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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2% BASTARDOMAESTRODELEMPERADOR / Chapter 2: 010-020

Kapitel 2: 010-020

#010화. 제물 황녀 (1)

죽겠다.

온몸이 뻐근하다 못해 찢어발겨지는 느낌이다.

"소가주님···?"

"아, 엠마. 거기 얼음 좀 가져와서 등 위에 대줘."

부들부들 떨며 겨우 그런 부탁을 했다.

등 뒤로 닿는 차가운 기운이 근육통을 그나마 상쇄시켜 주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유야 뭐···.

'···아, 너무 신나게 놀았네.'

태자와의 대련 때문이다.

'조금만 사릴걸.'

후회해 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태자를 이길 방법은 검의 뿐이었고, 검의는 원래 이런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검의는 결국 검식에 강제성을 부여하는 기예다.

육체가 검식을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허접하다고 해도, 마나와 의지가 억지로 동작을 수행케 만드는 형태란 말이다.

그러니 어찌 되겠나.

정도 이상으로 혹사당한 몸은 이렇듯 무너지고 만다.

'검의를 부하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육체 기준은 최소 익스퍼트 중위급.'

내 마나 운용 능력이 소드 마스터 급인 것은 의미가 없다.

동작을 수행할 몸이 비기너에 겨우 걸치는 수준이니, 이건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결과였다.

여하튼, 그런 이유로 죽겠다.

요 며칠은 침대에 누워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고, 그 덕에 누님이 찾아와 또 얼굴 위로 그늘을 드리우셨다.

―소가주. 몸은 괜찮으십니까?

―예, 뭐··· 운동을 좀 하다 보니.

―과한 것은 독이 되는 법입니다. 언제나 그 점을 유념하여 주셔야지요.

―···죄송합니다.

역시 조금만 살살 할 걸 그랬나 싶은 생각도 잠시.

'···투정 부려서 뭣하나.'

몇 번을 고민해봐도 바뀌지 않는 결론에 나는 투정을 그만두고 다음을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해야 할 일들을 고민하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미래는 영 쓸모가 없지.'

내 과거력이 과거력이지 않던가.

옥에 투옥되어 있던 죄수, 전쟁터나 전전하던 죄수 병사.

세상 물정을 알기엔 너무한 이력이었다.

그나마 아는 것이라곤 누님이 살아계실 적 면회에 와 들려주었던 제도 정계의 굵직한 사건 몇 개.

또한 부하들에게 들은 괴상한 소문 몇 개.

하지만 이 또한 그리 유용하지는 않다.

전자는 태자가 파로스를 친 사건이 사라짐으로써 그의 결정적 투옥 죄목이 없어졌다.

태자가 정계에 남는다면 그 활동이 미래를 바꿀 것이니, 상기한 사건들도 일어날지조차 미지수다.

후자? 설명할 필요가 있나.

원체 못 배운 놈들이 많았고, 순진한 놈들이 많았던 만큼 그놈들 정보는 영 믿을 게 못 된다.

결국 '파로스의 부흥'이라는 목적을 앞에 두고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로 귀결된다.

'태자를 그럴싸한 황제로 만드는 것.'

하여 놈이 알아서 제국 멸망으로 가는 전쟁을 막게 만드는 것.

큰 능선은 넘었다.

일단 태자가 그 평민 여자를 포기하지 않았던가.

그나마 걱정인 것이 있다면···.

'그 여자한테 홀렸던 나머지들.'

차기 마탑주, 성자, 북부의 대공자와 암흑가의 주인.

이 인간들이 저지를 사건은 태자가 역사를 바꾸건 말건 부동이다.

태자처럼 그 여자에게 미쳐 사리분별이 안 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아, 생각하니까 억울하네.'

그래, 태자가 투옥됐다 치자.

그래도 그 인간들만 멀쩡히 자리에 앉아만 있었어도 제국이 그 꼴까지는 안 갔다.

나름 제국 천년 역사상 가장 찬란한 황금세대라고 불리던 인간들이 아니던가.

한데 그런 놈들이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자멸하니, 제국은 속 빈 강정이 되어 결국 멸망에 이르렀다.

제국민 입장으로 속이 안 터질 수가 있나.

'나서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고개를 젓게 된다.

내 지금 입지에서 당장 뭘 할 수 있는 게 없다.

무엇보다 나는 그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만 알지 그게 언제인지를 모른다.

'대충 차기 마탑주가 제일 먼저였는데···.'

어떻게든 떠올려 보려고 했다.

그걸 침실에 누워있던 며칠간 하루도 쉬지 않았다.

하지만, 안타까워라.

"쾌유를 축하드립니다. 소가주."

"···예, 감사합니다."

나는 몸이 다 나을 때까지도 사건 시기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내 기억력, 이대로 괜찮은가.

아니, 그냥 애초에 시기를 들은 적이 없어서 못 알아낸 걸로 치자.

나중 일은 나중 일이다.

일단 멀쩡한 태자가 있고, 그 사건 개요는 아는 내가 있다면 사건이 일어난다고 한들 원만한 수습 정도는 가능하겠지.

일단은 며칠 만에 맞이하는 누이와의 식사다.

내겐 중요한 일과인 만큼 여러 대화를 나누려고 노력했다.

그래봐야 누이가 좋아할 만한 화제는 항상 정해져 있었지만 말이다.

"황실에서 전서가 왔습니다. 정식적인 임명은 황실 연회 때로 잡혔으나, 교육은 곧장 다음 주부터 시작하겠다 하십니다."

"예."

"정말··· 잘된 일입니다. 소가주께서 이리 가문의 이름을 드높일 지위에 서셨다는 것이 이 누이는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내가 태자의 스승이 된 일.

누이는 틈만 나면 이 이야기를 하며 들떠 재잘거리셨다.

한 얘기를 또 하고, 그걸 또 하고, 또 또 하고.

살살 지겨워지긴 하지만 내가 뭘 어쩌겠나.

누이가 저렇게까지 좋아라 하는데.

하지만 너무 오래 끌지는 못했다.

식사 시간이 너무 길어진 까닭이다.

"···아, 벌써 시간이."

"예, 슬슬 자리를 치워야지요. 사용인들도 다른 일이 있을 테니."

말하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언제나 초인 같던, 또한 인형 같던 누이가 이리 인간적인 사람이었다는 걸 새삼 알게 되어서.

분명 조곤조곤한 말투는 그대로였다.

조금만 거리가 멀어져도 듣지 못할 작은 목소리 또한 그대로고, 슬며시 내리깐 눈도 평소와 같았다.

하지만 누이를 오래 봐왔기에, 내가 태자의 스승이 된 것에 누이가 느끼는 기쁨이 정도 이상임은 너무 잘 느껴졌다.

'좋네.'

이런 행복을 쥐여 드리는 것이 나의 과업이다.

그 사실이 아로새겨지는 중이었다.

"음, 소가주. 오늘은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실 수 있으신지요."

"제가 도울 일이 있습니까?"

"예."

누이가 싱긋 웃었다.

충격적인 대목이었다.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입매가 치솟았다는 것은, 누이의 감정이 아주 고조됐다는 말이니까.

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리 노골적으로 좋아하실까.

헛웃음을 흘리는 순간이었다.

"예, 소가주께서 받으셔야 할 게 있습니다."

"제가, 말입니까?"

누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파로스에는 황실의 교육에 들며 수령해야 할 가보가 있지요."

그 말에 나는 놀라버렸다.

"저희가 가보가 있습니까?"

이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속에 혼란이 자리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그런 게 있었다고?'

내 기억상, 우리 가문에 가보 같은 건 없었기 때문이다.

* * *

자, 잘 생각해 보자.

'내가 몰랐을 수도 있지. 가문의 가보 같은 건.'

과거의 나는 영 가문에 관심이 없었으니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 사실에 영 신경이 쓰이는 건 다른 이유 탓이 아니었다.

'그 물건이 있다고 쳐도···.'

왜 미래에서, 나는 화재로 불타버린 저택에서 그걸 찾지 못했던 걸까.

아니, 그 가보라는 게 유실됐다거나 발견됐다는 말조차 못 들은 걸까.

전장을 전전하던 시기, 내 속에 있던 것은 가문을 부흥시키겠다는 죄악감이 섞인 열망이었다.

그런 만큼 나는 화마가 지나간 자리에 남아있던 유품들을 모두 찾아다녔었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죄를 잊지 않도록 만들어 주리란 집착에 가까운 믿음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럼에도 가보는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 게 있단 말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암만 제국이 파국으로 치닫는 시기였다곤 해도 그렇다.

나는 제국에 단둘만 남아있는 소드 마스터 중 하나였다.

적어도 유품을 모을 시기엔 제국이 그걸 조사할 여력이 있었다.

그런 이유로 황실의 인력들이 직접 그 일을 조사했다.

'그런데도 못 찾았어.'

그렇다면 떠오르는 불온한 추측이 있지 않나.

걸음은 무거워졌다.

눈빛은 차가워졌다.

'가문을 습격한 놈들은···.'

그 가보라는 게 목적이 아니었을까. 그 생각이 짙어질수록 속에선 불길이 치솟는 듯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누님은 날 이끌고 저택의 지하실로 향했다.

나는 존재만 알던 곳이었다.

'가주의 인장이 있어야만 들어올 수 있는 곳.'

가보가 이곳에 있었던 건가.

그렇다면 역시 내가 모르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이곳 내부의 정보는 소가주에게도 비밀이었으니까.

훗날 저택이 다 타버린 뒤로 가보자면··· 와보긴 했으나 이곳에서 찾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 말인즉슨, 추측이 조금 더 신빙성을 띤다는 말이다.

와중 다행스러운 점은 있었다.

'정말 가보가 목적이었다면?'

어떤 원한 관계가 있어 가문을 친 무리가 있고, 그들이 가보를 가져간 것이라는 가능성은 여전하다.

하지만 그들이 가보만이 목적이어서 이곳을 친 무리였다 치자.

그럼 적어도 이번 생에서는 그들이 노리는 게 가문이 아닌 내가 될 터다.

적어도 누님은 안전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겠지.

그런 생각에 빠져있던 중 누님이 오른손 검지에 끼워진 가주의 인장을 지하실 철문의 구멍에 넣었다.

그러자 굉음이 일었다.

쿠구궁!

철문이 열렸다.

나는 시선을 멀리 뒀다.

풍경은 기억 속 그대로였다.

그저 벽에 박힌 푸르게 빛나는 광석이 통로를 비출 뿐인 그런 공간.

"따라와 주시지요."

"···예."

나는 누님을 따라 나아갔다.

궁금증은 미칠 듯이 치솟기 시작했다.

'대체 뭐길래?'

그 가보를 홀라당 가져갔을까.

길은 길었고, 그 길이만큼 혼란도 거세졌다.

하나 그 순간이 영원할 순 없는 법이리라.

나는 통로의 끝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

드디어 육안에 보인 가보의 모습에, 나는 직전까지의 혼란이 모두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차오르는 것은 하나였다.

"이것입니다. 저희 파로스의 가보. 황실의 스승직을 역임할 때만 출고할 수 있는 신물. 초대 황제를 가르칠 때 시조께서 사용하셨던···."

"···회초리?"

"···교육봉입니다."

허탈함.

···지하실의 끝엔 웬 회초리 하나가 전시되어 있었다.

* * *

검은 회초리가 휙휙 허공을 휘두른다.

정말 단단하고 반짝거리는 것이 꽤 기품있어 보이는 물건이다.

하지만 그게 끝.

'특별한 건 안 느껴지는데.'

마나를 흘려봐도 별 반응이 없다.

몰래 불에 달궈도 보고 물에 빠트려도 봤으나 그냥 단단한 회초리인 게 끝이다.

그 외에도 지난 일주일간 여러 방법을 사용해 봤지만 모두 무반응.

천 년이나 가만 놔뒀음에도 멀쩡한 시점에서 범상치 않은 것은 맞지만··· 결국 그게 다였다.

'이게 특별할 이유가 있나?'

내 상식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뭐랄까, 이 가보를 목적으로 가문을 노린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게 바보 같아질 정도라면 이해가 되겠는가.

이 회초리에서 상징성 이상의 무언가를 얻을 수 없다고 판정을 내리니 이건 그냥··· 그냥 유실된 걸지도 모르겠다 싶은 것이다.

한숨이 푹 삐져나왔다.

그렇게 걷는 곳은 황궁.

오늘은 첫 교육이 있는 날이었다.

황궁은 회귀 후 몇 번이나 온 장소이지만 여전히 놀라웠다.

'이렇게 잘 꾸며져 있었나.'

내 기억 황궁은 화원이란 화원은 다 마르고 바닥을 깨지고 벽엔 금이 가 있는 공간이었다.

그야말로 망국의 상징 같은 곳이라 해야 할까.

그런 곳이었을진대 지금은 꽃이 흐드러져 있다.

'정취는 좋다만 영 어색하단 말이지.'

그런 감상이나 떠올리며 걷던 중이었다.

타다닥!

무언가 가벼운 뜀박질 소리가 귓가에 걸렸다.

점점 가까워졌다.

날 향해 오는 뜀박질.

그걸 깨달은 순간 그 소리의 주인이 뛰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몸이 먼저 반응해 등 뒤로 돌아 손을 뻗었다.

그러자,

"이야아···!"

탁!

"···앗?!"

손에 웬 꼬맹이가 걸렸다.

금발에 푸른 눈, 길게 기른 머리가 찰랑거리는 겨우 대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앙증맞은 여자아이.

고개가 기울었다.

'황족?'

황실에 이런 외형은 황족밖에 없다.

그렇다면 황족 중 누구인가.

"이 손 놓거라! 이 악당아!!!"

뺨을 말갛게 물들인 채 손을 붕붕 휘두르는 꼬마의 얼굴을 잘 뜯어봤다.

그러나 영 기억나는 건 없었다.

그런 순간이었다.

"3황녀 전하!"

어떤 시녀의 경악 어린 외침에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시선이 다시금 꼬맹이를 향했다.

꼬맹이는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새하얘진 안색으로 경기를 일으키며 외쳤다.

"앗! 진짜 놓거라! 놓아주거라! 이렇게 부탁한다!!! 저기 진짜 악당이 왔단 말이다!!! 히이익!!!"

문득 머릿속이 멍해졌다.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얘가?'

이 맹랑한 꼬맹이가 내가 아는 인간이었으므로.

그것도 꽤 친했던 사이였음으로.

머릿속에 곧 죽을 사람처럼 피폐하던, 또한 음침한 소리나 지껄이던 여자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이 꼬맹이는, 3황녀는.

―···나와 도망쳐줄 수는 없겠나?

제국이 멸망하던 시기, 제물이 되어 황좌에 오른 오르테어의 마지막 황제였다.

< 제물 황녀 (1) > 끝

ⓒ pap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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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물 황녀 (2) >

#011화. 제물 황녀 (2)

나라에 망조가 들면 도적떼가 판을 친다.

회고하길, 그 격언은 전쟁기의 제국에도 똑같이 적용됐었다.

진짜 강도들이 들끓었다는 것과는 다른 얘기였다.

그냥, 그만큼 나라의 정세가 어지러웠다는 말이다.

전쟁의 발발은 현 황제의 붕어로부터 한 달 뒤, 2황자가 대관식을 끝내 황위에 오른 때였다.

당시 옥에 있었던 터라 정확히는 모르지만, 면회를 찾아왔던 누이의 말로는 그랬다.

-제도 귀족의 사치가 극에 달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장 전란이 몰려오고 있건만 누구도 그를 신경 쓰지 않지요. 폐하께선 고작 야만인 따위에 천 년 제국이 무너질 리 없다고 하십니다. 그보다는 무희를 궁으로 들이는 일에 열중하시지요. 단언하심은 제국민들을 안심시켜 주는 행보이긴 하나, 너무 낙관적이진 않은지···.

그는 전란의 시기에 황제가 되었다는 것에, 책임감과 긴장감이 조금도 없는 사내였다.

옥살이 동기인 태자의 말을 빌리자면 '욕심이 과한 아이'였다.

그런 그가 황좌에 올라서 한 일이 무희를 불러 계집질이나 하는 것.

또한 각종 사치품을 모아 전시하는 것.

황제는 그를 위해 백성들을 수탈했다.

제국은 외부의 위협만큼이나 내부적인 불만이 쌓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에 옳은 소리를 할 대신은 없었다.

소신 있는 자들은 황제에게 숙청당하거나 정계··· 아니, 이 나라를 빠져나가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남은 건 우둔한 황제와 간신뿐, 그 치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나버렸다.

시기로 치면 누님과 가문의 사변이 있고 난 후였다.

-폐하께서 시해당하셨습니다.

흉수는 황제에게 숙청당했던 귀족의 아들이었다.

옥에 갇혀 있다곤 하나 태자는 현 황제와 피붙이 사이다.

그 소식을 그가 듣는 건 당연했고 그렇다면 그게 내 귀에도 들렸을 것 아닌가.

혹자는 제국이 안정을 찾을 것이라 했다.

외부의 위협도, 내부의 정비도 곧 이뤄지리란 희망적 목소리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두 가지 이유였다.

야만인의 수장은 너무나도 강했고, 제국의 다음 황제는 너무나도 유약했다.

3황자, 그리 불리던 태자의 아우는 치세 반년 만에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었다.

태자는 '계산이 빠른 아이였다. 답이 나오지 않음을 알았겠지.'라고 그 죽음을 평했다.

그 치세를 이르러 겁쟁이의 시대.

이후는 혼란이었다.

누군가는 황좌에 앉아야만 했다.

누군가는 그곳에서 이 제국의 비명과 환난을 몸으로 받아내야만 했다.

하지만 정통성을 지닌 이들 중 적합한 이들은 없었다.

제국에 유례없던 위기를 막아낼 영웅적인 인물은 모두 죽었고, 그 와중에 살 만큼 사리가 밝았던 이들은 모두 도망갔기 때문이다.

하여 황좌의 주인은 오를 때마다 계절 하나를 넘기지 못했다.

그러니 어찌하겠나.

아직 궁에 남아있는 황제의 핏줄을 순서대로 그 위에 올려둘 수밖에.

그런 이유였다.

고작 17세에 불과하던 반푼이 소녀가, 멸망이 예견된 제국의 옥좌에 앉게 된 것은.

-오랜만입니다. 오라버니.

그 소녀가 바로 나와 태자를 옥에서 꺼낸 제국의 마지막 황제, 아리아 오르테어였다.

* * *

따지고 보면 아리아는 정통성 있는 황실의 핏줄이 아니었다.

그녀는 칼리오스의 아비 되는 현 황제가 무희와의 불장난 중 실수로 만들어버린 아이였으며, 천한 피가 섞여 반푼이라 불리는 아이였다.

가치라곤 혼인 시장에 내어 황실의 우군을 만드는 게 끝.

한데 그런 일이 있기도 전에 제국이 망해 그 황좌에 올라버린 것이다.

모두가 금방 도망치거나 자살을 할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이후는 놀라웠다.

-아직도 그 여자야?

아리아는 4년간 홀로 제국이 지르는 비명을 받아낸 것이다.

경악이 나올 일이었다.

아무렴, 다들 살려달라 비명을 지르고 황실 탓이라며 원성을 쏟아내는데 그걸 몸으로 다 받아내며 4년이나 치세를 이어온 것 아닌가.

그 여자가 초인이기라도 했나.

그런 생각까지 들었을 정도였나, 결론만 말해 내 추측은 틀렸었다.

직접 본 아리아는 그저 아이였다.

도망칠 각오조차 없는 아이.

아리아 오르테어의 치세로부터 4년.

옥에서 나와 그녀를 처음 본 순간을 떠올려봐도 그랬다.

피폐함에 찌들어있는 얼굴.

잘 먹지도 못한 것인지 바짝 말라있는 몸.

