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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와의 첫 대면이 끝난 후.
나는 아카데미 최상층인 바로 아래, 249층에 마련된 스팅레이 장학재단 사무실로 돌아온 참이었다.
참고로 최상층인 250층에는 3명의 트리니티 아카데미 학원장실이 있다.
같은 249층에는 다른 스팅레이를 비롯한 TOP5 후원 기업용 사무실이 마련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학원장이 더 높아 보이지만, 사실 학원장실은 1년 내내 비어 있다. 학원장들은 250층의 학원장실이 아닌, 248층에 있는 다른 사무실을 사용한다.
이 도시, 그리고 이 아카데미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누군지 절실히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좋은 사무실이군.'
스팅레이 사무실 가장 안쪽, '이사장실'이라 적힌 곳의 문을 열자 널찍한 공간이 날 반겼다.
차분하고 실용적인 스타일로 꾸며진 이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재단 아카데미 전담팀 팀장이 쓰던 방이었다.
본래 스팅레이 인적자원개발 재단의 사무실은 따로 있고, 거기에 내 사무실도 떡하니 있다.
다만 앞으로 내가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활동할 것을 고려하여 이곳에 내가 머물 공간을 따로 마련한 것이었다.
다소 파격적인 행보처럼 보이기는 해도, 보통 재단의 활동 절반 이상이 이곳 트리니티 아카데미에서 이뤄진다.
그만큼 아카데미 학생들은 기업 인재 수급에 가장 핵심적인 존재들이니, 내 결정에 딱히 의문을 가지는 사람은 없으리라.
갑자기 내게 사무실을 뺏긴 아카데미 전담 팀장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나저나, 내가 역시 VVIP이긴 한가 보군.'
시간이 별로 없었을 텐데도, 사무실에는 흔한 페인트 냄새 하나 나지 않았다. 사소한 것에도 신경을 썼다는 거겠지.
내부 인테리어 역시 무채색 위주로 꾸며진 실용적인 느낌이라 내 마음에도 딱 들었다.
"그럼 필요하실 때, 불러 주십시오."
나를 사무실까지 배웅한 마리아는 예를 갖추고는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비로소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된 나는 업무용 소파에 등을 기대어 앉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천근추]가 벌써 한 건 했군.'
아까 아이리의 공격을 받아 낼 때 그 덕을 톡톡히 보았다.
아무리 내 몸이 튼튼해도 물리 법칙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
내 무게가 대략 80kg 정도 되니, 아이리 정도 되는 적응자가 힘껏 날리는 공격에 맞으면 다치지는 않아도 몸이 부웅 떠서 벽에 처박혔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참으로 볼썽사나웠겠지.
물론 그 외에도 공격을 흘려보내거나 반격하는 방법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럴 경우 아이리를 크게 다치게 하거나 그녀에게 충분한 임팩트를 주지 못했을 것이다.
'뭐, 일단 한 건 끝냈으니 다행이야.'
아이리 앨리스밸이 1권 스토리의 메인 캐릭터이니 만큼, 처음부터 그녀를 내 특별반의 울타리 안에 데려올 수 있었던 건 상당한 수확이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아이리를 둘러싼 트러블이 시작되기 전에 슬슬 확인해 봐야 할 것이 있었다.
'포인트 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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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인트 상점 Lv.1]
[모듈 호환성 상승 티켓]
Price: 300P
[모듈 레벨 + 1 티겟]
Price: 5000P
[과부하율 -10% 티켓]
Price : 1000P
[10만 크레딧 전환 티켓]
Price : 1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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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유 포인트: 20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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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이 꽤 늘었구나.'
여전히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에 불과하지만, 지난번과 비교해서는 확실히 유용해 보이는 것들이 늘었다.
나는 그것들을 차례대로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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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듈 호환성 상승 티켓]
Price: 3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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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말할 것도 없다.
내가 셰이드 웰즈의 유품인 [시체 먹는 자] 모듈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준 티켓이었다.
가격도 합리적이고, 모듈 대부분의 호환성이 낮아진 당장 내게 가장 필요한 물건이라 구매순위 1순위라 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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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듈 출력 레벨 +1 티켓]
Price: 50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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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능으로 보자면 이것도 만만치 않았다. 총 5단계로 매겨지는 모듈 출력 레벨에서 숫자 '1'의 차이는 결코 작지 않다.
특히 나는 현재 Lv.5짜리 최고등급 모듈들을 상당수 갖고 있다. 혹시 이걸 그것들 중 하나에 사용한다면 Lv.6라는 전무후무한 모듈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다만 그런 실험정신을 발휘하기에는 너무 비싸다. 현재 가진 포인트를 쏟아부어도 구매하지 못한다.
그러니 이건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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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하율 -10% 티켓]
Price : 10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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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이것도 나쁘지 않다.
[시체 먹는 자] 모듈의 유일한 문제점은 나노머신의 과부하율이 올라간다는 점인데, 이걸 사용하면 그 부담을 현저하게 낮출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역시 가격이 효과에 비해 상당히 부담이라 선뜻 구매하기는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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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 크레딧 전환 티켓]
Price: 1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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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필요 없군.'
환율은 썩 괜찮아 보이긴 했지만, 나는 돈이라면 현재 썩어 넘친다. 다른 빙의자라면 모를까, 나는 절대 살 이유가 없는 물건이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아마 다른 빙의자도 이런 특전을 갖고 있겠지?'
과연 그 녀석들은 어떤 특전을 갖고 있을지. 나하고 같은 포인트 상점일까? 아니면 다른 특전?
만약 나와 같은 포인트 상점이라고 한다면 판매상품은 같을까? 가격은? 포인트를 얻는 방식은 어떻게 될까? 내가 스토리를 진행하면 똑같이 점수를 얻게 되나?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스쳐 갔지만 현재로선 알아낼 방법이 전혀 없었다.
'확실하게 경계해야겠지.'
나는 아론 스팅레이라는 씹사기캐에 빙의한 만큼 다른 빙의자들보다 월등히 유리한 입장에 있다.
그러나 이 특전의 존재가 엄청난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어쩌면 내가 사기적인 캐릭터에 빙의한 만큼, 대신 놈들은 더 사기적인 대기만성형 특전을 갖고 시작할 수도 있다.
그러니 자만은 금물이다.
가능하다면 다른 빙의자를 한 명이라도 찾아내서 정보를 얻고 싶은데....'
나는 아까 마리아가 찍어 둔 아카데미 입교식 영상을 재생시켜 보았다.
만약 입교식 중에 몰래 빠져나가는 녀석이 있다면 그 녀석이 빙의자일 가능성이 크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영상에서 누군가 강당을 빠져나가는 모습은 전혀 찍히지 않았다.
특히 아이리, 미유를 포함해서, 주인공의 동료였던 캐릭터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입교식에 남아 있었다.
알리바이가 확실한 셈이다.
'학생 중에는 범인이 없는 건가? 아니면 혹시....'
머릿속에 떠오르는 용의자 한 명이 있었다. 하지만 과연 '그 녀석'에게 빙의가 가능한 것인지조차 의문스러운 탓에 확신을 하기가 어려웠다.
'뭐, 만약 [그 녀석]이 빙의자라면 아직 나설 단계는 아니겠지. 조금은 뜸을 들이는 편이 확실하게 잡을 수 있어.'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다시금 포인트 상점을 훑어보았다. 하지만 내가 아까 보았던 목록들 외에는 그다지 쓸 만한 게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인기상품? 뭐, 그런 것들을 목록 제일 위에 정렬해 놓은 걸지도 모르겠다... 라고 생각하던 그때.
"...음?"
포인트 상품 목록을 위아래로 쓸어 보던 내 시선은 순간 한 군데에 멈추었다.
"아, 아니, 이게 왜 여기에...?"
황당한 맘에 저도 모르게 입으로 탄식했다. 나는 내가 잘못 봤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비빈 뒤 다시금 상품명을 읽어 보았다.
하지만 내 눈은 잘못되지 않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상품의 적나라한 사진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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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암스트롱 사이클론 제트 암스트롱 4 만능툴]
Price: 5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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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네가 왜 여기서 나오냐.
아카데미 흑막 시점 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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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암스트롱 사이클론 제트 암스트롱 4 만능툴]
Price: 5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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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너무나도 적나라한 이름에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설마 이걸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스팅레이 그룹의 정보력을 이용해도 찌라시 정보만 나올 뿐이었는데....'
미유의 위시리스트 1순위.
동시에 이 세계의 모듈러들이 손에 넣고 싶어 하는 전설상의 만능도구. 그러나 그 누구도 본 적이 없다는 물건이.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이걸 사야 하나?'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이런 정체불명의 도구에 귀중한 포인트를 낭비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전설상의 만능도구인 만큼, 이것을 미유에게 선물해 주면 원작보다 훨씬 더 대단한 결과물들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뭣보다도....
-아론 씨! 이것 좀 보세요오!
-전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아론 씨! 아론 씨이~!
미유가 이걸 받아 들고 행복한 얼굴로 방방 뛰어다닐 모습을 상상하니 차마 상점창을 닫을 수 없었다.
'이, 이걸 어쩐다... 엇!'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손이 '구매' 버튼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러다간 무심코 2개나 사 버릴 것만 같았다. 두 배로 좋아할 미유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
상품명 옆, 만능툴 모습이 찍힌 사진이 뒤늦게 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처음으로 만능툴의 모습을 본 나는-
"...."
딸깍, 딸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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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구매 완료.
[모듈 호환성 상승 티켓]×3
[과부하율 -10% 티켓]×1
보유 포인트: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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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만능툴을 살 목록에서 제외해 버렸다. 솔직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작가, 이 미친 새끼야! 전 연령대 작품에 대체 뭘 넣어 놓은 거야!'
만능툴이 너무 남사스럽게 생겼다.
아니, 대놓고 외설물이었다.
길쭉한 막대기에 둥그런 두 개.
말하자면 강철○도.
'이딴 걸 여자애한테 어떻게 선물해!'
대체 어쩌다 저딴 모양이 됐는지 모르겠지만, 이걸 줬다간 분명 성희롱으로 잡혀간다. 사진에 모자이크를 안 달아 놓은 게 신기할 정도.
'사이버펑크 세계관이라 그렇다 하면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저건 좀 그렇잖아!'
아까 상상하던 미유의 행복해하는 이미지에 이 물건을 추가하니 굉장히 절망스러운 장면이 연출되었다.
그리고 드는 참담함.
왠지 골이 아파져서 엄지로 미간을 꾹꾹 문질렀다.
[아론 도련님.]
부글거리는 속을 속으로 삭이고 있자니, 마침 마리아에게서 연락이 들어왔다.
"후우... 무슨 일이냐."
[밀레테크에서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들여보낼까요?]
"손님?"
그러자 시야 UI 한쪽에 그 손님에 대한 정보가 팝업되었다.
긴 장발에 족제비 같은 인상을 지닌 사내였다. 얼굴 반쪽을 사이버웨어로 완전히 뒤덮고 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이 인간은....'
틀림없었다.
밀레니엄 테크놀로지의 후계자.
동시에 나와 마찬가지로 밀레테크 재단의 이사장직을 맡고 있는 남자였다.
원작에서도 한 번 등장한 적이 있었기에, 나는 굳이 아론의 기억에 의지하지 않아도 그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블라디미르 하리토노프...."
원작에서 그 이름이 언급된 것은 손에 꼽을 정도다.
주인공과 가장 직접적으로 적대했던 것이 스팅레이 그룹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묘사의 빈도가 적어질 수밖에 없었던 거겠지.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실.
'꽤나 위험한 남자일 거다.'
원작에서의 묘사가 적었다고 해서, 그가 지닌 위험성이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가 물려받을 밀레니엄 테크놀로지는 엄연히 뉴 발할라 시티의 TOP5로 일컬어지는 메가코프(Megacorp: 초거대기업) 중에 하나였으니.
'이건 예상치 못했는데....'
