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부협회장의 활약에 힘 입어 협회는 아무런 피해 없이 언데드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야, 순간 큰일 나는가 싶었는데 부협회장님이 돌아오실 줄이야. 누가 구해드린 건가?"
"글쎄요, 워낙 혼란하던차라."
협회의 주축인 마성철 팀장은 우리의 편이다.
그가 부협회장에게 제안했다.
"일단은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예후가 좋지 않습니다. 부협회장님께서 계속해서 우리 전체를 봐주실 수도 없는 노릇이고. 대형 길드와 합류하는 게 차라리······."
"지원 연락도 안되는 상황이니 어려울 것 같군."
백묵의 수하인 마성철.
그는 부협회장의 정체를 밝힐 시점을 얼추 정해둔 것 같았다.
바로 모든 길드가 다시 모인 시점.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 환상의 마족은 오래전부터 마기를 비축한 존재. 그 강함도 상상을 초월할테니.'
물론 쉽진 않다. 어지간히 사지로 몰아 넣는 게 아닌 이상 부협회장이 본 모습을 드러내진 않을 거다.
도망친다는 선택지도 있음을 감안하면, 꽤 신중히 움직여야 할 거다.
쿠구구구······!
그러나 협회측이 우선해야 할 것은 해당 지점의 공략이다.
"뭐, 뭐야? 갑자기 뭔가 생겼는데?"
"젠장, 벽으로 막혔어."
우리가 돌아가야 할 방향으로 거대한 뼈의 격벽이 솟아올랐다.
동시에 스산한 음성이 모두의 귓가에 울려퍼졌다.
- 허락 없이 숲에 발을 들인 존재들이여······. 응당한 대가를 치뤄야 할 것이다.
『 이중 던전 : 리치의 시련이 활성화 됩니다. 』
『 저주 받은 리치 처치 0 / 1 』
헌터들이 일제히 술렁이기 시작했다.
게이트 속의 던전.
흔히 있는 일은 아닌데다가 대부분 더 높은 난이도를 자랑하기 때문에 좋은 소식은 아니다.
그러나 이곳 게이트는 죄다 그런 식이다.
'다른 길드도 이중 던전을 공략 중일 거다.'
지원 연락이 되지 않는 이유도 그것 때문일테고.
"게이트 내부에 들어온 것처럼 다른 장소로 공간이동도 안 먹혀요."
유일하게 공간이동이 가능한 윤서현의 말도 앞쪽으로 전해졌다.
결국 전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어어어······!
앞길을 막아서는 언데드들이 떼지어 나왔다.
콰아앙! 콰앙!
하지만 부협회장이 전면에 나서준 덕분에 공략은 순조로웠다.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
그와 반대로 심각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입술을 깨문 채 내 뒤를 따르는 윤서현.
"정말이에요? 아니, 정말이겠죠."
그녀에게도 부협회장이 마족이란 사실을 말해줬다. 백묵의 수하가 아닌 이상 이러한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협회는 진짜 처음부터 끝까지 글러먹은 곳이었네요."
서걱—!
나는 눈앞의 언데드를 베어내며 말했다.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하나 확실한 건 있습니다."
"뭔데요?"
"윤서현 헌터의 그릇을 담기에 협회는 너무 작다는 겁니다."
"풋. 에이, 그건 오바 아니에요?"
"아뇨,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미래에서 확인한 그녀의 재능은 독보적이었다. 혼자서 마족의 대군을 막아내던 그녀의 모습은 인상적이기도 했고.
그때 옆에 있던 엘리스가 끼어들었다.
"사부님, 그러면 제 그릇은 어떤가요?"
너는······.
"훌륭하지."
"와아! 역시!"
근데 미래에선 되게 박식해 보였었는데······..
어쨌든 엘리스도 최후의 10인 중 하나였으니까.
"잠깐 말이 샜는데, 이번 일이 끝나면 은빛의 날개에 합류하시죠."
"지난번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죠. 저야 그러고 싶은데 언니가 격렬하게 반대한다니까요! 심지어 이번에 언니가 은빛의 날개 길드장이 되버렸잖아요. 절 죽어도 안 넣어줄걸요."
"······이번 공략이 끝나면 제가 설득하겠습니다."
부협회장의 정체가 밝혀지면 더 이상 그녀도 마냥 반대하진 못할 거다.
이미 이번 게이트 공략에도 참여한 마당에.
협회가 안전하다는 윤지은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동생인 윤서현이 안전하게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지만, 더 이상 세계에 안전한 장소는 없다.
역설적으로 은빛의 날개가 가장 안전할지도 모른다.
언데드들을 처리하며 어두운 숲을 나아가길 4시간.
"리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거야?"
"숲 한 번 더럽게 넓네. 끝이 없잖아."
"언데드 놈들도 계속해서 나오고 있고······. 아무리 부협회장님이 계시다지만."
긴장을 유지하고 있던 헌터들은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이들 대부분이 공략에 익숙하지 않은 협회 헌터들인 탓도 컸다.
본래대로라면 다른 길드의 후방을 지원하는 역으로 들어갔어야했지만.
부협회장의 강한 주장에 의해 따로 탐색을 펼치게 되었단다.
"휴식! 1시간 휴식입니다!"
"후우, 드디어 쉬겠네."
"교대로 쉽시다."
잠깐 주어진 쉬는 시간.
나는 엘리스, 윤서현 헌터와 마주 앉았다.
"잠깐만 이걸 봐주시죠."
배낭에 넣어놨던 지도를 꺼내어 펼쳤다.
"우왓, 어린애가 그린 것 같은 지도네요."
"······."
"나, 난 예술적이라고 생각해요."
윤서현이 빠르게 눈치채고 날 위로했다.
이건 내가 기억을 따라 열심히 그린 지도다. 이 지도에는 게이트 내부의 모습이 전부 담겨 있었다.
나는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지금 저희가 있는 장소는 여기 죽음의 땅입니다."
"잠깐만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지도를 살핀 윤서현이 부정했다.
"이건 너무 좁잖아요. 제 능력으로 확인했을 때는 이렇게 좁지 않았어요. 그리고 저희도 꽤 멀리왔고요."
그녀는 초공간인지의 재능 덕에 주변의 공간을 전부 파악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능력조차 이곳에서는 제 성능을 못 낸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나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전달했다. 입장 전에 백묵의 수하 길드원에게 전달 받은 차음 아이템도 손에 들었다.
"부협회장의 정체는 환상의 마족입니다. 일부러 같은 장소를 빙글빙글 돌고 있다는 게 되겠죠."
그가 만들어내는 환상은 오감이나 직감조차 속여낸다.
의도는 뭐 뻔하다. 대적자인 내가 나타날 때까지 이 짓을 반복하겠다는 거겠지.
"그래서 리치를 먼저 죽일겁니다. 리치가 죽으면 이중 던전은 공략 되기에 환상의 마족도 우리를 무리하게 잡아두지 않을 겁니다."
정확히는 첫번째 이중 던전이 공략 된 순간, 2페이즈가 시작되기에 그럴 수가 없을 뿐이지만.
나는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지도를 통해 공간을 재구성하고, 이쪽으로 이동해주세요. 리치가 있을 겁니다. 놈을 잡고 바로 돌아오면 감쪽 같겠죠."
윤서현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지한씨의 말이 다 맞다고 쳐도 공간이동에는 대기 시간이 있어요. 돌아오지 못하고 우리가 이탈한 게 들킬 거에요."
나는 엘리스의 어깨를 잡았다.
"엘리스가 있으니 괜찮습니다. 아까 보셨죠?"
"설마."
그녀의 시간조작이 윤서현의 공간이동이 가진 단점을 없애줄 거다.
그리고 내가 가진 절대 신성이 리치를 단숨에 죽일 거고.
* * *
"부협회장님, 이거 드셔보시죠. 새로 나온 자양강장제입니다. 헌터들에게 그렇게 좋다 하더라고요."
"고맙네, 직접 마시겠네."
마성철이 건넨 음료수를 받은 부협회장.
그는 심기가 불편했다.
상황이 대적자가 원하는대로 흘러가는 것 같았기에.
제일 많은 수의 언데드를 죽인 것도, 강한 언데드를 죽인 것도 전부 그였다.
'그래도 시간은 내 편이다. 시간이 지나면 대적자도 어쩔 수 없이 나와야겠지.'
부협회장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가장 의심이 되는 건 마성철 이 놈.
사람 신경 긁는 기술이 아주 예술이다.
거진 천 년을 살아 온 자신조차 놈 때문에 감정이 조금씩 드러날 정도다.
"부협회장님 덕분에 공략이 순조로워 다행입니다. 아, 뭔가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짜증을 돋구고 있었다.
'대적자건 아니건 이 놈은 꼭 죽여야겠군.'
환상의 마족은 마음을 다잡았다.
어쨌든 대적자를 미리 찾아내고 가는 게 이득이라는 판단이었다.
그가 나오지 않는다면 협회의 대부분은 무의미하게 던전을 헤매다 목숨을 잃을 것이다.
살아남은 몇은 상황을 충분히 증언해 줄 거다.
부협회장은 최선을 다했노라고.
'대적자, 언제까지 숨어 있을 수 있나 보자고.'
그리고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 저주 받은 리치가 처치 되었습니다! 』
『 이중 던전 : 리치의 시련을 극복하셨습니다. 』
생각하지도 못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뭐, 뭣?'
부릅 뜬 부협회장의 눈가에 핏줄이 솟아오른 건 그와 동시였다.
140화 연합을 이끄는 네 개의 별(4)
이중 던전의 보스 리치가 죽었다.
'대적자, 네 놈은 큰 실수를 한 거다.'
부협회장은 재빠르게 눈을 돌렸다. 그의 부릅 뜬 눈가에 핏발이 섰다.
지금 이 자리에 없는 누군가가 대적자일 것이다.
이번 공략에 참여한 협회 측 인원은 총 52명.
그들에 대해 세세히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비어 있는 인원이 있다면 물어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이해 할 수가 없군······.'
52명 전부가 이 자리에 있었다.
숨을 헐떡이는 사람도, 전투의 흔적을 가진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빠득.
부협회장은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마치 환상 속에서 놀아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화를 낸다고 대적자를 찾아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후우, 이거 나약의 마족에게 비웃음을 당해도 할 말이 없겠군.'
협회의 주요 인물들을 자연스레 죽음으로 몰아넣으려는 당초의 계획은 완전히 어그러졌다.
"잘은 모르겠지만 리치가 쓰러졌나봅니다. 어쩌면 다른 길드에서 우리가 모르는 지원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행운이군요."
행운은 개뿔.
부협회장은 당장이라도 마성철의 얼굴을 쳐부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냈다. 여기서 마족임을 드러내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었다.
이런 곳에서 밝힐 정체였다면, 뭣하러 자신이 수 년 간 인간의 틈에 숨어 있었겠는가.
'자신만만하게 말했건만 이런 망신이라니.'
첫번째 이중 게이트가 빠르게 공략 되었다.
부협회장이 세웠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사실상 달라지는 건 없었다.
가장 중요한 목적은 변치 않는다.
프로젝트 아포칼립스.
상위 나약의 마족이 착실하게 준비한 계획이다. 이것만큼은 달라지지 않을 거다.
거기에 한 숟가락 얹어 보려고 했건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빌어먹을 대적자 놈.'
그렇게 부협회장이 울분을 삼킬 때였다.
『 최초로 시련을 클리어하셨습니다. 』
『 멸망을 향한 카운트 다운이 시작됩니다. 』
경고성 메시지에 헌터들이 술렁였다.
그들 중 하나가 하늘을 가리키자 그 술렁임은 더욱 커졌다.
"저, 저기 좀 보세요······!"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거대한 운석 하나가 빠르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추락하는 지점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 제한 시간 내에 다음 지역으로 넘어가십시오. 』
부협회장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들 움직이지. 다음 지역이란 곳을 살피러가세나."
카운트 다운이 시작된 이상, 환상으로 이들을 묶어두는 건 무의미했다. 정확히는 그럴 수 없었다. 환상의 범위가 제한되기 때문이다.
저 운석이 떨어지면 상위 마족인 자신도 무사하리란 법이 없었다.
몰살은 언제나 좋은 선택지지만 휘말리는 건 사양이다.
"이런 상황에도 차분하시다니······."
"부협회장님······. 역시 노련하셔."
선두에서 길을 나아가는 부협회장.
그런 그의 뒤를 따르는 52명의 헌터들.
부협회장은 필사적으로 헌터들의 말을 무시하며 나아갔다.
이제는 그런 말조차 열 받을 뿐이었으므로.
모든 게 대적자의 뜻대로인 것 같았지만, 부협회장은 남몰래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그래도 내겐 비장의 수가 하나 남아 있으니,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대적자여.'
공략에 참여하는 협회 대부분의 인물들에게 심어 놓은 마기의 씨앗.
그것이 발화하면 대적자를 발견하는 일은 한결 쉬워 질 거다.
"협회장님, 무슨 좋은 일 있으십니까?"
"······."
부협회장의 옆에 딱 붙어있던 팀장 마성철이 물었다.
"쯧."
"혀를 차실 정도로 불편하신겁니까?"
"······."
부디 이 빌어먹을 놈이 대적자이길.
* * *
냠냠.
"뭐야, 뭐 먹는 거야?"
어깨에 보호구로 변해 있던 오르티마가 반대편 어깨로 기어와서 뭔가를 먹었다. 그러고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엘리스가 내 어깨 보호구를 툭툭 찔러보더니 말했다.
"정말 신기한 생물이네요. 사부님은 어디서 이런 걸 구하셨나요?"
"창고에서 주웠어."
내 대답에 옆에 있던 윤서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선 물었다.
"그게 어디 창고인지는 말 안해 줄거죠?"
"나중에 때가 되면 말해드리겠습니다. 같이 가시죠."
"정말요? 나중에 딴 말하기 없어요."
오르티마는 황금왕 자볼의 창고에서 얻었다.
그것도 미래에 있는 창고.
'이 시점에도 분명 자볼의 창고는 존재한다.'
미래에선 환세의 도둑 진세아가 아이템을 싹 쓸어가서 건질 게 별로 없었지만, 현시점에선 창고가 개방되지 않았다.
내부의 아이템도 그대로란 말씀.
'그런데 오르티마는 어떻게 되는 거지?'
창고에 오르티마가 하나 더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뭐, 그때 가봐야 아는거겠지만.
"정말로 저 운석은 괜찮은거겠죠?"
"시간 내에게 지역을 통과하기만 하면 괜찮을 겁니다."
"지한씨 말이 지금까지 틀렸던 적이 없기는 한데······."
이중 던전을 공략한 뒤로 협회를 가로막는 건 없었다.
검게 물든 숲을 벗어나자 메마른 언덕에 오르자 거대한 협곡이 한 눈에 들어왔다.
시스템의 메시지대로 우리가 첫 공략자였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협곡의 웅장함에 협회의 모두가 입을 벌리며 바라볼 정도다.
"우와우, 절벽 아래가 전혀 안보여요!"
"게다가 저 장벽은······."
중간에 반투명한 보랏빛 장벽이 협곡 전체를 가로막고 있었다. 우리가 다음 나아가야 할 지역은 바로 건너편에 있는 땅이다.
절벽도 절벽이지만 반대편의 땅과의 거리도 까마득하게 멀다.
"부협회장님! 다른 길드의 공략 상황이 보입니다!"
"오, 정말이네. 다들 저기 봐요."
우리가 위치한 장소는 고지대였다. 뒤를 돌자 다른 길드의 공략 상황이 한 눈에 보였다.
나는 미리 준비해 온 망원경을 꺼내들었다. 3억원 가량의 꽤 비싼 아이템이다.
가장 먼저 오성.
얼어 붙은 숲, 5m 크기의 얼음 마녀와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가장 뚜렷한 활약을 보이는 건 다름아닌 김상욱.