겁에 질린 듯 웅크린 자세.

하나 같이 옥좌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걸쳐진 황제의 의복은 화려했으며, 엉덩이를 깔고 앉은 옥좌는 거대했다.

비유하자면, 그녀는 꼭 옥좌에 삼켜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당장 내 처지가 끔찍했음에도 동정심이 들 정도.

물론 그 감정이 깊지는 않았다.

그 시기의 나는 그녀가 내건 사면권과 가문에 대한 속죄에 미쳐 있었으니까.

그런 내가 그녀와 친해지게 된 것은 오롯이 태자 때문이었다.

-보고드립니다.

-이번에도 오라버니는 오지 않으신 겐가?

-예, 지휘관께서는 전쟁의 상처를 돌보고 계십니다.

-···그런가.

그 망할 인간은 아리아와 얼굴을 맞대는 것을 꺼렸다.

이유는 스스로 태자위를 내팽개쳐 나라를 이 꼴로 만든 스스로에 대한 죄악감, 전쟁을 막아내기 전까지 한순간도 평온하지 않으리라는 다짐이라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랬다.

-그 아이에겐 몹쓸 짓만 했네. 그리도 작은 아이였을진대··· 그 아이가 아닌 아이에게 얽힌 정치적 관계를 봐버린 게지. 하여 한 번도 다정했던 적이 없네.

-그냥 면목 없어서 못 보는 거구만 무슨 죄악감이니 다짐이니···.

-대련이나 하지.

-······.

아리아에 대한 부채 의식.

뭐, 이해 못할 감정도 아니었다.

게다가 태자가 안 하면 부관인 나라도 보고를 하는 게 체계다.

나는 큰 전투를 끝낼 때면 아리아를 알현해 갈수록 야위어가는 그녀에게 전장의 상황을 보고했다.

하지만 그런 일이 한 번, 두 번, 또 열 번이 넘어가도록 이어지니 말을 트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녀에게 보고를 끝내면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규칙이 되었을 정도다.

뭐, 유쾌한 대화는 그다지 없었지만.

-자네는 왜 이렇게까지 하나? 그 정도 능력이라면 도망가서 다른 국가에 귀의하면 될 것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파로스의 재건?

-예.

-헛된 꿈을 꾸는군. 제국이 없어질 텐데 파로스가 무슨 소용인가.

-그러는 폐하께서도 망할 나라의 황좌에 참 오래도 계십니다.

-······.

당시의 나는 황족에 대한 존중이 이미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아리아에게 공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하여 태자에게 하는 것보다는 살짝 유하지만 예의범절은 없는 그런 말을 일삼았다.

그럴 때마다 아리아는 쓰게 웃었다.

사람이 망가지다 보면 저항할 힘조차 없게 된다는 것을, 그녀를 보며 깨달은 셈이다.

그 외에 특징 하나.

돌이켜보면 아리아는 묘한 형태로 내게 집착을 보였다.

-자네는 말을 참 심하게 해.

-죄송합니다. 입버릇이 이래서.

-죄송하지 않은 어투군. 뭐, 상관없네. 같이 무너질 사람이 자네라는 건 그리 나쁘지 않은 기분이야.

-전 살 거라니까.

-난 그다지. 죽고 싶네. 이왕이면 자네랑 같이.

이성을 보는 사랑과는 달랐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결핍에 의해 형성된 집착이었다.

보라, 말은 험하게 했으나 그녀가 얼굴을 맞대는 사람 중 그녀에게 원망을 쏟지 않는 건 내가 유일했다.

그 정도로 아리아는 몰려 있었다.

제국의 원망을 받아낼 허수아비로서, 제국과 함께 번제에 삼켜질 제물로서.

그러니 아리아에겐 내가 각별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나.

나로 인해 자신이 겪는 어떤 부정적인 감정을 조금은 해소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나야 불편했다.

죽고 싶다느니, 그럴 거면 나랑 같이 가는 게 좋다느니.

정말 죽을 것처럼 말라비틀어져 있는 망가진 여자가 같이 죽자는 얘기를 식사 때마다 하면 밥이 제대로 넘어가겠나?

물론 이해는 한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조금은 어울려 주어도 좋았을까 싶지만, 당시의 내게 그런 여유는 없었다.

-징그러운 소리 좀 그만하십시오.

앞서 일렀듯 나는 파로스를 재건해야 했다.

그것만이 내가 살아있는 이유였으니까.

여하튼 그런 시기를 살았고, 우리는 그렇게 만나 이야기를 나눴으며, 정해진 결말을 향해 나아갔다.

수도 방어전.

내가 회귀를 했던, 그 결과조차 알 수 없게 된 전투가 있기 전날 밤이었다.

그날은 이젠 패배할 것이라는 사실을 나와 태자조차 인정하게 된 날이었다.

아리아는 늦은 밤 나를 불렀다.

-···나와 도망쳐줄 수는 없겠나?

그곳에서 처음으로 녀석의 진심을 들을 수 있었다.

녀석은 도망치고 싶어 했다.

나를 끌어안은 채로 벌벌 떨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눈물로 망가져 내리는 얼굴이 내가 본 녀석의 안색 중 가장 붉었다는 것이다.

나는 물었다.

-도망가면 그 뒤는 어쩝니까?

-늦지 않았네. 전선 반대편으로 가면 돼. 신분을 숨길 방법은 많네. 아직 값진 보석 몇 개가 있네. 이걸 들고 타국으로 가서···.

아리아는 한참이나 그런 이야기를 했다.

도망갈 방법, 도망가서 신분을 숨길 방법, 또한 집을 구할 방법이나 그 외에 여러 가지를.

아주 쓰게 웃으며.

-···디저트 가게를 할 것이네. 나름 먹어본 게 많으니 일가견이 있지 않겠나. 응, 분명 할 수 있네. 그런 일을 꿈꾼 일도 있었고. 자네는 힘이 좋으니 뭐든 할 수 있겠지. 그러니까 그냥···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겐가?

그러던 아리아는 어느 순간부터 말을 잇지 못했다.

이유는 나도 안다.

그때의 내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리아가 그리는 미래 중 그 무엇도,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파로스를 재건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된 그날, 나는 내 마음속 무언가가 무너져내린 것만 같았다.

내가 더 살아있다는 사실조차 죄스러웠다.

그 순간이 끔찍할 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리하여 죽고 싶었다.

그날 처음, 우리는 죽고 싶은 사람과 살고 싶은 사람이 바뀌었다.

-보내주십시오. 전장에.

기억하는 것은 눈물이다.

애써 웃어 보이는 것조차 안쓰러울 만큼 처량했다.

-···자네는 참 나쁜 사람이었네. 처음부터 끝까지.

내 기억 속에서, 아리아는 끝까지 슬프게만 웃는 사람이었다.

* * *

"악당!!! 제발 살려다오!!!"

간절하게 버둥거리는 꼬맹이 아리아의 얼굴 위로 미래의 아리아가 겹친다.

그리하면 할수록, 나는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감정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괴리감.

내가 황좌에 앉아 있는 아리아를 처음 본 날 그랬듯, 밝은 아리아를 보는 지금 그런 감정이 느껴졌다.

'감정 표현이 이렇게 풍부했었나?'

아니, 단언컨대 단 한 번도.

'그럼···.'

이런 맹랑한 꼬맹이가 그 음침한 황제가 된다는 것이겠지.

그 모습은 역시 전쟁기의 광기가 만든 비극인가.

밝은 모습조차도 안타까움을 느끼게 만드는 것은 참 이 여자답다.

그리 생각하니 맹랑함이 조금은 친숙해졌다.

그런 순간이었다.

시녀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나와 아리아를 번갈아보는 모습이 참 안쓰럽다.

'시녀조차 안쓰러운 사람을 뽑은 건가.'

그럴 리가, 그냥 내가 망나니인 걸 아니까 저러겠지.

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됐으니까 가봐. 어차피 태자 전하를 알현하러 가는 길이다. 내가 조금 돌봐주마."

"그, 그게에···."

"난 같은 말 두 번 하는 거 싫어해."

"힉!"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시녀가 곧 고개를 푹 숙이곤 사라졌다.

끝까지 불안해 보이는 표정인데··· 뭐 내가 애를 때리기라도 할 것처럼 보이나?

'···아니, 때린 적이 있는 것 같기도.'

망나니 시절은 워낙 옛날 일이라 뭘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아무튼 시녀를 보내고 아리아를 살폈다.

그래도 인연이 있던 녀석이다.

조금은 궁금한 것이다.

미래와 지금, 아리아는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

"히야아···!"

아리아가 눈을 반짝이며 입을 헤 벌렸다.

그러더니 말했다.

"너는 좋은 악당이구나!"

"좋으면 좋은 거지 좋은 악당은 또 뭡니까. 그리고 저 처음 보는 거 아닙니까? 어찌 알고 악당이라 하시는지?"

"언니야 전하가 말했다! 잘생긴 남자는 다 악당이라고!"

이런, 나쁜 조기교육에 당했군.

'언니면 1황녀? 2황녀?'

2황녀겠군.

1황녀는 태자를 황위에 올리는 것에 미쳐 있으니 소거법이다.

그걸 떠나서도 2황녀라면 꽤 유명하다.

'남자 보는 눈이 그렇게 없다지.'

어찌 운명적 사랑이니 어쩌니 하며 나쁜 남자한테만 골라서 사랑에 빠진다던가.

이 시점에서도 그런 일이 꽤 있는 걸로 안다.

여하튼 억울하다.

"모든 미남이 악당은 아닙니다. 당장 태자 전하도 남들 기준에는 미남 아닙니까."

물론 내 기준에선 느끼하게 생긴 기생오래비지만.

"혹시 황녀님, 태자 전하를 모함하시는 겁니까?"

눈을 좁히며 물었다.

이렇게 통통 튀어대니 그냥 반응이 좀 궁금해서.

그러자 아리아의 눈이 슬그머니 돌아가 날 피했다.

"···아, 아리아는 그런 거 모른다···!"

회피라.

처세술을 아주 모르지는 않는군.

"뭐, 제가 알 바는 아닙니다만. 일단 따라오시지요. 제가 태자 전하를 알현하러 가는 길이라."

"으응?"

"제가 시녀한테 말했잖습니까. 황녀 전하를 태자 전하가 있는 곳까지 보필하겠다고."

의문은 해결됐다.

이 시기의 아리아는 평범한 꼬맹이다.

그걸 새삼 깨달으니 안도가 조금, 거기에 녀석이 잘 지낸다면 이번 생엔 굳이 더 엮일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조금.

뭐가 됐든 태자가 황제만 된다면 제국이 그 꼴이 날 확률은 획기적으로 준다.

그렇다면 이 녀석도 적당히 잘 살 것 아닌가.

그런 음침이로 자라진 않을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어···."

태자에게 가겠다니 기색이 영 묘하다.

뭔가 우물쭈물한다고 해야 하나.

"왜 그러십니까?"

"오, 오라버니는 공사가 망하셨다···!"

"공사다망하시다. 입니다."

교정해주었으나 듣진 않는다.

그저 내 눈을 피하며 말한다.

"아리아는 착한 황녀다···! 공사에 참견하면 안 된다···!"

"뭔 공사를 그리 좋아하는지 원. 됐으니까 갑시다."

"이악!"

아리아의 뒷목을 잡고 여명궁을 향했다.

와중 녀석이 발버둥을 쳤지만, 이 시기면 기껏해야 여섯 살인가 그랬을 터다.

꼬맹이 힘으론 힘들지.

그렇게 여명궁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저 멀리 정원에 태자가 보여 입을 열었다.

"저 왔습니다. 전하."

"아! 파로···."

태자의 몸이 우뚝 멎었다.

표정이 굳는다.

시선은 내 손에 매달려 있는 아리아를 향해 있었다.

"···3황녀로군."

딸꾹, 아리아가 들썩였다.

무심코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바닥에 탁! 하고 착지한 아리아가 허둥지둥하며 매무새를 다지다,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곤 내 다리 뒤에 숨어 웅얼웅얼 말했다.

"오빠··· 버니! 전하를 뵙습니다아···!"

굳은 얼굴의 태자.

맹랑함은 어디로 갔는지 갑작스레 풀이 확 죽어버린 아리아.

그 순간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말이 있었다.

-그 아이에겐 몹쓸 짓만 했네. 그리도 작은 아이였을진대··· 그 아이가 아닌 아이에게 얽힌 정치적 관계를 봐버린 게지. 하여 한 번도 다정했던 적이 없네.

그 말을 떠올리니 왜인지 속이 조금 답답해졌다.

그럴 수밖에.

바보가 아니면 알지 않겠나.

눈치가 궤멸적으로 없는 게 아니라면 알지 않겠나.

이 녀석은 전쟁이 아니더라도, 그리 행복하게 살진 못했을 녀석이란 것을.

'진짜···.'

뭐 이리 박복한 인간이 다 있나 싶다.

< 제물 황녀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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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물 황녀 (3) >

#012화. 제물 황녀 (3)

귀족의 피는 푸르다.

그것은 범상한 인간과는 종족이 다르다는 말이 아니다.

그저 피가 푸르게 얼어붙을 정도로 냉철하게 이성적 사고를 해야 함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 관점에서의 이야기였다.

'악성 재고.'

이 쭈구리 꼬맹이, 아리아 오르테어는 처리가 힘든 악성 재고였다.

황제의 피를 이어받았음에도 절반이 천민의 것이라 정통성이랄 게 없기 때문이다.

하나, 그럼에도 황실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존중할 수 없는 태생임에도 존중받아야만 하는 사람.

귀족의 의무에 따라 대우해야만 하는 사람.

그렇기에, 그리 대우받기에 그녀가 해야 할 일도 정해져 있다.

'혼인.'

황실의 피로서 의무를 수행하는 것.

정계에 발을 들일 수도 없고 그리해서도 안 되는 천출의 피 아리아로 치자면 그게 혼인이었다.

여기서 악성 재고인 이유가 나온다.

귀족가는 아리아를 원치 않는다.

정통성에 미쳐있기 때문이다.

특히 황실의 혼인 상대로 거론될 만한 백작위 이상 귀족들은 그 정도가 극심하다.

그들의 피에 천한 것이 섞이길 바라지 않는 것이다.

그럼 아리아가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혼인할 상대는 누구겠나?

자작 이하의 한미한 귀족가, 혹은 거상이라 치부되는 평민들.

중앙 정계와 귀족 사회에 편입되고 싶어 하는 외곽의 존재들이었다.

이게 문제가 된다.

아리아는 곧 죽어도 황실의 피.

그 말은 저 한미한 인간들은 필히 중앙 정계에 엮이며 휩쓸리게 된다.

그런 것을 감수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겠나.

권력에 미친 자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사고뭉치들이었지. 그것들은'

그런 이들이 오르테어의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고를 쳤던가.

나조차도 알 정도로 유명한 이름이 많았다.

여하튼, 정리해보자면 그렇다.

황실의 일원이 혼인하지 못해 궁에서 늙어 죽는 것은 절대 보기 좋은 그림이 아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혼인을 시키자니 혼인시킬 만한 놈들은 역사적으로 사건사고를 일으키는 매물들이었다.

아리아는 존재만으로 그런 딜레마를 만들어내는 존재였다.

태자의 입장으로 보면 존재만으로 치세에 혼란을 일으키는 존재.

또한 아버지 황제가 부정을 저지른 살아있는 증거.

그러니, 어쩌면 이뻐할 수 없는 것도 이해는 했다.

'그래도···.'

아니기를 바라였다.

제국의 환란만 아니었다면 그나마 남들처럼은 살 수 있을 거라 속 편히 생각했다.

낙관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나는 아리아를 동정했으니까.

이번은 다르길 바랐으니까.

상념에 빠져있던 중, 태자가 물어왔다.

"어찌 이리 함께 오게 된 겐가."

가만 태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싫어하는 건가?

'아니.'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하나 그렇다고 좋아하는 것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딱 하나, 무감정.

저 얼굴에 걸린 것은 그게 끝이었다.

나는 답했다.

"오는 길에 만났습니다. 마침 홀로 궁을 거니는 건 또 처음이라 길 안내를 받았지요."

아리아가 고개를 홱 들곤 날 봤다.

뭐, 어쩌라고.

이렇게 거짓말이라도 해야 괜한 오해는 안 사지.

"흠···."

태자는 잠시 침음을 흘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3황녀는 물러가 보거라. 이곳까지 안내하느라 수고 많았다."

차가운 명령조.

하나, 치하의 말.

그게 태자의 입에서 나온 순간이었다.

화아악!

돌연 아리아가 눈을 크게 뜨며 환한 미소를 만들었다.

그리곤 큰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웅··· 네! 성은이 망국하옵니다! 오빠버니 전하!"

망국. 오빠버니.

말이 이상한 것은 둘째 치자.

아리아는 저 냉막한 칭찬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이다.

어찌 그리하고 마는 건가.

그게 묘하게 거슬렸다.

그 순간 아리아의 시선이 날 향했다.

"다음부터는 길을 잃으면 안 된단다!"

헤헤 웃으며 날 길치로 만든다.

···뭐, 내가 뿌린 씨앗이니 어찌하겠나.

"···예, 받들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아리아는 직후 태자의 사용인들과 함께 종종걸음으로 자리를 빠져나갔다.

"자, 그럼 대충 정리됐군. 오느라 고생했네."

"뭐, 안내받아 온지라 고생은 안 했습니까."

"정말 길을 잃은 겐가?"

태자가 물었다.

나를 보지 않은 채로, 멀리 사라지고 있는 아리아를 본 채로.

나 또한 태자에게서 시선을 뗐다.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런 것으로 하지."

태자의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더 이어 나가지도 않았다.

"그럼 우리 얘기를 시작하지."

이후로도 아리아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 * *

태자의 검술 교육은 명목상의 일이다.

애초에 이 자리를 수락하면서부터 양측 모두가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태자는 나를 자신의 조언자로 쓰길 원한다.

나는 황실의 스승이라는 파로스의 영광을 손에 쥐길 바란다.

이것은 사전에 합의된 내용이다.

그런 만큼 첫 수업인 오늘, 우리가 한 일은 검술이 아닌 앞으로의 일에 관한 논의였다.

그렇게 알고 있었고 태자는 왜인지 나에게 검을 물었다.

하나 오래가진 못했다.

그보단 시간 내에 정할 이야기가 많았던 까닭이다.

"자네의 임명은 열흘 뒤의 대연회 때로 잡혔네. 그때를 위해 현 세력 구도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은 해두어야 할 것 같아서.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이곳 정세가 워낙 빠르게 바뀌지 않던가. 주지시켜야 할 사안은 알려주겠네."

나의 공식적인 임명은 일 년에 두 번, 황실이 직접 주관하는 대연회 때다.

대연회라고 해봐야 다른 귀족 연회보다 더 크고 황제가 직접 나서 '이번 반기에는 이래라 저래라' 권고 사안을 전하는 자리에 불과하지만··· 여하튼 태자의 스승을 임명하고 파로스의 개입을 선포하기엔 썩 어울리는 자리였다.

그에 관한 이야기가 한참, 그러다 보니 공사다망한 태자에게 할애된 교육 시간이 모두 끝나버렸다.

"흐음, 검술에 관한 것도 조언을 조금 듣고 싶었는데. 특히 자네가 쓴 검식에 대해···."

"어찌 걷지도 않고 뛰려 하십니까. 그건 지금의 전하껜 이릅니다."

태자가 울컥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실은 사실이다.

애초에 검의라는 것은 소드 마스터 이상의 검적 이해가 있어야 운용이 가능한 기예다.

아직 한창 성장 중인 태자로선 제대로 이해도 하지 못한 채 단련하는 검만 망가뜨리겠지.

하여 당장은 검의 자세를 봐주거나 실전 요령을 가르치는 것만 할 생각이다.