오늘 밀레테크 쪽 학생과 트러블을 일으킨 아이리를 우리가 대놓고 감쌌으니, 저쪽에서 어떤 식으로든 의사 표시를 해 올 것은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이렇게 우두머리가 직접 나를 찾아오는 상황은 상정해 두지 않았다.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결정을 내리기까지 깊게 고민하진 않았다.
"들여보내라."
[알겠습니다.]
여러모로 위험한 상대임은 틀림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런 상대들을 전부 피하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여태 나는 미유나 아이리 같은 작중 메인 캐릭터나, 스팅레이 쪽의 사람들... 즉, 잘만 하면 아군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들만 상대해 왔다.
하지만 이렇게 대립관계에 있는 인물을 상대할 기회는 없었기에, 이번 기회에 미리 경험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덜컥-.
이윽고 사무실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안쪽으로 블라디미르가 느긋한 기세로 들어왔다. 그것도 나와 눈을 정면으로 마주치면서.
"이거 오랜만입니다, 아론 스팅레이."
과연 밀레테크의 후계자라는 건가.
지금까지 나를 만난 사람 중, 나를 이렇게 똑바로 바라보면서 태연함을 유지한 이는 블라디미르가 처음이었다.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거지.
역시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닌 듯했다.
"블라디미르."
그때였다.
그 이름을 읊자 뒤늦게 아론의 기억 파편들이 조금씩 내게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내용에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얘가 나하고 동창이었단 말이야?'
아무래도 블라디미르는 학창 시절에 함께 학교에 다녔던 모양이다.
하기야 옛날부터 친분이 있으니까 이런 식으로 약속도 잡지 않고 멋대로 찾아올 수 있었던 거겠지.
"병이 나아서 복귀하셨다 들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에 실례를 무릅쓰고 보러 왔죠."
"무슨 용건이지?"
"여전히 쌀쌀맞으시군요. 뭐, 그런 점이 당신답다고 해야 할까요."
블라디미르는 권하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손님용 소파에 몸을 기댔다. 다리까지 꼬는 자세가 상당히 거만했다.
"뭐, 재밌는 소식을 들어서 왔죠. 당신이 복귀했다든가, 아카데미에 사무실을 마련했다든가, 특별장학생을 뽑기 시작했다든가... 아니면."
스윽.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노려봤다.
"거기에 폴른 출신을 영입했다든가."
"항의하러 온 건가."
"항의? 뭐, 그런 셈이죠."
블라디미르는 거만한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나는 그 태도에서 엄청난 위화감을 느꼈다. 정확히는 아론의 희미한 기억이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저 새끼 왜 저래?
어렴풋이 떠오르는 이미지 속 블라디미르는 자존심이 강하지만 상대를 봐 가면서 행동하는 녀석이었다.
바꿔 말해, 원래 저 녀석은 내 앞에서 저럴 수 있는 녀석이 아니라는 것이다.
'뭘 믿고 저러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이유를 가늠해 보고 있자니, 블라디미르 쪽에서 참지 못한 듯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과시하듯 내게 말했다.
"Lv.4 신비모듈 [천근추]. 그게 당신의 손에 있다는 걸 알고 있단 말이죠. 오늘 입교식에서 몰래 빠져나가서 23층의 배전함을 부수고 다닌 게 당신이란 사실도요."
"...."
다시금 놀랐다.
마리아의 말로는 추적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었는데. 그래도 나는 계속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시치미를 뗐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익명의 제보가 있었거든요. 이번 사건의 목적은 사실 거기에 숨겨져 있던 매우 특별한 모듈을 노린 짓이라고. 그리고 아마 입교식에 참석했단 사람 중에 범인이 있을 것이라고."
"...!"
익명의 제보.
나는 확신했다.
그 녀석은 틀림없이 빙의자다.
"정말이지, 여러모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곳에 무려 Lv.4나 되는 신비모듈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대체 누가 그런 걸 배전반에 넣어 뒀을까요."
"그건 내가 알 바 아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그 [천근추]를 제게 넘기시죠."
블라디미르가 즉답했다.
"이번 일을 모른 척 넘어가 드릴 테니까요. 물론 당신이 입양한 그 들개가 우리 쪽 소중한 재산을 건드린 일까지 포함해서."
아하, 그런 거였나.
아마 나보다 앞서서 모듈을 찾던 범인은, 눈앞에서 목표를 빼앗긴 탓에 내게 앙심을 품었겠지.
그러나 아론 스팅레이라는 먼치킨 캐릭터를 직접 건드리긴 두려우니, '밀레테크'의 힘을 빌린 거고.
'자기가 강해지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내 힘을 빼앗아야 한다고 판단했나? 그렇다면 녀석은 무척이나....'
"머리를 굴릴 줄은 아는군. 하지만 이해력이 부족해."
그에 블라디미르의 미간이 구겨졌다.
"...뭐, 뭐라고요?"
"신경 쓸 것 없다. 혼잣말이니."
헛웃음이 나왔다.
이렇게까지 단순할 줄이야.
아니, 정확히는 이 세계에 대한, 그리고 아론이란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진다고 해야 할까?
이것 참.
여태껏 상대를 너무 올려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까지 경계할 필요도 없었는데 말이다.
"후후...."
"뭐, 뭐가 그렇게 웃긴 겁니까?"
"그 익명의 제보자란 녀석 말이다. 나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군."
나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밀레테크를 이용하면 아론 스팅레이를 견제할 수 있을 거라고? 아무리 황족이라고 해도 다른 기업과의 관계는 신경 써야 하니까?
물론 맞는 말이다.
아무리 살인귀인 아론이라고 해도 시도 때도 없이 사람을 썰고 다니지는 않았다.
원작에서도 그는 어디까지나 사건을 스팅레이의 힘으로 무마시킬 수 있다고 판단될 때. 즉, 먹잇감이 발버둥조차 칠 수 없을 때만을 확실하게 노렸다.
하지만 그것을 바꿔서 말하면.
대충 재력과 권력으로 덮어 버릴 수 있는 일이라면, 살인도 취미로 저지를 만큼 제멋대로인 인물이란 뜻.
"우습구나."
배전함을 부수고 다녔다.
특별한 모듈을 손에 넣기 위해서.
아카데미 최대 후원기업 재단의 이사장이 말이다.
그것은 분명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 충분히 의아해할 만한 일이고, 내 이미지도 이상해지겠지.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게 전부다.
뭣보다 아론 스팅레이의 이미지는 원래부터 썩 좋지 못했다.
또한 그게 Lv.4나 되는 신비모듈을 손에 넣기 위함이었다고 밝혀지면, 그럴 만도 했다는 식으로 반응하는 이도 많겠지.
그렇다고 그것을 손에 넣겠다고 감히 덤비는 이도 없을 테고.
결국 별로 잃을 게 없다.
그렇게 판단한 나는 조금 더 과감하게 나서기로 했다. 아마 이러는 편이 원래 아론의 이미지에도 부합할 터이고, 뭣보다....
"블라디미르, 말해라."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이 녀석한텐 이래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말이다.
"무, 무얼 말입니까?"
"넌 익명 제보라고 했지만, 분명 추적할 수 있을 거다. 그 출처가 어딘지."
"허! 그런 걸 내가 알려 줄 거 같습니까?"
"아니, 전혀."
의자에서 일어난 나는 책상 앞으로 이동해 그 위에 걸터앉았다. 그러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말을 이어 나간다.
"블라디미르, 우린 꽤 많은 시간을 교류해 왔지. 그러니 네 녀석도 내 성격을 알 터다. 두 번 말은 하지 않는다."
"내, 내가 아직 10년 전의 그 얼뜨기인 줄 압니까? 나도 이제 엄연한 재단 이사장이야! 학생시절처럼 당신한테 일방적으로 끌려다니지 않을 거라고요!"
아아, 그런 거였나.
보아하니 아론은 어린 시절에 이 녀석을 패고 다녔던 모양이다.
내 말이 아무래도 트라우마를 자극했는지, 슬슬 그의 가면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걸 어쩌나.
아론에겐 그런 기억은 전혀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내가 대신 사과하고 싶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셋을 세지."
"뭐? 지금 무슨 권리로 그딴...!"
"셋."
"내, 내가 그걸 말해 줄 거 같습니까?"
"둘."
"해, 해보려면 해보시지! 나도 가만히 안 있습니다!"
"하나."
"모, 모듈 온라인!"
블라디미르가 먼저 외쳤다.
그리고 뒤이어 나 역시 중얼거렸다.
"모듈 온라인."
Lv.5 신비모듈 [구름거미].
내 양손에 가죽장갑이 덧씌워진다.
그와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실들이 블라디미르의 몸을 구속하기 위해 일제히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게 통할 거 같습니까?"
어째서인지 내가 쏘아낸 실들이 놈의 몸에 닿기 직전, 갑자기 궤도를 틀었다.
파지지지직!
뒤이어 실들이 튕겨 나간 곳에서 강렬한 스파크가 일어났다.
블라디미르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Lv.5 신비모듈을 쓸 수 있는 게 당신뿐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어리석군요! 이 역장은 절대 뚫을 수 없어!"
"흐음...."
어쩐지.
자세히 보니 녀석을 중심으로 강렬한 에너지 막이 펼쳐져 있었다.
아마 평범한 강철 정도는 닿는 순간 증발시켜 버릴 테지.
저게 바로 그 믿는 구석인 모양이다.
"이럴 줄 알고 미리 준비해 왔습니다! 내가 옛날의 난 줄 알아?!"
"적당히 하지, 블라디미르. 서로 이렇게 장난하면서 놀 나이는 지나지 않았나."
"당신은 지금 이게 장난으로 보입니까? 감히 밀레테크의 후계자인 나를 공격하다니, 이번 건은 아무리 당신이라도 못 넘어갈 겁니다!"
"모듈을 먼저 활성화한 건 네 녀석이지 않나. 그리고 우린 오랜 친구 사이가 아니던가? 이 정돈 고작해야 짓궂은 '장난' 수준이라고 생각했다만."
"친구? 누가 친굽니까?"
"아아, 그런가. 혼자 착각했던 모양이다. 그럼 아닌 것으로 알지. 이건 '장난'이 아니라 목숨을 건 '전투'였던 거로군."
나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금 손가락을 움직였다. 에너지 구체를 감싸는 듯한 모양으로 실들을 조종했다.
파지지직!
에너지 막과 닿은 실들이 미친 듯이 반발 작용을 일으켰다. 실들은 계속해서 파고들려고 했지만, 역장이 계속 밀어내는 형국.
"소용없다니까! 계속해 보든가!"
"잘 버티는군."
이래서야 끝이 안 나겠군.
하는 수 없이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물건을 하나 꺼냈다.
[모듈 호환성 상승 티켓].
"어? 무, 무슨 짓을 하려는...."
블라디미르가 의문을 표했지만 대답해 줄 의무는 없었다. 나는 그대로 양손으로 티켓을 잡고 찢어 버렸다.
그 순간.
카아아아아아앙-!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에너지 막이 찢어졌다. 나는 즉각 실을 다시 조종하여 블라디미르의 온몸을 구속했다.
"어? 어어어어?!"
손가락을 계속 움직여 블라디미르의 몸을 실로 둘둘 감는다.
몇백 겹으로 두껍게 겹쳐진 [구름거미]의 실들이 놈을 마치 애벌레 고치와 같은 모양새로 만들었다.
"으, 으아악!"
마지막으로 나는 놈을 천장에 거꾸로 매달은 뒤, 책상에 있는 내 앞까지 데리고 왔다.
"다시 묻겠다, 블라디미르."
그리고 뒤집힌 얼굴을 향해 물었다.
"지금의 너는 내 학창 시절 친우인가? 아니면 밀레테크 소속의 경쟁자인가?"
"치, 친구요, 친구! 친구입니다!"
"그럼 방금 우리가 했던 건?"
"에이, 자, '장난'이었지 않습니까? 아이참, 우리 옛날부터 이러고 놀았잖습니까? 아, 아하하! 이 나이 먹도록 그만둘 수가 없네, 참! 너무 즐거워!"
"네 입으로 아까는-."
"농담이었습니다! '전투'가 아니라 '장난'! 우, 우리는 '친구'잖아요?!"
