.

[불꽃 날개] 정도의 이름이 되려나?

놀란 빙의자들을 향해 에릭이 지시 사항을 읊었다.

"다들 집중해서 저 탑을 봐라."

에릭이 신성의 힘을 담아 세 빙의자의 눈에 기적을 내려 줬다.

일종의 강화형 축복으로, 안력을 높인다거나 가시거리를 개선해 주는 등의 효과를 지녔다.

그들의 눈에 탑 내부 풍경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저거는 사무실이고."

"형광등? 아니, 저거.... 그, 진짜 회사 같은데요?"

"어어? 저거 VR캡슐 아닌가. 애니에서 봤던 건데."

세 빙의자가 각자의 감상을 알렸다.

에릭이 던진 [루-솔라스의 쐐기]는 흑마그룹의 신사옥을 부쉈다.

그 과정에서 흑탑의 한쪽 벽면이 무너졌다.

건물 내부에는 지구의 회사를 닮은 쨍한 형광등이 가득한 사무실이라든가, 기다란 수면 캡슐을 닮은 무언가로 가득한 방들이 즐비했다.

에릭 또한 그 모습을 면밀하게 살폈다.

'사무실이야 뻔한데.'

책상 위로 사람이 놓인 사무실.

기괴했으나, 루시퍼의 성향이 가미된 것을 보아 용도는 추측할 수 있었다.

실험체 살피는 걸 무슨 서류 보는 것처럼 여기는 거겠지.

루시퍼는 흑마법사식 지구 문물 재현에 집착하는 미친놈이었으니까.

한데, 저 캡슐은 처음 보는 장치였다.

"저 캡슐은 뭐지?"

"주인-. 크흠. 저게 뭐냐 하면요...."

서브컬처에 통달한 니시다 료가 열변을 토했다.

구구절절, 몇 년의 작품이 히트를 쳤니 뭐니. 원조는 무슨 작품이고 거기서 파생되어 한국에서는 겜판 웹 소설에서 자주 나타나는....

"간단하게."

"그러니까. 저기 들어가면, 가상현실 세계로 가는 장치입니다! 그거 빨간 약 파란 약 고르는 그 영화처럼요!"

에릭은 박지훈이던 시절 게임을 즐겼을 뿐이지, 이런 종류의 콘텐츠는 잘 몰랐다.

그래서 빙의자들의 도움을 받은 건데.

'꿈이든 가상현실이든 구현은 가능하겠어.'

빨간 약 파란 약이라는 비유가 아주 적절했다.

에릭은 단박에 이해했다.

충분한 납득이 되었다.

"몽마 형태의 힘으로 무한한 꿈을 만들게 하거나.... 혹은 마법으로 가상현실을-."

"그만."

연신 이어지는 니시다의 말을 끊고 에릭은 빙의자들에게 다음 지시를 얘기했다.

"셋 다 전선으로 간다."

성창으로 황무지가 된 마경.

마경에는 구렁텅이라 불리는 시꺼먼 터널이 하나 있는데, 그곳이 바로 마경의 핵이다.

구렁텅이 옆에는 두 동강 난 흑탑이 있고, 그곳에는 각종 빙의자와 흑마법사들이 도사렸을 터.

"저, 저희가...?"

"저기로 간다고요?"

"으으...."

세 명의 빙의자가 창백하게 질렸다.

때마침 마경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놈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는군."

끼예에에에에엑-!!!

거대한 와이번과 공포를 뿌리는 흑기사.

또한 흑탑 위로 보호막처럼 거대한 그림자가 솟구쳐 올랐다.

쉴 새 없이 폭격을 쏟아 냈으나, 그것이 잠잠해진 틈에 놈들도 대응을 시작한 것이다.

"전원 돌격하라-!!!"

아스티아 교단의 금빛 신성력과 루-솔라스의 타오르는 불꽃 사이로 검은 흑마력이 넘실거렸다.

교단의 기사들은 동부 대수림에서 유일하게 제 모습을 유지한 흑탑을 향해 돌진했다.

"쫄 것 없다. 저 장두식을 봐라. 잭슨도 그렇고. 너희도 그렇게 될 거다."

괴물한테 뭉개지고 으깨지거나.

어디 한쪽이 뚝- 떨어져 나가는 지옥도가 펼쳐졌다.

"어지간하면 재생되니 걱정 마라."

* * *

후웅-.

장두식의 몸이 잔상을 그렸다.

전신에 문신처럼 새겨진 마법진이 빛을 발했다.

황실 마탑주가 새겨 준 힘이었다.

몽둥이를 든 채로 순간 가속을 한 장두식은 거대한 용의 머리 위에 올라섰다.

휘이익-!

몽둥이가 쏜살같이 용의 머리를 두드렸다.

응집된 마력과 뒤섞인 신성력이 충돌하며, 거센 폭발을 일으켰다.

꽈앙――!

거대한 용의 머리가 폭사했다.

후두둑 떨어지는 살점을 뚫고 장두식이 바닥으로 낙하했다.

쿵. 뿌득.

마력으로 강화된 몸으로 뛰어내린 탓에 다리가 부서졌다.

"두식 형님, 어째 나보다 더 많이 다시는 것 같습니다."

잭슨은 올방 스탯과 스킬들의 시너지를 받아, 어지간해서는 상처를 입지 않는다.

가끔 어디가 터지긴 하는데.

그건 르웰의 탓일 가능성이 높았다.

우웅-.

"거, 워-메이지가 마법사의 미래라더니 진짜 그렇구만."

장두식은 순식간에 회복했다.

그야말로, 워-메이지의 사기성에 놀라 버린 것이다.

"그거, 무한 재생 해서 그런 것 아닙니까?"

"거참, 따까리 쉑.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장두식이 자신만만하게 다음 몬스터를 향하려던 때였다.

'어째 머리통이 간질간질한데?'

장두식이 등 뒤를 돌아보니, 날개를 뽑아 든 에릭이 보였다.

"형님 오셨수?"

"많이 잡았냐?"

"한, 천 마리는 패 죽였수다!"

장두식이 방긋 웃으며 에릭을 반겼다.

"오오-! 보스, 날개에 불이!"

잭슨은 진화한 날개를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에릭은 너스레를 떨었다.

"별것 아니다. 그냥 루-솔라스의 힘이 섞인 거지."

"오오.... 그냥 이펙트가 아니라 효과가 붙은 겁니까?"

"태양신의 힘. 교단의 신성력과는 조금 다르더군."

[이름 없는 신]이 된 이후로, 신성에 대한 이해도가 대폭 증가한 느낌이었다.

[보스]로 격상된 지금은 이 차이가 더욱 선명했다.

"뭐가 다른 겁니까?"

"루-솔라스의 신성은 자연현상이랑 비슷하다."

화르륵.

에릭의 손이 불꽃처럼 변했다.

그러고는 불꽃 사이로 자신의 반대 손을 들이밀었다.

"허어.... 저게 무슨!"

불꽃의 손 사이로 멀쩡한 손이 투과해 지나갔다.

기괴했다.

"신성력이라는 힘의 근원은 비슷하나, 구현 방식이 완전히 다른 느낌이지."

여기까지 말을 마쳤을 때.

'어쩌면.... 새로운 방식을-.'

에릭의 머릿속으로 강렬한 깨달음이 느껴졌다.

파앗-!

[신전이 보다 선명해졌습니다.]

87화 레이드 (1)

'신은 어떤 방식으로 힘을 내려 주는가?'

신전이 선명해졌다는 문구.

에릭은 이루 설명하기 어려운 강렬한 직감을 느꼈다.

이곳의 사람들은 간접적으로 신의 힘을 활용한다.

'힘을 내려 주는 법.'

신의 뜻을 빌려 오는, 신성을 세운다는 행위.

혹은 계시라든가 예언.

성기사나 사제들에게는 일상과도 같은 일이었으나, 에릭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다.

신의 음성은커녕 기척도 못 느껴 본 그다.

에릭은 사색에 잠겼다.

'받아 보지 못한 걸 주는 입장이 되어 버렸군.'

그런 에릭의 고민과 상관없이 교단의 성기사단은 착실하게 부서진 흑탑을 향해 나아갔다.

"다들 두려워 말라!"

마경을 헤치고 나아가는 길.

해가 들지 않는 어둠 속을 교황의 신성이 밝혀 주었다.