수업 시간은 그리 끝을 냈고, 나는 다시 퇴궁을 위해 걸었다.

그런 때였다.

아리아를 본 것은.

"···거기서 뭐합니까?"

황성의 입구로 가는 길목의 정원.

아리아가 나무 뒤에 숨은 채 똘망똘망하게 날 보고 있었다.

문득 직전 일이 생각났다.

미래의 일도 생각났다.

역시 안쓰러운 인간.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떤 미래도 밝지가 않은 녀석에, 그나마 가장 행복하다 추억할 이 순간조차 황실의 모든 것으로부터 기피당하고 있으니.

속이 꽤 답답해지는 중이었다.

와중 아리아는 감탄을 흘렸다.

"악당은 참 눈치가 좋구나!"

"그렇게 대놓고 쳐다보면 바보도 압니다. 그리고 제 이름은 악당이 아니라 유렌입니다. 유렌 파로스."

"음! 파로스야!"

그건 성씨인데··· 뭐 됐나.

태자 앞에서의 쭈굴거리던 모습은 어디 가고 또 활기차진 것이 참 아이답다 싶다.

다가가니 아리아가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왔다! 아리아는 은혜를 아는 황녀란다!"

"음?"

"아리아를 지켜주지 않았느냐! 오빠버니 전하는 공사가 망하셔서 많이 바쁘신데 네 덕분에 화도 내지 않고 아리아를 칭찬해줬단다!"

어깨를 으쓱한다.

아, 거짓말로 감싸 준 얘기를 말하는 듯하다.

"뭘요. 같이 온 건 맞는데."

"파로스야! 하지만 사람은 도움을 받으면 감사를 해야 한단다!"

꾸벅, 아리아가 고개를 숙였다.

"고맙···!"

"황족은 함부로 고개 숙이는 거 아닙니다."

이마를 쭉 밀어 올려 다시 아리아의 자세를 곧게 만들었다.

아리아는 여전히 싱글벙글이었다.

직후엔 돌연 그런 말을 했다.

"내가 답례의 의미로 비밀을 알려주마!"

"오?"

뭘까, 황실에서 일어난 사건?

그도 아니면 다른 귀족의 정보?

요 뽈뽈대며 돌아다니는 꼬맹이가 황실의 이야기를 주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렴, 황제의 성적 취향도 소문이 돌 정도로 비밀이 없는 곳이 황궁이 아니던가.

임명식이 열흘 뒤인 만큼 알아둬서 나쁜 내용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며 귀를 기울였으나···.

"사실 아리아는 솜사탕이란다···!"

"-"

"아리아는 솜사탕 왕국의 공주 솜사탕이란다! 아리아는 특명을 위해 황궁에 잡입해 있는데··· 이건 특급 기밀이라서 파로스랑 알린 밖에 모른단다!"

진지한 얼굴로, 정말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듯이 헛소리를 지껄였다.

깨닫게 되는 게 있다.

'아, 얘 아직 애구나.'

한숨이 나온다.

기대감이 있던 만큼 뭔가 팍 식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이 꼬맹이는 눈치도 없는 걸까.

입이 쉬질 않는다.

"공주 솜사탕은 딸기랑 초코를 섞은 맛이 난단다! 딸기랑 초코는 제일 맛있는 과일들인데 이건 너무 달콤해서 고귀한 사람만 나는 맛이란다! 그래서 너무 고귀하고 맛있는 아리아는 정체를 숨겨야만 한단다! 그래야 악당들한테 솜사탕 왕국을 뺏기지 않는단다!"

쉿! 쉿!

입으로 연신 뱀같은 소리를 내며 아리아가 흥분에 차서 말을 이었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어린아이의 설정 놀음이라.'

그래, 누구에게나 순수했던 시절은 있는 법이다.

나도 그런 시절이 있지 않던가.

'내 어릴 때 꿈이 분수대였지.'

안타깝게도 진짜 분수대는 못 됐다.

하지만 샴페인 타워로 분수를 터뜨리는 어른은 되어 봤다.

이 정도면 절반 정도는 꿈을 이룬 게 아닐까.

여하튼,

"아리아는 전설의 솜사탕을 찾아서 가장 맛있는 솜사탕이 되어야 한단다! 전설의 솜사탕은 황궁의 보물창고에 있는데···!"

"예예, 그렇습니까."

아리아의 말을 끊었다.

솜사탕 왕국의 비밀은 다음에 알아도 될 문제인 것 같다.

그저 음침하던 녀석이 지금은 웃고 있으니 그것만 해도 다행인 일이라 생각하자.

미래는 암담하지만 최악과 차악 중에서 그나마 차악이다.

그조차 영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있지만,

'그때는···.'

도와줘도 되겠지.

지난 의리를 생각해서.

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정치란 본디 깊게 개입할수록 곤란함 위험이 찾아오는 판이다.

괜히 벌집을 쑤실 필요는 없지 않겠나.

"제가 바빠서 이만."

임명식 소식을 누님에게 전해드려야 했다.

그리 생각하며 일어서는 순간이었다.

턱!

아리아가 내 바짓자락을 잡았다.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듯 또 쭈구리가 되어 입술을 우물거린다.

"뭡니까?"

물어도 대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는다.

가만히 기다려줘 봤다.

이건 들어야 하는 이야기인 것 같아서.

그렇게 들은 이야기는,

"오, 오빠버니 전하는 바쁘시더냐···?"

아니나 다를까 역시다.

나는 이 순간, 이 꼬맹이의 나쁜 버릇을 하나 알아버렸다.

속마음을 드러내는 일에 헤헤헤 바보같이 웃으며 고개를 떨궈버린다.

이 모습을 안다.

미래의 아리아는 꼭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야 할 때면, 고개를 떨구며 쓰게 웃었으니까.

"···예, 조금 바쁘십니다."

또 한숨이 삐져나왔다.

발걸음이 영 떨어지지 않아 다시 곁에 쪼그려 앉았다.

그냥 불쌍하지 않나.

온통 자신을 탐탁잖아 하는 황궁에서 그나마 공무적으로 대해주는 유일한 사람이 태자.

그런 이유로 그 인간한테 매달린다는 게.

"으, 으응···! 바쁘시구나···!"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다.

이건 미래와 다르다.

그 여자는 표정으로 불만을 말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이 되기 전까지는.

문득 태자가 개새끼처럼 느껴졌다.

태자의 입장이고 뭐고 변명을 했지만, 결국 그리 행동하게 미래에 하는 게 뭐던가.

후회였다.

태자도 머리론 알았던 것이다.

이 꼬맹이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군주로서, 또한 군인으로서의 태자는 완벽했다.

하지만 여느 대단한 성군들이 그렇듯 그 인간은 연인부터 가족까지 사생활 쪽은 괴멸적으로 관리를 못하는 인간이었다.

오지랖이었다.

그럼에도 생각하길, 이 박복한 녀석이 구태여 그런 인간을 의지하며 상처받진 않길 바랐다.

"···다시 생각해보니 말입니다."

"우웅?"

"전하는 악당이 맞는 것 같습니다. 바쁜 척이 좀 심하네요."

그 순간이었다.

"아, 아니다! 그 말 취소하거라!"

벌떡 일어난 아리아가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오빠버니 전하는 용사 솜사탕이란 말이다!"

내 미간이 좁아졌다.

* * *

여명궁의 저녁은 2인분의 식사가 들어온다.

하나는 궁의 주인인 칼리오스의 것이었고, 하나는 그의 가장 큰 우군인 에릴다의 것이었다.

"임명식 관련해서는 말이 많아. 검술 실력에 관한 부분이야··· 확인되지 않은 만큼 다들 신빙성을 말하진 않지만 사생활 쪽은 곤란해."

에릴다는 연신 불만을 표했다.

"네 결정이니까 따르긴 할 거야. 하지만 이제부턴 네가 유렌 파로스의 행동을 자제시켜야 해. 망나니를 스승으로 들인다니. 암만 파로스고 암만 정통성이라지만 시선은 곱지 않을 거야. 특히 이번 임명식은···."

식사는 이미 뒷전이오, 에릴다의 입에선 임명식과 관련된 걱정만이 줄줄 새어 나오고 있었다.

칼리오스는 그 말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녀의 말을 중요치 않게 여기는 게 아니라,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칼리오스. 내 말 듣고 있어?"

"아, 미안하네."

칼리오스는 낮의 일을 되새겼다.

-정말 길을 잃은 겐가?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런 것으로 하지.

유렌이 자신에게 거짓을 고했다.

칼리오스는 알았다.

유렌은 누군가의 안내가 필요할 정도로 황궁의 지리를 모르지 않았다.

지난 몇 회의 입궁 때를 생각해보면, 그는 안내해주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도 분명 익숙히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를 취했으니까.

한데도 그는 거짓으로 길을 잃었다고 말했다.

더불어 그의 행동은 언제나 의도가 따랐다.

그렇기에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왜 그리했나.'

그리하여서, 자신의 앞에 3 황녀를 보여주었는가.

칼리오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러다 에릴다에게 물었다.

"에릴다. 요즘 3황녀 쪽은 어떻지?"

"음? 거기? 평소랑 같지. 걔 노리는 애들이 궁으로 선물 보내고 편지 보내고··· 중앙 정계 노리는 게 어디 한둘이야? 자기들끼리는 벌써 경쟁까지 하고 있던데."

참 헛웃음도 안 나오는 일이었다.

고작 6살짜리 아이에게 연서와 선물.

그걸로 쌈박질이나 하는 이 행태가.

'도와주란 말을 하고 싶은 겐가? 자네는?'

안 된다.

그 싸움에 자신이 끼는 것부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딱히 아리아에게 사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대외적인 부분에서 그러했다.

그녀가 자신과 가깝다는 소문이라도 난다면 저 싸움이 더 불거질 것이기에.

태자란 그런 자리다.

개입으로 인해 3황녀를 둘러싼 싸움은 돌이킬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무관심이 답.

그런 생각을 다시금 떠올려 보았으나.

'······.'

칼리오스는 마음이 영 불편했다.

아리아의 주눅 들어 있던 표정이 생각났다.

그는 속으로 물었다.

'자네가 보기엔 이번에도 내 선택이 그르던가?'

혼란이 가중되었다.

< 제물 황녀 (3) > 끝

ⓒ pap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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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명식 (1) >

#013화. 임명식 (1)

그날 수업 이후, 다음 주의 수업은 시행되지 않았다.

하반기 대연회의 준비로 황성이 시끄러웠던 까닭이다.

그렇게 열흘이 쏜살같이 흘러 오늘.

나는 입궁을 준비하고 있었다.

"참 잘 어울리십니다."

누님이 내 매무새를 그리 칭찬하셨다.

잘 어울리는지는 모르겠다.

누님 눈에야 내가 뭘 입든 훌륭해 보이시겠지만, 예전부터 이런 치장이 들어간 옷은 영 취향이 아니었던지라.

"자, 이 부분이 비뚤어졌습니다."

누님이 손을 뻗어 내 옷깃을 다듬었다.

꽤 오래 걸렸다.

연회 의상이란 게 워낙 복잡하게 만들어지다 보니 그랬다.

가만 있자니 보이는 것은 누님의 정수리.

이리 키를 대볼 일이 없어서 몰랐건만 누님은 생각보다 키가 작으셨다.

언제나 길쭉하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던 중이었다.

"요즘은 고민이 있으신지요."

대뜸 그런 질문이 전해졌고, 나는 뜨끔했다.

아닌 게 아니라 아리아의 일이 머릿속 한구석에 계속 맴돌았던 까닭이다.

온종일 그 생각만 하는 건 아니다.

그냥, 일상 중에 한 번씩 그날 나눈 대화가 생각나 속을 답답하게 했다.

-오빠버니 전하는 용사 솜사탕이란다! 나쁜 악당들이 나를 해칠까 봐 정체를 숨기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오빠버니 전하는 악당이 아니다! 언젠가 꼭 악당들을 물리치고 아리아와 함께 전설의 솜사탕을 찾으러 갈 것이다!

아이의 세계다.

하지만, 아리아는 황실에서 태어나 모든 순간 눈초리를 받아오며 산 아이다.

녀석은 조숙했다.

태자를 대하는 태도만 봐도 그게 보였다.

자신이 처한 처지를 어렴풋이는 알지 않던가.

그런 주제에 황실의 소문을 몰랐을까.

그러니 나로서는 아리아가 만든 세계관에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었다.

저것이 어떤 비유적인 의미는 아닌지.

혹은 진실의 어느 부분이 저 세계관의 기둥을 이루는 건 아닌지.

그게 고민이었다.

티가 났던 거겠지.

나는 누님께 사과를 드리며 얼버무렸다.

"···죄송합니다. 긴장이 많이 되어서."

"그런 건 아닌 듯합니다."

"예?"

누님이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미세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조곤조곤 말했다.

"소가주께선 어릴 적부터 그러셨지요. 답답하거나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꼭 미간이 좁아지십니다. 그 상태로 괜히 허공을 보거나 바닥을 봤지요. 그건 분명 긴장과 다릅니다."

"···그랬습니까."

"예, 소가주께선 항상 그랬습니다. 또한···."

누님이 고개를 들었다.

처진 눈꼬리가 온화함을 자아냈다.

"그리 불만이 있을 때마다, 결국 하고 싶은 대로 해내고 마는 분이셨지요."

밑도 끝도 없는 신뢰는 나로 하여금 안정감을 준다.

하나, 어느 면에서는 중압감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누님, 이번만큼은 그리할 수 없습니다.'

파로스는 권력 구도에 개입하는 가문이 아니다.

태사의 가문이라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입지 탓에 발언 하나를 잘못하는 것만으로도 황실을 힐난하는 모양새가 되는 가문이다.

후계 구도나, 그들의 혼약과 관련된 일에 개입하면 안 되는 것 역시 그런 이유.

더군다나 나는 이제 겨우 태자의 스승으로 임명받는 찰나일진대 행동거지는 더욱 조심해야하지 않겠나.

내 섣부른 판단이 곧 파로스의 악명이다.

나는 파로스를 영광되게 만들어야 했다.

그걸 위해서 이번만큼은, 딱 오늘만큼은 참아야 했다.

"생각이 정리되면···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에 누님은 말씀하셨다.

"예, 그리하셔도 됩니다. 저는 소가주를 믿으니. 다만 한 가지만 약조해주십시오."

"···뭡니까?"

"파로스로서, 스승으로서 자랑스러운 선택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 * *

식을 위해 입궁했다.

나를 반기는 것은 태자의 측근인 1황녀 에릴다였다.

암만 해도 이 녀석이랑은 영 친해질 일이 생각이 안 든다.

만날 기회고 뭐고를 떠나서,

"오늘은 언행을 특히 주의해주세요. 시선이 많이 몰릴 테니까."

요 잔소리나 해대는 꼴이 참 귀가 아파서 원.

'이건 미래나 지금이나 똑같네.'

사실은 익숙한 잔소리다.

회귀 전에 이 녀석과도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 전쟁의 시기, 이 여자는 황실의 적통인 주제에 황좌에 오르지 않았다.

스스로 황실의 피이길 거부하며 군에 투신했고, 그리하여 전쟁 후반까지 우리와 함께 했었다.

이유가 뭐라고 했더라··· 그래.

-군이 다 무너지고 있는 만큼 누군가는 체계를 잡아야 해요. 근데 그 체계를 잡을 인간이 다 도망치거나 죽었죠. 그 씨발 놈의 2황자 때문에.

-그래도 전 황제 아닌가.

-그 새낀 죽어서도 2황자에요. 황제 같은 짓을 했어야 황제라고 해주지.

옥좌가 아닌 전장의 지휘부가 자신에게 어울린다던가.

그 말은 맞았다.

그때는 에릴다가 옥좌에 앉았어도 달라질 것이 없을 정도로 나라가 기울어 있었다.

더불어 이 여자는 지휘관으로서 너무 유능했다.

이 여자가 없었다면 제국 수명이 2년 정도 일찍 끝났으리라 말하면 설명이 될까.

그런 생각이나 하다보니 이 여자의 최후도 떠오르게 된다.

'유이텐 성채 방어전. 그때였지.'

별동대들이 사방에서 진영을 흩어내고 태자와 나는 본대에 나서야만 했던 상황.

이 여자는 자신의 목숨을 미끼로 적들을 한데 몰아 대규모 폭발 마법으로 자살 특공을 해버렸다.

제국 멸망 반년 전 일이었다.

여하튼, 지금이야 없는 일.

그런 만큼 두드러지는 건 이놈의 잔소리다.

나는 마음을 비우고 들었다.

"전하의 스승으로서 중앙 정계에 발을 들이는 거예요. 어느 정도 생각은 있으시겠지만 그것보다 더 주의하셔야 하는 거죠. 남들 눈에 당신은 이미 전하의 파벌이에요. 당신의 실책이 전하의 입지에 영향을 준다구요."

틈만 나면 이거 조심해라, 저거 조심해라.

어머니가 일찍 타계하셔서 잘 모르겠지만··· 어머니도 저것보단 낫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다.

"특히 황족 사이에서의 처신은 잘 생각해주세요. 파로스가 파벌 경쟁에 참여하는 가문이 아닌 건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더욱 지금의 태자이신 전하를 교육하는데 힘쓴다는 뉘앙스를 풍겨줘야 해요. 자칫 다른 황족한테 호의를 줬다간 '파로스의 선택'이라는 명분이 생기는 건 당신도 알잖아요?"

"제가 망나니여도 상관없는 얘기겠군요."

"그쵸, 당신 인품이 아니라 명분이 필요한 거니까."

그런데 염병한다. 진짜.

내 망나니 같은 행색은 태자에게 흠이 되는데 내가 다른 황족에게 호의를 보이는 건 '파로스의 선택'이란다.

이놈의 정치판은 음습하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어 이렇게나 소름이 끼쳐온다.

뭐가 됐든 내가 할 말은 하나다.

"···뭐,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잘 해주세요. 열심히 말고."

"예입."

에릴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이럴 수 있지.

이 시기의 내가 얼마나 망나니로 정평이 나 있던가.

측근들 입장에서야 나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겠지.

하지만 이제부터는 나도 사고 칠 생각이 없다.

진심을 믿어주긴 할까.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그른 것 같긴 하다.

그런 과정이 있고 난 후.

에릴다 역시 자리를 떠났다.

대연회인 만큼 황족 전체가 참석해야 하는 까닭으로 나름의 준비를 하러 가는 것이다.

대기 시간은 지루했다.

딱히 의례에 참석하지 않는 누님은 이미 연회장으로 가 아는 귀족들과 인사나 나누고 있을 테다.

엠마라도 데려올 걸 그랬나.

그래도 요즘은 날 보며 벌벌 떨진 않는데 말이다.

뭐가 됐든, 멍하니 그러는 동안도 시간은 흘렀다.

어느덧 움직일 때였다.

"소가주님."

"아, 지금 가면 돼?"

"옙! 잠시···."

황실의 사용인들이 우르르 나타나 내 매무새를 다졌다.

의례용 장신구 따위를 몸에 걸쳤고 주의사항 따위를 말했다.

그것들이 끝난 후에야 움직일 수 있었다.

의례라는 것은 이다지도 귀찮은 것이다.

연회장의 문 앞, 안에서 식이 진행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윽고 내 차례가 됐다.

내 이름이 울려퍼졌다.

"파로스의 소가주, 유렌 파로스님이 입장하십니다!"

쿠구궁!

소리와 함께 음악이 귓가를 파고든다.

연회장의 전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저 끝, 황제가 보였다.

그 곁으로 태자가 날 보고 있었고, 에릴다는 조마조마한지 눈짓을 보냈다.

병신같은 2황자가 인상을 찌푸렸고 2황녀, 3황자는 심드렁했다.

그런 것들보다 잘 보이는 게 있었다.

