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화 사냥을 시작하자. (1)
약탈할 마을조차 없다는 사실에 로드리크군 지휘부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지금도 식량은 빠르게 소모되고 있는데 가져올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방법을 찾으란 말이다! 방법을!"
로드리크 후작이 연신 재촉하자 가신들이 하나둘씩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일단 다른 성이라도 점령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으음.... 적을 뒤에 두고 말이냐?"
"어차피 식량이 다 떨어지면 이 군대는 그대로 괴멸됩니다. 작은 성이라도 점령해서 정비한 뒤 다시 오는 게 어떻겠습니까? 다행히 펜리스 영지 안에는 도로가 깔려 있으니 금방 갈 수 있을 겁니다."
전쟁에서 적을 뒤에 놓는 건 굉장히 위험한 전략이다. 보급로가 끊기는 것은 물론이고 포위까지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보급로는 끊긴 상황이다. 차라리 다른 성을 공격하면서 실버라이트의 병력을 유인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다른 가신은 눈치를 보더니 반대를 했다.
"펜리스 백작은 전쟁 군주입니다. 마을이 없이 모두 성에 몰아넣었다면 분명 그곳도 확실히 전쟁 대비가 되어 있을 겁니다. 우리는 공성 병기도 없습니다. 사다리만으로는 작은 성을 점령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어찌하자는 것이냐?"
"차라리 퇴각해서... 린더스타인을 탈환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
"주변 봉신들도 어려운 상황이겠지만 그래도 쥐어짜면 징발할 것들이 남아 있을 겁니다. 공성 병기와 식량을 다시 마련한다면 린더스타인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으으... 나보고 패배를 인정하라는 것이냐?"
"지금 퇴각하지 않으면... 서부로 돌아갈 식량조차 부족해질 겁니다."
"...."
로드리크 후작은 입술만 질겅질겅 깨물며 고민에 빠졌다.
만약 다른 성을 치는 것에 실패하면 정말로 돌아갈 수조차 없게 된다. 지금 돌아가야 겨우 서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간다면 병력만 잃고 자신이 패배한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모든 귀족이 비웃을 것이며 어쩌면 봉신들이 로드리크 후작가의 그늘에서 빠져나갈지도 모른다. 지금 자신의 병력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줄었으니까.
"돌아간다면 린더스타인을 탈환할 수는 있느냐?"
린더스타인에 있는 펜리스군의 병력 규모는 이쪽에 비해 훨씬 적지만, 그 뒤엔 마스터인 펜리스 백작이 버티고 있다.
실버라이트도 점령하지 못했는데 더 거대한 성인 린더스타인은 장담할 수가 없었다.
"주변 봉신들의 영지에서 남은 병력과 식량을 전부 끌어모으면 됩니다. 병기들도 충원하고요. 린더스타인 곳곳에 투석기 공격으로 무너진 곳이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이미 봉신들을 탈탈 털어 왔음에도 더 짜면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 가신들이었다.
그들은 남의 사정을 전혀 봐주지 않았다. 그냥 뺏으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머리에 당연하게 박혀 있었다.
'일단 우리부터 살고 봐야지.'
'솔직히 벌써 3만을 잃었는데 뭘 또 싸워.'
'그냥 돌아가고 싶다.'
사실 이들은 처음 한 번의 패배로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는 이곳에 있기가 싫었다. 빨리 자신들의 본거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
로드리크 후작이 고민하고 있을 때, 이번에는 먼지를 가득 뒤집어쓴 기사 하나가 도착했다. 린더스타인에 있던 로드리크 후작의 방계 혈족이었다.
로드리크 후작은 그를 보며 깜짝 놀랐다.
"아니, 너는! 살아 있었느냐!"
그렇지 않아도 이전에 들어온 소식을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던 차에 린더스타인에 있던 자가 왔으니 빠르게 상황을 묻고 싶었다.
기사는 비통한 목소리로 외쳤다.
"셀버크 백작이 배신했습니다!"
"뭐?"
"그리고 다른 봉신들도 지금 깃발을 바꾸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자세히 말해 보거라!"
"린더스타인이 펜리스 백작에게 점령당하고 전 다른 봉신 영지로 먼저 피했는데...."
셀버크 백작은 린더스타인을 맡게 된 뒤로 그 병력을 이용해 다른 봉신들을 압박했다.
지셀이 서부를 평정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셀버크 백작은 무척이나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자기 혼자 배신자로 찍히기 싫은 이유도 있었지만, 펜리스에 정당한 명분을 몰아주고 자신의 안전을 꾀하려는 이유도 컸다.
어차피 펜리스가 패배하면 자신은 로드리크 후작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힘이 없던 서부의 봉신들은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항복했고, 몸을 숨겼던 패잔병들은 다시 도망을 갈 수밖에 없었다.
"이놈들이 감히!"
봉신들까지 배신했다. 로드리크 후작은 이제 정말로 갈 곳이 없어졌다.
이대로 돌아간다 해도 배신한 봉신들은 자신과 싸울 것이다. 회유하려 해도 안 믿을 게 뻔했다.
"으아아아! 펜리스! 펜리스 이 개자식들!"
제대로 뭘 해 보지도 못하고 당하기만 했다. 군대를 나눈 탓이었다. 차라리 모든 군대를 이끌고 펜리스를 쳐야 했다.
본래도 돌아가서 이긴다는 보장이 없었지만, 봉신들까지 배신한 이상 이젠 끝이다. 조금이라도 식량을 확보할 방법이 없어졌다.
길길이 날뛰던 로드리크 후작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당장 다른 성이라도 쳐라! 펜리스는 식량이 많다고 하니 분명 작은 성에도 식량을 쌓아 두었을 것이다!"
가신들도 이제는 반대하지 못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북부 내에서 해결을 봐야 한다.
돌아가 봐야 식량도 다 쓰고 병사들까지 지칠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테넌트가 말했다.
"다른 성을 점령해야 하는 건 맞습니다. 그 전에 레이폴드에서 식량을 조금이라도 받아 오는 게 어떻겠습니까?"
"레이폴드? 그 계집이 차지했다는 영지 말이냐?"
"네. 이 북부에서 그나마 잘 사는 곳으로 소문난 곳이 아닙니까? 레이폴드 백작이 여자이긴 하지만 영지민들에게 많이 베풀어서 인심이 좋다고 합니다. 그만큼 식량도 많이 확보했다는 뜻이지요. 충분히 저희에게 지원할 만한 식량이 있을 겁니다."
"끄응, 나보고 계집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란 말이냐? 내 명예가 떨어질 게 아니냐."
"어차피 정당한 거래일 뿐입니다. 후에 큰 보상을 약속하시면 군말 없이 내어줄 겁니다."
서부의 최강자가 달라는데 아멜리아 따위가 어찌 거부하겠는가? 괜히 거부했다가는 나중에 큰 화를 입을 테니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들이 서부 최강이라는 자부심을 놓지 않고 있었다.
3만이라는 대군이 남아 있으니 그럴 만했다. 반이 줄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펜리스군보다 많다.
어떻게든 펜리스만 잡으면 서부의 배신자들도 쉽게 이길 수 있을 터였다.
"허락하겠다. 당장 사신을 보내 레이폴드에 식량을 원조하라고 일러라. 전쟁이 끝난 뒤 북부든 서부든 원하는 영지 하나를 하사해 주겠다고."
로드리크 후작은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그가 내건 보상은 보통이 아니었다.
전쟁 중에 잠깐 식량을 지원해 주는 대가로, 대대로 다스릴 수 있는 영지 하나를 주겠다고 하는 것이니까.
로드리크 후작만큼 거만한 사신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아멜리아를 찾아갔다.
"저희에게 식량을 지원해 주시면 차후 전쟁에 승리한 뒤 보상으로 원하시는...."
아멜리아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사신의 말을 듣다가 말했다.
"미친 거 아냐? 전쟁에서 지고 있으면서 식량을 달라니!"
"어허! 백작님!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후환이 두렵지도 않으십니까! 아직 저희에게는 3만의 군대가...."
"내 눈앞에서 당장 꺼져. 더 귀찮게 하면 내가 후작의 뒤를 칠 테니까."
"...."
무시무시한 아멜리아의 엄포에 사신은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현재 구원교 때문에 상당히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고 있던 세력이 튀어나와 상황을 다 꼬아 버렸으니 당연한 일이다.
지셀과 친왕파가 구원교를 핑계로 여기저기 다 들쑤셔 놓은 탓에 지금까지 세웠던 작전을 다 새로 다시 짜야 할 판이었다.
가뜩이나 짜증이 날 대로 난 상황인데, 멍청이들이 전쟁에서 지고 있는 주제에 식량을 달라고 건방지게 구니 말이 곱게 나올 리가 없었다.
빈손으로 돌아온 사신을 보고 로드리크 후작은 다시 분노했다.
"으으으으! 그 계집이 감히! 이 북부에는 미친 것들만 가득하구나!"
식량을 얻기는커녕 모욕만 당했다. 지금껏 살면서 이런 대접을 받은 것은 정말 처음이었다.
"내 반드시 펜리스를 점령한 뒤 북부를 모두 불태울 것이다! 당장 군대를 움직여라!"
펜리스 다음은 레이폴드다. 그리고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모든 영주의 목을 벨 것이다.
로드리크 후작은 그렇게 다짐하며 군대를 움직였다.
이제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다른 성이라도 점령해서 식량을 확보하고 정비를 해야 했다.
그들이 목표로 한 곳은 실버라이트에서 꽤 멀리 떨어진 성이었다.
이제 뒤가 없는 로드리크군은 도로를 이용해 빠르게 움직였다.
성 앞에 진을 친 테넌트가 모두에게 말했다.
"실버라이트에서 이곳을 도우러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로선 차라리 그게 더 낫다! 1만을 따로 빼서 후방의 공격에 대비해라! 적들이 나타나면 바로 나머지도 합류해서 적을 섬멸한다!"
공성 병기가 없기에 성을 함락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래 봐야 작은 성이다. 병력도 약 2천 정도에 불과했다.
로드리크군이 한꺼번에 덤비면 결국 점령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펜리스는 식량이 많다! 성을 우리가 차지하면 배불리 먹을 수 있다! 모두 진군하라!"
"와아아아아!"
로드리크의 병사들이 큰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 나갔다.
어차피 그들에게도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거기에 딱 봐도 실버라이트보다 작은 성이니, 이길 가능성이 커 보였다. 종전의 패배로 꺾인 전의가 다시 샘솟아 올랐다.
현재 이 성의 지휘관은 해결사 출신인 맥스가 맡고 있었다. 그는 개미 떼처럼 몰려오는 로드리크군을 보며 질색했다.
"아니, 왜 여기로 왔대? 다른 데로 좀 가지."
그들이 실버라이트에서 대패하고 보급까지 끊긴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많고 많은 성 중에서 왜 하필 자신이 맡은 곳으로 온단 말인가.
"쏴라! 일단 막 쏴!"
맥스의 명령에 따라 펜리스군이 화살과 투석기를 쏘아 댔다.
콰앙! 콰아앙! 콰앙!
워낙 적들이 많으니 쏘는 족족 빗나가는 일 없이 병사들이 쓰러져 갔다. 하지만 그 공격은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콰아아아앙!
성벽 위에 불과 벼락이 꽂혔다. 그 모습을 본 맥스가 사색이 되어 외쳤다.
"마법사다! 피해라! 뒤로 물러나!"
로드리크군에 있던 고서클 마법사들이 성벽을 무지막지하게 공격해 댔다.
현재 이 성에는 저 마법사들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결국 투석기와 발리스타 등의 병기들은 모두 마법에 맞아 부서졌다.
로드리크의 마법사들이 공성 병기를 단번에 무력화시키자 달려오는 병사들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테넌트도 필사의 힘을 다해 외쳤다.
"붙어라! 어서 붙어라! 올라가면 우리가 이긴다! 마법사와 궁병들은 우리 병사가 올라갈 때까지 계속 성벽을 견제해라!"
로드리크군은 이를 악물고 달렸다. 이번에는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자 힘이 넘쳤다.
쿠웅! 쿠웅! 쿠웅!
로드리크군의 선두가 드디어 성벽에 사다리를 붙였다. 펜리스군은 그때까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와아아아!"
로드리크군은 마치 개미 떼처럼 성벽을 올라갔다.
그래도 전신을 갈바니움 갑옷으로 무장한 펜리스의 병사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아군이 맞을까 봐 마법사들이 공격을 멈추자 펜리스군도 드디어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로드리크의 병사들은 올라가는 족족 죽어 떨어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펜리스군이 조금씩 성벽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테넌트가 그 모습을 보고 주먹을 꽉 쥐었다.
"이곳에는 기사가 거의 없구나!"
무장의 차이 때문에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만, 마나까지 쓰며 싸우는 자는 지휘관을 비롯한 몇 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수가 훨씬 적은 펜리스군은 점점 밀릴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 병사들과 기사들도 지금 투입한다! 모두 성벽 위로 올라가라! 기사들이 선두에 서서 저 병사들을 베어라! 우리가 승리했다!"
테넌트의 외침에 병사들은 더 힘을 냈다. 로드리크의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저 성을 점령해야 자신들에게도 희망이 생긴다.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힘차게 달려 나갔다.
"비켜라!"
"우리가 먼저 올라가겠다!"
"어서 가자!"
무려 100명이 넘는 기사들이 사다리 앞에 도착했다. 이제 이들이 올라가 마나를 뿜어낸다면, 병사들이 아무리 좋은 갑옷을 입었더라도 버티지 못할 것이리라.
마법사들은 아군이 있는 위치를 피해 계속 성벽 주변을 공격했다. 이 정도만 해도 펜리스군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희열에 찬 표정으로 사다리를 붙잡고 올라가려 할 때.
두우우우웅!
둔중한 뿔 나팔 소리가 울렸다.
성벽에서 병사들과 함께 싸우던 맥스가 하늘을 보며 웃었다.
"왔구나!"
갑작스러운 소리에 로드리크군도 모두 하늘을 바라보았다.
"뭐야... 저거?"
"저게... 그 소문의...."
"저기에 사람이 타고 있다고?"
하늘에는 수십 대의 열기구가 떠 있었다. 성의 뒤쪽을 지나 어느새 성벽까지 다가온 것이다.
테넌트는 열기구들을 보며 외쳤다.
"신경 쓰지 마라! 조금만 더 밀면 된다! 이미 우리가 이겼다! 마법사들과 궁병들은 모두 저걸 공격해라!"
저게 소문의 열기구라는 건 알고 있다. 처음 보는 모양이라 신기하긴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저런 열기구 따위는 그냥 떨어뜨리면 그만이다. 저기서 몇 사람 정도 나와 봤자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로드리크 마법사들은 표정이 단단히 굳어 있었다.
"마력이... 봉쇄됐다고?"
이곳에 있는 고서클 마법사들의 마법이 순간적으로 모두 막혀 버렸다.
열기구를 공격하려 해도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테넌트가 뭐라고 다시 외치기도 전에, 가장 선두에 있던 열기구에서 한 사람이 뛰어내렸다.
쿠웅!
맥스가 로드리크의 병사들을 베며 그 사람에게 달려갔다.
"오셨군요!"
"그래, 총관이 지금쯤이면 된다더니 사실이었군."
차앙! 차앙!
사나운 웃음을 지으며 두 자루의 도끼를 꺼내든 자는 길리언이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펜리스의 기사 200명이 열기구에서 줄을 잡고 뛰어내렸다.
마지막으로 열기구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야이! 로드리크 후작 이 등신아아아아아!"
끝까지 상대를 빡치게 하는 임무를 잊지 않은 아스콘이었다.
406화 사냥을 시작하자. (2)
철퍼덕! 철퍼덕! 철퍼덕!
열기구의 줄을 잡고 떨어진 펜리스 기사들을 보고 로드리크의 병사들이 멈칫거렸다.
갑자기 하늘에서 사람들이 우수수 떨어지니 당혹스러울 만도 했다.
길리언이 도끼를 쥔 양 팔에 힘을 가득 주며 외쳤다.
"모두 죽여라!"
잠깐 움직임을 멈춘 로드리크군에게 재앙이 들이닥쳤다.
콰아아앙!
길리언은 도끼를 마구 휘두르며 눈앞에 보이는 로드리크의 병사들을 쳐 죽였다.
벌떡 일어난 펜리스의 기사들도 그를 따라 움직였다.
"으아아악! 뭐야!"
"기사들이다! 하늘에서 기사들이 나타났다!"
"옆으로 피해!"
지금까지는 펜리스군에 기사가 없기에 로드리크군이 숫자로 밀어붙일 수 있었다. 하지만 길리언과 기사들이 나서자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콰앙! 콰아아앙!
이들은 모두 드래곤 하트 조각을 이용해 전보다 더 강해진 상태였다. 로드리크의 병사들은 순식간에 밀려나 성벽에서 떨어졌다.
급하게 올라온 로드리크의 기사들이 그 상황을 보고 다급하게 외쳤다.
"어서 합류해라!"
"저놈부터 죽여라!"
로드리크 기사들은 바로 길리언에게 달려들었다. 누가 봐도 그가 병사들을 가장 많이 죽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앙! 카앙! 카앙!
하지만 로드리크 기사들의 공격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막혔다.
이미 최상급에 올라 마스터의 경지까지 엿본 길리언이다. 로드리크의 기사들은 그의 도끼를 전혀 막아 낼 수 없었다.
콰아앙!
도끼가 한번 움직일 때마다 기사들의 갑옷은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길리언에게 덤벼든 기사들은 순식간에 몸이 갈리며 쓰러졌다.
"이 미친...."
살아남은 한 기사가 길리언의 무시무시한 무위에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길리언이 성큼 다가갔지만 기사는 감히 피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더 강한 포식자를 보고 굳어 버린 동물과 다를 게 없었다.
텁!
그자의 목을 우악스럽게 움켜쥔 길리언이 사나운 웃음을 지었다.
"네놈들이 감히 올라올 곳이 아니다."
"자, 잠깐...."
우드득!
기사는 반항도 못 해 보고 길리언에게 목이 꺾여 죽었다.
시체를 옆으로 던져 버린 길리언이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빨리 적들을 성 밖으로 밀어내지 않고 뭣들 하는 거야!"
용병 출신인 길리언은 지셀 못지않을 정도로 거칠게 기사들과 병사들을 대한다.
호통 소리에 찔끔한 펜리스의 기사들이 마나를 더 끌어올렸다. 괜히 찍히면 지옥 훈련을 해야 한다.
고든이 로드리크 병사들을 밀어 내며 옆에 있는 루카스에게 말했다.
"야, 영감 화났다."
"아휴, 내가 진짜 나중에 도전해서 저 자리 뺏는다."
"너 그러다가 허리 반대로 접힌다."
"내가 더 젊거든?"
어느새 단짝이 된 고든과 루카스도 투덜거리며 마나를 끌어 올렸다. 이들도 이제 중급 기사를 넘어 상급을 바라보고 있다.
이렇게 성장 속도가 빠른 것은 사기적인 마나 연공법 덕분이긴 하지만, 그만큼 이들도 위험을 감수하고 매일매일 지옥 수련을 하고 있다.
나태함에 젖어 있던 로드리크의 병사들과 기사들은 아무도 이들을 당해 내지 못했다.
콰아앙! 콰아앙! 콰앙!
"으아아악!"
어느새 성벽은 다시 펜리스군이 차지했다. 로드리크군은 수로 밀어붙였지만 올라가는 족족 죽어 버리니 도무지 성벽을 점령할 수가 없었다.
공성 병기도 없이 성을 점령해야 하는 상황이다. 사다리는 한정되어 있으니 대군이라는 이점도 살릴 수가 없었다.
로드리크의 궁병들도 성벽에 화살을 쏘지 못했다. 아군 보병들은 무장이 빈약해서 오히려 아군을 죽이게 될 테니까.
열기구를 탈취하고 싶어도, 이미 그 안에 타고 있던 마법사들이 잽싸게 기구를 땅에 내린 지 오래였다.
"야이! 로드리크 후작! 이 또라이 새끼야아아아아아!"
성안에 착륙해 어디론가 숨은 아스콘의 목소리만 크게 울려올 뿐이었다.
결국 로드리크의 궁병들에게 새로운 명령이 내려왔다.
"전부 성벽으로 올려보내라! 어서!"
눈이 벌겋게 충혈된 로드리크 후작의 엄포에 궁병들까지 모두 성벽으로 향했다. 당연히 그들은 올라가는 족족 죽어 나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을 내라! 점령할 수 있단 말이다!"
분명 성벽을 점령하기 직전이었다. 조금만 더 싸우면 됐다.
