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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PRINCIPEDEUNPAISENEMIGO / Chapter 6: 6

Kapitel 6: 6

* * *

불의 마법은 상처를 태운다. 얼음의 마법은 상처를 얼린다.

바람의 마법은, 상처를 헤집는다.

회오리치는 바람의 힘에 어깨가 관통됐다. 말이 좋아 관통이지 갈가리 찢겼을 것이다. 대충 붕대만 감아둔 채로 방치된 상처 때문에 제대로 혈액이 닿지 않은 손은 퉁퉁 부은 채 짙은 보랏빛으로 변해 있었다.

칼리안은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어디에서 왔어?"

남자가 고개를 들어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픽 웃었다. 유란이 표정을 찡그렸지만 칼리안은 그냥 두라는 듯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귀한 집 도련님인 줄 알았더니."

"더 귀한 집 자식이라."

남자의 상처를 훑어보는 칼리안의 눈에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남자에 대한 미안함이나 걱정하는 기색 같은 것은 찾아보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물론 유란 역시 칼리안이 그 남자에 대해 부채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유란은 열 다섯의 소년이 제 손으로 사람을 다치게 한 뒤 지어보이는 얼굴이 지나치게 담담하다고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구리 광산 경비대원이다. 놈들이 찾아와서는 사람 찾는 것 좀 도와주면 사례하겠다기에 잠시 도운 것 뿐이다."

"그 설탕같은 것, 어떻게 네가 가지고 있어?"

"놈들이 하나씩 나눠가졌다. 좋은 건 줄 알고 빼돌렸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는 사실이라 믿기로 했다.

"놈들이 찾는 건 뭐였어?"

"모른다."

"누군지는 알아?"

"서로 이름도 부르지 않았고 복면 때문에 얼굴도 못봤다."

"다른 기억나는 건?"

"없다."

칼리안이 깍지 낀 손을 테이블에 올리며 남자를 살폈다. 붕대 위로 배어나온 진물이 흥건했고, 열이 나는지 얼굴이 붉었다.

아무리 마법에 의한 상처라지만 이런 덥고 습한 곳에서는 벌써 곪아들어가기 시작했을 터였다.

"치료, 해줄게."

남자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이 도시를 통틀어 남자가 어느 정도로 고통스러울지 가장 정확히 알고 있을 칼리안은,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치료가 안될 것 같으면 자르기라도 해줄게. 대신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걸 줘. 없으면, 서로 아쉬운 거고."

남자는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칼리안은 채근하지 않았다.

한참 뒤, 남자가 입을 몇 번 달싹이더니 말했다.

"한슨 마을에 아내가 있다. 놈들도 알고 있다."

아마도 남자가 사실을 발설할 경우를 대비해 협박을 해둔 모양이었다. 칼리안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이 잃어버린 것. 뭐야."

"······ 손톱만한, 투명한 구슬같은 것. 텐실의 신관에게 확인해봐야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란 말을 들었다."

신물을 가지고 있던 모양이다. 신물을 닥치는대로 모으고 있는 텐실에서 비싼 값에 살 테니, 그것을 빼앗겼다면 그리 난리를 칠 만도 했다. 게다가 신물이라면 엘프가 기운을 느끼는 것도 말이 되었다. 칼리안이 다음 질문을 했다.

"어디 가면 만날 수 있지?"

"이 곳에 머무는 이들이 아닌 것 같았다. 하얀 머리 엘프가 있었는데 놈을 쫓아갔을 것이다."

"놈들의 정체는?"

"아까도 말했지만 얼굴도 못봤고 이름도 모른다."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다는 생각에 조금 실망하는 칼리안의 귀에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대신 그들의 대장인 듯한 놈을 부르는 호칭은 들었다."

계속 말하라는 듯 칼리안이 턱짓을 했다. 남자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기억을 되짚더니 말했다.

"푸른 솔새. 그렇게 불렀다."

"······ 푸른 솔새."

하.

아버지.

당신의 새가 왜 여기까지 날아왔을까요.

칼리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9장. 확인해 (4)

시끄럽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아니, 자네는 어떻게 그런 명예롭지 못한 행동을 한단 말인가!'

그랬더니 그 천인공노할 인사가 하는 말이 뭐였는지 아십니까?"

술 취한 놈은 딱 싫다. 취해서 시끄러운 놈은 더 싫다.

칼리안이 불편한 기색을 굳이 감추지 않으며 앞에 앉은 헤일을 쳐다봤다.

저녁을 먹은 뒤, 칼리안을 공격했던 남자가 저지른 짓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을 꼬치꼬치 물어오기에 그 입을 좀 막을 겸 꼬투리 잡을 거리를 좀 만들어 볼 겸 술이나 한잔 하라 권했더니 저 지경이 됐다.

팔을 뻗어 와인잔을 집어들려던 그가 헛손질을 했다. 덕분에 와인잔이 옆으로 넘어져 붉은 술이 하얀 테이블보를 적셨다.

"아, 왕자님! 제가 좀 취했나 봅니다."

알고는 있으니 다행이다.

그래. 누굴 탓하겠는가. 칼리안이 잘못했다.

테이블에 흘러 넘친 와인이 바닥으로 한 방울씩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것을 보고 있으려니 괜스레 다른 모습이 연상됐다.

'그러고 보니 그 자의 이름도 묻지 않았네.'

유란의 검에 결국 한쪽 팔이 잘려나간 남자를 잠시 떠올리던 칼리안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헤일의 말은 끝없이 이어졌다.

"아무튼 그 뒤로 세 달이 넘도록 이렇게 연락을 한 번 안합니다. 그러니 왕자님께서는 결코 그런 자와 상종을 하시면 안 될 것입니다."

시끄러운 것으로도 모자라 이 근처 어딘가의 영주를 침이 마르도록 험담하는 헤일을 보던 칼리안이 혀를 쯧 찼다. 그리고는 헤일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이곳이나 인근에 텐실의 신관이 방문할 예정이 있습니까."

굳이 궁금해서 묻기보다는 저러다 행여 저 입에서 르메인 험담이 나오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꺼낸 말이었다.

그 말에, 비로소 말을 멈춘 백작이 얼큰해진 눈으로 기억을 뒤져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글쎄요. 있던가······. 없던가······."

대답 한번 가관이다.

칼리안이 실소했다. 헤일의 곁에 선 집사가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 보였다. 이 곳에 오는 길에 칼리안이 공격을 당한 것도 모자라 칼리안의 앞에서 술에 취하질 않나, 왕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 내어 놓는 것이 '있던가 없던가' 라니.

"텐실 신관들 콧대가 하늘을 찔러대는데 이런 시골 구석에 올 리가······ 있었던가······. 없었던가······."

쐐기를 박아 넣듯, 헤일이 다시 이렇게 말했다. 집사는 아예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고 칼리안은 드러나지 않게 웃었다.

'이 정도면 내일 내가 방에서 안나와도 의심하지 않겠네.'

칼리안이 헤일의 꼬투리를 잡으려던 이유는, 곧 이 성에서 몰래 나갈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내일 아침까지 들어오지 않는다면 헤일이 의심할 것이 분명했으니 헤일의 저런 무례한 태도에 화가 나서 만나주지 않은 것으로 꾸미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 성에서 몰래 나가야 할 이유는 바로, 조금 전 만나고 왔던 남자의 입에서 튀어 나온 이름 때문이었다.

- 푸른 솔새.

세크리티아 국왕인 데블란의 세작.

칼리안이 기억하는 푸른 솔새의 임무는 카이리스와 텐실의 관계를 감시하는 것이었다. 어디까지나 감시였지 직접 텐실 신관을 만나야 하는 정도의 임무가 주어졌던 적도 없었고 그런 일을 했다고 보고 받은 적도 없었다.

뿐만인가?

푸른 솔새가 담당한 지역은 이런 시골이 아니라 카이리시스였다. 텐실 신관의 그림자도 찾기 어려운 이런 곳에서 카이리스와 텐실의 관계를 어떻게 감시하겠는가.

물론 베른도 아닌 칼리안이 지금 세크리티아 세작이 자신의 활동 범위에서 벗어난 이유 따위가 궁금해서 이 일을 알아보려 한 것은 아니었다.

푸른 솔새는 베른과 약간의 친분이 있던 이였다. 때문에 칼리안은 푸른 솔새의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 한번도 임무에 실패한 적이 없었지.'

그런 솜씨 좋은 세크리티아의 세작이 카이리스의 왕자를 알아보지 못했을 리 없으니 그것을 감수하고 칼리안의 일행에게 활을 쏠 만큼 중요한 일이 대체 무엇인지를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왕자님."

잠시 푸른 솔새에 대해 생각하던 칼리안을 얀이 작게 불렀다.

얀이 보고 있는 방향을 쳐다보니, 어깨가 조금 젖어 있는 아르센이 식당으로 찾아온 것이 보였다. 그가 다른 말 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다. 나갈 준비가 되었음을 알리는 제스처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알 리 없을 헤일이 앞에서 또 주절거렸다.

"텐실 신관들은 아주 속이 시커먼 놈들입니다. 제가 만나보지 않았습니까? 텐실 왕국 사람들도 그렇고 신관들도 그렇고. 다들 뒤집어 보면 먼지 없는 것들이 없습니다."

칼리안이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헤일을 대신해 집사의 허리가 숙여졌다.

칼리안은 마치 불쾌하다는 것처럼 머리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곧 칼리안의 입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슬립]

그와 함께 계속 중얼거리던 헤일에게서 코 고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든 칼리안이 천연덕스럽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주······."

집사의 머리는 이제 아예 바닥에 닿을 기세였다.

"가지가지 하시는군."

칼리안이 무릎 위에 펼쳐둔 냅킨을 들어 테이블에 탁 올려놨다. 얀이 얼른 다가와 의자를 빼주며 집사를 향해 질책하는 눈초리를 보냈다. 칼리안은 고개를 조아리는 집사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뒤돌아 나왔다.

방으로 돌아가는 칼리안의 걸음이 매우 빨랐다. 아르센이 그의 뒤로 얼른 따라 붙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새, 잡았습니다."

지금 아르센이 잡았다 하는 것은 전서구였다.

다행스럽게도 칼리안이 처음 이 도시에 들어올 때 시아에게 로브를 씌우지 않았었다. 그 뿐인가? 칼리안의 눈에 들고 싶어하던 헤일이 꽤나 떠들썩하게 칼리안을 맞이했었다.

그러니 푸른 솔새 본인은 아니더라도 추격자 무리 중의 일부는 시아를 보았을 것이고, 이 도시 안에 머무르면서 푸른 솔새에게 상황을 전달하리라고. 칼리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칼리안은 마법사 길드에 아르센을 보냈다.

이런 비와 어둠을 뚫고 날아가는 이상한 새가 있다면 전부 다 잡아달라고 전했다. 그리고 아르센은 그 새를 잡았다고 알려주고 있는 중이었다.

생각보다 빠른 결과에 칼리안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디입니까."

전서구가 출발한 지점을 묻는 질문이었다. 아르센이 곧바로 답했다.

"레드위크 거리입니다. 그리 멀지 않습니다. 라우첼 경에게 위치를 전해두었습니다. 그리고, 내성 밖으로 나가시면 기사들이 말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새를 찾으라고만 했지 그 밖의 것은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아르센의 일처리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칼리안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수고했어요."

그 후 칼리안은 방문을 열었다.

방에 들어가 문을 닫기 전, 칼리안이 밖에 선 아르센을 향해 말했다.

"헤르츠 경. 밤에 또 놈들이 찾아올지 모릅니다. 그러니 부탁할게요."

"걱정 마십시오, 왕자님."

아르센이 매우 진지한 얼굴로, 아주 정중하게 대답했다.

아르센이 돌아간 뒤, 방 문을 닫은 칼리안은 곧바로 반지를 들어 마력을 불어넣었다.

남자를 만난 뒤부터 틈틈이 시도했으나 계속 연결이 되지 않았었다. 이번에도 자리에 없을까 하고 살펴보는데 반지가 잠시 빛나며 앨런의 말이 머릿속에 들렸다.

- 라트란에는 잘 도착하셨습니까.

- 스승님!

칼리안의 얼굴에 모처럼 빛이 돌았다.

- 가는 걸음이 편치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앨런은 앨런이다.

목소리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을 이런 대화에서도 칼리안의 낯빛을 읽는다. 칼리안은 재빨리 시아를 만난 뒤부터 푸른 솔새를 알게 된 경위까지를 모두 전했다.

그러다 카이리시스의 새 판매점에 갔던 일을 이제야 알리게 되는 바람에 잠시 혼이 났다.

- 계속 그렇게 칠락팔락 돌아다녀 보시지요. 늙은이는 그만 따뜻한 남쪽나라로 요양이나 가버릴 터이니.

- 듣던 중 무서운 소리네요.

칼리안이 거추장스러운 재킷을 벗으며 웃었다. 앨런의 말이 이어졌다.

- 그러니까 지금 하신 말씀이, 세크리티아의 세작이 찾는 물건과 얽혀들어서 이제는 왕자님 목도 간당간당하다. 이런 뜻이 맞으십니까?

- 아. 제 목은 괜찮습니다만.

칼리안의 대답에 앨런이 웃는 것 같은 느낌이 전달되어 왔다.

- 쫓기는 자의 목이 과연 아직 붙어있을까 하는 걱정은 됩니다. 제가 곧바로 따라 나설 처지가 되지 못했습니다.

칼리안이 창 밖을 쳐다봤다.

비는, 여전히 사납게 내리고 있었다.

- 그래서 지금 나가시려는 겁니까?

- 네. 그보다 스승님께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 말씀하시지요.

