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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100%EXP / Chapter 17: 17

Kapitel 17: 17

* * *

한 번 기세를 잡자 권속들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마기라는 강력한 무기를 봉인 당한 시점에서 그들은 우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살아남은 권속들은 전부 도망쳤다.

다크 엘프 메민은 다시 붙잡혔다.

"인간 놈들······. 나약의 마족님이 두렵지 않은가?"

"시끄러워. 너희들은 뭐, 인질 같은 개념도 없을 거 아니야? 죽고 싶으면 계속 그렇게 지껄여 보시던지."

"윽······."

김상욱의 험악한 눈빛에 메민이 입을 다물었다.

"뭐, 쓸모는 있을 것 같으니 데려가죠. 함정 같은 게 있으면 이 녀석을 던져 넣으면 될테니까."

"역시 김상욱. 적이 아니라 다행이라니까."

"난 볼 때마다 악당 같다고 느낀다고."

오성 길드원들도 그런 생각에 동조했다. 오성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텐데, 나름대로의 인정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점은 김상욱의 수완이 좋다고 해야겠지.

"잠시 위쪽을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오르티마."

내 말에 오르티마가 와이번으로 변했다.

"우와, 이거 뭡니까?"

"마수를 길들이신겁니까?"

"역시 소문의 용병······."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전투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기 때문일 거다.

"말했잖아, 대단한 사람이라고."

대놓고 듣기엔 낯간지러운 말이다.

그런 수군거림을 들으며.

나는 녀석의 등 뒤에 올라탔다.

그때 김상욱이 앞으로 나섰다.

"저도 타도 되겠습니까? 전체적인 상황을 보고 싶어서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나도 탈래요!"

"너는 여기서 기다려. 엘리스, 진세아 못 도망가게 꽉 잡아."

"알겠습니다!"

화아악!

와이번에 타고 단숨에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나무의 키를 넘어, 하늘 높이 올라오니 대삼림의 모습이 한 눈에 보인다.

이곳 저곳으로 뻗어져 있는 강줄기와 우거진 나무들로 가득한 숲.

브라질의 아마존이 이런 느낌이었던가.

고오오—.

그 중심이 되는 지점에 거대한 마기가 모여 있다.

마치 살아 있는 심장처럼 꿈틀 거리고 있다.

마기 조종을 익히기 전에는 보이지 않던 구체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불길함을 너머 흉악함이 느껴진다.

시험삼아 마기를 움직이려 시도했지만, 꿈쩍도 않는다.

'저기에 나약의 마족이 있겠군.'

강력한 주술이 마기를 옭아매고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내게 상위 마족의 마기 지배를 넘어설만한 힘은 없다.

"후우······."

와이번의 옆에 타고 있던 김상욱이 한숨을 내뱉었다. 바람에 그의 검은 머리가 흩날린다.

"드디어 말할 시간이 생겼네."

그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지한님이 센스가 있으셔서 망정입니다. 김민수한테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보고하는 노예가 한 마리있거든요."

대마법사 김민수.

그는 인류의 배신자다.

최후의 최후까지 그 사실을 들키지 않았을 정도니 철두철미할 것 같았다.

"그런거였군."

"아직까지는 완벽한 신임은 못 받았나 봅니다. 그 자식이 마족과 관련이 있는 건 확실하지만, 누군지까지는 모르겠습니다."

김상욱은 머리를 긁적였다.

"좋네. 이번 공략에 대해선 별 말 없었나?"

"예, 권속을 하나 잡아 오라기는 했는데. 딱 거기까지입니다."

그래서 다크 엘프를 사로 잡은 건가.

처음부터 죽일 생각은 없었던 모양.

왜 다른 마족의 권속을 잡아오라고 한거지?

그 점에 대해선 모르겠다. 바뀐 미래에서도 김민수의 행적은 모호했다.

그가 마왕의 수하가 되었다는 점만 명확할 뿐.

"그래,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물론입니다. 이 빌어먹을 마족 놈들 우리 세계에서 몰아내야하지 않겠습니까."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던 김상욱이 말했다.

"근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정체를 들켰지 않습니까."

"이제 상관없어."

"하기야, 깜짝 놀랐습니다. 도대체 뭡니까. 마기를 다루고, 그 화살 그건 또 뭡니까. 진짜······. 저한테만 알려주시죠."

"싫어."

"거 참 너무하시네."

이후로 김상욱에게서 몇 가지의 정보를 추가로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틀림없이 훌륭한 스파이다.

화아악—!

와이번은 다시 바닥으로 내려왔다. 김상욱을 향해 오성 길드원들이 모여들었다.

"어땠습니까?"

"공략 속도를 좀 더 내야할 것 같던데. 마족놈이 중심부에서 뭔가 꾸미고 있었어."

"하아, 쉽지 않겠네요."

공중에서보니 여러가지가 명확해졌다.

마기의 흐름을 느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흩어져 있던 권속들이 중심부로 모여드는 움직임이 보였다.

'나약의 마족도 방침을 바꾼 거겠지.'

내 힘을 대략이나마 확인했을테니 합당한 조치를 취한 것이다. 권속들을 무의미하게 소모시키는 것보단 마지막을 대비한다는 판단.

'그게 우리에겐 오히려 도움이 된다.'

권속들이란 방해물이 사라진 지금.

우리는 제단을 향해서 빠르게 나아갈 수 있었다.

간혹 대삼림의 마수들이 무리를 지어 우리를 습격했지만.

"낑, 끼잉!"

"깨갱······."

내가 내뿜는 강력한 마기 앞에서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 이곳의 마수들은 대부분 광폭화 되어 있었다.

이쪽뿐만 아니라, 다른 길드들도 탐색이 순조로울 거다. 권속들이 중심부로 도망쳤기에 그들을 막을 건 없었다.

"최상위 S급 게이트라는 게 안 믿길 정도로 쉽네."

"문제는 환상의 마족 같은 놈이 하나 더 있다는 거지."

"아직도 그때 생각만하면 몸서리가 쳐져."

이틀째되는 날 아침.

우리는 정화의 제단 앞에 도착했다.

"찾았다!"

오성의 헌터들이 질서정연하게 주위를 경계하며 다가갔다. 그때 속박된 다크 엘프 메민이 소리쳤다.

"배고프다! 밥을 내놔라."

"뭐야, 그건 무슨 신호인가?"

헌터들이 일제히 정지하며 주위를 두리번 거렸지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가 있기는 했던 모양이다. 암호 같은 거였겠지.

다만, 권속들은 전부 중심부로 도망쳤다.

그걸 몰랐던 메민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배고프다고······."

"이 녀석은 무시하고, 불이나 피우자고."

우거진 수풀을 치워내자, 검은색 돌로 이뤄진 제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중심에는 신비한 기운을 품은 목재가 자리잡고 있었다.

화르륵!

길드원 중 하나가 화염 마법을 사용해 제단에 불을 붙였다. 불은 붉은 색이 아니라 새하얀 색으로 불타올랐다.

『 첫번째 제단의 불을 밝혔습니다. ( 1 / 3 ) 』

『 정화의 불길이 사악한 기운을 몰아냅니다. 』

파아아—!

제단 위로 새하얀 빛의 기둥이 샘솟아 올랐다.

"이제 우리 할 일은 끝났으니까, 다른 장소에서 불을 붙이길 기다리면 되겠네. 잠시 휴식."

얼마지나지 않아 두번째 제단에서도 빛 기둥이 솟아올랐다.

『 두번째 제단의 불을 밝혔습니다. ( 2 / 3 ) 』

"이제 하나 남았네요."

"다들 실력있는 길드니까. 남은 하나도 금방 되겠네요."

나는 배낭에서 식재료를 꺼내 간단한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식빵 사이에 채소와 햄을 끼운 단순한 샌드위치다.

『 스킬 '중급 요리 Lv.11'을 발휘합니다. 』

하지만 내 마력과 스킬이 깃들어 그 맛은 차원이 다를 거다.

"맛있어요!"

"오, 오빠, 여기에 뭘 넣은거에요?"

샌드위치의 한 귀퉁이를 베어문 진세아가 빵을 열었다 닫았다 살펴본다.

"이 요리 솜씨는 너무 대단한데요······."

윤서현 헌터도 감탄하며 샌드위치를 먹는다.

만들기 어렵지 않았기에 나는 오성 사람들에게 나누어줬다.

나약의 마족과 싸우기 전에 만반의 준비를 해둬야 했다.

"느, 능력치가 오르는데요?"

"맛도 최곱니다. 이지한 헌터님을 오성에 영입해야 하는 거 아닌가."

"길드장님한테 바로 건의해. 이건 중대사항이다."

다들 분위기가 좋다.

"배고프다고 했었지. 먹어라."

나는 기둥에 묶여 있는 다크엘프 메민에게도 샌드위치를 물려줬다.

"허억······?"

충격받은 표정의 메민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모두가 식사를 마칠 때 즈음.

샤아아—!

저 멀리에서 새하얀 빛 기둥이 터져나왔다.

"오오, 드디어."

『 세번째 제단의 불을 밝혔습니다. ( 3 / 3 ) 』

『 모든 제단에 정화의 불이 타오릅니다. 』

세 개의 빛의 기둥이 하나로 이어졌다. 하늘에서 바라보면 삼각형의 모습을 하고 있을 거다.

그리고 그 중심부.

대낮임에도 눈부시게 밝은 빛의 기둥이 솟아올랐다.

마기가 모여 있는 장소이자, 나약의 마족이 우리를 기다리는 장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출발하죠."

나는 내 한계돌파 퀘스트 창을 다시 한 번 띄웠다.

『 <A등급> 한계돌파 퀘스트 』

- 목표 : 프로젝트 '아포칼립스' 저지

- 클리어 보상 : ???

드디어 이 퀘스트의 끝을 낼 시간이 다가왔다.

나약의 마족.

반드시 놈을 쓰러뜨리고 프로젝트 아포칼립스를 저지하겠다.

148화 타인의 재능(4)

"네 놈들은 어차피 죽은 목숨이야."

샌드위치를 전부 삼킨 다크 엘프 메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이, 권속. 입 다물어."

"아윽."

그녀는 김상욱에게 한 대 얻어맞자 다시 조용해졌다.

'자신만만해 하는 이유가 있기는 하겠지.'

나약의 마족이 위치한 중심부.

중심부로 향하는 길은 총 세 곳이다.

오성, 수호, 은날 세 개의 길드가 동시에 나아간다.

'예정보다 훨씬 빠르다.'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2주까지 바라보던 공략이 사흘 남짓한 시간에 이뤄졌다.

"중심부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느껴져요. 저희를 막기 위해서 총력전을 준비하는 걸지도 몰라요."

"윤서현 헌터 생각이 맞을 겁니다. 호되게 당했으니까요."

윤서현의 능력과 내가 가진 미래의 정보 덕분이었다.

이는 헌터들의 체력과 정신력 보존에 큰 영향을 미친다.

공략이 일주일 이상 이어지면 헌터들은 지칠 수 밖에 없다.

'어쨌든 목숨을 걸고 공략을 하는 거니까.'

그걸 최소화 시켰으니 공략의 성공 확률은 더욱 높아졌을 터.

'나약의 마족의 목적은 게이트의 붕괴.'

놈은 게이트가 공략되지 않도록 우리를 막아설 것이다.

중심부로 이동하는 도중.

이것 저것 생각을 정리하던 윤서현이 진지하게 물었다.

"나약의 마족도 제약을 사용하겠죠?"

"그럴 겁니다."

"이름에서 유추해보자면······. 상대의 힘을 나약하게 만든다거나······."

맞는 말이지만 한가지가 빠졌다.

"제약은 마족 본인에게도 적용됩니다."

"전부 약해진다는 건가요? 나약의 마족을 포함해서요?"

"어, 그렇게 되면 수가 많은 우리가 유리한 거 아니에요?"

진세아가 단순명쾌한 답을 내놨다.

실제로 그렇다.

물론 나약의 마족은 그런 식으로 제약을 사용하지 않을 거다. 자기가 유리한 방식으로 사용하겠지.

윤서현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부협회장은 딱히 제약을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나약의 마족이 어떤 공격을 해올지는 모르는 거네요. 이거 골치 아프네요."

"일단은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겠죠."

모든 것을 설명하기엔 보는 눈이 너무 많다.

"중심부 근처에 도착한 것 같습니다. 다른 길드에 연락부터 취해보죠."

김상욱의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성의 헌터들이 무기를 꺼내들었다.

"수호, 은날. 둘 다 입구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래? 그러면 시작해보자고."

길드원의 말에 김상욱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 보스를 처치하고 최후의 제단을 밝히세요. ( 0 / 1 ) 』

여기서 말하는 보스란 나약의 마족이다. 프로젝트 아포칼립스를 위해선 감수해야 하는 위험이었을 거다.

고오오오—!

김상욱의 주변으로 검은 기운이 오라처럼 방출되었다. 마기와 다름없지만, 문제 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마법은 적들도 사용하니 마기 또한 인간이 다루지 못하란 법은 없다. 능력의 한 종류라고 생각되는 모양이다.

그리고 김상욱이 앞으로 한걸음 내딛는 순간.

"어리석은 인간들이 기어코 여기까지 왔구나!"

"우리의 뒤에는 마(魔)를 따르는 자가 계신다! 망설이지 말고 싸워라!"

"남김 없이 죽여 대업을 이뤄라!"

중심부로 이어지는 길목에 숨어 있던 권속들이 튀어나왔다.

그 숫자는 대강봐도 우리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다.

그러나 오성의 헌터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해보자, 이 새끼들아!"

"마족이 아니라 잔챙이들이야, 별 거 없어!"

"전부 쓸어버려!"

오성의 탱커들이 방패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그들의 얼굴은 자신감에 차있었다.

뒤쪽의 헌터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한차례 권속에게서 승리해봤기 때문이다.

콰아앙!

탱커들의 방패와 전열의 권속들이 맞부딪혔다. 탱커들의 뒤쪽에서 불꽃과 얼음의 마법이 권속들을 덮쳤다.

콰과과과—!

반면 권속 진영에선 마기를 사용한 원거리 공격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나를 의식한 건가.'

합리적인 판단이지만.

그래서는 우리를 이길 수 없을 거다.

휘뤽, 휙.

두 개의 단검을 좌우로 빙글 돌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김상욱.

콰가각—!

그의 단검이 호쾌한 곡선을 그리며 권속들을 헤짚었다.

"마기를 다루는 인간이라! 흥미롭구나! 실력을 한 번 볼까?"

그런 그의 앞을 로브를 뒤집어 쓴 권속이 가로 막았다. 김상욱은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놈에게 달려들었다.

『 동료 김상욱이 스킬 '절대 급소 타격 Lv.6'을 발휘합니다. 』

콰악, 콰악!

