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미궁 (4)
어비스의 지하 50층부터 게임의 중반부라 하게 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것을 공략한 기점으로 많은 것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가장 굵직한 점들은 어비스의 입구가 지옥 동산뿐만 아니라 대륙 곳곳에 나타난다는 점.
난이도 또한 그에 걸맞게 대폭 상승하며 미궁과 같은 여러 형태의 어비스가 나타난다는 점 등이 있겠다.
이번 달의 공략 층이 미궁 형태인 것이 확인되었다, 하면은 우선 인원 모집에 들어간다.
비단 미궁뿐만이 아니라 중반부 이후의 모든 층이 그랬지만, 미궁은 그 특수성 덕에 조금 더 세분화하여 완벽하게 뽑는 것이다.
물론 정식 공략대 외에도 수없이 많은 공략대가 존재했고 꾸려진 공략대는 각기 다른 어비스 입구에서 출발해 미궁의 중심을 향해 조심스레 전진.
어둠을 헤치고 중심에 도착한다면 층의 구슬을 지키는 몬스터를 처리하고 구슬을 파괴하면 공략이 끝나는 것이었다.
층을 구성하고 있는 핵심, 층의 구슬.
구슬을 부수는 순간 해당 층은 무너지는 것이기에 그것을 지키는 몬스터가 그 주위를 벗어나는 경우는 없다.
그렇다면 지금 다프네와 히오에게 접근하고 있는 저것은 왜 저런 행동을 보이는 것일까.
- □□□□.
왜 층의 구슬을 내버려두고 방을 벗어나 예까지 직접 행차한 것인가.
그 이유는 일단 제쳐 두고.
"여태 쉬었으니 마무리 한 번쯤은 직접 나서도 불만 없겠지?"
라플리시아를 소환 해제하고 뒤로 물러나는 다프네에게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마저 엿보였으니.
명분 역시 충분했다.
한나절동안 모든 전투는 다프네가 담당했고 히오는 그 뒤를 따르기만 했지 않은가.
힘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것도 확인했으니 그 정도 요구야 너무도 당연해서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곤란한데?"
물론 당연이고 나발이고 히오의 입장에서는 곤란한 것투성이다.
어떻게 모은 인내력인데 전부 날려 버릴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분명 진입하기 전에 다프네가 멋있게 말한 것도 있었다.
"길만 알려 주면 네가 뚫어 준다며?"
"그래서 여기까지 뚫었지 않나. 마무리 정도는 네가 해."
"그런...."
"온다."
한가로이 이야기나 나눌 상황은 아니었다.
미궁의 몬스터라고 평가 절하되어 있지만, 그것은 다프네나 히오 정도나 되니 그리 여유롭게 말할 수 있는 것.
충분히 강력한 몬스터인 것이다.
- □□□□.
다가오는 보스 몬스터의 존재감이 느껴진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녀석의 눈동자.
다만 그 개수가 정상적이지 않았다.
못해도 백은 거뜬히 넘을 듯한 그 눈동자는 미궁의 공간을 가득 메우며 서서히 가까워져 오고 있었으니.
"어비스, 감시자네."
한 발 뒤로 물러선 다프네가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태평하게 말한다.
어비스 게이트에 대비해서 모든 주요 보스 몬스터를 기록하고 정리한 것이 다프네가 길드를 안정화시키고 가장 먼저 한 일이었다.
그러니 웬만한 몬스터는 전부 다 꿰고 있다는 말이다.
어비스 몬스터 - 감시자.
중반부 이후 미궁 형태에서만 나타나는 몬스터로 슬라임과 비슷한 몸체. 허나 슬라임과는 비교하는 게 민망할 정도로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며 그 몸에 박힌 눈의 개수만 수백 개.
사각 지대가 전혀 없으며 그 수많은 눈을 모두 터트리지 않는 이상 죽지 않는 몸은 자유자제로 형체가 변하기까지 한다. 미궁의 좁은 공간을 장악하며 밀고 들어오는 동안 모든 눈알을 터트려야 하기에 상당히 까다로운 몬스터.
"인 것쯤은 알고 있겠지? 지존천마?"
"물론이지. 다프네."
"그럼 빨리 해결하지?"
"네가 하는 건 어때?"
다프네가 한 걸음 물러서면 히오는 두 걸음 물러선다.
"어디까지 물러나려고?"
"일단 너보다는 더 뒤로?"
다프네가 세 발짝 물러나면, 히오는 네 발짝 물러나는 것이다.
청염은 진작에 꺼 버린 후였다. 목표치에 거의 도달한 인내력을 날려 버릴 수는 없었으니까.
물론 어비스 몬스터가 지성이 있는 생명체로 판정되지 않을 수도 있다.
미궁의 벽과 천장, 바닥까지 모조리 감싼 채 꿈틀대며 오는 저 수백 개의 눈동자를 좀 보라.
지성이 있는 생명체라고 볼 수 있겠는가.
다만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는 한 이건 도박이었다.
무려 인내력 935가 걸린 도박.
할 이유가 없는 도박인 것이다.
"아까의 그 불꽃은 왜 취소한 거지? 그 정도 스킬이면 감시자 정도야 어려울 것도 없어 보이는데."
"사정이 좀 있어서."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면서도 두 다리는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앞이 아닌 뒤를 향해서 말이다.
"무슨 사정?"
"첫 만남에 너무 많은 비밀을 캐 내려는군."
비폭력은 히오의 명백한 약점이다.
다프네는 멸망을 막기 위해 함께 움직여야 할 동료가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약점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으니.
- □□□가.
계속해서 밀고 들어오는 감시자의 징그러운 육체.
결국 먼저 나선 것은 다프네였다.
"쯧."
오른손을 옆으로 뻗자 다시금 모습을 드러내는 푸른 활, 라플리시아.
"일단 공략을 마무리해야 하니까."
꺼냄과 동시에 팽팽하게 당겨지는 활시위.
그 옆으로 활짝 펼쳐지는 새파란 꽃잎은 이전보다 더욱 커다랬으니.
쐐애액- 소리를 내며 빠르게 쏘아져 나가는 냉기의 화살.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아까와 같은 기본 화살은 아니었다.
못해도 수십 개는 되어 보이는 화살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 '감시자'의 거대한 몸에 모조리 틀어박힌 것이다.
얼핏 보면 푸른빛이 잠깐 번뜩이고 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빠른 속도.
하지만 감시자의 남은 눈은 여전히 많았고 밀고 들어오는 육체 또한 여전히 건재했다.
물론 다프네의 활 또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수십의 얼음 화살이 쏘아져 나간다.
감시자의 흐물거리는 몸과 눈동자에 틀어박히는 화살. 눈동자가 순식간에 얼어붙고 부서져 내린다.
그 직후 다시 다프네가 활시위를 당긴다.
쏘아지는 수십 개의 푸른 화살.
감시자의 걸쭉한 몸에 화살이 틀어박히고 그와 동시에 다시 화살이 쏘아진다.
이번에는 그 수십 발의 화살이 도착하기도 전에 그 뒤를 잇는 화살이 출발하고, 그것이 도착하기 전에 다시 쏘아지고, 또 쏘아지는 것을 반복한다.
쐐애액- 쏘아지던 파공성은.
어느새 쏴아아 쏟아지는 파도가 되었으니.
「'라플리시아' 스킬 - '청해(靑海)'가 발동됩니다.」
보이는 것은 차갑고도 푸른 빛의 물결.
얼음으로 이루어진 은하수.
진심을 다한 다프네의 힘이었다.
"공략을 마무리하지."
몇 초간 이어진 시린 빙하의 파도가 끝이 나고, 확인할 것도 없다는 듯 그대로 라플리시아를 소환 해제하는 다프네.
그 자신감은 당연한 것이었다.
미궁의 벽을, 천장을, 바닥을 모조리 감싼 채 질척이며 접근하던 보스 몬스터. 그 수백의 눈동자에서 따온 이름, 감시자.
그것은 본래의 기괴했던 형체를 잃어버리고 반짝이는 얼음 조각이 되어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으니.
수백의 눈은 모조리 얼어붙어 깨진 채였고 몸 곳곳에는 새파란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정상적이었다면 그 액체 같은 몸을 자유로이 변화하며 공략대를 위협하고 목숨과도 같은 수백 개의 눈을 감추고 이동시키며 제법 까다로웠을 감시자.
허나 미궁의 한정된 공간을 빼곡히 메우며 무한히 쏟아지는 빙하의 은하수 앞에서는 하찮은 생명에 불과한 것이다.
"구슬을 부수러 가지."
퍼석- 얼어붙은 채 떨어져 나온 감시자의 눈 하나를 밟으며 전진하는 다프네.
"생각보다는 실망이 커. 지존천마."
천장에, 벽에 눌어붙은 채 그대로 얼어붙은 감시자의 시체.
간헐적으로 떨어지는 얼음 조각.
그것의 사이로 걸어 들어가는 다프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뒤에 있을 히오에게 말한다.
"아니, 내 기대가 과한 것이었나?"
그녀 역시 벤타이얼에 몰입했던, 수많은 시간을 갈아 넣었던 유저 중 하나로서 지존천마를 대단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은 이 세계가 현실이 되며 더욱 부풀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도 압도적인 1위였던 지존천마가 특전까지 받았으니 대체 얼마나 강해졌을까.
이전보다도 더욱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며 활약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일부러 소문까지 내어 그를 수소문하였다.
모험가 길드장이 지존천마를 찾는다고. 그런 소문을 들으면 곧바로 이해하고 자신에게 연락이 올 것이라 믿었다.
멸망이 예정된 세계에서 힘을 합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비록 게임이었지만, 세상이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며 끝까지 발버둥 치던 것은 5명의 랭커 모두가 같은 마음이라 믿었으니까.
다프네를 비롯한 다른 랭커들이 지존천마를 그토록 찾은 것은, 어쩌면 조금 의지하고픈 마음도 있었을 테다.
급작스레 떠안게 된 책임감은 너무도 무거웠으니.
언제나 자신들의 위에 있던 그에게 의지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허나 2년이 지나도록 연락은커녕 그를 봤다는 사람도, 그 비슷한 흔적조차 보았다는 이가 없었다.
죄다 지존천마를 사칭하는 사기꾼 아니면 정신 이상자들뿐.
실망이 컸기에 그를 겁쟁이라 칭하고 신경 쓰지 말라고 다른 랭커들에게 말했지만, 그럼에도 가슴 한구석에는 그에 대한 기대가 남아 있었나 보다.
지존천마에 대한 소문이 퍼졌을 때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으니까.
드디어 그가 나타났다는 기대감에 휩싸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기대감은 미궁에 들어오고 한나절 만에 산산이 깨부서져 버렸으니.
"어쩌면 최근 들려오던 소문도 부풀려진 것이겠군. 그 허세 가득한 스킬과 복장을 이용해서 말이야."
지존천마가 보여 준 푸른 불꽃은 분명 강렬했지만, 사용할 수 없다고 그 입으로 직접 말했지 않나.
그래서야 한낱 길잡이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지난 시절 보여 주었던 압도적인 모습은 어디로 가 버렸단 말인가.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마지막 한줌의 기대마저 사라지는 것이다.
기대가 컸던 만큼, 몇 년 동안 놓지 않고 있던 기대였던 만큼 그것이 완전히 무너졌을 때 느낀 허무함은 이루어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앞으로는 볼일이 그리 많지 않겠네 지존천마. 아니, 히오 파블렌코."
갑작스레 미궁의 형태가 다시 나타난다면 길잡이로 다시 부를 테지만, 그 외의 문제는 굳이 히오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
그녀 역시 누구보다 진심으로 멸망을 막기 위해 준비해 왔고 힘을 키웠다. 지존천마가 더 이상 압도적이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이제 자신이 더욱 노력해야 하리라.
1위의 특전을 받고도 명성을 올리지 않고 고작 저 정도밖에 힘을 키우지 못한 사내.
숨어 지내다 갑자기 나타나서 사정이 있다는 둥, 그런 소리나 늘어놓는 사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노력했다는 말이다.
차라리 자신이 1위의 특전을 받았다면 좋았을 텐데.
"너에 대해서 다른 이들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을게. 뭐, 딱히 할 말도 없겠지만."
물론 다프네도 알고 있다.
굳이 이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크게 기대하고 있던 것은 자신이었고 크게 실망한 것 역시 자신이었다.
히오 파블렌코는 약속대로 미궁의 길을 찾아 주었고 어찌저찌 시간 내에 공략은 완료하였으니.
겁쟁이 치고는 퍽 용기를 내지 않았나.
이제 지존천마에 대한 기대는 접고 앞으로의 일을 계획해야 하리라.
그렇게 생각함에도 말이 삐딱하게 나가는 것만큼은 도무지 막을 수가 없었다.
"다음에 또 길잡이가 필요하면 부르도록 하지."
몇 년을 기다리고 기대했으며 희망을 품었던 사내에 대한 실망이다.
조금의 비아냥은 아주 작은 미련조차 남기지 않기 위한 본능적인 행위였으니.
"공략은 끝났다."
다프네는 얼어붙은 감시자의 사체를 밟으며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발밑에서 퍼석이며 부서지는 얼음조각.
사방에 자욱한 한기는 자신이 만들어 낸 빙하의 길.
익숙한 그 길을 따라가면 곧 미궁의 중심에 도착할 테고 그곳에 있을 층의 구슬을 파괴하면 공략은 끝이다.
이번에도 무사히 지켜낸 것이다.
…허나 무슨 미련이라도 남았음인가.
"아니, 공략은 끝나지 않았어."
아니면 자신의 비아냥에 자존심이라도 상했음인가.
뒤에서 들려오는 히오 파블렌코의 목소리.
"다프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도 다프네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변명이라도 하고 싶은 것일까.
굳이 그와 더 이야기를 나누기 보다는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는 공략을 확실히 마무리 짓는 게 우선이었으니.
"멈춰."
하지만 어쩐지 단호한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은 그의 말대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문득 짜증이 치솟은 까닭이었다.
그녀답지 않게 감정이 격해지는 것이 이유였다.
생각해 보면 미궁에 들어오고서부터 그랬다.
히오의 칭찬 몇 번에 미소 짓고 그 사소한 행동에 쓸데없는 의심을 키우고.
큰 실망감에 대놓고 비꼬기까지 한 것이 아닌가.
결코 다프네답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그것까지 떠올릴 여유가 없었다.
"이제는 일의 우선순위도 파악하지 못하나?"
무슨 변명을 하든, 자신의 사정을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든, 우선 공략을 마무리 짓고 해야 할 게 아닌가.
대체 저 사내는 얼마나 더 자신을 실망시킬 작정이란 말인가.
그런 생각과 함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치솟은 짜증으로 인상은 찌푸려졌고 머릿속으로는 상상을 하고 있는 채였다.
자존심이 상한 지존천마가 일그러진 얼굴로 화를 내거나, 변명하는 모습을.
"무슨 변명이든 우선 공략을...."
허나 뒤돌아선 다프네의 눈에 비친 광경은 그녀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마무리하고...."
히오 파블렌코는 화를 내는 것도 변명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자신을 쳐다보고 있지도 않았다.
다만 흰자위 하나 없이 검게 물들은 눈으로 자신의 뒤편을 바라보며.
"뒤돌아보지 마라. 다프네."
더할 나위 없이 진중한 음색으로 말을 전할 뿐이었다.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와."
그 모습에 불현듯 생겨나는 위화감.
언제부터였을까. 자신은 공략이 이미 끝났다 생각하고 방심하고 있었다.
층의 구슬을 지켜야 할 감시자가 자신들을 향해 직접 움직인 것부터가 충분히 이상한 현상이었음에도 말이다.
생각의 틀에 금이 가자, 비로소 조금 맑아지는 정신.
대체 언제부터,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정신이 맑아졌다는 것은 무언가에 뒤덮여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머릿속을 뒤덮은 것들이 걷혀 가니 위화감은 끝도 모르고 커져만 간다.
우선, 자신이 만들었던 얼음의 차디찬 냉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퍼석이며 발에 밟혔던 익숙한 얼음의 느낌이 아니었다.
어쩐지 무겁고 어쩐지 두려운 발밑의 감촉.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 끝도 없이 추락할 것만 같은 아득한 느낌.
"흔들리지 마라 다프네. 시선을 돌리지 마. 오직 나만 보고 이쪽으로 똑바로 걸어와."
혼란한 와중에 들려오는 히오의 목소리는 분명한 이정표였다.
아득하게 느껴지는 두려움 속에서 길을 알려 주는 자였다.
"괜찮아. 이리로 와."
어느새 덜덜 떨고 있는 팔다리를 부여잡고 간신히 도착한 히오 파블렌코의 옆.
히오의 눈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지만, 그 시선만큼은 여전히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히오의 곁에 도착하고 나서야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볼 용기가 한줌이나마 생긴 것이다.
분명 스스로가 만들어 내었을 빙하의 길도, 차가운 한기도, 퍼석이며 부서지는 얼음 또한 느껴지지 않는 공간.
"정신 단단히 붙잡아라. 다프네."
주변을 둘러본 다프네의 시선은 마지막으로 히오와 같은 곳을 향한다.
어느샌가 미궁의 벽이나 천장 따위가 사라진 아득히 높은 하늘. 무한히 검을 뿐인 하늘.
"미쳐 버리고 싶지 않다면."
그곳에 떠 있는 것은 거대한 눈.
가로로 길게 찢어진 채 자신을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는 괴이한 눈이었으니.
"심연이다."
이곳은 이미 심연이었다.
91화 미궁 (5)
이변을 느낀 것은 층의 구슬을 지키는 보스 몬스터, 감시자의 기괴한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였다.
- □□□.
사소한 위화감이었다.
어비스 몬스터란 이계의 생명체.
이곳의 소리가 아닌 만큼 위화감이 드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어비스 몬스터의 소리는 많이 들어 봤다.
대부분 키에엑, 캬아악거리는 여타의 몬스터와 크게 다르지 않은 소리.
그것이 저층 어비스 몬스터의 소리였고, '감시자' 정도 되는 중반부 보스 몬스터의 소리는 처음 들어 보았다.
그것은 그저 단순한 울음이 아니었다. 낯설기 그지없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와도 같은 것이었다.
중반부 보스 몬스터쯤 되면 이계의 언어도 구사하는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넘겼다는 말이다.
허나 몇 차례 반복되는 그 소리 속에서.
- □□□가.
어쩐지 조금씩 그 음색이 변화하는 것을 느꼈을 때.
「정신 공격이 감지되었습니다.」
「특성 - '간지 없이는 못 살아!'가 발동됩니다.」
위화감은 눈 깜짝할 새 덩치를 불려 막대하게 덮쳐들어 온다.
그것은 다프네가 빙하의 물결로 감시자를 순식간에 처리했음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강력해진 것이다.
- □□인가.