"그런데 이상하군. 이번 달 친구비가 들어온 기억이 없는데."
그에 블라디미르는 힘껏 소리쳤다.
분명 머리에 피가 쏠릴 텐데도, 어째서인가 훨씬 더 창백해진 얼굴로.
"드릴게요! 드릴 테니까 제발 좀-!"
아카데미 흑막 시점 19화
블라디미르의 참교육이 끝나고.
나는 마리아에게 커피 두 잔을 부탁했다. 손님용 소파에 다소곳하게 앉은 그는 흘끔 나를 곁눈질하며 물었다.
"근데요."
"왜 그러지?"
"아까 그건 뭐였습니까?"
"뭘 말하는 건지 똑바로 칭해라."
"그거 말입니다. 도중에 뭔가 종이 같은 걸 찢었잖습니까. 그러더니 갑자기 모듈 출력이 갑자기 상승했고."
"아, 그거 말인가."
모듈 호환성 상승 티켓을 말하는 거겠지.
모듈 호환성이라는 것은 게임으로 비교하자면 무기 숙련도나 적합도에 가깝다.
말하자면 모듈과 신체가 얼마나 잘 어울리느냐를 나타내는 수치.
이 때문에 한 가지 모듈을 오래 사용하다 보면 반대로 신체가 모듈 쪽에 적응해서 호환성이 높아지는 경우도 있다.
어쨌건.
지난번 병을 치료한 대가로 내 [구름 거미]는 호환성이 상당히 떨어져 있었고, 제 성능을 내지 못했다. 나는 그것을 티켓을 이용해서 원래대로 고친 것뿐이다.
즉, 내 힘이 갑자기 상승한 게 아니라, 내가 원래 갖고 있던 힘을 일부 되찾은 것에 불과하다.
비단 [구름거미]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듈들도 100% 능력을 끌어내려면 여러 장의 티켓을 투자하는 게 좋겠지.
그럴 여유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스팅레이는 모듈 출력을 일시적으로 올려 주는 기술이라도 개발한 겁니까?"
아마 그의 눈에는 그리 보였으리라.
모듈 출력 레벨을 올려 주는 티켓은 따로 있지만, 그런 것까지 자세히 설명해 줄 의리 따위는 없었다.
"비밀이다."
"쯧."
블라디미르는 혀를 찼다.
어차피 알려 줄 리 없다는 것을 아는지 그도 더 추궁하지는 않았다. 다만 작은 목소리로 구시렁거리며 불만을 표할 뿐.
"이게 어딜 봐서 죽을병에서 살아난 인간이냐고...."
"뭐라고 했지?"
"쯧. 당신이 건강해져서 반갑다고요."
블라디미르가 투덜거렸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마리아가 가져온 커피를 홀짝이고는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그 제보자가 누구지?"
"모릅니다."
"...."
"아, 아니! 진짜 모른다니까요?! 설명할 테니까 걸핏하면 주먹으로 해결하려 들지 좀 마십쇼! 도대체 인간이 왜 결혼할 나이가 다 돼서도 그럽니까! 어릴 때부터 봐 왔지만 이해할 수가 없어!"
살짝 째려봤을 뿐인데 과잉 반응하는 블라디미르.
아마도 이게 그의 본모습이고, 아까 전의 태도는 모듈의 힘을 믿고 자만했던 거겠지.
녀석이 과거의 아론에게 얼마나 호되게 시달렸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내 잘못은 없지만 일단 미안하게 생각한다.
"제대로 설명해 봐라."
"추적을 하려 해도 뭔가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단서가 아예 없다고? 그럴 리가."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조사해 봤습니다. 알아보니 아카데미 내부회선으로 연락이 온 거더군요. 최초 발신이 아카데미의 공중전화였습니다."
즉, 범인은 아카데미 내부에 있는 전화기로 밀레테크에 제보를 한 뒤 숨어 버렸다는 의미.
"그 공중전화에 흔적은 안 남았나?"
"...전혀."
"말이 짧군."
"아니, 솔직히 댁은 나랑 동갑이면서 왜 존댓말 시키는데?! 댁이 뭐라도 되는 것도 아니고!"
"말."
"...요."
결국 꼬리 내릴 거면서 대들긴.
그런데 사실 밀레테크의 후계자에게 이런 태도를 보인다는 게 장기적인 면에서는 좋을 건 없다.
나중에 내 태도 때문에 저쪽에서 대놓고 격한 항의를 하고 나설지도 모르지.
하지만 어쩌라고.
그건 나중의 일이고, 주먹은 법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 당장 내 심기를 거슬렸다간 손해 보는 건 블라디미르 쪽이다.
뭣보다 나중에 복수하려고 나선다고 한들 어쩌겠는가.
스팅레이 가문하고 정면 대결?
밀레테크가 큰 세력이긴 하나 당장으로선 스팅레이에게는 못 미친다.
뭐, 할 수도 있겠지.
실제로 원작에는 밀레테크가 다른 기업들을 끌어들이면서 펼치는 '기업전쟁' 에피소드도 있었으니까.
근데 하나 분명한 것은, 그렇게 된다면 밀레테크 수뇌부는 완전히 복구 불가능으로 작살날 거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물론 그러려면 전성기의 힘을 완전히 되찾아야 하겠지만.'
결국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목표를 위해서라도 빙의자를 한시라도 빨리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빙의자의 방해가 없어야 내가 계획한 시나리오대로 에피소드를 진행할 수 있고, 쉽게 포인트를 얻으면서, 힘을 키울 수 있을 테니까.
"어쨌든 흔적은 전혀 안 남았습니다. 하필이면 CCTV가 닿지 않는 곳이기도 했고, 주변 영상을 뒤져 봐도 그 시간대 그 주변엔 안드로이드들만 지나다녔던지라. 포기하는 게...."
"역시 그랬던 건가."
"음?"
블라디미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뭔가 알아냈습니까?"
"안 알려준다."
"거 치사하게!"
"시끄럽다. 이야기는 충분히 들었으니 돌아가도 좋다."
내 말에 블라디미르는 성을 내며 자리에서 벌컥 일어섰다.
"사람 이렇게 오라 가라 하지 마십쇼! 내가 무슨 동네 개도 아니고!"
"난 네놈을 부른 적 없다만."
네가 먼저 찾아왔잖아.
"아, 아무튼!"
그는 조금 식은 커피를 후루룩 원샷해 버렸다. 이 세계에서 커피는 굉장히 희귀한 것이었기에 아무리 녀석이라도 버리긴 아까웠던 모양이다.
그러고서 그는 성큼성큼 문으로 걸어간 뒤, 그 앞에서 내게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오늘 여기서 있었던 일들은 잊지 않을 겁니다! 힘 좀 쓴다고 패악질 부리는 것도 조만간 끝이니까! 어떤 식으로든 갚아 줄 거야!"
"...."
내가 무서워서 도망칠 준비를 해 놓은 주제에 자존심은 세서 입을 엄청나게 잘 놀려댄다.
'소설에서 봤을 때는 저런 이미지가 아니었는데....'
대체 저런 녀석이 어쩌다 밀레테크의 후계자가 된 걸까.
밀레테크의 장래가 어두워 보였다.
"조만간 아론 스팅레이라는 이름, 스팅레이 재단에서 내리게 만들어 줄 테니까 각오하고 있으십쇼!"
...이 새끼 봐라?
"모듈 온라인, [구름 거-."
"헉!"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블라디미르는 다급히 문을 열고 부리나케 달아났다. 그 발걸음 소리가 사라지고 나서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결국 이렇게 되나...."
나름 각오는 하고 있었다.
오늘 있었던 몇 가지 정황으로 보았을 때 '그 녀석'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으니까.
그러나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가슴이 크게 아려왔다. 셰이드 웰즈가 죽은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상으로.
'하는 수 없지.'
현재 시점은 원작의 1권 부분이다.
아이리 앨리스벨이 가장 메인으로 다뤄지는 파트이고, 그녀의 성장에 있어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시기다.
'싹은 미리 잘라 둬야겠지.'
빙의자라는 이레귤러는 내 계획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눈물을 머금고서라도 할 일은 해야 한다.
설령 그 빙의자가.
내 최애들 중 한 명이라고 해도.
* * *
-정말이야? 쟤가?
-정말이라니까. 쟤 맞아!
수군수군.
첫날 수업이 끝나고 기숙사로 향하는 아이리를 바라보며 학생들이 묘한 반응을 보였다.
아이리는 그것들을 애써 무시하려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첫날 수업은 오리엔테이션이라 다행이었어. 지도실에 불려 가느라 지각했던 게 점수에 반영 안... 아, 그렇지....'
...나 점수 필요 없었지.
이미 아론 스팅레이의 눈에 띄어 특별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아론이 먼저 요구하지 않는 이상 좋은 성적을 위해 아등바등할 필요는 없었다.
'아무래도 나한테 바라는 게 성적 말고 다른 거 같으니 말이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다시금 평정이 흐트러져서 주변의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그녀를 둘러싼 상황은 그것이 원인이었으니까.
-첫날부터 문제 일으켰다던데?
-그런데 어떻게 스팅레이 특별 장학생으로 뽑힌 거야? 그것도 첫날에!
-뭔가 빽이 있었겠지. 부모 중에 간부급 직원이 있다든가. 아니면 A섹터 출신이라든가.
-아냐, 그럴 리가. 듣기로는 저 애 폴른 출신이라고 하던데?
-뭐? 그 범죄자들 소굴?
-그렇다니까!
"...."
시끄러워, 이것들아!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아이리는 간신히 억눌렀다. 지금 상황에서 그래 봤자 역효과만 날 테니까.
'무슨 소문이 이렇게 빨라?'
계약서를 쓴 지 이제 겨우 한나절도 지나지 않았다.
근데 벌써 아카데미 1학년 신입생 중에 그녀가 스팅레이에 스카우트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는 것 같았다.
아이리를 바라보는 눈들은 하나같이 '저 녀석이 대체 뭐길래?'라고 묻는 듯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중 몇 명은 덕을 좀 보려는 심산으로 아이리에게 친해지고 싶다면서 접근해 왔다.
물론 그 속내들이 너무 뻔히 보여서 아이리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지만.
'정말 피곤해 죽겠네....'
어디를 가도 시선이 따라붙어서 죽을 맛이었다. 야생동물처럼 자라왔던 그녀에게 있어, 대중의 시선이란 전혀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결국 참지 못한 아이리는 도망치듯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일단은 기숙사로 돌아가면 이 상황에서는 벗어날 수 있으리란 심산이었다.
하지만 익숙지도 않은 곳에서 너무 걸음을 재촉한 탓일까, 그녀는 일반 기숙사동에 도착하고 나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아, 맞다. 여기 아닌데...."
스팅레이 특별 장학생이 되었으니 일반 학생동이 아니라 특별동으로 가야 했다. 아마 짐도 그쪽으로 옮겨져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곳으로 가는 길을 전혀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물어볼 사람이 있으면 좋을 테지만, 저녁 식사 시간이라 그런지 일반 기숙사동은 텅텅 비어 있었다.
전부 식당으로 향한 거겠지.
아니, 사실 물어본다고 해서 제대로 알려 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오늘 하루 분위기를 보아하니 일반 학생들은 기업 장학생들을 무척이나 질투하는 듯했으니까.
아이리가 말을 걸어도 돌아오는 건 싸늘한 시선뿐일 게 분명했다.
"어디로 가야...."
여러 개로 나뉜 복도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던 그때였다.
"뭔가 곤란하신 일이라도?"
"윽?!"
아이리는 갑자기 옆에서 다가온 기척에 화들짝 놀라며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 한 번의 제자리 도약으로 거의 3미터를 뛰었다.
"누구야!"
"죄송합니다.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냥 곤란을 겪고 계신 것 같아서 말을 걸었을 뿐이랍니다."
"음?"
아이리는 그제야 말을 걸어온 상대의 얼굴을 보았다.
단정한 금발 말총머리와 에메랄드색 눈동자. 상당한 미인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 그녀의 목에 두른 푸른빛 LED 초커가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그 상대는 아래로는 아카데미 마크가 그려진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안드로이드?"