- 라트란 인근에 텐실 신관이 있는지. 그것을 좀 알아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세작이 신관을 만나 확인할 것이 있다고 했다네요.

얀이 건네주는 로브를 입으며 꺼낸 칼리안의 말에, 앨런은 다른 의문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 그리하지요. 내일 아침까지는 확인을 해두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나니 키리에와 유란이 방으로 들어왔다. 키리에는 칼리안이 바르샤 거리에서 구매했던 두 자루의 검을 모두 들고 온 상태였는데 칼리안은 그 중 처음으로 샀던 가벼운 검을 받아 들었다. 앨런과의 대화를 마무리 지은 뒤 반지에서 마력을 뺀 칼리안이 얀에게 말했다.

"쉬고 있어. 아마 찾지 않겠지만 혹시 라트란 백작이 나 어디 갔는지 물어보면 적당히 잘 말해줘."

얀에게도 역시 상황을 알려두었다. 얀이 걱정 말라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주사나 부리는 라트란 백작의 무례함에 화가 나셔서 바람쐬러 나가셨다 하겠습니다. 내일도 알아서 잘 거절할게요."

이보다 더 좋은 핑계가 또 있을까. 칼리안이 씩 웃었다.

"딱 좋네."

얀은 그래도 예전 만큼 걱정하지는 않는 표정이었다. 유란도 있고 키리에도 있고. 시아를 만났을 때의 일을 보고 잔소리는 했지만 칼리안 스스로도 어느정도 제 몸을 챙길 만큼은 된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돌아서는 칼리안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창 밖으로 몸을 날렸다.

펄럭, 하고 검은 로브 자락이 창문 아래를 스쳐지나가 곧 사라졌다. 그러더니 키리에와 유란이 칼리안의 뒤를 따라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칼리안의 방은 3층에 있었다. 얀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아무리 그래도 문으로는 나갈 줄 알았지!'

* * *

비와 어둠에 숨어 내성 밖으로 나간 뒤 유란이 어느 한 지점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저기, 기다리고 있군요."

유란의 말에 고개를 돌린 칼리안의 눈에 미리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지그프리드 기사들이 보였다. 기사들이 말에서 내려 다가오더니 각자 타고 있던 말의 고삐를 셋에게 건넸다.

종일 행군에 지쳐있을 본인들의 말이 아닌 영주성의 말이었다.

"수고했어요."

칼리안의 말에 씩 웃은 기사들이 몸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성 안으로 몰래 들어가 사라졌다. 돌아올 때는 또 다른 기사들이 말을 가지고 들어가기로 약속을 해두었다. 몇몇 기사들만 계속 안보이면 의심을 살지 모른다며 유란이 의견을 준 것이었다.

"이제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칼리안이 말에 오르자 전서구가 날아올랐던 위치를 아르센으로부터 미리 전해들은 유란이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 나섰다.

어둠에 잠긴 거리는 매우 한산했다. 비가 와서 더 그럴 것이었다. 그런 거리를 몇 개쯤 지나친 뒤, 꽤 평범한 외관의 술집 앞에서 유란이 멈춰섰다.

도착했음을 알고 말에서 내린 칼리안이 로브를 깊이 눌러쓰며 말했다.

"5분만 있다가 들어와요."

일단은 먼저 들어가서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한 말이었다.

유란은 걱정하는 얼굴로, 키리에는 평상시와 다름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칼리안은 망설일 것 없이 술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제9장. 확인해 (5)

밤. 비. 술집.

썩 어울리는 조합이 아닌가. 칼리안은 잠시 그렇게 생각했다.

어울리지 않는 것이 있다면, 이 밤에 빗속을 뚫고 술집을 찾은 열 다섯의 소년이려나. 아니면 지금 눈 앞에 보이는 광경이려나.

분명 푸른 솔새의 일행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들어선 곳에서 아주 의외의 것을 발견한 탓에 로브 아래로 보여지는 입술이 언젠가와 같이 호선을 그렸다.

"내가 너무 마음이 급했나보네."

칼리안은 바 안쪽에 선 채로 유리컵을 닦고 있던 바다 색 머리의 여자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누가 보아도 그 외모를 칭송하지 않고는 못 견딜 것이다. 여자는 이런 술집과 어울리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어찌 보면 실리케보다도 훨씬, 아름다웠다.

그러니 이상하지 않은가.

저런 아름다운 여자가 운영하는 술집에, 비 내리는 밤에.

손님은 아무도 없고 피 비린내가 진동을 하니.

긴 속눈썹의 여자가 컵을 내려놓고는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칼리안이 그녀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밖에 있는 이들은 그저 나를 따라온 것 뿐이니."

"관계 없는 이들에게 칼을 보낼 만큼 매정하지는 않으니 걱정 마세요. 뒷처리하기 귀찮은 분들이기도 하고요."

칼리안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 모습이었으므로 밖에 남겨진 유란과 키리에를 걱정하여 꺼낸 말에 여자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칼리안의 입매가 씰룩였다.

"돈 궁한 남자와 어린 엘프에게 활을 보낼 정도로는 매정한 것 같았는데. 다행이네."

"관계 있는 이들이 되었으니까요."

여자가 다시 웃으며 칼리안의 말을 받았다.

칼리안이 여자의 뒤에 널려있는 일곱 구의 시체를 슬쩍 쳐다봤다. 낮에 칼리안의 일행을 향해 활을 쏘았던 이들과 수가 같았다. 칼리안의 시선을 따라 같은 곳을 보던 여자가 말했다.

"그들도 마찬가지였고요."

푸른 바다색 머리의 여자, 푸른 솔새가 그렇게 말했다.

* * *

오밤중에 자신을 찾아온 앨런을 보며, 르메인은 자연스럽게 안경을 꺼내 썼다. 또 서류뭉치를 꺼내놓겠거니 하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을 본 앨런이 웃으며 말했다.

"그저 궁금한 것이 있어 온 것이니 편히 계시지요."

"그럴 리가 없는데."

이제 조금씩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기 시작한 르메인을 향해 앨런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신임을 많이 잃었군요."

그제야 르메인이 안경을 벗고 소파로 갔다.

이제는 권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맞은편에 앉는 마법사를 보며 르메인이 말했다.

"궁금한 것이나 묻자고 이 시간에 찾아온다니. 왕관 맡아주는 사람 취급에서 이제는 정보원 취급이 되었군."

늦은 시간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대한 불만이 숨김 없이 들어간 말이었음에도 앨런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일전에 전하께서 제가 궁금한 것에 대한 답을 들여다보고 계셨던 것이 생각났지요. 그러니 잘 아는 분을 코 앞에 두고 굳이 어렵게 확인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과거 앨런이 마법사단을 만들자며 르메인을 찾았을 때 르메인이 보고 있던 서류가 바로 신관들의 거주지와 관련된 것이었다. 리베른의 국왕은 그런 것은 직접 보지 않는다고 핀잔을 주었던 기억이 난 덕분에 그 길로 왕궁으로 온 앨런이었다.

"텐실의 신관이 카이리스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여 왔습니다."

르메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필 지금 시점에 텐실의 신관에 대해서 묻는 것에 대한 반응이었다.

"경이 뭘 알고 묻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우연히 궁금해진 것인지 모르겠군."

이번에는 앨런의 미간이 움직였다.

"텐실의 신관과 관련된 다른 일이라도 있습니까?"

"안 그래도 텐실의 사신들이 그 일로 왔었네."

텐실에서 갑작스럽게 사신이 왔다는 것은 앨런 역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물론 그 방문 이유는 모르고 있었지만.

르메인이 책상 쪽을 잠깐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카이리스에 열 네 명의 신관이 있는데 이곳 왕궁에 있는 한 명을 제외하고 전부 찾아서 데려가겠으니 더는 신관을 요구하지 말라 하더군."

물론 그 작고 힘 없는 텐실의 사신들이 카이리스 씩이나 되는 나라에 와서 저렇게 공격적인 말을 했을 리는 없었다. 돌려돌려 저리 말했다는 소리겠지만 아무튼 카이리스 입장에서 기분 좋을 상황은 아니었다.

"애초에 카이리스에서 텐실에 신관을 요청했던 적이 없었는데 그런 식으로 나오니 불쾌한 일이지."

심지어 왕궁에 있는 치유사도, 텐실의 공주 아이샤와 르메인의 혼인 기념으로 알아서 보내주었던 이였다.

신관들이 부리는 치유력이 매우 효과가 좋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신관 좀 보내달라며 카이리스에서 텐실에 약한 소리를 해야 할 만큼은 아니었다. 그런 것을 내어 놓으라며 윽박지를 르메인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런 저런 것을 기념한답시고 제 멋대로 신관들을 보내놓고 그간 카이리스에서 강제로 신관을 뺏어다 쓰고 있던 것처럼 말을 하니 뭐라 할 말이 없더군."

르메인의 말을 듣던 앨런이 작은 소리로 웃었다. 텐실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는 르메인의 모습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며 구구절절 일러바치는 아이같았기 때문이다.

"신물이 어느 정도로 부족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퍽 어려워졌나 봅니다. 상황은 드러내기 싫고 신관은 데려가야 되겠고."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았네."

"그래서 어찌 하셨습니까?"

"신관들을 찾아다 전부 목을 매달까 했지만."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앨런도 잘 알았다. 그 순간 텐실과의 전쟁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르메인이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상황에 전쟁을 치뤄봐야 브리센만 이득이니 그럴 수는 없고. 란델을 보아 한 번은 참겠다 했네. 따로이 관리하고 있지 않으니 알아서 찾아 데려가라 하였지."

"잘 하셨습니다. 아무튼 저에게는 알려주시지요. 제가 아니라 칼리안 왕자님께서 궁금해하시는 부분이니."

르메인의 미간에 또 주름이 졌다. 지금 칼리안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르메인도 보고를 받았기 때문에 짓는 표정이었다.

"이미 신관이 있는 곳에 도착을 했으면서 굳이 그것을 왜 묻지?"

"어느 곳을 말씀하십니까?"

앨런은 갑자기 어딘가 찝찝한 기분을 느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지만 칼리안은 분명 주변에 신관이 없는 것처럼 물어왔었다.

"라트란. 텐실이 사막과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텐실에서 라트란 백작에게 신관을 선물했네. 지금이야 사이가 틀어졌다지만 그땐 란델과 라트란 백작 사이가 꽤 좋았으니까. 굳이 한번 보낸 신관까지 돌려받지는 않은 듯 하던데."

그 대답을 들은 앨런이 한동안 말이 없었다. 르메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혹시 무슨 일이 있나?"

찌푸려졌던 표정을 금세 되돌려놓은 앨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서둘러 만들어낸 핑계를 꺼내들었다.

"아닙니다. 왕자님의 시녀 아이가 치유사이니 신관에게 한번 보이고 싶었던 모양이지요."

"아닌 것 같은데."

앨런을 쳐다보는 르메인의 얼굴이 그리 좋지 않았다. 앨런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정말 신임을 잃었나 봅니다. 이렇게 믿질 않으시니."

"고작 그런 것을 묻자고 이 시간에 국왕의 집무실을 찾아왔다는데 그 말을 어느 누가 믿겠나."

하긴, 맞는 말이다. 앨런이 핑계를 거두고 솔직히 말했다.

"자세한 것은 사실 저도 잘 알지 못하는지라 내일 다시 와서 말씀드려도 될는지요? 일단 이 이야기를 왕자님께 전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아무튼 라트란 백작이든 누구든 카이리스의 왕자에게 해를 입힐 만큼 삶이 무료한 인사는 없을 것이니 걱정은 거두시지요."

왕궁에서 나가야 칼리안에게 내용을 전달할 수가 있었으니 시간을 끌어야 좋을 것이 없었다. 적당히 타협하기로 한 르메인이 마뜩치 않다는 얼굴로 그리하라 답했다.

* * *

평소 즐겨하던 남장을 그만 두고 서 있는 푸른 솔새를 보던 칼리안이 서두르지 않는 움직임으로 로브를 벗어 옆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낮에 누가 내 일행을 공격하기에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공격을 한 줄 알았는데."

"알고 있었죠. 말을 해 두고 갔었는데. 경솔했어요."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 같은 것을 본 푸른 솔새가 대답했다.

푸른 솔새는 칼리안 일행을 공격하지 말도록 이른 뒤 루카라는 엘프를 따라간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일행이 칼리안 쪽으로 활을 쏘도록 했고 덕분에 저렇게 시체 일곱 구가 되었다는 소리였다.

상황을 파악한 칼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그럼 이제 나도 관계 있는 사람이 된 건가?"

푸른 솔새가 칼리안을 공격할 생각인지를 묻는 말이었다.

"그렇다 하려고 했는데······."

푸른 솔새가 한동안 칼리안을 쳐다보았다. 곧, 푸른 솔새가 숨겨두었던 검에서 손을 뗐다. 그와 함께 푸른 솔새를 향하던 칼리안의 날카로운 살기가 사라졌다. 푸른 솔새가 신기하다는 눈으로 칼리안을 보며 말했다.

"쉽지 않으려나."

칼리안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네가 따라갔다던 엘프는 이미 죽었나?"

"숲의 길로 도망치는 엘프는 쫓기 힘들더군요. 다시 쫓아갈지 포기할지 머리가 아프네요. 그래서 돌아와보니 더 머리 아픈 일이 생겨 있고."

칼리안이 목을 잃고 죽어 있는 이들을 다시 쳐다봤다. 똑같이 고개를 돌려 같은 것을 한번 더 쳐다본 푸른 솔새가 말했다.