'아리아.'

가장 구석 자리.

바닥에 고개를 박은 채로 어울리지도 않게 커다란 의자에 앉아 꾸물대던 녀석이.

날 발견하고 환하게 미소 지으려다, 주변 눈치를 보며 다시 고개를 숙여버리는 녀석이.

그게 보였다.

"소가주님···!"

보챔에 앞으로 걸어 나갔다.

사방에서 시선이 꽂힌다.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선 안 된다.

그럼에도 참··· 사람 생각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막상 이 자리에 들어오니 저 꼬맹이 쪽으로만 신경이 쏠렸다.

과대 해석이라 해도 할 말이 없다.

그냥, 그런 생각이 영 지워지질 않았다.

-아리아는 솜사탕 왕국의 공주 솜사탕이란다! 아리아는 특명을 위해 황궁에 잡입해 있는데··· 이건 특급 기밀이라서 파로스랑 알린 밖에 모른단다!

멋모르는 꼬맹이에겐 자신이 소중한 이유가 필요했다.

-그래서 너무 고귀하고 맛있는 아리아는 정체를 숨겨야만 한단다! 그래야 악당들한테 솜사탕 왕국을 뺏기지 않는단다!

미움받는 이유가 필요했다.

고작 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꼬맹이에겐 너무 많은 이유가 필요했다.

그리고 하나 더.

-오빠버니 전하는 용사 솜사탕이란다! 나쁜 악당들이 나를 해칠까 봐 정체를 숨기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오빠버니 전하는 악당이 아니다! 언젠가 꼭 악당들을 물리치고 아리아와 함께 전설의 솜사탕을 찾으러 갈 것이다!

그저 자신을 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남들처럼 악의를 가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무심함조차 감사하여서 호의를 품어버린다.

'그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 남이었으면 신경도 안 썼겠지.

꼬맹이 하나가 불행한 게 내 알 바인가.

나는 성인군자가 아니다.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놈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경 쓸 수밖에 없다.

아니까.

얘기를 해봤으니까.

저 꼬맹이가 어떻게 망가질지를 알고, 그게 아니더라도 망가질 미래밖에 없다는 걸 아니까.

무엇보다 이뤄질 수 없는 것에 매달리는 기분을 누구보다 잘 아니까.

그 순간이었다.

나는 드디어 내가 이리도 아리아를 신경 쓰는 이유를 이해했다.

'아.'

내가 아리아에게 느낀 건 동질감이다.

내가 바랐던 파로스의 재건은, 저 녀석이 바라는 관심은 닮아있었다.

이뤄질 수 없는 걸 바라여 무너지는 면에서 그러했다.

그걸 알아서 저 녀석을 그냥 둘 수가 없는 것이다.

자리에 섰다.

에릴다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제발! 잘!'

잘하란다.

한데 잘하는 게 뭔가.

-특히 황족 사이에서의 처신은 잘 생각해주세요. 파로스가 파벌 경쟁에 참여하는 가문이 아닌 건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더욱 지금의 태자이신 전하를 교육하는데 힘쓴다는 뉘앙스를 풍겨줘야 해요. 자칫 다른 황족한테 호의를 줬다간 '파로스의 선택'이라는 명분이 생기는 건 당신도 알잖아요?

외면하는 것?

내 처신으로 당장을 모면하는 것?

태자를 봤다.

그 순간 태자는 3황녀를 보고 있었다.

제대로 알진 못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다.

'이건 아니야.'

내 개인적인 감정? 당연히 있다.

내 동정심, 동질감 따위가 이 감정을 발화시킨 것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구태여 하나를 덧붙이길.

나를 정당화하길.

'넌 후회할 거잖냐.'

이리 아리아를 외면한 것을 언젠가의 태자가 후회할 것임을 안다. 가만히 있는 것은 나를 위한 선택도, 태자를 위한 선택도, 아리아를 위한 선택도 아님을 안다.

그냥, 그거면 된 거 아닌가.

* * *

아리아는 임명식을 치르는 유렌을 보며 깜짝 놀랐다.

황제의 임명을 받는 대단한 사람인 줄은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편이구나!'

유렌은 자신과 같은 편이다.

칼리오스를 돕는 사람이니 분명 그렇다.

아리아의 속이 든든해졌다.

엉덩이가 꿍실꿍실 들썩였다.

하지만, 아리아는 꾹 참았다.

'악당들한테 들키면 안 된다!'

황궁엔 전설의 솜사탕을 노리는 악당이 너무 많았다.

그러니 여기서는 아는 척을 하면 안 된다.

그래서 칼리오스도 자신과 아는 척을 하지 않는 것이다.

아리아는 스스로 그 모든 노력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하여 식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이로써, 파로스의 유렌은 정식으로 태자의 스승됨을 선포하며···!"

식은 금방 끝났다.

그리고 이어진 건 연회였다.

황제는 자리에서 사라졌다.

다른 형제들도 모두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칼리오스는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있었다.

유렌 또한 근처를 맴도는 사람이 많았다.

아리아만이 자리에 덩그러니 놓여 앉아 있었다.

아리아는 괜히 치맛자락을 쥐다가, 이내 조심조심 일어나 연회장 구석으로 향했다.

웃으려 했다.

'괜찮다!'

언젠가는, 칼리오스가 바쁘고 힘든 일을 모두 이겨내고 자신을 도와주러 올 것이다.

유렌은 그걸 돕느라 바쁜 것일 뿐이다.

아리아는 조심조심 디저트가 있는 곳으로 가서 솜사탕 하나를 받아 또 구석으로 갔다.

"헤헤···."

달콤한 솜사탕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니 버틸 수 있었다.

그리 생각하면서 아리아는 고개를 숙였다.

그때였다.

"······."

시선이 꽂혔다.

아리아는 이 시선을 알았다.

차갑고 날카로움으로 두려운 시선이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또각, 또각.

구두 소리와 함께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리아가 얼어붙었다.

발걸음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드니 더 확실히 보였다.

매번 편지를 보내는 사람 중 한 명.

그때마다 주변 눈초리를 심해지게 만드는 악당.

배불뚝이 악당이 자신을 정확히 노려보며 걸어오고 있었다.

아리아의 몸이 떨렸다.

움츠러들었고, 고개가 더 깊이 바닥을 향해 파묻혔다.

더 도망칠 곳도 없는 벽이었다.

'괜찮···.'

···지가, 않았다.

아리아의 세상에서 저 악당은 너무 무서운 사람이었음으로.

미래가 아닌, 당장 누군가 자신을 도와주길 바랐음으로.

그러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음을 아리아도 알았다.

너무 많은 것을 알아야 했던 아리아는 어렴풋이 그런 것을 알고 있었다.

눈이 질끈 감기는 순간이었다.

톡―

누군가가 손안에 있던 솜사탕을 빼앗아 갔다.

악당인가.

아니, 그렇다고 하기엔 뭔가 달랐다.

무엇보다 주변이 숨소리조차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조용해져 있었다.

악당이 나타나 다가오는 순간엔 주변이 소란스러워진다.

'으응···?'

무슨 일일까.

두려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그런 이유로, 확인이라도 해야한다는 생각에.

아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눈을 떴다.

그러자 보인 것이 있었다.

그 순간의 아리아는 왜인지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파로스야···?"

"치사하게 왜 혼자 맛있는 거 먹습니까."

유렌이 자신의 솜사탕을 빼앗아 먹고 있었다.

시큰둥한 표정을 한 채로.

그 뒤로는 악당이 덜컥 멈춰서 있었다.

< 임명식 (1) > 끝

ⓒ pap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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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명식 (2) >

#014화. 임명식 (2)

유렌 파로스는 제도를 넘어 제국 전체에서도 유명세를 떨치는 망나니다.

그것은 다만 철없고 콧대 높은 귀족가의 자제들이 비행을 하는 것과는 결이 다른 이야기였다.

그들은 그저 '철부지'다.

하지만 유렌은 '망나니'다.

그게 대체 어떤 차이인가?

묻는다면 많은 이들이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유렌은 망나니 기질을 토해냄에 있어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상대가 노인이든 아이든, 설령 아녀자나 귀족이라 해도 가리지 않고 패악질을 벌여 댔다.

그게 이유였다.

지금 그가 태자의 스승으로서 임명식을 마치고 300년 만의 파로스로 중앙 정계에 나섰음에도, 누구도 말을 걸지 않은 이유.

저렇게 태자의 곁이 아닌 반푼이 3황녀 곁에 있음에도 속닥거리지도 못하는 이유.

유렌 파로스.

위대한 가문의 소가주이자 300년 만에 정계에 나온 파로스. 본디 망나니이던 그에게 저런 입지가 더해졌으니 그와 얽혀봐야 괜히 망나니 성정에 데이기나 하지 않겠나.

그러니 유렌은 누구도 섣불리 다가가 찔러볼 수 없는 벌집이다.

그런 배경 탓에 생겨난 것이 이 기묘한 상황.

그 속에서 셈이 빠른 귀족들은 생각했다.

파로스가 3황녀를 아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어우, 달아."

"내, 내 솜사탕이이···!"

아리아가 울먹거렸다.

유렌은 그런 아리아의 입에 솜사탕을 떼어 물려주었다.

그러자 아리아의 표정이 슬그머니 풀렸다.

유렌이 말했다.

"이런 건 역시 애들이나 먹는 음식인가 봅니다. 어른인 저는 맛이 영···."

"그럼 돌려주거라! 이건 아리아가 가져온 솜사탕이다···!"

"예예, 그러십시오."

아리아는 그제야 솜사탕을 돌려받고 유렌을 흘겼다.

그러다 솜사탕을 냠 하고 먹더니 뺨을 말갛게 물들였다.

사이 좋은 오누이 같았다.

그게 귀족들에게 괴리감을 일으켰다.

저 유렌 파로스가 타인에게 친절하다니!

그것도 아이에게 친절하다니!

이것은 상식선에서 있을 수가 없는 얘기였다.

그럼에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계속 이어졌다.

그것이 '파로스가 3황녀를 주목한다'라는 추론으로 귀결되고 만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당장 저 광경에 끼어들어 그들의 관계를 치하해야 하나?

3황녀를 친근하게 대해야 하나?

아니다.

그것은 중앙 정계를 모르는 하수들이나 할 법한 사고다.

더 지켜봐야 했고, 유렌이 어떤 사람인지를 더 파악해야 했다.

그저 태사의 자리에 오르며 성격을 죽인 것일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고조차 되지 않는 이들은 분명히 있었다.

중앙 정계를 모르는 촌놈.

그럼에도 중앙 정계에 발을 들이고 싶어 하는 욕심 가득한 인간.

그중 하나가 나섰다.

그것도, 유렌이 말하는 중에.

"황녀님, 이거 말고 고기나 좀 먹으러 갑시···."

"파로스의 작은 주인을 뵙습니다."

길란 남작.

그는 직전 아리아에게 다가가려 했던, 황실과의 연을 이어 중앙 정계에 진출하려 하는 길란 상회의 주인이었다.

아리아가 그새 움츠러들었다.

유렌은 슬그머니 길란 남작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제야 귀족들에게는 너무 익숙한 모습을 보였다.

"야."

"···예?"

"야, 너 나 알아?"

길란 남작의 미소가 쩌저적 굳어버렸다.

귀족들은 '유렌이 철들었을 가능성'을 머리에서 지웠다.

다만 경악하고, 걱정할 뿐이었다.

저 걸어 다니는 벌집을 어떻게 피해 다녀야 할지.

그러거나 말거나 유렌은 말을 이었다.

"내 말 안 들려? 너 나 아냐고."

"그···."

"아니, 근데 좀 어이없네. 직전에 임명식 봤으면 알 거 아니야. 네가 뭔데 나한테 친한 척 말을 걸어. 나 황녀님이랑 얘기 중이잖아. 이거 황실 일이라고. 너 위아래 없어?"

한마디 한마디가 경우가 없다.

예의도 없고, 존중도 없다.

그럼에도 누구도 꼬집을 수 없다.

고작 상회나 굴리는 지방의 남작, 천년 제국의 개국공신 가문.

체급이 다르다.

무엇보다, 이것은 '명분이 있는 행동'이다.

그렇지 않던가.

반푼이라고 하나 아리아는 황녀다.

파로스는 황실에 누구보다 지극한 가문이다.

그런 파로스가 황실의 인물과 대화를 나누고 있음에도 말을 끊고 대뜸 나선 길란은 예의가 없었다.

몰상식에 대한 몰상식한 대처는 귀족 사회에 어느 정도 통용되는 방식이었다.

물론, 누구도 유렌처럼 노골적이진 않지만 말이다.

"저, 저는 오거스 지방을 다스리는 남작 길란으로···."

"근데 어쩌라고."

"화, 황녀님과 좋은 관계를···."

"야."

길란 남작이 어떻게든 분위기를 풀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유렌의 태도는 한결같이 불량했다.

아니, 적대적이었다.

"네가 뭔데 황녀님하고 좋은 관계니 어쩌니 하고 있어."

서늘했다.

이 자리에 있는 귀족 중 누군가는, 그에게 맞아본 적이 있는 몇몇은 저 표정을 알았다.

저렇게 차분하게 말하고, 유렌은 주먹을 날리는 편이었다.

"자, 다시 한번 물을게. 내가 두 번 말하는 거 안 좋아하긴 하는데··· 오늘은 좋은 날이니까 특별히 해주는 거야."

분위기가 살얼음판이 됐다.

누군가는 곧 이어질 싸움판을 예견하며 몸을 벌벌 떨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과한 걱정이었을까.

혹은 유렌의 말처럼 오늘은 좋은 날이기 때문일까.

"나 황녀님이랑 얘기 중이었잖아."

그는 생각보다 온건했다.

"네가 뭔데 나한테 친한 척 말을 거냐고. 내 말 끊으면서까지."

그것으로 끝이었다.

길란 남작에겐 더 이상 유렌에게 다가갈 명분도, 유렌에게 반박할 논리도 없었다.

"죄송···."

"꺼져. 더 말하기 싫으니까."

그렇게, 뭣 모르는 지방의 촌놈은 침몰했다.

이로써 확실해진 것이 두 가지였다.

저 길란 남작은 다시는 중앙 정계에 손을 뻗지 못하게 되리란 것.

그리고 3황녀 아리아 오르테어는 전보다 취급할 가치가 있는 인간이 되었다는 것.

그런 흐름이 순식간에 생겨났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멀리서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저, 저 미친 새끼가···!"

1황녀 에릴다는 유렌의 행보에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주변 이들은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저 행위로 하여금 3황녀의 가치를 다시 계산하는 사람이 생김을 모르지 않기에.

그것이 또 다른 정치적 분란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기에.

"전하··· 역시 유렌 파로스는···."

"뭐, 어쩌겠나. 문제 될 정도는 아니네."

칼리오스는 조곤조곤하게 그런 답을 했다.

그의 표정은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유렌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아니었다.

그것과는 달랐다.

저 정도 품행의 방정맞음?

뒷말이야 조금 나오지, 자신의 태자위엔 조금도 흠결을 줄 수 없는 해프닝일 뿐이다.

유렌 본인에게도 그렇다.

파로스라는 이름은 뒷소문 정도로 무너질 만큼 얄팍한 이름이 아니다.

애초에 검술 스승이란 지위다.

칼리오스에게도, 유렌에게도.

유렌의 인격적인 하자는 칼리오스가 경지만 올린다면 무마할 수 있는 리스크였다.

그나마 하나의 문제.

정치적 분란.

그러나 그 문제 또한 당장은 불거질 일이 아니었다.

또한 그 일은 유렌이 개입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골치 아프게 될 일이었다.

그게 문제였다.

유렌의 행동은 어떤 실질적 손해도 입히지 않았고, 다만 칼리오스에게 아리아를 보여주는 일이 되었다.

칼리오스는 구태여 자신이 아리아를 보도록 만드는 유렌의 행동을, 그 저의를 계속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자네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생각할수록 그랬다.

역시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 * *

연회는 늦은 밤에 끝났다.

하나, 칼리오스의 밤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여명궁에 돌아와 유렌을 마주하고 있었다.

유렌은 어느덧 심드렁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여, 칼리오스는 물었다.

"왜 그랬나."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자네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칼리오스의 기색은 침잠해져 있었다.

전과는 달랐다.

레베카에게 빠져있던 자신을 일깨우던 유렌은 분명 정당했다.

그날은 너무나도 당연한 답을 일러준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칼리오스가 생각하길 자신이 아리아를 외면하는 것은 정치적인 선택의 영역이었다.

그걸 침범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게 이런 기색의 이유였다.

한데 유렌은 그런 기색의 영향을 조금도 받지 않고 있었다.

도리어 칼리오스의 눈을 빤히 봤다.

그것은 칼리오스의 확신을 흔들었다.

'저 눈···.'

그때의 눈이다.

자신이 놓치고 있던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 훈계하는 듯한 눈.

선결되었던 경험은 저 눈에서 무언가를 찾고자 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칼리오스는 독심술 따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유렌이 입을 열었다.

"3황녀님께서도 황실의 일원이십니다. 홀로 계시기에 상대를 해드렸습니다. 그 이상의 이유가 필요합니까?"

정론이었다.

하나 칼리오스는 알았다.

유렌이 저런 화법을 쓰는 이유는 스스로 생각하길 원함이라는 것을.

그러나,

"···파로스로서 공경했다. 그게 이유인가?"

"그렇습니다."

"하면 묻겠네."

이번은 칼리오스도 할 말이 있었다.

그리하여 언쟁이 오갔다.

"그게 3황녀를 둘러싼 분쟁을 더 심화시킬 걸세. 자네는 언젠가 있을 골칫거리를 더욱 크게 만든 것일세."

"그걸 황녀님께서 스스로 해결할 수도 있으시지 않습니까."

"없네. 그 아이가 타고난 핏줄의 절반은 무희의 것이니. 누구도 그 아이의 지위를 바라지 않을 테니."

"그렇다면 그 상황 속에서 그나마 현명한 선택을 할 수도 있으시지 않습니까."

"없네, 그 아이에겐 어떤 선택권도 주어지지 않을 테니."

그것이 무관심의 이유였다.

끈 떨어진 연이라는 걸 모두가 안다면 그나마 그 분쟁은 수습이 가능한 정도에서 끝날 테니.

아리아의 혼인 계약은 더 이상 국정에 문제가 되지 않을 테니.

이 무심함이 칼리오스의 자비였다.

그리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전하."

유렌이 자리에서 일어나, 뒷짐을 지며 말했다.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내려봤다.

그렇게,

"3황녀께선 무엇도 스스로 정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어떤 지위도 가질 수 없는 분입니다. 전하께서 그리 확언하셨습니다."

칼리오스를 찔렀다.

"그렇다면 3황녀 전하는 궁 밖의 백성과 무엇이 다릅니까?"

"···!"

"전하께서 경계해야 할 위정자가 아닌, 그 세파에 휘말릴 희생양이시라면 3황녀 전하께선 무엇을 위해 저리 고립되어 계신 겁니까?"

칼리오스는 답할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말은, 그 무엇도 시원스러운 답이 아니었기에.

그 순간에도 유렌의 말은 이어졌다.

"전하, 만인지상의 자리는 달리 말해 천하의 모든 것을 봐야 하는 자리입니다. 한데 전하의 시선은 천하에 모든 자리에 닿지 않고 있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칼리오스의 주먹이 쥐어졌다.

그는 더 이상 유렌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의 언어가 완성될수록, 떠오르는 뒷말이 있었기에.

듣고 싶지 않다.

그런 생각이 문득 치솟았으나,

"그분께선 어찌하여도 불행해지실 분입니다. 전하의 하늘 아래서 누구보다 비참하실 테지요. 하지만 말입니다."

유렌은 잔혹할 정도로 확실히, 숨통을 끊듯 다음 말을 이었다.