"여성형 가정부 안드로이드 입니다. 곤란하신 게 있다면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
"아, 뭐야...."
그제야 아이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 만난 상대가 안드로이드라 정말 다행이었다. 여기에 있는 인간들은 학생이고 교사들이고 다 못 믿을 족속들이니까.
아이리는 길을 물어보기로 했다.
"저기요 C... 뭐시기."
"시엘이라 불러 주세요."
"그래, 시엘. 특별동 장학생 기숙사를 찾고 있는데, 어디 있는지 좀 알려 줄 수 있어?"
"...."
"시엘?"
착각일까.
아이리의 눈에는 순간 시엘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물론입니다. 특별동 기숙사 말씀이시죠? 저를 따라오시면 된답니다."
"정말이야? 후, 덕분에 살았어."
"마땅히 해야 할 일인걸요."
싱긋.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안드로이드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이리는 '그것'을 전혀 경계하지 않고 따라나섰다.
함께 걸음을 옮기면서 시엘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아이리 주인님."
"주, 주인님이라니... 아니, 그보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야?"
"저희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안드로이드들은 실시간으로 학생 신상 데이터를 공유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그런 거구나."
아이리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칫했다.
근데 그런 기능이 있었던가?
오늘 신입생들을 안내하던 안드로이드에겐 딱히 그런 기능이 없었던 것 같은데... 아니, 있었나?
잘 모르겠다.
"...주인님이라곤 안 했으면 좋겠어. 그냥 아이리라 불러."
아이리가 지내던 폴른 구역에는 수많은 안드로이드들이 있었다.
대부분이 좋은 사람(?)이었고, 개중에 몇몇은 아이리와 유대를 쌓기도 했었다.
하지만 동시에 아이리는 세상의 모든 안드로이드들이 그들과 같지는 않다는 걸 안다.
그래서 아이리는 이런 '고장 나지 않은' 안드로이드들을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알지 못했다.
아까 점심때쯤만 해도 무심코 인사를 했다가 다른 학생들에게 비웃음을 사지 않았던가.
"아무튼 왜? 물어볼 거라도 있어?"
"네. 아이리는 혹시 장학생인가요?"
"아아, 첫날부터 장학생으로 뽑힌 게 좀 이상하지. 나도 좀 믿기지 않는데... 맞아. 스팅레이 그룹 특별장학생이래. 근데 뭐가 특별한진 나도 잘 몰라."
그렇게 답하자 시엘은 손뼉을 치면서 자신의 일인 것마냥 기뻐했다.
"놀랍네요! 뉴 발할라 시티 최대 기업이 주목하고 있는 학생이라니, 대단해요!"
"그렇게 띄워줘 봤자 안 기뻐. 하아... 나도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으니까."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군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들어 봤자 재미없을 텐데."
"아뇨. 꼭 듣고 싶네요."
눈을 반짝거리며 대답하는 시엘.
아이리 역시 '이런 걸 말해 봤자 뭐 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어딘가 하소연을 할 곳이 필요했다.
아카데미에서 그녀가 의지할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니까.
"그게 있잖아...."
결국 아이리는 오늘 있었던 일들에 대해 시엘에게 자세하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시비가 걸려 남학생 하나를 때려 버린 일, 지도실로 불려 가 설교받은 일, 그때 아론 스팅레이가 와서 자신을 스카우트한 일.
거기다 어쩌다 보니 시시콜콜한 과거의 일까지 털어놓을 때쯤이 되어서야 장학생 특별동 기숙사에 도착했다.
길게 이어진 복도가 다른 장소보다 유달리 호화스럽게 장식되어 있었고, 입구는 게이트로 막혀 있었다.
딱 봐도 분위기가 다르다.
"여기야?"
"네. 이곳부터는 허가받은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안내해 줘서 고마워. 어쩌다 보니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꺼내고 말았네."
"아니에요. 저도 아이리와 대화할 수 있어서 즐거웠어요."
시엘의 말에 아이리는 피식 웃었다.
그녀는 게이트에 달린 생체 센서에 손을 대서 인식시켰다.
특별동으로 향하는 문이 자연스럽게 열렸고, 아이리는 그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시엘에게 인사했다.
"그럼 또 봐, 시엘. 워낙 여기가 넓어서 또 만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분명 다시 보게 될 거예요.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주실 거죠?"
어째서인가 불안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 시엘에게 아이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아카데미 흑막 시점 20화
"이, 이게 대체 뭐야...!?"
특별동, 스팅레이 장학생 기숙사.
아이리는 자신에게 배정된 방의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경악을 넘어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이, 이게... 억...."
아이리는 너무나 충격을 받아 차마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다.
물론 그녀 역시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복도만 해도 고급스러운 분위기로 잘 꾸며져 있었으니 그만큼 방도 훌륭하겠지. 그렇게 막연하게 예상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건 상상을 뛰어넘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좋을까.
아니, 이걸 설명할 수나 있을까.
폴른 구역 이곳저곳의 판잣집을 전전하던 아이리에게는 그곳을 채운 고급스런 물건들을 뭐라 지칭해야 좋을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튼 대단했다.
무진장 넓고 뭔가 겁나 대단했다.
"시, 신발 벗어야 하는 거야? 아니, 나 제대로 찾아온 거 맞기는 한가?"
"가난뱅이 티는 적당히 내도록."
"으아아악!"
불현듯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이리는 화들짝 놀랐다.
오늘 대체 몇 번이나 놀라는 건지... 이번엔 피할 생각도 못 하고 소리만 질렀다.
뒤늦게 정신을 차려 보니 그곳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아론 스팅레이와 그 수행원. 아까 낮에 지도실에서 보았던 조합이 그대로 있었다.
"까, 깜짝이야! 왜 사람 놀라게 하고 그러는 건데... 요!"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는데 눈치채지 못하더군. 그렇게나 방이 마음에 들었나?"
"그, 그런 거 아니거든... 요! 겨우 이 정도 갖고 뭘~. 이것보다 좋은 방에서 얼마나 많이 지냈는데요~"
"그래, 그렇겠지."
"...."
그러면서 피식 웃는 아론.
괜히 자존심을 세우다가 더 망신을 당한 것 같았다.
아이리는 부글거리는 속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그래서 갑자기 여기엔 왜요?"
"몇 가지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다. 몇 가지 알려 줄 사실도."
"허. 나 하나 보자고 높으신 분께서 여기까지 행차하셔요? 돈만큼 시간도 썩어 넘치시는 건가요?"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하는군, 아이리 엘리스밸."
아론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너니까 찾아오는 거다."
"그, 게... 무슨...."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발언.
대체 어떤 반응을 보여야 좋을지 알 수 없어 망설이던 찰나에, 아론은 아무렇지 않게 화제를 전환했다.
"일단 들어가지."
"뭐, 뭐 어딜 들어오려는 거예요!?"
"졸업할 때까지 조명을 끄고 지낼 셈인가."
"뭐라고요?! 지금 내가 고작 불 켜는 방법도 모를 것 같은 등신 같-!"
말하면서 슬쩍 벽면을 살펴보니 알 수 없는 버튼들이 잔뜩 달려 있었다. 뭐가 뭔지 감도 안 잡혔다.
"...그, 그래서 어쩌라구요."
"마리아."
"조명은 음성인식으로 조절할 수 있습니다. 차례대로 안내해 드릴 테니 따라오시지요."
아론의 명령에 따라 마리아는 아이리를 이끌고 방의 구조나 옵션 같은 것을 차례대로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사용자 등록부터 시작해서, 인테리어 홀로그램 설정법, 공용 가정부 안드로이드 호출법, 하우스 AI 설정법까지.
처음 들어 보는 용어가 좌르륵 지나가는 바람에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아이리는 이 이상 얕보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것들을 머리에 넣었다.
"...이상입니다. 더 궁금하신 점 있으십니까?"
"아, 아뇨. 괜찮은데요...."
"차후라도 궁금하신 점이 있다면 입구 쪽에 배치된 전자안내서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후우...."
아이리는 이제야 길었던 설명이 끝나는 것 같아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스팅레이 장학생 기숙사의 규칙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설명할 게 또 있어요?!"
마리아는 이어서 통금시간과 장학생 식당 운영시간 등등을 포함한 설명을 아이리에게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몇 시까지 들어오라느니, 문제를 일으킬 경우에는 어떻게 된다느니. 잔소리를 듣는 기분으로 그것들을 한참 동안 견뎌 내고 있자니.
"거기까지 해라, 마리아. 어차피 이 녀석에게 규칙 같은 건 설명해도 소용없으니."
"네, 아론 님."
아론은 마리아를 뒤로 물린 뒤 아이리를 바라보며 짧게 말했다.
"네가 기억할 건 하나뿐이다, 아이리 앨리스벨. 넌 하나만 생각해라."
"...그게 뭔데요."
"최고가 되어라."
아론은 말을 이어 나갔다.
"규칙. 지킨다면 좋겠지만, 네가 그딴 걸 지키고 살았으면 애초에 이곳에 올 기회조차 없었겠지."
"...."
아론의 말은 정론이었다.
반박할 수가 없었다.
"너 자신이 이 아카데미에서 최고라는 걸 증명하면 될 뿐이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자질구레한 규칙 따윈 좀 어겨도 내 선에서 정리해 주지."
"최고가 되라고 해도...."
"내일 시험이 있을 거다."
아론이 말했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수업이 시작되는 만큼 기업 스카우터들이 모여서 돌아다니며 수업에 참관할 거다. 물론 그런 실무자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기업 VIP들도 대거 참관하겠지."
"왜 그러는 건데요?"
"그중에서 쓸 만한 녀석들을 뽑아서 영입하기 위함이다. 매년 초에 열리는 연례 시연회라고 할 수 있지."
학생들은 뛰어난 모습을 선보여 원하는 기업에 들기를 원하고, 기업들은 투자할 만한 인재를 찾는다.
시연회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너는 전술교전부인 만큼 각종 퓨어 스펙 테스트와 전투 능력 테스트를 받게 될 거다."
"반대로 과학기술부 애들은 기초학력 테스트 같은 걸 보겠네요?"
"그 말대로다. 하지만 보통은 기술부보단 전교부 학생들에게 더 이목이 쏠리기 마련이지. 기업 VIP들도 더 관심을 보일 테고."
"어째서요?"
"재밌으니까."
"...."
무슨 말인지 이해해 버리고 말았다.
하긴 기술부 쪽은 눈으로 보이는 게 그리 화려하고 재밌을 수가 없으니까. 완성된 데이터나 숫자만 봐도 되고.
뭔가 구경거리가 된 것 같아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불만을 품는다고 해서 피해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컨대 당신 얼굴에 먹칠 안 하게 최선을 다하라는 의미죠?"
"잘 알고 있군."
"...만약 내가 그러기 싫다면요?"
"상관없다. 네 손해일 뿐이지."
"...."
하기야 그렇다.
그런 짓을 해 봤자 아론에게는 조금의 타격도 없었다. 기껏 손수 뽑은 학생이 생각보다 뛰어나지 않았다는 것에 불과하겠지. 그땐 투자를 철회해 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하지만 아이리는 아니었다.
내일 어설픈 모습을 보인 만큼 자신의 선택지도 큰 폭으로 줄어들 것이고, 그녀의 진짜 목표에서도 멀어지게 될 것이다.
"...알았어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거절한다."
"아,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잖아요!"
"뻔하지. 1등을 하면 네 오빠에 대한 정보를 내가 아는 대로 다 알려 달라고 요구할 생각 아니더냐."
"그건...."
순간 당황했다.
이 남자는 대체 어떻게 내 속마음을 이토록 훤히 꿰고 있는 거지? 사람의 마음을 읽는 모듈이라도 장착하고 있는 걸까?
아니, 설령 그렇대도 상관없다.
아이리는 재차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이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입술은 떼기도 전에 아론이 선수를 쳤다.
"아직 네가 알기엔 이른 이야기다. 대신 다른 선물을 준비해 두지."
"전 다른 건 필요 없-."
"네 목덜미에 있는 모듈을 손상 없이 제거할 방법을 찾아 주겠다."