양 손에 단검을 들고 허공을 거침 없이 뛰어다닌다. 마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해 거의 날아다니는 수준이다.
마녀가 만들어낸 얼음들을 깨부수며 전투를 주도한다.
'확실히 보통 실력은 아니군. 오성에서 제일 강한 느낌인데.'
마기의 힘이 뛰어나기도 하다지만 상상 이상이었다. 오성의 다른 헌터들도 상당한 실력자건만.
어차피 오성은 공략에 무조건 성공한다. 마족과 내통하는 길드장이 있는 곳이니까.
나는 망원경을 그 옆으로 돌렸다.
'수호 길드는······.'
신태양과 사최헌의 활약이 눈부시다.
용암이 흐르는 대지 위, 몰려드는 헬하운드를 학살하다시피하며 전진하고 있다. 그 뒤를 받쳐주는 탄탄한 길드원들의 연계까지.
대한민국 1위 길드답다.
'이번 공략이 끝나면 신태양의 평가가 더 오르겠어.'
대한민국 최강이라는 칭호를 가진 사나이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
마지막으로 확인한 길드는 은빛의 날개.
황량한 바위 지대에서 바위 거인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콰아앙—!
천성호와 신아람이 만들어내는 강렬한 충격파가 이곳까지 느껴진다. 거인이 기우뚱 넘어가는 사이, 길드장 윤지은이 쏘아내는 화살이 비처럼 쏟아져내린다.
엄청난 파편이 솟구쳐 오른다.
채아연의 버프 덕에 윤지은이 쏜 마력의 화살이 더욱 두껍고 강력해졌다.
헌터들도 어떻게든 다른 길드들의 상황을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다른 길드들의 공략이 끝나야 다음 지역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건가."
하늘 위에서 떨어져내리는 거대한 운석.
그 크기와 거리는 가늠하기가 힘들다.
언제 떨어질지 예측이 가지 않는다.
그것이 협회의 사람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팀장인 마성철이 부협회장에게 제안했다.
"지원을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협회장은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다른 길드들도 이미 충분히 공략을 잘 해주고 있네. 괜한 도움을 주는 것보단 여기서 기다리는 게 나을 걸세."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
마성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은날이 있는 위치에 거인 둘이 더 모습을 드러냈다.
수호 길드가 있는 쪽도 마찬가지였다. 헬 하운드들 뒤로 철갑을 두른 화염의 야차가 나타났다.
"귀찮게 하는군······. 적당히 할 것이지."
"예?"
"아닐세, 다만 우리도 많이 지쳤을텐데. 지원이 오히려 독이 되는 건 아닐지 걱정이군."
돕지 않는다면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거라는 건 누구라도 예측할 수 있었다.
"부협회장님 저희는 괜찮습니다!"
"아까 쉬어서 괜찮습니다. 그 뒤로 큰 전투도 없었고요!"
"빨리 돕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떨어져내리는 운석이 보이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자는 사람은 없었다.
부협회장을 제외하곤.
그마저도 대다수의 의견이 간다는 쪽으로 굳어지자 부협회장도 허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지원을 가는 걸로 하게나."
"부협회장님의 힘도 꼭 필요합니다."
"그렇겠지······."
그리하여 협회는 나뉘어져 각 길드의 지원을 나서기로 했다.
좋은 선택이다.
우리는 은빛의 날개를 돕는 조에 속하게 되었다.
부협회장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무렵.
나는 조장에게 말을 건넸다.
"저희는 여기서부터 따로 움직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모든 길드가 합류하기 전까지만 도착해주시면 됩니다."
백묵의 수하 중 하나인 정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협곡쪽으로 돌아가죠."
"네? 은빛의 날개에 지원을 안 가도 되는 거에요?"
윤서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어차피 저희가 도착하기 전에 끝날 겁니다."
거기는 영웅 포화 상태다.
겉으로 크게 드러나진 않았지만 이제는 수호 길드보다 거기 전력이 더 강할 거다.
각 길드들의 공략이 끝나면 환상의 마족과의 전투가 벌어질 거다.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엘리스, 윤서현과 함께 협곡으로 돌아왔다. 나는 잠시 머릿속의 지도와 주변의 지형을 비교했다.
'여기인가.'
확인 했으면 고민할 건 없었다.
"우앗! 사부님!"
망설이지 않고 협곡 밑으로 뛰어 내렸다. 벽면에 검을 꽂아 넣고서 쭈욱 미끄러져 내려갔다.
카가가각—!
꽤 많이 내려갔다고 생각할 무렵.
발이 닿는 땅이 나타났다.
절벽에서 부자연스럽게 툭 튀어나온 부분이었다.
그 앞으로 협곡의 아래에 숨겨진 동굴이 보인다.
"다들 여기로 내려오시죠."
"순간이동이 안되는 장소네요······?"
"직접 내려와야 합니다. 조심하세요.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타앗.
윤서현은 사뿐하게 착지했다.
뒤이어 뛰어내린 엘리스.
휘익.
잘 착지하나 싶던 순간.
"우아앗?!"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 부딪힌 것처럼 엘리스가 휘청였다. 그대로 떨어지려는 엘리스의 손을 내가 낚아챘다.
"가, 감사합니다. 분명 아무것도 없었는데 이상해요."
"그러게. 신기하네."
엘리스를 끌어 올린 뒤, 나는 잠시 엘리스가 넘어진 공간을 바라봤다.
"······."
확실히 아무것도 없긴 하다만.
"이런 장소에 동굴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지한씨는 용케 알아챘네요."
"왠지 굉장한 아이템이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에요."
S급 게이트의 내부다.
그것도 상당히 SS급에 가까운 고등급.
당연히 좋은 아이템이 있을 수밖에 없다.
『 히든 이중 던전 : 잊혀진 종족의 빛바랜 유적 』
우리들은 동굴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화아악—!
일행이 발을 들이자 벽면의 횃불이 녹색의 불꽃을 피워냈다. 양측 벽면으로 펼쳐진 총천연색의 벽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로 유적이다.
"잠깐만요, 여기에 있는 거 사부님 아니에요?!"
유적의 그림을 유심히 살피던 엘리스가 말했다. 윤서현이 관심을 보이며 다가갔다.
"어디?"
"봐봐요, 여기 그려진 이 사람. 사부님하고 같은 팔찌를 왼손에 차고 있어요."
"팔찌의 문양이 비슷하기는 한데······. 그것만 가지고 지한씨라고 하기엔 너무 억지 같은데."
확실히 흥미롭긴하다. 나도 유적의 벽화를 살펴봤다.
"여기 그려진 건 마족처럼 보이네요. 이 종족이 멸망하게 된 배경이 그려져 있는 걸겁니다."
군단장을 의미하는 심볼과 문양이 보인다.
검, 밤, 독약, 썩은 고기, 어린 아이······.
고통 받는 사람들의 모습, 마족과의 전투를 묘사한 장면.
그 끝에는 마계왕처럼 보이는 인물이 서 있다.
그리고 그와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 바로 엘리스가 말한 인물이다.
'확실히 내 팔찌와 비슷하군.'
초월의 팔찌.
어쩌면 이게 마계왕에게 대항하기 위한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
다만 당장은 그 활용법을 알 수 없는 게 문제다. 벽화에도 관련된 언급은 없다.
고고학 탐구는 이쯤하면 됐고.
동굴의 끝에 다다르자 원형의 방이 나왔다.
그 중간에는 정육면체의 상자가 놓여 있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상자.
저 안에 무언가 있을 거라는 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아무도 섣불리 상자를 열지 않는 이유.
함정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여, 열어도 될까요?"
"그래요, 지한씨. 기다려봐요. 지금까지 아무일도 없었다는 게 오히려 의심스럽잖아요."
그래도 열지 않으면 시작되지 않는다.
나는 금빛 정육면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턱.
내 손이 닿는 순간.
투우웅—!
우리가 서 있던 바닥 전체가 사라졌다. 동시에 거센 중력이 우리의 몸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금빛 정육면체와 함께 그대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발 밑은 완벽한 어둠. 윤서현과 엘리스가 당황해하는 게 느껴졌다.
"자, 잠깐만요······! 이거 아무것도······!"
"사부님! 위험해요!"
"괜찮습니다. 다들 진정하세요."
"진정하게 생겼어요, 지금?!"
쿠웅!
꽤 오랫동안 떨어졌지만 예상했던대로 충격은 적었다.
거대한 동공이 우리의 앞에 펼쳐졌다. 복잡한 기계 장치가 가득한 유적이었다.
"주, 죽는 줄 알았네."
"너, 너무 무서웠어여······."
철컥!
우리와 함께 떨어진 금빛 정육면체가 분해되었다. 그 안에서 날개가 달린 열쇠가 나타났다.
위잉—!
그것은 우리를 놀리듯이 날아갔다.
동공의 중앙에는 거대한 보물 상자가 놓여 있다.
『 잊혀진 종족의 시련이 시작됩니다. 』
『 살아 있는 열쇠를 잡아 자격을 증명하세요. 』
그런 메시지가 떠올랐다만······.
우리 중 누구도 메시지에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그도 그럴게.
"아야야······. 아파······."
있을 수가 없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와 함께 자연스럽게 떨어져선 엉덩이를 문지르고 있는 녀석.
진세아가 우리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의 시선이 녀석에게로 향했다.
"세, 세아야?"
"어, 언제부터 있었던 거에요?"
"······."
녀석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가리키더니 물었다.
"내가 보여요?"
응.
아주 잘 보여.
141화 환상을 가르는 빛(1)
이번 공략에 참여하지 않았다던 진세아가 처음부터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으으, 감쪽같이 잘 따라오고 있었는데. 갑자기 땅이 없어져 버릴 줄이야······."
진세아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윤서현이 놀라며 물었다.
"따라왔다고? 언제부터?"
"물론 처음부터죠. 후후. 어때요, 내 실력?"
"꾸, 꿈에도 몰랐어요."
엘리스는 정말 놀랐는지 동그란 눈을 깜빡였다.
나는 중간부터 대강 눈치채고 있었다.
미래에서 얻은 정보와 달리 진세아가 없는 것부터가 말이 안됐다.
주변의 땅이나 수풀이 부자연스럽게 흔들리는 경우도 꽤 자주 있었다.
'······그렇다곤해도 내 생각보다 많이 성장했는데.'
진세아는 자신의 모습 뿐만 아니라, 기척까지 완전히 지워내는데 성공했다. 실제로 바로 앞에 있어도 알아챌 수 없을 정도였다.
엘리스가 절벽에서 미끄러진 이유.
그것도 진세아 때문이었다.
은신 상태의 진세아가 엘리스를 미처 피하지 못한 거였겠지.
코 앞에 있어도 눈치 못챌 정도로 은신은 정교하단 의미였다.
진세아는 씩 웃으며 손으로 브이자를 만들어보였다.
"오빠하고 게이트를 다녀온 뒤로 엄청난 깨달음이 있었거든요. 이것저것 시험하다보니 되더라고요."
리미트 해제 이후인가.
"이번 공략, 우리 아빠가 완전 반대해서 못 올 뻔 했거든요. 이런 중대한 공략에 내가 빠질 수는 없죠. 이번 공략은 지구를 구하는 거잖아요. 맞죠?"
대략 맞긴 하다.
진세아의 말을 들은 윤서현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랬던거였구나. 근데 게이트에 들어 온 뒤로부터는 모습을 드러내도 되는 거 아니었어?"
"내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 파밧하고 나타나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꼴사납게 됐어요······."
뭐, 등장하는 타이밍 자체는 나쁘지 않다.
"아이템부터 회수하죠."
나는 열쇠가 사라진 장소를 바라봤다.
그러자 세 사람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놀라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오빠는 냉혈한······."
"원래 그런 사람이잖아."
"사부님이 그런 냉혹한 면이 있기는 하죠."
"······."
동공의 중앙, 빛이 내리쬐는 장소에 보물 상자가 놓여 있다.
날개가 달려 도망간 열쇠를 찾아 끼우면, 잊혀진 종족이 숨긴 보물을 가져올 수 있다.
우우웅.
열쇠는 잡아 볼테면 잡아보라는 듯 유유히 내 앞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계속해서 우리를 따라다니고 있었으면 상황은 대충 알고 있다는 거겠네."
"음, 잘은 몰라요. 리치를 쓰러뜨린 게 오빠고, 부협회장이 환상의 마족이어서 곧 우리가 먼저 공격할 거라는 것 정도······?"
그러면 다 들은 거다.
"그러면 서두르죠. 지원을 나간 협회 사람들이 돌아오기 전에 끝내야 합니다."
내 말에 윤서현이 가장 먼저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섰다.
"저 녀석만 붙잡으면 되는거죠? 간단하겠네요. 내부에선 순간이동도 가능할 것 같거든요."
윤서현이 움직였다. 공간이 점멸하듯 반짝였다.
다음 순간, 윤서현은 날개 열쇠의 뒤편으로 이동해 있었다.
"잡았······!"
그녀의 손이 열쇠를 낚아 채려는 찰나.
휘릭, 휙!
열쇠는 순식간에 궤도를 바꾸어 그녀의 손을 빠져나갔다. 약올리듯 윤서현의 이마를 툭 치고 위로 올라갔다.
"큭!"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 윤서현. 귀가 빨개져 있었다. 자신만만하게 나선 게 부끄러운 모양.
"하, 한 끝차이였네요."
다시 공간이 반짝이며 윤서현이 순간이동을 사용했다. 먼 거리를 이동하는 공간이동과 달리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 순간이동에는 시간 제약이 없다.
에잇, 에잇!
윤서현이 필사적으로 움직였지만, 열쇠는 잡힐 생각이 없어보였다. 계속해서 한끝차이로 그녀의 손을 빠져나갔다.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 잡아줄테니까."
아무래도 열쇠가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 같다.
윤서현이 열쇠를 잡기 위해 시도하는 동안, 우리는 그녀를 따라 자연스레 동공 내부로 들어왔다.
"그나저나 보통 장소는 아니네요."
벽면을 둘러보던 엘리스가 감탄했다. 벽에는 잊혀진 종족의 유해가 보관 되어 있었다.
정좌를 한 자세 그대로 죽어 있는 자도 있었다. 그것이 미라처럼 보관 되어 수 백 년의 세월을 견뎌 온 것처럼 보인다.
"바깥의 벽화를 보면······. 이 사람들의 세계는 마족에 의해 멸망한 걸까요?"
"그렇겠지."
"그,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도 엄청 위험한 거 아니에요? 마족은 지금 우리 세계를 노리고 있다면서요!"
진세아의 말대로다.
마족은 위험하다. 그들의 야욕은 우리의 세계를 멸망 시킬 정도로 강하다.
"그게 지금 우리가 여기에 있는 이유가 되겠지."
"사부님은 막을 수 있다고 보시는 거군요."
"그래."
미래는 충분히 바꿀 수 있다. 나는 그걸 몸소 경험했다.
털썩.
열쇠를 잡기 위해 순간이동을 연달아 쓰던 윤서현이 바닥에 주저 앉았다.
"저는 포기······."
열쇠가 날아다니면서 윤서현의 머리를 마구 헤짚어 놨는지 머리가 엉망이었다. 엘리스가 윤서현에게 다가가 포션을 건네줬다.
"어머, 고마워. 잘 마실게."
그 사이 중앙을 유심히 살피던 진세아가 상자 앞으로 다가갔다.
"근데 꼭 열쇠를 잡아야 할 필요는 없지 않아요?"
『 동료 진세아가 스킬 '절대 해제 Lv.8'를 발휘합니다. 』
철컥.
경첩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상자가 시원스레 열렸다.
"그렇네······."
윤서현이 자리에 굳어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열쇠 또한 멈춰섰다. 어이 없긴 열쇠도 마찬가지인 모양.
그 순간을 윤서현은 놓치지 않았다.