분명 감시자는 죽어 버렸음에도 그것에서 나오는 소리만큼은 사라지지 않았기에.
괴이했던 음성은 점차 익숙한 것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었기에.
차오르는 긴장과 함께 지팡이를 들어 올린다.
「'어둠 권위자의 지팡이' 스킬 - '암흑의 통찰'을 발동합니다.」
검게 물든 눈에 보이는 것은.
"다프네. 멈춰."
저 높은 곳에 떠 있는 심연의 눈.
"내 옆으로 와."
그것을 인지한 순간, 이곳은 이미 심연이었다.
* * *
어찌 심연이라 단언했는가. 그리 묻는다면 답할 말은 딱히 없다.
그것 외에는 부를 말이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어둠을 배경으로, 어둠으로 이루어진 공간은 기이하기 그지없다.
언제든 집어삼켜질 수 있으며 언제든 무한하게 추락할 것만 같은 느낌. 그런 공간이었다.
굳건히 세워진 정신 방벽을 비집고 들어오는 막연한 두려움.
항거할 수 없다. 살아 숨 쉬는 생명체라면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공간.
「특성 - '간지 없이는 못 살아!' 가 발동 중입니다.」
의도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었다. 그저 심연 자체가 주는, 이 공간 자체에서 생겨나는 당연한 현상인 것이다.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940 / 1000)]
허나 참아 내야만 한다.
이유 모를 막연한 두려움을. 언제든 자신을 잃을 것만 같은 그 막연한 공포를 견뎌 내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
"정신 단단히 차려라 다프네."
다프네에게는 그리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달리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으니 그저 괴이한 이 공간에서 정신을 제대로 붙잡고 버텨 내기를 바라는 수밖에.
그런 말이 조금은 효과가 있었을까.
다프네의 오른손에서 푸른 빛무리가 뭉치더니 피어리어의 전설 속 무구. 라플리시아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다프네의 떨림은 멈추지 않은 채였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무기를 소환했지만, 심연이 주는 공포감은 그것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으니.
- □□□, □□ □□, 히오 파블렌코.
또다시 괴이한 음색이 들려온다.
분명히 낯선 것이었으나 마지막 그 말만큼은 또렷하게 이해되고, 확실하게 들려왔기에 목덜미가 쭈뼛해진다.
허나 그것에서 오는 두려움을 드러내서는 안 될 터였다.
그것을 나타내 봐야 돌아오는 것은 더욱 커져 버린 공포일 뿐일 테니.
지금 해야 하는 것은 발버둥.
심연에 더욱더 가라앉지 않기 위한 처절한 발버둥이었다.
- □□□, 지존천마, 히오 파블렌코.
다시금 심연 속에서 언어가 들려온다.
이번엔 절반 이상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 이현승, 지존천마, 히오 파블렌코.
그리고 세 번째 울림에서야 그 말은 온전히 이 세상의 것이 되어 울려 퍼진다.
완벽히 이해되어 다프네와 히오의 귓가에 들려오는 것이다.
심연의 눈은 히오를 내려다보며 그를 부르고 있었다.
그에 히오는 덤덤히 지팡이를 들어 올린다.
티내지 않으려 했건만, 그것을 쥔 손에는 저도 모르게 힘이 잔뜩 들어간 채였다.
「스킬 - '청염(靑炎)'이 발동됩니다.」
닿는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푸른 불꽃이 뿜어져 나온다.
감정이, 의지가 담긴 불꽃은 그 주인과 마찬가지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허나 그것을 표출하지는 않고 있었다.
주인이 행하고자 하는 의지는 그것이 아니었기에.
"불태워라. 청염."
아득히 넓으며 또 너무도 좁은 공간이다. 이것이 심연의 괴이함이었다.
히오는 그러한 괴리감을 소멸시키고자 했다. 공간의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부터 불태우고자 한 것이다.
그 의지를 고스란히 담은 청염이 덩치를 급격하게 부풀려 나간다.
사방에 자욱한 어둠을 밀어내고 아득한 발밑을 비추었으며 그 푸른 불꽃이 닿는 족족 공간이 밀려나는 것이었다.
비록 그 불꽃이 닿지 못한 곳은 여전히 심연이었고 여전히 어둠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조금은 숨통이 트인다.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942 / 1000)]
심연에 떠 있는 거대한 눈은 그런 히오의 행동을 그저 지켜만 보고 있다.
이유를 짐작해 보자면 이것이 하찮은 발버둥임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
히오의 능력으로는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아는 까닭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곧 예의 그 괴이한 음색이 심연의 눈으로부터 전해져 온다.
- 여태 잘 숨었지만, 결국 찾아내었다.
그와 동시에 공간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심연이 움직이는 것이다.
거대한 암흑이 머리 위에서, 양옆에서, 발밑에서 밀고 들어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압박감이었다.
집어삼켜질 듯한 심연 속에서 푸르게 빛나는 청염이 아니었다면 당장에라도 스스로를 잃을 것만 같은 두려움.
그만한 공포였으니 궁지에 몰린 다프네가 참지 못하고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끝나지 않는 두려움에 벼랑 끝까지 몰린 정신이 발악하며 명령을 내린 것이다.
저것을 없애라고.
그에 몸이 반응하며 라플리시아를 들어 올린다.
높은 하늘에서 지긋이 내려다보는 괴이한 눈을 향해 그것을 겨눈다.
"…죽어!"
몸이 덜덜 떨려 오지만, 상관없다.
목표는 거대하기 그지없고 다프네의 스킬은, 라플리시아는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었으니.
「스킬 - '빙하의 숨결'이 발동됩니다.」
「스킬 - '천중(千重)'이 발동됩니다.」
「'라플리시아' 스킬 - '어는점'이 발동됩니다.」
결코 실망시키는 일이 없던 필살의 조합이 순식간에 갖춰져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진다.
어둠 속에서 떠 있는, 어둠 그 자체인 듯한 눈을 향해 쏘아지는 천 겹의 화살. 그 속에 담긴 막대한 냉기.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쏘아져 나간 그것이 순식간에 심연의 눈을 꿰뚫고 지나간다.
"...."
아니, 정정해야겠다.
꿰뚫은 것이 아니라 그냥 지나쳤다.
마치 신기루를 관통한 유성우처럼.
거대한 눈을 지나쳐 아득한 심연 속으로 사라지는 냉기의 화살.
아득히 멀어지다 결국 심연에 집어삼켜지는 그것을 보고 있으면 정신이 멍해지는 것이다.
저것이 곧 머지않은 자신의 모습과도 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니.
"죽어! 죽어! 제발 죽어...!"
「스킬 - '천중(千重)'이 발동됩니다.」
「'라플리시아' 스킬 - '청해(靑海)'가 발동됩니다.」
다프네는 정신을 거의 놓아 버린 채 마구잡이로 스킬을 난사한다.
물론 그중 단 하나도 타격을 입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허망하게 지나갈 뿐이었다.
- 리퓨에의 희망도 끝이다.
다프네의 발악에도, 그 겁에 질린 외침에도 심연의 눈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오직 히오만을 지긋이 내려다보며 어둠을 조작한다. 공간을 확보한 채 덩치를 부풀리고 있는, 겁먹은 청염을 조금씩 압박해 들어가는 것이다.
청염이 마치 겁먹은 하룻강아지처럼 아득바득 덩치를 부풀리지만, 소용이 없다.
이곳은 이미 심연인 까닭이었다.
불태우고 불태우고 또 불태워도 무한한 심연 앞에서는 결국 지칠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결국 청염이 가까스로 확보한 공간마저도 점차 줄어든다.
들어선 순간, 정신을 갉아먹는 심연의 공간.
그것은 무척이나 강력한 것이어서 다프네 같은 최상위 랭커라도 무기력하게 함락당하고야 만다.
거기에 시시각각 거리를 좁히며 짓쳐들어오는 어둠을 보고 있노라면 멘탈이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그것이 심연이었다.
언제나 냉철하고 각성자들의 정점으로서, 거대 길드의 장으로서 단단한 정신력을 구축한 다프네조차 이토록 쉽게 무너지는 곳.
「'라플리시아' 스킬 - '청해(靑海)'가 발동됩니다.」
「스킬 - '빙하의 숨결'이 발동됩니다.」
「스킬 - '신속(迅速)'이 발동됩니다.」
마구잡이로 스킬을 난사한다. 그에 다프네의 마력이 빠르게 소모된다.
겁에 질린 발버둥. 그에 정신의 틈새가 더욱 벌어지는 것이다.
냉철한 이성이 있던 자리에 공포와 두려움이 밀려들어 오는 것이었다.
「'라플리시아' 스킬 - '어는점'이 발동됩니다.」
전설급 무구, 라플리시아에 내재된 스킬은 그 효과가 강력한 만큼 마력의 소모가 극심한 편이다.
최상위 스킬 정도는 아니더라도 저렇게 난사한다면 아무리 마력 스탯을 500까지 찍은 다프네라 할지라도 금방 마력이 바닥을 드러내고야 만다.
허나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그저 발버둥 치기에 바빴으니.
그러다 종내에는 미쳐 버리고 마는 것. 다른 세계의 생명체라면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나가 버리는 공간.
심연이었다.
"오지 말라고...."
그런 가엾은 발버둥도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력이 없으니 쏘아 대는 화살에도 힘이 실리지 않는 것이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과하게 긴장한 몸에 힘이 풀린다. 차라리 이렇게 정신을 잃는 것이 훨씬 편안하지 않을까.
이대로 힘을 푼다면 그대로 정신을 잃고 곧 편안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다프네의 몸이 하릴없이 무너진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허망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다.
아니, 주저앉은 것이 바닥인지. 올려다보는 것이 하늘인지도 분간이 가지 않는다. 머리가 뒤죽박죽 엉켜들어 가는 것이었다.
사방은 시시각각 어둠에 잠겨 들어가고 다프네와 히오가 선 공간은 빠르게 줄어들어 간다. 그렇게 어두워지는 와중에도 저 머리 위에 떠 있는 거대한 눈은 또렷하게 보이고 뚜렷하게 느껴지니, 그야말로 괴이(怪異).
이런 상식을 벗어난 것에 맞서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냥 포기하고 마지막 남은 한줄기 이성마저 놓아 버리는 게 마음 편하리라.
다프네가 그리 마음먹은 찰나였다.
"이제 좀 알겠네."
청염을 꺼내든 이후로 줄곧 조용하던 히오가 나선 것은.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999 / 1000)]
끊임없이 정신을 뒤흔드는 심연의 공간에서 가파르게 상승하던 히든 특성이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한 것은.
모든 것을 포기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1000 / 1000)]
「축하합니다! 히든 특성 '폭력은 안 돼!'의 목표치를 달성하였습니다. 히든 특성의 숨겨진 보상이 주어집니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 스킬의 이펙트가 거짓이 아닌 실제가 됩니다. 그에 맞춰 스킬의 등급이 재조정되며 스킬명이 변경됩니다.」
「보상으로 진화한 스킬은 삭제되지 않습니다.」
「보유한 스킬 중 하나를 택하십시오.」
망설임 없이 하나의 스킬을 선택한다.
「스킬 - '실드'를 선택하셨습니다.」
「특성과 연계된 스킬 - '실드'의 이펙트를 분석합니다.」
「분석이 완료되었습니다.」
「스킬 - '실드'에 히든 특성의 보상 -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가 적용됩니다.」
「스킬 - '실드'의 등급이 최상위로 향상됩니다.」
「스킬 - '실드'의 스킬명이 스킬 - '천상(天上)'으로 변경됩니다.」
한걸음 앞으로 나선 히오의 지팡이가 저 하늘을 향해 뻗어지고.
"천상."
빛이 쏟아져 내려온다.
심연이 갈라진다.
여태 꿈쩍도 하지 않고 있던 심연의 눈이 그 거대한 눈동자를 움직인다.
아래가 아닌.
- ....
천상(天上)으로.
92화 미궁 (6)
「스킬 : 천상(天上)」
「하늘 위, 만물을 굽어살피는 자의 힘. 그것의 가호.」
「손길이 닿는 곳은 모두 천상의 영역으로 지정됩니다.」
「사용자가 해롭다고 판단한 그 어떤 것도 감히 천상의 영역에 발을 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스탯 '마력'과 스탯 '신성력'의 보유량에 따라 지속 시간이 변경됩니다.」
「스탯 '신성력'을 획득했습니다.」
「스탯 '신성력'이 +10 상승합니다.」
「스킬 - '천상(天上)'이 발동됩니다.」
* * *
무한한 심연 속을 비추는 작은 빛.
미약했던 그것은 눈 깜짝할 새 크기를 키워 어둠의 중앙을 꿰뚫고 히오와 다프네의 몸을 감싼다.
스킬, '실드'의 이펙트는 거대한 빛의 손이 시전자를 감싸는 절대적인 방어막의 형태였다.
그것을 바탕으로 진화된 스킬 '천상.'
하늘에서 시작되어 내려온 빛의 손길은 이전의 허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따스하고 또 장엄했으니.
무자비하게 머릿속을 뒤흔들던 깊은 심연이 씻은 듯 사라지는 것이다.
근원을 종잡을 수 없던 다프네의 두려움과 공포가 순식간에 녹아 없어지는 것이다.
온몸을 감싸던 막대한 긴장감이 한순간에 풀려 버린 것이었다.
"…꿈인가."
아득해지는 정신.
이전과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마력 탈진과 과도한 긴장이 풀린 몸이, 한계까지 혹사당하다가 간신히 풀어진 정신이 휴식을 원하는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다프네는 스스로 결론을 내려 버리고 만다.
"꿈이네...."
꿈이 아니고서야 말이 안 됐으니 말이다.
몸을 감싸는 이 따스한 손길도.
그 전에 느꼈던 미칠 듯한 공포감도.
저 하늘 위에 떠 있는 온화한 여신의 얼굴도.
그에 맞서듯 더욱 존재감을 키워가는 소름 끼치는 거대한 눈동자도.
모두 아득한 꿈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니 다프네는 그 거대한 빛 속에서, 따스한 손길 속에서 서서히 눈을 감는다.
한겨울, 난로 앞에서 손을 쬐는 것 같은 따스함. 이불을 뒤집어 쓴 것만 같은 포근함.
그대로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희미하게 본 모습은.
"신성 마법이라."
저벅- 앞으로 나서는 히오 파블렌코의 뒷모습이었다.
* * *
실드가 진화하며 낼 효과에 대해서는 대충이나마 짐작하고 있었다.
이제 벌써 네 번째로 히든 특성의 효과를 받는 것이 아닌가. 이펙트로 말미암아 효과를 추측하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닌 것이다.
다만 변수가 하나 있었다.
새로운 스탯 '신성력.'
단순 마력만 필요로 하는 스킬이 아닌, 신성력까지 필요로 하는 최상위 스킬.
당연한 말이지만, 최상위 스킬이 가진 능력만큼 필요로 하는 마력이나 신성력의 양 또한 엄청나다.
'천상'의 지속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것이란 말이었다.
그저 암흑뿐인 심연 속에서 신성한 빛이 내리쬐인다는 것만으로도 심연의 공포가 사그라든다.
더군다나 히오를 중심으로 넓은 일대를 감싸는 금빛의 손 안쪽은 천상의 영역.
심연이라 할지라도 히오의 허락 없이는 감히 들어올 수 없는 신성한 영역이었으니.
- 이건 교단에서 사용하는 신성 마법과 비슷한 느낌이야.
히오의 혼과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는 푸르넬의 말이었다.
"신성 마법이라.... 신성력은 어비스 기운을 몰아내는 힘이 있었지."
신성 왕국의 빠른 몰락을 아쉬워한 이유가 이것이었지 않나.
신성력의 부재.
어비스의 저주받은 기운을 몰아낼 수 있는 유일한 대항 수단을 잃어버린 것.
"어쩌면 새로 얻은 신성 스탯이 미래의 활로가 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지금 당장이었다.
어찌저찌 다프네의 정신이 붕괴하는 것은 막아 냈지만, 여전히 이곳은 심연이었다.
천상은 명백한 최상위 방어 스킬.
지키는 것에 있어서는 최고이겠으나 그것만으로 심연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 것이다.
애초에 이곳에 어찌 끌려온 것인지.
무엇을 위한 공간인지도 파악 못 하지 않았나.
어비스의 진실에 대해서는 알면 알수록 의문점만 쌓여 갔으니.
- 이제 어쩔 텐가.
"뇌제로 올라가 보면 어떨까."
천상. 말 그대로 하늘 위.
그것이 시작된 하늘을 향해 간다면 이 공간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 글쎄. 그렇다고 해서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진 않네만.
"그렇겠지."
그렇다고 해서 심연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천상의 힘을 발휘했다고는 하지만, 결국 방어를 위한 스킬. 공간을 벗어난다거나 한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으니 말이다.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하지만 뭐라도 해 봐야 해."
기껏 완성된 천상이 신성력 부족으로 사라지기 전에 무슨 시도라도 해야 하긴 한다.
"보아하니 저거에 타격을 가하려면 의념을 다뤄야 하는데...."
발악하듯 내지르는 다프네의 스킬로 확인했지 않았나.
저 심연의 눈동자는 막대한 힘이 담긴 스킬을 없는 것으로 취급해 버린다.
과연 최상위 스킬이라고 다를까, 묻는다면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탈리아누스나 아타올프가 다뤘던 의념의 힘.
혹은 7서클 이상의 대마법사가 다루는 그런 힘이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당장에 그런 힘을 사용할 수는 없으니 이것 역시 헛된 생각이다.
그럼 어떤 방법이 남아 있는가.
사실 답은 나와 있었다.
그리고 이미 그것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 추측이 맞았으면 좋겠네만.
"…심연이니까."
히오와 푸르넬이 여태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었다.
전설의 네크로맨서이자 흑마법사, 크뢰츠발트가 남긴 것으로 추측되는 메시지를 확인한 이후로 머리를 맞대고 여러 가설을 세운 것이다.
푸르넬의 말에 따르면 그는 어비스 전쟁보다도 훨씬 이전의 인물.
푸르넬의 시대에도 이미 전설이나 다름없던 대마도사였다. 오죽하면 흑마법사의 시조라 불리겠는가.
그런 크뢰츠발트가 전언을 남겼다.
미래를 보았다고, 심연을 보았다고. 그곳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 싸우고 있다고 말이다.
크뢰츠발트뿐만 아니라 그와 비슷한 경지, 그와 비슷한 것을 본 마법사들이 합류했고 알 수 없는 무엇인가와 전투를 벌이고 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글귀는 '너는 언제 오는가'였으니.
혹, 이것이 히오 자신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크뢰츠발트가 본 미래에 자신이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마법이 상실된 시대에 마법의 길을 걷고 있는 마지막 마법사.
다소 과장된 생각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은 심연 속에서 울린 목소리에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됐다.