성창으로 초토화된 대지 덕분에 목적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저 멀리 반으로 부러진 탑이 보였다.

"기습이다!"

그렇게 진군하길 한참.

탑의 근처에 다가갈수록 어둠이 짙어졌다.

마경의 어둠 속에서 수도 없이 많은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성전기사단은 상층의 몬스터를 상대한다!"

사방이 전장이요, 피와 살이 난무하는 살육의 현장이다.

몬스터들이 기습을 가하고, 전술적인 움직임을 보이기까지.

"아스티아 님의 은총이 함께하신다!"

성기사들은 수도 없이 몸이 부서졌다.

하나, 교황의 힘은 그들을 온전한 상태로 돌려주었다.

"보스가 저렇게 집중을...."

에릭이 있는 후방에도 몬스터가 가득했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에 집중했다.

"거, 따깔아! 우측이 빈다!"

믿음직한 수하들이 함께다.

그러니 적진 한복판에서도 충분히 여유가 있었다.

하물며, 교단의 성기사단은 이루 말할 것도 없었다.

"아스티아 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니 두려울 것이 없느니라!"

믿음이면 믿음.

경험이면 경험.

실력이면 실력.

모든 것이 출중한 것이 아스티아 교단의 성직자다.

"율리우스, 에릭의 뒤를 지키거라."

에릭을 휘감은 신성의 기운은 그야말로 위대했다.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교황이 손을 보탤 정도였다.

교황은 직접 최전선을 맡고, 율리우스를 에릭의 호위로 보냈다.

"아버지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

교황이 날카롭게 신성을 벼려 내 검의 형상을 만들었다.

교황이 최선두에 나서니, 사기가 드높아졌다.

와아아아아-!!!

마경의 어둠을 찢어발길 기세였다.

그런 소란 속에서도 에릭은 고요했다.

'신은 어떻게 힘을 내려 주는가?'

그는 스스로 궁리하여 하나의 길을 찾고자 했다.

르웰과 강풍호의 대화를 엿들었던 경험을 떠올렸다.

'분명 나도 비슷한 일을 했어.'

에릭은 그때 느꼈던 연결에 집중했다.

목적은 하나.

자신을 신으로 여기는 존재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

'어디지?'

그리하여, 르웰의 기척을 찾고자 노력해 봤다.

빙의자가 아닌 존재여서 그런지, 생각보다 힘들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선이 연결된 느낌인데, 르웰의 경우는 스스로 그 선을 만들어 가야 했다.

하나, 괴물 같은 에릭의 재능은 금세 답을 찾아 갔다.

기척이 느껴진다.

'대충 저기쯤인가?'

에릭은 르웰의 기운을 찾아 시선을 옮겼다.

수많은 몬스터의 한복판.

끔찍한 괴물들 사이로 르웰의 기척이 선명했다.

'저기까지 들어가셨다고?'

도통 믿기지 않는 광경.

선의 끝은 마경 속 거대한 괴물들 한복판이었다.

흑마그룹의 탑과 지근거리였다.

'잘못 찾은 건가?'

그리 고민하자니, 엄청 커다란 오우거가 뭐에 부딪힌 듯이 방향을 꺾었다.

부자연스러웠다.

"끄아악-!"

때마침 우측 앞쪽에 있던 잭슨의 팔이 터졌다.

장두식이 그 광경에 '거참, 르웰 누님도 잘도 뽈뽈대는구만.' 중얼거렸다.

에릭의 뒤에 바짝 붙은 세 빙의자는 침음을 삼켰다.

흘깃.

서로 눈치를 봤다.

특히 강풍호가 놀란 모습이었다.

'설마, 르웰 사제님이 잭슨이란 오빠를....'

소름이 돋았다.

장두식의 투덜거림을 듣다 보니, 모를 수가 없었다.

잭슨이 무슨 힘을 썼고, 그 결과 르웰이 입는 피해를 대신 받게 되었다는 맥락이었다.

'르, 르웰 사제님한테도 빙의자는 사람 취급이 아닌 건가?'

교회에서 대화를 나눌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심지어 강풍호는 '뭔가'의 정체를 명확하게 알고 있다.

'수호자 클래스의 스킬.'

스킬 이펙트가 저렇게 선명한데 모를 수가 없지.

과거 대륙 온라인에 진심이었던 만큼, 모르는 스킬이 더 적다.

'잭슨 오빠도 빙의자는 분명한데.'

잭슨을 이 정도로 자세히 본 건 처음이다.

장두식과의 관계를 보아하니, 에릭과도 친밀해 보였다.

'어쩌면, 에릭 오-, 신께서 알고 계신 빙의자들의 지식이 다 저 사람한테서 나온 걸지도?'

그런 추측이 들었으나, 아는 척은 하지 않았다.

에릭이 미리 말하지 않았다는 뜻은 곧 알 필요가 없는 일이라는 의미였다.

눈치가 있지.

"창호야, 저거 수호자 스킬 아니냐? 3차 전직에서 쓰는 궁극기!"

그때 니시다 료가 소리쳤다.

박창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했다.

저 눈치 없는 새끼.

이걸 반응해 줘?

'그랬다가는....'

후웅- 빠악!

박창호의 예상대로, 순식간에 몽둥이가 날아들었다.

장두식이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이, 빙의자들의 앞에 섰다.

치익-.

온몸에서 문신처럼 마법진이 빛을 발했다.

진짜 쌍긴팔 문신을 한 조폭 같은 모습이었다.

"흐익!"

니시다 료가 몸을 덜덜 떨었다.

박창호와 강풍호도 마찬가지.

셋 다 미궁에서 죽도록 맞은 기억이 떠올랐다.

"두식아, 잘했다."

순간 집중이 끊겼던 에릭도 장두식의 칼 같은 대응에 고개를 끄덕였다.

"거참, 이놈들 사람 만들려면 갈 길이 멀겠수다."

"두식이, 네가 고생 좀 해라."

나름 진지하면서도 가벼운 분위기였다.

"-치유."

에릭은 잭슨과 세 빙의자를 치료하며 다시금 느껴지는 연결에 집중했다.

'자신을 믿는 자에게 보답해 주고자 하는 의지.'

르웰의 기척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마치 무언가 선이 이어진 느낌.

마경 속에 있어서 그런가?

소통은 어려웠으나, 대신 이번에 얻은 루-솔라스의 힘을 전해 주는 건 가능해 보였다.

'순수한 불의 힘.'

은밀함이라는 르웰의 개성과 잘 어울리는 힘일 테지.

마침 상황도 딱 좋지 않던가?

'르웰의 눈치라면 이 힘을 어떻게 써야 할지 잘 알 수 있을 거야.'

에릭이 힘을 전해 주기 시작했을 때, 등 뒤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후방을 지켜 주던 율리우스의 눈빛이었다.

숫제 미친놈들 보듯이 눈빛이 흔들렸다.

'소풍을 온 것도 아니고....'

지들끼리 패고 치료하고 난리도 아니다.

심지어 그들을 이끄는 에릭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명상하는 데 여념이 없다.

'지고한 힘.'

그만큼 대단한 힘이 느껴지긴 했으나, 상황이 상황이다.

언제까지 가만히 있을 생각이지?

눈앞에는 인외 마경이 펼쳐졌거늘.

고오오오—————

마경의 핵.

미궁의 오물을 내뿜는 구렁텅이가 지근거리에서 괴성을 토해 냈다.

그 섬뜩함에 신성이 일렁일 정도였다.

'마경의 몬스터는 미궁이랑 동일하건만....'

그런데도 저런 덤덤한 모습.

아니, 무관심한 태도다.

율리우스가 콧잔등을 문지르자니, 에릭이 눈을 떴다.

번쩍-!

금빛 파동이 에릭을 중심으로 흩어지고, 그가 율리우스를 향해 다가섰다.

"후방을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묘하게 자신이 넘치는 모습.

"성자 에릭, 대책이 있는가?"

율리우스가 물었다.

전투 한번 없이 명상만 한 에릭인데, 막상 변화는 없어 보였다.

표정이 자신만만하다는 정도?

그에 에릭이 율리우스와 함께 최전방의 교황을 향해 다가섰다.

"왔는가."

교황의 진군은 멈춘 상황.