"전하께선 편하실 겁니다. 외면으로 분쟁이 없다면 처세의 혼란 하나가 줄 테니. 그게 분명 전하께서 해결할 수 있는··· 다만 과정이 귀찮을 뿐인 분쟁이라 해도 말이지요. 아암, 최상의 방책은 원인의 봉쇄가 아닙니까."

그는 말하고 있었다.

"묻겠습니다."

꼬집고 있었다.

"3황녀 전하를 외면하시는 것은 누구를 위한 선택입니까."

자신이 지어온 모든 논리는 이기심이 지어낸 변명일 뿐임을.

"천하의 모든 것을 살피셔야 할 전하께서, 왜 편한 것만 살피려 하십니까."

자신이 본 것은, 아리아가 아닌 아리아를 둘러싼 정치적 위험뿐임을.

"제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전하는 안락함을 얻는 대가로 가장 가까이에 있던 백성의 눈물을 외면하신 것 아닙니까?"

자신이 놓친 것은, 미래로 미뤄둔 회한이라는 것을.

칼리오스의 잇새가 벌어졌다.

하나, 그의 목 끝까지 차오른 답은 모든 것이 변명이었다.

스스로도 그걸 알아 이가 꽉 물렸다.

그 순간 유렌이 뒤돌았다.

"선택은 전하의 몫입니다. 다만, 명심하시지요."

그는 한마디를 남겼다.

"안락함을 선택한다면, 전하께선 훗날 3황녀 전하를 마주하고도 이 일을 후회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쿵―

문이 닫히고도, 칼리오스는 오랫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모든 혼란이 다다른 종착지에 있는 것은···.

'···후회?'

다만 그제까지 정의라는 가면을 쓰고 있던 수치심이었다.

< 임명식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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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명식 (3) >

#015화. 임명식 (3)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다.

거추장스러운 예식용 복장을 입은 채 그대로 잠들어버려 아침부터 컨디션이 영 좋진 않았다.

멍하니 천장을 보며 전날의 일을 떠올렸다.

그리하여 생각하길,

'···할 수 있는 건 다 했지 뭐.'

내가 개입할 수 있는 건 이게 끝이다.

태자에게 스스로 후회할 일을 일러줬다.

그 과정에서 있을 말 역시, 미래의 태자가 직접 했던 말들이다.

하지만 미래의 그 인간이 깨달은 사실이라 해서 과거의 이 인간도 똑같이 그를 이해하겠나.

그게 당연하기만 한 일이겠는가.

결국 인간은 경험으로서 변화하고 완성되는 종이다.

옥에서의 참오로 많은 것을 보게 된 미래의 태자는 분명 저 콧대 높은 태자와 다른 이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본래 생각대로 진행하겠다면, 나는 그리하라는 말밖에 하지 못한다.

아리아야 개인적으로 도와야겠지.

여하튼, 당장의 내겐 그런 것들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보다 더 급한 게 있는 까닭이다.

"···엠마, 누님은?"

"아, 네! 아씨께선 이른 시간에 기침하셔서 공무를 보고 계세요!"

"혹시 기분이 안 좋아 보이거나 하진 않던?"

"네? 아씨께서요?"

엠마가 고개를 갸웃했다.

음, 괜한 걸 물었군.

누님이 아랫사람에게 감정을 드러낼 리가 없는데.

"에휴."

한숨이 나온다.

전날 연회에서 누님을 신경써드리지 못한 게 영 마음에 걸린다.

함께 하는 연회는 지난 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 처음이었건만 마차만 같이 타고왔다 뿐이지 이후로는 줄곧 따로 움직이기만 했다.

물론 어련히 잘 즐기고 오셨겠지.

하지만··· 내가 그리 깽판치는 걸 다 보고 계셨을 테니 주변 눈초리도 꽤 따가우셨을 것 아닌가.

"···일단 씻을 거리나 갈아입을 옷 좀 준비해줘."

사과라도 드리자.

생각하고 빠르게 준비를 마쳤다.

누님은 점심 식사 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

"소가주, 간밤엔 잘 주무셨는지요. 늦은 시간까지 들어오지 않아 걱정이었습니다."

누님께서 그리 말씀하셨다.

겉으로 보이는 기색에 그늘은 없다.

그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태자 전하와 잠시 담소를 나누고 왔습니다."

"술을 드셨습니까?"

"아닙니다."

"···?"

처음으로 누님에게서 표정이 나왔다.

당황이었다.

'제가 술을 안 마시는 게 그렇게 놀랄 일입니까···.'

···아니, 놀랄 일이긴 한가?

이 시기의 나를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인식이 이렇게 처참한 것은 역시 내가 덕이 모자란 까닭이겠지.

여하튼 잡생각을 지웠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나서야 조심스레, 나는 누님께 말씀드렸다.

"전날은 죄송했습니다."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파로스답지 못했습니다. 감정적으로 움직여 추한 꼴을 보였지 않습니까. 면목이 없습니다."

앞으로 안 이러겠다는 단언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물론 자제하려고 해보겠지만··· 성격이 이 모양 이 꼴인지라 또 들이박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자제할 의지 정도는 있음을 말하고 싶었다.

더불어 이 일에 대해 반성하고 있다는 마음 또한···.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예?"

"파로스답지 못했다니요. 소가주. 어찌 그런 말을 하십니까."

조곤조곤 누님이 물으셨다.

"전날의 선택을 후회하십니까?"

그에 나는 답했다.

죄스러운 마음을 품고서도, 그리했다.

"아닙니다."

아리아의 일은 후회하지 않는다.

모든 미래를 아는 나로서, 그것은 가장 이상적인 선택을 위한 추태였다.

다만 그런 확신을 어찌 설명할 도리가 없어 단답으로 말을 끝맺었다.

그러자 누님께서 답하셨다.

"그거면 된 일이 아닐런지요. 제 의견이 필요하다면··· 예, 저는 소가주가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스스로가 부끄럽덥니다."

"······."

"이 누이는 소가주를 믿는다 말하면서도, 속 어딘가에선 정계에 파고든 소가주께서 권력욕을 부릴까 걱정했습니다. 파벌 경쟁에 참여하거나 다른 귀족들과 관계를 쌓는 데만 집중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만 것입니다."

저것은 어딘가 나를 뜨끔하게 하는 말이다.

회귀 전의 나라면, 분명 그런 식으로 행동했을 터이니.

"하지만, 소가주께선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무엇인 줄 알고 계시었지요."

그 순간, 누님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고 계셨다.

"파로스는 황실을 모시는 가문입니다. 태자 전하가 아닌, 오르테어를 공경하는 가문입니다. 그것이 봉신임에도 스승이 되는 파로스의 책무이지요. 하여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리하며 끝으로 덧붙이시길,

"3황녀 전하를 염려하여 나서는 소가주의 모습은 누구보다 파로스다웠습니다."

그에 전날 누님께서 해주신 말이 떠올랐다.

-파로스로서, 스승으로서 자랑스러운 선택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사람은 참 변하지 않는구나.

한결같이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구나.

어쩌면 누님께선 내가 잘못된 일을 했다 한들 실망이 아닌 격려를 하셨을 거다.

그런 사람이니, 나 스스로 더 잘하고 싶어지는 것이겠지.

가슴 한켠이 따스해진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만든다.

무어라 말해야 할까.

고민한 끝에, 나는 결국 그런 말을 했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였다.

누님은 말씀하셨다.

"제게 감사할 것이 무에 있겠습니까. 식사부터 드시지요. 속이 든든해야 힘도 나는 법이니."

"예, 누님도 어서."

빵을 한 조각 물었다.

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볕이 사뭇 따스하다.

평화롭고, 좋은 날이었다.

* * *

며칠은 편히 쉬었다.

그동안 꾸준히 한 일은 운동이 끝이다.

성과라 하면··· 꽤 그럴싸한 수준이다.

그래도 마나를 다룰 줄 아는 몸이 아닌가.

그것까지 동원해 체계적으로 몸을 두들겨대니 빠르게 근육이 붙었다.

본래 뼈와 지방만 있던 몸인지라 그 변화가 더 크게 도드라진 것일 수도 있다.

경지로 치면 이제 비기너 끝자락.

조금만 더 하면 익스퍼트 초입 수준의 몸을 만들 수 있을 터다.

다음 수업을 위해 황궁을 찾아간 것은 그런 날이었다.

오늘은 조금 일찍 나왔다.

황궁에 들르는 김에 아리아도 만나기 위해서였다.

구태여 아리아의 별궁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

"파로스야!"

궁에 들어오자마자 어찌 오늘 오는 걸 알았는지 아리아가 달려왔다.

도도도도 소리가 아닌, 토도도돗!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말이다.

잔뜩 신난 표정.

거기에 붉어지기까지 한 안색.

그대로 박치기라도 할 기세이기에 손을 뻗어 머리를 막았다.

탁!

"우악!"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리아가 머리를 붙잡힌 채로 배시시 웃었다.

"아군이 왔지 않느냐! 아리아는 파로스랑 할 얘기가 아주 많단다!"

아, 내가 반가웠던 것이구나.

친밀도를 쌓았다는 게 새삼 느껴졌다.

길 옆으로 난 화단에 앉으니 아리아가 재잘댔다.

"연회 날이 지나고 악당들이 물러났단다! 그리고 알릭이 더 환하게 웃기 시작했단다! 그리고···!"

근황 보고였다.

꽤 그럴싸한 정보다. 듣다 보면 대충 보이는 게 있었다.

'관망?'

내 개입이 영향을 준 거겠지.

그 돼지 기름 같은 놈에게 했던 언행 같은 게 어쭙잖은 것들을 쳐냈고, 살벌한 놈들의 눈초리를 끌어당겼다.

뭐가 됐든, 당장 이 꼬맹이에게 손을 뻗는 놈들이 사라졌다는 건 호재다.

거기에 살벌한 놈들이라고 해봐야 날 직접적으로 건드리진 못한다.

그다지 걱정되는 내용은 아니라 안심.

그 순간이었다.

"···그래서 파로스야."

"뭔데 그렇게 우물쭈물합니까. 또."

"헤헤···."

아리아가 머쓱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이내 부릅 눈을 뜨며 말했다.

"아리아는 파로스의 노고를 치하한단다! 파로스는 오늘부터 솜사탕 왕국의 근위대장 솜사탕이란다!"

빠밤! 입으로 소리라도 내줘야 할까.

양팔을 허리에 얹으며 근엄하게 말하는 모습에 순간 그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후 나는 답했다.

"싫습니다."

"앗! 어째서?!"

"저 단 거 안 좋아합니다."

아리아가 울먹거리며 매달렸다.

"아, 아니다! 근위대장 솜사탕은 달지 않다! 그러니까, 어···! 그래! 근위대장 솜사탕은 오이맛이란다!"

"뭡니까? 그 끔찍한 혼종은."

"오, 오이가 싫더냐? 그럼 피클···!"

"단 거 안 좋아한다고 했지, 풀이 좋다곤 안 했습니다."

"그, 그럼 스테이크! 스테이크는 좋아하지 않더냐!"

"차라리 진짜 스테이크를 먹지 그걸 왜 솜사탕으로 먹습니까?"

"이이익···!"

진지하게 고민하며 분통을 터뜨리는 게 사뭇 우습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여기 있었군."

태자가 나타났다.

입궁 소식을 듣고 온 모양이다.

"아, 전하."

태자는 답하지 않았다.

시선이 아리아를 향해 있었다.

아리아는 그 순간 깜짝 놀라더니 합죽이가 됐다.

그러다 슬금슬금 일어나 중얼거리는 수준으로 작게 말했다.

"오빠버니 전하를 뵙습니다···!"

그에도 태자는 답하지 않았다.

일순간의 정적.

이후, 뒤늦게야 태자는 말했다.

"나는 지금부터 파로스에게 수업을 받아야 한다. 같이 가겠느냐?"

여전히 친절하다곤 할 수 없는 어조.

하나, 태자가 먼저 청을 건넸다.

그러자 아리아가 날 봤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마음대로 하십쇼."

아리아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반짝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

아리아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뺨이 붉어져 있었다.

* * *

칼리오스는 여명궁을 향하며 아리아의 뒷모습을 봤다.

아리아는 기사들 사이에서 앞서 걸으며 주변을 휙휙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다 아리아가 자신의 옆에 있던 유렌을 봤다.

환하게, 아리아의 얼굴 위로 웃음꽃이 피었다.

그를 보자 입술이 달싹였다.

"처음이네."

"무엇이 말입니까?"

"저 아이가 저리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은."

유렌의 시선이 제게로 꽂히는 것에 칼리오스는 쓰게 웃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네. 그것에 의문을 느낀 적도 없네."

지난 며칠은 고민에 잠을 설쳤다.

돌이켜 보니, 저번 경우도 그렇고 이번 일도 그렇고 유렌이 던지는 화두는 수면에 지장을 주는 경우가 참 많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유익한 고민이었다.

칼리오스는 마침내 인정할 수 있었다.

"자네의 말대로였네. 저 아이를 외면하는 것은 날 위한 선택일 뿐이었어. 그래, 돕고자 한다면 도울 수 있었네. 하다못해 친절하게 대할 수도 있었네. 그걸 못했어. 내게 저 아이는 나의 누이도, 백성도 아니었네."

스스로 치부를 드러냄은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그리하고 나서야 결국 칼리오스는 무언가 해방된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일종의 고해성사라고 봐도 무방했다.

"자네는 말했지. 내가 편한 것만 보려고 한다고. 맞네. 나는 편한 것을 보려 했고, 이제는 그것을 아네."

칼리오스는 유렌을 바라봤다.

"고맙네. 자네는 또 내게 가르침을 주었어."

이런 감사의 말로는 다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는 길을 잡아주었고, 그것이 군주로서의 칼리오스를 더욱 성장시켰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여, 칼리오스는 이제 유렌을 완전히 신뢰했다.

그의 언행에 이유가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을 터였다.

유렌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정답은 없습니다. 선택은 전하께서 하셨으니."

"겸양이네."

칼리오스는 큭큭 웃었다.

그리 걷다 보니 어느새 여명궁의 연병장.

이제는 수업 시간이다.

아리아가 눈을 끔뻑였다.

작고 여린 아이.

자신이 등을 돌린다면 평생을 고독 속에서 말라 죽어 버릴 아이.

그 미래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 왔다.

죄악감이 치솟았다.

당장은 많은 것을 해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아이에게 오라비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 줄은 알았다.

칼리오스는 무릎을 꿇고, 팔을 벌렸다.

"이리 와보련?"

따스하게 안아주는 것.

그것부터 해주어야 했다.

아리아의 눈이 왕방울 만해졌다.

머뭇거림은 자신의 방만이 만든 것이었다.

그러니 기다려야 했고, 칼리오스는 그리했다.

이윽고 아리아가 천천히 걸어왔다.

칼리오스는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기분을 느꼈다.

'내 너를 놓지 않으마.'

저리도 해맑게 웃을 수 있는 아이라면, 내 백성을 지키듯이 그 웃음을 지켜주마.

그런 마음을 먹는 순간이었다.

톡, 하고 아리아가 안겨 왔다.

칼리오스가 아닌, 유렌의 다리에.

"···?!"

칼리오스의 미소가 쩌저적 굳었다.

시선이 유렌을 향했고, 유렌의 다리 뒤에 숨어 자신을 보는 아리아를 향했다.

"그, 음···."

유렌이 목소리가 귓가에 때려 박혔다.

"···하루 이틀 만에 되겠습니까. 힘내십쇼."

이상한 일이었다.

왜, 저 아이를 가진 적도 없는데 뺏긴 기분이 드는 걸까.

"황녀 전하, 이제 수업해야 하니까 떨어져 계시겠습니까?"

"웅! 알겠다!"

도도도, 아리아가 멀어졌다.

칼리오스는 그때까지도 석상처럼 굳어있었다.

무릎을 꿇고, 팔을 벌린 자세로.

< 임명식 (3) > 끝

ⓒ pap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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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벌전 (1) >

#016화. 토벌전 (1)

그로부터 며칠이 더 지났다.

태자를 어려워하는 아리아가 괜히 나한테 달라붙어 태자를 물 먹이고, 그에 내가 "쩝" 소리나 하는 게 어느덧 익숙한 광경이 되었다.

새삼스러운 감상 하나가 있다면, 이리 회귀하고도 벌써 한 달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는 것.

한데 벌써 내가 알던 문제 중 몇 가지를 처리하게 됐다는 것.

이 속도면 여타 제국 멸망 시나리오도 빠르게 끝내버릴 수 있게 되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뭐, 나머지 일은 언제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있으니.'

옥살이나 하던 내게는 너무 흐릿하기만 한 정보다.

더군다나 이미 태자가 폐위되는 사건이 없어진 시점에서 미래는 전과 아예 다른 흐름으로 갈 테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결국 단련 정도밖에 없었다.

물론, 사람이란 게 그렇지 않나.

정령처럼 따박따박 같은 일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휴식이 필요했고, 내 경우엔 그게 오늘이다.

"파로스야, 뭘 하는 것이냐?"

파로스의 저택, 부엌.

아리아가 내 곁에 와서 연신 재잘거렸다.

왜 여기 황녀가 있느냐 하면··· 답은 태자가 허락해준 외출이라 해야겠지.

-아리아가 자네를 더 좋아하니 그 뜻을 존중해주는 것일세. 존중이네. 존중.

애써 대인배인 척을 하며 존중이니 어쩌니 하는데··· 눈 위로 실핏줄이 돋아난 채 말하니 썩 신빙성이 있진 않았다.

아리아의 환심을 사려고 이 일을 추진한 게 분명해 보였고, 내 입장에선 결국 귀찮은 꼬맹이를 내게 떠맡긴 꼴이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런 과정이 있어 우리 저택 부엌에 아리아가 있다는 것.

또한 건네진 질문이 있으니 나는 성실하게 답했다.

"요리 중입니다."

"우웅? 뭘 만드는 것이냐?"

정말 모르겠다는 태도다.

확실히 황녀에겐 익숙하지 않겠지.

···아니, 이 시간선에서 이 요리를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치즈 버거입니다."

치즈 버거.

이 요리는 죄수 부대의 부대장으로 복무하던 시기에 우리 취사병이 개발한 요리였으니까.

문득 그 나날이 생각났다.

전쟁기.

사회에선 해악밖에 안 되는 놈들(나와 태자 포함)이 모여 어떻게든 나라를 지키겠다고 발버둥을 쳤다.

우리는 다른 부대와 접점은 거의 없었다.

우리는 특공대나 정찰대로 주로 쓰였고, 그 전에 죄수라는 인식 탓에 기피당하는 성질이 컸으니까.

그러다 보니 부대원들 간의 유대가 깊게 형성됐다.

우린 떨거지들이니 그나마 서로를 잘 챙겨보자는 분위기였다면 이해가 되겠나.

'한나'는 그런 부대의 취사병이었다.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검은 머리의 어린 여자.

죄목은··· 꽤 억울했다.

녀석은 2황자의 치세로 제국이 혼란하던 시기에 노점을 하다가 허가되지 않은 상업 행위를 한 죄목으로 옥에 투옥됐다.

벌금이고 뭐고 없이, 그냥 투옥.

이후엔 전쟁이 심화 되며 재심을 받을 수 없는 환경에 처했다.

하여 거의 7년을 옥에서 살았다.

-···몰랐어요. 길거리 음식은 팔면 안 된다는 거.

멍청하고 불쌍한 녀석이었지.

그게 총평이고, 다르게 말해 한나는 우리의 보물이었다.

밥이, 한나가 만드는 기상천외한 밥이 정말 맛있었기 때문이다.

-이것 봐요! 밀을 얇게 펴서 고기를 안에 채우고 밀로 감쌌어요! 이대로 찌면··· 짜잔! 고기빵이에요!