- 리퓨에의 희망도 끝이다.
정확히 자신을 내려다보며 하는 눈동자의 말.
리퓨에의 희망.
그 말에 언젠가 신의 눈을 가렸다고 기뻐했던 날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이다.
신의 눈을 가렸으니 보상 또한 없을 것이라 예상했건만, 그런 생각을 뒤엎고 과분한 보상이 주어졌을 때. 그때가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이었다.
"이곳이 정말 심연이라면...."
분하지만, 자신은 아직 약하다.
모르는 것 또한 많다.
"이번 한 번만 도와줘."
그러니 이번 한 번만 부디 자신을 발견해 주기를.
이변을 알아차리고 이곳으로 향하기를.
그것을 노리고 펼친 청염이었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시전한 천상이었다.
그리고.
- 여기 있었구나.
예상은 적중했다.
* * *
꿈을 꾸었다.
끝도 없이 도망쳐야만 하는 꿈.
뒤에는 무엇인가가 쫓아오는데 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살면서 이토록 두려움에 떨었던 적이 있었던가.
자신은 겁이 없는 편이었다.
스스로도 그리 생각했고 남들도 자신에게 그리 말했다. 겁이 없고 담대하다고. 냉철하며 가히 집단을 이끌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말이다.
…아니었다.
자신은 겁이 생각보다 많았다.
지금도 보라, 꿈속인 것을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뒤를 돌아보는 것이 두려워 끝없이 도망치고 있지 않은가.
무엇이 두려운 것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정작 알아볼 엄두는 나지 않는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미쳐 버릴 거란 걸 너무도 잘 알 수 있었기에.
그렇게 무한한 어둠 속에서 계속해서 도망쳤지만, 끝은 보이고야 마는 것이다.
앞은 절벽이었다.
뒤에는 알 수 없는 것이 바짝 쫓아오고 있다.
낭떠러지는 가까워져 옴에도 달리는 두 다리를 멈출 수는 없었다. 그 절벽 밑은 너무도 까마득해 결코 살아남을 수 없음을 알고 있지만, 그보다 뒤의 어둠이 더 무서웠기에.
저것에 집어삼켜지느냐,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던지느냐. 고르라고 한다면 주저함 없이 후자를 택하겠다.
죽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말이다.
그 정도로 궁지에 몰려 있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다프네는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려 했다. 궁지에 몰려 끝없이 도망가던 정신은 너무도 지쳐 버렸으니.
하지만 그 바로 직전에 돌연 환하게 밝아지는 시야.
어둠을 물리치고 하늘에서부터 쏟아지는 금빛의 광휘. 온화한 여신의 미소.
일대를 감싸는 따사로운 손길.
그리고 절벽에 몸을 내던지려는 자신을 가로막으며 성큼 나타나는 사내는.
- 신성 마법이라.
지존천마였다.
"…히오 파블렌코!"
번쩍 눈을 뜸과 동시에 일어나는 상체.
익숙한 풍경이다.
지옥 동산의 주변에 마련한 모험가 길드의 지부. 다프네의 거처.
"…꿈이었나."
역시 꿈이었다.
생전 눌려 본 적도 없는 가위 같은 악몽.
하긴, 말이 안 되지 않나.
지존천마와 함께 미궁에 들어가고… 아니, 잠시만. 그것도 꿈인가?
미궁에 들어가서 분명 함께 한 것은 제법 현실처럼 생생한데… 어디서부턴가 흐릿한 꿈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정말 꿈이었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길드장님! 깨어나셨습니까?"
문이 벌컥 열리며 들어오는 한 사람.
아니, 그 뒤를 따라 우르르 몰려들어 오는 길드원들.
모험가 길드 소속이자 바깥세상에서도 다프네의 길드에 소속되어 있는 각성자들이었다.
"다프네 님. 몸은 좀 어떠십니까."
"…괜찮아."
이상할 정도로 몸 상태가 좋다. 머릿속이 무척이나 맑아진 느낌.
그런 것보다 우선 어째서 자신이 여기에 누워 있고 뭐가 어떻게 흘러간 것인지 묻기 위해 다프네가 입을 열었으나.
"그보다 어찌...."
"어찌 된 일입니까! 다프네 님!"
그 물음이 채 시작되기도 전에 길드원들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궁금해 죽겠다는 듯한 표정.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왜 그 파렴치한 작자가 길드장님은 안은 채로 어비스에서 나온 건지...."
동시에 우수수 쏟아지는 질문 가운데 유달리 귀에 꽂히는 하나의 질문.
"그보다 대체 어떻게 그 안에서 이 주일이 넘도록 있으셨던 겁니까?"
"…뭐라고? 이 주?"
다프네의 고개가 그런 질문을 한 길드원을 향해 홱 돌아가고, 질문에 역으로 질문을 받은 길드원은 얼떨떨해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예.... 분명 공략까지 남은 시간은 하루도 채 남지 않았었는데 이 주가 넘도록 공략됐다는 메시지도, 실패했다는 메시지도 나타나지 않고 길드장님이랑 그 지존천마라고 주장하는 놈도 나오지 않아서 저희가 얼마나 걱정을...."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다프네의 눈에 초점이 흐릿해진다.
마치 꿈처럼 느껴지는 아득한 기억을 더듬어 나가는 것이었다.
우선 이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는 것부터가 믿기지 않는다.
괴이한 공간에 떠 있던 거대한 눈. 그것을 본 순간부터 느꼈던 것은 압도적인 두려움.
정신이 반쯤 나간 채 발악하듯 내지르던 스킬.
그리고 기절하기 직전에 보았던 광경.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던 두려운 눈동자와 그보다 더 위에 나타난 여신의 빛.
마지막으로 무언가 중얼거리며 나서던 지존천마의 뒷모습까지.
그 모든 것이 정말 현실이었단 말인가.
"그 시간이 이 주나 되었다고...."
대체 뭐가 뭔지.
솔직히 말해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왜 일어난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답을 알고 있을 사람은 오직 한 명뿐.
"히오 파블렌코는 어디로 갔나."
심각해진 다프네의 표정에 모인 길드원들 또한 덩달아 조용해졌고 실내에는 약간의 긴장이 감돈다.
"히오 파블렌코… 지존천마는...."
이 모든 사태에 대한 답을 알려 줄 사람은.
"갔는데요?"
진작에 떠나 버린 후였다.
"나오자마자 길드장님을 대충 내려놓더니 별다른 설명도 없이 엄청 급하게 가 버렸습니다."
"그걸 그냥 보내면 어떡해. 일단 붙잡아 놨어야지."
그런 다프네의 말에 길드원은 억울하다는 듯 말했고.
"저도 그러려고 했는데 웬 페가수스 같은 걸 소환해서 날아가 버리는데 속도는 뭐 그리 빠른지 잡을 수도 없고 그래서...."
다프네는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쉬는 수밖에 없었다.
"하아...."
아무래도 지존천마를 다시 찾아가야 할 것 같다.
93화 아릴레이야 (1)
심연 속에서 울리던 목소리는 낮으면서 또렷했다.
크뢰츠발트가 온 것인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온 것인가.
장담할 수는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이까짓 심연 따위는 가볍게 압도하는 존재감.
- 여기 있었구나.
'천상'의 빛 아래에서 울리는 목소리.
눈부신 후광에 얼굴은 또렷하게 보이지 않았으나 심연의 공간을 가볍게 뛰어넘는 막대한 존재감만큼은 확실했다.
그 존재가 히오를 내려다보며 이야기하는 것이다.
- 미약한 희망아.
등장만으로도 공간이 일그러지고 막대한 빛의 행렬에 눈앞이 환해진다.
- 너는 아릴레이야로 가거라.
아니, 이것은 히오의 눈에만 보이는 경이로운 빛.
오직 마력으로만 이루어진 기적.
- 천 년을 묶여 있어야 했던 가엾은 아이를 풀어 주려무나.
'마력 감응의 천재' 특성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끓어오른다.
혼에 새겨진 특성 자체가 흥분하는 것이다.
눈앞의 존재가 지금 보여 주는 것은 마력으로 이룰 수 있는 행위의 끝과도 같은 것이었으니.
- 잠든 용을 깨우고.
가벼운 손짓 한 번에 심연의 눈이 찌그러지고.
- 그 힘을 취하거라.
두 번의 휘두름에 공간이 일그러진다.
- 아직은 미약한 리퓨에의 아이야.
짧으면서도 강렬한 만남이었다.
* * *
제국의 수도 이메니아에서 서쪽으로 한없이 쭉 나아가다 보면 항구 도시 루고가 나온다.
항구 도시 루고가 나왔다는 말인즉 대륙의 끝에 도달했다는 말이었다.
대륙의 끝에 도달했다는 말은, 그 앞에 펼쳐진 장소가 신비로 둘러싸인 곳이라는 말이었다.
땅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생물이라면 동경해 마지않는 장소.
알 수 없기에 두렵고, 두렵기에 신비했으며 신비했기에 정복하려 했지만, 수천 년이 지나도록 이뤄 내지 못한 미지의 장소.
바다라는 이름이었다.
그렇게나 드넓고 막연한 바다 중에서도 항구 도시 루고와 이어진 서해는 신비함의 정도가 유별나다.
사시사철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인 까닭이다.
때문에 루고와 이어진 항로는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호기심에 못 이겨 정해진 항로를 벗어난다면 곧바로 폭풍우가 몰아친다.
그것마저도 예상하고 더욱더 진입한다면 그때는 이제 행방을 찾을 수가 없어진다.
호기심의 대가로 얻는 것은 난파된 배. 엄청난 폭풍우에 허공을 날으는 몸.
허나 그런 폭풍우 속에서도 죽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의외로 멀쩡하게 살아 돌아와 얼떨떨해하며 동시에 기뻐한다. 천운이 따랐다고, 다시는 호기심에 저 폭풍우가 치는 바다로 나가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중에서 극히 소수는 살아 돌아왔음에도 넋이 나가 버린다.
그들은 보았기 때문이다.
폭풍우 치는 바다의 진짜 주인을.
어둑한 하늘.
수 미터가 넘는 파도.
눈을 뜰 수도 없는 거센 바람, 폭우.
그 속에서 문득 한줄기 벼락이 내리쳤을 때.
아득한 바다 위에서 보인 거대한 형체는.
"용, 용이다...."
폭풍을 부르고 바다를 다스리는 용.
해룡이었다.
"쯧쯧… 완전히 정신이 나가 버렸구먼."
물론 그런 말에 귀 기울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간신히 살아 돌아온 후유증으로 여겼다.
용이니 드래곤이니, 그런 것이 세상천지 어디 있단 말인가.
아직 순수함을 잃지 않은 어린아이들이나 좋아할 법한 이야기이지 않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순수함은 때론 그 어떤 복잡한 시선보다 직관적으로 본질을 꿰뚫는 것을 모르기에 가능한 말이었다.
모두가 순수함을 그리워하지만, 정작 순수한 것들을 비웃고 무시하기 일쑤였으니.
간혹 순수한 진실이 들려옴에도 코웃음 치고야 마는 것이다.
가령.
- 미지의 섬, 아릴레이야에는 엘프가 산다더라.
혹은.
- 용은 존재한다.
같은 소문을 믿지 않는 것처럼.
그렇기에 제법 단순한 진실은 아주 오랜 시간을 복잡한 세상에 숨겨진 채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용은 살아 있다.
믿기지 않지만, 이것은 분명한 진실이었다.
아릴레이야의 깊숙한 곳에.
천 년 동안 잠든 채로 말이다.
* * *
사면(四面)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
왕국 아릴레이야는 대륙의 타국과 교류하지 않기로 유명한 왕국이다.
교류하는 게 애초에 불가능한 왕국이기도 하다.
아릴레이야로 가는 항로가 뚫리지 않은 까닭이었다.
해역이 불안정하고 틈만 나면 폭풍우가 몰아치는데다가 아릴레이야 자체에서도 타국의 출입을 금하고 있었으니.
이제 굳이 교역을 트려는 국가조차 없어진 실정이다.
뭐, 그들은 아릴레이야를 구경조차 못해 봤기에 그리 쉽게 포기할 수 있던 것이리라.
폭풍우에 둘러싸인 왕국 아릴레이야.
저 멀리서 볼 수밖에 없었으니 어둡고 음침하고 왠지 불행할 것만 같은 느낌의 왕국이지만, 폭풍우를 뚫고 아릴레이야에 도착한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자국민 외에는 누구도 들어올 수 없었던 그곳은 그야말로 천혜의 자연과 어우러진 나라.
사시사철 먹구름이 낀 바다와는 달리 섬의 하늘은 맑기만 하다. 높다란 건축물 옆에는 그와 비슷한 높이의 거대한 나무가 자라나 있었다.
건물과 나무 사이를 오가는 통로가 자연스레 뚫려 있었고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조금 특이하다.
몇몇은 대륙 사람들과 같이 평범해 보이지만, 대다수는 귀가 도드라지게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누구도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으니.
이곳이 바로 베일에 싸여진 왕국, 아릴레이야였다.
"며칠째 의견 차가 좁혀지지 않는군요."
그런 아릴레이야의 수도.
아니, 인간의 관점에서 보자면 수도. 있는 그대로를 말하자면 그저 섬의 정중앙, 하늘에 닿을 듯 거대한 나무의 내부.
섬의 전역에서 보이는 그 커다란 나무는 아릴레이야의 중심으로서, 이곳을 다스리는, 대표하는 이들이 모여 며칠째 회의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멸망의 징조가 뚜렷하게 나타났지 않습니까.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목재 원탁에 둘러 앉아 있는 이들 중 귀 끝이 둥근, 말하자면 인간의 의견이었다.
그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이가 입을 연다.
귀 끝이 뾰족한, 엘프라 불리는 종족이었다.
"우리의 사명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린 인내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둘러앉은 두 종족의 비율은 7 대 3 정도.
엘프가 7, 인간이 3이었다.
겉으로 본 인간의 나이는 각양각색이었다.
청년과 아이, 주름이 자글한 노인까지.
하지만 엘프는 나이와 관계없이 모두가 젊어 보인다.
면 옷 위에 속이 비치는 하늘한 옷을 걸쳐 입고 머리에는 풀을 엮어 만든 관을 얹은 이들.
정해진 수명이 다할 때까지 노화라는 것을 겪지 않으며 평생을 아름답게 살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종족이 아릴레이야의 주류 민족, 엘프였다.
"하지만 그저 인내하고 지킨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습니다. 늦기 전에 움직여야 합니다. 아릴레이야는 강해요."
"정보가 너무 부족하지 않습니까. 천 년 동안 이어진 사명을 생각하자면 너무 섣부른 움직임입니다."
의견의 대립을 보이는 것은 인간과 엘프의 구도가 아니었다.
엘프족 사이에서도 의견이 나뉘고 인간 사이에서도 다른 말이 나오는 것이다.
그만큼이나 아릴레이야에 나타난 변화는 혼란스러운 것이었으니.
"저것은 분명 기록상으로 전해지던 심연의 징조가 맞지 않습니까."
다름 아닌 아릴레이야에 나타난 어비스 게이트 때문이었다.
며칠 전, 급작스레 나타난 무저갱과도 같은 칠흑의 입구.
이는 비단 아릴레이야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대륙 전역에 걸쳐 곳곳에 나타난 현상이다.
히오와 다프네가 50층을 공략하며 지옥 동산뿐만 아니라 모든 곳에 어비스의 입구가 나타나게 된 것.
게임 속과 비교하자면 본격적인 중반부에 접어든 셈이었다.
빙의자들에게 메시지가 뜬 것은 당연한 일.
「어비스 - 50층의 공략이 완료되었습니다.」
「어비스 공략을 위한 입구가 세계 곳곳에 생성됩니다.」
「공략의 난이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벤타이얼을 플레이했었던 빙의자들.
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상한 점이 상당했다.
10층을 건너뛰고 급작스레 50층이 되었지 않나.
거기에 공략 제한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실패의 메시지도, 완료의 메시지도 뜨지 않았고.
다프네와 지존천마가 2주나 지나서 나오고 난 뒤에야 그런 메시지가 떠오른 것이다.
물론 이를 아는 이는 빙의자 중에서도 극소수였지만.
아무튼, 빙의자도 없고 이러한 사실을 알 리 없는 아릴레이야인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정보가 없으니 얻기 위해서라도 들어가야지요."
"무분별한 희생입니다. 저희의 사명은 지키는 것이지 개척해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키기 위해서는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다 고꾸라진다면 지키는 것마저 힘들어질 것이에요."
엘프라고 해서 생각이 같지 않았고 인간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성향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의견은 어느 한 곳으로 통일되지 않고 며칠째 팽팽하게 대립하는 것이다.
엘프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엘프라고 해서 쉽게 결론짓지 못했고 인간 중에서 가장 사명감이 깊은 자라고 해서 이것이 옳다 확언하지 못한다.
그런 와중에 누군가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땅에 닿지 않는 짧은 다리를 버둥거리며 자신감 있게 번쩍 치켜든 작은 손.
연녹빛 머리칼이 인상적인 소녀, 프레이야였다.
아릴레이야에서도 결정권을 가진 중요 인물만이 모인 회의장.
그런 회의장에 당당히 참석한 프레이야.
이 작은 소녀에게는 당연한 권한이었다.
『할 말이 이씁니다! ヽ(•̀ω•́ )ゝ』
힘껏 들어 올린 손과 자신감이 넘치는 에메랄드빛 눈동자.
그 돌발 행동에 뒤에 선 뮤틴스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지만, 프레이야는 아랑곳 않고 반대 손을 움직여 글을 슥슥 적어 내려간다.
『제가 도움을 줄 사람을 불렀어요!』
아티팩트의 힘으로 회의장의 모두가 볼 수 있을 만큼 또렷하게 떠오르는 글자. 그것은 곧 프레이야의 생각이었으니.
"도움을 줄 사람이라면… 아릴레이야 내에서 말입니까?"
바로 옆, 주름이 자글한 노인이 프레이야를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고 프레이야는 아주 힘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히오 아저씨는 제국 사람이에요! - ̗̀( ˶'ᵕ'˶) ̖́-』
"그렇… 군요...."
당찬 프레이야의 태도에 난감한 미소를 짓는 노인.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심하는 모습이었다.
그를 대신해 반대편의 엘프가 특유의 나긋한 목소리로 프레이야를 향해 입을 연다.
"하지만 프레이야. 아무리 당신이라 해도 외부인을 함부로 들일 순 없어요."
그 이유는 단순한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그분의 판단에 달렸으니까요."
언제나 존중과 조화를 미덕으로 삼는 엘프이지만, 상대를 대놓고 높여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엘프의 존경을 받을 정도의 인물이 아니고서는 그만한 대우를 받기란 불가능한 것이고 여기서 말한 '그분'은 모든 엘프가 존경해 마지않는 인간이었으니.