"살기 보내는 왕자님이나 기사들이 쫓아다니는 것은 별로 달갑지가 않은데. 서로 별달리 해를 입은 것도 아니니 돌아가 주시겠어요? 그럼 저도 꼬마에게서 손을 뗄게요."

"기껏 찾아와서 만났는데, 그냥 돌아가 달라니."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몇 가지만 묻고 말해주면 돌아갈게."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던 푸른 솔새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궁금한 것까지는, 적당히 대답해 드릴게요."

"신관도 아니면서, 신물을 왜 찾은 거지?"

칼리안의 질문이 곧바로 튀어나왔다.

"요즘 제법 비싸니까요."

"그 말은 네가 신물을 팔고 있었다는 소리같은데."

푸른 솔새가 유리컵에 술을 한잔 따라 마셨다.

짙은 알콜 냄새에 인상을 살짝 찌푸리던 푸른 솔새가 대답했다.

"저도 본업만 가지고는 조금 아쉬울 때가 많으니까요."

카이리시스에서 세작 노릇을 하다가 손에 넣은 신물을 팔기 위해 이 곳까지 왔다는 소리였다.

그때, 칼리안의 손가락에서 미약한 마력의 기운이 느껴졌다.

앨런이 찾는 것을 안 칼리안이 반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곧바로 앨런의 음성이 들려왔다.

- 왕자님, 라트란 백작에게 신관이 있다더군요.

- 이미 신관을 데리고 있었다는 말씀이십니까.

신관에 대해 물었을 때 있던가 없던가, 라며 되도 않는 말을 지껄이더니.

- 일단 알겠습니다. 그런데 스승님. 신관들이 신물을 많이 씁니까? 몇 번이고 계속 사야 할 만큼요.

- 아닙니다. 한 두 개면 십 년은 쓸 겁니다.

푸른 솔새는 계속해서 신물을 팔아온 것처럼 말했다.

신관이 직접 쓰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고개를 든 칼리안이 푸른 솔새를 향해 다시 물었다.

"신물을 사주는 사람이 지금 라트란에 있나? 굳이 이런 시골에서 팔아야 할 이유가 없는데. 카이리시스라면 신관들을 찾기가 더 수월할테고."

"그 구매자만큼 값을 많이 쳐주는 이가 없거든요. 본래부터 연이 있는 사람이기도 했고."

'본래부터 세크리티아의 세작과 연이 있는 사람이라?'

"본래는 다른 일로 세크리티아의 세작과 연결이 있었고, 그러다 신물을 사고 파는 관계가 되었다는 말 같은데."

그것이 칼리안에게는 누군가 푸른 솔새에게 카이리스의 정보를 팔아오다가 이제는 정보를 사는 대신 신물을 구매하고 있다는 말로 들렸다.

칼리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곧 칼리안이 마지막 질문을 건넸다.

"그 구매자. 헤일 라트란 백작이 맞나?"

"적당한 질문이 아닌 것 같네요."

푸른 솔새가 생긋 웃었다.

대답하지 않는 것으로 긍정을 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 헤일 라트란. 데리고 있는 신관을 숨기고, 쓰지도 않는 신물들을 비싼 값에 사 모으면서 세크리티아 세작과도 연이 있는 자입니다. 조금 이상한 것 같은데요.

- 그렇군요. 행보가 범상치 않은 듯 하니.

- 네. 제가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칼리안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제10장. 너무 멀리 왔으니 (1)

첫 시작은 시아였다.

쫓기고 있던 것을 도왔다.

그 후에는 시아를 잡으려다 칼리안을 공격한 남자를 체포했다. 그랬더니 남자의 입에서 푸른 솔새의 이름이 나왔다. 그리고 푸른 솔새는 또 다른 이름을 내어 놓았다.

헤일 라트란.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의 귀결점이 된 남자를 떠올린 칼리안이 빗속을 질주했다.

찬 비를 맞으니 생각이 조금씩 정리가 됐다. 그러다보니 신물을 사 모으는 이유를 추론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여전히 마력이 흘러나오는 반지를 슬쩍 쳐다본 칼리안이 말을 전했다.

- 란델이예요. 텐실에 신물을 가져다 바치면서 란델과의 끈을 이어 둔 겁니다. 플란츠의 편에 서 있었으니 당연히 신물을 사 모으는 것은 비밀리에 진행해야 했겠죠. 그러니 굳이 그렇게 비싼 값을 주고 세크리티아의 세작을 통해서 신물을 구매한 겁니다.

칼리안의 말에 앨런이 허허 웃는 것이 느껴졌다.

- 란델과의 끈을 이어둔 채로 플란츠 편에 발을 올려놓고 뒤로는 저에게 선물을 보내고. 카이리스 정보까지 세크리티아 세작에게 팔고 있었어요.

- 그것 참 대단한 작자로군요.

- 일단은 성으로 빨리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란델의 편에 서 있는 자라면 칼리안에게는 적일 수 있다. 때문에 불안감이 들었다.

- 석찬 자리에서 제가 재웠을 때, 취해 있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워낙 숨기는 것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던가?

혹시라도 칼리안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 떠보려고 혹은 다른 꿍꿍이로 술에 취한 척을 했었다면.

- 멀쩡한 사람을 재워버리고 나오셨습니까.

- 취해있지 않았다면 그렇게 한 셈이 되네요.

칼리안은 이미 달리고 있는 말을 채근했다.

- 말이 왜 이렇게 발이 느린지 모르겠습니다. 레이븐이었다면 이미 도착했을 텐데!

- 천천히 달리십시오. 그러다 목 부러집니다.

태평하게 걱정해주는 앨런의 말을 들은 척 만 척, 칼리안은 계속하여 말의 속도를 올려갈 뿐이었다.

그 사이 앨런은 자신의 저택에 도착하여 노래하는 조각상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주방에서 커피 한 잔을 내리기 시작했다.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는 검은 커피의 향을 여유롭게 음미하고 있으려니 칼리안의 말이 다시 전해져왔다.

- 그런데, 여기 있다는 그 신관 이름이 무엇입니까?

- 말콤 체티쉬. 집사장일 것이라고 르메인이 그러더군요.

머리카락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빗물을 대충 훔쳐낸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집사장이라면 신관에 대해 물었을 때 옆에서 어쩔 줄을 몰라하던 바로 그 사람이 아닌가.

- 라트란 백작이 무례해서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라트란 백작이 거짓말을 하고 있어서 그랬나 봅니다.

그에 대해서는 따로 해줄 말이 없던 앨런은 다른 질문을 건네왔다.

- 그 솔새인가 하는 세작 입단속은 잘 해두신 겁니까?

칼리안은 앨런에게는 보이지도 않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 네. 라트란까지 와서 카이리스 왕자를 몰래 만났다는 것이 세작들 사이에 알려지면 결코 좋을 것이 없으니 입은 알아서 잘 닫을 겁니다.

거기까지 말한 칼리안이 달리는 말의 속도를 늦추었다. 영주성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비를 뚫고 달려온 말의 몸에서 더운 김이 풀풀 났다.

말을 데려갈 기사들이 나오기를 기다리자니 마음이 급했다. 때문에 칼리안은 뒤따라온 키리에와 유란에게 말 고삐를 넘겼다. 그리고 주변의 시선이 없는지 더더욱 주의하며 방으로 돌아왔다.

* * *

"왕자님께서는 지금 산책 중이시라 얘기했는데. 너무 끈질긴 것이 아닌가?"

방에 돌아온 뒤 클린 마법으로 비와 흙을 뒤집어 쓴 몰골, 그리고 창틀과 외벽의 진흙자국을 해결하고 나니 방문 밖에서 누군가에게 화를 내는 소리가 들렸다.

있는대로 날카로워진 얀의 목소리였다.

"백작께서 석찬에서 있었던 불손한 모습에 대해 꼭 좀 사과를 드리고 싶으니 밤이 가기 전에 왕자님을 뵙고 싶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언제 도착하시는지 만이라도······."

그리고 이런 말이 뒤를 이었다. 집사 말콤이었다.

'저 자가 신관이었단 말이지.'

칼리안이 산책을 나갔다 둘러대는 얀에게 말콤이 끈질기게 들러붙고 있었다. 아마도 헤일 라트란이 칼리안에게 사과를 하고 싶다며 이 시간에 말콤을 보낸 모양이었다.

"불손함을 덮겠다는 태도가 아니지 않나. 백작의 집사가 언제부터 왕자님의 걸음을 추궁하게 되었지?"

집사를 질책하는 얀의 목소리가 아주 냉랭하게 바뀌어 있었다.

일단은 저 집사를 먼저 돌려보내야 했던 칼리안은 재빨리 로브를 벗어 문 뒤로 숨겼다. 그리고 셔츠 단추 하나를 풀고 머리도 적당히 흐트러뜨렸다.

그 후에는 잔뜩 화가 난 표정을 만들어낸 뒤 문을 벌컥 열며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 도저히."

없다던 이가 불쑥 나오니 말콤이 매우 놀란 얼굴을 했고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쉴 수가 없는데."

어쩐지 지금 자신이 플란츠를 따라하고 있다는 듯한 불쾌한 느낌이 들었으나, 불청객을 쫓는 것에는 이만한 것이 없을 터였다.

"왕자님. 그것이 아니라······."

말콤이 안절부절 못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것을 듣지 못한 척. 칼리안이 얀을 질타하듯 말했다.

"넌. 적당한 핑계를 대어 물리라 했더니 그것 하나를 못하고."

"죄송합니다, 왕자님."

눈치 빠르게 사과하는 얀을 본체만체한 칼리안이 문을 세게 닫아버렸다.

- 쾅!

말콤이 사과하며 잰 걸음으로 물러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뒤 얀이 안으로 들어왔다.

"저 집사 외에 찾아온 사람이나 수상한 것은?"

"방금 왕자님께서 쫓아내주신 집사가 다입니다. 그 외에 수상한 것은, 창문 타고 나갔다가 창문 타고 들어온 어떤 왕자님이 있었는데요."

문 뒤에 둔 로브를 주워 든 얀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창문을 뛰어넘는 모습 때문에 꽤 놀랐었는지, 그 목소리에 가시가 가득했다. 칼리안이 얀의 어깨를 툭툭 치며 웃었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그렇게 됐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넌 왜 그렇게 화를 내고 있었어. 궁에서는 안 그랬잖아."

"왕궁에는 저 정도로 선을 넘는 이가 없으니까요."

이렇게 대답한 얀이 방금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일러바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왕자님께서 나가시기 전에 말씀드렸던 대로 얘기했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아 잠시 산책가셨다고요. 그런데 그 집사 정말 무례하더군요. 언제 어디로 나가셨는지 언제 오시는지 계속 묻던데요. 그러다 왕자님께서 쑥 나오신 거고요."

한 가지가 의심 되니 백 가지 행동에 다 미심쩍은 부분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다보니 얀이 전한 말이 또 이상한 것이다. 칼리안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내가 언제 오는지를 계속 물었다고?"

"네. 언제 오시는지를 더 알고 싶어 했습니다. 석찬의 일에 대한 사과를 드리고 싶다면서요."

"내 뒤를 캐려던 심산이었다면 언제 어디로 나가는지를 물어보는 것 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언제 오는지를 더 궁금해한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되네."

칼리안은 더 이상의 말 없이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만 끄덕였다. 전할 말을 마친 얀은 칼리안이 비에 푹 젖어 들어왔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말했다.

"저는 그럼 목욕물을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곧 칼리안은 자리에 앉아 버릇처럼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여전히 연결을 끊지 않고 있던 앨런은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텐데도 말 없이 기다려주었다.

한동안 그렇게 오도카니 앉아있던 칼리안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앨런을 불렀다.

- 스승님.

- 네. 말씀하시지요.

앨런의 대답이 곧바로 돌아왔다.

- 라트란 백작이 일단 취하지 않았던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취한 상태에서 마법으로 재웠다면 벌써 일어날 리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 집사가 찾아와서는 제가 언제 오는지를 계속 물었다 합니다. 그러니까 라트란 백작은 제 뒤를 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가 뒤를 캘까 경계한 것 같습니다.

백작이 취한 척을 해 가며 자리를 피하고 싶을 이유는 딱 하나였다.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 푸른 솔새가 술집에 있던 것은 제가 아니라 라트란 백작을 기다리기 위해서였을 것 같습니다. 신물 거래 날짜가 오늘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백작은 취한 척 자리를 피하려했고요. 그런데 일어났을 땐 제가 이미 밖으로 나갔다 하니 혹시 제가 뭔가 눈치챈 것이 있을까봐 그렇게 꼬치꼬치 물은 것이고요.

칼리안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둥, 모시게 되어 영광이라는 둥, 입에 꿀을 그렇게 발라대더니. 그 시간부터 이미 석찬에서 어떻게 빠져나갈지를 궁리하고 있었을 것이 아닌가.

어찌됐건 그냥 넘어갈 만한 문제는 아니었다. 푸른 솔새의 말이 맞다면 세작에게 카이리스의 정보를 팔아가며 돈을 벌고 그렇게 번 돈으로 텐실에 좋은 일을 하고 있는 놈이니까.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칼리안이 앨런에게 말을 전했다.

- 내일도 비가 올테고 저는 발이 묶였으니. 세작에게 카이리스 정보를 팔고 있는 박쥐 좀 잡고 가야겠습니다.

그 말에 앨런이 곧바로 물었다.

- 도울 일이 있겠습니까?

- 내일 일정이 있으십니까?

그리고 칼리안 역시 이렇게 곧바로 되물었다.

항상 그랬지만 칼리안의 말이라면 일정이 있어도 모두 취소할 앨런이었다. 때문에 앨런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 르메인을 만나기로 했습니다만 미루면 됩니다.