"커허억······."

로브를 쓴 권속이 허무하게 바닥에 쓰러졌다.

"카악, 퉤."

김상욱은 침을 뱉고서 다시 쌍단검을 들어 올렸다.

"이, 이 새끼가······!"

그 모습에 권속들이 분개하며 달려들었다.

그렇다고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김상욱은 차분하게 권속들을 쓰러뜨려나갔다.

마기라는 재능을 거머쥔 순간부터, 김상욱의 실력도 나날이 증가한 모양.

마기를 다루는 실력이 권속보다 우세함은 물론.

쌍단검을 다루는 실력 또한 예사롭지 않다.

"별 것도 아니네!"

"우리가 더 강하다!"

승기는 우리쪽에 있었다.

카앙!

단검으로 권속의 창을 막아낸 진세아가 뒤로 물러났다.

"오빠, 뭔가 느낌이 안좋아요."

숲 너머의 어두운 공간에서 불길한 기운이 느껴진다.

"동의해."

촤아아악—!

아니나 다를까,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검은 줄기가 뿜어져나왔다.

"뭐, 뭐야 저건?!"

"우리가 막을게!"

검은 줄기가 노리는 건 우리가 아니었다. 땅바닥에 누운 권속들과 상처를 입고 후퇴한 권속들이었다.

콰악!

그들의 뒷목에 검은 줄기가 꽂혔다. 권속들의 피부 위로 검은 핏줄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래, 이거야······."

"나약의 마족께서 우리의 뒤를 봐주신다."

"아아, 힘이 돌아온다."

마기가 권속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심지어는 바닥에 쓰러진 자들마저 일으켰다. 동시에 그들의 눈동자가 붉어졌다.

"그래봤자 크게 다를 게 있겠······."

전방에서 쌍단검을 내지른 김상욱.

그 공격을 받아낸 건 아까 쓰러뜨렸던 로브를 걸친 권속이었다.

"다르지, 다르고 말고."

뒷목에 검은 줄기가 이어진 권속은 아까와는 달랐다.

콰앙! 콰아앙!

더욱 빠르고 강해진 공격이 김상욱에게 쏟아졌다. 김상욱이 상대의 급소를 노리고 찔러도, 금세 수복하고선 다시 공격을 펼쳐올 뿐이다.

"뭐, 이런 개 같은······!"

여유롭던 김상욱의 표정에 금이갔다. 이를 악문채 필사적으로 쌍검을 휘둘러야하는 지경이었다.

"미친!"

"이 놈들······!"

권속들의 공격이 훨씬 강해지고 빨라졌다. 방금 전과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오성의 헌터들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나는 차분하게 소리쳤다.

"놈들의 뒤쪽에 있는 검은 줄기를 잘라내면 됩니다!"

서걱—!

검으로 권속의 목에 있는 검은 줄기를 끊어내자, 놈은 실이 끊긴 인형처럼 쓰러졌다.

여기서부턴 나도 전력을 내야한다.

『 타재간파의 서를 발휘합니다. 』

『 모든 능력을 활성화합니다. 』

내 역전의 검 위로 검은 오러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기의 운용.

그것은 마력과 다르다.

마력이 스킬이나 마법을 발휘하기 위한 자원에 해당한다면.

마기는 원하는 일을 구현화 해낼 수 있는 능력에 가까웠다.

"엘리스. 성배."

"여기요, 사부님!"

엘리스가 건네 준 성배를 받았다.

『 소유한 마력이 3배로 증가합니다. 』

나는 마기를 아낌없이 발산하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우왓, 오빠가 하늘을 날았어?!"

"뭐, 뭐에요?"

"잠깐 갔다 오겠습니다."

나는 계속해서 하늘 위로 날아 올랐다.

본래는 허공답보나, 공중 부유와 같은 스킬이 필요한 행위이지만.

마기로는 출력과 능력만 받쳐준다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마족들은 어지간히도 사기적인 능력을 태생부터 타고나는 거다.

'나쁘지 않군.'

공중에서 바라보니 전황이 한 눈에 보인다.

"크아악!"

"젠장, 줄기를 자르라곤 해도······. 이 놈들 보통이 아니야."

"어떻게 좀 해봐!"

검은 줄기를 등에 단 권속들이 헌터들을 공격하고 있다. 오성 헌터들은 계속해서 밀려나고 있다.

스윽.

나는 검을 뒤로 뻗었다.

공중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단 건, 스킬을 발휘하기 최적화 된 장소를 고를 수 있단 의미다.

파직, 파지직!

검에 응축된 오러와 마기가 크게 진동하고 있다. 검이 몇 배는 더 무거워진 느낌이다. 나는 힘을 주어 검을 앞으로 휘둘렀다.

『 특수 스킬 '마기 조종 Lv.12'를 발휘합니다. 』

『 스킬 '영웅의 힘 Lv.11'을 발휘합니다. 』

'일일이 놈들의 뒤에 있는 줄기를 제거할 필욘 없다.'

전부 쓸어버리면 그만이니까.

콰아아아—!

방출된 마기가 권속들이 있는 전장을 휩쓸었다.

* * *

같은 시각 수호 길드.

그들도 검은 줄기 때문에 고전하고 있었다.

사최헌은 이를 악물었다. 쓰러뜨려도 계속해서 일어나는 권속들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뭐, 이런 놈들이 다 있어?!"

눈이 붉게 변한 권속들은 완전히 다른 생물이었다.

"오성에서 연락입니다! 뒤쪽에 달린 검은 끈을 끊어내면 된답니다!"

"야, 그건 척보면 알겠다. 이 상황에 그걸 어떻게 하냐가 문제지."

이지한이 위치한 장소와 달리 권속들은 거리낌없이 마기 탄환을 날려대고 있었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상황.

저벅, 저벅.

그런 그들의 앞으로 신태양이 걸어나갔다.

"제가 한 번 해볼게요."

"뭐? 이 상황에서······."

사최헌이 미처 말리기도 전이었다.

신태양의 눈 위에 푸른 이채가 서렸다.

그리고 다음 찰나.

콰아아—!

마력이 서린 강렬한 돌풍이 사최헌과 길드원들을 지나쳤다.

"뭐?!"

"어느틈에······"

단단히 자리 잡 은 권속의 무리를 뚫은 신태양은 그들의 뒤편에 서 있었다.

신태양이 검집에 검을 집어 넣는 순간.

콰과과과——!

십자 모양의 광휘 수십 개가 권속들의 등 뒤에서 터져나왔다. 동시에 권속들을 잇고 있던 검은 줄기가 모두 끊겨 나갔다.

그 충격에 권속들이 휘청거렸다.

수호 길드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이다! 다들 달려!"

"태양이가 만든 기회다!"

"갑니다!"

은빛의 날개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투두두두—!

길드장 윤지은이 쏘아낸 녹빛의 마력화살이 장대비처럼 쏟아졌다. 마족들이 쏘아대는 마기 세례가 전부 허공에서 격추되었다.

"천성호가 나갑니다!"

"······."

그 틈을 천성호와 버서커 신아람이 밀고 들어간다. 성녀 채아연의 가호를 받아 더없이 날렵하고 튼튼해진 상태였다.

콰과과과—!

마기의 끈이 무색하게 밀려나는 권속들.

놈들의 얼굴이 공포에 질리기 시작했다.

"이, 이럴 리가 없어······!"

"나약의 마족님께 받은 힘이 먹히지 않을 리가!"

콰아앙!

"뭐란거야, 이 놈들은?"

천성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지축이 흔들리는 듯한 진동이 일어났다.

"생각보다 별 거 없어."

버서커 신아람이 쏘아대는 붉은 마력은 권속들을 통째로 집어 삼켰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나약의 마족.

'이, 이럴 리가

그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이, 인간의 수준이 이 정도라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대적자 하나만을 적으로 상정하던 그였다.

다른 인간들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자신의 힘을 받은 권속들의 상대가 될 거라곤 조금도 생각치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이 왜 이렇게 강하냔 말이다.

도저히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인간이라고 얕볼 수 있는 수준은 한참 전에 끝났다.

나약의 마족은 양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예언의 마족, 그 빌어먹을 새끼······. 도대체 맞는 예언이 하나도 없어.'

나약의 마족은 손에 든 금빛 조각을 땅 바닥에 던졌다.

땡그랑.

지원이라던 에픽 아이템도 절반만 손에 들어왔다.

'이딴 쓰레기를 쥐어주고 날 능멸해? 예언의 마족 네 놈의 실책은 반드시 마계왕께 알리겠다.'

그러나 당장이 급했다.

고오오······.

프로젝트 아포칼립스를 위한 마기는 아직 불충분하다.

인간들의 공략이 너무 빨랐던 탓이다.

'젠장······! 대적자.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는거냐.'

대적자를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약의 마족의 눈가에 핏줄이 돋아났다.

헌터들을 멈춰야만 했다.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다.

"놈에게 전해라. 이 몸이 대화를 원한다고."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보좌권속 제레는 차분한 걸음으로 중심부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잠시 뒤, 나약의 마족은 돌아온 제레에게서 이지한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

"뭐냐, 대적자가 뭐라고 말했나?"

"그것이······."

잠시 머뭇거리던 제레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개소리하지 말랍니다."

149화 타인의 재능(5)

"이 건방진······."

나약의 마족의 미간이 좁혀졌다. 어린 아이의 표정이라곤 믿기지 않는 험악한 표정이었다.

"세 갈래 길을 지키던 권속 대부분이 정리 당했습니다. 이대로면 이곳까지 뚫고 들어오는 것도 시간 문제입니다."

툭툭.

제레의 보고를 들은 나약의 마족은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실제로 수세에 몰린 상황은 맞다.

다만, 그것은 프로젝트 아포칼립스를 반드시 실현시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본분을 잠시 내려놓는다면······.

나약의 마족이 가진 패는 많았다.

"놈은 스스로 기회를 걷어찬 거나 마찬가지다."

"어찌하시겠습니까?"

"프로젝트 아포칼립스를 조금 늦추더라도 대적자를 처리해야겠다."

오랜 세월을 살아 온 그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대적자는 여기서 막아야 한다.

여지껏 수많은 종족이 있었으나 그들 모두 마족의 지배 대상에 불과했다.

그들은 마족에게 저항 했으나, 제대로 된 성과를 보인 종족은 소수에 불과했다.

'마족이 가진 힘, 기술, 지혜, 능력······. 모든 것이 우위에 있으니. 당연한 일.'

그러나 지금.

한 인간이 그러한 이치를 뛰어넘어 저항하고 있었다. 아니, 저항 수준이 아니라 역으로 마족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었다.

마족이 세운 계획까지 모조리 무산 시키면서.

고민하던 나약의 마족이 입을 열었다.

"제레, 재액을 방출 시켜라."

"괜찮으시겠습니까? 위쪽의 존재들께서 노하실지도 모릅니다."

"상관 없다. 대적자를 포함해 여기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을 전부 죽인다."

위쪽의 마족들이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 나약의 마족도 알고 있었다.

치욕의 밤.

어떤 하위 종족이 일으킨 반란.

초월자들마저 가세한 전대미문의 참사.

최상위 마족들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건이었다.

제레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들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희망마저 꺾어 버리는 것은 의도치 못한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나도 안다. 그러나 고작 대한민국 하나다. 대적자의 존재가 지금은 더 큰 위협이야."

"그리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제레가 자신의 검은 날개를 펼쳐 날아 올랐다. 수정구를 든 그녀는 헌터들이 모여들었을 중앙을 향해 날아갔다.

아포칼립스를 위해 모아둔 마기.

그것을 사용하면 대적자도 능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

나약의 마족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대적자, 네 놈은 후회하게 될 것이다."

다소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반드시 대적자를 없애야 했다.

놈에겐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 * *

"마족이 협상을 시도한 건 처음있는 일 아닌가요?"

"놈이 불편한 상황이란 증거겠죠."

협상은 거절한다.

놈들은 인간을 같은 수준으로 보지 않는다.

침략에서 손 떼겠다고 선언 할 리도 없고, 애초에 놈에게 그런 권한이 있지도 않다.

'해봤자, 날 회유하려 들었겠지.'

그 자리에서 무언가 그럴싸한 협의를 마쳐도 잠시 뿐이다.

세계가 멸망하는 미래를 바꿀 순 없다.

"이쪽은 정리가 끝났는데, 다른 길드는 어떻습니까?"

권속들은 전부 처리했다. 오성의 연락책이 곧바로 대답을 해줬다.

"아, 다른 길드도 상황이 좋습니다."

"좋습니다. 진입하죠."

헌터들은 권속들에게 이어져 있던 줄기까지 모두 끊어내고서 전진했다.

세 갈래의 길이 하나가 되어 모이는 지점.

"스승님, 제가 왔습니다!"

"후우, 드디어 다들 모였구만."

"이제 보스가 나올 차례라는 건가."

세 개의 길드가 한 자리에 모였다.

오성, 수호, 은날.

'다들 큰 피해는 없어 보인다.'

150명이나 되는 적지 않은 수다.

이들 중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S급.

나머지는 A급 상위에 위치하는 자들이다.

여기까지 왔으면 인간측이 유리하다.

"언니!"

"서현아. 무사했구나. 다행이야. 지한씨 덕분인가?"

은날의 길드장인 윤지은이 말했다.

그녀의 말에 윤서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불만스럽다는 표정이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닌데. 언니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 약하지 않다니까?"

"그래, 그런 것 같네."

"이런다니까. 나 진지하거든······?"

두 자매가 잠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수호 길드의 길드장 사최헌이 앞으로 나섰다.

"저 문만 지나면 마족이 기다리고 있겠군요."

이끼에 둘러 싸인 거대한 돌문.

유적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그 위로 거대한 마기의 구체가 보인다.

저 아래에 나약의 마족이 있단 거다.

"수호 길드의 컨디션은 좋습니다. 오성은 괜찮은가요?"

"아아, 물론입니다. 부상자가 조금 있기는 하지만 전력에 문제는 없어요."

사최헌의 말에 김상욱이 대답했다.

"그래도 큰 전투가 있었으니 가능하면 휴식을 취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적은 우리를 그렇게 놔둘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쿠우우웅······.

육중한 돌문이 좌우로 열리며 그 틈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검은 날개와 긴 생머리, 머리 위에 떠오른 흑색의 고리.

그녀는 차분한 표정으로 헌터들을 살폈다.

아까 나약의 마족의 말을 전하던 권속이었다.

이름은 제레. 나약의 마족의 보좌권속이랬나.

잠시 풀어져 있던 헌터들이 일제히 긴장하기 시작했다.

"천사······?"

누군가가 나지막이 말한 말에 제레가 대답했다.

"아뇨, 천계인이랍니다. 신기하죠. 저도 당신들이 신기해요. 어찌 이렇게 나약하고 벌레 같은 종족이 있을까. 종종 생각합니다."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그리 말했다.

