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장두식 구출 작전 (5)
'살 놈만 산다라-.'
에릭은 모험가들의 철칙을 곱씹었다.
장두식이 있는 5계층은 계층주 공략 없이 이동이 가능한 마지막 저층으로, 중층 모험가들의 집결지 역할을 해 왔다.
'두식이가 부국장이 됐다고 하니.'
빙의자 관리국 부국장, 장두식.
황제가 구색 맞추기 형식으로 내린 지위였기에 제국의 정복이 제공되지는 않았지만.
장두식의 가슴에는 제국의 상징인 은빛 달의 브로치가 달렸을 터.
'모험가 놈들이 두식이를 도울 리는 없겠지.'
같은 모험가들끼리도 버려 대는 판국에, 그들이 장두식을 도울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에릭은 중대장 자스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멀쩡한 모험가에 거지꼴의 제국군이라니.'
심지어 그녀는 소드마스터다.
그런 자스민의 미스릴 갑주는 균열이 잔뜩 일어나 곧 부서질 것처럼 보였으며.
하나로 땋은 머리칼은 푸석푸석하게 갈라진 데다, 척- 봐도 예뻐 보이는 얼굴에는 피로 얼룩이 져 있었으니.
'미궁에서는 군인 대우가 개차반이군.'
제국에서 군(軍)이란, 치안청이나 근위대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녔다.
'대단한 명예직이 군인이지.'
황도의 치안청 기사나 근위대는 일종의 경찰과도 비슷한 위치에 있으나, 군대는 말 그대로 제국이라는 국가를 위해 존재한다.
지고한 국가 수호의 사명을 지닌.
'전역조차 불가능한 게 제국군이다.'
대신 그만큼 대우가 좋고,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다.
거기에 전역 불가인 군대에 입대하려면 그에 어울리는 국가 수호의 사명을 지닐 필요까지 있었으니.
'대한민국이랑은 딴판이지.'
에릭은 과거 박지훈의 군 시절을 떠올렸다.
그 경험 때문인지, 그는 제국의 군인들을 더욱 대단하게 여겼다.
사명감을 지닌 자원자들이 엄격한 선별로 걸러지고 거기에 난이도 높은 훈련을 거쳐 거듭나는 것이 바로 제국의 군인이다.
'한데, 이런 취급이라.'
그런 군(軍)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르만의 성을 지닌 황족만이 가능한 일이다.
수호의 의무에 따라 국경을 지킨다거나, 미궁을 관리한다거나.
혹은 국가의 영토를 넓히기 위한 정복 전쟁에서 앞장서게 되는 등.
"국가 수호의 의무를 다하느라 고생이 많군."
그런 생각을 정리하며, 에릭이 자스민에 얼굴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얼굴 위로 몬스터의 핏물이 허물처럼 들러붙어 있었고.
에릭은 그것들을 가벼이 떼어 냈다.
"가... 감사합니다."
자스민은 볼에 홍조를 띠며 에릭에게 고개를 숙였다.
에릭은 그런 자스민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읊조렸다.
"제국군은 이대로 쉬는 게 좋겠군."
"하, 하지만, 곧 계층주가-."
"내가 혼자 처리하지."
황제 폐하가 내리신 영광의 주인이요, 순례자에 성자인 대단한 존재가 에릭이다.
하물며, 소드마스터 자스민은 에릭의 경지가 아주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하나, 그녀는 쉴 수 없었다.
"몬스터 웨이브가 올 겁니다. 모험가들까지 죄다 이쪽으로 모여서...."
"몬스터 웨이브는 모험가들이 처리하면 되겠군."
에릭은 담담하게 선언했다.
그 말에 모험가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아니, 맹약이 있는데."
"우리가 왜?"
작은 중얼거림이었으나, 에릭의 귀에는 선명하게 들려왔다.
"...교단도 모험가 길드에 뭘 시키지 않는데."
"애초에 우리가 제국에 쓰는 돈이 얼만데, 여기서 목숨까지 걸 필요가 있냐?"
에릭은 이러한 흐름을 주도하는 한 모험가를 바라봤다.
'좀 치는 놈인가?'
에릭이 볼 때 모험가들은 죄다 허접한 놈들이었으나, 개중에도 직급이 높아 보이는 자들이 몇몇 눈에 띄었다.
대화의 분위기를 주도한다거나.
여론을 이끈다거나.
그런 흐름을 타고, 한 사내가 당당하게 에릭을 향해 걸어왔다.
"...아스티아 교단 소속이셔도, 모험가들에게 강제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황가와 모험가 길드의 맹약을 모르십니까?"
중급 모험가 한 명이 기어코 에릭에게 정면으로 항명의 말을 시작했으니.
"이름이?"
"제국 모험가 길드 소속, 붉은 맹세 클랜의 아르고입니다."
"그래, 아르고.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에릭은 담담하게 아르고의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거대한 키로 인해 아르고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르고를 내려다보는 에릭의 얼굴은 평온하였으나, 지독하게 무표정했고, 어깨가 들썩이는 것이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었다.
"제, 제국법상 제국의 모험가는 미궁에서만큼은 그 어떠한 집단의 명령도 들을 필요가 없, 없습니다!"
아르고은 여느 때처럼 지고한 황가의 맹약을 들먹였다.
모험가들의 정점, 모험왕과 제국 황제의 맹약은 결코 가볍지 않았으니까.
"그거 아나?"
에릭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런 에릭을 두고도 아르고는 여상하게 제 할 말을 읊었다.
"뭔진 모르겠습니다만, 모험가 길드는 결코 부당한 명에 따르지 않을 겁니다!"
에릭의 위명에 겁을 먹었으면서도 아르고의 두 눈은 에릭을 향해 있었다.
부당한 명에는 따르지 않는다.
애초에 모험가 길드가 생긴 이유가 부조리한 권력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 아르고를 향해 에릭의 말이 이어졌다.
"아스티아 교단의 순례자에겐 국가와 종교의 굴레를 벗어나 이단을 처벌한 권한이 있지."
이 세계에서 이단(異端)이란, 미궁과 악마를 신앙하는 흑마법사를 의미하였으니.
하여, 에릭이 선고하기를.
"미궁에서 일어난 재난 상황에 협력하지 않는 모험가라-. 미궁을 신앙하는 흑마그룹과의 연관성이 다분해 보이는군."
* * *
순례자이되 성자다.
뭐가 우선시되었건 에릭에게 즉결처분 권한이 있다는 건 분명했다.
하나, 모험가 길드는 제국과 삼왕국을 아우르는 활동 반경을 지닌, 거기다가 대륙 최대 규모의 마경을 수호하는 거대한 집단이다.
그런데도 모험가들은 결국 에릭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족같네."
"어째 리페로제 때랑 흘러가는 꼴이 비슷해지냐?"
모험가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십 년 전의 대전쟁.
삼왕국 연합이 제국을 쳤고,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이 무르익어 가던 중 한 왕국이 흑마법사와 연합해 피아 식별 없는 학살을 저질렀다.
그때 강림한 악마는 수도 없이 많은 인명을 앗아 갔고.
"이단은 사형이다."
리페로제는 모험가들을 강제 동원 해서 악마의 하수인을 처리하게 만들었다.
그때 이단 혐의로 처형된 상급 모험가의 수가 물경 백에 달했다.
"다들 닥쳐. 너희들도 저 창대에 꽂히고 싶냐?"
지금의 상황도 비슷했다.
제국군의 창대 끝에는 중급 모험가 아르고의 머리가 꽂혀 있었고, 그 창대는 모험가들의 진영 한복판에 놓였으니까.
'본부에 가서 정식으로 항의를 해야겠어.'
급이 낮은 모험가들은 감히 에릭에게 대항할 생각을 못 했다.
그냥 이단 혐의를 읊조리며, 심문도 없이 목을 잘라 창대에 꽂아 버렸는데....
"저쪽이 허술하군, 방비를 단단히 해라. 10분 남았다."
그 위용을 등에 업은 제국군은 모험가들을 종놈처럼 부리기 시작했다.
내심 속으로 쌓여 있던 불만이 터져 나온 것이다.
"예, 옙. 십인장 나리, 명에 따르겠슴다."
제국군이 모험가를 이렇게 취급하는 것도 일종의 맹약 위반에 해당하였지만, 모험가들은 자세를 한껏 낮출 수밖에 없었다.
"제국군의 명령에 따라,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라. 이를 어길 시 이단 혐의를 적용하겠다."
홀로 30기의 계층주를 상대하러 산 정상으로 떠난 에릭.
그가 남긴 말은 절대 허언이 아닐 테니까.
"다들 속도를 올려라!! 10분 남았다-!"
십인장과 백인장으로 이뤄진 제국군이 모험가들을 닦달했다.
그리고 간만에 여유를 가진 중대장 자스민은 2계층에서 올라온 남편을 마주했다.
"여보, 제발 좀...."
"그분께서 내 얼굴을-."
코앞에서 에릭의 손길을 느낀 자스민은 남편을 무시한 채 연신 에릭의 대단함을 읊조렸고.
'미치겠네.'
2계층부터 에릭을 따라온, 같은 중대장이자 자스민의 남편인 메시는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바람을 피운 건 아니지만....
어딘가 서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칼에 모험가 목을 날려 버릴 때는 어찌나 통쾌하던지-."
"그, 그건 그렇지."
한데, 그런 심경을 토로하기도 어려웠다.
자스민의 말 하나하나에 메시 역시 공감하고 있었으니까.
'통쾌하긴 했지.'
미궁에 이변이 일어난 즉시, 모험가들은 각기 파티 단위로 모여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살놈살-!
이 지랄을 하면서 튀는데, 제국군 입장에서는 그 얄미운 꼴에 열이 뻗치는 게 당연했다.
황가의 맹약을 운운하면서 '어쩔 건데?' 이러는 통에, 제국군은 모험가들을 어찌하지도 못했으나.
"여보, 저 창대를 봐-."
자스민의 말처럼, 에릭이 베어 낸 모험가의 머리통이 모든 제국군에게 통쾌함을 선사했다.
"역시 성자님이셔.... 폐하의 치세 아래, 교단분이 활약하는 것도 참 좋은 것 같아. 그치?"
하나. 반쯤 맛이 간 아내의 눈동자를 보는 건 메시 입장에서 영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말을 돌렸다.
"성자님은.... 얼마나 강하신 거야? 여보는 소드마스터니까 알 거 아냐?"
"그분의 얼굴만큼?"
"뭐?"
"생긴 만큼 강하다고. 아아-."
자스민은 또 한 번 지근거리에서 마주한 에릭을 떠올렸다.
볼에 묻은 마른 피를 떼어 주는 그 상냥한 손길.
그리고 쉬어도 좋다며 귀를 호강시켜 주는 중저음의 목소리.
"...아. 그 찬란한 용안이-."
황홀하게 눈을 감은 아내.
그런 아내를 향해 눈을 치켜뜬 남편.
메시와 자스민 사이로 어색한 기류가 형성되었다.
메시가 뭐라도 말하려고 입을 달싹-거리던 순간.
"큼, 크흠. 주, 중대장님들! 이제 몬스터 웨이브 몰려옵니다."
문 앞에서 눈치를 보던 소대장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보고를 읊었고.
""가지.""
두 부부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각자의 무장을 챙겨 초소 앞으로 나섰다.
쉬라고 했으나, 제국의 군인이 국란의 위기에서 어찌 쉴 수 있겠는가?
* * *
산 정상에는 분화구가 있다.
그 안을 가득 채운 액체 위로 스멀스멀 거품이 일고, 하나둘 어떠한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에릭은 계층주의 리셋을 기다리면서, [인벤토리]에 넣었던 [검은 상자]를 꺼내 들었다.
'이게 말이 되나?'
일전의 1계층 계층주를 혼자 죽였을 때.
상자에는 [5]라는 숫자가 기입되어 있었고, 이는 5연 뽑기가 가능하다는 의미였다.
[150]
한데, 이번에는 150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보였으니.
'킹과 퀸이 하나로 취급되지.'
2계층의 계층주 30쌍을 해치웠더니, 보상도 30배로 들어왔다.
에릭은 기분 전환을 위해 잠시 머릿속을 환기했다.
'보상이 30배.'
모험가 놈들 때문에 잡쳤던 기분을 상자깡에 대한 생각으로 좋게 바꾼 것이다.
언제나 좋은 생각에 좋은 결과가 따르는 법이니까.
'이러면 두식이가 600연뽑을 해야 하는 건가?'
그 좋은 생각은 장두식을 통해 이뤄질 상자깡이었다.
2, 3, 4, 5계층의 계층주를 다 잡으면, 150뽑기가 가능한 [검은 상자]를 네 개나 얻을 테고.
축성된 장두식에게 [신성 축복]을 쓰면 대체 뭘 얻게 될 것인가?
에릭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모험가 새끼들을 보아하니, 서둘러야겠어.'
물론, 이를 해내려면 장두식이 살아 있어야 했다.
생각보다 제국군이 잘 버텨 줬는데, 그것도 이제는 힘들어 보였다.
그들의 무력은 계층주를 상대하기에 충분했으나, 체력전에서 한계에 다다른 것이 분명했으니까.
시간당 미궁이 리셋되고, 매일매일 몬스터의 숫자가 늘어난다는데....
"지독하군."
눈앞에서 형태를 이루는 3계층의 계층주들을 보며, 에릭이 인상을 찌푸렸다.
호수가 있는 3계층은 구역별로 테마가 나뉘어 있지만.
'멀럭.'
나타나는 몬스터는 한 종류뿐이었다.
이족 보행 하는 물고기, 멀럭.
이름과 생김새의 설명을 보면 예능 같은 놈들인데, 아니 실제로 게임 속에서는 스쳐 가는 하급 몬스터에 불과했지만.
'코끼리만 한 물고기라니.'
현실에서는 아주 끔찍한 몰골이 됐다.
일단 이족 보행 하는 물고기는 크기가 엄청나게 커졌다.
높이는 고블린 킹보다 작은 3미터였는데, 폭이 엄청나서 더 커 보이는 느낌이었다.
'역겹네.'
생김새는 아주 징그러웠다.
털이 수북한 사람의 다리.
상체는 커다란 물고기요, 입안으로 커다란 사람의 어금니가 달린.
보글-.
그런 주제에 물방울을 터트리는 귀여운 소리를 낸다.
'한 방에 지운다.'
장장 3미터에 달하는 계층주 멀럭 킹.
에릭은 거대한 어인(漁人)들을 바라보며 날개뼈를 꿈틀거렸다.
쿠웅-.
스킬 모션에 반응해 [광휘의 날개]가 뽑아지고 산 정상이 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역시-.'
에릭은 날개의 힘을 느꼈다.
재앙급 악마를 죽이며 직접 느낀 [광휘의 날개]의 능력치를 점검해 본 것이다.
'신성력 자연 재생이 10배쯤 빨라지고, 모든 대미지 500% 증폭.'
설명이 부재한 시스템을 대신해, 스스로가 직접 스킬의 성능을 수치화하는 것으로.
현실에서 크게 의미가 없어 보이는 일이지만, 에릭은 이를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이번 사태가 끝나고, 33층을 공략하려면 딜 컷이 필요하니까.'
미궁 속 이변은 현재 최상층인 32계층이 공략되어야 끝이 난다.
에릭은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32계층이 공략될 것이라 확신했다.
다음에 나타나게 될 33계층은 게임 속에서도 난이도가 높았던 구간으로, 에릭은 이를 미리 염두에 둔 것이다.
'33층은 공략을 모르면 힘들지.'
뭐, 현재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 미래를 떠올린다는 것이 만용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스승님은 미궁 최상층에 계신다.'
근거는 리페로제 아스티아였다.
그녀의 존재는 확신이나 다를 게 없었으니까.
그러니 미궁의 탈출 불가 현상과 미친 듯이 증가한 몬스터의 수는 큰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두식이지.'
5계층에 갇힌 장두식.
돈으로 신성을 회복하는 자신과 달리, 다른 사람들은 포션을 써야 하고 포션이 동나면 자연 회복을 기다려야 한다.
30일의 연이은 싸움은 소드마스터마저 지치게 만들었으니까.
'속전속결.'
에릭은 그대로 손을 들어 올렸다.
[광휘의 날개]의 효과로 공격력이 증가한 [유성우]가 미궁의 천장 사이로 나타나고.
싸아아아아아아―
신성으로 빛나는 별똥별이 산 정상으로 내려앉았다.
콰앙――――――!!!
거대한 충격파와 함께 미궁 3계층의 계층주가 소멸하고, 신성의 빛이 산을 타고 아래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으니.
"아아...."
에릭이 아래를 내려다보니, 산 아래로 수천의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신을 바라보는 듯이.
[신전이 조금 더 선명해졌습니다.]
61화 장두식 구출 작전 (6)
"레오나르도 전하, 정기 휴식 시간인데 좀 쉬는 게 어떠신지요?"
"그러지."
미궁 최상층을 공략 중인 제국의 1황자, 레오나르도 로펜 아르만.
그는 공략대 전원이 휴식에 돌입한 걸 확인하고 나서야 자리에 앉았다.
"전하, 서류를 보시는 건 쉬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휴식을 시작한 황자의 손에는 두툼한 서류 뭉치가 가득했는데, 그들이 있는 32계층의 지도라든가 몬스터의 종류를 기록한 자료였다.
"앉아 있으니 몸이 쉬고 있는 셈 아닌가?"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지고한 책임감이 묻어났다.
황자는 계층의 이변을 기록한 서류를 보던 중, 몇 가지 변화한 수치를 유심히 살폈다.
"어째 수위가 점점 높아지는 것 같지 않나? 여기를 보면 전보다 1미터는 높아졌군."
"그런 것 같습니다."
미궁 32계층.
부글부글 끓는 마그마 위로 거대한 뼈가 가득했다.
죽은 자의 협곡이라 불리는 32계층은 '지형' 취급을 받을 만큼 커다란 뼈로 이뤄져 있다.
말이 뼈지 그냥 거대한 흰색 산 같았다.
"더 위로 올라가야 하는 건가."
"계층주를 만날 위험이 있습니다."
최상층에서는 미궁의 이변이 일어난 지 한참이 지났다.
층이 높아질수록 심해지는 미궁의 시간비 때문이다.
다른 계층처럼 몬스터의 숫자가 늘어난다거나, 계층주가 돌아다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용암에 빠져 죽을 순 없지 않나?"
지형지물의 변화로 공략대는 강제로 계층주를 향해 다가가게 되었다.
본디 거대한 뼈의 발등에 있던 제국의 공략대는 허리춤까지 위치를 옮긴 상황.
"더 위로 가면 가슴 쪽이지 않습니까? 심장은 위험한-."
"지형지물만큼 커다란 뼈 위에서 그런 걸 논하고 싶진 않네."
이 뼈의 형태로 추정컨대, 계층주는 심장 혹은 머리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은 이름 모를 괴물의 갈비뼈에 군영을 차린 채,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계층주를 만나면 어떡하실 생각입니까?"
"뭘 어쩌나. 우리끼리 잡아야지."
황자가 공략대의 이동 경로를 고민하고 있자니.
"더, 더-."
"흐이익. 오지 마!"
바깥에서 기묘한 소란이 일었다.
'대체 누가?'
타 왕국의 공략대는 전멸했고, 모험가 길드의 공략대는 황자 쪽으로 합류했다.
'설마....'
그런 상황에 이런 소란을 만들 만한 인물은 정해져 있었으니.
제국의 1황자, 레오나르도 로펜 아르만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전하, 위험합니다!"
전장의 선봉(先鋒)은 언제나 1황자 레오나르도였다.
여기서 가장 강한 것도 그다.
한데 위험하다니.
"처, 척살자 루크! 여기는 제국군의 진형이다. 당장 물러가라-!"
황자가 천막을 치우고 밖에 나섰을 때, 수백의 공략대가 한 사내를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었고.
"황자를 데려와라."
그 사내는 피처럼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제 목적을 읊었다.
그에 황자는 병사들을 물리고 당당히 앞으로 나섰으니.
"척살자 루크, 우리는 네 길을 방해할 생각이 없다."
고고하면서도 황족다운 말씨.
묘한 안도감을 선사하는 그런 목소리였으나-.
"으으...."
척살자라 불린 남자가 주는 두려움은 더욱 커다랬다.
미궁에서 살아가는 세계 최초의 빙의자.
그는 남녀노소, 국가와 세력을 불문하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두를 죽였기에.
모든 사망자의 사인(死因)이 단검에 복부를 찔려 죽은 검상이었기에.
그 이명이 척살자라 하였다.
"황자 너한테 볼일이 있다."
스륵-.
그 척살자가 은발의 사내를 향해 검을 겨눴고.
"감히!"
"황자 전하께 무슨!"
수없이 긴 시간 미궁 속에서 함께 사선을 넘나든 공략대는 무기를 꺼내 들며 척살자 루크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척살자 루크, 또 광증이 도졌나?"
황자 역시 묵묵히 월광검(月光劍)에 손을 얹고 전투를 준비하려던 차에.
"어허-! 이놈!"
날카로운 음성이 척살자의 뒤에서 들려왔으니.
"...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어딜 거짓말을 하느냐!"
거대한 척살자 등 뒤에서 한 여인이 몸을 드러냈다.
새하얗고 기다란 백발.
우윳빛의 투명한 피부.