지금 누가 누구때문에 누구와의 약속을 미루겠다는 건지. 칼리안이 아연한 표정으로 우려 섞인 말을 했다.

- 스승님 그러다 정말로 리베른으로 추방되실지도 몰라요.

이번에는 앨런이 웃었다.

칼리안이 못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 오래 걸릴 일 아니니 전하 먼저 뵙고 어디 좀 다녀와주세요.

- 알겠습니다. 무엇을 하면 될는지요?

- 라트란 백작의 집에 사람을 보내주세요.

카이리시스에 있을 헤일의 집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 성에 헤일 외에는 없었으므로 나머지 가족들은 분명 카이리시스에 머물고 있을 터였다. 그 집에 사람을 보내 증거가 있는지를 살펴봐 달라는 의미였다.

- 그리고 브리센 상단에 가주세요.

그 말에 앨런이 굉장히 재밌어하며 말했다.

- 라트란 백작이 구리 광산을 소유하고 있었으니 브리센 상단에 가서 구리 시세나 물어보는 척 하고 돌아오면 되겠습니까?

앨런이 수도에서 무언가 조사를 하는 듯한 낌새가 있으면 헤일 측에서도 움직임이 있을테니 그것을 노리자는 말이었다.

말의 의미를 잘 알아들은 앨런에게 칼리안이 대답했다.

- 네. 맞습니다. 그렇게 해주세요. 그리고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내용으로 전서구 한마리 보내주시면 됩니다. 라트란 성으로요.

- 네. 말씀하시지요.

곧 칼리안이 앨런에게 편지 내용을 일러주었다. 편지에 들어간 어떤 이름을 들은 앨런이 매우 크게 웃었다.

* * *

그날 밤은 참으로 길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

앨런과의 대화를 마친 칼리안은 목욕을 잠시 미루고 다시 한번 감옥에 붙들린 남자를 찾았다. 그리고 비로소 남자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노튼. 노튼 라미레즈다."

그렇게 말하는 노튼은, 비록 한쪽 팔은 사라졌지만 오후보다는 많이 편안해진 얼굴이었다. 빠르게 괴사가 진행된 팔을 살려낼 수 없었다는 것을 그래도 잘 받아들인 듯 보였다.

하루 걸러 중상자가 나오는 광산의 경비병으로 일을 해왔기 때문일지, 사형수의 몸이 되었기 때문일지는 칼리안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노튼은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냐는 듯한 얼굴로 칼리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다 칼리안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어떤 불안한 생각을 떠올렸는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혹시. 내 아내에게 무슨 일이 생겼······ 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꼬박꼬박 반 말을 하더니 아내에 대한 불안함 때문에 이번에는 이렇게 물어오는 노튼이었다.

칼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튼에게 그런 되먹지 않은 협박을 했을 만한 이들은 이미 머리가 사라졌으니까. 푸른 솔새는 아마 노튼의 아내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를 수도 있었다. 노튼의 아내는 푸른 솔새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이였으니 말이다.

"그 쪽은 걱정 안해도 돼."

"그럼 무슨 일로······."

칼리안이 노튼을 보며 말했다.

"이대로 있으면 넌 며칠 뒤에 사형이야."

처음 보았을 때는 어깨를 망가뜨리고 두 번째에는 팔을 가져간 칼리안이 세 번째로 찾아와서는 넌 이제 곧 죽을 것이라는 말 따위를 꺼내놓고 있었다.

그러니 노튼의 표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화가 난 노튼이 뭐라 입을 열기 전, 칼리안이 말을 가로챘다.

"날 도와."

노튼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칼리안이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하면 치료받을 수 있게 해 줄 테니."

그것은 칼리안이 오후에 하고 갔던 말과 비슷했다.

다만 이번에 칼리안이 말한 것은 팔을 낫게 해 준다는 뜻이 아니었다. 치료 받을 필요가 없는 사형수라는 꼬리표를 떼어 주겠다는 소리였다.

노튼은 곧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자신의 팔을 쳐다보았다. 칼리안은 답답해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

"나한테 칼 뽑아든 대가로 그 팔 가져왔으니, 풀어주겠다는 소리야. 다른 영지에서 살 수 있게 조치도 해 주고 적당한 집과 농사지을 땅도 마련해 줄 수 있어."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후한 조건이 걸리는 거요?"

"위험할 수 있어서."

노튼이 실소하며 대답했다.

"시키시오. 뭘 하면 되는지."

제10장. 너무 멀리 왔으니 (2)

헤일 라트란 백작의 표정이 가히 좋지 않았다.

칼리안 때문에 쌓인 분이 도저히 풀리지 않아 밤이 새도록 이를 갈았다.

"보란듯이 선물 돌려보낼 때부터 알아봤지. 건방진 새끼."

원색적인 욕지거리가 저절로 나왔다.

눈 앞에서야 칼리안이 카이리스의 왕자라며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말했지만 속마음까지 그렇지는 않았던 것이다.

모르는 이들이야 그깟 구리 광산 하나 가진 일개 백작이 왕자를 깔아볼 만큼 유세가 있느냐 하겠으나 헤일이 믿는 구석은 구리 광산이 아니라 그간 많은 돈을 들여가며 카이리스의 중앙 귀족과 쌓아 둔 연줄이었다.

물론 그 중 으뜸은 브리센 후작이다.

브리센 상단에 구리를 싸게 납품해가며 간신히 연이 닿지 않았던가. 이런 저런 일들로 벌어들인 돈이 전부 다 브리센 후작에게 들어갔다. 그리하여 얼마 전에는 카이리시스에 가까운 부유한 영지 하나를 내려주겠다는 약속도 받았다.

그런데, 실리케가 사고를 쳤다. 칼리안에게 독을 썼다.

감기에 걸렸느니 어쨌느니 하는 소리로 무마했다지만 아는 이들은 다들 아는 사실이 아닌가.

그 일을 떠올린 헤일이 실리케를 잠시 욕했다.

"멍청하기는. 일을 냈으면 제대로 죽일 것이지."

아무튼 그 사건으로 인해 브리센이 휘청이니 약속의 이행이 먼 미래로 미뤄졌다. 그 뿐 아니라 당장 브리센 상단과의 거래로 벌어들이던 막대한 수익부터가 반토막이 났다.

그러니 지금쯤 꽃밭이어야 할 발 밑이 여전히 구리밭인 것은 결국 실리케의 심기를 건드린 칼리안 때문이라고, 헤일은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바로 그 칼리안이 찾아왔다.

그것도 하필이면, 푸른 솔새와 거래를 하기로 했던 날에 말이다. 그것부터 일단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얼굴을 보자마자 핀잔을 주질 않나 함부로 마법을 써대질 않나. 왕자라는 직책 때문에 참고 넘어가 줄 수 있을 한계를 넘어섰다.

심지어 칼리안과 얀이 집사 말콤에게 보인 행동까지도 헤일의 화를 돋우고 있었다.

"그깟 마법사 하나 꼬신 것을 두고 세상을 얻은 것처럼 구는 것도 꼴보기 싫고. 어제 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제 놈이 감히 다른 왕자들과 같은 급이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둘 중 누구든 왕이 되면 그야말로 갈 곳 잃은 새 새끼 신세가 되는 것도 모르고 날뛰는 천한 핏줄 같으니."

행여 누가 듣기라도 하면 그 길로 목이 달아날 말만 쏙쏙 골라 중얼거리고 있는데 말콤이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 똑똑.

"백작님. 일어나셨습니까."

"어. 잠깐만 들어와봐."

그 말에 조심스러운 몸짓의 말콤이 들어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헤일이 말했다.

"그 놈과는 다시 연락이 됐나?"

칼리안 때문에 약속 시간이 지나버려서 만나지 못한 푸른 솔새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집사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오늘 중으로는 연락을 해올테니 밤에 다시 만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헤일이 테이블을 탕 하고 쳤다.

"이런 놈도 신관이라고 집사 자리를 준 내가 잘못이지! 너처럼 멍청한 놈은 세상에 또 없을 것이다!"

말콤의 어깨가 움찔했다. 헤일의 손이 이번에는 창문을 탁탁 쳤다.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보라는 뜻이었다.

"날이 저렇게 안좋으니 그 평민의 자식이 오늘도 여기에서 잘 것이 아니냐?"

그제야 헤일의 의중을 파악한 집사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일정을 미루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왕자가 간 뒤에 서로 속 편하게 거래를 하자고 해."

"네. 알겠습니다."

그 후 헤일은 오늘 입을 것으로 준비된 옷을 쳐다봤다. 어째 색깔이 오늘 하늘만큼이나 우중충해 보이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를 않았다.

"다른 옷 없나? 너무 수수하지 않아?"

금단추가 화려하게 달린 재킷을 보면서도 그런 말을 꺼내놓는 헤일을 보며 말콤이 얌전히 대답했다.

"다른 옷을 찾아오라 이르겠습니다."

"그래. 하나하나 전부 콧대를 눌러서 아주 조용히 지내다 가게 만들어 놔야 해."

곧 하녀들이 여러 벌의 옷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헤일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옷을 다시 고르기 시작했다.

* * *

아침 준비를 마치자 얀이 빵 한 덩이와 차가운 홍차가 올려진 쟁반을 들고 왔다. 얀은 우선 기사 유란이 한 말을 전했다.

"밤새 라트란 백작과 집사 모두 밖에 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랬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얀이 아직 내려놓지도 않은 빵을 집어 들어 한 입 뜯어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백작이 오늘 조찬 시작을 조금 늦춰주실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왜?"

별다른 표정 없이 되묻는 칼리안을 대신해 매우 언짢은 얼굴이 된 얀이 대답했다.

"비 때문에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그렇다는데 어찌할까요."

"컨디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옷이나 골라 입고 있겠지."

실소가 절로 나온다.

지금 헤일은 어제의 일에 대한 항의를 하는 것이다.

백작의 작위는 결코 낮은 것이 아니다. 그런 헤일을 식사 자리에서 멋대로 재워버리고 사과를 청한 것도 완전히 무시했으니 그에 대해 심기가 불편하다는 뜻을 저렇게 전해오는 것이었다.

다만 칼리안 역시 헤일을 곱게 보고 있지 않았으므로 그런 항의를 굳이 받아 줄 생각이 없었다.

"싫다고 해. 제 시간에 나오라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곧 칼리안은 손에 들린 빵을 손톱만한 크기로 뜯어 티 테이블 위에 여기 저기 늘어놓았다. 얀은 칼리안이 일부러 어질러놓는 테이블을 치우고 차를 내려놓는 대신 잠시 서서 기다렸다.

- 푸드덕!

그러자 칼리안의 침대가 있던 곳에서부터 작은 날갯짓 소리가 들리더니 하얀 비둘기 한 마리가 테이블 위에 앉았다. 그리고는 내려놓은 빵을 하나하나 쪼아 먹기 시작했다.

새가 빵을 먹는 모습을 쳐다보는 칼리안의 눈이 퍽 자상했기 때문에 얀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 새는 혹시 계속 데리고 다니실 생각이십니까?"

어느새 빵 조각을 다 주워 먹은 새를 조심스레 안아든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대답했다.

"아니. 주인에게 돌려줄 때를 고민중이야."

칼리안의 침대 옆에 새장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새벽에 찾아온 아르센이 두고 간 것이었다.

칼리안이 새장을 열어 새를 안에 넣었다. 사람 손을 많이 타 보았던지 얌전히 칼리안의 손에 들렸던 새는 알아서 움직여 새장 안으로 들어갔다.

"어쩐지 갑자기 새가 들어와 있다 했더니, 주인이 있었군요."

"맞아."

아침에 침대 옆에 놓여 있는 새장을 보며 깜짝 놀랐던 얀의 말에 칼리안은 빵을 조금 더 뜯어 새장 안에 넣어주고 돌아와 앉은 뒤 대답했다.

새에게 준 빵보다 칼리안이 한 입 먹은 것이 더 많았다. 그리고 새에게 주고 남은 빵은 더더욱 많았다. 그렇게 남은 빵은 칼리안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얀은 그걸 왜 네가 먹냐는 표정이 되더니 말했다.

"조찬에 가셔야 하는데 그런 것으로 배를 채우십니까."

칼리안이 남은 빵 조각을 한 입에 털어넣고 웅얼웅얼 대답했다. 왕궁에서는 결코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맛있어. 그리고 어차피 조찬에선 많이 못 먹어."

헤일 라트란과의 식사 자리가 불편해서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한 얀은 테이블을 닦아낸 뒤 차를 내려놓았다. 그 뒤에는 새장으로 걸어가 구경하다가 새의 발목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전서구네요?"

새의 발목에 편지를 넣어둘 수 있을 작은 통이 묶여 있는 것을 이제야 본 것이다. 칼리안이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응. 그래서 창문만 열어주면 주인에게로 갈거야."

저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답고, 위험한, 푸른 솔새에게로.

칼리안은 전날 밤 푸른 솔새에게 소식을 전하려 날아가다 아르센의 손에 붙들려 온 전서구를 쳐다보며 차를 한 입 홀짝였다.

* * *

헤일이 또 과한 웃음을 만들어 보이고 있었다.

집사 말콤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얀의 얼굴에는 누구보다 깊고 큰 의구심이 자리했다.

'많이 못드시겠다고 하셨잖습니까?'

딱 이렇게 말하는 표정이었다.

얀의 시선이 닿아 있는 칼리안은 아주 열중하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새가 먹을 빵을 대부분 뺏어 먹어 놓고서는 아침은 아침대로 참 야무지게 잘 먹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헤일은 헤일대로 곤욕이었다.