명백한 도발.

"그쪽도 날개 달린 새랑 다를 거 없어 보이거든?!"

도발에 넘어간 진세아가 소리쳤다.

"······. 나약의 마족께서는 분명히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걸 걷어찬 건······."

"야! 새대가리! 무시하지마!"

"조용히 해요.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난건가요?"

제레의 한쪽 눈이 번뜩였다.

"그, 그러면 내가 쫄 것 같아?"

진세아가 한발자국 물러났다. 동시에 뒤쪽에서 화살과 마법이 제레를 향해 날아왔다.

콰과광—!

제레를 둘러싼 검은 보호막 앞에 공격은 전부 가로막혔다.

"쯧. 대화가 통하지 않는 종족이군요."

권속들을 한가득 보내놓고 이제와서 그런 소리를 한들 웃길 뿐이다.

혀를 찬 제레의 수정구에서 새하얀 빛이 솟아올랐다.

쏴아아—!

그와 동시에 위쪽에 있던 마기의 구체에서 검은 액체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검은 액체가 폭포처럼 쏟아져 바닥을 적신다.

가장 먼저 반응한 건 포로인 메민이었다.

"으악! 재, 재액이잖아! 뭣들하냐?! 도망 안치고?!"

"어머, 메민도 있었네요. 마족을 배신하고도 뻔뻔하군요."

제레가 혐오스럽다는 듯이 다크 엘프 메민을 쳐다봤다.

"붙잡힌 거야, 멍청아! 사, 살려줘!"

"배신자는 인간들과 함께 죽으세요."

촤르륵!

제레의 손에서 뻗어나간 수 십 개의 검은 줄기가 헌터들을 가로질렀다.

"전투 개시!"

"놈이 뭔가 하기 전에 끝내자고!"

"저거 우리를 노리는 게 아닌데?"

검은 줄기는 헌터들의 머리 위를 그대로 지나쳤다.

"바보들! 권속들의 시체를 끌어 오는거 잖아!"

메민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뭐? 시체를 어디에 쓰려고······."

권속들의 시체가 순식간에 제레의 앞에 차곡차곡 쌓였다. 제레는 검은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 올랐다.

구체에서 쏟아진 재액이 권속들의 시체를 흠뻑 적셨다.

꿈틀, 꿈틀!

재액에 휩싸인 권속들은 점차 한덩이로 뭉쳐졌다.

바닥을 흠뻑 적신 재액은 얕은 파도처럼 헌터들의 발아래로 다가왔다.

"다들 조심해요!"

쏴아아—!

재액은 마치 생명을 가진 액체처럼 헌터를 덮쳤다.

"크아악!"

헌터 하나가 그대로 재액에 휩싸였다. 검은 액체가 그의 몸을 잠식해나간다. 발버둥치던 그가 바닥에 쓰러졌다.

헌터들 전체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 스킬 '마기 조종 Lv.12'를 발휘합니다. 』

나는 마기를 사용해서 바닥에 쓰러진 헌터를 뒤쪽으로 보냈다. 피부가 녹아들고, 마력을 전부 빼앗겨 위독한 상태였다.

'재액이라······. 멸망한 세계에서 보던 걸 여기서 직접 보게 될 줄이야.'

마계의 악의를 전부 담은 재해.

순도 높은 마기가 빚어낸 저주의 일종이다.

상위 마족 중에서도 일부만 다룰 수 있는 특수한 물질.

'마기 조종으로도 다룰 수 없는 물질이다.'

어깨에 방어구가 되어 있는 오르티마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게 느껴진다.

나는 역전의 검을 들어 올렸다.

크어어어—!

권속의 시체가 한 덩이가 되어 만들어진 거인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은 흡사 늪지대의 거대 트롤과 같다.

몸에서 검은 액체가 뚝뚝 흘러내린다.

쿠우웅!

놈의 주먹이 헌터들을 강타했다. 공격을 피하는 건 간단했으나, 이후 손에서 튀어나간 재액이 헌터들을 감쌌다.

"으아아악!"

"사, 살려줘!"

"조금만 기다려요! 정화의 방법을······!"

투두두두!

윤지은의 화살이 재액의 거인을 두드렸다. 수백 발의 녹빛 화살이 놈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콰아아앙!

이어지는 신태양과 천성호의 합동 공격.

붉은색과 푸른색이 뒤섞여 거인의 몸을 강타했다. 거인의 절반을 날려버린 강력한 일격.

그 충격파가 헌터들을 훑고 지나갈 정도였다.

그러나 재액은 거인의 잃어버린 상반식을 단숨에 복구했다.

"뭐, 저런 괴물이 다 있어······?"

"잠깐, 방금 전력이었는데."

천성호와 신태양의 표정이 굳어졌다.

거인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합쳐지지 못한 권속들이 재액의 괴물이 되어 헌터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살짝 닿기만 해도 치명적인 극독이 헌터들을 몰아냈다.

서걱—!

『 스킬 '일자베기 Lv.12'를 발휘합니다. 』

반으로 나뉜 괴물이 두 마리가 되어 몸을 일으킨다. 내 주위로는 수십 마리의 괴물들이 둘러싸고 있다.

"대적자, 당신은 특별대우를 해드릴게요."

하늘에서 쏘아지는 마력의 광선이 매섭게 나를 노리고 떨어진다.

"으아악! 뭐, 이런 놈들이 있어?!"

"사, 사부님? 어쩌죠?!"

"어쩌긴. 정면 돌파해야지."

나는 항마의 활을 꺼내들었다. 화살로 변한 오르티마를 시위에 매겼다. 녀석의 떨림이 내게도 느껴진다.

『 스킬 '항마의 술 Lv.11'을 발휘합니다. 』

재액을 다루고 있는 건 천계인 제레다.

그녀를 향해 그대로 발사.

콰아아아—!

새하얀 빛을 내뿜으며 발사되는 화살.

동시에 제레가 든 수정구에서도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온다.

쿠우웅! 쿠웅!

몸을 던진 재액의 거인이 화살을 막아섰다. 항마의 화살은 그대로 집어 삼켜졌다.

"어리석군요. 대적자."

제레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꼴 좋다는 표정이었다.

"머, 먹혔어요!"

"이제 어떻게 해요?!"

엘리스와 진세아가 나를 바라본다.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헌터들은 제대로 공격도 못한 채 밀려나고 있었다. 수가 많은 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나는 스킬 향상의 반지의 지정 스킬 변경했다.

『 마기조종 -> 항마의 술 』

『 항마의 술의 스킬 레벨이 1 상승합니다. 』

『 스킬 '항마의 술 Lv.11'을 발휘합니다. 』

콰아앙!

거인의 몸 내부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나왔다. 거인의 몸이 점차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간다.

"뭐?! 그럴 리가······!"

제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이스!"

"지금이에요!"

새끼용으로 변한 오르티마가 빠르게 내쪽으로 날아왔다. 아니, 진세아의 머리 위에 올라갔다.

"왜 그래?!"

뀨, 뀨······!

다시는 안하겠다는 표정으로 항의해온다.

"지한씨, 좋았어요!"

투두두두두—!

거인의 공격이 주춤한 틈을 타서, 제레를 향해 화살의 비가 쏟아졌다.

검은 방어막째로 바닥에 내다꽂는 강렬한 공격이었다.

상황을 재빠르게 캐치한 윤지은의 공격이었다.

"으으윽······!"

제레의 시선이 내게서 윤지은에게로 옮겨갔다. 수정구가 한순간 빛나더니 거인이 윤지은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딜."

나는 역전의 검을 들고 제레에게 달려들었다.

재액이 흐르는 바닥인지라 마기로 허공을 부유해서 지나가야만 했다.

『 스킬 '일자베기 Lv.13'을 발휘합니다. 』

콰드드득!

푸르른 선 하나가 제레의 검은 방어막을 가르고, 녀석의 상반신을 베어낸다. 깊은 상처가 그녀의 몸에 새겨졌다.

"크아아악!"

본질베기의 후유증인 강한 탈력감이 밀려왔다. 곧바로 움직일 수 없었다. 피투성이가 된 제레가 바닥을 기어갔다.

그때였다.

"언니!!"

뒤쪽에서 윤서현이 크게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인의 공격을 미처 피하지 못한 윤지은이 재액에 휩싸였던 것이다.

거인은 멈추지 않고 몸집을 불려갔다. 위쪽에서 쏟아지는 재액이 거인의 상처를 계속해서 메꾸고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제레가 조소했다.

"크으윽, 구하러가지 않아도 괜찮습니까? 당신의 동료들은 저걸 막을 힘이 없습니다."

몸을 어거지로 움직여 검을 들어 올렸다.

"그거야 모르지."

"나를 죽여도 거인은 멈추지 않습니다. 후회할 선택을 하는 겁니다. 대적자 당신은 마족의 힘을 얕보고 있는 거에요."

최후를 직감한 제레가 필사적으로 나를 설득하려들었다.

"사부님!"

엘리스가 재액을 밟고 내쪽으로 뛰어왔다. 슬라임으로 변한 오르티마가 엘리스를 필사적으로 보호하고 있었다.

이윽고 엘리스의 손에 내게 닿았다.

『 동료 엘리스가 스킬 '시간조작 Lv.7'을 발휘합니다. 』

온 몸을 채우던 탈력감이 사라지고 활력이 깃든다.

"얕보고 있는 건 너다. 네 생각만큼 인간은 약하지 않으니까."

여기에 있는 헌터들은 대한민국의 최정예다.

특히 최후의 10인.

그들의 재능은 차원이 다르다.

절망으로 가득찬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 남았다.

살아남았다 뿐이겠는가.

불합리함과 부조리함으로 가득 찬 마족들을 상대로 끝까지 싸워 이겼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군단장을 몇이나 해치우기까지 했다.

그러니, 이들은 결코 이런 곳에서 무너지지 않는다.

고작 이런 곳에서 지지 않는다.

『 동료 윤서현이 새로운 재능 '절대 공간 격리'를 개화합니다. 』

화아아—!

뒤쪽으로 눈부신 빛이 솟아오른다.

허공에 떠오른 윤서현.

그 분노가 이곳까지 처절하게 느껴진다.

그녀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이 공간에 존재하던 모든 재액이 허공으로 떠오른다. 바닥을 흠뻑 적신 재액이 공중에 격리 된다.

재액으로 이뤄진 괴물들도 투명한 벽에 갇힌 듯 멈춰섰다.

"뭐,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같은 편인 헌터들조차 믿지 못할 광경.

재액의 거인 또한 예외는 아니다.

거인의 팔과 다리, 몸통이 분리되어 그대로 땅에 떨어진다.

쿠우웅!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존재하는 이 공간은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하다.

그것이 공간을 다루는 윤서현의 능력.

'절대 공간 격리······.'

그렇다면 승부는 난 셈이다.

얼빠진 표정으로 내 뒤편을 바라보는 제레. 차분하던 표정은 온데간데 없다.

"아, 안돼······. 이럴 순······."

마기를 쏟아부어 만든 재액은 이제 무용지물이다.

프로젝트 아포칼립스에 투자되어야 했을 마기가 무의미하게 소모되었다.

나는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게 사람을 잘 보면서 덤볐어야지."

너는 건드려선 안될 사람을 건드렸다.

150화 나약한 자의 말로(1)

재액의 거인이 언니인 윤지은을 덮친 순간, 윤서현의 머릿속에는 언니를 구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이 세계에 게이트가 나타나기 시작했을 무렵.

전국 각지에서 게이트 브레이크가 발발했다.

각성 초기 정부의 대처는 미흡했고,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윤서현의 부모는 그 사고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

그런 윤서현에게 있어 윤지은은······.

하나 뿐인 언니.

유일하게 남은 가족.

윤서현의 절대 공간 격리는 그런 분노와 당황이 뒤섞여 만들어 낸 일종의 각성이었다.

이지한의 타재간파 또한 유효하게 작용했다.

몇 배로 증가한 그녀의 경험이 스킬로서 시기적절하게 개화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 스킬 '절대 공간 격리 Lv.1'을 발휘합니다. 』

그녀의 의지에 따라 공간이 나뉘어졌다. 재액은 차단되고, 재액이 만들어낸 거인마저 분리 되어 격리되었다.

'언니······.'

평소의 윤서현이었다면 자신만만하게 앞으로 나섰을 거다. 언니를 공격한 적을 향해 분노를 쏟아내며.

그러나 저 앞에는 이지한이 있다.

그렇기에 윤서현은 바로 뒤를 돌아 달려갔다.

윤서현의 언니인 윤지은이 재액에 휩싸인 채 쓰러져 있었다.

"언니, 괜찮아?!"

이미 언니 윤지은의 주변에는 힐러들이 모여 있었다. 은빛의 날개 길드장이 당했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은 없었다.

채아연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일단 응급 치료는 했는데, 쉽게 회복이 안돼요. 다른 사람들도······."

"언니 눈 떠봐······."

윤지은이 힘겹게 눈을 떴다. 몸에 남은 재액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몸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녀는 고통에 몸을 떨면서 말했다.

"꼴 사납네. 너한테 실컷 잔소리했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어떻게, 어떻게 안돼요?"

윤서현이 채아연에게 말을 건넨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

앞쪽에서 푸른 섬광과 함께 강렬한 충격파가 터져나왔다. 이지한의 일자베기가 하늘까지 닿는 청색의 선을 만들어냈다.

재액을 다루던 권속이 죽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아아······.

헌터를 뒤덮었던 재액이 일시에 검은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으으으······."

윤서현의 품에 안긴 윤지은이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회복의 과정이었다.

"괘, 괜찮아?"

그걸 모르는 윤서현은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재액에 당한 다른 헌터들도 마찬가지로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녀의 뒤로 이지한이 다가왔다.

"재액의 원인은 제거 되었으니 조금 쉬면 나을 겁니다."

"다행이다······."

그제서야 윤서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큰일 난 줄 알았어요······."

자연스레 그녀의 시선이 거대한 돌문으로 향했다.

나약의 마족의 보좌권속 제레는 죽었다.

이제 남은 건 정말 나약의 마족 하나였다.

진세아가 뒤늦게 다가왔다.

"지은 언니 괜찮아요?!"

"다들 너무 호들갑이야. 나만 다친 것도 아닌데."

정신을 차린 윤지은이 바닥에 놓인 활을 움켜쥐었다.

"더 안쉬어도 괜찮겠어?"

"괜찮아.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내가 쓰러지면 안 돼."

윤지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쩡하다는 걸 보여주는 의미로 팔을 붕붕 휘둘러 보인다.

"봐, 멀쩡하다니까. 우리 은날에는 유능한 힐러가 있잖아. 아연이가 치료해준 덕분에 아무렇지도 않아."