발상이 특출하다고 해야 하나, 기괴하다고 해야 하나.

녀석은 다른 부대가 쓰고 남은 재료를 받아와 전투 식량을 창작하는 일이 잦았다.

한데 그것들이 참 맛있었다.

개중 특히 기억에 남는 게 '고기빵'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과 지금 만드는 '치즈버거'였다.

특히 치즈버거는 온갖 산해진미를 다 먹어본 태자도 인정한 요리였다.

태자가 새벽 중에 배가 고프다며 한나가 잠들어있는 여자 막사에 쳐들어가 한나를 끌고 나왔을 정도라면 이해가 되겠나.

지금은 그걸 재현하고 있었다.

'맨날 먹다가 안 먹으니까 참 입 안이 텁텁하단 말이지.'

빵을 반으로 잘라 굽는다.

다음엔 다져서 뭉친 고기를 굽는다.

치즈를 녹여 고기 위에 뿌린다.

풀쪼가리도 몇 개를 얹고 빵을 위아래로 덮는다.

한나가 가르쳐준 레시피 대로 만들었다.

"흐, 흐아아아···! 파로스야! 치즈 폭포란다···!"

아리아가 깜짝 놀라 뛰더니, 이내 침을 질질 흘렸다.

나는 치즈버거를 반으로 잘라 절반을 아리아에게 줬다.

그리고 내 몫의 버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하지만.

'···그 맛이 아닌데?'

맛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내가 알던 맛에는 한참을 못 미쳤다.

요리의 재능은 없는 건가.

어찌 같은 재료를 썼음에도 그 맛은 재현이 불가한 건가.

'아니.'

이건 순전히 한나의 요리 재능이 너무 탁월한 게 문제다.

탄식이 나왔다.

'그 요리는 다시 먹을 수 없는 건가?'

한나를 찾고 싶어도 찾질 못한다.

연표 상으로 지금 한나는 고작 다섯 살 정도일 터다.

녀석이 처음 노점을 한 게 열셋, 지금으로부터 10년 뒤이니 그 전까지의 행방은 묘연하다기만 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고향이나 어릴 적 일도 물어보는 건데.'

왜 관심을 가지지 않은 건지 후회하던 중이었다.

아리아가 정지했다.

녀석의 버거는 작게 한입을 베어먹은 흔적이 있었다.

입 맛에 안 맞는 건가.

생각했으나, 그 반대였다.

또르륵―

아리아가 멍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천천히 입을 우물거렸다.

도톰하게 살이 오른 볼이 씰룩거렸다.

큰 충격, 혹은 환희에 빠진 듯한 기색.

이내 꼴깍 입 안의 것을 삼킨 아리아가 말했다.

"···파로스야."

"예."

"나는 이때까지 속고 살았단다."

"음?"

"나는 솜사탕이 아니란다. 나는 사실 치즈 버거였던 것이다···!"

털썩!

아리아가 무릎을 꿇고 격양된 눈빛으로 치즈 버거를 응시했다.

"아리아는! 사실 치즈 버거였단다! 치즈 버거가 되기 위해 태어난 거란다···!"

하나는 확실히 알겠다.

아리아의 정체성은 가장 맛있게 먹은 음식인 듯하다.

그리고 저리 치즈 버거를 좋아하는 이유도 이해 범주 내에 있었다.

애초에 그 태자(야밤에 여자 막사까지 쳐들어가 치즈 버거 요리사를 탈취하던)의 여동생이 아닌가.

더불어 한나의 요리는 결국 전투 식량이다.

열량을 미친 듯이 채워 도리어 건강을 축내버리는, 황실에선 절대 먹을 수 없는 야매 음식이다.

맛의 밀도가 다르지 않겠나.

혀에 전해지는 묵직함에 저리 떠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단 말이다.

"나는···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랬다.

왜인지 장난기가 솟는다고 해야 하나.

"그것 아십니까. 황녀님."

"우웅?"

"사실, 세상 어딘가에는 전설의 치즈 버거라는 것이 있습니다."

"···!"

아리아의 눈이 뻔쩍 뜨였다.

직후 아리아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말했다.

"그, 그건 어디에 있는 것이냐···?!"

"모릅니다. 그렇기에 전설인 것이지요. 하지만 실존함은 분명합니다."

소곤소곤 말하자 아리아의 어깨가 흥분으로 들썩거렸다.

"차, 찾아야 한다! 나는 치즈 버거로서 전설의 치즈 버거를 찾아야만 한다···! 도와주겠느냐···?"

"당연하지요."

아리아가 관심이 없어도 한나는 찾아야 한다.

사람 식습관이 이렇게 무섭지.

이젠 무슨 음식을 먹어도 한나의 요리가 생각나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잘 부탁드립니다."

하며 손을 내밀자, 아리아가 탁! 하고 내 손을 맞잡았다.

"잘 부탁한단다! 오늘부터 너는 용사 치즈 버거란다!"

"태자 전하는요?"

"용사 솜사탕이란다!"

보직 변경은 없는 건가.

전생이나 이번 생이나 망할 나라에 남겨지는 걸 보니 어쩌면 이게 태자의 팔자가 아닌가 싶다.

여하튼, 그리 헛소리나 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난 날, 태자의 수업 때였다.

나는 태자에게 의외의 소식을 들었다.

"토벌을 나가야 하네."

"예?"

"곧 건국제이지 않나. 그리고 내 성인식이고."

"아."

지난 생에는 없었던 첫 번째 사건.

태자 칼리오스 반 오르테어의 성인식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성인식, 건국제, 그리고 토벌전.

이 세 가지의 연관성을 설명하기 위해선 역시 오르테어 제국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만 했다.

태초에 인간은 이종족의 노예였다.

국가나 집단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나약했기 때문이다.

그런 역사가 수천 년이었다.

그리고 그런 시대에 반항한 자가 있으니, 그게 바로 오르테어의 건국제였다.

"최초, 오크의 식량으로서 태어난 건국제께선 스스로 운명에 저항하고자 8세의 나이에 탈주를 감행하셨지. 그리고 자네, 파로스의 시조가 되는 방랑자를 만나 배움을 얻었네."

그게 건국기라 불리는 역사의 도입부였다.

건국제는 파로스에게 얻은 배움을 바탕으로 제국 검술을 지었다.

이후 그것으로 이종족들에게 잡힌 인간을 해방하며 집단을 이뤘다.

그 집단이 커져 군대가 되고, 군대가 커져 국가가 됐다.

그 끝에 생겨난 것이 오르테어.

그리고 그 나라를 세운 날을 기념하는 것이 건국제.

태자는 그 건국제의 적법한 후손이었다.

그러니 오랜 역사적 전통을 따라, 제국 후계자는 성인이 되는 날 자신이 '이종족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한 투사'인 건국제의 후손임을 몬스터 토벌로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

그럼 무엇을 토벌하는가.

고블린 부락?

태자 씩이나 되어서 그게 면이 살겠나.

그렇다면 용?

객기 부리다 죽는 수가 있다.

그러니 건국기를 되새겨보자.

그리하면 답은 꽤 쉬웠다.

건국제의 시발점에 있던 종족.

화합의 시대인 지금까지도 화합하지 않는, 저들의 본성을 따라가다 이젠 몬스터로 분류되게 된 종족.

"오크를 잡으러 가야 하네."

남쪽 고원의 오크들이다.

나는 물었다.

"그거 진짜 하십니까?"

묻는 이유는 하나다.

이 과정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당장 지금의 황제도 토벌 의식은 치르지 않았지 않던가.

이건 어디까지나 '하면 좋은 관습'이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나는 납득을 표하고 말았다.

"과분하게도, 나는 수많은 이들에게 건국제의 재림이라는 평을 듣고 있네. 기쁜 일이지. 하지만, 그는 달리 말해 내가 그 정도가 되는 인간임을 계속 증명해야 한다는 말이 되네. 토벌을 나서는 것 또한 그런 이유라네. 내가 남다름을 증명해야만 태자로서의 지위가 공고해지고 제국민들이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으니."

태자는 시원스레 웃었다.

과한 기대가 분명함에도 거리낌이 없다.

그 호연지기는 인정한다.

'그냥 호연지기인 것도 아니지.'

근거가 있는 행동이다.

확실히 여자 문제만 떼놓고 생각하면 태자는 누구보다 이상에 가까운 군주다.

애초에 그러기 위해서 태어난 인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개중 가장 도드라지는 게 무력.

아직은 실현되지 않은 미래이나, 이 인간은 제국의 역사 중 건국제 이후로 두 번째 그랜드 마스터에 도달하는 재능이다.

즉, 무력으로 스스로의 정통성을 증명하는 것은 태자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모든 판단을 마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뭐. 그럼 잘 다녀오십시오."

한동안 태자가 자리를 비운다면 나도 꽤 여유롭겠지.

미뤄둔 일을 조금 해두어도 좋을 듯하다.

'미래에 일어날 사건의 전조를 조사해야지.'

그 외에도 개인 무력을 끌어올릴 방법을 강구하거나 남는 시간엔 치즈 버거의 레시피를 더 연구해보고 싶다.

먹는 재미가 영 심심하니 삶의 질이 큰 폭으로 떨어졌다.

그런 생각이나 하는 순간이었다.

"무슨 소린가? 자네도 당연히 같이 가야지."

"···예?"

거길 내가 왜가.

눈빛으로 말하니 태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답했다.

"정통성의 시험 말일세. 자네도 치러야 한다네?"

""

"태사가 아닌가. 역대 파로스의 태사는 모두 태자의 성인식에서 함께 자격을 증명했다네."

"···아."

마지막 태사가 300년 전 사람이라 잊고 있었다.

맞다.

나도 파로스로서 증명해야 한다.

태자의 성인식 토벌전은 달리 표현하길 '건국기'의 재현이다.

건국제의 오크 토벌은 파로스의 가르침으로 시작됐다.

역사의 재현이 목적이라면, 태사로 임명받은 파로스는 무조건 그에 동참해야만 했다.

태자가 싱긋 웃었다.

"일주일 뒤가 출정이네. 준비하시게."

···귀찮게 됐다.

< 토벌전 (1) > 끝

ⓒ pap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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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벌전 (2) >

#017화. 토벌전 (2)

내가 회귀라는 기적을 겪은 후 결심한 것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 누이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이 파로스라는 가문을 가장 영광되게 만들겠다는 것.

둘, 군대는 다시 가지 않겠다는 것.

두 번째 결심은 정말 지독했던 과거를 떠올리다 보니 절로 하게된 것이었다.

옥살이도 옥살이지만 그놈의 훈련, 그놈의 전투와 그놈의 단체 생활은 내 성미에 너무 안 맞았다.

정말 제국이 조금이라도 멀쩡했다면 차라리 감옥에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절대 가지 않을 거다.

그리 다짐했으나, 그 제2 다짐이 제1 다짐과 충돌하는 상황이다.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고?

뭘 묻고 있나.

2번 보단 1번이 우선인 게 당연하지 않나.

"소가주, 남방은 지금 볕이 따갑다고 하니 챙 모자도 챙겨 가셔야 합니다. 부끄러워도 어쩔 수 없습니다. 고운 피부는 사교계에서 아주 중요한 재산이니. 아, 그리고 이건 얼음을 담는 마도구 물병입니다. 새로 얼음을 생성하진 못하니 적당히 물을 타서 시원한 물을 마시는 용도로 쓰셔야 하고. 또···."

내 출정 소식에 누님이 바리바리 짐을 챙기신다.

어찌나 걱정이 지극하신지, 아들을 제국군에 입대시키는 어머니들이 이럴까 싶을 정도다.

아니, 분명 그런 상황이 맞는 것 같다.

걱정하는 누님, 입대라는 상황, 거기에 썩어들어가는 내 표정까지 삼위일체로 모든 것이 완벽히 부합되고 있으니까.

"···누님, 짐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도 챙겨 가셔야지요. 몸이 재산입니다. 소가주의 건강은 저희 가문 모든 이의 중대사이니."

짐만 마차 하나를 채울 정도가 되는데 이게 맞습니까.

나는 쓰게 웃으며 답했다.

"그래도 침구는 뺍시다."

"편한 침구가 있어야 잠도 편히···."

"누님, 저 침낭에서 잡니다. 이불은 없어도 돼요."

"어찌 그런···."

누님이 충격받으셨다.

아, 이 사람은 역시 귀족 영애구나.

'맨바닥에서 잔다면 충격받으실까?'

아무래도 이 사실은 끝까지 함구해야겠다.

* * *

건국제까지는 시일이 꽤 남았으나, 황도는 벌써부터 축제 분위기였다.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그럼 출정식을 시작하겠소!"

뿌―!

올해의 건국제는 칼리오스가 성인이 되는 건국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거의 반세기 만에 치러지는 '저항의 의례', 토벌대의 출정일이기 때문이다.

대로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조금만 방심한다면 인파에 휩쓸려 떠내려갈 정도였다.

어찌 겨우 출정식 하나에 이렇게까지 사람이 몰리는가.

그리 물을 수도 있겠지만, 이는 달리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제국에서 모든 이들은 건국 황제의 전설을 들으며 자란다.

남자아이들은 건국 황제와 같은 영웅을 꿈꾼적이 있다.

여자아이들은 첫 번째 황후처럼 아름다운 사랑을 바란적이 있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절이 있는 만큼, 이 출정식은 단순한 역사적 의미 외에도 제국민들의 동심을 자극하는 면이 있었다.

어디 그뿐이겠나.

역사를 기리는 출정인 만큼 행렬도 화려하다.

황실 제1 기사단이 직접 출두한다.

그 지휘관으로는 소드 마스터 드레노어가 임명되었다.

1 황녀를 비롯한 태자의 가신들도 그 행렬의 중심에 있었고, 무엇보다 선두.

"아빠! 전하야!"

"그래, 곁에 계신 분이 파로스님이시란다!"

"스승님!"

"그래! 두 분께서 오크 로드를 처치해오실 거야! 건국 황제랑 시조 파로스님처럼 말이다!"

"우아아아···!"

칼리오스, 그리고 그의 바로 뒤를 따라 움직이는 유렌.

멋들어진 예복을 차려입은 두 사람의 모습이 제국민들을 뜨겁게 달궜다.

특히 영웅을 꿈꾸는 소년들에겐 그 정도가 더 심했다.

"와아아아아!!!"

노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 한가운데, 선두의 칼리오스는 연신 품위 있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토벌대가 황성을 나섰다.

등 뒤로 울려오는 제국민들의 환호성, 그리고 웅장한 나팔 소리.

그것들이 완전히 멀어진 후였다.

어느 공터에서 에릴다가 말했다.

"그럼 환복하죠."

보여주기는 끝, 이젠 현실로 돌아올 때였다.

칼리오스와 유렌이 말에서 내려 주섬주섬 예복을 벗었다.

유렌이 불평을 토했다.

"어우, 불편해 죽는 줄 알았네."

"예복이 원래 그렇다네."

"저도 압니다."

"···자네, 그래도 내가 태잔데 말투가 그렇게 불경한 게 맞나?"

"전하는 스승한테 불경이란 단어를 쓰는 게 맞습니까?"

"아."

다른 기사들이나 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삼삼오오 모여 백색의 예복을 벗고 간편한 옷차림을, 그리한 후엔 짐 마차에 예복을 실은 후 그걸 다시 황성으로 보냈다.

이번 토벌전 자체가 의식의 성향이 강한 만큼 보이는 것에 신경을 많이 쓴 편이다.

하여 이런 귀찮은 후처리가 생기게 된 것.

하지만, 직전의 환호를 떠올리면 역시 필요한 일이라 유렌을 제외한 누구도 그에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런 어딘가, 에릴다는 물자에 틀림이 없음을 확인한 후 말했다.

"좋아. 너희는 북문으로 해서 돌아가. 남문 쪽은 아직 인파가 많을 테니까. 그리고 행렬은 출발 전에 여기서 식사하고 갈 테니까 준비해."

에릴다는 이번 작전의 참모진이었다.

달리 수행할 사람이 많음에도 그녀가 직접 온 이유는 여럿 있겠으나, 개중 가장 큰 것을 꼽으라면 그랬다.

에릴다의 시선이 유렌을 향했다.

'저 인간, 미덥잖단 말이야.'

유렌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짐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선 어떤 귀족적인 것의 편린도 볼 수 없었다.

제도 최고의 망나니, 그리고 칼리오스의 스승.

두 가지를 양립할 수 없는 요소를 어떻게든 양립하고 있는 인간.

칼리오스야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듯했으나, 에릴다에겐 그럴 수 없는 이유가 몇 개나 존재했다.

먼저 유렌의 여태까지 행적.

이건 두말하면 입 아프니 더 설명할 것도 없다.

애초에 에릴다가 그를 미덥잖게 여기지 않는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저 인간, 칼리오스를 때릴 때마다 웃는단 말이지.'

칼리오스의 검술 수업은 대체로 대련 형식으로 진행된다.

유렌을 의심하는 에릴다로선 그 대련의 참관은 필수적인 일이었다.

그때마다 느끼는 게 있었다.

남들은 눈치채지 못한 듯하지만, 유렌은 칼리오스를 때리며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고 있었다.

납치 때의 앙금인지, 그도 아니면 사람 자체가 그리 생겨 먹은 건진 모르겠지만 여하튼 모셔야 할 사람에게 너무한 행사가 아닌가.

두 번째로는 너무 제멋대로인 성정.

지난 임명식 때도 그러지 않았나.

제발 얌전히만 있어 달라 했건만 그조차 안 듣고 사고를 쳐버린다.

저런 인간이 칼리오스의 곁에 있었다간 대외적인 이미지가 깎여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하여 에릴다는 이번 토벌전에 참여한 것이다.

유렌이 혹여 사고를 치려 든다면 직접 제동을 걸기 위해.

저 인간을 어떻게든 사람으로 만들어 태자에게 기여하게 만들기 위해 

그런 중이었다.

에릴다의 고개가 기울었다.

"-"

유렌이, 짐 속에서 웬 요리 도구를 꺼내기 시작했다.

* * *

치즈 버거는 계속 연구되어야만 한다.

한나의 것보단 못하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급까지는 맞춰야 내 식생활이 안정 되지 않겠나.

더불어 아리아에게도 떠나기 전 치즈 버거를 수련해오겠다고 했으니 약속은 지켜야 할 것 아닌가.

하여 가문의 사용인들에게 재료를 받아왔고, 그걸 식사 시간마다 조금씩 해볼 생각이다.

'전에는 고기가 너무 퍽퍽했지.'

이번엔 육즙을 좀 보존하는 방향으로 가보자.

다져 놓은 고기를 꺼냈다.

하지만 이대로는 잘 뭉쳐지지 않는다.

나는 허리춤에서 가보(회초리)를 뽑아 들었다.

그것으로 고기를 내리쳤다.

팍!

역시, 손맛이 좋다.

'신기하단 말이지.'

뭐하는 물건인진 모르겠지만 이 가보, 내구도가 너무 좋으니 꽤 다양한 방면으로 사용이 가능했다.

칼을 맞아도 생채기 하나 안 생기고, 무언가 얼룩 같은 게 묻어도 어느 순간 확인해보면 깔끔하게 지워져 있다.

하여 고기 망치로도 쓰기가 좋다.

다진 후엔 고기를 펴는 밀대로도 쓰기가 좋았다.

'이제···.'

빵을 굽고 치즈를 녹여야지.

불 앞에 앉아 한참이나 그 일에 열중하던 중이었다.

"소가주."

왜인지 피곤해지는 목소리.

고개를 드니 에릴다가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 황녀 전하."

"뭐 하시는 건가요?"

"밥 하고 있습니다만."

식재료로 향한 에릴다의 시선, 묘하게 떨떠름한 표정은 '이게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뭘 먹는 것까지 참견하나 싶다가도 이 정도면 양반이다 싶은 마음도 생긴다.