왕자가 첫 마디를 건네지도 않고 밥만 먹고 있으니, 그 앞에 앉아있는 백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할 말을 꾹꾹 눌러담아야 했기 때문이다. 헤일이 마음 속으로 다시 욕설을 내뱉었다.

그 얼굴을 슬쩍 쳐다본 칼리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헤일이야 감춘다고 감추었겠지만 밤새도록 날을 세우던 사나운 눈빛이 모두 가려지지는 않았으니까. 덕분에 칼리안은 이 식사 자리에서 자신이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를 확실히 결정할 수 있었다.

"아 참, 그렇지. 얘기하세요."

곧 칼리안이 전혀 미안하지 않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백작의 말을 허락해야 하는 것을 깜빡했습니다. 나보다 신분 낮은 이와 식사를 했던 적이 없었어서."

헤일은 화난 표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더 웃었다.

"식사는 입에 맞으십니까?"

"네. 맛있네요."

칼리안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렇게 잘 먹고 있는데 맛 없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

헤일이 기쁜 표정을 만들며 말했다.

"이전에 제가 보내드린 선물을 거절하셨기에 혹시라도 저를 마주하시는 것이 불편하시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식사라도 대접해드릴 수 있으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그런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 선물을 거절하셨던 이유를 여쭈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그다지 특별한 이유도 아니었다는 말투로 답했다.

"누군지 몰라서요. 들어 본 이름이 아니던데. 백작이 한 둘인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야말로 완벽한 지방 귀족 나부랭이 취급이었다.

얀이 입술 안쪽을 꽉 깨물었다. 웃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헤일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웃어야 했기 때문이다.

"······ 모르셨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제 이름을 아시게 되었으니 다행한 일입니다."

그렇게 말한 헤일이 탁자 아래 내려 둔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새끼가!'

칼리안이 자신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다시 깨달은 헤일은 어제 칼리안이 멋대로 자신을 재워버린 일에 대해 설명을 요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들어야 밥이 넘어갈 것 같았으니까.

다만, 연기였든 아니든 칼리안의 앞에서 추태를 부린 것은 맞았으니 그에 대한 사과를 먼저 내밀었다.

"아무튼, 어제는 제가 큰 실수를 하였습니다."

"괜찮습니다."

마치 그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칼리안이 빠르게 답했다. 헤일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혹시 어제 저에게 마법······."

"내가 더 불쾌해지기 전에 재웠으니까요."

헤일이 입을 딱 벌렸다.

지금 칼리안이, 주사를 부린 것이 괜찮다는 게 아니라 자신이 불쾌해지기 전에 재워서 괜찮았다고 말한 것이다.

"아. 그······ 러셨군요."

"그러니 더는 신경쓰지 않아도 됩니다. 백작도 왕족을 이렇게 대면한 적 없었을텐데 실수할 수도 있겠죠. 이해합니다."

칼리안이 생긋 웃으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항의할 수가 없었다. 불쾌할 것 같아서 재웠다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무슨 반응을 해야 좋을지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헤일은 그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항의해보지 못했다. 오히려 사과를 하고, 용서를 받았다.

속이 터질 노릇이 아닐 수 없다.

"헌데 어젯밤에는 왜 그렇게 안달을 냈습니까?"

안달이라는 표현에 포크를 쥐고 있던 헤일의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칼리안이 곧바로 그 손을 쳐다본 뒤 헤일을 봤다. 익숙치 않은 붉은 눈을 마주하자 헤일은 저도 모르게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

"제 실수에 대해서 사과를 드리려 하였습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어제 저를 습격했던 자에 대한 조사가 고단하여 쉬고 있었습니다. 백작이 내게 굳이 사과를 올리고자 하는 마음에 벌어진 일이라 하니 그렇다면 그것도 괜찮습니다."

모든 것이 헤일의 잘못이 되는 순간이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모든 것을 용서한 칼리안이 조용히 차를 들어 마신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조사 중에 이상한 것이 나오더군요."

헤일이 순간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노튼이라는 이름의 습격자가 칼리안을 공격한 일에 대해 그렇게 알아내려 했지만 칼리안의 호위로 따라온 스무 명의 기사들이 틈 없이 지키는 바람에 접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세한 내용은 조금도 알아내지 못한 헤일이었다.

그동안 헤일은 그리 깨끗하게 살아오지 않았다.

때문에 행여라도 노튼과 자신의 연결고리가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속이 타오른 헤일이 물을 마셨다.

어느새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진 얼굴이 된 칼리안이 헤일을 보며 말했다.

"카이리시스에서 새의 이름을 가진 수상한 자를 하나 봤었는데. 나를 공격한 이들이 또 다른 새와 연관되어 있지 뭡니까. 그래서 새의 이름을 가진 자에 대해서도 조사중입니다."

칼리안의 말에 너무 놀라 물을 뱉어낼 뻔한 헤일이 손수건을 들어 급하게 입을 가렸다.

몇 방울의 물이 헤일의 옷과 손에 떨어졌다. 말콤이 재빨리 다가와 그것을 닦아주려 하자 헤일이 신경질적으로 그 손을 뿌리쳤다.

헤일의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이 스치듯 떠올랐다.

'새라니. 세크리티아의 세작 말고는 새를 뜻할 것이 없지 않나. 설마 푸른 솔새를 알았다는 말인가? 습격자에 대한 조사를 하는데 대체 왜 세크리티아 세작에 대한 말이 나오지? 혹시 세크리티아의 세작 놈이 저 새끼를 죽이려 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왜지?'

신관 씩이나 되는 말콤이 헤일에게 지나친 저자세를 취하는 것, 잠시였지만 헤일의 눈빛이 흔들린 것. 칼리안은 그 두가지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샐러드를 집어 먹었다.

헤일은 무조건 그 노튼이라는 놈을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라도 알아야 대응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왕자님. 그렇다면 저도 함께 그 조사를 돕겠습니다. 왕자님께 해를 가하려던 이가 이 라트란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닙니까. 그러니 저도 함께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칼리안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지금까지 확인된 내용들은 이미 모두 왕궁으로 전달했고. 그러니 백작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연관이 없다면 아무 일 없을테니."

어쩐지 마지막 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헤일이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제10장. 너무 멀리 왔으니 (3)

헤일의 표정을 본 칼리안이 마찬가지로 눈썹을 찌푸렸다.

"백작의 표정이 좋지 않군요."

푸른 솔새에게 정보를 팔았다는 게 알려지지는 않을까 걱정하던 헤일이 얼른 인상을 폈다. 그리고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아니야. 만에 하나 잡히더라도 독하기로 소문난 세크리티아인이 아닌가? 잡히는 순간 목숨을 끊을테지.'

안심할 구석을 찾은 헤일이 다시 입에 꿀을 발랐다.

"아닙니다. 왕자님을 습격한 자에 대한 제 분노가 깊어 그렇습니다. 그러니 오늘부터는 이 헤일도 범인 잡기에 앞장을 서겠습니다. 제 영지에서 발생된 일이 아닙니까?"

칼리안이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을 잠시 보였다. 그 표정을 통해 칼리안이 뭔가 숨기는 것이 있음을 확신한 헤일이 잠시 칼리안을 비웃었다.

'나를 떠보려 한 것이군. 하여튼 건방지기는.'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칼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한 칼리안은 그 뒤로 다른 말 없이 식사를 이어나갔다. 그러던 중 식당으로 조용히 찾아온 유란이 얀에게 어떤 말을 건네고 돌아갔다. 그리고 얀이 칼리안에게 다가와 허리를 숙여 방금 유란이 해준 말을 전했다. 이야기를 들은 칼리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곧 칼리안의 눈이 헤일을 향했다. 헤일은 유란이 들어온 순간부터 이미 칼리안에게 집중하고 있었으므로 칼리안은 굳이 헤일을 부를 필요 없이 곧바로 말했다.

"노튼이라는 그 자. 나에게 직접 해야 할 말이 있다는군요."

전해들은 이야기를 말한 칼리안은 곧바로 냅킨을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문에 아직 제대로 뭘 먹지도 못한 헤일도 일어서야 했다. 헤일이 몸을 세우자마자 칼리안이 물었다.

"가볼까 하는데. 같이 갈 생각인지?"

"왕자님께서 직접 감옥으로 가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 말에 칼리안이 한동안 헤일을 쳐다봤다.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죄수들이 있는 곳이 아닙니까."

"당연한 것을 묻습니까. 감옥이니, 죄수가 있겠지."

"아니, 제 말씀은 그것이 아니라······."

어떻게 죄수들이 있는 그 더러운 곳에 자신을 데리고 가겠다는 말을 한단 말인가? 가려면 혼자 갈 것이지!

헤일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이런 말들을 꾹 눌러담았다.

"노튼이라는 자를 데리고 와서 만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데리고 와서 만나도 되고, 내가 가서 만나도 되고. 내 뜻대로 하지 못할 것이 있습니까."

"······ 아닙니다, 왕자님."

결국 감옥에 수감되러 가는 죄수와 비슷한 얼굴이 되어 칼리안의 뒤를 따라갔다.

지하 감옥은 어린 시절의 헤일이 호기심에 한번 가 본 적이 있었다. 그러다 피고름 가득한 죄수들의 몰골과 바닥에 깔린 짚풀 아래에 우글거리는 지네 떼를 보고 기함을 한 뒤로 두 번 다시 걸음하지 않았었다.

그런 곳을 오랜만에 다시 찾은 헤일이 코를 감싸쥐었다. 비가 유난스럽게도 내리고 있는 탓에 한껏 짙어진 불쾌한 냄새 때문이었다. 헤일은 아침을 얼마 먹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노튼의 앞으로 걸어갔다.

노튼은 전날 칼리안에게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그가 칼리안과 헤일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집사 말콤이 앞으로 나섰다.

"일어나 예를 보이지 않고 무얼 하는 것이냐."

그 말에 노튼이 말콤을 노려보며 말했다.

"망할 신분 때문에 하루 아침에 죽을 날 세는 신세가 됐는데 내가 지금 예까지 갖춰야 하나?"

그와 칼을 맞댄 것이 왕자가 아니라 같은 평민이었다면 이런 상황이 되지는 않았을테니 하는 말이다. 헤일은 당장 이 무례한 놈의 목을 내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더 큰 잘못을 저지른 범인을 잡기 위해 살려두어야 할 놈이었다. 노튼 역시 그것을 알고 저렇게 배짱을 부리는 것이리라.

화가 잔뜩 난 헤일이 잠시 칼리안의 기색을 살폈으나 칼리안은 특별히 불쾌해하는 낯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 앞에서 헤일이 어떻게 더 화를 내겠는가? 그저 일이 모두 끝나면 절대 곱게 죽지 못하게 하리라 다짐하며 열이 오르는 것을 꾹 참을 밖에.

그런 사소한 일이 잠시 있은 뒤, 노튼이 칼리안을 향해 말했다.

"생각나는 것이 있어 오시라 했소."

칼리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말해."

노튼이 잠깐 헤일과 말콤을 쳐다봤다. 그 뒤에는 기사들을, 그리고 감옥 벽과 주먹만한 창문들을 잠시 보았다. 그렇게 주변을 한번 둘러본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푸른 솔새라 불리는 그 자. 세크리티아의 세작이오."

밖에서 천둥 소리가 났다.

헤일의 머릿속에는 번개가 쳤다.

많고 많은 새 중에 하필이면 그 새가 왜 저 입에서 나오는지!

노튼이 칼리안과 헤일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그러더니 아주 큰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다시 입을 열었다.

"이 곳에 있는 누군가에게 물건을 팔 예정이라 했소. 아주 오래전부터 연이 있던 자라고 했지."

노튼은 빙글빙글 웃었다.

헤일의 낯짝을 보아하니 아주 가관이었다. 오늘이 아니면 언제 백작 씩이나 되는 이를 구석으로 몰아보겠나 싶은 마음에 노튼이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좀 이상하지 않소? 세작과 오랫동안 연을 맺었다니. 세작과 연을 맺고 할 만한 것이 뭐가 있겠소?"

여기까지.

노튼은 전날 밤 칼리안이 시킨 일을 능청스럽게 수행했다.

- 몇가지만 더 자백해. 내가 말해주는대로.

- 거짓말을 하라는 소리요?

- 거짓 아니야. 그냥 내가 네 입을 빌리는 것 뿐이야.

- 팔도 뺏어간 사람에게 입이라고 못 뺏기겠나. 알겠소.

전날 밤 노튼과 했던 대화를 떠올리던 칼리안이 노골적인 눈빛으로 헤일을 보며 말했다.

"세작질 밖에. 없겠지."

그리고는 헤일의 반응이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안 그렇습니까, 라트란 백작."

헤일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닐까 싶은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이 노튼을 향해 물었다.

"그 자의 이름은 들은 적 없어?"

"들었던 것 같은데. 영 기억이 나질 않소."

"곧 카이리시스로 호송될 거야. 도착하기 전까지는 그 이름 꼭 생각해내도록 해. 도움이 되면 네게도 나쁠 것 없을 테니까."

"알겠소."

칼리안이 단순히 자신을 떠보려는 자리가 아니었음을 깨달은 헤일은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냄새, 저 불쾌한 냄새가 머릿속을 멋대로 휘저었다. 짚풀 아래 있던 지네 떼가 온 몸을 기어다니는 것 같다. 팔다리에 피고름이 매달려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 감옥에 자신이 갇혀있는 모습이 끝없이 상상됐다.

아무리 평민의 증언이라지만 재수 없으면 저 증언을 곧이곧대로 믿은 르메인이 헤일의 목을 댕강 잘라버릴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헤일은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며 서둘러 방으로 돌아갔다. 브리센 후작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당장!