"그래도······."

"자, 부상자가 아닌 사람들은 모여요."

은날의 길드장이란 직책이 가진 무게는 가볍지 않다. 길드장이 회복했다는 말에 길드원들이 기뻐하며 모여들었다.

재액이나 괴물들에게 크게 당한 헌터들은 뒤로 빠지고, 컨디션이 좋은 이들이 앞으로 나섰다.

끝이 다가왔다 생각해서인지 그들의 눈빛도 결연했다.

"가보자고."

150명이었던 전력이 120명으로 줄었으나 이제 남은 적은 단 하나.

"그러면 열겠습니다."

쿠구구구······.

수호 길드장 사최헌이 조금 열려있던 거대한 돌문을 완전히 밀어 개방했다.

* * *

두꺼운 식물의 줄기가 우거진 유적의 내부.

뻥 뚤린 천장 위로 검은 구체가 일렁인다.

"기어코······. 여기까지 왔구나."

나약의 마족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외관은 어린 소년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저게 마족이야? 어린 애잖아······."

"외관에 속지마. 부협회장도 인간으로 변장하고 있었잖아."

나약의 마족의 붉은 눈이 천천히 헌터들을 살폈다. 언짢은 기색이 역력하다.

그럴 수밖에.

놈의 부하인 권속들은 전부 죽었고.

쏟아낸 재액도 윤서현에 의해 차단되었다.

놈의 시선이 내게 고정되었다.

"나약한 인간들아 착각하지 말아라. 너희들을 뒤덮는 거대한 흐름을 네 놈들이 거스를 수 있다고 여기지 말란 말이다."

오만한 시선이 헌터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이미 수적으로는 우리가 압도하고 있다.

사실상 대한민국의 대표인 사최헌이 한걸음 앞으로 나왔다.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우리는 게이트를 공략하러 왔을 뿐이다. 그걸 막으려하는 건 네 놈들 마족이고."

그의 검이 나약의 마족을 가리켰다.

"우리야말로 묻고 싶다. 마족들의 목적은 무엇이냐. 어째서 우리를 방해하는거지?"

"흐음······."

나약의 마족은 코웃음을 쳤다.

"버러지 같은 인간, 네 놈과는 나눌 말은 없다. 내 관심은 하나다."

녀석의 손가락이 나를 가리켰다.

"대적자. 네 이름을 밝혀라."

헌터들의 시선이 내게로 향한다. 녀석은 내가 대적자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분명 지금 이 상황도 다른 마족들에게 공유되고 있겠지. 적어도, 오성의 스파이를 통해 내 정체가 넘어갈 거다.

그러니 더 이상 내 신분을 숨기는 건 무의미할 거다.

그러나.

순순히 대답할 이유 또한 모르겠다.

나는 가볍게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아직까지 그런 간단한 것도 못 밝혀냈나? 우습군."

"크윽······."

나약의 마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주변으로 불길한 마기가 서서히 방출된다.

"······화났나본데요."

진세아가 중얼거렸다.

실제로 마족들은 끝까지 내 정체를 밝혀내지 못한 모양이다.

내 이름 하나 못 알아내 내게 묻는 꼴이라니.

"좋다······. 그 말 꼭 후회하게 해주마."

고개를 들어 올린 나약의 마족이 손을 위로 뻗었다.

놈의 머리 위에 모인 거대한 마기의 구체.

고오오······.

마계에서 넘어온 순수한 마기가 담긴 그릇이다.

재액을 쏟아냈음에도 그 양은 한참이나 남아 있다.

본래대로라면 아포칼립스를 위해 사용될 마기였지만.

쩌적, 쩌저적!

그 마기는 윤서현의 공간 격리의 틈새를 넘어 나약의 마족에게로 흘러들기 시작했다.

"막아!"

"공격 개시!"

"다들 공격해!"

헌터들이 일제히 나약의 마족을 향해 달려 들었다.

콰아앙! 콰앙!

나약의 마족을 향해 쏟아지는 무수한 세례의 공격.

하늘을 가득 메운 마력 탄환과 검격이 빗발쳤다.

윤서현이 앞으로 나섰다.

"공간 격리가 있으니까, 망설이지 말고 모든 공격을 때려부어요!"

그녀의 말에 은빛의 날개 마법사들의 주위로 푸른 마법진이 형성되었다. 거기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빛의 광선.

콰아아앙!

하늘에서 떨어져내리는 벼락까지.

유적의 공간 내부에서는 사용하기 어려운 강력한 기술들이 순차적으로 쏟아졌다.

[ 어설프구나, 어설퍼. ]

폭격음을 뚫고 나오는 강렬한 음성.

뼛속 깊이 울리는 소리에 헌터들의 공격이 잦아들었다.

격이 담긴 목소리가 그들을 뒤흔들었다.

"크윽, 익숙해지지가 않네."

"환상의 마족과 같은 능력을 쓰는 건가?"

"다들 정신차려!"

나약의 마족의 손짓 한 번에 피어오르던 연기가 흩어졌다.

검은 마기의 보호막 속에 있는 녀석은 멀쩡했다.

조금의 상처도 입지 않았다. 보호막에도 생채기 하나 남아 있지 않다.

나약의 마족의 머리 위에 솟아난 두 개의 검은 뿔.

그의 붉은 눈동자가 가소롭다는 듯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샤아아—!

나는 그런 놈을 향해 항마의 활을 들어 올렸다.

『 스킬 '항마의 술 Lv.12'를 발휘합니다. 』

내 손을 떠나간 항마의 화살이 새하얀 빛을 방출하며 나아갔다. 화살의 끝은 나약의 마족의 보호막에 명중했다.

쩌저저적!

새하얀 금이 검은 보호막 위로 셀 수 없이 퍼져나갔다.

[ 대적자, 네 놈만큼은 이해할 수가 없다. 어째서 사라진 종족의 기술을 네가 가지고 있는 거냐?! ]

쿠우웅!

놈의 손짓 한 번에 옆쪽 벽면에서 마기의 기둥이 치솟았다.

"방어 마법 생성합니다!"

금빛의 마력 방패가 허공에 떠올랐지만, 기둥에 닿자 산산조각이나며 흩어졌다. 기둥은 그대로 헌터들을 벽면에 쳐박았다.

"으아아악!"

"뭐, 뭐 저런······."

쿠우웅!

다시 거대한 마기의 기둥이 나를 노리고 솟아났다. 그러나 기둥은 내게 닿지 않았다.

『 동료 윤서현이 스킬 '절대 공간 격리 Lv.2'를 발휘합니다. 』

어느새 한단계 올라간 그녀의 기술이 기둥의 방향을 바꾸었다. 왜곡된 공간을 따라 마기의 기둥이 놈의 방어막에 박혔다.

쩌저저적!

검은 보호막 위로 생긴 금의 갯수가 더욱 늘어났다.

그러나 나약의 마족은 아랑곳하지 않고 공격을 계속해 왔다.

[ 대적자, 대답해라! 네 놈의 능력은 무엇이냐?! ]

앞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마기의 탄환.

콰과과과—!

나는 쏟아지는 탄환을 피하고, 쳐내며 앞으로 전진했다.

[ 말하지 않겠다면 억지로라도 입을 열게 해주마. ]

나약의 마족의 주변으로 나타난 마법진.

그 안에서 악마들이 기어나오고 있었다. 그 수나 모양도 가지각색이다.

이들은 권속이 아닌, 소환으로 불러들인 소환수들이다.

쿵! 쿵! 쿵!

염소 악마가 나를 향해 돌진해 왔다. 놈의 뿔에 맺힌 마기가 심상치 않다. 저 정도 마기면 마족에 맞먹는 상위 악마종이다.

'프로젝트 아포칼립스는 포기하기로 아예 작정했구만.'

나약의 마족은 진심으로 날 죽이려 들고 있었다.

콰아앙!

"스승님! 이 놈은 제가 맡겠습니다!"

뒤쪽에서 나타난 신태양이 염소 악마를 막아섰다.

"그래, 고맙다."

꾸역꾸역 기어나오는 악마들.

도마뱀, 영체, 순수 악마, 언데드······.

그들 중 몇은 S급 보스에 해당하는 흉악한 놈들이다.

나약의 마족이 얼마나 마기를 쏟아부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우리의 전력도 결코 만만치 않다.

"형, 나도 있어요!"

촤아악!

천성호가 휘두른 검이 악마의 뿔을 양단했다. 헌터들 사이에서 최후의 10인이었던 자들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소환한 악마들이 가진 힘은 권속보다 강했지만, 이쪽은 협력이라는 선택지가 존재한다.

버프와 마법이 어우러져 딜러들을 끊임 없이 지원하고 있다. 헌터들이 차근차근 악마들을 제압해나가는 형국이다.

콰아앙! 콰앙!

재액과 같은 특수한 장치가 없는 이상 우리가 유리하다.

그 상황을 무심히 지켜보던 나약의 마족이 입을 열었다.

[ 더더욱 확신이 들었다. 이곳에선 아무도 살려보내지 않겠다. ]

나는 검은 보호막을 향해 달려 나갔다. 타재간파의 모든 능력을 활성화 시킨 상태였기에 나를 막을 상대는 없었다.

촤아악!

악마를 베어내고, 다가오는 마기를 반으로 갈랐다.

그대로 뛰어올라 놈의 보호막에 달하는 순간이었다.

[ 모든 마기를 다 써서라도. ]

일순, 주변이 고요해졌다.

전에 없이 강력한 마기의 광풍이 휘몰아쳤다. 모든 것을 휩쓸고, 찢어 발기는 고밀도의 마기가 주변을 집어 삼키기 시작했다.

카가가가—!

내 방어구 위로 무수한 흠집이 새겨졌다. 마기가 칼날처럼 나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 방어구의 내구도가 빠른 속도로 감소합니다. 』

'크윽······.'

주변을 새까맣게 메우는 마기.

동료들의 모습도 더 이상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소리도,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젠장······.'

마계에서 가져 온 순수한 마기.

놈은 프로젝트 아포칼립스보다 나를 없애는 걸 우선시했다.

그 모든 힘을 사용해 헌터들을 몰살 시키고자 했다.

이번에도 내가 아는 미래가 바뀌었다.

그렇다해도 할 일은 하나였다.

나약의 마족을 쓰러뜨리는 것.

"오르티마!"

항마의 화살로 변해 있던 녀석을 불렀다. 마기의 폭풍을 뚫고 어디선가 녀석이 날아들었다.

어쨌든 나는 보호막의 지근거리에 있다.

"한 번 더 항마의 화살로······."

그리 말하려던 순간.

나는 보았다.

반짝.

오르티마가 입에 물고 있는 황금빛 조각.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 불완전한 아이템

그것은 에픽 아이템의 일부였다.

'이게 왜 여기에······?'

자세한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휘몰아치는 광풍 속에서 나는 성배를 꺼내들었다.

오르티마에 의해 완성된 불완전 에픽.

이 아이템의 진짜 조각이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다.

"잘했다, 오르티마."

나는 성배와 아이템 조각을 오르티마에게 모두 먹였다.

눈부시게 밝은 황금빛이 오르티마에게서 솟아 올랐다.

『 찬란한 성배(불완전 에픽)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습니다. 』

파직, 파지직···!

오르티마가 뱉어낸 아이템에서 피어오르는 스파크.

그 탓에 손 끝이 아려오지만 나는 웃으며 성배를 쥘 수 있었다.

이 세계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에픽 등급의 아이템.

그것이 진정한 형태로 내 손에 들어왔으니까.

『 찬란한 초월의 성배(에픽)를 획득하셨습니다. 』

- 마력양이 5배 증가합니다.

- 지정 스킬의 레벨을 1 올립니다. (12레벨 이하)

- 유니크 이하 스킬의 등급을 한단계 올립니다.

콰득, 콰드득······!

마기 폭풍 속에서 나는 항마의 활을 들어 올렸다.

『 항마의 술의 등급이 레전더리로 한 단계 격상합니다. 』

『 레전더리급 스킬 '절대 항마의 술 Lv.13'을 발휘합니다. 』

압도적인 광휘가 모든 것을 뒤덮는 순간이었다.

151화 나약한 자의 말로(2)

빛의 화살이 마기 방어막을 단숨에 깨부쉈다.

총알이 유리장을 부수는 것과도 같은 압도적인 기세.

콰드드득!

부숴진 방어막의 검은 파편이 허공으로 흩날렸다.

그러나 방어막은 한 겹이 아니었다. 나약의 마족을 둘러싼 수십 겹의 방어막이 빛의 화살을 가로막는다.

콰아아—!

그럼에도 화살은 힘을 잃지 않고 나아간다.

찬란한 빛을 머금고서 차례차례 보호막을 부숴간다.

[ 대적자······! 어째서 그게 네 손에 들려 있는거냐! ]

나약의 마족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놈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다.

[ 설마······. 사라진 절반을 네 놈이 가지고 있었던 거냐······. ]

내 손에 들린 '찬란한 초월의 성배'를 말하는 거였다.

본래대로라면 놈의 손에 들어갔을 물건이다.

이 세계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에픽급의 아이템.

그 성능은 레전더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강력하다.

'운이 좋았지.'

아니, 아이템을 발견한 오르티마의 공이 크다.

찰랑.

성배의 내부에서 푸른 액체가 차올랐다.

내게 마력이 5배로 늘어나는 게 느껴진다.

콰아아—!

항마의 술은 끊임 없는 마력을 부여 받아 마기의 방어막을 쳐부순다.

4번째, 10번째, 23번째······.

흩날리는 마기 방어막의 파편으로 주변이 어지러울 정도다.

그 속에도 똑똑히 보인다.

눈을 부릅 뜬 나약의 마족의 발악이.

[ 대적자······! ]

두 손을 앞으로 내민 그의 몸에서 마기가 끊임 없이 퍼져나간다. 항마의 화살을 막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게 보인다.

그러나 항마의 화살은 마기를 잡아먹으며 끊임 없이 질주했다.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잊혀진 종족이 마지막 염원을 담아 만든 기술.

그들의 기술은 미완성이나 다름 없는 수준이었지만.

내 손에서 완성되어 극한에 도달했다.

13레벨이라는 압도적인 경지.

오로지 마기를 파괴하기 위해 만들어진 항마의 기술을 마기로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다.

『 스킬 '데몬 헌트 Lv.11'을 발휘합니다. 』

『 '칭호 - 환상계의 영웅'의 효과로 모든 능력치가 2.5배 증가합니다. 』

콰아아아—!

방어막을 부숴 나갈수록 항마의 빛은 더욱 거세졌다.

[ 크아아아—! ]

격을 방출하는 나약의 마족의 발악.

콰아앙!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살은 마지막 방어막을 꿰뚫었다.