"...!"
아이리는 또다시 경악했다.
"그, 그런 것까지 어떻게...!"
"나쁘지 않은 거래인 것 같다만?"
"으윽...."
능구렁이 같은 아론의 표정에 아이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뭔가 석연치 않기는 해도 그의 말대로 나쁠 것 없는 거래였기 때문이다.
"...알았어요. 그렇게 하죠. 나중에 말 바꾸기 없기예요."
"그런 소리는 1등을 달성하고서나 하도록. 그럼 슬슬 일어나야겠군."
그렇게 말하며 아론은 소파에서 일어서 현관을 향했다. 할 얘기를 마쳤으니 이제 돌아가려는 거겠지.
마치 모든 상황은 자신의 손바닥 위에 있다는 듯했다.
아이리는 그 점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고작해야 팔짱을 낀 채 불만을 표시하는 것뿐.
"...할 말 다 했으면 어서 가 버리라구요."
"한 가지 더. 저녁 식사는 거르지 말아라. 몇 층만 내려가면 장학생 식당이 있으니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내가 밥 안 먹은 건 또 어떻게 안 거예요? 서, 설마 나 감시하고 있어요? 정말 미친 거-."
"뱃소리가 요란스럽군."
꼬르르륵-.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리의 배꼽시계가 울렸다. 아까 다른 학생들의 시선에서 도망치느라 저녁을 거른 게 화근이었다.
"...."
아이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언젠가 복수를 다짐했던 스팅레이 가문의 인간에게 밥 챙겨 먹으라는 걱정 어린 잔소리나 듣다니.
"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어서 돌아가란 말이에요!"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그럴 예정이다. 마리아, 미유는 지금 어디에 있지?"
"마찬가지로 방에 있는 듯합니다."
"바로 가면 되겠군."
그런 대화를 나누며 현관을 나서는 두 사람.
그러다 아론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아이리를 돌아보았다.
"이걸 잊을 뻔했군."
"또 뭔데요."
"안드로이드를 만났나?"
"...."
시엘의 이야기가 분명했다.
설마 아론이 그것까지 파악하고 있을 줄은 상상치도 못했다. 하지만 아이리는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면서 대답했다.
"아뇨. 왜요?"
"내가 보낸 거니. 피해 다니지 마라."
"싫다면요?"
"그렇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 네게 도움이 될까 싶었을 뿐이다."
"날 감시하려고 보낸 거군요."
"멋대로 생각해라."
아론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쿨하게 자리를 떴다.
스르륵.
현관문이 굳게 닫혔다.
아이리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를 앙다물었다.
정말이지, 사람의 프라이버시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고! 제기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렇게 미주알고주알 떠들어 대는 게 아니었는데.
"역시 맘에 안 드는 남자야. 자기가 뭐 내 오빠라도 되나?"
-저녁 식사는 거르지 말아라.
-저녁 꼭꼭 챙겨 먹어.
어째서인가.
아론의 잔소리가 다시금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그리운 목소리와 겹쳐져서 말이다.
얼마 뒤, 동시에 다시 한번 배꼽시계가 울려댔다.
"...안 먹으면 나만 손해겠지."
아이리는 앞서 배웠던 대로 하우스 AI를 통해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했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저 남자 명령을 따르는 게 아니야. 잔뜩 먹어서 스팅레이 그룹 재정에 타격을 주려는 계획이라고.'
* * *
아이리와의 대화를 끝낸 뒤, 미유의 방으로 가는 동안 마리아가 말을 걸어왔다.
"아론 도련님."
"왜 그러지?"
"아까 앨리스벨 양에게 보내셨다던 안드로이드라는 건 대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야 거짓말이니까.
아이리는 기본적으로 스팅레이를 비롯한 기업들을 싫어한다.
평생 기업들의 횡포로 폴른의 빈민가를 전전하다가 유일한 가족마저 스팅레이의 손에 잃고 말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어떻게든 내 지시를 어기려 들 테지.
나는 그것을 이용한 것이었다.
'CL-00245. 그 녀석이 빙의자다.'
사람이 되고 싶은 안드로이드, 시엘.
자아가 생긴 안드로이드로서, 인간이 되고 싶은 마음에 남몰래 학생들의 돈을 훔쳐 생체 파츠를 사 모으던 캐릭터다.
원작에서 주인공 일행은 시엘이 인간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도우며 다양한 위기를 겪는다. 그러다 끝내 승리하여 한 명의 인간이 된 시엘을 동료로 받아들이는 게 원래의 스토리.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겠군.'
아까 아이리를 살짝 떠보았을 때, 그녀는 이미 시엘을 만났음이 분명했다. 현재의 시엘은 빙의자임이 확실하다는 증거였다.
때문에 나는 아이리가 빙의자 시엘과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지 않도록, 아이리의 스팅레이에 대한 반감을 이용한 것이었다.
'조금 귀찮긴 해도 이게 맞겠지.'
사실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 녀석을 잡을 수 있다. 녀석을 무릎 꿇려 데려오는 데에는 내 말 한마디면 충분하다.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아직 알아내야 할 게 많다.'
정확히는 특전 시스템에 대해서.
빙의자마다 주어진 특전이 차이가 있는지. 혹시 그렇다면 녀석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려는 것인지. 내가 그것을 이용할 수는 없을지.
설령 새로운 게 없다고 하더라도, 상관없다.
'이 상황은 이용할 수 있어.'
녀석은 내게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소설 속 '시엘'로서의 역할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녀석이 이상한 짓을 못 하도록 적당히 통제할 수 있다면, 초장부터 없애 버리는 것보다 훨씬 전체적인 스토리 관리가 쉬워진다.
'그러니 제발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아줘라.'
얌전히 네 할 일만 해.
아카데미 흑막 시점 21화
트리니티 아카데미.
전술교전부 대형 실내훈련장 147-A호.
"좋은 아침입니다, 제군들!"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동양계 남자가 교단 앞에서 열정을 불태우듯 목청껏 인사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인원 체크를 하는 둥 마는 둥 했던 사격술 수업의 니시야마 교관이었다.
그가 있는 교단 아래에서 오와 열을 맞추어 서 있던 1학년 전교부 학생들은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저 인간 어제하고 태도가 너무 다르지 않아? 어제는 숙취로 반쯤 죽어 가던 거 같은데.
-옷차림도 되게 깔끔해졌네.
-그야 저기서 기업의 스카우터들이 보고 있으니까 그렇지. 스폰서님들 귀에 이상한 소리 들어가면 모가지니까.
과연, 그래서였구나.
아이리는 교관이 보지 않는 틈을 타서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실내 훈련장의 높은 벽 위로 위치한 전망대에 열댓 명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의 얼굴을 보며 아이리는 미간을 좁혔다.
'역시 왔구나, 저 인간.'
아론 스팅레이.
아니나 다를까, 자신의 스폰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오늘 수업에 참관하고 있었다. 참으로 한가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본격적인 수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오늘은 제군들의 기본적인 능력치를 종합적으로 확인할 겁니다! 오늘 기록된 데이터는 학생기록부에 입력되어 다른 훈련에서도 참고자료로 활용될 예정입니다!"
즉, 오늘 이 테스트가 전체 성적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였다.
하기야 수업마다 일일이 테스트를 하는 것보다 이렇게 처리하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이겠지.
"오늘은 기쁘게도 각 기업의 스카우터님들도 수업에 참관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오늘 멋진 모습을 보여 장학생으로 선발될 수 있도록 합시다!"
"예!"
이구동성으로 대답하는 학생들.
아이리와 달리 그들은 옛날부터 이런 훈련을 겪어 왔는지 군기가 어느 정도 잡힌 모습이었다.
'뭔가 혼자 붕 뜨는 느낌이네....'
그런 생각을 하던 그때였다.
"너도 왔구만."
시비조의 말투와 함께 누군가가 어깨를 뒤에서 툭 건드렸다.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다 싶었더니 어제 시비를 걸었던 그 남학생이었다.
아이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건들지 마. 손가락 뽑아 버린다."
"들었다. 스팅레이 특별 장학생이 되었다면서?"
"니가 뭔 상관인데? 배 아파서 그래?"
"'니'가 아니라 '도노반 폰 딜레이'다."
"꺼져."
아이리가 으르렁거렸지만 도노반은 신경도 쓰지 않고 시비를 계속 걸어왔다.
"너 같은 들개년이 어떻게 스팅레이 같은 메가코프의 눈길에 든 거지? 뭐, 그쪽 스카우터한테 다리라도 벌렸나?"
"뭐? 이 새끼가 뒤질라-!"
순간적으로 소리를 지를 뻔했던 그때.
아이리의 시야를 메신저 앱의 메시지 창이 가렸다.
[참아라.]
짧은 메시지.
보낸 이의 이름에 -A.S-라 적혀 있었다. 그게 누구를 의미하는 이니셜인지는 자명했다.
"칫...."
그제야 아이리는 냉정을 되찾았다.
그래, 거래하기로 했었지.
이 도노반인지 도미노인지 모를 녀석 따위에게 일일이 휘둘릴 필요는 없다. 실력으로 철저하게 짓뭉개주면 될 뿐.
...그건 그렇고.
저 인간은 대체 어떻게 이쪽의 속내를 훤히 다 읽는 거지? 저 위치에서는 이쪽에서 나누는 말소리가 들릴 것 같지는 않은데.
'설마 날 도청이라도 하고 있나?'
그렇게 진지하게 고민하는 아이리였으나, 진실은 알 수 없었다.
어쨌건 분명한 것 하나는.
"종합 테스트를 시작하겠습니다!"
실력을 선보일 시간이 왔다는 것이다.
* * *
'하여간 아이리 녀석.'
저 성질머리를 빨리 고쳐 놓든가 해야겠다.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또 무슨 사고를 터뜨릴까 불안불안하다.
'아, 그게 아니지? 반대로 생각하면 오히려 내버려 둬야 하나?'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아이리는 철이 들어서 굉장히 얌전하고 침착한 성격이 된다.
즉, 이런 거칠고 날 선 모습의 아이리는 스토리 초반에서나 볼 수 있는 레어한 모습인 셈이다. 그냥 놓치긴 아까운데....
그렇게 최애 덕질 겸 앞으로의 계획을 머릿속으로 검토하고 있는 와중, 옆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아론 이사장님 아니십니까?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어디서 본 듯한 모습.
아론의 기억이 슬그머니 되살아났다.
"오래간만이군요, 사이먼 실장."
"오랜만입니다. 몸이 편찮으셨다고 들으셨는데, 이제 다 나으신 겁니까?"
"그런 셈이죠."
"그렇군요. 건강하신 모습을 보니 좋습니다그려, 허허허."
껄껄 웃어 대는 남자는 '퓨어리티 서비스(Purerity Survice)' 인재개발연구실 실장이었다.
회사마다 구조가 조금씩 달라 직책도 다르지만, 맡은 역할은 나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그래, 인재 영입 총괄이다.
"사이먼 실장이 이렇게 직접 학생들을 보러 오는 건 드문 일이군요. 요즘 사업은 어떠십니까?"
"허허,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잘되고 있는 편입니다."
'스팅레이 그룹'이 나노머신과 적응자를 중심으로 한 군수산업에 큰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한다면, '퓨어리티 서비스'는 사이버웨어를 통한 '증강(增强)'이 가장 큰 수입원이다.
증강.
한마디로 나노머신의 힘을 빌리지 않고 직접 기계장치를 신체에 이식하는 기술이다.
말하자면 나노머신보다 한 세대 뒤처진 기술이라, 성능이 비교적 떨어질 뿐만 아니라 면역반응 같은 부작용도 만만찮다.
하지만 사이버웨어 증강기술이 나노머신과 비교해 압도적으로 뛰어난 부분이 있었으니.
'가격.'
나노머신은 돈이 많이 든다.
나노머신을 투여받는 것도 비싸고, 나노머신이 단번에 신체에 자리 잡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거기다 모듈을 장착하는 비용은 또 따로 든다.
그러한 탓에 나노머신은 보통 B섹터 이상에 거주하는 비교적 부유한 시민들만의 전유물이다. 아니면 스스로 기업의 개가 되기로 마음먹은 적응자 병사들이거나.