그런 헤일의 뒷모습을 보던 칼리안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어서 바쁘게 움직여봐."

그래서 제대로 된 증거 좀 만들어 달라고.

* * *

감옥에서 나와 잠시 다른 곳에 들렀다 온 칼리안이 자신의 방에 들어서니 아무도 없어야 할 곳에 두 명의 손님이 있었다. 바로 시아와 히나였다.

시아는 멀뚱멀뚱 칼리안을 쳐다봤고 히나가 깜짝 놀라 허리를 숙였다.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보아하니 청소를 하다 말고 새 구경을 하고 있던 것 같았다.

"히나는 청소하러 왔어. 내가 따라왔어. 새가 여기 있어서. 히나는 오면 안된다고 했어."

칼리안이 이상하다는 표정이 되어 말했다. 물론 시아의 답이 먼저 나왔다.

"알아. 히나 혼내지 말라고 말한 거야."

"왜 왔는지 물을 생각 없었어."

대화 담당자 아르센이 필요했지만, 없었다.

새 잡으러 돌아다닌 것도 모자라 밤새 시아 곁을 지키느라 잠이 든지 얼마 되지 않았을 터였다.

푸른 솔새가 시아에게서 손을 떼겠다 말했으나 칼리안은 그 길로 시아를 내쫓지 못했다. 때문에 히리스카 숲 앞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근까지는 동행하는 것으로 암묵적인 결론이 난 상태였다.

시아와 헤어질 때 쯤이면 이 대화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 칼리안이 실소했다. 아마도 안 될 것 같아서였다.

그러다 푸른 솔새가 이야기했던 말 중에 '숲의 길'이라는 것이 생각난 칼리안이 시아를 쳐다봤다. 분명 숲의 길로 도망치는 엘프를 따라갈 수가 없다고 했었다.

'숲' 까지만 운을 떼니 시아는 알아서 대답했다.

"맞아. 숲의 길, 나도 조금 알아. 인간들이 다니는 길보다 빨라."

칼리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 길을 이용해 지그프리드 영지까지 빠르게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시아가 먼저 말했다.

"어머니 나무는 인간에게 숲을 열어주시지 않아. 그래서 인간들은 못 가는 길이야."

치사하다.

칼리안은 엘프들이 왕도를 쓰지 못하게 하자고 르메인에게 건의해보고 싶은 마음을 애써 지웠다.

그때 옆에서 히나가 시아를 쳐다봤다. 매우 이상하고 신기한 그 능력 덕분에 시아는 굳이 수어를 보지 않고도 히나의 말에 대답했다.

"알았어."

그러더니 칼리안을 쳐다보며 말했다.

"미안하대. 나가보겠대. 청소는 이따 대장 없을때 다시 와서 하겠대."

히나의 말을 통역해 준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칼리안의 방에서 흥미를 느끼지 못한 시아가 먼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히나는 서둘러 청소 도구를 챙겼다. 그 와중에도 새장에 자꾸 눈이 가고 있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의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조금 전까지 성의 지하에 있느라 잔뜩 눅눅해진 기분이 싹 마르는 느낌이 든다.

물론 히나는 칼리안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저런 여동생이 있으면 잘해줄 것이라는 얀의 말에 백번이고 공감하는 순간이었다.

곧 칼리안이 히나에게 말했다.

"새, 오늘 저녁에 보내줘야 해."

히나는 실망한 표정을 짓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궁으로 돌아가면 다른 새를 사줄게."

히나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더니 곧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저었다. 시녀의 방에 새장이라니. 함께 지내는 메를린이 불편할 것이다.

칼리안이 잠시 창 밖을 쳐다봤다.

하도 비가 많이 와서 하늘 색 만으로는 지금이 몇 시쯤 되었는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한동안 말 없이 서 있던 칼리안이 그 창문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내가 석찬에 들어가면 새장 문 좀 열어줘. 창문도."

알겠다는 듯 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르메인이 처음으로 자신의 방문을 반기는 것 같다고, 앨런은 그렇게 생각했다. 지난 밤 칼리안의 소식을 전하다 만 뒤로 오늘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해 주겠다 하였으니 그것 때문에 저렇게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리라.

기다린 만큼 소식도 빨리 전해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때문에 앨런은 이번에도 본론부터 꺼내놓았다.

"카이리스 정보를 다른 나라에 파는 작자와 왕자님을 공격한 무리와 얽혀있는 작자 중에 어느 작자의 죄가 더 중합니까?"

르메인은 말 없이 고개만 짧게 끄덕였다.

그게 무슨 뜻의 대답인지를 가늠하기도 전에 르메인이 카에라의 기사 단장을 불렀다.

"라트란으로 기사단을, 그것도 카에라를 보내시려는 겁니까?"

"그렇네."

앨런은 어울리지도 않게 감정적인 행동을 하는 르메인을 서둘러 만류했다.

"국왕 친위대 발이 그렇게 가벼우면 왕자님께 좋지 않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카에라는 전하의 곁에 있어야 할 이들이니 다른 기사단을 부르시지요."

르메인의 눈초리가 꿈틀했다.

앨런이 설명한 것은 왕실에서 직접 나서서 단죄해야 하는 중죄 중의 중죄다. 그러니 왕실 기사단을 보내는 것이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카에라를 보내려 한 것에도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반역자들이 모인 곳에 있는 그 아이에게 아예 브리센의 칼까지 보내라는 말인가?"

브리센 소속의 기사단이 그 곳에 혼자 있을 칼리안을 제대로 도울 리가 없으리라는 생각에서 하는 말이었다. 그런 르메인의 말을 들은 앨런이 여유롭게 대답했다.

"그 반역자 중 한 명이 브리센도 배신했으니 이번 일에 대해서는 별 탈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앨런은 지금 잡아야 할 둘이 어떤 이들인지,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말해주었다. 그러자 르메인이 깊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라트란 백작이 입에 발린 말을 잘 하는 것은 알았어도 그 정도일 줄은 몰랐군. 게다가 세크리티아의 세작이라니. 그 아이가 대체 어쩌다 그런 험한 이들과 얽혔는가?"

"어쩌다보니 그리 되었다 합니다."

앨런이 별 것 없다는 얼굴로 답했다.

둘러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러했으니 설명할 것이 없었다. 르메인이 손깍지를 끼며 입을 열었다.

"기사단 카렌을 보내겠네."

"그리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라트란 백작의 저택에 사람을 좀 보내주실 수 있으신지요?"

가능성은 매우 적었지만 만에 하나 이번 일에 대한 증거가 카이리시스 저택에 있을 수도 있으니 하는 말이었다.

이미 그렇게 할 생각이던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 것이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한 앨런이 테이블에 놓인 레몬차를 쳐다봤다. 더운 여름에도 르메인은 뜨거운 차를 즐겼는데 차에서 김이 펄펄 나는 것을 본 앨런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리고 손가락 끝으로 찻잔을 톡 쳤다.

피어오르던 김이 사그라들며 살얼음이 생겼다.

추위와 더위를 잊는 경지는 이미 진작에 넘었지만 그래도 여름에는 시원한 것을 마셔야 맞지 않겠는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차가운 레몬차를 마신 앨런이 말했다.

"한가지 더 부탁드리자면. 제가 오늘 가야 할 곳이 있는데."

르메인이 앨런을 쳐다봤다.

앨런의 표정이 매우 부드럽게 변했다.

"제 걸음이 다소 시끄럽더라도 그러려니 하시지요."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그 얼굴에 웃음기가 있었다.

제10장. 너무 멀리 왔으니 (4)

히나가 나간 뒤 칼리안은 키리에와 두 명의 기사를 한슨 마을로 보냈다. 혹시라도 헤일 라트란이 노튼의 아내를 데려다 협박을 할까 우려됐기 때문이다. 물론 헤일이 노튼을 해치려 할 가능성도 많았으므로 감옥 역시 제대로 지키도록 해 두었다.

그리고 이제 막 르메인을 만나고 궁에서 나온 앨런에게 연락을 취한 뒤 이렇게 말했다.

- 스승님. 브리센 상단으로 가시면 안될 것 같습니다.

그러자 앨런이 의문을 가지는 것이 느껴졌다.

헤일이 브리센으로부터 등을 돌린 것을 넌지시 알려주기 위해 브리센 상단을 찾으려던 것이었지 않나?

브리센에서 자신을 어찌 맞이할지 모르니 걸음이 시끄러울 것이라 르메인에게 미리 말도 하지 않았던가. 헌데 그것을 가지 말라 하니 이상할 수 밖에.

- 다른 것이 확인되었습니까?

- 네. 다른 것들은 그대로 진행해주시면 되는데, 상단 쪽은.

말을 잠시 멈춘 칼리안은 조금 전 지하 감옥에서 나온 뒤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칼리안이 감옥에서 올라온 뒤.

방으로 돌아오기 전에 만난 것은 바로 집사 말콤이었다. 텐실의 신관이었음에도 헤일에게 너무 저자세를 취하는 것이 이상했던 터라 헤일 몰래 그를 찾아갔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칼리안은 그저 헤일이 말콤의 약점을 잡고 있을 것이라는 정도로만 예상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것을 해결해 준다면 헤일이 숨겨둔 무언가, 이를테면 거래를 입증할 만한 장부같은 것을 찾는 일에 말콤이 도움을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터였다.

"살려주십시오, 왕자님!"

그랬으니, 방 안에 들어와 있던 칼리안을 본 말콤이 이렇게 말하며 발 밑에 엎드리는 것을 보고 적잖이 당황할 수 밖에.

결론부터 말하자면 말콤에게 약점이 있기는 있었다. 대단할 만한 것은 아니었고 흔하디 흔한 돈 문제였다. 헤일에게 큰 빚을 지게 되어 그것을 빌미로 그리 잡혀 지냈다고 했다.

따라서 칼리안은 이제 텐실에서 신관들을 다시 데려가게 되었으니 빚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질 않는다고 말을 해주었다. 그 말을 들은 말콤은 후련해하는 대신 이렇게 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문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살려달라 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번 일로 백작님이 정말 처벌을 받으면, 그래서 신물을 사고 판 일에 제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들키면, 저는 텐실에 가자마자 죽습니다."

헤일을 압박하기 위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두었던 것이 오히려 말콤을 더 겁먹게 한 모양이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말콤의 말에 칼리안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신물을 산 건 알겠는데. 팔았다니. 텐실의 환심을 사려고 신물을 사다 텐실에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는 소리야?"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해오지 않았던가.

헤일이 푸른 솔새에게서 구매한 신물을 텐실에 보냈다고. 그렇게 란델과의 끈을 이어놓은 것이라고.

"텐실에 보낸 것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말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목숨 살릴 구명줄이 칼리안 뿐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줄줄 흘러나왔다.

"백작님은 완전히 미움을 받고 있어서 텐실 측과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아무래도 플란츠 왕자님께서 세자위와 멀어진 것 같자 끊어진 줄을 다시 연결할 방법을 이리저리 찾으셨습니다."

헤일이 텐실로부터 한 번 돌아선 뒤 플란츠의 미래가 영 어두운데다 칼리안 역시 헤일에 대한 반응이 시원치 않았으니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때문에 다시 란델과의 끈을 이으려 했으나 란델이나 텐실 측에서 헤일을 만나주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물론 여기까지는 흥미롭기는 해도 놀라운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리 놀라지 않은 칼리안의 얼굴을 잠시 살피던 말콤이 결심한 듯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푸른 솔새는 백작님에게 완전히 매수되어 있습니다. 카이리시스에서 얻어지는 정보로 신물을 찾아다가 백작님에게 파는데 그 양이 꽤 많습니다. 그래서 그 일이 혹시 들통날까봐 왕자님께도 제가 신관인 것을 숨기자 하였습니다. 아무튼 백작님은 그것을 사서 다른 곳에 싸게 되팔았습니다. 텐실과 연결을 시켜주면 그때부터는 그냥 주겠다고 거래를 했었습니다."

"어디로 되팔았는데?"

그 후 이어진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을 다시 떠올린 칼리안이 앨런에게 말했다.

- 아무래도 브리센 후작이 자식 교육을 잘못 시킨 것 같은데요.

"브리센 상단의 상단주, 실리케 왕비의 오빠인 레넌 브리센 자작입니다. 그가 텐실에 신물을 선물하고 있습니다."

레넌 브리센.

그가 텐실에 줄을 댔다.

플란츠를 배신하고 란델의 편에 선 것이다!

그것은 곧 레넌이 자신의 아버지인 브리센 후작과 동생 실리케에게서 등을 돌렸다는 소리와 같았다. 칼리안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헉 하는 소리가 났다.

엘프 꼬마 하나 만난 뒤 비 때문에 발이 묶였을 뿐인데.

카이리스에 두 번째 태풍을 몰고 올 바람길을 찾은 칼리안이 조용히 물었다.

- 어쩌죠?

현명한 마법사 앨런 마나실은 제자의 짧은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앨런은 마차를 돌렸다.

막내 아들이 여우 잡겠다 놓은 덫으로 곰을 잡은 것 같다는 말을 르메인에게 당장 전해줘야 했다.

* * *

앨런과 르메인이 얼결에 걸린 곰을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에 대해 매우 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문제의 발단이 된 칼리안은 석찬을 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레넌도 레넌이지만 헤일부터 잡는 것이 우선이니 칼리안은 일단 계획한대로 일을 계속 진행하기로 했다.

오전 중에 만난 히나를 통해 이 시간에 새장을 열어놔달라 부탁해 두었던 칼리안이었다. 그러니 만약 새가 곧바로 주인을 찾았다면 지금쯤 저 안에는 아주 반가운 손님이 와 있을 터였다.