"잡았다!"
그런 윤서현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 잊혀진 종족이 해당 시련의 부정을 감지합니다. 』
『 유적 자동 방어 시스템이 기동합니다. 』
쿠구구구······!
별안간 주변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바닥에서 정육면체의 상자들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것들의 중앙으로 붉은 빛이 모여든다.
딱봐도 심상치 않다.
"뭐, 뭐야?"
"서현 헌터. 상자에 열쇠를 집어 넣어요."
"알았어요!"
이 장소는 잊혀진 종족이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만든 장소. 진세아가 아이템을 훔쳐내더라도 마찬가지로 작동했을 거다.
그러니 그녀의 노력이 무의미하지는 않았던 셈.
철컥!
윤서현이 열쇠를 꽂아넣자.
붉은 빛을 내뿜던 방어 시스템이 일시에 정지 되었다.
스스스······.
『 정상적인 시련의 돌파를 감지합니다. 』
『 자동 방어 시스템이 정지합니다. 』
"휴우, 대체 여기에 뭘 숨겨 뒀길래 이렇게까지 해둔 거죠?"
모두가 상자 내부를 확인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화려한 보물상자의 외관과 다르게 내부에는 석판 두 개와 활과 화살이 놓여 있었다.
"이 종족의 언어인가본데요. 전혀 못 읽겠어요. 그나마 활을 건졌다면 모를까······."
윤서현이 무심코 활에 손을 댄 순간.
빠지직!
강렬한 푸른 전기가 솟아났다. 윤서현이 손을 털었다.
"아파라······. 만지지도 못하겠어요. 저주 아이템인가봐요. 이래서는 보상이랄 게 없네요."
"아뇨, 충분히 보상입니다."
나는 석판 중 하나를 들어 올렸다.
"여기에는 잊혀진 종족의 역사가 기록 되어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저한테 해석 스킬이 있거든요."
『 스킬 '다세계 해석 Lv.10'을 발휘합니다. 』
엘프 학자 세레네에게서 배운 일족 특유의 해석 스킬.
그 덕에 나는 석판 위에 새겨진 글자를 쉽게 해독해낼 수 있었다.
나는 천천히 첫번째 석판을 읽어내려갔다.
"마족은 세계를 삼켰고 우리는 철저히 패배했다. 그러나 우리는 희망을 보았다. 마족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 비록 미완성이나 그것을 여기에 남긴다. 후대의 누군가가 이 기술과 힘을 이어 받아주기를 바라며."
요약하자면, 마족에게 패배한 종족이 마족을 이길 방법을 남겨뒀단 것이다.
그들은 패배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마족을 쓰러뜨릴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그게 이 활과 화살이라는 거네요."
"그 활을 사용하려면 이 두번째 석판을 이용해야 한답니다."
"애초에 누가 여기서 아이템을 가져갈 줄 알고······."
그들에게 예언가라도 있었나.
그건 모르겠다만.
"실제로 저희한테 도움이 되고 있단 건 사실이니까요."
나는 석판을 읽어내려갔다. 다세계 해석으로 읽어낸 글자들이 푸른 빛을 내며 허공에 부유했다.
화아악—!
내 주위를 감싸기 시작한 푸른 글자들.
기술에 관한 정보가 내게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이것은 다세계 해석의 능력이 아닌, 석판 자체가 가진 힘이다.
팅.
이윽고 글자들 사이로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 유니크 스킬 '항마의 술 Lv.1'을 획득합니다. 』
『 항마의 비전이 담긴 아이템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
이거면 충분하다.
처억.
나는 상자에 있는 활과 화살을 주워들었다. 윤서현이 건드렸을 때와 달리 아무런 저항이 없다. 오히려 손에 착 달라 붙는 느낌.
"그러면 이제 올라가죠."
환상의 마족을 상대할 준비는 모두 끝났다.
* * *
네 개의 단체, 200명의 헌터들이 협곡 앞에 모여들었다.
『 네번째 시련을 클리어하셨습니다. 』
『 협곡을 가로막은 장벽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
협회의 지원은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보스인 리치를 상대하지 않고 곧장 게이트를 클리어 했기에 체력도 비교적 많이 남아 있었다.
길드와 비교하면 약하다곤 해도, 그들도 A급 상위에서 S급까지의 헌터.
결과적으로 모든 길드가 빠르게 이중 게이트를 공략했다.
"저 장벽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것만 남았다는 거군요."
수호 길드의 마스터 사최헌이 말했다. 협곡의 사이를 가로 막은 보랏빛 장벽이 중심에서부터 허물어지고 있었다.
"수호 길드는 게이트 공략의 단서도 찾아냈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습니까?"
"은빛의 날개도 단서가 담긴 파편을 발견했어요."
"오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쉽지만, 협회는 딱히 별 다른 증거를 찾지 못했네."
"그런가요. 뭐가 되었든 빨리 결정해야겠네요."
길드를 대표하는 이들의 얼굴이 썩 밝지는 않았다.
하늘에서 시선을 빼앗는 거대한 운석.
그것이 주는 시간적 압박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공간이동 능력자는 전체에서 총 두 명······. 이거 시간이 촉박하겠는데요."
"그 점에 관해서는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는 게, 저희 쪽에서 얻은 단서에 따르면 막바지에 다리가 생겨난다고 하네요."
"100% 신뢰하기는 어렵지 않나요."
대표들 가운데서 여러가지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사람들이 누군가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대부분이 협회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었다.
"지금입니다. 움직이시죠. 이 땅을 넘어가면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팀장 마성철.
그가 방패와 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묵의 수하인 그들의 목적은 부협회장의 정체를 밝혀내는 것. 그가 마족이라는 정보는 충분히 입수했기에, 남은 것은 증거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도망칠 장소도 없는 지금이 적기였다.
그를 중심으로 스무 명 가량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협회에 속해 있던 백묵의 수하들만 그 정도.
다른 길드의 산하에 들어 가 있는 자들까지 합친다면 그 수는 더욱 많다. 그들은 바람잡이 역할을 해줄 것이었다.
'지금입니다.'
마성철의 시선이 잠시 구석에 있는 이지한을 향했다.
이지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타이밍이다.'
유일한 기회이기도 하고.
협곡 건너편에 있을 나약의 마족은 움직이지 않을 거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프로젝트 아포칼립스의 성공.
때문에 이곳 어딘가에 위치한 심연에서 몸을 숨기고 있을 거다.
"대표분들, 잠시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
마성철과 부하인 그들이 대표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 다가갔다. 부협회장이 미간을 좁히며 그들에게 말했다.
"지금은 논의 중이니, 할 말이 있다면 잠시 뒤에······."
그리고 그 순간.
콰득!
뒤쪽에 있던 백묵의 수하 하나가 부협회장을 검으로 찔렀다. 복부를 관통한 검날이 부협회장의 가슴을 꿰뚫고 나왔다.
"커헉! 이, 이게 무슨······?!"
환상의 마족.
그는 몰랐을 것이다.
사냥꾼이 사냥감에게 역으로 사냥 당할 리가 있겠는가?
그 사냥감이 고라니 같은 약한 존재라면 더욱이. 그러한 주의가 있을 리가 없었다.
온 관심이 대적자에게만 쏠려 있었기에 이러한 기습은 성공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짓입니까!"
그 자리에 있었던 사최헌과 윤지은, 김상욱까지 모두 놀라며 무기를 꺼내들었다. 사최헌이 가장 먼저 검을 휘둘렀지만.
콰아앙—!
마성철의 방패가 그들을 막아섰다. 동시에 사최헌의 검을 완벽히 튕겨냈다.
자신의 검이 밀려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지 사최헌은 당황한 표정이었다.
"뭐······?"
"부협회장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 증거를 지금부터 보여드리겠습니다."
"커헉······. 이게 무슨 짓인가······. 마성철······."
부협회장이 피를 울컥 쏟아내며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갑작스런 상황에 모든 헌터들의 이목이 쏠린 상황.
"기다려요, 치료를······!"
누군가가 그렇게 소리치는 순간이었다.
"끝까지 연기라니. 마족 놈들은 자존심도 없나보군."
서걱—!
마성철이 단번에 부협회장의 목을 베어냈다.
"꺄아악!"
"미, 미친······!"
부협회장의 머리가 하늘 위로 솟구칠 줄 알았으나.
그런 일은 없었다.
마성철의 칼날은 부협회장의 목을 조금 파고들었을 뿐이었다.
"이 빌어먹을 인간들이······. 정말이지 열 받게 하는구나······."
눈이 붉게 물든 부협회장의 양 이마로 검은 뿔이 서서히 솟아오르고 있었다.
"네 놈들에게 자비를 베푸려고 했건만······."
인간의 모습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외통수였다.
콰드득!
환상의 마족은 가슴을 꿰뚫은 검을 손으로 쥐었다. 그의 악력에 검이 그대로 조각나며 떨어졌다.
콰아아아—!
강렬한 마기의 폭풍이 일대를 뒤덮었다. 근처에 있던 마성철과 길드장들이 뒤로 밀려날 정도의 강력한 힘이었다.
검은 날개를 펼친 채 하늘 위로 날아 오르는 환상의 마족.
그것을 바라보는 헌터들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 정말이잖아."
"부협회장이 마족이었다고······?"
"말도 안돼······."
마족의 증명은 간단하지만 확실한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이 모든 상황은 다른 이의 손에 의해 녹화되고 있을 것이고.
그러나 상위 마족을 죽인다는 것.
그것만큼은 간단하지 않다.
콰아아아—!
환상의 마족이 내뿜어내는 검은 마기가 일대를 완벽히 뒤덮기 시작했다. 눈 앞에 보이던 협곡을 가리고, 운석조차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그의 격이 담긴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차라리 잘 되었다. 네 놈들이 죽음을 자초한 것이다. 대적자, 네 녀석도 보고 있겠지. 전부 없애주마. 특히 마성철······. 네 놈만큼은 갈기갈기 찢어주지. ]
모든 헌터들이 갈팡질팡 길을 잃었다.
그들의 앞으로 펼쳐지는 무한한 환상이 그들을 가두기 시작했다.
그런 어둠 속에서 단 한 사람만이 차분했다.
이지한은 항마의 활을 들어 올렸다.
활에 매겨진 화살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 이지한의 팔이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다.
화살을 놓고 싶어도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부족한 레벨의 항마의 술 때문이었다.
잊혀진 종족은, 마(魔)를 꿰뚫기 위한 단 한 발의 화살을 남겼다.
준비되지 않은 자는 손대지도 못하며 쏘아내는 것조차 불허한다.
'크으윽······.'
콰아아—!
활을 잡은 팔 위로 거센 반발력이 느껴졌다. 옷을 찢고, 살을 파헤치는 강렬한 반발. 팔이 부숴지는 듯한 고통이 엄습하고 있었다.
『 스킬 '지고의 정신 Lv.2'를 발휘합니다. 』
그럼에도 이지한은 끝까지 상대를 조준한 채 활을 놓치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은 20만배의 경험치로 한없이 부풀려진다.
『 스킬 '항마의 술 Lv.2'를 획득합니다. 』
『 스킬 '항마의 술 Lv.3'를 획득합니다. 』
『 스킬 '항마의 술 Lv.4'를 획득합니다. 』
···
..
.
『 스킬 '항마의 술 Lv.10'를 획득합니다. 』
잊혀진 종족은 완성하지 못한 비전의 기술이.
이지한의 손 끝에서 지금 이 순간 완성되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어둠 속.
파아아——!
새하얀 빛줄기가 어둠을 꿰뚫었다.
142화 환상을 가르는 빛(2)
항마의 화살이 검은 안개를 가르며 나아갔다.
밤하늘의 먹구름을 몰아내듯 날아가는 한줄기의 빛.
'닿아라.'
내 손은 완전히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저릿한 통증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팔 뿐만이 아니었다. 전신에서 격통이 느껴지고 있었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몸은 떨려 온다.
그러나 나는 날아가는 화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무리 강한 기술일지언정 적에게 닿지 않으면 무의미하기에.
푸쉬이—!
검은 안개가 거세게 저항하며 빛줄기를 막아선다. 흩어지던 안개가 더욱 짙어지며 화살의 꼬리를 잡아끌었다.
항마의 화살이 만들어낸 빛의 길이 점차 닫히기 시작한다.
이윽고, 검은 안개가 빛의 화살을 잡아 먹었다.
"······!"
어두운 암흑 속 유일한 빛줄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
나는 이를 악물었다. 입에서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미 시위를 떠나간 화살을 돌이킬 방법은 없다.
'명중 스킬도, 항마의 화살도 있었다. 활을 다루는 스킬도 방금 얻었다. 뭐가 부족했던 거냐.'
검은 안개는 항마의 기운조차 집어 삼켜 환상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미래에서 얻은 정보는 모두 활용했다.
'분명 제대로 했을텐데······.'
길게 생각할 시간 따위 없었다. 실패를 따지고 있을 시간은 더더욱 없었다.
"사부님······!"
"지한씨······!"
바로 옆에 있었을 일행의 목소리가 벌써 어렴풋하다. 그들의 모습도 소리도 점차 멀어져만 간다.
"오빠, 어디에요······?"
"아무것도 안······."
환상의 마족이 흩뿌린 검은 안개가 모든 것을 잠식하고 있었다.
"크윽······."
나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항마의 활이 발하는 빛이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검은 안개가 스물스물 내 발을 타고 오르고 있었다.
환상을 부르는 검은 연기.
어줍잖은 환영이 아닌 오감을 현혹시키는 주술.
그것도 인간계에서 오랜 시간 힘을 길러 온 상위 마족이 보여주는 진짜 힘.
'어떻게든······.'
벗어나야만했다. 검은 안개에 대항해 손에 든 항마의 활을 휘두르는 순간.
화아악—!
순식간에 검은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강한 바람이 일시에 연기를 몰아낸다. 답답했던 시야가 한순간에 탁 트였다.
"빌어먹을······."
그러나 드러난 풍경은 이전의 푸른 하늘이 아니었다.
피로 물든 것처럼 붉은 하늘.
어느새 나는 멸망한 세계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특유의 메마른 공기가 코 끝을 스치고 지나간다.
"······."
환상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한 세계.
"아저씨! 정신차려요!"
그리운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20대 초반의 젊은 청년.
순하지만 강인한 성품을 가진 녀석.
"영훈이냐······."
아무런 힘도 없었던 나와 함께 멸망한 세계를 지켜 본 녀석. 최후의 순간까지도 나는 녀석과 함께였다.
"빨리와요, 아저씨. 뭔 생각을 그리 골똘하게 해요?"
그 앞으로 펼쳐지는 천 명 가량의 행렬.
대한민국 최후의 생존자들이었다. 그들의 표정은 어둡다. 살아남을 거란 희망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나는 영훈이 녀석의 옆으로 다가가 녀석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 빌어먹을 환상의 마족을 어떻게 죽여줄까 고민 좀 했다."
"오, 조금 웃겼어요. 10점 중에 7점 드릴게요."
"나쁘지 않네."
이동하는 도중에 달리 할 일이 있는 건 아니었다.
영훈이는 해맑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F급 헌터가 군단장을 물리친다라······. 제가 SSS급 헌터가 되는 것만큼 현실적인데요?"
"······근데 내가 형이라고 부르랬던 것 같은데. 다 죽어갈 때 불러주면 뭐하냐."
"아오, 왜 때려요! 그리고 마지막은 뭔 마지막? 갑자기 왜 그런 흉흉한 소리를 하고 그래요."
난리를 치는 영훈이와 나란히 앞으로 걸어나간다. 그대로 행렬을 따라 나아갔다.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이 꿈이었던건가.
조금이지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정교하고 현실적인 환상이다.
물론, 잠깐의 여유는 금세 깨졌다. 멸망한 세계는 방심할 수 없는 곳이니.
키륵, 키르르륵!
취이익!