조금만, 정말 조금만 더 밀면 됐을 터였다. 눈앞에서 성공을 놓친 로드리크 후작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으아아아악!"
전장의 분위기는 치열했지만 비명을 지르는 것은 로드리크 병사들뿐이었다. 펜리스군 쪽에서는 지휘관들의 외침 외에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로드리크의 지휘부와 병사들은 어느 순간 그 사실을 깨닫고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테넌트도 침을 꿀꺽 삼켰다.
"도대체 얼마나 훈련을 했기에...."
저들은 두려움이 없었다. 당황하지도 않는다. 마치 정교한 기계 장치처럼 전쟁을 수행할 뿐이었다.
이제 성벽 위에 로드리크 기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100명이 넘는 기사가 성벽 위에서 다 죽었다.
그나마 그들이 있어서 이 정도까지 버텼던 것이다. 로드리크의 병사들은 이제 누구도 성벽 위에 올라가 진형을 갖출 수가 없었다.
콰아앙! 콰앙! 콰아앙!
성벽 위에서 하얀 머리의 남자가 날뛰는 모습이 유독 눈에 띄었다. 테넌트도 그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저게... 펜리스의 하얀 사자 길리언인가?"
과연 소문대로의 실력이었다. 그 어떤 기사와 병사들도 길리언에게는 제대로 상처를 주지 못했다.
테넌트는 몇 번이나 검을 만지작거렸다. 한 사람의 기사로서 저자와 싸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미 성을 점령하는 건 불가능해졌다. 자신마저 불나방처럼 저곳에 올라갔다가는 로드리크 후작을 지킬 자가 없어진다.
"으아아악!"
쿠웅! 쿠웅! 쿠웅!
로드리크군이 성벽에 걸쳐 놓은 사다리까지 전부 박살이 나거나 뒤로 밀려서 떨어졌다.
다시 사다리를 세워 올려 봤자 의미가 없었다. 이미 전세는 기울었고 병사들의 전의도 바닥까지 떨어졌다.
오직 로드리크 후작만이 열을 내며 외칠 뿐이었다.
"마법사! 마법사들은 무얼 하느냐! 당장 저놈들을 모두 쓸어버려라! 아군이 휘말려도 상관없다! 어서 마법으로 모두 쓸어버리란 말이다!"
마법사들은 땀만 뻘뻘 흘리며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지금도 거대한 마력이 이 전장을 휘감으려 하고 있다. 마법사들이 온 힘을 다해도 그걸 막는 것이 전부였다.
현재 펜리스 측 마법사는 바네사를 비롯해 열기구의 조종을 맡았던 마법사들까지 수십 명이었다.
로드리크의 마법사들을 봉쇄하기엔 충분했다.
모든 방책이 막히고 상황이 풀리지 않자 로드리크 후작이 다시 괴성을 질렀다.
"으아아아!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이냐! 10만에 이르는 대군과 이 많은 마법사가 어찌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다는 말이냐!"
테넌트도 전장을 둘러보다가 눈을 감았다.
'끝났구나.'
병사들은 두려워서 이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저 성을 공략하기 위해 여기 온 인원의 절반이 넘는 수가 죽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이곳으로 와야 했다. 그랬다면 적어도 이 성은 점령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첫 전투에서 3만이나 되는 병력과 공성 병기를 모두 잃은 게 뼈아픈 실책이었다.
이제 늦었다. 저 성을 공략하는 건 불가능하다.
"병사들을 물려라."
얼핏 봐도 2만에 가까운 병사가 죽었다. 이제 겨우 1만이 조금 넘게 남았다. 남은 병력이라도 지켜야 이 북부에서 살아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테넌트의 명령에 병사들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걸 본 로드리크 후작이 발광했다.
"왜! 왜 병사들을 물리느냐! 어서 다시 보내라! 어서 다시 보내 저 성을 점령하란 말이다!"
"무리입니다. 다시 병력을 정비하고...."
부우우우우우!
테넌트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멀리서 웅장한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에서 나타난 군대를 본 로드리크 후작가의 참모들이 기겁하며 외쳤다.
"페르디움의 깃발입니다!"
"페르디움 후작의 군대입니다!"
"펜리스 백작이 지원을 요청했던 모양입니다!"
북방 야만인들을 상대하는 페르디움의 기마병들이 열을 지어 서 있었다. 얼핏 봐도 수천에 이르는 군대였다.
저 기마병이 평범하게 돌격하기만 해도 이미 전의를 잃은 로드리크 병사들은 속절없이 쓸려나갈 것이다.
거기에 성벽 위에 있는 펜리스의 기사들과 병사들까지 뛰쳐나오면 감당할 수가 없다.
테넌트가 그걸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이곳으로 올 걸 알고 준비하고 있었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순간에 나타날 수 없다. 이 전쟁에서 자신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적의 의도대로 놀아난 것이다.
그게 펜리스 백작인지, 실버라이트의 지휘관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크게 숨을 들이쉰 그는 로드리크 후작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후퇴하셔야 합니다."
"무어라? 후퇴? 지금 나보고 후퇴를 하라는 말이냐! 저 북부의 작은 성조차도 점령하지 못했는데! 서부의 지배자인 나더러 후퇴하라고! 저딴 지원군보다 우리 쪽 수가 더 많다!"
테넌트는 이를 꽉 깨물고 다시 말했다.
"도망가셔야 합니다."
후퇴가 아니라 도망이다. 그게 정확하다. 이 전쟁에서 로드리크 후작가는 패배했다.
로드리크 후작은 피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어디로! 어디로 도망간다는 말이냐!"
"수도로 가셔야 합니다. 남은 병력으로 친왕파에 합류하고 그쪽에 중재와 도움을 요청하셔야 합니다."
"이놈! 나보고 그런 굴욕을 겪으란 말이냐!"
친왕파의 중재를 몇 번이나 거부한 건 로드리크 후작 자신이다. 그런데 이제 와 패잔병들을 잔뜩 끌고 가 고개를 숙이라고?
자신은 이제 영지도 없다. 남은 병력으로 다른 약한 영지 어디라도 쳐서 뺏어야 할 판이었다.
10만 대군을 가지고도 뭐 하나 제대로 해 보지도 못했다. 그저 펜리스군에 계속 끌려만 다녔다.
"으아아아아! 어서 싸워라! 우리가 이길 수 있다! 우리가 이길 수 있단 말이다!"
로드리크 후작은 인정할 수 없었다. 수중에는 아직 1만에 이르는 군대가 남아 있다. 이 정도만 해도 대영주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싸우면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테넌트는 고개를 저으며 호위 기사들에게 말했다.
"후작님을 모셔라. 내가 앞장서겠다."
"놔라! 놓으란 말이다!"
강제로 로드리크 후작을 호위 기사들에게 맡긴 테넌트가 말에 올라탔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크게 외쳤다.
"어서 병력을 추려라! 이제 싸우지 않고 북부를 벗어난다! 최대한 빨리 수도로 가는 게 목표다!"
이제 막 허겁지겁 성벽 공략을 멈추고 돌아온 병사들이 절망 어린 표정을 지었다.
'제대로 걸을 힘도 없는데 바로 도망을 가야 한다고?'
끔찍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와아아아아아!"
저 멀리서 페르디움군이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구구구구궁!
성문이 열리고 펜리스군이 말을 타고 튀어나왔다.
"어서! 어서 움직여라!"
테넌트는 절대 맞서 싸울 생각이 없었다. 병사들이 지칠 대로 지친 이 상황에서는 절대 싸워서 이길 수가 없었다.
지휘부에 남아 있던 마법사들이 눈치를 봤다. 드네시가 테넌트를 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는 아직도 이곳을 파고드는 마력을 막느라 힘을 쓰고 있었다.
"우, 우리는 어떻게 하란 말이오?"
테넌트가 차가운 눈빛으로 드네시를 바라보며 말했다.
"후작님이 도망을 갈 때까지 적 마법사를 봉쇄하시오. 당신들은 지금까지 한 게 없으니까."
"뭐? 지금 우리를 버리겠다는 말인가!"
분노한 드네시가 마력을 거두며 테넌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마법사들 중 가장 강한 그의 마력이 빠져나가는 순간.
번쩍!
콰아아아아앙!
로드리크군의 진영으로 한 줄기 번개가 꽂혔다.
"으아아악!"
상황 파악도 제대로 못 한 병사들 수백 명이 단번에 죽고 말았다.
"크윽!"
드네시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마력을 쏟아부었다.
지금도 잠깐의 틈을 타서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온 마법이다. 만약 마법사들이 도망가겠다고 동시에 마력을 거둔다면?
저 엄청난 마법은 가장 먼저 그들을 향해 내리꽂힐 것이다.
그래야 나머지를 편하게 쓸어버릴 수 있을 테니까.
마법사들이 이도 저도 못 하고 있을 때, 테넌트는 호위 기사들과 남은 병력을 이끌고 빠르게 움직였다.
두두두두두두!
지휘부를 호위하기 위해 남아 있던 로드리크의 기마병은 약 5천. 그들은 비교적 빠르게 도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태껏 싸우다 막 돌아온 보병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지쳐서 제대로 도망도 가지 못했다.
콰아아아앙!
"으아아아악!"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항복입니다!"
"무기를 버리겠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본래도 나약하고 충성심 없기로 유명한 로드리크의 병사들이다. 지휘부까지 도망갔으니 그들이 계속 싸울 이유가 없었다.
이미 얘기가 되어 있었는지 펜리스군과 페르디움군은 항복한 병사들을 내버려두었다.
몇 명만 남아 항복한 병사들을 거두고, 나머지는 계속 로드리크군을 쫓아갔다.
펜리스의 기사들은 드네시를 비롯한 마법사들을 향해 달려갔다.
두두두두두두!
기사들이 돌격해 오자 마법사들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마법을 못 쓰는 이들은 일반 병사보다도 약하다.
저 돌격을 몸으로 맞이하면 순식간에 찢겨나갈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방어 마법을 쓸 여유가 없다.
두두두두두두!
드네시는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뒤룩뒤룩 굴렸다. 자신들은 버림받았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
언제나 풍족하게 살아온 그는 절대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았다.
개인주의가 강한 마법사답게 그는 바로 선택을 내렸다.
"항복하겠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마력을 거두고 그가 엎드렸다. 그러자 다른 마법사들도 모두 마력을 거두고 동시에 엎드렸다.
"저도 항복하겠습니다!"
"저는 5서클 마법사입니다! 쓸 만할 겁니다!"
"저는 그냥 연구만 하던 사람입니다!"
모두 같은 생각이었던 것이다.
번쩍!
하늘에서 빛이 번뜩이자 마법사들은 모두 눈을 감았다. 하지만 낙뢰는 떨어지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상대가 마력을 거둔 것이다.
히히히힝!
돌격해 오던 펜리스의 기사들도 말을 멈춰 세웠다.
'휴우! 살았구나!'
드네시는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지었다.
자신은 흔치 않은 6서클 마법사다. 자신 같은 고급 인력을 그냥 죽일 리 없었다.
저벅, 저벅, 저벅.
잠깐 고개를 처박고 기다리자 한 남자가 다가왔다. 하얀 사자란 이명을 가진 길리언이었다.
"마법사들의 수장이 누구냐?"
길리언의 물음에 드네시가 조심스럽게 일어나 헛기침을 했다.
"험험, 본인은 6서클 마법사요. 포로로 대우해 주시면 몸값은 충분히...."
콰직!
드네시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길리언의 도끼가 어느새 그의 목을 찍어 버렸기 때문이다.
"컥, 커억...."
'왜?'
6서클 마법사지만 코앞까지 다가온 길리언의 갑작스러운 공격은 막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렇게 의문을 가득 품은 채 죽고 말았다.
로드리크의 다른 마법사들은 겁에 질려 벌벌 떨며 더욱더 고개를 땅에 처박았다.
길리언은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들은 이제 펜리스의 노예다. 몸값이니 뭐니 그딴 말은 하지 말도록."
"...."
마법사들은 경악했다. 왕국에 그딴 법은 없다. 누구 마음대로 감히 마법사를 노예로 부린단 말인가?
하지만 목숨이 아까워서 아무도 반발하지 못했다.
딱히 그들만이 아니라 펜리스 마법사들이 다 노예 신세라는 것을 알면 더더욱 기겁할 터였다.
길리언은 그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이분이 앞으로 너희들의 수장이시다."
마법사들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길리언이 가리키는 곳에는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바로 펜리스 마법연구소장인 바네사였다.
* * *
― 주인, 시작됐다.
다크의 말에 지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펜리스 기동군 1만을 이끌고 북부에 도착해 있었다.
하지만 클로드의 요청에 따라, 로드리크군 본대를 찾아가지 않고 대기 중이었다.
다크의 말을 들은 지셀이 웃음을 지었다.
"그래, 이제 사냥을 시작하자."
407화 사냥을 시작하자. (3)
두두두두두두!
급하게 도망치느라 먼지 범벅이 된 로드리크 후작은 여전히 분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으으으으.... 이 왕국의 왕이 될 사람인 내가! 이 내가 이렇게 초라하게 도망쳐야 한다니!"
아직도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천지를 진동시키던 자신의 군대는 모두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도무지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당했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멍청한 놈들! 한심한 놈들! 저 많은 병력을 손도 못 쓰고 그냥 잃어버렸다니!"
로드리크 후작은 도망을 가면서도 휘하 장수들을 욕하기 바빴다.
옆에 있던 테넌트는 할 말이 없었다. 대부분의 작전은 자신이 입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진 것은 로드리크 후작이 성급하게 재촉했기에 작전을 제대로 검토하지 못했던 이유가 컸다. 딱히 누구 하나의 책임이라 할 수는 없었다.
그냥 로드리크의 가신들 전부가 펜리스 쪽 인물들보다 부족했을 뿐이다.
"이 쓸모없는 자식들아! 별것도 아닌 놈들한테 이렇게 대패한단 말이냐!"
그걸 모르는 로드리크 후작만이 같은 편을 계속 욕할 뿐이었다. 가신들은 그 욕을 들으며 씁쓸한 표정만 지었다.
마법사들까지 버리고 기마병만으로 움직여서 그런지 상당히 멀리 도망칠 수 있었다.
뒤를 쫓아 오던 페르디움군도 추적을 포기했는지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았다.
테넌트는 군대를 멈춘 뒤 로드리크 후작에게 말했다.
"잠시 쉬었다 가겠습니다."
"알아서 해라."
"불편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으십시오. 5천의 군사도 적지 않으니, 이들만 이끌고 가도 친왕파에서는 반갑게 맞아 줄 겁니다. 그들은 지금 상당히 아쉬운 처지니까요."
"5천.... 고작 5천이란 말이냐.... 브랜포드 후작이 날 비웃겠구나."
로드리크 후작은 욕을 하다 힘이 빠졌는지 상당히 초췌한 안색이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의욕까지 모두 사라진 것만 같았다.
제대로 챙겨 온 게 없으니 쉬더라도 그냥 바닥에 주저앉는 게 전부였다.
로드리크 후작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배가 고프구나. 요깃거리라도 가져오너라."
"...."
"무얼 하느냐. 어서 먹을 걸 가져오라지 않느냐."
"...따로 챙겨 온 게 없습니다."
"무어라? 그러면 굶으면서 수도까지 가라는 말이냐!"
"펜리스의 영역을 벗어나면 다른 영주들에게 식량을 조금 요청할 생각입니다."
"으으으.... 이 쓸모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로드리크 후작은 다시 화를 내었다.
식도락이야말로 그가 가장 즐기는 취미였다. 그런데 이제는 먹을 것조차 없이 쫓겨 다니다니.
스스로의 초라한 모습에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물이라도 가져오너라!"
다행히 물은 각자 주머니를 챙겨 다니기에 금세 가져다줄 수 있었다.
"우웩!"
로드리크 후작은 가죽 주머니에 담긴 물을 마시다가 헛구역질을 했다. 항상 마법으로 깨끗하게 정수된 물만 마시다가 냄새나는 물을 마시니 죽을 것만 같았다.
"물조차도 제대로 마실 수가 없다니! 내가 지금까지 이런 놈들을 데리고 영지를 운영했다는 말이냐!"
로드리크 후작이 물주머니를 집어 던지고 또 욕을 했다.
그 트집에 당하는 가신들의 표정도 점점 더 안 좋아졌다.
실컷 욕을 한 로드리크 후작이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문득 그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재수 없게 웬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거냐."
까마귀 한 마리가 하늘을 빙빙 돌고 있었다. 다른 이들도 모두 고개를 들어 까마귀를 바라보았다.
"병―신―아―!"
"저, 저 까마귀가 지금 욕을 한 거냐!"
가뜩이나 욕에 민감한 로드리크 후작이 다시 열을 냈다.
다른 이들도 그런 소리를 들은 것 같았지만, 까마귀가 말을 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차, 착각인 거 같습니다."
"까마귀가 말을 할 리가 없잖습니까?"
"우리가 잘못 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로드리크 후작은 집요하게 따지고 들었다.
"모두 같은 말을 들었는데 이상하지 않으냐! 까마귀가 아니라면 누구냐! 누가 지금 내 욕을 한 것이냐! 너냐?"
"아, 아닙니다!"
"그러면 누가 내 욕을 한 거야! 다 죽여 버리겠다!"
그에게서 서부의 최강자다운 모습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지금처럼 패퇴할 때는 지도자의 역량이 평소보다 더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로드리크 후작이 보이는 행동은 있던 충성마저 사그라들게 할 정도로 추했다.
그 모습을 더 보기 힘들었던 테넌트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저 멀리서 이상한 느낌을 받고 멈칫했다.
'먼지....'
다른 이들에게는 안 보이겠지만, 서부 최고의 실력자로 꼽히는 테넌트는 아주 멀리서 희미하게 퍼지는 먼지를 발견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조금 더 바라보았다. 자연 현상인지 인위적인 것인지 확인을 해야 했다.
잠시 지켜봤지만 먼지는 가라앉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인위적으로 생긴 것 같았다.
그는 바로 바닥에 귀를 대고 마나를 집중했다.
두두두두두....
아주 멀리서 땅이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벌떡 일어난 그가 다시 그 방향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왔던 방향이 아니다.'
페르디움군이 쫓아오는 건 아니다. 그들은 저 방향에서 나타날 수 없다.
그렇다는 건, 다른 적이 분명하다.
"모두 말에 올라타라! 바로 움직인다! 적이 오고 있다!"
그 말에 기사들과 기마병들이 잽싸게 다시 말에 올라탔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던 로드리크 후작도 강제로 말을 탈 수밖에 없었다.
"아,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무슨 일이냐!"
"적이 오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안 보인대도? 주변에 아무것도 없지 않으냐!"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후작님을 모셔라!"
말싸움할 시간이 없다. 테넌트가 말고삐를 틀어잡았을 때, 로드리크군 병사들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헉!"
"지, 진짜 적이다!"
"펜리스군이 나타났습니다!"
모습을 드러낸 적들의 머리 위에는 펜리스의 깃발이 걸려 있었다. 펜리스의 기마병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다가왔다.
"사력을 다해 움직여라! 피할 수 있다!"
테넌트가 검을 뽑으며 외쳤다. 로드리크의 기마병들도 말고삐를 강하게 당기며 달려 나갈 준비를 했다.
"가자!"
두두두두두!
로드리크군이 움직였다. 펜리스군이 빠르긴 하지만 꽤 거리가 있으니 충분히 충돌을 피해 도망갈 수 있을 거 같았다.
"더 빨리 달려라! 어떻게든 떨쳐내야 한다!"
테넌트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충돌하면 옆구리를 부딪치게 된다. 만약 거리가 더 좁혀지면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한다.
그가 힐끗 옆을 바라보았다. 아직 거리는 충분했다.
'됐다! 후미만 겨우 따라잡을 수준이구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문득 선두에 선 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엘프?'
그가 상대를 정확히 인식한 순간, 달려오던 펜리스군이 모두 활을 꺼내 들었다.
"궁기병이다! 더 빨리 달려라!"
기겁하며 도망가는 로드리크군에게 화살 비가 쏟아졌다.
파아아아앗!
로드리크군은 도망치면서도 궁기병의 공격에는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실버라이트 요새에 처박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날아오는 화살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퍼버버버버벅!
"으아아아악!"
콰앙! 쿵! 콰아앙!
화살에 맞은 병사들과 말이 땅에 나동그라졌다. 옆과 뒤에서 달리던 자들도 같이 엮여서 넘어졌다.
순식간에 중간 대열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펜리스군의 선두에 선 엘프 루미나는 손을 위로 들고 주먹을 쥐었다.