때문에 칼리안은 방문을 열어주려 하던 얀을 불러세웠다.

"나, 차 한잔만 가져다 줘."

"네.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얀은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가고 칼리안이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한대로, 있었다.

열린 새장과 열린 창문이 보였다. 그리고 하얀 비둘기 대신 푸른 솔새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혹시나 누가 들어올까 싶어 마법으로 방문을 잠궈버린 칼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엄청 빨리 왔네."

푸른 솔새는 이전처럼 여유롭게 굴지 못했다. 칼리안을 도울 만한 두 명의 검사가 없음에도 그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의 전서구가 가져온 칼리안의 편지를 읽은 탓이다. 푸른 솔새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칼리안에게 말했다.

"편지 내용이 너무 감명깊어서요."

카이리스인을 도와 제 실속을 단단히 차렸다는 사실이 나에랑샤 새 판매점에 전달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찾아오라고. 칼리안은 그렇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그럴 것 같았지."

칼리안이 부르는대로 찾아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얀 수리가 이 사실을 아는 순간 평생을 쫓기며 살텐데 어떻게 무시하겠는가? 생각지 못한 일을 마주한 푸른 솔새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로 저를 협박하는 건가요?"

"헤일 라트란이 신물을 거래한 증거. 그리고 정보를 팔았다는 증거. 그것들이 필요해서."

"백작에게 확인하면 될 것을, 굳이 저에게?"

말콤의 말에 따르면 헤일은 거래 증거를 남겨두지 않았다고 했다. 발각되어 제 목을 조를까 우려한 듯 싶었다. 물론 말콤의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으니 수색은 하게 될 것이지만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푸른 솔새를 다시 불렀다.

헤일에게 증거가 없다는 것을 굳이 푸른 솔새에게 알릴 필요는 없었으므로 칼리안은 그냥 웃으며 대꾸했다.

"일단 네 것 부터."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푸른 솔새가 앉아있던 곳에 올려두었던 서약서를 가리켜 보였다. 실리케와 거래했을 때 사용한 것과 같은, 맹세의 인을 담은 것이었다.

"증거를 넘기면 네 비밀은 지켜줄게."

푸른 솔새가 발 끝으로 바닥을 톡톡 쳤다. 정보를 넘기고 돌아갈지 칼리안을 죽여 입을 닫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푸른 솔새의 발이 잠시 멈추었다.

그와 함께 숨 막힐 듯한 살기가 칼리안을 향했다. 칼리안은 살기에 짓눌리는 대신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

"이게 대답인가?"

"귀찮은 관계가 만들어졌으니까요."

칼리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내가 너 때문에 어떤 일에 얽혔는지 알면 그런 말 못할텐데."

푸른 솔새가 생긋 웃었다.

그와 함께 딸깍, 하는 작은 소리가 들렸고 세 개의 구슬 같은 것이 칼리안을 향해 쏘아지듯 날아왔다.

화염구의 힘을 응축시켜 만든 마력탄이었다.

하나라도 정통으로 맞는다면 시신을 수습할 때 집게를 써서 한조각씩 모아야 할 정도의 화력을 지닌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이었으나 칼리안은 재빨리 실드를 펼치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 쾅! 쾅! 콰앙!

마력탄이 벽에 닿아 터지며 세 번의 폭발음이 울렸다.

건물이 흔들렸다. 자욱한 먼지가 칼리안과 푸른 솔새의 시야를 방해했다. 칼리안이 인상을 쓰며 입을 열었다.

"아예 죽일 생각으로 온 거야?"

꽤 비싼 물건인데 이렇게 준비해온 것을 보면 애초부터 칼리안의 거래에 응할 생각은 없었다고 보아야 할 터였다.

공격을 해 올 것은 대비했지만 마력탄은 예상하지 못했다.

'본래 칼을 썼었는데, 왜 마력탄을!'

그녀는 검을 매우 잘 다뤘다. 마력탄 같은 것을 이렇게 쏘아보내는 싸움을 하지는 않았다.

급한 와중에도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푸른 솔새에게 검 하나만 가지고도 충분히 강해질 수 있다 조언했던 것은 다름 아닌 베른이었다.

젠장!

곧 다시 한번 딸깍 하는 소리가 나며 칼리안의 그림자가 보이는 곳을 향해 마력탄이 날아왔다. 칼리안은 다시 피했고 폭발음이 또 울렸다.

- 콰아앙!

결국 네 번의 마력탄에 직격당한 벽이 무너졌다.

커다란 구멍을 통해 라트란 시의 전경이 그대로 보였다. 창문이 필요치 않게 된 귀빈실 벽을 보며, 칼리안이 실소했다.

"다 죽이겠네."

방문 밖으로 다가온 얀과 기사들의 소리가 들렸다.

다수의 싸움을 할 만큼 방이 크지 않았고 폭발 범위는 상당히 넓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문에 다시 한번 락을 걸며 말했다.

"들어오지 마."

먼지가 걷히자 그녀의 손에 또 하나의 마력탄이 들려 있는 것이 보였다. 칼리안이 아연하여 실드를 둘렀고 마력탄이 마치 암기와 같은 속도로 날아왔다.

- 쌔애액!

검을 뽑아 든 칼리안은 이번에 날아오는 마력탄을 피하지 않았다. 이 성은 카이리스 왕궁과 달랐다. 그러니 마력탄이 또 벽을 두드리면 정말로 건물이 무너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리안은 실드를 두른 채 검을 휘둘러 마력탄을 쳐냈다. 뚫린 벽 밖으로 날아간 마력탄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다시 터져 나왔다.

푸른 솔새가 칼리안에게 한발 더 다가섰다.

칼리안이 짜증 섞인 소리를 냈다.

"또 있어?"

푸른 솔새가 검을 뽑아들며 말했다.

"없어요."

그와 동시에 푸른 솔새의 몸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의 검이 날듯이 뻗어나오며 칼리안의 목을 향해 쇄도했다. 칼리안이 검을 들어올려 공격을 막았다.

- 카앙!

두 개의 검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불안했다.

키리에와 연습을 하느라 여러 차례 무리가 가해졌던 평범한 철검이었다. 제대로 된 오러를 버텨내기는 힘들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칼리안은 검 대신 몸에 오러를 둘렀다. 그리고 검을 비틀어 푸른 솔새의 공격을 흘려보낸 뒤 곧바로 내리그었다. 푸른 솔새가 다시 검을 휘둘러 칼리안의 검을 튕겨냈다.

그리고 그 순간.

푸른 솔새의 시야에서 칼리안이 사라졌다.

푸른 솔새는 다급히 검을 회수하며 몸을 돌렸다. 어느새 그녀의 뒤로 돌아간 칼리안의 검이 날아오고 있었다. 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빨랐다. 위험을 느낀 푸른 솔새가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으나, 팔이 길게 베이는 것을 막지 못했다.

칼리안이 다시 검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푸른 솔새는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다시 날렸다. 딸깍,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없다더니."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쳐낼 만한 충분한 공간이 없었다.

찰나와 같은 시간에 결정을 내린 칼리안의 검이 짙게 빛났다.

- 우웅!

미세한 떨림과 함께 청명한 소리가 들렸다. 푸른 오러가 검에 씌워져 차갑게 빛났다.

칼리안은 오러의 힘이 담긴 검을 들어 이미 지척까지 날아온 마력탄을 내리그었다.

- 서걱!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던 마력탄이 오러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반으로 잘라져 땅에 떨어졌다. 푸른 잔상이 허공에 한참을 남았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폭발은 없었다.

대신,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리며 칼리안의 검이 산산조각났다. 버텨내지 못한 것이다.

칼리안이 눈을 내리깔았다.

"어찌해야 하나. 내가, 너를."

잠시 베른의 눈이 되어 푸른 솔새를 보던 칼리안이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에일라."

푸른 솔새는 지금 칼리안이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칼리안의 부서진 검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에는 경악한 빛이 가득했다.

여섯 번째 소드마스터가 지금 그녀의 눈 앞에 서 있었다.

제10장. 너무 멀리 왔으니 (5)

에일라의 손에 힘 없이 들려있던 검이 떨어졌다.

깊이 베인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잠시 시간이 지난 뒤 입을 연 에일라에게서 작열하는 태양 때문에 쭉쭉 갈라진 소금 같은 목소리가 간신히 나왔다.

"어떻게······?"

이름을 어떻게 아는지, 새 판매점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어떻게 벌써 검의 길에 올랐는지.

수많은 의문이 섞인 질문이었고 같은 의미의 빛이 그 눈에 떠올랐으나 칼리안은 단 하나도 말해 줄 생각이 없었다.

곧바로 칼리안은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가 에일라의 눈을 보고 섰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에일라의 턱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에일라가 저도 모르게 외마디 소리를 냈다.

"윽!"

세작들이 항상 물고 다니는 독약을 꺼내려 한 행동이었으나 에일라의 입 속 어디에서도 독은 찾을 수 없었다. 이미 독을 삼킨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독약을 빼고 다녔던 것임을 안 칼리안이 실소했다.

"에일라."

칼리안이 다시 부르자 에일라가 어깨를 움찔했다. 칼리안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해. 증거."

그런 것은 애초부터 없었다고 거짓을 말할까.

여기서 보내주면 건네주겠다고 말할까.

에일라의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깜박이듯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대로 잡힌다면 그 길로 죽을 것임을 알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던 에일라가 넌지시 물었다.

"말해주면 풀어줄건가요?"

"이제와서?"

칼리안이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

살기를 보내며 다짜고짜 공격을 하더니 이제와서는 살려달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무슨 기회를 더 줄 수 있겠는가. 칼리안이 다시 말했다.

"세크리티아인들은 독하다고 다들 그러던데 너는 아닌가보네."

그리고 혼잣말 같은 투로 덧붙였다.

"아닌 건지, 아니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에일라가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칼리안의 얼굴을 보니 살려줄 생각 같은 것은 조금도 없는 것 같았다.

곧 에일라가 칼리안을 향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섰다. 그리고 바닥에 흩어진 검의 파편을 가리켜보였다. 살려주지 않겠다 하니 살 길을 찾으려는 것이다.

"소드마스터의 칼이 오러 한번에 부서졌네요. 기사도 아닌 호위의 것보다도 못한 검을 들고 다니는데. 왜일까요?"

언제 키리에의 검을 보았는지 에일라가 그의 검을 언급하고 있었다. 칼리안은 대답 없이 에일라를 응시했다. 다음 말을 내놓으라는 뜻으로 해석한 에일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주변에서는 모르고 있는 거예요. 실력을 숨기고 있는거죠?"

그렇게 은근슬쩍 운을 띄운 채 칼리안을 관찰하던 에일라는 우월한 자리를 차지한 이들의 눈빛을 했다. 칼리안이 살짝 주먹을 쥐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에일라는 멈추지 않고 말했다.

"날 그냥 보내주는 게 좋을거예요. 안 그러면 당장 밖에 있는 기사들에게 내가 방금 뭘 봤는지 전부 말할거니까."

칼리안은 분명히 기회를 줬다.

전부 다 눈 감아 줄 테니 증거만 놓고 가라고.

어떻게든 살려주려고, 기회를 줬다.

말 없이 서 있던 칼리안의 입에서 결국 작은 웃음소리가 났다.

- 화악!

돌연 칼리안이 에일라의 멱살을 움켜잡고 앞으로 당겼다. 그리고 에일라의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보며 이를 악물고 사납게 말했다.

"살고 싶었으면, 이렇게까지 해 가면서 살려달라고 할 거였으면, 내 앞에서 죽을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칼리안의 살기가 폭발하듯 터져나와 에일라를 내리눌렀다. 붉은 눈이 당장에라도 에일라를 집어 삼킬 것 같이 번뜩였다.

에일라의 얼굴에 본능적인 공포가 어렸다.

"기대하지 마. 그러기엔 네가 너무 멀리 왔으니."

지금 칼리안의 속이 어떤지는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감히 공감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칼리안이 잠시 천장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쏟아지는 빗줄기를 쳐다봤다.

한참이 지난 후 서서히 살기가 흩어졌다.

평소와 같은 얼굴과 목소리로 돌아온 칼리안이 에일라를 보며 말했다.

"네 목숨이랑 바꿀 만큼 대단한 비밀 아니야. 그러니 증거나 말해. 그럼 다른 심문은 받지 않도록 해줄게."

왕족에 대한 암살 시도. 당연히 참수형이다. 세작인 것이 알려지든, 혹은 암살자로 알려지든, 숨긴 것을 모조리 뱉어내게 할 고문이 당연히 있을 것이다. 그것을 피하게 해주겠다는 말이었다.

에일라가 피식 웃었다.

이렇게 잡혀 그대로 죽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던 탓이다. 때문에 그녀는 증거가 어디에 있는지 절대로 말하지 않고 죽는 것으로 억울함을 좀 풀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마치 그 마음을 읽은 것처럼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심문을 하게 된다면 우리가 안 해. 내가 누구를 좀 불러올 생각이라서."

에일라가 다시 한번 찌푸려진 눈으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이 무미건조한 얼굴로 말을 맺었다.

"하얀 수리. 심문은 그가 할 거야."

그 말은 진심이었다.

카이리스와 세크리티아 모두를 배신했으니 처벌의 권한도 함께 나누어야 할 터.

그제야 에일라의 눈에 뿌리 깊은 공포감이 들어찼다.

마치 칼리안의 살기를 대했을 때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배신자를 대하는 하얀 수리의 잔혹성은 칼리안도 잘 알았다. 하얀 수리가 추적해 잡아낸 배신자의 시신을 본 체이스는 사흘을 넘게 밥을 넘기지 못했었다.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이에게 생의 밑바닥을 보여주는 자라는 것을 에일라 역시 모르지 않는 것 같았다.