기다란 금빛 십자가가 그려진 하늘하늘한 장포와 등에 맨 거대한 대검.
'저 척살자와 대화를?'
그녀의 등장은 시작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미궁 속 불가사의, 척살자 루크.
제 앞길을 막아서는 모든 자를 죽이는 괴물이....
"저들이 먼저 무기를 겨눴다-! 나, 나는 정말 아무런 위협도 가하지 않았다!"
다급한 어조로 변명을 늘어 두는 게 아닌가?
심지어 들고 있던 검까지 집어넣은 상황.
"꿀밤 백 대다."
미궁을 떠도는 학살자요, 불가해(不可解)한 괴물이라 불리는 존재가.
빠악-!
"윽!"
스물이나 됐을까 싶은 소녀에게 얻어맞는다고?
'황제폐하께 들은 적이 있는-.'
그 이질적인 광경에 황자의 머릿속에 번뜩 옛 기억이 떠올랐다.
"아들아, 명심해라. 혹시라도 미궁에서 백발의 마녀를 만난다면 절대로 적대하지 말거라."
미궁 공략의 의무를 위해 레오나르도가 미궁에 들어가기 전, 황제가 했던 조언이다.
'그녀의 이름이-.'
"-리페로제 아스티아."
황자가 그 이름을 떠올려서 입으로 내뱉자.
"후훗."
백발의 미인이 산뜻한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말하기를.
"애비를 닮아서 그런지 싸가지가 없구나."
* * *
계층 공략 보상을 챙겨 든 에릭은 곧장 다음 계층으로 향했다.
전처럼 소란이 일지 않게끔 [인벤토리]에 검은 상자를 수납한 뒤에 말이다.
"...아아, 성자님."
하나, 그런 에릭의 바람과는 다르게 더 거센 소란이 일었다.
"아니, 에릭 님-."
"산에서 분화하는 거대한 신성력이라니!"
모험가 제국군 할 것 없이 모두가 애타게 에릭의 이름을 불러 댔으니.
'미치겠네.'
에릭의 미간에 팔(八)자가 그려졌다.
이 소란을 진정시킬 수 있는 두 명의 중대장이 있는 상황이건만.
"인상 쓰신 것도 너무 멋지십니다."
"역시 성자님이시군요."
두 남녀가 가장 열렬히 자신을 찬양하고 있었고.
그들은 중대장이라는 지위를 가졌으며 심지어 부부라는 사실을 알기에....
'윗사람부터 저 지경이니 답이 없네.'
에릭은 그저 인상을 쓰고 묵묵히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저쪽이 4계층으로 향하는 계단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사막 한복판에 놓인 회색빛 벽돌 계단 덕분에, 에릭은 무지성 찬양 세례에서 벗어났다.
'미궁의 계단을 반가워하는 날이 올 줄이야.'
조금 불편하긴 한데.
에릭은 이런 흐름을 막을 수도 없었고, 막을 생각도 없었다.
'입지 상승은 좋지.'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야, 황제나 교황의 위세를 따라갈 수 있는 법.
이름값은 얼추 따라잡았다고 하지만, 아직 힘과 영향력은 많이 부족했다.
이대로 생존자를 이끌고 탈출한다면, 충분히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겠지.
'게다가 신전이 더 선명해지기도 했다니-.'
그런 생각을 하며 에릭은 미궁의 계단을 올라 4계층에 도착했다.
"모험가들이 합류를 요청했습니다!"
그곳에서도 이전과 똑같이 생존자들을 규합하며 계층주를 향해 달렸다.
"여, 여기 처음 보는 지형이 존재합니다!"
4계층은 층 전체가 거대한 사막으로, 샌드웜이라 불리는 까다로운 몬스터가 나타난다.
그런 사막 한복판에 오아시스가 나타나 있는 게 아닌가?
'히든피스를 찾은 흔적이겠군.'
그 말인즉슨, 장두식과 세 빙의자가 잘 해냈다는 의미다.
'드디어....'
에릭은 장두식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해낸 것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두식이도 성장할 때가 되긴 했지.'
지금이야 별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데, 과거의 장두식은 그야말로 트러블 메이커나 다를 게 없었으니까.
'상점을 운영하라 준 돈을 도박으로 다 날리고, 사람을 쓰라고 했더니 웬 깡패 놈들을 패서 부하로 만들었었지.'
"거 형님, 내 한평생 배운 게 이런 건데, 대뜸 매장 관리니 사람을 고용해 보라 하면 내가 어떻게 하겠수?"
그 행동 교정에 들인 시간이 얼마던가?
그랬던 장두식이 지금은 홀로 마도구 상점을 관리하고, 나아가서는 미궁 속 히든피스를 챙기라는 고난이도의 임무를 해내는 수준에 이르렀다.
'레벨 업 영약이 나온댔지.'
에릭은 니시다 료가 말했던 보상을 떠올렸다.
그래서 더더욱 장두식이 임무에 실패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만약 실패다?
'흠.'
그때의 두식이는 꿀밤으로 끝나지 않겠지.
에릭은 무조건적인 성공을 확신하며, 계층주 공략을 서둘렀다.
생존자를 규합하며 제국군의 군영에 도착했고, 모험가들을 동원해 몬스터 웨이브를 처리하라 명했다.
"모험가 길드는 제국군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
고작 한 놈을 창대에 꽂았을 뿐인데, 모든 모험가가 에릭의 뜻을 따라 움직였다.
항명?
모험가의 자유?
'저 거대한 행렬-.'
에릭의 뒤로 수천의 생존자가 따르는 상황.
그들에게 나오는 말만 들어도, 저 거대한 성기사의 말을 어겨서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으니까.
"저 창대 보이지? 말 안 들으면 그냥 이단이라면서 죽여 버린다."
"야, 말도 마. 무슨 미궁 천장을 뚫고 신성력으로 만든 메테오를 뿌렸다니까."
"과장? 지랄, 여기 천 명도 넘게 그걸 봤는데?"
"아, 천장을 뚫은 게 아니라 부순 것 같기도 하고."
"파괴 불가인 미궁을 어떻게 부쉈냐고? 나도 모르지. 성자라서 되는 걸지도...."
거기다가 소문을 좋아하는 모험가들이 너도나도 한마디씩 덧붙여 가며, 에릭의 위용을 읊어 댔다.
'저런 새끼들이 무슨 모험가라고.'
에릭은 차마 간섭할 가치도 느껴지지 않는 쓸데없는 대화를 흘려 넘기며, 4계층의 제국군 책임자를 마주했다.
"충-! 3중대 중대장 로휜입니다."
"5계층에도 중대가 있는 건가?"
계속해서 중대장을 책임자로 마주치고 있어서 에릭은 간단한 질문을 건넸고.
"2계층, 3계층, 4계층에는 각기 하나의 중대가 배치되었고 5계층은 대대장님과 그분의 직속 부대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는 미궁 5계층까지를 관리하는 군의 배치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2, 3, 4층을 관리하는 세 개의 중대와 5층의 대대장.
즉, 미궁 2계층에서 5계층까지를 하나의 대대가 관리하는 셈이다.
"대대장은 강한가?"
에릭이 이런 질문을 한 이유는 간단했다.
장두식이 있을 5계층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아보기 위해서였는데.
"그분은 강하시지만, 마법사...입니다."
들려오는 대답은 썩-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마나 고갈이....'
마법사는 기사에 비해 체력이 떨어진다.
당연한 거였다.
황실마탑의 '워-메이지'는 결이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군대의 마법사는 화력을 중시한 대규모 마법에 특화된 존재다.
그렇기에 마나 소모량도 크고, 마법의 시전 시간이 길다.
'어쩌면 5계층이 제일 위험할지도 모르겠군.'
장두식도 마법사다.
하나, 장두식은 마력 재생력이 남다른 괴물 같은 재능을 지녔기에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에릭이 걱정이 드는 이유는, 계층주를 틀어막은 제국군이 밀려났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몬스터 웨이브를 정리하면서 계단까지 길을 뚫어 놓도록."
에릭은 그리 말하며 계층주가 나오는 붉은 사막을 향해 걸었다.
* * *
1시간이 지났다.
계층주가 나타나는 붉은 모래 위로 거대한 샌드웜 킹 30개체가 솟구쳤다.
숫제 거대한 이무기를 보는 느낌.
후우우웅-.
모래 위로 솟구친 십 미터의 지네를 닮은 몬스터 위로, 강력한 풍압이 일고.
콰아아아앙――――!!!
대지를 뒤흔드는 금빛 구체가 떨어졌다.
잠시 뒤.
"와...."
"저게 뭐냐."
싸아아아아아―
경악한 제국군과 모험가들을 향해 황금빛 바람이 불어온다.
사막의 모래 위를 스쳐 가는 신성의 바람은 참으로도 아름다웠으나, 그 광경을 감상할 여유도 없이 그들은 곧장 움직여야 했다.
"후, 엄청 서두르시는군."
"수하분이 5계층에 있는 모양이다."
제국군과 모험가들은 짙은 피로감을 씻어 주는 신성의 바람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성큼- 내딛는 에릭의 발걸음을 따라가기가 벅찼다.
제국군은 충실하게 5계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길을 뚫어 놨고, 에릭은 별다른 전투 없이 계단 위로 발을 내디뎠다.
한 걸음에 세 계단씩 성큼성큼 올라 에릭이 5계층에 도착한 순간.
콰직-!
사방에서 공격이 날아들었다.
'입구 킬을-.'
미궁의 계층 이동 직후, 잠시 경직 상태가 일어나는데.
한때 빙의자들이 경직 상태를 악용한 입구 킬을 유행시킨 적이 있었고, 제국군은 이를 방지하고자 각 계층의 입구를 지키곤 했다.
쩡-!
에릭은 경직이 풀린 직후 몸에 힘을 주었고, 자신을 향한 공격의 정체를 알아챘다.
'-계층주?'
거대한 이빨.
커다란 발톱.
컹컹―――!!!
누린내를 풍기는 하이에나를 닮은 늑대인간.
"전원 방어 태세!!! 진영을 확보하라-!"
뒤따라온 제국군이 재빠르게 대응을 시작했다.
에릭은 손을 휘둘러 신성력을 흩뿌렸다.
"-신성 결계."
계층 입구로 신성의 돔이 생겨나고, 그 안에 있는 몬스터들 위로 희뿌연 연기가 피어나기 시작했으니.
"다들 결계를 중심으로 움직여라!!"
세 명의 중대장은 이 틈에 병사들을 재편해 재빠르게 계층주를 몰아내기 시작했다.
'어디냐.'
에릭은 눈을 감고 기척을 감지하려 노력했다.
컹컹―――!!!
사방이 계층주였다.
그 말인즉슨, 5계층에서 제국군이 패퇴한 지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의미였다.
'북서쪽이랑 동남쪽인가.'
에릭은 저- 멀리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두 개의 기척을 잡아냈다.
예상컨대 한쪽은 제국군일 것이며, 다른 한쪽은 장두식일 터.
'이쪽이 더 강하군.'
에릭은 기척이 약한 쪽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이곳은 맡기지."
남겨진 제국군에게 한마디 말을 남기고서는 묵직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쿵- 하고 땅이 파이며 사방으로 풍압이 일었다.
'어디냐.'
에릭은 스쳐 가는 풍경 사이로 눈동자를 마구 굴렸다.
기척이 점점 희미해졌다.
괜히 빙의자를 챙기라고 말했던 것에 후회가 느껴졌다.
'책임감이 강한 놈이니....'
장두식 성격에 '형님이 그랬다.'라며, 빙의자들도 알뜰살뜰하게 챙겼을 것이 분명했고.
어쩌면 그 탓에 더 위험에 처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컹컹―――!!!
사방이 개 짖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계층주가 뿜어 대는 위압이 미약한 기척을 자꾸 흐트러트렸다.
그때 에릭의 귓가에 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으니.
"드, 드루와. 씨이벌-. 다 드루와!"
거칠고 위협적이었으나.
그 어느 때보다 다급해 보였다.
쿠웅-!
날개를 뽑아낸 에릭은 희미한 목소리를 향해 쏘아지듯 날아들었고.
"그윽.... 퉤엣. 드루와, 씨벌."
처참한 몰골로 비틀거리는 장두식을 마주쳤다.
그의 뒤로는 넝마가 된 세 빙의자가 옅은 숨을 들썩거리고 있었으며.
컹컹――!!
장두식을 둘러싼 놀킹들은 마치 조롱이라도 하듯이 그를 빙빙 둘러싸고 짖어 댔다.
"두식아-."
한 팔을 잃고 전신에서 피를 줄줄 흘려 대는 장두식.
한쪽 눈이 일그러진 상태로 장두식은 에릭의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겼고.
이내 '카악- 퉷!' 피가래를 뱉더니 에릭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
"거, 형님. 왜 이렇게 늦었수?"
그렇게 말하며 장두식의 몸이 기울었다.
62화 장두식 구출 작전 (7)
페르안 뒷골목의 이름 없는 고아 6호.
삼왕국과 제국, 마경에 둘러싸인 분쟁 지대의 무법 도시에는 넘쳐 나는 것이 고아였다.
그렇기에 100호까지 있는 고아들 중에서 가장 쓸 만한 놈이 되어야, 두목에게 이름을 받을 수 있었고.
"네놈은 이제부터 장두식이다."
두 주먹으로 뒷골목을 평정한 6호는 성인이 되어 이름을 받게 되었다.
"거, 두목은 너무 개새끼요. 다 같은 거지 새끼들끼리 챙겨 줘도 모자랄 판에-."
뿌득.
이름을 얻은 장두식은 가장 먼저 두목의 모가지를 뽑아 버렸다.
"-반반한 놈들은 변태 늙은이들한테 팔아 젖히는 게 말이 되는 짓이요?"
장두식은 뽑아 든 머리를 마주 보며, 그리 중얼거렸다.
"두목-."
"형님이라 불러라. 두목이라 하니까 그 개새끼랑 같은 느낌이라 기분이 더럽다."
장두식은 무법 도시 뒷골목의 두목이 되었다.
한데, 배운 게 없어서 사는 건 전과 비슷했다.
"애새끼들이랑 마약을 파는 건 금지다. 대신, 돈 많아 보이는 놈들 털어먹는 건 괜찮다."
그래도 장두식이 운영하는 조직에는 선이 존재했다.
그 선이라는 것이, 썩 좋은 방향은 아니었지만-.
'뒈진 두목이 하던 인신매매나 장기 매매보다는 좋은 방향 같수다.'
장두식은 진심으로 자신이 선(善)을 행한다고 여겼다.
장두식이 배운 세계에서는 약탈이 기본이며, 나아가서 더 잔혹한 범죄들이 즐비했으니까.
그런 뒷골목에서 장두식의 방식은 뒤처지기 딱 좋았다.
"형님, 아무래도 우리 애들이 다른 조직으로 튀는 것 같은뎁쇼?"
다른 조직들은 두식파의 허점을 노렸다.
본래 인신매매를 주력으로 하던 놈들이, 두식파로 이름을 바꾸고서 한다는 짓이 평민들 삥 뜯는 게 전부였으니까.
아주 만만해 보였겠지.
"두식 형님, 이런 방식이 되겠습니까?"
같은 고아 출신들이 팔려 나가는 게 보기 싫어서 두목의 대가리를 뽑아 버린 장두식이었으나.
대책이 없었다.
"돈을 더 뺏으면 되는 거 아니냐?"
"아니, 형님. 페르안에서 부자들 털어먹는 게 쉽습니까? 애들도 만만한 놈들만 털어먹는 거죠. 부자들은 병사니 용병이니 대동하고 다니는데...."
"병사? 용병? 몽둥이로 줘 패면 갑옷도 벗겨 먹을 수 있는 놈들 아니냐?"
"그건 두식 형님이나 그렇고요."
음지에서는 음지의 법도가 있으나, 장두식은 이를 역행했다.
그렇다고 양지로 나갈 수도 없다.
장두식은 올바른 양지의 방식을 모르니까.
"그럼 수준 맞는 놈들만 털어먹으면 되지 않냐?"
"아니, 형님. 우리 애들 입이 몇 갠데, 소매치기나 삥 뜯는 걸로 되겠습니까? 차라리 약이라도 팝시다!"
"약은 안 된다. 사람을 침 질질 흘리는 병신처럼 살게 만드는 게 약인데, 그걸 왜 팔겠다는 거냐?"
"아이씨, 모르겠다. 형님! 나도 못 해 먹겠습니다."
결국, 오른팔이던 수하도 장두식을 외면했다.
그래도 장두식은 인복이 있었다.
뒷골목의 노인네들이나 사창가에서 구원받은 여인들은 장두식을 잘 챙겨 주었다.
"두식 오빠야, 나랑 고기나 잡으면서 살자. 저어기- 가르시안 왕국으로 가면, 어부로 영민들을 받아 준다더라."
"마! 나 장두식이다! 내가 어떻게 해서든 다른 일거리를 찾아볼 테니, 그런 개소리는 집어치워라."
그는 홀로 페르안 빈민굴을 벗어나 도시로 향했다.
"거, 존만 한 꼬마야."
"뭐?"
거기서 웬 이상한 꼬마를 마주쳤는데, 키가 1미터나 될까 싶은 놈이 제 몸만큼 커다란 검을 질질- 끌고 다녔다.
'검을 팔면 되겠구만.'
그래서 장두식은 그 검을 뺏고자 했다.
그리하여 장사꾼으로 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거 놓고 가라. 그러면 살려는 주마."
"아-. 분쟁 지대에는 죄다 병신들밖에 없나."
그날 장두식은 복날 트롤처럼 처 맞았다.
도시 한복판에서 얻어맞는데, 그 누구도 장두식을 구하려 들지 않았고.
심지어 꼬마를 말리는 사람도 없었다.
"...미친 살인귀 에릭이다."
주변의 소란을 듣고서야 장두식은 꼬마의 정체를 알아챘다.
흑마법사를 패 죽이고, 그와 연류된 모든 자를 없애 버린다는 도시 괴담과도 같은 존재.
미친 살인귀 에릭.
왜 그런 이명이 붙었나 했더니, 처맞다 보니 이유를 알게 되었다.
빠악-!
검의 면(面)으로 팬다.
근데, 검에서 신성력이 줄줄- 새 나와서 맞은 즉시 회복이 돼 버린다.
"기도하고 회개해라."
"퉤엣! 기도는 니미, 거, 간지럽지도 않구만!"
장두식은 꿋꿋하게 버텼다.
작디작은 꼬마한테 얻어맞는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런 장두식을 보며, 꼬마는 검을 고쳐 잡았다.
대충 들고 있던 손에 힘을 꽉- 주더니 대검을 양손으로 번쩍 들어 올리는 게 아닌가?
그리고 말하기를.
"그러냐? 그럼 한 방에 뒈지길 기도하든가."
꼬마의 앳된 목소리로, 그리고 아주 귀여운 얼굴로 저렇게 살벌한 말을 내뱉으며 패는데....
빠악-! 뻐억. 퍽!
무호흡 매타작이 시작되었다.
한마디 말도 없이, 꼬마는 일관적인 무표정을 유지하면서 장두식을 팼다.
"사, 살려만 주십쇼! 혀, 형님으로 모시겠수다-!"
한 시간을 넘게 얻어맞고서, 장두식의 기세가 꺾였다.
"형님? 지랄-."
그때였다.
꼬마가 검을 내리치려던 순간에.
"어허! 에릭!"
웬 백발 장발을 휘날리는 여인이 꼬마의 머리통에 꿀밤을 내리쳤다.
콰앙―――――!!
"끄윽."
굉음과 풍압이 일고 장두식은 그 여파로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러다 정신을 차렸을 때.
"오, 이런 순수한 기운이라니."
꼬마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자가 장두식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니.
그녀는 어머니보다는 소녀가 어울리는 외견이었으나, 이곳에는 어린 엄마들이 많았다.
장두식은 당연히 그녀가 에릭의 엄마일 거라 여겼다.
"거참, 애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요?"
꺾였던 장두식의 기세가 되살아났다.
깽값이라도 벌자는 마음가짐이었는데.
"애 엄마면 애한테 기본적인 건 가르쳐야 하지 않겠수? 다짜고짜 사람을 이렇게 패는 게-."
여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설명하기 어려운 섬뜩한 기운이 잔뜩 느껴졌다.
그녀가 묻기를.
"내가 애 엄마로 보이냐?"
* * *
"그때만큼 처맞았수다."
"그러냐?"
에릭은 잔뜩 분노했다.
사방을 둘러싼 놀 킹을 전부 신성력으로 태워 죽이고서 죽어 가는 장두식을 향해 [신성 치유]을 사용했다.
회복한 장두식에게 어떤 일이 있었냐고 물었는데.
"거참.... 그때를 생각해 보면, 형님보다 리페로제 누님이 더 많이 팬 것 같수다."
장두식이 실로 오래간만에 어릴 적 얘기를 꺼냈다.
에릭에게는 조금 껄끄러운 이야기였으나, 상대가 장두식이었으니 그냥 묵묵히 들었다.
"후-. 두식아 그래서 놀 킹한테 그때만큼 처맞았다는 게 네가 아는 전부냐?"
장두식이 많이 맞았다는 것이 대화의 결론이었다.
미궁 5계층에서 어쩌다가 이 사달이 났는지, 제국군은 뭘 하고 있으며, 여기에 집결한 모험가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런 설명은 전무했다.