회귀 전의 이 여자를 생각하면 그렇다.

-분명 내가 지휘한 건 별동대의 요격이었어요. 그런데 왜 적 본진까지 간 거죠?

-그쪽 오라버니가 가는 걸 어쩝니까? 부관이면 닥치고 따라가야지.

-···말릴 생각은 못 했어요?

-그쪽은 그 인간 말릴 수 있습니까? 아니, 그리고 애초에 전장 자체가 변수 덩어린데 어떻게 목적만 이루고 빠져나와?

-···당신은 그나마 이성적인 줄 알았는데.

-이성적이었으면 옥에도 안 갔지.

뭐랄까, 능력은 좋은데 사람이 참 빡빡하다.

전쟁기에는 이것보다 더 심했다.

'계획 하나가 어그러지면 그렇게 노발대발했지.'

태자는 전장을 누빔에 있어 눈에 보이는 적은 죄다 쳐 죽여야 직성이 풀리는 전투광이었다.

그런 이유로 작전 외의 전투를 벌이는 일이 많았고, 그건 극도의 계획적 전투를 추구하는 에릴다와 항상 부딪히는 원인이 됐다.

참모로서 에릴다의 입장도 이해했다.

지휘 체계가 공고해야 작전 수행도 원활한 거고, 그걸 떠나서 자신의 선택 하나에 몇백이 우습게 죽어 나가는 입장에 있기도 했으니까.

다만 불만인 것은 그리 마찰한 두 사람이 직접 싸운 게 아니라는 거다.

태자 그 인간이 문제였다.

매번 보고를 내게 맡겼다.

잔소리를 듣기 싫으니 냅다 도망가버린 것이다.

결국 싸우는 건 내 몫이었고, 그리하여 이 여자와는 정말 사이가 안 좋았다.

'생각해보니까 또 억울하네.'

난 결국 사이에 끼어서 당한 피해자가 아닌가?

대련을 더 열심히 해야 할 이유가 늘었다.

그런 생각이나 하던 중이었다.

"취사병들이 만들고 있어요. 식사 정도는."

"제가 입맛이 까다로워서."

"제국군을 못 믿나요?"

우뚝, 손이 멈췄다.

왜인지 기시감을 느끼게 만드는 말이었던 까닭이다.

-제국군을 못 믿나요? 그래, 못 믿겠지. 겨우 야만족 하나 못 이겨서 옥에 있던 당신들까지 끄집어냈으니까. 우리도 알아. 제국군은 약해진 거. 당신들이 없으면 무너질 거란 거.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그날은 참, 짜증이 날 정도로 선명했다.

-특히 유렌, 당신이 없으면 안 돼. 그 망할 오라버니를 통제할 수 있는 건 당신밖에 없어.

어울리지도 않게 웃는 얼굴이 그러했다.

-살아. 내가 아닌, 당신이 살아.

괜히 입맛이 써졌다.

지워내고 말했다.

"···취미가 요리라 그럽니다. 메뉴 정도는 마음대로 고르게 해주십쇼."

나름 예를 차려 말하자, 에릴다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전쟁기 때처럼 깐깐하게 굴진 않았다.

"마음대로 해요. 대신 행군에 방해될 정도로 시간이 걸리는 요리만 피해 주세요."

흘긋 보니 짜증이 가득한 얼굴.

된다고 하니 감사한 마음으로 요리를 계속하긴 하겠지만, 직전 떠오른 일 때문에 괜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는 과거의 다른 일들도 떠올랐다.

"전하도 드셔보시겠습니까?"

"네?"

"이것 말입니다. 제가 만드는 요리."

에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얕보는 거 같은데, 예상한 반응이다.

말했던가, 치즈 버거를 비롯한 여러 전투 식량은 죄수 병사인 한나가 직접 고안한 요리였다고.

이 황족의 표본 같은 여자는 그놈의 품위유지인지 뭔지 끝까지 한나의 요리를 먹지 않았었다.

그러니 궁금한 것이다.

'입맛은 태자랑 다를 게 없을 텐데 말이지.'

이미 아리아를 통해 '황족은 치즈 버거에 환장하는 핏줄일지도 모른다'라는 가설이 세워진 참이다.

그러니 검증해봐도 좋지 않겠나.

자신이 무시한 요리에 빠져들어 허우적대는 꼴.

조금은 보고 싶단 말이다.

마침 고기와 빵이 다 구워졌다. 야채와 녹은 치즈를 함께 곁들여 치즈 버거를 만들었다.

"드셔보십쇼. 맛있습니다."

에릴다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이윽고 입이 열리길,

"이따···."

"3황녀 전하가 참 좋아하는 간식입니다."

"······."

그래, 차마 동생 욕은 하지 않는구나.

그래도 태자보다 백 배는 낫다.

"···한 입만이에요."

무슨 생각을 했으려나.

이 여자 발상을 따라가 보자면 그래도 내가 파로스다.

개인적으로 마음이 안 든다 해도 예는 차려주겠다는 거겠지.

에릴다가 망설임 가득한 얼굴로 치즈 버거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눈을 질끈 감곤 '앙···!' 하고 치즈 버거를 베어 물었다.

직후였다.

꼴깍!

에릴다의 목구멍으로 버거가 넘어갔다.

에릴다가 고개를 숙였다.

앞머리 때문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래도 대충 알겠다.

'좋아하네.'

순간 흠칫하는 꼴.

턱을 우물거리며 입맛을 다시는 꼴이 마음에 안 드는 건 절대 아닌 듯 보였다.

'황족은 치즈 버거를 좋아한다.'

가설, 거의 절반의 증명이 성공됐다.

이제 2황자, 3황자, 그리고 2황녀와 황제로 증명하는 일만 남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단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음, 그리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모양입니다. 한 입만이라 하셨으니 더 드실 필요는 없습니다. 주십쇼."

손을 내밀자 흠칫한 에릴다가 되물어왔다.

"···제가 한 입 먹은 음식 아닌가요? 맛은 그다지. 그래도 이대로 버리기도 그러니 제가 마저 먹을게요. 행군에서 음식 귀한 줄은 알아야 하니까."

"엥."

"식사 맛있게 하세요."

에릴다가 그대로 등을 돌려 내게서 멀어졌다.

와중에 어깨가 솟고 고개가 떨어진다.

버거를 마저 먹고 있는 건가.

'몸은 솔직하군.'

괜히 흐뭇해졌다.

* * *

토벌대는 남쪽으로 빠르게 행군했다.

말과 마차로 이뤄진 행렬인 만큼 이동 거리는 빠르게 늘어났다.

그렇게 일주일.

남쪽 고원으로 왔다.

"이곳에 막사를 설치하죠. 빠지기 쉽고 진입하기 쉬운 자리에요. 사주 경계도 좋고."

입구 쪽의 어느 고지대였다.

에릴다는 능숙하게 병력을 지휘하여 막사를 설치했다.

이후엔 지휘부에 참모들을 모아 토벌전 일정을 공유했다.

회의엔 나도 참석이다.

일단 상석에 앉은 태자의 스승이란 명목이다.

"토벌 일정은 총 일주일. 제국 국경선 근처에서 발견된 열 개 부락이 목표에요. 근처 마을에서 얻은 정보는 이 정도고···."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오크란 족속이 몬스터로 전락한 이유가 뭔가?

전투 본능에 미쳐서 집단을 이루는 게 어렵기 때문이다.

집단이 거대하면 거대할수록, 그 내부에서 일어나는 다툼 탓에 빠른 속도로 집단이 와해 되기 때문이다.

하여 오크 부락 하나는 겨우 이삼십 남짓의 오크만 있다.

총 토벌 수가 많아야 삼백 정도.

그것도 각개 격파라고 치면 드레노어 경까지 끼인 이 병력으로는 졸면서도 수행이 가능한 임무였다.

"일단 자세한 건 척후를 세워 조사해볼 거예요. 태자 전하께 배정될 부락은 이후 고르는 걸로 하죠. 다음으로···."

그렇게 계획이 수립됐다.

그날 저녁에도 나는 치즈 버거를 연구했다.

에릴다가 날 강렬하게 바라보는 게 느껴졌고, 태자가 와서 나도 한 입만 달라길래 거절했다.

그 정도로 평화로우니 나른했다고 해야 하나.

특히 수도 보다 덥고 건조한 남쪽 고원이라 영 움직이기가 싫은 기분이 됐다.

딱, 그날 하루만 그랬다.

"···척후 부대가 당했습니다. 적병이 유인책을 썼습니다. 일단 생환하긴 했으나 상처가 극심해 더 이상의 임무 투입은 어려울 듯합니다."

적병과 유인책.

즉, 오크와 전략.

"그 말은···?"

"오크 군대가 생겼습니다. 그, 지휘관급 개체가 발생을···."

있어선 안 될 사고가 일어났다.

< 토벌전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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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벌전 (3) >

#018화. 토벌전 (3)

오크 지휘관이란 놈은 그저 오크를 한데 모으는 놈들이 아니었다.

앞서 일렀듯, 그놈들은 '무력'으로 서열을 나눈다.

즉 서열 구조를 확립하여 군집을 만들 수준이라면 다른 오크들과는 격이 다른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다 보니 군집의 크기는 곧 지휘관의 급수를 말하기도 한다.

백 단위의 오크를 부리면 커맨더, 천 단위의 오크를 부리면 챔피언, 그리고 만 단위의 오크를 부리면 로드.

그렇기에 과거엔 군림하는 종족 중 하나였다.

오르테어의 건국 황제가 그놈들의 로드를 죽이지 않았다면, 오크의 땅은 작금의 고원보다 훨씬 더 커다랬을 것이다.

···라는 게 골자.

그리하여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지난 생의 일이었다.

'지휘관급 오크가 나온 적이 있었나?'

적어도 내 기억엔 없었다.

하지만 이 기억을 신용할 수는 없는 것이, 이 시기의 나는 이미 옥살이 중이었으며 누님이 일러준 내용은 대부분이 제도의 정세에 한정되어 있었다.

지휘관급 오크는 급에 따라 위험도가 나뉘는 걸 생각하면, 지금 나타난 녀석이 제도에까지 위협을 끼칠 정도로 강한 녀석은 아니었기에 누님이 구태여 말해주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여하튼, 위기라면 위기.

오크가 위험하지 않았던 이유는 결국 그들이 군집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전제가 깨졌다.

군집을 이룬 오크는 같은 수준으로 치면 약 세 배 정도의 병력이 있어야 비빌 수 있는 급이다.

그에 에릴다는 말했다.

"복귀하죠. 상대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른 채로 토벌을 진행할 순 없어요. 제도에서 병력을 추가해 돌아와야 해요. 저희 병력이 기사 열, 마법사 둘, 병사 오십, 저를 포함한 참모진 셋, 거기에 전하와 파로스 소공자까지. 커맨더 급이면 어떻게든 잡을 수 있겠지만 챔피언급만 돼도 상황은 끔찍해질 거잖아요."

단순 계산으로는 그렇다.

이조차도 소드 마스터 드레노어 경이라는 전략 병기가 있기에 나오는 수치였다.

"전하, 당장 철수 명령을 내려주세요. 이건 위험해요."

에릴다가 그리 정리하는 순간이었다.

"아니, 이대로 조사를 진행한다."

"전하?!"

"토벌이 아니네. 조사를 진행하겠다는 거지."

태자가 에릴다의 의견을 기각했다.

그녀가 무어라 항변할 틈도 없었다.

"드레노어 경, 상대 주 전력 파악 및 지휘 개체의 조사는 자네가 직접 해주어야겠네."

"기사 넷을 데려가겠습니다."

"커맨더 급이라면 즉결 처분하게. 챔피언급이라면 돌아와 보고를 해주게. 챔피언 자체는 잡을 수 있어도, 그 아래 모인 병력은 겨우 기사 다섯으로 힘들 터이니."

"예."

"그럼 출발하시게. 링어 경, 병사들을 소집해 막사의 경계 태세를 강화하지. 군터 경, 기사 하나와 병사 다섯을 데리고 인근 마을로 가 백성들을 대피시키게."

"예!"

"게일 경, 당장 영주성으로 가 병력을 지원받아오게. 내 이름으로 내리는 명일세."

"옙!"

순식간에 방책이 정해졌고 기사들과 병사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휘부 막사에 남은 것은 나와 태자, 그리고 에릴다가 끝이었다.

멍하니 태자를 바라보던 에릴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야, 너 미쳤어?"

곧장 반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아직 있건만 그건 신경도 안 쓰이는 걸까.

"이게 보통 사안으로 보여? 그냥 객기 부려서 해결될 일인 줄 알아? 이거 오크야. 지휘관 급 개체가 섞인! 적어도 백 단위의 병력이 상대 쪽에 있는 오크!"

쾅!

에릴다가 책상을 내리쳤다.

"넌 네가 태자라는 자각이 없어? 검술로 오냐오냐 해주니까 진짜 그랜드 마스터라도 될 줄 알아? 네가 죽으면 제국이 어떻게 되는데? 그 병신같은 2황자한테 맡기게? 아니면 찌질이 3황자? 그것도 아니면 내가 할까? 어?!"

"진정하지."

"내가 진정하게 생겼냐고!!!"

아주 막사가 떠나가라 외친다.

이러면 바깥 병사들도 다 듣지 않을까 싶은데··· 아니, 방음 아티팩트가 작동 중이구나.

"네 목숨이 네 거 같아? 아니야. 황태자 자리에 오른 이상 네 목숨은 절대 널 위한 게 아니라고."

눈에서 불똥이 튄다.

그러면서도 어조는 어딘가 애원을 닮아 있었다.

태자는 그때까지도 입을 꾹 다문 채 에릴다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에릴다가 다시 말했다.

"철회해."

그제야 태자는 답했다.

"불허한다."

"이게 진짜 미쳤···."

"지금 황도로 돌아가 병력을 다시 꾸려오면 암만 빨라도 2주다. 이 자리를 수성하며 근처 영지의 병력을 다 끌어와도 군대 형성까지는 나흘이다. 그럼 그동안 오크는? 저 지휘관급 개체들이 가만히 있겠느냐?"

"그건···!"

"영역에 침입한 것만으로도 척후를 저 꼴로 만들었다. 그리고 저들은 오크지. 영역을 나갔다 하여 봐줄 정도로 너그러운 족속은 아니야."

태자가 팔짱을 풀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단 사나흘. 우리가 방비를 위해 그정도 시간만 자리를 비워도 인근 백성들의 마을은 초토화될 것이다. 설령 이것이 과한 걱정이라도, 그것이 만약의 가능성일지라도 우리는 떠나선 안 된다."

정론.

그러나, 위기를 수반한 판단이다.

에릴다는 그 점을 꼬집었다.

"크게 봐. 넓게 보라고. 이 마을 몇 개보다 네 목숨이, 네가 만들어갈 제국이 더 중요해. 이건 불가피한 희생이야."

저거다.

전쟁기의 에릴다가 악명 높았던 이유.

저 여자는 사람조차 숫자로 본다.

그 외의 모든 것을 숫자로 본다.

그리 이해득실로 판단해 가장 최적화된 결론을 도출해낸다.

특유의 성정인지 뭔지는 모른다.

많은 지탄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 하나.

에릴다의 저 판단이 멸망해가던 제국의 수명을 몇 년이나 늘렸다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저게 맞지.'

태자의 능력을 생각해봤을 때, 이곳에서 그가 부리는 것은 객기였다.

하지만 말이다.

나는 저 태자를 질릴 만큼 잘 안다.

대답은 뻔했다.

"그럼 물으마."

"···뭐?"

"몇을 희생하는 것까지가 대의더냐?"

태자의 목소리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에릴다는 흠칫했다.

"그게 무슨···."

"마을의 백성 수백을 희생하는 게 대의라 했다. 그렇다면 그 큰 뜻은 몇 명의 희생까지 용인할 수 있는 것이냐 물었다."

칼리오스가 에릴다에게 다가갔다.

에릴다는 주춤 물러섰다.

기세는 이미 밀린 것처럼 보였다.

"영지 하나? 아니면 지방 하나? 그도 아니라면 제국 남방 전부? 내 목숨을 지키기 위한 희생의 기준은 무엇이냐?"

저건 태자의 천성이다.

저 인간은 이상주의자이며, 그 이상을 실현할 능력이 있는 인간이었다.

전쟁기, 내가 저 인간 대신 에릴다와 지독하게 말싸움을 벌였던 본진의 침공 날도 그랬다.

우리 병사 하나가 포로로 잡혀갔다.

태자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앞뒤 가리지 않고 적진 한가운데까지 달려가 결국 그놈을 구했다.

숫자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저 인간에겐 모두가 똑같이 구해야할 백성이었을 뿐이다.

그게, 이번 역시 그럴 뿐이다.

"에릴다, 대의로는 부덕함을 포장할 수 없다. 그리하여도 결국엔 그 모난 모양새가 들통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걸 알아버렸다."

순간 태자의 시선이 날 향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침묵.

에릴다는 더 말을 덧붙이지 못했다.

태자는 그 모습에 피식 웃곤 에릴다의 어깨를 두드렸다.

"난 죽지 않는다. 전쟁을 벌이는 게 아닌, 전쟁터의 오라비를 조금만 더 믿어보거라. 무엇보다도 그렇지 않더냐."

"······."

"이건 의식이란다. 내가 건국제의 후신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온 자리지. 한데 적이 많다 하여 울면서 돌아오면 얼마나 위신이 깎이느냐. 백성의 목숨보다 내 안위를 걱정하면 얼마나 추하겠느냐. 그것은 태자로서도, 기사로서도 옳지 못하다."

태자는 그리 말하고 막사를 떠났다.

끝으로 그가 남긴 말은 그랬다.

"지휘를 부탁하마. 그 방면에선 네가 나보다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테니."

태자와 눈이 마주쳤다.

직후 태자가 내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잘 부탁하네.'

""

···나보고 뭐 어쩌라고.

* * *

태자는 이후로도 막사의 방비를 위해 돌아다니느라 바빴다.

나야 할 게 뭐가 있나, 그냥 가만 앉아 있었지.

그게 몇 시간 정도 흐른 후였다.

"소가주."

에릴다가 날 찾아왔다.

고민이 가득한, 그러나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표정을 한 채로.

"태자를 말려주세요."

"제가 어떻게 합니까. 한낱 가신이 주군의 명을 거역할 수는···."

"있죠. 당신은 파로스니까."

어이쿠야.

"재고와 반려. 당신은 파로스의 소가주로서 그 권한을 행사할 수 있어요."

그거야 그렇긴 하다.

황실의 잘못된 판단을 바로잡기 위한 수단이고, 몇몇 선결조건이 필요하지만 지금만큼은 그 모든 조건을 만족하고 있었다.

서류 절차야 후처리로 해도 될 만한 긴급한 사안이기도 하고.

"부탁드려요. 제가···."

에릴다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윽고 내뱉는 말은 그랬다.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부탁이라면, 그게 뭐든 들어드릴게요."

시선이 에릴다의 손을 향했다.

대체 날 어떻게 보는 건지, 배 앞으로 깍지 껴 모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오라버니는 여기서 죽으면 안 돼요. 지금 황실엔 오라버니를 대체할 사람이 없어요. 아니, 아마 다음 세대도, 다다음 세대에도 나오지 않을 거예요."

충심인가, 그도 아니면 개인적인 감정인가.

생각했으나 결론은 둘 다 아니었다.

저건 '계산'이었다.

인정한다.

"예, 태자 전하는 대체되지 않지요. 워낙 뛰어나시니."

에릴다는 숫자로 태자를 본다.

나는 내가 본 태자를 안다.

그 인간은 건국 황제가 무덤을 박차고 일어나지 않는 이상 대체될 수 없다.