불과 백여 미터 거리에 두 동강 난 흑탑과 그 앞의 구렁텅이가 선명했다.

또한 부러진 탑 앞에서 루-솔라스의 성자가 괴성을 지르며 몸부림치는 모습이 보였다.

"구해야 하거늘."

교황이 나직이 읊조리자, 에릭이 이를 만류했다.

"성하, 저희의 적은 저놈입니다."

에릭의 손끝이 구렁텅이에서 올라온 거대한 몬스터를 향했다.

우어어어어———!

미궁 30계층의 계층주.

거인(巨人), 루드릭의 기사.

30미터짜리 회색 거인이 대검을 내들었다.

거인을 따라 수많은 회색 병사들이 구렁텅이를 빠져나왔다.

말이 병사지, 5미터는 넘는 거인들이었다.

희번뜩—!

부러진 탑 위로 떠오른 붉은 눈알이 움직였다.

동공의 끝이 아스티아 교단을 향하자, 거인으로 이뤄진 몬스터 무리가 울부짖었다.

―Ep. 19 레이드

"끄아아아악-!!!"

성자, 레이 솔라스.

그는 흑마그룹에 붙잡혔다.

흑마력에 구속된 상태로 신체가 조각조각 해체되어 제물로 바쳐졌다.

'아, 아버지-.'

신은 응답하지 않는다.

태양이 뜨지 않는 마경에서, 태양신 루-솔라스의 기운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팔이 사라지고 다리가 어둠에 삼켜졌다.

"후훗."

먼 거리에 있음에도, 새하얀 여인의 웃음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조롱하는 듯하면서도 통쾌해 보이는 그런 목소리였다.

'아, 아버지!'

차라리 아스티아 교단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죽음에 순응했을지도 모른다.

하나, 태양신의 힘이 듬뿍 담긴 성물을 본 이상 그는 희망을 버릴 수가 없었다.

어쩌면 아스티아 교단이 자신을 돕는 것이 아닐까?

교단 틈에 루-솔라스의 성녀가 함께일지도 몰랐다.

'누나가 던진 창일 거야.'

종교들끼리는 서로 사이가 나쁘다고 하지만, 흑마법사를 두고 적대할 정도는 아니다.

'나, 나를 구해 줄 거야!'

마경의 구렁텅이에서는 연이어 몬스터들이 나타났고.

그것들은 전부 아스티아 교단을 향해 돌진했다.

마치 자신이 당했던 것처럼, 끝이 없는 파도처럼 몬스터들이 몰아쳤다.

'저들도 답이....'

미궁의 계층주다.

심지어 최상층으로 분류된 30계층의 주인이다.

우어어어어—.

30미터의 회색 기사가 함성을 내질렀다.

녹슨 거인의 철갑옷을 타고 굉음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회색 병사들이 검날을 수평으로 눕혔다.

'일점돌격....'

레이 솔라스는 침음을 삼켰다.

수십 년 전, 미궁 30계층 공략에 참가했던 태양성국의 군대가 떠올랐다.

'공략대의 강자들 중 고작 열댓 명이 살아 나왔어.'

생존률 5%, 최악의 공략 기록이었다.

알려진 바로, 첫 돌격에서 반수가 죽어 버렸다고....

쿠웅——!

거인(巨人), 루드릭의 기사가 발을 굴렀다.

대지가 뒤흔들리고 그와 동시에 회색 병사들의 위로 검은색 그림자가 일렁였다.

'저건 막을 수 없는 공격이야.'

방어 불가라는 괴현상을 일으키는 돌진이다.

무조건 피격당한다는 괴상한 힘을 사용하는 것이 루드릭의 기사였다.

'피하기엔 수가 너무 많아.'

사방을 빽빽하게 채운 5미터 크기의 거인병들을 대체 어떻게 피하겠는가?

그림자를 두른 병사들은 일종의 무적 상태나 다름없으니.

그리 생각하던 차에, 변화가 일어났다.

콰앙——————!

짧은 굉음과 함께 거대한 유성우가 마경의 어둠을 뚫고 떨어졌다.

성자는 일말의 기대를 품었다.

'설마....'

압도적인 위력이었다.

그 여파로 사방에 신성의 불길이 일렁일 정도였다.

마경의 어둠이 일순 밝아질 정도.

하나, 성자의 기대와는 다른 말이 들려왔다.

"멍청한 놈들."

"훗, 너무 그러지 마세요. 우리 세계에는 토마스처럼 미궁에 빠삭한 사람이 없잖아요?"

"그.... 대표님께 한 말이-."

"알아요, 나의 토마스가 그럴 리가 없죠."

다시금 흑마법사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레이 솔라스는 으득 이를 갈았다.

이 말을 들려주는 것 또한 자신에 대한 모욕이 분명했다.

"역시, 토마스의 말대로네요. 30계층의 주인을 불러온 건 옳은 선택이었어요."

희뿌연 연기가 넘실거렸다.

흩날리는 신성의 잔향 너머로 온전한 상태의 회색 거인들이 가득했다.

거인들의 위로는 여섯 날개를 꺼내 든 찬란한 존재가 휘광을 두른 채 뭐라 소리치고 있었다.

'아스티아 교단의 성자.'

신의 특징을 지녔으니, 어렵지 않게 알아봤다.

자신의 누이, 태양신의 성녀는 아니었지만 그 또한 자신과 비슷한 존재였다.

느껴지는 바로, 저자가 루-솔라스의 창을 던진 게 분명했다.

'아스티아 교단이 루-솔라스의 성물을....'

이상한 일이었다.

'저 힘을 보아하니 가능할 것도 같은.... 어?'

레이 솔라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성창을 건물에 꽂았지?'

저토록 강대한 힘을 지닌 존재가, 창의 도착점을 잘못 정했을 리가 없다.

아이처럼 생겼고 그렇게 행동하는 레이 솔라스지만, 실제로 살아온 세월은 백 년이 훌쩍 넘었다.

하나의 행동에서 많은 뜻을 읽어 낼 경륜이 쌓였다는 의미다.

'어째서....'

한탄스러웠다.

자신의 납치를 몰랐을 리는 없을 테지.

그러면 의도한 게 아닐까?

'왜 나한테 던지지 않은 거지?'

태양신의 성물을 자신에게 날렸더라면....

몸이 제물로 바쳐지지도 않았을 것이며, 오히려 적진 한복판에서 계층주의 뒤를 노려 기회를 만들 가능성이 생겼을 거다.

'몸이 움직이질 않아.'

그러나 루-솔라스의 성물은 애꿎은 탑에 꽂힌 상황.

거리가 멀다.

다가가기엔 팔다리가 없다.

"우훗, 이제 심장이랑 머리만 남았군요. 거기서 발버둥 치면서 아스티아 교단의 몰락을 지켜보세요."

마키아가 짙게 웃었다.

저토록 거리가 먼데, 귓가에 속삭이는 느낌.

레이 솔라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대표님, 왜 땅을 저렇게 부숴 버렸는지 걱정이 좀 드는군요."

"토마스가 말하던 공략법에 있는 내용인가요?"

"그, 그건 아니지만, 어딘가 찝찝한 기분이.... 허!"

파괴된 지형 덕분에 거인병들의 돌진 방향이 바뀌었다.

아스티아 교단의 군대는 일사불란하게 세 무리로 뭉쳤고, 모든 거인병들이 그곳을 피해 지나쳤다.

"토마스, 왜 그렇게 심각한 얼굴이에요?"

"대표님, 저놈들이 공략법을 아는 것 같습니다."

"예?"

"계층주를.... 저, 저건! 패턴을 암기하지 않으면 보일 수 없는 행동입니다!"

성자를 농락하는 것도 잊은 채, 마키아는 토마스의 얼굴을 바라봤다.

진심으로 당황스러운 모습이었다.

"혹시라도, 다음 패턴을...."

가드 불가 속성의 돌진.

게임 속에서는 흑마법사들의 격리 마법으로 파훼하는 공략이 유행했다.

한데, 지금은 지형을 바꾼다는 괴기한 방법으로 첫 패턴이 끝났다.

'다음은 장판을 까는군.'

그리 놀라 있자니, 계층주가 검을 꺼내 들었다.

일반적으로 탱커가 [도발]을 써서 반대 방향으로 공격을 유도해야 하는 패턴이다.