에릭은 다시금 상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거, 내가 어찌 알겠수. 저 따까리들 데리고 도망치는 것도 벅차 죽겠는데."
음.
승모근이 꿈틀거렸으나, 에릭은 참아 냈다.
'두식이가 신의는 있는 놈이지.'
치료되기 전에 보았던 장두식의 상처를 떠올렸다.
팔 한짝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반쯤 일그러졌으며 눈이 깊게 파여 한쪽 눈이 멀어 버렸다.
그런데도 앞으로 둘러멘 봇짐은 아주 멀쩡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니.
"이게 형님이 모으라고 했던 거요."
그 봇짐은 에릭에게 줄 아이템들이었다.
그런 충의를 보고서 어찌 화를 내겠는가?
"고생이 많았다. 고맙다, 두식아."
건네받은 봇짐은 장두식이 흘린 피로 흥건했다.
그래서 에릭은 덤덤히 감사의 말을 읊조렸다.
'신이 있다면....'
장두식에게서 머리를 앗아 갔지만.
그 대신 지고한 충(忠)과 의(義)를 내려 줬으리라.
그런 감동 속에서 에릭은 곧바로 봇짐을 열었다.
그때, 장두식이 흠칫- 놀라며 에릭에게 물었다.
"거, 형님. 저 따까리들은 죽게 내버려 두는 거요?"
빙의자들에게 자신처럼 아우 대접을 해 줄 거라는 생각은 안 했지만, 그래도 목숨은 구해 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에릭은 관심도 주지 않고서 아이템을 확인하고 있었다.
"두식아, 쟤들한테 신성 치유를 쓰면 어떻게 되겠냐?"
"타 죽지 않겠수?"
"엘릭서를 먹여야 낫는 상천데, 엘릭서를 여기서 어떻게 찾겠냐?"
"거, 엘릭서 꿍쳐 둔 거 없수?"
"벌써 다 팔았다. 몇 개는 썼고."
장두식이 고된 시간을 보냈듯이, 에릭도 힘겨운 싸움을 벌였다.
강림한 재앙급 악마를 해치우느라 수많은 자원을 소모한 상황.
'빙의자들은 이런 게 불편하군.'
급한 대로 엘프 왕국에서 돈은 보충했으나, 회복 포션 같은 건 구하지 못했다.
아니, 챙길 생각을 못했다.
신성력이 있는 에릭에게 포션이나 엘릭서는 효율이 떨어지는 물건이었으니까.
"두식아, 인간은 언제나 답을 찾는다는 말이 있다."
봇짐에서 소주병같이 생긴 것들을 잔뜩 꺼내 든 에릭의 입가에 싱그러운 호선이 그려졌고.
"그 술병이 뭐라고 실실- 웃는 거요?"
장두식은 큰 이득을 봤을 때 나오는 에릭의 함박웃음을 보며, 의아함을 느꼈다.
'거, 뭘 어쩌겠다는 건지....'
분명 빙의자들을 버린 눈치는 아닌데, 그렇다고 딱히 구하려는 모습도 아니었으니까.
[레벨 업 영약] × 40
하나, 에릭에게는 명확한 대책이 있었다.
이를 위해서 장두식을 미궁으로 보낸 것이 아니던가?
[신체(神體) - 69/100]
레벨 업 영약을 써서 신체(神體)를 이루고, 엘프 왕국에서 얻은 10억 골드를 태워서 4티어 신성력을 개방한다면.
'분명 빙의자들에게도 신성력이 먹힐 거다.'
잭슨의 흉터를 조금이나마 치료했듯이.
그 여파로 몸이 조각나긴 했었다마는, 이는 신체(神體)를 이루면서 해결될 문제다.
말 그대로 신의 몸을 가지게 될 테니까.
뽀옹-.
그런 생각을 하며, 에릭은 망설임 없이 영약의 병을 땄다.
"거, 고블린 오줌 냄새가-."
옆에서 장두식이 투덜거리기 시작했지만, 에릭은 개의치 않고 병 안의 액체를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신체(神體) - 100/100]
그리하여 도달한 것은.
[신체(神體)를 이룹니다.]
에릭만의 깨달음이요, 다음 경지로 넘어갈 계기였다.
싸아아아아아.
에릭의 숨결을 따라 사방에서 신성력이 넘실거렸다.
하얀 피부 위로 금빛 안개가 뿜어지고 미궁 속을 찬란하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전능해진 기분.'
에릭의 온몸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충만함이 가득했다.
다시 재앙급 악마를 마주한다면, 맨손으로 패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감상에 젖어 있자니.
"거, 형님 빙의자들 몸에서 연기가 풀풀- 나고 있수다!"
장두식이 다급히 소리쳤다.
에릭이 고개를 돌려보니, 몸에서 넘쳐 나는 신성력이 빙의자들을 태우고 있었다.
[4티어 신성력]
[보유 골드: 1,230,506,500]
에릭은 황급히 상태창을 조작해, 다음 단계를 개방했다.
순식간에 10억 골드라는, 한화 1,000억에 달하는 금액이 사라졌다.
그 대신.
[4티어 신성력이 개방되었습니다.]
선명한 한 줄의 문구와 함께 에릭의 의식이 저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 * *
―너의 신전.
―너의 신성.
―너의 세계.
황금빛 신성이 가득한 공간.
'이 모든 것이 나의 것.'
같은 공간이나 느껴지는 것은 달랐다.
이 공간이 오롯이 자신의 것이라는, 아니 마치 제 몸처럼 느껴졌다.
에릭이 사방을 가득 채운 신성을 느끼고 있자니.
―이제 너의 신앙을 만들어라.
미궁의 음성이 새로운 말을 내뱉었다.
'다음 단계로 가면 신인가?'
상태창에는 [5티어 신성력]이라는 새로운 경지가 나타나 있었고, 그것의 의미는 명확했다.
―세상을 떠난 삼신을 넘어, 지고한 신앙을 쌓아라.
에릭의 예상대로, 미궁의 음성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미궁 속에서는 침묵을 유지하면서, 여기서는 왜 말을 거는 걸까?
여러 의문이 남았으나, 이에 답해 줄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 제 할 말만 내뱉고 사라지는군.'
에릭의 신성으로 가득한 공간에 들어선 이질적인 기운.
그것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곳은 그의 몸과도 같은 공간이었으니, 분명한 사실이다.
'미궁의 음성이니까, 언젠가는 그 정체를 알게 되겠지.'
에릭은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미뤄 두고 처리하기 쉬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황금빛 눈동자가 구름 위에 놓인 신전으로 향했다.
'익숙한 기척이 세 개.'
신전 입구에서 세 빙의자가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었으니.
"에릭 그 새끼가 시키는 대로 다 했더니 개새끼한테 씹어 먹혀 죽는 게 말이 되냐?"
"...니시다, 말 좀 가려서 해라. 딱 봐도, 여기 에릭 국장이랑 관련 있는 장소인데."
"박창호 너야말로. 병신 호구도 아니고, 개처럼 부려지다가 개새끼한테 물려 뒈진 마당에 아직까지 그 새끼를 두둔하고 싶냐?"
"오, 오빠들-. 그만 싸우자!"
저놈들을 살려 줘야 하나?
에릭에게 일순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그래도 살려 줘야겠지.'
특히 니시다 료는 무조건 살려 내야 한다.
[레벨 업 영약]의 맛을 본 뒤라 그런지 에릭은 빙의자들에게 조금 유해진 마음이 들었다.
"아아-. 족같은 이세계에서 이게 무슨 고생인지."
"그건 그래. 대륙 온라인만 안 했어도, 아, 난 금메달 따서 군대도 면제였는데...."
에릭은 하고자 하는 건 무조건 해내는, 대쪽 같은 성정을 지녔다.
그런데도 저놈의 빙의자들을 보니,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렸다.
'저걸 살려, 말아?'
이 새끼 저 새끼 하면서 싸우다가, 일치단결해서 신세 한탄을 늘어 두고.
"나, 난 여기가 더 좋은데?"
"그래.... 너는 좋겠지."
"나도 이런 뚱뚱한 몸 대신 박창호 같은 모습으로 빙의했으면 좋았을 건데."
"야, 나는 외변권 써서 원래 내 모습으로 돌아간 거다."
여자가 돼서 행복해하는 강풍호에 외모를 두고 이러니저러니 하는 모습까지 보니까....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에릭은 그대로 힘을 휘둘렀다.
쿠웅―――!!
묵직한 진동이 일며 에릭이 있는 구름과 신전 사이로 반투명한 금빛 계단이 생겨났다.
"어...?"
"그, 에, 에릭 국장님?"
"에릭 오빠?"
세 빙의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 있자니, 에릭은 성큼- 계단을 올라 자신의 신전으로 다가섰다.
"내 뒷담을 재밌게도 하더군."
툭- 뱉은 한마디 말에, 세 빙의자가 창백하게 질렸다.
63화 주인공 (1)
지구에서 안락한 삶을 살던 빙의자들이 야만적인 이세계에서 적응하기란 아주 힘든 일이었다.
그것도 지구의 중세 수준을 아득히 넘은 하드코어 난이도였다.
'지, 진짜 괴물이잖아?'
게임을 즐기며 백수로 살아가고 있던 일본 국적의 니시다 료는 처음 마주친 몬스터를 보고 당황했다.
군대조차 안 다녀온 그가 괴물과 사투를 벌이는 건 말도 안 됐다.
'사, 상태창?'
하나, 니시다 료는 자신이 선택받은 주인공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 세계는 내가 구원해 주마!'
야만적인 이세계에 적응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즐겨 하던 게임 속 세상이 배경이었기에 더욱 자신감이 붙었다.
[미궁은 꿈도 꾸지 마라.]
[요즘 모험가들 트렌드가 신입 파티원한테 성수 먹여 보는 거임]
[혹시라도 호감작 하겠다고 네임드 NPC들한테 껄떡거리지 마, 그냥 단두대로 끌려감.]
하지만 게임 속 지식을 써먹기란 불가능에도 가까운 일이었다.
그가 빙의한 시점에는 이미 빙의자의 존재가 공식적으로 알려진 상황이었고.
미궁은 빙의자들 사이에서 기피 대상 1위로 여겨졌다.
'미궁에서는 고블린이 2미터가 넘는다고? 얼굴도 안 본 새끼들 말을 어떻게 믿어.'
커뮤니티의 조언을 믿지 않았지만, 그래도 미궁은 무서웠다.
니시다 료는 미궁에서 활동하는 대신, 대륙을 누비며 레벨 업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푸욱-!
"끄아아아악!!!"
미궁이나 마경에서 나타나는 몬스터와는 다르게, 지상을 떠돌아다니는 몬스터는 게임과 비슷한 크기를 지녔기에.
니시다 료의 몸으로도 충분히 해낼 법한 일이었다.
'너무 아프다.'
하나, 빙의한 육체는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1레벨인 그는 첫 싸움에서 고블린의 단검에 찔렸다.
그래도 니시다 료는 힘겹게 1미터 남직한 고블린을 죽여 냈다.
"나 좀 재능 있을지도?"
니시다 료는 자신감이 붙었다.
[고통 내성] 스탯을 5 이상 올렸더니 어지간한 상처는 간지럽기만 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줄줄- 흐르는 건 조금 끔찍했는데.
상태창에 나타나는 HP 바를 확인하는 습관을 들여, 이 또한 자연스레 해결되었다.
여느 빙의자들이 그렇듯이, 니시다 료의 싸움법은 몸을 아끼지 않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고블린 슬레이어다!"
고블린만 잡아서 20레벨을 이룩한 니시다 료는 이명(異名)을 얻었다.
고블린은 번식 능력이 엄청나서, 순식간에 군체를 이루는 해충과도 같은 존재였으니까.
언제라도 찾을 수 있는 쉬운 사냥감이었다.
'고블린 슬레이어-.'
마을 사람들은 고블린만 사냥하는 니시다 료를 조롱하려고 한 말이었지만, 그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다.
일본에서 유명했던 만화 주인공과 같은 별명이었기 때문.
'이 정도면 돌아다닐 만한데?'
20레벨에 도달하면서 제국에 대한 정보도 많이 얻었고 멋진 이명까지 생긴 상황.
니시다 료는 빙의한 육체가 살던 깡촌을 벗어나 도시로 향하고자 했다.
'이 세계는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커뮤니티에 수많은 빙의자가 있음에도 니시다 료는 그렇게 자만심을 가졌다.
그도 그럴 것이.
"농민으로 태어나 죽기 보다는 함께 모험을 떠나 보는 건 어때?"
우연찮게 호감작이 가능한 미녀 NPC를 발견했기 때문.
게다가 그녀의 반응이 게임과도 똑같았다.
"진짜요? 너무 기대돼요!"
커뮤니티의 정보랑은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 아닌가?
'역시 커뮤니티는 다 사기였어.'
그녀는 밝게 웃으며 니시다 료를 데리고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이런 미녀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어쩌면 커뮤니티의 인물들은 정체를 숨긴 짓궂은 성좌(星座)들이며, 자신은 이 세계의 주인공이 아닐까?
하나, 니시다 료의 망상은 거기까지였다.
도착한 낡은 오두막집은 사실 제국 정보부의 안가(安家)였다.
'검은 옷? 커뮤에서 말하던 제국 정보부 같은데?'
그 안에서는 칠흑 같은 제복을 입은 사내들이 날붙이를 들고 니시다를 노려보고 있었고.
"이야-. 진짜 이거에 당하는 놈이 있었네요."
아리따운 미녀 NPC는 뒤틀린 입매로 니시다를 비웃었다.
이후 그는 숱한 고문과 취조를 받으며, 빙의자와 게임에 대한 정보를 읊었다.
"이놈만 특이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군, 수도의 수용소로 보내라."
결국 그는 2평 남짓한 철장에 갇혔다.
다행스럽게도 그곳에서 같은 처지의 빙의자들을 만났고.
'나는 주인공이 아니었어-.'
그 덕에 니시다 료는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커뮤니티의 조언은 전부 사실이었다.
"호감작을 해서 잡혀 온 놈은 또 처음 보네...."
그가 예상했던 것처럼 성좌들의 농간이라든가 그런 방향은 전혀 아니었다.
"커뮤에 주기적으로 하지 말라고 올라오잖아."
그래도 같은 철창 아래의 동료들 덕분에 나름 동질감을 느끼던 차.
"앞으로 너희는 미궁을 공략해야 한다."
거대한 성기사에게 끌려가 매주 미궁에 들어가는 처지에 놓였다.
박창호의 캐리로 그것도 슬슬- 적응이 되나 싶었다마는.
대격변이 일어나서 끔찍한 고난을 겪어야 했으며.
거기에 더불어 [고통 내성] 스탯을 잃어버리는 최악의 사태까지 벌어졌으니.
'이 세계는-.'
얼마 전까지 놀 킹에게 씹어 먹히는 고통을 느꼈던 니시다 료다.
분명, 다른 빙의자들과 함께 에릭의 뒷담화를 나누던 그였다.
'-어쩌면....'
하나, 신전에 들어온 에릭을 본 뒤로 그의 머릿속을 뒤흔드는 강렬한 직감이 느껴졌다.
'...빙의자들은 전부 조연이야.'
거대한 신전 한복판에서 찬란한 신성을 뿜어내는 에릭.
'저 말도 안 되는 외모에 압도적인 체구 하며, 한계를 알 수 없는 힘.'
문득 이 세계에는 주인공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이미 정해져 있는 게 분명했다.
누가 봐도 이질적인 힘을 지닌 거대한 사내.
'...주인공이 못 될 바에는 주조연이라도 노린다.'
니시다 료.
40년 인생에 처음으로 목표가 생겨났다.
―Ep. 14 주인공
'이게 조금 선명해진 건가?'
에릭은 자신의 신전에 일어난 변화를 살폈다.
거대한 신전은 여전히 뭉뚱그려진 모습이었으나, 신전 중앙의 끝자락으로 거대한 석상이 생겨나 있었다.
대략적인 실루엣만 있어서 정확한 석상의 형태는 알 수 없었다.
'뭔가 익숙한 느낌인데-.'
다만 그 실루엣은 어딘가 자극적으로 굴곡진 몸매를 지닌, 여신의 석상이라기에는 배덕한 매력을 자아내는 그런 모습이었다.
묘-하게 이루 말하기 어려운 친밀감이 들어왔고.
그래서일까?
'뭐, 한번 봐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빙의자들이 제 흉을 보는 것을 들었음에도, 에릭은 관대함을 내세우기로 정했다.
단순히 기분이 좋은 것을 넘어서, 그들이 최선을 다했다는 건 에릭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이 반쯤 죽어 가는 상태였지.'
놀 킹이 갯과의 몬스터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세 빙의자의 팔다리는 개껌에 씹힌 것처럼 너덜거렸다.
'얼굴은 터질 듯이 퉁퉁 불어 터졌고.'
이목구비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세 빙의자의 얼굴은 심각하게 부어오른 수준이었다.
개한테 어떻게 물리면 그렇게 퉁퉁- 불어 터지나 싶긴 했다만.
"니시다 료, 너까지 스킬 초기화를 했을 줄이야."
아무튼.
그들의 고초를 생각하며 에릭은 한마디 치하의 말을 건넸다.
"...가, 감사합니다!"
니시다 료가 눈망울을 빛내며 고개를 넙죽 숙였다.
'쟤가 저런 반응을 한다고?'
에릭은 고개를 기울였다.
니시다에게 저런 반응은 또 처음이 아니던가?
"더,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게다가 엎드린 채로 저렇게 소리까지 치다니.
에릭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줬다.
'저게 무슨-.'
그런 에릭과 니시다 료를 바라보던 박창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감을 느꼈다.
사람이 원래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던데.
'니시다 료가 저러는 건 즉사 감지가 발동한 걸지도?'
빙의자들은 이미 한번 에릭의 신전을 본 적이 있었다.
거기서 지구의 자신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니시다 료의 이상 행동을 보니, 박창호의 머릿속에서 온갖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 감정은 영혼으로 존재하는 신전 속에서도 죽을 수 있다는 공포였다.
"박창호, 왜 그렇게 겁에 질려 있지?"
박창호가 몸을 덜덜- 떨고 있었기에, 에릭의 눈길이 그곳으로 향했다.
니시다 료에 더불어 박창호까지 이상 행동을 보이자, 에릭은 무언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생각해보니까 이놈들, 이 장소를 아는 것처럼 말했었지?'
명석한 두뇌를 굴려 빙의자들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셋 중 하나만 봐주마."
어느덧 에릭도 빙의자를 다루는 요령이 생겼다.
팰 필요도 없다.
대충 이런 말 한번 뱉어 주면, 지들끼리 견제하고 난리를 치겠지.
"제가 말하겠습니다!"
"제, 제가!"
"저욧!"
예상대로 동시에 세 사람이 손을 들었다.
에릭은 순서대로 기회를 주었고, 빙의자들은 각자 이실직고하듯이 신전에서 보았던 일을 읊었다.
그에 에릭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흐익!"
그 이유는.
"니시다 료, 네가 이 사실을 숨기자고 했다고?"
니시다 료가 주도적으로 이를 비밀에 부쳤기 때문.
빙의자들도 쓸 만한 패를 하나 만들어 두려는 의도였는데, 그것도 사람을 봐 가면서 해야 했다.
"고통 내성 스탯이 없어졌다지?"
에릭은 니시다 료를 향해 성큼- 다가섰다.
니시다는 점점 뒤로 밀려났으나, 신전을 감싸고 있는 황금빛 구름에 닿을까 봐 더 도망가지도 못했다.
사실 빙의자들에게 이 공간은 거대한 감옥과도 같았다.
'사방이 신성력으로 가득한....'
도망칠 수도 없다.
사방은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구름이요, 샛노란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신전이다.
바닥?
보이지도 않는다.
떨어지면 100% 낙사할 높이.
스윽-.
에릭이 손을 움직이자, 구름이 슬며시 움직여서 니시다 료의 등을 건드렸다.
치이익.
"-흐아악!"
괴성과 함께 니시다 료가 데굴데굴 굴러서 에릭의 코앞까지 다가섰다.
툭- 하고 발등에 닿은 니시다 료의 뱃살을 바라보며 에릭은 곰곰이 고민을 해 봤다.
'얘들이 왜 내 신전에 왔는가?'
에릭은 빙의자를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
4티어 신성력은 이와 관련된 이능일 터였다.
하나,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도통 감이 안 잡혔다.
'힘을 쓰는 종류는 아니다.'
신성력을 휘두른다거나.
신성 축복을 내린다거나.
잭슨의 경우처럼 의도적으로 신성력을 조절한다면 치료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고통을 지운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보스, 흉터 하나 지우는 데 영혼을 불로 지지는 고통이 느껴지더군요."
잭슨이 추가 치료를 거부할 정도였으니, 이루 말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이리라.
'혹시....'
그때 에릭의 눈에 신전 한복판에 놓인 신좌가 떠올랐다.
에릭은 성큼- 걸어서 신좌에 앉았고.
[신앙]
너덜너덜한 상태창 위로, 선명한 황금색 화면이 떠올랐다.
상태창과는 전혀 다른 온전한 금빛 시스템 창.
'음, 신앙 관리창 이런 건가?'
파앗-!
[신앙 관리]
에릭이 생각을 마침과 동시에 [신앙 관리]라는 문구로 화면의 명칭이 변했다.