가난한 시민들이 나노머신 없이 어떻게든 도시 생활을 이어 나가려면, 퓨어리티 서비스 같은 기업이 생산하는 사이버웨어를 이식받아야만 한다.
부작용을 각오하고서라도.
모든 사람이 꼭 [신비]들과 싸우기 위해 기계 신체를 요구하는 게 아니니까.
퓨어리티 서비스는 그런 점을 공략해서 성공한 기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건 아론 님에게만 슬쩍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5년 내로 생산 콜로니를 확장할 계획입니다. 허허."
생산 콜로니.
대부분의 기업은 뉴 발할라 바깥의 지역, 즉, [신비]들의 영역에 자원을 채취하고 상품을 만드는 용도의 거대한 생산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걸 확장하려고 하면 필연적으로 괴물들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그리고 전쟁을 치른다는 건.
돈이 많이 든다는 의미.
결국 사이먼 실장의 말은 '우리한테 투자해! 돈 벌게 해 줄게!'라는 뜻이었다.
나는 거기에 이렇게 답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로군요."
직설적인 거절이었다.
그야 들을 필요도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 정도의 계획이라면 이미 스팅레이 그룹 미래전략실에서 진즉에 파악을 끝내고 투자계획까지 세워놨을 거다.
그런데 내게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실제 계획이 별로라 투자자가 없다는 뜻. 나를 구슬려서 투자를 유치해 보겠다는 심산이다.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최근에야 간신히 복귀한 젊은 황태자라면 어쩌면 꾀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거겠지.
그딴 거엔 안 넘어간다, 이 아저씨야.
사이먼 역시 내 말뜻을 찰떡같이 알아들었는지 껄껄 웃으면서 말을 돌렸다.
"뭐, 어느 쪽이든 조만간 많은 적응자 병사들이 필요해질 건 사실입니다. 또 아론 님께서 첫날부터 '직접' 영입했다는 아이가 궁금하기도 해서 말이죠, 허허."
"과연."
결국 본심은 후자겠지.
얼마나 대단한 녀석이길래 테스트도 안 거치고 특별반으로 영입해? 그것도 재단 이사장이 직접? 한 번 보여 줘! ...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쩐지 보기 어려운 얼굴들이 다 이곳에 모여 있다 했습니다."
"다들 같은 마음인 거겠지요."
이 아저씨 말고도, 지금 이곳에는 다양한 기업의 윗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과는 아까 전 인사를 나눈 참이었다.
보통 이런 자리에는 스카우터, 혹은 헤드헌터라 불리는 직원들이 대신 참가하기 마련이다.
'다들 내가 뽑은 아이리가 어느 정도 실력인지 궁금했던 모양이군.'
뛰어난 적응자를 다수 보유하고 있을수록, 기업은 도시 외부 생산시설을 공격적으로 확장하거나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쉬워진다.
즉, 이곳에서 뛰어난 인재를 많이 영입한 기업일수록 미래의 성공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만약 그곳이 적대적인 기업이라면 경계하며 대응할 방법을 찾을 테고, 아니라면 큰 투자를 고려해 볼 만한 곳이 되겠지.
아카데미 스폰서가 단순히 애들 뒷바라지나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저 아이입니까?"
"그렇습니다."
사이먼 실장이 가리킨 곳에 찰랑거리는 잿빛 은발이 눈에 띄었다.
나는 긍정했고, 사이먼 실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흐음. 생각보다 왜소하군요. 틀림없이 조금 더 강한 인상일 거로 생각했습니다."
"적응자의 능력은 단순히 덩치나 외모로만 평가할 순 없습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만, 저 뒤쪽의 청년이 너무 강렬한 인상이라 다소 묻히는 감이...."
사이먼 실장의 눈길이 아이리 대신 그녀의 뒤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어제오늘에 걸쳐 아이리에게 계속 시비를 걸던 남학생에게 말이다.
그러자 그때였다.
"도노반 말씀이시군요!"
갑자기 흥분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얼굴 절반이 기계 부품에 가려진 족제비 같은 인상의 남자가 있었다.
블라디미르 하리토노프.
밀레니엄 테크놀로지 재단 이사장이자, 내 친구였다.
뭐? 친구 아닌 거 같다고?
그럴 리가.
어제 친구비 받았으니 친구 맞다.
"역시 사이먼 실장님. 사람 보는 눈이 탁월하십니다."
"오, 블라디미르 씨. 허허, 무슨 그런 말씀을."
"역시 왔군, 블라디미르."
"아, 아론 스팅레이. 당신도 있었군요."
마치 '너 같은 건 있는 줄도 몰랐네~'라는 듯한 말투다. 어제 된통 깨져 놓고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듯했다.
뭐 하기야 그게 우리 블라디미르의 매력이 아니겠는가. 나중에 친구비를 올려서 받아야겠다.
"블라디미르 씨. 저 아이를 아십니까?"
"도노반 폰 딜레이라는 아이입니다. 저희 보안부 고위 간부의 자제이지요."
"아하, 그렇다는 건...."
"예. 죄송하지만 이미 저희의 후원을 받기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것참 아쉽게 되었군요. 허허. 참 듬직하게 생긴 녀석이라 조금 욕심이 났는데 말이죠."
"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나저나 이번 달 말 G20 총회에 블라디미르 씨도 참가하시는지?"
"물론이죠!"
학생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 그들의 대화는 어느덧 G20 총회와 사업 이야기로 발전했다.
그만큼 사이먼이 보기에도 저 '도노반'이라는 남학생이 상당한 유망주로 보였으며, 반대로 아이리는 그렇지 못했다는 의미다.
또 어쩌면 아이리의 출신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수도 있고.
선발한 학생이 훌륭하면 후원자의 콧대도 높아지는 법. 덕분에 나는 둘에 대화에서 다소 따돌려지는 듯한 상황이 되었다.
'하, 이 자식 봐라?'
어제 일도 있고, 그래서 서로 좋게 좋게 가자는 의미에서 우리 멍멍이의 목줄을 최대한 꽉 잡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
우리 개가 얼마나 잘 무는지, 확실하게 알려 주는 수밖에.
나는 아이리에게 보내려던 메시지를 삭제하고 창을 닫아 버렸다. 그러고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테스트를 마냥 지켜보며 기다렸다.
'이제 슬슬 타이밍인가.'
아이리 녀석의 성격이라면 지금쯤 터뜨릴 때가 되었겠지.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내 예상대로 녀석이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
웅성웅성.
훈련장 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하지만 아직 블라디미르는 사이먼과 대화를 나누느라 그 장면을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그는 계속해서 과장된 태도를 유지하며 내게 말을 걸었다.
"아차! 이거 스팅레이 씨를 의도치 않게 따돌린 모양이군요. 죄송합니다."
고개까지 숙이며 사죄하는 모습.
물론 돌려서 비꼬는 것이다.
하지만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나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오히려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나인데 말이다.
"미안하군, 블라디미르. 내가 제대로 다시 교육하도록 하지."
"응?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블라디미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리고 그때, 훈련장 쪽이 한층 더 시끄러워졌다.
"대체 왜 이렇게 시끄러워... 앗?!"
뒤늦게 훈련장의 광경을 확인한 블라디미르의 얼굴색이 창백해졌다. 그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한 것이었다.
쾅! 쾅!
땅이 부서져라, 다리를 내리찍어 대는 아이리.
그리고 그 밑에 깔려서 흠씬 얻어맞고 있는 것은, 조금 전까지도 블라디미르가 입이 닳도록 자랑하던 도노반 폰 딜레이.
그 광경이 지금 이곳에 있는 모든 기업 관계자들에게 똑똑히 포착되고 있었다.
"정말로 미안하군, 블라디미르."
"아, 아론 스팅레이!"
뒤늦게 화를 내는 블라디미르를 향해, 나는 다시 한번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
"우리 쪽 학생이 실례를 범했군. 내 이번 건은 확실하게 책임지도록 하지."
뭐? 내가 웃고 있다고?
사과가 아닌 것 같다고?
그럴 리가. 이건 분명 반성의 표정이다.
하하.
아카데미 흑막 시점 22화
쾅! 콰앙! 콰앙!
아이리가 바닥에 쓰러진 도노반을 발로 연신 내리찍고 있었다.
그 힘이 어찌나 강한지 '퍽퍽!' 소리가 나는 게 아니라 '쾅쾅!' 소리가 날 정도였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블라디미르가 역정을 냈다.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분명 저 도노반 녀석이 아이리에게 시비를 걸었고, 아이리가 결국 참지 못하고 빡돌아서 참교육을 시전한 거겠지.
"아론 스팅레이...!"
블라디미르가 악귀 같은 표정을 지으며 날 노려보았다. 마치 내가 저러라고 시킨 거라고 믿고 있는 듯했다.
물론 난 억울하다.
내가 그러라고 부추긴 적은 없으니 말이다. 뻔히 벌어질 일이란 걸 알면서도 막지 않았을 뿐.
말하자면 사람을 향해 컹컹 짖고 있는 개의 목줄을 일부러 손에서 놓아 버렸다고 할까. 본인이 들으면 노발대발할 비유겠지만.
"이런 식으로 나옵니까?!"
"무슨 소릴 하는지 전혀 모르겠군.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내가 그럴 이유가 있겠는가?"
사실 이유야 있었다.
다른 기업 스폰서들이 몰래 나누는 대화만 봐도 바로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놀랍군요. 어떻게 저렇게 작은 몸에서 저런 힘이?
-저 아이. 성격은 다소 불같은 듯하지만, 그런 편이 병사로서는 딱 좋죠.
-아직 가르칠 시간은 많이 남아 있으니까요. 소재 자체는 나쁘지 않으니 잘만 길들이면 상당히 쓸 만해질 것 같습니다.
-황태자가 맘에 들어할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네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도노반에게 쏠려 있던 관심이 순식간에 아이리에게 집중되었다.
그녀가 폭력을 행사하긴 했어도 그들은 도리어 그 능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듯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와 달리 메가코프 후원자라는 작자들은 학생들을 일종의 투자 자산, 인간병기, 혹은 장기말 따위로밖에 생각하지 않으니.
조금 난폭하긴 해도 능력이 뛰어나다면 오히려 환영이라는 거겠지. 덩달아 그녀의 능력을 한눈에 알아보고 일찌감치 영입한 나에 대한 평가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슬슬 다음 단계로 나아갈 차례다.
나는 표정을 유지한 채 말했다.
"일단은 저들을 말리는 게 우선이 아닌가? 저대로 내버려 두었다간 정말로 큰일이 날 것 같은데."
"...제길!"
블라디미르는 나를 노려보더니, 욕지거리를 내뱉고는 등을 돌렸다. 다급히 이동하는 그의 뒤를 경호 인력들이 뒤따랐다.
나는 그와 달리 느긋하게 마리아와 함께 훈련장 쪽으로 향했다.
"도련님."
"이제부터 시작이다, 마리아.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간섭하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마리아는 진즉부터 내 의도를 눈치챈 듯 보였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내 의지에 따르겠다는 듯이 고개만 까딱 숙일 뿐이었다.
나는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그러지 말았어야지, 블라디미르.'
네가 감히 나를 향해 어쭙잖은 신경전만 벌이지 않았어도. 또 하필이면 그 대상이 아이리 앨리스벨만 아니었더라도 내가 이러진 않았을 거다.
아이리 녀석의 목줄을 똑바로 잡고.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막았겠지.
허나 너는 실수를 저질렀고.
내 신경을 거스르는 짓을 했다.
그러니.
이제 그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 * *
"말해 봐! 뭐? 뭐? 또 지껄여 보라고!"
콰앙! 콰앙! 콰앙!
아이리는 연신 도노반의 등에 다리를 내려찍으며 분노를 표출했다. 그녀가 발길질을 할 때마다 도노반의 몸이 조금씩 바닥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도노반 역시 그리 큰 타격을 입지는 않은 듯했다. 그 역시 더 이상은 참지 않겠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씨발! 이년이 어따 대고-!"