"고, 고블린이다······! 오크까지 있어······!"
"위험해, 다들 물러서! 최후의 5인은 어디계셔?!"
이어지는 행렬이 끝나는 지점, 바위 틈에 숨어 있던 마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기를 듬뿍 머금어 광폭화한 고블린과 오크다.
영훈이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녀석은 내 옷깃을 잡아 끌었다.
"아저씨 빨리 도망쳐요!"
"······."
나는 꼼짝하지 않았다.
광폭화한 고블린들의 등급은 A.
오크의 경우에는 S까지 넘볼 정도다.
말도 안되는 파워 인플레이션이다.
그렇다곤 해도 내 상대는 아니다.
"미쳤어요?! 여기에 서 있다간 찢겨서 죽어요!"
"그래, 도망치는 게 최선이었지. 그때는 그랬어."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에요?! 어서요!"
고블린들과 오크들이 눈을 번뜩이며 달려왔다.
"키륵, 인간들! 죽여라!"
"취익, 취익! 마족에게 바쳐라!"
놈들은 미처 도망치지 못한 피난민들을 덮치고 있었다. 어느새 코 앞까지 다가온 고블린 한 놈이 내게 단검을 내려찍으려 하고 있었다.
"아저씨!"
어느샌가 내게는 강력한 무기도 믿음직한 방어구도 전혀 남아 있지 않다. 환상의 마족이 내게 건
"어쩔 수 없었다. 도망쳐서 살아남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고."
F급 헌터였던 내 몸뚱이만이 남아 있을 뿐.
까득.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근데, 내가 이 개같은 환상 속에서까지 내가 도망쳐야겠냐?"
콰앙!
올려 뻗은 발차기가 고블린의 턱을 강타했다. 고블린은 그대로 허공에 떠올랐다 바닥에 떨어졌다.
"키, 키륵······."
몸을 부들부들 떨던 고블린은 그대로 축 늘어졌다.
나는 녀석의 손에 들린 단검을 빼앗아 들었다.
특성, 아이템, 스킬 모든 게 전부 사라져 있다. 심지어는 떠오른 정보창마저 그럴 듯하게 날 속이고 있다.
『 스테이터스 』
- 이름 : 이지한
- 등급 : F
- 보유 스킬 : 근력 Lv.1
너는 약하다.
그러니 도망쳐라.
환상은 그렇게 나를 유도하고 있었다.
'속겠냐.'
아무리 그럴듯해도 결국에는 환상이다.
"아, 아저씨······?! 어떻게 한 거에요······?"
지금쯤이면 도망갔을 법도 하건만 영훈이 이 녀석은 끝까지 나를 버리지 않는다. 하긴, 원래 그런 놈이었다.
"S급 헌터로 재각성."
"쩌, 쩐다······. 지, 진짜죠?"
"그럼 진짜지."
"지, 진짜 미쳤다!"
영훈이 녀석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얼굴의 환한 미소가 사라질 줄을 모른다.
"잠깐 물러나 있어."
"넵!"
콰득!
나는 달려드는 오크의 모가지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내 일자베기가 단번에 마수들의 몸을 갈라냈다.
오크가 들어 올린 철제 방패는 허무하게 잘렸고, 고블린이 휘두르는 단검은 간단하게 내 검에 막혔다.
촤아악—! 촤악! 콰앙!
고블린과 오크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서기 시작했다.
열마리 남짓한 놈들을 박살내는데 1분이 넘지 않았다.
영훈이 녀석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저씨가 S급 헌터라니. 이게 꿈이야, 생시야?"
"······유감스럽게도 꿈이야."
"올해 최고의 유머네요. 아저씨 제 볼 한 번 꼬집어봐요. 아직도 못 믿겠으니까."
따악.
나는 녀석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으아악, 볼을 꼬집어 보라니까요. 어쨌든 이렇게 아프니까 꿈은 아니겠네요. 형, 진짜 축하해요."
"니 꿈이 아니라 내 꿈일 수도 있잖아."
"그렇게 따지면 한도 끝도 없는데요."
나는 쓰게 웃었다.
고블린 무리는 처치했다. 환상 속에서도 힘이 건재한 건 확인했다. 다만, 여기를 어떻게 탈출하느냐가 문제인데.
그런 내 뒤로 강한 기척이 느껴졌다.
여태껏 느끼지 못한 강자의 기운.
수호 길드의 사최헌이나, 신태양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강한 위압감이 느껴진다.
"······누가 한 일이지?"
그 정체는 멸망한 세계의 천성호였다.
최후의 5인 중 하나인 그는 내가 아는 천성호와는 상당히 다르다.
붉은 머리의 그가 미간을 좁혔다.
"이지한······. 당신인가. 분명 F급 헌터였지."
내 이름을 알고 있을 줄이야. 의외인데.
내 기억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환상이니, 뭐가 나와도 이상할 게 없다만.
"와, 미쳤다. 천성호가 직접 말을 걸었어. 형 이제 최후의 6인 되는 거 아니에요?"
"······."
옆에서 영훈이 녀석이 더 호들갑이었다.
"재각성인건가? 이런 시기에 드물군. 등급과 레벨은 어떻게 되나."
그는 거침 없이 물어왔다. 멸망한 세계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사항이었으니 이상할 것도 없다.
"S급. 레벨은 100."
"그런가······."
그리 중얼거린 천성호는 망토의 안에서 검을 꺼내들었다. 붉은 도신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스릉.
그의 검이 내 목을 향했다.
"처, 천성호씨?!"
놀란 영훈이가 소리쳤지만 천성호는 검을 거둘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의 미간이 한층 더 좁혀졌다.
"그거 이상하군, 내 스킬이 네 거짓을 감지했다. 지금 당장 네 각성이 마족과 관련되지 않았단 걸 증명해라."
눈 앞의 천성호는 환상 속의 존재지만 그 강함은 진짜다. 적어도 내게는 SSS급 헌터만큼의 강함을 가지고 있다.
환상의 마족이 만들어내는 것은 그런 환상이니.
나는 양 손을 들어 올린 채 입을 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내 특성 때문에 A급에 100레벨이다. 그리고 지금은 환상의 마족의 환상 속에 갇혀 있는 상태고."
"······?"
천성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그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정신이 나갔군."
"글쎄."
괜히 의심스럽게 숨기는 것보다 이쪽이 낫다. 나는 적당히 시간만 끌면 되었기에.
천성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나를 향해 마력을 발산했다. 그의 손에서 뻗어나간 붉은 띠가 나를 칭칭감았다.
"하지만 확인할 필요는 있겠지."
"아, 아저씨는 나쁜 거 없어요······! 뭔가 오해가······!"
영훈이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콰아아앙—!
뒤쪽에서 거대한 폭발이 터졌기 때문이다. 천성호의 시선이 뒤쪽에서 나타난 거대한 마수들을 향했다.
"이런······!"
그렇다.
환상은 인류가 최후의 방어막 속으로 숨어들기 직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공간 전이 마법으로 나타난 마수의 군세는 피난민들을 노리고 있었다.
"천성호! 어디에 있어?"
저 멀리서 성녀 채아연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거 나만 보고 있을 시간은 없을 것 같은데."
"······. 그대로 있어라.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짓을 한다면 용서치 않겠다."
그리 말하고서 단숨에 땅을 박차고 사라진 천성호.
"으윽, 이거 안 풀리네요. 아오, 의심할 사람이 없어서 아저씨를 의심하다니. 너무 한 거 아니에요? 아저씨도 뭐라고 말 좀 해봐요!"
나는 여전히 천성호의 마력에 묶인 상태였다.
환상 속에서 시간이 제대로 흐르는가?
거기에 대한 답은 어렵지 않게 내릴 수 있었다.
타재간파의 서에 기록된 스킬 '초시공인지'.
나는 그것을 발휘했다.
여전히 메시지는 떠오르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수십 번도 더한 일이다. 스킬의 사용은 어렵지 않았다.
'아직 시간은 있다.'
바깥의 시간은 거의 흐르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환상 속에서 굴리겠다는 건가.
환상의 마족이 단단히 열 받기는 한 모양.
"영훈아, 죽지마라."
"네? 갑자기 또 뭔 소리에요? 그것보다 안전한 곳으로······."
"어디에 있든 죽지 말라고."
환상에서 깨어나는 방법.
그런 건 없다.
이곳에서 죽으면 진짜로 죽는다.
괜히 숱한 영웅들이 상위 마족에게 고전한 게 아니다.
진정한 힘을 되찾은 상위 마족의 능력 앞에 인류는 무력하다.
나는 그런 마족을 잠시나마 얕봤다.
'그리고 터무니 없이 착각하고 있었다.'
미래에서 얻은 정보는 모두 타인을 통해 전해 들은 것이었다.
그곳에 '나'가 경험한 미래는 없었다.
그러니 내가 모르는 상황이 일어나는 건 당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에서 전달 받은 정보는 유효했다.
'결국 내가 깨닫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아이템이 있어도 소용 없다는 거다.'
즉, 바깥으로 나가기 위한 열쇠는 이미 내 손에 있었다는 것.
파직!
분명히 내 손에는 쥐어져 있을 거다.
마(魔)를 멸하는 항마의 활이.
그렇다면······.
나는 눈을 감고 활을 들어 올렸다.
환상 속에 잠들기 이전 내 손 끝에서 발휘 되었던 항마의 술을 그대로 실현시킨다.
파직, 파지직!
손 끝이 아릿하다. 전기가 한쪽 팔을 타고 오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 격통을 느끼며 나는 항마의 술을 펼쳤다.
『 스킬 '항마의 술 Lv.11'을 획득합니다. 』
『 추가효과 : 마(魔)속성 저항력 30%, 주술 저항력 30% 』
팅!!
보이지 않던 메시지가 공간을 뚫고 떠올랐다. 붉은 하늘 위로 거대한 균열이 생겨난다. 몰려오는 마족의 군세 또한 느릿하게 전진할 뿐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 레전더리급 '스킬 향상의 반지'의 적용 대상을 변경합니다. 』
『 '절대일격' -> '항마의 술' 』
『 '항마의 술'의 레벨이 한단계 증가합니다. 』
반지의 효과를 항마의 술에 부여한다.
새하얀 빛이 전신을 휘감기 시작했다.
동시에 멸망한 세계의 시간이 멈췄다.
멈춰선 시간의 틈에서 허공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 스킬 '항마의 술 Lv.12'을 획득합니다. 』
『 추가효과 : 마(魔)속성 저항력 50%, 주술 저항력 50% 』
샤아아—!
내 손 위로 떠오르는 순백의 활.
나는 그것을 움켜쥐었다.
143화 환상을 가르는 빛(3)
항마의 활에서 뿜어져 나오는 밝은 빛이 주변의 풍경을 바꾸었다.
드러나는 세계는 더 이상 붉은 하늘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본래 있던 환상 밖의 세계도 아니었다.
산뜻한 바람이 스쳐가는 평원 위.
푸른 하늘 위로 새하얀 구름이 빠르게 흘러간다.
'여기는······.'
한 그루의 푸르른 나무.
그 아래 서 있는 한 남자.
갈색의 탄탄한 상반신을 드러낸 그의 몸에는 기하학적인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그의 외관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손목에 찬 팔찌다.
검은색 팔찌 위에 음각으로 새겨진 문양.
내가 차고 있는 것과 완전히 동일한 생김새였다.
그의 손에도 내가 들고 있는 것과 동일한 활이 들려있었다.
'항마의 활이 만들어내는 환상인가.'
환상의 마족의 힘을 빌어 무언가를 내게 전달하려 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리고 눈 앞의 남자.
'이 자가 벽화 속의 인물.'
잊혀진 종족의 구원자.
이미 멸망한 세계의 유일했던 희망.
나와 그 남자를 제외한 배경의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있다.
거대한 나무를 중심으로 작은 판잣집이 생겨나고, 어느새 마을을 이룬다. 마을은 도시가 되고 도시는 국가로서 번영한다.
번영한 세계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게이트.
그 게이트를 통해 이들도 기술의 발전을 이룬다. 국가는 끊임 없이 발전한다.
비행선이 하늘을 날고, 기관차가 질서 있게 놓인 철도를 달려나간다.
자원은 풍족하고, 기술은 어느때보다 발전해 있다.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근심이 없다. 그들의 세계는 어느때보다 풍요롭고, 평화롭다.
그러나 그러한 평화는 한순간 뿐이었다.
불현듯 하늘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멸망의 때가 찾아 온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쓸쓸하게 지켜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우리의 유산을 찾아낸 존재여. 일족의 마지막 숙원을 이뤄낼 것은 그대다. 이 환상을 빌어 그대에게 전하노라."
그는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내가 든 활을 가리켰다. 화살이 비어 있다.
"항마의 화살은 통했는가?"
"통했다면······. 내가 이 환상을 볼 일도 없었겠지."
애초에 항마의 술은 미완성.
내가 아니었다면 다룰 수도 없는 실패작이었다.
남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런가."
"그런가가 아니잖냐."
"외지인이 다루기엔 어려웠을지도 모르지. 확실히 항마의 술은 미완성이었다. 다만, 항마의 활과 화살만큼은 완벽했다. 거기에 문제는 없다네. 부족한 것이 있다면······."
남자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대의 능력이겠지. 일족 최후의 용사이자 선택 받은 존재였던 나에 비하면, 그대의 출신과 재능은 너무도 평범하다."
"그런 뻔한 말이나 할 거면 빨리 사라져라. 바쁘니까."
"하하, 오해하지 말게. 나는 진심으로 자네를 돕고 싶으니까. 아니, 증오스런 마족을 멸하고 싶다는 게 맞겠군."
남자의 손에서 녹색의 빛이 뻗어져 나갔다. 나무의 가지처럼 솟아난 기운은 이윽고 내 몸에 닿았다.
"우연이 겹쳐 일어난 이 모든 것은 기적. 출신은 평범하나 그대가 보여준 업적은 기적을 아득히 뛰어넘었지. 그러니 이 순간, 그대에게 내 자질을 건네주겠네."
『 레전더리 스킬 '영웅의 격 Lv.1'을 전수받습니다. 』
『 당신이 소유한 격의 수준이 상승합니다. 』
『 레전더리 스킬 '항마지체 Lv.1'를 전수받습니다. 』
『 항마 관련 기술의 효과가 50% 상승합니다. 』
두 개의 메시지가 떠오른다.
"나는 일족을 구하는데 실패했지만, 자네는 다를지도 모르겠지."
마족의 출현과 함께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하는 문명.
세계는 붕괴하고, 붉은 하늘과 검은 구름이 세상을 뒤덮는다.
씁쓸한 표정으로 그것을 지켜보던 남자의 시선이 내가 차고 있는 팔찌로 향했다.
그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반드시 초월의 좌에 오르게나. 그때까지 지켜보고 있을테니."
『 초월의 존재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
화아악—!
그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세계가 일변했다.
환상 속에 존재하던 세상은 사라지고 검은 안개가 나를 덮쳤다.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며 시야를 막아섰다.
'크윽.'
끈적이는 마기가 내 전신을 파고든다. 나를 다시금 환상 속으로 잡아 끌려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당하지 않는다.
꽈악.
나는 항마의 활을 움켜쥐었다.
새하얀 빛이 전신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마기의 격류를 떨쳐내는 견고한 힘이 내게 깃든다.
『 스킬 '항마지체 Lv.1'를 발휘합니다. 』
『 스킬 '항마의 술 Lv.12'를 발휘합니다. 』
휘몰아치는 검은 안개의 폭풍 속에서 나는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
환상의 마족이 만들어낸 안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어둠 속에 파묻혀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항마의 화살이.
샤아아—!
다시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가슴시리도록 아름다운 새하얀 빛줄기가 되어.
어둠을 가르며 나아가고 있었다.
* * *
마족의 수식어를 정하는 기준은 두 개다.