[이름 없는 신의 신전 – Lv.1]
[임명 가능한 신도 – 0/3]
[신앙을 키워 보다 많은 신도를 확보하세요!]
신앙을 키우고 신도를 임명하라고?
에릭은 나타난 화면을 이리저리 조작해 본 뒤에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역시, 나는 이런 쪽으로....'
신성력의 경지을 돈으로 사는 에릭답게, 신도에 대한 문구를 클릭하자 돈을 쓰라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박창호 – 15,000,000]
[강풍호 – 10,000,000]
[니시다 료 – 200,000,000]
"허어-."
다만 그걸 본 에릭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신전에 들어온 빙의자를 신도로 임명할 수 있는 구조의 시스템인 건 알겠다.
게다가 신도의 가치에 따라 금액이 다르게 정해진다는 것도 분명하게 이해했다.
하지만.
'니시다 료가 2억?'
니시다 료가 2억이나 한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에 에릭이 니시다 료를 바라봤다.
"...지, 진짜 박창호가 시켰다니까요!"
그는 아직도 신전을 숨긴 것에 대한 변명을 늘어 두고 있었다.
에릭은 그가 빙의자 관리소에 잡혀 온 이유를 떠올렸다.
'히든피스를 잘 찾는 건 알겠다만-.'
"야, 강풍호! 아니, 풍호가 옆에서 막 부추겼습니다!"
아직도 변명을 늘어 두는 니시다 료를 보면서 2억 골드가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답지 않지만....'
에릭은 씀씀이가 크다.
낭비가 심한 게 아니라, 제 사람에게 돈을 잘 쓴다는 의미였다.
르웰한테 교회 부지를 통째로 사 줬을 때도.
두식이한테 마도구 상점의 명의를 이전해 줄 때도.
고아원을 떠난 1기생들한테 제국일보나 포차를 넘겨줬을 때도.
심지어 십일조의 일부를 아스티아 교단에 기부를 했을 때조차 에릭은 아깝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돈은 써야 돈이다.
박지훈 시절부터 이어져 온 에릭의 철칙 중 하나였으나.
'돈이 아까워 죽겠다는 게 이런 느낌이었군.'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진짜 너무 아까웠다.
* * *
"딱 세 가지만 맹세해라."
에릭은 덤덤하게 세 빙의자를 하나씩 바라봤다.
'대, 대체 뭐를....'
황금색 의자에 앉아서 골똘히 고민을 하더니, 대뜸 맹세하라는 말을 내뱉는 에릭.
빙의자들은 뭔진 몰라도 무서운 일이 벌어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특히 박창호는 그 정도가 더 심했다.
'아니, 특성이 고장 난 건가?'
박창호의 [제육감]이 미친 듯이 반응하고 있었는데, 온몸이 찌르르- 울리는 것이 전기 충격을 받는 기분이었다.
하나, 이 찌릿한 감각은 매우 좋은 소식을 의미했다.
'몸은 다 죽어 가는 판국에 무슨 좋은 일이 생긴다고.'
영문을 모르겠는 상황에 박창호가 의아해하자니.
"하나, 너희는 이 대륙에 살아가는 이 세계의 주민이다."
묵직한 중저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둘, 너희는 세계의 위기를 구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맹세라더니, 별것도 없었다.
평소에 에릭이 강조하던 말들이 아니던가?
"셋, 정당한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세 가지 맹세를 읊조린 에릭은 박창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찬란하게 빛나는 신좌 위에서 에릭이 묻기를.
"박창호, 지킬 수 있겠나?"
박창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예! 맹세하겠습니다!"
구름 위를 떠다니는 거대한 신전.
화려한 옥좌 위에서 손을 내미는 에릭의 모습은 맹목적인 믿음을 불러일으켰고.
[제육감]의 발동까지 있으니, 이를 근거로 박창호는 단번에 소리친 것이다.
그런 박창호를 향해 에릭이 손을 휘두르자, 그의 눈앞에 처음 보는 샛노란 상태창이 나타났다.
[이름 없는 신의 신도가 되셨습니다.]
64화 주인공 (2)
아스티아 교단의 사제요, 제3구역의 명소가 된 황도 중앙 교회의 주인이자.
제국의 아이돌, 르웰.
"와아아아아아아아-!!!"
그녀가 예배당 단상에 오른 직후 사방을 쩌렁쩌렁 울리는 함성이 울려 퍼졌다.
지구의 유명한 건축물을 따라 만든 교회의 내부 풍경은 사뭇 장엄하기 그지없었으나, 예배의 분위기는 숫제 아이돌 콘서트를 방불케 했다.
"-믿습니까?"
르웰은 짜릿한 쾌감을 느끼며 고개를 한껏 치켜올렸다.
구구절절 기도문을 읊을 필요도 없이, 그냥 네 글자 물음을 건넸을 뿐인데-.
"예에에――!!!"
모든 신도가 절로 신앙의 믿음을 부르짖었으니.
그야말로 진실된 믿음.
우우웅-.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교회 전체를 둘러싸고 신성의 물결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허어-. 아스티아 교단의 예배는 처음 봤다만, 아주 기괴한 방식으로 이뤄지는군."
그 광경을 본 황도군 장군이 예배실 문 앞에서 턱을 쓸며 중얼거렸다.
"잭슨이랬나? 너무 과묵한 것도 좋지 못하네만."
장군은 르웰의 예배를 구경하며 연신 감탄사를 늘어 뒀지만, 옆에 있는 잭슨은 시종일관 무대응을 유지했다.
답답함을 느낀 황도군 장군이 잭슨을 툭- 밀치고 르웰을 향해 다가서려 했는데.
스릉.
"이 이상은 못 갑니다."
잭슨이 우뚝- 그를 막아섰다.
잔뜩 일그러진 흉터 사이로 식은땀이 삐질삐질 새어 나왔다.
하나, 검을 잡은 손과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중하였으니.
"...허.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황도군 장군은 그런 우직한 모습을 보며, 크게 감탄했다.
그는 잭슨을 향해 진심으로 살기를 내뿜었다. 이를 버티면서 검을 놓치지 않는 검사라니-.
"신성도 못 다루는 자가 어찌 교단의 번견을 자처하는지 모르겠군."
황도군 장군은 잭슨에게 큰 흥미를 느꼈다.
제국은 언제나 인재 등용을 중요시하는 국가였고, 그곳의 강자들은 자연스레 가능성을 품은 이들을 아꼈다.
가능성은 곧 신념이다.
"-이미 제 충심은 성자 에릭님께 바쳤습니다."
잭슨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장군이 자신을 회유할 기회도 주지 않고 스스로가 누구의 사람인지를 상기시켰다.
"그래, 주인을 향해 충심을 다한다면, 내 질문에 답을 주면 되지 않겠는가?"
황도군 장군은 심히 언짢았다.
그는 그저 궁금한 걸 물었을 뿐인데, 에릭의 사람들은 누구 하나 제대로 된 답변을 주지 않았다.
"내, 다시 묻겠네. 성자 에릭이 어떻게 폐쇄된 미궁으로 들어간 건가?"
이 간단한 질문에 아무도 대답을 않는 상황.
'전이와는 전혀 다른 힘이었지.'
황도군 장군은 폐쇄된 미궁을 지키고 있었다.
그때 거대한 성기사가 나타나서는 급한 용무가 있다며 장군의 병사들을 뿌리쳤다.
"닫힌 미궁에서 뭘 하겠다는 건지, 그냥 둬 봐라."
장군은 미궁이 닫힌 상황에서 대체 무슨 짓을 하려나 궁금해서 에릭을 지켜봤다.
한데, 그 커다란 성기사가 신성력으로 공간을 가르고는 미궁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닌가?
"대체, 닫힌 미궁을 어찌 열고 들어갔는가?"
다시 생각해 봐도 믿기지 않는 순간이었으니.
미궁을 무슨 제 방문처럼 열었다 닫았다 마음대로 하는 게....
'황제 폐하께서도 할 수 없는 일을.'
미궁이 닫히면, 한 주의 첫날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하물며 닫힌 미궁 속에서는 대격변 패치라는 대재앙이 벌어져 있는 상황이 아니던가?
아직까지 미궁에서 나온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황제 폐하께서 못 하는 일을 해내는 교단의 인물이라.'
장군의 입장에서는 꼭 알아야만 했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으나, 이 교회를 보고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어쩌면, 에릭은 제국의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자였으니까.
'보스, 대체 어떡해야-.'
잭슨은 저런 장군에게 뭐라도 변명을 해야 하는 입장이다.
한데, 머리를 암만 굴려 봐도 명확하게 떠오르는 답변이 없었다.
사실, 보스가 [성기사] 클래스의 빙의자여서 가능합니다만.
그렇다고 이딴 대답을 할 수는 없지 않나?
"흥흥, 당연히 성자님이라서 가능한 일이지요!"
그때 갑자기 잭슨과 황도군 장군 사이에 르웰이 나타났다.
한껏 허리를 세우고 고개를 빳빳하게 내든 채, 요염한 자태로 그리 말하는데-.
"-흡!"
장군은 제 기감으로 감지하지 못한 존재에 화들짝 놀라 본능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휘두르기까지 해 버렸다.
후웅-.
격을 넘은 강자의 검이, 르웰을 향해 떨어지고.
'이 내가 이런 실수를-.'
일곱 줄을 지닌 흑마법사의 기척도 잡아내는 장군의 기감이 뚫렸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검을 내리쳤다.
검을 휘두른 근거로는 충분하였으나.
'힘없는 교단의 사제를 죽일 순 없지.'
그 대상이 문제였다.
급히 내지른 검에 손대중을 할 여유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장군의 기감을 뚫고 나타난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장군은 온 힘을 다해 자신의 검을 멈춰 내려 했다.
내지른 힘을 회수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으나, 장군은 지고한 강자였기에 이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쨍――――!
"깜짝이야!"
한데, 그의 예상보다 빠르게 검이 멈췄다.
아니, 막혔다.
사제의 코앞에서 은빛 검이 서슬 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 뒷걸음치더니.
"나, 나한테 칼을 휘둘렀어?"
명품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드는 게 아니던가?
그녀는 기록용 수정구를 사용해 칼을 든 채 멍하니 서 있는 장군의 모습을 촬영했다.
"왜, 저한테 칼을 들이대신 거죠?"
한쪽 팔을 허리에 얹고 단단히 화가 난 표정으로 그리 묻는데.
"지, 지금 무슨...."
장군은 도통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의 일검(一劍)이, 허무하게 막혀 버렸다.
분명 사제한테 검을 휘둘렀고 장군은 검을 회수하려 했다.
"크윽-."
한데, 회수하기 직전.
소드마스터 잭슨이 그의 검을 받아 낸 게 아니던가?
"끄윽, 제, 힘의 개성입니다."
특정 대상에게 휘두른 검을 공간을 뛰어넘어 막는 능력이라니.
그런 개성이 있단 말인가?
'도통 믿을 수가 없군.'
게다가 격을 넘어선 강자에게서 기척을 지워 낼 수 있는 이질적인 사제도 있고.
"여러분-! 별일 아니니까, 다들 기도합시다!"
심지어 그녀는 담대하기까지 했다.
'이 나를 눈앞에 두고도 저런 모습이라니....'
방금 검에 맞을 뻔했는데도, 그녀는 대충 영상만 찍고는 뒤돌아서 신도들을 향해 가 버렸다.
도망친 것도 아니다.
런웨이를 하듯, 당당하게 예배실 정중앙의 카펫을 밟고서 단상을 향해 걸어가는데....
"자, 여러분 이제 봉헌 기도의 시간이 왔습니다-! 헌금함은 저쪽에 있어요!"
봉헌 기도라고?
그런 이상한 것들을 본 장군은 그대로 등을 돌려 교회 밖으로 나섰다.
"-다음에 다시 오지."
벽을 넘은 강자인 제게 기척을 숨길 수 있는 사제와 자신의 일격을 원격으로 막아 버리는 기이한 소드마스터.
수도 한복판에 저런 괴물들이 도사렸을 줄이야.
'저게 성자의 사람들....'
* * *
[신도가 임명되었습니다.]
[신앙의 증거로 '제약(制約) - 신성을 거부하는 영혼'이 무효화됩니다.]
'역시-.'
에릭은 신도를 임명했고, 그에 따라 신전 관리창에 변화된 정보가 나타났다.
[성기사] 클래스 상태창과는 달리, [신성 관리] 화면은 선명했고 자세한 정보들을 면밀히 알려 주고 있었다.
'영혼 페널티라니.'
상태창을 지닌 빙의자들은 신성력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몬스터나 흑마법사들처럼 오히려 신성에 활활- 타 버리는 모습을 보였는데, 에릭은 그 원인을 규명한 것과도 다름없었다.
"...이게 무슨."
"아앗-! 에릭 오빠, 내 몸이 빛나고 있는데요?"
박창호와 강풍호의 몸이 찬란하게 빛나고.
파앗-!
[이름 없는 신의 신전 – Lv.01]
[임명 가능한 신도 – 2/3]
[보유 신앙: 23GP]
상태창에 변화가 일어났다.
신도의 수가 늘고, 보유 신앙 옆으로 GP-아마 갓 포인트로 추정되는 문구가 생겨났으니.
[박창호] - 새로운 파티를 꾸리고 싶은 염원이 있습니다.
[강풍호] - 강지나로 개명을 하고 여자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음...."
거기에 몇 가지 조작을 더해 보니, 에릭은 정말 자신이 전지전능에 가까워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타인의 강한 욕망을 볼 수 있게 되었고, 거기에 더불어.
[수정] [고정]
무슨 게임 캐릭터 커스터마이징을 하듯이, 신도들의 설정들을 제멋대로 바꿀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여기서 고정을 하면, 외형 변경권을 써도 지구의 모습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거기다 이름이나 자잘한 설정을 변경할 수 있다고 하니.
'진짜 캐릭터 커스터마이징도 아니고....'
조금 이상한 능력이었다.
하나, 무언가 쓸모가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에릭은 두 사람에게 질문을 건네 봤고.
"오오...."
대답은 아직 신도가 되지 않은 니시다 료에게서 나왔다.
빙의자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데, 하나는 성별이 바뀌거나 모습이 달라진 것에 절망하여 이 세계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부류고.
나머지 하나는 강풍호처럼 변한 제 모습을 받아들이고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에 행복을 느끼는 자들이다.
"-저는 이 몸이 더 좋긴 한데, 좀 더 미남에 근육질이었다면 싶은 욕망이 있는 거죠. 그, 그래서 왜 저는 신도가 될 수 없는 거죠?"
니시다의 개인적인 욕망까지 들을 뒤에야, 에릭은 신도임명 칸을 눌렀다.
에릭의 손끝이 살짝- 떨려 왔다.
[200,000,000골드를 사용해 니시다 료를 신도로 임명합니다.]
에릭의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돈을 다 써 버렸군.'
2억 3천만 골드 언저리였던 자산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박창호와 강풍호에게 2천 5백만.
그리고 니시다 료에게 2억.
[3/3 신도 슬롯이 가득 찼습니다.]
[슬롯 확장: 100,000GP]
게다가 신도 슬롯을 늘리는 데에는 GP라는 게 필요하다.
'골드에 이어서 GP도 모아야 하는 건가.'
GP라는 것의 값어치는 아직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그의 돈지랄은 영원토록 계속될 것이리라.
익숙한 일이었다.
그래서 에릭은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돈도 돈이지만-.'
파앗-!
[니시다 료] - 주인공 옆에서 활약하는 주조연의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이런 새끼한테 2억을 태운 게 맞을까?
분명 근육질 미남이 되고 싶다 했던, 니시다는 주조연이라는 괴팍한 욕망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에릭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것이다.
[이름 없는 신의 신도가 되셨습니다.]
반면, 자신의 상태창을 본 니시다 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이름 없는 신!"
신이란 믿음을 먹고 사는 존재다.
니시다는 그걸 잘 알았다.
'정통 신화물부터 외신을 다룬 것까지 생각해 보면.... 흔한 촉수물에도 나오는 설정이니까.'
온갖 매체로 학습된 정보들이 니시다 료의 머릿속에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고.
"빙의자의 신-."
에릭을 향해 경외의 말을 내뱉었으니.
"빙신이시여!"
* * *
'영혼의 세계에서도 처맞으면 얼굴이 퉁퉁- 불어 터지는구나.'
시종일관 침묵을 유지하던 박창호는 니시다 료의 비대해진 얼굴을 보며, 자신은 입을 닥치고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에릭 오빠 무서-!'
강풍호 역시 입을 꾹- 닫은 채 니시다 료를 훑어봤다.
장두식에게 맞아 본 강풍호는 보는 것만으로 깨달았다. 에릭이 패는 게 장두식의 배 이상으로 맵다는 것을.
"흐이익-."
얼굴을 부여잡은 니시다 료는 '조금 더 멋진 신명(神名)을 생각해 보자.'라고 다짐하였고.
세 빙의자가 진정된 것을 본 에릭은 입을 열었다.
"봐서 알겠지만, 너희는 이제 나의 신도다."
그 목소리가 제법 무거웠다.
에릭은 자신이 상당히 애매한 입장에 놓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신이 된다는 건 아주 큰 문제를 불러올 터였다.
'아스티아 교단의 성자인 내가-.'
[이름 없는 신]이 된 것이니까.
내심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다마는, 신도로 빙의자를 받아야 한다는 건 조금 문제였다.
아스티아 교단은 몰라도, 다른 종교 단체는 에릭을 이단(異端)으로 몰아갈 가능성이 농후할 테니.
"당분간 다들 입조심하도록."
생각을 마친 에릭은 신좌에 앉은 상태 그대로 손을 휘저었다.
스르륵-.
구름이 거둬지고.
세 빙의자의 영정 사진이 선명하게 드러났으니.
"부, 부끄러워요...."
에릭은 관자놀이를 질끈 눌렀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원래 어떤 놈들인지 봐 둘 생각이었는데....'
박창호야 지구에서와 같은 모습이라고 하지만, 니시다 료와 강풍호의 모습은 지금과 전혀 달랐다.
특히 강풍호가 심각했다.
무슨 SNS 사진으로 사기 치는 것도 아니고.
'머리가 휑한 중년 아저씨가-.'
빙의한 강풍호와 영정 사진 속 강풍호를 번갈아 본 에릭은 한마디 말을 남겼다.
"다시는 오빠라는 호칭을 쓰지 말도록."
이제 확인할 건 다 끝난 셈이다.
밖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
게다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나머지는 밖에서 얘기하지."
에릭은 손바닥을 마주 댔다.
쩌엉――――!!!
절대로 손바닥에서 나지 않을 법안 장엄한 공명음이 울리고는.
그대로 세 빙의자의 의식이 구름을 타고 사라졌다.
남겨진 에릭은 손을 살짝 움직여, 자신의 영정 사진을 드러냈다.
"...박지훈, 너는 대체 어쩌자고 혼자 가 버렸니?"
전번과는 다른 여인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때보다 시간이 조금 지난 느낌이었는데, 그 근거로 다른 빙의자들의 영정 사진 앞에는 조문객이 보이지 않았었다.
다만, 박지훈의 영정 사진 앞으로는 아직도 찾아오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고.
"후-."
에릭은 복잡한 심경을 한숨으로 토해 내며, 자신의 의식을 신전 밖으로 끌어 냈다.
스르르륵.
금빛 물결을 타고 눈을 떴을 때.
"거, 형님. 빙의자들이 번쩍거리는데, 저거 봤수?"
끔뻑, 끔뻑.
왕만 한 눈망울을 빛내며 장두식이 에릭을 바라보고 있었고.
"상처가 재생되는 게 무슨- 신성 치유를 받은 것 같수다."
장두식의 머리통은 빙의자들 이상으로 반짝거렸다.
에릭은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두식이도 뭐가 변한 건가?'
에릭의 예상과 달리 본래부터 이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자신을 향한 [신앙]이 적용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자니.
"끄윽-."
"내, 내 몸이!"
"살았다, 살았어!"
세 빙의자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반죽음 상태였던 그들의 몸은 신성의 빛에 휩싸여 제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우리도 신성력을-."
한껏 기뻐하던 그들은 장두식을 보자마자 '흐익-!' 비명을 내질렀다.
겁을 먹어도 잔뜩 겁먹은 모습.
'얼굴이 왜 그렇게 불어 터졌나 했더니-.'
에릭은 빙의자들의 상처를 떠올렸고, 얼굴이 터질 듯이 불어 터진 원흉을 찾아냈다.
장두식에게 성큼- 다가서서는 물었다.
"두식아, 너 또 애들 팼냐?"
65화 주인공 (3)
살다 보면 한 번쯤 정말 억울한 일을 겪게 된다.
자신은 좋은 의도로 한 일이었으나, 단편적으로 보이는 순간만 보면 나쁜 짓을 한 것처럼 보이는 상황 말이다.
지금의 장두식이 그랬다.
"거참, 형님. 나도 나이가 서른여덟인데 이유 없이 애들을 팼겠수?"
정말로 억울했다.
그런 장두식의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장두식은 허겁지겁 변명을 시작했다.
"-자, 잠깐! 형님 들어 보고 생각해 보슈! 진짜 억울해서 그렇수다."
사방에서 몬스터가 몰려오는 와중에, 빙의자들이 너만 왜 고통 내성 스탯을 가지고 있냐는 식으로 말하며 서로 싸워 댔다.