아니, 아릴레이야에서 살아가는 이라면, 그 사명을 알고 있는 이라면 모두가 존경하며 기꺼이 고개를 숙이는 이.
"레가르다 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바깥세상에서 부르기를 서쪽 바다의 지배자.
혹은 아릴레이야의 수호자.
레가르다 오비에르.
랭커들이 알기로 비탈리아누스, 아타올프와 함께 세계관 최강자 중 일 인.
허나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시피 한 신비로운 인물.
"그분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아릴레이야에 발을 들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레가르다의 허락은 그가 사명을 부여받은 이후로 단 한 번도 외부인에게 떨어진 적이 없었다.
그의 신념은 너무도 고결하며 또 깊은 것이어서 감히 그것을 뚫고 들어올 수 있는 이가 없는 것이었다.
무려 천 년 동안이나 말이다.
『그래도 히오 아저씨라면 가능할 걸요? (´O`)』
하지만 프레이야는 조금의 의심 없이 확고하게 적어 내려간다.
당연한 것이다.
마법이 상실된 시대에서 반쪽짜리나마 1서클을 만들어 낸 소녀는 알고 있었으니까.
세상 무엇보다 화려하게 움직이던 그의 마력을.
정교하게 완성되어 가던 마법의 황홀경을.
누구도 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이 작은 소녀만큼은 아는 것이었다.
마법사란, 본디 기적을 불러오는 존재임을.
그리고 이 세상 남은 마지막 마법사가 누구인지 말이다.
무엇하나 장담하지 못하는 이 회의장에서 오직 프레이야만이 확신하며 써 내려간다.
그것은.
『제가 도움을 청했으니 히오 아저씨는 반드시 올 거예요! (๑•̀ – •́)و』
복잡한 문제를 관통하는 순수.
"으음...."
허나 다른 이들의 반응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다름 아닌 레가르다 오비에르였으니.
"일단… 회의를 이어 가시죠."
그런 반응에 프레이야의 볼이 급격하게 부풀려졌지만, 땀을 삐질 흘리며 애써 모른 척하는 것이었다.
* * *
『아저씨! 도움! 도움! (,,>ヮ<,,)!』
메시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며 히오가 헛웃음을 흘린다.
"이런 싸구려 아티팩트가 다 있나...."
프레이야의 그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휘스퍼링 스톤의 역할이 다해 버렸기 때문이다.
답장을 할 새도 없이 말이다.
- 내 말했지 않나. 나의 시대에는 아티팩트 취급도 받지 못하는 싸구려 물건이었다고.
푸르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휘스퍼링 스톤을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뭐, 어차피 아릴레이야로 향하던 중이었으니까."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히오.
콰앙!
멀지 않은 곳에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려 퍼진다.
폭풍이 불고 파도가 거세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른다.
먹구름이 잔뜩 낀 바다의 한가운데.
"지독하다 지독해."
본격적인 아릴레이야 해(海)로 진입하기 전, 이름 없는 무인도에서 잠시 취한 휴식이 끝난 것이다.
「스킬 - '서먼 팬텀 스티드'가 발동됩니다.」
유계의 문이 열리고 재차 나오는 팬텀 스티드.
특성의 효과로 신수처럼 화려해진 유령마의 등에 올라타고 시선은 폭풍우 치는 바다를 향한다.
"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건지… 가 보자고."
게임 속은 물론, 지금까지도 잔뜩 웅크린 채 비밀을 숨기고 있는 신비의 섬.
"아릴레이야로."
94화 아릴레이야 (2)
정신을 차린 다프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히오 파블렌코의 위치를 파악하는 일이었다.
차근차근 진행되어야 할 어비스의 난이도가 대폭 상승했지 않나.
미궁이 나타난 것으로도 모자라 그 안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을 겪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 정신은 쇠약해져 가는, 다시 생각해 봐도 섬뜩한 경험.
히오 파블렌코, 지존천마는 분명 그곳이 심연이라고 했다.
심연은 무엇이며 그곳에 떠 있던 두려운 눈동자는 또 무엇이었을까.
겁에 질려 발악하며 한계까지 스킬을 쏟아부었건만,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던 괴이.
그에 맞서듯 나선 히오 파블렌코와 동시에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던 빛, 희미하게 보인 여신의 얼굴, 따스한 손길.
그것들은 다 무엇이고 괴이에 어떻게 맞설 수 있었는지. 어떻게 그 공간에서 나온 것인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다프네는 막대한 권력과 명성을 누리고 있는 길드의 장으로서, 모든 각성자들의 최상위에 군림하는 최초의 각성자로서.
무거운 짐을 짊어진 한 명의 랭커로서 반드시 알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물론 개인적인 호기심을 참기 힘들다는 이유도 있긴 했다.
"사라진 방향은? 무슨 일 때문인지도 듣지 못했나?"
"예.... 말씀드렸다시피 조금의 설명도 없이 바로 움직였습니다. 그렇다고 저희가 붙잡거나 뭐 힘으로 막아 세울 수도 없지 않습니까."
다프네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정확한 목적지를 듣지 못한 것은 무척 아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무리하게 행동해 반감을 사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으니.
미궁에 들어갔다 온 이후로 지존천마의 중요도가 대폭 상승한 것이다.
그는 자신들이 모르는 어떤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으니.
"일단 서쪽을 향해 쭉 날아가긴 했습니다."
"…서쪽."
"그리고 가늠해 봤는데 일직선으로 쭉 이어 보면 그 끝은 항구 도시 루고이더라고요."
"루고라면… 설마."
"예. 아릴레이야가 있죠."
게임 속에서는 물론이고 현재까지도 밝혀진 바가 거의 없는 신비의 섬.
현실이 된 지금도 몇몇 랭커들이 관심을 가지고 조사해 봤지만, 결코 진입할 수 없었던 비밀의 왕국.
그런 곳에 지존천마가 출입을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 또한 꽤나 커다란 일이다.
"우선 경로상에 있는 모든 지부에 연락해."
"이미 지시 내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루고에 각성자가 있나?"
"있긴 있을 겁니다. 정확하게 확인해 보겠습니다."
"만약 히오 파블렌코로 추정되는 이가 나타나면 정체를 밝히고 가능한 한 동행하라고 해. 그게 안 되는 상황이면 위치라도 확실하게 알아내. 단, 그가 원하지 않는 것 같으면 당장 중단하고 최대한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해야 돼."
"...."
다프네의 긴 주문에 잠시 침묵하던 길드원이 어렵사리 입을 연다.
"그러니까… 동행할 수 있으면 하고 그게 안 될 것 같으면 목적지라도 확실하게 알아내되 거슬려하는 것 같으면 그만두라고요?"
"그래."
"예.... 뭐, 일단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그로서는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보더라도 굉장히 조심스러운 태도이지 않은가.
히오 파블렌코가 지존천마임은 알지만, 이쪽 또한 다프네이다.
이곳에서는 모험가 길드를 통해 막대한 세력을 거느리고, 무력 또한 일만의 각성자들 중 한 손에 꼽히는 최강자.
거기에 지구의 일반 각성자들 숫자까지 생각한다면 다프네는 그야말로 수백만의 정점에 위치한 최상위 포식자인 것이다.
그런 다프네가 이토록 조심스러운 명령을 내린 것은 처음 있는 일.
대체 미궁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러는 것일까.
"그… 히오 파블렌코가 그렇게까지 조심해야 할 인물입니까?"
궁금증을 참지 못했으니 묻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에 돌아온 다프네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래. 중요도를 최상으로 올려."
"…예. 그럼 만약 히오 파블렌코를 발견하면 길드장님께서 직접 가실 겁니까?"
그에 다프네는 잠시 망설이더니.
"아니. 그건 아니야."
고개를 가로젓는다.
물론 그러고픈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그가 원하지 않을 터였다.
자신이 필요했다면 깨어나기를 기다렸겠지. 어떤 말 한 마디라도 남겼었겠지.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곧장 떠났다는 말은 그만큼 급한 일이 생겼다는 말이고 그것에 다프네는 필요 없다는 의미였다.
이런 문제에 관해서 다프네는 퍽 냉철했으니.
"일단 행선지를 파악하는 것에만 초점을 둬. 지금은 그거면 충분해."
그래야 또 다시 영문 모를 일이 벌어졌을 때 그를 찾을 수 있을 게 아닌가.
"그러면 저희는...."
"다음 공략을 준비해야지."
51층부터 세계 곳곳에 나타난 어비스 공략의 입구. 대폭 상승하는 난이도. 이제는 고작 몇 명으로 공략할 수 있는 난이도가 아니다.
강자들을 불러 모으고 대규모 원정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대책이야 세워 뒀지만, 준비는 한없이 모자랐다.
그도 그럴 게 어느 누가 10층에서 하루아침에 50층이 되어 버릴 것이라 예상했겠는가.
그러니 할 일이야 흘러넘칠 정도로 많은 것이었다.
"그래도 경로상의 각성자들에게는 히오 파블렌코의 목적지 파악이 최우선이야."
"예. 확실하게 전달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쉴 틈도 없이 회의를 위해 떠났고 다프네의 명령은 길드를 통해 빠르게 퍼져 나갔다.
모험가 길드 소속 각성자의 내부 통신망을 통해 바로 전달된 것이다.
* * *
제국 서쪽의 항구 도시, 루고에 있는 모렐과 베시 또한 그런 명령을 확인했다.
그들에게는 더욱 강조되어 확실하게 지시가 떨어졌으니 확인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나 참… 히오 파블렌코라면 최근에 새로 임명됐다는 수호 기사 아니야?"
"그 히오 파블렌코 맞을 걸요?"
"그 대단하신 황제의 수호 기사가 뭐 하러 이런 곳까지 온다고...."
히오 파블렌코라 함은 최근 급속도로 그 이름이 퍼지고 있는 유명인이었다.
새로운 황제의 새로운 수호 기사. 제국 무력의 상징이자 황제와 제국을 지키는 거대한 방패.
심지어 흑아를 무너트리고 대륙 최강자인 아타올프를 죽인 자라는 소문 또한 빠르게 퍼지고 있는 엄청난 인물이 아닌가.
그런 대단한 사람이 별 볼일 없는 작은 항구 도시에 뭐 하러 온단 말인가.
모렐이 내려진 지시를 의심하는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뭐? 커다란 고깔모자를 쓰고 손에는 마법 지팡이를 쥔 채로 날개 달린 하얀 말을 타고 와? 이걸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되는 거야."
길드 본부에서 직접 내려진 명령. 그것도 앞에 ★중요★ 표시가 붙은 명령이 아니었다면 믿기 힘들었으리라.
처음 확인했을 때는 오늘이 만우절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으니 말이다.
"안 그래도 이번 명령 보고 제가 생각난 게 있는데요."
베시의 말에 모렐의 고개가 돌아간다.
"뭔데?"
"지금 가장 핫한 게 히오 파블렌코라는 사람 아닙니까. 최근 행보가 파격적이었으니까요."
"그렇지."
"그래서 그런지 그럴싸한 소문이 퍼지고 있는데… 히오 파블렌코의 정체가 지존천마랍니다."
"…지존천마? 그 랭킹 1위?"
"예. 저도 긴가민가했는데 저런 지시가 본부에서 직접 올 정도면… 꽤 신빙성 있는 소문이지 않습니까?"
"으음… 지존천마라… 그게 사실이면...."
모렐의 얼굴에서 의심의 기색이 사라지고 새로운 감정이 떠오른다.
그것은 희망이었다.
"대박인데?"
의심스러운 잡다한 것을 뒤집어 엎을 만한 희망.
히오 파블렌코가 정말 지존천마이고 자신이 그를 찾아낸다면… 큰일을 해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려진 명령을 자세히 읽어 보면 이상할 정도로 조심스러운 면이 있었다.
아무리 대륙에서 가장 명예로운 훈장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다프네가 이리 조심스러운 명령을 내릴 이유는 하등 없는 것이다.
검성 비탈리아누스와 관련된 임무에서도 이러지는 않았었으니.
하지만 그것이 지존천마라면?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은가.
내려진 명령대로 동행이라도 할 수 있다면, 자그마한 친분이라도 쌓을 수 있다면.
모렐의 입가에 탐욕스러운 미소가 걸린다.
"본부로 가는 것도 꿈은 아니지… 흐흐흐."
공로를 인정받아 승진을 노려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모험가 길드의 본부를 말하는 게 아니다.
바깥세상. 이들의 말을 빌리자면 현실 세계에서의 승진.
전 세계의 존경을 받고 등장했다 하면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며 또 영향력 있는 여인 다프네.
그런 다프네의 곁에 선 자신의 모습이 상상되는 것이었다.
"으흐흐흐...."
그리고 그런 모렐의 망상에 정점을 찍는 베시의 외침.
"저, 저기...!"
그가 가리키는 하늘 위로 시선이 이동했고, 곧 보이는 믿기 힘든 광경.
쐐애액- 쏜살같이 지나가는 새하얀 무언가.
"진짜로… 하얗고 날개 달린 말이잖아...?"
워낙 빠르게 지나갔기에 잠깐이었지만, 분명 그 위에 탄 것은 사람이었다.
거기에 복장이 또한 눈에 띄었기에 확신하는 것이다.
"뛰어!"
히오 파블렌코다.
"하, 하지만 저 방향은… 바단데요?"
"그럼 빨리 연락해서 배 띄워!"
"예, 옙!"
모렐과 베시, 두 사람은 정말이지 빠르게 움직였다.
"저쪽은 아릴레이야다. 아릴레이야로 간 거야."
"방향은 맞긴 한데 아릴레이야를 들어갈 수 있는 거였습니까?"
"그러니까 빨리 가서 확인해야지."
모험가 길드 소속의 각성자이고 나름 강자였기에 루고에서는 입지가 제법 있었고 그것을 활용해 가장 빠른 배를 띄웠으며.
"아유, 저기는 절대 안 됩니다요. 저주받은 바다가 아닙니까."
한사코 가지 않겠다는 선장에게 돈을 몇 배로 쥐여 주며 간신히 설득하고.
"아… 안 되는데...."
어찌저찌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평화로운 바다를 빠르게 가로질러 가는 배.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 저주받은 곳을 향해 질주하는 그 모습은 무모하기 그지없다.
그러니 모렐과 베시의 얼굴에도 자연스레 긴장감이 떠오른다.
"그나저나 히오 파블렌코는 저걸 어떻게 뚫고 들어가려는 걸까요."
"글쎄다… 무슨 생각이 있겠지."
"설마 서쪽 바다의 그 녀석이랑 싸울 생각은 아니겠죠?"
"…설마. 아무리 지존천마라 해도 바다에서 그 녀석이랑 싸운다는 건 그냥 죽겠다는 거지."
점차 주변이 어둑해지기 시작한다.
아직 저주받은 해역까지는 거리가 있음에도 그곳에서 부는 폭풍의 여파로 바람이 불고 배의 흔들림이 강해지는 것이다.
"…늦진 않겠지."
"그러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최악은 이렇게까지 했음에도 아무런 소득도 없는 것.
동행까진 못하더라도 히오 파블렌코가 아릴레이야로 향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그것은 곧 그들의 실적이 될 테니 말이다.
"일단 영상석 구매해 놔. 증거가 필요하니까."
"…제가요?"
"그럼 내가 하리?"
"아, 근데 제가 모아 둔 포인트가 없어서...."
어쭙잖은 베시의 변명에 모렐이 피식 웃는다.
"내가 며칠 전에 로그아웃해서 확인했거든? 신문에도 실렸더라 너?"
"아...."
"크리톤 님이랑 같은 게이트 갔다며. 그럼 명성치가 쏠쏠했을 텐데."
그들이 기를 쓰고 승진하려는 이유였다.
본부로 간다면 유명 랭커들과 함께할 기회가 더 많아지고 그 옆에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명성 포인트가 벌리곤 했으니까.
"예...."
"혹시 모르니까 최상급으로 구매해. 가까이 가기 힘들 수도 있으니까."
"…그건 가격이… 예, 알겠습니다."
새삼 더럽지만, 따를 수밖에 없다.
모렐은 베시의 상사였고 이곳은 부당하다고 때려치울 수 있을 만한 직장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지, 진입합니다요! 꽉 잡으십쇼!"
그런 와중에 배는 기어이 저주받은 해역으로 진입하고야 만다.
* * *
꽈아앙-!
바로 머리 위에서 울리는 귀청을 찢을 듯한 천둥.
강한 비바람에 맞서 히오는 실드 마법을 두른 채 제법 여유롭게 날아가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이게 전부 마법에 의한 것 같다는 말이지?"
중얼거리는 말에 대한 대답은 바로 머릿속에서 울려 퍼진다.
- 그렇네. 아마 아릴레이야라는 곳에 대규모 마법진이 있는 모양이야. 이 정도 규모로 펼쳐지는 마법진이라니… 관리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닐 터인데.
여태까지는 그저 서쪽 바다의 지배자, 레가르다의 스킬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한데 사시사철 폭풍우가 치는 바다는 아무래도 그의 스킬이 아닌, 아릴레이야에 형성되어 있는 마법진의 영향인 모양이다.
"하긴… 개인의 마력이 무한한 것도 아니니. 마법진으로 행해지는 것이겠지."
- 이만한 넓이의 날씨를 조종하는 마법진. 못해도 대마도사 둘 이상이 관여했지 않겠나.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했을까."
- 이제 차차 알아 볼 수 있지 않겠나.
"맞아. 그리고 지금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히오의 시선이 정면, 그보다 조금 더 아래를 향한다.
그와 같은 시야를 공유하고 비슷한 것을 느끼는 푸르넬 역시 히오의 의견에 동의하며 목소리에 신중함이 깃드는 것이다.
- …쉽진 않겠구먼.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발밑까지 파도가 치솟아 오르는 바다. 마치 심연과도 같이 어두컴컴한 그 깊은 심해 속에서 번뜩이는 한 쌍의 눈.
"드디어 만나는군."
점점 가까워지더니 거센 물보라와 함께 솟아나는 거대한 생물.
그것은 전설 속의 해룡의 모습과 똑 닮아 있었다.
다만 히오의 시선은 그 용이 아닌, 그것의 머리 위에 선 사내를 향했으니.
"레가르다."
그 머리 위에 굳건히 서 있는 한 명의 사내.
손에 쥔 푸른색의 장창.
서쪽 바다의 지배자, 레가르다 오비에르.
그의 무거운 시선이 히오를 향하고.
거센 폭풍을 뚫으며 또렷하게 울리는 파도와도 같은 목소리.
- 돌아가라.
동시에 해룡의 눈에 벼락이 담기기 시작한다.
95화 아릴레이야 (3)
서쪽 바다의 지배자, 레가르다 오비에르.
본디 '지배자'라는 칭호는 아무에게나 붙는 것이 아니다.