첫번째로 마족 특유의 제약에 따른 명명법.
불사의 마족이 가진 제약은 주변의 어떤 생물도 죽게 하지 않는다.
성장의 마족의 제약은 어떠한 생물도 성장 시키지 않는다.
선혈의 마족은 제약으로 모든 생물의 피를 붉게 만든다.
이런 식이다.
두번째로 마족이 가진 특기에 따라 수식어가 붙는 경우다.
전투의 마족은 강력한 전투 능력을 가지고 있어 그 능력이 마계에서도 인정 받는다.
발전의 마족은 마도지식이 풍부하고 다양한 마도병기를 제작하는데 특기가 있다.
환상의 마족은 두번째에 해당한다.
진짜보다 더욱 진짜 같은 환상을 퍼뜨리고 조종한다.
"크아악!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어머니, 잡아요! 어머니!!!"
"죽어, 죽으라고!"
그가 만들어내는 환상의 안개를 걷어낼 수 있는 존재는 마계에도 몇 존재하지 않는다.
하물며 S급에 불과한 인간들이 그의 환상을 견뎌 낼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짧은 순간에 퍼져나간 검은 안개는 헌터들을 완전히 잠식했다.
"이 개새끼야······! 너는 절대로 용서 못해······!"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
"돌아 온 거야. 돌아왔어. 다시는 떠나지 않을 거야."
증오와 분노.
슬픔과 후회.
환상은 대상의 트라우마를 자극해 더욱 깊숙히 끌고 들어간다.
환상임을 알아채도 빠져나올 방도는 없다.
환상의 마족이 만들어낸 환상은 적어도 해당 인물에게 있어선 진짜처럼 느껴지기에.
SSS급 헌터도 상상 속의 공포도 전부 진실이 되어 구현된다. 모두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무엇이 어려우랴.
"크윽, 어째서······. "
"여기서 끝내야 해."
"떨어져, 떨어져라!"
그러나 그 완벽한 환상이 지금 깨어졌다.
샤아아—!
새하얀 빛줄기가 어두운 안개를 순식간에 걷어냈다. 항마의 화살은 환상을 없애고, 그들을 현실로 불러 왔다.
그 뿐이 아니었다.
[ 뭐냐, 대체 무엇이······?! ]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던 환상의 마족.
그는 두 눈을 의심했다.
환상을 몰아내는 빛.
그런 일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아니,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억하지 못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잊혀진 종족이 만들어낸 비전의 화살.
콰아아앙—!
그것이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가슴 주변이 순식간에 석화되며 갈라진 틈에서 하얀 빛이 새어나왔다.
[ 크아아아악! ]
불의의 일격을 당한 환상의 마족이 공중에서 몸부림쳤다. 날개짓을 하지도 못할 정도로 치명적인 상처였다.
쿠우웅!
환상의 마족은 땅 위로 추락했다.
더 이상 검은 안개는 없었다. 헌터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들었다.
"커허억······. 뭐, 뭐가 어떻게 된거야······?"
"그래, 나는 공략을 하고 있었어. 수호 길드에서."
그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실제로는 짧은 순간에 불과한 환상이었지만, 그들을 옭아맨 환상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내, 내가 왜 이런 곳에 있는거야? 돌려 보내줘!"
환상 속에서 많게는 한 달의 시간을 보낸 이도 있었다.
"빠져나온건가······. 어떻게?"
사최헌의 몸에서도 비오듯 땀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 중에는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었다.
환상 속에서 죽은 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이지한은 다시금 활을 들어 올렸다.
"사부님······."
엘리스의 이마에도 땀이 한 방울 흘러내리고 있었다. 윤서현도 곧장 이지한의 근처로 다가왔다.
"······지한씨가 한거죠?"
"진짜 열 받네······."
진세아도 자리에서 일어나 단검을 들어 올렸다.
그들 뿐이 아니었다.
"도저히 용서 못해요."
"빌어먹을 마족 자식······!"
"······이번에도 도움을 받았네요."
신아람, 천성호, 윤지은, 신태양······.
최후의 10인이었던 모두가 무기를 들고 일어났다.
그들은 환상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살아남았다 뿐이겠는가.
그들의 눈에 서린 의지는 한층 더 강해져 있었다. 아무런 희망이 남아 있지 않던 멸망한 세계에서도 살아남았던 이들이다.
그 찰나의 환상 속에서 그들은 더욱 견고해져 있었다.
[ 대적자, 이 빌어먹을 대적자! 기어코 네 놈이 나를 방해하는구나! 이 모든 계획이 네 놈의 짓이었겠다! ]
격이 섞인 노성을 뱉어내는 환상의 마족.
자리에 있는 헌터들의 정신을 뒤흔들기에 충분한 위력이었다.
[ 감히······. ]
환상의 마족의 보랏빛 피부에선 검은 피가 울컥울컥 솟아나고 있었다. 마기로도 회복되지 않는 치명상이었다.
콰득!
환상의 마족이 가슴팍에 박힌 화살을 뽑아냈다.
[ 이딴 잔재주로 나를 능멸하려 들어? 어림도 없다! ]
분노와 함께 손에 쥔 항마의 화살을 부러뜨리려는 찰나.
물컹!
손에 있던 화살이 은광택을 띄는 액체처럼 변해 버렸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슬라임 오르티마.
[ 뭣?! ]
환상의 마족이 당황하는 틈, 오르티마는 자그마한 드래곤으로 변해 그의 손을 물었다.
동시에 입에서 뿜어내는 강력한 브레스가 마족의 손을 태웠다.
[ 크아아아! ]
마족의 괴성이 협곡 전체에 울려퍼졌다. 그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동안 오르티마는 재빨리 이지한의 손으로 돌아왔다.
『 형상기억마수 '오르티마'가 항마의 화살로 변합니다. 』
슬라임은 또다시 화살로 변했다. 단 한 번을 위해 존재했던 화살이, 오르티마와 함께라면 몇 번이고도 재사용할 수 있게 변한 것이다.
시위에 매겨진 항마의 화살이 새하얀 광채를 발했다.
환상의 마족은 포기하지 않았다.
[ 반드시 후회하게 해주마······. 네 놈을 영원한 환상 속에서 고통 받게 해주마······. ]
그의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검은 안개.
이미 치명상을 입었기에 이전과 같은 힘은 낼 수 없었으나.
주변에 환상을 구현하기엔 충분했다.
순식간에 마족 병사들이 협곡을 빼곡히 뒤덮었다. 그 수는 눈으로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200명 남짓한 헌터들을 완전히 포위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이지한은 무표정했다.
조용히 활을 들어 올리고 조준할 뿐이었다.
파직, 파지직!
활에 매긴 화살 위로 압축된 마력이 모여들고 있다.
"스승님, 길을 만들겠습니다!"
"다 비켜!"
콰아앙! 콰앙!
최후의 10인이 이지한의 화살이 나아갈 길을 만들어냈다. 말하지 않아도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검과 화살이 어지러히 뒤섞이며 환상이 빚어낸 병사들을 단숨에 몰아낸다. 그들은 연기가 되어 허무하게 흩어졌다.
[ 어리석기는······! 다시 맞을 성 싶으냐! ]
환상의 마족은 몸에서 끊임없이 마기를 쏟아냈다. 오래 전부터 인간의 세계에 섞여들어 힘을 비축한 상위 마족.
그가 가진 마력양은 차원이 달랐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그래? 근데 이미 한 번 맞았잖아. 엘리스."
"네, 사부님."
화살에 모인 힘은 충분하다.
이지한의 옆으로 성배를 든 엘리스가 붙었다.
카드득······!
빛의 화살 위로 엘리스가 손을 가져갔다. 항마력이 압축된 공간 위로 그녀의 새하얀 손이 찢겨지고 피가 새어나온다.
"으윽."
그럼에도 엘리스는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의 손이 화살에 닿았을 때.
『 동료 엘리스가 스킬 '시간조작 Lv.8'을 발휘합니다. 』
콰아아아—!
화살은 시간을 역행하여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새하얀 빛줄기가 뻥 뚫린 길로 쏘아지듯 나아갔다.
그 행선지는 환상의 마족.
"피할 수 있으면 피해봐라."
이지한은 그리 말했다.
144화 환상을 꿰뚫는 빛(4)
콰아아아—!
항마의 화살은 환상의 마족을 향해 쏘아졌다. 이전에 화살이 적중했던 그 자리를 향해 되돌아간다.
[ 어딜······! ]
환상의 마족은 땅을 부수며 날아올랐다. 치명상을 입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 움직임으로 허공을 가른다.
그러나 항마의 화살은 부자연스럽게 휘어 마족을 쫓는다.
그것이 본래 있었던 자리로.
화살이 적중했던 그 시기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환상의 마족이 그 사실을 깨닫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 대적자, 무슨 짓을 한 거냐······?! ]
검은 마기를 흩뿌리며 나아가는 환상의 마족 뒤로 수십의 환영들이 산개했다. 그러나 빛의 화살은 정확히 본체를 노리고 날아간다.
이윽고 화살이 놈의 가슴팍에 정확히 명중했다.
콰아앙!
빛과 함께 가슴을 꿰뚫은 빛살. 화살이 닿은 부분에서부터 석화되고 있었다.
[ 크아아악! ]
치명적인 고통 앞에서 환상의 마족은 다시 추락하기 시작했다.
쿠우웅!
놈이 떨어진 자리에서 흙먼지가 크게 피어올랐다.
"사, 사부님······. 저는 여기까지인 것 같아요······."
"그래, 고생했다. 쉬고 있어."
엘리스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나는 쓰러지는 엘리스를 받아 옆의 진세아에게 넘겨주었다.
시간 조작으로 적에게 영향을 끼치는 일은 막대한 자원을 소모한다.
녀석은 훌륭히 제 역할을 했다.
환상의 마족은 아직 쓰러지지 않았다. 항마의 화살을 두 발이나 맞고도 아직 꿈틀대고 있다.
이제는 다른 헌터들의 차례다.
"크으윽, 힘이 안들어가."
"대체 내가 봤던 게 전부 환상이었다고······?"
"뭘 어떻게 해야······."
최후의 10인을 제외한 헌터들은 아직 갈피를 못잡고 있었다. 환상 속에서 깨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혼란스러운 게 당연했다.
"다들 정신 차리세요! 눈 앞의 적을 물리쳐야죠! 쓰러져 있으면 어쩌자는 거에요?!"
그런 그들을 향해 소리치는 채아연.
그녀의 손에 들린 금색의 지팡이에서 강렬한 빛이 터져나왔다.
『 동료 채아연이 스킬 '절대 정신 고무 Lv.6'를 발휘합니다. 』
『 일시적으로 정신력과 판단력이 크게 상승합니다. 』
"그, 그래. 공략 중이었어."
"우선은 쓰러뜨려야 해. 저 마족을."
"다들 일어서! 지금이 기회야!"
그녀의 말과 버프 덕분에 기진맥진하던 헌터들이 무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200명 가량의 헌터들이 단숨에 전의를 회복했다.
그들은 환상의 마족이 만들어낸 환영들을 몰아내고 처치하기 시작했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광경이었다.
"스승님, 이제 맡겨주시죠."
"거기 비켜, 형한테는 내 솜씨를 보여주기로 했거든?"
그 사이로 신태양과 천성호가 경쟁하듯 달려나갔다. 강한 섬광과 폭발이 전장을 휩쓸며 나아갔다.
콰과과—!
바닥에 쓰러진 환상의 마족을 향해 쏟아지는 다양한 공격들.
윤지은이 쏜 수 천 발의 화살도, 윤서현의 공간탄도 모두 환상의 마족을 노리고 있었다.
투두두두—!
놈은 온 몸으로 공격을 받아내며 소리쳤다.
[ 겨우 여기에서 보잘 것 없는 네 놈들에게 당하려고 기다렸던 게 아니란 말이다! ]
콰아—!
그의 몸에서 발산된 마기가 다시 한 번 전장을 휩쓸었다.
[ 이것까지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대적자 네 놈에게도 분명하게 심어두었다. 마기의 씨앗을. ]
가벼운 파동이었지만 몇 헌터들이 격하게 반응했다.
"으아악!"
"꽃이, 꽃이!"
"커헉!"
그들의 머리와 복부에서 검은 꽃이 돋아났다. 그들은 좀비처럼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기 시작했다.
[ 이걸로 대적자 네 놈도······. ]
나를 바라보는 마족의 붉은 눈이 흔들렸다.
[ 뭐, 뭐냐?! 어떻게 멀쩡히 있는거냐······. ]
도중에 오르티마가 먹어 치운 게 그거였나.
'운이 좋다고 해야하나.'
환상의 마족이 가진 최후의 수단은 허무하게 차단당했다.
놈의 머리 위로 마법과 검기가 쏟아져내렸다.
콰앙! 콰앙!
[ 크아아악! 그만, 그만! ]
정말로 그게 최후의 발악이었던 것 같다.
항마의 화살을 두 발이나 맞아 이제는 제대로 된 반항도 못하고 있었다.
나는 놈을 향해 다가갔다.
너덜너덜해진 오른팔이 끔찍하게 아프다.
그럼에도 나는 검을 쥐었다.
환영들과 맞서 싸우는 헌터들을 지나쳐,
날아오는 화살과 마법들을 배경 삼아서,
환상의 마족을 눕힌 신태양과 천성호의 사이에 섰다.
놈의 날개는 완전히 찢어져 성한 곳이 없고, 팔과 다리도 전부 잘려나간 상태.
나는 쓰러진 환상의 마족을 내려다보았다.
"뭐가 그리 불만인지 모르겠군."
[ 크으윽, 대적자! ]
분노로 가득찬 붉은 눈이 나를 향했다.
나는 그 눈을 조용히 응시했다.
게이트 생성 초기부터 이 세계에 숨어든 마족.
녀석은 헌터 협회의 부회장이란 자리까지 오른다.
[ 잘 생각해라! 네 놈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우리의 계획을 막지 못한다. 이 세계는 어둠에 휩싸일 거다! ]
그의 공은 마족들 사이에서도 독보적.
본래대로라면 군단장이 되어 대한민국을 공포로 몰아 넣었을 존재다.
[ 나를 죽인다해도 고작해야 그 멸망을 잠시 미루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협력해라! 대한민국의 도시를 주마! 나라면 가능하다! ]
수많은 영웅들을 절망으로 빠뜨리고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겠지.
"나쁘지 않군. 대신 조건이 있다."
내 말에 환상의 마족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스쳐갔다. 반면 신태양과 천성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 스승님?"
"형?"
[ 그, 그렇지. 그래. 말만 해라. 원하는 건 얼마든지 주마. ]
나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도시 하나로는 모자른데. 전세계를 내놔라. 그거라면 받지."
[ 뭐, 뭣이? ]
환상의 마족의 얼굴이 당황으로 일그러졌다.
"안된다면 어쩔 수 없겠군."
세계를 얻을 수 없다면.
네 놈과의 대화는 무의미하다.
나는 역전의 검을 들어 올렸다.
[ 자, 잠깐······! ]
그런 말해도 소용 없다.
이미 늦었으니까.
상위 마족을 죽이려면 결국엔 이게 제일이다.
『 각성 스킬 '일자베기 Lv.12'를 발휘합니다. 』
『 해당 수준의 스킬을 '본질 베기'로 명명합니다. 』
푸른 빛의 기둥이 하늘 높이 솟아 올랐다.
본질마저 베어가르는 푸른 선이 놈의 생명을 집어 삼켰다.
『 상위 환상의 마족을 처치하셨습니다. 』
『 막대한 양의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 이계 규율이 보상을 정산합니다. 』
* * *
각성 스킬을 사용한 후유증으로 나는 자리에 쓰러졌다.
항마의 술도 적지 않은 체력을 소모했기에 정말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스승님!"
"형, 여기서 죽으면 안돼요!"