그렇지 않으면, 즉사에 준하는 피해를 입히는 공격이 날아온다.

게다가 그 여파로 초당 체력의 5%를 깎는 필드 장판까지 깔린다.

"다들 병사들을 죽여라!"

하늘 높이 떠오른 아스티아 교단의 성자가 소리쳤다.

쩌렁쩌렁 울리는 목청이 마경을 뒤흔들었다.

공략법 따위는 모르는 멍청한 판단력에 토마스는 안도했다.

"아무래도 제 기우였나 봅니다."

* * *

세 빙의자는 실로 당혹스러웠다.

공략법을 잘 안다던 에릭이 미친 짓을 벌였기 때문이다.

우어어어어—.

30미터의 거인이 검을 뽑아 올리며 소리쳤다.

"아, 아니. 저거 맞으면 탱커 빼면 다 즉사 아니냐?"

유사 즉사기 패턴.

체력이 높은 탱커 클래스가 아니면 즉사하는 수준의 대미지가 들어온다.

딸피로 살아남아도, 이어지는 화염 장판에 당해 죽게 된다.

그래서 보통 [강제 도발] 계열의 스킬을 지닌 탱커가 보스의 방향을 바꿔 공략을 진행한다.

한데, 에릭은 거인의 병사들을 죽이라는 이상한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 잡으면 2페가 날먹이긴 해도, 저걸 어떻게 버틴다는 거지?"

나름 공략에 빠삭한 박창호가 열심히 머리를 굴려 봤다.

돌진 패턴을 잘 피했으니, 뭔가 이유가 있으리라 여긴 것인데.

"성기사들은 체력이 높은 편이라서 그럴지도-."

"그러면 우린 다 뒈진다는 말 아니냐?"

"그럴 리가...."

괜한 말에 절망감이 짙어졌다.

그때였다.

쿠웅—!

검은 마경의 하늘 위로 쨍한 금빛이 일렁였다.

여섯 날개를 휘감은 성기사가 [개벽의 검]을 뽑아 들었다.

에릭이 쏜살같이 허공을 박차며 거인을 향해 날아들었다.

'체급부터가....'

그토록 찬란한 신성을 머금었음에도, 가능성이라고는 단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평소라면 찬양했을 빙의자들이 암울해할 정도였다.

보이는 광경이 그러했다.

후우웅——.

수십 미터의 대검을 수직으로 내리긋는 거인과 작은 검을 횡으로 올려 치는 에릭.

성패는 뻔해 보였다.

그리 절망에 빠져 있자니.

쩌엉——————!

쨍한 공명음과 함께 에릭의 검과 거인의 검이 맞닿았다.

수십 배의 크기 차이를 이겨 내고서 두 존재의 검이 허공에 정지했다.

인간(人間)이 거인(巨人)과 합을 겨루는 모습.

싸아아아아.

신성의 빛이 찬란하게 번져 갔다.

개벽의 검을 타고 거대한 검광이 허공을 갈랐으며, 그 길을 따라 강렬한 빛이 번뜩였다.

"하, 하늘이!"

그 광경에 마경의 어둠이 반으로 갈라졌으니.

결국 거인이 검을 회수할 지경에 이르렀다.

"막을 수 있는 존재가 있으니까.... 공략법도 바뀌는구나."

88화 레이드 (2)

에릭은 차분했다.

다 아는 내용을 반복하는 게 전부였으니, 어려울 게 없었다.

'미리 준비해 둔 보람이 있네.'

수십에서 수백 배까지 커진 미궁의 스케일을 감안해서 어릴 적부터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 온 결과였다.

여기에 어울려 준 리페로제의 덕도 크게 봤다.

'이쯤이면 막을 수 있다.'

계층주의 패턴, 이론상 방어가 가능해 보였다.

현지인들은 게임처럼 공략하는 대신, 사람의 방식으로 계층주를 사냥해 왔다.

당연한 얘기였다.

우어어어어어―.

루드릭의 기사가 다음 패턴을 뽑아 들었다.

이번에는 횡으로 검을 휘두르는 방식이다.

압도적인 위력의 검기를 쏘아 내는 기술이다. 순수 위력만큼은 좀 전의 수직 베기 패턴보다 강력했다.

하나, 에릭은 자신이 있다.

'혼자서는 어렵겠지만.'

이곳에는 에릭보다 강한 사람이 둘이나 존재한다.

힘의 범용성은 다를지언정, 순수한 위력으로는 교황과 율리우스가 한참 앞서 있으니까.

'아직도 본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그 증거는 교황이다.

그는 여전히 아이였다가 노인이 되며 변화무쌍한 모습을 내보였다.

다만, 아직은 교황이 나설 차례가 아니다.

'성하의 힘은 아껴 둬야 한다.'

그러니 에릭은 율리우스를 바라봤다.

"율리우스 님, 준비하시죠."

"크흐흐-. 교황 성하의 허가를 받았다고 성전기사단장을 부려 먹는 성자라니."

율리우스가 농담을 내뱉으며 대검을 꺼내 들었다.

[개벽의 검]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강력한 무기였다.

[전설급 – 아스티아의 대검]

'크기가 엄청나군.'

에릭이 탐을 낼 만큼 커다랗고 단단해 보이는 대검이었다.

그걸 든 율리우스는 아주 든든해 보였다.

"반 남았습니다!"

뒤에서는 성기사단과 성가대가 거인병들을 사냥하는 중이다.

그들이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루드릭의 공격을 막아 내야 했다.

"슬슬 준비하시죠."

거인의 검이 점점 커다래졌다.

후웅――.

바람을 찢으며 압도적인 크기의 검이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날개의 쿨타임인 지금, 율리우스의 도움이 절실한 순간이었다.

"지금입니다!"

소리침과 동시에 두 사람이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땅을 부수는 발돋움은 거인의 검을 향해 이어졌고.

콰앙―!

숫제 대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퍼져 나갔다.

횡으로 내긋는 거인의 검을 수직으로 올려치는 두 자루의 검이 막아 냈다.

치지직-.

짧은 힘 싸움에 검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우세는 명확했다.

아무리 거대하고 미궁의 힘을 사용하는 괴물이라고 하나, 신성(神聖)은 그것들의 천적이다.

'모션을 막아 버리면 그만이지.'

그 결과, 계층주의 패턴을 캔슬해 버리는 기예가 가능해졌다.

"공략법도 모르는 우리가 어떻게 미궁을 공략했냐고?"

이 또한 지고한 강자였던 리페로제가 알려 준 현지인만의 방식이었다.

"에릭, 미궁의 공략대는 죄다 벽을 넘어선 강자들이다. 네가 말하는 키보드나 깔짝이던 놈들과 같겠느냐?"

처음에는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싶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실로 옳은 말이었다.

'내가 벽을 넘어서니 보인다.'

게임과 달리, 막을 건 막아 낼 수 있다.

콰앙―――!

거인의 검이 뒤로 밀려났다.

30미터짜리 거인이 고작 2미터가 조금 넘는 두 사람에게 밀려나 뒤로 넘어가는 광경.

가히, 인간의 위대함을 실감케 하는 모습이었다.

"성자님 말씀대로 끝냈습니다!"

때마침, 성기사단이 루드릭의 병사들을 다 정리한 모양이다.

"단장님,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즉, 이제는 공세를 취할 차례라는 말이다.

"크하핫-! 중검술이 왜 중검술인지를 보여 주마."

* * *

박창호는 세 갈래로 나뉜 교단의 중심에 들어섰다.

성자와 교황의 명령이 내려왔다는 이유만으로, 수백의 성기사단이 자신의 말에 따라 움직였다.

'내가 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박창호는 손발이 덜덜 떨렸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에릭에게 구원을 받아 신성의 은총을 받게 된 입장이다.

당연히 에릭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건 맞다.

그런데도 지금의 상황은 너무나도 부담스러웠다.

우웅-.

미약한 효과음과 함께 바닥에서 희미한 회색빛이 일렁였다.

"지금 왼쪽으로!"

박창호가 재빨리 소리쳤다.

몬스터의 크기가 커졌듯이, 놈들이 만드는 함정이나 공격의 규모도 거대해졌다.

하나, 현지의 성기사들은 게임 캐릭터 따위랑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움직임을 내보였다.

후웅-.