벤타이얼 속 지존천마가 화염의 지배자라 불렸듯, 해당 분야에서 가장 강한 이에게 붙는 이명인 것이다.
지존천마는 특성도 화염의 지배자였고 관련 스킬도 모두 화염에 관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서쪽 바다의 지배자, 레가르다는 물을 다루는 스킬을 사용할 것이라 예상할 수 있겠으나 이는 절반의 정답.
레가르다 오비에르.
아릴레이야를 지키는 수호자의 스킬은 소환 계열이었으니.
짙은 청색에서 옅은 하늘색으로 반짝이는 영롱한 비늘.
역삼각형의 머리에 솟아난 두 개의 뿔.
빛을 머금은 포식자의 눈.
최상위 신수, 해룡.
그것을 소환하여 부리는 것이 레가르다의 스킬이었다.
굵은 비와 거센 바람. 벼락이 점멸하고 천둥이 휘몰아치는 바다의 한가운데.
깊은 심해에서 물보라와 함께 솟구친 해룡의 주위만큼은 고요하다.
해류를 조작하고 날씨를 바꿀 수 있으며 바다를 다스린다는 전설만큼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능력을 지닌 신수인 것이다.
그런 해룡의 머리 위에서 레가르다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서 있었다.
용의 눈을 닮은 푸른 눈동자는 하늘 위를 향해 있다.
팬텀 스티드에 올라탄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히오 파블렌코.
그리고 그를 향해 내뱉는 레가르다의 목소리는 단호하다.
- 돌아가라.
이 너머로는 결코 향할 수 없음을 알리는 경고.
그에 히오는 주머니를 뒤적여 휘스퍼링 스톤을 꺼내들고 그를 향해 쭉 뻗어 보였다.
"여기 프레이야라는 친구가 도와 달래서 온 건데?"
나름 아릴레이야의 중요 인물로 예상되는 프레이야가 아닌가.
분명한 목적이 있어서 가려는 것임을 우선 밝힌 것이었고.
그것을 확인한 레가르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너는 돌아갈 생각이 없는 자로구나.
그의 입장에서는 아릴레이야인과 동행하지 않는 이상… 아니, 설사 동행하는 중이라도 외부인은 들여보낼 수 없는 것이었으니.
누가 불렀건, 무슨 목적이건 레가르다에게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오직 자신의 경고를 받아들이고 돌아가느냐, 그렇지 않느냐뿐.
그리고 그가 판단하기로 하늘 위의 저 사내는 자신의 경고를 무시하는 자에 속했다.
간혹 있는 일이었다.
어떻게든 아릴레이야에 들어가고야 말겠다며 레가르다의 경고를 무시하는 이.
혹은 레가르다 그 자체가 목적이어서 무모하게 찾아오는 이.
그들의 공통점은 본인의 실력에 나름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바다의 무서움을 모르는 어리석은 이들이라 할 수 있겠다.
뭐가 어찌 되었든, 그 목적이 무엇이든 그런 이들에게 두 마디 이상의 경고는 의미가 없었으니.
레가르다는 의지를 다스린다. 그것을 전달한다.
동시에 해룡의 두 눈에 가득 담기기 시작하는 벼락.
"통하지 않을 건 알았지만...."
그것을 확인한 히오는 실드 마법을 해제하며 입맛을 다신다.
레가르다는 게임 속에서도 늘 이런 식이었다.
그저 가로막을 뿐인 레가르다. 자신이 할 일은 그것뿐이라는 듯 별다른 대화도 없이 침입을 막아 내는 것이다.
프레이야의 이름을 들먹였음에도 그게 어쨌냐는 듯 히오에게 마지막 말을 전하는 것이었다.
- 다시는 이곳으로 넘어오지 말아라.
동시에 엄청난 빛과 함께 해룡의 뿔에서, 입에서 벼락이 뿜어져 나온다.
콰과광-
눈 깜짝할 새 히오가 있던 공간을 뒤덮어 버리는 전격의 브레스.
담이 약한 이라면 애초에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터이고.
어쭙잖은 이라면 이번 공격 한 번에 잿가루가 되어 버렸을 테다.
알고도 반응할 수 없고, 막아 낼 수 없는 것이 해룡의 힘. 벼락의 숨결이었으니.
처음에는 거들먹거리며 오만한 태도로 찾아왔던 하룻강아지들은 모조리 이런 숨결 한 번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친다.
나름 강하다고 으스대는 이들도 간신히 막아 내거나 버텨 내는 것이 고작.
그 정도가 대부분의 한계인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 …무엇이냐.
곧 드러난 광경은 레가르다의 예상을 아득히 벗어나는 모습이었으니.
그는 벼락을 막아 낸 것도 피해 낸 것도 아니었다.
그저 받아 내었다.
"이런 건 처음 보나. 레가르다."
전격을 품은 해룡의 브레스가 지나간 공간.
드러난 사내의 모습은 너무도 멀쩡했다.
아니, 멀쩡한 것을 넘어서 사람 자체가 바뀐 것 같지 않은가.
온몸에서 튀어 오르는 막대한 에너지.
그것은 벼락이었다.
백색으로 발하는 두 눈.
그 역시 벼락이었다.
하늘 위에 오롯이 선 채 몸에 벼락을 두른 사내. 그를 배경으로 더욱 짙게 몰려든 먹구름.
그 모습은 그야말로 벼락을 다스리는 군주.
뇌제(雷帝)였으니.
- 재밌군.
조금의 변화도 없던 레가르다의 얼굴에 표정이란 것이 생겨난다.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한 흥미.
헤아리기 힘든 긴 시간 속에서 찾아온 아주 작은 유희.
레가르다의 변화를 느낀 것일까. 해룡이 낮은 울음소리를 흘린다.
그에 일대의 바다가 함께 들썩인다.
"재밌지."
히오의 입가에도 미소가 피어오른다.
레가르다와 싸우지 않고 아릴레이야로 들어갈 방법은 있다. 굳이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허나 그래서야 나아갈 수 있겠는가.
자신이 상대해야 할 적은 앞으로 수도 없이 많고 또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할 터인데 자신은 아직도 약하지 않은가.
갈 길이 너무도 먼 것이다.
그렇기에 히오는 손을 움직인다.
폭풍우 치는 바다 위, 무겁게 내려앉은 먹구름의 바로 아래에서 벼락을 부르는 것이었다.
그에 머리 위의 먹구름은 더욱이 짙어지고.
쿠릉- 육중한 우레가 하늘을 울린다.
- 허나 변하는 건 없다.
레가르다는 손에 쥔 창을 들어 올린다.
그의 창끝으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무(武)의 상징. 강기.
그를 닮은 샛노란 강기가 마치 용처럼 솟아오른다.
그의 창끝이 하늘 위의 히오를 겨누니.
동시에 해룡이 고개를 치켜들며 포효하는 것이다.
일대의 모든 바다가 솟구치며 하늘을 향해 덤벼드는 것이다.
"변하는 게 없어서야 되겠나."
같은 순간에 히오 역시 움직인다. 그의 손이 아래를 향하고 일대의 모든 구름 속에서 빛이 쏟아진다.
눈을 뜰 수조차 없는 황홀한 벼락의 세례가 바다에 맞서는 기적.
히오를 지나쳐 내려가는 수백 수천, 혹은 수만의 벼락.
"숨기고 있는 것을 내게 보여라. 레가르다."
바다가 솟구치고 하늘이 떨어져 내린다.
꽈아아앙-!
세상이 뒤집히는 것이다.
* * *
황궁에 머물 때 비탈리아누스에게 물었다.
의념이란 무엇인가.
의념을 다루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으니 조언을 구한 것이다.
'의념이라… 어려운 것을 묻는군. 마법사.'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침묵했다.
생각에 잠긴 듯, 할 말을 무척이나 신중하게 고르려는 듯이 말이다.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이어진 정적 끝에 무인의 정점, 초인 위의 초인이라는 검성의 입에서 나온 대답.
그것은 히오가 예상치 못한 것이었으니.
'나도 모르겠네.'
웃으며 그리 답해 버린 것이었다.
그냥 말해 주기 싫은 거 아니냐고 의심하기 시작한 히오를 향해 뒷말을 덧붙였던 검성.
'내 섣부른 조언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측할 수가 없으니 이해하게나.'
그는 말했다.
의념이란 자신이 깨달아야만 하고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본인의 삶을 녹여 내는 과정이자 결과라고 말이다.
그러니 남이 섣불리 조언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마법사. 그대라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의념을 다루는 자는 항상 조심하게.'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경고하는 것이다.
'하나같이 예측이 불가능한 자들이니 말이야.'
* * *
발밑에서 자신을 잡아먹기 위해 출렁이는 바다를 본 적이 있는가.
그것에 그치지 않고 자유로이 형태를 바꿔 가며 끝없이 솟구치는 바다를 본 적 있는가.
그것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이다.
바다의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말 그대로 무한함과 싸우는 듯한 느낌.
거세게 출렁이는 바다가 돌연 거대한 손의 모양이 되어 히오를 잡아채기 위해 짓쳐든다.
꽈앙-!
뇌제의 힘으로 그 손아귀를 바로 벗어났지만, 그를 맞이하는 것은 결국 바다.
그것으로 이루어진 수백, 수천 개의 창.
"…쯧."
곧바로 방향을 꺾어 하늘 높이 올라가고 그 뒤를 눈부신 광휘가 따른다.
허나 기다렸다는 듯 사방에서 덮쳐 오는 해일.
바다의 지배자와 바다 위에서 싸운다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 것이었나.
그런 생각이 얼핏 들었으나 후회는 없었다.
다만 최선을 다해 볼 뿐이다.
나아가야 했으니.
앞으로 마주해야 할 것들은 이보다도 더욱 강대한 것들일 테니 말이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해일을 고작 물이라고 경시할 수도 없다.
그 속에 담긴 힘이 여실히 느껴지지 않은가.
「스킬 - '청염(靑炎)'이 발동됩니다.」
그러니 푸른 화염을 불러내 끝없는 해일과 맞서게 한다.
동시에 시선은 해룡 위에 선 레가르다를 향하고.
꽈아아앙-!
한계까지 중첩된 벼락을 그 머리 위로 떨어트리는 것이다.
공기를 찢으며 내려치는 벼락은 어찌나 강한지 그 충격으로 깊은 심해의 끝까지 얼핏 드러났으나.
"더럽게 빠르네."
레가르다는 이미 그 자리에 있지 않았으니 허사와 다름이 없었다.
뇌제를 사용 중인 자신 못지않게 빠르며 바다에 의념을 실어 자유자재로 조종한다.
해룡에게서는 이따금씩 벼락의 브레스와 함께 강풍이 몰아치기도 하고 돌연 비가 쏟아져 내리더니 그것이 칼날처럼 쇄도해 오기도 했다.
그렇다고 근접전이 약한가.
그의 창에 넘실거리는 샛노란 강기를 보라.
떠오르는 단어는 하나뿐인 것이다.
"뭐 이딴 괴물이...."
무적.
바다 위에서는 결코 대적할 수 없는 무적.
온통 바다로 둘러싸인 아릴레이야에 그 누구도 발을 들일 수 없었던 이유.
살아 숨 쉬는 증거였다.
그렇다고 두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않나.
이것은 히오 자신이 원해서 벌어진 전투였지 않은가.
그도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었다.
아타올프와의 전투 이후 무작정 최상위 스킬이 많다고 해서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으니.
의념 다루는 법을 익히기 전까지, 그에 대항하기 위해 나름 여러 방법을 생각해 본 것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스킬의 합성.
최상위 스킬 '뇌제'와 '청염'의 장점만을 골라내 보자는 생각이었다.
물론 포인트 상점을 이용해서 하는 진짜 합성은 아니었고 그 스스로가 자체적으로 두 스킬을 동시에 사용하며 만들어 낸 새로운 기술이었다.
「스킬 - '청염(靑炎)'이 발동됩니다.」
우선 청염을 불러들인 다음 그 모든 화염을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압축한다.
이는 아타올프가 검은 안개를 압축하는 것에서 영감을 얻은 것.
그리고 '마력 감응의 천재' 특성은 이를 곧장 실현할 수 있게 해 주었다.
- ....
그렇게 압축된 청염의 뒤에는 벼락이 놓인다.
가느다란 한 줄의 벼락처럼 보이지만, 이것 역시 수백이 중첩된 막대한 힘.
한 점으로 집중되어 닿는 모든 것을 꿰뚫어 버릴 창.
압축된 청염의 힘으로 가로막는 것을 파괴하고 그 직후 이어지는 작은 벼락이 꿰뚫을 터.
그런 벼락을 마치 창대처럼 손에 쥔다.
전신에 가득한 벼락 군주의 힘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
그대로 아래를 내려다보면, 레가르다 역시 히오를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 나쁘지 않아.
그는 바다를 잠재우고 자신의 창을 꼬나 쥔다.
얼굴에는 여전히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살짝 구부리는 무릎.
청염과 뇌제의 합작품에 직접 창을 움직여 맞서려는 것이었다.
히오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레가르다가 진심을 다해 히오를 몰아붙였다면 이런 기술을 시도할 기회조차 없었겠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심지어 히오가 무언가를 하려는 듯하자 기다려 주기까지 한 것이 아닌가.
사실 벼락을 손에 쥐고, 청염을 압축하는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다. 스킬을 다루고 그것의 숙련도가 크게 늘었다는 의미였으니 레가르다와의 전투는 이것만으로도 큰 성과를 거둔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어느 정도의 효과를 발휘할지 결과를 확인하는 것.
벼락을 쥐고 크게 들어 올리는 팔.
손에 쥔 벼락이 번쩍이고 그 끝에 매달린 청염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한계까지 압축되어 있다.
조금이라도 집중이 흐트러진다면 너무도 다른 이 두 개의 스킬은 제각기 날뛰어 버릴 터.
"...."
그에 레가르다 역시 자세를 더욱 낮추고 창을 양손으로 쥔다.
용을 닮은 그의 강기가 창날을 통해 하염없이 뿜어 나와 형태를 갖추어 간다.
의념을 담은 레가르다의 창과 화염을 품은 벼락의 창.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그 팽팽한 긴장 속에서.
쿠릉-
문득 하늘에서 번개가 번뜩였을 때.
두 개의 창끝은 어느새 맞닿아 있었으니.
꽈아아아앙-!
그 자그마한 한 점에서 시작된 충격은 드넓은 바다 전체를 울리며 퍼져 나가는 것이다.
바다를 넘어 섬에 닿았으며, 기어이 땅까지 울리게 만든 것이다.
그곳에서 시작된 빛이 아릴레이야를 뒤덮어 버린 것이었다.
콰아앙-!
그 충격은 아릴레이야 섬의 모든 주민들이 느낄 수 있을 정도였고.
항구 도시 루고에서도 번뜩이는 빛이 보일 정도였으며.
"야, 찌, 찍고 있… 으, 으아아악!"
"뭐, 뭐야! 살려...!"
제법 떨어진 곳에서 몰래 숨죽이고 있던 한 척의 배가 뒤집히며 날아갈 정도였다.
96화 아릴레이야 (4)
"이걸 성공이라 해야 할지."
아타올프의 스킬 활용을 보고 영감을 얻은 청염과 뇌제의 합작품.
비록 진정한 스킬 합성은 아니었지만, 최상위 스킬 두 개의 힘을 억지로 이어붙인 막대한 힘.
그 결과는 나름 성공적이라 할 만했다.
의념에 조금이라도 대항해 보고자 고안해 낸 기술이었지 않은가.
초기의 그 목표대로 의념이 가득 실린 레가르다의 창을 막아 내는 것에 성공했으니 말이다.
힘의 균형 역시 팽팽했다.
그렇기에 막대한 폭발이 일어났고 그것을 막아 내는 데에만 2서클 실드 마법을 수십 번 중첩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못 쓰겠네. 이거."
특수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쓰지 못할 기술.
아니, 그냥 쓰지 않는 게 나을 것이다.
우선 준비하는 데 걸리는 시간.
그것은 다른 이들이 보기에 그리 길지 않겠으나 의념을 다룰 정도의 강자에게는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다.
흥미를 느낀 레가르다가 기다려 주었으니 망정이지. 본래라면 사용할 틈조차 없는 것이 정상이었다.
들어가는 마력량은 또 어떤가.
스킬 합성이 아닌 말 그대로 억지를 부려 이어 붙인 두 개의 최상위 스킬.
그만큼 들어가는 마력의 양도, 정신력도, 시간도 많이 드는 것이다.
그렇게 들인 정성에 비해 이룬 효과는 고작 의념 실린 공격 한 번을 막아 내는 게 전부였으니.
차라리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의념이란, 그만큼이나 부조리한 힘인 것이다.
- 인정하지.
레가르다가 창을 한 손으로 옮겨 쥐며 주위를 둘러본다.
그에 폭발의 여파로 거센 해일을 이뤄 가던 바다가 가라앉는다. 그의 눈짓 한 번에 잠잠해지는 바다.
그야말로 바다의 지배자라는 이명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내.
막대한 격돌을 바로 앞에서 직접 맞이했음에도 몸에는 자그마한 생채기조차 나지 않았으니.
- 꽤 재밌었네.
그럼에도 상당히 흥미로운 것이다.
의념이 실린, 자신이 나름 진심으로 질러 낸 일격을 의념도 없이 막아 냈지 않은가.
의념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 이라면 이해할 수도 없고 다룰 수도 없는 상식 밖의 힘.
허나 저 사내는 상식 내의 힘을 무식하게 긁어모아 상식 밖의 힘에 대항한 것이다.
레가르다로서도 처음 보는 광경.
- 거기까지지만 말이야.
허나 그 정도가 끝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강한 것은 사실이나 그래봤자 벽을 넘지는 못했으니.
- 그래도 보답은 해야겠지.
얼마 만에 느낀 흥미로움인가.
비록 작은 감정이긴 했지만, 긴 세월 동안 느끼지 못했던 것이기도 했다.
허나 그것은 그것이고, 이제는 자신의 사명을 계속해야 할 때.
용을 닮은 눈동자가 히오를 향한다.
- 내가 할 수 있는 보답이란 이런 것뿐이니. 부디 이해하게.
그의 시선이 히오를 지나치고 더욱 위.
높은 하늘을 향한다.
그것을 가리키며 번쩍 들어 올리는 창.
전달되는 의지.
그에 히오의 시선 또한 자신의 머리 위, 먹구름 낀 하늘을 향하고.
곧 드러나는 광경은 가히 눈을 의심케 했으니.
"…허."
짙은 먹구름을 가볍게 뚫고 나타나는 거대한 형체.
본디 바다 위에 떠다녀야 할 그것이 하늘 위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극히 일부만이 드러났음에도 하늘 정도야 가볍게 뒤덮는 크기.
그 옆면에 달린 수십 개의 대포.