"나는 스킬이니 뭐니 잘 모르지 않수? 그래서 그냥 내버려 뒀었는데-."
빙의자들의 대화를 듣다 보니까, 니시다 료가 에릭의 지시와 다른 행동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자기들끼리 싸워 대는 통에 개새끼들한테 물려 죽을 뻔했수. 그러니 내가 어찌 가만히 있겠수?"
장두식은 어쩔 수 없이 몽둥이를 들었다는 게 요점이었다.
"거, 형님이 말하지 않았수? 사랑의 매라고."
거기까지 설명이 이어지자 에릭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잘했다."
아주 흡족스러운 얼굴이었다.
한껏 찢어진 입가를 보아하니, 함박웃음이 분명했다.
장두식이 그런 에릭의 모습에 안도감을 느끼던 차.
"두식이 너도 새 몽둥이를 뽑을 때가 됐지."
에릭이 [인벤토리]에서 아주 크고 우람한 몽둥이를 꺼내 드는 것이 아니던가?
"저렇게 대단한 몽둥이는 처음 봤수다!"
장두식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애들을 팼다며 꿀밤 세례를 각오했던 그였는데, 역으로 극찬과 함께 포상까지 주어졌으니.
정말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받아라."
에릭이 건네준 몽둥이는 엘프 유렌이 서 있던 세계수의 가장 높은 가지였다.
아주 크고 기다랗고 두꺼운.
"허어-. 손에 착착 감기는 게 마치 내 몸 같수다."
기존의 몽둥이와 달리, 에릭이 준 새 몽둥이는 존재만으로 아이템 취급을 받을 만큼 대단한 물건이었다.
"내 꼭 이 몽둥이로 8서클에 도달해 보겠수."
장두식이 연신 감탄을 내뱉고 있자니, 옆에서 세 빙의자가 입을 쩍- 벌린 채 휘둥그레진 눈으로 몽둥이를 바라봤다.
[세계수의 가장 높은 가지(재료 아이템)]
[레전드 등급]
'재료템이 레전드 등급?'
게임 속 최고 등급 아이템은 크게 두 종류였다.
[성유물]과 [신화급]으로.
성유물은 파밍으로만 얻을 수 있는 신과 관련된 설정이 붙은 아이템이고.
신화급은 말 그대로 신화를 재현할 만한 힘을 지닌 아이템으로, 유저가 만들 수 있는 종류였다.
'장인만 잘 만나면 신화급도 노려 볼 만한데?'
후자의 경우는 [레전드] 등급의 재료템을 가공해서 [신화급]에 도달할 수 있었으나.
'그걸 가공도 안 하고 그냥 써?'
툭툭-.
"거, 손맛이 좋겠구만."
장두식에게 아이템을 가공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군침이 도는 눈빛으로 빙의자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
그런 장두식의 눈빛을 읽고 에릭이 으름장을 놓았다.
"두식아, 이유 없는 매는 독이다."
"...알겠수다."
마력의 순환을 극대화해 주는 세계수의 가지를 들고서도 물리력을 행사하지 못해 아쉬워하는 장두식.
'저기 맞으면....'
그리고 그런 장두식을 두려워하는 빙의자들.
에릭은 지금의 구도가 아주 만족스러웠다.
'두식이가 목줄이 되어 주겠군.'
빙의자들은 이제 신성력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말인즉슨, 이전에 걸어 두었던 제약 마법의 효과가 무의미해진다는 것이다.
[개벽의 검]에 관한 비밀을 발설하면 몸에 심긴 신성력이 터진다는 제약이었는데, 이제 그 효과는 사라진 것과도 다름없었다.
'신도를 추방하는 기능도 없지.'
하물며, 한번 신도가 되면 에릭이 이를 해제할 수도 없다.
아직 [신도 임명]에 대한 조건을 명확히 모르는 상황이라서 섣부르게 빙의자들을 처분하기도 어려운 상황.
'조금 이상해서 그렇지 애들이 착하긴 해.'
에릭이 겪은바, 세 빙의자는 제법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니시다와 강풍호는 조금 특이한 구석이 있지만, 그래도 악(惡)에 치우친 쪽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호감작은 조금 괘씸하지만....'
그간 겪은 빙의자들을 떠올려 보니, 이들 정도면 최상급 빙의자로 봐 줄 만했다.
'뭐, 이제 개벽의 검은 문제가 아닐 테니까. 나머지는 차차 알아 가면 되겠어.'
생각을 정리한 에릭은 다음 행선지를 정하고 발길을 옮겼다.
장두식에게 들은 바.
그들이 신전에 들어간 뒤로 시간이 몇 초 지나지 않았다는데, 그래도 여유를 부릴 상황은 아니었다.
'생존자들이 남았으니까.'
처음 5계층을 살폈을 때, 두 개의 기척이 느껴졌다.
장두식 일행을 구했으니, 남은 하나는 제국군일 가능성이 높았다.
혹은 모험가들일 수도 있고.
"너희들도 왜 5계층에 이 사달이 났는지는 모르는 거냐?"
"...예."
마법사로 알려진 대대장이 마력 고갈을 겪어서 계층주가 풀려난 게 아닐까?
처음에는 이런 생각을 했었지만, 에릭은 이내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흑마법사 새끼들.'
제국 남부에 재앙급 흑마법사가 등장했다.
그때부터 에릭의 오감은 아주 예리해졌고, 그래서인지 이루 말하기 어려운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런 진중한 생각에 잠겨 있자니.
"형님, 그런데 내 머리는 왜 이렇게 반짝거리는 거요? 축성이 무한으로 지속되는 것 같수다."
장두식이 아주 중요한 질문을 건넸다.
흑마법사 따위보다 더 우선순위로 처야 하는 그런 말이었다.
에릭은 무한 축성의 원인을 생각해 봤다.
'아마도....'
장두식은 아주 무식하다.
그가 살아온 뒷골목은 성인이 되도록 일반 상식을 배울 수 없는 환경이었고, 거기에 더불어 장두식의 천성은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야만적인 환경은 장두식을 아주 심플한 존재로 성장하게 만들었다.
하나, 이런 개막장 세계에서 심플한 건 오히려 장점이었다.
'무식한 건 전혀 문제가 아니지.'
장두식은 아주 정직하고 우직하며 의리 있는 사내다.
어릴적 의형제라는 말을 알려 준 뒤로, 철석같이 자신을 형님으로 모시며 살아가는 장두식이었으니.
사실, 황녀와의 혼인에서 에릭은 장두식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근거도 충분했다.
'의리.'
그런 우직한 성격은 장두식의 의리를 지고한 신념처럼 만들었고, 그 덕에 [이름 없는 신]의 신도로서 효과를 얻는 게 아닐까?
에릭은 그런 추측이 들었다.
다만, 상대가 장두식이었으니 이를 한 줄로 요약해 줬다.
"두식아, 그 빛은 네 신념이다."
"그게 뭔 개소리요?"
"지금처럼 살라는 말이다."
"오오, 신념이 그런 뜻이었수?"
"그래."
아무튼, 그런 소소한 잡담을 나누며 일행들은 제국군의 기척을 향해 다가갔다.
* * *
"대대장님이라도 살아야 합니다!"
"저희가 결사대가 되겠습니다! 부디, 계층 입구로-."
대대장의 직속 부대는 전부 기사로 이뤄졌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제국에 충성하며, 상관의 명을 목숨처럼 중요시하는 정예병이다.
"불허한다. 우리는 죽어도 함께 죽는다."
그런 기사들을 부리는 자가 결코 가벼울 리가 없었다.
대대장은 이 사달이 났음에도 제국의 대대장을 뜻하는 문양이 새겨진 투구를 벗지 않았다.
그런 완고한 성격이었기에.
대대장은 부하들과 함께 죽음을 맞이할 생각이다.
'어쩌다가....'
대대장은 이 지경까지 몰린 원흉을 떠올렸다.
'흑마법사 놈들-.'
5계층의 계층주를 틀어막는 건 순조로웠다.
보급품으로 마력 포션을 잔뜩 챙겨 왔으니, 그저 자리를 지키며 계층주를 학살하면 그만일 터였다.
하나, 갑작스레 흑마법사들이 포탈을 열고 나타났다.
"난데없이 수확할 기회가 찾아왔구나!"
5계층은 일종의 집결지 역할을 하는 장소였다.
모험가도 많았고, 생존자들도 죄다 이쪽으로 모인 상황.
그때 나타난 여섯 줄을 지닌 흑마법사는 모험가와 제국의 병사들을 잡아먹었다.
빙의자 흑마법사들이 [단절] 주문을 사용한 탓에, 대대장과 그 직속 부대는 격리된 공간에 가둬졌다.
"다들 일점을 노린다!"
대대장이 탈출했을 때.
5계층의 생존자는 전무했으며, 그들은 [단절]을 파훼하기 위해 대부분의 전력을 소모했다.
대대장은 마력 고갈에 시달렸고 기사들의 체력도 한계에 달하여 결국 계층주를 피해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여정은 끝이 나겠지만, 제국은 영원하리라.'
짧은 회상을 마친 대대장은 자신의 수하들을 한 사람씩 바라보며 악수를 건넸다.
그 뒤 장엄한 최후의 연설을 시작했으니.
"우리의 죽음은 알려질 것이며, 황제 폐하께서 피의 복수를 천명하실 것이다! 그러니 다들 제국의 영광을 그리며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한다!"
마력 고갈, 오러의 소실.
거기에 더불어 흑마력의 저주를 받아 자연 재생력도 현저히 떨어진 상황.
그러나 대대장과 부대원들의 사기(使氣)는 미궁의 천장을 찢을 듯했다.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라."
거대한 고대 석조 건물 속에 몸을 숨긴 부대는 일사불란하게 장비를 점검했다.
파직-.
짧은 점검이 끝난 직후, 건물 벽을 타고 균열음이 들려왔다.
대대장이 마지막 남은 마력으로 쳐 둔 방어막이 부서진 것이다.
"방패 앞으로-!"
균열을 향해 부대의 1선을 담당하는 방패를 든 기사들이 나아갔다.
컹컹―――!!!
깨진 방어막 사이로 소름끼치는 괴성이 들려왔다.
놀 킹, 5계층의 주인이 사방을 둘러쌌다.
문과 창문에 천장까지, 모든 곳이 침을 질질 흘려 대는 몬스터로 가득했다.
파칭-!
결국 마력 방어막이 깨지고.
터진 댐 사이로 물이 몰아치듯이 몬스터들이 밀려왔다.
"막아-!"
"찔러-!"
방패로 막고 그 사이로 찌르고, 최대한 오러를 아끼며 기술로 몬스터를 상대해 봤지만.
"후퇴-!"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뚫을 길이 보이지 않는다-.'
기사들은 대대장을 살려 둘 생각이었다.
눈빛으로 암묵적 합의를 보았으니, 타이밍을 봐서 길을 뚫은 뒤에 대대장을 데리고 5계층의 입구로 향할 생각이었지만.
"젠장, 2열 두보 후퇴!"
말 그대로 몬스터가 물처럼 쏟아지는 상황.
도통, 활로(活路)가 보이지 않았다. 길을 뚫기는커녕 이대로 압사당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으니까.
"훗, 자네들 생각대로 안 될 거네. 다들 오러를 아끼지 마라!"
대대장 역시 그런 부하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리고 그게 이뤄질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았으니, 대대장은 헛웃음을 흘리며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젠장, 진짜 대대장이랑 같이 가게 생겼군요."
"대대장을 업고 달려가는 영광을 누리려 했건만...."
죽음을 각오한, 아니 죽음이 예정된 군(軍).
그들의 상황은 혹독했으나, 마음은 여유로웠고 휘두르는 검은 한없이 가벼웠다.
목숨을 불태우는 마지막 전장.
"제국이 우리를 기억하리라-!"
그 영광된 죽음을 위해.
대대장은 최후의 마법을 시전했다.
쿠웅-.
건물을 가득 메운 마법진에 빛이 일고.
8서클의 증거인 광역 확산 마법이 시전되었다.
이름하여, 종언의 불.
귀족회의 허가하에만 쓸 수 있는 대규모 살상 마법이었으나, 생존자가 없는 5계층에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마력 고갈?
생명을 바쳐서 쓰는 최후의 마법인데, 그 정도는 충분했다.
어차피 이제 끝이 아니던가?
쿠웅-.
빛은 점점 강렬해졌다.
건물 내부에는 기사들의 선혈이 낭자했고, 죽은 동료들의 시체는 곧장 놀킹에게 짓밟혀 뭉개졌다.
그러나 대대장과 부대원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짙어졌다.
"제국에 영광을-!!!"
마지막 종언(終焉)이 내려지고.
콰아아앙―――――!!!
세상이 검붉은 빛에 휩싸였다.
불꽃은 모든 것을 불살랐고.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다.
"-이 땅에 신성을."
하나, 그런 장엄한 결사대의 죽음은 유예되었다.
흐려져 가는 의식 너머로 묵직한 중저음이 들려왔으니.
"-이 땅에 축복을."
"-이 땅에 치유의 기적을."
불꽃이 작렬하던 몸이.
놀 킹에게 산 채로 뜯어 먹히던 팔과 다리가.
그리고 지팡이를 든 채 녹아내리던 4군단 대대장의 손이.
싸아아아아아아.
불꽃을 뚫고 흘러넘치는 신성으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종언의 불은 신성의 빛에 사그라들고 그들을 위협하던 몬스터는 입자처럼 흩어져 사라진다.
"...이, 이게 죽음."
이미 혼절했던 자들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시, 신성-."
살아남은 이들은 씻은 듯이 사라진 고통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쿵-.
제국군이 숨어 있던 건물 입구로 찬란하게 빛나는 한 사내가 나타났다.
거대한 체구에 신성한 용모가 곁들여지니.
그야말로 신의 현신이나 다를 게 없었다.
* * *
[신앙을 획득했습니다.]
[+GP 23,790]
제국의 대대장과 그 수하들을 수습한 직후, 에릭의 눈앞에 상태창이 나타났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신성 관리] 창이었다.
"다들 고개를 들게."
고작 23밖에 없었던 GP가 단박에 만 단위로 올라간 상황이지만, 에릭은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아.... 이 어찌-."
예정된 죽음을 벗어난 사람들이, 얼마나 그에게 감복했겠는가?
기사들은 기본이고, 대대장마저 고개를 조아린 채 에릭을 바라보지도 못했다.
"목숨의 구명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신이시여-."
본디, 제국의 장교는 무교인 자가 많다.
종교보다 황제를 신처럼 생각하는 놈들이라서 그런데, 막상 기적 같은 일을 겪고 보니 생각이 달라진 모양이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에릭은 대대장의 직속 부대와 함께 죽은 기사들의 시체를 수습했다.
"동료의 장례까지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대장의 고개가 더욱 숙여졌다.
에릭은 덤덤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가 제국군을 구한 것은 단순히 이득을 위해서가 아니다.
에릭에게 있어 어디에 쓰는지도 모르는 GP보다야, 사람의 목숨과 사명감을 불태우다 죽은 군인들에 대한 예우가 더욱 중요했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도리요, 어릴 적 분쟁 지대에서 구하지 못한 생명들에 대한 속죄였다.
'우리를 구하는 것은 해야 할 일이며.... 전사자를 수습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라니.'
대대장은 물론, 그를 따르던 모든 병사들까지 가슴 깊이 찡-한 감동을 느꼈다.
[신앙을 획득했습니다.]
[+GP 7,840]
선행에는 좋은 결과가 따른다고 하더니.
[보유 GP가 30,000을 초과했습니다.]
['이름 없는 신'의 신전 설비 증축 기능이 개방됩니다.]
에릭의 눈앞으로 신전의 모습을 담은 3D 조감도가 나타났다.
66화 주인공 (4)
힘과 권력을 다 가진 존재가 인정(人情)이 넘치기까지 하면, 그 매력은 배가되기 마련.
대대장이 보는 에릭은 그야말로 팔방미남 그 자체였다.
'심지어 나이도 어리군.'
도통 믿기지는 않는데, 저 거대한 성기사는 열다섯이었다.
얼굴은 20대의 젊은 미남인데, 눈빛은 그윽한 중년의 향기를 풍기며, 체구는 든든한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크흠."
대대장, 제국 서부를 지키는 변경백의 차녀 이리스는 그런 에릭을 보며 가슴 깊이 감동했다.
그녀는 시종일관 쓰고 있던 투구를 벗었다.
"대대장님, 괜찮겠습니까?"
투구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모습에 대대장의 직속 부대가 이리스를 둘러쌌다.
그녀의 주변으로 거대한 벽이 생겨난 모양새였다.
"성자님은 이미 저- 멀리 가 버리셨으니, 괜찮다."
에릭이 떠나간 곳을 바라보는 이리스의 눈빛이 아련했다.
그는 사망자의 수습까지 마친 직후, 자신의 일행들을 데리고 계층주를 틀어막겠다며 이곳을 떠나 갔다.
'그야말로 성자. 아니....'
에릭은 아무런 대가 없이 모두를 구했다.
거기다가 더 큰 위협을 도맡겠다며 홀연히 떠나 버린 그의 모습은 마치-.
'...영웅 같구나.'
먼 옛날, 삼신과 함께 세상을 구원했다는 영웅을 떠올리게 만들었으니.
"이 저주만 아니었다면...."
이리스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당신의 옆에서 전장에 함께-.'
에릭의 기척은 사라진 지 한참이건만, 아직도 그녀의 시선은 그곳을 향해 있었다.
볼을 타고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흡."
그녀를 둘러싼 직속 부대원들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대대장님이 눈물을....'
그녀는 군인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투구를 쓰기 위해 머리를 깔끔하게 올리고 매쉬 망사로 덮고 있었는데, 거친 전장을 겪은 탓에 흙먼지와 땀으로 머리가 눌려 있었다.
그런데도 분홍빛 머리칼은 윤기가 흘렀고 앳된 얼굴과 여리여리한 이목구비를 가리지는 못했다.
"가지."
짧은 상념을 끝낸 이리스는 투구를 다시 쓰고, 에릭이 뚫고 온 길을 따라 걸었다.
에릭과 함께 계층을 올라왔다는 제국군과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다들 전투를 준비하라."
직속 부대원들은 순식간에 이리스를 호위하기 위한 진영을 만들었다.
"대대장님, 아무래도 전투는 필요 없어 보입니다."
신성의 축복으로 몸과 마음의 피로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언제라도 싸울 준비가 된.
만전을 기한 군대였으나, 싸울 일이 없었다.
"그렇군. 그 많은 몬스터가 단번에...."
에릭이 지나온 길을 따라 기다란 신성의 잔향이 빛을 뿜어 댔다.
그 덕분에, 그들은 아무런 피해 없이 5계층의 입구에 도달할 수 있었다.
"충-!"
그곳에는 반가운 면면들이 대대장 이리스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저, 정말 대대장님이-!"
2계층, 3계층, 4계층을 관리하는 세 명의 중대장이었다.
이리스 휘하의 세 중대장은 환한 미소로 그녀를 반겨 줬다.
"보고부터 듣지."
대대장 이리스 역시 반가웠으나, 인사를 미루고 군인답게 본분에 충실했다.
"1중대, 사망자 13명."
"2중대, 사망자 23명."
"3중대, 사망자 19명."
보고는 심플했다.
머리랑 심장만 붙어 있다면, 숨이 멎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어떤 상처든 회복할 수 있는 세상.
에릭의 신성력은 중상자까지 원상태 그대로 회복시켜 줬다.
"성자님 덕에 사망자가 적구나."
대륙통일군과 달리 미궁을 관리하는 미궁군 부대원의 수는 그렇게 많지 않다.
100명으로 이뤄진 소대 셋을 합하면 하나의 중대가 되며, 이런 중대를 세 개 합치면 대대가 된다.
대대장과 그녀의 직속 부대 그리고 중대장과 부관까지 더해져, 대대는 약 1,000명으로 이뤄졌다.
"다들 어땠나?"
사망자의 시신을 한데 모아 제국의 국기로 덮는 작업을 마친 후에야 대대장과 중대장들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서, 성자님이-."
"저희도 성자님께서!"
중대장들과 대대장 모두 겪은 일이 똑같았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성자의 구원을 받았다는 것.
"아, 그리고 모험가들이 저희에게 협력하기로 했습니다."
거기에 더불어 말을 안 듣기로 유명한 모험가들의 협력까지 얻어 냈다.
"뭐, 뭐든 시켜만 줍쇼."
마지못해 돕는 것도 아니고, 비굴한 자세로 제발 뭐라도 시켜 달라고 애원하는 모양새였다.
이리스는 눈을 힐긋 굴려, 모험가 진영의 중심을 바라봤고.
'모험가들 한복판에 제국의 국기라니. 그리고 저건-.'
펄럭-!
제국의 국기 아래에 걸린 이질적인 무언가를 발견했다.
모험가들의 중심에 세워진 제국의 국기, 그 바로 아래의 창대에는 신성으로 보존된 머리통이 꽂혀 있었으니.
"미궁의 이변에 협조하지 않는 자는 이단일지어다. 성자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더군요."
이리스는 그 말에 가슴 깊이 감복했다.
'거대한 세력을 상대로도 굴하지 않는 그 신념-.'
"다들 성자님께 감사의 마음을 잊지 말도록."
모두가 잠시간 눈을 감고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 * *
미궁의 5계층은 고대 도시라는 설정이 붙은 장소로, 모든 건축물이 2층 높이의 낡은 회색빛 벽돌로 지어졌다.