박창호의 운반을 담당한 성기사가 그를 어깨에 이고 자리를 옮겼다.

'수백 명이 이렇게 빠르게 움직인다고?'

박창호가 소리친 뒤로 1초 내에 모든 대피가 이뤄졌다.

그 즉시.

콰앙――――――!

그들이 있던 자리에 즉사(卽死) 효과를 지닌 회색 불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계층주가 사용하는 랜덤 패턴이다.

'풍호는-.'

박창호는 흘깃 옆을 살폈다.

단발머리 미녀가 잘생긴 성기사의 어깨에 앉아 이리저리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그녀가 지나친 자리로는 마찬가지로 즉사기 패턴이 솟구쳤다.

조금 찝찝한 기분이 들어 박창호는 니시다 료의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고유 특성.'

생각 외로 니시다도 제 역할을 잘해 주는 중이었다.

"흐어억!!!"

니시다가 반응하면, 그 즉시 모든 인원이 한쪽 방향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30계층부터는 잘 모른다던 니시다였으나, [즉사 감지] 특성이 제 효과를 발휘하는 모양이었다.

우어어어―――.

그때 거인의 함성이 들려왔다.

30미터짜리 거인을 타고 두 명의 성기사들이 검을 내지르고 있었다.

거인이 고통스러운 듯이 괴성을 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림자 사이로 5미터 크기의 병사들이 소환되기 시작했다.

'진짜 바로 2페를 보려고 그러나?'

병사들이 소환된다는 뜻은 계층주의 체력이 깎이고 있다는 의미였다.

"딜컷! 아니, 공격 중지!!!"

박창호는 소환된 병사들의 개체 수를 조절했다.

그러면서도 즉사기 패턴을 살피며 지시를 이어 나갔다.

그러기를 한참.

조금의 여유가 생겨 거인, 루드릭을 바라봤다.

녹슨 회색 갑옷을 입은 30미터짜리 거인은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존재였는데.

'갑옷을 벌써 다 깠다고?'

반쯤 나체가 된 거인의 주위로 금빛이 반짝였다.

거인의 본체는 신성에 난도질당하는 중이었다.

'커진 게 마냥 나쁜 건 아닐지도?'

에릭과 율리우스는 루드릭의 지근거리에 바짝 붙어서, 물 흐르듯이 공격을 이어 나갔다.

거인의 발목으로는 성전기사단이 모여들어 검을 휘둘렀다.

큰 대미지는 주지 못하지만 장두식과 잭슨도 한 손씩 거드는 중이었다.

'그 장두식이 저렇게 초라해 보일 줄이야....'

30미터짜리 거인에 비하면 장두식은 아주 작았다.

'뭔가 빛나는 풍뎅이처럼 보이네.'

쌍긴팔 문신에서 푸른빛을 내뿜고 반삭 머리에서는 금빛 신성이 일렁였다.

장두식은 거인의 안구 사이를 오가며 몽둥이를 휘둘렀다.

작은 인간과 30미터짜리 거인의 전투는 인간을 초라하게 만들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굉장하게 느껴졌다.

'이게 진짜 이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

루드릭의 기사는 어찌할 바를 몰라 팔을 휘적대는 게 전부.

그 결과 그를 뒤덮은 녹슨 갑옷이 다 부서져 가는 상황에 이르렀다.

'진짜 2페를 바로 넘어가네.'

그 말인즉슨, 이제야 본 공략이 시작된다는 말이다.

보통의 레이드는 2페이즈부터가 중요하기 마련.

'나도 준비해야겠지.'

박창호는 마음을 다잡았다.

콰앙!

에릭이 거대한 신성의 기둥을 세워 거인을 뒤덮었다.

압도적인 크기의 거인이 그보다 거대한 신성력에 잡아먹히는 모양새였다.

미리 준비했던 신호다.

박창호가 소리쳤다.

"살려 둔 거인 중에 이마에 표식이 생긴 놈을 죽여야 합니다!"

우어어어―――!

거인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살려 뒀던 20기의 거인병들이 정지한 듯이 멈춰 섰다.

하나씩 이마에 표식이 생겨나고 성기사들은 그러한 거인병을 골라내 죽였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에릭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빙의자들이 이런 쪽으로는 뛰어나.'

2페이즈, 계층주 루드릭이 살아남은 병사들에게 표식을 새기는 것이 시작이다.

'표식이 생기자마자 찾아내는군.'

이 표식이 새겨진 병사를 5초 내로 죽이지 않으면, 살아남은 병사의 수만큼 필드에 영구 지속 페널티가 부여된다.

안 그래도 마경의 어둠 속인데, 여기다가 온갖 부정적인 효과가 더해진다는 의미였다.

하나, 공략법을 잘 알아서 이 또한 별문제 없이 넘어갔다.

'패턴은 완벽하게 똑같아.'

20기의 거인병만 살려 두면, 2페이즈는 날먹이 가능하다.

루드릭이 추가로 병사를 소환하지 않고, 남은 병사들에게 표식을 새기기 때문이다.

"표식 새겨진 개체 전부 사살했습니다!"

필드의 거인병들이 모두 정리되었다.

'압도적인 공략 속도.'

이제 남은 것은 3페이즈.

3페이즈는 광폭화다.

그냥 계층주 본체의 공격력이 증가하고, 틈틈이 즉사의 오러를 두른다는 변화가 있는데.

이 또한 빠르게 끝내 버릴 수 있다.

'이렇게 빨리 끝낼 줄은 생각도 못 하겠지.'

구렁텅이 너머의 흑탑.

제법 먼 거리였으나, 에릭의 눈에는 탑 위에 선 흑마법사들의 표정이 매우 잘 보였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놀라는 모습이 퍽- 우스웠다.

분명 이걸로 교단의 진군을 막아 보겠다는 심산이었을 터.

'시우론의 눈도 만능은 아닌가 보군.'

흑마법사건 성기사건 성자건.

아무리 힘이 강해도 힘이라는 건 결국 소모되기 마련이다.

그러니 루-솔라스의 성자가 물량 공세에 못 이기고 저렇게 잡혀 간 거겠지.

'나도 엄연히 한계가 있긴 하지.'

1만 골드로 신성력을 Max로 만드는 에릭.

그도 돈이 떨어지면, 신성력이 소진되고 자연 회복을 기다려야 할 터였다.

'89억 골드쯤 있으니까.'

물론, 돈은 썩어 넘친다.

또한 힘을 소진한 시우론과 달리, 에릭과 율리우스는 굳건하다.

"단장님! 이제 죽여도 됩니다!"

에릭이 날개를 뽑아 들며 소리쳤다.

* * *

기울어진 흑탑에서 보이는 풍경은 사뭇 장엄하기 그지없었다.

계층주, 거인 루드릭의 기사를 상대하는 성기사들의 모습은 가히 신화적인 광경이었다.

아아——————.

마경에 울려 퍼지는 성가대의 음율까지 더해지니, 정말 성서의 재현과도 다름없어 보였다.

'패턴을 캔슬해?'

토마스의 입장에서는 진짜 게임 속 보스전이 떠오를 만큼 놀라웠다.

무슨 BGM을 깔아 놓은 듯이 울려 오는 웅장한 사운드.

거인, 루드릭의 기사와 맞서 싸우는 금빛 휘광을 두른 성기사들.

'거인병을 20마리만 살려 뒀다고?'

다만, 그는 그 웅대한 광경보다 죽어 가는 계층주의 모습에 더욱 충격을 받았다.

처음엔 운이라고 여겼다.

한데, 지금은 명백히 공략법을 아는 모습이 아니던가?

"어, 어떻게 공략법을!"

토마스가 몸을 비틀거렸다.

시종일관 미소를 짓던 마키아의 얼굴에도 지독한 무표정이 내려앉았다.

모든 흑마법사들이 비슷했다.

누가 봐도 계층주 루드릭의 기사가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으니까.

다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아직 계층주가 죽어서는 안 됐다.

스르륵.

마키아가 검은 베일을 걷어 올렸다. 흐릿한 흑색 동공이 더욱 혼탁해졌다.

"토마스, 루-솔라스의 성자를 온전히 바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대주주를 위한 선물이 바로 루-솔라스교의 성자다.

신의 자식이라는 이름값에 걸맞게 막대한 힘을 품은 존재였으나, 그만큼 소화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상황.

"시우론이시여."