"이건… 정말 몰랐군."
그것은 함선이었다.
바다가 아닌, 하늘을 유영하는 군함.
레가르다 오비에르.
창을 다루는 기사로 본신의 무위만 7위계 이상으로 추측되며 최상급 스킬, '해룡 소환'을 사용하는 소환 스킬 사용자.
여기에 새로운 정보 하나가 추가되는 것이다.
그가 소환할 수 있는 것은 비단 해룡뿐만이 아니었음을.
- '더치맨'이라는 이름의 함선이라네.
그 말과 동시에 수십의 거대한 포신이 일제히 움직인다.
쿠구궁- 단순한 움직임에도 들리는 것은 우레와도 같은 소리.
지상의 모든 것을 소멸시킬 수도 있을 그것이 일제히 히오를 겨냥하는 두려운 소리.
조여들어 오는 압박감.
- 이만 돌아가게.
레가르다는 보여 주고자 한 것이다.
- 그대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이 이상은 넘어갈 수 없어.
아릴레이야로 향하는 길은 결코 열리지 않을 것임을.
하지만 히오는 그런 레가르다의 말에도 들어 올린 고개를 내리지 않는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하늘 위의 거대한 군함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레가르다."
하늘을 유영하고 지상을 내려다보는 함선, 더치맨.
거기서 느껴지는 것은 짙디짙은 사기(死氣)였기에.
쏴아아- 쏟아지는 장대비를 맞으며 차오르는 확신과 함께 말을 전한다.
"나는 아릴레이야에 가야만 해."
그럼에도 레가르다는 조금의 미동이 없다.
고작 말 몇 마디로 이 바다의 지배자를 흔들기에는 그가 살아 온 세월이, 지켜온 사명은 너무도 무거운 것이었으니.
- 그대의 무위에, 노력에 경의를 표했건만,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가.
그가 내뱉는 말은 언제나 하나뿐이었다.
- 돌아가라.
하지만 히오는 여전히 하늘 위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의 말에 정면으로 맞선다.
"들어가야 해."
- …보기보다 더 아둔한 자였군.
레가르다는 작게 탄식하며 힘을 모은다.
이례적으로 많은 경고를 보내고 상대의 무위를 높이 사 더치맨까지 드러내었건만, 여전히 물러날 생각이 없지 않은가.
제법 안타까우나 어쩔 수 있나.
자신이 할 일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뿐이었으니.
- 피하지는 못할 테다.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포신에 막대한 힘이 집중되기 시작한다.
공기가 떨려 오고 바다가 진동하니. 이것은 벼락으로도, 푸른 화염으로도 막을 수 없는 압도적인 힘.
마지막 예우로 경고는 보냈지만, 숨겨 놓은 수가 없다면 그는 이번 일격을 피하지도, 막아 내지도 못할 터였다.
그럼에도 히오는 꿈쩍도 않는다.
수십의 포에서 막대한 빛이 모여들고 있음에도.
그 엄청난 기운에 공간이 크게 흔들림에도.
천천히 고개를 내려 레가르다를 향하는 시선.
"레가르다 오비에르."
쏟아지는 비.
함선의 포에 모여드는 막대한 힘.
그에 진동하는 대기.
출렁이는 바다.
"천 년 동안 아릴레이야를 지켜 온 가엾은 아이."
그 모든 것들의 움직임이 뚝 멎는다.
내리던 빗방울은 허공에 멈추고.
금방이라도 터질 듯 모여들던 힘은 한순간에 자취를 감추었으며.
그에 대기의 울림도, 바다의 떨림도 우뚝 굳어 버렸다.
마치 크게 놀라기라도 한 듯이.
그 속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은 사정없이 떨리는 한 사내의 눈동자.
"크뢰츠발트가 그리 말하더군."
용을 닮은, 그것을 동경했던 자의 눈.
자신의 신념을 위해, 사명을 위해 천 년의 세월을 견뎠던 그 눈빛만이 하염없이 흔들렸으니.
"이제 그만 너를 풀어 주라고 말이야."
그는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
* * *
아릴레이야 섬의 중앙.
마치 산처럼 우뚝 솟은 거대한 나무의 안은 하나의 도시와도 같다.
처음 방문하는 이에게는 복잡하기 그지없는 것이지만, 외부인이 이곳을 올 일은 없기에 누구도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 곳.
그런 곳의 상층에는 긴급한 회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천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토록 급하게 회의가 이루어진 적은 한 손에 꼽을 정도.
그리고 그중 두 번이 불과 며칠 사이에 발생한 것이다.
어비스 게이트가 나타났을 때 한 번.
그리고 지금.
"레가르다 님께서 더치맨까지 소환한 적이 있었던가요."
"처음 있는 일입니다."
일차로 느껴진 섬을 뒤흔드는 충격파와 번뜩이며 스쳐 지나간 빛무리.
그것만으로도 이미 유례없던 이변이었다.
아릴레이야의 모든 주민이 그것을 느꼈고 불안해하는 것이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하늘을 뒤덮으며 그 위용을 드러내는 함선.
현존하는 가장 고귀한 엘프마저도 처음 보는 광경.
그녀의 선조들 역시 이야기로만 전해 들었던 레가르다의 비밀 병기, 더치맨.
그것이 모습을 드러낸 이상에야 비상사태임은 틀림이 없었다.
무언가 오고 있는 것이다.
아릴레이야의 수호자 레가르다조차 고전하는 무엇인가가 이 섬에 발을 들이려 하는 것이다.
"우선 더치맨이 모습을 드러낸 방향의 해안에 병력을 파견했습니다."
"그보다 레가르다 님께 지원을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다 위입니다. 저희는 방해만 될 거예요."
처음 있는 일에 모두가 혼란해 하며 회의가 난잡해진다.
그나마 감정의 동요가 적은 엘프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이 정도인 것이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사건인 것이었다.
"제네비 님의 말이 맞아요. 바다로 가는 건 외려 방해만 될 겁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일 레가르다 님께서 패한다면...."
"그런 존재가 있을 리 없어요."
"다른 이도 아니고 레가르다 님입니다. 어찌 그런 말을...."
"물론 저도 레가르다 님의 위대함은 알지만, 대비는 해야 합니다."
"살아생전 더치맨을 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어쨌든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는 말은 맞는 말이에요."
결론은 빠르게 났다.
"아릴레이야의 모든 힘을 집결시킵니다."
최악의 상황을 준비하기로.
한데 뭉쳐 레가르다의 패배에 대비하기로 말이다.
그런 결정과 동시에 장내 모두의 시선이 한 사람을 향한다.
"프레이야 님."
이런 비상 상황에서 모두가 목숨 바쳐 지켜야 하는 이는 가장 고귀한 엘프도, 인간족의 수장도 아니었다.
프레이야인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될 것을 예상했다는 듯 프레이야는 단호한 표정으로 미리 작성한 글을 보여 준다.
『저도 갈 거예요.』
뮤틴스를 비롯한 몇몇이 나서며 만류하려 했지만.
『어차피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해요.』
프레이야는 확고했다.
아직 어리지만, 명석한 프레이야는 이미 깨닫고 있는 것이었다.
혼자 살아남아 봐야 할 수 있는 건 없음을.
자신은 아직 어리고 모르는 것이 많았으니까.
"그럼… 알겠습니다."
시간은 많지 않았다.
아릴레이야 상공의 절반 이상을 장악하며 그 위용을 뽐내던 함선, 더치맨이 그 모습을 감추었으니 어떻게든 결판이 난 것이리라.
"이동하시죠."
굳은 표정으로 중앙에 모이는 이들.
그들의 앞에는 육면체로 된 포털이 느리게 회전하며 작동하고 있었다.
* * *
하늘을 달리는 팬텀 스티드에 올라탄 채 하늘을 달리는 히오.
그리고 그 바로 옆에서 해룡 위에 올라탄 채 바다를 가로질러 가는 레가르다.
"레가르다."
히오가 그를 불렀으나.
"아릴레이야의 비밀을 말해 주지 않겠나."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아릴레이야를 향해 묵묵히 전진할 뿐이었다.
섬에 거의 다 와 가는 지금까지 레가르다는 계속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크뢰츠발트의 이름을 꺼낸 그 순간부터 쭉 말이다.
그 이후로 한참을 서 있다 안내하겠다는 말 한 마디 한 후, 섬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었다.
레가르다에게 다른 증거를 들이댈 필요도 없었다.
크뢰츠발트의 이름이 나온 것부터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이미 천 년도 훨씬 전의 인물.
역사에는 나오지도 않는 잊혀진 자.
그를 언급하는 것만으로 이미 자격은 충분했다.
"크뢰츠발트는 내게 용을 깨우라 말했어."
그 말에는 잠시 움찔하는 듯 했지만, 여전히 다른 말은 없었다.
자신의 사명은 그게 아니라는 듯, 네가 직접 알아내고 해결하라는 듯 그저 섬을 향해 나아가기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섬의 윤곽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원체 빠른 속도의 팬텀 스티드와 해룡이었으니.
거기에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르자 이제 확연하게 섬의 내부가 보이기 시작한다.
하늘에 닿을 듯 거대한 한 그루의 나무.
원근감을 무시하는 그 거대한 나무 아래 광활하게 펼쳐진 아름다운 섬.
온갖 비밀과 신비를 감추고 있는 아릴레이야에 도착한 것이다.
"이거...."
이 감격스러운 첫 순간에 대한 소감은, 제법 난감하다 할 수 있겠다.
"환영 인사가 격렬하구만."
해안가에 빼곡히 들어선 수많은 인파.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시선이 이곳을 향하고 있는 게 느껴졌으니 말이다.
97화 아릴레이야 (5)
해안 곳곳에 마치 첨탑처럼 솟은 나무.
그 위에 올라선 채 이곳을 바라보는 이들의 손에는 가느다란 나무줄기를 엮은 활이 들려 있는 채였다.
아마 예상해 보건대 조금 전까지는 저것을 있는 힘껏 겨누고 있다가 레가르다의 해룡이 모습을 보이자 거둔 게 아닐까.
아마 맞을 것이다.
저런 반응도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하도 요란하게 싸워댔으니 말이다.
이상한 건 따로 있었다.
"뭐가 좀… 다른데?"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모인 인파.
그들이 동시에 뿜어대는 강렬한 기세.
아름다운 섬의 경치 등에 눈치 채는 게 조금 늦었지만, 분명 뭐가 좀 달랐다.
하늘하늘 날리는 가벼운 옷차림.
유달리 길쭉길쭉한 팔다리와 작은 머리 덕에 한 명 한 명의 비율이 심상치 않은 것은 물론.
그 귀는 인간의 두 배 정도 크고 끝이 뾰족했으니.
- 엘프였구먼.
푸르넬의 중얼거림을 듣고서야 알아차린 것이다.
벤타이얼의 세계 속에는 엘프라는 종족이 없었으니까.
팬텀 스티드에 올라탄 채로 섬에 가까이 갈수록 그들의 얼굴이 자세히 보여 온다.
하나 같이 깎아 낸 듯 수려한 외모로 이곳을 바라보는 그들의 표정에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 천 년 동안 감추고 있던 비밀 중 하나가 엘프였어. 어쩌다 이리 되었는지....
천 년 전, 어비스와의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엘프를 마주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물론 쉽게 볼 수 있는 종족도 아니긴 했지만, 지금처럼 동화 속에나 나오는 그런 종족까지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우릴 경계하고 있네."
- 당연하겠지. 무려 천 년 동안 외부의 출입이 없던 섬이라지 않은가.
그런 만큼 그들의 경계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해룡에 올라탄 채 나란히 함께 가고 있는 레가르다가 아니었다면 여기서 또 한바탕했어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쨌든 레가르다의 설득에 성공했고 그와 함께 가는 중이다.
「스킬 - '서먼 팬텀 스티드'가 해제됩니다.」
해안가에 착륙할 때까지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그들의 자그마한 행동과 조심스러운 태도에서 레가르다를 향한 존경과 믿음이 엿보였으니.
"숨겨 두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예쁜 섬이야."
해안가에 내려서며 그리 말하자 뒤따라 내려온 레가르다의 입이 열린다.
입이 열리고, 곧 그를 닮은 굳센 목소리가 나온다.
마치 사람처럼.
- 크뢰츠발트 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게 전부인가.
그 말에 히오가 뒤를 돌아본다.
레가르다의 푸른 눈이 그를 직시하고 있었다.
"뭐, 그렇지."
- …알겠다.
그러는 새 두 사람의 주위로 몰려드는 아릴레이야의 주민들.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모여든 그들의 눈에는 히오를 향한 경계와 호기심, 레가르다를 향한 존경과 신뢰가 뒤섞여 있었다.
"레가르다 님."
그리고 그런 인파가 쭉 갈라지며 걸어 들어오는 몇 명의 사람들.
그리고 그중 가장 앞에 있는 엘프.
다른 엘프들의 외모도 충분히 수려했지만, 그녀의 외모는 그것을 넘어서 화려하다.
별다른 장신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머리에 쓴 풀잎 티아라 정도가 전부일까.
그럼에도 화려하다 느껴지는 것이다.
마치 태어나기를 고귀하게 태어난 듯 걸음걸이 한 번에도 기품이 서려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곧장 알 수 있었다.
저 여인이 아릴레이야를 다스리는 자.
"오랜만에 뵙습니다. 레가르다 님."
그런 엘프가 레가르다를 향해 거리낌 없이 고개를 숙인다.
그에 일대의 모든 이가 동시에 고개를 숙여 오는 것이다.
"강녕하셨습니까."
레가르다는 노란색의 창대로 바닥을 짚고서는 고개를 끄덕인다.
- 십여 년 만인가. 이시도르.
"정확히는 이십칠 년 만입니다. 레가르다 님."
- 그렇군.
"찾아뵙기가 어려워 이따금씩 보이는 미르 님의 흔적으로만 안부를 확인하였습니다.
- 신경 쓰지 않는다.
"전해 드릴 이야기가 제법 쌓였습니다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먼저 여쭙겠습니다."
그리고 아릴레이야에서 가장 고귀한 엘프.
이시도르의 시선이 히오를 향한다.
"이 분은 누구십니까."
그에 레가르다의 입이 막 열리려는 찰나.
사람들을 헤치고 우당탕탕 뛰쳐나오는 작은 형체.
그 머리 위에 불쑥 떠오르는 것은 마치 전광판과도 같은 번쩍이는 알림창이었는데.
『☆★마법사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그런 메시지와 함께 활짝 웃고 있는 소녀는 프레이야였다.
* * *
생각보다 빠르게 경계심은 가라앉았다.
유효했던 것은 역시나 레가르다의 보증.
아니, 사실 이것이 보증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일언반구도 없이 그저 함께 아릴레이야 섬으로 들어온 것이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이곳 주민들에게는 확실한 보증인 셈이었다.
천 년 동안 외부의 출입을 결코 허용치 않았던 레가르다. 그런 이와 함께하는 것보다 더 훌륭한 보증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두 번째로는 프레이야의 보증이 있었다.
이건 좀 신뢰도가 떨어지는 보증이긴 했는데 어쨌든 제국에서 돌아온 후로 틈만 나면 히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었으니.
계속 듣다 보니 어느샌가 내적 친밀감이 형성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여전히 그 저의를 의심하는 자는 많았다.
"마법사라니. 저는 믿을 수 없습니다."
다른 걸 의심하는 게 아니었다.
아릴레이야에 조금이라도 해가 될 자였다면 레가르다가 들여보낼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들이 의심하는 것은 바로 본인이 마법사라 주장하는 히오 파블렌코의 말.
그리고 그중에는 새 황제의 즉위식에 참석했던 뮤틴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히오 파블렌코는 제국의 수호 기사입니다. 그러니 무력이 강력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겠지요. 허나 마법은 별개이지 않습니까. 그동안 저희가 얼마나 많이 보았습니까. 마법을 들먹이는 사기꾼들을."
아릴레이야 인들은 그 누구보다 마법의 역사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믿지 않는 것이다.
마법의 부활은 불가능하다.
프레이야마저도 빈껍데기 1서클을 간신히 만드는 게 고작인데 어찌 평범한 인간이 마법사로서 수호 기사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겠는가.
이것은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다.
그러한 놈들에게 당했던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고 그것은 천 년의 역사가 말해 주고 있었으니.
"동의합니다."
"레가르다 님께서도 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시니 원...."
"명목상으로는 프레이야 님의 연락을 받고 온 것이라고 하는데...."
"그리 깊은 인연은 아니지요. 베르덴의 즉위식에서 한 번 본 게 전부라고 했지 않습니까."
다른 의미로 혼란스러운 것이다.
레가르다가 그를 통과시키기는 했지만, 무엇을 보고 그를 들인 것인지. 목적은 무엇인지 등 그 어떤 말도 남기지 않았으니.
"모두의 앞에서 마법을 증명하게 해야 합니다."
"우선 빠르게 대화를 나눠 보는 것도 중요해요. 제국의 수호 기사라면 저 시커먼 게이트에 대해 아는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프레이야 님을 돕기 위해 온 것이라 말했으니 괜찮을 것 같아요."
뮤틴스를 비롯한 몇몇의 반응이 조금 격하기는 했으나 대부분의 생각은 중립적이었다.
일단은 조금 더 지켜보겠다는 태도.
마법에 관해서든, 멸망의 징조에 관해서든.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그분을 모시고 이야기 나눠 보는 걸로 마무리 짓죠."
혼란한 회의는 가장 고귀한 엘프, 이시도르의 말을 기점으로 마무리되었다.
* * *
『진짜 와 주셨네요! 히오 아저씨! ˶•⩊•˶』
프레이야의 머리 위에서 반짝반짝 요란하게 떠오르는 메시지.
자신의 고향인 만큼 휘스퍼링 스톤 같은 저급 아티팩트가 아닌, 눈에 잘 띌 수밖에 없는 그런 문자 아티팩트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럼.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놀라서 바로 달려왔지."
『헤헤헤. 거리가 너무 멀었는지 한 번 사용하고 고장 나 버렸지 뭐예요. (ゝω・)ノ』
"그래도 덕분에 말로만 듣던 아릴레이야에도 와 보고 좋네."
『엄청 예쁘죠?』
"맞아. 정말 예쁜 섬이야."
거대한 나무 위에서 그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풍경.
나무에서 나무로 얼기설기 이어진 하늘 길과 그 아래로, 그 위로 지나다니는 엘프들. 대륙에서는 볼 수 없던 생소한 동물의 모습까지.
가히 자연으로 이루어진 도시라 할 만했다.
해가 떠 있을 때도 절경이었지만, 진짜는 해가 지고 난 이후.
나무 곳곳에 별처럼 매달린 빛과 그 속에서 번지는 빛으로 이루어진 야경이 진풍경인 아름다운 도시.
"이만 들어가자."