두 사람이 내 입에 포션을 마구 쏟아 부었다. 쏟아지는 포션 탓에 숨을 못 쉬겠다.
그만해, 그만해 이 자식들아.
한마디 할 힘도 없었다.
"그쪽은 비켜, 형은 내가 옮길테니까."
"어이, 꼬마. 키나 더 키우고 와라. 스승님, 제 등에 기대시죠."
"꼬마? 이 자식이······."
"이 새끼가······."
그만해 미친 놈들아.
녀석들은 나름의 응급처치를 끝낸 뒤 나를 뒤쪽의 채아연에게로 운반했다.
"환자를 그런 식으로 운반하면 어쩌자는거에요?"
그녀의 회복 마법을 받자 회복이 더욱 가속되기 시작했다. 과연 미래의 성녀다. 심지어는 스킬까지 하나 얻을 수 있었다.
『 레어 스킬 '자연 재생 Lv.1'을 획득합니다. 』
『 스킬 '자연 재생 Lv.2'를 획득합니다. 』
『 스킬 '자연 재생 Lv.3'를 획득합니다. 』
···
..
.
『 스킬 '자연 재생 Lv.11'을 획득합니다. 』
『 초인적인 재생 능력을 획득합니다. 』
일반 스킬인 자연회복에 이은 레어 스킬 자연 재생.
몸이 한결 편안해진 느낌이다.
그제서야 나무에 몸을 기대고 앉을 수 있었다.
"사, 사부님······."
완전히 지쳐보이는 엘리스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채아연의 회복 덕에 의식을 찾은 모양.
"수명은 좀 더 아껴쓰세요······."
샤아아—.
내게 시간조작을 사용하고선 내 어깨에 픽 쓰러졌다. 잃어버렸던 수명이 되돌아 왔을 거다.
"고맙다."
환상의 마족은 쓰러지자 녀석이 만들었던 환상도 전부 사라졌다.
살아남은 헌터들은 각자 한숨 돌리며 힘을 비축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형의 계획이 세계 정복이었을 줄이야."
"세계 정복? 그게 무슨 소리야?"
팔에 붕대를 감은 진세아가 천성호의 말을 듣고 다가왔다. 천성호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하냐? 아까 마족하고 상대할 때 말이지······."
무슨 소문을 퍼뜨리려는건지.
말릴 힘도 없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고오오——.
붉은 운석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떨어지기까지는 시간이 있겠지만······. 아직 공략은 진행중이란 건 변함 없다.
'저 건너편에 나약의 마족도 남아 있겠지.'
환상의 마족을 처치하는 건 중간 지점에 지나지 않는다.
프로젝트 아포칼립스의 저지.
그걸 위해선 놈을 없애야 했다.
'헌터들의 사기는······. 최악이군.'
채아연이 일시적으로 사기를 고조 시키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전투 동안이었다.
환상의 마족과의 전투 이후 분위기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순조로울 줄 알았던 공략이 사상자를 낸 최악의 공략이 되었다.
부협회장이 마족인 것만으로 굉장한 충격이었을테니.
특히 사망자가 나온 수호 길드와 협회는 더욱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이들 대부분이 국가의 전력에 해당하는 S급 헌터이기도 했으니까.
한쪽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지금 이 상황에서 돌아가는 게 말이나 됩니까?!"
수호 길드의 길드장 사최헌이 목에 핏대를 세운 채 소리치고 있었다.
그런 그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는 마성철.
"감정적으로 말씀하지 마시죠. 부협회장이 없어진 지금. 협회 측의 결정권자는 제가 됩니다. 전부 가는 것도 아닙니다. 필요한 인원은 남겨두겠습니다."
마성철은 공략 포기를 선언하고 있었다.
그는 정보꾼 백묵의 직속 부하.
그들의 목적은 애초부터 공략에 있지 않았다.
부협회장이 마족이었다는 증거는 전부 입수했으니 더 이상 게이트에 볼 일은 없다는 거겠지.
분노한 사최헌은 출구가 있을 방향을 삿대질했다.
"그쪽들이 나가고 나면 운석 때문에 게이트 출입이 불가능해질 게 뻔하잖습니까."
"100% 확실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어차피 누군가는 바깥에 상황을 전해야하고요. 상대적으로 전력이 안되는 저희는 빠지겠습니다."
사최헌이 살기를 풍기며 마성철 팀장에게 성큼 다가갔다.
"그러니까 거기에 왜 마성철 당신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냐고. 그쪽이 힘을 숨기고 있는 거 모를 줄 압니까?"
"한국 최고의 헌터이신 사최헌님께서도 착각을 하실 때가 있나봅니다."
"뭐요? 지금 나랑 해보자는 겁니까······?"
"그럴리가요."
마성철은 그대로 돌아섰다.
그의 주변으로 부하들이 모여들었다. 게이트에 같이 들어왔던 백묵의 수하 정진수도 있었다.
나를 지나치는 마성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지한씨의 활약은 빠짐 없이 전해 드리겠습니다. 조만간 다시 연락드리죠."
그의 손에는 귀환석이 들려 있었다. 굉장한 희소성을 자랑하는 아이템이다.
새하얀 빛이 그들을 뒤덮었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 그들은 없었다.
"진짜 가버렸네요."
윤서현이 내 뒤에 서 있었다. 그녀도 마성철이 갑자기 돌아갈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서현씨는 남아 있으셔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죠. 아직 공략은 안 끝났잖아요. 그리고 뭔가······. 아니에요."
"알겠습니다."
"······궁금해하는 척이라도 해주지."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뇨, 아니에요."
그래도 협회에서 사망자들의 시신을 회수해갔다.
남아 있는 우리들은 공략을 계속해야 한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아니, 이상하다기보다는 다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호 길드의 길드장 사최헌,
은빛의 날개의 윤지은,
오성의 김상욱.
그들을 제외한 헌터들도 모두.
윤지은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뭘 놀래요. 지한씨 덕분에 다들 살아남았잖아요. 이제 어떻게 하실 거에요?"
답은 정해져 있었다.
"······운석이 떨어지기 전에 이곳을 빨리 벗어나죠."
보랏빛 장벽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대신 협곡의 중간을 잇는 보랏빛의 다리가 생겨났다.
마치 이곳으로 건너오라는 듯.
"수호 길드 모두 움직입시다! 지금은 공략이 우선입니다."
"은빛의 날개, 출발하죠."
"오성도 가봅시다."
세 개의 길드가 거대한 다리를 넘어간다.
150명으로 줄어든 인원이지만 공략은 멈출 수 없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최정예.
포기라는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콰아아앙—!.
우리가 넘어옴과 동시에 운석이 떨어져 반대편 협곡을 완전히 파괴했다. 거대한 진동이 게이트 내부를 뒤흔들었다.
예상했던대로 우리가 넘어 온 장소까지는 영향이 없었다.
동시에 떠오르는 메시지.
『 이계 규율의 업적이 정산 완료 되었습니다. 』
『 전무후무한 업적! 인과의 흐름이 뒤틀립니다. 』
『 아카식 레코드에 해당 업적이 기록됩니다. 』
『 특별한 보상을 획득합니다. 』
새하얀 빛이 내 주위를 휘감기 시작했다.
'이건······.'
145화 타인의 재능(1)
『 이계 규율이 업적을 정산합니다. 』
- 업적명 : 상위 환상의 마족 처치
- 기록 : 스킬 성장 SSS, 약점 공략 SSS, 스킬 활용 SSS······.
- 종합평가 : SSS
환상의 마족은 지금까지 만났던 어떤 적보다 강했다.
놈의 환술은 대한민국의 최정예 헌터들을 전부 무력화 시킬 정도였다.
'항마의 활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실제로 화살은 놈에게 닿지 않을 뻔했다.
부협회장을 공격한 것은 어찌보면 자살행위였다.
그런 부분까지 마성철이 잘 전달해 놓을 거라고 본다.
『 소수의 초월자가 당신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집니다. 』
『 초월자 '잊혀진 종족의 영웅'이 당신의 기록을 눈여겨봅니다. 』
『 특별한 보상을 지급합니다. 』
그리고 이어지는 특별한 보상.
"허······."
그것을 바라보는 내 입이 슬쩍 벌어진다.
『 1★ 업적 '절대 성장'을 획득합니다. 』
『 모든 경험치를 2.5배로 획득합니다.』
『 이제 50만 배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
'보상이 정신 나갔군······.'
20만배였던 경험치 배율이 2.5배가 되었다.
50만 배.
그 압도적인 수치에 잠시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이계 규율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시스템을 무시하고 이만큼의 보상을 부여하는가.
회귀전, 이계 규율은 본래 불사의 마족의 것이었다. 놈은 마계왕의 자리를 노리고 도전했다가 처형당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거야.'
결과적으로 엄청난 이득이다.
이걸로 스킬 11레벨까지의 달성이 매우 쉬워졌음은 물론.
유니크, 레전더리의 숙련도도 가파르게 증가할 것이다.
세 개의 재능 파편에 의해 조금이나마 재능이 보조되고 있는 지금.
내 성장을 막을 수 있는 건 없다.
『 초월의 코인을 획득합니다. 』
나는 허공에 떠오른 순백의 코인을 낚아 채 인벤토리에 집어 넣었다.
이걸로 세 개째.
초월자들과의 거래가 멀지 않았다. 실제로 초월자 중 하나인 잊혀진 종족의 영웅을 직접 만났기도 했고.
'그 자도 마계왕과 같은 초월자인건가?'
나는 손에 찬 검은 팔찌를 확인했다.
잊혀진 영웅도 차고 있었던 거다.
『 초월의 팔찌 - 흑(黑) 』
이 또한 이계 규율에 의해 보상으로 받았다.
이것은 초월자의 존재에 닿을 수 있는 길.
'······.'
그 정체가 모호하기는 하나 마계왕 또한 초월자.
놈을 물리치기 위해 그만한 힘이 필요하다면.
초월이든 뭐든 망설이지 않고 하겠다.
그것이 설령 인간의 길을 벗어나게 되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콰과과과!
거대한 운석이 지면에 충돌했다.
우리가 건너 온 협곡의 반대편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충격파가 바람이 되어 헌터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신기하게도 이곳에는 피해가 없다.
"무시무시하네요."
"하아, 이 게이트는 도대체 뭐냐고."
"이제 돌아갈 길은 없는건가······."
헌터들이 각자 한마디씩 쏟아냈다. 그들의 얼굴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몰골도 엉망진창이었다.
이중 게이트 공략에 이어 환상의 마족까지 상대했으니 당연하다.
팅!
『 새로운 시련이 시작됩니다. 』
『 정화의 제단 세 곳에 불을 붙여 악을 정화하기 ( 0 / 3 ) 』
모든 헌터의 눈 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협곡 너머의 땅은 이전보다 더욱 넓다. 여기 어딘가에 있을 제단에 불을 붙이는 것.
탐색과 공략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했다.
게이트 공략에 성공한다면 프로젝트 아포칼립스는 자연스럽게 일시 정지 된다. 나약의 마족은 그걸 막으려고 최선을 다하겠지만.
- 마족도 만능은 아니에요. 타차원에 대한 간섭에 있어서는 특히요. 세계의 억지력이 그들을 막아서거든요.
미래의 엘리스는 그렇게 말했었다.
시스템이 우리에게 주는 일종의 기회인 셈이다.
'그래봤자, 나약의 마족을 처치하지 않으면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놈을 처치하는 수밖에 없다.
내 뒤로 수호 길드의 사최헌이 다가왔다. 은날의 윤지은, 김상욱도 함께였다.
"여기서 하루 휴식을 취하고 갈까하는데 어떻습니까."
"지한씨가 보기엔 어때요? 의견이 궁금하네요. 이대로 공략해도 괜찮을까요?"
마족이었던 부협회장이 처단 당하고, 협회를 이끌던 마성철도 돌아갔다.
거기에 더해 환상의 마족을 처치하면서 자연스레 내 발언권이 커진 모양.
애초에 전부 모르는 사이도 아니었고.
편하게 내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어 좋다.
"하루 쉬고서 세 팀으로 나눠서 공략하면 될 것 같습니다. 부협회장 말고도 다른 마족이 더 있을 수 있단 것도 감안하면······. 확실히 전력을 회복한 뒤 움직이는 게 좋겠죠."
밤하늘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프로젝트 아포칼립스는 게이트 붕괴로부터 시작된다.
공략만 성공한다면 막을 수 있다.
그러니 헌터들의 회복이 우선이다.
"다른 마족이 더 있을 수 있다라······. 가능성 있네요."
윤지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는 길지 않았다.
남아 있는 협회 측 헌터들은 각 길드에 적절히 분배.
이어서 가볍게 공략 방향에 대해 이야기 한 뒤, 휴식이 시작되었다.
* * *
타닥, 타닥.
나는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 걸터 앉아 불을 응시했다.
'······.'
헌터들이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초인이라지만, 반드시 휴식이 필요하다. 포션은 사람이 정신까지 치유해주진 못한다.
환상의 마족이 남긴 환상이.
헌터들 전체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놨다.
나야 괜찮지만 다른 이들은 어떨지 모른다.
타닥, 타닥······.
어둠을 밝히는 모닥불.
타들어가는 빛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쩐지 안정된다.
『 불을 바라보는 행위가 당신의 마음을 치유합니다. 』
『 일반 스킬 '고요한 정신 Lv.1'을 습득합니다. 』
『 스킬 '고요한 정신 Lv.2'를 습득합니다. 』
···
..
.
『 스킬 '고요한 정신 Lv.11을 습득합니다. 』
『 심리가 안정 됩니다. 』
『 추가효과 : 시간 지연 1% 』
잠시 불멍을 때리다보니 스킬을 습득했다.
이런 스킬이 다 있다.
50만 배가 된 경험치가 바로 체감 되는구만.
"스승님, 여기서 뭐하세요?"
수건을 목에 걸친 신태양이 내게로 다가왔다. 샤워를 방금 마쳤는지 머리가 젖어 있었다.
"저희 길드 텐트 사용하셔도 됩니다. 샤워 시설이랑 에어컨도 있어요."
"······."
신태양이 뒤쪽의 천막을 가리켰다.
최상위 길드는 모닥불을 피워 놓는 궁상 맞은 짓은 안한다.
공간 마법이 인챈트 된 최고급 텐트다. 각종 편의 시설도 내부에 완비하고 있다. 지난번에 봤었다.
타닥, 타닥.
그래도 나는 이게 좋다.
멸망한 세계를 떠올리게 하거든.
"그러면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신태양은 어디선가 캠핑용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부협회장이 마족이었다니······. 정말 위험하다는 거겠죠. 그래서인지 환상 속에서 세계가 멸망한 거 있죠. 진짜 고생했어요."
"······정확히 어떤 환상이었는데?"
"아, 어떤 환상이었냐고요?"
내가 관심을 가져주자 신태양은 기쁜 표정으로 답했다.
"붉은 하늘, 검은 땅, 포악해진 마수들. 말하기 좀 부끄러운데. 거기서 저는 검성이라고 불렸습니다. 제자도 두 명 있었죠. 근데 신기한 건 그 중 한 명이 은빛의 날개 신아람양이었다는 거죠. 그리고 다른 하나가 누구였는지 아세요?"
잠시 말을 멈춘 신태양이 씩 웃었다.
"스승님이 제 제자였습니다. 웃기죠? 근데 그랬습니다."
"······."
"애정을 담아 지도했었죠."
그 애정이 뭐였는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왠지 모르게 후련해 보이는 얼굴만 봐도 알겠다.
"그리고 마족과 싸우고······. 별에별 일이 다 있었습니다. 적은 상상 이상으로 강하더군요. 환상이기는 하지만요."
신태양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상한 환상이었죠."
어째서 신태양이 미래의 일을 환상으로 보았는가.
대강 짐작은 간다.