그의 저항이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허공으로 치솟은 무수한 마기의 파편이 눈처럼 떨어져내렸다.

화살은 나약의 마족의 미간을 노리고 나아간다.

피하기에는 늦었다.

마기를 사용해 화살을 막으려했던 놈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시점에서, 나약의 마족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그러나 그 찰나의 순간.

나약의 마족은 포기하지 않았다.

스윽.

그의 손이 부자연스럽게 들어 올려졌다.

나와 놈의 사이 한없이 고요한 정적이 찾아왔다.

끝내 놈은 사용한 것이다.

마족이 가진 고유한 능력.

제약.

『 마(魔)를 따르는 자의 권역에 진입하셨습니다. 』

『 마도 : 계약에 의거하여 제약이 발생합니다. 』

스스스······.

찬란했던 광휘가 빛을 잃고 사그러들었다.

압도적인 기세로 나아가던 빛의 화살은 평범한 화살이 되어 떨어졌다.

"뭐, 뭐에요?!"

"사, 사부님 이게 무슨······!"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진세아와 엘리스가 경악했다.

목숨을 앗아갈 뻔했던 화살을 막아냈으나, 나약의 마족은 기뻐하지 않았다.

마족 특유의 자만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그저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선언할 뿐이었다. 격이 사라진 평범한 마족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절대로 살려두지 않겠다. 그리 정했다. 대적자, 네 놈은 반드시 죽이겠다."

『 근처 500m 이내의 존재는 나약해집니다. 』

『 나약 : 모든 스킬, 레벨, 능력치가 초기화 됩니다. 』

여지껏 숨겨두고 있었던 놈의 제약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 * *

나약의 제약.

그것은 헌터가 가진 능력을 무력화 시킨다.

헌터들이 쌓아온 경험과 기술을 없던 것으로 한다.

"크윽, 갑자기 몸이 무거워졌어!"

"잠깐······. 스킬이 안나가······!"

나약의 마족이 소환해 둔 악마를 상대하던 헌터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뭐냐고, 이거······!"

무거워진 무기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기를 놓치는 이도 있었다. 전투가 난장판이 되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지원가의 버프는 사라졌다.

가볍던 몸이 한없이 무거워졌다.

무기와 방어구를 걸친 몸이 제 마음 같을 리가 없었다.

"이, 이대로는 못싸워······."

크오오—!

다행인 점이 있다면.

헌터들과 전투를 벌이던 악마들이 돌연 멈춰섰다는 것이다.

"뭐, 뭐야?!"

악마들은 더 이상 헌터들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크어어······.

날개를 가진 악마들은 하늘 위로 날아 올랐다. 그렇지 않은 악마들은 벽을 타고 기어올라 유적을 벗어났다.

그렇게 악마들은 하나둘씩 유적을 이탈했다.

"뭐가 어떻게 된거야?"

"갑자기 도망가다니. 다행이기는 한데······."

어안이 벙벙해진 헌터들은 그제서야 시스템창을 살펴볼 수 있었다.

『 근처 500m 이내의 존재는 나약해집니다. 』

『 나약 : 모든 스킬, 레벨, 능력치를 잃습니다. 』

나약의 마족이 만들어낸 제약.

그 효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레벨이 1레벨이 됐잖아······?"

"스킬도 전부 사라져 있어······."

"젠장, 이번에는 또 무슨 난리냐고."

"설마 이번에도 환상은 아니지?"

환상의 마족에 이어 나약의 마족.

다들 그만한 능력이 있을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막상 실제로 당하고 보니 상상 이상이었다.

"스승님, 이게 대체······."

당황하는 헌터들 사이로 이지한이 말했다. 그의 칼날이 나약의 마족을 가리켰다.

"알고 있겠지만······. 제약은 마족 본인에게도 적용됩니다."

악마들이 도망친 이유는 간단했다.

나약의 마족이 가진 소환 능력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주인을 잃은 악마들은 무의미한 싸움을 하는 대신 제 살길을 찾아 사라진 것이다.

"전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앞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은 뒤로 빠져주세요."

숱한 전투를 겪어 온 헌터들이었기에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래, 뭐가 됐든 간에······. 저기 저 마족을 쓰러뜨려야한다는 건 변하지 않잖아."

사최헌이 철제 대검을 질질 끌며 앞으로 나섰다.

그가 걸친 갑옷이나 대검 모두 보통 이상으로 무거웠으나 평소에 단련을 착실해 둔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스킬이 사라져도 활은 쏠 수 있으니까요."

은날의 길드장 윤지은 또한 세계수의 가지로 만든 활을 들어 올렸다.

"그런거란 말이죠······. 충분히 해볼만한데요."

신태양도 검을 쥐고서 앞으로 나섰다.

엘리스도 이지한의 옆에 섰다. 그녀의 손에 들린 권총의 은색 총열이 반짝였다.

"총은 방아쇠만 당기면 쏠 수 있거든요."

50명 가량의 인원이 나약의 마족 앞에 섰다.

스킬과 레벨을 잃었지만, 그것은 마족도 마찬가지다.

순수하게 많은 헌터들이 살아남아 여기까지 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헌터들의 무기가 나약의 마족을 겨눴다.

여기까지만 보면 승패는 명확하다.

"하······."

격이 사라진 나약의 마족의 음성이 유적에 깔렸다.

그는 불쾌하단 표정이었다.

"네 놈들은 정말로 주제를 모르는구나······."

실제로 나약의 마족은 많은 것을 포기했다.

프로젝트 아포칼립스도, 그의 능력을 강화 시킬 순도 높은 마기마저도.

스으으—.

그의 머리 위에 모여 있던 거대한 마기의 구체가 형태를 잃고 대기 중으로 퍼져나간다. 마기를 모아두던 마족의 구속력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나를 몰아 붙인 것은 칭찬해주마. 너희들은 성공했다. 내 권속들은 모두 죽었고, 멸망은 늦춰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고오오······.

나약의 마족의 손 위로 검은 마기가 모여들고 있었다. 그것은 이윽고 탄환이 되어 바로 앞의 이지한을 향해 쏘아졌다.

콰아앙!

검을 들어 막아낸 이지한의 주변으로 검은 연기가 퍼져나왔다.

"뭐야?! 저 녀석, 어떻게 마기를······?"

"스킬은 전부 사라진 거 아니였나?"

"저런 건 반칙이잖아······."

헌터들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제약을 벗어난 마족이라니?

마치 능력이 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열등한 인간종이 우월한 마족을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그의 능력은 스킬이 아니었다.

다시금 그의 주변으로 마기가 짙게 모여들었다.

마족이 가진 태생적인 힘 그 자체.

마기를 다루는 능력은 마족에게 있어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에 지나지 않았다.

콰아앙—! 콰아아앙!

검게 솟아난 마기가 이지한을 노리고 무자비하게 쏟아졌다. 이지한의 주변으로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스승님! 젠장, 다들 뭐합니까! 공격해요!"

"그래, 뭐가 됐든 공격해!"

작전이고 뭐고 없었다.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헌터들이 나약의 마족을 향해 화살과 총탄을 퍼부었다.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화살은 놈의 몸을 관통했고, 총탄도 얕게나마 놈의 가슴팍에 박혀들었다. 그 위로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

"크으윽······. 이 버러지들이······!"

나약의 마족의 붉은 눈이 번뜩였다. 마기 탄환의 목표가 바뀌어 헌터들을 노렸다.

콰아앙! 콰앙!

폭격이나 다름 없는 공격이 헌터들에게 쏟아졌다. 방패를 든 헌터가 공격을 받아내려고 했지만 무리였다.

"커허억!"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을 뿐이다.

"젠장!"

나약의 마족은 헌터들의 사이로 파고들었다.

"네 놈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변하는 건 없다. 인간의 몸뚱아리로 나에게 맞설 생각을 한 어리석음을 탓하며 죽어라!"

콰아앙!

마기는 채찍이 되어 헌터들을 휩쓸었다. 이전만큼의 파괴력은 없었으나, 레벨이 1이 된 헌터들을 압도하기엔 충분했다.

신태양이 빠르게 마족을 향해 접근했다.

"하압!"

스킬이 사라졌다고는 하나, 그가 만들었던 검술과 보법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신태양의 날카로운 검이 나약의 마족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런 기술이 통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능력치가 비슷할 때의 이야기.

뻐억!

나약의 마족이 한발 빠르게 신태양의 명치에 발차기를 꽂아 넣었다.

"크허억!"

신태양은 그대로 바닥을 굴러 유적의 벽에 쳐박혔다.

"죽어라!"

나약의 마족의 뒤를 노리고 사최헌이 달려 들었지만, 놈은 간단하게 몸을 틀어 피해냈다.

콰득!

목표를 맞히지 못한 철검이 땅바닥에 박혀들었다. 나약의 마족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주먹을 뻗었다.

뻐어억!

사최헌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대한민국의 최강이라고 불렸던 그가.

고작 주먹 한 방에 의식을 잃었다.

헌터들이 동요한 것은 당연했다.

"길드장!!"

"젠장, 무슨······!"

"공격해!"

나약의 마족은 이어지는 헌터들의 공격을 여유롭게 피해냈다. 간혹 공격이 마족에게 닿는 일도 있었으나 그의 신체를 조금 파고드는데서 그쳤다.

50명이었던 헌터들이 어느새 절반까지 줄어들었다.

"허억······. 허억······."

"진짜 괴물이잖아."

강했다.

나약의 마족은 순수하게 생물자체로서 강했다.

맨 몸의 인간이 사자에게 이기지 못하듯.

마족의 앞에서 인간이 가진 힘은 무력했다.

능력치와 스킬이 초기화 된 지금, 그들은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 지쳐버리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뻐억!

헌터 하나를 발로 차서 치워버린 나약의 마족이 고개를 들었다.

이쯤 되면 분풀이는 충분했다.

"후우······. 이제 알겠나? 네 놈들과 마족 사이에 존재하는 지대한 차이를."

나약의 마족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적지 않은 체력을 소모한 것은 사실이었다.

몸에서 흘러내리는 피와 상처가 아려오고 있었다.

상처를 수복할만큼의 능력이 지금의 그에겐 없었다.

"이젠 아무래도 좋다. 전부 죽여주마."

우우우······.

나약의 마족의 손 위로 날카로운 마기의 검이 구현되었다.

그걸 잡아드는 그 순간이었다.

그의 등 뒤로 기척이 느껴졌다.

"할 수 있다면 해 봐."

"응?"

이지한이었다.

마력탄환을 직격을 맞은 것 치고는 아주 멀쩡했다.

그러나 나약의 마족은 코웃음을 쳤다.

"아, 네 놈은 나중에 천천히 처리해줄테니 서두르지 말아라. 절대로 그냥은 못 죽이지."

그런 나약의 마족을 향해 이지한이 달려오고 있었다. 손에는 무기도 들려 있지 않았다.

이지한은 맨손으로 나약의 마족에게 달려들었다. 나약의 마족은 그런 이지한을 가소롭다는 듯 비웃었다.

"하, 어리석구나. 인간의 몸으로는 결코 나를 이길······. 커허억?!"

가볍게 피할 생각었건만, 어느 순간 이지한의 주먹은 나약의 마족에게 닿아 있었다.

아니, 닿아도 상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콰아앙!

주먹에 머리를 정통으로 맞은 나약의 마족이 땅바닥을 굴렀다. 강렬한 통증이 놈의 전신을 뒤흔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도저히 인간이 낼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바닥에 쓰러진 나약의 마족이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 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어떻게 제약에서 벗어난 거냐?!"

그런 나약의 마족을 향해 이지한이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제약을 벗어나? 이상한 말을 하는군.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네가 더 잘 알지 않나?"

나약의 마족이 몸을 일으키려다가 쓰러졌다. 고작 한 방 맞았을 뿐인데 몸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내가······. 이 내가 떨고 있단 말인가······?'

마족의 몸에서 식은땀이 미친듯이 흘러내렸다.

이지한은 주먹을 들어 올렸다.

"아무리해도 검에는 재능이 없어서 말이야. 주먹을 단련했다."

나약의 제약은 만능이 아니다.

레벨, 스킬, 능력치는 초기화 시키지만.

초기화 시키지 못하는 것들이 존재한다.

먼저, 이계 규율의 칭호.

『 무성(無星) 칭호 : '마계의 재앙(災殃)'을 발휘합니다. 』

『 무성(無星) 칭호 : 기적의 발현자'를 발휘합니다. 』

『 1★ 칭호 '마(魔)의 대적자'를 획득합니다 』

『 칭호 '마족의 천적'을 발휘합니다. 』

모두 특정 상황에서 능력치와 데미지를 높여주는 칭호이지만.

그것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효과는 명확했다.

『 제약 무시 17%가 적용됩니다. 』

제약 무시.

그 효과가 가져오는 힘은 대단했다.

어째서인지 스킬은 초기화 되었으나 능력치만큼은 남아 있었다. 이지한 자신의 재능과 연관있으리라 희미하게 느낄 뿐이었다.

그러나 승산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약의 마족의 제약은 특성을 초기화 시키지 못한다.

『 특성 '무재조정'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

그렇기에 이지한은 단련했다.

나약의 마족이 방심한 그 짧은 시간 동안 경험치를 쌓았다.

『 스킬 '정권 지르기 Lv.4'을 획득합니다. 』

『 스킬 '정권 지르기 Lv.5'을 획득합니다. 』

『 스킬 '정권 지르기 Lv.6'을 획득합니다. 』

···

..

『 스킬 '정권 지르기 Lv.11'을 획득합니다. 』

그것이 지금 이지한의 앞으로는 무수한 메시지창이 떠있는 이유였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나약의 마족을 향해 이지한이 말했다.

"나약의 마족. 유언이 있으면 지금해라."

152화 나약한 자의 말로(3)

"하아······.하아······."

바닥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킨 나약의 마족이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이마에 검은 핏줄이 돋아났다.

"어떻게, 대체 어떻게······."

이지한은 천천히 나약의 마족을 향해 다가섰다.

나약의 마족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이 내가 두려워하고 있단 말인가.'

그 사실을 깨달은 나약의 마족이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째서냐······. 인간에 불과한 네 놈이 어떻게 제약을······."

이지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주먹을 올렸을 뿐.

나약의 마족은 마기를 발산해 온 몸에 둘렀다.

"인간이······. 마족을 뛰어넘을 리가 없다!"

마족의 주먹이 이지한을 향해 휘둘러졌다. 이지한은 손으로 가볍게 주먹을 쳐냈다. 나약의 마족이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압도적인 능력치 차이가 둘 사이에는 존재했다.

마족이란 종족이 가진 힘과 능력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이지한에게 작용하고 있었다.

뻐어억!

이지한의 주먹이 나약의 마족을 강타했다. 헌터와 상위 마족의 싸움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단순한 주먹다짐이었지만.