"술집 옆 건물.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세 번째 칸."

곧바로 이렇게 말했으니까.

* * *

에일라는 포박당한 채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다.

유란과 기사들이 직접 감시를 시작했다. 왕실의 기사단이 도착해 카이리시스로 이송 될 때까지 절대로 도망치지 못하게 하라는 칼리안의 엄명이 따랐다.

그리고 칼리안은 키리에와 함께 한슨 마을로 간 두 명, 그리고 에일라와 노튼을 감시할 여섯 명을 제외한 나머지 기사 모두에게 에일라가 말한 곳과 술집을 수색하도록 지시했다.

성의 하인들이 칼리안의 얼마 안되는 짐을 성에 마련된 또 다른 귀빈실로 옮기는 틈을 타 칼리안이 홀로 지하 감옥을 찾아갔다.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은 에일라가 아니라 노튼을 찾아 간 길이었다.

주변을 잠시 물린 칼리안은 종이에 싸인 작은 것을 노튼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든 노튼이 퉁명스레 물었다.

"뭐요, 이게?"

칼리안이 웃으며 대답했다.

"내일 아침에 먹어."

그렇게 말한 칼리안은 더 이상의 말과 설명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펼쳐 보니 그것은 자신이 숨겨왔던 설탕 조각이었다. 노튼은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으나 그냥 이제는 뭔들 못하겠냐는 심정이었으므로 그것을 잘 챙겨 품 속에 숨겼다.

방으로 돌아온 뒤 칼리안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종이 한 장을 들어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카이리스의 중범죄자를 잡는 것에 매우 큰 도움을 준 말콤 체티쉬라는 이를 너그럽게 용서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그것을 봉인한 뒤 얀에게 건네주며 칼리안이 말했다.

"집사에게 전해주면 돼."

얀은 기꺼이 그리하겠다 대답했다.

* * *

한편 그 시간.

헤일 라트란은 불안한 표정으로 방 안을 걸어다니는 중이었다. 이미 전부 물어뜯어 사라진 손톱을 또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이 영 탐탁지가 않았다. 칼리안의 방에 암살자가 들었다. 온 성이 흔들리고 벽에 구멍이 나도록 싸움을 했다. 그런데 칼리안은 그에 대해 설명해주지도, 추궁하지도 않는 것이다.

게다가 말콤이 사라졌다.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기에 돌아오면 한 소리를 해야겠다 하고 있었는데 밤이 다 되어가도록 오지를 않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냔 말이다!"

답답해하며 다시 손톱을 물고 있는 헤일에게 한 명의 하인이 돌돌 말려 있는 작은 편지를 가져다 주고 돌아갔다. 바로 전서구를 통해 전해진 소식이었다.

"설마, 왕실에서 집을 수색했다는 내용인가."

있을 수 있는 일이었으나 집의 일은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어차피 헤일은 증거 자료를 남겨 두지 않았다. 게다가 헤일은 오전에 전서구를 보내 레넌 브리센에게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청해 둔 상태였다. 이런 일에 힘이 되어 달라고 지금까지 그렇게 공을 들여놓은 것이 아니겠는가?

미리미리 대비를 잘 해뒀다 생각한 헤일이 편지를 펼쳐들었다.

그리고 눈을 부릅떴다.

그의 집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 변호를 맡아 줄 이가 필요할걸세. 그래서 자네를 좀 도와 달라고, 실리케 왕비님께 자네가 무엇을 팔다 그리됐는지 내가 잘 설명해두었네. 그러니 마음 푹 놓게. <앨런 마나실>

헤일의 손에서 편지가 뚝 떨어졌다.

대체 칼리안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그것을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았다. 앨런 마나실의 편지에 적혀 있는 '무언가'가 신물을 뜻하는 것이 정말 맞는지를.

헤일이 서둘러 방 밖으로 나갔다. 그러다가 마음을 고쳐먹고는 다시 들어왔다.

"아니야. 그 능구렁이 같은 마법사 새끼는 이미 다 알고 저런 편지를 보냈을 테지. 그 평민의 자식에게 왕자님 소리하며 굽신거리는 것도 지친다. 일단 숨기기나 하자."

헤일이 방 문을 걸어잠궜다. 만에 하나 왕실에서 보낸 이들이 수색을 하다가 이 비밀공간이 드러날 경우를 대비해 꼭 숨겨야 할 물건이 있었다. 실리케나 브리센 후작이 절대로 알아서는 안 되는 것.

신물!

그간 푸른 솔새로부터 구매해두었으나 아직 브리센 상단에 넘기지 못한 신물을 꺼내려는 것이었다.

- 드르륵!

침실 난로 위의 시계를 돌리자 침실 옆에 놓인 책장이 작은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그리고 그 안에 쌓여 있는 수많은 귀중품이 눈에 보였다. 헤일은 그것들에는 눈길을 주지 않고 서두르는 걸음으로 가장 구석에 놓인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잠시 뚜껑을 열어 그 안에 든 것을 확인했다.

꽤 많이 모인 신물들이 보였다. 이 정도면 한 재산 챙길 수 있었을 텐데 레넌 브리센과 조금 더 협상을 해보려 따로 모아 두었더니 이런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아쉬운 마음에 쩝, 하고 입맛을 다신 헤일이 얼른 상자 뚜껑을 닫고 몸을 일으켰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런 소리를 들었다.

헤일이 깜짝 놀라 고개를 치켜 들었다. 그의 눈 앞에 어떤 남자의 머리가 둥둥 떠 있었다. 그러더니 마치 허공에 그림을 그리듯 머리부터 목, 어깨, 상체가 조금씩 나타났다.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을 마주한 헤일이 헛숨을 들이키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누, 누구냐!"

어딘가 낯이 익은 이였다.

전날 밤 비에 젖은 채로 칼리안을 찾았던 마법사······.

마법사!

곧 온 몸이 다 보여지게 된 그가 헤일을 보며 뒤늦은 자기 소개를 해주었다.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진중한 얼굴이었다.

"마법사. 아르센 헤르츠입니다."

에일라와 칼리안이 싸움을 벌이느라 마법으로 잠근 문을 아무도 열지 못했던 이유는 그것을 열어 줄 만한 단 한명의 마법사가 헤일의 방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이유는 집사 말콤도 숨긴 위치를 알지 못하는 빼도 박도 못할 증거인 신물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칼리안이 말하기를 증거는 차고 넘칠수록 좋다 하였으니.

종이에 적힌 거래 기록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렇게 눈에 잘 띄는 것이 있으면 더욱 좋지 않겠는가?

때문에 4서클의 투명화 마법을 유지하며 몇 시간째 헤일의 방에 숨어 있었던 아르센 헤르츠가 매우 정중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수고스럽게 찾아주신 만큼 잘 쓰겠습니다."

아르센이 넋을 잃은 헤일의 손에서 상자를 뺏어들었다. 그리고는 문득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백작께서 아무 저항 없이 순순히 전해주셨다고, 능구렁이 같은 마법사 새끼와 평민의 자식인 왕자님께 꼭 전해드리겠습니다. 사양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헤일의 얼굴이 새하얗게 탈색됐다.

꺼질 듯한 숨소리가 그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제10장. 너무 멀리 왔으니 (6)

많은 일을 끝마친 칼리안은 자리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몸 속의 마나를 순환시키며 외부의 마나를 천천히 끌어와 정제시켰다.

곧 따스한 기운이 몸 속으로 모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칼리안은 그렇게 모여든 마나를 조심스럽게 심장 쪽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네 번째의 서클을 만들려는 것이다.

처음에는 마나가 띠를 이루며 무리 없이 심장으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3서클을 마스터한 이후 지금의 단계까지는 항상 성공을 했었으나 이 다음을 넘기지 못했던 칼리안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더욱 집중하며 마나의 띠를 조심스럽게 심장으로 이동시켜갔다.

갑자기, 원활하게 이동하던 마나 띠의 성질이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마나의 따스한 온기가 강인하면서도 날카로운 예기로 전환되는 것이다.

성질이 바뀐 마나가 빠르게 단전으로 흘러들어갔다. 마나 띠의 꼬리가 단전으로 들어가 사라지니 심장으로 가던 마나 띠 역시 거꾸로 움직이며 단전으로 빨려들어가듯 흡수되어 버렸다. 서클을 이루어야 할 마나가 오러의 근원으로 바뀌어 심장이 아닌 단전에 쌓인 것이다.

이번에도 서클을 만들어내지 못한 칼리안이 짧은 말을 내뱉었다.

"또."

오늘도 역시 같았다.

칼리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머릿속으로 앨런이 웃는 것이 느껴졌다. 앨런이 웃음기 어린 느낌을 굳이 지우지 않으며 말을 전해왔다.

- 더욱 강한 오러를 지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저것이 어찌 칭찬이겠는가? 저렇게 비꼬지 말고 차라리 개똥만도 못한 놈이라고 욕을 하면 속이라도 시원할 것 같았다.

- 칼 휘두르던 버릇을 아무리 잠시라지만 물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요. 이해하고 있으니 성공하기 전까진 카이리시스에 발 못 들이시리라는 것만 아시면 됩니다.

앨런의 응원 같은 협박에 칼리안이 어색하게 웃었다.

오러와 마법을 운용하는 것 자체는 그 원리가 다르지 않았다. 축복의 힘 덕분에 칼리안은 오러와 마법을 모두 사용하는 것이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마나도 잘 모아두고 있었다. 때문에 이미 축적된 힘을 발현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문제는 모아 둔 마나로 서클을 만들려 하면 이 놈의 마나가 전부 단전으로 가버린다는 데에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오러를 쌓는 과정을 밟게 되는 것이다. 4서클을 만들질 못하고 있으니 아무리 옆에 아르센이 있다 한들 마법을 알려 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시스파니안이 울고 갈 것이라고 앨런이 르메인에게 얘기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차고 넘치는 마나가 전부 오러로만 변해가고 있으니 보는 앨런도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

그래도 마나가 단전으로 흡수되는 시점이 늦춰지고 있으니 아무리 늦더라도 지그프리드 영지에 도착하기 전에는 성공을 할 수 있으리라. 앨런이나 칼리안 모두 그렇게 기대하고 있는 상태였다.

- 아무튼 알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왕자님 부친께서 벌인 일 때문에 보름은 꼼짝 없이 궁에 있어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대화에 응해드리기 어려울 수 있으니 제 응답이 없더라도 걱정은 하지 마시지요.

그런 앨런의 말에 칼리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껏 일을 벌인다면 칼리안이나 앨런이 벌였지 르메인이 일을 냈던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칼리안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 전하께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앨런이 잠시 대답이 없었다. 조금 놀랐기 때문이다.

언제나 앨런과 대화를 할 때는 르메인의 이름을 부르던 칼리안이었는데 르메인을 부르는 칼리안의 호칭이 바뀌어 있었다. 그것이 아마도 이번에 푸른 솔새를 잡으면서 생긴 변화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으나 굳이 언급하지는 않고 대답만 전했다.

- 별 일 아닙니다. 그저 다 제 업이지요.

적당히 얼버무리는 말을 들은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웃는 소리를 냈다. 도무지 마법사의 입에서 나올 만한 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찌됐건 칼리안이 알아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라면 앨런이 숨길 이유가 없으므로 칼리안은 그저 둘이 또 뭔 일이 있었겠거니 하고 넘어갔다.

대신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 그래서, 레넌 브리센의 일을 어떻게 하실지 결정은 되었습니까?

칼리안의 질문에 앨런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헤일 라트란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헤일이 신물을 브리센 상단에 판매한 일이 알려질 터였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너무나 분명했으므로 만약 그 사실이 공개된다면 그 순간 브리센 후작을 비롯한 모두가 레넌의 마음이 바뀌었음을 알게 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니 르메인은 그 사실을 숨겨둘지 공개하여 이득을 노릴지를 결정해야 했다. 그리고 칼리안은 그 고민의 결과를 묻고 있었다.

앨런으로부터 침중한 느낌과 함께 말이 전달됐다.

- 아직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번질 불인지 가늠하고 있는 듯 하니 우선 지켜보시지요.

그것이 단순히 부자간의 싸움이라면 마음을 바꿔먹든 말든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 싸움이 벌어지는 브리센이라는 집안의 몸뚱이가 너무 크다는 것이 문제였다.

둘의 싸움이 내전으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자칫 1, 2왕자의 세력 싸움으로도 번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벌써부터 왕자들의 싸움을 걱정하는 전하도 고민이 크시겠네요.

일의 발단을 들고 온 칼리안이 그렇게 말하자 앨런이 웃었다.

- 르메인도 장자가 아니었으니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왕자님 앞길이나 잘 걸어가시면 됩니다.

레넌의 배신이 불러오게 될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해가며 숙고하고 있을 르메인을 존중하여 칼리안은 그에 대해 다른 의견을 내는 대신 알겠다고만 대답했다.

곧 왕궁에 들어가야 한다 했으므로 그대로 이야기를 마칠 줄 알았는데 앨런이 다시 말을 전해왔다.

- 메를린이라는 시녀 아이가 찾아왔었습니다. 휘트린 영지에서 수익금을 보냈다는데 왕자님께서 부재중이시니 그것을 어찌 해야 할지 물어봐달라 하더군요.어떻게 처리해드리면 되겠습니까?

- 아. 시기가 그렇게 되었군요.

칼리안의 금고를 열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칼리안은 금고 관리를 잠시 앨런에게 부탁하며 금고의 위치와 마법 문양 해제 방법을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반지에 불어넣던 마력을 끊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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