마키아의 걱정 어린 얼굴에, 토마스가 주주를 바라봤다.

철그럭-.

시우론이 토마스를 향해 다가섰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두른 갑옷.

그가 손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 마디까지도 철갑이 둘러진 상태였다. 약지를 두른 갑주 위로 샛노란 반지가 돋보였다.

그 색이 흐릿했다.

"힘이...."

미궁 30계층의 계층주를 불러오느라 반지의 힘이 소진된 상황.

앞서 성자를 납치하는 데에도 제법 많은 힘을 소모했으니, 자연 회복에는 족히 며칠은 걸릴 것이다.

"차라리 성자를-."

"토마스, 그건 안 됩니다."

성자를 바쳐, 시우론의 힘을 회복해 봤자, 본말전도나 다름없는 일이다.

대주주, 태초의 흑마법사를 위해 바치는 성자다.

그래야 의미가 있을 터.

그리 걱정에 잠겨 있자니, 전장에 변화가 일어났다.

"계층주가!"

우어어어어————!!!

마경에 울려 퍼지는 계층주의 비명.

금빛 날개를 뽑아 든 에릭이 허공으로 기다란 신성의 검기를 쏘아 올렸다.

키이잉——!

목 둘레만 수 미터에 달하는 루드릭의 기사다.

그런 거인의 목에 커다란 균열이 일어났다.

그 균열을 향해 성전기사단장 율리우스가 대검을 쑤셔 넣었다.

푸욱-!

회색빛 핏물이 흩뿌려졌다.

"야만적인 성기사 놈들."

마키아의 미간이 구겨졌다.

무슨 도축하듯이 거인의 목을 따는 2미터의 성기사들을 보아하니, 절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쿠구구궁——!

거인의 목이 바닥을 굴렀다.

머리통이 떨어진 여파만으로 사방으로 흙먼지가 일었고, 목 없는 거인의 몸이 구렁텅이 방향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왜, 왜 이쪽으로!"

원래였다면, 구렁텅이로 사라졌어야 할 거인의 몸뚱이건만, 날개를 뽑아 든 에릭이 그 방향을 틀었다.

'저게 아스티아 교단 성자....'

그리하여, 거인의 몸은 흑탑을 향해 쓰러졌다.

콰앙——————!

짧은 굉음과 함께 탑이 뒤흔들렸다.

"저, 저 괴물들!"

거인을 죽이고 다가서는 성기사단의 모습은 실로 공포스러웠다.

흑마법사들은 하던 일을 멈춘 채 멍하니 그 진군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제가 나서는 게 좋겠군요."

꾸드득-꾸득.

흑탑 앞에서는 검은 장막이 루-솔라스의 성자를 먹어 치우는 상황.

아직도 성자의 심장과 머리가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토마스, 부탁할게요."

마키아가 짙게 웃으며 토마스를 바라봤다.

* * *

"허어...."

교황은 경악했다.

성자 에릭이 성기사단의 지휘권을 달라고 요청했고, 교황은 이를 들어줬다.

그 결과가 어떻던가?

"지고한 계시로다."

에릭은 거대한 계층주의 행동을 예측해서 군대를 지휘했다.

게다가 시시각각 적재적소에 빙의자들을 배치해 적절한 대응을 하게 만들었다.

"신의 부름을 받은 존재로다."

교황이 박창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페로제의 말이 실로 옳았다.

직접 확인했다.

"성하, 저는 그저 성자님의 뜻을 따랐을 뿐입니다."

교황의 치하에 박창호가 정중히 고개를 내리깔았다.

그는 그저 공략법대로 소리친 게 전부였다.

"그럴 리가, 그대들의 인식도 바뀌어야 할 때가 온 게야. 노란 피부를 지닌 빙의자가 신의 뜻을 받았노라!"

교황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들의 무력은 한미했으나, 지시는 올발랐다.

피할 때를 미리 알린다거나.

갑자기 공격을 멈추라고 하거나.

처음에는 따르기 어려운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말은 옳았다.

"성자 에릭, 창에 대한 것부터 시작해서 도무지 할 얘기들이 많지만...."

교황은 에릭을 바라봤다.

'아스티아 님의 힘으로 어찌 태양신의 불꽃을.'

일반적인 성자들과는 다른 모습.

사실 말이 안 되는 수준으로 이상한 일들이 많았다.

그러나 교황은 이조차 받아들었다.

[그를 믿어라.]

아스티아 님의 안배.

지고한 뜻이 있을 터였다.

"내,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볼 지어다."

"성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에릭은 고개를 조아렸다.

"슬슬, 끝을 낼 때가 왔구나."

교황이 손을 내들었다.

성기사들이 남은 성창을 들어 성전기사단에게 전달했다.

남겨 둔 성창을 소모해 지근거리에서 흑탑을 부숴 버리려는 의도였다.

'아직 살아 있구나.'

교황은 흑탑 앞에서 제물로 바쳐지고 있는 루-솔라스의 성자를 구하려고 했다.

그때였다.

쿠웅-!

묵직한 진동이 일며, 허공에 어둠이 일렁였다.

에릭이 재빠르게 창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

'포탈.'

[흑마법사]의 스킬이다.

포탈의 일렁임 사이로 새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투명한 유리 같았다.

가녀린 발끝부터 늘씬한 다리가 나오더니, 이내 정갈한 오피스 룩을 입은 여인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흑마그룹의 대표, 마키아라고 합니다."

오피스 룩에 베일을 덮어쓴 기이한 여인이었다.

베일 안으로 비치는 붉은 입술이 요사스럽게 느껴졌다.

그녀는 베일을 벗으며 두 손을 하늘 위로 올렸다. 대화를 요구하는 제스처였다.

교황이 손바닥을 펴, 군대를 멈춰 세웠다.

"저는 루-솔라스의 징벌병으로 전장을 전전하던 죄인이었습니다."

새하얀 피부에 붉은 입술.

그리고 탁한 동공에 웃음기 섞인 말투.

그리고 이어지는 말.

"신의 뜻을 모른다는 이유로 열세 살의 저는 죄인이 되어 태양성국의 징벌병이 되었죠."

그녀는 혼자였으나 존재감이 압도적이었다.

"밤에는 죄수들이 저를 겁탈했고, 낮에는 제국 병사들의 창을 받아 내야 했습니다."

마키아는 덤덤하게 자신의 얘기를 읊조렸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치다 보니 어느새 밤의 살인귀라 불리게 되었고, 흑마법사들과의 전장에서 버려졌죠."

교황은 일순 당혹했으나, 잔잔하게 이어지는 마키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런 저와 논담을 나눠 보실 생각 없으신가요?"

명백히 그녀는 한 사람으로서 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어둠에도 인간이 있거늘....'

교황이 대화에 응하려던 순간.

"어딜 개소리를!"

후웅-!

에릭이 쏜살같은 속도로 성창을 내던졌다.

89화 레이드 (3)

'으음....'

르웰은 흑탑을 향해 나아갔다.

사방에 끔찍한 괴물들이 가득하였으나, 자신을 채운 거대한 신성의 힘은 두려움을 지워 줬다.

해가 들지 않는 짙은 어둠의 마경이다.

하나, 성창의 여파로 사방에서 금빛이 일렁였다.

끼예에에에엑——.

흠칫-.

그래도 놀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성창의 불꽃이 미치지 못한 곳은 시꺼먼 어둠으로 가득했다.

그 안에서 갑자기 거대한 괴물들이 나타나는데....

'깜짝이야!'

놀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조금 무섭기도 했다.

과거 분쟁 지대에서 험한 꼴을 많이 봤는데도, 마경의 괴물들은 격이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서 좋은 추억을 떠올리며 두려움을 몰아냈다.

'미군이란 존재가 아스티아 교단이랑 비슷하다고 그랬지?'

에릭이 어린 시절 해 줬던 지구의 얘기였다.

"폭격, 창 비슷한 걸로 평지를 만든 뒤에 군인들을 투입하는 거죠."

교단의 성창투척을 알려 줬을 때, 에릭이 처음으로 지구라는 곳의 얘기를 꺼내 들었다.

그곳의 가장 강력한 군대도 그런 전술을 사용한다고 그랬었지.

'그래야 병사들이 덜 죽는다고.'

지금 보이는 광경도 그랬다.