말이 2층이지 죄다 10미터는 넘는 거대한 건물이었다.
평균 신장이 5미터는 돼야 이런 거대한 건물에서 살겠구나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이 커다랬다.
"다들 입구에서 기다려라."
도시의 한구석에는 유일하게 돔의 형태를 취한 마을 회관 같은 것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계층주가 나타나는 보스룸이다.
에릭은 성큼- 발을 내디뎌 홀로 보스룸에 들어갔다.
"형님, 그 커다란 개새끼들이 저런 구멍에서 나오는 거요?"
장두식과 빙의자들은 활짝 열린 보스룸 앞에서 에릭을 바라봤다.
에릭은 혹시라도 그들이 방 입구를 넘어올까 싶어 손사래를 쳤고, 장두식은 빙의자들과 함께 한 발짝 더 물러섰다.
그제야 에릭은 본격적으로 보스룸을 살폈다.
'보스룸까지 땅굴이 파인 게, 마치 몬스터에 함락당한 도시 같군.'
에릭은 도시 곳곳에 파인 땅굴을 떠올리며 그런 감상을 품었다.
그러고는 계층주가 나타나는 구멍을 바라봤다.
회관 중앙에 뚫린 커다란 터널 입구, 에릭은 그 위로 손을 얹었다.
쿠웅-.
그의 손끝을 타고 묵직한 신성력이 내려앉았다.
'이런 느낌인가?'
어릴적부터 스승과 몸을 쓰는 수행을 해 온 덕분에, 에릭은 자신의 힘에 대해서 깨닫는 것이 빠른 편이었다.
이번에 [4티어 신성력]에 도달하면서 자신의 새로운 힘을 특정 장소에 주입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1티어는 내 몸과 무기, 2티어는 타인에 대한 영향력, 3티어는 사거리의 확장.'
화륵-.
에릭의 손끝에서 불꽃이 일었다.
금빛 불꽃은 촛불처럼 작았으나, 그 밝기는 보스룸 전체를 환하게 비추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는 손끝에서 일렁이는 신성의 불꽃을 터널 속으로 떨어트렸다.
쿠웅-.
불꽃을 따라 어두운 터널이 점점 밝아졌다.
거대한 신성력이 응집된 불꽃은 터널의 끝에서 큰 빛으로 화하고 이내 거대한 물결이 되어 터널을 타고 흘러넘쳤으니.
"허어...."
그 광경에 고개를 빼꼼 내밀고 에릭을 구경하던 장두식이 침음을 내뱉었고.
"흐익-!"
빙의자들은 흘러넘치는 신성에 지레 겁을 먹었다.
그런 소란에도 에릭은 무심한 얼굴로 자신의 힘이 일으키는 변화를 지켜봤다.
'4티어 신성력은-.'
놀 킹은 회관 중앙에 놓인 거대한 구멍에서 나타난다.
쏴아아아아아―.
한데 계층주가 나타나야 할 구멍에서 성수(聖水)가 쏟아지듯 흘러넘쳤으니.
'-신성을 세우는 힘.'
에릭은 재앙급 흑마법사와의 전장을 떠올렸다.
그들을 상대하려면 신의 허가 아래 신성을 세워야 했다.
에릭에게 신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는다. 그런 에릭에게 신성을 세우는 일은 불가능과도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신의 몸과도 비슷했기에 조금 무리를 한다면 신성을 세울 수는 있었다.
물론, 그 반작용으로 몸이 부서진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신념의 고리 덕분에 잘 넘어갔지.'
고리를 잃은 대신, 에릭은 온전한 자신의 신성을 세웠었다.
에릭은 그때의 경험을 살려 작은 불씨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제 아무런 부작용 없이 신성을 세울 수 있게 됐다.'
신성(神聖)을 세운다.
이는 말 그대로 신의 힘, 지고한 뜻을 이 땅에 현신하게 한다는 의미였다.
믿음으로 얻은 힘이 아니라, 직접 신의 힘을 신의 공간으로부터 내려 받는 것이 바로 신성을 세운다는 의미였다.
'내 신전에 있는 신성력과 비슷한 느낌이군.'
신성은 일반적인 신성력과는 느껴지는 힘이 달랐다.
"...형님, 이게 대체 뭐요?"
보스룸 앞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장두식은 눈을 끔뻑거렸다.
저런 얼굴로 이 힘이 뭐냐고 묻다니.
에릭은 제 힘을 정의(定義)했다.
'이 신성은-.'
지고한 신의 뜻을 믿음과 신념으로 구현하는 것이 신성을 세우는 행위였다.
'-내 신념과 믿음이며, 나아가야 할 지침.'
그러나 상대가 장두식이었다.
에릭은 이를 간단하게 바꿔 설명했다.
"보면 모르냐, 신성의 분수 비슷한 거다."
"거참, 분수가 성수를 뿜어내는 건 또 처음 봤수다. 게다가 계층주는 얼굴도 못 보고 다 뒈져 버린 것 아니요?"
장두식은 눈을 끔뻑거리며 거대한 신성의 분수를 바라봤다.
금빛 물결 속에서 시꺼먼 상자가 튀어나왔다.
"그 상자를 보면, 계층주가 나오긴 한 것 같수다."
계층주?
그냥 사라졌다.
리젠이 됐는지도 모르겠다.
"거, 또 상자깡을 해야겠구만."
에릭의 손에 들린 시꺼먼 상자.
그것은 계층주의 공략을 의미하는 물건이다.
장두식은 에릭이 뭔 말도 하기 전에 제 본분을 다하기 위해 계층주의 방으로 들어섰다.
그 뒤를 세 빙의자가 따랐다.
"흐이익-!"
선명한 금빛을 띤 신성의 물이 바닥을 서서히 물들이고 있었다.
어느덧 빙의자들의 발치에도 물이 흥건했다.
'흐익-.'
'이, 이러다 나도-.'
공간을 가득 채운 신성의 분수는 모든 것을 정화시켰고, 그 모습에 겁을 먹었던 빙의자들은.
"...어어?"
불현듯 자신들이 괜찮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우리도 이제 신앙인이다."
"마, 맞네."
"휴우-."
세 빙의자는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몰라 신성의 물속에 손을 담가 봤는데, 몸이 맑아지는 기분이 드는 것이 이루 말하기 어려운 청량감이 느껴졌다.
빙의자들은 이런 대단한 힘에 적대받지 않게 된 현실에 깊이 감사했다.
"흐음."
정작 그런 기적을 이뤄 낸 에릭은 팔짱을 낀 채 골똘히 고민에 잠겨 있었다.
생각할 여유가 생겼기 때문.
'당장 계층주는 틀어막았고, 몬스터 웨이브도 신성력에 타 버릴 테지.'
제국군이 있는 5계층의 입구도 문제없는 상황.
모험가와 일기투합해 오합지졸 몬스터를 잡는 정도는 문제없을 터였다.
이제부터 할 일은 그간 이룬 것들을 정리하는 일이다.
얻은 것들이 너무 많았으니까.
'뭐부터 하지?'
에릭은 제 사람을 아꼈기에, 장두식을 구하러 미궁에 들어섰다.
거침없이 5계층까지 와서는 장두식과 빙의자들을 구했다.
장두식 또한 형님을 철석같이 믿고 따랐기에, 에릭이 내린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했고 그 덕에 신체를 이룰 조건을 이뤘으니.
그런 것들이 맞물린 덕분에 4티어를 개방할 수 있었다.
'이런 재앙 속에서 얻은 것들이 많구나.'
좋은 마음으로 좋은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따른다.
이는 진리(眞理)였다.
'4티어 신성력은....'
에릭은 우선순위를 생각했다.
신체(神體)를 이루고 개방한 4티어 신성력.
신성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아직 확인할 부분이 많았다.
'차차 힘을 쓰면서 알아 가면 될 부분이고.'
하나, 본디 힘이라는 것은 써 보면서 익혀야 하는 법.
힘은 워낙에 활용법도 크고 다루는 방법도 많으니까.
반면, [신성 관리] 창과 [신전 설비]에 대한 것은 달랐다.
온전한 형태로 나타난 금빛 화면은 온갖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보여 줬다.
'-이쪽은 봐도 쓸 방법이 없군.'
3D 조감도가 나왔고, 여기서 설비 증축이 가능하다는 설명이 있었는데....
[신앙을 획득했습니다.]
[보유 GP 47,835]
에릭이 조감도에 나오는 신전의 영역을 클릭해 봤으나.
[설치 가능 설비]
[초대형 화분: 2,000,000GP]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밖에 없었다.
다행인 점은 용도를 명확히 알 수 있다는 것.
'세계수를 여기다 심으라는 의미겠지.'
용도는 알아도, 200만GP라는 금액 때문에 당장은 뭘 건들 수 없었다.
사실 화분은 완전 후순위로 밀린 지 오래.
'잭슨을 신도로 만들어야지.'
10만 GP로 신도 슬롯을 확장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순위였다.
그래야지, 잭슨도 신성력을 받아들이게 될 테니까.
[신앙을 획득했습니다.]
[+325GP]
이래저래 GP라는 재화가 많이 필요해질 테지.
하나, 에릭에게는 이게 금방 벌릴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양이 조금 줄어드는 추세지만, 계속해서 GP 획득에 대한 알림창이 떠올랐으니까.
'신성 포인트 이런 느낌이 맞네.'
에릭이 예상했던 대로, GP는 갓포인트 이런 종류였다.
아무튼.
신성력은 써 봐야 제대로 알 것이며, 신전 설비 쪽은 기다려야 답이 나올 테니.
앞으로 할 것들을 정리했으면,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해결해야 하는 법.
'600연 뽑.'
그것은 바로 상자깡이다.
"두식아."
"준비됐수다!"
에릭은 [인벤토리]에 담긴 모든 상자를 꺼내서 장두식에게 건네주었다.
150이라는 숫자가 쓰인 검은 상자가 네 개.
"600연 상자깡 가자."
게임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지려 한다.
* * *
MMORPG, 대륙 온라인은 하드코어 장르라는 별명을 가졌다.
게임을 제대로 즐기다 보면 현생이 하드모드로 된다는 밈이 있었기 때문.
'상자깡이 600번?'
보상도 짜고, 세트 아이템을 맞추려면 한 보스를 수백 번씩 트라이하는 건 기본이었다.
게다가 지상과 미궁으로 나뉜 탓에 자원 소모도 압도적으로 많았다.
"미친."
하물며 MMORPG 장르의 특징인 '페이 투 윈'도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대륙 온라인은 시간과 돈을 갈아 넣으면서 즐겨야 하는 그런 게임이었다.
"얘들아, 저거 숫자 진짜냐?"
"...어, 저거 진짜 150번짜리가 4개다."
"지, 진짜로 600연 뽑이 된다고?"
물려받은 유산을 현질로 탕질해 버린 니시다 료부터.
올림픽 금메달로 따낸 광고비를 전부 무기 강화로 날린 박창호에.
넷카마로 살기 위해 퇴직금을 게임에 몰빵해 버린 강풍호까지.
이게 말이 되나?
세 빙의자는 넋을 놓았다.
그들은 게임에 진심이었다.
'내 몸은 게임을 하기 위한 영양분을 공급하는 기관일 뿐-.'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그런 그들이었기에, 빙의한 후에 이뤄진 게임적 요소에 열광하는 건 당연했다.
"빠꾸 없이 한 방에 가겠수다."
블랙 등급의 미궁 상자.
이건 게임에서도 엄청 귀한 물건이었다.
경매장에 올라오면 즉시 구매가로 현금 천만 원은 받을 수 있을 만큼 비쌌다.
고작 5회짜리에 확률도 낮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최초 공략에서만 받을 수 있는 보상이기 때문.
"-크으, 시원하다-!!!"
그런 상자를.
장두식은 미친 듯이 열었다 닫았다 반복하고 있었으니.
'이 미친 현지인 놈들이....'
빙의자들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그냥 무식하게 상자를 까면 뭐 하나?
'최소한 자리라도-.'
맵 전체를 뒤져 가며 명당이라 불리는 장소에서 길드원들을 모아서 기도를 올린 뒤에 열어야 하는 상자를....
"잠깐-."
200번의 꽝.
에릭이 장두식을 멈춰 세웠다.
'그치, 아무리 그래도 블랙을-.'
빙의자들은 자기 물건도 아닌데,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블랙 상자는 확률이 극악인 대신 유저가 필요한 아이템을 콕- 찝어서 주는 그런 대단한 물건이었으니까.
이제라도 무지성 상자깡을 중단한 에릭을 보며, 현지인들도 다를 게 없구나 생각하던 와중에-.
"-축성."
에릭이 대충 두 글자를 읊조렸다.
"-다시 가겠수다!"
미친 속도로 이뤄지는 무지성 상자깡이 재개되었다.
'이제 곧 300번째 꽝-.'
빙의자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무심한 듯 있지만, 에릭의 승모근이 미친 듯이 꿈틀거렸기 때문.
덜컥-.
그때 장두식의 손이 멈췄다.
"거, 형님. 이게 뭐요?"
약 300번째 빈 상자만 나온 시점이었다.
빙의자들은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그랬는데....
"어어-?"
"저, 저게 왜?"
"...에엣?"
빙의자들은 경악했다.
충격적인 얼굴로 입을 쩍- 벌렸다.
[경매장 생성권]
67화 주인공 (5)
"인수 합병 결과가 나왔습니다!"
흑마그룹의 대표실(代表室).
반짝거리는 흑색 명패 아래로 벽이 갈라지더니, 정갈한 양복을 차려입은 토마스가 나타났다.
대표 마키아 장첸은 살펴보던 실험체의 배를 덮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자태가 마치 서류를 덮는 듯이 자연스러웠다.
"-읍! 읍읍-!!"
그 감각에 책상에 묶여 있는 이름 모를 귀족이 몸을 뒤흔들었고, 마키아 장챈은 검은 마력을 덮어 이내 그 소리를 지워 버렸다.
끄어억-!
짙은 흑마력은 실험체를 소화시키고 짧은 포효를 내질렀다.
적막이 내려앉은 대표실에서 마키아가 입을 열자.
"나의 토마스, 결과가 나왔다고요?"
토마스가 고개를 조아렸다.
하얀 손등이 그의 눈앞으로 내려오고 토마스는 그 위에 쪽- 입을 맞댔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빙의자의 몸에 주주님의 영혼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으셨습니다!"
전율에 겨운 토마스는 기쁘게 인수 합병의 결과를 보고했다.
"대단한 일입니다! 역시, 나의 토마스에요!"
마키아 대표의 입가에 생긋한 미소가 그려졌다.
성자와 성녀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시작된 프로젝트가 큰 성과를 거뒀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을 보고드리겠습니다."
토마스는 검은 마력을 흘려, 반투명한 화면을 만들었다.
화면 속은 회사원들이 쓸 법한 각종 도표와 자료들이 정리된 문서로 가득했다.
"-우선 이쪽 자료입니다. 빙의자의 혼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증거로, 상태창이 소멸했습니다."
이번 인수 합병의 목적은 회사의 주주, 강대한 흑마법사들이 빙의자의 몸을 빼앗고 기억을 흡수하는 것이다.
거기에 더불어 [상태창]을 이용할 수 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상태창이라는 능력까지 주주님이 온전히 누리시길 바랬건만.... 아쉽게 됐군요."
빙의자의 혼이 사라지면 [상태창] 역시 사라진다.
영혼에 묶인 힘이라 어쩔 수 없었다.
뭐,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마키아는 그룹의 대표답게 당장의 큰 성과에 집중했다.
"그래서 이번 프로젝트의 가능성은 어떻죠?"
중요한 건, 빙의자의 기억이다.
그녀의 질문에 토마스가 화면을 돌려, 강림한 악마들의 통계를 보여 줬다.
"-이 세계에는 몬스터라는 괴물이 실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악을 추상적으로 떠올리면, 몬스터를 먼저 연상하게 되지요."
자연스러운 일이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인류를 가장 공포에 떨게 만든 것이 몬스터였으니까.
하나, 흑마법사에게 있어서 그건 아주 큰 문제였다.
"-하물며 고대 기록이나, 민간의 전승을 봐도 악을 표방하는 것은 대부분이 몬스터의 형태를 취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토마스는 일목요연하게 현 흑마법사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주주님들 역시 그렇지요."
회사의 주주들은 최소 7줄을 이룬 흑마법사들로 이뤄졌다.
1백만이 넘는 제물을 바쳤다는 의미였다.
7줄을 이뤘건 그 이상이 되었건, 악마(惡魔)라는 추상적인 대상의 형태는 오롯이 인간의 보편적인 상상을 기준으로 이뤄졌다.
'우리의 강림은 비효율적이다.'
토마스의 보고에 마키아 장첸은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잘 아는 바였다.
이 세계의 흑마법사들이 강림시킨 악마들은 대부분이 몬스터의 형태였다.
흔해 빠진 고블린과 트롤을 닮은 형상이 태반이고, 잘 해 봐야 용종(龍種)이었으니까.
'반면, 빙의자들은 달랐지.'
마키아 장첸은 십 년 전의 전쟁을 떠올렸다.
주주에 발끝에도 못 미치는, 하물며 [스킬] 없이는 제대로 된 흑마력도 다루지 못하는 빙의자.
한데, 그런 빙의자가 여섯 줄을 이루더니 말도 안 되는 힘을 지닌 악마를 강림시켰다.
'타락한 천사, 악마들의 주인이자, 지옥의 군주-.'
이름하여, 루시퍼.
그 강함은 현세에 지옥을 불러와 제국군의 진군을 막아 낼 수준.
거기에 더불어, 그 리페로제 아스티아 또한 지옥의 왕을 상대로 고전을 겪었다고 하니.
"토마스, 설명은 충분합니다. 그래서 주주님의 기억은 어떻습니까?"
마키아는 애가 닳았다.
그렇게 인수 합병을 거듭해 봤지만, 이번처럼 빙의자의 기억을 온전하게 얻은 건 처음이었다.
토마스의 얼굴을 보아하니 분명 좋은 소식이 있을 터.
"주주님께서 빙의자가 학습해 온 정보가 일목요연하게 떠오르신답니다."
그녀의 예상대로, 토마스는 아주 밝은 소식을 안겨 줬다.
"...그, 문화와 문물에 대해서는 이해를 못 하시는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악마나 괴물에 대한 내용은 확실하게 인지하신 느낌입니다!"
지구의 문화와 문물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대목에서 마키아는 깊이 공감했다.
'빙의자들의 세계.... 애초에 인간이 80억 명이 넘는다는 것부터 이해가 안 되긴 하죠.'
고블린보다 인간의 수가 많다는 게 말이 되는 건가?
마키아 역시 토마스에게 많은 정보를 들었고 지금도 틈틈이 익혀 가는 중이다.
그런 그녀조차 아직까지 지구라는 세계의 편린조차 이해하지 못한 상황.
'투표로 왕을 선출하고, 전 국민이 작은 화면 속에서 다른 세상을 관찰한다는....'
상상력을 구체화하여 영상과 이미지로 만들어 내며, 가상의 공간을 구현해 새로운 세계를 간접 체험 할 수 있는 세계.
거기다가 토마스가 빙의하기 직전에는 딸깍- 버튼만 누르면 원하는 것을 만들어 내는 기술이 등장했다고 하니.
도통 믿기지가 않았다.
'토마스가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지만요.'
믿기건 안 믿기건, 중요한 건 빙의자들이 지닌 기억이다.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 속에는 아주 강력한 악마들이 구체적인 형태로 존재해 왔다.
그 말인즉슨.
'대악마 루시퍼 같은 존재가-.'
과거 흑마그룹의 초대 대표와 비슷한 수준의 악마를 강림하게 만들 수 있다는 의미였다.
"고생이 많았어요. 역시 나의 토마스예요."
생각을 마친 마키아는 산뜻한 미소를 그리며 토마스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래서 주주님이 어떤 악마님을 원하시는지 들었나요?"
"사르곤의 눈.... 아무래도 성자와 성녀를 죽일 장소가 미궁이니 그 힘을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만마(萬魔)를 제 뜻대로 다루며, 세상을 정복하려는 어둠의 왕.
"운이 좋다면, 절대 반지라는 아이템까지 얻을 수 있을 겁니다."
* * *
미궁 5계층의 보스룸.
에릭은 [경매장 생성권]을 들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니, 이게 왜 나와?
'그러니까 내가 경매장을....'
게임 속 경매장을 떠올려 보니, 도통 믿기지가 않았다.
이걸 찢으면, 경매장을 만들 수 있다는 건가?
충격받은 에릭의 뒤에서는 세 빙의자가 눈을 비비며 아이템의 네임태그를 확인했다.
[경매장 생성권]
암만 봐도 이름이 똑같았다.
아니, 경매장을 생성한다고?
이용하는 것도 아니고, 만들어 낸다는 말이....
"형님, 그게 뭔데 그렇게 다들 정신이 나간 거요?"
이 와중에 장두식만 홀로 눈을 끔뻑거릴 뿐.
"저번부터 보니까, 형님도 그렇고 빙의자들도 그렇고 작은 티켓 쪼가리만 보면 입을 헤실거리는데-."
장두식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좀 전까지 티켓을 들고 손을 덜덜 떨던 에릭이 티켓을 확 찢어버리고는 그를 향해 성큼- 다가왔기 때문.