"닥쳐."
콰앙!
아이리가 몸을 일으키려던 도노반의 머리를 다시 한번 짓밟았다.
하지만 도노반의 얼굴에는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성질을 더욱 돋울 뿐이었다.
"개 같은 년이! 봐주니까 끝까지 기어오르고 있어!"
도노반은 아이리의 발길질을 그대로 받아 내며 몸을 일으켰다. 아이리의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고, 도노반은 그 타이밍을 노려 아이리의 멱살을 잡았다.
부웅-!
도노반의 팔이 힘차게 머리 위로 솟구쳤다. 아이리의 얼굴을 후려칠 심산이었다.
그러나 아이리는 조금도 겁내지 않았다.
"하! 때릴 테면 때려 보든가!"
아이리는 도노반의 주먹이 날아오는 즉시 반격할 준비를 했다. 어느 쪽이든 죽을 장을 봐야 끝낼 생각이었다.
그때 들려온 목소리.
"거기까지다."
"이게 뭣들 하는 짓이냐! 어?!"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두 사람이 싸우는 곳으로 몰려왔다. 상대의 정체를 확인한 둘은 그제야 싸움을 멈추고 물러났다.
"아론 스팅레이...."
"블라디미르 이사장님...!"
아론 스팅레이와 블라디미르 하리토노프. 뉴 발할라 시티를 지배하는 황족과 대귀족의 행차였다.
일반인들은 평생에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인물들의 등장에 주변 학생들은 이번 사태가 예사로운 일이 아님을 직감했다.
웅성웅성.
심상찮은 분위기 속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열었던 것은 황태자, 아론 스팅레이었다.
"담당교관은 어디에 있지?"
"책임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론의 곁을 보좌하던 마리아가 그 대신 큰 목소리로 교관을 불렀다.
다른 곳에 신경을 쓰고 있던 니시야마 교관은 그제야 뒤늦게 상황을 인지하고선 멀리서부터 달려왔다.
"이, 이게 무슨 일... 헉!"
니시야마 교관은 아론과 블라디미르의 얼굴을 확인하고선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곧장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눈을 뗀 사이에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질 줄은...!"
"네가 책임자로군."
"그, 그렇습니다만...."
가늘게 뜬 황금색 눈동자가 니시야마 교관을 경멸하듯 위아래로 훑었다. 옆에 있던 마리아가 아론의 뜻을 대신하여 전했다.
"이번 일에 대한 관리책임을 지셔야 할 겁니다, 니시야마 교관님."
"하, 하지만 저는...!"
"학생들을 데리고 가 주시죠. 교무부를 통해 조만간 이번 건에 대해 정식으로 항의할 테니까요."
"그, 그럴 수가...!"
"어서 가 주시죠. 저희 쪽 학생들은 나중에 따로 테스트를 받게 하겠습니다."
마리아가 채근했다.
그에 니시야마 교관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나머지 학생들을 이끌고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렇게 해서.
자리에 남은 것은 아이리와 도노반, 그리고 양측 학생들의 후원자들뿐.
먼저 입을 연 것은 블라디미르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도노반 폰 딜레이!"
"죄, 죄송합니다. 이사장님."
도노반은 조금 전과 달리 굉장히 겁을 먹은 듯한 표정이었다. 고작 자신들의 싸움에 갑자기 도시의 실세들이 한꺼번에 나타나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듯했다.
"소란을 일으켜서 면목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먼저 공격한 건...!"
"그딴 게 문제가 아니다!"
블라디미르는 버럭 소리쳤다.
"어째서 저딴 여자애한테 손도 못 쓰고 당하고 있던 게냐! 어?! 네놈의 사이버웨어와 전투모듈에 얼마가 들어갔는지 아느냐! 내가 어찌나 자존심이 상하던지!"
"죄,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블라디미르에겐 도노반이 문제를 일으킨 것보다, 혹은 맞아서 다친 것보다도 '손도 못 쓰고 당했다'라는 사실이 더욱 화나는 일인 듯했다.
'하! 쌤통이다, 망할 새끼.'
도노반이 꾸중을 듣는 모습에 아이리는 통쾌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 역시 마냥 속 시원해하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뚜벅.
검은 그림자가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황금색 예리한 시선이 그녀의 전신을 훑는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눈에는 형용하기 어려운 위압감이 있었다.
말 그대로 황족의 눈빛.
오랫동안 위에서 군림해 온 특권계층 특유의 카리스마, 바로 그것이었다.
"...."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눈빛만으로 겁을 먹고 용서를 구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아이리 역시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론은 분명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고 개인메일을 보내면서까지 당부했었고, 아이리에게 '거래'라는 당근까지 내보이면서 그녀를 어떻게든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아이리는 그 뜻을 거슬렀다.
아론은 틀림없이 분노했을 테고, 어떤 식으로든 명을 어긴 것에 대해 무거운 처벌을 내릴 것이다.
부자 놈들의 사고방식이야 뻔한 법이니까.
그럼에도.
아이리는 아론의 눈을 마주 보았다.
당당하게, 두려워도 결코 피하지 않고.
"난 잘못 없어요."
그래.
어차피 이딴 취급은 숱하게 당해 봤다.
폴른 구역 출신이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굴욕을 겪어 왔던가. 얼마나 많은 차별을 당해 왔던가.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해묵은 상처들이 그녀의 가슴에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결국 다 똑같은 놈들이야.'
댁도 다를 바 없겠지, 아론 스팅레이.
어차피 여기에 있는 놈들은 다 한통속이다. 이곳에 내 편은 없다. 아무리 용을 써 봤자 불합리한 판결을 받겠지.
'그러니 적어도 당당하자.'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불합리한 일을 당할지언정, 절대 울며 고통스러워하진 않겠다. 이번 일을 계기로 목적을 이루지 못할지언정 비굴해지지는 않겠다.
적어도 가슴을 당당히 펴고 엿을 날려 주는 거다. 특히나 저런 빌어먹을 양복쟁이들, 특히나 스팅레이의 인간에겐 말이다.
"...할 말 있으면 하든가!"
아이리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 남자가 어떤 식으로 나오든, 그 어떤 모멸적인 말을 던지든. 거기에 철저하게 응전해 주기로 말이다.
벌을 주라면 주라지.
그렇다고 꺾이진 않는다.
어떻게든 너희에게 갚아 줄 거다.
한평생이 걸리더라도 말이야.
그렇게 속으로 되뇌었던 그때.
"아이리 앨리스밸."
마침내 아론이 입을 열었고.
그 입에서 나온 말은....
"다친 곳은 없느냐."
무심하고도 상냥한 한마디였다.
꿈에도 예상치 못한 대사였다.
그것이 석벽처럼 단단하게 굳어졌던 아이리의 마음에, 빗물 한 방울처럼 틈새 깊은 곳에 스며들었다.
순간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에? 아? 네, 저기...?"
"다친 곳은 없느냐 물었다."
"아, 그... 네, 안 다쳤는데...요. 사, 사실 제가 일방적으로 때렸다고나 할까... 그, 그래서...."
"그렇다면 되었다."
짤막하게 대답한 아론은 곧장 고개를 돌려 도노반 쪽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노려보는 것에 가까웠다.
"답해라. 이게 무슨 일이지?"
"그래, 도노반! 어서 대답해 보거라!"
블라디미르 역시 도노반에게 채근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커지리라 예상치 못한 도노반은 상당히 주눅이 든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저, 저는 단순히 말을 걸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저 여자애가 먼저...."
"뭐어?! 야! 어디서 또 구라를 치고-!"
"조용히 해라."
혼란 상태에서 벗어나 또다시 흥분해서 달려들려는 아이리. 아론은 그녀를 제지하려 했으나 그걸 들을 그녀가 아니었다.
"순 개뻥이에요! 저 새끼가 먼저 나더러 뭐라고 했는지 들으면-!"
"그럴 리가요! 설마 저 폴른 출신의 말을 믿으시는 건 아니겠죠?"
도노반의 하소연에 일순 주변의 공기가 바뀌는 것을, 아이리는 민감하게 감지했다. 이윽고 한껏 차가워진 시선들이 그녀를 향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뭐야, 범죄자였나?
-그런 녀석이 어떻게 아카데미에?
-더러운 피.
'제기랄...!'
아이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또 이렇다.
폴른. 그 이름이 발목을 잡는다.
아무리 아론이라고 한들, 분위기가 이렇게 되면 감싸주기 어려울 터였다.
분명 그럴 터였는데....
"도노반 폰 딜레이."
그 순간.
아론이 가볍게 내뱉은 한마디가.
"죽고 싶나?"
분위기를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23화
"죽고 싶나?"
살벌한 대사.
이곳 뉴 발할라 시티 메가코프의 임원은 그야말로 중세 귀족과 다름없다.
아론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입에 담는 순간, 그 발언은 무서울 정도로 현실성을 띠게 된다.
그의 한마디는 E섹터의 부랑자들이 마구잡이로 떠들어 대는 살해 협박 따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차원이 다르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 그, 그게 무슨 말씀...!?"
"잠깐만요, 아론 스팅레이. 지금 이게 장난처럼 보입니까?"
황태자의 협박에 겁을 먹은 도노반.
그를 감싸듯 블라디미르가 대신 언성을 높였다.
"공식 석상입니다, 아론 스팅레이. 당신과 나, 두 사람만 있는 곳이라면 모를까. 좀 더 발언에 주의하는 게 어떻습니까."
"블라디미르."
아론이 그를 흘겨보았다.
"네 녀석은 입을 다물고 내 심기를 이 이상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군. 함께 죽여 버리고 싶어질 것 같으니."
"...지금 진심으로 말하는 겁니까?"
"진심이 아닐 이유도 없지."
그 순간.
아론의 손에 검은 장갑이 덧씌워졌다.
밀레테크 진영의 반응은 빨랐다.
"...미친!"
철컥! 철컥!
밀레테크의 보좌관들이 일제히 총을 빼 들었다. 그들은 블라디미르의 앞을 가로막으며 아론과의 거리를 서서히 벌렸다.
반면 아론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블라디미르와 도노반을 같이 노려볼 뿐이었다. 마리아 역시 침착함을 유지하며 아이리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
팽팽한 대치 상황.
그것을 깬 것은 블라디미르였다.
그는 자신을 가로막는 보좌관들을 옆으로 밀쳐 내며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아론 스팅레이! 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전쟁이라도 벌이고 싶은 겁니까? 일을 이 지경까지 키우는 이유가 대체...!"
"이 지경? 이것 참 놀랍군. 그딴 장난감 따위를 들고 '해 볼 만하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나?"
"뭐, 뭐라...?"
"정신 차려라, 블라디미르. 네 녀석이 지금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 건지. 또 네 옆의 애송이가 누굴 욕보인 건지."
"잠깐...."
아론의 말에 블라디미르는 충격을 먹은 듯한 반응을 보였다.
"설마 그 폴른 출신을 데리고 [쇼케이스]라도 해 보겠다는 생각입니까?"
"발언에 주의해라. 이 녀석은 일개 '폴른 출신'이 아니라, '스팅레이 재단 소속'이다."
"지금 그거 진심으로...!"
블라디미르는 아론의 얼굴을 살피고는 표정을 굳혔다. 그러더니 자신의 부하들에게 신경질적으로 지시했다.
"...제길. 다 무기를 거둬라! 당장!"
"하, 하지만 도련님!"
"닥쳐라! 네놈들이 도리어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는 걸 모르겠나!"
블라디미르의 명령에 밀레테크 진영은 하는 수 없이 물러났다. 그에 맞추어 아론의 손에서도 가죽장갑이 스르륵 녹아들 듯 사라졌다.
그렇게 상황이 끝나나 싶던 찰나.
짜아아아아악-!
훈련실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소리.
블라디미르는 씨익씨익, 거친 숨을 내쉬며 바닥에 쓰러진 도노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도노반의 뺨을 후려친 것이었다.
"...이, 이사장님?"
도노반은 어째서 자신이 얻어맞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런 그에게, 블라디미르는 더 크게 고함을 쳤다.