그렇게 주변을 서성이며 야경을 구경하다가 밤이 깊어져 왔기에 안으로 들어갔다.
숲의 중심에 위치한 나무.
하늘에 닿을 듯 거대한 그 나무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 안에는 레가르다가 팔짱을 끼고 히오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 오래도 돌아다니는군. 프레이야 님은 아직 어리시다.
히오의 품 안에서 새근새근 잠든 프레이야를 보며 말하는 레가르다.
"신비한 섬이잖아. 볼 게 많더라고."
거대한 나무는 그 크기만큼 수백 개의 층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히오가 들어온 곳은 다름 아닌 레가르다의 거처였다.
본래 마련된 다른 방이 있었으나 레가르다가 그럴 필요 없다고, 자신과 함께 가겠다 말해 버렸고, 진짜로 자신의 거처로 데려와 버린 것이다.
뭐, 열 명은 지낼 수 있을 정도로 넓었기에 문제될 건 없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넓은 방을 혼자 쓴 거야?"
- 거의 쓰지 않는다. 대충 이십칠 년 만이겠군.
"그럼 평소에는 어디서 지내는데?"
- 바닷속.
"…아릴레이야를 지키기 위해서?"
- 그렇다.
"그럼 지금은?"
- 해룡이 나를 대신하고 있지.
"허...."
그러니까 평소에는 그 어두컴컴한 심해 속에서 홀로 지낸다는 말이었다.
레가르다의 정체를 짐작했을 때부터 얼추 예상은 했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희생이 아닌가.
대체 그 사명이 얼마나 중한 것이기에.
- 그대를 들이기는 했다만, 이후부터는 그대가 직접 알아보고 움직여야 할 일이다.
프레이야를 조심스레 침대에 눕히며 레가르다의 말에 답한다.
"네가 나설 수 없는 일이라는 건가?"
- 정확하다.
"네게 주어진 임무가 아니라서?"
-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정확히는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지.
"할 수 없는 일이라...."
크뢰츠발트라 생각되는 이는 아릴레이야로 향해 용을 깨우라고 했다.
그리고 그 힘을 취하라고 말했다.
이것이 히오가 아릴레이야에서 해야 할 일.
동시에 레가르다가 할 수 없는 일.
다만 몇 가지 변수가 존재했었으니.
"어비스 게이트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어비스 게이트의 존재가 그것이었다.
프레이야에게 상황은 대충 들었다.
어비스 게이트가 나타났고 그로 인해 의견이 좁혀지지 않고 있다고.
들어가야 한다는 의견과 그저 지켜야 한다는 의견.
이 중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나느냐에 따라서 히오의 계획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리라.
- 내가 할 일은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다.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다… 결국 지켜보겠다는 말이군."
대충 예상했던 답변이다.
레가르다가 이런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으면 27년 만에 집에 들어오는 일 따위도 없었을 테니까.
그에게 들어야 할 건 이것이 아니다.
좀 더 근원적인 질문.
"그래서 용은 어디 있나."
잠든 용은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깨워야 하는가.
그 힘이 얼마나 막대하기에 크뢰츠발트가 직접 나서서 언급할 정도였는가.
그런 히오의 질문에 레가르다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돌린다.
히오에게 향해 있던 시선을 좀 더 내려 그 옆을 향한 것이다.
그에 히오의 시선 또한 그를 따라 옆으로 돌아갔고.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새근새근 잠든 녹빛의 작은 소녀.
"…설마?"
히오의 고개가 다시 홱 돌아가 레가르다를 향한다.
두 눈 가득 담긴 의심을 걷어 내는 레가르다의 끄덕임.
- 용이다.
* * *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열린 회의에는 당연하게도 히오 역시 참석했다.
졸린 눈을 비비적거리는 프레이야의 손을 잡고 그 반대편에는 무표정한 레가르다와 함께 들어서는 회의장.
원목으로 만들어진, 아니 그저 이 나무의 일부분인 커다란 원형 테이블.
그것을 둘러싼 엘프들과 몇몇의 인간들은 전날에 보았기에 제법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그중 가장 익숙한 얼굴을 뽑으라면 단연 한 사람을 뽑을 수 있겠다.
즉위식에서 계속 프레이야를 감싸고돌았던 사내, 뮤틴스.
그는 여전히 적대적인 눈빛을 보내며 히오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회의가 시작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더욱 격하게 히오를 몰아붙이는 것이다.
제국의 수도였고 별다른 명분도 없었던 이전과 달리, 이번에는 명분이 확실하게 있었으니.
마법을 상실한 시대에 어찌 마법이 존재할 수 있겠냐는, 아주 논리적인 명분 말이다.
그리고 그의 말이 계속될수록 동조하는 이들이 늘어 가는 게 보였다.
뮤틴스처럼 대놓고 나서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그 의견에 동의하는 것이다.
레가르다가 왜 이 자를 들여보냈는지는 몰라도 마법에 관련된 자는 아닐 것이라고.
적어도 이곳에 있고 싶다면 마법사라는 의견만큼은 철회하고 확실하게 사과하라는 뮤틴스의 주장에 설득되어 갔으니.
"거짓이라."
그럼에도 히오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사정을 다 아는 마당에 저 정도 반발을 이해 못 할까.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
다만, 이제는 그러면 안 될 터였으니.
"첫 번째 스승은 베르가 파블렌코."
언젠가 황궁의 정원에서 프레이야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이제 모두에게 들려주면 될 뿐인 일이다.
"마법이 사라진 세상에서 한 줄기 불꽃을 피워 올렸던 위대한 마법사."
덤덤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손에는 예의 그 커다란 지팡이가 들린 채였다.
"두 번째 스승은 푸르넬 펜체프."
그쯤에서 장내는 조용해진 상태였다.
히오의 입에서 '마법이 사라진 세상'이라는 말이 나왔지 않은가.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천 년 전 괴이와의 전쟁을 겪은 네크로맨서 학파의 마법사."
자리에서 일어난 히오는 회의장의 바깥을 향해 걸어간다.
창이 없는, 시원하게 뚫려 바깥이 훤히 보이는 회의장의 벽.
높은 층이었기에 그만큼 하늘과 맞닿아 있고 그러니 더욱 잘 보일 터였다.
그것을 알기에 히오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이들이 상실한 것은 마법뿐만이 아니다.
마법에 대한 확신, 믿음, 희망.
그 모든 것을 함께 상실한 것이었으니.
분노하고 불신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은 그 희망을 다시 심어 주면 될 터였다.
"이 세상 남은 마지막 마법사."
지팡이가 가볍게 들어 올려지고.
「스킬 - '일루전 - 신의 심판자'가 발동됩니다.」
곧 하늘이 열린다.
"히오 파블렌코."
신의 검이 그 위용을 드러내는 것이다.
98화 아릴레이야 (6)
"마법은… 끝났다."
뮤틴스 크라츠.
아릴레이야에서 나고 자라 아릴레이야의 주민인 것에 강한 자부심을 품고 살아가는 이.
그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보아 온 것은 일어나고서부터 잠에 들기까지 온종일 마법에 미쳐 살던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아니 비단 그의 아버지뿐만이 아니다.
아릴레이야인이라면 모두가 비슷한 것이다.
마법을 다시 되찾음과 동시에 부흥시키는 것.
이는 모든 아릴레이야의 꿈이었고 또 목표였으니.
"이건 미친 짓이야!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지만 어느날 문득, 책상 위 빼곡히 들어찬 마법 서적을 던져 버리는 아버지를 보았을 때.
삶의 목표를 잃고 허무에 빠져 버린 그 모습을 보았을 때.
그렇게 살다 가 버린 아버지의 묘지 앞에서 그는 다짐하는 것이다.
책상 위 뿌옇게 내려앉은 먼지를 닦아 내며 깨닫는 것이었다.
"마법은 끝이야."
뮤틴스 크라츠.
그는 인간이었다.
엘프와 하프 엘프가 대부분인 이곳 아릴레이야에서 얼마 남지 않은 순혈 인간.
평범한 인간.
그렇기에 그는 다른 엘프처럼 감정의 변화가 적지도 않았고 불가능한 일에 평생을 매달리지도 않았다.
마법의 상실을 인정하고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임을 적극적으로 주장해 온 것이다.
그리고 그 성과는 조금씩 드러났다.
엘프들 사이에서도 끝없는 실패에 지친 이들이 나오기 시작했으니.
더욱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마법이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이 세계는 그것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고 말이다.
"나는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마법사."
한데 저 오만한 말은 무엇인가.
마치 자신이 정말로 먼 옛날이야기 속의 위대한 마법사가 된 것마냥 휘두르는 커다란 지팡이.
얼핏 스쳐 가는 것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안쓰러움의 눈빛.
"히오 파블렌코."
그의 배경으로 쏟아지는 것은 눈이 멀어 버릴 듯한 환한 빛의 무리.
까마득한 구름을 가르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신성한 빛의 검.
하나만으로도 이미 재앙스러울 그것은 수십 개가 온 하늘을 장악하며, 하늘을 가르며 나타나고 있었으니.
"저게 무슨...."
모두가 넋을 놓고 그것을 바라본다.
회의장내뿐만 아니라 아릴레이야의 모두가 혼이 나간 채 그것을 올려다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히오 파블렌코는 지금 저것이 마법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어찌 저만한 것을 마법으로 펼칠 수 있단 말인가.
스킬이라 해도… 저런 스킬이 있다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저게 가능한 이가 있다면 이미 대륙 최강자의 반열에 이름을 올렸을 텐데....
"…황제의 수호 기사."
그렇다. 저 자는 제국에서 가장 강하다는 수호 기사의 좌에 오른 인물.
정신이 번쩍 든다.
홀려서는 아니 될 것이다.
다짐하지 않았던가. 확신하지 않았던가.
엉망진창이 된 아버지의 방 안에서. 먼지가 두껍게 쌓인 그 책상 앞에서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불끈 쥐지 않았던가.
마법은 불가능하다.
저것은 그저 마법이라 주장하는 그의 스킬일 터.
저 압도적인 광경에, 힘에 눌린 것이었을 테다.
저토록 강한 이가 마법이라 주장하니 대륙인들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겠지만, 마법을 보존하고 용을 지키는 이곳 아릴레이야에서만큼은 그런 거짓이 통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그런 뮤틴스의 예상은 이번에도 보기 좋게 빗나갔다.
"과연, 이것이 그대의 마법이란 말이군."
아릴레이야의 위대한 수호자, 레가르다가 고개를 끄덕인 것이 그 이유였다.
하늘이 장악당한 고압적인 광경에도 그저 팔짱을 낀 채 묵묵한 표정일 뿐인 레가르다.
그의 최종병기인 더치맨에 비견되는 거대한 힘, 신성한 검의 모습에도 태연했다.
레가르다의 처지에서 보자면 당연한 것이다.
그는 저것이 그저 허상일 뿐임을 곧장 파악했으니. 그렇기에 외려 저것이 마법이라고 납득해 버린다.
자신과 맞설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히오 파블렌코에게 저런 허세 가득한 스킬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구태여 그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히오 파블렌코는 크뢰츠발트를 아는 자였다.
그 사실을 파악하고 있는 레가르다에게 히오파블렌코란 곧 마법사.
조금의 증거만 있어도 쉬이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마법… 마법이 가능할 리 없어...."
허나 뮤틴스는 두 눈 가득 하늘의 검을 담으며 중얼거린다.
마법은 완전히 상실했다. 그것은 이미 이 세상의 법칙이 되어 버렸다.
분명 그리 확신했건만… 어째서.
대체 왜.
"그렇군요. 히오 파블렌코, 당신이 보이고자 하는 바를 이해했습니다."
가장 고귀한 엘프마저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인가.
무엇을 이해했단 말인가.
자신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어찌 일개 인간의 몸에서 저런 힘이 가능한 것인지.
어찌하여 위대한 수호자와 가장 고귀한 엘프는 저것을 마법이라 인정하는 것인지.
히오 파블렌코. 그 정체가 대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기에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순혈 인간인 뮤틴스의 반응이 가장 격할 뿐, 장내의 대부분이 그에 못지않은 혼란이었다.
급작스레 나타난 이가 마법사라 주장하는 것도 충분히 혼란스러운데 눈을 압도하는 광경과 더불어 레가르다와 이시도르의 인정까지.
그런 반응을 음미하며 히오는 작게 미소 짓는다.
'일루전 - 신의 심판자'는 일루전 마법을 이용한 스킬이다.
그 말인즉 저들이 보고 있는 광경은 마법을 근간에 두고 있지만, 분명 스킬.
마법이 아니라 스킬이라는 의미였으나.
'뭐, 대충 뜻만 통하면 됐지.'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자신이 마법이라 하면 마법인 것이다.
이곳에서 마법과 스킬을 구분할 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을 테니까.
- …이건 사기 아닌가?
두 번째 스승의 불만 섞인 투정 따위는 가볍게 무시한다.
중요한 것은 마법의 증명. 그리고 저들의 마음속에 다시금 희망을 심는 것.
작게 심어진 희망.
그것은 종내에 커다란 나무가 되어 미래를 푸르게 채워 갈 터였으니.
'불만 있으면 나와서 나랑 마법으로 토론해 보든지.'
그런 히오의 등 뒤로 금빛 광휘의 검이 아릴레이야를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다.
다시금 들어 올리는 지팡이.
빙글- 가볍게 돌리는 손짓.
「스킬 - '일루전 - 신의 심판자'가 해제됩니다.」
그 손짓 한 번에 아릴레이야 전역에 내려꽂힐 듯 하강하던 신의 검이 자취를 감춘다.
순식간에 사라진 빛.
지팡이질 한 번에 생겨나고 또 그 한 번에 마치 꿈처럼 사라졌으니.
"…마법...."
마법이란 말 외에 그 어떤 말로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장내는 침묵이 감돈다.
침묵 속에 가득한 것은 소리 없는 혼란.
그런 가운데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단 세 명뿐인 것이다.
언제나 온화한, 가장 고귀한 엘프. 이시도르.
히오 파블렌코가 마법사임을 인지하고 있는 아릴레이야의 수호자. 레가르다.
그리고.
『엥? (。・ω・。)?』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프레이야였다.
* * *
모험가 길드 본부.
이곳은 양지에 드러난 빙의자 집단 중에 가장 강대한 집단이라 할 수 있다.
1위, 지존천마는 홀로 활동하고.
2위는 황성에서 본인의 지위를 쌓아 올리고 있었으며.
3위, 아이라이츠는 흑아의 몰락과 동시에 소식이 끊겼다.
5위, 시르베르트는 아카데미 교수로 활동하며 정계에 발을 담갔으나 실비아 베르덴이 황위에 오르며 그것이 별 의미 없어졌으니.
이 세상에서는 다프네를 구심점으로 모험가 길드에 빙의자들이 몰린 것이었다.
바깥세상에서는 각 국가별로 최고의 대접을 받는 각성자들이었지만, 이곳 세상에서는 다프네의 아래에서 활동한다.
허나 그것에 큰 불만을 품은 이는 거의 없었다.
이곳 세상에서 다프네의 아래에 있다고, 그것이 바깥세상에 번지는 일은 없었으니.
중요한 것은 바깥세상, 즉 지구에서의 명예와 권력.
여기서 굳이 다른 집단을 만들어 다프네와 경쟁하느니 그녀와 함께하는 것이 여러모로 이득임과 동시에 편하기도 한 것이다.
그러한 점들이 작용하여 모험가 길드의 본부에는 각 국가에서 내로라하는 최상위 각성자들이 모일 수 있었다.
그들도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한데 모여 회의하는 것이다.
51층이 되어 세상 곳곳에 나타난 어비스의 입구.
하루아침에 중반부로 접어든 어비스.
그 난이도를 잘 알고 있는 이들인 만큼 발 빠르게 모인 것이었다.
그런 이들이 모인 모험가 길드 본부의 회의장.
중심에는 최상급 영상석이 하나 놓여 있었고 그곳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중이었다.
포인트 상점에서 구매할 수 있는 영상석 중에서도 가장 비싼 최상급 영상석.
그것은 시각적 효과뿐만 아니라 담긴 모든 것을 전달하는 신비한 돌.
현대의 4DX 영화관을 능가하는 생생한 현장감을 느끼게 해 주는 아티팩트.
쏴아아-
그렇기에 회의장은 지금 망망대해의 한가운데였다.
몰아치는 파도와 거센 비바람, 비릿한 짠 내음과.
콰앙!
울리는 천둥까지 생생하게 느껴지는 서쪽 바다.
그런 바다의 저 안쪽.
그곳에 보이는 것은 보고 있음에도 믿기 힘든 대자연의 격돌이었다.
바다가 뒤집히고 번개는 비가 되어 그에 맞서 간다.
쿠릉- 쉼 없이 울리는 천둥에 하늘이 진동함에도 무한한 바다는 아랑곳 않고 그를 향해 짓쳐 들어간다.
바다에는 해룡이 포효하고 그 위에 올라탄 사내의 손짓에 바다가 움직였으며.
해룡의 움직임에 빗방울이 방향을 틀고 그것은 곧 칼날이 되어 한 사람을 향해 끝없이 쇄도한다.
해룡의 숨결에는 벼락이 담겼으나 그것을 맞이하는 사내는 여유로울 뿐이었으니.
"…지존천마."
누군가의 중얼거림과 함께 영상은 끝을 향해 달려간다.
푸른 화염이 넓게 퍼지며 대해를 막아서고 벼락이 한데 모여 거대한 창을 이루어 간다.
폭풍우 치는 하늘 아래.
벼락을 쥔 채 바다를 굽어다 보는 자는 무어라 불러야 할까.
보기만 해도 두려운 그 벼락의 창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 맞서려는 자는 또 무어라 불러야 할까.
마치 용을 닮은 샛노란 강기가 창으로부터 뿜어 나오고.
번쩍이는 번개와 동시에 그 두 개의 창끝이 맞부딪쳤으니.
꽈아아아앙-!
귀청을 찢을 듯한 굉음과 함께 강한 빛이 시야를 장악한다.
막대한 충격파가 휘몰아치고 배가 뒤집히며 세상이 반전되는 듯한 느낌과 함께.
"허억...!"
영상은 비로소 끝이 났다.
어느새 폭풍우 치는 바다가 아닌, 어둑한 길드 회의장이 된 것이다.
"이게 최근 입수한 히오 파블렌코의 행적입니다. 보시다시피 아릴레이야로 향했고 서쪽 바다의 지배자와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확인되었죠."
이곳에 모인 이들은 최소 100위권 안쪽의 랭커들. 동시에 각 국가에서 최고위 전력으로 평가받는 인물들.
게임에서의 랭킹에 국한되지 않고 발전을 거듭하여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들이었으니.
즉, 중요한 정보를 공유하고 대책을 회의해야 할 이들이었다.