뻐억!

"크아아악!"

나약의 마족의 받는 데미지는 상상을 초월했다. 정신을 뒤흔드는 고통이 마족을 덮쳤다.

"크허억······. 이럴 순 없어······."

바닥에 나동그라진 놈의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이지한은 무표정하게 다시 주먹을 들어 올렸다.

"다들 그런 말을 하더군."

"으으윽······."

이지한의 공격이 이어졌다.

『 스킬 '격투 Lv.1'을 획득합니다. 』

『 스킬 '격투 Lv.2'를 획득합니다. 』

『 스킬 '격투 Lv.3'를 획득합니다. 』

···

..

.

『 스킬 '격투 Lv.11'을 획득합니다. 』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그의 앞으로 무수한 메시지창이 떠오른다.

"죽어라!"

마기의 칼날이 이지한을 노리고 날아들지만 간단하게 회피했다.

스슥!

고개를 틀어 피하자마자 스킬이 생성된다.

『 일반 스킬 '회피 Lv.1'를 획득합니다. 』

『 일반 스킬 '회피 Lv.2'를 획득합니다. 』

..

.

『 일반 스킬 '회피 Lv.11'를 획득합니다. 』

압도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스킬은 계속해서 생겨난다.

세 개의 재능 조각을 소유한 이지한에게 일반 스킬의 습득은 쉬웠다.

퍼억! 퍼억!

연달아 이어지는 펀치에 나약의 마족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뭐 이런 괴물이······!'

필사적으로 마기를 끄집어내 반항하지만, 그럴수록 이지한은 강해졌다.

속도도, 힘도, 정밀도도 계속해서 강해져만 간다.

마족으로써 유리해야 할 지점이 역으로 그에게 불리한 상황을 만들고 있었다.

"크아악!"

그렇다고 제약을 해제할 수도 없었다.

대적자가 쏘아내는 항마의 화살.

그 치명적인 기술을 방법이 지금의 나약의 마족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젠장, 어쩌다 이런 꼴이······.'

바닥에 쓰러진 나약의 마족이 고개를 들었다.

살기가 깃든 헌터들의 눈빛이 그에게 꽂히고 있었다. 무기를 든 그들은 더 이상 하찮은 인간 따위가 아니었다.

"네, 네 놈들!"

그들은 나약의 마족을 사냥하기 위해 모인 사냥꾼.

나약의 마족은 지금 그저 사냥을 당하는 마수에 불과했다.

그토록 무시하던 인간들이 자신의 위에 서 있다.

"뭘 보는 거냐?!"

동물원의 원숭이나 다름 없는 꼴이었다.

그 순간, 나약의 마족은 자신의 패배를 깨달았다.

더 이상의 전투가 무의미했다.

'사, 살아야 한다.'

그는 이미 모든 패를 소진했다.

권속들은 모두 죽었다.

프로젝트 아포칼립스를 위해 마계에서 가져 온 마기는 흩어졌다.

대적자를 쓰러뜨린다는 작전은 완전히 실패했다.

뼈저린 패배.

문책을 당해 마계에서의 직위도 잃을만한 실책이었으나.

일단은 살아야 했다.

도망치는 것 이외의 선택지는 없었다.

『 공간을 지배하던 제약이 사라집니다. 』

상처투성이의 나약의 마족이 제약을 해제했다.

이지한의 화살이 날아오기 전에 재빨리 마계의 틈으로 향하는 게이트를 만들어냈다.

마계의 틈.

마족의 고유 공간.

거기까지만 도망친다면 일단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게이트 속으로 몸을 던져 넣으려는 찰나.

투웅!

"뭐, 뭐?!"

투명한 벽이 그를 가로막았다.

정확히는 공간을 넘어갈 수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여자 헌터 하나의 손에서 보랏빛 기운이 솟아나고 있다.

공간이 조작되고 있었다.

윤서현의 절대 공간 격리가 나약의 마족을 막아서고 있었다.

"비, 빌어먹을······!"

그뿐이 아니었다. 뒤로 빠져있던 헌터들 모두가 각자의 무기를 들어 올렸다.

"이제 우리 차례라는 거죠."

"나약의 마족 각오해라."

"모두 공격해!"

제약이 해제 되기만을 기다렸던 그들의 무수한 공격이 나약의 마족을 향해 쏟아졌다.

콰과과과—!

"크아아아!"

고통 속에서도 나약의 마족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마기 보호막을 간신히 형성할 때즈음.

그의 시야 끝으로 새하얀 빛무리가 보였다.

"아······."

나약의 마족은 끝을 직감했다.

그가 준비해 온 모든 것들은 너무나 어이없게 실패했다.

단 한 명.

이지한이라는 대적자에 의해서.

파앙!

이지한이 당긴 활의 시위를 놓았다.

마(魔)를 멸하는 항마의 화살은 올곧게 나아가.

결국 나약의 마족을 꿰뚫었다.

강력한 빛의 폭발이 유적을 뒤덮었다.

* * *

"이거······.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왔는데요."

수정구를 들여다보던 흑발의 남성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들었다. 로브를 뒤집어 쓴 그는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트렸다.

"하하하! 이렇게 흥미진진한 경우는 처음이에요."

예언의 마족은 다시금 수정구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를 못마땅하다는 듯 바라보는 갑옷의 기사가 있었다.

"어이, 최상위 마족다운 그만한 위엄을 갖춰라. 네 놈은 너무 경박하다."

낡은 투구와 낡은 갑옷을 걸친 그의 정체는 검의 마족이었다.

"딱딱하기는. 젊게 살자구요. 그쪽도 내가 뭘 봤는지 들으면 놀랄 걸요."

그 둘은 최상위 마족이었다.

그들은 마계 내에서도 손에 꼽는 강자들로서 군림한다.

두 마족이 소유한 막대한 힘은 세계의 운명을 가를 수 있는 수준이다.

어떠한 세계에서는 신으로 불리며 숭배받고, 어떠한 곳에선 절대 악이라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존재.

그것이 최상위 마족이다.

"문명계에서 굉장히 재밌는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예언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미친 인간이 있다고요."

"흐음? 그럴 리가. 그런 말은 처음 듣는다."

"지금 처음 말하니까요. 제 예언이 하나도 통하지 않는단 거 굉장하지 않아요? 이 대적자의 출현으로 주변의 인과가 완전히 붕괴하고 있어요."

별 거 아니란 투로 말하고 있었으나, 예언의 마족의 말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예언이 빗나가는 일은 여지껏 없었다.

아니,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그런가······."

그리고 그 날을 마족들은 치욕의 밤이라 불리며 영원토록 기억하고자했다.

검의 마족은 머리에 쓴 투구를 벗어 바닥에 두었다. 그녀의 백발이 바람에 휘날렸다.

"투구 벗고 다녀요. 훨씬 낫네."

"흥, 쓸데 없는 소리를."

검의 마족이 절벽 아래를 내다보았다.

석양이 지는 메마른 땅.

그곳을 가득 메운 한 종족이 보인다. 인간과 비슷하지만, 태초부터 마나를 다루고 사용하는 자들이다.

그 수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백만? 이백만? 어쩌면 그 이상일 거다.

"마족의 목을 취하라!"

"놈들을 쓰러뜨려 우리의 세계를 되찾아라!"

"기적의 용사가 우리와 함께한다!"

거대한 함성이 황량한 땅을 가득 메운다.

이들의 목표는 하나.

두 명의 최상위 마족과 대적하기 위함이다.

그들의 증오와 두려움, 공포, 분노가 잘 느껴진다.

"그러면 빨리 끝내고 가죠. 할 일이 많아요."

"보채지 말아라. 내 나름대로의 준비가 필요하니."

"기도 같은 거라도 하려고요?"

검의 마족은 피식 웃으며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럴리가."

투웅.

가볍게 휘두른 그녀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단지 그 뿐이었으나.

그 행위가 만들어낸 결과는 단순하지 않았다.

쿠구구구—!

강렬한 진동이 땅을 뒤흔든다. 시야에 보이는 모든 땅 위로 돌이키지 못할 상처가 새겨졌다.

갈라진 땅 위로 군대가 개미처럼 떨어져내렸다.

바다에서 솟아난 해일이 군대를 집어 삼킨다.

투둑, 투두둑······.

어둡게 변한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허리케인이 사정없이 그들을 파헤친다.

그야말로 재해.

아비규환 속에서 이 세계의 인간들은 무력했다.

그 누구도 마족에게 닿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에 의해 무참히 삼켜졌다.

단 한 번의 검격이 만들어낸 재앙.

그것은 무감하게 지켜보던 검의 마족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 대적자란 인간을 처치해야 하는 건가?"

이러한 일은 그녀에게 아무런 감흥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저 단순한 일상에 불과하기에.

예언의 마족은 씩 웃으며 로브를 걷어냈다.

그의 앞으로 게이트 하나가 생성되었다.

"그래야겠죠."

그곳으로 발을 옮기는 예언의 마족은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예언이 빗나가는 초유의 사태.

그는 이것이 너무나도 즐거웠기에.

* * *

『 상위 나약의 마족을 처치하셨습니다! 』

『 본래의 인과를 초월한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

『 초월자 '잊혀진 종족의 영웅'이 크게 기뻐합니다. 』

『 소수의 초월자들이 당신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

『 이계규율이 업적을 정산합니다! 』

나약의 마족은 목숨을 잃었다.

항마의 화살에 완벽히 정화되어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이계 규율의 보상도 기대되지만 진짜는 따로 있었다.

『 A등급 한계돌파 퀘스트를 클리어하셨습니다. 』

『 프로젝트 아포칼립스 저지 ( 1 / 1 ) 』

'드디어······.'

참 길었다.

하지만 결국 퀘스트를 클리어했다.

마족들의 작전 프로젝트 아포칼립스를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대한민국을 쑥대밭으로 만들겠다는 놈들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 축하합니다. S등급 헌터가 되셨습니다. 』

『 레벨 제한이 해제 됩니다. Lv.100 / 150 』

레벨 제한이 해제되며 최대 레벨이 150이 되었다.

SS급이 되기 위해 필요한 레벨은 150.

SSS급은 200이다.

아직 모든 마족을 상대하기엔 한참 모자르지만······.

F급이었던 내가 이만큼 올라왔다.

감격스러운 순간인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 제단에 불을 붙이는 걸로 공략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나약의 마족에게 당해 정신을 잃었던 사최헌이 헌터들에게 말했다.

"지한씨,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번 공략의 주인공은 지한씨니까요."

헌터들의 시선이 나를 향해 모여들었다.

사최헌이 내게 횃불을 넘겨줬다.

화르륵.

제단에 있는 검은 나뭇가지에 불을 붙이자 새하얀 불꽃이 타올랐다.

『 게이트의 공략에 성공하셨습니다. 』

『 잠시후 본래의 세계로 귀환할 수 있는 게이트가 생성됩니다. 』

"끝났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다들 고생했어요!"

헌터들이 소리쳤다. 그러나 각 길드 수장의 얼굴은 그리 상쾌해 보이지 않았다. 그들 모두 알고 있었다.

인류는 마족 앞에 무력했다.

최정예라고 불리는 그들이 제대로 손도 쓰지 못하고 당하기만했다. 환상의 마족도 나약의 마족이 가진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번 사건은 그 사실을 확실히 깨닫는 계기가 될 거다.

'더욱 강해져야한다.'

나 뿐만 아니라 다른 헌터들도 강해져야 한다. 다가오는 마족들을 몰아내고, 우리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선.

"고생했어요, 지한씨."

"윤서현 헌터도 고생 많았습니다."

윤서현이 내게 다가왔다. 이번에는 윤서현의 역할도 컸다.

"협회는 나가려고요. 오늘 확실히 깨달았어요. 언니를 도울래요. 언니 설득 해줄거죠?"

"협력하겠습니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능력을 개화한 그녀가 있어 한층 수월하게 나약의 마족을 처치할 수 있었다. 그런 전력을 협회에서 썩히고 있을 순 없다.

그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나는 다시 메시지창에 집중했다.

아직 확인하지 않은 보상이 있었다.

바로 한계돌파의 클리어 보상이다.

'???'로 표시 되어 있었던 바로 그 보상.

'지금까지는 재능 개화의 물약이나, 능력치 증가 같은 보상이었지.'

혹은 스킬의 레벨을 올려준다거나.

그런 식의 보상이었다.

파직, 파지직!

시스템 창에서 붉은 스파크가 튀어오른다.

정황상 다시 한 번 미래에 가게 될 각오도 충분히 하고 있다.

『 A급 한계 돌파의 보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

『 재능 획득의 물약(에픽)을 지급합니다. 』

샤아아—!

허공에 생겨나는 순백의 호리병.

포옹!

그 마개가 저절로 열렸다.

내부에 있던 액체는 눈부신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물약.

"자, 잠깐 뭐에요. 저거?!"

응? 윤서현 헌터한테도 보이는 건가.

"오, 오빠! 뭔가 이상한 게 나타났어요!"

덩달아 옆에 있던 진세아도 호들갑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 말도 없는 것 같다. 무슨 기준으로 보이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 둘에게 말했다.

"잠시 어딜 갔다와야 될 것 같습니다."

"네? 설마······?"

"그 설마가 맞을 겁니다."

빛이 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 이계 규율이 해당 시퀀스에 간섭합니다. 』

『 시스템이 이계 규율의 인과 타당성을 검토합니다. 』

『 대상 이지한이 재능을 획득하기 가장 적합한 장소로 이동합니다. 』

내 주변의 공간이 뒤틀린다.

『 귀환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

『 일자베기 14레벨 달성 0 / 1 』

알 수 없는 힘에 어딘가로 잡아당겨졌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불안하지 않다.

거기가 어디가 되었든.

마족을 없애기 위한 힘을 키워 돌아오겠다.

쿠웅!

돌연 중력이 돌아오며 딱딱한 바닥이 느껴졌다.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기분이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처음보는 기계 장치들이 가득한 장소다. 바깥으로 보이는 붉은 하늘은 그대로다. 검은 구름들이 흘러가고 있다.

틀림없는 멸망한 세계다.

'이전에 왔던 기지 안인건가?'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은 하늘의 것이었다. 내가 있는 이 건물은 아무래도 하늘을 날고 있는 것 같았다.

바깥으로 보이는 반대편의 구조는 마치 SF에 나올 법한 비행선을 떠올리게 했다.

그 아래로 보이는 점처럼 작은 도시와 건물들.

어쨌든 비행중이라는 게 분명했다.

'함선? 비행선?'

누군가 설명을 해줄 사람을 찾아야겠다 생각한 순간이었다.

"오, 오빠 여기는 어디에요?!"

뒤쪽으로 진세아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방금까지 우리 게이트에 있지 않았나요?"