그 기도가 사뭇 위협적이었다.
'거참, 소외감이 들어 한마디 했을 뿐인데....'
꿀밤을 예상하고 눈을 질끈 감은 장두식이었으나, 들려오는 음성에 눈을 슬쩍- 떴다.
"경매장은 말이다. 빙의자들을 한곳에 모아 둘 구심점이다."
에릭의 얼굴에 미소가 만연했다.
'거기에 거래 수수료를 고정적으로 받아 갈 수 있지.'
티켓을 찢고 나타난 화면을 보며 에릭은 그렇게 확신했다.
이게 현실에도 등장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터라, 아주 기쁠 다름이었다.
본래 게임 속에서 [경매장]은 기본적으로 개방된 기능이었다.
하나, 현실이 되면서 [커뮤니티]가 생겨나고 [경매장]은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래서 경매장이 뭔데 그러는 거요?"
경매장이 무엇이냐고?
아이템을 등록만 해 두면, 언제 어디서든 최고가로 입찰한 사람이 그것을 구매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여기서 '기본 거래 수수료'가 10% 붙는데, 각종 어뷰징을 막기 위한 개발사의 안배였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달랐다.
'10%는 다 내 몫이지.'
경매장을 만든다는 의미는 곧 에릭이 그것의 주인이 된다는 말이었으니까.
여기까지 설명을 들은 장두식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끝이요?"
"그럴 리가."
에릭은 한껏 들뜬 목소리로 설명을 마저 이었다.
경매장에서 팔 수 있는 것에 제한은 없다.
현실에서 직접 쓸 수 있는 [장비 아이템]부터, 빙의자 외형 변경권과 비슷한 부류의 [룩딸용 아이템]에, 길드홈 생성권과 같은 [세력 형성]에 대한 것까지.
이 정도의 설명이 덧붙여지고 나서야, 장두식이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대충 다 팔고 다 살 수 있는데, 형님이 10%를 떼먹는다 이 말 아니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으나, 에릭은 맥락이 맞다는 것에 만족하며 장두식에게 칭찬의 말을 건네주었다.
"네 학식이 날로 무르익어 가는구나."
"허허! 거참, 이게 다 형님 덕분이 아니겠수? 맨날 머리통에 신성력을 퍼붓는데, 언제까지 내가 빡대가리일 거라 생각하는 거요?"
거대한 에릭과 호쾌한 장두식이 웃어 젖히니 사방이 쩌렁쩌렁- 울렸다.
빙의자들은 귀를 틀어막으며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니시다 너도 안 됨?'
'나도 안 되는데, 풍호 넌?'
'나도.'
[경매장이 개방되었습니다.]
세 사람의 상태창에 [경매장]이라는 버튼이 생겨났으나, 아무리 눌러도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습니다.]라는 메시지만 나왔다.
그에 니시다 료와 강풍호가 박창호를 빤-히 바라봤다.
총대를 메라는 의미였다.
'씹새들.'
박창호는 익숙하게 관자놀이를 질끈 누르며 에릭을 향해 다가섰다.
평소라면 더 머뭇거렸겠지만, 박창호는 용기 있게 발을 내디뎠다.
'...으, 소름.'
그런데도 몸은 반사적으로 덜덜- 떨려 왔다.
신성의 분수 한복판에 서있는 거대한 성기사는 그만큼 위협적이었으니까.
'지, 진짜 안 뜨겁네.'
그간 신성에 데어 온 게 한두 번이 아닌지라,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지레 겁이 났다.
첨벙.
막상 성수에 발을 담가 봐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기분이 좋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
"그, 그, 경매장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하는데요...."
박창호는 흘러넘치는 성수에 발을 담근 채 물었다.
모기 기어가는 목소리였으나, 에릭은 그 말에 반응해 고개를 돌려 박창호를 내려다봤다.
"내 허가가 있어야만 경매장을 사용할 수 있지."
"허, 허가요?"
에릭의 입장에서는 아주 반가운 일이었다.
[경매장]은 자신의 상태창이 아닌, [신성 관리] 창과 연동되어 있었으니까.
'게다가 조건도 붙일 수 있고 말이야.'
개나 소나 다 쓰게 된다면 자신의 경매장에서 흑마법사 전용템을 거래하는 말 같지도 않은 일이 생길지도 몰랐으니까.
설령 그랬더라도 경매품을 관리할 수 있으니, 방지는 가능하겠지만....
'손이 많이 가겠지.'
그런 상황에서 허가된 사람들만 경매장을 쓸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달가운 일이었다.
[이름 없는 신의 신도]
[개별 허가]
에릭은 현재 두 개의 조건을 붙여 놨다.
이 사용 조건이라는 것은 [경매장]의 주인인 자신이 멋대로 바꿀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경매장을 본격적으로 활성화하는 일은 미궁을 탈출한 후로 정했다.
'빙의자들의 도시를 만들고서.'
그때 진행할 생각이었으니까.
대격변 패치, 이 이후로 세계 정세는 크게 바뀔 것이 분명했다.
이를 위해서는 수십만의 빙의자를 한곳으로 모아 둘 필요가 있을 테지.
'경매장이 아마 구심점이 되어 줄 거야.'
자본주의에 익숙한.
그리고 온갖 편의성이 접목된 천혜의 보고(寶庫)가 바로 경매장이니까.
* * *
"상자깡은 여기서 멈춘다."
에릭은 300회가량 남은 [흑색 상자] 두 개를 인벤토리에 수납했다.
당장 필요한 것들은 모두 준비된 상황.
'간절한 게 있을 때 열면 더 좋은 보상이 나오겠지.'
그간 겪은 상자깡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미궁의 보상은 게임과 똑같은 메커니즘으로 작용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게임 속에서는 캐릭터가 필요한 것을 주었던 극악한 확률의 보상이었으나.
지금은 현생의 자신에게 필요한 걸 내주고 있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자니.
'저놈들은 또 왜?'
우물쭈물 거리는 세 빙의자가 에릭의 눈에 들어왔다.
니시다 료와 강풍호가 빤-하게 박창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문제가 있나?"
그래서 에릭이 박창호를 향해 물었다.
"커, 커뮤니티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대답은 심플했다.
[경매장]이 생긴 뒤로, 커뮤니티에 미친 속도로 게시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는 것.
"왜 안 되냐는 질문이 태반인데-."
그 뒤에 들려온 박창호의 말에 에릭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 이유는.
[조연 따리도 못 되는 NPC 미만의 존재들은 경매장을 쓸 수 없다.]
[신성력의 분수에 몸을 담근 사진]
니시다 료가 올린 게시글 때문.
"바, 박창호! 그걸 이르면 어떡하냐!"
니시다 료가 황급히 에릭에게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걸 찍어서 올려?'
숫제 미친놈이 아닌가?
에릭은 그런 니시다를 보며 고개를 반쯤 기울였다.
화난 것도 잊었다.
저거 진짜 미친놈이다.
'주조연이 어쩌구 하더니....'
신전에서 보았던 뒤틀린 욕망.
아마 일본 오타쿠 특유의 감성이 아닐까?
에릭은 진지하게 처분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오-. 아니, 성자님!"
강풍호가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에릭의 앞을 막아섰으니.
동료를 지키려는 그의 용기는 가상하였으나, 에릭은 더욱이 의문이 들어왔다.
'저놈들이 서로를 위한다고?'
그간 정보부에서 받은 보고를 생각해 보면 도통 말이 안 됐다.
빙의자 관리국장인 자신의 뒷담을 까고, 서로를 견제하며,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이가 아니던가?
그런 의문을 알기라도 했는지, 강풍호는 재빠르게 설명을 시작했다.
"-여론이 아주 좋아요!"
이 세계의 인물들은 빙의자들을 혐오한다.
가족의 몸을 빼앗은 것도 문제고, 고통을 못 느끼는 괴상한 존재라는 인식이 만연하다.
한데,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신성력에 배척받는다는 거였다.
[진짜 신성력?]
[저거 빙의자 수용소 놈들 아님? 저렇게 커다란 성기사가 또 있을 것 같진 않은데.]
[방법이 뭐냐?]
대충 이런 글들이 올라온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니시다가 글을 더 쓰게 만드는 거예요!"
에릭은 강풍호의 말에 잠시 고민을 해 봤다.
'빙의자들을 모은 도시를 만들 때 일이 편해질지도.'
추후 빙의자들을 모아, 도시를 만들고 [신도]를 확장시켜 GP를 얻어 낸다.
거기에 [경매장] 활성화로 10%의 거래 수수료를 챙기는 것까지 고려해 보면, 강풍호의 의견은 제법 괜찮은 방향이었다.
그에 에릭이 선뜻 강풍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성공한다면 성별을 원하는 대로 바꿔 줄 생각이다. 거기에 이름도 원하는 대로 개명시켜 주지. 다만, 실패한다면-."
에릭은 말을 잇지 않았으나, 그의 손에는 [빙의자 외형 변경권]이 들려 있었다.
68화 주인공 (6)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를 보았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겁을 먹고 두려움에 질려 도망치게 만드는 그런 괴물이었다.
하나, 순례자 리페로제는 그런 괴물을 향해 앞장서서 나아갔다.
"나를 따르라아-!!!"
리페로제는 그저 당당했다.
백발을 나부끼며 괴물을 향해 달려들었으니.
그녀의 뒤로 새하얀 잔상이 그러졌다.
"다들 순례자를 따라 계층주를 상대한다-!"
백발의 소녀가 금빛 신성을 뿜어내며 공략대의 앞을 밝혀 주었고, 그녀의 빛에 용기를 얻은 공략대는 장엄한 사투를 준비했다.
우어어어――――――!!!
'젠장....'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머뭇거리고 있는 것은 척살자라 불리는 세계의 첫 번째 빙의자였다.
'...저렇게 커다란 게 보스라고?'
클래스가 [전사] 하나였을 때 빙의한 그는 미궁에 대한 사전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
하나, 돌아가고 싶은 집이 있고 다시 만나고 싶은 가족이 있으니 그는 미궁을 집으로 삼아 수없는 세월을 보내 왔다.
"척살자랬나? 네놈의 구원은 미궁이 아니라 미궁 밖에 있다."
리페로제 아스티아, 백발의 소녀가 자신을 찾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척살자는 리페로제와 상성이 좋지 않았다.
그에게 신성(神聖)은 독이다.
괴물 같이 강한 그도 천적에게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으니.
'여보, 내 딸아-.'
숱한 꿀밤 세례는 척살자의 마음을 꺾었다.
수치심을 자극하는 폭행과 영혼을 타들어 가게 하는 고통의 시간은 척살자의 부서진 이성을 되살려 줬다.
그렇게 척살자는 최상층의 공략대 앞까지 끌려갔다.
굴욕?
아니, 타 죽지 않은 것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미궁에서 살아온 그에게 있어 저런 고농도의 신성력은 실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것이었으니까.
자신을 패는 저 소녀는 그야말로 진짜 괴물이었다.
거대한 계층주보다 더한 괴물.
'괴물 같군.'
공략대를 이끄는 황자 레오나르도 역시, 리페로제를 보며 그런 감상을 품었다.
공략대를 애먹게 하던 척살자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이 영 찝찝하긴 하였으나.
'이 나의 머리통을 때릴 줄이야.'
황자로 살며 처음 맞는 꿀밤에 머리가 깨질 뻔했다.
하물며, 저 거대한 계층주를 상대하는 리페로제를 보면....
아무렴 어떠랴 싶었다.
"하하-! 이게 전부냐?"
호리호리한 백발 장발의 여인이.
제 몸처럼 커다란 대검을 들고, 미궁의 붉은 하늘까지 솟구친 거대한 계층주와 합(合)을 겨루고 있었으니.
콰아앙――――――――!!!
일검에 용암이 갈라지고 그 아래의 대지가 부서졌다.
그리고 계층주의 거대한 뼈가 폭산하여 사방을 뒤덮었다.
"-우리가 서 있던 땅이, 계층주의 몸이었을 줄이야."
황자는 월광의 힘으로 파편을 지워 내며 허탈한 듯이 중얼거렸다.
'대체 저 마녀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던 건가?'
아스티아 교단의 순례자.
교황과 나란히 설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그리 알려진 자가 리페로제 아스티아였다.
'신의 계시인가?'
척살자를 끌고 온 리페로제는 공략대에게 계층주에 대한 정보를 알려 줬다.
"계층주를 밟고 있다가는 놈이 깨어난 직후 즉사할 게다."
그녀의 말 그대로였다.
황자가 용암을 피해 밟고 있던 뼈 자체가 계층주였다.
계층주는 깨어난 직후 즉사(卽死)를 유발하는 기운을 내뿜었고, 리페로제 덕분에 공략대는 이를 피해 낼 수 있었다.
'공략법을 알고 있기까지-.'
게다가 그녀는 계층주를 상대할 비책까지 알려 주었는데.
"전하, 정말 순례자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정말로 리페로제 아스티아는 처음으로 등장한 32계층 계층주의 패턴을 미리 알고 있었다.
"다들 약점을 노려라-!!!"
거대한 뼈들은 수백 미터에 달하는 압도적인 크기를 지녔다.
그 형태를 말해 보자면, 날개 없는 용과 비슷한 모양새였고.
"-지금!!!"
황자는 리페로제가 알려 준 타이밍을 노려, 계층주의 눈동자를 향해 일점 공격을 퍼부었다.
스걱―――――!
시작은 황자가 지닌 달빛의 힘이었다.
월광(月光)의 힘이 담긴 오러가 계층주를 향해 곧게 나아가고 허공을 가르는 달빛을 따라 수많은 공격이 이어졌다.
고위 모험가들과 제국에서 엄선된 격을 넘은 강자들의 힘이 맞물려, 계층주의 눈에 도달했다.
쿠웅-.
강대한 힘들의 집합체는 고요하게 계층주를 두드렸으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쩌저적-.
세상이 무너지는 듯이, 굉음이 울려 퍼지며 계층주의 한쪽 눈알이 파괴되었다.
우어어어――――――!!!
계층주가 고개를 치켜들며 괴성을 내질렀고.
"-루크, 지금 도발을 써라!"
그때 최전방에서 계층주와 싸우던 리페로제가 소리쳤다.
'저 여자가 대체 어떻게 스킬을 알고 있는 거지?'
빙의자 루크는 3차 전직을 마친 후 만렙에 도달한 빙의자다.
게다가 수십 년을 미궁에서 살아가며, 본신의 힘 또한 벽을 넘어선 강자가 되었다.
한데, 저 백발 장발의 소녀는 빙의자의 스킬을 훤히 꿰고 있었다.
'뭐가 되었든.... 정말 그녀의 말대로 이뤄지는군.'
[전사] [광전사] [혈전사]
그는 싸우면서 강해지고.
피를 흘리면서 회복하고.
죽지 않고 수십 일을 싸울 수 있는, 그야말로 단독 전력의 최강자였다.
"흐아압-!!!"
루크의 몸 위로 붉은 이펙트가 피어올랐다.
최상급 도발 [원수(怨讎)]가 발동되자, 계층주의 시선이 루크를 향했다.
한쪽 눈이 파괴되며 발동되는 [즉사기]를 파회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쿠웅-.
계층주의 거대한 발이 루크를 향해 휘둘러졌고.
발 위로 즉사를 유발하는 시꺼먼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사망의 유예]
그에 루크는 어깨를 움츠리면서 스킬 모션을 취했다.
궁극기가 발동했다.
* * *
[세계의 주인공은 정해져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성자 에릭 님이시다. 우리 빙의자들은 그분의 인정을 받아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신성력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나처럼ㅋ.]
[신성력으로 목욕하는 사진]
'이거 맞나?'
박창호는 새로 등록된 게시글을 보면서 진지한 의문이 들었다.
여론이 좋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강풍호가 남자로 변할지도 모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를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박창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래서 허공에 타이핑을 하던 니시다 료의 손을 붙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상의해서 하자."
"왜 내가 맡은 임무를 너와 함께해야 하지?"
니시다 료는 주제 파악을 잘 못한다.
눈치가 없고 둔하며 그걸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는 전형적인 안하무인의 인간이었다.
'에릭이 패면 좀 낫지만....'
지금의 에릭은 빙의자들이 뭘 하든지 관심을 주지 않는다.
그는 장두식의 재롱에 푹- 빠져 있었으니까.
"거, 형님 보이슈?"
"허, 두식아. 진짜 워-메이지가 된 거냐?"
"반쯤은 그런 것 같수다. 마누라를 만나서 확인해 봐야 알 것 같지만요."
장두식은 홀로 5계층에서 사투를 벌였던 일대기를 늘어 두며, 자신이 익힌 새로운 마법을 자랑하고 있었다.
"한계까지 쥐어짜다 보니까 마력을 순환한다는 게 뭔지 알게 됐수다."
"스승님이 아무리 패도 마력 강화는 못 하더니...."
에릭은 그런 장두식을 보며, 감탄을 연발했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던 박창호에게 불현듯이 니시다 료를 설득할 묘책이 떠올랐다.
'패서 가르치는 게 이쪽 세계의 기본이랬지?'
주먹질을 했다가는 호되게 응징당할 가능성이 있으니, 박창호는 혀로 패 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니시다, 계속 혼자 그따위로 굴래?"
그간 쌓인 게 있으니 니시다를 향한 독설(毒舌)에 망설임은 없었다.
"뭐?"
"접때, 영정 사진 보니까 가족도 너를 한심하게 여기던데, 여기서도 그따위로 살 거냐고."
무릇, 설득이란 것은 상대의 약점을 후벼 파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일 터.
적어도 빙의한 후 이 년간 살아온 박창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너, 너. 어떻게 가족 얘기를-!!! 다 보고도!"
이는 실로 효율적이었다.
시종일관 얼굴에 철판을 깔고 있던 니시다 료가 무너졌기 때문.
"어, 어떻게 네가-."
"내가? 씹새야, 너 하는 꼴을 봐라. 이러다 강풍호는 남자 되고 너는 병신으로 낙인찍혀서 지구에서랑 똑같이 살게 되겠지."
그 말에 강풍호까지 합세해 니시다를 압박했다.
"맞아! 니시다 네가 나빴어!"
남자가 되는 건 죽기보다 싫은 강풍호였으니, 박창호의 말이 심하다고 생각은 했으나 결국 편을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합심해 2:1의 구도를 만든 덕분에 니시다의 폭주를 막아 낼 수 있었다.
'지구에서처럼 안일하게 생각하면서 살면 안 된다.'
강풍호가 니시다에게 했던 말들은 사실, 전부 스스로에게 한 말과도 같았다.
그는 자신이 수용소에 오게 된 계기를 떠올렸다.
"하, 친구들이 있으니까 이런 세계에서도 살 만하네. 얘들아, 사실은-."
모험가들을 믿었고.
그들에게 자신이 빙의자라는 사실을 알렸다.
"뭐? 사실은 네가 존슨이 아니었다는 말이냐?"
"아니, 너희랑 함께할 때부터 나는 계속 나였-."
"지랄 마! 우리가 그걸 어떻게 믿어. 너 언제부터냐!"
그의 동료들은 180도 돌변해, 박창호를 위협하고 들었다.
약점이 잡힌 박창호는 힘든 나날을 보냈어야 했다.
'노예처럼 일만 하다 버려졌지.'
그는 믿었던 동료들에게 착취당했다.
한계까지 쥐어짜지고는 최후에는 밀고당해서 2만 골드의 현상금과 맞바꿔졌다.
이런 사정을 말하진 않았으나, 눈물이 고인 박창호를 보며 니시다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마치, 방 밖에 나와서 세상을 보라던 돌아가신 어머니의 눈빛을 떠올리게 했으니까.
* * *
"...형님, 진짜 공략이 되는 건 맞수?"
열흘이 넘게 지났다.
밖에서도 며칠은 흘러갔을 시점이고.
장두식은 감옥에 갇혔을 때처럼 에릭을 향해 독촉의 말을 내뱉었다.
빠악-!
"끄윽-! 거, 말로 좀 합시다!"
에릭 역시 마음이 급했다.
그런데 어떡하겠는가?
미궁 최상층의 공략대가 계층주를 죽여야지 이 재앙이 끝나는 것을.
"그, 서, 성자님."
에릭의 마음이 급해진 이유로는 빙의자들이 [커뮤니티]의 정보를 알려 주는 것도 한몫했다.
처음에는 좋은 소식이 전부였다.
"커뮤니티 반응이 좋습니다! 빙의자에게 구원이 올 거라는 방향으로 기대감을 깔아 뒀는데-."
"다들 조만간 이뤄질 빙의자 자신 신고 기간을 기대하는 눈치였습니다!"
"마, 맞아요! 게다가 원하는 성별을 인정받고 개명할 수 있다는 말도 아주 큰 주목을 받고 있어요!"
분명 이랬었는데, 여느 커뮤니티가 그렇듯이 금세 새로운 떡밥들이 나타나면서 이 화제는 뒤로 미뤄지게 되었다.
한데, 그 새로운 화젯거리라는 게 에릭의 입장에서는 썩- 달가운 것들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또 뭐지?"
"그.... 제국일보에서 공식적으로 르웰 사제님의 교회를 황도 중앙 교회라고 부르기로 했다는-."
"그리고?"
"세계수가 시들시들하다는 말이 있는데, 이건 커뮤니티에서만 떠도는 내용이라-."
지난 열흘간.