아스티아 교단의 사망자는 현재까지 0명.

'교황 성하를 중심으로 뭉쳤으니까, 당연한 건가?'

교황의 압도적인 신성력이, 공격 대신 회복과 방어에 집중되었으니 가능한 일이다.

공격을 맡아 줄 율리우스와 에릭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에릭은 돈으로 신성력을 즉시 100% 회복하는 사기적인 존재였으니까.

콰앙——————!

실시간으로 거대한 유성우가 마경의 몬스터를 지워 버리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 뒤편으로 거대한 신성의 장막이 넘실거렸다.

마경 속을 밝히는 교황의 힘.

지고한 신성이었으나, 그녀는 그 힘에 감흥하지 못했다.

'...진짜 배교자가 된 거네.'

등 떠밀리듯이 에릭의 신도가 되어 버린 신세.

르웰은 이를 실감했다.

평소였다면 교황의 힘에 무언가 와닿는 것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 대신.

'읏-!'

르웰의 몸에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마치 아스티아 신의 계시를 받을 때와도 비슷한 느낌인데, 더 익숙한 감각이었다.

'에릭?'

들려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그렇지만 무언가 달라진 느낌이 들었다.

강렬한 빛.

뜨거운 열정.

태양의 이글거림.

스쳐 가듯 지나가는 풍경.

분명, 태양과 관련된 힘이었다.

'어?'

르웰의 손끝에서 불꽃이 일렁였다.

신성이되 순수한 불꽃이었다.

'마치, 루-솔라스의 힘 같네.'

조금 떨떠름했으나, 에릭이 뭘 했거니 하며 르웰은 계속해서 흑탑을 향해 다가갔다.

몰러드는 몬스터들을 역행하는 길은 고되고 고독했다.

그러나 그녀는 굳세게 나아갔다.

"어린 날의 저를 지켜 주셨듯이, 저 또한 평생 보답하겠습니다."

자신이 한 말은 어떻게 해서든 지켜 내는 존재가 에릭이다.

남아일언중천금이라며, 호언장담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분명, 에릭이 자신을 지켜 줄 터였다.

그런 생각들로 르웰은 마경의 어둠을 이겨 냈다.

그리 걷기를 한참.

"토마스 이사님, 저쪽은-."

"빨리 캡슐부터 챙겨! 대표님이 시간을 벌러 가셨다!"

르웰의 귓가에 이질적인 소음이 들려왔다.

'흑마법사.'

반으로 부러진 흑탑.

한쪽 벽면이 무너져 내린 흑탑의 내부는 쨍-한 하얀빛으로 가득했다.

'저게 형광등인가?'

어둠 속에 새하얀 빛이 비치니 눈이 시려 왔다.

르웰은 눈가를 좁히며 빛에 적응했다.

흑마법사들이 사람 크기의 캡슐을 옮기며 분주하게 오갔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모든 흑마법사들이 흘깃 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건데....

'으음.'

르웰의 청록빛 눈동자가 탑에서부터 먼 곳으로 향했다.

마경의 구렁텅이 너머로 신성의 빛이 가득했다.

하늘에서는 날개를 뽑아 든 에릭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여자는 뭐지?'

교황과 에릭을 향해, 검은 여인이 다가서는 모습이 보였다.

르웰의 각도에서도 얼굴이 잘 보이는 구도였다.

'나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미인이었다.

인간 같지 않은 느낌이 묘한 신비함을 더해 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르웰은 에릭을 살폈다.

'어?'

눈을 휘둥그레 뜬 에릭이 검은 여자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나한테 그렇게 작업을 걸고는-.'

에릭이 저렇게까지 놀란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이었다.

눈이 터질 듯이 커졌다.

째릿.

르웰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그때였다.

쐐애애액————!

먼 거리에서도 선명하게 들려오는 소리.

퍼엉—!

'어어?'

너무 빠르게 일어난 일이라 정확히 본 건 아니지만, 대략적인 상황은 이해했다.

'그러니까....'

검은 여자가 몇 마디 떠들자.

에릭이 화들짝 놀라 쳐다보더니.

대뜸 창을 꽂아 버렸다.

'이게 맞나?'

교황이 미친놈을 보듯이 에릭을 쳐다보고 있었다.

'웬, 미녀가 말을 거는데, 머리통을 날려 버리다니....'

놀란 속내와 다르게, 르웰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필드 보스?'

에릭은 엄청 익숙한 존재를 마주쳤다.

[필드 보스 마키아.]

만렙 세트템을 제공하는 유명한 보스의 이름이다.

'제법 좋은 템을 줬지.'

무릇 아이템이란.

성능이 좋으면 생김새가 형편없기 마련이요, 룩이 훌륭하면 성능이 떨어지는 법.

MMORPG 게임의 진리였다.

하나, 마키아가 드랍하는 세트템은 성능과 룩을 둘 다 충족시켜 주는 몇 안 되는 부류였다.

'길드장이 집착하던 보스지.'

대신, 드랍률이 극악에 가까웠다.

그래서 셀 수 없이 잡아 봤다.

그 덕에 대략적인 배경 스토리도 수도 없이 들었다.

나는 어째서 죄인으로 살아야 했는가?

내가 흑마법을 배워 세계를 원망하는 것이 그리도 잘못되었는가?

거대한 거미 몸에 절세 미녀의 얼굴이 달린 필드 보스 마키아.

게임과는 달리, 눈앞의 마키아는 정갈한 오피스 룩을 입고 있는 사람의 형체였다.

'본질은 똑같지.'

게임 속 필드 보스와 현실의 흑마법사의 공통점.

'죽어 마땅한 존재.'

그러니 할 일은 간단했다.

에릭은 마키아가 두 마디쯤 건넸을 때 창을 내던졌다.

퍼엉-!

지근거리에서 쏘아진 창이 마키아를 산산이 부숴 버렸다.

사방으로 검은색 핏물이 낭자했고, 교황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에릭을 바라봤다.

그에 에릭이 소리쳤다.

"이는 아버지, 아스티아 님의 뜻입니다! 다들 창을 들어라-!!!"

마치, 대화를 나눌 듯한 상황에 기습을 가한 모양새가 되었다.

그리고 아스티아 교단의 성기사들은 실전 경험이 풍부하다.

"와아아아아-!!!"

그 즉시 성기사들이 창을 꺼내 들고, 성전기사단이 이를 받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성가대는 축복을 내리며 기사단의 사기를 북돋았다.

"전원 탑을 노려라!"

초지근거리에서 시작되는 무지성 성창투척.

쐐애애액———!

수십 자루의 창이 구렁텅이 너머의 흑탑으로 향했다.

에릭은 마키아의 잔해를 향해 창을 내던졌다.

'일단 꽂고 본다.'

눈 아래에 그어진 6줄의 선.

옆으로 희끗한 줄이 보였으니, 조만간 7줄을 이루게 될 존재였다.

경지에 걸맞게 조각난 몸이 순식간에 재생되기 시작했다.

'필드 보스 마키아의 눈가로 8줄이 있었지.'

절망을 먹는 거미 형태의 보스.

분명, 강력하고 위험한 존재일 것은 분명했다.

게임 속에서는 왕국 하나를 멸하고 등장한다는 설정이 붙었으니까.

'그게 태양성국이지.'

루-솔라스를 모시고 사는 광신자들의 국가.

세습 따위는 없다.

위세가 강해진 귀족은 강제로 전 재산을 바치고 교인이 되어 버리는 미친 나라다.

그리고.

'태양성국은 제국에 편입돼야 한다.'

무교는 곧 죄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징벌병이 되어 전쟁터로 보내진다.

에릭은 그런 걸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마키아라는 여자가 그 희생양이었다는 것도 잘 안다.

필드 보스의 형태로 모니터 속에서 중얼거렸던 그녀의 대사들은 죄다 그런 슬픔을 담고 있었으니까.

'자기가 그런 피해자라고 백만에 가까운 생명을 제물로 바쳐도 되는 건 아니지.'

하나, 에릭에게 그런 건 핑계에 불과했다.

'두식이도 떳떳하게 살아가는데.'

인신매매를 일삼는 조직의 이름 없는 고아 6호.

그는 장두식이라는 이름을 내려 준 두목의 목을 뽑고 스스로 선(善)을 행하려 노력했다.