항마의 활이 내게 다른 환상을 보여준 것처럼, 내 존재가 다른 이들의 환상에 영향을 끼쳤다는 거겠지.
그게 아니고서야 설명되지 않는다.
"살아서 다행이다."
그저 한마디 해줄 뿐이다.
다시 불을 쬐고 있는데, 뒤쪽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으아아······. 무지 혼났다."
진세아였다. 녀석은 어깨가 축 늘어진 상태로 다가오고 있었다.
윤지은에게 게이트에 몰래 숨어 들어 온 일에 대해서 한 소리 들은 모양이다.
녀석은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았다.
"둘이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어요?"
"환상에 대해서."
진세아도 무슨 환상을 봤는지 조금 궁금하다. 신태양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환상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되게 이상했는데. 마족한테 세계가 망하고, 모두가 나를 피하고, 오빠도 없고······. 아무도 없는······. 뭐, 그런 거였죠."
환세의 도둑.
멸망전 세계에서 진세아는 기인이라고 불렸다.
"근데 힘들지는 않았어요. 그냥 전부 훔치고 다녔거든요. 어차피 환상이라고 생각하니 죄악감이 없었달까."
"평소에도 그냥 훔치고 다니는 거 아니야?"
"뭐래. 나만큼 선량한 사람이 어딨다고."
신태양의 말에 진세아가 얼굴을 찡그렸다.
"솔직히 그리고 오빠가 어떻게든 하겠지. 생각하고 있어서 괜찮았어요. 실제로 그렇게 됐고."
"그거야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승님. 믿고 있었죠."
갑자기 나한테 왜 아부하는 흐름이 된거냐.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다른 사람들도 내 근처로 모여들었다.
신아람, 천성호, 윤서현······.
"다들 모여서 무슨 이야기?"
"서현 언니도 이리와요. 아람 언니도!"
"저는 환상 속에서 스승이 있었는데······."
"와, 대박. 둘이 무슨 인연 있는 거 아니에요?"
한동안 여러 이야기가 이어졌다.
다들 멸망한 세계에서 고생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지한씨는 무슨 환상을 봤어요?"
"저는 별 거 없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천성호가 나왔었지."
"크으, 다 봤어요?! 평소에 형이 얼마나 저를 생각하면 환상에 나오겠어요."
"젠장······. 더 노력하겠습니다. 스승님."
"나는? 나는 없었어요?"
모닥불 주위가 시끌벅적해졌다.
잠깐 뿐이겠지만 이런 분위기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밤하늘 위로 흐르는 은하수 아래.
잠깐의 평화였다.
* * *
다음날, 세 개의 길드가 나뉘어졌다.
윤서현의 초공간인지와 내 기억으로 그린 지도를 통해 나아갈 방향도 결정되었다.
나는 오성에 합류했다.
"이지한 헌터님, 저희는 완전 환영입니다."
김상욱이 능글맞은 미소로 두 팔 벌려 나를 환영했다. 다만, 그 태도는 지극히 사무적이다.
내가 아는 김상욱의 본래 태도하고는 다르다.
배신자 김상욱.
스파이 노릇을 하라고 오성에 보냈는데, 그 짧은 사이에 당당하게 리더 자리를 꿰차고 있다.
마기를 다룰 수 있다곤 하나 여러모로 능력자긴하다.
"저희 쪽에 와주시면 든든하죠."
"마족 놈한테 한 방 먹이는 거 봤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말했었잖아, 용병들 사이에선 소문이 퍼져있다니까."
오성의 헌터들도 나를 환영해주었다.
이들의 수장인 대마법사 김민수는 인류의 진짜 배신자.
현 시점에서 그 어둠이 얼마나 깊은지 나는 모른다.
'오성 길드원들까지는 괜찮겠지만, 문제는 김상욱이지.'
수호 길드와 은빛의 날개는 최선을 다하겠지만, 오성의 리더인 김상욱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우선 그는 프로젝트 아포칼립스의 중대성에 대해 모른다.
그리고 그의 반응만 봐도 뭔가가 있다는 건 알 수 있다.
김민수의 감시를 받고 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옆에 붙는다면 공략도 제대로하고 스파이의 입지도 지킬 수 있다.'
그게 내가 오성에 합류한 이유였다.
"그때봤던 비열하게 생긴 아저씨네요."
진세아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나와 함께하는 건 윤서현과 엘리스, 진세아 이렇게 세 명이다.
김상욱하고는 이전에 전투의 마족과의 전투에서 마주쳤었다.
"저 사람 뭔가 느낌이 안좋아요. 위험한 사람일지도 몰라요."
김상욱을 처음 본 엘리스는 나한테 속삭였다.
"······."
뭐, 나쁜 놈이긴 했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그러면 출발하시죠."
오성 길드를 필두로 60명 가량의 인원이 탐색을 시작했다. 넓게 퍼진 산림 속에서 제단을 찾아내는 일이다.
『 정화의 제단 세 곳에 불을 붙여 악을 정화하기 ( 0 / 3 ) 』
제단의 위치는 윤서현의 초공간인지로 확실하게 확인했다.
가는 길까지가 안전하냐면 또 그건 아니었다.
산림을 지나쳐 약 3시간.
우리의 앞에 버려진 폐허가 나타났다.
아무일도 없는 게 오히려 불안감을 증대시킨다.
"갑자기 마수가 나타날 수도 있으니, 주의하면서 휴식을 취합시다. 저는 잠깐 주변 좀 보고 오겠습니다."
"덥네, 물 남은 거 있어?"
"쭉 마수가 없었으면 좋겠구만."
김상욱의 말에 오성 길드원들이 각자 폐허 어귀에 걸터 앉았다.
"여기는 마을이었던 걸까요?"
"오빠, 이것봐요. 낙서 같은 게 있어요."
나는 진세아가 가리킨 돌판을 확인했다.
『 스킬 '다세계 해석 Lv.11'을 발휘합니다. 』
"흥정의 기술, 상인의 마음가짐······."
뭐 그런 게 적혀 있다.
"그 능력 나도 알려주면 안 돼요?"
"그래,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쿠우웅!
폐허의 앞쪽에서 짙은 먼지가 피어 올랐다. 이어서 굉음이 연달아 들어왔다. 폐허의 파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뭐, 뭐야?"
"다들 전투 태세 갖춰!"
헌터들이 허겁지겁 무기를 들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멀지 않은 장소였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전투는 끝나있었다.
주변을 살피고 오겠다던 김상욱이 누군가를 제압하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에서 뻗어나간 검은 손이 상대를 꽉 붙잡고 있다.
별로 숨기려는 모습도 없었다.
"뭐, 뭐냐······. 어떻게 인간이 마기를······."
붙잡힌 것은 갈색 피부의 여성.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단 표정이었다.
김상욱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마족의 권속인가? 더 볼 일은 없으니 죽여야겠군."
그녀는 상위 마족의 권속이다. 그걸 단숨에 제압하다니, 김상욱의 재능도 눈여겨 볼만하다.
『 타재간파가 대상의 잠재력을 파악합니다. 』
『 김상욱 : 마(魔)의 패왕 (SS) 』
'······.'
뭐, 저런 악인 특화 잠재력이 다 있나. 다만, 최대 등급은 SS급 정도.
나는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상당한 수준의 마기에 피부가 저릿하다.
그래도 권속을 그냥 죽여서는 의미가 없다.
"잠시만요. 역으로 마족의 정보를 캐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물론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나는 검은 마기에 붙잡힌 권속을 바라봤다.
"크윽······. 내가 순순히 말할 것 같으냐."
다크 엘프라고 불리는 종족.
그녀의 이름은 메민.
권속 중에서도 상당한 힘을 소유한 자다.
『 '타재간파 : 이계 규율의 장'을 발휘합니다. 』
『 타인의 재능을 확인합니다. 』
그러니 더욱 새로운 능력을 사용할 차례였다.
촤르륵!
내 앞으로 타재간파의 서의 페이지가 넘어가기 시작했다.
146화 타인의 재능(2)
협곡 너머 대삼림의 중심부.
온갖 희귀한 식물로 뒤덮인 유적의 왕좌.
나약의 마족은 그곳에 앉아 있었다.
"잘못 됐어······. 한참 잘못 됐어."
외관은 영락 없는 어린 소년이나, 그의 미간에 나이대에 맞지 않는 주름이 잔뜩 잡혔다.
함께 마계를 넘어왔던 선혈의 마족은 죽었다.
문명계에 미리 숨어든 환상의 마족도 방금 최후를 맞이했다.
"인간을 얕보니 그리 되는 거다. 환상의 마족은 치욕의 밤을 목격한 세대인지라 조금은 다를 줄 알았더니······."
유적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게 원통할 따름이었다.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프로젝트 아포칼립스의 시동.
"마도의 주인이시여 괘념치 마소서. 대신 대적자의 정체를 밝혀내지 않으셨습니까."
나약의 마족의 옆에는 수정구를 든 긴 생머리의 여성이 있었다.
등에 돋은 검은 날개와 머리 위에 떠있는 검은 고리가 눈에 띈다.
그녀가 천계인이라는 증거였다.
나약의 마족은 한숨을 내뱉었다.
"쯧, 내가 합류할 수만 있었다면 환상의 마족도 그리 허무하게 죽진 않았을텐데."
"지고하신 마족의 염원을 이뤄내는 일만큼 중요한 일은 없으니까요. 나약의 마족께서는 최선을 다하신 겁니다."
나약의 마족은 현재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마도주술을 유지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고오오오——!
유적의 위로 점점 모여드는 순도 높은 마기.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힌 구의 형상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마계의 마기를 이곳 게이트로 가져 온 뒤, 게이트 브레이크를 통해 대한민국의 전역으로 퍼뜨릴 예정이었다.
마도 주술에 의해 특수한 성질을 띄게 된 마기는 연쇄적으로 근방의 게이트를 붕괴시킨다.
붕괴된 게이트는 또다시 마기를 내뿜으며 같은 일을 반복한다.
붕괴된 게이트에선 광폭화한 마수들이 쏟아져 나오며 국가적인 기능을 마비시킨다. 그것은 향후 발생하는 게이트에 대한 대처력 또한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것이 프로젝트 아포칼립스의 실체였다.
'선혈의 마족이 사용했던 것과는 비교가 안되는 주술이지······.'
그녀는 너무 급했다. 그런 급조한 주술로는 게이트 붕괴에 성공해도 그리 큰 타격을 입히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녀의 손실은 뼈 아팠다.
이번에도 선혈이 있었다면 환상의 마족과의 전투 양상은 완벽히 바뀌었을 거다.
아니, 인간들이 갑작스레 부협회장을 공격할 거라곤 생각치 못했다. 실책은 거기서부터였다.
완전히 당했다는 말 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대적자······. 도대체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는 거냐.'
권속이 제공해준 시야 마법으로 전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찾아 헤매던 대적자의 정체.
그 정체는 인간 헌터.
그 점이 나약의 마족을 더 소름 돋게 했다.
지금까지 계획 전체를 뒤흔들고, 다수의 마족을 살해한 정체가 정말로 한낱 인간이었다니.
나약의 마족은 입술을 깨물었다.
"제레, 나는 두렵다."
"제약을 다루시는 위대하신 존재께서 고작 인간 하나를 두고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평소답지 않으십니다."
"그렇지 않다. 너도 대적자가 사용하던 활과 화살을 보았겠지."
"그렇습니다. 마(魔)를 물리치는 성질의 아이템었지않습니까. 그런 무구는 이제껏 헤아릴 수 없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 것들에 비하면 그리 대단할 것도······."
제레의 말대로였다.
많은 종족들이 마족에게 대항하기 위한 기술과 아이템을 만들어왔다. 그 중에는 너무나 치명적인 성능을 가지고 있어 마계에서 직접 봉인해 둔 물건도 있다.
그에 비하면 대적자가 가지고 있는 활은 대단치도 않았지만.
"완성 되지 못한 쓰레기나 다름 없는 잔재주. 그리 부르는 게 적합하겠지. 하지만······."
나약의 마족의 눈가가 떨리고 있었다.
그는 항마의 술을 알고 있었다. 지금 이 게이트가 이루고 있던 본래의 세계의 종족들이 발악하며 만들어낸 최후의 기술.
그건 분명 실패작이었다.
"대적자가 사용한 것은 그보다 훨씬 진보해 있었다. 완성을 뛰어넘어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냈다. 환상의 마족의 환술을 부술 정도로 말이다."
그러니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힘을 숨기고 있는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단 거다."
대체 어떤 능력이기에 마족의 모든 계획을 방해하고,
예언의 마족의 예언을 뛰어 넘어 행동한단 말인가.
하나의 능력인가? 다수의 능력인가?
어째서 그런 힘을 한낱 인간이 손에 넣고 있는가.
모든 것이 의문이었다.
"말씀하신대로 얕볼 상대가 아니란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지······. 그래서 보내둔 권속들은 어떻게 되었지?"
나약의 마족의 말에 권속 제레가 잠시 눈을 감았다.
바깥의 상황을 확인하던 그녀가 움찔했다.
"······좋지 않습니다. 하나가 인간에게 사로 잡혔습니다. 대적자가 존재합니다."
"뭐가 되었든 대적자를 방해해라. 놈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리하겠습니다."
마도주술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대적자를 이곳에 들여보내선 안된다.
* * *
"크윽, 인간 놈들······! 무슨 꿍꿍이냐. 전부 죽여주마."
"그래, 그래."
김상욱이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권속을 끌고 움직였다.
다크 엘프 메민.
녀석은 반항하며 몸부림쳤지만, 김상욱이 만들어낸 마기의 손아귀를 벗어나진 못했다. 그만한 격차가 있는 모양.
폐허로 이동하는 동안 나는 메시지창을 살폈다.
『 타재간파 - 이계 규율의 장 』
『 동료가 아닌 타인의 재능을 확인합니다. 』
무재조정이 만들어낸 두번째 능력 '타재간파'.
이건 타인의 재능을 살피고 개화시켜 줄 수 있는 능력이다.
'그리고 그 재능을 내가 스킬로 습득한다.'
동료에게 사용했을 때는 그런 효과였다.
그렇다면 이걸 적에게 사용한다면 어떨까.
적의 재능을 키워준다거나.
'생각만해도 끔찍하군.'
권속이면 몰라도, 마족의 재능을 키워준다라.
가뜩이나 아슬아슬하게 이기는 상황에서 그런 짓은 자살이나 다름 없다.
다행히 그런 방식은 아니었다.
사실, 능력을 얻은 뒤 사용법은 대강 파악해둔 상태였다.
'먼저 필요한 건 대상에 대한 정보.'
『 대상의 진명(眞名)을 알고 있습니다. 』
『 대상의 종족과 주특기를 알고 있습니다. 』
『 대상에 대한 정보가 충분합니다. 』
회귀자의 이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이계 규율은 내가 회귀자라는 것도, 10만배의 경험치를 가지고 있단 것도 신경쓰지 않은 채 보상을 준다.
이번 '타재간파:이계규율의 장'도 마찬가지였다.
"뭐야. 네 놈 무슨 짓을 하려는거냐?"
뭔가 수상함을 느낀 메민이 나를 노려봤다.
"글쎄."
나는 신경쓰지 않고 능력을 전개했다.
『 '다크 엘프 메민'의 재능은 다음과 같습니다. 』
- 마기 조종(S+)
- 마기 적응력(S)
- 면역의 주술(S)
과연 상위 권속답게 대단한 재능을 보유하고 있다.
'쓸만한 게 많군.'
마족의 권속 노릇을 하고 있는 이들은 전부 유능한 축에 속한다. 그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마족에게 몸을 의탁하고 살아간다.
여기서 내가 선택할 건 정해져 있다.
『 재능 '마기 조종(S+)를 선택하셨습니다. 』
『 조건 달성시 일시적으로 해당 재능을 소유합니다. 』
곧이어 내 앞으로 떠오르는 조건.