두두두두두두!
그러자 펜리스군이 일제히 방향을 틀어 로드리크군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다시 그녀가 활을 들자 모두가 똑같이 활을 들었다.
파아아아앗!
화살이 집요할 정도로 쉬지 않고 로드리크군에게 쏘아져 나갔다. 도망가는 로드리크군의 중후열은 궁기병들이 화살을 쏘는 대로 맞아 줄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악!"
"멈추지 마라! 어떻게든 달려라!"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그래도 테넌트의 빠른 판단 덕분에 로드리크군은 상당수가 전장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루미나는 궁기병들을 이끌고 따라가다가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그만. 어차피 이제 따라잡기는 늦었다. 살아 있는 말부터 챙겨라. 남은 자들은 포로로 끌고 간다."
그녀는 덤덤히 명령을 내렸다.
서부 최강이라더니 제법 뛰어난 자가 있는 모양이다. 자신들이 다가가는 것을 금세 눈치채고 움직였다.
'적이 조금만 늦게 움직였어도 충분히 로드리크 후작을 잡았을 텐데.'
조금 아쉽긴 했지만, 공명심이 크지 않은 그녀였기에 쉽게 마음을 접을 수 있었다.
"그래도 총관님 말씀처럼 정말 여기에 있네."
현재 지셀과 클로드는 다크를 이용해 빠르게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지셀이 다크의 의식을 최대한 여러 개로 분리해 사방에 뿌렸기 때문이다. 엄청난 마나가 소모되었지만 지셀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이 전쟁에서 위협 요소는 전부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허겁지겁 전장을 벗어난 로드리크군은 추격이 없는 걸 확인하고 속도를 늦췄다.
"허억, 허억.... 도대체 어디에서 적이 나타났다는 말이냐."
숨을 가쁘게 내쉬는 로드리크 후작에게 테넌트가 말했다.
"엘프 궁기병은 실버라이트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입니다. 그쪽에서 보낸 모양입니다."
"이이익! 그러니까 그곳을 점령했어야 하는데!"
만약 실버라이트를 점령했다면 저 엘프들을 다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감히 적들이 이렇게 건방지게 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분하고 원통했다.
"이제 추적을 뿌리쳤으니 조금 쉬었다 가자."
"아직 위험 지역입니다. 북부의 경계를 벗어날 때까지는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이제 더 찾아올 놈은 없지 않으냐."
페르디움군도, 실버라이트의 추격군도 떨쳐 냈다. 펜리스 백작은 아직 서부에 있을 테니 자신들을 쫓을 자는 더 없었다.
테넌트는 그래도 고개를 저었다.
"식량도 없고 이미 1천의 병사를 또 잃었습니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빨리 북부를 벗어나는 게 낫습니다."
"끄응.... 알겠다."
로드리크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테넌트의 말에 따랐다. 조금 전에는 진짜 죽을 수도 있었던 것을, 테넌트 덕분에 살았기 때문이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패잔병 꼴이 된 그들은 다시 수도를 향해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진군이 멈췄다.
"으음... 협곡이로군."
테넌트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이곳을 통과하면 가장 빠르게 북부를 빠져나갈 수 있다.
문제는 매복이다. 만약 협곡 안에 매복이 있다면 큰 피해를 볼 것이다.
그렇다고 정찰을 보낼 여유는 없었다. 협곡을 뒤지고 소식을 가져오는 데는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린다.
테넌트가 고민하고 있을 때 로드리크 후작이 말했다.
"그냥 협곡으로 들어가자."
"후작님... 협곡은 위험이...."
"이제 막 실버라이트에서 온 추격군이 붙었다. 협곡에 미리 매복할 정도라면 그 전에 우리를 포위했을 거 아니냐?"
"으음...."
일리 있는 말이었다. 실버라이트에서 군대를 보내 여기에 매복을 시킬 거였으면 그 시간에 이미 자신들을 따라잡았을 것이다.
아까 만났던 궁기병들이야말로 실버라이트가 가장 빨리 보낸 군대가 분명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협곡을 통과하겠습니다."
테넌트의 말에 로드리크 후작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판단이 다른 이들보다 더 정확하고 뛰어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 몰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하지만 협곡 중간을 지날 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다들 조금은 마음을 놓고 편히 움직였다.
"허허허, 멍청한 놈들. 만약 내가 쫓았다면 아까 궁기병을 거기로 보낼 것이 아니라 미리 여기에 매복했을 것이다."
로드리크 후작이 거만한 웃음을 지었다. 역시 펜리스 놈들은 운이 좋아 승리했지, 제대로 붙었으면 상대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또 열이 오르고 분했다.
"젠장! 내 언젠가 다시 이 북부를 침공해서 모두 죽여...."
"와아아아아!"
로드리크 후작의 혼잣말은 중간에 들려온 큰 함성에 끊기고 말았다.
"뭐, 뭐냐!"
로드리크군은 모두가 당황했다. 협곡의 양옆에서 갑자기 군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곧 누군가가 새로이 나타난 군대를 보고 중얼거렸다.
"페, 펜리스 용병단...."
펜리스 영지의 깃발이 아닌, 펜리스 용병단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영지의 군대와는 분리된 단체였지만 그래도 어차피 같은 편이었다.
그들을 보고 로드리크군은 사색이 되었다.
"왜 저들이 이곳에...."
"도대체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던 거야!"
그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용병단 쪽에서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쏴라!"
파아아아앗!
수천 개의 화살이 로드리크군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앞으로 달려라!"
"협곡을 돌파해야 한다!"
좁은 협곡에서 공격당하자 전보다 더 피하기가 힘들어졌다. 어쩔 수 없이 로드리크군은 대항을 포기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어서 달려라! 어서!"
테넌트는 얼이 빠진 로드리크 후작을 강제로 끌고 가며 목이 쉬어라 외쳤다.
자칫하면 협곡 안에서 전멸할 수도 있었다.
"크읏!"
테넌트는 달리면서 이를 악물었다. 협곡을 빠져나가는 길목에는 위에서 내려올 수 있는 길도 있었다.
그곳에서 수많은 용병이 길을 막으러 쏟아져 내려왔다.
그들의 선두에는 서부에서 온 드레이크 용병단이 있었다.
"로드리크 후작을 죽여라!"
드레이크 용병단의 단장, 도미닉의 외침이 쩌렁쩌렁하게 협곡에 울렸다.
"와아아아아!"
달려오는 로드리크군을 향해 용병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나아갔다.
테넌트 또한 검을 뽑으며 크게 외쳤다.
"뚫어라!"
싸울 생각은 없다. 이 좁은 협곡에서 싸워 봤자 좋을 게 없다. 자칫 잘못하면 로드리크 후작이 죽을 것이다.
카앙! 카아앙! 카앙!
테넌트는 서부제일검이라는 명성답게 용병들을 헤치며 나아갔다. 그의 기마술 또한 서부에서 제일가는 실력이라 할 수 있었다.
로드리크 후작과 몇몇 가신들은 그의 뒤에 바짝 붙어 쫓아가는 게 전부였다.
"로드리크 후작!"
도미닉이 눈에 불을 켜며 그들을 쫓았다. 하지만 그는 테넌트의 뒤를 따르던 호위 기사들과 병사들에게 막혔다.
"비켜라!"
콰앙! 콰아앙! 콰앙!
지셀을 만나고 전보다 훨씬 더 좋은 마나 연공법과 검술을 얻게 된 도미닉이다. 거기에 풍부한 룬스톤을 바탕으로 마나 집속진까지 써서 수련할 수 있었다.
그는 전보다 더 강해진 실력으로 로드리크의 기사들과 병사들을 처죽였다.
"형제들의 원한을 갚을 시간이다!"
도미닉이 외치자 드레이크 용병단의 다른 이들도 똑같이 외쳤다.
"형제들의 원한을 갚을 시간이다!"
그 소리는 협곡이 터질 정도로 울려 퍼졌다. 당연히 도망가는 로드리크 후작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저 천박하고 하찮은 용병들이 감히 나를!"
드레이크 용병단 때문에 이 전쟁의 명분이 생긴 셈이다. 그런데 이제는 저놈들에게 쫓기고 있으니 복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테넌트! 테넌트! 저딴 용병들에게서까지 도망을 가야 한단 말이냐!"
"...."
로드리크 후작의 외침에도 테넌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이곳을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
하지만 로드리크 후작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테넌트! 당장 저 비루한 놈들을 죽이란 말이다!"
로드리크 후작이 계속 발악하던 그때, 테넌트가 갑자기 분노한 표정으로 뒤를 돌며 검을 집어 던졌다.
퍼억!
"히익!"
로드리크 후작은 깜짝 놀라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테넌트의 검에 맞은 자는 로드리크 후작의 옆에 있던 호위 기사였다. 그는 로드리크 후작에게 검을 찔러넣으려 하고 있었다.
"그르륵...."
기사는 목이 반쯤 베여 말에서 떨어졌다.
테넌트는 다시 말고삐를 강하게 쥐며 말했다.
"후작님, 지금은 도망가는 데만 집중하셔야 합니다."
"아, 알겠네."
로드리크 후작은 주눅 든 목소리로 답했다. 호위 기사까지 자신을 배신하려 한다. 이제는 정말 목숨이 위태롭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두두두두두!
테넌트의 활약 덕분에 로드리크군의 선두는 겨우 협곡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뒤에서는 끊임없이 비명이 들려왔다.
"으아아아악!"
"살려 줘!"
"항복! 항복할게!"
그간 분노를 쌓아 왔던 드레이크 용병단은 전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결국 로드리크군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보고 말았다.
"로드리크 후작!"
로드리크군을 완전히 짓밟은 도미닉이 크게 외치며 후작의 뒤를 쫓았다. 드레이크 용병단도 함께였다.
어떻게든 로드리크 후작을 잡아 죽이겠다는 의지가 느껴질 정도였다.
테넌트는 그 모든 걸 무시하고 오직 달리기만 했다. 로드리크 후작도 이제는 말없이 땀만 뻘뻘 흘리며 그의 뒤를 쫓기에 바빴다.
하지만 그들은 곧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협곡을 빠져나오고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른 군대가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일렬도 길게 진을 친 그 군대의 수는 얼핏 봐도 1만은 되어 보였다.
가장 앞에 선 자를 본 테넌트는 침중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벌써 북부에 도착했구나...."
검은 말에 올라타 창을 늘어뜨리고, 누구보다 여유 있는 웃음을 짓고 있는 사내.
북부의 최강자라 불리는 펜리스 백작이 협곡 앞을 막고 있었다.
408화 수련 상대로는 최적이군. (1)
'정말 끝이구나.'
테넌트는 고개를 숙였다.
뒤에서는 펜리스 용병단이 남은 로드리크군을 짓밟으며 쫓아오고, 앞에는 펜리스 백작의 군대가 길을 막고 있다.
이제는 도망갈 수 없었다.
쫓기고 쫓기고 쫓기다가 결국 막다른 곳에 들어선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펜리스군은 상대가 어디로 이동하는지, 아군이 어디로 가는지 다 알고 있었다. 서로가 떨어져 있는데도 유기적으로 빈틈없이 움직였다.
'대단하다.'
대단하다는 말로도 부족하지만 다른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는 문장가가 아니라 기사였으니까.
완벽하게 패배했다. 펜리스 백작뿐만이 아니라 다른 지휘관들도 로드리크군 지휘부를 뛰어넘었다.
어떻게 그런 인재들이 죄다 북부에 몰려 있는 걸까.
'어쩌면....'
어쩌면 펜리스 백작이 서부까지 우회해서 들어갔던 그때, 자신들의 패배는 이미 결정된 것이었던지도 몰랐다.
"테넌트! 테넌트! 이제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로드리크 후작이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그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후작님...."
"어서, 어서 달리자! 네 실력이면 뚫고 갈 수 있지 않으냐? 분명 그럴 수 있을 것이다."
"...."
뚫을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테넌트는 자신의 실력과 기마술에 자신이 있었다. 펜리스 백작이 아무리 마스터라 해도 전력으로 도망가는 자신을 잡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 혼자만 도망간다면 말이다.
"모두 말에서 내려라."
테넌트의 말에 로드리크의 남은 기사와 병사들이 말에서 내렸다. 이제 그 수는 고작 백여 명에 불과했다.
로드리크 후작이 다시 불안해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째서 말에서 내리라고 하는 것이냐! 이 인원이 전부 돌격하면 충분히 도망갈 수 있을 것이다."
"후작님, 말에서 내리십시오."
"싫다! 내가 왜 내린단 말이냐! 난 이곳을 떠날 거다! 어서 앞장서라! 어서 앞장서란 말이다!"
테넌트는 옆에 있는 기사들에게 말했다.
"후작님을 거들어라."
"놔라! 이놈들!"
로드리크 후작이 말에서 내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쳤지만 기사들의 힘에는 이기지 못했다.
"으아아! 이놈들! 지금 날 배신하려 하는 것이냐! 날 넘기고 목숨을 구걸하려는 게 아니냐! 이 명예도 모르는 쓰레기 같은 놈들아!"
로드리크 후작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테넌트와 후작가의 기사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기사들은 그저 로드리크 후작이 도망가지 못하게 양팔을 꽉 잡고 있을 뿐이었다.
"놔라! 놓으란 말이다!"
그렇게 로드리크 후작이 발악할 때, 협곡 안의 로드리크군을 전멸시킨 도미닉이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으며 달려왔다.
"로드리크 후작! 죽여 버리겠다!"
피범벅이 된 그는 눈에서 무시무시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어떻게든 로드리크 후작을 직접 죽이겠다는 결의가 느껴졌다.
누가 나가서 막든 도미닉은 미친 듯이 싸울 것이다. 저 원한에 가득 찬 자를 막는 건 불가능했다.
이제 그러고 싶지 않은 테넌트가 말했다.
"모두 무기를 버려라."
철그렁, 철그렁.
기사들과 병사들이 바로 무기에서 손을 놓았다. 그들도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았다.
도미닉은 달려오다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이런다고 내가 봐줄 거 같으냐? 항복한 자들은 살려 줘도 로드리크 후작은 살려 줄 수 없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지셀도 흑왕을 타고 여유롭게 다가와 말했다.
"이제 항복인가? 생각보다는 시시하군."
그 말에 로드리크 후작이 지셀을 노려보았다.
"펜리스 백작.... 네놈이 감히...."
로드리크 후작은 훅 치밀어오르는 분노에 얼굴이 시뻘게졌다.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도 패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며 저주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기사들마저 전부 자신을 배신한 상황에서 마음대로 굴 수는 없었다. 당장 죽고 싶지는 않으니 거친 숨만 내쉴 뿐이었다.
로드리크 후작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테넌트를 노려보았다.
"테넌트.... 내가 널 얼마나 아꼈는데.... 역시 재능이 뛰어나도 출신이 비천한 놈은 어쩔 수가 없구나. 이 천박한 배신자 같으니라고."
"...."
로드리크 후작의 말대로, 테넌트는 본래 농노의 자식이었다. 하지만 그의 엄청난 재능을 알아본 로드리크 후작은 테넌트를 직접 거둬들였다.
덕분에 그는 서부제일검이라는 명성을 얻을 정도로 성장해 후작가의 기사단장이 되었다. 후작가의 도움으로 단승 작위까지 얻어 귀족이 되었다.
'그런데 은인을 이렇게 배신해?!'
로드리크 후작은 침을 튀기며 말했다.
"역시 너 같은 놈을 거두면 안 됐었다. 내가 키우던 개새끼 주제에 감히 주인을 배신해? 그것도 저 북부의 애송이에게 항복하려고?"
한참 동안 말이 없던 테넌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러고 있느냐? 왜 끝까지 도망가지 않고 날 붙잡고 있느냔 말이다!"
"도망도 가지 않을 것입니다."
"뭐?"
테넌트가 가슴에 주먹을 올려 군례를 취한 뒤 비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제 제가 후작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게 뭐냐?"
"제 주군이 적들에게 더 이상의 치욕을 당하지 않게 하는 것."
"너... 지금 무슨 소리를...."
"그것이 제 주군의 명예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푸욱!
테넌트의 검이 번개같이 로드리크 후작의 배를 찔렀다.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그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컥, 커억...."
호위 기사들에게 팔을 잡힌 로드리크 후작은 제대로 반항조차 못 하고 배가 뚫리고 말았다.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 가는 그를 바라보며, 테넌트는 피눈물을 흘렸다.
"후작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갑작스러운 테넌트의 행보에 도미닉도 멈칫했다. 로드리크 후작은 자신이 죽이려 했고 지셀에게 허락도 받은 상태였다.
테넌트가 저렇게 먼저 손을 쓸 줄은 몰랐다.
로드리크 후작의 숨이 끊어지자 테넌트가 검을 뽑으며 말했다.
"모두 무릎을 꿇고 펜리스에 항복하라. 더 이상 희생할 필요는 없다."
로드리크의 살아남은 병사들이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기사들은 달랐다.
무릎을 꿇은 자도 있었지만 차마 그러지도 못하는 자도 있었다.
깃발을 바꿔 든 기사들은 평생 오명에 시달려야 한다. 형편없는 영주에게 가거나 신분을 바꾸고 살아야 한다.
서부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자긍심을 품고 살아왔던 이들은 그런 삶을 살 자신이 없었다.
스각!
그런 기사들은 품에서 단검을 꺼내 알아서 자결하고 쓰러졌다.
하지만 테넌트는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지셀을 노려보며 자신의 검집을 땅바닥에 버릴 뿐이었다.
그러고는 모두에게 들릴 정도로 크게 외쳤다.
"나! 로드리크 후작가의 기사단장이자 서부제일검 테넌트는!"
그가 검을 앞으로 뻗으며 지셀을 가리켰다.
"북부제일검, 펜리스 백작에게 결투를 신청하오."
모두가 침묵을 지켰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그냥 쓸어버리면 됐는데 테넌트가 로드리크 후작을 직접 죽이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턱.
지셀이 흑왕에서 내렸다. 그는 창을 버리고 검을 뽑았다.
"그 기개는 높이 사 주도록 하지."
"고맙소."
테넌트가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물론 지셀은 기사도에 별 관심이 없다. 애초에 그의 정체성은 귀족이라기보다 용병에 가까웠다.
하지만 기사도를 지키는 상대를 무시할 정도로 몰상식하지는 않다. 또한 실력자가 청하는 결투를 피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테넌트는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만한 실력자였다.
"와라. 서부제일검의 실력을 한번 보자."
테넌트가 미소를 지었다. 한 지역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실력자에게 누가 감히 저렇게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상대에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 저자야말로 왕국제일검의 자리를 다투는,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자였으니까.
지셀이 수락한 이상 다른 이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모두가 거리를 벌리며 넓게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파아앙!
테넌트가 바로 뛰쳐나가며 검을 휘둘렀다. 어지간한 기사들도 순간 그의 모습을 놓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카아앙!
"제법이군."
지셀이 씨익 웃으며 테넌트의 검을 막았다. 아무리 나태함으로 유명한 서부라고 해도 서부제일검의 명성은 괜히 얻은 게 아니었다.
카앙! 카앙! 카앙!
순식간에 수십 번의 공방이 오갔다. 지셀은 일부러 모든 힘을 폭발시키지 않았다.
테넌트는 순수한 검술로만 본다면 펜리스의 누구보다 뛰어나다.
절제된 기도와 군더더기 없는 검술. 그가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런 자와 싸우는 건 즐겁다. 효율만 따지기에는 아까웠다.
지셀은 마나를 억제하고 검술로만 승부를 보려 했다. 그 또한 스스로의 검술에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카카카카캉!
두 사람의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어느새 밤이 되어 어두워진 공간에서 붉은 선과 푸른 선이 쉴 새 없이 얽히며 춤을 추었다.
펜리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영주와 저 정도로 싸울 수 있다니."
"서부에도 강자가 있었구나."
"아까운 실력이야."
이들은 모두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고 있다. 일대일 대결로 자신들의 영주를 이길 수 있는 자는 왕국에 거의 없을 것이다.
설사 상대가 서부 제일의 실력자라 해도 말이다.
하지만 질 걸 알면서도 무릎 꿇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테넌트의 모습에 그들도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콰앙! 콰앙! 콰앙!
두 사람의 결투는 갈수록 힘을 더해 갔다. 두 사람이 검을 한번 휘두르고 맞부딪칠 때마다 사방으로 충격파가 퍼지며 땅이 패었다.
'테넌트, 아마 전생에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었지?'
전생에 용병왕으로서 서부를 불태울 때, 그의 앞을 막은 테넌트는 마스터 초입 수준에 올라 있었다.