그리하여, 에릭과 리페로제를 만나 새 사람으로 거듭났다.

지금에 와서는 워-메이지가 되었고. 세계 유일 신성 마법사로 위용을 떨치는 중이다.

'심지어 황녀와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지.'

최악의 현실에서 최선을 택하는 것 또한 인간 됨됨이의 기본이었다.

'어딜 궤변을 늘어 두려고.'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에릭은 재생하는 족족 창을 꽂아 마키아를 부쉈다.

그러기를 한참.

에릭은 문득 의문이 일었다.

'대체 저건 뭐지?'

성창(聖槍)이다.

아스티아의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진짜 신의 신성을 벼려 낸 신성력의 총집합체다.

그런 성창에 맞았는데 죽지 않는 몸이라니.

흑마법사의 핵이나 다름없는 심장을 터트렸음에도 끝없이 재생하는 모습이 괴이하게 느껴졌다.

"후우-."

에릭은 투창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1만 골드를 사용해 신성력을 Max로 회복하였습니다.]

신중하게 전황을 살폈다.

자세히 보니, 탑을 향해 꽂히는 성창들도 반쯤 막히는 모습이었다.

"저게 대체...."

또한, 이상한 걸 발견했다.

스륵.

루-솔라스의 성자를 가둔 장막이 사라졌다.

회수된 검은 마력이 탑의 정상으로 흘러들어 가더니, 사람의 형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다만, 좋은 소식도 하나 있었다.

'성자를 다 흡수하지 못했군.'

반쯤 남은 황금색 심장이 벌렁거렸는데, 혈관 곳곳으로 검은색 흑마력이 침투한 모양새였다.

"과거 흑회로 불리던 시절, 그들은 한 존재를 어둠으로 추앙했지."

교황도 그 이질적임을 발견한 모양인지, 전장을 정비하고 에릭을 향해 다가섰다.

"그자가, 지금은 대주주라 불리고 있더구나."

회사를 표명하는 흑마그룹이니, 주인 격인 주주들이 존재하는 건 당연했다.

"어둠의 부름을 받은 자여."

"이곳에 그대들의 안식이 있노라."

심장이 터져도 죽지 않는 마키아.

그 이유가 드러났다.

"저게 그런 존재겠군요."

부러진 탑 위로 떠오른 붉은 눈.

그 위로 시꺼먼 그림자들이 일렁였다.

흑마그룹의 주주들이다.

과거 리페로제를 피해 숨어들었던 주주들은 온전히 제 힘을 유지한 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성하, 제가 지금 잘못 본 건 아닙니까?"

그리고 지금.

세상에 모습을 나타냈다.

"저게 정녕...."

가장 높은 자리에 아주 짙은 어둠이 드리워졌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다.

신성하지 않고 더러운 힘이다.

그러나 초월적인 무언가가 분명했다.

이루 불경한 말이었지만....

'저런 존재가 신으로 불리는 걸지도.'

에릭의 머릿속에는 그 밖에 형용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일종의 현상처럼 보이는 무언가였다.

마경의 구렁텅이조차 밝아 보이게 하는 짙은 어둠이다.

그런 주제에 사람의 형체라니.

심지어 이마에는 투박한 선이 그어져 있었다.

'아홉 줄....'

에릭의 숨이 턱- 막혔다.

'1억이라고?'

제국 인구 전체가 1천만이다.

지구처럼 80억의 인구가 있는 세상도 아니다.

그런데 아홉 줄을 이뤘다.

"제물로 순수하게 일억 명을 바친다는 게 말이 되는...."

"태초의 삼신이 있을 때부터, 흑마법사 또한 존재했으니, 가능성은 있겠지."

교황도 저런 걸 실제로 마주친 건 처음인지, 크게 놀란 모습이었다.

손끝을 떠는 것이 이루 말하기 어려운 충격을 받은 모양새였다.

게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오거라."

스르륵-.

9줄을 이룬 검은 존재의 말을 따라 마키아의 잔해가 흑탑을 향해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언데드도 소멸시킬 수 있는 힘을 퍼부었는데, 저건 무슨....'

충격적이었다.

성창에 소멸될 만큼 피해를 입은 마키아이건만, 어떻게 해서든 작은 조각이라도 남아서는 재생하고 들었다.

지금은 그 작은 조각이 어둠으로 빨려 들어가는 상황.

"대계를 방해한 가증스러운 것들."

탑 끝에서 검은 그림자가 일렁였다.

부러진 부분을 감싸고는 도망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성자 에릭, 네가 내 힘을 아껴 두라 한 이유가 있었구나."

그에 교황이 발을 굴렀다.

따앙———!

그 발걸음을 따라 마경의 어둠 사이로 신성의 빛이 일렁였다.

나타난 것은 검의 형상.

루드릭의 기사만큼 커다란 검이 허공을 가르고 나타났다.

후우웅———!

그것이 흑탑의 장막으로 내리꽂혔다.

"노오옴-!!!"

어둠이 일렁이며 잔뜩 노성을 내질렀다.

그 모습에 에릭이 짙게 웃었다.

'9줄을 보고 쫄았었는데....'

머릿속이 번뜩였다.

"성하, 저놈들 아무리 봐도 제 구실을 못 하는 것 같습니다."

* * *

[필드보스 1초 컷.]

[온전한 형태의 마키아 사진]

[산산조각 난 마키아 사진]

짧고 굵은 게시글.

수백 개의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유명한 존재의 등장과 사망 소식이 담긴 게시글이었기 때문이다.

"풍호, 이거 찍었어?"

"웅웅!"

세 빙의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에릭을 찬양하며 그 위용을 전파하는 데 전념했다.

필드 보스 마키아는 등장과 동시에 퇴장했다.

그 뒤 벌어진 광경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돌겨어억-!!!"

교단의 성기사들은 돌진을 감행했다.

교황의 과감한 결단 덕분이었다.

성전기사단이 목숨을 내걸고 흑탑을 부수러 달려들었고, 흑마법사들은 이를 막고자 악마들을 강림시켰다.

끼예에에에엑—.

하늘에서는 시우론의 흑기사들이 와이번을 타고 공포를 흩뿌렸다.

하나, 성가대의 축복이 두려움을 물리쳐 줬다.

어떠한 미혹(迷惑)도 들지 않은 채, 교단의 성기사들은 어둠에 맞서 싸웠다.

'무한 재생 흑마법사와 무한 재생 성기사단이라니....'

그 광경을 보던 빙의자들은 침음을 삼켰다.

"저걸 뭐라고 설명하지...."

그 니시다 료가 제목을 정하지 못할 정도로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그야말로 불사자들의 전쟁터를 보는 느낌.

서로 죽여도 죽지 않는다.

"상성 차이는 압도적이네."

상호 무한 재생이어도, 결국 상성 차이로 결판이 났다.

흑마력을 정화시키는 힘이 신성력인 이상, 이 우세를 뒤집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쪽에 붙은 건 잘한 선택이었네."

니시다 료가 의기양양하게 그리 말했다.

박창호가 인상을 잔뜩 구겼다.

"...병신아, 우리는 사로잡힌 거야."

"그, 그래도! 에릭 신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건 맞잖아?"

"너, 그러다 또 두식 형님한테 처맞는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박창호도 내심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저 새끼랑 같은 의견이라니.'

이걸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조금 복잡한 심경이 들었으나, 박창호는 성수를 들이켜며 좋은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진짜 합법 마약이 따로 없네.'

끔찍한 전장에서도 안정감을 주는 신의 힘이었다.

그리 안도하고 있자니.

[세계의 법칙을 뒤틉니다.]

[전이 효과가 봉인되었습니다.]

빙의자들의 상태창 위로 이상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필드 효과를 알려 주는 메시지였다.

"흑마법사 스킬들 다 막히겠네."

"진짜, 신성력이 사기긴 하다."

세 빙의자가 에릭을 바라봤다.

누가 했는지 물을 필요도 없이 뻔했다.

다만, 같은 처지의 빙의자들에게 일종의 측은지심이 조금 들었다.

"불쌍해."

강풍호의 눈망울이 촉촉해졌다.

"편하게 살겠다고 사람을 막무가내로 죽인 새끼들인데, 뭐가 불쌍해?"

그에 니시다가 발끈했다.

"캡슐에 있는 애들...."

"아."

90화 레이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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