그런 인력이었고, 내가 본 미래로 봐도 저 인간의 태자위 유지는 무엇보다 중요한 명제였다.

하지만 말이다.

"부탁은 거절하겠습니다. 황녀 전하께 바라는 것도 없고. 내키지도 않습니다."

이건 기각이다.

"어째서인가요!"

울컥한 에릴다가 날 쏘아붙였다.

하지만 내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전하의 선택 아닙니까. 제가 보기엔 그쪽이 대의에 더 맞습니다."

···가, 표면적인 이유.

그리고 하나를 덧붙이길.

"실전 경험 쌓으셔야죠. 태자 전하도."

온실 속 화초처럼 키울 생각은 없다.

제국의 미래엔 확정된 전쟁이 있다.

야만인의 왕은 그랜드 마스터다.

그 끔찍한 놈을 상대하기 위해선, 이쪽도 그 정도 전력이 필요하다.

'옥에서의 수련은 너무 지지부진했어.'

나와 태자는 옥에서 검의를 지었다.

수많은 논검을 했으며 수많은 대련을 했다.

하지만, 그 십수 년의 세월보다 우리를 성장시켰던 건 단 3년의 전쟁이었다.

그런 처절함이 태자에게 필요하다.

만약 정말 위험해진다?

그럼 내가 나서서 태자를 빼돌리면 된다.

'로드급이 나오지 않는 이상은 괜찮아.'

이종족이다.

더군다나 오크다.

그 명제가 있는 만큼 내게도 방법이 하나 있었다.

그런 점을 대강 설명해봤다.

하나, 이게 에릴다를 만족시킬 답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작은 위험의 가능성도 싫은 걸까.

"···다시 생각해주세요."

에릴다가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떨궜다.

분하다는 듯이 말을 해온다.

"안 돼요. 이건···."

무엇이 그리도 두려운 걸까.

고민은 필요치 않았다.

이 여자는 꽤 한결같은 면이 있는지라, 그때나 지금이나 파악이 쉬웠다.

"···차라리 제가 죽을 수 있어요. 하지만 오라버니는 안 돼요. 제국은 그 사람이 없으면 무너지고 말 거야."

에릴다 오르테어는 제국을 사랑했다.

만약 그녀가 태자와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능히 황위에 올라 성군이 되었을 정도로.

그 정도를 이르길,

-살아. 내가 아닌, 당신이 살아.

자신의 목숨 위에 오르테어를 둘 정도로.

그녀의 이유는 그것 하나뿐이었다.

< 토벌전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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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벌전 (4) >

#019화. 토벌전 (4)

최초에 그녀를 만난 것은 전쟁기.

옥에서 나와 제국의 죄수 병사로서 전장에 투입되던 때였다.

-소드 마스터? 옥에서 잘도 그런 자리까지 오르셨네요.

-내 걸작이네.

-네, 제국은 당신 졸작이고요.

-허허! 자네는 여전히 혀가 매섭군!

태자가 날 그녀에게 소개시켰다.

내 전략적 가치를 가장 잘 파악할 사람이 그녀라는 이유로.

인연은 그리 시작되었고, 망할 태자 덕에 사사건건 부딪혔다.

하지만 적어도 공적으로는 서로를 인정하는 사이였다.

나는 전략 병기였고 이 여자는 최고의 참모였으니까.

다만, 그놈의 성향이 문제였다.

-다음 수성전은 여기서 치를 거예요. 당신은 오라버니를 데리고 적의 보급로를 끊어줘요.

-위험해 보이는데.

-네, 우리 쪽 희생은 30명에서 50명 정도가 되겠네요.

-어, 내 부하가 그만큼 죽는다고.

-가만히 있으면 몇백 몇천이 죽겠죠.

이 여자가 정말 싫었다.

사람을 도저히 사람으로 보지 않는 태도가, 그저 책상에 앉아 남을 사지로 몰아넣기만 하는 행태가.

하여 나는 날카로웠고, 이 여자는 그런 나를 어느 정도 외면했다.

얼굴을 맞대는 이상 평생을 그리하리라.

언젠가는 그리 생각했고, 그걸 바꾼 것은 유이텐 성채 방어전.

그녀가 죽었던 전투였다.

전황은 끔찍했다.

그곳마저 뚫린다면 황도까지는 남은 전략적 요충지가 다섯 개도 채 남지 않게 됐었다.

한데도 지킬 여력이 없었다.

보급이 밀려 한 달은 무구도 정비하지 못하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수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저를 미끼로 쓸 거예요. 폭발형 아티팩트들을 다 모아서 외성에 배치하세요. 저는 그곳에 있을게요.

-에릴다!

-한 달을 버티려면 핵심 병력을 모두 끊어야 해요. 제가 특무대를 붙잡는 동안 본대를 치세요. 별동대를 조직해서 진영을 꼬는 것도 잊지 마시고.

에릴다 오르테어는 자신을 미끼로 보급까지의 시간을 벌고자 했다.

그것은 가장 효율적이고 확실한 유인책이라는 이유였다.

아무렴, 야만인들이 가장 두려워한 이름은 칼리오스 반 오르테어였으나, 야만인들이 가장 먼저 죽일 상대로 지목한 것은 에릴다였지 않던가.

그녀의 지략은 그 정도로 뛰어났다.

오직 인간을 숫자로 보기에, 자신조차 숫자로 보기에 가능한 전략들이 야만인들에겐 무엇보다 큰 위협이었던 것이다.

태자가 반발했으나 묵살됐다.

그 태자조차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전황이 너무 끔찍했기 때문이다.

작전 결행 전날 밤이었다.

에릴다는 내게 식사를 청해왔다.

나는 물었다.

-지칩니까? 자살해서 도망가고 싶었나.

말이 곱게 나오진 않았다.

하나, 에릴다는 평온하게 답했다.

-아뇨, 사실 더 싸우고 싶어요. 방법이 이것밖에 없으니 이렇게 하는 거지.

-있을 텐데.

-없어요. 나머지 방법들은 자멸의 위험이 있어요.

-당신이 없으면 어차피 자멸 아닌가? 전하나 나는 칼질밖에 모르는 무지렁이야.

-그 무지렁이가 희망이에요. 병사들의 사기엔 백 개의 전략보다 당신들 검에서 흐르는 오러가 더 유의미해.

그녀는 최후의 만찬으로 딱딱한 빵에 꿀꿀이 죽 스프를 먹었다.

까다로운 성정을 생각하면 참 특이해 그게 기억이 남았다.

물론, 그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것은 따로 있었다.

-내가 도망가면 어쩌려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탁해요. 끝까지 남아서 제국을 지켜줘요.

-어째야 하나···.

도망칠 생각도 없으면서 빈정댔다.

그때, 그날 처음 나는 이 여자가 웃는 걸 봤다.

-제국군을 못 믿나요?

이 여자는 정말··· 정말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못 믿겠지. 겨우 야만족 하나 못 이겨서 옥에 있던 당신들까지 끄집어냈으니까. 우리도 알아. 제국군은 약해진 거. 당신들이 없으면 무너질 거란 거.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날 뭐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른다.

-특히 유렌, 당신이 없으면 안 돼. 그 망할 오라버니를 통제할 수 있는 건 당신밖에 없어.

-······.

-살아. 내가 아닌, 당신이 살아.

-···제국이 뭐라고 그렇게까지 하나.

다만,

-좋으니까. 내가 나고 자란 이 나라가.

그날의 미소는 내게 이 여자의 인식을 조금이나마 바꿔준 계기가 됐다.

에릴다는 그렇게 죽었다.

적들의 특무대를 모조리 외성으로 끌어들인 후, 자폭하여서.

보급이 도착할 한 달을 벌기 위해서.

이후 에릴다가 사라진 제국군은 반 년만에 수도 함락전까지 치달을 정도로 급속히 몰락했다.

그녀가 벌었던 반년은 제국민들이 피난을 떠날 말미가 되어 주었다.

다시 이르길, 이 여자가 싫다.

아마 저 사고방식이 바뀌지 않는 이상 평생 좋아할 일은 없을 터다.

그럼에도 인정은 한다.

이 여자는 제국에 필요한 사람이었고, 누구보다 제국을 아끼는 사람 중 하나다.

그게 내가 지켜야 할 누군가랑 닮아서.

"황녀 전하."

"···부탁드려요."

"안 들어줄 겁니다. 대신, 이건 약속하겠습니다."

그래서 약속했다.

"태자 전하는 어떻게든 살려서 제도로 돌려보내겠습니다. 제가 죽는 한이 있어도."

에릴다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같지도 않는 소리냐는 듯 헛웃음을 흘린다.

그래, 이런 약속이 가지는 의미를 믿지 못하는 여자다.

하여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말했다.

"재고와 반려. 정말 위험해질 것 같을 땐 써주겠다는 말입니다."

내가 보기에 이 여자의 문제는 하나다.

너무 계산적이라서, 기적을 믿지 못하는 것.

그 문제 때문에 죽어버렸다.

"그때까지만 태자 전하를 믿어주십시오."

그러니 기적을 보여주고 싶었다.

에릴다는 날 노려보다, 이내 이를 꽉 깨물곤 답했다.

아직은 이해하지 못한 거겠지.

"···그 말, 잊지 마요. 재고와 반려는 위험한 순간에 써주겠다는 거."

"아무렴요. 그보다 밥이나 먹읍시다. 요리할 건데 전하 것도 해드립니까?"

"······."

침묵은 긍정인 듯했다.

그에 비웃음이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쿠구구궁···.

···땅에서 진동이 울렸다.

* * *

드레노어는 빠르게 움직였다.

데려온 기사는 자신의 속도를 따라올 수 있는 부단장과 익스퍼트 상위 기사 셋.

그렇게 고원의 생명 반응을 쫓아 달리던 어느 순간,

"그르륵···!"

드레노어는 깨닫게 되었다.

"커맨더."

갈색의 피부, 인간의 두 세배는 될 법한 몸집.

그리고 사납게 솟은 송곳니와 전신을 감싸는 빽빽한 근육.

지휘관 중 최하위 개체인 커맨더.

한데,

"···셋."

그 숫자가 셋이다.

주변에 어느 순간 오크들이 몰렸다.

수는 몇백이었다.

드레노어는 낭패 어린 기색을 느꼈다.

'우리가 올 걸 알고 있었다?'

즉, 전략을 간파당했다.

그리고 이리 많은 오크가 있고, 커맨더가 셋이라는 게 시사하는 바가 있었다.

오크는 동급의 존재끼리는 협력할 수 없다.

힘의 논리상 우열을 가려야 하기 때문이다.

한데 저들이 협력한다.

이게 무슨 말이겠는가.

저들을 아우르는 상위 개체, 천 단위의 오크를 아우르는 챔피언이 이 무리의 수장이라는 말이다.

"단장님···!"

부단장이 무언가를 눈치챈 듯 말했다.

드레노어는 분노를 느꼈다.

'당했다···!'

없다.

어디에도 챔피언의 기척은 없다.

그리고 이들은 커맨더까지 동원해 자신들의 발을 묶으러 왔다.

챔피언의 목적은 명확했다.

'전하!'

막사다.

"일점 돌파다! 전하께 돌아가야 한다!!!"

콰아아아앙!!!

소드마스터의 오러가 공간을 뒤흔들었다.

* * *

칼리오스는 막사 주변을 살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정찰하는 것들이 있다.'

칼리오스의 마나는 범상한 인간과는 그 밀도나 농도가 달랐다.

당장의 수준에서도, 넓게 편다면 익스퍼트 최상위에 육박하는 탐지 능력이었다.

이쪽을 노리는 적들이 있었다.

아마 적측 지휘부에서 보낸 척후병들이겠지.

집단의 수장이라는 것을 안 것일까.

그렇다면 대단했다.

'척후는 일부러 살려 보냈군.'

오크에 지휘부가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 척후를 살렸다.

이후엔 이쪽의 경계심을 생각해 가장 강한 전력··· 드레노어 경이 고원 안으로 진입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자신과 유렌, 그리고 셋의 기사와 병사들이 끝이다.

전략적 우위를 잡혔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 것인가.

칼리오스는 입을 열었다.

"이보게."

"예, 옙!"

"막사로 돌아가 파로스 소가주를 불러오게. 한시가 급하네."

도망칠 수 없다.

하지만, 살기는 자신을 향해 있었다.

그렇다면 병사들을 구태여 쫓기보단, 이쪽에 전력을 다할 테지.

'유렌을 불러오면 내 쪽의 전력을 보강할 수 있다.'

그의 무력은 자신보다 확실히 위에 있었다.

그러니 익스퍼트 급 둘.

버티다가 유렌이 올쯤엔 퇴각을 볼 수도 있었다.

막사 쪽 병력은 괜찮다.

핵심인 지휘관 급은 자신을 노리러 오고 있었고, 그곳엔 에릴다와 기사 셋이 있었다.

그 정도라면 에릴다의 지략으로 일백 정도까지는 수성할 수 있다.

'소가주와 함께 드레노어 경이 도착할 때까지 버티면 이긴다.'

판단을 내린 칼로오스가 외쳤다.

"어서!"

"예, 옙!"

병사들이 빠르게 돌아갔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이 나타났다.

칼리오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챔피언.'

과연 머리를 쓸 줄 안다더니 챔피언 급이다.

그를 호위라도 하겠다는 듯 약 오십에 달하는 오크가 함께하고 있었다.

칼리오스는 챔피언을 살폈다.

자신보다 두 배는 커다란 몸, 그의 몸만큼이나 거대한 그레이트 소드, 거기에 화려한 치장과 위압감까지.

무력으로 치면 익스퍼트 상위.

하지만, 오크와 인간의 격차를 생각하면 그것보다 더 벌어지는 차이였다.

단순 무력적 계산으로 오크는 동급의 인간보다 세 배에서 다섯 배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칼리오스 본인은 아직 익스퍼트 중위에 머물러 있는 만큼, 이건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고 봐야 했다.

하나,

'기껏 억지를 부려 남아 놓고 죽으면 그게 무슨 망신이겠나.'

선택에 후회는 없었다.

안위에 급급해 백성을 저버린다면 스스로를 용서치 못할 것이었다.

외에도, 마침 좋은 상대였다.

수준 높은 오크라는 것은.

"반갑네."

칼리오스는 인사를 건네며 자세를 잡았다.

떠올리는 것은, 다름 아닌 유렌의 가르침이었다.

-모든 검에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검술이 창시되던 천 년 전의 것들이 특히 그렇습니다. 예, 제국 검술 말입니다.

조르고 졸라 유렌이 사용하는 검의(劍意)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직접적인 가르침은 아니었으나, 그는 분명 칼리오스의 상식에서 어느 부분을 깨부숴주는 이론이었다.

-제국 검술은 이종족에게 대항하기 위한 검술입니다. 검술 자체가 종족에 상성을 쳐버린단 말이지요.

-그런가? 딱히 수련하며 그런 것을 느끼진 못했는데···.

-전하께서 경지가 낮아 그렇습니다. 보는 눈을 키울 기회도 없었고.

-하면 그건 어찌 사용하는 겐가?

-사용한다는 느낌이 아닙니다.

첫 실전, 긴장이 차올랐다.

-이해한다는 느낌이지요.

검술의 역사를 공부했다.

그제야 알게 된 것이 있었다.

'제국 검술에는 분명 존재한다.'

다름 아닌, 오크를 상대하기 위한 검술이.

칼리오스는 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이어서 검 끝을 챔피언에게 겨눴다.

그리고 허리를 낮췄다.

기수식이었다.

하지만, 이 기수식을 역사적으로 파고 들어가자면 그렇다.

인간은 오크보다 약하다.

인간의 검 또한, 당연히 오크보다 약하다.

그를 어찌 타파하겠나.

혹은 무작위로 달려드는 오크들을 어떻게 상대할 수 있겠나.

건국 황제는 그것을 고민하던 중, 한가지 꾀를 냈다.

오크의 노예였기에 알 수 있었던 그들의 어떤 습성을 이용한 꾀였다.

"악 사르!"

오크의 고대어.

그들의 신앙으로 말미암아 강제성을 띠게 되는 의식의 말.

그리고 약속된 자세.

1대1 결투 신청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구르, 자카."

쿵!

오크가 치장을 벗었다.

그의 검 위로 붉은 기운··· 투기가 넘실거렸다.

그가 칼리오스와 같은 기수식을 취했다.

1대 51이 순식간에 1대1이 되었다.

이제부터 버티는 것은 온전히 칼리오스의 몫이었다.

투기가 전신을 훑는 느낌, 모르는 검술을 상대한다는 중압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생존본능이 일깨워졌다.

전신의 감각이, 사고력이 한층 더 날카롭게 벼려지는 기분이었다.

순식간에 수많은 경우의 수가 칼리오스의 뇌리에서 떠오르고, 지워졌다.

흥분 상태에 돌입하며 그의 마나가 조금 더 거칠어졌다.

칼리오스는 웃으며 생각했다.

'이건···.'

꽤, 좋은 공부가 될지도 모르겠다.

살아남기만 한다면 말이다.

* * *

촤아아악―!

막사를 습격하던 오크가 무더기로 썰려 나간다.

남아 있는 기사 셋은 익스퍼트 중위.

황실 제1 기사단인 만큼 합격진이나 수비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나는 회초리에 묻은 피를 털었다.

이놈의 특성 하나를 또 깨달은 참이다.

'마나를 잘 먹는다. 원하는 형태로 출력도 잘 나오고.'

내 마나의 성질이 워낙 베는 것에 특화되어 있다 보니 날붙이가 아닌 무기를 사용하는 건 언제나 힘들었다.

한데 이놈은 다르다.

분명 회초리의 형태를 하고 있음에도 예기가 첨예하기 그지없었다.

여하튼, 감상은 거기까지.

"황녀 전하."

"소가주! 어서 오라버니를 모셔와야···!"

"전하."

짝!

혼비백산해있던 에릴다의 코앞에서 손뼉을 쳤다.

깜짝 놀란 에릴다가 이내 정신을 붙잡았다.

나는 말했다.

"말 안 해도 갈 겁니다. 그보다 전하께서 정신을 붙잡으셔야 할 것 아닙니까."

막사로 달려든 오크의 수는 백 오십 가량.

하지만, 일반 오크다.

익스퍼트 중위급 기사 셋에 마법사 둘, 일반 병력 오십.

조금만 신경 쓴다면 수성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해야 할 일, 스스로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에릴다는 주먹을 꽉 쥐더니 이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약속, 지켜줘요. 전하는 어떻게든 살려와야 해요."

"아무렴요."

에릴다가 돌아섰다.

잠시 전황을 살피고 심호흡을 하더니, 이내 외쳤다.

"방진 구축해! 로라 경은 뒤로 빠지고 마법사! 혼란 마법으로 준비해요!"

에릴다는 모든 전략 전술에 능숙했다.

주특기는 아니라고 하나, 야전 사령관으로서도 그녀는 아주 우수했다.

'여기는 버티겠지.'

드레노어 경?

소드 마스터다.

알아서 살아온다.

지금 제일 위험한 것은 태자.

하지만, 태자는 병신이 아니다.

적어도 지금 해야 할 게 무엇인 지를 정확히 깨닫고 병사를 돌려보내기까지 했으니 이 정도면 90점은 줄 수 있다.

더불어 기수식의 의미나 '겁화식'의 요령을 일러뒀다.

당장은 버틸 거다.

'오래는 못 가겠지만···'

나는 말에 올라탔다.

그렇게 병사들이 일러준 대로 태자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정말 쓰고 싶지 않지만 혹시 모르니.

'···무리할 생각도 해야지.'

전신으로 퍼져있던 마나를 그러 모았다.

그리고 그것을,

꽈드드득―!

심장에 집약시켰다.

< 토벌전 (4) > 끝

ⓒ pap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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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드 마스터 (1) >

#020화. 소드 마스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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