그때는 이렇게 서로의 검술을 주고받을 필요조차 없었다. 분노로 가득한 지셀의 검은 가차 없이 적을 찢어 버렸으니까.
어쨌든 테넌트는 미래에 확실하게 마스터에 오를 만한 재능을 가진 자다.
'여기서 죽이는 건 아깝지만....'
이런 자를 거둔다면 앞으로의 싸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지셀 또한 굳이 이 자를 죽일 만큼 원한이 깊지도 않았다.
하지만 테넌트는 절대 굽히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오만한 만큼 자긍심도 큰 기사였으니까.
'네 재능만큼은 원 없이 풀고 가라.'
지셀의 검술이 점점 바뀌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정석적인 검술로 테넌트와 어울렸다면, 이제는 광폭하게 모든 걸 찢어발길 정도로 거칠어진 검술을 내보였다.
카카카카카칵!
테넌트는 눈을 부릅떴다. 상대의 검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저 수많은 검격 하나하나에 의지가 있는 것만 같았다.
"크읏!"
테넌트는 이제 막기에만 급급했다.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 정도였단 말인가!'
상대가 모든 힘을 다하지 않는다는 건 진작에 알았다. 검을 섞을수록 와닿았다.
펜리스 백작은 마나를 억제하고 순수하게 검술 대결로 승부를 보려 했던 것이다. 소문의 그 검은 악마와 같은 형상을 보이지 않는 것이 그 증거였다.
'검술만큼은 뒤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거늘....'
적어도 검술에서 우위를 보여 준다면 서부의 자존심은 살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누구의 검술이 더 훌륭한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어졌다.
카앙! 카앙! 카앙!
'죽는다!'
테넌트는 사방에서 덮쳐 오는 검격을 어떻게든 피해 보려 했다.
이미 죽음을 각오했다. 하지만 '진짜' 죽음이 코앞에 오자 모든 신경이 곤두섰다.
펜리스 백작은 마나의 양뿐만이 아니라 검술조차도 아득히 높은 경지에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어찌 인간의 검술이 이렇게 뛰어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나의 재능은 별거 아니었단 말인가....'
테넌트는 어릴 때부터 검술에 큰 두각을 드러냈다. 어떻게 휘둘러야 하고 상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본능적으로 보였다.
자신이 남들과는 다른 재능을 타고났다는 걸 알았다. 서부의 최강자가 되는 것 또한 정해진 운명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벽에 막혔다. 분명 그 너머의 세상을 얼핏 보았음에도 벽을 넘지는 못했다.
그렇게 하염없이 세월을 보냈건만.
'아아.... 이제 무엇이 부족했는지 알겠구나....'
아무리 노력해도 보이지 않던 길이, 죽음을 앞에 두자 점점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을 어떻게든 죽이려고 날아오는 저 검을 보자 몸 곳곳이 찌릿해졌다. 이 상황을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모든 신경이 날카롭게 날이 섰다.
마나가 한올 한올 풀리며 미세한 근육까지 흘러 들어갔다.
목숨이 경각에 이르자 그간 추상적으로만 잡혀 있던 개념이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은 지금 살기 위해 부족함을 채우며 한 단계 더 진화한 것이다.
화아아악!
새로운 세상이 보인다. 극한의 공포 속에서 얻은 극한의 깨달음이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었다.
느리다.
시간의 흐름이 달라졌다. 주변의 모든 이들이 멈춘 것만 같았다.
모든 감각이 주변의 정보를 생생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것이....
'이것이 벽 너머의 세계란 말인가!'
희열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간 자신이 골몰하며 갈고닦았던 모든 것이 하나의 의지가 되어 세상에 펼쳐졌다.
파아아아악!
갑자기 테넌트의 검에서 어마어마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지셀의 몸이 검은 기운으로 둘러싸였다.
콰아아아앙!
408화 수련 상대로는 최적이군. (1)
'정말 끝이구나.'
테넌트는 고개를 숙였다.
뒤에서는 펜리스 용병단이 남은 로드리크군을 짓밟으며 쫓아오고, 앞에는 펜리스 백작의 군대가 길을 막고 있다.
이제는 도망갈 수 없었다.
쫓기고 쫓기고 쫓기다가 결국 막다른 곳에 들어선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펜리스군은 상대가 어디로 이동하는지, 아군이 어디로 가는지 다 알고 있었다. 서로가 떨어져 있는데도 유기적으로 빈틈없이 움직였다.
'대단하다.'
대단하다는 말로도 부족하지만 다른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는 문장가가 아니라 기사였으니까.
완벽하게 패배했다. 펜리스 백작뿐만이 아니라 다른 지휘관들도 로드리크군 지휘부를 뛰어넘었다.
어떻게 그런 인재들이 죄다 북부에 몰려 있는 걸까.
'어쩌면....'
어쩌면 펜리스 백작이 서부까지 우회해서 들어갔던 그때, 자신들의 패배는 이미 결정된 것이었던지도 몰랐다.
"테넌트! 테넌트! 이제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로드리크 후작이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그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후작님...."
"어서, 어서 달리자! 네 실력이면 뚫고 갈 수 있지 않으냐? 분명 그럴 수 있을 것이다."
"...."
뚫을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테넌트는 자신의 실력과 기마술에 자신이 있었다. 펜리스 백작이 아무리 마스터라 해도 전력으로 도망가는 자신을 잡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 혼자만 도망간다면 말이다.
"모두 말에서 내려라."
테넌트의 말에 로드리크의 남은 기사와 병사들이 말에서 내렸다. 이제 그 수는 고작 백여 명에 불과했다.
로드리크 후작이 다시 불안해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째서 말에서 내리라고 하는 것이냐! 이 인원이 전부 돌격하면 충분히 도망갈 수 있을 것이다."
"후작님, 말에서 내리십시오."
"싫다! 내가 왜 내린단 말이냐! 난 이곳을 떠날 거다! 어서 앞장서라! 어서 앞장서란 말이다!"
테넌트는 옆에 있는 기사들에게 말했다.
"후작님을 거들어라."
"놔라! 이놈들!"
로드리크 후작이 말에서 내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쳤지만 기사들의 힘에는 이기지 못했다.
"으아아! 이놈들! 지금 날 배신하려 하는 것이냐! 날 넘기고 목숨을 구걸하려는 게 아니냐! 이 명예도 모르는 쓰레기 같은 놈들아!"
로드리크 후작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테넌트와 후작가의 기사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기사들은 그저 로드리크 후작이 도망가지 못하게 양팔을 꽉 잡고 있을 뿐이었다.
"놔라! 놓으란 말이다!"
그렇게 로드리크 후작이 발악할 때, 협곡 안의 로드리크군을 전멸시킨 도미닉이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으며 달려왔다.
"로드리크 후작! 죽여 버리겠다!"
피범벅이 된 그는 눈에서 무시무시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어떻게든 로드리크 후작을 직접 죽이겠다는 결의가 느껴졌다.
누가 나가서 막든 도미닉은 미친 듯이 싸울 것이다. 저 원한에 가득 찬 자를 막는 건 불가능했다.
이제 그러고 싶지 않은 테넌트가 말했다.
"모두 무기를 버려라."
철그렁, 철그렁.
기사들과 병사들이 바로 무기에서 손을 놓았다. 그들도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았다.
도미닉은 달려오다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이런다고 내가 봐줄 거 같으냐? 항복한 자들은 살려 줘도 로드리크 후작은 살려 줄 수 없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지셀도 흑왕을 타고 여유롭게 다가와 말했다.
"이제 항복인가? 생각보다는 시시하군."
그 말에 로드리크 후작이 지셀을 노려보았다.
"펜리스 백작.... 네놈이 감히...."
로드리크 후작은 훅 치밀어오르는 분노에 얼굴이 시뻘게졌다.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도 패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며 저주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기사들마저 전부 자신을 배신한 상황에서 마음대로 굴 수는 없었다. 당장 죽고 싶지는 않으니 거친 숨만 내쉴 뿐이었다.
로드리크 후작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테넌트를 노려보았다.
"테넌트.... 내가 널 얼마나 아꼈는데.... 역시 재능이 뛰어나도 출신이 비천한 놈은 어쩔 수가 없구나. 이 천박한 배신자 같으니라고."
"...."
로드리크 후작의 말대로, 테넌트는 본래 농노의 자식이었다. 하지만 그의 엄청난 재능을 알아본 로드리크 후작은 테넌트를 직접 거둬들였다.
덕분에 그는 서부제일검이라는 명성을 얻을 정도로 성장해 후작가의 기사단장이 되었다. 후작가의 도움으로 단승 작위까지 얻어 귀족이 되었다.
'그런데 은인을 이렇게 배신해?!'
로드리크 후작은 침을 튀기며 말했다.
"역시 너 같은 놈을 거두면 안 됐었다. 내가 키우던 개새끼 주제에 감히 주인을 배신해? 그것도 저 북부의 애송이에게 항복하려고?"
한참 동안 말이 없던 테넌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러고 있느냐? 왜 끝까지 도망가지 않고 날 붙잡고 있느냔 말이다!"
"도망도 가지 않을 것입니다."
"뭐?"
테넌트가 가슴에 주먹을 올려 군례를 취한 뒤 비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제 제가 후작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게 뭐냐?"
"제 주군이 적들에게 더 이상의 치욕을 당하지 않게 하는 것."
"너... 지금 무슨 소리를...."
"그것이 제 주군의 명예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푸욱!
테넌트의 검이 번개같이 로드리크 후작의 배를 찔렀다.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그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컥, 커억...."
호위 기사들에게 팔을 잡힌 로드리크 후작은 제대로 반항조차 못 하고 배가 뚫리고 말았다.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 가는 그를 바라보며, 테넌트는 피눈물을 흘렸다.
"후작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갑작스러운 테넌트의 행보에 도미닉도 멈칫했다. 로드리크 후작은 자신이 죽이려 했고 지셀에게 허락도 받은 상태였다.
테넌트가 저렇게 먼저 손을 쓸 줄은 몰랐다.
로드리크 후작의 숨이 끊어지자 테넌트가 검을 뽑으며 말했다.
"모두 무릎을 꿇고 펜리스에 항복하라. 더 이상 희생할 필요는 없다."
로드리크의 살아남은 병사들이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기사들은 달랐다.
무릎을 꿇은 자도 있었지만 차마 그러지도 못하는 자도 있었다.
깃발을 바꿔 든 기사들은 평생 오명에 시달려야 한다. 형편없는 영주에게 가거나 신분을 바꾸고 살아야 한다.
서부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자긍심을 품고 살아왔던 이들은 그런 삶을 살 자신이 없었다.
스각!
그런 기사들은 품에서 단검을 꺼내 알아서 자결하고 쓰러졌다.
하지만 테넌트는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지셀을 노려보며 자신의 검집을 땅바닥에 버릴 뿐이었다.
그러고는 모두에게 들릴 정도로 크게 외쳤다.
"나! 로드리크 후작가의 기사단장이자 서부제일검 테넌트는!"
그가 검을 앞으로 뻗으며 지셀을 가리켰다.
"북부제일검, 펜리스 백작에게 결투를 신청하오."
모두가 침묵을 지켰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그냥 쓸어버리면 됐는데 테넌트가 로드리크 후작을 직접 죽이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턱.
지셀이 흑왕에서 내렸다. 그는 창을 버리고 검을 뽑았다.
"그 기개는 높이 사 주도록 하지."
"고맙소."
테넌트가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물론 지셀은 기사도에 별 관심이 없다. 애초에 그의 정체성은 귀족이라기보다 용병에 가까웠다.
하지만 기사도를 지키는 상대를 무시할 정도로 몰상식하지는 않다. 또한 실력자가 청하는 결투를 피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테넌트는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만한 실력자였다.
"와라. 서부제일검의 실력을 한번 보자."
테넌트가 미소를 지었다. 한 지역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실력자에게 누가 감히 저렇게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상대에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 저자야말로 왕국제일검의 자리를 다투는,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자였으니까.
지셀이 수락한 이상 다른 이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모두가 거리를 벌리며 넓게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파아앙!
테넌트가 바로 뛰쳐나가며 검을 휘둘렀다. 어지간한 기사들도 순간 그의 모습을 놓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카아앙!
"제법이군."
지셀이 씨익 웃으며 테넌트의 검을 막았다. 아무리 나태함으로 유명한 서부라고 해도 서부제일검의 명성은 괜히 얻은 게 아니었다.
카앙! 카앙! 카앙!
순식간에 수십 번의 공방이 오갔다. 지셀은 일부러 모든 힘을 폭발시키지 않았다.
테넌트는 순수한 검술로만 본다면 펜리스의 누구보다 뛰어나다.
절제된 기도와 군더더기 없는 검술. 그가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런 자와 싸우는 건 즐겁다. 효율만 따지기에는 아까웠다.
지셀은 마나를 억제하고 검술로만 승부를 보려 했다. 그 또한 스스로의 검술에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카카카카캉!
두 사람의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어느새 밤이 되어 어두워진 공간에서 붉은 선과 푸른 선이 쉴 새 없이 얽히며 춤을 추었다.
펜리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영주와 저 정도로 싸울 수 있다니."
"서부에도 강자가 있었구나."
"아까운 실력이야."
이들은 모두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고 있다. 일대일 대결로 자신들의 영주를 이길 수 있는 자는 왕국에 거의 없을 것이다.
설사 상대가 서부 제일의 실력자라 해도 말이다.
하지만 질 걸 알면서도 무릎 꿇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테넌트의 모습에 그들도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콰앙! 콰앙! 콰앙!
두 사람의 결투는 갈수록 힘을 더해 갔다. 두 사람이 검을 한번 휘두르고 맞부딪칠 때마다 사방으로 충격파가 퍼지며 땅이 패었다.
'테넌트, 아마 전생에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었지?'
전생에 용병왕으로서 서부를 불태울 때, 그의 앞을 막은 테넌트는 마스터 초입 수준에 올라 있었다.
그때는 이렇게 서로의 검술을 주고받을 필요조차 없었다. 분노로 가득한 지셀의 검은 가차 없이 적을 찢어 버렸으니까.
어쨌든 테넌트는 미래에 확실하게 마스터에 오를 만한 재능을 가진 자다.
'여기서 죽이는 건 아깝지만....'
이런 자를 거둔다면 앞으로의 싸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지셀 또한 굳이 이 자를 죽일 만큼 원한이 깊지도 않았다.
하지만 테넌트는 절대 굽히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오만한 만큼 자긍심도 큰 기사였으니까.
'네 재능만큼은 원 없이 풀고 가라.'
지셀의 검술이 점점 바뀌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정석적인 검술로 테넌트와 어울렸다면, 이제는 광폭하게 모든 걸 찢어발길 정도로 거칠어진 검술을 내보였다.
카카카카카칵!
테넌트는 눈을 부릅떴다. 상대의 검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저 수많은 검격 하나하나에 의지가 있는 것만 같았다.
"크읏!"
테넌트는 이제 막기에만 급급했다.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 정도였단 말인가!'
상대가 모든 힘을 다하지 않는다는 건 진작에 알았다. 검을 섞을수록 와닿았다.
펜리스 백작은 마나를 억제하고 순수하게 검술 대결로 승부를 보려 했던 것이다. 소문의 그 검은 악마와 같은 형상을 보이지 않는 것이 그 증거였다.
'검술만큼은 뒤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거늘....'
적어도 검술에서 우위를 보여 준다면 서부의 자존심은 살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누구의 검술이 더 훌륭한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어졌다.
카앙! 카앙! 카앙!
'죽는다!'
테넌트는 사방에서 덮쳐 오는 검격을 어떻게든 피해 보려 했다.
이미 죽음을 각오했다. 하지만 '진짜' 죽음이 코앞에 오자 모든 신경이 곤두섰다.
펜리스 백작은 마나의 양뿐만이 아니라 검술조차도 아득히 높은 경지에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어찌 인간의 검술이 이렇게 뛰어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나의 재능은 별거 아니었단 말인가....'
테넌트는 어릴 때부터 검술에 큰 두각을 드러냈다. 어떻게 휘둘러야 하고 상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본능적으로 보였다.
자신이 남들과는 다른 재능을 타고났다는 걸 알았다. 서부의 최강자가 되는 것 또한 정해진 운명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벽에 막혔다. 분명 그 너머의 세상을 얼핏 보았음에도 벽을 넘지는 못했다.
그렇게 하염없이 세월을 보냈건만.
'아아.... 이제 무엇이 부족했는지 알겠구나....'
아무리 노력해도 보이지 않던 길이, 죽음을 앞에 두자 점점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을 어떻게든 죽이려고 날아오는 저 검을 보자 몸 곳곳이 찌릿해졌다. 이 상황을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모든 신경이 날카롭게 날이 섰다.
마나가 한올 한올 풀리며 미세한 근육까지 흘러 들어갔다.
목숨이 경각에 이르자 그간 추상적으로만 잡혀 있던 개념이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은 지금 살기 위해 부족함을 채우며 한 단계 더 진화한 것이다.
화아아악!
새로운 세상이 보인다. 극한의 공포 속에서 얻은 극한의 깨달음이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었다.
느리다.
시간의 흐름이 달라졌다. 주변의 모든 이들이 멈춘 것만 같았다.
모든 감각이 주변의 정보를 생생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것이....
'이것이 벽 너머의 세계란 말인가!'
희열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간 자신이 골몰하며 갈고닦았던 모든 것이 하나의 의지가 되어 세상에 펼쳐졌다.
파아아아악!
갑자기 테넌트의 검에서 어마어마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지셀의 몸이 검은 기운으로 둘러싸였다.
콰아아아앙!
409화 수련 상대로는 최적이군. (2)
마스터는 자신만의 세계를 완성한 자다.
실전을 한 번도 겪지 않은 사람도, 검을 궁구하고 이치를 깨달으면 마스터가 될 수 있다.
수십만 번의 검을 휘두르며 노력하다가 깨달음을 얻은 자도, 미친 듯이 마나만 늘리다가 깨달음을 얻은 자도 마스터가 될 수 있다.
이렇듯 깨달음의 형태는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테넌트는 지금껏 어떤 깨달음도 얻지 못했다. 그 뛰어난 재능이 앞을 막고 있었던 탓이었다.
누구든 쉽게 이겼으니 젊었을 적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실전을 치른 적이 없었다. 누구든 쉽게 이겼으니 누군가를 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지 않았다.
검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 스스로 궁구하고 궁구해 본 적도 없었다.
그리하여 자신이 가진 재능과 오만함에 갇혀버린 것이었다.
'우리는 정말 나태했구나.'
로드리크 후작이 그랬고 자신이 그랬다. 서부 최강이라는 이름 아래에 안주하며 세상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가장 위에 선 자들이 그러니 그들을 따르는 이들도 함께 나태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북부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더 강해지기 위해 노력해 왔다.
자신들이 전쟁에 패한 건 당연한 결과였다.
콰아아앙!
지셀과 테넌트의 검이 한번 부딪치고 두 사람의 거리가 벌어졌다.
검은 기운에 휩싸여 붉게 눈을 빛내던 지셀이 물었다.
"드디어 그 뛰어난 재능이 오만함을 벗고 벽을 넘었군. 항복할 생각은 없나?"
지셀이 누군가를 회유하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하물며 적으로 만난 자라면 더더욱 말이다.
하지만 테넌트는 고개를 저었다.
"주군이자 은인을 직접 죽인 몸. 설사 이 승부에서 이기더라도 자결할 생각이오."
테넌트는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검에서는 푸른색의 오러 블레이드가 길게 뻗어 있었다.
"그게 서부제일검으로서의 내 긍지요."
"인정하지."
파아앙!
지셀이 빛살처럼 쏘아져 나가며 검을 휘둘렀다.
이제 상대는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 더 봐줄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상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수련 상대로는 최적이군."
콰아아앙!
지셀의 검을 막은 테넌트가 힘겹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쉽지 않을 거요."
콰아앙!
두 사람의 검이 부딪칠 때마다 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대결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더 멀리 피했다.
구오오오오!
두 사람의 주변은 마나의 충돌로 인해 숨도 쉬지 못하는 진공 상태가 되었다. 아예 공기조차 들어오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빠져나온 마나가 주변을 맴돌며 거대한 회오리가 생겨났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경악했다.
"이, 이게 마스터의 싸움인가...."
"어찌 인간이 이런 힘을...."
마법을 쓴 것도 아닌데 거대한 회오리가 만들어졌다. 그것도 인위적으로 세상의 법칙을 비튼 게 아니라, 순수한 힘으로 자연 현상을 일으킨 것이다.
콰아아아앙!