세 빙의자들은 [커뮤니티]의 정보를 정리해 에릭에게 보고해 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에릭의 얼굴이 점점 흉악하게 변해 가는 상황.
[르웰의 교회가 제국에 정식으로 인정받음.]
[황제 지상주의 국가에서 교회에 '황도 중앙'이라는 이름을 붙여 준 건 처음 아니냐?]
[사진]
인증 사진이 있는, 예컨대 [제국일보]발(發) 정보 같은 것들.
[세계수께서 시들어 간다. 그분께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혹은, 이런 식의 게시글.
커뮤니티는 익명이라서 확인이 어려운 부분이 많고 시간이 지나면 글 또한 사라진다.
그렇기에 세 빙의자는 최대한 중요한 정보들만 추려서 보고에 올렸다.
'왜 계속 화를 내는 건데....'
빙의자들은 미칠 지경이었다.
에릭은 보고를 요구하되 듣는 내내 화만 냈다.
소리를 지른다거나, 승모근을 꿈틀거리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 무섭지.'
원래 소리 없이 화내는 게 제일 무섭다고 하지 않나?
"거, 형님. 상자깡이라도 마저 하면서 기분 전환 하는 건 어떻수?"
그 장두식이 에릭의 기분을 읽고 이런 제안을 건넬 정도였으니까.
"-됐다."
에릭이 심란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장두식이 [상자깡] 같은 자극적인 말을 내뱉었음에도 말이다.
"그 사진이 어떻다고?"
"...수만의 시민들이 교회를 둘러싸고-. 그, 그. 사제님께서 교회 종탑에서 손을 흔들며-."
"-그만."
사방이 고요해졌다.
차라리 계층주라도 나오면 좋겠는데, 저놈에 분수 때문에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레어-적색 상자]
그래도 보상은 착실하게 쌓여 갔다.
블랙 등급에 비하면 보잘것없어도, 적색 등급도 나름 고등급 템을 많이 주는 상자다.
게다가 이 또한 늘어난 계층주의 숫자에 맞춰 150연뽑이 가능했다.
물론, 다 에릭의 것이지만.
"끄응-."
전전긍긍하는 빙의자들을 보면서 에릭은 마음을 정리했다.
저들은 이제 자신의 신도가 아니던가?
'어쩔 수 없겠어.'
빙의자들에게 노려진 적이 있던 만큼 르웰의 안전은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에릭의 생명의 은인이자 이 세계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가족이었으니까.
'그 미모에 그 관종력을 가지고 여기까지 버틴 것도 용했지.'
하나, 이제 르웰의 인기는 에릭이 뭘 어떻게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르웰은 타고나길 스타의 자질을 띠고 있었으니까.
좋게 말하면 스타나 주인공이 될 타입이라는 말이고, 나쁘게 말하면 관종이라는 의미다.
"킥킥, 에릭. 르웰이 제국 수도에 산다. 그 사실만으로도 네가 싸고도는 게 의미가 없어진다는 말이다."
리페로제 아스티아.
에릭의 스승은 폭력 지상주의자에 광신론자였으나, 그 직감만큼은 아주 정확한 인물이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돌아가는 꼴을 보면 그랬다.
빙의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예배는 연신 만석에 교회 마당까지 신도들이 가득하고.... 담장 밖까지 수도의 시민들이 몰려들어서 르웰 얼굴을 보자고 난리를 친댔지.'
무늬만 사제지, 그냥 아이돌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헌금함에서 금화가 흘러넘칠 정도라서, 헌금함의 개수도 늘어났다고 그러는데....
평소의 에릭이었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이를 무마해 보려 노력했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신전.'
계속해서 떠오르는 GP 획득에 대한 알림.
[+238 GP]
에릭이 추측건대, 자신을 추종하거나 찬양하는 세력이 늘어날수록 획득하는 GP의 양이 극대화되는 구조일 터였다.
지금은 미궁 속 제국군에게만 적용되는 느낌이라, 이렇게 액수가 적은 게 아닐까?
그 말인즉슨, 르웰과 합심한다면 세계수의 화분을 마련하는 건 순식간에 해결된다는 의미였다.
'아마도....'
나무를 심기 위한 GP라고 알려 준다면, 르웰도 선뜻 납득해 줄 것이 분명했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치자.
―33계층이 개방되었다.
―유예는 60일.
수십 일간 침묵을 유지하던 미궁의 음성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이제야 나갈 수 있겠어."
69화 대비 (1)
"대공, 옛 생각이 나지 않는가?"
"크르르...."
황제의 물음에 북부 대공이 으르렁거렸다.
야만적인 북부 부족의 왕(王)은 제국의 대공이 되었고, 지금에 와서는 북부의 벽이라 불리며 수호자의 의무를 지녔으니.
황제는 대공이 짊어진 짐을 나눠 주고자 북부로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불사의 군대가 제국 땅을 밟았다라....'
제국 북부에는 마경이 존재한다.
일명, '죽음의 땅'이라고 불리는 장소로.
살점 한 조각만 남아도 되살아나는 강력한 언데드가 도사리는 땅이다.
대격변으로 인해, 그런 언데드들이 제국의 땅을 침범한 상황.
크르르-.
황제의 옆에서는 대공이 희번뜩 눈알을 굴리며 적을 찾아 댔지만.
"대공, 전쟁은 끝났다."
"-폐하."
종전을 알리는 황제의 말에 북부 대공은 이지를 되찾았다.
황제와 대공을 중심으로 거대한 크레이터가 파였고, 사방으로 검보랏빛 핏물이 낭자했으나.
그들이 디딘 땅만큼은 오롯이 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니.
"폐하...."
흔들리는 눈빛으로 북부 대공이 황제를 바라봤다.
"제 가족은 무사합니까?"
거대한 맹수 같은 대공이었으나, 그 눈빛은 구원을 바라는 어린아이와도 같았고.
"북부는 안전하다-."
황제는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대공에게 안심을 주었다.
그제야 사방을 휘감고 있던 북부대공의 흉포한 오러가 사그라들었다.
"대공, 나머지는 내가 정리하마."
부서진 대지의 한복판에서 황제가 기세를 일으켰다.
쿠웅-!
거대한 체구에는 달 조각을 정련해 만든 은빛 갑주가.
오른손에는 월광을 빚어 만든 검날이 번뜩였다.
황제의 시선은 보랏빛 핏물의 끝을 향해 있었다.
'감히 언데드 따위가.'
제국 북부 대산맥을 따라 질척거리는 언데드의 흔적이 가득했고, 그 너머로는 검은 안개가 뒤덮여 있었는데.
안개 속에서 보랏빛 안광을 흩뿌리는 언데드들이 황제와 북부 대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죽지 않는 자들이여-."
콰앙―――!!!
황제는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발걸음을 따라 대지가 부서지고 하늘이 갈라졌으니.
그 한 걸음에 북부산맥의 봉우리가 뻥- 뚫렸고, 산맥을 가득 채웠던 검은 안개가 흩어졌다.
밤하늘 사이로 달빛이 반짝거렸으며, 흩어진 안개 속에서는 보랏빛 눈동자들이 흔들렸다.
"-이 땅은 황가 아르만의 이름으로 보호받는 곳이다."
힘이 실린 황제의 말은 북부의 칼바람을 타고 죽음의 땅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니 너희의 땅으로 돌아가라."
칠흑 같은 밤하늘을 뚫고 한줄기 은빛 월광이 흘러내렸다.
황제의 손길을 따라 달빛이 마경을 비추었고, 안개 속에 도사린 보랏빛 눈동자들은 어느새 짙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폐하-."
그 광경에 대공이 무릎을 꿇고 황제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황제가 담담한 표정으로 대공에게 말하기를.
"대공, 국란의 위기다."
"하명하소서."
대공이 짊어진 것은 북부 수호의 의무요, 그를 옥죄고 있는 책임감이라는 이름의 족쇄였다.
"제국을 하나로, 대륙을 하나로."
황제는 대공의 족쇄를 풀어 놓을 생각이다.
본디 수호자의 의무는 북부 대공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기에.
'북부 대공, 아툰 일족의 피를 잇는 자들.'
먼 옛날에는 대륙의 패권을 두고 제국과 경쟁하던 전쟁광의 일족.
황제는 대공을 대장군으로서 통일 전쟁의 선봉에 세울 생각이다.
세계에 들이닥친 재앙 속에서 제국을 하나로 만들 최선의 수단.
그것은 전쟁이다.
그것도 대륙을 하나로 만들겠다는 지고한 사명감을 지닌 전쟁.
"대공, 이 시간부로 그대를 대륙통일군의 대장군으로 임명한다."
그에 대공이 경건하게 고개를 조아리며 답하기를.
"-지엄한 폐하의 명을 따르겠나이다."
우직하며 맹목적인 충성의 말이었지만.
북부 대공의 입가에는 찢어질 듯이 짙은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피에 굶주린 맹수.
그답지 않게 수호자의 의무를 짊어지고 살아왔으나.
"왕국을 멸하고 이 땅에 오롯한 제국을!"
그 맹수는 세계를 상대로 이빨을 들이댈 것이다.
―Ep. 15 대비
제국의 수도 황도 아르만.
제3구역 미궁 광장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황도군이 사뭇 진중한 자세로 미궁 입구를 경계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제국민들은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미궁의 문이 활짝 열렸기 때문.
"더 뒤로 물러나라-!"
치안청과 근위대가 협력해서 광장을 통제했다.
전체 가용 인력의 반이 동원될 정도.
하나, 몰려드는 인파를 관리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내 가족이 미궁에 들어갔단 말입니다-!!!"
"왜 우리를 막습니까!"
인파들은 두 무리로 나뉘어 있었는데, 한쪽은 미궁에 들어간 가족을 애타게 찾는 부류였다.
"뭐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절대 시민들이 입구 근처로 다가가지 못하게 해라!"
가족이 생환한다는 보장도 없는 상황에 제국민을 위협으로 몰아넣을 수는 없는 법.
대격변 패치는 근 일주일 동안 세상을 완전히 뒤바꿔 놨다.
"폐하께서 막 귀환하신 상황이니.... 최소한 저쪽 인파라도 통제가 됐으면 좋겠군."
근위대장이 진지한 얼굴로 광장의 한구석을 바라봤다.
가족을 찾는 이들보다 이쪽이 더 골칫거리였으니까.
"제게 기회를 주신다면,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상황에 근위대의 신입 단장 에리카가 선뜻 이 사태를 해결하겠노라 나섰다.
"에리카 단장, 묘책이 있다고?"
"예, 제가 르웰 사제님과 친분이 있습니다."
에리카의 시선은 광장 한구석을 가득 채운 인파를 향했다.
미궁 입구 너머로 거대한 단두대가 보였는데, 이는 미궁 광장에서 가장 높은 자리였다.
그 위에서는 한껏 차려입은 르웰이 한 손에는 돈 가방을 든 채, 미궁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사제님의 인기는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차려입었다 뿐이지, 르웰은 잔뜩 분위기를 잡은 채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사뭇 장엄하게 느껴질 정도.
'역시....'
오히려 그 장엄함이 신도들의 간절함을 더 일깨운 느낌이었다.
단두대 아래에서 신도들이 애타게 그녀를 바라보며 기도를 올렸기 때문.
흉터를 잔뜩 일그러트린 잭슨이 초밀착 경호를 하고 있어서 가까이 다가서는 이는 없었으나.
그녀를 따라 움직이는 신도들은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위협이 될 수준이었다.
'폐하께서 교단의 위세를 내버려 두시다니-.'
에리카는 광장에 모인 사람들 중 반 정도는 르웰을 보기 위해 모였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에.
게다가 그것이 제국이 용납해서 가능했다는 걸 알았으니.
에리카는 단두대 위로 발걸음을 옮겼다.
'역시.... 르웰 사제님은 나의 신과 비견될 만한 분이시다.'
에릭이 유명해지기 전.
그의 장래성을 알아본 페르나시아 공작이 그녀와 에릭을 이어 주려 했지만....
"흥흥~. 에리카 님이라고 하셨나요?"
에리카는 위아래로 자신을 훑어보는 르웰의 시선을 느낀 순간부터 자신이 패배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도 간간히 에릭을 유혹해 보려 노력해 봤으나, 이 또한 그의 짓궂은 장난으로 무산되었다.
매번 심장이 철렁-하는 기분만 느끼고는 에릭은 허상처럼 자신의 곁을 떠나갔었다.
'...나는 그저 믿고 따르면 된다.'
그런 에리카의 연심은 재앙급 악마와의 전장에서 광신(狂信)으로 거듭났으니.
자신이 지닌 마음은 사랑이 아닌 믿음이었다.
"사제님, 그간 격조했습니다."
그리하여, 에리카는 신의 여인을 대하듯이 르웰에게 정중함을 보였다.
스윽-.
단두대 위에서 르웰이 에리카를 내려다봤다.
그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그려졌으나, 그녀는 이내 입술을 오므리고는 평소처럼 교단의 성호를 그리며 인사를 건넸다.
"아스티아 님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에리카 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귀족가의 여식이며, 제국 근위대의 기사단을 맡은 에리카다.
르웰은 존대를 하였으나, 에리카는 그것이 부담스러웠고.
"말씀 편하게 해 주시지요."
이내 고개를 더욱 깊이 숙이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럴까?"
그제야 두 사람은 본론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에리카는 군중을 물려 달라는 부탁을 건넸고 르웰은 한껏 기쁘게 이를 받아들였다.
"여러부운-!!!"
단두대 위에서 르웰이 신성력을 뿌렸다.
신성의 빛이 스포트라이트처럼 르웰을 비추자, 기도하던 시민들의 시선이 그녀를 향해 모여들었다.
"안전거리를 지켜 주세요-! 돌아올 가족들이 자리 잡을 수 있게 광장을 비웁시다-!!!"
치안청과 근위대가 별짓을 해도 물러나지 않던 시민들이, 그 한마디에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미궁 광장이 휑-하게 비었다.
'저게 무슨....'
미궁 입구를 지키던 황도군 장군이 크게 놀랄 정도였다.
에릭의 세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건 알았으나, 제국민들에게 저런 영향력을 끼친다니.
'최대한 빠르게 폐하를 알현해야겠군.'
그런 복잡한 심경을 느끼던 장군 앞에서 이변이 발생했다.
쿠구구궁―――――――!!!
광장은 평온하였으나.
미궁의 입구로부터 굉음이 들려왔다.
숫제 지진이라도 난 듯이 투박한 나무문이 덜덜- 흔들렸다.
그에 황도군 장군이 칼을 빼 들며 소리쳤다.
"전원 발검하라-!"
챙-!
날카로운 검날이 미궁을 겨눴다.
겨눠진 검날을 향해 어두운 미궁 입구로부터 스산한 바람이 불어온다.
미궁에서 흘러나오는 칙칙한-.
"어어...?"
산뜻하고 신성한.
금빛을 품은 바람이었다.
광장을 둘러싼 제국민들은 보았다.
쿵.
미궁의 가장 앞에서 나타난 거대한 성기사를.
금빛 신성을 휘감고, 찬란한 위용을 뽐내는 그의 얼굴을.
"사, 살았다아-!!!"
그리고 그 성기사의 뒤를 따르는 수천의 인파들을.
제국의 미궁군과 모험가 할 것 없이 그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생존의 기쁨을 누렸다.
"우리의 구원자!!!"
기쁨을 누린 뒤에는 감사의 마음을 나눴다.
그 대상은 명확했다.
'저게.... 성자 에릭.'
가장 앞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본 황도군 장군은 마치 영웅처럼 나타난 에릭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 * *
생환은 곧 재회의 기쁨으로 거듭났다.
에릭 또한 마찬가지였다.
"에릭-!"
"사제님-!"
두 사람은 얼싸안고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에릭이 미궁에 들어간 뒤.
밖에서는 고작 며칠이 지나갔지만, 그럼에도 대격변이라는 재난 때문에 르웰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다친 데는 없어?"
"걱정해 주신 덕분에 멀쩡합니다."
에릭은 르웰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습관적으로 인상이 조금 찌푸려졌으나, 이내 그는 표정을 밝게 바꿨다.
열다섯을 넘기며 자신이 힘을 드러냈듯이.
르웰 또한 넘치는 미모를 뽐낼 시기가 온 것이리라.
'마치 르웰을 위해 만든 옷 같군.'
그리하여, 에릭은 순수한 감상을 품었다.
늘씬하게 붙어 몸매를 아름답게 부각해 주는 긴 원피스.
허벅지 라인이 트여서, 걸을 때마다 그녀의 하얀 피부가 도드라졌다.
오른팔에는 아끼는 명품 가방을 걸쳤고 다른 손에는 금화로 가득 찬 커다란 여행 가방을 든 르웰.
'엄청 뚫어져라 보네-.'
평소라면 남들의 시선을 의식했을 에릭이건만, 저런 진지한 눈빛이라니.
르웰도 다소 긴장한 채 에릭을 향해 물었다.
"어때?"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에릭은 아주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 하며, 모든 것이 완벽에 가까웠다.
'목이 좀 허전한가?'
일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구태여 내뱉지는 않았다.
대신, 허리를 기울이며 르웰을 향해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으니.
그 모습에 르웰이 들고 있던 금화 가방을 놓칠 뻔했다.
'에, 에스코트?'
마치 귀족들이 영애를 에스코트하는 모양새가 아니던가?
르웰은 갑자기 성큼- 다가선 거리감에 화들짝 놀랐다.
"무거울 테니 제가 들겠습니다."
에릭은 금화 가방을 건네받고는 르웰의 손을 붙잡고 미궁 광장을 거닐었다.
거대하고 찬란한 성기사와 화려하고 아름다운 사제의 행진.
그 행선지는 황도 중앙 교회로 불리는 에릭과 르웰의 보금자리였다.
"와아...."
수만에 달하는 인파가 몰렸으나, 그 누구도 에릭과 르웰의 길을 막아서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아우라에 절로 길을 터 줄 뿐.
"거참, 미치겠구만-."
에릭과 르웰의 재회는 별천지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다.
장두식과 세 빙의자 또한 그 광경을 지켜보며 놀랄 따름이었으니까.
"따까리야,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두식 형님, 저도 모르겠습니다."
르웰의 호위를 맡은 잭슨도 단두대 위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에릭이 왔는데 무슨 호위가 필요하겠는가?
그냥 눈치껏 빠져야지.
다만, 문제는 잭슨과 장두식도 교회로 가야 하는 입장이라는 것.
"우선 천천히 따라갑시다."
"거, 잘들 따라와라."
에릭이 터놓은 길을 따라 장두식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아그들아- 비켜라!"
* * *
르웰은 기분이 날아갈 듯이 좋았다.
'그 꼬꼬마가- 이렇게....'
오늘따라 에릭이 더욱 성숙해 보였다.
바깥일을 해서 그런가?
그래서 그런지 평소 크게 의식하지 않던 르웰도 무의식적으로 에릭을 힐끗 살피게 되어 버렸다.
손이 횅-해졌으니까.
'왜 손을 놨지?'
르웰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앞에 거대한 교회의 정문이 보였다.
"들어가시죠."
에릭이 짓궂게 웃었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의미였다.
허전한 손이 어딘지 아쉽게 느껴지는 르웰.
그녀는 조금 침울한 듯이 교회로 들어섰다.
'역시 부담스러우셨나?'
르웰의 뒷모습에 에릭 또한 아쉬움을 느꼈다.
그렇다고 당장 뭘 할 생각은 없었다.
본디 거리감이라는 건 천천히 줄여 가는 것이며, 아직 그들의 관계는 명확히 정해진 것이 없었으니까.
어딘가 어색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그간 어땠습니까?"
그렇기에 에릭은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으며 소소한 대화를 나눌 생각이었다.
일상적인 대화란 어색한 순간을 환기시켜 주는 좋은 작용을 해 줄 터였다.
"큰일은 없었는데-."
"저도 뭐, 계층주를 공략하면서 두식이를 찾아다녔-."
도란도란 말소리가 교회에 퍼져 나갔다.
어색함은 일상으로 물들었다.
그래서 텐션이 올랐고 르웰이 고민거리를 꺼내 놨다.
"아-! 요즘 신도들이 너무 많아서 교회를 증축해야 하나 고민이 드네."
그 말에 에릭은 르웰이 준 돈 가방을 인벤토리에 넣어 봤다.
'...이게 무슨.'
단번에 1,000만 골드라는 거금이 들어왔다.
에릭이 놀라 있자니, 르웰의 말이 덧붙여졌다.
"저게 10분의 1 정도야."
"그, 그게 무슨-."
"짠-!"
르웰의 손끝으로는 거대한 함(函)이 가득했다.
'저게 다-.'
십일조의 헌금함이었다.
전부다 투입구까지 금화가 흘러넘치는 모양새였다.
"이럴 생각으로 십일조를 받은 게 아니니?"
정작 르웰이 더 덤덤했다.
물론 에릭의 의도대로 일어난 일이었지만....
'상상 이상이군.'
기대치를 아득히 상회했으니.
에릭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구구절절 설명이 덧붙이고 설득의 시간을 가져야 했지만.
기분이 한껏 올라간 상태의 대화는 그런 과정을 생략해 버렸다.
에릭이 말하기를.
"르웰 사제님, 개종하실 생각 없으십니까?"
대뜸 튀어나온 그 말에 르웰이 뒷목을 붙잡았다.
70화 대비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