"저게 제국의 수호 기사위를 차지한 지존천마라는 말이군요...."
영상이 워낙 생생하고 장엄했던 까닭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근육이 이제서야 풀린다.
국가의 영웅이라 불리는 각성자들 또한 압도될 수밖에 없는 전투.
"최강자 중 한 명이라 평가받던 레가르다와 비등한 전투를 벌인다니, 그래서 결과는 어찌 되었습니까."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저희가 확인한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혹, 지존천마가 패하기라도 했다면 큰일 아닙니까?"
"누가 이겼든 분명 온전치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맞아요. 이런 중요한 시기에 왜 지존천마는 굳이 아릴레이야로 가서 레가르다와 마찰을 벌인 것인지...."
웅성이는 회의장.
워낙 엄청난 전투인 까닭에 처음에는 압도되었고 그것이 진정되자 안타까운 것이다.
이런 시기에 그가 있었더라면 걱정을 크게 덜 수 있었을 터인데.
"제가 확인해 본 바, 그에게도 다른 계획이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어둑한 회의장에 다시 불이 밝혀지고 다프네의 목소리가 장내에 퍼진다.
"저희가 알고 있는 진실 뒤에 더욱 거대한 무엇인가가 있어요. 그는 그것과 싸우고 있을 겁니다."
심연에서 겪었던 끔찍한 경험.
그에 덤덤히 맞서던 히오 파블렌코의 모습.
"그게 무엇인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우리가 해야 할 것도 매우 중요한 일임은 분명합니다."
어찌 되었건 당장 지존천마의 도움은 받을 수 없는 것을 확인했다.
남은 것은 이곳에 모인 이들의 힘을 최대한 발휘해 이 위기를 극복하는 것.
51층이라 명명하는 그것을 말이다.
"선발대에게서 연락은… 아직도 없습니까."
다프네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젓는다.
그 표정이 심각했다.
"없어요. 바깥세상에서도, 이곳에서도."
여태 어비스를 공략해 낸 방법은 단순했다.
선발대의 투입.
그 후 어비스의 형태를 파악하고 그들이 되돌아와서 보고하거나, 혹 미궁 사태처럼 위험할 경우 로그아웃한 후 바깥세상에서 이를 전달한다.
그러면 다프네를 비롯한 길드 소속의 각성자들이 인원을 꾸려 공략대를 파견하는 것이다.
허나 51층의 파악을 위해 들어간 선발대에게서는 그 어떠한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으니.
방심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든 버틸 수 있는 조합을 꾸려 열 명의 선발대를 보냈음에도 누구하나 소식을 전해 오는 이가 없는 것이었다.
"상황은 둘 중 하나겠지요."
냉정하게 생각해 본 바.
"전멸했거나."
전멸, 혹은.
"로그아웃이 불가능한 지역이거나."
나갈 수가 없는 지역.
물론 로그아웃이 불가능했던 경우는 전혀 없었다.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로그아웃이 가능했기에 빙의자들은 이 세상을 여유롭게 탐험할 수 있었다.
어비스의 악명에도 큰 두려움 없이 진입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한데 로그아웃이 불가능한 지역이 생긴다?
이건 정말이지 위험하기 그지없는 비상사태였으니.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다프네는 자신의 결정을 모든 이들에게 알린다.
"가동할 수 있는 모든 인원을 불러 모으세요."
공략의 실패는 곧 멸망의 시작.
어비스 1층의 실패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재앙이 되어 버릴 것이었다.
이곳 세상이든, 바깥세상이든.
그러니.
"모든 전력을 동원해 51층 원정대를 꾸릴 것입니다."
첫 대규모 원정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99화 아릴레이야 (7)
[이름 : 이현승(zl존☆천마★)]
[근력 : 50]
[민첩 : 50]
[체력 : 50]
[마력 : 420 (+45)]
[영력 : 45]
[신성력 : 10]
[주 특성 : 마력 감응의 천재]
[부 특성 : 간지 없이는 못 살아!]
[보조 특성 : 모든 게 두 배!]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0 / 1000)]
[특성 : 유령의 눈]
[특성 : 영체화]
[스킬 : 뇌제(雷帝)]
[스킬 : 청염(靑炎)]
[스킬 : 사신(死神) 소환]
[스킬 : 천상(天上)]
....
['악당을 물리친 수호 기사'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이메니아를 지켜낸 수호 기사'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벼락을 다루는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
명성 포인트는 느리지만, 꾸준하게 오르고 있었다.
바깥세상의 명성이 하루아침에 확 오르고 그 다음부터는 거의 오르지 않는, 가벼운 느낌의 명성이라면.
이곳 세상의 명성은 진득하고 꾸준하다.
명성의 질이 높은 것이다.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번지고 어떤 것은 과장되기도 부풀려지기도 하며 사람들의 머릿속에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하니.
'한 소녀를 위해 검성에 맞선 정신 나간 마법사.'
'동부의 몬스터 웨이브를 홀로 정리한 흑마법사.
'벼락을 다루는 마법사.'
'죽음을 거부한 기사.'
'여린 황녀를 기어이 황제의 위에 올린 한 마법사.'
'황제의 수호 기사, 제국을 지키는 수호 기사.'
'공포의 상징을 무너트린 영웅.'
그런 이야기가 한데 뭉치고 뒤엉켜 소문이 된다.
널리 퍼져 나가며 뒤엉킨 그것은 여러 이름으로 변형되어 사람들의 뇌리에 박히는 것이다.
그것은 동경 또는 선망.
혹은 누군가의 꿈이 되기도 하고 어떤 이의 목표가 되기도 하였으며 종내에는 하나의 이름으로 통일된다.
'희망'이라는 이름이었다.
그렇게 차근차근 쌓아 올려진 명성은 그 질이 높고 꾸준했다.
히오의 명성 포인트가 빠르게 오른다는 말이었다.
"마력 스탯은 곧 한계까지 찍을 수 있겠어."
얻는 족족 마력에 투자하다 보니 어느새 400대를 돌파한 마력.
4서클에 오르기에 충분해진 것이다.
- 5서클까지는 무난하겠구먼. 문제는 그 이후라네. 알고 있겠지?
"그럼."
냉정하게 말해 현재 마법 경지로는 딱히 도움 되는 것이 없다.
말하자면 스킬의 진화를 위한 용도라고 할까.
최상위 공격 스킬과 방어 스킬.
전쟁 단위의 상황에서 힘을 발휘할 낑낑이까지.
이 엄청난 스킬 사이에서 고작 3서클의 마법이란, 의미가 없는 것이다.
허나 5서클, 그것을 넘어 6서클에 이른다면 확연히 달라질 터였다.
그곳부터는 단순 마력량으로 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닌, 어떤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하니.
예상해 보건대 의념과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
- 늘 말하지만, 경이로운 속도야. 마법에 입문한지 2년 정도나 되었나? 그 사이에 4서클에 도전할 수 있다니.
"운이 좋았지."
- 노력 또한 대단했음을 내가 알고 있다네.
운이 따랐다는 건 부정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단순 운만으로는 해낼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코볼트의 영역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던 늙은 마법사와 조우한 그 순간부터.
아직은 거짓으로 점칠되어 있던 청염의 아래에서 그와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
궁극의 마법을 완성시키겠다.
다시는 그 누구도 마법을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겠다.
그리 다짐한 자신의 앞에서 늙은 마법사는 어떤 표정이었던가.
어떤 심정으로 그 자글한 눈가 아래로 한줄기 눈물을 흘렸던가.
마지막 표정은 어찌 그리 평안하였는가.
이루지 못한 그의 꿈이, 열정이 이제는 자신과 함께하는 것이었으니.
그것을 위하여 이를 악물고 노력해 온 것이었다.
"아무튼, 내려진 결정은 아쉽게 됐어."
아침 일찍부터 이어진 회의.
마법사임을 증명하기 위해 일루전 스킬로 대국민 사기극까지 벌였건만, 결과는 제법 아쉬운 것이다.
- 어비스 게이트로는 진입하지 않는다.
그렇게 결정 난 것이었다.
이는 히오의 주장과 상반되는 결정이었다.
어비스 게이트가 어떤 것이며 이것을 공략해야 한다는 것.
대륙에서도 이를 위해 준비하고 있을 테지만, 아릴레이야도 나름대로 준비를 해야 한다.
어비스에 진입을 해 보아야 한다.
그리 주장했으나 그렇기에 오히려 들어가지 않는 것으로 결론이 나 버렸다.
정보가 전혀 없었을 때라면 모를까.
아릴레이야에서만 나타난 이변이 아니라 모든 곳에 나타난 이변임을 알았으니 그들은 지키는 것을 택한 것이다.
천 년 동안 그래 왔듯이.
그것은 아주 오랜 세월을 이어져 온 그들의 사명이었기에.
용을 지키고 언젠가 다시 닥쳐올 멸망에 맞서 그것을 깨워 내는 일.
그것이 아릴레이야 섬의 존재 이유이자 먼 선조부터 목숨 바쳐 행해 온 일이었다.
"거기서 억지로 밀어붙이기는 어렵지."
그런 상황에서 어비스 게이트에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밀어붙이기는 어려웠다.
자신은 이곳에 온 지 하루밖에 되지 않은 외부인.
반면에 이들은 오직 지키는 것을 위해 살아 온 아릴레이야인.
51층 공략을 위해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을 것은 사실이었으니 어비스 게이트에 진입했으면 하는 것은 히오의 노파심에 가까운 것이다.
더군다나 아직 반신반의하는 이들이 많았다.
마법의 가능성 말이다.
그들 역시 꾸준히 시도하고 있었기에,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성공한 적 없던 것이 마법이란 것이기에.
그것에 대한 불신은 의식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고, 스킬 한 번 딸깍 보여 준 것으로는 완전한 믿음을 사기에는 어려웠다.
그래서 회의가 끝난 후, 지금 이런 상황이 된 것이다.
"히오 파블렌코 님."
홀로 휴식을 취하고 있는 히오를 찾아온 한 명의 엘프.
"준비가 되었습니다. 가시지요."
히오가 해야 할 건 확실한 증명.
"마법사의 집으로."
더불어 완연한 4서클로의 진입.
상급 마법사가 되는 것이었다.
* * *
아릴레이야 섬의 중앙에 자리한 거대한 나무.
신수(神樹)라고도 불리는 이것의 명확한 기원은 아무도 모른다.
자연의 종족, 엘프의 기원이라는 설도 있고 신이 창조한 나무라는 이야기도 있다.
거대한 나무의 명확한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있었으니.
이 나무가 섬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높게 솟은 그 크기만큼이나 아래로 거대한 뿌리는 바다 깊은 곳까지 뻗어 있고 그것에 각종 토양이 퇴적되어 섬을 이루고 있다.
그런 나무의 뿌리가 시작되는 곳.
그 앞에 히오는 서 있었다.
주위에는 예의 그 아릴레이야의 고위 엘프들과 뮤틴스를 위시한 몇몇 인간들이 함께였다.
물론 프레이야와 레가르다 또한 자리하고 있는 채였고.
"들어가시지요."
수 갈래로 나누어진 나무의 거대한 뿌리.
그 입구는 봉인되다시피 막혀 있었다.
마치 나무 자체에서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는 듯한 모양새.
엘프 중 두 명이 나서서 입구로 보이는 것을 양옆으로 벌리자 곧 드러나는 안쪽의 통로.
나무의 기둥이 아닌, 뿌리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곳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지상이 아닌 지하로 내려간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안쪽으로 향함과 동시에 눈앞을 수놓는 것은 반짝이는 빛의 행렬.
"…허."
짧은 감탄사를 내뱉자 옆에 있던 프레이야가 히죽 웃으며 문자를 띄워 올렸다.
『예쁘죠? 저도 올 때마다 놀라요. 헤헤.』
보통 마법사의 집이라 하면 기본적으로 음침하다.
숨겨져 있거나 오랜 세월 방치되어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허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우선 관리가 잘 되어 있고 프레이야의 말대로 반짝이는 빛무리가 마치 반딧불처럼 날아다니며 주변을 밝히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히오가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 마력이… 엄청나구먼.
바깥에서 뿌리 안쪽으로 들어오는 순간 느껴지는 막대한 마력량.
이전에도 느끼고는 있었다.
이 거대한 나무 자체에서 마력의 흐름이 느껴지는 것을.
하지만 뿌리 안쪽에서 감지되는 것은 그것의 수십 수백 배.
굳이 비교해 보자면....
'마치 테트라디아 마탑과 비견될 만한 마력량이네.'
그만큼이나 대단한 마력량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히오의 눈에는 그런 막대한 마력의 흐름이 선명하게 보였고 그렇기에 터트린 감탄사였으나....
"이 정도 풍경에 감탄하다니… 마법사는 다 그런가?"
무지한 뮤틴스는 그런 히오를 보고 비꼬듯 말을 뱉는다.
애초에 첫인상부터가 사기꾼으로 박혀 있던 사내가 아닌가.
어떤 수를 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결코 마법사일 리가 없을 터.
그 한심한 거짓말이 곧 밝혀질 것이라 생각하니 말이 신랄하게 나오는 것이다.
"뮤틴스."
"…예."
질책하듯 짧게 내뱉는 이시도르의 한 마디에 금방 조용해졌지만 말이다.
품위 있게 뮤틴스를 다그친 이시도르의 시선이 히오를 향한다.
"이곳은 신수(神樹)의 뿌리이자 아주 오래전 지어진 '마법사의 집'이라는 곳이에요."
"여기가 마법사의 집이군요."
"네. 그리고 히오 파블렌코,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증명. 이 텅 빈 공간에서 아래로 향하는 길을 찾으면 됩니다."
나무의 뿌리 내부라고는 믿기 어려운 넓은 공간.
허나 이곳이 정녕 마법사의 집이라면 다른 곳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마법사의 집 지하로 향하는 통로쯤이야 찾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수없이 많이 들락거렸지 않은가.
다만 약간의 사소한 문제가 있었는데 주변에 느껴지는 마력이 너무 막대하다는 점.
그렇기에 작은 마력의 흐름을 찾는 데는 조금의 시간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히오가 대답만 하고 가만히 선 채 아무런 행동이 없으니 이해하지 못했다 여겼는지 이시도르의 부연 설명이 뒤따랐다.
"어떤 장치를 이용하거나 아티팩트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에요. 물론 저희는 마석을 이용해 지하로 이동하지만, 전해져 오기를 마법사라면 다른 도움 없이 스스로 통로를 열 수 있다고 하더군요. 저희는 그것을 보고자 한 것이에요."
"예."
이번에도 대답만 하고 가만히 서서 주변을 둘러보는 히오.
그는 분명 '마력 감응의 천재' 특성을 이용해 막대한 마력의 파도 속에서 통로를 잇는 작은 물줄기 하나를 찾고 있는 것이다.
허나 천재의 생각을 어찌 한낱 범부가 알겠는가.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그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위를 둘러보는 것처럼 보였으니.
"하.... 내 저럴 줄 알았습니다."
뮤틴스가 한숨을 내쉬며 또다시 나서 버렸다.
"본인을 마법사라 주장하는 이들 중에서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곧 탄로 날 상황인데 뭐라도 있는 것처럼 아직도 저리 주변을 둘러보고 지팡이를 들어 올리고… 문이 열리고...?"
뮤틴스의 말을 무시하며 히오가 지팡이로 한 곳을 가볍게 툭 치자.
쏴아아-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뿌리의 벽.
그 사이로 드러나는 것은 역시나 별처럼 반짝이는 공간.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드러난 것이다.
"가시죠."
입을 떡 벌린 채 말문이 막힌 뮤틴스를 태평하게 지나쳐 걸어가는 히오.
"정말로… 여셨군요."
그 뒤를 이시도르와 다른 엘프들이 따른다.
뮤틴스 또한 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그 뒤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지 않나.
사실 지하 통로를 열기란 무척 쉽다.
마정석의 도움이 있다면 말이다.
정해진 장치에 그저 마정석을 꼽기만 하면 열리는 것이 마법사의 집이었으니.
허나 마정석이 없다면 결코 열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원리를 파악하기도, 그것을 다스릴 수도 없는 것이었다.
한데 어찌 히오 파블렌코는 저토록 쉽게....
정녕 마법사라도 된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마법은 자신도, 자신의 아버지도, 아릴레이야를 너머 세상의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학문.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도착한 그 아래층.
그리고 그곳에서 보인 광경에 다시금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히오가 장난처럼 툭 가져다 댄 지팡이에.
쏴아아- 청량한 소리를 내며 활짝 열리는 지하 계단.
대충 감을 잡았는지 통로를 여는 속도가 더욱 빨라진 것이다.
그렇게 다시 내려간 그 아래층에서는 이제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도착과 동시에 지팡이를 흔들어 통로를 열었으니.
"이건… 말도… 안 돼...."
기어이 두 발로 직접 가장 아래층까지 따라 내려간 뮤틴스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평생토록 믿어 의심치 않던 전제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으니.
마법은 재기 불가능한 학문이다.
이렇듯 뿌리 깊게 자리한 생각이 눈앞에서 부정당한 것이었다.
"정말… 찾아내셨군요."
뮤틴스만큼은 아니었지만, 이시도르를 비롯한 다른 엘프들의 반응 역시 제법 격렬했다.
언제나 평온한, 가장 위대한 엘프가 눈을 동그랗게 뜰 정도였으니 그 놀람이 엄청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예, 뭐… 나름 익숙한 곳인지라."
그래봤자 히오에게는 뻔히 예정되어 있던 결과였기에 별다른 감흥도 일지 않는 것이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와들와들 떨고 있는 뮤틴스.
그가 이전에 했던 약간의 비아냥 정도야 그저 귀여운 수준.
광대니 사기꾼이니 온갖 잡소리를 면전에서 들은, 말 같지도 않은 인내력 수치를 1000까지 무려 네 번을 채운 인내 장인으로서 신경조차 쓰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히오의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 있었다.
"정말 대단하세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어떤 마법을 사용하신 겁니까? 원리라도 조금...."
"마법사는 정녕 존재했단 말인가! 아아...."
"아릴레이야의 천 년 사명에도 드디어...."
주변에서 들려오는 칭찬과 감탄, 감격과 놀람 등에도 그 표정은 심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이유라 한다면 마법사의 집, 지하 3층까지 내려오며 보아 온 것들.
지하 1층을 지나 2층, 3층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던 서적.
거기에 적혀 있던 고대어의 의미를 파악해 버린 까닭이었다.
주변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깊은 생각에 빠진 것이 그 이유였다.
- 허허… 설마설마 했지만, 존재했었군.
진심으로 놀란 듯, 작게 중얼거리는 푸르넬의 목소리.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 들어 올리는 한 권의 책.
그곳에 적힌 제목은.
- 용언 마법.
반신(半神).
드래곤의 마법이었다.
100화 아릴레이야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