검이 한번 부딪칠 때마다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만약 가까이 있었다면 고막이 터져 나갔으리라.
콰앙! 콰아앙! 콰아앙!
과연 테넌트는 조금 전과 다르게 엄청난 힘을 뿜어내었다.
길게 뻗은 푸른빛의 오러 블레이드는 지셀의 검붉은 오러 블레이드를 훌륭하게 막아 냈다.
파앗!
때로는 테넌트의 검이 지셀의 검붉은 장막을 뚫고 들어가기도 했다. 검에 맞은 지셀의 몸에서는 검붉은 연기가 미친 듯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거기까지가 테넌트의 한계였다.
콰아앙!
"크윽!"
지셀이 번개같이 휘두른 검에 테넌트의 왼팔이 어깨부터 잘려 나갔다.
콰아아앙!
테넌트는 힘겹게 반격했지만 지셀은 한 박자 빠르게 그의 가슴을 갈랐다.
이제 막 마스터에 오른 테넌트는 마나도 검술도 지셀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콰앙! 콰아앙!
어느새 테넌트의 몸은 걸레짝이 되었다. 찬란하게 빛나던 오러 블레이드의 빛도 점점 깜빡이며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래도 테넌트는 웃었다.
"기사로서 이런 싸움을 해 보고 죽을 수 있다니, 크나큰 영광이오!"
그토록 바라던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 다른 마스터와 목숨을 걸고 결투를 한다. 그 상대는 북부의 신성이자 최강자라 불리는 펜리스 백작.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상대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기사도 이런 경험을 하기는 힘들 것이다.
"후회는 없소이다!"
콰아아아아아!
테넌트가 모든 힘을 끌어내어 지셀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방어 따위는 이제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이 일격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았을 뿐이다.
테넌트의 거대한 오러 블레이드가 지셀을 부술 기세로 날아왔다.
"훌륭하다."
지셀이 마주 웃으며 검을 휘둘렀다.
두 사람의 검이 다시 부딪쳤다.
콰아아아앙!
어두워진 주변을 환하게 밝히며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구경하던 사람들의 시야가 순간적으로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리고 그 빛이 사라졌을 때.
주변을 갈기갈기 찢어 대던 회오리도 사라지고 사방이 고요해졌다.
테넌트가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빛나던 오러 블레이드는 사라지고, 검날은 반쪽만 남아 있었다.
그에 반해 지셀의 오러 블레이드는 여전히 거친 기운을 뿜어 내오고 있었다.
무엇이든 벨 수 있다는 오러 블레이드가 상대의 오러 블레이드에 베여 사라진 것이다.
스윽.
테넌트의 목에서 핏물이 새어 나와 붉은 선을 그렸다.
목이 떨어질 정도로 깊게 베인 건 아니지만, 한 사람의 목숨을 거두기엔 충분히 깊은 상처였다.
테넌트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입가에도 한줄기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고맙...소."
쿠웅!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바닥에 쓰러졌다.
"후우...."
지셀이 한숨을 내쉬자 그를 감싸고 있던 기운이 사라졌다.
몸 곳곳에 상처가 있고 상당히 헝클어진 모습이었지만, 문제가 될 만큼 큰 상처는 없었다.
지셀 또한 수련을 거듭하며 전생에 이룬 경지에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잠시 테넌트의 시체를 바라보던 지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포로들을 챙기고 클로드에게 연락을 취해라."
침묵으로 가득한 전장을 둘러보며 지셀이 피식 웃었다.
"우리가 승리했다고. 전쟁은 끝났다."
"와아아아아!"
승리 선언이 나오자 그제야 사람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무기를 들어 올렸다.
북부 최강과 서부 최강의 싸움은.
북부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이 났다.
* * *
"엣헴, 엣헴."
클로드가 거드럭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와 마주칠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이번 전쟁에서 기가 막힌 전술로 실버라이트뿐만 아니라 다른 성까지 지켜 내었다.
행정 일은 사실 아무리 잘해도 잘한 티가 많이 나지 않는다. 클로드가 아무리 훌륭하게 살림을 꾸려도, 특유의 깐족거리는 성격 탓에 그다지 인정을 받지 못했다.
실제로 삶이 나아지는 걸 느낀 사람들도 그저 영주 덕분이라고 지셀만 칭송했다.
하지만 전쟁에서는 단 한 번만 활약해도 사람들의 인식을 바꿀 수 있었다.
영지민들은 모두 클로드를 다시 보게 되었다.
"역시 괜히 총관을 하는 게 아니었어."
"그러고 보니 우리 영지가 잘 돌아가는 것도 사실 총관님이 잘해서 그런 거잖아?"
"뇌물만 안 받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단번에 명성이 크게 오르니 클로드는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왕국 전체에 소문이 퍼질 것이다.
"하, 나도 내가 이렇게 잘할 줄 몰랐다니까. 이 미친 재능 어떻게 하지?"
"...."
웬디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녀답지 않게 칭찬도 해 주고 평소보다 더 잘 챙겨 주었다. 하지만 쉬지 않고 잘난 척하는 걸 곁에서 듣고 있다 보니 이제 귀에서 피가 날 정도다. 미칠 거 같았다.
벨린다는 클로드를 볼 때마다 피해 다녔다. 이제 갈구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클로드만 그러고 다니는 게 아니었다.
"엣헴, 엣헴."
알포이도 무척이나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다녔다. 이번 전쟁에서 드디어 명성을 떨쳤기 때문이다.
사실 상대 마법사들을 봉쇄한 사람은 바네사였다. 그녀가 없었으면 펜리스는 상당히 곤욕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억에는 알포이가 마법을 난사한 것이 더 강렬하게 남았다.
불도 쏘고 안개도 뿌리고 별짓을 다 한 건 사실이니까.
영지민들은 알포이에 대해서도 다시 평가했다.
"맨날 도박만 하고 술이나 처마시는 놈인 줄 알았는데."
"50서클이래, 50서클."
"우와, 그 정도면 드래곤 아니야? 알포이 님이 그렇게 강했다고?"
그 덕분에 명성도 크게 올라, 이제 적염의 마탑주인 휴베르트가 와도 알포이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할 터였다.
기분이 좋아진 알포이는 영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괜히 훈수도 두고 잘난 척하기 바빴다.
언제나 옆에서 붙잡고 공부하라고 구박하던 바네사도 이번만큼은 알포이에게 자유 시간을 허락해 주었다.
그리고 지셀과 펜리스 기동군이 영지에 돌아온 날.
"와아아아아아!"
"우리가 최강이다!"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영지민들이 모두 거리에 뛰쳐나와 환호를 보냈다.
이번 전쟁은 지난 전쟁과는 조금 달랐다. 지셀이 없는 상태에서 모든 영지민들이 힘을 합해 함정을 준비했다.
영주 없이도 다 같이 힘을 합쳐 수만의 대군을 막아 내었다.
그렇게 할 수 있던 건 모두 지셀 덕분이라는 점을 영지민들은 잊지 않았다.
영주 덕분에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고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으며 스스로를 지킬 힘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어느 곳과 싸워도 지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과 확신까지 얻게 되었다.
"펜리스 만세!"
모두의 환호를 받으며 지셀이 영주성으로 들어왔다.
그는 클로드를 보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클로드가 히죽 웃으며 주먹을 맞부딪쳤다.
항상 클로드와 알포이가 하던 동작을 지셀이 해 준 것이다.
"이야, 내가 올 때까지 막고만 있으라고 했는데 전멸을 시켰어? 대단한데?"
전생에 클로드는 훌륭한 작전 참모이자 전략가였다. 그걸 믿고 수성을 맡겼는데 이 정도로 잘해 줄 줄은 정말 몰랐다.
원래는 적당히 버티고 있으면 페르디움군과 용병들을 이용해 포위한 뒤 쓸어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클로드 덕분에 오히려 지셀이 패잔병들을 쫓는 역할을 하게 됐다.
클로드는 여전히 거만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흠, 뭐, 영주님도 서부를 점령하고 오셨으니 나름 잘하셨네요. 그렇게 어렵진 않은 일이긴 하지만...."
그게 더 어려운 일인데 클로드는 애써 지셀의 공적을 폄하했다. 괜히 자신의 공이 가려질까 봐 그러는 것이었다. 참으로 쪼잔한 놈이었다.
클로드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지셀은 그런 작은(?) 일 따위에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래, 그래. 잘했어. 그러면 이제 뭘 해야 하는지 알겠지?"
"...승전 축제?"
"아니, 일을 해야지. 서부도 빨리 안정화해야 하잖아. 그리고 영지 생산력도 늘려야지. 갈바니움 투석기를 더 만들어야 한다고."
"...."
클로드의 낯빛이 순식간에 거멓게 죽었다. 아무래도 죽어야 쉴 수 있을 거 같다. 이번 전쟁에서 죽었어야 했다.
그래도 지셀의 말에는 틀린 점이 없었다. 서부는 지금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셀버크 백작에게 관리를 맡기고 왔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가 그 넓은 서부를 혼자 안정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끄응, 일단 관리들을 빨리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할 일이 많겠군요."
당장 서부 전체를 펜리스처럼 만들 수는 없다. 안타깝지만 서부는 어느 정도 안정되고 나면 펜리스의 부족한 점을 채워 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본래 자원과 인구가 많은 지역이니, 빠르게 안정될수록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일단 병력은 친왕파의 도움을 받자고."
지셀의 말에 클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셀버크 백작은 서부의 균열까지 처리하진 못한다. 그로서는 남은 영주들과 도적들을 회유하고 통제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친왕파의 군대가 균열 처리를 명분으로 서부에 들어올 수 있다.
로드리크 후작은 남의 말도 제대로 듣지 않고 제멋대로 굴어서 곤란했지만, 이젠 서부의 주인이 지셀로 바뀌었기에 문제가 없었다.
지셀은 바로 가신들을 모아 서부를 어떻게 활용하고 빠르게 안정화할지 연일 회의를 이어 갔다.
어느 정도 운영 방향이 정해지고 서부로 보낼 관리들을 고르기 시작할 무렵, 안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구원교가 대놓고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허겁지겁 달려온 전령의 말을 들은 지셀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구원교 놈들이 전생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유는 뻔했다. 자신이 구원교의 정체를 일찍 드러냈기 때문이다.
지셀이 작게 중얼거렸다.
"...시작인가."
그는 궁지에 몰린 구원교가 무슨 짓을 할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410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1)
구원교가 발각된 일은 공작가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4대 교단이 구원교를 이단으로 지정하였고 공작파에 속해 있던 영주들이 속속들이 이탈했다.
특히 로드리크 후작이 이탈한 게 가장 타격이 컸다. 강대한 귀족인 그가 친왕파에 붙자 다른 자들도 허겁지겁 자신은 이단이 아니라고 변명하기 바빴다.
이제는 공작가가 모르는 척해도 통할 상황이 아니었다.
사실 다른 일이었다면 꼬리들이 자백했더라도 더 확실한 증거를 가져오라고 무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4대 교단이 나서서 그들을 대륙의 공적으로 지정을 했다. 교단도 여기서 말을 바꾸면 권위를 잃게 된다.
이제는 서로 물러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쾅!
공작가의 참모, 라울은 책상을 내리치며 앞에 있는 검은 로브의 중년 사내를 노려보았다.
"가트로스 심판관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하필이면 전쟁 직전에 이런 일이 터지다니! 이러면 일이 더 힘들어지지 않습니까!"
지셀과 로드리크 후작이 전쟁을 시작했을 즈음, 공작가도 휘하 봉신들을 모으고 전쟁 준비를 끝낸 참이었다. 그런데 공작파 영주들이 함께 움직이기는커녕 모두 배신해 버렸다.
지금 공작가는 왕국의 모든 귀족과 교단까지 상대해야 하는, 무척이나 불리한 상황에 빠져버린 것이다.
"왕국 전체를 상대하는 건 가능합니다. 하지만 4대 교단까지는 무리입니다. 우리가 승리해도 타국에서 간섭해 올 거란 말입니다! 거기다 '문'은 어떻게 할 겁니까? 브랜포드 후작이 알아냈단 말입니다!"
라울은 머리에 열이 올라 씩씩댔다.
'균열'의 위치까지 발각됐다는 소식이 막 들어왔다. 그것 때문에 왕국 전체에 난리가 난 터라 자신의 힘으로는 수습하기가 불가능했다.
가트로스라 불린 중년인은 심유한 눈빛으로 라울을 바라보며 답했다.
"라비에르가 실수를 한 모양이다. 성전사들만 발각됐다면 수습할 수 있었을 텐데, '문'의 위치까지 알아낼 줄이야...."
그곳만큼은 죽어도 발각되면 안 되는 곳이다. 하지만 라비에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브랜포드 후작이 군대를 끌고 움직였다.
"라비에르가 죽었던 곳뿐이라면 우연이라 치부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곳을 정확하게 짚었다는 건, 내부에서 정보가 새어 나갔다는 뜻이다."
"...우리 중에 배신자가 있다는 말입니까?"
"어쩌면 라비에르가 죽기 전에 말했을 수도 있지. 하지만 지금은 무엇이든 확신할 수가 없다."
"그러면 어찌해야 합니까? 지금 당장은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물론 저들도 마찬가지겠지만요."
친왕파와 4대 교단도 입으로만 떠들 뿐 공작가를 치지는 못하고 있었다. 공작가의 힘이 그만큼 강대하기 때문이었다. 쥐가 고양이 목에 방울 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언젠가는 결국 붙어야 한다는 건 모두가 잘 안다. 그렇기에 다들 엄청난 긴장 상태에 빠져 있었다.
가트로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사도께서는 따로 말씀이 없으셨느냐?"
사도란 바로 에른하르트 델파인 공작을 지칭하는 말이다.
구원교는 그에게 사도의 사명을 쥐여 주며 함께하고 있지만 이상할 정도로 에른하르트는 자신의 의견을 내지 않았다.
라울은 고개를 몇 번 저었다.
"이번에도 알아서 하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분명 실망하셨을 겁니다. 몇 번이나 대계가 미뤄지고 있으니...."
"집행관 아이던은?"
"대기 중입니다. 원래는 친왕파와 전쟁이 시작되면 바로 북부로 갈 계획이었으나 지금은 소강상태니까요. 로드리크 후작과 펜리스 백작이 싸우고 있고요."
"누가 이길 거 같은가?"
"확률은 반반으로 보고 있습니다. 군세는 로드리크 후작이 많지만 펜리스 백작은 마스터에 이르렀으니까요."
가트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알겠다. 잠시만 기다리거라. 상황이 어찌 되는지 조금 더 살펴봐야겠다."
구원교 또한 지금 신경이 무척 날카로워져 있었다. 친왕파가 균열의 위치를 더 알고 있는지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보다 상황이 더 심각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강국인 루타니아, 그 실세인 브랜포드 후작은 다른 왕국에서도 유명하다.
그가 각 왕국에 보낸 서신에는 구원교가 했던 짓과 균열의 위치가 적혀 있었다.
서신을 받은 왕국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4대 교단이 인정했다고?"
"정말 우리 왕국에도 이런 놈들이 암약하고 있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루타니아 왕국의 브랜포드 후작이 한 말이라면 무시할 수 없지 않은가?"
"일단 확인해 보고서...."
웃기게도 몇몇 왕국의 실세들은 조사를 거부했다. 하지만 교단까지 나서서 압박하는 것까지 무시하지는 못했다.
결국 다른 왕국에서도 구원교가 행한 짓들이 속속들이 발견되었다.
대륙 전체가 충격에 빠졌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교가 오랫동안 활동하며 수많은 사람을 죽여 왔다니!
거기다 은밀한 장소에서 뭔지도 모를 짓까지 하고 있었다.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 특히 지식인층의 반발이 무척이나 거셌다.
"도대체 귀족들은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자신들의 배만 불리느라 바빠 사교가 이런 활동을 해도 모르고 있었던 거지!"
"왕국은 개혁이 필요하다!"
이제 엉뚱한 곳에서 난리가 났다. 숨죽이고 있던 혁명단이 날뛰고 많은 사람이 그들에게 가담했다.
그런 와중에 구원교와 한패였던 귀족들이 주변의 압박을 못 이기고 군사를 일으켰다.
다른 왕국에는 델파인 공작가처럼 왕국이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세가 큰 귀족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당하기 전에 먼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세이론 왕국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튜리안 왕국에서도 내전이...."
"모라비스 왕국은 현재 교단까지 공격을...."
대륙 전체가 전쟁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이 정도 상황까지 가니 구원교도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스스로의 정체를 밝히고, 자신들에게 협력한 귀족들을 대놓고 도왔다. 동시에 영향력이 있는 곳에서는 강제로 사람들을 교도로 만들며 포교를 시작하였다.
"개판이군."
정세를 보고 받은 라울은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정말 대륙 전체가 개판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개판을 시작한 건 고작 '한 사람'이었다.
"펜리스 백작...."
어찌 한 사람의 영향력이 이리도 크단 말인가.
그는 공작가의 모든 일을 망치고도 모자라 라비에르를 붙잡아 구원교의 계획까지 까발렸다.
가트로스 또한 라울을 책망했다.
"어찌 그자를 먼저 처단하지 않은 것이냐. 우리 계획보다 더 빨리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느냐. 우리가 준비한 문이 절반이나 닫혔다."
"...."
라울은 할 말이 없었다. 루타니아의 전복은 자신이 맡은 임무였기 때문이다.
한데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북부의 애송이가 몇 년 만에 이렇게 성장하고 모든 일을 망칠 거라고 말이다.
가트로스도 그간 보고를 들어 라울의 억울함을 알기에 더는 책망하지 않았다. 그 또한 안타까움에 한 말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많은 문이 닫혀 버렸다. 아무래도 라비에르가 자백을 했거나 정신 조작에 당한 거 같구나.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지셀은 정신 조작 같은 건 전혀 하지 않았다. 라비에르 정도의 강자에게 그런 게 통할 리가 없었다. 라비에르가 자백하는 것도 말이 안 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게 아니면 도무지 이 상황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구나. 남은 문이라도 없어지기 전에 당장 여는 수밖에...."
"아직 조금 불안정한 상태가 아닙니까?"
"그래도 더 시간을 끌 수는 없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가 먼저 당할 것이다. 다른 심판관들도 같은 생각이다."
이제 구원교는 대륙의 공적이 되었다. 구원교와 손잡은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만으로 대륙의 모든 왕국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이 상태로 가다가는 필패다.
그렇다면 결국 다른 힘을 끌어오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계획이 많이 어긋났지만 대륙을 혼란에 빠뜨리기엔 충분할 것이다. 어차피 예정일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쿵!
가트로스는 자신이 가진 지팡이를 땅에 찍으며 말을 이었다.
"루타니아에 있는 모든 교도에게 전하라. 이제 '문'을 열겠다고.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성전'을 시작하겠다."
* * *
"이게 영주님이 하신 일입니다."
"음."
클로드의 말에 지셀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대륙의 모든 왕국에 난리가 났다. 구원교를 때려잡고 균열을 닫겠다고 다들 군사를 일으켰다.
클로드도 이 정도 상황까지 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지셀이 한 일이 이제는 대륙급 스케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찌 보면 대단하고 어찌 보면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물론 지셀로서는 지금 상황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다들 경각심을 갖게 됐어.'
전생에는 대비도 없이 갑작스럽게 당했다. 군사를 준비한 자들도 없었기에 환란의 시기 초반에 엄청나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균열이 전생에 비해 상당수 줄어들었고, 구원교에 대한 경계심으로 영주들의 긴장감이 올라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꼭 말을 안 듣는 놈들이 있다는 점이다.
"연구를 하겠다는 놈들은 뭐야?"
"왕국마다 한두 개씩은 남겨 두고 그게 무엇인지 알아보겠다고 합니다. 변이자들도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모양입니다."
"하.... 역시 말로 해서는 안 듣는 놈들이 너무 많아. 그렇게 설명해 줬는데도 그런다고?"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본 게 아니면 안 믿는 경향이 크거든요. 그리고 그걸 이용할 수 있는지도 알아보고 싶은 거죠."
전생에도 그랬다. 그걸 어떻게 자신의 힘으로 이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놈들이 꽤 많았다.
균열에 관해 지셀이 넘겨준 정보는 제한적이었다.
그도 전생에 있었던 모든 균열을 기억하지는 못했다. 겪어 보지 못한 곳, 너무 멀리 있거나 신경 쓰지 않았던 곳 등등, 인지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루타니아 왕국에서도 분명 놓친 곳이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하나라도 줄여야 피해가 적을 텐데, 발견한 곳을 일부러 남겨 놓는다니.