덩달아 윤서현의 목소리까지 들려온다.

설마.

"······."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윤서현과 진세아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아는 모습 그대로다.

설마 두 사람까지 같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벌컥.

당황하고 있는 사이 방문이 열렸다.

"이럴 수가······. 정말이잖아······."

거기서 나타난 사람은 더욱 놀라운 사람이었다.

함장의 모자와 망토를 걸친 그녀는 믿을 수 없단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뒤쪽에 있던 진세아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쳤다.

"자, 잠깐······?! 저, 저건······!"

그 정체는 다름 아닌.

"나잖아?!"

미래의 진세아였다.

한때 환세의 도둑이라 불렸던 진세아.

그녀는 인류 최후의 보루 '세이비어'의 함장이 되어 인류를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153화 세이비어(1)

"말도 안돼······!"

진세아의 앞에 똑바로 서 있는 미래의 진세아.

이 자리에 같은 사람이 동시에 두 명이 존재하고 있었다.

윤서현도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세아가 둘······. 여기가 정말로 미래란거에요? 마족의 환각이 아니라······?"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짠가보네······."

윤서현은 바로 납득했다.

나 때문에 겪은 일이 많아서 그런가.

애초에 눈 앞에 미래의 진세아가 떡하니 있는데 의심할 여지도 없다만.

재능 개화의 물약(에픽)은 나 뿐만 아니라, 옆에 있던 진세아와 윤서현까지 미래로 끌고 온 것이었다.

'별 일을 다 겪는군.'

원래부터가 상식을 뛰어넘는 물약이었다.

때문에 무엇이 일어나더라도 이상하진 않았다.

한계돌파 퀘스트의 보상이 '???'로 나와 있었던 건 이것 때문이었을지도.

"흐흐, 꼬맹이. 어때. 미래의 자기 자신을 만난 기분은?"

놀란 진세아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는 진세아(미래). 녀석은 또 다른 자신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그리 놀라는 것 같지 않았다.

미래의 자신을 훑어본 진세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나 완전 그대로잖아. 키도 그렇고······. 여기저기 전부 그대로······. 여기서 성장이 멈출 줄은······. 저, 절망적이야."

"······."

미래의 자신을 만났다는 것보다 그게 더 충격인 모양.

그래도 미래의 진세아가 외관상 더 성숙해 보인다. 함장모와 제복을 갖추고 있는데다가, 그녀의 눈빛에는 확실한 노련미가 묻어 있다.

진세아(미래)는 쓰게 웃었다.

"나다운 대답이긴 하네. 어쨌든 다들 얼떨떨하지? 나도 깜짝 놀랐어.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정말로 여기가 미래인거에요? 그렇다면 여기는 대체······."

상황을 살피던 윤서현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 그것부터 이야기해줘야겠네."

미래의 진세아는 방에 있는 창으로 다가섰다.

바깥으로 보이는 새빨간 하늘.

마기로 뒤덮인 검은 구름.

내려다보이는 지상이 한없이 조그맣다.

"보시다시피 여기는 지상이 아닌 하늘. 세계의 위를 표류하는 인류 최후의 보루 '세이비어'. 이 함선에는 그런 거창한 이름이 붙어 있지."

미래의 진세아가 창문을 열자 마기가 섞인 끈적한 바람이 쏟아졌다. 특별한 장치가 되어 있어 일정량 이상의 기류를 막아주는 모양.

그 말에 윤서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세계는 어떻게 된거죠······?"

나도 궁금했던 질문이다.

미래의 진세아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를 뒤로 넘겼다.

나온 답은 단순했다.

"망했지 뭐."

망했다는 건 척보면 안다.

다만, 어떻게 망했느냐가 문제다.

"마족들을 못 막았어. 12군단장 중 열을 처치 했지만 실패한 건 실패한거니까."

그렇지만도 않다.

본래 멸망한 세계에서 처치한 군단장의 수는 단 둘.

그것이 새로운 미래에서 절반으로 늘어나고.

이번 미래에서는 열 명이라는 숫자가 되었으니까.

내게는 그것이 미래로 나아간 증거라고 보인다.

말을 들은 윤서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족들은 정말로 세계를 노리고 있었던거네요······. 그렇다고 정말로 세계가 망해버릴 줄이야."

미래를 모르던 그녀에겐 다소 충격적인 결과일 수밖에 없었다.

"뭐, 그래도 거의 우리가 이겼다고 할 수 있을만큼 끌어왔지만. 결정적인 패배요인이 있었달까."

미래의 진세아는 씁쓸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오빠가······."

이 세계가 또다시 멸망을 막지 못한 이유.

그 결정적인 이유는 지극히 간단했다.

간단하면서도 핵심적이었다.

"죽었거든."

* * *

미래 진세아의 말에 따르면 이 세계의 나는 죽었다.

"그때부터 영웅들의 사이도 틀어졌고······. 오빠가 인류 최후의 리더라고 불렸을 정도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거지만."

"인류 최후의 리더? 오빠가?"

"······죽었다는 게 더 충격이지 않아?"

미래의 진세아가 어이없다는 듯 과거의 자신을 바라봤다.

"오빠랑 두 사람의 상황은 이해하고 있어. 그래서 말인데. 나도 부탁할 게 하나 있어. 물론 그 전에 지금 상황을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그 순간이었다.

띵! 띵! 띵!

"윽."

진세아의 주변으로 붉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긴급 호출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잠깐 다녀와야될 것 같은데. 그때까지만 잠깐 이 방에 있어줘. 특히 서현 언니는 절대로 방 안에서 나오지마······!"

그런 말을 남기고 진세아가 서둘러 바깥으로 나갔다.

아직 듣지 못한 이야기가 많다.

나머지 최후의 10인들은 어디에 있는지, 내가 어째서 죽었는지 등등.

"나는 왜 나가지 말라는 걸까요?"

"저한테 물어봐도 모릅니다. 미래에는 저도 끌려 온 거니까요."

"은근슬쩍 넘어가려 해도 소용 없어요. 여기까지 온 이상 이유를 들어야겠어요. 지한씨의 능력은 대체 뭐에요?"

"맞아! 이제는 알려줘요!"

진세아까지 가세했다.

"정확히하자면 두 사람이 미래에 오게 된 건 제 의지가 아닙니다. 퀘스트의 보상이었어요."

"퀘스트라면 그 게임에 나오는 그런 거요?"

"네, 맞습니다."

이런 능력을 가진 헌터는 내가 알기로 없다.

나는 간략하게 내 능력을 설명했다.

경험치를 배로 받고, 타인의 재능을 간파할 수 있는 능력. 퀘스트를 받아 능력치를 높인다는 것 정도.

다들 짐작하고 있었을 거다.

경험치 배율과 이계 규율에 대해선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10만배가 터무니 없거니와, 이계규율과 합쳐져 50만배로 받는다는 건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으니까.

진세아와 윤서현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엄청난 능력이잖아요!"

"뭐, 다 좋은데요. 저희 돌아갈 수 있는거죠?"

윤서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건을 달성하면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 조건이란······."

일자베기 14레벨의 달성이다.

13레벨 일자베기를 달성하기 위해서 유니크 등급의 심화 스킬들이 필요했다. 14레벨엔 어떤 조건이 붙을지 현재로선 미지수다.

'문제는 그 방법을 누가 아느냐인데.'

어쨌든 재능 개화의 물약이 나를 이 시간대로 보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진세아와 윤서현이 같이 넘어온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일지 모른다.

그리 설명하려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강렬한 진동이 함선 전체를 뒤흔들었다. 거센 충격에 내부의 가구들이 사방으로 흔들렸다.

"꺄아악!"

진세아는 바닥을 구르고, 윤서현은 옆에 있던 손잡이를 붙잡았다. 나도 간신히 자세를 잡았다.

"바, 바깥을 봐요······!"

윤서현의 말에 창문을 내다보자 거기엔 가공할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함선과 맞먹는 크기의 대형 마수가 허공을 날아 올랐다. 용과 닮은 마수는 함선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날아 올라, 이쪽을 향해 아가리를 벌렸다.

고오오오——!

타오르는 태양과도 같은 열기가 놈의 입안에 고이기 시작했다.

"우, 우와앗!"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바라보는 것 뿐.

놈의 입에서 브레스가 분출 되기 직전, 함선에서 한 줄기의 붉은 레이저 포가 발사되었다.

콰아아앙!

레이저에 직격 당한 거대 마수는 구름 사이로 떨어져내렸다.

- 위이잉—! 비상사태입니다. 거주자들은 행동을 멈추고 긴급 피난 시설로 대피해주십시오.

함선 전체에 울려 퍼지는 경고.

붉은 경고등이 방 안에서 깜빡였다.

"이, 이거 어쩌죠? 우리도 긴급피난 시설로 가야할까요?"

다행히 우리끼리 행동할 필요는 없었다.

위이잉!

우리가 있는 방의 문이 열리더니, 금발의 여성 한 명이 들어왔다.

새하얀 로브를 걸친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다들 빨리 나와요!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에, 엘리스?!"

"엘리스 맞으니까, 일단 움직여요!"

쿠우우웅—!

다시 한 번 강한 진동이 우리를 덮쳤다. 창밖으로 보이는 함선 반대편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일단 나가죠."

엘리스라면 믿을 법하다. 그녀는 무엇보다 시간의 능력자다. 현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잠깐만요. 서현 언니. 이거 받아요!"

엘리스는 품에서 가면 하나를 꺼내 윤서현에게 건넸다. 어리둥절해 하는 윤서현에게 강제로 씌웠다.

"자, 잠깐······!"

"설명은 가면서 할게요!"

미래의 엘리스를 따라 복도로 나왔다. 사람들은 우리와는 반대방향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붉은 경고등이 점멸하는 복도를 따라 달려갔다. 미로처럼 얽힌 통로를 이리저리 통과해 어딘가로 향한다.

"엘리스, 지금 어디로 가는거야?"

"함장한테요. 지금 시점에서 제일 믿을 수 있는 사람이거든요."

쿠우웅—!

선체에 울려퍼지는 강력한 진동. 바깥에서는 마수와의 전투가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는 모양.

엘리스는 곤란한 표정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상황이 바뀌었어요. 저쪽에서 눈치를 챘어요."

"저쪽이라니?"

"으으, 함장이 설명 안했을 줄 알았어요. 세계를 구하는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인류는 분열되었어요."

쿠웅!

복도의 코너를 돈 순간이었다.

길을 막아선 남자 하나가 보였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내뿜어내고 있는 남자. 그는 검은 제복을 걸치고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 신경질적으로 좁혀진 미간, 날카로운 눈매.

"금빛의 현자······. 포기하고 얌전히 리더를 넘겨라."

그 정체는 천성호였다.

엘리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늦었나······."

"저, 저 사람은······?"

"천성호에요."

"그 중딩이 저렇게 변했다고?"

천성호는 검을 들어 올렸다.

단지 그 뿐이었지만.

"윽, 숨이······."

"뭐야······?"

그 압도적인 격 앞에 진세아와 윤서현이 무릎을 꿇었다. 엘리스도 쉽사리 움직이지 못한채 상황을 살필 뿐이었다.

그러나 그 격은 나에게는 조금도 닿지 않는다.

내 격이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천성호는 고개를 숙였다.

"리더. 이런 배신자들에게 속지마시고, 저희와 함께 가시죠."

그 말에 엘리스가 양 손에서 권총을 꺼내들었다.

"함선을 공격하면서 그런 말을 해도······."

인류는 분열되었다는 게 이런 말이었을 줄이야.

최후의 10인이 따로 나뉘었을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러면 반대쪽의 리더는 천성호라는건가?

"리더께서 동의하지 않으셔도 상관 없습니다. 여제의 명을 따를 뿐입니다."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천성호는 '여제'라는 자의 명을 따른다고 말하고 있었다.

"사부! 제가 실패하더라도 이 길을 쭉 따라 올라가서 함장을 만나요!"

"네가 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건가?"

천성호의 검에서 시뻘건 마력이 뚝뚝 떨어져내린다. 그 모습이 피처럼 섬뜩하다. 엘리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권총을 손에 쥔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못 막아요. 하지만······."

『 동료 엘리스가 '절대 미래 예지 Lv.10'을 발휘합니다. 』

『 동료 엘리스가 '시간 조작 Lv.10'을 발휘합니다. 』

파아아—!

점멸하듯 시야에서 사라진 엘리스.

그녀는 어느 순간인가 천성호의 뒤에 서 있었다.

"이건 몰랐을 걸요."

『 동료 엘리스가 '절대 시간 정지 Lv.1' 을 발휘합니다. 』

엘리스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천성호는 시간이 멈춘 듯 멈춰 서 있었다.

콰아앙!

엘리스눈 발로 복도의 벽면을 발로 찼다.

콰아아—!

부숴진 벽면으로 강렬한 기류가 휘몰아쳤다. 지친 엘리스가 휘청거렸다. 천성호를 저기로 떨어뜨리려고 하는 것 같은데.

"도, 도와주세요! 시간이 얼마 없어요!"

나는 엘리스의 뒤에 섰다.

지금 상황에서 누가 배신자이고 뭐가 어떻게 굴러가는지까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을 거다.

나는 엘리스를 도와 천성호를 바깥으로 밀었다.

후우웅!

굳어진 천성호가 그대로 추락했다.

"지, 진짜로 밀어버린거에요?!"

"괜찮은거 맞아요?"

"두 분 다 진정해요, SSS급 헌터니까요. 금방 다시 쫓아 올 거에요."

"SSS급······?!"

SSS급은 상상을 초월한 존재니.

엘리스가 한숨을 내쉬며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빨리 갑판 위로 올라가죠."

* * *

함선 바깥으로 나오자 강한 바람이 휘몰아친다.

함교의 중심부.

함선 전체가 한눈에 보이는 자리에 진세아가 서 있었다. 그녀가 찬 망토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함선 전체가 어마무시한 크기다.

그러한 배가 하늘을 날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

그녀를 돕는 사람들이 갑판 위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콰앙—! 콰앙!

달려드는 아룡들을 향해 각종 함포들이 쉴 새 없이 불을 내뿜고 있다.

"함장님, 데려왔습니다."

"고마워, 엘리스.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야.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크어어어어—!

거대한 아룡 한 마리가 함선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그 크기는 일반 함포의 저지력을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잠깐, 이것만 해결하고."

이를 악문 진세아가 바닥에 손을 올렸다.

『 동료 진세아가 '절대 강탈 Lv.10'을 발휘합니다. 』

『 함선 '세이비어'의 조종 권한을 강탈합니다. 』

그와 동시에 함선이 크게 기울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그 덕에 함선이 달려드는 아룡을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갔다. 진세아의 절대 강탈 때문일까.

함선은 말도 안되는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어느새 배의 머리가 아룡들을 향해 있었다.