"똑바로 말해라! 네 말이 사실이더냐?"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까 전 네 증언에 거짓이 없었느냐 묻는 것이다!"
"네? 아, 그, 그것이...!"
"조금이라도 거짓이 섞였다면 내가 직접 너를 처벌할 테니, 진실만을 말해라!"
도노반은 겁에 질린 눈이었다.
전혀 이 상황에 쫓아가지 못하겠다는 표정. 하지만 적어도 여기서 더 거짓말을 했다간 자신이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건 깨달은 듯했다.
"죄, 죄송합니다. 거짓말을 했습니다. 제, 제가 먼저 시비를 걸었습니다. 하, 하지만 저 여자는...!"
"닥쳐라! 거기까지다!"
블라디미르는 도노반을 침묵시킨 후에, 아론을 돌아보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이번 건은 사과하지요, 아론 스팅레이. 우리 쪽 학생들을 제대로 교육하도록 다시...."
"정말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하나?"
아론이 말을 끊었다.
그에 블라디미르가 미간을 찌푸리며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진짜로 이렇게 나올 겁니까?"
"내 성격을 모르진 않을 텐데."
"너무 잘 알아서 탈이죠, 젠장."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끝내면 우리 쪽 손해도 이만저만이 아니지. 내가 그걸 용서하고 넘어가리라고 보나?"
"정말로 끝장을 보자는 말이군요."
아론의 물음에 블라디미르는 분한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제길!"
그러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휙 등을 돌려 현장을 벗어났다. 밀레테크의 보좌관들과 도노반이 눈치를 보더니 다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다 우뚝.
블라디미르가 걸음을 멈추더니 뒤돌아 아론을 보며 뇌까렸다.
"그 아이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길 바랍니다. 책임을 져야 할 테니까요."
"물론이다. 30분 후로 하지."
"그럼 [쇼케이스] 방식은 제가 정하겠습니다. 제기랄, 첫날부터 이게 뭐 하는 짓인지...!"
그러면서 블라디미르는 이내 훈련장을 떠났다. 한바탕 소란이 끝난 후에야 마침내 고요가 찾아왔다.
아론은 깊은 한숨과 함께 아이리를 돌아보았다.
"...아이리 앨리스밸."
"네? 왜, 왜요?"
"이제부터는 네 차례다. 준비하도록."
그러더니 마찬가지로 몸을 돌려 휙 떠나 버리는 아론.
내 차례라고?
대체 그게 무슨 뜻일까?
뭔가 큰일이 벌어진 것 같긴 한데, 도저히 이 상황을 쫓아갈 수가 없었다.
멍하니 서서 혼란스러워하고 있자니, 마리아가 아이리의 팔을 잡아끌었다.
"따라오세요, 앨리스밸 양."
"네? 어, 어디 가는 건데요?"
"군말 말고 따라오세요. 30분이면 준비 시간이 많지는 않습니다."
아이리는 하는 수 없이 마리아에게 질질 끌려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뭐가 뭔지 알 수 없었으나, 그녀의 예리한 감이 하나만은 확실하게 알려 주었다.
...아무래도 사고를 친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거하게.
* * *
마리아의 손길에 이끌려간 곳은 대형실내훈련장 147-A호의 옆에 붙어 있는 여학생용 락커룸이었다.
마리아는 그녀를 사물함들 사이에 있는 벤치에 앉히고서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데이터케이블을 손에 들었다. 자세히 보니 그 케이블은 마리아의 손목에서 뻗어 나온 것이었다.
"일단 아이리 양의 바이오 모니터부터 체크하겠습니다. 소켓에 연결할 테니 고개를 돌려주시겠습니까?"
"자, 잠깐만요! 그 전에 설명 좀 해 줘요! 지금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그 [쇼케이스]라는 건 또 뭐고요?"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는군요."
"설명을 해 줘야 알든 말든 하죠!"
"...."
아이리의 대답에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단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아이리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쇼케이스]는 일종의 대리전입니다."
"대, 대리전이라니요?"
"쇼케이스(Show Case)라는 이름답게, 기업들의 자존심 싸움입니다. 학생들로 펼치는 모의전이라고 할까요? 옛날부터 상류층들이 반쯤 흥미 삼아 벌이던 내기가, 일종의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지요."
마리아가 말하는 도중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빛났다. 아마도 메일을 수신한 모양이었다.
"조금 전에 승부 방식이 나왔군요. 마지막 일대일 모의전투 결과로 승부를 겨루게 될 것 같습니다."
"제가 그 도노반이라는 녀석과 싸우게 된다는 거죠? 바라던 바예요!"
"자신 있으십니까?"
"그런 게 뭐가 중요해요?"
아카데미에서 쫓겨날 염려 없이 그 자식을 정식적으로 밟아 줄 수 있다는 게 중요하지,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다.
물론 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만에 하나 패배하더라도 놈에게 몇 방 시원하게 먹여 주기만 한다면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이리의 대답에 마리아는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뭔가 잘못 생각하시는 것 같군요. 앨리스밸 양이 물러설 곳은 없습니다. 만약 패배한다면 최소 장학생 자격 박탈, 어쩌면 아카데미 퇴학까지 생각하셔야 합니다."
"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결과에 따라서는 스팅레이의 주가가 폭락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도련님께서 이사장직을 유지하기 힘들어지실 수도 있고요."
"자, 잠깐만요. 겨우 우리 학생들끼리 쌈박질 좀 하는 것뿐이잖아요? 겨우 그런 것 때문에 주가가 폭락한다든지, 이사장 직위가 박탈된다든지 하는 게 말이나 되는...."
"앨리스밸 양."
하아.
마리아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후원기업 측에서 아카데미 장학생 한 명을 길러 내기 위해 4년 동안 투자하는 금액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어... 그건...."
"학생마다 편차가 크긴 하지만 대략 적게는 1억 크레딧에서 많게는 10억 크레딧까지 들어갑니다."
"시, 십억...!"
생전 들어 본 적 없는 금액에 아이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혹여나 마리아가 자신을 겁주기 위해 액수를 부풀린 게 아닐까 싶었지만 거짓말을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급여, 급식, 피복 같은 직접비. 인력 운영, 장비와 시설 유지비용 같은 간접비. 물론 개인 모듈링 비용은 제외한 금액입니다."
"거, 거기서 더 늘어난다고요!?"
"4학년 기준 한 명당 들어가는 모듈과 개인 장구의 가격은 평균 5천만 크레딧. 만약 모듈링에 고레벨 신비모듈이 다수 포함된다면 가격은 계산하는 게 무의미해질 정도죠."
"헉...."
흔히들 적응자들을 인간병기라고 부르곤 하지만 실제로 그만한 돈이 들어가는 줄은 전혀 몰랐다.
그 정도 금액이면 정말로 학생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전차나 헬기 정도의 몸값을 지닌 셈이다.
"적응자 산업은 이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분야 중 하나입니다. 뛰어난 적응자 병사 한 명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생산콜로니를 하나 더 세울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되니까요."
"...이제 좀 이해가 되네요."
단순한 학생이 아니라 전술 병기.
개인의 재능에 따라서는 전략병기급 기량을 보여 주기도 하니 기업들이 학생들의 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저는 걸어 다니는 금덩어리를 망가뜨릴 뻔했던 거군요."
"마찬가지로 아론 이사장님은 직접 선발한 장학생에게 이상한 낙인이 붙는 걸 경계했던 겁니다."
백화점에서 파는 명품 가방이, 전문 장인이 아닌 E섹터 마약쟁이들의 손에 만들어졌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대체 누가 사겠는가?
그와 마찬가지다.
재단 이사장이 직접 선발한 장학생이 폴른 출신이라는 소문이 퍼지면, 덩달아 후원기업의 안목 자체가 의심받게 된다.
그리고 자연스레 기업 전체의 이미지도 덩달아 낮아지는 거고.
"결국 다 돈 때문이라는 거군요...."
다친 곳은 없느냐.
그렇게 묻던 아론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가 이내 아지랑이처럼 사라졌다.
'뭐, 역시 그런 거였겠지.'
결국 그 남자도 자기네 기업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그랬던 것에 불과했다는 거다. 하기야 정말로 자기를 걱정해서 그런 행동을 보였을 리가.
'실망스러울 것도 없어.'
애초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스팅레이의 인간은 사람을 단순히 '상품'으로밖에 취급하지 않는다는 건 뉴 발할라 시티의 상식이다.
...그런데 뭘까.
이 묘한 착잡함은.
"...."
"왜 그러십니까?"
"아뇨, 암튼 결론은 간단하잖아요. 무조건 이길 것."
만약 패배하는 순간 자신은 장학생 자격이 박탈되는 것은 물론, 아카데미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 아론 역시 이번 사태에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날 테고.
일부러 패배해서 스팅레이의 이름을 가진 인간에게 골탕을 먹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어서야 자신의 '진짜 목표'에서는 한없이 거리가 멀어지고 만다.
"어쩔 수 없죠. 결국 제가 엎지른 물이니, 제가 닦아야겠죠. 목적이야 어찌됐든, 이사장이 절 감싸준 건 사실이니까요."
"...."
아이리가 말했다.
그러자 마리아가 묘한 반응을 보였다. 표정의 변화는 거의 없었으나, 아이리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뭐가 문제라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
아이리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마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
아이리에게는 인간병기 운운했지만.
사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카데미 학생들이 결국 스무 살 남짓한 젊은이들이라는 부분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
혈기 왕성한 녀석들을 한데 모아놨으니 하루가 멀다 하고 문제가 일어나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문제가 벌어지면 보통 실무자들 선에서 규정에 따라서 벌을 주는 식으로 처리한다.
애초에 애들끼리 좀 싸웠다고 후원 재단 최고 책임자가 나서서 [쇼케이스]니 뭐니 하면 아카데미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으니.
바꿔 말하자면.
아무리 직접 선발한 장학생이라고 해도, 이번 일은 아론이 과민 반응했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어째서?'
[쇼케이스]는 공식적으로 벌이는 모의전인 만큼, 양측 기업에서도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일종의 내기 도박.
승리한다면 여러모로 큰 이득을 거둘 수 있지만, 패배한다면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정말로 승부에 자신이 없다면 함부로 걸지 않는 게 상책이다.
'밀레테크 쪽의 자신감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도노반 폰 딜레이는 밀레테크 보안부 소속 고위 간부의 아들이다. 실력이야 말할 것도 없고, 밀레테크 내부 정치 때문에라도 함부로 버릴 수 없는 인재다.
말하자면 밀레테크의 핵심 유망주.
하지만 아이리는 아니다.
폴른 출신의 문제아. 원한다면 얼마든지 버려도 상관없는 패를, 아론은 끝까지 끌어안으려고 들고 있다.
그것은 어째서인가?
어째서 아론은 [쇼케이스]를 벌이면서까지 아이리의 '폴른' 낙인을 벗겨 내려고 하는 것인가?
대체 아이리의 무엇을 보고서 그녀의 승리를 자신하는 것인가?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이 아이리라는 아이에게 있는 것인가?
이 두 눈으로 확인해 봐야만 한다.
"설명은 이제 충분할 것 같군요. 슬슬 바이오모니터를 체크해 봐도 되겠습니까?"
"아, 네. 여기요."
아이리는 의심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잿빛 머리카락 뒤에 가려져 있던 목덜미가 드러났다. 피부 중앙에 데이터칩과 모듈칩을 꽂을 수 있는 소켓 구멍이 있었다.
마리아는 곧장 데이터 케이블을 그곳에 연결했고, 아이리의 승인을 받아 생체데이터를 전송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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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 체크]
신경계: 매우 건강
근육계: 매우 건강
내분비계: 매우 건강
호흡계: 매우 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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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화계: 주의 요망(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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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는군요.'
생체정보에서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한 마리아는 나노머신 및 모듈 체크로 넘어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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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마리아의 시야에 마리아의 시야에 아이리의 모듈링 정보가 떠올랐다. 묘한 긴장감에 마리아는 마음을 추스르며 그것을 찬찬히 살펴보려 했으나.
'이, 이건 대체....'
첫 줄에 적힌 내용을 보자마자.
마리아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2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