그러다 자칫 균열이 열리면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보고를 들은 지셀은 혀를 차며 말했다.
"쯧, 전부 찾아다니면서 닫을 수도 없고. 몇 번 얻어맞아야 정신을 차리겠네."
"일단 우리부터 확실히 준비해 두죠."
"그래, 그래야지. 앞으로의 전투는 더 격렬해질 테니까."
지셀은 가신들에게 균열에 관한 정보를 대략적으로 알려 주었다. 당연히 친왕파에도 전달했다.
균열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점점 변이하게 되고, 그곳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나온다고.
다들 지셀에 그럴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했지만 라비에르에게 들었다는 핑계로 넘어갔다.
실제로 변이자들이 발견되었기에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었다.
"구원교의 움직임은 어떻지?"
"결탁한 영주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습니다. 교도들이 많지는 않은데 사제들의 힘이 상당히 강력하다고 합니다. 특히 고위 사제들은 몇 안 되긴 하지만 초인에 버금가는 힘을 보이는 모양입니다."
"모두 제압하기는 쉽지 않을 거 같군."
"왕국마다 상황이 다릅니다. 궁지에 몰린 곳도 있고 오히려 더 세를 불려 나가는 곳도 있습니다. 루타니아 왕국처럼 소강상태인 곳은 몇 없습니다."
"그렇겠지. 여기는 델파인 공작가를 먼저 치기가 어려우니까."
공작가의 힘이 워낙 강하다고 알려져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4대 교단들이 끼어들었음에도 섣불리 치기 힘들 정도였다.
거기에 초인에 준하는 강함을 보이는 구원교의 고위 사제들도 문제였다.
하지만 이쪽의 힘도 이제 만만치 않았다. 소강상태가 잠시 유지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공작가에서도 친왕파의 전력을 무시하지 못한다는 증거였다.
문제는 이 상태가 그리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점이었다.
"구원교가 본격적으로 움직인 이상 이런 상황도 오래가지 않을 거야."
"역시 그 균열이란 걸 이용할까요?"
"그래, 그래야 다른 영주들의 힘을 약화하고 혼란을 일으킬 수 있으니까."
클로드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빨리 준비해야겠네요."
사태가 심각해서 표정을 굳힌 건 아니었다. 할 일이 많아서 그렇게 된 거다.
지셀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요정의 축복은 많이 확보해 놨지?"
"네, 자생지도 잘 관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몇 년은 계속 수급이 가능할 겁니다."
요정의 축복은 포션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재료였다. 그걸로 펜리스는 어마어마한 포션을 확보했다.
현재 그 포션들은 페르디움에도 전달되고 있다.
하지만 요정의 축복이 쓰이는 곳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약의 개발 상황은 어떻지?"
"아주 약하게 희석해서 대량 생산 체제에 돌입했습니다. 한 뿌리에 수백 병을 만들 수 있을 정도입니다."
"좋아, 그 '약'이 상당히 많이 필요할 거야. 계속 생산에 박차를 가해."
"그런데.... 정말 이렇게 많이 필요합니까?"
"응, 우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한테. 제조법도 친왕파에 보내도록 해. 브랜포드 후작님에게 다른 왕국에도 보내라고 꼭 전해 주고."
"알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지셀 혼자만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균열을 줄였어도 그 위협은 아직 남아 있다. 나눠 줄 수 있는 건 나눠 주고 알려 줄 수 있는 건 알려 줘야 한다.
그래야 대륙을 강타할 위협과 싸워 이길 수 있다.
펜리스는 지셀이 알려 준 신약을 개발하며 병력 충원과 무장 생산에도 박차를 가했다.
더 많은 병력과 무장, 그것이 지셀이 원하는 바였기 때문이다.
서부를 안정화하는 일도 동시에 처리하느라 다들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다들 바쁘게 움직이던 어느 날, 영지민들이 밤에 다들 모여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와, 예쁘다!"
"저렇게 많은 유성은 처음 봐!"
"다들 소원을 빌자!"
어두운 밤하늘 곳곳에서 밝은 유성이 떨어지고 있었다.
유성은 정말 끝도 없이 떨어졌다. 대륙 곳곳으로 퍼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영지민들은 난생처음 보는 아름다운 현상에 즐거워했다.
오직 단 한 사람.
지셀만이 서늘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411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2)
페르디움은 요새 너무나 평화로웠다.
북방을 지키는 임무는 여전했지만 야만인들이 날뛰지 않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지금은 야만인들과 왕국 간 무역의 중개지 비슷한 무언가가 되고 있었다.
히이이잉!
북방 요새로 수백 필의 말이 들어왔다.
바로 워로카가 조공으로 바치는 말들이었다.
"크흠흠, 북방의 늑대, 오랜만이다."
"오랜만이군, 워로카."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악수했다.
몇 번 서로 필요한 걸 주고받다 보니, 이제 예전처럼 보자마자 무기를 꺼내 들고 싸우는 일은 없어졌다.
물론 속으로 칼을 가는 것은 여전했다.
'전에 출정 나갔을 때 칠 걸 그랬나?'
'이놈들은 믿을 수가 없어. 언제 우리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놈들이야.'
그래도 두 사람 모두 겉으로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 당장은 협약을 지키는 것이 이득이기 때문이다.
즈발터가 워로카에게 준비한 식량을 보여 주었다.
"자, 약속한 식량이다. 올해는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워로카는 쌓여 있는 식량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놈들은 식량이 너무 많다. 어떻게 이렇게 잘 얻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우리가 이렇게만 식량을 생산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이렇게 목줄에 매여 살 필요가 없다. 진짜로 북방 왕국을 건설할 수 있다.
"우리도... 식량 생산 방법을 좀 알려 주면 안 되나?"
이 척박한 북부에서 갑자기 대량 생산에 성공했다. 분명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걸 알면 자신들도 번영을 꾀할 수 있다.
그런데 즈발터가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
"...?"
"진짜 모른다. 아들이 알아낸 방법인데, 우리 쪽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젠장! 가르쳐 주기 싫으면 가르쳐 주기 싫다고 할 것이지!'
워로카는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즈발터의 말은 사실이었다. 마법 개간지는 펜리스의 주요 인물들이 와서 직접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마수의 숲을 개척한 뒤로 페르디움은 마법 개간지에 기대지 않았다. 그곳에서 식량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단위 면적 당 생산량은 펜리스의 마법 개간지보다 적지만 개척한 영역이 워낙 크고 지력이 풍부해서 별문제가 없었다.
마수의 숲에 관해 알려 줄까 고민하던 즈발터가 문득 한 가지를 떠올리고는 말했다.
"너희 어차피 농사지을 줄도 모르잖아?"
"...."
마수의 숲은 야만인들의 영역에도 걸쳐 있다. 하지만 그들은 농사를 지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농사는 약한 놈들이나 하는 치욕스러운 짓이다. 전사들은 오직 사냥하고 뺏을 뿐이었다.
그러니 농사를 하자 해도 대부분이 안 할 게 뻔했다.
워로카도 사실 왕국을 침략하면 왕국민들을 노예로 써서 식량을 생산하려 했었다.
헛기침을 몇 번 한 그가 다시 은근히 물었다.
"그러면 식량을 조금 더 주면 안 되나? 우리도 부족민이 더 늘고 있어서 말이야. 슬슬 빠듯해지고 있거든."
워로카가 식량으로 여러 부족을 휘어잡으니 강제적인 평화가 찾아왔다.
다른 부족들은 불만스러워했지만 반항하지 못했다. 페르디움과의 거래를 통해 식량을 받아올 수 있는 사람은 워로카뿐이었기 때문이다.
워로카는 야만인 중에서 그래도 제법 머리를 쓰는 편이었다. 그만큼 의심도 많기에 식량 거래는 수하에게도 맡기지 않고 꼭 자신이 직접 주도했다.
즈발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 협상 조건에 그런 건 없었지 않은가. 더 받고 싶으면 다른 걸 가져오도록."
마음 약한 호구였던 즈발터도 많이 달라졌다. 그만큼 그도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끄응.... 거 너무 빡빡하게 구네."
워로카가 볼멘소리를 냈다.
어쨌든 강제적으로나마 부족민들을 통합하고 평화를 이룬 건 식량 덕분이었다.
싸우고 싶어도 식량이 상대방에게 있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예전처럼 약탈을 하면 식량이 끊길 테고... 부족도 흩어지겠지.'
그건 싫다. 지금처럼 자신이 모든 권력을 쥐고 부족을 통합하고 싶었다.
'다른 힘이 필요해....'
이미 한번 지셀에게 크게 당해 봤다. 싸워도 이길 자신이 없었다.
워로카는 점점 깨닫고 있었다. 이 상태로 가다가는 영원히 페르디움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야망이 큰 그로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삶이었다.
'그놈이 문제야. 그놈만 처리하면 될 거 같은데....'
워로카가 검은 속내를 숨기고 즈발터에게 은근슬쩍 물었다.
"핏빛 악마... 아니, 펜리스 남작은 잘 지내는가?"
"이제 백작이지."
"맞아. 승작을 했다던가? 북방의 늑대, 자네도 후작이 됐다는 소리를 들은 거 같은데. 어쨌든 펜리스 백작은 어떻게 지내는가?"
야만인들 쪽에는 아무래도 소식이 좀 늦을 수밖에 없다. 즈발터는 별다른 의심 없이 상세하게 얘기해 주었다.
"아아, 모르는 건가? 요새 우리 아들이 말이야. 백작으로 승작을 한 뒤에 최근 로드리크 후작하고 붙었는데...."
즈발터의 자식 자랑이 시작됐다. 말이 이어질수록 워로카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로드리크 후작이라면 엄청 유명한 대영주잖아? 10만을 박살 냈다고? 그것도 별 피해 없이? 그게 말이 돼?'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데 즈발터의 자랑은 끝이 없었다.
"아, 그래서 그때 내가 딱 나타나서! 어? 로드리크 후작의 남은 군대를 추격하는데!"
즈발터는 최근 페르디움에 지원을 나갔던 얘기를 신나게 해 댔다.
처음에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로드리크 후작과 싸운다는 건 서부 전체를 상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어차피 공작가와도 싸워야 하는 아들이다. 그 전에 로드리크 후작을 꺾으면 위험 부담이 크게 줄어든다.
그래서 즈발터는 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자, 지원 요청이 들어오자마자 출정을 했다.
'그 클로드란 이상한 놈이 갑자기 작전을 바꾸긴 했지만....'
원래는 약속된 지역에서 대기하다가 지셀의 신호에 맞춰 적군을 기습해 포위 공격을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펜리스의 총관이 작전을 바꿔 페르디움 지원군을 이상한 성으로 보냈다.
'뭐 해 보지도 못하고 전쟁이 끝나 버렸지.'
적군은 그들이 모습을 보이자마자 도망갔다. 잠깐 추격했지만 거리가 벌어져서 멈췄다.
그냥 그게 끝이었다. 잠깐 기다리니 로드리크 후작이 죽고 전쟁이 끝났단다. 뻘쭘하게 감사 인사만 받고 돌아왔다.
아직도 유령에 홀린 기분이었다.
'크, 아무튼 우리 아들부터 그 수하들까지 정말 대단해. 로드리크 후작까지 깨부술 줄이야. 혹시 펜리스가 왕국 최강?'
"아, 맞다. 우리 아들 마스터야, 마스터."
"마스터...?"
"마스터 몰라?"
"서, 설마? 불사의 전사?"
"너희들은 그렇게 부르나? 아무튼 마스터다."
'불사의 전사'는 북방 부족의 전설에 나오는 경지였다. 대륙에서 흔히 쓰는 '초인'보다 조금 더 높은 수준을 뜻하긴 하지만, 그 외에 마땅히 대체할 말이 없었다.
즈발터가 자식 자랑을 하면 할수록 워로카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젠장, 원래도 괴물이었는데 이제는 그 이상이 되었구나!'
제일 무서운 놈이 전보다 더 강해졌단다.
과장이 조금 섞였을 걸 감안해도, 그 정도면 홀로 부족 몇 개는 너끈히 없앨 것이다.
거기에 영지는 10만 대군과도 싸워 이길 정도의 전력을 갖췄다.
편히 약탈했던 루타니아의 북부는 이제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벽이 되었다.
'진작 페르디움이라도 우리가 차지했어야 하는데....'
펜리스야 어쩔 수 없다 쳐도 페르디움도 문제다. 올 때마다 느끼는 건데 기사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았다.
"저기... 전보다 기사들이 늘어난 거 같은데?"
"아아, 모르는 건가? 우리 아들 덕분이지. 보급형 마나 연공법을 만들어서 나눠 줬거든. 그래서 기사들을 계속 늘리고 있지."
"마나 연공법? 그거 함부로 나눠 주면 안 되는 거 아냐?"
"우리는 이제 달라졌지.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아끼지 않아."
기사 계급은 기득권, 특히 귀족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 중의 하나다. 그렇기에 마나 연공법이 비전 중 하나가 된 것이다.
힘을 가진 자가 많아질수록 기득권에 도전하는 자도 많아지는 법이니까.
하지만 페르디움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셀은 가문의 연공법을 개조해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게 했다.
파괴력은 다소 떨어지지만 약간의 재능과 노력만 있으면 마나를 쓸 수 있게 말이다.
물론 특유의 폭발력은 그대로 가지고 있다. 덕분에 새로 들어온 기사들도 죽기 싫으면 미친 듯이 수련을 해야 했다.
"뭐, 그렇다고 아무나 뽑는 건 아니야. 최소한의 인성은 보고 뽑는 거지."
그 말을 들은 워로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젠장! 젠장!'
상대는 기사들도 늘어나고 식량도 넘친다. 시간이 갈수록 격차가 벌어지고 있었다.
거기에 북방 부족의 장점인 기마병도 이제는 퇴색되었다. 자신들이 말을 가져다 바친 만큼 상대도 많은 기마병을 보유하게 되었으니까.
이제 자신들의 힘으로는 이곳과 싸워서 이길 수가 없다. 평생 말이나 바치며 살게 생겼다.
'그렇게 살 수는 없다!'
펜리스는 멀리 있다. 어떻게든 페르디움이라도 멸하고 왕국 내의 영역을 차지해야 한다.
페르디움의 식량 생산도 많이 증가한 모양이니 이곳만 차지해도 북방 왕국은 제대로 힘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북방의 늑대, 즈발터. 이만 돌아가겠다. 식량은 잘 먹도록 하지."
"벌써 가? 전처럼 차라도 한잔하고 가지 그래?"
"됐다, 일이 많다."
처음 식량 거래를 했을 때는 워로카도 기분 좋은 티를 냈다. 싸우지 않고도 부족들을 복속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지셀의 의도대로 자신들은 더 약해지고 있었다.
전사들은 나태해지고 페르디움에 찍소리도 못한다. 부족 간의 불화도 쉽게 없어지지 않고 다들 불만이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
그래도 방법이 없었다. 싸우면 다 죽는다. 그렇게 고민만 하고 있었다.
'그놈들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말이지.'
얼마 전 찾아온 의문의 단체. 그들은 자신을 구원교라고 소개했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쫓아냈을 것이다. 자신들에게는 자신들만의 종교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아주 구미가 당기는 제안을 했다.
'페르디움을 포함한 북부의 영지 3개를 우리에게 주겠다고 했지.... 델파인 공작가가 도와주겠다고....'
대가만 나쁘지 않았다면 바로 수락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대가로 요구한 것은 야만인이라 불리는 워로카조차도 꺼림칙할 정도였다.
그래서 일단은 보류해 두었다. 그들은 결론이 날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워로카의 부족과 가까운 곳에 머물고 있었다.
워로카는 돌아가면서 계속 고민했다.
'어차피 방법은 없어.'
'핏빛 악마는 내 힘으로 이길 수 없다.'
'페르디움조차도 이제는 상대하기 힘들어. 예전의 페르디움이 아니다.'
북방 왕국을 세운다는 그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식량을 자급자족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
"후...."
워로카의 눈빛이 점점 살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는 옆에 있는 대전사 몬가에게 물었다.
"몬가, 그들이 얼마나 기다리겠다고 했지?"
몬가는 손바닥 두 개를 쫙 편 뒤 말했다.
"이만큼 정도라고 했습니다."
"...."
잠시 침묵하던 워로카가 말했다.
"바로 그들을 만나겠다."
"저, 정말로 제안을 수락할 겁니까?"
"그래.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는 아무것도 못 하고 페르디움의 노예가 될 거야."
몬가가 조금 두려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구원교의 제안은 대전사라 불리는 그에게도 잔혹한 것이었다.
하지만 워로카는 이미 결심했다.
그는 부족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수하들을 대동하고 손님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엔 작은 천막 몇 개만 세워져 있었다. 워로카가 방문을 알리자 곧 천막 하나에서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창백한 인상의 청년이 나왔다.
그는 워로카를 보고 방긋 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생각은 해 보셨습니까? 워로카 님."
"이름이 덴타리아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미흡하지만 구원교의 심판관직을 맡고 있는 덴타리아입니다."
"...정말 성공할 수 있는 것이냐?"
워로카의 물음에 덴타리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워로카 님이 도와만 주신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습니다. 저희 뒤에는 루타니아 왕국 최강이라는 델파인 공작가가 있지 않습니까?"
"북부의 영지 3개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수를 맞춰야겠다. 5개를 다오."
잠시 고민하던 덴타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제 권한으로 처리할 수 있지요. 5개의 영지를 드리겠습니다. 또한 왕국을 차지한 뒤에는 워로카 님에게 공작의 작위를 드리겠습니다."
"나는 그냥 루타니아 북부를 휘저으면 된다는 거지?"
"네. 물론 부족들의 힘만으로는 어렵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지원해 드리겠다는 것이지요."
"후우...."
워로카가 크게 숨을 내쉬며 잠시 눈을 감았다.
중대한 결정이다. 한번 결정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이미 마음속으로는 결단을 내린 상태다. 그 말을 꺼내기가 두려울 뿐.
숨을 고르며 몇 번이나 망설인 워로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좋다, 제안을 수락하겠다."
"그 말씀은...?"
"너희들이 말하는 '문'을 만들어서 루타니아 북부를 치겠다는 말이다."
"대가는 알고 계시지요?"
"그래, 부족 다섯을 너희에게 제물로 바치겠다. 나도 다섯 부족을 동시에 치기는 힘드니 일단 그것부터 도와라."
"알겠습니다.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덴타리아가 고개를 숙이며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412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3)
카앙!
두 사람의 검이 불꽃을 튀기며 부딪쳤다가 떨어진다.
지셀은 씨익 웃으며 아렐에게 말했다.
"다시 해 보자."
"알겠습니다."
지셀은 영지가 바쁜 와중에도 아렐을 가르치는 것은 소홀히 하지 않았다.
아렐은 이제 뭇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할 만한 멋진 청년으로 자랐다.
하지만 그 외모보다 더 유명한 건 바로 그의 실력이었다. 그간 아렐은 지옥 같은 훈련을 버텨내며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했다.
얼마나 독하게 훈련하는지 초창기부터 지셀을 따랐던 용병 출신 기사들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뿐이 아니다. 지셀은 아렐이 휘하 기사들처럼 단순히 무력에만 집중하게 두지 않았다. 군사학을 포함해 영지의 온갖 학자들을 붙여 주어 학문을 익히게 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수행하기 힘든 일정이다. 하지만 아렐은 그런 생활을 불평불만 없이 성실하게 임했다.
― 독종이야, 독종.
― 영주님이 어디서 엄청난 놈을 주워 왔다니까?
― 그런데 왜 저렇게까지 혹사시키는 걸까?
사람들은 아렐만 보면 수군거렸다. 아렐이 대단해 보이기도 했지만, 검술 외에도 학문까지 가르치는 지셀의 의도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지셀도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알고 있다.
'아직은 다들 모르니까. 전생에 이놈이 어떤 놈이었는지.'
북방 요새 카이필러의 사령관.
비운의 천재, 야만인 학살자, 북방의 공포, 왕국의 신성 등으로 불린 남자.
아렐 하이듄 남작.
공작이 된 해럴드 데스몬드의 눈에 띄어 휘하로 들어간 아렐은 그 재능과 노력을 인정받아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멸망한 페르디움 대신 북방 요새를 지키는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마수의 숲 일지에도 아렐의 이름이 나와 있었다.
그렉스들이 마수의 숲을 벗어나 북부를 초토화했을 때, 북방 요새를 지키던 아렐이 군사를 이끌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쪽에서는 제법 명성이 있었지.'
아렐은 복수심과 재능으로 훌륭하게 북방을 지키며 야만인들을 휩쓸었다.