진세아가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조져버려!"

"변함없이 막나가는 명령······."

"주포 최대출력으로 발사!"

함선의 가장 큰 레이저포 위로 붉은 마력이 모여들었다. 공기가 저릿해질 정도로 압축된 마력이 절정에 달한 순간.

콰아아아—!

주포에서 발사한 레이저포가 아룡을 꿰뚫었다. 레이저는 놈의 아가리부터 꼬리까지 완벽하게 관통했다.

투두두두······.

마수의 피가 비처럼 갑판 위에 쏟아져 내렸다. 그럼에도 아룡들은 포기를 모르고 바닥에서부터 쫓아오고 있다.

"함장님,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쩌긴 도망가야지."

"넵! 알겠습니다!"

비서로 보이는 사람이 진세아의 말을 전달했다.

그제서야 진세아도 한숨을 내쉬며 난간에 기대었다.

"그래도 한숨 돌렸어. 그러니까 다들 궁금하겠지. 무슨 상황인가하고."

미래의 진세아가 손가락으로 아래쪽을 가리켰다. 수십 마리의 아룡이 함선을 노리고 날아오고 있었다.

"저것들은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니야. 지구에 마족이나, 각종 마수들은 많지만 저런 용들은 보기 드물었으니까."

말 그대로다.

저만한 크기와 저만한 힘을 가진 아룡종은 정말로 드물었다. 인간의 수백 배에 달하는 크기를 가진 아룡은 멸망한 세계에도 몇 없었다.

"모두 여제가 다른 차원에서 불러 온 존재들이야. 말했다시피 지금 인류는 두 개의 파벌로 나뉘어 있어."

"네가 말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아, 맞아. 말하는 걸 까먹었네."

진세아가 머리를 긁적이다 소리쳤다.

"어쨌든! 세계는 내가 이끄는 함선 '세이비어'와 여제가 이끄는 최후의 10인으로 나뉘었어. 이 공격은 전부 여제의 짓이고."

인류는 분열되었다.

세이비어와 여제로.

"여제는 이 세계를 새로운 멸망으로 끌고 가고자 하는 존재. 대한민국의 영토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그 사람은······. 어쩌면 마족보다 더 위험할지도 몰라."

여제.

진세아는 이 모든 게 여제의 공격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다른 차원에서 마수들을 불러낼 정도로 강력한 존재.

미래의 천성호가 따르는 그 사람.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그 여제란 건 누구야?"

기억을 뒤져봐도 그런 힘을 가진 마족은 없었다. 다른 차원에서 아룡종을 불러오는 능력을 가진 마족이라니.

'설마······.'

영 짐작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진세아와 엘리스의 행동으로 유추하건데.

그리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답은 나와 있었다.

"여제의 정체는······."

미래의 진세아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시선은 윤서현에게 향해 있었다.

이쯤했으면 알 수 있었다.

"서현 언니야."

"나, 나라고······?"

당황하는 윤서현.

그녀의 얼굴에 씌여진 가면은 그런 의미였다.

진세아는 진지한 눈으로 내게 말했다.

"그러니까, 오빠의 책임이 막중할지도 몰라. 오빠, 미안하지만 한 번만 우리를 도와줘. 우리가 이 세계를 구할 수 있게."

어떻게 되먹은 미래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154화 세이비어(2)

함선의 엔진이 붉게 달아 오르며 에너지를 방출해냈다. 가속하는 함선의 뒤로 두 개의 붉은 꼬리가 이어졌다.

콰아아아——!

함선을 쫓아 오던 아룡종들이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고 떨어져나간다.

깔끔한 도주였다.

"으아아, 멀미 할 것 같아요······."

난간을 붙잡은 진세아가 불평했다.

함선이 요동치는 탓에 멀쩡히 서있기 어려울 정도였다. 마법 공학적인 장치가 되어 있어 튕겨나가는 일은 없는 것 같다만.

미래의 진세아는 함장모를 붙잡은 채 함선이 나아갈 진로를 바라보고 있다. 탐탁치 않은 표정이었다.

"쯧, 도망은 쳤지만 방어 시스템을 빨리 복구하지 못하면 따라잡히는 건 시간 문제겠어."

미래의 진세아는 뒤를 돌아 함선 내부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를 따라 망토가 펄럭였다.

"일단 회의실로 가자. 모두에게 해야 할 설명이 많아."

"알겠어요, 함장. 그러면 가시죠."

엘리스를 따라 우리는 회의실로 향했다. 도중에 박살난 통로를 확인한 미래의 진세아가 기겁했다.

"끄아아! 이거 뭐야?!"

"아······. 천성호씨와 전투가 있었거든요."

"함선 내부까지 침입했었단 말이야?"

"네, 뭐······."

엘리스가 손을 대자 빛이 감돌더니 부숴진 통로가 순식간에 복구되었다. 편리한 능력이다.

미래 진세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함선 내부에 다른 최후의 10인이 남아 있는 건 아니겠지."

"없어요."

거기에 대해선 엘리스가 확답했다. 그제서야 진세아의 표정이 풀어졌다.

"대체 여제 쪽에선 오빠가 나타난 걸 알아챈거지? 우리야 엘리스가 있다지만······."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엘리스와 달리 반대편에는 그러한 능력자가 없다는 게 진세아의 설명이었다.

어쨌든 한시름 놓은 상황.

우리는 회의실에 도착했다.

텅 비어 있는 공간에 불이 켜졌다.

"다들 아무데나 앉아. 앉을만한 사람도 없거든. 사실상 세이비어의 책임자는 엘리스와 내가 유일하니까."

"다른 사람들은 전부 여제의 편이 된 건가?"

내 질문에 미래의 진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제의 편이 되었거나 죽었거나. 그렉스나, 류이치, 레일리는 전부 죽었어."

"그 사람들은 해외의 유명 헌터들······?"

윤서현의 물음에 미래의 진세아가 아차 싶은 얼굴을 했다.

"아, 아직 그 시점에선 같은 팀이 아니었나?"

"굳이 숨길 필요도 없죠. 지금 상황에선 최대한의 정보를 전달해주는 게 서로에게 윈윈일테니까요."

엘리스의 말에 잠자코 있던 진세아(현재)가 입을 열었다.

"근데, 미래인데 어떻게 내가 두 명 존재할 수 있는 거야······? 이거 완전히 타임 패러독스라던지, 어긋나 버리는 거 아니야?"

엘리스는 친절한 미소와 함께 설명을 시작했다.

"시간은 한 줄기로 흐르지 않아요. 세아양이 이해하기 쉽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다중차원 우주이자 멀티버스인 셈이죠."

내 앞에 계속해서 다른 미래가 펼쳐지는 것도 그 때문일 거다. 미래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게 마음에 든다.

"······다만 이런 식의 침범은 본래라면 일어날 수 없는 일. 지금 상황은 사부의 능력이 만들어낸 기적이라고 봐야겠죠."

콰앙!

미래의 진세아가 회의실의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러니 이 기적. 확실히 사용해서 이 세계를 구하는거야. 우리는 전적으로 오빠를 돕고, 오빠는 우리를 돕고."

* * *

진세아와 엘리스로부터 현 상황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중점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0명의 군단장을 처치한 시점.

마족과 인류는 고착 상태에 빠졌다.

그런 와중에 내가 죽은 것이다.

"잠깐, 나는 어쩌다가 죽은거야?"

내 질문에 엘리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곤란함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게 문제에요. 아무도 사부가 어떻게 죽었는지 몰라요. 최후의 10인도, 마족 그 누구도······."

모른다는 답이 나왔다.

내 입장에선 꽤나 충격적이다.

'곤란한데. 이유를 모른다면 사전에 방지하는 것도 불가능하잖아.'

어쨌든 나의 죽음을 계기로 인류는 둘로 분열되었다.

여제 윤서현과 함장 진세아로.

여제는 인류를 구하고 마족을 막아내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자신의 힘을 공고히 하기 위해 아이템과 능력, 기술을 독점하는데에만 관심이 있단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반항하는 자를 처단하거나 죽이는 일도 서슴치 않는다고 한다. 심지어 마족과 협력하는 정황까지 포착되었다고 하니.

"여제가 어째서 그렇게까지하는지는 나도 모르겠어. 완전히 미쳤다니까."

반면 진세아가 이끄는 함선 세이비어는 인류를 구원하고 마족을 몰아내기 위한 정의의 집단이라는 게 본인의 설명이었다.

"이 함선도 사실은 훔친 거야. 아이템 제작자 김건이 만든 최후의 병기 '세이비어'. 여제의 창고에 잠들어 있던 걸 내가 가져왔어. 대단하지?"

"자, 잠깐만요. 혹시 내가 아는 김건이에요?"

진세아(현재)의 머릿속에 떠오른 그 사람.

성장형 아이템을 만들 수 있는 제작자 김건이다.

"맞을 걸. 은빛의 날개 아이템 제작자."

"그 어벙해보이는 아저씨 진짜 대단한 사람이었네······. 친하게 지내야겠다."

진세아가 중얼거렸다.

미래의 진세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문제는 김건도 도중에 죽었거든. 그래서 이 함선의 구조나, 기능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게 많아. 고작해야 50% 정도 사용하고 있달까."

이번 미래에도 김건은 살아 있지 않았다. 김건의 미래에 대해서도 고민해 볼 법하다.

'어디 가둬놔야하나.'

그가 가진 재능을 생각하면, 절대로 살려놔야 할 인물 중 하나다.

"여제는······. 어째서 그런 짓을 하는 건가요?"

테이블에 가면을 벗어둔 윤서현이 진지하게 물었다. 어쨌거나 그녀의 미래가 현재의 여제다.

"말했다시피, 정확한 이유는 본인만 알겠지. 아니면 오빠를 너무 사랑해서라던가?"

"사, 사랑······?"

나와 눈이 마주친 윤서현이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가면으로 부채질하며 얼굴을 식힌다.

"그, 그 정도는 아닌데······."

엘리스가 진세아를 째려봤다.

"함장······."

"아, 왜. 맞잖아."

"단정하긴 어렵지만, 여제의 언니인 윤지은의 사망과 사부의 죽음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긴 해요."

그 말에 윤서현이 되물었다. 충격 받은 표정이었다.

"언니가 죽었어요······?"

"네······. 아, 그래도 너무 걱정마요. 지금의 서현씨의 미래는 충분히 바꿀 수 있으니까요. 이곳에서 충분한 정보를 얻어서 돌아가면 될 거에요."

엘리스는 그리 말했지만, 나로서는 쉽게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몇 번의 미래를 겪었지만 바뀌지 않는 사실이 몇 가지 있었다.'

윤서현은 본래 죽었을 인물이다. 내가 아는 최초의 멸망한 세계에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기사, 살아 있는 대한민국 사람들이 1000명 정도니 당연하지만.

이후 내가 본 모든 미래에서 무한의 궁사 윤지은은 죽었다. 살아남은 건 동생인 윤서현 뿐이었다.

'설마, 바꾸지 못하는 미래가 있는 건······.'

아닐 거다. 애써 그런 생각을 떨쳐냈다.

지금은 그리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애초에 바꾸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면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도울 일이란 뭐지?"

과거에서 온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이계 규율의 칭호 덕분에 강해지긴 했다만, 여제의 수준은 내 상식을 아득히 초월하고 있다.

타차원의 아룡종을 부리고, 공간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그녀의 능력은 쉬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다.

그럼에도 미래의 진세아는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간단하지만 어려운 일이야. 여제를 설득해줘. 인류의 분열을 멈추고, 마족을 몰아낼 수 있도록······."

지금의 윤서현이 어떤 상태인지.

직접 만나보지 않는 이상 확답할 순 없다.

그 천성호나 다른 이들이 그녀에게 협력하고 있단 건 나름대로의 이유가 존재한단 의미일테니.

"다른 누구의 말은 몰라도 오빠의 말이라면 들을지도 모르니까."

미래의 진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안전장치도 없이 오빠를 보낼 수는 없으니 우리도 나름의 준비는 할테지만. 어때······? 괜찮겠어?"

본래의 세계로 귀환하기 위한 조건은 '일자베기 14레벨'.

그러나 단순히 스킬을 배워 돌아가는 게 정답은 아니다.

미래의 일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결국 같은 미래를 반복하게 될테니까.

이 미래는 언젠가 내가 마주하게 될 세계.

"한 번 해보자."

내 말에 줄곧 심각한 표정이던 미래의 진세아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좋아. 역시 오빠야."

한순간이지만, 그 표정은 평소의 진세아와 똑같았다.

"근데 밥은 언제 줘요?"

정작 현재의 진세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었지만.

"밥 같은 소리하고 있네. 진세아, 너는 날 따라와라. 오늘부터 특훈이다."

미래의 진세아는 과거의 자신의 어깨를 붙잡았다.

"엥?"

"아직 모르는 거야? 네 능력은 단순히 물건이나 훔치려고 있는 게 아니라고."

과거의 자신의 볼을 마구 잡아 늘렸다.

"아파! 으아아······."

진세아(현재)가 반항하지만 기초적인 능력치에서 지대한 차이가 있다. 미래의 진세아는 SSS급 헌터일테니.

"오, 오빠! 살려져혀!"

함장 진세아는 과거의 자신을 끌고 회의실에서 나가버렸다.

미래의 자신에게 받는 특별 과외라.

그것만큼 효율이 좋은 훈련이 있을까.

엘리스는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머지 두 분도 움직일까요? 사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도 시간을 허투루 보낼 순 없으니까요. 잘 따라와주신다면 서현씨도 이곳에서 큰 성장을 하실 수 있을 거에요."

흰색 로브를 걸친 엘리스.

천성호는 그녀를 금빛의 현자라고 부르고 있었다.

내가 아는 미래의 엘리스보다 한결 차분한 느낌이 강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곳에서의 관계는 내가 아는 것과는 다르다.'

내가 리더라고 불리던 미래에서와 달리 엘리스는 윤서현을 언니라 부르지 않는다.

그 사소한 차이가 미래의 변화를 실감케 한다.

"아, 그 전에······. 사부, 재능의 원석을 가지고 있지 않으신가요?"

"가지고야 있는데."

미미한 재능의 조각, 특이한 재능의 조각, 신기한 재능의 조각.

모두 파편을 합쳐 각각의 조각으로 만들어낸 재능들.

이것들을 말하는 거다.

엘리스가 함선 내부가 그려진 홀로그램 창을 띄워 올렸다.

"그것들을 사용할 수 있는 장소가 함선 내부에 있어요. 한 번 가보시겠어요?"

"김건이 남겨준건가."

"네, 이 함선 자체도 사부의 지시로 만들어졌다고 들었거든요."

이전 미래에서도 김건이 조각들을 합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두었었다.

'여기에서도 나를 배려해준건가.'

가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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