『 마기에 의해 체력의 5,000%에 해당하는 충격을 받을 것 ( 0 / 1 ) 』
터무니 없는 조건이 떠오른다.
'······.'
5,000%라. 내가 제대로 보고 있는 건가?
"지한씨, 뭐 문제라도 생겼어요?"
"아뇨, 아닙니다."
잠깐 놀랐을 뿐이다.
그래도 뭔가 해결할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해결 방법을 생각하는 동안 우리는 메민을 끌고 폐허까지 왔다.
그녀는 여전히 속박된 상태였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까요. 저희 중에 정신 지배 스킬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하, 그런 스킬이 있다고 한들 굴복할 것 같으냐? 이곳에 계신 나약의 마족께서 네 놈들을 용서치 않을 거다. 네 놈들은 전부 죽은 목숨이라 이거다!"
"그런가. 무섭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술술 대답하고 있다.
"부협회장 이외에도 마족이 있다는 게 확실해졌네요. 이름은 나약의 마족인가 봅니다."
"그런 괴물이 또 있다는 거군요······."
오성의 헌터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김상욱이 다른 헌터에게 명령했다.
"다른 길드에도 전해. 마족이 하나 더 있다고."
"바로 전하겠습니다."
나약의 마족에 대한 정보가 곧바로 다른 길드들에게도 전달되었다.
- 고맙군, 조심하겠네.
- 정말 지한씨가 말한대로였네요. 고마워요. 주의할게요.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음."
김상욱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권속 메민에게 다가갔다.
"하, 나약의 마족이 우리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냐? 우리는 대한민국에서도 손꼽히는 헌터들이라고."
"크하핫, 멍청하군. 그분이 가진 나약의 제약 앞에 네 놈들이 쌓은 능력은 무의미하다."
김상욱의 가벼운 도발에 메민이 바로 넘어왔다.
나약의 제약.
"호오, 그게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래봤자 내 마기에는 못 당할 것 같은데."
"내가 바보도 아니고 적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말할 리가 없지. 두려워 해라. 이 게이트에 존재하는 권속의 수만해도······."
권속들은 마기에 심취해 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치열하게 머리를 굴려 살아남아야하는 인간과 달리, 적당히 죽이고 정복하면 된다는 게 마족들의 정복 방식이기도 하고.
'이 녀석은 특히 더 심하군.'
덕분에 잠깐의 심문 동안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김상욱이 흡족스럽게 손을 비볐다.
"이거, 꽤 많은 걸 알아낼 수 있었네. 상대 권속의 수나, 게이트에 위치한 위험한 마물이나 함정까지도. 이거 그냥 죽이면 아까울 뻔했네."
"이 비열한 인간······!"
이 공략이 실패로 끝나지 않으려면,
정보가 모든 인원들에게 전달되는 것도 중요하다.
"······공간이동으로 넘어가는 건 위험하겠네요."
"그럴 것 같습니다. 놈들도 단단히 준비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요."
"그래도 어느 정도까지는······."
윤서현이 말을 하다가 멈췄다. 그녀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쪽으로 다수의 상대가 접근해 오고 있어요."
진세아도 어딘가를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뭐, 뭔가 위험한 게 느껴지는데?"
엘리스는 주위를 그냥 두리번거렸다. 나처럼 아무것도 안보이는 모양. 그러나 상황은 짐작이 간다.
콰아앙—!
별안간 김상욱을 향해 창 한자루가 날아왔다. 마기의 손아귀를 끊어 버리는 강력한 일격이었다.
속박에서 풀려난 메민이 땅을 박차고 도망쳤다.
"크하하! 내 동료들이 왔으니 이제 너희는 죽은 목숨이야!"
"너무 바보 같은 놈이라 죽일까 잠시 고민했던 게 멍청했네. 오성 모두 전투 준비!"
김상욱이 전투 태세를 바로 갖추었다. 그가 꺼내든 양손의 단검 위로 짙은 마기가 일렁인다.
권속과의 전투를 꺼리지 않는다. 나약의 마족과의 커넥션은 없는 건가?
'······그보다 더 윗마족과의 연결 고리가 있다는 건가.'
일단은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말이다.
폐허 주변의 숲의 곳곳에서 다양한 종족들이 튀어나왔다. 대부분 인간형이었다.
"뭐야, 이 놈들 왜 이렇게 많아······?"
"이게 전부 권속이라는 건가?"
수는 27명.
우리의 인원수가 60명 가량임을 생각하면 절반 정도다만.
그들 하나 하나의 힘은 S급 헌터 못지 않을 거다.
"아뇨, 이것보다 더 많아요."
슈우우—!
숲 안 쪽에서 마기의 포탄 세례가 우리를 향해 날아왔다. 얼굴을 보인 수보다 훨씬 많은 권속들이 숲에 숨어 있었다.
"위험해요!"
"딜러들은 안쪽으로!"
"포탄에 안맞게 조심해!"
우리는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슈우우—! 쿠구구구—!
마기 세례가 내 근처에는 유독 많이 떨어져 내렸다.
"우와앗! 뭔가 이쪽으로만 엄청 날아오는데요?!"
"세아야, 고개 숙여!"
윤서현의 공간 왜곡이 쏟아지는 마기를 전부 다른 방향으로 비틀었다.
오성의 헌터들도 자리를 잡고 전투를 시작했다.
"권속 놈들 쓸어버려!"
"지능이 있는 놈들이다, 긴장해!"
"비겁한 새끼들 기습을 해?"
마력과 마기가 허공에서 교차되고, 검과 칼날이 맞부딪혔다.
상대는 마수가 아닌 권속이다.
작은 전쟁이나 다름 없는 전투였다.
게다가 공격을 받는 입장이 되니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놈들이 나를 노리고 공격을 퍼붓고 있기도 했고.
"사부님, 어떻게 하죠?"
탕! 탕!
엘리스가 날아오는 마기를 총탄으로 막으며 물었다.
"잠깐. 멈춰봐."
"네?"
나는 날아오는 마기를 향해 달려나갔다.
"으왓?! 사부님!"
"오빠?!"
"지한씨?!"
세 명이 동시에 놀라며 소리쳤다. 무슨 미친 짓을 하냐는 표정이다.
근데 미친 게 아니다.
콰아앙!
내 몸에 직격한 마기가 폭발했다. 검은 연기가 갑옷 위로 피어 올랐다.
스스스······.
그러나 나는 멀쩡하다.
『 묵빛 마기가 서린 풀 플레이트 메일(Lv.100)이 마기의 충격을 흡수합니다. 』
'장비빨 한 번 제대로 받는군.'
가공할 방어력을 가진 레전더리급 장비다.
그것도 레벨 100을 달성해 에픽에 달하는 성능을 가진 방어구.
어지간한 마기는 내 갑옷을 뚫을 수 없다.
쿠구구구—!
이어서 마기가 쏟아졌지만.
전부 견딜만하다.
"어라······?"
"괜찮은거에요···?"
이걸로 확실해졌다.
『 마기로 인한 공격을 받아냅니다. 』
『 누적 데미지 : 2530% 』
시스템 메시지는 5,000%의 데미지를 단번에 받으라곤 하지 않았다. 내가 직접 피해를 입으라고도 하지 않았고.
'이거라면······.'
쏟아지는 폭격은 더욱 거세졌다.
나는 윤서현이 걸어주는 방어막도 마다하고 마기를 받아냈다. 치명상이 될만한 것은 피해내면서, 착실히 데미지를 쌓아간다.
『 누적 데미지 : 3230% 』
『 누적 데미지 : 3786% 』
『 누적 데미지 : 4971% 』
확실히 현 시점에선 비정상적인 방어구다.
그야 레벨을 100까지 키워낸 에픽급 성능이니 당연하다.
마기를 퍼붓던 권속들도 점차 당황하기 시작한다.
"하, 소문대로군···."
원거리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놈들도 깨달은 모양.
"대적자······! 네 놈은 내가 직접 처리해주마!"
이름 모를 전사가 나를 향해 뛰어들었다. 놈의 손에 쥐어진 창날에서 마기가 활활 타오르고 있다.
나는 놈을 향해 달려갔다.
카가각—!
놈의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검은 불꽃이 튀어오르지만, 방어구는 건재하다.
『 5,000%에 달하는 마기 충격을 받아내셨습니다. ( 1 / 1 ) 』
『 다크엘프 메민의 재능 '마기 조종(S+)'를 습득합니다. 』
『 해당 재능은 게이트 내에서만 유효합니다. 』
내 앞으로 떠오르는 다수의 메시지 창.
이걸로 승부는 정해졌다.
『 특수 스킬 '마기 조종 Lv.1'을 획득합니다. 』
그 사용법이 자연스레 몸에 체득된다. 그저 불길하게만 느껴지던 마기의 흐름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폐허를 뒤덮는 마기들의 움직임과 방향이.
마기라는 새로운 힘이 단박에 이해된다.
나는 곧바로 스킬을 발휘했다.
『 스킬 '초마력회로'의 효과를 발휘합니다. 』
『 마력을 마기로 전환합니다. 』
손 끝에서 퍼져나간 가벼운 마기.
그것은 점차 크게 퍼져나간다.
수많은 경험이 내게로 모여든다.
『 특성 '무재조정'의 효과를 받습니다. 』
『 10만 배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
10만배.
『 칭호 '초성장'의 효과를 발휘됩니다. 』
『 2 배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
20만배.
『 칭호 '절대 성장'의 효과를 발휘합니다. 』
『 2.5배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
50만배의 경험치가 되어.
『스킬 '마기 조종 Lv.2'를 획득합니다. 』
『스킬 '마기 조종 Lv.3'을 획득합니다. 』
···
..
.
『 스킬 '마기 조종 Lv.11'을 획득합니다. 』
내게 깃든다.
『 스킬 향상 반지가 '마기 조종'에 적용됩니다. 』
『 스킬 '마기 조종 Lv.12'를 획득합니다. 』
그것은 한차례 발전을 거듭해.
여지껏 없던 경지를 개척한다.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스으으······.
폐허를 울리던 폭파음이 사라지고, 가벼운 정적이 찾아왔다.
보여지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허공을 가로지르는 백 여개의 마기 세례가 일시에 정지했다.
"뭐, 뭐야······?"
"마기가 어째서······."
권속들이 쏘아낸 마기도 나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선다.
막대한 양의 마력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진다.
그래도 버틸만한 수준이다.
초마력회로의 성능이 압도적인 덕이다.
"뭐, 뭐냐. 대적자······. 네 놈 도대체 무슨 짓을······?"
나를 바라보는 이름 모를 권속의 눈에 두려움이 일렁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고오오——.
허공에 모인 마기는 하나의 구체가 되어 내 위로 떠올랐다.
"나약의 마족에게 전해라."
지금 이 순간.
나는 마기를 완벽히 다룰 수 있다.
"쓸데 없는 짓하지 말라고."
147화 타인의 재능(3)
콰과과과—!
공중에 떠오른 마기의 구체는 탄환이 되어 사방으로 발사되었다. 숲으로 떨어진 마기는 강력한 폭발을 일으켰다.
"크아악!"
"마기가 말을 안들어······!"
"인간이 어떻게 우리의 마기를 다루는 거냐!"
막대한 피해를 입은 권속들이 소리쳤다. 그들은 적지 않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게 내가 마기를 사용하고 있으니까.
마력과 마기는 다르다.
마력은 인간과 여타 종족이 사용하는 자연스런 신비의 힘이다.
반면, 마기는 마족들만이 다루는 어둡고 불길한 힘이다. 이름은 비슷하지만 그 성질은 완전히 다르다.
그럼에도 나는 마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
『 특수 스킬 '마기 조종 Lv.12'를 발휘합니다. 』
내가 다크엘프 무민이 가지고 있던 재능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녀의 '마기 조종'은 이제 내 것이다.
'이번 게이트에 한해서라는 조건이 붙지만.'
권속들이 쏘아낸 마기가 다시 그들에게로 되돌아갔다. 이해하기 힘든 상황에 헌터들도 주춤대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한 이가 있었다.
"지금이 기회다! 다들 망설이지 말고 공격해!"
과거 배신자 김상욱이었다. 과연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르다.
"그래, 다 죽여버려!"
"마족의 부하들이다! 가자!"
"틈을 주지마!"
오성의 실질적인 리더의 명령이 떨어지자, 오성 길드원들은 망설이지 않고 마족에게 달려들었다.
촤아악! 콰앙!
그들의 기세에 권속들이 밀려나고 있었다. 사방을 포위하듯 에워쌌던 녀석들의 진형이 점차 붕괴되어 간다.
오성의 길드원들도 S급 헌터다. 실력은 밀리지 않는다.
"인간인 네 녀석이 어째서 마기를 다룰 수 있는 거냐······."
내 앞의 이름 모를 전사가 대검을 들어 올렸다. 그의 몸 위로 검은 마기가 피어오른다.
다른 이들의 마기와 달리 그 수준이 높다.
"글쎄."
그 답은 간단하다.
마기의 특징 중 하나인 '마기 지배' 때문이다.
그건 정령 간섭보다 훨씬 난폭한 법칙이다.
강자의 마기가 약자의 마기를 압도한다.
제약과 각종 능력이 넘쳐나는 마족들.
그들의 사회가 힘의 논리 아래에 구성되는 가장 큰 이유였다.
'미래에서 배워온 초마력회로의 덕도 톡톡히 보는군.'
『 유니크 스킬 '초마력회로 Lv.11'을 발휘합니다. 』
『 마력을 마기로 전환합니다. 마기 효율이 증가합니다. 』
초마도파괴광선을 사용할 때와 마찬가지다.
내가 가진 마력은 마기가 된다.
콰아앙!
권속의 대검과 내 역전의 검이 부딪혔다. 그러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가볍군.'
『 '칭호 - 환상계의 영웅'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
『 환상계에서 모든 능력치가 250% 상승합니다. 』
내 능력치는 한계돌파 덕분에 기존의 S급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거기에 2.5배의 능력치 상승이 이뤄졌으니.
권속 정도로는 날 막을 수 없다.
콰앙!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이름 모를 권속이 뒤로 크게 밀려났다. 붙잡혀 있다가 도망친 권속 메민이 소리쳤다.
"뭐하는 거야?! 대적자고 뭐고 죽여버려!"
"시끄럽다······."
대답하는 그의 이마에서 땀방울 하나가 흘러내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윤서현이 앞으로 나왔다.
『 동료 윤서현이 '공간 속박 Lv.5'를 발휘합니다. 』
촤르륵!
허공에서 솟아난 보랏빛 사슬이 권속을 향해 쏘아졌다.
"이따위 잔재주······!"
그는 땅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완벽하게 사슬이 빗나갔다고 생각한 순간.
우웅!
사슬은 공간을 꿰뚫고 권속의 옆에서 나타났다.
"뭣?!"
촤르르륵!
다섯 개의 사슬이 권속을 완전히 칭칭 동여 맸다. 허공에서 속방 당한 권속은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
쿠웅.
"좋네요."
"이 정도야 간단하죠."
그녀의 성장세도 무시 못할 수준이 되었다. 능력을 다루는 게 점점 더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런······. 저 녀석이 저렇게 쉽게 당했다고······? 도망쳐야겠다."
다크 엘프 메민이 황급히 뒤를 돌아가려는 순간.
뻐억!
기척을 죽인 채 숨어 있던 진세아가 돌려차기를 먹였다. 턱을 정통으로 맞은 메민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후후, 어때요. 내 실력?"
진세아가 나를 바라봤다. 마지못해 엄지를 들어 올려줬다.
진세아는 아직 '절대은밀기동'을 개화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저런 수준의 은신이 가능하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군.'
진세아도 일취월장했다. 최후의 10인의 성장이 더욱 가속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그러면 나머지 잔당도 처치하죠!"
신이 난 진세아가 단검을 들고 달려나갔다.