오죽했으면 야만인들은 아렐의 이름만 들어도 이를 갈며 저주를 할 정도였다.
물론 예전의 페르디움과 달리 왕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전생에 얼굴은 못 봤었지만 말이야.'
아렐은 일 년 전쟁이 시작되기 전, 왕국이 마수의 숲 개척을 위해 야만인들과 협상하려 할 때 격렬히 반대했었다. 하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물론 야만인들은 협상을 하고 나서도 아주 작은 마을 정도는 반쯤 재미로 약탈을 자행했고 '고작' 그 정도는 왕국도 눈감아주었다.
하지만 아렐은 아니었다. 분노한 그는 군사를 이끌고 출정해 그 부족을 없애 버렸다.
그로 인해 야만인들과 왕국은 다시 긴장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마수의 숲 개척이 우선이었던 왕국은 아렐에게 항명죄를 뒤집어씌우고 감옥에 가둔다.
이후 마수의 숲에서 어마어마한 병력을 소모한 왕국은 북방 요새의 병력까지 절반 이상을 마수의 숲에 밀어 넣어 버렸다.
어차피 야만인들과 협상만 잘 진행되면 굳이 북방 요새에 많은 병력을 배치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가 기록의 끝이었지.'
그래서 지셀도 그 이후에 아렐이 어떻게 됐는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여러 기록을 통해 그 이름은 기억하고 있어 아렐을 거둘 수 있던 것이다.
어쨌든 지셀도 자신의 의도대로 아렐이 잘 따라와 주는 것이 기꺼웠다. 그래서 더욱더 열심히 가르쳐 주고 지원해 주었다.
아렐이 쉬지 않고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영지에 대한 충성심, 그리고 자신의 가족과 마을을 몰살시킨 야만인에 대한 증오다.
카앙! 카앙! 카앙!
스승이 스승이니만큼 아렐의 검은 무척이나 격렬했다. 하지만 그저 지셀에게 배웠다는 것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지셀의 검술을 완벽히 익히기 위해서는 기술을 뛰어넘는 감정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아렐은 지셀의 검을 누구보다 빨리 흡수했다.
그 또한 지셀과 같은 아픔을 겪었기 때문이다.
카아앙!
검을 마주하며 지셀이 물었다. 전생에는 야만인들과 협상조차도 반대하며 감옥에 갔던 아렐이 어떤 마음인지 궁금했다.
"아직도 속이 안 풀리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야만인을 치자고 하지 않지?"
"...영지와 협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피해를 줄이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그쯤에서 끝낸 것이다.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야만인들이야 얼마든지 다시 칠 수 있다. 내 하나뿐인 제자의 소원도 못 들어줄 정도로 빈곤한 스승은 아니거든."
지셀이 웃으며 말하자 아렐은 주저 없이 답했다.
"복수도 중요하지만 삶의 터전인 영지는 더 중요합니다."
"폐를 끼칠까 봐 걱정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영지와 영지의 사람들이 제 복수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지키는 것이 제 일생의 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올곧은 대답에 지셀이 미소를 지었다.
아렐은 전생과 조금 달라졌다. 그는 복수보다 소중한 것을 지키는 걸 우선으로 삼았다.
만약 전설의 용사가 실존한다면 바로 지금의 아렐과 같은 성격이 아니었을까?
사사로운 개인의 감정보다 대의를 더 중요시한다.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알고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리하여 모두를 위해 자신의 고통을 감내한다.
아렐은 지셀과 비슷하면서도 또 그 결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지셀은 내심 감탄했다.
'이런 영지에서 이렇게 바르게 자라다니.'
솔직히 펜리스 영지엔 아렐에게 악영향을 줄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클로드, 알포이, 카오르, 아스콘, 케인, 그리고 고든과 루카스 등의 기사들까지. 못된 것만 가르쳐 줄 놈들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아렐은 언제나 그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정진하는 데만 집중했다.
바르게 자라도 너무 바르게 자랐다.
지셀이 피식 웃으며 검을 거둔 뒤 말을 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혼자 수련할 거면 조금 더 하고 저녁 수업에 가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야만인들과는 곧 다시 싸우게 될 것이다."
그 말에 아렐이 눈을 크게 떴다. 현재 펜리스, 페르디움, 야만인들은 식량과 말을 거래하는 협약을 맺은 상태다. 야만인들과 싸운다는 것은 협약이 깨진다는 뜻이다.
"그 말씀은...."
하지만 지금 왕국, 아니 대륙 전체가 들썩이고 있는데 야만인들을 상대하는 데 힘을 쏟기에는 위험한 상황이지 않은가.
지셀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치지 않아도 어차피 그놈들은 움직일 거다."
"정말입니까?"
"그래, 워로카는 욕심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놈이거든. 내전이 일어나면 그놈은 분명 움직일 거다. 어쩌면 그 전에 움직일 수도 있겠지. 이 상태로 가다가는 영원히 식량이나 구걸하면서 살게 될 걸 알 테니까 말이야."
전생에 지셀이 왕국을 침공했을 때도 어떻게든 틈을 비집고 들어와서 땅을 차지하려고 했던 놈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4대 교단과 구원교까지 끼어 내전의 규모가 더 커질 것이다. 왕국은 무척 혼란스러워질 테고, 워로카는 어떻게든 그 혼란을 틈타 들어오려 할 게 뻔하다.
그러니 이제부터 미리 대비해 둬야 했다.
물론 워로카가 어떤 식으로 공격할지는 지셀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놈이 움직일 거라는 점은 확신했다.
"그러니 그때까지 기다려라. 내가 반드시 너를 그 전쟁의 주역으로 세워 줄 테니."
"알겠습니다!"
아렐이 힘차게 대답했다. 반드시 그 전쟁에 참여해 공을 세우고 싶었다.
공명심이 아니라 복수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승리해야 영지를 지킬 수 있다.
아렐은 지셀이 떠난 뒤에도 온 힘을 다해 수련했다. 그에게는 그럴만한 목표와 근성이 있었다.
개인 수련을 끝내고 수업을 받으러 가던 아렐은 잠깐의 틈을 이용해 기어 나온 알포이를 만났다.
"어이, 아렐! 오늘은 그냥 가지 말고 홀짝 한 번 하고 가라니까? 내가 처음에는 좀 져 줄게."
알포이 앞에는 피오테가 훌쩍거리고 있었다. 또 돈을 뜯긴 모양이었다.
아렐은 알포이에게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한 뒤 말했다.
"군사학 수업을 들으러 가야 합니다."
"몇 판만 하고 가자니까? 홀짝이라 금방 끝나. 너 항상 그렇게 빡빡하게 굴 거야?"
"죄송합니다."
"너 나 무시하는 거야?"
"아닙니다."
"아니면 뭐 영지 생활 끝나냐?"
"...."
"너 영주 제자라고 은근히 나 무시하는 거 같아. 5서클 마법 맛 좀 한번 볼래?"
"...."
"오늘은 무조건 한판하고 가. 너 돈도 안 써서 많이 모았을 거 아냐? 여기 사제님은 이제 돈이 없대."
"죄송합니다."
"야! 내가 지금 하자고 하잖...."
알포이가 성을 내려고 하는데 뒤에서 뾰족한 소리가 들려왔다.
"알포이 님! 잠깐 쉬겠다더니 또 나오신 거예요?!"
빛이 한번 번쩍이더니 바네사가 알포이의 앞에 나타났다.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왜 공부하러 가는 사람을 막고 그래요! 아렐 님처럼 열심히 하셔야 하잖아요! 그리고 피오테 님은 언제 또 데리고 오신 거예요!"
알포이가 떠듬거리며 궁색하게 변명했다.
"그러니까 그게... 피오테는 우연히 만나서 한 건데 아렐도 우연히 만나서.... 그런데 얘 너무 재미없게 사는 거 같아서.... 아, 얘 친구도 없다니까? 옛날의 너를 보는 거 같아서 가슴이 막 아픈 게...."
알포이가 변명하는 도중에 아렐은 바네사를 보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영지 최고의 마법사이자 노력가에게 보내는 존중이 듬뿍 섞여 있었다.
바네사도 아렐에게 마주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참으로 예의 바른 두 사람이었다.
"아렐 님, 신경 쓰지 마시고 어서 수업에 들어가세요. 피오테 님도 어서 볼일 보시고요."
"네, 감사합니다. 바네사 님."
그렇게 알포이는 바네사에게 강제로 끌려가고 아렐과 피오테는 풀려날 수 있었다.
다시 수업 장소로 향하던 아렐은, 이번에는 막 훈련을 끝내고 술을 마시러 이동하는 카오르와 기사들을 마주쳤다.
"어이, 아렐. 수련 끝난 거야? 우리도 끝났는데 같이 한잔하러 갈래?"
"괜찮습니다. 카오르 님."
"야, 너 매일 그렇게 뺄 거야? 너도 이제 다 컸으니까 술도 좀 마시고! 어? 사나이답게 화끈하게 좀 놀기도 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냐?"
"아닙니다."
"아니면 뭐 기사 생활 끝나냐?"
"...."
"안 되겠다. 내가 오늘 아렐을 진정한 사나이로 만들어 줘야겠다. 너 오늘은 못 빠진다. 알겠어? 영주도 마침 다른 곳에 시찰을 나갔겠다. 각이 딱 나왔어. 너."
기사들도 카오르의 말을 듣고 마구 웃었다.
"그럼! 돌격대장님이 가자시는데 가야지!"
"영지 기사들의 화합 자리에 영주님의 제자가 빠지면 쓰나!"
"자자, 오늘은 밤새도록 마셔 보자고!"
카오르는 영지에서 무척이나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영지 전체를 통틀어도 한 손에 꼽힌다.
아렐도 오늘만큼은 쉽게 빠져나갈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을 느꼈다.
그렇게 아렐이 카오르에게 강제로 끌려가기 직전, 똑같이 군사 훈련을 마무리하고 나온 길리언이 나타났다.
카오르는 괜히 고개를 홱 돌리며 중얼거렸다.
"에이씨, 영감은 또 언제 끝난 거야?"
길리언은 보자마자 상황을 파악하고 아렐에게 가 보라고 손짓했다.
아렐은 잽싸게 인사를 한 뒤 도망갔다. 카오르와 기사들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자리를 떠났다.
그 뒤로도 아렐은 영지 내에서 이동할 때마다 그를 타락시키려는 사람들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사람이 너무 바르게 행동하니 그걸 못 견디고 망가뜨리고 싶어 하는 놈들이 많았던 것이다.
특히 영주의 사촌인 케인은 무척이나 집요하게 지셀의 혈족이라는 배경을 내세웠는데 그런 경우에는 벨린다가 나타나 도와주었다.
그나마 클로드는 아렐을 만나도 뭘 해 보지 못했다.
"어이, 아렐, 너 나랑 계약 하나... 악! 밀지 마! 나 다리 아프다고!"
뭐만 하려고 하면 웬디가 강제로 클로드를 밀쳐서 자리를 뜨게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윗사람들이 적절하게 나타나 도와주지 않았으면 아렐은 진작 끌려가서 타락했을 것이다.
'휴, 오늘도 무사히 수업 장소에 왔구나.'
검술 수련과 군사학 공부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아렐은 매일같이 이렇게 정신적인 단련도 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의 인내심과 정신력은 날이 갈수록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렐을 가르치는 학자들은 그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이해도 빠르고 언제나 성실하게 공부에 임했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맛이 나는 학생이었다.
그렇게 평소처럼 하루를 충실하게 보낸 아렐은 평소와 다르게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야만인들과 다시 싸운다니....'
언젠가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올지 모른다.
더욱더 열심히 힘을 키워야 한다. 그래야 죽은 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복수를 할 수 있다.
그리고 북방을 평정해 이 북부를 영원히 안정시킬 것이다. 북부의 사람들이 야만인들의 침략을 걱정하지 않게 할 것이다.
'내가 반드시....'
반드시.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지 않게.
* * *
"도적 떼라고? 갑자기?"
"네, 그렇습니다."
영지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지셀은 로웰에게 보고를 받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왕국이 혼란스러우니 도적들이 들끓을 수는 있다. 영주들이 모든 군사를 모아 주요 거점에 배치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마을과 도시의 주변은 치안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적 떼가 나타났다는 장소들이 조금 미묘했다. 다른 곳은 이해가 가도 북부와 서부의 경계로 가는 길목에도 나타났다.
그간 잠잠했던 도적들이 지금 갑자기 들끓는 것도 수상했다.
로웰이 지도 곳곳을 짚으며 말했다.
"로드리크 후작이 없어지고 서부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니 도적 떼 자체는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영역 인근에 나타난 건 좀 의심스럽습니다."
서부의 도적들은 펜리스라는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떤다. 로드리크 후작이 패한 뒤 투항하는 자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거기에 펜리스군의 기동력은 이제 왕국 전역에 알려졌다. 어디든 도적 떼가 나타나면 순식간에 가서 몰살시킬 수 있다.
그런데 펜리스 인근에 나타났다? 제발 토벌해 달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그 정도로 멍청해서야 도적질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지셀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시선을 돌리려는 세력인가?"
"저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시선을 돌리려는 쪽은 공작가와 구원교밖에 없겠죠."
"흐음, 그렇다는 건...."
"예, 이들이 무언가를 감추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건...."
로웰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마 우리가 놓친 '균열'일 가능성이 큽니다."
지셀도 마주 웃으며 물었다.
"예측되는 장소는?"
"도적들의 움직임과 활동 영역을 보면 세 군데 영지의 길을 교묘하게 막고 있습니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은 어디지?"
로웰이 지도의 한 곳을 짚으며 답했다.
"굳이 한 곳을 꼽자면 공작파 영주였던 핀로스 남작령입니다. 그리고 이 길목에 작은 도시가 하나 있습니다."
지셀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서부에도 한번 가야 했는데 잘됐네. 그리 멀지 않으니까. 가는 길에 거기도 들러서 확인하도록 하지. 바로 움직이겠다."
"어떻게 준비할까요?"
"빠르게 움직여야 하니 기사들 200명만 준비해."
"알겠습니다."
"아, '약'들은 보내고 있나?"
"네, 생산하는 대로 친왕파와 페르디움에 보내고 있습니다. 조제법도 알려 주었고, 추가 생산도 요청했습니다. 다른 왕국에는 브랜포드 후작이 전달하기로 했습니다."
"그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지셀은 어두워진 창밖을 바라보았다.
유성 몇 개가 저 멀리서 떨어지고 있었다.
413화 문이 열렸다. (1)
"사, 살려 주세요!"
서부로 가는 길목에서, 작은 상단의 사람들이 모여서 무릎을 꿇고 누군가에게 빌고 있었다.
상대는 바로 도적들이었다.
최근에 이 지역이 불안하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상행을 감행했던 상단주는 시커멓게 죽은 낯빛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이곳은 예전에는 서부의 대영주 로드리크 후작의 영향력 아래 있었고, 지금은 북부 최강인 펜리스 백작이 다스리는 곳이다.
교역에 필수적인 만큼 주변 영주들도 이 지역에 도적들이 들끓는 건 가만두지 않았다. 도적들은 작은 영지 내에서나 활개 치고 다녔다.
그러니 상단주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었다. 정말로 도적들을 만나 호위들이 다 죽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도적 한 명이 다가와 두목으로 보이는 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주변에는 더 없습니다. 아직 병력이 움직이지 않은 거 같습니다."
"그래, 마저 정리하고 이동하도록. 최대한 이 지역에서 도망 다니며 우리를 쫓아오게 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상단주는 벌벌 떨면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의문에 잠겼다.
'무슨 도적들이....'
그간 살면서 많은 도적을 만나 봤지만, 이들은 뭔가 달랐다.
복장은 전형적인 도적놈들의 복장인데 하는 말이며 행동에서는 범죄 집단 특유의 천박함과 비열함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군대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 행동에 절도가 있다. 움직일 때도 당연하다는 듯 대열을 갖추었다.
'타, 탈영병들이 모인 건가?'
최근에 서부의 탈영병들이 도적 떼로 변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펜리스가 로드리크를 점령한 뒤로 죄다 투항했다고 들었는데.'
거기다 지금 눈앞에 있는 자들은 아무리 봐도 쫓기는 자들처럼 보이지 않았다.
도적들의 두목이 말했다.
"다 죽이고 시체는 던져 놔라. 재물은 가져간 뒤 대충 처리해라."
"알겠습니다."
도적들이 무기를 뽑고 다가왔다. 상단주는 사색이 되어 다시 빌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다 드리겠습니다!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아무리 빌어도 상대는 말이 없었다. 협상도 받아 주지 않았다. 훔쳐 들은 대화로 짐작건대 딱히 재물이 필요한 거 같지도 않았다.
이런 도적놈들은 난생처음 봤다. 그냥 미친놈들이 아닌가 싶어질 정도였다.
도적이 검을 들었다. 상단주를 비롯한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았다.
퍼억!
"으아아아!"
가장 앞에서 무릎 꿇고 있던 상단주는 무언가 뚫리는 소리에 비명부터 질렀다.
그런데 아무런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
깜짝 놀라 눈을 떠서 앞을 바라보니 검을 휘두르려던 도적은 창에 가슴이 뚫려 뒤로 나가떨어져 있었다.
남은 도적들은 전부 긴장한 표정으로 진형을 갖추고 무기들 들어 올렸다.
두두두두두!
상단주는 도적들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한 남자가 검은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도적들의 수는 서른 명이다. 고작 한 사람에게 겁을 먹는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가오는 남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무슨 말이 속도가...."
눈 한번 깜빡일 때마다 훅훅 거리가 좁혀졌다. 자세히 보니 남자의 몸에서 나온 기이한 검붉은 빛이 일렁이며 말을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도적들의 외침.
"펜리스 백작이다!"
"펜리스 백작?"
달려오는 자는 지셀이었다.
지셀이 앞에 있는 도적들을 보며 씨익 웃었다.
"역시 평범한 도적놈들이 아니구나."
서부 인근에서 활동하는 도적들이 홀로 움직이는 자신을 단번에 알아봤다.
지셀이 워낙 많은 활약을 했기에 알아볼 수야 있다. 하지만 저들의 절도 있는 움직임은 절대 일반 도적들이 보일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로드리크군의 탈영병도 저럴 수는 없을 터였다.
파아앙!
순식간에 다가온 흑왕이 사람들을 뛰어넘으며 도적들 앞에 당도했다.
턱.
지셀이 말에서 내려 검을 뽑으며 말했다.
"한 놈도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마라."
"쳐라!"
도적 두목이 외치자 도적들이 모두 지셀에게 달려들었다. 다들 죽음을 각오한 눈빛이었다.
파앙! 파앙! 파앙!
지셀이 가볍게 검을 휘두를 때마다 도적들의 목이 날아갔다.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고 덤벼드는 적들을 보며 지셀이 웃었다.
"기사가 도적질을 해?"
수준이 높지는 않지만, 한 놈도 빠짐없이 마나를 쓰고 있다. 최소한 초급 기사는 된다는 뜻이었다.
이런 놈들이 무엇 하러 도적질을 하겠는가? 공작가가 보낸 놈들이 확실했다. 아무리 초급에 불과하다 한들, 기사를 이렇게 버리는 패로 쓸 수 있는 곳은 공작가밖에 없다.
물론 도적들은 자신들이 버리는 패로 쓰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의 임무는 이리저리 도망 다니며 시선을 끄는 것뿐이었으니까. 그 정도는 쉽다고 생각했다.
도적단의 두목으로 위장한 자는 지셀을 직접 상대하게 되어서야 그게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직접 보니 소문 이상이구나!'
이미 펜리스 백작의 영역이 된 이곳에서 잘 도망 다닐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착각에 불과했다.
그렇게 경계를 서고 주변을 살폈는데도 펜리스 백작이 오는 걸 발견하지 못했다.
자신들보다 훨씬 더 넓은 곳을 감시할 능력이 있거나, 초급 기사들이 인식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다가올 수 있다는 뜻이었다.
콰아아앙!
지셀에게 덤벼들었던 도적들이 순식간에 모두 죽었다. 자신들로서는 지셀을 감당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두목은 바로 검을 꺼내 스스로의 목을 베었다.
쿠웅!
두목까지 쓰러지자 이 자리에 서 있는 도적은 아무도 없었다.
지셀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쓰러진 두목을 바라보았다.
"흠."
약한 놈들이긴 하지만 제법 기강이 단단하게 잡혀 있었다. 잡혀서 고문당하고 실토할까 봐 저렇게 단호하게 목숨을 끊는 걸 보면 말이다.
'오히려 저러니까 더 확신이 가는데.'
실력도, 충성심도 확실한 기사들을 도적단 따위로 쓸 자들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공작가가 이곳에서 또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상념에 빠져 있던 지셀 앞에 상단주가 달려와 다시 엎드렸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살아났으니 이들로서는 감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지셀은 그런 상단주를 보고 물었다.
"펜리스 백작이다. 저놈들이 특별히 한 얘기가 있나?"
"역시 펜리스 백작님이셨군요! 아, 보통 도적들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무언가 목적이 있는 거 같았습니다. 협상도 받아 주지 않고 재물에도 관심이 없는 거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 안에서 도망 다니면서 쫓아오게 해야 한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탈영병인 줄 알았는데...."
상단주는 무척이나 말이 많았다. 살아난 게 너무 기뻐서 도움이 되려고 그러는 건지, 아니면 원래 말이 많은 성격인지는 모르겠지만.
지셀은 상단주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시선을 돌리려는 게 맞았군."
저 정도 기사들이 마음먹고 도망 다니면 어지간한 토벌군은 잡기가 힘들 것이다.
그것도 저런 집단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모두가 기사일 리는 없지만, 상당한 실력자들로 구성되어 있을 게 뻔하다.
공작가와 구원교는 가짜 도적 떼를 만들어 각 영주들의 시선과 병력을 돌리려고 한 것이다.
'적절했어. 놈들도 바보가 아니라는 거지.'
지셀이 건네준 정보에 있는 것이 균열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친왕파도 알고 있다. 다른 왕국에서 정보에 없던 균열을 우연히 발견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국 곳곳에서 수색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방에서 도적들이 날뛰니 병력이 분산되어 수색도 그만큼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만약 수색을 하지 않았다면 공작가도 이렇게 시선을 끄는 짓을 하지 않았을 테지. 확실하다. 남아 있는 균열들이 아직도 많은 거야.'
그리 유쾌하지 않은 결론에 지셀이 미간을 찌푸릴 즈음, 멀리서 기사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영주님!"
도적들을 지셀 혼자 다 죽인 후에야 기사들이 도착한 것이었다. 지셀은 그들을 보며 혀를 찼다.
"여전히 느리네."
'아니, 영주님이 빠른 거라고요.'
기사들이 입을 삐죽댔다. 흑왕이라는 미친 말을 마나로 강화해 달려 나가는 걸 기사들이 어찌 따라잡는다는 말인가. 솔직히 억울했다.
지셀은 상인들을 보며 말했다.
"도적들은 병력을 보내 모두 토벌할 테니 걱정하지 말도록."
"감사합니다! 그런데 백작님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혹시 가까운 도시로 가신다면 제가 극진히 모시겠습니다."
같이 가자는 의도가 물씬 풍겼다. 혹시나 또 도적들을 만날까 봐 걱정이 됐던 것이다.
"나는 따로 볼일이 있다. 기사 몇 명을 붙여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가라."
"아이고, 감사합니다!"
호위를 다 잃은 상단주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건넸다.
지셀은 조금 전 상대한 도적들의 실력을 대충 어림해 기사를 10명이나 붙여 주었다.
"상인을 호위해 준 뒤에는 린더스타인에 가서 대기하도록. 그리고 셀버크 백작에게 일단 토벌군을 준비하라고 일러라."
현재 서부는 셀버크 백작이 대표로 다스리고 있지만, 실제 업무는 펜리스의 관리들이 하고 있다.
로드리크 후작가를 따르던 봉신들은 모두 지셀에게 새로 충성을 맹세했다. 봉신이 아닌 영주들도 지셀의 눈치를 보고 있으니 서부를 관리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기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상단주와 상단 사람들은 마음 든든하게 떠났다.
지셀은 그들을 보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뭘 하고 있었든, 상당히 진척되었겠군.'
도적들이 활개 친다는 소문을 접한 지도 이미 며칠이나 지났다. 소문이 퍼지고 정보를 취합하는 데 걸리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났다.
'어쩔 수 없지.'
아무리 전생의 정보를 가지고 있다 해도 지셀이 신은 아니다. 그렇기에 언제나 상황에 맞춰 계획을 수정해 오지 않았는가.
공작가와 구원교도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며 움직이고 있다. 그걸 자신이 모두 알고 사전에 막을 수는 없다.
결국 대비할 수 있는 만큼은 대비하되, 상대가 무슨 짓을 하든 박살 낼 수 있게 힘을 길러야 한다.
"일단 핀로스 남작령으로 가자."
균열이 있을 거라고 가장 유력하게 의심되는 지역이었다. 그곳에 가서 수색해 보는 것이 지금으로선 최선의 대응이었다.
핀로스 남작령의 경계 검문소에 있던 병사들은 지셀이 나타나자 깜짝 놀랐다.
"페, 펜리스 백작님이 여기에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책임자인 기사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로드리크 후작까지 펜리스에 박살 난 걸 봤으니 다들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핀로스 남작은 공작파에 있다가 탈퇴한 영주였다. 그리고 최근 공작파의 최대 적은 친왕파가 아니라 펜리스였다.
그런 펜리스 백작이 딱 봐도 200여 명에 가까운 기사들을 끌고 나타났으니 정신을 못 차리는 건 당연했다.
덜덜 떠는 병사들을 보고 지셀이 피식 웃었다.
"그냥 영지 좀 둘러보러 왔다."
"...."
기사는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앙다물었다.
예전 같았으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호통을 쳤을 것이다. 공작파에 있을 때는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뒤에 공작가를 업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한낱 남작령에 불과하다. 본래는 친왕파가 아니었으니 편들어 줄 사람도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친왕파 최강의 귀족이 영지 좀 보자고 하니 막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그, 그.... 제가 영주님에게 빨리 보고를 올리고...."
"아니, 뭐 번거롭게 그렇게 해? 그냥 여행자처럼 생각해, 여행자처럼. 알았지?"
"아, 아니. 어찌 그렇게...."
기사들을 이끌고 온 영주를 어떻게 여행자처럼 생각하고 그냥 들여보낸단 말인가. 어디서 어떤 난리를 칠 줄 알고?
"그냥 여행 온 거라고 생각해. 나 지금 많이 바쁘거든?"
뭔가 기세가 살벌했다. 기사는 눈을 꼭 감고 말했다.
"핀로스 영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백작님. 좋은 여행 되시기를."
대놓고 억지로 검문소를 통과한 지셀은 가장 빠른 길을 통해 목표 지점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작은 도시였다.
그간 친왕파가 찾은 균열은 라비에르가 숨었던 곳처럼 작은 마을에만 있지 않았다. 몇몇 균열은 도시에 있었다.
사람도, 건물도 많은 도시에서는 균열을 찾기가 상당히 어려웠고, 그만큼 수색에 많은 병력이 필요했다.
지금 공작가는 그 병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대놓고 도적들을 푼 것이다.
지셀이 도시에 도착하자 경계 검문소에서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다, 당장 시장님에게 연락을...."
"아니, 됐다. 그건 나중에 하도록 하지. 내가 지금 바쁘거든."
"그, 그러면 무슨 용무로...."
"따로 볼 일이 있어. 잠깐 들어간다."
도시에 진입하자마자 지셀은 기사들에게 말했다.
"모두 마나를 최대한 끌어올려서 주변을 탐색해라. 저번에 느낀 기운들 알고 있지?"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비에르를 잡았던 마을에서 그들은 은밀하고 역겨운 기운을 분명히 느꼈다.
정신을 집중하고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기운이다. 최대한 마나를 방출해서 다른 기운의 간섭을 줄여야 했다.
"좋아,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한 곳도 빠짐없이 수색해."
"알겠습니다!"
기사들이 거칠게 움직였다. 도시의 경비병들은 그 모습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셀이 경비병들의 어깨를 툭툭 친 뒤 말했다.
"괜찮아, 별일 없을 거야."
물론 그 말을 믿는 병사들은 아무도 없었다.
오자마자 다짜고짜 도시에 기사들을 풀어 버리다니. 사달이 나도 단단히 날 거 같았다.
지셀은 경비병들을 무시하고 자신도 마나를 잔뜩 뿜어내며 움직였다.
그렇게 꼼꼼하게 주변을 수색하고 있을 때, 루카스가 허겁지겁 달려오더니 크게 외쳤다.
"찾았습니다! 찾았습니다!"
"찾았어?"
"네! 저 그때 그 마을에서 싸우다가 팔도 부러졌었잖아요! 진짜 확실합니다. 그때 느낀 기운하고 똑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주변 사람들 뭔가 좀 이상합니다!"
"이상하다고?"
"네, 일단 가 보셔야 할 거 같습니다!"
"그래, 가자."
지셀이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이곳에 균열이 준비되어 있었다.
414화 문이 열렸다. (2)
수도원에서 지내고 있는 수녀 세라는 최근 잠이 들 때마다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옆 침대에서 지내는 동기 수녀가 새벽에 혼자 계속 중얼거리는 소리였다.
'아....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처음에는 잠꼬대려니 했다. 그런데 요 며칠간 계속되니 그녀도 상당히 짜증이 난 상태였다.
'일어나면 얘기를 해야겠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겨우 잠이 든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얘기를 하려고 했다.
"아, 벌써 나간 건가?"
잠을 설치다 보니 늦잠을 잔 모양이다. 이미 동기는 자리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오다가다 만나면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도를 하고 할 일을 하다 보니 너무 바빠서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잠을 잘 때 빼고는 최근에 동기의 얼굴을 본 기억이 없었다.
'뭔가 자꾸 동선이 엇갈리는 느낌이네.'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니 이미 상대는 잠이 들어 있었다.
세라는 살짝 가까이 가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동도 없이 잠이 든 게 참으로 조용했다.
'오늘은 제발 조용히 있어 줘. 나도 며칠간 잠을 못 자서 힘들단 말이야.'
속으로 투덜거린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겨우 잠이 들락 말락 하는데 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
무척이나 빠르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웅얼거리는 발음에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 제발....'
귀를 막았는데도 자꾸 들려왔다. 마치 자신의 옆에 앉아 귀에 대고 속삭이는 거 같았다.
오싹!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소름이 돋은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이를 악문 그녀가 조심스럽게 일어나 옆자리로 걸어갔다.
천천히 다가가 침대를 바라보자 여전히 그 수녀는 조용히 잠이 들어 있었다. 조금 전 보았던 그대로, 미동도 안 한 상태였다.
'무슨....'
자신이 착각을 했단 말인가? 그런데 눕기만 하면 들리는 이 소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게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있으면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는다.
옆자리를 바라봐도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는다.
결국 세라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해가 밝아 올 즈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고 말았다.
[$%&*#@$%!%^$$#]
"아아악!"
또다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발 그만 좀 해!"
소리를 지르고 주변을 둘러보니 벌써 밤이었다.
자신이 하루 종일 잠만 잤단 말인가?
말이 안 된다. 그러면 누군가 깨우러 왔을 것이다. 수도원의 일은 생각보다 많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런 의문보다 옆 침대에서 지내는 동기에 대한 분노가 더 컸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세라는 옆자리로 다가가 이불을 거칠게 들췄다.
"꺄아아악!"
그러고는 비명을 내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동기는 피투성이 시체가 되어 있었다. 아마 세라가 처음에 확인했을 때도 이미 죽은 상태였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 누워 있던 자세 그대로 미동도 없었던 것이다.
"도, 도대체 이게...."
누가 감히 수도원까지 와서 사람을 죽인단 말인가!
"사, 사람을 불러야 해...."
다른 이들을 불러야 한다. 범인을 잡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벌떡 일어나는데 갑자기 세상이 일그러지며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지지지지지직....
세상이 갈라지는 것만 같은 소리가 났다.
그녀의 눈앞이 어느 순간 붉게 물들었다. 본래의 색이 남아 있는 물건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왜, 왜 이래. 이게 뭐야."
공포에 질린 그녀가 벌벌 떨며 나가려 했다.
끼이이익....
그때, 방문이 저절로 열렸다.
"뭐, 뭐야...."
세라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주 살짝 열린 문틈 너머는 어둠으로 가득했지만, 그녀는 확실히 보았다.
드르륵.
그 어둠 속에서 붉게 충혈된 눈 하나가 나타나 방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악마다, 악마가 이곳에 나타난 게 분명하다.
세라는 두려움에 가득 차 도무지 밖으로 나갈 자신이 없었다.
"주, 주여...."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눈을 감고 묵주를 연신 굴리며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기도문을 외울수록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안심하기도 잠시, 그녀의 기도문 사이에 점차 다른 소리가 끼어들기 시작했다.
[$%&*#@$%!%^$$#]
매일 밤 들었던 그 속삭임이었다.
동기가 낸 소리일 리가 없었다. 동기는 이미 죽어 있다.
이건 악마가 낸 소리가 분명했다.
"제, 제발...."
[$%&*#죽여...!%^$$#]
속삭임은 점점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던 속삭임은 이제 그녀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죽여...!%^탈출해....#]
'무엇을 죽여? 어디를 탈출해?'
[$%살기 위해&*#죽여...!세계를%^탈출해....#]
'악마! 내 안에서 물러나라!'
그녀는 속삭임이 들려올수록 더욱더 간절하게 기도를 올렸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제발 가엾은 제 영혼을 구해 주소서....'
지금은 기도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속삭임을 계속 무시했다.
어느 순간 속삭임의 내용이 달라졌다.
[죽여.... 죽여.... 죽여.... 그래야 살아....]
갑작스레 느껴진 차가운 감촉에 눈을 뜬 그녀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고기를 잡을 때나 쓰는, 넓적한 푸줏간 칼이 하나 쥐어져 있었다.
뚝.... 뚝....
이제 막 고기를 잡은 것처럼, 칼에서 신선한 피가 떨어졌다.
그녀의 손과 몸에도 피가 가득 묻어 있었다.
"이, 이게 뭐야...."
여전히 붉은 세상은 숨 막힐 정도로 고요했다. 들리는 건 알 수 없는 속삭임과 자신의 숨소리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수도원이 너무 조용하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 그녀가 앞을 바라보았다.
문틈으로 보이던 눈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작은 촛불들만이 어두운 수도원 내부를 비추고 있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이 분위기가 너무나 무서웠다.
끼익.... 끼익....
걸을 때마다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조심히 둘러보니 벽 곳곳이 끔찍하게 피 칠이 되어 있었다.
"아아...."
그녀는 저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곳저곳에 사람들이 죽어 있었다. 이러니 아무도 반응을 안 한 것이다.
정말 악마가 들어와 모두를 죽인 것일까?
'밖으로 나가야 해.'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불러야 한다.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그녀는 칼을 꽉 쥐고 떨리는 두 걸음을 옮겼다. 이 칼은 몸을 보호하라고 신께서 내리신 것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답답하고 좁아 보였던 수도원이 오늘 밤에는 왜 이렇게 넓어 보이는 걸까.
[죽여.... 죽여.... 죽여.... 그래야 살아....]
속삭임을 무시했다. 벽면 가득한 피 칠도 무시하고 시체들도 무시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이곳에서 탈출하는 데만 전력을 다했다.
"아아...."
수도원의 정원에 나온 그녀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두려움에 떨었다.
쿠르르릉!
붉게 변한 하늘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달빛마저 일그러지며 불길한 굉음을 뿜어냈다.
"아아아...."
끝도 없이 음산한 바람이 불었다. 나무들은 모두 메말라 죽어 가고 있었다.
가아아아아악!
사방에서 기괴한 비명들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절망 어린 표정으로 눈물을 흘렸다.
세상이 멸망한다면 이런 광경일까. 철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그저 붉은 어둠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그제야 속삭임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은 알 거 같았다.
[!세계를%^탈출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세상이 이상해진 모양이다. 하지만 탈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곳에 혼자 있을 수도 없었다.
너무나 무서웠지만,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아야 했다. 살아남은 사람을 찾아야 했다.
그녀는 수도원의 철문을 힘차게 열었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며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녀는 순간 눈을 감았다.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철문은 그냥 수도원과 바깥을 막고 있는 문일 뿐이다.
이미 밤이 되었는데 이렇게 빛이 쏟아져 들어올 리가 없었다. 분명 철문 사이로 바깥세상을 봤을 때는 수도원과 다를 게 없었지 않은가.
밝은 빛에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 뜬 그녀는 곧 문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아아...."
귀족처럼 보이는 금발의 청년이 앞에 서 있다. 그의 뒤로는 심각한 표정의 기사들이 줄지어 있었다.
복장과 갑옷의 양식이 평소 보던 것과는 좀 다른 게 의아하긴 했지만 그래도 사람을 만났다는 게 너무 반가웠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으며 울부짖었다.
"살려 주세요! 악마가 나타났어요! 수도원의 모든 사람이 죽었어요!"
울부짖는 그녀에게 청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옆에 있는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서요! 어서 수도원을 확인해 주세요! 저는 이곳의 수녀인 세라예요! 영주님이 이상함을 느끼고 보내신 것 아닌가요?"
그녀가 울먹이면서 말했지만 여전히 청년은 입을 열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꺼내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기겁하며 외쳤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수도원 안을 살펴보라고요!"
청년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무심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미 먹혔군."
"네? 먹히다니요? 뭐가요?"
"너는 수녀가 아니다."
"뭐라고요?"
어릴 때부터 이 수도원에서 살아왔다. 평생을 신을 모시며 살아왔는데 자신보고 수녀가 아니라니!
그건 자신의 인생을 부정하는 말이었다.
아니, 지금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수도원에 시체가 가득한데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알았어요! 일단 제발 수도원 안을...."
청년은 다시 그녀의 말을 끊었다.
"여기는 수도원이 아니다. 그리고 너는 수녀가 아니다. 남자는 수녀가 될 수는 없지."
"그게 지금 무슨 소리...!"
그녀는 소리를 지르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목소리가 어느새 굵고 거친 남자의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어, 어... 이게 지금 무슨...."
손에는 여전히 피 묻은 칼이 쥐여 있었다. 하지만 우락부락한 손과 거친 털이 가득한 팔뚝은 본래의 제 것이 아니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정신이 혼란스러운데 갑자기 피비린내와 악취가 화악 풍겨 왔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어...."
수도원의 정원과 건물이 아니라, 그냥 제법 넓은 푸줏간이 거기에 있었다.
사방에 매달린 고깃덩이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 옆에는 사람들의 시체도 같이 매달려 있었다. 바닥 여기저기에도 시체가 널려 있었다.
"아, 아, 아, 아... 이, 이게 무슨...."
철그렁.
남자는 칼을 떨어뜨리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떠올랐다. 저기에 죽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아는 사람들이었다.
같이 일하던 동료와 가끔 찾아오는 손님, 그리고 가족들.
푸줏간의 벽면은 모두 피 칠갑이 되어 있었다. 사람을 이렇게 죽여 댔으니 멀쩡한 게 오히려 이상했으리라.
"아, 아, 아...."
자신의 기억과 세라의 기억이 뒤섞였다. 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은 분명 이 푸줏간에서 일하던 남자였다. 그냥 평범하게 고기를 잡고 팔며 가족들을 위해 살던....
그리고 자신은 분명 수녀였다. 멸망하던 세계에서 신께 기도를 올리던....
[$%&*#@$%!%^$$#]
귓가에 다시 속삭임이 울렸다. 이제 그 뜻을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그 속삭임은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러나 이 세계의 것이 아닌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야 살 수 있어.]
"아아...."
남자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자신의 손으로 가족들까지 다 죽여 버렸다.
신을 모시는 수녀가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죽여 버렸다.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이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은 그냥 살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 그뿐이었다.
뚝, 뚜둑! 뚝!
갑자기 뼈가 꺾이는 소리가 나며 남자의 몸이 기괴하게 이리저리 비틀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곧 남자의 머리가 정수리부터 갈라지기 시작했다.
찌지직....
껍질이 벗겨지듯, 인간의 허물이 벗겨진다. 그리고 나타난 것은 뇌에 두꺼운 촉수가 달려 꿈틀거리는 변이자였다.
츠츠츠츳....
변이자의 머리에 눈처럼 붙어 있는 붉은 광석이 빛을 내더니, 변이자가 불길한 기운을 마구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청년, 지셀이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든, 당장 이곳의 시장을 찾아가 병력을 모으고 사람들을 대피시킨 뒤 도시를 포위하라고 일러라."
"알겠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전투를 준비해라."
변이자 따위는 몇이나 있든 지셀 혼자서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라비에르를 잡을 당시의 마을에서처럼 정상적으로 변이가 이루어진 상황이 아니었다.
쿠우웅!
땅 밑에서 어마어마한 마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현상이 무엇을 뜻하는지 지셀은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이곳의 '문'이 열렸다."
지셀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415화 아직은 닫을 수 없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